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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화 매듭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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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그닥! 다그닥!

성문이 활짝 열리며, 맞은편에서 익숙한 얼굴이 말을 타고 빠르게 달려왔다. 그 뒤를 다섯 기의 말이 따라왔다.

- 히히힝!

선두의 남자가 말을 세우며, 훌쩍말 아래로 뛰어내렸다.

"은공! 오랜만에 뵙습니다!"

뛰어내린 남자는 예전과 옷차림이 꽤 달라져 있었다.

이제 가벼운 도복이 아니라, 군대지휘관 같은 정복 차림새.

그가 나를 둘러싼 병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네들은 이만 물러나게! 여기부터는 내가 모실 테니까."

그라스미어 자작.

챈들러 였다.

옆구리에 낀 창을 꽉 쥐고 있던 두 명의 기병도 고개를 숙이며 손에서 힘을 풀었다.

라인버그 옆에 있던, 쥐를 닮은 칙칙한 인상의 남자가 무언가 입을 움직이려다 곧 고개를 숙였다.

'슬슬 풀어 줄까.'

공포 스킬을 해제하자, 멋진 콧수염의 라인버그 남작은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으으."

그는 내 쪽은 바라보지도 못하고 식은땀을 홀렸다. 괜히 챈들러를 바라보며 무언가 항의하려 했다.

"저, 그게.

'공포.'

"그, 히꾹!"

챈들러가 고개를 갸웃하며 녀석을 바라봤다.

"자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라인버그 남작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만 가라고 했을 텐데. 여기는 분명히 내 영지야."

"아, 알겠습니다."

남자는 아직도 흔들리는 눈빛으로 안으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그라스미어 소속은 남아라."

챈들러가 짧게 끊어 말했다.

익숙한 갑옷을 입은 보병 다섯이 남아 자리를 지켰다.

"매튜. 다리오. 슬라딕. 베르단. 페나르."

"예! 영주님!"

'영주라고?' 챈들러는 경비들의 이름을 하나씩 또박또박 호명한 뒤 말을 이었다.

"이 도시의 주인은 너희들이다.

저들은 손님일 뿐이야. 판단에 더자신감을 가져라."

"예!"

"앞으로도 계급 세 단계 정도는 그냥무시하고 일해. 기죽지 말고. 뒷일은 내가 책임진다."

"알겠습니다!"

'재밌는 짓을 하는군. 그냥 걸친옷만 달라진 건 아닌 것 같은데.' 풍기는 분위기와, 입은 정복이 꽤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인간들 나름의 의식인 것 같았다.

끼어들지 않고 옆에서 방관했다.

챈들러는 병사들의 어깨를 툭툭두드려 준 뒤 복귀시켰다.

성문 안으로 들어가며 챈들러에게 물었다.

"오랜만이야. 도시로 들어오는 게 꽤 힘들어졌는데?"

그러자 챈들러가 다른 녀석들에게 짓던 근엄한 표정을 싹 지우고는, 빈틈 많은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스스로 강제하던 긴장감을, 내 앞에서는 살짝 내려놓는 모습이었다.

'하긴.:

예전에 별꼴을 다 보였으니 딱히 이상할 건 없었다.

"그게. 전쟁이 곧 시작될 것 같습니다."

"그런가."

"남부의 무기창武器舍에 해당하는 저희 도시를 지키기 위해 황실이 군대를 파견한 거죠."

생각해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라스미어의 무기 제작은 대부분직속 제국군을 위한 것.

전쟁이 가까워져 오는데 무기 창고를 지키는 일은 당연하다.

"아까 들었다. 남부 제국군 특작연대라던데."

"뭐, 잘만 지켜 주면 저희는 좋죠.

시기가 뒤숭숭하니까요."

"그런데. 언제 또 그라스미어의 영주가 된 거지?"

"후우.

내 질문에 챈들러가 땅이 꺼지듯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됐습니다. 평생 놀았으니 이제 일하라고 하시는 바람에. 억지로 작위를 물려받았죠."

"전 영주는?"

"온천 여행 가셨습니다."

"전쟁 전이라면서."

"전부 내려놓으시고, 전부 저한테 다 던지고 가신 거죠."

챈들러의 한탄이 이어졌다.

"평생 굴레에 매여서 살았으니, 자기 시간을 갖고 싶다고 하시는데 뭐라하겠습니까."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몸에 벌레가 심어진 채 한평생을 아이작의 노예로 살아왔다.

남은 인생이나마 평온하게 자신을 위해 쓰고 싶은 건 당연하다.

"그런데 이 귀여운 꼬마 아가씨는 누구시죠? 레나가 생각나는군요."

"안녕하세요, 영주님. 레나 언니를 아세요? 전 동생인데요."

아이가 의외로 의젓하게 인사를 건넸다.

챈들러가 살짝 놀라며 나를 바라봤다.

"정말입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챈들러가 아이와 레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조금 맹한 것 같은 느낌의 녀석인데, 의외로 잘 보살피는것 같았다.

보살핀다기보다는, 판을 제대로 깔아준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그는 아이의 말에 맞춰 질문을

던지고, 추임새를 넣으며 적당한 반응을 했다. 헤일리는 신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완전히 맡겨도 되겠군.'

곁에서 걸으며 천천히 도시 안을 둘러봤다.

안의 분위기는 전에 왔을 때와도 확실히 달랐다.

전쟁이 임박한 느낌이었다.

한쪽에는 제국군 복장도, 그라스미어경비대 복장도 아닌 자들이 천막을 치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좋은 무장을 하고, 하나같이 긴 창을 가지고 있는 게 눈에 뜨였다.

챈들러에게 슬쩍 물었다.

"저들은 누구지?"

"독립 용병대, 〈별의 창병〉입니다.

사태가 어떻게 진행될지 몰라 일단계약한 녀석들이에요."

"엄격한 규율, 충실한 계약 이행으로 유명해요. 특별히 골라 들인 자들입니다."

"가격은?"

"말도 안 되게 비싸죠. 하하.

챈들러의 얼굴에서 깊은 피곤함이 느껴졌다.

'걱정할 게 많겠군.' 우리는 어느새 계단을 올라 내성안으로 들어갔다.

내성은 여전히 검소함 일색이었지만 예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거리가 전쟁 분위기로 긴장감이 돌고 있다면, 영주의 성은 오히려 예전보다조금 더 밝아져 있었다.

분위기가 바뀐 이유는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다.

아이작의 지배에서 벗어난 데다, 영주가 젊은 챈들러로 바뀐 것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엇, 아, 안녕하세요!"

내성에 들어가자, 곧바로 날 알아보는 인간을 마주할 수 있었다.

'저 여자는.

성에서 가장 어린 시녀.

나와 레나의 시중을 들던 단발머리의 메이 드였다.

음식도 술도 먹지 않는 나를 상대하며 꽤 곤란해하던 기억이 난다.

다른 거라도 신경 쓴다며, 침구와 목욕 준비에 심혈을 기울였었지.

"이 아가씨만 먼저, 식사 준비 좀부탁해도 될까?"

작은 인간이 긴 거리를 걸었다.

배고픔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안심이야.'

챈들러가 나보다 훨씬 아이를 잘대할 것 같았다.

아이가 시녀를 따라 사라졌을 때, 나는 망설이던 말을 꺼냈다.

"부탁 하나 해도 될까?"

"뭐든 말씀하시죠. 최선을 다해 수행하겠습니다."

≪ 으 W

"a".

챈들러는 분위기를 살피며 옆에서 별말 없이 복도를 따라 걸었다.

어느새, 그는 예전에 썼던 커다란응접실로 나를 안내하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응접실에 들어왔을 때에야 나는 입을 열었다.

"아까 그 아이, 혹시 여기서 맡아줄 수 있을까?"

"하하핫.

말없이 걸어오던 챈들러가 크게 웃었다.

"곤란한가?"

"아닙니다. 걸어오면서 상상했던 것들이 우스울 만큼 간단하고 좋은 일이라서요."

"크흠.

"레나 동생이라니, 제가 특별히 더신경 써서 돌보겠습니다. 다른 요청사항은 없으십니까?"

"일단은. 근데 뭐 나한테 말하고 싶은 거라도 있나?"

줄곧 웃음으로 얼버무렸지만.

챈들러는 나를 향해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전쟁 걱정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다른 용건이 있는 듯했다.

"그게.

뭔가 있다.

"뭐지?"

내 추궁에, 신임 영주의 입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혹시. 레안드로 후작과 어떤 관계이십니까?"

갑작스럽게 들어오는 질문에 조금당황해 되물었다.

"왜 그런 질문을 하지? 별 관계는 아닌데."

이건 어차피 사실대로 말하는 게 불가능한 일이다.

부인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챈들러는 어느 때보다 진지한 분위기로 말을 이어 갔다.

"그때 저에게 보여 주셨던 얼굴, 한창 시끄러운 후작을 닮은 것 같아서 말이지요."

"그때는 그냥 넘겼잖나?"

"저도 얼굴까지는 몰랐습니다. 하지만 죽은 뒤에, 묘하게 선전되는 탓에 외모도 알게 된 거죠.

"으음."

"어쨌건 성문 앞에서 투구를 벗지 않은 건 잘하셨습니다. 시끄러우면 시끄러워졌지, 도움이 안 됐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고민이 깊어졌다.

절벽 아래로 떨어진 소년이 갑자기 떠올랐다.

'확실히 죽였어야 했나?'

달리아크의 정보를 신뢰한다면, 후작은 반역죄로 살해당했다.

닮은 외모에 대한 증언이 나오면, 확인 차원에서라도 추적이 붙을 게 분명하다.

미처 관리하지 못한 친척이라고 생각할 가능성도 있다.

'마스커레이드. 스킬 레벨을 좀더 올려야 되겠군.'

가장假裝이라면.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는 평범한 얼굴로 변하는 게 이상적이다.

짧은 변장 시간.

제한적인 변장 부위.

무엇보다, '인상적인' 모습으로 변장하는 건 역시 스킬 레벨이 낮기 때문일 거다.

마스커레이드 스킬을 띄워 쌓인숙련도를 확인했다.

거짓을 거짓으로 덮는다.

공식적인 입장에 더해, 생길 수밖에 없는 음모론까지 따로 맛있게 제공한다.

정교하게 투척되는 쓰레기들.

레안드로 후작이 반역죄로 황실에 살해당했다는 진실은, 저 아래에 깔려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제국 4대 검주가, 어째서 황실에 반역했는가 하는 질문은 어둠 속에 묻혀 아무도 던지지 못한다.

온통 깜깜하다.

머리를 천천히 저으며 챈들러에게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떻지?"

"현 황제는 이것저것 다 끌어다가 전쟁 재료로 쓸 모양입니다. 시비야 쌓이면 쌓일수록 좋으니까요."

인간들이야 뭘 어쩌든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려 하지만, 의문이 꼬리를 문다.

'왜 황제의 죽음은 써먹지 않지?

계획이 변경되기라도 한 건가?'

기스-제-라이는 이번에도 은발의 제국 황제를 암살했다.

용모와〈검식〉까지도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황제 암살만큼 적절한 전쟁의 명분은 없는데, 황제가 죽은 건 아무도 모른다.

'이게 무슨.

안개가 너무 짙었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다.

고민에 빠진 사이, 챈들러가 문득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라스미어 곳곳에도 제국군이 잔뜩깔려 있습니다. 되도록 저와 함께 움직여 주십시오. 계속 투구를 쓰고 지내시면 약간 귀찮은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걱정하지 마라. 사고 안 칠 테니."

제법 독립적인 성격의 영지라고 해도 결국은 제국의 휘하.

영지민들을 지키기 위해, 황실 직속군대에 협조하는 챈들러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뭐, 어차피 숨어 다니면 되니까.'

레일리의 정수를 흡수한 덕분에, 챈들러와 만났을 때보다 은신 능력이 한 단계 올라갔다.

"그런데 저번에 볼 때랑 분위기가 좀 달라지신 것 같은데.

'아, 맞다.'

170화 매듭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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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아이작 이야기겠지?'

이것까지 털어놓아도 될지 잠시 고민했지만, 레나가 챈들러를 믿을 만한 인간이라고 한 게 떠올랐다.

인간 전반, 특히 남자에게 평가가 혹독한 그녀의 말이라면 분명 틀림없을 것이다.

'동생도 맡기는 인간이니.'

"그야, 그때 네가 상대하던 건 다른 녀석이었으니까."

나는 사실 그대로 말했다. 챈들러의 눈이 크게 떠졌다.

"다른. 녀석이었다니, 그게 무슨말씀이십니까?"

"너도 아는 자였다고."

나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야기를 들은 천들러의 눈이 커지며 연달아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아니. 어떻게. 그런.! 세상에.! 그럴 수가.!"

아이작과 있었던 이야기를 적당히 다듬어 챈들러에게 들려주었다.

대체로 사실을 말했지만, 진명에 관한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

"저희를 도와주시려다 그런 고생까지. 정말 상상도 못 했습니다.

살짝 이상한 것 같긴 했지만, 곧떠나셔서 금방 잊어버리고 있었죠.

정말 놀라운 일뿐이로군요. 그 주술사가.

"그러니 그 계약서 같은 건 이제잊어버려도 된다. 내가 만들어 달라고 한 것도 아니니까."

마음대로 계약서를 파기한다고

레나에게 한 소리 들을지 모르지만, 아이작이 멋대로 끼친 민폐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챈들러는 단호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그건 절대 안 됩니다. 계약은 계약입니다. 받은 게 있는데 어떻게 그냥지나갑니까. 게다가 끔찍한 고초까지 겪으셨는데!"

"내가 쓴 게 아니라니까?"

"그래도 안 됩니다. 당시 그라스미어의 영주는, 영주 자신의 의사로 한 계약입니다."

"네가 이러는 걸 알면, 부친이 무척 싫어할 것 같은데?"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다 버리고 온천 여행 가셨는데요, 뭘."

"부디, 언제든 계약상의 내용을 자유롭게 요청해 주십시오."

그가 단호하게 말을 끝냈다.

- 띠링!

챈들러의 머리 위에 호감도가 올랐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좀 부담스러운데.

눈빛에 신뢰와 애정이 한층 더

진하게 느껴졌다.

더 상대하기도 애매해 슬쩍 말을 돌렸다.

"그런데 크리스티나는?"

그의 호위인 크리스티나가 눈에 띄지 않았다.

"아, 이쪽으로 오십시오."

챈들러가 나를 안내했다.

"하루하루 다르게 실력이 훌쩍 느는 게, 제 호위로만 묶어 놓기는 역시 아까운 인재더군요."

광화 가스를 마시고 각성 상태를 경험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래서, 요즘 훈련을 맡아 주고 있습니다."

"훈련을?"

"예."

챈들러는 나를 영주 집무실로 안내했다.

성에서 가장 높은 곳.

연병장이 한눈에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장소다.

"저기입니다."

챈들러가 아래를 가리켰다.

익숙한 모습의 여자가 서른 명

정도의 병사를 훈련시키고 있었다.

- 까앙!

한 명 한 명과 전부 칼을 부딪쳐 가며 진형과 자세를 교정해 주고 있었다. 병사들의 눈에서 하나같이 그녀에 대한 존경심이 느껴진다.

"저건 또 뭐지? 죄라도 지었나."

크리스티나의 팔다리에 매달린

쇳덩이 네 개가 보였다.

두꺼운 쇳덩이가 수갑처럼 발목팔목에 매달려 있었다.

챈들러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무게추입니다. 병사들을 교육하면서, 자기도 훈련해야 한다고 항상 매달고 다니더군요."

"흐음.

"활쏘기를 연습할 때나 밥을 먹을 때도 항상 매달고 다닙니다."

"열심이군."

"지금 만나 보시겠습니까? 오신 걸 알면, 당장 저걸 벗어던지고 대련을 신청할 겁니다."

"아니. 그건 좀 무서운데."

"하하핫.

병사들은 다들 전쟁이 얼마 안 남은 걸 인식하는 듯 적극적으로 훈련하고 있었다.

마왕군의 일선에서 부딪쳤던, 억지로 징집된 소모용 병사들과는 눈빛과 기세부터 완전히 다르다.

'저 인간 여자도. 잘 녹아들어 살고있군.' 에라스트에서 험한 꼴을 당하던 모습이 더 이상 겹치지 않았다.

위에서 가만히 훈련 장면을 보고 있으려니, 옆에서 챈들러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더 필요한 건 없으십니까?"

"글쎄."

"오래간만에 뵈니. 뭐라도 해드리고 싶습니다만."

없다고 하려다, 문득 슬라임에게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대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혹시 이 칼을 한번 녹여 볼 수 없을까."

"제련製鍊을 원하시는 겁니까?"

"감정사에게 들었다. 안에 특수한 금속이 함유되어 있다고 하더군."

"금속 이름이.

"프리모. 파이트랬나."

"프리모파이트. 들어 본 적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야금은 별로 아는 게 없으니, 수석 대장장이를 지금 불러 보겠습니다."

"수석 대장장이?"

"예. 드워프에게 직접 사사받은 툴즈라는 분이 계셨는데, 지금은 돌아가시고 그 동생이 성안에서 무기 제작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홈. 프리모파이트가 얼마나 제련하기 힘든데."

한창 작업하다 나타난 듯, 얼굴이 붉게 그을린 백발의 대장장이는 내쪽은 제대로 보지도 않고 말했다.

"영주님, 감정이 확실한 겁니까?

그. 칼 안에 뭐가 들었는지, 말은 누구나 막 할 수 있고 그런데."

'이자가 수석 대장장이.?' 영주인 챈들러 앞인데도 노인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그라스미어가 무기의 도시인 탓일까.

대장장이의 지위가 다른 곳보다 높은것 같았다.

"감정은 확실하다."

내가 끼어들었다.

"흥. 웬 귀족 나리."

노인이 가볍게 코웃음을 뱉었다.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했지만, 그셔츠 아래 드러나는 팔꿈치 아래는 제국 특작부대 병사들보다 훨씬 더두꺼운 노인이었다.

"알겠습니다. 말씀하시면 해야죠.

해야 되는데, 이게 참.

노인이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프리모파이트는 쇠보다 훨씬 더무겁다던데, 저겁니까?"

- 툭.

나는 별말 없이 칼을 벽에 기대놓았다.

"별로 무겁단 생각은 안 했는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내 쪽을 곱지 않은 눈으로 흘끗보던 대장장이가 손잡이를 잡고 이마에 꿈틀 핏줄을 세웠다.

"어이쿠.!"

근육이 빼곡히 붙어 있는 노인의 손목이 흔들렸다.

그가 양손으로 칼자루를 잡은 채 간신히 균형을 잡고 끙끙댔다.

- 쿵!

곧 다시 칼을 바닥에 놓았다.

"이걸 한 손으로 다루다니.

칼의 무게를 느끼고 뭔가 생각이 달라졌는지, 퉁명스럽던 노인은 조금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감탄과 승부욕이 섞인 표정으로 날보던 노인이 곧 챈들러를 향해 말했다.

"뭐. 제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보겠습니다. 기대는 마십시오.

돌아가신 툴즈 형님이라면 모를까, 전 다뤄 본 적도 없는 금속이라."

"넉넉히 기다려 드리죠."

"만져는 보겠습니다."

노인은 그동안 쓰시라며 칼 한

자루를 넘겼다.

그리고 조수 두 명과 끙끙대며

대검을 들고 사라졌다.

"될까?"

"뭐, 모르겠습니다. 저 칼을 만든 3대 영주님이 워낙 전설적인 분이라서.

저야, 그동안이라도 은공을 붙잡아둘 수 있어 기뽑니다."

챈들러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레나 있을 때는 못 이러더니.'

호감도가 너무 오른 게 아닐까?

너무 가까이 오는 것 같아 슬쩍떨어지며 물었다.

"저번에 갔던. 주술사의 무덤말인데. 다시 가 볼 수 있을까?"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물론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 저벅.

반원의 석조로 된 회랑을 그대로 따라 걸었다.

아이작이 사라진 탓일까.

통로는 예전처럼 좁고 어둡지만, 석벽 틈마다 스며들었던 음산함은 한결 걷힌 것 같았다.

'주술사가 갇히면서 결계도 함께 사라졌나.'

주술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다.

그저 짐작해 볼 뿐.

한참을 걸었다.

- 끼기기각

챈들러가 금속으로 만들어진 까만 횃대를 움직였다. 계단이 드러나고 거대한 철문이 보였다.

'까마귀.

천사의 눈을 쪼아 먹는 까마귀는 물론 마왕 말파스.

내 몸에 빙의해 여길 빠져나올

때까지만 해도. 아이작은 즐거운심정이었을 거다.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줄은 전혀모른 채.

〈조슈아.! 내 조슈아가.! 〉

〈이럴. 어떻게 이럴 수가.! 〉

〈내 후예들은. 마지막 숨소리하나까지 푸르손에게 바쳐진 거다. 〉아이작의 절규가 떠오른다.

마왕들 사이의 분쟁.

좀 더 많은 정보를 얻게 된다면, 그 분쟁을 이용해 이득을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다시 반복한다고 해도. 무작정아이작을 만날 수는 없어. 철저한 준비가 필요해.'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놈을 이용하려다, 내가 뒤통수를 맞을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아니다. 가자."

문은 열린 채 그대로였다.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부순 강철 골렘도 치워지지 않았다.

인간 수백 명이 여유롭게 설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원형 공간에는 달리 아무것도 없다.

"공간 활용은 안 하나?"

"계약서에 쓰여 있지 않습니까. 내성지하 전체와, 그곳에 묻힌 모든 물품의 권한을 양도한다고요. 어떻게 쓰시겠습니까?"

챈들러가 말한 대로다.

사실 여기에 들른 목적은 옛 추억회상 따위가 아니다.

- 그곳에 묻힌 모든 물품의 권한.

아이작이 쓴 계약서의 일부.

이 장소에 녀석이 무언가를 숨겨놓았을 확률이 높다.

보물 같은 것들.

