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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고 찢겨 빛바랜 꿈이라 해도.
포기하지 않았기에.
반복하는 오늘에도, 내일을 위해 달리기에.
기사가 될 수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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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섬광이 번뜩였다.
엔크리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불에 달군 꼬챙이가 목을 쑤신 듯한 통증을 느꼈고.
가죽을 덧댄 갑옷 따위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았을 뿐이다.
몸 안을 돌던 빨갛고 뜨거운 액체를 왈칵 쏟아 내며 정신을 잃고.
다시 눈을 뜬다.
하루의 시작이다.
꿈은 아니다.
이미 수차례 겪은 일이기에.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다.
그저 일어난 일일 뿐.
따-앙.
아침을 알리는 소리.
불침번이 국자로 냄비를 땅땅 두드린다.
세 번째 같은 아침.
엔크리드는 그제야 실감했다.
'또?'
매일, 죽기만 하면 똑같은 하루가 반복된다는 걸.
1. 내 꿈은 기사였다.
엔크리드에게 칼을 가르쳐 준 선생은 성격이 꽤 좋은 편이었으며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넌."
그 선생이 검집째로 든 검을 바닥에 수직으로 세운 채 몸을 기대고 엔크리드를 불렀다.
"마을로 돌아가라. 농사를 짓는 게 싫으면 마을 자경단 노릇을 하고. 그럼 자경단장쯤은 꿰찰 거다."
그때 이 칼밥 좀 먹었다는 선생의 말을 들었으면 조금은 나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어릴 때 들었던 한마디가 문제였다.
"엔키, 넌 천재다."
서너 살 많은 동네 철부지와 목검을 들고 다퉜는데 가뿐하게 이겼다.
이때가 11살, 처음으로 천재란 소리를 들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 자식이 엄청나게 칼싸움을 못 했다는 걸.
엔크리드는 열다섯에 마을 어른과 목검을 들고 겨뤄 이겼다.
그 후로 실력에 자신감이 붙었다.
그가 태어난 작은 마을에는 제대로 칼을 쓸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나마 있다는 놈은 삼류 용병 출신이었는데.
다리 하나를 잃고 마을에 흘러들어온 뜨내기였다.
그가 마을 꼬맹이들에게 검술을 가르쳤다.
그 사이에 엔크리드도 있었다.
"넌 천재구나."
열다섯에 두 번째로 같은 말을 들었다.
일전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동네 어른이 한 말이었다면, 이번에는 제 입으로 말하길 기사 작위를 포기하고 레이디를 위해 다리를 잃은 용병의 말이었다.
'내가 천재구나.'
그리 생각했다.
꿈을 품었다.
기사가 되기로 했다.
전화에 휩싸이는 대륙을 일통할 군주를 보필하는 기사.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 기사.
이때 즈음 대륙 전체에 한 음유시인의 노래가 널리 퍼졌다.
작은 마을, 엔크리드의 마을에까지 닿을 정도로 널리.
내용은 평이했으나 음률이 귀를 홀렸고, 마지막 가사가 마음을 흔들었다.
이 전쟁을 끝내는 기사!
전쟁을 황혼으로 물들게 할 기사!
우리는 그를 황혼의 기사!
종말의 기사라 부르리!
끝의 기사! 전란을 끝낼 기사!
전란을 끝맺을 기사.
음유시인의 노래가 소년·소녀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내가 바로.'
엔크리드도 마찬가지였다.
열여덟, 마을에 당할 자가 없다고 생각한 엔크리드는 마을을 떠났다.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다.
친구는 몇 놈 있지만, 어릴 때부터 검에 빠진 엔크리드 곁에는 마음을 붙일 이들도 몇 없었다.
그 틈에서 소년은 성장했고 떠났다.
그렇게 용병 생활을 시작했다.
실력이 나쁘진 않았다. 특히나 노력하는 자세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천재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는 두 달이면 충분했다.
이름도 없는, 흔히 말하는 삼류 용병이란 작자한테 깨지고.
"덜 여물었다."
이런 말을 들었다.
좋은 선생이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돈을 모았다. 죽을힘을 다했다. 목숨을 반 개쯤 걸고 도적 무리와 싸웠다.
그렇게 번 돈으로 교습소를 찾아갔다.
큰 도시에는 검술 교습소가 두어 개는 있었다.
검을 배웠다.
운이 나쁘진 않았다.
선생은 솔직했으며 양심적이었으니까.
그는 엔크리드에게 칼을 놓으라고 했다.
"아니요. 안 그럴 겁니다."
엔크리드는 포기하지 않았다.
"참 열심이다. 열심이야."
엔크리드를 본 이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그래야 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으니까.
손바닥이 터지고 팔근육이 후들거리고.
수없이 반복했다.
끼리끼리 모인 곳에서는 괜찮았다.
엔크리드는 특출난 노력가였다.
그리 돈을 모아서 이 교습소, 저 교습소를 헤매다 보니 스물이 넘었고.
스물다섯이 넘었을 때쯤에는 그래도 경력이 쌓이고 실력이 쌓여 용병으로 이름을 알리기도 했다.
그래봤자, 작은 도시에서 몇 번은 되물어야 '아, 그 친구, 칼 좀 쓰지.'라는 말이 돌아올 뿐이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일말의 희망이 있었다.
지금보다 나아지리란 희망.
그렇게 스물일곱의 봄.
엔크리드는 자신의 재능이 보잘것없음을 깨달았다.
지나가다 붙은 시비의 결과가 그리 만들었다.
다섯 합 만에 손에 쥐고 있던 검이 날아가고 배에 구멍이 났다. 엔크리드는 구멍 난 배를 손바닥으로 틀어막고 물었다.
"너, 몇 살이냐?"
"열둘."
열둘이란다. 기도 안 찼다.
이런 게 진짜 천재였다.
"미안, 첫 실전이었어."
꼬마가 말했다. 귀족도 아니고 평민도 아닌 농노 출신의 꼬맹이.
검을 잡은 지는 고작 반년.
"손속이 과했군. 치료비에 보태게."
꼬맹이의 스승이란 작자가 돈주머니를 던졌다.
죽을 정도의 부상은 아니었다.
내장도 다치지 않았고, 그리 깊게 찔리지도 않았으니까.
그래도 주머니는 챙겼다.
열한 살 때부터 지금까지, 16년을 손바닥이 터지도록 검을 휘둘렀다.
그런데 고작 6개월 배운 열두 살 꼬맹이에게 졌다.
우울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음습한 감정을 품고 살진 않았다.
굳이 그리 어둡고, 칙칙하게 살아갈 이유는 없지 않나.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것도 아니고.'
엔크리드는 자신이 천재가 아님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하란 법은 없었다.
그렇게 다시 칼잡이 생활을 이어 갔다.
용병 생활만 얼추 십 년.
뛰어난 기사나 검사는 될 수 없어도 노련한 병사는 될 수 있었다.
엔크리드는 용병 일을 때려치우고 군사 훈련을 받았다. 이게 그가 택할 최선이었다.
이제 와서 농사나 짓고 살 순 없지 않나.
용병 출신의 삼류 검사, 적절한 수식어였다.
"군대가 장난으로 보이시나, 아무나 다 받아 주는 줄 아냐고."
누군가는 비웃었고.
"힘내쇼."
누군가는 어깨를 두드렸다.
인정을 받기도 했고, 뒤처지기도 했다.
그렇게 서른.
나우릴리아 왕국, 사이프러스 사단.
4연대, 4대대 4중대, 4소대.
일명 사사 소대 소속이 곧 엔크리드가 있는 곳이었다.
소대장의 바로 밑, 십인장이 바로 엔크리드의 지위였고.
깡, 깡, 깡.
불침번이 쇳덩이를 후려쳐 막사 전체를 깨웠다.
"...꿈자리 한번 더럽게 뒤숭숭하네."
그 소리에 깬 엔크리드가 중얼거렸다.
"무슨 꿈을 꿨는데 그러슈?"
옆자리 부하 놈이 면포를 겹겹이 쌓아 만든 야전 침대에서 일어나, 부츠에 발을 쑤셔 넣으며 말했다.
껄렁껄렁한 태도지만, 실력은 자신보다 나은 친구였다.
"내 일생."
"불길하게, 씁. 아, 벌레."
부츠 안에 벌레가 있었는지, 부하가 신다가 만 신발을 벗어 탈탈 털고는 다시 신었다.
그 뒤, 바닥에 떨어진 벌레를 보곤 침을 뱉고 발로 비볐다.
진득한 체액과 침이 섞인 흔적이 바닥에 남았다.
그걸 본 엔크리드도 일어나서 복장을 챙겼다.
심장 어림에 쓰로잉 나이프가 꽂힌 흉갑, 팔을 보호하는 완갑, 정강이 보호대 등이다.
몸 안에는 두꺼운 천을 겹으로 쌓은 내갑을 입고.
그 위로는 가죽으로 만든 갑옷을 걸친다.
갑옷은 가죽을 몇 겹으로 덧댄 물건이지만, 그리 튼튼한 가죽이라고 할 순 없었다.
잘 벼린 칼날이면 쓱싹 베일 만한 물건이다.
기름 먹인 나무를 덧댄 완갑 정도는 다른 놈들 것보다야 조금 낫긴 했다.
"이전 십인장이 뒈지기 전에 이런 꿈을 꿨다고 들었는데."
엔크리드는 얼핏 그런 소문을 들은 기억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오늘 뒈질 팔자요?"
부하가 웃기에 뒤통수를 툭 때렸다.
"안 죽어. 재수 없는 소리는."
일어나서 냄비에 물을 붓고 육포 몇 조각을 던졌다. 그 후 몇 가지 먹을 만한 채소를 더 넣고 끓인다.
아침 식사였다.
"오늘 교전 계획 있수?"
옆자리 부하가 묻기에 고개를 저었다.
"모르지."
자신은 말단 십인장이다.
네 명의 십인장 위로 한 명의 소대장이 있다.
아마 그 소대장도 모를 거다.
엔크리드는 검술 실력도 그저 그렇고 귀족도 아니기에 십인장이자 분대장에 머무르지만, 전장에서 구른 짬밥은 어지간한 중대장도 씹어 삼킨다.
그걸 알기에 십인대의 부하도 엔크리드를 존중하는 거고.
"그래서 어릴 때 꿈에서 대장은 뭐가 되고 싶었수?"
부하가 툭툭 다가오더니 물었다.
"기사."
"...웃으면 때릴 거요?"
"안 때려."
"풉."
"그렇다고 비웃냐? 이 새끼가 빠져 가지고."
말하며 궁둥이를 걷어찼다.
맞은 부하가 아픈 척을 하며 말했다.
"아니, 그래도 기사라니."
기사란 무엇인가.
전장의 판도를 바꾸는 자다.
홀로 천을 상대하는 괴물이다.
홀로 수백의 적을 베어 죽이는 영웅이다.
하물며 현재 그들이 속한 부대, 그러니까 사단의 이름도 기사 이름을 땄다.
사이프러스 사단, 사이프러스 경의 군대란 소리다.
그런 기사가 꿈이라니.
"꿈이 참 야무져서 좋수다."
"꿈은 원래 야무진 거야, 자식아."
말하며 엔크리드는 대수롭지 않게 그릇을 챙겼다.
오늘 설거지 당번은 자신이었다.
다른 십인대는 모르겠지만, 엔크리드의 분대는 모든 잡일을 똑같이 분담했다.
십인장이라고 해 봤자 명령을 받고 전달하는 정도다.
그래서 대부분 창이나 칼을 제일 잘 쓰는 놈이 하기 마련인데.
그런 면에서 엔크리드는 조금 특별했다.
그의 무력은 다른 분대원보다 약하다.
하지만 다른 분대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이들을 하나로 뭉치게 할 수는 있었다.
타 부대에서 엔크리드 부대를 두고 말하길, 사사사 분대라 한다.
사사 소대의 사고뭉치 분대라고.
엔크리드는 그런 분대의 분대장이었다.
"도와드리리다."
"그럼 그 입은 좀 다물고 따라와라."
"그럽시다."
부하가 낄낄 웃었다.
이놈은 어쩌다 여기까지 굴러왔는지.
독특한 놈이지만, 엔크리드는 딱히 부하의 개인사가 궁금하진 않았다.
그래서 묻지 않았고.
분대원들은 이런 엔크리드의 태도를 좋아했다.
과거를 묻지 않고, 현재도 따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특별히 요구하는 것도 없다.
이런 점에서 아마도 분대원 전부가 자신을 따르는 게 아닌가 싶었다.
덜그럭거리며 그릇을 씻고 있자, 부하가 냇가의 물을 첨벙거리다가 물었다.
"기사는 왜 되고 싶었던 거요?"
