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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 *

"눈 안 치웠다고 두들겨 맞은 거요? 그런 거요?"

숙소에 돌아오자, 온열 가죽으로 몸을 감싼 렘이 먼저 반응했다.

"뭐?"

"몰골이 왜 그 모양인 거요? 누구 짓이요?"

말은 숫제 지금 당장 뛰쳐나갈 것 같은데, 손은 온열 가죽을 더 여민다.

그래, 저거 꽤 따뜻하지. 엔크리드도 알았다.

오늘은 또 유난히 추운 날이기도 했다.

"뭡니까?"

라그나도 묻고.

어쩐 일인지, 오늘은 숙소에 있는 작센도 유심히 엔크리드를 바라본다. 눈으로 무슨 일이냐고 묻는 것 같았다.

아우딘이 조용히 뇌까렸다.

"왜 만날 맞고 다니십니까, 형제님."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되게 허약 체질 같은데.'

툭 하면 맞고 다니는 철부지 어린애 같지 않나.

엔크리드는 생각하며 답했다.

"대련했다."

"누구랑 한 거요?"

"중대장."

"우리 중대장?"

끄덕.

"왜 그랬수? 맞고 싶으면 내가 때려 줄 텐데."

저 새끼는 말을 참 얄밉게 해.

엔크리드는 대답도 집어치웠다. 조금 전 초인적인 의지로 몸을 씻고 온 참이었다.

다행히도 막사 내에는 크로나만 주면 뜨거운 물이 나오는 욕탕이 있다.

그게 아니었다면 씻는 걸 포기했을지도 몰랐다.

전신이 욱신거렸다. 손가락 까딱할 힘도 없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쉬면 되니까.

한 이틀 푹 쉬면 될 것이다.

근무도 없고 훈련도 없으니 쉴 시간은 충분했다.

"기실 도시의 치안을 위해 노력한바, 공적을 인정해 나흘의 휴가를 준다. 포상금은 없다."

해가 떨어질 때쯤, 중대장이 대련을 끝내며 한 말이었다.

근무가 없다는 얘기다.

포상금이 없다고도 했지만, 엔크리드는 대련이 포상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범죄 길드에서 얻어 온 재물도 있고.

'열 번은 넘었던 것 같은데.'

꽝꽝 언 흙바닥 위에 널브러진 횟수다. 몸이 고생했으나, 배운 게 있었다.

'지금 나한테 부족한 것.'

중대장은 입을 열어 말하는 대신 검과 주먹으로 말했다.

검술과 한 점의 집중, 야수의 심장, 칼날의 감각을 갈고닦는 건 당연했다. 그건 기본이다.

다만, 그에 앞서 엔크리드는 자신의 안에 채워 넣어야 할 걸 깨달았다.

"둔하구나. 너."

중대장의 마지막 말이 비수가 되어 날아왔지만, 그 정도로는 아프지도 않았다.

그동안 자신을 가르친 선생은 더 심한 말도 입에 달고 살았다.

"꼭 배워야 하는 건가?"

"관두고 고향에 내려가 농사나 지어라."

"삼류 칼잡이가 되어 죽을 사람을 가르칠 순 없다."

제대로 된 사람일수록 더욱 심한 말을 내뱉었다.

중대장은 엔크리드한테 둔하다 했지만, 엔크리드는 그 둔함 속에서도 원하는 건 얻었으니.

'기술의 부족함.'

정확히는 몸을 다루는 기술의 부족함이다.

요정 중대장은 같은 방식으로 계속 자신을 내동댕이쳤다. 그녀는 몸으로 가르쳤고 엔크리드 또한 몸으로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배움의 기회만큼은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놓치지 않았으니.

'나한테 필요한 것.'

레슬링, 격투술, 무투술, 박투술이라 부르는 전투 기술이다.

검을 휘두른다고 해서 검만 들고 싸우는 건 아니다.

손과 발, 몸통을 활용하는 것도 포함이란 거다.

이제까지 엔크리드도 꽤 활용한 전법이나.

'제대로 배운 적 없는 게 확연히 드러났어.'

중대장의 기술은 무척 뛰어났다. 특히나 검을 놓고 바닥을 기듯이 달려와 단숨에 균형을 무너뜨린 뒤, 무릎을 잡아 꺾는 건 당해 낼 방법이 없었다.

단검을 뽑아서 내리찍는다면?

아니, 중대장이라면 단검을 뽑아 꽂기 전에 무릎 관절을 빼고 부순 뒤, 몸을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쉽지 않아.'

요는 기술의 차이란 거다. 숙련도의 차이도 있으나, 애초에 배우고 지닌 게 달랐다.

'재밌긴 했지.'

전신이 욱신거리고 지금도 골병을 든 것 같지만, 배운 게 있으므로.

하물며 그 배움이 새로운 길을 열어 주었기에 엔크리드는 즐거웠다.

침상에 누우려고 보니 표범이 고개를 내밀어 파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봤다.

'이름을 지어 준다고 했었지.'

제대로 부를 만한 이름도 없어서야 곤란하다.

침상에 몸을 들이밀자, 표범이 품을 파고든다. 따듯한 온기가 느껴졌다.

어째 그 온기에 골병이 든 몸이 조금 나아지는 기분이 든다.

"따뜻하니까 난로라고 이름 지을까?"

"그걸 이름이라고 지은 거요?"

옆에서 렘이 끼어들었다. 이 새끼는 안 끼어드는 데가 없군.

"이상하냐?"

"말이라고 하십니까?"

반대편 침상이다. 라그나가 답했다. 침상이 누운 채다. 일어나기도 귀찮은 주제에 입은 살았다.

"형제님은 표범이 싫은 겁니까?"

아우딘까지 이런다.

"싫어?"

엔크리드가 표범에게 묻자, 놈이 앞발로 찰싹 하고 엔크리드의 뺨을 때렸다.

"정말 싫은가 본데."

엔크리드가 중얼거리며 표범을 품에 안은 뒤, 생각에 잠겼다.

이름을 뭐라고 지을까.

이런 거로 고민할 줄은 몰랐군.

검둥이?

아니, 무슨 강아지 이름 같은데.

눈이 파랗고 호수 같으니까 파란 눈이라고 할까.

이건 좀 괜찮은 것 같은데.

표범이 품에 안겨서 가슴을 톡톡 두드리는 게, 마치 자기 생각을 읽고 전부 싫다고 하는 것 같았다.

파란 눈도 싫니?

그럼, 뭐라고 해야 하나.

흑표라고 부를까. 그럼 편할 것 같긴 한데.

꾹.

표범이 가슴을 발로 눌렀다. 눌러서 연신 비비는 걸 보니, 어지간히 싫은 것 같다.

'그런데 너, 내 생각 읽는 거냐?'

외부 작전에 나가, 제가 죽인 이들의 동료와 함께 밤을 보냈었다.

그런 상황에서 코까지 골면서 잔 렘이나 죽은 듯이 잔 라그나가 이상한 거였다.

어느 정도 긴장은 필요했다.

덕분에 도둑의 본거지에서 푹 잠들 순 없었다. 선잠이 들었고 간신히 눈만 잠깐 붙인 정도였다.

이후 돌아오자마자 보고했고 곧바로 대련이었다.

그것도 수차례 언 바닥을 뒹굴며 몸을 혹사한 대련.

덕분에 노곤해진 몸이다. 온수로 몸을 씻고 돌아와 온열 가죽을 두르고 그 위에 모포까지 두르자 온기가 몸에 스며들었다.

표범이 주는 온기도 한몫했다.

놈이 발로 꾹꾹 누르며 박자를 타는 것도 절로 잠이 들게 했다.

엔크리드는 그렇게 반쯤은 잠에 취한 채였다.

'너 이름이 뭐냐?'

반은 꿈에 정신을 두고 반은 현실에 정신을 둔 상태를 비몽사몽이라 하겠다.

그런 상태에서 물은 순간, 엔크리드는 꿈을 꿨다.

꿈에서 실버 블론드 머리칼에 파란 눈을 가진 미녀가 나왔다.

똑바로 뜬 눈은 크고 선명했으며 곧게 솟은 콧대는 그녀의 성격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곧고 흐트러짐이 없는 오만한 미녀라는 생각이 들었다.

희고 붉고 노랗고 파란 꽃이 흐드러지게 핀 꽃의 초원의 한복판.

그녀는 홀로 꽃 사이에서 빛나는 별과 같았다.

모든 꽃에 빛을 주는 그런 별.

"예쁘게 생겼는데."

엔크리드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초원을 넘어 상대에게 닿았다. 꿈이기에 알 수 있는 거다.

그리고.

"내 이름은 에스터다."

그녀가 말했다.

그 목소리 또한 거리와 공간을 넘어 엔크리드에게 닿았다.

다시 초원이 사라지고 그녀도 사라진다. 반쯤 잠에 취한 엔크리드가 잠꼬대를 뱉었다.

"에스터, 에스터라고 하자."

"...꿈 꾸슈?"

옆에서 렘이 답했지만, 이미 잠이 든 엔크리드는 답하지 않았다.

잠든 분대장을 본 렘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피곤해도 저리 정신을 잃을 정도로 잠드는 인간은 아닌데.

"피곤한가 보네."

렘이 중얼거렸다. 중대장이 작정하고 분대장을 굴린 것 같았다.

그게 그리 마음에 들진 않았다.

중대장이란 요정족 여자는 속이 뭔지 알 수 없는 타입이었다.

하물며 제 분대장을 왜 멋대로 저렇게 굴린단 말인가.

누구 허락받고?

"그르륵."

에스터란 단어에 반응하듯, 분대장의 품 안에서 표범이 기분 좋은 울음을 터트렸다.

"그래, 에스터 해라. 너."

렘은 농담조로 뱉고 자신도 눈을 감았다.

지금의 온기가 만족스러웠다.

추운 건 싫다. 정말 끔찍하게.

사흘 동안 근무가 없다고 했던가?

렘은 그동안 먹고 쌀 때 빼고는 온열 가죽에서 나갈 생각이 없었다.

* * *

레이크 팬서, 에스터는 엔크리드란 남자에게서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주문과 신비, 비의와 관련된 향이다.

실제로 파고들면 저주에 가까운 거지만.

'겉에만 머물렀다.'

저주라 불리는 신비가 엔크리드 주변에서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한 채 흔적만 남겼다.

그녀의 경험으로 봤을 때 누군가 만들어 둔 주문 트랩이 발동했던 것 같다.

발동했으나, 그게 먹히지 않은 거고.

왜 저주는 머물기만 했는가, 짐작은 했다.

물론 짐작뿐이다. 지금의 몸으로는 그 무엇도 증명할 수 없으니.

자세히 알고 싶어, 더 파고들고 싶지만, 지금은 따질 수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따질 일은 아니었다.

주문의 향을 한껏 맡으며 엔크리드란 남자에게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하고 겉에만 남은 기운을 빨아들였다.

이미 저주라 불릴 만한 의념과 의지는 사라졌기에 순수한 에너지, 마나만 남았다.

에스터는 그걸 한껏 음미했다.

감미로운 향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맛보는 주문 세계의 일부였으니.

그 와중에 자신의 이름을 멋대로 지으려는 남자의 꿈에 자신을 투영했다.

"내 이름은 에스터다."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전했다. 도저히 그냥 둘 수 없었다.

주문 세계에서 이름이란 특별한 의미가 있기에.

하물며 지금 자신의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함에야.

지금 모습에 새로운 이름을 받으면 저주가 더 깊어진다.

그러니 본래의 이름을 알려야 했다.

