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作者: kakao_cuen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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概要

Chapter 11

신전 짓는 뱀파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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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뱀파이어의 삶은 어떨까?

그런 호기심을 자극하는 게임이 하나 있었다. 바로 <신전 짓는 뱀파이어>란 타이틀.

처음에는 다들 대체 뱀파이어가 신전을 왜 짓냐는 반응이다.

하지만, 플레이 하다보면 악신(惡神)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열심히 신전을 짓는 뱀파이어의 처지에 금세 몰입하게 되는 명작이다.

신전 건립이란 주된 목표 외에도, 매혹적인 뱀파이어의 삶을 현실감 있게 그려 큰 인기를 끌었다.

늙지 않는 불멸성과 초인적인 신체 능력, 어둠으로 가득 찬 이면의 세계가 갖는 매력까지. 그야말로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일탈로 가득했다.

나 역시 흠뻑 빠져 즐기는 중이었다. 이 세계로 직접 들어오기 전까진 말이다.

* * *

"이게 대체···."

나는 비슷한 말을 반복하며 같은 공간에서 이틀째 머물고 있었다. 그 정도로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까닭이다.

'게임 속 세계로 들어온 게 확실하다. 여기에 다른 결론은 없어.'

이건 이틀간 수많은 현실 부정 끝에 도달한 결론이다.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나는 즐겨하던 <신전 짓는 뱀파이어>에 들어왔다는 것.

눈앞에 있는 네 개의 신상이 그 명백한 증거다.

주변은 방향을 구분하기 어려운 공허하고 어두운 공간이다. 오로지 눈앞에 있는 네 개의 신성만이 또렷하게 보인다.

'영락없이 게임 시작 부분이네.'

여기서 저 신상 중에 하나를 골라 섬길 신을 택해야 한다. 이후 신들은 뱀파이어를 후원하거나 임무를 내린다. 물론 임무 완수 후에는 짭짤한 보상을 주니 꽤나 이로운 존재들이다.

나는 여기서 멈춰 있었다.

가뜩이나 게임 속 세계로 들어왔는데 섬길 신까지 정하면 진짜 돌이킬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 공허한 공간 안에서 탈출하기 위해 이틀 동안 갖은 노력을 다해봤지만 소용없었다. 게다가 뱀파이어가 된 탓에 피에 대한 갈증도 점점 심해지고 있었고.

'이걸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광기가 도질 거야. 피 못 먹은 뱀파이어처럼 골치 아픈 게 없거든.'

결국 나는 이틀 만에 현실을 받아들이고 신상을 택하기로 했다. 마음을 다잡은 나는 네 개의 신상을 차분히 살펴봤다.

첫 번째는 상당히 친숙한 존재다.

뱀파이어의 소신(小神)인 '드라큘라'로 신상은 잘 차려입은 창백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아마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뱀파이어가 아닐까 싶은데, 인간 세계의 백작이던 그는 결국 신위를 얻어 소신격이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자신을 섬기는 뱀파이어들에게도 상당히 잘해주는지라 평판이 좋다. 이 때문에 플레이어들은 친밀감을 담아 '드사장'이라고 불렀다.

'문제는 드사장이 소신격이라 끗빨이 없어.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고.'

인간일 적에는 유명한 뱀파이어였다지만, 신의 세계로 들어가고는 쭈그리 신세가 된 게 그다.

섬기는 이를 열심히 도와주긴 하는데 영 믿음직하지 못한 뒷배다. 갈등이 일어날 때 다른 강한 신이 으름장을 놓으면 꽁무니를 내빼기 일쑤.

사람은 좋지만 능력이 없는 자의 전형이다. 본인은 막 신위를 얻은 초심자가 자기 정도 해주면 대단한 거라 하던데, 막상 현실적인 문제와 마주해야 하는 플레이어들의 입장은 또 달랐다.

'드사장이 제일 인기 많긴 하지만 결국 초보자용이지.'

나는 다음 신상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번째는 '불멸의 여왕 카라즈라.' 이쪽은 드사장이랑 차원이 다른 존재로 대신(大神)이다.

드사장이 사는 게 힘든 협력업체 사장이라면 이쪽은 대기업 총수. 불멸의 여왕 카라즈라라고 하면 어디서든 알아주는 거물이었다.

저런 여신만 섬기면 답답한 앞날 대신 언제나 승리일 것 같지만, 또 그것도 아니다.

'대기업 총수라 나 같은 말단 사원은 쳐다도 안 본다 그거지···.'

드라큘라는 '뱀파이어의 소신'이지만, 불멸의 여왕 카라즈라는 '언데드의 대신'이다. 애초에 사업장의 규모 자체가 비교 불가다.

언데드 전체가 섬기는 초거물이다 보니, 뱀파이어만 돌봐주는 드사장이랑 시선 자체가 달랐다. 도와주긴 하지만 매사 영 심드렁하다는 것.

휘하에 드라코리치, 리치, 데스나이트 등 온갖 고위 언데드가 바글거리니 상대적으로 뱀파이어에게 별달리 관심을 갖지 않는 게 문제였다.

'주목 받기가 어려워.'

높은 신위를 가졌음에도 단점이 있는 것이다.

세 번째는···.

음, 기각.

발음하기도 힘든 '아르굴라르스 프타흐 흐근' 이름의 사람 몸에 문어 대가리를 가진 괴이한 신이다.

중신(中神)이라 힘도 충분하고, 후원도 빵빵하다.

문제는 저 문어 대가리는 흡혈 벌레나 흡혈 촉수덩어리 같은 괴생명체들이 섬기는 신이라는 것.

피 빨아먹는 온갖 이상한 놈들이 숭배하다 보니, 저 문어한테 힘을 받으면 플레이어도 점점 그렇게 변해 간다.

팔이 촉수가 되고, 나중에는 언어 능력도 잃어버리고 그랬지.

'게임에서라면 그것도 나름 재밌는 플레이겠지만, 이곳은 현실이야. 내가 진짜 촉수 괴물이 되는 건 사절이라고.'

마지막 네 번째는 모든 신상 중에서 가장 작고 초라했다. 그도 그럴 게, 그것은 반신(半神)인 '뱀파이어 성녀'의 신상이기 때문이다.

반신이라 하면, 가장 신위가 낮은 존재이자··· 좀 노골적으로 말해···.

'되다만 신이란 거지.'

반신은 사는 게 매사 억울한 우리 협력업체의 드사장보다도 지위가 낮다.

심지어 뱀파이어 성녀의 신도는 0명. 즉, 1인 사업자라는 거다. 막 사업자 등록을 하고 직원도 없이 홀로 뛰는 눈물겨운 사장님.

'게다가 뱀파이어+성녀라는 괴상한 상극의 조합. 망캐도 이런 망캐가 없을 지경···.'

참고로 저 반신은 인간이던 시절에 그 이름도 영광스러운 '태양 교단'의 성녀였다. 그 후 눈물 없이 못 들을 구구절절한 사연을 겪은 뒤 흡혈귀 반신격이 됐다.

'저 정도 기구한 팔자도 드문데 말이야.'

뱀파이어 성녀는 최근 패치로 등장한 신격이다. 아름다운 외모로 많은 관심을 끌었는데, 태양 교단의 성녀와 뱀파이어라는 해괴한 조합에 모두 나가떨어졌다.

'애초에 뱀파이어를 죽이는 게 태양빛이잖아.'

한데 그쪽 교단의 총본산에서 온 성녀를 섬기라고?

개소리도 이런 개소리가 없다.

심지어 도중에 태양빛을 쏘는 걸 가호랍시고 내려준다. 당연한 얘기지만 시전하면 플레이어는 새카맣게 타죽는다.

'일종의 블랙 코미디인가 싶었지.'

하지만 제작진이 미친 것도 아니고 뭔가 의도가 있을 터였다.

처음 고르는 신들은 격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건 각자의 개성일 뿐, 실질적으로 누가 좋다고 하기 힘들다. 서로 장점이 있으니 고심해서 자기 스타일에 맞게 정하라는 것이다.

하면 뱀파이어 성녀도 무언가 쓸 곳이 있을 터인데, 플레이어들은 그걸 좀처럼 찾질 못하고 비난만 심해졌다.

반면 이 몸은 달랐다.

커뮤니티에서 잘나가던 공략쟁이였던 나는 뱀파이어 성녀를 주구장창 판 끝에 정답을 알아낸 것이다.

'그걸 막 게시판에 작성하고 있었는데···.'

한창 공략을 쓰다 정신을 잃었더니 이 세상에 들어와 있었다. 다시 생각해도 황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제 현실을 받아들여야겠지."

기왕 이렇게 된 거 어쩌랴. 피에 대한 갈증 때문에 더 이상 머뭇거리고 있을 틈도 없었다. 나는 진지한 눈빛으로 뱀파이어 성녀의 신상을 한동안 쳐다봤다. 모두가 망캐라 비난하지만, 직접 겪은 내 생각은 달랐다.

'뱀파이어 성녀만이 후반의 그 좆같은 어려움을 극복할 잠재력이 있어.'

게임의 후반부는 극악의 난이도다. 치트키 없이는 못 깬다는 소리가 있을 정도인데, 뱀파이어에게 상극인 태양 교단 놈들이 미쳐 날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쪽 교단 출신인 뱀파이어 성녀라면 공략이 가능하다는 게 내 판단이었다.

'게다가 이 비루한 반신의 첫 번째 신도가 된다는 점도 크고.'

뭐든 1등은 의미가 있기 마련이다. 아무래도 후원이 각별할 수밖에 없다. 용 꼬리보다는 뱀 대가리가 낫지 않겠는가?

게다가 다들 뱀파이어 성녀가 주는 괴랄한 힘을 잘 활용하지 못해서 그렇지, 방법만 알면 사기도 그런 사기가 없었다.

"뭐든 쓰기 나름이지."

결정을 내린 나는 뱀파이어 성녀의 신상을 잡았다. 그러자 손이 타들어 가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윽···."

인상을 찌푸리며 보니 왼쪽 손바닥에 처음 보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건 뱀파이어 성녀의 첫 번째 신도를 의미하는 낙인이다. 이건 단순한 문양이 아니라 실질적인 힘을 갖고 있었다.

'앞으로 도움이 되겠군.'

그와 함께 시야가 흐릿해졌다.

신을 택하는 절차가 끝나자 드디어 월드로 진입하는 것이다.

'얼른 뭐든 잡아먹어야겠어. 배고파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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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의 갈망(1)

"신기하군."

눈앞이 암전한다 싶더니 어느새 주변은 어두컴컴한 숲 속이었다.

익숙한 장소다. 게임의 초반부인 '어둠의 숲'이기 때문. 높이 솟은 침엽수가 빽빽한 이곳은 모니터로 보던 모습 그대로였다.

잠시 멍하니 주변을 돌아다니다 달빛이 일렁이는 연못을 발견했다. 가까이 가자 수면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나는 홀린 듯 그걸 바라봤다.

