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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 *

엔크리드는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두 개씩 밟으며 올라갔다.

훅훅- 하고 계단을 밟고 뛰는데 몸이 가벼웠다.

'고립의 기법.'

확실히 몸의 변화를 만들어 냈다. 아우딘은 더디다고 했지만, 정작 엔크리드는 차이를 확연히 느꼈다.

전보다 몸이 가볍다는걸.

2층 복도에 올라서는 순간, 머리 위쪽에서 칼을 든 암살자가 떨어져 내렸다.

이전에 상대한 암살자보다 수준이 떨어졌다.

기척이 눈에 보일 듯 잡혔으니까.

좁은 복도에서 휙 하고 몸을 틀었다. 그렇게 벽에 바짝 붙어 피하자, 칼을 든 상대가 바닥에 뚝 떨어졌다.

떨어진 상대의 눈이 엔크리드에게 닿는다.

엔크리드는 오른손으로 롱소드 그립을 쥐며 반쯤 무릎을 굽혔다. 중검식의 발검 자세다.

바닥에 떨어진 상대가 균형을 잡으며, 숏소드를 땅과 수직으로 세웠다.

횡 베기를 막는 시도로 중검식 발검을 막기에는 훌륭한 방어 태세였으나.

엔크리드의 왼손에서 시작된 수직 베기를 막기에는 형편없는 자세였다.

퍽!

오른손과 자세로 상대를 속이고 왼손에 몰래 뽑아 둔 숏소드로 정수리를 쪼개듯 벴다.

발렌 식 용병검 이중 발검이다.

속은 상대의 눈알이 떨렸다.

하지만 뭐라 말은 하지 못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까.

"미쳤어? 여기가 어디라고 암살자를 고용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딜!"

또 다른 여자의 목소리도 들렸다.

엔크리드는 시체를 뛰어넘고 좁은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문이 반쯤 열린 호실이 보였다.

그 앞을 막은 복면 쓴 괴한도.

"멍청한 놈들."

놈이 달려오는 엔크리드를 보더니. 손을 휘저었다. 핑하고 쓰로잉 나이프가 날아왔다.

휘슬 대거에 비하면 반의반도 속도가 나오지 않았다.

야수의 심장이 준 대담함이 날아오는 비도를 정면으로 바라보게 하고.

한 점의 집중으로 타오른 집중력이 날아오는 비도를 느리게 보이게 했다.

그 위로 칼날의 감각이 더불어 붙으며 비도의 궤적을 읽어내고.

이 모든 과정을 뒷받침해 주는 근육과 순발력이 몸에 붙었기에.

엔크리드는 고개만 옆으로 꺾었다.

과거, 그러니까 오늘을 반복하기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동작이다. 묘기라고만 생각했었다.

날아오는 비도를 고개만 꺾어서 피하다니.

실제로 전장에서 매의 발톱인지 뭔지 하는 놈의 화살을 피하지 못해 방패를 들지 않았었나.

지금이라면 그 화살도 피할 수 있을 듯했다.

귓가에 쌔액 하는 투척물이 날아가는 소리만 남았다.

고개만 꺾어 피하고 달려들자, 상대의 눈이 커진다. 놀란 거다. 그러면서도 상대는 손을 움직였다. 재차 단검이라도 던질 셈으로 보였다.

왼손에 든 숏소드를 세워, 달려드는 척 보여 준 엔크리드는 오른팔을 한 번 휘저었다.

삐이익.

팔이 휘두른 궤적을 따라, 휘파람이 울렸다.

휘슬 대거가 상대의 목을 관통하니.

"끄럭."

목에서 피가 터지고 입에서는 피거품이 흘렀다. 놈은 반사적으로 하던 동작을 마무리했다.

손에 든 단검을 던졌다. 다만, 이미 죽어 가던 중이기에 힘이 없어,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을 뿐.

피하고 던진 동작 모두가 몇 호흡 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엔크리드는 달리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그대로 어깨로 부딪쳐 목이 뚫린 놈을 옆으로 날려 버렸다.

퍽, 붕, 쾅!

날아간 놈이 반대쪽 복도에 있는 문에 부딪히자, 안에서 으헉 하는 놀란 비명이 나왔다.

여긴 여관이다. 당연히 묵는 사람이 있었다.

대낮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도시 한복판, 그것도 여관에서 이런 습격을 벌이다니.

상대는 보통 강심장이 아니었다.

아니면 전부 병신에 머저리거나.

"끄으으으!"

막 한 놈을 처리한 뒤, 열린 문을 박차고 방에 들어선 순간이다.

상단의 호위가 배에 칼을 맞고 쓰러지는 게 보였다.

호위의 배에 칼침을 놓은 상대, 복면을 쓴 놈이 검을 뽑으며 그대로 호위 대상을 베려 했다.

찰나의 틈.

엔크리드는 손에서 휘슬 대거가 날아갔다.

삐익! 땅!

너무 급해서 전력으로 던진 건 아니었으나, 휘슬 대거는 제 역할을 했다. 상대가 그걸 막느라 주춤했으니.

던지며 달려가는 엔크리드다.

상대는 달려오는 엔크리드를 상대하지 않았다.

대신 휘슬 대거를 막은 검을 재차 호위 대상, 상단 아가씨에게 휘둘렀다.

'엿 같은 새끼.'

엔크리드는 집요한 암살자를 욕했다. 방법이 없기에.

한순간, 전장에서 봤던 스콰이어의 동작을 흉내 냈다.

당연히도 그대로 해낼 순 없다. 그에게 그런 재능은 없다.

하지만 짧은 거리였다. 그리 넓지 않은 방, 침대 하나와 가구 두어 개가 전부인 방.

좁은 공간이니, 흉내 정도는 내볼 만했다.

자세를 낮추고 땅을 찬다. 단숨에 공간을 좁힌다. 휘슬 대거를 하나 더 뽑아 던져 봤자 상대를 제지할 순 없으리라 생각했기에, 엔크리드는 몸을 던졌다.

빡!

그리 검과 호위 대상 사이에 들어선 엔크리드의 등에 칼날이 날아와 쳤다.

갬비슨이 베이고 그 안까지 칼날이 들어와 등허리를 갈랐다.

엔크리드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틀어 몸을 때린 검을 흘렸다.

칼날을 몸으로 막은 엔크리드의 눈에 호위 대상이 들어왔다.

놀란 눈과 하얗게 질린 안색을 기대했는데, 어금니를 꽉 깨문 야무진 인상의 여인이 보였다.

호위 임무다. 임무란 무엇인가.

맡은 일이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란 거다.

등으로 검을 받아냈기에 엔크리드는 그 충격을 고스란히 몸으로 견뎠다.

동시에 속으로 아우딘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맙다. 아우딘.'

"잘 맞는 법, 그게 우선이지요."

레슬링의 기초라 했다. 맞으며 힘을 흘리는, 몸으로 하는 칼날 흘리기다.

배울 때는 죽을 것 같았는데.

배워 놓고 나니, 이리 써먹는구나.

"잠시."

엔크리드는 말하며 상단 아가씨를 손으로 밀쳤다.

"음!"

아가씨는 비명 대신 숨을 참았다. 강단 있는 타입으로 보였다.

"이 새끼가?"

상황을 파악한 암습자가 두꺼운 칼날을 지닌 검, 글라디우스를 들고 엔크리드를 노려봤다.

"우리 내려가서 얘기할까?"

엔크리드는 뒤로 돌아서서 말한 뒤, 냅다 달려들었다.

상대의 칼날이 미간을 노리고 찔러 들어왔으나.

휘슬 대거를 상대한 경험이 이리 도움이 될 줄은 엔크리드는 꿈에도 몰랐다.

휘슬 대거보다 느린 찌르기다.

피하고 자세를 바짝 낮춰 상대의 허벅지 뒤를 손바닥으로 감쌌다.

그대로 아래에서 위로 상대를 들어 올리며 창문으로 내달렸다.

펑, 우지끈.

나무로 만든 틀이 깨지고 창이 부서진다. 엔크리드와 암살자는 그대로 2층 바깥으로 추락했다.

74. 매 순간 단련했기에 (3)

2층이라고 해도 그리 높진 않았다.

그래도 성인 남자 무게, 거기에 얼추 무장까지 갖춘 뒤 떨어지는 건 자살행위가 맞았다.

엔크리드는 상대의 배를 정수리로 받은 채로 밀었고.

떨어지며 몸의 균형을 잡았다.

갑자기 들어온 태클에 상대는 영락없이 당한 꼴이었다.

쿵 하고 바닥에 떨어지며 둘이 몸이 포개졌다.

위는 엔크리드, 밑은 암살자다.

"쿨럭!"

떨어진 암살자가 피를 토했다.

상대를 밀치며 일어난 엔크리드가 후하고 숨을 내쉬며 몸 상태를 점검했다.

'다친 곳 없고.'

관절이나 인대가 상한 곳도 없다.

그럼 됐다.

암살자와 호위 대상 간의 위치를 떨어뜨리는 것.

그게 호위의 일 순위였다.

2층으로 가는 길은 작센이 막고 있고.

나머지 소소한 문제는 요정 중대장이 해결할 것이다.

몸을 점검하며 등 뒤에 딱히 상처가 없다는 것도 인지했다.

상대의 칼날을 몸으로 막은 것도 어느 정도 계산한 일이었다.

'갑옷.'

일전에 길핀 길드를 털며 얻은 갑옷.

그 가치를 제대로 알아본 건 렘이었다.

"어지간한 칼질에는 안 잘릴 것 같은데, 음, 귀한 마수 가죽이니까 잘 쓰쇼. 이거 무두질부터 들어가는 재료가 만만찮은데 이걸 두고 안 입고 있다가 뒈진 놈은 뭐 하는 놈인 거요?"

본래는 상자에 저주가 걸려 있었고.

뒈진 길드장은 저주를 풀지 못해 가지고만 있던 물건이었다.

그 저주가 모종의 이유로 엔크리드에게 작용하지 않았기에.

지금 상대의 칼날을 몸으로 받아 내고도 피 한 방울 안 흘리는 쾌거를 만들어 냈다.

다만, 날카로운 쇠붙이는 얼추 막아도 충격까진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었기에, 아우딘에게 감사한 거였다.

고립의 기법은 몸을 만들고.

만든 몸을 쓰는 법으로 레슬링을 배웠다.

그리 배우고 익힌 기술로 엔크리드는 자신의 몸을 지켰다.

매 순간 단련하고 또 단련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칼날을 피한 것도, 상대를 제압한 것도 전부.

그 어느 하루 허투루 보냈다면 지금의 오늘이 있을 것인가.

없다. 단언할 수 있었다.

"미친놈이구나."

입가에 피를 흘려 복면이 젖은 게 보인다. 놈은 그게 갑갑한지 복면을 벗어젖혔다.

모르는 얼굴이었다.

당연했다. 보더 가드에 머무는 인구만 5천 명이 넘는데 어찌 얼굴을 일일이 다 알겠나.

다만, 눈에 조금 익은 느낌은 든다. 오가며 마주친 것 같은 그런 묘한 느낌이.

"쿨럭."

놈이 재차 기침을 토한다. 피가 섞인 기침이다. 핏물이 놈의 수염을 적시며 바닥에 떨어졌다. 놈은 그러면서도 엔크리드를 노려봤다.

눈빛에 살기가 가득했다. 반드시 죽이겠다는 의지가 분분히 뻗어 나왔다.

스릉.

엔크리드는 롱소드를 뽑았다.

상대는 한 손에 글라디우스를, 다른 손에는 숏소드를 뽑아 나눠 쥐었다.

'양손 무기.'

좌우로 흐트러지지 않은 균형, 입에서 피를 토하는 걸 보면 내장이 상한 게 분명하지만 눈빛은 살아 있다.

전장을 경험한 인간이다. 엔크리드의 본능이 말하는 신호였다.

얼굴에 나이가 엿보였다. 적어도 서른 줄은 훌쩍 넘었다. 그만한 시간 동안 살아남은 작자라면, 숨겨 둔 한 수쯤은 있을 것이다.

'기검을 쓸 것 같은데.'

보통의 검술보다는 기괴한 형태의 공격이 올 것이다. 눈에 보이는 걸 토대로 한 예측이다.

"커르륵, 퉤."

상대는 코 안에 피가 찼는지, 돼지 울음 비슷한 소리와 함께 코를 빨아들여 피가 섞인 가래를 뱉고는 엔크리드에게 물었다.

"어디 소속이냐?"

"알아서 뭐 하게?"

"상비군이면 내 후배니까."

후배?

표정으로 의문을 보인다. 그러면서도 엔크리드의 눈은 연신 상대의 전신을 훑었다.

생각보다 빈틈이 없다. 자세가 깔끔했다.

"소대장까지 해 먹었거든."

놈이 말한다. 엔크리드는 상대의 말을 믿었다. 그렇다고 변하는 건 없으므로.

군에 있다가 전역한 놈이 어디 한둘일까.

병신이 돼서 나가는 놈.

죽어서 이름만 나간 놈.

사지 멀쩡하지만, 사고 쳐서 나가는 놈.

수도 없다.

그 와중에 멀쩡하게 전역하는 놈도 있었다.

가령 감옥 대신 종군을 택했다면, 의무 복무 기한이 끝났을 때 전역을 선택할 수 있었다.

"학살자 소속?"

상대가 재차 물었다.

엔크리드는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답하는 이유는 하나다. 상대의 허점을 찾기 위해서다.

그런데 여전하다. 쉽사리 틈을 내보이지 않는다.

좀 하겠는데.

엔크리드는 생각하며 슬그머니 검 끝을 내렸다. 은근히 검의 위치가 바뀌자, 상대도 양손에 든 검의 위치를 바꾼다. 만만찮은 상대다. 본능도, 이성도 같이 말했다.

"후, 이제 됐다. 속이 울렁거려서 어지러웠는데, 너 죽이고 위에 있는 저년도 죽이고 가면 되겠다."

상대가 바닥에 떨어진 동화 한 닢을 줍듯, 그처럼 쉬운 일인 것처럼 말했다.

이번에는 답하지 않았다.

그럴 틈이 없었으니까.

말과 동시에 상대가 내달렸다. 빠르다. 글라디우스와 숏소드가 춤을 추든 허공을 노닐었다.

좌우, 양손이 다른 박자로 움직였다.

'발렌 식 이중주.'

아는 기술이었다. 재능의 한계로 시도는 못 해 봤지만.

박자가 다른 두 개의 검은 둘 다 치명상을 노린다. 상대의 발놀림, 검놀림 둘 다 만만찮았다.

엔크리드는 상대의 돌격을 보자마자 양손으로 그립을 쥐고 검 끝을 내려, 검을 왼쪽 허리 뒤로 늘어뜨렸다.

달려오는 상대가 눈을 빛낸다.

엔크리드는 당황하지 않았다. 야수의 심장이 대담함을 준다.

상대 움직임을 예측할 수 없다. 발렌 식 이중주는 제 몸으로 실현할 수 없는 기예이니까.

그렇다고 상대할 수 없단 소리는 아니지만.

툭.

왼발을 앞으로 내밀고.

상대 박자와는 무관하게 자신의 박자로 움직인다.

칼날 두 개가 원을 그리듯 날아 오고.

그게 닿기 전, 엔크리드가 움직였다.

"근력 하나는 끝내주는군요."

아우딘은 다른 모든 건 둔하다고 욕하면서도 근력 하나만은 인정했다.

근력과 중검식으로 상대의 기검을 부수는 방법, 엔크리드는 그걸 알았다.

훙.

롱소드가 허공을 가른다. 발레리 산 강철이 섞인 칼날이 횡으로 공간을 잘랐다.

물론 공간만 자른 건 아니었다.

퍽, 뿌왁!

중단 수평 베기.

기교에는 힘으로.

그동안 했던 대련만 수십 번이다.

오늘을 반복한 뒤부터 부쩍 늘어난 실력은, 대련 중 얻어 내는 것의 범위를 훌쩍 넓혔다.

못 보고 못 느끼고 지나쳤던 것들을 야수의 심장, 칼날의 감각, 한 점의 집중을 통해 인지했다.

인지한 걸 몸으로 재현하고 단련했고.

따라 주지 않는 몸은 고립의 기법으로 뜯어고쳤으니.

고개만 까딱여 단검을 피한 것과 같다.

다만, 이번에는 마음먹고 검을 휘둘렀다는 게 달랐을 뿐.

만들어진 몸을 통해, 왼발을 축으로 근육을 비틀어 내친다.

그 모든 과정이 한순간 이뤄졌고.

중단을 가른 칼날은 상대의 몸을 반쯤 잘랐다.

상대가 한쪽 칼로 막고 비껴내며 안으로 들어오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기교를 힘으로 찍어 눌렀다.

완연한 근력의 승리다.

엔크리드는 몸이 반쯤 잘려 뜨거운 김이 폴폴 날리는 내장을 쏟아 낸 작자를 바라봤다.

"잘 가시오. 선배."

몸이 반쯤 잘려서도 그는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 줬다. 미련이 많은 눈빛이었다.

그는 입술을 달달 떨며 중얼거렸다. 엔크리드는 그의 입 모양을 읽었다.

"조국에 영광을."

이 모든 게 나라를 위한 충성의 발로인가? 그것이 암살로 이어졌나?

모른다.

다만 확인해 볼 가치는 있어 보였다.

검을 휘둘러 피를 털어 낸 후 스릉 하고 검을 챙기니, 그제야 요정 중대장과 작센이 밖으로 나왔다.

"요란하게도 싸우는군요."

말하며 작센의 눈이 한차례 엔크리드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딱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창문을 뚫고 나오느라 생긴 생채기뿐이다.

"내 애인이라면 이 정도는 해야지."

요정 중대장은 평소의 말투, 그러니까 무뚝뚝한 어조로 살벌한 단어를 내뱉었다.

"오해합니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당황해서 오해라는 말이 먼저 나왔다. 말의 앞뒤가 바뀌었다.

"그런가?"

중대장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몇 명은 생포했지?"

"했습니다."

작센의 말에 엔크리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에 들어갔다.

1층에 가니, 이미 포박된 이들이 보였다.

주변을 보니 상단의 호위였던 이들이 몇 안 보였다. 죽은 사람이 있는 거다.

'습격자의 수준이.'

높진 않다.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엔크리드의 기준이었다.

일반 상단의 호위가 상대하기에는 꽤 까다로웠을 것이다.

무엇보다 마지막에 자신이 죽인 상대는 퇴역 군인이다.

어설픈 용병 한둘은 단숨에 썰어 버릴 수 있었을 터.

어디서 이런 무리가 튀어나왔지?

절로 의문이 생겼다.

1층에 들어서니 이미 호위 대상, 상단의 아가씨가 내려와 있었다.

주변이 피와 시체요, 거기에는 아군의 것도 섞여 있다.

전장의 한복판이라고 봐도 좋았다.

최소 스물이 넘는 암습자가 있었으니까.

그중 반수 이상이 중대장과 작센의 손에 죽거나 잡혔고.

토악질을 해 대는 상단 사람도 서넛 보였다. 그럴 만했다.

시신과 피와 내장이 만연했으니.

그런데도 그녀는 미간만 찌푸릴 뿐, 태연해 보였다.

그녀가 부츠 굽을 튕기며 다가왔다.

"이름이?"

여자는 다가와 물었다. 엔크리드는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끄덕.

고개를 끄덕인 상대를 보며 엔크리드는 입을 열었다.

"엔크리드입니다."

"괜찮나요?"

여자가 등을 향해 손짓하며 물었고, 엔크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죽 갑옷 덕이다. 렘의 말대로 어지간한 칼질에는 베이지 않을 것이다.

한순간 상대의 수준을 파악했고, 몸으로 막아도 된다고 판단했기에 막았다.

그게 아니었다면 어떻게 막았을까.

다른 수단을 썼을 것이다. 무식하게 몸으로 막으려고는 안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때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요. 나중에 대가를 치르도록 하죠."

딱히 사례를 원해서 한 일이 아니었다.

"괜찮습니다. 제 임무라서."

그 말에 여자가 몇 번 입술을 오물거리다 말했다.

"레오나예요."

"네."

이름은 이미 알고 있다.

그녀는 제 이름을 말하곤 주변을 둘러보더니,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죽은 분의 유가족에게 사례금을."

"네, 아가씨."

유모가 다리를 벌벌 떨면서도 다가와 답했다. 정작 레오나 아가씨보다 이쪽이 더 놀란 것 같았다.

입가에 토사물 따위가 묻은 걸 보니, 주변을 보고 이미 구역질이라도 한바탕 한 것 같았다.

유모는 의식적으로 바닥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

반면에 레오나 아가씨는.

'태연하네.'

생각보다 이런 일에 무던해서?

아니다. 강단이 다른 거다.

아니면 각오했거나.

엔크리드는 주변을 수습하는 이들을 돌아보고는 물러섰다.

레오나도 더 말을 걸진 않았다.

엔크리드는 여관 한쪽으로 움직이며 주인의 낭패한 얼굴을 봤다.

그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리라.

정말 어떤 미친놈이 이런 짓을 벌인 걸까, 궁금하다 못해 꼭 알고 싶어졌다.

'조국의 영광이라.'

보더 가드 내에 아즈펜의 첩자가 있단 소리로 들리긴 했다.

"주모자로 보이는 놈이 도망갔습니다."

옆에서 작센이 말했다.

"왜 안 잡고?"

"제가 왜?"

호위하러 왔으니, 호위하겠다. 이게 바로 의뢰를 수행하는 바른 병사의 태도다.

작센은 말을 넘어서서 태도로 제 뜻을 말했고.

엔크리드도 그걸 나무라진 않았다.

그래도 렘이나 다른 분대원을 데려오는 것보다는 나은 일일 테니.

"잘했다."

"이틀 남았습니다."

호위 임무에 충실하게 임하자는 말로 들렸다. 일은 일이다. 작센의 말이 맞긴 하지만.

'배후가 궁금하긴 하네.'

이른 저녁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둠이 내려앉는 사이, 피비린내만 가득했다.

그나마 있던 고객 몇이 방을 빼고 나섰다.

여관 주인의 얼굴이 더 일그러지기 시작할 때쯤, 레오나 아가씨가 말했다.

"손해는 본 상단에서 메워 드리겠습니다."

말하는 그녀의 등을 보는데, 겁먹은 새처럼 보이진 않았다. 당당했다.

상단에서 곱게 자란 것만은 아니겠지.

엔크리드는 묵묵히 그녀의 등을 보다가 물었다.

"우리 밤샙니까? 중대장님?"

"그러고 싶나?"

"아니요."

"교대하지, 먼저 쉬어라."

"네."

사양하지 않고 엔크리드는 2층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며 손을 쥐었다가 펴 본다.

자신이 죽인 상대의 수준이 어느 정도였을까?

적어도 첫 번째 오늘을 반복하며 전장에서 만났던 그 찌르기 변태 정도는 되는 듯했다.

2층에서 추락하며 수를 썼기에 상대는 부상을 안고 싸워야 했다.

'내장을 다쳤고.'

사지에 힘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승리의 휘장에 드리운 빛이 흐려지진 않는다.

'만전이었어도 내가 이겼어.'

자신감, 태어나 제대로 가져 보지 못했던 세 글자다.

그게 조금이나마 가슴 속에 피어올랐다.

여전히 거북이처럼 걷겠지만, 전과는 다른 걸음이 되리라.

엔크리드는 꿈에 한 걸음 다가섰다고 생각했다. 너무 미약하기에 발을 뗀 거로 보이지도 않겠지만.

전진했다는 사실은 그에게 충족감을 줬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호위 중 하나가 계단을 내려오다 마주쳤다.

"보더 가드에 호위 요청을 안 했다면...."

말하는 여자 호위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레오나의 근접 호위를 맡았던 여자다.

배에 구멍이 뚫렸는데도 벌써 걷다니.

죽고 싶어 환장한 건가 싶은데.

"옅었어요. 아슬아슬했죠. 내장은 안 다쳤습니다."

눈길을 느꼈는지 호위가 말했다.

"다행입니다."

서로 어색하게 마주 보다가 엔크리드가 먼저 지나쳐 올라갔다.

"고맙습니다."

여자 호위가 다시금 말했다. 엔크리드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해야 할 일이었다.

그게 임무고 의뢰였으니까.

엔크리드는 딱 반나절을 쉬고 새벽 시간에 일어났다.

"교대다. 분대장."

중대장의 부름이었다. 그전에 이미 눈은 떴지만.

방 하나를 중대장과 엔크리드, 작센이 같이 썼다.

번갈아 가며 쓰기에 문제는 없었다. 애초에 남자, 여자이기 이전에 군인이기도 했고.

보더 가드 상비군의 호위가 붙었는데도 습격이 있었다.

그 습격이 불러온 일이다.

