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루비아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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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당하게 걸어. 턱 당기고.
- 앗. 네! 네!
영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걷는 모습하나하나가 중요하다.
성 밖에서 살해당한 커크 자작
패거리의 모습에 압도당했다고 해도, 루비아의 뒤를 따라 걷는 이들은 모두 실시간으로 그녀를 평가 중일 확률이 높았다.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는 건 그녀의 몫이다.
안전하게 지켜 주는 건 내 몫이다.
대들보 위를 걸어 루비아를 계속따라가며 주위를 살폈다.
그녀를 가로막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아가씨.!"
성안에는 부끄러움도 잊고 엉엉울면서 반가워하는 자들이 많았다.
대부분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루비아 역시 성안의 사람들 하나하나와 상냥하게 인사를 나누며 눈가를 촉촉하게 적셨다.
'위협은 없군.'
구석구석 세심히 살폈다.
현재 성안에 있는 자들 가운데
루비아를 적대하는 인물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걸. 인덕이라고 하나.'
새삼 루비아가 달라 보였다.
= 위협은 없군. 성은 안전하다.
- 감사해요. 전부 덕분이에요. 음.
그런데. 이제 뭘 해야 하죠?
루비아는 긴장한 듯 입술을 꼭
깨물었다.
= 일단 회의라도 여는 게 어떨까.
이럴 때는 공식적인 자리가 필요하다.
에라스트에서, 그녀의 지위를 모두에게 확고히 각인시킬 자리가 필요할것 같았다.
- 그래야겠네요!
루비아가 꿀꺽 침을 삼켰다.
"한 시간 뒤 대회의실에서 모이 겠습니다. 각자 분야별 안건 준비
"알겠습니다."
"곧 뵙겠습니다!"
감옥에 있던 자들이 눈빛을 빛내며 빠르게 흩어졌다.
- 이렇게. 하면 되겠죠?
= 잘했어.
- 헤햇.
모두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 서 있던 시녀가 들어왔다.
"아, 아가씨. 목욕 준비가.
'상태가 안 좋군.' 붉은 기가 도는 머리칼을 가진, 시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얼굴 여기저기 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한눈에 봐도 주먹에 맞아서 생긴 상처 같았다.
드러난 팔다리에도 긁히고 맞은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어휴.
루비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조용히 시녀에게 걸어가 그녀를 꼭 껴안았다.
전 영주가 어떻게 다른 인간들을 취급했는지 그녀를 보면 명백했다.
놀랄 일은 아니다. 레이 커크는 네크론 소속이다.
"흑흑. 아가씨.
루비아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시녀의 등을 가만히 토닥였다.
'저런 모습이었나.' 목욕을 마치고 나온 루비아.
흙탕물과 피를 모두 닦고 깨끗한 옷을 걸친 그녀는 조금 전과 전혀다른 느낌이었다.
물기가 촉촉한 머리칼이 하얗고 깨끗한 피부 아래로 흐트러졌다.
치장 같은 건 하지 않은 맨 얼굴이었는데도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저 하얀 피부에 새빨간 손자국과 시퍼런 멍 자국이 생겨났던 과거를 떠올리니 괴로워졌다.
이번에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한다.
'어떻게 해서라서도.'
"후우."
대회의실로 걸어가면서 루비아가 길게 심호흡을 했다. 목덜미의 곡선이 부드럽게 움직인다.
-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도와 주실 거죠?
= 내 능력 내라면.
간단한 의견 정도는 말해 줄 수있다. 몇 번이고 삶을 겪으며 이래저래 스킬도 흡수했다. 에라스트통치에 별다른 도움은 안 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 그럼. 안심이네요!
뭐라 덧붙이기도 전에 루비아는 멋대로 안심해 버린다.
그녀의 신뢰에 미안해진다.
몇 번이고 눈앞에서 죽는 걸 보고 나서야 지금에 이르렸으니까.
에라스트 성은 두 번째.
처음은 레나와 함께 토너먼트 참가자로서 왔지만, 지금은 루비아를 영주로 만들기 위해 찾아왔다.
함께 방문한 인간이 달라서인지 성을 걷는 기분은 꽤나 색다르다.
대회의실까지는 금방이 었다.
루비아가 다가오자 먼저 와 있던 자들이 자리에서 일제히 일어났다.
자리는 이미 꽉 차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영주님."
감옥에 갇혀 있던 노인이 좌중을 대표하듯 말했다.
넝마를 입고 수염도 깎지 못한 채 감옥에 갇혀 있던 때와 달리, 검은 의상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노인은 말쑥하고 힘이 넘쳐 보였다.
모두의 시선이 루비아를 향했다.
- 어떡하죠? 이렇게 다들 갑자기 저한테 영주라고 해 버리면.
긴장한 건가. 빠르게 뛰는 그녀의 심장박동이 느껴진다. 가느다란 손끝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 당황하지 마. 침착해라. 전부 다예상하고 있던 거 아니었나?
- 이야기가 나올 줄은 알았는데, 이건 좀 갑작스러워서.
= 네가 모두를 구했으니까.
나는 반투명한 시나리오 창을 다시 불러온다.
[루비아를 에라스트 영주로 등극시키십시오!]
[통치 레벨을 10까지 올리세요!]
'이번에는 꽤 수월한가.
영주로 인정받았다면, 통치 레벨정도는 쉽게 올릴 수 있지 않을까?
레나의 경우 지부장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몇 번이나 사망을 맞아야만했다.
'S급 시나리오가 훨씬 더 어려운 것이어야 할 텐데.
물론, 내가 그만큼 강해졌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루비아가 말을 걸어온다.
- 제가 아니라. 해골님이. 구하셨는데.
= 그게 곧 네가 한 거지.
- 그게 무슨 말씀이신.
= 다들 너만 보고 있어. 저들에게 물어봐. 네가 아니면 누가 영주를 하겠는지.
_ 으음.!
루비아는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진흥색 활동복 뒤쪽 주름골사이를 남몰래 꾹 말아 쥐었다.
망설일 건 없다. 루비아도 알고 있을거다. 하지만 언제나 마음의 준비라는건 필요한 법이다.
= 시작해.
그럴 때는, 뒤에서 살짝만 떠밀어주면 된다. 루비아가 입을 열었다.
"일리아르 총관님, 제가 영주 위를 차지하는 데 문제는 없나요?"
긴장했으면서도, 나오는 목소리는 떨리지 않고 당당하다.
총관 일리아르라고 불린 노인이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영주님. 이 유언장을 확인해 보십시오."
- 찌익!
총관이 밀랍으로 봉인된 봉투 끝부분을 찢었다.
'저건.
안에서 나온 종이를 펼쳐 모두의 앞에 보여 주었다.
레이 루비아를, 에라스트의 적법한 후계자로 지정한다는 내용이 분명하게 적혀 있는 종이가 모두의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틀림없는 선대 영주님의 사안좌중이 술렁거렸다.
- 아*??.! 아버지가 유언장을 썼다고 말씀하긴 하셨는데. 설마.!
= 표정 관리. 표정 관리.
- 네.!
루비아는 좌중을 돌아보며 표정만큼은 꽤 담대하게 입을 열었다.
"커크에게 빼앗겼을 거라 생각했는데.
보관하셨군요."
물론 옷 아래에서 뛰는 맥박까지 숨길 수는 없다.
굳이 탐지를 켜지 않더라도, 그정도는 생생하게 느껴진다.
총관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거 아닙니까?
받았을 때부터 저만 아는 곳에 잘숨겨 뒀지요. 이게 없어도 어차피정당성은 영주님께 있었지만.
"맞습니다. 정당하게 임명된 전 영주의 직계이시니까요. 황실의 예규이 니만큼따로 허가를 받으실 필요조차 없는 사안입니다."
"문제는.
노인이 말을 이었다.
"영주님이 황실 눈 밖에 나서 살해당했다는 소문입니다."
소문이라기보다는 사실.
분위기로 보아 다른 참석자들도 그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다.
"그것 때문입니다. 많은 놈들이커크를 적극 막아서지 않은 게. 어휴, 한심한 것들."
= 황실의 지침에 거스를 생각은 없다고 말해.
- 앗. 그래야 하나요?
= 거스르면 곤란해. 천천히 설명해주도록 하지.
루비아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에 거스를 생각은 없어요."
회의실에 모인 중역들의 표정이 일제히 밝아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이제 루비아가 부친의 죽음에 유감을 품고, 황실에 반기를 들면 함께 죽어야 하는 입장이다.
"그러시다면! 그러시다면 저희가 무슨 걱정을 하겠습니까마는.
"그럼. 시작하게나."
- 스르륵.
바짝 마른, 외눈 안경을 쓴 중년여인이 종이를 넘기며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보고드리겠습니다. 현재 영지 상황입니다."
감옥에는 없던 여인이었다. 무척행색이 수척하고, 눈 아래가 움푹패여 있었다.
- 네 삼촌에게 협조했던 자인가?
= 그래도 탓할 수는 없어요.
루비아가 말을 이었다.
- 저분이 아니면 영지가 전혀 돌아가지 않거든요. 창고에 쌓인 농작물도 관리를 못 해서 다 썩어 들어갔을 거예요.
= 잘 아는군.
-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루비아의 얼굴에 약한 흥조가 떠올랐다. 눈 아래 짙게 그림자를 드리운여인이 루비아를 바라봤다.
"영주님?"
"어이쿠, 영주님! 이 친구가 어떤 친구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한 번봐주십시오."
총관 노인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루비아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오해가 있던 것 같았다.
"흐음! 아니에요. 말씀하세요, 세무관님."
세무관이라고 불린 여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에라스트 백작령. 총 721가구가 거주하며, 인구는 3, 841명입니다.
오늘부로 30명 줄어들었습니다."
내가 줄인 숫자다. 여자가 짧게 덧붙였다.
"생산 인구는 아닙니다."
"없어지는 게 훨씬 나은 쓰레기들이지요! 어. 영주님께서 그것들을 어떻게 없애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누군가 슬쩍 루비아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어쩌면, 그들에게 루비아는 손가락 한 번 대면 즉시 터트릴 수 있는 마법사가 되어서 왔다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 어떻게 없앴는지 말할까요?
= 농담도.
- 농담. 아닌데. 소개하면 안되는 거예요?
= 싫다.
나는 딱 잘라 거절했다. 루비아에게 그런 말도 안 되는 리스크를 지울생각은 전혀 없었다. 나는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 모노클의 세무관이 말을 이었다.
"경비대 숫자는 151명입니다."
아까 못 본 자들은 교대로 휴식을 취했거나, 아니면 다른 먼 곳에 있었던 것 같다.
루비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나 많아요? 원래는 100명이 안 되지 않았나요."
"영주가 바뀌면서, 젊은 농민들상당수를 병사로 징발했습니다."
- 어떻게 하죠?
= 마음대로.
- 그러면.
내가 지켜 주는 이상 숫자 따위는 별 의미가 없다. 나 혼자서도 평범한 인간은 백 명이든 이백 명이든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다.
"억지로 잡아 온 사람들은 다 풀어주세요. 원하는 사람만 남기세요.
징병되어 있었던 기간 동안 입은.
생업의 손해도 물어 주시고요."
세무관이 손에 든 하얀 종이와
루비아를 번갈아 응시하며 고뇌에 찬 표정을 짓는다.
"영주님."
"말씀하세요."
"다음은. 치수 문제입니다."
"아버지께서 특히 신경 쓰셨던 사업이네요. 현안은 뭔가요?"
"치수에 사용할 자재를 전 영주가 모두 매각했습니다."
"왜죠?"
"다른 이유는 아닙니다. 유흥비로 사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세무관의 말을 들은 중역들은 황당함에 할 말을 잃었다.
모두 감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실시간으로 레이 커크가 벌여 놓은 짓들을 알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곧 겨울 흥수철입니다. 임시로 상단에 자재 구매 요청은 해 놓았습니다. 하지만 현재 남은 예산은 간신히 이 자재들을 구매할 정도뿐입니다."
≪으. rt
문제는 돈이다.
결국 억지로 징병된 농민들에게 제대로 된 보상을 해 주는 일은 어렵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루비아에게 돈 걱정 따위를 끼칠생각은 전혀 없다.
= 돈은 많다고 해라.
- .네?
드디어 돈이 필요할 때가 왔다.
'여태 제대로 써 보기도 전에 죽어버렸지.'
유블람 근처에 묻혀 있는 은괴들을 유효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뿌듯해지는 기분마저 든다.
은괴를 묻어 놓은 인간들은, 어차피나에게 다 살해당할 테니 별로 돈쓸 일은 없을 것이다.
= 돈 걱정은 하지 말라고 해.
- .정말요?
= 그래. 돈 많거든.
굳이 회계 스킬이 없더라도 쉽게 계산이 가능하다.
묻혀 있던 은괴들을 다 파낸다면 최소한 에라스트 5년 예산 정도는 가뿐히 뛰어넘는다.
182화 루비아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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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바로 어젯밤에 무덤에서 일어나신 거 아닌가요?
= 그래서?
- 그런데 어떻게 돈이! 무덤에는 안 보였는걸요.
= 다 숨겨 놓은 데가 있지.
- 설마. 전생의 기억 같은 걸
가지고 계신 거예요? 대부호? 아니면 고향으로 돌아온 해적왕? 이제 우리는 숨겨 둔 보물을 찾아 여행하는 건가요?
모험 책은 대부분 몇 번씩 읽었거든요.
잘할 자신 있어요!
들떠 있는 게 느껴진다.
= 그 정도는 아니고. 너 하나 평생먹여 살릴 돈은 충분히 있어.
- 저 많이 먹는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언제 한 번쯤은, 루비아의 말대로 모험이라도 떠나면 좋을지도 모른다.
물론.
어디서도 그녀를 지켜 줄 수 있을 만큼 강해진 후여야 하겠지만.
= 많이 먹어 보든지. 어쨌거나 돈걱정은 하지 말고 일이나 제대로 하라고 해.
유블람의 은괴만 계산하더라도 도시하나 일으킬 정도는 충분하다. 거기서 돈이 더 필요하다면, 기스-제-라이의 황제 암살을 방관하고 금괴라도 챙겨오면 된다.
'물론. 그건 위험한 선택이지만.'
"음. 돈 걱정은 하지 마시고요."
루비아는 결국 내가 말한 그대로 세무관에게 전달했다.
세무관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루비아를 바라봤다.
"돈 걱정이 제 임무입니다만. 진심이십니까?"
= 진심이라고 해.
"진심이에요. 흠흠!"
"알겠습니다. 예산편성 후 다시 보고 올리겠습니다."
한참 더 세무관의 보고가 이어진다.
당연한 이야기인지도 모르지만, 보고를 들어 보면 나보다도 회계 스킬이 훨씬높은 인간인 듯하다.
하지만 루비아에게 도움이 되는 인간을 죽여서 정수를 흡수할 생각은 전혀 없다.
'흡수되지도 않겠지.'
지금까지 경험한 바가 있다.
전반적인 능력치가 나보다 크게 떨어진다면, 특정한 스킬을 갖고 있더라도 나에게 흡수되지 않는다.
비슷하거나 약간 더 뛰어난 능력정도면 흡수 효율이 좋지 않다.
나보다 훨씬 더 강한 자들을 흡수할때에야, 비로소 체감될 정도로 많은 것들을 얻어 낼 수 있다.
'강해질수록. 한계에 부딪히게 되는 스킬이군.'
물론 불만을 가질 생각은 조금도 없다. 오로지 이 스킬 덕분에 이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
가만히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에 세무관의 보고가 끝났다. 다음은 건조하고 단단하게 생긴 치안관의 차례였다.
얼굴에 고문 흔적이 남아 있는, 이빨몇 개가 빠져 있는 치안관이 입을 열었다.
"다음 보고드릴 사항은 잡아 온.
여자들에 관한 겁니다. 도시 바깥에서 잡아 온 자들입니다."
= 루비아.
- ^1?
'그 아이도 있으려나.'
익숙한 얼굴이 있을지도 모른다.
가명으로 토너먼트에 참가한 뒤, 영주가 나에게 데려다줬던 어린 인간여자가 떠오른다. 무신경한 내 반응에 오들오들 떨던 아이다.
레나가 아이의 옷을 벗겨서 내게 등을 보여 줬을 때, 채찍질로 살이 찢어진 자국이 가득했다.
'레나가. 잘 처리해 줬지.'
회귀 전과 회귀 후가 그대로 이어졌는지, 세계선의 변동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직접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도 든다.
하지만 단념하기로 했다.
그런 것까지 신경 쓰기에는, 우선다른 할 일이 많다.
= 신경 쓰지 마라. 아무것도 아니야.
- 아. 예! 알겠어요. 혹시 말씀하실거 있으면 언제든 해 주세요.
= 그래.
치안관이 조심스러운 얼굴로 루비아를 바라보며 묻는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후우."
루비아가 한숨을 쉬었다.
"일단 치료하고. 쉬게 하세요.
그분들은 제가 면담하면서 조금이라도 보상해 줄 수 있는 게 있는지 알아볼게요."
"다음은.
"이거. 에라스트가 완전히 망해버릴 뻔했네요."
루비아가 중얼거렸다.
그녀를 살해하려고 한 남자, 커크자작은 도시를 착취하는 것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이렇게 운영하다간 삼 년은 고사하고 일 년 안에 도시가 엉망이 되어 버렸을 거다.
내가 토너먼트 때문에 방문했던 그때가, 어쩌면 앞뒤 안 가리는 흥청망청의 절정이었는지 모른다.
물론 힘껏 일해 봐야 이들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커다란 두 개의 재난이 닥쳐오기는 한다.
첫 번째는 전쟁.
하지만 자유 연합과의 전쟁은 어떻게 이겨 낸다고 하더라도.
두 번째는 마왕 강림이다.
그건 절대로 에라스트 따위에서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이다.
이런 작은 소도시 따위는 마왕의 발자국 한 번에 짓밟혀 멸망한다.
루비아 한 명만 데리고 도망치는 정도는 어떻게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힘겹게 가꿔 온 도시가
파괴되는 모습을 보고, 루비아가 받을 충격을 생각하니 씁쓸해졌다.
지나치게 딴생각에 빠져 있던 탓일까.
묘하게 변해 있는 분위기를 뒤늦게야 알아차렸다.
"영주님.
회의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뭐지?' 다들 온몸이 피곤에 절어 있으면서도, 루비아를 향해 감동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만족스러웠던 건가.'
루비아와 그들이 정무 회의를 하는건 당연히 처음일 터.
그녀가 잘해 낼 수 있을지 중역들입장에서는 걱정이 많았을 게 분명하다.
아무래도 루비아가 그들의 걱정을 불식시키고, 기대보다 훨씬 더 잘해준 것 같다.
전 영주인 레이 커크가 지나치게 쓰레기인 탓도 있겠지만.
루비아는 훌륭했다.
회의 중간에 이것저것 끼어들어실시간으로 조언해 주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아니더라도, 그녀는 사실 준비된 영주였다.
에라스트에 대한 분석이 예상보다훨씬 더 꼼꼼하고 철저했다.
무덤가에서 본 어리바리한 모습은 어디 버리고 왔는지 몰라볼 정도.
'재능인가.
감격한 중역들의 기분.
충분히 이해한다.
- 쿵!
총관 노인이 큰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제일 감격했군.
심장 안에서 피가 요동친다는 표정으로 그가 입을 열었다. 자연스럽게 한쪽 무릎은 꿇은 채였다.
"회의를 진행하면서. 돌아가신 선대백작님을 뵙는 것 같았습니다. 다시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총관 일리아르, 영주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사전에 약속이 되어 있었던 걸까.
다들 가슴에 주먹을 대고, 한쪽무릎을 꿇은 채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받아 줘. 충성 서약이다. 얼른.
- 네.!
루비아를 독촉했다. 그녀가 있어야 할 자리는 여기다.
벌레 같은 인간들에게 능욕당하고 살해당한 채, 아무렇게나 버려져서 썩어 가는 것 따위가 아니다.
제자리를 찾은 루비아의 모습이 뿌듯했다.
"다들 일어나세요. 앞으로 좋은 영주가 되도록 노력하지요. 어려운 시기니까 많이 도와주세요."
- 도와주실. 거죠?
= 나 없어도 되겠는데. 굳이 깨울필요도 없었던 거 아닌가?
- 그, 그런 농담은 심해요.! 정말 꿈같은 하루였어요. 정말 꿈 아닌거 맞죠?
루비아가 허공을 흘끗 바라보며 물었다. 묘하게 울 것 같은 표정을하고 입술을 꾹 다물고 있다.