도와준다고 따라와선 물장구나 치고 있는 꼴이다.
음유시인의 노래에 빠져서라고 답하면 웃으려나?
엔크리드는 잠깐 생각한 뒤에 답했다.
"칼도 잘 쓰고 싶었고, 기왕 하는 거 기사도 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
"소년 감성이시구려."
부하가 또 낄낄댔다.
"그 입 좀 닥치라니까."
"그래서 아침저녁으로 그렇게 검 들고 춤을 춘 거였소?"
"노력은 배신하지 않으니까."
수없이 검을 휘두른 탓에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가득했다.
"그래서 지금도?"
기사가 되고 싶냐고?
그럴 수가 있나. 무리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다만, 포기하진 않는다.
그저 묵묵히 견디고 나아갈 뿐.
엔크리드도 현실을 모르진 않았다.
다만 꿈은 현실에 침묵했고, 침묵한 엔크리드는 그저 칼밥을 먹고사는 병사가 되었다.
"다 닦았으면 가자."
"그럽시다."
시답잖은 대화였다.
몸을 일으켜서 막사로 돌아가고.
국지전이 진행 중인 왕국과 교전이 벌어질지.
아니면 근래 생긴 도적단이 보급품을 노린다는데, 거길 공격할지.
뭘 할지는 모르지만.
'공기가 탁하네.'
전장의 공기는 언제나 그렇다.
하지만 오늘은 더 그런 기분이 들었다.
대기 시간이 길었다.
딱히 할 일도 없겠다. 검이나 휘두를까 하다가, 낮잠을 잤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도 있는 법이었다.
'예전만큼 하긴 어렵지.'
부단한 노력, 했다.
그 결과가 이거다.
삼류 용병 수준의 십인대장.
해가 하늘 꼭대기에서 서쪽으로 두 뼘은 넘어갈 때쯤에야 소대장이 외쳤다.
"사사 중대 전원 집합."
교전이었다.
중대원이 모여 군대의 한 축을 차지했다.
엔크리드의 십인대도 마찬가지였다.
싸늘한 긴장감이 몸을 감쌌다.
엔크리드는 용병 생활을 하며 얻은 목걸이 부적을 한 번 쥐었다가 옷 안으로 쑥 집어넣었다.
'이게 목숨을 구해 준다고 했던가?'
개소리겠지만, 본래 전장에 나서는 병사는 미신을 쉬이 믿는 법이었다.
다만, 엔크리드 자신에게 이 부적을 믿는다고 하면 글쎄라는 답이 나올 터였다.
그저 그때 이걸 쥐여 줬던 노파의 눈을 봤고, 그 절절한 말투가 마음을 움직였을 뿐.
'밑져야 본전이니까.'
목숨 걸고 싸운 뒤 보상으로 받은 게 달랑 이 부적뿐이었다.
반쯤은 운이 따라 죽인 거지, 수틀리면 죽는 건 자신이었을 거다.
험난한 마물 퇴치였음에도.
작은 화전민촌이기에 줄 돈이 없었다.
우연히 길목을 지나치는 엔크리드를 보고 마물을 처리해 달라며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을 뿐이지.
'웃기는 일이지.'
동정심에 목숨을 걸다니, 미친 짓이다.
하지만 엔크리드는 그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기사란 그런 것이니까.
꿈은 현실에 침묵하고 잡아먹혀 찢겼어도, 흔적은 남았으니.
기사가 되고 싶었다.
전쟁 영웅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일개 병사.
와아아아아!
함성이 터졌다.
덩달아 엔크리드도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내질렀다.
앞쪽에서 군대의 물결이 몰아쳐 온다.
뉘엿뉘엿 지는 해가 긴 노을을 만든다.
그 노을빛을 부수며 양쪽 군대가 내달렸다.
엔크리드도 마주 달렸다.
"목숨 간수하면서 싸웁시다!"
언제나 웃는 낯의 부하가 외치며 먼저 튀어 나갔다.
곧 적과 아군의 창과 칼이 서로의 피와 살을 헤집기 시작했다.
오늘의 전투는 백병전이었다.
2. 주마등
가죽 투구의 눈구멍 사이로 까만 점이 날아오는 듯 보였다.
엔크리드는 왼손등에 고정한 방패를 들었다.
퉁.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때리면서 흘리려고 했는데 반만 성공한 탓에 팔뚝이 뻐근했다.
엔크리드는 창을 내지른 놈의 투구 위로 칼날을 내리쳤다.
뻑.
반사적으로 목을 꺾은 놈의 어깨 위로 칼날이 떨어졌다.
견갑을 때린 묵직한 소리와 함께 손아귀가 찡하니 울렸다.
"끄윽, 죽인다. 너."
적군이 중얼대더니, 창대를 짧게 잡고 휘둘렀다.
잘 배운 솜씨였다.
엔크리드는 생각할 것도 없이 발바닥으로 놈의 배를 밀어 찼다.
"억."
맞은 놈이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백병전, 난전에 가까운 전투다.
아군과 적군의 선두가 엮이고 섞이면 적아가 뒤섞이기 마련이었다.
고로, 쓰러지면 곧 죽는다는 말이었다.
쓰러뜨린 놈에게서 시선을 뗀 엔크리드는 방패 손잡이를 꽉 그러쥐고 아군을 찾았다.
이성을 잃고 날뛰면 죽는다. 난전이 됐다고 광전사 흉내를 내면 광전사가 되는 게 아니라 시체가 되기 마련이었다.
긴 세월, 보잘것없는 재능으로 살아남은 이유.
엔크리드는 분수를 알았다.
'나서지 말고.'
어디선가 날아온 칼날을 방패로 막았다.
칼날이 방패 모서리에 맞으며 쇠테가 찌그러졌다.
기름 먹인 나무 방패가 뒤틀렸다.
잘해야 몇 번 더 쓰면 무용지물이 될 듯했다.
'공격은 짧고 단순하게.'
막고 난 뒤, 엔크리드는 칼을 쥔 손에 힘을 주고 휘둘렀다.
퉁.
곧 묵직한 타격감이 손아귀를 강타했다.
운 나쁜 적군 하나가 머리통을 얻어맞아 옆으로 나뒹굴었다.
쓰러진 놈의 가슴으로 아군의 창날이 푹 하고 박혔다.
솜과 리넨을 겹쳐 두껍게 만든 갬비슨이 창날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안으로 푹푹 찍혔다.
맞은 놈이 살겠다고 발버둥 쳤다.
퍽! 퍽! 퍽!
아군 병사는 쉼 없이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막든 말든, 거리를 두고 창날을 힘 있게 꽂았다.
푹.
결국, 창날이 갑옷을 뚫고 운 나쁜 적군의 몸통에 틀어박혔다.
"끅."
피를 울컥 토해 낸 놈이 부들부들 떨며 제 배를 찌른 창대를 움켜잡았다.
"시발, 놔! 놓으라고! 개새끼가."
적군은 끝까지 창대를 잡고 버텼고, 아군 병사는 자신의 무기를 포기하고 놈이 쓰던 창을 집어 들었다.
거기까지 확인한 엔크리드는 뒤로 물러나며 호흡을 끊어 삼켰다.
"후우, 후우, 후우."
그는 자신이 선 위치, 아군의 위치, 적군의 위치 따위를 눈에 담고 머릿속에 그렸다.
'나서면 죽는다.'
자신의 실력으로 적군 사이로 파고들면 전장에 뿌려지는 거름이 될 터였다.
조금 전 배꼽보다 몇 배는 큰 구멍이 뚫려 죽은 적군과 마찬가지다.
놈은 흥분한 채 전선 앞으로 튀어나왔으나, 실력은 그저 그랬다.
그동안 전장에서 제 놈보다 운 나쁘고 실력 없는 놈을 몇 잡아서 자만했을지도 모르고.
단순히 운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노리고 휘두른 것도 아닌 엔크리드의 칼날에 걸렸으니까.
며칠째 비가 오지 않아 바닥이 딱딱하게 굳어 돌덩이 같았다.
그 위로 피가 흩뿌려졌지만, 그렇다고 건조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동안 비가 너무 안 왔다.
목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 들며, 목구멍 안에서부터 피 냄새가 솟구쳐 올라왔다.
엔크리드는 마른침을 삼키며 눈으로 제 분대원을 찾았다.
물론 찾는다고 보이진 않았다.
그 대신이다.
"우아아아아!"
누군가 고함을 내질렀다.
두 걸음 거리였다. 아군 소대원 중 하나가 창을 들어 찌르는 장면이 보였다.
'뭐하냐.'
찌르기 자체는 좋았으나 혼자 발을 헛디디더니, 제 왼발에 오른발이 걸려 자빠졌다.
쿵- 하고 쓰러지며 무기도 놓쳤다.
'죽여 달라고 기도라도 올리는 거냐?'
쓰러진 놈이 고개만 삐죽 올리는 꼴이 엎드린 채 기도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엔크리드는 생각을 끊어 내고 움직였다.
앞으로 나아가며 방패를 위로 들고 숨을 참으며 근육에 힘을 줬다.
퉁. 우지직.
상대 칼날이 방패를 후린다. 묵직한 충격이 팔뚝을 통해 전신에 퍼졌다.
가까스로 칼날을 막자 기름 먹인 나무 방패가 쪼개졌다.
엔크리드는 부서진 방패를 앞으로 던지고 젖 먹던 힘까지 더해서 세차게 칼을 좌우로 휘둘렀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한 번, 다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크게 한 번.
훙, 훙.
까-앙!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휘두르는 타이밍에 상대 무기가 걸렸다.
칼날과 칼날이 만나 불똥이 튀고, 상대의 무기가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게 보였다.
그걸 노렸다.
엔크리드는 어쭙잖은 제 검술보다, 그동안 키운 제 완력을 믿었다.
훈련만큼은 어지간한 일류 용병 이상으로 해 왔다.
그 완력이 만든 기회였다. 그렇다고 덤벼들진 않았다. 언제나 위기 속에 기회가 있듯, 기회 속에 위기가 있는 법이니까.
"우아아!"
무기를 놓친 적군은 주춤하더니 팔을 들고 달려들었다.
자신이 곰인 줄 아는 듯했다.
엔크리드는 칼을 내미는 척하다가 바닥에 던지듯 놓아 버리곤 몸을 숙였고, 달려들던 놈을 받아서 뒤로 넘겼다.
갑옷과 투구, 갖가지 무장, 거기에 성인 남성의 몸무게가 등허리 위로 실렸다.
묵직했다.
상대를 등에 싣는 순간, 허리와 허벅지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 비명을 무시한 채, 엔크리드는 힘껏 허리를 펴며 몸을 일으켰고.
"컥!"
적군의 몸은 뒤로 훌렁 넘어갔다.
쿵 하고 떨어진 놈을 돌아볼 필요는 없었다.
자신이 선 위치는 아군이 만든 전선의 한 발자국 안쪽이었고.
이쪽에선 보통 세 종류의 적군만 만날 수 있었다.
하나, 등 떠밀려 달리다 보니 선두에 서게 된 운 나쁜 놈.
둘, 며칠 간의 전투를 통해 자만감이 가득한 머저리.
셋, 제 실력에 자신이 있기에 전투를 주도하는 진짜배기.
지금 뒤로 넘긴 놈은 첫 번째 타입이었다.
자포자기로 덤비다가 적군 사이에 떨어졌으니 죽은 목숨이었고.
엔크리드는 바닥에 떨어진 칼을 주워들었다.
돌진하다 제 발에 걸려 쓰러진 아군이 주섬주섬 일어나는 게 보였다.
어디서 맞았는지 투구 반쪽이 곱게 쪼개진 것도 보였다.
머리통에서도 피가 흘렀다.
'운 참 억세게 좋은 놈일세.'
하물며 조금 전에도 죽을 뻔한 걸 자기가 살렸다.
여러모로 운이 좋은 친구였다. 아는 놈이기도 했고.
"벨, 머리통이 쪼개져서 정신을 놔 버렸냐?"
엔크리드가 말했다.
투구가 반쯤 쪼개진 병사, 벨은 눈 위로 흐르는 피를 닦으며 답했다.
"크흐, 시발, 염병할, 간신히 살았네."
"간신히 살았으면 등 좀 막아 줘."
전장 한복판에서 일개 병사가 전세를 읽긴 어렵다. 분대장이자 십인대장은 지휘관이 아니라 십인대에 명령을 조달하는 역할이 주가 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엔크리드는 전세를 읽었다.
정확하게는 느꼈다.
'안 좋은데.'
수없이 긴 세월, 전장의 피와 칼날을 머금고 살아왔다.
그 나날들이 그에게 검술의 재능을 주진 않았지만, 그래도 얼치기로 전장의 흐름은 잃게 해 줬다.
