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4

28. 기습과 푸른 눈

엔크리드는 비틀거리는 정찰 분대장을 보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간신히 성공했네.'

손등으로 칼을 쳐 내는 묘기는 열에 다섯 번만 성공하는 수준이었으니까.

뭐, 하다 보니 조금씩 익숙해지긴 했다.

이 친구가 가진 특유의 버릇 같은 게 눈에 익었기에 가능한 거지.

그게 아니라면 쉽게 엄두도 못 낼 묘기이긴 했다.

하지만 그건 순전히 엔크리드의 입장이었다.

옆에서 보면 실력 차이가 월등해 보일 뿐이었다.

다가오는 칼날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쳐 내곤 명치를 때려서 전투 불능으로 만들었다.

압도적인 실력 차가 아니라면 보이지 못할 묘기 아닌가.

"당신이 최하급 병사라고?"

이 말을 대체 몇 번째 듣는 거지?

이제는 지겨울 수준이었다.

"진급 테스트를 안 받았어. 필요 없다고 생각했거든."

이후 나올 질문에 대한 답까지 완벽하게 한 엔크리드는 뻐근한 손목을 좌우로 꺾었다.

이상은 없었다.

그동안 검을 휘두르며 필요하다는 훈련은 다 해 왔다.

근력의 단련은 당연했다.

힘으로만 치자면 엔크리드는 부대 내에서도 꽤 상위에 꼽힐 수준으로 잘 단련된 상태였다.

그러니 이런 결과가 가능한 거고.

"이제부터 내가 분대장이다."

엔크리드가 선언했다.

이제 산 하나를 넘은 셈이었다.

정찰 분대장은 뭐라 대들지도 않았다.

멍한 시선으로 보고 있나 싶더니 "그, 너, 어"라고 중얼거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따르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은연중에 분대장 다음으로 영향력 있는 인상 험악한 병사가 얌전히 엔크리드를 따랐으니까.

예상한 바였다.

그 뒤, 활로를 찾기 위한 길이 더 이어졌다.

"엔리, 넌 꿈이 뭐지?"

엔크리드는 대형을 바꿔 선두로 나선 뒤, 엔리를 옆에 끼고 걸었다.

한바탕 소란이 일고 난 뒤다. 엔리는 정신이 빠질 것 같다가도 엔크리드의 말에 금세 마음을 다잡았다.

"네?"

"하고 싶은 거 있냐고."

엔리는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당황했는지 꽤 자세한 소망을 입에 담았다.

"에, 음, 잘 살아남아서 꽃집 미망인이랑 살림을 차리는 겁니다."

그렇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목표가 있다.

"일단 살아서 돌아가야겠군. 그럼 넌?"

그 뒤 곧바로 고개를 돌려 뒤를 향해 묻는다.

엔크리드의 바로 뒤에는 앤드류가 있었다.

엔크리드가 대형을 바꾸고 제일 처음 한 건, 자신의 바로 뒤에 앤드류를 세운 거였다.

하물며 무장도 그대로 들려준 채다.

엔리는 그걸 보며 생각했다.

엔크리드란 인간은 정말 겁도 없다고.

악감정에 뒤에서 콱 찌르면 어쩌려고?

엔크리드야 찔렸다고 해도 다시 하루를 시작하면 그만이었지만, 엔리는 그걸 몰랐다.

질문을 받은 앤드류가 숨을 푹 내쉬었다.

"좋아. 내가 졌다고."

그가 말한다.

"그래서 넌 뭘 하고 싶냐고 물었다. 병사."

분대장에서 병사로 강등이다.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실력 차이를 너무 명확하게 보여 줬으므로.

"가문의 부흥."

몰락 귀족이라더니.

"그럼 너도 일단 살아 돌아가야겠네."

엔크리드가 말한다.

다들 새로이 취임한 분대장이 왜 이러는지 빤히 바라봤다.

그는 이후에도 같은 질문을 반복하고 똑같은 답을 내놨다.

"살아서 돌아가야 돈도 버는 거다."

돈을 모아서 가게를 차리는 게 꿈이라는 병사의 말에 대한 답이었다.

"애인이 애를 가졌다고? 아비 없는 자식으로 안 키우려면 너도 돌아가야겠네."

깡패 병사 중 하나는 이미 예비 애 아빠였다.

"전부 같은 의견이네."

엔크리드가 이어 계속 말한다.

"그럼 일단 살아 돌아가 보자고."

다들 정말 이 작자가 왜 이러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따지는 사람도 없다. 엔크리드는 모두와 눈을 한 번씩 마주쳤다.

본래라면 별 의미 없을 동작이겠지만, 앞에서 뿌린 말이 있지 않나.

앤드류를 포함한 아군 병사는 각각 자신이 뒤에 두고 온 걸 떠올렸다.

엔크리드는 이들이 스스로 목적의식을 갖길 바랐다.

폭력과 강압으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알아서 잘 싸워 줘야 했으므로.

몇 번이고 해 본 방법이었다.

마음 안에 삶의 갈망을 심어 주는 것.

이건 퍽 잘 먹히는 수단이었다.

홀로 뚫고 나가는 것보다 열 명이 한 몸처럼 헤쳐나가는 게 훨씬 유리했다.

아니, 이 정도면 도망이 아니라 기습을 시도해 볼 법도 했다.

기습이 시작되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

'될 것 같아.'

가능성만 보인다면 몇 번이고 해 볼 수 있었다.

죽음만 각오한다면 그럴 수 있었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으며 엔크리드는 적의 위치와 숫자를 외웠다.

분대장을 몇 번 더 때려눕히는 오늘이 지난다.

"꿈이 뭐라고?"

같은 말을 반복하는 오늘도 지난다. 그 모든 것들이 지겨울 법도 했지만, 엔크리드는 반복되는 오늘을 똑같이 충실하게 보냈다.

그리하여 얻은 것, 핵심은 두 개였다.

기습과 깃대.

'해 보자고.'

그 모든 오늘을 거쳐 지금이다. 수없이 반복한 오늘에서 연습은 충분히 했다.

"다들 살아 돌아가자."

엔크리드가 뒤를 돌아보자, 정찰 분대 전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이게 그리 위험한 임무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어찌 됐든 계속 저리 말하니, 가슴이 꿈틀거리긴 했다.

"그럼 가자고."

대련으로 익힌 건 얼추 몸에 익었다.

이제 더 오늘을 반복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엔크리드는 신중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미 적의 위치를 대강 외우고 있었다.

"전에 여기 와 보셨습니까?"

평원 사냥꾼 출신 엔리가 물었다.

선두에 엔크리드와 나란히 선 채였다.

"몇 번."

안 와 봤다고 하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아무리 봐도 거침없이 길을 나아가고 있으니까.

"아, 그렇군요."

그렇게 조금 더 걷다가 엔리가 또 물었다.

"혹시 사냥꾼 출신이십니까?"

"그건 아니고, 아는 사냥꾼한테 조금 배웠어."

흔적을 읽는 법이나, 풀이 누운 방향을 읽어 내니 그런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엔크리드에게 이런 걸 가르친 건 엔리다.

그리 길을 인도하며 뒤를 보니, 앤드류 곁에 꼭 달라붙은 보모 병사가 보였다.

저 외모로 진짜 보모가 된다면 애들이 기겁하고 내빼겠지만.

전장에서라면 더없이 훌륭한 경호원이 되리라.

앤드류와 보모 병사를 보며 엔크리드는 생각했다.

'전투가 벌어지면 인상 나쁜 병사는 반드시 앤드류를 따라온다.'

걸으면서도 자신이 곱씹어 찾은 활로를 몇 번이고 그렸다.

목적지에 다다른 순간, 엔크리드가 오른 주먹을 들어서 분대원을 멈춰 세웠다.

"후."

멈춘 자리에서 크게 호흡을 가다듬고.

다들 여기서 왜 멈췄나 싶어서 시선이 모였다. 이제 풀밭 초입이니까.

하지만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엔크리드는 강압적인 분대장이었다.

움직이는 방향이나, 루트에 관해서 상의하는 법이 없었다.

독단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순찰 임무라는 게 일정 지역 부근을 돌아보는 게 목적이니까.

중요한 정찰 임무라면 그에 맞는 인원이 배치되었을 건데, 아무리 봐도 이 부대의 역할의 중요성은 그리 무겁지 않은 듯했으니.

어찌 됐든 필요한 일만 하고 돌아가면 그만이라는 소리였다.

"쏴."

엔크리드가 한쪽을 가리켜 명령했다.

석궁을 든 엔리가 멀뚱히 엔크리드를 바라봤다.

당황한 엔리가 "네? 어딜요?"라고 되물었다.

매번 반복된 일이다.

어쩔 수 없다. 이들에게는 반복된 오늘이 없으므로.

"쏴라. 두 번 말하지 않는다."

엔리는 눈치가 없는 편이 아니었다.

엔크리드의 말투는 차가웠고, 반론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깃들었다.

그가 가리킨 곳은 키다리 풀 너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딱히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고.

그래도 시키는 대로 했다.

엔크리드가 싸우는 걸 봤다. 소문과 달리 만만찮은 양반임이 분명했다.

활줄을 당겨 화살을 시위에 걸자, 팽팽하게 활줄이 늘어났다.

엔리는 눈치를 보다가 엔크리드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시위를 놨다.

분대장이 시키는 거니까.

퓽 하고 날아간 화살이 어딘가 푹하고 박히는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억' 하는 단말마도.

"...어?"

엔리가 당황했다.

이 순간, 당황하지 않은 건 둘뿐이었다.

베테랑 전사인 인상 더러운 병사와 엔크리드.

"따라와라. 앤드류."

바로 뒤에 앤드류를 둔 건, 이 순간 때문이었다.

실전 경험은 형편없지만, 그래도 실력만큼은 꽤 괜찮은 병사.

실력이 나쁘지 않다면 잘 굴려서 써먹어야 하지 않겠나.

그동안의 오늘에서 해 온 실수는 너무 혼자서 해결하려고 했다는 것.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안다.

엔크리드가 앞으로 뛰쳐나가자 앤드류는 반사적으로 그 뒤를 따랐고, 그러자 인상 험악한 병사가 '젠장'이라고 한마디 욕설을 뱉으며 다시 그 뒤를 따랐다.

세 명의 병사가 풀숲 너머에 다다르자, 이마 정중앙에 볼트가 꽂힌 시신이 보였다.

그리고 그 주변에 서성이는 병사 무리도.

아즈펜의 쇠뇌 부대였다.

숫자는 대략 열 명 내외.

엔크리드는 시작부터 필살의 수를 꺼냈다.

찌르기다.

왼발로 땅을 밟으며 비틀어 내지른 검 끝이 적병의 목 하나를 꿴다.

"꺽!"

칼날이 꽂힌 부위로 피가 줄줄 흘렀다.

목에 구멍이 난 놈이 손을 들어 검을 쥐려고 했다.

엔크리드는 곧바로 발바닥으로 죽은 병사의 배를 차며 검을 뽑았다. 검이 뽑힌 자리로 까만 구멍이 생겼고, 그 구멍에서 꿀렁 하고 선혈이 왈칵 쏟아졌다.

그사이 바로 옆에서 앤드류가 숏소드를 내리쳤다. 슬쩍 보니 칼질이 꽤 어설펐다.

갑자기 따라오란 말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적을 보고 반사적으로 내려친 것에 불과했다.

깡!

쇠뇌를 내팽개친 적병이 단검을 뽑아 막았다.

'어설퍼.'

하지만 괜찮다.

앤드류를 여기에 데려온 건 이 친구 뒤에 딸린 옵션 때문이기도 하니까.

인상 험악한 병사가 움직였다.

그는 기합을 내지르지도, 그렇다고 과격한 움직임을 보이지도 않았다.

앤드류의 숏소드를 막은 병사의 뒤로 돌아간 그는 오른손으로는 적병의 턱을, 왼손으로는 머리통을 감싸듯 잡더니 그대로 양손을 반대 방향으로 세차게 꺾었다.

우득!

적병의 머리가 꺾일 수 없는 각도로 꺾였다.

당연히도 죽었다.

인상 험악한 병사는 그 뒤 허리춤의 숏소드를 뽑으면서 뒤로 팽하고 팽이처럼 돌았다.

훙.

그의 숏소드는 바로 뒤에 있던 병사의 투구와 흉갑 사이에 드러난 목 한가운데를 갈랐다.

베인 목 피부가 한순간 쩍 벌어졌다.

피슉. 피슈슈슉.

잘린 목에서 핏줄기가 솟는다.

그걸 보며 엔크리드도 옆에 있던 적병의 발목을 걷어찼다.

손에 들린 검을 경계하던 적병이 옆으로 고꾸라졌다.

엔크리드는 넘어진 병사의 머리통을 걷어찼다.

빡! 우득.

목뼈가 꺾이며 맞은 놈이 끄럭 하고 묘한 비명을 내지르며 기절했다.

"기, 기습이다!"

"적병이다아!"

그제야 놀란 적병의 기합이 들렸고.

그제야 엔크리드의 뒤쪽에서 싸움 좀 한다는 깡패 출신 아군 병사를 비롯해 전원이 싸움에 합류했다.

"전원 척살."

엔크리드가 말했다.

핑!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엔리의 볼트가 날았다.

날아간 볼트는 엔크리드 앞에 있던 병사에 가슴에 박혔다.

날아간 볼트가 적병이 입은 갬비슨을 퍽 하고 뚫곤 빨간 핏물이 흘러나오게 했다.

"이런 씨-"

적병이 뭐라 입을 열려고 했다. 엔크리드는 놈이 뱉는 말을 마저 들을 수 없었다.

곧바로 검을 찔러 놈의 목에 구멍을 만들어 줬으므로.

"후."

호흡을 뱉어 내며 단시간에 과격하게 움직인 근육을 쉬게 한다.

그사이 챙챙 하는 소리가 울렸다.

꼭 혼자 전부를 상대할 필요는 없다.

새삼 깨달은 그 사실을 되새기며 몸을 돌리려는데.

하-악!

세 걸음 앞에서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났다.

이미 수차례 본 광경이다.

경계심 가득한 짐승의 울음소리.

눈을 돌린다. 그리고 정체를 확인한다.

새카만 털이 보였다.

저 존재가, 이곳에 주둔한 적의 쇠뇌 부대 일부가 방심한 이유였다.

엔크리드는 오늘을 반복하며 기습할 장소를 몇 개 봐 뒀다.

직접 목숨을 버려 가며 가장 유리한 기습 장소로 여기를 택했다.

그 이유가 저기에 있었다.

풀밭을 떠돌던 저 작은 짐승이 이쪽 쇠뇌 부대의 시선을 끌었을 것이다.

그럴 만한 존재다.

이미 알고 있다.

꼭 의도한 건 아니지만, 도움이 된 존재.

새카만 털의 주인이 푸른 눈으로 엔크리드를 바라봤다.

엔크리드의 푸른 눈도 놈을 바라봤다.

둘의 눈이 마주친다.

적병 중 하나가 칫 하고 잇소리를 내며 보병용 단창을 내리꽂는 게 보였다. 까만 털의 짐승을 향해서였다.

'신세를 진 셈이니.'

죽게 놔둘 생각은 없었다.

엔크리드는 가슴팍을 손으로 훑고는 앞으로 팔을 뻗었다.

뻗은 팔은 손가락을 전부 세운 형태로, 손이 바닥과 직각이 되게 멈췄다.

그 일련의 동작에 맞춰 가슴팍에 꽂혀 있던 나이프가 허공을 날았다.

팽하고 날아간 나이프가 적군의 어깨 어림에 꽂혔다.

그 덕분에 단창을 든 놈이 주춤했고.

캬아아아앙!

그 틈에 기껏해야 팔뚝 반만 한 짐승은 기겁할 만한 소리를 내지르더니 적병의 종아리를 물어뜯었다.

팍 하고 살점과 피가 튄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짐승은 자신이 물어뜯은 자리를 앞발로 후볐다.

상처를 쑤신 발톱과 털에 피가 묻어 번들거렸다.

그렇게 쑤시고는 잽싸게 피한다.

"이 개 같은 새끼가!"

종아리가 뜯긴 적병이 단창으로 바닥을 찍지만, 이미 까만 털의 짐승은 피한 뒤였다.

'그놈 참.'

영물이다.

엄청나게 영리하고 사나운 어린 흑표범이었다.

어깨에 나이프를 맞은 적병은 발악하기도 전에 인상 험악한 병사의 손에 죽었다.

적병의 뒤에서 나타나 목을 슥 하고 긋는 게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비명이 그친다.

마지막 남은 적병은 앤드류가 죽였다.

슬쩍 보니, 숏소드로 몸통을 수차례 찌르고 바닥에 쓰러뜨려 얼굴을 쑤신 듯했다.

그리 적을 죽인 앤드류가 숨을 몰아쉬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헉헉대는 숨소리가 들렸다.

"허억, 허억, 후우우, 후우, 씹, 이거 뭡니까."

놀란 아군이 묻는다. 얼굴은 눈에 익은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대신 엔크리드는 죽은 병사의 시신 중 아군의 것을 눈으로 찾아냈다.

쟤는 어떻게 해도 죽는다. 이번에는 적병의 단창에 얼굴을 찔려 죽은 듯했다.

보기 흉한 몰골이었다.

저 자식도 몇 번이고 구하려 해 봤지만, 저게 구해 주면 꼭 중간에 자기 살겠다고 탈주해서 일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반복된 오늘을 통해 아는 사실이었다.

"적병이지. 순찰 임무 중에 이런 경우가 있을 거라는 거 몰랐나. 잊지 마라. 우리는 살아 돌아가야 한다."

엔크리드는 다시 한번 삶의 갈망을 이끌어주며 분대원을 이끌었다.

"이쪽으로."

그러자 인상 험악한 병사가 말로 엔크리드를 붙들었다.

"거긴 더 안쪽이야. 분대장."

"불복인가? 항명하려면 아까 했어야지."

엔크리드는 반대 의견을 뭉개 버린 뒤,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마치, 따라오지 않으면 다른 선택지가 없는 것처럼.

무언의 압박과 강요다.

그래야 했다.

일일이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내달리며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어린 흑표범의 눈이 보였다.

파랗고 깊은 호수 같은 눈.

엔크리드는 자신과 비슷한 색의 눈을 보며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다른 그 무엇보다 살기 위해 발악할 시간이었다.

짐승과 교감을 나눌 시간이 아니라.

29. 나도 살고 싶다.

"더 앞으로 가겠다는 건가? 이건 미친 짓이야."

엔크리드의 뒤로 바짝 붙은 인상 험악한 병사가 말했다.

최초 기습에 성공한 뒤, 앤드류 분대에서 엔크리드 분대가 된 정찰대는 두 번의 기습을 더 시도했다.

두 번째 전투는 다섯 명의 병사 무리였고, 세 번째 전투에선 열다섯 명이 넘는 병사 무리를 만났다.

둘 다 험난했다.

두 번째 전투에서는 적병 중에 실력이 뛰어난 놈이 있었고.

세 번째 전투는 상대 머릿수가 많았으니까.

그런 와중에 살아남은 병사의 숫자는 일곱.

둘을 더 잃었다.

'더 살릴 수가 없다.'

뭘 어떻게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엔크리드는 자신이 성자 나부랭이가 아니라는 걸 안다.

여기서 죽은 셋을 살리겠다고 오늘을 반복하는 건 요정 뼈다귀 뜯는 소리였다.

그나마 엔크리드의 활약 덕에 이 정도였다.

물론 아군 병사도 피 터지게 싸웠다.

살아남았지만, 한쪽 눈을 잃은 놈도 생겼고.

앤드류도 얼굴에 칼자국이 남았다.

왼쪽 볼 위를 리넨 붕대로 감아 놨는데, 살아남으면 좋은 훈장이 될 만한 그런 상처다.

이런 상황인데도 엔크리드는 더 안쪽으로 향했다.

퇴로를 생각하지 않는 무지한 돌진과도 같다.

일반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미친 짓이 맞았다.

인상 험악한 병사는 솜씨나 경험이 녹록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도 방향 감각을 완전히 잃지 않았다.

그는 엔크리드가 적지를 향해 간다는 걸 눈치챘다.

그걸 본 엔크리드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네.'

렘이나 다른 분대원과 비교하면 한참 부족하겠지만, 그래도 퍽 쓸 만한 인재다.

작정하고 나서면 최소 소대장은 하지 않을까 싶은 그런 인재.

"이제부터는 숨 좀 돌릴 수 있을 거다."

엔크리드가 말하자, 인상 험악한 병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얘기가 아닐 텐데?"

"아까도 말했지만, 항명은...."

"항명이고 뭐고 간에 죽으러 가는 길이라면 분대장이든 뭐든 아군의 등 뒤에다 칼을 꽂아서라도 살길을 찾을 거다. 난."

이 새끼, 위험한 말을 너무 막 뱉네.

그러다 살아 돌아가면 얼굴을 어떻게 보려고?

빤히 쳐다봐도 미동도 없다. 뻔뻔했다.

