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에서 토레스가 중얼거렸다. 다 들리게 하는 걸 보니 딱히 혼잣말은 아닌 것 같았고.
"가면서 얘기할까? 지금 가면 해 떨어지기 전에 야영지에 갈 수 있는데."
뒤쪽 병사 둘은 핀의 부하로 보였다. 다들 각자 군례를 보였고.
곧 다섯이 된 일행이 움직였다.
가는 도중, 그제야 핀의 입에서 상세 작전 목표가 나왔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고 온 건 아니지?"
"마물과 마수의 땅이라고 듣긴 했습니다."
엔크리드가 답했다.
탁월한 기억력으로 엔리가 한 말을 하나씩 떠올려 되새긴 참이다.
펜-하닐 강 위쪽은 마물과 마수의 보금자리가 많다고 했었다.
어지간히 길을 잘 보는 패스파인더나 사냥꾼이 아니라면 꺼리는 땅이라고.
"크로스 가드의 코앞이기도 하고."
핀의 딱딱한 말투가 이어졌다.
"본래 작전 목표는 고양이를 통해 정보를 전달받는 거였는데. 뭐, 이제까지는 그게 전부였었는데."
고양이는 첩자의 은어.
이쪽 대륙에서 흔히 쓰는 말이다.
양국은 각 도시에 첩자를 심어 두긴 했다.
그건 나우릴리아뿐 아니라 아즈펜도 마찬가지란 거다.
실제 엔크리드가 그 첩자 일부와 싸워 죽이기도 했으니, 첩자의 존재가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고양이가 약속된 날짜에서 벌써 나흘째 연락이 없어."
핀이 걸으며 말한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걸까.
토레스와 엔크리드가 귀를 기울이자, 핀이 마저 말했다.
"여기서 지침이 내려왔는데, 직접 들어가서 구해 오래. 우리 쪽 고양이의 마지막 연락이 중요한 정보를 취득했다는 말이었거든."
엔크리드는 짜릿한 느낌에 전신을 떨었다. 소름이 돋으며 위험하다는 경고가 전신을 후렸다.
이건.
'위험한데.'
위험한 정도가 아니다.
죽는다. 반드시 몇 번은 죽을 것이다.
수없이 많은 오늘을 겪으며 생긴 본능의 직감이 말한다.
지금 핀이란 여자의 말을 따르면, 크로스 가드 내부에 잠입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했으니까.
"후, 개 같은 임무지? 시발, 나도 안다고. 하지만 방법은 있어, 있긴 하지."
핀이 그제야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이미 일전의 마법사 트랩에 빠질 때, 엔크리드는 깨달았다.
도망가는 것으로 오늘을 넘길 수 있는가?
답은 '없다'였다.
밤을 새우려 해도, 그냥 잠들어도, 다른 곳으로 밤새 도망간다고 해도.
결과는 같다.
몸의 피로도만 더할 뿐이었다.
깨달은 건 피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피할 수 없다면 즐길 수밖에 없는 법이었으니.
엔크리드도 웃었다. 핀과는 다른 느낌의 웃음이었다.
기대감이 드러나는 기쁨의 웃음과 희열의 미소다.
그걸 본 핀이 눈썹을 씰룩이며 말했다.
"본대에서 미친 새끼를 보냈네?"
토레스도 반은 진심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가 봐도 엔크리드는 정상이 아니니까.
자기도 긴장한 판인데, 이건 뭐.
물론, 엔크리드도 긴장했으나.
그보단 새로운 내일을 맞이하기 위한 마음가짐이 달랐을 뿐이었다.
'넘는다.'
벽을 넘는 것, 그건 곧 성장을 의미하므로 그게 기뻐 웃었다.
물론 발악할 것이다. 오늘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버둥거릴 것이다.
그게 섬뜩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그저, 그보다 더 앞쪽을 볼 뿐.
걷는 엔크리드의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긴장과 기대감이 섞인 탓이었다.
97. 쟤는 정말 아파?
야영지에 도착한 건 밤이 다 돼서였다.
달빛 덕분에 그리 어둡지 않은 날이었다.
자갈길에서 어느새 주변이 풀밭으로 변했다.
겨울이 끝나가는 중이라는 걸 증명하듯 슬슬 풀색이 보이는 땅이었다.
물론 밤인지라 그게 보랏빛처럼 반짝일 뿐이지만.
'달이 밝아.'
엔크리드는 머리 위에 뜬 달을 보며 손에 쥐고 있던 돌멩이를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오른팔 근육이 파르르 떨렸다.
여기까지 오는 데 반나절 이상을 걸었는데, 오는 내내 토레스의 하이드 나이프를 연습했더니.
전완근 쪽이 저려서 뻐근했다.
몇 번 손을 쥐었다가 펴 본 엔크리드는 내일이면 괜찮아지리라는 걸 알았다.
고립의 기법으로 몸을 혹사해 봤기에 자연스레 근육의 회복 정도를 아는 거다.
아니, 내일까지 갈 것도 없이 조금만 쉬면 괜찮을지도.
"종일 돌만 가지고 놀고. 이상한 작자네, 진짜."
도착하자마자 핀이 한 말이다. 가는 내내 힐끗힐끗 보던 시선을 엔크리드도 느꼈다.
"손이 심심해서, 버릇입니다."
엔크리드는 대충 답하고 야영지를 살폈다.
여느 야영지처럼 불을 피우고 천막을 세운 곳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야영지가 아니라 굴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았다.
곳곳에 구멍을 뚫어 만든 굴이 여러 개 보였으니.
"마음에 드는 구멍에 찾아서 들어가고 위장막으로 가리면 됩니다. 아늑하게 자려면 온열 가죽이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그건 귀해서 나눠 드릴 건 없고요."
대원 중 하나가 넓은 천을 하나 가져와 말했다.
얼추 보면 여기에 구멍이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땅과 비슷한 황톳빛이었다.
'온열 가죽이라.'
엔크리드의 배낭에 하나 있긴 했다.
'에스터는 잘 있으려나.'
놔두고 가려니 한참 하악질을 했다.
뭔가 마음에 안 들어 하는 눈치였는데.
그렇다고 데려갈 순 없기에 두고 왔다.
"추우니까 둘이 굴 하나를 써. 그쪽은 신입이니까 나랑 같이 자면 되겠네."
핀이 말했다.
그쪽이라고 손가락을 들어 가리킨 건 엔크리드였고.
엔크리드의 배낭에는 온열 가죽도 있고, 굴 크기가 그리 넓어 보이지도 않았다.
체구가 작은 둘이라면 모를까.
가령 에스터 정도라면 데리고 잘만 하겠지.
하지만 아우딘에 비할 바는 아니어도 엔크리드의 몸뚱이도 그리 작은 편이 아니었다.
즉, 불편할 것이다.
하물며 상대는 여자다. 더 불편할 것이다.
'이걸 누가 알면 또 난리가 날 테고.'
부대 내에서 소문 퍼지는 속도를 보자니, 누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가 말하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옆에서 토레스가 빤히 쳐다보는 게 보였다.
"괜찮습니다. 전 준비한 게 있어서."
핀이 실망한 눈치였다.
"난? 난 혼자 자라고?"
토레스가 그 틈에 손을 들어 말했다.
"변방 수비대의 소대장이란 친구가 맨몸으로 왔어? 부대원 하나 붙여 주지."
"난 왜 부대원이지?"
"굴이 좁아."
토레스가 그 말에 엔크리드를 한 번 보곤 고개를 내려 제 몸을 본다.
아무리 봐도 자신의 체구가 더 작은 듯했다.
"뭐지."
어쨌든 핀잔만 들은 토레스다.
핀이 대강 부대를 정리하고 제 굴로 지정한 곳에서 이것저것 꺼내는 걸 보는데, 토레스가 엔크리드 옆으로 다가왔다.
"나 왜 기분이 나쁜 것 같냐?"
그걸 왜 여기서 묻나.
"피곤해서?"
"이게 피곤해서일까? 응? 중대장도 사로잡은 마성의 분대장, 아니 이제 소대장이지. 마성의 소대장께서는 정말 그리 생각하시나?"
"응."
"나쁜 새끼."
토레스가 장난스레 말하고 돌아섰다.
굴은 그리 좁지 않았다.
지면에서 비스듬히 뚫려 있었고, 안에 습기가 차지 않도록 천을 덧대어 깔아 두기도 했다.
그 위를 위장막으로 덮으며 들어가니 의외로 아늑한 느낌도 들었다.
다시 나와 온열 가죽을 꺼내 두르고 들어가 보니, 지낼 만했다.
"준비가 철저하시네. 드시렵니까?"
정찰대원 중 하나가 다가와 육포를 건넸다.
"아니, 내 건 따로 있어서."
일전에 얻어먹은 육포가 어찌나 입에 쫙 달라붙던지.
그게 어디 물건인지 찾아 결국 몇 점 더 얻어 온 참이었다.
"어머니의 비법이지."
수수하게 웃으며 말하던 병사다.
그 병사의 모친이 작은 식당을 운영했다. 여관 뒤쪽에 있는 곳인데, 음식 맛이 훌륭했다.
주력으로 파는 건 아무 고기나 양념을 발라 구워 주는 건데, 양념 맛이 훌륭했다.
꼬치구이 식당으로 주변에서 평도 좋았다.
'돌아가면 더 받아 와야겠는데.'
어지간하면 그쪽 육포를 주기적으로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기에 크라이스에게도 비슷한 부탁을 해 두고 오긴 했다.
어쨌든 육포를 배낭에서 꺼내 입에 물었다.
매콤함이 섞인 달짝지근한 양념이 입안을 휘돌았다. 어떤 비법이 들어 있는지 부드럽기도 했다.
엔크리드는 요리에는 영 재주가 없었다.
그러니 이런 걸 먹을 때면 신기할 따름이다.
엔크리드가 가진 보잘것없는 재주는 오롯이 검을 휘두르는 것뿐.
용병질을 할 때부터 이런저런 잡기를 익히긴 했지만, 그 어느 것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오롯이 검이었고, 기사를 꿈꿨을 뿐이다.
육포 몇 개를 씹어 삼키고 누우니 졸음이 몰려왔다.
마수와 마물의 땅.
잠드는 와중에 엔리의 경고가 떠올랐으나, 아무 일도 없이 크로스 가드의 앞마당에서의 첫날이 지나갔다.
혹 밤중에 죽을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했으나.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
첫날인지라 불침번도 빼 줬다.
동이 트기 전 엔크리드는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곧 밖으로 나와 상의를 벗었다. 차가운 공기가 몸을 감싼다. 그 차가움이 정신을 일깨우고.
일깨운 정신은 몸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엔크리드는 하의만 입은 채로 고립의 기법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바닥에 손을 짚은 채로 발끝을 세운 뒤, 무릎을 복부까지 끌어올려 차듯 움직이는 것부터 시작해서 이후 다양한 동작을 수행하니.
"...뭐 하는 겁니까?"
마지막 불침번이 야영 굴 사이에 있는 나무에 등을 기댄 채로 보고 있다가 물었다.
"아침 훈련."
"여기가 어딘지는 아시고?"
"크로스 가드 앞마당."
"그걸 알면서?"
이쪽에 있는 정찰대 중 엔크리드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니 황당할 만했다.
그리 몸을 혹사하는 수준으로 구른 엔크리드가 곧 검을 꺼내 휘두르기 시작하자.
핀도 깨서 그걸 봤다. 다른 대원 전부도.
토레스만 빼고 전원 다 '저게 뭐 하는 짓인가?'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쟤는 정말 아파?"
핀이 혼잣말하듯 물었다.
곁으로 다가온 토레스가 모포 대신 들고 온 두꺼운 망토를 걸친 채 말했다.
"저 친구는 저게 일상이라."
"저걸 매일 한다고?"
말하며 핀은 엔크리드의 몸을 떠올렸다. 바로 어제 아닌가.
아직 기억에 선명했다.
조각 같은 근육과 우람한 다리와 그사이 묵직한 그것.
'아, 그건 단련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지.'
묵직한 그것보다는 기억을 더듬어 엔크리드의 몸을 떠올렸다.
그 몸이 만들어지는 이유를 알 듯했다.
이 땅에서의 생활은 그 자체로 몸을 혹사하니, 자연히 다들 육체 단련 정도가 남달랐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남들보다 배는 더 열심히 살면 되는 것이다.
저렇게 말이다.
다만, 안다고 쉬이 할 수 있을까?
"오후에 마물이라도 만나면 싸울 힘은 있고?"
하는 짓거리를 보니 근육 경련이라도 일어날 것 같아 물으니.
"저거 하고도 나랑 대련만 열 번을 넘게 했지, 그리고 어제 행군을 한 거고."
토레스는 말하며 자신도 그와 비슷한 수준으로 체력을 소모했다고 은근히 말을 흘렸지만.
핀의 눈은 엔크리드에게서 떨어지질 않았다.
왜인가.
검을 휘두르는 저 동작 한 번에 영혼을 태우는 느낌이 들어서.
"미친 사람 같아."
말은 그렇게 했으나, 토레스가 듣기에 핀의 말투에 악의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감탄과 호감만 가득할 뿐.
'뭘 했다고.'
토레스는 새삼 마성의 소대장의 위용을 보는 기분이 든다.
이제까지 한 거라고 목욕하고 걷고 자고 일어나 아침에 훈련한 게 전부인데.
이 험한 땅에서 정찰대를 이끄는 지휘관급의 병사가 넘어간 것 같지 않나.
'이렇게 중대장도 꼬신 건가.'
아니, 사실 중요한 건 육체의 조건일까.
강가에서 남긴 인상 때문인가.
토레스의 잡생각은 금방 끊겼다.
다들 엔크리드를 신기하게 보는 것도 잠시니까.
"배 채우러 가자."
해가 뜨는 시점이다. 핀의 정찰대는 함부로 불을 피울 수 없었다.
그렇다고 매일 육포와 마른 과일로 끼니를 때우지도 않았다.
야영지로 삼은 곳에서부터 동쪽으로 반나절이면 크로스 가드고.
북서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작은 숲이 나왔다.
그곳이 그들의 식당이었다.
"배 안 채울 거야? 운 좋으면 토끼라도 잡을지 모른다."
핀을 포함한 정찰대는 총 여덟.
그리 많은 숫자가 아니다.
이들의 끼니야 사냥꾼 식으로 때우면 그만이었다.
현지 조달 말이다.
그중 둘이 더 합류한 것뿐이니, 식사 패턴은 변하지 않았다.
"안쪽에 냇가도 있으니, 거기서 씻어도 되고."
핀이 엔크리드를 보며 말했다.
"옷도 빨아도 됩니까?"
엔크리드가 시선을 대수롭지 않게 흘리며 물었다.
독립 소대장이 되었으니, 둘은 동급이라 할 수 있으나.
실제로는 조금 달랐다.
병사 등급제와 별개로 레인져 호칭을 단 정찰 소대장은 중대장과 소대장의 중간 계급이라 봐야 했다.
토레스와 비슷하단 소리다.
변방 수비대 소대장의 직급이 남다른 것과 같았다.
"시간 날 때 씻고 먹고 개인 정비를 하는 건 병사의 의무지."
어찌 보면 지원군이라고 둘만 오는 것도 어색한 일인데, 그 둘이 소대장급이라는 것도 평범한 일은 아니었다.
핀은 그리 생각하면서도 깊게 파고들진 않았다.
그녀는 일선에서 뛰는 레인져일 뿐이니.
곧 북서쪽 숲에 도달한 그들은 냇가를 주둔지로 삼고 마른 나뭇가지 따위를 모았다.
그 와중에 마수 두 마리를 만났는데, 엔크리드는 구경만 했다.
"키에엑!"
마수는 동물의 변형체다.
어떤 형태로든 마물화가 된 동물이다.
그러니 이런 일도 있을 수 있었다.
사슴 마수다.
피부는 전염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곳곳에 껍질이 벗겨졌고 피부는 푸르스름했다.
마수 특유의 홍채와 구별이 되지 않는 초점 없는 까만 눈이 빤히 엔크리드를 바라보는 순간.
픽, 픽, 픽.
뒤쪽에서 들린 소리다.
정찰대원 셋이 동시에 숏보우를 들어 화살을 쐈고, 두 발은 사슴 마수의 이마에, 한 발은 목에 꽂혔다.
머리통이 꿰뚫리면 죽는 건 마수나 마물이나 인간이나 마찬가지다.
사슴 마수는 단말마와 함께 바닥에 고꾸라졌다.
무릎부터 꺾이며 바닥에 머리를 박은 사슴 곁으로 대원 셋이 다가가 발끝으로 툭툭 차 보더니, 죽은 걸 확인하곤 화살을 회수했다.
그러더니 한 명이 혀를 찼다.
"칫, 부러졌네."
사슴 마수가 쓰러지며 목에 꽂힌 화살대가 부러진 거다.
'익숙해 보이네.'
정찰대원과 근접 전투를 배제하고 목숨을 걸고 싸운다면 어떨까.
무조건 이긴다고 보긴 어려울 것 같은데.
근접에서 정면 승부라면 필승이지만.
'다대일이라면.'
쉽지 않을 것이다.
괜히 마수와 마물의 땅에서 살아남은 부대가 아니란 거다.
"상급 병사라면서요? 사냥 경험은 있습니까?"
"조금."
엔리를 통해 배운 것도 있고, 그 외 용병질이나 대륙을 떠돌며 배운 것도 있다.
물론 사냥에 능숙한 편은 아니었다.
대신 다른 쪽에 능숙했지.
그런 와중이다.
가장 먼저 앞서 나아갔던 정찰대원 중 하나가 돌아왔다.
"에이씨. 구울입니다. 주둔지 옮길까요?"
"몇 마리였는데?"
"열 마리까지 세다가 뒤에 더 오길래 빠지고 돌아왔습니다."
구울의 출현이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그리 드문 일도 아닌 것 같았다.
기껏 불을 피우고 이런저런 대비를 해 둔 주둔지다.
구울 열 마리는 정찰대원에게는 부담스러운 적이다.
특히나 이쪽 구울은 발이 빠르니.
화살 몇 발로 제지할 숫자가 아니라면 근접전에 돌입해야 했다.
대강 훑어보니 숏보우를 든 병사는 셋.
그럼 구울 무리를 보면 어떻게 해야 하나.
피하는 게 상책이란 소리다.
"지랄맞네."
핀조차 짜증을 내는 사이, 엔크리드가 나섰다.
"어느 쪽?"
그가 묻는다.
어색할 법도 한 물음이나, 그의 눈이 조금 전 구울을 보고 온 병사에게 향했다.
병사가 눈을 깜빡였다.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탓이다.
"구울 말이다."
토레스가 나서며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토레스는 엔크리드의 실력을 대강 가늠했다.
무엇보다 그의 특기는 중검술.
자신이 단검을 주로 다루는 것과 비교하면, 마물 사냥에 특화되었다고 할 수도 있었다.
하물며 일전의 인면견과 하피를 잡는 것도 보지 않았나.
"이쪽 구울은 얌전한 편이 아니야."
엔크리드의 의도를 읽은 핀이 걱정스레 말했다.
"걱정 안 해도 될걸."
토레스가 덧붙이며 엔크리드 곁에 섰다.
"난 보조만 해도 되겠지?"
토레스의 물음에.
"발만 묶어 줘."
엔크리드가 답한다. 한 마리도 놓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그럼."
엔크리드는 제 능력을 증명하고자 했다.
핀과 남은 정찰대원 몇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이들에게도 전투는 일상이었다.
다만, 날쌘 몸놀림의 구울 열 마리는 정말 만만치 않은 상대다.
손톱에서 솟는 독에 당하면 그거로 이미 전력 손실이지 않나.
"이봐."
핀이 말리려고 말했으나, 엔크리드는 이미 코를 씰룩이는 중이었다.
'썩은 내.'
후각을 예민하게 만드니 구울이 오는 쪽이 대강 어느 방향인지 알 듯했다.
이렇게 하면 사냥도 할 만하려나?
냄새와 귀로 사냥감을 찾으면 될 듯한데.
어쨌든.
지금은 구울을 벨 때였다.
엔크리드가 땅을 박찼다.
"어, 야!"
그 뒤를 핀과 토레스, 정찰대원이 우르르 쫓았다.
엔크리드의 태도와 행동.
그 모든 게 그가 무슨 짓을 할지 지켜보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러니 죽든 살든, 돕든 말든.
일단 가서 보고 싶었다.
과연 아침부터 제 몸을 자랑하던 저 작자가 무슨 짓을 하는 건지.
당연하게도 엔크리드는 제 할 일을 했고.
그걸 본 핀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98. 개구멍
이쪽 구울은 등이 굽었는데도 빨랐다. 손톱이 이전에 봤던 놈보다 더 길기도 했고.
그래도 하피보다 빠르진 않았다.
렘의 도끼보다 날카롭지도 않았고.
'점과 점.'
선을 잇는다. 주변 모든 움직임을 육감의 영역에 넣는다.
다가오는 구울을 보며 해야 할 일은 하나뿐.
검을 뽑아 휘두르는 것.
치링.
검집에서 벗어난 칼날이 제 역할을 했다.
카아!
썩은 내를 풍기는 구울이 다가오는 걸음을 감으로 계산한 엔크리드의 검이 밑으로 떨어졌다.
딱. 쩍!
정수리 베기다.
왼발은 앞에 둔 자세에서 위에서 밑으로 내려친 검이 정확히 구울의 정수리를 쪼갰다.
이마까지 내리꽂힌 검을 다시 당겨 회수하는 것까지가 한 동작이다.
그걸 세 번 반복했다.
검 끝을 사선으로 하늘을 향한 채, 위에서 밑으로 내려친다.
순식간에 세 마리 구울이 바닥에 드러누웠다. 전부 정수리가 쪼개진 채였다.
그사이 옆에서 토레스가 단검을 하나 던졌다.
팽하고 날아간 단검이 구울의 머리통에 꽂혔다.
왼쪽으로 우회하려던 놈이다.
엔크리드의 발이 바빠졌다.
스텝을 밟고 다가오는 놈의 목덜미를 베고.
거리를 좁힌 구울의 머리통을 주먹으로 때리고.
한 손으로 든 검을 찔러 다른 놈의 머리통을 뚫었다.
처절함? 그딴 건 없었다.
열세 마리의 구울이 순식간에 죽었다.
그리고 놈들을 다 죽이며 엔크리드는 묘한 걸 느꼈다.
'패턴이.'
구울이 마치 싸우는 법이라도 배운 것처럼 일정한 형태로 덤볐다.
그래서 더 상대하기 쉽기도 했지만.
만약 압도할 만한 실력이 없다면 순식간에 포위당해 죽을 수도 있을 터였다.
'뭘까.'
이전 하수도에서 봤던 구울이나, 오면서 해치웠던 강가의 구울과는 또 다르다.
마물 중 가장 흔하게 보이는 식인귀, 그게 구울이다.
짐승보다 머리를 쓰지 않는 괴물인데.
'이런 놈들이 전술을 쓸 수 있나?'
없다. 불가능하다. 콜로니라도 이뤘다면 모를까.
집단을 이끌 리더가 있는 마물 무리를 군체, 콜로니라고 부르는데.