솔직히 말하면 순전히 감이었다.
그래도 그 감이 그를 여러 번 살린 건 사실이었다.
'이거 염병난 것 같은데.'
"끄으, 그럽시다."
벨이 머리에 피를 닦으며 대답하곤 제 무기를 챙긴 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동작으로 움직였다.
창을 든 벨은 주변을 경계하며 두 걸음 걸었고.
퍽.
섬광이 날아와 머리통을 뚫었다.
반쯤 잘린 투구 사이였다.
화살이 날아와 머리통에 꽂혔다. 그 충격에 눈알이 튕겨 나와 엔크리드의 가죽 갑옷 위를 때렸다.
'아.'
벨은 짧은 신음조차 뱉지 못하고 죽었다. 입만 벙긋 벌린 채였다.
엔크리드는 시선을 돌렸다.
하늘 저편, 정확히는 허공. 무어라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공간의 사이.
번쩍하는 빛과 점이 보였다.
그걸 보는 순간, 그게 자신의 머리에 꽂힐 거란 걸 알았다.
엔크리드는 눈을 감았다.
죽음의 순간에 초연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엔크리드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눈을 감자 곧 지난 삶, 어제 꿨던 꿈처럼 과거가 툭 하고 튀어나와 흔히 말하는 주마등처럼 지나가려 했다.
시간이 느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전장의 소음이 지워지고 숨 쉬는 것조차 느려지는 기분이었다.
툭, 탁!
곧 그런 기분은 사라졌다. 주마등도 사라졌고 다시 전장의 소음이 들렸으며 숨도 똑바로 쉬고 있다는 걸 느꼈다.
"죽여 줘서 고맙다고 감사 기도라도 올리는 거요?"
부하 놈이었다.
제 십인대 중 하나.
그가 자신을 밀쳤고, 화살은 바닥에 꽂혔다.
"렘."
엔크리드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번 전투에 매의 눈깔인지, 깃털인지 하는 개자식이 왔다니까, 화살 조심하쇼."
"그게 조심한다고 안 맞겠냐?"
"내가 조지고 올라니까, 좀 기다리고."
이 새끼도 참 신선하게 미쳤지.
엔크리드는 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삶을 포기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오늘따라 훈련도 빼먹고 낮잠 자더만."
렘이 말했다.
"참견이냐?"
"혹시나 뒈지고 싶은 거 살렸으면 내가 찝찝하니까."
"염병할,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
칼밥 먹고 산다는 게 자살 기도한다는 것과 같은 말은 아니었다.
"평소에는 잘만 싸우다가 꼭 중요한 순간에는 눈을 감으니까 하는 말이지."
"감고 싶어서 감는 거겠냐?"
아까도 비슷한 말로 되물은 것 같은데.
렘은 오른손에는 도끼, 왼손에는 부러진 창을 들고 있었다.
칼이나 도끼, 둔기 등의 무기를 가리지 않고 잘 쓰기에 가능한 무장이었다.
그는 도끼를 든 오른손을 들어 엄지로 제 머리를 북북 긁었다.
그렇다고 시원해 보이진 않았다.
투구 위를 긁고 있었으니까.
"시발, 이 투구는 냄새가 참 개같아."
"그건 동감이지."
"죽을 것 같으면 더 집중하라니까."
렘이 말했다.
자주 하는 말이었다. 엔크리드도 안다. 저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렘은 자주 말하곤 했다.
뒈질 것 같은 순간, 그 주마등의 순간, 사람은 초인의 경지로 집중한다. 그걸 전투에 활용하라고.
염병, 그게 되겠냐?
그게 재능이었다.
삶과 죽음을 나누는 그 찰나에 눈을 뜨고 상대를 직시하고 내 할 일을 하는 것.
"집중은 지랄."
엔크리드가 말했다.
"뭐, 수백 번 죽어 보면서 배우면 좋겠지만, 목숨은 하나니까. 그럼 또 봅시다."
렘이 낄낄 웃고는 또 훌쩍 뛰어 전장으로 내달렸다.
참 잘 싸우는 놈이다.
엔크리드는 다시 전투에 집중했다.
어깨 옆으로 아군 병사를 두고 싸운다. 그걸 반복한다.
엔크리드는 칼을 쑥 내질렀다.
운 좋으면 꿰이고 운 나쁘면 피하겠지.
이도 저도 아니면.
퉁.
그저 칼끝으로 치는 수준의 타격이 될 거다.
상대의 갑옷을 뚫지 못한 칼끝이 그대로 둔기처럼 상대를 밀쳤다.
"음."
맞은 놈이 신음을 흘리며 뒷걸음질 쳤고, 지나가던 아군의 전투 망치가 놈의 머리통을 때렸다.
꽝.
잡생각을 지웠다.
당장 눈앞에 날아드는 칼날, 창날, 몽둥이를 막고 피하고 검을 휘두르는 것만 해도 신경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다.
방패가 없어서 불안해 바닥에 떨어진 도끼를 하나 주워 방패 대용으로 썼다.
여전히 주변에 아군을 두고 막고 때리고 찔렀다. 틈이 보이면 그동안 배운 어설픈 칼질을 선보였다.
왼발을 앞으로, 무게 중심을 이동하며 칼끝은 곧게 팔에 힘을 빼지 않고.
찌르기다.
적당히 긴장한 근육과 집중력, 틈을 포착할 센스만 있다면 성공할 법도 했다.
팅, 티디디디디딩!
엔크리드의 찌르기는 반만 성공했다.
'씁.'
투구와 흉갑의 틈새를 노렸는데 상대가 움직이며 빗나갔다.
상대의 목에 긴 칼자국을 만들긴 했지만, 치명상이라고 보긴 힘들었다.
피를 흘리던 놈의 눈이 엔크리드를 향했다.
독기가 가득한 눈이었다. 놈은 말없이 까드득 하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위험.'
전장의 감이 말했다.
엔크리드가 뒤로 물러나는 사이, 아군 병사 하나가 그사이를 채웠다.
놈은 말없이 몸을 수그렸고 제 앞을 막은 아군의 정강이를 칼을 쥔 주먹으로 때렸다.
빠각.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끄윽!"
정강이가 부러진 병사가 쓰러지자, 적병은 단검을 뽑아서 아군의 목을 쑤셨다.
푹 찌르고 뽑아내는 과정이 자연스러웠다. 마치 그러라고 정해 둔 연극의 한 장면 같았다.
피가 솟으며 놈의 흉갑을 적셨다.
놈은 그대로 죽은 병사를 밀쳤다.
'아.'
주마등.
삶과 죽음의 경계.
빛을 뿜는 등(燈) 바깥으로 수없이 많은 그림이 스친다. 그 그림은 엔크리드의 인생이었다.
어젯밤 꾼 꿈처럼.
그 인생의 끝, 모든 게 지나치는 순간, 상대의 칼날이 엔크리드의 목을 꿰뚫었다.
자신이 선보인 찌르기를 그대로 해 보인 놈이었다.
완벽한 찌르기였다. 적어도 엔크리드가 보기에는 그랬다.
화끈한 통증이 목에서부터 전신을 치달릴 때다.
엔크리드는 삶과 죽음의 순간을 마주했고 렘이 말한 그 집중력이란 게 뭔지 깨달았다.
다만, 너무 늦었을 뿐이었다.
'죽어야 배울 수 있는 거였냐?'
속으로 렘을 욕하고 눈을 감으며 엔크리드는 생각했다.
아니, 그의 마음이 멋대로 움직였다.
갈망, 갈구, 열망.
'검을 잘 쓰고 싶었다.'
'기사가 되고 싶었다.'
'영웅이 되고 싶었다.'
결국, 그리되지 못한 엔크리드는 적당히 돈을 벌어 적당한 마을에 정착해 집을 짓고 살아야 하는 신세였다.
하지만 그리하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가슴에서 들끓는 열정이 그를 그렇게 놔두지 않았으므로.
끝내 마지막 순간까지, 전장에서 피로 번 돈을 교습소 따위에 날렸다.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시간이 더 있었다면.
남들 잘 시간에, 소위 말하는 수재나 영재라는 새끼들이 노는 그 시간에 더 휘두르면 되리라고 생각했다.
주마등의 마지막, 자신이 혼자 힘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구했던 작자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부적은 기사님의 바람에 움직일 겁니다요."
부적을 선물한 건 화전민 마을 촌장이었다.
앞니 몇 개가 빠져 바람 새는 소리가 나던 그 노파.
후회와 갈망이 섞이며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가슴을 채웠다.
후회다.
'칼 몇 번 더 휘둘렀으면 달라졌을까?'
죽음이란 두 글자가 몸에 깃든다. 감은 두 눈 너머로 검은 강물이 보였다.
그리고 엔크리드는 오늘 낮에 검을 휘두르는 대신 낮잠을 잔 걸 후회했다.
만약 그때 조금 더 했다면, 마지막 찌르기가 성공했을지도 몰랐다.
검은 강물 위로 얼굴 없는 뱃사공이 나룻배 위에 앉아 있었다.
그 뱃사공이 물었다.
"진짜 그렇게 생각해?"
음?
"너 재밌네."
으으음?
"그럼 그렇게 하자."
입 없는 뱃사공이 말했다. 말소리가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입 부근은 까만 복면이라도 쓴 것처럼 그저 어두울 뿐이었다.
엔크리드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대로 정신을 잃었고 다시 눈을 떴다.
깡, 깡, 깡.
불침번이 쇳덩이를 두드리는 소리.
정확히는 국자로 냄비를 때리는 소리다.
익숙한 아침을 깨우는 소리.
"...."
말없이 옆을 바라보자.
"개 같은 꿈이라도 꾼 거요?"
옆자리 부하, 램이 야전 침대에서 일어나 부츠에 발을 쑤셔 넣으며 투덜거렸다.
"아, 벌레."
부츠에 벌레.
엔크리드는 눈을 깜빡였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현실 같은 일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퉤."
벌레를 털어 낸 렘은 침을 뱉고 벌레를 발로 짓이겨 죽였다.
바닥에는 벌레의 체액과 침이 섞인 흔적이 남았다.
3. 하루
어제와 똑같은 하루.
'꿈?'
너무 생생했는데, 그게 꿈이었나?
어안이 벙벙했다.
꿈인지, 아니면 진짜인지.
어제와 비슷한 하루를 보내며 맞이한 전장.
또 난전, 비슷한 자리에서 싸우다 보니 반사적으로 환영이 겹쳐 보이는 기분이었다.
'어제도 이러지 않았나?'
생각하다 말고 고개를 흔들었다.
잡념이다. 꿈이었을 거다.
운이 좋아 예지몽이라도 꾼 걸까?
'예지몽을 운이 좋다고 꾸는 게 맞나?'
모른다. 알 수 없다.
엔크리드는 혼란스러웠다.
특히.
기름 먹인 방패가 쪼개지고.
"염병, 뒈질 뻔했네."
벨이 저 말을 했을 때 더 그랬다.
"벨, 머리통이 쪼개져서 정신을 놔 버렸냐?"
반사적으로 기억한 말을 그대로 뱉으니.
"무슨 미친 소리야."
벨이 주섬주섬 일어난다. 엔크리드는 벨을 보고 생각했다.
벨은 곧 죽는다.
그걸 두고 봐야 하나.
두고 봤다.
현실감이 없는 일이었기에, 그리 놔뒀고.
섬광이 벨의 머리통을 터트렸고, 눈알이 튀어나와 다시 엔크리드의 가슴팍을 때렸으며.
"정신 놓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요?"
렘이 다시 자신을 구했다.
"뭐?"
"드디어 돌아 버린 거요?"
렘이 귀에 대고 손가락을 빙빙 돌렸다. 그의 손에 들린 도끼가 보였다.
"오늘 매의 새끼인지, 발톱인지 하는 새끼가 와서 나 그거 잡으러 가야 하니까, 정신 좀 차리쇼. 씁, 이거 원 불안해서 놔두면 금방 뒈질 것 같네."
"네 걱정이나 해."
반사적으로 말하니, 렘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발을 뗐다.
"집중하라니까, 말 참 안 들어."
그리 중얼거리며 렘이 떠났고.
난 왼손에 방패 대신 바닥에 굴러떨어진 도끼를 줍고, 오른손에는 검을 쥔 채로 전장에 섰다.
찝찝했다.
그리 버티는 와중이다.
앞에서 적병 하나가 거리를 좁혔다.
순식간이었다. 발을 쓸 줄 아는 놈이었다.
검술 선생 중 그런 말을 한 작자가 있었다.
검술에서 칠 할은 발이 하는 거라고 하던가.
칼날이 보이며 엔크리드는 다시 죽음의 순간에 직면했다.
