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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화 오래된 친구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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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친해지자고?

뜬금없는 제안에 잠시 굳어 버렸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일까.

아이작이 내 진명眞名을 찾아서, 나에게 봉인술을 쓰고 역풍을 맞는 계획을 가지고 왔다.

빠르게 녀석을 봉인하고, 여행을 재개하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식으로 나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잠시 침묵했다.

녀석이 말을 이어 갔다.

- 너도 여기까지 찾아온 걸 보면 분명히 원하는 게 있잖아. 말해 봐.

고민 있지? 혼자 끙끙거리지 말고 나한테 속 시원히 털어놔. 무조건도와준다니까. 응?

물론 협조할 생각은 없다.

더는 안 속는다.

결과는 좋았지만 속는지도 모르고 까맣게 속아 무덤 위치를 알려 주고, 말파스의 인장을 푸르손의 던전에 여기저기 잔뜩 찍고 다녔다.

그때 트로핀 나냐우가 없었더라면, 내 저번 생은 훨씬 일찍 끝났겠지.

'싫다.'

아이작에게 단호히 대답했다.

- 뭐?

'뭘 또 어떻게 속여 먹으려고. 이사기꾼아.'

- .뭐야. 너, 진짜 나 아니?

당황하는 기색이다.

'예전부터 여기저기 많이 사기 치고 다녔나 보네. 놀라는 걸 보니까.'

웃음이 나온다.

아이작은 결코 못 믿을 존재다.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기는 해도.

녀석이 하는 말을 참이니 거짓이니가려 가면서 들을 자신도 전혀 없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런 변수는 아예 봉인해 두는 게 안전하다.

또 당할 줄 알고.

다시 한 번 놈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날 생각은 없다.

'다짜고짜 몸을 빼앗으려 해 놓고 친해지긴 뭘 친해져?'

- 그건. 내가 미안하다! 너에게 잠시 머무르다 곧 다른 그릇을 찾아전이할 생각이었다.

'나를 죽여서 말이지? 응?'

어떻게든 말을 이어 나가려던 놈이 잠시 말을 잃었다.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협조하고 싶다면 그거나 해 봐라.'

- 뭘 원하지?

나는 아이작의 석관 뒤로 저벅저벅걸어갔다.

아무런 표시도 없는 석벽을 가만히 마주 보고 섰다.

'여기 비밀 통로 있잖아.'

- 너??????!

끌어올릴 수 있는 최대 출력으로 냅다 화염 검기를 갈겼다.

정확한 조준 탓일까.

쿠구구, 하는 소리와 함께 예전과 같이 작은 입구가 생겨났다.

'이거 말고. 진짜 비밀 통로.'

- 어떻게 그것까지 다 아는 거지?

나는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 대체 정체가 뭐냐. 누구 지령을 받고 온 거야. 기만의 마왕? 아니, 그 녀석이 이런 여유가 있을 리가.

- 평!

입구에서 피어오르는 짙은 안개를 자연스럽게 뚫고 들어간다.

안개는 이번에도 나를 허락한다.

- 아이고. 이 새끼가 남의 결계를 막 뚫네, 막 뚫어.

블랙 골드로 빚어진 까마귀 대열을 지나자 곧 시야가 환하게 밝아졌다.

거대한 석문 위에 하얗게 타오르는 액체가 홀러간다.

- .뭘 어쩌라고?

'열어 봐. 협조하고 싶다며.'

- 이런 미친. 이건 못 연다.

'왜 못 해? 네가 숨긴 통로잖아.'

아이작은 어찐지 차분히 가라앉은 느낌으로 대답했다.

- 힘을 3할 이상 회복한 후에야 열 수 있다. 네 몸에 빙의해 있는 지금으로서는 꿈도 못 꾸지.

발끝에서부터 척추를 통해 저릿한 느낌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원래의 힘을 회복한다면, 아이작은 정말 이 문을 열 수 있다는 건가?

바티엔느 폰 레안드로 후작마저도 살해한, '소녀' 공작이 못 부순 문.

그 문을 아이작은 3할의 힘만으로 열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3할의 힘을 회복해야 문에 걸린 결계를 해제할 수 있는 거냐?'

- 그렇다니까?

'그런 절차 없이. 힘으로 이 문을 부술 수 있나?'

- 그런 짓을 왜 해? 미쳤어?

'한다고 가정하면.'

- 그래도 7할 이상은 회복해야겠지.

왜 그런 쓸데없는 걸 물을까?

수백 년 전 남부의 열두 도시를 지배했다던 벨'호멧 아이작.

이자는 대체 얼마나 강했던 걸까.

아이작이 만들어 낸〈힘〉은 죽은 후에도 나에게 남아 유지된다.

그가 자신의 힘을 되찾으면.

죽고 나서도 내가 다시 그 힘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유령들의 수장으로 보이는, 〈소녀〉

공작을 넘어서는 힘을.

협조해야 하나, 라고 생각하면서 녀석에게 다시 물었다.

'이걸 열면 안에는 뭐가 있지?'

그러자 아이작이 짧게 대꾸했다.

- 마계魔界.

'뭐? 마계?'

흐르는 액체 보석을 보며 그에게 물었다.

- 이 문을 열면. 마왕이 세계에 강림한다는 거냐?

분명하다.

마왕 강림은 10년 후.

그런데 아이작이 힘을 회복하기만 하면, 마계로 통하는 이 문을 당장 열어젖힐 수 있다는 걸까?

- 그건 아니고. 마계에서 그 정도 힘이 유출되려면. 대륙 전역에서 훨씬 더 많은 제사가 필요해.

제사祭事.

전쟁을 일으켜 피와 절규를 바치는 일이다.

- 저 문을 연다고 해도,지금 들어올수 있는 건 조무래기 정도지.

'조무래기 라고?'

- 지옥궁 근처에도 못 가는 하급악마들 정도다. 임시 제사로 최대한 무리해 봐야 시종부侍從部의 이품=品 악마들 정도?

'베에모트. 멜콤. 다곤 같은 것들말이냐?'

다른 건 몰라도 시종부의 악마들은 잘 알고 있다.

가장 큰 시종부를 가지고 있던 건 단언컨대 바알.

까마득한 저 아래를 기어 다니긴했지만, 나도 바알의 군단에 속해있었다. 바알을 섬기는 악마들의 이름과 모습 정도는 안다.

- 역시 그런 것까지 아는군.

아이작이 말을 이었다.

- 어쨌건 지금은 열지도 못한다.

열고 싶으면, 내가 힘을 회복하게 도와줘. 서로 돕고 살자니까?

마계와 통하는 문이라.

이걸 열 때 벌어질 일이 확실히 궁금하기는 한다.

아이작이 금방 자충수를 둬서 봉인될거라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나오니 훨씬 더 신경 쓰인다.

어떻게 반격이 시작될지도 모르고.

-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니? 고민있으면 다 털어놓으라니까? 나랑얘기하러 온 거 아니야? 어?

- 여기 계속 있을 거야? 네가 가고 싶은 데로 움직여 봐.

녀석이 슬쩍 통제권을 내준다.

일단은 루비아에게 떨어져 지내야한다. 놈이 그녀를 알게 된다면, 내약점으로 잡을 확률은 100%.

우선 자연스럽게.

까마귀 조각을 지나고, 골렘들을 지나갔다.

지하 복도에 서서 초조한 표정으로 기다리는 집사가 보였다.

"끝이다."

"해방. 인 겁니까?"

"그래. 영주는 이제 괜찮을 거야."

"자,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집사는 통로를 빠르게 달려 영주의 상태를 확인하러 갔다.

나는 느긋하게 바깥으로 걸어가며 아이작에게 물었다.

'왜 챈들러 가문을 괴롭힌 거지?'

- 누가 누구를 괴롭혀? 나는 금빛새벽의 주主이자 왕의 성막을 담당하는 대제사장이야. 내가 연결되어 주면, 감사해야지.

금빛 새벽.

녀석이 저번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게 떠오른다.

'금빛 새벽.?'

- 어? 몰라? 모르면 그냥 모르는 대로 있어.

문득 오기가 솟는다. 놈을 흔들고 싶어졌다.

'아이작.'

- 왜?

'네 교도들이 어떻게 됐는지 알고 싶지 않나?'

아이작이 긴장했다.

환령換靈이 실패하고, 내 뼈마디에 새긴 회로를 확인한 뒤에도 비치지 않던 차가운 긴장감이었다.

'조슈아라는 이름을 알고 있지?'

내〈몸〉이 굳었다.

아이작이 무심코 통제력을 발휘한 것이다.

기이하게도, 그는 나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조용히 중얼거렸다.

- 전부. 죽었. 다고? 멸망했어.?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생각을 읽는 주술이라도 쓴 건지 모른다. 녀석이 침묵으로 완전히 굳어져 있을 때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환한 얼굴로 달려온 집사가 머리를 몇 번이고 깊숙이 숙였다.

"영주님도 오고 계시는 중입니다."

"뭘 오기까지."

뒤따라 도착한 영주는 눈에 띄게 상태가 좋아진 모습이었다.

"왕의 사자使者시여! 저희가 어떤명을 받들면 되겠습니까? 뭐든 부디명만 내리시면.!"

"지금은 됐다."

"지금은. 말씀이십니까?"

"그래. 나중에 말하지"

"어떤 보답이든지 반드시 해 드리고 싶습니다! 꼭 말씀해 주십시오!"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가득이라는 것 정도는 안다.

어쨌건 영주를 쓰는 건 나중.

아직은 아이작을 완전히 봉인하지 못한 상태다. 영주에게 루비아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다.

시간을 두고, 몸에 대한 통제력을 확실히 되찾을 필요가 있다.

'아이작, 뭐 하고 있지?'

말이 없으니 괜히 불안해진다.

그때 였다.

- 달그락!

다리가 멋대로 음직였다.

"어이, 영주."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이 새끼가, 협조하겠다더니?'

통제력에서 내가 밀리는 상황.

놈이 집중해서 뭔가 할 때는 그저두고 볼 수밖에 없다.

"예! 말씀하십시오!"

집사와 영주가 귀를 종긋 세운다.

뭘 어쩌려고 하는 거지?

저번에 놈은 온갖 걸 다 요구했다.

내성 대장간 사용 권한, A급 무기 무제한 양도 같은 것들을.

이번에도 계약서를 쓰고 그걸 요구할까? 하지만 '내' 입에서는 전혀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잠깐 나갔다 오지."

"그럼 안내해 드리겠.

"금방 온다."

"예! 알겠습니다!"

'뭐 하는 짓이냐.' - 왕의 가짜 사자使者여, 바깥에 네가 가기 싫어하는 곳이 있구나.

뭐지? 착 가라앉은 말투다.

아이작은 빙빙 도는 것처럼 바닥을 걸어갔다.

- 좋아. 계속 마음속으로 속삭여.

성안? 성 밖?

머릿속에 자꾸 중얼거리던 녀석은 내성 성문을 열고, 계단을 제대로 걷지도 않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성 밖에는. 루비아가 있는데.

- 밖이군.

불길한 긴장감이 올라온다.

뭐 하는 거지?

어느새 몸이 내성에서 훌쩍 멀어져빠르게 대로를 걷고 있다.

몸이 미세하게 움찔거린다.

'안 돼.'

- 왼쪽? 오른쪽? 왼쪽이네.

루비아가 있는 곳으로 유도하기 싫은 마음을 읽기라도 하는 걸까.

몸이 떨렸다.

오싹한 한기가 발끝에서 올라온다.

설마 했지만 주술로 생각까지 읽어낼 수 있는 건가?

- 이쪽인가. 질주.

홀린 기분이었다.

어떻게든 그쪽으로 가지 않기 위해저항했지만, 저항할수록 속도는 빨라지고 방향은 정확해졌다.

- 여기로군.

순식간에 도착한 곳.

〈나〉는 천천히 앞을 바라봤다.

이미 보고 있는 풍경을 인식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붐비는 선인장〉

내 앞에 있는 건, 루비아를 놓고 왔던 바로 그 여관이었다.

드르륵, 창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환한 미소를 짓는 여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와아! 드디어 오셨네요!"

루비아가 나를 보고 활짝 웃고는 난간에서 곧 사라졌다.

한걸음에 후다닥 계단 내려오는 소리가 요란하다.

기분이 싸늘히 내려앉았다.

194화 오래된 친구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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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훗. 마지막까지 네가 숨기고 싶어 하던 게 이거였나?

처형대에 선 기분이었다. 불안과 초조가 정신을 썰어 댔다.

- 너무 걱정하지 마. 응? 내 말만 잘 따르면 저 아이 해칠 일 없어.

끔찍했다. 움직임이 읽힌 건지, 생각이 읽힌 건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당했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더 곤혹스러웠다.

루비아가 옆에 서서 팔 하나를 꼭안으면서 말했다.

"다녀오셨어요? 보고 싶었어요!"

아이작이 큭큭거렸다.

- 숨겨 놓은 부인? 설마 널 일으킨사령술사가 이 아이인가? 그럴 만한 능력은 없어 보이는데.

- 얼른 인사 받아. 뭐 하고 있어?

모르는 척이라도 하려고?

몸이 긴장으로 바짝 굳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비아는 활짝 웃으면서 아래에서 나를 올려다봤다.

"좋은 소식이 있어요."

"좋은. 소식?"

그녀의 웃음이 괴로웠다.

이쪽은 끔찍한 악령에 빙의된 채 다가와 버렸는데.

"유베 님이, 캐빈 애슈턴의 책을 한 권 찾아 주셨거든요."

- 지금 캐빈, 애슈턴이라고 했나?

아이작이 묘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게 어쨌다는 거지?'

하지만 아이작의 반응은 없었다.

방금 전까지 시끄럽게 떠들던 그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조용해졌다.

갑자기 말수가 줄어든 놈이 무척신경 쓰이는 와중에, 루비아가 계속내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캐빈 애슈턴이 쓴 책을 전부 읽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다른 도움은 전혀못 드리는데. 그런 거라도 잘 기억해야죠!"

루비아는 앞에서 밝게 웃었지만.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언제 어떻게 손이 나가서 루비아를 부숴 놓고, 그녀의 목을 뽑아 올릴지 모른다.

아이작이 살의를 품는 순간.

내가 루비아를 직접 죽이는 재앙이 시작된다.

"오셨습니까?"

뒤쪽에서 따라 나온 유베가 꾸벅인사했다.

아이작이 깽판을 치기 시작한다면이 인간의 운명도 경각에 달린 건 마찬가지.

"캐빈 애슈턴의 책입니다. 찾으신다고 들었습니다만.

그가 쓱 내미는, 붉은 가죽으로 된표지의 책은 꽤 오래되어 보인다.

유베도 대단한 인간이다.

처음 보는 괴한을 위해 이 정도의 호의를 베푸는 건, 자신의 직관에 대한 확신 없이는 불가능하다.

만나는 인간들마다 족족 이런 호의를 베풀다간 이미 오래전 파산했을 테니까.

어쨌건 캐빈 애슈턴에 책을 사양할이유는 전혀 없었다.

〈사람을 따라하는 인형〉

표지 오른쪽 아래에 캐빈 애슈턴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안에 있는 것도 함께 받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살짝 불룩한 부분이 있었다.

책을 펴자 당연하다는 듯 그곳이 펼쳐졌다. 오망성이 새겨진 검은색카드 두 장이 겹쳐져 있었다.

유베에게 보여 줬던 카드에, 그가 추가로 건넨 카드 한 장이 끼워져있었다.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일이 생기면 언제든 저를 찾아 주십시오."

유베가 뒤로 물러갔다.

"책부터 읽으실래요?"

루비아가 내 왼쪽 팔을 붙잡은 채 물었다.

"그건 잠시 미루지."

아이작이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캐빈 애슈턴의 책을 읽기가 어쩐지 찝껍 했다.

그에게 나에 관한 정보를 하나라도 덜 주고 싶었는데.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버린 느낌이 든다.

"무슨. 생각 하고 계세요? 혹시고민 있으세요? 괜찮으신 거예요?"

문득 루비아가 묻는다.

알아 버렸나.

고민하고 있는 걸.

= 루비아.

- 네?

= .아무것도 아니야. 난 괜찮다.

그녀와의 대화를 아이작은 모르는 모양이다. 아니면 못 들은 척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건 여기서 상황을 털어놓아도 루비아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차라리 모르고 있는 게 낫다.

알면 오히려 독이 된다.

"내성으로 가자."

"우와, 해골님은 그라스미어 영주님도 아시는 거예요?"

루비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평소였다면 루비아의 순진한 반응에 웃음이 나왔겠지만, 지금은 그럴여유가 없다.

"너무 신기해요. 아직 일어나신 지며칠도 안 됐는데! 살아 계셨을 때 엄청 중요한 분이셨나 봐요."

젠장.

아이작이 다 듣고 있겠지.

"어떻게 저 같은 힘으로 해골님을 깨웠는지. 초심자의 행운이라는 게 진짜 있네요!"

이제 와서 루비아의 입을 막긴 늦었다. 이게 어떻게 이용될지 차마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성으로 최대한 빨리 들어가는 데집중하기로 했다.

"돌아오셨군요!"

집사가 나를 반갑게 맞이한다.

헐레벌떡 뛰어간 경비병의 연락을 받은 영주도 곧 뒤따라 나온다.

"그런데 이쪽 분은.?"

영주가 루비아를 가리키며 물었다.

겨우 한 마디씩 뱉어 내듯이 말했다.

'보호하도록. 최대한. 안전하게."

- 저를요?

= 잠깐 내 말에 따라 줘.

루비아는 나를 보며 또르륵 눈을 굴리더니,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집사가 루비아를 안내했다.

그 뒤를 시녀와 경비들이 따랐다.

역설적이다.

내가 보호를 부탁한, 저 경비들이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은 바로 나.

저들에게는 어떤 승산도 없다.

아이작이 마음만 먹으면 루비아는 물론, 이 성 전체가 죽은 목숨.