그런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더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냥 육감의 영역에서 묘한 게 걸린 것뿐이니.
칼날에 묻은 구울의 피를 냇가에 씻어도 될까.
그리 생각하며 처리가 끝났다고 말하려 돌아선 순간이다.
핀이 성큼 다가왔다.
"뭐야, 너."
핀이 엔크리드를 빤히 바라봤다.
질문에 많은 게 내포되어 있으나, 지금은 구울을 상대한 능력을 묻는 것일 터.
엔크리드의 입이 열렸다.
"독립 소대를 책임진다고 말했는데, 그 소대가 극단적인 전투 소대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애초에 중대장의 의도 또한 그런 역할이라 예상하기도 했으니.
소대가 고작 아홉 명이라고 하면 누가 믿겠나.
그런데도 유지될 수 있는 것.
대원 하나하나의 실력이 일반적인 기준을 뛰어넘는다는 거다.
변방 수비대가 버젓이 존재하고 있었으니 그 위명에 가려질 법도 하지만.
엔크리드 개인의 감상으로는 전혀 아니었다.
'상대가 안 돼.'
렘과 라그나, 아우딘, 작센.
이 넷의 실력은 지금도 넘보기 어렵다. 이리 구울을 썰어 대는 능력을 갖췄음에도.
'멀었어.'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을 봤음에도.
그 넷은 아직 저 너머에 있는 느낌이다.
그에 반해 변방 수비대의 토레스는 어떤가.
잡을 만했다. 정작 목숨을 걸고 싸우면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나, 질 거란 생각도 쉬이 들지 않으니.
"너 되게 잘 싸우는구나."
"끝내주는군요."
핀의 말을 새벽 나절에 불침번을 서던 병사가 받았다.
대원 몇이 다가와 엔크리드를 본다. 엔크리드는 이게 이만한 대우를 받을 일인가 싶었다.
이런 경우가 참 흔치 않았기에, 어색하기도 했다.
덕분에 뱉은 말이다.
"주둔지는 안 옮겨도 되겠군요."
"그렇지."
핀이 답했다.
이후 다시 주둔지로 돌아가기로 했고, 중간에 눈꼬리가 처진 대원이 냇가 방향을 알려 줬다.
임시 주둔지이자 식당으로 삼은 곳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이봐, 나도 셋을 죽였는데."
돌아가는 길, 옆에서 토레스가 중얼거렸으나, 그걸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엔크리드만은 그에 반응하긴 했다.
그가 툭 하고 토레스의 어깨를 쳤다.
"덕분에 쉬웠다."
실상 토레스도 알긴 했다.
그가 한 일은 어디까지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고.
'혼자서도 다 잡았겠지.'
새삼 깨닫는 것.
'실력을 숨겼어.'
아니, 토레스는 다시 생각했다.
엔크리드가 실력을 숨긴 게 아니라 대련과 실전의 온도가 다른 거다.
제대로 붙으면, 만약 목숨을 걸고 싸운다면 어떨까.
'질 것 같은데.'
특급 병사라는 등급 내에서도 변방 수비대는 나름대로 기준을 나눴다.
전투력만 치자면 토레스는 특급 중에서도 중간쯤이었는데.
엔크리드는 그보다 더 위 같았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괜히 하이드 나이프를 알려 준 게 아까워졌다.
"야, 그거 연습하지 마라."
전투가 끝나고 검을 회수한 엔크리드가 버릇처럼 얇은 돌을 만지작거리는 걸 본 토레스가 말했다.
"기껏 알려 줄 땐 언제고?"
"...그냥 해 본 말이다."
엔크리드야 토레스의 속내를 알 턱이 없었다.
자신보다 한참 밑이라고 생각한 존재가 자신을 뛰어넘어 버렸을 때의 기분.
가히 좋을 수가 없었다.
물론 엔크리드는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기분이다.
그에게는 그게 일상이었으니까.
재능의 부족함으로 다들 그를 두고 추월했고 지나쳤으며 돌아보지 않았으니.
그런데도 그는 꿈을 버리지 않았고 손바닥이 터지도록 검을 휘둘렀다.
그게 엔크리드란 인간이었다.
"칼이나 씻으러 가자."
구울의 피는 썩은 내를 풍긴다.
그 냄새가 좋을 리도 없고, 피는 기본적으로 기름기를 가졌으니.
그대로 두면 칼날을 상하게 한다는 거다.
"알았다."
어째 힘이 빠진 토레스와 엔크리드는 사냥에서 제외됐다.
"식사는 우리가 준비할 테니, 빨래라도 하고 오시죠."
그 덕에 냇가에서 땀에 전 옷을 빨 수 있었다.
말리는 게 문제이긴 하나.
보통 굴로 돌아가는 건 밤이 되어서라고 하니.
여기서 피운 모닥불에 종일 말리면 될 것이다.
안에 입은 가죽 갑옷을 벗어서 씻은 건 어제니까 두고.
행군 중에 또 땀이 났지만, 그렇다고 도시에 있을 때처럼 청결을 유지할 순 없을 것이다.
씻지 않으면 병에 걸린다는 건 상식이다.
특히나 군대 내에서는 청소와 청결이 기본이었다.
냇가의 물은 생각보다 맑았고, 오물을 가지고 하류로 흘러내려 가는 속도도 빨랐다.
핀이 물을 마셔도 된다고 해서 가죽 물통에 물을 채우고 한 모금 마신 뒤다.
꼬르륵하고 위장이 울었다.
"너도? 나도."
토레스가 그걸 듣고 말했다.
둘은 자리를 수습하고 꽉 쥐어짠 옷가지를 챙겨 돌아갔다.
"주시죠."
구울을 해치우기 전보다 배는 친절해진 대원이 긴 나뭇가지를 가져와 옷을 걸어 줬다.
모닥불 바로 옆에서 어디서 잡았는지, 뱀 껍질을 벗기는 대원이 보였다.
"횡재했죠?"
뱀 껍질을 벗기는 대원이 말한다.
입맛이 돌긴 했다.
보기에는 징그러워도 뱀 고기는 단백질이 가득한 영양분이었다.
아우딘도 말하지 않았나.
없어서 못 먹지, 있으면 다 먹어 치우는 고기라고.
"그러게."
답하고 옆에 앉았다.
토레스가 그 옆에 앉고, 핀은 맞은편에 앉았다.
모닥불이 타닥타닥 타는데 연기가 거의 나지 않았다.
'이것도 재주지.'
사냥꾼이나 정찰대가 이런 일을 능숙하게 하는 걸 몇 번 본 적 있었다.
나무껍질과 잎으로 먼저 작은 불을 피운 뒤, 잘 타는 나무를 잘게 쪼개서 넣는 거다.
물론, 이것도 요령이 필요한 일이다.
엔크리드가 하면 번번이 실패다.
이쪽은 일상인지, 연기가 잠깐 올라왔다가 사라졌고.
곧 대원 중 하나가 격자로 쌓아 둔 장작 밑으로 그을린 숯 따위를 넣었다.
"장작을 태우면 연기가 많이 나거든요."
그러니 처음 불을 피울 때 주의하고, 이후에도 장작을 넣을 때마다 연기가 나는 걸 조심하는 거다.
크로스 가드에서 보일 만한 연기는 아닐 것 같지만.
매사 조심하는 건 정찰대의 버릇일 터였다.
곧 대원 둘이 뱀 고기를 구웠고, 나머지는 육포 따위를 굽기도 했다.
그중 하나는 커다란 냄비를 가져와 물을 끓였다.
그 안에 이런저런 열매 따위를 넣더니, 조금 뒤 건져 냈다.
"쟤는 별명이 요리사야."
궁둥이를 바닥에 붙인 채로 핀이 말했다. 그녀는 숫돌로 제 손도끼의 날을 가는 중이었는데.
그걸 보니 괜히 렘이 떠올랐다.
'사고는 안 치고 있으려나.'
엔크리드가 대강 고개를 끄덕인 뒤, 얼마 안 있어 식사를 시작했다.
뱀 고기는 생각보다 부드러웠고 소금을 뿌려 간도 맞았다.
솔직히 말하면 굉장히 맛있었다.
특히나 꼬리 부분이.
"전 돌아가면 식당을 차릴 겁니다."
이 모든 요리에 관여한 병사가 말했다. 모닥불 불빛이 얼굴을 환하게 보이게 했다.
생각보다 앳된 얼굴인데 나이를 물어보니 스물둘이었다.
"자식이, 훌륭한 레인져가 될 생각을 해야지."
"전 요리사가 더 좋다고요. 대장."
핀의 말에 요리사란 별명의 대원이 말하고, 핀은 그 말에 파하하 웃으며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끈끈한 분위기가 오갔다.
엔크리드는 뱀 고기를 씹어 먹고 육포를 달궈 먹었다.
양념 육포를 조금 나눠 주자, 요리사란 별명의 병사가 눈을 빛냈다.
"아, 이거 뭐지, 왜 맛있어요? 어디서 구한 거죠?"
"도시에서. 돌아가면 알려 주지."
엔크리드의 말에 요리사란 병사가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였다.
"꼭입니다."
그리 든든히 먹은 뒤에는 반씩 나눠서 오침을 즐겼다.
"잘 쉬는 것도 레인져의 일이야, 실상 주변 정찰이 의미 없는 땅이기도 하니까. 이곳에서 최우선은 생존이야. 생존에 체력은 필수고."
핀이 말했다.
쉬는 곳도 정해져 있었다.
커다란 나무를 파내서 만든 은신처였다.
누군가는 나무 위로 올라가서 쉬었고.
또 누군가는 모닥불 곁을 지켰다.
반씩 나눠서 휴식을 취한 뒤다.
해가 뉘엿뉘엿 서쪽으로 넘어갈 때쯤, 핀이 본론을 꺼냈다.
핀이 토레스와 엔크리드를 앞에 두고 선 채로 말했다.
"성벽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세 가지다. 같이 상의해 보자고, 첫 번째는 개구멍."
이어진 핀의 설명이다.
"뭐, 도시 내에 암거래하는 애들이 쓰는 루트라서 알 놈은 알지만, 그렇다고 딱히 막진 않거든. 들어 보면 알겠지만, 이쪽 통로를 아는 놈들이 좀 있어서."
쉽지만, 그만한 위험이 동반된다는 말이 덧붙었다.
"다음은?"
토레스가 물었고.
핀이 줄줄 이어 말했다.
두 번째는 야밤에 성벽을 타고 넘는 것.
세 번째는 새벽 나절에 움직이는 상단을 가장해, 몰래 숨어 들어간다는 거다.
"가장 빠른 건 첫 번째, 가장 안전한 건 두 번째, 가장 편한 건 세 번째."
들어만 봐도 알겠다.
위험도는 세 번째, 첫 번째, 두 번째 순이라는 것.
하지만 핀이 말하는 걸 봐서는 큰 위험은 없다고 판단하는 것처럼 보였다.
전혀 심각한 말투가 아니었다.
"실상 성벽 너머로 들어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 문제는 그다음이지, 고양이를 만나는 거."
엔크리드도 그게 난감한 문제가 되리라고 봤다.
만약 억류된 상태라면? 이미 잡혔다면 어떤 표식도 남기지 못할 것이고.
그렇다면 감옥까지 가 봐야 하나?
"도시 내에서 흔적을 찾을 수 없으면 그대로 복귀다. 정찰대 전원도 본대로 돌아가고."
"그럴 것 같더라."
기다렸다는 듯 토레스가 말했고, 그 말을 핀이 받았다.
토레스는 본대에서 몇 개의 지침을 더 받고 온 듯했다.
"들어가는 건 우리 셋만 간다. 어디로 갈래?"
핀이 말했다.
"그건 그쪽이 선택해야겠지? 이쪽 상황은 제일 잘 알 거 아니야."
토레스의 말에 핀이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엔크리드도 동의하니, 핀이 개구멍으로 가잔 말을 뱉었다.
"어지간히 재수가 없지 않은 이상은 안 걸릴 테니까. 출발은 내일 아침이다."
"밤이 아니라?"
토레스가 되물었다.
잠입은 전통적으로 밤이 아닌가.
"아침이 나아, 밤이 되면 오히려 더 경계하니까. 성벽을 넘는 것도 내일 밤이 더 낫고."
엔크리드는 흘러가는 상황을 지켜만 봤다.
그 뒤, 먹고 단련하고 돌을 소매에 넣었다가 빼는 연습을 종일 하니 하루가 끝났다.
다시금 굴에 들어가 잘 시간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위험은 없고 오히려 지금 상황이 평온하게까지 느껴졌다.
'이쪽에는 아즈펜의 정찰대가 없는 건가?'
그런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다음 날 아침이 밝았고.
"간다."
핀을 선두로 셋이 크로스 가드로 나아갔다.
크게 우회해서 갈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도 않았다.
"애초에 크로스 가드의 서쪽은 마물과 마수가 장벽이라고 생각하는 놈들인데. 정찰대? 돌아다니긴 하지. 만나면 재수 없는 수준으로 끝나진 않을 거야. 어지간한 실력자가 아니면 저쪽에서도 여기에 정찰대를 안 보내는 거로 아니까."
확실한 목적 없이는 아즈펜의 정찰대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소리로 들렸다.
핀의 걸음은 빨랐다.
괜히 레인져가 아니었다.
특히나 마물과 마수의 흔적을 확인하고 피하는 솜씨는 기가 막힌 수준이었다.
특히나 걸음걸이가 독특했다. 발뒤꿈치부터 바닥을 지그시 눌러 밟는 걸음, 그게 엔크리드의 눈에 들어왔다.
"여기서는 좀 돌아가야겠다."
덤불이 가득한 작은 둔덕을 헤집고 나가는 길도 있었다.
핀이 허리춤에 찬 도끼로 길을 냈고.
엔크리드도 검을 휘둘러 앞을 막는 덤불을 벴다.
'칼날 점검을 안 했네.'
아침에 장비를 점검해야 했는데,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 작업을 빠뜨렸다.
훈련에 너무 열중한 탓이었다.
'실수.'
대단한 실수는 아니다. 그게 지금 상황에 큰 영향을 끼치지도 않을 것이고.
그리 삭삭 하고 덤불을 베자, 안에 빨간 열매 따위가 보였다.
"독이다. 먹지 마라."
핀이 농담을 섞어 말했다.
"주의하죠."
"나한테도 말 편하게 하지 그래?"
핀이 말했다.
"그러지."
제안하면 굳이 거절하는 법이 없다. 굴에서 같이 지내자는 것만 빼면.
엔크리드를 보던 핀이 입이 근질거리는 걸 참지 못하고 물었다.
"일 끝나면 나랑 잘래?"
"아니."
"칫."
"야, 옆에 나도 같이 걷고 있다."
마지막의 토레스의 말이다.
"응. 알아."
핀은 당당했다. 애초에 성격 자체가 대범한 덕이리라.
그리 도착한 곳 성벽이 보이는 작은 둔덕이다.
둔덕을 지나 서쪽으로 향하면 성문이 있을 터였다.
저 멀리 성벽이 보였는데, 해자는 없었다.
"굳이 해자까지 필요하겠어? 어지간한 재주가 아니라면 마물과 마수를 피해서 여기까지 오는 것부터가 어림도 없는 일인데."
그 말인즉슨 핀이 어지간한 레인져가 아니란 거다.
하긴, 이 정도가 아니라면 이쪽 지역의 책임자로 있진 않겠지.
엔크리드는 생각하며 구멍을 따라 들어갔다.
"레인져가 먼저 간다."
그 앞에서 핀이 레인져의 구호를 뱉고 들어갔다.
전장의 꽃은 보병이라는 말과 같은 거다.
뒤를 슬쩍 본 핀이다.
엔크리드의 눈에 핀의 미소와 머리를 감싼 얇은 가죽 투구, 투구 틈에 삐져나온 주황색 머리칼 따위가 보였다.
그 뒤를 엔크리드와 토레스가 따라 들어갔다.
이후는 생각지도 못한 일의 연속이었다.
"멍청한 놈들."
한참 들어가자 그들을 반긴 건, 긴 창을 앞세우고 방패를 든 부대였다.
꽤 널찍한, 셋이 나란히 설 정도의 넓이의 통로.
장창과 방패를 앞세운 부대가 머물기도 좋을 터였다.
그리고 뒤편으로는.
끼-익.
시위를 당기는 소리가 났다.
뒤를 보니 숏보우로 무장한 부대가 보였다.
개구멍으로 들어와 반 시간을 걷기도 전이었다.
함정이었다.
방패와 장창부대가 전면.
뒤를 막은 건 시위에 걸린 화살 수십 발이다.
기사급이 아니라면 빠져나갈 수 없는 완벽한 함정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토레스의 좌절감 가득한 목소리와.
"꼭 잡고 싶었다. 살쾡이 같은 년아."
적 지휘관의 말.
그걸 듣고 안색이 변한 핀이다.
"개새끼!"
핀의 말이 마지막이었다.
화살이 날고 장창이 오갔다. 엔크리드도 반항 비슷한 걸 했다.
왼손에 버클러를 들고 검을 휘둘렀으나.
어쩌겠나, 압도적으로 숫자에서 밀리고 좋은 위치를 뺏겼으니.
푸부부부북.
창날에 허벅지를 뚫리는 걸 시작으로 머리통까지 뚫리며 죽었다.
그걸 여실히 느끼자니, 괴로움이 치솟으나.
피할 수 없는 죽음이었다.
물론 그냥 죽진 않았다.
"지독한 새끼."
그의 검과 휘슬 대거는 이런 상황에서도 길동무를 여럿 만들긴 했다.
그들과 같이 길을 떠날 일은 없겠지만.
통증과 함께 어둠이 시야를 가리고.
낄낄낄.
뱃사공의 웃음을 끝으로 엔크리드는 눈을 떴다.
새벽 나절, 죽음이 기다리는 하루의 시작, 오늘의 반복.
다시금 시작된 오늘이다.
정작 임무는 첩자의 생사 확인인데, 성벽을 넘기도 전부터 난관이었다.
'성벽을 넘는 방법이 세 가지라 했던가.'
일단 개구멍은 막힌 길이라는 걸 알았고.
그럼, 나머지는?
엔크리드가 다시 시작된 오늘을 맞이하며 몸을 일으켰다.
99. 운이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1)
새벽 나절에 일어난 엔크리드는 다시금 똑같은 오늘을 맞이했다.
고립의 기법으로 몸을 단련하는 거다.
다시 시작되는 오늘이다.
대부분 이전의 오늘과 같았다.
몸을 단련하고 구경하는 정찰대원과 핀.
새벽부터 움직인 엔크리드는 검술 단련을 끝낸 뒤 장비를 점검했다.
구울과의 전투 이후 아침에 장비를 확인하는 걸 잊었었다.
'여기서부터 다시.'
새로운 오늘의 시작이란 거다.
그리고 방향성도 정해야 할 순간이다.
개구멍으로 다시 갈 것인가.
아니면 다른 길을 택할 것인가.
검을 들어 땅과 수평을 만들고 비스듬히 기울여 눈높이에 맞게 들었다.
칼날을 눈으로 훑는다. 이가 빠진 곳은 없었다.
엔크리드는 칼날을 보며 생각을 이어갔다.
반복되는 오늘에서 가장 우선해야 할 것.
'상황 파악부터.'
뚫고 나아갈 길이 세 갈래라면, 그 세 갈래 길의 끝에 뭐가 있는지부터 알고 싶었다.
기다렸다는 듯 세 가지 길이 눈앞에 놓여 있지 않나.
'어떻게' 내일을 향해 걸을 것인지는 그 뒤에 생각을 정리해 볼 일이었고.
준비한 가죽으로 칼날을 한번 닦고 다른 장비도 한 번씩 확인한 뒤, 손잡이에 감아 둔 가죽끈을 풀어서 다시 감았다.
이건 다른 오늘을 시작하는 행위라는 일종의 표시였다.
늘어가는 오늘의 숫자를 일일이 셀 수 없기에 첫 번째 오늘을 반복하며 만든 수단이었다.
검 그립의 가죽끈을 다시 묶는 게 두 번째 오늘, 엔크리드는 기억했다.
"아침나절부터 가려면 부지런히 가야 하는 거 아닌가?"
토레스가 아침 식사를 육포로 때우며 하는 말이다.
양념 육포를 맛보더니 아침마다 엔크리드에게 달라붙곤 했다.
안 그래도 엔크리드가 입을 열려던 참이었다.
마침 핀이 다가오는 것도 보였다.
왼쪽 허리춤에 손도끼, 바닥이 두꺼운 부츠, 다시 오른쪽 허리춤에는 숏소드.
몸에는 무두질이 잘 된 얇은 가죽 갑옷을 걸쳤다. 일전에 몸의 움직임에 맞춰 갑옷이 잘 휘어지는 걸 본 적이 있다.
'가볍겠어.'
무장이 그리 보인다.
경갑보병 중에서도 정찰대는 최소한의 장비만 갖추고 움직이는 이들이기에 가능한 무장이었다.
"레인져가 먼저 간다."
이게 그들의 구호인바.
가장 앞서 걷기에 가장 가볍게 걷는 이들이다.
중갑보병에 비하면 엔크리드도 경갑보병에 속하지만, 이들과 비교하자면 상대적으로 무거운 장비를 갖춘 편이라 할 수 있었다.
롱소드 한 자루만 해도 걸리적거릴 테니.
그럼, 제대로 싸우면 실력은 어떨까?
사실 며칠 내내 궁금한 참이었다. 고립의 기법을 통해 배운 육체 단련 정도를 보면 토레스와 비교해도 밀릴 것 같지 않아 보였으니까.
마침 오늘 시간도 남을 것이고.
어제와 다른 오늘을 맞이하기 위한 첫 번째.
아침부터 구멍에 머리를 들이미는 선택지는 없앤다.
"야밤에 성벽을 넘는 거로 하는 건 어떻습니까?"
다가온 핀을 보며 엔크리드가 대뜸 말했다.
돌려 말하면 말만 길어지는 법이다.
때로는 제 목적과 의도를 훤히 드러내는 게 대화를 이끌어 갈 때 유리한 법이었다.
엔크리드는 이런 면에서 아주 능숙했다.
"갑자기?"
"감이 안 좋아서."
다가온 핀이 고개를 갸웃하기에 숨도 안 쉬고 답했다.
엔크리드는 부대 내에서 자신을 부르는 별명을 잘 알았다.
마성의 분대장이나, 주술파괴자를 빼면 그를 지칭할 때 가장 많이 쓰이는 말.
'행운의 여신에게 사랑받는 놈.'
이거다.
다른 병사나 지휘관이 불길함이 느껴진다고 하면 무시하기 좋지만.
그걸 자신이 하면 좀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거다.
"감이 안 좋다고?"
물론 핀은 그런 별명 따위 모르기에 반응이 이럴 수 있었으나, 토레스는 달랐다.
잠깐 엔크리드의 얼굴을 보던 토레스가 제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차피 세 가지 방법 모두 상관없는 거라면 성벽을 넘어도 괜찮은 거 아닌가?"
대뜸 호응이다. 이유도 묻지 않는다. 그저 감이라고 했을 뿐인데도.
이건 무슨 경우인지.