찰나의 순간, 집중력이 빛을 발한다. 점이 보였다.
그 점은 작아졌다가 금세 커졌다.
엔크리드는 그걸 끝까지 지켜봤다.
그 점이 칼날이 되어 제 목을 뚫는 것까지.
'아.'
비명과 신음은 나오지 않았다. 목이 꿰뚫렸으므로.
시-익 하고 공기 빠지는 소리만 목구멍에서 나올 뿐이었다.
끔찍한 통증이 목구멍에서부터 전신으로 퍼진다. 엔크리드는 목을 부여잡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대로 피를 꿀렁꿀렁 흘리자.
"자비다."
자신을 잠시 지켜보던 적병이 말하며 머리를 칼끝으로 찍었다.
그걸로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그리고 엔크리드는 또 들었다.
깡, 깡, 깡.
국자로 냄비를 때리는 소리를.
"아침부터 눈빛이 왜 그따위인지 묻고 싶은데."
옆자리의 렘이다.
그가 부츠를 들고 말했다.
또 하루다. 같은 하루.
'꿈?'
"개 같은 꿈이라도 꾼 거요?"
"그치, 꿈이지?"
"아, 시발, 벌레."
렘은 부츠에 있던 벌레를 털어 내곤 가래침을 뱉고 짓밟았다.
세 번째 보는 장면이었다.
엔크리드는 부츠도 안 신고 장비도 걸치지 않았다.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이게 꿈이라고?'
다시 하루가 시작되고.
벨이 죽고 렘이 자신을 구한다.
렘은 매의 신체 부위 중 하나를 별명으로 가진 궁수를 찾으러 떠나고.
검을 잘 쓰는 적병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다.
"너 뭐냐?"
엔크리드가 물었다.
적은 대답 없이 검을 찔렀다. 볼 때마다 감탄이 나오는 그 찌르기.
두근.
심장이 뛴다. 집중력이 발휘된다. 엔크리드는 이전보다 더 확실히 검 끝을 볼 수 있었다.
몸을 뒤틀며 피했다.
드드득!
그리 좋은 결과를 얻진 못했다. 유려한 찌르기는 엔크리드의 목을 꿰뚫진 못했으나, 목 옆을 크게 뜯어 냈다.
화끈한 통증이 목덜미를 따라 전신으로 퍼졌다.
다시 바닥으로 쓰러지고.
피가 꿀렁꿀렁 쏟아진다.
"자비다."
머리통으로 칼날이 떨어진다.
깡, 깡, 깡!
"악!"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통증이 여실하다. 엔크리드는 목을 쓰다듬었다.
"악몽이요? 마녀가 총각 딱지라도 떼간 거요?"
렘이 시답잖은 농담을 지껄였다.
"부츠에 벌레 있다."
엔크리드가 손으로 얼굴 반쪽을 덮으며 말했다.
죽을 때 고통도 고통인데.
이게 무슨 일인지, 도저히 감이 오질 않았다.
"뭐? 뭐요, 이거 어떻게 안 거요?"
렘이 부츠 안에 든 벌레를 바닥에 버리곤 가래침을 뱉어 짓밟았다.
"그냥."
"예언가였소?"
"아니야."
말하며 손을 휘저었다.
엔크리드는 평소와 같이 준비를 마치고 나가다 말고 멈췄다.
"렘."
"왜 그러쇼?"
"머리가 너무 아프다. 식사는 알아서 해결하고, 누가 날 찾으면 막사에서 앓고 있다고 해 줘."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거라면야."
렘이 낄낄 웃었다. 웃음이 헤픈 친구다.
만약 이게 꿈이 아니고.
죽은 뒤에 다시 반복되는 거라면.
그게 맞나?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엔크리드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막사 안으로 도로 들어가 장비를 풀고 앉았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원인은?'
언뜻 생각나는 게 있어 더듬더듬 품을 뒤적였다. 없었다. 화전민 촌장에게 받은 목걸이가 없었다.
'그거 때문이라고?'
갈망? 소원?
'축복?'
아니, 이걸 축복이라고 할 수 있나?
그저 하루가 반복되는 것뿐인데?
하물며 축복 계열, 그러니까 블레싱 계열 아티팩트에 관해서는 엔크리드도 주워들은 게 있었으나, 이런 경우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에 가깝지 않나?'
생각하며 엔크리드는 제 목을 쓰다듬었다.
참 끔찍하게도 아프다. 죽을 때마다 더럽게 아팠다.
복잡한 생각에 머리가 터질 듯했다.
점심까지 거르자, 렘이 먹을 걸 챙겨서 들어왔다.
"뭐 때문에 그러는 거요? 진짜 게으름이라도 피우고 싶어서?"
설마 그러겠냐는 눈치다.
엔크리드는 이곳에서도 알아주는 노력가였다.
"응."
"진짜?"
"응."
엔크리드가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별일이네, 그럼 쉬쇼. 오후 늦게 전투가 있다고 하니까 잘 쉬고. 내가 잘 둘러대 줄 테니, 그때까지 몸 추스르고."
렘이 나갔다.
시간이 흐른다. 생각이 정리될 리가 없었다.
이런 건 정리한다고 정리되는 종류의 일이 아니니까.
아아아!
함성이 들린다. 땅이 울린다. 전투가 시작됐다.
엔크리드는 나갈 생각이 없었다.
나가면 그 찌르기에 죽을 테니까.
그리 버티려 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버틸 순 없었다. 전장의 소모품 주제에 몸이 아프다고 전장을 외면할 순 없는 노릇이니.
"다들 준비하고 나가! 전투다!"
막사 안을 도는 감시병이 있다.
엔크리드는 장비를 갖추고 나갔다.
다시 싸웠다.
어제보다 한참 후방에서 싸웠다.
벨도 렘도 안 보고 버티는데.
훅- 하고 앞쪽 군세가 요동쳤다.
적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아군이 밀렸다.
어느새 엔크리드는 최전선에 섰다.
그리고 다시 그놈을 만났다.
이건 우연인가, 필연일까.
모른다. 다만, 전장의 어디로 가든 죽거나 이 친구를 만나게 된다는 건 확실했다.
그러므로 지금은 '왜'가 아니라 '어떻게'를 고민할 때였다.
왜 만나는지 알아볼 게 아니라 어떻게 살아남느냐다.
찌르기.
칼날이 날아온다.
'기술 이름이 뭐였더라?'
렘이 집중하라며 기술에 관해 말한 적 있었다. 이것만 할 줄 알아도 전장에서 그냥 뒈지진 않을 거라고 하며.
마물의 굴에 갇혀도 차분히 숨을 돌려야 한다고도 말했었다.
지금 엔크리드가 시도하는 이 짓은 렘이 알려 준 거였다.
무슨 심장이라고 했었는데.
이름이 떠오를 듯 말 듯 머릿속을 스쳐 갔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 재주가 다시 빛을 발한다. 엔크리드는 칼날을 보며 자신이 숨을 참고 있다는 걸 자각했다.
두근.
심장이 요동친다. 칼날이 제 목을 파고드는 타이밍과 각도를 본다.
몸을 옆으로 날렸다. 볼썽사납게 바닥을 굴렀지만, 살았다.
그리 기뻐하는 것도 잠시였다.
뻑!
뒤통수에 충격이 오며 끔찍한 고통이 뒤따라왔다. 머리가 멍해졌다. 바닥에 쓰러진 줄도 몰랐다.
뒤쪽에서 다른 적군이 도끼로 투구를 후려친 거다.
그리 얻어맞은 뒤, 몽롱한 눈으로 위를 쳐다보니.
"자비다."
찌르기 새끼가 다시 칼날을 꽂았다.
퍽.
깡, 깡, 깡!
다시 눈을 뜬다.
반복되는 하루.
'생각하지 말자.'
목걸이가 축복인지, 저주인지 생각하지 말자.
이게 무슨 일인지도 생각하지 말자.
지금 생각할 건 두 가지다.
전장에서 살아남는 것.
그리고 그걸 위해 무엇이든 하는 것.
"부츠에 벌레 있다."
"응? 예언가요?"
"그거 뭐였지? 나한테 예전에 가르쳐 주려고 했던 거."
끔뻑끔뻑.
렘이 눈을 깜빡이다가 말했다.
"야수의 심장?"
맞다. 그런 이름이었다.
야수의 심장.
한낱 인간의 심장으로는 창과 칼, 도끼가 날아다니는 전장에서 어찌 눈을 부릅뜨고 있으랴.
야수의 심장을 품으면 그럴 수 있으니, 그리하라.
렘이 말한 내용이 떠올랐다.
"다시 가르쳐 줘."
"엥?"
렘이 황당해했다.
엔크리드는 렘을 이해했다.
한때는 배우겠다고 아등바등했고, 그 열정에 반한 렘은 가르치겠다고 아등바등했다.
결국, 엔크리드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고 렘은 아무것도 가르치지 못했다.
찰나의 순간, 눈을 감지 않는 게 훈련의 기초라는데.
뒈지기 일보 직전까지 눈을 뜨고 있는 건 보통 담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냥 눈만 뜨고 있다고 끝나는 일도 아니고.
엔크리드가 보기에 렘의 실력은 어지간한 일류용병보다 나았다.
그의 도끼가 목을 반쯤 파고들 때까지 보고 피하는 게 훈련의 골자였다.
"해 보자고, 훈련."
엔크리드의 눈에서 열정이 타오른다.
가슴에 불꽃이 지펴졌다.
'축복인지 저주인지 따질 필요가 있을까?'
자신에게 재능은 없다. 그건 안다.
그리고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그러므로 둔재는 천재를 이길 수 없다.
그럼 시간이 공평하지 않으면?
저주라도 좋다. 이건 끈이었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끈.
"좋수다. 요즘 뼈다귀 잃어버린 개새끼마냥 힘이 쪽 빠져 있었는데 오늘따라 힘이 넘치는 걸 보니 나도 힘이 나네."
렘이 일어나며 말했다.
"아침 먹고 바로."
"뭐, 그럽시다."
아침을 먹고 그릇을 씻어 내고.
기사가 꿈이었다는 시답잖은 말을 나누고, 렘은 그걸 보고 웃고.
그 뒤 수업 시간이 됐다.
"훈련법 까먹었수?"
"전혀."
어찌나 인상적인지, 엔크리드는 렘의 훈련 때문에 악몽도 꿨다.
그놈의 도끼가 목을 가르는 악몽을.
"가 봅시다."
훈련의 요지는 간단하다.
도끼가 목을 베려 하면 눈을 부릅뜨고 피하는 거.
렘이 실수하면 엔크리드가 죽는다.
원래는 그게 겁이 나서 제대로 못 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달랐다.
'죽어도 다시 땅땅땅이잖아.'
겁대가리 상실의 시간이다. 처음 죽으며 배운 집중력, 야수의 심장을 일깨운다.
엔크리드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놀라서 요동치던 심장의 박동이 평온해진다.
야수는 쉬이 놀라지 않는다. 느려진 심장 박동이 평정심을 가져온다.
평정심, 야수의 심장의 핵심이다.
차분한 마음이 도끼날의 궤적을 눈에 담게 한다.
몸을 다루는 훈련이야, 그동안 쉬지 않고 해 왔다.
궤적을 보고 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도끼날이 허공을 가른다. 엔크리드는 타이밍에 맞춰 오른발을 뒤로 빼고 몸을 뒤로 물렸다.
도끼가 눈앞을 지나쳤다.
"...나 몰래 연습했수?"
렘이 물었다.
"조금."
"좋수다. 좋아. 하지만 지금 타이밍은 조금 빨랐수. 직전에 피하는 거요."
심장 가죽을 두껍게 하는 훈련이다.
렘이 도끼를 휘둘렀다.
엔크리드는 도끼가 목을 벨 듯 말 듯한 타이밍까지 기다렸다가 피했다.
"크, 우리 부족에서도 이거 배워서 하는 놈이 몇 안 됐는데 말이요. 신기하네."
오전 훈련이 끝났다.
렘이 엔크리드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했수다. 이 정도면 실전에서 어설픈 놈들은 상대해볼 만할 거요."
"어설픈 걸 넘어서는 놈들이면?"
"뭘 묻고 싶은 거요?"
"그런 놈을 마주하면 어떨까."
"몰라서 묻는 거요?"
엔크리드가 빤히 보자, 렘이 말을 이었다. 이 양반이 오늘 왜 이러나 싶은 눈빛이다.
"튀어야지."
그래, 도망이다.
전장에서 자기보다 강한 상대를 마주해 부딪치는 건 미친 짓이다.
눈치가 있고 제 주제를 알았기에 엔크리드는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그리고 지금.
