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概要

Chapter 11

000화 [Prologue]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망했다.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망했다.

세상이 망할 거라는 징조라면 이것저것 있기는 했었다.

전 세계를 휩쓴 전염병, 거짓말처럼 벌어진 전쟁, 그로인한 경기침체와 식량난 그리고 마침내 벌어졌던 핵전쟁까지.

인류는 누구보다 확실하게 자멸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인류의 숨통을 끊어낸 것은 그들 자신이 아니었다.

'전혀 의외의 존재들이었지.'

인류를 종말로 이끈 것은 기후 위기도, 운석도, 핵전쟁도 아니었다.

'빌어먹을 몬스터들.'

싸구려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고블린, 오크, 트롤, 드래곤 등.

그 괴물들이 인류를 멸망으로 이끈 장본인이었다.

'아니지. 아직 완전히 망한 건 아니야. 여기 내가 살아있으니까! 분명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때였다.

카아아악―!

나보다 두 배는 커다란 덩치를 가진 괴물새 한 마리가 나를 향해 돌진해오고 있었다.

"씨, 씨발!"

나는 그 기세에 놀라 뒷걸음질 치다 넘어지고 말았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내 집 거실, 고층아파트 꼭대기 층의 거실이었다.

밖이 훤하게 보이는 거실 창문 너머로 괴물새가 무서운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저 놈의 속도와 기세라면 거실창문 정도는 문제없이 부수고 들어와 내 목을 물어뜯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콰아아앙!

기세 좋게 날아오던 괴물새는 창문에 그대로 얼굴을 쳐 박은 뒤, 보기 좋게 튕겨져 나갔다.

그대로 바닥을 향해 추락하는 것을 보면 정신을 잃은 듯 했다.

그 직후 내 눈앞에 뜨는 알림.

[허가 받지 않은 대상이 출입을 시도합니다.]

"휴우."

그렇다.

싸구려 소설의 뻔한 도입부 전개처럼 세상이 망하고 나는 상태창과 함께 한 가지 고유 능력을 각성했다.

[집구석 절대자]

집구석 선포 (패시브) Lv. 1

-그 누구도 절대자의 허락 없이는 집구석을 침범할 수 없다.

평소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던 나의 생활패턴 때문일까, 이상한 능력이 생겨버렸다.

하지만 방금 내 목숨을 구해준 것도 바로 이 능력이었다.

그래, 안다. 고마운 능력이다.

내가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도 전부 이 능력 덕분이었으니까.

"하, 씨발."

한 가지, 이 능력에 씨발스러운 점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었다.

[집구석 절대자는 집구석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세상이 망한 지 사흘 째.

나는 여전히 집구석에 갇혀 있다.

001화 [Episode 01] 집구석 절대자 (1)

일단 현관문의 문고리를 잡고 돌리는 것 까지는 가능하다.

하지만 문을 미는 순간 투명한 벽에 가로막히는 듯한 감각과 함께 이러한 문구가 나타난다.

[집구석 절대자는 집구석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런, 씨발!"

문고리는 돌아가지만, 문이 열리지가 않는 것이다.

'어떻게든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나도 안다.

지금 시점에 밖으로 나가는 것은 미친 짓이라는 걸.

세상이 망하고 사흘.

내가 아직까지 생존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내 능력덕분이었다.

지금 밖은 위험한 괴물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방금 거실 창문에 대가리를 박았던 괴물새 한 마리만 만나도 나 같은 건 한끼 식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밖으로 나가려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가족.

'엄마, 아빠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사랑하는 가족들이 전부 밖에 있었다.

[집구석 절대자는 집구석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아―."

가족들과 떨어져 있는 데에는 나름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방 3개. 화장실 2개. 거실과 주방이 합쳐진 널따란 공간까지 있는 이 30평짜리 아파트에 실질적으로 거주하는 것은 나 혼자뿐이었다.

이 아파트를 사들인 것은 아버지의 선택으로, 은행 빚 2억과 우리 가족 전 재산 2억을 합쳐서 사들인 물건이었다.

아버지의 도박은 성공했고, 4억에 사들였던 아파트는 겨우 반년 만에 10억을 넘어섰다.

금수저도 아닌 내가 이런 호화로운 아파트에서 혼자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세금 감면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실 거주 2년을 채워야 했기 때문이었다.

세금 폭탄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쨌든 2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에 팔아야했기 때문에 그동안 내가 집을 지키게 된 것이다.

물론 그 뒤로 상황이 좋게 흘러가지만은 않았다.

코로나와 전쟁의 여파로 무너진 경기는 부동산에도 영향을 주었고, 10억을 넘어섰던 집값은 어느새 7억까지 내려앉았다.

게다가 은행에서 빌린 돈의 이자까지 치솟고 있었으니 꽤나 위험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것도 이젠 다 부질없는 이야기지.'

세상이 망해버린 이상 은행 빚이 얼마였든, 아파트 가격이 오르든 내리든 그게 다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팔지도 못하는데.

'제발 무사하기만 하세요.'

가족들의 무사를 기원하며 스마트폰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연결 중···]

역시나.

지난 사흘간 그랬던 것처럼 아무리 기다려도 변화는 없었다.

전화는 물론 메시지, 까톡 등을 비롯한 모든 메신저가 먹통이었다.

안 될 것을 알지만, 까톡을 열어 메시지를 입력해 봤다.

-엄마, 괜찮은 거지?

"제발 좀···!"

그러나 결과는 예상대로.

⟳ 엄마, 괜찮은 거지?

재전송 버튼이 등장할 뿐 메시지는 전송되지 않았다.

그때였다.

[일시적인 오류가 발생하였습니다. 잠시 후 다시 시도해 주세요. (오류코드: 580, LO) ]

새로운 메시지가 뜨더니 아예 까톡 앱이 꺼져버렸다.

몇 번을 다시 켜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혹시나 싶어 핸드폰 위쪽 탭을 바라보니 데이터가 끊겼을 때 나타나는 아이콘이 생겨나 있었다.

"······젠장."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사실은 사흘이나 데이터가 터진 것이 더 신기할 지경이었다.

구굴이나 네이머와 같은 대형 웹사이트들은 세상이 망한 당일에 먹통이 됐었으니까.

답답한 마음에 주먹을 꽉 쥐어봤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떻게든 해야 해.'

문제는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이대로 갇혀있다가는 굶어죽는다.'

인터넷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끊기고 있었다.

수도, 전기, 가스 등.

생활에 필요한 필수요소들이 시시각각 사라지는 중이었다.

'물은 충분해.'

다행히 쿠퐁에서 시킨 물이 넉넉하게 있었다.

2L짜리 20개와 500ml짜리가 47개가 있었고, 물병이든 컵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 물을 가득 채워 놓은 상태였다.

일일이 정수 물을 뜨기 귀찮아서 시켰던 것인데, 귀차니즘이 나를 살린 셈이다.

'문제는 먹을 거다.'

어제, 전기가 나가버리며 냉장고 전원이 내려가는 것과 동시에 냉장고 안에 있던 모든 반찬들은 시한부 운명을 맞이하게 됐다.

최대한 문을 열지 않은 것과 냉동실의 냉기로 아직 버티고는 있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라면도 몇 개 안 남았다.'

남아 있는 거라곤 겨우 진라면 순한맛 세 봉지.

'이럴 줄 알았으면 라면도 대량으로 사 놓을 걸···.'

일주일마다 냉장고에 반찬을 채워주러 오시는 부모님 덕분에 먹을 것을 쟁여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덕분에 지금 남아 있는 식량도 딱 일주일 치였다.

'아껴먹는다고 해도 결국에는 바닥나게 돼.'

결국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밖으로 나가야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집구석 절대자는 집구석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

사나운 몬스터들로부터 나를 완전하게 지켜주고 있는 이 능력 덕분에 나는 언젠가 굶어 죽게 되고 말 것이다.

식량이 떨어지고 나면, 굶주림 속에서 천천히 죽어가겠지.

'최악이다.'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거실 창밖으로 손을 뻗어갔다.

나갈 수만 있다면 창문을 통해서라도 나갈 생각으로.

그러나.

[집구석 절대자는 집구석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씨바아알!"

이제는 지겨워진 그 문구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딱딱한 벽과 부딪히는 감각과 함께 주먹이 아려왔다.

'절대자는 무슨!'

자신의 영역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반푼이가 아닌가.

'···한심한 새끼.'

세상이 망한 지금도 나는 그대로였다.

집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으며 부모님 등골이나 빨아먹는 그런 불효자식.

스물여덟이나 먹고는 아직까지 제 앞가림도 하지 못해 부모님께 용돈이나 받아 쳐 먹는 병신 버러지.

세상에 하등 도움도 되지 않는 기생충 그 자체.

"···시발."

그런데 그때였다.

띠링!

"···응?"

지난 사흘간 한 번도 본 적 없던 메시지가 눈앞에 나타났다.

[켈리칸(Lv. 23)을 사냥하셨습니다.]

'켈리칸?'

그 직후.

[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스킬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스킬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대량의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문득 거실 창문에 거하게 대가리를 박고 추락했던 괴물새의 존재가 떠올랐다.

나는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확인했다.

"카아악!"

"캭!"

괴물새의 시체 주변으로 초록색 피부의 작은 괴물들 수십 마리, 고블린들이 몰려들어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고층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개미 떼처럼 보였다.

'저것들이 마무리한 건가?'

괴물새가 정신을 잃고 떨어진 사이 고블린들에게 사냥당한 듯했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괴물새를 기절시킨 것은 나였으니, 나에게도 경험치가 들어온 것이고.

덕분에 스킬 레벨이 두 단계나 상승했다.

'하, 웃기지도 않는군. 집돌이 스킬이 레벨업을 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

그러나 그것은 너무 섣부른 판단이었다.

[새로운 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조건에 충족되는 전리품이 근처에 있습니다.]

[전리품을 정산을 시작합니다.]

"응?"

알 수 없는 알림들이 나타난 직후 변화가 일어났다.

"케에에엑!!"

"뭐, 뭐야?"

갑작스러운 고블린들의 발작에 놀란 나는 급하게 다시 땅을 내려다봤다.

그곳에서는 아까와는 약간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잔치를 벌이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주변에 있던 고블린들은 처절한 절규를 내뱉고 있었다.

'왜 저래?'

놈들이 발작하는 이유는 괴물새의 사체에 일어난 변화 때문이었다.

'사라지고 있다?'

괴물새의 사체 일부가 실시간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고블린들의 입장에서는 사냥감의 고기가 실시간으로 줄어들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러니 절규를 내뱉을 수밖에.

[전리품 정산이 완료되었습니다.]

메시지를 확인한 나는 아래를 확인했다.

'시체가 삼분의 일은 줄어들었어···.'

[집구석 절대자의 지갑에 2,203,241 원이 입금되었습니다.]

새로 뜬 메시지 항목의 숫자를 본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되뇌었다.

'일십백천만, 십만, 백만···. 이, 이백만원? 갑자기 이백만원이 입금됐다고?'

평소 용돈을 받으며 생활했던 내게 이백만원이라는 돈은 어마어마한 거금이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내가 사태를 이해하기도 전에 또 다시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번쩍

거실이 조금 밝아졌다.

대낮이었던 탓에 아주 조금 더 밝아진 수준에 그쳤지만, 어쨌든 밝아졌다는 게 중요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올렸다.

거실 천장 중앙에 박혀 있는 전등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전기가 돌아왔어?'

분명 어제 전기가 끊겼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몬스터의 등장으로 인해 도시 인프라에 치명적인 피해가 생겼을 것이다.

그게 이렇게 빠르게 복구 될 리가 없었다.

'스킬이다! 아까 분명히 새로운 스킬이 생겼다고 그랬어!'

나는 급하게 상태창을 열어 스킬의 변화를 확인해 봤다.

[집구석 절대자]

집구석 선포 (패시브) Lv. 3

-그 누구도 절대자의 허락 없이는 집구석을 침범할 수 없다.

집구석 절대자의 품위 유지 (패시브) Lv. 1

-품위 유지를 위한 집구석 전반의 기능을 정상적으로 수복한다.

집구석 절대자의 상점 Lv. 1

-상점에 등록시킨 물품을 정가에 구매할 수 있다.

집구석 절대자의 지갑 Lv. Max

-보유 금액 : 2,203,240 원

총 세 가지 스킬이 새롭게 추가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전기가 돌아온 것은 '집구석 절대자의 품위 유지'라는 스킬 때문인 것으로 보였다.

'집구석의 기능을 정상적으로 수복한다고?'

곧바로 일어난 나는 냉장고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우우웅

전기가 나가버리며 유사 아이스박스가 되었던 냉장고가 냉매 돌아가는 소리를 뱉어내고 있었다.

꾸욱

나는 냉장고 문을 조심스럽게 붙잡고 조금씩 힘을 주었다.

"!!"

냉장고 문을 열자마자 불빛이 나를 반겨주고 있었다.

'작동한다! 정말로 전기가 들어왔어!'

냉장고뿐만이 아니었다.

바로 옆에 싱크대에서는 물이 나왔고, 정수기도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또한 가스레인지와 인덕션도 정상적으로 켜졌다.

혹시나 싶어 확인한 핸드폰에서는 와이파이가 연결되어 있었다.

'정말로 원래대로 돌아왔다. 세상이 망하기 전으로······!'

전기가 들어오며 TV나 컴퓨터도 전원이 켜졌다.

물론 정상적인 채널이 없어 지지직거리는 화면만 송출하는 TV는 있으나 마나 한 물건이었다.

그나마 컴퓨터로는 오프라인 게임이 가능했기 때문에 아예 쓸모 없지는 않은 정도.

'그래도 멀쩡히 켜지는 모니터를 보니 뭔가 안심이 되네.'

세상이 망하기 전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모니터 앞에서 보내고는 했다.

그래서인지 정상적으로 부팅이 된 컴퓨터 화면만 봐도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꼭 세상이 망하기 전으로 돌아온 것만 같다고 해야 할까?

'인터넷 연결이 돼 있기는 한데··· 역시나 들어갈 수 있는 사이트는 없구나.'

전기가 끊기기 전만 해도 접속할 수 있던 사이트들이 있었다.

전세계적으로 나타난 몬스터나 피해 상황 따위를 속보로 떠들어대곤 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접속 가능한 사이트가 하나도 남지 않게 된 것이다.

'서버가 맛이 간 거겠지.'

전기가 끊기기 전까지 실시간으로 전해지던 서울의 상황은 심각함 그 자체였었다.

그곳에는 거대한 덩치를 가진 괴물들이 건물을 통째로 부수고 있었으니까.

'그나마 부산에 살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적어도 부산에서는 고층 빌딩만한 거대 괴물은 없었다.

멍하니 컴퓨터를 뒤지던 도중이었다.

'이건···.'

예전에 제주도로 가족 여행을 갔을 때 찍어뒀던 사진 파일이었다.

당시 디지털 카메라를 처음 산 엄마가 본전을 뽑겠다며 수백 장이 넘는 사진을 찍었더랬다.

그중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셋이서 같이 찍은 사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

사진 속의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었고, 엄마와 아빠는 양옆에서 나를 감싸며 행복한 듯 미소짓고 계셨다.

"···엄마, 아빠."

떨리는 내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엄마 아빠를 구해와야 해. 반드시.'

002화 [Episode 01] 집구석 절대자 (2)

후루룩―

갓 끓인 꼬들꼬들한 면발이 입 안으로 힘차게 빨려 들어왔다.

물을 적게 넣고 끓인 탓인지 라면 스프의 강렬한 맛이 혀를 자극해 왔다.

반숙이 된 계란 노른자를 입에 넣으니 완벽한 조화였다.

면을 깨끗이 비워낸 후 남아 있는 국물에는 방금 한 밥을 양껏 넣어 말아 먹었다.

"후아."

라면에 밥까지 말아먹으니 배가 터질 것만 같았다.

"흐음."

부모님 걱정에 눈시울을 붉히던 게 바로 아까 전이었는데, 이렇게 정신없이 배를 채우는 내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 자괴감이 들었다.

'너무 잘 먹었나···.'

배를 채운 나는 설거지 거리들을 물에 담가 놓고 다시 거실 창문 근처로 다가갔다.

[집구석 절대자는 집구석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역시 안 되나.'

혹시나 싶어 확인해봤지만, 역시나였다.

'스킬 레벨이 늘어나긴 했어도 아직은 밖으로 나갈 수 없군.'

그래도 아예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가능성을 봤다.'

몬스터를 잡는 것으로 스킬 레벨이 오른다는 것.

스킬 레벨이 오르며 새로운 기능을 가진 스킬이 생겨났다는 것.

'레벨을 올리다 보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종류의 스킬이 생겨날지도 몰라.'

그러니 지금의 내가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은 하나였다.

'몬스터를 사냥해서 스킬 레벨을 올리는 것.'

하지만 이것에는 아주 커다란 문제가 한 가지 있었다.

'그런데 밖으로 나가지 못하면 어떻게 몬스터를 사냥하지?'

레벨을 올리기 위해서는 몬스터를 사냥해야만 하는데, 정작 그 몬스터들은 죄다 밖에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집구석에 갇혀있는 신세인 내가 몬스터를 사냥할 방법이라고는 굉장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방금과 같은 천운을 기대하기는 힘들고.'

켈리칸이라는 이름의 괴물새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운빨이었다.

집구석 선포 스킬 덕분에 놈을 기절시킬 수 있었던 것도 그렇고, 고블린들이 추락한 놈의 숨통을 끊어준 것도 실로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었다.

또 다시 그런 형편 좋은 일이 발생할 리가 만무했다.

'고블린들은 잘만 하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딱히 대단한 방법은 아니었다.

[집구석 절대자는 집구석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보시다시피 거실 창문 밖으로 조금만 손을 뻗으면 보이지 않는 벽이 내 몸을 막아선다.

