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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 *

다섯 번째 아침을 맞이한 순간, 엔크리드는 오늘에 안주하지 않기 위해 목표를 세웠다.

'육감의 문을 열고, 이 굴을 통과한다.'

누군가 안다면 가히 미친 짓이라 하겠지만.

엔크리드에게는 이 또한 단련의 순간일 뿐이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

성장한다는 것.

내일을 위해 발악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 우리 가게 밑에 구멍이 있다는데, 왜 웃는 거요?"

신발 직공이 웃는 엔크리드를 보고 물었다.

"미지를 탐구하는 취미가 있습니다."

아무 말이나 뱉고 내려가려는데, 직공이 팔을 붙들었다.

"아래에 뭐가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으니까 조심해야...."

"네, 그러죠."

시험해 보고 싶은 게 많았다.

내려서고 통로를 마주한다. 곧바로 불길함이 전신을 찌르는 듯한 육감이 경고성을 울리진 않았다.

'문이 열리다 만 거라고 보고.'

이제부터 마저 열어 볼 심산이었다.

무식하게 함정에 몸을 던질 생각은 버렸다.

해 보니까 알겠다. 그런 방식으로는 안 된다. 다섯 번째 오늘이다.

여기서 끝낼 수 없다고 해도, 여전히 발악은 할 생각이니.

쉽게 반복할 수 있다고 지금을, 이 순간을 헛되이 보내진 않는다. 그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럼 해야 할 일은?

엔크리드는 종일, 정말 온종일 통로 앞을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오갔다.

첫 번째에서 두 번째 앞, 두 번째에서 여섯 번째까지.

다시금 여섯 번째에서 처음으로 돌아오길 반복했다.

횃대 다섯 개가 다 탈 때까지.

이렇게 하루를 보내면 이대로 오늘이 끝나지 않을까 할 시간까지.

"대체 뭐 하는 거요?"

처음에는 황당해하던 직공이.

"점심은 먹고 하지?"

끼니를 챙겨 줬다.

"근데 왜, 오리가 강물 오가듯 좌우로 오가기만 하시나요?"

나중에는 딸이 와서 의문을 표하고.

"거, 의뢰로 왔다면서 저 병사는 왜 저러는 건가?"

"나도 몰라. 종일 저러네."

옆 가게 약초상 주인까지 와서 구경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 짓.

엔크리드는 종일 한 점의 집중을 발동한 채로 이상한 부분을 찾기 위해 애썼다.

불길함을 감지하는 육감은 어떤 원리로 발동하는가.

작센의 설명대로라면 보고 듣고 맡고 느끼는 과정이 본능의 영역에서 발동하는 거라 했다.

인식하지 못한 위험을 육감이 먼저 잡아채는 거다.

그 시작, 이질감을 찾는 작업이었다.

그렇게 종일 보고 있었음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다 불현듯 든 생각이다.

'이대로 안 죽고, 하루가 지나 버리면 어떻게 되는 걸까?'

새삼 드는 의문이었다. 이후, 종일 통로 앞을 수없이 오갔으면서도 얻은 건 없었다.

'높이는 내 신장보다 반 배 정도 더 높고.'

밑으로 꽤 깊은 굴이라는 거다.

안으로 들어가 보진 못해서 굴이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는 모르겠다.

부스스하고 흙먼지가 떨어지긴 하지만, 꽤 견고한 벽과 천장.

기둥은 없지만, 금세 무너질 것 같진 않고.

또 다른 점은 뭐가 있나.

음습한 공기지만, 바람이 통한다는 것.

저 안쪽의 어둠은 횃불에 기대어 봐도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

'또 다른 건?'

냄새는 어떤가. 비릿한 향이 나긴 하지만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정말 언데드형 마물이라도 있을까?

성직자라면 주변에 감도는 공기만으로 알아챌지도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오롯이 검에만 미쳐 살던 엔크리드에게 그런 재주는 없었다.

찾고 또 찾는다.

이질감이 느껴질 때까지 끝없이 관찰하다 보니, 어느새 깊은 밤이었다.

"안 돌아갈 거요?"

통로 뒤쪽, 직공의 부름이다.

뒤로 돌아가자, 비스듬히 이어진 경사로 위쪽에 직공의 얼굴이 보였다.

엔크리드는 위로 올라서며 답했다.

"안쪽에 뭐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위험한 건 없어 보입니다. 입구를 막고 내일까지 기다리시죠. 지원군을 데려올 테니."

"서성거릴 시간에 지원군을 불렀으면 됐을 것 같은데?"

본래라면 그게 맞는 말이지.

근데 지원군을 불러 누구 하나가 통로 안에 들어서서 폭발을 일으키면 그거로 끝 아니겠나.

다 같이 죽는 길이다.

"살펴볼 게 있어서."

전문가인 척, 마치 이런 종류의 일에 능숙한 척하자, 직공이 미심쩍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금 구멍을 막고 부대로 돌아가는 길이다.

머리 위에 뜬 달이 보였다.

보름달이었다.

낮에는 조금 풀린 날씨가 밤이 되자 다시 쌀쌀해졌다.

마수 가죽으로 만든 코트를 여민 엔크리드가 뒤를 흘깃 봤다.

신발 직공이 막아 둔 바닥을 뚫고 아래로 내려가진 않은 듯했다.

호기심 많은 양반 같았는데.

'그랬으면 폭발이 일어났겠지.'

여기서 다시 드는 의문이다. 이대로 밤이 지나면 어떻게 되는가.

부가적인 일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반복되는 오늘, 언젠가는 끝내야 할 순간이 필요할 테니.

'진즉에 시험해 봐야 했다.'

하긴, 지금까지는 시험하기 좋은 환경이라 할 수 없었으니.

수틀리면 죽는 전장에서 반복되던 오늘이었고.

암살자의 단검을 피하던 오늘이었다.

그런 오늘을 겪고 이런 날을 맞이하니 싱겁게 느껴질 수도 있었으나, 엔크리드는 덤덤했다.

언제든 똑같이 단련했고 반복했다.

그게 '오늘'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마수 잡으러 간다며? 근데 대신 부츠를 죽이러 간 거요? 죽이긴 했고?"

숙소에 들어서자, 렘이 물었다.

이미 어떤 의뢰로 어디에 갔는지 다 아는 눈치였다.

흙먼지가 묻은 바지의 궁둥이를 털며 엔크리드가 답했다.

"세 개쯤 죽였지, 보람찬 하루였다."

"...말을 맙시다."

렘은 자신이 질 게 뻔한 말싸움을 시작하지 않았다.

작정하고 덤비면 혀를 놀리는 것만큼은 엔크리드가 월등한 재주를 보였으니.

자기 전까지 작센의 살기에 시달린 뒤, 엔크리드는 침대에 누웠다.

혹 오늘을 반복하기 위해 누군가 자신을 죽이진 않을까? 하는 걱정도 했으나,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에 아무 일도 없이 잤다.

* * *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흘러가는 상황을 본 엔크리드는 속으로 읊조렸다.

'반복이군.'

오늘의 반복이다. 자고 일어나는 거나, 뒈지는 거나, 매한가지였나 보다.

그리 다시 시작된 오늘이다.

엔크리드는 또 갈림길 앞을 서성였다.

죽음의 고통이 없는 오늘의 반복이지만, 그는 한결같았다.

여전히 최선을 다했고, 여전히 발악했다.

오늘에 묶이는 게 엔크리드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이걸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뱃사공이 말해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여길 넘어서는 거겠지.'

* * *

횃대가 꺼지자, 빛에 익숙해져 주변이 컴컴하게만 보였다.

화륵.

다시 부싯돌을 튕겨 횃불에 불을 붙이고 든다. 엔크리드는 여섯 개의 갈림길을 바라봤다.

'이런 경우 여섯 개 중 하나는 진짜겠지?'

쉬운 방법은 몸을 던져 확인하는 거다. 여섯 개 전부를 하나씩 일일이.

엔크리드는 그 방법을 쓰는 대신, 육감의 문을 갈고 닦고자 했다.

그리고 그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불길함.'

생존 본능이 자극하는 무언가.

여섯 번째 오늘에서 희미하게 그게 느껴졌기에.

엔크리드는 다시금 전과 비슷한 오늘을 보내고.

"대체 종일 뭐 하는 거요?"

황당해하는 신발 직공을 달래기 위해 이전의 오늘에 생각해 둔 핑계를 댔다.

"안쪽에 뭐가 있나 확인하는 겁니다. 보니까 트랩이 깔렸네요. 도둑 길드 쪽에서 몰래 비밀 통로라도 만든 것 같으니, 안으로 들어가진 마십시오."

도시에 도둑 길드가 길핀 길드만 있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엔크리드를 그들을 연상하며 말했으니.

그들의 이름을 판 셈이다.

그럴듯한 핑계였다. 통로 앞을 오가며 고심까진 아니어도 고민한 결과다.

직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다시 돌아간 숙소에서 엔크리드는 작센의 눈초리를 받았고.

그가 쏘아 내는 살기를 느껴야 했다.

매일 저녁 반복되는 일이다.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며 버틴 뒤에도, 엔크리드는 잠들 생각이 없었다.

자서 반복되었다면 밤을 새우면 어떻게 될 것인가.

궁금했다.

그리 버티고 버텨 다음 날의 동이 터오는 걸 보려 했다.

"냐아."

옆으로 에스터가 다가와 발로 등을 툭툭 쳤다.

안 자고 뭐 하냐고 시위하는 것 같았다.

"먼저 자라."

엔크리드는 에스터의 정수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리 동이 터오길 기다리는 사이다.

엔크리드는 잠깐 눈을 깜빡였고.

곧 검은 강을 보았다.

"무의미한."

뱃사공이 보이지 않았는데 그가 한 말은 남았다.

다시금 눈을 뜨니.

"뭐 하슈?"

밤을 지새운 것처럼 머리는 무겁고 몸에 피로는 남았는데, 다시금 반복된 오늘이었다.

'아예 눈도 깜빡이지 않으면?'

그럼, 그대로 하루가 이어지는 걸까?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눈을 깜짝이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그건 기사가 된다고 해도 할 수 없는 일.

그러므로 오늘의 반복은 피할 수 없는 일인 거다.

'오늘만 살아가라 이거냐.'

그것도 좋다.

어쨌든 이미 내일로 나아가는 방법은 알고 있으니.

엔크리드는 다시금 구둣방으로 향했고.

전보다 피로한 채로 오늘을 견뎠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며칠 밤을 새우며 싸우고 도망가던 전적이 있음에야.

그렇게 오늘을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죽음의 고통이 없으니, 평온하다고 해야 할까?

평온함에 취해 이대로 오늘에 안주하게 되는 건가.

아니, 엔크리드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반복한 오늘의 오늘의 오늘의 오늘의 오늘의 오늘.

일흔여덟 번의 반복이다. 매일 똑같이 흘러가는 오늘을 살아간 이후다.

숙소에 돌아온 엔크리드는 작센이 쏘아 낸 살기를 피했다.

옆으로 두 걸음.

세밀하게 상대의 살기를 느끼면 할 수 있는 묘기다.

우연일지도 몰랐기에 작센은 다시금 살기를 쏘아 냈다. 국소 지역, 이곳을 넘으면 상대를 죽이겠다는 의지를 실어 바라보는 것, 살기를 뿌리는 원리다.

그리 뿌려 낸 살기를.

엔크리드가 몸을 틀어 흘려 냈다. 육감의 문을 열지 않으면 흉내도 못 낼 짓이었다.

그것도 어설프게 여는 게 아니라 활짝 열어젖혀야만 할 수 있는 짓임에야.

"...뭡니까?"

'생존 본능의 효율이 끝내주더라고.'

속으로 한 대답과.

"갑자기 되네."

겉으로 뱉은 말이 달랐다.

물론 속으로 한 말이 진실이었다.

죽음에 이르는 트랩.

그보다 좋은 훈련 도구는 없었다.

그 도구를 엔크리드는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겼고.

그게 육감의 문을 열어젖혀 줬다.

그리하여 지금 작센의 눈을 저리 크게 뜨게 만들 수 있었고.

"갑자기?"

이럴 수가 있나? 없다. 하지만 실제로 눈앞에서 일어난 일이다. 작센은 심히 당황했으나,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

어쩌겠나, 됐다는데.

진전이 전혀 없어 보여서 어떻게 자극을 줄까 고민하던 참이었다.

별의별 방법을 다 떠올렸는데.

전부 무용해졌다.

"덕분이다."

엔크리드가 말했고, 작센은 괜히 기분이 좋았다.

물론 그러곤 곧 평소와 같이 속으로 읊조렸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속으로 그리 생각하면서도 작센은 다시금 흐뭇했다.

과정이 어떻든, 엔크리드가 자신이 바라는 대로 문을 열어젖혔으니.

작센의 입꼬리가 잠깐 올라갔다가 도로 내려왔다.

그만큼 기쁘다는 표시였다.

86. 문을 열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육감의 문.

몸에 해를 끼치는 걸 감지하는 것으로 열었지만.

이건 일정 반경으로 자신 주변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더듬이였다.

본능을 토대로 문을 열어 놓고 보니 알 수 있었다.

'쓰는 방식을 달리하면.'

제 뒤에 있는 사람의 동작을 읽어 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대로 뒤에 있는 렘의 움직임을 머릿속에 그려 낸다. 코를 파고 튕겨 내고, 온열 가죽 안에서 몸을 비비적대다가 고개를 든다. 시선이 자신의 등에서 멈춘다.

세세한 과정을 설명하자면 소리를 듣고 그 소리가 나는 이유를 추측, 이후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거지만, 그 일련의 과정이 단숨에 이뤄졌다.

이게 '육감의 문'.

열린 문으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거라면.'

뒤에서 누가 몽둥이를 휘둘러도 피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육감과 직감, 본능의 영역이다.

그제야 작센이 말한 짐승의 본능적인 사냥 방식이 이해됐다.

육감의 문은 주변 모든 정보를 단숨에 집약해서 머릿속에 꽂아 주는 용도였다.

그러니 응용한다면 집중함으로 뒤에서 렘이 코를 파는 것도 알 수 있는 거고.

"생각 없는 놈들은 이런 걸 심안이라고 하지만, 다 개소리입니다. 그저 감이 좋아진 거, 그게 전부일 뿐."

작센의 설명에 따르면 그렇다고 했다. 그러니 응용할수록 쓸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지는 건 당연했다.

물론 조심할 것도 있었다.

"감을 너무 맹신하면 역으로 속을 수도 있으니, 주의하십시오."

말하며 작센은 왼손으로 엔크리드의 어깨를 짚었다. 그리고 엔크리드는 어깨에 작센의 손이 닿기 직전까지 그가 그 손으로 제 목을 노리는 착각이 들었다.

묘한 속임수였다.

어찌 보면 발렌 식 용병검과 비슷한.

육감의 문을 열었다고 해서 오늘을 반복하는 일에 달라진 게 있는가. 없다. 엔크리드는 다시금 똑같은 오늘을 살기 시작했다.

다만, 이제까지의 오늘과 결과가 다를 것이라는 예감이 들 뿐.

사실, 예감이랄 것도 없다.

이제 그 흉악한 함정을 넘어설 자신이 생겼으니.

가죽 흉갑을 두르고 왼쪽 허리에 롱소드, 허리 뒤편에 두꺼운 칼날을 가진 가드 소드.

휘파람 비도를 몸에 두른 칼집에 촘촘히 꽂아 챙기고 작은 나이프를 양쪽 발목에 숨겼다.

그 위로 갬비슨까지 걸치면 경장보병의 완전 무장이었다.

익숙했기에 무장한다고 시간을 낭비하진 않았다.

이러려고 일부러 아침을 게 눈 감추듯 해치우고 움직였고.

'가면서 횃대 몇 개만 더 챙기면.'

수십 번 오간 길이다. 가는 길에서 잡화점을 들르는 것까지도 익숙하다 못해 질릴 정도로 반복했으니.

"구둣방 가서 주인을 달래기 위해 목에 검을 들이댈 셈인 거요? 아니면 부츠와 목숨을 걸고 싸울 셈인 거요?"

의뢰 내용을 대강 들은 렘이 하는 말이다. 렘이 침대에 누운 채로 얼굴만 내밀고 떠들었다.

"부츠 열을 썰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

매일 하는 농지거리였다.

'어째 오늘을 계속 반복해도 비슷한 농담을 하는 것 같은데.'

렘의 속내가 얼핏 보였다. 마수가 아니라 구둣방에 가는 것 자체가 거슬리기 때문일 것이다.

"후딱 처리하고 마수 대가리 따러 가쇼."

렘이 콧방귀를 뀌고는 말했다.

엔크리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누구도 직공의 가게 지하에 그런 굴이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었다.

'나도 보기 전엔 안 믿었지.'

그러니 새삼 궁금했다.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가앙.

에스터의 배웅, 엔크리드는 오늘을 기억하기 위해 손끝으로 에스터의 코를 툭 때렸다.

캬릉!

방심하고 있던 에스터가 뒤로 물러나더니 고개를 좌우로 털곤, 곧 사나운 울음을 터트렸다.

그게 퍽 귀여워 엔크리드가 웃으며 말했다.

"간다."

그리 숙소를 나서서 중간에 잡화점을 들러 횃대 세 개를 사서 두 개를 허리춤에 꽂고, 하나는 몽둥이처럼 들고 걸었다.

재게 발을 놀려 직공의 가게에 도착해 들어서니.

"보시오! 여기 구멍이!"

놀란 직공이 하는 말이 들리고.

"그러네요. 구멍이 있네요. 확인해 보겠습니다."

놀란 눈으로 말하던 직공은 엔크리드의 대답에 호들갑을 떠는 대신 엔크리드의 전신을 훑었다.

"...어디 전쟁 나가쇼?"

순찰병도 이렇게 무장을 완벽하게 하고 돌진 않는다. 두툼한 천 갑옷에 무장 상태를 보니 직공의 입에서 저런 말이 절로 나왔다.

"매사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라. 검을 가르쳐 준 선생이 해 준 말입니다."

실제 지나가며 만났던 검술 교관이 저런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거짓말은 아니다.

실제로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에 만반의 준비를 한 것뿐이지만.

"누가 지독한 함정을 깔아 뒀으니, 실수로라도 안에 들어오면 안 됩니다."

구멍 안을 슬쩍 보고 직공에게 겁을 주자, 그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그러곤 묻는다.

"그걸 안을 슬쩍 보기만 하면 안다고?"

아, 마음이 조금 급했군.

엔크리드는 생각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 쪽은 제가 전문가라."

무심하게 답하니, 직공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곤 마저 입을 열며 본래 엔크리드가 기대했던 반응을 보였다.

"함정? 무슨 함정? 내 가게 밑에 왜 이런 게 있는 거요?"

그야 엔크리드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계속 모르진 않을 것이다.

이제부터 알아볼 참이니까.

함정을 깔아 뒀고, 함정이 본연의 역할을 했다.

여기서 당연히 알 수 있는 사실은.

함정을 넘어서면 무언가가 나온다는 거다.

숨길 게 있어야, 감추려고 노력하는 법이니.

"왜 여기에 이딴 짓을 했는지는."

엔크리드는 잠시 말을 끊고 호흡을 가다듬은 뒤,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알아볼 겁니다."

엔크리드도 호기심이 솟구쳐 오른 참이니.

답하고 능숙하게 경사로를 밟고 내려갔다.

어디에 어떤 형태로 굴이 생겼는지, 이제는 눈을 감아도 훤했다.

그동안 수십 차례 오간 길이다. 육감의 문을 열겠다고 이 좁은 굴 안을 계속 돌아다녔다.

덕분에 땅의 굴곡까지 외울 판이었다.

그리 다시 여섯 개의 갈림길을 앞에 섰다.

첫 번째와 두 번째 통로는 폭발이.

세 번째 통로는 바람의 칼날이 수직으로 떨어졌다.

육감을 단련하기 위해 더 시간을 소비할 필요는 없었다.

할 만큼 했으니.

'그럼.'

여섯 개의 통로 중 안전한 길은 어디인가.

속으로 되뇐 질문에 답을 하는 대신, 엔크리드는 이걸 만든 새끼의 머리통을 열어 보고 싶었다.

'음흉해.'

여섯 개 전부 함정이니까.

제 육감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그렇다.

수십 번의 오늘 중, 당연히도 제 육감을 확인하는 작업도 있었다.

과연 위험을 감지하는 감각이 올바른가.

올바른 감각이다.

기실 엔크리드는 여섯 번째 길도 잘못됐음을 알게 됐으니.

여섯 번째 통로에 들어가면 머리 위에서 뿌연 연기 같은 게 퍼졌다.

피부를 감싼 순간 수포가 일어나고, 들이켜면 검에 베이고 창에 찔리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통증을 선물하는 독 안개였다.

여섯 개의 통로 모두에서 불길함이 느껴진다. 길이 없다. 막혔다.

여기서 멈춰야 할까? 발이 묶인 건가? 더는 손을 쓸 수 없나?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 굴 너머로 향해야만 오늘을 벗어날 수 있다는 건.

길이 막혀 멈춘다는 건 오늘에 갇힌다는 소리였다.

상대는 찌르기에 능숙한 병사도 아니었고.

소리 없이 다가오는 암살자도 아니었으며.

불리한 전장에서 마주한 적군 무리도 아니었다.

그저 함정일 뿐이지.

멈춰 있는, 움직이지 않는 이지(理智)가 존재하지 않는 스펠 트랩일 뿐.

엔크리드는 첫 번째 통로 앞에 섰다.

'잘못 디디면 통구이.'

스펠 트랩은 어떻게 발동하는가.

육감의 문을 열었기에 본능의 영역에서 바라볼 수 있다.

횃불도 필요 없었다.

엔크리드는 통로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발을 뗄 때마다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손가락만 대도 베일 듯한 칼날 사이를 맨몸으로 아슬아슬하게 피해 가는 기분이었다.

트랩의 발동 원리는 감지다.

불길함이 느껴지는 곳을 피해 걷는다.

한 점의 집중을 발동하고 심장에 야수의 대담함이 깃드니.

발걸음이 흔들릴 경우는 없었다.

집중한 채로 육감의 문을 열어 봄으로.

스펠 트랩의 빈틈을 밟았다.

누군가 본다면 지그재그로 걷는 걸음일 뿐이지만.

엔크리드는 외줄을 걷는 기분으로 통과했다. 그런데도 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육감, 직감의 영역.

본능만으로 함정을 돌파했다.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 성취감에 가슴이 뿌듯해지긴 했다.

물론 이런 감정 따윈 잠시 뒤로 미뤄 둬야 할 시간이었다.

"일단."

첫 번째는 넘어섰다.

이후 어둠 너머를 보며 횃불에 불을 붙였다.

길을 유심히 보는데, 아까와 같은 불길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저 앞에 뭐가 있다는 건 확실했다.

직감이었다.

엔크리드는 조심히 걸어 나갔고, 곧 그 앞에 자신을 맞이한 놈을 볼 수 있었다.

"끄르르윽."

굽은 등, 척추가 있는 자리로 뾰족한 가시 같은 뼈가 튀어나왔고.

횃불의 불빛에도 새파란 피부임이 보일 정도로 피부색이 옅다.

입은 인간보다 몇 배는 컸고, 걸쭉한 침을 흘리는 모습이 군침을 삼키는 듯하다.

손톱은 길고 팔뚝은 두꺼웠으며 눈깔은 까맸다.

갈라진 피부 사이로 근육의 결이 얼핏 보였다.

구부정한 허리 덕에 양 주먹이 바닥에 닿는 놈이었다.

구울(Ghoul)이다.

이 세상에는 마물과 마수가 존재했다.

신학자들의 말을 따르면, 먼 옛날 신이 서로 죽고 죽이며 생긴 존재라는데.

그거야 엔크리드가 알 바는 아니었다.

이런 놈들이 존재한다는 게 중요할 뿐.

짐승의 그것을 닮으면 마수.

그 외는 전부 마물이라 불렀다.

구울은 그중에서도 인간을 잡아먹는 식인 괴물이었다.

"네가 왜 여기서 튀어나오냐?"

이걸 언데드라 할 수 있을까?

직공의 말이 반은 맞은 셈이다.

아래에 괴물이 있었으니까.

다만, 해골 병사 따위가 아니라 구울이 나왔을 뿐.

마물에게 대화를 나눌 지성은 없다. 먹이를 보고 달려들 뿐.

"끄워어어어!"

구울은 인간을 먹는다. 콧대 따위가 없어 얼굴에 달라붙은 구멍으로 보이는 그들의 납작한 들창코는 인간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기관이었다.

먹이 냄새를 맡은 놈들은 냅다 덤볐다.

굴이 그리 비좁진 않았다.

그렇다고 좌우로 뛰어다니며 검을 휘두를 형편은 아니었지만.

환경에 따라 움직일 정도의 재량은 있으니.

스릉, 챙.