"아···."

영화에서 볼 법한 잘생긴 얼굴이 거기 있었다. 하지만 입을 벌리자 송곳니가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이 뾰족하고 날카로웠다. 그 외에 체격과 키가 커졌다.

'정말 뱀파이어가 되었군.'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틀림없이 현실이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목표는 확실했다.

'생존. 살아남아야 해.'

여기서 죽는다면 흔히 겪는 게임오버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일 터. 어떻게든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일단 그 외의 것은 생각하지 말자.'

게임을 할 때는 뱀파이어의 삶을 꽤 동경하기도 했다. 뭔가 방탕하고 고혹적이었으니까. 그래서 내가 '만약 뱀파이어가 되면 어떨까'란 생각도 많이 해봤다.

뱀파이어가 되면 할 수 있는 게 많았다. 종복들을 부려 튼튼한 성을 짓고, 흡혈로 아름다운 권속을 만들어도 된다.

권력자를 조종하는 막후의 권력자가 되거나, 인간일 때는 친해지기 어려운 몬스터 놈들과 파티를 이루는 일도 가능해진다.

내 머릿속에는 온갖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직장 생활이 워낙 힘들고 지겨웠기 때문이다.

남들처럼 흔히 일탈을 꿈꿨던 건데, 그렇다고 정말 뱀파이어가 되길 바란 건 아니었다.

판타지란 판타지일 때 아름다운 법. 그게 현실이 되면 잔혹한 블랙 코미디가 따로 없었으니까.

바로 생존부터 떠올린 건 이 때문이다. 그런데 생존이란 키워드 때문이었을까?

갑자기 피에 대한 갈망이 솟구쳤다. 이미 이런 욕구에 시달리고 있긴 했지만, 월드에 진입하자 정말 주체할 수 없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피를 마셔야 해. 피, 피···."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이 나올 정도였다. 얼마 전까지는 인간이었던 주제에 당장 피를 안 마시면 어떻게 될 것처럼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문제는 이 갈망이 참으로 고약하다는 것.

'배고픔과 갈증이 한꺼번에 온다.'

보통 배고픔이나 갈증 한 가지만으로도 견디기 힘들다. 그런데 그 두 가지가 같이 왔다. 왜 뱀파이어가 피가 부족하면 미쳐 날뛰는지 절절히 알게 됐다.

나는 급한 대로 연못에 얼굴을 박았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맙소사. 물을 마셔도 갈증이 안 사라져!'

오히려 바닷물을 마신 듯 목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그제야 왜 뱀파이어가 저주 받은 존재인 걸 알게 됐다. 게임에서 보던 뱀파이어의 매력은 삽시간에 벗겨졌다.

'빨리, 뭔가 대책을···.'

당장 흡혈이 급해지자, 낯선 세계에 홀로 떨어졌다는 사실 따위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됐다.

당장 피를 마시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 같았으니 그딴 걸 생각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피를 가진 존재를 찾아야 해.'

머릿속에 그 생각만 가득 찼다. 그러자 모든 감각이 마치 면도날처럼 날카로워졌다. 동시에 주변을 훑는 것처럼 확장됐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각으로, 분명 뱀파이어의 능력이 틀림없었다.

'신기하군. 일대를 스캔하는 것만 같은데?'

그러던 중 갑자기 눈이 커졌다. 가까운 덤불에 웅크리고 있는 작은 생물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나는 연기처럼 몸이 꺼지며 앞으로 질주했다. 본능적으로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는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토끼다!'

저 앞에 산토끼가 하나 있었다. 나는 살금살금 움직여 산토끼를 향해 손을 뻗었다. 놈은 어째서인지 바로 코앞까지 접근할 때까지도 알아채지 못했다. 아마 뱀파이어의 발걸음은 소리가 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야!"

바로 잡아채자 그제야 놀란 토끼가 발버둥을 치며 난리를 피웠다. 나를 보는 커다란 눈동자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당장 피를 마실 수 있다는 욕망 때문에 동정심 따윈 생기지도 않았다.

즉각 손날로 토끼의 목을 베듯 날려버렸다. 뱀파이어기에 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마치 뚜껑을 따는 것처럼 토끼 머리를 제거하자 피가 진득하게 흘러나왔다. 토끼의 털가죽이 끈적끈적한 피로 지저분하게 젖어 들어갔다. 나는 서둘러 토끼를 위로 들고는 피를 마셨다.

꿀꺽꿀꺽.

흡혈의 본능 때문에 정신없이 피를 들이켰다. 입가와 목덜미가 피로 더러워졌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지금은 토끼 피를 마시는데 온 정신이 쏠렸으니까.

'달아! 달콤해!'

어째서인지 토끼의 피는 체리주스처럼 맛있었다. 문제는 피가 너무 조금이라는 것이었다. 금세 끝나버린 토끼 피가 아쉬워, 놈의 사체를 들고 이리저리 흔들어 보다가 내던졌다. 그리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 이게 무슨."

그제야 이성이 돌아왔다. 동시에 방금 내가 벌인 야만적인 짓거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한 가지를 깨달았다.

'방금 위험한 상태였어.'

뱀파이어는 피에 대한 갈망이 지나치면 결국 정신줄을 놓아버리는 종족이다. 급기야 폭주하는데, 그렇게 되면 끊임없이 피를 찾아 헤매는 짐승이 된다.

그때는 이성이라곤 없다. 피를 마시기 위해서라면 태양빛 속으로도 돌진하다 타 죽는 괴물로 전락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토끼피를 마시긴 했지만 오래 가지 않을 거다. 이건 응급조치 밖에 안 된다. 충분한 피를 마시지 않으면 정신이 붕괴하고 말 거다. 문제는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다.

'아직은 여유가 있지만 네다섯 시간 뒤면 태양이 뜰 거야.'

달이 기운 걸 보니 대강 그 정도일 것 같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뱀파이어는 태양빛 앞에 버틸 수가 없다.

그전까진 추가로 피를 보충한 뒤에 어딘가로 숨어야 한다. 낯선 세계로 와서 태양빛에 타죽는 건 정말 사절이었다.

'존나게 아플 것 같단 말이지.'

게임을 하다보면 태양광에 잿더미로 변하는 뱀파이어를 여러 번 보게 된다. 그때마다 어찌나 끔찍한 비명을 질러대던지 모골이 송연해질 지경이었다. 역시 직접 체험해 보고 싶진 않았다.

'방금 그 굶주림도 마찬가지고.'

토끼 따위보다 크고, 기운 넘치는 생물을 찾아야 했다. 여전히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은 기분이다. 이대로라면 멧돼지 한 마리도 통째로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서 생물을 찾아야 할까? 아까 토끼를 탐색한 날카로운 감각을 발동해 보려 했지만 이번에는 안 됐다.

'반쯤 정신이 날아간 상태에서만 가능한 건가? 생각해 보니 게임에서도 비슷한 기술이 있었어.'

굶주림 상태가 되면 뱀파이어의 생존본능이 몇 가지 능력을 선물해 준다. 아마 그런 종류겠지. 그렇다면 이 넓은 숲에서 먹잇감을 어떻게 찾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그때 코에 혈향이 감지됐다.

"!"

비릿한 피 냄새. 하지만 지금 내게는 완전히 다르게 다가왔다. 세상에 이렇게 달달한 냄새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 잔뜩 배고플 때 빵집 앞을 지나다 맡는 냄새도 이 정도는 아닐 것 같았다.

마치 머리를 망치로 때리는 듯한 강렬한 충격과 충동이 느껴졌다.

나는 홀린 듯 피 냄새를 따라 걸어갔다. 거리가 꽤 있는 것 같았지만 방향을 잃지 않고 따라갈 수 있었다. 마치 멀리서부터 피 냄새를 감지하는 상어의 능력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그것을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쓸 수 있었다.

'저기구나!'

한참 걷던 나는 피 냄새의 근원에 접근했다는 걸 깨닫고는 조심스레 움직였다. 발걸음 소리는 나지 않았기에 들킬 리는 없었다.

앞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나고 있었다.

"이 인간은 꽤나 맛있다! 어려서 부드럽다!"

"하지만 말라서 먹을 게 없어. 크에엑!"

"닥치고 그냥 먹어라!"

앞에는 모닥불도 피워져 있었다. 동시에 저런 흉험한 대화를 나누는 게 누군가 궁금해졌다.

사실 두려움이 없는 건 아니다. 야밤에 저딴 대화를 나누고 있다면 필시 연쇄살인범 같은 놈들일 테니까.

하지만 그보다 피에 대한 갈망이 더 컸다.

'먹을 수 있을 거 같아.'

지금은 이게 끔찍한 생각이란 자각조차 별로 없을 정도였다. 그저 먹기 위해 풀숲에 몸을 숨기고 조심스럽게 앞쪽을 살폈다.

모닥불이 피워져 있고, 덩치 둘이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오크잖아?'

오크는 야만적이고 추악한 외모의 종족이다. 아래턱이 튀어나와 얼굴은 불균형했고, 피부색은 짙었다. 눈빛은 마치 이리처럼 사나웠는데 모두 구운 사람의 팔다리를 뜯어먹고 있었다.

'저런 흉악한 놈들!'

뱀파이어가 된 주제에 사람을 먹는 모습을 보니 분노와 역겨움이 솟아올랐다.

나도 언젠가는 사람을 흡혈할 날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아직은 원래 세계에서 인간이던 감각이 생생하다. 저 모습에 토악질이 쏠리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동시에 묘한 감정이 들었다. 꿈틀거리는 오크의 근육과 불끈거리는 힘줄을 보니 자기도 모르게 목울대가 꿈틀거린 것이다.

'오크 놈들. 군침이 싹 도는데?'

참으로 모순적인 감정이 아닌가. 사람을 먹는 놈들을 역겹다고 여기면서도 나도 놈들을 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으니 말이다.

오크는 생명력이 넘쳐흘렀고, 뱀파이어가 된 나는 거기에 끌렸다. 보기만 해도 침이 고이고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다만 불안감도 없진 않았다.

'혼자서 오크 전사 둘을 이길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런 우려는 빠르게 사라졌다. 피에 대한 본능적인 갈망이 그 모든 걸 압도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아직 한 가닥 남아 있는 이성조차 전투를 종용했다.

'어차피 여기서 오크를 흡혈하지 않으면 폭주하겠지. 오늘밤 이런 기회는 또 없어.'

점점 피에 대한 광기가 머릿속을 채워갔다. 어느 정도였냐면 꾸엑, 꾸엑 거리는 오크의 목소리가 마치 세이렌의 노래처럼 달콤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싸움을 피할 수 없다면 최선을 다해야 하는 법. 다행히 맨손으로 싸우지 않아도 좋았다. 허리춤에는 꽤나 멋진 한손검을 차고 있었기 때문이다.