그걸 내가 저지할 수 있을까?

그나마 루비아와의 거리가 조금씩 벌어지자 약간 긴장이 풀린다.

"잠시 성을 둘러봐도 되겠지?"

나는 영주에게 물었다.

"물론입니다! 곧바로 안내를 붙여드리겠습니다!"

"안내는 필요 없다."

방향만 알면 된다. 따라붙으려는 집사를 거절하고, 루비아와 반대로 걷기 시작했다.

그때 였다.

- 야, 뭘 또 그렇게 졸았어. 내가 협조하자고 했잖아. 뭐가 그렇게 못미더운 건데? 응?

루비아가 사라지길 기다리기라도 한 걸까.

조용하던 아이작이 다시 나타났다.

- 뭘 원하는 거냐.

이번 생에도 또 허무하게 루비아를 잃을 수는 없다. '내' 손으로 그녀를 살해하는 일은 결코 벌어지게 두지 않을 거다.

최악의 경우라도.

아이작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면서 천천히 기회를 노리는 게 낫다.

무슨 생각일까.

놈은 기분 나쁠 정도로 친근하게 내게 말을 걸어 댄다.

- 내가 립 하나 주겠는데 말이야.

이럴 땐 저 여자가 어떻게 되든지,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하는 거야.

그렇게 재가 내 약점이다, 하면서 온 사방에 알리지 말고.

- 그러면 나처럼 탁월한 관찰력의 소유자가 아닌 한 잘 모를 수도 있거든. 지금 봐 봐. 성안에 있는 애들 다 루비아가 네 약점인 걸 알아버렸다고.

'원하는 거나 말해라.'

다시 잠시 생각에 빠진 듯, 말이 없던 녀석이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어조로 내게 물었다.

- 캐빈 애슈턴. 캐빈 애슈턴과 너는 어떤 사이지?

예상외의 질문이다.

캐빈 애슈턴을 어떻게 안다거나, 캐빈 애슈턴의 책을 왜 좋아하냐고 묻는 게 아니다.

어떤 사이냐고?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하지만 이미 녀석은 강한 심증을 가지고 물어보는 듯하다.

'좋아하는 작가라고 했잖아.'

진실을 말해 봐야 약점이 될 뿐이다.

물론 아이작은 믿지 않는다.

- 어떻게 캐빈 애슈턴을 아는지 말해라. 그럼 저 여자아이를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비웃음이 나왔다.

한두 번 속나.

교단의 멸망을 본 뒤.

말파스에 맹세를 하고도, 묘하게 나를 함정에 몰아넣었던 게 바로 이아이작이라는 자다.

죽음마저 속이고, 석관에서 가사상태로 수백 년을 지내 온 인간.

- 너, 지금 나 의심하는구나? 아직속이는 건 시작도 안 했거든?

'생각을 읽는 주술이 대단하다는건 인정하지.'

- 그냥 눈치라니까. 뭣보다 난 너를 속일 필요가 전혀 없어. 아까 개 다시 불러오라고 해 볼까? 응?

칼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주위를 한번 쓱 둘러봤다.

모두를 물린 탓에 다행히 아무도 없다.

하지만 아이작이 소리라도 지르면, 경비병들이 당장 나에게 달려와서 루비아의 위치를 알려 줄 거다.

아직 낮이었지만, 사방이 캄캄하게 느껴졌다.

- 자살은 하지 말라고. 어지간해서 그것도 쉽지 않을 테니까.

'좋다. 모두 말해 주지. 하지만 네가 캐빈 애슈턴에 대해 왜 묻는 건지도 말해 줄 수 있나?'

어차피 말할 수밖에 없다면, 역시 조금이라도 정보를 얻어내야 한다.

다음에 다시 아이작을 만날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아이작은 지식과 능력, 심리전에서 모두 나를 압도한다.

솔직히 한 번의 생으로 감당하기엔 버거운 상대다.

그렇다고 이 녀석을 석관 안에만 썩혀 두고, 아예 그라스미어 무덤에 접근하지 않기는 아깝다.

- 뭐. 그 정도야.

아이작은 의외로 선선히 수긍했다.

자신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라고 생각해서인지도 모른다.

- 물론 네가 아주 솔직하게 이야기 했을 때 일이지만 말이야.

어차피 속일 생각은 없었다.

'캐빈 애슈턴. 그 인간이 쓴 책을 읽으면. 지혜가 조금씩 오른다:- 지혜라고? 책을 읽으면 지혜가 오르는 게 당연하잖아. 지금 무슨엉뚱한 소리를 하는 거냐?

아이작은 여전히 단단히 칼을 잡고있다.

거짓말이라고 하지 않는다.

내 대답이 진실이라는 건 자신의 직감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무슨 소리인지 납득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아니. 어떤 내용이든지 관계없이, 캐빈 애슈턴의 책을 읽을 때마다.

내 지혜가 1씩 오른다는 거다.'

- 하?

'캐빈 애슈턴의 책을 읽을 때마다 반투명한 푸른 창이 뜬다.'

- 푸른. 창이라고?

'지혜가 1 올라갔다는 창이 뜨지.

그게 내가 캐빈 애슈턴의 책을 찾는 이유다.'

- 하". 하하하. 크하하하?

아이작이 음산한 광소를 터트렸다.

하지만 그 웃음은 결코 적대적이지 않았다.

? 크크크. 크족 좀 더 해 봐라.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나?'

상관없었다.

나는 어떤 거짓도 없이 녀석에게 대답하고 있다.

잠시라도 루비아에게서 아이작을 떨어뜨려 놓고, 그의 의중을 살필수 있다면 어떤 취급을 받든 아무런상관 없었다.

하지만 아이작에게 나온 말은 전혀의외의 것이었다.

- 지금 너에 관한 모든 것들이.!

네 눈에는 '푸른 창'으로 보인다고 말하고 있는 거냐?

'어느 정도는 그렇다만.'

- 크하하하하??. 창천蒼天의 구멍을 인식하는 자라니! 캐빈 애슈턴은 그구멍에 이런 안배까지 준비해 놓았단말인가. 그자는 대체.

아이작이 미친 듯 말을 이어 갔다.

- 말도 안 되게 둔한 눈치 주제에,

'막 일어났는데도' 수많은 것들을 알고, 날 만나지 않았으면 새기지 못했을 회로까지. 이거 하나면 다 설명이 되겠군.

아이작의 광기가 점점 누적되는 게 느껴졌다. 그가 미친 듯 머릿속에서 스멀거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녀석은 잠시 침묵했다.

어둡고 무거운 침묵은 아니었다.

무언가 단단히 묶여 있던 것이 막풀려나기 시작할 때의 그런 기묘한 침묵이 었다.

한참을 침묵하던 그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 나에게 가설이 하나 있다.

195화 오래된 친구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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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설?,

"이 세계가.

그는 아예 내 몸을 장악했다.

거울 앞에 서서, 몸 구석구석을 비춰보며 말하기 시작했다.

"하나의 결계라는 가설 말이지."

"결계?"

그런 생각은.

아직 해 본 적이 없었다.

"살아 있는 커다란 덫이라고 해도 좋고, 백일몽이라고 해도 돼. 내가 그런 데 빠져 있는 게 아닐까?"

그는 쉽게 타자를 악몽에 가둘 수 있는 주술사다.

결계에 너무 천착해서 저런 상상을 하게 된 건지도 모른다.

- 철컥!

'내'가 갑자기 투구를 벗었다.

"뭔가 있다. 분명히 느껴져. 의식하고 의식하면, 연구하면 할수록 점점 날미치게 만들었다. 무언가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게 있어. 나는 그게 뭔지 알아내야 했지."

나를 조롱하는 것 같던 상태창의 문구들이 떠올랐다.

'나'는 말을 이었다.

"시선. 고삐. 그런 게 느껴졌다.

이 위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존재가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나를 계속 사로잡았지."

가만히 아이작의 이론을 들었다.

그가 루비아에게 할 짓이 겁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슨 말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굴레.

레나를 T&T 지부장으로 만들고

죽었을 때가 떠오른다.

〈1차 봉인 해제. 〉

무덤에서 다시 살아났을 때.

그런 반투명한 상태창이 허공에 떠올랐다.

나를 계속 해골병사에 머무르도록막고 있는 어떤 〈굴레〉가 분명히 있었다는 이야기다.

세계의 악의. 시선.

그런 걸 나도 느끼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계속 떨어지던 동화율.

정해진, 해골병사로서의 역할에의 동화율일까?

자신의 운명과 환경에 의문 따위가지지 않고, 짓밟히는 해골병사는 해골병사로의 모습에 충실한 것이 동화율의 뜻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이작이 말하는 결계.

이 세계에 봉사하는 가장 아래의 톱니바퀴로써, 아무 의미도 없이 던전돌바닥에서 부서지는 역할을 담당하는것.

"역시 짚이는 게 있나 보지?"

- 달그락.

거울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아무 단서도 잡을 수 없었다. 제대로 설명하는 이론도 세울 수 없었지. 구체적인 증거들이 없었거든."

"그래서?"

"그러던 중 그 작가를 알게 됐다.

캐빈 애슈턴을."

신경이 곤두섰다.

애초에 대화를 시작했던 이유다.

그의 책을 읽는 것만으로 지혜가 오르며, 책 안에 기묘한 메시지를 심어 놓은 자.

캐빈 애슈턴에 대한 정보는 하나라도 놓칠 수 없었다.

"그놈은 내 수준보다 훨씬 정교한 이론을 펼치고 있었어. 구체적인 증거들도 제시하고 있었지."

"그게 언제지? 무슨 이론인가?"

"400년 전이다. 질문은 하나씩."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나는 수도에서 발행인이 캐빈 애슈턴으로 된, 후작의 죽음이 적힌 신문을 보았다.

400년.

그 오랜 세월을 살아 있단 말인가?

아니면 개인이 아니라 단체?

아이작이 말을 이었다.

"애슈턴은 이 세계가 주인, 혹은 주민과 손님으로 이루어져 있다고했어. 그리고 손님들에게는 특별한 〈푸른 창〉이 띄워진다고 했지."

푸른 창.

"녀석이 창천蒼天의 구멍이라는 이름을 붙인. 정보의 집합이다."

정보의 집합체.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었다.

상태창이다.

너무 많은 정보들을 받아들여서 정신이 혼미한 속에서도, 머릿속에 계속 맴도는 의문이 있었다.

"그렇다면 네게는. 그 정보들이 보이지 않는 거냐? 푸른. 창이?"

[자동 진행.]

[동화율이 내려갑니다.]

[73.4%??????.]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은, 반투명한 푸른 창이.

아이작은 단언했다.

"그딴 거 안 보여. 전혀. 하나도.

대체 언제부터 그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하게 된 거지?"

하지만 화를 내는 건 아니다.

이건 호기심이다.

언제부터 내가 그렇게 생각했는지 순수하게 궁금해하는 호기심.

나는 기억을 돌이켜 보았다.

레나는 자신의 레벨을 인식했다.

허공에 매달린 거미들을 잡고 레벨이 올랐고, 오르는 능력치에 대한 깨달음도 분명히 있었다.

서큐버스님은 어땠지?

그때의 기억을 되살렸다.

분명히.

그녀는 인식하고 있었다.

인식했다 뿐일까.

인간과, 몬스터들의 '창'에 대해서자세히 설명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서큐버스님은?

대체 그걸 어떻게 알았던 거지?

왜 나에게 거짓말을 한 거지?

누구지? 누구. 였지?

그녀와 보낸 3년간의 기억이 모두 뒤틀리는 것 같았다.

[자동 진행.]

[동화율이.]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한 해골병사에 불과한 나를 몇 년동안이나 소중하게 돌봐 주었다.

던전 안에 있을 때에도.

다른 녀석들과 대화 따위는 거의 하지 않았다.

그녀와의 소통으로 충분했으니까.

좀 더 빨리 만났더라면 상처 받을 필요 없었다는 다정한 말을 하며, 나를 보호해 주었으니까.

원래의 다정한 성품 탓일까?

하지만 던전의 다른 마물들에게도 나처럼 대했던 기억은 없다.

내 곁에서 나만을 챙기고 내게만 말을 걸었다.

하지만 거기서 의심이 시작된다.

.왜 나를?

내가 뭐라고?

배은망덕한 의심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유가 전혀 없다.

이유가.

〈계속 같이. 〉

〈이야기를 들려줄게. 〉

아무리 회상해도.

그녀가 보인 다정한 태도는 오직나에게만 한정되어 있었다.

- 뭔가 짚이는 게 있는 모양이지?

내가 아는 건.

오직 그녀가 설명한 세계.

'정말로. 인간들은 자신에 대해 〈읽지〉못하는 거냐?'

? 콕. 크크. 하하하. 당연히!

그런 건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캐빈 애슈턴이 쓴 책에서 읽은 걸 제외한다면 말이다.

아이작은 어느새 통제권을 놓고 내면으로 들어가 있었다.

녀석이 큭큭거림이 남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 너는 얼마나 강한 최면에 갇혀있는 거지? 대체 누가 너한테 이런강한 거짓을 주입시킨 거냐?

'좀 닥쳐 봐라.'

아이작이 두개골에서 스멀거렸다.

육체의 통제권을 내놓았던 건.

아무래도 내 심리에 더 집중해서 읽는 것 같은 모양새다.

- .연인? 그런 게 있었나?

오지 람이 다.

그의 말을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서큐버스님이 나를 속였다기보다, 아이작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게 훨씬 고르고 싶은 선택지.

잘못된 걸 알면서도 그 선택지를 고르고 싶었다.

'상관없다.'

- 하아?

'거짓이 주입됐더라도 상관없다.

그녀를 모욕하지 마라.'

서큐버스님과 함께 보냈던 3년의 시간은 거짓이 아니다.

그동안 내가 느낀 소소한 행복은 가짜가 아니다. 그녀가 날 어떻게 이용했더라도 상관없었다.

- ?"하.

아이작이 비웃었다.

- 이런 멍청한 게 '손님'이라니-요지는, 내가 널 돕겠다는 거다.

대화 주제가 바뀐 게 반가웠다.

서큐버스님이 날 정말 속였는지, 최면을 걸었는지 따지는 건 감정적으로 너무 소모적이다.

그 고민은 나중으로 미룬다.

마음도, 생각도 좀 더 차분하게 정리된 다음으로.

나는 아이작에게 물었다,

'날 도와주겠다고? 왜지?'

- 올라가려면〈탈것〉이 필요하지.

아이작은 솔직한 어조로 말했다.

'날 타겠다고?'

- 혼자 제국 남부를 제패한 내가, 왜 갈까마귀의 제사장이 되었는지 짐작하겠느냐?

'마왕에게 올라타서. 저 위쪽에가 보고 싶었던 거냐.'

말파스.

강림했던 열여섯 마왕 가운데서, 오직 혼자만이 순수한 새 형태의 마왕이 었다.

올라타는 것.

위에 가 보는 것.

두 가지 모두, 중의적인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 그렇다. 깊은 유대를 형성하고 강림을 도우면, 그 정도는 해 주지 않을까 싶었지.

'그럼 얌전히 말파스를 기다리면 될 게 아닌가?'

굳이 날 도와주려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 아니. 그때까지 캐빈 애슈턴이 안배해 놓은 힘을 획득해야겠다. 널나침판으로 사용해서 말이지. 그 과정에서 네놈은 상상도 못 한 힘을 가지게 될 거다.

'안배해 놓은, 힘이라고?'

- 설명은 여기까지다. 눈뜬 장님, 들리는 귀머거리인 네 녀석을 내가 인도해 준다는 거다.

으음'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당장은 녀석이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놈은 알고 있는 걸 모두 말한 것 같지도 않다.

지금 하는 말들은.

냉정히 평가해 보면 구체적인 게 단 하나도 없다.

극히 모호한 얼버무림들 뿐.

숨기고 있는 게 많아 보인다.

물론.

나로서는 실컷 이용당한다고 해도 손해 볼 건 없다.

캐빈 애슈턴.

그를 찾기 위해 나를 이용한다면.

오히려 얼마든지 이용해 주었으면하는 바람이다.

더 강해지기 위해서라도, 녀석의 인도는 큰 도움이 될 확률이 높다.

다만.

잠시 생각하는 사이를 못 참고서 아이작이 날뛰었다.

- 야! 인마! 이게 얼마나 대단한 제안인지 몰라? 금빛 새벽의 주主이자 말파스의 대제사장인 내가 널먹살 잡고 키워 주겠다는 거잖아!

빨리 황송해해야 할 거 아니야?

원래 성격 나오는군.

지난 생에서부터 주술사 벨'호멧아이작은 계륵이었다.

나에게 상세한 얘기를 털어놓았긴했지만, 어떤 기괴망측한 속임수가 여기 숨어 있을지 모르고.

'널. 어떻게 믿지?'

- 못 믿기는 왜. 혹시 성향 같은것도 '푸른 창'으로 뜨냐?

물론 그런 건 뜨지 않는다.

하지만 녀석 스스로도 찔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닌 듯하다.

나는 블러핑을 쳤다.

'네가 너를 잘 아는군.'

- 흥. 좋아. 선불이다. 먼저 네몸에서 나가 주도록 하마! 일단 그정도면 괜찮겠지?

루비아를 가지고 협박하면 내가 곤란한 처지지만.

의외로 지금은 호의적이다.

[빙의가 해제되는 중.]

정말 되는 건가?

몸 전체에서 무언가 윙윙거리는 느낌이 들더니, 이내 스르르 칼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빙의가 해제되었습니다.]

눈앞에 아이작과 계속 이야기했던 '푸른 창'이 떠오른다.

아이작은 볼 수 없다는 창이.

또다시 서큐버스님이 떠오르면서 머리가 지끈거린다.

- 나가 줬다. 이제 됐지?

196화 오래된 친구 (12)

***************************************************

이 세계가 아이작의 말대로 결계라해도, 캐빈 애슈턴이 썼다는 대로 주인과 손님으로 이루어졌다 해도.