그게 아니라도 상관없다.

혹시 아이작의 약점 따위를 잡을 부장품이 있다면, 반드시 찾아내야한다.

두 번째 만남에 대비하기 위해.

'탐지.'

[탐지 Lv. 6을 사용.]

[심안心眼(C+)이 적용됩니다!]

예전보다 한 단계 오른 탐지 스킬로 사방을 훑었다.

스킬 등급이 상승하며 얻은 특전.

지형지물과 함정까지 모두 파악이 가능하다.

그러나.

주술사의 무덤에서는 어떤 수상한 물체도 잡히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아니야. 나가자고."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밖으로 가지고 나갈 만한 물건이 라면. 그때 가지고 갔겠지?'

아이작은 나에게 빙의를 성공하고 빈손으로 나갔다.

계약서를 쓴 뒤에도 다시 무덤에 돌아오지 않았다.

을 되찾은 후에, 무덤에 있는

물건을 챙길 생각이었거나.'

더 가능성 높은 쪽은-

을 되찾지 않으면. 챙길 수도

없는 무언가가 여기 있는 걸까?'

당장은 풀기 곤란한 의문을 접어두고 밖으로 나섰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염치 불구하고 부탁드리고 싶은 게 딱 하나있습니다."

"뭐지?"

"혹시, 저희가 제작 중인 병기들을 한번 보아 주시겠습니까?"

"보여 준다면야.

'그런 걸 뭐 부탁까지 하지?' 의문을 안고 녀석을 따라갔다.

녀석이 나를 안내한 곳은 거대한 창고였는데, 매서운 눈빛의 경비가 빼곡했다.

물론 챈들러는 가볍게 통과.

- 끼이이익.

거대한 문이 열렸다.

'여기가 무기창인가.

사방으로 100여 미터의 공터.

눈앞에는 약 4미터 정도의 투창병기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제작이 전부 종료된 건 아닌지, 사다리를 댄 인간이 여럿 붙어 곳곳을 조이고 두드리고 있었다.

병기들을 보는 순간.

'왜 데려왔는지 알겠군.'

[기계공학 Lv.3!]

[기계 분석을 자동 발동합니다!]

어디를 어떻게 고쳐야 더 강한

관통을 줄지, 내구성을 향상시킬지 한눈에 들어왔다.

"저. 어떠십니까?"

녀석이 슬쩍 바라는 대로, 적당히 병기들의 허점을 지적해 줬다.

기능에 대한 지적이 끝났을 때, 묘하게 느껴지는 부분을 물었다.

"투창이 2미터 정도로군. 대인용이 라기엔 너무 크고, 공성용이라기에는 너무 작고 날카로운데? 차라리 트레뷰셋을 쓰지 그런가."

"그게 말입니다.

챈들러가 작게 말했다.

"연합의 〈파일럿〉들을 상대하기 위한 병기입니다."

"파일럿.?"

분명 들어 본 적 있는 단어.

머릿속에서 그 단어가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챔들러의 설명이 좀 더 빨랐다.

"자유 연합의 기사들, 특히 제국국경 쪽의 병사들은 말보다 거대 철인鐵人에 타고 움직인다는군요."

"사실 탄다고 할지, 착용한다고 해야 할지 조금은 애매한 크기죠. 그들을 꿰기 위한 무기입니다."

"?"

그럴듯하군."

"보통의 〈철인〉이 4미터를 약간넘으니까요. 최대한 잘 뚫고 들어가게 창을 설계했습니다."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결국 이 인간남자도 제국 쪽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입장인 것이다.

"으음. 내 무기를 점검하는 데시간이 얼마나 걸리지?"

"이런, 실례가 많았습니다. 오늘 가르침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련이 가능할지 어떨지 아는 건 하루면 충분할 겁니다."

"그럼 내일 보자고."

나는 첸들러와 헤어진 뒤 슬쩍

밖으로 빠져나갔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그놈들. 그대로 포기할까?'

내 투구를 벗기려 했던 제국군.

'라인버그 남작이랬나.'

공포 스킬로 쫓아 보내긴 했지만, 아직도 나를 수상하게 생각할 게 분명하다.

놈들의 동향을 확인해야 한다.

171화 매듭 (11)

***************************************************

이런 일은 직접 확인해야 한다.

허술하게 대처하다간 언제 어디서 칼날이 날아을지 모른다. 부족한 관찰은 죽음을 낳는다.

'이미 여러 차례 경험했지.'

조언을 줄 레나도 없다. 펜던트의 발동 시간도 한참 남았다.

최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짙게 뻗은 밤에 그림자를 숨기고, 적막해진 거리를 걸었다.

그라스미어의 밤은 조용했다.

간간이 횃불을 들고 순찰 도는

녀석들만 있을 뿐.

수마에 반쯤 잠긴 병사들은 숨은 그림자를 눈앞에서 놓친다.

첫 번째 목표.

날 검문하려 하던 병사들은 지금어디서 뭘 하고 있는가.

확인을 위해 성문으로 가는 길.

무언가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챈들러와 걸어오며, 그가 설명한 커다란 천막.

차갑게 내려앉는 달빛 아래, 유독빛나는 흰 천막이 눈에 들어왔다.

흰 천막 주위로, 무장한 용병들이 긴 창을 들고 차분히 주위를 순찰하고 있었다.

졸고 있는 녀석은 없다.

문제는.

'느껴지지. 않아?'

천막 안쪽은 뭔가에 막힌 것처럼 기척이 닿지 않는다.

탐지 스킬을 써 봐도 간헐적으로 들리고 느껴질 뿐.

위험한 냄새.

더불어 익숙한 냄새가 난다.

용병들은 두셋이 한 조를 이루어규칙적으로 주위를 순찰하고 있다.

놈들의 음직임에서 엄격한 훈련을 거친 티가 났다.

조직적이다.

'어디서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데.'

별의 창병들.

챈들러는 그들이 엄격한 규율, 충실한 계약 이행으로 높은 평판을 가졌다고 했다.

소문과, 덧붙여지는 의견들.

후작의 죽음이 황당하게 왜곡되는 모습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았다.

평판이라는 건 누가 만드는 걸까?

어쩌면 터무니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조작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챈들러가 좀 안일한 게 아닐까?

머리를 흔들어 잡생각을 떨쳤다.

'이럴 때가 아니지.'

라인버그 남작이 어딜 가서 보고하는지 확인하는 게 먼저다.

잡념을 떨치고 발걸음을 재촉해 곧성문에 도착했다.

경비대의 모습을 살폈다. 하지만 경비대가 전부 다 바뀌어 있었다.

내성에 있는 사이에 이미 교대를 마친 것 같았다.

'역시 바뀐 건가? 일단은 여기서 기다려 봐야겠군.'

거리를 무작정 헤매도 답은 없다.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얼어 죽겠네. 얼어 죽겠어.

밤 경비조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나 납치해 심문이라도 해 볼까싶었지만, 챈들러의 입장이라는 게있다.

병사들에게 질문을 하려면 입을 막기 위해 죽여 버릴 수밖에 없다.

챈들러에게 사고를 치지 않겠다고 약속한 일도 있다. 말썽 같은 건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서서히 날이 밝았다.

다행히 익숙한 얼굴들이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나오겠지?' 밖에서 나를 둘러싸던 녀석들의 얼굴이 하나씩 확인됐다.

보병과 기병 둘이 어제처럼 다시 성문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곧 비어 있는 자리 하나가 눈에 띄었다.

가장 중요한 자리.

'안 나와?'

라인버그 남작의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마음 한구석이 싸늘히 가라앉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디로 간 거지? 누구에게?'

기다리던 경비병들이 교대하러 온녀석들에게 물었다.

"남작님은?"

"오늘 중요한 일 있다고 하셨어.

내일이나 모레쯤 오신대."

"아예 밖으로 나가신 건 아니고?"

"아닐걸? 자세한 건 나도 몰라."

'중요한. 일?' 하필 이때 놈이 사라졌다. 나에 대한 보고일 확률이 높다.

〈상관〉의 결정이 내려지면 무언가 움직임이 나올 터.

'어쩌지.'

안타깝게도 힌트는 없다.

그라스미어 거리를 돌면서, 일단무작정 한번 찾아보기로 했다.

반나절 넘게 거리를 돌아다녔지만 녀석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애초에 건초 더미에서 바늘 찾기.

탐지 스킬로 기척은 감지할 수 있지만, 누가 누군지 다 알아볼 수 있는 건 아니다.

잡히는 건 대략적인 크기 정도.

도시 가운데 자리 잡은, 가장 큰선술집〈피곤한 도끼〉로 갔다.

동서쪽으로 한참을 가지 않는 한.

녀석이 근무하던 곳에서 술을 마시려면 이곳이 최적. 라인버그가 잘아는 장소일 확률이 높다.

술집에 들어서자 시끌벅적한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확인해 봐서 나쁠 건 없다.

- 끼익.

문을 열자 종업원이 다가왔다.

"주문 받겠습니다."

이제는 슬쩍 은화 한 닢을 손에 쥐어 주는 것도 익숙하다.

"용돈이나 하시오."

손안의 단단한 감촉을 확인한 종업원이 입을 떡 벌리고 말했다.

"어이쿠!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전쟁을 앞두고도 돈은 통하는 것같다. 아니, 전쟁을 앞두었기에 더통하는 건지도 모른다.

"잠시만. 좀 둘러보지."

"어이쿠! 예, 모쪼록 편하게. 룸까지 잠시 열어 보게 해 드리겠습니다. 둘러보십시오!!"

- 드르륵! 드르륵!

종업원이 환하게 미소 지으며 름을 열었다. 사람들이 얼굴을 찡그렸다.

"뭐 필요하신 건 없으십니까?"

"없어! 닫으슈!"

"예이!"

종업원은 나를 커다란 술집의 2층, 3층까지 안내했다. 하지만 어떤 곳에도 라인버그 남작은 없었다.

"원하는 걸 찾으셨는지요.?"

"없군."

적당히 수고비로 은화 한 닢을 더쥐어 주었다.

"아이고! 평생 복 받으십시오!"

종업원의 허리가 바닥까지 숙여졌다.

곧장 문을 닫고 돌아 나가려 할 때였다.

"거. 레안드로 후작 말인데."

익숙한 이름이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들렸다.

'레안드로!? 그 인간 말인가?'

자동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키 크고 뚱뚱한 남자와 앙상하게 마른 남자 둘이 앉아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마른 남자가 재촉했다.

"뜸 들이지 말고 말해 봐."

우스꽝스러운 머리를 하고, 턱수염이 귀까지 돋아난 뚱뚱한 남자가 말을 이었다.

"죽기 전에 유블람에서 그 난리를 피웠다질 않아? 경비대를 싹 잡아죽이고, 영주를 확 갈아엎는다고 하면서. 그게 말이 될까?"

마른 남자가 고개를 신경질적으로 끄덕였다.

"당연히 말이 되지. 마약 살포에다인신매매까지 했다고 하는데."

"그야 그렇지. 그러니, 내 말은.

이게. 가능한가 싶어서."

"뭐? 무슨 소리야?"

"내 매형이 사령부 행정병이잖아.

이건 사실 비밀도 아닌데. 그게.

유블람에서 난리가 날 때, 후작은 저 서북쪽 끝에서. 임무 중이었다고 하더라고."

열어 가던 손잡이를 놓았다. 발은 이미 안으로 돌아섰다.

"저희 가게가. 나가려다가도 다시 들어오게 되는 곳이지요! 헤햇!"

종업원이 내 눈치를 보다가 근처자리를 하나 치우고 의자를 했다.

쥐어 준 팁이 넉넉한 탓인지 주문으로 귀찮게 하지 않았다.

아예 의자에 앉아서 두 남자의

대화에 정신을 집중했다.

"임무?"

"응. 서리 바실리스크를 잡는 임무를 맡고 있었대. 이상하지?"

바실리 스크.

마왕군에서 본 적 있는 녀석들.

길이만 무려 삼십 미터에 달하는 흉악무도한 마물이다.

'지금도 출현하는 건가.'

하지만 바다에서 크라켄을 잡은 레안드로 놈이라면 충분히 요리할만한 상대.

북방의 바실리스크 살해 임무를 놈이 받은 것도 이상하지 않다.

- 탁.

깡마른 남자가 술잔을 내려놓고 인상을 찡그렸다.

"대륙 서북쪽 끝과 동남쪽? 그럼뭐가 진짜야. 한 사람이 두 군데 있을 수 없잖아?"

"그러니까 말이지. 진짜 후작은 안죽었다는 소문이 있어. 유령을 봤다는 소리도 있다니까!"

'젠장.' 테이블 아래로, 발이라도 살짝 구르고 싶었다.

전부 내 이야기다.

평범한 인간 두 명이 내가 벌인짓을 술자리에서 공공연히 이야기하고 있다.

"그럼 남쪽에 있던 게 진짜겠군.

그 후작은 유블람 행정관들이 분명확인했다며?"

"그래. 얘기들 하잖아. 회청색 머리칼에. 검기를 썼었다고."

"살아 있는데 숨기는구만. 나타난유령이 진짜 레안드로 후작이네."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어디까지 어떻게 소문이 난 걸까.

수습이 절대 불가능할 지경인 건 분명하다. 절벽으로 떨어진 소년 탓을 할 것도 없다.

이번 생의 초반에, 후작 흉내를 낼때부터 이미 모든 일이 꼬였다.

〈제국 대상조大上造 바티엔느 폰레안드로가 명한다. 〉〈유블람 영주에게 전해라. 자살할이틀의 여유를 주겠다. 〉그때는 좋았다.

예전보다 훨씬 더 강해진 힘.

새로 얻은 스킬들.

인간의 법률을 으르렁거리며 루비아의 직접적, 간접적 원수들을 처참하게 살해했다.

죽음의 공포, 쫓기는 공포를 진득하게 느끼게 해 줬다.

내 힘이 이 정도라는 생각에 꽤 즐거운 마음까지 들었다.

소년을 구출한 뒤 마스커레이드로 모습을 보일 때에는 하찮은 우월감을 만끽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내 행동은.

후작을 죽인 황실의 심기를 몹시거슬리게 했을 것이다.

낭만적인 자살.

혹은 엠버와 연합의 암살.

기껏 조성한 두 겹의 소문이〈후작의 유령〉이라는 존재 때문에 초점을 잃고 흐릿해진다.

- 후작의 유령이 남부를 배회한다!

황실이 만들어 내지도 않았으며, 통제할 수도 없는.

〈후작은 살아 있다! 〉라는 소문은 〈후작은 왜 죽었는가? 〉를 완전히 묻어 버린다.

수도에서.

황실이 엮인 비밀 사육장을 전혀건드리지 않았더라도.

나는 처음부터 놈들에게 노려질 처지였던 것이다.

'이게 무슨. 망할.'

- 끼익!

몸을 뻘 때다. 선술집 문을 열고 나가 내성을 향했다.

'그래도 칼은 찾고. 챈들러에게 마지막 인사 정도는 해야겠군.'

곧 떠난다고 말하기 위해 내성에 도착했을 때.

집무실 쪽에서 소란스런 언쟁이 들려왔다.

"전시에 그라스미어의 대장장이를 모두 징발해 주십시오. 병기를 수리하면서 전진해야 하니까요."

"우리 장인들 전체를 다 전선에 내보내라는 거야? 자네,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챈들러는 불쾌한 심기를 조금도 감추지 않고 단호히 반박했다.

하지만 상대도 물러서지 않았다.

"황실의 명령입니다. 그리고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도시의 치안 권한 말씀인데.!"

'라인버그?' 한참을 쫓았는데, 그야말로 등잔밑이 어두웠다.

바로 여기로 온 걸까.

아니면 황실의 명령을 전하러 왔다고 했으니, 이미 윗선과 접촉을 끝냈다는 뜻일지도.

나에 대해 보고를 끝냈을까.

'흐음.

한참 앵무새처럼 떠들던 녀석이 떠났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나타나 안으로 걸어갔다.

"은공! 오셨군요! 한참 나타나지 않으셔서 걱정했습니다."

"내 걱정은 됐다. 너야말로 곤란해보이던데?"

물론 가장 위기에 처한 건 나.

하지만 챈들러 정도에게는 허세도 한번 부려 보고 싶다.

"다 보신 겁니까? 어휴.

챈들러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분위기가 축 쳐져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꺼낸 말은 예상 밖이었다.

"라인버그 남작, 원래 저런 사람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저런 사람이 아니라고?"

"예. 인망 두럽고, 줏대 있는 기병지휘관이었습니다. 근처에 주둔하면서 유사시 그라스미어를 보호해 주는 역할이었죠."

"그런가."

"예. 아버지와도 꽤 친분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황실 꼭두각시로 변해 버렸죠. 사람이 아예 바뀐 것처럼 말입니다."

'아예 바뀌었다고.

그 말을 잠시 곱씹던 나는 챈들러에게 충고를 건넸다.

"어쨌건, 황실 명령에 정면으로 어깃장이라니 위험한 거 아닌가?"

전쟁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여무참하게 살해당했다는, 루비아의 부친이 떠올랐다.

하지만 챈들러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어차피 그라스미어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제가 필요합니다. 그래도 몇 대째 이어져 온 가문인데요."

'게다가 이 정도면 많이 맞춰 주고 있는 겁니다.'라며 챈들러가 말을 이어 갔다.

"외동인 데다 친척도 없습니다.

저를 찍어 내도, 자리 대체할 인간못 찾을 겁니다."

상당한 자신감이다.

에라스트의 전 영주, 레이 백작에게는 쓰레기 남동생이라는 대체제가 있었다.

청부업자 둘을 보내어 루비아를 죽이라고 명령했던 '대체재'가.

하지만 챈들러는 아무도 없다.

게다가 도시 내에서 가문에 대한 평판은 가히 압도적.

얼핏 들어 보면 그의 말에 일리가 느껴진다. 상식선에서라면.

'하지만. 황실이 과연 그렇게 생각대로 굴러가 줄까?'

놈들은 검주인 레안드로 후작을 깔끔하게 살해했다.

마왕과 결탁하고 있다는 심증까지 수도 곳곳에서 찾았다.

챈들러의 예단 따위, 가볍게 짓부수는 집단일 게 분명하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지 챈들러가 나를 보고 물었다.

"짚이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글쎄.

하지만 뭔가 확실한 증거를 꺼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튼 조심하라고."

뻔한 당부였다. 그러나 정말 딱히 해 줄 말이 없었다.

사육장의 벌레 이야기를 뭐라고 해야할까?

레안드로 후작이 죽은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해야 하지?

'후우.'

그대로 떠나려 했지만, 왠지 그냥두고 가기가 영 불안했다.

'이거라도 작동됐으면 뭔가 좀 더안심일 텐데.'

목에 걸려 있는 펜던트를 손으로 살짝 쥐었다. 여전히 어둡게 빛이 죽어 있다.

[다음 발동까지: 49:41:35.]

구까지 이틀.

172화 매듭 (12)

***************************************************

그때 였다.

"영주님.?"

뒤쪽에서 풀 죽은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오시죠."

복도 쪽에서 팔 굵은 노인이 나타났다. 챈들러가 칼을 맡겼던 수석대장장이 였다.

노인은 한 명의 조수와 함께 내가 맡긴 칼을 들고 있었다. 그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딱 맞춰 오셨네요."

챈들러가 대장장이를 반갑게 맞았다.

노인이 침울한 낯빛으로 나와 챈들러를 번갈아 바라봤다.

"칼은 어떻게 됐나요?"

"면목 없습니다."

챈들러의 질문에 노인이 고개를 푹수그렸다.

'실패로군.'

처음부터 기대하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하면서 가져갔지만, 만지다 보니 성공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던 것이었을까.

노인은 꽤 심란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영주 전용 화로를 쓰면 녹이는 온도 자체는 얻을 수 있겠지만. 제가 제대로 다시 빚어낼 역량이 없을 것 같습니다. 포기했습니다."

챈들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무리한 요구를 드린 제잘못이죠."

"부끄러워서. 후우. 그게.

노인이 주섬주섬 품을 뒤졌다. 그리고 커다란 종이 한 장을 꺼내 챔들러에게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지도입니다."

"지도.?"

내 물음에 대장장이가 목소리를 낮춰말했다.

"흠. 검사 양반, 뭐라고 불러야 될지 모르겠구려. 아무튼, 산맥에서 드워프 장인들이 살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략의 위치라오."

"드워프들의 위치라니.!"

깜짝 놀라 지도를 바라봤다.

그들이 동부 산맥에 숨어 산다는 이야기는 슬라임으로부터 들었다.

하지만 '동부 산맥'이라고 간단히 칭하고 있으나 그 면적은 실로 어마어마하게 넓다.

제국 면적의 1/3을 차지한다.

그라스미어 같은 도시는 백 개도 가뿐히 들어갈 수 있을 넓이.

게다가 층층이 겹친 지하 계곡과 동굴 미로들까지 생각해 보면 수색이란 건 사실 요원한 일.

이런 길잡이가 있고 없고는 그야말로 천지 차이다.

놀란 마음을 숨기지 않고 들떠서 지도를 바라보았다.

하룻밤 사이에 만들었는지 그다지 정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산맥의 깊이와 높이까지, 나름대로 애써묘사하려 한 티가 났다.

"정말 대단하군."

대장장이 노인이 흠, 하고 콧김을 들이마시며 말을 이었다.

"죽은 툴즈 형님에게 들은 기억을 바탕으로 그렸소. 웬만하면 비밀로 하라고 했는데. 뭐. 다 쓰고 꼭 찢어주시면 좋겠소만.

"어떻습니까, 은공.?"

챈들러가 나를 바라봤다.

"그러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이해할 만한 요구.

영주의 요구가 아니라면 눈앞의 대장장이는 애초에 드워프 장인들에 대해 완전히 함구했을 것이다. 그들의 존재를 안다면, 사슬을 채우고 노예로 사용하려는 인간들이 셀 수도 없을 터.