그럴 만도 했다.

사람 목숨이 먼저지, 임무가 먼저겠나.

특히나 얘처럼 특수한 목적으로 종군하는 놈이야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앤드류와 자신의 목숨이 최우선이겠지.

엔크리드는 고개를 들어 해의 위치를 확인한 뒤, 걸음을 멈췄다.

자연스레 아군도 멈춘다. 모두 엔크리드와 인상 험악한 병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어깨를 들썩이며 호흡을 고르는 병사 무리 사이로 엔크리드가 입을 열었다.

"지금 돌아가면 어차피 죽어. 뒤에는 미친 들개 떼처럼 뭉친 적군뿐이다."

말하며 엔크리드는 손의 보호구를 느슨하게 풀었다.

가죽을 덧댄 보호구는 분명 쓸 만한 물건이지만, 오래 끼고 있으면 손 근육이 짓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느슨하게 차자니, 전투 중에 위험할 게 분명하고.

"그걸 어떻게 알고? 우리 존재 자체를 모를 텐데, 퇴로를 어떻게 벌써 막는다는 거냐?"

인상 험악한 병사는 엔크리드가 손등 보호구를 푸는 걸 슬쩍 보다가 미간을 팍 찌푸리며 말했다.

여유를 보이는 엔크리드의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엔크리드는 벌써 수십 번 이 순간을 맞이했다.

수십 차례 반복한 오늘이었다.

적군은 숫자가 많고 놈들은 기습을 확인한 순간, 반드시 퇴로를 끊는다. 그것도 무척 집요하게.

지휘관이 누군지 모르지만, 여기에 매복한 걸 어지간히도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그건 언제나 같았다.

키다리 풀숲 사이, 적당히 몸을 낮춘 아군 무리는 불안해 보였다.

무작정 뒤를 쫓기는 하지만, 지금 둘의 대화를 듣자니 위험한 전장 한복판에 선 듯했다.

그럼에도 쉬이 나서는 사람은 없다.

그저 귀만 쫑긋 세울 뿐이었다.

엔크리드는 다시 위를 슬쩍 보며 머릿속으로 시간을 계산했다.

서너 시간 뒤면 어둠이 내려앉을 것이다.

그러면 활로가 열릴 거고.

그 전에 일단 이 자리에서 이들을 설득해야겠지만.

힘으로 찍어누르면 좋겠지만, 그게 안 되는 상대다.

그렇다고 강압으로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강압과 폭력으로 몰아친 건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기습, 도주, 기습.

분대원을 정신없게 몰아쳐 여기까지 왔지만, 이제는 기다려야 할 시간이었다.

기다리자니, 이런 의문이 생기는 거고.

굳이 힘들여 설득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늦었다는 거 모르나?"

그 말이 맞았다. 이미 시간이 지체됐다.

여기서 돌아가는 게 더 미친 짓이었다.

인상 험악한 병사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뭐 이런 미친 새끼가 다 있지?

라고 말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그리 말하는 대신 눈알을 굴리더니, 물었다.

"생각이 있는 거겠지?"

엔크리드는 상대의 눈을 보고 주변 아군과도 한 번씩 눈을 맞췄다.

엔리, 앤드류까지 전부.

그들의 눈에는 의심과 불안이 담겨 있었다.

숨이 돌아오자, 여유가 생겼고.

여유는 이들에게 생각이란 걸 하게 만들었다.

이미 늦었다는 건 알 거고.

엔크리드는 합리적인 이유를 설명할 생각이 없었다.

사실 적절한 이유를 설명할 수도 없었다.

어떻게 말하겠나.

오늘을 반복해서 미래를 봤다고?

그 반복된 오늘을 끝내기 위해서, 내일로 나아가기 위해서, 무조건 자신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퍽이나 믿겠다.

그러하기에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나도 살고 싶다."

짧지만, 모든 게 담긴 한마디였다.

죽으려고 발악하는 건 아니라는 거다.

삶의 갈망.

그게 꼭 이들에게만 있을까.

자신도 마찬가지라는 걸 모두에게 주지시킨다.

물론 엔크리드는 죽으면 다시 오늘을 반복하면 되지만.

'정체되지 않겠다.'

그 강의 사공이 누구든.

눈앞에 세워진 벽이 얼마나 높고 단단하든.

멈출 생각은 없다.

엔크리드에게 반복된 오늘은 넘어야 할 산이자 정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러므로.

"믿어. 죽으러 가는 길 아니다."

설명 따윈 생략한 채, 모두의 믿음을 사겠다.

이들의 믿음을 토대로 하루를 비틀어서라도 오늘을 벗어나 내일을 맞이하겠다.

삶의 갈망, 반복된 전투, 흥분이 가신 뒤 생긴 불안, 이런 상황이라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리라.

그런 이들에게 엔크리드의 짧은 두 마디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신뢰감을 줬다.

나도 살고 싶고, 그러니 믿으라 한다.

또한, 이들은 본능적으로 다른 방법이 없음을 알았다.

여기서 당장 어떻게 할 건데.

적군은 키다리 풀밭 여기저기를 들쑤시며 득실거리고.

여기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어떻게 해도 보이지 않는다.

이럴 때면 누군가를 믿는 것만이 방법이 될 테니.

"저, 꼭 살고 싶습니다."

엔리가 중얼거렸다.

그 말을 시작으로 다들 엔크리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상 험악한 병사는 그나마 냉정했지만, 그에게도 방법은 없었다.

앤드류는 그중에서도 가장 큰 충격을 받았다.

실력을 떠나서 엔크리드가 인격적으로 완성된 사람 같았다.

지금의 엔크리드는 미래에 이럴 것이라 꿈꾸던 자신의 모습과 흡사하지 않나.

'이런 상황에서도 의연하고.'

포기를 모르며 모두의 신뢰를 얻었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나도, 나도 믿습니다."

그리하여 앤드류도 말했다. 어느새 말도 높였다. 그게 어색하지도 않았다.

아군 사이로 뜨거운 열기가 일어 엔크리드에게 닿는 듯했다.

"그럼 모두."

그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엔크리드가 입을 연다.

"지금부터 내 신호를 받을 때까지 두더지처럼 엎드리고 소리 내지 마라."

신뢰를 얻었다면 쓸 차례다.

그부터 솔선수범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리고 숨을 죽였다.

다들 엔크리드를 따라 했다.

당장 도망가지 않고 무슨 짓을 하나 싶지만, 어쩌겠나 조금 전까지 뜨거운 무언가를 나눈 사이다.

단 5분이라도 믿음을 줘야 할 타이밍이었다.

인상 험악한 병사는 제 코 위로 풀벌레 하나가 톡 뛰어서 사라지는 걸 보며 기가 찼다.

'이 새끼, 기가 막힌 수완가잖아.'

사람을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이런 솜씨로 그 사고뭉치 분대를 움직이는 거였나?

당연히 드는 생각이다.

푸스스슥.

그때, 풀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다들 숨도 조심히 쉬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리 가깝진 않았다.

키다리 풀밭은 빽빽한 풀숲과 같다. 바로 앞까지 다가오지 않고서야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숨기는 좋은 곳이었다.

주변에서 풀 밟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앞에서 뒤로 소리의 방향이 흘러간다.

멈춘 이들에게는 상황이 보이지 않았지만.

만약 키다리 풀숲 위를 나는 새가 있어, 지금의 광경을 봤다면 놀랄 만한 일이 펼쳐지는 중이었다.

엔크리드 일행이 멈춰 있는 곳을 중심으로 사방의 풀들이 요동치며 움직인다. 그들 전부가 적군이었다.

다만, 그들은 중앙에 멈춘 채 엔크리드 분대가 숨은 곳만은 피해서 움직였다.

그러니까 지금 엔크리드가 멈춘 장소는 적병 사이에서 유일하게 안전지대인 무인도와 같았다.

운이 따라 준다고 해도, 적군이 움직이는 궤도 사이에서 이런 빈틈을 발견할 순 없을 것이다.

행운의 여신이 키스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축복을 힘껏 쏟아부은 수준이다.

물론, 이건 운 따위가 아니었다.

미치도록 반복한 오늘을 통해 터득한 꼼수지.

풀 밟는 소리가 멀어지며 이제 소리로는 적군의 위치가 분간이 안 될 때쯤, 엔크리드가 다시 말했다.

"다시 이동한다. 전군 일렬종대로 전진."

이동할 시간이었다.

엔크리드는 웅크린 몸을 펴며 저린 다리가 회복될 때까지 천천히 걸었다.

그러며 작센에게 배운 오감 단련이 무척 쓸모 있다고 생각했다.

소리로 거리를 가늠하고 방향을 판단하는 것.

보통의 훈련으로 습득할만한 기술이 아니었지만, 엔크리드는 암살자에게 목을 갖다 바치며 배웠고, 풀숲에서의 오늘을 반복하며 소리를 구분해 들을 수 있었다.

'두 번째 목표도 지나쳤고.'

기습과 도주를 반복한 뒤, 여기에서 적병을 뒤로 흘려보내는 것.

그가 생각하는 활로의 핵심 중 두 번째였다.

이제 마지막 세 번째가 남았다.

그건 시간의 도움이 필요했다.

저린 다리가 풀린 뒤에는 속도를 조금 높였다.

다들 불만을 내비치는 대신 잘도 따라왔다.

내심 다들 놀라는 중이기도 했다.

아무리 봐도 주변에 적군이 그득한 것 같은데, 어떻게 이렇게 잘 피해 가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으니까.

생각해 보면 이제까지의 전투 양상도 희한했다. 마치 적군의 위치를 아는 것처럼 습격했으니까.

전부 아군의 기습으로 전투를 시작했고.

덕분에 유리한 고지에서 차지한 채 싸울 수 있었다. 그 모든 전투에서 엔크리드는 선두에 섰고, 미친 듯한 활약을 선보였다.

제 목숨을 도외시하는 놈처럼 보였다.

그의 뒤를 따르는 분대원 모두는 엔크리드가 목숨을 걸고 싸웠다는 걸 안다. 그가 가장 선두에서 위험을 감수했다는 것도.

고요한 풀숲 사이, 다시금 기이한 열기가 일어난다.

그건 살아남은 아군 가슴에 피어오른 불꽃의 열기였다.

엔크리드는 그 열기를 느끼지 못했다.

대신 다음을 생각할 뿐.

'여기까지는.'

수월했다.

솔직히 말하면 어렵지 않았다.

어려워서도 안 됐고.

현재까지 이르는 '오늘'을 벌써 오십 번을 넘게 경험했다.

그러니 이건 당연한 결과다.

그럼 왜 오십 번을 넘게 이 '오늘'을 경험해야 했나.

그건 전부 이다음 작전 때문이기도 했다.

이쪽은 소수고, 상대는 다수다.

의도도 알 수 없다.

알 수 있는 건 단 하나다.

적의 지휘관이 이곳에 접근한 이들을 한 명도 살려 보내지 않으려 한다는 것.

처음 몇 번은 퇴로 확보를 위해 어금니를 깨물고 돌파하려 했다.

당연하게도 번번이 실패했다.

분대원의 도움이 있다고 해서 그 결과가 변할까?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그 뒤에는 생각을 전환했다.

'우릴 잡는 것보다 더 골치 아픈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될까.'

해가 떨어진다. 눈앞에 노을이 지기 시작하며 황혼의 주황빛이 내려앉았다.

노을빛이 키다리 풀밭을 비추자, 마치 주황색으로 빛나는 호수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지금만큼은 이곳을 그린 펄이 아니라 오렌지 펄이라고 해야 할 듯했다.

오늘따라 하늘은 맑았고 떨어지는 햇볕이 쏘아 내는 노을은 더없이 따스했다.

해는 금세 서쪽 너머로 사라졌다.

그리고 어둠이 찾아왔다.

엔크리드가 택한 활로의 세 번째 목표를 취할 때였다.

30. 어둠을 친구로 삼는 순간은 언제인가.

어둠을 친구로 삼는 순간은 언제인가.

이게 문제라면 답은 쉬웠다.

자신이 잘 아는 곳.

앞마당처럼 훤하게 지형을 파악한 곳.

기왕이면 최근까지 생활한 곳이라면 더 좋을 것이다.

어렴풋하게 주변이 보이는 것만으로도 대강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을 테니까.

더없이 익숙한, 예를 들어 바로 어제까지도 야간 훈련장으로 삼고 사용한 장소라면 더 좋을 것이다.

지금 엔크리드가 도달한 곳이 그러했다.

본래라면 생소한 장소여야겠지만.

"이건...."

본래라면 이리 보고 놀라야 했지만.

"젠장."

본래라면 적의 규모가 눈에 들어온 순간 절망해야 했지만.

엔크리드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그는 이미 수차례 여기에 왔으니까.

그냥 오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구르고 또 굴렀다.

싸우고 또 싸웠다.

그때마다 함께 오는 인원이 조금씩 변하긴 했다.

그래도 기본 구성은 비슷했다.

앤드류와 인상 험악한 병사, 엔리, 그 외 분대원.

그중 깡패 출신 분대원 둘은 큰 도움이 되기도 했었다.

키다리 풀밭을 역행에서 빠져나온 곳.

예상치 못한 장면이 그들 앞에 펼쳐졌다.

분대원 중 일부는 본대로 향하는 퇴로가 막혔으니, 이쪽이 반대로 활로가 됐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정확히는 엔리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인상 험악한 병사만큼이나 방향 감각이 좋았다.

평원 사냥꾼 노릇은 괜히 한 게 아니었으니까.

엔리는 적이 풀밭 안에 매복했으니, 이쪽은 오히려 비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의 예상은 틀렸다.

그래서 더 절망적이었다.

엔리는 다리가 풀리는 걸 느꼈다.

화르륵.

처음 보인 건 타오르는 횃대였다.

그리고 그 불빛을 반쯤 가로막는 넓고 두꺼운 천이 보였다.

그걸 보자마자 엔리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고개를 들고 시야를 넓히자, 눈에 들어온 구조물의 형태가 드러났다.

천막이었다.

여기서 천막이 왜 나와?

어렴풋한 불빛에 의지해 고개를 옆으로 넘기자, 천막 옆으로 타오르는 횃대가 보였다.

저 멀리까지, 줄지은 횃대.

대강 숫자를 세도 열 개는 넘었다.

간신히 주변이 보일 정도로 횃대 사이의 간격이 넓었다.

달빛과 횃불의 빛이 엮이며 시야가 더 트였다.

그들의 눈에 보인 건 천막이었다.

최소 스무 동이 넘는 천막이 키다리 풀밭의 옆을 타고 쭉 이어져 있었다.

이쪽은 아군 진지를 기준으로 반대편.

그러니까 눈앞에 보이는 천막은 적군인 아즈펜 공국의 진지였다.

"씹, 이게 뭔데?"

깡패 출신 병사가 본능적으로 목소리를 죽인 채 중얼거렸다.

"허, 기껏 온 곳이."

엔리가 허탈한 목소리가 입을 열었다.

"쉿, 조용."

이 순간, 인상 험악한 병사가 가장 빨리 반응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경계병에게 발각되면 전투가 일어날 것이고.

그리되면 순식간에 살해당할 것이다.

모두의 눈에 횃대의 불빛 말고도 저 멀리 움직이는 불빛이 몇 개 보였다.

경계병이 든 횃불이란 건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다 알았다.

"주둥이 다물어."

인상 험악한 병사가 말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수틀리면 죽는다. 위기의 순간에 베테랑의 경험이 빛을 발하기 마련이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행동했다.

자세를 낮추고 경계병의 기척을 감지하려 했다.

최대한 몸을 숨기고 상황을 파악한 뒤, 도망갈 구멍을 찾는다. 운이 좋다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지금은 밤이었고 자신의 의도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적군의 예상과는 한참이나 동떨어진 방향으로 움직였으니까.

손만 뻗으면 적군의 천막에 손이 닿을 만큼 적진 한복판에 들어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리지만 않으면 도주할 기회는 있다.

그는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

정신만 차리면 마물 무리 한복판에 떨어져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날붙이 뽑지 말고 자세 낮춰."

마치 그가 리더인 양 행동했다.

분대원의 대부분이 그의 말에 따라 움직였다.

오직 둘만 제외하고.

당연하게도 한 명은 엔크리드였고, 다른 한 명은 앤드류였다.

"생각이 있겠지. 분대장은 엔크리드야."

매가 약이 된 건지.

오늘 아침에 쥐어 터져서 분대장을 뺏긴 놈이 유일하게 엔크리드의 편을 들었다.

"지금 장난할 때가 아닙니다."

인상 험악한 병사가 꾸부정하게 허리를 숙인 채로 뒤로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것과 같은 기세가 담겼다.

그는 마음이 급했다.

이곳은 적군 한복판이다.

키다리 풀밭에서 매복한 적을 맞이한 것보다 몇 배는 더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 천막 너머에서 곧바로 적군의 창날이 튀어나와도 할 말이 없는 순간인데.

이런 상황에서 생각은 무슨 생각.

인상 험악한 병사의 반응은 타당했다.

실제로 엔크리드는 몇 번이고 이 병사를 보며 같은 생각을 했으니까.

'보통내기가 아니야.'

실력도, 경험도, 판단력과 행동력도.

전부 어쭙잖은 병사 수준은 아니었다.

만약 자신이 없었다면, 오늘을 반복하지 않았다면.

이 남자를 분대장으로 삼고 발악하는 게 맞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다른 분대원은 몰랐지만, 여기까지 오는 길은 전부 엔크리드의 의도대로였다.

시간, 위치, 장소 모든 게.

벌써 몇 번의 밤을 이곳에서 보냈던가.

몇 번의 목숨을 던져 버렸던가.

몇 번의 오늘을 반복했던가.

지금 눈앞에 있는 천막에는 둔해 빠진 병사 셋이 곯아떨어져 있으며.

진지를 순찰하는 병사를 만나려면 아직 여유가 있었다.

그렇게 모든 걸 알고 있기에 엔크리드는 행동했다.

촤악.

검을 뽑아 천막의 벽을 찢었다.

아래에서 위로 검날이 달빛을 반사한다.

"이 미친 새끼."

인상 험악한 병사가 기겁했다.

그리고 여기서 앤드류는 엔크리드의 행동에 반응했다.

찢어진 천막 안으로 단숨에 들어가 놀라서 눈을 뜬 적병의 목에 숏소드 끝을 내리꽂은 거다.

푹!

그 뒤로 엔크리드도 뛰어 들어갔다.

일어나려는 놈의 목에 칼날을 들이밀자, 자다가 깬 놈이 놀라서 헛바람을 들이키며 손으로 칼날을 쥐려 했다.

엔크리드는 힘으로 칼날을 내리눌러서 목을 그었다.

부우욱.

가죽 뜯기는 소리 따위가 나고, 곧 피 냄새가 천막 안을 가득 채웠다.

마지막 적병은 깡패 출신 분대원이 심장에 단검을 꽂았다.

"끄륵, 끄르그극."

심장에 칼을 맞은 놈이 바닥을 기며 손을 뻗었다.

생명력이 질긴 놈이었다.

천막 입구 쪽에서 비춰 들어오는 불빛이 손을 뻗은 적병의 머리통을 비췄다.

그리고 그 위로 검은 그림자가 생겼다.

인상 험악한 병사다.

그가 무릎으로 적병의 등을 누르고 손으로 목을 잡고 비틀었다.

우득.

목뼈가 부러진 적병은 혀를 쭉 내밀고 죽었다.

"야, 너."

어둠 속에서 인상 험악한 병사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그가 엔크리드를 노려봤다.

운이 좋아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당장 적진 한복판에서 포위 섬멸당하는 꼴이 되었을 것이다.

이건 그야말로 도박 같은 짓이었다.

그가 보기에는 그랬다.

"옆으로 이동한다."

엔크리드는 그 눈빛을 무시했다.

그가 뭐라 말을 하기 전에 검을 뻗었다.

"야, 이 미친 새끼야."

인상 험악한 병사가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

절절한 짜증과 분노가 느껴졌다.

그가 보기에는 하염없이 미친 짓이었으니까.

엔크리드는 천막 옆을 검으로 찢고 베며 고개만 뒤로 돌렸다.

뒤에서 자신을 어찌할 거란 걱정은 조금도 들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살기를 뿌리는데도?

적지에 고작 순찰대 병력으로 돌격한 상황인데도 둘 사이에 번개가 튀는 것처럼 살벌한 분위기가 오가자, 다들 둘의 눈치를 봤다.

"이름은?"

"뭐?"

"네 이름."

엔크리드의 태연한 태도 때문일까.

살기에 반응하지 않는 담대함 때문일까.

검을 잡고 밑으로 내리그으며 묻는 엔크리드의 질문에 인상 험악한 병사가 순순히 입을 열었다.

"맥이라고 불러라."

말하면서도 살기를 거두지 않았다. 엔크리드는 그런 병사를 향해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맥, 항명은 받지 않겠다."

"뭐?"

부-욱.

엔크리드가 천막 벽을 마저 찢고 나갔다.

남은 이들의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그 뒤를 따라갈 수밖에.