달려드는 구울을 보는 순간, 엔크리드는 롱소드를 뽑아 앞으로 비스듬히 세웠다.

'셋.'

한 놈 뒤로 두 놈이 더 있다.

일반적으로 구울 하나를 잡으려면 장창병 둘이나 셋은 필요하다.

능숙한 병사라면 검을 들고 혼자서도 잡겠지만.

되도록 그런 시도를 하지 않는 게 전술적으로는 옳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구울의 낯짝에 주먹질이라도 해야 할 것이다.

지금의 엔크리드처럼 말이다.

뿍!

앞으로 비스듬히 세운 칼날을 들이밀어 첫 번째 구울의 가슴팍에 꽂고, 왼손으로만 검을 잡은 뒤 바깥쪽 사선으로 내리눌렀다.

"끄르꺼거르르!"

인간의 성대에서는 절대 나오지 못할 괴성이 터졌다. 검이 꽂힌 구울 한 마리가 엔크리드의 힘에 끌려 무릎을 꿇었다.

그 덕에 칼날이 놈의 몸에서 손가락 한 마디쯤 밑으로 내려갔으나, 양단할 순 없었다.

이것만으로 왼팔 근육에 부하가 밀려왔다.

그렇게 한 놈을 제압하자, 그 뒤에 달려드는 놈이 손톱을 휘둘렀다.

예상한 바였기에 왼발을 중심으로 빙글 몸을 틀어 피하고, 자유가 된 오른손 주먹을 뻗어 끊어쳤다.

뻑!

주먹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놈의 고개가 뒤로 들렸다. 충격이 온전히 전달된 덕에 놈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돌격이 저지되자, 세 번째 구울 놈이 달려들려고 애썼다.

뒤에서 손을 쭉 뻗는데 다른 두 놈보다 팔이 더 길었다.

구울은 본래 제멋대로 생긴 족속이니.

어느 놈은 팔이 길고, 어느 놈을 다리가 두껍기도 했다.

엔크리드는 마지막 구울의 움직임을 진즉에 눈치챘기에 고개만 꺾어, 쭉 찌르는 손톱을 피했다.

틈을 만들었으니 그 뒤에는 무엇을 해야 하나.

'하나씩.'

죽이면 될 일이다.

예전이었다면, 진실로 예전, 오늘을 반복하기 전의 그였다면 진즉에 죽었겠지만.

몸에 붙은 경험과 검술, 체술이 이제 남다른 수준까지 올라왔다.

왼손으로만 쥐고 있던 검을, 두 손으로 잡고 내리그었다.

양팔 근육에 힘이 들어가고.

부우욱.

"끄럭!"

구울 한 마리가 가슴부터 가랑이까지가 갈라져 밑으로 보랏빛 내장을 쏟아 냈다.

한쪽으로 굴러떨어진 횃불이 남은 두 마리의 얼굴을 비추고, 그 뒤로 그림자를 길게 이었다.

공포 따윈 잊은 괴물 두 마리가 재차 달려들고.

세 마리였을 때도 무난하게 한 마리를 죽여 없앤 엔크리드의 검이 다시금 춤을 췄다.

단순한 동작을 반복하는 구울을 향해 스텝을 밟고, 중검식 상단 수평 베기로 한 놈의 목을 자르고.

마지막 남은 놈은 발을 걸어 넘어뜨린 뒤, 머리통을 발로 힘껏 밟았다.

빡!

머리가 호박처럼 터지진 않았으나.

"끄르거, 끼륵."

깨진 머리통에서 검은 체액이 줄줄 새긴 했다.

"이제 정말 궁금해졌는데."

엔크리드가 말하며 남은 구울의 머리통에 검을 수직으로 내리꽂았다.

빠직.

검 끝이 구울의 머리통을 관통해 땅에 박혔다. 엔크리드는 깨진 머리통을 헤집은 검을 뽑았다.

구울 세 마리.

최소 하급 병사 여섯은 필요한 싸움이었으나, 엔크리드는 가뿐히 이겨 냈다.

구울의 손톱에는 독이 있기에 스치기만 해도 돌아가야 할 판이었지만, 스치지도 않았다.

그동안의 단련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아무도 보지 않았으니, 그게 좀 서운하긴 해도.

곧 이 안에 숨은 놈에게는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제 검이 얼마나 매몰찬 편인지 말이다.

"후."

몇 번 호흡을 고르고 검에 묻은 구울의 체액을 털고 품에서 싸구려 린넨을 꺼내 칼날을 닦아 낸 뒤, 엔크리드는 다시 안으로 들어섰다.

굴 안으로 향하는 것이 곧 내일로 향하는 길이 될 테니.

주저는 없었다.

87. 죽일 놈은 죽여야 하는 법

"수를 읽고 대응하는 법입니다."

렘에게 맞으면서.

작센에게 육감에 대해 들으면서도.

아우딘과 고립의 기법으로 몸을 쥐어짜면서도.

라그나에게도 충실히 검술을 배웠다.

실력이 느는 건 별개로 참으로 꾸준히.

"안 답답합니까?"

그런 엔크리드를 향해 라그나가 묻곤 했다.

답답? 그럴 이유가 없다.

라그나의 가르침은 기본기를 배운 다음을 향한 길이자, 이정표였다.

그동안 길을 몰라 헤맸던 나날이 얼마나 길었던가.

이제는 한 걸음 나선 순간, 곧바로 다른 길이 보이니, 그저 즐거울 뿐이었다.

상대가 검을 내리치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마수가 상대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갑자기 뒤에서 누가 창을 찔러 오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검을 뻗어야 하는가.

기본을 갖췄다면 이후 갖춰야 할 건 응용하는 법이니.

모든 상황에 대응할 순 없다. 이것도 비슷했다. 요는 요령을 깨우치는 건데.

당연하게도 쉬울 리가 없었다.

"이건 좀 빨리 끝날 줄 알았는데."

라그나가 그리 말했지만.

어림도 없지. 엔크리드는 자신의 재능이 형편없다는 걸 안다.

재능이 어지간한 수준이었다면 이렇게 고생했을까.

아닐 것 같은데.

그렇다고 원망 따윈 하지 않는다. 그럴 시간에 검을 한 번 더 휘두르고 말지.

"검술의 응용은 수를 읽고 대응해야 의미가 있는 법입니다."

상대하는 놈이 마수든, 마물이든, 적병이든, 움직임을 보고 속임수와 진실을 판별, 이후 검으로 베거나 찌르면 그만이다.

라그나는 지치지 않고 가르쳤고.

엔크리드도 지치지 않았으나, 진도는 하염없이 느렸다.

느리고 부족함을 안다. 다른 사람보다 몇 배는 노력해야 하는 것도.

그러하기에.

주변 모든 것, 모든 상황, 환경, 주어진 어떤 짧은 순간까지도.

모든 걸 성장의 도구로 삼을 뿐.

엔크리드는 그렇게 했다.

굴을 파헤치고 나아가는 길.

늑대 마수 네 마리가 튀어나왔다.

컹컹!

개처럼 짖은 놈들은 숨도 쉴 틈 없이 달려들었다.

팍팍 하고 바닥의 흙을 박차며 달려드는 역동적인 늑대 마수는 보는 순간 오금이 저릴 만했다.

야수의 흉포함을 담은 눈, 혀를 내밀고 침을 흘리는 주둥이 사이, 누런 이빨이 횃불 빛을 받아 빨갛게 빛났다.

'야수의 심장.'

대담함, 그 덕에 칼날을 코앞에 들이밀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수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엔크리드는 덤덤했다. 숨 몇 번 고를 시간에 늑대 마수가 몇 걸음 앞까지 왔고.

엔크리드는 검을 다루는 법에 본능의 직감을 더했다.

대담함에서 비롯된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이 또한 성장의 발판이 되리라 믿었고, 훈련의 일부로 삼고자 했기에.

'실전만큼 좋은 훈련은 없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매번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뿐.

오늘을 허무하게 보내는 건 용납할 수 없다.

그렇게 하루하루 목숨만 붙은 채로 사는 삶을 원했다면 꿈을 노래하는 게 아니라 밭을 일구고 신의 축복을 갈구했으리라.

그리 오늘을 아끼고 아끼기로 했으면서도, 목숨을 걸고 나아가야만 한다.

이것만이 엔크리드가 꿈을 노래할 수 있는 길이니.

죽기 위해 달려드는 게 아니라 살기 위해 목숨을 거는 거다.

직감이 말하는 대로.

본능에 따라.

딱!

늑대 마수의 이빨이 부딪치는 소리가 코앞에서 났다.

엔크리드는 왼발을 뒤로 빼는 거로 늑대 마수의 입질을 피하곤, 팔꿈치를 움직여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쳤다.

쩍! 깽!

칼날이 아니라 검면으로 후려쳤다. 무게를 잔뜩 실은 일격에 머리통을 맞은 늑대 마수가 바닥에 고꾸라졌다.

검을 후려치고 자연스레 왼쪽으로 한 걸음.

횃불을 한쪽으로 던져 놨으나 꺼지지 않았기에, 그게 광원의 역할을 했다.

왼편으로 한 걸음, 엔크리드는 막 횃불을 몸으로 가리며 늑대의 앞발을 피했다.

붕 소리와 함께 묵직한 일격이 본래 엔크리드의 배가 있던 자리를 훑었다.

잘못 걸리면 갬비슨 따위는 걸레 조각이 되어 버릴 게 분명했다.

마수란 짐승의 특징을 가진 괴물이었다.

그중 두 마리가 영악하게 뒤를 잡으려고 돌았다.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두 놈이 보통의 늑대보다 배는 날카로운, 짧은 나이프를 촘촘히 꽂아 둔 것처럼 생긴 주둥이를 들이대며 엔크리드의 양쪽 허벅지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삐이-익!

횃불 하나만 비추는 어두운 굴에 묘한 소음이 퍼졌다.

한순간의 일이었다.

몸을 돌린 엔크리드가 손을 털었고 달려드는 늑대 마수 한 마리의 이마에 퍽- 하고 휘파람 비도가 꽂혔다.

그야말로 빛살과도 같은 속도였다.

그사이에 달려든 다른 한 마리는 허벅지를 당겨 피한 후 그대로 무릎을 치켜세움으로써, 피하는 것과 때리는 걸 동시에 행했다.

뻑.

큰 충격이 아니었는지, 무릎에 맞은 늑대 마수는 물러서지 않았다.

대신 제 다리 근육을 자랑하듯 앞발로 엔크리드의 발등을 누르려고 했다.

치켜세운 무릎을 뒤로 빼며 반 발짝 물러나 발등을 노린 앞발을 피하고 엔크리드는 앞과 뒤를 가로막은 두 마리 마수 사이에 섰다.

포위된 것과 다름없었다.

위기라고 부를 만한 상황 속에서도 엔크리드의 눈은 늑대 두 마리를 보고 있지 않았다.

집중 그리고 또 집중.

전처럼 주변이 느리게 느껴지진 않았다.

점과 선만이 남아, 다른 게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저, 늑대 마수의 움직임이 눈에 훤히 보였다.

그들의 다음 동작을 미리 머릿속에 그려 낼 수 있었다.

마수의 다음 움직임이 눈에 잡히니 엔크리드의 행동은 단순해졌다.

복잡하게 속이고 휘둘러 상대를 몰아세울 필요가 없었으니.

늘어뜨린 검, 그걸 크게 휘둘렀다.

좌우로 휘두르기에는 좁아도 종으로는 크게 반원을 그리기에는 굴의 높이가 충분했다.

중검식은 어떤 검인가.

기본으로 배운 것을 떠올린다.

일격에 부수는 것을 장기로 삼는 검이다.

컹!

늑대 두 마리가 동시에 달려들었고.

엔크리드는 머릿속에 그린 동작을 수행했다.

부웅 퍽! 찌직! 콰직!

온 힘을 다해 휘두른 롱소드가 제 역할을 다했다.

검 쪽에 있던 늑대 마수는 가슴팍부터 턱, 머리까지 쪼개졌고.

반원을 그리며 떨어진 내려치기에 당한 놈은 머리통이 터졌다.

조금만 타이밍이 어긋났어도 두 마리 중 한 놈한테는 어딘가 물어 뜯겼을 터였다.

지금의 일격은 힘으로 부린 묘기였다.

"후아."

엔크리드는 참고 있던 숨을 뿜어냄으로 심장을 다독였다.

'하나.'

남은 마수는 한 마리.

남은 늑대 마수가 주춤하는 사이, 엔크리드가 앞으로 툭 뛰어 들어갔다. 우습게도 그는 늑대 마수의 정면이 아니라 왼쪽으로 달렸는데.

마수는 그걸 보지도 못했는지 똑같이 그 방향으로 뛰었다.

'왼발을 축으로.'

극도의 집중 상태, 직감과 몸, 그동안의 훈련으로 인해 응축된 경험이 시키는 대로.

왼발로 땅을 찍고 검을 뻗었다. 찌르기다. 곧게 뻗어 나간 검 끝이 늑대의 주둥이 안에 꽂혀 뒤통수를 뚫고 나왔다.

푹!

소음과 함께 늑대의 무게가 양팔에 실렸다.

자연스레 힘을 빼며 퍽 하고 늑대를 바닥에 패대기치듯 늘어뜨렸다.

엔크리드는 입부터 머리까지 구멍이 난 늑대의 머리통을 발로 밟아 검을 뽑았다.

뿍 하고 뽑힌 검 사이로 마수의 빨간 피가 바닥에 흘렀다. 늑대 마수의 시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낑.

마지막 남은 마수의 숨이 허무하게 흩어졌다.

죽인 마수를 두고 양팔을 늘어뜨린 채, 엔크리드는 조금 전 자신의 한 짓을 되새겼다.

'보인다.'

늑대 마수의 움직임은 단순했다. 본능에 맡긴 움직임.

그러니 육감에 걸린다. 한 점의 집중과 본능의 육감.

두 개의 합이 만들어 준 감각에 치중한 검격의 연속이었다.

'할 수 있다.'

지금이라면 라그나가 말한 응용하는 검이라는 걸 보여 줄 수 있을 듯했다.

상대의 의도와 움직임을 읽는다. 이후 남은 건 기본기로 단련한 검을 내려치는 것뿐.

상대를 속이는 것도 비슷한 이치다.

"원래 할 줄 아는 겁니다. 그걸 정형화해서 몸에 붙이는 과정일 뿐인데도."

라그나가 한 말이 새삼 떠올랐다.

그래, 맞다. 본래 하던 거다.

하지만 알고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건 고양이와 호랑이만큼이나 차이가 있었기에.

엔크리드는 손을 쥐었다 펴며,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횃불을 들고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계속 머릿속으로는 제 검을 그렸다.

한 번으로 몸에 착 달라붙는 건 재능 있는 이들의 전유물.

그러니 고심하고 되뇌는 거다.

엔크리드는 모든 걸 수련으로 삼고 행했다.

이후 마물과 마수는 더 보이지 않았다.

대신 통로의 끝에 하수도와 연결된 통로를 찾았다.

그제야 검술 대신 다른 게 보였다.

'미친놈이군.'

여기까지 이런 굴을 파다니.

이게 무슨 짓인지.

스펠 트랩은 비쌌다. 싸구려 쥐덫 따위가 아니니까.

그런 걸 여섯 개 갈림길에 전부를 막으며 깔아 둔 저의가 무엇인가.

크로나가 남아도는 부유한 상인도 어지간해서는 못 할 짓이다.

거기에 식인귀라 불리는 구울과 마수까지 있다.

이렇게까지 막아서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 뒤에는 대체 뭐가 기다리고 있는가.

그 질문의 답 일부가 보였다.

"미친 새끼가."

엔크리드는 절로 입이 열렸다.

고약한 냄새가 나는 하수로를 따라 걸어 도착한 곳.

횃불 빛에, 사방에 빨래처럼 널린 게 보였다.

벽에 못을 꽂고 거기에 줄을 엮어서 늘어뜨려 만든 것들이다.

옷가지가 아니었다. 그 옷가지를 입어야 할 부위였으니.

인간의 내장과 살점, 뼈로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극의 현장이다.

어지간히 험한 꼴을 보고 살아온 엔크리드조차 구역질이 날 정도인 그런 참극.

'미친 새끼.'

반드시 죽여야 할 놈이었다.

죽어 마땅한 놈이니까.

이런 놈을 죽이는 것 또한 기사의 할 일 아닌가.

꿈을 꾼다고 해서 기사가 되는 게 아님을 안다.

하지만 이런 걸 보고 그냥 넘어갈 순 없었다.

사이사이 멀쩡한, 그나마 인간의 형체를 한 시신도 보였다.

그중 하나가 살아 있는 듯했다.

눈을 몇 번 깜빡이다 입을 연다.

"끄르륵."

말은 못 했다.

당연했다. 머리밖에 안 남은 인간이 어찌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저 상태로 눈을 뜨고 말한다는 것 자체가 그로테스크할 뿐이다.

"끄르륵, 끄르륵."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추측조차 어렵다.

엔크리드 자신이라면 죽여 달라 빌 것 같은데.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는 알 수도 없었다.

거기다, 머리통을 관통한 줄은 어떻게 넣은 건지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어지간한 일을 다 겪었음에도 이런 참극은 정말 역겨웠으니까.

"넌 뭐냐?"

그때 들린 목소리다. 엔크리드의 시선이 목소리 쪽으로 돌아갔다.

인간의 시신을 장식으로 삼은 길의 끝이다. 하수도 구석, 시신 애호가의 얼굴이 보였다.

하얀 얼굴의 창백한 인상의 젊은 남자였다.

칙칙한 녹색의 로브를 둘렀고 머리칼은 길었다.

엔크리드가 물었다.

"여긴, 네 작품이겠지?"

남자는 잠시 고심하는가 싶더니 혼잣말을 섞어 말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걸까. 신이 날 사랑하는 건가. 가만히 있어도 실험체를 이리 던져 주는 걸 보니, 자, 보자. 상비군인 것 같은데, 잘 단련된 몸이구나. 좋구나. 좋아."

젊은 남자의 목소리는 가볍고 경쾌했다.

양질의 철을 받은 대장장이 같았고.

이득을 본 거래를 성사한 상인 같았다.

어찌 보면 잔잔하게 제 마음을 고백하는 순수한 청년 같기도 했다.

묘했고 또 묘했다.

"넌 어떤 거로 만들어 볼까?"

엔크리드는 횃불을 높이 들었다. 남자의 뒤로 어른거리는 그림자 너머다.

몸을 이리저리 짜깁기 한 기묘한 시체가 보였다. 벽에 기대앉은 채로.

두 눈은 감고 숨을 쉬는 기색도 없었다. 엔크리드의 판단으로는 시신이었다.

"사랑스럽지? 얘가 바로 내 최고의 명품이 될 것이야. 이름은 바밀로다."

엔크리드는 결론을 내렸다. 사실 더 말을 나눌 필요도 없었다.

완벽하게 미친 새끼.

엔크리드는 횃불을 집어던졌다.

화륵, 화륵! 횃대가 팽팽 돌아 둥글고 긴 궤적을 남기며 미친놈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다.

퉁.

그리고 미친놈은 손을 드는 것만으로 횃불을 튕겨 냈다.

주문, 그러니까 마법사였다.

그래서, 그게 자신이 멈출 이유인가.

아니다. 죽어야 할 놈은 죽어야 한다. 엔크리드는 횃불을 던졌고, 그게 손짓 한 번에 날아가는 걸 봤음에도 발을 멈추지 않았다.

땅을 찬 엔크리드는 몸을 낮췄다.

하수로의 진득한 땅 밑으로 몸을 깔며 앞으로 내달린다. 퍽- 하고 오물을 차자, 몸이 쌕 소리와 함께 마법사 앞에 도달.

달리는 힘까지 이용해 검을 휘둘렀다. 아래에서 위쪽으로 휘두른 검을 따라, 사선 베기가 횃불이 사라진 어둠을 갈랐다.

* * *

에스터는 주로 밤에 바짝 붙어 있곤 했는데, 엔크리드가 도시에 있는 날이면 그 근처를 배회하는 때도 있었다.

물론, 안 그런 날도 많았다.

'밤에만 붙어 있어도 충분하니까.'

그리고 꼭 항상 붙어 있을 필요도 없었다.

보통이라면 막사 안에 그냥 붙어서 시간이나 보내고 있을 그런 날.

가앙.

잘 가라.

나가는 엔크리드를 배웅하는데, 방심하는 사이 놈이 손가락을 튕겨 코끝을 때렸다.

캬릉!

이 새끼가?

"간다."

그러곤 나가 버린다.

그 뒤, 에스터는 몰래 엔크리드의 뒤를 따라갔다.

'무슨 짓을 하러 가는데, 남의 코를 때린 거냐.'

순수한 호기심에서 시작된 미행이다.

에스터가 따라나선 건 엔크리드의 변덕 어린 손끝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어제의 오늘에서는 없던 일.

톡톡.

검은 표범은 금세 골목 사이,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는 천장을 밟으며 움직였다.

사뿐하고 가뿐한 걸음걸이다.

사람들 눈에 안 띄게 움직이는 거야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에스터는 엔크리드가 들어간 지하까지 발을 디뎠다.

'또 무슨 짓을 하는지.'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그러다 엔크리드란 놈이 들어간 곳에서 고약한 주문 냄새를 맡게 됐다.

'잘못하면.'

자기가 택한 인간이 죽을 듯했다. 곤란했다. 아직은 자신한테 필요한 인간이었다.

안으로 들어가 봐야 했다.

스펠 트랩을 보고 피하는 거야, 에스터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한때 그녀는 별을 노래했고 별을 품은 마녀였다.

이런 조악한 트랩쯤이야.

그렇게 구울과 싸우는 남자를 봤다.

'실력이 늘었나?'

검에 관한 조예는 없다. 다만 매일, 정말 매일같이 엔크리드를 지켜봐 왔기에.

'늘었네.'

성장 정도가 보였다.

그러다 늑대 마수를 죽일 때다. 이건 에스터가 보기에도 이상했으니.

'이건 뭐야?'

엔크리드란 남자가 신들린 듯한 움직임을 보였다.

어둠을 꿰뚫은 에스터의 눈에 그의 움직임은 이해할 수 없음의 연속이었다.

검을 휘두르고 베고 찌른다. 발과 무릎 따위로 늑대를 걷어찬다.

난전이라 생각했는데, 그는 어떤 치명적인 상처도 입지 않았다.

고작 긁힌 게 전부였는데 그 또한 갑옷이 긁혔을 뿐이다.

엉켜 싸워서 저런 결과가 나올 수 있나?

'마수가 반푼이인가?'

아닌 것 같은데.

물론 그녀가 본래의 힘을 찾았다면 이런 마수나 마물 따위는 감히 자신을 향해 고개도 들 수 없을 테지만.

'그런데 계속 가네?'

이제 돌아갈 법도 한데.

엔크리드는 계속 나아갔고, 결국 그 참극의 현장을 에스터도 봤다.

그녀는 충격까진 받진 않았다.

주문을 연성하는 놈 중에는 별의별 미친놈이 많았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결국, 이 너머에 있는 게 마법사라는 걸 알았다.

'어떻게 할까?'

마법사를 상대할 때, 도와야 할까?

그동안 모은 쥐꼬리만 한 힘으로?

그럼, 자신의 몸을 되찾는 데 더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나름대로 엔크리드의 갑옷에 기운을 불어 넣어 둔 것도 있긴 하지만.

'골치 아프게 구네.'

결국 판단을 유보하고, 에스터는 몸을 숨겨 엔크리드의 뒤를 쫓았고.

그와 마법사가 마주하는 걸 봤다.

엔크리드는 몇 마디 말을 건네곤 곧바로 공격을 이어 갔다.

이후, 에스터는 놀랐고 또 놀랐다. 그럴 만했다.

어둠을 옷 삼아 숨은 레이크 팬서의 눈에 엔크리드란 남자가 가득 찼다.

그리고 남자는 말도 안 되는 재주를 부리는 중이었다.

88. 본헤드

거리를 좁혔기에 일격으로 끝낼 생각이었다.

그리 검을 올려치는데 뭔가 엔크리드의 얼굴을 때렸다.

묵직한 한 방이, 마치 렘의 주먹에 맞은 것 같았다.

궁둥이부터 넘어진 엔크리드의 머리 위로 다시 묵직한 충격이 느껴졌다.

엔크리드는 반사적으로 턱을 당기고 옆으로 굴렀다.

퍽.

그러자 또 보이지 않는 뭔가, 그러니까 무형의 충격파가 그가 있던 자리를 후려쳤다.

더러운 하수가 없는 자리였다. 대신 축축한 흙더미가 튕겨 얼굴에 튀었다.

한쪽 눈을 찡그린 엔크리드의 눈이 바빠졌다.

'안 보여.'

주문일 것이다.

당연한 예상이다. 얼굴만 있는 채로 입을 뻐끔거리는 머리통을 봤다.