?"아마도.
그때 였다.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루비아의 머리 위쪽에 반투명한 상태창이 떠오른 건.
[루비아의 호감도가 2 올랐습니다!]
[통치 레벨이 생성되었습니다.]
[현재 통치 도시 - 에라스트]
[통치 Lv.1]
[통치 레벨은 영지의 발전과 주위사람들의 신망에 따라 결정됩니다.
레벨이 올라갈 경우 다양한 효과가 부여됩니다.]
'시작인가.' 루비아의 에라스트 영주 생활은 오늘부터 다.
그녀는 옳은 일만 하고, 선정만 베풀게 해 주면 된다. 밝은 곳만을 걸어가게 할 생각이다.
지저분한 일들은 굳이 그녀에게 알릴것도 없다.
전부 다 내가 처리한다.
얼마 뒤 충성 맹세를 한 중역들이 물러났다.
총관 노인이 믿을 수 있다고 한 호위병들만 남아 그녀의 방 앞을 지켰다. 성안에 위협이 없다는 건 확인했다. 잠시 자리를 떠나도 괜찮을것 같다.
= 그럼 쉬라고.
- 어디. 가시는 거예요?
= 산책.
_ 아?? 오늘 밤은 죽하 파티를 하려고 했는데.
아쉬운 기색이 완연하다.
= 축하 파티? 다들 물리지 않았나.
- 둘이서. 하려고 했죠!
둘이서 무슨 축하 파티를 하려고 했는지는 몰라도, 말을 꺼내는 루비아의 심장이 두근거린다.
'호감도 때문인가.'
그녀와 함께한 세월 덕분이기는 하지만, 특전으로 얻은 호감도다.
어찐지 그녀를 기만하는 것 같아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 금방 돌아온다.
레이 커크를 심문한다.
조금 지저분해질 수는 있지만, 사실처리하는 데 크게 오래 걸릴 일은 아니다.
- ??? 네. 안 자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꼭 오셔야 해요!
나는 그녀를 놓아둔 채, 복도의 그림자에 몸을 숨기며 성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 철컥.
적당히 챙긴 갑옷이 몸에 잘 맞지 않는다.
너무 큰 걸 챙겼는지도 모른다.
'루비아가 사 줬던 게 훨씬 낫군.'
맞춤형 제작도 아닌데, 놀랍게도 루비아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딱맞는 갑옷을 내게 사 주려 했었다.
눈썰미가 보통은 아니다.
레이 커크를 심문한 뒤 한 벌쯤그녀에게 갑옷을 부탁하고 싶다.
'오늘 해 준 일이. 갑옷 한 벌 값은 되겠지.'
바깥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춥고 어두웠다. 칼바람이 불고 홍수의 흔적은 꽝꽝 얼어붙어 있었다. 이런날씨에 루비아가 따듯한 곳에 있는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감옥까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야, 밖에 또 나왔어? 한 시간은 더 안에 들어가 있어야 되는 거아니야? 밖에 춥다."
"어휴! 추운 게 낫지. 저 미친놈안에서 끙끙거리는 소리를 나보고 어떻게 들으라는 거야. 완전히 맛이가 버렸는데."
감옥 앞에서 간수들이 수다를 떨었다.
누구 이야기인지는 명백하다.
- 픽!
바깥에 서 있는 간수들의 뒷목을 툭 건드렸다. 그들 모두를 간단히 기절시키고 안으로 들어선다.
- 끼이이익
"으어어어. 으어어.
과연 간수들의 말대로 안쪽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온다.
죄수는 단 한 명이다.
나머지는 전부 죽였으니까.
레이 커크는 팔다리가 묶인 채 감옥안에 쓰러져 있었다.
포승보다도 공포와 불신이 그를 더욱강하게 묶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스르륵 열리는 문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저를.! 저를 구해 주러 오신겁니까.! 풀어. 풀어 주십시오!"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지?' 이런 식이라면 대화가 생각보다 훨씬쉽게 이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굳이 고문할 필요조차 없다.
그의 끙끙거리는 외침 외에 감옥안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이야기를 듣기 좋은 환경이다.
'뭐부터 물어볼까.
목에 작게 그려진 지렁이가 신경쓰인다. 네크론에 관한 걸 물으면 언제든 눈멀고 시커먼 독사가 되어 레이 커크의 목을 물어뜯으리라.
오싹한 일이다.
네크론에 대한 정보를 누설하면 죽는다. 하지만 그 사실조차 회원들은 모르는 것 같았다.
'입 무거운 놈들을 자체적으로 골라가겠다는 건가.
대신 다른 걸 들을 게 많다.
"뭘 좀 물어보지. 네크론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필요 없다."
"아. 예! 예! 알겠습니다!"
"네가 어떻게 영주가 됐더라?"
"다, 다 아시지 않습니까. 저도! 저도 제가 영주가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라.
"아니라?"
"저에게 시키시지 않으셨습니까!
형을 죽였으니 영주가 되라고.!
다시 저를 살려 주십시오!"
'누가 시켰다는 거지?' 녀석은 특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떠오르는 건 하나다.
'황실이겠지.
"그래, 우리가 누군지 잘 알지?"
"예! 당연히.
그때 였다.
- 스숫!
단단하게 다져진 돌을 뚫고 바닥에서 날카로운 창날이 솟아올랐다.
183화 루비아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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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윽!"
창날은 영주의 가랑이를 꿰뚫고 내장을 관통했다.
- 파삭!
그리고 얇은 종이를 찢는 것처럼 두개골을 깨뜨렸다.
단단한 천장에 박힌 창이 바르르떨렸다. 영주는 숨 한 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죽었다.
창날이 관통한 충격인지 흐물흐물거리는 그의 안구가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더러운 피와 뇌수가 사방으로 작게 폭발을 일으켰다.
제대로 뱉어지지도 못한 비명 소리가 핏줄기와 함께 입 밖으로 울컥 새어나왔다.
- 스숫!
영주를 꿰뚫고 천장까지 박혔던 긴창날이 다시 땅으로 들어갔다.
꼬치처럼 들려 올라갔던 커크의 몸이 바닥에 떨어졌다.
너무도 짧은 순간에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다. 공격이 들어온방향도 기괴했다.
'땅 아래에서.!'
서큐버스님의 서재에서 읽은 지식이 떠올랐다.
바트라(지행술).
지하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바로 그술법임에 분명하다.
아예 땅 아래로 숨어 이동한다.
탁월한 은밀성은 말할 것도 없다.
정상급의 암살자와 도둑들 가운데 이 술법을 익히고 있는 자들이 있다고 읽은 바 있다.
'숙련도가 올라가면. 땅 위보다아래에서 더 빠르게 움직일 수도 있다던데.
희귀한 술법이다.
마왕군을 따라다니면서도 한 번도 이런 걸 쓰는 자들은 본 적 없다.
그런 고급 술법을 이런 시골 도시에서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탐지.'
역시나 스킬에는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창날이 발아래에서 뚫고 나올수 있다고 생각하니 차라리 천장을 딛고 거꾸로 서고 싶은 심정이었다.
잔뜩 긴장한 채로 집중하며 다음 공격에 대비했다.
언제 어디서, 얼마나 빠른 속도로 땅에서 공격이 들어올지 모른다.
하지만.
다음 공격은 없었다.
대신 딛고 선 바닥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기껏 자리에 앉혀 줬더니 말이야. 이거 참. 무능에도 정도가 있어야지. 〉낭랑한 여자의 목소리는 다리 사이 정중앙에서 울렸다. 위치는 확실했다.
'선수를 친다.'
상대는 지금 분명 방심하고 있다.
바트라(지행술)를 쓰는 술법사의 빈틈을 두 번 다시 노리기는 절대쉽지 않으리라.
손에 쥔 장검이 검기를 내뿜으며 울었다. 대처 방법은 명확하다.
'격발.'
- 파삭!
화염으로 타오르는 칼날을 그대로 단단히 얼어붙은 바닥에 박았다.
말파스의 인장이 남느니 어쩌니 하는 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다.
내성에서 주워 온 장검이 진흥 섬광을 발하면서 바닥에 깊숙이 박혀타올랐다.
'질풍. 격발의 플레어!'
이를 악물었다. 단단한 땅에 박아넣은 칼을 상하좌우로 네 번 강하게 휘둘렀다.
바람과 불꽃이 서로의 몸을 휘감으며 푸른 검기 위에서 폭발했다.
- 파사사삭! 화르르르!
얼어붙은 바닥이 폭발하면서 잔해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칼끝에 걸리는 느낌이 좋았다.
'죽었겠지.'
바닥에 있던 술법사는 온몸이 불타올라 죽었을 게 분명하다.
서큐버스님의 서재에서 읽은 책에 분명히 그렇게 나와 있었다.
지행술을 쓰는 상대는. 바닥을 불태워 상대한다.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반투명한 상태창이 떠올랐다.
'레벨 업인가?'
하지만 레벨 업은커녕 경험치를 얻었다는 메시지조차 뜨지 않았다.
상대는 죽지 않았다.
대신.
[주의! 무기 내구도가 50%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 파삭.
한 번 사용한 장검이 눈에 띄게 상해 있었다. 칼끝부터 자루 쪽까지 이가 군데군데 빠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검기조차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칼로 무리한 짓을 한 결과였다.
'이런.'
급하게 주위를 둘러봐도 쓸 만한 무기는 보이지 않았다.
'에라스트보다 먼저 그라스미어에 한 번 들렀어야 했나?'
그라스미어의 대검을 가져오지 않았던 게 후회되기 시작했다.
창고의 위치도 알고, 문은 그냥검기로 찢어 버리면 그만이다.
아니면, 최소한 그럭저럭 쓸 만한 명검이라도 에라스트 내성에서 잘챙겨 왔어야 했다.
너무 여유로웠다.
벤슨 프레쳐와 석궁잡이를 너무간단히 짓이겨 놓은 바람에 긴장이 지나치게 풀렸다.
몇 번씩 반복해서 마주한 것들을 간단히 짓이겼다고 해서, 그 뒤에 벌어질 전혀 다른 상황까지 무심코가볍게 생각해 버린 것이다.
내 실수였다.
커크를 고문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 그냥 아무 칼이나 주워 온스스로에게 넌더리가 났다.
'이런.'
하지만 바닥에 박아 넣은 불꽃이 아무런 효과도 없는 건 아니었다.
어디서 떨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바닥에 살짝 그을린 흰색 가면이 던져졌다.
가면 양옆으로는 장난처럼 검은 사슴뿔이 그려 넣어져 있었다.
- 人/,,/,,/,,, ,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그와 비슷한 하얀 가면을 쓴 인간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가면 아래로는 어둠을 두른 것처럼 무언가 흩날리는 느낌만 있었다. 그녀의 등장과 함께 감옥안을 흐릿하게 밝히던 횃불들이 일제히 꺼졌다.
- 스스숫.
좌우 앞뒤로 비슷한 가면 다섯이 더 나타났다.
육 대 일. 만만해 보이는 자는 단하나도 없다.
애초에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 똑. 똑.
정면에 나타난 여자의 발밑으로는 레이 커크의 것으로 보이는 탁한 핏방울이 아래로 떨어진다. 이들의 정체는 물을 것도 없다.
'유령.'
황실의 유령들.
첫 생애에서는 아예 그 존재조차 몰랐던 집단.
서큐버스님에게도 전혀 들은 바가 없고, 어디서 읽은 것조차 없었다.
그들이 뭘 하는 집단인지 자세히 알 수는 없었다.
황제를 위해 모두를 감시하면서, 거리낌 없이 모두를 살해한다는 것정도를 짐작할 뿐.
표면상 황제를 호위하는 '근위대'보다 훨씬 강한 자들이 바로 이들유령이 다.
명예나 긍지, 존중 따위는 완전히 시궁창에 처박고, 가장 위험하고 음험한 임무에 투입되는 강자들.
결코 쉽게 접할 수는 없다.
나 역시 열 번이나 회귀한 뒤에야 처음으로 이들과 칼을 맞댔다.
무려 레안드로 후작을 사칭했다는 오해를 사고 나서야 이들의 가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이번 생에도.
언젠가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오늘이라고.? 여기서 바로?'
에라스트.
남부의 작은 도시다.
그 어떤 특산품도, 눈여겨볼 만한 요소도 전혀 없다.
대체 왜?
황실 근위대 기사단장급의 실력을 가진〈유령〉들이 이 허름한 도시에 나타나는가.
황실에 어떤 반기도 들지 않았다.
축출된 레이 커크가 유령이 당장 출동할 정도로 중요한 인물도 절대아니다.
그러면 이렇게 쓰레기처럼 간단히 죽여 버렸을 리가 없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런 보잘것없는 도시에.!'
하지만 깊이 생각할 틈은 없다.
포위망이 조금씩 좁아진다. 싸우면 패배할 거다. 내 앞에 선 유령이 양쪽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흐으음. 〉
그녀가 흰 가면을 좌우로 조금씩 기울인다. 세 조각으로 갈라진 자국자체가 문양으로 새겨진 기이한 가면이었다.
〈이상하네. 언제 우리를 본 적이있나? 〉
"무슨 소리지."
싸우면 곧 죽는다. 승산은 없다.
무기도 엉망이다. 사실 전에 썼던 대검을 들고 온다고 해도 여기를 벗어나기는 어렵다.
굳이 칼을 부딪칠 필요도 없다.
단언컨대.
이들을 그라스미어에서 마주쳤던 자들보다 윗줄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하나라도 정보를 알아내고 죽는 편이 낫지.'
저들이 달려들지 않는데 공격할필요는 없다.
〈확실히. 별로 놀라지는 않는데 말입니다. 〉
주위에 선 하얀색 가면들으로부터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황실 비역에 적혀 있는 이야기가 사실이라니, 황당한데요. 〉〈국장 후보자들을 승급 전 반드시이런 시골에 근무시키는 방침이, 솔직히 무슨 저질 농담인가 싶었습니다만. 〉〈진짜 뭐가 나오긴 나왔네요. 〉〈사르디아 주간에는 특히 더 잘살펴 보라더 니 . 어 제부터 잖아요. 〉
'황실의. 비역? 국장 후보자?'
저들은 마치 나를 실험체 보듯 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인지 조금 알아듣게 말해주겠나?"
하지만 무시 일변도.
여섯 명의 유령은 내가 도망가지 못하게 각자 방위만을 점유하고 있을 뿐이었다.
뚫을 공간은. 없었다.
〈지침에 따라 제거하겠습니다. 〉
〈그러면 시작할까요? 〉
- 스릉.
여섯 개의 무기가 동시에 나를 향해노려졌다.
가볍게 공기를 울리는 금속성의 소리에서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질주.'
스킬을 지금 사용해야 했다.
이들을 상대로 질주의 활성 시간만큼버틸 확률은 희박하다.
하지만 효과가 멈춰지는 바로 그순간, 결코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찾아올 것은 더욱 명백하다.
[20분 동안 400%의 속도를 낼 수 있습니다!]
[다음 사용까지 50 : 00]
[24시간 내 사용 가능 횟수 2/3]
- 부응!
왼쪽에 선 가면이 두 손으로 잡은 커다란 칼을 크게 휘둘렀다.
- 팟!
질주가 아니었다면 절대 피하지 못했을 강하고 빠른 공격이었다.
바닥이 부서지며 돌과 흙이 사방으로 튀었다. 돌덩이를 피해 고개를 돌린 쪽에서 은색 창이 날아왔다.
'흡착.' 뻗어 오는 창을 손으로 잡아챘다.
쉽게 감당할 수 있는 속도도 힘도 아니었다.
강철로 만들어진 건틀렛이 창에 쓸리듯이 터져 나갔다.
〈어어? 〉
하지만 잡힌 걸로 충분하다.
'결빙.'
'이중영창.
'뇌격.'
- 파지직!
푸르게 얼어붙은 창을 통해 샛노란번개가 뻗어 나갔다.
"크흑!"
상대는 몸을 움찔거리면서 목소리를 뱉었다. 창을 잡은 손에 힘이 조금느슨해졌다.
- 피릭!
바로 그 순간 몸을 회전하며 창을 빼앗았다. 창을 거꾸로 들어 원주인을 찌르려 할 때였다.
〈어딜. 〉
세 자루의 칼이 동시에 나를 향해내리쳐졌다.
- 까앙!
두 자루는 간신히 막아 냈다. 발로 딛고 선 곳이 움푹 패일 정도로 힘겹게 막아 냈을 때, 세 번째 칼이 날아들었다.
마지막으로 휘둘러진 칼에는 강한 회전력이 걸려 있었다.
- 콰직!
창을 잡고 있는 양손의 건틀렛이 충격에 완전히 으스러졌다. 새하얀뼈가 건틀렛 바깥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둘러싼 유령들은 하얀 뼈를 보고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조급할 건 없다는 둣 더이상 휘몰아쳐 오지는 않았다.
애초에 전력 차이는 명백하다.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공격을 그대로 받아 낸 충격인지 하체 갑옷곳곳이 우그러져 있었다.
'이것마저 안 맞는군.'
희망은 없다.
도움 따위도 바랄 수 없다.
루비아가 사는 세계.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이 감옥에 갇혀 있던, 루비아를 도와주려는 자들은 이런 이면衰面 세계에 사는 인간들이 아니다.
그자들이 절대 끼어들 수 없는
수준의 싸움.
이건 내가 해결해야 한다.
지금이 아니라, 다음.
아니면 다음 생에서라도.
간신히 균형을 잡으며 벽에 붙어주위를 돌아봤다.
방금의 것도 단순한 동시 공격이 아니다. 분명 오랜 기간에 걸쳐 호흡을 맞춘 합격술合擊術. 빈틈을 노릴 희망 따위는 없다.
"유령들이냐? 날 언제부터 따라온거지?"
〈호오. 역시 우리를 알고 있는데?
도대체 얘 뭐야? 〉
〈비역의 지침에 따르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살해하라고 했습니다. 〉〈흐으. 〉살아 나갈 틈은 없다.
하지만 정보를 얻을 틈은 보인다.
"레이 커크를. 영주로 만들었던게 너희들이냐?"
하지만 말 대신 칼이 날아왔다.
- 까앙!
저지하는 사이 회전력이 담긴 창날이 투구를 터트리려는 것처럼 날아들었다.
흡착을 무시하고 창날이 그대로 팔을 꿰뚫었다.
'이자가 우두머리인가.'
가운데 서 있는, 기괴하게 갈라진 가면을 쓴 여자의 창술은 차원이 달랐다.
뼈 사이에 박힌 창날이 차갑다.
시간이 없다.
나만 죽는 게 아니다.
이들이 루비아에게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죽더라도 버티고 버티면서 최대한 많은 걸 알아내고 죽어야 한다.
저번 생에 날 죽인, 유령이 몹시두려워하던 그 남자를 떠올렸다.
"건드리지 마라. 공작 각하의.
특명을 수행하는 중이다."
184화 루비아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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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다 비켜 봐."
조각난 가면을 쓴 여자가 말했다.
주위에 서 있던 유령들이 일제히 두걸음 뒤로 물러났다.
조각난 가면을 쓴 여자가 한 걸음앞으로 다가왔다.
다섯 명이 두 걸음 물러나고, 한 명이 한 걸음 다가왔지만 아까보다훨씬 더 짙은 압박감이 느껴졌다.
여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특명인데?"
"그거야 물론 공작의 특명이지."
대답하는 순간이었다.
〈큭. 〉
두 걸음 뒤로 물러난 유령 가운데 한 명이 낮은 목소리로 비웃음을 홀렸다. 비웃음은 전염된 것처럼 주위에 금방 퍼졌다.
흰색 가면을 쓴 다섯 명의 유령이 너도나도 킥킥대기 시작했다.
정면에 선 여자는 귀찮다는 듯이 길게 한숨을 쉬며 물었다.
"그래서 무슨 공작? 어?"
분위기가 이상하다. 하지만 일단그냥 뻗대 보기로 했다.
"〈소녀〉공작이면 하나밖에 없지않나. 몰라서 묻는 거냐."
팔짱을 낀 여자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나는 내친김에 말을 계속이어 갔다.
"날 방해하고 있다는 걸 그분이 알면 너희를 바로 죽일 거다."
"하하하하. 사칭을 해도 뭔.
여자는 가면을 벗었다.
가면 아래 무표정하게 굳어 있는 얼굴이 드러났다.
아무렇게나 묶은 회색 머리칼이, 붉은 눈빛이 드러났다.
눈 아래로 옅은 그림자가 드리워져있었다. 굳은 얼굴 곳곳이 묘한 음영을 만들었다.