"후, 진짜 뭐가 뭔지."

맥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다 앤드류와 눈이 마주쳤다.

"네, 갑니다."

맥이 그 눈빛에 답했다.

일단은 따라가야 할 판이다.

그 옆 막사는 비어 있었다.

막사에 있는 병사 전부가 어디 야간 경계 근무라도 나간 것 같았다.

'그게 말이 되나?'

천막은 아무리 적어도 열 명 이상은 수용할 만한 크기다.

최소 분대 단위다.

좀 무리하면 두 개 분대 병력도 머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천막 내부 흔적을 보면 열 명 이상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앞으로."

그 천막을 지나고 나선 뒤, 사고뭉치 분대장은 아예 천막 벽을 찢지도 않았다.

천막 입구에 고개를 내밀어 좌우를 보더니, 앞으로 훅 나간다.

그 뒤를 분대원이 따랐다.

어느새 구름이 껴 달빛을 가렸다.

그러자 횃대의 불빛만으로는 주변을 보는 게 쉽지 않았다.

눈을 몇 번이고 깜빡이며 야간에 적응하려고 해도 컴컴했다.

그런 곳을 엔크리드는 서슴없이 나아갔다.

그 뒤를 따르는 분대원의 숨소리 외에는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쪽."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울린다. 그리 작지 않은 목소리다.

혹시 주변에 적군이 있다면 듣기 충분한 그런 소음이다.

맥은 등 뒤로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저 새끼가 진짜.'

그런데 기척이 없다. 미처 감지하지 못한 적군의 움직임도 없고.

만약 발견했다면 당장 누구냐 따위의 말이 들렸을 테니까.

엔크리드는 또 움직였다.

이제는 맥조차도 방향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키다리 풀밭에서야 머리 위에 태양이 버젓이 떠 있으니, 방향을 살피는 데 문제가 없었지만, 지금은 사방이 어둡지 않나.

'뭘 알고 가는 건가?'

그래 보였다. 엔크리드의 걸음에는 망설임 따윈 없어 보였으니까.

그는 움직였고, 저 멀리 횃대 두 개가 붙어 있는 천막을 시야에 두고서야 멈췄다.

앞에 솟은 적당한 나무를 엄폐물로 삼은 엔크리드가 뒤쪽을 향해 손짓했다.

어둠에 적응된 눈에 간신히 그의 손짓이 보였다.

맥은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우리가 얼마나 걸었지?'

정확히는 모른다. 하지만 천막의 개수를 토대로 진지의 크기를 가늠해 봤을 때.

'관통한 것 같은데?'

적지를 관통할 정도는 걸은 것 같았다.

그런데 아무도 몰라? 이거 왜 안 걸려?

이러니 귀신에 홀린 기분이 드는 게 당연했다.

"여기서 대기."

엔크리드가 뒤로 돌아서서 말했다.

속삭이는 목소리였다.

그가 말한 천막을 슬쩍 보니, 지키는 병사가 넷이다.

적의 진지는 밤이라고 해도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는데 저 천막만큼은 붐비는 것처럼 보였다.

휘잉.

바람이 불며 횃대의 불빛이 흔들리자, 병사의 그림자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러자 천막 안쪽에서 누군가 나와 뭐라 말하는 게 보였다.

거리가 있는 탓에 목소리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그 말을 들은 병사가 고개를 끄덕이는 건 보였다.

'뭘 지키고 있는 건가?'

그럼 사고뭉치 분대장은 저걸 노리고 온 거고?

그제야 맥은 이 상황을 이해했다. 아니, 추측했다. 불현듯 머릿속을 스치며 한 가지 생각이 뇌리에 자리 잡았다.

'비밀 임무였군.'

자신과 다른 분대원을 제외하고 오롯이 사고뭉치 분대장에게만 주어진 임무.

그만큼 지휘관의 믿음을 산 것일 테고.

맥은 앤드류가 말한 걸 떠올렸다.

중대장의 지시로 사고뭉치 분대장이 합류했다고 했었다.

이제야 모든 게 맞아떨어졌다.

엔크리드, 분대장은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거였다.

'그런 거였나?'

오해였다.

맥은 작은 깨달음을 얻었지만, 그렇다고 말로 내뱉진 않았다.

그리고 엔크리드는 이런 오해가 생겼다는 걸 알아도 굳이 가타부타 부연 설명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장 할 일이 더 급했으니까.

"우리는 저 막사에 불을 지른다."

엔크리드가 손가락을 들었다.

전면에만 병사 넷이 지키는 막사였다.

31. 불을 질러라.

'어째 천막에 불 지르는 게 특기가 되어 버리는 것 같기도 하지만.'

엔크리드는 그리 생각하며 나무를 낀 채로 간단하게 작전을 설명했다.

분대원 누구도 말을 덧붙이지 않고 듣기만 했다.

이제는 그야말로 쏘아진 화살에 탄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그 뒤 엔크리드는 움직였다.

"먼저 간다."

걸음 소리조차 나지 않게 아주 조용히 발을 뗀다. 나중에는 자세를 낮추더니 아예 바닥에 누워서 기었다.

분대원 전부는 엔크리드가 바닥을 기는 걸 지켜봤다.

그가 지시한 작전은 단순했다.

동쪽에서 소리를 지르고 서쪽을 치는 간단한 속임수다.

소리를 지르는 쪽은 맥과 나머지 분대원 전부였다.

소리 지르는 쪽에서 빠진 건 셋뿐이었다.

엔크리드와 앤드류, 그리고 깡패 출신 병사.

"내가 하지."

병사의 시선을 끄는 역할에 맥이 솔선수범해서 나섰다.

불평도 없고 선뜻 말한다.

맥의 태도가 갑자기 변했지만, 엔크리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말 잘 들으면 좋은 거지 뭐.

맥은 어둠 속에서 슬금슬금 몸을 풀다가 돌멩이를 하나 주워, 냅다 던졌다.

날아간 돌멩이가 병사의 머리통을 맞췄다.

딱!

투구에 맞은 돌멩이가 튕기고 맞은 병사가 악하고 비명을 질렀다.

"...이런 씨."

"뭐냐!"

경계를 서던 병사 넷이 한쪽으로 몸을 돌렸다.

엔크리드는 숨을 죽이고 그들을 지켜봤다.

말은 필요 없었다.

"침입자다!"

병사가 외친다. 소란이 일었다.

그리고 엔크리드는 그 타이밍에 맞춰 천막에 바짝 붙으려 했으나.

"쥐새끼 같은 놈."

딱 걸렸다.

당황할 건 없었다.

몇 번의 오늘을 통해 배운 거다.

'혼자서는 안 돼.'

천막 옆, 창을 든 병사 하나가 눈을 부라렸다.

엔크리드는 상대가 냅다 달려들기 전에 몸을 일으켰다.

가슴팍에 묻은 흙이 부스스 바닥에 떨어졌다.

기합조차 없이 횃대를 등진 병사가 창을 내질렀다.

팽 하고 날아온 창을 끝까지 지켜보던 엔크리드는 몸을 틀어서 피했다.

아니, 피한 거로 끝나지 않았다.

목숨 반 개쯤 걸고 도박을 걸었다.

야수의 심장이 대담함을 주기에 할 수 있는 미친 짓이다.

피하며 앞으로 나아간 거다.

창날이 어깨를 스쳤다. 가까스로 피한 셈이었다.

어깨에서 화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대신 엔크리드는 적의 코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거리를 얻음과 동시에 검을 위로 긋는다.

검날을 확인한 적병이 창대를 밑으로 내려 방패 삼아 막으려 했다.

그리고 엔크리드는 처음 달려들 때부터 보이지 않게 들고 있던 왼손의 나이프로 상대의 빗장뼈를 향해 꽂았다.

푸꺽!

뼈와 살을 동시에 가르며 칼날이 꽂혔다.

"끅!"

적병이 신음을 흘렸다.

엔크리드는 그대로 놈의 콧잔등을 이마로 받았다.

빡!

맞은 병사는 신음조차 흘리지 못하고 뒤로 넘어가며 넘어졌다.

발렌 식 용병검, 삼검류였다.

첫 번째 검은 속임수, 실제 공격은 왼손에 쥔 나이프와 박치기다.

이걸 위해서 목숨 반 개쯤 걸고 창을 향해 돌진한 거였다.

적병은 쓰러뜨렸다.

하지만 이미 발각되었기에 막사에 불을 지르는 건 요원한 일이 됐다.

쓰러진 적병 뒤로 다른 병사가 횃불과 검을 들고 나타났으므로.

눈가에 흉터가 있는 남자는 정말로 만만찮아 보였다.

걸음걸이, 태도만으로도 알 수 있다.

하수는 아니라는 걸.

"같잖은."

그가 칫 하고 잇소리를 내고는 말했다.

걸어오는 걸음에 여유가 느껴졌다.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습격자를 본 셈인데 두려워하는 기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후, 오래도 걸리네."

엔크리드가 중얼거렸다.

남자가 그 말에 눈썹을 찡그렸다.

화륵.

남자의 뒤쪽이었다.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어느새 천막에 불이 붙은 거다.

"...꺼!"

남자가 외친다. 그걸 보며 엔크리드는 앞으로 뛰어나가며 검을 찔렀다.

오른발로 땅을 밀고 왼발로 땅을 찍는다.

"모든 건, 발부터."

렘과 라그나, 두 명의 분대원이 입을 모아 말한 검술의 기초다.

엔크리드는 그렇게 했다.

발부터.

땅을 차며 나아간다. 순식간에 양손에 검과 횃불을 든 병사의 모습이 확대됐다.

뒤를 돌아본 채다. 죄다 빈틈이었다.

엔크리드는 검을 찔렀다.

전신의 탄력이 실린, 처음 엔크리드를 수없이 죽였던 병사의 그 찌르기다.

팽.

공기를 가르고 칼날이 목적지에 도달한다.

그야말로 한순간이었다.

이제까지 수없이 했던 찌르기 중에서도 지금이 최고였다.

반복된 오늘을 통틀어서도 그렇다.

엔크리드는 상대를 죽였다고 생각했다.

집중한 엔크리드의 눈에 사물이 느리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모두가 느려진다. 자신의 검도 남자의 손도.

느려진 세상에서 적병의 손이 꿈틀 움직인다. 곧 적병의 검이 아래에서 위로 솟구쳤다.

파악!

픽!

엔크리드는 남자를 지나쳐 옆으로 튕겨 나가듯 움직였고, 배를 움켜쥐며 멈췄다.

고개를 뒤로 돌린 채로 있던 적병이 도로 앞을 봤다.

그는 엔크리드를 보더니, 눈썹을 추켜세웠다.

"건방진 새끼가."

상대는 잔뜩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물론 화가 난 거야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문제라면 놀라운 검 솜씨 때문이지.

'그 순간에?'

찌르기는 완벽했다. 더 없이 만족할 정도로.

렘이라 해도 그 채찍처럼 휘어지는 도끼가 아니고서야 막을 엄두도 못 냈을 그런 찌르기다.

그런데 피했다.

목에 옅은 자상을 남기긴 했지만, 치명상은커녕 그냥 생채기라고 봐도 무방한 상처다.

반면에 적이 반사적으로 뽑아 올린 검은 정확히 엔크리드의 옆구리 부근을 그었다.

깊은 상처는 아니다. 뼈도 상하지 않았다.

죽을 정도는 아니지만.

'방심했었는데.'

그런데 결과가 이렇다.

하물며 엔크리드에게 이 '오늘'은 얼마나 익숙했나.

그런데도.

적병과 자신의 사이에 큰 강이 놓인 것 같다.

다만 상대는 언제든 강을 넘어와 자신을 찌르고 벨 수 있으나.

자신은 강에 발만 간신히 담그면 끝인 것처럼 느껴졌다.

둘 사이에 명확한 실력 차가 존재했다.

그래서 어쩌겠나.

언제는 자신보다 약한 상대와만 싸웠던가.

엔크리드는 호흡을 가다듬고 검을 그러쥐었다.

여기가 오늘의 분기점이라면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막막함이 느껴지는 실력 차지만.

그렇다고 해서 변하는 건 없다.

다른 사람에게는 막막함이 절망과 절벽과도 느껴진다면.

엔크리드는 그걸 계단처럼 느꼈다.

언젠가는 밟고 올라갈 수 있는 그런 계단.

짜릿한 희열이 발끝부터 가슴을 채운다.

보아라.

오늘을 반복하는 것이 어떻게 저주인가.

그 수많은 오늘을 넘어 결국, 저 어마어마한 실력자를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반드시 그럴 것이다.

절대로 오늘에 안주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희열이 차오른다.

엔크리드의 그런 마음이 그의 얼굴을 통해 드러났다.

"웃어?"

검을 든 적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엔크리드가 희열이었다면 이쪽은 분노를 얼굴에 드러냈다.

"찢어발겨서 개 먹이로 던져 주마."

엔크리드는 죽음을 예감했다.

지금 당장은 뭘 어찌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이므로.

그렇다고 얌전히 당해 줄 생각은 없지만.

고통을 각오한다. 물러서지 않는다. 그리 검을 쥐고 마음을 다잡을 때다.

화르륵.

남자의 뒤쪽으로 불길이 위로 치솟았다. 조금 전 불길은 장난이라고 말하는 듯, 용이 불이라도 토하는 것 같았다.

천막 전체에 불길이 옮겨붙었다.

티딕티딕 하고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천막에서 솟은 불길 너머 다급한 목소리가 여럿 들렸다.

"이 새끼들이! 불 꺼!"

"누가 기름을 부었습니다. 소대장님!"

"횃대가 넘어졌습니다!"

어이쿠, 일도 잘하네.

엔크리드는 이 천막에 불을 피우기 위해 시선을 두 번 끌었다.

한 번은 맥과 분대원으로.

다른 한 번은 자신이 직접 몸소.

불은 앤드류와 깡패 출신 분대원이 질렀다.

깡패 출신 분대원이 도시에서 말썽 좀 부려 본 솜씨를 여기서 유감없이 발휘한 거다.

"깃대가 탄다!"

그러자 천막 바로 옆에서 치솟은 불길을 보며 어떤 남자가 외쳤다.

얼굴에 기이한 모양의 문신을 한 남자였다.

"소대장! 지금 뭐가 중요한지 모르는 건가!"

그가 엔크리드 앞에 있는 남자를 나무랐다.

그걸 보며 엔크리드가 뒤로 슬쩍 물러났다.

아무리 상대보다 실력이 떨어진다고 해도 한두 번 칼질에 죽어 주진 않는다.

그건 상대도 안다. 작정하고 버티면 저 불길이 천막을, 그 안에 깃대를 다 태울 때까지 버틸 수 있다는 거다.

솔직히 엔크리드는 고작 깃대 몇 개에 왜 목숨을 거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아는 건 단 하나다.

상대가 그걸 소중히 한다는 것.

고작 적병 몇 명의 목숨보다 훨씬 더 말이다.

"너, 두고 보자."

상대, 아즈펜 부대의 소대장이란 놈이 엔크리드를 노려보다가 몸을 홱 돌렸다.

여기서 엔크리드를 상대하는 것보다 뒤쪽 불을 지르는 놈들을 처리하는 게 급하다고 판단한 거다.

엔크리드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야말로 죽었다가 살아난 기분이다.

죽는다는 것, 오늘을 반복하며 수없이 해 봐도 적응이 되질 않는다.

이 또한 저주라면 저주일 것이다.

그 끔찍한 순간을 거듭 겪어야 하니.

물론 그 모든 고통과 죽음에 직면함으로 생기는 괴로움은 엔크리드에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이걸 통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이걸 통해 실력이 늘어난다면.

이걸 왜 못 견디겠는가.

"가야 합니다."

잠시 주변을 경계하고 있자니, 뒤에서 앤드류의 목소리가 들렸다.

슬쩍 보니, 얼굴에 검댕이 가득했다.

"퇴각한다."

엔크리드가 말하고 움직였다.

그 뒤로 깡패 출신 병사가 따라 움직였다.

뛰다가 앤드류가 품에서 피리를 꺼내 불었다.

삐이익, 삐이익!

두 번 길게 불자, 저 멀리서 맥이 남은 분대원을 이끌고 달려왔다.

보니까 엔리는 팔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고, 맥의 뒤를 따르는 병사는 더 없었다.

처음 열 명이었던 분대가 반쪽이 된 거다.

그리고 엔크리드가 원했던 활로가 열렸고.

"분주해졌군, 상대가, 대규모 추격대는 없겠지?"

맥이 이걸 노렸냐고 그리 물어보는 것 같았다. 이쪽도 험난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도 이마가 찢어졌다. 이마에서 피가 흐르는 게 보였다.

"아마도."

엔크리드는 답하고 발을 놀렸다.

그의 옆구리 쪽에서도 피가 계속 흘렀다.

그리 깊지 않은 상처라 생각했지만, 지혈도 없이 계속 뛰고 있으니 피가 멎을 생각을 안 한다.

당장은 어쩔 수 없으니 손으로 꾹 누르고 뛸 뿐이었다.

지금부터는 미지의 오늘이기에 엔크리드는 뒤쪽을 경계했다.

적군의 추격이 있었다. 다섯 놈이 쫓아왔다.

"이 미친 새끼들!"

상대적으로 쌩쌩한 놈들이었다.

얼굴에 그을음이 남긴 했지만, 상처 하나 없는 놈들이다.

그 다섯은 엔크리드, 앤드류, 맥이면 충분했다.

엔리는 배에 구멍이 났고, 복부에서 흘린 피 때문인지 비틀거렸다. 깡패 분대원이 그걸 부축하느라 제대로 싸울 수 없었다.

"염병, 이러다 다 죽는데, 정신 좀 차리쇼!"

깡패 병사가 엔리를 타박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버리고 가진 않았다.

엔크리드는 추격조와 싸우는 바람에 옆구리 상처가 더 벌어졌다.

그래도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맥은 추격조 병사 중 둘을 죽이느라 허벅지를 베였다.

하지만 리넨 붕대를 꺼내 동여매더니 뒤처지지 않고 따라왔다.

앤드류는 고작 몇 번의 전투로 급격하게 실력이 늘어난 것 같았다.

'아니지.'

엔크리드는 그가 금세 실력이 늘어난 게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농도 짙은 전장을 경험하며 본래의 실력이 나왔다는 게 더 옳은 말일 것이다.

앤드류의 검이 무섭게 휘몰아쳐 추격조 둘을 단숨에 죽이지 않았다면, 아마도 탈출은 실패했을 것이다.

또는 더 험난했거나.

앤드류가 처음 얻었던 볼의 상처에서 다시금 피가 배어났다.

다들 만신창이였지만, 그대로 죽진 않았다.

밤새 방향을 잡고 도망가자, 중간에 엔리가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서쪽으로 가면 평원 여우와 뱀 서식지가 나옵니다. 거기로 가면 쉽게 못 쫓아올 겁니다."

이쪽 평야, 그린 펄이라 불리는 곳에는 다양한 동물이 산다.

그중에는 여우와 뱀도 있었다. 다만, 여우는 그렇다 쳐도 뱀 중에는 독사가 많아서 위험했다.

"거기로 가면 적병 뿌리치다가 우리가 먼저 독사한테 물려 죽어."

맥이 말했다.

그러자 엔리가 희미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그 여우 서식지와 뱀 서식지가 겹치는 곳이 있습니다. 제가 압니다. 거긴 뱀과 여우 서식지의 경계선이라 괜찮습니다. 사냥꾼의 길이죠."

엔크리드는 엔리를 보며 창백하게 질린 채로 잘도 웃는다고 생각했다.

저런 상태로 길 안내라니.

이쪽도 보통 정신력이 아니다.

다들 엔크리드를 바라봤다.

판단은 그의 몫이니까.

"그쪽으로."

엔크리드는 말하고 움직였다. 망설임은 없다.

그는 걸으며 다른 생각에 잠겼다.

'처음 본 놈인데.'

적의 소대장이란 놈이 뇌리에 깊게 남았다.

매번 그 소대장이란 놈이 튀어나왔으면 죽느라 바빴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이었다.

아마도 이런 상황까지 몰아붙였기에 나타난 것이리라.

'아닌가.'

생각해 보니 그 목소리를 들어 본 것 같기도 했다.

이전 몇 번의 오늘을 반복한 끝에 불 지른 막사로 숨어 들어갔을 때다.

가까스로 적병이 지키는 막사에 들어가자 엔크리드의 눈에 보인 건 묘한 광경이었다.

깃대와 깃발.

이상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대접, 얼굴에 문신이 가득한 남자.

점이라도 치고 있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상대 반응이 너무 격했다.

"잡앗!"

깃대를 발로 걷어차자 기겁하지 않았나.

그때 깨달았다.

이 깃대가 이들한테 뭔가 중요한 거라는 걸.

그리고 그때 뒤에서 자신의 목을 벤 놈이 있었다.

"뭐야, 이 새끼는."

생각해 보니, 그 목소리의 주인과 같은 놈 같았다.

생각에 잠긴 채, 엔리의 인도로 걷다 보니 주변이 파랗게 물들기 시작했다.