그런 짓을 가능케 하는 게 누구겠나.

"피했구나. 괜히 고생만 더 한다. 얌전히 있으면 안 아프다."

남자 마법사가 말하며 손을 휘저었다.

보이지 않으니, 막을 도리가 없었다. 엔크리드는 또 옆으로 굴렀다.

그가 있던 자리로 씽 하고 바람의 칼날 따위가 지나갔다.

물론 엔크리드는 그게 뭔지도 몰랐다. 그저 무슨 주문의 일종이라는 것만 알았지.

'이럴 땐 어떻게 하지.'

그동안 참 많은 검술 교관을 만났는데, 그들이 마법사 얘기만 나오면 하는 말이 있다.

"마법사? 대응하는 법은 하나지."

"튀어라. 뒤도 돌아보지 말고 튀어."

"상대하지 마라. 평생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죽도록 고생만 하고 싶지 않다면."

"운 좋으면 죽는 거고, 운 나쁘면 상상도 하지 마라."

이들 중 이름깨나 날린 이들도 있다는 걸 보면, 그만큼 마법사란 존재와 주문이란 것의 위험함을 상기시키는 말이었다.

반면 사고뭉치 분대원은 마법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좀 다르긴 했다.

"활로 쏴 죽여."

이건 렘.

"안 볼 때 죽입니다."

이건 작센.

"꼭 싸워야 한다면 바짝 붙으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형제님."

아우딘다운 답이다.

라그나야 뭐.

"그냥 베면 죽는 건 똑같습니다."

하고 답했고.

어쨌든, 여기서 내린 결론은.

마법사는 피하는 게 좋다는 것.

하지만 꼭 죽여야 한다면 라그나의 말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베면 죽는 건 똑같다.'

그러니 그렇게 하면 될 것이다.

뒤로 도망가는 선택지 따윈 없었다.

놔두면 계속 같은 짓을 할 놈이었다.

사람이 낡은 옷가지처럼 찢기고, 걸레처럼 널브러질 것이다.

신발 직공과 직공의 딸이 떠올랐다.

가만히 놔두면 그 둘이 제일 먼저 죽을 테니.

직공과 그의 딸.

일방적이긴 해도 수십 일을 지켜봤다.

교류가 없다고 해도 그들은 갈림길 앞을 서성이는 엔크리드를 위해 식사를 준비했고, 걱정을 남겼다.

그렇다고 그들이 엔크리드의 고생을 알진 않겠지만.

그래,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

아무도 모른다고 해도 지켜야 할 게 있다면 지킬 뿐.

그게 엔크리드가 꾼 꿈이고, 걷고자 정한 길이며, 가리키는 이정표의 종착지였다.

"자자, 도망은 가지 말고, 착하지, 괜찮다."

마법사가 말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딱 소리와 함께 하수도 위쪽에서 빛이 떠올랐다.

횃불보다 훨씬 밝은 광원이다. 머리 위로 떠 오른 빛 덕에 발밑으로 그림자가 퍼지듯 생겼다.

마법사는 웃지도, 그렇다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에게 이건 일일 뿐이었다.

엔크리드는 그런 마법사를 보며 집중의 집중을 더 해 육감의 문을 활짝 열었다.

마법사는 엔크리드의 움직임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상대는 그저 실험체, 버러지, 고깃덩이.

그의 눈에 엔크리드는 그렇게 보였다.

그의 손이 다시 움직이자, 무형의 충격파가 날아갔다.

펑!

'운이 따르는구나.'

마법사의 눈에는 그리 보일 뿐이다.

엔크리드가 옆으로 툭 뛰어 주문을 피했으니까.

그리고 엔크리드는 묘한 감각에 기대어 움직이는 중이었고.

'안 보여.'

안 보인다고 없는 건 아니다.

작은 깨달음과 함께다.

그럼 느낄 순 없나.

집중력과 육감이 합쳐져 늑대 마수의 움직임을 예측하듯.

이번에는 시신 애호가 마법사의 손짓을 보고 다음을 예측하고 무엇이든 느껴 본다.

엔크리드는 그렇게 했다.

마법사가 바람을 조형해 칼날로 만들어 던졌다.

세 방향에서 동시에 휘어지며 날아가는 바람의 칼날이다.

사신의 낫보다 매서운, 걸리면 저따위 천 갑옷은 썩둑 잘릴, 그런 주문이었으나.

엔크리드는 그걸 옆으로 굴러 피했다.

"또 피해?"

마법사는 말하면서도 양손을 연신 놀렸다. 그에 따라 보이지 않는 충격파와 칼날이 연이어 엔크리드를 노렸으나.

엔크리드는 그걸 다 피했다. 운은 아니었다.

감각, 오감을 넘어선 육감의 영역이다.

반쯤 게슴츠레 뜬 눈, 쫑긋하며 움직이는 귀, 오도독하고 소름이 돋은 피부.

모든 게 마법사가 부리는 수작을 연상케 했다.

그러면서도 상대를 죽일 길을 찾았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휘파람 비도 하나만 던지면 끝날 일이었다.

베면 죽으니, 목이나 머리통에 구멍이 나도 죽겠지.

'아니, 안 돼.'

순전한 감이다. 육감이 말했다. 비도 따위로는 죽일 수 없다고.

그럼 최선의 선택은 무엇인가.

이게 자연스러운지는 모르겠으나.

오롯이 감으로 마법을 피하는 중이었다.

상대는 주문을 이용해 신기한 짓을 했으나.

'어차피 화살이나 칼날이라고 생각하면.'

적병이 둔기나 검을 휘두르는 거로 생각한다면.

'위협적인가?'

아니다. 피할 수 있었다. 오히려 미치 휴리어의 검이 더 날카롭다.

그러니 피한다. 피할 수 있었다.

휘파람 비도가 안 된다면 아우딘의 조언을 되새겨 볼 때였다.

'붙으면 되는 것.'

피하고 단숨에 땅을 찬다. 마법사의 눈이 커지는 게 보였다.

"이놈이!"

마법사는 놀랐다. 단숨에 몇 발짝, 보이지 않는 마법을 피해 달려들며 검을 치켜든 놈이다.

병사의 칼붙이가 위협적인 거리에 도달했다.

엔크리드의 거리, 검사의 거리다.

붕.

롱소드의 칼날이 머리 위로 떨어지자, 마법사가 다급하게 외쳤다.

"삼켜라!"

강력한 마나와 주문이 합치되어 세상에 구현된다. 마법사의 말이 곧 세상에 현현하여 그 힘을 행사했다.

깊고 어두운 세계를 경험한 마법사만이 보일 수 있는 주문이었다.

그리 현현된 주문.

본래라면 마법사의 주문은 엔크리드의 내장 일부를 잘라내 없애야 했다.

이건 감으로 피할 수 있는 주문도 아니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없었다.

아니, 있긴 했다.

"웩."

마법사는 당황했다. 분명 구현되어야 할 주문이 반사되어 제 몸에 충격으로 돌아왔으니.

그의 눈에 바람의 칼날이 잘린 천 갑옷 안쪽이 보였다.

까만 가죽 갑옷, 마법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물건이었다.

"너, 너, 뭘 입고 있는 거냐?"

"좋은 거."

엔크리드가 마법사의 눈이 제 갑옷을 닿은 걸 보며 답했다.

그게 상대가 부린 무슨 술수를 막은 것처럼 보였으니.

엔크리드는 눈치가 빨랐다.

그리고 손도 눈치만큼 빨랐고.

훙!

칼날이 공기를 삼킨다. 내려치는 쇠붙이는 대장장이란 이들이 망치와 불길이란 주문으로 만든 검이라는 물건이었다.

으적, 쩍!

머리통이 잘리고 터진다. 중간에 검을 막는 저항감이 느껴졌지만, 힘으로 찍어 눌렀다.

마법사는 죽어 가며 속으로 억울함을 토로했다.

'아직 준비한 게 많은데! 바밀로! 바밀로!'

바밀로라 이름 붙인 제 아이를 깨우려고도 했다.

물론 다 실패했다.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건 마법사라고 해서 다를 바 없으니.

죽은 뒤의 망상으로 현실에 영향을 끼칠 순 없었다.

"아쉬워 보이네."

엔크리드는 죽은 마법사를 발로 걷어찼다.

이후 엔크리드는 여기저기 찢긴 갬비슨을 벗었다. 도저히 더 입고 있을 수 없었다. 이건 걸레로도 못 쓸 판이었다.

보람이 솟구치진 않았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도 거의 들지 않았다.

목숨의 위협? 있었으나 넘어섰다.

그저 할 일을 했다는 마음만 들었다.

죽일 놈을 죽였다. 딱 그거다.

'뒤처리하기 전에.'

이런저런 스펠 트랩을 깔아 둔 놈 아닌가.

여기저기 꿍쳐 놓은 게 좀 있지 않을까 싶어 안쪽을 뒤졌다.

혹시나 다른 함정이 발동할까 꽤 주의하며.

그렇게 찾은 게 갈색의 두꺼운 책 한 권, 금화 다섯 개가 든 크로나 주머니, 까만 나무 지팡이, 파란 돌과 흰 돌 몇 개, 밤색 장갑을 한 쌍 찾았다.

엔크리드는 몽땅 챙겼다.

나머지는 이름 모를 풀과 또 뭔지 모를 물건들이었다.

하나같이 보기만 해도 찝찝한 게 챙길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엔크리드는 이제 돌아갈 요량으로 검을 닦아 넣는데, 쨍 하고 칼날 중간이 부러졌다.

"이런."

절로 탄식이 나왔다.

검을 너무 험하게 써서 그런 건 아닐 것이다.

마지막 마법사를 벨 때 묘한 저항감을 느끼긴 했다.

그게 원인일까. 알 순 없다.

어쨌든 미친 마법사가 꿍쳐 놓은 크로나로 또 검이나 사야 할 판이었다.

'이어 붙일까?'

발레리산 강철이라고 했으니 고치면 또 쓸 만할지도 몰랐다.

엔크리드는 그대로 뒤로 돌아 나갔다.

충격파를 여러 대 맞은 탓에 배가 욱신거렸고 골이 띵했지만, 버틸 만은 했다.

그리 걸어가던 엔크리드가 열 걸음도 안 걷고 돌아왔다.

"안 꺼지네?"

마법사가 주문으로 수작을 부린 줄 알았는데.

머리 위, 광원이 그대로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눈살을 찌푸리며 위를 보자, 빛을 뿜는 돌멩이가 둥둥 떠 있는 게 보였다.

'홀로 떠 있는 마법 도구라.'

크로나 냄새가 물씬 풍기지 않나.

'이건 뭐.'

고작 주먹만 한 돌이었다. 위로 툭 뛰어 낚아채니, 손안에서도 계속 빛을 뿜어냈다.

일단 나갈 때 횃불 대신 쓰기 좋을 물건이 될 듯했다.

엔크리드가 다시금 자박자박 걸어서 왔던 길로 돌아가고.

한참 뒤에야 검은 고양이처럼 보이는 레이크 팬서 한 마리가 바닥에 내려섰다.

'마법을 보고 피해?'

에스터는 몹시 놀랐다. 세상에 이런 재주를 부리는 놈이 있으리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물론, 상대 마법사의 실력이 형편없긴 했지만.

그러곤 또 새삼 깨달았다.

'내가 모르는 게 당연한 거긴 하지.'

그리 세상을 주유하며 살진 않았다. 오히려 은둔하는 삶을 살았지.

그러니 이런 재주가 있는 놈도 어딘가에는 있겠지.

어쨌든.

'횡재했네.'

에스터는 마법을 탐구하고 지식을 탐닉한다.

한때는 다른 마법사의 마도서가 궁금해 몇 개 훔쳐서 보기도 했었다.

에스터는 손톱으로 이리저리 물건을 뒤적이고는 코웃음을 쳤다.

'수준이.'

조악했다.

그녀 자신이 볼 때는 그렇다.

횡재는 이런 물건 따위가 아니라, 이쪽이었다.

바밀로라고 했던가.

마수, 마물, 인간의 시체로 기워 만든 존재.

마법사의 육체 능력을 보완하기 위한 가디언이었다.

흔히 마법사는 이런 걸 플래시 골렘이라 불렀다.

사람이 보기에 원초적인 불쾌감을 자극하는 존재겠으나.

마법사에게는 굉장히 쓸 만한 괴물이라 하겠다.

에스터는 없는 힘을 쥐어짜, 손톱을 세워 플래시 골렘 이마에 마법진을 새겨 넣었다.

검은 땅과 불의 세계.

그녀가 가진 주문 세계 너머에 기워 만든 괴물을 집어넣는 술식이었다.

죽은 마법사는 더없이 멍청했다.

처음부터 골렘을 깨웠으면 엔크리드의 승산이 더없이 낮아졌을 텐데.

물론, 그걸 자신이 그냥 두고 보진 않았겠지만.

곧 마법진을 새기는 작업이 끝났다. 술식을 통해 세계와 세계가 연결되며.

플래시 골렘의 전신이 조각나고 부서지기 시작했다. 먼지처럼 으깨져 사라진다.

에스터의 내면세계와 연결된 이계로 넘어가는 과정이었다.

골렘이 있던 자리에는 앉은 흔적 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걸 본 표범이 쌕쌕 숨을 몰아쉬었다.

에스터는 기진맥진했다. 남은 미량의 마나를 전부 소진했으니.

숙소로 돌아가 푹 쉬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래도 마지막을 장식하지 않을 순 없으니.

에스터는 플래시 골렘을 만든 마법사를 기리며 잊지 않을 이름을 지었다.

"본헤드."

그는 자신이 본 주문을 탐구하는 이들 중 가장 병신같은 놈이었다.

* * *

"도시 밑 하수구에 마법사가 있다고?"

"네."

"그리고 그걸 죽였고?"

"네, 그렇습니다."

엔크리드도 무덤덤했고, 중대장도 무덤덤했다.

이후 확인을 위해 그녀가 자리를 비웠고 엔크리드는 씻고 장비를 점검했다.

곧바로 마수 처리 의뢰에 지원할 생각도 있었는데, 검이 부러져 버렸다. 당장은 검을 구하는 게 급선무였다.

"...뭘 하고 온 거요?"

들른 숙소에서 렘이 엔크리드를 보고 물었다.

"부츠와 전쟁을 치르고 왔다."

"아니, 그 직공은 에고 부츠를 만드는 거요? 부츠가 그렇게 잘 싸운다고?"

반은 농담, 반은 놀람을 표현하는 말이었다.

에고 부츠는 에고 소드를 빗대어 한 말이고 에고 소드는 스스로 생각하는 검을 말한다. 물론 전설 수준의 얘기였다.

렘뿐 아니라 다들 엔크리드를 빤히 보는 게, 무슨 일이 있나 물어보는 눈치였다.

"보고부터 다시 하고 오마."

중대장이 곧 돌아올 터, 괜히 자리를 비워 책잡힐 일을 만들진 않는 게 좋을 듯했다.

"에스터는?"

밖으로 나가기 전, 엔크리드가 주변을 돌아보며 묻자 구석에 있던 아우딘이 답했다.

"자주 자리를 비웁니다. 저녁이 되면 형제님의 품 안으로 다시 돌아오겠지요."

걱정하지 말란 소리였다.

하긴, 영리하다 못해 영악해 보이는 표범이다. 누가 어찌 해하진 못할 것이다.

그대로 중대장의 집무실로 돌아가자 얼마 안 있어 중대장이 돌아왔다.

"있더군. 스펠 트랩도, 죽은 마법사도."

"네."

"도시 밑에 있던 잠재적 위험이었다."

"그렇습니까?"

"수고했다."

중대장의 농담을 경계하던 엔크리드가 군례를 보였다.

왼손으로 검 손잡이를 내리누르고 고개를 숙였다.

이후, 다시금 숙소로 돌아와 분대원에게 사정을 설명하자, 다들 놀랐다.

"거기서 마법사가 왜 나오는 거요?"

"음, 역시 베어서 죽이면 되는 겁니다."

"하수도에?"

"몹쓸 놈을 징치하셨군요. 형제님."

거기에 왜 마법사가 있는지는 엔크리드도 통 모를 일이었다.

부상까진 아니지만, 피로는 쌓였기에 이틀을 푹 쉰 엔크리드는 검을 이어 붙이려다가 대장장이에게 신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건 다 망가졌어. 안 돼. 무슨 짓을 한 건가? 뭐? 마법사를 베?"

대장장이가 엔크리드를 묘한 눈으로 바라봤다.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마법사 일은 묻기로 했다. 괜히 시민들이 알아서 좋을 게 없는 일이었으니.

위협은 있었으나, 이제는 없다.

아무도 모른다고 해도, 지켰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에 엔크리드도 큰 불만은 없었다.

"그 말이 진짜라고 치고, 내가 주문에 맞설 무기를 만들 위인으로 보이나?"

보더 가드에서는 꽤 알아주지만, 그렇다고 대륙에 이름을 날릴 만한 장인은 아닌 대장장이.

딱 그 정도였다.

엔크리드가 고개를 젓자, 대장장이가 답했다.

"앞으로는 그런 짓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이건 다시 못 써. 괜찮은 검? 지금은 없어. 하나 만들어 줘? 발레리산 강철은 없고 일반 철로 해야지."

발레리산 강철은 쉬이 구할 수 없는 물건이긴 했다.

"아쉬운데, 그건."

"며칠 기다려 보든지, 마수 때문에 일정이 좀 꼬여서 그렇지, 아는 사람이 이번에 누아르산 연철을 좀 들고 온다고 했으니. 비싼 건 알지? 두둑하게 들고 와야 할 거다."

대장장이가 말하며 손바닥을 펴 보였다.

군침이 도는 소리였다. 누아르산 연철은 보통의 연철보다 강도가 몇 배는 뛰어나, 무기에 쓰면 명검 소리는 못 들어도 대장간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비싼 무기가 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발레리산 강철보다 구하기 더 어려운 물건이고.

그러니 기대가 될 수밖에.

대장장이 가게에 들렀다가 나오는 길이었다.

"이봐, 이봐! 어이, 병사!"

익숙한 목소리가 엔크리드를 잡았다.

시장 한복판이었다. 가로질러 가는 길을 붙든 이가 반쯤 뛰다시피 걸어와 엔크리드를 향해 낡은 주머니를 내밀었다.

꽤 부피가 큰 주머니였다. 부츠 하나쯤은 너끈히 들어갈.

"자."

"뭡니까?"

"신발, 다 낡았더구먼, 신어."

신발 직공이었다. 그는 모르지만, 엔크리드는 벌써 수십 일을 봤던 구멍이 뚫린 구둣방의 주인.

"이걸 왜?"

"주면 그냥 받으면 그만이지, 뭘."

직공은 쑥스러운지 툴툴대며 돌아섰다. 그리고 엔크리드는 픽 웃음이 났다.

직공은 자신이 한 일을 모른다. 그저 의뢰를 처리한 것에 고마움을 느낀 게 전부였을 것이다.

부츠 하나.

괴이한 취미의 마법사를 죽인 것치고는 별거 없다 할 수 있겠으나.

부츠는 새것이었다.

마무리가 특별히 더 꼼꼼해, 어디 하나 거슬림이 없는.

그걸로 충분했다.

엔크리드는 부츠를 챙기고 숙소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

엔크리드는 손에 익진 않지만, 라그나가 비상용으로 갖고 있던 아밍 소드를 허리에 차고 마수를 죽이러 떠났다.

실전, 지금 필요한 게 실전이란 것에는 이의가 없었다.

조금, 마음이 급하기도 했다.

마법사의 굴을 탐험하며 얻은 경험을 어서 빨리 몸에 다 녹여 내고 싶었기에.

그는 어느 때보다 의욕이 넘쳤다.

"마수를 죽이러 가는 게 너무 신나 보이는 건 내 착각이요?"

렘이 함께했고 나가는 길에 웃으며 말했다.

"아니. 맞아, 신나."

엔크리드는 여느 때처럼 렘의 말을 잘 받아쳤다.

진심이기도 했다.

89. 과거를 곱씹되 후회를 남기지 않았기에

"진형 갖춰!"

지휘관은 외침이 울렸다.

다가오는 건 늑대 마수, 숫자는 여덟 마리다.

마수나 마물은 위협적인 존재다. 특히나 보더 가드는 상단과 행상이 뻔질나게 오가는 도시인지라, 주변 마물과 마수 소탕에 꽤 적극적인 편이었다.

"왜 겨울에 극성인지."

병사 하나가 툴툴거리면서 장창을 세운다. 엔크리드의 귀에는 그게 긴장을 풀려고 일부러 뱉는 말처럼 들렸다.

명령에 따른 스물의 병사가 늑대 마수에 맞서 단단한 방진을 구축했다.

마수는 일 대 다수로 상대하는 게 기본이었다.

소대장은 기본에 충실한 편이었다.

그리고 엔크리드는 그게 불편했다.

'이런 경우가 처음이긴 한데.'

대련으로 채울 수 없는, 그러니까 실전을 원해서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을 말하는 거다.

피를 보는 싸움, 그로 인해 얻은 것을 정리하는 시간, 그야말로 한 발짝을 내딛는 순간.

그게 엔크리드가 바란 것들이다.

장창을 들고 찔끔찔끔 다가오는 마수의 가죽을 찌르는 게 아니라.

이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료함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본래라면 마수를 보고, 오금이 저리는 게 정상이겠지만.

여느 때와 다르게 얌전하게 말을 따른 렘이 옆에서 낄낄 웃었다.

"욕구 불만인 표정 같수다."

본래라면 얼굴 볼 시간에 마수 눈깔이나 찌르라 하겠지만, 답답함에 절로 말이 나왔다.

"그게 보여?"

"이제 분대장도 모난 돌이 된 거요."

렘은 뜻 모를 소리를 하며 낄낄 웃었다. 그러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비범한 것과 미친 것은 한 끗 차이라는 거 몰랐수?"

몰랐다.

여기서 마수 여덟 마리 사이로 뛰어들면 어떻게 될까.

렘이 뒤를 받쳐 준다는 전제하에.

괜히 장창 스무 개로 찔러 대며 한 마리씩 죽이는 것보단 훨씬 빨리 끝날 것 같은데.

이렇게 상대해서 주변 마물과 마수는 언제 다 정리하지?

한참 걸리겠지. 시간을 버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까지 방진 훈련 또한 단 한 번도 소홀히 받은 적 없기에. 몸은 자연스레 방진 구성의 일원으로서 병사의 의무를 다했으나.

답답함은 여전했다.

옆에서 렘이 자꾸 낄낄 웃는데 그게 제 등을 떠미는 기분도 들었다.

왜 따라와서 이러는 건지.

엔크리드는 장창을 앞으로 내질렀다. 힘이 실린 창끝이 마수의 앞발 가죽을 훑었다.

"크르릉!"

통증에 반응한 늑대 마수가 송곳니를 드러냈고, 그걸 본 소대장이 놈의 머리를 놀려 창을 푹 찔러 넣었으나, 영악한 마수는 뒤로 내빼며 그걸 피했다.

거기까지, 본 엔크리드는 일부러 잡생각을 떠올렸다. 그게 아니라면 당장 뛰쳐나가서 검을 뽑아 베어 버리고 싶은 욕구를 참기 어려울 것 같다.

그의 머릿속에 우연히 기르게 된 표범이 떠올랐다.

'에스터.'

하수도의 미친 마법사 새끼의 머리를 쪼개고 돌아온 후, 얼마 안 있어 레이크 팬서가 힘이 다 빠져서 돌아왔다.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게 하수도에 돌아다니는 쥐라도 잡아먹은 듯했다.

도시 쥐 사냥에 너무 열중한 것이지, 기운이 다 빠져서는 바닥에 누워 숨만 쌕쌕 내쉬었다.

그게 안타까워 손수 육포를 물에 불려 찢어 먹였다.

에스터는 그걸 넙죽넙죽 잘도 받아먹었다.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건지.'

컹!

잡생각 사이다. 늑대 마수가 창이 닿는 거리에 다가왔다.

엔크리드는 머릿속 한쪽에 떠오른 에스터를 뒤로 미루며 다가온 늑대 머리통을 장창으로 찔렀다.

푹.

머리 가죽 일부가 찢기며 피가 튀었다.

"자리 뺏기지 마!"

소대장의 외침이 들렸다.

다가오려는 마수와 마수 주변을 위협하며 창날을 찔러 대며 거리를 유지하는 부대.

쉬이 끝날 싸움이 아니다.

달려들던 마수 무리가 창날에 몇 번 찔리곤 뒤로 물러났다.

이게 맞긴 하다.

이게 정석이긴 한데.

여전히 답답하다.

병사를 이끄는 소대장이 보였다.

전신이 탄탄해 보이는 멀끔한 인상이다.

저 작자가 2중대였던가, 3중대였던가.

답답함과 갑갑함을 품은 채, 엔크리드는 장창을 놀렸다.