칼을 쓸 줄은 모르지만 든든했다. 본디 날붙이란 어린애가 휘둘러도 위험한 물건이다.

더군다나 뱀파이어가 되면 초인적인 힘과 민첩성을 갖게 된다. 기술이 부족해도 깡스펙으로 휘두르는 칼은 무시무시하겠지.

'좋아. 해보자.'

기습을 하면 둘 정도는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조용히 검을 뽑으며 상황을 자세히 살펴봤다. 그러자 미처 보지 못하던 게 눈에 들어왔다.

'여자애?'

오크들 옆에는 짐승을 넣어두는 것 같은 작은 나무 우리가 있었다. 그 안에 붉은 머리를 가진 더러운 인간 꼬맹이가 보였다.

녀석은 커다란 눈을 치켜뜨고는 소리를 질러댔다.

"저주받을 놈들아! 감히 우리 가족을! 오빠를 먹어! 끄아아아!"

악을 쓰는 아이의 목소리에도 오크들은 별달리 신경 쓰지 않았다. 한 놈이 시끄럽다는 듯 돌멩이를 던졌을 뿐이다. 마치 인간이 닭이나 돼지를 다룰 때랑 비슷했다.

아무래도 지금 오크들이 토막 쳐 구워 먹고 있는 건 저 꼬맹이의 오빠였던 모양이다. 그걸 보고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거 에레미나 퀘스트잖아?'

상황을 보니 분명 게임 초반의 서브 퀘스트 가운데 하나인 '에레미나 구하기'다. 저기 우리에 갇혀 있는 꼬맹이가 전도유망한 암살자라, 구해주면 나중에 득을 볼 수 있다.

본래 게임이었다면 지도에 뜬 퀘스트 표시를 따라왔을 거다. 하지만 여기선 흡혈의 욕구 때문에 경황이 없어 서브 퀘스트 따윈 신경도 쓰지 못했다.

'그런데 결국 혈향 때문에 도착하다니···.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그건가.'

이렇게 된 이상 흡혈도 하고 에레미나 퀘스트로 해결해야겠군.

"후우···."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다잡았다. 실제로 오크와 싸우는 건 쉽지 않겠지만 지금은 뱀파이어가 가진 특유의 강함을 믿어야 했다.

딱 봐도 놈들은 무리를 떠나 방랑하는 부류 같았다. 뭔가 사고를 치고 쫓겨난 놈들은 하나 같이 변변찮으니 괜찮겠지.

나는 검을 들고는 즉각 오크를 향해 튀어 나갔다. 그 속도는 충분히 빨랐다. 오크가 제대로 반응하기도 전에 앉아 있던 냅다 칼을 휘두를 수 있었으니까.

부웅―!

검술의 문외한이지만 뭔가 제대로 된 일격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칼날이 날카롭고 정교하게 바람을 가르는 게 아니라, 무식하게 몽둥이를 휘두르는 소리가 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에 뱀파이어의 막강한 힘이 결합하자 결과는 놀라웠다. 칼날이 오크의 두툼한 목덜미를 깊게 파고든 것이다.

피츄슈슈!

대번에 피가 치솟았다. 그리고 칼을 맞은 오크 놈의 목뼈가 끊어져 옆으로 넘어간 머리가 덜렁덜렁 거렸다.

나는 당장이라도 저 피에 얼굴을 처박고 싶었다.

'안 돼. 흥분을 가라앉히고 어떻게든···.'

하지만 사고가 더 이어지지 못하고 피를 향해 달려들었다. 가뜩이나 갈증을 느끼던 중에 전투의 흥분까지 겹치자 참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곧장 덜렁거리는 오크의 머리를 뜯어낸 뒤에 얼굴을 처박았다. 그러자 옆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크에에엑! 이런 미친!"

다른 오크가 놀라서 벌떡 일어나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흡혈을 이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간신히 초인적인 의지로 참아냈다. 옆에서 도끼가 날아올지도 모르는데 무방비 상태로 계속 피를 마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억지로 내가 고개를 쳐들어 오크를 보자, 험상궂은 놈이 마치 뱀을 마주한 개구리처럼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크엑!"

사람을 구워먹던 이 잔혹한 놈이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서는 어버버 거리는 것이었다.

나는 그 모습에 놀라다가 곧 포식자로서의 뱀파이어의 위치를 절감하게 됐다.

뱀파이어란 아직 어설프기 짝이 없는 나조차 살아 숨 쉬는 생물에게 공포를 선사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겁먹을 필요가 없었던 거였어. 이놈은 내 밥이다.'

나는 상황을 이해하자 자기도 모르게 입 꼬리가 길게 올라갔다. 그래서 붙잡고 있던 오크를 내던지고는 놈에게 말을 걸었다.

"너도 맛있어 보인다. 크흐흐."

남은 오크 놈은 거의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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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의 갈망(2)

이후 놈의 반응은 간단했다. 비명을 지르더니 뒤돌아서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크에에에! 크에!"

어찌나 당황하던지 달리다 벌러덩 뒹굴기까지 했다. 내 입장에선 놓칠 수 없었다.

'음식이 도망간다!'

이미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피에 대한 갈증 때문에 오크가 먹을 거로만 보였으니까. 지금 무척 배가 고픈 상태라 어떻게든 오크 둘을 다 먹어치우고 싶었다. 한 마리라도 놓치긴 싫었기에 곧장 쫓았다.

"케엑!"

오크 놈은 어떻게든 몸을 다시 일으켰지만, 이미 거리를 좁힌 뒤였다.

나는 도망가는 놈의 등판을 칼로 찔렀다. 그런데 검 끝이 제대로 박히지 않았다. 놈이 입고 있던 스케일아머의 미늘조각에 막혔던 것.

카앙!

짧게 불꽃이 튀기며 찌르기는 실패했고, 오크는 다시 달렸다.

'젠장!'

전투 경험이 부족해서 일어난 문제였다. 뒤를 점했으니 갑옷이 가리지 않는 부분을 요령 좋게 찔렀어야 했다.

'해본 적이 있어야지.'

그냥 다짜고짜 한 탓에 막힌 거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뭔가 배울 여유 따윈 없었다.

찌르기가 막히자, 다시 쫓아가서 더 세게 찔렀다. 단순무식한 해결책이었지만, 그건 뱀파이어의 괴력과 어우러져 효과를 봤다.

캉!

이번 찌르기는 검 끝이 기어코 철제 미늘을 구부리더니, 미늘을 잇는 가죽 줄을 끊으며 틈새로 파고 들어갔다. 놀라운 동체시력을 가진 탓에 그 모든 광경이 생생히 보였다.

"헙―!"

도망가던 놈이 칼에 찔려서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헛바람을 들이 삼켰다.

그런데도 오크는 끈질기게 다리를 놀렸다. 원래라면 검 끝이 쑥 빠져서는 놈은 계속 달아나야 했을 거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못했다. 뱀파이어가 쓰는 검의 독특한 구조 때문이었다.

뱀파이어의 검은 칼날 부분이 가시처럼 뾰족뾰족하다. 이건 낚시 바늘처럼 안쪽으로 휘어진 형태인데, 처음 게임에서 봤을 때 뭔가 싶었다.

이런 구조라면 칼의 베기 성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래서 그저 판타지적인 장식인 건가 싶었다. 원래 판타지 무기는 실용성보다는 화려한 게 중요하니까.

'하지만 아니었군!'

이것은 지극히 실전적인, 뱀파이어 선배들의 노하우가 묻어난 형태라는 걸 써보니 알 수 있었다.

달아나는 먹이를 뒤에서 푹 찔러서 도망가지 못하게 붙드는 용도였던 것이다.

내가 칼을 단단히 붙잡고 버티자, 오크 놈은 더 도망가질 못했다. 검이 가시 때문에 몸에서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크에에에!"

놈은 배를 헤집는 격통에 어쩔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 틈에 힘껏 당기자 결국 이쪽으로 딸려왔다. 역시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의 반항은 결국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하지만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 죽을 위기에 처하자 오크 놈은 몸을 돌려서는 날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내 쪽이 더 빨랐다.

비어 있는 왼손으로 사정없이 내리찍어 버린 것이다.

기술이라곤 없이 그냥 주먹으로 무식하게 찍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괴력 탓에 오크 놈의 머리가 단숨에 뭉개졌다.

빠각!

뼈가 박살나는 소리와 함께 오크의 눈알이 튀어나왔다. 그렇게 녀석은 단숨에 죽어버렸다.

"헛!"

나는 직접 하고도 너무 끔찍해서 화들짝 놀랐다. 피의 갈망 때문에 반쯤 정신이 나간 와중에도 이럴 정도였으니 눈앞의 광경은 가히 충격이었다.

며칠 전만 해도 컴퓨터 앞에서 배가 벅벅 긁고 있었는데 이런 상황이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아무리 인생 알 수 없다곤 하지만 정도가 심하군.'

하지만 충격 덕에 돌아온 이성도 오래 가지 못했다. 오크 둘을 모두 쓰러뜨리고 마음껏 흡혈을 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 * *

얼마 뒤.

"허···?"

잠깐 정신줄을 놨던 것 같다. 주변을 둘러보자 어느새 빼빼 말라비틀어진 오크 시체 두 구가 보였다. 내 앞섬은 온통 끈적이는 피범벅이었다.

'미친 듯이 흡혈한 건가?'

주둥이를 들이민 건 기억나는데 그다음 상황은 필름이 끊긴 것처럼 남아 있지 않았다.

어쩐지 소름이 쭈뼛하고 돋았다. 자기 자신이 통제에서 벗어난다는 건 결코 유쾌한 상황이 아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난장판이었다. 죽은 오크와 토막 난 인간의 조각, 어지럽게 흩어진 야영지에 반쯤 꺼져가는 모닥불까지.

그 속에서 작은 여자애가 조용히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이도 어린 게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했다.

'어려도 떡잎부터 다르다 그건가.'

꼬맹이는 타는 듯 붉은 머리칼에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 그리고 커다란 눈망울을 갖고 있었다. 내가 아는 에레미나가 확실했다.

어쨌든 오늘 이 녀석은 살아남았다. 에레미나는 게임에서 구해준 것에 감사를 표하고 이대로 떠난다. 대신, 훗날 그녀가 암살자로 성장한 뒤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아쉬운 건 에레미나가 완전한 동료 캐릭터는 아니란 거지.'

스토리 특정 구간에서만 고용할 수 있는 용병 캐릭터로, 쓰는 데 여러 가지 제한이 붙어 있다.

왜 그런지는 간단하다. 에레미나가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이 녀석은 세계관 최강의 암살자라 게임 밸런스를 해칠 수준이다.

이런 에레미나 같은 부류를 '전설급 캐릭터'라고 칭하는데, 그들은 동료가 될 수 없게 만들어져 있다. 너무 강하기 때문에 일정 구간만 함께하거나 스토리상으로 등장하는 식이다.