위에서 밑으로 푸른 빛이 주변을 감싸, 하루의 시작을 알린다.

새벽이었다.

어느새 동이 트기 시작했다.

엔크리드는 자신이 또 오늘을 넘어섰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해가 뜨고 주변에 환하게 밝아질 때까지 본대를 향해 가던 엔크리드의 정찰대는 정찰 본대를 만났다.

"꼴이 그게 뭔가?"

마주하자마자 정찰 소대장이 물었다.

엔크리드는 설명보다 급한 게 많았다.

다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보고는 돌아가는 길에 하는 거로 충분했다.

그저 지금은 살았다는 거로 충분했다.

"후, 저 이제 기절하겠습니다."

뒤에서 엔리가 말했다.

엔크리드는 따로 답하지 않았다.

이미 기절한 놈한테는 무슨 말을 해도 안 들렸을 테니까.

32. 꿈, 질책, 책임

"깃대는?"

"괜찮소."

아즈펜 공국의 중대장은 지금 진행하는 작전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윗선에서 명령이 내려온 걸 일개 지휘관이 어쩌겠는가.

까라면 까야지.

그래서 까는 중이었고, 그 와중에 작은 문제가 생겼다.

나우릴리아의 쥐새끼 몇 마리가 막사에 잠입해서 불을 질렀다.

병력의 반 이상이 키다리 풀밭에 매복했음에도 침입을 허용했다.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이미 시작된 작전이다.

여기서 당하는 건 자존심 문제였다.

실패는 더더욱 용납할 수 없는 거였고.

"방비를 더 철저히 해 주셨어야지."

깃대의 주인이 말했다. 그 말에 중대장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이대로 검을 뽑아 목을 후려치면 단숨에 뒈질 놈이 입을 놀리는 게 아니꼽다. 그래도 어쩌겠나.

부대 경계에 구멍이 생긴 건 맞았다.

"그러지."

펄럭!

중대장은 그리 말하고 막사 출입문을 손으로 쳐 내듯 밖으로 나왔다.

그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 말이 되나?'

적군이 여길 알아채는 건? 그래, 이건 알아챌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그다음은?

고작 열 명도 안 되는 숫자로 키다리 풀밭에 풀어 둔 병력을 지나쳐 본대의 깃대를 습격해?

중대장은 자신의 부대를 믿었다.

당연했다.

평소에 그의 별명은 악마 중대장이다.

훈련을 하도 지독하게 시켜서 붙은 이명이다.

평소에 피를 토해야 전장에서 피를 토하며 뒈지지 않는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그런 자신이 키운 부대였다.

'이걸 뚫고 들어와?'

전투에 패배한 군인은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군인은 없다.

중대장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그렇다고 아군의 경계를 나무랄 것인가.

무작정 그럴 순 없었다.

이걸 계획하고 실행한 놈은 보통이 아니었다.

적지를 소수로 들어올 수 있는 담력에.

자신의 수하로 있는 소대장과 맞붙어 살아남는 실력과.

불을 지르고 내빼는 완벽한 마무리까지.

소대장이야, 뒤쪽에 불이 번져 어쩔 수 없이 놓쳤다곤 해도.

'운도 실력이지.'

긴 시간 전장을 떠돈 아즈펜의 중대장은 운의 중요성도 알았다.

중대장은 대기하던 부관을 향해 말했다.

"근무 나간 소대장을 제외하고, 모든 지휘관 불러와."

"네, 대장님."

그의 중대는 대대 휘하에 있으나, 별개의 작전권을 지닌 부대였다.

그러니까 독립 중대였다.

그리고 보통의 경우 독립 중대는 별칭이 붙었다.

이 부대의 이름은 '그레이 독'이었다.

아즈펜 공국에서 그레이 독이란 회색 털을 가진 개로 집요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그레이 독이란 개는 자신이 점 찍은 상대와 어떻게든 이어져야 직성이 풀렸다.

그게 사랑이 됐든, 싸움이 됐든 말이다.

그 덕분에 그레이 독 부대는 '집요한 사랑꾼'이라 불리기도 했다.

지금 그 부대의 장이 이름도 모르는 적의 정찰 분대장을 찍었다.

'반드시 잡아 죽인다.'

그레이 독, 회색 개가 표적을 정했다.

중대장은 제 가슴에 거듭 각오를 새겼다.

반드시 잡아 족치겠다고.

그의 머리 위, 천막 안에 있는 주술사의 수작인지 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곧 비가 올 것 같았다.

근래 간간이 내린 비는 대부분 지금 천막 안에 자리한 주술사의 솜씨였다.

그리고 이 주술사가 이번 전술의 핵심이었고.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게 효율적인 작전임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이 작전이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면 독립 중대 그레이 독, 또는 '집요한 사랑꾼'이라 불리는 부대의 대장은 때려 죽어도 이 작전에 참여하지 않았을 테니.

승리가 약속된 전장이라니.

복수심을 불태우는 것과는 별개이긴 하지만, 몹시 재미없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 * *

"우연히 적의 매복을 발견한 뒤, 우연히 적의 본진으로 진입해서 우연히 적진에 불을 지르고 왔다고?"

이렇게 말하니까 또 이상하게 들리긴 하네.

엔크리드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사족을 덧붙였다.

"네, 그 순간에 적절한 판단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한 결과가 우연히 그렇게 됐습니다."

정찰 소대장은 눈을 깜빡였다.

이 친구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건지.

나이는 자신과 버금가면서 운 좋게 분대장이 된 놈.

실력은 형편없으면서 틈만 나면 검을 휘두르는 머저리.

그게 사고뭉치 분대장의 대외적인 평가다.

그런데 지금 그가 한 일을 들어 보면 이건 뭐.

하물며 엔크리드의 입에서 들어서 이 정도다.

살아남은 분대원의 입에서 들은 얘기는 더 가관이었다.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는군요. 가능하다면 옆에서 더 배우고 싶습니다."

떠나기 전에는 너무 건방져서 걱정되던 앤드류다.

이 새끼를 이대로 보냈다가 혹 사고가 나지는 않을까 했는데.

정찰대의 지휘권을 강압적으로 뺏겼는데 그게 당연하단다. 아니, 더 배우고 싶단다.

이게 내가 알던 그 앤드류가 맞는 건가?

"실력만 보자면 중급 병사 수준은 넘었다고 보는데."

다음은 앤드류의 보모 맥이었다.

정찰 소대장은 맥의 솜씨를 알았다.

반쯤은 그를 믿고 앤드류에게 정찰대를 맡긴 것도 있었다.

그런 맥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거다.

그것도 실력으로.

"아는 게 많더군요. 시키는 대로 했더니 이렇게 됐습니다."

마지막은 평원 사냥꾼 엔리다.

분대원의 평가가 한결같았다.

믿고 따랐을 뿐이란다.

다 같이 입을 모아서 거짓을 말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엔크리드가 정찰대 지휘권을 빼앗았고.

고작 열 명으로 키다리 풀밭에 매복한 적병의 눈을 피해 적 진지에 불을 지르고 살아 돌아왔다고.

'이게 말이 되나?'

안 되는 것 같은데, 이미 불도 지르고 적의 움직임도 파악했다고 하니 뭐라 할 말이 없다.

들었던 모든 걸 정리해 보는데 당황스럽다.

적군 사이에서 멈춰 있었더니 알아서 피해 갔다는 둥.

어둠 속에서 적지를 관통해서 움직이는데 아무한테도 걸리지 않았다는 둥.

"그, 음, 운이 엄청 좋았나 보군."

결국, 정찰 소대장은 이렇게밖에 말하지 못했다.

엔크리드는 그 말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죽으면 반복되는 오늘 덕분에 적군의 움직임과 진지 상태를 외웠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네, 운이 따랐습니다."

이게 운이라면 정말 보통 운이 아니었다.

행운의 여신이 키스를 넘어 동침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정작 운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기도 했다.

딱히 숨길 일이 아니기에 정찰 소대에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사고뭉치 분대장인 엔크리드는 운이 따르는 남자라고, 행운의 여신이 동전을 맡겨 둔 남자라고, 행운 그 자체라고.

또는 평생의 운을 이번 정찰 임무에서 다 썼다고.

본대로 복귀하는 길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

반나절 동안 걷는 중에 잠깐 비가 추적추적 내린 게 전부였다.

맑은 하늘에 비가 떨어졌다.

흔치 않지만, 가끔은 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돌아가는 내내, 엔크리드는 한 가지 생각에 몰두했다.

'그게 최선이었나?'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만약 '오늘'을 몇 번 반복했다면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지 않았을까?

무슨 일이든 미련은 남는다. 엔크리드는 어려서부터 그걸 깨달았다.

중요한 건 선택이고 그 선택의 과정이다.

'최선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을 반복할 수 있으니, 절로 다른 생각이 들었다.

과연 그게 최선이었나 하는 미혹과 의문, 혹 다른 선택지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미련.

'겨우 넷.'

함께 살아 돌아온 숫자다.

자신을 포함하면 다섯.

부대의 반수가 죽었다.

결과가 엔크리드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게 최선이냐고,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냐고.

'다섯이 죽었다.'

그 다섯은 엔크리드의 가족도, 친구도 아니었다.

고작 짧은 일정을 함께 한 부대원일 뿐이다.

그들이 있거나 없다고 해서 변하는 건 없다.

그저, 그 순간, 그 오늘에서 그들이 엔크리드의 책임이었을 뿐.

오랜 시간 가슴 속에 품었던 꿈이, 그를 지금까지 올곧게 이끈 신념이, 그를 질책했다.

과연 그게 최선이었냐고.

더 지킬 수 있지 않았냐고.

'넌 대체 어떤 기사가 되겠다는 거냐?'

그저 기사, 두 글자에 매료된 건 소년 시절의 엔크리드였다.

종전의 기사란 음유시인의 노래에 매료되었던 소년은 성인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 엔크리드는 자신이 보잘것없는 재능의 소유자란 걸 알았다.

전장을 구르며 자신의 한계도 깨달았다.

그럼에도 꿈은 버리지 않았다.

그 꿈이 헤지고 헤진 가죽이 되었다 해도.

결국, 현실이란 칼에 뜯기고 찢긴 천 조각이 되었다고 해도.

포기한 적은 없었기에.

그러므로 고작 기사란 글자에 매료된 채로 끝나지 않을 수 있었다.

기사란 지키는 자, 기사란 나서는 자, 기사란 자신의 뜻한 바를 보이는 자.

'어떤 기사가 될 것인가.'

오늘을 반복함으로써 엔크리드는 한계 너머로 발을 뗄 수 있었다.

그렇다면 평소 자신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깨닫고 확립한 무언가를 지켜야 할 것이다.

'나는 어떤 기사가 되고 싶었던가.'

현실에 찢기고 찢긴 꿈이, 신념이란 글자가 되어 질책하니.

엔크리드는 그 질책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함으로 이미 지나간 일을 넘기기로 했다.

오늘을 반복해서 다섯을 더 살릴 수 있었다고 해도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므로.

이미 그 '오늘'은 끝났다.

거기에 미련을 두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본대다."

함께 걷던 병사 중 하나가 말했다.

"후으, 살았군요."

뒤에서 부축받아 오던 엔리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래서 돌아가면 그 꽃집 미망인한테 바로 달려갈 건가?"

"이번 전투가 끝나야 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엔크리드의 말에 엔리는 기쁜 낯으로 말했다.

살아 돌아왔다는, 그 험난함을 뚫고 생환한 기쁨이 그의 가슴에 가득했다.

그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그중 깡패 출신 병사는 더 그랬다.

그는 오는 내내 이번에 있었던 일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과연 자신은 어떻게 해서 살아남을 수 있었나.

평생 양아치처럼 살다가 죽을 줄 알았는데 어쩌다 보니 종군하게 됐고.

또 어쩌다 보니 앤드류란 주군을 모시게 됐다.

그리고 이번 정찰 임무.

그는 느낀 바가 많았다.

생각을 거듭하던 깡패 병사는 다친 다리를 절뚝이며 엔크리드의 옆으로 다가갔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오는 내내 단 한마디 말도 건네지 않았었다.

'은혜를 모르면 사람 새끼가 아니라고 했다.'

어릴 때 자신을 거둬 준 형님이 해 준 말이다.

그 형님은 진즉에 죽어서 다시 볼 수 없지만, 그가 자신에게 해 준 말은 어느새 삶의 지표가 됐다.

껄렁껄렁하게 대강 살았어도 깡패는 은혜를 알았다.

"버릇없게 굴어서 죄송합니다. 목숨을 구해 준 은혜는 기회가 되면 갚겠습니다."

엔크리드는 갑자기 다가와서 말하는 병사를 빤히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목숨을 구해 준 게 맞나?

사실상 수틀리면 죽을 자리였는데, 살아남은 건 병사 자신의 운이었다.

실제 오늘을 반복하며 이 병사가 죽은 적도 많았으니까.

그저 그 오늘, 그 순간에 행운의 여신이 잠시 머물렀을 뿐.

"마음대로 해."

대수롭지 않게 답하고 돌아서니, 이번에는 앤드류와 맥이 보였다.

"신세 졌네."

맥이 먼저 말했다. 전에 없이 호의적인 눈빛이다.

앤드류는 그보다 더했다.

"다음에 또 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한없이 건방진 애새끼라고 생각했는데, 태도가 변했다.

눈빛이 공손해졌다.

엔크리드는 통증이 느껴진 옆구리를 손바닥으로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같은 전장에 있으면 또 보겠지. 전장의 꽃은."

"보병이다."

보병대의 구호를 작별 인사로 삼았다.

그걸 옆에서 보던 정찰 소대장이 다가왔다.

"모두 복귀해도 좋다. 부상자는 의무 막사를 찾아 몸을 돌보도록 하고. 다들 수고했다. 그리고 그, 아니다."

정찰 소대장은 몸을 돌리기 전 엔크리드에게 성과와 포상에 관해 말하려다가 관뒀다.

'일단 보고부터.'

듣고도 못 믿을 일을 하지 않았나.

위에서 믿을지 안 믿을지도 모르는데 벌써부터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이르다고 생각했다.

"그럼."

금세 옆구리 통증이 가라앉는 걸 보며 엔크리드는 굳이 치료가 필요한 상태가 아니라고 생각하곤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복귀할 시간이었다.

'별일 없으려나.'

키다리 풀밭에서야 이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지만, 부대에 돌아와 막사로 돌아갈 때가 되니, 과연 자신의 분대원이 얌전히 있었을까 싶었다.

다른 부대원과 시비가 붙었든지.

아니면 자기들끼리 피 터지게 싸웠든지.

뭐가 됐든, 일이 있었을 것 같은데.

괜히 분대에 사고뭉치란 이름이 붙은 게 아니었다.

그렇게 막사에 도착하기도 전이었다.

따-앙!

쇠와 쇠가 만났을 때나 나올 법한 굉음이 귀를 때렸다.

작센을 통해 배워 훈련한 청각이 빛을 발했다.

소리의 근원지를 단숨에 찾았다.

본대 막사 쪽이었다.

엔크리드의 걸음에 속도가 붙었다.

막사에 다가가자, 주변에 사람이 에워싼 게 보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 도끼와 검을 맞댄 둘이 보였다.

위치는 사고뭉치 분대 막사 앞.

도끼를 든 건 렘.

검을 쥔 건 라그나였다.

33. 목표

소대장의 보고를 들은 중대장의 에메랄드빛 녹색 눈에 의아함이 담겼다.

"고작 열 명으로?"

정찰 임무 중 다른 분대에서 있었던 일은 전부 평이했다.

유일하게 있었던 일이라고는 평원에서 아즈펜의 보병 정찰대를 만났고, 서로 싸우는 대신 거리를 두고 헤어졌다는 것뿐.

당연하게도 아즈펜 쪽에서도 정찰대를 운용할 테니, 평원에서 마주치는 게 드문 일은 아니다.

오히려 한 번만 마주쳤다는 게 이상한 일이지.

하지만 엔크리드 부대가 한 일은 궤가 달랐다.

적이 키다리 풀밭에 매복한 것.

적군이 무슨 수작을 부린다는 것.

정보를 알아내는 것까지야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고작 열 명의 병사로 적진에 침투하고 불을 질렀다.

'뭐 하는 새끼지?'

그 모든 일의 중심에 엔크리드가 있었다.

이전 암살자 사건도 그렇고.

묘하게 일이 꼬이는 곳마다 엔크리드란 분대장이 있지 않나.

순전히 재수가 없다고 봐야 하나?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악운에 강했다.

그냥 있는 게 아니라 번번이 활약 아닌 활약을 했다.

가진 바 실력은 그저 그런데, 매번 벌어진 일의 결과는 예상 이상이었다.

암살자 때도 그 분대장이 버틴 덕분에 목표를 보호할 수 있지 않았나.

이번에 한 일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적진에 침투해서 정보를 알아낸 것만 해도 백번 상을 줘도 부족한 일이었다.

"네, 그렇다고 합니다."

소대장이 답했다.

열이 적진에 침투해서 고작 다섯이 죽고, 나머지 다섯은 말도 안 되는 성과를 이루고 돌아왔다.

사이프러스 사단이 키운 정예 특급 부대도 아니고 최하급 병사가 이끄는 정찰대 열 명이 한 일이다.

중대장은 흥미를 느꼈다.

'엔크리드, 엔크리드.'

이건 진짜 뭐 하는 새끼지?

실력은 고만고만한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걸까?

깊게 고민할 일은 아니었다.

'운.'

그저 운이 따른다고 생각했다.

이게 운이 아니라면 뭐라고 해야 하나.

적 지휘관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온 것처럼 부대 위치를 다 외웠다면 모를까.

그건 더 말이 안 된다.

차라리 아즈펜 공국이 키운 첩자라는 가설이 더 나을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말이 안 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어떤 멍청한 놈이 이런 첩자를 키워서 보낸단 말인가.

겨우 분대장에, 실력은 형편없는 일개 병사를?

"분대장을 불러 사실 여부를 확인하시겠습니까?"

"이런 걸 거짓으로 말할 만큼 멍청한 놈이라면 진즉에 죽었을 거다."

중대장은 앉은 자리에서 주먹으로 턱을 괴고 생각했다.

엔크리드란 분대장은 운이라 치고.

아즈펜 놈들은 뭘 노리는 걸까?

일단 대대장에게 말을 전해야 한다.

그게 순서였다.

그녀는 생각을 끝내고 일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이 멍청한 놈은 누가 소대장으로 뽑은 걸까?

중대장은 머저리를 밀치며 말했다.

"대대장 막사로 간다."

이런 일이 있었으니 보고가 최우선 아니겠나.

* * *

렘은 심심했다.

소소한 전투도 없고, 딱히 할 일도 없다.

현재 양군은 각 진지에서 서로를 노려보며 버티기 바빴다.

이번에는 이대로 전쟁이 끝나리라는 소문이 부대 내에 돌기 시작했다.

"뭐, 그런 거죠. 곧 겨울이고 이쪽 평원 전투가 단숨에 끝날 일은 아니잖아요? 그러니 또 내년을 기약하겠죠."

귀가 밝은 크라이스의 말이다.

본인의 의견이라기보다는 돌고 도는 소문을 듣고 종합해서 내린 결론일 것이다.

렘은 크라이스가 뭐라 떠들든, 이딴 일에는 관심 없었다.

이 전장이 매년 반복된다는 거나.

아즈펜과 나우릴리아가 과거에는 사이가 좋았다던가.

알게 뭐란 말인가.

'더럽게 할 일 없네.'

적당히 도끼날을 갈고 그거로 도끼 저글링을 하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지만, 할 일이 없다는 게 변하진 않는다.

렘은 미치도록 이 시간이 지루했다.

그를 제외하면 다들 할 일이 있어 보였다.

"아니, 궐련을 그 가격에 달라고요? 돌았어요? 머리에 화살촉이 박히셨나."

한쪽에서 왕눈이가 연신 뭘 파느라 바빴다.

전투가 끝나면 한동안 수익이 줄어드니, 지금 바짝 벌어야 한다던가.

참 열심히도 산다.

"뭐? 화살촉?"

가끔 왕눈이 놈의 작은 체구를 보고 눈을 부라리는 놈들이 있었다.

렘은 그런 놈들을 위협하는 걸 소소한 취미로 삼기도 했다.

방금 갈아 둔 도끼날을 혀로 핥으며 바라봐 주면 끝이다.

애초에 도끼날은 그렇게 날카롭게 갈아 두지도 않는다. 손가락이 대자마자 베일 정도로 갈아 두면 날이 쉽게 깨진다.

마법이나 장인의 손길이 닿지 않는 이상은 이게 맞는 손질법이다.

그러니 도끼날을 핥는다고 해서 혀가 베이진 않는 거다.

"...저번 전투에서 투구에 화살이 맞긴 했지."

금세 꼬리를 말 놈이 덤비기는.

"궐련은 구하기도 힘들다고요. 그래서 몇 대가 필요하시다고?"

크라이스가 금세 목소리를 높였다.