무리해서 남자의 꿈에 나타난 이유다.

엔크리드란 남자의 몸에 남은 마나와 꿈에 자기 모습을 비춘 덕이었을까.

에스터는 잠깐이지만, 본래의 모습을 찾았다.

자신이 택한 남자의 품 안에서 나체로.

"음."

남자가 자신을 끌어안는다. 품에 이성을 허락한 적 없기에 에스터는 금세 얼굴이 시뻘게졌다.

하지만 그걸 본 사람은 없다.

남자의 탄탄한 가슴 근육이 코앞이었다.

에스터는 가느다란 숨소리만 흘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소란을 피울 처지가 아니었다.

본모습이 돌아온 건 아주 잠깐이었다.

남자의 눈꺼풀이 슬며시 올라간다. 잠에 취한 눈이었다. 또렷한 눈빛은 아니다. 그 눈을 마주한 순간, 에스터는 너무 놀라서 숨 쉬는 걸 잊었다.

"응?"

남자는 멍한 시선으로 보다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여전히 잠에 취한 눈이었다.

그사이 에스터는 표범의 형태로 돌아갔다. 마법의 신비였다.

다시 눈을 떴던 남자가 눈을 감고 잠에 취했다.

"에스터, 에스터."

남자는 제 이름으로 잠꼬대를 했다.

기억 못 하겠지?

그녀는 도로 표범으로 변해 다행이라 생각했다. 처음 보는, 엄밀히 말하면 처음 보는 남자는 아니지만, 어쨌든 남자의 품에 나체로 안긴 꼴이라니.

상상도 하기 싫다.

그러곤 에스터는 후회했다.

'저주가 다행이라니.'

실수로도 할 생각이 아니다.

하지만 남자의 품에 이렇게 안긴 게 처음이었던지라.

표범은 괜히 남자를 밀어내려다가 가만히 있었다.

남자의 품에 마나의 향이 아직 남아 그녀를 유혹했다.

그녀는 마나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품에 파고들었다.

엔크리드가 표범의 온기를 느끼듯.

표범도 엔크리드의 온기를 느꼈다.

잠깐이나마 본 모습을 찾을 만큼 기운을 차렸으니.

이제 표범의 모습이어도 어느 정도 활동할 수 있을 터였다.

아직 제 모습을 찾으려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곧.'

말 그대로 시간의 문제일 뿐이었다.

엔크리드란 인간의 곁에서라면 그리될 수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애초에 이 작자를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얼굴이 마음에 들긴 해.'

그녀가 보기에도 엔크리드는 보기 드문 미남이었다.

물론 에스터는 그게 중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69. 여자를 안는 꿈을 꿨다 (2)

엔크리드는 꿈을 꿨다.

꽃밭과 여자가 나왔다.

"당분간 신세 좀 질 테니, 그렇게 알아."

신비한 매력의 소유자였다.

여자라면 잘 돌아보지도 않는 엔크리드인데도 쉬이 잊히지 않을 듯했다.

꿈은 난잡했다.

꽃밭이었다가, 검은 강이 나왔다가, 사공이 보였다가 여자가 보였다가 갑자기 표범이 보였다.

'네가 여기서 왜 나오냐?'

속으로 물었는데, 표범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토라졌는지 한쪽으로 고개를 팩 돌린다.

그게 몹시 귀여워, 엔크리드는 참지 못하고 놈의 정수리를 손가락을 세워 긁었다.

그르르.

레이크 팬서는 맹수라고 들었는데, 이럴 때 보면 고양이와 매한가지였다.

놈이 기분 좋은 울음을 흘렸다. 그르륵거리는 소리가 엔크리드가 듣기에도 정겨웠다.

그러다 잠깐 눈을 떴는데,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참 모호했다.

눈앞에 꽃밭과 검은 강에서 봤던 여자가 품에 안겨 있었다.

그것도 나체로.

눈을 깜빡이니, 여자는 사라지고 표범의 정수리가 보였다. 아무래도 꿈이었던 것 같았다.

'그런 것치고는.'

품에 안은 묵직한 느낌이 남았다. 작은 표범에게선 느낄 수 없는 향기와 온기가 남아서 더 묘한 기분이었다.

'꿈이 너무 현실감 있는데.'

그러다 다시 잠이 쏟아졌고, 엔크리드는 굳이 쏟아지는 잠을 이겨 내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난 눈을 뜨니, 자신이 일어나기 전에는 절대 품 밖으로 나가지 않던 표범이 온데간데없었다.

"표, 에스터."

아무렇게나 부르려던 엔크리드는 잠결에 지은 이름을 떠올렸다.

그러자, 한쪽에서 꼿꼿하게 선 레이크 팬서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숙소 그늘에 기가 막히게 숨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찾기도 어려웠다.

호수 같은 푸른 눈과 흑단 같은 까만 털의 주인이다.

놈이 톡톡 바닥을 즈려밟고 걷더니 새초롬하게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숙소 한쪽에 쉬라고 만들어둔 가죽 위다. 당연히 온열 가죽이고.

'하루아침에 풍족함을 넘어 사치스럽게 됐어.'

일개 표범까지도 온열 가죽 위에서 제 손톱을 손질하는 광경이라니.

그 위 왕눈이가 가져다 놨는지, 렘이 가져다 놨는지 육포 따위가 놓여 있었다.

표범은 육포를 손톱으로 대충 자르더니 입 안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근데 뭐가 이렇게 허전하지?

아침에 품 안을 데워주던 작은 짐승이 없어서?

아니면 꿈이 너무 현실적이어서?

꿈에 나온 여성의 나체를 그리라고 해도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그림에는 조예가 조금도 없기에 엉망진창으로 그리겠지만.

그만큼 기억에 뚜렷하게 남았다.

'예쁘긴 했지.'

미모가 탁월했다. 인외의 미모를 뽐내는 요정 중대장과 버금갈 정도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슈?"

"꿈을 꿨는데 너무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서."

에스터가 그런 엔크리드를 바라봤다. 표범의 눈빛이 묘했다.

꿈에서 자신이 이름을 말할 때, 생각보다 의념이 강하게 남았을지도 모른다.

의지력이 약한 사람이라면 그것만으로 정신적인 타격이 있을 수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표범의 몸으로라도 손을 쓸 방도를 궁리해 봐야 할까.

표범은 심각해졌다.

"무슨 꿈인데 그러슈?"

가죽을 돌돌 말고 누운 채로 렘이 물었다.

"넌 애벌레냐?"

"맞수. 난 애벌레요. 입만 산 애벌레요. 그러니 아침 식사를 먹여 주시오. 아니면 이 허약한 애벌레는 굶어 죽는다오."

이 새끼는 확실히 반쯤 미친 새끼가 맞다.

엔크리드는 렘의 말을 귓등으로 흘렸다. 그래도 될 만한 놈이다.

"그래서 무슨 꿈이오?"

렘이 다시 물었다. 엔크리드는 턱을 긁으며 답했다.

"묘한 꿈이었어."

"묘하다?"

렘이 고개를 갸웃했다. 대가리만 나와 있으니, 모든 표현을 표정과 머리로만 한다. 이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발가벗은 여자를 봤다."

"크륵! 칵, 칵!"

'음?'

엔크리드의 눈이 표범에게 향했다.

육포 조각 따위가 목에 걸렸는지, 연신 기침을 토하는 표범이 보였다.

"에스터?"

표범은 그대로 바닥에 고개를 박은 채, 부름을 외면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전신에 신비로움을 뿌리던 표범이다.

맹수 중의 맹수, 그린 펄의 주인.

호수를 닮은 눈을 가진 표범, 레이크 팬서.

그런 맹수가 바닥에 침을 흘리며 기침을 토했다.

"켁!"

저러다 죽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내 살다 살다 표범이 육포 처먹다 목에 걸려 죽은 건 본 적이 없수, 그래서 예뻤수?"

엄청 예뻤다.

하지만 답을 하진 않았다. 말해 뭐하나.

어차피 꿈인걸.

"겨울이라고 너무 굼뜬 건 아니냐? 렘?"

엔크리드가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고 보니 전신이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움직이는 것 자체가 괴롭다.

그래도 이럴 때 가만히 있으면 몸이 더 축난다. 경험으로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훈련이 필요하다는 건 아니다. 예전이라면 급한 마음에 더 호되게 몸을 굴리겠지만.

그러면 몸이 더 망가진다는 걸 안다. 안 이후부터는 선을 지켰다.

전처럼 마음이 급하지도 않았고.

'휴식도 훈련의 일부.'

수없이 많은 검술 선생이 했던 말이다.

오늘은 적당히 몸을 풀어주면 내일은 조금 더 편할 것이다. 아우딘에게 배운 몽크 체조면 충분하리라.

"그래서 예뻤냐니까."

"알아서 뭐 하냐. 꿈인데."

대강 답하고 나갔다. 오늘도 추웠다. 전신에 안 아픈 곳이 없지만, 몸을 풀기 시작했다.

생각이 많진 않았다. 오히려 대련으로 한바탕 구르고 나니, 명확해졌다.

항상 의문이었다.

'다음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재능이 있는 자들, 흔히 말하는 천재라는 이들에게는 원하지 않아도 길이 보인다고 한다.

당장 자신에게 필요한 것, 부족한 걸 찾아내는 것도 재능이란 거다.

그럼, 재능이 없는 이들은?

이것도 해 보고 저것도 해 본다.

거기서부터 시간이 소모된다. 출발선이 달라진다.

그래서 훌륭한 선생이 필요한 거였다.

부족한 걸 집어서 얘기해 줄 선생의 존재는 언제나 보물과 같으니.

이번에는 요정 중대장이 그 역할 일부를 해 줬다.

이제 부족한 나머지는 다른 사람이 채워 줘야 했다.

"아우딘."

아침이면 아우딘은 밖으로 나온다. 추위? 그런 거에 신경 쓰는 인간이 아니다.

오죽하면 주변에서 그를 기도하는 곰이라 부를까.

몸집만으로 그리 불리는 건 아니리라.

"네, 형제님, 좋은 날이지요?"

쌩 하고 칼바람이 둘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보더 가드는 펜-하닐 대륙 내에서도 북단이다.

펜-하닐 대륙 내에서도 특별히 추운 지역이란 거다.

구름 낀 하늘 덕분에 아침인데도 주변이 얼룩덜룩해 보였다.

하지만 아우딘은 본래 이런 인간이다. 해가 뜨면 뜨는 대로, 비가 오면 오는 대로.

차마 눈이 오는 날에는 좋은 아침이란 말을 하지 않지만.

"그러네."

엔크리드가 대꾸했다. 날이 무슨 상관일까.

아니, 좋은 날이긴 했다. 어떤 날이든 새로이 뭔가를 배우는 시간은 좋은 날이 맞으므로.

"레슬링 가르쳐 줘."

엔크리드는 언제나 그대로였다. 그는 하던 대로 했다.

목적과 의지가 명확했다.

분대원을 항상 이렇게 대했기에 지금과 같은 관계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아우딘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에게 이 작자는 참으로 독특한 사람이기에.

며칠 만에 실력이 늘어난 걸 보며 어떤 행운이 있기에 저렇게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엔크리드는, 분대장은 아우딘이 보기에 타오르는 불꽃이었다.

제 몸이 타는지도 모르고 주변을 태우는 불꽃.

그러하기에 그 불꽃은 주변을 밝히고 데운다.

세상 모든 걸 외면하고 고개를 돌리려 했을 때, 기실 반쯤 포기한 상태였을 때.