"저도 잡아먹을 건가요···?"

에레미나가 조용히 물어왔다. 차분하면서도 날 경외하는 듯한 태도가 묻어나고 있었다. 눈앞에서 오크 둘을 썰어버린 게 꽤 인상적이었나 보다.

"아니."

"어째서죠? 복수를 해주셨으니 그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게임에선 여기서 선택지가 나와서 에레미나를 잡아먹을 수도 있다. 하지만 훗날 도움을 받을 걸 생각하면 삽질 그 자체다.

"됐다. 배부르다."

"······."

솔직히 상대가 에레미나가 아니라도 저런 어린 여자애는 흡혈하고 싶지 않았다.

굶어 죽기 직전이라면 모를까, 이렇게 여유가 넘치는데 굳이?

더군다나 나는 아직 신입 뱀파이어에 불과했고, 이쪽 세계의 삶에 대해 다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였다. 좀 더 스스로 고민해보고 어떻게 행동할지 결정해야 했다.

나는 에레미나에게 다가가 나무 우리를 손으로 뜯어 버렸다.

두둑!

녀석의 가는 팔로 아무리 힘을 줘도 어쩔 수 없던 우리가 수수깡처럼 박살 났다.

"···감사합니다."

에레미나는 밖으로 나오더니 조각난 오빠의 시신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나는 녀석을 물끄러미 보다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떠나겠다는 에레미나를 굳이 잡아둬도 별수 없다. 결국 녀석이 도주하는 것으로 퀘스트는 끝나니까. 제작사에선 전설급 캐릭터를 동료로 삼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아니, 잠깐?'

하지만 여기는 엄연한 현실이잖아?

현실이라면 게임의 규칙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대화창에 뜬 대사 선택지 중에 마음에 드는 게 없어도 억지로 하나를 택해야 하는 세계가 아니다.

'게임을 기준으로 판단할 필요는 없어. 시도해 보고 안 되면 그만이지.'

에레미나가 떠나고 싶다면 보내주면 그뿐이다. 영입 제의를 해서 손해 볼 건 없잖아?

"앞으로 어쩔 건가? 인간 꼬마."

내 물음에 시신을 수습하던 에레미나가 잠시 생각하더니 답했다.

"복수···. 오크들에게 복수를 하고 싶습니다."

이후 에레미나는 자신의 말을 지킨다. 앞으로 오크만 죽자고 썰어 대서 오크의 재앙으로 불릴 정도니까. 그녀에게 죽은 오크 영웅이 한둘이 아니었지.

"내가 힘을 줄 수 있다. 꼬마야."

"뱀파이어의 권속이 되는 것 말인가요?"

"그래."

피를 빨아 그녀도 뱀파이어로 만들어 주겠다는 얘기였다. 잠시 생각하던 에레미나는 거절했다.

"강한 힘을 갖게 되겠지만, 피의 저주를 받는 삶은 원치 않습니다."

"그런가. 하지만 그게 아니라도 네게 줄 수 있는 건 많다."

"어떤 건가요?"

에레미나를 설득하기 위해선 그녀가 선택할 길보다 나와 함께 하는 게 이득이란 걸 알려줘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앞으로 에레미나가 어떤 과정을 겪어 암살자가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꼬마야. 너는 제법 영리한 것 같다만, 결국 뻔하지."

"제가 뭘 할 생각인지 아시는 건가요?"

"아마 검술 길드 같은 곳에서 허드렛일 하며 기술을 배우려 하겠지. 몇 년 그렇게 지내다 나중에는 용병 일을 시작할 거고."

실제로 에레미나는 근처의 도시에 있는 검술 길드에 지인이 있기 때문에 내가 말한 대로 성장해 나간다. 게임 스토리를 다 알고 있기에 말한 거지만 에레미나는 살짝 놀란 기색이었다.

"어찌···?"

"어차피 너 같은 애새끼 생각이야 조금만 생각해 봐도 훤하지 않나. 하지만 그것은 복수를 향한 여정을 구불구불한 길로 돌아가는 방법에 불과하다."

"어째서죠?"

나는 에레미나가 실제로 겪었던 불합리한 현실을 잘 알고 있기에 어떤 단점이 있는지 설명해줬다.

"애초에 검술 길드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어깨너머로 배운 기술이 얼마나 대단할 거 같나? 놈들은 널 부려먹고 제대로 된 거라곤 알려주지 않을 거다."

실제로 에레미나는 용병 일을 시작하고 나서 실전 속에서 강해진다. 그리고 종종 검술 길드에서의 삶을 불평하곤 했다.

"또한 복수를 위해선 조직의 힘이 필요한 법이지. 꼬맹아, 최종적으로 오크를 어떻게 하고 싶나? 단순히 몇 마리 멱 따는 걸로 만족하겠다면 더 권하지 않으마."

에레미나는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결론을 내놨다.

"오크를··· 멸망시키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정보가 필수다. 오크는 그 수가 바퀴벌레처럼 많으니 놈들을 흔들려면 우두머리 위주로 노릴 필요가 있어서다. 혼자 그걸 어찌 알아내려고?"

"뱀파이어 님은 다 알고계신가요?"

"물론이다. 단순히 잘 아는 것만이 아니다. 나 역시 오크를 증오하고 놈들을 두들겨 패야 하는 입장이거든."

앞으로 뱀파이어로서 세력을 넓히다 보면 반드시 충돌하는 놈들이 오크다. 선택한 악신을 위해 봉사해야 할 뱀파이어에게 오크의 교단은 현실적이고 심각한 위험이니까.

오크들도 나름의 종교가 있는데, 그들만의 전쟁신을 섬긴다. 문제는 그 신이 엄청 강하다. 숭배하는 오크의 수가 많기 때문이다.

"나는 뱀파이어 성녀라 불리는 신을 섬기고 있다. 섬기는 분을 위해서 오크를 살육하고 그들의 교단을 약화시키는 게 내 소명이다. 즉, 너처럼 오크를 썰어버려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는 거다."

에레미나는 본격적으로 혹하는 표정이 됐다. 서로 목표가 같다는 데 끌리는 거겠지. 나는 그런 녀석에게 쐐기를 박았다.

"나를 섬겨라.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주인이 된다면 한 가지는 맹세하지. 네 복수를 돕겠다."

거기까지 말하고 에레미나를 쳐다봤다. 녀석은 묵묵히 말이 없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설득하긴 했는데··· 과연 전설급 캐릭터가 동료가 될까?'

대답을 기다리고 있자니 솔직히 좀 긴장이 됐다. 그런데 녀석이 뜻밖의 제안해 왔다.

"해가 뜨고 있습니다. 햇빛을 피할 곳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그렇긴 하다. 적당한 곳이 있나?"

"제가 사냥꾼의 딸이라 이 근처에 밝습니다. 안내해 드릴게요."

에레미나는 태도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그래서 기대를 갖고 물었다.

"그 말은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고 봐도 되나?"

내 물음에 에레미나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작게 끄덕였다.

"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나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기쁜 티를 내지 않기 위해서였다.

'대박이야, 이건.'

확실히 이곳은 현실 세계였고, 게임에서 적용되던 제한은 적용되지 않았다. 전설급 캐릭터를 부하로 삼게 된 것이다.

이러면 다른 전설급 캐릭터도 동료로 삼는 게 가능할 것 같은데? 만약 그게 성공한다면 앞날이 탄탄대로일 것 같았다. 모두 직접 동료로 삼는 게 금지된 사기 캐릭터들이었으니까.

'아무튼, 에레미나를 잘 키워야겠군.'

오크의 재앙이 내 손 안에 들어왔다.

* * *

에레미나를 뱀파이어 권속으로 만드는 건 보류했다. 이 문제에 관해선 나중에 얘기해 볼 생각이다.

일단 우리는 주변을 정리하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죽은 오크 놈들의 물건도 털었다.

떠돌이라 그런지 재산은 많지 않았다. 갑옷 두 벌과 도끼, 단검, 혁대 정도였다. 놈들은 신발 같은 건 신지도 않았다.

그밖에 부싯돌과 피로 얼룩진 가죽 포대, 더러운 모포, 은화와 동화가 약간 든 가죽 주머니를 구할 수 있었다.

오크 전쟁신의 부적이나 고약한 냄새가 나는 곰팡이 맥주, 용도불명의 약초 따위는 그냥 내다버렸다.

이후 에레미나는 자신의 오빠였던 조각들을 모았다. 녀석은 가져가서 장례를 치러주겠다고 했다.

"피곤하지 않겠냐?"

"그래도 오빠잖아요. 낮에 할 테니 뱀파이어 님께서는 자고 계세요."

"뭐, 좋다."

이후 에리미나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산중에 있는 작은 오두막이었다. 뭔가 가건물 같은 느낌이었다.

"여긴 뭐냐?"

"아버지랑 사냥을 나왔을 때 임시로 머무는 장소입니다. 사냥해 온 걸 저장하기 위한 지하실이 있습니다. 거기라면 확실하게 태양을 피할 수 있을 거예요."

오두막에 들어가 확인해 보니까 괜찮은 장소였다. 나는 더는 아이에게 신경 쓰지 못하고는 그냥 지하실에 웅크린 채 곯아떨어졌다.

"죽겠군···."

이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단잠을 자고 있는데 작은 손길이 날 흔들어 깨웠다.

"뱀파이어 님! 뱀파이어 님!"

뭔가 해서 눈을 뜨니까 에레미나였다.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보이는 게 뱀파이어의 시야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잠에 취한 채 물었다.

"음··· 오빠 장례는 잘 치렀냐? 얼마나 지난 거지···."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소리 죽이고 있지만 말투가 다급했다. 뭔가 해서 눈으로 물으니 에레미나가 속삭여왔다.

"지금 근처에 교회의 수도승들이 나타났습니다. 성기사도 여럿이고요."

"뭐?"

순간 잠이 싹 달아났다.

수도승과 성기사라면 뱀파이어에겐 천적과도 같은 존재.

아니, 그 마귀 사탄 같은 것들이 여기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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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 구경(1)

사실 뱀파이어가 성직자 무리를 그렇게 부르는 게 이상한 일이긴 하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 놈들은 마귀 사탄이 맞다.

태양이라면 뱀파이어의 철천지원수인데, 태양신을 숭배하고 있으니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이지.

무엇보다 놈들은 이 세계에서 가장 능숙한 뱀파이어 학살자들이란 게 문제였다. 즉, 뱀파이어 연쇄살인의 프로들. 당연히 이야기만 들어도 동공이 마구 흔들릴 수밖에.

"갑자기? 왜? 어디쯤 왔는데?"

연이어 묻자, 에레미나가 의연하게 답해왔다.

"침착하세요. 뱀파이어 님."

놀랍도록 차분한 말투다. 나는 잠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역시 보통 녀석이 아니야.'