고명한 솜씨라 보긴 어렵다. 그저 찌르고, 당기는 게 전부다.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기분이었다.

창은 영 손에 익지 않으니.

만약 창을 주로 썼다면 검보다 더 못 쓰지 않았을까 싶다.

라그나가 말했었다.

"검이나 창, 다루는 무기에 따라 손에 익는 게 다를 수도 있습니다."

보통 기사는 다양한 무기를 다루는 걸 장려하긴 한다.

그래서 기본은 배우긴 했으나, 그중 검만이 손에 착 달라붙는 느낌을 줬다.

'검.'

오롯이 검.

처음 쥐었을 때부터 오랜 시간 알아 온 친구를 만나는 것 같았다.

처음 검을 잡았을 때의 희열. 기쁨. 기대감.

두근거리는 심장, 날이 선 쇠붙이의 온기.

'아, 검 쓰고 싶다.'

마법사의 굴에서 얻은 경험을 되새기고 싶은데.

장창이 아니라 검을 휘두르고 싶은데.

"소원 성취해 드리지."

옆에서 렘이 중얼거렸다. 엔크리드의 시선이 그에게 향할 때쯤, 렘은 이미 앞으로 튀어 나가는 중이었다.

"날 새겠네!"

렘이 신명 나게 외치며 나간다. 목소리에 쾌활함이 깃들었다. 땅을 박찰 때마다 바닥의 흙이 치솟는다. 역동적이었다. 달리는 모습이 늑대 마수보다 거칠어 보였다.

"저 미친 새끼가!"

기다렸다는 듯 소대장이 버럭 화를 냈다. 방진을 지킴으로써 마수를 상대하는 게 기본이다. 방진이 흐트러지면 다른 병사의 목숨도 위험해지니.

튀어 나가는 건 잘못된 게 맞다. 엔크리드도 그걸 잘 알았다.

하지만.

'아예 마수를 다 죽이면 되잖아.'

못 참겠다.

말 그대로 욕구 그 자체를 참을 수 없었다. 당장 나가서 검을 휘두르고 경험을 되새기고 싶은 그 욕망.

엔크리드는 내심 눈을 감았다. 잠시 이성적인 판단보다 육감에 의존했다.

감을 따라, 엔크리드도 장창을 던져 버리곤 땅을 박차고 앞으로 뛰었다.

"아니, 넌 또 왜!"

소대장의 외침이 뒤로 밀려난다.

렘의 돌발 행동은 소대장의 인지 범위 안이었다.

하지만 엔크리드는 아니다.

그러니 화들짝 놀랄 수밖에.

"신났수?"

뒤따라온 엔크리드를 인지한 렘이 말하며 도끼 두 자루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두 자루 도끼날이 허공에 궤적을 그린다. 궤적의 끝은 당연히 참살이었다.

첫 도끼질이 막 정면으로 다가온 늑대의 머리통을 쪼개고, 두 번째 횡으로 가른 도끼가 땅을 차며 옆으로 돌아서 팔을 물어뜯으려는 마수의 턱을 쪼갰다.

도끼 두 자루는 처형대의 칼날이었다.

"조금."

인정할 건 인정하고.

엔크리드도 검을 뽑았다. 뽑으며 크게 수평으로 벤다. 마수 한 마리가 달려들다 말고 앞다리가 베였다.

"깽!"

마수라도 뱉는 신음은 개와 비슷했다.

엔크리드는 수평으로 뻗은 팔을 당겨 수직으로 내려쳤다.

늑대 마수의 머리가 걸려 쪼개지고.

퍽!

머리통을 쪼갠 검을 당겨 옆으로 달려오는 늑대의 머리통을 검을 쥔 주먹으로 후려쳤다.

뻑!

머리통을 맞은 놈이 옆으로 나뒹굴었다.

고작 여덟 마리.

'언제부터 여덟 마리 마수를 고작이라고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 엔크리드가 느끼기에 이들은 위협이 되지 않았다.

도끼가 머리를 쪼개고 검이 늑대를 가르고 벤다.

손에 쥔 아밍소드는 롱소드보다 베는 맛은 떨어졌지만, 그래도 썩 나쁘진 않았다.

라그나가 같이 오지 못해 아쉬워했는데.

여덟 마리 중 한 마리는 방진을 짠 병대의 장창에 죽었고.

나머지 일곱 중 넷이 렘의 도끼에.

셋은 엔크리드의 검에 쪼개졌다.

발군의 솜씨였다.

괜히 상급 병사라는 지위를 따낸 게 아니라는 방증과도 같기에.

"와 씨, 더럽게 잘 싸우네."

병대를 구성한 병사 하나가 감탄성을 섞어 중얼거렸다.

소대장은 버럭 화를 내야 했다. 그래야 했는데.

'할 말이 없게 하는군.'

말 그대로 싸우긴 더럽게 잘 싸우네. 마수를 상대하는 데 있어 방진을 짜는 게 기본이라면.

비범한 전력을 지녔다면 그걸 쓰는 것도 지휘관의 소양이다.

소대장은 화를 내는 대신, 효율성을 따졌다.

이건 엔크리드와 렘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고지식하게 따지면 둘은 명령 불복종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소대장은 엔크리드의 존재 자체를 높게 샀다.

예전부터 몇 번 스치듯 봤었는데, 그때는 영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언제 이만한 실력을 키운 걸까.

소문대로 갑자기 실력이 늘어난 걸까.

모른다.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다.

그저 결과만 따질 뿐.

'상급 이상이다.'

변방의 학살자라 불리는 수비대원 중 하나라고 해도 믿겠다.

실제 그들이 마수 토벌에 나서면 이런 방진을 유지하는 게 아니라 개인의 실력으로 맞서곤 하니까.

"너희 둘."

소대장은 둘을 나무라는 대신 전장을 주기로 했다.

싸우고 싶다면 싸우게 해 주는 거다.

"골치 아픈 마수가 나온 곳이 있다. 거기로 가라."

"그렇습니까?"

죽은 마수 사이, 주술파괴자 엔크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덤덤한 태도에 병사 중 일부가 환호 비슷한 걸 뱉었다.

어쨌든 마수를 쓸어버리지 않았나.

이거로 이쪽 의뢰는 끝나고 이쪽 부대는 다른 곳을 지원하러 갈 것이니, 잠깐은 쉴 수 있을 것이다.

그 누구도 마수와 목숨 걸고 맞서 싸우는 걸 즐기지 않는다.

비범하거나, 미치거나.

적어도 둘 중 하나는 돼야겠지.

"우리는 도시로 돌아가 재정비한다."

소대장이 부대를 이끌고 물러나기로 하고.

엔크리드는 렘을 슬쩍 봤다. 도끼에 묻은 마수의 피를 대강 닦아 내던 렘이 씨익 웃는다.

"빚진 거요?"

"빚은 무슨."

말은 그렇지만, 덕분에 속이 시원하긴 했다.

하지만 여전히 갈구하는 마음이 더 컸다.

'부족한데.'

늑대 마수 몇 마리로는 채울 수 없는 갈증.

대련이 아닌 실전.

엔크리드의 가슴에 지펴진 불이 활활 타올랐다.

"갑시다. 다른 데로 가라잖아."

렘이 말했다.

부대로 돌아가게 된 병사 중 몇이 다가와 엔크리드의 가슴을 툭 쳤다.

"덕분에 먼저 가오."

실실 웃는 병사의 얼굴이 낯익었다.

엔크리드는 기억을 더듬었다.

첫 번째 오늘을 반복할 때 주사위 노름판에 있던 병사다.

그가 엔크리드의 손에 깨끗한 천에 감싼 육포를 쥐여 줬다.

"드셔 봐. 끝내줄 테니."

그가 말하고 돌아섰다.

그 병사뿐 아니라 몇몇이 눈으로 호감을 표했다.

잘 싸우는 병사, 아군은 언제나 우대받는 법이니.

엔크리드는 거기에 성격도 무난해 평판도 나쁘지 않았다.

렘과는 달랐다.

다들 렘이랑은 적당히 거리를 뒀다.

야만인 출신인 것도 있지만, 성격이 거칠고 심심하면 아무나 붙들고 시비를 거는 취미가 너무 잘 알려져 있었다.

"같이 싸웠는데 대우가 다른 것 같수다. 이건 뭐, 차별인가?"

"업보겠지."

엔크리드는 말하며 육포를 쭉 찢어서 나눠 줬다.

그리고 한 입 베어 무는데.

'다른데.'

맛있었다. 부드러운 육포 조각이 입 안을 휘돌다 꿀떡 넘어갔다.

간도 적당했고 무엇보다 무슨 양념을 발라 뒀는지, 달짝지근한 맛이 났다.

"뭐냐, 이거 왜 맛있수?"

"그러게, 나중에 더 달라고 해야겠는데."

무슨 비법으로 만들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엔크리드는 손에 낀 장갑을 당겼다.

두툼한 가죽으로 만든 밤샘 장갑은 그대로 손을 감싸 튼튼하게 지켜 줬다.

하수구에 살던 시신 애호가 마법사의 물건 중 하나였다.

특히나 늑대를 후려칠 때, 예상하던 것보다 훨씬 작은 충격이 돌아왔다.

이것도 괜찮은 물건이란 소리다.

마법사가 한 짓은 참 찝찝했지만, 물건이 무슨 죄인가.

장갑은 튼튼했다. 가죽을 몇 장이고 덧대 만든 것 같은데, 방어력은 물론이고 주먹질하기에도 좋아 건틀렛 대용으로 쓰기도 좋았다.

갬비슨 안에 두른 몸통 가죽 갑옷도 든든하긴 마찬가지다.

무려 마법사의 수작에 자신을 지켜 준 물건 아닌가.

크라이스가 보통 물건이 아니라 했을 때는 그저 튼튼한 물건일 줄 알았는데.

든든한 장비와 새로이 깨달은 것까지.

엔크리드는 투지를 불태우며 말했다.

"가자."

소대장의 지시다. 엔크리드는 렘과 함께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도시를 중심으로 남쪽으로 반나절.

아군 부대가 집결한 곳으로 향했다.

"여긴가 본데."

"그런 것 같수다."

간단한 약도와 안내로만 찾은 곳이다.

도착한 곳은 아예 진지가 구축되어 있었다.

마수나 마물 토벌이 어지간히 본격적이지 않으면 이렇게까지 진지 구축을 하진 않는다.

무엇보다 현재 한창 소란이 이는 중이기도 했다.

오기 전에 하늘에 뭔가 날아다니는 것 같더니만.

엔크리드가 중얼거리며 전장에 합류했다. 렘이 그 뒤를 폴짝폴짝 뛰어와 따라붙었다.

"끼아아악!"

머리 위로 울음이 터져 나온다. 끔찍한 마물이 제 존재를 알렸다.

그 아래로 눈알이 파였거나, 팔이나 다리 몸 여기저기가 할퀴고 파인 병사 몇이 나뒹구는 게 보였다.

"내 눈! 내 눈!"

"아아아악!"

"시발! 죽여! 죽여!"

쇠뇌병 몇이 하늘을 향해 볼트를 쏴 댔다.

투두두두둥!

볼트가 허공을 갈랐고, 목표는 하나도 맞추지 못했다.

"까아아아!"

마물의 울음, 듣기에 끔찍한 소음이었다. 절로 귀를 막고 싶은.

이곳은 전장이었다.

상대는 마물과 마수였고.

날아다니는 마물의 바로 밑, 중갑으로 소대 단위로 뭉친 부대가 병진을 만든 게 보였다.

전원 사슬 갑옷을 두른 중갑보병이다. 그러니까 중갑보병으로 구성된 중대인 1중대다.

"전원 제자리이이!"

보병 중대 지휘관의 외침이 터졌다.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마물의 이름은 하피.

여성의 상체에 양팔 대신 날개, 하체는 독수리의 그것과 같은 마물이었다.

붉은 깃이 허공에 휘날리고 하피의 가슴이 출렁거렸다. 여성의 그것과 같은 가슴이나, 그게 성적인 느낌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오히려 불쾌감을 줄 뿐이지.

하피를 본 엔크리드는 순간 몸이 굳었다.

과거, 한때 동료의 죽음을 두고 돌아서야 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하피의 출현은 용병 몇의 발악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죽음과 죽음, 그리고 도주.

아픈 기억이다.

친구라 부를 순 없지만, 십수 명의 동료를 잃었으니.

끼이익!

하피의 울음은 사람의 정신을 흔드는 효과가 있었다.

떠오른 놈들만 해도 다섯 마리가 넘었는데.

쇠뇌병 다섯이 하늘을 향해 겨누고 있으나.

조금 전 봤듯이 맞춰 떨어뜨리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그리 전장에 들어선 직후다.

"어째 재밌는 일이 있을 것 같더니, 괜찮수?"

옆에서 렘이 물었고 그 순간 새로 들어온 둘을 향해 하피 한 마리가 쇄도했다.

쌕!

바람을 가르는 낙하다. 독수리를 닮은 발톱은 강철만큼 단단하기에 저기에 걸려 눈알만 파였다면 그건 운이 좋았다고 봐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머리통이 찢겨 터졌을 테니.

다가오는 하피 모습에 엔크리드는 과거의 기억을 곱씹었으나, 그건 잠시였다.

그는 지나간 일에 후회를 남기지 않았다.

그보다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에 힘을 실었다. 엔크리드의 삶이 그러했기에.

치링.

검을 뽑는다.

순간 주변에 느려지는 착각, 동시에 점과 선을 잇는 동선을 그려 내고 육감이 경고성을 발했다.

야수의 심장이 주는 대담함이 엔크리드는 전신에 힘을 실어 주니.

떨어지는 하피의 궤적에 맞춰, 홀로 느리게 느끼는 시간 속, 엔크리드의 검이 움직였다.

90. 정답이었다.

중갑보병 중대 소속 4소대장은 중앙에서 최근에 이쪽 부대에 전입된 지휘관이었다.

'지랄 났군.'

부대에 소속된 김에 적응과 실전 훈련도 할 겸, 마물 소탕 임무를 나선 참이었다.

물론 그런 것치고는 규모가 큰 편이긴 했다.

대규모 인면견 무리 소탕이 본래 임무였으니.

그래도 괜찮았다.

중장보병이 괜히 크로나 잡아먹는 병과란 소리를 듣는 게 아니었으니까.

결론적으로 아군 부대의 위력을 알기에 나선 길이었는데.

갑자기 하피가 튀어나왔다.

난감한 상황이었다.

왜 갑자기 하피인가.

지원을 부르고.

중갑보병으로 방진을 짜고.

그사이 부대를 지원하는 병사 몇이 죽었다.

쇠뇌가 괜히 허공을 가르는 사이, 지원군이 왔다.

달랑 경갑보병 둘.

'장난해?'

그것도 겁도 없이 하피의 공격 영역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저건 자살이다.

지휘관은 엔크리드를 몰랐고, 렘을 몰랐다.

그는 최근 전입되어 부대 내 분위기에 적응 중이었다.

물론 주술파괴자니, 상급 병사 사고뭉치 분대장이니 하는 건 들었지만, 거기까지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그러다 나온 소탕 작전이었기에 둘을 보자마자 화부터 났다.

"이런 씨!"

절로 욕설이 튀어나온다. 중갑보병과 경갑보병 사이에 은근한 알력이 있다고 해도.

제 눈앞에서 동료가 죽는 걸 보는 게 즐거울 리가 없었다.

하물며 하피한테 머리통 따위가 뜯기는 걸 누가 보고 싶단 말인가.

경갑보병 둘은 엔크리드와 렘이었고, 실상 이 둘만 달랑 나타난 건 다른 부대원을 굳이 기다리지 않고 둘이 먼저 합류한 탓이었다.

그러니 본대에 요청한 지원 병력인 궁병대는 아직 도착도 안 한 거고.

"야, 뒤로...!"

마음이 급해서 전하려는 말이 전부 나오지 못했다. 그는 도망가거나, 대가리를 숙이라고 하고 싶었다.

이쪽에서는 하피의 발톱과 공격을 버틸 수 있는 구조다.

두꺼운 천갑옷 위 사슬갑옷, 다시 그 위로 얇은 철판을 덧댄 흉갑과 강철로 만든 건틀렛에 그리브까지.

거기에 사각 방패를 들고 방어 진형까지 구축했다.

거북이 중갑보병대란 별명에 걸맞은 전략적 방어 태세다.

지원군이 오기까지 버티기 충분하다는 거다.

그러니, 이쪽보다 만만한 이들이 하피에게는 더 쉬운 먹이였을 터다.

하피가 새로 온 먹잇감을 발견, 한 마리가 무서운 속도로 쇄도했다.

지휘관의 눈에 붉은 깃이 훅하고 밑으로 떨어지며 긴 궤적을 그리는 게 보였다.

돕고 싶어도 도울 수단이 없었다.

이젠 얌전히 뒈지는 걸 보고 후일 복수를 기약할 도리 밖에.

그리 하피의 발톱에 병사의 머리통이 쪼개지기 직전이다.

칭.

슈컥.

지휘관의 귀에 쇠의 마찰음과 살을 베는 파육음 따위가 들렸다.

그의 눈에 보인 건 하피의 등판뿐이었다.

하피의 몸집은 성인 남성과 비슷하기에 떨어지는 하피에 가려진 경갑보병이 무슨 짓을 했는지 정확히 보이진 않았다.

보인 거라고는 하피의 날개 한쪽이 찢어지며, 몸통이 실패한 물수제비처럼 바닥에 퍽 하고 나가떨어지더니, 허공에 한 번 퉁겨져 바닥을 구르는 모습뿐.

붉은 깃을 자랑하며 유방을 출렁거리던 하피의 반신이 피로 물들고, 흙먼지가 놈의 전신을 뒤덮었다.

"끼에에에에에!"

바닥에 널브러진 하피가 울부짖는다. 지휘관은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이거 뭐지?

"...어?"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 외마디 물음만이 남았다.

지휘관의 눈이 상황을 훑고, 곧 이해의 영역에 모든 걸 쑤셔 넣었다.

'하피가 날아왔고.'

그걸 검으로 벴다?

그게 돼?

쉬이 볼 수 없는 묘기였다.

다가오는 하피의 발톱이 조금만 어긋났으면? 타이밍을 놓치면? 베는 힘이 부족하면?

모든 게 문제 아닌가?

저런 짓을 한다는 것 자체가 미친 거다.

쇄도하는 하피를 상대로 저런 짓을 하는 놈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변방의 학살자란 변방 수비대에서도 저게 가능한 놈이 몇이나 있을까.

끼이익!

'우연, 행운.'

운이 엄청나게 좋은 거다. 자신만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었는지 머리 위, 떠다니는 하피 중 두 마리가 활공하며 둘을 노리고 다시금 지상으로 쇄도했다.

빨랐다. 하피의 발톱이 공기를 찢어발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지휘관의 눈이 지원군이랍시고 온 경갑보병 둘에게 꽂혔다.

하피가 들이치는 각도가 아까와 달랐기에.

지휘관의 눈에 둘의 대응이 명확히 보였다.

봤으나, 이해의 범주를 벗어난 움직임이었기에 여전히 할 말은 없었지만.

도끼를 든 병사는 날아오는 발톱을 몸을 꺾어 피하더니, 도끼를 휘둘렀다.

휘둘렀다는 것만 인식했는데.

어느새 쩍 하고 하피의 머리통이 수직으로 쪼개졌다.

머리통이 쪼개진 하피가 바닥에 곤두박질치며 퍽 하고 터진 토마토처럼 바닥에 흔적을 남겼다. 바닥에 미끄러지면서 생긴 긴 핏자국과 낭자한 마물의 피, 머리 터진 하피.

한 마리가 또 죽었다.

도끼질이 보인 광경이다.

나머지 병사 하나도 비슷한 짓을 또 했다.

처음 하피의 날개를 찢은 병사는 검을 들더니, 다시금 수직으로 벴다.

어떻게 저럴 수 있는지.

검을 휘두르는데, 칼날 앞으로 하피가 달려드는 것 같았다.

하피의 움직임을 예측해 검을 휘두른 결과다.

이 또한 묘기가 아니고 뭐겠나.

퍼억!

다만, 이번에는 조준이 엇나갔는지 하피의 가슴팍을 후려쳤고.

병사의 검이 하피의 반신을 쪼갰으나, 병사도 검을 놓쳤다.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지만.

끼엑.

여성의 유방을 닮은 하피의 젖무덤 두 개 사이에 꽂힌 검이다.

퍽 하고 바닥에 구르며 또다시 피를 흩뿌리는 마물이다.

내장을 쪼개고 부쉈으니.

저 또한 죽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지휘관은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위로 올렸다.

남은 하피의 숫자는 여덟.

이쪽은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나타나자마자 세 마리가 죽었다.

'변방 수비대?'

지휘관은 상대를 오해했다. 일개 병사라고 보기에는 실력이 너무 압도적이었으니까.

특급 병사라는 게 이 정도였나?

전출 오기 전 변방의 학살자에 관한 소문을 듣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런 지휘관의 눈에 둘의 뒤쪽 일부 무리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전원 투사 무기, 투창이나 장궁, 쇠뇌 따위를 들고 오는 이들이었다.

망토를 두르고 독수리 문양의 견장을 찬 이들.

진짜 변방 수비대다.

이들을 이끄는 수비대원도 상황을 확인했다. 두 눈으로 직접 보기도 했다.

'실력이.'

더 늘었다. 이제는 쉬이 이긴다고 확답할 수 없을 정도로.

수비대를 이끄는 건 토레스였다.

여러모로 엔크리드와 인연이 있는 변방 수비대 소속의 소대장이다.

마물을 죽이는 것만으로 상대의 실력을 가늠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다만, 토레스는 날아오는 하피를 상대로 저런 묘기를 할 자신은 없었다.

그것도 두 번 연속으로는 더더욱.

'운이 따라서?'

중갑보병 소대 지휘관과 똑같은 생각을 한 토레스다.

그런데 그 타이밍에 세 번째 하피가 날아들었다.

토레스의 시선이 하피에서 밑으로 떨어졌다.

그 자리에 막 죽은 하피의 가슴에서 검을 뽑는 엔크리드가 보였다.

"어이!"

토레스가 외쳤다. 위를 보라는 경고성이었다.

* * *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엔크리드는 점과 점을 이었고.

시간을 쪼갰으며.

직감이 이끄는 대로 검을 휘둘렀다.

그 결과 첫 번째 하피의 날개를 잘랐다.

"휘유."

옆에서 렘이 휘파람을 불었다. 손아귀에 남은 아찔한 저항감이 쇄도한 마물 하피의 묵직한 무게감을 알려 줬다.

벨 만했다.

무리는 없다. 이후 다시금 검을 든다. 하피가 날아오고 이번에는 가슴 정중앙을 베며 검을 놔 버렸다.

그대로 쥐고 있으면 손아귀가 찢어질 듯했다.

판단은 정확했다.

점과 점을 잇는 일격, 힘을 실은 검격.

결과는 마물의 죽음이다.

허리를 숙이며 검을 내려친 엔크리드의 머리 위로 하피의 발톱이 지나쳤다.

쌕 하고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섬뜩했으나, 위험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피하면 그만.'

단순한 공격 패턴이다.

피하고 베고 찌른다. 검술의 응용이다.

척척 걸어 죽은 하피의 출렁거리는 가슴 위, 인간이라면 빗장뼈 부위에 발을 얹고 검을 뽑았다.

"끼이익."

질긴 생명력이다. 가슴이 반쯤 쪼개져 그 안에 있던 내장 따위가 흘러내렸는데 눈을 깜빡였다.

아직 살아 있었다.

엔크리드는 제가 벤 하피를 보고 있었지만, 그의 감각은 주변, 특히 위에서 내리꽂히는 하피를 주시했다.

보지 않아도 공기의 파동이 느껴졌다.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한 감각이다.

"어이!"

외침이 들렸으나, 그보다 먼저 움직이는 중이었다.

죽어 가는 하피의 날개를 검 끝으로 찍고 힘을 줬다.

우득!

양쪽 팔 근육에 부하가 걸리고, 허리와 허벅지까지 힘이 실렸다.

그대로 죽어 가는 하피를 위로 들쳐 올렸다.

뻑!

날아오던 하피가 거기에 맞아 나뒹굴었다.

하피로 하피를 막은 뒤, 엔크리드는 흘리기를 응용해 충격을 분산시키려 옆으로 굴렀다.

의도하고 예상하여 몸에 남은 충격을 해소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구르자마자 일어난 엔크리드가 탁탁 뛰어서 바닥에 떨어진 하피의 머리통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장작을 쪼개듯 후려친 칼날에 하피의 머리통이 쩍 하고 쪼개졌다.

이거로 네 마리.

렘이 하나, 엔크리드가 셋을 죽였다.

처음 떨어진 놈도 이미 주변 병사가 쿼렐을 머리에 박아 뒀으니.