하지만 이것은 오로지 '나'만을 밀어낼 뿐이다.

나는 다른 한 손에 쥐고 있던 뭉친 휴지를 밖으로 던졌다.

휴지는 내 손바닥이 닿아 있는 옆을 허무하게 지나쳐 바깥으로 떨어졌다.

'좋아, 된다.'

마침 이곳은 아파트 최상층인 30층이었다.

게다가 켈리칸의 남은 시체가 너무 무거운 탓인지 제법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고블린들은 그것을 어찌하지 못하고 있었다.

켈리칸의 사체가 완벽한 미끼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적당히 무거운 물건이라면 충분히 흉기가 될 수 있었고, 머리만 맞출 수 있다면 고블린 정도는 한 방에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이거라면 충분하겠지.'

아령 3kg.

조금이라도 운동하는 게 어떻냐고 엄마가 직접 사주신 물건이었다.

물론 내가 이것을 사용한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몇 번 들고 말았으니 사용했다고 말하기도 애매하지.

그런데 그걸 이렇게 사용하게 될 줄이야.

'고맙습니다, 엄마.'

문제는 아령의 개수였다.

'겨우 두 개···.'

잘해봤자 겨우 두 마리의 고블린을 잡는 게 한계였다.

'할 수 있을까?'

아령을 들고 고민하던 그때, 켈리칸의 남은 사체를 운반하고 있는 고블린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까보다 더 많은 숫자의 고블린들이 켈리칸의 사체에 들러붙어 있었다.

낑낑대기는 해도 천천히 켈리칸의 사체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고블린들이 떠나가고 있었다.

'지금을 놓칠 순 없어!'

지난 며칠간 놈들을 관찰했었지만, 이렇게 많은 숫자가 밀집되어 있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모두 켈리칸의 시체 덕분에 벌어진 일이었다.

'맞아라!'

휘익!

창밖을 향해 던진 아령은 무서운 속도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빠각!

"케엑!"

"켁!"

아령이 명중한 곳에서는 뼈가 박살나는 살벌한 소리와 함께 피가 튀었다.

'···망했다.'

그러나 아령이 적중한 곳은 고블린의 머리가 아니었다.

그것이 떨어진 곳은 켈리칸의 머리.

완전히 빗나간 것이다.

'이젠 하나밖에 안 남았어.'

절망적이었다.

던져서 고블린을 잡을만한 물건이야 아직 남아 있긴 했다.

컴퓨터도 있고, TV도 남아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것들을 겨우 고블린 잡는 데 사용하기는 너무 아까웠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볼 때 하등 필요 없는 물건들이라는 것쯤은 안다.

하지만.

'이게 얼마짜린데···.'

이건 감성의 영역이었다.

어쩌면 아직 그렇게까지는 절박하지 않은 것인지도.

'게다가 내 힘으로 TV나 컴퓨터 본체를 던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기껏해야 창문 밖으로 밀어내는 정도일텐데, 그것만으로는 고블린들이 있는 곳까지 닿지 않을 것이다.

'이게 딱인데.'

실제로 아령은 고블린들이 있는 곳 바로 근처까지 날아갔지 않은가.

빗나가긴 했지만.

'더 없나?'

기도하는 심정으로 집안을 샅샅이 뒤져봤지만, 아령은 나오지 않았다.

하긴 내가 엄마였어도 나 같은 놈에게 아령을 더 사주진 않았을 것이다.

한 번을 사용 안 하는데 뭐하러 사주겠는가.

돈만 버리는 셈인데.

'그새 고블린 놈들이 떠나지는 않았겠지?'

슬쩍 거실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고블린들의 상태를 살폈다.

그런데.

고블린들과 눈이 마주쳤다.

'젠장!'

켈리칸의 머리 위에 올라간 고블린의 한 손에 내가 던진 아령이 들려 있었고, 놈은 내가 있는 곳을 향해 손가락질 해 대고 있었다.

"케겍!"

"케에에엑!"

고블린들이 나를 가리키며 지랄발광을 해 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아령을 던진 것이 나라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놈들은 켈리칸의 시체를 내버려두고 내가 있는 아파트 안쪽을 향해 우르르 몰려들었다.

'올라오려는 건가?'

아파트 저층은 이미 진즉에 놈들에게 점령당한 상태였다.

애초에 켈리칸의 사체를 아파트 안쪽으로 끌고 들어가고 있던 것을 보면 아예 아파트 저층을 둥지로 삼은 듯 했다.

"케에엑! 캬아악!"

"케게게겍!"

그 증거로 그곳에서 고블린 수십 마리가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는 내가 있는 고층을 향해 항의라도 하듯 고함치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 더 많은 고블린들이 몰려 있었다.

'TV를 던져 볼까? 지금이라면 한 방에 몇 마리는 죽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새로운 스킬 기능만 개방되면···. 어?'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아!"

갑자기 전기와 가스가 들어오며 정신이 없어서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스킬이 하나 있었다.

집구석 절대자의 상점 Lv. 1

-상점에 등록시킨 물품을 정가에 구매할 수 있다.

품위 유지 스킬과 함께 열렸던 상점 스킬.

"상점 오픈."

명령어를 내뱉은 순간 눈앞에 새로운 창이 나타났다.

[집구석 절대자의 상점]

(물건을 등록해 주십시오.)

ᚠ보유 금액 : 2,203,239 원

▶물품 등록

'보유 금액을 보면 절대자의 지갑 스킬이랑 연동되어 있나 보군.'

아직은 등록된 물품이 없어 텅텅 비어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한 손에 들고 있는 아령을 상점창에 갖다 대며 말했다.

"물품 등록."

[물건을 등록하시겠습니까?]

"그래."

그러자 상점창에서 빛이 뿜어져 나와 내가 들고 있는 아령을 스캔했다.

[클래식 논슬립 아령 3kg의 등록이 완료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비어있던 상점창에 익숙한 아령의 사진과 함께 새로운 품목이 생겨났다.

[집구석 절대자의 상점]

클래식 논슬립 아령 3kg (16,990 원)

ᚠ보유 금액 : 2,203,239 원

▶물품 등록

'쿠퐁에서 구입했던 가격이랑 똑같다.'

아무래도 시세는 세상이 망하기 전과 동일한 것 같았다.

'쿠퐁에서 산 건 두 개에 한 세트였는데.'

마침 상점창에 나타나 있는 사진에도 아령 두 개가 교차되어 놓여 있었다.

"클래식 논슬립 아령 구입."

[정말로 구매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예."

아령을 구매 확정한 순간.

짤랑!

동전이 짤랑거리는 효과음과 함께 상점창이 거실 바닥을 향해 빛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지이이잉

그곳에는 내가 손에 들고 있는 것과 완전히 똑같은 아령 2개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됐다!'

손에 들고 있던 아령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새롭게 생겨난 아령을 들어보았다.

'무게감 좋고.'

손에 잡히는 질감, 무게감 전부 오리지널과 완벽히 똑같았다.

'좋아.'

망설임 없이 그것을 창문 밖으로 냅다 던졌다.

그리고.

콰직!

[고블린(Lv. 7)을 사냥하셨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집구석 절대자의 지갑에 3,345 원이 입금되었습니다.]

"예스!"

바로 밑에 고블린들이 몰려있었던 탓인지 한 방에 명중시킬 수 있었다.

"케에엑!"

"켁켁!!"

"카아아악!"

고블린이 죽자 밑에서는 아주 난리가 나고 있었다.

그런 놈들을 향해 한 번 더 아령을 집어 던졌다.

이번에는 아령을 보자마자 고블린들이 혼비백산하여 흩어졌다.

콰아아앙!

덕분에 아령은 땅바닥에 쳐박히며 요란한 소음을 만들어냈다.

"까비."

빗나갔지만, 아쉬워할 필요는 없었다.

"클래식 논슬립 아령 3세트 구입."

지이이잉

이제 아령이라면 얼마든지 수급할 수 있게 됐으니까.

휘익 빠각!

[고블린(Lv. 6)을 사냥하셨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집구석 절대자의 지갑에 2,512 원이 입금되었습니다.]

그렇게 두 마리째 사냥에 성공했을 때였다.

[스킬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새로운 스킬을 습득하셨습니다.]

'나이스!'

고블린들의 레벨이 낮아서 조금 걱정했었는데, 생각보다 빠르게 레벨업을 할 수 있었다.

'아마도 켈리칸을 잡고 얻은 경험치 덕분이겠지.'

켈리칸의 레벨은 무려 23레벨이었다.

놈을 잡고 얻은 경험치가 레벨업 직전까지 차 있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곧바로 새롭게 얻은 스킬을 체크했다.

집구석 절대자의 창고 Lv. 1

-물품을 보관할 수 있는 아공간이다.

스킬명을 보는 순간 나는 약간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창고인가.'

무슨 종류의 스킬인지는 설명만 보고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창고 오픈."

띠링!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나타난 것은 상점창과 비슷한 창이었다.

마침 남아도는 아령 하나를 그곳에 갖다 댔다.

[창고에 보관하시겠습니까?]

"응."

지이이잉

상점창에서 쏟아지던 빛과 유사한 빛이 아령을 향해 쏟아졌고, 내 손 안에 들려있던 아령의 무게감이 희미해지더니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다.

[집구석 절대자의 창고]

클래식 논슬립 아령 3kg (1)

창고 안에 아령이 들어간 것을 확인한 나는 허공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아령 소환."

지이이잉

창고에서 나온 빛은 당연하다는 듯이 내가 노려보고 있는 허공을 향했고, 곧이어 그곳에서 아령이 나타났다.

툭!

허공에서 생겨난 아령을 낚아챈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된다.'

창고의 물품을 내가 원하는 곳에서 소환하는 게 가능했다.

'그렇다면.'

손에 든 아령을 다시 한 번 창고에 보관한 나는 거실 창문으로 바짝 다가갔다. 그리고 창밖으로 손을 뻗었다.

[집구석 절대자는 집구석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투명한 벽에 가로막히며 알림창이 생겨나는 것을 확인한 나는 아래에 몰려 있는 고블린들의 위치를 유심히 관찰했다.

그리고 투명한 벽 너머 3m 정도 떨어진 허공을 노려보며 말했다.

"아령 소환."

지이이잉

창고에서 빛은 정확히 내가 원하는 장소로 쏘아졌고, 아령 하나가 허공에서 나타났다.

허공에서 나타난 아령은 중력에 의해 고속으로 추락했다.

콰직!

아령에 적중당한 고블린 한 마리의 머리가 박살나며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시스템 메시지가 출력되었다.

[고블린(Lv. 6)을 사냥하셨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집구석 절대자의 지갑에 2,733 원이 입금되었습니다.]

003화 [Episode 01] 집구석 절대자 (3)

운 좋게 켈리칸을 사냥하고, 스킬 레벨업을 하면서 새로운 스킬들을 얻은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진라면 순한맛 구입."

[정말로 구매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예."

지이잉―

상점창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머문 곳에는 진라면 순한맛 5개입 한 봉지가 나타났다.

나는 그것을 들어 올려 유통기한 날짜를 확인해 봤다.

'며칠 전에 샀던 거보다 유통기한이 뒤로 밀렸다.'

오늘 아침 다 먹어치운 라면 봉지에 적혀 있는 유통 기한보다 정확히 3일 뒤로 밀려 있었다.

'역시 유통기한 날짜까지 최신화 돼서 나오는구나.'

새롭게 얻은 스킬 중 가장 유용한 것은 단연코 '집구석 절대자의 상점'스킬이었다.

필요한 물건을 상점에 등록하면 마음껏 구입할 수 있게 해주는 스킬.

사실상 내가 그동안 굶어죽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이 스킬 덕분이었다.

'딱 10개만 등록할 수 있다는 건 좀 아쉽지만···.'

그동안 상점을 이용하며 알아낸 사실이 몇 가지 있었다.

물품 등록은 딱 10개만 가능하다거나, 한 번 등록한 물건은 삭제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처음 스캔하는 물건의 상태에 따라서 상점에서 판매하는 물건의 상태가 결정된다는 것 까지 말이지.'

예를 들어 처음 상점에 등록할 때, 라면의 유통기한은 3개월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인지 상점에서 구입하는 라면은 죄다 지금 날짜로부터 3개월의 유통기한이 남은 물건이 나왔다.

그러니까 상점에 등록할 당시의 라면과 정확히 똑같은 상태의 물건이 나온다는 소리였다.

'뭐, 3개월이면 충분히 다 먹고도 남으니까.'

마땅한 반찬도 없고 배달도 불가능한 현 상황에서는 라면이 최고였다.

쪼르르르

냄비에 물을 받고 가스레인지 위에 올린 다음 불을 켰다.

따따따닥 화르륵

불이 붙은 것을 확인한 나는 건더기 스프와 분말 스프를 넣고 물이 끓는 것을 기다렸다.

오늘도 내 점심은.

"라면인 건가~ 라면인건가 오~ 라면···."

노래를 흥얼거리던 나는 그대로 멈추고는 잠시 자괴감에 빠졌다.

"······."

세상이 망하고 당장 부모님의 생사도 모르는 지금, 집 안에서 호의호식하며 노래나 흥얼거리고 있다니.

그것도 부모님이 전 재산을 투자해서 마련해 준 집에서.

"하아―."

보글보글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지.

물이 끓는 소리에 면을 집어넣었다.

멍하니 라면을 지켜보다가 젓가락으로 면을 휘휘 저었다.

그리고 적당한 시점에 계란 하나를 까 넣었다.

잠시 후 최적의 타이밍에 그릇에 옮겨 담은 라면은 면발의 쫄깃함이 극에 달해 있었다.

이 짓도 며칠이나 반복하며 꽤 요령이 생긴 상태였다.

후루룩

기대를 져 버리지 않는 맛이었지만, 어딘가 2프로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라면도 맨날 먹으니까 질리는 건가.'

혼자 산지 벌써 3년이 넘어가고 있었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연속해서 라면만 먹은 것은 처음이었다.

보통 일주일에 한 번은 엄마가 집에 찾아왔었으니까.

그냥 편하게 있다가 가라고 해도 엄마는 항상 집을 청소하고, 반찬을 만들어 주거나 카레를 해 주었다.

엄마가 왔다 가면 항상 냉장고에는 먹을 거리들로 가득했고, 나는 밥만 하면 됐었다.

반찬들이 상하기 전에 전부 먹어치우기 위해서는 라면을 끓여 먹을 일이 거의 없었다.

"···엄마."

엄마가 해준 반찬을 못 먹은 지 겨우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그 맛이 그리운 걸까.

군대에서도 이렇게 그립진 않았는데.

뚝.

난데없이 눈물 한 방울이 흘렀다.

나는 멍하니 얼굴을 닦아내며 생각했다.

'머리가 맛이 가고 있는 건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라면을 끓이며 노래를 부르더니, 이제는 라면을 입에 넣은 채로 눈물을 흘리다니.

내가 봐도 내 자신의 정신 상태가 그리 좋아보이진 않았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라면은 반쯤 남아있었지만, 입맛이 없었다.

'버려야겠군.'

음식물 쓰레기.

원래라면 최대한 나오지 않게 하고, 생긴다면 모아뒀다가 나중에 배출해야 했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다른 방법이 생겼다.

"창고 오픈."

창고를 오픈한 나는 라면 그릇을 바라보며 명령했다.

"그릇 안에 내용물을 보관해줘. 면이랑 국물이랑 건더기까지 전부."

[창고에 보관하시겠습니까?]

"응."

창고에서 나온 빛은 라면 그릇을 비추었고, 그릇 안은 설거지를 한 것처럼 깨끗하게 비워졌다.

이런 방법으로 남은 음식물들을 보관할 수 있었다.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해 창고 안에서는 음식물이 뒤섞이거나 부패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 상태였다.

'나름 유용하지. 혹시나 먹을 게 다 떨어지면 먹을 수도 있고.'

그렇게 식사를 마무리하고 그릇을 대충 헹궈 싱크대에 쌓아두었다.

-아들! 설거지는 꼬박꼬박 해야지!

설거지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을 보니 매번 잔소리하던 엄마의 목소리가 떠올라 또 다시 우울해졌다.

"후우. 상점 오픈."

[집구석 절대자의 상점]

클래식 논슬립 아령 3kg (16,990 원)

진라면 순한맛 (3,100 원)

제주삼다수, 2L, 12개 (12,400 원)

곰곰 우리쌀 5kg (14,890 원)

곰곰 특란, 10구 (3,950 원)

소화가 잘되는 우유, 930ml, 2개 (6,220 원)

양반 올리브 김 24봉 (9,800 원)

카놀라유, 900ml, 2개 (12,330 원)

반쯤 남은 오뚜기 토마토 케찹, 500g (3,350 원)

귤 껍데기 (300 원)

ᚠ보유 금액 : 1,893,340 원

▶물품 등록

지금 상점에 등록된 물건은 총 10개.

고블린을 잡기 위해 등록했던 아령부터 시작해서, 라면, 물, 쌀, 계란, 우유, 김, 식용유 등 전부 생활필수품 위주로만 등록을 했다.

그러다가 저지른 첫 번째 실수의 흔적이 바로 '반쯤 남은 케찹'이었다.

'상점에 등록하면 그냥 새 상품으로 되는 줄로만 알았지.'

그런데 '반쯤 남은'이라는 타이틀이 붙어버릴 줄이야.

시험 삼아 구입해본 케찹은 정말로 내가 등록할 때 상태 그대로 반쯤 남아 있는 중고 케찹이었다.

케찹을 등록하기 이전까지 개봉하지 않은 새 상품을 상점에 등록시킨 게 천만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상점의 제일 마지막 항목.

귤 껍데기 (300 원)

내가 저것만 보면 혈압이 오른다.

온전치 못한 상태로 케찹이 등록되는 것을 확인한 나는 괜한 실험정신이 발동되어 귤껍질을 등록시켜 보았다.