결국 지금 달라지는 건 없다.

꼭 지키고자 마음먹은 루비아조차 안전하지 못하다.

아이작은 내 몸을 빠져나가 칼에 깃들었다.

하지만 하필 대검에 빙의한 건.

언제든지 루비아를 죽일 수 있다는 무언의 시위인지도 모른다.

'협력하겠다.'

당장 눈앞의 걸림돌을 치우면서, 앞으로 조금씩 나아갈 수밖에.

- 당연히 그래야지.

검이 만족스럽게 응- 하는 소리를 내며 울었다.

'조건은 두 가지다. 하나는 루비아의 안전을 보장할 것.'

내 말에 아이작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수긍했다.

- 뭐, 그쯤이야. 다른 하나는 뭐지?

'캐빈 애슈턴. 그를 반드시 만나게 해 줘야 한다.'

아이작이 클클거리며 웃었다.

- 크흐흐. 내가 너에게 협조하는 이유가 바로 캐빈 애슈턴 때문이다.

당연한 소린 그만 지껄이고 일단전당부터 가라. 그 세상 물정 모르는 여자애도 데리고.

"그렇게 된 거다."

나는 루비아에게 사실을 자세히 털어놓았다.

물론 아이작이 듣는 앞에서.

비밀리에 전달한다고 눈치채지 못할녀석이 아니다.

숨겼다간 공연히 안 좋은 쪽으로 일이 흘러가게 될지도 모른다.

벨'호멧 아이작.

녀석을 절반도 믿고 있지 않지만, 일단 협조하기로 했으니까.

"여기에. 정말로 영혼이 깃들어있다고요?"

내가 말리기도 전.

루비아는 스스럼없이 손을 뻗어서, 대검 구멍에 숙 넣었다.

"루비아!"

검신이 응웅거리며 떨렸다.

- 뭐야? 인질 주제에 왜 막 나를 함부로 건드리느냐? 못 하게 해라.

"루비아!"

"앗. 죄송해요. 칼이 혼자 떨리는게 너무 신기해서요."

"닿지 않도록 조심해라. 위험한 녀석이 들어 있으니까."

"위험한. 녀석이요? 누구. 요?"

- 흠. 아무것도 모르는 아둔한 이 아이에게 내 존성대명을 가르쳐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의외로 아이작은 당장 그녀를 해칠생각은 없는 듯했다. 대신 녀석은 거만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 고금제일의 주술사. 제국 남부의 지배자, 창천을 검은 깃털로 뒤덮는 말파스의 대리자가 나라고 전해라.

내 앞에 서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여기고 복종하라고 하도록.

너무 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별로 옮겨 주고 싶은 말은 아니었다.

'어. 그러니까:

- 뭐냐?

'직접 하지 그래?'

저번 생에서, 아이작은 메달 안에 봉인된 채로도 레나에게 말할 수 있었다.

지금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 그럴 수야 있지만.

나를 소통의 매개로 사용하는 법은 이미 알고 있었다.

둘의 정신을 연결했다.

아이작과 루비아가 나를 통해서 대화하기 시작했다.

= 이분인가요?

- 그러하느니라. 이 몸은.

갑자기 근엄한 척을 하는 말투가 우스웠다. 티는 내지 않았다.

= 흠.

제 자랑을 잔뜩 늘어놓은 녀석의 말을 듣고, 루비아는 뭔가 심각한 고민에 빠진 표정이었다.

= 저. 궁금한 게 있어요.

- 무엇이든 고해 보거라.

= 아이작 님은. 사실 저도 책에서 읽었어요. 갑자기 여신의 저주만 받지 않았으면, 어쩌면 제국 전체를 지배하실 수도 있었다고 하던데.

역시 유명한 녀석인가?

하긴, 아이작이 맨날 자랑하는 게 사실이라면 책에 실려 있을 법하다.

루비아가 말을 이었다.

= 특기인 주술만 말씀해 주셨지만 사실 불세출의 전술가셨다면서요?

심심풀이로 쓰신 회전會戰 교본은 아직도 제국에서 쓰인대요.

- 크흠. 그런 것까지 아느냐.?

역사를 아는 아이의 미래는 밝느니라.

이 멍청한 해골이 본받을 여지가 있구나.

= 그런데

- 흠흠. 고하거라.

자신이 인정받았다는 생각.

기억되고 있다는 생각 덕분인지, 아이작은 꽤 기분이 좋아 보였다.

루비아가 질문을 이어 갔다.

= 그런 분이 왜 지하에 계속 갇혀계셨던 거예요? 지금은 왜 또 이칼에 갇혀 있고요?

나도 궁금했다. 아이작은 왜 계속지하에 갇혀 있었을까?

왜 석관을 결계로 해서 그 안에만 가만히 머무르고 있었을까.

-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갇히긴어딜 갇힌다는 말이냐!

근데 갇혔잖아, 라고 말하려다가 루비아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들었다.

= 그러니까요. 아이작 님의 수준과 비슷하게 도달한 결계사도 없다고 하던데. 갇힌 건 아니고.

- 당연한 소리!

= 그럼 왜지.

루비아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둣, 머리칼을 살짝 꼬며 물었다.

= 혹시 뭔가로부터 피하셔야 했던 건가요? 숨어야 했다거나?

그건가 싶은 순간.

아이작과 루비아의 연결이 끊겼다.

"어, 이분 어디 가셨죠?"

루비아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 네 능력이 부족해서 연결이 끊어졌다고 해라.

'응? 무슨 소리야?'

- 아무튼 네가 부족해서 연결이 끊어졌다고 해. .내가 전당 안에서 좋은 거 찾아 줄 테니까.

녀석이 갑자기 의기소침해졌다.

"아. 그게. 오래 연결하고 있으면 내가 좀 피곤해서."

"저는 그런 줄 모르고. 죄송해요!"

'이제 됐냐?' - 흠흠.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녀석은 티는 안 내도 은근히 고마워하는 듯싶었다.

전당 문 앞.

- 끼기기기긱.!

예전 이 문을 챈들러가 열었던 게 떠올랐다.

이번에는 집사에게 열쇠를 받아서, 나란히 뚫린 두 구멍에 넣고 그대로 돌렸다.

- 제법 자연스러운데. 언제 여기 문 열어 본 적 있느냐?

'글쎄.'

- 보통 열쇠 구멍 찾기도 힘든데.

왠지 이 몸이 함께 있어서 축복이 깃든 것 같군.

너 몸 없잖아, 라고 면박을 주고 싶었지만.

문이 열린 뒤 루비아가 내는 탄성소리에 그런 생각이 묻혀 버렸다.

"우와.!"

그녀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먼지 쌓인 골동품들이 취향에 맞는 모양이었다.

"저. 조금 살펴봐도 되나요? 너무신기한 게 많은데.

"그러든지."

- 흠흠.

아이작이 헛기침을 했다.

= 왜 네가 거들먹거리냐?

내 노예들이 만든 것들인데 이 정도도 못 하느냐?

= 노예라니

물론 아이작의 인성에 대해서는 알만큼 아는 터라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루비아가 지루해하지는 않았을까고민했지만 기우였다.

그녀는 전당 내부를 이리저리 신나게 뛰어다녔다.

"갖고 싶은 거 있으면 일단 챙겨.

고민하지 말고.

그녀가 옷 가게에서 한나절을 골라겨우 한 벌을 맞춘 기억이 난다.

"위험해 보이는 건 만지지 말고."

재가 애냐? 너보다 훨씬 똑똑해.

진짜 별걱정을 다하시네.

"네! 그런 건 구경만 할게요."

- 재는 냅두고, 넌 따라오기나 해.

어휴. 칼에 깃들어 있으려니 진짜재미가 없네.

대검이 웅웅거렸다.

- 아, 빨리 왼쪽으로 가라니까.

어. 거기서 직진. 쭉.

뭘 주려고 이렇게 나를 끌고 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이작이 나를 인도했다. 그리고 커다란 상자 앞에서 멈춰 섰다.

본 적 있는 익숙한 상자다.

"이건.

- 뭐야? 아는 거야?

저번에 전당을 방문했을 때.

휴대용 대포라고 생각한 물건이다.

길이는 160cm 정도.

"그냥. 특이하게 생겨서. 이걸 챙기면되나?"

슬쩍 대포를 들고, 안에 있는 설명서를 읽으려 할 때였다.

[기계공학 Lv. 3을 활성화합니다!]

- 야, 뭘 그딴 걸 읽어? 버려.

"설명서도 안 챙기.

- 장갑 벗고, 통 안에 손부터 집어넣어 봐.

"안으로?"

- 시키는 대로 좀 해라.

흐. w

- 안으로 손을 넣어서. 위에 작은 돌기 있는 부분을 오른쪽으로 쭉 당겨 봐.

'여기 말인가."

- 어, 거기! 그리고 손 빼!

손을 뺀 직후였다.

- 파캉!

작은 폭음이 터지며 구멍 안에서 강하게 메아리쳤다.

직경 1미터 정도의 커다란 대포가 줄어들며 쥐기 편한 형태로 변했다.

"이게. 뭐지?"

- 타이탄 전용 저격기지.

'타이탄. 이라고?'

- 연합 의회의 의원들이 파일럿으로 타고 다니는 거 말이다. 번외급 철인鐵人이라고 보면 된다.

기억났다.

자유 연합의 정예 기사들은, 말이 아니라 강철로 된 기계에 탑승해서 움직인다는 이야기.

활동하던 지역 때문에 그들과 직접부딪쳐 보지는 않았지만.

들은 적은 있었다.

'그 철인이라는 거. 본 적 있나?'

- 뭐? 당연하지. 5선 이상 의원용타이탄까지 타 본 적 있다고.

'그거. 세냐?'

- 큭큭큭_

아이작이 웃었다.

- 궁금하면 너도 한번 타 보든지.

나만 잘 따라오면, 머지않아 거기 올라타게 될 수도 있어. 일단 가자.

하나 더 챙길 게 있으니까.

197화 오래된 친구 (13)

***************************************************

아이작의 인도를 받아 전당 내부를 걸어갔다.

원래 크기의 대포는 대검과 함께

들고 있기 걸리적거렸지만,

아이작이 시키는 대로 하자 크게 줄어든 '저격기'는 훨씬 더 들기가 간단했다.

"그런데 이건 어떻게 줄인 거지?"

- 큭큭. 감은 잡히느나? 의외로 잡는 자세가 괜찮구나.

기계공학 스킬이 발동하며, 무기를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내가 나름대로 기계공학 지식이 있어서.

- 호오? 제국 쪽에서 공학 지식이 있는 녀석들은 거의 없다시피 한데 말이야. 역시 애슈턴과 관련 있는 놈이라 특별한 건가?

기계공학.

코드네임 별빛청여우, 가면을 쓴수녀에게 흡수한 스킬이다.

〈물질투과〉의 권능으로 레안드로 후작의 심장에 깊이 갈고리를 박아넣었던 수녀.

잊으래야 결코 잊을 수 없는 강한 인상을 내게 남겼다.

지금 그녀는 어디 있을까?

분명 기스-제-라이의 황제 살해를 입회한다고 했었는데.

〈이 암살의 입회인으로서.) 〈레드 플레이크 전체가, 이 계약을 증명하고 집행한다. 〉만나 보고 싶은 존재다.

활공滑空 가능한 거대 쇠풍뎅이와, 크라켄 뱃속에서, 갈고리로 목을 숙그어 자살한 최후 모습이 떠오른다.

-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게 하냐?

전 여친 생각이라도 해?

"수녀 생각이다."

- 수녀? 클클. 수녀들도 나름대로 매력이 있지. 쾌락을 깨우쳐 주면 앙앙거리며 몸을 비트는 수녀들이 얼마나 또'아이작의 질펀한 헛소리를 어떤 방면으로든 전환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 물건은 기계공학으로 작동하는 거냐?"

- 흠. 아니다. 이건 기계공학으로 작동하는 물건이 아니야.

"그럼 뭐지?"

- 바로. 마도 공학이다.

"마도. 공학?"

- 느긋하게 가르쳐 주도록 하마.

연합 내에서도 극소수만 알고 있는 분야지.

"?. W

.?

- 어흠흠. 왜 별 반응이 없느냐?

어서 매달리지 않고?

"나를 써먹으려면 어차피 가르쳐 줘야 되는 거겠지."

녀석에게 최대한 많은 걸 얻어 내야 겠지만, 매달린다고 더 주는 녀석이 아닌 건 분명히 알고 있다.

- 기껏 가르쳐 준다는데 저 싸가지 하고는. 앞으로 걷기나 해라.

"또 뭘 가져가겠다는 거지?"

- 진짜 중요한 건 따로 있느니라.

우아한 내가 이런 무식한 쇳덩이에 들어가 있으니 정말 짜증이 나서.

왼쪽. 어. 쭉 가서. 여기다.

아이작의 말에 그 자리에 멈췄다.

하지만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나무와 쇠 부스러기 같은 것들만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예전에 레나와 함께 왔을 때 전혀신경 쓰지 않고 지나친 지점.

- 부스러기 치워 봐라.

굳이 녀석에게 토를 달지 않았다.

투두둑, 하며 바닥의 부스러기들이 한쪽으로 쓸려 나갔다.

- 으음. 저기다. 틈에 칼을 꽂아.

하지만 틈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잠시 멈칫하자 아이작이 큭큭거리며 말을 이었다.

- 시커먼 부분 보이지? 거기에다꽂아. 그게 틈이니까.

- 투둑.

녀석의 말대로였다.

거의 힘을 주지 않았음에도 칼은 바닥의 까만 부분으로 쑥 들어갔다.

심안心眼 특전으로도 발견할 수 없었던 틈.

"이제 옆으로 돌리면 되나-

- 감 좋은데? 그대로.

돌바닥이 기괴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 쿠궁. 쿠궁. 쿠궁. 쿠르르,

바닥 깊은 곳 어디선가 묘한 울림

소리가 들리더니,

- 그그그긍!

평방 2미터 정도의 바닥이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 어휴. 먼지 좀 봐.

저 멀리 있는 루비아는 묘하게도 이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 뭘 놀라? 어차피 재한테는 소리안 들려. 버튼을 누르는 순간 차폐결계가 작동하거든.

- 쿵!

3미터쯤 내려간 바닥이 멈춰 섰고, 눈앞에 작은 공간이 펼쳐졌다.

아이작은 눈앞의 까마귀 조각상을 보고 말했다.

- 목덜미를 잡고 마력을 넣어라.

"무슨 마력을?"

- 아무거나 상관없다.

크기 약 50cm 정도의 까마귀 조각목덜미를 잡았다. 딱딱한 크리스탈표피가 느껴졌다.

까만 철사 같은 것들로 몸이 칭칭감겨져 있었다.

아이작은 재촉하지도 않았다.

대신 뭔가 자랑하는 듯한 태도로 내 움직임을 기다리고 있었다.

궁금하다.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마법 장전]

[더블 캐스팅]

[격발 Lv.2 & 질풍 Lv. 1을 혼합사용합니다!]

[숙련도가 매우 낮습니다.]

[마력 소모량이 300% 상승.]

[너울거리는 불꽃.]

[격발의 플레어 Lv.1 발동!]

- 화르르!

새까맣게 칠해져 있던 몸에 바람과 불의 기운이 휘감겼다.

새의 두 눈에 서서히 붉은 물이 들었다.

수많은 세월이 묻어 있는 것처럼 수십 겹으로 칠해져 있지만, 결코탁하지 않은 깊고 붉은 빛이었다.

검고 단단한 부리가 서서히 숨을 쉬듯 구부러졌다.

- 크하하하.

대검이 부르르 떨었다. 칼에 있던 무언가가 혼불처럼 까마귀 안으로 쏟아져 내렸다.

- 파드드득!

몸에 칭칭 감겨 있던 검은 철사가 풀려났다. 십여 겹의 얇은 크리스탈표피가 일제히 펴지며 날개가 되어 파드득거렸다.

한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강한 날개바람이 활개 쳐 나왔다.

〈들리느냐? 이제부터 이 벨'호멧아이작은 여기 깃들겠느니라. 〉 50cm 정도의 크기로 움츠러들어있던 까마귀 인형은.

양 날개 길이가 단번에 1미터를 훌쩍 넘는 크기로 변해서 나를 향해똑바로 고개를 들었다.

새까만 크리스탈 깃털 수백 개가, 몸을 확인하듯이 동시에 부드럽게 움직였다.

아이작에게 감탄해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분명 장관이었다.

어디서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닌 건 분명하다.

이게 무슨 인형이냐고 질문이라도 던져 보려던 순간이었다.

- 추록.

밤처럼 검은 칠흑으로 화려하게 펼쳐졌던 날개가 추욱 늘어지면서 쭈그러들었다.

- 아이고. 힘들어라*

다시 처음의 작은 크기로 돌아간인형으로부터 아이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금 전의 웅장한 울림과는 한층대비되는 목소리다.

"뭐냐?"

왜 갑자기 크기가 줄어든 거냐는 질문이다.

- 이게 고급스러운 대신에 효율이 조금 안 좋아서. 계속해서 마력 충전을 해 줘야 하거든.

"마력 충전?"

어찐지 어감이 별로다.

- 원래 루-륨으로 작동하는 거다.

방금 같은 식으로 하면 계속해서 충전이 필요하지.

"귀찮군."

작은 까마귀 인형이 파드득거리며 날아다녔다.

일단 비행은 가뿐한 모양이다.

아까 같은 위엄은 없었지만.

- 걱정할 거 없다. 내 교단에 가서 루-륨을 챙기면 되는 일이니까.

교단.

나는 이미 아이작에게, 제 교단이 모두 몰살당했다고 말해 주었다.

그래서인지 교단에 관한 이야기를하는 아이작의 목소리가 쓸쓸하게 들린다.

그곳에 간다면, 녀석은 살해당한 제 신도들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루-륨을 얻으면 아까같이 화려한 모습을 계속 보여 줄 수 있을까?