물론, 드워프들은 노예가 되느니땅에 머리를 찧어 자살을 택할 종족이긴 하지만 말이다.

"뭐, 아예 여기서 파기하자고."

- 화르르!

꼼꼼히 지도를 외운 뒤, 곧바로 난로에 태워 버렸다.

외우며 궁금했던 점 몇 가지에

대해서도 착실히 답변을 받은 터.

불타는 지도를 확인하고 백발의 대장장이는 꾸벅 인사한 뒤 바깥으로 사라져 갔다. 조금 미안한 듯한 어조로 첸들러가 말했다.

"툴즈라는 분이 살아 계셨다면 도와 드렸을 텐데. 죄송합니다."

"언제 죽은 인물이지?"

"일 년 정도 됐습니다."

'그 정도면.

내가 일어날 즈음 죽었거나, 이미죽어 있을지도 모른다.

과거로 돌아가도 만날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는 인물.

"상관없다. 어차피 동부 산맥으로 갈 생각이었으니까. 혹시나 해서 물어봤던 거다."

비단 검 문제뿐만은 아니다.

황실의 추적으로부터 몸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직스키세스 붐텅이 말한 마법사머드캐쉬를 만나 보기 위해서라도, 동부 산맥 곳곳을 깊숙이 뒤지고 다닐필요가 있었다.

"그래도.

뭔가 못 해 줘서 미안하다는 듯한 기색인 녀석을 보고 말했다.

"무척이나 피곤해 보이는군. 이만 슬슬 잠들지 그러나?"

"그렇습니까? 사실 아직 할 일이 좀 남았습니다."

챈들러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늦은 밤이었다.

영주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전쟁 준비까지 하느라 상당한 격무에 시달리는 것 같았다.

내가 한층 더 녀석을 피곤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럼 난 이만 떠나지."

"벌써 말씀이십니까.?"

"이미 이틀을 머물렀어."

내가 여기 더 남아 봐야 의심만 계속 살 게 분명하다.

내 안전뿐만 아니라.

이 도시를 위해서라도 하루라도 빨리빠져 주는 게 낫다. 챈들러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꼭 그러시다면. 다른 사람들과 작별 인사라도 하시지요."

"작별 인사?"

"헤일리가 무척 기다리던데요."

"나를?"

"예. 자넷과 함께 놀면서도 종종언제 오냐고 물어보더군요."

갸웃한 표정을 짓는 나를 향해

챈들러가 설명했다.

"들어오면서 보셨던 단발머리 메이드이름입니다."

날 어떻게든 대접하려 했던 어린 시녀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조금 심한 일인지도 모른다.

"꼭 봐야 할까?"

"이대로 떠나시면 다들 무척 아쉬워할 겁니다. 헤일리는. 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깨울까요?"

"아니. 지금은 자고 있을 텐데."

"그럼 내일 아침 보시는 겁니다!"

챈들러의 간곡한 요구에 결국 백기를 들고 승낙했다.

하지만.

얌전히 내 방으로 되돌아갈 생각따위는 전혀 없다.

'하루를 더 머무른다면.

망설일 것 없다.

조금 전 밖으로 나간 라인버그의 뒤를 쫓는 게 당연.

마찰을 빚을 생각은 없다.

일단 어디로 가는지 정도만 해도 도움이 될 거다.

- 팟!

다행히 녀석은 크게 멀어지지 않았다.

금세 기척을 잡고 뒤를 바싹 따라붙었다.

집중해서 따라가서일까.

'뭔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따라가며 보는 라인버그 남작의 뒷모습이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어딘가-

흐물흐물하다.

묘하게도 그런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밤거리를 걷는 주제에 우습게도 여러군데를 돌아다녔다. 골목길을 굽이 굽이 돌고, 이 담 저 담을 훌쩍넘으며 엉뚱한 방향을 빙빙 돌기만했다.

'미행을 눈치챘나?'

성문 앞에서 나에게 한 번에 제압당하던 모습을 생각하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다 이제 안심이라고 여겼는지 똑바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참 걸어가던 녀석이 멈췄다.

묘한 일이었다.

놈의 걸음이 멈춘 곳은 숙소도, 술집이나 사창가도 아니었다.

생각하지 못한 전혀 엉뚱한 곳.

그리고 멈춰서는 안 될 장소.

'여기는.

흰 천막.

용병대, 별의 창병들이 주둔하는 곳에 라인버그는 걸음을 멈췄다.

거리를 지나는 행인이나 제국군은 한 명도 없었다.

눈길을 피하기 위해 이런 시간에 온 건지도 모른다.

주위에는 횃불을 들고 서 있는

용병들뿐이었고, 그는 제지받지 않고 곧바로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저 용병들은. 분명히 챈들러가 고용했다고 했는데?'

평판을 듣고 개인적으로 고용한 용병대라고 했다.

하지만 라인버그는 황실 직속.

제국군 지휘관이 천막 안에 바로 들어가는 상황은 몹시 이상하다.

명백한 내통. 아예 처음부터 같은 패거리였을지도 모른다.

'배신당했군.'

무슨 대화를 하나 듣고 싶었지만, 천막에는 차단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내부 대화가 들리지 않았다.

이미 경험했던 것처럼.

탐지 스킬도 먹히지 않는다.

한 시간 정도 가만히 기다렸지만, 라인버그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쳐들어갈까?'

곤란하다.

명분도 없이 이 자리에서 확 엎어버릴 수는 없다.

탐지를 차단하는 천막에 머무르는 상대다. 전력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챈들러에게 일단 경고를 주는 게 답이다.

'아침까지 기다릴 것도 없어. 곧장 가서 말해 줘야겠군.'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나마 하루라도 더 머물러, 이런사실을 확인한 게 다행이었다.

나는 어둠에 몸을 숨긴 채 곧바로 내성을 향했다.

- 덜컥.

하지만 내성 문이 잠긴 채 열리지 않았다.

챈들러에게 받은 열쇠가 철컥철컥소리를 내며 자물쇠를 풀었지만, 안쪽에 무언가가 굳게 걸려 있다.

'이런 일이 없었는데.'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 콰앙!

그대로 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안쪽에 덧댄 두꺼운 나무가 깨진 모습을 흘끗 바라보고 복도를 달려들어갔다.

곧 바닥에 쓰러져 식어 가는 시체한 구가 보였다. 종종 보곤 했던 익숙한 얼굴의 내성 경비다.

깔끔하게 끊긴 경동맥 주위에서 아직따듯한 김이 새어 나왔다.

'습격.!'

천천히 사방을 살피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내성에 암살자가 진입했다면 목표는 하나다.

'질주.'

- 팟!

최대한 빠른 속도로 영주가 있는 집무실을 향해 몸을 튕겼다.

- 서걱!

하지만 2층으로 올라가기도 전, 허공에 떠서 흔들리는 두 다리가 나를 가로막았다.

바닥에서 1미터 정도 붕 뜬 채로, 대들보에 시체가 매달려 있었다.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두 손이 묶인 채, 밧줄에 목 졸려죽은 시체의 얼굴이 익숙하다.

나를 어떻게든 챙겨 주려던 시녀.

식사를 하지 않자, 침구와 목욕이라도 애써 준비하던 우스꽝스러운 행동들이 눈앞에 선명히 떠올랐다.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않은 그녀의 몸이 축 늘어져 허공에서 흔들린다.

'자넷이라고 했던가.

당연히 자살일 리는 없다.

딛고 올라갈 만한 것도 없으며, 시녀의 작은 손으로 밧줄을 매기에 대들보는 지나치게 굵고 커다랗다.

전시展示와 같은 살해.

혀는 입술을 비집고 밖으로 살짝나와 있고, 입술 근처는 작게 하얀거품이 맺혀 있었다.

아주 잠깐-

그 앞에 굳어져 있을 때였다.

- 피릭!

시체가 매달린 대들보 위.

단검이 날아왔다.

마치 투창기에서 발사된 것 같은 빠른 속도였다.

'기척도 못 느꼈는데.!'

피할 새도 없었다. 그대로 칼을 들어검면으로 막았다. 힘을 줘서 강하게 떨쳐 내려 후려칠 때였다.

- 까앙!

하지만 칼에 닿는 순간 단검이 수 조각이 나며 깨졌다.

'뭐지?'

냉기가 폭주하듯 대검과 온몸, 바닥으로 퍼져 갔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터무니없이 강렬한 냉기가 칼과 갑옷 전체를, 서 있는 주위공간을 딱딱하게 얼려 가며 바닥에 몸을 붙게 만들었다.

'인첸트.?'

소모성 인첸트.

영구 인첸트와 달리 무기가 부서지며 내장 마법이 발동한다.

한 번밖에 쓸 수 없는 만큼 위력만큼은 발군.

- 사가각!

단 한 명의 적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대로라면 완전히 얼어붙어 움직일 수조차 없다.

'이럴 때는.

갑옷의 관절 부위들이 모두 광꽝얼어붙어 있다. 슬라임과 싸울 때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

두 번째 겪는 상황이었기에, 나는 반사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 화르르르!

[마력 소모량 300% 상승.]

온몸을 불꽃으로 달궜다.

혼합 마법의 이중 중첩.

'몸을 매개로.

거기에 한 번 더.

격발.

- 퍼버벙!

발아래에서부터 양손, 발끝 칼끝까지 강렬한 화염이 터져 나갔다.

그라스미어에 도착하기 전 겪은 대對슬라임 전.

귀중한 경험이었다.

몸을 매개로 한 마법 발동에 이미익숙해진 것이다.

- 파사사사삿!

강렬한 냉기에 얼어붙었던 사방이 부서져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제법인데?"

단검이 날아온 대들보 위쪽에서 살짝놀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허공이 일렁거렸다.

반쪽짜리 은색 가면을 쓴 여자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왼손에는, 그 칼날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얇디얇은 레이피어가 낭창거렸다. 날 전체에 날카로운 기운이 맺혀 있는 게 느껴졌다.

- 쓱!

은빛 가면의 여자는 레이피어를 들어시녀의 이마 가운데에 꽂았다.

칼날은 마치 호수에 나뭇가지를 담그는 것처럼 아무런 저항 없이 깊이 들어갔다.

- 피릭!

어느새 빼낸 칼에 묻은 뇌수가

도발하듯 내 쪽으로 흩뿌려졌다.

여자는 한쪽 입꼬리만 비뚜름히 올리며 느긋하게 이죽거렸다.

"가짜 잡으러 온 진짜〈유령〉이지.

후후후. 어딜 갔다 오시는 걸까?

덕분에 내 실적이 하나 늘겠지만."

'유령이라고?' 손목을 바라봤다.

무리해서 마법을 쓴 탓에 손목의 매듭 다섯 개가 더 타올라 있었다.

물론 그걸 신경 쓸 여유는 없다.

기척도 느끼지 못했던 상대가 칼을 들이대고 있다.

바로 여기서 죽을지도 모른다.

'한 명일까.'

조금씩 상대의 간격을 겠다.

깔끔하게 경동맥이 절단된 경비의 시체도, 눈앞에 있는 여자의 솜씨라고 보면 될 것이다.

상대도 내 간격을 조용히 재는 것 같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들보 위를 가만히 걷던 여자가 나를 바라보고 말했다.

"측정치랑 뭐 이리 실력이 달라?

그래도. 몸에 구멍 열 개 정도는 뚫어 줄 수 있겠는걸."

- 피릿!

칼날 전체에 섬뜩한 기운을 담은, 레이피어 끝이 수 갈래로 휘어지며 나를 향해 찔러 왔다.

스물하나.

갑옷 곳곳에, 레이피어로 완전히 관통한 작은 구멍의 숫자.

무려 스물이 넘는다.

열 개를 뚫어 주겠다던 은색 가면의 말은 과한 겸손이었다.

그에 비해.

내가 뚫은 구멍은 단 하나.

다만, 조금 더 크고 치명적이다.

"끄흐. 끄흐혹. 이런 씨발.

배에 칼이 깊이 박힌 상태에서도 여자는 죽지 않고 꿈틀거리며 붉은 침과 함께 욕설을 내뱉었다.

"스켈레톤이라니. 뒷. 이 무슨개 같은.

안타깝지만 실력에 비해 상성이 좋지 못했다.

여자의 쾌검.

급소를 뚫어야 할 레이피어 끝이 모두 빈 공간만 뚫고 지나갔다.

"쿨럭.!"

피기침이 투구에 튀었다.

두개골을 붙잡아, 반으로 쪼개기라도하고 싶었을까.

"넌. 어차피 뒈질.!"

이를 악물고 내뻗어 오던 그녀의 손이 아래로 축 늘어졌다.

힘겨운 상대였다.

- 참격.

횡으로 칼을 휘둘러 시체를 절반으로 잘랐다.

- 퍼걱!

반으로 잘린 여자의 상반신에서 은은한 초록빛이 났다. 레일리에게 나던 것보다 조금 더 어두웠다.

[민첩이 1 올랐습니다!]

[민첩이.]

흡수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약간의 스탯을 빨아들였다.

흘끗 시스템 창을 확인한 뒤에 곧아래로 내려 꼈다.

시선이 팔목이 머물렀다.

샤루니안이 만들어 준 부적 팔찌매듭들이 남김없이 모두 회색 재가 되어 버렸다.

'이제 이것도 끝이군.'

하지만 그것까지 고려하며 싸울정도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체력도 반 이상 깎여 있었다.

도망갈까, 하는 생각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문득 고개를 든다.

하지만 여기서 내빼 버리면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다.

'젠들러. 헤일리는.?'

오늘 밤 벌어진.

혹은 벌어지고 있는 참극에 대해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

- 팟!

마음을 굳히고 긴 복도를 달렸다.

2층으로 올라가 영주의 방에 도착했을 때였다.

- 와그작. 와그작. 아삭! 꿀끽.

눈앞에 붉게 꿈틀거리는 어지러운 광경이 펼쳐졌다.

173화 매듭 (13)

***************************************************

- 오도독. 오도독

눈앞에 있는 건, 어쩌면 낯선 행위는 아니었다. 살아 있는 것들은 대개시체를 먹고 산다.

이 경우 뼈와 살을 씹는 건 팔다리가 달린 통통한 애벌레.

수도 외곽의 사육장에서도 비슷한 광경을 봤다.

하지만 녀석은 조금 달랐다.

레일리와 함께 뛰어든 사육장에서 봤던 것처럼, 길이 10cm 정도의 작은 녀석들이 아니었다.

스무 배는 커다란 한 마리가 시체를 상반신부터 꼭꼭 씹고 있었다.

뼈까지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누구의 시체인지는.

잠시나마 외면하고 싶었다.

다른 건 크기만이 아니었다.

주둥이 이빨은 훨씬 더 빼곡했고, 목 주변은 대여섯 겹의 근육으로 둘러싸여 씹는 힘을 지탱했다.

- 아드득!

벌레는 다시 한 번 입을 닫았다.

점액으로 끈적거리는 벌레의 입이 오물거렸다.

씹는 순간 밖으로 터지는 피조차 홀리기 아까워하는 듯했다.

'검기.'

- 우우우응!

대검에 곧바로 힘을 실었다.

강철 골렘들을 부술 때보다 훨씬강렬한 기운이 검에 모였다.

몸을 튕기며 곧바로 공격해 들어가려할 때였다.

애벌레의 반들반들한 등 부위가 조금씩 위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 꾸르륵. 꾸르르륵.!

'폭발인가?'

일종의 자폭일지도 모른다. 뒤로 훌쩍 물러나 거리를 뒀다.

- 꾸이이악

애벌레의 등이, 30센티 정도의

높이로 꿈틀거리며 솟아올랐다.

피막을 길게 당기며 부풀어 오른덩어리는 살로 만들어진 반죽처럼 아무것도 없이 밋밋했다가.

- 크흥! 흠! 흐응!

바람 빠지는 기괴한 소리와 함께 코가 뚫리고, 입이 뚫렸다.

코를 가운데 두고 두 개의 작은 눈이 생겼다.

눈이 붉게 번들거리며 깜빡였다.

자폭 따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공격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어딘가 익숙한 눈매.

내가 보러 온 바로 그 얼굴.

'챈들. 러? 어떻게.?'

지독한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새로 솟아난〈얼굴〉이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얼굴〉은 코를 벌름거렸다. 입을 열고 닫았다.

끈적한 녹색 점액이 막 뚫린 입사이에 거미줄처럼 쳐져 있었다.

그 입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처럼 오물조물 움직였다.

- 우우우응!

칼에 검기를 피워 올린 채 녀석을 겨눴다. 그때 챔들러의 모습을 한 입이 다시 열렸다.

"배고파."

'배고프다고.?'

"배고파.

- 아그작! 아그작!

커다란 애벌레는 눈앞에서 계속시체를 씹는다.

나는 밖에서 은빛 가면을 쓴 여자에게 했던 질문을 다시 한 번 반복할수밖에 없었다.

"넌 누구냐?"

그러자 만들어진 〈얼굴〉이 다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얼굴은 점점 더 또렷해졌고, 이목구비도 서서히 챔들러를 닮아 가고 있었다.

수박 같던 큰 고깃덩어리에서, 굴곡과 입체감이 생겨 가던 얼굴이 막 빚어져 가는 새빨간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오셨, 습, 니까. 은, 공.'

"키킬 키키키키 킥

내가 흠칫하자 벌레는 몸을 높이 세우며 발작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막 챈들러의 몸을 씹어 먹고 있는, 밋밋한 주둥이 부위마저도 들썩이는것 같았다.

그건 나를 놀리기 위한 웃음이나 겁주기 위한 웃음이 아닌, 어쩔 수 없이 근원적으로 터져 나와 버린 웃음인 것 같았다.

- 투둑! 투두둑!

어느새 시체를 모두 먹어 치운

애벌레의 몸에서, 점액에 뒤덮인 팔몇 개가 추가로 튀어나왔다.

'이게. 성체?' 수도의 애벌레 사육사들이 하던 말이 떠올랐다.

〈성체는 위험해서 마법사들 입회하에 훈련시킨다잖냐. 가죽을 종이 처럼 쫙 뜯는다고 하던데. 〉하지만 먹어 치우며 모습을 훔친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벨 자세를 잡고 기다렸다.

- 찌익!

팔 한 쌍이 길게 뻗어 왔다.

인간이 가질 수 없는 길이로 팔을 늘어뜨리며 나를 양쪽에서 잡아채려했다. 날카롭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른 기습.

슬쩍 몸을 숙여 피했다.

- 광!

애벌레가 화난 둣 돌기둥을 쳤다.

돌기둥이 울리며 조각이 뜯어졌다.

'단단하긴 하군.'

애벌레가 팔 두 쌍을 길게 늘여나를 겨냥했다.

"피해도. 먹는다.

등 부위에 솟아난 챈들러의 입이 오물거렸다.

다시 한 번 애벌레가 팔을 교차해나를 잡으려고 했다.

- 팟!

내가 있던 자리를 덮치는 순간, 뒤가 아닌 위쪽으로 뛰어올랐다.

허공에서 칼을 등 뒤까지 180도 당긴 뒤 강하게 앞으로 내리쳤다.

- 서걱!

팽이가 돌 듯 회전하는 대검에, 좌우로 교차된 벌레의 팔 두 쌍이 그대로 잘려 나갔다.

"어. 어어어.

당황한 벌레가 커다랗게 입을 벌려서 나를 씹어 먹으려 한다.

어설프다.

자의식은 강하게 가지고 있는 것 같았지만, 능력의 절대치에 비해한심할 정도로 조잡한 전투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앞서 고전한 은빛 가면의 여자는커녕, 챈들러보다도 한참 약하다.

누군가를 흉내 내는 것에만 특화되어 있는 벌레인지도 모른다.

'고작 이 정도 녀석에게 먹혔단 말인가.

강자를 찾아, 황야의 낯선 이에게까지 가르침을 청하던 챈들러의 모습이 떠오른다.

터무니없는 계약을 꼭 지키겠다며 우기던 모습.

'친절한 녀석이었다.'

벌레의 등에 달린 챈들러를 베낀얼굴을 흘끗 봤다.

똑같지만, 조금도 그와 같지 않다.

한층 괴로운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결빙.'

지저분한 꼴을 더 보기 싫었다.

냉기를 두른 칼을 휘둘렀다. 아예반조각으로 갈라진 벌레가 안쪽에서부터 얼어 갔다.

'질주.!'

앞으로 더 빠르게 달렸다.

또 하나의 익숙한 얼굴이 시체가 되어 복도에 쓰러져 있었다.

"집사?"

챈들러 가문의 2대를 이어 섬기던 집사는 통로 한쪽 기둥에 등을 기댄채 죽어 있었다.

단정한 복장의 집사는 목이 반쯤잘려 너덜거렸고, 가슴 한쪽에는 날카로운 것에 베인 긴 자국까지 나있었다.

나름의 반격을 시도하려 했는지, 기둥 곁에 검신이 가늘고 긴 검은색스틸레토가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뾰족한 칼끝은 아무것도 찌르지 못하고 떨어진 듯 깨끗했다.

손을 모으고 바닥에 눕힌 뒤 다시 복도를 달려갔을 때였다.

선 채로 죽은 시체가 피를 흘리고 있었다.

몸에 창 여럿이 꽂혀 있다.

부릅뜬 눈에 영주를 지키지 못한 한이 담겨 있었다.

'크리스티나.

그녀의 두 눈을 막 감기려 할 때였다.

- 피이익!

앞쪽의 커다란 기둥 뒤에서, 어딘가 눈에 익은 대검이 빠른 속도로 빙빙돌아가며 내던져졌다.

대검이 만드는 공격 궤도를 슬쩍피하는 순간이었다.

- 촤르륵!

어두컴컴한 복도에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까만 사슬이, 목을 칭칭감고 뒤로 획 잡아당겼다.

- 광!

피하는 방향으로 확 끌어당기는 힘에 끌려갔다.

바닥에 몇 번을 부딪힌 뒤에야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다.

- 철컹!