'이런 쓰레기도 등록이 될까?'하는 순수한 궁금증에서 저지른 짓이었다.

"병신 같은 놈."

호기심의 대가는 컸다.

그 직후 샴푸를 등록하려 했을 때, [더 이상 상점에 물품을 등록하실 수 없습니다.]라는 알림을 봐야 했으니까.

'좀 더 신중했어야 했는데.'

생각 없이 행동한 과거의 내가 미웠지만,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었다.

'괜찮아. 상점 스킬에도 레벨이 있는 것을 보면 분명 레벨업 할 방법이 있을 거야. 그러면 등록 가능한 물품 개수도 올라가겠지.'

절대자의 상점이라는 명칭이 붙어 있는 주제에 겨우 10가지 물품만 등록 가능하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어차피 샴푸나 린스 같은 것들은 당장 필요한 물건은 아닌데다 개봉도 하지 않은 새 상품들도 있었다.

'새 상품들을 개봉하기 전에만 레벨업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래야 온전한 물건을 구입할 수 있게 될 테니까.

상점창을 노려보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어?"

ᚠ보유 금액 : 1,893,339 원

분명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보유 금액이 1원 줄어들었다.

"뭐지?"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품위 유지 스킬에도 돈이 들어가는 거였나.'

전기나 가스, 그리고 수도.

이것들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을 소모해야 하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중임에도 돈이 빠져나간 것은 아마도 냉장고가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겠지.

'큰일이군.'

이래저래 돈 들어갈 일은 많은데, 돈을 벌 방법은 없었다.

지금 당장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고블린 사냥뿐이었는데, 이젠 그게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망할 고블린 새끼들.'

고블린들은 눈치가 빨라도 너무 빨랐다.

아령을 떨어뜨리는 방식으로 몇 마리를 사냥한 그날, 나를 향해 악을 쓰던 것도 잠시 그대로 거처를 옮겨 달아나 버렸다.

덕분에 지난 일주일간 내가 사냥한 고블린들의 숫자는 겨우 13.

그 중에 대부분이 첫째 날 사냥한 것이었다.

고블린들이 거처를 옮겨버린 뒤로는 겨우 2마리밖에 잡질 못했다.

'너무 비효율적이야.'

첫 날에는 제법 쏠쏠했다.

16,990원인 아령 한 세트를 사서 두 마리의 고블린을 잡으면 약 5천원을 돌려받을 수 있었으니까.

아령을 던지는 족족 고블린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고블린들이 거실 창문 밑에 몰려있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아무렇게나 던져도 맞추는 게 가능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열 개를 던져서 한 마리를 잡을까 말까니.'

고블린 한 마리를 잡기 위해 거진 17만원을 들이는 셈이다.

이런 식이면 운 좋게 켈리칸을 사냥하며 벌어들인 200만원도 금방 소모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끝장이다.'

그 돈을 다 쓰게 되면 식량은 물론 절대자의 품위 유지 스킬도 끊길 테니까.

'젠장. 어디 잡을만한 놈 없나?'

예전에는 아파트 산책로를 내려다보면 꼭 몇 마리씩 무리지어 다니는 고블린들을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 빈도가 너무 낮았다.

하루 종일 창밖을 내다보고 있어야 겨우 한, 두 무리를 찾을 수 있었는데, 그 중에서 아령을 떨어뜨려서 죽일 수 있는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는 고블린들의 숫자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나마 저게 있어서 고블린들이 좀 찾아왔었는데.'

고블린들이 버려두고 간 켈리칸의 시체 조각.

저것 때문인지 고블린 무리가 몇 번 찾아오기는 했었다.

하지만 켈리칸의 사체가 있는 곳까지는 거리가 멀다보니 창고에서 아령을 소환하는 방식으로는 사냥이 불가능했고, 직접 아령을 던져야 했다.

당연히 정확도가 터무니없이 낮을 수밖에.

'오늘은 한 마리도 보이질 않는 군.'

더군다나 상황은 더욱 더 나빠지고만 있었다.

고블린 놈들 사이에서 소문이라도 퍼진 것인지 어제와 오늘은 하루 종일 고블린 무리를 못 봤다.

'뭔가 방법을 찾아야 해.'

무언가 획기적인 방법이 필요했다.

'예를 들면 켈리칸이 날아와 창문에 부딪힌다거나.'

다시 생각해봐도 그건 정말 천운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나는 천천히 말라죽었겠지.'

스킬 레벨을 올려줄 대량의 경험치가 없었다면 상점과 품위 유지 스킬을 각성하지 못했을 것이고, 지금쯤 식량다운 식량은 전부 소모했을 것이다.

아마도 생쌀을 씹어 먹고 있었지 않았을까.

'아, 어디 멍청한 켈리칸 한 마리 안 지나가나?'

이런 상황에서 태평한 소리일지는 몰라도 고층 아파트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날씨 좋다."

그때였다.

"······?"

시리도록 푸른 하늘 저 편에서 무언가 검은색의 점처럼 보이는 것이 나타났다.

그것은 점점 더 커지더니 금세 주먹만 한 크기가 되었다.

'저건?'

그제서야 그것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일주일쯤 전에 저것과 똑같은 것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켈리칸!'

거대한 괴물새, 켈리칸이었다.

지난 일주일간 몇 번이고 상상하던 상황.

어떻게 행동해야할 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아아아악! 여기다! 이 괴물아아아―!!"

거실 창문을 열어젖히고 힘차게 팔을 흔들어댔다.

놈이 나를 발견할 수 있도록 커다랗게 소리를 지르며 방방 뛰기까지 했다.

'제발!'

간절한 마음을 담아.

"여기다! 여기―! 망할 괴물 새끼야!"

어그로를 끌었다.

그리고 그것은 성공적이었다.

'됐다!'

놈과 눈이 마주쳤다.

놈은 정확히 이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나이스!'

흥분한 켈리칸이 이곳을 향해 머리를 박으면 그대로 게임 끝.

그때처럼 기절하며 바닥으로 추락하겠지.

지금은 켈리칸의 숨통을 끊어줄 고블린들이 없었지만, 문제는 없었다.

'내가 직접 아령으로 마무리하면 되니까.'

켈리칸이 무서운 속도로 나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저번과는 달리 공포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기대감으로 가슴이 달아오를 뿐이었다.

'저것만 잡으면 백퍼센트 레벨 업이다.'

심지어 저 놈은 그때 봤던 놈보다 덩치가 더 컸다.

당연히 레벨도 더 높겠지.

그렇다면 경험치도 훨씬 후할 것이고 돈도 더 많이 줄 것이다.

완전 대박이었다.

"덤벼 이 개자식아―!"

혼신의 힘을 다 해 놈을 도발하던 그때였다.

펄럭!

놈이 창문에 부딪히기 직전, 거센 돌풍이 불었다.

"으윽!"

갑자기 몰아친 바람으로 인해 눈을 감았다 떴을 때.

"······어라?"

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이게 대체···?'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러다 문득 소름이 돋았다.

'설마?'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고, 아파트 옥상에 꼿꼿이 선 채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켈리칸과 눈이 마주쳤다.

004화 [Episode 01] 집구석 절대자 (4)

놈과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온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공포가 전신을 휘감으며 발이 딱딱하게 굳었다.

가까이서 마주한 놈의 거대한 덩치와 살기가 담긴 눈은 전형적인 포식자의 그것이었다.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다음 순간, 켈리칸은 기습적으로 나를 향해 아가리를 들이밀었다.

콰직!

[허가 받지 않은 대상이 출입을 시도합니다.]

보이지 않는 벽이 놈의 이빨을 막아서고 나서야 나는 놈이 나를 덮치려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허억!"

투명한 벽에 진입이 차단된 놈은 그대로 아래로 미끄러졌지만, 이내 다시 날개짓 하여 올라왔다.

그리고 그 상태로 벽면에 딱 달라붙어서는 나를 향해 이빨을 들이밀었다.

까드드득!

[허가 받지 않은 대상이 출입을 시도합니다.]

[허가 받지 않은 대상이 출입을 시도합니다.]

[허가 받지 않은 대상이 출입을 시도합니다.]

······

······

바로 앞에서 녀석의 이빨과 아가리 안쪽을 라이브로 관람하고 있던 나는 문득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설마 뚫고 들어오는 건 아니겠지?'

녀석의 사나운 이빨이 보이지 않는 벽을 뚫고 내 목까지 닿을 것만 같다는 불안감.

거기까지 상상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떻게든 해야 해!'

최악의 상황이 닥치기 전에 뭐라도 해야만 했다.

곧바로 부엌으로 달려간 나는 식칼을 손에 들고 켈리칸의 앞에 섰다.

놈은 내가 움직이던 말던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보이지 않는 벽을 씹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동안 칼의 길이와 놈과의 거리를 가늠해보던 나는 결론을 내렸다.

'칼이 너무 짧아.'

평범한 부엌칼의 도신은 겨우 20센티 정도였다.

투명한 벽에 내 몸이 막히는 것을 생각하면 칼이 뻗어나갈 수 있는 것은 겨우 한 뼘 정도인 것이다.

당연히 놈에게 타격을 입히기 위해서는 투명한 벽에 바짝 붙어 있는 곳을 공략해야만 하는데, 그런 곳이라고는 투명한 벽을 갉아먹고 있는 놈의 아가리 밖에 없었다.

단단해 보이는 부리와 그 안에 자라난 이빨들.

저기에 부엌칼을 쑤셔 넣는다고 해서 딱히 큰 효과는 없을 것 같았다.

'목에 박아 넣으려면 창처럼 만들어야 해.'

마침 적절한 재료는 다 있었다.

다이소에서 구입한 밀대 끝부분에 부엌칼을 고정시키고 테이프로 마구 휘감았다.

그러자 그럴듯한 무기가 완성되었다.

식칼이 잘 고정됐는지 확인한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충분해.'

까드드득!

[허가 받지 않은 대상이 출입을 시도합니다.]

녀석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 채로 투명한 벽에 몰두하고 있었다.

'지금!'

푸욱!

온 힘을 다해 내지른 창은 놈의 목덜미에 반쯤 파고들었다.

-끼에에엑!!

놈은 기겁하며 몸을 뒤로 뺐고, 그 반동으로 창이 빠져나오며 놈의 상처를 한층 더 벌려놓았다.

푸확!

녀석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피는 투명한 벽에 막혀 흘려 내렸는데, 그 양이 꽤 많았다.

'됐어!'

그러나.

-끼에에엑―!!

놈은 목에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멀쩡히 움직이고 있었다.

쿵! 쿵!

[허가 받지 않은 대상이 출입을 시도합니다.]

대가리로 투명한 벽을 들이받으며 화풀이하는 모습은 상처 입은 맹수 그 자체였다.

사납게 들이받는 그 모습은 자기가 죽는 한이 있어도 꼭 나를 죽이고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엿보이는 듯 했다.

"하, 한 번 더!"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한 번 창을 내뻗었다.

그러나.

휘익!

"엇!"

이번에는 놈이 내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고, 창을 찌르는 순간 오히려 부리로 창대를 붙잡고 잡아당겨 버렸다.

빠직!

다이소에서 구입한 플라스틱 창대는 켈리칸의 부리 속에서 개박살이 나버렸고, 그 결과 앞부분에 달려 있던 식칼을 잃어버렸다.

"이러면 나가린데···."

-끼에에에에―!

자그마한 과일칼이 하나 더 있긴 하지만 그건 식칼만큼 날카롭지는 않았다.

아마 거의 피해를 주지 못하겠지.

'게다가 놈이 나를 주시하고 있는 이상 내 공격이 통할 거 같지도 않고.'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놈이 지랄발광을 해대는 순간에도 목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저대로 놔두면 과다출혈로 죽을 것 같았다.

[허가 받지 않은 대상이 출입을 시도합니다.]

투명한 벽은 녀석의 침입을 완벽히 차단해주고 있었으니 이젠 별로 무섭지도 않았다.

차분하게 기다리기만 하면 그만이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투명한 벽에 녀석의 피가 범벅이 될수록 놈은 확실하게 지쳐가고 있었다.

이윽고 아예 움직임을 멈춘 놈은 더 이상 투명한 벽을 공격하지 않고 나를 조용히 노려볼 뿐이었다.

무언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놈의 눈을 마주 노려보고 있던 나는 한 가지 좋지 않은 가설이 떠올랐다.

'잠깐만.'

녀석도 투명한 벽을 뚫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지한 듯 했다.

그렇다면 이대로 녀석이 포기해버리면?

과다출혈로 죽기 전에 하늘로 날아 떠나가 버리면 어떻게 되는 걸까?

'전리품 정산은 사체가 근처에 있을 때만 발동된다.'

내가 이런 가설을 세운 이유는 간단했다.

그동안 고블린들을 사냥하면서 무조건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아령이 몸이나 다른 곳에 맞은 놈들도 있었고, 그 중에는 분명 죽기 직전의 상태였던 놈들도 있었다.

'하지만 같이 있던 무리가 놈을 데려갔고, 그 놈은 전리품 정산이 되지 않았었지.'

분명 죽었을 것이다.

머리가 아닌 가슴팍에 아령을 명중 당했던 그 놈이 지금까지 살아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렇다면 이놈도 일정 거리 이상 멀어지면 전리품 정산이 안 된다는 소리다.'

그럴 순 없었다.

돈이 얼마짜린데 이대로 놓아준단 말인가.

그것도 다 잡은 사냥감을.

'마무리 할 방법이 없나?'

나는 다급하게 집안을 둘러봤다.

그리고 그런 내 두 눈에 식용유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

저거라면 놈을 마무리할 수 있지 않을까.

"상점 오픈! 카놀라유 10세트 구입!"

[정말로 구매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예!"

지이잉―

순간 거실 바닥에 카놀라유 900ml를 담은 식용유 통 스무 개가 나란히 생겨났다.

"창고 오픈! 플라스틱 통 빼고 식용유만 넣어줘!"

지이잉―

그렇게 모든 식용유를 창고에 보관한 나는 계속해서 부지런히 움직였다.

놈이 부러뜨린 창대 끝에 키친타올을 둘둘 만 다음 테이프로 고정시켰다.

그리고 주방으로 달려가 가스 불을 켰다.

"식용유 소환!"

그리고 커다란 냄비를 올리고 그 안에 모든 식용유를 부어냈다.

타다다닥- 화르륵!

식용유가 충분히 가열될 때까지 내 마음도 타들어가고 있었다.

카드드득! 카드득!

'이 정도면 됐나?'

기다림의 시간은 무척이나 길었다.

"보관!"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식용유를 창고에 보관하고, 키친타올에 식용유를 적신 다음 그대로 불을 붙였다.

화르륵!

가스불은 그대로 창대 끝으로 옮겨 붙었고, 나는 그것을 가지고 거실 창가로 달렸다.

놈은 여전히 내 모습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특히 불이 붙은 창을 경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놈의 머리 위를 노려보며 말했다.

"식용유 소환!"

그 직후.

지이잉―

켈리칸의 머리 위에서 소환된 펄펄끓는 식용유 18L가 그대로 놈의 몸을 적셨다.

-키에엑?!

갑작스러운 식용유 공격에 당황한 놈의 시선이 하늘을 향한 순간.

"뒤져!"

부러진 창대 끝의 활활 타오르는 부분을 놈의 몸에 찔러 넣었다.

-끼에에엑!

기습에 놀란 것인지 놈은 아파트 벽면에서 떨어지며 날갯짓 했다.

놈이 떠나가고 있었지만, 나는 미소 지을 수 있었다.

'됐다.'

식용유는 발화점이 높아서 불이 잘 붙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발화점이 높을 뿐이지, 기름이기 때문에 한 번 불이 붙으면 아주 잘 타오르기도 한다.

때문에 가끔씩 나는 주방 화재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켈리칸의 몸통에는 불붙은 창이 꽂혀 있었다.

자그마한 불길은 놈의 몸을 흠뻑 적신 식용유에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옮겨붙기 시작했다.

화륵-

처음에는 천천히 퍼지던 불길은 이내 켈리칸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화르르륵!

불길이 거세지는 것과 동시에 당황한 켈리칸이 허둥대는 것이 눈에 보였다.

불을 끄기 위함인지 다급하게 날개를 퍼덕여보지만, 그런 행동은 오히려 불을 더 크게 만들 뿐이었다.

-케에에에엑―!

외마디 비명과 함께 놈은 아파트 산책로로 추락했다.

콰직! 쿠우웅!

육중한 몸이 추락하며 산책로에 있는 나무 한 그루를 완전히 박살내었다.

나무가 쿠션 역할을 해 준 것인지 놈은 아직까지도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꽤애애액!

몸에 붙은 불을 끄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굴러다녀보지만, 주변에 불을 옮겨 붙이기만 할 뿐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화르르륵!

녀석의 발버둥은 그리 길게 이어지진 않았다.

[켈리칸(Lv. 27)을 사냥하셨습니다.]

[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스킬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스킬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새로운 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시스템 알림창이 켈리칸의 숨통이 끊어졌음을 알려왔다.

[조건에 충족되는 전리품이 근처에 있습니다.]

[전리품을 정산을 시작합니다.]

정산이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아래쪽에서 불타고 있던 켈리칸의 시체가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일부가 남았던 저번의 경우와는 달리 이번에는 확실하게 전부 사라지고 나서야 알림이 나타났다.

[전리품 정산이 완료되었습니다.]

[집구석 절대자의 지갑에 9,347,487 원이 입금되었습니다.]

그 액수를 본 나는 놀라 자빠질 수밖에 없었다.

"구, 구, 구백만원?!"

레벨이 높은데다 이번에는 온전히 내 힘으로 사냥한 것이어서 정산 금액이 높으리라고는 예상을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많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거의 천만원이잖아?'

사실상 남아 있던 돈까지 합치면 천만원이 넘는 금액을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이것도 나름 직접 번 돈이라고 만족감이 굉장했다.