은근히 기대되는 것도 사실이다.

- 이제 올라가라. 바깥에서 쓸모있는 것들을 좀 더 챙겨야 된다.

- 쿠구구구구.

아이작이 가리키는 부분을 칼로 누르자 석판이 위로 올라갔다.

- 자, 다음은. 그거.

녀석이 다음으로 챙기라고 한 건 특이하게 생긴 반지였다.

커다란 상자 안에 들어 있었는데, 링 부분은 다른 반지와 비슷하지만 몸통 부분이 컸다.

그리고 안쪽에는 기이한 문자열이 적힌 바늘 두 개가, 내 움직임에 따라좌우로 살짝 살짝 흔들렸다.

"이게 뭐지?"

- 길 찾는 데 도움이 된다. 봐도 너는 잘 모를 테니까 그냥 나한테 물어보면 된다.

움직임을 멈추자 두 개의 바늘은 각자 서로 다른 곳을 가리켰다.

내 의문을 미리 읽은 걸까.

- 망가진 거 아니야. 평범한 나침바늘과 비교하면 아주 곤란해.

다음으로 아이작은 팔찌 하나를 나에게 착용하게 했다.

일부러 찾아가지 않으면 절대 못보고 지나칠 것 같은 평범한 흑색팔찌 였다.

끼게 뭐지?"

꽤 쓸 만한 물건이다.

"아무 기능도 없어 보이는데.

나는 팔찌를 몇 번 두드렸다.

둔탁한 감각만 와 닿을 뿐이었다.

- 후후. 팔찌에 검기를 불어넣어보거라.

검기를?

약간 의아해하면서도 녀석의 말을 따랐다.

그 순간이었다.

- 좌르록!

"호오.

팔찌에서 칼날이 솟아 나왔다.

실제로 그럴 리는 없었지만, 촘촘하게 솟아난 칼날들에게서 흥건한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던지는 건가?"

한눈에 봐도 날리기 좋게 생긴

팔찌 였다.

- 잘 아는군. 적의 생명줄을 끊고 다시 돌아오는 데 특화되어 있는 물건이지. 연습해 보지 그러냐?

"나중에."

비록 멀리 떨어져 있긴 하지만, 루비아와 함께 있는 공간에서 잘알지도 못하는 걸 던지면서 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 이제 저 상자를 열어라.

녀석은 대검 칼자루 위에 앉아서, 가져갈 것들을 부리로 가리켰다.

거기서 나온 건 길고 치렁치렁한 목걸이 였다.

"이건 어떤 기능이지?"

- 목걸이다.

"음. 마력을 불어넣으면 되나.' - 그냥 목걸이라니까? 안 예쁘냐?

흑옥으로 만들었어. 최저로 쳐도 100세이론이 넘는 물건이라고.

문득, 레나가 들으면 좋아할 만한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녀였다면, 그 말을 듣는 순간까마귀 부리에서 목걸이를 낚아채가지 않았을까.

아예 자기가 먼저 집어 갔을지도.

레나는 잘 살고 있을까.

찾아가 보고 싶은 마음을 일부러억누르고, 외면하고 있었다.

나와 얽히지 않는 게 레나에게는 훨씬 안전할 것이다.

어디 있을지. 어떻게 살고 있을지 괜히 알아보려고 했다간 또다시 피해를 끼칠지도 모른다.

알아보더라도.

나중에 천천히. 주위 환경이 다안정되었을 때 알아보도록 하자.

"해골님!"

루비아의 목소리가 나를 상념에서 일깨웠다.

198화 오래된 친구 (14)

***************************************************

"이건 어때요?"

루비아는 은색 펜던트를 슬며시 들어보이며 물었다.

살짝 굳어 있는 루비아가 무척

귀엽다.

마음에 들었는데, 내가 별로라고 말하기라도 할까 봐 걱정된 걸까.

"괜찮은데. 어울리는군."

그냥 하는 말은 아니다.

별다른 장식은 없지만, 우아한 곡선이 그녀에게 딱 맞는다.

자신과 어울리는 물건을 고르는 센스도 뛰어난 것 같다.

"예뻐 보이는데."

"그렇죠.

루비아의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칼자루에 앉아 힘없이 푹 수그리고 있던 아이작이 말을 걸었다.

- 가지고 싶다는 말이잖아, 멍청아.

이미 들어올 때 갖고 싶은 건 전부 다 가지라고 이야기했다.

저런 거 하나를 가지고 또 고민할줄은 전혀 몰랐는데.

- 재가 너 눈치 보고 있거든?

나는 루비아에게 다시 한 번 확인해 줬다.

"챙겨 가지 그러나."

"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루비아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다른 마음에 드는 건 없나?"

"괜찮아요! 이거 하나로 충분해요.

그런데.

"뭐지?"

루비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칼자루에 앉은 아이작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 까마귀 인형은 장신구 거치대같은 거예요?"

≪흐 , '하긴 과하게 치렁치렁하긴 하다.

웃기다고 생각될 정도로.

- 말하는 싸가지 하고는. 뭐?

장신구 거치대?

루비아는 까마귀 인형이 파닥거리며 나는 모습을 아직 보지 못한 상태다.

"어. 그게. 아까 그 칼에 있던 영혼이다."

"정말요? 그 유명한 아이작 님이 여기 들어가신 거구나!"

- 저것 좀 봐라. 말투가 왜 나를 놀리는 거 같느냐?

'오해다.'

"다시 연결해 줄까?"

- 싫어. 하지 마. 저런 하룻강아지와 나를 엮지 마라. 우아하게 가만히 있고 싶느니라.

아이작은 단칼에 거절했고.

"음. 힘드신 거 아니었어요?"

루비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언제든 연결하고 싶으면 말해."

"네! 감사해요. 그런데 혹시 이거움직이기도 하나요?"

루비아가 손을 뻗는 것과 동시에, - 파드득!

까마귀 인형이 기겁을 하며 위로 솟아올랐다.

- 놀랐잖아1 이 무엄한 것이 감히.!

잔뜩 날개를 벌리고서 위협하려는 자세는 취했지만.

고작 30cm 정도의 크기라 전혀

위협적이지 못하다.

- 파득! 파득!

- 이 아이작을 감히 장난감 만지듯다루느냐!

녀석의 반응이 의외였다.

아까는 수녀들이 어쩌고 하면서 질펀한 척하지 않았나?

나름대로 거칠어 보이려고 위장음담패설 따위를 했는지도 모른다.

사실 원래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라거나.

아니면 여자를 꺼리는지도 모르겠다.

"잘 난다. 신기하네요! 인형이 이렇게 날아다니는 걸 보니 무슨원리인지 궁금하네요."

루비아의 눈이 반짝인다.

루-륨을 충전하지 않은 상태라도 아이작이 날아다니는 건 문제없어 보인다.

그냥 마력액을 충전해 주지 말까?

아까 같은 모습이면 멋지긴 한데, 위협적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도 나름 괜찮을지도.

- 파드득!

아이작은 어느새 5미터 높이까지 날아올라 루비아의 손길을 회피했다.

"아, 높이 올라가 버렸다. 장신구를 줄줄 감고도 잘 날고 있네요."

- 흥. 건드리는 건 꿈도 꾸지 말라고해라. 한데 애송이 주제에. 감각은 제법이로군.

'감각?'

- 너 말고. 저 아이 말이다. 물건을 제법 잘 골랐어.

루비아가 고른 물건은 하나뿐이다.

조심스레 들고 있는 은빛 목걸이를 바라봤다.

내가 보기에는 평범한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걸기는 싫은 건가?"

"아니요! 너무 예쁜데 제가 그냥막 사용하기가 미안해서요."

"한번 걸어 봐."

"넷. 맵!"

그녀가 막 펜던트를 목에 걸었다.

쇄골과 쇄골 사이 옴폭 파인 곳.

섬세하게 구부러진 은빛 펜던트가 처연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 마법이 걸린 목걸이다. 가벼운정도로 존재감을 지워 주는 마법에 불과하지만. 부담 없이 쓰기에는좋지.

가진 것만으로도 존재감을 지워 주는 목걸이.

내 주의를 돌릴 정도는 아니지만, 무언가 그녀의 기척이 어렴풋해진 느낌은 든다.

- 혹시라도 벳어서 네가 쓸 생각은 하지 말라고. 네 은신 능력이 훨씬더 좋으니까.

물론 그럴 일은 없다. 목걸이를 건 루비아는 아이작을 흘끗흘끗 쳐다보며 내 옆에 머물러 있었다.

'더 챙길 건 없나?'

- 꼴사납게 곁에 딱 붙어 있는 꼴하고는. 흥. 어차피 많이 가져가려해도 별로 담을 데도 없느니라.

그 말대로다. 길다란 '저격기'와 대검을 들고 있으니 손에 남는 공간이 없었다.

까마귀 인형 목에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장신구들을 흘끗 바라봤다.

넣을 공간이라.

머드캐시의 주머니가 생각났다.

홉고블린 직스키세스 붐텅을 구해주며 들었던, 고블린 마법사 머드캐시의 주머니.

금화가 무한정으로 들어간다고

했지만, 정말 금화만 무한정으로 들어가는 걸까.

동부산맥에 있다는 그 녀석의 주머니가 있다면, 여기 있는 것들도 좀더 넣을 수 있지 않을까.

하나 더 떠오르는 것도 있다.

기스-제-라이가 죽었을 때.

그녀의 유해를 넣어 둔 아공간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이었을까?

남들에게는 그 공간이 보이는지,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건지 확인하지 못했던 그 공간.

머드캐시라는 마법사의 주머니는 그것과 비슷한 성격일까.

"저. 해골님?"

루비아의 목소리가 나를 잡념에서 일깨웠다.

"괜찮으세요?"

- 달그락.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기억이 조금 과도하게 쌓여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일단 아이작 말대로 교단부터 간다.

아이작에게 교단이 망한 걸 확인시켜 준 뒤에 생각해 봐도 충분하겠지.

당장 급한 건 눈앞에 있는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할지다.

"루비아."

"네?"

"나는. 당분간 여행을 떠날 거다."

몇 개월이 될지, 일 년이 될지 모른다.

그라스미어에 위험이 닥치기 전에 루비아를 빼낼 생각이기는 하지만.

여행 중에 내가 죽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어쩌면 지금 여기가, 이번 생에서 마지막 만남일지도.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같이 갈 텐가, 아니면 이 성에 남아있을 건가?"

당연히 여기 있는 게 훨씬 더

안전하다. 적어도 황실이 벌레를 보내기 전까지는 그렇다.

루비아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예상했던 질문이라는 듯 나에게 말했다.

"제가 결정하는 건가요?"

그녀의 말에서는 일종의 결기마저느껴졌다.

"그래."

"정말이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비아는 작고 하얀 주먹을 꼭

쥐었다. 그리고 나를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그럼, 전 함께 갈 거예요! 책 속세상이 아니라. 제 눈으로 현실을 직접 보고 느끼고 싶어요."

그녀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폐가 되겠죠? 하지만 저도 어딘가 쓸모 있을지 모르잖아요?

어. 배워 놓은 언어도 많은데.

나중에 동방에 가게 된다면 제가 번역도 할 수 있어요! 통역은 잘될지 모르겠지 만요."

- 호오. 동방어를 한다고?

루비아를 피해 가 있던 아이작은 살짝 놀라는 듯했다.

'왜 그러지?'

- 클클. 원해遠海가 막히고 나서 어차피 그쪽에 갈 수 있는 방법도 전혀 없는데 동방어를 해서 무슨쓸모란 말이냐.

'아예 없다고?'

의아했다. 기스-제-라이는 자신이 동방에서 왔다고 했고, 첸들러 남작은 동방에서 무사수행을 했다고 들었다.

아이작은 차갑게 대꾸했다.

- 본토에는 갈 수 없다. 경험할 수 있는 건 작은 섬 하나뿐이지. 동방의 작은 '복제품(레플리카)'. 놀이공원같은 거다.

'그게 무슨_

하지만 내 의문에도 불구하고 아이 작은 더 말해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루비아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이름: 레이 루비아]

[사령술사 Lv.1]

[체력-9 힘-7 민첩-8 지혜-14]

[호감도: 35]

- 루비아는 당신을 몹시 신뢰하며, 높은 결속력과 친근함을 느껍니다.

[기본 스킬]

- 책 찾기 Lv.10

- 책 읽기 Lv.10

- 고대어 Lv.3

- 룬어 Lv.3

- 독도법 Lv.3

- 예법 Lv.2

- 동방어 Lv.3 (new!)

- Ill (호감도가 부족합니다.)

- ??? (호감도가 부족합니다.)

[특전]

- 호감도를 올리면 개방됩니다.

[칭히

- 호감도를 올리면 개방됩니다.

예전에 봤을 때는 ??? 로 표시된스킬 중 하나가 동방어로 변경되어 있었다.

루비아가 말해 줘서 새롭게 나타난건지, 아니면 원래 저런 게 있었는지는 모른다.

'흐음.' 물론 그런 스킬이 아니라도 폐가 될 일은 없다.

오히려 서번트 시스템의 영향으로, 루비아 근처에만 있어도 내가 훨씬이득을 취하는 입장이다.

마음에 걸리는 건.

확실히 지켜 주지도 못할 주제에 그녀를 이용하게 되는 것.

- 파득! 파드득!

문득 허공을 날고 있는 아이작이 신경 쓰인다.

녀석 입장에서는 인질이니 당연히 데리고 가자고 할 줄 알았는데 별말이 없다.

혹시. 루비아가 껄끄러운 건가?

생각이 더 깊어진다.

루비아를 놓고 가면 1년간은 정말 안전할까.

'너는 왜 아무 말이 없지.'

- 흥. 그런 건 알아서 하도록 해라.

왜 내게 물어보느냐? 저 여자애가 변사체가 되면 내 탓을 하려느냐?

아이작의 핀잔이 뜨끔하다.

결국 내가 결정할 문제고, 내가 책임져야 할 문제.

여기에 내버려 두는 건.

그라스미어 영주에게 루비아의 보호책임을 유기하는 짓이다.

게다가 영주가 어떻게 변할지는 알기 어려운 일.

아이작에게 꾸준히 생명을 빨아먹혀오던 그는 굴레에서 해방되자마자 온천 여행을 떠났다.

지금은 삶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지 모른다.

예전처럼 황실의 비합리적인 요구들을 순종적으로 수용할까?

챈들러가 더 빨리 영주가 되지는 않을까.

조금이라도 뻗댄다면, 〈유령〉들이 벌레를 가지고 찾아오지 않을까.

나는 고민 끝에 결정을 내리고, 루비아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같이 가자."

"정말요.!?"

잔뜩 긴장해 있던 그녀의 눈이

휘둥그래진다.

"그래."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 띠링!

[루비아의 호감도가 3 올랐습니다!]

허공에 뜬 반투명한 상태창 너머로, 나를 바라보는 티 없는 눈동자가 촉촉하게 반짝거린다.

눈빛이 흔들린다.

의외의 대답이었던 걸까.

"걸리적거릴 텐데. 너무 욕심을 부리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승낙해주실 줄은. 정말 몰랐어요."

199화 오래된 친구 (15)

***************************************************

우리는 그라스미어에서 빌려준

마차를 타고 출발했다.

영주의 호의였다.

마차는 화려함보다는 견고함과

탑승감에 중점을 둬서 만들어진 것 같았다.

- 다그닥! 다그닥!

무척 상태가 좋은 말이 두 필이나 붙었는데도, 마차의 폭이 좁아서 샛길도 잘 달렸다.

좁은 마차 안에서 루비아와 나의 거리는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 덜컹.

커다란 돌멩이라도 밟고 지나가는걸까. 웬만해서는 충격이 느껴지지 않던 마차가 한차례 흔들렸다.

- 파드득!

마차 지붕에 앉아 있던 아이작이 갑작스레 날갯짓을 하며 위로 솟아올랐다.

"앗. 저분, 놀랐나 봐요."

곁에 앉은 루비아가 손가락으로 지붕을 가리켰다.

그나저나. 마차가 흔들리며 몸이 좀 겹쳤는데.

떨어질 생각은 없어 보인다.

나는 굳이 지적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뒀다.

불편하면 알아서 멀어지겠지.

"저분이요. 놀라서 막. 파드득움직였어요."

몸은 가까이 다가오면서, 화제는 먼 곳을 향하게 하는 방식인가.

다행히 아이작의 목소리가 마차 안의 어색함을 깨트렸다.

- 다 들린다.

'들리면 어쩔 건데?'

- 이 건방진 것들이.!

아이작이 부들거린다.

하지만 별 신경은 쓰이지 않는다.

처음에는.

아이작이 다시 빙의해서 루비아를 해칠까 봐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루비아가 나에게 들려준이야기를 듣고 난 뒤 그런 걱정은 조금 덜어졌다.

루비아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사실 저분이 걱정돼요. 〉

〈아이작이? 왜 그렇지? 〉

〈'혼魂은 그릇에 담긴 물과 같아, 옮겨 다닐수록 그 절대치가 계속줄어든다.' 사령술의 기본 교과서에 쓰인 내용이거든요. 〉〈아이작, 사실이냐? 〉〈. 흥. 날 그런 기본적인 법칙이 적용되는 존재로 보면 곤란하다. 〉하지만 결국 법칙은 법칙이라는 이야기.

부수려면, 자칭 대주술사 벨'호멧아이작이라 해도 힘깨나 들겠지.

대검에 들어간 건 내 믿음을 사기 위해서였다고 해도, 전당에서 찾은 까마귀는 준비된 빙의체일 거다.

임시로 깃들기 위한 최적의 그릇.

좀 열 받게 했다고 해서.

그 까마귀 인형에서 함부로 나올가능성은 낮겠지.

- 파닥! 파다닥!

아이작은 불쾌한 듯 마차 주위를 빙빙 돌아가며 파드득 날았다.

창밖으로 고개를 흘끗 내밀었다.