대검을 축으로 삼아 몸을 돌리며 쇠사슬을 잡아당겼다. 좌우의 기둥에서 사슬을 나눠 잡은 두 명의 인간이 나타났다.

4둘 9

이번에도 기척은 느끼지 못했다.

남자였다.

둘 모두 검은 가면을 썼다.

은빛 가면의 여자처럼 한쪽만 살짝가리는 게 아니라, 전체를 모두 덮는 가면이었다.

"제법 빠른데?"

"저기 있는 여자애 유품이잖아. 너아니면 이제 받을 사람이 없어. 다른 친구들은 다 뒈졌거든."

놈들은 한 손으로는 쇠사슬을 컨트롤하는 긴 두 개의 막대를 나눠 들고 있었고, 다른 한 손으로는 긴 창을 들고 있었다.

'투창인가.'

크리스티나를 살해한 건 눈앞의 두인간인 듯했다.

'지금까지. 아홉.'

사방 곳곳에서〈가면:)들이 나타났다.

누구도 처음 나를 가로막았던 은빛가면의 여자만큼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숫자와 기습에는 당할 수 없었다. 몸 곳곳이 얼고 지져지고 부러졌다.

헤일리의 시체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곳곳에서 나타난 놈들은 하나같이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숨어있는 기척을 읽을 수 없었다.

- 화르르르!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그라스미어의 불'이 다시 한 번 나를 향해뿜어졌다.

간신히 피했다. 질주의 유효 시간이 거의 다 떨어지고 있었다.

[잔여 시간: 1:13.]

'망할.

답도 없었다. 처음 상대했던 은빛가면 여자처럼 강한 녀석은 없었지만, 하나하나가 결코 한 번에 제껴 낼수 있는 상대들은 아니었다.

한 번에 제끼기는커녕, 수도에서 후작의 시체를 다시 한 번 흡수하지 않았다면 이미 다섯 번은 죽었을 터였다.

놈들 하나하나의 수준은 무척 높았다.

전투 중심의 푸른 사자 기사단에서도 손꼽히는 순위라고 자부했던 레일리나, 명색이 근위기사단장인 이사벨보다 고작 반수 정도 떨어졌다.

그런 것들이 최소한 두셋, 아니면서넛이 뭉쳐 덤벼드니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다.

창문을 부수고 나가려고 해도, 놈들의 봉쇄는 철저하기 그지없었다.

'여기까지 내몰릴 줄이야.'

끝이라는 걸 알면서도 지하로 내려갔다. 다행히 이 장소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좁아지는 계단에서 일대일로 상대한 덕분에, 둘을 치명적인 부상에 빠뜨릴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여섯이 남았다.

"뭐 이런 곳이 다 있어.?"

가까이 따라온 검은 가면이 폭주하며 쇠사슬에 매달린 거대한 추를 휘둘렀다.

- 광!

매끈한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말파스의 조각상이 산산히 부서졌다.

울리는 소리가 던전 안쪽을 진동시킬정도였다.

부서진 골렘의 잔해를 지나 계속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잠깐!"

바깥에서 놈들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안쪽은 함정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물러가자고?"

"이번 작전은 적 전력 측정이 완전히 틀렸어. 변수가 너무 많다.

상황을 보고하고, 그분의 지시를 기다리는 게 낫지 않을까?"

"미친 소리 하지 마. 희생자가 셋이나 나왔다는 걸 알면. 우릴 산채로 포를 떠 버리실 텐데. 제발 우리선에서 해결하자고. 응?"

'차라리 함정이라고 착각한다면.

혹은 함정을 그대로 남겨 뒀더라면.

광화 연기가 뿜어지는 함정.

그게 있었다면 좀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두 부질없는 생각일뿐이다.

슬슬 진입하려는 놈들을 향해 통로에 계속 냉기 폭풍을 날렸다.

174화 매듭 (14)

***************************************************

- 휘이이잉!

통로를 전부 얼려 버리는 강렬한 냉기가 검에서 터져 나왔다.

손목에 있는 부적 매듭.

마흔아홉 개가 모두 타 버린 지이미 한참이다. 회색 재는 흔적도 남지 않았다.

팔찌를 찾을 것도 없었다.

팔목 갑옷 자체가 공격에 거칠게 뜯겨 하얀 뼈가 드러나 있다.

'어차피.

회로가 만든 마왕의 흔적을 쫓을, 푸르손 추종자들을 걱정할 상황은 아니다.

'차라리 지금 나타나 주든가.'

당장이라도 여기 출현해, 혼란의 삼파전이라도 벌여주면 좋겠지만 그런 기색은 없다.

- 퍼걱!

암살자들은 커다란 방패를 들어마법을 막아 냈다.

냉기에 섞인 바람의 위력에 뒤로 한참 밀려나기는 했지만, 고작해야 시간을 버는 정도에 불과했다.

전장의 일선에서 사용하면, 강제징집된 노예나 해골병사 소부대를 한 번에 얼려 깨뜨릴 수 있을 것 같은 위력의 마법.

예전에는 아예 상상도 해 보지 못했을 힘이지만, 가진 힘에 취할 여유 따위는 없다.

가면을 쓴 인간들은 그런 공격을 어떻게든 막아 내며 조금씩 간격을 좁혀 오고 있다.

'정체가 뭐지.'

놈들은 놈들 나름대로 나에 대해 무척이나 당황한 것 같았다.

"크으윽.!"

"아직도 이 정도의 마법을 시전할수 있다니. 대체 정체가 뭐야?"

"돌아가면 첩보조를 전부 죽여버려 야겠어."

"빌어먹을. 이거 진짜〈수도회〉의 협조라도 받았어야 하는 거 아냐?"

"헛소리 집어치우자고."

놈들이 이를 갈며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우쭐할 건 없다.

버텨도 답이 없는 상황.

버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아이작이 뼈에 새겨 넣은 회로는 완전히 과열된 데다가, 과다한 사용으로 몸 안에 있는 루-륨의 총량이 계속 말라 가는 게 느껴졌다.

자동으로 회복할 수 있다고 해도, 지금은 그 회복치를 한참 넘어서 사용하고 있다.

눈앞의 통로를 뚫고 어떻게든 탈출하고 싶었지만, 그럴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가면〉여섯이 모두 모인 지금, 결판을 내겠답시고 덤벼 봐야 조금더 빨리 죽을 뿐.

차라리 저들이 성급히 공격해 들어올때, 조심스레 반격을 노리는 편이낫다.

"계속 밀어붙이자. 저 새끼, 거의 다 끝났어. 아까보다 공격 빈도도 위력도 훨씬 더 약해."

저편에서 차가운 진단이 들린다.

'하나라도 더 데려가 주마:

챈들러부터 시작해, 크리스티나와 집사, 시녀와 헤일리까지 모두 다죽인 상대들이다.

왜 나 따위가 동생을 맡겠다고

말했을까?

그 아이는, 어쩌면 슬라임과 함께 있는 편이 안전하지 않았을까.

챈들러도, 크리스티나도.

내가 그라스미어에 오지 않았다면 혹시 안 죽지 않았을까?

하루라도 더 살았을지도 모른다.

'또 나 때문인가.

- 달그락.

나는 반쯤 부서진 갑옷 안에서 몸을 움직였다.

내게는 비기秘技도, 숨겨 둔 궁극의 한 수 같은 것도 없다.

그저 온몸이 전부 부서질 때까지 움직일 뿐. 갈 때 가더라도, 끝까지 한칼을. 더 먹인다.

'격발.'

이미 너덜너덜한 회로를 또 한 번발동시켰다.

- 화르르!

지금까지와 같은 불꽃이 대검을 휘감으며 타올랐다.

[주의! 체력이 15%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체력이 가파르게 깎인다. 끝일 수 밖에 없는 건 이미 알고 있다.

- 투둑.

갈비뼈 두 개가 과부하를 이기지 못하고 타 버린다.

물론 아무래도 상관없다.

지금은 여기서 끝이지만, 놈들을 기억했다가 다시 만날 것이다.

그때 지금의 빚을 받는다.

죽어 간 모두의 얼굴이 떠올랐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최대한 끌어올린 검기와 질풍을 섞어, 가장 먼저 다가오는 놈에게 다시 한 번날렸을 때였다.

- 쿠구구구구.!

뒤쪽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 퍼엉!

선두에 다가오던 놈이 주춤한 틈을 타서 빠르게 뒤를 돌아봤다.

아이작의 관이 있는 가장 안쪽.

놀랍게도 약 1미터 정도의 작은 입구가 생겨난 게 보였다.

'비밀. 통로?'

이번에야말로 끝이라 생각했는데, 그런 나를 놀리는 것처럼 석벽 한구석이 옆으로 밀려났다.

지금까지 아무 일 없다가 갑자기 왜 석벽이 열리게 된 건지 사정을 알기 힘들었다.

하지만 자세히 생각할 틈은 없다.

아이작의 무덤에 숨겨진 또 다른 비밀을 발견한 건지도 모른다.

죽어도 하나라도 더 알고 죽어야 복수에 도움이 된다.

- 팟!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좁은 입구로 몸을 날렸다.

안쪽으로 첫발을 디뎠을 때였다.

- 퍼엉!

짙은 안개가 입구 근처에서 피어오르며 갑옷 안으로 들어왔다.

몸을 살살이 훌으면서 무언가를 검사하는 것 같았다.

갑자기 몰려들었던 안개가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뭐였지?'

이 장소가 나를 〈허락〉하는 게 느껴졌다.

"저건 또 뭐야?"

"안개 안으로 들어갔어! 쫓아!"

"막바지로 몰아세운 줄 알았는데 비밀 통로라고? 정말 연기력 한 번끝내주는 해골이군."

바깥에서 웅성거리는 가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면들의 웅성거림에서 몹시 강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멀다.'

몇 걸음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어찐지 바깥에 있는 적들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작게 들리거나 알아듣기 어려운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과 나 사이가 철저히 무언가로 [격리]되어 있는것 같았다.

아주 얇아서.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지만.

결코 그 사이를 뛰어넘을 수 없는 터무니없이 견고한 법칙으로.

"이, 이거 뭐야? 왜 발이 멋대로 꼬이고 있어.?"

"벽이 몸을 끌어당긴다! 조심해!"

- 화르르르르!

그들을 향해서, 어디선가 강렬한 화염이 치솟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열기는커녕 한 조각 바람마저나에게 닿지 않았다.

"으아아아악!"

"눈! 눈이 안 보여!"

"터무니없이 강한 결계다. 움직이지 말고 역진逆進해라. 멍청한 새끼들아, 내가 순순히 보고하자고 했잖아?"

뒤를 바싹 쫓던 자들의 발작적인 외침이 멀게만 들려왔다.

'결계인가.!'

아이작이 오래전에 만들어 놓은 결계인지도 모른다.

수백 년 전 제국 남부를 지배한 대주술사.

그가 만든 결계라면 위력은 말해봐야 입만 아플 터.

곤란에 처한 가면들에 반격해 볼까했지만, 정체도 모르는 장소에서 경거망동하고 싶지 않았다.

일단 계속 안으로 들어갔다.

바깥에서 보기에 무척 좁았는데, 안쪽으로 발을 디디자 신기하게도 공간이 훨씬 더 넓었다.

발을 디딜수록 넓었고 새로웠다.

주위를 둘러보니 바깥과 완전히 별개의 공간인 것처럼 느껴졌다.

어두웠지만 은은한 빛이 비쳤다.

앞이 안 보일 정도는 아니다.

'일단. 상황을 정리하자.'

아이작은 말파스의 대제사장.

내 몸을 빼앗은 놈은 두 차례에 걸쳐 뼈에 루-륨 회로를 새겼다.

마법을 쓸 때마다 마왕 말파스의 인장이 새겨진다.

제단을〈망쳤다〉며, 푸르손의 추종자들이 득달같이 나를 쫓게 만든 그인장.

힘을 쓰는 것만으로 다른 마왕의 제단이 훼손된다면, 자기의 제단에서는 어떨까?

여기는 말파스의 제단.

그 인장이 방금 결계를 연 열쇠인지도 모른다.

역시 더 살아남아서 이 장소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아이작이 숨긴 유산이라도 잠들어있다면, 회귀를 반복하면서 계속활용할 수 있으니까.

전부 가정에 불과하다.

하지만 여기서 안심할 수는 없다.

밖에 있는 녀석들이 결계를 파괴하는 방법을 언제 찾을지 모른다.

'뭘 하더라도. 서둘러야겠군.'

한참 더 안으로 걸어갔다.

무척 길고 넓었다. 통로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저건.?'

한참을 더 가자 앞쪽 곳곳에서

거대한 까마귀 조각상들이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없는 살점이라도 뜯어낼 것 같은 눈빛.

날개를 활짝 편 까마귀도, 고개를 앞으로 내민 채 날개를 접고 있는 까마귀도 있었다.

나는 조각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곧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빛.

새까만 조각상들에서 은은히 빛이 나고 있었다.

사방이 막힌 통로에서 달이라도 비치는 것처럼 앞이 보이던 이유가 있었다.

- 스윽.

대검을 높이 들어 조각상 하나를 긁었다.

검기 서린 칼날 끝에 퇴폐적으로 빛나는 금속을 보고 확신했다.

블랙 골드.

이야기만 들었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황금보다 스무 배는 아름답지만 정해진 가격은 없다. 거래도 거의 되지 않는다.

'태양빛을 받으면, 그대로 스러져재가 되기 때문이었지.

블랙 골드.

음울한 호사의 극치인 금속으로, 수십 마리의 까마귀가 나란히 빚어져있었다.

거기에는 잠시 멈춰 멍하니 바라볼수밖에 없는 퇴폐미가 있었다.

보석과 금을 좋아하는 마왕.

더 의심할 바 없다.

이곳은 말파스의 제단이다.

한참 걸어가 통로 끝에 다가갔을 때였다.

시야가 훨씬 더 밝아졌다.

- 스스스스.

까만 어둠 속에서.

칠흑의 석문에 새겨진 회로 위에, 하얗게 타오르는 액체가 흘렀다.

블랙 골드에 반사되던 빛은 모두 여기서 나온 것이었다.

모든 것이 정지된 공간에서 오직반투명한 백색만이 생생했다.

백색은 때로 초록빛으로, 붉거나 푸른빛으로 변하기도 했다.

나는 멍하니 석문 앞으로 몇 걸음발을 내디뎠다.

가장 깨끗한 보석을 녹인 것 같은 반투명한 액상이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흘렀다.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아름다움.

이런 건 들어 본 적도 없었다.

흐르는 액체 보석을 멍하니 바라보자, 움직임의 패턴이 읽혔다.

'언어?'

하지만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대륙어도 동방어도 아닌, 완전히 낯선 언어.

한참을 그 앞에 있던 나는 정신을 차리고 몸을 움직였다.

망설임 끝에 결론을 내린 것이다.

열어 봐야 한다.

문 장식이 이 정도인데, 뒤쪽에 얼마나 대단한 게 숨겨져 있을지는 상상도 되지 않았다.

이 상황을 완전히 뒤집을 수 있는 수단이 있을지도 모른다.

팽팽한 긴장감에 온몸이 굳는 것 같았다.

'어딜 잡아야 하는 거지.

겉모습만 아치형의 거대한 문門이지, 손잡이는커녕 어디로 움직일 만한 홈도 없다.

- 달그락.

일단 밀어 봤지만 석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 달그락! 달그락!

어떻게든 왼쪽으로 밀고, 당기고, 오른쪽으로도 밀어 봤지만 거대한 문은 눈도 깜짝 않는다.

- 까앙!

망설이다가 칼로 쳐 봐도 아무런반응이 없다. 검기가 서린 칼날이 작은 생채기조차 내지 못한다.

몹시 강력한 결계가 걸려 있는 게 분명했다.

잠시 루-륨 회로를 식힌 뒤, 마법으로 전체를 건드려 봤지만 역시 어떤 반응도 없다.

'어쩌라는 거지?'

아주 약간이라도 반응이 있다면 더공격해 볼 만할 텐데, 그야말로 아무런 반응이 없다.

시도해 볼 기분이 나지 않았다.

결계 해체는 당연히 불가능.

내 수준의 지식으로는 아예 감도안 잡히는 상태니까.

일단 석문을 놓아둔 채 주위를 계속둘러봤다.

이 문이 뚫리지 않으면 다른 탈출구가 있어야 한다.

강력한 결계로 보호된다고는 해도 한없이 여기 있을 수는 없다.

문의 오른쪽으로 쭉 가 보자, 길고 좁은 길이 있었다.

하지만 끝부분은 막혀 있었다.

'탐지.'

스킬을 사용해도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한참을 살펴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문이 아예 없거나.

파악할 수 없는 수준의 통로라는 이야기.

'누굴 놀리는 건가.

빛 글자가 새겨진 석문 앞에 서서 몇 번 더 개방을 시도했지만 아무것도 먹히지 않는다.

"이런.

연달아 마법을 써도 무반응.

나는 문 앞에 누워 조용히 체력을 복구하기 시작했다.

힘을 회복하는 게 답이다.

이 석문을 두드려 보려고 해도, 밖으로 나가서 싸우려고 해도 힘이 필요하다.

혹시 펜던트가 답을 주지 않을까하는 기대감도 있었다.

[잔여 시간: 29:53.]

하루 정도만 더 버티면 펜던트의 쿨타임이 돌아온다.

'이 번에야말로.

성에 있던 자들은 이미 모두 살해당했다.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펜던트의 말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수행하겠다.

따르지 않은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지는 지금 경험하고 있으니.

하루가 조금 더 지났다.

[뼈 복구를 실행하시겠습니까?]

타 버렸던 갈비뼈가 희미한 빛을 내며 다시 아물었다.

〈뼈의 군주〉스킬로 마지막 상처까지 전부 치료했다.

몸은 완전히 회복된 상태.

루-륨 회로의 과부하도 풀렸고, 양자체도 거의 회복된 상태다.

하지만.

- 화르르!

여전히 석문은 어떤 반응도 없다.

'그냥 돌파해야 하나.'

입구 근처에 다가갔을 때 놈들이 하던 대화를 회상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독 안에 든 쥐라고. 〉

〈추가 지원은 아직? 〉

〈불렀으니 기다려 보자. 〉

〈정말 보고 없이 괜찮을까? 〉

〈그분이 알게 되면, 우리는 정말 죽지도 살지도 못할 텐데. 〉그들은 누군가를 몹시 두려워하며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누굴 말하는 거지?'

결계 바깥에서, 설핏 들리는 그들의 대화는 나까지도 약간 긴장하게 만드는 데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끝이다.

펜던트가 답을 줄 테니까.

[다음 발동까지: 00:00:10.]

9, 8, 7.

남은 시간이 정확히 0을 가리켰을 때였다.

175화 매듭 (15)

***************************************************

[위기회피(B)가 발동합니다!]

허공에 반투명한 상태창이 떴다.

역시 지금이 위기.

임의로 발동시키지 않은 상황에서 저절로 펜던트에 빛이 들어왔다.

펜던트가 시키는 대로만 이행하면 문제는 해결된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잠시, 포근한 안도감에 젖었다.

하지만 저번과 달리 그 밑에 아무해결책도 나타나지 않았다.

'뭐지?'

[해결책을 모색 중.]

[해결책을 찾을 수 없습니다.]

'뭐라고?'

[다시 탐색합니다.]

- 파직.! 파지직.!

펜던트에 불꽃이 튀었다.

[올바르지 않은 탐색.]

[회피가 불가능합니다. 지원되지 않는 수준의 위기이거나, 해결책이 전무합니다.]

[새로운 경로로 탐색 시도.]

[새로운 경로로.]

[새로운.]

[시스템 과부하.]

- 퍽!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펜던트가 바스러졌다.

- 스르록.

작은 조각이 되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깨어진 부스러기들이 통로 바닥에 붙었다. 부서진 조각들은 더 이상빛을 내지 않았다. 아무런 충고도 해 주지 않았다.

신음이 말이 되어 새어 나왔다.

"이게. 무슨.

잘게 조각난 부스러기들의 단면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마치 내가 그렇게 부서진다는 걸 조금 앞서 보여 주는 듯했다.

이해가 어려운 상황은 아니었다.

그저 예측하지 못했을 뿐이다.

펜던트에도 한계가 있다는 걸.

내가 펜던트에 걸었던 기대가 지나치게 컸다.

혹은 닥친 위험이 지나치게 크다.

조각조각 부서진 펜던트에 대한 집착을 끊어 냈다.

오래 끌어서는 안 된다.

빠르게 남은 선택지를 검토했다.

선택은 결국 두 가지.

첫 번째는 결계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결계는 내 생각보다 훨씬 오래, 어쩌면 반영구적으로 버텨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흘끗 봐도 여기는 마왕 말파스와 관련된 결계.

지나치게 희망적인 관측이지만, 어쩌면 마왕 강림 때까지라도 버텨줄 수 있지 않을까?

그동안, 어떻게든 안쪽 석문의

비밀을 연구해 보자.

펜던트가 괜히 깨진 건 아닐 터.

상황이 나아질 희망은 무척 낮고, 증원된 적들이 안으로 밀고 들어올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두 번째는.

돌격.

밖을 지키고 있는 가면들의 합공에는, 뼈가 전부 회복된 지금이라 해도 승산이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데리고 간다는 각오로 돌격해야 한다.

포획된 후, 연구용으로 해체당해실험 대상으로 쓰일지도 모른다.

- 달그락.

품속 깊이 넣은 기스-제-라이의 단검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가면들과의 전투에서 사용한 뒤, 아직 글자 하나가 남았다.

여차할 경우 두개골에 박아 넣고 자살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

안쪽을 어떻게든 뚫어 볼 것인가.

위험을 감수하고 돌격할 것인가.

빠르게 결정을 내려야 한다.

'뭘 하려고 해도.

가면들의 동향을 알아야 한다.

- 팟!

일단 몸을 튕겨서, 빠르게 통로 입구로 가려고 할 때였다.

- 콰앙!

사방의 공기가 폭발했다.