영락없는 장사치의 모습이었다.

음흉한 들고양이 같은 작센 놈은 막사에 붙어 있기보다는 밖을 나돌았고.

종교쟁이 놈은 기도하다가 몹시 우울한 얼굴로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그러며 만날 '신이시여 답을 주소서'라고 중얼거리는데.

보다 보면 가까이하기가 꺼려진다. 하는 짓만 봐도 미친 광신도의 냄새가 물씬 풍기지 않나.

진짜 저 새끼는 만날 왜 저러는 건지.

마지막으로 남은 라그나 놈은 툭하면 잠만 처자고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고.

지루하지도 않은지, 저리 종일 멍 때리고 자고 멍 때리고 자고를 반복한다.

저게 재밌나?

'분대장이 없으니 너무 심심하잖수.'

렘은 속으로 불만을 토하며 생각했다.

혹시 분대장이 뒈져 버린 건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

정찰 임무는 위험하다. 그리고 분대장의 실력이 많이 늘긴 했지만, 렘의 기준에서 보자면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실력이었다.

만약 그가 죽었다면?

그렇다면 좀, 아니 많이 아쉬울 것 같았다.

'씁, 그 사이 정이라도 들었나.'

그동안 지켜본바, 죽게 놔두기 참 아까운 인간이긴 했다.

그렇다고 쫓아다니며 지키는 것도 웃기지 않나.

그 인간이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우연히 만난 마음에 드는 인간일 뿐.

'마음에 드는 인간?'

생각해 보니 그런 인간도 참 드물었다. 렘의 평생에 그런 인간이 몇이나 있었다고.

기왕이면 살아 돌아오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초조하진 않다.

애초에 어쭙잖은 놈들한테 당할 위인은 아니니까.

이런저런 잡다한 생각의 끝, 여전한 무료함에 렘은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분대장이 죽었든 살았든 지금 이 순간의 무료함을 해결해야 했다.

"나 혹시 너 죽이고 싶냐?"

렘은 단순한 방법을 택했다.

하릴없이 드러누운 라그나를 툭 발로 차며 말했다.

라그나는 빤히 렘을 올려다봤다.

과연 이 새끼가 지금 무슨 짓인가 하는 눈빛과 함께.

"죽고 싶어서 이러는 거냐?"

라그나는 진지했다.

"심심해서. 한판 붙자."

긴말은 필요 없었다. 막사에 잠깐 들른 작센이 둘을 보고는 무시하고 지나쳤다.

종교쟁이야 평소와 같이 우울한 낯으로 바닥에 머리를 처박느라 바빴고.

크라이스는 자리를 비웠다.

둘은 합의하에 밖으로 나섰다.

챙.

가볍게 도끼와 검을 마주쳐 싸움의 시작을 알린 뒤.

서로를 향해 검과 도끼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후앙!

렘의 팔이 휘어지며 도끼가 무섭게 내리꽂힌다. 라그나는 그 도끼날을 피하며 몸을 틀어 검을 내뻗었다.

분대장 엔크리드가 수없이 보였던 찌르기보다 완성도가 배는 높은 날카로운 공격이 렘의 복부를 노렸다.

렘은 발끝에 힘을 잔뜩 주며 뒤로 뛰었다.

퍽.

그의 발이 있던 곳에 족적이 남았다.

안목이 있는 사람이 봤다면 깜짝 놀랄 수준의 공방이 오갔다.

엔크리드가 도착한 건 막 둘의 전투가 절정에 치달았을 때였다.

* * *

"죽여 버려!"

흥분한 병사 하나가 외쳤다.

어느새 둘을 구경하는 이들이 잔뜩 모였다.

사고뭉치 분대가 왜 사고뭉치 분대인가.

여러모로 문제가 있는 이들의 집합체이기 때문이다.

그럼 부대에서는 왜 이런 사고뭉치 무리를 데리고 있는가.

당연하게도 실력 때문이었다.

그런 둘이 실력을 뽐내고 있으니, 이게 어떻게 구경거리가 아니겠나.

따-앙!

검과 도끼가 만나며 둘을 중심으로 흙먼지가 일었다.

쌔액!

그럼에도 둘은 서로를 향해 시선을 떼지 않았다.

스카가각.

도끼날이 위에서 밑으로 떨어지는 듯하더니 바닥을 긁었다.

자잘한 돌이 도끼날에 긁히며 튀었다.

라그나는 아래를 긋는 도끼를 피해 위에서 밑으로 검을 내리그었다.

훙.

눈을 뜨고 있음에도 검날의 궤적이 보이지 않았다.

위에 있던 검이 어느새 밑으로 떨어져 렘의 목을 그었다.

따-앙!

거기에서 다시 도끼와 검이 맞부딪쳤다.

둘이 쥔 무기를 중심으로 불똥이 튀었다.

"미친."

4중대 2소대장이 중얼거렸다.

딱 봐도 자신보다 수준이 몇 배는 높아 보였다.

그 외에도 실력에 자신 있는 병사 몇이 혀를 내두른다.

곧 상급 병사 수준을 넘보던 이들도 몇 있었다.

그들은 전부 수준이 다름을 느꼈다.

물론 그중에서 둘의 실력을 가늠하는 이들도 있었다.

'나도 저 정도는 하지.'

'나라면 벌써 끝냈어.'

지금 보이는 게 둘의 전부라 착각했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엔크리드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제자리에 멈춰 섰다.

주변에서 뭐라 떠들든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순간 엔크리드의 눈은 오롯이 둘의 동작을 쫓기 바빴고.

머릿속에는 둘의 검과 도끼를 상대하느라 집중했다.

엔크리드의 코끝으로 땀방울이 흘렀다.

지켜보고 집중하는 것만으로 전신이 땀으로 푹 젖을 정도였다.

때로는 보는 것만으로도 실력이 늘 수도 있었다.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엔크리드는 이 순간 자신이 할 일을 깨달았다.

'지금 같은 방식으로는 안 돼.'

사람에게는 각자 맞는 형태가 있다. 검을 배우는 것도, 몸을 단련하는 것도 그렇다.

그리고 엔크리드는 다른 사람에게 없는 걸 갖고 있었다.

오늘이 반복되는 저주.

눈깔 없는 뱃사공이 말한 끝없이 나타나는 벽.

그렇다면 평범한 훈련이나 수련이 아니라 그에 맞는 새로운 방법을 택해야 할 터였다.

저 둘의 도끼와 검을 보며 엔크리드의 머릿속에 그 방법이 떠올랐다.

흥분과 깨달음은 순식간에 찾아왔고 곧 찬물을 끼얹은 냄비처럼 금세 식었다.

둘의 대련 아닌 대련을 보는 순간, 엔크리드는 순순히 인정해야 했다.

그는 아직도 저 둘의 실력을 끌어낸 적이 없었다고.

렘도 라그나도 자신과 대련하며 저런 걸 보여 준 적이 없었다.

힘과 속도를 떠나, 둘의 표정에서 알 수 있다.

렘이 웃고 있었다.

그게 어찌나 신나 보이는지.

라그나의 표정에도 생동감이 넘쳤다.

평소에는 쉬이 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몇 번의 오늘을 반복했던가.

몇 번이나 죽음의 순간을 넘겼던가.

그럼에도 지금 당장 둘 중 누구와도 진지하게 겨룰 수 없다.

그게 자신의 위치였다.

그렇다고 낙담하진 않았다.

겨우 이 정도로 포기할 거였다면 시작도 못 했을 테니.

되려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표가 생겼으니까.

'저 표정.'

둘을 지켜보는 와중, 자신을 상대함에도 저런 표정을 짓게 만들겠다는 각오가 선다. 엔크리드는 그게 못내 만족스러웠다.

새로운 길이 보였고 그 길을 걸어갈 시간이 있기에.

더없이, 정말 더없이 즐거웠다.

티리리리링.

도끼와 검이 스치며 기묘한 소리를 토해 냈다.

그와 동시에 렘과 라그나가 거리를 벌렸다.

둘 다 땀을 꽤 흘렸다. 라그나의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이 보였다.

후- 하고 숨을 토해 낸 렘이 히죽 웃었다.

"만날 잠만 처잔 놈치고는 쓸 만하네."

라그나가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약한 놈들만 괴롭히는 야만인 주제에 어디서 평가질이냐?"

날 선 말과 달리 둘은 검과 도끼를 거뒀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상태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

둘 다 흥분했다면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어느 정도 여력을 남겨 둔 대련이었다.

둘은 싸우면서 구경꾼 사이에 있는 익숙한 얼굴을 확인했다. 분대장이었다.

싸우면서도 여력을 남겨 둬 주변을 둘러봤다는 방증이었다.

"구경났어? 계속 볼 거면 나랑 놀아 주든가."

렘이 불쑥 말하자 구경하던 무리가 금세 흩어졌다.

흩어진 사람 사이로 꾀죄죄한 몰골의 엔크리드만 남았다.

"왔수?"

렘이 엔크리드를 반겼다. 라그나도 눈으로 아는 척을 해 왔다.

싸움은 끝났다.

그리고 엔크리드도 무사히 복귀했고.

곧 부스스한 붉은 머리를 손으로 빗으며 작센이 나왔고, 크라이스도 분대장을 보더니 뛰어왔다.

"오셨습니까?"

"분대장!"

"신이 보살피셨군요."

종교쟁이 분대원도 아는 척을 해 왔다.

총원 여섯, 본래는 십인대가 되어야 할 분대의 전부다.

그 여섯의 하나가 되어 엔크리드는 복귀를 알렸다.

34. 왜 그렇게까지 합니까?

"내가 아는 정찰이랑 분대장이 아는 정찰이 다른 거유?"

렘이 손안의 도끼를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뭐가?"

"반쯤 뒈지다 말고 돌아온 것 같아서."

"옆구리 좀 긁힌 게 다다."

"그게 긁힌 거면, 베이면 바로 뒈지는 거요?"

렘이 말하고 낄낄 웃었다.

이 새끼는 변한 게 없다.

하긴 며칠이나 못 봤다고 변했겠나.

엔크리드에게는 몇 달의 시간이지만, 이들에게는 고작 일주일도 안 지났을 뿐이니.

"뒈질 뻔하긴 했지."

엔크리드는 옆구리 상처를 손으로 더듬으며 말했다.

실제로는 수없이 죽음을 경험했지만, 그걸 그대로 말할 순 없지 않나.

"좀 보죠."

작센이 다가와 옆구리 상처를 들췄다. 엔크리드는 몸을 돌려 보기 편하게 상의를 들어 올렸다.

"네가 본다고 아냐?"

렘이 툴툴거렸지만, 작센은 상큼하게 무시하고 엔크리드의 상처를 살폈다.

"별거 아니야."

엔크리드가 말했다.

"뼈는 안 상했지만, 가벼운 상처라고 얕보다가는 고생합니다."

그건 맞는 말이지.

"연고는 발랐어."

"다행이군요."

작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찰 나가서 교전이 있었나 보네요?"

왕눈이가 엔크리드의 꾀죄죄한 몰골을 보며 말했다.

머리는 기름이 졌고, 전투 후에 쉬지도 않고 도보 행군을 이어 온 탓에 눈 밑이 퀭했다.

임무 내내 제대로 씻는 건 고사하고 먹고 마시는 것도 부족했으니, 몰골이 꾀죄죄한 건 당연했다.

'교전 정도인가, 아예 적진 안을 한번 들쑤시고 왔지.'

솔직히 다 말할 필요는 없기에 그냥 그렇다는 시늉으로 고개만 끄덕여 줬다.

오자마자 렘과 라그나의 전투를 보는 바람에 땀을 또 흠뻑 흘려 몸이 노곤했다.

그러니 지금은.

"먹을 거 없냐? 물도."

먹고 쉴 때였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검을 휘둘러 보고 싶으나, 지금 몸 상태로 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키다리 풀밭에 모인 적을 봤을 때, 이 전투가 이대로 끝나지도 않을 것 같다.

고로 또 전장에 나서야 할 것 같으니, 몸 상태를 끌어올려 놔야 했다.

"씻고 오슈. 왕가의 만찬으로 차려 드리지."

렘이 웃으며 말했다.

엔크리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근처 개울로 향했다.

괜히 보병 진지를 이곳에 둔 게 아니다. 뒤쪽으로 개울이 흘러 식수를 구하기도, 몸을 씻기도 쉬웠다.

물에 손을 넣으니, 훅하고 찬 기운이 올라왔다.

'추워지는군.'

기온이 떨어질 시기이긴 했다.

엔크리드는 얼굴을 대강 헹구며 주섬주섬 입은 걸 벗고 몸에 묻은 피와 기름, 땀과 때를 씻어 냈다.

'그놈.'

씻다 보니 이번에 겪은 일이 절로 머릿속을 채웠다.

키다리 풀밭, 매복, 깃대를 지나서 마지막 검과 횃불을 들고 있던 놈까지.

'다시 만날 것 같은데.'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마주할 것만 같은 그런 예감이다.

'이게 그 벽인가.'

눈 없는 뱃사공이 말하지 않았던가.

벽이 끝없이 자신의 앞을 막을 것이라고.

걱정은 되지 않는다. 막으면 넘어서면 그뿐.

솔직히 말하면 은근히 기대도 됐다.

그 자식과 승부를 겨루지 않고 돌아온 게 못내 아쉬울 지경이었으니까.

물론 승부를 내는 순간, 죽는 건 자신이겠지만, 그래도 피하고 싶진 않았다.

한번 붙어 보고 싶었다.

그 자식을 보는 순간 이상할 정도로 호승심이 생겼다.

가끔 보다 보면 이런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지는 것과 비슷하지만, 그와 반대로 싸워 이기고 싶은 상대 말이다.

그리 몸을 단장하고 돌아가니, 온기가 도는 수프와 빵, 또 어디서 구해 왔는지 노릇노릇하게 구운 고기 꼬치구이까지 있었다.

이 정도를 왕가의 만찬이라 할 순 없지만, 전장에서 보기 드문 성찬이라고는 할 수 있었다.

"토끼?"

엔크리드의 물음에 렘이 에헴 하고 나서서 말했다.

"내 친히 준비했수다."

"아니, 렘이 아니라 제가 구한 거잖아요."

그러자 왕눈이가 눈을 흘겼다.

"그래. 고맙다."

엔크리드는 앉은 자리에서 게눈 감춘 듯 음식을 먹어 치웠다.

"항상 볼 때마다 생각하는 건데, 분대장은 참 잘 드슈."

"잘 먹어야 힘을 내니까."

"분대장은 내가 본 인간 중에 가장 독특한 인간이우."

먹는 데 옆에서 구경한다 싶더니, 렘이 팔짱을 낀 채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뱉었다.

여긴 사고뭉치 분대고, 그중에서도 아군 폭행이 취미인 놈한테 독특한 인간이라는 말을 듣다니.

"너한테만은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은데."

그 말에 렘이 또 낄낄 웃었다.

그 뒤 분대원은 다 제각각 흩어졌다.

작센은 볼일이 있다며 나갔고, 크라이스는 장사할 시간이라고 나갔다.

종교쟁이 분대원은 한쪽에서 기도를 시작했고 렘은 낄낄 웃으며 막사 밖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다.

아마도 지나는 다른 병사를 보며 시답잖은 농담이나 던지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라그나는 물끄러미 엔크리드를 바라봤다. 시선이 자꾸 느껴졌다.

"왜?"

시선이 신경 쓰여 엔크리드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그냥 봤습니다."

반쯤 비스듬히 누운 채로 라그나가 답했다.

엔크리드가 고개를 갸웃하자, 라그나가 아무것도 아니라며 몸을 돌렸다.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더 묻진 않았다.

이제까지 사고뭉치 분대를 이끈 경험으로 알았다. 지금은 물어도 대답이 안 나올 것이다.

이런 경우 기다리면 나중에 다시 말을 꺼내곤 했다.

말을 안 꺼내면 뭐, 그냥 넘어가는 거고.

임무에 돌아온 뒤였으니, 불침번도 식사 당번도 다 열외였다.

엔크리드는 잘 먹고 푹 잤다.

작센의 연고는 효력이 좋았다. 옆구리 상처가 금세 아물었다.

이 정도면 이틀만 쉬어도 충분할 것 같았다.

엔크리드가 누워 쉰다고 해서 하릴없이 시간만 보낸 건 아니었다.

'열이면 열, 다 질 것 같긴 하지만.'

엔크리드는 앉은 채로 머릿속에서 연신 검을 휘둘렀다.

첫 상대는 렘, 다음은 라그나, 그 뒤에는 적지에서 만난 적.

궁리하고 또 궁리했다.

한적한 해안 도시에서 검을 가르치던 늙은 검사는 말했었다.

"눈먼 칼에 죽고 싶지 않으면 너한테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행운의 여신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또 비는 것이고."

하나는 운에 맡기라는 거였고.

"두 번째는 수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는 거다."

목숨 반 개쯤 걸고 싸웠는데 살아남았다면 그 싸움은 재산이 될 거라 했던가.

해안 도시의 늙은 검사가 자주 했던 말이다.

그럼 그 목숨 반 개를 걸고 싸워 살아남으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궁리다. 생각이다. 고민이다.

끝없이 방법을 생각하라 했다.

만약 아무 생각 없이 적을 마주했다면 그때는 첫 번째 방법에 모든 걸 기대야 할 거라고.

그렇게 되기 싫으면 평소에 궁리하라 했다.

'괜찮은 선생이었어.'

그때의 엔크리드에게 딱 맞는 조언이었다.

그리고 그 조언은 지금도 빛을 발했다.

엔크리드는 궁리하고 생각했다.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최소한 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방법을 찾기 위한 발악이 발렌 식 용병검이었다.

누군가는 조악한 속임수라 말하는 그 검술이 바로 엔크리드가 가진 핵심 기술이기도 했다.

속임숨, 박치기를 포함한 삼검류, 단검이나 돌을 던지기 위한 발검술 등.

실제로 당하고 나면 얼토당토않고 허무한 기술이지만, 처음 접하는 상대나 어설픈 실력의 상대에게는 잘 먹혔다.

머릿속의 엔크리드가 검을 휘둘렀다.

찌르기의 자세를 잡고 돌을 던지고.

검을 뽑는 척하다가 쓰로잉 나이프를 던졌다.

렘은 도끼를 휘둘러 다 쳐 냈고, 라그나는 발을 놀려 다 피했다.

그리고 검과 횃불을 든 상대는 돌이 날아오는 걸 무시하고 달려와선 검을 찔러 자신의 심장을 쪼갰다.

실제로는 상상한 대로 움직이지 않을 수도 있으나, 적어도 엔크리드가 가진 심상에서는 그렇게 움직였다.

'다시.'

수없이 궁리한다. 엔크리드는 그렇게 하루를 꼬박 보내고 잠이 들었다.

잠이 들 때는 머리를 대자마자 곯아떨어졌다.

고된 임무를 마친 뒤였다. 피로가 쌓인 참이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크라이스가 아침 배식을 받아 왔다. 멀건 수프와 소금기가 가득한 마른 육포, 푸석푸석한 빵이었다.

"네가 당번이냐?"

"네, 아주 푹 자던데요?"

"피곤했으니까"

크라이스는 그 큰 눈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말해 봐요."

크라이스, 왕눈이는 전장의 정보통이다.

엔크리드는 말하려다가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러곤 꼭 숨길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금세 알려질 일이었고, 딱히 기밀이라고 한 적도 없다.

그렇다고 너무 세세하게 말해 줄 순 없어서 키다리 풀밭에 적이 매복해 있다는 말만 남겼다.

자세히 설명하자니, 대답이 궁하기도 했고.

"이런 젠장. 매복까지 했으면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단 건데, 근데 거기에 매복하는 게 의미가 있나?"

왕눈이는 전략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모르면서 가끔 정곡을 찔렀다.

'의미 없지.'

기실 정찰대의 루트가 거기로 잡히지 않았다면 걸리지도 않고 넘어갔을 것이고.

자신에게 오늘을 반복하는 재주가 없었다면 정찰대가 전멸하는 정도로 넘어갔을 일이다.

매복이란 공격을 대비한 전술이다.

그런데 아군은 키다리 풀밭을 향해 진격하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의미는 없다.

왕눈이가 말한 게 그거였다.

"아직은 모르지."

모른다. 그게 정답이었다.

윗선에서 뭔가 꾸미는 게 있겠거니 했다.

다만, 뭔가 있다는 건 확실했다.

그 깃대, 그걸 지키던 놈까지.

부대 배치만 봐도 접근하는 적을 말살할 의지가 충만하게 느껴졌으니까.

보통이라면 그렇게까지 부대를 운용하진 않는다. 그러므로 결론, 적은 뭔가를 준비했다는 거다.

"씁, 이번에는 이대로 끝날 줄 알았더니."

"아마 오늘내일 중으로 명령이 내려올걸?"

시답잖은 얘기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누군가 외치는 게 들렸다.

"이동이다. 4중대 이동한다!"

4소대장의 목소리였다.

"다리를 다친 건 아니지?"