아이작에게 눈길 한 번 안 주고 묵묵히 마차를 모는 중년 마부가 대단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딱 하나만 물었다.

〈이 까마귀도 일행이십니까? 〉

그렇다는 대답에 마부는 고개를 끄덕였고, 지금까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 파득! 파드득! 파드드득!

숙련된 마부의 요건이 신경줄이 굵은 것이라면 무척 잘 만족시키는 남자다.

마부 경력 30년이라 했던가.

마차는 서부를 향해 달렸다. 아직교단까지는 한참이다.

커튼을 걷고 풍경을 바라봤다.

겨울 산은 여백이 많아 좋다. 중턱이 햇볕에 천천히 그을린다.

돌 위에 흔적처럼 남은 눈이 투둑조금씩 녹아내렸다. 루비아도 내게 살짝 기대어 바깥을 바라봤다.

개울 위 얇은 빙판이 졸린 햇살에 조금씩 부서졌다. 겨울 꽃은 그런 식으로 핀다.

힘들게 이리저리 뛰다가, 알아서 움직이는 마차 위에 앉아 풍경을 바라보니 다 때려치우고 여행이나 다닐까 싶기도 하다.

진심으로.

물론 모두 잊고 도망친다고 해도 유유자적 여행 다닐 수 있는 미래따위는 오지 않는다.

일 년 뒤 전쟁이 예정되어 있다.

바람에서 피 냄새가 나는 세월이 지나면 마왕이 강림한다.

어디로 도망쳐도 세상의 시선을 피할수 없다. 독 오른 칼날들이 루비아를 노릴 것이다.

- 달그락.

나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닥쳐오는 운명은 정면으로 마주할수밖에 없다.

- 스르록.

유베가 구해 준 책을 펼쳤다.

잠시 외면하고 있었지만, 역시 삶을 마주보는 첫 시작은. 애슈턴의 책을 읽는 것부터.

"옆에서 같이 읽어도 되나요?"

루비아가 내 쪽으로 몸을 붙였다.

겨울의 산길이다.

온기가. 싫을 리는 없다. 이렇게 곁에 붙어서 책을 읽자니 떠오르는 분이 있다.

서큐버스님이.

그분은 어떤 존재였을까.

아이작의 말을 무시하려 해도, 끝끝내 불투명한 의구심이 머릿속에 거뭇거뭇 번져 온다.

"저. 강요하는 건 아니에요! 전그냥 옆에만 있어도 좋아요."

"아니. 같이 보자고."

루비아를 괜히 긴장하게 만든 듯하다.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이지만, 어딘가 들뜬 둣도 했다.

혹시 책을 읽는다는 생각만으로 저렇게 되는 걸까.

보면 볼수록 재미있는 여자다.

〈사람을 흉내 내는 인형〉

〈캐빈 애슈턴〉

첫 장을 넘겼다.

텅 비어 있는 백지에, 알아볼 수 없는 꼬불꼬불한 글씨가 있었다.

제국 공용어도 아니었고, 분명히 동방어도 아니었다.

루비아가 곁에서 글씨를 읽으며 중얼거렸다.

"타락한. 영혼과 순수한 육체? 뭘말하고 싶은 걸까요."

깜짝 놀라 루비아를 바라봤다.

"이걸 읽을 줄 안다고?"

"네. 룬어로 그렇게 쓰여 있어요."

격렬한 반응에 루비아는 부끄러운 표정이었다. 그녀가 양 볼을 살짝비비며 말했다.

"도서관에 있는 책 중에 고대어랑룬어로 쓰인 책도 몇 권 있어서.

"사전인가?"

"아니요, 그건 아닌데. 계속해서 보고 또 보다 보니 어느새 읽을 수 있게 됐어요."

나는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모르는 언어로 쓰인 서적을 계속읽기만 하면 뜻이 와 닿는다고?

아예 배운 적도 없는데?

대체 얼마나 언어에 대한 재능이 뛰어나야 그게 가능한 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게 되는 건가.!"

"그렇게 말씀하시면 부끄러워요.

아버지에게만 말했거든요. 아빠도 사실 처음에 안 믿으시다. 룬어와 고대어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은 꼭비밀로 하라고 했어요."

"그건 왜지?"

"그건 마법사들만 남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금어禁語거든요."

"호오."

루비아의 말에 이런저런 호기심이 솟구쳤다. 하지만 앞으로도 들을 기회는 많으리라. 일단 애슈턴의 책부터 읽기로 했다.

다행히 첫 장에 쓰인 문장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내가 읽을 수 있는 대륙 공용어로 쓰여 있었다.

〈어린 시절, 내 친구는 목이 잘린 알몸의 인형을 주워 온 적이 있다.

친구는 자기 목을 대신 그 인형에 끼워 넣고 싶다고 말했다. 〉

"무서운 이야기네요."

캐빈 애슈턴의 책이 그렇듯 초반몇 페이지는 실용적인 내용과 별상관없는 글줄들이 자리했다.

〈나는 생각했다. 굳이 목이 잘린 인형을 찾아서 제 목을 끼워 넣을 필요는 없다. 〉〈완벽한 인형에 제 영혼만 뽑아서 집어넣으면 되는 일이다. 그렇게 우리는 순수한 육체를 가지리라. 〉

[동화율이 내려갑니다.]

[72.14%.]

어찐지 울렁거리는 기분이 든다.

"괜찮으세요?"

루비아는 걱정이 가득한 말투로 내게 물었다.

나는 피에 절어 있는 살인마 해골인데, 마치 강가에 내어 놓은 어린 아이라도 보는 것처럼 불안하기 그지없는 눈빛이다.

그녀의 걱정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혹시 멀미가 있으신 건가요?"

그럴 리가 없다.

흔들릴 것도 없이 텅 비어 있다.

숙련된 마부가 끄는 마차는 굉장히 편안하다.

그냥 이 책이 문제지만, 그렇다고 안 읽을 수는 없다.

"계속 읽자고."

"많이 피곤해 보이세요. 페이지는 제가 넘겨드릴게요!"

과도한 친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행에 나서 들뜬 그녀를 굳이 제지할 필요도 없다.

루비아의 곁에 가만히 앉아서,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그녀와 보조를 맞춰 가며 읽기 시작했다.

책 뒤로 갈수록 실용적인 내용이 많이 등장했다.

하지만 역시 이해하기는 어려운 내용들이 많다.

룬어라고 했나?

읽을 수 없는 꼬불꼬불한 글씨도 종종 등장했고.

"먼저 다리에 입고, 그다음으로 흉갑. 마지막에 양팔을 장착하는 거네요."

루비아가 주석과 그림들을 하나씩 가리키며 말했다.

연합에서 쓰는 철인鐵人들.

읽다 보니, 처음 어렴풋이 가졌던 이미지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거대한 강철 기계 위에 올라타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탑승한다기보다 착용한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은 장치들이다.

"신기하네요.

루비아도 눈을 반짝이면서 책을 바라보고 있다.

책 읽기 스킬이 높아서 그런가.

읽는 속도가 무척 빠른 데다, 책내용에 대한 이해마저 굉장히 높아보인다.

생소한 내용을, 나에게 하나하나제대로 설명해 주는 것도 고맙고.

"신기하네요.

그녀는 나와 책을 한 번씩 번갈아바라봤다.

"연료를 등에 꽂아 넣으면, 자기 힘이 아니라 착용한 철인의 힘을 낸다는 것 같아요."

자유 연합의 〈파일럿〉들이 타는 거대한 철인들.

크기 4미터의 전투병기.

그 기계가 어떤 힘을 낼 수 있는 건지는 모른다.

하지만 연합은 제국에 참패했다.

검주劍主들이나, 아쥬라의 탑주급마법사들보다 분명히 약할 터.

솔직히 큰 흥미는 생기지 않는다.

다만.

혹시 루비아도 그 기계를 입으면 강해질 수 있는 걸까?

난전 중에 자신을 지킬 수 있을 정도만 되어도 좋을 텐데.

나는 루비아에게 물었다.

"연료로 움직인다고? 그럼 원래 힘은 상관없다는 건가?"

그녀가 슬쩍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에요. 장비를 착용하고 활용하는 것 자체가 굉장한 체력을 필요로 한대요. 하지만.

"하지만?"

- 스르륵.

루비아는 하얗고 가는 손가락으로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시선이 그대로 따라갔다.

"스스로도 자아를 갖는 타이탄급철인 같은 경우는, 공조共助현상을 일으키면 힘을 빌려준다고 쓰여있어요."

"공조 현상이라.

"단어에 대한 설명은 여기 없는 것 같아요.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하는걸까? 잠시만요."

루비아가 막 책을 뒤적거리려고 할 때였다.

- 흠흠_

아이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녀석은 마차 지붕 위에 앉아서, 대화를 엿들은 것 같다.

뭔가. 끼어들 틈을 계속 노리고 있던 것 같은데.

조금 우습다.

헛기침을 하는 녀석에게 물었다.

'뭐. 아는 거 있나?'

- 타이탄의 공조는 파장이다.

'파장?'

- 영혼의 파장이다. 본신의 능력이 뛰어나도 타이탄이 거절하면 못 타는 경우가 있지.

아이작이 계속 말을 이어 갔다.

- 반대로, 벌레 한 마리 못 잡는 어린아이라도 타이탄이 허락하면 탑승이 가능하다. 200년 전에는 빈민가에서 태어난 열다섯 살 약골남자아이 하나가, 초월급 타이탄〈잔-메랄〉의 선택을 받았었지.

초월급 타이탄, 이라는 말에 아이 작의 힘이 들어갔다.

조금 들뜬 듯한 어조에서 그것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적어도 난전亂戰 중에 제 몸을 가릴만한 것보다는 훨씬 강하리라는 느낌이 온다.

'??? 그럼 루비아도 된다는 거냐.'

- 큭큭. 타이탄이 누군가를 선택하는 경우는 수백 년에 한 번이다.

'수백 년에 한 번?'

- 그래 녀석들은 웬만한 인간보다훨씬 비대한 자아를 갖고 있거든.

받을 거 다 받고 탑승을 허락하는것도 드문데, 스스로 도와주는 건 정말 없다고 봐야 하지.

'흐음.

- 네 옆의 아이가 그렇게 되지는 않을 거야. 그런데 네놈이 탑승할생각은 안 하느냐?

'어차피 제국에는 없지 않나?'

- 잘 찾아보면 또 모르지. 연합에 가도 되는 거고. 뭐, 일단 교단부터 가고 나서 말하거라.

아이작은 갑자기 대화를 끊었다.

말은 자기가 먼저 걸어 놓고.

- 툭.

루비아와 조금씩 대화해 가며, 〈사람을 흉내 내는 인형〉을 모두 읽고 책을 덮었을 때였다.

- 띠링!

반투명한 상태창이 떠올랐다.

[서번트 시스템]

[마스터와 함께 책을 읽었습니다.]

[지혜가 3 올랐습니다!]

[마도공학 Lv. 0을 습득했습니다.]

[경험치가 약간 올랐습니다.]

이렇게까지?

여러모로 놀라웠다.

〈캐빈 애슈턴의 업적 - 17〉이나, 〈음란한 슬라임 메이드〉를 읽었을 때와는 다르다.

지혜가 1 오르는 데 그치지 않고 무척 많은 폭이 올라갔다. 게다가Lv. 0에 불과하지만, 무려 마도공학이라는 스킬까지 습득했다.

그러니까.

연합의 철인이라는 걸 이해하려면이 스킬이 필요하다는 거겠지.

진네이 유베.

그는 어디서 하루 만에 이런 책을 구해 온 걸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책도 책이지만, 서번트 시스템과 루비아의 영향력이 훨씬 큰 거라고 느낀다.

룬어가 곳곳에 적힌 책.

루비아가 곁에서 하나씩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았다면 이만큼 깊게 이해할 수 없었겠지.

아이작 놈이 설명해 줬다고 해도, 서번트 시스템은 당연히 발동하지 않았을 거고.

루비아를 곁에 둬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더 강해진다.

그나저나.

- 다그닥! 다그닥!

슬슬 산세가 험해지고 있었다.

200화 오래된 친구 (16)

***************************************************

[심안心眼 (C+)]

[탐지 Lv. 7을 발동합니다!]

나는 아주 적은 체력 소모만으로, 멀리 산길의 정보를 샅샅이 훌어내면서 파악할 수 있다.

길이 점점 좁아지는 게 느껴졌다.

지금 탑승한 마차로도 지나갈 수 없는 너비였다.

"저 앞에 공터가 있다. 그쯤에서 마차를 돌리고 돌아가라."

나는 마부에게 말했다.

"공터 말씀이십니까? 제가 그래도 되겠습니까?"

앞에 나올 공터를 당신이 어떻게 벌써 아냐는 의아함이 더 담겨 있는 이중 질문이었다.

"물론이지."

당연하게도, 곧 마차를 돌릴 만한 공터가 나왔다.

마부가 움찔 놀라며 마차에서 말한 마리를 떼었다.

루비아가 곁에서 눈을 깜빡이면서 물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 파드득!

- 어울리지 않게 웬 신비주의냐?

아이작이 시비를 걸어왔다. 나는 녀석의 시비를 무시한 채, 주머니에서 은화 서너 개를 꺼내 마부에게 건넸다.

"고생 많았다."

"아닙니다."

마부가 은화를 거절했다.

"정말 안 받는 건가?"

"예. 정말 괜찮습니다. 그리고.

마부가 마차에서 말 한 필을 떼어냈다. 그리고 새롭게 커다란 안장을 등에 장착했다.

"영주님이 이런 경우는 말 한 필놓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꽤 강인한 녀석이니 두 분이 타셔도 됩니다."

- 당연히 두 필 다 떼 놓고 가야지.

건방지게 어디서 감히 마차를 다시 몰고 가려고 해?

"고맙다."

"저희 영주께 말씀 전하겠습니다.

조심히 살펴 가십시오."

마부는 말안장에 이런저런 것들을 살짝 매달았다. 말린 육포나 과일, 바람막이 같은 것들이다.

[승마 Lv. 2를 발동합니다!]

가볍게 말 위에 올라 루비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 흥.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는 몰라도, 나뭇가지 위에 앉은 아이작이 기분나쁜 소리를 냈다.

루비아도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맞잡아 살짝 들어, 말안장뒤쪽에 앉혔다.

"전 말 탈 줄 모르는데.

"붙잡을 줄은 알겠지."

"네.

"꽉 잡아."

- 꼴같잖은 짓들을 하는구나. 길을 서두르기나 하여라.

- 다그닥! 다그닥!

말 한 마리가 둘을 태웠지만, 덩치좋은 준마는 가뿐하다는 둣 산길을 내달렸다.

콧김도 별로 뿜어내지 않고 발이 보이지 않게 빠르게 달렸다.

오히려 아이작이 힘겹게 파득파득우리를 따라와야 했다.

등 뒤에 붙은 루비아의 숨소리가 조금씩 떨려 왔다.

겨울 산이 조금도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허리가 아프네요."

"그만 탈까?"

"아니요 허벅지 근육이랑. 기분 좋게 욱신거려서 좋아요. 나중에.

나는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나중에, 말을 잘 타게 되더라도 계속 이렇게 뒤에서 타고 싶네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건 왜 그렇지?"

루비아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바람을 다 막아 주시잖아요."

뒤에 닿은 그녀의 가슴이 뛰는 것 같았다.

곳곳에 눈 덮인 하얀 산은 말이 움직일 때마다 파도처럼 일렁였다.

- 야! 같이 안 가? 이것들이 진짜??.!

"먼 길을 가는 게 힘들지 않나?

그냥 성에 남아 있었으면.

"좋았겠죠?"

"역시 좋았겠지."

놓고 왔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루비아가 무언가 즐거운 듯이 말을 이었다.

"그때 억지로라도 쫓아가야 했을 거라고 잠도 못 자고 뒤척일 거고, 밥도 안 넘어갔겠죠. 그렇게 시름시름앓다가 죽을 테니 좋았겠죠?"

절대 좋은 게 아니었다.

잠깐 고민한 끝에 그녀가 특이한 화법을 쓰고 있음을 깨달았다.

"반어법인가."

"글쎄요."

어째서인지, 호감도가 1 올랐다는 메시지가 허공에 떠올랐다.

그냥 숫자로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차가운 바람이 한차례 정면으로 치고 들어왔다. 말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 파드득!

뒤쪽에서 힘겹게 우리를 쫓아오던 아이작이 다시 멀어졌다.

달리는 말의 속도를 조금 늦췄다.

교단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번에는 작은 마을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정글로 향했다.

- 정말 여기 와 본 거냐?

'그렇다니까.'

정글 사이로 말을 천천히 몰았다.

아이작은 한층 침울하게 날갯짓을하며 내 주위를 날았다.

조용하다.

처음 여기 올 때가 생각난다.

제 교도들이 결계를 유지하면서, 번성하고 있을 거라고 기대했었던 아이작이 괴로워하던 게 떠오른다.

무너진 결계의 실체를 보고.

하지만 이번에는 내 말을 확실히 믿고 있었는지, 저번과 같은 충격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축 가라앉긴 했다.

- 이제 물어봐야겠군. 내 교단이.

멸망한 건 어떻게 알아낸 거지?

이야기해 봐라.

'그건 내가 캐빈 애슈턴에 관해서 알아내고 나서 말해도 늦지 않을 것 같은데.'

아이작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건방지다고 중얼거릴 줄 알았는데, 망가진 교단을 살펴보느라 그럴정신은 없는 것 같았다.

더 이상 나에게 말을 걸지 않고 파닥거리며 날아가는 녀석의 뒤를 쫓았다.

곧 '조슈아'의 머리 위에 우두커니앉아 있는 녀석을 볼 수 있었다.

시커떻게 그을리고, 날개가 모두 부서진 채 얼굴도 속도 파내진 돌토템을 보고 루비아가 흠칫했다.

아이작은 토템 위에 한참을 앉아있었다.

잠시 녀석을 기다려 줬다.