땅이 흔들리며 엄청난 진동이 터져나갔다. 몸이 위로 붕 뜨는 것 같았다.

통로 바닥 전체가 크게 울렸는지, 돌가루와 흙먼지가 바닥에서 튀어뽀얗게 날았다.

'지진인가? 아니.

- 우우우응!

나는 반사적으로 검기를 최대한 발현시켜 입구를 겨냥했다.

결계 침입일 확률이 높다.

하지만 뭔가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호호. 여기랍니다. 왜 엉뚱한 곳만 보고 계실까아?"

- 스르록.

잘못된 것은.

방향.

칼을 겨눈 그 자세로 천천히 뒤로 돌았다.

- 파직.! 파지지직.!

"이 소녀는, 서운해 버려요.?

기괴하게 애교를 부리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굵은 목소리에 억지로 비음 섞인 가성을 낸 어투.

석문이 있는 곳.

처음 굉음이 울린 곳이지만, 설마그쪽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먼지 사이로 드러나는 상대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귀 옆에서부터 입술 위, 턱 아래까지 모두 뒤덮고 있는 빳빳하고 두꺼운턱수염.

어깨까지 오는 긴 새까만 머리.

길게 붙여 위로 올린 속눈썹.

잔털까지 전부 다듬은 눈썹에다, 입술은 피로 칠한 듯 붉다.

남자가 콧김을 불었다. 양쪽 코에 모두 꿘! 커다란 비취 코걸이가 바람에 쓸려 달각거렸다.

거대한 두 개의 흉근 아래는 은색코르셋이 받쳐져 있고, 그 아래는 반투명한 실크 드레스와 굽 높은 금색구두를 신었다.

신장은 1미터 90센티 정도.

제압당했다.

일반적이지 않은 그 인간의 외모때문은 아니었다.

순수하게.

사방의 공기가 나를 옭아매는 것 같았다.

상대를 공격해야겠다는, 도주해야 겠다는 판단조차도 순간 내려지지 않았다.

"아이 차암. 눈을 못 떼시네에.

계속 그렇게 보시면 부끄러워요?"

상대가 엉덩이를 씰룩거렸다.

- 잘그락.

상대의 허리에 걸린 아홉 가면이, 과장된 엉덩이의 움직임에 따라서 잘그락거렸다.

은빛 가면, 검은 가면, 하얀 가면, 보라색 가면.

가면의 공통점은 한 가지.

그 모두 하얀 뇌수와 새빨간 피에 질척하게 젖어 있다는 것.

'설마.

가면들의 모습이 전부 익숙하다.

단 한 가지 가능성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상대는 이미 결계를 뚫고 왔다. 어떤 기척도 없이.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가면들을 전부 살해했다.

어떤 소음도 없이.

저자야말로 가면들이 두려워하며 말하던〈그분〉임에 틀림없었다.

승산 따위 조금도 없다.

가면들이 모두 순순히 그 자리에 서서 목숨을 헌납한 게 아니라면, 내가 도망칠 수 있는 확률도 없다.

펜던트가 단번에 깨졌다는 사실이 납득될 정도.

이런 상대에게서 어떻게 도망친다는 말인가? 나는 이번 생에 대한 집착을 조금씩 내려놓았다.

남자가 굵은 팔뚝을 쓰다듬으며 멋대로 지껄였다.

"흐잉. 그래도 기뻐요."

"해골에게도 통하는 매력이라니.

흐응. 나, 정말 치명적인 거예요?"

"조금 더 가까이 와요. 가까이.

- 휘우우.

반쯤 벗은 근육질의 남자는 붉은 입술에 두꺼운 손가락을 가져다대고, 내 쪽으로 흩뿌리며 윙크했다.

작게 바람이 불었다.

뽀얗게 떠 있는 돌먼지는 어느새완전히 걷혀 있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누구지?' 〈깎아〉지른 듯한 이목구비.

하지만 따져 보면 분명한 미남이라고 불릴 만한 외모.

다만 얼굴을 뒤덮은 것은 분장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의 화장이며, 장신구들이었다.

"있잖아요.

- 콰앙!

그는 왼쪽 팔꿈치로 보석액이 흐르는 석문을 가볍게 쳤다.

- 우수수!

내가 칠 때는 흠집도 나지 않던 석문 표면에서 돌가루가 연달아떨어져 나왔다.

"이 문은, 어떻게 여는 걸까요오?

아이. 알려 주세요."

두렵다.

눈앞의 상대는 도무지 측정할 수 없이 강하다.

기세를 내뿜지 않아도 바로 알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

상대는 자신의 투기閱氣를 억지로 짓누르다시피 감추고 있었다.

'끝인가.

궁금증이라도 풀어 볼 심산으로 상대에게 말을 걸었다.

"너는, 이 결계를 뚫은 거냐?"

"네? 흐흐흥. 약한 결계는, 강한 결계에 잡아먹혀 버려요."

남자는 천천히 양손을 들었다.

그리고 흩뿌리듯 가볍게 흔들었다.

- 짤랑.

- 짤랑, 짤랑-

팔찌의 알알에서 어울리지 않는 묘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놋쇠 방울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같기도 했고, 얇은 장신구 수십 개가 만드는 울림 같기도 했다.

남자가 말을 이었다.

"저를 두르고 있는 건 다섯 겹의 결 계 예요."

"뭐라고?"

나는 깜짝 놀랐다.

움직이는 누군가를 대상으로 결계를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인가?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이야기였다.

'아이작, 이 녀석.

결계 전문가인 주제에 이런 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니.

상대가 눈을 살짝 떴다.

"첫 번째, 기척차단. 여기까지 온것도 못 느끼셨죠?"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다른. 가면들도 비슷한 결계를 두르고 있는 거냐?"

"에이. 비교도 안 되게 형편없는 열화판들이죠. 저는 명품이구요."

'〈열화판〉들에게도 당해서 기척을 못 느꼈다는 건가.' 자괴감을 느끼는 사이, 상대가 씩웃으며 말을 이었다.

"두 번째 결계, 자기강요. 세계를 멋대로 변경해도, 소녀에게는 안먹힌답니다. 저어, 누가 뭐래도 제주관이 뚜렷하거든요?"

"그래 보이는군."

남자는 붉게 칠한 입술을 안으로 살짝 말았다. 쾌락이 흐르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나머지는. 더 친해지면 알려 드려요. 그러니, 여기 문 여는 법 좀가르쳐 주실까요?"

- 위이이이이잉.!

반투명한 은빛 기운이 상대의 손주위로 강렬히 휘몰아쳤다.

검기劍氣라고 불러야 할까.

손가락에서 직접 뽑아낸 기운은, 아예 굳건히 유형화되어 있었다.

- 스롱!

기운은 점차 압착되어 갔다.

아주 얇은 침 모양이 되어 남자의 금빛 손톱 끝에 머물렀다.

'설마. 레안드로 후작을 이자가 죽인 건가?'

후작의 몸에 난 상처가 떠올랐다.

정확하게 일치하는 기운.

'말을 더 시켜야겠어.'

어떻게든 놈에게 정보를 얻어 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말해 주지."

기대감 탓일까. 짙은 화장에 덮여있는 남자의 눈썹이 아래위로 들썩이고 있었다.

"어머. 정말 아시는 거예요?"

그는 굵은 손가락을 조물거리며 또각또각 내 쪽으로 조금씩 가까이 걸어왔다.

'신경 쓰이는군.

나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물론. 말파스의 회로를 네 몸에 새겨 넣어라. 일단 회로가 생긴 후, 특정 패턴에 따라서 힘을 쏟아부으면된다. 그 패턴은.

물론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이다.

진실이 뭔지 알 게 뭐란 말인가.

회로를 새기고 시간을 끌면 내가 놈에게서 얻는 정보가 늘어난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 또각.

힐 소리가 칼날처럼 울려 퍼졌다.

남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나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저. 거짓말 싫어하는데.

"무슨 소리지? 네 의문에 성심껏대답해 주고 있는데."

무거운 공기가 갈비뼈 안에 들어차는것 같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대답했다.

- 짤랑!

"세 번째 결계.

남자가 겹겹이 채워진 팔찌들을 다시 한 번 가볍게 흔들었다.

"진위변별眞僞辨別

"≪????. r

"저, 황실 정보기관의 수장이어요.

슬프지만 거짓말 정도는, 간단히 구별할 수 있는걸요.

'역시.

머릿속으로 여러 생각이 가파르게 스쳐 갔다.

밖에서 본 가면들은 황실 기관의 일원들. 그라스미어의 영주를, 외모복제의 애벌래로 교체하려 한 것 역시 황실의 음모.

네크론 놈들이 관리하던, 애벌레사육장 역시 한 번에 연결된다.

고깃덩어리로 변해 있던 후작도 이놈의 손을 빌린 황실의 짓.

문득, 〈달리아크〉의 정보는 정말 정확하구나 하는 꽤 실없는 감상이 떠올랐다.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직감하고 바로 질문을 던졌다.

"네가 후작을 죽였나?"

_ 툭.

의외였다,

후작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그는 걸음을 멈췄다.

남자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연극을 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었지요. 소녀가, 그를 후작 위位에 추천했으니까요."

그의 기이한 자칭自稱에는 관심도 생기지 않았다.

'후작 추천이라고.?'

머리가 멍하게 울리는 것 같았다.

"귀중한 추천권을 사용했는데.

소녀가 그이를 추천할 때는, 사이좋게 이 세계를 가지자는 거였죠! 연합도, 엠버도 모두 짓밟아서 엉덩이 아래두자는 거였는데.

- 아드득.

남자는 이를 꽉 깨물었다.

공간이 일그러지며 눈에 보일 정도의 살기가 뿜어졌다.

"골반도 없고 머리 큰 년 하나뒈졌다고 일을. 망쳐요?"

이사벨을 말하는 건가 싶었다.

"아아. 어떻게. 이럴 수가.

발정이 나려면 그냥 나한테 나지.

생일 선물도 못 사 줬는데.!"

그는 진심으로 슬퍼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관심은 전혀 다른 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추천권.!'

흡수한 제국 예법에 따르면, 누군가를 후작으로 추천할 수 있는 건 오직 공작公爲뿐이다.

영공전하令公殿下로 불리며, 최대셋밖에 존재할 수 없다는 작위.

그중 하나가 내 앞에 있다.

한참 슬픔에 젖어 있던 남자가 날바라보며 말했다.

"제 입장이 너무 곤란해졌어요. 이런하찮은 것까지 직접 처리해야 할 만큼. 문 여는 법, 사실 전혀 모르시죠? 아이. 모르시네."

남자는 석문을 아쉬운 듯 훑었다.

- 또각!

굽 높은 구두가 바닥을 울렸다.

"뭐어, 쉬운 쪽부터 가야죠오."

'젠장.!' 죽이려는 걸까? 아니면 납치?

나는 펼치지도 않은 기세에 눌려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공작이면 뭐가 어떻단 말인가?

황실 비밀기관의 수장이 뭐가 어떻단말인가?

- 딱딱.

이를 위아래로 부딪쳤다.

갑옷은 반쯤 허물어져 버렸지만, 몸은 전부 복구한 상태.

지킬 것은 없어도.

싸우지 못할 이유는 없다.

다시 한 번 검기를 끌어올렸다.

어차피 기회는 단 한 번뿐.

'격발.'

- 화르르!

화기火氣가 솟아올랐다.

'산성.'

- 치이익!

부식의 오라가 검 전체에 스몄다.

'질풍.' '뇌격.'

바람과 번개의 기운까지 대검에 전부 불어넣었다.

wrc n: ㄹ

?II~?

뚜투루루 뚜뚜ㅡ

'질주!'

코걸이를 들썩이며 오는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한 번이라도 제대로 공격을 하고 죽고 싶었다.

- 파아앗!

온갖 기운이 타오르는 검을, 놈의 코앞에서 정면으로 휘둘렀다.

'일도양단.'

"어머머, 너무 잡스러워."

- 쾅!

칼자루를 잡은 몸이 빠르게 위로 튕겨져 나갔다.

- 퍽!

5미터가 넘는 통로 천장에 몸이 거세게 부딪혔다가 다시 초라하게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양 손목모두 절반 이상 금이 가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대검은 겨우 깨지지는 않았으나, 칼날 쪽에 주먹 모양으로 아예 푹들어간 자국이 있었다.

"무리, 무리예요."

그는 바람과 산성과 불꽃과 번개사이를 마치 봄바람처럼 태연하게 걸어 나왔다.

"대검으로 대체 월 하고 싶었던 건가요? 베기에 집중하셔야죠."

머리털 하나, 치렁치렁 늘어진 옷하나 그을리지 않았다.

꾸준히 수련해 왔다.

이 정도면 적어도 한 방은 먹일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참담한 결과.

그렇게 수준이 떨어졌던 걸까?

남자가 몸을 꼬고 웃으며 말했다.

"호호호. 되도록 검기劍氣 하나에 집중해 보세요, 해골 씨."

- 또각.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뭘 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더는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후작 때와 같이 온몸이 묶인 채 달그락거릴 생각은 없다.

- 콰직!

나는 억지로 단검을 꺼내 머리에 박았다.

- 츠릇! 츠르르르. I

마지막 하나 남은 글자벌레가, 내머리에 생긴 균열을 파고드는 것을 느끼며 안심했다.

이제 끝이다.

아니.

다시 시작이다.

- 또각.

"흐으응.

걸어오던 놈이 어깨를 으쪽했다.

후작과 달리, 남자는 의외로 쉽게 내 죽음을 허용하는 것 같았다.

스륵.

남자의 굵은 손가락이 내 갈비뼈사이로 깊이 들어왔다.

마치 없는 감각이라도 만들어 낼것처럼 척추를 스으윽 주물거리며 희롱하던 손이-- 바스스.

약간의 힘을 줬다.

뼈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어차피 쓰레기시니까, 뭐.

쓰레기.

빛나는 풀 플레이트를 걸친.

용사의 시종이 날 짓밟으며 하던 말이 떠올랐다.

〈이런 쓰레기가! 〉

아직 나는 여기에 있다.

실패만을 연거푸 쌓아 나간 채로, 마왕이나 용사 따위와는 까마득한 저 아래 멀리 떨어져 있다.

눈앞의 남자-

정체 모를 제국 공작公詩을 보고 말했다.

"다시 돌아올 것이다."

"응? 무슨 헛소리. 어? 어라.!"

놈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어지며, 입이 떡 벌어졌다.

놀라 부릅떠진 짙은 화장의 눈.

몹시 길었던 이번 생에서.

기괴한 인간의 손아귀에 쥐어진 내가 마지막으로 본 모습이었다.

- 위이이이잉! 위이잉!

- 우르르롱! 광!

하늘에서 진동이 울린다.

- 번쩍! 번쩍!

벼락이 연거푸 친다. 새까만 하늘이 밝아진다.

- 우지끈!

- 투두두두두두!

파헤치고 뜯겨진 것들이 캄캄한 허공을 날아다닌다.

"망자亡者여!"

- 쏴아아아아.

"망자여! 콜록, 콜록."

'격발.' - 화르르!

"이러면 좀 따듯한가?"

176화 루비아 (1)

***************************************************

빗속에서 불이 타오른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불은 손에서, 팔에서, 다리에서 타오른다.

- 투두두두두둑!

뼈마디를 부술 것처럼 두드리는 장대비 속에서도, 몸에 붙은 불은 꺼지지 않는다.

불에 관한 생각을 지속할 여유는 없었다.

- 띠링!

- 띠링!

- 띠링!

[계승되었습니다.]

[74.3%.]

[동화율 75% 이하.]

[1 차 봉인 해제.]

[전직이 해제되었습니다.]

[특전을 자동으로 선택합니다.]

특전: 네크로멘서의 연인

영웅급 특전입니다. 다른 영웅급 특전이 활성화될 때까지 강제로.

- 모든 사령술사(네크로멘서)와의 관계에서 기본 호감도 20을.

- 사역 관계를 맺은 사령술사의 호감도가 추가로 10 상승.

- 당신의 존재는 사령술사의 영감을자극.

- 영웅급 특전입니다. 다른 영웅급특전이 활성화될 때까지 강제로 이특전이 선택됩니다.

눈앞에 빼곡히 떠오르는 상태창을 죽 내린다. 자세한 사항은 나중에 확인하면 그만이다.

지금 중요한 건-

은몸이 젖은 채 추위에 바르르 떨면서,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

온도를 확 높인 탓인지, 그녀의 입에서는 더 이상 기침이 나오지 않는다.

비명을 지르지도 않고, 뒷걸음질 치지도 않는다.

"아아.

그저 나지막한 탄식만이 새어 나올뿐이다.

주저앉은 진회색 로브의 여자.

네크로멘서들의 로브나, 나 같은 것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또렷하게 나를 올려다본다.

비에 젖은 속눈썹이 깜빡거린다.

'루비아.

익숙해질 수가 없는 눈빛이다.

"저.

무언가 말을 하려는 둣, 루비아는 가만히 눈을 마주친 채로 입술을 달싹거린다.

'시작점이. 달라졌어.?' 시나리오 완료의 영향일까.

레나가 잠든 동굴이 아니라.

- 우르릉!

- 콰앙!

폭우에 미친 듯이 파헤쳐진 무덤한가운데서 일어났다.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때로 다시 돌아왔다.

나 때문에 비참하게 죽은 그녀를, 차가운 땅에 묻은 채 두 번 다시 못 보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따듯한 온기를 뿜어내는 것 같은 저 촉촉한 눈동자를.

무책임할 정도로 약해 보이는 흰손목과 목덜미를.

- 쏴아아아.

그녀는 끈적거리는 새까만 늪에 내려앉은 하얀 꽃 같다.

"아.

약한 탄식과 함께, 그녀가 천천히 손을 내 쪽으로 뻗는다.

입에서 천천히 말이 새어 나온다.

"저. 정말로.

주위의 시간이 갑자기 느려진 것처럼 느껴진다. 체념했던 그녀의 죽음이 되돌려졌다.

내 앞에서 살아 움직이면서 나를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루비아를 눈앞에 보자-

함께했던 장면들이, 수많은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모든 걸 털어놓고 싶기도 하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채 조용한 조력자가 되어 주고 싶기도 하다.

- 우르릉! 광!

이제 간헐적으로 내려치는 번개가 없어도, 몸에서 피어나는 불꽃으로 그녀의 모습이 선명하게 비친다.

"정말. 정말 제가.

눈도 깜빡거리지 못하고, 얼굴에 진흙과 빗물이 묻은 채 빤히 나를 바라보는 그녀를 향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말. 제 부름에 따라 무덤에서 일어서신 건가요?"

다시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묻고 싶다.

정말 시작점이 달라진 거냐고.

그녀를 지키지 못한 모든 과실을 없었던 것처럼 만들고, 정말 다시 지금부터 시작할 수 있는 거냐고.

불이 옮겨붙지 않게 하기 위해 몸에 붙은 불을 누그러뜨렸다.

열은 남아서 따듯하다.

어느 정도 적당한 온기가 되어 준건지, 그녀의 얼굴에 조금 화색이돈다.

루비아.

그녀는 불타올랐던 해골인 나를 보고 물러서지 않는다.

경계하지도 않는다.

대신 조심스럽고, 무척이나 반가운얼굴로 나에게 인사를 했다.

"감사. 합니다! 불렀는데 일어나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저는 루비아라고 하고.

- 띠링!

〈S급 시나리오, '레이 루비아'가 열립니다. 〉

- 동화율이 75% 이하입니다.

- 세부 퀘스트: 영주 루비아

- 루비아를 에라스트 영주로 등극시키십시오!

- 통치 레벨을 10까지 올리세요!

- 보상: ???

'뭐라고?' 허공에 떠 있는 루비아의 이름에 정신을 집중한다. 아래로 주르륵상태창이 떠오른다.

[이름: 레이 루비아]

[사령술사 Lv.1]

[체력-9 힘-7 민첩-8 지혜-14]

[호감도: 30]

- 루비아는 당신을 신뢰하며, 높은 결속력과 친근함을 느껍니다.

[서번트 시스템]

- 양자의 관계를 인정합니다.

- 관계의 발전에 따라 부가 효과가 생성됩니다.

'서번트. 시스템.

레나와 함께할 때는 나오지 않던 시스템.

루비아가 나를 일으킨 걸 특별하게 취급해 주는 거라고 생각된다.

아래로 기본 스킬창이 펼쳐진다.

[기본 스킬]

- 책 찾기 Lv.10

- 책 읽기 Lv.10

- 고대어 Lv.3

- 룬어 Lv.3

- 독도법 Lv.3

- 예법 Lv.2

- ??? (호감도가 부족합니다.)

- ??? (호감도가 부족합니다.)

[특전]

- 호감도를 올리면 개방됩니다.

[칭히

- 호감도를 올리면 개방됩니다.

[세계선 변경이 적용되었습니다.]

'능력치가. 변했어.' 약간이지만, 분명한 변화가 있다.

루비아와 쌓았던 관계가 조금이나마반영된 건지도 모른다.

그저 시간이 반복되는 걸 넘어.

내 음직임에 따라-

세계가 처음부터 바뀌고 있다.

- 달그락.

주먹이 꽉 쥐어진다.

두 번 다시 만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루비아를 만났다.

내 움직임에 따라, 이 세계선이 처음부터 변화한다면.

'레나는. 어디 있는 걸까?'

함께 지냈던 서큐버스님도, 아예만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고민할 게 너무 많군.'

- 달그락!

고개를 한 번 흔들었다.

지금은 루비아에게 집중하자.

내 앞에 서서 입술을 달싹이는

루비아를 향해 물었다.

"복수를 하고 싶은 건가?"

"마, 맞아요! 어떻게.!"

"일단 비부터 피하지."

"네! 그런데. 말을. 말을 너무잘하시네요!"

"잠깐 눈 감아."

계속 비를 맞고 있어서 좋을 리가 없다. 잘못 움직이다 벼락이라도 맞으면 더 그렇다.

"그럴게요!"

억지로 얻어 버린 호감 때문일까.