"어설프지 않은 상대로 연습하면 더 좋겠네? 이거?"
"그렇게 훈련하면 목숨이 백 개라도 모자랄 거요."
렘이 낄낄 웃었다.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엔크리드는 생각했다.
지금 막 자기 목숨이 수백 개가 된 것 같다고.
축복이든 저주든.
'쓸 수 있으면 다 쓴다.'
엔크리드는 지금까지 그리 살았다.
그리 살았으니, 지금도 그럴 생각이었다.
그 찌르기, 마주한다.
그럴 생각이었다. 좋은 훈련 상대 아닌가.
죽을 때의 고통은 끔찍하지만, 그만큼 반대급부가 크다.
엔크리드는 십여 년 만에 성장의 기쁨을 느꼈다.
더 없이 마음이 충족되는 기쁨.
마약과도 비교할 수 없는 충족감이었다.
4. 야수의 심장
"전군 집합! 4소대 집결!"
소대장의 외침이 막사 앞을 울린다.
충족감이 가슴을 채운 하루, 그 하루의 끝이 다가오기 시작한다.
어느새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기 시작한 늦은 오후였다.
"쉽게 말하면 이건 몸으로 익히는 게 아니라는 거요. 그러니까 백날 연습만 해서 소용없는 거고, 그런데 훈련한다고 이걸 이만큼 익힌 걸 보면 재능이 없다고 하긴 어렵지 않수?"
소대장의 부름에 움직이며, 렘은 답지 않게 진지하게 말했다.
"그래?"
엔크리드는 반문할 뿐이다.
자신한테 일어난 일을 있는 그대로 말한다고 믿기도 어려울뿐더러, 그걸 믿는다고 해도 문제다.
얘기라도 퍼지면?
진짜 신의 축복이라면 모르겠지만,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이단심문관이랑 면담이다.
이단심문관이란 작자들과 면담해서 그 끝이 좋을까?
어림도 없지.
잘해야 화형이고 최악은 고문 파티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몸에 못질을 당하고 손발톱이 뽑히고 싶은 사람은 없다.
물론 엔크리드도 그랬다.
용병 시절, 이단이란 이름으로 억울하게 당한 이들을 많이 봤다.
그중 일부를 뒤로 조금 도운 적도 있고.
누가 알았다며 자살도 골라서 한다고 비아냥거렸을 거다.
그만큼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도 했다. 그리 돕는 게 옳은 일이었으니까.
그것조차 하지 않는다면 칼잡이로 살아갈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뭐지, 그 여유는? 몹시 보기 꼴값지 않은데, 어디서 금괴라도 주웠수? 오늘 탈영할 예정이고? 그런 거 혼자 먹으면 탈 나는 거 모르슈?"
금괴라....
그것보다 좋은 걸 얻긴 했다.
"닥치고 가자."
집합 명령이 떨어졌으니, 움직여야 할 때다.
엔크리드는 이마 위로 흐르는 땀을 대충 소매로 닦았다.
이대로 투구를 쓰면 고약한 냄새가 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 와중에 냇가로 가서 몸을 닦고 가겠다고 할 수도 없다.
옆에 선 렘 놈은 땀도 흘리지 않았다. 무슨 훈련을 하면 저렇게 되는 걸까.
엔크리드는 4소대 소속.
소대 위치로 이동했다.
'먹힐까?'
하루 만에 배우는 건 무리다. 그래도 어느 정도 요령은 터득했다.
칼에 찔려 죽은 경험 덕분이다.
"우리는!"
소대장이 외친다.
"이긴다!"
소대장은 모난 곳 없이 무난한 사람이다. 특별할 것 없이 윗선의 지시를 잘 따르는 사람이고.
전장의 문이 다시 열리려 한다.
해가 서쪽을 따라 내려가며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심장이 떨렸다.
왜?
엔크리드는 자신에게 되물었다.
답은 금방 나왔다.
두려움.
칼에 찔려 죽는 것만 세 번.
그 통증, 그 아찔함, 몇 번을 겪는다고 해서 적응될 것 같진 않았다.
엔크리드가 목을 쓰다듬었다.
아무 상처가 없는데도 따갑다. 칼날을 삼킨 기분이었다.
"왜? 목이 간수가 안 될 것 같수?"
옆에 선 렘이 속삭였다.
"긴장 좀 해라. 전장이다."
엔크리드가 '전군 전진!' 소리에 맞춰 발걸음을 떼며 말했다.
옆에서 렘이 발을 맞춰 걸었다.
"긴장감이 몸을 굳게 만드는 거요. 안 그러려고 나한테 그거 배운 거 아니요?"
맞는 말이다. 그래서 얄밉다.
야수의 심장.
가르친다고 배우는 놈이 몇 없다고 했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누른다.
걸음에 맞춰 호흡을 가다듬는다.
"그래, 그렇게 하는 거요. 오늘도 뒈지지 말고 봅시다. 꿈이 야무진 대장."
렘의 말을 들으며 엔크리드는 만약 오늘 또 죽으면 내일은 기사가 꿈이었다는 얘기는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다시 전장이었다.
백병전의 시작.
똑같은 하루가 흐른다. 엔크리드에게는 네 번째의 오늘이다.
방패가 쪼개지는 걸 막아 보려다가 관뒀다.
애초에 방패의 역할이 뭔가.
상대의 칼이나 창, 도끼 따위를 막으려고 들고 있는 걸 아끼겠다고 용쓰는 게 더 우스운 일이었다.
'그럴 바에는.'
잡생각이 길었다.
갑자기 눈앞에서 뭔가 훅하고 날아왔다.
잇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뒤로 몸을 젖히며 방패를 앞으로 내밀었다.
몸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땅!
날아오는 창날이 방패 모서리를 때렸다.
아슬아슬하게 막은 셈이다.
왼쪽 어깨가 시큰했다. 창이었다. 꽤 힘이 들어간 일격이었고.
적군이 뻗은 창을 뒤로 당기고 다시 뻗었다.
평소라면 굳은 몸이 풀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또 뻣뻣한 자세로 막았을 거고 위기의 연속이었을 테지만.
마음이 가라앉는다. 덕분에 창날이 보였다.
자신을 죽인 찌르기보다 두 배는 느렸다.
그러므로 피하지 못할 것도 없다.
창날 끝을 끝까지 바라보다가 고개만 꺾었다.
씽.
창날이 투구 옆을 스쳤다.
태어나 처음 해 보는 묘기에 가까운 짓이었다.
야수의 심장은 쉬이 흥분하지 않는다.
작은 동작으로의 회피.
그만큼 여유가 생겼다.
마음의 여유는 새로운 시각도 선사했다.
엔크리드의 눈에 창을 내지른 놈의 투구와 흉갑 사이의 틈이 보였다.
턱이 슬쩍 보일 정도의 틈.
그리 넓은 틈은 아니다.
그렇다고 좁다고 할 수도 없다.
칼날이 들어갈 만큼은 될 테니까.
칼을 쥐고 위로 찔렀다.
대단한 기술까지도 필요 없었다.
푹.
아래에서 위로, 칼날이 턱부터 목구멍까지 뀄다.
"꾸륵."
적병이 피와 잘린 혀 덩어리 따위를 입 밖으로 뿜어냈다.
빈틈을 노리는 칼질은 대단한 완력이 필요치 않는다. 그걸 새삼 되새긴 엔크리드는 예전에 검술 선생이 해 준 말을 떠올렸다.
"최소한의 동선으로 상대 공격을 피할 수 있다면 그다음이 쉬워져."
꽤 비싼 교습소였는데, 가르치는 건 몇 개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몇 개조차도 엔크리드는 한동안 개소리라고 생각했었다.
'돈값 했네.'
그 개소리 중 하나가 현실이 됐다.
짧은 동선의 회피와 공격, 유효했다. 효과적이었고.
발로 상대 복부를 밀며 칼을 뽑았다.
턱 밑으로 생긴 구멍에서 피가 더 울컥울컥 쏟아졌다.
적병은 그대로 뒤로 무너졌다.
"이 새끼가!"
바로 뒤에서 다른 놈이 달려든다. 엔크리드는 숨을 몰아쉬지도, 급하게 대응하지도 않았다.
'여섯 걸음.'
엔크리드는 상대와의 걸음을 재며 검을 들어 왼손등에 고정된 방패 끈을 그었다.
두드드득.
스윽.
두드드득.
두 번을 긋자 고정해 둔 끈이 잘렸다. 팔뚝에 방패를 끈으로 칭칭 감아 두는 건 살아남기 위해 배운 편법이었다.
이렇게 하면 난전 중에도 방패를 쉬이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필요 없다.
적병이 다가온다. 엔크리드는 방패를 집어 던졌다.
땅!
창을 든 적병이 갑자기 방패가 날아오자 놀라서 양손을 당긴다.
자연히 손에 들린 창도 뒤로 후퇴요.
발도 느려지기 마련이었다.
넓적한 방패는 잠깐이지만, 상대 시야를 가리기엔 충분했다.
방패를 던진 엔크리드는 상대 시야가 가려진 틈에 왼쪽으로 성큼 두 걸음 걸었다.
투구는 머리를 보호하기 위한 도구지만, 좌우 시야를 좁게 한다.
엔크리드도 눈앞에서 갑자기 적군이 사라지는 경험을 몇 번이나 했다.
그걸 이용해 상대의 눈을 속이고 밑으로 몸을 숙이고 떠받치듯 상대를 뒤로 넘기는 기술도 애용했었고.
처음 죽는 날에도 한 일이다.
그걸 이번에는 더 깔끔하게 썼을 뿐이다.
상대의 오른쪽이다. 엔크리드는 달려들기 전에 적병의 손부터 살폈다. 긴 창대의 앞은 왼손, 오른손은 창대 뒤를 쥐었다.
오른손잡이라는 거다.
평소라면 보이지 않을 것들이 보였다.
냉정함이 준 시각이다.
소규모 전투나 대결에서는 가끔 이용하는 것들이지만, 난전 중에는 쉽게 쓰지 못했던 잡기들.
용병으로 살아남으며 배운 통찰력이다.
오른손잡이 창수는 오른쪽으로 창을 휘두르기 어렵다는 것.
방패를 막은 적병이 다급하게 고개를 좌우로 돌린다.
화들짝 놀란다. 그럴 만도 했다. 눈앞의 상대가 갑자기 사라졌으니까.
적병의 눈이 곧 엔크리드를 쫓아 발견한다.
좌우로 고개를 돌리고 놀라는 사이, 엔크리드는 상대의 뒤통수 쪽에서 가슴 앞쪽을 향해 사선으로 검을 내리쳤다.
빡!
놈의 갑옷은 목 뒤를 가로막는 형태였다.
두툼한 천과 그 위를 덮은 얇은 가죽이 그의 목이 완전히 잘리는 걸 막았다.
칼날이 목 뒤에 반쯤 박혔다.
"컥, 컥, 아."
적병의 눈이 보였다. 놀란 그대로의 눈. 동그랗게 뜬 눈.
반쯤 잘린 목 뒤로 피가 울컥울컥 쏟아졌다.
목이 반쯤 잘렸음에도 창수는 반사적으로 창을 휘둘렀다. 창대가 엔크리드의 오른쪽 어깨를 툭 하고 쳤다.
충격은 없었다. 이미 반쯤 죽은 사람이었고, 애초에 창대에 힘을 싣기 어려운 각도로 움직인 덕분이었다.
엔크리드는 검을 위로 들어 뽑았다.
우드득.
뼈에 박혔었는지, 꽤 힘을 줘야 했다. 빠진 칼날에 핏덩이 따위가 엉켜 흘렀다.
전장의 상황을 얼핏 살피며 엔크리드는 바닥에서 도끼 대신 귀퉁이가 깨진 방패를 주웠다.
이제는 그만한 여유가 있었다.
'이게 되네.'
너무 쉽게 된다. 전장에서는 평소 가진 실력의 반도 보이기 어렵다.
그게 당연하다.
죽고 죽이는 한복판에 서서 어떻게 평소와 같이 움직일 수 있을까.
가끔 더 미쳐 날뛰는 놈도 있지만, 대부분 당황하기 마련이다.
세 번의 죽음을 겪기 전까지는 엔크리드도 그랬으나, 이제는 좀 달랐다.
'되겠다.'
그 찌르기, 상대해볼 만하지 않을까 싶었다.
엔크리드가 한 일이 전장의 판도를 바꿀 만한 건 아니었다.
그저 한 명의 병사가 조금 더 잘 싸우는 정도였다.
판세의 변화는 없다.
하지만 엔크리드 개인에게는 큰 변화였다.
적병 두엇을 그리 쓰러뜨린 후.
"억!"
벨이 다시 넘어진다.