저번 생에서. 개가 살아 있을 때 밤톨이 정도 크기라고 했던가?

밤톨이는 잘 있을지 모르겠다.

한 번 구해 줬으니까, 이제 웬만한 덫 따위에는 안 걸리겠지.

이 앞으로는 더 이상 말을 타고 가는 게 무리였다.

말에서 내려 토템 근처에 섰다.

슬퍼하는 아이작을 향해 루비아가 말을 걸었다.

"친구였어요?"

아이작은 잠시 침묵했다.

- ??? 가자. 홈을 밟고 내려와라.

아이작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암벽아래를 향해 날아갔다.

나는 깎아지른 암벽을 보고 루비아에게 물었다.

"같이 가고 싶다고 했지?"

루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해서. 꽉 잡고. 홋!"

혼자 내려가게 둘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위험해서."

나는 낭창한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낚아채 들었다.

≪ㅇ"

"H*.

"숨 편하게 쉬어."

고소공포증이 꽤 심한지, 루비아의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다.

숨도 잘 쉬지 못하는 그녀를 살짝감은 채 그대로 아래로 내려갔다.

이렇게 겁이 많으면서 따라오려고 했다니, 정말 모험을 하고 싶었던것 같다.

가볍게 반동을 줘서, 직경 2미터정도의 뻥 뚫린 구멍으로 들어갔다.

고개를 숙인 채로 눈을 꼭 감고 있던 루비아가 깊게 숨을 내쉬었다.

"다 왔어."

"와.!"

루비아가 감탄성을 내뱉었다.

"이게 정말. 모험. 이군요.

그녀가 침을 꿀꺽 삼키면서 맞은편을 바라봤다.

우리는 잠시 맞은편의 눈 덮인

산봉우리를 보고, 안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베로라이트네요!"

"베로. 라이트?"

"네. 책에서만 보던 광석이거든요.

상징은. 악마로부터의 보호."

"악마로부터의 보호라고?"

"네. 어둠의 악령들로부터 자신을 지켜 주는 돌이라고 해요. 스스로 빛을 내는 돌들 중에서도 꽤 특별한 녀석이니까요."

- 흥! 별 쓸데없는 지식이 다 있군.

앞으로 가기나 해라.

아이작은 어쩐지 약간 부끄러움을 타는 것 같았다.

교단이 보호받지 못했다는 걸 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안쪽으로 십여 분을 더 들어가자, 예전처럼 거대한 바위들이 길을 꽉가로막고 있었다.

"뒤로 물러서."

진지한 내 말에 루비아는 아무 말않고 뒤로 훌쩍 물러섰고, - 자신 있냐?

아이작은 뒤로 파드드득 날아가며 시니컬하게 말했다.

나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물론 자신 있었다.

저번 생에 같은 곳에서, 아이작이 한 조언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검기를 써서. 조금씩 부수며 밀어내라고 했나.

게다가 요령도 붙었다.

- 콰지직!

연녹색 검기와 화염이 타오르며, 순식간에 구멍이 뚫렸다.

아이작마저 놀라는 게 느껴진다.

뒤를 돌아봤다.

루비아는 한쪽 가슴 위에 손을 얹은 채 석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어어.

"왜 그러지?"

"거대한 바위들이 이렇게 간단히 부서진다는 사실에. 제가 더 빨리적응했어야 하는 걸까요?"

농담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서번트 시스템]

[루비아가 당신의 힘을 목격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끝인가?

놀라고 그대로 끝이었다.

워낙 서번트 시스템이 퍼 주는 것에 익숙해진 나머지, 체력 회복 상승같은 게 나타나지 않을까 기대한 나자신이 우스웠다.

루비아를 너무 기능적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괜히 찔려서 길을 재촉했다.

"가자고."

손쉽게 퍼즐을 풀어내고, 계단을 자연스럽게 지나갔다.

"여기. 분위기가 조금 어둡네요.

무척 조용하구요."

사원 건물들을 둘러보며 루비아가 사뭇 긴장된 태도로 말했다.

아이작은 이미 착 가라앉은 태도로 주위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녀석을 따라서 사원 중심부에 도착했다.

삼십 미터는 될 것 같은 거대한 사원의 중심부 탑.

'안쪽을 보기 전에 마음의 준비는 하라고.'

- 알고 있다.

아이작의 고통 어린 비명이 밖으로 전해졌다.

루비아가 나를 바라봤다.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은데요.

안에 뭐가 있는 거죠?"

"녀석의 후손 수백이 매달려 있지.

들어가 볼 텐가?"

루비아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고 편한 것만 보려고 여기까지 따라온 건 아니니까요."

- 달그락. 달그락.

의외였다. 루비아는 크게 놀라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

레나보다도 안 놀라는 모습에 무척당황스러웠다.

그렇다고 왜 안 놀라냐고 물어볼수도 없어서, 그냥 가만히 루비아를 바라봤다.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해골이네요.

"안 놀라나?"

"저 사령술사예요."

루비아가 새초롬하게 대답하면서 나를 빤히 바라봤다.

잊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는 나 하나만 일으킨 거아닌가.

하긴.

루비아는 말하고 움직이는 해골인나랑 하루 종일 바싹 붙어 있다.

그냥 매달려 있는 녀석들 정도는 별 감흥이 없을지도 모른다.

- 파드득!

아이작은 어느새인가 저 아래로 날아가 푸르손의 문양을 확인했고, 다시 한 번 분노했다.

혼에 각인을 새기는 제사가 지내진 흔적이 었다.

녀석이 저번에 설명해 준 바로는, 교도들이 살아 있는 채 고문당하면서 제물로 바쳐졌다던가.

힘들겠지.

아이작은 안쪽에 더 못 있겠는지, 바깥으로 나와 양 날개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괴로워하는 녀석의 곁에 루비아가 다가갔다.

"아이작 님?"

- 파드득

까마귀 인형은 부담스럽다는 듯이 날갯짓을 하며 도망가려고 했다.

하지만 날갯짓을 할 힘도 없는 것 같았다.

루비아는 까마귀 인형의 목덜미에 손을 얹고 가볍게 쓰다듬었다.

- 나보다 스무 배는 어린 인간에게 손이 얹히다니 어처구니가 없군.

"마음이 많이 아프시죠?"

"다들 반짝이는 별이 됐을 거예요.

밤이 되면. 저 위에서 아이작 님을 보면서 반짝인다니까요. 아, 사실은 낮에도 별들이 떠 있다는 거 알고 계시죠? 다들 아이작 님을 보고 힘내라고 하고 있어요."

- 시끄럽게 구는군.

녀석은 투덜거리면서도 한참을 그자세로 있었다.

묵묵히 날개를 접은 채 루비아의 위로를 받던 아이작이 말을 이었다.

- 뭐라도 마셔야겠다. 탑 왼쪽으로가라.

예상했던 순간이다.

녀석은 루-륨을 숨긴 장소로 나를 인도하고 있었다.

손을 내밀어서.

이미 한 번 해 본 일.

익숙하게 벽에 손을 통과시켜 상자 하나를 쑥 빼냈을 때였다.

내 입에서 무심코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너무 가벼운데?"

201화 오래된 친구 (17)

***************************************************

가볍다.

상자를 들고 느낀 첫 감정이었다.

내 말에 아이작이 의아한 어조로 물었다.

- 가볍다고?

의아한 건 나도 마찬가지다.

힘자랑을 하려는 건 아니다.

어차피 스탯이 잔뜩 올라간 지금, 뭐가 들었다 해도 상자 따위가 들기 어려울 만큼 무거울 리는 없다.

그러니까, 가볍다는 건.

상대적인 문제다.

예전보다 가볍다는 이야기.

- 달칵!

상자를 열었다.

1리터짜리 유리병 열두 개가 안에 변함없이 담겨 있었다.

"텅. 비어 있네요?"

루비아가 눈을 깜빡였다.

- 뭐,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왜 아무것도 없어?

아이작이 놀라서 외쳤다.

열두 병.

병은 전에 있을 때 그대로였다.

그러나 내부에 꽉 차 있던 은빛마력액은 온데간데없었다.

-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내 소중한 보물이 사라지다니! 사도의 피가 대,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이냐!

이럴 리가 없다!

사실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다.

이게 다 어디 간 거지.

"병은 예쁜데. 원래 뭐가 있어야 하나 보네요."

루비아가 당황한 아이작을 보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다.

뭐가 있어야 한다.

저번 생에서는 분명히 열두 병이 은빛으로 꽉 차 있었다.

그때보다 오히려 지금 훨씬 더 일찍왔다.

누가 와서 가져갔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

정보를 얻기 위해 아이작에게 슬쩍떠 봤다.

"푸르손의 추종자들이 이것까지 다털어 갔을 가능성은 없는 거냐?"

어차피 교단의 결계도 부서진 거아니냐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아이작이 작게 부리를 저었다.

- 그럴 리가 없다. 결계가 훼손되었으면 흔적이 있어야겠지. 드나든 흔적자체가 전혀 없다.

"음."

확신으로 가득하다.

자칭 고금 제일의 결계사니까, 아무래도 그 정도는 알아보겠지.

옆에서 루비아가 갸웃하며 물었다.

"이 상자는 사백 년이나 전에 여기 놓으신 것 아닌가요?"

- 그래서?

"안에 있던 게 말라붙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증발했을지도 몰라요."

아니라는 건 안다.

그래도 아이작의 대답이 궁금해서, 가만히 있었다.

녀석이 단호히 대꾸했다.

- 사도의 피는 그 총량이 변하지 않는다. 땅으로 스며들지도 않으며, 말라붙고 기화하지도 않지. 게다가 보존 결계 안에 있는데 그럴 리가 총량이 변하지 않는다고?

루비아의 질문 덕분에 중요한 말을들은 것 같다.

"마법을 쓰면 줄어들던데."

예전에 이 교단으로 들어오면서, 바윗덩어리를 모두 박살 냈을 때가 떠올랐다.

아이작이 즉각 반발했다.

- 과하게 썼을 때 아닌가?

그건 그렇다.

- 원래라면 발휘할 수 없는 힘을, 루-륨을 사용해서 발휘한다.

- 변혁의 질료로 사용될 때 기화하는 거다. 보존되어 있는데 변할일은 없다.

변하지 않는다.

머릿속에 퍼뜩 스치는 게 있다.

설마.

회귀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걸까?

일단 그 질문은 참기로 한다.

아이작에게 너무 많은 걸 드러내고 싶지는 않으니까.

- 그러니까.

녀석은 잠시 고개를 숙인 뒤.

- 이게 대체 어디로 간 거야!

고개를 들어 다시 황당해했다.

어디로 가긴.

세 병은 내 몸 안에 흐르고 있고.

한 병은 레나가 T&T 지부장으로 승급하는 데 사용했지.

문득 궁금해진다.

나머지 여덟 병 분량은?

그건 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남은 루-륨을 마지막으로 어디에 맡겨 놓았는지 떠올렸다.

내가 가지고 다니지는 않았고.

레나.

분명히 그녀에게 맡겨 놓았다!

그러면 이 시간선에서.

루-륨 여덟 병이, 모두 레나에게 있다는 소리일까.

그녀가 루-륨을 어떤 식으로 보유하고 있을지, 어떻게 쓰고 있을지 솔직히 짐작조차 어렵다.

세계 변혁의 질료라.

그 말이 자꾸 곱씹어진다.

세 병 분량을 가지고 있는 나조차 이렇게 강해졌는데.

여덟 병은 레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어쩌면.

단순한 T&T 지부장 이상의 존재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작."

망연자실해 있는 녀석이 대꾸했다.

- 뭐냐.

"루-륨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혹시 알고 있나?"

- 현 황실이 가진 힘의 원천이자 기반이다.

"황실이 가진. 힘의 원천이라고?"

- 세이론이 사도들을 살해하며 얻은피다. 사도들을 찢고 흩뿌리면서 그들에게서 약탈한 피. 힘 그 자체라고 보면 된다.

"황실은 그걸 어디 보관하고 있는건데?"

- 내부의 비역이겠지. 거기까지는 나도 모른다. 목숨이 다섯 개쯤있으면 약간은 홈칠 수 있을지도.

K.r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던 황궁에 영향을 끼칠 방법이.

목숨 다섯 개를, 어쩌면 그 이상을쓴다.

황실이 가진 힘의 원천.

'사도의 피'라고 부르는 그 액체의 위치를 바꿔 놓는다.

그러면 이 세계의 판도를 바꾼 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말 아닌가?

내가 레나의 운명을 바꿔 놓았던 것처럼.

그녀의 이름을 장부에서 지워 냈던 것처럼, 세계의 수레바퀴를 조금씩 바꿔 놓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황실 근처에도 접근 못 하고 있는 지금이지만.

엄청난 실마리를 얻어 낸 기분이다.

- 탁.

아이작이 한숨을 쉬듯 부리를 벽에 부딪쳤다.

- 이렇게 된 이상, 캐빈 애슈턴의 유적으로 간다.

'애슈턴의 유적이라고?"

- 그렇다. 내가 수상하게 생각했던 곳이 있다. 네게는 따로 뭐가 보일지도 모르겠군. 거기로 가자.

그때 였다.

"해골님에게는 따로 뭐가 보여요?

무슨 말씀이시죠?"

루비아가 끼어들었다.

"그게.

상태창에 관해 말해야 할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이작도 알고 있는데 루비아에게 숨길 건 없다.

허공에 뜨는 반투명한 창.

자신에 대해서 나오는 여러 가지 정보들.

"이 수치들이 표현되는 거다."

차분히 고백했을 때였다.

루비아가 묘한 표정이 되어 나에게 말했다.

그녀의 말은 나와 아이작의 예상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세상에. 저처럼 그런 창을 보는 분은 처음 봐요!"

아이작은 기절할 것처럼 뒤쪽으로 몇 걸음을 디디며 말했다.

- 뭐. 뭐라고?

"제 능력치도 볼 수 있어요. 스킬확인도 다 되고 있고요."

루비아는 당연하겠지만, 아이작이 놀라는 것도 연기는 아니다.

녀석은 진심이었다.

마치 무덤에서 주술 역류로 봉인될때처럼, 정말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부터 그런 게 보였지?"

"어릴 때부터요. 아버지께 말씀드렸는데,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어요."

어릴 때부터라고?

과거까지 바뀌어 버렸다.

처음 루비아와 만날 때는 분명히 이런 이야기가 없었다.

회귀를 거듭하며 생긴 현상이다.

레나 역시 언제부터인가 그 창을 인식했다.

혹시 나와 관계가 깊어지게 되면, 상태창을 보게 될 확률이 늘어나는걸까?

- 이런 어처구니없는.

아이작에게 물었다.

"네가 살았던 시대의 인간들만 그창을 볼 수 없었던 건 아니겠지?"

루비아와 아이작이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버지도 그런 건 처음 듣는 소리라고 했으니까요."

- 그건 헛소리다. 대대로 챈들러가주들의 시야를 공유하며. 실시간으로 전부 인간을 봐 왔다. 이런존재는 너희 둘밖에 없다. 우연이라는건 말도 안 되고.

멈칫하던 아이작이 말을 이었다.

- 너희 둘 중 하나가, 상대에게 큰영향을 준 거겠지.

과연 눈치가 빠르다고 할까.

녀석은 나를 더 의심에 찬 눈으로 바라봤지만, 어릴 때부터 상태창이 보였다는 루비아의 말에도 흔들리는것 같다.

"그런가요?"

루비아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 분명한 건. 후후. 나도 너희를 따라다니다 보면 창천의 구멍을 볼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어쩐지 기분이 꺼림칙하다.

루비아보다도, 왠지 내 쪽을 신경써서 보는 것 같은데.

루비아의 상태창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아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다.

볼 수 있는 건 역시 자기 자신에 대한 내용뿐이라고 했다.

첫 번째 생의 나 정도로 상태창을 인식하는 것 같다.

그녀가 어떻게 변할지 궁금했지만, 나는 일단 화제를 돌렸다.

"아까 캐빈 애슈턴의 유적이라고했나."

- 그렇다. 이 근처에서 루-륨을 보관하고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이지.

루-륨이 라.

"결국 네가 마력 충전을 하겠다는 이야기 같은데."

- 흥. 어차피 '타이탄 저격기'도 충전해야 할 거 아니냐. 그 무기를 한번 써 보고 싶지 않느냐?

"글쎄."

마도공학으로 작동하는 무기라.

조금 호기심이 가는 건 부정할 수 없다만.

적어도 지금은, 그걸 작동시키는 은빛 액체가 훨씬 더 궁금하다.

- 따라오기나 하거라.

- 파드득!

힘을 조금 회복한 둣, 위로 날아오르는 아이작을 향해서 루비아가 말했다.

"탑에 있는 유해들은 그대로 놓아두실 생각인가요?"

- 신경 쓰지 마라. 힘을 회복하고 돌아와서. 내 손으로 유해를 모두 수습할 것이다.

예전과 같은 반응이다.

성격은 변하지 않는 건가 싶다.

그렇지만, 지금은 교단의 결계를 복구해 달라는 이야기는 없다.

레나와 함께 여기 머물렀을 때랑은 상황이 달라서 그런가.

교단 밖으로 나는 녀석의 날갯짓이 어쩐지 쓸쓸해 보인다.

"이런 곳에 폭포가 있었다니.

남쪽으로 향한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아이작은 기묘한 장소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 콰르르르.

"아.

폭포 아래로 넓게 펼쳐진 경치를 루비아가 멍하니 바라봤다.

멋진 풍경이기는 하다.

그나저나 여기는 어디일까.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장소다.

아이작이 우리에게 말하는 대로, 이상한 규칙에 따라 움직이자 마치 환각처럼 나타난 공간.

- 뭘 이런 거에 감탄하고 그러느냐.

빨리 가자!

- 파드득!

녀석이 절벽 아래를 날아갔다.

우리는 어쩌라는 건지.

말이랑 함께 가는 건 좀 무리고.

여기서부터는 두 발로 뛰어야겠군.