루비아는 나를 조금도 경계하지 않고 눈을 꽉 감는다.

꽉 감은 속눈썹에 맺힌 빗물들이 아래로 고여 떨어진다.

잠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질주.'

품에 루비아를 안아 들고 그대로 동굴로 뛰었다.

박쥐 한 마리조차 들어오지 않는 안전한 미로述路.

'거기도 오랜만이군.

최초의 생에서 3년이나 살았다.

하지만 저번 생에 워낙 많은 일을 겪어서인지 어찐지 조금은 아득히 느껴진다.

- 팟!

처음에는 30분을 힘겹게 걸어야 했던 길.

지금은 높은 스탯과 스킬의 영향때문에 채 2분도 걸리지 않는다.

수풀에 가려진 좁은 동굴 앞.

"다 왔는데."

루비아의 대답이 없다.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니, 그녀는 두 주먹을 꼭 쥐고, 눈을 감은 채 나에게 안겨 있었다.

'그사이 감기라도 걸린 건가?'

새하얀 얼굴이 붉어져 있다.

한참을 가만히 있던 그녀가 눈을 깜빡거리며 품에서 내려왔다.

"아. 죄송해요!"

"잠깐 여기에 들어가 있으시오. 너무멀리 가지는 말고."

동굴 안쪽은 벌레도, 거미도 없는 꽤 넓은 공간이다.

사실 저 안에서 그녀가 헤맨다고 해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예전과는 다르다.

[추적 Lv.15]

[심안心眼 (?)]

[탐지 Lv.7]

루비아가 동굴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 멋대로 길을 잃어도, 쉽게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까.

하지만 루비아는 연달아 몇 번씩 고개를 끄덕인다.

"네! 가만히. 가만히 있을게요.

그런데 어디. 가시는 거예요?"

의아하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약간의 불안이 느껴진다.

"혹시 제가 너무 약해서. 실망하신건가요.? 죄송해요!"

"아니, 그건 완전히 오해인데."

"정말요.? 저로 괜찮으세요?"

뭐가 괜찮으냐는 건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안심시키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괜찮지."

"헤.

잔뜩 긴장하고 있던 루비아의 어깨가 스르르 풀어진다. 꽉 주먹을 쥐고 있던 그녀의 손가락이 작게 꼬물거린다.

"금방 돌아올 테니 별걱정 말고.

잠깐 할 게 있어서."

"네!"

힘차게 대답하는 그녀를 동굴에 넣어두고 밖으로 나왔다.

- 위이이이이잉

여기까지 미친 듯이 바람이 분다.

땅을 모조리 파헤치고 나뭇가지를 뜯어낸다.

- 수국! 누누국!

가볍게 온몸을 한 번씩 풀어 주며 다시 무덤으로 돌아간다.

수많은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지만, 가장 먼저 처리할 일이 바로 가까이 있다는 건 안다.

'다시 한 번 해 볼까. 격발.'

- 화르르!

다시 한 번 손끝에서, 빗줄기에도 좀처럼 꺼지지 않는 마법 불꽃이 타오른다.

회로가 전승되어 있다.

뼈 사이사이를 돌고 있는 은빛 액체가 느껴진다.

돈도, 무기도.

부서진 레나의 펜던트를 포함해 다른 어떤 것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몸 안을 흐르는 루-륨만은 멀쩡하다는 사실이 낯설다.

아이작과 나눴던 대화가 문득 머릿속에 떠올랐다.

〈피라고? 〉

〈그래. 사도使徒의 피다. 세이론이 잡아 죽인 사도들의 피지. 〉어쨌거나.

'마법을. 전부 쓸 수 있는 건가?'

말파스의 인장이 이번 생에서도 이어져 있다는 이야기.

던전 여기저기에 흔적을 남기고 다니지 않는 편이 좋다.

어디가 다른 마왕들의 제단인지 명확히 알 수 없으니까.

과거와 달리 이번 생에는 푸르손추종자들과 대립하지 않는다 해도.

'마법은 일단 좀 자제해 볼까.'

보티스나 푸르손과 달리, 세력도 갖추지 못한 마왕의 인장을 찍고 다녀서 좋을 일은 없다.

'아이작 정도는 남았지.'

하지만.

결계가 파괴되고, 그 신도들마저모조리 푸르손의 제물로 바쳐졌던 그의 비밀 교단이 떠오른다.

마법은 당분간 봉인이다.

- 팟!

몸을 솟구쳤다.

질주 스킬을 사용한 상태.

가볍게 걸어도 평범한 팀박질보다훨씬 더 빠르다.

커다란 바위 같은 걸 훌쩍훌쩍

뛰어넘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나무에 묶인 두 필의 말과, 산을 수색하는 두 명의 인간이 잡힌다.

나를, 루비아를 몇 번이고 죽였던 자들이다.

그 둘을 살해하기까지.

몇 번이고 반복해 가며 두개골이 부서졌다.

잔뜩 긴장한 채 바닥에 엎드려서 놈들을 기다리던 때가 떠오른다.

그때와 지금의 나는, 힘이라는 면에서 보면 도무지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달라졌다.

- 히히힝!

말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린다.

석궁을 쥔 놈과 망치를 쥔 놈이 조심스럽게 산을 뒤지고 있다.

'은신.'

기척을 숨긴 채 녀석들 곁에 따라붙는다.

- 스륵.

- 스르륵.

놈들이 제 딴에는 은밀한 자세로 수풀을 헤치며 조심스레 전진한다.

루비아 혼자서, 온갖 흔적을 다남기며 왔던 내 무덤가까지는 잘쫓아온 것 같다.

하지만 흔적은 거기까지.

내가 뻔 흔적을 놈들은 발견하지 못한다.

이대로 다시 돌아가도, 쫓아오지 못하고 단념할 확률이 높다.

'구경이나 해 볼까?'

나는 바로 뒤를 걸어간다. 그들의 〈추적〉을 관람한다.

한참을 뒤에 서 있어도 내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최소한의 육감마저도 없는 건지, 아예 감도 잡지 못한다.

너무나도 쉬운.

간단히 짓눌러, 철저히 유린할 수 있는 사냥감에 대한 흥분.

그게 이 두 남자를 완전히 눈멀게 만든 건지도 모른다.

"뭐야? 왜 없어.?"

"닥쳐 봐. 완전히 포기했냐? 지금이빨 털게?"

"근데 없잖아. 하. 어떻게 이걸놓치는 거야. 기가 막히겠네."

"나 얘 때문에 창녀도 안 사 먹고 사흘째 참았거든?"

"병신. 아무튼 여기서는 더 못 찾겠어. 절벽에 떨어졌다고 할까? 어차피 영주 새끼, 완전 호구잖아."

"돈이 중요한 게 아닌데. 산에서하고 싶었다고, 산에서.!"

세상은 악의로 가득하고 작은 별빛조차 드물다.

이들은 한순간의 축축한 쾌감을 위해, 타자를 가볍게 찌그러뜨리고 해체하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서로 진솔하게 나누는 이야기를 좀더 들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루비아가 과거에 이들에게 살해당하는 모습이 떠오르자, 더는 가만히 듣고 있기가 힘들었다.

[산성酸性 Lv. 5를 발동합니다!]

- 치지지지지지직!

[체력이 0.017% 감소합니다.]

[체력이.]

손가락을 매개로 쓴 탓에 체력이 줄어든다.

물론 한참은 버틸 만한 속도다.

"히, 히익?"

갑작스럽게 드러낸 기척에 놀란 두 인간이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177화 루비아 (2)

***************************************************

- 툭.

나는 놈들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을 걸었다.

"뭐야. 더 안 찾아봐?"

- 치이이이익!

"히갸아아악!"

크라켄의 산酸이 갑옷을 태우고, 옷을 태우고, 살을 태운다.

피는 흘러내리지 않는다.

지글지글 끓어오르고는, 신경과 함께 엉망으로 뭉쳐진다.

놈들은 새된 비명을 지르며 펄쩍펄쩍뛰고 싶어 한다.

하지만 어깨를 잡고 누르는 힘에 조금도 저항하지 못한다.

"끼힉! 히이익!"

첫 생애에서는 아예 놈들의 뒤로

접근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다섯 번째 생애에서도 사투 끝에 간신히 이기는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손가락 다섯 개를 다 쓸 필요조차 없다.

그 가운데 하나로도 쉽게 모두를 늘러 버릴 수 있다.

- 치지지지직!

두 놈은 인간 중에 상위 10%에는 가볍게 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숙련된 사냥꾼들.

손발이 맞는다.

웬만한 것들은 어렵지 않게 잡아유린하겠지.

하지만.

그저 아래로 누르는 내 손놀림에, 뼈가 으스러지며 다리가 땅 아래로 천천히 처박히고 있다.

- 꾸두둑! 꾸두두둑!

어떤 특별한 스킬도.

마법도 전혀 필요가 없다.

그냥 순수한 힘 스탯으로 누르면 이렇게 된다.

"끄아아아아아!"

"끄흑! 흐흐흑! 끄흐흐흐.!"

'슬슬 그만둬야 하나.' 여기서 더 했다가 둘 모두 쇼크로 바로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몸을 가진 한 여자 대신.

손에서 강산强酸을 뿜는 딱딱한 해골이 나타났다.

그들의 다리뼈를 부수며 단단한 땅아래로 처박는다.

그것만으로 심장이 멎을 상황.

거기에 더해, 과격한 출혈은 내의도보다 빠른 죽음을 부른다.

"뭘 해야 하지.

솔직히 별로 물어볼 건 없다.

네크론 신사회에 대해 물어볼까?

이 두 놈은 목덜미에 작은 뱀조차 그려져 있지 않은 하부 인원.

가진 정보라고 해 봐야 의미 없는 수준일 게 분명하다.

마왕들에 대해서는?

아예 기대할 필요조차 없다.

아무것도 모를 거다.

"전혀 모르겠지?"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도, 물론.

"끄흑! 끄흐아아아악!"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뭐, 모르는 게 당연하지."

"알아요! 압니다! 끄아아아악!"

"히익! 끼힉! 끼히헉!"

뭘 안다는 걸까.

"말하고 싶은 거 있으면 해 봐. 그러다가, 운이 좋으면 좀 더 빨리 죽을지도 모르지."

나는 아무렇게나 말하며 두 놈을 천천히 짓밟는다.

- 꾸드드. 꾸드득.!

동적인 명상을 하는 것처럼 집중해서 두 인간의 몸을 아주 천천히 발로 밟아 으깬다.

"끄헉! 꺽! 히끄극!"

고민하고, 정리할 게 많은 밤이다.

그럴 때는 이런 반복 작업이 꽤나유용하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연달아 메시지가 떠오른다.

두 남자는 쓸 만한 정보도 하나주지 못하고 죽어 버렸다.

아는 게 없어서다.

비가 둘의 피와 뇌수를 아래로 홀려보낸다.

다음번부터는 이런 식으로 시간 써주기도 아까울 것들.

그래도 놈들을 천천히 으깨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일단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 덥석.

무덤 앞에 놓인, 앞으로 엎어진 비석윗부분을 손으로 잡았다.

느릿하게 위로 올리기 시작했다.

'여기에 새겨져 있는 게. 그러면 내 이름인가?'

아이작이 요란을 떨며.

내 진명을 개방해야 한다고 하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함정이었지만 의문은 남는다.

비석이 사라진 뒤.

놈이 주술을 펼칠 때 벌어진 일.

내 진명을 주술로 묶으려던 아이작은 오히려 자기가 무언가에 당해 묶여버렸다.

'이해가 안 됐단 말이지.'

별거 아니라 생각했던 내 정체가 궁금해졌었다.

그때는 비석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었지만.

지금이라면.

확인해 볼 수 있다.

여기에 대체 뭐라고 적혀 있을까?

일단 이름만 알아낸다면, '등불' 달리아크에서 정보를 살 수 있다.

T&T 같은 곳에 그 이름의 정체를 의뢰해 볼 수도 있다.

'물론〈정보〉로 취급될 정도로 유의미한 이름이어 야겠지만.'

기대 반 긴장 반으로, 느긋하게 비석을 내 쪽으로 돌렸을 때였다.

긴장이 탁 풀렸다.

[######]

비석에는.

아무것도 새겨져 있지 않다.

? 쏴_아_아_아아 ?

이름이 새겨져 있지 않다.

돌 가운데 전면부가 거칠게 훼손되어 있었다.

'이건.

훼손되지 않은 중간중간 부분을 면밀히 살폈다.

- 달그락.

손으로 더듬었다.

하지만 이렇다 할 글자는 도무지 쓰여 있지 않다.

마치 훼손되기 전에도.

이 비석에는 원래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았던 것 같은 느낌.

이중의 장막帳幕.

긴장이 사라진 자리를, 더 짙은 의문이 메운다.

누가 훼손할 걸까?

아무것도 없는 비석을 왜 처음에 이름이 있었던 것처럼 가장했을까.

누가? 왜?

조금도 짐작 가는 바는 없다.

묘비의 훼손은 최근에 이뤄진 것 같지 않았다.

아주 오래된 흔적이다.

'이름을 알아내는 건. 실패로군.'

하지만 비석을 잘 보관해 두면, 혹시나중에라도 정체를 확인하게 될지 모른다.

- 퍽!

비석을 내 무덤 안쪽 깊숙이 꽂아넣고, 대충 흙으로 덮었다.

어차피 이 위치는 기억한다.

꾹꾹 흙을 다져서 비석을 묻어 놓은 뒤, 밟아 죽인 두 놈의 시체를 꼼꼼히 뒤졌다.

- 짤그랑.

74로티.

별 의미는 없는 금액.

많은 시간을 레나와 함께한 영향인지도 모른다.

지갑과 신분증을 빼앗았다.

예전에 봤던 장부를 빼앗았다.

'노예 장부.'

이미 확인한 장부.

하지만 무언가가 마음에 걸렸다.

장부를 다시 펼쳤다.

페이지마다 글자가 빼곡하다.

왼쪽 상단에는 여자의 이름.

옆에는 A, B 같은 등급과 함께

가격이 적혀 있다.

하지만.

'역시. 빠져 있어.'

장부가 변해 있었다.

익숙한 이름이, 몇 번을 거듭해서 뒤져도 발견되지 않는다.

〈레나, A등급, 10세이론. 〉

그 문구가 없었다.

'세계선이 달라져서인가? 그녀는 그러면 어디 있는 거지?'

〈납골당"게 들어오지 않을지도, 아예T&T 남부 지부에 없을지도 모른다.

〈잠시 떠나도, 언젠가 다시 만난다는 확신이 생겼으니까요. 〉〈이번 생이 아니라면 다음 생에서 라도. 〉〈제가 조금씩 변한다면. 길드의 핵심인 채로가 더 좋을 테니까. 〉〈다음 생에는 스승님을 도와드릴위치에 있지 않을까요? 〉물론 동명이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나'라는 이름이 이 장부에 적혀있지 않다는 사실에 나는 상당한 만족감을 느꼈다.

이번 생의 '레나'는 저런 부류들에 고통을 받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수도의 T&T 지부를 뒤져 볼까?

레나와 접촉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시 만나게 된다고 해도.

몇 번째 생에 걸친 기억을 갖고 있는 나와 달리 레나는 아무것도 모를터다.

완전히 낯선 존재.

어쩌면 적敵.

찾는 건 둘째치더라도.

그녀의 삶에 함부로 난입하는 게 몹시 망설여진다.

마지막으로 본 그녀는 T&T에서

무척 잘 지내고 있었다.

'그 세계선이 이어진다면.

오히려 내 접근이 큰 민폐가 될 가능성이 높겠지.

나중에 천천히 고민하자.

밑으로 작게 내려 뒀던 상태창을 다시 하나씩 열어 보기 시작했다.

일단 스탯창부터 시작이다.

[Lv.6(189)]

[체력: 71]

[힘: 82]

[민첩: 74]

[지혜: 63]

[잔여 포인트: 5]

다시 레벨 1부터 시작이다.

초기인 만큼 레벨은 금방 오르고, 스탯도 쉽게 쌓인다.

방금 두 인간을 죽여 오른 스탯은 전부 힘에 투자했다.

- 띠링! - 띠링! - 띠링.!

[힘이 올랐습니다!]

[힘이.]

방금 전처럼, 벌레 같은 인간들을 상대로 압도적 완력을 행사하는 건 그 자체로 꽤 저열한 쾌감을 준다.

물론, 그 이유만으로 힘 스탯에 투자한 것은 아니다.

75 이하의 스탯은 다른 녀석들에게서 빨아들일 수 있다.

80이 넘어가서, 흡수가 안 되는 힘스탯에 투자하는 게 효율적인 일이다.

나는 다음 상태창을 본다.

[1 차 봉인 해제.]

[전직이 해제되었습니다.]

'봉인 해제.

전직이 해제되었다는 말을 곰곰이 생각한다.

열 번이 넘게 시간선을 반복하며, 지금껏 쌓아 온 레벨은 190 이상.

'하지만 계속 해골병사였지.'

신경 쓰고 있지는 않았다.

별 의문 없이 받아들였다.

직업적인 혜택 따위는 전혀 주어지지 않는 삶을.

하지만.

다른 무언가로 바1 수 있다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봉인이라니.'

내가 계속 해골병사에 머무르도록막히고 있었다는 이야기일까?

기억이.

정신이 찢어질 것 같다.

어떤 악의가 느껴진다.

〈세계〉가 나를.

[동화율이 떨어집니다.]

[72.7%.]

- ^|-?]-? |-?]-. I

내리는 빗줄기 하나하나에서 기묘한 위화감이 느껴진다. 척추 사이사이를 두드리는 물방울이 무언가를 떠올리라고 말하는 것 같다.

물론 아무것도 떠오르는 건 없다.

실마리 하나 잡히는 건 없다.

- 달그락.

머리에 흐르는 건 빗물을 흔들어털어 냈다.

지금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생을 거듭할수록.

마왕군의 최전선에서 움직일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너무 많이 겪었다.

이 세^! 가.

내 예상보다도 훨씬 더 음험하고 터무니없는 곳임이 알게 된다.

저번 생에 겪은 일들을 하나하나떠올렸다.

아이작과 망가진 교단.

트로핀 나냐우와 T&T의 분열.

살해당한 레안드로 후작.

애벌레 사육장.

황실의 유령들.

그라스미어의 비밀 통로.

정체 모를 제국 공작.

'그놈은 대체 누구였을까?'

자신를 소녀라고 하던 인간 수컷.

유령들의 수장이라는 것 외에는, 뭐 하는 놈인지 전혀 알 수 없다.

'일단.

마왕과 황실에 관련된 무리들은 최대한 만나지 말아야 한다.

비를 쏟으며 산을 가린 어둠처럼, 이 세계를 마왕들과 황실이 가리고 있으니까.

- 팟!

나는 두 구의 시체를 아무렇게나멀리 던져 버리고, 루비아가 기다리는 동굴을 향해 몸을 솟구쳤다.

"저.

루비아의 갈색 눈동자에 졸음이 잔뜩묻어 있다.

'너무 늦었군.'

두 남자를 천천히 밟아 죽이는 데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썼다.

이미 슬슬 동이 틀 시간이다.

"저. 안 움직였어요. 여기에서 가만히. 기다렸어요!"

루비아는 칭찬이라도 해 달라는 듯한 묘한 눈빛으로 날 바라본다.

졸음에 취한 건지.

아니면 호감도에 취한 건지.

나에 대한 의문과 경계심이라고는 보여 주지 않는다.

그 태도에 어찐지 맥이 조금 풀려버렸다. 루비아가 이미 흐물거리는 눈을 다시 뜨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생각해 봤는데.

"그게.!"

- 풀썩.

그녀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한쪽으로 쓰러졌다.

쓰러지는 루비아의 몸을 받쳤다.

어떻게든 지켜 주지 않으면 안 될것 같은 부드러운 몸이 한쪽 팔에 감긴다.

'격발.'

물기를 털어 내고, 불길로 말린 모피를 그녀의 아래에 깔았다.

'예전보다 오래 버렸군.'

처음 함께 동굴에 왔을 때는 두시간을 걷다가 쓰러져 잠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올 때까지 밤새도록 버틴 것이다.

체력의 영향인지, 높은 호감도의 영향인지는 모른다.

굳이 서두를 이유는 없다.

곤하게 잠든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입술 끝에 따듯한 숨이 잠시 머물다 흩어진다.

내가 아니면 쉬어지지 못했을 숨.

'오늘 밤 정도는.'

푹 쉬게 해도 될 거다.

하얀 손가락 뼈 사이사이 감겨든 풍성한 갈색 머리카락을 본다.

지독히도 오랜만에 보는 광경에 감회가 새로웠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는 않을 것 같다.

나는 잠든 그녀의 상태창을 다시 가만히 들여다본다.

[이름: 레이 루비아]

[체력-9 힘-7 민첩-8 지혜-14]

지독히 약하다.

내가 없다면, 그녀가 두 사냥꾼의 협공에서 도망칠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다.

목 졸리고, 뜯어 먹히고, 짓밟히고 난자당해 목숨을 잃을 것이다.

물론 약하고 악한 것들은 세상을 가득 메울 만큼 많다. 먹고 먹히고 살해하고 살해당한다.

그들을 모두 돌아볼 여유 따위가 나에게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나를 무덤에서 일으켰다.

말을 걸고, 눈송이를 뭉쳐 던졌다.

꽃을 건넸다.

갑옷을 선물하려다 살해당했다.

그리고는, 수회의 회귀 끝에 다시 만나 내 팔에 잠들어 있다.

'세 번의 삶 정도는. 이 여자를 위해서 살아도 되겠지.' 꽃에 한 번, 눈송이에 한 번.

건네받지 못했던 갑옷에 한 번.

나는 빠르게 계산을 끝내 버린다.

누가 봐도 정확하다. 홈잡을 구석따위는 없으리라.

178화 루비아 (3)

***************************************************

가만히 그녀의 모습을 지켜본 채 6시간 정도가 흘렀다.