파닥파닥, 머리 위에서 날개를 퍼덕이던 하피 무리가 하나둘씩 멀어진다. 하피는 승산 없는 싸움을 하지 않는 놈들이었다.

놈들이 도망갔고.

엔크리드는 팔을 늘어뜨린 채, 속으로 아쉬움을 삼켰다.

'몇 번 더.'

싸우고 싶었다. 경험을 더 쌓아야 했다. 아직 배운 걸 익히고 되새기는 중이었다.

적응하고 배우는데 실전이 더 필요했다.

그럼, 하수구에서 얻었던 걸 완전히 몸에 붙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좋수?"

옆에서 렘이 낄낄대며 말했다. 눈치 빠른 야만인인지라, 자신의 상태를 이미 알아챈 듯했다.

"누가 보면 미쳤다고 하겠지만, 이 정도면 이제 비범한 실력이라 할 수 있수다. 근데 참 신기하긴 하단 말이우. 실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어떻게 또 하루 만에 이렇게 되는 건지."

깊게 파고드는 건 아니지만, 의문은 표한다. 당연했다. 하루 만에 최악의 재능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는 게 어디 정상일까.

엔크리드는 매일 하는 변명을 뱉었다.

"운이 좋았지."

렘은 운으로 실력을 이리 기를 수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따질 생각은 없었다.

아무렴 어떻단 말인가.

이 작자가 이리 신나서 검을 휘두르는 걸 보니, 자기도 재밌는걸.

"예전에 하피에게 쫓겨서 간신히 살아남은 적이 있었는데."

엔크리드가 중얼거렸다.

"그랬수?"

"그랬지."

딱히 감정이나 의미를 담은 말은 아니다.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는 정도지.

엔크리드는 그때 죽은 동료가 떠올렸다. 그리고 털어 냈다.

'이게 복수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하피 무리를 죽인 것에 만족감은 있다. 아쉬움이 더 큰 건 어쩔 수 없는 거고.

"둘, 소속이, 아니 근데."

거북이처럼 등껍질 방어 진형을 갖추고 버티던 지휘관이 다가왔다.

황당한 듯했다.

"4중대 4소대 4분대장 엔크리드입니다."

군례로 답하고 말하니.

"분대장? 변방 수비대가 아니라?"

아닌데.

"변방 수비대는 이쪽."

아는 얼굴, 토레스가 다가왔다. 그가 손을 들며 말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엔크리드에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눈이 엔크리드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훑었다.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실력이 늘었을까.

"지원을 오긴 했는데."

화살 한 발도 못 쏴 봤다.

이게 뭔지, 대체.

곧 중갑보병중대 4소대장과 토레스가 대강 인사를 나누고 상황을 정리했다.

엔크리드는 둘의 대화를 듣다가 대뜸 물었다.

자신에게는 꽤 중요한 문제였다.

"끝난 겁니까?"

"...뭘 묻는 건가?"

"마물 소탕, 이제 끝인 건지 궁금해서."

뭐지, 왜 묻는 거지?

하피 네 마리를 죽인 경갑보병 둘.

일반 병사 둘이 중갑보병소대를 구했다. 대단한 업적까진 아니지만, 포상받을 만한 일인 것 같은데.

그중 하나는 진지하게 이게 끝이냐 묻고 있고.

이민족으로 보이는 다른 한 놈은 옆에서 낄낄 웃기 바쁘다.

뭐지, 이 미친 새끼들 조합은.

소대장은 생각하며 답했다.

"본래 타격 목표는 무리를 이룬 인면견 무리 소탕이니, 끝은 아니다."

소대장은 파견 목적을 잊지 않았다. 보더 가드 주변에 인면견 무리가 집단을 이루는 바람에 상단을 비롯해 행상 무리의 발이 묶였다.

덕분에 나선 길 아닌가.

성벽 바깥, 상단이 오가는 가도에 인면견 무리가 나온 건 아니지만.

근처에 한두 마리씩 모습을 보이는 걸 미뤄보아 곧 문제가 생길 게 자명했다.

주변 마물과 마수를 소탕해 도시 안전을 보장하는 임무다.

"합류하고 싶습니다."

엔크리드의 말에 소대장은 생각했다.

'더 싸우고 싶다는 건가? 싸우고 싶어 안달 나 보이는데? 내 눈이 이상한 건가?'

눈이 이상한 게 아니라 정확한 거였다.

소대장이 보는 게 정답이었다.

91. 특수 소대

인면견.

마물과 마수의 중간 어디쯤 있는 놈들이다.

노인과 비슷한 얼굴을 한 사족보행의 마물.

또는 인간의 그것과 닮은 얼굴을 한 갯과의 마수.

사실 그게 무슨 상관인가.

마물과 마수는 인간을 먹이로 삼는 놈들.

죽여야 할 대상일 뿐이다.

마물과 마수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아무도 모르나.

엔크리드가 태어났을 때부터, 아니 이 세계가 존재하면서도 마물과 마수의 위협은 있었다.

구울, 하피, 스켈레톤 등 종류도 다양했다.

마물과 마수의 차이는 단순했다.

마수가 짐승의 그것을 닮았다면 마물은 개별적 특징을 보였다.

그중 인면견은 무리를 이루면 겁대가리를 상실하는, 마수와 마물의 중간쯤 있는 괴물이었다.

"전진."

대강 봐도 쉰 마리가 넘는 무리였다. 크르르 하는 울음을 토해 내며 중구난방 흩어져 있던 인면견 무리다.

그걸 발견하자마자 중갑보병대 지휘관이 말했다.

중갑보병, 장비에도 훈련에도 가장 비용이 많이 드는 병과다.

걸친 무장이 무거워 기동력이 떨어지고, 같은 이유로 투창을 들거나 궁병이 될 수도 없다.

갑옷의 무게가 역동적인 움직임을 제한하기에 경쾌한 돌격 따위를 할 수도 없으나.

전신을 막는 무장, 사각 방패, 그사이 삐죽 솟은 장창.

오롯이 이것만으로 중갑보병대는 평야 회전에서 압도적인 효율성을 보였다.

지금도 그랬다.

황무지를 가로지르는 중갑보병의 걸음은 느렸다. 황토 먼지가 크게 일어나지도 않았다.

차분히 한 걸음씩 멈추지 않고 나아갈 뿐.

그런데도 인면견 무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인면견의 주요 공격 수단은 발톱.

그 발톱이 아무 효용 가치가 없었으니까.

'압승.'

하늘에서 노는 하피조차도 중갑보병대에는 타격을 줄 수 없었는데, 인면견 무리 따위가, 상대가 될 턱이 없다.

퉁!

발톱을 휘둘러 봤자 방패에 막힐 뿐이었다.

가끔 방패 사이 틈에 발톱을 밀어 넣는다고 해도.

탕.

철판으로 무장한 갑옷에 흠집만 날 뿐이다.

더욱이 그런 인면견은 열에 하나도 되지 않았다.

대부분은 중갑보병이 든 방패 전진에 막힐 뿐.

"카앗!"

듣기 껄끄러운 인면견의 비명이 터졌다.

앞발로 사각 방패를 후려친 놈이 방패 사이에서 쭉 하고 뻗어 나온 장창에 옆구리가 뚫리며 몸통이 꿰였다.

인면견 몸통이 창날에 꿰여 달랑거리자, 일선에 선 병사가 들고 있던 방패로 인면견의 몸통을 밀어내 창날을 쏙 빼냈다.

옆구리에 구멍이 난 마물이 바닥을 굴렀다.

깨개갱 하는 비명이 곧 단말마가 됐다.

그 위를 중갑보병이 밟고 지나가 으깨 죽여 버렸으니.

퍽, 퍽.

그들의 무게를 고려해 봤을 때, 밟는 것만으로 훌륭한 확인 사살이 될 터였다.

방패로 막고 장창으로 찌른다.

단순하지만 효율적인 전략이다.

상대가 사람도 아니고, 마물이다. 어찌할 수 없는 거다.

중갑보병이 그리 인면견 무리를 해치우는 동안.

왼쪽 구릉을 차지한 특임대, 변방수비대가 원거리 공격을 퍼부었다.

장궁과 쇠뇌 부대다.

장궁수 다섯과 쇠뇌수 열다섯.

한쪽 면을 틀어막아 화살과 볼트를 쏟아 내니, 그걸 피해 인면견이 한쪽으로 몰리고.

몰린 쪽은 중장 보병이 막았다.

엔크리드와 렘도 구경만 하지 않았다.

쉰 마리의 인면견 무리 뒤편으로 어디서 계속 꾸역꾸역 나와 합류하는 놈들도 있었다.

"저건 우리가 잡는 게 맞는 거 같수다!"

렘이 전에 없이 신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엔크리드는 대답하는 대신 발을 뗐다. 그가 오히려 렘보다 더 빨리 뛰쳐나간 셈이었다.

아직 가슴 속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러 몸에 밴 것을 증명하는 시간.

그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는 중이었다.

목숨을 걸고 싸우되, 죽을 것 같진 않다.

언제 이런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던가.

그게 엔크리드를 묘한 기분으로 만들었다.

겨우 인면견 열댓 마리 사이에서는 죽을 것 같지 않기에, 죽음의 위기 따윈 없을 듯했다.

왜 이런 확신이 드는가.

렘이 함께라서?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생각은 나중 일이었다.

달린다. 중갑보병은 보일 수 없는 속도와 역동성이다.

대담함과 집중력으로.

뛰다 말고 허리를 낮추며 검을 휘둘렀다.

땅과 수평으로 날아가는 검이다.

스컥! 퍽!

그러자 첫 번째 마중 나온 인면견의 주둥이가 잘리고, 주둥이를 가르고 마저 휘두른 검에 다른 인면견의 머리가 걸렸다.

두 번째 놈, 머리통을 맞은 놈도 눈깔과 이마가 찢어져 터졌다.

검을 뽑아 휘두름과 동시에 두 마리를 처리한 셈.

엔크리드는 그대로 왼발로 땅을 찍어 몸에 제동을 걸며 스텝을 밟았다.

왼발을 축으로 삼아 오른발을 그 뒤로 빼며, 몸을 한순간에 옆으로 돌린다.

몸을 돌림과 동시에 검을 수직으로 들었다가 내리쳤다.

교본에 나와도 할 말 없는 중검식 수직 베기였다.

쩍!

거기에 걸린 인면견의 머리가 쪼개졌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친다. 검을 베고 휘두르고.

다시 앞을 바라보고 다가오는 인면견의 머리를 주먹으로 후려친 후, 그사이 정강이를 물려던 놈은 검 끝을 수직으로 꽂아 머리통에 구멍을 뚫어 줬다.

두개골을 부수는 느낌이 손에 오롯이 남았다.

검을 뽑을 틈을 주지 않으려고 하는데, 옆에서 번쩍 하고 도끼가 궤적을 그려 냈다.

렘이었다.

호쾌한 돌격과 호쾌한 참격이다.

그 도끼에 걸린 놈들은 가차 없이 몸통이든, 머리가 잘렸다.

엔크리드는 눈을 돌려 달려드는 마물 무리를 보았다.

이전이었다면 겁부터 났을 듯한 광경이나, 이제는 아니다.

담대함의 심장이 뛰기에 덤덤하게 싸울 수 있었다.

머리는 더없이 차갑다. 짓쳐들어오는 마물을 베기 위해 최선을 동선을 거듭 떠올리기 바쁨에도 어디로 움직여야 유리한지를 계산했다.

머리는 차가우나, 반대로 심장은 더없이 뜨거웠다.

고양감.

타오르는 감각이 몸과 감각을 상승시키기에.

'된다.'

하수도의 마법사를 상대하며 배운 것들이 몸에 붙는다. 분대원과 머리통 싸매며 훈련하던 것들이, 실전을 통해 하나씩 쌓이는 과정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렘은 엔크리드를 보며 성벽 축조 과정을 떠올렸다.

한때 일꾼을 가장해 성벽 축조에 동원된 적이 있었는데.

묵직한 돌을 어찌어찌 들고 와 하나씩 쌓아 올리는 과정.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지루하고 지난한 과정.

결국, 인내심을 요구하는 과정.

'신기하긴 해.'

엔크리드의 성장세를 보다 보면 신기하다는 생각만 들 뿐이다.

기실 그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보기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다.

매일 돌을 하나씩 쌓는 것도 못 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수십 개의 돌을 쌓는다.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 걸까.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았고.

그저 흥미를 더 돋울 뿐.

'재밌수다. 재밌어.'

"꾸엑!"

마지막 남은 인면견의 머리에 볼트가 박혔다.

어느새 한쪽으로 몰아 마물 무리를 죽인 뒤, 다가온 토레스다.

토레스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아쉬워, 우리 부대로 넘어와야 했는데. 왜 아직도 분대장질을 하는 거야?"

그건 1중대 소대장도 궁금한 참이었다.

저만한 실력으로 왜?

렘과 인연이 있는 병사 몇이 그를 노려보는 걸 엔크리드가 몸으로 슬쩍 가렸다.

1중대에서 상관을 두들겨 패고 온 렘이다. 저들과는 항상 사이가 나빴다. 특히나, 렘이 더 도발하는 경향도 있고.

그렇게 사고를 예방한 뒤에야 엔크리드가 입을 열었다.

"제 분대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아직 없습니다."

엔크리드는 현실적인 문제를 짚어 냈다.

만약 그가 소대장이 된다면, 당장 444분대는 누가 맡을 것인가.

"어쨌든, 수고했다."

한껏 차오른 고양감은 이제 슬며시 가라앉았다.

앤크리드는 물음에 답하긴 했으나, 그리 심각하게 듣지도 답하지도 않았다.

엔크리드의 머릿속에는 오롯이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정리가 필요해.'

싸워 보니 알겠다. 자신의 가진 것을 한 번쯤은 깔끔하게 정돈할 필요가 있다는걸.

그동안 몇 가지 기술을 엮어 써서 상승 작용을 일으키기도 했고.

검술에 적용하기도 했다.

이제까지는 되는 대로 상황에 맞춰 썼기에, 오히려 정립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이런 경험 또한 처음이었기에 엔크리드는 새삼 다시 희열을 느꼈다.

스스로 필요한 걸 찾는 것.

그 자체가 흔치 않은 일이었다.

언제나 앞은 까만 어둠이었고 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그 보이지 않던 길에 자꾸 이정표가 생기니.

너무 기뻐 참을 수 없었다.

그게 엔크리드가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보인 이유다.

렘조차 그의 속을 짐작할 수 없었고.

당연하게도 토레스와 중갑보병 소대장도 마찬가지였다.

싸움이 끝난 시점이다. 승리에 취해 기뻐하는 일? 그런 싸움이 아니다.

이기는 게 당연하고, 죽이는 게 당연한 토벌이었다.

그런데 피를 뒤집어쓰고 날뛴 병사 하나가 갑자기 더없이 즐겁다는 듯 웃질 않나.

중갑보병 소대장은 그걸 보며, 한겨울에 뜨거운 물 속에 몸을 담글 때나 나올 법한 그런 미소라고 생각했다.

"...그, 살짝 이상이 있소?"

1중대 소속 소대장이 토레스의 곁으로 붙어, 제 손으로 슬쩍 제 머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물론, 시선은 엔크리드를 향해서다.

"정상이라고 말하기 힘든 사람이긴 한데."

토레스가 말끝을 흐렸다.

지금의 웃음보다, 그는 엔크리드의 평소 생활에 무게를 두고 한 말이었다.

어떤 미친놈이라도 부대 내에서 사고뭉치 분대장처럼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진 않을 테니.

"뭘 봐?"

"...이 개새가."

엔크리드가 방심한 사이, 렘과 1중대 사이에 시비가 붙었다.

엔크리드는 급히 렘을 말리려고 돌아갔고, 토레스를 비롯한 이들도 장내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 * *

의뢰 두 번, 하나는 중대장 선에서 묻었기에 마법사를 죽인 건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마물 토벌은 전부 알았다.

렘과 둘이서 늑대 마수를 벤 것부터.

하피를 검으로 상대한 것까지.

렘이 한 일에 놀라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를 모르는 사람이야 한두 번은 놀라겠지만, 애초에 뛰어난 실력 덕에 부대에 붙어 있는 존재였으니까.

"렘 새끼가? 원래 잘 싸우는 놈이라."

"성격만 좋았으면 대대장도 해 먹지 않았을까?"

부대 내에 소문이 퍼졌을 때 병사 무리를 놀라게 한 건 엔크리드 때문이었다.

상급 병사, 병사 등급제에서도 상위는 맞다.

하지만 모든 상급 병사가 그런 짓을 할 순 없을 것이다.

하피를 상대로 칼질을?

아니, 그런 무식한 짓을 왜?

그런데 그 무식한 짓으로 하피를 죽였다고?

한 마리만 간신히 죽였다면 우연이라고 할 텐데.

세 마리다.

소문은 무섭게 퍼졌다.

"아니, 뭘 어떻게 했길래."

"언제라도,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엔크리드? 그 사고뭉치 분대장이?"

"저번에는 주술 파괴했다고 하지 않았어?"

"허, 전에 붙었을 때는 간신히 상급 아닌가 싶었는데."

말이 많이 나올 법도 했다.

인면견 무리를 해치운 것도 인상적이었는데, 그걸 본 이들이 한둘도 아니었기에.

"그런데 왜 아직도 분대장이냐?"

소문과 의문이 부대 내에 퍼진다. 대대장의 귀까지 들어가는 게 당연했다.

대대장은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덕분에 요정 중대장이 불려 가서 질문을 받았다.

"고작 분대장에 머물게 하는 게 맞나?"

"분대가 워낙 특별한지라."

"포상금을 줄 여력이 없으니, 지위를 높여 주는 게 맞을 것 같은데."

나우릴리아 왕국의 제도는 명확했다.

잘하면 잘한 대로 더 준다는 것.

그게 핵심이었다.

괜히 병사 등급제나 병사 용병제 같은 정책을 쓰는 게 아니다.

대가는 포상금 또는 명예.

대대장은 제 잇속을 위해 포상금 대신 지위를 주자고 했다.

중대장은 사고뭉치 분대의 특이성을 잘 알았다.

엔크리드를 소대장으로 올려선 통제 불가한 분대가 될 것이다.

그럼 색다른 방법을 통용시키면 될 것이다.

"그러죠."

군례를 보이고 중대장은 돌아섰다.

그녀는 대대장도 만족하고 현재 편제도 유지하는 기책을 떠올렸다.

그렇게 엔크리드는.

"제 휘하 대원은 열이 전부입니다만."

"그거랑 상관없이 오늘부터 소대장의 위와 같은 직급을 가진다. 불만 있나?"

"없습니다."

상관의 말이다. 엔크리드는 굳이 따질 이유가 없다.

하물며 상대가 요정 중대장이다. 괜히 농담의 대상이 되는 게 더 껄끄럽다.

"가 봐."

그렇게 소대장의 위를 받게 된 거다.

"이제 소대장이라고 불러야 하는 거요?"

"오, 소대장님, 봉급이 오른 겁니까?"

"그럼, 우리는?"

"형제님, 축하드립니다."

"내 검 칼날이 다 나갔던데."

이게 축하의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 라그나는 확실히 축하의 말도 아니긴 하지만.

실상 소대장이 됐다고 해서 변하는 것도 없었다.

아, 이제껏 대강 넘어간 분대의 빈자리를 채워 주겠다는 말이 오가긴 했다.

본래 분대는 열 명이 정원이다.

다만, 지금까지는 열 명이 아니라 엔크리드를 포함해서 여섯이 전부였다.

정식 명칭, 4중대 휘하 독립 소대.

이제 4분대가 아닌 거다.

소대원을 보충하고 싶다면 더 해도 된다고 했지만.

'굳이?'

말이 독립 소대지, 개별 작전에 나설 일은 거의 없을 터였다.

주어진 특혜 중 유일한 거라면.

소대장은 일반 근무를 서지 않는다는 것.

"그건 좀 치사한데?"

렘이 불만을 표하긴 했으나, 일단 이 분대가 그대로 유지된다는 말에 어지간한 건 그냥 넘어갔다.

소대장이 되고 부대 내에 소문이 퍼진 뒤에 생긴 변화다.

다만, 그렇다고 엔크리드의 일상이 변하는 법은 없었다.

"더 배우고 싶다는 거지요?"

시작은 아우딘이다. 가진 것을 정리하는 것과 별개로.

시간 낭비는 싫었다. 시간이 날 때 배우고 익히는 걸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게 엔크리드가 생각하는 반복하는 오늘을 활용하는 핵심이다.

그래서 아우딘을 찾았다. 몸에 익혀 무르익은 기술의 그다음을 바라니.

"침대 전투라고 들어 보셨는지."

이건 또 무슨 헛소리인가 싶긴 한데.

"성기사 발라프가 만든 훈련 방법이지요."

아우딘의 설명이다.

발라프 식 무투술.

때리고 패는 게 아니라 잡고 꺾는 기술의 향연.

침대 위에서 눌리고 꺾이는 일상의 추가다.

물론, 아우딘에게만 새로운 걸 배우는 것도 아니었다.

어느새 겨울의 상징인 혹한의 추위가 물러나는 중이었고.

엔크리드는 여전했다.

꿈에 뱃사공이 나오면 숫제 너는 뭐 하는 새끼냐 물을 정도로 반복하는 그런 일상이었다.

그리고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국지전이 아닌, 전면전이 벌어질 거라고.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이전 전장에서 상대는 주술을, 아군은 스콰이어를 보임으로써 전장의 판도를 바꿨다.

전보다 더 치열한 전장, 봄이 다가오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봄이 다가오기 전 엔크리드는 자신의 것을 정리하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92. 비범함과 미친 건 한 끗 차이임에

엔크리드는 부츠와 장갑을 손질한 뒤, 기름 먹인 천으로 검을 닦는 중이었다.

이전 마수 무리를 처리한 게 행상을 불러들이는 일이 됐고.

그건 곧 엔크리드에게 새 검이 생긴다는 말이었다.

부러진 검의 소재였던 발레리산 강철을 다시 녹이고.

거기에 누아르산 연철을 섞었다.

대륙에서 알아주는 양질의 철 두 개를 섞는 일이다.

"이거 나 아니면 못 한다고."

대장장이가 큰소리를 뻥뻥 쳤다.

그럴 만도 했다.

마법검을 주조할 수는 없어도.

쇠를 다루는 솜씨만큼은 마법사 못지않은 사람이었으니까.

보더 가드 내에서는 이름 높은 장인이라 하겠다.

물론, 간신히 도시 내에서만 유명하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그게 어딘가.

결국, 그 장인이 자신의 검을 만들어 줬음에야.

무기, 특히 검에 관해서 까칠한 라그나조차도 고개를 반은 끄덕여 줬다.

"그럭저럭 괜찮군요. 제가 쓰기에는 나쁘지만."

고개를 반만 끄덕여 줬다는 게 이런 말을 덧붙여서였다.

엔크리드가 기름 먹인 천으로 칼날을 정성스레 닦고는 칼날에 대고 손가락을 튕겼다.

팅.

꽤 괜찮은 공명음이 흘러나왔다.

엔크리드로서는 처음 쓰는 명검이라 불릴 수준의 검이었다.

그러니 어찌 만족스럽지 않을까.

정작 검에 관해 쉬이 만족하지 않는 라그나는 굴러다니는 쇠붙이라면 아무거나 잡고 썼다.

일전에 이가 나간 아밍소드도 직접 숫돌로 갈기 귀찮아하기에 엔크리드가 대신 칼날을 갈아 주기도 했으니.

그게 아니었다면 이가 빠진 검을 그냥 들고 다녔을 것이다.

"에스터, 그거 장난감 아니야."

엔크리드는 검 손질을 끝내고 에스터를 살살 달랬다.

일전에 하수도의 시체 애호가를 죽인 뒤 가져온 물건이 몇 개 있었다.

팔아 치우려고 크라이스에게 말을 해 뒀는데.

그중 하나는 뒷골목에서도 처리하기가 골치 아파서 그냥 들고 있었다.

"그거 사람 가죽으로 표지를 싸 놨더라고요. 정말 하수도에 마법사가 있었어요?"

크라이스에게 물건을 맡기자 나온 말이다.

그런데 되묻는 말이 하수도에 있던 마법사를 죽였다는 걸 안 믿는 것처럼 들렸다.

"안 믿었냐?"

"믿었는데, 이제 조금 더 믿고 있습니다."

⋯⋯안 믿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그래서 그건 처리가 좀 어렵고, 지팡이랑 나머지는 네, 잘 팔았습니다."

세상에는 진귀한 물건을 원하는 사람이 많다. 크라이스의 말에 따르면 그렇다. 엔크리드는 관심이 없는 분야니.

그렇게 까만 나무 지팡이와 돌 몇 개를 팔았다.

지팡이는 마법사가 만든 조악한 물건이라 했고.