"루비아."

"네?, '

"잠깐 날자."

'으어에옛!"

- 쿵!

루비아를 안고 곧바로 절벽 아래로 착지했다.

그녀의 안색이 새하얗다.

"괜찮은 건가?"

최대한 충격이 안 가게 안았는데.

루비아가 아니라 신생아라도 괜찮을 정도로.

그녀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상한"

비명. 질러 버렸네요*".

- 파드득!

근처에 있던 아이작이 날개를 크게 움직였다.

- 장난칠 시간 없다. 주변 냄새를 맡아 봐.

냄새라고?

품 안에 안겨 있는 루비아도 짐짓심각한 기색이 되어 말했다.

"피. 냄새인가요?"

202화 오래된 친구 (18)

***************************************************

피 냄새다.

한두 명의 피 냄새가 아니었다.

압도적인 숫자의, 얼마 되지 않은 신선한 피 냄새가 났다.

- 채 하루도 안 지났군.

아이작이 중얼거렸다.

나는 녀석을 보며 물었다.

'여긴 대체 어디지?"

- 말하지 않았나? 캐빈 애슈턴의 유적이라고.

캐빈 애슈턴의 유적이라는 건 다이렇게 피비린내가 나는 걸까.

루비아를 바닥에 사뿐히 내려놓고 칼자루를 꽉 잡았다.

이대로 들어가도 될까?

'탐지.'

내 영역 안에서 움직이는 녀석은 없다.

하지만 그저 감지되지 않을 뿐인지도 모른다.

이대로 저 안쪽으로 들어간다면 어떤 위험이 닥칠지 알 수 없다.

마치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아이 작이 중얼거렸다.

- 나간다고 안전한 것도 아니다.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다면. 상황을 알아 두고 가는 게 차라리 더 나을거다. 이런 일을 벌인 게 지금은 '밖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일리 있는 말이다.

"어쩔까?"

나는 루비아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녀도 긴장이 되는지, 몸을 살짝긴장시키며 대답했다.

"저는 끝까지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여기 들어오려고 결계까지 힘들게 뚫은 거잖아요?"

힘들게 뚫긴. 금방 뚫었지.

"흐음.

둘의 의견이 일치한다.

발끝에서부터 느릿하게 차오르는 긴장감을 느끼며 한 걸음 한 걸음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당하는 건 전혀 상관없지만, 루비아가 이 시체들과 비슷한 꼴을 당하게 될까 봐 차오르는 긴장이다.

누가 이런 짓을 한 걸까?

한 걸음 한 걸음 더 걸어갈수록시체의 상태는 점점 끔찍해졌다.

제대로 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들은 거의 없었다.

짓이겨져 있거나 뜯겨져 있다.

"이분들은. 여기서 대체 무슨 일을 당한 걸까요."

시체들 사이를 한 걸음 한 걸음나아갈 때마다, 루비아는 내 곁에 더 바싹 붙었다.

"좀 더 봐야겠지."

팔을 붙잡는 그녀의 손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

"해골님도 부디 조심하세요.!"

내가 죽으면 루비아도 필연적으로 죽게 될 거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기보다도 내걱정을 먼저 하고 있다.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인간 주제에.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나간다고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는 것,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확인하고 싶다는 마음이 우리들을 안으로 계속 들어가게 만들었다.

시체가 산산이 조각나서 겹쳐진 탓에, 몇 명이나 죽었는지 정확한 숫자도 파악할 수 없을 정도였다.

팔다리와 내장이 서로 넝쿨처럼 뒤엉켜 있었다.

흘끗 루비아를 바라봤다.

따라오는 루비아의 다리에 약간 힘이 풀리는 게 느껴진다.

내장과 뇌수가 흐르는 시체에는 조금약한 건가.

"뒤에 남아 있는 건 어때."

"아, 아니에요!"

루비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이작이 작게 날개를 파닥거리며 말했다.

- 어설픈 헛소리 하지 말고 데리고가라. 얘를 여기에 혼자 떨어트려놓을 생각이냐?

옳은 말이다.

죽은 것이 있으면 죽인 것이 있다.

'죽인 것'이 얼마나 강한지, 지금어디 있는지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루비아 바로 옆에 있는 게 그나마안전하겠지.

"따라. 갈께요."

그녀는 낯빛이 하얗게 질리지도 않았고 이를 부딪치며 떨고 있지도않다.

숙련된 병사라도 이 정도 광경을 접하면 그녀보다 격한 반응을 보일텐데, 시체의 바다에서 나름대로 멀쩡히 버티고 있다.

역시 사령술사라는 건가.

직업 특전으로, 일종의 정신저항을 가진 건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책만 읽던 영애가 시체들을 보고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런데 이분들.

정신을 꽉 잡으려고 노력하는 둣, 루비아가 이를 악물고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전부 엘프. 인 건가요?"

그러했다.

사방에 널린 시체들은 모두 귀가 길고, 얼굴이 뾰족했다.

어두운 피부색과 하얀 머리칼.

그들 특유의 물결 모양 갑옷.

으음.

루비아가 아이작에게 물었다.

"캐빈 애슈턴의 유적이라고 하셨는데, 왜 엘프분들이 전부 여기에 잔뜩 계신건가요? 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길래.

그녀도 주저주저하면서 말했지만, 꽤나 날카로운 질문이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질문을 대신 해 준 것이다.

- 딱.

녀석이 부리를 닫으며 대꾸했다.

- 여기는 놈들의 성지聖地니까.

"뭐야? 다크 엘프의 성지라고?"

- 그렇다. 그들이 섬기는 레라지에의 성지지.

〈새를 사냥하는 마왕〉레라지에.

말파스와 적대하는 사이라는 건, 저번 생에서 주술사를 봐서 이미 잘알고 있었다.

"또 거짓말이었나."

레라지에는 말파스의 적이다.

아이작은 나를 여기 데리고 와서 한바탕 분탕이라도 치려 한 걸까?

녀석이 파닥거리며 홍분했다.

- 거짓말은 무슨! 이 장소가 캐빈애슈턴의 유적이라는 데는 변함이 없다. 레라지에의 성지이기도 한 걸 굳이 말하지 않았을 뿐이지.

"일부러 누락하신 거군요."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주저주저하면서도 루비아는 할 말 다 하고 있었다.

시체의 계곡을 지나면서도.

아이작이 주제를 돌리듯 말했다.

- 애슈턴이 쓴 책은 분명 여기를 가리켰느니라. 보이는 거 없느냐?

창천의 구멍을 보는 너라면 뭔가 다를 법한데.

"글쎄."

아이작의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딱히 보이는 건 없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뭐가 더 위험한 선택인지, 현명한 선택인지.

적어도 앞을 향해 계속해서 걸어가라거나 뒤돌아서 도망치라거나 정도만 써 줘도 좋을 텐데.

문득 레나가 떠오른다.

그녀의 직감에 의지하거나, 혹시〈펜던트〉라도 남아 있었다면 그걸믿었을 텐데.

지금은 내가 결정해야 한다.

"루-륨이 여기 있는 건 맞고?"

- 그래! 당연하지! 괜히 레라지에의 성지가 아니라니까?

회귀된 후에도, 유지되는 물질.

세계를 변경시키는 힘.

캐빈 애슈턴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는 액체.

뒤로 도망쳐도 위험을 회피한다는 보장이 없으면, 분명 안으로 들어가 볼 만한 가치는 있다.

안쪽으로 더 들어갔다.

둥그런 돔 모양의 천장은 오히려조금씩 더 높아지고 있었다.

- 저건.!

- 파드득!

빠르게 천장으로 날아간 아이작은 그곳에 맺힌 은빛 액체 한 방울을 삼켰다.

좌록, 하며 무언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까마귀 날개가 커졌다.

"와아.

- 보아라!

처음 마력을 불어넣어 줬을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 이걸로 잠깐은 살겠군.

- 화르록! 화르르륵!

날갯짓을 할 때마다 큰 날개에서 강한 바람이 일어났다.

많은 양도 아닌데.

"한 방울도 효과 좋은데?"

- 400년 전 이 녀석을 만드느라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느냐? 모든 것이 최적화되어 있는 녀석이다.

"그러면 루비아 좀 뒤에 데리고 있지그래?"

저렇게 힘차게 날아다닐 정도면, 인간도 데리고 날아오를 수 있을 것처럼 보이니까.

- 내가 알아서 하느니라. 어디서 감히 누구에게 명령질이냐?

"아이작 님? 어찐지 아까랑 말투가 달라졌네요.

확실히 마력이 충전되지 않았을 때의 아이작이 더 나은 것 같다.

지금의 기고만장한 녀석은 그리 봐줄 만한 꼬락서니는 아니다.

하지만 저 정도로 기운이 넘치면, 무슨 일이 생길 때 루비아를 보호하는 역할은 하겠지.

특히 지금처럼, 위험한 분위기가 팍팍 풍겨 오는 상황에서 녀석이 힘을 찾은 건 반가운 일이다.

나는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안쪽에 움직이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흔적은 안으로 갈수록 조금씩 더분명해졌다.

'죽인 것'은 외부의 다크 엘프들을 제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살해할 수 있었지만, 안쪽에서는 약간이나마저항이 이루어진 모양이었다.

몸이 찢겨져 나가기 전에 한 번은 휘둘러 본 듯, 부러진 창칼이 여기 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바닥 곳곳에는 무언가로 찍은 것 같은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바위가 몇 개의 조각으로 부서져나간 흔적도 흔했다.

'죽인 것'은 다크 엘프들을 가시가 박힌 꼬리로 쳐서 부수고, 손으로 찢고, 입으로 잡아 뜯은 것 같았다.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들어오길 정말 잘한 걸까?

바로 나갔어야 하지는 않을까?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 파드득!

아이작이 내 뒤에서 커진 날개를 펄럭이며 말했다.

- 뭔지 알 것 같다.

"짚이는 거라도 있나?"

- 부스러기. 사도의 부스러기들이 남긴 흔적과 비슷하다.

"사도의 부스러기라고?"

어디에서도 못 들어 본 단어였다.

- 그렇다. 이 몸이 제국 남부를 지배하던 시절 자주 사냥하던 것들이지.

"네가 자주 사냥했었다면 별거 아닌거 같은데."

- 아니. 별거 아닌 게 아니다!

아이작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있었다.

"그럼. 이제 나가야 하나요?"

"그럴 수는 없지. 너희들은 뒤에 남아 있어라."

- 뭐? 혼자 뭘 하려고?

어쩌면 루비아가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

내가 다시 안쪽에 있는 '무언가'에 다크엘프들처럼 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안쪽으로 홀린 듯이 계속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신전 최심부 쪽에서 은은한 초록빛이 비쳐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알고 있는, 몹시 익숙한 빛.

정수 흡수의 빛이다.

수없이 많은 인간들을 죽였지만, 이제 웬만해서는 만날 수 없게 된정수 흡수의 빛.

레안드로 후작처럼 나보다 월등히 강하다거나.

은신술처럼 뛰어난 게 있으면서, 어느 정도의 실력도 가진 레일리 같은 녀석의 시체에서나 보여지는 초록빛그게 가능할 정도로 강한 자들이, 신전 최심부에서 당했다는 말.

이런 곳에서, 정수 흡수를 할 수 있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것도 이렇게 대량으로.

가로로 쭉 찢긴, 잿빛 머리칼의 남성엘프에게 손을 뻗었다.

완전히 갈라진 은색 갑옷 아래로 초록색 정수가 빨려 들어왔다.

[시미터 Lv. 1을 흡수했습니다!]

골반 아래 두 다리가 날아가 버린 여성 엘프에게 손을 뻗었다.

[숲 적응 Lv. 1을 흡수했습니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초록색 빛을 뿜는 녀석은 점점 더 많아졌다.

기스-제-라이가 만들어 낸 구덩이 정도는 아니었지만, 쉽게 접할 수 없는 장소임은 분명했다.

[지혜가 1 올랐습니다!]

[단검술 Lv. 1을 흡수했습니다!]

[쌍검술 Lv. 1을 흡수했습니다!]

[쌍검술 Lv. 2를.]

쌍검술 스킬이 있던 다크엘프를 흡수하고 있을 때였다.

뒤쪽에서 주위를 경계하고 있던 아이작이 파닥거리며 날아왔다.

- 이건. 루턱의 인장 아니냐!

놈은 슬쩍 부리를 움직여 쓰러진 엘프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기묘하게 생긴 펜던트가 흉갑에 대각선으로 매달려 있었다.

위쪽은 붉은색, 아래는 진녹색의 보석이 타원형의 은색 고리에 박혀있다.

"아는 거냐?"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 레라지에의 추종자들 가운데서 최상위 전사들에게 수여되는 문양이다.

이런 녀석도 살해당하다니.

"강한가."

- 난 기본적으로 다크 엘프는 광산노예로밖에 취급하지 않지만, 이 인장을 가진 놈들은 솔직히 말해 실력이 상당하다. 광산 경비대로 쓸 정도는 된다는 얘기지. 너도 쉽게 이기지 못할걸?

쌍검 다크엘프의 몸에는 빼곡한 저항흔이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고 몸통이 날아간 바깥쪽 녀석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 봐 봐. 몇 칼은 제대로 먹인 것 같은데.

부러진 칼끝에 맺힌 은빛 액체를 아이작이 부리로 집어삼켰다.

- 화르록!

살판난다는 듯이, 녀석이 부리로 화염을 뿜었을 때였다.

203화 오래된 친구 (19)

***************************************************

방금 전까지만 해도 쓰러져 있던 다크엘프가 눈을 뜨고 일어났다.

- 피릭!

날카로운 바람소리와 함께 두

자루의 칼이 동시에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 까앙!

급하게 대검을 들어 막았다. 전혀예상하지 못한 움직임에 놀라 뒤로 세 걸음을 물러났지만, 가해진 공격자체도 범상치 않았다.

양손으로 대검을 잡은 손목에서 미미한 떨림이 느껴졌다.

[집중 Lv. 2를 시전합니다!]

세계가 조금 더 선명해졌다.

쌍검을 든 하얀 머리칼의 엘프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가 탁한 은빛으로 눈을 빛내며 내게 칼을 휘둘렀다.

"엘프 눈 색이 원래 이러냐?"

- 다크엘프들이 그럴 리가 없지.

원래는 검은색이나 적갈색이다. 조종당하는 인형들이지.

- 시체를 부릴 줄 아는 적이다. 힘을 아껴라! 본체가 어디 숨어 있을지 모른다.

- 까강!

또다시 두 자루 시미터가 대검에 얽혀 들어왔다.

만만치 않았다.

한 자루가 부러졌음에도 불구하고 몹시 위력적이고 변칙적인 공격이었다.

[쌍검술 Lv. 2를 사용합니다!]

[전투 패턴 분석.]

방금 전, 바로 이 녀석으로부터 쌍검술 스킬을 흡수했던 게 그나마다행이었다.

검이 날아오는 루트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다.

물론 최소한에 불과하지만, 이게 아니었다면 대응이 더 어려웠겠지.

- 끼긱!

- 끼기긱!

춤추듯 휘어져 들어오는 두 자루시미터를 막는 대검에서 요란하게 쇠 긁는 소리가 났다.

"해골님!"

[서번트 시스템]

[마스터가 당신을 걱정합니다.]

[걱정 정도: 극상極上]

[방어력이 15% 상승합니다.]

이건 또 놀라운데.

걱정만으로 방어력 상승이라니.

확실히, 상대의 쌍검 공격이 훨씬덜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이 세계가 어떻게 되어 먹은 건지는 몰라도, 역시 내 쪽에서 루비아에게 함께 다녀 달라고 사정해야 할 듯하다.

사실은 창천의 구멍이니 뭐니 아이 작이 말하는 것도, 어쩌면 내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루비아가 특별해서 인지도 모른다.

결론은.

그녀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

"아이작! 뒤로 빠져라!"

- 당연하지. 이미 그러고 있다고.

- 파드득!

아이작은 어느새인가 기절시킨

루비아를 발톱으로 잡고 한참 뒤로 빠져 날아갔다.

그 와중에도 '루틱의 인장'을 가진 다크엘프는 쌍검을 연달아 휘둘러들어왔다.

숨 한 번 쉴 사이에 다섯 번이나 공격이 이어졌다.

굳게 다문 입술이 살아 있을 때 단호한 성격이었음을 말해 주는 듯 하지만, 지금 녀석은 그저 자신을 잃은 인형에 불과하다.

처음에는 좀 당황했지만.

이런 인형을 상대로 길게 시간을 끌 필요도 없다.

[검기 Lv.3 최대출력.]

[홉착吸着 Lv. 5를 발동합니다!]

- 화록!

두 자루 시미터가 그대로 대검에 달라붙었다.

검의 무게도. 크기도.

칼자루를 잡은 힘도 내 쪽이 압도적으로 우위다.

"크으어.

칼이 묶인 다크엘프가 발로 나를 걷어차려 했다.

- 덥석.

한 손으로 발을 잡아 그대로 빙그르르 돌렸다.

코드네임 별빛청여우, 소명수녀 엘윈에사우에게 체술을 괜히 흡수한 게 아니다.

푸른 검기가 어린 대검을 들어, 녀석이 잠깐 쓰러진 사이 그대로 위에서 내려쳤다.

퍽!

시체의 갑옷이 반으로 갈라졌다.

- 더 있다. 방심하지 마라.

물론 알고 있다.

긴장을 늦출 새도 없이 긴 창과 언월도가 날아들었다.

휘두르는 녀석들은.

아까 시체에서 정수를 흡수했던 녀석들이다.

곱게 묻어 주지는 못할망정, 착취하려고 해서 화가 났던 걸까.

- 깡!

내리치는 언월도를 위로 쳐냈다.

아래로 찔러 오는 창 자루는 끝을 두 동강 냈다.

[질주 Lv.5!]

[일도양단 Lv.1 발동!]

바닥을 박차고 달려갔다.

휘두르는 대검이 직선을 그리면서 둘의 몸을 그대로 잘라 냈다.