물이라도 받아 올까 했지만 잠든 그녀는 나를 꽉 잡고 놓지 않았다.

'곤란하군.'

스탯창을 바라본다. 보이는 근력수치는 10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떨쳐낼 수가 없다. 특별한 스킬이라도 가졌는지 모른다.

그냥 그녀의 숨이 몇 번 섞였을 뿐인데, 동굴 안의 공기가 어느새나른하고 몽롱해진다.

"으응. 으으응.

조금 더 기다리자, 그녀가 작게 신음소리를 냈다.

"깨어났나."

루비아가 두 눈을 손으로 가볍게 문지른다.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나를 보며 천천히 젖은 입술을 연다.

"꿈이.

잠꼬대 묻은 목소리가 느슨하게 입밖으로 흘러내린다.

"꿈은 아니지."

끼어들었다.

"흐끅!"

짧은 신음이 루비아의 가날픈 목안에 걸렸다. 그녀는 가볍게 몸을 떨며 말을 이었다.

"그거. 제가 할 말인데!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눈을 동그랗게 뜬다. 놀라서 달아오른 체온이 느껴진다.

"신기하다.

루비아는 내 쪽으로 천천히 몸을 기대 오며 물었다.

"정말 제 소환에 응하신 거죠?"

"그래."

루비아가 잠시 우물쭈물거리더니, 결국 말을 꺼낸다.

"이 근처에 있는 다른 강한 네크로 멘서가 해골님을 소환한 건 아닐까요? 정말 저예요? 확인해 보지 않으셔도 괜찮으실까요?"

터무니없이 강한 네크로멘서라면 분명히 있다.

'기스-제-라이.'

세계선의 변화가 크게 일어나지 않았다면, 3개월 후에는〈메마른 지하묘지〉에서 그녀를 볼 수 있게 된다.

황제 암살을 준비하는 그녀를.

'꼭 해 줘야 할 말이 있는데.'

전해야 할 말이 있다. 찾아가아: 한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일단 루비아에게 집중하고 싶다.

"확실하다. 그대가 나를 일으켰다.

계약은 성립되었지. 끊고 싶은가?"

"아니요! 절대 아니에요!"

그녀가 좌우로 고개를 젓는다.

"그럼. 영혼 같은 걸 드리면. 되는 건가요? 아니면.

"영혼?"

"너무 강한 분을 소환했잖아요!

어, 그러니까. 등가교환의 법칙에 따르면.!"

흥미로운 주장이다.

"어, 그게. 제 영혼 같은 게 쓸모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러니까. 뭐라도 드려야 될지.

"아니, 마음에 드는데."

"마음에. 드세요? 제 영혼이?"

- 달그락.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루비아를 안심시키기 위해 좋은 표정이라도 지어 주고 싶지만, 아쉽게도 그런 건 무리다. 루비아는 눈을 꼭감았다.

"그럼. 가져, 가져. 가세요!"

웃음이 나왔다.

물론 영혼은 받지 못한다.

아이작 같은 주술사는 어떻게 쓸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인간의 영혼 같은 건 받을 줄도 쓸줄도 모른다.

이마에 제 영혼이 담겨 있기라도 한 듯 루비아가 얼굴을 내밀었다.

- 스륵.

하얀 손가락뼈를 뻗었다. 이마에 닿는다. 손끝에서 닿아 오는 미열이 천천히 안쪽까지 전해진다.

어쩌면 이것을 영혼이라고 불러도 좋을지도 모른다.

"가져갔다."

"아."

짧은 탄식을 뱉고, 한동안 말이 없던 그녀가 곧 눈을 뜨고 나를 바라봤다.

"어떻게. 그렇게 강하신 거죠?"

"내가?"

"네. 손에서 불을 일으키셨잖아요!

마법사시죠?"

"게다가. 음.

"이야기하지 그러나."

루비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무겁단 말이에요!"

≪. 〈?"

"저. 완전. 무겁다고요. 절안고 엄청 빠르게 달리셨잖아요!"

물론 들면서 무게 따위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지금까지 반복된 삶 동안 그녀가 무겁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깃털보다 가볍던데?"

루비아가 풋, 하는 소리를 내며 앞으로 허리를 꺾었다.

"말도 안 돼!"

"든 것 같지도 않았는데 말이지.

무겁고 싶은 거라면 좀 더 노력해살을 찌워야겠군."

"흠.!"

그녀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움찔거렸다. 가만히 루비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날 일으킨 목적은 뭐지?"

처음부터 다 아는 척 이야기하는것도 좋지만, 모르는 척 받아넘기는것도 나쁘지 않다.

"하고 싶은 거라도 있나?"

루비아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주먹을 꼭 쥐었다.

"성을. 다시 되찾고 싶어요."

'변했군.' 예전의 루비아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엠버에 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원인은.

자기가 일으킨 해골이 생각보다 훨씬더 강하다는 것.

그 사실이, 그녀에게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든 건지도 모른다.

루비아는 나에게 다시 사정을 자세히 털어놓으며 말했다.

"영주가 되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그냥 구해 주고 싶어요. 저를 도와 주려다가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요.

너무. 너무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어요. 저는 그들을 다 버리고 도망쳤고요."

"될까요?"

물론 성 탈환 자체에 문제는 전혀없다.

'너무 쉽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할 때조차도, 에라스트에서 열린 토너먼트에서 나보다 강한 존재는 없었다.

별거 없는 남부의 소도시.

성문을 차고 들어가거나, 성벽을 훌쩍 뛰어넘어도 된다.

현 영주와 몇 안 되는 추종자들을 죽이면 간단히 끝나는 일.

다만.

걸리는 건 황실.

황실이 내세운 놈을 잘라 내고 새영주를 앉힌다고?

황실의〈유령〉들과 직접 싸워 본입장에서, 그들의 강함은 충분히 알고있다.

결국 뒷감당이 문제다.

하지만.

'영주가 힘이 없다고 했던가.

밤새도록 두 남자를 고문하면서 들은 바로는 그러하다.

새로 영주가 된 루비아의 삼촌은 지독한 무능함으로 인정받고 있지 못한 듯했다.

위험부담은. 어쩌면 생각보다 적을지도.'

결국 누가 영주건.

얌전히 황실에 협조하기만 하면 되지 않을까?

애초에 그렇다.

황실이 자신을 확실히 뒷받침해 줬던 거라면.

지금의 에라스트 영주가, 자신의 조카딸인 루비아에게 위협을 느낄이유는 조금도 없다.

내쳐질 위기를 느끼기 때문이다.

루비아를 살해하려고 한 것은.

'영주가 되어도 괜찮을지도.

에라스트 공략.

의외로 위험하지 않을 일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퀘스트까지 있다.

[루비아를 에라스트 영주로 등극시키십시오!]

[통치 레벨을 10까지 올리세요!]

[보상: ???]

나는 그녀의 상태창을 다시 한 번불러내, 퀘스트를 확인한다.

보상이 뭐가 나올지는 모르지만, 도전할 이유로는 몹시 충분하다.

그녀가 물기에 가득 찬 목소리로 애처롭게 호소한다.

"당장 내일 아침에라도 처형될지 모르는 분들이 많아요. 구해.

주고 싶어요."

"어떤 인간들이 갇혀 있지?"

"일단은.

"가지."

"정말요?"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울 건 없다.

루비아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에라스트에서도 핵심적인 인물들은 루비아를 지지하다 옥에 갇혔다.

그들을 풀어 줘 일을 하게 하고, 현 영주가 데리고 온 인신매매단패거리만 정리하면 일은 깔끔하게 끝날 것 같았다.

'너무 쉬운 거 아닌지.'

그런 의심이 들 정도다. 레나보다훨씬 높은 등급의 퀘스트가 이렇게 쉬울 수 있을까 싶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금의 나는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어쩌면, s급 퀘스트 정도는 이제나에게 쉬운 일이 된 건 아닐까?

"그럼 제가 할 일은.

나는 루비아를 보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냥 걸어."

"걸으. 라구요?"

"그래."

"그냥 걸어요?"

"네 자리에 돌아가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그냥 걸어가."

"어.

그녀가 가는 길.

그 앞의 장애물은 내가 모두 전부 치우면 된다.

지독히도 쏟아지던 호우가 언제그랬냐는 듯이 멈췄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환한 햇볕이 내리쬐고, 그 사이로 사뿐사뿐 루비아가 걷는다.

'입구 쪽으로 다시 나와 보는 건 처음이군.

"아.

수많은 빗방울 자국이 찍힌 산길위에 루비아가 멍하니 서 있다.

동굴을 벗어나서 밖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무언가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한 모양새다.

"성으로 가. 네 자리로."

"네!"

눈빛이 잠시 흔들렸지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은신.'

"어! 해골님이 안 보여요!"

"옆에 있어."

"신기하다. 그치만 보고 싶으면 어떡하죠?"

"우와앗!"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어차피계속 옆에 있을 테니까."

나는 다시 슬쩍 모습을 감췄다.

"와아. 없어졌다.!"

[서번트 시스템]

[루비아는 당신이 놀라울 정도로 신출귀몰하다고 생각합니 다.]

[칭호: '보이지 않는'을 획득.]

[마스터를 위해 싸울 때, 당신의 은신 능력이 30% 상승합니다.]

'이건.!' 서번트 시스템의 재등장.

'30%가 상승한다고?'

터무니없게 여겨질 정도의 증폭.

지금까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이 시스템은 하나의 혜택만 주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쌓아 온 힘에, 이런 게 몇 개만 겹쳐진다면 어떤 결과를 낳게될까?

내가 그녀의 〈서번트〉로서 계속활동한다면.

'과연.'

혼자 움직일 때와 비교할 수 없는 효율로 강해지게 될 것이다.

단, 그 강함은〈마스터〉를 위해 싸울때라는 조건이 붙고 있지만.

루비아 곁에 있기만 하면 대부분그 조건은 충족될 터.

"저, 걷고 있어요. 옆에 계시는거죠?"

툭.

루비아가 밟을 만한 돌부리들을 치우며 생각에 잠겼다.

힘이 필요한 일은 내가 은밀하게 전부 처리해 주고, 그녀가 황실에 거역하지 않게 조언한다면.

적어도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어쩌면 마왕이 강림하기 전까지도.

간단하고 평화롭게 에라스트에서 지낼 수 있지 않을까?

어렵게만 생각할 필요도 없다.

'뭐, 좋지.'

어젯밤 쏟아진 비 때문인지, 탐지 스킬에는 헤매는 인간 여행자 하나잡히지 않았다.

루비아가 지나갈 길을 평탄하게 만들어 주며 산길을 약 1시간 정도 내려갔을 때였다.

'저긴가.'

두 번째로 보는 에라스트 성문이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 보면, 한눈에 들어오는

크기의 작은 도시.

꽤 침울한 낯빛의 경비병 둘이, 의자에 걸터앉아 건성으로 경계를 서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심지어 그 성문은 제대로 꽉 닫혀있지도 않다.

'엉망이군.'

영주 쪽에서도 두 놈이 죽은 건전혀 모르고 있을 시간.

'모조리 죽이기보다는.

살짝 상기된 얼굴로, 제 입술을 다물고 걷는 루비아를 바라봤다.

그녀에게 적의를 드러내는 자만 골라살해한다.

나머지는 알아서 하겠지.

179화 루비아 (4)

***************************************************

높은 랭크의 탐지 스킬.

그리고 심안 특전은, 반경 수십미터를 내 영역으로 만들어 준다.

성벽 바깥에 있는 경비들은 물론 그 안쪽에 있는 녀석들까지 모두 느껴진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봐도 보이지 않을 인간들까지 파악할 수 있다.

성벽 안쪽에 서 있는 녀석들까지, 전투원의 숫자는 모두 다섯.

존재 자체만 읽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세부적인 측정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략적인 강함은 읽힌다.

말할 것도 없이.

지금의 나에 비하면 그들 모두는 터무니없이 약하다.

어젯밤 밟아 으스러뜨린 두 명의 사냥꾼보다도 약한 무리.

'이게. 평범한 인간이라는 거군.'

창칼이 아니라 대포를 장비하고 있어도 나에게 의미 있는 위해를 가할수 없는 존재들이다.

죽이려고 마음만 먹으면, 숫자가 얼마나 되건 상관없이 너무 손쉽게 학살할 수 있다.

성문 근처의 두 경비병은 심지어인지 속도조차 무척 느렸다.

"누구. 어? 아니.!"

"아, 아가씨!"

두 경비병이 모두 기겁을 하면서 루비아에게 소리쳤다.

"대, 대체 어쩌시려고요! 여기에 오면 안 되는 거 뻔히 아시면서!"

관리하지 않은 턱수염이 잔뜩 난 뚱뚱한 경비병이 손을 저으며 낮게 소리쳤다.

"무슨 험한 꼴 보려고 이러세요.

빨리! 빨리 다시 도망가세요! 절대다시는 오지 마십시오!"

의외다.

현 영주에게 그리 충성심이 깊지 않은 경비병들인 것 같았다. 곧장 루비아를 포획하려고 하거나, 창을 들이대지 않는다.

그들의 눈빛에 비치는 건 걱정과 공포다.

절반은 루비아에 대한 걱정.

나머지 반은 루비아를 잡지 않고 들여보냈을 때, 자신들이 받게 될 처벌에 대한 공포다.

그녀를 잡아서 영주에게 바쳐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갈등은 눈빛에 비치지 않는다.

'죽일 필요는 없겠군.'

루비아가 영주가 된다면 얼마든지 그녀에게 협조할 만한 인간들이다.

경비병은, 그저 경비병으로 쓰면 그만이다.

"지나가요."

루비아는 단호했다.

"안 됩니다!"

두 명의 경비병은 들고 있던 창을 거꾸로 잡고 길을 막아섰다.

단단한 물푸레나무가 루비아의

복부와 흉부 앞에서 교차됐다.

"저희가 왜 못 들여보내 드리는지 다 아시지 않습니

'공포.'

[먹이와의 스탯 차이: 절대적]

"히, 히이이익!"

길을 가로막던 경비들이 몇 걸음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 쾅!

그리고 거의 동시에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어, 어이쿠!"

"아이고.

보이지 않는 압박감에 확 뒤로

밀려난 경비들은, 다시 일어서지도 못한 채 바르르 몸을 떨었다.

정작 스킬을 쓴 건 은신 스킬로 숨어 있던 나였지만, 경비병들은 루비아와 눈을 마주치지도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였다.

간신히 창이라도 들고 있었던 건, 내가 스킬을 약하게 발동해서다.

"그럼. 지나갈. 게요?"

"예! 예.!"

공포는 아주 편리한 스킬이다.

이게 아니었으면 일일이 직접적인 무력을 행사해야 했을 것이다.

루비아도 방금 벌어진 사태에 꽤 놀란 것 같았다. 나를 찾겠다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어울리지 않는 진회색 로브 위로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이 흩날린다.

"뭐야? 무슨 일이야!"

안에 있던 세 명의 경비병이 함께 달려 나왔다.

'공포.'

"히이이익!"

"딸꾹!"

하지만 모두들 공포 스킬 한 방에 흠칫거리며 주춤주춤 뒤로 한참을 물러났다.

"아, 아가씨.!"

투구를 쓴 경비병이 이마에 땀을 흘리고, 이를 빠르게 부딪치면서도 루비아를 저지하려고 했다.

"이게. 무슨.!"

"몸이. 내 몸이 왜 이러지?"

"무슨 위엄이.!"

잔뜩 움츠러든 경비병들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떨었다.

"저는 성으로 갈 겁니다. 자리를 되찾을 거예요. 지금이라도 저를 따라오고 싶다면.

루비아는 주저앉은 경비병들은 한 차례 쑥 훑어보고 말했다.

"따라오셔도 좋아요."

경비병들을 슬쩍 보았다.

바닥에 주저앉았던 그들의 눈빛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마음속으로 웅성거리고 있는 게 여기까지 들려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경비병들은 루비아를 따라가지 않았다.

스킬을 풀자, 그제야 창백한 안색으로 땅을 짚고 쌕팩거리면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녀가 내성을 향해 걸었다.

토너먼트에 참가한 후.

에라스트를 걷는 건 두 번째.

루비아를 탈출시킨 녀석들을 처형하기 위해서인지, 거리 한복판에 처형대가 설치되어 있다.

처형은 고상한 취향이다. 타인의 죽음으로 자신의 불안을 덮는다.

인간과 잘 어울린다.

처형대의 가장자리를 지나며 레이 루비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루비아가 얼마 걷지도 않았을 때.

'벌써 나타나는군.'

비릿한 살기가 느껴졌다.

화살통을 등 뒤에 맨 쥐 수염의 남자가 루비아를 가만히 바라봤다.

시위에 화살이 매겨진다.

화살은 루비아의 가슴팍을 겨누다가 그 아래로 천천히 내려간다.

겨냥하는 곳은 종아리.

시위가 팽팽하게 뒤로 당겨졌다.

- 팟!

수십 미터의 거리를 빠르게 좁혀은밀히 사수의 뒤로 돌아갔다.

메겨진 화살을 바로 손으로 잡자, 물소 힘줄로 꼬아 만든 활시위가 텅빈 공간에서 파르르 떨렸다.

- 뚜둑.

그대로 목을 틀어 죽여 버린다.

누군가에게 살을 쏘려고 했으면 제목이 틀어지는 것 정도는 각오해야한다.

조용히 거리 구석에 시체를 놓고 루비아의 주변 수십 미터를 다시 훌었다.

한 번에 모아서 싹 죽이는 것도 좋겠지만, 하나씩 사냥해 나가는 즐거움도 있다.

살의는 감지하기 어렵지 않다.

거리의 사람들은 대부분 루비아의 등장에 깜짝깜짝 놀라며, 숨어서 지내실 일이지 어쩌려고 왔냐는 반응이었다.

나는 공포 스킬을 조금씩 발휘해인간들을 루비아에게서 물러나게 만든다. 그들은 불가사의한 위엄이 루비아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편하겠지.'

이 도시를 통치해야 하는 인간은 물론 루비아지, 내가 아니다. 나는 최대한 드러나지 않는 게 좋다.

그림자 사이사이로 몸을 숨기며 은밀히 그녀를 따라갔다.

내성이 보일 정도로 걸어갔을 때, 갑자기 짧은 소리를 내지르며 발을 접질려 주저앉는 시녀가 보였다.

장을 보려는 듯 커다란 바구니를 들고 밖으로 나오던 시녀였다.

스킬을 쓴 것도 아닌데 무슨 일인가 했더니, 루비아와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아는 사이인 듯했다.

"카나트!"

"아, 아가씨.!"

시녀는 입을 딱 벌리고 루비아를 바라보더니 소리쳤다.

"도망가세요! 지금은 잠깐 밖에 나갔지만. 다들 곧 돌아올 거란말이에요!"

"어디 갔는데?"

- 저벅.

탐지 영역 바깥쪽.

스무 명 정도의 인간이 천천히 말을 몰고 들어오는 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주칠 수도 있었겠군.'

모두 방금 지나친 정문으로부터 들어오는 무리다.

비릿하다.

그들의 온몸에서 진한 퀴퀴함과 비릿함이 풍겨 온다.

폭력의 냄새가 난다. 강자를 찾아다니며 스스로를 검증하는 폭력이 아니다.

약하고 잡아 뜯기 쉬운 먹잇감만 철저히 찾아다니는 폭력의 냄새.

한 녀석은 목에 화살에 꽂혀 죽은 암사슴을 둘러메고 있다.

다른 한 놈은 잡은 령 몇 마리를 철사로 꿰어 말안장에 걸어 놓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영주와, 그 옆의 두 놈은 목에 뱀이 그려져 있었다.

저게 없는 자들은 정보가 없다. 있는 자들에게는 제대로 된 정보를 뽑아낼 수 없다.

새삼 네크론과 싸우는 일이 지난하게 느껴졌다.

- 저벅.

목에 뱀이 그려진, 사슬 갑옷을 입은 남자가 앞쪽으로 나왔다.

"이야. 이거, 소식 듣고 와 보니 정말이네?"

공포 스킬에 한차례 주춤해 있던 군중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처형장이 설치되어 있는 사거리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흑, 아가씨. 어떡해요.!"

- 다그닥. 다그닥.

영주와 주변 무리가 루비아를 포위하듯 말을 몰았다.

말을 모는 모습이 한참 어설프다.

비교 대상이 떠올라 그런 건지도 모른다.

이사벨 백작이 지휘하는 근위대가 말을 몰던 모습이 저들과 겹쳐지는건 어쩔 수 없었다.

기스-제-라이의 군단에 속절없이 무너지기는 했지만, 근위기사 둘정도로도 저 스물은 어렵지 않게 도륙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흡수할 정수가 있을 리 만무.

"레이. 커크.!"

루비아가 드물게 분노에 가득 찬표정으로 현 영주를 노려봤다.

"허허. 삼촌한테 말버릇 한번고약하구나."

"쓰레기 같은 네놈을, 어떻게든 선하게 만들어 보겠다고 노력했던 우리 아버지를 죽여?"

"하하하하.

어렸을 때는 미형美形이었을 걸로 추정되지만, 살아온 세월에 의해 잔뜩 망가진 얼굴의 영주가 크게 웃었다.

- 촤륵!

옆에 있는 남자가 채찍으로 장갑낀 손을 탁탁 두드리며 말했다.

"매달까요?"

"기왕 제 발로 찾아왔는데, 일단 무슨 소릴 하나 보자고."

"그런데. 여기까지 어떻게 다시 온 거지? 보낸 애들이 그렇게까지 멍청한 것들은 아닌데 말이야."

잠시 고민하던 영주가 루비아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하! 살아남았을 리가 없으니.

재는 내 조카가 아니네?"

"그럼 뭡니까?"

"뭐긴, 탈주 노예 같은 거겠지."

말을 타고 주위를 둘러싼 인간들스무 명이 깔깔대며 웃었다.

하나같이 과장되게, 자신들에게 둘러싸인 루비아를 겁주려는 듯이 웃었다.