"지금 사칭이라고 했나?"
"그래. 지금 누구 앞에서 그 망할〈소녀〉를 들먹이고 지랄이니."
개인적인 감정이 너무나도 짙게 느껴지는 말투였다.
건조한 붉은 눈빛의 여자가 계속말을 이어 갔다.
"우리는 내사과다. 그리고. 네가 방금 지껄였던 그 '소녀'분의 직속부하거든."
후우, 하고 가볍게 한숨을 뱉은 여자가 긴 회색 머리카락을 풀어흩트리며 말했다.
"아주 불행하게도 말이지."
- 피릿!
날카로운 파공음을 내며 목덜미로 쇠사슬이 날아들었다. 뱀처럼 춤을 추는 쇠사슬을 피할 공간도 시간도 없었다.
- 좌라락!
간신히 팔을 들어 사슬의 진로에 가져다 댔다. 팔에 사슬이 촘촘히 감겼다. 조금만 늦었다면 투구째 목이 그대로 뽑혔을 게 분명했다.
'결빙.'
팔에 묶인 쇠사슬에 하얀 서리가 서렸다.
'뇌격.'
- 파지직!
하얀 서리를 타고 샛노란 뇌전을 쏘아 냈다. 팔 스스로가 매개체가 되어 환하게 반짝였다.
타격을 받을 때 쇠사슬을 당겨서 빼앗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쇠사슬을 잡은 힘이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다.
- 파직.! 파지직.!
뇌전은 여자의 진흥 장갑 끝에서 멈춰 허공으로 흩어졌다.
진홍색으로 칠해진 얇은 장갑은 뇌전뿐 아니라 쇠사슬을 타고 홀러내린 냉기까지 흩트리고 있었다.
"두 번은 안 통해. 마법사 사냥도 드문 일은 아니거든."
- 화룍.
여자는 얇은 장갑을 낀 손을 살짝좌우로 움직였다. 뇌전도 냉기도 진흥색 장갑 근처에서 완전히 차단됐다. 아예 먹히지도 않았다.
"안 그래도 그 '소녀'랑 안 맞아서 짜증 나는데 여기서 내가 그 단어를 또 들어야 돼? 어?"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이 무리가 저번 생에 나를 죽인놈의 직속이었다니!
운이 지나치게 나쁘다.
우연일까?
아니다.
이런 수준의 존재들이, 남부 시골도시 에라스트에 와 있는 것부터가 절대로 우연일 리가 없다.
왜 그런 건지 알아내야 한다.
막막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는, 내가 가진 최고의 무기를 활용해야한다.
가장 강한 무기.
그건〈회귀〉다.
〈정말 공작 각하의 명을 받은 건 아니겠지요? 〉
"그럴 리가 없잖아. 이제 끝내자."
"잠깐."
붉은 눈의 여자가 한쪽 입꼬리를 비뚜름히 올리며 나를 바라봤다.
"왜? 뭘 해도 여기서 부서질 건데 뭐 이렇게 미련이 많아?"
'유령 내사과라고.
손안에 든 먹이라고 생각하는지 상대의 입이 조금 가벼워졌다.
이들은 다시 과거로 되돌아올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죽어도 하나라도 더 알고 죽어야 한다.
하다못해, 루비아를 한순간이라도 더 생존시키기 위해서라도 시간을 끌고 싶었다.
"너희 유령들에게. 일문일답을 제안한다."
"뭐? 뭔 소리야?"
손가락으로 회색 머리카락을 꼬고 있던 여자가 피식 웃었다.
일단 아무렇게나 뱉어 버렸다.
하지만 이미 기호지세.
내친김에 끝까지 달려가야 한다.
"너희도 결국 정보기관 아닌가? 가치있는 정보들을 하나씩 교환하도록하자고."
"하하하하.
〈죽일까요? 〉
여자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거짓말쟁이 해골을 어떻게 믿고 그런 걸 하자는 거야?"
"너희가 손해 볼 건 없지 않나."
회색빛 머리칼과 어울리지 않는 검고 얇은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동의하는것 같은 표정이었다.
어차피 여기서 날 죽이기로 마음먹었을 거다. 내가 회귀라도 하지 않는다면 이들이 볼 손해는 없다.
"신뢰를 쌓는 차원에서 내가 먼저말하지."
무기들이 나를 향해 겨눠져 있다.
얼토당토않은 말을 하면 곧 날아와 갈비뼈를 부수고 두개골을 반으로 가를 거다.
"네 달 후. 〈황제〉가 남부를 순방한다."
일부러〈황제〉라는 단어에 미묘한 악센트를 줬다. 레안드로 후작은 그가 〈허수아비〉라고 말했다.
눈앞의 여자가 뭔가 알고 있다면.
'반응이 있겠지.'
"하핫. 뭐야, 이거. 끌리는데?"
여자의 얇은 눈썹이 한차례 더
꿈틀거렸다.
〈과장님, 송구스럽지만 더 이상 말섞으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즉시제거하라는 지침이. 〉내사과장이 주위를 획 돌아보며 말했다.
"어이, 너희들."
〈네, 과장님. 〉
"니들, 다 이런 거 알고 싶어서 내사과 들어온 거 아니야? 내사과는 그런 곳이라고. 별거 별거 다 알아야돼. 졸리면 가면 벗고, 이 일 청산하든지. 듣기 싫으면 듣기 싫은 놈만나가."
말이 빠르게 쏟아졌다.
"문은 저기야."
부스스한 긴 회색 머리칼의 내사과 장이 감옥 정문을 가리켰다.
하지만 아무도 나가지 않았다.
그녀의 창끝에는 짙푸른 기운이 자루부터 빛나고 있었다. 나가는 순간밀고자가 되어 저 창에 꿰이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좋아. 좋아. 그러면 이제 우리모두 공범이잖아?"
어두운 감옥 안의 분위기가 한층더 스산해졌다.
창에서 푸른 기운을 지운 '과장'이 나를 비스듬히 바라보며 물었다.
"황제가 순방해서. 다음은?"
감옥 안을 떠도는 공기가 칼날을 세우고 나를 둘러싼 것 같았다.
받아 낼 수 없는 압박감이었다.
"그 '황제'는. 허수아비다."
일단 후작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내사과장이 목을 한 바퀴 돌렸다.
"허수아비. 허수아비.
레안드로 후작이 직접 한 말이니틀릴 리가 없다.
그럼에도 압박감을 견디고 가만히 서 있는 것조차 그리 쉽지 않았다.
"꼭 틀린 표현은 아닌데, 조금 더정확히 말해 보지 그래?"
여자의 눈빛이 붉게 빛난다.
여기서의 대답에 따라서 어떤 정보도 얻지 못하고 살해당하느냐, 아니면 대화를 조금 더 이어 나갈 수 있느냐가 결정된다.
필사적으로 떠올렸다.
[황제, 폐하, 만세.]
기스-제-라이의 손톱에 목이 그인채, 붉은 피를 흩뿌리며 죽던 은발황제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마지막 순간까지 황제에게 만세를 부를 허수아비지."
"뭐. 그 정도면 정답에 가깝다고 해야겠네."
여자의 눈빛은 여전히 싸늘하다.
한 겹 한 겹 서늘한 공기가 주위에 쌓여 굳어져 간다.
하지만 이번 대화로 불티 몇 개가 허공에 튀어 올랐다.
살아서 도망갈 수는 없더라도.
다음 생에 활용할 정보는 될 수 있을 불티가.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지?"
계속 불을 지펴야 한다. 일방적인 질문 같지만 대화를 나누다 보면 상대의 반응으로 나도 알게 되는 것들이 많다.
'일단은.
눈앞의 여자는 황실의 비밀을 꽤 깊은 수준까지 알고 있다.
다른 유령들이 움찔거릴 때에도 눈빛한 번 변하지 않고 똑바로 내 쪽을 바라본다.
"엠버의 네크로멘서, 기스-제-라이가 황제를 살해한다."
"호오.
처음으로 그녀의 눈이 크게 한 번깜빡였다.
붉은색 열은 눈동자가 호기심을 띠기 시작한다.
'기스-제-라이.
그녀를 팔아먹을 생각이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여기서 죽는다면, 기스-제-라이는 어차피잿빛 기사에게 살해당한다.
붉은 회로가 흐르는 갑옷을 입고, 흐물거리는 공간을 뚫고 나타나는 정체불명의 존재에게.
하지만 이들이 끼어든다면?
내가 정보를 홀려 훼방을 놓으면 어떨까.
황제 암살에 방해를 받은 그녀는 암살을 단념할지도 모른다.
어떤 식으로든 계획을 변경하게 되면, 기스-제-라이의 사망이라는 미래가 바1 가능성이 있다.
다른 장소, 다른 시간에는 어쩌면 그 잿빛 기사가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인과를 바꾼다.
기스-제-라이를 살린다.
"이거 말 되는데? 연합과 엠버는 그게 가짜 황제라는 걸 모를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주위의 유령들을 둘러보며 여자가 말을 이었다.
"솔직히 4검주나 2검주 같은 분은 적에게 포섭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정보가 밖으로 새어나가지를 않은 건가?"
〈과장님께서 내사과를 잘 이끌어주신 덕분 아닙니까. 항상. 〉
"왜 아부를 떨고 그래? 내가 기분좋으면 꼭 한 사람씩은 죽이는 거몰라서 그래?"
〈죄송합니다. 〉
"안 그래도 기분 좋은데 말이야."
내사과장의 목소리는 노래하는 것 같은 음률을 띠고 있었다.
조금 흥분한 듯한 색정적 울림이 답답한 감옥 안을 맴돌았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어. 그럼네가 묻고 싶은 건 뭐야? 적당히 봐서 대답해 주도록 할게."
한층 호의적인 태도였다.
물론 밖으로 보내 줄 기미는 없다.
"너희 같은 강자들이 왜 이런시골에 와 있는 거냐."
"상부 지침이라고. 황실 비역에서 내려오는 지침."
가만히 있자 여자가 말을 이었다.
"국장 후보자들은 에라스트에서 필히 1년씩 근무해라. 수상한 게 등장하면 깔끔히 정리해라. 묻지도, 따지지도말고. 왜 이런 지침이 있는지는 나도몰라."
황실의 지침.
'설마. 내가 여기에 나타나는 걸 누군가가 처음부터 예측하고 있단말인가?'
흠칫했다. 뼈 사이사이를 흐르는 공기가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여자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니 이제 '너'룰 정리해야지.
깔끔하게."
"현 영주는 어쩔 거냐."
곱게 그대로 내버려 둘 가능성도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순순히 내두개골에 칼을 박는다.
이 세계선의 루비아가 편안하다면 그걸로 작은 위안은 된다.
"누가. 누가 영주 자리에 앉아 있건황실 방침에 협조하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냐?"
"어. 그래서?"
"현 영주는 살려 줬으면 하는데."
"그런가? 별로 걱정할 거 없어.
허수아비로 잘 써먹어 줄게."
〈과장님, 하지만 그것도 '신형'이 개발되면 끝 아닙니까? 〉유령 한 놈이 끼어들었다.
문득 정신을 사각사각 갉아먹는 것 같은 불길한 기분이 스쳐 갔다.
"너희가 키우는 애벌레를 말하는건가?"
"얘, 뭐야?"
〈아니, 그걸 어떻게.! 〉
'신형.'
잡아먹는 대상의 모습을 복제하는 커다란 애벌레.
챈들러가 와그작와그작 먹히는
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루비아가 애벌레에게 먹히는 모습같은 건 상상도 하기 싫었다.
'도망친다.'
루비아를 데리고.
- 팟!
오른쪽으로 움직이며 주먹을 휘둘렸다. 높은 랭크의 체술로 보정된주먹이 유령의 어깨를 때렸다.
'냉기폭풍.'
가격과 동시에 손에서 얼음 바람을 뿜었다. 살상력은 약해도, 얼어붙은 유령의 몸이 순간적으로 느려졌다.
칼을 흡착으로 빼앗아 들고 옆에 있는 놈에게 휘둘렀다. 칼을 피해휘청거리는 사이 복부를 걷어찼다.
〈끄헉! 〉
배를 받침돌처럼 디뎌 빠르게 여자에게 돌진했다.
'검기.'
- 우우우우!
어느 때보다 필사적으로 검기를 칼날에 싣고 '내사과장'을 향해 달려들었다. 여럿과 싸울 때는 우두머리를 쳐야 한다. 일단 그녀만 제압하면 승산은.
"어이구.
회색 머리칼의 여자가 비뚜름히 입꼬리를 올리며 씩 웃었다.
"안 되는 줄 알면서 왜 그럴까."
- 차르륵!
소매에서 쇠사슬 두 개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튀어나왔다.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
- 치이이익!
산성 스킬로 검기를 강화해 베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튀어나온 사슬에도 푸른 기운이 맺혀 있었다.
내가 두 손으로 잡은 칼에 맺힌 기운보다 얇은 쇠사슬에 각각 맺힌 푸른 기운이 훨씬 더 짙었다.
"오러는 이렇게 쓰는 거다."
- 콰광!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쇠사슬이 칼에 감기며 칼을 찢고, 온몸을 통째로 묶으며 바닥에 나를 강하게 구속시켰다.
"나도 듣는 귀가 신경 쓰여 더는 얘기 못 하겠네. 언제 어디서 도청되고 있을지 모르니까."
- 달그락!
사슬에 맺힌 오러로 만신창이가 된채 억지로 일어나려고 했지만 몸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이 언데드 따위가. 〉
〈방심했습니다. 죄송합니다. 〉
- 끼긱!
- 끼긱!
갑옷을 뚫고 몇 개의 칼날이 몸에 더 틀어박혔다.
다리가 끊어졌다. 팔이 끊어졌다.
척추가 끊어졌다.
- 파삭!
빛살처럼 날아온 내사과장의 창이 두개골에 꽂혔다.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습니다.]
[체력이 20% 이하로 떨어집니다.]
- 파사삭! 파삭!
[체력이 5% 이하로 떨어집니다.]
두개골이 완전히 깨지는 소리가 아득하다.
세계가 까맣게 흐트러진다.
'열 번을 넘게 회귀했는데.
첫날에 죽는다.
여러모로.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마지막까지 의식에 매달려 있었다.
185화 오래된 친구 (1)
***************************************************
- 우르릉! 광!
- 투두! 투두두두둑.!
〈어젯밤〉으로 되돌아왔다.
- 쏴아아. |
- 번쩍!
'하루.'
단 하루를 버티지 못했다.
곧바로 에라스트에 간 게 그렇게 잘못된 선택이었나.
루비아를 영주로 세우려 한 것이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이었나?
너무 빠르고 허망하게 죽었다.
관을 박차고 일어날 기분도 들지 않는다.
하지만 나를 독촉하듯 반투명한 상태창이 허공에 빼곡히 떠오른다.
- 띠링!
[계승되었습니다.]
[특전 갱신!]
[네크로멘서의 연인플러스(new!)]
당신은 특정한 사령술사를 위해서 목숨을 세 번 바쳤습니다.
- 사령술사의 재능을 한층 강렬히 자극합니다.
- 사역 관계로 맺어진 사령술사의 네크로멘시 숙련도가 15% 빠르게 증가합니다.
나쁘지 않은 소득이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조금이라도 더발버둥 친 보람이 있었던 걸까.
띠링,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다른 상태창들이 연달아 떠오른다.
서른 명 정도의 인간을 죽여 얻은 능력치가 스탯에 반영되어 있다.
힘 스탯과 민첩 스탯이 모두 80을 훌쩍 넘는다. 죽고 사는 걸 반복할때마다 끊임없이 올라간다.
이것만 목표로 끊임없이 회귀를 반복해 볼까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방법은 쓸 수 없다.
"망자여.!"
뼈마디를 때리는 빗줄기 사이로 루비아의 목소리가 들린다.
혹시라도.
내가 죽을 때마다, 지켜 주지 못한 그녀는 평행세계에 남아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생 한생을 최후까지 버둥거릴 수밖에 없다.
최소한-
이 여자의 안정安定이 확정되는 순간까지 라도.
"내가 그대를 깨웠습니다!"
그녀가 다시 나를 부른다.
- 달그락.
"레이 루비아."
"흐에에옛!"
- 덥석.
놀라는 것도 물론 모두 예측 범위안에 있다. 가볍게 손을 뻗어 뒤로 넘어지지 않게 잡아 준다.
하루 사이에 보는 그녀의 얼굴에 붉게 홍조가 들었다. 아무리 사령술사라고 해도 내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놀라 기겁해 도망치는 게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제 익숙하다.
기본 특전으로 인한, 30이라는 높은 호감도가 주는 효과에도.
"어. 그러니까. 제가, 당신을!"
"당신을?"
"선택. 지명. 아니, 깨웠어요!"
"고마워."
- 번쩍!
그녀의 갈색 눈동자는 커다랗게 떠져있다.
"그런데 제. 제 이름은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말을. 말을 할 수 있으신 거예요?"
놀람으로 가득한 눈빛 아래, 나에 대한 진한 호기심이 읽힌다.
"일단 가자."
"앗. 네! 그럴게요!"
어디로 가자고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일단승낙부터 한다.
"이리로."
"넵! 넵!"
루비아의 손을 잡고 동굴을 향해빠르게 걸어갔다.
아예 그녀를 안아 들고 빨리 움직일까 싶기도 했지만.
저번 생에서 하루조차 지켜 주지 못했던 주제에, 그런 일을 하는 건 어쩐지 망설여졌다.
손을 잡은 채 걸어갔다.
동굴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말이 통하는 나를 보고 잔뜩 들뜨기라도 했는지, 루비아는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 사정을 자세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저는.
가만히 이야기를 들었다.
'바뀐 건 없군.' 예전과 달라진 건 없었다.
저번 생에서 레이 커크를 죽이고, 영주를 루비아로 바꾸기는 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대로다.
아버지가 살해당한 것도, 삼촌도 영주가 된 것도.
황급히 에라스트 밖으로 도망가야 했던 것도.
영주로 만든 것 자체는 '변경점'이 아니었다.
레나를 T&T 지부장으로 만든 뒤회귀 시점이 처음으로 되돌아왔다.
네크론 노예 수첩에서 '레나'라는 이름이 사라져 있었다.
루비아도 그런 과거의 개변改變을 일으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 무슨 생각. 하세요?"
"글쎄."
할 생각이 너무 많다. 중요한 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는. 약해요.
"상관없다."
"감사해요. 일어나 주셔서.
졸음이 묻어 있는 갈색 눈이 나를 빤히 바라보다 툭 감긴다.
긴장으로 굳어 있던 그녀의 몸이 어느새 스르륵 풀어진다.
'잠들었군.' 어디로 가야 할까.
일단 에라스트는 아니다.
그곳에는 유령 중에서도 특별한 녀석들이 숨어 있다.
'내사과랬나.'
붉은 눈동자의 그 여자는 황제가 가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비역의 지침이라는 것.
무언가 나타난다는 것을, 그곳의 유령들은 알고 내려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설마 내 등장을 황실에서 알고 있었다는 건가? 대체 어떻게? 내가 뭐라고.!'
- 달그락.
고개를 흔들었다.
남부 시골에 저 정도 최정예 유령들이 박혀 있는 이유가 나 때문이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황실 비역에 일개 해골병사인 나따위가 기록되어 있을 리가 없다.
'우연의 일치겠지. 한데 그자들은 언제까지 여기 있는 거지?'
기억을 정리했다.
토너먼트에 참가할 때는 그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난동을 피우지 않고 가만히 왔다 가기만 해서인지도 모른다.
그때라고 유령들이 에라스트에서 대기하고 있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자신이 생길 때까지 확실히 회피지역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들은 유령의 정예 중에서도 최정예인 것 같았다.
특히 그 붉은 눈의 내사과장은, 적어도 후작에 근접하지 않고는 압도할 자신이 없었다.
'너무 목표치가 높은데.
지금보다 서너 차원은 다르게 강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게 안 되면, 루비아를 에라스트영주 자리에 계속해서 올려놓는 건 불가능하다.
한창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들어왔군.'
동굴 입구 쪽에서 인간 두 명의 기척이 느껴진다. 나와 루비아가 있는 곳에선 한참 떨어져 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
조금만 침착했어도, 쉽사리 길을 잃을 동굴이라는 건 알았을 거다.
하지만 바로 앞에 사냥할 수 있는 젊은 여자가 있다는 사실이 그들의 피를 끓게 만들었다.
추적. 사냥.
어떻게든 루비아의 따듯한 피를 흘리게 만드는 것.