밖에서 외치던 그가 엔크리드의 천막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엄청나게 고생했다며?"

"어디서 들었습니까?"

"소문이 파다해. 무슨 행운의 여신이 숨겨 둔 자식이라고."

이번 일을 전부 운이라고 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럼 제 아빠는 누구고요?"

"알 게 뭐냐."

엔크리드의 농담에 소대장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피곤하겠지만, 부대 이동이다. 진지에서 동쪽으로 간다니까 움직이자고."

그 말에 엔크리드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동쪽이면 키다리 풀밭 쪽이다.

매복하는 걸 알고 있으니, 풀밭에 진입하진 않을 것이고.

"싸움이 있을 것 같은데, 공기가 달라졌수다."

렘이 어느새 옆에 착 달라붙어 말했다.

"그러냐?"

"실력 늘었다고 나대면 골로 가니까 조심하슈."

이건 걱정하는 걸까, 저주하는 걸까.

4중대뿐 아니라 보병대대 전체의 이동이었다.

그러니까 이번 전투에서 끌고 나온 보병 병력의 대부분이 움직였다.

소대 하나의 병력이 대략 마흔이니까.

얼추 보병 육백의 이동이다.

착착- 발걸음 소리와 함께 보병대가 이동하고.

당일은 전투가 없었다.

이동해서 다시 간이 진지를 꾸렸다.

불을 피우고 각자 자리를 잡았다.

지휘관이 머리에 화살촉이 꽂히지 않고서야 키다리 풀밭으로의 돌격 명령 따위를 내리진 않을 테니, 아마도 이쪽 부근에 부대를 이동함으로써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거로 보였다.

그리 하루를 보내고 나자, 옆구리 상처가 거의 신경 쓰이지 않았다.

다음날, 각자 분대에서 알아서 식사를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분대원 여섯이 모여 냄비 하나에 스튜를 끓였다.

"오는 길에 도마뱀을 잡았습니다."

작센이 스튜에 피를 뺀 도마뱀 고기를 넣었다.

"어쩐 일로 기특한 짓을 하는구나."

그걸 보고 렘이 심히 기뻐했다.

물론 작센은 대거리하지 않았다.

렘이 그걸 보고 또 자기 말을 씹는다고 으르렁거렸으나, 작센은 그 또한 무시했다.

'묘하게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한쪽은 떠들고 한쪽은 무시하는 게 어째 합이 맞는 것 같았다.

군대는 이동하고 먹고 쉬는 것만 해도 일이었다.

그리고 그리 이동하며 먹는 내내 엔크리드는 묘한 시선을 느꼈다.

빤히 자신을 보는 눈이 있었다.

라그나였다.

"얼굴 닳겠다."

대수롭지 않게 말하니, 라그나가 시선을 돌린다.

"아닙니다."

뭔가 말할 게 있어 보이는 건 확실해 보였다.

당장 전투가 일어날 것처럼 분위기가 살벌해졌지만, 다시 하루가 더 지나갔고.

엔크리드는 남는 시간에 심상으로 훈련한 것들을 몸으로 구현해 봤다.

어떤 건 생각한 것보다 쉽게 됐고, 어떤 건 어려웠다.

아침부터 그렇게 검을 쥐고 한쪽 구석에서 휘두르고 있자니, 라그나가 다가와서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합니까?"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엔크리드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주변에 말 못 하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어야지.

라그나도 말재주가 있는 쪽은 아니었다.

제멋대로 말하는 쪽이지.

그러니 듣는 쪽에서 잘 들어줘야 했다.

그런 면에서 엔크리드는 적임이었다. 라그나가 한 말을 대강은 알아들었으니까.

긁적.

엔크리드가 손가락으로 제 이마 위를 긁었다.

35. 그는 순수하게 기뻐했다.

사고뭉치 분대원은 전부 개성이 강하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주변에 관심이 별로 없다는 거다.

그중에서도 라그나는 특별히 더 주변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뿐더러 딱히 신경도 쓰지 않는 타입이었다.

'대충 배 채우고, 대충 싸우고, 대충 사는.'

그리 대충 살면서 잠도 많다.

그런 라그나인지라, 일전에 정찰대에 대신 지원하겠다고 나서는 걸 보며 엔크리드는 내심 놀랐었다.

그 라그나가 정찰을 대신 나가겠다며 나선다고?

우리 게을렀던 분대원이 달라졌나?

그건 아니었다.

라그나는 변덕쟁이에 기분파였다.

그때 당시에 분위기에 취해 나섰지만, 아마도 하루, 아니 반나절도 안 돼서 안 가겠다고 했을 터였다.

애초에 그런 걸 예상했기에 보내지도 않았겠지만.

괜히 사고뭉치 분대에서 귀찮은 임무 대부분을 엔크리드가 처리한 게 아니었다.

라그나는 어찌 보면 엔크리드 자신과 정반대의 성격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매사 의욕이 없는 편이었고, 엔크리드는 시간을 쪼개서 검을 휘두르는 타입이었으니까.

물론 라그나도 가끔은 검을 휘둘렀다.

복귀했을 때 봤던 것처럼 렘과 어울릴 때도 있었고, 전장에서 활약할 때도 있었다.

물론 그때마다 라그나는 '의도한 건 아닌데'라고 중얼거리긴 했지만.

엔크리드는 그런 라그나를 알기에 그가 자신한테 관심을 보이는 게 신기했다.

'어쩐 일로?'

정말 드문 일이었다.

때때로 뭘 묻기도 하고 요구도 하지만.

이처럼 며칠 내내 눈으로 주시하며 진득하게 질문을 정리하는 타입은 아니었으니까.

엔크리드는 제 이마를 긁던 손을 내렸다.

분대원 중 렘이 그나마 활발한 편이지만, 렘 새끼도 일정한 선 밖에서만 사람을 대한다.

가까이에서 보면 그게 보였다.

선 안으로 사람을 들이지 않는 타입이다.

어떻게 보면 라그나 같은 게으름뱅이보다 더 까다로운 타입이라 할 수 있다.

그래도 렘은 할 말은 한다.

라그나는 필요한 말도 잘 하지 않는 타입이고.

그런 라그나의 질문이었다. 그래서 신기했다.

잠시 라그나의 눈을 바라봤다.

둘 사이에 고요한 침묵이 오갔다.

엔크리드는 눈싸움이라도 하는 듯 빤히 보다가 곧 고개를 들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보였다.

근래 비가 자주 오더니만, 작은 구름조차 없는 새파란 하늘이 보였다.

절로 가슴이 탁 트였다.

하늘을 바라보니 얘가 왜 이러는지, 무슨 이유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자신이 추측한 의도가 맞는지 따위의 생각이 사라졌다.

엔크리드는 고민 따위 때려치웠다.

물었으니 답한다.

검을 대할 때도, 사람을 대할 때도 매사 최선을 다할 뿐이다.

'언제부터 이런 걸 고민했다고.'

매사 최선을 다해도 원하는 건 아주 멀리 있기에, 언제나 갈구하는 삶을 살았다.

라그나는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아마도 틈날 때마다 검을 휘두르는 걸 말하는 것일 터다.

아마도 매사 어떤 것도 허투루 대하지 않는 태도를 말하는 것일 터다.

아마도 비루한 실력으로 포기하지 않는 마음가짐을 묻는 것일 터였다.

그래서 엔크리드는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다.

"만약 내가 검을 잘 썼다면 어땠을까?"

임시로 구축한 진지 외곽.

그늘 하나 없는 곳, 햇볕이 둘을 감싼 가운데 라그나의 시선이 엔크리드의 얼굴에 머문다. 엔크리드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랬다면 어떻게 됐을까? 뭐가 될 수 있었을까?"

엔크리드의 목소리는 유려했다. 잘 만든 악기 같았다.

적어도 라그나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열에 들뜬 목소리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낙담한 목소리도 아니었다.

어린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 주듯, 그리 유유하고 담담했다.

"지금 난 살아남기 위해 검을 휘둘러. 그런데 그렇게 살고 싶지 않거든."

말과 함께 엔크리드가 검을 휘둘렀다. 위에서 밑으로 수직으로.

붕.

날붙이가 공기를 가르며 특유의 향을 퍼트렸다.

쇠 냄새가 섞인 전장의 향이 라그나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엔크리드는 라그나가 옆에 있든 없든 하던 일을 계속했다.

검을 수련하는 거다.

위에서 밑으로.

아래에서 위로.

사선으로 다시 옆으로.

이내 가상의 상대를 두고 바인드, 검과 검을 붙여 당기는 시늉을 하며 뒷날 치기를 했다.

라그라는 대답 없이 그런 분대장을 빤히 바라봤다.

나우릴리아 왕국의 최하급 병사.

라그나는 사고뭉치 분대장의 실력이 고작 최하급에 머무를 수준은 아니라는 걸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수준 높은 검사나 전사라고 할 수도 없었다.

지금 용병 업계에 뛰어들어도 잘해야 중간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다.

중급 용병이라면 그리 뛰어난 실력이라 할 수 없다.

라그나는 한때 용병계에 깊게 몸을 담았기에 용병의 수준을 잘 알았다.

검에 관한 것만큼은 프록만큼이나 타고난 통찰력도 있었다.

그는 분대장의 실력을 가늠했고, 그의 한계도 알 수 있었다.

'이미 늦었어.'

시작이 잘못됐다.

검을 쥐었을 때부터 기본기에 충실해야 했다. 재능의 부족함이 그에게서 기회를 앗아 갔다.

지금의 분대장은 어떤가.

그의 말대로였다.

살아남기 위한 발악, 그걸 위해 갈고닦은 기술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분대장이 지닌 것 중에 쓸 만한 건 두 개 정도다.

재수는 없어도 실력은 괜찮은 야만족 렘이 가르친 것.

그러곤 갑자기 실력이 늘더니 보인 찌르기.

그 두 개를 제외하고 보면 기본기가 부족해, 항상 편법에 기대는 기술뿐이다.

그 편법이 문제였다.

라그나는 자신의 통찰력을 유감없이 발휘했으나, 그걸 말해 주는 대신 신경 쓰이는 부분을 물었다.

"검을 잘 쓰게 되면 그럼 그때는 뭘 하실 겁니까?"

엔크리드는 검을 휘두르는 걸 멈췄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이 주르륵 흘러 턱 끝에 맺히더니 바닥에 똑 떨어졌다.

밟고 선 흙 위로 떨어진 땀이 스르르 흙 안으로 금세 스며들었다.

햇살, 검, 바람, 하늘.

모든 걸 가슴에 품은 채, 엔크리드는 실상 수없이 되뇌었던 꿈을 뱉었다.

"기사, 전장의 끝을 향해 달리는 기사가 되고 싶다."

"왜요?"

라그나가 되물었다. 그에게는 당연한 물음이었다.

라그나는 길이 보였다.

경험하지 않아도 목적지가 빤히 보이는 길이.

그럼 그 길이 즐겁겠는가.

정작 목적지에 도착해도 딱히 할 일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없는 다음에야, 그 길을 걸을 의지가 생길 리 없었다.

라그나가 그랬다.

그는 목적지와 길이 보였으나 걷고 싶지 않은, 걸을 수 없는 방랑자였다.

"되고 싶다는 데 이유가 있어야 하나?"

엔크리드가 되물었다.

이건 로망이다. 낭만이다. 그의 삶이고 지나온 나날이다.

동시에 매료되었던 어린 날의 꿈이기도 했다.

자신의 꿈에 대해 그동안 얼마나 되뇌었던가.

되고 싶다는 것에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저 되고 싶은 거로 끝낼 생각도 없다.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고 싶다. 가난하고 병든 이를 위해 검을 들고, 명예를 위해 검을 들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검을 들고 싶다."

기사란 무엇인가.

그저 잘 죽이고 잘 싸우는 살인 병기인가.

흔히 기사를 그렇게 부르기도 했다.

무언가를 죽이는 데 특화된 전투 병기.

하지만 엔크리드가 꿈꿨던 기사가 고작 그런 거였다면 지금까지 검을 휘두를 수도 없었을 것이다.

명예와 신의, 검으로 제 뜻을 피력하는 자.

이제는 대부분 찾지 않는 기사도를 품은 검.

엔크리드는 말하며 크랑을 떠올렸다.

그의 말에는 왜 힘이 있었나.

그의 말은 어떻게 모두를 끌어당겼나.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았다.

진심, 진정이 담겨 있기에 그렇다.

그게 기본이었다.

그래서 엔크리드도 마음을 다해 말했다.

그게 라그나한테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물론 겉으로는 그런 표를 조금도 내지 않았기에 엔크리드는 몰랐지만.

라그나는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대로 살고 싶은데 왜 검이 필요한가.

무력이 없다면 자신이 믿는 바를 실현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항상 그의 가슴 안에는 공허함이 감돌았다.

그게 그의 무력감의 원인이었다.

그런데 지금 엔크리드와 대화하는 사이, 그의 마음에 무력감 대신 다른 불꽃이 타올랐다.

가슴에서 피기 시작한 불꽃을 품고 라그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아예 평원 한쪽에 풀을 깔고 앉았다.

기사란 무엇이고, 검이란 무엇인지.

고민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결론을 내린다.

'길을 걷지 않고서는 알 수 없겠구나.'

그는 길을 걸어야 할 당위성을 찾았다.

엔크리드는 그를 놔두고 다시 검을 휘둘렀다.

침묵 사이로 검과 하늘과 바람만 오갔다.

조금 떨어졌기에 한쪽에서는 진지에 있는 병사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긴 했으나, 그 외에는 조용했다.

침묵은 길지 않았다.

"검 배우고 싶습니까?"

라그나가 멍한 시선으로 한쪽 땅에 박힌 뾰족한 돌을 보며 입을 열었다.

팍!

내지른 찌르기와 함께 땀이 허공에 흩날렸다.

엔크리드는 그 상태 그대로 멈췄다. 호흡을 고른 채, 검 끝에 그대로 시선을 둔 채 답했다.

"응."

평이했고 담담한 말투였다.

배움의 기회가 있다면 놓치지 않는다. 엔크리드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라그나는 자신이 말하고 자신이 말한 내용에 놀랐다.

'내가 왜?'

그러나 곧 이유를 깨달았다.

저리 발악하는 분대장에게 옳은 길을 보여 주고 싶은 마음이 반.

나머지 반은 자신을 위해서였다.

'분대장이 곁에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힘껏 움직이게 된다.

엔크리드가 사는 걸 보면 자극을 받는 거다.

라그나에게는 자극이 필요했다. 길고 지루한 길을 걷게 해 줄 자극이.

분대장의 존재가 그에게는 자극이었다.

그가 있다면 어설프게나마 훈련을 하게 된다.

그가 발전하는 걸 본 순간, 전에 없는 활력이 생긴다.

분대장과 대련도 했고, 정찰도 대신 나가려 했으며 렘을 통해 몸을 풀기도 했다.

드문 일이었다.

적어도 라그나 자신한테는 그랬다.

그럼 분대장을 가르친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이타심보다는 이기심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그리고 엔크리드는 이유 따위를 고민하지 않았다.

'얘 왜 이러지?'

자신이 나서서 뭘 해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선뜻 나서서 검을 알려 준단다.

야수의 심장을 배울 때도 렘을 귀찮게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작센에게 뭘 배울 때는 또 어떻고.

전부 자신이 먼저 들이대고 나섰기에 일어난 일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며칠 자신을 빤히 보더니 대뜸 다가와선 질문 몇 개를 던지더니 검을 가르쳐 주겠단다.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이유를 묻고 싶지 않았다.

라그나는 대련할 때도 딱 그때 필요한 움직임 외에 검술에 관해서는 입을 다물었었다.

엔크리드는 검에 관해서 만큼은 굶주린 승냥이와 같았다.

대련 때도 수없이 물었고 더 달려들었으나, 라그나는 답을 회피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대뜸 알려 준단다.

"그럼 일단."

라그나는 궁둥이를 털고 일어나더니, 입술을 우물거렸다.

말을 고르는 듯했다.

엔크리드는 검 끝을 밑으로 떨군 채로 차분히 기다렸다.

기다리는 사이, 그의 머릿속에는 렘이 한 말이 떠올랐다.

"내가 검을 가르치는 건 좀 그렇수다."

렘은 도끼뿐 아니라 검도 잘 썼다. 엔크리드는 몇 번이고 그가 검으로 적을 썩둑 자르고 푹 찌르는 걸 봤다.

"난 순전히 감으로 휘두르는 건데, 이런 건 가르친다고 되는 게 아니란 거요. 그러니까 분대장은 좀 더 체계적으로 배우는 게 좋수다."

정말 가르치기 싫어서 그러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자신의 기술이 아까워서 그러는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런 거였다면 야수의 심장도 안 알려 줬을 테니.

그때는 그러냐고 하고 넘어갔었다.

생각에 잠긴 엔크리드를 두고 라그나가 말했다.

"야만족 놈한테 배운 짐승의 내장인지, 양심인지 하는 거랑."

...야수의 심장이다. 이게 어떻게 짐승의 내장이 되는 걸까.

렘이 들었다면 당장 도끼를 휘두를 것 같았다.

"찌르기 하나."

라그나는 이어 말하더니 엔크리드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 외에는 처음부터 다시 쌓아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습니까?"

순간 이해할 수 없었던 엔크리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니까 기초부터 다시 다져야 한다는 건데, 할 수 있습니까?"

라그나는 검을 가르치고 배움에 다른 방법을 몰랐다.

엔크리드는 순간 수긍하기 어려웠다.

"왜?"

발렌 식 용병검.

남들이 뭐라 해도 훌륭한 기술이고 검이라 생각했다.

"그 용병검을 계속 쓰면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없을 테니까."

이후 라그나는 설명을 이어 갔다.

예시가 조악했고 설명도 명확하지 않았으나, 엔크리드는 금세 알아들었다.

핵심은 하나였다.

현 상태는 한계가 명확하다는 것.

지금처럼 단련해도 나아갈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속도는 더딜 것이고 한계를 넘을 순 없을 것이란다.

이유를 물으니, 너무 잡다한 걸 많이 익혀서 그렇다고 했다.

"요는 기본기가 부족하다는 겁니다."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은화나 금화 따위를 들고 어디 교습소를 찾아가도 항상 기본기의 중요성을 강조하기에 수긍하고 꽤 시간을 투자했었다.

곰곰이 생각하니 이런 얘기를 들을 법도 했다.

매번 돈을 주고 배우는 처지였다.

엔크리드에게 그 시간에 기본기나 다질 수 없었다.

그래서 이제까지 기본이라 생각되는 베고 찌르는 건 혼자 했다.

그게 문제였다.

짧은 깨달음이 찾아온다. 엔크리드는 순간적으로 희열이 찾아와 전신을 울렸다.

검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길이 보였기에.

항상 눈앞을 가로막은 벽과 어둠 너머에 조악하지만, 길이 열렸다.

이 순간의 희열은 삶의 그 어떤 감동과도 바꿀 수 없으리라.

그리 손을 떨고 있으니, 라그나가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선택하면 됩니다. 새로 쌓을 건지, 지금에 만족할 건지."

라그나는 엔크리드가 포기하리라 생각했다.

이제까지 쌓은 걸 버리고 새로 쌓는다는 건 바닥부터 새로이 올라간다는 거니까.

그럼 용병계에서도 대강 중상 수준의 실력이 다시 하급 수준으로 떨어지리라.

그걸 견딜 수 있을까?

그것도 전장 한복판에서 칼밥을 먹고 사는 사람이?

목숨이 여러 개라면 모를까.

하고 싶다고 해도 쉬이 되지도 않을 터였다.

정작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면 몸에 익은 기술이 나올 테니.

"목숨 몇 개쯤은 걸어야 할 겁니다."

라그나가 말했다. 투박했지만, 걱정이 담긴 말투였다.

엔크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뜻이 모호해 라그나가 눈으로 묻자, 엔크리드가 마저 입을 열었다.

"새로 쌓지 뭐."

"정말입니까?"

되레 라그나가 놀랄 대답이었다.

대답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어 보였기에.

분명 조금 전까지 손을 부들부들 떨었으면서도.

그게 분노이자, 좌절이자, 절망이라 생각했는데.

엔크리드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응."

그는 순수하게 기뻐했다.

36. 몰살의 안개

라그나는 당황스러웠지만, 곧 생각하는 걸 때려치웠다.

'원래도 이상한 사람이었으니까.'

그의 눈으로 보기에 엔크리드도 정상인은 아니었다.

"그럼 지금부터?"

엔크리드가 묻는다.

"그러죠."

라그나가 답하고.

둘은 청명한 하늘 아래에서 검을 쥐는 것부터 새로이 시작했다.

아니, 맞는 무기를 찾는 것부터 시작했다.

"힘이 좋은데 굳이 가벼운 무기를 쓸 이유는 없습니다. 그것보다 무거운 롱소드로 무장을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나랑 바꿉시다."

라그나가 자신의 허리춤에 찬 검을 건네며 말했다. 엔크리드는 파격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보통 자신의 손에 익은 무기를 이리 쉽게 넘기나?