그때 처음 부대에 들어와 마주한 인간이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첫 만남이다. 엔크리드는 막사 앞에서 몽둥이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냥 몽둥이도 아니고 물 먹은 나무 세 개를 겹쳐 끈으로 묶은 물건이었다.

"근력 단련."

단순히 무거운 것만 휘두른다고 힘이 쉬이 늘까.

늘긴 하겠지만, 효율적인 방법은 아니다.

저러다 몸이 망가지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며칠이면 관두리라 생각했다.

엔크리드는 그러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한결같았다. 전장에 나서도, 근무가 있어도,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자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그는 검을 휘둘렀다.

아우딘은 그때 당시의 자신을 떠올렸다.

피폐, 두 단어로 당시의 자신을 그려 낼 수 있으리라.

음울함을 한껏 풍기며 물었었다.

"실력이 형편없는데, 왜 매일 그러는 겁니까?"

"하다 보면 나아지겠지."

기분 상한 표정도 없었다. 평온한 물음에 담담한 답처럼, 그리 대답하고 하던 일을 마저 한다.

그걸 보며 아우딘은 머리에 벼락이 꽂힌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무엇이 그를 움직이게 하는가.

어떤 믿음이 그에게 있는가.

신앙의 냄새는 없다.

노력하는 것도 재능이라 하지만, 애초에 타고난 게 없다면 노력이란 것도 계속할 수 없는 법이다.

엔크리드는 그런 사람이었다.

매일의 노력에 매일 배반당하는 사람.

그리 매일 배반당하면서도 또 매번 나아가는 사람.

'당신은 뭡니까?'

아우딘은 그 뒤 분대장을 꾸준히 관찰했다.

분대장을 계속 보다 보니 자신이 낙담한 이유가 참으로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믿음은 대가를 바라며 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날, 아우딘은 다시 기도를 시작했다.

"형제님, 그러다 관절 전부 망가집니다."

이후, 분대장의 훈련을 조금씩 봐 주기 시작했다.

아우딘은 사람의 몸을 본다. 프록 수준만큼이나 재능을 보는 눈이 있다고 봐도 좋았다.

프록이 재능 판독자라고 불린다면.

아우딘은 후천적인 노력과 재능의 힘으로 몸을 본 뒤, 몸의 단련 정도를 파악하는 신체 판독자라고 해도 좋았다.

그가 보기에 엔크리드는 몸을 만드는 일에도 다른 이들보다 배는 노력해야 했다.

타고난 골격이 그렇다.

근육의 질도 그리 좋지 않다.

그렇다고 포기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자신이 아는 분대장은 그런 인간이 아니다.

"시작은 몸부터 만들어야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아우딘이 물었다. 여전히 칼바람이 부는 날이지만.

그는 분대장을 지켜보다 다시 기도를 올린 그 날 이후로 항상 좋은 아침이라 생각했다.

물론 눈 오는 날은 빼고.

"얼마든지."

"고통스러울 겁니다."

"괜찮아."

죽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엔크리드는 그리 생각했다.

"아플 겁니다."

"문제없어."

칼에 수없이 찔리며 죽는 것보다는 덜 아플 것이다.

"지금부터 알려 드리는 건 몽크의 체조가 아닙니다. 제가 개발한 기술이지요. '고립의 기법'이란 겁니다."

이름이 불길하게 들렸지만, 그만큼 희망적이라는 생각도 했다.

일단 배운다면 제대로 배우는 게 맞으니.

현시점에서 분대원, 아니 엔크리드 자신이 본 사람 중 최고의 무투 기술을 가진 사람의 말이다.

"고립의 기법."

야수의 심장, 칼날의 감각, 한 점의 집중, 이후 네 번째 기술의 이름이다.

"머리로 이해하고 몸으로 수행하는 훈련이 될 겁니다. 형제님."

"응."

"그럼, 하시지요."

덤덤한 말투였다. 엔크리드도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끄으으으으음."

연병장 한쪽에서 비명 대신 신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제 시작이지요. 형제님."

엔크리드는 아우딘이 매일 기도하는 대상이 악마가 아닌가 생각했다.

일전에 했던 체조는 말 그대로 몸을 푸는 수준이었다.

툭하면 기본이라 하더니.

"유연성을 기반으로 무게를 들어 근육에 힘을 붙일 겁니다. 하시지요."

아우딘은 몸 곳곳을 주물럭거리더니, 기묘한 자세를 시켰다.

말 그대로 근육을 찢어발길 것 같은 자세였다.

왜 엎드려서 발뒤꿈치가 엉덩이를 짓누르는데, 허벅지 앞쪽 근육이 찢어질 것 같은 건지.

아우딘은 손수 엔크리드의 다리를 붙잡고 눌렀다.

엔크리드는 아우딘의 손이 강철로 만든 족쇄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굳건한 힘이다.

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엔크리드는 몸으로 근육의 움직임을 익혀야 했다.

"두어 번 죽는다고 생각하시면 편할 겁니다."

안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는 중이었다. 정말 끔찍한 고통의 연속이었으니까.

차라리 이대로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끄르으그그륵."

엔크리드의 입에서 묘한 신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괜찮습니다. 분대장 형제의 한계는 제가 압니다."

'내 한계를 왜 네가 알아?'

사실 아우딘은 미친 새끼였을까?

엔크리드는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래도 내심 즐겁긴 했다. 이 괴로움을 통해 얻은 것이 기대됐기에, 엔크리드는 신음을 흘리고 괴로워하면서도 웃었다.

"표정을 보니 여유가 있으시군요."

아니, 여유는 없는데.

악마의 사제 아우딘은 그날 엔크리드의 몸을 수차례 분해하고 쪼개고 찢었다.

사계의 끝, 겨울의 어느 날이다.

사흘 내내 유연성을 기른 뒤다.

"드십시오."

무거운 돌덩이 따위를 들고 제한된 동작을 수행하는 게 뒤따라왔다.

"스읍, 후. 호흡 잡고. 배에 공기 넣습니다. 복압으로 하는 겁니다. 형제님."

고립의 기법은 전투에 쓰는 재주가 아니었다.

제 몸을 개조하는 기술이었다.

보름, 보름 내내 엔크리드는 피똥을 싸는 기분으로 버텨 냈다.

그러자 조금 버틸 만했다.

다시 보름이 더 지나자.

"할 만하시지요?"

전처럼 힘들진 않았다. 그만한 고통은 없다. 시작은 힘들었지만, 그럴 만한 가치도 있었다.

그렇게 다시, 보름 총 한 달이 지나자, 몸의 변화가 시작됐으니까.

70. 고립의 기법

'고립의 기법'의 기본은 부하였다.

무거운 걸 들고 동작을 반복 수행함으로 운동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무거운 걸 들고 단련한다고 해서 단순히 근력을 늘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소리다.

"이제 할까?"

한 달,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연병장 구석이다.

엔크리드가 대련을 제안한다. 아우딘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팔이 좋으십니까? 다리가 좋으십니까? 형제님?"

둘 중 하나를 비틀겠다는 신호다.

"혀가 길어. 아우딘."

둘 다 맨손이었다.

한 달 내내 고립의 기법만 배운 건 아니었다.

둘이 서로를 노려본다. 아우딘과 눈을 마주치려면 비스듬히 고개를 들어야 했다. 체격 차가 명확했다.

그런데도 먼저 움직인 건 아우딘이었다.

툭, 땅을 차는 순간 몸을 낮추며 달려드는데, 순간 잔상이 보일 정도로 빨랐다.

기도하는 곰이라는 별명답지 않다.

예전 엔크리드라면 무릎을 세워 대응하는 게 최선이었으나.

지금은 달랐다.

똑같이 자세를 낮추고 주먹을 쥐고 엄지를 세워 앞으로 찌르듯 겨눈다. 달려들면 눈알을 터트릴 수 있는 위치다.

그러자 아우딘이 달려들다 말고 옆으로 몸을 튕겼다.

팍팍 하고 땅을 차는데 커다란 덩치가 에스터만큼이나 잽싸게 자리를 바꿨다.

날랜 표범 같단 소리다.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 민첩함과 순발력이다.

뒤를 잡히면 싸움은 거기서 끝나기에 엔크리드도 수차례 몸을 돌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우딘이 주먹을 뻗었다.

어느새 팔의 리치가 닿는 거리였다. 언제 간격을 허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한 점의 집중 상태였다.

엔크리드는 시간을 쪼갠 틈에서 판단했고 행동했다. 이마를 내밀어 주먹의 타격점에 도달하기 전에 막아 내려 했다.

아프지 않게 맞는 법, 레슬링 기술 중 하나였다.

아우딘은 주먹을 뻗다가 손바닥을 펴 엔크리드의 머리카락을 잡았다.

그 뒤 잡아챈 머리칼을 밑으로 당기고, 왼 팔꿈치로 엔크리드의 등을 찍으며 무게를 싣고 내리눌렀다.

엔크리드는 잠깐이지만, 아우딘의 힘과 무게를 견뎠다.

견디는 것에 끝나지 않고 등 뒤로 넘기려는 시도까지 했다.

아우딘은 얌전히 엔크리드의 등에 오르지 않았다. 그는 무게를 실으며 엔크리드의 머리칼을 앞으로 당겼다.

귀신같은 타이밍에 머리칼을 당긴 바람에 엔크리드는 무게 중심이 흔들렸다. 도저히 제 몸을 뜻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균형을 잃은 탓이었다.

이제는 도리가 없었다.

쿵.

엔크리드는 손으로 자신의 안면을 막으며 아우딘에게 깔렸다.

"팔과 다리 대신 몸을 내주셨군요. 분대장 형제님."

아우딘이 껄껄 웃었다. 호쾌한 웃음이었다.

"전장이었으면 투구가 있었을 거야."

머리카락을 잡은 걸 말한 거다. 깔린 채로 말하니, 아우딘이 웃으며 답했다.

"그럼 다른 수단을 썼겠지요."

맞는 말이었다. 엔크리드도 불만이 있어 말한 게 아니었다.

다른 수단이 궁금해서 물은 거였지.

"투구가 있었다면 머리카락 대신 손바닥으로 목덜미를 잡거나 뒤통수에 대고 단숨에 누르는 방식을 썼을 겁니다."

"그렇구나."

아우딘에게 깔린 채다. 기도하는 곰의 무게가 짓눌러 금방이라도 내장이 터질 것 같지만, 엔크리드에게는 지금 배운 하나가 더 중요했다.

집중하는 엔크리드를 두고 아우딘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한 달, 누군가에는 지루함에 미쳐 버릴 일상이지만, 엔크리드에게는 담담한 일과가 된 나날이다.

오전에는 고립의 기법을 점심 이후에는 레슬링을 배웠다.

다시 저녁 전까지 검술을 단련했고.

저녁을 먹은 뒤에는 그동안 배웠던 것들을 되새겼다.

야수의 심장, 칼날의 감각, 한 점의 집중.

전부 개선의 여지가 있었다.

발전할 수 있는데 왜 멈춰야 하는가.

그런데도 익히는 속도는 느렸다. 한 점의 집중과 칼날의 감각, 야수의 심장이 받쳐 주는데도 그랬다.

그래서 엔크리드는 기었다.

그는 느린 달팽이였고 육지에 오른 거북이었다.

"참 느리게 느는군요."

자리에서 일어난 아우딘이 제 옷을 추스르며 말했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았기에 어깨 위로 하얀 김이 폴폴 솟았다.

엔크리드의 어깨도 마찬가지다.

고립의 기법도, 레슬링도, 둘 다 땀이 흠뻑 흐르는 행위다.