"하하."

그러나 켈리칸이 준 선물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집구석 영역 확장이 시작됩니다.]

"음?"

우우웅

처음 보는 메시지와 함께 무언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집 전체가 옅게 요동치는 것 같은 느낌.

그것이 절정에 이른 순간.

"!!!"

갑자기 시야가 확장되었다.

우웅!

처음에는 거실에 주저앉아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이건··· 나?'

그 이후 시야는 빠르게 확장되기 시작했다. 거실 전체의 모습과 주방, 안쪽에 있는 방과 화장실의 모습까지 구석구석 보였다.

아니, 보인다기 보다는 느껴졌다.

집의 전체적인 형태와 실시간으로 흐르는 전기. 가구들의 배치와 바닥의 자잘한 먼지들까지.

그 모든 것이 느껴지고 있었다.

마치 내가 집 그 자체가 된 듯한 기분.

우우웅!

'으윽!'

그때 전신에서 격통이 느껴졌다.

몸 전체가 부풀어 오르며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 이건!'

실제로 몸이 확장되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 몸이 아니라 내가 느끼는 곳의 영역이 늘어나고 있었다.

현관문을 너머서 복도로, 복도를 너머서 엘리베이터를 감싸고, 심지어는 옆집까지.

이윽고 옆집의 상황이 훤히 들여다보이기 시작했다.

'사람?'

옆집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부부와 아이 둘.

'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남편은 아는 얼굴이었다.

가끔 편의점을 갈 때나 쓰레기를 버리러 갈 때 마주치곤 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옆집 사람들?'

그들이 대화 내용이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려왔다.

"여보, 어떡해요? 타는 냄새가 나는데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에요?"

"괜찮아. 여긴 30층이잖아. 웬만한 괴물들은 절대 못 올라와."

"아까부터 쿵쿵거리는 소리도 들렸잖아요.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아빠아아. 무서워어."

"서연아, 쉿!"

"흐윽."

그들이 공포에 떨고 있는 이유는 짐작이 갔다.

켈리칸이 만들어낸 소음 때문이겠지.

그때였다.

"허억!"

집구석의 영역이 30층 전체로 확장된 것을 느낀 순간, 다시 내 몸의 통제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

'방금 그건···.'

생각을 정리하려 하는데 눈앞에 새로운 알림창이 나타났다.

[시민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을 만족하는 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시민권을 부여하시겠습니까?]

005화 [Episode 01] 집구석 절대자 (5)

알림창에는 네 명의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30대 부부와 아이 둘.

모두 옆집 사람들의 사진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시스템 창을 향해 질문을 던져봤다.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시민권을 부여받지 못한 개체는 집구석에서 퇴출됩니다.]

[정말로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역시나.'

그냥 물어본 게 아니었다.

시스템은 내 말을 이해하고 있었다.

아니면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던가.

'그게 아니라면 그릇 안에 있는 라면만 창고에 보관한다던지, 카놀라유 통 안에 들어있는 기름만 창고 안에 넣는 짓 따위는 불가능했겠지.'

집구석 절대자 스킬.

이 힘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어느 정도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는 건 짐작하고 있었다.

물론 시스템의 설명이 친절한 방식은 아니었다.

모든 것을 가르쳐주진 않으니까.

'집구석에서 퇴출된다는 건···.'

어떤 방식으로 퇴출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쩐지 그리 안전한 방식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 명 모두에게 시민권을 부여해."

[최형준, 박혜원, 최나연, 최서연에게 시민권을 부여합니다.]

옆집 가족에게 시민권을 부여한 뒤 곧바로 스킬창을 열어봤다.

시민권과 관련된 스킬이 새롭게 각성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응? 다른 거네?"

새롭게 각성한 스킬은 시민을 관리하는 스킬이 아니었다.

집구석 절대자의 눈 Lv.1

-집구석 안에서는 그 무엇도 절대자의 눈을 피할 수는 없다.

방금 겪었던 묘한 현상이 바로 절대자의 눈을 사용한 상태였다는 것을 바로 눈치 챌 수 있었다.

'시민 관련된 건 어디 있지? 아, 찾았다.'

시민과 관련된 것은 의외로 집구석 선포 스킬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집구석 선포 (패시브) Lv. 6

-그 누구도 절대자의 허락 없이는 집구석을 침범할 수 없다.

ᛗ시민 관리

집구석 선포 스킬에 시민 관리라는 버튼이 새롭게 생겨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눌러보니 아까 봤었던 네 명의 사진과 함께 간략한 수치가 적혀 있었다.

□최형준 (신뢰도 : 24) (Lv. 9)

□박혜원 (신뢰도 : 18) (Lv. 5)

□최나연 (신뢰도 : 33) (Lv. 3)

□최서연 (신뢰도 : 42) (Lv. 2)

현재 인구수 ( 4 / 600 명)

"600명이라고?"

마지막에 적혀 있는 숫자는 아마도 받아들일 수 있는 시민들의 숫자일 것이다. 앞에 4라는 숫자가 적혀 있기 때문에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숫자가 너무 컸다.

'그렇다는 건 앞으로 596명이나 더 받아들일 수 있다는 소리인데. 숫자가 좀 지나치게 크지 않나?'

본능적으로 이 기능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최형준."

네 명의 시민 중 한 명의 이름을 부르자 자세한 시민 정보가 떠올랐다.

『이름 : 최형준 (Lv. 9)

신뢰도 : 24

각성 능력 : 없음

경험치 분배율 : 0%

정산금 분배율 : 0%

★퀘스트 부여 퇴출』

경험치 분배율과 정산금 분배율.

이 항목이 의미하는 바는 결국 시민이 사냥하는 경험치와 정산금이 나에게 들어온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내 마음대로 분배율까지 조종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이거 설마?'

레벨이 오르면서 새롭게 생겨난 기능이 아니라 원래부터 있었던 기능이 아닐까?

단지 우리 집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시민권 부여를 하지 못했던 게 아니었을까?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처음에는 내가 가진 스킬이 굉장히 기형적이라 생각했었다.

집에 한정해서 완벽한 안전구역을 만들어주는 것까지는 좋지만, 정작 나는 집구석에 갇혀 있어야만 했었으니까.

'하지만 처음부터 시민권 부여가 가능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처음부터 같이 사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 사람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면 그만이었다.

시민이 사냥하는 경험치가 고스란히 내게 돌아올테니까.

'그런 식으로 성장하는 거였나.'

방금 켈리칸과의 전투로 확실해진 것이 한 가지 있었는데, 내 능력이 생각보다 상당히 사기적이라는 것이었다.

27레벨이라는 게 정확히 어느 정도로 강력한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웬만한 몬스터들의 공격은 충분히 막겠다 싶었다.

'처음부터 여기가 아니라 본가에 있었더라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문제인데.'

부모님은 2층짜리 주택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계셨는데, 거기서 각성했다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우선 가족들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내 능력을 성장시키는 것도 문제없었을 것이다.

'사냥도 걱정 없지.'

내가 켈리칸을 사냥한 방식을 생각해보면 굳이 집 밖으로 나가지 않더라도 충분히 사냥을 할 수 있었다.

대문만 열어놓고 집 안에서 몬스터들을 공격하면 되니까.

생각해보면 내가 이렇게까지 고립된 것도 전부 30층이라는 고층 아파트에서 능력을 각성한 탓이었다.

1층이었다면 거실 창밖으로 고블린들을 찔러 죽이며 성장 할 수 있었을 텐데.

'내가 운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면 아무것도 못 해보고 죽었겠지.'

원래라면 처음부터 시민들을 부리며 성장했어야 하는 능력인데, 나는 이제야 겨우 시민들을 부릴 수 있게 된 셈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결과적으로는 모든 것이 잘 풀리긴 했으니까.

'그런데 이건 뭐지?'

최형준의 시민 정보창에는 유독 눈에 들어오는 항목이 한 가지 있었다.

"퀘스트 부여."

띠링!

퀘스트 부여 창에는 퀘스트 내용, 제한시간, 성공 보상, 실패 페널티 항목으로 나뉘어 있었다.

나는 시험 삼아 각 항목들을 채워봤다.

"고블린 한 마리 사냥, 기간은 넉넉하게 일주일, 보상은 없음. 실패 페널티는 없음."

띠링!

"퀘스트 부여"

퀘스트 내용 : 고블린 사냥 (0/1)

제한 시간 : 168시간 00분 00초

보상 : 소량의 경험치.

실패 페널티 : 없음.

[이대로 퀘스트를 부여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내 의견이 그대로 반영된 퀘스트 창이 나타났다.

이상한 것은 보상 쪽이었다. 분명 없음을 선택했는데도 불구하고 소량의 경험치가 보상으로 제시되어 있었다.

'기본적인 보상은 존재한다는 건가. 그러면··· 실패 페널티는 어디까지 가능 한 거지?'

악의가 있는 게 아니다.

단지 어디까지 가능한지 실험해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곧바로 퀘스트가 부여되는 게 아니라는 걸 확인했으니까.

"퀘스트 실패 페널티 수정, 죽음."

띠링!

"퀘스트 부여"

퀘스트 내용 : 고블린 사냥 (0/1)

제한 시간 : 168시간 00분 00초

보상 : 소량의 경험치.

실패 페널티 : 죽음.

[이대로 퀘스트를 부여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아니오."

[퀘스트 부여를 취소합니다.]

···이게 될 줄이야.

퀘스트 내용도, 제한 시간도 모두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 페널티에 제한이 없다니.

이것이 뜻하는 바는 명백했다.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시민을 죽일 수 있다.'

시민들의 생사여탈권을 내가 쥐고 있다는 것.

어려울 것도 없었다.

겨우 고블린 한 마리 잡는 퀘스트라고 할지라도 제한시간을 1초로 잡아버리면 그 즉시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미친."

스킬의 진짜 성능을 마주하게 되니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한 사람, 아니 시민으로 받아들인 네 사람의 목숨이 내 손에 달려있다고 생각하니 절로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처음으로 내 능력이 두려워졌다.

'이게 집구석 절대자 스킬···.'

스킬명 그대로 집구석 내에서만큼은 그야말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게 바로 내 스킬인 것이다.

'···어떻게 한다?'

시민들을 써 먹을 방법이야 많았다.

극단적인 경우 퀘스트 부여를 활용해서 장기말처럼 사용하는 것도 가능했다.

방금처럼 페널티를 죽음으로 만들어버리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사냥을 하러 나가야 할 테니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시민들을 착취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말이다.

'퀘스트로 엄마 아빠를 구해오라고 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다고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퀘스트를 수행하려고 할까? 아니, 그 전에 퀘스트를 수행할 능력은 있을까?'

옆집 아저씨, 최형준의 레벨은 겨우 9였다.

고블린 정도야 문제없이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고블린들의 레벨은 고작해야 6이나 7이었으니까.

하지만 바깥세상은 지금 레벨 27의 켈리칸 같은 괴물이 돌아다니는 위험한 곳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당장 고블린 수십 마리가 달려든다면 금방 죽고 말겠지.'

그래서야 의미가 없었다.

'고블린 무리 정도는 압도할 수준으로 키워야 해. 아니면 그럴만한 수준의 팀을 구성하던가. 그래야 엄마 아빠를 구출해 올 가능성이라도 생긴다.'

방법이야 간단했다.

경험치 분배율이 있는 것을 보면 시민들도 몬스터 사냥으로 성장이 가능하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몬스터 사냥 퀘스트를 부여하면 된다.

퀘스트를 수행할 수밖에 없도록 강제하는 것이야 얼마든지 가능했지만, 그러기는 싫었다.

인간적으로도 도리가 아닐뿐더러 분명히 내게 반감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부모님을 구하는 데 있어서 좋지 않은 변수로 작용하게 되겠지.

'최악의 경우 엄마 아빠가 위험해 질 수도 있다.'

내가 원하는 건 시키는 대로만 하는 장기말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나를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 필요했다.

'퀘스트로 강제하는 방식으로는 얻을 수 없어.'

사람을 얻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마음을 먼저 얻어야 하는 법이다.

'윈윈 전략으로 간다.'

결론을 내린 나는 곧장 이웃집을 향해 움직이려 했다.

그러다 현관에 있는 전신 거울에 비친 스스로의 모습을 보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정돈되지 않은 수염과 편한 추리닝 복장은 전형적인 백수의 모습이었다.

게다가 방금 직전까지 있었던 켈리칸과의 전투로 온몸이 땀에 절여져 있는 상태였다.

'우선은 좀 씻자.'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첫인상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나도 안다.

쏴아아아

따뜻한 물을 맞으며 스킬 창을 점검해보던 중 아까는 미처 발견하지 못 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

집구석 절대자의 상점 Lv. 1 [+]

-상점에 등록시킨 물품을 정가에 구매할 수 있다.

[보유 스킬 포인트 : 3]

집구석 절대자의 품위 유지 (패시브) Lv. 1 [+]

-품위 유지를 위한 집구석 전반의 기능을 정상적으로 수복한다.

[보유 스킬 포인트 : 3]

집구석 절대자의 창고 Lv. 1 [+]

-물품을 보관할 수 있는 아공간이다.

[보유 스킬 포인트 : 3]

스킬 레벨 옆에 플러스가 붙어 있었다.

'스킬 레벨을 올릴 수 있다!'

드디어 상점에 새로운 물건을 등록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집구석 선포 스킬은··· 역시 스킬 포인트로는 올릴 수 없는 건가.'

플러스 표시가 나타난 스킬은 상점과 품위 유지 그리고 창고 스킬뿐이었다.

지갑 스킬이야 맥스 레벨이니 더 이상 올릴 수 없는 게 당연했고, 방금 얻은 절대자의 눈 스킬은 레벨이 1로 표시되어 있지만 플러스 버튼은 나타나지 않았다.

'숙련도라도 있는 건가?'

어찌됐든 상관없었다.

처음부터 레벨을 올릴 스킬은 정해져 있었으니까.

[정말로 집구석 절대자의 상점 스킬을 올리시겠습니까?]

"그래."

그 순간 스킬 창이 황금빛을 뿜어내며 점멸했다.

우웅!

[집구석 절대자의 상점 스킬이 Lv. 2가 되었습니다.]

[등록 가능한 물품의 개수가 20개로 늘어났습니다.]

[모든 상품의 가격이 10% 할인됩니다.]

"오?"

물품 등록의 한계치가 늘어나는 것 까지는 예상했었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 가격까지 할인해주다니.

"괜찮은데?"

남은 포인트는 이제 2개.

혹시나 싶어 상점 스킬을 확인했지만, 이번에는 +버튼이 없었다.

'레벨업 마다 뭔가 조건이 있는 것 같은데.'

짐작 가는 게 한 가지 있었다.

'물품 등록 한계치인 스무 개를 모두 채우면 다음 레벨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어차피 등록시킬 물건들은 미리 생각해둔 상태였다.

최우선순위로 등록시키는 것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 상품인 것들.

샤워물품이나 휴지 같은 것들이었다.

'한 번 해보자.'

006화 [Episode 02] 생존자들 (1)

남은 보유 스킬 포인트가 2개 이므로 품위 유지와 창고에 투자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점에 집착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상점 스킬이 훨씬 유용하니까.'

이미 전기, 수도, 가스의 사용이 가능한데 굳이 품위 유지 스킬에 투자할 이유가 없었다.

해 봤자 전기세 할인, 수도세 할인 같은 효과가 나오지 않겠는가.

'음. 그러고 보니 영역이 확장 됐었지. 옆집에 전기를 공급해주려면 레벨을 올려야하나?'

창고에도 굳이 스킬 포인트를 투자할 이유가 없었다.

솔직히 레벨을 올려봤자 창고 공간을 늘려주거나 하는 게 전부일 것 같은데 지금까지 창고를 쓰면서 공간이 부족한 적이 없었다.

'나중에는 몰라도 당장 레벨을 올릴 필요는 없어.'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단연코 상점 스킬이었다.

'무조건 초반에 빠르게 올려야만 해. 멀쩡한 상태가 아니라면 의미가 없어진다.'

휴지, 샴푸, 린스, 바디워시 등등.

생활전반에 필요한 필수품이 온전할 때 최대한 많은 것들을 상점에 등록시켜야만 했다.

'세상이 망한 뒤로 새 상품을 생산해 내는 공장은 없을 테니까.'

생산은 고사하고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무서운 속도로 소모해댈 것이 분명했다.

아직 확인은 못했지만 바깥에 있는 편의점이나 마트들은 죄다 털렸을 것이고 멀쩡한 물건이 있는 곳은 손에 꼽을 것이다.

이미 세상이 망한지 열흘이나 지났으니까.

'최대한 많은 물건을 확보해서 상점에 등록시켜야 해.'

생존에 필요한 물건들부터 우선적으로 등록하고, 그 이후에 여유가 되면 콜라나 과자와 같은 것들을 등록할 계획이었다.

'인류 문명이 망하면 빠르게 사라져 갈 것들.'

그 중에서 내게 행복을 줬던 모든 물건들을 등록시켜야만 한다.

맛있는 것, 유용한 것, 필요한 것 모두.

가능한 한 빠르게.

샤워를 마친 나는 곧장 밖으로 나와 한 번도 쓰지 않은 샴푸, 클렌징폼, 바디워시, 칫솔, 치약, 면도날 그리고 로션을 등록시켰다.

이어서 두루마리 휴지, 물티슈 등을 등록시켜 순식간에 9칸을 소모했다.

생활하면서 소모가 빠르고,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 상품이 있는 것들 위주로 가득 채운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뭐로 채우지?'

웬만큼 필요한 것들은 전부 등록했다.

무엇을 등록할까하며 집안 곳곳을 둘러보던 그때 문득 모니터가 눈에 들어왔다.

"······."