돌 몇 개는 연금술과 관련된 물건인데, 그리 대단한 건 아니라 했다.

그렇게 크라이스가 약속한 길핀 길드의 상납금과 마법사를 죽이며 얻은 크로나와 물건을 판 대금, 의뢰 수행 대금 등.

그걸 전부 다 쏟아부어 검을 산 거고.

애초에 누아르 산 연철도 더럽게 비싼 판이었으니.

크로나가 아깝진 않았다.

'발레리산 강철이 조금 더 있었으면 좋았을걸.'

"그 큰돈으로 검 한 자루라니."

크라이스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지만, 엔크리드는 만족했다.

칼밥 먹고 사는 사람한테 무기만큼 중요한 게 어디 있다고.

소모품이라고 해도 목숨을 담보로 하는 싸움에서 무기의 우월함을 가져갈 수 있다면, 크로나를 아끼겠는가.

"이 정도면 됐지 뭐."

그렇게 마도서가 남았는데, 사람 가죽이라 찝찝해 그 위를 다시 얇은 천으로 덧대서 감싸 두고 자리에 대강 보관해 둔 것을 에스터가 찾아 제자리로 가져간 거다.

그 위에 오줌을 싸지르면 어떻게 되는 걸까.

마도서란 무엇인가.

마법사가 평생을 걸쳐 제가 가진 것을 기록하고 채워 두는 보물이라 하겠다.

마도, 마법의 도를 추구한다는 거창한 이름까지 붙을 만큼이나 중요한 것.

그런 마도서를 표범이 깔개로 쓰는 중이다.

'이거 놔둬도 되나?'

적어도 저 위에 오줌을 싸지르진 않을 것 같긴 했다.

에스터는 절대 부대원 앞에서 대소변을 보지 않았다. 이게 고양잇과의 습성인지 몰라도, 반드시 어딘가 숨어서 해결하고 왔다.

씻는 것도 자주 씻었고.

엔크리드는 마도서에 신경을 껐다.

마도서가 얼마의 가치를 지닐지는 모르겠으나.

당장 가져가려고 손을 뻗으면.

"하악!"

에스터가 흔치 않게 하악질을 해 댔다.

"놔두쇼. 편한가 보네."

옆에서 렘이 한마디 거들기에 엔크리드도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렇게 마법사가 죽어가며 물려준 유산을 처리해 검으로 바꾼 뒤다.

엔크리드는 여전히 훈련에 매진했다.

매일 해가 뜨는 것보다 일찍 일어나 일상의 시작을 조금 더 당기기도 했다.

소대장은 열흘에 한 번 따로 근무를 서면 그만이다.

보통은 4시간에서 6시간 내외로 순찰병이나 불침번을 서는 이들을 불시에 감독하는 근무고.

이렇듯, 일반 근무를 서지 않게 된 덕분에 시간이 남아 본래보다 하루를 조금 더 일찍 시작할 수 있었다.

일반병의 기상 시간보다 2시간 앞서, 엔크리드의 하루가 시작되는 셈이었다.

"꺄릉."

그렇게 일어난 여느 날의 아침, 품에 안긴 에스터를 내려놓은 뒤.

밖으로 나갔다.

아직은 추위가 전부 가시지 않았기에 새벽의 공기는 살을 에는 바람을 동반했다.

이런 걸 삭풍이라고 하던가.

그런 바람 앞에서 엔크리드는 호흡부터 가다듬었다.

시작은 '고립의 기법'부터다.

몸을 움직여 열을 낸다. 무거운 돌 따위로 만든 기구로 근육에 부하를 건다.

그리 몸을 달구다 보면 아우딘이 숙소 밖으로 나와 엔크리드 곁에 서서 자기도 고립의 기법을 시작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소대장 형제님."

이건 대우를 해 주려는 건가.

형제님 앞에 이제 소대장이란 호칭이 붙었다.

그걸 들으니, 곧 부대원 머릿수를 채워 준다던 중대장의 말이 떠올랐다.

"집중."

잡생각에 빠지니, 곧바로 아우딘이 나무랐다.

"알았다."

정신을 산만하게 해서는 기법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

호흡과 근육에 집중하는 법.

아우딘이 강조하는 바이다.

엔크리드는 그렇게 했다.

다시 몸을 단련하고 또 단련하는 그런 과정.

또 고립의 기법만 한 건 아니었다.

가진 걸 정립해야 한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으니.

'야수의 심장, 칼날의 감각, 한 점의 집중, 고립의 기법.'

중검식을 비롯한 검술.

검술의 응용.

몸을 보고 상대의 단련 정도와 특기를 알아채는 안목.

육감과 직감을 토대로 공격을 예측하는 것.

검술로 치자면 본래 자신이 지니고 있던 발렌 식 용병검도 있다.

'활용할 수 있나, 아니면 버려야 하나.'

버릴 필요는 없다. 그게 엔크리드가 내린 결론이었다.

가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는가는 개인의 역량에 따른 것.

'역량이 부족하면 키우면 될 일.'

대담함은 언제나 필요하다. 중요한 순간에 눈을 감지 않게 하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를 증명함에야.

엔크리드는 야수의 심장을 모든 것의 기초로 봤다.

'담담하게.'

그렇게 어느 날은 육감을 단련하고.

또 어느 날은 감각과 집중력을 섞어도 봤다.

'섞어서 몸에 새기자.'

검을 한 번 내지르는 것에는 다양한 경험이 녹아 있는 법이다.

감으로 체득하고 머리를 인식하고.

다시 몸에 때려 박는 과정이다.

물론 쉽게 될 리는 없었다.

이 과정에서 엔크리드는 슬슬 자신만의 패턴이자 방법을 다잡았다.

'단련만으로는 어림도 없다.'

필요한 건 실전.

단련과 훈련이 병행된 실전이다.

기왕이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실전.'

"이전에 말했잖수. 목숨을 걸고 싸웠는데 살아남으면 얻는 게 많다고. 그런데 목숨이 한 개니까, 그렇게 실력을 쌓는 건 말이 안 되긴 하지."

렘이 농담 섞어 꺼낸 한마디가 정답이라는 것.

이제는 안다. 목숨을 건 실전의 중요성을.

물론, 죽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죽음을 거듭 이겨 내는 게 중요한 거지.

실전의 필요성을 알기에 엔크리드는 의뢰를 받았다.

자잘한 것부터 과격한 것까지.

어떤 것도 가리지 않았다.

"뭘 찾아 달라고 한 겁니까?"

"내 고양이를 좀."

한 귀부인의 의뢰다. 이런 의뢰까지 받는 부대가 잘못한 걸까.

아니지, 이 또한 필요한 일이니까 하는 거다.

엔크리드는 굳이 의뢰를 가리지 않았다.

어떤 상황이든, 어떤 순간이든.

'모든 건 단련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뇌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받아들였기에.

엔크리드는 나무 위에 오른 고양이를 찾았다.

"얌전히 가자."

고양이는 도망갈 기세였다. 육감, 직감의 영역에서 볼 수 있다.

어처구니없게도 이 또한 깨달음이 되긴 했다.

고양이의 본능을 의도한 대로 움직이는 거다.

살기, 기세를 쏘아 내어 나무에서 뛰어내리게 만들고.

폭 하고 품에 받아 낸 뒤, 눈빛으로 제압했다.

이제는 이런 것도 가능했다.

"육감의 문을 열었으니까요."

작센이 덧붙인 한마디다. 이제, 작센은 시도 때도 없이 엔크리드를 괴롭히지 않았다.

살기에 시달릴 시기는 지난 거다.

이제는 그게 의미가 없기도 했고.

의뢰는 고양이를 찾아 주는 것부터.

"누가 강도질하고 도시에 숨었다는데?"

이런 의뢰도 있었다.

어떤 뜨내기가 도시에 들어와 어설픈 짓을 저지른 거다.

"찾아."

길핀 길드를 먹어 치웠을 때, 이렇게 쓸 줄은 몰랐으나.

크라이스는 예상한 바였는지, 능숙하게 필요한 일을 척척 해냈다.

뒷골목 도박장이었다.

이마에 칼자국이 난 퇴역군인이었다.

"나랑 싸우자고? 시발, 변두리로 오니까 별의별 경우를 다 겪네. 보더 가드 상비군이 좀 한다며? 덤벼 보든가."

자신감, 그만한 실력도 겸비했는가.

아닌 것 같은데.

그동안 기른 안목을 시험해 보기 좋은 기회였다.

적당히 밀리는 척, 상대의 수를 시험해 본 결과.

'잘해야 중급에서 상급.'

나우릴리아 병사 등급제를 기초로 보자면 그렇다.

예상 밖의 실력은 없었다.

"헉, 헉, 너 뭐냐."

"보더 가드 상비군."

그 말을 끝으로 적당히 다리 몽둥이를 부러뜨려 압송했다.

잡힌 놈은 부대 내 감옥에 갇힐 것이고.

누군가 대신 벌금을 내지 않으면 평생 못 나올 것이다.

"두고 보자."

라고 말하긴 했는데.

다시 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 뒤 상단 호위끼리 붙은 싸움을 말리러 여관에 출동한 적도 몇 번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의 실력이 꽤 출중했다.

그와 붙으며 엔크리드는 한 점의 집중과 칼날의 감각을 섞는 훈련을 겸했다.

감각의 문을 연 상태로 집중하는 것.

이전에도 몇 번 했지만, 새삼 깨닫는 것도 있었다.

집중력의 차이가 많은 것을 바꾼다는 거다.

'느려져.'

전만큼은 아니지만, 상대의 검이 느리게 보이는 효과다.

예측한 그대로 움직이기에 그렇고.

실제, 인지 속도의 차이가 나기에 그렇다.

모든 것이 훈련의 연속이었고.

단련과 단련의 계속됨이었다.

이런저런 의뢰를 하다 보니.

"아니, 무슨 의뢰에 미친 새끼세요?"

병사 사이에서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비난은 아니었다.

"몸이 열 개인가. 안 쉬어, 왜 안 쉬는데."

"사람이 아니야. 사람이."

비난보다는 놀람, 놀람보다는 감탄이다.

"괜히 소대장이 된 게 아니라고."

"시벌, 나도 좀 일찍 일어나서 창이라도 몇 번 찔러 버릇해야겠는데."

엔크리드 덕에 때아닌 훈련 열풍이 불기도 했다.

실력으로 증명했고.

병사 사이에서 평판도 좋다.

상급 병사 이상이라는 말이 떠돌며 소대장이 되기도 했으며.

엔크리드 덕에 목숨을 구한 병사도 있다.

이 모든 게 복합적으로 작용해 부대 내에서 훈련 열풍이 불었다.

다들 조금 일찍 일어나 제 몸을 단련하는 상황이 됐다.

엔크리드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당장 자기 앞길 살피기 바쁠 뿐이니.

훈련하는 내내 엔크리드는 가슴 속에서 은은하게 불길이 타오름을 느끼기도 했다.

본래 전장에 나설 때의 자신은 어떠했는가.

두려움까진 아니어도 즐기기는 어려웠다. 전장이 반갑진 않았다.

'이게 정상은 아닌 것 같긴 한데.'

이제는 전장이 기대됐다. 나가서 싸우고 싶었다. 자신을 증명하고 싶다. 실력을 내보이고 싶다. 그곳에서 목숨을 걸고 다시 한번 사선을 넘고 싶다.

미친 소리가 맞았다.

그리고.

"비범함과 미친 건 한 끗 차이라는 거 모르슈?"

렘의 말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비범함으로 나아가는 길이 미친 자들에게만 허락된다면.

미쳐야 하지 않겠나.

단련과 의뢰로 점철된 어느 날.

"다시 한번 붙으면 재밌겠는데."

중대장이 제 개인 연무장으로 엔크리드를 부르더니 하는 말이다.

"대련?"

당연하지만, 엔크리드는 거절하지 않았다.

"좋습니다."

이전과 상황은 같다. 그럼, 결과도 같을까.

그건 모를 일이었다.

아직 엔크리드의 안목으로 요정 중대장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전처럼 당할 것 같진 않았다.

물론, 이 모든 건 직접 손이든 칼이든 맞대 봐야 알 일이었다.

곧, 중대장이 손을 반듯하게 세워 손날을 만들며 말했다.

"오늘은 이거로 하지."

이게 시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일전, 자신의 부족함을 일깨우게 한 게 중대장과의 대련이기도 했으므로.

그때 부족했던 것, 근접 박투다.

레슬링이라 부르던 것들이다.

엔크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둘의 손날이 허공을 격하고 만났다.

툭.

짧은 격타음이 곧 인사였다.

93. 우연의 결과인가, 중첩된 필연의 순간인가?

"발라프 식 무투술, 침대 위에서는 디딤발이 불편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편하겠습니까?"

아우딘이 묻는다. 엔크리드는 곰곰이 생각한 뒤 답했다.

좁은 침대 위 두 남자는 더없이 진지했다.

"힘을 준다?"

처음에는 일부러 좁고 불편한 곳에서 주먹을 뻗는 요령을 배우는 건 줄 알았으나.

"아니요. 못 합니다. 침대는 눕는 곳입니다. 우리는 누운 기술을 연마할 겁니다."

침대는 눕는 곳이란다.

무투술 첫 훈련 이후 아우딘이 생각보다 자주 씻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겨드랑이에 머리가 낀 상태로 사지를 제압당했는데, 시큼한 향 따위가 나진 않았으니까.

좁은 침대 위에서 손과 발을 놀리고 관절을 꺾고 잡아서 제압한다. 아니, 제압당했다.

"침대는 좁습니다. 복잡한 동작보다는 빠른 동작으로."

배움이다. 가르침이다. 사막을 헤매는 목마른 자에게 주는 물 한 모금이다.

엔크리드에게는 그랬다.

그러하기에, 경청의 자세 그 이상으로 집중했다.

물론 실전에서 쓰기 까다로운 기술이긴 했으나.

의뢰를 받아 돌아다니며 여기저기서 써먹긴 했다.

가령, 뜨내기 소매치기의 손목을 잡아 꺾을 때라든지.

"길핀이 밤의 수호자를 자처하니, 뜨내기가 늘어나는 것 같은데?"

소매치기는 잡히면 손목이 잘린다.

아직 어려 보였다. 잘해야 열두 살? 그래서 길핀 길드에게 넘겼다.

나중에 들어 보니 신명 나게 매타작당했다고 하지만.

그게 손목을 잘리는 것보다는 나은 일이리라.

그 외에도 여기저기 쓸 수 있는 곳에서 항상 활용하려 했다.

하지만 지금만큼 좋은 기회는 없으리라.

중대장과 손날을 맞댄 순간, 엔크리드는 오른발을 뒤로 빼며 스텝을 밟았다.

왼발을 앞에 두고, 뒤로 뺀 오른발을 왼발 위치만큼 앞으로 당기며 무릎을 구부렸다가 펴며 바닥을 차면.

폭발적인 돌격 스텝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전신 탄력을 이용해 오른손을 쭉 뻗는다.

찌르기다. 손날로 구현했으나, 그 핵심이 변하진 않았다.

마치 크랑을 구했을 때와 같다.

의무 막사의 천막을 찢고 중대장이 들어왔을 때, 그때 엔크리드의 손에는 단검이 들려 있었으나, 지금은 손날로 바뀌었을 뿐.

중대장도 그때와 같이 반응했다.

오른손을 안에서 밖으로 휘둘러 엔크리드의 손목을 쳐 낸다. 그 손짓에 찌르기의 궤도가 틀어지고.

중대장의 발이 엔크리드의 발뒤축을 걷어찼다.

그때는 속절없이 당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발을 걷어차이기 직전, 발을 떼서 피하고 손날 찌르기로 틀어진 자세 그대로 왼발을 축으로 몸을 기울여 밀어냈다.

요정 중대장과 자신이 가진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인가.

'체중.'

"상대의 약점을 파악해, 자신의 장점으로 무너뜨리는 겁니다. 형제님."

엔크리드는 아우딘의 말을 따랐다. 어설프게 수를 교환하지 않고 덮쳤다.

"음!"

중대장이 외마디 신음을 뱉었다. 그녀는 발바닥으로 엔크리드의 허벅지를 찼으나.

엔크리드는 충격을 견뎌 내며 결국 중대장을 몸으로 깔아뭉갰다.

깔아뭉개며 손목을 잡고 바깥으로 밀어내고, 중대장의 다리 사이를 제 다리로 휘어 감았다.

그러자 중대장이 옆으로 누운 자세에서 왼손은 앞으로 뻗은 형태로 잡혔고, 다리는 엮여 사지가 결박됐다.

"제가 이긴 것 같습니다만."

숨을 고른 엔크리드가 말했다.

중대장이 고개만 돌렸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곧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인간의 프러포즈는 요정과 상당히 다르군."

중대장의 입에서는 꽃향기가 났다.

또 요정의 농담이었다.

그대로 붙어 있자니, 요정 중대장의 입술이 보였다.

분명 부드러울 것 같긴 하지만.

"...아닙니다. 그런 거."

엔크리드는 곧 자세를 풀어 일어나려 했으나, 이번에는 반대로 중대장이 엔크리드의 허리를 다리로 감았다.

순간 휘청하긴 했으나, 엔크리드의 허릿심이 워낙 좋기도 했고 요정 중대장이 가볍기도 했기에 그대로 버텼다.

"허리가 튼튼하군."

중대장의 말이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는 건 청자의 잘못일까.

아니면 화자의 잘못인가.

'굳이 따질 일은 아니지.'

"내려오시죠."

반쯤 매달렸던 중대장이 내려섰다. 그러곤 바로 서더니, 몸을 탁탁 털었다.

연무장 바닥에 부대끼는 바람에 흙먼지가 묻은 참이었다.

제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찰싹 때려 바지에 묻은 흙먼지를 턴 중대장이다.

오늘따라 몸에 딱 달라붙는 바지를 입어, 보기에 따라 참 묘한 자세라는 생각이 들었다.

"늘었군."

"네, 늘었습니다."

이후 뱉은 한마디.

엔크리드는 순순히 수긍했다.

실제 실력을 보이려고 시작한 일 아닌가.

순간의 빈틈, 상대의 약점을 파고들어 승기를 잡은 것.

거기에 섞인 발라프 식 제압술.

모든 게 다 실력이 늘었다는 방증이기에, 중대장의 말에 수긍할 수 있었다.

중대장은 잠시, 아주 잠시 말을 잇지 않았다.

그러곤 말했다.

"일단 막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해 두지."

밑도 끝도 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하니.

"소대 보충 인원은 오늘 내로 간다고 알고 있으면 되고."

엔크리드는 무슨 말이냐고 되물으려다가 관뒀다.

중대장이 어느새 몸을 돌려 들어가는 중이었다.

따진다고 뭘 알려 줄까?

안 그럴 것 같은데.

말하는 내용을 보니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알게 될 일이기도 할 터였다.

'막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으니.'

그보다 윗선에서 내려온 어떤 명령이라는 것도 알겠고.

눈치로 치자면 엔크리드도 어지간한 수준이다.

어설픈 실력으로 살아남기 위한 필수품이었으니.

'곧 알게 되겠지.'

신경을 쓰지 않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괜한 것에 신경 쓰느니, 그 시간에 검이라도 한 번 더 휘두르는 게 나았다.

* * *

대대장이 교체됐다.

그럴 만도 했다. 국지전으로 야금야금 싸우는 전장이 아니라 전면전을 예고했다.

이전 전장에서 일어난 일이 이어져 전장이 확대됐고.

싸움은 커졌다.

그러니 대대장도 전투에 특화가 된 이가 와야 하는 법.

"내 이름은 마커스다."

마커스 대대장.

한때 기사의 위를 넘봤으나, 결국 재능의 벽을 넘지 못한 자.

변방 수비대를 거쳐 갖가지 부대에 복무한 경험이 있는, 사이프러스 휘하의 핵심 장교라 하겠다.

그는 이전 대대장이 했던 멍청한 짓 따윈 관심도 없었다.

"주력이라 할 만한 건, 변방 수비대와 거북이 중대 정도인가? 그 외 땅개는 머릿수 채우기 용도잖나, 그에 따른 전략 수립이다. 할 수 있겠지?"

오롯이 전쟁만 머릿속에 가득한 남자였다.

그리고 부대 내 도는 소문이 그의 귀에도 들어갔다.

"사고뭉치 분대장? 이제 소대장인가? 독특하군. 운이 좋았다고?"

그동안 있었던 일을 전부 보고받은 뒤다.

고작 운이 좋다고 할 만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누구라도 이런 생각을 할 법도 했고.

여기서 마커스 대대장은 한 발 더 나갔다.

"그 운, 한 번 더 시험해 보는 건 어떨까?"

고작 병사 하나, 희생된다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정말 행운의 여신이 눈여겨봐 살려 준다면 그걸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운이 아니라면? 죽으려나? 그래 봤자, 고작 병사 하나다.

이래저래 손해 볼 일이 아니었다.

요정 중대장이 한 말의 전모가 이거였다.

막지 못해 미안하다는 것.

"보내."

첩보이자, 공작을 위한 부대 편성이다. 대대장의 직접 지시다. 막을 도리가 없었다.

'살아 돌아왔으면 좋겠는데.'

농담처럼 진짜 반려라 생각해서 그런 건 아니다.

'그만한 인재.'

뒤도 깨끗하며 '크랑'과 엮였다.

그가 부탁한 바도 있고 자신이 생각해도 아깝기에 그런 거다.

실력도, 패기도, 담력도.

전부 마음에 드는 친구였다.

그러니.

'살아와라.'

이렇게 바랄 뿐이었다.

* * *

"그냥 지원 임무가 아닌데."

엔크리드는 렘도 자신만큼 눈치가 빠르다는 걸 안다.

이런저런 의뢰를 하는 사이 내려온 임무다.

보더 가드 북쪽, 펜-하닐 강을 넘어서 주변 지형을 파악하라는 임무가 내려왔다.

엔크리드가 머릿속에 지형도를 그렸다.

보더 가드를 중심으로 동쪽으로 나가면 그린 펄.

그 위는 펜-하닐 강이다.

그리고 펜-하닐 강을 도강한 뒤 동북으로 나아가면 도시가 하나 나왔다.

철저히 군사적 목적으로 세워진 아즈펜의 요새 도시, 크로스 가드다.

임무의 목적지가 크로스 가드가 있는 자리다.

그러니까 이건 겉보기에는 지형 파악 임무지만.

'실제로는 첩보.'

임무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강을 넘어서면 알 수 있다는 말이 덧붙었다.

"콕 집어서, 대장만?"

작센도 옆에서 하달된 임무 내용을 파악한 뒤 미간을 찌푸렸다.

골치 아픈 일인가?

맞다. 엔크리드도 안다.

하물며 자신에게 내려올 종류의 일도 아닌데.

'이거구나.'

요정 중대장이 한 말이.

"왜요? 지형 파악? 곧 전면전이 벌어질 거라는 말이 파다한데 어딜 나간답니까?"

새로 온 소대원이 말했다. 엔크리드는 잘 아는 얼굴이었다.

엔리. 평원 사냥꾼 출신의 병사다.

이전 전장이 끝나면 다시 평원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한 것 같은데.

여전히 도시에 남아 있었다.

"돌아가고 싶어도 전면전이 벌어지면, 어차피 평원에서 살긴 그른 거 아닙니까."

그게 이유였다.

그 외에도 둘이 더 합류했다.

앤드류, 철없던 분대장이 이제 진짜 분대장이 됐다.

그 옆은 당연히 맥이 함께였고.

그렇게 합류한 인원이 셋이고, 공식적으로는 앤드류가 이 부대의 분대장이 됐다.

물론, 렘을 비롯한 분대원에게 먹힐 턱이 없는 편제이긴 했다.

실제 인원도 겨우 아홉이 전부인데, 여기에 분대장까지 뭐가 필요한가.

하물며 누가 그 말을 들을까.

"이런 거면 차라리 제가 나을 것 같은데."

엔리가 말했다.

"그냥 지형 파악이 아니니까 그런 겁니다. 형제님."

아우딘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는데, 그걸 본 엔리의 어깨가 움찔했다.

아우딘을 처음 본 사람이라면 당연히 나오는 반응이다.

거구의 사내가 미소와 함께 부드러운 어투로 말을 건다. 위압적인 주먹과 덩치가 눈에 가득 차기에 어색하기 짝이 없다.

한동안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대대장 직속 명령? 무시하면 안 되나."

기웃거리던 라그나가 생각 없는 말을 던졌다.

무시하면 명령 불복종이다. 이 새끼야.

본래라면 더럽게 걸렸다는 생각이 들 거다.

누가 봐도 위험도가 높은 임무니까.

곧 전면전이 벌어질 적국의 요새 도시다. 근처까지 가는 것 자체가 모험이다.

'목적은 도시 내에 있는 첩자에게서 정보를 받아 오는 건가.'

엔크리드는 대충 임무 목적을 떠올려봤다. 그럴듯했다.