엔크리드는 몇 번이고 아우딘의 가르침을 되새겼다.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실력을 가늠하는 법.'

몸에는 모든 정보가 담겨 있다.

가령 오른손잡이 검사는 오른팔 근육이 더 발달하곤 한다.

몸의 체격과 발달 정도를 보고 상대의 경험과 단련 정도를 읽어 내는 안목이다.

고립의 기법으로 단련을 시작한 뒤, 새로이 깨달은 거다.

이후 배운 것도 값지다. 고립의 기법으로 몸의 기초를 잡은 이후에는 레슬링을 배웠다.

아우딘은 레슬링을 크게 타격기와 관절기, 던지기 세 가지로 나눴다.

상대가 자신보다 체격이 작다면 던지고 메치는 것만으로 싸움이 쉬워지는 법이라 했다.

"내가 더 작으면?"

엔크리드는 제대로 들을 줄도 알았지만, 그만큼 질문도 많았다.

배움에 있어 절대 어떤 것도 쉬이 넘어가지 않았다.

아우딘은 그때마다 생각하곤 했다.

이게 바로 분대장의 장점이라고.

"작으면 작은 대로 싸우는 법이 있지요. 관절기와 타격기, 박투에 능숙한 이들이라면 상대의 힘을 이용해 쓰기도 합니다. 카운터도 그런 방식의 일종입니다."

요정 중대장이 한 것도 그런 종류일 것이다. 손짓 한 번에 자신을 넘어뜨린 기술, 그게 떠오르는 말이었다.

실제 아우딘은 그런 방식으로 시범도 보여 줬다.

아우딘은 친절했다. 고립의 기법을 함께 할 때는 악마와 같으나, 레슬링을 가르칠 때는 오히려 순했다.

"여기서 힘을 더 주면 팔이 부러지고 관절이 망가집니다. 신성 치료가 동반되지 않으면 회복할 수 없으니, 팔 병신이 되겠지요."

조금만 실수해도 엔크리드의 몸은 맨손 해체를 당할 판이었다. 자연스레 레슬링은 순한 맛이 되었다.

"힘과 속도는 당연히 갖춰야 합니다. 그 외 급소 파악, 쓰러뜨리는 방법, 뼈를 부러뜨리는 방법, 관절을 부수는 방법 등을 배워야 하지요. 어느 하나 대강 배워서 될 건 없습니다.

그러니 새로이 배우는 것보다 지금 배운 걸 더 반복하셔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도 새로운 걸 배우고 싶다는 겁니까?"

가끔 나무라기도 했다. 그럴 만했다.

엔크리드는 기술 하나에 완숙의 경지에 다다르기보다는 최대한 많은 걸 배우고 몸에 때려 넣으려 했다.

'이게 맞아.'

엔크리드에게는 오늘의 반복이 있다.

지금 배우는 거로 기술의 숙련까지 바랄 순 없다.

아우딘이 보기에는 욕심이 많고, 몸은 못 따라주는 거로 보일 뿐이지만, 엔크리드한테는 이게 맞는 길이었다.

배운 걸 되새기는 상념이 아우딘의 목소리에 깨졌다.

"조금 전 상황에서 왜 머리칼이 잡혔다고 생각하십니까?"

"간격."

엔크리드는 담백하게 답했다. 몰라서 당한 게 아니었다.

"그렇지요. 간격, 수없이 말했는데도 분대장 형제님은 참으로 둔하고 느리군요."

엔크리드는 여전했다. 이딴 말에 상처 따위 받지 않는다. 그럴 시간도 없었다.

오늘 배운 걸 또 되뇌기 바빴으니까.

관절기는 종류만 수십 가지였다.

그걸 외우고 몸에 대강이라도 때려 박는 것만으로도 한계였다.

여기에 던지기와 타격기까지 배워야 했고, 기본적인 원리도 몸에 새겨 둬야 했다.

"몇 번이고 말씀드렸습니다. 체력은 필수고. 간격을 읽는 건 검술과 마찬가지이며, 마지막으로 민첩하지 못하면 모든 게 소용이 없음을."

아우딘은 좋은 선생이었다. 가르치는 방식이 훌륭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포기를 몰라.'

느리고 더디기에 성장하는 게 보이지 않아도 우직하게 가르쳤다.

엔크리드에게는 이런 선생이 가장 잘 맞았다.

우직한 가르침은 조금이라도 몸과 뇌리에 남기 마련이니, 숙련과 숙달은 뒤로 미루되 엔크리드도 우직하게 익히고 배웠다.

"체력, 간격, 운동 능력."

엔크리드가 아우딘의 말을 되새겼다.

검이든, 창이든, 둔기든, 레슬링이든 힘과 속도는 필수다.

간격을 재는 법이야, 꽤 익숙해졌지만 아우딘은 엔크리드보다 더 능숙했다. 그래서 당했다.

"오늘도 맨땅에서 구른 거요?"

그렇게 레슬링을 끝내고 돌아오니 렘이 기다렸다.

"오늘은 쉴 거유?"

매번 같은 질문이다.

"아니."

이번에는 검이다. 목검을 들 때도 있었으나, 이제는 진검이 더 편했다.

손에 익은 롱소드가 렘의 전신을 노린다. 매일 렘만 상대하는 건 아니었다.

어느 날은 라그나가.

"보고 있으니 한번 붙어 보고 싶군요. 분대장."

또 다른 날은 작센이 나서기도 했다.

"시간이 남습니다. 검을 들고 나오십시오."

하나같이 엔크리드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는 이들이다.

그러면서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긴 했다.

가령 렘은.

'무슨 재능이 이따위일까. 실전 경험이 필요한 건가?'

분명 전장에서는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늘었던 것 같은데, 도시에 돌아오니 다시 제자리다.

물론 전보다는 낫지만.

극적인 성장은 없다. 렘이 보기에는 그렇다.

전보다 나은 건, 그나마 야수의 심장과 한 점의 집중, 칼날의 감각과 고립의 기법 덕이었다.

고립의 기법 덕분에 근육의 질이 변하는 중이었으니까.

물론 한 달 만에 극적인 변화를 일으킬 순 없었다.

조금씩, 반걸음씩 나아갈 뿐.

느린 달팽이가 기어가듯, 그리 나아간다.

라그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기본기는 탄탄한데, 응용식은 왜 이렇게 더디게 늘지?'

나이 서른에 재능이 터진 게 아니었나? 왜 다시 바보가 됐지?

알 수 없다.

그런데도 라그나는 의욕을 보였다.

엔크리드는 절로 의욕이 생기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매일, 근무가 있든 다른 사정이 있든 어떻게든 똑같은 맹훈련을 반복한다.

오전 근무가 있으면 저녁 늦게라도 돌덩이 따위를 들고 묘한 자세를 취하곤 했다.

레슬링과 검술도 마찬가지다.

그 시간에 근무가 있으면 근무를 선 뒤, 돌아와서 단련을 시작한다.

자는 시간을 쪼개고 먹는 시간을 쪼갠다.

단체 병대 훈련에 들어가면 렘과 라그나, 작센, 아우딘, 크라이스 이렇게 다섯은 게으름을 피우거나 대강 넘기곤 하는데 엔크리드는 훈련에도 전력을 다했다.

그 뒤 숙소로 돌아와선 연무장으로 나가고 다시 제 훈련을 반복했다.

징그러울 정도로 한결같았다.

그러하기에 라그나는 분대장을 보며 자극을 받았고.

작센도 마찬가지였다.

'감각이.'

청각은 뒤통수에 눈을 단 수준인데.

그 뒤 감각의 예민함이 발전하지 않는다.

'왜?'

가르치는 자신의 잘못인가?

아니면 배우는 엔크리드가 문제인가.

'배우는 쪽이 문제지.'

이미 수차례 가르쳐 본 경험이 있기에 안다. 그래서 신기할 따름이었다.

참 느리고 더디게 실력이 늘어나는 것이.

'그런데도 포기하진 않아. 독특해.'

작센은 흐뭇한 미소를 지을 뻔하다가 본래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분대장이 뭐가 중요하다고.'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는 항상 최선을 다했다.

돌아가며 가르치다 보니 알아서 순번이 정해졌는데, 그중 작센이 제일 열심히 했다.

에스터는 자기가 택한 남자를 바라봤다.

검은 표범의 푸른 눈에 상대의 모습이 잡힌다.

어떻게 저럴 수 있는 걸까.

자신도 주문 세계에 미쳐 살던 때가 있다.

온종일 주문 세계에 몸을 담고 있으면 그 무엇도 필요 없던 시절이 있었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러다 이렇게 됐지.'

에스터는 과거를 곱씹다가 눈으로 다시 엔크리드를 쫓았다.

'나와는 달라.'

저 남자의 일과는 단순하고 반복적이다. 먹고 자고 쉬는 것까지도 일과의 일부처럼 행한다.

열심히 쉬고 있다는 말이 퍽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보고 있자니.

'도울 게 있으면 나도.'

돕고 싶어진다. 그런 사람이었다.

정작 엔크리드는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말 그대로 제 몸에 이런저런 걸 새기기에도 바빴으니.

본래도 훈련에 미친 놈이었으나, 최근에는 더했다.

고립의 기법 덕도 있었다.

'근육의 질이 변한다.'

옷을 벗고 제 몸을 거울에 비춰 보고 싶을 정도다.

이걸 제일 잘 느끼는 게 누구겠나.

엔크리드 자신이었다.

전에는 힘겹던 동작이 부드럽게 나올 때면 기껍다 못해 즐거워 미칠 지경이었다.

찌르기부터 시작해서 중검식의 기초까지.

변한 몸으로 하니, 모든 게 전과는 다르다. 더 부드럽고 유려하다.

유검식의 흘리기도 이제 어느 정도 손에 익을 정도.

따-앙.

칼과 칼이 만나며 상대의 무기를 흘린다. 렘의 도끼를 옆으로 쳐 낸 참이었다.

"좀 나아졌수다."

렘이 인정한 흘리기다. 완벽하다고 할 순 없지만.

'전보다 좋아졌다.'

엔크리드 자신이 느끼기에도 기술의 완성도가 다르다.

이 모든 것에는 몸을 만드는 기법이 자리했다.

즉, 고립의 기법이다.

"진즉에 배우지 않은 걸 후회하고 계십니까?"

아우딘이 언젠가 물었었다. 몸을 만드는 게 늦었다고 생각하진 않냐고.

"아니."

엔크리드는 고개를 저었다.

지나간 날에 관한 후회는 없다.

그런 후회 따위가 남았다면.

이미 '오늘'에 갇혔을 것이다.

과거의 그때는 그때 배운 것들이 중요했다.

그러므로 지금에 충실히 하는 것.

그게 맞았다.

한 달 동안 딱 한 번 사공이 나오는 꿈을 꿨다.

"오늘에 갇힌 것과 다를 바 없이 사는구나."

지루하다는 감정을 전신에서 뿜으며 턱을 괸 사공은 말했고 스러졌다.

일전에 그리 세차게 비웃던 놈은 어디 갔는지.

사공의 말이 맞았다.

엔크리드는 오늘의 반복과 다름없는 한 달을 보냈다.

바뀌는 건 근무 시간과 날씨뿐이었다.

"이전에 배웠다면 몸이 받아들이지 못했을 겁니다."

아우딘은 그런 말을 남겼다. 굳이 신경 쓰진 않았다.

중요한 건 오늘, 지금이었기에.

어느새 사계의 끝, 네 번째이자 가장 가혹하다는 겨울이 중턱을 넘어선 날이 다가왔다.