꼬맹이의 태도에 나도 금방 냉정을 되찾았다. 어린 이 녀석도 이리 담담한데 내가 호들갑을 떨면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일단 아는 걸 말해봐. 꼬마야."

"네."

꼬맹이는 설명에 들어갔다. 들어보니 다행인 점은 아직 오두막과 거리가 있다는 것. 장례를 치른 뒤, 주변을 둘러보다가 태양 교단 놈들을 발견했다고 했다.

"들켰어?"

"아니에요. 몰래 보고 왔어요. 제가 사냥기술을 배워서 그런데는 능하거든요."

"다행이군. 그런데 날 노리는 건가?"

"아닌 것 같아요. 대강 들어보니 오크들 때문에 이 숲에 들어온 모양이에요."

그 말에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뱀파이어 척살을 목표로 눈이 벌게진 광신도 놈들은 다시없는 악몽이니까. 하나 오크가 목표라고 해도 근처에서 그런 흉악한 놈들이 배회한다는 건 위험하긴 마찬가지였다.

'일단은 숨어서 놈들이 사라지길 기다릴까?'

가장 간단한 방법이긴 했다. 하지만 문제가 없진 않다. 태양 교단 놈들은 뱀파이어 같은 사특한 존재를 탐지하는 능력도 갖고 있기 때문에 자칫하다가는 여기까지 쳐들어 올 수도 있다.

'차라리 멀리 도망갈까?'

모처럼 찾은 임시 거처를 포기하자니 아까웠다. 하지만 그게 제일 확실한 방법이겠지. 그렇게 결정을 내리려다가 퍼뜩 한 가지가 떠올랐다.

"가만?"

어쩌면 이건 중요한 기회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내가 서둘러 신전을 지어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현재 나는 반신인 뱀파이어 성녀의 1호 신도다. 그녀의 후원을 받기 위해 하루라도 빨리 신전을 올릴 필요가 있었다.

신전이라고 해서 무슨 대리석으로 된 거창한 건물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나중에야 그렇게 되겠지만, 일단은 이 사냥꾼의 오두막 같은 곳에서 조촐하게 시작해도 된다.

중요한 건, 신전의 중심이 될 '피의 제단'을 만드는 것.

피의 제단은 섬기는 신의 신상을 안치하는 곳이라 매우 중요하다. 거기에 더해 혈액을 신선하게 보존하는 역할도 한다. 뱀파이어 전용 냉장고인 셈.

즉, 뱀파이어로서의 근거지를 만들려면 피의 제단부터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피의 제단이 없다면 아무리 거창한 건물이 있어도 그곳은 신전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피의 제단을 만들 재료지.'

재료는 여러 가지가 들어가는데, 제단을 쌓을 벽돌이나 여타 목재 같은 것들이다. 그런 거야 어떻게든 구할 수 있는데, 제일 중요한 게 문제였다.

바로 제단의 내핵이 되어줄 '타락한 성유물'이란 것.

이것은 태양 교단이나 오크 교단 같이, 다른 종교단체의 성유물을 가져다가 뱀파이어의 어둠에 물들게 만드는 것이다.

문제는 이걸 마련하는 게 꽤나 어렵다는 점으로 섬기는 신에 따라 그 난이도가 달라진다. 예를 들면, 대신격인 불멸의 여왕 카라즈라를 선택하면 '타락한 성유물'을 그냥 하나 내려 준다.

'역시 대기업 복지가 쩔어···.'

다른 신격들도 저마다의 방법으로 타락한 성유물을 구하는데 도움을 준다.

반면 내가 섬기는 '뱀파이어 성녀'는 개뿔도 없다. 이유는 간단한데 그냥 가난해서다···.

'영세한 개인사업자의 한계지.'

본디 복지란 예산에서 나오는 법. 한데 우리 가여운 성녀님께선 끼니나 굶지 않으시는지 모르겠구만.

그 때문에 뱀파이어 성녀를 택하면 초반 난이도가 대폭 상승한다. 가뜩이나 저렙 뱀파이어인데 타락한 성유물을 구하는 게 너무나 빡세기 때문이다.

내겐 대책이 있긴 하지만 만만치 않은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래서 신전 건립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꽤 미뤄질 거라 여겼는데···.

'설마하니 성직자 무리가 나타날 줄이야.'

수도 제법 된단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성직자가 몰려다닌다면 분명 성유물 한두 개쯤은 갖고 있을 터. 그걸 털 수만 있다면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르게 신전을 짓는 게 가능하겠지.

'이게 위기를 기회로인가? 생각하기에 따라 복이 넝쿨째로 굴러 들어온 거야.'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두려움은 사라지고 탐욕이 마음속에 자리 잡아간다.

"자세한 상황을 한 번 봐야겠군."

하지만 그냥 이대로 갔다가는 들킬 확률이 높다. 설령 발걸음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해도 성직자들은 사특한 기운에 민감하다.

꼬맹이도 그런 점을 지적해왔다.

"전에 한 번 보니까 성직자가 어둠의 존재를 찾아내는 게 사냥꾼이 짐승을 찾는 거랑 별반 다르지 않았어요."

"확실히 내가 그들 앞에서 사슴 같은 사냥감이긴 하지. 하지만 걱정할 것 없어. 방법이 있으니까."

나는 자신의 왼쪽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뱀파이어에게 어울리지 않는 태양이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뱀파이어 성녀의 첫 번째 신도라는 표식이자 축복이다. 오직 단 한 명만 받을 수 있는 대단한 특전으로 뱀파이어 성녀를 택해 얻을 수 있는 장점이었다.

'결국 다 장단이 있다는 거지. 불멸의 여왕 카라즈라에게선 이런 건 절대 받을 수 없다고.'

이 문신의 능력은 간단한데, 한 달에 한 번 뱀파이어 성녀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상당히 다양하게 활용이 가능했다. 물론 우리 사장님은 가난했기에 무리한 요구는 불가능했지만.

나는 문신을 바라보며 조용히 기도문을 읊조렸다.

"박해받았던 고귀한 성녀여, 고난을 이기고 어둠의 존재를 돌보는 어머니가 된 존재여, 여기 당신의 첫 번째 종이 환난에 처했으니 그 아름다운 눈길로 이 미천한 종을 살피소서."

기도문은 게임에서 봤던 것 그대로 읊었다. 그러자 곧장 손바닥의 문신에서 은은한 빛이 나기 시작했다.

'다행히 기도문은 잘 작동하는군.'

뱀파이어 성녀가 응답하겠다는 신호를 보내자 나는 은근히 물어봤다.

"혹시나 타락한 성유물을 하나 내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안 된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게임 속의 지식. 현실에선 좀 다른 게 있을까 싶어서 기대를 걸어본 것이다. 하지만 알짤 없었다.

손바닥의 문장이 푸른빛을 시작한 것이다.

'아차!'

이것은 성녀가 거부감을 표출했기 때문이다. 이 푸른빛은 주식 차트에서 음봉을 보는 것마냥 식겁할 종류였다.

여기서 계속 열 받게 했다가는 문신이 폭발해서 팔이 통째로 날아가게 된다. 더불어 첫 번째 신도에서 잘리는 건 덤이다. 나는 재빨리 말을 바꿨다.

"아닙니다. 그저 지금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도움이면 충분합니다."

그 말에 이번에는 문신이 양봉과도 같이 붉게 변했다. 이것은 좋은 징조다. 우리 아름다운 여신님께선 진홍색 눈동자를 가졌기에, 붉은색은 길조로 통했다.

잠시 뒤에 저 차원 너머 어딘가에서 무언가 육중한 게 날아와 내 몸에 내리꽂히는 기분이 들었다. 뱀파이어 성녀가 응답한 것이다.

나는 그 즉시 내 몸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알게 됐다.

"오오···!"

놀랍게도 뱀파이어 성녀께서 능력을 하나 하사하셨다. 그건 바로 '박쥐 변신'이었다.

뱀파이어는 다양한 동물로 변할 수 있다. 그중 많이 하는 형태가 늑대나 박쥐였다. 박쥐로 변하면 전투력은 별 거 없지만, 날아다닐 수 있는 게 좋다.

더불어 동물의 형태라 성직자의 감각을 피할 수 있고. 이걸로 적정(敵情)을 살피라는 배려였다.

"감사합니다. 자애로운 성녀님."

만족해서는 그리 말하자, 이번에는 문신이 붉은빛을 깜빡, 깜빡 거렸다. 처음 보는 사람은 이게 뭔 뜻인가 싶지만 나는 잘 알았다.

붉은빛이 깜빡인다는 건 기쁨의 표현. 여신님께선 지금 스스로 흡족해하고 계신 거다.

이해 못 할 것도 없다. 왜냐하면, 뱀파이어 성녀는 막 시작한 풋내기 신격이라 관련된 경험이 없기 때문. 첫 신도에게 힘을 준 게 뿌듯한 듯 기뻐하고 있었다.

'···어쩐지 좀 귀엽군.'

혼자 흡족해 할 성녀님을 생각하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나중에 제단을 성심껏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박쥐로 변신했다.

펑!

연기가 치솟고는 작은 박쥐가 됐다. 앞에서 조용히 있던 꼬맹이 놈이 화들짝 놀랐다.

"힉! 뱀파이어 님?"

눈이 잔뜩 커진 게 상당히 귀엽다. 의연한 척해도 이럴 때 보면 애새끼가 확실했다.

"잠시 정찰을 다녀오마. 여기 잘 숨어 있거라."

"네! 네, 알겠습니다!"

꼬맹이는 변신이 신기한지 표정에 한껏 존경심이 피어올라 있었다. 나는 그게 맘에 들어 괜히 꼬맹이 주위로 몇 번 날다가 오두막 밖으로 빠져나왔다.

이미 사방은 어두워진 상태. 공포의 태양은 한동안 나타나지 않을 테니 적잖이 안심됐다. 나는 미리 꼬맹이에게 들은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날아갔다.

파닥파닥.

한참을 가다 보니 저 앞에 불빛이 보였다. 다행히 놈들은 모닥불을 피운 채 휴식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밤은 뱀파이어의 시간. 인간들은 불을 지핀 채 슬슬 잘 준비를 하기 마련이다. 이런 구도 자체가 기습을 하거나 염탐하기 아주 좋았다.

나는 놈들의 근처에 내리 앉아, 나뭇가지를 발로 붙잡고 거꾸로 매달렸다. 이 숲에는 흔한 게 박쥐이니 설령 날 발견해도 별다른 의심을 하진 않겠지.

'음···, 들은 대로 꽤 많네.'

모닥불 근처에 모여 앉은 이는 총 10명이었다. 나는 면밀히 구성을 살폈다.

지도자로 보이는 고위 성직자가 하나, 부관 같은 수녀 하나, 수수한 차림의 수도승 둘, 성기사 둘, 그리고 종복이 넷이었다.

'일개 뱀파이어가 상대하긴 지나치게 막강한 전력이군.'