핀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말고 입을 열었다.
"성벽 오르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세상에 쉬운 일은 없는 법이죠."
그 말에는 엔크리드가 답했다.
셋이 함께 가는 길에서 둘이 한 편이라면 답이 쉽게 나오는 법 아닌가.
핀도 기실 어느 쪽으로 가도 상관없었다.
그래서 세 가지 길을 전부 알려 준 거 아닌가.
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뭐."
기 싸움을 할 것도 없었다.
핀은 은근히 엔크리드에게 호감도 있었고.
"한판 어떻습니까?"
엔크리드가 가죽끈을 다 묶은 검을 검집째 허리에 묶으며 하는 말이다.
"오호."
옆에서 토레스가 호응했다.
대상은 당연히 핀이었고.
"나랑 하자고? 난 전투가 특기가 아닌데?"
그럴 리가.
그런 사람이 저런 단련된 몸을 가질 리가 없다.
"난 검술이 특기도 아니고."
말하며 핀이 어깨를 으쓱하곤 손바닥을 보인다.
그걸 본 엔크리드의 입이 재차 열렸다.
"맨손으로 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죠. 중요한 임무 전에 다쳐서도 안 될 테니."
귀한 경험이 될까? 모른다. 다만, 단련된 몸을 보자니 붙어 보고 싶긴 했다.
호승심이다.
토레스가 그랬든, 핀도 호감과 별개로 엔크리드와 겨뤄 보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들었다.
'오랜만이긴 하네.'
자신도 한때는 단련하는 것에 열정이란 불꽃을 태웠다.
한계를 경험했을 때 멈췄으나.
지금도 어지간한 놈에게 쉬이 넘어가는 수준은 아니었다.
가령 구울을 벤 엔크리드의 검술이 인상적이긴 해도.
'검을 빼고 하는 거면.'
쉽게 지리란 생각은 안 들었다.
사람마다 특기가 있는 법인데, 핀의 특기는 맨손 일대일 전투였다.
"오, 오랜만에 보겠군요."
정찰대원 중 하나의 말이다. 산적 같은 외모에 달리 부드러운 말투를 지닌 친절한 대원이다.
나뭇가지에 엔크리드의 옷을 대신 말려 주던 대원이기도 했고.
오랜만에 본다고 말하는 걸 보니.
핀의 재주를 이미 아는 듯했다.
"쓸데없는 소리는."
말하는 핀의 눈이 빛난다. 이미 전투태세로 보였다.
"밤까지 시간이 있긴 하지."
핀의 입에서 허락의 말이 떨어졌다.
엔크리드는 검집을 다시 풀었다. 갬비슨과 가죽 갑옷도 벗고 가슴팍을 가죽으로 당겨서 고정하는 얇은 셔츠만 걸치고 마주 섰다.
어느새 정찰대와 토레스가 큰 원을 그리며 공간을 만들었다.
중앙쯤에 자리 잡은 토레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째, 일전에도 본 광경 같긴 하다만."
승급 대련을 말하는 것일 터.
토레스는 그때의 엔크리드를 떠올렸다.
자신이 상대했을 때의 엔크리드.
'많이 변했지.'
그때와 비교하면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다.
적어도 토레스가 보기엔 그러하니.
"하시죠."
곧 둘의 대련이 시작됐다.
핀의 특기는 근접 전투였다. 그녀는 그걸 숨길 생각도 없었다.
좌우로 발을 놀리더니, 곧바로 거리를 좁혔다.
엔크리드는 아우딘을 통해 타격 기술도 배웠다.
발을 앞뒤로 벌리고 스텝을 밟으며 왼손을 쭉 뻗었다.
좌우로 돌리는 게 아니라, 직선으로 뻗는 주먹은 동선이 짧다.
고로 빠르다는 거다.
검의 찌르기를 닮은 주먹이었다.
그걸 본 핀은 묘기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여 줬다.
두 눈을 부릅뜬 채로 날아온 주먹을 몸을 낮춰 피했다. 딱 필요한 만큼만의 움직임, 엔크리드의 찌르기 주먹이 그녀의 머리칼을 스쳤다.
'이건.'
레오나 로크프리드의 호위 임무 때가 떠오르는 동작이다.
그때, 레오나를 구하려고 2층에 올라섰을 때, 엔크리드는 상대가 던진 단검을 고갯짓으로만 피했었다.
그 동작이 연상되는 돌진이었다.
핀이 제 주먹을 그리 피했다.
집중력이 더해진다. 상대의 몸이 그린 동선이 보이며 시선이 자연히 핀의 얼굴로 향했다.
그녀의 눈에서 안광이 뿜어지는 듯했다.
그대로 근접전 돌입이었다.
'태클일까?'
고민은 짧았고, 판단은 빨랐다.
훅.
뻗은 왼 주먹 대신 오른 팔꿈치를 밑으로 꽂았다.
안 피하면 등허리 어딘가에 구멍을 낼 듯한 과격한 공격이다.
핀은 그조차도 피해 냈다.
그녀의 움직임은 뱀과 같았다. 유연하게 허리가 꺾이더니, 스텝을 어떻게 밟았는지 어느새 엔크리드의 우측을 잡아챘다.
자리만 잡아챈 게 아니라 양손이 어느새 엔크리드의 손목과 팔뚝을 쥔다.
엔크리드는 반사적으로 힘을 줘 핀의 손아귀에서 제 팔을 빼냈다.
동시에 핀이 종아리 안쪽으로 엔크리드의 정강이를 감았다.
이후의 싸움은 누가 먼저 상대의 관절을 잡느냐의 전투였다.
피하고 막고 부둥켜 구른다.
어느새 둘은 바닥을 구르며 몇 번이고 뒹굴었다.
쿵 하고 머리를 찧기도 했고.
인지하지 못했지만, 엔크리드의 사타구니에 핀의 발이나 손이 들어가기도 했다.
'에일 카라즈 식.'
엔크리드는 핀이 구사하는 기술을 알았다.
아우딘이 수없이 가르치며 말해 준 것 중 하나였으니.
대륙을 통틀어 악명 높은 감옥 중 하나에 에일 카라즈가 있다.
아주 오래전에 그 에일 카라즈의 교도관 중 하나가 만든 기법이다.
죄수에게 더없이 괴로운 통증을 주며 상처 없이 제압하는 기술, 에일 카라즈 식 무투술이었다.
타격기를 제외한 관절기가 주력으로 별명은 '흙바닥의 왕'.
에일 카라즈의 연병장 바닥을 굴러 왕의 칭호를 얻어 내며 붙은 별명이다.
그리고 그 이름만큼이나 악명 높은 기예였다.
엔크리드도 몇 번이고 아우딘에게 침대 전투라며 배운 발라프 식 관절기로 받아쳤으나.
상대의 숙련도가 몇 배는 높았다.
그러니.
"패배 인정?"
잘 막았다고 생각한 순간, 어느새 핀의 양다리 사이에 목이 잡혔다.
수틀리면 목이 꺾일 수 있었다.
이리 잡혀 보니 알 수 있는 것, 핀의 허벅지 근육이 엄청 탄탄하다는 거다.
"졌습니다."
목이 조인 채로 엔크리드가 패배를 인정했다.
"검을 들고 싸우면 모르겠지만, 난 이게 특기라."
말하며 핀이 자세를 풀었다.
몇 번이고 바닥을 구른 탓에 둘 다 몸에 흙먼지가 가득했다. 머리칼이 황토색 먼지가 흩날려 떨어지고.
"씻어야겠는데? 같이 갈래?"
핀이 물었다.
"전 좀 나중에."
서슴없는 거절이다. 같이 벗자는 말이랑 다른 없는 제안이었다.
"칫."
핀도 농담이었는지 장난처럼 잇소리를 내고 일어났다.
그녀가 궁둥이를 탁탁 털고는 말했다.
"저녁에 보자고."
그리 그녀가 떠난 뒤다.
"그렇게 부둥켜안을 거면 그냥 굴 하나 차지하지 그러냐?"
토레스가 웃으며 말했다.
음?
그게 무슨 소린가 쳐다보자, 토레스는 계속 웃고.
"우리 대장과 뒹군 사람 중에 가장 오래 걸렸네."
그 옆에 있던 대원이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이해가 되긴 했다.
'가슴이고 뭐고 간에 몸을 비비긴 했구나.'
너무 급해서 거기까지 생각하진 못했다.
다만, 한 가지 깨달은 것.
'훌륭한 대련 상대야.'
아우딘보다는 못하다. 아우딘은 자신에게 별의별 말을 다 하면서도 꼼짝 못 하게 하니까.
다만, 현재 상황에서는 더없이 좋은 대련 상대 아닌가.
발라프 식 무투술을 갈고 닦을 수 있으리라.
물론 그게 오늘을 허투루 보내겠단 건 아니다.
당연하지만, 오늘을 벗어날 발악도 할 것이나.
다만, 이제껏 이런 상황을 맞닥뜨린 게 몇 번인가.
본능적으로 알았다. 마치 꿈의 뱃사공이 나타나 읊조리는 것 같았다.
"어떻게 빠져나갈래?"
또 다른 벽이 나타났음이다.
고작 몇 번 만에 빠져나갈 수 있을까?
아직은 모르나,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좌절할 것인가.
그럴 일은 없다. 엔크리드는 덤덤했다.
신나서 날뛰지도 않았고 괴롭지도 않았다.
실제로 그랬다.
일단 돌아가는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는 게 먼저라 생각했을 뿐.
그 와중에 핀의 특기를 알아낸 건 부가적인 일이었을 뿐이다.
이후, 남는 시간 동안 엔크리드는 토레스의 하이드 나이프를 연습했고.
"그건 계속할 거냐? 내가 몇 번 가르쳐 봐서 아는데, 안 되는 애들은 안 돼."
옆에서 토레스가 진지하게 조언을 건넸다.
일전에 그만 배우라고 하긴 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농담 쪽인 듯했으나.
지금 하는 말에는 진심이 담겼다.
나무 아래에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던 토레스의 말에 엔크리드가 답했다.
"그런가."
어디 이런 말을 한두 번 들어 봤어야지.
"그래, 마음대로 해라."
토레스는 금세 포기했다. 며칠이지만 그도 엔크리드를 얼추 파악한 덕이다.
이 새끼는 고집불통이라는 걸.
"성벽으로 가자는 건, 왜냐?"
대뜸 믿어준 뒤에 다시 나오는 질문이었다.
"그쪽이 더 나을 것 같아서."
"그동안 네 감이 딱 맞았고?"
"대부분은."
사실은 미친 듯이 오늘을 반복해서 이뤄 낸 것들이지만.
설명한다고 알겠나.
"믿어 보지, 뭐."
토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엔크리드는 그가 안 믿는다고 해서 문제가 되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이리 이리 흘러가리라는 걸 예상했을 뿐.
계속된 연습과 단련이다.
시간을 내서 몸을 씻고, 잠시 눈도 붙였다.
"밤에 일하려면 눈 좀 붙여 두는 게 좋으니까."
토레스도 마찬가지였고 핀도 충분히 쉬는 거로 보였다.
잠깐 자고 일어나니, 곧 해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너희는 접선지로 가 있고. 여긴 비운다."
최악의 상황을 고려해 남은 정찰대는 현재 주둔지를 버리고 이동한다고 했다.
그렇게 셋이 성벽으로 향했다.
가는 길은 더 험했다.
덤불이 아니라 밤중에 바위산을 탔으니까.
"오늘 달이 두 개 뜨는 날이라 다행이지?"
앞장선 핀의 말이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거냐? 험로네."
"말했잖아. 다른 길보다 이쪽이 배는 힘들다고."
핀이 웃으며 말을 덧붙이고 다시금 발을 뗐다.
걸음걸이도 걸음걸이인데, 핀은 부츠 밑에 뭘 붙여 뒀는지 걷는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엔크리드는 묵묵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바위산을 넘어 머리 위를 가린 수풀이 그들을 반겼고.
핀의 인도로 셋은 그조차 넘어갔다.
그렇게 크로스 가드의 성벽이 눈에 훤히 보이는 곳까지 왔다.
"운 좋네."
성벽을 보며 핀이 말했다.
땀을 흠뻑 흘린 토레스가 고개를 들었다.
"이게 운이 좋은 거냐?"
"좋은 거지. 마수랑 마물을 하나도 안 마주쳤잖아."
엔크리드도 땀이 흠뻑 났다. 레인져의 걸음을 쫓아 따라가는 일 자체가 보통 고된 게 아니었다.
그리고 이게 끝도 아니었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신사님들."
핀이 생긋 웃으며 지옥이 시작됨을 알렸다.
바위산보다 성벽을 넘는 게 더 힘들다는 소리였다.
그보다 일단 성벽에 바짝 붙는 게 문제일 테고.
고개를 든 엔크리드는 저 앞쪽에 보이는 성벽의 높이를 가늠하며 생각했다.
꽤 고생하겠다고.
그렇다고 돌아갈 길이 있는 것도 아님에야.
"갑시다."
묵묵히 핀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100. 운이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2)
"그 롱소드 꼭 가져가야겠어?"
야영지이자, 주둔지에서 출발하기 직전이었다.
핀은 엔크리드와 토레스의 장비를 지적했다.
"안 되나?"
"성벽 안 넘어 봤지?"
당연히 안 넘어 봤다. 성벽을 넘는 게 쉬이 할 만한 경험은 아니지 않나.
"다시 말하지, 최대한 가볍게 가. 그 두꺼운 갬비슨을 입고 가면 성벽에 오르기도 전에 퍼질 거다."
핀의 말이 맞았다.
바위산을 넘는 것부터가 일이었다.
그렇게 바위산을 넘고 성벽 앞에 도착했을 때 엔크리드는 핀의 조언을 듣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최대한 가볍게.'
그게 핵심이었다.
핀은 자세를 낮춰 성벽 앞까지 달라붙었고.
엔크리드와 토레스도 자세를 낮춰 다가갔다.
성벽 사이사이 방어탑에서 횃불이 화르륵 타오르는 게 보였다.
'몰래 들어갈 수 있긴 있는 건가?'
간담이 서늘했다. 발밑에 깔린 풀은 겨우 정강이 어림에 올라오니, 몸을 가려 줄 것 같진 않고.
그렇다고 달빛이 흐린 밤도 아니었다.
비라도 내려서 뭐가 안 보이면 모르겠는데.
주변이 훤하다. 횃불 없이도 너른 평야에서 움직이는 사람을 알아채는 건 너무도 쉬운 일 같았다.
심장이 두근댔다.
성벽을 오르긴커녕, 다가가다가 그냥 화살 따위에 꿰인 신세가 될 것 같아서.
만약 야수의 심장이 없었다면 다리가 후들거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엔크리드의 눈에 선두에 선 핀의 등이 보였다.
자세를 낮추고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그 걸음에 망설임은 없어 보였다.
'믿는 구석이 있는 건가.'
모르겠다. 그리 성벽 앞에 도착한 뒤다. 진땀을 흘리며 걸어온 거리가 꽤 됐다.
물론 작정하고 달리면 금세 좁힐 거리지만, 방어탑 위에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그럴 엄두도 내지 못하게 했으니.
"지금 뚫고 간 루트라면 방어탑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거였나?"
토레스도 비슷한 심정이었는지, 성벽에 붙자마자 속삭이듯 물었다.
그러자 핀이 답했는데, 답이 가관이었다.
"아니, 걸리면 잽싸게 도망가려고 했지."
"...뭐?"
"안 걸렸잖아. 그럼 됐지. 뭐. 전에 보니까 달 밝은 밤에 애들이 좀 해이해지더라고. 우리 애들이었으면 어림도 없다. 진짜."
어떤 대단한 재주가 아니라 운에 맡긴 거였다.
"이런 미친."
토레스가 중얼거렸다.
엔크리드도 비슷한 마음이었으나.
생각을 조금만 바꿔 보면 또 그럴듯하긴 했다.
'걸리면 도망간다.'
레인져의 발을 쫓으려면 기병이라도 나와야겠지만, 이 땅이 무슨 땅인가.
마물과 마수의 땅이다.
기병이 움직이기에는 최악의 조건이다.
괜히 말고기 좋아한다는 그리폰이라도 달려들어 봐라.
그리폰은 기사급이 아니라면 최소 소대급 이상의 병력, 그것도 훈련된 정예병이 필요한 마물이다.
여기에 그리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기병대는.
'어림도 없지.'
그럼 답이 나온다. 어지간하면 안 걸릴 날을 정해서 성큼성큼 걸어서 붙으면 되는 거다.
재수 없으면 화살이 날아오겠지만.
어느 명사수가 밤에 어렴풋이 보이는 그림자를 정확히 맞추겠나.
달 밝은 밤, 적군의 방심을 이용한 대범한 접근이다.
그러니.
"밤에 성벽을 탈 걸 생각해서 하루를 보낸 거였습니까?"
오늘처럼 듀얼문이 뜨는 날 온 것도 의도한 바겠지.
엔크리드가 읊조리자, 핀이 고개를 돌렸다.
달빛이 그녀의 얼굴을 반만 밝혀, 한쪽은 어둡고 한쪽은 은빛으로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핀은 입술을 오므리듯 모아 감탄사를 터트리고 말했다.
"호오, 예리한데? 오늘처럼 듀얼문이 뜨는 날은 애들이 해이하다니까. 방어탑 앞에 서성이는 그림자 봤지? 끽해야 둘뿐이었어. 숫자도 적단 얘기지."
엔크리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시선을 돌렸다.
성벽 위쪽에 솟은 방어탑의 숫자는 넷.
각 탑에 경비가 둘.
많진 않다.
'위로 올라가면 회랑 형태의 통로가 있을 것이고.'
성벽 위를 오가는 통로가 그리 넓진 않을 것이다.
보더 가드와 크로스 가드의 성벽은 동시대에 지어졌으니.
'비슷한 구조일 거고.'
머릿속에 그림을 그린다. 성벽 위에 올라선 뒤 무엇을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예측하고 움직이는 것과 되는대로 움직이는 건 차이가 크다.
엔크리드만 머리를 굴린 건 아니었다.
"성벽 오르다가 힘 다 빠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는데."
토레스도 마찬가지다. 그도 이후의 일을 걱정했고.
그 말에 핀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여기까지 온 이상 일단 가야지. 둘의 체력과 악력을 믿겠어."
엔크리드가 고개를 들어 성벽 높이를 다시금 가늠했다.
대략 엔크리드 자신의 신장의 서너 배는 될 듯했다.
"이쪽."
핀이 다시 안내를 시작했다.
그녀의 안내를 따라 도착한 곳 성벽의 외곽이라 하겠다.
달이 방어탑을 지나며 진한 그림자를 만드는 곳이기도 했고.
성벽에 바짝 붙자, 주변이 까맣게 보였다.
저 멀리 방어탑 위에 타오르는 횃불.
그리고 바로 곁에 서 있는 토레스와 핀의 인기척.
부우-!
아주 멀리서 들리는 밤새 소리.
그 외에는 열 발짝 정도 옆으로 벗어나면 땅을 비추는 밝은 달빛과 주변을 채운 상반되는 어둠뿐이다.
새카만 어둠 속 핀의 눈이 보였다.
낮에 보면 갈색빛이 감돌지만, 지금은 어둠 속에서 뭔가 반짝거린다는 것만 보일 뿐이었다.
"성벽은 생각보다 철저하게 안 지켜, 특히나 성벽을 넘는 걸 막아서는 이들은 정말 흔치 않지. 순찰병의 눈에 띄지만 않으면 된다 이거야."
"순찰병이 도는 시간을 알거나, 매수해 둔 사람은 없고?"
"있겠어?"
"또 운에 맡기는군."
핀과 토레스가 속닥였고.
엔크리드로선 이게 반드시 운에 기댄 작전이란 생각이 들진 않았다.
'달빛.'
방심, 성벽을 넘어서 곧바로 도시에 숨으면 되는 거다.
"이쪽 너머는 빈민촌이야. 잘만 숨으면 된다, 이거야."
순찰병이 이곳을 도는 횟수도 다른 곳보다는 현저히 적겠지.
왜 아니겠나.
보더 가드도 그러한 판에.
고약한 냄새와 툭 하면 구걸을 해 대는 이들 사이를 어떤 병사가 즐거이 걷겠나.
하물며 한밤중이면 반쯤 미친 부랑자가 덮칠 수도 있었다.
고로, 지금의 움직임 전부가 계산까진 아니더라도 경험이 묻어 있는 잠입이란 거다.
"경험이 있군요."
"너 정말 날카로운 맛이 있네."
성벽을 넘는다는 행위 자체를 누가 쉽게 상상하겠나.
그러니 도리어 허술하다는 것.
하물며 땅굴을 파서 개구멍을 만들어 놨음에야.
굳이 크로스 가드 내부로 들어가는 수단으로 성벽을 넘는 걸 택할 놈은 정말 흔치 않을 것이다.
그러니 가장 안전한 방법이 된 거고.
물론 고생은 필수겠지.
바위산을 넘는 루트부터, 지금 성벽을 오르기 위한 준비까지.
뭐 하나 만만한 게 없었으니.
"퉤."
핀은 제 손에 침을 뱉고 문지르더니, 곧 허리춤의 가죽 주머니 하나를 비스듬히 찼다.
주머니 안에는 돌가루가 가득했다.
그걸 손에 뿌려 비빈 핀이 성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틈을 찾아 손가락을 걸고 땅을 차 성벽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반듯하게 세운다고 해도 돌덩이가 엮여 있는 성벽은 이리저리 틈이 많았다.
핀이 성벽을 타고 올라가며 중간중간 허리띠에 꽂아 둔 말뚝을 성벽 틈에 비스듬히 꽂기 시작했다.
위에서 밑으로 사선이 되게.
그리 꽂힌 말뚝에 줄을 걸어 늘어뜨리고는 다시 맨몸으로 성벽을 기어오른다.
"저거 따라 할 수 있을까?"
"나? 난 무리지."
엔크리드와 토레스는 달빛이 성벽을 가로막으며 생긴 그림자에 숨어 고개를 든 채 말을 나눴다.
성벽을 오르는 핀은 원숭이 같기도 했고 날랜 다람쥐 같기도 했다.
그녀는 그리 줄을 늘어뜨리며 제 할 일을 했다.
그리고 엔크리드와 토레스가 줄을 잡고 오르기 시작했다.
사선으로 꽂힌 말뚝이 삐걱거리며 돌가루를 흘렸다.
그래도 뽑히는 법은 없었다.
줄만 잡고 오른 건 아니었다.
얼기설기 엮인 돌덩이 사이로 빈틈이 보이면 발끝을 집어넣고, 손끝으로 매달리기도 했다.
둘도 준비한 돌가루를 손에 잔뜩 묻히고 때로는 줄을 잡고, 때로는 성벽 틈에 발과 손가락을 박고, 지탱한 후에는 숨을 돌렸다.
고개를 들고 봤을 때는 금세 오를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뒈질 것 같은데.'
생각보다 힘들었다. 고립의 기법으로 단련된 엔크리드조차도 팔다리 근육이 뻐근했다.
특히나 전완근이 찌릿했다.
매일 검을 잡고 휘둘렀기에 단련을 거듭한 곳임에도 그렇다.