저들은 그것에 완전히 눈이 멀어미로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서로의 시체를 뜯어 먹다, 안에서 굶어 죽게 될 거다.
누가 먼저 상대의 등에 칼을 박아넣을는지 모른다.
벤슨 프레쳐가 전투력이 조금 더위다. 하지만 장전된 석궁이 먼저급소에 쏘아진다면, 누가 승자가 될지 쉽게 짐작할 수는 없다.
'조금 도와줄까.'
- 팟!
"무슨 동굴이 이래. 이러다가 길잃는 거 아니야?"
"이렇게 날 고생시켰으니. 반항하면 눈알을 파 버려야겠어."
"제대로 허리를 안 흔들면 아주 토막토막을.
"쉿."
"쉿은 뭐가 쉿이야? 헤으웃!"
"히익! 히, 히이익!"
크라켄에게 흡수한 공포 스킬은 언제나 유용하다.
처음 날 봤을 때는 다짜고짜 망치부터 휘두른 벤슨 프레쳐가 꼼짝도 못하고 덜덜 떨고 있었다.
받아 쥐는 것처럼 무기를 빼앗고 프레쳐의 한 손을 망치로 으쨌다.
피와 뼈와 살이 분해되어 사방으로 흩날렸다. 드러난 신경들이 동굴바닥에 눌어붙는다.
여유롭게 움직여도 도망갈 엄두는 내지 못한다.
- 퍽!
프레쳐의 발 하나를 으깬 뒤 석궁수의 손을 맞잡았다.
- 꽈? 드득!
그리고 새끼부터 엄지까지 다섯 개의 손가락을 동시에 뒤로 완전히 접었다.
"끄헤에에에엑!"
좀처럼 듣기 어려운 진귀한 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아주 깊은곳. 이들에게도 영혼이라는 게 있다면 그런 곳에서 날 것 같은 찐득한 비명이다.
다행히 동굴 구조상 비명 소리가 바깥으로 나가는 게 다행.
경련과 공포로 몸을 바르르 떠는 두 남자를 놓아두고 적당히 겉옷와 무기 등의 아이템을 챙겼다.
"간다. 좋은 시간 보내."
뒤처리는 서로 알아서 할 거다. 내가 더 시간을 쓸 필요는 없다.
루비아에게 돌아왔을 때, 그녀는 돌바닥 위에서도 완전히 잠에 곯아떨어져 있었다. 쌔근거리는 그녀의 숨소리에 조금은 안도감이 든다.
빼앗은 모피를 바닥에 깔아 놓고, 그 위에 가만히 루비아를 눕혔다.
- 화르르!
빼앗은 단검에 화염 검기를 발현시킨채 루비아 근처에 커다랗게 원을 그렸다.
배 주위나 하체 쪽은 조금 좁게, 머리 쪽은 조금 거리를 두고 바닥에 칼을 박았다. 그녀의 젖은 몸이 천천히 마르기 시작했다.
- 끼긱.
무리하게 화염 검기를 감당시킨탓인지, 단검이 급속히 파손되기 시작했다.
'그냥 뼈에는 안 되나.
위험 부담은 상당하지만, 뼈 자체에서 불꽃은 일으킬 수 있다.
그렇다면 검기는 어떨까.
하지만 결국 실패였다.
[검기 레벨 5 이상이 요구됩니다!]
[현재: 검기劍氣 Lv.3]
'이건 안 되는군?
아쉬움이 느껴졌다.
'후작을 한 번 더 흡수할까?'
그 루트로 가 볼까 싶었다.
하지만 그건 몇 개의 우연이 겹쳐 일어난 일.
후작이 황실에 반기를 들고 몰래살해당하며, 내가 트로핀 나냐우의 도움을 받아서 비밀 통로를 쓸 수 있어야 한다.
시도한다고 해도 당장은 아니다.
가만히 다음 선택지를 생각했다.
던전 정보를 얻어 강해지려면.
슬라임에게 가야 한다.
푸르손의 부하이긴 하지만, 그는 안전하고 확실하게 내 성장 루트를 계획해 줄 수 있다.
그의 성향은 이미 알고 있다.
친해지는 게 어렵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그 선택지는 나를 마왕의 휘하들에게 노출시킨다.
게다가 내 몸에는 루-륨 회로가 흐르고 있다.
말파스의 인장이 찍혀 있을.
슬라임은 위험부담이 지나치게 큰선택지다.
'기각'
두 번째는 T&T의 시조, 트로핀
나냐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
비밀 통로를 보유한 데다가, 수는 적어도 멤버의 구성은 압도적으로 보였다.
예언자에다 마법사까지.
게다가 잠깐 본 것에 불과했지만, 나냐우 본인의 전투력은 내가 감히 측정할 수 없을 정도.
문제는, 그 녀석들도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처지.
T&T는 마왕 푸르손의 계파에게
이미 대부분이 점령당해 있다.
나냐우가 나를 좋아할지 어떨지는 차치하더라도, 그들이 제대로 된 세부정보망을 나에게 제공해 주지 못할가능성이 크다.
'이것도. 일단 보류.'
곧이어 머릿속에 세 번째 선택이 떠오른다.
'기스-제-라이.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녀는 분명날 좋아할 거라는 사실이다.
매우.
부담스러울 정도로.
내가 가진 〈네크로멘서의 연인〉
특전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의 성격과 맞물리면, 일단 가면 감당할 수 없다.
'살려야 하는데.'
만나긴 해야 한다.
정수 흡수라는 에픽 스킬을 내게 심어 준 그녀를 절대로 죽음 앞에 방치할 수는 없다.
황제 암살을 저지시키기고 그녀를 살리기 위해, 〈린트부름의 꿈〉을 걸으라고 해 주어야 한다.
- 달그락.
하지만 고민은 점점 깊어진다.
강렬한 호감은 어떻게든 몸으로 받마"
낸다고 치더라도.
역시 걸리는 게 있다.
루비아다.
네크로멘서 기스-제-라이는 과연인간 여자인 루비아를 어떤 식으로 취급할 것인가?
'?"무슨 짓을 해도 안 이상하지.'
자세한 건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의외로 다정하게 대해 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지만, 기스-제-라이의 '다정함'은 너무 해석이 다양하다.
기스-제-라이에게는 가더라도 나혼자서 가야 한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
그라스미어!
무기의 도시 그라스미어.
지금은 그곳에 갈 수밖에 없다.
최소한 영주가 '먹히기' 전까지의 1년 정도는 루비아가 안전하게 지낼 수 있으리라.
무기나 갑옷 같은 것도 취득하기 딱 좋다.
챈들러 가문의 약점을 알고 해결해줄 수 있다는 건 회귀를 하면서 얻어 낸 큰 자산이다.
그걸 활용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어쩌면 루비아가 그곳에서 정치적지분을 1 수도 있을 거다.
벨-호멧-아이작.
녀석이 잠시 몸을 탈취하긴 하겠지만, 〈진명〉을 찾도록 놓아두면 다시 역으로 가둘 수 있다.
'나쁘지 않군.'
적어도 1년은 보장된 기분이다.
186화 오래된 친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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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라스미어로 가는 선택 역시 걸리는 게 있다.
챈들러가 날 환영할까.
그보다, 도시에 있기는 할까.
'수행 중일 텐데.'
동방에서 돌아온 건지 아닌지도 알지 못한다.
일면식도 없다.
인간도 아닌 내게 그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벨'호멧 아이작에게서 구해 준다고, 내가 먼저 말해도.
예전처럼 경계 없이 받아들일까?
누구나 자기실현적이다. 자신의 머리에서 나온 판단과 생각을 훨씬더 높게 평가한다.
환영받았던 이유는 그들의 제안을 내가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우연히 나와 마주친 첸들러.
그와 시선을 공유하던 대주술사벨'호멧 아이작이, 세계에 나가기 위한 첫 숙주로 나를 낙점하고 또다른 거짓 꿈을 챔들러 부자에게 주입했기 때문이다.
가서 빠르게 아이작에게 빙의를 당하고, 다시 한 번 놈을 봉인하는 방법을 써야 할지도 모른다.
일단, 챈들러 부자와의 대면에서 인간이 아니라는 건 숨겨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루비아가 잠에서 깨어 하품하며 눈을 막 떴다.
촉촉하게 젖은 눈이 반짝거렸다.
꿈이 아니었구나, 라는 표정이다. 나를 바라보는 눈에는 공포보다는 호감과 호기심이 어려 있다.
"우와. 따듯해요."
"일어났나."
"모닥불이 있는 것도 아닌데.!
제 몸 주위로 신기하게 따듯해요."
그럴 수밖에 없다. 바닥에 뜨겁게 달군 단검을 박아 넣었으니까.
덕분에 내구도가 반쯤 날아갔다.
"어떻게 이런 게 되는. 거예요?
불도 없고. 어. 모피는 어디에서 가져오신 거예요? 그것도 엄청.
보송보송해요! 와.
감탄이 이어졌다.
조금 으쓱해졌는지도 모른다.
"마법을 쓸 수 있지."
- 화록!
단검에 다시 한 번 불꽃을 피워올렸다. 루비아가 숨을 들이켰다.
"그. 그럴 리가 없어요!"
"무슨 소리지?"
그녀가 진지한 낯빛으로 고개를 숙인다.
"죄송해요! 저는 마법사를 깨운 적이 없어요! 말을 할 수 있으신 것도 그렇고. 제가 아니에요. 음, 그러니까. 역시 제가 깨운 분이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저는 아무것도 한게 없거든요.
빠르게 쏟아 내는 말에 당황했다.
"말이 통해서 싫은가."
"아니요! 너무 부담스러워서.
가벼운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루비아가 말을 이었다.
"저는 책으로만 배웠고, 처음.
처음 해 보는 거예요! 아무래도.
뭔가 잘못됐어요! 잘못된.
- 달그락.
어깨를 으쓱했다.
필사적으로 자기가 아닐 거라고 부정하는 루비아의 모습이 우습다.
하지만 저번에도 비슷한 모습을 봐놓고, 고작 하루 만에 부셔져 버린 나를 생각하면 순전히 웃음만 나오는것은 아니다.
"천부적인 재능이 있나 보지."
"재능. 이요?"
"그래. 처음 배운 거 맞아? 무덤위에 서서 날 부르는 태도가 무척익숙하던데."
사실, 익숙한 것은 나를 부르는 그녀의 모습 자체다.
몇 번을 거듭 죽었는지 생각하면 죄책감이 올라온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루비아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날 보고 웃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요. 제가 무슨!"
"농담 아닌데."
"진심이세요?"
재능이 있는 거라고 적당히 루비아를 납득시킨다.
물론 거짓말은 아니다.
수십 수백을 일으켜 제대로 관리도 못 하던 쓰레기 같은 마왕군의 네크로멘서들에 비하면, 내 곁에 앉아가만히 이야기를 나누는 루비아는 탁월한 네크로멘서다.
기스-제-라이의 말이 떠오른다.
〈그녀에게. 사령술사의 재능이 있다는 거요? 〉
〈그럼. 살아 있다면, 내 라인에 끼워줬을 텐데 아쉽게 됐어. 〉
'나중에 기스-제-라이에게 가서.
분위기를 보고 소개를 시켜 주든지 해야겠군.'
멍하니 생각에 잠긴 날 바라보는 루비아와 눈이 마주쳤다.
"일단. 옷부터 살까요?"
"갑옷을 사야겠지."
루비아가 눈을 깜빡거렸다.
"맞아요! 갑옷이요! 어떻게 말씀드리자마자 바로 아시네요!"
물론 모를 리가 없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했던 이야기니까.
"그럼.
일단 유블람부터 들르기로 한다.
그라스미어까지는 하루 반이 꼬박걸린다. 루비아도 뭘 먹어야 하고 유블람 근처에서 챙길 것도 있다.
내가 의견을 개진하자 루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혼자 가서 얼른 갑옷을 사올게요!"
"나도 따라간다."
"네?"
[은신 Lv. 6을 활성화합니다!]
[자취말소(C+)가 적용됩니다.]
= 이렇게 갈 거니까 상관없어.
저번 생과 비슷한 상황이 한 차례반복됐다. 능력을 드러내자 그녀는 거의 혼절할 지경이 되었다.
"저를 그냥 버리셔도 괜찮아요.
혼자서도 잘 살 수 있어요. 제가 너무. 할 일이 없을 것 같은데.
물론 둘다 틀리다.
루비아는 혼자서 절대 잘 살 수도 없을 뿐더러, 그녀가 할 일도 많다.
서번트 시스템의 특혜를 포기할생각은 조금도 없다.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 도움이 된다.
"그럼 목표는 유블람이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유블람에도 유령이 있는 게 아닐까?'
에라스트에서 워낙 황당한 일을 겪은 탓에, 도시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살짝 꺼려지는 감이 있었다.
하지만 저번에 유블람 경비대를 몰살시키고 들어갔을 때.
유령 따위 코빼기도 비치지 않던 걸로 봐서 괜찮을 것 같다.
'에라스트가 이상한 거야.'
그렇다.
에라스트가 이상한 게 틀림없다.
툭.
나는 바닥에서 캐낸 은괴들을 루비아앞에 던져 놓았다.
루비아는 뭐라 말도 하지 못했다.
눈을 깜빡이면서 입만 떡 벌리고 있었다.
"담아 줬으면 좋겠는데."
"이, 이게. 이게 다.
"관리해 준다면 수수료는 나쁘지 않게 챙겨 주지."
나쁘지 않은 수수료는 물론 은괴전액을 뜻한다.
돈 같은 걸 내가 갖고 있어 봐야 쓸모는 없다.
〈어쨌건, 돈은 당신이 갖고 있으시오.
그게 돈이라는 걸 알아도 나에겐 쓸모가 없으니. 〉
처음 살아남았던 밤에 그녀에게 했던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앞의 루비아는 그때의 대화를 기억하지 못한다.
과거로 돌아올 때마다, 쌓아 나간모든 과거가 사라진다.
"제가. 이것들에 손대도 되는 건가요?"
"홈쳐 갈 텐가."
"아니요! 저, 절대 아니에요!"
"뭐. 두 군데 더 있다. 훔쳐 가도 상관없으니 일단 정리해 두라고."
"그럼. 이름 써 놓을게요."
"이름?"
"해골님이라고 써 놓을게요. 나중에 제가 갖고 싶어서 모른 척할 수도 있는걸요."
"모른 척하든지."
"으웃.
두 군데서 더 은괴를 파냈다.
거미굴 가까이 있는 마지막 장소에서 은괴를 파내고, 이제 유블람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뭐지?'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거미굴에서 더 가까운 곳이다.
'탐지.'
기척이 또렷하게 잡힌다. 위험한 상대는 아닐 것 같았다.
"루비아."
"네!"
"거미 싫어하나?"
거미라는 말에 그녀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면서도 입술을 꼭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꼭 그렇지는. 괜찮아요."
전혀 괜찮지 않은 기색이다.
'굉장히 싫어하는군.'
"여기서 잠시 기다리도록."
루비아를 나무 위에 올려놓았다.
한 번 당한 기억이 있으니 조심스럽게 주변을 탐지했다.
하지만 저 앞에 보이는 건 녀석하나밖에 없다.
게다가 주위는 황야.
위험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 팟!
곧장 한명의 인간이 땅을 파고
있는 곳에 접근했다.
놀랍게도 그곳에 있는 건 익숙한 인간이었다.
'경비. 대장?'
유블람의 대머리 경비대장!
살해한 루비아를 달구지에 담아 버린 자들의 우두머리다.
뒤에서 봐도 머리가 벗겨진 모양새가 분명히 그자였다.
'저놈이 왜 여기 있지?'
나는 은신 상태를 유지한 채 조심스럽게 놈의 뒤로 접근했다.
[서번트 시스템]
[마스터가 근처에 있습니다.]
[마스터의〈복수〉를 위해 상대에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이 활성화됩니다.]
[은신 능력이 30% 상승합니다.]
'나왔군.!' 시스템이 다시 등장했다.
몇 번 접하긴 했지만, 실전에서는 처음으로 제대로 효과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바로 뒤까지 접근하는데도 경비대장은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이거 놀라운데.'
바로 근처에서 놈의 행동을 지켜보는데도 제 행동에 몰입하고 있을 뿐이다.
- 픽! 픽!
작은 손 삽으로 땅을 파헤친 뒤, 안쪽에 있는 상자에 무언가를 넣고 있었다.
- 번쩍!
작은 상자에서 비치는 것은 하얀은괴가 아니다.
누르스름한 금빛!
'금괴.?'
크기는 작지만, 은과 금의 가치차이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
회귀하며 알아낸 것은 세 군데의 은괴 매설 지점이다.
세 명의 행정관이 관리하던.
'이건 놈만 아는 장소인가.
lkg 정도 되어 보이는 금괴들은, 놈 혼자만 아는 여기에 모아 놓고 있는 것 같았다.
'작긴 하지만 금괴만 세 개라니.
거기에 금화까지 잔뜩.'
크지 않은 도시의 경비대장을 하면서 저 정도 돈을 모으려면, 대체 무슨짓을 해야 할까?
절규가 되풀이되어 칠해지며 금괴크기를 늘려 갔을 것이다.
"어이."
"흐에에엑!"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경비대장이 칼을 뒤로 휘둘렀다.
추잡한 비명과 다르게 나름대로 깔끔한 일격이었지만, 내 수준과는 이미 너무 거리가 멀다.
'흡착.'
"이익! 이이익!"
단검에 달라붙은 녀석의 장검이 떨어지지 않았다.
'공포.'
[마스터의 영역 아래 있습니다.]
[〈복수〉중입니다.]
[스킬 효과가 15% 상승합니다.]
버둥거림이 멎었다.
녀석의 몸이 즉시 굳는다.
'이렇게까지?'
잠시 상황에 대해 고민하다 다시 구덩이를 덮었다.
"걸어."
등을 쿡 찔렀다.
굳어진 몸은 내 명령에 따라서만 움직인다.
이자가 공포에 질려 있다는 건 사실꽤 우스운 일이다.
어차피 죽을 거다.
뭘 해도 죽인다. 이렇게 바르르 떨까닭까지는 없다.
굳이 유블람에 찾아갈 것도 없이, 이렇게 바깥에서 처리할 수 있다니 의외의 소득이다.
- 끼긱! 끼기기긱!
놈을 데리고 거미굴 안쪽으로 들어가자 거미들이 배가 고픈 듯 덤벼들기 시작한다.
[마스터의 영역을 벗어났습니다.]
[증폭 효과가 사라집니다.]
'반경은. 이 정도인가.' 경비대장이 움찔거리며 흐끅대기 시작한다. 대충 거미들을 물리치며 안쪽으로 향했다.
우두머리에 먹일 생각이었다.
이놈 정도라면 우두머리에게 먹여야한다. 협곡을 지나 곧 거대한 거미와 마주쳤다.
- 키가아아악!
길이 4미터쯤 되는 거대한 거미가 보인다.
'언제 봐도. 꽤 빠른데?'
하지만 아무래도 이동 수단으로 쓰기에는 여러모로 무리가 있다.
'길들이는 건 차치하더라도.'
루비아와 함께할 때는 곤란하다.
이런 거미를 타자고 하면 심장에 마비가 오지 않을까.
대머리 경비대장이 살려 달라면서 곡꼭댄다.
물론, 새로운 금화 매립 장소를 알려준 걸로 녀석의 이번 삶은 제 역할을 다했다.
- 획!
빠르게 음직이는 웹슬링거에게 놈을 던졌다.
'회귀하면서 너무 많이 죽였지.'
던전을 지키고 가만히 있는 거미녀석을 몇 번이고 죽였다.
마음에 품고 있는 미안함이 있다.
먹이 한 번쯤은 줘도 괜찮을 거다.
- 좌르록!
웹슬링거는 꽁무니에서 하얀 실을 뽑아내어 녀석을 칭칭 감아 버린다.
공포인지 뭔지는 몰라도, 입까지 감긴 유블람 경비대장의 눈에서 탁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그때 였다.
- 키갸아아악!
웹슬링거가 나를 향해 달려든다.
"너, 지금.?"
먹이 하나를 확보했다고 달려드는 녀석의 모습이 황당하다.
"어딜."
- 콱!
배 부분에 경비대장의 칼을 꽂아놓았다. 거대한 몸집에 비해 작은 칼이었지만 손잡이가 반쯤 들어가도록 꽂아 넣자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거대한 대검 같은 열두 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느 것 하나로도 내 칼을 막지 못했다.
- 키갸악! 캬아악!