저런 완편된 마귀 사탄 파티랑 싸우면 나 같은 건 순식간에 녹아버리겠지. 언젠가 강해진다면 저딴 것들을 일거에 쓸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정말 무서운 적이다.

박쥐로 변해서 들키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얼른 내빼고 싶단 생각마저 들었다. 성직자와 성기사 라니,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히네.

'그래도 뭐라고 떠드나 들어보자. 상황 파악을 해야지.'

마침 리더로 보이는 고위 성직자와 부관인 수녀가 뭐라 쑥덕쑥덕하고 있었기에 귀를 기울였다. 뱀파이어의 청력은 매우 예민하다. 인간이라면 듣지 못할 것도 잡아낼 수 있었다.

"교구장님···. 저희의 행동을 과연 신께서 용서하시겠습니까?"

말을 거는 수녀의 목소리는 근심이 가득했다. 그에 대해 교구장이라 불린 자는 냉정하게 답한다.

"이번 일에 의심을 품지 마십시오.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일부러 마을로 오크를 유도하다니요. 이후 교회가 나서 오크를 토벌하고 민심을 산다는 것 자체가 저는···."

"어허, 큰일 날 소리. 다시는 그런 말 입에 담지 마세요."

"교구장님."

"이것은 교회의 개척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이 땅의 주민들은 우리 주에 대해 알지 못하는 야만적인 이교도들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오크를 토벌하면 지역 영주가 포교 활동에 대한 편의를 봐줄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렇게 큰 피해가 날 줄은 몰랐습니다. 마을 하나가 몰살됐지 않습니까?"

"야만적인 이교도의 희생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들의 핏값과 믿는 자들의 핏값이 같지 않습니다. 더 말하지 마십시오. 자매님."

나는 얘기를 듣다 보니 사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최근 인간의 마을 하나가 박살 났는데 저놈들이 벌인 공작이었다. 이후 나서서 오크를 격퇴해 지역민들에게 신망을 얻기 위한 수작이었던 것.

'저런 천인공노할 것들!'

아마 내가 주운 꼬맹이도 저놈들의 일에 휘말려 가족을 다 잃어버린 것 같았다.

나는 분노를 애써 억누르며 좀 더 놈들을 살폈다. 그러다가 교구장의 반대편에 있는 여자 성기사의 목에서 눈에 확 들어오는 아뮬렛을 발견했다.

'역시, 예상대로 성유물이 있군.'

잘 됐어. 이제 저걸 빼먹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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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 구경(2)

일단 여자 성기사를 관찰했다. 그녀는 인상적인 외모를 갖고 있었다.

투구를 벗은 상태라 탐스러운 은발을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모닥불에 비친 머리칼이 찬란했다.

외모는 멀리서 봐도 눈에 확 들어올 정도로 아름다웠다. 다만 완고하게 다문 입술과 차가운 눈빛을 보니 엄격한 성정을 가진 것 같았다.

'어쩐지 보기만 해도 알 것 같군. 쉽사리 타협이 안 되는 스타일이야.'

저런 성기사랑 협상하려 했다가는 돌아오는 건 높은 확률로 칼침이다. 분명 뱀파이어의 살점을 광어회처럼 떠버리겠지.

그런데 불안하게 저 여자가 자꾸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마치 뭐라도 거슬린다는 것처럼. 그러자 옆에 있던 중년의 남자 성기사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발레나 아가씨. 무언가 불편하신 점이라도 있습니까?"

"···음. 아닙니다. 제가 과민한 것 같군요."

그것으로 대화는 끊겼다. 남자 성기사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더 묻지 않고 입을 닫았다.

나는 그 짧은 대화에서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저 여자, 세속성기사(世俗聖騎士)구나.'

분명히 '발레나 경'이 아니라, '발레나 아가씨'라고 했다. 이것만 봐도 확실했다.

본디 성기사는 입단하고 나면 속세의 것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어디든 예외는 있는 법. 온전히 입단하기 어려운 자들은 5년에서 10년 정도 복무하다가 자기 가문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이를 세속성기사라고 불렸다.

보통 고위 귀족이 세속성기사가 됐다. 정치적인 이유나 가문의 계승 때문에 성기사단에 온전히 투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남자 성기사도 부티가 흐르는 걸 보니 귀족 같은데, 여자 성기사를 대하는 태도가 조심스럽다. 딱 봐도 자기보다 신분이 높으니 저러는 거겠지.

'고위 귀족이니 희귀한 성유물을 갖고 있는 것도 이해가 가는군.'

정찰을 나온 보람이 있구만. 저런 고가치의 표적을 발견했으니까. 다만 저 여자가 자꾸 두리번거리는 게 불안하네. 슬슬 빠져야겠어.

원래 유난히 민감한 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동물로 변했다지만 들킬 위험은 여전했다.

나는 서둘러 날갯짓을 해서 그곳을 떠났다.

* * *

파닥파닥.

어두컴컴한 밤하늘을 비행하면서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어떻게 하면 저 뱀파이어 학살자들에게서 성유물을 빼낼까?

'무슨 도둑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고민이 깊어가는 중 나는 저 앞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뭐야?'

딱 봐도 수상쩍은 무리가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밤 이 숲에서 어슬렁거리는 무리는 태양 교단만이 아닌 모양이다.

마침 움직이던 그들이 멈춰서 두런두런 얘기를 하고 있었기에 얼른 접근해 봤다.

'오크잖아?'

십여 명이 넘는 오크 무리가 늑대까지 데리고 밤중에 무슨 일이지? 호기심이 인 나는 근처의 나무에 달라붙어 귀를 기울였다.

"대장, 늑대들이 방향을 헷갈리고 있다."

"어째서?"

"중간에 탈영한 잡것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 같다! 만약 누군가 놈들을 불태우거나 파묻었다면 늑대가 따라잡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쿠엑!"

"그렇다면 그 빌어먹을 새끼들이 뒤진 흔적이라도 찾아야 한다."

가만히 들어보니 이들은 탈영병을 잡으러 온 오크 추격대였다. 정황상 내게 당한 오크 둘을 찾는 것 같았다.

'오크 무리가 꼬맹이의 마을을 습격했고, 이후 그 두 놈이 사고를 치고 탈영한 건가?'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다. 아무튼 비상식량으로 꼬맹이 녀석들을 들고 튄 모양이다. 그러다 잠깐 쉬며 밥 먹다가 내게 걸렸고.

나는 단순히 이 사태를 무시할 수 없다는 판단이 섰다. 왜냐하면 오크 탈영병의 무구나 장비를 사냥꾼의 오두막으로 옮겨뒀기 때문이다.

늑대가 냄새를 따라 결국 오두막까지 올지도 모른다.

'성직자만 해도 문제인데 이제 오크까지. 뭔가 마라도 낀 건가···.'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그러던 중 한 가지 생각이 퍼뜩 들었다.

'잠깐? 지금 상황 말이야. 이용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성직자와 오크가 서로 만나면 차 한 잔 하면서 담소를 나눌 리가 없다. 들고 있는 무기를 상대의 머리에 휘두르고 보겠지.

'어부지리를 노릴 수 있겠는데? 좋아.'

결정을 내린 나는 저 오크 놈들을 만나기로 했다.

* * *

오크 추격대는 총 14명이었고, 훈고르라 불리는 유능한 오크가 이끌었다. 훈고르는 다른 오크들 보다 머리 하나는 컸고, 무시무시할 정도의 근육질이었다.

오크의 세계에선 힘이 지도자의 자격인데, 훈고르는 그 점에 있어 부족함이 없었다.

오히려 훈고르 같은 강력한 전사가 이런 추격대 하나를 맡고 있는 게 의외일 정도. 좀 더 단련하면 한 부족의 족장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거물이었다.

그렇기에 휘하의 오크들도 반항적인 성격의 정예병들이었지만, 그에게는 고분고분하게 굴었다.

잠시 멈춰서 늑대를 다루는 부하들과 상황을 논의한 훈고르는 다시 추격대를 출발시키려 했다.

갑자기 일대에 검은 연기와 함께 흉험한 존재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말이다.

휘이이이잉.

밤의 숲 안에서 돌풍이 일더니 창백한 얼굴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에 놀란 오크들은 저마다 무기를 꼬나들었다.

남자는 혼자였으나 훈고르를 포함한 모두는 그를 우습게보지 않았다. 다들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뱀파이어라는 걸.

보자마자 소름이 쭈뼛 돋는 게 살아서 숨 쉬는 존재가 아닌 게 확실했다. 훈고르는 상대에게 침착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 뱀파이어?"

비록 상대가 뱀파이어긴 하지만 훈고르는 겁먹지 않았다. 자신의 힘이면 어지간한 뱀파이어는 찢어발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어진 대답에 그는 상황을 재고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몸은 어둠의 숲의 주인인 블라르 다르코 백작이다. 말투를 조심하라. 천한 오크 놈아."

언짢음이 담긴 그 말에 매사 대범한 훈고르와 그의 전사들은 동요하는 기색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블라르 백작은 이 '어둠의 숲'의 지배자이기 때문이다. 뱀파이어 중에 잘 알려진 거물로 오크 족장들 역시 존중으로 대하는 자였다.

하니 일개 추격대의 대장이 무례하게 굴 수는 없는 일이다. 일단 훈고르는 말투를 고쳤다.

"음, 혹여나 불쾌한 점이 있다면 사과하겠소. 하지만 당신이 어찌 백작이라 믿겠소이까?"

훈고르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눈앞의 사내가 블라르 백작일지도 모른다고 반쯤 믿는 상태였다.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저 정도 위엄을 가진 자가 백작이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그도 몇몇 뱀파이어를 만난 적은 있었지만, 눈앞의 존재 같은 이는 없었다. 키가 크고 잘생긴 얼굴은 카리스마가 가득했다.

상당히 젊어 보이는 게 다소 걸리긴 했지만, 상대가 뱀파이어니 노소로 정체를 구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몸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 이 비루한 것아."

뱀파이어의 얼굴에 짜증이 잔뜩 피어올랐다. 훈고르는 블라르 백작의 지랄 같은 성격에 대한 소문을 떠올렸다.

"당신을 무시하려는 건 아니오. 하지만 다짜고짜 찾아와 백작이라 하면 누가 순순히 받아들이겠소?"

"흥, 좋다. 증명하지 못할 것도 없지."

남자가 워낙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기에 훈고르는 괜히 뻗댄 건가 싶은 후회가 일어났다.

* * *

나는 오크들에게 갑자기 들이닥쳐 블라르 백작이라 우겼다. 녀석들이 블라르 백작의 명성에 주춤하는 게 재밌었다.

'역시 백작의 이름을 팔길 잘했다.'

무명의 뱀파이어로 다가가 봐야 설득하기도 힘들다. 가능하다 해도 오래 걸릴 테고.