"저도 아직 손에 익을 때까지 쓴 게 아니니까."

라그나가 이어 말했다.

받아 보니 그리 좋은 검은 아니었다.

자신이 쓰던 게 더 나아 보이기도 했으나, 수긍했다.

지금 가르쳐 주는 사람은 라그나다.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알겠다."

아밍소드에서 롱소드로.

손잡이가 더 길어 양손으로 잡고도 휘두를 수 있는 검이었다.

검날도 한 뼘은 더 길었고, 무게도 더 나갔다.

그렇다고 엉망인 검은 아니었다.

좋은 철로 만든 건 아니지만, 무게 중심을 비롯해 검의 마감은 괜찮아 보였으니.

"오른손을 앞에 왼손을 뒤에."

검을 바꾼 뒤, 쥐는 법부터 새로이.

엔크리드는 그 시간에 흠뻑 빠졌다.

그리고 그건 라그나도 마찬가지였다.

분대장의 존재만으로도 자극이었다. 직접 가르치니, 그도 의욕이 치솟아 그 시간에 심취했다.

둘은 점심이 지날 때까지 그리 시간을 보냈다.

끼니를 거르고 한참이 지나서야 알아챌 정도로 집중했다.

"끼니도 거르는 소꿉장난이라니, 뭐하슈?"

렘이 찾아오고 나서야 엔크리드는 시간의 흐름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배가 고프네."

라그나가 중얼거렸다.

"너 이 새끼 우리 분대장 괴롭혔냐?"

"꺼져라. 야만인."

"너나 꺼져라. 게으름뱅이 새끼야."

둘이 투덕거렸다. 엔크리드는 땀을 흠뻑 흘린 채로 검을 늘어뜨렸다.

꽤 지쳤다.

새로 시작하겠다고 마음먹었으나 그게 곧바로 되는 건 아니었다.

'부족해.'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본래라면 센스 있게 기술만 빼먹을 생각이었다.

오늘을 반복할 수 있으니, 그렇게 하면 실력이 늘 거라 예상했는데.

'정반대로군.'

기본기가 부족할 줄이야.

생각지도 못했다.

그리고 새삼 깨달은 것 또 하나.

검을 잘 다루는 이가 봐주며 기본기를 쌓는 건 홀로 하는 것과는 궤가 달랐다.

"발끝 방향은 무슨 의도로 그렇게 했습니까?"

"쥐는 힘이 빠졌습니다."

"찌르려고 한 겁니까? 베려고 한 겁니까?"

"지금 하고 싶은 게 뭡니까?"

"안 되겠군요. 제대로 걷는 것부터 배워야겠습니다."

잔소리가 소나기처럼 쏟아졌고.

그 하나하나가 자산이 된다.

렘과 투덕거리던 라그나가 대뜸 엔크리드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검 실력을 늘려서 으스대고 싶다거나 그런 건 없습니까?"

라그나는 어릴 때 자신이 검을 잡은 이유를 떠올리며 물었다.

드러내고 돋보이고 싶은 욕구가 없다면 거짓말일 터.

엔크리드에게도 당연히 공명심과 호승심, 욕망이 있었다.

그의 망상 중에는 레이디 앞을 지키며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네받는 것도 있었으니.

어찌 그러지 않을까.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다.

"그런 거 많아. 엄청나게 으스대고 싶다."

엔크리드가 답했다. 누군가의 환호를 받고 음유시인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 당연히 그런 욕구도 있었다.

라그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대답이 된 것 같았다.

"뭐라는 거야? 하여간 소집이유. 적군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모이라는 명령이 떨어졌수다."

다시 전투였다.

엔크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그나는 그런 엔크리드를 보며 자신이 괜한 짓을 했다고 생각했다.

'오늘을 넘길 수 있으려나?'

만약 엔크리드가 이대로 전장에 나가면 어떻게 될까?

익숙하지 않은 검, 어설프고 어색한 수준의 검.

그가 오늘 쌓은 검이다.

그러하기에 그가 죽으리라 예상했다.

'재능이 없다.'

기본기를 다시 쌓는 내내, 엔크리드의 실력이 보잘것없음을 깨달았다.

하루아침에 이뤄질 일이 아니다.

라그나는 잠깐 자신을 책망했다.

'내가 죽음으로 내몰았나?'

후회다. 자신의 입이 문제였다.

자기가 나서서 제대로 된 일이 뭐가 있었다고.

오늘 또 나섰나.

라그나는 후회가 섞인 한숨을 내쉬며 결심했다.

'근처에 있자.'

되도록 오늘 하루는 지켜 주고 싶었다.

"적군이다!"

전투의 시간은 금세 다가왔다.

임시로 구축한 진지를 정리하기도 전, 키다리 풀밭 너머와 전면에 적의 보병대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기묘할 정도로 빠른 행군이었다.

각 부대가 모여 적군을 보는데, 적군의 부대가 모인 방식이 특이했다.

점점이 덩어리가 떨어졌으며 각 부대가 긴 깃대를 들고 있었다.

빠라라라락!

그들이 든 깃대 위로 깃발이 나부꼈다.

갑자기 적지에서 이쪽으로 강한 바람이 불었다.

눈꺼풀을 때리는 바람 때문에 눈살을 찌푸린 채로 깃대와 적병을 본 순간, 엔크리드는 이 전장이 절대 쉽지 않으리라는 걸 느꼈다.

수년간 그를 살려 준 생존 본능이 주는 직감이었다.

그리고 그 직감이 맞다는 건 금세 알 수 있었다.

"뭐야?"

정렬한 보병대 선두, 소대장 하나가 중얼거렸다.

아는 얼굴이었다. 벤젠스 소대장.

의무 막사에서 헤어질 때 퍽 어색한 표정으로 보병대 식 인사를 나눴던 그 소대장이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던 소대장과 엔크리드 사이로 짙은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 * *

"당했습니다!"

부관이 말하기도 전에 요정 중대장은 상황을 파악했다.

요정의 예민한 감각은 전장의 흐름을 피부로 느끼게 했다.

'마법? 주술?'

전장에 짙은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자연적인 현상은 아니었다. 자연의 벗, 숲의 친구라는 요정의 감각이 이질감을 알렸다.

인위적인 안개가 짙게 깔리더니 곧 한 치 앞도 안 보이기 시작했다.

"중대장님!"

당황한 부관의 목소리에서 요정 중대장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누구도 대비하지 않았겠군.'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는다. 다들 당황했으리라.

4중대만의 문제도 아닐 것이다.

이게 인위적으로 만든 안개라면 이대로 끝나지도 않을 것이고.

그 불길함은 곧 현실이 됐다.

투두두두둥!

쿼렐과 화살이 날아왔다.

보이지 않는 화살이었다. 안개 너머에서 갑자기 우수수 쏟아진 사신의 부름이다.

퍼버벅 하고 주변에 있던 병사의 전신에 쿼렐이 꽂혔다.

부관도 머리통에 화살을 맞고 나가떨어졌다.

요정 중대장은 자신의 감각을 더없이 날카롭게 끌어올리며 뒤로 훌쩍 물러났다.

그녀가 있던 자리에도 화살이 꽂혔다.

물러나며 검을 뽑아 휘둘렀다.

티디딩!

두 발의 화살이 검에 걸려 튕겨 나갔다. 중대장은 곧 죽은 부관의 시체를 들어, 몸을 가렸다.

이러지 않으면 눈먼 화살에 죽을 터였다.

안개와 화살.

'준비된 전략.'

된통 당한 거였다.

* * *

"먹혔군!"

아즈펜 공국 지휘관의 눈에 희열이 떠올랐다.

곧 이 전장을 승리라는 이름으로 장식할 수 있을 테니.

이걸 위해 소모한 자원이 만만치 않다.

실패는 용납할 수 없었다.

안개가 짙어지자마자 지휘관이 외쳤다.

"쏴라!"

기쁨과 흥분이 섞인 명령이 떨어졌고, 준비된 화살과 쿼렐이 적군을 향해 떨어졌다.

아즈펜이 준비한 건 주술이었다.

상대의 눈을 가리는 '몰살의 안개'라는 이명의 주술!

지휘관의 외침에 주술사는 흡족한 미소를 보였다.

주술이 성공했다.

갓 태어난 양과 송아지, 망아지 백 마리의 피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호수의 물을 매개로 만든 주술이었다.

평범한 재료만 들어간 게 아니다.

주술을 위해 희생한 게 많다. 지휘관은 거기까지는 몰랐다.

어쨌든 주술사는 그동안 열과 성을 다했다.

지형과 기후, 그동안 비를 부르는 주술을 부린 것도 이 때문이었다.

땅이 젖어 있어야 발동되니까.

피로 적신 깃발과 깃대가 주술의 매개였다.

깃대에 보호를 받는 병력은 안개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 이게 주술사가 부린 수작의 전부다.

다만, 이걸 고작이라고 할 순 없었다.

상대는 보이지 않으나, 이쪽은 볼 수 있다.

그게 대규모 전장에서 얼마나 큰 효과를 발휘하는지는 어지간한 머저리가 아니고서야 잘 알 터였다.

주술사는 싸움의 향방이나, 성패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주술의 성공이 기꺼울 뿐이었다.

"성공해서 기쁜 거요?"

깃대를 지키는 소대의 지휘관이 물었다.

일전에 엔크리드를 궁지에 몰아넣었던 검 잘 쓰는 소대장이었다.

"잘못하면 실패할 뻔했으니까, 그러니 기쁘지."

주술사는 일전에 적군이 야습했던 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부정이 타서 지금껏 준비한 주술력이 다 사라질 뻔했다.

그때만 생각하면 아찔했다.

소대장은 주술사의 말을 들으며 야습을 감행했던 놈을 떠올렸다.

'그 새끼.'

그레이 독, 집요한 사랑꾼의 일원으로서 그 새끼만은 꼭 자기 손으로 죽이고 싶었는데.

지금 적진 어딘가에 그놈이 있을 거 아닌가.

아즈펜의 소대장은 횃불에 비친 그 얼굴을 잊지 않았다. 곱상하게 생긴 적군의 낯짝이다.

그는 놈을 다시 만나고 싶었다.

* * *

확 퍼진 안개가 다가오자, 물 냄새가 났다.

동시에 앞이 보이지 않았다.

아까까지 눈에 보였던 벤젠스 소대장이 사라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바로 옆에 붙어 있었던 라그나도 안 보인다.

"주술!"

누군가 외쳤다. 아니 누군가가 아니다. 렘의 목소리였다. 그는 짜증을 쏟아 냈다.

"어떤 빌어먹을 새끼가?"

주술? 무슨 주술?

엔크리드는 생각과 함께 몸을 숙였다.

어느새 머리 위로 화살과 쿼렐이 날아들었다.

"잘했습니다. 고개 들지 마십시오."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라그나였다.

티디딩! 투둥!

따위의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됐다.

엔크리드는 고개를 숙인 채 생각했다.

'주술이라니.'

주술사가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서부 개척지의 이민족 중에서도 아주 드물게만 존재한다는 주술사가 왜?

왜라는 질문은 사실상 지금 의미가 없었다.

엔크리드는 생각을 접었다.

갑자기 눈앞에 창날이 훅 찔러 들어왔다.

두근.

야수의 심장이 반응한다. 대담함이 고개를 들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몸이 굳어 그대로 죽었을 것이다.

엔크리드는 반사적으로 몸을 왼쪽으로 틀고 아래에서 위로 검을 휘둘렀다.

딱!

기름 먹인 창대를 어설픈 칼질로 잘라낼 수 없었다.

창대가 튕겨 나갔다.

안개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창날이었다.

엔크리드는 창날이 날아온 위치를 가늠해서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그러자 다른 창날이 또 날아왔다.

딱!

이번에도 간신히 막았다.

막으며 생각했다. 자세가 흐트러졌으며, 무게 중심 이동도 엉망이라고.

잘한 거라고는 검을 꽉 쥔 것뿐이었다.

라그나가 몇 번이고 잔소리하며 가르쳐 준 걸 다 날려 먹었다.

'이거 참.'

당연하게도 한 번 배운 거로 숙달되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뒤로."

라그나가 말한다. 엔크리드는 그 말의 반대로 움직였다.

작센 덕분에 청각이 예민해졌다.

보이진 않지만, 소리는 들렸다.

"으악!"

"끄악!"

"죽엇!"

"빌어먹을!"

사방에서 들리는 비명과 욕설 사이로 엔크리드는 몸을 날렸다.

"...분대장!"

엔크리드의 뒤로 놀란 라그나의 외침이 들렸다.

그리고.

푹!

창날이 목을 뚫었다.

'정확하군.'

어설프게 몸에 구멍을 내느니 이쪽이 낫다.

끔찍한 통증이 목부터 전신으로 퍼졌다.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다.

"미친 새끼."

엔크리드를 찌른 병사가 중얼거렸다. 갑자기 목을 내밀고 덤비는 바람에 당황한 탓이다.

"뒈져."

병사는 엔크리드를 발로 밀었다. 창날이 쑥 빠지며 두 번째 극통이 찾아왔다.

엔크리드는 죽음이 다가오는 걸 느꼈다.

이대로 숨 몇 번 내쉴 시간이면 그대로 암흑이 자신을 감싸리란 걸 알았다.

그는 죽음이 다가오는 것에 만족했다.

끔찍한 통증과 수없이 반복해도 적응되지 않는 죽음의 공포가 대수일까.

'이걸로.'

라그나에게 기본기를 배울 수 있는 '오늘'이 시작됐으니.

그게 어찌나 즐겁던지.

"끄끅."

엔크리드는 피를 줄줄 흘리며 웃었다. 그걸 본 적병은 혀를 내둘렀다. 미쳐도 제대로 미친놈을 본 거다.

암전, 암흑이 찾아온다. 눈을 뜨니 다시 시작된 오늘이다.

* * *

"왜 그렇게까지 합니까?"

라그나가 묻는다. 이번에는 이마를 긁는 대신 곧바로 답했다.

"검을 잘 쓰고 싶으니까."

본래와는 다른 답이지만, 그래도 목적지는 같았다.

"검 배우고 싶습니까?"

물론이다.

라그나가 다시 제안했고 엔크리드는 받아들였다.

기본기 수행 이틀 차, 두 번째 오늘이 시작됐다.

그리고 전장에 섰고.

안개가 펼쳐졌다.

"어? 지랄?"

렘이 또 짜증을 낸다. 엔크리드는 이번에 창대를 세 번 쳐 내고 다시 창날에 목을 맡겼다.

재수 없어서 비켜 맞았다. 목 가죽이 뜯어지며 바닥에 피를 후두둑 뿌렸다.

'젠장.'

이대로 과다출혈로 죽는 건 너무 괴로운데.

그리 생각하기도 전에 적병 중 하나가 창날을 다시 찔렀다. 고마웠다.

퍽.

다시 또 죽는다.

그리고 세 번째 오늘이 시작됐다.

37. 주술의 매개는 무엇인가?

"그 스텝은 어디서 배운 겁니까?"

다섯 번째 오늘에서 라그나가 대뜸 물었다.

물론 네가 가르쳐 줬지.

엔크리드는 솔직할 수 없었다.

"내가 다닌 교습소만 스무 군데가 넘어."

그중 사기꾼에 가까운 놈들도 있었지만, 제대로 가르친 곳도 많다.

"음."

라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그나에게 배운 스텝을 토대로 움직이니, 어느새 라그나의 표정에 생동감이 넘친다. 그는 지금을 즐기고 있었다.

냉정하게 보자면 라그나는 훌륭한 선생은 아니었다.

그럴 수가 없었다.

천재는 자신의 발밑을 보지 못한다.

그러하기에 자신이 지나온 길을 가르치는 게 어렵다.

그냥 하면 되는 걸 어떻게 설명하란 말인가.

검을 내리치라고 하면 내리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 사이에 필요한 스텝과 무게 중심의 이동 따위는 설명하지 않는다. 아니, 설명할 수 없다.

검술 교습소를 차리기에는 최악의 타입이다.

엔크리드는 그걸 첫 번째 오늘에서 깨달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가르치는 사람이 엉망이라면 배우는 사람이 잘하면 된다.

그런 면에서 엔크리드는 대륙 최고라고 해도 무방했다.

"발은 어디로? 발끝은 어느 방향으로 하지?"

"그거까지 말해 줘야 합니까?"

비난하는 어조가 아니다. 진정 궁금해서 묻는 거다.

"응."

라그나는 발끝 방향을 말해 주며 자세를 교정해 주고 자신의 자세를 보여 줬다.

그 자세는 기본기의 표본과도 같았다.

안목이 있는 이들이 본다면 누구나 침을 흘릴 만한 재능일 것이고.

엔크리드는 라그나의 자세를 반복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됐다.

"무게 중심은?"

"네, 그 타이밍으로 하면 됩니다."

엔크리드는 물었고, 라그나는 답했다.

열두 번의 오늘을 반복하는 내내 라그나는 엔크리드에게 스텝과 자세만 가르쳤다.

"자세와 발이 먼저, 기본기는 다음입니다."

"가끔은 괜찮게 휘두르기도 하는군요."

"지금은 장작도 못 팰 수준이었습니다."

"조금 전 내려치기에 적병이 죽는다면 그 병사에게 죽어 줘서 고맙다고 세 번 말하십시오."

"지금은, 그러니까 춤을 춘 겁니까?"

"춤이 맞군요. 검을 들고 췄으니 검무라고 해야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군요. 작대기 춤이라고 이름 지읍시다."

라그나는 조곤조곤 독설을 날렸다.

'이 새끼 이런 타입이었나?'

렘이 몇 배는 더 부드러운 선생이었다.

가끔 말하는 걸 보면 돌았나 싶은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웠다.

하루하루, 알을 깨고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었으니.

사선 베기를 시작할 때쯤, 라그나는 말했다.

"대치하고 있는 상대와 나 자신을 잇는 선을 공격선이라고 합니다. 이 선은 보통 두 사람 사이의 최단 거리이자 공격 시 무기가 지나가게 되는 길이기도 합니다."

"상대의 공격선을 막고 내 공격선을 뻗어 내는 것, 이 또한 기본입니다. 이해했다고요? 아닌 것 같은데. 아, 이게 그겁니까? 머리로는 이해했는데 몸은 말을 듣지 않는 것?"

"다시 말하죠. 분대장은 입으로만 이해했습니다."

라그나는 독설을 뱉지 않으면 가르칠 수 없는 인간이었다.

배우고 또 배운다.

스무 번의 오늘이 지나고.

스물다섯 번의 오늘이 지나갔다.

"...기본기가 형편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발은 쓸 줄 아는군요."

서른다섯 번째 오늘에서 들은 얘기였다.

이때쯤이 돼서는 엔크리드의 행동 양식이 조금 바뀌었다.

안개가 낀 뒤 곧바로 죽지 않았다.

첫 번째 창질은 피한 뒤에 그 안으로 돌진하고 죽었다.

몸에 창이 고슴도치처럼 꽂히곤 했다.

퍽 괜찮은 방법이었다.

창 한 자루는 가끔 빗나가곤 했으니까.

죽여 달라고 달려드는데 왜 창을 도로 빼냔 말이다.

이해는 한다. 갑자기 죽여 달라고 덤비는 걸 보면 황당할 테니까.

그리 창질이 빗나가면 1시간 동안 꿈틀거리다 죽어야 했다.

그건 정말 견디기 힘든 통증의 연속이었고 끔찍한 순간의 이어짐이기도 했다.

라그나는 그때마다 엔크리드를 부르거나 외쳤다.

"분대장!"

"미친!"

"야!"

나중에는 어찌나 급하던지 그냥 야라고 외치기도 했다.

엔크리드는 오늘을 충실히 채웠다.

"자세가 생각보다 좋군요."

조금씩 나아진다. 그렇게 변할 때마다 라그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제까지는 분명...."

이렇게 중얼거리기도 했다.

"...어디서 뭘 배운 겁니까?"

백 번의 오늘이 지나갈 때쯤에 라그나가 말했다.

"당신 누구야?"

뭔 뜬금없는 소리인가 쳐다보니.

"분명 어제까지는 개판이었는데 어떻게 하루 만에, 마법인가?"

라그나가 놀랐다. 엔크리드는 그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왜? 예상보다 내 실력이 좀 나은 것 같아?"

"조금이 아닙니다. 진짜 분대장이 맞나 싶을 정도니까."

라그나는 진짜 의심의 눈초리를 보였다.

이곳은 사고뭉치 분대, 라그나도 괴짜였다.

"그래서 안 가르쳐 줄 거냐?"

"그건 아닙니다."

라그나는 긴가민가한 태도로 다시 시작했다.

이후는 가상의 대련 상대를 두고 검을 휘둘렀다.

공격선의 개념, 검을 쥐는 법, 검을 방어 수단으로 쓸 때의 방법.

"질이 좋은 검이라면 옆면으로 막아도 되고 그게 아니라면 칼날로 막습니다."

"베기, 찌르기, 자르기, 이 세 개가 기초입니다. 스텝이랑 자세는 나쁘지 않으니, 세 가지 기본 검술을 중점적으로 연마하십시오."