수십 개의 눈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어지럽게 돌아갔다. 배에서 새카만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상당한 크기의 상처이긴 하지만, 인간의 수십 배나 되는 부피로 봐생명에 위협은 없어 보인다.
- 키기긱!
고통에 차 비명을 지르던 거미는 어서 잊겠다는 듯 확보한 먹잇감을 향해 돌아갔다.
과 C
생생한 먹이를 진득하게 맛보며 고통과 두려움을 잊으려는 몸짓이었다.
촘촘한 이빨과 이빨이, 꽁꽁 묶인 유블람 경비대장의 머리 위로 느리게 닫혔다.
'이만 물러날까.'
이 정도면 흡족하다.
거미굴의 보스를 혼자 잡는다는, 무리한 짓을 하다 놈이 죽었다는 그림이 그려질 가능성이 크다.
이빨 많고 눈 많은 저 아이까지 같이 죽이면 너무 의심스럽다.
제3자의 개입이 느껴지니까.
상처 하나 정도면 됐다.
'이 아래는 바알의 제단이었나.
지금 괜히 뒤집을 생각은 없다.
여기서는 조용히 빠져나간다.
187화 오래된 친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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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트에서 워낙 황당한 일을 겪은 탓일까. 괜히 조금 긴장하며 거미굴바깥으로 나왔다.
물론 동굴 밖에는 아무도 없다.
다시 금화 상자를 묻어 둔 곳으로 걸어간 뒤 뚜껑을 열었다.
다른 세 곳의 은괴들을 전부 합한 수준이다.
이렇게 돈을 끌어모아 뭘 하려고 했을까 싶다.
상자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안쪽에 무언가가 들어 있다.
'카드?'
상자 바닥에 새카만 카드 한 장이 보였다.
카드 위에는 오각별 하나와 함께 새하얀 글씨가 쓰여 있었다.
〈흔들리는 세상, 당신을 위한 철제침대를 마련하세요. 〉카드를 손으로 더듬었다. 오돌토돌한 재질이 느껴진다.
본 적이 있는 카드였다. 그라스미어에 방문했을 때, 진네이 유베라는 상인에게 받았던 카드다.
문구도 디자인도 같다.
그때를 회상했다.
〈내가 속한 길드의 소개장이오.
고객의 바람을 어떻게든 해결해주려는 훌륭한 상인들의 모임이지. 〉〈별 하나로는 효력이 없어서. 그별 다섯 개를 모으시면, 그때부터 우리 고객이 되실 수 있소. 〉
'별 하나.
유블람의 대머리 경비대장도 그수상한 '상인 모임'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악착같이 돈을 모아서 상인 연합회원권을 사려고 했던 걸까?
카드를 품에 챙기고 금화 상자를 들었다. 모아 놓으면 어딘가 쓸모있을지도 모른다.
상인 연합에 속한 진네이 유베는 믿을 만한 인간으로 보였으니까.
그라스미어에 머무르고 있으면 또만나게 될 가능성도 있다.
그에게 같은 카드를 받으면 가진 '별'은 두 개가 된다.
나무 위에서 기다리고 있던 루비아를 데리고 유블람으로 들어갔다.
이제 제법 익숙한 도시의 회색 성벽이 보인다. 성 앞에 넓게 펼쳐진 눈 덮인 밀밭을 지났다.
예전에 이곳으로 왔을 때와는 느껴지는 감회가 사뭇 다르다.
유블람은 더 이상 낯선 장소가
아니다. 뒷골목을 한차례 깊숙하게 누벼 본 데다 루비아를 저기에 혼자 보내지도 않을 거다.
은신으로 몸을 숨긴 채 루비아를 따라 들어갔다.
= 나는 이제 안 보일 거다. 말은 이렇게.
[은신 능력이 30% 상승합니다.]
반투명한 창이 허공에 떠올랐다.
은신 스킬이 한층 더 강화된다는 메시지였다. 다시 봐도 놀라웠다.
하지만 티내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루비아에게 〈의사소통〉에 대해 교육했다.
어느 부분에서 어떻게 놀라는지 이미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를 교육시키는 일은 예전보다는 조금 더 빠르게 이루어 졌다.
'아무리 봐도 재능이 있다니까.
루비아와 나는 경비병들을 향해느긋하게 다가갔다.
- 두근.
탐지 스킬을 쓰자, 경비병들의 목근처 경동맥이 뛰는 소리까지 생생하게 들렸다.
예전에는 멀리 풀숲에 숨었다.
맞지도 않을 거리에서, 맞히지도 못할 실력으로 어설프게 석궁이나 겨누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혀 다르다.
바로 뒤에서 단검으로 목을 그을 수 있는 거리다.
비명도 못 지르고 절명할 거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고, 한차례 경련하면서 그대로 숨어끊어지리라.
허튼짓을 한다면.
하지만 경비병들은 루비아를 보고 농담조차 건네지 않았다.
그저 귀찮다는 듯이 손짓을 했다.
"어. 들어가려면 들어가쇼."
허무할 정도로 쉽게 그녀를 성문안으로 들여보냈다.
별 수상한 점은 느껴지지 않는다.
레나와 들어올 때도 별 특이점은 없던 녀석들이다.
이상한 점이라면 오히려 너무나간단히 검문을 마친다는 것.
여행자가 이 도시에서 무슨 일을 당하든 알 바 아니라는 방관자적태도인지도 모른다.
- 끼이익.
열린 성문 안으로 루비아가 들어갔을 때였다.
"여기가 유블람이구나.
루비아가 작게 중얼거리며 거리를 걸어갔다. 별거 아닌 거리를 생경한 듯 두리번거리는 모습이었다.
어지간히 평생을 책만 읽으면서 살아왔구나 싶었다.
어디로 가라는 둥 참견하지 않고 가만히 그녀를 내버려 뒀다.
처음 이 도시에 왔을 때 루비아는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어떤 것들이 엮여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다고 생각할 때였다.
무척 피곤해 보이는 뚱뚱한 중년여인이 루비아에게 말을 걸었다.
"아가씨, 혼자 왔어요?"
"그런. 데요?"
수상한 녀석일지도 모른다.
여기서부터 납치가 시작되는 건가 싶어 칼을 뽑고 몸을 긴장시켰다.
하지만 푸석푸석한 얼굴의 여자는 가볍게 한숨만 뱉을 뿐이었다.
"후.
"왜 그러세요?"
"그대로 뒤를 돌아요. 자연스럽게 도시 바깥으로 나가도록 하세요. 여긴외지인이 올 곳이 아니거든."
'뭐라고?' 루비아를 걱정해 주는 인간이 나타났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전에도 이뚱뚱한 여자가 나타났을까?
같은 경고를 들었을까.
"뭐 때문에 그러시는데요?."
"아가씨, 그냥 내 말 들어. 밖으로 나가야 된다니까."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하지만 꼭 사야 하는 물건이 있어서요."
루비아가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오래 말 못 나눠. 빨리빨리 나가요. 난 분명히 경고했어."
주위를 슬쩍 둘러보던 여인은 곧뒷골목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 경고를 들었는데. 이제 밖으로 나갈 생각인가.
루비아를 슬쩍 떠봤다.
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 그럴 리가요! 혼자가 아니잖아요.
무슨 일이 생겨도 절 지켜 주실 건데 제가 왜 도망치나요? 갑옷 사러가야죠.
- 해골님.?
나는 알고 있다. 루비아는 혼자 들어왔더라도 도시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무언가 양쪽에서 마음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경고를 듣고도.
내게 갑옷을 사 주고 싶은 마음에 여기 남았다가, 그런 비참한 일을 당한 것이다.
자괴와 비탄이 뼈 사이로 모래알처럼 흘러내렸다.
무슨 일 있냐고 묻는 루비아에게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천천히 거리를 걷던 그녀가 문득 나에게 말을 건넸다.
- 거리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요.
= 아편이다.
- 아편이요? 와. 생각해 보니까 그렇네요. 이렇게 옅은 달달한 향이라고 책에서 읽었어요.
- 정말 모르는 게 없으시네요. 해골님은 아무래도 전생에 엄청난 분이셨을 것 같아요!
전생에 루비아를 지켜 주지 못한게 생각나서 할 말을 잃고 가만히 있었다. 루비아는 잠시 침묵하더니 앞쪽을 가리켰다.
- 저기 있어요. 대장간.
그녀의 말대로였다.
바로 앞에서 깡깡거리며 망치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얼굴의 노인이 보였다.
'또 만났군.'
아편에 중독되지 않은 눈동자와 흰수염을 가진 노인이었다.
레나와 함께 왔을 때, 우리들을 한 차례 유심히 훑어봤던 자.
〈불〉을 우리에게 건네줬던 노인이 망치를 두드리는 대장장이 근처에 서서 작업을 감독하고 있었다.
루비아가 대장간 진열대 근처로 다가갔다. 흰 수염 노인이 슬며시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뭘 사러 왔소?"
"갑옷 좀 보여 주실래요?"
그녀가 암살당한 에라스트 영주의 딸인 걸 아는지 모르는지, 노인은 꽤 호의적이었다.
"이쪽으로 오시겠소?"
그가 하나씩 물건을 소개했다.
'이건가.,
진열장에 있는 것 중에 루비아가 샀던 갑옷을 곧 알아봤다.
오래 입은 갑옷이라 손쉽게 알아볼수 있었다.
"이게 딱 맞겠는데요?"
어김없었다.
그녀는 그 갑옷을 골랐다.
"크음. 비싼 건데 괜찮으시겠소.
나름의 역작이라서. 이 정도 되는 물건은 어디서 구하기 힘들 거요."
"얼마인데요?"
돈은 넉넉하다. 아무리 비싸 봐야 은괴 하나만 족하다.
"홈.
머뭇거리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아가씨에게서 묘한 기운이 느껴지는군. 누군가가 당신을 지켜 주는것 같아."
"그래요?"
확실히 감이 좋은 노인이다. 저번생에도 갑옷 안에 들어 있는 내정체를 알아챘다.
'〈불〉을 만들어 낼 정도의 대장장이라는 건가.
"얼마에요?"
"150로티만 받지."
150이라면.
내가 처음 루비아를 만났을 때 준금액은 72로티다.
전혀 액수가 맞질 않는다.
'그때는 어떻게 샀던 거지?'
당황하고 있는 사이에, 루비아가 품에서 지갑을 꺼냈다.
"주세요."
처음 보는 지갑이었다.
= .은괴를 내놓으면 넉넉할 텐데.
- 아니에요. 제가 억지로. 관에서 일으켰는데 제가 사야죠.
당황스러운 논리다.
- 여기선 제가 살게요. 앞으로 잘부탁드려요.
과거가 떠올라 부끄러워졌다.
생각해 보면 눈앞에 놓인 갑옷은 이음새가 몹시 좋다. 72로티라는 돈으로 구할 정도는 아니다.
200, 300을 불러도.
이상하지 않다.
'저번에도 자기가 샀던 건가.
생각해 보면 그녀 역시 영주의 딸.
에라스트에서 탈출하면서 비상금한 푼 갖지 않고 나왔을 리 없다.
그리고 그 비상금을 나를 위해서 아낌없이 사용한 거다.
"단검은 서비스로 주도록 하지. 품에 잘 안고 있도록 하게나.
'몸을 조심하라는 건가.'
- 좋은 걸 싸게 산 것 같아요!
루비아가 기뻐했다.
- 당장 입혀 드리고 싶은데
= 여관에서 입자고.
노인을 흘끗 돌아보았다.
'날 한 번 죽였었지.
〈불〉을 건네주며 일부러 사용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루비아에게 잘해 주는 모습을 보자 한 번 정도는 봐줄까 싶었다.
그때 였다.
'저건?'
철로 된 작은 검은색 통이 선반한구석에 놓여 있는 게 보였다.
그라스미어의 불이다.
'집이 아니라. 여기에 보관하고 있는 건가.'
가게에 있을 때는 가게에, 집에 있을 때는 집에 보관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혹은 두 통을 가지고 있을지도.
어쨌거나 이건 압수다.
노인이 루비아를 보고 사람 좋은 척 웃음을 짓고 있을 때, 스리슬쩍흑철로 된 분사기를 빼돌렸다.
찰랑거 리는 감각이 틀림없었다.
'적당히 희석해서 써야겠군.'
가져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3층짜리 흰 건물 앞에 멈춰섰다.
- 여관이. 여기 하나래요.
- 무슨 일 있으세요?
= 아니. 들어가지.
삐그덕, 하는 소리와 함께 여관 문이 다시 열렸다. 루비아가 혼자 들어갔던 여관이다.
레나와 올 때에는 주인이 바뀌어있었고, 루비아가 죽은 뒤로 한참 지났다.
지금은 루비아가 살해당했던 바로 그 시점.
성불구자인 여관 주인이 손님들을 팔아먹던 바로 그 시점이다.
"어이구, 반갑습니다. 어서 오십쇼, 손님. 짐은 제가 다 들어 드리겠습니다요."
유블람에서 두 번째 보는 익숙한얼굴.
여관 주인이다.
그는 말끔한 얼굴을 하고 있다.
심한 멍도 들어 있지 않고, 귀에서 진득한 핏물도 흘러내리지 않는다.
살갑게 웃으면서 손님을 맞는다.
"아, 괜찮은데.
루비아가 갑옷을 안고 돌아선다.
그 순간 여관 주인의 눈이 뱀처럼 번뜩인다.
차갑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시선이 섬뜩할 정도다.
'이런. 시선을 받으면서 여관에 들어왔단 말인가.'
"어휴, 손님. 마침 방이 딱 하나남았습니다요. 이리 오십시오."
'탐지.' 물론 거짓말이었다. 3층 건물의 방은 전부 다 비어 있었다.
그리고.
레나와 함께 올 때에는, 어렴풋이 밖에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명확하다. 지하에 꽤 큰 공간이 있는 게 느껴진다.
'이번에는 꼭 확인해야겠군.'
188화 오래된 친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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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골님, 따라갈까요?
= 일단은.
자초지종을 파악할 시간이다.
"부디 푹 쉬십시오."
여관 주인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알고 봐서 그런 건지도 모르지만, 파국을 맞이할 먹잇감을 바라보는 시선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납치범들이 곧 접근할 거다.
낮에 대놓고 쳐들어올지.
한밤중에 몰래 쳐들어올지는 알지 못한다. 경계는 늦출 수 없다.
[탐지 Lv. 7을 활성화합니다!]
[심안心眼(C+) 적용!]
'여기인가.' 푹신해 보이는 큰 침대 옆.
멀쩡해 보이는 벽 안쪽이 챙 뚫려있는 게 느껴진다.
단순히 빈 공간이 아니다.
인간 두 명 정도가 들어올 만한 길고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다.
비밀 통로다.
'식사도 쓰레기 같군.'
보기만 해도 안다.
같은 여관인데도 불구하고.
레나와 함께 왔을 때와 사뭇 비교되는 식사가 내어져 나온다.
여관에 손님이 없는 이유를 알 것 같은 구성이었다.
그런데도 루비아는 허겁지겁 식사를하기 바빴다.
초라한 음식들이 빠르게 사라지는 모습을 보니 놀라웠다.
- 꿀꺽.
루비아가 물을 한 모금 들이마시고는 내 쪽을 보며 웃었다.
"하아?. 살았네요. 그런데.
"그런데?"
"왜 이렇게 졸.
루비아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갑자기 휘청거리며 쓰러졌다.
가물거리던 눈이 그대로 확 풀려버렸다.
의식을 잃고 벌어진 입에서 열은 숨이 새어 나왔다. 순식간에 의식을 잃고 잠들어 버린 것이다.
'이런.,
맥박부터 확인했다.
절명은 아니다. 심장이 빨리 뛰는것도 아니다.
'수면제인가.
아찔한 기분이 든다.
수면제가 아니라 독약이었다면
어땠을까. 허무하게 루비아가 죽는 꼴을 봐야 했을 거다. 강해졌다고 방만하게 생각한 건지도 모른다.
'독 감지하는 능력도 필요하겠군.'
어쨌건, 당장 루비아가 잠든 게 나쁜일은 아니다.
지금 재운 걸로 봐서.
'이제 들어오겠지.'
내가 상황을 정리할 동안 그녀는 푹 자고 있으면 된다.
무릎에 파묻은 루비아의 머리를 슬쩍들었다. 머리를 조금 높게 해 비스듬히 침대에 눕혔다.
적어도 표정은 편안해 보인다.
다시 벽을 살피기 시작했다.
비밀 통로의 손잡이로 쓸 만한 게 보인다.
- 드르륵.
잘 보이지 않는 틈을 벌려 옆으로 밀었다. 뻥 뚫린 통로가 안쪽에 휑하니 드러난다.
꽤나 공을 들인 통로다.
인간들이 여기 한두 번 다녀간 게 아닌 듯하다.
은신 상태를 유지한 채 다시 벽을 닫는다. 가만히 안에서 기다렸다. 당장 올라오지는 않는다.
'여관 주인이 보고하는 건가.'
사냥감을 재웠다고.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인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야, 이거 올 때마다 불편한데. 그냥정면으로 들어가면 안 되냐?"
"재밌잖아. 마스터키로 문 따고 들어가면 그게 뭐가 재밌어? 상상못 한 곳에서 나타나야 재밌지, "
"약으로 다 재워 놓는 거 아니야?
약효가 돌 동안은 어차피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도 못할 텐데."
"그래도 말이지. 기어올라서 짠!
하고 나타나는 거랑. 계단으로 터벅터벅 걸어서 문 여는 거랑. 기분이 다르잖아. 어떤 야생성. 사냥. 그런 짜릿함이 있어야지."
수면제에 잠든 상황에서 세 명의 경비병이 자신을 납치한다. 반항할수 있을 리가 없다.
의식도 없는 상황에서, 내 갑옷을 사러 유블람에 들어왔던 루비아가 끌려갔던 거다.
분노가 올라온다.
물론 눈앞의 이들은 아직 그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하지만 정당하든 정당하지 않든, 분노를 매번 풀어낼 생각이다.
더도 덜도 없다.
이들의 생은 항상 여기까지다.
껑껑거리며 올라오는 경비들에게 바로 스킬을 사용했다.
'공포.'
"어? 몸이. 모. 몸이 안. 안움직여.
실체 없는 공포에 세 명의 몸이 전부 굳어 버렸다.
모두 익숙한 얼굴이다.
한 번씩 죽인 얼굴이기도 하다.
루비아의 시체를 찾던 녀석도 이가운데에 있다.
이미 저번 생에 경비대 전체를
가볍게 몰살시켰다.
개개인은 당연히 내 상대가 되지 않는다. 모든 능력치에서 압도적으로 차이가 난다.
먼저 한 대쯤 맞아 주려고 해도 맞아 줄 수가 없고, 피해를 입으려해도 입을 수가 없다.
- 철컥.
갑옷을 입고 코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한층 더 강렬해진 공포에 눈만 낌렉이면서 말도 하지 못한다. 입은 벌린 채 그대로다.
"에. 에. 히.
목구멍에서 메아리 같은 소리만 내면서 딱딱하게 굳어져 있다.
내가 처음 동굴 밖에서 레안드로 후작을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그때의 나와 후작의 정도.
그 정도가 아마 이들과 내 힘의 차이가 될 것 같다.
"아, 해 봐."
"아, 아, 아.
- 콰득.
흑색 철통을 맨 앞에 선 남자의 입에 처넣었다.
사냥을 운운하던 녀석은 루비아의 시체를 찾아가던 바로 그자다.
자꾸 입을 벌리면 뭔가를 처넣어줄 수밖에 없다.
마침 잘 타는〈불〉을 가졌다.
"읍. 윽. 히윽.
뭐라는 건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유언을 남기는 건지도 모른다.
물론 알고 싶은 생각도 없다.
"너흰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
입에 흑색 발화기가 꽂힌 놈과, 다른 녀석 두 명이 일제히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다.
사실 그저 경련에 가까운 음직이지만, 굳어 있는 몸으로 저 정도 움직이는건 정말 필사적으로 끄덕거리는 거다.
수면제를 먹고 쓰러진 루비아를 '사냥'하러 가다 이런 꼴을 당했으면서도, 세상없이 억울하다는 듯 탁한 눈물을 뚝뚝 홀리고 있다.
"그게 너희 문제다."
- 화르륵!
〈불〉이 앞장선 남자의 입안으로 뿜어졌다.
불은 혀를 태우고 목젖을, 길게 뻗은 식도를, 폐를, 위와 장을 모두 태우고 가슴과 팔다리로 번졌다.