여관 앞, 두 개 분대 병력이 출진했다. 2중대 병력이었다.

"어떤 개새끼인지, 내가 꼭 잡아서 죽여드리지."

2중대 휘하 소대장 중 하나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들이 생포한 이들을 데려갔다고 들었다.

엔크리드는 홀로 내려갔다.

열심히 치웠지만, 옅은 피 냄새와 불쾌한 몇 가지 냄새가 섞인 홀이다.

촛대의 어슴푸레한 빛이 홀 안을 비췄다. 사람은 없었다.

일반 손님이야, 진즉 다른 여관으로 가 버렸고.

덕분에 메인 홀은 텅 비었다.

엔크리드는 테이블 하나를 차지해 앉았다.

그리고 복기를 시작했다.

그게 그에게는 당연한 거였다.

꼭 오늘을 반복하지 않더라도, 계속하던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복기와 앉은 채로 할 수 있는 단련 등을 하는데.

아침 해가 뜨기 직전 계단 위에서 누군가 내려왔다.

"일찍 일어났군요."

호위 대상인 레오나 아가씨였다.

75. 마성의 분대장

여관 홀 벽 곳곳에 붙어 있는 촛대엔 불꽃이 반만 붙어 있었다.

손님도 없겠다. 촛값이라도 아껴 볼 심산일까.

덕분에 생긴 짙은 음영으로 엔크리드의 그림자가 바닥에 길게 늘어졌다.

새벽 내내, 감각의 칼날을 연습하던 중이었다.

조용한 실내, 밖에서 보초를 서는 병사의 소리, 호위 대상이 술잔을 기울이는 소리.

집중력과 동시에 감각의 날을 세워 듣는다.

기척을 읽고 주변에 있는 사람 숫자를 센다. 저 멀리서 우는 밤새 소리를 듣고 거리를 가늠해 보기도 한다.

그러며 엔크리드는 자신이 인지하는 범위를 되새겼다.

'다섯 발짝 안쪽이라면.'

기척까지도 읽을 수 있다. 옷깃 스치는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며 드는 생각이다.

'오롯이 듣는 거로만 그런 게 가능한가?'

습격 직전, 요정 중대장과 작센의 대화를 떠올려 보면 둘은 이미 기습을 예측했다.

그건 어떻게 했을까?

오롯이 귀에 의지해서는 아닐 것이다. 나중에 작센에게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울 수 있는 거라면 배우고 싶었다.

'이번에는 벽이 아니었어.'

이제 어지간한 수준에서는 오늘을 반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일부러 죽으면서 오늘에 갇히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엔크리드는 여전했다.

'내일을 위해.'

항상 앞만 보고 달렸다.

그게 그를 오늘에 갇히지 않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부스스, 타다다닥.

벽난로 안에 넣어 둔 장작이 부러지며 불똥이 튀었다.

전투의 복기 외에도 잡다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엔크리드는 자리에 앉은 채 턱을 괴고서 자신이 죽인 사람을 떠올렸다.

'조국의 영광이라.'

아즈펜의 첩자 부대인 걸까.

그만한 인원을 움직인 놈은 무슨 생각을 일을 벌인 걸까.

보더 가드 내에서 이만한 사고를 치고 어쩌려는 걸까.

다시금 습격이 있을까?

두 개 분대의 병력을 뚫고? 암살자라도 보낼 것인가?

그리 생각하다 보니, 도망간 놈을 잡는 게 생각보다 쉬운 일이 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 타이밍에 레오나가 내려왔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근무 중이라 교대였습니다."

"아, 그렇군요."

레오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왔다.

이전 밤의 흔적이 남은 바닥이다. 그녀는 무던하여지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면 더 신경이 쓰일 텐데.

다른 일에 집중하는 게 오히려 더 편할 것이다. 엔크리드는 경험으로 그걸 알았다.

"보더 가드에 온 건 처음입니까?"

"네? 네."

근데 왕눈이가 이 여자 성격이 유별나다고 하지 않았던가.

강단은 있어 보이지만, 아직은 렘과 같은 미친 면모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지, 렘이랑 비교해선 안 되지.'

그건 예의가 아니다.

"펜-하닐 강에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고 하죠. 그중 강의 물로 만든 검 이야기를 아시는지요."

음유시인의 이야기는 언제나 심장을 자극했다. 엔크리드는 그런 얘기 몇 개를 외워 뒀다.

이야깃거리로 쓰기도 좋을뿐더러, 근무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보내기도 좋았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하는 얘기는 근무 중에 떠드는 잡담 같은 거였다.

다만, 처음 듣는 사람에게는 꽤 신선한 얘기일 것이다.

"들려주세요."

레오나가 흥미가 생겼는지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답잖은 얘기인데도, 레오나는 눈을 빛내며 들었다.

중간중간 미소와 함께 호응도 했다.

"그래서 한때 강물로 검을 만드는 유행이 돌았지만, 이야기처럼 강에 사는 정령을 불러일으키는 검이 만들어지진 않았습니다."

"말을 잘하시네요."

"그런 편이죠."

렘이 인정하는바, 말로 상대를 도발하는 재주는 제 분대장을 이길 수 없다고 했고.

여기서 분대장이 자신임에야.

고개를 끄덕이는데, 대뜸 레오나가 말했다.

"저랑 같이 가실래요?"

고개를 갸웃한 엔크리드가 되물었다.

"네? 어딜?"

상대는 아직 호위 대상이다. 보더 가드 내에서 일어난 습격으로 두 개 분대 병력이 여관을 통제한 상태라 안에 아무도 없긴 해도.

아직 엔크리드의 임무가, 그녀가 요청한 의뢰가 끝난 건 아니다.

이틀이 남았으니까.

그러니 그녀가 가는 곳이라면 따라가는 게 당연한데.

"이후 보더 가드를 떠날 때 같이 가자는 제안을 하는 거예요."

대뜸 하는 말인데, 준비된 말 같다. 사람을 여럿 부려 본 이들에게서 보이는 특유의 뉘앙스가 담겼다.

조용히 앉아, 붉은 입술을 열어.

"오세요."

자신이 제안한 자리가 더 좋으리라 확신하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레오나는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다.

로크프리드 상단이 어떤 곳인가.

렝가디스 상단이나 다른 대형 상단보다는 조금 처져도 지역 일대에 영향력이 있는 상단이었다.

이들 상단은 펜-하닐 최북단에 있는 '황야의 양치기' 무리와 준비만 할 수 있다면 용도 잡을 수 있다는 사냥꾼 집단인 '검은 가죽 길드', 깊은 산속에서 자연을 벗 삼고 사는 빙하수호단체인 '글레이셔 레인져'와도 거래를 텄다.

그들의 핵심 거래 상대가 위 셋인 셈이다.

거기에 펜-하닐 대륙 곳곳을 유랑한 선대의 경험이 녹아든 지도도 있다.

로크프리드 상로도란 물건이다.

상행을 기록한 지도인데.

각 상단의 특산물을 정리하고 가장 빠른 길을 정리해 둔 보물 중의 보물이었다.

누군가 그걸 훔쳐서 팔아먹으면 죽을 때까지 먹고 살 걱정은 없을 만큼의 보물.

로크프리드가 이런 상단이었다. 누구나 욕심을 낼 만했다.

특히나 선대의 핏줄을 이었다면 자신의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 생각이 어제의 과감한 습격을 만들었으리라.

'여기에서 먼저 칼을 뽑다니.'

그래서 화가 난다. 그 과감함이 왜 하필 지금인지.

자신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선대의 유언을 지키려고 이리 노력하는데.

어째서 상대는 그걸 모두 무시하는지.

그래, 선대의 유언만 아니라면 여기까지 올 일도 없었겠지만.

그 선대의 유언이 무엇이었나.

"죽고 죽이기 전에 합의부터 시도해 주렴. 그렇게 해 주겠니? 레오나."

선대, 자신을 딸처럼 키워 준 사람이다.

하지만 쉬이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상단도, 혈연도.'

둘 다 포기할 수 없기에 하는 유언이다. 레오나는 선대의 마음을 이해했다.

로크프리드 상단을 키우기 위해서 레오나를 키웠으나.

제 핏줄을 타고난 놈을 마냥 내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거였다.

나우릴리아의 보더 가드, 칼 없이 말을 나눌 최후의 보루로 삼은 곳이다.

선대의 유언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끝났을 후계 경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의 암습이다. 하물며 보더 가드에서 칼을 뽑아?

'머저리.'

잡다한 생각의 끝이었다.

위기에 빠진 순간 자신을 구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가장 처음 눈에 띈 건 호수를 닮은 눈이었다. 그 푸른 눈.

마력이 깃든 것처럼 보일 정도로 매력적인 눈이었다.

흑발과 푸른 눈에 단련된 몸.

거기에 얼굴까지 잘생겼다.

관심이 생길 법도 했다.

'정말 괜찮은 외모야.'

거기에 실력도 뛰어났다. 단숨에 방으로 뛰어 들어와 상대를 제압하는 모습이라니.

무얼 바라지 않는 성품은 또 어떤가.

구한 뒤, 일이라는 한마디에 레오나는 심장이 뛰었다. 그때부터였다.

탐이 났다. 데려가고 싶었다.

"지금보다 나은 위치, 나은 대우를 약속드리죠."

엔크리드는 고민할 게 없었다.

상단의 호위라고 해 보지 않았을까.

만약 자신의 목적이 오롯이 크로나라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앞으로 커나갈 상단의 검으로 살아가는 것도 괜찮을 거다.

하지만 꿈이 있고 나아갈 길을 봤으며, 더디다고 해도 현재 그 길을 걷는 중이기에.

한눈을 팔 틈은 없었다.

"괜찮습니다."

두 손을 허벅지에 올려 두고 허리를 바로 세운 자세다.

곧은 자세에서 나온 확실한 답변.

거절할 때는 확실하게 하는 게 좋다. 엔크리드는 경험으로 그걸 알았다.

레오나의 동공이 흔들렸다.

"싫다는 사람 붙잡는 건 추합니다."

언제 내려왔는지, 뒤쪽에서 작센의 목소리가 들렸고.

"그렇군, 추한 거군."

요정 중대장의 한마디도 들렸다.

"그런가요."

레오나는 버럭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리지도 신경질을 내지도 않았다.

담담히 고개를 끄덕일 뿐.

"지금 자리에 만족하시는군요."

그건 아니지만.

여기에 있어야 올라갈 수 있는 길이 보이긴 하니까.

"에효, 장사가."

어느새 나온 여관 주인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새벽의 푸른빛이 서서히 여명의 노란빛으로 바뀌는 중이었다. 아침이었다.

"손해는 상단에서 메워 드릴 겁니다."

레오나가 다시금 말했다. 애초에 확답을 듣고자 꺼낸 말처럼 보였다.

"아이고, 그래 주시면."

여관 주인이 손을 싹싹 비비며 말한다. 레오나는 그걸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시죠. 정오쯤에 손님이 올 테니, 준비해 주시고요."

"네."

앉은 채로 명령을 전하는 게 익숙해 보였다.

곧 위에서 유모가 내려왔고.

레오나는 쉬겠다 말하며 자리를 비웠다.

그러자 작센이 다가와서 말했다.

"도시 내에도 예쁜 여자 많으니, 굳이 상단의 후계자를 건드리진 마십시오."

안 건드렸다. 거절했지.

엔크리드도 여자가 꼬인 경험이 많다. 얼굴이 어디 가는 건 아니니까.

하물며 단련된 몸은 여러모로 매력을 발산하기 좋은 도구고.

"엔크리드 상급병."

중대장이다. 다가오지도 않고 제자리에서 평소와 똑같은 자세, 똑같은 말투로 그녀가 부른 뒤 물었다.

"여성 편력이 있는 편인가?"

"...아니요."

"지나가는 여자 모두에게 추파를 던지는 편인가?"

"아닙니다."

"그런가?"

"네."

분명 농담일 것이다. 농담이 맞는데.

표정은 더없이 진지하고 눈빛은 더없이 담담했다. 그래서 대하기 어려웠다.

'이제 좀 그만했으면 좋겠는데.'

"그렇군."

중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숨이나 돌릴 요량으로 밖으로 나가니.

2중대 3소대 소속 분대원 중 하나가 아는 척을 해 왔다.

"지나가는 여자마다 전부 꼬시고 다니면 저 같은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이것도 아는 척이라면 아는 척이겠지.

"누가?"

"중대장에 이어서 로크프리드의 아가씨까지. 크으, 마성의 분대장이네, 마성의 분대장."

감탄사를 보내는 건 소대장이다. 이쪽도 안면이 있긴 했다.

이런저런 임무로 여기저기 임시로 불려 나간 적이 많으니.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구나."

"아니랍니다."

"아니라고 하십니다."

병사 몇이 그 말을 받았다. 복명복창이다.

갑자기 파견 나와 도시 내 여관을 둘러싸고 있으려니 할 일이 없나 보다.

지루할 법도 했다.

이후 따로 습격도 없었으니까. 그럴 낌새도 없었고.

그래, 심심한 건 이해하는데.

'그렇다고 날 놀리며 시간을 보내는 게 반갑진 않은데.'

소문은 언제나 무서운 법이라.

역시나, 얼마 안 돼서 또다시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고.

여관에 찾아온 크라이스가 이런 말을 하게 만들었다.

"아니, 분대장 하루 만에 상단주와 잤다면서요? 그건 어떻게 한 겁니까? 나도 쉽지 않은데, 로크프리드 아가씨는 콧대가 높기로 유명한데요. 성격도 까칠하고."

"안 까칠해."

"에이, 아닌데."

"왔으면 일이나 하나 해라."

"네?"

엔크리드는 크라이스에게 시답잖은 말 대신 일을 줬다.

오해를 푸는 건 신경도 안 썼다. 얘도 알고 놀리는 거니까.

"습격한 놈 중에 도망간 놈이 있다. 찾아봐."

도망간 놈, 엔크리드는 그놈의 행적이 궁금했다.

아즈펜의 첩자로 자신의 칼에 죽은 사람은 조국의 영광을 부르짖고 죽었는데.

정작 이 일을 작당 모의한 놈이 살아남으면 재미가 없지 않나.

'제가 한 일의 대가는 치러야겠지.'

그게 순리고 옳은 일이다.

정의는 살아 있다고 말해도 좋은 일이고.

그리고 부대에서도 곧 찾으라는 명령이 떨어질 것이다. 그냥 놔두고 싶지도 않았다.

일을 벌였다면 책임을 져야지, 부하를 전부 놓고 도망가다니.

아즈펜의 첩자라고 자신을 밝힌 이상, 살려서 내보낼 순 없는 노릇이다.

"네."

밤의 길드가 있으니, 도시 내에 있는 일은 대부분 알 수 있다. 장점이었다. 그러니 사람 하나 찾는 게 어려운 일이 되진 않겠지.

'때마다 크로나도 들어오고.'

이번에 돈을 모으면 부무장으로 괜찮은 숏소드나 가드 소드를 구해 볼까 했다.

가드 소드는 일전에 써 보니 퍽 마음에 들었다.

라그나는 방패를 드는 것도 권했지만, 방패는 쉬이 손에 익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배우겠지만, 가진 바 능력 중 근력을 쓰는 게 특기라면.

"애초에 검을 양손으로 잡고 휘두르는 게 낫겠군요. 그래도 전장에서는 방패가 있는 게 좋습니다."

라고 말한 것도 라그나다.

경장 보병으로서 어느 정도 수준으로 방패를 다룰 줄 알긴 했다.

군대의 목적이 무엇인가.

특출난 하나보다 평준화된 다수의 힘을 우위로 보는 곳이다.

뛰어난 검사 둘이 섞인 십인대보다, 똑같이 훈련받아 규격화된 십인대가 더 강하다는 건 상식이었다.

규격화된 훈련에 속한 방편으로 방패를 다루는 집단 대형 훈련도 있었다.

휘하 분대원은 대충하고 넘어갔지만, 엔크리드는 그것도 부지런히 배워 뒀다.

쉽게 안 늘어서 그렇지.

'손에 안 익긴 해.'

방패를 들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라그나 말대로 양손으로 검을 잡고 휘두르는 게 훨씬 잘 맞는 옷처럼 느껴졌다.

방패를 쓰거나 쓰지 않는 것.

규격화된 다수의 법칙을 깨는 존재가 된다면 크게 신경 쓸 부분이 아닐 것이다.

크라이스가 가고 얼마 안 있어 볼살에 심술이 가득한 남자와 십여 명의 병력이 찾아왔다.

호위라고 온 놈 중 하나가 눈에 띄었다. 눈매가 쭉 찢어졌고 팔이 밑으로 축 늘어진 사내였다.

허리춤에 가늘고 긴 칼날의 세검, 레이피어를 찼다.

'빠를 것 같은데.'

보자마자 드는 느낌이다. 상대는 굳이 자신을 감추지 않았다. 자신감의 발로로 보였다.

'난 빠른 검을 쓴다. 하지만 안다고 막을 순 없다.'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자세와 태도였다.

심술보로 양 볼을 채운 남자의 이름은 폴리드.

레오나와 후계 경쟁을 한 상대였다.

그가 들어오자마자 테이블을 하나 차지해 앉더니, 말했다.

"야, 레오나 불러와."

'야'라고 불린 상대는 작센이었고.

작센은 당연하게도 그 말을 무시했다.

76. 카르멘 컬렉션

"야, 너 말 안 들려? 너 적갈색 대가리."

작센은 또 무시했다.

그걸 보며 엔크리드는 새삼 작센을 데려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렘이었다면 어땠을까?

"지금 저거, 나 부른 거요?"

말과 함께 도끼나 안 날아가면 다행이지.

작센은 무시만 한다. 얼마나 다행인가.

다만, 정작 무시당한 쪽은 상당히 불쾌하겠지만.

"이 새끼가, 나 폴리드 로크프리드다!"

그래서 어쩌라고.

작센은 눈으로 말했고.

다행히 일이 커지기 전에 레오나가 내려왔다.

유모를 대동하고 내려온 레오나는 활짝 웃었다.

"늦었네요."

"늦기는, 호위라고 데려온 저놈은 대체 뭐 하는...."

"네가 보냈죠?"

'음?'

레오나는 사뿐사뿐 걸어오더니 입을 터는 폴리드의 말문을 질문으로 막았다.

폴리드는 그게 무슨 소리냐고 고개를 갸웃했고.

레오나의 손은 허공을 갈랐다.

짝!

'와우.'

엔크리드는 속으로 감탄했다.

레오나가 신호도 없이 상대의 뺨을 후려갈겼다.

경쾌한 스윙과 호쾌한 타격이었다.

뺨을 맞은 놈이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으니.

폴리드란 놈이 고개가 돌아간 채, 눈깔만 돌려 레오나를 바라봤다.

"네가 그랬잖아. 이 미친 새끼야."

레오나의 맑고 고운 목소리가 울렸다.

크라이스에게 한 대답을 정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여자 까칠했다. 다른 사람한테는.

채채채챙!

다수가 검과 무기를 뽑는다.

뺨 한 번에 분위기가 살벌하게 변했다.

엔크리드는 무기를 뽑진 않았지만, 레오나의 뒤에 섰고.

작센이 그 옆에, 요정 중대장은 묵묵히 제자리를 지켰다.

"이, 이, 이, 미친년이, 죽으려고 진짜."

그제야 폴리드가 제 뺨의 심술보를 부여잡고 말했다.

"죽기는 네가 죽겠지. 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함부로 돈 쓰고 병력 썼니? 그게 안 걸릴 줄 알았니?"

엔크리드는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싶어서 보고 있었다. 일이 참 재밌게 돌아간다는 생각도 들었다.

보더 가드의 여관은 상단의 회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부대 내에 관사 따윈 짓지 않았기에.

덕분에 여관업이 발달한 거고.

그래서 이들이 여긴 모인 거다.

여관 주인이 홀을 지키다 눈을 휘둥그레 떴다.

대뜸 뺨을 후려갈기고 서로 무기를 겨누는 상황이다.

이런저런 일을 다 겪은 그도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주인은 몇 번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곧 결심하고는 주방 안쪽으로 발끝을 돌렸다.

포기다.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어차피 말릴 수도 없고 끼어들 수도 없으니.

다행인 건, 여기서 생긴 모든 피해를 로크프리드 상단의 이름으로 보상해 주기로 했다는 거다.

그러니 저리 여유를 부리지.

그가 주방 안으로 들어가며 슬쩍 엔크리드를 향해 눈짓을 보내긴 했다.

'큰일은 나지 않겠지? 괜찮겠지?'

여관 주인 알렌과는 알음알음 안면이 있다.

엔크리드가 남들에게 보이지 않게 고개를 끄덕여 줬다.

레오나란 여자는 멍청하지 않다. 그러므로 여기서 칼부림이 날 만한 상황을 만들진 않을 터였다.

고로 분위기는 흉흉해도. 소란은 이게 전부다.

"그렇게 멍청하니까, 선대가 상단을 너한테 안 맡긴 거야."

레오나가 입을 연다.

그녀는 상대의 반항이나, 무력 따윈 신경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감히 너희가 날 건드릴 수 있겠냐는 생각이 전신에 묻어난다.

엔크리드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오롯이 레오나란 여자가 보여 준 태도 때문이다.

'과감해.'

이런 건 뭐라고 해야 할까.

상대가 뭐라 반항하거나 말할 틈을 잘라 내는 재주다.

"여기가 어딘지 말해 봐. 당장."

어금니를 깨물고 윽박지르는데, 폴리드란 놈이 기가 죽어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보, 보더 가드."

"그래, 이 머저리야, 여긴 보더 가드야. 여기서 함부로 뒷골목에 부랑자나 등쳐먹는 길드를 고용해? 내가 보더 가드 상비군의 호위를 받는 걸 알면서도?"

"...내가 그랬다는 건, 아니 난, 그런 적이, 그 보더 가드 호위가 있다는 건 뒤 늦게...."

기세에 눌렸네.

폴리드란 놈은 헛소리를 뱉는 것도 모자라 손까지 파르르 떨었다.

스릉, 탁!

폴리드의 헛소리에, 뒤에 선 남자가 검을 엄지 한 마디쯤 뽑았다가 도로 넣었다.

그 소리에 폴리드가 번뜩 정신이 돌아왔는지 말을 바꿨다.

"내, 내가 아니다. 어디서 누명을!"

대충 상황을 보니 그려지는 그림이다.

'오기 전에 자신이 아니라고 발뺌할 준비도 했겠고.'

그런데도 분위기에 휩쓸려, 다 털어 낼 뻔한 거다.

"쳇."

레오나가 혀를 찼다. 그러더니 드르륵 의자를 당겨 앉았다. 가죽 바지를 입은 채로 다리를 꼬곤, 품에서 연초를 꺼내 문다.

"불."

유모가 촛대를 들어 불을 붙여 줬다.

"앉아. 계승권 논의 안 할 거야?"

양쪽에서 무기를 꺼내고 대치하게 만든 여자가 한 말이다. 그녀의 입에서 연초 연기가 훅하고 올라왔다.

폴리드도 의자를 거칠게 끌어당기며 자리에 앉았다.

여기서 칼부림하면 불리한 건 누구겠나.

밖을 지키는 두 개 분대 병력은 어디에서 파견을 나왔다고 생각하는 건지.

곧 둘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계승을 위해 서로 준비한 것을 치고받는 시간이었다.

즉, 엔크리드는 못 알아들을 말의 연속이었다.

"상로도 해석도 못 하면서 상단을 이어받겠다고? 상단 암어는 다 외웠니? 너?"

"그, 그런 건 집사가 해도 돼! 그것보다 난 적통이다. 어디서 밖에서 굴러먹다 온 계집이...."

"내가 상단 물려받을 자격이 있다는 건 선대가 인정한 거야. 그걸 깨겠다고? 적통이라고 물려받겠다고 하는 건 선대의 피를 이어받아서 하는 말이잖아? 그런데 선대가 공표한 건 인정 못 하는데 능력도 없으면서 피를 물려받았다고 상단을 갖겠다? 다른 사람들이 잘도 인정하겠네."

엔크리드는 대강 듣고 흘렸다. 애초에 말하는 거나,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거나, 전부 레오나의 승리로 보였다.

'그래서 마지막 동전 뒤집기로 암살이나 시도한 건가.'

보더 가드에 마침 그런 일을 받아 주는 집단이 있었던 거고.

이건 재주가 좋다고 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머저리 같다고 해야 하는 건가.

둘은 한참이나 더 떠들었는데.

엔크리드가 듣기에는 레오나는 상대를 조롱하기 위해 이 자리에 앉은 듯했다.

"너 선대의 아들은 맞니? 아무리 봐도 안 닮았어. 의심이 가는걸?"