"동작에 따라 쓰는 근육은 매번 다릅니다."
괜히 아우딘의 말이 떠올랐다.
그걸 염두에 두고 보면 성벽을 타는 것도 고립의 기법을 수행하기 좋은 수단이 될 터였다.
위를 보니, 핀은 성큼성큼 잘도 올라갔다.
어쨌든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그렇게 낑낑대며 성인 남성 키의 서너 배쯤 되는 성벽에 오른 뒤다.
조심스럽게 성벽에 손과 발을 걸치고 그 위에 몸을 얹고 넘는다.
바닥에 발을 내디디며 엔크리드는 주변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직감과 육감이 그리 말했다. 그래서 조금은 안심하기도 했으나.
"밤중에 오른다고 고생하는구나."
기다렸다는 듯 들리는 목소리다.
맑고 청아한 여자 목소리였다.
이후, 딱- 하는 소리가 이어지며.
화르르르륵.
횃대와 횃대 사이, 달빛이 비치는 곳 위에 횃불 서너 개가 더 타올랐다.
무슨 재주를 부렸는지 모르겠으나.
손가락을 튕긴 것만으로 횃불에 불을 붙인 거다.
놀랍다. 서커스에서나 볼 법한 재주니까.
그래서 놀랍다고 손발을 멈출까.
"후욱."
횃불에 눈이 시리다고 느낀 순간, 엔크리드는 올라오느라 턱 끝까지 찬 호흡을 도로 들이마시곤 곧바로 손을 털었다.
허리춤을 지나친 손에 단검이 걸려 날아간다.
휘슬 대거는 소리가 단점이기에 평범한 쓰로잉 나이프다.
다만, 던지는 방법은 배운 대로 날카롭기 짝이 없었으나.
두둥!
엔크리드가 던진 단검 뒤로 쉭 하고 다른 단검 한 자루가 더 날았지만.
방패에 막힌 것이 아님에도 마치 엉망으로 만든 북을 치는 북채로 후려치는 소리와 함께, 단검이 허공에서 튕겨 나갔다.
두 자루 모두.
"이건 뭐, 운도 더럽게 없네."
그걸 본 토레스가 말했다. 낭패한 말투였다.
"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으며 엔크리드는 양손에 다시금 단검을 슬며시 쥐었다.
"마법사다."
마법사?
여기서 마법사가 나온다고?
이게 엔크리드의 머릿속에 처음 든 생각이었다.
그제야 횃불 사이에 오롯이 선 상대가 보였다.
달빛과 횃불을 가로지르며 선 여자다.
웨이브 진 긴 머리칼과 세로로 쪼개진 뱀을 닮은 눈이 보였다.
거리는 고작 열 걸음 내외.
주변을 포위한 병사의 숫자는 열 명도 안 되어 보였다.
그리고 열 명 다 쇠뇌를 들고 조준한 채였다.
'안 좋은데.'
당연히 드는 생각이다.
마법사가 뭐라 더 입을 열려는 순간.
"나와."
핀의 목소리가 울렸다.
엔크리드는 그 말에 반사적으로 몸을 낮추고 좁다란 통로 벽에 바짝 붙었다.
곧.
부웅!
뒤에서 파공음이 울렸다. 묵직한 뭔가가 엔크리드의 얼굴 옆을 지나치며 공기를 밀어냈다.
그게 여실히 뺨으로 느껴졌다.
'도끼를 던졌구나.'
단숨에 상황을 인지하며 앞을 보자, 그제야 달빛을 반사하는 투명한 막이 보였다.
유심히 보면 얼추 눈에 보일 그런 방어막이다.
쩡!
곧 회전하며 날아온 도끼가 사정없이 방어막을 후렸다.
단검을 막을 때와 다른 소리가 나며 방어막에 실금이 가는 게 보였다.
도끼가 허공에 멈췄으니, 방어막에 꽂힌 것처럼 보였다.
"뛰어내려!"
다시금 핀이 외치고.
도끼는 허공에 멈춘 채로, 곧바로 으깨졌다.
우득.
날이 부서지고 손잡이가 우그러지더니, 쪼개져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팅디디딩, 투두두둑.
도끼를 허공에서 분해한 마법사가 한쪽 입꼬리만 올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무슨 짓이든 해 보라는 듯한 그런 웃음으로도 보였다.
핀의 외침에 처음 뛰어내린 건 토레스였다.
그는 가장 기민하게 움직였다. 성벽 바깥쪽에 엮인 줄을 잡아챘고, 그거로 낙하 속도를 줄이며 내려갔고.
그 뒤로는 핀이 맨몸으로, 날 듯이 성벽 바깥으로 뛰어내렸다.
낙법을 제대로 하면 다리가 부러지진 않겠지만.
건물로 치자면 대략 5층 이상의 높이다.
잘못 떨어지면 죽는 거다.
그런데도 주저는 없다.
그리고 엔크리드는.
'어차피 빠져나가야 한다면.'
마법사란 여자에게 칼침을 한 번 먹이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자세를 낮추고 허벅지에 힘을 모은다.
한 번 보고 흉내를 내봤지만, 결국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한 스콰이어의 기술을 떠올리며.
콰득, 텅!
땅을 찬다.
한순간에 공간을 좁혀 마법사의 목을 향해 손을 뻗는다. 손에 쥔 건, 칼날이 넓적한 가드 소드.
도끼에 깨지는 방어막이라면.
'힘으로 부수고.'
머리를 쪼갠다.
일전에 만났던 마법사를 어떻게 죽였는가.
바짝 붙어서 베면 될 일.
보이지 않는 주문은 감으로 피한다.
마법사를 상대해 봤기에 보이는 자신감이다.
쿼렐이 남았으나, 그건 나중 문제였다.
그리 거리를 좁힌 엔크리드의 눈에 마법사의 눈이 보였다.
세로로 쭉 쪼개진 눈.
그 눈과 마주한 순간, 자기도 모르게 사지에 힘이 풀릴 뻔했으나.
두근-!
야수의 심장이 힘을 더해 주며 근육을 붙들었다.
동시에 든 생각이다.
'잡았다.'
하지만 확신은 때론 독이 될 때도 있었다.
"육감을 속이는 놈들도 있습니다. 조심해야 할 상대죠. 마법사가 그렇습니다."
떠오르는 작센의 말.
푹.
파육음.
따라오는 통증.
"멍청아!"
떨어지다 죽진 않았는지 위를 향해 외치는 핀의 목소리.
"쿨럭!"
죽음에 이르기 직전 더 날카로워지는 감각에 토레스의 기침 소리가 들렸다.
작센이 마법사에 관해 논했을 때.
이미 마법사를 죽여 봤기에.
육감을 통해 주문을 피해 봤기에.
제대로 듣지 않고서 흘려들었다.
'멍청한 짓을 했어.'
병사라고 다 수준이 같나.
기사라고 다 수준이 같을까?
그럼 마법사는?
전부 다른 거지.
엔크리드는 제 팔을 감고 결국 목을 뚫은 가시 박힌 넝쿨 따위를 봤다.
마법사의 눈길을 이겨 냈다고 생각한 순간, 바닥에서 뭔가 팔을 감쌌다. 가시넝쿨이었다.
"내가 바로 장미 넝쿨의 렛샤다."
마법사의 말을 끝으로 엔크리드는 눈을 감았다.
두 번째 오늘의 끝이었다.
세 번째 오늘이 시작됐을 때, 엔크리드는 똑같이 몸을 단련하고 검을 휘두르고는.
토레스의 하이드 나이프를 연습한 뒤, 연습용 얇은 돌멩이를 바꿨다.
세 번째 오늘을 기억하기 위한 행위였다.
그리고.
"새벽에 상단으로 위장할 수 있다고 했습니까?"
성벽을 넘는 세 번째 방법에 관해 물었다.
101. 운이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3)
세 번째 방법, 그러니까 이틀 뒤 새벽에 상단으로 위장해서 크로스 가드 안으로 들어가자고 설득하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감이 안 좋아."
성벽을 타고 넘자고 했을 때와 똑같은 이유다.
토레스가 지지하고, 핀이 데면데면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럼 뭐, 오늘도 여기서 묵어야겠네."
굴을 파 둔 야영지다.
그 소식에 요리 전담 병사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저녁 반찬으로 그걸 꺼낼까요?"
레인져 핀을 필두로 한 전방 정찰대.
이들이 한 번 작전에 나오면 머무는 시간이 평균 반년이다.
물론 중간에 일이 터지면 한두 달 만에 복귀하기도 하지만.
이들은 벌써 여덟 달째 이곳에서 머무는 중이었다.
그리 있다 보니 별짓을 다 했는데.
개중에는 잡아 둔 짐승의 고기를 염장해서 햄을 만들어 두는 것도 있었다.
"그럼 한잔 마셔 볼까?"
핀이 신나서 그 말을 받았다.
어떻게 보면 전장에 있는 이들보다 더 신경이 곤두서 있어야 할 부대인데도 신경줄이 무딘 건지 두꺼운 건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 이런 날을 위해서 평소에 더 예민한 건지도 모르지.'
식당으로 삼은 곳에서 연기가 나는 것도 주의했고.
주변 경계를 위해 돌아가며 크게 원을 그리며 순찰하는 일도 잦았으며.
눈 밝은 대원 둘이 항상 바깥쪽을 바라보며 경계도 했다.
그런 정찰대를 보고 있자니, 이전에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곧기만 하면 부러지기 쉽다. 필요하다면 부드럽게 휘어질 줄도 알아야지."
이건 어떤 교관한테 들었더라.
'교관이 아니었지.'
지방 도시를 순례하던 교단 소속의 성전사였다.
시간이 없어 가르침을 베풀지 못하겠으니 짧고 굵게 대련으로 해결하자고 했었다.
껄껄 웃으며 제 수염을 쓰다듬는 걸 보면 성직자가 아니라 산적이라고 해도 믿을 외모였으나, 그는 존경받는 성직자이자, 뛰어난 전사였다.
"휘어진다고 해서 물러지는 게 아니다. 중심이 굳건하면 쉬이 부러지는 법이 없지. 쉽게 설명해 주랴? 악 좀 그만 지르라는 거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악을 지르는 것처럼 들린다고 했던가.
그래서인가.
새삼 제 검이 어찌 보일지 궁금해지는 건.
치링.
마음이 가기에 그대로 움직였다.
"...술이나 한잔하자는데 또 왜 저래."
꿍쳐 둔 술병을 찾아온 대원에게 막 술병을 건네받은 핀이 중얼거렸다.
일어난 엔크리드는 검을 뽑아 휘둘렀다.
반복된 오늘과 상관 있는 것도 아니요.
최근에 배웠던 것도 아니다.
그저 의문에서 시작된 칼질이었다.
그때 자신과 마주했던 성전사는 엔크리드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악을 내지른다고 했다.
부러질 수 없다고 발악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근육을 부드럽게 쓸 줄 알아야 검도 더 잘 튀어 나간다."
껄껄 웃던 성전사의 얼굴 뒤로 분대원의 얼굴이 겹쳤다.
수백 번에 걸친 대련이다.
대련 중 렘은 어땠나, 그의 근육은 탄력 그 자체였다.
도끼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기술의 근간에는 여유가 있었다.
지지 않으리란 믿음 때문에?
'아니.'
채찍처럼 휘어지는 팔뚝과 도끼, 렘의 얼굴, 부드러운 근육.
모든 게 섞여 내놓는 답이다.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만 힘을 썼다.'
라그나는 어땠나, 무기력해 보이는 손짓이지만 말도 안 되는 수준의 검술이 엮여 있으니.
작센도 아우딘도 마찬가지였다.
뻣뻣해 보이는 태도와 달리 작센도 항상 여유가 있었고.
아우딘은 팔을 이리저리 잡아 꺾으면서 엔크리드를 놀리기도 했지만 조언을 건네기도 했다.
반면 자신은 어떠한가.
'어깨.'
아니, 전신에 힘을 주고 싸웠다. 점과 점을 이을 때도 그리했다.
항상 전력을 다해야 했으니까.
최선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이게 바로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는 거다.
엔크리드가 허공에 검을 휘두른다. 훙, 평소와 비교하면 허무할 정도로 힘이 빠진 채다.
'이건 그냥 힘을 뺀 거고.'
몸에서 힘을 뺀다고 검술 자체의 위력을 죽이라는 게 아님에야.
방법, 길, 이정표 따위가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안다고 곧바로 할 수는 없다.
안다. 너무도 잘 안다.
엔크리드는 제 재능을 뼈저리게 알고 있다.
그저 어깨에 힘을 빼야 하는 걸 깨달았다는 것뿐.
다만, 깨달음 자체만으로도 두근대며 심장이 뛰었다.
기쁨과 희열이 전신을 채웠다.
똑바로 걸을 수 있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길이 보이며 생기는 희열이다.
그리고 엔크리드에게 검은 곧 삶이었고, 삶은 곧 검이었으며.
꿈을 향해 걷는 동반자였다.
그리 희열에 찬 채로 떠오르는 의문 하나.
'발악만이 답인가.'
항시 내일을 위해 오늘을 허투루 보낼 수 없다고 다짐했다.
수차례 마음을 다잡았다.
버티고 또 버티며 발악하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기에, 그렇게 해 왔으나.
'꼭 그럴 필요는 없지.'
생각과 함께 검을 내리그었다.
쉭.
칼날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전과 달랐다.
그걸 들은 엔크리드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어렸다.
조금 전 칼질.
그저 위에서 밑으로 휘두르는 칼질에 향수를 느꼈다.
언제였던가.
앤드류와 엔리가 함께한 키다리 풀밭에서였다.
흔히 말하는 손에 느낌이 나지 않는 검격.
천재라 불리는 이들이 수없이 해내는 그 일격.
조금 전 눈앞에 상대가 있었다면, 손에 감촉도 남기지 않으며 벨 수 있었을 터였다.
다시금 똑같은 느낌을 얻기 위해 수없이 반복했음에도 결국, 단 한 번도 '손에 느낌이 나지 않는 검격'을 다시 할 수 없었는데.
'이게 되네.'
지금 제 손에서 그 검격이 이뤄졌음에.
이게 어떻게 기쁘지 않겠나.
"조금 전 칼질은 뭐가 좀 다른 것 같은데."
"그러게. 흔치 않은 베기였다."
핀과 토레스가 한쪽에서 궁둥이를 붙인 채 앉아 입을 열었다. 둘 다 보는 눈이 있었다.
이어 핀이 말을 덧붙였다.
"근데 쟤 정말 괜찮은 거 맞지? 왜 자꾸 혼자 쪼개?"
"그건 나한테 묻지 말고. 나도 얼굴 몇 번 본 게 전부니까. 정상이 아닌 건 본대에서도 유명한 친구라고."
엔크리드는 둘의 대화를 가뿐하게 흘려들었다.
다시금 검을 몇 번이고 휘두르고 싶을 뿐이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생각이다.
'발악하되.'
어깨의 힘을 뺀 발악은 어떤가.
반복된 오늘 안에서 꼭 발버둥 치는 것만이 답은 아니라는 것.
악을 내지르는 것만이 길은 아니라는 거다.
중요한 건 무엇인가, 내일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발걸음, 마음가짐, 그사이 얻을 수 있는 건 다 얻는 것.
깨달음이다. 깨우침이다. 새로운 배움이다.
또 그게 기뻐 웃고 있자니.
"아우, 생긴 게 저러니 저렇게 웃어도 괜찮긴 하네. 보통이라면 미친놈 같아 보여야 하는데, 왜 그럴듯하냐."
핀이 술을 한잔 걸치며 하는 말이다.
"난?"
토레스가 주제도 모르고 끼어들었고.
그는 그대로 무시당했다.
대원 몇이 낄낄대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만난 지 며칠 되지도 않았지만, 금세 곁을 허락한 이들이다.
그렇게 검을 세차게 휘두르는 사이, 핀과 토레스와 대원 몇이 술 몇 잔을 나눠 마셨다.
넉넉히 마실 양도 없을뿐더러, 독주도 아니었다.
도시 안이라면 흔히 구할 수 있는 싸구려 과실주였다.
그와 곁들어 식당으로 삼은 숲에서 염장하고 훈제한 햄을 몇 조각 잘라서 먹자니.
"넌 꼭 식당 차려라."
요리사가 꿈인 정찰대원에게 절로 이런 말이 나왔다.
엔크리드는 술을 입에 대지도 못했다. 오늘은 마실 생각도 없었지만, 마시려고 해도 마실 게 없었다.
검을 휘두르고 씻는 사이, 나머지가 냉큼 해치웠다.
"왜? 그 얼굴에 술도 마시고 싶다 이거냐?"
토레스가 괜히 툴툴거렸다.
웃으며 떠들 정도는 아니었으나, 적당히 풀어지는 시간이다.
물론, 이럴 때도 더듬이를 세우듯 예민한 이들이 몇 있긴 했다.
핀도 그중 하나였다.
술 한두 잔을 입에 대긴 했으나, 모두를 책임지는 위치 아니던가.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굴에 돌아온 밤이다.
개구멍이라 부르는 땅굴을 향하든, 성벽으로 가든.
본래라면 오늘 이곳에서 머무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야 했다.
핀이 떠나면 주둔지를 비우고 본대와 가까운 곳에 다시 집결하기로 했었다.
그 모든 게 상단으로 위장하기로 하며 틀어졌고, 본래는 존재하지 않아야 할 밤이 다가왔다.
두 개의 달이 뜨고 주변을 파랗게 비춘다. 엔크리드는 굴에 들어가기 전 고개를 들어 두 개의 달을 봤다.
둥글고 크게 뜬 달은 언제나 보이는 달.
두 번째 새끼 달은 보름 때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 달이다.
'밝다.'
주변이 훤하다. 밤을 새워 봤자, 어차피 오늘은 반복된다. 도시 내 구두 직공의 가게 밑을 파고들며 이미 배운 바다.
그러니 자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는 건 의미가 없었다.
눈이나 붙여, 괜한 피로를 쌓지 않으려 했다.
이제 막 깊은 밤이 시작되기 시작하는 시점.
어제 반복한 오늘과 비교하자면 막 성벽 앞에 도착했을 때쯤이리라.
아우우우우!
꽤 가까운 곳에서 터진 음성이다.
엔크리드는 마법사에게 죽으며 제 육감이 발동하지 않은 이유를 대강 알아챘다.
불길함이 발동하지 않는 이유.
'주문이 수작을 부릴 때.'
성벽을 오르는 내내 머리 위에 장미 넝쿨인지 장미 가시인지 하는 마법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수작을 부렸기에 위쪽의 기척을 읽지 못했다.
소리를 듣지 못했고 불길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럼, 지금은?
"씹! 기상! 비상이다! 비상!"
경계 근무 겸 불침번을 서던 정찰대원의 외침이다.
늑대의 울음소리, 병사의 경고성, 이후 들리는 소리다.
타닥! 타닥! 타닥!
무언가 내달리는 소리였다.
그리고 달빛을 등진 마물이 나타났다.
대륙 동쪽 끝 어딘가에 모여 사는 수인이라는 종이 있다. 인간과 야수의 특성이 섞인 독특한 아인종인데.
지금 나타난 마물은 그 수인의 실패작이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조물주가 빚은 실패작이기에.
그들은 언제나 피를 갈구하고 인간을 증오하니.
아우우우!
울음의 주인이다.
마치 발끝으로 서 있는 것처럼 발목이 뒤쪽으로 삐죽 솟았고.
회색 털로 전신을 감싸고 짐승 특유의 노란 눈동자가 빛났다.
주둥이는 쭉 튀어나왔고, 그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번뜩였다.
달빛을 등진 마물의 이름은 라이칸스로프.
다른 말로 하자면 웨어울프, 늑대인간이었다.
당연하게도 이들은 수인이라는 종(種)이 아니기에, 대부분 마물이 그러하듯 말은 통하지 않았다.
선두에 선 놈은 애꾸였다.
왼쪽 눈 위를 선명하게 가로지르는 흉터가 선명하게 보였다.
하나만 남은 노란 눈알로 주변을 둘러본 놈이 입을 벌렸다.
카아아!
마물의 외침이 터졌다.
그게 엔크리드의 귀에는 돌격이란 소리로 들렸다.
"정신 차려!"
반사적으로 외쳤다.
오늘이 어떻게 끝날 것인가.
반반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도전도 하지 않아 멈춘 하루가 되거나.
그게 아니라면 무슨 일이 일어나거나.
결과는 후자였다.
웨어울프,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선두에 나선 놈을 제외한 다른 놈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달빛이 밝은데도 놈들을 한눈에 찾기 어려웠다.
타닥타닥하고 바닥을 차는 소리와 함께 어둠을 가로지르는 그림자만 남을 뿐.
나무 사이, 달빛이 가려지는 곳, 그런 곳에서 노란 안광이 선을 그리며 빛났다.
달빛 아래 튀어나온 놈들은 뭉친 인간을 두고 뱅뱅 돌았고.
잔상이 보일 정도로 빠른 뜀박질이었다.
"이런 씨."
엔크리드는 여기서 또 깨달은 점이 있었다.
불길함이다. 왜 어떤 불길함도 느끼지 못했는가. 베테랑이라 할 수 있는 핀의 경계병은 왜 늑대인간의 접근을 이리도 늦게 알아챘는가.
'뭔가 수작을 부렸겠지.'
그러니까 여기에도 마법사가 관여했을 거라는 거다.
늑대인간이 저리 몰려서 온 것 자체도 이상한 일이고.
마법사가 부린 수작이 뭔지는 모른다. 결과만이 눈앞에 명확하게 나타났을 뿐.
대충 세어 봐도 열 마리가 넘었다.
"열이 넘는다. 안 좋다."
토레스가 등을 붙이며 말했다. 엔크리드도 검을 뽑았다.
치링.
토레스와 등을 맞댄 채다. 생각은 나중에 하기로 했다.
적당히 발버둥 치기로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얌전히 죽어 줄 수는 없는 것 아니겠나.
'그럴 순 없지.'
언제나 그러하듯.
내일을 위한 한 걸음을 걷겠다.
엔크리드는 각오를 다지고 검을 바로 세웠다.
마물의 이름은 라이칸스로프.
심장에 마력이 깃든 마물이다.
식인귀 구울과 비교하기도 어려운, 상대하기 까다로운 마물이다.
보통 늑대인간 하나를 잡기 위해선 훈련된 분대 하나가 필요하다.
그보다 적은 숫자로 사냥을 시도하는 걸 권하진 않는다.
쉬이 다치거나 죽는 사람이 나올 것이므로.
그리고 라이칸스로프가 무리를 이루면, 소대 단위로도 덤비지 말라 권했다.
하지만 지금 보니.
"하, 스물도 넘겠다."
잠깐 사이 숫자가 더 늘었다.
이쪽은 자신과 토레스를 포함해 정찰대 열 명.
늑대인간은 스무 마리가 넘었다.
그것도 마법사가 관여했다는 엔크리드의 추측을 증명이라도 하듯, 포위하고 덤비는 무리다.
본능에 미쳐서 날뛰어도 상대하기 힘든 마물이 늑대인간이다.
듀얼문이 뜬 날에는 더 힘을 발휘하는 마물이기도 했다.