"잠깐 보지."

그런 나날 중 하나, 요정 중대장이 엔크리드를 찾아왔다.

숙소 앞에 나가자, 추위를 등진 중대장이 녹색 눈으로 빤히 보며 말했다.

"임무다."

보더 가드 상비군은 각각 필요에 따라 차출되곤 한다. 전장에서 싸우는 게 의무의 전부가 아니었다.

"네."

"상단의 후계를 호위하는 일이다. 사 분대에서 한 명만 차출해 같이 오도록."

중대장은 명령으로 용건을 전했다. 상부의 지시였다. 엔크리드는 그에 따라야 했다.

의뢰와 임무.

본래는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공을 쌓는 것에도 관심이 생겼다.

실력을 갖추고 공을 쌓는다. 기사로 가는 길이었다.

71. 소문은 빛의 날개를 달고

"그 몸, 이제야 좀 봐줄 만하군요. 형제님."

"이 정도면 이제 기본기는 나쁘진 않습니다."

"어지간한 눈먼 칼에 죽을 일은 없을 겁니다. 대응이 나쁘지 않다. 딱 그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흐흐, 이제 좀 대련할 맛이 나는 걸 보니 검이 좀 손에 붙은 거요? 야수의 심장도 무르익었고?"

각각의 분대원이 하는 말이다.

곱씹어 생각할 것도 없이 전부 실력이 늘었다는 말이었고.

엔크리드에게 실력이 늘었다는 건, 그의 삶에서 아주 특별한 의미였다.

그건 꿈을 이어 줄 실이었고 어두운 밤을 비추는 달빛이었으며, 아침을 데려오는 여명이었다.

빛바래고 찢어진 꿈에 한 줄기 빛이 스며들었기에.

이 한 줄기 빛이 꿈이란 놈을 다시 일으켜 세울 기반이 되었으니까.

기사란, 명예를 쌓아 올려 실력으로 완성하는 이름이다.

엔크리드는 기사급 용병이나 전사가 되길 원하는 게 아니라 기사가 되기를 원했다.

왜냐고 물어보면 답할 말이 궁하긴 했다.

가슴 속을 간질거리는 건 있다. 그게 입 밖으로 선뜻 나오지 않을 뿐.

거짓된 말로 하라고 하면 그리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또 싫다.

이런 부분에서는 고지식한 게 엔크리드란 인간이었다.

용병 시절 봤던 불합리한 것들이 꿈을 포기하지 않게 만드는 이유가 되기도 했으나.

오직 그것만이 이유 전부라 할 순 없다.

꿈은 왜 꿈인가.

'그저 바라기에.'

누군가의 환호도 받고 싶고.

검술을 단련하는 시간도 좋고.

주변에 있는 이들과 떠드는 시간도 좋다.

과거, 자신을 무시하고 내쳤던 이들을 만나 달라진 모습을 보여 주고도 싶다.

복잡하게 얽히고 섞인 욕망이다.

사람의 마음은 단순하지 않으니.

그 욕망의 집합체가 엔크리드에게는 두 글자로 귀결됐다.

'기사.'

꿈이다.

실력이 부족해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해도.

꿈으로 향하는 길이 생겼다면 그곳으로 걷고 싶었다.

그러므로 명예를 쌓는 것 또한 해야 할 일이었다.

또한, 시험해 보고도 싶었다.

'내 검, 어디까지 통할까?'

대련이라고 해 봤자 종일 분대원하고만 한다.

전장에서는 미치 휴리어란 놈과 싸워 이겼고, 승급전도 치렀고, 혼혈 요정의 암살도 이겨 냈지만, 그때의 자신과 오늘의 자신이 다르기에.

엔크리드는 손을 쥐었다가 폈다.

'싸우고 싶다.'

오롯이 검을 휘둘러 자신을 증명하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병사 등급제에서 상급 병사가 됐다.

다만, 상급 내에서도 편차는 존재한다.

실력이 늘었기에 생기는 호승심과 호기다.

실전을 통해 실력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이었다.

그런 차에 들어온 의뢰였다.

하물며 중대장이 함께다. 만만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왜, 중대장이 직접?'

엔크리드의 의문이다.

그가 가진 의문을 다른 사람이라고 안 가질까.

중대장은 오가는 길에 들른 게 의도의 전부였지만, 여타의 소대장들이 보기에는 이상한 일이긴 했다.

특히나 본래 이 일을 전했어야 할 엔크리드의 직속 상관인 4소대장이 보기에는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그저 우연이었으나, 우연을 우연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었다.

* * *

보더 가드 상비군은 도시 내 시민과 상단 등에 무력을 빌려주곤 했다.

나우릴리아가 만든 양대 정책 중 하나로 비롯된 일이다.

하나는 병사 등급제.

둘이 병사 용병제다.

용병 대신 병사가 나서서 의뢰를 수행하게 한 건데, 등급제와 더불어 왕국의 성공한 정책 중 하나였다.

"보더 가드의 상비군이라면 믿을 만하지."

이런 말이 곧잘 나올 정도였으니.

용병 대신 병사가 나서서 의뢰를 수행하는 병사 용병제는.

시민과 상단의 호응을 얻게 된 건 어쩌면 당연했다.

용병은 거칠고 험하지만, 병사는 그보다 덜하다. 기강이 잡힌 부대가 다 그렇듯 명령에 충실했다.

거기에 대형 용병 길드에 비하면 비용도 더 저렴했다.

"도시 내 치안을 위해 호위는 당연한 거 아닌가? 이런 거 하나하나에 크로나를 요구하는 건 너무한 처사라는 생각이 들진 않소?"

가끔.

이리 툴툴거리는 상단 책임자가 나오기도 하지만.

호위 병력을 한 번이라도 써 보면 그 말이 쏙 들어갔다.

보더 가드 상비군은 연에 2번씩 국지전을 벌이는 이들이다.

전장이 근접한 군사 도시의 부대다.

죽고 죽다 보면 당연히 어중이떠중이는 걸러지는 법이니, 상비군 소속 병사의 수준이 상향 평준화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비용, 실력, 안전.

세 가지 연유로 다들 만족감이 높으니, 성공한 정책이라 하는 거고.

중대장이 의뢰를 수급한 것도 그런 일 중 하나였다.

'굳이?'

다만, 다들 이런 생각을 하긴 했다.

이 정도면 중대장이 나설 일은 아니었으니까.

소대장들도 다 눈이 있고 귀가 있다. 입이야 처신을 위해 다물었지만, 그들도 제 중대장의 실력이 어중간한 수준이 아니라는 걸 안다.

'변방 수비대장이랑도 해볼 만하지 않으려나.'

변방 수비대장은 보더 가드 최강이다. 대대장은 지나가는 사람이니 논외로 치더라도.

'중갑 중대장은 잡을 것 같고.'

요정 중대장은 이미 제 전투력을 전장에서 증명하기도 했으니.

"이 의뢰는 내가 하지."

그런 요정 중대장이 의뢰서를 하나 가져간다고 한다.

상관이 나서서 한다고 하는데 뭐라고 하겠나.

알겠다고 하는 수밖에 없지.

"왜 굳이 직접 나서십니까?"

4소대장이 물었으나.

"사고뭉치 분대장을 데려가지."

저게 대답이었다.

의뢰 하나야, 이게 뭐 별일이겠나.

문제라면 데려가는 사람 때문이지.

주술파괴자, 상급 병사가 된 엔크리드다.

4소대장은 오롯이 눈치로 이 자리에 올랐다.

요정 중대장이 훌쩍 떠나자, 4소대장은 머리를 굴리며 과거를 더듬었다.

눈치의 기반은 정보다. 주변 상황 파악이 늦으면 진급에 악영향을 미친다.

그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충실히 기억을 떠올렸다.

'의무 막사 때도 보러 갔다고 하지 않았나?'

요정 중대장이 엔크리드를 보러 직접 갔었다.

그것도 부임하자마자.

의무 막사에도 굳이 보러 가고.

이후 엔크리드와 독대한 것도 몇 번 되고.

하물며, 다른 소대장과는 독대하는 상황도 거의 없는 판이었다.

대답이나 제대로 해 주면 다행이었다.

중대장은 엔크리드의 승급전에 끼어들기도 했다.

4소대장도 그 장면을 봤다.

'변방 수비대원과 싸울 때였지.'

그때 4소대장의 눈에는 위험에 빠진 엔크리드를 위해 나서서 막은 것처럼 보였었다.

또한, 눈이 펑펑 내리는 날, 중대장은 사고뭉치 분대만 명령을 내려 밖으로 내보내기까지 했다.

그들은 눈을 다 치운 아침이 돼서야 돌아왔다.

'온열 가죽까지 챙겨서.'

어디서 뭘 하고 왔을까.

기밀 작전이라고만 말했다. 중대장에게 직접 보고한 내용이라 자신도 몰랐다.

중대장과 둘이 개인 연무장에서 대련도 했다고 들었다.

왜 그랬을까.

의무 막사, 독대, 승급전, 눈 오는 날의 작전 명령과 대련에, 의뢰까지.

모든 정보가 하나가 되어 섞이며 머릿속에서 결론을 만들어 낸다.

4소대장의 자신의 추리에 소름이 돋았다. 물론 헛다리였고 오해였으며 멍청한 생각의 연속이었지만, 그는 제 추측에 짙은 확신의 향기를 맡았다.

고로 절로 드는 생각이다.

'설마 둘이?'

소대장은 요정과 사고뭉치 분대장을 나란히 세워 봤다.

생각보다 잘 어울리는 그림 같았다.

"에이, 아니겠지?"

전신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확신이 들지만, 괜히 혼잣말을 던져 봤다.

"뭐가 말입니까?"

옆에 있던 부하가 묻는다. 무료한 위병 근무 중이었다.

4소대장은 조심스레 제 추측을 말해 봤다.

헛소리라고 했다면 거기서 끝날 일이었는데.

"...와, 씨."

부하의 반응이 묘했다. 그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 또한 충격을 받은 듯했다.

보더 가드가 작은 도시는 아니지만, 소문은 금세 퍼졌다.

특히나 어떤 소문은 날개 달린 말보다 빠른 법이니.

부대 내에 하릴없는 이들, 특히 욕탕 관리와 식사를 준비하는 여인들은 이런 종류의 소문에 환장하는 편이었다.

그들을 통해 소문에 빛의 날개가 달렸고, 금세 부대 내에 퍼지기 시작했다.

하루도 채 걸리지 않아서 부대 내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 * *

"분대장! 곧 애 아빠가 된다면서요? 맞아요?"

사흘 만에 부대로 들어온 크라이스가 물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가.

엔크리드는 생각해 봤지만, 그가 알 수 있는 건 없다.

소문은 이미 퍼졌다.

크라이스의 말에 옆에서 렘이 배를 잡고 낄낄 웃었다.

어찌나 신나게 웃던지, 온열 가죽이 흐트러지며 맨발이 쏙 나왔다.

"키흐크흐, 맞지. 맞아. 애 아빠지. 왕눈아, 엄마 얘기도 들었냐?"

"그, 네, 무슨 소문이 이런가 싶어서. 난 혹시나 했죠. 애는 과장된 건 줄 알긴 했지만, 중대장은 언제 꼬드긴 겁니까? 역시 우리 분대장."

크라이스가 엄지를 치켜세우자, 엔크리드는 그 엄지를 잡아서 다시 눌러 넣어 줬다.

"오해다."

"오해?"

"누가 이상한 소문을 냈어."

4소대장이 냈지만, 엔크리드는 그 사실을 몰랐다.