조금의 여유가 그를 붙들어 세울 시간을 줬다.
"괜찮냐?"
"염병, 여기 무슨 돌부리가 있어."
마른 벌판이다.
돌이 삐죽 솟아 있는 건 드문 일도 아니다.
다만, 벨은 제 발에 걸려 넘어졌다.
그러므로 넘어진 벨이 멍청한 거다.
"정신 차리고."
벨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덕분에 살았네."
엔크리드는 손에 힘을 빼지 않고 벨의 손을 꽉 쥐었다.
"...손 좀."
벨이 손을 놔달라 중얼거린다.
반쪽으로 쪼개진 투구, 피로 물든 머리통, 벨의 눈이 보인다.
섬광은 화살이었고 그 화살은 벨의 머리통을 꿰뚫는다.
이미 아는 일이다.
다만, 난전 속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알아채는 건 어렵다.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엔크리드는 잡은 손을 당기려 했다.
벨은 비틀거리며 중심을 잃다가 용케 힘을 주며 버텼고.
퍽.
머리통이 깨졌다.
화살이 날아와 벨의 머리통을 부쉈다.
흉갑에 피가 튀었다.
엔크리드는 벨의 머리가 터진 걸 보자마자 머리를 숙였다.
훙- 하고 머리 위에서 섬뜩한 뭔가가 지나갔다.
화살이겠지.
뒤쪽에 있던 죽은 아군의 시신에 화살이 퍽 소리를 내며 꽂혔다.
"행운의 여신에게 기도라도 올리고 온 거요?"
피하자마자 렘의 목소리가 들렸다.
벨의 머리통을 지켜 주진 못했지만, 내 머리통은 지켰다.
물론 안 그랬어도 렘이 구해 줬을 거다.
네 번째, 똑같은 상황이었다.
"뭐, 비슷한 거."
대강 답하니, 렘이 피식 웃는다.
투구 사이로 그의 치아가 보였다.
생긴 건 나름 곱상한 놈이 말투나 하는 짓은 과격하기 짝이 없다.
"좋수다. 이 화살 날린 게 매의 젖꼭지인지, 뭔지 하는 놈이라고 하니, 난 그놈 찾으러 가오. 여신에게 기도 열 번 더 하시고."
"가다가 뒈지지 말라고 네 기도도 대신해 주마."
"그럼 고맙지. 이거 잊지 말고."
렘이 도낏자루로 제 왼쪽 가슴을 툭 때리며 다시 전장으로 향했다.
매의 눈인지, 발톱인지를 잡으러 가는 거다.
엔크리드는 오늘 밤에 렘이 이 화살을 날린 궁수를 죽였는지 안 죽였는지 물어볼 수 있기를 바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렘이 사라진 자리로 아군과 적군이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간격이 좁아지기 시작하며 엔크리드는 전장 흐름이 도저히 좋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미 세 번의 경험이 있다.
아군은 밀리는 중이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다.
살아남는 것.
엔크리드는 기묘한 흥분이 자신을 감싸는 걸 느꼈다.
조금만 있으면 그 실력 좋은 병사를 만날 테니까.
얼마 안 있어 그 일은 현실이 됐다.
그 찌르기가 다시 제 머리를 노렸다.
피하는 대신, 엔크리드는 날아오는 칼날에 제 칼날을 들이밀었다.
티디디디딩.
허공에 불똥이 튄다.
적병과 시선을 마주했다.
이걸 막아?
그리 묻는 듯한 눈이었다.
"실력이 괜찮은데."
적병이 말하며 다시 검을 뻗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처음은 방패로 두 번째는 옆으로 몸을 굴려서, 세 번째는 역으로 칼을 휘둘렀다.
짧은 동선을 그린 엔크리드의 칼날은 허공을 그었다.
그리고 적병이 다시 팔을 뒤로 당긴 순간, 뒤에서 뭔가가 허리를 후렸다.
뻑!
"끅."
비명이 절로 나오는 걸 씹어 삼켰다.
이후 다시 찌르기가 날아온다. 일부러 몸의 무게 중심을 앞으로 쏠리게 해 아예 넘어지듯 구르려 했다.
의도는 좋았지만, 타이밍은 나빴다.
뿍.
칼날이 목 옆 빗장뼈를 부수며 안으로 박혔다.
불에 달군 인두가 살과 뼈를 지지는 것 같았다.
"끕!"
비명조차 나오지 않을 만큼 아팠다.
꽂힌 칼날을 손으로 쥐려 하자, 상대가 쑥하고 칼을 회수한다.
평소에 칼을 갈 때 공을 들였는지, 칼날이 무척 날카로웠다.
검이 뽑힐 때는 더 끔찍한 통증이 따라왔다.
눈앞이 하얗게 보일 정도로 아팠다.
엔크리드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뒤를 돌아봤다.
엉거주춤하게 선 덩치 큰 적병이 보였다.
손에 든 몽둥이도.
저게 자신의 허리를 때린 것일 터.
"자비다."
날 세 번이나 죽인 놈이 그렇게 말하며 칼을 수직으로 세워 찍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눈이 감긴다. 어둠이 눈앞에 스며든다.
깡, 깡, 깡.
국자로 냄비를 두드리는 소리가 다시 들린다.
"다섯 번째."
염병할.
될 줄 알았는데.
"뭐가 다섯 번째요?"
옆자리 렘이 물었다.
"부츠에 벌레."
엔크리드는 말하면서 일어났다.
또 죽었지만, 배운 게 있다.
아니, 그동안 교습소에 돈을 금화 단위로 쏟아부으며 얻은 교훈이다.
한 번에 되는 건 없다는 것.
그럼 어떻게 하면 되나.
한 번으로 안 되면 열 번, 열 번으로 안 되면 백 번 하면 되는 거였다.
원래라면 한 번 뒈지면 끝이겠지만.
다행히도 엔크리드는 이 짓을 수없이 반복할 수 있었다.
5. 발렌 식 검술
"응? 잉? 어떻게 안 거요?"
"예언자 아니다."
엔크리드의 말에 렘이 부츠에 들어간 벌레를 바닥에 털어 내고는 확신에 찬 어투로 말했다.
"분대장이 넣었수?"
"내가 안 넣었다."
"씁."
렘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엔크리드는 렘의 눈초리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렘이 밑으로 떨어뜨린 벌레를 엔크리드가 발로 짓이겼다.
우직.
별로 유쾌하지 못한 느낌이 부츠 바닥을 타고 느껴졌다.
"퉤."
엔크리드는 침을 뱉어 대충 벌레의 사체를 바닥의 흙과 비벼 두고 말했다.
"야수의 심장 알려 줄 수 있지?"
"음? 그거 기억하고 있었수?"
렘이 부츠를 고쳐 신고 일어나며 말했다.
"잊을 만한 일은 아니지."
"잊고 싶다고 위장에 술을 갖다 부을 때는 언제고."
그때는 그랬다. 꿈에서 자꾸 도끼에 목이 잘리는 장면이 나오니, 정말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았다.
"해 줄 수 있어? 없어?"
"오늘따라 열의가 끓어 넘치는 거요? 좋수다. 합시다."
렘이 고개를 끄덕였다.
"작센, 아침 당번 좀 해 줘. 내일은 내가 할 테니까."
먹어야 힘을 쓰니, 식사는 하더라도 설거지 따위에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을 거다.
"네, 그러죠."
잘 웃고 타인과도 잘 지내는 분대원이 작센이다.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를 정도로 무난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처음 봤을 때 엔크리드는 작센이 이곳에서 조율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작센이 제 적갈색빛 머리카락을 툴툴 털어 내며 천막 밖으로 나갔다.
그걸 물끄러미 보던 렘이 킁 하고 코를 풀었다.
"저 새끼는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단 말이지."
당연하게도 작센이 이곳에서 조율자의 역할을 잘 수행했다면, 엔크리드가 이곳에 올 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작센은 타 부대랑은 그리 잘 지내면서 오히려 4분대원과는 사이가 나쁜 편이었다.
물론 엔크리드만 빼고.
엔크리드는 묘하게 제 분대원의 신뢰를 받는 편이었다.
그게 이런저런 부탁을 말없이 들어줘서인지, 그게 아니면 평생 십인대 분대장으로 살 것 같은 허접한 실력 때문인지는 엔크리드도 몰랐다.
그저 두 이유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렘이 천막 밖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엔크리드가 그 뒤를 따라 걸었다.
"꺼림칙한 놈이오. 느낌이 안 좋은 놈이니, 너무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수."
그러는 너는?
엔크리드는 속으로만 되물었다.
이전 부대에서 상급자와 시비가 붙어 그 상급자의 턱을 부수고 온 놈이 할 말인가, 이게.
렘이 자신한테야 은인이지만.
타 부대, 특히 이전 소속이었던 1소대에서는 렘을 죽일 듯이 노려보곤 한다.
제 소대장의 턱을 그리 만든 놈이 예뻐 보이진 않겠지.
엔크리드는 따지지 않았다.
따진다고 변하는 건 없다.
시간 낭비다. 이걸 따지느니 야수의 심장이나 더 익히고 말지.
렘에게 야수의 심장을 배우는 것 외에도 할 일이 많았다.
"특히 1소대 새끼들이랑 친한 거 보면 더 찝찝하단 말이우."
그래, 그렇다고 치자.
엔크리드가 대거리하지 않자, 렘이 걷던 발을 멈췄다.
"왜?"
"분대장 양반, 오늘 진짜 이상하네, 평소라면 뭐라고 한마디 할 타이밍 아니었수?"
그렇다. 평소라면 상급자의 턱을 부순 놈이 할 말이 아니라고 하든지.
그것도 아니면 친해지지 않을 것 같으면 아예 쳐다도 보지 말라고 했을 거다.
친해지라고 종용하느니, 차라리 서로 싸우지 않게 떨어뜨려 놓는 게 낫다고 생각하니까.
그게 개성 넘치는 사사사 죽음의 분대를 이끄는 엔크리드의 비법이기도 했고.
"할 말 없는데."
엔크리드는 말을 잘랐다.
렘은 제 뒤통수를 북북 긁었다.
"거참 이상한 날이네."
둘은 아침을 먹고 막사 외곽의 공터를 찾았다.
전장에서 훈련 따위를 하는 모습이 어색할 법도 하지만.
엔크리드는 평소에도 이래 왔다.
아는 이들에게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거다.
지나가는 이들도 딱히 둘에게 시선을 두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야수의 심장 전수가 시작됐다.
"...나 말고 딴 놈한테 몰래 배운 적 있수? 그럴 리 없을 텐데."
"배운 거 반복만 했어."
"훈련한다고 이게 이렇게까지 된다고?"
또 한 번의 죽음은 또 한 번의 경험이었으니.
엔크리드는 전보다 마음을 다잡기 쉬웠다.
그걸 본 렘은 의아한 눈빛을 보내다가도 '좋수다' 하고는 넘어갔다.
"내가 볼 때, 분대장은 재능이 있는 거요. 이 정도로 하는 거면."
렘이 어제와 비슷한 말을 던졌다.
재능이라, 그랬다면 참 좋았겠지.
조금 전, 끝내 렘의 도끼를 피하지 못했다.
그 도끼는 목울대 바로 앞에서 멈췄다.
손목만 까딱하면 목에 긴 흉터를 남길 정도로 가까운 위치였다.
"아슬아슬했수다."
렘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는 엔크리드가 이리 배우는 게 기특한 듯했다.
웃음에 어딘지 모를 만족감이 배어났다.
엔크리드도 그걸 느꼈다.
"무슨 짓을 하면 도끼를 그렇게 휘두를 수 있는 거냐."
조금 전 그 도끼질.
렘의 도끼는 몇 번이나 자신을 죽인 찌르기보다도 빨랐다.
도끼날이 목 피부 거죽 위에 닿을 듯 말 듯 다가온 건, 정말 눈 깜빡할 새였다.
실제로 엔크리드는 눈도 깜빡하지 않았지만, 도끼날의 움직임을 놓쳤다.
"음, 재능?"
엔크리드는 오랜만에 렘이 참 재수 없는 새끼라는 생각을 했다.
원래 이런 놈이긴 했다.
"훈련한다고 다 되면 세상에 칼질 못 하는 놈이 있겠수?"
렘이 낄낄 웃었다.
엔크리드는 아까 렘의 얼굴에서 만족감을 읽어 냈듯, 이 새끼가 자신을 놀리는 걸 즐긴다는 것도 알아챘다.
이상한 새끼였다.
하긴, 이 분대에 이상하지 않은 놈이 어디 있을까.
"더 훈련하면? 더 노력하면? 자는 시간도 없이 검을 휘두르면?"
엔크리드는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자신이 오랫동안 가진 딜레마였다.