거기에 포위 공격까지?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까.
"죽겠는데?"
토레스의 자조적인 말이 답이었다.
빠져나갈 길은 없었다.
엔크리드는 분전했다. 세 마리의 늑대인간을 죽였고.
네 번째 놈의 팔을 잘랐으니까.
그 와중에 휘슬 대거를 던져 늑대인간의 리더로 보이는 애꾸 놈에게 친구를 둘이나 만들어 줬다.
말 그대로 분전이었다.
무리를 이룬 라이칸스로프 집단과 싸워 남긴 흔적이니.
토레스도 비슷했다.
엔크리드보다 먼저 쓰러지긴 했으나, 그도 두 마리는 잡았다.
핀은 한 마리를 잡고 두 번째를 상대하다가 당했다.
다른 대원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엔크리드는 피를 뚝뚝 흘리며 찢긴 팔을 늘어뜨렸다.
마지막 일격을 먹일 심산으로 발을 돌리는데 발끝에 걸리는 게 있었다.
머리통이었다.
요리사가 되고 싶다던 대원의 머리통.
"조금 짜증 나긴 하네."
죽으면 반복되는 오늘임을 알지만.
이런 걸 보는 게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크오오!"
곧 늑대인간 여섯 마리가 단숨에 엔크리드를 덮쳤다.
당연히 살아남을 순 없었다.
전신이 물어뜯기며 죽는 건 처음이었는데.
이것도 당연히 괴로웠다. 고통의 시간이 지나간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눈을 감고 뜨니.
통증은 사라지고.
소리 없이 출렁이는 검은 강이 보였다.
검은 강 위에 둥둥 떠 있는 나룻배와 사공도 함께였다.
102. 운이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4)
"무엇이 더 즐겁더냐?"
화살에 꽂혀 꼬치가 되어 죽는 것?
마법사의 넝쿨에 조이고 가시에 찔리는 것?
라이칸스로프에게 전신을 물어뜯기는 것?
나타난 사공이 말하며 웃었다.
그가 허락하기에 인지할 수 있는 웃음.
새삼 무척 신기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마치 사공이 웃었다고 그렇게 누군가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사공이 웃는 건 알지만, 정작 웃는 얼굴을 본 것도 아니요. 웃음소리를 들은 것도 아니다.
머릿속에 상대가 웃었다는 것만 인지됐을 뿐.
질문을 들었기에 엔크리드는 답했다.
검은 강과 나룻배, 사공을 향해.
지금 하는 대답이 과연 사공에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나룻배를 향한 것인지, 검은 강을 향한 것인지도 구분되지 않았다.
그래도 입을 열 수 있었으니.
"화살이 제일 낫던데."
라이칸스로프 무리에 물어 뜯겨 죽는 거나 마법사의 넝쿨보다야 그게 낫지.
"...미쳐라. 그리 미쳐서 날 즐겁게 해야지."
어째 사공의 말문이 잠깐 막힌 것 같은 건 착각일까.
엔크리드는 미치지 않았다. 전혀 아니었다. 고민할 필요가 없었을 뿐이라 바로 답한 거였다.
"냉정하게 답한 건데."
"미친 새끼가."
사공은 웃음으로 시작해 화를 냈다.
물론 이 또한 누가 말해 주는 것 같다. 실제로 사공이 화를 냈는지는 모른다. 그저 짜증을 냈다는 것만 인지했을 뿐.
그거로 끝이었다.
검은 강 위로 까만 암흑이 덧칠되고.
눈을 감고 뜨자.
동이 트지 않은 새벽이다.
여전히 같은 오늘.
엔크리드는 가뿐하게 일어났다. 몸에도 마음에도 무거움은 없다.
물론 늑대인간에게 물어뜯기고 내장이 손톱에 찢기며 죽은 통증이 남긴 했으나.
"후."
그건 한숨 한 번으로 잊기로 했다.
진짜 잊을 순 없어도, 몸을 움직이고 검을 휘두르다 보면 괜찮을 것이다.
엔크리드는 덤덤했다. 태도도 마음도.
'어깨에서 힘을 빼고.'
본래라면 살아남기 위해, 오늘을 벗어나기 위해 발악에 가까운 궁리를 할 시간에.
엔크리드는 고요했다. 조용한 호수와 같았다.
새로이 깨달은 것이 있지 않던가.
'발악만이 답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내일을 위해 걷는 건 변함없다. 다만, 무조건 전력을 다해 뛰는 것만이 가장 빠른 길로 향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가장 빨리 갈 필요도 없을 것이고.
'길은 세 가지.'
일어나 평소와 같이 몸을 놀린다. 그러면서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시작은 구울이었다.
'그놈들도.'
이상했다. 누군가의 명령으로 움직이거나, 또는 그런 일을 경험한 무리로 보였다.
'마법사가 엮여 있겠지.'
그 마법사, 전에 경험한 놈과는 궤가 다른 수준이긴 했다.
'장미 넝쿨의 렛샤.'
들은 이름이 뇌리에 선명했다.
잡을 수 있나.
이런 질문을 할 필요가 없긴 했다.
잡아야 했으니까.
이어 생각이 라이칸스로프 무리에 닿는다. 경험한 걸 역순의 흐름으로 훑는 과정이다.
'마법사가 부린 수작이다.'
확신이었다.
성벽을 넘으면 마법사가 맞이하고.
개구멍으로 향하면 앞뒤를 가로막는 부대가 나타났다.
전면에는 넓적한 방패와 장창으로 무장한 정예병, 뒤는 궁수 부대가 막아섰다.
완벽한 준비다.
'미리 알고 있지 않고서야.'
일이 어떻게 돌아갔는지는 모르나, 이미 상대는 이쪽의 움직임을 읽고 있다는 게 결론이다.
그래서 첩자가 있나?
있었다면 라이칸스로프가 습격했을 때 어떻게든 표가 났겠지.
다른 방식으로 정보가 넘어갔을 수도 있고.
뱃사공이 웃을 만한 상황이긴 했다.
세 가지 길 전부 벽이라 할 수 있었고.
단순히 단련함으로써 넘어설 벽은 아니니.
'재수가 없긴 없다고 해야 할까.'
어떻게 매번 이렇게도 죽을 일이 있는지.
다만.
운이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변하는 게 있던가.
없다.
엔크리드는 같았다. 여전했다. 마음이 흔들리는 일 따윈 없었다.
달그락.
엔크리드는 검의 손잡이 끈을 다시 맸다.
새로운 오늘을 시작한다는 표식이다.
엔크리드는 머릿속으로 오전 시간을 쪼갰고.
그에 맞춰 움직였다.
고립의 기법 이후, 검술 단련.
다시 하이드 나이프를 연습하고.
"대련 한판 할 수 있을지?"
핀에게 말해, 발라프 식 무투술을 단련했다.
"누가 쫓아와? 오늘은 어째 더 급해 보이냐."
토레스가 제 장비를 챙기며 말했다. 저 몸 안에 숨긴 나이프가 몇 자루나 될까나.
엔크리드는 토레스가 나이프 여덟 자루가 달린 허리띠를 차는 걸 보며 생각하고 답했다.
"매일 최선을 다하는 거지."
"그러다 몸 상한다."
겨우 이 정도로 상할 몸뚱이는 아니었다.
"그럼 갈까?"
오전 나절부터 한바탕 어울려 준 핀이 말했다.
새벽부터 시작한 엔크리드의 훈련이 끝난 시점이기도 했다.
땀에 흠뻑 젖은 채로 갈 수 없어 대강 옷을 갈아입고 나선 길이다.
가는 동안 핀이 아즈펜의 정찰대를 쉬이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이미 들은 얘기였다.
덤불을 헤치고 나가며 핀이 겉보기에는 먹음직스러운 열매를 보며 말하고.
"그거 독이야."
"주의해야겠군요."
엔크리드가 곧바로 답했다.
"너, 좀 신기한데."
"뭐가?"
옆에서 단검 따위로 덤불 따위를 자르던 토레스가 끼어들었다.
"막 뭔가 아는 것처럼 굴잖아. 여기 와 본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이건 여자의 감일까, 아니면 레인져의 감일까.
"처음입니다."
"말 편히 해."
"그러죠."
같이 자잔 말을 또 하려나.
첫 번째 오늘에서는 그랬는데.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핀은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묘한 시선으로 엔크리드를 바라봤을 뿐.
오늘이 반복되더라도 모든 일이 똑같이 일어나진 않았다.
사소한 몇 개는 변하곤 했다.
그렇게 도착한 개구멍의 입구다.
"여기 깊이가 얼마나 되지?"
들어가기 직전 엔크리드가 물었다.
"음? 부지런히 걸으면 한 시간도 안 걸리지."
"그렇군."
"그건 왜?"
"궁금해서."
"어두운 데 가면 무서워? 걱정하지 마라. 누님이 손잡아 줄게."
"그건 아니고."
핀이 피식 웃고는 입을 열었다.
"레인져가 먼저 간다."
둔덕을 방패로 두고 내려간 길.
전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엔크리드는 둘에게 어떤 경고는 물론이고, 어떤 준비도 따로 하지 않았다.
대신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억했다.
"포위당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분대원 누구에게도 이런 질문은 해 본 적이 없다. 고로 배운 게 없다는 거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아는 건 있다.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
피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게 맞다.
그럼 피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건 지금부터 고민해 볼 일이었다.
엔크리드는 답을 찾는 중이었다.
"어서 와라!"
적이 보였다. 장창과 방패로 무장한 부대다.
숫자는 최소 2개 분대.
횃불 몇 개가 눈앞을 확 밝혔다.
끼-익.
기다렸다는 듯, 뒤를 막는 숏보우로 무장한 적병 무리.
'여기도 스물은 될 것 같고.'
다시 전면으로 시선을 돌려, 지휘관으로 보이는 작자를 봤다.
방패 사이로 고개를 내민 놈인데, 이마까지 가리는 철 투구를 쓰고 있어서 눈만 보였다.
희미하지만, 눈깔에 희열 따위가 엿보였다.
이 상황을 반기는 그런 느낌이다.
"살쾡이 년아."
지휘관이 입을 열고.
"이런 씨."
핀이 앞뒤로 고개를 돌리다 말고 단검을 뽑아 역수로 쥐곤 자세를 낮췄다.
왼손은 얼굴 앞을 비스듬히 막고 오른손은 뒤로 빼며 상대 시야에서 나이프를 숨긴 채다.
그 모습이 살쾡이가 발톱을 숨기는 것처럼 보이긴 했다.
토레스는 횃불이 만드는 그림자 옆으로 조용히 움직였는데.
뒤에서 숏보우를 든 병사 일부의 시선이 토레스를 따라왔다.
'눈도 밝아.'
제대로 훈련받은 병사란 거다.
역시나 그렇다.
함정에 빠지면 끝이다.
기사급이 아니라면 빠져나갈 수 없는 그런 함정.
핀도, 토렌스도 뛰어난 병력이다.
만약 여기가 굴만 아니었다면.
만약 앞뒤로 막히지만 않았다면.
'그럼 해볼 만하겠지만.'
안 된다. 반항은 할 수 있지만, 죽을 것이다.
막 지휘관이 뭐라 외치기 직전이었다.
"잠깐."
엔크리드가 왼손바닥을 보이며 나섰다.
검도 뽑지 않은 채다. 싸울 의사가 없다는 걸 보여 주는 손짓이었다.
"말이 통할 상대가 아닐 것 같은데."
토레스가 중얼거리고.
핀은 여전히 앞을 향해 흉흉한 눈빛만 빛내고 있었다.
"뭐냐?"
다 잡은 거라 확신하기에 생긴 여유다. 지휘관이 물었다.
엔크리드는 상대와 거리를 좁힐 필요가 있었다.
토레스의 말 대로 말이 통할 상대는 아니니까.
그저 잠깐의 여유가 필요했을 뿐이다.
싸우기 직전에, 상대가 격하게 움직이기 전에 확인할 게 있었다.
타박타박.
양손을 든 채 앞으로 나가 싸울 의사가 없다는 걸 피력한 채.
엔크리드의 시선이 횃불 빛에 훤히 드러난 상대의 무장과 옷 따위를 살폈다.
'흙먼지가.'
꽤 쌓였다.
걸어서 한 시간 남짓한 구멍이다.
적병의 몸에 묻은 흙먼지가 오늘 하루 만에 쌓인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늘만 기다린 게 아니야.'
그러니 이건 확인차 던진 질문이었다.
"며칠이나 기다렸지?"
"...뭐?"
정곡을 찔렸는지, 상대 지휘관의 목소리에 당황한 감정이 섞였다.
그건 확답이었다.
'확신을 하고 기다린 게 아니야.'
뭘까, 뭐가 이들을 여기에서 기다리게 했을까.
새삼 궁금하다. 물론 지금은 호기심이 중요한 건 아니긴 했다. 결과가 중요하지.
이곳에 며칠이고 이들이 기다린다는 사실을 말이다.
"잘도 기척을 숨겼네."
엔크리드가 재차 말했다. 모든 말이 상대를 떠보는 거지만.
지휘관이 그걸 알 턱이 없었다.
"이 새끼가. 너 뭐야? 너도 마법사냐?"
여기도 마법사가 관여했나?
대체 장미 넝쿨의 렛샤란 년은 뭐 하는 년인지.
"렛샤로군."
하는 김에 한 발 더 나가 봤다.
"...시발, 뭔지 모르겠는데, 뒈져라."
딱 여기까지였다.
곧 적병이 달려들고 화살과 장창이 엔크리드와 핀, 토레스를 노렸다.
지휘관은 손짓으로 제 부대를 향해 명령하고 물러났다.
핀은 그 지휘관이란 자식을 죽이고 싶은 눈치였으나.
방패로 앞을 틀어막고 긴 창으로 찔러 대는 적병을 뚫고 나갈 재주는 없었다.
그녀의 특기는 이런 곳에서 발휘하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평범한 병사 수준의 전력만 보이는 거다.
토레스는 달랐다.
그는 벽을 차며 상대의 예측을 벗어나는 동작을 보이더니 허공에서 손을 털었다.
그의 손에서 쓰로잉 나이프 4자루가 날았다.
엔크리드의 눈에도 어디로 날아가는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토레스가 숨겨 둔 한 수였으나.
퍼버벅.
부족했다.
궁병도, 전면을 막아선 놈들도 전부 두툼한 가죽을 두른 방패로 전신을 가렸으니.
'노릴 거면 차라리 발가락 따위를 노려야겠는데.'
딱 여기까지.
벽을 넘을 해답은 뒤로하고, 엔크리드는 생각해 둔 바를 실행하기로 했다.
단련된 정예병을 상대하는 것.
그것도 다수의 정예병이다.
엔크리드에게는 지금 순간이 무척 생소한 경험이었다.
자신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이들이 단체로 자신을 노릴 일이 뭐가 있었겠나.
그만한 실력도 없었음에야.
그동안 검을 휘두르는 수단이 늘었고.
찌르기 변태를 죽이고, 미치 휴리어란 작자도 벴다.
암살자가 자신을 노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건 정말 처음이었다.
단체, 부대, 병력을 상대로 소수의 위치에 선 싸움.
전장이라면 주변 아군을 이용할 수 있으나.
여기서는 그런 기회도 없다.
'그렇다면.'
이건 되레 실력을 키울 기회가 되진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재밌어."
절로 혼잣말이 나왔다.
"이 미친 새끼."
웃는 엔크리드를 향해 질린 표정의 장창병이 창을 내리꽂았다.
죽기 직전에, 입가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재밌다고 중얼거리며 웃는 놈이 가히 정상으로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물론 엔크리드는 그딴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당장 이것저것 시험해 볼 생각만 가득했지.
'한 점의 집중과 칼날의 감각으로는 안 된다.'
다수의 적을 상대로 시야가 좁아져 버리면 답이 없다.
구울 무리나 늑대 마수 무리, 또는 인면견 무리를 상대했을 때처럼 중검식으로 베고 으깨 버리면?
'안 돼.'
상대는 마수가 아니라, 전략과 전술을 쓸 줄 아는 부대 단위의 적이다.
머리를 굴리고 궁리한다.
평소와 같다. 전과 다른 점이라면 이전보다 어깨의 힘이 조금 빠진 것뿐.
그렇게 며칠을 개구멍으로 진입하려다가 잘 풀리지 않으면 성벽의 마법사를 만나러 갔고.
렛샤의 넝쿨에 수없이 당하며 궁리하다가 막히면 달빛을 벗 삼아 늑대인간 놈들과 춤을 췄다.
물론, 그 춤의 끝은 언제나 죽음이었다.
엔크리드는 작정했기에, 조급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저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할 뿐.
어깨의 힘을 뺐다고 하루를 허투루 보내겠다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마흔두 번의 오늘 끝에 하이드 나이프를 손에 익혔고.
"그게 왜, 돼?"
당연히 토레스는 놀란 토끼 눈이 됐다.
그로선 하루 만에 자신의 비기를 흉내 낸 셈이니까.
"운이 좋아서."
되지도 않은 변명이지만, 토레스도 할 말은 없었다.
"하루 만에?"
이딴 말이나 중얼거릴 뿐이었다.
토레스에게 보여 준다고 하이드 나이프가 더 숙달되는 건 아니었기에.
엔크리드는 마흔두 번을 넘어서 일흔 번을 넘는 오늘을 보냄으로 토레스의 속을 편하게 해 줬다.
더는 그의 앞에서 하이드 나이프의 재주를 보여 주지 않은 거다.
이제는 홀로 계속 반복하면 그만이었다.
나날이 발라프 식 무투술도 숙달됐다.
에일 카라즈 식 무투술을 익힌 핀과의 대련 덕분이었다.
그리 오늘을 반복하고 또 반복한 끝에.
엔크리드는 하이드 나이프도, 발라프 식 무투술도, 성벽 위의 마법사를 상대하는 것도, 성벽 위를 기어오르며 악력을 기르는 것도, 늑대인간 무리를 상대하며 검술을 단련하는 것도.
'전부.'
더는 반복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그럼, 다음은 무엇이겠나.
오늘을 넘어 내일로 향할 차례였다.
103. 이건 사랑?
'행운의 여신이 날 저주한 게 아닌가 싶은데.'
새로이 시작한 오늘, 엔크리드의 시선이 하늘 위로 향했다.
파랗게 보이는 달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아직 동이 트기 전이다. 일찍 일어난 탓에 자기 전에 본 달을 일어나서도 볼 수 있었다.
달이 참 밝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나.'
꿈에 나오는 사공이 벽이니 뭐니 하지만, 어찌 됐든 계속해서 재수 없게 죽는 셈이니까.
하물며 이번에도 그랬다.
몇 번이고 포위 병력의 틈을 노렸으나, 그때마다 정말 지독히도 운이 따라 주지 않았다.
빈틈을 노려 장창병의 발등을 찍고 파고들었더니, 갑자기 머리 위로 흙무더기가 쏟아지질 않나.
왜 하필 그 타이밍에 천장 일부가 무너져 내리냐고.
또, 떨어진 흙은 왜 하필 눈에 들어가는 건지.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마법사를 노리고 성벽 위를 달렸는데, 이제까지 튼튼하게 버티던 성벽 일부가 허물어져 디딤발을 없앴고.
그 외에도 비슷한 악운이 계속됐다.
변종인지, 늑대인간의 심장이 반대쪽에 있기도 했고.
한창 싸우다 숨을 돌릴 틈을 얻으려 등을 기댄 나무가 하필 썩은 나무라 등을 받쳐 주지 못해 균형을 잃은 적도 있었다.
뭐, 운이 따라 주지 않는 경우가 한두 번도 아니고.
타고난 재능이 없는 것부터 불운 아니겠나.
'진짜 여신께서 장난치는 겁니까?'
그래도 이리 물어보고 싶긴 했다.
물론 답은 없었다.
답을 원한 질문도 아니긴 했다. 새로운 오늘을 기억하기 위한 수단일 뿐.
오늘은 여신께 인사하는 거로 하루를 시작하는 거였다.
그대로 일어나 고립의 기법으로 몸을 단련하기 시작.
한쪽 무릎을 굽힘으로 반대쪽 무릎을 땅에 닿을 듯 자세를 낮춰 걷는 걸음이다.
한창 훈련에 매진하다 보면 다들 눈을 뜨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엔크리드가 그에 맞춰 정찰대원 하나를 붙들고 말했다.
"이런 거 만들 수 있을까? 비상금 주머니로 쓸 건데."
엔크리드가 말과 설명을 덧붙였다. 천 주머니이긴 한데. 소매 안쪽에 넣게 해 달라는 거였다.
고정되면 더 좋다는 말도 했다.
시간 남는다고 햄까지 만드는 이들이니.
이런저런 도구를 갖추고 있어서 재료를 구해 줄 필요도 없었다.
"네? 뭐, 금방 하기야 하죠. 근데 아침에 바로 가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 전에 만들어 주면 좋겠는데."
엔크리드의 요청에 정찰 대원 중 하나가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죠. 야, 내 근무 좀 대신 서 줘라."
대원은 호탕했다.
고맙다는 의미로 어깨를 두드리고.
나머지 단련을 하고 나니, 핀이 다가왔다.
"아침부터 좋은 구경이라도 시켜 주는 건가."
상의를 벗은 채로 검을 휘두르니 하는 말이다.
"쇠뇌 쓸 줄 아십니까?"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거야? 레인져의 기본 소양 중 하나지."
그러냐고 하면 왜 물어보냐고 할 것이다. 이미 알고 있기에 엔크리드는 미리 답했다.
"그냥 물어봤습니다."
"...나 뭔가 할 말이 없네."
"부츠 밑에 뭘 깔아 두면 걸음 소리가 그렇게 죽는 겁니까?"
"아, 이거? 이쪽이 예민한 마수가 많거든."
핀은 왼손을 들어 제 귀를 가리키곤 이어 말했다.
"그래서 천을 몇 겹 덧대서 바닥에 깔고 부츠 안쪽에는 솜을 넣는 거지."
당연히도 몰라서 묻는 건 아니었다.
"그거 좋군요. 제 부츠에도 하면 좋겠는데."
"어렵진 않지."
"토레스?"
"나도 하라고?"
"마수가 많다잖아."
"그 마수를 만날 일은 거의 없긴 하겠지만."
핀이 말을 덧붙이긴 했으나, 별문제는 없었다.
대원 둘이 붙어 부츠를 손봐 주기 시작했다.
"이 부츠 엄청 꼼꼼하게 만들었군요. 정성을 들인 태가 납니다."
"그래?"
대원 하나가 엔크리드의 부츠를 살피며 말했다.
하수도에 시체 애호가 덕분에 만났던 신발 직공이 애를 써서 만들었단 소리다. 듣기 좋은 말이었다.
부츠에 천을 덧대 붙이고 안쪽에 솜을 까는 일은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훈련도 끝냈고, 소리 없는 부츠도 만들었고.
"여기."
아침나절에 부탁했던 주머니도 왔다.
손목에 걸어서 끈을 조이는 방식으로 소매 안에 쏙 넣으면 보이지 않았다.
술 좋아하는 분대장 놈보다 나은 솜씨다. 바느질이 무척 촘촘했다.