"이런 씨, 뭐? 뭐라고? 그, 어머니가 그러면 어디 다른 놈의 씨, 씨라도 받았단 말이냐!"

얼마나 화가 났는지 심술보 폴리드가 말을 더듬었다.

꽝!

그러곤 테이블을 후려치며 분노를 뿜어냈지만.

"후우, 그게 그렇게 되네? 그런 의도로 한 말은 아니었는데."

연초를 뿜으며 상황을 장악한 건 레오나.

그런데, 이 여자 원래 이런 여자였나.

조신하고 조용한 편 아니었나.

모르겠다. 사실 본 건 겨우 이틀, 얘기를 나눠 본 건 길어야 쉰 마디가 안 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양면성이 있고 단순하지 않으니.

"이 씹어먹을 년이!"

"주둥이 함부로 놀리지 마. 이 못생긴 자식아."

"이년이!"

제 모친 욕에도 꾹 참던 놈이 못생겼단 한마디에 허리춤에 찬 숏소드로 손을 올렸다.

그걸 본 엔크리드가 슬며시 검 그립을 잡았다.

보더 가드의 호위가 자리를 지키는 곳이다.

검을 뽑고 싸우는 걸 그냥 두고 볼 순 없단 거다.

보더 가드란 도시의 가치를 높인 이유 중 하나가 상단, 귀족 할 것 없이 이곳에서는 칼 없이 혀의 싸움으로 논의를 할 수 있게 한 것임에야.

물론 뒤에서야 칼도 쓰고 암살도 하지만.

이렇게 눈앞에 상대를 두고 검을 뽑는다?

죽여달란 소리다.

작센이 내 우측에, 중대장은 한 걸음 뒤에서 구경하듯 섰다.

난 그립에 손을 올린 채 폴리드의 호위를 검의 범위에 넣었다.

'첫걸음에 왼쪽으로.'

검을 뽑아 위에서 밑으로 정수리 베기로 벤다.

자세를 제대로 잡을 시간은 없으니, 발검과 동시에 이뤄져야 하리라.

범위에 담긴 폴리드 쪽 검사도 반응했다.

툭 하고 팔을 더 길게 늘어뜨린다.

어떤 검술을 쓸까?

한순간 엔크리드는 상대가 덤비길 바랐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럴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겠지만.

그래도 그는 바랐다.

'어떤 검이냐.'

빠르면 얼마나 빠른가.

렘의 도끼보다? 혼혈 요정의 휘슬 대거보다도?

경험하고 싶다. 맞서고 싶다. 상대하고 싶다.

호승심이다.

순수하게 실력을 가늠해 보고 싶었다. 순간 차오른 열기가 몸을 데웠다.

덤비면 벤다.

둘 사이의 묘한 기류가 형성되었다.

그 사이에서 폴리드란 놈이 식은땀을 삐죽삐죽 흘렸다.

여기서 칼을 뽑아도 되나? 안 뽑으면 겁먹은 것처럼 보이진 않을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레오나는 그런 상대를 경멸했다.

차라리 검을 뽑든지, 아니면 말재간으로 넘어가든지.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면 시작하지 말아야 했다.

역시나, 선대의 유언이 아니었다면 볼 일이 없는 상대다.

묘한 대치가 이어지며 여관 안이 고요해졌다.

그때였다.

퉁.

여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두꺼운 나무 문이 활짝 열리며 벽을 때렸다.

세차게 문을 밀고 들어온 사람 덕분에 엔크리드의 시야가 넓어졌다.

상대도 기세를 푼다. 둘이 암묵적인 약속하에 반걸음씩 물러섰다.

'이거야 원.'

렘도 아니고 싸움에 미쳐서 상황을 돌보지 않고 검을 뽑을 뻔했다.

엔크리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돌렸다.

아는 얼굴이 보였다. 변방 수비대의 토레스다.

그의 뒤로 비슷한 복색의 다섯이 더 따라왔다.

튜닉 위에 격자무늬의 갈색 가죽 갑옷, 그 위에 밤색 코트를 걸쳤고 코트의 어깨 위 독수리 문양의 견장을 달았다.

"우리는 국왕 직할군 변방 수비대다. 아즈펜 첩자 부대에 일을 사주해 소란을 일으킨 주모자를 잡으러 왔다."

"히익."

폴리드가 멍청한 신음을 흘렸다. 그러자 호위가 옆으로 붙어 그의 어깨를 쥐었다.

엔크리드는 둘의 관계가 궁금했다.

단순히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관계로 보이진 않았다.

"후계 싸움에 아즈펜의 개들을 끌어들였다고?"

토레스의 말에 폴리드의 안색은 파래졌으나.

레오나는 덤덤했다.

'누가 변방 수비대까지 불렀지?'

엔크리드는 그런 생각을 하며 상황을 지켜봤다.

"전원 체포하겠다."

토레스의 말에 반응하는 사람은 폴리드도 레오나도 아니었다.

"증거 없이 사람을 억류하겠다는 겁니까? 이쪽은 로크프리드 상단을 이어받을 몸입니다. 설마 반대편에서 약을 타 먹은 건 아니겠지요?"

폴리드의 뒤편이다.

갈색 머리칼의 수수한 차림의 남자가 나섰다.

약, 뇌물을 말함이다.

놈의 말에 토레스가 인상을 썼다가 도로 피식 웃더니 답했다.

"...웃기는 개새끼가 있군."

그가 대놓고 불쾌함을 표했다. 하지만 맞는 말이기도 했다.

보더 가드에서 대형 상단이 회의를 열고 후계 문제를 논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보더 가드 상비군이 언제나 중립을 지키기 때문이다.

보더 가드 내에서 문제를 벌이면 상비군이 개입한다는 건 기정사실.

다만 어떤 일에도 이들은 중립을 지키기로 약속했으니.

여기서 증거도 없이 상대를 잡아간다면 여러모로 오해받기 좋으니, 잡아갈 수 없다는 말과 같았다.

'노린 건가.'

상대도 나름 머리를 굴렸다.

토레스도 그걸 알기에 단숨에 웃기는 개새끼의 목을 벨 수 없었다.

짧은 침묵, 긴장감이 감돈다. 침묵을 깬 건 레오나였다.

"약이라니요, 당연히 아니죠."

일단 웃기는 개새끼의 말을 부인하고서.

"물론 아즈펜의 첩자를 상단 쪽 사람이 끌어들였을 수도 있지만."

그다음으로 이어 붙인 말이다.

"음?"

레오나의 말에 폴리드가 또 화들짝 놀라 입을 쩍 벌렸다가 주변 시선을 의식하곤 입을 다물었다.

그걸 보니 절로 엔크리드조차 한숨이 나올 뻔했다. 이거야 원, 자기가 했다고 대놓고 말해 주는 꼴도 아니고.

"아직 모르는 거니까요. 그래서 제가 불렀어요. 변방 수비대."

누가 불러? 이건 엔크리드도 놀랐다.

레오나가 말을 이었다.

"이 일이 밝혀질 때까지 구금을 원합니다. 양쪽 후계자 전부를요. 그리고 증거를 찾는 거죠."

레오나가 좌중을 둘러본다. 몇 마디 말로 흐름을 바꾸는 재주가 돋보였다.

"도망간 주모자가 있다고 들었어요. 그놈을 생포해서 시인하게 하죠."

노림수, 외통수다.

체스로 치자면 체크메이트, 도망갈 구석이 없다.

놈을 잡고 고문하면 과연 버틸까.

지금 잡은 놈들도 부대로 끌려갔다고 들었지만, 다들 주모자가 누군지는 몰랐다.

그들은 입을 모아 전부 대장이 전부 안다는 말만 했단다.

그 대장이 바로 도망간 놈일 것이고.

"좋습니다. 레이디 레오나, 그런데 그놈이 끝내 안 나오면요?"

수수한 갈색 머리칼 남자가 시선을 돌려 레오나를 보며 물었다.

"그럼, 변방 수비대가 관여할 일은 아니겠죠."

레오나가 답하고.

"이후는 상단끼리 상의할 문제가 되겠지요. 후계를 결정하기 위해 본 도시로 돌아가 상단 주요 인사에게 자격을 묻는 게 도리겠고요."

갈색 머리 남자가 눈웃음을 지으며 마무리했다. 핵심을 제대로 짚었다.

'도시에서 나가면.'

레오나가 폴리드의 호위 병력을 상대할 수 있을까?

안 될 것 같은데.

"전 상인입니다. 대가 없는 일은 시키지 않죠. 가장 먼저 그놈을 찾아서 데려오는 분에게 이걸 드리죠."

레오나가 말과 함께 단검 한 자루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길고 가는 칼날, 그 위를 덮은 검은 가죽 검집, 스틸레토 형태의 단검이었다.

"카르멘 컬렉션?"

누군가 알아봤고.

엔크리드는 자신의 옆에서 작센이 한걸음 나선 걸 보았다. 어지간한 일에 무덤덤한 친구가 단검 한 자루에 발을 떼?

물론 그만한 가치가 있는 무기이긴 하지만.

'의외네.'

카르멘, 제 손으로 만든 무기로 활동한 유명한 암살자다.

정작 암살 실력보다는 무기 제작 실력이 더 뛰어났지만.

그놈이 만든 무기를 카르멘 컬렉션이라고 부르는데.

지금 꺼낸 무기가 그거였다.

사람을 찌르고 빼도 피 한 방울 묻어나지 않는다는 명장의 단검이다.

"야, 그걸 왜 네 마음대로 내놔?"

"이건 내 물건이니까. 선대가 주신."

폴리드가 뭐라고 따졌지만, 레오나는 무시한 채로 확답했다.

"드립니다. 잡아 오세요."

이로써 현상금이 붙은 셈이었다.

그리고 엔크리드는 일이 묘하게 흘러간다고 생각했다.

'이미 잡아 오라고 시켰는데.'

그리 생각하면서도 엔크리드는 새삼 레오나의 수완에 감탄했다.

'변방 수비대를 불러 시간을 끌고, 현상금을 걸어 원하는 바를 취하고.'

모두에게 좋은 상황을 만들었다.

폴리드란 작자만 제하고.

어쨌든 잡기만 한다면 수십만 크로나를 넘게 벌게 될 것이다. 다들 눈이 벌게질 만했다.

"잡아 오겠습니다."

그리고 의외로 여기서 선뜻 의지를 보이는 이가 있으니.

"제가 직접 나서죠."

작센이었다. 말만 하는 게 아니라, 자신도 있어 보였다.

엔크리드는 작센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작센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선 건 처음인지라.

'어지간히 갖고 싶은가 본데.'

그런 생각이 들게 했다.

어려울 일은 없었다.

이 도시, 보더 가드의 밤과 뒷골목을 책임지는 건 누구인가?

길핀 길드다. 그 길드의 주인인 크라이스는 현재 엔크리드의 분대원이었으니.

하물며 이미 신경이 쓰여 잡아 두란 말까지 해 둔 바였다.

즉, 반쯤은 이미 손안에 들어온 물건이었다.

77. 심심할 땐 대련을 하는 거다.

"그럼, 여기서 이틀을 지내고, 이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두 명 다 부대로 압송하는 거로 결정하겠다. 압송 이후 증인이나, 증거가 수집되면 그때 문제를 다루기로 하겠다."

토레스가 상황을 정리했다. 폴리드가 그럴 수 없다고 일어나려 했는데, 폴리드 쪽 웃기는 개새끼가 그의 어깨를 잡고 귓가에 뭐라 속삭임으로 그를 제지했다.

레오나는 덤덤했다.

"좋아요."

바라던 바였다는 듯, 선선히 고개도 끄덕였다.

엔크리드는 돌아가는 상황을 보며 작센의 옆구리를 찔렀다.

예민한 작센은 손바닥으로 엔크리드의 손가락을 막았다.

"뭡니까?"

"칼 모으는 취미가 있었냐?

몰랐다. 이제까지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하물며 숙소 내에 작센의 물건은 전부 보급품뿐이다. 개인 물건은 취급도 안 하던 놈이?

"카르멘의 스틸레토입니다."

작센이 답했다.

그게 대답이라는 것처럼.

엔크리드는 잘 몰랐다. 사실상 카르멘 컬렉션이 유명하고 비싸다는 것만 주워들은 정도였으니까.

엔크리드의 태도에 작센의 입이 다시 열렸다.

"금화 수십 닢이 있다고 해도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카르멘이 누군지는 아십니까? 명장이란 소리는 괜히 듣는 게 아닙니다. 저 칼 한 자루가 암시장에 나오면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이 일기도 합니다. 실제로 몇 년 전에는 암살자 길드끼리 카르멘 컬렉션의 세 번째 작품인 카타르가 나와 소란이 난 적도 있었죠."

엔크리드는 또 몰랐지만, 실상 소란 수준이 아니라 암살을 업으로 하는 이들 여럿이 죽었다.

물론 양지에 사는 이들은 알 수 없는 얘기다.

게오르의 비수라는, 대륙 제일의 암살 집단에서 회수했다는 얘기만 남았고.

"스틸레토는 카르멘의 네 번째 작품."

첫 번째는 주머니칼.

처음으로 사람을 죽여 본 칼이기에 '첫 살인'이란 이름이 붙었으나.

이미 부서져 없어졌다는 평이고.

두 번째는 얇고 긴 지팡이 검, 스틱 소드.

세 번째가 카타르, 네 번째가 스틸레토다.

다섯 번째는 한쪽만 날이 선 사냥용 단도 따위를 만들었고, 여섯 번째로는 소드 브레이커를.

일곱 번째로는 대낮에 꺼내면 칼날이 보이지 않는 인비저블 블레이드를 만들었다.

일곱 개의 단검, 그리고 일곱 개의 이야기.

그게 카르멘의 이름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이유다.

그는 살해 대상 일곱을 위해, 딱 일곱 개의 무기만 만들었고 모든 건 복수를 위해서였다.

'첫 살인'으로는 제 주인이었던 노예상을.

두 번째 '스틱 소드'로는 제 누이를 욕보인 병사의 등을 찔러 죽였고.

세 번째 '카타르'로는 누이를 욕보인 병사를 이끌던 귀족의 종자를.

네 번째 '스틸레토'로는 종자의 주인인 귀족의 심장을 찔렀고.

다섯 번째 '사냥용 단도'로는 귀족의 녹을 먹은 이들의 멱을 일일이 땄다.

여섯 번째 '소드 브레이커'로는 그 귀족이 아끼던 검을 부러뜨림으로 복수를 완성했다는 말이다.

마지막 일곱 번째 '인비저블 블레이드'는 끝내 제 역할을 완수하지 못했다는 말이 떠돌기도 했고.

또는, 사실상 마지막 복수의 대상은 자신이었기에 제 심장에 꽂아 죽었다는 말도 같이 돌았으나.

진실이야 영원히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벌써 수십 년 전의 이야기 아닌가.

"그 얘기를 전부 외우고 다니는 거냐?"

작센은 단숨에 모든 얘기를 조곤조곤한 말투로 풀어냈다.

엔크리드는 작센의 말을 중간에 끊을 수 없었다. 말투는 담담하나 말하는 내내 작센의 눈에는 기이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광기와 같은 열정이다.

멈출 수 없기에 전부 듣고 한마디 툭 내뱉은 게 전부였다. 이걸 외우고 다니냐고.

작센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냥 아는 겁니다. 외우는 게 아니라."

그제야 평소의 작센으로 돌아왔다.

"이틀을 더 여기에 묶여야겠군요."

당장 뛰쳐나가고 싶으나, 호위 임무가 발목을 잡았다. 어디까지나 의무는 다해야 하니.

다만, 엔크리드의 눈에는 지금의 태도가 말을 돌린 것처럼 보였다.

'설마.'

엔크리드는 작센을 보며 묘한 생각이 들었다.

'이거, 부끄러워하는 건가.'

얼굴이 빨개지지도 않았고 당황한 흔적도 없지만, 말을 돌렸다는 기색은 역력했다.

"직접 잡으러 가고 싶지만, 호위 임무를 팽개칠 순 없겠지요."

어서 빨리 이쪽 주제로 얘기나 나누자는 것 같았다.

"카르멘 컬렉션 받으면 팔 거야?"

그게 참 신기해서 쿡 찌르니.

"그걸 왜 팝니까?"

작센이 평소보다 눈을 크게 뜨며 되받아쳤다.

이거, 정말 좋아하나 본데.

크로나 때문도 아니고 순수하게 저 스틸레토가 갖고 싶단 거다.

취향 한번 독특하네.

그래, 누군가에게는 대단한 물건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나 크라이스가 보면 침을 질질 흘리겠지. 팔면 주머니가 두둑해질 테니까.

하지만 오롯이 소장 가치로만 본다면 취향 한번 너무 독특하지 않나.

'암살자가 사람 죽인 단검이잖아.'

유명한 것과 별개로 저걸 간직하고 싶다는 건 대체 무슨 생각인지.

하릴없는 부호의 악취미도 아니고.

그렇다고 따지거나 더 묻진 않았다.

엔크리드는 평소와 똑같은 태도를 고수했을 뿐.

분대원의 일상에 너무 발을 들이지 않는 거다.

그게 이제까지 그가 분대장으로서 지위를 유지한 비결이니.

엔크리드는 그리 작센을 놔두고 시선을 돌렸다.

폴리드 쪽이다. 한쪽에서 수수한 외모의 남자, 웃기는 개새끼와 팔을 늘어뜨린 검사가 얘기를 나누는 게 보였다.

둘은 속닥였고 그중 레이피어를 찬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의 눈이 엔크리드를 스치고 지나갔다.

엔크리드도 남자를 바라봤다.

여전히 한번 붙어 보고 싶은 상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일이 꼬였군요."

"잘못 고른 셈이군."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지요."

"그런가?"

수수한 얼굴의 남자가 시작한 말을 검사가 되물었다. 무료한 말투다.

별 관심이 없었기에 그렇다.

그의 눈은 요정과 상대 일행을 훑었다.

'재밌는 놈들인데.'

특히 요정 년이 흥미가 돋는다. 그들의 '나이들'은 속도의 검이라 한다.

겨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 전에 곁에 있는 이들도 꽤 쓸 만해 보이고.

자신의 휘하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키워 볼 만했겠어.'

둘 다 나쁘지 않다. 특히나 적갈색 머리칼을 가진 놈은 걸음걸이 하나조차 마음에 든다.

조용하고 언제 어디서든 검을 뽑을 준비가 되어 있는 놈이다.

"이제 어쩌죠?"

"일이 꼬이면 이제까지 어떻게 했나?"

검사의 물음에 남자는 배시시 웃었다. 밉지 않은 웃음이었다.

"완력으로 해결했죠."

"그럼, 그렇게 하지."

검사는 자신과 슬쩍 눈이 마주친 상대를 봤다.

얼굴이 곱상하게 생긴 병사다.

어린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

막 검을 잡고 흥분한 꼬맹이를 보는 기분이 든다.

호승심을 저리 대놓고 보이니.

그에 끌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상대가 호기를 부리면 맞서고 싶은 것이 칼잡이의 숙명 같은 것 아닌가.

"부탁드리겠습니다."

갈색 머리 남자는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고는 폴리드에게 붙어 그를 달래기 시작했다.

"흥분하지 마십시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어차피 증거가 없으면 그만 아닙니까. 무엇보다 도시로 돌아가면 상단의 사람들이 누구 편을 들겠습니까?"

"하지만, 하지만, 잡아 오면?"

"그래도 괜찮습니다."

갈색 머리 남자는 눈웃음을 보였다. 폴리드는 여전히 불안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억지웃음을 보였다.

"믿으십시오."

그의 말에 폴리드가 억지로 용기를 쥐어짜 말을 덧붙였다.

"돌아만 가면 끝이야. 다 아버지 사람들이니, 전부 날 밀어줄 거고. 그럼, 저 창녀는 그냥 뒈지는 거야.

그게 좀 아쉬우니까 내가 첩으로 거둬 줄 수도 있어."

과연 그럴까.

갈색 머리 남자는 폴리드가 머저리라고 생각했지만, 그걸 겉으로 표현하진 않았다.

레오나란 여자는 묵묵히 둘을 지켜봤다.

대화가 들릴 거리는 아니었다.

갈색 머리 남자는 검사가 말한 완력을 믿었다.

검사는 자신을 향해 호승심을 보인 병사를 때려눕히면 요정과 싸울 수 있을까 하고 생각 중이었다.

* * *

작센은 둘의 대화를 들었지만, 관심이 없었다.

폴리드란 머저리를 안심시키기 위한 연극으로 보였다.

그저 카르멘의 스틸레토나 갖고 싶었다.

'크라이스.'

그는 속으로 크라이스가 그동안 길드원을 제대로 구워삶아 놓길 바랐다.

내심 믿기도 했다. 몸을 쓰는 일은 형편없어도 크라이스의 수완은 무척 뛰어났다. 한 분대에서 지내며 그동안 봐 온 게 있었다.

걱정할 일은 아니다.

'수틀리면.'

단검이야 다른 수단으로 취하면 되는 일이니.

엔크리드가 작센의 취미를 존중하며 물러나자, 상황을 정리한 토레스가 다가왔다.

"잘 지냈나?"

"못 지낼 건 없으니까."

"그건 그렇지. 이틀 동안 여관에서 시간을 죽이게 생겼네?"

토레스의 말대로였다. 그런데 꼭 하릴없이 시간을 보낼 필요는 있을까.

엔크리드는 크라이스가 제 역할을 해내리라 믿었다.

뒷골목 세계에는 그쪽의 규칙이 있고.

일은 전문가에게 맡겨야 하는 법이니까.

크라이스가 어떤 놈인가.

굳이 사고뭉치 분대 안에 직접 발을 들인 놈이다.

이유? 여러 가지겠지만, 명확한 이유는 하나다. 사고뭉치 분대에서는 자기가 싸우지 않아도 됐으니까.

다른 분대와는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그는 자신이 있을 자리를 잘 찾았다.

길드를 먹겠다고 했을 때는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엔크리드는 그걸 믿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저녁쯤 크라이스가 보낸 사람이 왔다.

"여기 엔크리드란 사람 있습니까?"

열 서넛이나 됐을 법한 소년이었다. 이제 막 목소리가 굵어지기 시작한.

겁을 먹었는지 눈알을 굴려 좌우의 눈치를 보며 묻는다. 여관을 지키던 병사가 안쪽을 향해 눈짓했다.

안 그래도 홀에서 의자나 테이블을 이용해 고립의 기법으로 몸을 단련하던 엔크리드가 그걸 듣고 나섰다.

상의를 벗고 있었기에 몸 위로 대강 커다란 천을 두른 채다. 밖으로 나서니 찬바람에, 이마에 흐르는 땀이 금세 식었다.

날이 무척 추웠다.

"나다."

얇은 천을 덧대 만든 외투를 입은 소년이 엔크리드를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심부름 왔습니다."

소년의 말투는 야무졌다.

엔크리드는 주머니에서 동화 몇 닢을 꺼냈다.

겁을 집어먹고 눈치 보며 몸을 떠는 걸 보니, 몇 푼쯤 필요할 듯해서.

야무진 말투도 마음에 들고.

그런데 되려 소년이 크로나를 거절했다.

"아닙니다. 수당은 길드에서 받습니다."

거절한 소년은 작은 쪽지를 건넸다. 퍽 인상적이었다. 크라이스가 길드를 완벽하게 통제한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심부름하는 꼬마가 크로나를 거절하다니.

"누군데?"

여관을 둘러싼 병사 중 하나가 다가와 물었다.

엔크리드는 크라이스가 보낸 애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걔는 밖에서 또 뭘 한대?"

크라이스는 이런저런 일에 손을 대고 정보를 취급하며, 연초를 팔고 창부를 불러 주는 수완가다.

꼬마애 하나 고용해 심부름시키는 거야 평범한 일이었다.

엔크리드는 도로 들어와 쪽지를 펼쳤다.

- 이틀 아침 전까지.

짧은 내용이지만, 뜻은 충분했다. 곧 잡아 온다는 말이었다.

"종일 뭐 하는 건지 물어도 되나?"

쪽지를 벽난로에 던져 넣으니, 뒤에서 토레스가 물었다.

"단련."

"호위 임무 중에?"

"지금 당장 누가 습격하진 않을 것 같은데."

"그래도 의뢰주가 뭐라고 안 하나?"

"보시다시피."

"보기 좋은데요."

레오나도 구경 중이었다. 엔크리드는 누가 구경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아우딘이 말하지 않았나.

"고립의 기법은 하루에 하루를 더하는 겁니다. 공들여 오늘을 토대로 몸이란 성벽을 쌓는다고 생각하십시오."

하루도 빼먹지 말란 말을 멋지게도 한다고 생각했다.

어지간하면 그 말을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엔크리드는 마음먹으면 하는 인간이었다.