재능이 없다면 포기해야 할까?
엔크리드는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 대신 진격을 택했다면 자신이 가진 건 무엇인가.
지치지 않고 나아가는 것뿐이었다.
소위 천재라는 놈들이 열 걸음씩 간다면 자신은 반의반 걸음씩이라도 쉬지 않고 꾸준히 걸어가겠다는 의지뿐이다.
"거참. 오늘 진짜 이상하단 말이지. 진지함의 비약이라도 쳐드신 거요?"
렘이 도끼를 대강 허리춤에 묶어 둔 줄에 걸치며 말했다.
"아니."
"분대장."
웃음기 없이 렘이 엔크리드를 불렀다.
렘과 눈을 마주쳤다.
짧은 침묵 뒤, 렘이 입을 열었다.
"사람은 잠을 안 자면 뒈진다오."
부들.
렘 새끼가 말이 끝남과 동시에 볼을 떨며 웃음을 참다가 파하하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까 자는 시간도 없이 검을 휘두르면 어떨지에 대한 답이었다.
"꺼져."
엔크리드는 대륙 공통의 손가락 욕을 했다.
중지를 들어 보이는 거다.
렘은 낄낄대며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고 했다.
엔크리드는 더 가르쳐 달라 조르지 않았다.
첫술에 배부를 순 없다.
그 사실을 엔크리드는 너무도 잘 알았다.
점심을 먹은 뒤에는 자신이 가진 검술을 점검했다.
찌르고 베고 휘두르는 기본 검술.
기본 검술 이후 배운 건 발렌 식 용병 검술이다.
허접한 건 아니었다.
발품을 꽤 팔았고 돈도 꽤 들었다.
은화 몇 닢 따위에 배울 수 있는 검술은 아니다.
발렌 식 용병 검술.
기사급은 되지 못했으나, 용병 계에서는 꽤 이름 날린 발렌의 검술이다.
굳이 분류하자면 환검(幻劍) 계열이다.
본래 발렌이 어떤 식으로 썼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나름대로 몇 가지 기술은 몸에 익혀 뒀다.
엔크리드는 거기에 힘을 쏟았다.
'죽은 뒤에는 같은 하루가 반복되지만, 몸에 남은 건 사라지지 않았다.'
야수의 심장은 머리로 배운 게 아니라 몸으로 익혔다.
그 말은 제 몸에 남은 건 그대로라는 거다.
몸을 혹사했다. 굳은살이 깊게 베인 손바닥이 다시 터질 정도로 그리 검을 휘둘렀다.
본래 병사는 검을 쓰지 않는다. 창이 기본 무장인 게 대부분이다.
사사사 분대장을 맡았기에 얻은 특전이다.
엔크리드는 검을 손에서 놓고 싶지 않았다.
훈련을 거듭한다. 손아귀가 아프지만, 참는다.
먹은 게 소화가 끝나지 않아 위장이 시큰하지만, 참는다.
발끝, 손끝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
환검은 속이는 검이다.
상대를 속일 수 있는 수단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쓰라고 했다.
실제로 용병 세계에 발렌 식 검술 몇 개는 이미 퍼져 있었다.
가령 넘어지는 척하다가 상대를 찌르는 기술 따위다.
치사하다고 할 수 없다.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든 하는 것이 왜 치사한 게 되는가.
기사라면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엔크리드는 그와 논쟁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그의 가치관이 있는 거다.
자신은 자신만의 가치관이 있는 거고.
허락된 시간은 반나절.
다리가 후들거리진 않았다. 이 정도로 다리가 풀린다면 그동안 매일 해 온 체력 훈련이 의미가 없을 터였다.
엔크리드의 다리는 튼튼했다.
"몸뚱이가 튼튼한 건 참 장점이오."
렘이 돌아온 엔크리드에게 말했다.
막 전령이 오간 참이었다.
여섯 번째 오늘의 반복, 대강 하늘만 봐도 시간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었다.
"20년 넘게 훈련한 몸뚱이니까."
엔크리드는 대강 답하고 다시 소대 자리로 옮겼다.
"튼튼한 몸뚱이가 훈련용 허수아비로 전락하지 않게 열심히 하시우."
전장이 시작되기 직전, 렘이 또 낄낄거렸다.
"내일 당번 해 주셔야 합니다."
옆에서 작센도 말했다.
한 놈은 자신을 놀리는 것 같고.
다른 한 놈은 이틀 연속 식사 당번을 할 수 없다는 의지의 표명 같다.
뭐, 표현이 어떠하든 둘 다 자신이 살아 돌아오길 바라는 것 같으니.
"이따 보자."
여섯 번째의 오늘이 시작되고.
엔크리드는 다섯 번째 날보다 더 수월하게 적을 죽였다.
처음 덤비는 적은 발을 걸어 넘어뜨려 방패 모서리로 뒤통수를 찍었고.
두 번째 적은 검을 흔들다가 찔렀다.
발렌 식 검술.
용병 세계에서 흔히 알려진 게 아닌, 발품 팔고 돈을 들여 따로 배운 기술이다.
흔들리는 칼끝은 그 자체로 상대의 시야를 어지럽히는 아지랑이라 했다.
배운 걸 실현했고 먹혔다.
보람을 느꼈다.
성장의 기쁨, 충족감이 또 가슴을 채운다.
하루의 반복으로 이뤄낸 것이 적지 않았다.
엔크리드는 죽었다가 살아난다고 해서 허술하게 하루를 보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더 치열했다. 더 몰두했다. 더 몰입했다.
기회가 온다면 놓치지 않으리라, 갈망과 염원을 품고 살아왔기에 그래야 했다.
엔크리드는 그렇게 했다.
적병을 베고 때리고 넘어뜨렸다.
반복된 전투는 그에게 색다른 경험을 안겨 줬다.
'야수의 심장.'
이전 날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인다.
어느새 벨이 넘어지는 순간까지 왔다.
매일 같은 장소에서 싸우니, 매번 벨을 본다.
원한다고 전선을 뒤로 물리거나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없다.
함부로 전선을 뛰어넘는 건 자살 행위다. 전장에서 제 위치를 임의로 바꾸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내 실력은 그 수준이 아니다.'
엔크리드는 자신을 잘 알았다.
여유가 생겼지만, 그렇다고 적병 사이를 뚫고 들어가거나 도박에 가까운 행위를 할 정도는 아니었다.
더욱이 숙련된 궁수의 화살을 미리 알아챌 수준도 안 되고.
퍽!
벨의 머리가 또 터졌다.
"젠장."
이번에는 꼭 살리려고 했는데 또 실패다.
엔크리드는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약속이라도 한 듯 화살이 허공을 꿰뚫었다. 쌩하는 파공성이 귓가에 남았다.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능숙한 몸짓이다.
"오늘 감이 좋은 것 같수다?"
어느새 다가온 렘이 말했다.
"가라, 화살 쏜 새끼 멱이나 따오든지."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수다. 감 좋으니 알아서 잘 사시우."
렘이 떠난다.
다시 찌르기를 장기로 삼는 적병을 만난다.
엔크리드는 또 실패했다.
이번에는 뒤쪽에 달려드는 병사의 몽둥이는 피했으나, 그 바로 옆에서 어떤 놈이 투척 도끼를 던졌다.
지랄 맞았다.
일곱 번째의 아침이 밝고.
"내가 벌레 넣어 놨다."
렘에게 말하니.
"미쳤수? 돌아 버린 거요?"
"안 미쳤어.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이 요동치지 않게 하는 것, 야수의 심장 맞지?"
"음?"
"가르쳐 줘."
다시 오늘이 시작된다.
렘은 눈을 끔뻑거리다가 수락했다.
배운다. 익힌다. 검을 휘두른다.
이번에는 벨을 구하려고도 안 했다.
구하려면 화살이 날아오는 걸 읽어야 한다.
그게 안 되면 운에 기대야 할 뿐이다.
렘은 어떻게 화살을 피하는 걸까?
엔크리드는 의문을 품고 몸을 움직였다.
찌르기에 또 죽었다.
"자비다."
그놈의 자비는.
죽는다. 그렇게 여덟 번째, 아홉 번째, 열 번째, 열한 번째, 열두 번째... 백 번이 넘는 죽음, 엔크리드는 그렇게 죽음으로 시작되는 오늘을 반복했다.
6. 손아귀가 찢어졌어야 했다.
반복되는 오늘.
그 하루하루를 엔크리드는 전부 값지게 보냈다.
그 어느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난 범재.'
검술로 치자면 수재도 영재도 될 수 없다.
천재는 당연히 못 되고.
여덟 번째 실패 후, 엔크리드는 생각했다.
'포크질 한 번에 식사를 끝내려고 했어.'
천재는커녕 수재, 영재도 안 되는 주제에 그랬다.
엔크리드는 할 일을 나눴다
'반의반 걸음씩 간다.'
지겨울 일은 없었다. 반복되는 오늘, 그와 동시에 늘어나는 기량.
그것은 마약이었다. 엔크리드는 이 상황이 더없이 즐거웠다.
'좋은 점이 많아.'
무엇보다 좋은 점은 끊임없이 실전을 경험할 수 있다는 거다.
그것도 목숨을 대가로 겪는 농후한 경험이다.
엔크리드는 그걸 십분 활용했고, 전장에 나서기 전까지는 하루를 알차게 쓰기도 했다.
야수의 심장을 단련하고.
검술을 새로이 익히고.
그와 함께 반복되는 시간은 그에게 주변에 일어나는 일을 외우게 하기도 했다.
아침 식사와 함께 일어나는 옆 막사의 도박판 같은 게 좋은 예였다.
"이런 씨발! 너 사기 쳤지?"
"사기라니, 이 새끼야. 운이 좋은 거지."
정겨운 아침의 광경이다.
사기는 아니다. 몇 번을 봤기에 안다. 주사위는 항상 같은 수가 나오고, 엔크리드는 그걸 알고 있었다.
스쳐 지나가며 다시 하루를 보낸다. 반복한다.
거듭되는 실전은 엔크리드의 개념을 넓혔다. 정확히 말하면 생각할 시간은 많았기에 생각의 폭이 넓어졌다.
'벨을 구하려고 굳이 화살을 쳐 낼 필요는 없지.'
그건 일류 용병이나 할 수 있는 짓이다.
엔크리드는 깨끗하게 포기했고, 그럼으로써 벨을 구할 수 있었다.
팍!
그저 더 튼튼한 방패를 구하면 될 일이었다.
화살이 원형 방패에 꽂혔다. 아무리 솜씨 좋은 궁수라도 방패 뒤에 숨은 병사의 머리통을 꿸 순 없는 노릇이었다.
"...어디서 튀어나왔어?"
자빠진 벨이 눈이 동그래져서 말했다.
"언제까지 땅에서 뒹굴래? 냉큼 안 일어나?"
엔크리드는 흐르는 땀을 대충 손등으로 털어 낸 후, 발로 벨의 궁둥이를 걷어찼다.
궁둥이를 쓰다듬은 벨은 또다시 전장으로 향했다.
'여기서 살린다고 내일 저 새끼 얼굴을 볼 수 있을까?'
모른다. 그저 여기를 첫 번째 포인트로 삼았을 뿐이다.
전장을 헤집고 벨을 구하는 것, 그게 엔크리드가 정한 작은 목표였다.
그걸 해낸 건 스물다섯 번째의 오늘이었다.
"어이구. 수도원의 마더 납셨네. 시간 나면 나도 구해 주쇼. 다른 부대 놈팽이 구할 시간에."
렘이 뒤에서 불쑥 튀어나와 개소리를 지껄이는 건 일상이었다.
벨을 구할 때마다 다른 레퍼토리로 미친 소리를 뱉어 내곤 했으니.
그럴 때마다 엔크리드도 받아쳐 주긴 했다.
마더는 수도원을 책임지는 수녀를 칭하는 말이었다.
"넌 파문이다. 생긴 게 더러워."
수도원은 신자(信者)가 아니면 받질 않는다. 파문은 마더의 품을 떠나라는 말, 즉 수도원에서 내쫓는다는 소리다.
렘이랑 하기에는 꽤 고차원적인 농담이다.
"생긴 거로 차별하는 더러운 세상, 카악 퉤."
렘은 언제나처럼 굴하지 않고 뛰쳐나갔다.
매의 눈깔인지 뭔지 하는 놈을 잡으러 가는 것일 터,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그리 쉰 번쯤의 하루를 반복하면서도 엔크리드는 찌르기 적병을 이기지 못했다.
운 좋게 공격을 여러 번 막은 적은 있었으나, 그 순간에 옆에서 튀어나와 해머를 휘두르는 놈한테 머리통이 터졌다.
"시간 끌 거 없잖아."