세상이 망하기 전, 모니터가 하나 더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게임을 하면서 뉴튜브를 보거나 영화 같은 걸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도 안하는 백수에게 하나에 10만원을 넘어가는 모니터는 사치였고, 핸드폰으로 영상을 시청하는 것으로 참았었다.

'하나쯤은 쓸데없는 걸로 채워도 되지 않을까. 어차피 칸을 다 채우는 게 목적인데.'

더군다나 내게는 지금 천만 원이 넘어가는 돈이 있었다.

그 중에서 1%정도는 낭비해도 되지 않을까.

기어코 모니터에 손을 댄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에휴. 정신 차리자."

모니터 따위보다 중요한 물건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수건, 이불, 옷, 그릇, 냄비, 비타민, 영양제.

인터넷도 끊긴 이 세상에서 저 모니터의 우선순위는 한참이나 뒤로 밀려나게 된다.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은 3분의 1정도 밖에 남지 않은 박스테이프였다.

'이것만 있으면 식칼을 창처럼 만들 수 있으니까. 제법 유용할 거야.'

쓰던 것 밖에 없긴 했지만, 앞으로 많이 써먹게 될 것 같은 물건이었다.

"테이프 등록."

[물건을 등록하시겠습니까?]

"그래."

지이잉―

그렇게 늘어난 물품 등록창을 모조리 채웠을 때.

"빙고."

집구석 절대자의 상점 Lv. 2 [+]

-상점에 등록시킨 물품을 정가에 구매할 수 있다.

[보유 스킬 포인트 : 2]

상점 스킬 레벨 옆에 플러스 버튼이 생겨나 있었다.

나는 고민 없이 상점 스킬의 레벨을 올렸다.

[집구석 절대자의 상점 스킬이 Lv. 3이 되었습니다.]

[등록 가능한 물품의 개수가 40개로 늘어났습니다.]

[물품 수복 기능이 추가되었습니다.]

연속해서 뜬 시스템 알림창 중에 제일 마지막 것을 유심히 바라보던 나는 그 의미를 생각하느라 잠시 멍때릴 수밖에 없었다.

"허? 이걸 이 렙에 준다고?"

등록된 물품을 수복하는 기능.

상점에 등록된 중고 물품들을 새 상품으로 만들어준다는 의미겠지.

반쯤 남은 케찹이나 귤 껍데기 같은 물건이 등록될 때부터 언젠가는 나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겨우 3레벨에 나타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러면 억지로라도 상점을 3레벨 찍은 보람이 있지.'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이었다.

"상점 오픈."

상점 창은 슬롯이 넉넉해지며 이전보다 두 배는 더 커다래져 있었다.

물품 수복 버튼은 스무 개의 품목 중 세 개의 항목의 옆에만 존재했다.

[집구석 절대자의 상점]

반쯤 남은 오뚜기 토마토 케찹, 500g (3,015 원) ▶수복하기

귤 껍데기 (270 원) ▶수복하기

조금 남은 테이프 (2,700 원) ▶수복하기

ᚠ보유 금액 : 11,240,720 원

▶물품 등록

마음 같아서는 귤 껍데기 항목을 제일 먼저 없애버리고 싶었지만, '조금 남은 테이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조금 남은 테이프, 수복하기."

['조금 남은 테이프'를 수복하기 위해서는 150,000 원의 금액이 필요합니다.]

[수복하시겠습니까?]

15만원이라는 돈이 아깝기는 했지만, 앞으로 계속해서 쓰일 물건이기 때문에 충분히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조금 남은 테이프를 저 돈을 주고 여러 개 사는 것보다는 완전한 물건을 사는 게 훨씬 효율이 좋을 테니까.

"수복해."

['조금 남은 테이프'를 수복합니다.]

['조금 남은 테이프'가 '황색 박스테이프 80m, 10개'로 변화합니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황색 박스테이프 80m, 10개 (3,500 원)

하나 당 가격도 반절로 내려갔고, 양은 3배가 늘어났으니 총 6배의 이득을 본 셈이다.

더불어 나머지 두 개 항목도 완벽하게 수복했다.

오뚜기 토마토 케찹, 500g, 2개 (5,580 원)

제주감귤, 3kg (16,110 원)

"오케이. 끝."

이것으로 상점창에 등록한 모든 상품이 멀쩡한 상품으로 변했다.

이제 상점에 등록 가능한 물품은 총 40개.

나머지 20개 칸도 빠르게 채운 다음에 레벨업을 시켜주고 싶었지만, 아직 구체적으로 뭘 등록할지 정하지 못했다.

한 칸 한 칸이 소중한만큼 신중하게 채워나갈 필요가 있었다.

'몬스터를 사냥하기 위해서는 무기가 필수다.'

가정 내에서 그나마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으로는 식칼이 있는데, 켈리칸과의 전투로 식칼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옆집에 있는 걸로 등록하자.'

이제 슬슬 새로 받아들인 시민들과 마주할 시간이었다.

'그 전에 살짝만 엿볼까.'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고, 협상 전에 상대에 대해 탐색하는 건 기본중의 기본이라 할 수 있었다.

"절대자의 눈."

스킬명을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우우웅!

침대에 누워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마치 게임에서 1인칭 시점에서 3인칭 시점으로 바꾼 듯 한 모습.

'좋아. 됐다.'

천천히 확장되어진 감각은 빠르게 내 영역 전체로 퍼져나갔다.

'보인다.'

젊은 부부, 최형준과 박혜원은 불이 들어오지 않는 거실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보, 이제 우리 어떡해요."

"어떡하긴. 밖에 나가서 물을 구해와야지. 내가 구해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안 돼요! 너무 위험해요!"

"나도 알아. 하지만 방법이 없잖아."

"······물이 남아 있는 곳이 있을까요?"

"근처에 편의점에 한 번 가 보려고. 꽤 큰 곳이니 뭐라도 남아있겠지."

"······."

그때 방 안쪽에서 아이들이 나와서 그들을 재촉했다.

"엄마···. 나 목말라···."

"서연아···."

목마른 자신의 새끼의 재촉을 들은 최형준은 결심을 굳힌 얼굴로 말했다.

"나 믿지? 어떻게든 구해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

박혜원은 참담한 표정으로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녀의 두 볼에 눈물 줄기가 흘러내렸다.

'···절대자의 눈 해제.'

스킬을 해제한 나는 잠시 침대 위에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사태가 훨씬 더 심각하네.'

옆집의 상황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안 좋았다.

식량은 물론이고 이미 식수까지 떨어진 듯 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이미 단수가 된 지 일주일이 넘게 지났으니까.

지금까지 계속 집에만 있었다면 모든 자원을 소모했을 것이다.

사람도 네 명이나 있으니 더 빨리 소모할 수밖에 없었겠지.

"상점 오픈. 삼다수, 제주감귤 구매."

지이잉―

나는 그것들을 창고로 옮겨 넣은 뒤 스킬창을 켰다.

그리고 품위 유지 스킬을 올렸다.

[정말로 집구석 절대자의 품위 유지 스킬을 올리시겠습니까?]

"그래."

마지막 남은 보유 포인트를 품위 유지 스킬에 투자한 것은 옆집에게도 전기와 수도를 공급해주기 위해서였다.

그것을 대가로 꽤 많은 것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니까.

[집구석 절대자의 품위 유지 스킬이 Lv. 2가 되었습니다.]

[가신 등록이 개방됩니다.]

"응?"

그런데 품위 유지 스킬이 오르며 새롭게 생겨난 기능은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능력이었다.

'가신? 이건 또 뭐야?'

***

최형준은 밖으로 나가기 전 현관에서 마지막으로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물과 식량을 담을 배낭, 기능성 소재인 등산복, 평소 애용하던 골프채까지.

드라이버.

골프채 중 공이 제일 멀리 나가는 채다. 그만큼 강력하다는 소리이고, 이거면 그 작은 괴물들 정도는 한 방에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여보···."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마중 나온 아내와 자식들을 보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빠 다녀올게! 집 잘 지키고 있어!"

그러자 최나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진짜 나가게요, 아빠?"

"그럼. 아빠가 물이랑 먹을 것 좀 구해올 테니까 그동안 엄마 말 잘 듣고···."

"하, 하지만!"

최나연이 그의 말을 끊어내며 말했다.

"밖에는 그 괴물들이 있잖아요!"

그 날.

최형준의 가족은 밖에 있었다.

아파트 단지 내에 만들어진 놀이터에서 아이들과 함께 가족이 다 같이 놀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몬스터들이 나타났고, 곧이어 놀이터에서는 학살이 벌어졌다.

아이들은 고블린이 사람을 도륙하는 장면을 두 눈으로 목도하고 말았던 것이다.

"흐아아앙!"

그때의 악몽이 떠오른 것인지 최서연이 울음을 터뜨렸다.

"서연아, 뚝. 착하지."

박혜원의 달램에도 최서연의 울음은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최악의 분위기.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직감하고 있었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아직도 고블린들에게 죽어나가던 사람들의 모습이 생생했다.

더군다나 근처 편의점에 물자가 남아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아마 없겠지.'

솔직히 밖으로 나가려는 지금도 자신 없었다. 다만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뿐이었다.

이미 두 딸이 가벼운 탈수 증세를 보이고 있는 중이었다.

변기 물탱크에 들어있는 물까지 모두 마셔버린 지금, 이제는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그러나 사랑스러운 아내와 두 딸의 모습을 보는 게 이번이 마지막이 될 수 도 있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차마 떨어지질 않았다.

그때였다.

♬♪♬♩~

갑작스럽게 들려온 벨소리에 최형준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벨소리라고?'

소름이 끼쳤다.

미안하지만, 전기라면 한참 전에 끊긴지 오래였다.

그런 상황에서 벨소리라니.

앞을 바라보니 자신과 같은 생각으로 공포에 질려 있는 아내의 얼굴이 보였다.

최나연과 최서연은 이 상황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듯 했지만, 울음을 그친 것을 보면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은 읽은 모양이었다.

아마도 최형준의 표정이 그만큼 무섭게 굳어 있기 때문이겠지.

최형준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벨소리는 여전히 울리고 있었고, 밖에서는 무언가 인기척이 나는 듯 했다.

그 순간.

똑똑똑

"허으어!"

"꺄아아악!"

노크 소리에 놀란 최형준이 뒷걸음질 치자 뒤에 있던 세 명의 여자도 자지러지는 비명을 뱉어냈다.

"실례합니다. 문 좀 열어주세요."

최형준은 직감했다.

'괴, 괴, 괴··· 괴물!'

괴물이 분명했다.

어떻게 인간의 말을 흉내 내는지는 몰라도 기어코 자신들의 가족이 있는 곳을 알아내 찾아온 것이리라.

"저기요?"

똑똑똑―

괴물이 문을 두드릴 때마다 최형준을 비롯한 가족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조용히 괴물이 떠나가는 것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밖이 조용해졌다.

'가, 갔나?'

실낱같은 희망이 생겼던 것도 잠시.

달칵!

"허억!"

거짓말처럼 문이 열리며 괴물이 집안으로 침입해버렸다.

"안 돼!"

"꺄아아악! 여보!"

"아빠아아아!"

"흐어어엉!"

최형준은 필사적으로 뒤에 있는 가족들을 감싸 안았다.

최후의 순간, 사랑하는 가족들이 자신보다 1초라도 더 오래 살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었다.

최형준은 죽음을 각오했지만, 뒤에서 날라온 것은 괴물의 공격이 아니었다.

"실례합니다."

예의바른 목소리에 최형준은 천천히 뒤돌아봤다.

그곳에는 한 청년이 서 있었다.

며칠 동안 씻지도 제대로 먹지도 못해 꾀죄죄한 자신들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방금 샤워라도 한 것인지 약간 젖은 머리와 은은하게 풍겨오는 샴푸와 바디워시 향.

현 상황과는 전혀 맞지 않는 비현실적인 향기가 그의 신비로움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게다가 은은하게 느껴지는 존재감과 카리스마는 그를 거인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최형준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누, 누구···?"

그가 입을 열었다.

"옆집에 사는 김재현이라고 합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벙찐 얼굴로 아무 대답도 못하던 그때 청년은 옆에 놔둔 물건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물이랑 귤인데. 몇 개 드시고 나서 이야기하실래요?"

청년이 들고 온 물건은 최형준 가족이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것들이었다.

물과 식량!

이쯤되니 그가 누구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아졌다.

최형준은 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들어오시죠!"

007화 [Episode 02] 생존자들 (2)

옆집은 전체적으로 어두웠다.

불이 켜져 있지 않은 것도 있지만,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것은 거실 창문 전체를 가리고 있는 두꺼운 커튼 때문인 것 같았다.

'현명하네.'

저렇게 해 두면 켈리칸 같은 비행 몬스터에게 습격 받을 일도 없을 테니까.

'근데 너무 어둡네.'

복도 밖으로 나오게 되면서 깨달은 것이지만, 품위 유지 스킬은 내 영역 안이라면 어디서든지 적용이 가능했다.

그래서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마음대로 열어젖히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집구석 영역 안에서만큼은 모든 것이 내 의지대로 이루어졌다.

'이렇게 하는 거였지, 아마?'

거실 천정을 바라보며 원했다.

'켜져라.'

번쩍­

불이 들어오자마자 최형준네 가족들이 움찔하며 몸을 떠는 게 느껴졌다.

"어? 불 켜졌다!"

이 집에서 제일 막내인 5살 정도의 아이만 영문도 모른 채 감탄할 뿐이었다.

나머지는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었다.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최형준에게 삼다수를 건네주며 말했다.

"우선 애들 물부터 먹이시죠."

"아, 네. 감사합니다."

최형준은 내가 건네주는 물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받았다.

지나치게 공손해 보이는 모습이 오히려 내가 다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첫 등장이 너무 임팩트가 컸나?'

초인종을 누른 것도, 거침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것도 의도한 행동이기는 했다.

최대한 신비주의적 컨셉으로 밀고 나가면서, 동시에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오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잘 먹힌 것 같았다.

"나연아 서연아. 물마시자."

두 사람은 아이들에게 물을 먹이면서도 내 눈치를 살폈다. 덕분에 아이들도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켈록! 콜록!"

"서연아! 괜찮아?"

아니나 다를까 불편한 분위기에서 물을 마시던 최서연이 사래가 들려 연신 기침을 해댔다.

'이야기하기 전에 분위기부터 풀어야겠네.'

겁을 준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있었던 나는 상자에서 귤 하나를 꺼내 최서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쭈그려 앉아 아이와 눈높이를 맞춘 후 귤을 건네며 말을 걸었다.

"귤 좋아해?"

최서연은 콜록거리면서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

"고, 고맙습니다. 콜록."

꾸벅 인사까지 하며 귤을 받은 최서연은 내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귤을 엄마인 박혜원에게 넘겼다.

"잠시만."

박혜원은 능숙하게 귤을 까 최서연의 입에 한 조각을 넣어주었다.

단 게 입안에 들어가자 최서연은 금세 긴장을 풀며 미소를 지었다.

"헤헤. 엄마, 또 주세요!"

"맛있어?"

"네!"

네 살 배기 애기가 미소를 짓자 얼어붙어 있던 분위기가 빠르게 녹아내렸다.

"엄마 나도, 나도!"

6살쯤 되어 보이는 최나연도 엄마에게 달려들어 귤을 받아먹었다.

그때였다.

[시민 최서연의 신뢰도가 올라갑니다.]

[시민 최나연의 신뢰도가 올라갑니다.]

[시민 박혜원의 신뢰도가 올라갑니다.]

[시민 최형준의 신뢰도가 올라갑니다.]

그 뒤로도 계속해서 연달아 새로운 메시지들이 나타났다.

[시민 최서연의 신뢰도가 50을 달성했습니다.]

[충성도가 개방됩니다.]

[시민 최서연의 충성도가 30을 돌파했습니다.]

[시민 최서연이 가신 등록을 위한 조건을 충족시켰습니다.]

처음부터 신뢰도가 42로 높았던 최서연의 신뢰도였다.

그게 귤 하나로 50을 넘어선 모양이었다.

나는 조용히 시민 관리창을 열어 최서연의 정보를 확인했다.

『이름 : 최서연 (Lv. 2)

신뢰도 : 57 충성도 : 33

각성 능력 : 없음

경험치 분배율 : 0%

정산금 분배율 : 0%

★퀘스트 부여 퇴출』

신뢰도가 올랐을 뿐만 아니라 충성도라는 새로운 지수가 생겨났다.

이것도 시작부터 무려 33이었다.

'어린 아이라서 그런가.'

어쨌든 덕분에 가신 등록을 위한 조건을 파악할 수 있었다.

가신 등록 시스템은 품위 유지 스킬이 2레벨로 올라가면서 새롭게 등장한 기능이었다.

생기자마자 레벨이 가장 높은 최형준을 가신으로 등록하려 했지만,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습니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실패했다.

신뢰도 50과 충성도 30.

그것이 가신 등록을 위한 최소 조건이었던 것이다.

'최서연을 가신 등록을 해 볼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빠르게 포기했다.

'너무 어린데다 레벨도 낮아.'

시민과 달리 가신 등록은 겨우 10명만 가능했다.

처음으로 조건을 충족시킨 시민이니 기념으로 가신 등록을 해 볼 수도 있었지만, 그랬다가 상점창의 경우처럼 취소를 못 할 수도 있었으니까.

시험 삼아 해 보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생각보다 엄청난 효과가 있을 지도 몰라. 그러니까 가신 등록을 한다면 최소 최형준 정도의 수준은 돼야해.'

건장한 30대 남자에 레벨도 9나 된다.

원활한 몬스터 사냥을 위해서라도 최형준의 능력치를 올리는 게 맞았다.

'하지만···.'

□최형준 (신뢰도 : 31) (Lv. 9)

그나마 오른 신뢰도가 31 수준이었다.

50까지 올리려면 아직 한참 남은 상태인 것이다.