라그나가 알려 준 스텝은 종류가 많았다.

전진하는 것, 지나치는 것, 파고드는 것, 피하는 것, 옆으로 도는 것, 돌아서는 것, 크게 돌아서는 것.

외우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해지지만, 이 또한 하다 보니 어느 정도는 몸에 붙었다.

아무리 둔재라고 해도 이 정도 수준의 실력자가 1:1로 붙어서 계속 가르치니, 실력이 늘었다.

천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미약함이라도 엔크리드에게는 희열의 연속이었다.

"머릿속으로 상대를 그리십시오. 그 뒤에 검을 휘두릅니다."

챙!

수십 번의 오늘을 통해 계속 배웠다.

사선 베기, 검을 붙이는 바인드, 감아치기, 꺾어 베기, 상단 수평 베기, 곁눈 치기, 정수리 베기, 되치기, 하프 소드 파이팅, 받아넘기기, 흘리기, 연속 치기, 파고들기, 대고 긋기.

시간이 지날수록 독설이 줄었다.

"생각보다 괜찮군요. 검 붙이는 기술 어디서 배웠습니까?"

"이전 교관 중 하나가 바인드 하나는 죽도록 가르치더군."

"훌륭합니다."

라그나는 그게 만족스럽다고 했다.

다른 기술을 배울 때도 이 방식을 차용했다.

"이전 교습소에서 상단 수평 베기가 계속 엉망이라고 했는데, 검술을 가르쳐 주겠다면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는데."

"...가르치는 건 전데 이미 배울 걸 정해 두고 오신 것 같군요."

"꼭 그런 건 아니고."

어깨를 으쓱하면 라그나가 짧은 테스트를 했다.

그러곤 곧 엔크리드의 말대로 했다.

"그렇게 하죠."

라그나는 절대 모르겠지만, 오늘을 수차례 반복하며 자신이 가르친 뒤, 이 정도면 됐다고 넘어가곤 했다.

그럴 때마다 엔크리드는 다음 진도를 나갔다.

내리쬐는 햇볕을 지붕 삼아 땀을 흠뻑 흘리는 오늘의 반복.

누군가에게는 지겨워 구역질이 나올 수 있는 일이, 엔크리드에게는 아니었다.

그렇게 이백 번의 오늘이 지나갈 때쯤.

"음?"

눈을 뜨니 검은 강이 보였다.

무슨 일일까?

뱃사공이 보인다. 눈을 가린 뱃사공.

그의 입이 열리는 건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선명하게 귀에 꽂혔다.

"미친놈이냐? 제 발로 계속 죽어? 이 아둔한 놈이."

사공의 말투는 평이했지만, 내용은 아니었다. 뭐라 답을 하기도 전에 꿈에서 깼다.

다시, 익숙한 오늘이었다.

엔크리드는 눈만 뜨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대로 생각에 잠겼다.

"몽정이라도 했수? 뭐 하슈?"

옆에서 렘이 강아지가 뱉을 만한 소리를 했다.

무시한 채, 엔크리드는 몸을 일으켰다.

'그냥 미친놈이란 소리가 하고 싶었던 거라고 해 두자.'

왜 그러냐고 물어보고 싶어도 그리 물을 수도 없지 않나.

고민해 봤자 답이 나오지 않을 문제는 붙잡아도 의미가 없다.

엔크리드는 몸을 일으켰다.

"주술 좀 알아?"

그 말에 렘이 고개를 휙 돌렸다.

"주술?"

"알면 아는 대로 좀 알려 줘."

매번 안개가 낄 때마다 렘은 주술에 관련된 말을 뱉었다.

분명히 아는 게 있을 터였다.

그동안은 검술의 기초를 단련하느라 정신없이 보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다.

훈련이 몸에 붙었다는 거다.

라그나가 보면 매번 놀랄 정도로 실력도 늘었고.

아직 실력을 시험해 본 적은 없지만, 확실한 건 엔크리드 자신도 전보다 나아졌다고 느낀다는 거다.

"주술이 주술이지 뭐겠수."

"아는 대로 읊어 봐, 재밌을 것 같은데."

평소의 엔크리드는 이리 먼저 말을 거는 경우가 없다. 렘은 실실 웃으며 입을 열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궁금한 거유? 좋수다. 음, 간단히 말해 주겠수다. 마법과 주술의 다른 점이 뭔지 아슈?"

"마법이 더 흔하지."

드물지만 마법사는 간간이 보인다.

하지만 주술이라니, 대륙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닌 엔크리드도 본 적이 없다. 그만큼 드물다.

"틀린 말은 아닌데."

렘이 말하며 잠자리를 정리했다. 모포를 대강 툭툭 말아서 한쪽에 밀어두고 부츠를 신고 밖으로 나섰다.

그 뒤를 엔크리드가 따라 나왔다.

똑같은 오늘이다.

지겹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떤 오늘이든, 엔크리드에게는 즐거운 오늘이 될 뿐이다.

뒤를 따라 나오니 렘이 마저 말했다.

"주술은 매개가 필요하우. 마법도 매개체가 필요할 때가 있다는 거 아는데, 주술은 제물이나 매개가 어어어어엄청 중요하우. 그게 없으면 시작이 안 되거든."

"네 부족도 그런 거 썼냐?"

렘은 서부 개척지대 출신이다.

그쪽이 개척지대가 된 건 중앙 대륙 제국이 전쟁에 승리해서다.

그전 서부는 이민족의 땅이었다.

이것도 이미 백 년이 넘은 이야기였다.

지금은 서부 개척지대로 굳어졌고, 서부 이민족은 하나의 인종으로 편입됐다.

지금도 얕잡아 부를 때는 야만인이라 부르긴 하지만, 어쨌든 주술은 서부에서 비롯됐다.

그건 상식이었다.

"몇 번 구경은 해 봤지. 근데 진짜 주술사는 사실 몇 안 되는 거 아시우? 대륙에 떠도는 놈들은 다 사술쟁이우, 사술쟁이."

렘이 그렇다면 그렇다는 거겠지.

엔크리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할 일을 하러 갔다.

"어디 가슈?"

"훈련."

라그나를 만나 다시 기본기를 갈고 닦는다.

반복되는 오늘이 이백오십 일이 지날 때쯤, 라그나가 말했다.

"원래 기본기가 이렇게 탄탄했습니까?"

금발을 쓸어넘긴 라그나의 붉은 동공이 커진 게 보였다.

"거기에 애초에 롱소드를 주력으로 삼은 거 같군요."

응, 그 말이 맞을걸.

계속 이 검으로 훈련했으니까.

어색하지만 손에 익은 검이다. 엔크리드의 손길을 타는 건 처음인데, 이미 이 과정이 수차례 반복됐으니.

반복된 오늘을 통해 얻은 익숙함이다.

"실전이 필요한 시점이군요."

훈련이 끝난 뒤 라그나가 말했다.

엔크리드는 그러냐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하슈? 모이라는데."

렘이 둘을 불렀다. 엔크리드는 돌아가는 길에 크라이스를 통해 빵을 구해 씹었다.

물에 적셔서 딱딱한 빵을 꾸역꾸역 씹어 넘기고 육포도 구해 먹었다.

장비를 점검했고 다시 전장에 섰다.

라그나와 바꾼 롱소드가 허리에서 흔들거리자, 렘이 물었다.

"쓰던 검 비싸게 줬다고 하지 않았수?"

"이쪽이 더 손에 익어서."

"하루아침에 무기 바꾸고 골로 간 놈 많이 봤수다."

이건 악담일까, 걱정일까.

"네 걱정이나 해라."

후 하고 숨을 내뱉고 마음을 다잡았다.

야수의 심장이 대담함을 준다고 해서 거기에만 의지할 순 없다.

기왕 하는 실전이라면 '내일'을 위한 일이 되는 게 좋을 것이다.

엔크리드는 적군이 시야에 들어오기 전 생각했다.

'주술은 매개가 필요하고.'

그 매개는 너무도 중요하다.

렘의 말에 따르면 그렇다.

키다리 풀밭에 적이 머문 이유가 매복이 아니라 은폐였다면?

저들이 숨기고 싶은 게 있었다면?

그걸 엔크리드는 미리 봤다.

깃대와 깃발.

막사 하나에 불을 지르니, 침입자를 죽이는 게 아니라 그 막사의 불을 끄기 바쁘지 않았던가.

곧 적군이 시야에 들어왔다.

바로 옆 3분대 소속 병사가 창을 든 채로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대형이 왜 저래?"

깃대를 토대로 뭉친 대형이니, 전술적 가치는 없다.

그렇다면 오롯이 주술적 가치만 있겠지.

적군의 위로 불쑥 솟은 깃대와 깃발이 여섯 개.

주술의 매개다.

"엇!"

안개가 퍼지며 눈 앞을 가린다.

자, 그럼 주술의 안개 속을 유영해 볼까나.

엔크리드의 귀가 씰룩였다.

작센에게서 얻은 예민한 청각이 눈을 대신할 차례였다.

38. 깃발은 나부끼고 병사는 칼춤을 춘다 (1)

"검 꼭 배워야 합니까?"

라그나는 말했었다. 독설이었다.

그만큼 몸이 안 따라 준다는 말이었는데, 맞는 말이었다.

엔크리드는 재능을 타고나지 못했다. 둔함 몸에 우직한 노력만을 보태며 살았다.

다만, 그래도 그동안 수없이 많은 교관을 만나고 검술을 익히고 홀로 궁리하는 시간이 있었기에.

그의 사고는 유연했고 더불어 응용력이 뛰어났다.

처음 익히는 게 어렵지, 익히고 난 뒤 실전에 돌입하면 달랐다. 사실상 하나의 재능은 타고난 법이다.

유연함과 응용력, 그게 엔크리드가 가진 재능이다.

'상황에 맞게, 필요에 맞게, 뭐든지 그렇게 쓰면 돼.'

나우릴리아 왕국 기준으로 치면 잘해야 중급 이상.

용병 업계로 쳐도 중급.

어디를 가도 중간쯤 되는 실력, 그게 지금 엔크리드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실력과 별개로 실전에서의 전투력은 탁월했다.

본래 미천한 재능으로 살아온 삶이었기에.

엔크리드는 자신이 가진 걸 십분 활용할 줄 알았다.

병사의 창날이 날아온다.

예민해진 귀가 붕 하는 파공성을 들었다.

눈에 보이는 것만큼 정확하진 않지만, 방향은 잡아챘다. 상대의 동작도 머릿속에 그렸다.

'옆으로 도는 발.'

엔크리드는 스텝을 밟았다. 야수의 심장이 대담함을 가져다줬다. 왼발 뒤꿈치에 힘을 주고 오른발은 뒤로 빼며 몸을 돌린다.

그 한 수에 팽하고 창날이 눈앞을 스쳐 갔다.

안개에서 갑자기 창날만 날아오는 판인데도 엔크리드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미 수십 번은 자신을 찔러 죽인 창이었다.

첫 번째 창질만 이백 번 넘게 피했다.

엔크리드는 검을 뽑는 대신 창대 중간을 잡고 당겼다.

훅- 하고 끌려온 적병이 놀라 입을 연다.

"어?"

적병이 머리가 안개를 뚫고 나오고 엔크리드는 그 머리를 잡아 비틀었다.

우드득.

병사의 목이 부러졌다. 목이 부러진 사람은 살 수 없다.

목이 부러진 적병이 바닥으로 허물어지고 엔크리드는 죽은 적병의 창을 들었다.

머릿속으로 안개가 퍼지기 전 적의 진형을 떠올렸다.

전부 뭉쳐 있었다.

'아무 데나 던져도 누구 하나는 맞는 거지.'

왼발로 땅을 찍으며 힘껏 내던졌다.

창이 허공을 격하고 날아가선 퍽 하고 어딘가에 박혔다.

"꺽!"

단말마가 들렸다.

"뭐야?"

"미친!"

적병의 당황하는 소리도.

창을 던지고 귀를 기울이던 엔크리드가 몸을 바짝 숙여 앞으로 달렸다.

안개를 뚫고 보는 눈이 있다고 해도 발밑으로 짓쳐들어오는 사람을 보긴 어려울 것이다.

투두두둥!

쿼렐과 화살이 머리 위를 날았다.

"으악!"

"끅"

"시발, 화살이다!"

뒤편에서 아군의 비명과 욕설이 터졌다. 솜털이 쭈뼛 설 법도 하지만, 괜찮다. 이미 수차례 해 본 일이었다.

오히려 긴장감이 너무 없어서 문제였다. 엔크리드는 거리를 좁히며 롱소드를 뽑았다.

청각으로 거리감을 가늠했는데 정확했다.

스릉!

검을 뽑아 양손에 쥐고 그대로 상단 수평 베기를 변형해 검을 휘둘렀다.

본래 상단 수평 베기는 가드로 상대의 검을 막고 뒷날로 베는 기술이다.

엔크리드는 멋대로 그걸 바꿨다.

자세는 비슷했다.

바닥과 수평이 되게 정수리 위로 검을 들고 그립을 바꾼다.

엄지를 세운 섬 그립이다.

그 자세 그대로 검으로 원을 그렸다.

바짝 낮춘 자세 때문에 상단 수평 베기가 하단 수평 베기가 됐다.

말도 안 되는 자세였기에 검에 힘이 제대로 실리진 않았다.

하지만 의외의 일격이었다.

적군이 반응하지 못했다.

부우웅!

퍽! 퍼벅!

휘두른 칼날에서 저항감이 느껴졌다.

"악!"

"뭐야!"

"바닥이다!"

어이쿠, 빨리도 보시네, 안개를 뚫고 나아가 위로 솟으니 적병이 보였다.

그래 봐야 시야각은 고작 검이 닿는 범위까지 정도였지만, 그나마 이게 어딘가.

적이 보이고 적이 든 무기가 보이고 자신이 쥔 검이 보이니.

아까와는 상황이 달랐다.

정강이가 크게 베인 놈이 셋이었다. 세 놈이 피를 줄줄 흘리며 절뚝거렸다. 전부 쇠뇌로 무장한 상태였다.

그중 하나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쇠뇌를 겨눴다.

엔크리드는 지나치는 스텝을 밟았다.

왼발을 대각선 앞으로 뻗어 나아가며 오른발이 뒤따랐다.

순식간에 그의 위치가 변했다.

퓽 하고 날아간 쿼렐은 그가 있던 자리를 꿰뚫었다.

엔크리드는 쿼렐을 피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피한 것과 동시에 정수리 베기를 시도했다.

위에서 밑으로 묵직한 롱소드가 떨어졌다.

쇠뇌를 들고 있던 적병이 반사적으로 숏소드를 뽑더니, 롱소드와 십자 모양을 만들며 막으려 했다.

엔크리드는 그걸 힘으로 찍어 눌렀다.

쩡! 꾸드득!

힘을 이기지 못하고 숏소드의 반대편 날이 가죽 투구를 누르고 적병의 머리에 파고들었다.

베는 게 아니라 때려 부수는 것 같았다.

뿌그륵.

피거품과 함께 머리통이 깨진 놈이 뒤로 넘어갔다. 안으로 움푹 파인 가죽 투구 사이로 피가 줄줄 흘러 적병의 얼굴 앞에 빨간 커튼을 쳤다.

"끄, 끄."

머리통이 깨진 적병은 말을 잇지 못하고 엉덩방아를 찧더니, 눈이 흐려졌다.

엔크리드는 그대로 검을 회수, 뒤로 한 걸음 빼며 몸을 돌렸다. 순식간에 한 걸음 옆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그가 있던 자리로 보병용 단창이 휙 하고 날아왔다.

창날이 왼쪽 옆구리를 스쳤다. 천 갑옷이 조금 뜯어졌다. 그리고 그게 전부였다.

피한 다음에 검을 내지른다.

빨리 휘두르는 게 아니라 천천히.

창을 휘두른 놈이 반사적으로 단창을 당겨 창대로 칼날을 막았다.

퉁.

검과 창대가 만났다.

그 상태 그대로 검이 창대를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전진하는 걸음과 더불어 바인드 후, 따라 베기.

드드드드드드!

창대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퍽!

검의 종착점은 적병의 가슴이었다. 순식간에 창대를 타고 내려간 칼날이 적병의 가슴을 헤집었다.

살이 파이고 뼈가 깨진다. 검을 뽑자, 팍 하고 피가 쏟아졌다.

핏줄기가 엔크리드의 가슴팍을 적셨다.

무릎을 살짝 굽힌 자세 그대로 검을 회수하며 일어났다.

툭 하고 무릎을 펴며 몸을 바로 세웠다.

지금까지 배운 건 기본기였다. 안 좋은 버릇을 버리고 새로이 쌓는 시간, 냉정하게 보자면 이제 겨우 이전 수준에 다다른 거였다.

다만, 발렌 식 용병검을 중심으로 한 검과 검술의 기본기를 단련한 지금은 가진 게 달라도 너무 달랐다.

숫제 사자의 등에 날개를 단 격이었다.

엔크리드의 유연한 사고는 실력 이상의 성과를 내보이게 했다.

남은 병사 사이로 피에 젖은 검이 움직인다. 엔크리드는 말없이 칼춤을 췄다.

* * *

깃발 부대가 여섯.

아즈펜 공국의 지휘관은 생각했다.

'혹시 주술이라는 걸 알아채도, 저 여섯 개 중 뭘 쓰러뜨려야 하는지는 알아채지도 못할 테니.'

승리다. 이제는 어떤 승리를 가져갈 것인가 대해 고민할 차례였다.

"퇴로 끊어."

독립 유군으로 놔둔 그레이 독 부대가 움직였다.

나우릴리아 왕국군의 뒤쪽이다.

이제 안개에 화들짝 놀란 놈들이 도망가려면 그레이 독 부대를 만날 것이다. 지휘관은 명령하고 자신의 작전에 오류가 없는지 되새겼다.

없었다.

프록 장군이 와서 이번 일이 실패하면 안 된다고 다시금 확인하고 갔다.

그게 아니었다면 장군급 인사가 이쪽 전장까지 올 일은 없을 것이다.

지휘관이 재차 명령했다.

"다 죽여라."

이번 전투로 아즈펜과 나우릴리아는 처지가 달라질 것이니.

그의 명령이 떨어지는 사이, 제1 깃발 부대에서 엔크리드는 칼춤을 추고 있었다.

* * *

"빌어먹을!"

나우릴리아의 대대장은 끔찍한 꿈을 꾼다고 생각했다.

'선수를 뺏겼다.'

적이 준비한 게 있다면 이쪽도 준비한 게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병력을 다 잃으면 준비고 뭐고 아무것도 못 할 것이다.

"퇴각해! 퇴각!"

여기저기서 퇴각하란 소리가 울렸다.

대대장은 침착하지 못했다.

"끄억!"

뒤로 물러나는 아군 뒤에서도 쿼렐이 날아들었다.

'빌어먹을 쇠뇌 부대들!'

대대장은 아찔함을 느꼈다.

용케도 저만한 숫자의 쇠뇌를 숨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에? 정찰대의 보고에서 이미 답이 나왔었다.

'키다리 풀밭!'

지금 한가하게 이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대대장의 뇌가 현실에서 도피했다.

"정신 차려! 뭉쳐라!"

그나마 실력 있는 중대장 둘이 부대를 수습하려 했으나, 적군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뒤를 물러온 부대는 그레이 독.

아즈펜 공군이 자랑하는 독립 중대였다.

대대장은 당했다는 걸 인지했다.

필사적으로 정신을 차리려 했다.

"몰살의 안개입니다! 아즈펜 공군에서 주술사를 부렸습니다!"

개 같은 새끼들.

"안개를 걷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부관 중 답을 하는 이가 드물었다.

"아는 놈 데려와!"

앞은 안 보이고, 앞뒤로 적군이 아군을 두들기고 있다.

이대로라면 전멸할 수도 있었다.

아니, 전멸할 것이다.

곧 부관이 답을 가져왔다.

"주술의 매개를 부숴야 합니다!"

매개? 깃대다.

"깃대를 향해 돌진해!"

대대장이 외쳤다.

"...깃대가 어느 방향인지 모릅니다."

부관이 절망적인 말을 토해냈다.

처음 보였던 적군은 톱니바퀴처럼 자리를 바꿨다. 뱅뱅 돌았다. 그래서 적군의 위치를 특정할 수 없었다.

대대장은 전멸이란 두 글자를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대대장이 끙끙 앓는 사이, 4중대를 책임지는 요정 중대장은 적이 이대로 순순히 물러나게 해 주지 않으리라는 걸 눈치챘다.

그녀의 예상이 맞았다. 그리고 그건 좋은 일이 아니었다.

'반전이 없으면 다 죽겠는데.'

그녀는 전장에 새로운 바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나, 결국 바람이 불어오지 않았다.

전투는 대패했다.

요정 중대장은 죽음의 위기를 넘기며 간신히 살아남았다.

도주하는 그녀의 뒤로 안개가 걷혔다. 전멸이었다. 살아남은 아군이 오십도 되지 않을 터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