요즘 이런저런 일로 정보를 다루는 데 이골이 난 크라이스도 몰랐다.

작정하고 파헤치면 소문의 근원지를 알아내는 게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만, 그럴 일은 아니지 않나.

목숨이 위협받는 것도 아니고.

"흠, 나쁘지 않지요. 반려로 두고 검술 선생으로 삼으면."

라그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저 새끼는 머리통에 뭐가 든 걸까.

가끔 보면 렘보다 더한 게 들어 있는 것 같다.

혼인을 검술 향상의 기회로 도모하라는 건가?

"후으, 끼이이이."

옆에서 쉬지 않고 웃어 젖힌 렘은 이제 마수의 울음과 비슷한 소리를 토해 내기 시작했다.

"너무 마음 주지 마십시오. 나중에 차이면 고생하니까."

한쪽에서 제 옷을 접던 작센이다.

'내가 차이는 게 기정사실인 거냐?'

전제가 심하게 잘못되지 않았나?

"형제님, 축복을."

다들 알면서 건네는 장난질이었다.

다들 엔크리드의 일과를 알지 않나.

누군가와 정을 통하고 뭔가를 하기에는 빡빡한 일과의 연속이었다.

"말을 말자."

쓸데없는 소문일 뿐이었다. 그리 생각하고 에스터에게 손을 뻗는데.

하악!

오늘따라 에스터는 자신의 손길을 거부했다.

"나 크라이스 아닌데."

억울한 엔크리드가 말했으나, 에스터는 매섭게 흘겨보곤 온열 가죽 위에 길게 누울 뿐이었다.

온종일 품에 파묻혀 있더니, 갑자기 저러는 이유는 뭘까?

"질투하나 본데. 다독여 주쇼, 좀."

옆에서 렘이 한마디 하더니, 또 배를 잡고 미친 듯이 웃어 댔다.

렘은 역시나 미친 새끼였다.

"하아, 덕분에 즐거웠수, 그래서 언제 출발하는 거요?"

"어딜?"

"호위 임무, 한 명만 데려가야 한다면서."

"그런데?"

"당연히 나랑 가야지."

가죽을 펄럭이고 반쯤 몸을 일으키며 하는 말이다.

그러며 당당히 엄지로 자신을 가리킨다.

일어난 렘의 어깨 위에서 펄럭하고 온열 가죽이 한번 넓게 펴지더니 툭 하고 렘의 어깨에 걸쳐지며 망토처럼 늘어졌다.

"놀렸다고 이러는 거요? 냉정하게 생각합시다. 분대장, 저기 얼음장 같은 작센 새끼? 호위 대상이 신소리 한 번만 해도 난리가 날 거요. 음흉한 들고양이가 호위 대상을 할퀴는 걸 보고 싶은 거요?"

그게 네 입에서 나올 말이냐.

엔크리드는 황당했으나, 표정은 그대로였다.

어디 마음껏 말해 보라는 태도다.

"게으름뱅이야, 관심도 없을 것이고."

라그나는 본래 의뢰 따위 잘 나서지 않는다. 마지못해 나서는 일이 아니라면 그렇다.

"그렇다고 왕눈이를 데려가실 거요? 호위할 대상을 늘리실 것도 아니고."

이건 맞다.

크라이스는 애초에 선택 사항이 아니었다.

"덩어리는 그래, 뭐, 쓸 만하다 칩시다. 그런데 기도한다고 호위 대상 옆에서 중얼대면? 종일 그러면? 호위 대상이 그걸 썩 반기진 않을 것 같은데?"

덩어리는 아우딘을 말하는 거였다. 렘 자식, 서부 개척민 출신의 이민족 주제에 말재간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매끄럽다.

남은 선택지가 렘뿐이라고 그리 들리게 하는 말솜씨다.

다만.

'네가 제일 문제지.'

상관 폭행은 왜 했는가.

제 성질 때문이다.

호위 대상을 두들겨 패서라도 지켜야 한다면, 그래, 렘도 괜찮다. 괜찮을 수도 있다.

하지만 두들겨 팰 수 없다면?

호위 대상의 성격이 조금이라도 지랄맞다면?

호위 대상과 렘을 붙여 놓을 순 없는 거다.

만 하루, 아니 반나절도 되지 않아 파국이 예상된다.

의뢰를 맡아서 공을 세우는 게 아니라 위약금이나 잔뜩 물 생각이 아니라면, 렘은 기피 대상 일 순위란 얘기다.

"넌 안 돼. 절대."

숨을 고를 필요도 없기에, 단호하게 말을 뱉었다.

"...와, 나 지금 상처 받았수. 특히 절대라고 할 때. 이거 어쩔 거요? 다 큰 성인 남자의 가슴에 이런 상처를 남기고?"

"그래도 안 돼."

"나 삐뚤어질 거요."

무시했다. 머리통 안에 자갈이 꼈는지, 렘은 본래 이상한 소리를 잘 지껄이니.

부대 내를 둘러봤다.

"그렇게 부탁한다면야."

슬쩍 눈이 마주친 라그나가 말했다. 웃기고 있다. 저걸 데려가면 호위가 아니라 퍼질러 자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아침잠 많은 저 자식 깨우느라 고달프기도 할 것이고.

'어딜 혼자 보낼 수도 없지.'

길을 잃을 테니까.

라그나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한 길치다.

남은 선택지는 둘, 아우딘과 작센이었다.

고민할 것도 없기에 내가 말했다.

"그래, 너로 정했다."

72. 매 순간 단련했기에 (1)

고심할 이유가 없는 선택이기에 작센을 택했다.

의뢰라면, 가장 수행 능력이 높은 대상과 함께하는 게 맞다.

사고뭉치 분대 내 작센이 의뢰를 가장 많이 맡아서 했었다.

경험이 많다는 거다. 그만큼 찾는 사람도 많고.

예민한 오감이 호위에 도움이 된다는 거야, 두 번 말하면 입 아플 테고.

다른 분대원과 비교하자면 호위 대상과 마찰을 빚을 확률도 낮았다.

"그러지요."

작센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그걸 본 렘이 납득할 수 없다고 난리를 피우고.

다시 라그나가 자기도 이건 좀 이상한 것 같다고 하고.

아우딘은 신의 뜻과 어긋난 게 아니냐고 하고.

당연하다는 듯 라그나와 렘이 시비가 붙고.

작센이 옆에서 렘의 속을 긁자.

라그나가 빠지고 렘과 작센이 싸우고.

엔크리드는 말리고 또 말리다가 나중에는 아예 서로 눈도 마주치지 말라고 했다.

"대련할 거면 나랑 하고."

엔크리드는 마지막 말을 덧붙여, 분대원과 돌아가며 대련을 하는 거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정신적 피로를 느낄 법도 했으나, 그럴 일은 없었다. 이게 사고뭉치 분대의 일상이었다.

무엇보다 재능 없다고 빌빌거리면서도 끝내 검을 휘두르며 긴 세월을 버틴 엔크리드에게는 이 정도는 별일도 아니었다.

이 정도로 정신적 타격을 받았다면 검 따위는 진즉에 놓아 버리고 쟁기를 들었을 테니.

"분대장은 역시."

크라이스가 그걸 보고 다시 엄지를 치켜세웠다.

새삼 분대장의 정신력을 칭송하는 엄지다. 엔크리드는 대강 고개를 끄덕여 줬다.

호위 의뢰는 내일이었다.

중형 상단의 후계 문제였으며 도시 내 호위 임무였다.

배정된 인원은 셋.

요정 중대장과 엔크리드와 작센이었다.

새벽 나절부터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호위 대상은 점심나절에 도시에 들어온다고 했으니.

* * *

푹 자고 일어난 다음 날 아침, 어느새 품에 에스터가 들어와 있었다.

"어제는 왜 그런 거냐?"

눈곱 낀 채로 물으니, 에스터가 손으로 툭 가슴을 쳤다.

뭐 때문에 화가 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화해의 신호로 보였다.

"그래, 오늘 하루도 잘 뒹굴고."

에스터가 할 일이 뭐가 있겠나.

밤 되면 품에 들어와 자고.

아침이 되면 비비적거리며 일어나 뒹구는 게 일과다.

가끔 밖에 나갔다 오는 거로 봐서는 도시 근처에서 쥐라도 잡아 먹는 것 같긴 했다.

따로 식사를 챙겨 주는 편이 아니긴 한데, 간식으로 육포를 자주 주는 편이었다.

의외로 모든 분대원이 에스터를 잘 챙기는 편이었다.

특히나 크라이스가 살뜰히 챙겼다.

"레이크 팬서는 때가 되면 발톱을 갈 거든요. 그때 가져가면 뭐라고 안 할 거 아닙니까."

털갈이하듯, 발톱갈이를 한다는 거다. 그러니까 크라이스는 합리적인 이유로 잘해 주는 거였다.

"요놈, 요놈."

"갸륵."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는 게 귀엽고 신기해 정수리를 두어 번 손톱으로 긁어 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아침 식사 시간이었다.

"날 버리고 얼마나 잘될지 한번 봅시다."

아침 당번은 렘이었다. 놈이 눈을 흘겼는데, 엔크리드가 그걸 보고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뻗었다.

탁.

렘이 손바닥으로 주먹을 막았다.

"팔 하나 부러진 채로 가도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수? 아침부터 도전이라니."

"아니, 얼굴을 보니까 반사적으로 나갔다."

"그게 더 기분 나쁜데?"

그럴 수 있지.

말은 그렇게 했어도 렘이 덤비진 않았다.

임무를 나가는 날 아닌가.

몸이 상해서 나가서야 될 일도 안 될 법이니.

아침으로는 돼지 안심을 납작하게 눌러서 구운 것과 삶은 감자를 섞은 요리가 나왔는데, 맛은 형편없었다.

"몸에는 좋습니다. 고기는 근육을 단단하게 해 줍니다. 형제님."

고립의 기법은 몸을 만드는 것이고, 몸을 만드는 것의 완성은 먹는 거라고 했던가.

아우딘의 말에 엔크리드도 꾸역꾸역 먹었다. 아우딘의 말이 아니더라도 잘 먹는 게 중요하다는 건 잘 알고 있기도 했고.

남는 시간을 고립의 기법으로 몸을 달구고 나니, 출발할 시간이었다.

엔크리드는 우물에 몸을 씻고 장비를 챙겼다.

일전 길핀 길드를 털고 얻은 가죽 갑옷을 챙겨 입었다.

몸통만 가리는 용도인데, 얇고 탄성이 좋아서 불편하지 않았다.

갑옷 위로 휘슬 대거의 나이프집을 두르자, 옆에서 작센이 물었다.

"그건?"

"전에 암살자 죽이고 챙겼지."

"알뜰하시군요."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어쨌든 꽤 쓸 만한 도구라고 생각하긴 했으니까 챙기긴 했다.

이런 종류의 무기는 많으면 많을수록 이득이니까.

두꺼운 갬비슨까지 걸침으로 무장을 완료한 뒤, 밖으로 나섰다.

도시 내 여관까지 작센과 나란히 걸었다. 작센은 걷는 내내, 잘 듣는 법, 잘 보는 법 따위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둔하군요."

이렇게 한마디를 추가하는 걸 잊지 않았다.

엔크리드는 여전히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이 둔하다는 거야, 언제나 알고 있는 얘기다.

네 개의 여관이 중심이 된 사거리에 도착하니, 중대장이 이미 와 있었다.

"호위 대상은 도착했습니까?"

엔크리드가 약식으로 군례를 보인 뒤 물었다.

"아직이다. 곧 오겠지."