필요한 일이긴 하다.

누군가는 나서야 하는 일이다.

보통은 이런 종류의 임무를 전문으로 하는 이들을 따로 쓰는 게 맞는데.

'중대장이 못 막았다고 한 걸 보니.'

대대장이 직접 나선 일이라는 거고.

그게 여기에 대대장 직인이 찍힌 이유겠지.

"어쩌냐?"

임무를 전하러 온 소대장이 주변 눈치를 보다가 쭈뼛거리며 말했다.

"뭘 어떻게 합니까."

엔크리드는 고민 따윈 하지 않았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고.

'실전이라면.'

언제나 반길 뿐이니.

무엇보다 어떤 일이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면 새로이 배우고 익히고 깨달을 게 있다는 걸 되새긴 시점이었다.

오히려 두근거리기도 했다.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이건 뱃사공이 준 벽인가.

그게 아니라면 그저 흘러가는 일일 뿐인가.

우연의 결과인가.

했던 일이 중첩된 필연의 순간인가.

전부 알 바 아니었다.

눈앞을 막아서는 게 있다면 그저 치고 나아갈 뿐.

그게 엔크리드의 삶이었다.

"임무 접수합니다."

엔크리드의 말에 분대원 전부의 인상이 안 좋아졌다.

"따라가야겠는데."

라그나가 말했으나,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대대장의 의도를 정확히 알 순 없으나, 엔크리드를 제외한 분대원은 새로 온 분대장의 명령에 따라 대기하라는 명령이 덧붙었다.

명령을 통해 추측하자면.

'전장에서 활약할 게 뻔한 이들은 남기고. 나만 빼낸 건데.'

어떤 생각으로 이런 지시를 한 건지는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누가 알겠나.

행운이 따르는 병사라는 말에, 그 행운을 시험해 보자는 미친 짓을 했다는 걸.

마커스란 대대장도 정상은 아니었다.

그게 당연하기도 했다.

전쟁에 미친 장교, 마커스에게 따라붙는 별명이었으니.

이기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하는 작자였다.

그 시작이 엔크리드일 뿐.

"걱정하지 마라. 알아서 잘하고 돌아올 테니까."

죽을 일은 없다. 오늘이 반복되는 이상, 그 오늘을 넘어서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인 이상.

툭 하고 엔크리드가 말하자, 렘의 앞 눈썹이 위로 치솟았다.

"알아서? 자아아아알? 그게 될 것 같수? 아직 멀었수다. 안 되겠네. 오늘 특훈합시다. 특훈!"

라그나와 작센, 아우딘도 렘의 반응과 별반 다르진 않았다.

"리듬은 탔습니까?"

"뒤에서 사람 찌르는 법을 배워 보죠."

"허허, 발라프 식 침대 무투술을 더 깊게 배울 때가 됐군요."

거기에 선 앤드류가 모두의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연다.

"자, 내가 분대장이니까 다들 내 말을 따라야 할 것 같은데."

위에서 내려온 명령이다. 앤드류는 전처럼 건방 떠는 게 아니라 명령을 따르려 했다.

그게 전부였으나.

"웃기시네!"

렘이 발작했다. 평소의 발작이다. 대단한 것도 없는.

그가 팍 하고 뛰어들더니, 곧바로 앤드류의 머리통을 때렸다.

주먹이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빨랐다.

앤드류가 반응하기도 전, 쇄도했고 후려쳤으니.

뻑 하고 머리통을 얻어맞은 앤드류의 눈이 풀리고 모로 쓰러졌다. 옆에 있던 맥이 그를 받았다.

"뭐?"

쓰러진 앤드류를 보고 맥이 발끈하듯이 고개를 들었다.

그걸 본 렘의 말이다.

상관 폭행.

렘의 이름 앞에 따라붙는 명칭이다.

렘이 노려보고, 맥은 잠시 그를 보다가 앤드류가 기절만 했다는 걸 확인한 뒤 말했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어쩌겠나. 이리 무력 차이가 나는걸.

어설픈 반항은 폭력으로 돌아온다는 것.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다.

그래서 여기 오기 싫었고.

하지만 앤드류가 자원하는 걸 막을 수도 없었다.

'하.'

인생, 참 꼬인다. 맥은 한탄했고.

엔리는 눈치를 보며 확신했다.

'함부로 입 털면 뒈지는구나.'

그제야 이곳이 왜 사고뭉치 분대인지 알 것 같았다.

엔크리드만 보고 오긴 했는데, 조금은 후회가 되는 시점이었다.

94. 벌인가 기회인가?

은은한 달빛이 차오른 밤, 평소와 똑같은 훈련으로 몸을 굴린 뒤, 씻고 들어온 참이었다.

날이 풀리고 있다고 해도 밤은 아직 추웠기에 숙소에 들어온 엔크리드의 어깨 위로 김이 솟았다.

이틀 뒷면 도강, 강을 넘어서 지형 파악 작전에 나서야 하는 걸 알면서도 훈련 강도는 변함이 없다.

기실 변할 게 없는 일이다.

앞에 무엇이 기다리든 하루를 쌓아 내일을 향해 가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기에.

엔크리드의 일상도 똑같았다.

뱃사공이 지겨운 놈이라고 평한 그대로.

그렇게 돌아온 숙소다. 한쪽에서 크라이스와 뭐라 말을 나누던 엔리가 다가오다 멈췄다.

그의 눈이 엔크리드의 침상에 닿았다.

에스터가 이미 엔크리드의 침상 위에 자리를 잡은 채였다.

마도서를 갖고 놀다가도 잘 시간만 되면 제자리가 저기인 듯 저리 자리를 잡는다.

에스터가 침상 위에서 제 앞발에 머리를 기대고 엎드린 채였다.

그런 에스터의 시선이 엔리를 향했다가 도로 제 발로 향했다.

관심이 조금도 없다는 뜻이었다.

엔리는 그런 레이크 팬서를 조심스러운 태도로 대했다.

함부로 그 곁을 지나려고도 안 했으니.

레이크 팬서가 그린 펄 평원에서는 수호 영물처럼 여겨진다고 했던가.

그렇게 침대를 사이에 두고 엔리가 목소리를 조금 높여 물었다.

"패스파인더 훈련을 따로 받으신 적이 있으십니까? 전에 보니까 그쪽으로 좀 아는 게 있던 것 같으신데."

그런 적 없다. 간신히 길 찾기만 하는 정도였다.

다만, 엔리가 오해하는 이유도 알았고 이해할 순 있었다.

'다 그쪽한테 배웠는데.'

무안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상대는 기억할 수 없는 일이니.

일전 그린 펄 내의 키다리 풀밭에서 엔리의 지식에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 오늘을 반복하며 몇 가지를 배운 게 전부였고.

엔크리드는 이마를 긁으며 답했다.

"전혀."

"그럼, 강 위쪽 길은 좀 아십니까?"

펜-하닐 위쪽이라면 북방 대 쪽에 가깝다.

용병 일에 종사하면서도 가본 적이 없었다.

"이제 봄이라 땅이 슬슬 녹긴 해도 아직은 딱딱할 겁니다. 그쪽 길을 오간 적이 몇 번 있는데 아는 바를 전해 드릴까요?"

엔리는 사려 깊은 성격이었다. 이런 성격이라 사냥꾼이 된 걸까.

아니면 사냥꾼으로 살다 보니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게 되는 걸까.

그는 앞뒤를 따져 현재 가장 필요한 일을 하는 타입이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부대 내에 녹아들기도 했고.

지금도 크라이스와 뭐라 말을 한창 나누다 일어난 참이었다.

렘도 딱히 엔리를 들볶지 않았다.

렘을 빼면 나머지야 무시하면 무시했지, 딱히 시비를 거는 쪽은 아니니.

"사냥꾼 출신이라더니 어디서 좀 놀았나 보네."

렘이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말했다. 손에는 도끼를 들고 삭삭 숫돌로 날을 가는 중이다.

그러며 시선을 한쪽으로 뿌리는데, 그쪽에는 앤드류와 맥이 있었다.

숙소 구석이다.

앤드류가 그 시선에 움찔하며 어깨를 움츠렸다가 폈다.

"그만해라."

엔크리드는 렘에게 경고했다.

"아니, 지금 또 차별대우하는 거요? 새로 온 사람 챙기겠다고? 그렇게 새 부인 들이고 전 부인을 허술하게 대하다가 등에 칼 맞고 그러는 거요."

말이 앞뒤가 안 맞지 않나.

그리고 누가 전 부인이고 새 부인인가.

"미친놈."

한마디로 렘의 성격과 삶을 일축한 엔크리드가 엔리를 향해 다가갔다.

엔리가 에스터 때문에 엔크리드의 침대에는 다가올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캬릉."

침대를 지나치자, 에스터가 발로 엔크리드의 허벅지를 툭 치며 울었다.

그 앞발질이 어서 일을 끝내고 침대로 오라는 것 같았다.

'너도 질투하냐?'

이거 렘만 문제가 아닌데.

숙소에 묘한 기류가 흐르긴 했다.

엔리와 앤드류, 맥이 합류한 뒤에 흐르는 기류다.

괜히 사고뭉치 분대가 아니었다.

새로 온 사람을 반기는 분위기가 아니다.

엔크리드도 굳이 이들을 섞으려 하진 않았다.

그게 마음대로 되는 일도 아니라는 걸 알기도 했고.

굳이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일 필요도 없다고도 생각했으니까.

전장에 나서면 각자 알아서 싸우는 이들이다.

괜히 손발 맞추겠다고 따라다니면 제 명대로 못 죽기 딱 좋을 판일 테니.

제 목숨은 제가 알아서 챙길 것.

이게 사고뭉치 분대의 유일한 지침이니.

"진땀이 흐릅니다."

합류하자마자 슬쩍 눈치를 보던 엔리가 그리 말했었다.

근데 이게 그나마 나은 분위기라는 건 알까.

이전, 새로운 부대원이 왔을 때는 분위기가 정말 살벌했었다.

그들 중 일부는 분대장인 엔크리드를 무시했고.

그런 이들은 꼭 며칠 뒤에 어딘가 부러지거나 크게 다쳐 후송되곤 했다.

렘의 짓일 때도 있었고.

다른 이의 짓일 때도 있지만.

'대부분 분대원 작품이긴 하겠지.'

엔크리드도 눈치 하나는 비상했다.

이번에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들은 다 아는 얼굴이고,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자신을 좋아하는 편 같으니.

그럼 적어도 어딘가 부러져서 나갈 일은 없지 않을까.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그럴듯했다.

"펜-하닐 강 위쪽에서 주의할 게 몇 개 있을 겁니다. 대부분 알아서 하시겠지만, 그래도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게 좋을 것 같으니. 혹시 납작한 돌판 같은 거 아십니까? 강 위쪽에 그런 돌이 많은데...."

이후, 엔리에게 들은 것들은 전부 산지식들이었다.

직접 경험하고 겪은 것, 선대 사냥꾼 시절부터 이어져 온 요령들.

납작한 돌 중 황톳빛이 나는 걸 제외하곤 전부 불에 달구면 터진다는 것.

황톳빛 돌 밑에는 독사가 숨어 있을 때가 있다는 것.

강의 수심이 깊어지고 유속이 빨라지는 구간이 있다는 것 등.

하루 만에 전부 외울 순 없었으나, 대강이라도 아는 것과 모르는 건 큰 차이였다.

그리 하나씩 듣고 외우고 있자니, 어느새 눈을 붙일 시간이었다.

언제 왔는지, 맥이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가 다가와 속삭였다.

"부탁이 있는데."

그 말에 근무를 나간 라그나를 제외한 나머지 분대원의 시선이 꽂히는 것 같았다.

육감의 경고다.

'놔두라고 말을 해야 하나.'

이대로 놔두면 어떻게 되려나.

작전에서 돌아와 말라죽은 앤드류와 맥을 볼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전출 요청 좀 해 주시오."

맥은 사나운 시선에도 끝내 할 말을 했다.

"음, 형제님. 들어올 땐 마음대로지만, 나갈 땐 그리 쉽진 않지요."

아우딘이다. 이건 농담이었다. 상대의 반응을 보고 짓궂게 행동하는 건 사고뭉치 분대의 전통과도 같은 것이니.

다만 듣는 쪽에서는 이게 농담인가 싶을 뿐.

맥이 그 말에 '다 듣고 있었나'라고 중얼거렸고.

렘이 뭐라 입을 열기 전, 앤드류가 먼저 나섰다.

벌떡 일어나더니, 대뜸 소리치듯 말했다.

"내가 마음에 안 드나 본데, 그럼 덤비든가! 누가 뭐라고 해도 난 분대장, 아니 소대장 밑에서 배우겠다. 절대 안 나가!"

패기다. 젊다 못해 어리다고 말해도 좋을 병사의 패기.

그 패기가 기꺼웠을까.

"내가 먼저."

렘이 벌떡 일어났다. 날을 갈던 도끼를 들고서다.

그가 혀를 내밀어 도끼날을 핥는 시늉을 했다.

"어딜 잘라 줄까."

그걸 지켜보는데 엔크리드조차도 섬뜩했다.

이민족의 외모, 회색빛이 도는 눈, 말투에서 진심이 느껴진다. 덤비면 최소 팔 한쪽은 잃을 것 같다.

"네가 먼저 하면 난 병신이나 상대하라는 건가? 내가 먼저다."

그 말에 작센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뱉는다. 이게 앤드류가 합류하고 나서 그를 향해서 하는 첫마디였다.

"형제님들, 아시지 않습니까? 전 죽이진 않습니다. 주물러만 드리지. 그러니 제가 먼저 해야지요."

셋 다 의욕이 넘쳤다. 그리고 그걸 본 맥이 엔크리드의 소매를 잡아서 흔들었다.

"시발, 말려, 쟤들 뭐야. 앤드류 님 왜 그런 말을."

맥이 울기 전에 말려야 했다. 다 큰 남자가 찔끔찔끔 우는 걸 볼 순 없으니.

"그만해라."

근데 이게 또 다행인 것 같은데.

렘은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를 저리 상대하지 않는다.

'어딜 잘라 줄까'는 실상 대련 한판 해 주겠다는 말이니까.

그러니까 호의다.

작센은 무시로 일관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말을 걸었다는 것 자체가 호의인 거고.

아우딘 또한 마찬가지다. 호의가 아니라면 '형제님 자중하십시오' 따위의 말이나 하겠지.

애초에, 마음에 안 들었다면 아까 같은 농담도 안 할 테고.

이거야 원,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근데 꼬맹아, 내가 좀 바쁘긴 하거든? 일단 우리 소대장 나리께서 임무에 나가면 보도록 할까? 그때 시간이 펑펑 남아돌 예정이니까. 그때는 나가고 싶다고 울어도 안 보내 줄 거다."

렘이 여전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섬뜩하긴 했다.

앤드류는 얼굴이 파랗게 질렸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이걸 정신력만큼은 일품이라고 해야 할까.

"언제든 덤벼! 난 가드너 가문의 앤드류다. 피하진 않겠다!"

목숨을 건 각오로 보이는 게 엔크리드만의 착각은 아닐 것이다.

그걸 보며 크라이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엔리는 한 걸음 물러나 바라봤으며.

렘은 실실 웃음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

아우딘은 그저 '형제님 진정하시지요, 어차피 겪을 일이니'라고 중얼거렸다.

작센이야, 무표정하게 둘의 전신을 훑을 뿐이다. 아주 작게 속삭이긴 했다.

"손가락 몇 개쯤은 잘라도 되지 않을까."

저게 진심일까 봐 더 섬뜩한데.

엔크리드는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다치게 하지 마라. 같은 분대원이다. 곧 전장에 나설 몸이고."

경고이자, 다짐을 받아 두는 거였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못 하게 말릴 순 없는 노릇이니.

그럴 능력도 안 되고.

"대련한다고 큰 소리 나지 않게 하고."

"걱정 마슈. 혀부터 잘라 낼 테니."

그 농담 좀 그만하라니까.

"덤벼! 덤비라고!"

공황에 빠진 앤드류를 진정시키느라 잘 시간이 지나 버렸다.

엔크리드가 어찌어찌 상황을 수습하고 잠자리에 들자, 에스터가 품에 들어와 가슴팍을 때렸다.

그게 늦게 들어온다고 나무라는 것처럼 느껴져, 에스터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미안하다."

그러자 표범이 곧 갸르릉거리며 엔크리드의 품에 파고들었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엔크리드라고 해서 앞날이 아예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특히나 가끔 꿈에서 뱃사공이 끔찍한 말을 내뱉음에야.

오늘도 그랬다.

눈을 감고 잠이 들었더니, 까맣게 굽이친 강이 보였다.

"갇혀서 울부짖어라, 그 울음이 내 양식이요, 즐거움이 될 테니."

까까까까!

어떻게 웃으면 저딴 웃음소리를 내는 걸까.

오늘에 갇히는 건 괴롭고 두렵다. 더는 다음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만 해도 불안감에 가슴이 저렸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잠에서 깬 엔크리드는 악몽을 털어 냈다.

그거로 끝이었다.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날 것이고.'

해야 할 일은 해야 하고.

길을 걷는 건 그대로이니.

"좋은 아침."

새벽 나절에 눈을 뜬 엔크리드는 홀로 중얼거리고는 똑같은 하루를 시작했다.

고립의 기법으로 시작해 발라프의 침대 무투술.

이후 렘과의 대련, 라그나와 검술 단련.

작센과 함께 살기를 뿌리는 것과 육감을 단련하는 것까지.

"어떤 부분에서 직감은 위험한 무기입니다. 상대가 능숙하게 속일 줄 안다면 그대로 속아 버리니까."

작센의 말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전하다.

단련하고 경험하고 실전을 통해 갈고닦는 것.

앤드류와 맥, 앤리는 엔크리드가 있을 때까지는 그럭저럭 잘 지내긴 했다.

엔크리드가 보기에 방식은 지랄 맞아도 분대원 전부가 호의를 보이는 것 같았으니.

받아들이는 처지에서야.

'꽤 고달프겠지만.'

그만큼 남는 게 있지 않을까.

자신이 그랬듯 말이다.

그렇게 이틀.

"가자."

새벽 나절, 잠이 든 분대원 사이를 지나쳐 숙소 밖으로 나섰다.

펜-하닐 강을 넘어 지형 파악 임무를 나서는 날이었다.

대대장 직속 명령이다.

실패하면 골치 아픈 일이지만.

성공하면 그만한 보상이 따를 일.

이번에 온 대대장이 그런 인간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크라이스가 신나게 떠든 내용이다.

"마커스라고, 전쟁광이라던데요? 대신 공이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상을 주고 죄가 있는 사람에게는 꼭 벌을 준다고 하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나우릴리아 왕국의 군 정책이 만든 괴물 같은 거죠."

공을 이룬 자에게는 그만한 대가를.

죄를 지은 자에게는 용서 없는 칼날을.

왕국의 군대와 더없이 잘 어울리는 지휘관이란 거다.

그럼, 지금 나서는 임무는 무엇일까. 어떤 목적일까?

'이건 벌일까.'

아니면 기회일까.

엔크리드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든 자신을 증명하고 위명을 쌓는 것.

그게 자신 또한 바라는 바 아니었던가.

"또 만나는군."

성문을 나서기 전, 강을 건너는 임무에 합류한 인원이다. 정확히는 엔크리드가 합류해서 만난 거로 해야겠지만.

소대 지휘관으로 임명받아 나선 사람, 변방 수비대의 토레스였다.

95. 동안의 비결은 끝없는 훈련

"이 정도면 우린 전생에 부부였던 거 아닌가."

일만 있으면 만나니, 하는 말일 것이다.

일전 마물 사냥 때도 본 얼굴이니.

"원수였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토레스가 옛이야기를 빗대어 말했고, 그걸 엔크리드가 받아쳤다.

전생의 인연이 이어지는 경우는 두 가지.

만나야 할 인연이거나.

만나서는 좋을 게 없는 악연이거나.

"우리가 악연은 아니지 않냐?"

토레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렇긴 하죠."

두 남자가 툭 하고 주먹을 맞댔다.

앞에 뭐가 기다리든, 모르는 얼굴보다는 아는 얼굴이 나을 터였다.

그렇게 나선 길이다.

터벅터벅.

북쪽 성문을 나와 둘을 반긴 건 자갈길이다.

보더 가드에서 출발하는 건 달랑 둘이 전부였다.

"우리 둘만 가는 겁니까?"

"강 너머에서 아군 정찰대를 만나기로 했다."

딱히 위험한 임무는 아닌 건가.

그래서 둘만 보내는 건가.

엔크리드는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어쨌든 책임자는 토레스다.

그가 말하는 것만 알면 그만인 거다.

그렇게 새벽녘부터 나선 길이다.

아침 해가 뜰 때쯤 부지런히 걸은 엔크리드는 갑옷 안에 받쳐 입은 천 옷이 축축하게 젖었다.

추위가 가시지 않았다고 해도 전신에 무장을 걸치고 걸으면 땀이 흠뻑 날 법도 했다.

얇은 천으로 만든 소매 없는 속옷을 입고, 그 위로 그보다 두꺼운 소매까지 감싸는 겉옷을 입는다.

다시 그 위로 마법을 막아 준 가죽 갑옷에 휘슬 대거집을 착용.

갬비슨과 부츠, 가죽 건틀렛까지 차면 몸에 걸치는 건 끝이다.

상대적으로 바지는 얇게 입는데 두꺼우면 기동성을 해치기 때문에, 이건 어쩔 수 없었다.

여기에 가드 소드라고 이름 붙은 날이 두꺼운 단검을 허리춤에 차고.

이번에 새로 장만한 롱소드를 왼쪽 허리에.

숏소드 하나를 오른쪽 허리에 나눠 찬다. 이게 끝도 아니었다.

비상시 무기는 많을수록 좋다. 양쪽 발목에 나이프 두 자루를 숨기고, 왼쪽 팔뚝에 던지는 나이프 두 개를 더 챙겨 넣었다.

말이 경장보병이지, 묵직한 무게감의 무장이다.

여기에 평소에 없던 무장이 하나 더 추가됐고.

"왼손이 놉니다. 그거 해결해야 합니다."

라그나의 주문이다. 덕분에 버클러 하나를 챙겨 등에 짊어지고 오는 중이다.

'이거 냄비 대용으로 쓸 수 있지 않으려나?'

급하면 그렇게 쓸 수도 있을 것 같다. 손잡이가 있는 쪽에 붙여 둔 가죽을 떼면 얇은 쇳덩이 아닌가.

그만큼 불필요한 짐이란 생각이 드는 거다.

'어쩔 수 없지.'

하라고 하니, 일단 하는 수밖에.

방패로 써 보고, 이게 안 맞으면 다른 수를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

"검과 방패가 됐든 검 하나가 됐든, 이제 다음으로 넘어갈 때가 됐습니다. 그 전에 균형을 먼저 맞출 겁니다."

라그나는 평소에는 한없이 게으름을 부리면서 엔크리드를 가르칠 때만 되면 더없이 성실한 교관이 된다.

그래서 그게 거슬리는 거냐고 묻는다면.

'전혀.'

오히려 고마울 따름이다.

엔크리드는 육감을 열고 사방을 훑으며, 머릿속으로는 라그나의 말을 되새기며 걸었다.

그걸 옆에서 보면 참 묘한 광경으로 보였다.

토레스는 왼쪽 허리에 겹쳐서 찬 짧은 숏소드 두 자루 외에는 겉보기에 무장이 없었다.

상대적으로 가벼운 무장이다.

토레스가 힐끗 옆을 보며 생각했다.

'잘 따라오네.'

저 무거운 짐을 들고도 잘도 쫓아왔다. 헉헉대지도 않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에 초점이 안 맞는데 주변 기척에는 곧바로 반응했다.

'무슨 생각을 하면서 걷는 거냐.'

새삼 그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것만 궁금한 것도 아니었다.

이제까지 이런저런 작전을 나서 본 토레스다.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안 물어보니까 오히려 서운한데.'

이렇게 숨겨진 게 많은 일에 나서게 되면 보통은 무슨 일이냐, 목적이 뭐냐, 강을 건너면 뭘 하게 되냐 물을 것도 많을 텐데.

그렇게 물으면 토레스가 할 말도 정해져 있었다.

'우리는 군인이고 병사다.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전부라는 생각은 안 드나?'

따끔하게 한마디 할 기회인데.

정말 아무것도 안 물어본다.

"정면."

그런 엔크리드가 입을 열었다. 토레스가 앞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우측에는 강을 끼고 북서쪽으로 한참 걷던 참이다.

푹 젖은 구울 두 마리가 보였다.

몇 가닥 남은 머리카락이 뭉쳐 하얀 머리통에 걸쳐 늘어진 게 꼭 해초 같았다.

커다란 바위를 끼고 숨어서 이쪽으로 노리는 중이었는데, 바위 색과 피부색이 비슷해 자세히 보지 않으면 놓칠 법도 했다.