남자는 충격적인 공포와 고통에 굳어몸부림도 제대로 치지 못하고 재가 되어 절명했다.
불꽃에 먹혀 버린 비명이 진회색재가 되어 입 밖으로 흩날렸다.
첫눈이 생각나는 모습이었다.
툭.
안쪽에서 타 버린 몸을 건드리자 곳곳에 금이 생겨나며, 경비병은 다리부터 머리끝까지 허물어졌다.
"다음."
세 남자의 발화發火가 끝났다.
한때 살아 꿈틀대는 인간이었던 것들이 하얀 재가 되어 흩어졌다.
뼈와 거죽이 모두 없었던 것처럼 되어 버렸다.
거죽 안에 가득 차 있던 욕망들도 이제는 조용한 침묵이 되어 있다.
깔끔해졌다.
몸에 묻은 재를 툭툭 털고 다시 방 안으로 돌아갔다.
"흐으음.
루비아가 더운 듯 몸을 뒤척인다.
'이제 안심인가.' 적어도 이제 벽 안쪽에서 타 버린 경비들에게 당할 일은 없어졌다.
물론 식도에 발화기를 쑤셔 넣고 장기를 다 태우는 것보다 고상하고 우아한 방법도 많이 있을 거다.
교화라거나, 교정이라거나 하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인신매매와 납치 고문을 즐기는 자들이지만 향후 마음을 고쳐먹을 가능성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물론 내 알 바 아니다.
이제 아래쪽을 확인할 때다.
마침 여관 주인이 천천히 계단을 올라오는 게 느껴진다.
상황을 엿들으려는 듯 그가 문에 귀를 가져다 댄다.
나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아도 탐지 스킬로 모든 걸 파악한다.
"궁금한가?"
- 끼이익.
그대로 방문을 열어 줬다.
"어엇.? 엇?"
호기심과 욕구로 반짝이는 눈빛이 의아함에 젖는다.
'이자는 대체 누구지?'
'다른 경비병들은?'
하고 싶은 말들이 쉽게 읽힌다.
소리를 지르기 전에 공포 스킬로 목을 굳혔다. 꺽꺽거리는 소리만 간헐적으로 새어 나왔다.
"히끅, 21, 끄헉!"
'확실히 그때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군.
방앗간 근처에 있는 녀석의 집에 갔을 때가 떠오른다.
지금은 꽤나 깔끔한 모양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남자도 역시 고문을 당하고 버려지게 된다.
그 전에 죽여 주는 것도 꽤 관대한 일일지도 모른다.
"내려가지."
"ㅇ 아으. 아으아."
심장이 몇을까 봐 다른 녀석들보다약간 더 약하게 스킬을 썼다.
"지하실로."
내 말에 그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려 한다. 혀를 깨물려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차피 다불가능하다.
완전히 뻣뻣해진 상태다.
크라켄에게 공포를 흡수할 때는 이걸어디에 써먹을까 싶었는데, 실제활용도는 압도적이다.
별도 레벨 업 없이도.
상대와 내 능력 차에 따라 효과가 커진다는 것도 무척 편리하다.
"열쇠."
여관 주인이 바들거리며 덜덜덜 떠는 손을 내민다.
손끝에 걸린 지하실 열쇠를 받아비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죽는 길인 줄 알면서 억지로 가게하는 게 공포 스킬의 효과다.
- 덜컹.
지하실 안쪽은 꽤 넓었다.
그리고 각양각색의 형벌 기구들이 사방에 깔려 있었다.
물론 이따위 지하실이 제국 특별법원일 리는 없다.
참회의 여신 예메라의〈정화소〉일가능성도 없다.
여기는 그냥 납치한 여행객들을 나긋나긋하게 만들기 위한 착실한 고문 장소다.
잡아 늘이거나 관절을 탈구시키는 장치들이 보였다.
날카로운 것, 휘두르는 것, 잡아찢고 벌리는 것들이 있었다.
신체를 기괴하게 구속하는 장치가 많았다.
기구들은 다음 사용을 위해서인지 깔끔히 청소되어 있었다.
하지만 짙게 배인 고통과 절망의 비린내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 쿵.
다시 지하실 문을 닫았다.
자백을 받기 위해 공포를 풀었다.
여관 주인이 바들바들 떨면서 살려달라는 말은 되풀이한다.
비명은 지르지 않는다.
지하실 벽은 무척 두꺼웠고, 모든 면에 촘촘하게 방음재가 붙었다.
누구보다 그걸 잘 알고 있는 둣, 여관 주인은 부들부들 떨면서 고분고분하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 이것들, 이것들은 제가 쓴 게 아닙니다! 저는 정리만 했습니다!"
"그만."
나는 손을 든다.
장황하게 이야기를 들을 생각은 전혀없다. 진실을 말하든 거짓을 말하든 관심도 없다.
어차피 할 일은 정해져 있다.
나는 놈에게 종이 한 장과 펜을 던졌다.
"써라."
"무,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그동안 잘못한 거 다 적어."
"그, 제가 그러면.!"
"살해당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트읍, 하고 그가 격렬하게 숨을 들이쉰다.
"으으으. 정말로.!"
"그래."
희망을 주는 일은 중요하다.
어차피 그에게 선택지는 없다.
차가운 칼날이 내장을 길게 늘어뜨릴준비를 하고 파랗게 빛나고 있다.
"쓰겠습니다! 쓰겠습니다.!"
이런 반응이 당연하다.
수면제를 타서 먹여 왔고, 고문 장소를 제공했다는 내용이 세세히 종이 위에 적히기 시작했다.
횟수는 백 회가 조금 넘는다.
그런 대규모 납치를 어떻게 무마했는지 놀랍다.
인간 사회는 얼핏 체계가 잡힌 것 같으면서도, 터무니없이 시꺼멓고 커다란 구멍들이 자리하고 있다.
'자세히도 쓰는군.
여관 주인은 자세하게 내역 하나하나를 기재했다.
적어도 쓰고 있는 그 시간만큼은 살 수 있기에 그런 건지도 모른다.
'어차피 마지막 문장은 뻔한데.'
빼곡하게 종이 앞뒤를 채워 가던 여관 주인이 손을 파르르 멸었다.
"다. 썼습니다."
"그럼 받아 적어. 이로써. 저는, 죄책감에."
- 사각. 사가각.
"모든 범죄 사실을 공표하고."
- 사각.
깃털펜이 빠르게 움직인다.
"자살합니다."
관성적으로 움직이던 여관 주인의 손이 자살, 에서 멈췄다.
"야, 약속, 약속이 다르지 않.!"
"살해당하는 거 아니잖나. 자살당하는 거지."
'공포.' 굳은 손을 잡고 움직였다. 마지막문장을 완성시킨다.
"그럼. 자살해라."
"끅! 끄흐흑!"
놈의 겉옷을 죽죽 찢어 묶은 뒤, 한 가닥 줄로 두 번 감아 허공에 목을 매달았다.
피눈물을 홀리며 버둥거리는 놈을 보면서 할 일을 마친다.
주머니에 그가 쓴 유서와 그라스미어의 불을 넣어 주었다.
흑철의 발화기.
아직 꽤 남았다. 이대로 버리면 조금아깝기는 하다.
하지만 다른 인간들을 납득시키기 위해, 공범을 살해한 도구 정도는 시체가 갖고 있어야 한다.
'일단 가 볼까.
태워 죽인 자들은 공교롭게도 수레를 끌던 딱 그 무리다.
이 사건이 반복된다면.
다음에도 비슷하게 처리하고 여길떠나면 될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
- 띠링!
오랜만에 들리는 효과음과 함께, 허공에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퀘스트가 갱신되었습니다!]
[네크론 신사회에 대한 정보가 추가 되었습니다.]
- 놀랍군요! '두 가지 상태'의 여관주인을 모두 심문하셨습니다.
- 스팟 등록: '교육' 장소인 여관지하실을 직접 방문하셨습니다.
[퀘스트 진행 보상]
[심문 Lv. 1을 획득합니다!]
- 패시브 스킬입니다.
- 고통을 가할 때, 상대방으로부터 진실을 들을 확률이 미약하게 상승합니다.
'이런 게 있었나.'
[속성: 사형私刑을 획득합니다.]
- '당신이 내리는 천벌天罰'- 카르마 수치 ? 이하의 존재들을 의도적으로 살해하는 중입니다.
- 사형私刑을 계속 집행할 경우, 미약한 확률로 다음 여신의 축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1. 빛의 여신 일리엔
2. 참회의 여신 예메라
3. 불의 여신 비르폰
'장난하나.'
빼곡이 떠오른 상태창을 보고 든생각이었다.
189화 오래된 친구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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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축복이라니.'
속으로 피식 웃었다.
농담에도 정도가 있다.
이제 와서 내가 무슨 신의 축복을 얻는다는 거냐.
카르마 수치라는 것도 우습다.
여신이라는 것들은 인간을 이렇게 재단하는 걸까.
마왕들에게 인류가 짓이겨질 때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것들이면서.
인간들에게 섬김을 받는 그녀들이 마물魔物인 내게 축복을 내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다.
어쨌거나.
오랜만에 뜨는 네크론 퀘스트는 꽤 반가웠다.
심문이라는 패시브 스킬도 생겼다.
고통을 가하면 진실을 들을 확률이 늘어난다는 우스꽝스러운 스킬이다.
하지만 유용성만큼은 확실하다.
고통을 가할 상대들도 많고 들을 이야기도 많다.
악의와 뒤틀린 정욕으로 가득 찬지하실을 한 번 더 둘러본 뒤, 문을 열고 1층으로 올라갔다.
여관 주인의 유서에 위치가 기록된수면제를 확보했다.
모두 가루 형태.
물에 타고 빵에 뿌리는 방식으로 쓴 모양.
발견하기 쉽게 여기저기 흩뿌렸다.
여관 주인과 세 경비들의 죽음을 인간들에게 납득시키는 과정이다.
에라스트에서 한 번 당한 뒤로는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고 느껴진다.
방으로 올라가자, 루비아는 마치 겨울잠에라도 든 것처럼 세상없이 자고 있었다.
역시 단순한 수면제인 모양이다.
맥박은 평온하다. 탐지를 활성화한 상태로 빠르게 시간이 홀러갔다.
경비대가 여관에 쳐들어오면 모두 죽여야 할까? 아니면 그녀를 안고 다른 곳으로 도망쳐야 할까.
다행히 선택할 필요는 없었다.
≪으으음. w
루비아가 작은 신음 소리를 냈다.
천천히 눈을 떴다.
"저. 어떻게. 된 거죠?"
나는 아무렇게나 대꾸했다.
"많이 피곤했나 보지."
"그래도. 저 설마, 밥 먹다 잠든 거예요?"
- 달그락.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루비아가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푹아래로 숙인다.
얼굴이 살짝 달아올라 있다.
"얼마나. 잤어요?"
"별로 오래 안 잤어."
"하지만 아까는 아침이었는데.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다섯 시간 정도."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흘러간지는, 가만히 곁에 있던 나도 몰랐다.
〈서번트 시스템〉의 능간 같은 게 아니었을까 싶다.
"더 자도 되는데."
"아, 아니에요!"
루비아는 눈을 수줍게 깔았다가, 다시 나를 바라봤다.
"혹시 무슨 일 있었나요?"
"아무 일도."
방으로 몰래 들어오려는 경비 셋을 살해한 뒤에도 별일은 없었다.
경비대장이 있었다면 대처가 좀달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금화 상자와 함께 오각별이 새겨진 '카드' 한 장을 남긴 그는, 이미 거대 거미의 뱃속에서 잘 소화되었을 거다.
'꽤 꼭꼭 씹던데.
금방 소화되었으리라.
당장 내일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거리 곳곳에서 달달한 아편냄새가 풍겨 오지만.
유블람은 평안하다. 적어도 지금의 나와 그녀에게는 그렇다.
"옷이나 사러 가지."
루비아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옷. 이요?"
고개를 끄덕였다. 흙은 털어 냈지만, 산에서 도망치느라 곳곳이 험하게 찢긴 스커트가 눈에 들어온다.
"갑옷은 네가 샀으니까."
"허리는 남는데. 가슴이 너무 꽉끼네요."
옷가게 주인이 옷을 갈아입고 나온루비아를 보며 말했다.
"이걸 입으셔야 될까.
"아니야. 이것도 가슴이 너무 꽉끼겠는데요."
- 저
루비아가 빨개진 얼굴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 뭐지?
- 밖에서. 기다려 주실래요?
왜 가라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가게 밖으로 슬쩍 빠져나갔다.
삼십 분이 지났다.
'도대체 뭘 얼마나 사는 걸까?'
한 시간이 지났다.
가게를 그냥 다 사 버리려는 걸까?
옷 사라며 은괴 하나를 건네줬다.
혹시 그 금액을 맞춰서 다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그래도 상관은 없지만.'
다시 한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와. 정말 잘 어울리시네! 이게 딱이야! 딱!"
그녀가 호들갑을 떠는 점원과 함께 바깥으로 나왔다. 얼굴이 약간 상기 되어 있었다.
이상하다.
전혀 지친 것 같지가 않다.
나는 반사적으로 루비아의 스탯을 확인했다.
'체력이.
분명히 낮다.
스탯에는 변동이 없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저 긴 시간을 옷을 고르며 버틸 수 있었던 걸까.
- 저. 괜찮나요?
루비아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회색 로브 대신, 흑백 무늬의 편한 활동복을 입은 그녀의 모습은 확실히 색다르다.
살짝 묶은 진흥색 띠가 잘록한
허리를 부각시키고 전체적인 균형을 잡아 주고 있었다.
움직이기 편하게 머리를 고정한 장신구도 잘 어울렸고, 옷 곳곳에 있는 무늬들도 훌륭하다.
하지만 조금 이상한 게 있었다.
두 시간이 넘게 기다렸는데.
왜인지 그녀의 양손이 텅 비어
있었다.
= 설마 한 벌을 산 건가? 두 시간동안?
- 어. 한 벌 더 사야. 하나요?
이거 안 어울려요? 그럼 다시.
루비아가 섬뜩한 소리를 뱉어 냈다.
나는 당황해서 급히 수습했다.
= 아니. 그러니까, 지금 옷이 딱좋은 거 같아서. 진심이다.
- 정말요? 감사합니다! 전부 해골님덕분이에요! 정말 마음에 드는 옷을 고를 수 있었다니까요.!
'큰일 날 뻔했군-
활동복을 입은 루비아는 한층 더가벼운 발걸음으로 길을 걸어갔다.
처음부터 신발도 훨씬 걷기 편한 걸로 맞춘 상태였다.
"같이. 산을 걸으니까 좋네요!"
누가 본다면 미친 여자가 혼자 중얼거리는 것처럼 보일 거다.
물론 주위에는 아무도 없지만.
내 탐지 스킬은, 비활성화 상태에서도 반경 30미터 정도는 언제나파악하고 있다.
"그라스미어에 가는 거죠?"
"어딜 좀 들렀다가."
"좋아요. 모닥불 피우고 야영해도 될까요? 아니, 겨울에 불을 피우면 위험하니까.
루비아가 혼자 신나서 중얼거린다.
"야영은 없어. 위쪽에 산장이 있다.
거기서 잔다."
"와! 산장까지.!"
그녀의 눈이 초롱초롱 빛난다.
'산장.'
물론 캠프 기분을 내기 위해 가는건 아니다. 그곳에서 캐빈 애슈턴의 책을 확인해야 한다.
단순히 지혜가 1 오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번 생에 그 책이 무언가 '다른' 걸 보여 주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캐빈 애슈턴.
죽음을 거듭할수록 점점 더 신경쓰이는 이름이다.
〈등불〉달리아크에서는 아예 캐빈애슈턴에 관한 정보 제공을 단칼에 거부했다.
레안드로 후작에 관해 기사를 쓴, 제국 황색지 발행인의 이름도 캐빈애슈턴이었다. 흔적을 따라가 볼가치는 충분히 있다.
한참을 걸어갈 때였다.
"어? 늑대 울음. 아니, 신음 소리같은 게 들려요!"
- 크르릉.
루비아가 조금 더 잘 들으려는 듯 귀에 손을 가져다 댔다.
물론, 나는 이미 한참 전부터 그신음 소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이 길을 선택한 또 다른 이유 중하나다.
"저기! 저기!"
루비아가 앞쪽을 가리켰다.
눈처럼 새하얀 털의 늑대가 한쪽앞발을 뻗은 채 바짝 엎드려 있다.
시커먼 덫에 당해 고통스러운 듯 쌕쌕거리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다.
〈하루〉를 더 굶어서일까.
예전에 봤을 때보다도 더 힘없이 축 쳐져 있다.
내가 함정을 망가뜨리지 않은 미래에서, 트롤을 잡은 사냥꾼들은 새끼늑대 따위는 무시했으리라.
'죽이지도, 풀어 주지도 않은 채로 그냥 방치한 건가.
그렇게 굶어 죽었을 거라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밀려온다.
"크르르.! 크르. 르.
제대로 짖을 힘도 없어 보인다.
녀석이 버둥거리거나 경계할 틈도 없이 빠르게 접근했다.
- 철컥!
강력 스프링으로, 꽉 물린 쇠덫을 손가락 두 개로 풀어 버렸다.
"크. 크으응?"
새파란 눈을 깜빡이면서 날 올려다보는 녀석을 몇 번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갈기의 느낌이 좋다.
"왜? 상황 파악이 안 돼?"
- 꾸득! 꾸드득!
푼 덫을 손가락뼈 두 개로 아무렇게나 접었다.
한 번을 접고, 다시 두 번을 접자 덫으로서의 기능은 물론이고 외형이 엉망이 되어 버린다.
"와아.
어느새 따라온 루비아가 곁에 서서 두 손을 모으고 감탄하고 있다.
늑대를 구해 준 게 마음에 들었던 건지, 우습게도 호감도가 올랐다는 메시지가 떠오른다.
수통에 담긴 물에다 육포를 적셔먹이자, 작은 주둥이를 오물거리며 귀를 종긋 움직인다.
"귀엽네요."
루비아가 옆에 서서 가만히 늑대를 구경하고 있었다.
"이제 이런 데 걸리지 말고.
다 먹은 녀석의 엉덩이를 손으로 톡 두드렸다. 밤톨이가 움찔거리며 숲 쪽으로 튀어 가기 시작했다.
함께할 생각은 없다.
하얀 털을 가진 고고한 늑대답게 산에서 혼자 잘 살아가길 바란다.
가던 녀석이 흘끗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냄새라도 기억하려는 것처럼 몇 차례 쿵쿵거린 뒤 멀어진다.
"혹시. 구면이세요?"
너무 자연스럽게, 늑대와 대화하는 내 모습이 의아했던 걸까.
루비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글쎄. 가자고."
하얗게 쌓인 눈 위에는 아직 녹색핏자국이 많이 남아 있었다.
끊어진 철사와 부러진 나뭇가지가 곳곳에 보인다.
"사냥의 흔적이군."
"사냥이요? 트롤이 죽은 건가요?"
조금 놀라서 루비아를 돌아봤다.
"어떻게 알았지?"
"책에서 읽었어요. 초록색 피를 가지고, 함정에 걸린 상태에서. 이정도 난동을 피울 만한 몬스터라면 설원 트롤 아니에요?"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 트롤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루비아는 공포에 질려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갖고 있는 지식은 분명히 거짓은 아니다.
"맞아. 잘 알고 있군."
"감사합니다! 저, 제가 해골님을 깨웠으니까 책임감을 갖고 열심히 살아갈 거예요."
루비아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상한 곳에서 책임감이 발동한다.
"아. 으음.
적당히 얼버무리고 주위를 살폈다.
처음 트롤에게 살해당할 때보다 '하루 뒤'에 왔다. 이미 트롤 사냥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시점.
'정확하게. 반복되는 건가.'
내가 개입하지 않은 일들은 그대로 쳇바퀴를 돌고 있다.
"일단 가자."
"맵!"
산길은 적막했다.
사냥꾼 따위는 나타나지 않았다.
저번에 왔을 때 트롤에게 갈가리찢긴 사냥꾼들은, 잔뜩 투창을 박은 트롤을 들고 즐거운 마음으로 마을에서 파티라도 열고 있을 거다.
산장은 며칠 비어 있을 테고.
한참을 더 걸었다.
걸릴 만한 것들을 앞에서 치우면서 가기는 했지만, 루비아는 성큼성큼걷는 나를 의외로 잘 따라왔다.
해가 졌다.
바람이 완연히 얼어붙기 시작했을 때였다.
"죄송, 죄송, 해요.
- 털썩.