매일 검을 단련하는 일에 고립의 기법을 섞었다.

"지겹지도 않나?"

그럴 리가. 재미만 있을 뿐이다. 하루하루 변해 가는 자신을 보는 재미다.

단련하는 사이 칼날의 감각을 유지했고.

한 점의 집중도 활용했다.

야수의 심장만은 단련할 때 쉬이 활용할 수 없는 기술이었다.

그리 다시 상의를 벗은 채로 기법을 수행하는 중이었다.

"상단의 따님이시라 그런가, 내외가 없으시네."

토레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의자 하나를 뒤로 돌려 앉은 채였다.

레오나는 대답 대신 가벼운 미소로 답을 했다.

그러며 그녀는 엔크리드를 감상했다.

저 얼굴에 저 몸.

단련하며 흐르는 땀까지.

그녀의 취향에 딱 들어맞았다.

엔크리드는 여전히 주변 누구의 시선도 무시한 채로 움직였고.

그걸 보며 요정 중대장은 여관 계단에 앉아 작센에게 물었다.

"원래 시선을 즐기는 편인가? 병사의 분대장은?"

"잘 모릅니다."

작센은 까칠했고, 중대장은 더 묻지도 않았고 따지지도 않았다.

그녀도 지금 엔크리드를 면밀히 보는 중이었다.

잘생긴 얼굴과 단련된 몸은 언제나 환영받는 거 아니겠나.

엔크리드가 의자를 양 손바닥으로 누르며 발을 앞으로 쭉 뻗고 팔뚝에 무게를 실었다.

그의 몸뚱이가 의자 밑으로 내려갔다가 올라올 때마다 팔뚝 외측 근육이 씰룩였다.

그걸 쭉 지켜보던 토레스의 곁으로 변방 수비대원의 둘이 더 붙었다.

"저 친구가 그 친구입니까?"

"우리를 깐 주술파괴자? 맞네."

들으라는 듯 둘이 말하고.

엔크리드는 마침 기법을 한 바퀴 돌린 참이기에 토레스에게 제안했다.

"심심하면 대련이나 한판?"

어차피 보내야 할 시간이고.

여관 뒤쪽에는 큰 공터도 있다. 모든 게 여관을 찾는 이들을 위한 시설이다.

상단의 호위를 맡은 용병이나 칼잡이를 위한 공간이란 거다.

가끔 시비가 붙으면 거기서 싸움도 나는 곳.

그러니 대련 한판 하기에는 충분한 장소다.

"아가씨께서 아량이 넓군."

토레스가 말하며 다시 레오나를 보자, 레오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구경하겠네요."

토레스는 괜찮냐고 돌려 물은 거였고, 레오나는 곧바로 허락했다.

토레스도 몸이 근질거리긴 했다.

무엇보다 뒤에 있던 변방 수비대원 둘이 더 반겼다.

"상급 병사라잖아."

"토레스 대장이 먼저 하시게요? 이런 건 밑에서부터 올라가는 거 아닌가?"

모두 엔크리드에게 관심이 많아 보였고.

엔크리드는 상대가 많아져 즐거웠다.

"전부 다 하시죠."

그때부터 때아닌 대련 열풍이 불었다.

진검을 뽑으면 대련이 대련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기에 적당한 나뭇가지를 부러뜨려서 검을 대신했으나 다들 진지했다.

"나도 끼지."

중대장까지 끼고, 여관 안에 있는 사람이 전부 구경꾼이 됐다.

"미쳤군요."

혀를 내두르는 건 레오나 쪽 호위뿐이었다.

이들은 다 미쳤다.

호위 중에 무슨 대련이란 말인가.

물론 말릴 순 없었다.

제 주인인 레오나가 허락한 판이었다.

78. 열정으로 물들이는

토레스는 여전히 실력이 출중했다.

엔크리드는 그와 대련하면 열 번에 일곱 번은 졌다.

"실력이 늘었네."

토레스가 숨을 고르며 우두커니 선 채로 말했다.

새삼 드는 의문이다.

진검을 들고 제대로 붙으면 어떻게 될까.

모르겠다. 엔크리드는 싸움에 확신을 가지는 부류가 아니었다.

아무리 검을 잘 다뤄도 일곱 살 아이가 쥔 단검에 심장이 찔리면 죽는 게 사람이다.

실력을 떠나 목숨을 건 싸움의 승패는 어찌 되는지 알 수 없단 거다.

"그렇습니까?"

엔크리드는 드러누운 채로 답하고 벌떡 일어났다.

"다음은 나."

"들어와."

입김이 나오는 계절임에도 여관 뒤 공터에는 땀이 튀고 열기가 피어올랐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는데, 전부 엔크리드와만 싸웠다.

대련의 연속이다.

엔크리드에게는 값진 시간이었다.

토레스를 비롯한 변방 수비대는 변칙 공격에 능했다.

그렇다고 기본기가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뚝 하고 나뭇가지를 부러뜨려 양손에 쥔 수비대원이 말했다.

"난 단검이 특기라. 다치지 않게 조심해라."

팔뚝 반만 한 길이의 나뭇가지 두 개다.

"서로 조심해야겠지."

"그러니까 같이 조심하자고."

수비대원이 실실 웃었다. 웃음 안에 열기가 보였다. 적의 따윈 없는 순수한 호승심.

딱!

나뭇가지가 만나 부딪히며 엔크리드는 또 싸웠다.

몇 번의 수를 교환한 뒤다. 당연히 상대가 거리를 좁히리라 생각했는데.

그는 단검 대신 든 짧은 나뭇가지 두 자루를 교차해 엔크리드의 검을 잡아서 옆으로 꺾어 내쳤다.

그거로 균형을 무너뜨린 뒤, 손에 든 나뭇가지를 던져 엔크리드의 몸통 어림을 맞췄다.

"실전이었으면 눈알이었다."

그러곤 말한다. 이 작자도 뛰어났다. 토레스에 버금갈 정도로.

변방 수비대가 왜 특별 취급을 받는지 알 수 있었다.

엔크리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또 한 번의 패배다.

잠깐 쉴 시간이었다.

자연히 전원 휴식이다.

공터와 여관을 잇는 문에 작센이 비스듬히 서 있었다. 엔크리드가 안으로 들어서자 작센이 입을 열었다.

"상대가 단검을 들었다고 거리를 좁히는 데만 정신이 팔리면 안 됩니다. 기본기가 잘 닦였다고 기본기로만 싸울 겁니까? 상대가 바닥을 기어서 다가오는데 굳이 검으로 등을 내리찍는 것만이 답입니까? 발로 걷어차는 건 왜 안 됩니까?"

지든 이기든 작센은 입을 열었다. 가르침의 시간이었다. 누군가는 잔소리라 생각할 수도 있으나 엔크리드에게는 아니었기에.

그는 귀를 열고 들었다.

"단검으로 저런 수법을 쓸 줄은 몰랐는데."

"본래 쓰는 무기는 소드 브레이커 종류일 겁니다."

소드 브레이커, 칼날 뒤쪽을 톱날처럼 만든 검을 말한다. 즉, 저 작자는 상대의 무기를 부수는 게 특기 중 하나인 거다.

"거리를 내주진 않은 건 잘했지만, 그다음도 염두에 뒀어야 합니다."

작센은 대련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곱씹어 줬다.

엔크리드는 매번 최선을 다했다.

거리를 내줬으면 그냥 당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거리를 내주지 않은 거다.

덕분에 소드 브레이커를 쓰는 수법을 본 거고.

잘한 건 잘한 거다. 작센도 그걸 집어 말했다.

"상대하는 법을 궁리해 보십시오."

검술의 기본기와 몸을 단련하는 것. 기술을 배우는 것. 그걸 몸에 새기는 단련법까지.

전부 좋다.

하지만 대련 중에 생긴 일에 관한 대처는 스스로 고민해야 했다.

작센의 말이었다.

엔크리드도 동의하는 바다.

같은 동작을 수백 번 해야 그나마 몸에 익곤 했다.

무엇이든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면 궁리해야 했다.

복기와 궁리.

그게 엔크리드가 가진 무기였으니.

그는 그렇게 했다.

"쉬고 나면 내 차례다."

다른 수비대원이다. 검과 발을 잘 쓰는 대원이었다. 단순히 스텝을 밟는 게 아니라 번번이 발차기를 섞어 썼다.

상대하기 까다롭지만, 또 그만큼 배우는 게 있다.

토레스를 포함한 변방 수비대원 여섯이 전부 돌아가며 대련했는데.

여섯 명 다 비슷한 기술을 쓰긴 했으나, 독특한 기술도 보여 주곤 했다.

개성도 있으나, 기본기가 출중하다. 배울 게 많았다.

예전이었다면 이런 대련이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

산을 오르지 않은 사람은 정상의 풍경을 체감할 수 없으니.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한 점의 집중에 더.'

라그나에게서 배운 기술이 빛을 본다. 야수의 심장이 주는 대담함이 기초가 되는 건 당연했다.

"어떤 순간에도 감각의 날을 세우십시오."

작센이 말한다. 날카로운 감각을 유지하라는 말이다.

엔크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땀을 흘리는 그의 곁으로 레오나가 다가왔다.

"정말 좋아하나 봐요."

"뭐가 말입니까?"

"검 쓰는 거요."

"그렇게 보입니까?"

"네."

레오나는 종종 말을 걸었다. 시답잖은 얘기였으나.

엔크리드가 보기에는 먹이를 눈앞에 둔 거미가 상대를 관찰하는 것처럼 보였다.

절대로 먹이를 그냥 두고 볼 일 없는 욕심 많은 거미.

'저 외모에 거미는 좀 무리이긴 하지만.'

누가 봐도 돌아볼 만한 미녀 아닌가.

"요정 중대장님 때문인가요? 여자의 외모에 둔감한 편 같으신데."

"꼭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제가 그쪽 타입이 아니라는 거?"

이건 어떤 의미의 질문일까, 얼굴에 장난기가 엿보였다.

"레이디 레오나 수준의 외모를 외면할 수 있는 남자는 흔하지 않을 것 같은데, 아닙니까?"

돌려 말하지만, 엔크리드는 관심이 없다는 말이다.

시답잖은 대화 후 레오나는 수수하게 웃으며 중대장 곁에 앉곤 했다.

"조심해라. 여성 편력이 있다."

그럼, 중대장이 헛소리를 뱉고.

그 말에 레오나가 웃었다.

요정의 농담을 이해하는 건가.

엔크리드를 곤란하게 하는 농담이 레오나를 연신 웃게 했다.

"제가 본 요정 중에 가장 재치 있는 분이군요."

"그런 소리 많이 듣지."

대체 어디서?

대련을 준비하는 중에 발목을 삐끗할 뻔했다. 감각의 날을 세우고 있으니, 절로 둘의 대화가 들렸다. 유심히 듣지 않아도 들릴 크기의 목소리다.

"나와는 아이도 있지."

"네?"

"부대 내에 그렇게 믿는 사람도 있다는 말이다."

저렇게 말하면 오해가 깊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들기도 했지만.

레오나는 웃으며 넘어갔다. 믿는 건지, 마는 건지.

"안 할 거야? 이제 지쳤나?"

엔크리드는 자신을 기다리는 이들을 보며 걱정을 버렸다. 소문이야 어차피 지독하게 날 것이다.

일전, 레오나의 기습 고백 때문에 아마 더 지독한 소문이 퍼질 거고.

"마성의 분대장."

밖을 지키는 이들이 툭하면 자신을 그리 부르고 있으니.

"주술을 파괴한 마성의 분대장."

"여자를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마성의 분대장."

이제 슬슬 그만 듣고 싶어질 정도다.

"마성의 분대장입니까?"

하물며 작센도 그 단어를 입에 꺼냈다.

"응?"

"수비대원 전부가 다 분대장만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만 하루를 미친 듯이 대련만 했다.

처음, 주변에 내려앉았던 어색한 공기 따윈 이제 없었다. 그들 전부는 검과 땀으로 어울렸다.

그 대가로 엔크리드는 몸 여기저기에 멍이 들기도 했고.

"아픈가?"

때린 쪽이 물으면 엔크리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조금 전 일격은 기가 막혔다. 몇 번이고 되새기는 중이었다.

상단 내려치기에 맞서, 밑에서 위로 막는 척하며 팔뚝을 벤다.

순간적인 판단, 타이밍을 재는 눈, 과감함까지.

필요한 것들이 절로 떠올랐다.

이전에는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경험의 체화다.

'아.'

엔크리드는 다시금 희열에 휩싸였다.

그는 현재 일어나는 일에 취했다.

가끔 중대장이 나서서 레슬링 비슷한 걸 할 때도 있었고.

중간중간 레오나가 말을 걸기도 했다.

"부럽네요. 저도 배워 둘 걸 그랬나 봐요."

중대장이 자기 팔을 공중에서 잡아채 매달리며 팔 관절에 부하를 주는 걸 보고 하는 말이다.

정작 엔크리드는 넘어져 버티느라 바빴던 기술이다.

"레슬링을 활용해라. 병사."

중대장도 한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작센의 말을 듣는 걸 봐서 그랬는지, 아니면 순수한 호의인지.

지금도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걸 따질 필요는 없기에 엔크리드는 경청의 자세를 고수했다.

"좌우 균형이 많이 무너졌네. 몸 단련하는 걸 누가 봐주긴 해?"

중대장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이건 변방 수비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우딘도 했던 말을 변방 수비대원의 입에서도 들었다.

좌우 균형의 차이.

오른손잡이니까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인간의 한계에 다다르는 법 첫 번째가 전신 근육을 단련하는 거다. 힘은 쓸 만하네."

토레스도 조언을 건네고.

"단검이라고 해서 거리감을 죽일 생각만 했지? 차라리 더 근접전으로 끌어들일 것처럼 해 봐. 그럼 상대가 어떻게 생각할까? 상대의 머리통에 악령을 심어 주라고."

상대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는 법.

"안 좋은 버릇이 있군, 상대를 속이려는 수법도 좋지만, 기본을 잃으면 안 되지. 중심축은 어디에 둘 건가?"

대련하며 저지르는 실수를 지적해 주기도 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말 그대로 엔크리드는 푹 빠져서 모든 걸 새겨들었다. 경청의 자세로 듣고 또 듣는다.

분대원 사이에서 대련으로 보내는 것과는 또 달랐다.

이게 즐거워 보였을까?

"나랑도 하겠나?"

폴리드 쪽 검사가 나섰다. 레이피어를 검집째 풀며 옆으로 내려 두고 하는 말이었다.

엔크리드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라 마지않던 일이었기에.

"재밌는 친구군. 임무 중에 이런 대련이라니."

"시간을 값지게 쓰는 편이라서."

호위 임무 중, 대형 상단의 후계 문제로 피를 보기도 했다.

이런 상황인데도 엔크리드는 검을 잡고 휘둘렀다.

그래야 했다.

다른 이의 시간과 엔크리드의 시간은 다르니.

재능을 가진 이와 가지지 못한 이는 평등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부족한 걸 메워야 하는 사람에게는 시간이 언제나 부족한 법이었다.

* * *

레이피어의 검사는 흥미가 돋았다.

'실시간으로 실력이 늘진 않는데.'

주변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는 병사다.

특히나 변방 수비대란 이들과 엔크리드란 남자와의 관계 변화가 흥미롭다.

처음 보는 사람 사이에 있던 경계심은 어느새 사라지고 녹아든다. 그러면서 호감을 얻는다. 눈앞에서 일어난 일임에도 참 신기한 광경이었다.

'드문 인재야.'

다만 검술 쪽 재능은 아니다. 지금 실력이 한계다. 그게 레이피어의 주인인 검사의 눈에는 보였다.

엔크리드란 병사의 재능은 다른 곳에 있다.

많은 인재를 접하고 살아온 그였기에 떠올릴 생각이다.

만일 엔크리드의 꿈이 기사란 얘기를 듣는다면 곧바로 고개를 저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재능이 어쨌든 간에.

'가르쳐 보고 싶긴 하다.'

끝없는 열정이다. 그 어떤 말도 허투루 흘리지 않는다.

재능은 형편없지만, 그것과는 다른 묵직한 열기를 가졌다.

열정만으로 주변을 감화시키는 재주다.

이제껏 엔크리드를 가르친 교관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다들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결국 자신이 가진 걸 엔크리드에게 집어넣으려 했다. 가르치고 또 가르쳤다.

포기 따윈 아예 없는 단어처럼 구는 열정과 패기다.

"나랑도 하겠나?"

그게 발을 떼게 하고, 입을 열게 했다.

"에?"

옆에 있던 함께 온 동료가 놀라 자신을 본다. 자신도 놀랄 판이다.

적이라면 적인데.

여기서 나서는 게 우스워 보일 것 같아서.

하물며 상대가 거절하면 꼴이 더 우스워지려나.

문제라면 입을 열기 전까지는 그런 생각 따윈 전혀 하지 않았다는 거다.

엔크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팔에는 멍이 들었고, 온몸은 땀으로 흥건하다. 공터에 부는 찬 바람을 날려 버릴 열기를 몸에서 풍긴다. 뜨거운 김이 어깨 위로 솟는다. 지치기도 했을 텐데.

이기고 지는 게 중요한 게 아닌 거다.

지금 저 작자는 순수하게 대련을 즐기고 있으니.

"좋군."

검사는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 * *

작센은 상대의 의도를 의심했고.

중대장은 흥미롭다는 고개를 끄덕였고.

변방 수비대원 전부는 수틀리면 베어 버릴 생각을 했다.

엔크리드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걸 두고 볼 생각이 없으니.

그리고 엔크리드는.

'쾌검.'

상대의 검을 머릿속에 그리기 바빴다.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어떤 식으로 싸우는 게 승산이 높을까.

이길 수 있을까?

"고민하지 마쇼!"

렘은 승패를 머릿속에 넣고 싸우는 새끼 중 살아남은 새끼를 못 봤다고 했다.

승패를 의심하느니.

"확신을 가지는 거요. 그게 먼저요."

확신이란 칼을 갈아라.

야수의 심장이 대담함을 품는다.

엔크리드는 나뭇가지 끝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양손으로 검 그립을 쥐듯 집중했다.

한순간, 주변이 변한다. 집중력이 타오르며 주변을 전장의 한복판으로 바꿨다.

상대의 몸에 두른 갑옷이 보이고.

그의 손에 들린 얇은 검이 보인다.

피하지 못하면 죽으리라.

문득 든 생각에 엔크리드는 푹 빠져들었다.

79. 머저리를 다루는 법

얇은 나뭇가지 하나와 사람 하나.

늘어뜨린 팔, 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한 나뭇가지.

그게 검처럼 보였다. 그 어떤 칼보다 날카롭고 뾰족한 검.

이후에는 생각하고 마시고 할 것도 없었다.

모든 건 순식간에 일어났고 순식간에 끝났다.

엔크리드는 전장의 환영을 봤고.

상대가 발을 움직였다 싶은 순간, 본능의 영역에서 검을 내리그었다.

훙.

엔크리드가 든 가지가 묵직하게 허공을 갈랐다.

정확히 허공만 갈랐다.

그리고 상대의 나뭇가지 끝이 목에 닿았다.

툭.

'어떻게?'

조금 전 자신이 본 장면을 되새긴다. 보이긴 했다. 그러니 보고도 당했다고 해야 맞는 말일 것이다.

"다들 끝나고 한마디씩 하는 것 같으니, 나도 하지. 타이밍이었네."

남자가 말했다.

상대는 쾌검을 썼다. 그리고 그걸 정검식의 교본처럼 활용했다.

먼저 움직인 게 아니라 엔크리드가 내리긋는 검격을 역이용했다.

'받아치는 게 아니라.'

엔크리드의 눈이 상대의 발밑으로 향했다.

상대의 부츠를 따라 부드럽게 반원을 그린 흙바닥이 보였다.

'몸을 틀어내 중심선을 숨기고.'

기본기다. 어찌 보면 단순한 기술이라 하겠다.

몸을 틀어 피하고 검을 찔러 끝냈다.

'전장이었다면.'

첫 번째 찌르기와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그때와 자신은 완전히 다른 수준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도.

멀고 높다. 상대의 실력이 월등히 뛰어났다.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절망과 좌절에 휩싸일 정도로.

그만한 차이를 보였다. 고작 작대기 한 번 내지르는 것으로.

"어린 축은 아닌 것 같은데."

남자가 말을 흘렸다. 질문이 내포된 말이었기에 엔크리드는 답했다.

"서른. 한 번 더?"

"한 번 더 하자고?"

끄덕.

"허."

엔크리드의 끄덕임에 남자는 허탈한 웃음을 토했다.

그가 보기에 이 작자는 정상이 아니었으니까.

차이를 보여 줬다.

열정에 물들어 나섰으나, 한계가 명확하니 시간 낭비하지 말라고 마음을 꺾어 주고자 했다.

패배는 누구에게나 뼈아픈 법이니까.

그것도 압도적 차이의 상대를 마주할수록 더 아플 테고.

진다는 건 어떤 것인가.

패배를 마주한 자는 어찌 되는가.

좌절하고 절망하며 괴로워한다.

그중 인정하지 않고 발악하는 자가 있기도 하지만.

'발악인가?'

그렇게 보이진 않았다.

"검을 내리치는 타이밍을 뺏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한 건지."

되레 자신에게 더 가르쳐 달라 묻고 있다.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었다. 처음 자신을 유혹했을 때처럼, 무엇이든 불사를 소리 없는 불꽃을 품은 눈으로 바라보기만 할 뿐.

'미친놈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음에도 남자는 다시금 자세를 취했다.

상대의 실력과 한계가 보임에도.

그래도 다시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또다시 대련, 당연하게도 엔크리드는 패했다.

그는 네 번을 더 패했다.

지치지도 않고 도전했고 폴리드 쪽 검사는 전부 받아 줬다.

"아직 상대할 수준이 아닙니다."

작센은 조언 대신 위로를 건넸으나, 엔크리드에게 딱히 위로가 필요치는 않았다.

지는 것, 패배는 정말 수도 없이 겪었다.

자신보다 어린 재능에 꺾이고.

자신보다 늦게 검을 잡은 용병에게도 밀렸다.

마을에서 자경단 노릇을 하는 놈에게도 진 적이 있었다.

산적에게도 졌었다.

용병 생활을 할 때는 성격과 실력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걸 증명한 개자식한테도 패했다.

마수나 마물에게 도망친 적도 수없이 많았다.

하피의 발톱이 동료의 심장을 후볐을 때도 도망가기 바빴다.

그때마다 고개를 떨궜으면 엔크리드는 지금 여기서 분대장 노릇을 하고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런 일로 상처를 받는 일 따윈 없었다.

다만.

"재밌었다."

즐거울 따름이지. 엔크리드는 솔직했다.

"...가끔 보면 분대장은 너무 이상합니다."

엔크리드는 정말 제 분대원에게 이런 말을 듣고 싶진 않았다.

그나마 제일 멀쩡해서 데려온 작센이지만, 이쪽도 사실상 평범한 병사는 아니지 않나.

폴리드란 놈이 말할 때 완벽하게 무시한 것부터 정상이 아니다.

지금도 작센은 폴리드를 본체만체했다.

틈만 나면 폴리드가 슬그머니 다가와.

"너 병사 새끼, 얼굴 기억했다. 내가 바로 로크프리드의 차기 상단주다."

라고 말해도 깨끗하게 무시했고.

"야, 야, 너 대답 안 해? 왜, 오금이 저려서 말이 안 나오냐?"

그래도 무시했으며.

"이 새끼가, 나중에 눈물 줄줄 흘리며 후회하게 해 주마."

저래도 무시했다.

한결같다고 해야 하나.

나중에는 결국 폴리드란 놈이 엔크리드에게 하소연했을 정도니.

"야, 저 새끼 왜 자꾸 나 무시하는 거냐?"

아예 없는 사람 취급을 하니 환장하겠는지, 엔크리드가 보기에 폴리드란 놈은 툭 치면 울 것 같았다.

엔크리드는 상대가 가여워 조언했다.

"말을 거니까."

어리석은 질문에 현명한 답이었다.

말을 거니까 무시하는 것 아닌가.

애초에 말을 걸지 말았어야지.

엔크리드는 자신의 아량에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더없이 친절한 조언이었다.

정작 그 말을 들은 폴리드가 부들부들 떨었다.

"너, 너, 너."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걸 보고 엔크리드는 상큼하게 그를 지나쳤다.

"병사, 지독하군."

중대장이 옆에서 그리 말했지만.

이보다 친절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레오나가 그걸 듣고 있다가 마시던 차를 뿜는 일도 있긴 했지만.

"음, 새삼 정말 마음에 든다는 말을 다시 한번 하고 싶네요."

그러곤 저런 말을 남겼다.

아니, 왜 친절함을 보였는데 이러는 건지.