'솔직히 최형준에게 써먹기도 조금 아깝긴 한데.'

그때였다.

"저어···."

최형준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다 방법이 있습니다."

"···네?"

"잠깐 복도에서 따로 이야기 좀 하시죠."

"어, 네."

가족들이 듣고 있는 곳에서 하기에는 껄끄러운 이야기였다.

나는 지금부터 그에게 나를 위해 목숨을 걸어달라고 할 작정이었으니까.

***

복도로 나와 단 둘이 있게 되자 최형준은 처음 나와 만날 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우선은 긴장을 풀기 위해 가볍게 던졌다.

"시민권은 받으셨나요?"

최형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그 허공에 생겨난 알림창 같은 걸 말씀하시는 거라면, 네. 받았습니다. 한 삼십 분 전에 저희 가족 단체로 받았어요."

시민권을 부여하면 시민들도 그것을 인지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물어본 것이었다.

"그러면 그 알림이 나타나기 전에는 뭔가 특별한 게 없었나요?"

"어, 그게···."

"있었나요?"

"네. 잠시 동안 몸이 경직되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군요.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시민으로 받아들여지기 전에는 일시적인 경직이 찾아오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몬스터는 어떻게 되는 거지?'

집구석 선포 스킬이 5레벨이 되며 30층 전체가 영역으로 변했다.

당연히 레벨이 더 올라갈수록 영역이 넓어질 것이라 추론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면 영역 내에 인간이 아닌 몬스터들이 있는 경우가 언젠간 찾아올 것이다.

마찬가지로 경직되거나 내 의지대로 내쫓을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일이 그렇게 쉽게 흘러갈 것만 같지는 않았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쓸데없는 걱정을 하기에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이전의 안정적인 생활로 돌아갈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밥도 해 먹고, 따뜻한 물로 샤워도 하고 그런 삶이요."

"네?"

"뿐만 아니라 집 안에서만큼은 안전을 보장합니다. 제가 허락하지 않는 한 그 어떤 몬스터도 침입할 수 없을 겁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제 이름을 걸고 약속드립니다."

최형준은 떨리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결연한 눈빛으로 말했다.

"당연히 공짜로 이 모든 것을 해주시는 건 아니겠지요.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나는 잠시 침묵하며 그를 무심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부탁드릴 일은 어쩌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래도 하시겠습니까?"

진지하게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은 최형준의 고민은 의외로 짧았다.

"예. 하겠습니다. 아내랑 자식들이 무사할 수만 있다면 뭔들 못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당신이 아니었다면 밖으로 나가서 물과 식량을 구해볼 작정이었습니다. 그때 이미 목숨을 걸었습니다."

처음에는 최형준에게 곧바로 고블린 사냥을 시킬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첫 대면에서 보여준 그의 실망스러운 모습 때문이었다.

'골프채라도 휘두를 까봐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초인종을 누르던 당시 나는 절대자의 눈을 운용하며 안쪽 상황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때 당시 최형준의 손에 들린 골프채를 보고 상당히 긴장했었다.

들어가자마자 공격하지말라고 소리쳐야하나 고민도 했었다.

하지만 막상 집 안으로 들어갔을 때, 최형준은 공격 한 번 하지 못했다.

'덩치는 산만한데.'

체격도 크고 골격도 좋았지만, 보기보다 마음이 여린 것 같았다.

현대인이라면 당연한 반응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실망스러운 건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나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집구석 선포 스킬에 많이 의지하긴 했어도 켈리칸을 잡아낸 경험이 있었다.

고블린의 경우 아령을 던져 잡은 것이 전부였지만, 제대로 된 무기만 주어진다면 질 것 같지는 않았다.

'호전적인 성향일 필요까지는 없지만, 고블린을 만났을 때 당황하지 않고 싸울 정도는 돼야 할 텐데.'

지금까지 지켜본 최형준은 책임감 있고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어른이긴 했지만, 무언가를 죽이거나 할 수 있는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문득 그의 손에 들려있는 골프채가 눈에 들어왔다.

'통짜 쇠로 만들어진 거겠지? 확실히 저걸 휘두르면 고블린 머리 정도는 쉽게 박살낼 수 있겠는데.'

나는 최형준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 골프채 좀 볼 수 있을까요?"

"어, 이거요? 여기 있습니다."

골프채를 받은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상점 오픈. 물품 등록.'

아까 절대자의 눈 스킬을 사용하면서 깨닫게 된 사실이 하나 있었다.

굳이 말을 안 해도 스킬들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

조금 집중력이 필요하긴 해도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지이잉―

상점창에서 쏟아져 나온 빛이 골프채를 스캔하더니 상점에 새로운 물건 하나가 등록되었다.

최형준의 반응을 보면 상점창이나 거기서 나오는 빛은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중고 골프채 (538,200 원) ▶수복하기

'뭐?'

더럽게 비싼 골프채였다.

'53만원이라니.'

그것도 상점 레벨 효과 덕분에 10%할인이 들어간 금액이 53만원이었다.

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최형준에게 물었다.

"이거 얼마예요?"

"어···으음. 한 사십 만원 줬던 걸로 기억합니다."

"사십이요?"

"네."

이전부터 느낀 건데, 이놈의 망할 상점은 수복이 필요한 상품들의 가격이 원래 상품가격보다도 높았다.

중고라면 반값으로 할인해줘도 모자랄 판에.

'수복하기.'

시험 삼아 수복하기를 눌러보니 금방 견적이 나왔다.

['중고 골프채'를 수복하기 위해서는 3,870,000 원의 금액이 필요합니다.]

[수복하시겠습니까?]

'미친.'

수복을 위해서 무려 400만원이 필요했다.

무려 내가 가진 돈의 절반에 가까운 돈이었다.

'취소! 취소!'

어차피 중고나 새거나 크게 차이 없는 물건이었다.

이런 건 수복하기 보다는 그냥 이대로 조금 비싼 가격에 사는 게 차라리 나았다.

'수십 개씩 필요하게 되면 또 몰라도···.'

그 전에는 오히려 상품을 수복하는 게 손해였다.

"저어··· 정말로 그거면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저희 집에 있는 다른 골프채들도요."

최형준은 약간 긴장이 풀린 기색이었다.

그럴만하긴 했다.

목숨이니 뭐니 진지하게 지껄일 땐 언제고 골프채 가격이나 물어보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나는 급하게 대화 화제를 돌렸다.

"크흠, 흠. 괴물들이 나타난 날을 기억하시나요?"

"···기억합니다."

"그 날은 토요일이었습니다. 주말이었죠. 아마 꽤 많은 사람들이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을 겁니다."

날씨가 워낙 좋았던 탓에 놀러나간 이들도 있겠지만, 그만큼 집에서 쉬고 있던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아파트에도 못 해도 수십 명의 사람들이 생존해 있을 거라는 소리였다.

"그때 당시에 집에 있었던 운 좋게 사람들은 아직까지 생존해 있을 겁니다. 그 사람들을 찾아가주세요."

고블린과 직접 싸워보지는 못했지만, 개체 하나가 그리 큰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덩치도 작고 레벨도 성인 남성보다 낮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고블린의 진짜 무기는 숫자.

무리 지어 다니며 긴밀하게 협력하며 사냥하는 것에 있었다.

하지만 무리를 지을 수 있는 건 고블린 뿐만이 아니다.

예로부터 숫자로 밀어붙이기는 인류의 전통적인 무기 중 하나였다.

최형준 혼자서 고블린을 사냥하기는 힘들다고 판단, 일단은 고블린과 싸울 수 있는 병력 숫자를 늘리는 데 주력하기로 했다.

"생존자들을 찾아서 여기로 데리고 올라와 주셨으면 합니다."

008화 [Episode 02] 생존자들 (3)

우선은 최형준을 집으로 다시 돌려보냈다.

극한 상황에 처해 있을 생존자들이 그냥 문을 열어줄 리가 없으니 구호물자를 준비해서 보낼 생각이었다.

물자가 준비 될 동안 집에 돌아가서 밥 먹고 씻고 오라고 한 것이다.

'물이랑 귤이면 충분하겠지.'

적절한 대비를 해 놓지 않았다면 물은 필수일 것이고, 식량은 조리 없이 해 먹을 수 있는 귤이 적당했다.

'상점 오픈. 귤 한 세트 구입.'

지이잉―

의지만으로 상점에서 물품을 구입하고,

'창고 오픈. 귤 상자 넣어.'

의지만으로 창고에 물건을 넣는 행위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지이잉―

직접 입으로 내뱉는 것이 아닌 마음속으로 스킬을 사용할 경우 한 가지 커다란 장점이 있었다.

'확인 단계가 스킵 된다.'

애초에 스킬을 사용할 때부터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사용해야 되기 때문인지 한 번 더 확인하는 과정이 사라졌다.

그만큼 상점에서 물건을 구입하거나 창고에 보관하는 속도가 더 빨라진 것이다.

'상점 오픈. 이번에는 삼다수 한 세트 구입.'

정신력이 소모된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연습해두면 분명 쓸모가 있을 것 같았다.

'창고 오픈. 물 보관.'

그때였다.

[창고에 보관 가능한 무게를 초과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창고를 사용하면서 처음 보는 메시지였다.

'용량은 대략 100kg 정도 되나.'

1레벨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커다란 용량이었다.

'창고는 레벨 2가 되면 어떤 기능이 추가되는 걸까?'

품위 유지 스킬이나 상점 스킬이 레벨이 올라가며 특별한 기능이 추가된 것을 생각해볼 때, 창고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용량이 늘어나는 것 말고는 딱히 생각나는 게 없는데.'

진지하게 고민을 하던 와중, 익숙한 메시지가 나타났다.

[시민 최형준의 신뢰도가 올라갑니다.]

'또 올랐네.'

최형준뿐만이 아니었다.

아까부터 옆집에 있는 가족들의 신뢰도가 급속도로 상승하고 있었다.

막상 내가 한 일은 별 것 없었다.

그저 수도, 전기, 가스를 공급해준 것뿐이다.

'시민 관리.'

□최형준 (신뢰도 : 40) (Lv. 9)

□박혜원 (신뢰도 : 32) (Lv. 5)

□최나연 (신뢰도 : 51) (충성도 : 17) (Lv. 3)

□최서연 (신뢰도 : 63) (충성도 : 39) (Lv. 2)

현재 인구수 ( 4 / 600 명)

최나연과 최서연은 이미 신뢰도 50을 돌파하며 충성도가 나타났다.

아무래도 어린 아이들이다보니 경계심을 푸는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생각보다 신뢰도라는 게 올리기 쉬워서 다행이네.'

아직 표본이 적어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충성도가 개방되는 신뢰도 50까지는 무난하게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최형준을 기다리는 동안 평소처럼 거실 창밖을 내려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일주일간 매일 이러고 있었던 탓인지 시간이 남으면 이렇게 밖을 관찰하게 된다.

'불타는 건 멈췄네.'

켈리칸을 잡을 때 생겨났던 화재는 의외로 커다란 불로 번지지는 않았다.

'곧 해가 지겠군.'

오늘 하루는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가장 큰 것은 역시 집구석 선포의 레벨이 오르며 영역이 확장된 것이었다.

'천천히 영역을 확장해나가고 사람들을 흡수하다 보면, 언젠가 가족들을 구하러 병력을 파견할 수준까지 성장할 수 있을 거야.'

그때였다.

'사람이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고블린이 아닌 사람이 산책로를 돌아다니는 광경을 보게 된 것은.

'뭐 하는 거지?'

그것도 한 명이 아닌 여섯 명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들 중 남자로 보이는 인물 두 명이 향한 곳은 켈리칸의 남은 사체가 있는 곳이었다.

'설마 저걸 먹으려고?'

벌써 죽은 지 일주일도 더 된 사체였다.

피도 빼지 않은 고기가 일주일동안 버텨낼 리가 없었다.

아마도 썩은 내가 진동을 할 것이다.

'못 먹을 텐데.'

그들도 냄새를 맡은 듯 했다.

켈리칸 사체 가까이 접근하던 남자 둘은 이내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미친 사람들이네.'

몬스터를 먹을 생각을 하다니.

얼마나 배가 고프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걸까.

동시에.

'마음에 들어.'

다른 것을 떠나서 다함께 밖으로 나왔다는 게 크게 다가왔다.

적어도 저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밖으로 나올 용기를 가지고 있단 뜻이었으니까.

'상점 오픈. 진라면 순한맛 구매, 올리브김 구매.'

지이잉―

나는 곧장 그것들과 귤 몇 개를 밖으로 힘껏 던졌다.

라면이 박살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고, 그들의 시선을 한쪽으로 모을 수 있었다.

자연스레 고개를 들어 올린 그들과 눈을 마주칠 수 있었고, 나는 손을 흔들었다.

'더 먹고 싶으면, 여기로 찾아와라.'

그들은 내가 던진 물품들을 빠르게 챙기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키에엑!"

물품들이 떨어지며 난 소리를 듣고 고블린 무리가 나타났다.

'···이런.'

실수였다.

고블린이 나타날 줄이야.

'도와주기도 힘들다.'

아령을 던져서 맞히기에는 고블린이 나타난 곳이 너무 멀었다.

'네 마리···.'

아무리 용기가 있는 이들이라고 해도 무언가를 죽이는 건 쉽게 못 할 것이었다.

'잘 도망쳐야 할 텐데.'

그러나 그때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켈리칸 사체로 다가가던 남자 중 한 명이 고블린을 향해 손을 크게 휘둘렀다.

그 직후 남자의 손에서 쏘아지듯이 나간 무언가가 고블린의 머리에 직격했다.

퍼억!

고블린 한 마리가 픽 하고 쓰러졌다.

'뭐?'

그것은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

쐐애애액!

네 명 쪽에서 한 여자가 고블린을 향해 활을 쏘아냈고,

푸욱!

"꽤애액!"

푹!

순식간에 두 마리의 미간을 꿰뚫었다.

"으어어어!"

그러는 동안 덩치 큰 남자가 남은 고블린 한 마리를 향해 달려가 야구 배트를 휘둘렀다.

"꽥!"

전투는 눈 깜짝할 새에 끝났다.

'허.'

순식간에 고블린 무리를 정리한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고개를 들어 올려 내 쪽을 바라봤다.

나도 그들을 마주 보며 되뇌었다.

'제발 여기로 올라와라.'

그러나 내 바람과는 달리 그들은 물자만 챙긴 뒤 다른 동 아파트 입구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때였다.

♬♪♬♩~

아무래도 최형준이 찾아온 듯 했다.

나는 가만히 현관 쪽을 바라보며 집중했다.

'열려라.'

철컥.

'됐다.'

아직은 속으로나마 강하게 되뇌어야했지만, 연습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문을 열어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들어오세요."

"실례하겠습니다. 엇?"

분명 문이 열리는 소리까지 들렸는데, 최형준이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현관으로 나가보니 그는 양손 가득 물건을 챙긴 상태로 당황스러워 하는 모습이 보였다.

"왜 그러세요?"

"어, 그게··· 자격이 되지 않는다고 하네요?"

"자격이요?"

"네."

아무래도 시민이라고 해도 마음대로 내 집에 들어올 수는 없는 것 같았다. 아마도 특정 조건을 충족시켜야 가능한 거겠지.

'가신 등록이 된 사람만 들어올 수 있는 건가?'

최형준은 상자 안에 가득 채워 온 물건들을 건네며 말했다.

"말씀하신 물건들입니다. 무기로 쓸 만한 것들은 모조리 챙겨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자 안에는 식칼과 함께 커다란 공구 상자가 하나 들어가 있었다.

'창고 오픈. 물과 귤 두 세트 꺼내줘.'

자신의 옆에 실시간으로 생겨나는 물과 귤을 본 최형준은 토끼눈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런 그를 향해 말했다.

"일단 이건 29층에 보낼 물자입니다. 사람이 없는 것 같아도 그냥 앞에 놔두고 와주세요."

"네, 맡겨만 주십시오!"

힘차게 대답하는 그를 향해 말했다.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지금 당장 움직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예?"

원래는 내일 낮이 밝으면 작전을 시작하기로 했었다.

아무래도 밤에는 사방이 어두워서 위험했으니까.

상식적이지 않은 내 말에 최형준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저어,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아니에요. 오히려 대낮일 때가 더 위험합니다."

솔직히 내 고집이었지만, 어느 정도 일리 있는 말이긴 했다.

고블린들을 사냥하기 위해 지난 일주일간 목이 빠져라 바깥을 관찰하던 나였다.

덕분에 고블린들이 주로 낮에 활동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방금 산책로에 있던 여섯 명의 남녀도 그것을 알고 지금 움직이기 시작한 것일 테지.

게다가.

'저들을 반드시 불러와야 해.'

고작 고블린 네 마리에 불과했지만, 그것을 저렇게 압도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반드시 내 편으로 만들어야한다.'

놓치기 싫었다.

"아, 알겠습니다. 29층에 가는 거야 그렇게 어렵진 않으니까요."

"그게 아닙니다. 층마다 물자를 배치하는 건 내일부터 하셔도 돼요. 제가 원하는 건 귤이랑 물 한 세트를 들고 1층으로 가 주시는 겁니다."

"이, 일층이요?"

"일층 문밖에 물자를 놔두고 올라와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박살난 라면과 김 가지고는 부족할 것이다.

'그냥 떠난 걸 보면 나를 미친놈쯤으로 여기나본데, 인식부터 바꿔줘야 해.'

하긴 이해는 한다.

30층에서 식량을 집어던지는 미친놈이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우선 내가 가진 식량이 많다는 걸 확실하게 알려줘야 해.'

1층에 귤과 물을 가져다놓으면 분명 그들은 자연스레 나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방금 식량을 던져줄 때 귤도 함께 던졌으니까.

'그럼 나를 찾아올 수밖에 없을 거다.'

궁금증을 유발해서라도 찾아오게끔 만들어야만 했다.