루비아가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으음.
이런 식이면 곤란하다.
"힘들면 이야기를 해라."
"하, 하지만. 버릇.
"버릇?"
"이러면 버릇 들어 버려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건싫다는 건 아닌 것 같다.
"이러려고 소환한 게 아닌가?"
나는 가볍게 루비아를 안아 들었다.
여기서 자는 건 무리다.
w ㅇ n
ㅈ.?
루비아는 눈을 꼭 감았다. 뭐라고 반박을 하려는 듯 입이 작게 오물거리다가 다시 닫힌다.
"할 말이라도?"
"아니요. 없는데.
가볍게 부는 바람에, 긴 갈색 머리카락이 내게 감겨든다.
- 팟!
질주를 쓴 채로, 산 정상을 향해내달렸다.
한층 빨라진 느낌이 든다.
달리는 상태 그대로 상태창을 열어확인했다.
[서번트 시스템]
[스탯이 상승된 상태입니다.]
'루비아 때문이군.' 스탯이 전반적으로 오른 덕분이다.
땅을 박차는 기본 힘이 상승하니 질주 속도가 빨라진 것.
루비아를 안고 달린다는 패널티를, 훌쩍 상회하고도 남는 상승 폭이다.
옆으로 싁싁 지나가는 지형지물이 더 쏜살같이 느껴졌다.
'며칠 비어 있을 테지.
산장에 도착한 건 순식간이었다.
190화 오래된 친구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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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아?"
그녀는 눈을 꼭 감고 있다.
아직도 달리는 거라고 생각하는지, 내 팔을 잡은 손에서 힘을 빼지 않는다. 손에서 느껴지는 온도가 신경쓰인다.
"다 왔는데."
"후우. 죄송해요. 좀 놀랐거든요."
루비아는 약간 떨리는 어조로 말을 뱉으며 내 팔에서 내려왔다.
장애물 같은 건 닿지 않게 하면서 빠르게 왔는데, 정상까지 순식간에 질주한 속도 자체가 그녀를 놀라게 한 것 같았다.
"정말 이런 산장이 있네요. 그런데 잠겨. 있는데요?"
"열면 돼."
- 투둑!
강철 자물쇠를 수수깡처럼 손으로 뜯고 안으로 들어갔다.
"헛.!"
"자물쇠가 좀 약하네."
이 정도로 놀라면 곤란하다.
나는 이미 순수한 힘 스탯만으로 오우거를 가볍게 제압할 수준이다.
- 끼이익.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등불을 켰다.
일렁이는 불빛에 커다란 트롤 박제가 비친다. 루비아가 깜짝 놀라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시체다. 죽어 있어."
"아아.
잠시 신음을 홀리던 루비아가 말을 잇는다.
"박제. 네요. 여기 사냥꾼들이.
저렇게 한 건가요."
"그래."
"트롤은 꼭 한 쌍이 함께 산다고 하던데요. 혹시. 암컷은.
흘끗 루비아를 바라봤다. 그녀는 우둔하지 않다. 이미 암컷이 어디있는지 짐작하는 눈빛이다.
내 침묵에도, 그녀는 스스로 답을 찾는다.
"아까 거기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트롤에게 감정이입이라도 하는지, 루비아의 안색이 어두워진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 화르륵!
벽난로 불씨를 피웠다. 산장 안이 한층 밝아졌다.
이번에는 피 냄새는 나지 않았다.
트롤 수컷을 사냥한 건 꽤 오래전일인 것 같았다.
"2층으로."
피와 내장을 빼고, 솜을 채운 뒤얼기설기 철사로 엮은 트롤 시체를 루비아와 함께 둘 생각은 없다.
"네."
그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면서, 곁에 바싹 붙어서 나를 따라온다.
2중으로 된 창문을 열자 시원한 공기가 들어온다.
"하아.
루비아가 숨을 내쉰다.
팽팽히 당겨졌던 신경이 조금 풀린 모양이다.
그녀가 침대를 짚으며 말했다.
"여기 누워서 밖을 보면 별이 손에 잡힐 듯이 보일 것 같아요."
"마음에 드나."
"네.! 산 냄새가 확 들어와요."
루비아가 원하면 며칠 더 머물러도 별 상관은 없다.
사냥꾼들이 다시 올라오기 전에, 기척을 탐지하고 떠나면 그만이다.
아니면 올라오는 것들을 그냥 다죽여 버리면 끝이기도 하다.
눈을 깜빡이며 침대에 앉아 있는 루비아를 바라보다, 원래의 목적을 떠올린다.
'여기 그대로군.'
침대 옆 협탁.
가지런히 놓인 캐빈 애슈턴의 책이 보인다.
〈당신이 트롤을 죽이고 싶다면〉
다시 첫 장부터 페이지를 펼쳐 갈때였다.
"해골님. 뭘 보시는 거예요?"
루비아가 곁에 다가와 책을 흘끗거렸다. 그녀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시선이 묘했다.
매번 내가 중간 부분을 다 읽기도 전에, 그녀의 시선은 이미 페이지 끝에 가 있었다.
넘기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미 한 번 꼼꼼히 읽은 책이라서 속도가 꽤 붙어 있다는 걸 생각하면 더욱 놀라운 상황이다.
고개를 돌려 루비아를 바라봤다.
"속독이라도 익혔나?"
루비아가 입술을 살짝 말았다.
"앗. 들켜 버렸네요. 책을 좀 빨리읽기는 해요."
"지루하겠군."
루비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같이 읽는 분이, 어디를 읽고 계신지 생각하는 것도 굉장히 재미있다고요. 게다가.
그녀의 안색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어릴 때를 제외하면, 책은 항상혼자서만 읽어야 했거든요. 이렇게 같이 책 읽는 걸 꼭 한번 해 보고 싶었어요."
영주의 딸치고 터무니없이 소박한 희망이다.
들어줘도 상관은 없다.
"그런데.
"뭐지?"
"아, 네. 아까 흘끗 봤는데, 혹시작가가 캐빈 애슈턴인 건가요?"
- 달그락.
페이지를 넘기던 손이 멈췄다.
"앗, 혹시 제가 뭔가 실수라도. r
"아니. 아니야."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캐빈 애슈턴을 알고 있나?"
루비아가 눈을 깜빡거렸다.
"그럼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예요.
좋아한다고 말하기에는 사실 그 사람책을 한 권밖에 안 읽었지만요.
〈시간의 틈바구니에 갇힌. 〉"
"천재 대마법사?"
내가 루비아의 말을 받았다.
"헉!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루비아가 숨을 들이켰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라서.
그자의 책을 다 읽는 걸 목표로 삼고있지."
좋아하는 건 몰라도.
뒤의 이야기는 진심이다.
캐빈 애슈턴에 대한 내 호기심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세상에.
"저희는 취향이 정말 비슷하네요!"
루비아가 방긋 웃었다.
"그래서. 제가 엄청 약한데도.
소환되어 주신 건지도 모르겠네요.
감사드려요."
언젠가 에라스트 서고에 들어가서, 방금 루비아가 말한 책도 찾아봐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유령 〈내사과〉가 지키고 있는 그 도시에 직접 가기에는 몹시꺼려지는 게 사실.
'그런데, 캐빈 애슈턴이 루비아가 좋아하는 작가라니.
생각에 빠져 있는 나를 바라보며 루비아가 계속 말을 이었다.
"저도 캐빈 애슈턴이 쓴 작품을 다읽어 보고 싶어요. 다른 이름으로 쓴 작품들도요."
"다른 이름.?"
"네. 계속해서 필명을 바꿔 가면서 쓴다고 하더라고요."
슬라임에게 그의 책을 빌리며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름을 계속 바꾸는 성격이라서, 캐빈 애슈턴이라고 말하면 모르는 자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또. 뭐가 있는데.'
다른 누군가에게 비슷한 이야기를들은 적이 있다.
'이름을. 계속. 바꾸는.
기억을 차근히 되짚어 갔다.
분명히 떠오르는 게 있었다.
기스-제-라이와의 대화.
〈제대로 된 마법사는 딱 하나야.
그년 말고는 없어. 〉
〈이름 바꿔 가면서 노는 또라이 같은 년 하나 있어. 누가 확 찔러서 시체로 안 만들어 주나? 그럼 내가 나긋나긋하게. 〉
'그게 설마. 캐빈 애슈턴인가.'
그때는 짐작도 하지 못했었지만.
기스-제-라이를 만나서 물어봐야 할 게 생겼다.
"무슨 생각을 하세요?"
"별로."
"궁금한데. 흐응. 이 책이 여기에 있다는 건 어떻게 아신 거예요?"
"예언 능력이다."
"예언. 이요?"
농담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어떤지, 루비아의 입가에 웃음이 감돌았다.
"그럼 제 운명도 예언해 주실 수 있는 거예요? 알고 싶어요!"
"일단 이것부터 읽자고."
곁에서 눈을 깜빡거리는 루비아를 외면하고, 다시 트롤에 관한 책을 펼쳤다.
루비아는 내가 신기한 듯, 곁에서 먼저 빨리 읽고 남는 시간은 책을 읽는 나를 가만히 관찰하고 있었다.
신경 쓰인다고 말하기도 애매해서, 그냥 내버려 두고 책을 읽었다.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했을 때였다.
"깨진. 조각들과 접촉할 것? 이게 뭘까요? 책에 이런 내용은 없는데."
고개를 돌려 루비아를 바라봤다.
"동방어도 읽을 줄 아나?"
"네. 조금은요. 그냥 배워 봤어요."
"놀라운데."
"하핫. 별거 아니에요. 해골님이 훨씬 더 대단하신걸요."
"별로.
책을 덮었다.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지혜가 1 올랐다는 메시지가 다시 떠올랐다.
'역시 다시 읽어도. 오르는 건가.' 하지만 동화율은 떨어지지 않았고, 깨진 조각들과 접촉하라는 마지막문장도 예전 그대로였다.
알아보기 쉬웠다.
세계가 흔들리거나, 글씨가 '일그러져' 있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미묘하게도 문장 아래 적힌 숫자가 달라져 있었다.
〈2/7〉
'늘어. 났어?'
분명하다.
전에 봤을 때는〈1/7〉.
숫자가 하나 늘었다.
누군가 숫자만 바꾸고 갔을 리는 없다. 애초에 수정한 흔적조차 전혀없는 문장.
"루비아."
"네?"
"이 글자가 보이나?"
나는〈2/7〉을 가리켰다.
루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2. 7 이라고 쓰여 있네요?
이게 뭘까요?"
나에게만 보이는 숫자는 아니다.
루비아가 이 숫자를 읽는다고 생각하자, 어쩐지 고립되지 않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도 모르겠군."
"흐음. 깨진 조각이 일곱 개라니생각 좀 해 봐야겠네요."
"일곱이라는 숫자에 대해 무언가 떠오르는 게 있나?"
루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무지개나 별자리, 혹시 요일을 말하는 걸 수도 있죠. 주사위의 마주보는 숫자도 일곱. 7대 죄악이나, 그걸 관장하는 악마도 일곱이에요.
동방에서는 일곱 명의 무사가 용을 잡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루비아의 말을 쭉 들어도 상황과 딱 맞아떨어지는 건 없었다.
무엇보다 숫자가 왜 하나 더 늘어났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여기서 고민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겠군.' 캐빈 애슈턴의 책을 챙기고 휴식을 취한 뒤 루비아와 산을 내려갔다.
곧 높다란 이중 성벽으로 보호된그라스미 어 가 내 려 다보였다.
해자는 여전히 깊고 넓다.
'저건 못 뛰어넘겠군.'
숨어들면 간단하지만, 일단 성문은 열려 줘야 한다.
저번에 왔을 때와 달리 그라스미어근방 산길은 조용했다. 여행자들은 보이지 않는다.
다행히 저 멀리 가도에서 상단이 접근하고 있었다.
"조금 기다렸다 같이 들어가지."
"네, 그게 좋겠어요."
아직 전쟁 직전은 아니라서인지, 경비는 저번보다 덜 삼엄해 보인다.
성벽 위로 거대한 발리스타가 나타나는 일도 없었다.
루비아는 손쉽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나도 몸을 숨기고 루비아를 따라안으로 들어갔다.
'익숙한 얼굴이군.'
처음 그라스미어에 들어갔을 때, 내 출입을 보증했던 감독관이 보인다.
근무가 지루한 듯 스트레칭을 하며 한가한 표정을 짓고 있다.
녀석의 얼굴을 보자 그라스미어가 한층 친숙하게 느껴진다.
전혀 유해해 보이지 않아서일까.
루비아는 상인들 틈에 섞여서 딱히 취조도 없이 통과됐다.
- 깡! 깡! 깡
"전쟁이 일어난다면서?"
"이미 황실에서 엄청나게 주문을 했다는구만."
"그래서 이렇게 발주가 많나.
"벌써부터 아주 어수선하잖아."
대장장이들이 망치를 두드리면서 나누는 대화가 모두 파악된다.
탐지 영역 안이긴 해도, 루비아가들을 수 있는 거리는 아니다.
그녀는 살짝 입을 벌리고 주위를 돌아보고 있다.
- 와. 도시가 정말 커요. 사람도 굉장히 많네요.
제법 들떠 보인다.
- 그냥 여기 앉아서 사람 구경만 해도 시간 잘 가겠어요. 여기가.
책에서만 보던 그라스미어네요.
= 다른 도시를 아예 안 다녔나?
- 그게. 어릴 때 다리에 병을 앓았거든요. 꾸준히 치료는 받았는데.
몇 해 전에야 나아서 제대로 걸어다닐 수 있게 됐거든요.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 이제 무기를 살 생각이신가요?
= 구하기는 해야겠지만. 일단은 여관부터 가자고.
루비아는 다른 곳에 놔둬야 한다.
그라스미어 영주 부자를 만나는 건 혼자 할 생각이다.
이야기가 잘못될지도 모르고.
'잘된다고 해도.
아이작을 봉인하기 전까지, 놈이 내 몸을 점거하는 시기가 있다.
그때 그가 루비아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 여기 지도가 있어요!
루비아는 곧 사거리 한복판에 놓인도시 지도를 가리킨다.
방문객이 많은 도시인 만큼, 이런시설이 잘되어 있다.
나무로 만들어진 지도에는 여관이 특히 잘 보이게 표시되어 있었다.
'어딜 가지.
예전에 왔을 때는〈먼 숲 엘프〉라는 여관에 묵었다.
챈들러와 레나가 전세를 내고 날기다리고 있던 곳이다.
이번엔 다른 데를 가 볼까 생각할때였다.
- 여기가 제일 가깝네요?
루비아가 한 곳을 짚는다. '붐비는 선인장'이라는 이름의 여관이다.
'여기는.
진네이 유베라는 남자와의 대화가 생각났다.
〈'붐비는 선인장'에 묵을 생각이오.
혹 필요한 게 생기거나, 내키신다면 언제든 들러서 '바토 시마'를 찾아주시지요. 〉
191화 오래된 친구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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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그 말이 떠올랐다.
나와 연을 맺고 싶다며〈카드〉를 건넸던 인간.
혹시, 붐비는 선인장에 지금도 머무르고 있지는 않을까?
'언제든 들러 찾아 달라고 했지.'
그라스미어에서 일종의 거점으로 쓰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확인해 볼 가치는 충분하다.
= 좋아. 붐비는 선인장으로 가자.
- 어, 정말요? 제가 찍어서 그런 거면 꼭 여기가 아니라도 괜찮아요.
= 그런 건 아니고.
루비아가 붉어진 양 볼을 손으로 감쌌다.
괜히 민망하게 만든 것 같다.
- 그럼. 갈게요.
고개를 푹 숙인 그녀가 성큼성큼앞으로 걷는다.
그녀에게 따라붙으며 생각했다.
'흐음.
진네이 유베가 지금도 그 여관에 머물러 있다면.
그자에게 루비아의 신변 보호를 잠시 맡기면 어떨까?
오래는 아니라도.
아이작을 다시 봉인할 때까지는 괜찮지 않을까.
초면인 주제에 그런 부탁을 한다는게 황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네이 유베는 '유능함'에 매우 끌리는 인간이다.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난다.
기계공학에 관한 지식을 보여 주자 눈빛을 반짝이며 친해지려 했다.
굳이 기계공학은 아니더라도.
검기나, 마법 같은 능력을 보이면 틀림없이 호의적인 반응일 거다.
게다가, 지금까지의 생에서 간접적으로 접한 바로 추정하자면 상당히 신뢰할 만한 인간.
마침 '카드'도 하나 가지고 있겠다.
녀석이 여관에 있길 바랐다.
"여기예요!"
어느새 여관 앞에 도착했다.
은신을 풀고 여관 문을 열었다.
가운데 큰 화덕 근처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하는 바드가 보인다.
한눈에 봐도 북적이는 여관.
아기자기한 맛은 조금 부족해도, 〈옛 숲 엘프〉보다 오히려 규모는 한층 더 크다.
"어서오십시오!"
인사하는 점원에게 곧바로 다가가 물었다.
"바토 시마라는 자가 여기 있나?"
그때 였다.
주위의 의자에서 세 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일어나서 나를 둘러쌌다.
"당신, 뭐 하는 사람이오?"
"왜 그분을 찾는 거지."
목소리에 경계심이 가득하다.
진네이 유베의 수행원들인가?
'이거 반가운데.'
좋은 현상이다. 내가 찾는 녀석이 근처에 있거나, 이들을 족치다 보면 녀석이 탁 튀어나올 거다.
나는 대놓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진네이 유베라고 해야 하나? 너희주인은 어디 있지?"
"이자가 건방지게.!"
나름대로, 한 명 한 명이 단순한 상인의 호위라고 말하기에는 포위해들어오는 자세가 제법이다.
"실력 좀 볼까? 덤벼."
"뭐 야?"
- 쌔앵!
세 방향에서 동시에 주먹이 날아들어온다.
그래도 이 정도면 제법.
- 콰당.
세 명의 팔을 각각 한 번씩 꺾어전부 바닥에 내팽개쳤다.
"끄흐윽!"
"으어어어.
놈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파악이 안 되는 표정이다.
"으윽. 끄응.
고통에 신음하며, 녀석들은 힘겹게 다시 자세를 잡고 일어난다.
"그래. 계속해 봐."
코드네임 별빛청여우, 엘윈 에사우에게 흡수한 체술이 있다.
이런 것들이 부리는 애교 정도는.
굳이 공포 스킬을 쓰지 않고 놀아줄 의향도 있다.
"마법사.?"
나를 둘러싼 놈들 중 가장 우람한 체구를 가진, 뻣뻣한 턱수염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묻는다.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내 움직임이, 웬만한 것들에게는 마법의 영역으로 보이고 있다.
"진짜 마법 봤다간 어쩌려고."
w 크으으.?
턱수염이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최소한의 눈치는 있는지, 세 남자는 곧바로 다시 달려들지는 않고 경계 자세만을 유지했다.
'완전히 병신들은 아니군.'
그때 였다.
"모두 물러서시게!"
2층 계단 위에서 한 명의 인간이 나타났다.
진네이 유베.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다.
이번에는 전과 같은 초록색 로브가 아닌, 그럴듯한 장식이 달린 고급코트를 입고 있었다.
"어허!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다들날 부르지 않고 뭘 했나!"
그 반응이 재미있다.
주위의 세 남자가 진네이 유베의 말 한 마디에 곧바로 고개를 숙이고 몇 걸음 뒤로 물러갔다.
나는 진네이를 바라보고 물었다.
"나를 처음 보지 않나?"
그가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웃음을 지었다.
"감히 무례를 범한 수하들을 살려주셨으니 어찌 귀한 손님이 아니겠습니까? 2층으로 모시겠습니다."
'이 정도였다니.' 예상보다 보는 눈이 더 뛰어나다.
한순간에 세 남자를 다 죽일 수 있었다는 걸 금세 파악한 것 같다.
루비아가 속으로 말을 걸었다.
- 아는 사람이에요? 혹시 전생에 인연이 있었던 분?
= 믿을 만한 인간이다. 뭘 좀 부탁하려고 왔지.
- .어떤 걸요?
= 네 보호를 맡기려고.
눈만 깜빡거리며 굳어 있는 그녀를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간단히 두 분 소개를 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아무도 없는 방에서, 유베가 나와 루비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방에 있던 호위들은 모두 밖으로 물린 채였다.
루비아는 상황을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저. 제가 자기소개를 하는 건 위험할까요?
= 잠시만.
일단 무력시위부터 하기로 했다.
단검을 들고 검기를 일으켰다.