당연히 이미 저 친구의 솜씨가 좋다는 걸 알고 시킨 거긴 했다.
이미 돌아가며 다 시켜봤으니까.
핀이 했을 때가 제일 끔찍했지.
솜씨가 없다면 한다고 덤비지나 않았으면 좋았을 건데.
그녀가 꿰맨 주머니는 주머니라고 부르기 흉한 모양에, 안에 손가락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 크기였다.
당연히도 쓸 수 없는 물건이 됐고.
"하핫, 바느질은 오랜만이라."
그랬던 오늘도 있었다. 참, 힘든 시작이었지.
되뇌는 엔크리드를 향해 어떤 오늘에서는 바느질로 힘든 시작을 선물했던 핀이 다가와서 어깨를 툭 쳤다.
"이제 가자고."
아침 식사가 끝났고 준비도 끝났다.
다시금 개구멍으로 향하는 길이다.
'일흔아홉 번째.'
반복한 오늘의 횟수를 되뇐 엔크리드는 부지런히 걸었다.
이미 수없이 가 본 길이기에 주저는 없었다.
핀은 간간이 뒤를 힐끗 봤는데, 엔크리드의 걸음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하고 물었다.
"정찰대로 오래 일했었나?"
"나?"
"아니."
토레스가 되물었다가 엔크리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니요."
엔크리드가 걸으며 답했다.
"그래?"
토레스야 왜 저리 묻는지 모를 일이지만, 엔크리드는 더없이 잘 알았다.
캐물으면 핀이 답할 말을 이미 아니까.
"걸음이 달라, 레인져의 걸음이잖아."
라는 답이다.
그동안 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뭘 했겠나.
그녀의 걸음걸이를 보고 따라 했다. 레인져의 걸음, 부츠 밑에 깔아 둔 천을 이용해 소리 없이 걷는 걸음이다.
시답잖은 대화 외에도, 간간이 풀 따위가 보이는 흙길을 조용히 걷는 중 엔크리드가 물었다.
"개구멍에서 적군이 기다리고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뜬금없는 질문이었으나, 타당한 의문이었다.
"싸워야지."
토레스가 먼저 답했다. 말하며 토레스가 발 앞의 자갈을 툭 찼다.
톡 하고 구른 돌이 황톳빛의 납작한 돌에 맞아 튕겨 나갔다.
엔크리드는 토레스가 찬 돌이 부딪힌 곳을 유심히 보며 귀를 기울였다.
"그럴 확률이 낮긴 한데, 있다면 내빼면 돼."
기다렸다는 듯 핀도 답했다.
"그렇군요."
대강 답한 엔크리드와 일행이 덤불이 가득한 둔덕에 도착했을 때다.
"그럼, 퇴로가 막히면 어떻게 합니까?"
엔크리드가 또 물었다.
막 둔덕에 발을 올리던 토레스가 얘가 왜 이러나 싶어 바라봤다.
임무는 단순했다.
안쪽에 들어가 아군이 심어 둔 고양이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
그 와중에 수틀리면 도망가는 거야 자유지만.
시작도 하기 전에 이렇게 자꾸 초를 치는 건 무슨 이유일까?
"그럴 일이 없도록 하는 중이긴 한데."
두 번이나 비슷한 질문이 나오니, 핀도 신경 쓰이는 듯했다. 말투가 딱딱해졌다.
"저 굴 높이나 넓이가 얼마나 됩니까?"
"응?"
"앞뒤로 막히면 다른 샛길은 없습니까?"
둔덕에서 몇 걸음 떼지도 않았는데, 계속되는 질문이다.
'이 새끼가 진짜 왜 이러지.'
토레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제까지 말없이 따라오다가 여기서 이런다고? 왜?
두려워서 이러는 건 아닐 것이다.
겨우 개구멍에 들어가는 게 무서운 놈이라면 인면견 무리 한복판으로 돌진도 안 하지.
지상으로 쇄도하는 하피를 상대로 칼질은 더더욱 안 하고.
"왜? 감이 안 좋나?"
토레스는 미신 따위를 믿지 않지만, 엔크리드의 감은 존중했다.
변방수비대 안에도 비슷한 놈이 있으니까.
감이 묘하게 좋은 놈들 말이다.
"그건 아니고."
어차피 들어가야 한다. 감이 안 좋다고 하면 길이 틀어질 테니.
엔크리드는 덤덤하게 답했다.
핀이 그런 엔크리드를 돌아봤다.
이 새끼가 지금 나한테 시비를 거는 건가?
그런 표정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그냥 적이 나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서."
갸웃.
핀이 고개를 옆으로 눕혔다가 바로 세웠다. 속이 불편한데, 왜인지는 모르겠다.
이 자식이 자꾸 딴지를 걸어서 그런 걸까.
"개구멍은 암거래상의 주요 통로지, 고양이나 우리 쪽이 쓰는 길이 아니야. 그러니까 지금은 가장 안전한 길 중 하나라고."
핀은 엔크리드에게 설명하며 자신에게도 이 길을 택한 이유를 되뇌었다.
토레스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레인져 수준은 아니지만, 별의별 임무에 다 참여해 본 몸이다.
'이 정도면 안전하지.'
핀의 말이 맞았다.
엔크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개구멍 안 경사로로 발을 들이고 안으로 서너 걸음 들어갔을 때다.
"혹시, 저 앞에 무장 병력이 기다리면 우리는 다 죽은 목숨입니까?"
엔크리드가 또 물었고.
"아니, 시발."
결국, 핀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아무리 긴장하지 않는 척을 한다고 해도 적군의 도시에 들어가는 길이다.
이따위 말을 하는 이유가 뭔가.
"하기 싫어? 싫으면 빠지든가."
듣다 보니 성질이 났다. 버럭 화를 낸 핀을 본 엔크리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
"저거 왜 저래?"
괜히 토레스에게 화살이 돌아갔다.
좋은 말도 한두 번인데, 신경 거슬리는 말만 골라서 한다.
원래 저랬나?
아닌데.
토레스도 할 말이 없었다.
"갑시다."
핀이 성질을 내며 멈추자, 이제 엔크리드가 되려 앞장서며 말했다.
성질이 난 핀이 뭐라 한마디 더 하려는 순간이다.
토레스와 핀은 순간 묘한 느낌을 받았다.
둘 다 자기도 모르게 엔크리드에게 시선이 꽂혔다.
왜?
묵직한 기세, 그래, 그런 게 엔크리드에게 뿜어져 나왔으니까.
토레스도 특급 병사였고, 핀도 그에 뒤지지 않는 기량을 갖췄다.
둘은 엔크리드의 기세를 느꼈다.
"조금만."
엔크리드가 둘을 분위기로 누르고 입을 열었다.
"조심하자는 겁니다."
끊어서 하는 말에 핀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새끼 뭐지.
분명 재수 없게 굴었는데, 지금 이건 왜 이렇게 멋있냐.
솟구치던 짜증이 갑자기 사라지는 기적이 핀에게 일어났다.
'이건 사랑?'
핀의 정찰대원 전부가 인정하는바, 금방 사랑에 빠지는 여자였다.
그렇다고 일을 소홀히 하진 않긴 하니, 그건 다행이었다.
사랑은 사랑이고.
남자는 남자고.
일은 일이고.
핀은 인정했다. 조금 풀어진 건 맞다고.
고양이가 잡혔다고 해서 자신들의 거취가 드러날 일도 없었고.
도시 안에 들어가는 게 위험하긴 하지만, 실상 몸 하나 빼내는 건 자신 있었다.
그걸 위해 그동안 아껴 둔 '길'로 가기로 했으니까.
"그러지."
핀이 먼저 인정했다. 그녀는 곧바로 태세를 전환했다. 더 신중하게 발을 떼기 시작했다.
토레스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묘한 눈길로 엔크리드를 쳐다보긴 했으나.
"당연히 조심해야겠지."
이내 입을 열고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엔크리드는 둘의 태도가 변했다는 걸 느꼈다.
괜히 잔소리를 갈긴 게 아니었다.
기세를 일으킨 것도 마찬가지고.
이 앞에서 기다리는 애들 멱을 따고 살아남으려면 틈을 열어야 했다.
반대로 이쪽은 조금의 틈도 보이면 안 되고.
함정을 판 장창과 방패로 무장한 정예병.
그리고 뒤를 막는 궁수.
합쳐서 사십이 넘는 숫자다.
실수를 용납할 수준이 아니지 않나.
그래서 그렇게 했다.
실수 없이 아랫배에 힘을 빡 주도록.
과연.
일반 병사의 신중함과 레인져의 신중함은 달랐다.
"묘하네."
횃불에 의지해 걷는 내내 핀은 고개를 푹 숙여 걸었고.
패스파인더와 사냥꾼의 뺨을 왕복으로 후려칠 능력의 레인져가 그녀 말대로 묘한 흔적을 찾았다.
"발자국이 묘해."
핀이 말했다. 그래, 그러라고 신나게 떠든 거다.
상대는 흔적을 지웠다.
하지만 작정하고 주변을 의심하는 레인져의 눈을 전부 피할 순 없는 법이었다.
엔크리드는 여길 뚫으며 처음부터 정면 승부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동안 반복한 오늘이 몇 번인가.
그 오늘을 통해 배운 것도 있었다.
굳이 정공법으로 뚫을 필요는 없다는 것도 그중 하나다.
"뒤가 찝찝한데요."
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엔크리드가 준비한 대사를 뱉었다.
빼어난 연기력이 필요하진 않았다.
수차례 해 본 거니까.
여기까지야, 사실 그동안도 몇 번이고 마주한 순간이다.
그러니 할 일을 할 뿐이다.
"진짜 앞에 뭐가 있을 것도 같은데."
핀이 말하고.
"이런 씨, 뭐라는 거야."
토레스가 긴장한 채로 앞뒤로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엔크리드는 적절한 시기라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퇴로 확보부터 하죠."
그러니까 뒤로 돌아가서 길을 닦자는 말이었다.
정확히는 궁병대가 대기하고 있을 뒤쪽을 조지자는 말이지만, 당연히 이 둘은 그런 사실은 모를 것이다.
핀과 토레스의 시선이 엔크리드에게 향하고.
"만약 뒤에서 누가 퇴로를 막으면...."
말을 끝낼 필요도 없었다.
"접수, 가자."
"이거 일진이 안 좋나."
토레스와 핀이 연달아 말하며 몸을 돌렸다.
104. 렛샤의 말을 전한다.
"이런."
핀이 입술을 깨물며 읊조렸다.
뒤에 붙은 엔크리드와 토레스의 귀에만 간신히 그녀의 낭패한 목소리가 들렸을 뿐이다.
셋은 뒤로 돌아가서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도 병사 무리를 발견했다.
완만하게 이어진 모퉁이에 어깨를 기대곤 뒤를 향해 고개만 빼꼼 내민 핀이 들고 있던 횃불을 뒤로 던졌다.
휙 하고 날아간 광원이 사라지자, 앞쪽에서 은은하게 비추는 횃불만이 빛의 전부였다.
주변이 까매졌다는 거다.
토레스가 자세를 낮춰, 앞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어둠 속을 꿰뚫어 볼 재주는 없어도 이런 일을 대비해서 했던 훈련이 있기에, 얼추 상대 숫자나 무장을 볼 정도는 됐다.
'시발, 많은데.'
얼추 봐도 스무 명이 넘는다. 거기에 무장 정도도 만만치 않았다.
쇠뇌는 기본에, 허리춤에 숏소드를 찼고 전부 비슷한 무장 상태였다.
이게 말하는 건 무엇인가.
'훈련받은 부대다.'
어중이떠중이 용병 집단 따위가 아니라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훈련받은 병사 무리는 어지간한 마수나 마물 무리보다 위험했다.
특히나 이렇게 좁은 굴 안에서 쇠뇌로 무장한 적이라니.
'죽겠는데.'
토레스가 상대를 살피는 사이, 핀은 고민했다.
이대로 반대로 돌아서 차라리 크로스 가드로 나가야 하나?
퇴로만 막은 걸까?
아니면 본래 가려고 했던 길에도 뭐가 있을까?
핀과 토레스가 가벼운 패닉에 빠졌을 때.
혹시나 말소리가 들릴까 입을 다물고 머리를 굴릴 때.
"전령, 로저 대장의 전령이다!"
엔크리드가 뛰쳐나갔다. 그것도 목청을 자랑하며.
토레스는 놀랐다.
핀은 더 놀랐다.
손을 뻗거나 소리를 낼 엄두도 못 낼 만큼 기겁했다.
'미친 새끼가.'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쇠뇌병 중 서넛만 화살을 쏴도 그대로 꼬치구이행이다.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도 엔크리드의 뜀은 주저가 없었다.
당연했다.
로저는 장창부대 지휘관의 이름.
상대가 당혹할 만한 말을 던지므로 주춤하게 했으니까.
"빈틈이 보이지 않으면 빈틈을 만들면 되는 겁니다. 정정당당한 승부? 그게 목숨을 살려 주는 겁니까?"
작센이 했던 말이다.
상대를 속이는 거?
필요하다면 왜 못 하겠나.
기사를 꿈꾼다고 해서 결투만 하는 머저리가 되겠다는 건 아니었다.
명예가 필요한 자리라면 그리하겠지만.
'애초에 함정 파고 마법사가 수작을 부린 것도 부족해서 늑대인간까지 동원한 마당에 무슨.'
그렇다고 단순하게 적을 속이기 위해 오늘을 소모한 것만도 아니었다.
어깨의 힘이 빠지니 시야가 넓어졌고.
넓어진 시야는 엔크리드가 할 수 있는 것과 얻어 낼 것을 알려 줬다.
과거의 경험과 최근의 경험.
반복되는 오늘.
그 틈에서 무엇을 바라고, 얻어야 하는가.
단순히 오늘을 벗어나기 위해 버둥댈 이유는 없다.
'다수와의 전투.'
그것도 정예병과의 전투 경험은 흔히 할 수 없다. 하물며 함정에 빠져 오도 가도 못 한 상황이라니.
키다리 풀밭과는 상황이 달랐다.
그때는 피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장창과 화살, 지휘관의 명령, 방패로 막힌 전면과 화살 비가 쏟아지는 후면.
한 발짝만 잘못 움직여도 죽는 찰나의 순간.
날아오는 화살이야 작정하면 한두 발 정도는 피할 순 있지만,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을 어떻게 피할까.
그렇다고 어쭙잖게 기사를 흉내 내서 검으로 화살을 다 쳐 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즉, 정예병과의 대치에서 검술을 단련할 겨를은 없었다.
한순간에 끝나는 싸움이다.
방심하면 곧바로 죽음이다.
이런 순간에는 무엇을 해야 하나.
무엇을 무기로 삼아야 하는가.
점과 점을 잇는 선.
점을 보는 것도 순간이고 선을 잇는 것도 순간.
깨달은 건 하나.
'순간적인 판단.'
찰나의 틈을 노리기 위한 빠른 판단력이다.
여기서 머무른다 해도, 고작 양초 반 개 탈 시간도 되지 않아 장창부대가 들이닥칠 것이다.
그러니 지금 해야 할 것.
개 같은 쇠뇌 부대 지휘관의 멱을 따고 날뛰어야 할 터였다.
화살을 잡지 않고서는 내일을 기대할 수 없으므로.
"로저 대장? 전령?"
이곳은 굴이다. 횃불을 가까이 대지 않으면 얼굴을 확인하긴 어렵다.
아즈펜 군의 복장을 확인하는 건 더 어렵다.
그리고 눈썰미 좋은 놈이 있다고 해도.
잽싸게 뛰어오는 엔크리드의 몸을 어떻게 세세히 보겠나.
"도시가! 도시가!"
엔크리드는 아무 말이나 던졌다. 괜히 상대가 오해할 말이라면 어떤 거라도.
"시발! 마물이!"
퇴로를 막기로 한 지휘관의 동공이 요동쳤다. 물론, 그게 엔크리드의 눈에 보이진 않았다.
볼 필요도 없었다.
거리 확보, 횃불을 밝히고 있기에 면상 확인도 끝났다. 결정적으로 엔크리드는 지휘관이 누군지도 안다.
그렇게 냅다 달려들었다.
"어? 어, 멈춰!"
그제야 앞선에 있던 적병이 말하긴 했지만, 늦어도 한참 늦은 반응이었다.
이 잠깐의 틈을 노리려고 이제까지 숱하게 떠든 것 아닌가.
수십 걸음을 단숨에 주파했으나, 호흡을 다스릴 겨를도 없었다.
치링.
검을 뽑아 양손으로 그립을 쥐고서 오른쪽으로 당겼다가 우에서 좌로, 상단 수평 베기의 형식을 빌려 횡으로 휘둘렀다. 상대가 쓴 투구와 입은 갑옷은 목을 보호하지 못했다.
달려드는 방향에서 왼쪽에 있던 둘은 신장이 비슷했기에.
서걱!
칼질 한 방으로 두 명의 목에 칼자국을 만들어 줄 수 있었다.
푸왁.
잘린 목에서 피가 쏟아지고.
"어, 우어! 이런 씹!"
당황한 적병이 반응하는 찰나, 지휘관이 뒤로 물러나는 걸 본 엔크리드의 오른손이 움직였다.
왼손으로 검을 파지하고 오른손으로 허리춤을 때리듯 움직였다가 앞으로 뻗는다.
삐이익!
휘슬 대거다. 일반 쓰로잉 나이프보다 몇 배는 위험하고 날카로운 칼날이 퍽- 하고 지휘관의 가죽 투구를 뚫고 꽂혔다.
머리통에 반 이상 칼날이 꽂힌 상태로 살아남는다면.
'인간이 아니겠지.'
"죽여!"
적병 중 서넛이 챙하고 숏소드를 뽑았다.
엔크리드는 굴이 넓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등 뒤에 메고 있던 버클러를 끌러서 집어던졌다.
뻑!
붕 하고 날아간 원형 방패가 몇 발짝 밖에서 쇠뇌를 들던 병사의 머리통을 맞췄다.
"억!"
방패로 자신을 노리는 쇠뇌병을 맞춰 시간을 번 엔크리드가 검을 가슴 앞으로 끌어당겼다.
당긴 뒤, 약간씩 틀어 내는 것으로 달려들어 휘두르는 숏소드의 검격을 받아 냈다.
따당! 칭! 채챙!
칼날의 면을 이용해 검을 쳐 내는 기술이다. 유검식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검을 방패 삼아 막은 게 전부였으니.
그다음이다.
"핫!"
갑자기 기합을 내질러 상대가 깜짝 놀라게 하고서.
적병의 위치와 쇠뇌가 가리키는 방향 따위를 보며 몸을 날렸다.
엔크리드가 그냥 구르기만 한 건 아니었다.
옆으로 구르며 적병의 발목을 잡아채 꺾어 당겼다.
우득.
발목 뒤쪽이 뒤틀린 상대가 균형을 잃고 허물어지는 걸, 엔크리드는 뱀이라도 된 것처럼 전신으로 휘어 감으며 일어났다.
왼팔로는 목을 감고.
오른손으로는 상대의 오른 손목을 쥐고 위로 꺾었다.
그러자 적의 손에 있던 숏소드가 바닥에 떨어졌고.
툭.
흙바닥은 칼날이 떨어지는 소리도 흡수했다.
"끅."
적병을 죽이는 건 하수다. 살려야 버틸 수 있었다.
쇠뇌는 거리를 두고 뭉쳐서 쏘면 치명적인 무기지만, 거리를 좁힌 채로 방패만 제대로 있으면 버틸 만했다.
그리고 버클러를 던져버린 대신 엔크리드는 고기 방패 하나를 주웠다.
'어째 첫 번째 오늘이 떠오르기도 하고.'
그때도 방패를 주워 가며 썼으니까.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나무 방패 대신 소재가 인간인 것만 다른 거지.
등을 벽에 기대고 버티자, 쇠뇌를 든 놈들이 주춤했다. 숏소드를 든 놈들도 마찬가지고.
"난 혼자다! 전부 덤벼라! 로저 대장 만세! 아즈펜의 개들아! 쇠뇌는 쏠 줄 알고 들고 다니는 거냐!"
짧은 침묵이 오갈 타이밍에 엔크리드가 헛소리를 내뱉었다.
그것도 쉬지 않고 계속.
"전부 덤비라니까! 혼자인 나도 해결이 안 되는 거냐? 그러냐? 로저 대장이 그렇게 가르치디?"
'이제 슬슬 움직여 줘야 할 텐데.'
헛소리를 괜히 뱉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이제는 해 줄 때가 맞긴 했다.
그리고 그 기대는 이루어졌다.
팟.
에일 카라즈 식 무투는 숨소리 하나 새어 나가지 않게 사람을 제압할 수도 있었다.
어둠, 횃불, 소란, 헛소리.
그 모든 게 일시적으로 몸을 가리는 도구가 될 터였다.
"미친 새끼가, 쏴 버려!"
"야, 아, 하지 마! 쏘지 말라고!"
흥분한 병사 일부와 목과 손목이 붙들린 놈이 번갈아 외쳤다.
지금이 딱 좋았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유리했다.
지금도 저 뒤에서 에일 카라즈 식으로 적병의 숨골을 하나씩 후려치거나 조르는 핀이 있을 것이고.
픽픽 소리를 내며 적병의 목구멍이나 머리통에 구멍을 내는 토레스가 있을 테니까.
훤히 드러나서 정면 승부로 하면 둘이 불리하겠지만.
상황이 이렇게 변하면 완전히 다른 얘기가 된다. 자, 지금은 누가 유리한가. 포위는 누가 했는가.
"날은 밝고 어둠은 물러가, 태양이 빛나고 달이 꺼진다! 로저어! 로저어!"
둘의 기척을 숨기기 위해 엔크리드가 계속 외쳤다. 대강 박자를 맞춰 노래를 지어 부르기도 했다.
지휘관은 머리통에 칼날이 박혀 죽고.
그 외에도 둘이 비명을 지르며 갔다.
이후에 벌어진 일도 정신이 없는데, 그 소란의 주범이 계속 헛소리를 뱉는다.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게 정상이었다.
'시발, 어쩌라는 거야.'
적병 중 하나가 고뇌했다. 차라리 잡힌 놈 머리통을 쏴 버리는 게 낫지 않나.
지휘관이 죽는 바람에 답이 없어졌다.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은 순간.
퉁!
쇠뇌 현이 튕기는 소리가 울렸다.
퍽!
날아간 볼트가 잡힌 아군의 머리통에 꽂혔다.
'아.'
결국, 누군가 쏴 버렸다.
"죽여."
쏜 병사의 읊조림일 것이다.
이들도 제대로 훈련받은 부대임에.
이런 짓거리에 더 어울리면 최악의 상황이 된다는 것에 이견이 없었다.
"횃불 들어! 뒤!"
그리고 그 타이밍에 핀과 토레스도 들켰다.
저들이 일류 암살자도 아니고.
당연한 수순이긴 했다.
다만, 둘이 그사이 쇠뇌를 든 병사 여섯은 해치웠으니.
'나쁘지 않아.'
몇 번이고 반복한 오늘 아닌가.
그중 여섯까지 잡은 날이 몇 번 없었다.
그다음이다.
엔크리드는 고기 방패를 앞으로 밀었다.