* * *

거듭된 대련은 만 하루가 지난 뒤 끝났다.

이제는 일을 마무리할 시간이었으니.

변방 수비대원, 중대장, 이름 모를 검사까지.

엔크리드는 얻은 게 많았다.

정작 작센을 포함한 모두는 그저 그의 열정에 감탄했을 뿐이지만.

엔크리드에게는 더없이 값진 시간이었다.

'특히나.'

상대 검사는 쾌검이 무엇인지, 대처하는 방식은 어떤 건지, 상대가 빠름을 이용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려 줬다.

지금 당장 머릿속에 번개가 치듯 새겨진 건 없지만.

'괜찮아.'

벽을 만났을 때, 더없이 유용할 테니.

땀을 씻고 벽난로에 몸을 덥히고 무장까지 점검한 이튿날 아침이 밝았다.

"분대장."

크라이스가 여관 문을 열었다.

그의 뒤로 대머리 길핀이 보였고, 길핀의 손에 얼굴이 반쯤 박살 난 친구가 하나 들려 있었다.

저렇게 두들겨 패 놓으니 얼굴을 알아보긴 글렀다 싶은데.

"그놈이군."

중대장은 한눈에 알아봤다. 요정의 감각은 뭐가 달라도 다른 듯했다.

"히끅."

멍청한 폴리드가 딸꾹질했다.

엔크리드는 어떻게 저런 놈을 상단의 머리로 삼을 생각을 했는지, 그 휘하에 있는 이들의 머릿속이 궁금해졌다.

'꼭두각시로 세울 셈인 건가?'

그렇다면 뭐.

그게 아니라면 저만한 검사가 왜 저기에 있겠나.

딱히 약점을 잡힌 것도 아닌 듯한데.

"그으으으, 사, 살려 주십시오."

잡혀 온 놈이 피가 섞인 침을 흘렸다. 뚝 떨어진 피와 침이 바닥에 고였다.

어지간히도 두들겨 맞았나 본데.

"이 친구가 처음에는 거칠었는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성격이 좀 부드러워졌습니다."

크라이스가 말했다.

당연하게도 크라이스가 말한 대화가 혀를 쓰는 건 아니었을 것이다.

주먹 또는 발.

거기에 칼도 섞인 듯했다.

팔뚝 어림을 보니 베인 상처도 있다.

낡은 리넨 붕대로 대충 감아 두긴 했지만, 흔적은 여실했다.

"내가 리더입니다. 맞습니다. 제가 크로나에 눈이 멀어서 일을 벌였습니다."

남자는 묻지도 않은 말을 뱉었다.

"잠시만."

다들 얻어터진 남자의 입을 주목하는데, 레오나의 목소리가 주변을 환기했다.

"사람을 좀 물렸으면 하는데요? 책임자가 특등 병사 소대장 토레스 맞죠?"

"...그러지."

보는 눈이 많긴 했다. 토레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변방 수비대원 둘이 남자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었다.

그대로 위층으로 향했고.

곧 레오나와 폴리드, 토레스와 말 잘하는 갈색 머리 남자, 엔크리드와 대련한 검사까지 위로 향했다.

그 일행에 엔크리드와 중대장도 합류해 같이 올라가기로 했고.

"두 분은 제 호위를 마저 해 주시길 부탁드리고요."

그 말에 작센이 밑에 남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눈앞에 놓인 카르멘 컬렉션의 스틸레토가 있는 자리에서 멀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다들 움직이는 가운데, 크라이스가 막 올라가려는 엔크리드에게 다가와 슬그머니 물었다.

"뭔데요?"

"몰라서 묻는 거냐, 확인차 묻는 거냐?"

"받을 걸 받고 싶어서 묻는 거로 해 두죠."

이 크로나에 미친 왕눈이.

일했으니 대가를 지급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스틸레토를 줄 순 없고.

"이번 달 경비는 너 다 가져라."

크라이스는 남자를 잡아 온 순간, 작센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다가 멈춘 걸 봤다.

지금 작센의 손에서 카르멘 컬렉션을 뺏는 건 어지간한 재주로는 어림도 없을 터였다.

그럴 생각도 없었고.

그렇다고 일을 시키고 입을 닦을 생각도 없었다. 엔크리드는 길드, 그러니까 크라이스에게 받을 주머니를 양보했다.

"약속한 겁니다."

만약 대가가 카르멘 컬렉션인 걸 알면 크라이스는 어떻게 할까.

그래도 그냥 넘어가려나?

사실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럴 것이다. 그냥 넘어갈 것이다.

그건 작센이 탐낸 물건이니까.

크라이스는 분대 내에서 제 위치를 잘 알았다.

분대 사이에서 살아남는 법을 익힌 건 엔크리드만이 아니었으니까.

작센이든, 렘이든, 라그나든, 아우딘이든.

그들이 바라는 거라면 크라이스는 깨끗하게 뒤로 물러났다.

목줄에 묶인 사냥개를 보고 무는지 안 무는지 확인한다고 제 손을 개의 주둥이에 넣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나중에 보자."

크라이스의 이마를 툭 밀어낸 엔크리드가 위층으로 향했다.

방 하나를 차지한 이들이다.

가운데 무릎 꿇은 첩자 부대의 리더가 있고.

토레스가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남자 옆에 서 있었다.

폴리드 쪽에서 셋, 레오나는 혼자였다.

엔크리드가 중대장과 레오나 곁에 서자, 그제야 구도가 잡혔다. 엔크리드까지 오자, 레오나가 입을 열었다.

"따로 심문해야 하는 걸 알지만, 제가 먼저 몇 가지 물어도 될까요?"

토레스를 향한 물음이었다.

"그러시오."

토레스의 태도는 첫날부터 지금까지 똑같았다.

보더 가드 외부 인사를 향해서는 언제나 딱딱했다. 레오나는 거기에 딱히 신경 쓰는 것 같진 않았다.

암살 대상이었던 레오나다. 심문까지는 아니어도 몇 마디 먼저 물을 자격은 충분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이기도 했고.

상단 승계 문제가 모든 일의 시작점이니까.

얻어터져서 푸딩이 된 남자다.

레오나는 무릎을 구부려 바닥에 꿇어앉은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누가 시킨 거죠?"

"모, 모릅니다. 제가 아는 건, 가용 자원을 이용해 여관에 있는 레이디를 노리라는 것밖에는...."

남자는 떨면서도 똑바로 말했다.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끝장나리라는 걸 예감한 듯 보였다.

"이 방 안에 혹시 아는 얼굴이 있나요?"

남자는 주변을 둘러봤다. 엔크리드를 비롯한 모두를 슬쩍 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멍청하게 직접 나서서 시키진 않았겠지.

보통 이런 일을 벌일 때는 중간에 사람 몇을 더 넣는 법이니.

이후부터는 심문의 시간이리라.

레오나를 노린 건 폴리드.

그게 밝혀지면 상단 후계를 논하는 문제는 끝일 테니.

엔크리드는 그렇게 예상했고.

"이런, 아무래도 제 주머니가 탐이 났던 멍청이 몇이 모여서 일을 벌인 모양인데요."

레오나는 예상 밖의 말을 읊기 시작했다.

"...네?"

잡혀 온 첩자 부대의 리더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한 게 아니다!"

그리고 멍청한 폴리드는 자신의 지혜를 뽐냈다.

레오나가 한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말한 거다.

"누가 뭐래요?"

레오나가 오히려 말을 받아쳤다.

"에, 아, 그게 아니고."

폴리드가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첫 만남에 대뜸 뺨을 후려갈길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이런단 말인가.

엔크리드는 자신이 폴리드의 처지였다고 해도 심히 당황했으리라 생각했다.

끝내 폴리드는 어버버 하며, 혀를 이용해서 할 수 있는 가장 멍청한 소리를 뱉어 내며 말을 잇지 못했고.

토레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폴리드를 제외한 상단 측 사람들이 오히려 덤덤했다.

상황이 묘하게 흘러갔다.

폴리드란 놈의 죄로 몰아가리라 다들 생각했으니까.

"대담하군."

뒤에서 중대장이 속삭였다. 간신히 엔크리드만 들릴 정도였다.

대담해? 뭐가?

엔크리드는 상황이 쉬이 이해되진 않았다.

궁금해지니, 절로 머리가 구르며 생각을 이어 갔다.

사람이 독특한 행동을 할 때는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

물론 렘을 포함한 분대원 들은 이유 없이 미친 짓을 하곤 하지만.

레오나가 렘은 아니니까.

엔크리드는 상황을 되새겼다.

로크프리드 상단, 폴리드, 레오나, 승계 문제, 보더 가드 내에서의 습격, 변방 수비대원, 잡아 온 놈, 아즈펜의 첩자.

알고 있는 걸 정리하고 돌아본다. 그제야 깨달은 점이 있기에, 엔크리드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대련과 단련하는 시간에 푹 빠져 미처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이다.

그걸 이해한 순간이다.

80. 레오나 로크프리드

"아즈펜의 이름으로 범죄를 덮으려 한 거죠?"

레오나가 재차 묻자.

"거기까지, 그 뒤부터는 우리 소관인 것 같은데."

토레스가 레오나의 말을 막았다.

"그런가요? 어쨌든 오해는 풀렸군요."

레오나가 생긋 웃었다. '난 순수해요, 순진해요, 아무것도 몰라요' 이런 미소였다. 물론 그녀는 전부 알았고 순진하지도 않았다.

토레스는 답하는 대신 남자의 어깨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간다."

엔크리드에게 돌아가서 보자는 인사도 없었다. 그대로 얼굴이 엉망이 된 남자의 어깨를 툭 밀어 버리곤 눈을 부라릴 뿐이었다.

"어, 어, 살, 살, 살려 주십시오."

"닥쳐라. 적군의 첩자 주제에."

"제가 아는 건 전부, 전부 말하겠습니다. 첩자 아닙니다. 오해가, 오해가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혀는 제일 나중에 자를 테니까."

토레스의 말에 남자의 다리가 풀렸으나, 그에게는 넘어질 자유도 없었다.

좌우에 붙은 대원 둘이 그를 그대로 둘러메듯 겨드랑이에 팔을 넣어 버렸으니.

토레스의 태도를 보자니,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아 짜증이 난 것 같았다.

'머리싸움이 있었구나.'

검에 미쳐서 상황을 돌아보지 않아, 이제야 보인 것들이다.

레오나는 왜 폴리드에게 죄를 뒤집어씌우지 않는가.

만약 폴리드가 사주한 게 밝혀진다면 어떻게 될까?

'그건 폴리드만의 책임인가, 아니면 로크프리드 상단에도 책임이 있는가.'

상단에까지 책임을 묻는다면 레오나는 그걸 인정하는 게 이득인가, 부인하는 게 이득인가.

만약, 상단이 자신의 것이 확실하다면 인정하지 않는 게 이득이다.

굳이 이 문제로 폴리드란 멍청이를 쳐 내지 않아도 된다면 그렇다는 얘기다.

엔크리드는 레오나가 상단 승계를 위해서 희생을 감수하고 폴리드를 쳐 내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보더 가드는 로크프리드 상단의 일원이 암살을 사주한 걸 빌미로 대가를 요구했을 것이다.

어찌 됐든 상단이 사주한 일로 도시의 명예가 더럽혀졌으므로.

도시의 명예는 곧 부대의 명예이니, 이걸 토대로 한 몫 톡톡히 뜯어 낼 수 있었을 테니까.

'상단을 위해서 이런 판단을 내렸다는 건가?'

그녀가 그만큼 자신의 상단을 아껴서 그럴까.

"왜요? 새삼 제 미모에 빠져 드셨나요?"

엔크리드는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얼굴을 빤히 보고 있었다.

이 여자는 대체 뭘까.

그녀의 얼굴은 폴리드의 뺨을 후려칠 때보다 배는 밝았다.

절로 여유가 느껴졌다. 그리 여유를 보이면서도 앉은 자세에 빈틈은 없다.

계산이 끝난 상인의 얼굴이었다.

상단의 어떤 것도 희생할 필요가 없다는 태도인데. 필시 믿는 구석이 있는 거였다.

그게 보더 가드 상비군은 아닌 거고.

정말 묘한 여자였다.

"아닙니다."

엔크리드는 답할 건 답했다.

그녀의 생각과 태도, 의도와 별개로 엔크리드는 임무를 수행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아쉽네요."

레오나가 웃었다.

저 미모가 거미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가.

그 생각을 고칠 필요가 있었다.

지금 보니 더없이 잘 어울리지 않나.

순수함이란 가면을 벗고 지은 지금의 미소는 먹이를 머금은 거미 그 자체였다.

* * *

"그동안 감사했어요."

의뢰가 끝나가는 시점이다.

여관에서 짐을 챙겨 나온 레오나가 말하고.

그 옆에서는 폴리드가 실실 웃었다. 실상, 승계 관련으로 레오나와의 말싸움을 이기길 했나, 준비한 암살이 성공하기를 했나.

그런데도 웃음기를 보였다.

그 웃음이 이제 상단의 주인은 자신이라 말하는 것 같았다.

"야, 병사 너, 나중에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질 거다."

'처음에는 작센한테 시비를 걸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엔크리드를 향해 화살촉을 돌렸다. 번번이 엔크리드를 걸고넘어졌다.

'무시해야 했나?'

친절했기에 생긴 문제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폴리드의 얼굴이 의기양양한 표정의 표본처럼 보였다.

웃음기 어린 입가, 확신에 찬 눈빛, 내적 흥분으로 인한 콧김 발산까지.

"바짓가랑이를 잡는 게 아니라 발모가지를 잘라 줄 순 있는데."

엔크리드는 괜히 상대가 대답할 거리를 주기 싫어 혼자 중얼거렸다.

그걸 들은 건 작센과 중대장, 가까이 있던 레오나뿐이었다.

"그럴 바에는 목을 자르십시오. 그게 빠릅니다."

작센은 조언을.

"남자한테도 인기가 있군, 병사."

중대장은 놀림을.

"제가 괜히 미안하네요."

레오나는 사과했다.

"응? 너 뭐라고 했냐?"

엔크리드의 혼잣말을 듣지 못한 폴리드가 물었다. 엔크리드는 깨끗하게 그걸 무시했다.

처음부터 친절 따윈 담지 말았어야 했다.

무시당한 폴리드가 잠깐 성질을 부리긴 했지만, 곧 진정했다. 뒤에 있던 수수한 외모의 남자가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금세 흥분을 가라앉힌다. 이후에도 폴리드 놈은 재차 눈을 부라림으로 자신감을 표출했다.

'누가 봐도, 뭘 준비한 거로 보이는데.'

그 준비가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뻔할 것이다.

보더 가드 내에서의 소란은 더는 용납되지 않을 테니.

'나가자마자 죽이겠다고 덤비겠지.'

여관 앞에 모인 레오나 일행의 면면을 보면 과연 상대를 감당할 수 있을까 싶긴 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자, 레오나가 옆에 다가와 말했다.

"에스코트 받는 기분이네요."

에스코트 받는 기분이 아니라, 호위 임무의 일부로써 실제 해야 할 일이었다.

폴리드는 멍청하게 속내를 보였지만, 레오나는 그 반대였다.

그녀는 뭘 믿고 있을까.

새삼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레오나의 태도에 걱정 따윈 엿보이지 않았다.

"목숨을 구해 준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후일, 기회가 되면 반드시 갚겠습니다."

2층에서 퇴역 병사라는 암살자에게 간신히 목숨을 건진 여자 호위도 다가와 말했다.

"네."

엔크리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 넓은 대륙에서 다시 만날 일이 얼마나 있다고.

다만, 주변에서 보는 이들의 생각은 달랐다.

여관 전체를 호위하던 두 개 분대가 아직 곁에 있었다. 하는 김에 호위 임무도 함께했다. 보더 가드 내에서 일어난 사고에 대한 책임이었다.

"지나가는 모든 여자와 염문을 뿌리는."

"스치는 모든 여자에게 매력이란 독을 던지기에."

"그대의 이름은 마성의 분대장이라."

근데 일은 안 하고, 시나 짓고 앉아 있는지.

"...왜들 저러는 겁니까?"

여자 호위가 얼굴이 빨개져서 말했다.

"퇴역하고 다들 음유시인이 되길 원해서 연습하는 겁니다. 놔두십시오."

엔크리드도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했다.

중대장이 그사이 레오나의 곁에 붙어 소곤거렸다. 예민한 청각이 그녀의 말을 잡아챘다.

"조심하는 게 좋겠다. 저 병사는 눈에 보이는 모든 여자를 자빠뜨리는 경향이 있으니."

뭘 자빠뜨린다는 건가.

엔크리드는 근래에 여자의 분 냄새도 맡아 본 적 없었다.

그러기에는 정신없는 일이 연속해서 그를 덮쳤으니까.

"안 갑니까? 꺼지실 때가 된 것 같은데."

엔크리드는 정중하게 두 개 분대의 병사를 배웅했고.

그들은 정말 퇴역하고 음유시인이라도 할 생각인지, 순식간에 마성의 분대장이란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미친 사람들이었다.

이번 일로 토레스 쪽, 그러니까 변방 수비대는 골이 아픈 채로 떠났는데, 이쪽 병사 무리는 태평했다.

그럴 만하긴 하지.

저들이야 시키는 일을 할 뿐이니까.

변방 수비대를 떠올리니 새삼 레오나의 수완이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로 보더 가드에 빚을 지운 셈인가.'

그녀는 말 몇 마디로 상황을 엎었다. 보더 가드 내에서 이걸 인정할지는 모르겠지만.

습격 자체를 도시 내 치안 문제처럼 몰아갔으니까.

상단의 승계 문제로 생긴 습격이라면 로크프리드 상단 책임이 될 테고.

크로나를 보고 습격한 거라면 도시의 치안 관리 문제가 된다.

'기가 막히는 일이군.'

폴리드가 시킨 짓이라는 건 다 알지만, 정작 암살 대상이 부인하니.

이런 걸 타고난 상인이라 해야 하는 걸까.

결론이 났기에 눈에 보이는 거지, 그게 아니었다면 눈치채지 못하고 넘어갔을 이야기다.

뭐, 토레스가 떠난 후 여관에 남아 있던 크라이스가 얘기를 보충해 주기도 했고.

"결국 보더 가드 쪽도 부인하긴 하겠죠. 그런데 상황이 저쪽이 유리하긴 하네요. 걔들 아즈펜의 첩자 부대라면서요?"

그게 왜 불리한지 물었더니, 크라이스가 술술 말했었다.

"아즈펜의 첩자가 일으킨 문제의 책임을 따지게 되면 그게 누구에게 유리할까요? 아즈펜의 첩자가 상단의 크로나를 노렸다는 것과 도시 내에 분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것, 어떤 이야기에 더 무게를 두고 싶으세요?"

크라이스 말이 이해됐다.

아즈펜이란 이름이 나온 순간부터 이건 상단에 유리한 상황이 된 거다.

결국, 조국의 영광을 부르짖고 뒈져 버린 첩자 덕이라 하겠다.

엔크리드는 그 얘기를 들으며, 크라이스의 머리도 레오나 못지않게 잘 돌아가는 걸 알았다.

본래 머리 좋은 건 알았지만.

'대형 상단의 후계와 엇비슷해 보이는데.'

잠깐 머릿속을 스친 생각일 뿐이다. 머리가 좋으면 뭐 하나.

크라이스의 꿈은 귀부인을 등처먹는 살롱을 차리는 것인데.

이런저런 생각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성문 입구다.

위병을 서는 병사가 엔크리드와 일행이 다가오는 걸 보고 몸을 돌렸다.

"엔크리드라고 했지?"

그들을 보고 있는데 어느새 다가온 폴리드 쪽 검사가 말을 걸었다.

"난 그쪽 이름을 못 들었는데."

"그건 미안하군, 여기서 이름을 밝힐 처지가 못 돼서."

"...."

갑자기 다가와 왜 말을 거나 빤히 보니, 검사가 엔크리드의 뒤쪽을 향해 말했다.

"몇 마디 말만 하려고 한다. 살기는 거두지."

엔크리드의 우측, 어느새 작센이 바짝 다가와 있었다.

"예민하시군. 살기라니."

작센이 답했다. 폴리드를 그렇게 무시한 놈이, 여기서는 대답을 곧잘 했다.

"걱정하지 마라. 살기 없이도 사람 목 베는 건 쉬운 일이다."

중대장은 또 언제 온 건지, 그녀가 폴리드 쪽 검사의 뒤편에 섰다.

검사는 둘을 한 번씩 보고는 깔끔하게 외면하고 엔크리드를 바라봤다.

"검을 놔라."

대뜸 하는 말이다.

"열정만으로 되지 않는 일도 있는 법이다."

엔크리드로서는 아주 오랜만에 듣는 얘기다.

포기해라. 재능이 없다. 시간 낭비다. 길이 없는 곳을 걷는 것과 같다.

꼭 맞아 봐야 아픈 걸 아는 거냐?

칼에 베이면 아프다는 걸 이제는 너도 알지 않느냐?

수련에 시간을 쏟는 만큼, 재능이 보잘것없음을 알 수 있는 법임을 왜 느끼지 못하는가.

느끼지 못하긴, 그래, 안다.

무수히 많이 듣던 얘기.

말 몇 마디에 좌절과 절망의 늪에 빠지지 않더라도 엔크리드도 알긴 했다.

자신이 기사가 될 순 없다는걸.

그래, 한때는 그랬다.

그래도 검을 휘둘렀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찢기고 바란 꿈의 조각을 그저 품고만 살아왔다.

앞을 가로막은 벽이 어찌 생겼는지 볼 수도 없었다. 주변이 모두 암흑이었다.

그런 때도 손아귀가 터질 때까지 검을 휘두르며 살아왔는데.

지금 이런 얘기를 들었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을까.

야수의 심장, 칼날의 감각, 한 점의 집중, 고립의 기법.

중검식을 비롯한 검술의 기본.

발렌 식 용병검의 응용.

반복되는 오늘, 계속되는 단련과 수련, 늘어나는 실력.

누군가의 눈에는 거북이보다 느린 반걸음이, 엔크리드에게는 과거 그 어떤 때보다 의미 있는 반걸음이었기에.

그렇게,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보였다.

"웃는 건가."

검사가 그걸 보고 읊조렸다.

"괜한 걱정을."

작센이 한마디 하고.

중대장은 묵묵히 엔크리드를 바라봤다.

검사는 대답을 원했고 엔크리드는 그가 바라 마지않던 답을 던졌다.

"다음에 보면 내가 이길 수도 있다."

사람의 앞날을 예단하는 건 오만한 짓이다. 엔크리드가 말했고.

"그렇군."

검사는 귀를 닫은 상대에게 굳이 제 생각을 강요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성문을 앞에 두고 일어난 작은 소요다.

"정말 수고하셨어요."

성벽 앞에 다다랐을 때다.

레오나는 뒤로 돌아서며 엔크리드를 포함한 이들에게 말했고.

이대로 나가나 싶은 순간이다.

엔크리드의 눈에 위병이 고개를 앞뒤로 돌리면서 일행과 바깥을 번갈아 보는 게 보였다.

곤란한 기색이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성벽 바깥, 일대의 무장 집단이 보였다.

그걸 보는 순간 알았다.

상대가 무력을 앞세웠다면 이쪽은 무엇을 내세워야 하는가.

레오나가 믿는 카드였다. 그들이 성벽 밖에 있었다.

"로크프리드 상단 호위대 매티스, 여기 왔습니다."

유일하게 성벽 안에 들어와 있던 자다.

가지런한 콧수염을 기른 자였다. 발걸음은 가벼워 보였고 걸친 코트의 어깨 위로 먼지가 쌓였다.

무력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대륙에서 상단의 이름을 세울 수 없다.

주변 도적과 산적, 마수와 마물에 다 뜯어 먹혀 뼈다귀로만 장사할 게 아니라면, 무력은 필수다.

나선 남자는 로크프리드 상단의 무력을 책임지는 이였다.

그는 다가와 자신을 보이는 것만으로 모두의 시선을 모았다.

엔크리드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자신의 시야에 매티스란 남자만 가득했기에.

그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기세가 남달랐다. 그는 기세만으로 모두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재밌는 친구들이 같이 있군요."

그는 그리 말하고 레오나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호위대가 왔습니다. 단주."

남자가 레오나에게 말했다.

엔크리드는 그제야 그의 뒤로 시선을 던질 수 있었다.

로크프리드 상단 호위대.

서른 명 이상의 무장 병력이 성문 밖으로 진을 친 게 보였다.

81. 매사 최선을 다하기에.

매티스란 남자의 등장 이후.

"얘가 왜 단주야?"

폴리드의 멍청한 물음이 뒤따랐고.