엔크리드의 머리통을 깬 놈이 말했고.
엔크리드는 자신이 어떻게 당했는지도 몰랐다. 그저 갑자기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고 바닥이 다가와 있었다.
고개를 휘저을 정신도 없었다. 그저 얼굴을 따라 끈적한 액체가 흐르는 걸 느꼈고.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자신이 검을 놓친 채 무릎을 꿇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뿐이었다.
"고통스럽겠네, 자비다."
곧바로 칼날이 목을 꿰뚫음에 통증에 허우적거려야 했다.
목에 칼날이 파고든다. 익숙해질 수 없는 통증이 전신을 치달린다.
달군 쇠꼬챙이로 목을 헤집은 통증이 뇌를 헤집었다.
죽어가며 엔크리드는 눈을 깜빡였다. 눈에 들어간 핏물 때문에 세상에 빨갛게 물들었다.
그 빨갛게 물든 시야 너머, 투구 사이로 검을 든 적병의 빨간 눈이 보였다.
실제로 빨간색은 아니겠지만, 그때는 그리 보였다.
적병의 눈에는 얄팍한 희열이 어려 있었다.
하도 죽다 보니, 별것이 다 보였다.
단련된 야수의 심장 덕분이리라.
'변태 새끼구나.'
자비를 주는 게 목적이 아니라, 살인에 희열을 느꼈기에 그리 죽인 거였다.
놈은 항상 목에 칼날을 쑤셔 넣었고 천천히 뺐다.
검을 통해 타인의 마지막 숨이 흩어지는 걸 느끼며 발기하는 걸지도 몰랐다.
그걸 깨달았음에도 엔크리드는 담담했다.
죽음의 순간을 수없이 넘겼기에 절로 담대함이 자리 잡는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어디서 나 몰래 밀회라도 즐기는 거유?"
여든여섯 번째, 렘이 불쑥 말했다.
렘의 말에 엔크리드는 눈썹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개소리일까.
"뭐?"
"야수의 심장, 나한테 배운 거잖수. 근데 혼자서 이렇게 단련이 될 리가 없거든."
도끼날이 눈알에서 고작 손가락 한 마디 거리에 멈춰 있었다.
조금만 더 가까이 왔다면 풍압만으로 각막이 상했을 거리다.
그 덕분에 엔크리드의 시야에는 날이 잘 갈린 도끼날 너머로 렘의 얼굴이 반밖에 안 보였다.
하지만 이런 순간임에도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야수의 심장이 가져다준 힘이자.
고통이 찾아올 걸 알면서도 견디게 해 준 담대함이다.
엔크리드는 도끼날 너머로 의문을 표하는 렘의 눈을 보며 생각했다.
'이런 일도 있을 수 있구나.'
오늘을 반복함으로써 야수의 심장이 단련되었으니, 그걸 가르친 장본인으로서는 황당한 일일 수도 있었다.
그걸 이제야 깨달은 건, 평소에 렘이 워낙 앞뒤 안 가리는 타입의 부대원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렘은 시답잖은 얘기는 많이 해도 뭘 따지는 부대원이 아니다.
그런데 야수의 심장만큼은 다른 얘기일 것이다.
그가 직접 가르친 것이므로.
엔크리드는 같잖은 핑계는 대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오늘 내내 생각한 뒤, 다시 시작되는 오늘에서 수습하면 되니까.
툭, 렘이 도끼를 뒤로 당겼다. 엔크리드의 시야가 열렸다.
얼굴에는 생채기도 나지 않았다.
렘은 묵직한 도끼를 제 손처럼 다뤘다.
도끼를 당긴 렘은 도낏자루 끝으로 제 머리를 긁었다.
"이해가 안 되는데 말이요, 혹시 나 말고 딴 놈한테 더 배웠나 해서."
말하면서도 이게 말이 되나 싶은 얼굴이다.
엔크리드는 사사사 분대장이고, 이 빌어먹을 분대는 그가 없으면 통 말을 듣지 않는 꼴통 모임이었다.
엔크리드는 렘에게 야수의 심장을 배운 뒤로 이 분대를 떠난 적이 없었다.
고로 배우고 싶어도 배울 시간이 없었을 거다.
렘은 그런 엔크리드를 쭉 지켜봤고.
혹시 불침번이라도 서면서 몰래 배웠다면 모르겠지만.
그 또한 말이 안 되긴 마찬가지.
"검 쓰는 건 당장 오늘 오후에 뒈져도 '아, 그렇구나' 할 정도인데, 어째 심장 가죽만 두꺼워질 수가 있는 거요?"
말을 해도 새끼가.
오늘 오후에 뒈지긴 뒈진다. 렘은 아무것도 모르고 한 말이지만, 괜히 말에 뼈가 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죽을 고비를 여든 번쯤 넘겼거든."
대강 답하며 엔크리드는 생각했다.
렘에게 야수의 심장을 더 배울 순 없을 거라고.
어떤 핑계도 지금 저 야만족 출신 사내의 의문을 완벽하게 해결할 순 없다.
'오늘이 반복될 때마다 매일 너한테 배우고, 거기에 죽으면서 배우다 보니까 이렇게 됐다고 말할 순 없잖아.'
하지만 대강 넘어갈 순 있을 것이다.
렘은 그리 깐깐한 사내가 아니니까.
과연 그랬다. 시간을 들일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칩시다. 가끔 행운의 여신은 자기도 모르게 동전을 흘린다고 하니까."
생각하지도 못한 우연이 겹쳐 살아난 병사에게 흔히 하는 말이다.
그게 이런 비기를 익힐 때도 통용이 되나?
안 되면 또 어떤가.
렘이 넘어갔으면 된 거다.
"덕분에 전보다는 재밌네. 실력이 좀 늘었수다. 몰래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요?"
"죽을 만큼 아픈 짓."
엔크리드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 남자가 비밀이 좀 있어야지. 그래야 남자다운 거요. 내 좀 알지."
렘은 이조차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전처럼 제 할 말만 하고 도끼를 들었을 뿐이다.
"한 판 더?"
도끼를 든 렘이 말했다.
엔크리드는 말없이 검을 들었다.
자빠지는 병사 벨을 살리는 게 첫 번째 목표라면.
두 번째이자, 마지막 목표는 사람을 죽일 때마다 희열을 느끼는.
찌르기 잘하는 변태 새끼를 죽이는 거였다.
그걸 위한 준비는 착실했다.
그리 맞이한 백열한 번째의 날, 렘과의 대련 시간이었다.
엔크리드는 팔을 당기며 근육을 부풀렸다.
왼발을 앞으로 뻗으며 렘의 발을 밟으려 했다.
렘은 눈치 빠르게 발을 쏙 뒤로 뺐고 그걸 본 엔크리드는 렘의 발 대신 땅을 밟은 왼발을 중심으로 허리를 틀며 전력으로 검을 내질렀다.
발은 속임수였다.
렘이 물러나는 걸 노린 한 수다.
근육에 힘을 줘 검을 내질렀다.
찰나의 순간, 엔크리드의 눈에 렘의 팔이 채찍처럼 휘어지는 게 보였다.
어찌나 비현실적인 모습인지, 손에 든 도끼까지 휘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깡!
한순간 일어난 일이었다.
도끼날은 휘어지다 벼락처럼 위로 치솟았고.
그건 그대로 엔크리드가 쥔 검을 때렸다.
검이 위로 날았다.
엔크리드의 손에서 빠져나가 위로 솟은 검은 공중에서 휘릭 돌더니, 바닥에 딱- 하고 떨어졌다.
바닥에 박힌 돌에 검면이 우연히 부딪쳐 난 소리였다.
검이 바닥을 구르는 게 눈에 보였다.
"좀 봅시다."
대뜸 다가온 렘이 엔크리드의 손목을 쥐었다.
검을 놓치며 생긴 충격에 손이 떨렸다. 렘은 엔크리드의 손을 보더니 쯧 하고 혀를 차고 말했다.
"이게 피가 좀 나 줘야 하는데."
"뭐?"
힘 조절 좀 할 것이지, 무식하게 도끼를 휘둘러놓고 한다는 말이 이게 뭔가.
"그 찌르기 괜찮았는데, 괜찮은데, 거, 좀 부족하단 말이지. 내가 이런 설명은 못 하는데, 방금은 손아귀가 찢어졌어야 한다는 거요. 검을 놓치는 게 아니라."
"죽어도 검을 손에서 떼면 안 된다?"
엔크리드는 오른손을 잡힌 채로 말끝을 올렸다. 검술 선생에게 수없이 들었던 말이다.
매일 반복되는 하루를 새는 건 힘겨운 일이다.
엔크리드는 하루의 시작을 조금씩 달리 하는 거로 그걸 기억했다.
어릴 때부터 기억력은 남다른 편이기도 했으니까.
이제까지는 그 기억력이 검술에 크게 도움이 안 됐다.
물론 이제는 도움이 된다.
특히 선생들에게 배운 걸 되새길 때.
지금 그 배움을 되새김질하며 말한 거고.
"그건 무슨 개소리유? 필요하면 검을 상대 낯짝에 던지기도 하는 거지. 이, 아우, 좋수다. 좀 쉽게 갑시다. 조금 전에 찌르기, 어디 노렸수?"
렘은 그 말에 콧김을 뿜으며 말했다.
엔크리드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이 찌르기는 비장의 한 수였다.
적병에게서 백 번을 넘게 목을 찔리며 훔쳐 배운 기술이었으니까.
전체적인 자세부터, 발의 위치와 검을 쓸 때의 무게 중심 이동, 근육의 움직임, 발끝의 방향, 검을 쥔 손 모양까지.
모든 걸 훔쳤고 흉내 낸 거다.
"조금 전 검격, 그거 겉보기는 그럴싸한데, 그, 염병할. 설명하기 더럽게 어렵네. 자, 이거 보슈."
렘이 도끼를 밑으로 늘어뜨리더니 흙바닥에 큰 원을 그렸다.
대강 사람 머리통만 한 원이었다.
"우리 목적지가 여기 어디쯤이라고 칩시다."
말하며 렘은 원 위로 도끼를 돌리다가 쿡 하고 점을 찍었다.
"근데 사실은 여기로 갈 거요."
엔크리드는 처음에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동안 검술 선생에게 배운 시간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개똥 같은 설명임에도 혀 안에 감기는 절인 과일처럼 착 하고 알아들었다.
'목표점.'
조금 전 자신이 내지른 찌르기에 깃든 건 무엇이었나?
잘한다고 칭찬이라도 받고 싶었나?
흉내 잘 냈으니, 자신도 재능이 개미 눈곱만큼이라도 있다고 인정받고 싶었던가?
요는 무엇인가.
검은 무엇을 위한 물건인가.
상대를 베고 찌르는 것, 살상 무기다.
그중 찌르기는 한 점을 노리고 쓰는 검술의 기본이라 할 수 있었다.
특히나 세검술에서 많이 쓰인다.
갑옷의 틈새를 찌르는 얇은 검날을 주 무기로 삼는 기사도 있다고 들었다.
"나 진짜 더는 잘 설명 못 하겠고. 내가 당연히 피하거나 막을 거로 생각하니까 검을 그리 쉽게 놓친 거요. 근데 조금 전 그 찌르기는 확실했어야 한다는 거지. 딱, 널 찌르겠다. 넌 못 피한다. 이걸 화끈하게 보여 줘야 했다고."
말하고 나서도 렘은 자기가 제대로 설명했는지 되새기는 중이었다.
제 페이스대로 노는 놈인 터라 설명에는 젬병이었다.
다만, 상대가 얼추 알아들었다면 이 옆집 강아지가 짖는 것 같은 설명도 훌륭하다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엔크리드에게는 훌륭한 설명이었다.
'내 검에 확신이 없었기에.'
조금 전 찌르기는 삼류 용병의 찌르기였다.
백열한 번째의 날에 엔크리드는 깨달았고.
백스물세 번째의 날까지, 전력의 찌르기를 행했으며.
백스물네 번째의 날에 렘의 벼락같은 도끼질에 손아귀가 찢어졌다.
찢어진 정도가 아니라 터져 나갔다.
손아귀를 타고 피가 질질 흘렀다.
엔크리드는 그걸 보고 웃었다.
바라는 걸 이뤘으므로.
"이제 완전히 미친 거요? 전장에서 미친 아군만큼 위험한 놈은 없다는 거 아슈? 아니, 왜 계속 처웃냐고."
그걸 본 렘은 드물게 당황한 모습을 보였으나, 엔크리드는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시발, 그만 웃으라고. 미친 새끼 같다니까?"
그걸 본 렘이 말했다.
백스물네 번째의 '오늘'에 일어난 일이었다.
7. 삼 세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