'오늘밤은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특히 뱀파이어는 늘 시간제한에 시달리게 된다. 아무리 더 활동하고 싶어도 해가 뜨는 순간 종막이기 때문이다.

인간처럼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계속 활동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유리한 건지 절절히 깨닫게 됐다.

"당신을 무시하려는 건 아니오. 하지만 다짜고짜 찾아와 백작이라 하면 누가 순순히 받아들이겠소?"

오크 추격대의 대장 놈이 의문을 제기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당연히 대책도 있었다. 나는 이 세계와 블라르 백작 같은 네임드 캐릭터에 관해 다양한 지식을 가졌다. 그럴 듯한 이야기를 지어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네놈, 정말 멍청하군."

잔뜩 깔보는 듯한 태도에 상대가 인상을 찌푸리며 발끈했다.

"말을 조심하시오. 백작."

뿐만 아니라 정찰대의 다른 오크들까지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그들은 대장이 나서는 동안 입을 열지 않았지만, 명령만 떨어지면 언제든 날 공격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내심 그 모습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정예로군. 무질서하고 난장판인 보통 오크랑 달라.'

아마 이들을 이렇게 바꾼 건 저 오크 대장의 솜씨겠지. 그래서 문뜩 궁금증이 들었다.

"네놈의 이름은 뭐지? 눈빛이 제법이구나."

"훈고르라 하오."

뭐, 훈고르라고?

그건 미래에 오크 대족장의 이름인데? 지금 시점에선 작은 무리의 대장을 하고 있었던 건가?

오크 얼굴을 구별하기 어려워서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솔직히 오크는 흉악하게 생긴 게 다 거기서 거기라, 갑옷의 형태나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장식으로 구분하곤 했으니까.

'거물이었구만. 어쩐지 비범하더라.'

놀라움이 일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외적으로는 내가 알고 있는 블라르 백작을 철저히 따라야 했기 때문이다. 몹시 거만하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상대를 버러지처럼 내려다봤다.

"그래, 훈고르. 질문을 던지기 전에 한 가지 알아두도록. 너희 비천한 오크 놈들이 지금처럼 숲에 들어올 수 있는 건, 이 몸과 너희 대족장이 맺은 협정 때문임을 모르더냐?"

원래 이 숲에는 오크가 들어오지 못한다. 하지만 모종의 협정이 성립해, 블라르 백작의 묵인 하에 오크가 출몰하게 된다.

사실 이건 게임적인 장치긴 했다. 어둠의 숲이 워낙 통제되고 있어서 막 시작한 초보 뱀파이어에게는 사냥감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반에 해치울 수 있는 오크가 유입되도록 그런 협정이 있었다는 설정이다.

다만 이곳은 현실세계니 그런 게임적인 배려가 아니라 블라르 백작과 오크 대족장의 정치적 목적이 따로 있겠지만.

'거기까진 자세히 몰라도 이놈을 구워삶는 데는 문제없지.'

마치 말을 안 들으면 숲에서 쫓아내겠다는 태도를 보이자 훈고르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런 놈을 향해 혀를 찼다.

"쯧쯧! 그리 협정을 맺어 출입의 자유를 줬는데 인간에게 멋대로 휘둘리고 있으니 한심해서 나선 것이다."

"그게 무슨 소리시오? 백작."

"최근 네놈들이 근처의 인간 정착촌을 습격한 일말이다. 다 태양 교단에서 유도한 걸 모르더냐?"

"그게 무슨 소리요?"

이에 대해 나는 성직자 놈들을 염탐하고 알게 된 사실을 들려줬다. 그들이 교세 확장을 위해 머리를 썼고, 이후 오크를 걸리는 대로 사냥해 공을 세우려 한다고.

"현재 숲에는 태양 교단의 성직자와 성기사들이 있다."

명백한 사실이었기에 나는 양심의 가책이라곤 느끼지 않고 술술 말했다. 물론 여기에 사소한 거짓말을 더했다.

"너희가 쫓는 탈영병 역시 그들이 처리했다. 놈들은 숲을 돌아다니며 만나는 오크를 사냥하고 있지."

당연히 이를 듣던 오크들은 분개했다. 훈고르의 표정 역시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감히, 동족을!"

열이 뻗친 그 모습에 나는 속으로 웃어댔다.

'낄낄, 하여간 오크는 재밌어. 지들도 탈영병을 추살하러 왔으면서···.'

죽여도 자신들이 죽여야 한다는 거겠지. 다른 놈들이 자기 종족을 손대는 건 용서할 수 없다는 이런 오크의 심리는 내게 익숙했다.

놈들의 표정을 보니 이미 내가 블라르 백작이란 걸 믿는 것 같았다. 대족장을 운운하고, 이런 정보도 알고 있으니 그리 보일 수밖에.

뭣보다 처음 월드에 진입할 때 받은 옷이 고급스러운 것도 도움이 됐다.

'하긴, 비단옷을 입고 다니는 놈이 많지는 않지.'

나는 이런 분위기를 놓치지 않고 으름장을 놨다.

"너희 놈들이 태양 교단에 휘둘리기나 하고 숲을 더 어지럽게 만드는구나. 무능한 것들! 아무래도 대족장과 맺은 협정을 다시 생각해 봐야겠구나."

자신의 권한을 한참 넘어서는 소리에 훈고르는 난감한 기색이다.

"그런 점은 대족장과 상의하시오.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오?"

그 말에 나는 씩 웃어 보였다.

"가서 쓸모를 증명하라는 거다. 천것들아. 네놈들이 미워하는 태양 교단 놈들이 있는데 이대로 두고 볼 생각은 아니겠지? 설마 성기사에게 겁먹었나?"

이에 훈고르는 격분해서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백작이라고 해도 전사에게 그런 모욕은 그만 두시오. 우리는 당신들과 다르게 태양을 두려워하지 않소이다!"

"호? 자신감이 넘치시는군? 이 몸에게 그딴 식으로 지껄이는 걸 보니."

"그런 의도가 아니오. 당신이 천적인 태양 교단을 상대하기 껄끄러워 우리를 들이밀려는 걸 모르지 않소. 하지만 기꺼이 응해주지! 동족을 건드렸다면 전투를 피할 이유가 없소."

이에 다른 오크들이 사납게 호응해왔다.

"오늘밤 놈들의 대가리를 쪼개자! 좋아하는 태양을 다시는 보지 못하게 하겠다!"

"형제의 복수를 하자!"

"옳다! 도주한 놈들을 처리할 권리는 우리에게 있다!"

이런 태도에 나는 흡족함을 감출 수 없었다.

"좋다. 놈들이 어디서 야영을 하고 있는지 알려주지."

다른 세계로 와서도 싸움 구경이 기대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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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 구경(3)

그런 기대와 별개로 태양 교단과 오크 놈들 중 누가 이기든 알 바 아니었다. 난장판만 벌어지면 나야 만족이다.

'그 틈에 성유물을 탈취해서는 튄다.'

꼬맹이를 데리고 아주 멀리 도망가야지. 태양 교단에서 날 갈아 마시려 할 거고, 오크 놈들도 시간이 지나면 속았다는 걸 알아챌 테니까.

'더군다나 어둠의 숲에서 이곳 주인인 블라르 백작을 사칭했으니···.'

이래저래 여기선 재앙만 남았다. 앞으로 얼씬도 하지 말자. 하지만 성유물이란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도 남을 가치가 있었다.

"자, 백작. 안내하시오."

추격대 리더인 훈고르는 콧김을 내뿜으며 말해왔다.

"좋아. 가자고."

우리는 나란히 달렸고 이런저런 대화를 하게 됐다. 그는 침착한 어조로 내게 경고를 해왔다.

"백작이여. 만약 우리를 곤경에 빠뜨릴 속임수를 준비했다면 후회하게 될 것이오."

깡이 좋은 녀석이었다. 내가 블라르 백작이라 여기면서도 저렇게 말해올 수 있다니. 나는 일부러 비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무식한 놈 같으니라고! 너희 하찮은 것들을 처리하고자 한다면 여기 그냥 다 파묻어 버리면 그만이다. 굳이 이런 수작을 부릴 이유가 어디에 있나?"

훈고르는 모욕을 받자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딱히 반론을 제기하진 않았다. 내 말이 맞다고 여기는 거겠지.

나는 훈고르 놈이 의욕을 내도록 은근히 말했다.

"태양 교단은 네놈들에게 매혹적인 먹이가 아니더냐? 잡아서 오크 전쟁신에게 공양한다면 큰 축복을 받겠지."

"···확실히 그렇소."

내가 알기로 오크들은 전쟁신의 축복을 받으면 더욱 커다란 몸집의 전사가 된다. 당연히 부족 내에서 지위도 올라가고. 나는 그 점을 지적했다.

"좋은 기회니 쓸데없는 의심은 접으란 소리다. 한 번 더 구질구질하게 굴면 그냥 여기서 네놈들을 다 흡혈해 버리겠다."

혀로 입술을 핥으며 그리 말하자 훈고르는 주둥이를 다물어 버렸다. 현명한 태도였다.

나는 태양 교단의 야영지로 향하며 작전을 점검했다. 다행히 오크 놈들은 의욕을 보이고 있었다. 그들은 나 같이 어둠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성기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성기사가 태양의 신에게 가호를 받는다면 이들도 전쟁의 신에게 가호를 받는다. 자기가 믿는 신의 투사란 점에선 차이가 없는 것이다.

"슬슬 도착할 것 같군. 저 앞의 작은 언덕이 보이나? 저길 넘어가면 놈들의 불빛이 보일 것이다."

내 설명에 훈고르가 물었다.

"같이 가지 않는 것이오? 백작?"

"나는 숨어서 기회를 엿볼 것이다. 놈들이 내가 끼어 들 걸 모르는 게 유리하겠지. 아마 적절한 비수가 될 터."

"내키는 대로 하시오. 다만 우리를 방해하지 마시오. 만약 뒤통수를 친다면 대족장이 당신과 맺은 협정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될 거요."

그 말에 나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럴 리가? 이 몸은 오크의 좋은 친구라고."

* * *

훈고르는 곧 저 앞에 있는 모닥불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부하들을 이끌고 가자 가증스러운 태양 교단의 놈들이 이미 전투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시끄럽게 함성을 질러대고, 늑대도 계속 울어댔으니 모르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인간의 사제와 성기사들이 무기를 꼬나든 채 오크를 맞이했다. 무리 중 리더로 보이는 인간이 호통을 치며 앞으로 나섰다.

"오크! 이 저주 받을 짐승들이 기어코 모습을 드러냈구나! 감히 이 땅의 형제들을 도륙했으니 교회가 그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

언뜻 듣기에는 격정이 가득한 말이었으나 교활한 훈고르는 그 기저에 깔려 있는 감정을 알아챘다.

'반색하고 있군.'

분명 저 성직자 우두머리는 자신들의 등장에 기쁨을 애써 억누르는 것 같았다. 그것을 보고 훈고르는 블라르 백작이 말한 게 사실임을 알게 됐다.