'나보다 먼저 찾았네?'

생각보다 감이 좋은 건가, 아니면 소문대로 운이 좋은 건가.

모를 일이다.

어쨌든 마물, 적이 나왔다.

"하나씩?"

"그러죠."

토레스의 말에 엔크리드가 먼저 나서서 시선을 끌었다.

등에서 방패를 끌러 손에 쥐더니, 롱소드를 뽑는다.

스릉.

'소리 좋은데.'

칼밥 먹는 이들이라면 무기에 민감한 법이다. 토레스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토레스는 무기를 뽑는 대신 구울과 거리를 쟀다.

구울의 손톱에는 독이 있다.

굳이 가까이 갈 필요가 있을까.

먼저 나선 엔크리드를 향해 구울 두 마리가 땅을 박찰 때, 토레스가 손으로 허리춤을 훔친 뒤, 앞으로 뻗었다.

스텝 먼저, 오른발로 땅바닥을 콱 찍으며 탄력 있게 뻗친 팔꿈치에서 시작된 손끝.

손가락에 실렸던 무게감이 손을 떠난다. 나이프가 공기를 가르며 날아가 구울의 머리통에 꽂혔다.

퍽하고 머리통이 반쯤 갈라지며 칼날이 옆으로 튕겨 나갔다.

물가에 서성이는 구울의 몸은 반쯤 썩은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런 고약한 냄새도 나는 거고.

썩은 살을 헤집고 두개골을 부수며 칼날이 튕겨 나갔다는 소리였다.

토레스는 단검을 던지고서 엔크리드를 살폈다.

그곳에 어설프게 방패를 들고 구울의 손톱을 튕겨 낸 엔크리드가 롱소드를 휘두르는 게 보였다.

적절하게 휘두른 검이 구울의 썩은 목을 뎅겅 잘랐다.

구울의 피는 검었다.

머리를 잃은 몸뚱이가 푹하고 앞으로 무릎부터 꿇고 쓰러지더니, 검은 피를 울컥 쏟아 냈다.

"이쪽은 마물이 거의 없는 거 아니었습니까?"

같은 소대장이라고 해도 한쪽은 왕국 직할부대인 변방 수비대.

엔크리드도 소대장이 됐으나, 대우는 확실히 해 줬다.

"아예 없을 순 없지. 인면견 무리 때문에 최근에 이쪽에 돌릴 병력도 없었을 테니까. 그래도 많이는 안 나올 거야."

엔크리드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보니 토레스는 문득 궁금해졌다.

"우리가 어딜 가는지 궁금하진 않고?"

"강 건너 아닙니까?"

"일단 말은 편히 하고. 뭐 직할대 소대장이나 일반 부대 소대장이나 매한가지 아닌가? 나이는 비슷한 것 같고."

"서른입니다."

"하물며 내가 어려."

"그럼, 뭐."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니.

"동안의 비결은 뭐냐? 다 같이 전장을 구르면서 그 얼굴은, 나 조금 억울한데."

겉만 보면 누가 봐도 토레스가 연상이다. 하물며 토레스는 생김새가 밋밋한 편이다.

어디 여관 급사라고 해도 믿을 판이었다.

토레스가 말하며 떨어진 단검을 녹색과 파란색이 섞여 흔들리는 강물에 대강 닦아 내곤 소매로 물기를 훔쳐 품에 넣었다.

나이프가 품 안에서 쏙 사라졌다.

품에 따로 나이프집을 만들어 넣는 듯했으나, 한순간 사라지는 것처럼 보여 엔크리드의 눈에는 신기해 보였다.

"끝없는 훈련."

엔크리드의 답을 들은 토레스는 헛웃음을 토했다.

말하는 재주가 있는 친구다.

역시나 제 부대에 들이면 좋았을걸.

생각하며 토레스가 본론을 꺼냈다.

"강만 건넌다고 끝날 일은 아닌 건 알지?"

끄덕.

"그런데 뭘 안 묻네?"

"물으면 알려는 주고?"

못 알려 주지, 토레스도 자세히는 모른다.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지.

"마냥 재밌는 일은 아니겠지."

엔크리드가 말하며 눈을 깜빡였는데, 빛이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토레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는데.

그게 전에 마물과 더 싸우겠다고 말하는 모습과 겹쳐 보였다.

'이 새끼, 이거 기대하는 건가?'

강 건너는 마물과 마수의 땅이라는 곳이니까?

"묘하게 재밌네."

토레스도 위험을 즐기는 편이다. 그런데 이쪽도 그런 것 같지 않나.

"가자고."

둘은 다시금 부지런히 걸었다.

나루터에 다 왔을 때쯤 토레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는데. 시간이 좀 남겠어."

강을 건너려면 사공이 있어야 한다.

나루터 근처에 대충 쌓아 둔 돌무더기 따위가 보였고, 어설프나마 가도도 보였다. 이제는 해가 위로 멀끔히 솟았다.

토레스가 적당한 그늘을 찾아 앉자, 엔크리드가 그 옆에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안 쉬고?"

"이게 쉬는 거라."

이러니 훈련에 미친 놈이란 소리를 듣지.

토레스는 허공에 검을 휘두르는 엔크리드를 지켜봤다.

스텝을 밟고 검을 휘두른다.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빈틈.'

이라고 생각한 순간, 검을 당기며 팔근육을 지렛대 삼아 칼날의 반대편, 폼멜을 무기 삼아 올려친다.

기본기의 응용이다.

'깔끔해.'

저기에 턱주가리가 걸리면 최소한 며칠은 죽만 퍼먹고 지내야 할 것이고.

운이 나쁘면 평생 딱딱한 건 다 씹은 일이 될 터였다.

'아오.'

상상하다 보니 제 턱이 아픈 것처럼 느껴졌다.

엔크리드는 이후로도 계속 움직였다.

여기까지 온 것도 나름대로 강행군인데도.

'체력은 죽여주게 좋네.'

휘두르고 또 휘두른다.

지켜보던 토레스가 자기도 모르게 숏소드 손잡이를 쥐고 당겼다.

칭.

칼날이 반쯤 뽑히며 마찰음을 토해 냈다.

'아.'

너무 몰입한 탓이다.

그 소리에 엔크리드가 휘두르던 칼질을 멈춰 세우고 고개를 돌렸다.

둘의 눈이 마주치고.

"한판?"

엔크리드가 제안했다.

이럴 때가 아니긴 한데.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는데, 엔크리드란 놈을 보고 있으면 묘하게 호승심이 생겼다.

그렇다고 적의를 불태우는 건 아니고.

순수하게 실력을 겨루고 싶게 만들었다.

즉, 이전 승급 결투에서 못다 한 승부도 내보고 싶었다.

'제대로 해야겠지.'

일전에 하피와 인면견을 다루는 걸 봤다.

지금 검을 단련하는 모습도 봤고.

이제 무조건 밑이라고 보긴 어렵지 않을까.

'성장기야, 성장기.'

서른이라면서 이런 성장세라니.

"그래, 하자."

토레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엔크리드가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통째로 뽑아 들었다.

검집째로 맞아도 어디 한 군데는 부러질 것이다. 엔크리드는 강격의 검술을 쓰니까.

"좋아. 좋다고."

더없이 진지한 그 모습에 토레스도 괜한 말을 하며 팔을 늘어뜨렸다.

'단검을 던져 볼까?'

아니, 어쭙잖은 수는 안 통할 테니.

그럼 어떻게?

계산하고 생각한다.

수없이 많은 실전을 통해 얻은 깨달음이 토레스의 머리를 관통했다.

'일격에.'

툭 땅을 찬 순간, 토레스는 몸이 바닥을 스치듯 나아갔다.

낮고 빠르다.

아우딘의 태클이 떠오르는 속도에 엔크리드가 반사적으로 무릎을 굽히고 세웠다.

동시에 검을 아래로 휘둘렀다.

뭐가 됐든 다가오면 맞을 터.

그러자 토레스의 몸이 옆으로 튕겨 나갔다.

엔크리드의 검이 그런 토레스의 흔적을 쫓았다.

눈으로도, 손으로도, 발로도.

전신 감각도 북돋는다. 놓치면 진다. 이전 결투에서 얻은 교훈이다.

동시에 거리를 주지 않는 거다.

장기전의 싸움이다. 그럼 이길 수 있을까?

장기전과 거리를 재며 싸운다면, 그리고 이게 진검 싸움이라면 죽일 수는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 하는 게 그런 싸움은 아니지 않나.

엔크리드는 일부러 거리를 좁혔다.

토레스는 당황하는 대신, 준비했던 걸 꺼내 보였다.

팔을 반만 뻗어도 닿을 거리까지 좁힌 채 상대의 목덜미 어림에서 손목을 한번 턴다. 그게 전부였다.

손에 무기도 없고 목을 쥔 것도, 때린 것도 아니다.

엔크리드는 오롯이 직감에 반응해서 고개를 뒤로 젖혔다.

픽.

거기서 승부가 났다.

토레스의 손에 어느새 한 뼘 길이의 칼날을 가진 나이프가 들려 있었다.

죽고 죽이는 싸움이었다면, 토레스가 손목만 뒤틀어도 치명상이다.

"볼에 예쁘게 칼자국을 내줄 생각이었는데."

"...뭐냐, 그건."

엔크리드는 놀랐다.

그럴 만했다. 분명 빈손이었으니까.

"내 비기다. 물어본다고 알려 주겠냐?"

"안 알려 주겠지."

안 알려 줄 줄 알았는데, 의외로 토레스는 술술 입을 열었다.

"손재주가 필요해. 하루아침에 되는 것도 아니고."

그가 말하며 손목을 뒤집자, 어느새 손에 있던 나이프가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손을 털자, 소매에서 툭 단검이 튀어나왔다.

자세히 보니 손잡이도 칼날도 상대적으로 얇다. 소매에 숨기는 용도로 만든 물건으로 보였다.

"하이드 나이프. 내 비기다."

토레스가 말을 내뱉곤 한숨을 쉬더니 이어 말했다.

"씁, 이거 아무나 보여 주는 거 아니다."

"그래, 그런 것 같네."

엔크리드는 다시 일어나 먼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사공이 오기로 한 시간까지 아직 여유가 있었다.

"한 판 더?"

물으니, 토레스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젓다가 일어났다.

"그래, 하자."

오랜만이었다. 마치 처음 검을 잡았을 때의 열정이 가슴에 타오르는 것 같은 기분은.

토레스는 그 기분에 휩쓸려 어울렸다.

그는 정말 아주 오랜만에 짧은 대련만으로 실력이 늘어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양감, 곧 목숨을 건 작전에 임해야 한다는 긴장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일어난 일이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눈앞에 있었고.

'묘해.'

이 모든 건 엔크리드 덕분이었으니까.

토레스는 그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러니 묘하고 신기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수밖에.

약속된 시간에 사공이 도착했을 땐, 땀에 흠뻑 젖은 병사 둘이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상비군 임무라고 들었는데, 임무가 아니라 훈련이었소?"

늙은 사공이 물었다.

할 말이 없는 질문이었다.

96. 볼 게 있는 자와 없는 자

토레스는 조금만 방심하면 기가 막히게 약점을 파고들었다.

숨 쉬는 것만큼 대적하는 상대의 호흡과 상태를 읽을 줄 알았다.

그건 어떻게 할 수 있냐 물었더니.

"이런저런 다양한 애들이랑 최대한 많이 싸워 보면 돼. 그게 단시간 특급 병사가 되는 가장 빠른 방법이자, 변방 수비대의 철학이지."

철학이라고 할 건 없으니, 마지막에 덧붙인 말은 반쯤 농담이리라.

말한 토레스가 피식 웃었다.

출렁이는 물결, 엔크리드는 강물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달라.'

렘과 라그나의 가르침이 다르듯.

토레스와의 대련과 말도 다르다.

요정 중대장 또한 다르고.

'다양하다.'

전부 배울 게 있었다. 무엇 하나 놓칠 게 없었다.

토레스의 하이드 나이프는 어떻게 보면 단순한 손장난이지만, 그걸 어떻게 활용하냐에 따라 치명적인 한 수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알았고.

그걸 위해 상대의 인지를 속이는 것까지 일부 익혔다.

토레스의 실전 전투법이었다.

"아버지란 인간이 도박꾼이었고, 날 2대 도박꾼으로 만들고 싶어 한 덕이지."

하이드 나이프란 기술의 기원이라고 해야 할까.

엔크리드에게는 그게 탁월한 재능과 부단한 노력의 결과물이라는 말처럼 들렸다.

"가르쳐 줄까?"

사공이 오기 직전이었다.

"비기라면서?"

"원하면 가르쳐 주고."

왜 저러는 걸까.

모른다. 다만, 엔크리드는 상대의 심정 변화에 이유를 찾기보다 주어진 기회를 잡는 것에 익숙했다.

끄덕.

"좋아. 잘 봐, 소매 안쪽에 이렇게 숨겨 두고."

그 뒤 나이프 숨기는 법, 손바닥을 뒤집는 것만으로 뽑는 법 등의 설명이 이어졌다.

"재주 되게 없네."

토레스가 불평을 토할 정도로 엔크리드의 손끝은 무뎠으나.

무언가를 배울 때, 한 점의 집중을 활용하는 법을 알았기에 전보다는 나았다.

확실히, 이전보다 몇 배는 나았다.

이전의 엔크리드였다면, 한 점의 집중을 배우기 전이였다면.

'진즉에 포기했으려나?'

진즉에 고개를 가로젓는 토레스를 보진 않았을까?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일에 시간을 투자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일 테니.

"전용 나이프는 나중에 따로 대장간에 말해서 만들고. 그전에는 얇은 돌 따위로 연습하면 좋을 거다."

토레스가 그리 말하며 직접 얇은 돌도 주워다 줬다.

"너 정말 둔하구나."

그러며 또 핀잔.

다 아는 사실이기에 엔크리드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애초에 저런 말에 신경 쓰면서 살 여유도 없었고.

"그래도 꾸준하긴 하네."

토레스의 말을 흘려들으며 몇 번 시도해 봤으나, 당연히 쉬이 되진 않았다.

집중력을 더해 얇은 돌판을 숨기는 과정이다.

손매를 늘어뜨려 걸치고 안쪽에 쏙 돌멩이를 넣는다. 손등을 하늘로 향했다가 땅으로 돌리며 튕기는 게 핵심이었다.

당연히 쉽지 않았다.

"연습용 검집이라도 하나 있으면 좋겠지만."

토레스의 중얼거림이다.

본래 연습할 때는 소매 안쪽에 단검 따위를 고정하는 전용 검집이 있다는 거다.

익숙해지기 전에 쓰면 좋다고 했다.

"도박꾼 사이에서는 파밍이라 부르는 기술을 응용한 거다."

엔크리드가 기술 단련하는 걸 지켜보며 토레스가 말했다.

"파밍."

몇 가지 조건이 붙어야 쓸 수 있는 기술이라 하겠다.

칼날이 쫙 편 손바닥보다 짧아야 했고, 숨기는 것도 정확한 타이밍에 해야 했기에, 손에 잡는 것부터 연습할 시간이 필요했다.

'어려운데.'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 몇 배 어렵다.

그래도 방패를 손에 익게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리 시간을 보내고 다시금 대련으로 땀을 흠뻑 흘린 채로 쉬고 있자니, 사공이 온 거고.

사공은 가도를 따라왔는데, 이쪽은 마물 소탕을 주기적으로 하는 순찰병이 도는 곳이었다.

덕분에 사공이 홀몸으로 올 수 있었다.

"올해가 지나면 여기에 오두막을 세운다고 합디다. 그럼 사공이나 어부가 이쪽에 자리를 잡겠지요. 가능하면 작은 어촌이 꾸려지면 좋을 것 같은데."

사공은 말이 많았다. 적당히 받아 주던 엔크리드가 끼익하는 노의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강물을 바라봤다.

펜-하닐 강.

일대 마을은 물론, 크게는 나우릴리아를 포함한 근처 나라의 젖줄이다.

저 멀리 강변에 낮게 자란 풀과 나무 몇 그루, 한쪽으로 시선을 던지면 바위 절벽과 절벽 사이로 떨어지는 폭포와 강변을 따라 지어진 몇 개의 오두막도 보이곤 했다.

이쪽은 자갈길이지만, 시선을 저 너머로 던지면 봄이 오면 녹색으로 변할 풀밭도 보였다.

"엇차, 여긴 유속도 느리고 깊이도 얕은데 저런 게 위험해."

사공이 혼잣말하듯 내뱉으며 나룻배 방향을 바꿨다.

중간에 삐죽 솟은 암회색 바위가 보였다.

저기에 걸리면 이런 나룻배 따위는 부서지는 게 당연할 것이다.

배는 유유히 강물을 타고 흘렀고, 곧 강 너머에 다다랐다.

"난 가 보겠수다."

사공이 돌아가고.

"좀 씻고 갈까? 만나기까지 여유가 좀 있는데."

토레스가 머리 위에 뜬 해를 보며 제안했다.

"그게 좋겠네."

안 그래도 땀을 흠뻑 흘렸다가 식으니, 불쾌한 냄새가 올라오는 중이었다.

작전 기간이 며칠이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시작부터 불쾌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여유가 있을 때, 먹고 자고 씻는 건 병사의 기본 소양이기도 했다.

"그럼."

토레스가 먼저 훌훌 옷을 벗고 강물에 몸을 담갔다.

출렁거리는 강물은 파란색과 녹색의 중간쯤 됐는데 무척 맑고 깨끗해 보였다.

곧 엔크리드도 무장을 하나하나 해제하곤 발가벗고 강물에 들어갔다.

발을 담그자 싸늘한 감각에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그런 엔크리드를 본 토레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뭐냐, 넌."

여기서 놀랄 게 있나?

토레스가 입을 벌렸다가 시선을 엔크리드의 다리 사이로 내리더니, 곧 하던 말을 멈추고 입을 꾹 다물었다.

엔크리드도 새삼 제 다리 사이를 바라봤다.

놀랄 거, 하나 있긴 했다.

"이 새끼, 다 가진 새끼."

토레스의 말투가 울먹거리는 것처럼 들렸다.

"얼굴만 가졌어야지."

"자꾸 그러니까 이름도 모르는 부모한테 고마워하고 싶어지잖아."

"너 고아냐?"

"응."

여긴 부모를 모른다는 게 특별한 곳이 아니다. 종군하는 이들 태반이 그럴 테니까.

"손바닥을 때려가며 뭘 가르치는 부모보다는 없는 게 나을 수도 있다."

"그럴지도."

엔크리드는 애초에 부모의 정을 갈구한 적이 없다. 그럴 시간에 검을 휘두르고 싶을 뿐.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없던 시절.

오롯이 그 시절을 견디게 해 준 건, 기사라는 꿈과 검이라는 물건뿐이었으니.

고아로 자란 꼬맹이에게 세상은 부드러울까.

설마.

그런 세상이 아니다. 뒈지지 않은 게 용하지.

그나마 엔크리드가 머물던 마을 사람들이 순박하고 선했기에 그가 살아 있는 거지.

'기사.'

오롯이 그것만을 바라보고 살아왔다. 정을 갈구할 시간에 기사를 꿈꿨다.

굶주림을 잊기 위해 꿈을 꿨고.

괴로움을 잊기 위해 몽둥이를 검 삼아 휘둘렀다.

그래서 엔크리드는 정을 갈구하지 않는다.

대신 검을 갈구하니.

그로 인해 꾸는 꿈이다. 종전의 기사, 엔크리드가 가진 꿈의 시작.

새삼 고향이라 부를 만한 마을 사람들 몇몇이 머릿속을 스쳤다.

부모처럼 아껴 준 자들은 아니지만.

적어도 죽어가는 걸 놔두는 이들은 아니었다.

그런 이들까지 전쟁에 휩쓸리는 게 세상이다.

'전쟁은 모든 걸 잡아먹지.'

그러니 그 전쟁을 끝낼 수 있으면 좋으리라.

거기에 일조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두르면 그만이다.

엔크리드가 아는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그게 그의 부모요, 형제고, 자매이며.

꿈이고 목표이자, 모든 것이었으니.

부르르.

수면 위로 거품이 솟아올랐다.

잠수한 채로 엔크리드가 생각에 잠기자, 토레스가 물 안에서 엔크리드의 어깨를 툭 쳤다.

"푸아."

그리 숨을 토해 내며 올라오자.

"왔다."

토레스가 말하며 한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돌아간 그의 눈을 따라 뒤로 고개를 돌리자, 짝다리를 짚은 병사 하나와 그 뒤에 숏소드보다도 더 짧은 몽둥이를 든 병사 둘이 보였다.

스치듯 보면 마적이나 산적쯤으로 오해할 법한 무장이었다.

클럽이라는 부르는 둔기와 헤진 가죽 갑옷.

무장은 가볍다. 두꺼운 천 갑옷인 갬비슨을 포기했다는 건 기동성에 더 무게를 뒀다는 것일 테고.

자연스레 엔크리드는 상대의 무력 정도를 가늠해 봤다.

아우딘과 고립의 기법을 통해 배운 것이니.

'양팔 균형이 좋다.'

짝다리를 짚었음에도 곧바로 양손은 늘어뜨려 뒀다.

언제 저런 자세를 취하는가.

'수틀리면 뭘 던질 수도 있겠고.'

투척 무기를 다루는 솜씨가 꽤 괜찮을 듯싶다.

그걸 증명하듯 허리춤에 투척용 손도끼가 달랑거리고 있고.

단련 정도를 봐서는 다른 재주도 있을 법했다.

뒤에 선 병사 둘은 도끼 대신 단검을 허리춤에 찼고, 손에 몽둥이를 든 걸 제외하고는 그리 눈에 띄지 않았다.

'주황색 머리카락이네.'

엔크리드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선두에 선 병사의 얼굴에 닿았다. 주근깨와 주황색 머리칼, 체구는 작다.

여자 병사였다.

"여유만만이네? 목욕도 즐기시고. 시원은 하시고?"

주황색 머리칼이 껄렁한 말투로 둘을 맞이했다.

그걸 보며 엔크리드는 새삼 제 육감이 아직 발전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다가오는 걸 못 느꼈다.'

그게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여기까지 누가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기도 했고.

물속에 잠수한 채로 생각에 잠긴 탓이다.

너무 마음을 놓은 건가.

아니다. 그래도 최소한의 대비는 했다.

강변 바로 앞이고 무장은 그곳에 있으니.

여기까지 접근한 이들이 기척을 숨기는 게 능숙한 것도 있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지대가 높은 곳에 서 있던 주황색 머리칼이 말했다.

"안 나올 거야?"

토레스가 먼저 나섰다.

"계속 보게?"

그러며 말하니.

"볼 게 있어야 보지."

독한데.

엔크리드는 생각하며 밖으로 나갔다. 촤아악 하며 그의 몸을 따라 물이 흘러 내렸다.

기실 토레스가 놀란 게 과연 남자의 상징뿐이었을까.

아니다.

고립의 기법은 엔크리드의 몸을 아예 다른 형태로 만들었다.

오늘을 반복하며 새겨 둔 아우딘의 가르침, 시간의 중첩된 결과가 몸에 여실히 드러났다.

쪼개진 어깨 근육을 따라 탄력이 느껴지는 팔근육이 씰룩였다.

탄탄한 가슴 근육을 따라 내려가면 각이 진 복근이 꿈틀댔고, 허벅지 앞쪽 대퇴부 근육이 쪼개지며 병사의 눈을 반겼다.

마지막으로 가운데에 덜렁하고 튀어나오는 게 병사의 눈에 가득 차니.

"...그쪽은 볼 게 좀 있나 본데."

옆에서 빤히 상황을 지켜보던 토레스가 불평 어린 말을 내뱉게 했다.

"큼, 옷이나 입어."

주황색 머리칼의 병사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토레스와 엔크리드는 땀에 전 옷을 두고 배낭에서 새로운 옷을 꺼내 입었다.

입었던 옷이 마르며 소금기가 보일 정도였다.

시간이 되면 좀 빨아 두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과 함께 엔크리드가 다시 완벽하게 무장한 채로 일어섰다.

"정찰 소대장 핀."

주황색 머리칼이 주먹을 내밀며 말한다.

토레스가 먼저 나섰다.

"변방 수비대 소대장 토레스다."

툭, 주먹을 맞대고 그 주먹이 곧 엔크리드에게 다가왔다.

"독립 소대, 소대장 엔크리드입니다."

요정 중대장은 엔크리드의 소속을 묘하게 바꿔 버렸다.

실제 소대를 맡길 순 없으니, 아예 밖으로 빼 버리고 중대 휘하 독립 소대로 편제를 짠 거다.

"독립 소대? 그건 뭐야? 하여간 반갑다."

핀은 엔크리드의 주먹을 지나쳐 배를 툭 쳤다.

"복근 좋더라."

"나도 복근은 좋았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