머리통에 쿼렐이 꽂혀 부들거리던 시신이 앞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놈이 쓰러지기 전, 몸이 앞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엔크리드는 옆구리와 허리춤에 꽂아 둔 휘슬 대거를 뽑아 던졌다.
팔꿈치를 펴며 손끝을 튕긴다.
손을 늘어뜨리는 과정은 생략한 채, 손을 바삐 움직였다.
눈 깜짝할 새에 여섯 개의 휘슬 대거가 날아갔다.
삐이익!
소음과.
퍼버벅!
소음.
그렇게 여섯의 시신을 더 만들고 나자.
남은 건 쇠뇌를 든 병사 하나와 숏소드를 들고 방어 자세를 취하는 병사 둘뿐이었다.
정말 모든 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적병들의 처지에서 보자면 악몽 그 자체였다.
그리고 대치할 것도 없이 해치우려 할 때였다.
"앞으로."
묵직한 음성이 통로를 넘어 귀에 꽂혔다.
로저, 그러니까 장창부대 지휘관이 도착을 알렸다.
엔크리드의 일행이 지나온 통로 건너편이다.
척척척.
통일된 걸음이 땅을 울렸고 대기도 울렸다.
궁병대의 남은 병사가 한쪽으로 뭉쳤고.
로저와 그의 부대가 횃불 십여 개를 비추며 나타났다.
그는 냉정했다.
아군이 당한 걸 봤음에도 덤덤한 표정으로 주변을 훑을 뿐이었으니.
퇴로를 막기로 한 놈들이 당했다면 어느 정도는 당황해야 할 것 아닌가.
훈련받은 정예 장창부대 서른 명이다.
로저의 눈이 엔크리드를 한 번 바라보았고, 핀에게 닿았다.
"살쾡이 같은 년이 운도 좋구나."
"운이 아니라 실력이다. 새끼야."
둘이 서로를 죽일 듯 노려봤다.
화르륵.
횃불이 타는 소리가 침묵 중인 굴 안을 울렸다.
둘 사이에 둘만의 역사가 있다는 건 이미 첫 번째 오늘에서 알았다.
엔크리드는 거기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대신 로저와 장창부대가 일정 거리를 두고 멈춘 사이.
휙.
다시 움직였다. 한걸음에 뭉친 궁병 셋 앞으로 몸을 날린 거다.
검을 냅다 찔러 다시 적군 하나의 목에 구멍을 냈다.
푹 하고 파육음과 함께 찌른 검을 회수하는 사이.
퉁 하고 쇠뇌 튕기는 소리가 났다. 엔크리드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픽 하고 쿼렐이 머리칼을 스쳤다.
'죽을 뻔했네.'
이건 운이 좋긴 했다. 여기서 냅다 쿼렐을 쏠 줄은 몰랐으니까.
어쨌든 이런 운이 오랜만이었기에, 그걸 십분 활용했다.
"다 보여."
말하며 쇠뇌를 쏜 병사를 향해 달려드는 것처럼 하다가 옆으로 휙.
다시 다른 적병의 머리통에 검을 내리꽂았다.
퍽!
머리통을 반쯤 쪼갠 검을 회수하고 뒤로 물러나는 척하며 나머지 적병의 뒤를 부릅뜬 눈으로 봤다.
장창부대가 횃불을 들고 나타난 덕에 주변이 더 밝아졌기에.
엔크리드의 표정과 눈빛이 적병의 눈에 훤히 보였다.
적병은 엔크리드의 표정을 보고 뒤에 자신을 덮치는 놈이 있다고 판단했다.
안 그래도 아까 뒤를 잡혀 죽은 놈이 한둘이 아니지 않나.
하지만 놀라서 뒤를 돌아본 적병의 눈에는 어둠만 있었다.
횃불이 비치지 못한 어둠과 통로, 굴, 부스스 떨어지는 흙.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린 순간 빛이 보였다.
묵직하고 커다란 쇳덩이가 주는 빛이다.
푹.
엔크리드는 적병이 뒤로 시선을 던지자마자 다시금 내달려 목을 찔러 적을 죽였다. 이 또한 순식간에 일어난 일.
로저가 참지 못하고 돌격이라 외치려 할 때다.
"렛샤의 말을 전한다!"
엔크리드가 또 수작을 부렸다.
그 말에 로저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렛샤, 이번 일에 핵심인 마법사의 이름이 튀어나옴에 어찌 놀라지 않겠나.
"튀어!"
그리고 냅다 엔크리드가 외쳤다.
"뭐?"
토레스는 그리 되물으면서도 반사적으로 뛰었고.
핀은 대답도 없이 쇠뇌 두 개를 집어 들기도 했으나, 어쨌든 엔크리드를 쫓아 내달렸다.
"잡아!"
그들의 뒤에서 로저의 사나운 외침이 터졌다.
장창부대가 중갑보병대도 아니니, 추격이 불가능하진 않을 것이다.
창을 비스듬히 세워 굴 밖으로만 나오면 장창을 그대로 들고서도 달릴 만할 테니.
엔크리드는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달렸다.
토레스와 핀도 마찬가지.
돌아가는 상황에 궁금한 게 많은 둘이지만, 물을 시간도 호흡도 없었다.
지금은 뛸 때였다.
105. 이기는 법을 아는 도박
"잡아!"
적병의 외침이 울렸고, 당연히도 그들은 미친 듯이 쫓기 시작했다.
엔크리드가 뒤를 힐끗 보다가 슬쩍 방향을 틀었다.
후두둑.
그가 막 지나가려던 곳에 흙무더기가 쏟아졌다.
무너질 징조는 아니었다.
그냥 불운의 상징이지.
'아니, 오늘은 운이 좋은 편인가.'
쿼렐 하나가 머리통을 스치기만 하고 말았으니까,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창을 비스듬히 앞으로 세운 장창 끝이 굴 위를 스치고.
적병이 무섭게 달리기 시작했다.
전투 한 번을 치르긴 했으나.
'체력이 빠질 정도는 아니고.'
문제가 있다면 광원이 없다는 것 정도긴 한데.
핀은 레인져, 발바닥에 눈깔을 달고 길을 본다는 패스파인더 출신이다.
어둠 때문에 그녀가 나자빠질 일은 없었다.
그건 엔크리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핀의 걸음을 흉내 내면서 다녔다.
완벽하진 않아도 발바닥으로 얼추 땅의 생김새는 짐작한다는 거다.
게다가, 이 길로 오간 게 몇 번인가.
이러고도 자빠져서 코가 깨지면 이건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머리통을 투구걸이로 쓴다는 방증이다.
엔크리드가 기억력만큼은 뛰어나기도 했으니.
여타의 이유로 핀과 엔크리드는 어둠 속을 문제 없이 뛸 수 있었다.
"씹."
토레스만 곤란을 겪었을 뿐.
움푹 파인 곳에 발을 디딜 때마다 놀라서 움찔했으니까.
그래도 운동 신경이 남달라, 금세 균형을 잡고 뛰었다.
화르륵.
횃불 소리와.
드드드득.
가끔 굴 천장에 창날이 긁히는 소리.
훅훅!
그 외에는 거친 숨결만 이어지는 추격전이었다.
여기서 핀과 토레스의 몸이 가장 가볍긴 했지만, 그렇다고 속도를 높여 따돌릴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금세라도 잡힐 것 같은 기분이 들긴 했다.
그렇게 뛰다 보니 앞에서 달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입구였다. 개구멍의 입구.
핀이 먼저 경사로를 달리다가 쇠뇌 하나를 뒤로 던졌고.
그냥 버리느니, 투척 무기로 쓰면 좋을 듯해 엔크리드가 그걸 도로 주워 힘껏 집어던졌다.
바짝 뒤를 쫓던 놈이 그걸 보곤 몸 옆으로 돌렸던 방패를 앞으로 세웠다.
팍!
그리 튼튼한 재질이 아닌지, 허공에 나뭇조각 따위가 튀며 쇠뇌가 튕겨 나갔다.
추격을 조금 늦추긴 했으나, 유의미한 건 아니었다.
토레스의 걸음이 조금 뒤처져 도와줄 겸 던진 것뿐이었다.
토레스가 그걸 보고는 엔크리드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는 눈짓과 고갯짓이었다.
'이 와중에 공치사는.'
핀이 먼저 밖으로 나가고 엔크리드도 경사로의 위, 입구 구멍에 손을 얹고 몸을 당겼다.
우스스, 흙먼지가 밑으로 떨어져 내리자, 토레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잠깐."
갑자기 토레스가 말하며 토굴 경사로에 왼손으로 단검을 뽑아서 꽂더니, 몸을 비스듬히 뒤로 돌렸다.
'오, 이건 또.'
반쯤 기울어진 벽에 몸을 기대서 뒤로 손을 털어 낸다.
발로만 지탱할 수 없기에 단검 하나를 꽂아, 균형을 지탱하고.
단검을 내던지는 거다.
'이런 건 또 처음인데.'
엔크리드가 반복한 오늘에서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본래 반복하는 오늘이 매번 똑같진 않으니,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팽하고 단검이 뒤를 향해 날아갔다.
퍽! 퍽!
횃불도 던져 버리고 온 주제에 적병은 방패로 날아오는 단검을 잘도 막았다.
"이 새끼들."
단검을 막은 병사 둘이 험한 소리를 뱉었다. 눈이 시퍼렇게 빛났는데, 잡히면 곱게 죽이진 않을 것 같았다.
물론 엔크리드는 잡혀 보기도 했다.
잡히면 가히 좋은 끝이라고 할 수도 없었고.
창날 꼬치구이가 되거나.
머리통에 칼날이 꽂히거나.
사실, 어떤 죽음도 다 반길 수는 없는 법이긴 하니까.
"미친."
단검을 막은 걸 보고 토레스가 혀를 내둘렀다.
횃불과 달빛이 비친다고 해도 어두운 곳이다. 그걸 막아?
어지간한 훈련으로 저런 병사를 양성할 순 없는 법이다.
토레스는 적병이 단검을 막는 걸 보고 확신했다.
'변방수비대급이다.'
그럼, 잡히면 뒈진다는 소리다.
바로 옆에서 자신에게 손을 뻗은 엔크리드가 있긴 해도.
'안 되지.'
"몇 명까지 될 것 같아?"
손을 맞잡으며 물었다.
"따로 만나면 전부 다 상대할 만할 것 같은데, 저렇게 뭉쳐서 오면 뭐."
엔크리드도 답이 없다는 거다. 그런데 묘하게 엔크리드의 얼굴에 긴장감이 흐릿했다.
얘는 왜 여유가 있냐.
토레스는 생각하며 부지런히 위로 올라왔다.
뒤에서 창병 중 하나가 토레스와 비슷한 재주를 뽐냈다.
훙.
숏소드를 쓰로잉 나이프 삼아 던진 거다.
솜씨도 좋네.
엔크리드는 그리 생각하며 검을 뽑아 쳐 냈다.
칼날 중간쯤에 숏소드 날이 걸렸다.
치링! 퉁!
튕겨 나간 숏소드가 옆쪽 바닥에 푹 하고 박혔다.
시퍼런 날이 달빛과 아래에서 불쑥 솟는 횃불을 반사해 빨갛고 파랗게 빛났다.
"빨리."
검을 쳐 낸 엔크리드의 한마디다.
토레스의 동작이 더 빨라졌다.
"나와!"
가장 먼저 나온 핀이 그사이에 드르륵 하고 하나 남은 쇠뇌의 도르래를 당겨 현을 고정하곤 외쳤다.
엔크리드와 토레스가 좌우로 비키는 사이, 핀이 쇠뇌의 방아쇠를 당겼다.
퉁 하고 쏘아진 쿼렐 한 발이 횃불 때문에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구멍 안으로 쑥 사라졌다.
연사식 쇠뇌가 아닌 탓에 한 발이 한계였다.
퍽 하는 소리가 들리긴 했으나, 그게 대가리에 꽂혔는지, 아니면 방패로 막았는지 확인할 틈도 없었다.
"뛰어."
이번에는 핀이 먼저 말하고 움직였다. 엔크리드와 토레스가 그 뒤를 따랐다.
중간이 토레스, 끝이 엔크리드였다.
방향은 본래 본대가 주둔했던 야영지 쪽이었다.
핀은 달리면서 연신 머리를 굴렸다.
'어디로 가지?'
본대 쪽으로? 만약 이게 작정하고 판 함정이라면?
그렇다고 강변으로 향하면 아즈펜의 레인져가 있진 않을까?
아니, 애초에 이런 소란을 부리고 움직이면 마수와 마물의 표적이 될 텐데.
구울 열댓 마리야, 어찌 상대한다고 쳐도.
이러다가 재수 없게 군체를 이룬 놈들이랑 마주하면?
군체를 이룬 마수나 마물을 소수 병력으로 상대하는 건 자살 행위다.
그냥 몰려다니는 마수와 콜로니라 부르는 군체라는 이름의 집단이 된 마수는 아예 다른 얘기였다.
레인져인 그녀는 마수와 마물의 생태를 잘 알았다.
'여기서 최악은 뭐지?'
잡히는 거다. 마수와 마물은 일단 다음에 생각해야 할 터였다.
"야영지로."
그런 핀의 고민을 엔크리드가 끝내 주었다.
뒤를 힐끗.
가장 뒤에서 따라오는 엔크리드가 보였다.
셋 다 숨을 헐떡이긴 하지만, 묘하게 여유가 있어 보이는 눈과 입매다.
'왜?'
왜 여유가 있어 보일까.
아, 입이 다물어져 있다. 이렇게 뛰면서도 헐떡이지 않았다. 자신도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는데.
자기보다 무장이 더 무겁지 않던가? 허리에 롱소드도 차고 있는데 저렇게 뛰면서 여유가 있어 보이네?
핀은 왜 방향을 그쪽으로 잡는지 물을 수 없었다.
그저 판단해야 할 뿐이다.
엔크리드는 핀의 결정에 더 관여하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은 어디로 가도 망했다는 생각이 들 테니.
'알아서 가겠지.'
아마도 엔크리드의 말을 따라 야영지로 향할 거다.
그것도 되도록 왔던 길을 되짚어서.
레인져의 습성이다. 안전하다고 판단한 길을 되짚는 건.
이미 몇 번의 오늘을 겪어서 아는 거였다.
그렇게 도로 뛰어가는 사이, 엔크리드의 손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리띠에서 검집째 검을 풀더니, 달리며 좌우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바닥을 향해 검을 찔렀다가 위로 들어 올렸다.
툭, 붕, 툭, 붕.
검집째 움직인 검을 따라 허공에 납작한 돌이 떠올랐다.
엔크리드는 검을 몽둥이 삼아 그걸 뒤로 쳐 냈다.
"흥!"
바짝 뒤를 따라온 창병이 다섯이 넘었다.
부대 내에서도 발이 빠른 놈들이었다.
그들 중 전면에 섰던 이가 코웃음을 쳤다.
넓적한 돌멩이 따위로 제 앞길을 막으려는 게 가소로웠다.
그는 방패를 들 것도 없이 창대를 앞으로 내밀었다.
피할 것도 없었다. 쳐 내고 속도를 죽이지 않으려 한 짓이었다.
탁.
창병은 제 의도대로 됐다고 생각했다.
돌을 쳐 내며 허공에 솟은 기묘한 곡선을 그린 긴 그림자만 아니었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텐데.
사악!
"악!"
뱀이었다. 납작한 돌 밑에 뱀이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이런 씹!"
창병이 급히 숏소드를 뽑아 휘둘렀다.
삭!
뱀의 몸통이 잘렸다. 마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독을 품긴 했다.
그중 창병 하나가 운이 나빴다. 돌 밑에서 독사가 튕겨 나가며 정강이를 휘감았고, 부츠와 갑옷 사이를 파고든 뱀이 다리를 콱 물었다.
극독은 아니었지만, 통증과 함께 다리에 저릿한 느낌이 들었다.
다리가 물린 창병이 단검을 꺼내 제 다리를 문 뱀의 머리를 찔렀다.
푹.
그리 죽인 놈의 입가로 피와 노란 액이 흘렀다.
"독사다!"
병사가 단검 집을 뜯어서 끈처럼 만들어 종아리 위를 졸랐다.
제자리에 멈춘 건 당연했다.
그리고 나머지의 걸음이 주춤한 것도 당연했고.
시발, 독사라니, 음흉한 새끼들.
독에 당한 병사가 어금니를 깨물며 앞을 바라봤다.
엔크리드는 그사이에도 숫제 검집으로 돌을 쳐 내는 묘기를 부리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독사가 달린 돌이었고.
이후에는 일반 돌팔매도 섞여 있었으나.
그걸 구분할 지식이 없다면.
냅다 다 피하거나 쳐 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개자식이."
뒤따라온 지휘관도 상황을 보더니, 눈을 부라렸다.
살쾡이 같은 계집을 잡기 직전이었는데.
"방패로 막으며 뛴다!"
그의 판단은 주효했다. 돌이든 뱀이든, 눈만 빠끔 내밀고 방패로 막은 병사를 제지할 순 없었으니까.
물론 엔크리드도 독사 따위로 저들을 물리치는 건 꿈도 꾸지 않았다.
'엔리에게 이것저것 배운 게 도움이 되네.'
황톳빛 납작한 돌 밑에 독사가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마침 이 길을 지나기에 써먹었다.
아주 쓸 만했다.
한 놈을 눕혔고, 나머지의 걸음을 느리게 했으니.
"후우, 후우, 왜 야영지야?"
그쯤 내달리던 적의 걸음이 늦춰지자, 핀이 속도를 조절해 옆에 붙더니 물었다.
토레스도 궁금한 참이었는지 그도 곁에 다가왔다.
뒤를 힐끗 본 엔크리드가 말했다.
"후, 저 숫자를 상대하려면 우리도 아군이 있어야 하니까."
그 말에 핀의 인상이 구겨졌다.
"하아, 하, 거긴 이미 비었어, 내 부대원은 자리를 옮겼다고."
핀은 오해했다.
토레스도 오해했다.
엔크리드는 놀란 척을 하고서 말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길을 꺾을 순 없어. 야영지를 끼고 다시 방향을 정한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말을 놓고서 앞장도 섰다.
핀과 토레스도 답이 없다는 걸 알았다.
이제는 갈 수밖에.
그들은 뒤통수가 뜨끔뜨끔했다.
어느새 다시금 쫓아온 놈들이 입김을 피워 올리며 거리를 좁히는 게 보였다.
저렇게 오와 열을 맞춰서 내달리는 게 되네?
신기하긴 했다. 얼마나 훈련받은 정예병이면 저런 게 가능할까.
그걸 본 후에야 핀은 상대 부대의 정체를 알았다.
"씹, 아무래도 그레이 독 새끼들 같은데?"
그레이 독, 회색 사냥개 부대.
그보다 귀에 익은 이름은 집요한 사랑꾼.
여러모로 엔크리드와도 인연이 깊은 놈들이었다.
미치 휴리어가 저 부대 소속이었고.
휘슬 대거란 선물을 혼혈 요정으로 포장해서 보내 주기도 했으니.
상대가 변방수비대에 버금가는 정예란 소리였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엔크리드는 놀란 척 말했다.
"앗, 정말?"
다만, 그게 또 묘한 여유를 보이는 말투 같아 보이는 게 문제였으나.
엔크리드를 제외한 둘 다 거기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상대가 강할수록 더 좋다.
속으로 엔크리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오늘이 있기 전까지, 일흔여덟 번의 오늘이 있었다.
그동안 엔크리드는 무엇을 했나.
정예병 수십 명을 상대로는 순간적인 판단 능력을 길렀고.
로저라는 놈에게 괜한 질문을 던지며 놈의 정보를 캐내기도 했다.
그렇게 알아낸 모든 걸 쏟아 내는 중이었다.
셋 다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뒤에서 따라오는 놈들을 보니, 절로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후! 후! 훅!"
옆에서 토레스가 호흡을 조절하며 달리고.
"징, 후우, 그러운 새끼들!"
핀도 마찬가지다. 그 와중에 입까지 터는 걸 보면, 어지간히 저 새끼들이 싫은 것 같긴 했다.
그렇게 야영지를 향하는 길, 엔크리드는 일부러 우회했다.
핀은 눈치챘지만, 별말을 더하지 않았다.
레인져가 먼저 간다는 구호도 있을 만큼, 이런 상황에선 자신이 앞서는 게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엔크리드가 너무도 태연히 앞을 맡았다.
먼저 갔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따라가는 수밖에.
그렇게 도달한 야영지다.
그들이 파 둔 굴, 이제는 흙으로 덮어 흔적을 지운 곳.
한쪽에 우두커니 선 나무 몇 그루와 작은 둔덕 몇 개.
그리고 건너편에 기대하지도 않던 광경이 보였다.
아우우우!
늑대인간 무리였다.
"이런, 씨!"
마물, 그것도 멀쩡한 몸으로 만나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늑대인간이 스물이 넘게 무리 지어 있었다.
정면에 선 놈이 이끄는 걸 보니, 아예 콜로니를 이룬 놈들이었다.
'아, 최악.'
핀은 이 순간 삶을 포기할 뻔했고.
토레스는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느라 눈알이 바빴다.
엔크리드만, 오롯이 그만, 다음을 위해 숨을 고르고 있었다.
'여기가 분기점.'
반은 도박이지만, 반복한 오늘은 도박이 도박으로 남지 않게 했다.
그러니까 이기는 법을 아는 도박이다.
엔크리드는 이기기 위해 발을 뗐다.
106. 피하고 또 피해
레오나 로크프리드와 헤어졌을 때다.
보더 가드의 성벽 앞에서 매티스란 호위 무사는 주변의 시선을 단숨에 끌어모았다.
그건 분명 의도적이었다.
기세라는 거였다.
"살기는 기세가 됩니다. 육감이 열리면 할 수 있습니다. 쉽습니다. 아, 소대장한테는 조금 어려울 수도 있겠군요."
미친 작센 새끼.
하여간 말이 맵다. 혀를 대장간에서 주조한 건지.
말속에 칼이 있다.
그렇다고 엔크리드가 그걸 신경 쓰는 건 아니지만.
그저 미친 새끼라 말하고 넘어갈 뿐이다.
결론적으로 작센의 말이 맞기도 했으니까.
육감이 열렸고.
고양이를 잡는 의뢰에서 이미 기세 비슷한 걸 써 봤음에도 몸에 붙이기는 어려웠다.
그걸 이번에 다시금 익히긴 했다. 어깨에 힘을 빼고 나니 생각보다 쉽게 되기도 했고.
그래서 결국 써먹지 않았나.
토레스와 핀에게 조심 좀 하자고 말할 때, 엔크리드는 기세를 올려 말했다.
그리고 지금.
"옆으로 빠져, 나머지는 내가 유인한다."
"뭐?"
핀이 반응하고.
"무슨 개소리야?"
토레스도 반응했다.
핀은 본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토레스라고 크게 다를 건 없으니, 서로 목숨 걸고 지켜 줄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이런 씹, 레인져는 동료를 버리지 않는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둘은 왜 이렇게 적극적인지.
핀과 토레스의 눈이 반짝였다. 확고한 의지를 담은 눈이었다.