'가증스러운 것. 감히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동족을 이용하다니.'

이를 뿌득 가는 동안 그 성직자 놈들은 목청껏 외쳐댔다.

"위대한 태양의 신께서 너희 저주 받은 것들을 심판할 것이다."

당연히 오크는 분노를 터뜨렸고, 훈고르가 대표로 답했다.

"네놈들의 소중한 태양도 지금만큼은 우리 도끼날로부터 지켜주지 못할 거다. 네놈들의 목을 따고 전쟁의 신을 공경하는 법을 가르쳐 주마!"

"불경하구나! 작은 자비조차 베풀 필요가 없는 짐승이로다! 태양의 분노를 느껴보라!"

"크흐흐흐! 우리는 너희의 약한 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모두 머리를 잘라 우리 전능하신 전쟁신께 바치겠다."

"이런! 무도한!"

더 이상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참을 수 없던 양쪽이 격렬하게 충돌했기 때문이다.

콰아앙! 캉!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훈고르는 양손에 도끼 하나씩을 들고는 성난 곰처럼 돌진했다.

태양 교단 놈들은 강했지만 훈고르는 조금도 겁먹지 않았다. 대단한 적을 바칠수록 전쟁신의 축복이 크기 때문이다.

"크하하하하!"

강해질 기회가 왔다는 사실에 그는 크게 웃으며 도끼를 마구 휘둘렀다.

잘 무장한 종복 넷이 그를 막으려 했지만 썰려나가는 건 삽시간이었다. 훈고르의 가공할 힘은 마치 야생의 분노와도 같았다.

결국 보다 못한 성기사 곤 경이 두툼한 방패를 들이밀고서야 간신히 훈고르의 전진을 막아낼 수 있었다.

"태양의 신께서 너희를 벌할 것이다!"

훈고르는 자신의 힘이 버거운 듯 팔이 떨리는 성기사에게 외쳤다.

"닥쳐라! 어디 태양이 너희만의 것이더냐! 그것은 누구라도 따뜻하게 비추는 존재이다!"

비록 훈고르는 자신이 기선을 제압했지만 상대인 수컷 성기사가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아껴둔 능력을 즉각 발동했다.

"위대한 전쟁의 주인이시여! 여기 당신께 제 피를 바치니 적을 찢어발길 힘을 허락하소서!"

훈고르는 도끼날로 팔뚝을 긋자 피가 사방에 튀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전쟁신의 가호가 내려졌다.

가뜩이나 무지막지했던 훈고르의 힘이 더욱 강해지자 성기사 곤 경의 방패는 파편을 튀기며 박살나기 시작했다.

"죽어라! 아무런 의미도 없는 너희 믿음과 함께!"

상대를 몰아붙이며 훈고르는 그 너머를 슬쩍 볼 기회를 얻었다. 그때 뱀파이어인 블라르 백작이 누군가에게 은밀히 접근하고 있는 걸 발견했다.

'암컷 성기사를 노리는 건가?'

저 성기사가 강해보이긴 하지만 아마 블라르 백작이라면 일격에 죽이고도 남으리라.

훈고르는 전투가 유리해지겠단 생각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조용히 접근하던 블라르 백작은 공격이 아니라 도둑질을 시도한 것이다.

암컷 성기사에게 재빠르게 달려들더니, 목에 건 무언가를 억지를 잡아 뜯었다. 그리고 믿었던 블라르 백작이 즉각 내빼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게 정말 삽시간에 벌어졌다.

"뭣!"

놀란 훈고르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대체 왜 위엄 넘치는 블라르 백작이 줄행랑을 놓는다는 말인가?

눈앞에 수컷 성기사를 상대하고 있음에도 뇌 정지가 올 것 같았다. 하지만 훈고르는 오크 중에서도 영리한 녀석이다. 대번에 상황을 파악했다.

'이런! 당했다! 저놈 블라르가 아니었군!'

어이가 없을 정도로 완벽히 속았다. 훈고르는 긴박한 와중에도 헛웃음이 터질 정도였다.

"크하하핫! 이럴 수가!"

애초에 저 사기꾼 뱀파이어의 목표는 저 암컷 성기사가 목에 걸고 있던 물건이 틀림없었다. 혼자 그걸 빼앗을 방법이 없으니 감언이설로 자신들을 속여 싸움을 붙이고 어부지리를 노렸던 것.

이 흉악한 계책에 훈고르는 소름이 다 돋을 정도였다.

'역시 뱀파이어 새끼들은 인성이 제대로 된 놈이 없다!'

어떤 의미로는 참 대단하고 무섭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세 치 혀로 농락하는 게 눈앞에 들이미는 검보다 효과적이었던 것이다.

이건 훈고르에게 독특한 감명을 줬다. 오늘 제대로 속아 넘어가긴 했지만 아무래도 저 뱀파이어를 기억해 둬야 할 것 같았다.

"서라! 사악한 것!"

목에 건 걸 빼앗긴 암컷 성기사가 분통을 터뜨리며 뱀파이어를 쫓아갔다. 주변에 있던 인간들이 당혹성을 터뜨렸다.

"발레나 아가씨! 혼자 가시면 위험합니다!"

"앗! 발레나 아가씨께서 이탈을!"

아무래도 저 암컷 성기사는 중요한 인물인 듯 놈들이 흔들리는 기색을 보였다. 훈고르는 도끼를 들어 올리며 씨익 웃었다.

"아주 쓸모없지는 않았군."

저 뱀파이어 덕에 인간들의 대열이 흐트러진 것이다. 제대로 속아넘어가 벌어진 일이긴 하지만 가증스러운 태양 교단 놈들과의 전투는 언제든 환영이었다.

훈고르는 기왕 이렇게 된 거 최대한 많은 머리를 수확하기로 했다.

* * *

나는 오크와 태양 교단이 대판 붙는 틈을 노렸다. 상대는 발레나라고 불리는 여자 성기사. 마침 그녀는 늑대와 오크를 동시에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지.'

살금살금 접근해서는 여자 성기사의 목에 걸린 성유물을 힘껏 낚아챘다.

팟!

아뮬렛의 목걸이 부분이 끊어지며 금속 파편이 튀었다. 동시에 손바닥을 불로 지지는 듯한 격통에 사로잡혔다.

"으아악!"

성유물이란 뱀파이어에게 쥐약과도 같으니 당연한 일이다. 새빨갛게 달궈진 쇠붙이를 쥐는 것과 같은 짓거리였다. 그렇기에 나는 도망가면서 망토를 끌러 성유물을 감싸서 들었다.

'기본 의상에 망토가 붙어 있어서 천만다행이군.'

역시 뱀파이어하면 망토지. 그런데 망토로 두툼하게 감쌌는데도 성유물의 기운은 화끈하기 그지없었다. 그저 손바닥이 통째로 타들어가지 않는다는 점에 감사해야했다.

나는 성유물을 얻었다는 희열에 사로잡혔지만, 그건 오래 가지 못했다.

"이 도적놈!"

뒤에서 날카로운 포효가 들렸던 것이다. 달리면서 뒤를 돌아보니 눈이 돌아간 여성 성기사가 광인처럼 쫓아오고 있었다.

무표정하기 짝이 없던 여자인데, 성유물을 털리자 완전히 태도가 돌변했다. 실로 악귀와 같은 게 보기만 해도 식겁할 정도였다.

"저, 저! 미친!"

늘씬한 체형의 여자 성기사였지만, 내 입장에선 무슨 황소가 돌진해 오는 것처럼 무서웠다.

손에는 눈을 찌르는 듯한 광채를 빛내고 있는 검을 든 채다. 당장이라도 날 오체분시할 기세였다.

그녀는 싸움터에서 이탈해서 혼자가 됐지만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다. 오로지 날 잡으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 찬 거 같다.

"이 흉악한 것! 그게 무엇인지 알고 가져간 것이냐!"

정확히 뭔지 모르지만 타락한 성유물을 만드는 데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힘이 넘치는지 여자 성기사는 무슨 심해의 발광생물처럼 온몸으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뱀파이어 입장에서 보면 간 떨어질 만한 광경이다.

박쥐로 변해서 날아가 버리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성유물을 옮기지 못해서 안 된다. 성유물은 함께 변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발로 뛰어서 따돌릴 수밖에.

'그나저나 이거 어떤 물건이지?'

달리는 와중에도 성유물에 대한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처음 볼 때는 거리가 있어서 자세히 관찰 못 했다. 방금 전에는 급히 낚아채느라 마찬가지였고.

나는 달리면서 망토를 까서 성유물을 급히 살펴봤다. 왜 저 여자 성기사가 오크랑 싸우는 동료도 버리고 쫓아오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중요한 성유물이면 알아볼 수 있을 거다.'

공략쟁이답게 게임 속 성유물도 어지간한 건 다 파악하고 있었다. 분명 알아볼 수 있을 터. 한데 이건 이리 봐도 저리 봐도 모르겠다.

부우웅!

그때 뒤에서 엄청난 충격파가 날아왔다. 분노한 성기사가 무슨 검기를 쏘는 것처럼 원거리 공격을 날린 것.

콰앙!

공격이 지면을 강타하자 나는 옆에서 포탄이 터진 것처럼 튕겨 나갔다.

"크윽! 미친 성기사가···."

온몸이 바스러지는 것 같았다. 뱀파이어도 아픈 건 똑같구나. 다만 내구력이 남달랐기에 바로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봤다. 저 앞에 떨어뜨린 성유물이 구르고 있었다.

재빨리 망토를 주워 성유물을 감싸다가 놀라운 걸 발견했다. 방금 충격으로 성유물을 둘러싼 금제 장식의 상당 부분이 떨어져 나갔던 것이다.

덕분에 안쪽에 수정으로 된 부분이 훤히 드러났다. 그런데 그 수정 안에는 가느다란 새끼손가락 한 개가 들어 있었다.

'성인의 신체인가?'

현대인의 감각으론 영 비위가 상하긴 하지만, 이 종교 변태들에게 성인의 신체를 지니는 건 대단한 영광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넘어가려 했는데, 손가락에 반지처럼 새겨진 정교한 문신을 보고 놀라서 멈춰버렸다. 저 문신이 뭔지 대번에 알아챘기 때문이다.

'분명 태양 교단의 최고위층만 가능한 신성 문신인데?'

동시에 중요한 사실이 한 가지 떠올랐다. 내가 섬기는 뱀파이어 성녀는 왼손의 새끼손가락이 없다는 것.

인간이던 시절에 박해를 받다가 이단심문관에게 잘려나갔다고 한다.

"맙소사··· 이거?"

놀란 나는 도망가는 것도 잊고 성유물을 멍하니 쳐다봤다. 설마하니 진짜 이게 뱀파이어 성녀의 손가락이란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이걸로 피의 제단을 완성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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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인 네크로맨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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