"그럼 영주님이 쓰실 겁니까?"

"글쎄. 너무 닮아서 신경 쓰이니얼굴 한쪽만 살짝 밀어 볼까?"

주먹을 꽉 쥔 채, 분노로 상기된표정을 하고 있는 루비아가 살짝 입을 벙긋거린다.

'뭐라고 하는 거지?'

입 모양을 읽는다.

〈계시죠? 〉

라고 하고 있는 것 같다.

스물이나 되는 인마人馬에 둘러싸여 버리자 루비아도 꽤 압박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사실, 루비아가 혹시 저들에게 할 말이라도 있을까 싶었는데.

지나치게 무신경했던 거 같다.

'칼을 쓸 것도 없고.'

바닥에 있는 돌을 잡고, 그대로 던져 버린다.

- 펑!

날아간 돌이 폭발을 일으키며 두남자의 배를 그대로 뚫어 버린다.

내장과 피가 꽃처럼 뿌려진다.

"어? 어어?"

내가 던지는 돌이 빛살처럼 빨리 날아가기에,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영주와 그 무리는 돌처럼 굳어 있었다.

공정한 거래다.

스킬은 아예 쓰지도 않았다. 그런 데도 루비아를 둘러싸려던 놈들은 공포에 질려 새파랗게 움츠러들어있었다.

돌은 충분히 바닥에 떨어져 있고 얼마든지 주울 수 있다.

- 펑!

무기를 잡고 어딘가를 겨누려는 두명의 어깨를 터트린다.

분리된 팔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무기를 바닥에 떨어트린다.

둔탁한 금속 소리가 몇 번씩 반복되며 거리에 울려 퍼진다.

투석 스킬 따위는 없다.

그냥 순수한 민첩과 힘에 의해, 빠르게 날아간 돌이 인간을 분쇄할뿐이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반투명한 상태창이 떠오른다.

피와 뇌수, 내장을 뒤집어쓴 채 눈을 부릅뜬 남자들은 아직도 내가 어디있는지 알지 못한다.

"으, 으어어어.!"

날아가고 터지는 동료의 신체들사이에서 그들의 얼굴은 번갈아서 하얗고 파랗게 질려 갔다.

"어, 어, 어디야!"

덜덜 떨면서 아직도 무기를 들고 어딘가를 겨낭하려는 자들이 있다.

무기를 내려놓지 않는다면, 내가 직접 내려놓게 만들면 그만이다.

'돌 던지는 것도 재미있군.

- 퍽!

"끼! 끼아아아아!"

정확하게 손목을 맞췄다.

돌도 던지면 던질수록 정확도가 향상되는 것 같다.

손목 위쪽만 남은 자가 말 위에서 피를 뿌리며 묘한 춤을 춘다.

분수처럼 피를 뿜는 팔을 상하로, 좌우로 흔들어 댄다.

위, 아래, 왼쪽, 오른쪽.

물론 그런 움직임이 나에게 별

감흥은 주지 못한다.

"히끅! 끄, 끅?"

경박한 딸꾹질과 함께, 거리에서 지린내가 나기 시작했다.

거들먹거리며 사냥터에서 돌아와, 루비아를 둘러싸며 얼굴 피부를 반쯤벗겨 낸 뒤 노예로 삼겠다던 현 영주의 다리 사이가 축축해졌다.

- 히히히힝!

지린 건 한 놈이 아닌 것 같았다.

- 다그닥! 다그닥!

불쾌하다는 둣, 말들은 남자들을 바닥에 떨구고 멀리 도망쳤다.

오줌을 지린 놈들 가운데, 고삐를 제대로 쥘 정신이 남은 자는 물론 한 명도 없다.

그들 모두가 머리를 땅에 처박고 벌벌 떨고 있다.

지금 그들에게 누가 영주냐고 물어보면, 모두 시키는 대로 대답할 것 같은 분위기다.

물론.

성문의 경비병 같은 자들이라면 모를까.

루비아가 지배하는 에라스트에, 저런것들을 남겨 둘 이유는 전혀 없었다.

- 펑!

엎드려 있는 놈 하나의 어깨를 다시 돌로 부쉈다.

"끄아아아악!"

어깨가 부서진 남자가 뒹굴뒹굴구르며 바닥에 피를 칠한다.

흘끗 루비아를 바라봤다.

후들거리는 티 하나 내지 않고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서번트 시스템]

[마스터는 당신의 활약에 대단히 전율하고 있습니다.]

['전율의 연속'을 획득합니다.]

[마스터의 주위에 있는 것만으로 모든 스탯이 10% 상승합니다.]

[루비아의 호감도 상한이 40으로 상승했습니다!]

'호오.'

[스탯 10% 상승이 적용됩니다!]

미묘하게 달라진 기분이었다.

뭘 별로 하지도 않았는데, 그녀와 함께 있는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특전을 받아 버렸다.

에라스트에 올 가치는 충분했다.

"내, 내 팔.! 내 파알.!"

"다리, 다리가 없어!"

남자들의 시끄러운 비명 소리가 내감상을 방해한다.

나는 시끄럽게 외치며 바닥에서 뒹구는 인간들을 내려다본다.

"살려 주세요! 사, 살려 주세요!"

에라스트 영주.

루비아 살해를 청부했던 그녀의 삼촌은 시체들 사이에 숨는다.

배 밖으로 내장이 질질 빠져나온시체들을 질질 그러모아서 덜덜떨면서 그 사이에 숨었다.

'공포.'

나는 내장이 흘러내리는 시체들사이에 숨은 영주에게 돌을 던지는 대신 스킬을 발동한다.

[대상과의 스탯 차이: 절대적.]

스킬을 집중한다. 그가 벌레처럼 버둥거린다. 수도 사육장에서 길러지던 애벌레들이 떠올랐다.

어떤 인간은 벌레에 먹혀 버리고, 어떤 벌레들은 인간을 흉내 낸다.

그렇게 태어나서 사방에 분변과 구정물을 튀기며 살아간다.

물론 사육장에 꿈틀대고 있을 애벌레들도, 인간들도, 뼈밖에 없는 나역시 다를 건 없다.

모두 서로라는 붉은 잿물에 몸을 담그고 갉고 갉아 대며 살아간다.

그냥 지금 이 순간만은, 내가 이장소에서 좀 많이 강할 뿐이다.

그게 전부다.

180화 루비아 (5)

***************************************************

크라켄에게 흡수한 공포 스킬은 여러모로 유용하다.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늪의 악령에게마저 먹혔다.

터진 내장들을 잔뜩 뒤집어쓰고, 혼자 그 스킬을 받는 기분이 어떤 건지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만해 볼까.'

나는 공포 스킬을 해제했다.

이대로라면 영주는 돌아 버리거나 심장마비로 죽을 확률이 크다.

그러면 곤란하다.

루비아의 복수를 내가 마음대로 빼앗을 수는 없다.

"으어. 으어어.

스킬 해제의 효과는 곧 나타났다.

에라스트 영주가 비틀거리며 시체더미 속에서 기어 나왔다.

피와 내장을 털어 내고, 제가 만든 처형대 위에 선 영주는 어느 정도 자신을 되찾은 것 같았다.

"이, 이, 이년이.! 가, 가, 감히!"

대단하다면 대단하다.

제 패거리가 전부 피떡이 되어 죽어버렸는데도 큰소리다.

상황 파악이 안 된 건지, 아니면 저 안에서 벌써 미쳐 버린 건지도 모른다.

"너, 너, 너를 가, 가만두지 아, 않을 것이야!"

다른 건 모르지만, 언어장애는

확실히 온 것 같다.

"추잡하시네요."

루비아는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영주를 매도했다.

"가만두지 않으려고 온갖 발악을 다했으면서. 헛소리는."

차갑다.

단호하다.

산에서 다리가 풀려서, 내 쪽으로 무방비하게 풀썩풀썩 넘어지던 여자 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 이, 이.!"

영주가 부들거린다.

그때 였다.

[서번트 시스템]

[마스터가 당신의 조언을 간절히 원합니다.]

[의사소통 채널이 열립니다.]

놀라웠다.

'그런 게. 된다고?'

나는 루비아를 가만히 바라봤다.

= 루비아.

그녀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둘러봤다. 내가 머쓱해질 정도로 놀라는 반응이었다.

격하게 뛰는 그녀의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 너무 놀라지 마라.

하지만 사실 내가 더 놀랐다.

'어떻게 이런 게. 혹시 사령술의 재능이라고 봐야 하나?'

허공에 뜨는 메시지에 따르면.

나는 루비아의〈서번트〉다.

그렇다면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재능인 셈이다.

어쩌면.

이런 시간회귀마저, 그녀가 나의 마스터인 탓이 아닐까. 그런 황당한 생각마저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렇게 생각하니 저 앞에 서 있는 루비아라는 여자가, 예전보다 한층더 각별한 존재로 느껴진다.

루비아가 여기저기를 돌아본다.

= 왼쪽 담벼락 아래에 숨어 있다.

너무 눈 돌릴 필요 없어. 그냥.

들리면 고개를 끄덕여라.

흠칫하던 그녀는 얼마 망설이지 않고 곧 고개를 끄덕거렸다.

- 아아.

루비아의 목소리가 몸 안쪽에서 울려온다. 조심스럽고 따듯하고, 조금은 물기에 찬 목소리다.

- 이렇게. 하는. 건가요?

= 그래.

그때 였다.

"겨, 경비! 경비대!"

처형대 위의 영주가 고래고래 악을썼다.

루비아와 생각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너무 들떠 버린 탓인지, 잠시 신경 쓰지 않고 있던 사이 영주가 조금 더 정신을 되찾고 경비병을 부르기 시작했다.

- 뿌우우우!

그가 품에서 구불구불한 뿔나팔을 꺼내 길게 불었다. 거리를 둘러싼경비병들이 보였다.

'나타났다.'라기보다는, 이미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던 자들이었다.

수십 명의 에라스트 경비병이 처형대가 설치된 장소를 둘러싸고 있었다.

작은 시골 도시에서 동원할 수 있는 대부분의 치안 병력이 온 것 같은 모양새였다.

영주가 뿔나팔을 불기 전에, 이미누군가에게 급히 연락을 받고 모인것 같았다.

새로 나타난 그들의 존재에 기운이라도 얻은 건지, 영주는 패닉을 잊기라도 한 듯 한층 더 건방진 태도가 되었다.

"다. 당장 저년을 잡아! 아니, 주, 죽여! 죽여! 다, 당장!"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경비병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들 가운데는 성문에서 꼴사납게 주저앉은 녀석들도 섞여 있었다.

'소문이 퍼졌군.'

루비아가 성으로 간다는 소문이.

영주의 뿔나팔 따위가 그들을 여기에 오게 한 것이 아니다.

성문에 있던 경비들이 자기들을 한 번에 비키게 만든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동료들을 끌어와서 여기로 그녀를 쫓아온 거다.

그저 방관자에 불과한가 했지만, 그들도 루비아가 차마 도시 안에서 끔찍하게 살해당하는 모습은 볼 수 없었던 건지 모른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끝난 터.

= 경비들에게 물어라. 어느 편을 따를 거냐고.

"여러분! 누구를 따르실 거죠?"

"내, 내가 여, 영주다! 뭣들 하는게냐! 뭣들 하는 거야!"

영주를 따른다면.

물론 여기서 경비병들을 다 죽여버릴 생각이다.

이 정도의 인원이라면 내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

"길게 말하지 않을께요. 예전의.

에라스트로 돌아가고 싶다면, 저를 따르세요."

루비아가 주위를 돌아보며 말을 이어 갔다. 그녀에게 묘한 품격이 느껴졌다. 경비병들이 일제히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전 영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역시.

"그야. 당연히.!"

"아가씨께서 마, 마법사가 되어서 돌아오셨다니까! 저거 봐!"

"이, 이 미친것들이! 어서 저년을 잡지 않고 무엇 하는 짓이야!"

영주가 발작하며 처형대 위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경비대원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 쿵.

- 쿵.

_ 쿵.

수십 명의 경비병이 루비아를 향해차례로 한쪽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숙였다.

= 제법인데?

- 어. 이게. 되네요? 다 해골님덕분이에요.!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루비아의 호감도가 3 올랐다는 상태창이 떠올랐다.

어째서 이런 것까지 내 덕분이라고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호감도가 오른다는데 싫을 이유는 없었다.

"이, 이익! 이, 이 미친것들이! 도, 돌아와서 모조리 죽여주마!"

"어딜 가시려고요?"

가장 먼저 루비아에게 무릎 꿇었던 경비 두 명이, 긴 창을 겹쳐서 영주를 막아섰다.

"너 같은 게 영주라니."

"쓰레기 같은 놈들을 또어디서 데려오려고."

- 콱!

날아온 창대들이 영주의 손목을 쳤다.

정강이를 치고, 등을 쳐서 그를 바닥에 무릎 꿇렸다.

순식간에 여섯 자루의 창대에 짓눌린 영주가 바닥에서 버둥거렸다.

"바, 바, 반역자들!"

"영주님, 아직도 현실을 제대로 모르는 거 같은데. 우리 다 당신싫어했어."

"흐이익! 이! 이이이익!"

= 이제 뭘 할 거지?

아직 적응되지 않는 듯, 머릿속에 울리는 소리에 루비아가 흠칫했다.

시끄럽게 울리는 비명 소리 사이로 루비아의 목소리가 들린다.

- 저 때문에. 저 때문에 갇힌.

사람들이 있어요. 구해 줘야 해요.

루비아도 새로운 의사소통 방법에 제법 익숙해진 것 같다. 대화하는 기분은 전혀 달랐지만, 아이작과 함께할 때가 떠오른다.

= 하고 싶은 대로 해.

"일리아르 총관은 어디 있지요?"

"외, 외성 감옥에 계십니다."

가까이 있던 경비병이 대답했다.

총관이 감옥에 갇히는 걸 막지 못한게 자기 잘못이라도 되는 듯이 흠칫거리는 태도였다.

"치안관과 서기관도요?"

"예. 죄송합니다."

위기의 순간에 중립을 지켰던 자들은, 언제나 반쯤 고개를 숙이고 살게 된다.

"그럼 가요."

루비아는 그들을 탓하지 않았다.

그저 앞장서 걸어갔다.

이제라도 확실히 이쪽에 서려는 듯이, 루비아 가까이 있던 경비병들이 말을 이어 갔다.

"저. 주의하셔야 합니다. 아직잔당들이 남아 있습니다."

= 어디냐고 물어봐.

"어디죠?"

"내성. 망루 쪽입니다. 쇠뇌를 놈들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감옥쪽으로 가시면. 쇠뇌의 공격 범위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 맡겨라.

날아오는 쇠뇌 살 정도는 간단히 잡아낼 수 있겠지만, 미리 제거할수 있다면 당연히 제거하는 편이 좋다.

= 신경 쓰지 말라고 해.

루비아가 수긍의 몸짓을 하면서 내말을 따라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크흠! 일단 방패벽을 만들어서 호위하도록 하겠습니다."

곧장 내성 망루를 확인했다. 과연경비대의 말대로였다.

내성 위에 있는 망루에서, 대형쇠뇌가 이쪽을 향해 겨눠졌다.

물론 대형이라고 해 봐야, 그라스미어성벽에 있던 것에 비하면 장난감 같은 크기에 불과하다.

"저것들. 인가요?"

루비아가 하얗고 매끈한 손가락을 뻗어 망루 위를 가리켰다.

"예! 맞습니다! 조심하십시오!"

그와 동시에.

쇠뇌 유효 사거리가 닿지도 않는 거리에서, 처형장 근처에서 주운 칼을 망루를 향해 내던졌다.

- 피잉!

날카로운 파공음이 일었다.

투창처럼 날아간 칼이 끝에서부터 쇠뇌를 부수고, 쇠뇌를 잡고 있던 자의 목을 날려 버렸다. 잘린 목이 핑그르르 허공을 날았다.

죽음의 공포를 제대로 느끼기도 전에 망루 위의 남자는 사망했다.

"어엇! 저, 저기! 저기!"

경비병들이 망루 쪽을 보고 놀라며 몸을 움찔움찔 떨었다.

아.!

= 놀란 티 내지 말고.

[루비아의 호감도가 1 올랐습니다!]

처리는 간단하다. 바닥에 떨어진 칼은 많았다. 망루 위에 남은 적은 둘밖에 없다.

- 피잉!

다시 한 번 강하게 던진 칼이 한명의 복부를 뚫고 등 뒤로 나왔다.

"크아아아악!"

칼에 뚫려 몸이 번쩍 들린 남자가 그대로 성벽 아래로 추락했다.

누구나 생애 한 번쯤은 날개가

없어도 날 수 있는 법이다.

"어어!"

"이게. 영주님의 힘.!"

이미 몇몇 경비대는 루비아를 영주라고 부르고 있었다.

[루비아의 호감도가 1 올랐습니다!]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호감도 상승상태창이 계속 떠오른다.

계속해서 호감도가 오르는 건,

루비아가 이런 자극에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고 있었다. 의외로 피를 보는 걸 싫어하지 않는 여자인지도 모른다.

- 저를 위해 이렇게까지. 정말.

감사드려요'

이제 제법 소통에 익숙해진 듯, 그녀가 나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 저, 지금 꿈꾸는 거 아니죠?

= 글쎄. 일단 주위를 좀 보지.

"마, 마법사.!"

경비병들이 눈을 부릅뜬 채 루비아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오해는 어렵지 않다.

루비아가 손가락으로 망루를 가리키자, 쇠뇌가 부서지고 인간들이 모조리 죽어 버렸다.

"이, 이게 뭐야! 아냐! 이, 이럴 리가!

이럴 리가 없어.!"

- 털썩.

영주가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주저앉는 영주를 경비병들이 질질 끌고 감옥으로 향했다.

"이, 이건 꿈이야.

영주가 끅끅거리며 손가락으로 제볼살을 힘껏 꼬집는다.

저런 식으로 꿈과 현실을 구분할수 있다면 편리하겠지만, 그 둘이 그렇게 선명하게 나눠져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럼, 이제 감옥으로 가요."

루비아에게는 그사이에 벌써 상당한 위엄이 느껴진다.

그녀가 경비대를 이끌고 거리를 걸어가자, 주민들이 하나둘씩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아가씨!"

"오오.!"

머리를 양쪽으로 묶은 여자아이 한 명이 쪼르르 달려왔다.

"언니! 영주님이 되신 거예요?"

"추운데 왜 왔니. 들어가."

"보고 싶었어요.!"

= 누구지?

- 도서관에 자주 놀러온 아이예요.

아주 똑똑해요.

백작의 딸.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평민 여자아이와 격식을 차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모습이 몹시자연스러웠다.

모두가 루비아를 환영하고 있다.

어떤 선정善政을 베푼 건 아니다.

성과를 낸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저 영주를 몰아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은 마음속 깊이 환호하고 있었다.

"아가씨! 저 쓰레기 같은 놈을 꼭처형해 주십시오!"

에라스트 시민들은, 루비아가 쭉멀어질 때까지 그대로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감옥에 도착하자, 상황을 잽싸게 파악한 간수들이 열쇠를 바쳤다.

"저, 저희도 이러고 싶었던 게 아니었습니다!"

"정말입니다! 절대로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벌벌 떠는 기색이 역력했다.

위협이 될 수 없는 무리다.

그대로 무시한 채 루비아가 감옥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일리아르 할아버지!"

"쿨럭.! 이게 꿈은 아니겠지요?"

- 저를 마지막까지 구하려던 분이에요. 이분이 없었으면 절대 성에서 탈출하지 못했을 거예요.

= 그런가.

근육질의 노인은 온몸이 전부 상처투성이였다. 난자를 당했다고 말해야 할 정도로, 몸 곳곳에 선명한 칼자국이 나 있었다.

"하하. 그때 깔끔하게 죽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이런 날도 오는군요."

루비아는 감옥 안에 갇힌 자들을 하나하나 돌아보며 눈물을 홀렸다.

"엘란! 마레일 서기관님.!"

"쿨럭. 영애, 지켜 드리지 못해죄송했습니다."

서기관이라 불린 남자가 뒤에 묶인 영주를 흘끗 보며 말했다.

"이 망할 놈을 잡으셨군요. 그 패거리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다 죽었어요."

"예? 이놈들처럼 겁 많은 것들이 그럴 리가 없는데.

그들을 날카롭게 훌는 서기관의 눈빛에, 경비병들은 머리만 아래로 푹 수그렸다.

"자세한 설명은 성 안에서 천천히 드릴게요. 간수들과 커크 자작을 여기 구금하세요."

"네!"

- 털썩.

팔다리가 묶인 채, 감옥 안으로 처박힌 레이 커크의 몸이 힘없이 무너졌다. 그의 눈빛이 초점 없이 멍하니 풀렸다.

"후후후.

말도 제대로 못 하고 꺽꺽거리던 그가 실성한 듯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크후후후. 이럴 리가 없지.

레이 가문의 마법의 피가 각성한 건가?

그럼 나도.

피와 오물로 범벅이 된 루비아의 삼촌이 수갑에 묶인 손을 허공에 내저었다.

"풀려라! 다 죽어라! 불타라! 모두 불타리라!"

"재갈도 물리세요."

"예! 예!"

"읍.! 읍읍.!"

[루비아의 호감도가 3 올랐습니다!]

이번에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또다시 호감도가 오른다.

당황스러울 정도의 빈도.

= 뭐냐?

- 감사해요. 정말. 감사해요. 돌아가신 제 아버지께서도 진심으로 감사하고 계실 거예요.

루비아는 중요한 건 지금부터라는 사실을 모른다.

'황실.

그녀의 부친을 죽인 세력.

녀석들에게 협조적으로 보여야만 루비아의 생존이 가능하다.

하지만 지금을 즐기는 것도 나쁘지는않다.

일단, 나부터가.

무언가 벅차오르는 듯한 루비아의 모습이 좋았다.

181화 루비아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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