호위 대상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는 말이 있었다.

크라이스가 전해 준 말이다.

길드를 맡더니, 전보다 배는 귀가 밝아진 것 같았다.

'후계를 정하기 위해서 왔다고 했던가.'

얼마나 성격이 모난 건지 궁금할 따름이지만, 큰 걱정은 없다. 렘 수준의 망나니는 흔하지 않다.

사고뭉치 분대에서 한 달만 지내 봐라.

그 어떤 망나니도 귀여워 보일 수 있을 테니.

엔크리드는 태평했다.

작센은 별생각이 없었다. 그에게 의뢰는 의뢰일 뿐이었다.

사흘 동안 지켜 준다. 상단 내 후계 회의가 끝나면 의뢰도 끝이었다.

도시 내에서 안전만 보장하면 되는 거다.

머릿속에 입력은 끝났으니, 그다지 생각할 거리가 없는 거였다.

중대장은 엔크리드의 뒤통수를 보며 그를 데려온 이유를 떠올렸다.

사고뭉치 분대장, 이 남자는 아즈펜의 암살 대상이었다. 그건 뒤가 깨끗하다는 방증이었다.

무엇보다 도둑 길드를 처리한 방식도, 이후 대응도 마음에 들었다.

뇌물은 유지하고.

범죄 길드를 정보 길드로 갈아 버렸다.

덕분에 대대장과 마찰이 없었다.

범죄 길드를 없애 버리면 문제가 생김을 알고도 그리하라고 놔뒀다.

만약 뇌물이 끊겨서 윗선에서 문제 삼으면 이리저리 손을 쓸 생각이었는데.

저 분대장은 그럴 일조차 만들지 않았다.

'생각한 바와 다르게 흘러가긴 하지만.'

이 또한 나쁘진 않았다.

중대장은 호위 대상을 기다리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몸을 섞는 사이였던가?"

검 그립에 손을 비스듬히 올리고 있던 엔크리드다.

그의 전신이 순간 굳는 듯했다.

잘 만든 조각상이 된 그는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려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나한테도 들릴 정도면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해입니다. 헛소문이죠. 요새 워낙 일이 없고 조용하다 보니 시답잖은 소리로 시간을 보내는 놈들이 있는 겁니다."

"그런가?"

"네."

"그럼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거군?"

"상급자와 하급자의 사이입니다."

"그렇군."

시답잖은 얘기로 넘겨야 했다. 소문이 참 넓고 깊게 퍼지기도 했지.

"큼."

옆에서 작센이 헛기침했다. 슬쩍 보니 입꼬리가 씰룩인 것 같았다. 웃음을 참는 흔적이다.

'이게 웃겨?'

입 모양으로만 물었다.

'안 웃었습니다.'

작센도 입 모양으로 답했다.

중대장은 요정이었다. 그녀는 옆으로 슬쩍 눈을 돌리는 것만으로 둘 사이에 오간 대화를 읽었다.

독순술이야, 요정에게는 어려운 재주도 아니었다.

"곤란했나 보군."

"아닙니다."

엔크리드의 즉각적인 답이 돌아왔다.

"곤란한 것 같은데?"

"아닙니다."

"그럼 좋았나?"

왜 이러는 걸까.

"아니이입니다."

대답하는 발음이 묘하게 늘어졌다.

저리 말하고 웃기라도 하면 좋겠지만, 무표정이다.

하물며 눈도 마주치지 않고 도시 저쪽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다.

'요정의 농담은.'

좀처럼 적응되지 않았다.

"오는군요."

엔크리드는 작센의 한마디로 곤경에서 벗어났다.

호위 대상이 오는 게 보였다.

두두, 두두.

이두 마차가 다가오자, 땅이 흔들렸다.

엔크리드는 중대장보다 호위 대상을 상대하는 게 몇 배는 편할 것 같았다.

"재밌었는데."

뒤에서 중대장이 소곤거리듯 중얼거리는 게 들려 엔크리드를 오싹하게 했다.

온열 가죽을 덧댄 망토를 입었는데도 순간 오한이 들었다.

곧 마차가 서고 사람이 내렸다.

엔크리드의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볼 빵빵한 욕심 많은 두꺼비가 아니라.'

수려한 외모를 지닌 여자였다. 긴 금발과 붉은 기가 감도는 갈색 눈이었다.

눈에 확 띄는 미모라 하겠다.

'딱' 하고 부츠 굽이 바닥을 밟는 소리가 났다. 마차에서 내려선 여자는 요정 중대장을 직시하곤 말했다.

"잘 부탁드려요."

상비군에서 나온 호위라는 소개는 따로 필요 없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함께 온 자기 일행하고만 말을 나눴다.

곁에 붙은 중년 여인, 유모라는 사람이 호위 대상의 뜻을 전할 뿐이었다.

금발 여인은 이제 막 스물이라 했고 성격이 유별난지는 알 수 없었다.

'얘기를 나눠 봐야 알지.'

눈 한 번 마주친 적이 없는데, 뭐라 하겠나.

"일은 편하겠군요."

작센이 말했다. 엔크리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호위를 요청하기에 달랑 혼자 오는 건 아닌가 했는데, 상단 호위랍시고 다섯 명의 검사가 붙었다.

그중 셋은 방패를, 둘은 얇은 세검을 가진 게 보였다.

엔크리드는 배운 걸 활용했다.

"나이, 자세, 위치 선정, 눈빛, 모든 게 다 정보입니다. 형제님."

아우딘이 말한 대로 자세를 토대로 몸의 형태를 그리고 추측하는 거다.

'맞을까?'

확신은 없다. 프록이라면 본능적으로 상대의 실력을 가늠한다고 하지만.

인간은 그럴 수 없기에 지식과 경험이 필요한 법이라고 했던가.

"하다 보면 됩니다. 형제님."

아우딘은 그리 말했지만, 하루아침에 될 일은 아닐 듯했다.

조바심은 없었다. 엔크리드는 차분히 상대를 관찰하기 바빴다.

다섯 중 왼손잡이가 하나 있었고 테이블을 잡고 앉을 때 의자가 끼익하고 비명을 내지르는 걸 보니 무게감이 있는 무장을 걸친 듯했다.

그렇다고 사슬 갑옷을 입은 사람이 있진 않았다.

때가 겨울이다. 사계의 끝, 끝의 계절이라 불리는 혹독한 추위에 쇠로 된 갑옷을 입는다? 굳이 그럴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하물며 호위를 위해 마차를 쫓아 걷는 길이라면 두꺼운 갬비슨이 제격이리라.

이들도 그러했다.

그동안의 경험, 상식이 아우딘을 통해 배운 것과 맞물렸다.

무장의 상태, 자세를 보고 실력을 가늠하는 거다.

열이면 열, 다 맞진 않겠지만.

'다섯 모두.'

변방 수비대원보다 못해 보였다. 병사 등급제로 보자면 특급 이하란 거다.

엔크리드는 자신이 깨달은 점을 되새겼다.

'나쁘지 않아.'

자세와 무장만 보고 실력을 가늠하는 것, 평소에는 엄두도 못 낸 일 중 하나다.

그런 자신의 변화를 느꼈기에, 엔크리드는 오늘도 성장의 기쁨을 누렸다.

이런 기쁨은 질리는 법이 없었다.

매번 새로웠고 짜릿했다.

검술을 비롯한 전투 기술과 무예가 늘고 실력이 향상되고.

희열은 계속된다. 즐겁다. 정말 더없이 즐겁다.

비록 이번 임무에서는 검을 꺼내 칼부림할 일은 따로 없다고 해도.

앉은 자리에서 새로이 배우고 익힌 걸 활용할 수 있다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꼈다.

"재밌는 놀이 하나 하시겠습니까?"

거기에 작센이 던진 제안이 꽂혔다. 재미난 생각, 아니 수련법이었다.

"소리 맞추기란 놀이입니다."

"하자."

렘과 라그나, 아우딘 못지않게 렘도 가르치는 열정이 드셌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 차가운 불꽃 같은 열정이나.

그걸 모를 순 없는 노릇이다.

그 열기의 수혜를 입는 게 자신이니.

그러니 이번에도 정말 놀이나 하자는 말은 아닐 터였다.

엔크리드의 추측이 맞았다.

작센이 제안한 건, 칼날의 감각을 단련하는 수련법 중 하나였다.

물론 쉬운 방법은 아니었다.

* * *

"혀 차는 소리."

작센이 말하고 엔크리드는 미간을 찌푸렸다.

"늦습니다."

호위 임무는 대체로 무료한 편이다. 하물며 여긴 보더 가드다.

상단의 개인 호위도 있는 마당에 셋을 부른 이유야 뻔했다.

크로나를 지급하고 호위를 불렀는데도 우리를 습격하면 보더 가드 상비군이랑도 붙어 보자는 말이 된다.

보더 가드는 국왕 직할령.

직할령 내에서 왕국의 병사를 건드린다?

호위 대상의 중형 상단이 아닌, 백지어음으로 유명한 대륙에서 제일 잘 나가는 렝가디스 상단이라고 할지라도 부담이 되는 일일 것이다.

"왼쪽 테이블 세 번째 남자입니다."

어떻게 듣는 것만으로 저렇게 정확하게 아는 걸까.

엔크리드도 이제 등 뒤에 눈이 달렸다는 수준까지는 오른 것 같은데.

간단하지만 어려운 놀이였다.

작센이 말하면 주변 소리에 집중하고 있는 엔크리드가 알아맞히는 것뿐인데도.

"칼 가는 소리."

주방인가? 아니다. 그보다 위다.

엔크리드는 한 점의 집중까지 발동했다.

이마에 땀방울이 흐를 정도다. 벽난로의 온기가 내부를 달군다고 해도 엔크리드가 있는 곳은 싸늘한 공기가 흐르는 곳임에도.

"위."

"방향은 맞습니다. 몇 층입니까?"

그들이 있는 곳의 여관은 3층까지 있다.

찍어야 하나? 아니, 그럼 훈련이 되지 않는다.

"102호겠군요."

작센이 정답을 말했다. 이 놀이의 핵심은 시간이었다. 제때 말해야 한다는 거다.

몇 번 오가니, 중대장이 다가왔다.

"같이 하지."

상대는 요정이다. 오감이 인간보다 배는 뛰어난 종족.

엔크리드가 보기에 그녀는 작센보다 더 뛰어난 것 같았다.

"짧은 칼날을 넣고 뽑는 소리, 반복."

다시 문제가 제시되고.

엔크리드는 거듭 놓치고.

요정 중대장은 숨도 안 쉬고 답했다.

"여관 입구 앞."

"입가를 가리고 숨 쉬는 소리."

아니, 그딴 건 어떻게 아는 거지?

엔크리드는 황당했으나, 요정 중대장의 유려한 목소리는 연신 정답을 말했다.

"창문 바깥."

"앉은 채로 숨죽인 놈."

"입구를 바라보고 우측 테이블 밑."

"슬그머니 눈치 보는 놈."

"네 뒤쪽."

중간부터 엔크리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언제부턴가 숫제 소리를 묻는 물음이 아니었기에.

호위 대상은 상단의 후계.

상단은 개별 호위까지 데려왔고.

여관의 메인 홀 한쪽을 전세 내듯 자리 잡았다.

그리고.

"습격 예상."

"동감이다."

작센과 요정 중대장이 나눈 말을 엔크리드가 이해한 순간.

작센이 일어나며 앉아 있던 의자를 뒤로 밀었다.

드르륵! 퍽!

"읍."