"우리가 여기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상단 내부에서는 이미 모든 일이 끝났으니까요. 아, 취임식은 돌아가서 하기로 했어요."

그 답은 레오나가 했으며.

이후 상황을 파악한 폴리드 쪽 사람들이 눈치를 보기 시작하자, 레오나가 그들을 향해 손짓했다.

"오세요. 받아 줄게요."

실제로 이렇게 말한 건 아니었으나, 엔크리드가 듣기에는 별반 다를 바 없는 내용이었다.

이제 상단의 이름 아래서 하나가 되어 살아 보자, 뭐 이런 말이었으니까.

움직이지 않은 건 둘이었다.

수수한 인상의 남자와 엔크리드에게 검을 놓으라던 검사.

아, 폴리드도 남았다.

그는 턱- 하고 무릎을 꿇었다. 다리에 힘이 빠진 것처럼 보였다.

"왜? 내가 아들인데? 상단 사람은 전부 아버지 사람이잖아?"

왜겠나. 하는 짓을 보니 오히려 폴리드 쪽에 붙은 이들의 지능이 의심스러운 수준인데.

엔크리드의 시선이 남은 둘에게 꽂혔다.

아마도 수작을 부린 건 저쪽인 듯했다.

둘은 딱히 위기에 빠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둘을 제외한 모두가 몸을 돌렸음에도 덤덤했다.

"끝났군."

검사가 말하고.

"그러게요."

수수한 인상의 남자가 답한다. 둘은 그대로 폴리드를 외면했다.

"인정할 수 없다! 이게 무슨! 내가 아들인데!"

폴리드가 외치며 레오나에게 다가가려 하자 매티스가 그 앞을 막았다.

"더 다가오면 베겠다. 전대 상단주의 아들."

까칠한데.

그거로 상황 종결이었다.

엔크리드가 볼 때 수작을 부린 것처럼 보인 둘은 그대로 뒤로 물러났고.

폴리드는 좌절과 절망에 빠져 공황 상태에 빠진 사람이 어떻게 변하는가를 실시간으로 보여 줬다.

턱- 하고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침을 흘리기 시작했으니.

애가 좀 많이 놀랐네.

주변을 오가는 행상 무리, 도시 내의 상인, 병사, 성문 근처의 거지 무리까지 그들을 바라봤다.

위병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표정을 짓자, 레오나가 나섰다.

"데려가요. 전대 단주의 아들을 길바닥에서 침 흘리다 죽게 할 순 없습니다."

"네."

매티스가 밖을 향해 손짓하자, 누군가 들어와선 폴리드를 질질 끌고 나갔다.

위병이 편히 나가라고 길까지 비켜 줬다.

"잠시만."

레오나는 매티스에게 말하곤 엔크리드 앞으로 다가왔다.

"카르멘의 스틸레토는 부하에게 준 건가요?"

어째 여자한테 받은 선물을 다른 사람한테 내준 그런 기분이 드는 말투다. 엔크리드는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마음이 조금 불편해졌다.

"...많이 원해서. 네, 줬습니다."

뒤를 슬쩍 보니, 작센이 묵묵히 서 있는 게 보였다.

처음 스틸레토를 줬을 때, 작센의 반응은 일반적이진 않았다.

눈물을 글썽거릴 정도로 감격하지 않을 줄 알긴 했지만, 그저 덤덤했다.

스틸레토를 챙기고 한마디만 툭 뱉었을 뿐.

"오감을 계속 단련하는 건 무엇을 위해서인가, 어떻게 뒤에서 날아오는 단검을 보지도 않고 피할 수 있는가."

누군가에게는 헛소리가 누군가에게는 바라 마지않던 답일 수 있었다.

"다음에 배울 내용입니다."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작센은 거래할 줄 아는 놈이었다.

"그렇군요."

레오나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웃는 걸 봐도 뭔가 마음의 빚을 진 기분이 든다.

정말 묘한 여자다.

그녀는 물끄러미 엔크리드의 얼굴을 보며 재차 입을 열었다.

"전 상인이고, 거래는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부터 시작이죠. 고가의 물건을 줬더니 부하에게 줘 버리고 미모의 여성이 둘이나 있음에도 눈을 돌리지 않았죠."

레오나는 보더 가드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고.

그 남는 시간에 탐나는 상대를 관찰했다.

과연 이 남자는 무엇을 원하는가.

보물이나 다름없는 물건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하에게 단검의 유래를 들으며 은근히 질린 표정을 보였다.

욕심이 없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욕망에 빠져 허우적거릴 인간처럼 보이진 않는다.

레오나는 자기 외모가 지닌 강점을 잘 알았다. 그러하기에 슬쩍 유혹하는 몸짓도 보였지만.

"여성 편력이 심하다. 조심해라."

중간에 틀어막는 요정도 있었고.

틈이 보여 성큼 다가가도 엔크리드가 넘어오지 않기도 했다.

'뭘까, 이 남자가 바라는 게.'

그때부터는 상인으로서의 자존심도 꿈틀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인이란 무엇인가, 거래를 성사되도록 하는 사람이다.

황야의 양치기, 검은 가죽 길드, 글레이셔 레인져.

모두 폐쇄적인 집단이다. 그런 곳과도 거래를 트는 게 상인이다. 그게 바로 로크프리드다.

레오나는 로크프리드를 사랑했고 자부심도 있었다.

상대는 일개 병사, 고작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지위가 그렇다.

'신경 쓰여.'

상대를 원하긴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선이 있는 법이지만.

이제는 자존심까지 걸린 셈이지만.

레오나는 상대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보였다.

거래의 기본, 상대가 원하는 게.

'물건이 아니었어.'

카르멘 컬렉션이야, 상단을 집어삼키기 위해 보인 대가이기도 했다.

다들 단검에 시선이 팔리고, 기습을 감행한 집단을 신경을 쓸 때, 그녀가 가진 자원은 이미 상단 내부의 일을 단속하는 중이었으니까.

겸사겸사 엔크리드란 남자의 탐욕을 보는 용도로 썼지만, 잘못 짚은 셈이었다.

레오나는 관찰한 뒤에야 알 수 있었다.

그가 바라는 것, 미래다.

자신의 미래. 더 나아지는 검술, 실력, 무력.

그래서 매티스를 안으로 불러들였다.

로크프리드 상단 최고의 전사이자, 한때 도시급 용병으로 이름 날린 호위대장.

"어떤가요, 매티스의 밑에서 검을 단련해 보는 건. 당신의 미래를 이곳에서 키워 보는 건?"

강한 사람과 제 몸을 단련하는 게 끌린다면.

이게 답이었다.

물론 엄청난 착각이었다. 레오나는 엔크리드의 분대원을 몰랐다.

'대단한 사람이긴 한 것 같은데.'

레오나가 상황을 정리할 때 작센이 해 준 얘기가 있으니.

"작은 도시 하나라면 대표할 만한 실력자입니다. 딱 그 정도란 겁니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실력을 몇 번 보인 것만으로도 도시 내에 그 이름이 절로 퍼지는 것.

그게 바로 도시급 실력자였다.

"토레스와 비교하면?"

"병사 등급제 기준으로 보자면 특급 이상, 하지만 기사는 아닙니다."

작센의 평가는 냉정했다.

특급 이상이지만, 기사는 아닌 이들.

'분대 내에 널렸다고 말해야 할까.'

렘도, 라그나도, 작센도, 아우딘도.

그 넷 중 누구도 매티스란 작자에게 질 것 같진 않았다.

하물며 그들에게 이미 배워 증명된 바가 있음에.

"사양하죠."

대답에 망설임이 없는 이유다. 레오나는 처음으로 표정 관리를 실패했다.

"이렇게 탐나는 무언가를 놓치는 건 처음이네요."

엔크리드는 이 수완 좋은 아가씨이자, 빼어난 미녀인 상단주가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든다고 어설픈 수작을 부리지 않는 점이, 특히.'

그러고 보면 참 재밌는 일 아닌가.

이번 일에서 만난 사람 중 하나는 자신에게 검을 놓으라 했고.

다른 하나는 탐이 나니 제 곁에 와 달라 한다.

상반된 평가다.

"꼭 옆에 둬야 하는 겁니까?"

엔크리드의 입이 열렸다.

상대가 자신에게 가진 호감이 그리 나쁘게 다가오지 않기에, 엔크리드도 상대를 호의로 대했다.

그 말에 레오나가 눈을 깜빡였다.

"그건 그렇네요. 의뢰는 끝났고. 그럼, 우리 친구 할까요? 하루는 친구랑 시간을 함께해 줘도 될 것 같은데? 어때요?"

친구까진 아니더라도 적당한 호감을 지닌 채, 잘 지내 보잔 말이었는데.

"...네?"

"이것도 거절한다면 가련한 소녀는 여기서 좌절할 것 같은데요."

가련한 소녀는 누가 가련한 소녀인가.

지금 막 로크프리드란 상단을 차지한 주인이 됐으면서.

"매티스, 저 하루만 더 도시에 머물러도 될까요?"

"뜻대로."

매티스가 뒤로 물러나고.

"부대의 허락이 필요하겠죠?"

이어진 레오나의 말에 엔크리드 대신 중대장이 답했다.

"의뢰를 수행한 대가로 만 하루의 휴가를 허락하지."

의외의 대답이었다.

"왜요? 싫어요?"

레오나가 짓궂은 미소를 보이며 물었다. 새삼 외모가 가진 힘을 알겠다.

저런 표정을 지어도 귀여웠다.

상단을 통째로 집어삼킨 거미가 귀여운 표정을 짓다니.

엔크리드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안 싫습니다."

참 많은 교관을 만났지만, 그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다.

쉴 땐 쉬어라.

밤낮없이 검을 휘두르고 제 몸을 혹사하는 것만이 답은 아니었다. 엔크리드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묘하게 마음의 빚이 생겼기에 그걸 해소하고도 싶었다.

"좋아요. 그럼."

레오나는 다시 매티스에게 향했다. 그사이 작센이 다가왔고, 그걸 본 엔크리드가 먼저 말했다.

"이상한 소문 내지 마라."

"야만인한테나 할 법한 소리입니다. 제가 그럴 것 같습니까?"

엔크리드는 작센을 데려온 걸 다시 한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렘이었다면 없던 얘기도 퍼졌을 거다.

"수고했다. 병사."

중대장은 레오나와 둘이 남는 걸 딱히 막지 않음으로 이제까지 했던 말이 농담임을 증명했다.

"내가 그리우면 돌아와도 좋다. 병사."

그런데도 꼭 요정식 농담을 덧붙였다. 하도 듣다 보니 이제는 곤란한 기분도 안 들었다.

"네, 그러죠."

태연히 받아넘기자, 작센이 옆에서 슬그머니 말했다.

"혹시."

"혹시?"

"카르멘 컬렉션 중 가진 게 더 있다면 미남계를 써서라도 가져오십시오."

이 새끼 이건 농담인가, 아니면 진심인가.

요정 중대장의 농담보다 더 판단하기 어려웠다.

"농담입니다."

그나마 농담이라 말하는 걸 보니 다행이었다.

아니, 근데 반쯤은 진심이 담긴 것 같기도 하고.

카르멘 컬렉션, 정말 진심으로 바라지 않았던가.

"먼저 가겠습니다."

작센과 중대장이 물러나고, 레오나도 상황을 정리하고 다시 왔다.

"가죠."

그 뒤엔 엔크리드와 레오나는 한때를 즐겼다.

시장을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괜찮은 식당의 위치를 이미 꿰찬 엔크리드의 안내로 배를 채웠다.

"이건 정말 맛있는데요?"

그중 약초 파이와 바네사의 호박 수프를 먹곤 엄지를 치켜들기도 했다.

바네사의 호박 수프, 네 개 여관 중 음식 맛으론 가장 일품인 곳에서 자랑하는 요리다.

"이것도 맛있네요?"

레오나의 농담 한마디에 웃고, 역으로 엔크리드가 던진 말에 레오나도 키득키득 웃었다.

뜬금없는 시간이었지만, 우습게도 꽤 재밌는 시간이었다.

해가 떨어지고 나서는 한두 잔의 술을 마셨으며.

"즐거웠어요."

밤을 같이 보냈지만, 육체적으로 서로를 탐하는 일은 없었다.

"좋아요. 우린 오늘부터 친구예요."

"그러죠."

그렇게 친구가 되었고, 아침까지 수다를 떨다가 헤어졌다.

엔크리드가 사이사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짓긴 했으나, 둘 모두에게 즐거운 시간임은 분명했다.

* * *

"어쩐 일인지."

매티스는 엄청 드문 일이라고 생각했다.

레오나는 쉬는 걸 모르는 여자였다. 지독했으며 확실했고 능력이 출중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그가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즉, 레오나는 폴리드란 머저리와는 차원이 달랐다.

'전대 상단주의 아들이란 놈이.'

어디서 주워 온 자식이란 소문이 도는 게 당연할 정도로 멍청했다.

어릴 때부터 폴리드와는 아예 궤가 다른 삶을 산 레오나다.

그녀가 고작 남자 하나에 하루 동안 저리 묶인다?

드문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존중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상단의 앞날을 밝습니다.'

이제 로크프리드 상단은 전대가 있을 때보다 더 나은 길로 향할 것이다.

매티스는 레오나를 믿었다.

하루의 휴식을 끝내고 단주가 후련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가죠."

그렇게 상단은 제 갈 길로 향했다. 승계를 위해 마지막 말을 나눠 보란 상단주의 유언을 지키되.

뒤로도 할 일을 다 했다.

그렇게 레오나는 모든 걸 집어삼켰다. 이게 그녀가 보인 답이었다.

전대 상단주는 그녀를 구했고, 길렀다.

폴리드를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 그녀는 은혜를 갚는 셈이었다.

실제 유언의 의도가 거기 있다는 걸 레오나도 잘 알았다.

그녀는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지난밤을 떠올리다 웃었다.

'재밌었어.'

이제껏 이득 없는 대화를 한 게 몇 번이나 될까.

목적 없는 수다를 떨다니, 퍽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엔크리드.'

상대의 이름이 뇌리에 남았다.

* * *

수수한 인상의 남자와 세검을 다루는 전사는 폴리드 일행으로부터 나와서 밖으로 향했다.

둘을 잡는 사람은 없었다. 매티스란 작자가 매섭게 노려보긴 했지만.

"놔두세요."

레오나의 한마디로 끝이었다.

둘은 그대로 성문 밖으로 나섰다.

끝 계절, 겨울이 끝나 간다고 해도 둘만 떠나기에는 험한 길이었다.

마수와 마물이 언제라도 튀어나올 수 있으니.

하지만 둘은 그런 걱정 따윈 하지 않았다.

"왜 그러신 겁니까?"

둘은 소속이 같았다. 한 국가의 일원이었다.

그중 세검을 지닌 전사는 출중한 실력자였다. 어지간한 마물 따위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그런 실력자.

수수한 외모의 남자는 그런 전사의 무심한 성격을 알기에 이번 일이 신기했다.

지나가는 사람, 그것도 좋게 말해야 타인이고 나쁘게 말하면 적이라 할 수 있는 자를 위한 조언이라니.

"보고 있자니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세상일이란 게 뭐든 딱 부러지게 끝나는 게 아님에야.

이런 일도 있는 법이다.

"그렇군요."

수수한 남자는 수긍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었다.

공작에 실패했으나, 얻은 건 있었다. 다음 대 로크프리드 상단주란 여자의 능력이 몹시 출중하다는 것.

정보란 어느 때든 소중한 것이었다.

* * *

엔크리드는 아침나절에 부대에 돌아왔다.

"아주 신이 나셨네, 신이."

오자마자 렘이 그를 반겼다.

이미 다 들었군.

첫마디에 알 수 있었다.

"좋았수?"

착각할 만했다. 레오나와는 그저 말만 나눴을 뿐이지만.

여기서 어떤 답을 해도 헛소리가 나올 터였다. 렘은 그런 놈이니까.

엔크리드는 답하는 대신 검을 들었다.

"대련?"

"이 지겨운 양반, 좋수다."

렘은 더 따지지 않고 제 도끼를 들었다. 그는 엔크리드가 돌아와서 첫 대련 상대로 자신을 꼽는 걸 좋아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엔크리드는 렘과 마주 섰다.

그리고 레오나와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곱씹었다.

묘한 일이다.

휴식이었고 휴가였다.

검에 관한 걸 잊고 푹 쉬었다고 봐도 좋았다.

밤새 레오나와 떠들기도 했고.

수다의 연속, 의미 없는 대화라고 봐도 좋을 그런 시간.

그런데 왜.

'될 것 같다.'

레오나와 시간을 보내며 엔크리드는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무언가를 체감했다는 게 옳은 말일 터였다.

시간이 느려지거나, 집중력이 타올라 어떤 변화가 찾아온 게 아님에도.

그냥 될 것 같았다.

아무렇지 않게 보여 줄 수 있을 듯했다.

검을 휘두르는 궤적, 그 전에 내디딘 발, 어깨의 움직임.

모든 것이 섞이며 하나의 답을 내놓는다.

빠름이란 무엇인가.

세검을 쓰는 검사를 상대했을 때부터 가졌던 의문에 어설프지만, 답 일부를 보일 수 있을 것 같았다.

82. 좀 변한 것 같수다.

그동안 본 게 많았다.

빠름에 관련된 건, 특히나 더.

폴리드란 머저리 뒤에 있던 검사가 계기가 됐으나.

그보다 먼저, 항상 보던 것들.

대련마다 마주했던 순간들.

채찍처럼 휘어지는 도끼질이다.

폴리드란 머저리를 따라온 검사의 검.

렘의 도끼질.

전장에서 경험하고 체득한 것.

그동안 홀로 단련하고 고민했던 것.

고립의 기법으로 변한 몸까지.

모든 것이 집약되어 머릿속에 내려앉는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감각이 몸 안에 자리 잡고.

엔크리드는 한 점의 집중 상태에 들어섰다.

오롯이 검과 자신만이 남은 세상.

손에 쥔 감촉마저 멀어진다. 눈에 보이는 건 점과 점을 잇는 선.

필요한 건 선을 잇는 데 필요한 근력.

마주한 렘의 눈을 본 순간, 그걸 토해 내니.

늘어뜨린 검 끝이 점과 점을 잇는 가장 짧은 선을 그렸다.

검 끝이 목을 꿰뚫는다.

환상이 보였다. 진짜라고 착각할 만큼 뚜렷한 환상이.

환상 속에서 엔크리드의 검은 렘의 목을 뚫었다.

렘은 목에 구멍이 나서 쓰러졌다.

피가 흘러 바닥을 적시고.

쓰러진 렘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피거품을 물었다.

그 눈에 원한 따윈 보이지 않았다. 오롯한 놀람만 보였을 뿐.

"시발, 이번 건 진짜 빨랐수."

얼마나 놀랐는지, 욕설로 시작한 한마디에 엔크리드의 환상이 깨지고 무너졌다.

환상으로 남은 장면이 깨진 유리 조각이 되어 와르르 흘러내리는 듯했다.

깨진 유리 너머, 놀란 눈의 렘이 보였다. 놀란 것도 잠시다. 곧 렘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 같은 눈이다.

"무슨 짓을 한 거요?"

묻는 렘의 목덜미에 핏자국이 보였다. 칼날이 스친 탓이었다.

"골로 갈 뻔했수다."

연이은 말에 엔크리드가 입을 열었다.

"미안, 죽일 뻔했다."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데, 우리 분대장 졸라 컸수, 정말."

"본래 나이는 내가 더 많지 않나?"

키도 엔크리드가 더 컸다.

"거참. 재밌는 작자라니까."

말과 함께 렘이 도끼를 불쑥 찔렀다.

엔크리드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걸 피하자, 도끼날이 엔크리드의 뺨을 따라 따라오기 시작했다.

대련의 연속이다.

이후, 엔크리드는 렘의 도끼질에 반쯤 생사를 넘나들어야 했다.

"빨리 휘두른다는 게 뭔지 깨달은 거요? 좋수다. 더 해보자니까."

이건 뭘까, 목에 생채기가 나서 그런 건가? 반쯤은 원한이 깃든 것 같은데?

그러면서도 엔크리드는 물러서지 않았다.

"또 날 죽일 것 같아서 쭈뼛대는 거요? 걱정하지 마쇼. 내가 먼저 죽일 테니."

렘의 눈이 사납게 빛났다. 이후 그의 팔은 채찍이 아니라 빛살이 되었다.

이제껏 간신히 피하고 막고 튕겨 내던 도끼날이 어느새 엔크리드의 목덜미에 닿았다.

피부에 생채기조차 내지 않은 채로.

툭 도끼날이 목을 치고 뒤로 물러났다. 날이 서지 않기에 상처가 생기진 않았다. 차가운 도끼날의 감촉만 남았을 뿐.

"제 손에 든 무기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면 그건 반푼이요."

대련의 끝을 알리며 렘이 남긴 말이다. 차디찬 땅 위에 드러누운 채로 엔크리드는 조금 전 대련으로 얻은 것을 정리했다.

빠름이란 무엇인가.

지금 내린 결론은 궤적, 동선이다.

점과 점을 잇는 선을 단숨에 그려 내는 동작이다.

거기에 필요한 것, 머릿속에 선을 그릴 것, 그린 선을 그대로 구현하는 데 필요한 건 또 무엇인가.

몸이다. 몸이 따라 줘야 한다. 그러므로 육신의 단련이 필요할 터였다.

도끼가 채찍처럼 휘어져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근력, 단련된 근육, 운동 능력.'

이제껏 아우딘이 몸에 쌓으라 했던 것들 아닌가.

고립의 기법을 통해 얻은 것과 같다.

근력은 기반이다.

손에 쥔 검을 어느 때보다 빠르게 찌르거나 휘두르는 행위의 기반.

거기에 동선의 개념을 담는다.

점과 점을 잇는 선을 머릿속에 그린 직후 한순간 실현해 내기에.

'이게 빠름이다.'

정중환쾌유.

그중 쾌검식의 일부였다. 엔크리드는 쓰러진 채로 웃었다.

"푸후."

오늘을 반복하지 않았음에도.

죽음을 반복하지 않았음에도.

검은 강의 뱃사공을 만나지 않았음에도.

'내일을 위한 검.'

자신의 성장을 실감했기에.

무엇보다 누군가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달았기에 더 뿌듯했다.

재능이 없다는 소리만 듣던 삶이다. 그런 삶 속에서 이런 경험을 하리라고 언제 상상이나 했던가.

'더 할 수 있다.'

나아갈 길이 보이기에 엔크리드는 심장이 두근댔다.

이후 렘이 남긴 말을 파고들었다.

복기와 궁리.

안으로 침잠할 시간이었다.

"얼어 죽고 싶지 않으면 안으로 들어오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바닥에 드러누운 엔크리드를 향한 목소리, 작센이었다. 외부에 나갔다가 들어오는 듯했다.

평소와 같은 무덤덤한 표정의 작센이 어깨 위에 두른 온열 가죽 망토를 바람에 펄럭이며 다가왔다.

엔크리드는 누운 채로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났다.

뽑았던 검을 검집에 넣고, 굳은 목을 좌우로 풀고.

그리 일어나 숙소로 들어가는데, 갑자기 전신에 소름이 돋고 모골이 송연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전신 근육이 바짝 긴장했다. 본능의 영역에서 일어난 반응이었다.

반사적으로 뒤로 몸을 돌려 재차 검을 뽑았다.

챙!

칼날과 검집의 마찰음이 울리고.

엔크리드는 자기도 모르게 호흡을 참고 있다는 걸 깨닫곤 그제야 숨을 내쉬며 상대를 봤다.

살기의 진원지, 세 걸음 뒤다. 작센은 여느 때와 같이 평범하게 서 있을 뿐이다.

아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오른팔을 밑으로 늘어뜨렸을 뿐.

"나쁘지 않군요."

그런 엔크리드를 보고 작센이 말했다.

뭐가 나쁘지 않다는 건지, 엔크리드는 조금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만, 작센이 뭔가 했다는 건 알았다.

살기를 뿜어내는 행위 자체가 이리도 살벌하게 사람을 옥죌 수 있던가?

"카르멘의 스틸레토는 아주 좋은 단검입니다."

작센이 재차 입을 열었다. 그제야 엔크리드는 작센이 자신이 말한 바를 지키려는 걸 알았다.

"오감을 계속 단련하는 건 무엇을 위해서인가, 어떻게 뒤에서 날아오는 단검을 보지도 않고 피할 수 있는가."

작센이 했던 말이다.

그리고 지금 보여 준 게 스틸레토의 대가일 테고.

"상대를 죽이려는 의지를 다질 때, 자기도 모르게 기세가 실리곤 합니다. 그걸 살기라고도 부르죠."

기세, 살기, 투기, 의지.

모든 것이 비슷한 개념이었다.