그래, 너희 둘 다 참 괜찮은 인간이구나.
그건 알겠는데.
"좀 꺼져라. 방해된다."
엔크리드는 매몰찼다. 일일이 설명할 시간도 없고.
다른 오늘에서 설명도 해 봤으나.
둘 다 진드기라도 된 것처럼 안 떨어졌다.
"...이게 왜 멋있냐."
그러더니 핀이 중얼거리고.
"이 새끼가?"
토레스가 핏대를 세웠지만, 그래도 둘 다 말은 알아듣긴 했다.
엔크리드는 진심이었다.
"최대 가시거리에서 대기했다가 일이 끝나면 합류해. 생각이 있다. 다 살아남을 수 있어."
숫제 명령조다. 몇 번 해 본 일, 설명보다는 의지를 보여 주는 게 더 낫다. 하나하나 설명할 시간도 없었고.
곧.
"나중에 보자."
토레스가 중의적인 의미를 담아 말하곤 먼저 옆으로 샜다.
그 뒤를 핀이 두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따라갔고.
엔크리드는 떠나는 둘을 보며 생각했다.
둘이 따로 떨어졌음에도 장창을 든 적병 모두가 자신을 쫓아와야 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엔크리드는 슬쩍 뒤를 한 번 보곤 외쳤다.
"로-저, 투구를 벗어라!"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이 듣는다면 아무 의미도 없는 말.
"로-저! 제 머리카락을 먼저 죽여 하늘로 보낸 이여!"
음유시인이 시를 짓듯, 엔크리드는 소리 높여 외쳤다.
일흔여덟 번의 오늘 중 로저가 어떤 인간인지 들은 적도 있었다.
핀과 사이가 나쁜 건 다른 이유긴 하지만.
그는 투구를 벗지 않는 지휘관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했었다.
그게 참 인상적이었다.
정수리부터 이마까지, 그의 머리 위에는 사막이 있었고.
그건 그의 치부였다.
"풀 한 포기 나지 않은 불모지를 머리 위에 얹고 다니는가!"
처음에는 이게 먹힐까 싶었다.
확인이야, 쉬웠다.
다른 오늘에서 로저에게 잡혔을 때, 우연히 놈의 투구를 벗겼고.
"대머리였나."
이 한마디에 로저의 눈깔이 돌아가는 걸 봤다.
결론만 말하면 핀에 대한 원한을 이쪽으로 끌어들여야 했기에.
'좀 미안하긴 하다만.'
엔크리드는 괜히 제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올렸다.
풍성한 검은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제 존재를 보이니.
"저, 씨발 새끼가?"
로저의 눈깔이 돌아갔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 잡히면 정말 곱게는 못 죽을 터였다.
고문이 기본이 될 터.
그러니 잡히면 안 될 일이다.
엔크리드는 달렸고, 핀과 토레스가 빠지는 걸 보고서도 로저는 명령했다.
"저거 잡아 와!"
분노에 찬, 장창병 스물아홉 명이 내달렸다.
지금이야 흥분해서 저리 외쳐도 저 상태라면 금세 인원을 나눠 핀과 토레스의 목에도 창을 푹 쑤셔 넣고 싶어질 터.
'슬슬.'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엔크리드를 중심으로 장창부대의 반대편, 마물의 하울링이 울렸다.
아우우우우우우!
듀얼문이 뜬 날이기에 주변이 밝았다.
달빛이 가시거리를 확보해 주기에 반대편에서 달려드는 마물의 모습이 너무도 선연히 보였다.
두 다리로 땅을 차고 내달리는 늑대 대가리의 마물, 라이칸스로프다.
"후."
그걸 본 엔크리드는 숨을 한 번 내뱉는 거로 호흡을 가다듬은 후 멈췄다.
여기서 승부수다. 장창과 라이칸 새끼들을 전부 묶어야 하니.
'날 봐라.'
기세를 뿜는 법.
그건 전신에 상대를 죽이기 위한 마음을 담는 것.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베어 죽일 수 있다고 마음먹는 것.
츠르르릉.
검집에 꽂힌 그립을 잡고, 천천히 당긴다. 칼날이 달빛을 반사하며 모습을 드러내며.
엔크리드는 오른발을 반걸음쯤 내밀고 전신으로 말했다.
지금 다가오면 베겠다.
기세, 살기, 투기.
말로 표현하면 이 셋 중 하나가 분명한, 무형의 압력이 퍼져 나갔다.
달려드는 모든 장창부대도, 달려드는 라이칸스로프 놈들도 옆으로 빠진 토레스와 핀을 잊을 정도로 강렬한 기세.
그 기세에 이끌려 늑대인간 무리와 장창부대가 달려들었고.
그 중심에는 엔크리드가 있었다.
그게 마치 자살 행위처럼 보이긴 했다.
* * *
로저는 슬슬 짜증이 나는 중이었다.
살쾡이 같은 년 하나 잡으면 끝날 일이 묘하게 꼬였다.
그렇다고 이대로 놓쳐야 할까?
아니다. 잡아 죽이고 싶었다.
제 동생을 죽인 년 아닌가.
"시발, 쫓아."
반드시 잡아 죽이겠다. 그리 마음먹은 순간, 엔크리드의 외침이 터졌다.
'투구를 벗어라'부터, '불모지'까지.
두근, 심장이 뛴다. 분노가 차올라 피가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았다.
"저 시발 새끼가?"
그는 결심했고 각오했다.
저 개새끼를 잡으면 고이 죽이지 않기로.
죽여달라고 빌게 만들어 주리라.
순간 이성이 날아가 외치며 쫓으라 하고.
로저 본인도 내달리던 때.
아우우우!
마물의 하울링이 터졌다.
로저는 반대편에서 튀어나온 늑대인간 무리를 보는 순간, 왈칵 짜증이 치솟았다.
'이런 씹.'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됐는지.
'저 개자식.'
제 머리털을 두고 시라도 읊듯이 조롱한 놈 때문이다.
저 새끼의 조롱 때문에 순간 마음을 다잡지 못했다.
"개 같은."
로저는 늑대인간을 보고서 욕설 한마디를 뱉는 거로 마음을 추스르고자 했지만, 쉬이 되지 않았다.
그럼 어쩔까?
고민은 짧았다.
'죄다 죽여 버린다.'
렛샤인가 뭔가 하는 년이 애지중지하든 뭐든, 마물 따위야.
진형을 갖추고 싸우면 콜로니를 이룬 라이칸스로프 무리라고 해도 상대할 수 있었다.
그리하려던 때다. 마음먹고 입을 열려던 때.
그 순간.
쫓던 놈이 후- 하고 숨을 내뱉더니 멈춰서 검을 쥐었다.
검을 쥐었고, 몸으로 말했다. 기세로 말했다. 살기로 말했다.
'다가오면 벤다.'
로저의 눈에 주변 배경이 지워지고, 어느새 검을 뽑아 든 놈 하나만 남았다.
그의 눈에도 이랬으니, 다른 병사에게는 어땠겠나.
진형이고 뭐고 간에, 기세에 말려 그렇게 전투가 시작됐다.
멈추란 말이 없었기에 전면에 선 창병은 하던 대로 했다. 적이 보이면 싸우는 것, 그게 그가 하던 일이니.
그렇게.
붕!
힘껏 창을 찌르고.
아우!
파칵!
그 창날을 막 다가선 늑대인간의 손톱이 쳐 냈다.
늑대의 울음과 손톱과 창대가 만드는 불협화음.
그 소리에 로저의 머리에 차가운 한줄기 이성이 돌아왔다.
'아차.'
진형도 제대로 짜지 않고 덤볐다.
마음이 급한 탓이었다.
아니, 적이 자신의 약점을 놀린 탓도 있다.
거기에 기세, 그 기세도 문제였고.
꼬이고 꼬인 탓에.
난전의 시작이었다.
* * *
훅.
엔크리드에게 가장 먼저 도달한 건 늑대인간이었다.
놈의 손톱이 목을 노렸다. 크게 휘두른 팔 동작을 보며 엔크리드는 뒤로 물러났다.
"후."
호흡을 고른다. 숨을 헐떡이면서 버틸 순 없다.
지금부터는 낭떠러진 사이에 있는 외길을 걷는 것과 마찬가지다.
방심은 물론이고.
실수도 용납할 수 없는 길이 됐다.
그럼 필요한 건 무엇인가.
'대담함과.'
야수의 심장이 뛴다.
두근.
달려든 늑대인간 무리도 옆으로 파고드는 장창부대도.
사방에 적뿐이고 휩싸인 상태지만.
마음 졸일 이유가 되진 않는다. 하물며 자신이 만든 전쟁터 아닌가.
'그럼, 다음은?'
감각의 날을 세운다. 오감을 넘어 육감의 영역으로 나아간다.
뒤에서 날아오는 발톱이나 창날도 피해야 했다.
엔크리드는 그렇게 했다.
왼발을 앞으로 빼며 검을 옆으로 휘저었다.
힘 있는 칼질은 아니지만.
티디딩!
바로 옆에서 달려들던 늑대의 발톱을 막기에는 충분했고.
왼발을 축으로 옆으로 도는 북방식 패싱 스텝을 밟았다.
본래라면 여기에서 중검식 내려치기로 제 등을 찌른 놈의 팔이나 무기를 부수는 게 순서지만.
'다시 앞으로.'
그 대신 몸을 구부리듯 숙였다.
붕!
머리 위로 늑대의 발톱이 스친다.
어느새 엔크리드는 눈을 반만 떴다.
시선도 흐릿했다.
누가 가까이에서 본다면 육지에 올라온 생선 눈깔 같다고 할 터였다.
'집중.'
한 명에게 집중하는 대신,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엔크리드가 택한 방식이다.
'더 넓게.'
집중력의 칼날을 세워 퍼트린다. 몸을 중심으로 검을 휘두르는 범위까지.
전투의 승패는 판단, 거리, 시간, 위치에 따라 판명 난다.
순간에 판단하고.
상대와의 거리를 재고.
발이 움직이는 시간과 적의 무기가 도달하는 시간.
자신의 검이 원하는 곳에 도달하는 시간을 가늠하며.
현재 선 곳과 앞으로 설 곳의 위치를 인지한다.
그것으로 엔크리드는 이곳에서 홀로 춤을 췄다.
따당.
가끔 늑대인간의 손톱과 그의 칼날이 만나기도 했고.
창날이 갬비슨의 옆구리를 훑고 지나가기도 했다.
목 바로 앞을 스치는 손톱도 있었고.
발등을 밟으려는 적도 있었다.
엔크리드는 누구도 베지 않았다.
바짝 붙어서 발등이 밟힐 뻔할 때도 어깨로 툭 상대를 밀었을 뿐이다.
그 결과가.
"끄억!"
병사의 단말마로 이어졌을 뿐.
밀린 병사의 목덜미를 늑대인간이 콱 깨물었다.
파바박 하고 피가 튀며 마물의 얼굴에 핏자국을 남겼다.
꼭 의도한 건 아니었다.
다시 피하고 또 피한다.
크르릉!
늑대인간이 어깨를 물어뜯으려 할 때도 주저앉아 피했고.
딱!
마물의 이빨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일어나며 놈을 뒤로 밀어냈을 뿐이다.
그게.
퍼퍼퍼벅!
끄게에엥!
엔크리드를 노렸던 늑대인간의 뱃가죽에 창이 꽂히는 결과가 됐을 뿐.
공격이 아니라 회피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며 전장의 중심이 아닌 외곽을 돌며 슬금슬금 빠져나가니.
늑대인간은 당장 장창을 든 인간 무리를 죽여야 했고.
장창부대는 당장 늑대인간 무리를 상대해야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게 그리 멀리 가지 않은 토레스와 핀의 눈에도 보였다.
"...저거."
"미쳤어, 미친 거야."
토레스와 핀이 번갈아 떠들었다.
둘은 상황도 잊은 채 발을 멈췄고, 눈은 한 명의 움직임을 따라가기 바빴다.
엔크리드는 피하고 또 피했다.
가끔 창대에 맞고 손톱이 그의 몸을 할퀴긴 했지만.
가까스로 피하긴 했다. 치명상은 없었다.
무엇보다 중앙에서 기세를 끌어올리고 몇 마디 말로 그가 만들어 낸 걸 보라.
마물 무리와 정예병의 싸움이 난전이 됐다.
"인간 쪽이 이길 것 같은데."
그래도 정예는 정예.
진형이 무너지긴 했으나, 부대원은 서넛씩 뭉쳐 서로의 뒤를 봐줬다.
그거로 뛰어오며 소실한 체력 일부를 회복하고.
방패로 막고 찌르는 그룹을 만들어 대항했다.
그게 주효했다.
그러자, 로저가 움직였다.
그는 혼자 늑대인간 서너 마리를 상대하면서 한 마리의 머리통에 창을 꽂아 죽였다.
장창 대신 단창을 들고 날뛰는데 한 마리의 호랑이 같았다.
"저거, 그냥 놔두면."
놈이 그대로 엔크리드 쪽으로 향하는 게 보였다.
핀은 안 봐도 저놈의 눈에 독기가 가득하리란 걸 알았다.
머리털로 놀리면 광분하곤 했으니.
"미친 새끼."
"도우러 가야겠다."
핀의 중얼거림에 토레스가 결심하듯 외쳤고.
그사이 로저라는 적 지휘관이 무섭게 돌진하더니, 엔크리드를 향해 단창을 찔러 넣었다.
"아."
핀이 그걸 보고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의 눈에는 엔크리드의 옆구리 푹하고 뚫린 것처럼 보였으니까.
"씹. 아니야, 피했다."
토레스가 말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착각이었다.
창대를 옆구리에 낀 거다. 피하다 말고 팔뚝과 옆구리로 상대의 무기를 잡은 거였다.
가까스로 피한 거로 보였다.
절체절명의 위기처럼 보이기도 했고.
적어도 토레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107. 일대일이라면
엔크리드는 제 의도가 먹혔다는 걸 알았다.
전장을 개판으로 만드는 거.
보라, 지금 개판이 된 전장을.
더 없이 제대로, 반복했던 오늘 중에서도 양질의 오늘이 된 판을.
개판 중에서도 개판이 됐으니.
'됐네.'
난전을 유도했고, 그게 먹힌 덕에 늑대인간 학살이 일어났다.
병사도 여럿 죽긴 했으나, 아무리 마구잡이로 덤볐다고 해도 몇몇씩 모여 최소한의 진형을 갖춰 싸우는 병사 쪽이 더 유리했다.
'병사 쪽이 이기겠군.'
그리 유도한 개판의 외곽에서 숨을 돌리는 중에 로저가 달려든 거다.
선뜻 달려들어 창을 내지르는데, 창날이 점처럼 보였다.
무서운 찌르기였다.
엔크리드는 크게 움직이는 대신 몸만 살짝 틀었다.
갬비슨은 이미 너덜너덜했지만, 그는 자신이 입은 가죽 갑옷의 단단함을 믿었다.
훙. 드드득.
그렇게 상대의 창날이 옆구리를 스쳤다.
따끔한 통증은 없다. 그렇다면 갑옷이 버틴 거다.
엔크리드는 그대로 창대를 옆구리에 끼웠다.
"흥!"
로저는 제 단창을 옆구리에 끼운 엔크리드를 보며 힘을 줬다.
창을 단숨에 당겨 상대의 팔과 옆구리를 헤집을 생각이었다.
창날을 옆구리로 잡아? 갈기갈기 찢어발겨 주마.
삐-이익!
그리 힘을 준 순간.
괴상한 소리와 함께 이마 앞이 섬뜩해져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아니, 고개를 젖히는 것만으로 부족해 허리도 뒤로 꺾었다.
놀라운 반사신경과 순발력이었다.
'개 같은.'
핑하고 머리털과 투구의 이마 부분을 칼날이 스쳤다.
쓰로잉 나이프였다. 날아든 칼날이 어둠을 가르며 긴 선을 그렸다.
물론 그게 눈에 보이진 않았다.
감으로 알아챈 것뿐.
섬뜩했다. 그 섬뜩함이 금세 분노로 변했고.
로저가 불같은 화를 연료로 도로 몸을 세울 때.
어째 손에 쥔 창에 무게감이 사라졌다고 느꼈다.
"머리카락과 조우할 시간이다."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다. 머리 위를 가로막는 그림자가 보였다.
엔크리드였다. 어느새 달려들어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중이었다.
'이 새끼.'
왜 이렇게 날래?
몸집과 어울리지 않는 기민함이다.
위에서 밑으로 내리꽂는 칼날.
그게 로저의 눈에 남은 마지막 잔상이었다.
퍽!
정수리가 쪼개지며 그의 머리를 감싸 머리털을 숨겨 주던 투구도 쪼개졌다.
쫙, 터진 머리통 사이로 뇌수와 피가 섞여 흘렀다.
툭.
땅에 내려선 엔크리드는 제 몸을 점검했다.
창을 잡고 상대의 이마에 휘슬 대거를 날린 뒤, 앞으로 뛰어 수직 베기, 생각한 그대로의 움직임과 결과였다.
'나쁘지 않네.'
크게 다친 곳은 없다. 조금 전 창을 붙든 덕에 옆구리가 시큰거리긴 하지만.
손가락으로 갈비뼈 어림을 만져 봤다.
'부러지진 않았고.'
그럼 괜찮다. 멍이나 좀 들었겠지.
"시이발! 대장!"
적병의 외침이 들렸다.
일부 적병이 로저의 죽음을 봤으나, 봐서 어쩔 건가.
눈에 핏발이 섰다고 해서 상대하던 라이칸 놈들을 두고 덤빌 순 없는 노릇이다.
그들을 노리는 늑대인간이 아직 송곳니를 흉흉하게 빛내는 중이었다.
어쨌든, 이 한 번의 칼질로 싸움의 향방이 묘해졌다.
로저의 죽음으로 창병이 조금 처진 그런 느낌이랄까?
아직 우위에 있는 건 확실하나.
사이사이 늑대인간에게 죽는 놈들도 나오긴 했다.
지금도 그랬다.
머리털 없는 지휘관의 죽음을 본 병사가 눈이 벌게져서 흥분한 사이 제 몸뚱이를 숨겼다가 튀어 오른 애꾸눈의 라이칸스로프에게 머리통을 얻어맞았으니.
퍽!
애꾸는 손톱이 아니라 주먹을 썼다.
본능을 따라 손톱과 이빨을 무기로 삼은 게 아니라 주먹질을 하는 거다.
그래, 저 정도는 해야 콜로니를 이끄는 리더라 할 수 있지.
마물 군체의 리더가 어디 뭐 아무나 시켜 주는 건가.
그렇다고 주먹만 쓰는 것도 아니다. 제 몸에 달린 무기도 충실히 잘 썼다.
애꾸가 그대로 병사 몇을 상대로 따다다당 하며 손톱을 휘둘러 창날을 쳐 내곤 창대 두어 개를 부러뜨렸다.
그렇게 두 놈을 죽인 후, 다시금 제 군체 뒤로 몸을 숨겼다.
나무의 그림자, 적병의 뒤, 다른 라이칸 새끼들이 날뛰는 뒤쪽.
어떻게든 숨어서 기습을 노린다.
아까부터 비슷한 전법을 썼다.
계속해서 어둠에 숨어 기습하는 거로 빈틈을 후벼 파고 있었으니.
엔크리드는 제 무리 사이로 숨은 놈을 찾는 걸 포기하고 조용히 숨을 골랐다.
그 사이, 장창병 하나가 달려들었다.
"복수를!"
어림도 없는 소리를 하네.
그쪽 대장도 일대일로 덤벼서 뒈졌는데, 어딜 혼자서.
처음부터 일대일로 싸웠다면 이길 수 있는 상대들이었다.
그래서 만든 개판 아닌가.
엔크리드는 날아오는 창대를 검면으로 쳐 내고 발바닥으로 지면을 밀며 창대를 따라 검을 밀어 넣었다.
드드드드.
창대의 껍질을 벗기며 다가간 칼날이 창수의 목에 다다랐다.
푸걱.
잘 벼린 칼날이 적의 목을 벴다.
반쯤 잘린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고.
엔크리드는 목을 자른 동작에 이어 원심력을 이용, 몸을 휘릭 돌리며 눈앞으로 검을 바로 세웠다.
'언제 오나 했다.'
엔크리드의 뒤편.
로저의 시신 쪽에서 자세를 낮춘 라이칸 새끼 한 마리가 보였다.
살금살금 뒤를 잡은 늑대인간 무리의 리더다.
어느새 자신의 뒤로 돌아온 놈이다.
애꾸눈의 라이칸스로프.
놈의 노란 눈이 빛나며 엔크리드를 마주 봤다.
"먼저 올래? 내가 갈까?"
늑대인간 리더는 로저보다 까다로운 상대가 맞다.
다만.
엔크리드는 일흔여덟 번의 오늘 동안 그 어느 오늘도 쉬이 보낸 적이 없었다.
어깨의 힘을 뺐다고 발악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빨리 가자."
이놈을 죽이는 것도 그리 힘든 일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손톱이 허공을 가르고 틈을 쪼갠 찰나의 순간 점과 점을 이어, 따다당, 칼날과 손톱이 부딪치고.
몇 번의 공수 교환 이후, 엔크리드의 칼이 애꾸 늑대인간의 팔을 잘랐다.
'무기의 우위.'
이번만큼 실감한 적이 없다.
크로나를 투자해서 만든 검이 빛을 발했다.
번번이 휘두르는 놈의 손톱을 후려쳐 깼고.
그 틈에 팔을 벴으며, 승기를 가져왔다.
애꾸 라이칸이 아래에서 위로 훙 하고 발톱을 휘둘러, 엔크리드가 있던 자리를 세로로 쪼갰다.
엔크리드는 왼발을 옆으로 빼서 피하고는 몸을 휘릭 돌렸다.
정수리부터 가랑이 사이까지 중심축에 무게를 싣고서.
발끝, 무릎, 허리를 탄 원심력에 근력을 더해 중검식의 강격을 뿌려 냈다.
회전하며 뻗어 나가는 검이 달빛을 가르고 동시에 늑대인간의 목도 갈랐다.
쉭.
손에 저항감이 남지 않는 일격.
타격점에 정확히 맞아 목을 베어 낸 검.
석.
검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도.
늑대인간의 머리가 날아간 것도.
모두 한순간이었다.
침묵이 내려앉진 않았다.
이 싸움을 지켜본 이들도 몇 안 되니.
장창부대가 진형을 갖춰 달려들어 싸웠다면.
죽는 건 엔크리드였을 것이다.
늑대인간 무리가 덮쳐도 비슷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전에서 일대일이라면.
'안 질 것 같으니.'
그래서 만든 상황이었다.
하물며 지휘관도 애꾸 라이칸 새끼의 버릇도, 싸우는 방식도 몇 번이고 경험했다.
물론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버릇을 아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반 바퀴 회전하며 검을 뻗어 냈기에 엔크리드를 중심으로 달빛이 회오리치는 듯한 환상이 일었다.
물론 환상일 뿐이었다.
엔크리드는 슬그머니 발을 뺐다.
이제는 호흡을 돌릴 때였다.
하물며 '오늘'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벽은 아직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