엔크리드의 눈에 작센이 밀친 의자 등받이에 허벅지를 맞은 놈이 보였다.

당황한 눈빛과 손에 들린 칼이 보인다. 검게 칠한 단검이었다.

소리 듣기 훈련, 그걸 위해 항시 신경을 곤두세워 뒀었다.

엔크리드는 작센을 보고 자신도 뒤로 몸을 돌렸다. 단검을 든 놈이 보였다.

냅다 찌르기 직전이었다.

갑자기 몸을 돌린 엔크리드를 보고 상대가 놀랐는지 눈이 커졌고, 순간이지만 몸이 굳었다.

그 틈에 엔크리드는 손을 뻗어 상대의 손목을 쥐었다.

우득.

쥐고 바깥으로 비틀어 당기며 반대쪽 팔꿈치를 직각으로 세운다.

"끅."

손목이 뒤틀린 상대는 엔크리드가 당기는 대로 부질없이 끌려왔다.

그렇게 엔크리드가 팔꿈치로 상대의 가슴팍 중앙을 찍었다.

우직.

상대의 가슴뼈가 부러지며 단검을 놓친다. 떨어지는 단검을 잡아챈 엔크리드가 몸을 숙였다. 그가 있던 자리로 팽하고 단검이 날았다. 날아간 단검이 나무 기둥에 퍽 소리와 함께 꽂혔다.

누군가 보면 가까스로 피했다고 하겠지만.

엔크리드는 예상한 바였다. 쉽게 피했다는 거다.

'별게 다 도움이 된다고 해야 하나.'

의무 막사에서 겪은 암살자의 습격 때, 크랑을 노린 습격이었으나 엔크리드를 거쳐 가야 했다.

매번 아득바득 살아남았다.

오늘을 반복함으로.

이후 혼혈 요정 암살자의 휘슬 대거와 맞붙었다. 하물며 이건 최근의 일.

이 또한 오늘을 반복했다.

누군가는 살면서 한두 번 겪을 일을 수없이 많은 반복으로 경험했다.

즉, 그동안 겪은 경험의 총체다.

이제 이런 종류의 습격은 수월하게 받아치게 된 거다.

73. 매 순간 단련했기에 (2)

습격자의 수법이 도둑의 그것과 너무 닮아 있었다. 검게 칠한 단검, 쇠뇌, 쓰로잉 나이프 등이 주력이었으니.

'이거 참.'

다만, 솜씨는 더 떨어졌다.

'길핀 길드 수준도 못 되는 것 같은데.'

"피해?"

단검을 피하자 놀라서 저리 말하는 것부터 전문가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본래 암살이 주특기가 아닌 거다.

엔크리드는 죽은 상대의 손에서 뺏은 단검을 손안에서 휘돌렸다.

손가락을 튕겨 나이프의 위치를 바꾸고 엄지와 검지로 날을 잡은 뒤, 앞으로 팔을 뻗었다.

일련의 동작이 결과를 불러 왔다.

팽하고 날아간 단검이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습격자의 이마에 꽂혔다. 이마에 칼을 맞은 그대로 암습자의 몸이 뒤로 넘어가 쓰러졌다.

쿵 하고 머리통이 바닥에 찧는 소리가 나며 붉은 피가 여관 바닥에 줄줄 흐르고.

"우아악!"

그저 여관에서 끼니나 때우던 시민 몇이 비명과 함께 밖으로 뛰쳐나간다. 음식을 나르던 급사와 여급은 어느새 테이블 밑에 숨었다.

습격은 비명을 불렀고.

비명은 소란을 일으켰으나.

엔크리드 일행은 생채기도 나지 않았다.

"...다 죽여 버려!"

습격자 중 하나가 외쳤다.

"습격이다! 반격해!"

"무기를 챙겨라!"

상단의 호위 쪽에서도 반격의 봉화를 올렸다. 각자 무기를 뽑아 들었다.

챙하고 칼날이 검집과 마찰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걸 들으며 엔크리드는 이게 호위 임무임을 잊지 않았다.

"제가 갑니다."

요정 중대장에게 말한 엔크리드는 발걸음을 돌렸다.

누군가는 호위 대상의 안전을 확보해야 했다.

1층이 이 난리라면 위층에도 문제가 생겼을 것 아닌가.

근접 호위가 붙어 있긴 하지만.

'여기서 일 터지면 우리 책임이기도 하니까.'

과연 어떤 미친놈이 사주한 건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보더 가드 내에서 상비군을 호위로 둔 상단을 습격하다니.

엔크리드는 그대로 위층으로 향했다. 중간에 자신을 막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럴 만했다.

작센이 중간을 막아섰으니까.

그는 의자 하나를 들더니 방패처럼 휘둘러 날아오는 단검을 전부 막았다.

의자는 금세 형이상학적인 예술품이 되었다. 단검과 쿼렐이 곳곳에 꽂힌 나무 의자다.

던지는 게 안 되자 숏소드나 몽둥이를 들고 다가오는 이들도 있었다.

작센은 그들이 제 범위 안에 들어올 때마다 검을 휘둘러 한칼에 한 명씩 영혼과 육신을 분리해 줬다.

그야말로 깔끔 그 자체였다.

막고 베는데, 칼날의 궤적은 평범했으나, 상대는 번번이 막지 못했다.

챙!

한 명이 가까스로 막긴 했으나, 작센은 애초에 끊어치기로 검을 휘둘렀고 튕겨 낸 검을 번개처럼 뻗어 다시금 상대의 얼굴 위에 쑤셔 넣었다.

뚝 하고 코뼈가 부러지며 콧등 위로 새로운 구멍이 생긴 상대가 쓰러지고 작센은 검을 뽑아 다시금 같은 작업을 시작했다.

날아오는 단검은 의자로 막고, 다가온 상대는 검으로 벤다. 엔크리드보다 단검 던지는 솜씨가 몇 배는 훌륭하지만, 활용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런 씹, 뭐냐, 이 새끼는."

작센은 대답하지 않았다. 곧 죽을 놈들과 무슨 대화를 나누겠나.

요정 중대장은 작센이 시선을 끄는 사이, 아예 습격자 가운데로 들어섰다.

그녀의 허리춤에서 나이들이 뽑혔다.

잎새 검이 춤을 추자, 습격자가 목을 잡고 쓰러지기 시작했다.

베고 또 벤다.

핏방울이 허공에 튀었다. 그녀의 얼굴과 몸에도 분분히 피로 만든 그림이 그려졌다.

경쾌한 요정의 몸놀림에 대응할 놈은 없었다. 그만한 실력자가 모인 그룹이 아니었다.

"이게 전부면 실망인데."

요정이 한 발만 바닥에 대고 한 다리는 바닥에서 두 뼘 높이로 들곤 잎새 검으로 상대를 겨누듯 자세를 잡고서 말한다. 춤을 추기 직전처럼 보이기도 했다.

맑고 경쾌한 목소리지만, 듣는 처지에서야 명부의 마왕과도 같을 것이다.

복면을 쓴 놈 중 하나가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시이발."

남은 놈 중 하나가 울상을 짓고 말했다. 습격한 무리 중 하나의 읊조림이었다.

1층을 습격한 이들 중 리더는 생각했다.

'어차피 목표만 달성하면.'

시간은 충분히 끌었다. 2층의 작업이 성공했든 말든 여기서 시간을 더 끄는 건 죽은 목숨이리라.

호위대의 실력이 그의 생각보다 몇 배는 뛰어났다.

전부 변방의 학살자를 데려오기라도 한 걸까.

모른다. 알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는 제 일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빠질 때였다.

"다 죽여!"

리더는 그렇게 말하며 문 쪽으로 달렸다. 부하가 시간을 버는 사이, 자신은 몸을 뺄 심산이었다. 작전은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아즈펜에 영광을!"

남은 부하 중 하나가 외쳤다. 외침을 뒤로 흘리며 리더는 도주했다.

도시에 남아 있던 첩자의 잔재다.

그들은 나라와 명예를 위해 목숨을 던졌다.

리더야 돈 때문에 하는 일이지만.

본래 충성이란 이럴 때 쓰라고 키우는 거 아니겠나.

그렇게 도주하는 리더의 뒷모습을 유심히 보던 작센은 허리춤에 숨겨 둔 얇은 칼날에 손을 댔다가 뗐다.

'괜한 짓이다.'

저거 하나 죽인다고 달라지는 건 없을 것 같으니.

여기서 놓친다고 큰일이 생길 것도 아니고.

작센은 고개를 돌려 하던 일을 계속했다.

덤비는 적을 무참히 도륙하고 죽이는 것.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막아서는 수문장의 역할이다.

평소 태도를 생각해 보면 퍽 어울리는 일은 아니지만.

여관 메인 홀에 모인 이들의 실력만 놓고 보자면 요정 중대장 다음이었으니, 아무도 작센을 넘어서지 못했다.

신나게 나이들을 휘두르면서도 요정 중대장은 뒤쪽을 한 번씩 봤다.

계단에 올라간 엔크리드보다 그 앞을 막아선 분대원의 실력이 눈에 띄었다.

'돋보이는구나.'

사고뭉치 분대라고 했던가.

정작 분대장보다 뛰어난 분대원이라니.

그런 경우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이쪽은 실력 차이가 확연했다.

'최소 도시급.'

병사 등급제는 나우릴리아가 만든 제도.

넓게 대륙으로 나가 보면 실력 수준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법이다.

떠돌이 생활을 해 온 중대장에게는 그쪽이 더 익숙했다.

마을, 도시, 대륙.

이 중에서도 큰 마을이냐, 작은 도시냐를 따졌고, 대륙도 지역을 말함이냐, 아니면 대륙 전체를 말하는 것이냐 따지긴 하지만.

기본적인 구조가 이렇다는 거다.

마을 하나에 이름을 떨칠 실력인가.

아니면 도시 하나에 이름을 팔아도 될 실력이 되나.

대륙 전체에 이름을 날리려면 어느 정도여야 하나.

그녀 기준으로 대륙급 강자는 최소 기사급 강자다.

그들이 다루는 '힘'을 깨우치지 않고서는 힘들다.

음유시인을 고용해 이름을 파는 사기꾼을 제하면, 그렇다.

"재밌어."

그녀가 읊조렸다.

습격한 쪽, 조금 전 나이들을 막으려다가 오른쪽 손의 손가락 네 개를 전부 잃은 처지에서 보자면 끔찍한 소리였다.

"끄흐윽, 뭐?"

눈물을 흘리며 손가락을 잃은 사내가 말한다. 요정 중대장은 말없이 나이들의 폼멜로 상대의 뒤통수를 때렸다.

뻑.

기절이다. 손을 지혈해 둬야 할까?

아니, 상관없을 것이다.

죽으면 죽는 대로 놔둘 것이다.

어차피 증언할 입은 널렸다. 전부 죽이진 않았다. 작센도 마찬가지였다.

개중 어려 보이고 입이 가벼워 보일 것 같은 이들 몇은 죽이지 않고 허벅지를 베거나, 기절만 시켜 놨다.

맨 처음 아즈펜을 외친 놈도 살려 뒀다.

여러모로 쓸모가 있을 것이다.

'위는?'

요정은 싸우며 위쪽에 신경 일부를 던졌다. 청각이 열리며 위쪽 상황을 알렸다.

그녀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재밌어.'

거듭 드는 생각이다.

어릴 때, 맨 처음 나이들을 받았을 때였던가.

그때도 이만큼 즐거웠던 것 같은데.

생각과 함께 요정의 나이들은 다시금 움직였다.

어느새 습격자의 숫자가 반 토막이 된 채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