엔크리드는 매티스란 이름의 상단 호위 무사를 떠올렸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며 기세를 드높였다. 그것만으로 모두의 시선을 모았다.

작센은 그걸 통해 상대를 도시급 강자라 평했고.

"살기를 감지하는 법입니다. 지금 보인 건 사실상 지나가던 꼬마 아이도 느끼고 기겁할 수준이었으니 느끼는 게 당연한 거고. 계속 느끼십시오. 오감을 포함한 모든 거로 느낍니다. 그게 바로 '칼날의 감각'의 다음 단계, '육감의 문'입니다."

두근.

다시금 심장이 뛰었다.

빠름에 관한 개념을 세울 때만큼이나.

"알겠다."

대답은 덤덤하게 했으나, 대담함을 지닌 심장은 연신 뛰었다.

이 또한 즐거워 미칠 것 같았기에.

오늘을 반복하며 엔크리드에게 생긴 가장 큰 변화라면 이런 부분일 것이다.

하루하루가 더없이 즐거워졌다는 것.

이전에는 느껴 보지 못한 성장의 즐거움이 채찍과 당근이 되어 엔크리드의 등을 떠밀었다.

너는 더 할 수 있다고, 여기서 멈추지 않아도 된다고.

'무엇을 위하여.'

목표 또한 명확했다.

기사.

꿈은 그대로 빛나는 별이 되어 엔크리드의 가슴 안에서 빛났다.

"들어가시죠."

작센은 그리 말하곤 먼저 숙소 안으로 들어갔고.

그 뒤 엔크리드가 들어가자.

"오늘치 단련은 하셨습니까?"

아우딘이 묻는다.

"아직."

이 또한 해야 할 일이다. 하기 전에는 전신을 통증의 바다에 던져 넣는 짓이기에 괴롭지만, 또한 괴롭지 않기도 했다.

괴로움의 바다를 넘은 뒤 입 안에 떨어질 과실이 너무도 달콤하기에.

육신을 쥐어짜 얻는 괴로움이 즐거움으로 화했다.

"시작하시죠."

이후 아우딘과 고립의 기법을 시작.

단련을 끝낸 후 녹초가 된 몸을 씻고 돌아와 침대에 누우려고 하자, 에스터가 먼저 제 침대에 누운 게 보였다.

가슴 앞에 앞발을 모은 뒤, 그 위로 얌전히 머리를 올린 채였다.

엔크리드가 손을 뻗어 에스터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다.

카-앙!

손끝이 막 정수리 부근에 닿을락 말락 하는데 에스터가 손등을 할퀴어 물러났다.

에스터가 작정하고 발톱을 휘두르면 손등을 할퀴는 게 아니라 손목을 잘라 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지금 보이는 건 귀여운 앙탈이라 봐야 옳을 터였다.

다만.

"왜 또 그러냐."

이유를 모를 뿐.

그걸 보고 옆에서 크라이스가 쿡쿡 웃었다.

"그러게요. 아니, 마성의 분대장 노래를 들을 때부터 저러더라고요."

결국, 하릴없는 위인들이 마성의 분대장이란 노래를 신나게 불러 젖힌 모양이었다.

"유후, 도시 안의 모든 여자를 눕힐!"

"지나가는 여자 모두를 노리는 사냥꾼!"

"마성, 마성, 마성의 분대장!"

크라이스가 첫 소절을 시작하고 렘이 덧붙였다.

가사도 음률도 엉망이었다. 사실상 진짜 노래라 부르긴 힘들지만.

"캬악."

뭐 때문인지, 에스터는 그 노래가 아주, 매우, 몹시 싫은 듯했다.

노래를 듣자마자 곧바로 표독스러운 울음을 토해 내니.

'크라이스 때문인가.'

크라이스는 노래를 더럽게 못 했다. 의외로 렘은 남자다운 목소리로 곧게 지르는 편이라 듣기 괜찮은 편이고.

"중대장은 어쩌고? 다른 여자를? 마성의 분대장."

옆에서 라그나가 물었다. 진짜 궁금한 것처럼 보였으나, 저 자식 또한 놀리기에 진심일 뿐이었다.

"닥쳐라."

일일이 오해를 푸느니, 얌전히 소문이 가라앉길 기다리는 게 나았다.

괜히 말 한 번 더 꺼내면 불이 더 크게 붙을 판이었다.

"그래서 했수, 안 했수."

그래도 이건 답해야 했다. 레오나의 명예와도 관련된 문제니.

"안 했다."

"...그거 음, 진심이우?"

"이런 거로 거짓말할 이유는 없지."

자면 또 어떤가.

사실 그렇다. 이걸 괜히 거짓으로 무마할 필요는 없다. 그런 엔크리드의 성격을 알기에 렘도 엔크리드가 한 말이 진실임을 알았다.

"고자요? 어느 틈에 잘린 거요? 그래서 그런 거요?"

이 새끼는 진짜.

"괜찮습니다. 마성의 형제님, 신은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잘려도 사랑하십니다."

거기에 아우딘의 한마디.

근데 왜 형제님 앞에 '마성의'가 붙는 걸까.

"풉."

크라이스가 웃고.

작센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누르며 외면.

라그나는 '그럼 중대장과는 어떻게 한 거지?'라는 말을 뱉어 드물게 엔크리드의 화를 돋웠다.

"미친 새끼들."

분대원 전부 정상은 아니다. 엔크리드는 이 안에서 정상인이 자신밖에 없기에 안타까웠다.

화를 내면 뭐하나.

어차피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놈들인걸.

엔크리드는 자기들끼리 싸우는 것보다 이게 더 나은 것 같다는 걸 위안으로 삼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 합심해 엔크리드를 한참 놀린 뒤다.

"좀 변한 것 같수다."

누운 엔크리드를 보고 렘이 대뜸 말했다.

"나도 같은 생각인데."

라그나가 덧붙였다. 나머지는 귀만 기울였다.

변해? 엔크리드는 렘의 말에 생각했다.

자신이 변했나? 어떤 점에서?

"요새 자꾸 묘하게 웃는 것 같은데. 또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고."

이전에는 잘 웃지 않았던가?

새삼 엔크리드는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어땠었던가.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그때도 지금도 발악하는 건 마찬가지라는 것.

다만, 그때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헤쳐 나가는 중이었다면.

지금은 제 앞에 놓인 길이 어렴풋이나마 보인다는 것.

그 길이 보인다는 게, 재능이 있는 자들은 상상도 못 할 즐거움을 줬다.

"원래도 검에 미친 작자라는 건 알긴 했지만, 그래도 최근에는 좀 심한 편인 것 같기도 하고. 웃는 것도 그렇고, 실력도 부쩍 늘었고. 하여간 변했수다."

이유도 변변찮은 주장이었으나, 그걸 다른 분대원이 동의했다.

"예전보다 조금 더 미친 것 같긴 해요."

마지막은 크라이스가 장식했는데.

엔크리드는 그 말에 조금도 동감할 수 없었다.

자신처럼 무던하고 평범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단련하고 수련하는 데 조금 더 시간을 투자하고, 다른 이들보다 꿈이 조금 클 뿐.

"그게 뭐 나쁘다는 건 아니유."

렘이 덧붙였다. 엔크리드는 무시했다. 밤이다. 잘 시간이었다.

떠들 시간이 아니고.

이후 작센과 크라이스가 근무 때문에 숙소를 비웠고.

엔크리드는 금세 잠이 들었다.

매일 느끼는 거지만, 몸을 혹사하는 게 익숙해진 만큼 언제나 피로가 몰려왔다.

그런데도 아침이 되면 꽤 몸이 가볍긴 했다.

기초 체력이 늘어난 걸까.

모르겠다. 이전보다 최근에 더 그런 듯한데.

'그게 언제부터였더라.'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최근이었다. 전장에 돌아오고 나서 얼마 되지 않은 최근.

* * *

에스터는 상대가 얄미웠다.

'나가기만 하면 여자와 일이 생겨.'

부대 내에 있어도 일이 생긴다. 일이 있기에 함께 있는 거지만, 어떻게 자신을 두고 다른 여자에게 시선을 돌릴 수 있는가.

한때는 어떤 주문 없이도 매혹과 매료의 대명사로 불렸던 그녀다.

지나가는 것만으로 남자가 제 혼을 바치겠다며 줄을 서기도 했다.

'그 요정도 꼴사나운 판에.'

그녀는 생각을 이어 나가다 기겁했다.

표범의 모습으로 변한 자신을 자각한 순간이다. 이런 모습을 보고 어떤 남자가 반하겠나.

하물며.

'내가 왜?'

그야말로 어떤 필요도 없는 잡스러운 생각이라 느껴졌다.

그녀의 목표는 명확했다. 제 몸에 걸린 빌어먹을 것을 중화시키는 것.

에스터는 그걸 위해 움직였다.

그러니 지금과 같은 잡스러운 생각은 뒤로 밀어 둬야 할 것이다.

에스터가 제 몫인 온열 가죽 위에서 내려와 사뿐히 막사 중앙을 가로질렀다.

"또 가냐?"

잠든 엔크리드란 놈 곁에 있던 야만인이다.

"토라진 꼬맹이 같네."

야만인이 불경스러운 말을 뱉었으나, 에스터는 무시했다.

그녀는 자신이 할 일을 명확히 인지했다.

그러므로 여기에 사감이 들어갈 일은 없었다.

그대로 표범이 폴짝 뛰어 소리 없이 엔크리드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품 안에서 표범은 손톱으로 괜히 엔크리드의 가슴팍을 한 번 쿡 찔렀다.

"아파. 자자. 에스터."

엔크리드가 제 몸을 끌어안았다.

'이 부끄러움도 모르는 놈.'

에스터는 슬쩍 엔크리드의 얼굴을 보곤 곧 남자의 맨살과 맞닿은 채로, 그의 몸에 남긴 피로의 일부를 빨아들여 허공에 날렸다.

쉬이 할 수 있는 재주가 아니다.

기실 엄청나게 도움이 되는 수준은 아니지만.

이 남자처럼 미친 듯이 매일 몸을 혹사한다면 꽤 의미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 하나 더.

가죽 갑옷에도 수작을 부려 뒀다.

일회성이긴 해도 누군가 마법으로 해하려 하면 한 번은 막게끔.

그로 인해, 제 몸을 찾는 게 조금 늦춰졌지만.

'이 자식이 멀쩡해야 하니까.'

그러므로 이건 필요에 의한 행위였다. 장기적인 관점으로 본 거다.

그리 생각하면서도 에스터는 남자의 품이 주는 안온함과 따뜻함에 취했고.

잠결에 또 헛된 생각을 이어 나갔다.

'그 말을 믿어 주지.'

감히 자신을 두고 다른 여자와 무슨 짓을 하진 않았으리라는 말.

그 말이 진실처럼 여겨지기에.

사실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83. 뜨거움

검은 강의 뱃사공이 말했듯, 엔크리드의 일상은 오늘을 반복하는 것과 비슷했다.

오롯이 단련밖에 없는 나날이었다.

"통제, 통제, 통제하시라고."

렘과의 대련은 엔크리드가 제 몸과 검을 완벽하게 다루는 데 중점을 뒀고.

가끔 오싹함을 느끼게 만드는 살기는 어딘가 숨어서 자신을 노려보는 작센의 눈빛이 부리는 묘기였다.

작센은 사람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몸이 바싹 마르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조금만 방심해도 죽을 것 같다.

정작 작센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으나 눈빛만으로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드니, 참 미칠 노릇이었다.

이렇듯 매번 살기를 뿌리는 작센을 찾는 것 또한 훈련의 일환이었다.

그걸 위해 청각과 오감의 영역을 넓히며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엔크리드는 '육감의 문'이란 개념이 와닿지 않았다.

"쉽게 되진 않습니다."

작센은 우직하게 같은 짓을 반복했고.

엔크리드는 살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만큼 견디기 어려운 훈련이지만.

그렇다고 그만하라는 말을 하진 않았다.

"작작 해라. 음흉한 들고양이야. 되게 거슬려, 너."

"야만인 따위가 내 살기를 느꼈나? 섬세함이 부족했군."

"일부러 흘렸으면서, 말은 참 잘해요. 도끼, 내 도끼가 어디 갔나, 들고양이의 머리통을 쪼갤 내 도오오끼이이이."

말라가는 엔크리드를 보며 렘이 대신 한마디씩 던졌고, 이후에는 당연하게도 다툼이 이어졌다.

그럼, 엔크리드는 도끼를 찾으며 음률을 타는 렘을 말리곤 했다.

"내가 원해서 하는 거다."

"염병. 적당히 하라는 거지, 적당히."

'적당히'란 말을 하는 놈치고는, 엔크리드는 전신에 멍이 마르지 않는 날이 없었다.

렘의 주먹과 도끼에 얻어맞은 덕이었다.

렘도 적당히 하는 법은 몰랐다.

엔크리드는 그게 렘이 할 말인가 싶었으나, 렘에게도 그만하라 하진 않았다.

고립의 기법으로 몸을 단련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지금처럼 버티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우딘은 틈만 나면 물었다.

"힘들면 쉬셔도 됩니다. 형제님."

이 새끼는 확실히 신이 아닌, 악마의 사제 같았다.

힘들면 쉬어라. 그만해도 좋다.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그건 실제로 악마의 속삭임이었다.

"그럴까."

하고 말하면.

"정신력도 단련해야겠군요."

라고 말하며 부리나케 달려드니까.

"정신력은 육체의 힘에서 비롯되는 법, 이건 비밀인데 형제님께만 알려 드리죠. 기실 정신력은 근육에서 나오는 겁니다."

농담 삼아 꺼낸 한마디에 그날 들어야 할 무게가 느는 건 물론이요. 고립의 기법과 레슬링이 더 과격해지곤 했다.

미친 성직자 새끼가 악마를 흉내 내 사람을 괴롭히는 취미가 있었다.

그렇다고 이게 또 불만인 건 아니었다.

가끔, 아주 가끔.

너무 고되어 혹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아우딘이 뱉는 악마의 속삭임은 엔크리드의 정신을 일깨워 주는 역할을 하긴 했다.

"오늘은 좀 쉬고 싶군."

아우딘이 어떻게 반응할지 알면서 일부러 이리 말하기도 했다.

그럼, 아우딘은 만면에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할 만하셨나 보군요."

도발임을 알고 그에 상응하는 훈련을 준비해 엔크리드의 몸에 쑤셔 넣는 과정이다.

고되고 고되다.

이걸 고되지 않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그 어느 때보다 착실히 단련의 성과가 몸에 쌓였다.

렘의 도끼가 빛살이 될 때 막지 못하는 건 똑같지만.

채찍처럼 휘는 도끼질 세 번 중 두 번은 몸의 균형을 흐트러트리지 않고도 막을 만했고.

라그나와 대련 중에는 수를 읽는 게 늘었다.

이제껏 한 치 앞만 보기 급급했다면, 이제는 몇 개의 속임수를 엮어서 상대를 제 의도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수단이 더 날카로워졌다.

라그나와 렘은 확연히 다른 상대였지만, 둘 다 엔크리드에게는 도움이 됐다.

작센의 살기 감지는 여전히 꽉 막힌 채지만.

'육감의 문이라.'

전신에 소름이 돋는 과정을 몇 번이나 반복했나.

언제 어느 때건, 그 시선을, 그 살기를 받아 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오한이 들었다. 끔찍했다.

오늘을 반복하며 죽는 것만큼이나.

이제껏 암살자를 만난 게 두 번이다. 그 두 번 다 오늘을 반복해야 했으나, 이만한 살기를 느낀 적은 없었다.

잘 훈련된 암살자는 되려 살기를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하던가.

엔크리드는 자신이 만났던 암살자를 떠올렸다.

첫 번째는 의무 막사에서.

'살기보다는 소리가 들렸었지.'

그놈은 어설픈 놈이었을까.

두 번째, 휘파람 비도를 던지던 혼혈 요정을 상대할 때는 놈의 움직임, 손끝 하나 까딱이는 것도 놓치지 않으려 했었다. 눈을 부릅뜬 채로 노려보듯 바라봐야 했다.

둘 다 육감 활용이란 것과는 거리가 먼 형태다.

어느새 사계의 끝이라는 겨울의 혹한이 슬며시 머리를 숙이기 시작했다.

아직 따뜻하다고 할 순 없지만, 날이 조금씩 풀리는 모양새다.

눈이 와야 할 타이밍에 비가 내리면 이제 그게 봄비가 되어 새로운 해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될 터였다.

그래도 한동안은 추위가 남을 테지만.

본래 이 지역이 그렇다. 추위가 긴 곳이다.

암살자를 떠올리다 보니 자연스레 생각이 닿았다.

'집요하다고 했는데, 이제 더 오진 않는 건가.'

아즈펜이 자랑하는 특수 부대인 그레이 독은 지독한 놈들이었다.

그걸 몸소 느끼지 않았나.

'병사 하나 잡자고 암살자를 보내다니.'

염두에 두고는 있는데, 습격할 낌새는 안 보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누가 자신을 노린다고 해도 반응할 수는 있을까 싶었다.

렘과 라그나, 아우딘, 작센에게 시달리기 바빴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지금 당장은 그레이 독인지, 회색 고양이인지를 걱정할 때는 아닐 것이다.

'내일의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오늘 제 몸에 쏟아붓는 시간, 그로 인한 단련은 언제나 선물인 셈이다.

내일의 내가 오늘의 고통을 희열로 받아들일 테니.

* * *

미치 휴리어는 대련장 한가운데서 겨울의 기운을 날렸다.

몸을 움직이고 검을 휘두르므로 전신에서 김이 올라온다. 미치는 추위를 잊었다.

그저 검, 자신, 그리고 상대만 그렸다.

휘두르고 또 휘두른다.

병상에서 일어나 몸을 회복하자마자, 미치 휴리어는 검에 미친 사람처럼 굴었다.

훈련 전용으로 두껍게 칼날을 만들어 무게를 더한 가검이다.

그 검이 허공에 몇 개의 선을 그리다가 하늘을 찌를 듯 검 끝을 비스듬히 세운 채로 멈췄다.

이후, 미치의 팔 근육에 힘줄이 솟고 검 끝이 허공을 갈랐다.

숭-

위에서 밑으로.

어느 정도 안목이 있는 이들이 봤다면 소름이 끼칠 만한 검격이다.

검은 땅과 수직을 이루는 선을 그리되 검 끝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서 완벽한 직선을 그려 냈다.

어지간한 롱소드보다 세 배는 무거운 검을 들고 몇 시간째 검을 휘둘렀음에도 이런 검격을 보인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미치 휴리어는 패배를 자양분 삼아 자라는 나무가 되었다.

'그러니 그렇게 죽어선 안 되지.'

자신이 병석에 누운 사이, 자신을 때려눕힌 놈에게 암살자를 보냈다고 들었다.

그걸 듣고 얼마나 짜증이 나던지.

그런데 암살이 실패했다.

그게, 미치를 기쁘게 했다.

'넌 내 손에 죽어야 한다.'

그것도 전장에서.

엔크리드란 병사에게 패한 이후부터 놈을 넘어서는 게 미치 휴리어란 인간이 사는 이유이자, 삶의 목표가 됐다.

"보기 좋지만, 또한 보기 나쁘다."

아버지는 그런 미치를 엄히 나무랐다. 검에 미쳐 날뛰는 망나니가 되어 버려서야, 가주가 바라는 가문의 일원은 아니겠지.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일까.

가문의 명예를 위한다고 그레이 독의 이름을 팔아서 암살자나 보내는 것보다야.

'내 쪽이 훨씬 건실하지.'

미치는 웃었다.

언젠가 전장에서 자신을 찌른 상대를 만나길 기대하고 고대하며.

그리고 그건 헛된 망상은 아닐 터였다.

이전 전장에서 상대의 기사단원에게 당한 걸 염두에 두고 아즈펜에서 대대적으로 군대를 모으고 있으니.

'전장에서 보자.'

상대의 얼굴이 또렷이 기억에 남았다. 평생 못 잊을 터였다.

그렇게 진 건 처음이었으니까.

그 덕분에 태어나 처음으로 대련장에서 떠나지 않는 훈련 중독자가 됐다.

본래 암살자를 더 보내기로 한 것을 미치의 상태를 본 그레이 독 부대장이 막았다.

"다시 만나면 잡을 수 있겠지?"

"만날 겁니다. 그리고 죽일 겁니다."

미치의 대답을 들은 부대장은 이후 암살자 문제를 덮었다. 다시 그 병사에게 뭘 보낼 일이 없단 거였다.

* * *

"변했다는 말 취소합시다. 그게 맞는 것 같수."

렘이 말했다. 치고받던 대련이 끝난 뒤다.

"정체기 같수다."

입버릇 나쁜 야만인이 드물게 엔크리드를 향해 독설을 뱉었다.

"실력이 늘었다 싶으면 멈추는 건, 버릇이우?"

엔크리드는 그 말에 굳이 토를 달지 않았다.

왜 저러는지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으므로.

본래 그렇다. 가르치는 이가 열정을 보일 때쯤, 멈춰 버리는 성장.

보는 사람으로서는 답답할 수도 있다.

렘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신기할 정도로 응용식이 안 되는군요. 기본기는 그리 단숨에 몸에 붙였으면서. 단기간에 실력이 늘면 보통은 재능이 있다고 말해야 하는데, 뭐랄까 분대장은 꾸역꾸역 따라오는 느낌이 납니다. 분명 단시간에 실력이 늘었었는데."

라그나는 날카로울 때가 있었다.

어쨌든 그 또한 렘과 같은 말을 뱉었다.

아우딘도 비슷했다.

"형제님, 생각한 대로 몸을 움직이게 하는 건 훈련뿐입니다. 반복하다 보면 됩니다. 그러니까 보통은 그렇습니다만, 음, 분대장 형제님은 좀 느리긴 하군요."

제자리걸음이라는 말을 길게도 한다.

작센은 크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육감의 문인지, 구멍인지는 처음부터 엔크리드 쪽에서 아예 가닥도 못 잡았으니.

오전 나절의 수련 시간이었다. 상비군은 기본적으로 제 몸을 단련하는 걸 업으로 삼는 이들이다.

괜히 직업 군인이 아니었다.

그리 다들 몸을 단련하는 곳이다.

길게 늘어선 회랑의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훈련에 전념하던 렘이 갑자기 손을 멈췄다.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그러지."

렘은 엔크리드를 두고 숙소 안으로 들어섰다.

포기한 건 아니다. 그런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 필요한 게 단순한 대련이 아니라는 것뿐.

"실전."

숙소에 들어온 그의 중얼거림에.

에스터가 슬쩍 고개를 들어 그를 봤다.

나머지 분대원의 눈도 렘을 스쳤다.

곧 라그나, 아우딘, 렘과 작센은 분대에 합류한 처음으로 의견이 합치됐다.

이어 엔크리드가 안에 들어오자, 작센이 팔을 붙들며 말했다.

"의뢰받으시죠."

"응?"

"실전이 필요한 시점인 거요. 어디 전장에 던져 놓고 살아 돌아오면 좋겠는데, 그건 뭐 지금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렘이 덧붙였다.

다들 같은 의견으로 보였다. 엔크리드는 새삼 이들의 태도에 놀랐다.

'포기하지 않을 줄은 알았지만.'

이리 합심해서 뭔가를 얘기할 줄은 또 몰랐다.

게으른 라그나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만으로도 신기할 따름인데.

넷이 한마음 한뜻이 되었다.

엔크리드는 꿈에서도 보지 못할 광경이라 생각했던 장면이다.

"냐아."

에스터가 발밑에서 울었다.

엔크리드가 표범을 안아 올리며 말했다.

"안 그래도 나도 같은 생각이었는데."

목숨을 던져 오늘을 반복하겠다는 건 아니다.

다만, 엔크리드는 언제나 전장과 실전에서 제 몸을 다지고 검을 휘둘렀다.

훈련과 단련을 했다면 제 실력을 시험해 보고 싶은 것도 당연한 거고.

재능으로 똘똘 뭉친 놈들이야, 정체기 따윈 훌쩍 털고 일어날 테지만.

자신에게 그런 재능 따윈 없었기에.

부족한 건 몸으로 구르며 익혀야 할 뿐.

'막혔고 멈췄으면.'

뭐라도 할 뿐이다. 언제나 그러하듯 발악을 하든, 춤을 추든, 엔크리드는 지푸라기를 잡을 것이다.

그게 그가 살아온 방식이었다.

"당장 내일 아침부터 의뢰받으러 나가슈. 마수 토벌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있다고 하는 것 같던데."

엔크리드가 이미 알아보기도 했다.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었군요."

작센이 말한다. 엔크리드는 손끝으로 에스터의 머리를 긁으며 답했다.

"응."

작센이 수없이 말하지 않았나.