칼날 끝에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푸른 기운이 맺히자 유베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검기.!"
"어엇.
루비아도 놀랐는지, 뒤로 한 걸음물러서 벽에 기댔다.
깜짝 놀란 두 인간을 한 차례씩 돌아보고는, 품에서 카드를 꺼냈다.
오각별이 그려진 검은색 카드.
유블람 경비대장의 비밀 상자에서 빼앗은 카드였다.
그리고 은괴 하나를 얹어 유베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걸로 의뢰를 하나 하려고 한다.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야."
유베는 파드득 놀랐던 얼굴을 다시 천천히 추슬렀다.
"아니요. 이렇게 검기를 능숙하게 쓸 수 있는 분에게 돈 받을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저건!"
루비아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카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는 거냐?"
"이걸 아십니까?"
나와 진네이 유베가 동시에 질문을 던졌다.
"네. 이건 드-루즈의 별이잖아요.
거꾸로 뒤집고 원을 그리면 타락한 세레르(Serer)의 상징. 좌우로 조금좁히면 정체불명의 알(Baha's Faith)이고 안을 채우면.
잠시 오각별의 기원과 상징에 대해 설명을 이어 가던 루비아는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아저씨는. 상인이시죠? 이 별이 가장 널리 쓰였던 건, 역시 최초의 상인 연합인〈하크스 베르겐〉에서 였으니까요."
"무슨 얘기냐?"
"〈세상의 모든 로고〉, 〈오컬트의 상징주의〉, 〈메타포의 고백〉에 전부 쓰여 있는 내용들이에요."
나는 멍하니 루비아를 바라봤다.
눈만 껌백이고 있던 진네이 유베가 작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크흠. 정말 영특하시군요. 저도 아가씨의 정체를 알 것 같습니다."
"저요?"
"예. 에라스트 서재를 고서古書의 전당으로 만든 레이 백작의 장녀분아니십니까?"
"어엇.
나도 놀라서 유베를 바라봤다.
"비극에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진네이 유베가 말을 이었다.
"영주님께서는 따님께 가져다줘야 한다며 서책들을 많이 구입하셨죠."
"그러셨군요.
"돌아가신 백작님께서 안심하시겠군요. 이런 실력자 분께서 따님과 함께 계신다니."
"그렇죠? 정말 대단한 분이에요.
한참 부족한 저를, 많이 도와주고 계세요."
루비아가 뿌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지금까지의 기억이 떠오르며, 그 시선이 민망해 고개를 돌렸다.
유베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런 정도의 검기를 보다니, 눈이 확 트이는 기분입니다. 그럼.
어떤 일을 의뢰하시겠습니까?"
나는 루비아를 손으로 가리켰다.
"이 여자를 잠시 맡아 줬으면 좋겠는데."
루비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보호 말씀이십니까?"
"그래."
"기본적인 건 가능합니다만. 혹시암살단에라도 찍혀 있는 거라면 좀곤란합니다."
"그런 건 아니야. 그다지 오래 할 필요도 없어. 일주일. 아니 삼 일이면 충분하겠군."
이미 한 번 해 본 일이다.
사흘을 이야기했다.
그 안에 벨'호멧 아이작을 봉인할생각이다.
"알겠습니다. 돌아오실 동안, 여기 머무르면서 보호하겠습니 다."
나는 은괴를 만지작거렸다.
"정말 아무것도 받지 않을 건가?"
유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제 일꾼 세 명을, 몸 성하게 살려 주신 것만 해도 이미 의뢰비는 넉넉히 받았습니다. 후한 책정에 감사드립니다."
재미있는 태도다.
결코 눈앞의 돈만 보지 않는다.
쓸모 있어 보이는 상대를 발견하자 어떻게든 은혜를 입히려고 한다.
조금 더 편하게 녀석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물어볼 게 좀 있는데. 챈들러남작에 대해 알고 있나?"
"그분은. 아직 동방에 있는 거아닙니까?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아직인가.'
그건 바뀌지 않은 것 같다.
사실 절대다수의 미래가 바뀌지 않았다.
레나 하나를 제외하고는.
레나의 운명이 바뀌었다는 것도, 지금으로서는 네크론 장부를 보고 멋대로 던진 추측일 뿐이다.
유베는 이 여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같았다. 루비아가 묵을 방을 곧바로 준비해 줬다.
"그럼 며칠 뒤에 여기서 보자."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하실일이 있는 거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는 모험일 거 같아서 약간서운하긴 하지만.
루비아는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지금으로서는 전 짐만 되겠죠."
"그건 아니야."
"아니에요. 맞아요."
루비아가 내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게요. 제가 필요하면. 아니, 필요 없어도 꼭돌아오셔야 해요!"
"당연하지."
"나중에 모험담을 들려주시면 더좋고요."
그녀가 애써 웃었다.
짧게 스쳐 가는 웃음에서 떨어지기 싫은 마음이 느껴졌다.
나는 루비아를 떼어 놓고 내성으로 걸어갔다.
도시 자체가 워낙 큰 탓에, 성문근처 사거리에 있는 여관에서부터 내성까지는 걸어서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질주를 썼으면 금방 도착했겠지만 굳이 서두를 기분은 아니었다.
어차피 '하룻밤'이 필요하다.
벨'호멧 아이작이 영주의 꿈속에 개입할 하룻밤이.
그라스미어 내성에 다가갔다.
구불구불한 긴 계단을 태연히 걸어올라갔다.
- 철컥.
두 자루의 할버드가 교차되어 나를 가로막는다.
"일단 정지."
"투구를 벗고 신분을 밝히시오."
'그건 안 되지.' 마스커레이드의 지속 시간은 십 분.
이런 경비병 따위에게 쓰고 싶은 생각은 없다.
영주에게 써야 한다.
그렇다고, 여기서 난장을 치거나 공포감을 조성할 필요도 없다.
나는 대화를 선택했다.
"너희 영주, 아프지?"
"무슨 소릴 하시는 거요?"
"가서 보고해라. 더 이상 고통을 받을 필요 없다고."
"이런 어처구니없는.
당황하는 녀석들을 보고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말파스의 사자가 영주를 구원하러나타났다고 말해라."
"오라고. 하십니다!"
내성에 갔다 온 경비병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경계하는 건 여전하지만, 극도로 조심스러운 분위기다.
"그래야지."
당연한 일이다.
영주는 벨'호멧 아이작의 노예로 살며 끔찍한 세월을 견뎌 왔다.
마왕 강림 시에 그라스미어가 구원받을 거라는 희망 하나로 반항하지 않고 얌전히 견뎌 온 시간들.
바로 그 마왕의 사자가 등장했다고 하는데, 당장이라도 밖으로 뛰쳐나오고 싶은 심경일 거다.
안쪽으로 걸어갈 때마다 경비들이 조금씩 더 붙는 느낌이다.
칼 한 번만 휘두르면 서너 명씩 휘말려 날아갈 수준이지만, 그래도 인간치고는 괜찮은 수준이다.
'나름대로 소수 정예. 인가.'
주위를 둘러볼 것도 없이 안으로 빠르게 걸어 들어간다.
내성 방문은 이걸로 세 번째다.
- 쿨럭!
곧 주름이 자글자글한 그라스미어영주가 나타났다. 겉으로는 여든이 넘어 보이지만 사실은 오십 정도다.
기대와 경계가 반반씩 섞인 눈빛이 나를 향해 강렬하게 꽂힌다.
저번 생에서 내가 그를 해방시켜 준 뒤, 아들에게 모든 걸 떠넘기고 온천 여행을 간 남자다.
문득 척추를 타고 차가운 감각이 올라온다.
정말 전쟁 전에 모든 걸 버리고 온천 여행을 간 걸까?
혹시, 유령들에게 여행당했다거나 했던 건 아닐까.
"귀하가 말파스의 사자를 자칭한 분이오?"
192화 오래된 친구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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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에 빠져 있는 나에게 영주가 질문을 던졌다.
"그래."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다.
"저 무례한.
건방진 태도에 경비들이 긴장하며 무기를 고쳐 잡았다.
그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영주를 바라본다.
"쿨럭.
역시 무척 힘들어 보인다. 밤마다 생명력을 빨아 먹히는 녀석과 밀고 당기는 대화는 무리다.
"내가 다 설명하지."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한 번이야기했다.
챈들러 가문이 대대로 아이작의 노예로 살아가며, 매일 밤〈계시〉를 공유하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지하의 무덤이 어떤 식으로 되어 있는지까지 전부 말하자 영주는 눈물마저 글썽거렸다.
"그런 것까지 알고 계시다니.!
감히 의심할 여지가 없구려.
하지만 말과 달리, 그의 얼굴에는 약간 고민하는 기색이 남아 있다.
아무래도 첫 번째 만남.
확신을 줄 게 필요하다.
나는 양손을 들었다.
'격발.' - 화르르!
[마법 장전]
[더블 캐스팅]
'뇌격.' - 파지직!
"마, 마법사!"
"진짜 마법사라고.?"
"양손에 불과 번개라니.
- 스르릉!
경비들이 일제히 칼을 빼들었다.
"그만! 어리석은 짓들 하지 말고 모두 물러가라!"
"영주님!"
현 상태를 정확히 진단한 데 이어마법까지 보였다.
빠른 선택을 도와준 거다.
"무릎 꿇고 사자를 받들겠습니다.
불민한 저희가 무엇을 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그때 였다.
- 띠링!
익숙한 효과음이 울리면서 허공에 반투명한 상태창이 떠올랐다.
[퀘스트 강제 활성화]
[고분 속의 주술사 - 챈들러 가문의
저쥐
격동의 세월, 남부를 지배하던
대주술사 벨'호멧 아이작은 챈들러가문을 대대로 노예로 삼았습니다.
아이작은 단단한 결계를 치고, 반쯤죽은 상태에서 가주들의 생명력을 빨아먹으며 생존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당신은 이 모든 사실을 전부 알고 있네요?
악랄한 주술사 벨'호멧 아이작을 퇴치하십시오!
모든 사정을 아는 당신에게, 영주는 두려움과 경외감을 품고 있습니다.
- 퀘스트를 승낙할 경우: 이미 강제로 퀘스트를 시작하셨습니다.
- 퀘스트를 성공할 경우: 챈들러가문 전원의 당신에 대한 공포심과 복종도가 크게 상승합니다. 제국남부에서 평판이 크게 상승합니다.
챈들러 가문에서 특별한 보상을.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
[당신은, 이미 이 퀘스트를 강제로 시작했습니다.]
나는 살짝 올라오는 어지럼증을 억누르며 퀘스트 내용을 확인했다.
우스꽝스러운 어조 말고는 상태창내용이 바뀐 건 별로 없다.
예전과 비슷하다.
상태창을 아래로 치우고, 영주를 보며 자연스럽게 말했다.
"무덤에 가려면 피를 뽑아야지."
지하 결계를 돌파하려면 영주 직계의 피가 필요하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결계를 때려부술지 없을지는 모른다.
위풍당당 내려가 놓고 못 부쉈다간망신살이 뻗치는 데다, 불필요한 의심을 살지도 모른다.
"준비해서 내일 보자고."
영주가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부축을 받아 물러갔다.
녀석의 몸 상태도 좋지 않다.
피 뽑는 데 하루 정도 여유는 줄생각이다. 서두르면 오히려 저쪽의 확신이 줄어든다.
'꿈도 꾸게 만들어야 되고.'
영주의 눈을 통해 이 상황을 접한 아이작은, 지금쯤 나를 만나 보고 싶어 몸이 달아 있으리라.
어떻게든 나를 아래로 내려보낼 '계시'를 영주에게 주겠지.
귀빈실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식사는 하지 않겠다고 말해 두었고, 아무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밤새 혼자 방을 둘러보며 생각에 잠겼다.
두 번째 방문.
레나와 함께 있던 바로 그 방.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알 수 없게, 잔뜩 음식을 입안에 넣던 그녀의 모습이 생생하다.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날 어떻게 대접할지 몰라 쩔쩔매던 시녀의 모습도 어른거린다.
뭐라도 하겠다며 먼지 하나 없이 갑옷을 반들반들 닦아 놓았었는데, 어디로 휴가라도 받아 놀러 간 건지 보이지 않는다.
연무장에서의 기억들도 떠올랐다.
커다란 골렘 모형을 놓고 챈들러와 크리스티나를 지도했다.
근위대에게 흡수했던 검술 교육스킬을 처음으로 써 봤다.
하지만.
'전부 혼자만의 기억이지.'
아무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슨대화를 나눴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추억하는 건 오로지 나 하나뿐.
발목 한쪽이, 아래부터 차갑게 젖어오는 것 같았다.
아침이 되기도 전.
집사와 시녀와 함께 찾아온 영주는 거듭 고개를 조아렸다.
나는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꿈〉은 잘 꿨나?"
"역시 알고 계시는군요. 맞습니다.
계시가 내려왔습니다.!"
"선조들의 전당을 열어라. 챙겨야 할 게 있다."
"예!"
어제 곧장 전당 문을 열어 달라고 했으면 망설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바로 열어 준다.
[검기 Lv. 3을 활성화합니다.]
- 우우우옹!
"어. 어.?"
"세상에.
전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간단하게 칼을 석벽에서 뽑아낸 뒤, 지하의 긴 통로를 다시 걸어갔다.
옆에서 수행하는 집사는 꿈이라도 꾸는 표정이다.
통로 한쪽 기둥에 등을 기댄 채, 목이 반쯤 잘려 너덜거리던 녀석의 모습이 생각난다.
그래도 한 가닥 하는 녀석이다.
유령들에게도 칠흑의 스틸레토를 휘두르려 시도했던 솜씨니까.
챈들러도, 크리스티나도 없는 이도시에서는 최강의 실력자겠지.
"걱정하지 마라. 너희 영주 부자를 고통에서 해방시켜 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 끼기긱.
- 쿠구구구궁.
나는 챈들러가 열었던 비밀 통로를 그대로 작동시켰다.
집사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것까지. 전부 아시는 겁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여기서부터 나 혼자 간다. 먼저올라가 있도록."
"아, 알겠습니다.!"
시커떻게 입을 벌린 계단을 따라아래로 내려갔다.
- 풍.
질척한 핏빛 광채가 흐르는 까마귀조각 앞에 서서 유리병을 땄다.
한 병을 다 붓자 까마귀의 입에서 음침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네가 바친. 제물을. 받는다.]
- 쿠구구구구구구구.!
문이 열렸다.
여기까지 전부 똑같은 반응이다.
- 부응!
나는 앞으로 펼쳐진 넓은 복도를 걸어가며 이리저리 칼을 휘둘렀다.
[벨'호멧 아이작의 전당]
[던전 랭크: B마이너]
[적정 레벨: 81-90]
[감히 접근조차 할 수 없는 레벨의 던전입니다.]
[적정 클리어 인원: 1인]
'적정 인원은 무슨 의미지.
저번 생과 달리 지금은 나 혼자.
뭐가 달라질까?
함정이 발동되지 않을까?
솔직히 함정이 발동된다고 해도, 무덤 자체를 다 부수면서라도 혼자 뚫고 나올 자신도 있다.
궁금한 건.
아이작을 봉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저번 생에 던전 클리어 메시지가 안떴다는 점.
'아예. 놈의 영靈을 완전히 소멸시켜야 했던 건가?'
하지만 의지는 둘째치고라도 그럴방법을 모른다.
나는 터벅터벅 안으로 들어갔다.
"어이, 친구들."
거대한 황동 골렘 여섯이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는다.
"가만히 서 있을 거야?"
"오랜만이야. 인사 좀 하지?"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기껏대검을 붕붕 휘두르며 들어온 게 허탈해질 지경.
[기계공학 Lv. 3을 사용 중입니다!]
[개체 탐지.]
고장 난 건 아니다. 그대로 골렘들사이를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작이 통제하는 골렘일까?
따로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얼마 안 되는 경험치 때문에 굳이 부술 필요는 없다.
"가는데 뒤에서 공격하고 그러진마라. 괜히 귀찮으니까."
육중하게 날뛰면서 나를 공격했던 골렘들은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녀석들을 뒤로하고 안쪽 복도로 계속들어갔다.
통로가 끝날 때까지 골렘도 양쪽석벽도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으음.
홀 중앙.
구형의 일그러진 조각 앞에 다시 한 번 섰다.
'아이작의 석관.
유리병 안에 담긴 피를 알 곳곳의 틈새에 다시 죽 부었다.
- 쿠르르르.!
[이 사기꾼 새끼가.!]
석관 안에서 격정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 아이작."
- 끼긱. 끼기긱.!
알의 틈이 벌어진다.
[감히 나한테 아는 척을 하느냐?
네놈은 대체 누구냐?]
"기다려 봐.' - 퍼걱!
석관 틈새 사이로 대검을 깊숙이 꽂아 넣었다.
'격발. 질풍.'
- 화르르르!
석관 안에서 가사 상태로 봉인된주술사의 몸이 활활 타오른다.
'몸 자체가 봉인 같단 말이지.
"이제 나와 봐."
[황당한 놈! 일단 몸을 펫어 주마!]
- 펑!
새까만 연기가 다시 한 번 나를 향해 덮쳐들었다.
[빙의에 저항합니다!]
[정신 저항 스킬이 없습니다. 지혜수치에 따라 저항 확률과 범위가 결정됩니다.]
[〈암시되는 세계의 운명〉이 발동합니다. 150 이상의 지혜를 가지고 있을 경우〈공포〉〈절망〉〈망각〉에 빠집니다.]
[지혜가 너무 낮습니다. 저항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봐도 황당한 능력이다.
일정 이상의 지혜를 지닌 자들은 반항하지 못하게 저주에 당한다.
나처럼 지혜가 낮으면?
당연히 원래 저항하지 못한다.
하지만.
- 띠링!
[이미 한차례 극복한 빙의입니다.]
어째서인지 몰라도.
나는 저번 생부터 점차적으로 저항이 가능했다.
손가락 끝이 묘하다.
통제력이 조금씩 되돌아온다.
"으하하하. 뭔가 싶었거늘 역시 별것도 없구나. 한 번에 빼앗기지 않았느. 어.?"
아이작의 웃음소리가 잦아든다.
'잘되냐?'
놈에게 의사를 전달했다.
- 까딱.
가운멧손가락부터 움직이다가, 점점통제 범위를 넓혀 간다.
확실히 한 번 되찾아 본 몸이라그런 걸까.
저번보다 훨씬 더 제어가 쉽다.
물론 당장은 무리고, 손목쯤에서 통제가 끝난다.
"너, 너는 대체 무슨.! 이, 이런말도 안 되는.
하지만 벌써 놀라면 곤란하지.
아이작이 곧 패닉에 빠져 투구와 갑옷을 내던져 버리고, 내 뼈다귀를 마구 더듬는다.
"대체. 이 몸에 새겨진 회로들은뭐냐! 아케인 하트를 대체하는.
세기말 천재의 고유회로인데.!"
놈이 살았던 때가 세기말이었나.
아닌 거 같은데.
어쨌거나 아이작이 따지는 소리가 지나치게 시끄럽다. 입에 집중해서 힘을 줬다.
몸 전체의 통제권은 아직 놈에게 있지만, 부분 부분에 집중하면 이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읍.! 이런 개. 읍.!"
놈이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한다.
'속으로 말해. 아무도 없는 데서 떠들면 너무 미친 거 같잖아?'
- 이건 말도 안 돼.! 아무에게도 가르쳐 준 적 없는 내 회로에 나만 새길 수 있는 마왕의 인장까지.!
넌 대체. 어떤 존재지?
놈은 한참 머리를 감싸고 말도 안되는 사실 앞에 끙끙거린다.
그런 녀석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꾸준히 통제권 회복을 시도했다.
다음 차례.
이제 놈은 내 진명眞明을 알아낸답시고 무덤 위치를 물어볼 거다.
알려 주면 기괴한 주술을 쓰다가 자기가 거꾸로 봉인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던 참.
당혹감으로 가득 차 있던 녀석의 태도가 한순간에 변했다.
'뭐? 뭐가 궁금한데?'
- 지금 나를 어떻게 유도하려고하는 거지?
'뭘 유도해?'
뜨끔하다.
그는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한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 다짜고짜 여기 들어온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확실히 나에 대해 뭔가 잔뜩 알고 있는 거 같은데.
무서울 정도로 눈치가 빠르다.
그는 어떻게든 내 신뢰를 얻어야 한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 정확히 뭘 원하는지 모르겠지만 최대한 협조하도록 하지. 그러니 말이야, 우리 오늘 친해지자. 응?
193화 오래된 친구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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