"갑작스럽겠지만,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1층에 놔두고 오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네."

최형준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겠습니다. 그 정도야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요."

원래라면 1층에 고블린들이 자리 잡아서 위험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놈들이라면 내가 아령을 던져서 쫓아버렸다.

1층에 물건을 놔두고 오는 정도라면 분명 괜찮으리라.

일주일간 바깥을 관찰하며 어느 정도 확신은 얻었지만, 그럼에도 조금 걱정되기는 했다.

"혹시라도 몬스터를 만나게 된다면 전부 내팽개치고 최대한 빠르게 30층으로 달려오세요. 복도까지만 들어온다면 안전할 겁니다."

"···예!"

갑작스러운 요구에도 응해준 그에게 미안하고 고마웠다.

뭐라도 해 주고 싶었다.

'퀘스트 부여. 1층에 귤 상자와 물 내려놓고 오기. 기간 하루. 보상 없음, 페널티 없음.'

"퀘스트 부여"

퀘스트 내용 : 1층에 귤 상자와 물 내려놓고 오기 (0/1)

제한 시간 : 24시간 00분 00초

보상 : 소량의 경험치.

실패 페널티 : 없음.

"엇? 이건?"

"수행하시면 약간의 경험치를 획득하실 수 있을 겁니다."

"경험치라니··· 게임 같은 겁니까? 그러면 레벨 같은 것도 있습니까?"

비교적 젊은 나이라 그런지 게임 시스템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가 있었다.

덕분에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맞습니다. 현재 최형준 씨의 레벨은 9입니다. 레벨이 오르면 긍정적인 효과가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꼭 좀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최형준의 첫 퀘스트가 시작되었다.

***

최형준은 비상계단 출입구 앞에서 침을 삼켰다.

'가자.'

불이 켜지는 것은 복도까지만이다.

이 밑으로는 옆집 남자의 신비로운 힘이 닿지 않는 공간이었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초록빛을 뿜어내고 있는 비상등의 존재였다.

"후우."

그렇지 않아도 비상등의 옅은 불빛에만 의지해서 계단을 내려가야 하는데, 꽤나 무거운 짐까지 들고 있으니 더욱 긴장됐다.

'괴물들이 여기까지 올라오지는 않았겠지.'

바짝 긴장한 상태로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계단을 내려갔다.

그렇게 부지런히 발을 놀린 덕분에 금세 20층까지 내려올 수 있었다.

'후우. 힘드네.'

아무래도 15키로가 넘어가는 짐에다가 만일을 위한 골프채까지 손에 쥔 채로 계단을 내려가고 있으니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응?"

계단 아래쪽에서 무언가 소리가 들린 듯 했다.

최형준은 어둠에 잠긴 아래쪽 계단을 유심히 노려봤다.

웅성웅성

"!!!"

이번에는 확실하게 들려왔다.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말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오고 있었다.

불현 듯 최형준의 머릿속에 그날의 참상이 떠올랐다.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는 사람들, 그리고 사람들을 사냥하듯 공격하던 고블린들의 모습.

'도, 돌아가야!'

최형준은 다급하게 계단 위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다리는 후들거렸고, 심장이 쿵쾅댔다.

얼마나 당황했으면 손에 들고 있던 짐을 내려놓을 생각조차 못하고 올라가고 있었다.

그의 처절한 발버둥에도 불구하고 웅성거리는 소리는 점점 더 빠르게 다가왔다.

결국.

"으, 으억!"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계단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쿠웅! 콰앙!

물이 떨어지며 비상계단 전체에 쿵쾅대는 소리를 냈고, 귤상자에서 튀어나온 귤이 사방에 나뒹굴었다.

"으으으!"

얼른 달아나려 했지만 최형준의 다리는 이미 공포에 집어삼켜진 뒤였다.

'우, 움직여! 제발!'

웅성

웅성웅성

말소리가 점점 더 빨리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윽고 어둠 너머로 비상등의 불빛에 비친 그들의 그림자가 일렁이는 게 보였다.

공포가 극에 달했다.

패닉에 빠진 최형준은 온몸을 웅크려 숨죽였다.

그것이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리고.

"저기요."

"히이이익!"

"아저씨. 괜찮아요?"

조심스럽게 들어 올린 그의 눈에는 어둠을 뚫고 올라온 여섯 명의 남녀의 모습이 비춰졌다.

009화 [Episode 02] 생존자들 (4)

그들이 다시 나타나지는 않을까하는 기대로 산책로를 유심히 관찰하던 와중이었다.

[허가 받지 않은 대상이 출입을 시도합니다.]

"응?"

난데없는 알람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별안간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설마 고블린이 남아 있었던 건가?'

최형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절대자의 눈.'

곧바로 스킬을 사용하여 비상구 쪽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익숙한 차림의 사람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 이거 못 들어간다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안 보여? 눈앞에 이상한 메시지가 떴는데."

"뭐? 그럼 저 아저씨는 어떻게 들어간 건데."

"나도 모르지."

각양각색의 무기를 손에 쥐고 있는 여섯 명의 남녀.

'그 사람들이다!'

벌써 이렇게 접촉하게 될 줄이야.

'생각보다 꽤 하잖아.'

최형준이 내 예상보다 훨씬 일을 잘 해줬다.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절대자의 눈 스킬을 끄자 눈앞에 새로운 알림창이 나타나 있었다.

절대자의 눈으로 봤던 여섯 명의 사진과 함께.

[시민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을 만족하는 개체가 집구석 근처에 접근하였습니다.]

[시민권을 제의하시겠습니까?]

이것으로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시민권 부여가 제의로 바뀌었다.'

처음부터 영역 내에 있었던 최형준의 가족과는 달리 저들은 영역 바깥에 있었다.

'영역 확장 과정에서 포함된 사람들에게는 강제로 시민권을 부여할 수 있지만, 이런 경우에는 선택권을 준다는 건가.'

제의.

말 그대로 시민이 될지 말지 저들에게 선택권을 준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거부할 수도 있다는 소리군.'

어떻게 해야 저들에게서 거절이란 선택지를 머릿속에서 없애버릴 수 있을까.

방법을 고심하던 그때.

♬♪♬♩~

벨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이거다.'

시민권 제의를 받아들이는 행위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끼게 만들면 된다.

그렇다면 저들도 아무렇지 않게 시민권을 받아들일 것이다.

'퀘스트 부여.'

[시민 최형준은 이미 수행중인 퀘스트가 있습니다.]

[퀘스트를 재설정하시겠습니까?]

'그래.'

[퀘스트를 재설정 해 주십시오.]

바뀐 퀘스트의 내용은 간단했다.

'손님 여섯 명에게 식사 대접하기.'

[퀘스트 내용이 갱신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월패드를 통해 바깥 상황을 확인했다.

초인종을 누르던 최형준은 갱신된 퀘스트 내용을 확인하더니 고개를 갸웃 거리며 비상구 쪽으로 이동했다.

월패드의 스피커에서 그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희 집에서 식사를 대접해도 될까요?)

(네? 하지만 저희는 지금 들어가지도 못하는 상황인데요.)

그때 타이밍을 맞춰 속으로 되뇌었다.

'여섯 명 모두에게 시민권 제의해.'

[하동건, 강덕수, 김가영, 유혜린, 김 건, 문병호에게 시민권을 제의합니다.]

승부수를 띄운 나는 월패드 화면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오! 투명한 벽이 사라졌어!)

경쾌한 목소리와 함께 건장한 체격의 남자 한 명이 영역 안으로 들어왔다.

야구방망이를 들고 있는 것을 보면 아까 고블린 무리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남자인 듯 했다.

그 뒤를 이어서.

(진짜네? 시민권 획득하니까 바로 들어와지는데?)

여섯 명 모두가 순서대로 시민권을 받아들이고 영역 안으로 들어왔다.

그 순간.

[시민의 숫자가 10명에 도달했습니다.]

[시민들이 벌어들이는 경험치와 정산금이 10% 증가합니다.]

처음 보는 알림이 나타나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보너스 경험치에 보너스 정산금인가.'

본격적으로 몬스터 사냥을 나설 인원의 합류와 동시에 이런 질 좋은 버프라니.

두 손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시민 관리.'

새롭게 합류한 여섯 명의 프로필은 한 눈에 보기에도 만족스러웠다.

□하동건 (신뢰도 : 19) (Lv. 23)

□강덕수 (신뢰도 : 28) (Lv. 13)

□김가영 (신뢰도 : 17) (Lv. 17)

□유혜린 (신뢰도 : 30) (Lv. 10)

□김 건 (신뢰도 : 15) (Lv. 11)

□문병호 (신뢰도 : 11) (Lv. 10)

······

······

현재 인구수 ( 10 / 600 명)

과연 고블린 무리를 압살한 파티답게 레벨 단위부터가 달랐다.

놀랍게도 모두가 두 자리 수 레벨을 가지고 있었고, 그 중 한 명은 무려 23레벨이었다.

'23레벨이면 일주일전에 잡았던 켈리칸과 동급이라는 건데.'

이상하리만치 높은 레벨의 비밀은 그의 시민 정보를 확인하는 순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름 : 하동건 (Lv. 23)

신뢰도 : 19

각성 능력 : 야구공 투척

경험치 분배율 : 0%

정산금 분배율 : 0%

★퀘스트 부여 퇴출』

'능력자다.'

각성 능력에 집중하자 그가 가진 능력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떠올랐다.

야구공 투척 (D 등급)

체력을 소모하여 공의 위력을 3배 증가시킨다.

제일 처음 고블린 무리를 향해 공을 던지던 남자가 바로 하동건인 듯 했다.

'이래서 고블린이 즉사했던 거구나.'

실제 야구공을 만져본 사람은 알겠지만, 돌덩이나 다름없는 물건이었다.

거기다 스킬로 위력이 3배나 증가된다면 충분히 살상무기가 될 수 있었다.

대부분 신뢰도가 낮은 것은 살짝 아쉬웠지만, 그거야 천천히 올리면 그만이다.

'새로 합류한 여섯 명 모두 경험치 분배율을 70퍼로 설정해.'

[설정 완료하였습니다.]

정산금은 굳이 건드리지 않았다.

시민들이 돈을 사용할 수 있는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굳이 배분해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됐다.'

이제 이들에게 몬스터 사냥 퀘스트를 부여하기만 하면 앉아서 경험치와 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다.

자동 사냥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물론 이들을 돈 벌어다주는 기계 취급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적당한 타이밍에 얼굴을 마주보고 인간적인 교류를 해볼 생각이었다.

어쩌면 이들이 우리 가족을 구해줄 열쇠가 될 수도 있었으니까.

'그 전에 어떤 사람들인지 한 번 살펴볼까.'

절대자의 눈 스킬을 사용하려던 찰나.

[시민 하동건의 신뢰도가 올라갑니다.]

뜬금없이 신뢰도 증가 알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뭐지?'

아직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지도 않았는데 나에 대한 신뢰도가 오를 수가 있나?

[시민 김가영의 신뢰도가 올라갑니다.]

[시민 유혜린의 신뢰도가 올라갑니다.]

"허."

아무래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 직접 봐야 할 것 같았다.

***

"들어오시죠."

"실례하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저녁 식사 초대를 받은 하동건의 파티는 우르르 최형준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도어락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소리에 현관까지 마중을 나왔던 박혜원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여보? 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

"나중에 설명해줄게. 밥 좀 준비해 줄 수 있어?"

"밥이요? 새로 해야 하는데···."

"부탁할게. 그 분의 지시야."

"조금 걸릴 거예요. 금방 차릴게요."

최형준이 '그 분'을 언급하자 박혜원은 군말 없이 식사를 준비하러 갔다.

하동건은 그 모습을 눈여겨보며 물었다.

"그 분은 어떤 사람인가요?"

"으음. 그게, 저도 잘 모릅니다."

"잘 모른다고요?"

"네. 이웃집에 살고 계신다는 것 말고는···."

그의 말에 하동건은 현관문 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반대쪽 집이었나.'

자신들의 파티가 이곳에 들어온 이유.

그것은 꼭대기 층에서 라면과 김 따위를 던져대는 이상한 남자의 존재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좀 더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찾아온 것이었다.

"하여튼 신비한 분이십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전기가 들어오는 것도 그 분의 힘입니다. 물이랑 귤을 창조하시는 능력도 가지고 계시죠."

"흐음."

하동건은 자신을 밝게 내리비추는 현관등을 유심히 관찰했다.

'초능력인가.'

그것들이 세상에 나타난 날, 자신도 새로운 능력을 각성했다.

다른 이들이라고 해서 그러지 말란 법은 없었다.

'엄청난 능력이군.'

그가 자신들을 향해 식량을 던져준 이유도 알 것 같았다.

'분명 그가 창조할 수 있는 것은 물과 귤뿐만이 아니다. 우리에게 던져줬던 라면과 김도 만들어낼 수 있는 게 분명해.'

어쩌면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들을 창조해낼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에게 붙어야 한다.'

이런 때일수록 강한 힘을 지닌 사람에게 붙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전기를 공급하고 물과 음식을 만들어내는 능력.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는 그야말로 기적과 같은 능력이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투척 능력과는 차원이 다른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든 그와 접촉하여 자신들의 능력을 어필하기 위한 방법을 생각하던 와중에 최형준이 말했다.

"밥 하는 데 조금 시간이 걸리니 간단하게 샤워라도 하시겠습니까?"

그의 말에 가장 격한 반응을 보인 것은 김가영과 유혜린이었다.

"샤워요?!"

"씻을 수 있다고요?"

전기가 들어온다는 것은 알았어도 수도까지 들어올줄이야.

'하긴 물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다면 그쯤이야 어렵지 않겠지.'

최형준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대답했다.

"예. 따뜻한 물도 나옵니다."

"따뜻한 물?!"

"이 또한 그 분의 은총이죠."

김가영과 유혜린이 차례로 말했다.

"다 비켜! 내가 제일 먼저 씻을 거야!"

"그, 그 다음은 나!"

그 옆에서 최형준이 나직이 말했다.

"화장실이 두 개 있으니 두 분이 동시에 씻으시면 됩니다."

"대박!"

"한 분은 여기 쓰시면 되고, 다른 한 분은 안방에 있는 화장실을 쓰시면 됩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김가영과 유혜린이 저렇게 애써 밝은 척을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조금이라도 분위기를 전환시키고 싶었던 거겠지.

요즘 그들의 분위기는 지나치게 무거웠으니까.

그렇게 두 여자가 사라지고 현관에는 네 명의 남자만 남았다.

김 건이 중얼거렸다.

"···선배. 그 남자도 초능력자인 걸까요?"

하동건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마도. 그것도 내가 가진 능력과는 비교도 안 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인 거 같아."

그 말을 들은 강덕수가 하동건에게 어깨동무하며 우렁차게 말했다.

"기죽지 마, 임마! 그깟 놈쯤 내 몽둥이찜질 한 방이면―."

"미친놈아. 잘 보여도 모자란 판에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아? 그런 거야?"

"부탁이니까 제발 너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주라."

"아하하. 오케이, 오케이."

하동건은 작게 한숨 쉬고는 말했다.

"어쨌든 우리 목표는 여기서 될 수 있는 한 많은 식량을 얻어가는 거야. 실수하지 말고 최대한 잘 보여야 돼. 알았지?"

"오케이, 오케이."

"···네."

"······."

한 사람, 하동건의 말에 대답이 없는 남자가 있었다.

하동건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병호야."

그러자 드디어 반응이 왔다.

"엇, 네, 형. 죄송해요, 못 들었어요."

"미안하다. 괜히 나 때문에."

문병호가 애써 어두운 표정을 떨쳐내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형. 형이 무슨 잘못이 있어요."

"후. 미안하다. 내가 괜히 집들이한다고 부르는 바람에···."

"아니에요, 형. 저도 오고 싶어서 온 건데요."

하동건 파티가 모이게 된 것은 신혼인 하동건과 김가영의 집들이 때문이었다.

파티 준비가 한창이던 그때, 괴물들이 나타났고 세상이 망했다.

당연히 그들은 다 같이 하동건의 집에서 고립되고 말았다.

"할머님은 무사하실 거야. 분명."

"······네."

가족들이 걱정되는 것이야 모두가 마찬가지였지만, 문병호는 특히 더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나밖에 없는 가족인 할머니는 나이가 드시며 거동이 불편한 상태였고, 문병호의 간병이 필수적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문병호가 집에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날, 몬스터들이 나타나자마자 그들은 모두가 함께 문병호의 집을 제일 먼저 들리자고 약속했다.

그러나 지난 열흘간 몇 번이고 외출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고블린 놈들에게 막히고 말았다.

그들이 고블린 무리를 익숙하게 잡아냈던 것은 모두 그간의 경험 덕분이었다.

"여기서 식량을 구하고 나면 다 같이 할머님 댁으로 가자."

"······네에. 감사해요, 형."

문병호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도 아는 것이다.

이미 너무 늦었다는 걸.

그 날로부터 열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운이 좋아 몬스터의 습격을 받지 않았더라도 문병호의 할머니가 살아있을 가능성은 굉장히 낮았다.

꾸욱

화가 나는 것은 그의 집은 하동건의 집에서도 보일만큼 바로 근처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매번 실패하고 말았다.

당장 주변에 널려 있는 고블린 무리가 너무 많았다. 수십 마리 단위가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날 지경이었으니 말 다 했다.

"바로 근처니까 힘을 합치면 충분히 갈 수 있을 거야. 조금만 더 힘내자."

"정말 감사해요, 형. 그런데······."

이제는 그만하자고.

이제 괜찮다고.

모두에게 민폐인 걸 알기에 그 말을 꺼내고 싶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목에 가시처럼 박혀 아프기만 할 뿐이었다.

잠시 동안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하던 그때였다.

철컥

"응?"

"어?"