육감의 문이란 무엇인가.

그걸 열기 위해서는 본능의 영역을 엿봐야 했다.

오감이 아닌 보이지 않는 감각으로 무엇을 인지하는 게 가능한가?

"가능합니다. 다만, 정말 보이지 않는 감각은 아니죠. 야수가 먹이를 사냥하거나 내달릴 때, 몇 초 이내로 판단하는 그 직감이 어디에서 온다고 생각합니까? 초식동물이 포식자를 피하는 감각은요?"

작센이 풀어 준 육감의 정의다.

인간의 감각은 보고, 듣고, 맛보고, 맡고, 느끼는 것만 있는 게 아니다.

평형감각, 위치 감각, 운동 감각, 온열감 등.

인간의 몸은 다양한 감각으로 이뤄졌고.

자신이 가진 모든 감각을 칼날처럼 세운 채로 싸우는 걸 반복하다 보면.

본능의 영역에서 자연스레 살기를 읽어 내고 예측하고 반응하는 법이라고.

그때가 되면 뒤통수에 칼이 날아와도 피할 수 있게 된다고 했으니.

"기사쯤 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겁니다. 실제 기사도 이런 훈련을 받고."

엔크리드는 작센이 마지막에 덧붙인 말에서 그의 투박한 배려를 느꼈다.

답지 않은 짓이지만, 또 작센다운 배려였다.

"알았다."

기사의 훈련이기도 하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아라.

응원까지 받은 판이다.

야수를 예로 들었으니, 그와 비슷한 마수를 만나 볼 생각이었다.

마수의 본능 또한 그와 비슷할 것이고.

그들이 내뿜는 살기는 작센의 것보다 더 날 것일 테니.

물론, 모든 게 엔크리드의 생각대로 되는 건 아니었다.

* * *

"의뢰? 그럼 이것부터 처리해 줘. 우리 쪽 사람이 너무 없어서."

다음 날 아침, 곧바로 마수 토벌 의뢰를 찾는데 대뜸 비집고 들어온 옆 소대 분대장이 부탁을 했다.

신발 직공이 제 소유의 구둣방에서 밤만 되면 이상한 소리가 난다고 확인해 달라는 의뢰다.

아무래도 언데드 계열의 마물이 밑에 사는 것 같다고.

"도시 내에 그런 게 있었으면 진즉에 난리가 났겠지."

"나도 알아. 그런데 어쩌겠어. 의뢰 하나 끝내면 공적도 되고 좋잖아. 슥삭 해치워 주자. 시간 되면 좀 들어줘. 내가 그, 예전에 바느질도 해 주고 그랬는데."

맞다. 그때의 분대장이었다. 첫 번째 오늘을 넘어설 때 바느질을 해 줬던 그 친구, 술 좋아하던 분대장.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고 한 뒤에 직공의 불안감만 없애 주고 갈 생각이었다. 제 가게 마루 밑에서 무슨 마물이 나오겠나.

숙소에 들러 채비하고 있자니.

"마수 토벌 의뢰는 안 가고?"

작센이 버릇처럼 말끝의 존칭을 생략했다.

"어, 이거 갔다가."

마수 의뢰도 하러 가겠다고 해 뒀다.

이거 끝나고 곧바로 가면 될 듯했다.

이번 실전은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이다.

'검도 감각도, 심장도, 몸을 쓰는 법도.'

마수를 베다 보면 뭔가 잡힐 것 같았다.

그렇게 도착한 신발 직공의 집이었다.

"여기, 보쇼. 내가 결국 밑을 까 보니 이런 게 있었다고!"

직공은 흥분했다. 엔크리드도 놀랐다. 직공의 집 지하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안쪽으로 인위적인 동굴이 보였다.

"잠깐, 제가 먼저 가서 볼 테니."

안쪽에 귀를 기울였는데,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엔크리드가 말하고 직공이 뚫은 구멍 안에 발을 디밀었다.

'횃불이 필요하겠는데.'

완전한 어둠은 아니었다. 뚫린 구멍으로 스며드는 빛 덕분에 조금은 앞이 보였다.

비스듬한 경사로다. 밑으로 내려가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들어서서 앞쪽으로 조금 걷자, 마법사나 마물이 만든 던전을 걷는 기분이 들었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다.

아직 등 뒤로 위에서 밝힌 촛불의 빛이 스며들었으니.

그렇게 맞이한 여섯 갈래의 갈림길이다.

"이건 어떤 미친놈이 만든 거냐."

절로 혼잣말이 나왔다. 아무리 봐도 인위적인 냄새가 풀풀 난다.

엔크리드는 여섯 통로 중 왼쪽 첫 번째 통로에 발을 디뎠다.

아무 낌새도 없었다. 몇 걸음 더 걸어 안으로 들어갔다.

자박자박.

통로를 지나는 바람 소리 외에는 어떤 인기척이나 소리도 없었다.

다만.

웅-

곧 작디작은 진동음이 들리고.

엔크리드는 제 눈앞에서 터지는 불빛을 봤다.

뻐-엉.

폭음이 들렸고, 뜨거운 쇠꼬챙이 같은 것들이 폐 안으로 들어와 내장을 헤집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기억이 끊겼고 다시 아침이 밝았다.

당연하게도 엔크리드는 왜 이렇게 된 건지 알았다.

'죽었어.'

몸에 남은 마지막 감각은 뜨거움.

그러니까 열기였다.

어떻게 죽었는지는 이제부터 알아볼 판이었고.

84. 사람을 살리고자 마음먹으니, 틈이 보였다.

'열기.'

폭발이다. 몇 번이고 마지막 순간을 되새겼다.

정말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전 혼혈 요정의 암살은 죽기 직전 말이라도 나눴지.

이번에는 그런 것도 없었다.

그저 뜨거운 열기로 인한 열통, 뜨거운 죽음의 고통만이 남았다.

검이나 창에 찔리면 달군 쇠꼬챙이에 꿰인 느낌이 들곤 했는데.

이번에는 진짜 불에 타죽은 셈이다.

'트랩? 폭발하는 걸 보니, 마법 트랩인 거겠고.'

"무슨 생각을 그리 하슈?"

"의뢰받을 생각."

아침을 해결하고 렘의 말에 대거리해 준 뒤, 다시금 의뢰를 수급하러 간 곳이다.

"제발 부탁이다. 이것 좀 해 줘."

당연하게도 바느질 분대장이 부탁이란 말을 던졌다.

이 새끼, 그쪽 상태를 알고 보내는 걸까?

그런 것치곤 눈 밑은 퀭한 게, 상대를 골려 먹을 그런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피로에 찌든 병사로 보일 뿐.

"요새 일이 많나 보네?"

"밤에 사고 치는 애들은 줄었는데, 최근에 외부 마물이나 마수가 좀 늘어서 그쪽으로 빠지는 병력이 많아."

숫제 울상이었다. 그 말에 진심이 느껴졌다.

사실 속인다고 해도 의뢰를 거절하면 그만이고.

의뢰를 받는다 해도 구둣방 안에 들어서지만 않는다면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무시해도 되는 일인 거다.

'충분히 피할 수 있는 벽 같은데.'

엔크리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물었다.

"내가 안 가면?"

"묵혀야지."

부대 내 병사가 해야 할 필수 의뢰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의뢰도 있는 법이다.

이건 무시해도 될 만한 일이긴 했다.

"그래, 꼭 갈 필요는 없긴 하지. 그런데 구둣방 그 아저씨가 헛소리할 사람은 아니라서 그래. 나도 내가 갔으면 좋겠는데 소대장이 자꾸 눈치를 줘서 도저히 몸을 뺄 수가 없어."

이 또한 진심인 듯했다.

생각에 빠져 답이 늦자, 바느질 분대장이 재차 입을 열었다.

"저기, 나 기억하지? 그때 그 가죽 뭉치로, 응?"

"기억하지."

도시에 돌아와서 술병을 입에 달고 살진 않나 했더니, 여기서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었다.

"걱정이 돼서 그래, 좀 봐주라. 어릴 때부터 알던 아저씨라."

"알았다."

일단 가 보자.

가서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이라도 해 볼 참이었다.

일반적인 트랩이라면 화염 폭발이 아니라 독침 따위가 날아왔을 텐데.

트랩이 작동하는 소리나 낌새는 조금도 없었다.

그렇다면 마법이란 소리인데.

'마법이라면.'

전혀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생각한다고 답이 나오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리 생각하며 걷다 보니, 본래보다 조금 늦게 구둣방에 도착했고.

문을 두드려도 답이 없었다.

"보더 가드 상비군입니다. 열어 주십시오."

전보다 문을 세게 두드리고 외치니 그제야 문이 열렸다.

문 너머에 직공 대신, 젊은 여자가 보였다.

길게 땋은 갈색 머리칼과 볼에 주근깨가 가득한.

"상비군이요?"

사슴처럼 커진 눈을 하고 여자가 말했다.

"의뢰 때문에."

슬쩍 말하고 안을 보는데, 안쪽에도 직공이 안 보였다. 그 대신 덩그러니 난 구멍만 보였다.

"그, 저, 아버지는 가게 밑에 뭐가 있다고 거기에 들어가셔서."

이런 젠장.

엔크리드는 속으로 읊조리고.

"잠시."

놀란 신발 직공의 딸을 반쯤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부스스.

뚫어 놓은 구멍 안으로 흙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게 보였다.

'성격 더럽게 급하네.'

직공이 상비군을 기다리다 못해 먼저 들어간 거다. 아예 누구도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고.

보통이라면 이런 일로 병사가 쉬이 오지 않으리라는 걸 예상할 테니.

"위험한 거죠? 들어가면 안 된다고 했는데."

주근깨 여자가 울상을 지었다. 그러더니,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말했다.

"제가 들어가서 데려와야겠어요."

"제가 갈 테니까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아니요. 저도 가야겠어요."

말린다고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 빨리 가서 그 폭발을 막아야 했다.

엔크리드는 설득하는 대신 단숨에 구멍 안으로 몸을 날렸다.

가장자리에 손을 얹고 왼발부터 밀어 넣어 동굴 경사로를 타고 내려간다. 모든 동작이 자연스럽다.

고립의 기법으로 몸 전체를 통제하는 게 수월해졌기에 간단한 동작에도 운동 능력의 향상을 체감했다.

물론, 지금은 이딴 생각을 할 때가 아니긴 했다.

경사로를 다 내려서자마자, 단련된 엔크리드의 귀가 발걸음 소리를 잡아챘다.

시선을 앞으로 던지니, 더듬더듬 첫 번째 통로로 발을 디디는 직공이 보였다.

엔크리드의 뒤에서 직공의 딸이 쫓아오더니 그를 지나쳐 나가려 했다.

"아빠!"

엔크리드는 딸의 허리를 붙들고 뒤로 던지듯 내려놓으며 외쳤다.

"멈춰!"

직공이 뒤를 돌아본다. 그의 얼굴에 긴장과 의문이 섞여 있다.

이미 떨어진 발이다. 그는 그대로 걸음을 내디뎠고.

엔크리드는 빠아아앙 하는 소음과 함께 공기가 압축되어 몸을 짓누르는 걸 느꼈다.

모든 건 한순간이었다.

불길, 화염, 폭발.

화르르륵.

"끄!"

제대로 뱉지도 못한 직공의 단말마와 함께 터진 불길이 엔크리드의 몸을 불살랐다.

직공도, 그 뒤의 딸도.

펑!

엔크리드는 죽어 가며 폭발의 여파가 위로 솟겠다고 생각했다.

허탈한 죽음이다. 통증을 버티고 이겨 내자, 어둠이 지나친다. 꿈과 같은 검은 강을 헤치고 다시금 눈을 떠, 아침을 맞이하자.

* * *

"뭐 안 좋은 꿈이라도 꿨수?"

렘이 옆에서 물었다. 차마 좋은 꿈이라고 할 순 없었다.

꿈에서 검은 강의 뱃사공이 생긋 처웃더라고.

과거, 오늘을 반복할 때는 그래도 매번 제 손으로 시작하고 제 손으로 끝낸 것 같았는데.

이번에는 억울한 감이 있었다.

불가항력이란 생각이 들어 버렸으니.

'놔두면 죽으러 간다는 건가.'

아버지가 먼저, 딸이 그다음.

그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까.

그런 건 알 바 아니었다. 이미 그들이 죽은 시점에서 실패한 일이 될 테니까.

'외면하면 그만인데.'

엔크리드가 외면하면 그 둘은 죽는다. 반드시 죽으리라.

그래서 그게 문제가 되나?

죽고 죽이는 세상이다.

그런 시대고.

전장에 나서서 싸우는 걸 업으로 삼았기에 엔크리도 수없이 누군가를 죽였다.

다만.

'그 사람들은 죽고 죽이는 전장에 나선 게 아니잖아.'

그저 제 가게를 꾸려 나갈 사람일 뿐이다.

엔크리드는 자신이 꿈꾸는 기사가 음유시인이 노래하던 그런 기사도를 갖춘 위인이 아님을 안다.

현실에 따라야 하는 거다. 세상이 변한만큼.

그렇다고 해도.

'지고 싶진 않아.'

이걸 외면하고 돌아서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직공과 그의 딸 하나가 더 죽는 것뿐인데.

다만, 그게 엔크리드의 눈앞에서 일어난 일일 뿐.

그리고 그들이 죽는 걸 아는 건 오롯이 엔크리드 혼자뿐이니.

이게 전쟁이라면, 제 손으로 막을 수 없는 일이라면.

그래, 그럼 놔둬야 할지도 모른다.

다만.

'막을 수 있잖아.'

그렇다면 그냥 둘 순 없다. 막을 수 있으니까.

이걸 기사도라 말하진 않을 것이다.

그저 고집이라 부르고 말지.

그렇다고 해서 엔크리드가 아는 기사도가 흐려지는 건 아니었다.

아무도 모른다고 해도 거기에 자신이 지켜야 할 게 있다면 지키는 것.

그게 엔크리드가 아는 기사다.

꿈을 꾸는 자는 그걸 배반할 수 없기에.

엔크리드는 그곳에, 직공과 딸을 보러 가야 했다.

"개 같네."

엔크리드는 드물게 짜증을 드러내며 하루를 시작했다.

어제 직공과 딸을 죽게 만든 자신의 느린 걸음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심히 재수 없는 꿈을 꿨나 보네."

뒤에서 렘이 중얼거렸다.

다시금 하루를 시작한 엔크리드는 배를 채우고 의뢰받으러 가는 내내 고민했다.

'통로를 하나씩 들어가 봐야 하나?'

그만큼 거지 같은 짓도 없을 것이다.

통로에 얼마나 많은 트랩이 있는지도 모르는 판에.

하지만 다른 방도가 떠오르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분대원 중 누구를 데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구둣방 직공이 제 가게 밑에 언데드형 마물이 있는 것 같다고 같이 가자고 하면 뭐라고 생각할까.'

놀리는 건 둘째치고 아무도 안 올 것 같은데.

억지로 데려갈 순 있겠지만.

엔크리드는 그럴 마음이 안 생겼다.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분대원에게 매달릴 것인가.

아니면 혼자 넘어갈 것인가.

과연 자신이 바라고 바란 꿈이 누군가의 뒤에 서서 입을 터는 것인가.

선두에 서서 검을 휘두르는 것인가.

이번 일이 검을 쓰는 일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혼자 한다. 내가 지킨다.'

분대원에게 기댈 일은 아닐 것이다.

"그 구둣방 아저씨가 걱정돼서, 나 알지?"

"알지, 뱀 술은 맛있었나?"

"꿀맛이었지."

입맛을 다시는 바느질 분대장에게 다시 의뢰를 건네받고 곧바로 뛰듯이 걸었다.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갑니까?"

막 나서는 데 뒤에서 작센이 물었다.

"재수 없는 양민 구하러 구둣방에."

"...구두나 부츠가 양민을 괴롭힌답니까?"

아니, 지하 통로가 괴롭히지.

엔크리드는 속으로만 답하고 곧바로 구둣방으로 직행했다.

문 앞에 다다르기도 전, 직공이 막 바닥을 향해 망치를 휘두르는지, 꽝꽝 하는 소리가 먼저 반겼다.

쿵쿵!

엔크리드가 드세게 문을 두드려 자신이 왔음을 알리자, 직공이 이마에 땀을 흘리며 나왔다.

"자, 보쇼. 저기 구멍이!"

"있군요. 구멍이. 한번 봅시다."

가서 아예 구멍을 여는 작업을 도와줬다.

망치로 때리고 두꺼운 쇠막대 따위를 지렛대로 써서 판자를 들춰냈다.

그리 만든 구멍이다.

"내가 가 볼 테니까, 기다리시고요."

"에, 음, 혹 마물이라도 나오면."

"제가 알아서 합니다."

내려가기 전 부싯돌로 횃대에 불을 붙였다.

화륵.

어째 불만 봐도 경기를 일으킬 것 같았다. 불에 타죽는 경험은 두 번이면 족할 테지.

내려서는 순간, 엔크리드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건 죽음의 공포가 불러온 본능적인 거부감이었다.

엔크리드는 저 통로 안에 들어서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걸음을 돌리진 않았다. 가뿐히 이겨 내고 나아갔다.

싫다고 외면한다면.

평생 도망만 가는 삶을 살 것이다.

이제껏 살기 위해 도망친 적이 여러 번이었고.

그때마다 후회했다. 그런 후회를 다시금 경험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므로 엔크리드는 돌아서지 않는다. 그는 앞으로 향했다.

한 걸음 성큼, 첫 번째 통로는 볼수록 기분이 더러웠다.

여섯 개의 통로 중 나머지 다섯 개다.

'어디냐.'

멀쩡한 통로를 만들고 전부 트랩을 깔아 두진 않았을 테니.

두 번째는 괜찮을까?

엔크리드는 신중하게 횃불을 들어 바닥과 벽, 천장까지 꼼꼼히 살폈다.

딱히 눈에 두드러지는 게 걸리는 건 없었다.

별 차이 없는 갈림길만 있을 뿐.

통로 크기도 비슷비슷했다.

안쪽은 어두워 끝이 보이지 않았다.

도시 밑에 이런 미친 공간을 만든 놈이 누군지.

잘하면 하수도까지도 이어져 있을 듯싶었다.

후두둑.

머리 위로 흙먼지가 떨어졌다.

급조한 통로는 아닌 것 같은데.

갑자기 무너져서 깔려 죽진 않으려나.

어쨌거나 지금은 안쪽을 살펴볼 시간이었다. 절로 이걸 만든 놈의 낯짝이 궁금해졌다.

'간다.'

갈림길 두 번째 통로다.

'첫 번째에 들어가면 불길이 덮치고.'

여긴 어떨까.

두 번째 통로 앞에 선 순간, 엔크리드는 또다시 솟아오른 불쾌한 기분에 돌아서고 싶었으나, 무시하고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긴장한 채 내딛는 첫 번째 걸음, 어떤 이상도 없었다. 폭발도 화염도, 그 외 다른 것도.

엔크리드는 신중하게 주변을 살폈다.

횃불을 들어 다시금 사방을 꼼꼼하게 관찰했다.

이후 내린 결론이다.

'본다고 알 수도 없지 않나.'

검 하나에만 매달리기도 바쁜 시간이었다. 던전 탐험이야 용병질하면서 어깨너머로 보긴 했으나, 트랩을 살필 만한 지식은 없었다.

그런 건 제대로 훈련받은 이들이나 가능한 짓이니.

그러므로.

'이건 답이 없군.'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불길함이 전신을 짓누른다. 눈앞에서 마수가 입을 쩍 벌리고 자신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맨몸뚱이로 마수의 입안에 머리를 들이미는 기분이다.

그걸 이겨 내고 나아가려는데.

"지금 뭐 하는 거요?"

어느새 뒤따라 내려온 직공이 뒤에서 물었다. 그 한마디에 예민하게 벼려져 있던 불길함을 느끼는 육감이 무뎌지고, 한걸음 나서는 게 그리 대단한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전만 해도 느껴지던 것들이 희미하게 흐려졌다.

"다가오지 마십시오."

직공과 함께 불에 타 죽는 건 한 번이면 족했다.

그렇게 다시 한걸음 디디는데, 다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여전히 비슷한 감이다.

불길함에서 비롯된, 마치 실수한 것만 같은.

'내딛지 말았어야 할 걸음.'

불현듯 든 생각이 곧 답이었다.

훙.

첫 번째 통로와 같았다.

폭발, 압력, 화염.

이 통로 끝에 뭘 숨겨 놨는지는 모르겠지만.

지독한 트랩을 준비했다는 건 분명했다.

뻐-엉.

소음과 함께 화염에 불타 죽는다. 당연하게도 그냥 죽기만 한 건 아니었다.

'아.'

엔크리드는 죽어 가며 속으로 짧은 탄성을 뱉었다. 통증과 무관하게, 야수의 대담함이 현재 느끼는 감각을 여실히 판단하게 해 주는 기반이 되어 주니.

세 번째 오늘을 마무리하며 엔크리드는 뜻밖으로 무언가를 느꼈고.

그렇게 네 번째 오늘을 맞이했다.

85. 육감의 문

"작센."

일어나자마자 엔크리드가 작센을 찾았다.

"무슨 일입니까?"

"육감의 문이라는 게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기도 하겠지?"

"그게 시작이죠."

이제껏 작센이 살기를 마구잡이로 쏘아 낸 이유이기도 했다.

생존 본능.

생명이 있는 존재라면 누구나 가진 것.

그게 시작이라면.

'이거였구나.'

간질간질하게 심장을 건드리던 감각.

아련하다고 해야 하나, 분명 그와 비슷한 걸 느꼈다.

물론 한 번만으로 완벽하게 몸에 새길 순 없었다.

부족한 재능 덕이다.

그렇다고 한탄 따윈 하진 않았다.

재능이 없다는 걸 되새긴다고 달라지는 건 없기에, 다시 움직일 뿐이었다.

엔크리드는 몸을 일으켰다. 다시금 시작된 오늘, 부지런히 움직여야 할 시간이었다.

"간다."

똑같이 의뢰를 받고, 횃불을 하나 가져와 구둣방으로 향했다.

이제 네 번째다.

이번에는 아예 첫 번째 망치질도 시작하기 전에 도착했다.

"같이 뚫어 보죠."

"에? 뭐?"

엔크리드는 황당해하는 직공과 힘을 합쳐 바닥에 구멍을 뚫었다.

그리 다시 맞이한 여섯 개의 갈림길.

첫 번째와 두 번째 통로를 마주한 순간이다.

간질거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불길함이라 말해야 옳을 만한 감.

엔크리드는 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이게.'

이곳, 그저 직공이 죽는 걸 두고 보지 못해 들어선 곳.

몇 번 시도해 보고 아니다 싶으면 그대로 봉인했어야 할 스펠 트랩이 있는 곳.

엔크리드는 이 '오늘'에 묶일 생각이 없었다.

이건 사고였고, 이 사고는 의지가 있다면 피할 수 있는 문제니까.

당장만 해도 직공과 딸을 무력으로라도 내보내고 구멍을 조사할 병대를 요청하면 될 일이니까.

물론 그건 최후의 수단이었다.

스펠 트랩이 있기에 아무것도 모른 채 들어가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죽는 게 자신이 아니더라고 해도 가만히 두고 볼 순 없는 노릇이니까.

그렇다고 여기에 마법이 걸려 있으니, 몸값이 금보다 비싸다는 마법사를 데려오라고 할 순 없지 않나.

일개 분대장이 요청한다고 마법사가 쭐레쭐레 이곳으로 올 일은 없을뿐더러.

스펠 트랩이 있다고 말한들 그걸 누가 믿을 것인가.

대부분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반응이겠지.

'우리 분대원이나 중대장은 믿어 줄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결론은 이거였다.

이곳이 바로 육감의 문을 단련하기에 최적의 장소라는 것.

그걸 깨닫자, 짜릿한 희열이 치솟는다. 겨우 네 번 만에 육감의 문에 틈이 생기지 않았나.

이제 열어젖힐 일만 남은 셈이었다.

그렇게 세 번째 통로에 발을 디뎠고.

엔크리드는 그 순간 색다른 고통을 겪었다. 보이지 않는 칼날이 머리 위에서 세로로 몸을 갈랐다.

끔찍한 고통, 통증, 쌔애애애애액 하는 바람 소리, 몸에 남는 서늘함, 피가 바닥에 울컥 쏟아지며 몸 안의 모든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 듯한 탈력감.

그 어느 하나, 두 번 겪고 싶지 않은 통증과 감각이다. 괴롭다. 당연했다.

다만, 새로이 깨달은 경험의 족적이 괴로움을 잊게 해 줬다.

그러니 반복되는 오늘이 괴롭지만은 않았다.

그저 내일을 위해 내달리고 발악할 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