"뭐야?"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모두가 긴장하며 야구 배트를 들었다.

하동건 또한 주머니에서 야구공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문이 열리고 나타난 남자의 모습과 마주하는 순간, 모두의 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뭐, 뭐야. 이 존재감은?'

평범해 보이는 외모의 남자였다.

키가 엄청 크거나, 덩치가 큰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부드러운 인상에 태양의 그슬림 하나 없는 깨끗한 피부가 온화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거인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듯한 압박감이 전해져오고 있었다.

거대한 맹수의 아가리가 자신들의 모가지를 겨누고 있는 듯했다.

그동안 죽을 고비를 숱하게 겪으며 날카로워진 그들의 본능이 경종을 울려댔다.

하동건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 남자···.'

눈앞에 있는 남자의 손에 자신과 동료들의 목숨 줄이 쥐여져 있다는 것을.

남자가 마음을 먹으면 언제든지 자신들을 죽일 수 있는 존재라는 직감이 왔다.

그가 입을 열었다.

"제가 돕겠습니다."

겨우 말 한 마디가 문병호의 가슴 속에서 희망을 피워냈다.

그래서인지 홀린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쩌면···.'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라면 이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 자신을 구해줄 것만 같다는, 그런 믿음이 생겨났다.

아무런 근거는 없는 확신이.

010화 [Episode 02] 생존자들 (5)

거실의 커다란 상에 일곱 명의 남녀가 옹기종기 붙어 앉아 있었다.

"죄송해서 어떡하죠? 자리가 부족해서."

내 눈치를 살피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박혜원을 향해 말했다.

"괜찮습니다. 갑자기 쳐들어온 저희 잘못이죠."

4인 가족이 살던 집에 다 큰 성인이 일곱 명이나 들이닥쳤으니 자리가 부족할 수밖에.

"차린 건 없지만, 맛있게 드세요."

박혜원의 겸손한 말과는 달리 상 위에는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갓 지은 쌀밥과 예쁘게 말려진 계란말이, 한껏 부풀어 오른 계란찜과 맛있게 익은 계란프라이까지 굉장히 푸짐한 식탁이었다.

"차린 게 없다니요! 완전 진수성찬인데요, 언니!"

김가영이 호들갑을 떨어대자 박혜원이 손사래를 치며 공을 나에게 돌려왔다.

"재현님께서 주신 재료들 덕분인걸요. 재현님이 아니었으면 진짜 밥이랑 귤만 대접할 뻔 했어요."

사실 열흘이나 버틴 집에 제대로 된 식재료가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모든 요리가 계란으로 만들어진 것은 그 때문이었다.

겸사겸사 비어있는 최형준네 집 냉장고를 우유나 계란 따위로 가득 채웠고, 비어가던 쌀통도 가득 채워주었다.

그 과정에서 박혜원의 신뢰도가 50에 도달했다.

'최형준 보다 먼저 50에 도달할 줄이야.'

분명 최형준네 가족 중에서 제일 낮은 신뢰도로 시작한 게 박혜원이었는데, 그녀는 작은 것에 커다란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잘 먹겠습니다!"

본격적인 식사가 시작되자 모두가 쉼 없이 숟가락을 놀려대느라 바빴다.

"으음! 계란찜 완전 맛있어요!"

"와 이 계란말이 그 달달한 계란말이네요? 일식집 가면 나오는!"

그때 최서연이 박혜원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며 중얼거렸다.

"엄마. 서연이도 계란말이···."

"서연아. 손님들 다 드시면 엄마가 금방 만들어줄게. 알겠지?"

"힝."

그 모습을 본 김가영이 최서연을 향해 말했다.

"서연아 언니랑 같이 계란말이 먹을까?"

"응!"

박혜원이 말릴 새도 없이 쪼르르 달려가 김가영의 옆자리를 비집고 들어간 최서연은 김가영이 주는 계란말이를 받아먹었다.

"아앙―음."

그 모습이 꼭 먹이를 받아먹는 아기 새 같았다.

그때 하동건이 주방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최형준의 가족을 향해 말했다.

"괜찮으시면 같이 식사하시죠?"

"앗, 저희는 괜찮습니다. 자리도 없고, 아까 먹어서···."

최형준은 자신의 말과는 달리 식탁위에 차려진 진수성찬을 보며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아까 먹은 건 맨밥에 물을 말아먹는 정도가 고작이었을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내가 입을 열었다.

"같이 와서 드시죠. 밥도 남아 있는데."

"그, 그럴까요?"

결국 열한 명이 식탁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식사를 하게 되었다.

먹기 좋게 썰려 있는 계란말이를 하나 집어서 입 안에 넣었다.

"!"

김가영의 반응은 호들갑이 아니었다.

생각보다 박혜원의 요리 솜씨는 대단했고, 정말로 일식집에서 판매하는 계란말이가 떠오르는 맛이었다.

'맛있네.'

뿐만 아니라 계란찜 또한 간이 정말 딱 맞았다.

밥에 그냥 계란찜만 비벼먹어도 완벽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와. 얼마 만에 먹어보는 집밥이냐, 이게."

강덕수의 감탄대로였다.

'오랜만이네.'

라면이 없는 식사를 하고 있자니 저절로 엄마가 떠올랐다.

특히 쓸데없이 푸짐하게 차려진 식탁의 모습 때문에 더욱 그랬다.

'다들 무사하겠지.'

가족들이 보고 싶었다.

절대자의 눈을 통해 문병호의 사정을 알게 된 이후 마음이 움직였던 건, 할머니를 걱정하는 감정이 문병호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가족을 걱정하는 마음이야 잘 알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문병호를 위해 다 함께 움직여주는 하동건 파티의 의리도 마음에 들었다.

고민 없이 여기로 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들이 충분히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으니까.

"······."

갑자기 식탁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째서 그런가하고 고개를 들어보니 사람들이 하나 같이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 있다 보니 괜히 긴장한 듯했다.

나는 애써 괜찮은 척 표정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크흠. 흠. 어우 맛있다."

모든 이들이 나를 어려워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상하네.'

상대적으로 동안인 외모를 갖고 있는 탓인지 나를 만만하게 보거나 편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있었어도, 이렇게까지 나를 어렵게 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모든 이들이 하나 같이 나를 어려워하다니.

물론 딱 한 명만 빼고.

"엄마, 서연이 졸려."

가장 어린 최서연만이 나를 편하게 여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보다 조금 나이가 많은 최나연의 경우에도 내 눈치를 보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 그래 서연아. 나연이도 이제 엄마랑 같이 자러 들어갈까?"

"으응."

그렇게 박혜원이 두 아이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고 나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동건을 향해 말했다.

"아까 하던 이야기를 이어가볼까요. 할머님 댁이 그렇게 가까이 있는데도 가지 못한 이유가 뭐죠?"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블린 놈들 때문입니다."

"고블린이요?"

"네."

이상했다.

내가 본 장면은 하동건의 파티가 고블린 네 마리를 순식간에 압살하는 장면이었는데.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자, 하동건이 추가적인 설명을 이어나갔다.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커다란 공간이 있는 것은 알고 계실 겁니다."

"그거야 당연하죠."

"동굴처럼 몸을 숨기기 좋은 장소이기 때문인지, 아파트 단지 주변에 있던 고블린들이 죄다 몰려들어 자리를 잡은 것 같습니다."

지하 주차장이 얼마나 넓은가.

수천 대의 차량을 주차할 수 있을 만큼 커다란 공간, 그곳에 수용 가능한 고블린들의 숫자는 과연 얼마일까?

"최소 수천 마리가 거기에 모여 있는 것 같습니다."

"······."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이었다.

지하에 고블린 수천 마리가 무리지어 있다니.

내가 산책로에서 봤었던 수십 마리 정도는 정말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아파트의 모든 출입구는 지하주차장의 근처에 존재합니다. 워낙 많은 숫자의 고블린이 돌아다니다 보니 나갈 엄두도 못 내고 있는 중입니다."

하동건의 말에 내가 반론했다.

"샛길이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네. 맞습니다. 처음부터 저희가 노리던 것이 바로 샛길을 통해 빠져나가는 것이었습니다만···."

말끝을 흐리는 하동건의 두 눈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곳에는 고블린 보다 더 위험해 보이는 놈이 있었습니다."

"위험해 보이는 놈이라니요?"

하동건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늑대인간이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늑대인간?"

"정확한 건 저희도 잘 모릅니다. 워낙에 어두웠고, 너무 위험해 보여서 놈을 발견한 순간 곧바로 도망쳤거든요."

샛길을 사용할 수 없다면 결국 원점이다.

"결국 정면 돌파를 해야 한다는 거네요."

"네. 그래서 며칠 동안 고블린들의 숫자를 줄이는 데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하동건은 어두운 얼굴로 고백해왔다.

"꽤 많은 고블린을 죽여 왔지만, 숫자가 크게 줄어드는 느낌도 없었고, 이제는 슬슬 한계입니다."

"한계라니요?"

그때 하동건의 옆에 있던 김가영이 나서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저희들의 주 무기는 활과 야구공이에요. 그런데 이게 화살이 소모품이다 보니 다 떨어져가는 중이에요. 나름 회수해서 재활용하긴 하는데··· 제 남편이 던질 야구공도 얼마 남지않았고요."

"그거라면 제가 해결해드릴 수 있습니다. 화살을 좀 볼 수 있을까요? 야구공도요."

김가영은 자신이 사용하는 활과 화살 그리고 야구공을 가져왔다.

"여기요."

그것들을 상점에 등록한 다음 곧장 물품 수복을 시행했다.

화살과 야구공은 수복하는 데 얼마 들지도 않았다.

문제는 활이었다.

['상태가 좋은 컴파운드 보우'를 수복하기 위해서는 1,530,000 원의 금액이 필요합니다.]

[수복하시겠습니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결단을 내렸다.

'수복해.'

다른 건 몰라도 활과 화살은 앞으로도 매우 유용하게 쓰일 것이 분명했다.

앞으로도 계속 사들일 물건이라면 수복해두는 게 남는 장사였다.

"다들 활은 좀 쏘시나요?"

내 질문을 들은 하동건 파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들을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속으로 되뇌었다.

'활 다섯 세트 구입. 화살 다섯 세트 구입.'

지이잉―

새롭게 나타난 다섯 세트의 활과 화살을 가리키며 말했다.

"못 쏴도 이참에 연습 좀 하도록 하세요. 앞으로 계속해서 사용하게 될 테니까."

나머지 인원들이 야구 배트를 사용하는 것은 그게 더 유용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활이 없으니까 야구 배트라도 휘두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장 다섯 명의 인원이 추가로 활로 무장하게 된 것이다.

서투르더라도 원거리에서 타격이 가능한 무기가 있다는 것은 커다란 장점이었다.

활과 화살을 그들에게 건네는 순간.

[시민 하동건의 신뢰도가 올라갑니다.]

[시민 김가영의 신뢰도가 올라갑니다.]

[시민 유혜린의 신뢰도가 올라갑니다.]

······

······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신뢰도가 일시에 상승했다.

"확실히 이러면 고블린을 사냥하는 속도가 몇 배는 빨라질 것 같습니다."

"화살이 이 정도로 넉넉하다면 무리해서 화살을 회수할 필요도 없죠. 이러면 강제로 아파트 입구를 뚫는 것도 가능하겠는데요?"

하동건 일행은 무척이나 흥분해 있었다.

특히나 고무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문병호였다.

[시민 문병호의 신뢰도가 크게 증가합니다.]

그럴 만도 했다.

할머니를 구할 수 있는 희망이 눈앞에서 실현되고 있었으니까.

그런 그를 향해 말했다.

"그건 아직 이릅니다. 그 전에 고블린들의 숫자를 크게 줄여둘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빠져나간다 해도 고블린들이 건재하다면 다시 들어오는 게 문제일 겁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신 건 아니겠죠?"

"······."

하동건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해왔다.

"맞습니다. 안전을 위해서는 먼저 고블린들의 숫자를 줄여야겠지요. 그러면 작전 시행은 언제하시는 겁니까?"

그 말을 들은 문병호의 안색이 다시 어두워졌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만큼 할머니가 생존해 계실 확률이 줄어들 테니까.

내가 말했다.

"작전 시행은 내일입니다."

"···내일이요?"

"네. 이건 빠를수록 좋은 문제니까요."

"그렇긴 합니다만···."

"내일. 문병호씨의 할머님을 구해 올 겁니다."

그 말을 들은 모두가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었다.

겨우 하루만에 고블린 숫자를 줄여봤자 얼마나 줄일 수 있느냐는 반응이었다.

그런 그들을 한 번 훑어본 뒤 선언하듯 말했다.

"몰이사냥을 할 겁니다."

나는 작전의 개요를 간략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모든 작전을 들은 이들은 결연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어쩌면 가능할지도···."

"잘 풀리기만 한다면···."

"시간이 없으니 식사는 여기서 마무리하고, 제 지시대로 움직여주세요."

그때였다.

[시민 최형준이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퀘스트 비용 30,000 원이 소모됩니다.]

알림을 확인한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돈을 써야하는 거였나.'

하긴 퀘스트가 공짜로 부여가 가능했다면 꼼수가 가능해진다.

'예를 들면 퀘스트 내용을 아주 쉬운 걸로 준다던지.'

팔굽혀펴기 10회 따위의 퀘스트를 주고 퀘스트 보상인 소량의 경험치를 얻어 가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되면 굳이 몬스터 사냥 없이도 시민들의 레벨을 천천히 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돈만 충분하면 얼마든지 시민들의 레벨을 올릴 수 있다는 소리군.'

자본금만 충분하다면 꼼수를 사용할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정말로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굳이 쓸 필요가 없겠어.'

아직은 지갑 형편이 그렇게 넉넉한 편은 아니었으니까.

그때, 퀘스트 완료 보상을 받은 것 때문인지 갑자기 최형준의 신뢰도가 상승했다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시민 최형준의 신뢰도가 올라갑니다.]

그와 동시에.

[시민 최형준의 신뢰도가 50을 달성했습니다.]

[충성도가 개방됩니다.]

[시민 최형준의 충성도가 30을 돌파했습니다.]

[시민 최형준이 가신 등록을 위한 조건을 충족시켰습니다.]

드디어 최형준의 신뢰도가 50이 되었다.

더군다나 충성도를 개방하자마자 30을 돌파했다는 알림이 있었다.

'그게 가능한가? 시민 정보, 최형준.'

『이름 : 최형준 (Lv. 9)

신뢰도 : 51 충성도 : 62

각성 능력 : 없음

경험치 분배율 : 0%

정산금 분배율 : 0%

★퀘스트 부여 퇴출』

시민 정보를 확인해보니 최형준의 충성도는 무려 62로 제일 먼저 충성도를 개방했던 최서연 보다도 높은 상태였다.

이렇게 되면 곧바로 가신 등록이 가능해진다.

'가신 등록, 최형준.'

그 순간.

우우웅!

밝은 빛이 최형준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뭐, 뭐였죠, 방금?"

"뭔가 번쩍한 듯한···."

띠링!

[최초로 가신을 임명했습니다.]

[보상으로 '가신 소환'스킬을 획득합니다.]

{가신 소환}

집구석 안으로 가신을 소환한다.

단, 한 번 소환된 가신은 두 시간 이후에 소환이 가능하다.

새롭게 얻은 스킬은 굉장히 직관적이었다.

잘만 사용한다면 무척이나 유용하게 써 먹을 수 있을 듯한 스킬이었다.

더불어 최형준의 시민 정보창에는 꽤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이름 : 최형준 (Lv. 20) [+]

칭호 : [첫 번째 종]

신뢰도 : 51 충성도 : 62

각성 능력 : 고릴라의 괴력

★퀘스트 부여 』

당장 레벨이 11개나 올랐으며 '첫 번째 종'이라는 칭호가 새롭게 생겨나 있었다.

게다가 '고릴라의 괴력'이라는 능력까지 각성한 상태였다.

고릴라의 괴력 (C) [패시브]

고릴라에 버금가는 괴력의 소유자가 된다.

칭호를 자세히 들여다보자 그것의 효과가 나타났다.

{첫 번째 종}

가신이 사냥한 몬스터의 경험치와 정산금은 2배로 증가하여 지급됩니다.

집구석 바깥에서 반경 5m 이내에 '집구석 절대자의 눈'을 소환 가능한 영역을 만들어낸다.

이제는 최형준을 정찰 보내면 바깥 상황을 좀 더 상세하게 파악하는 게 가능해지는 셈이었다.

'레벨 옆에 플러스 버튼은 뭐지?'

[1,000,000 원을 사용해 가신 최형준의 레벨을 올리시겠습니까?]

무려 100만원이라는 거금을 요구하는 것을 보고 미련 없이 메시지를 꺼버렸다.

'놀래라.'

놀란 마음을 추스르고 있던 그때, 옆에서 자신의 손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최형준의 모습이 보였다.

"왜 그러시죠?"

"아, 재현님. 방금 그 빛을 맞은 이후에 뭔가 힘이 넘쳐나는 것 같습니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이것도 재현님이 하신 겁니까?"

아마도 고릴라의 괴력 효과인 듯 했다.

"맞습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따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재현님. 정말이지 10년은 젊어진 듯한···."

기분이 좋아 보이는 그에게 새롭게 구매한 활과 화살 세트를 건네주며 말했다.

"형준님도 작전에 참여해주시기 바랍니다."

"·········예?"

기본적으로 시민들에게 부여되는 10%의 경험치 보너스.

그것이 가신 효과로 2배로 증가되어 지급되니 220%의 경험치를 얻는 셈이었다.

내가 직접 잡는 것보다도 최형준의 손을 빌려 몬스터를 잡는 것이 더 보상이 좋다는 말이었다.

"꼭, 최대한 많이 잡아 주셔야합니다."

울상을 짓는 최형준을 향해 다시 한 번 당부했다.

"믿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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