아름다운 엘프의 몸이 하반신은 아래로 주르르 밀리고, 상반신은 위로 강하게 날아갔다.

굳은 장기들이 아무렇게나 허공에 흩뿌려졌다.

그러나 셋이 끝이 아니었다.

- 투둑.

- 투두둑.

어느새 열 명이 넘는 엘프들이 탁한 은빛으로 눈을 빛내며 땅에서 일어나고 있다.

얼굴만 날아간 시체, 가슴이 활짝열린 시체들이 다시 일어나 내게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당신들, 왜 이렇게 된 거지?"

"으어. 으어어.

물론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는다.

마치 망령의 납골당에서 동료 해골병사들을 상대하던 느낌이다. 자기 자신으로서 움직이는 게 아니라면, 빨리 쓰러트려 주는 게 이들에게 자비로운 일이겠지.

- 파드득!

한층 위로 높이 올라간 아이작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 눈가림이다. 본체를 조심해라.

"본체?"

-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저것들을 조종하는 본체가 있지. 위에서 관찰하다가. 나오면 알려 주마.

- 파득! 파드득!

녀석은 거대해진 날개를 쫙 펴고 유유히 뒤로 더 빠졌다.

기절시킨 루비아를 발톱으로 쥐고 있었지만, 인간 하나 드는 데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듯하다.

끼어들 생각은 없는 것 같다.

완전히 3인칭 관찰자 시점인가.

힘을 아끼려는 건지는 몰라도.

뭐, 루비아만 잡고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지 싶다.

"으어아

바닥에서 일어난 엘프들을 한 번쓱 둘러봤다.

아이작의 말대로 애초에 이들을 살해한 '본체'가 있을 게 분명하다.

- 팟!

칠흑 중갑을 입은 엘프 한 명이 방패를 들고 내 쪽으로 돌진했다.

한눈에 봐도 내가 입은 갑옷보다훨씬 좋아 보이지만, 안타깝게도 머리가 세로로 반쯤 날아갔다.

다른 손의 도끼를 굳이 막을 것도 없었다. 앞에 내세운 방패를 칼로 강하게 올려쳤다.

[산성 Lv. 5를 발동합니다!]

방패가 위로 튕겨지며 생긴 틈에 다시 칼을 가로로 휘둘렀다.

절단면이 녹아내리며 시체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거의 동시에 네 명의 다크엘프가 사방에서 나를 공격했다.

그들 모두 강력한 힘에 몸이 찢겨죽은 녀석들이다.

그나마 이런 식으로. 동료에게 살해당하지는 않은 것 같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시체들이 일어난 건 방금 전 내가 들어온 뒤의 일이니까.

[체술 Lv. 7이 보정됩니다.]

- 팟!

박차고 오른 바닥에서 돌먼지가 일었다. 3미터 가까이 뛰어올라서 포위망을 단숨에 넘었다.

- 퍼걱!

대검을 위에서 아래로 휘두르며 시체들을 베어 나갔다.

그들은 더 이상 엘프가 아니다.

마왕 레라지에의 추종자 따위도 아니다.

정체불명의 뭔가에 조종되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다.

[격발Blaze Lv. 2를 발동합니다!]

칼에 불꽃을 실어 위에서 아래로 내려쳤다.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경험치가.]

비명도, 고통스러워하는 표정도 전혀없었다.

타오르는 인형들을 향해 대검을 다시 휘둘러 힘을 뿜어냈다.

[냉기 폭풍 Lv.1 발동!]

[스킬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엘프들의 시체가 얼어붙으며 뒤로 쓸려 갔다.

시체 두엇은 그 와중에도 버티며 도끼를 내려치고 칼을 꽂았다.

미처 막지 못해 갑옷의 가슴팍이 움푹 파였다.

- 광!

반쯤 얼어붙은 녀석들을 주먹으로 강하게 후려쳤다.

시체에 붙은 얼음이 부서졌다.

두 녀석이 몇 바퀴를 구르며 뒤로 나가떨어졌고, 그 사이에 검기가 서린 칼을 들어 가로로 베어 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서번트 시스템!]

[마스터를 지키며 싸웠습니다.]

[홉착 Lv. 5의 반복적인 사용으로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흡착 Lv.5 ? Lv.6]

[스킬 등급이 '희귀'로 조정됩니다.]

이것도 루비아 덕분인가.

한참을 반복하고야 신전은 침묵을 찾았다. 아이작이 루비아를 처음에 기절시켜 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고개를 돌려갑옷을 바라봤다.

곳곳이 우그러지고 뜯겨져 있다.

사방에는 마법과 폭력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몸보다도 정신이 더 지쳤을 때.

- 저벅.

신전 가운데의 커다란 구멍에서, 발가벗은 무성無性의 아이 하나가 꾸물거리며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인간. 아이?"

- 공격해라!

생식기가 없는 걸 제외한다면, 겉으로 보기에 그저 평범한 아이에 불과했다.

이마와 배, 등 부위에 동그란 뚜껑같은 게 붙어 있는 아이가 내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나이는 일곱 살에서 열 살 정도나되었을까. 제대로 짐작하기는 어려웠다.

머리카락 한 올 없는 아이가 딱딱한 표정으로 말했다.

입은 가만히 꾹 다물고 있었지만, 그 뜻이 머리로 직접 전해졌다.

[뭔가 꺼림칙해 숨어 있었는데.

느리네. 약하고. 괜히 겁먹었잖아?

네까짓 게 뭐라고 말이야.]

뭐라고. 뭐라고. 뭐라고≪

목소리가 신전 안에 기묘하게 울려퍼졌다.

얼핏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저런 작은 몸으로 엘프들을 모두 찢었단 말인가? 적어도 수 미터는 되는 괴물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게 어디 숨은 건 아닐까?

그때 였다.

- 투둑.

이쪽으로 걸어오는 아이의 모습이 서서해 변해 가기 시작했다.

팔은 몸통처럼 길고 두꺼워졌고, 그 끝에 달린 양손은 머리통처럼 커다랗게 변했다.

[왜 내가 겁먹었지. 정말 기분이 나빠서 진짜.]

웅얼거리는 입이 일그러지며 점점거대해졌다.

깨끗했던 엉덩이 쪽에 가시 달린 두꺼운 꼬리가 길게 자라났다.

나는 아이작에게 물었다.

"저게. 네가 말한 사도의 부스러기냐?"

- 그래. 아직 자라지 않은 놈이다.

완전히 변할 때까지 가만히 두고 볼셈이냐?

하지만 아이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일단 이 정도에서 싸워 볼까.?

충분할 것 같은데.]

'아이'는 장난치는 것처럼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강할까?

강하다면 얼마나 강할까?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다.

경계하며 대검으로 아이를 겨냥한 순간이었다.

- 쾅!

녀석의 머리통만 한 주먹이 빠르게 날아왔다.

칼로 막아 냈지만 순간적인 속도와 힘이 어마어마했다.

등이 바위에 부딪히며, 루비아가 사 준 갑옷이 뒤에서 한차례 더찌그러졌다.

억지로 대검을 잡고 있었다. 머리가 세차게 흔들린 탓인지 정신이 어지 러 웠다.

녀석은 뒤로 나가떨어진 날 보며 무표정하게 천천히 걸어왔다.

[집중 Lv. 2를 발동합니다!]

[명상 Lv. 2를 발동합니다!]

녀석의 등 뒤에 반투명한 촉수가 빼곡히 돋아 있는 게 보인다.

다크엘프들이 죽을 때마다 아래로 빠져나가던 촉수였다.

저걸로 시체들을 조종한 건가.

[검기 Lv.3 최대 출력!]

[산성 Lv.5 발동!]

죽은 뒤에도 이용당한 엘프들을 떠올리며 녀석에게 칼을 내리쳤다.

치직거리는 연푸른 검기가 칼날전체에 둘러졌다.

- 펑!

녀석이 팔을 교차해 칼을 막았다.

은빛 진물이 나오는 팔을 내려다보며 '아이'가 슬쩍 인상을 썼다.

[흐음.]

하지만 내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몸 전체를 자를 생각으로 강하게 내리친 검격이다.

검기를 둘렀는데.

이게 부스러기라는 말인가?

왜 갑자기 나타난 거지?

원래 이런 게 있었나?

- 꽝!

녀석이 강하게 꼬리를 내리쳤다.

대검을 들어 막았지만.

강한 힘에 손목 하나가 어긋난 것 같았다.

잡념에 빠져 있던 대가는 컸다.

[약하네.]

녀석은 다시 가까이 붙은 뒤 배를 주먹으로 올려쳤다. 갑옷이 부서져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가슴을 맞았으면 갈비뼈가 다 부러져 밸런스를 잃었을 게 분명했다.

[어디 더 피를 흘리게 해 봐라.

내 피를.]

- 광!

'아이'는 장난치는 것처럼 다시 한 번내 배를 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치고 빠지지 못했다.

[어라?]

아이의 거대한 주먹을 배 부분의 갑옷에 붙인 뒤, 몸을 회전시키며 대검으로 목을 베었다.

먹혀들었다.

하지만 칼날은 끝까지 들어가지 않았다.

뒤로 떨어져 나가 자세를 잡았다.

다음 공격을 버틸 자신이 없었다.

'아이'는 목을 손으로 만져 보더니 흐르는 은빛 액체를 보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팔을 공격할 때에도 그랬지만.

루-륨이 몸에 흐르는 건가?

나냐우가 떠올랐다.

그녀에게 물어보면 제대로 대답해줄까?

계속 떠오르는 생각을 지워 내며 눈앞의 녀석에게 다시 집중했다.

손톱 길이 정도로 목에 칼이 들어갔지만, 생명에는 전혀 지장이 없는것 같았다.

'조금 더 커져야겠구나."

- 투둑.

- 투두둑-

아이의 몸이 조금씩 더 커지기

시작했다.

204화 오래된 친구 (20)

***************************************************

아이의 몸이 순식간에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5미터가 훌쩍 넘는 크기였다.

몸이 거대해지며 새까만 눈썹과 머리칼이 길게 자라났다.

털은 불에 탄 것처럼 지저분하고 길었다.

이마와 배, 등 부위에 붙어 있던 검은 뚜껑 같은 것에서 우둘투둘한 칠흑의 갑각이 솟아나서 갑주처럼 전신을 뒤덮었다.

주변 공기마저 일렁이면서 까닿게 물들었는데, 마치 공기의 질량마저달라진 것처럼 보였다.

기분 탓이 아니었다.

정말 녀석의 몸을 둘러싸고 만져질것 같은 검은 아지랑이가 스멀스멀피어올랐다.

계속해서 거대해지는 녀석을 따라고개를 위로 들어야 했다.

녀석의 모습을 끝까지 인식하는 순간.

[동화율이 떨어집니다.]

[70.9%.]

[출력 코드를 인식합니다.]

세계가 출렁거렸다.

놈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아지랑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기이했다.

녀석의 존재감은 조금 전과 비교할수 없이 압도적이었지만, 두렵다는 생각이나 싸워서 내가 질 것 같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자신감이 올라왔다.

놈이 아이 형태일 때 일방적으로 당하며 아래로 처박혔던 자신감이, 다시 위로 올라온 기분이다.

[크하하하하.]

놈은 자신의 힘에 도취된 둣 꿈틀거리며 웃고 있었다.

부스러기 주제에.

대체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진짜 일 났네. 일 났어. 대체 뭘가만히 보고만 있었냐?

아이작은 파드득거리며 뒤로 다시 물러갔다.

여차하면 도망갈 듯한 모양새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눈앞에 있는 이 녀석은.

"약하다."

[뭐라고?]

구부정한 자세를 취한 녀석은 곧내 앞에 뛰어들었다.

- 쿠궁!

돌 파편이 부서져 사방에 튀면서 진동이 신전 전체에 울려 퍼졌다.

[감히 나에게 뭐라고 하였느냐? 이미천한 벌레가!]

나를 내려다보는 녀석의 시선이 조금도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읽힌. 다?'

그 약점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어디를 어떻게 공격하면 되는지.

상대가 어떻게 이쪽을 공격해 올것인지.

- 광!

거대한 손이 뻗어 와 바로 옆에 꽂혔다. 다크엘프들을 몰살한 바로 그 공격이었다.

공격은 처음부터 완전히 읽혔다.

느리다.

한심할 정도로 느리게 느껴졌다.

놈에게 고마운 마음마저 들었다.

놈을 보자마자 뭔가 나를 억제하는 장치가 하나하나 풀리는 기분마저들었다.

나는.

누군가 날 조종하는 것처럼 이미몸이 움직이고 있었다.

연속해 들어오는 공격을 피한 뒤손목에 칼을 휘둘렀다.

아이 형태일 때에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은 칼이었지만, 이번에는 단한 번으로 신전 기둥만 한 놈의 손목이 너덜거렸다.

[어? 어어.?]

내가 가진 힘 자체가 놈의 몸을 아무렇지 않게 자를 정도로 강해진건 아니었다.

기억이다.

정신 깊숙한 곳 어딘가에서 아주 익숙한 기억이 떠오르는 것 같다.

덧씌워진 '기억'으로 곧바로 놈의 어깨에 올라탔다.

마치 환각에 빠진 것처럼 녀석의 약점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거기에 칼만 가져다 대면 가볍게 일이 끝날 것 같았다.

- 서걱!

선을 따라 그대로 대검을 그었다.

갑각이 돋아나기 전에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던 칼날이 아예 어깨를 끝까지 베어 냈다.

그은 대로 어깨가 잘려 나갔다.

- 쿵!

검은 연기에 쌓인 거대한 팔뚝이 거짓말처럼 아래로 떨어졌다.

놈의 비명이 신전 안에 가득찼다.

이렇게 쉬운데.

아까보다 강해진 게 맞는 건가?

나는 어떻게 된 거지?

생각을 하는 순간에도 몸은 마치 폭주하는 것처럼 칼을 휘둘렀다.

대검을 '선'에 찔러 넣고 내려치고 돌리고 휘둘렀다.

옆으로, 아래로, 위로, 사선으로 베었다.

놈이 뿜어내는 검은 연기 위에서 파도를 타는 것처럼 움직였다.

흩어진 연기 속에서 마주한 놈의 눈동자는 공포로 질려 있었다.

[끼, 끼히이익-!]

[이런 말도 안 되는.!]

팔이 잘린 놈이 몸을 뒤로 솟구쳐 도망갔다.

- 콰광!

거대한 발로 강하게 내딛는 탓에 바위가 부서져 사방으로 튀었다.

'나'는 길게 자란 녀석의 머리칼을 잡고 다시 보이는 검은 선을 따라연속해서 칼을 찔러 넣었다.

- 퍼걱!

잘리는 느낌, 부서지는 느낌이 말할수 없을 정도로 상쾌했다. 손에 회전을 주며 칼을 휘저었다.

등부터 머리까지 계속 그어 대자 순식간에 놈의 몸이 터져 나갔다.

일방적인 학살.

그러나 경비대 같은 약한 것들을 한 번에 처리할 때의 느낌과 전혀달랐다.

정신적인 쾌감이었다.

해야 할 최적의 행동을 하는 듯한,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느낌.

기이할 정도로.

익숙한 쾌감이었다.

몸이 너덜너덜해진 녀석이 처음 나왔던 구멍으로 몸을 던지려 할 때였다.

"주술사! 놈을 저지해라!"

'내' 입에서 아이작을 향해 강렬한 명령이 터져 나왔다.

- 어, 어어. 토 에이나이 보모스프로스카미야 사스 텔레스 에도 (이곳이 제단이니 그대의 순례는 여기에서 끝나리라). 멈춰라.

사념居〉念 영역에서의 고속 영창.

주술의 발휘에는 채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발작적으로 도망치던 '부스러기'가 짧은 시간 멈칫했다.

그리고 그걸로 충분했다.

눈에 훤히 들어오는 '선'을 따라이루어진 공격이 놈의 몸 전체를 갈라냈다.

[안 돼! 안 돼! 살려만, 살려만 줘!

계속할 거야.]

"뭘 계속한다는 거냐."

머리 옆에 다가가 물었다.

이미 반으로 갈라진 채로 녀석이 중얼거렸다.

[살더_?]

:??? 살더_?]:??? ?우나] 살까서:

하는데.]

녀석이 마지막 반격인 듯 이빨을 들어 나를 깨물었다. 이빨째 놈의 머리를 싹둑 베어 버렸다.

은빛 액체가 사방에 튀었다.

녀석의 몸을 둘러싼 검은 연기가 사방에 먼지처럼 흩어졌다.

아이작이 파드득거리며 내 곁으로 날아왔다.

- 너. 방금 나한테 감히 '명령'을 했었던 거냐? 나는 그걸 들었고?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 이건 대체 어떻게 이렇게 쉽게 잡았어? 어? 이야기 좀 해 봐라.

하지만 녀석의 말에 대꾸할 힘은 없었다.

- 털썩!

나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아무리 훤히 보이는〈선〉을 따라움직였다고 해도.

어떻게 된 건지 전혀 알 수 없는 〈기억〉에 따라서 움직였다고 해도.

말도 안 되는 움직임을 한 부담이 몸에 그대로 가해진 것 같았다.

맞은 충격보다도, 내 역량을 훨씬뛰어넘어서 움직인 탓에 온몸의 뼈가 실금으로 가득했다.

쓰러진 채 손가락 하나도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 대체 어떻게 된 거냐니까? 혹시뭔가 보이기라도 했냐?

선이 보였다.

기억이 떠올랐다.

기억이.

[동화율 동결.]

[하락 방지.]

[이 노예를 세계에 고정시깁니다.]

[기억의 천막天幕을 삭제.]

눈앞이 붉었다가, 하얗다가, 다시 새까매졌다.

정신이 서서히 돌아왔다.

두 쌍의 시선이 누워 있는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 일어났느냐?

"괜찮으세요? 정신이 드세요?"

[서번트 시스템]

[마스터의 걱정을 받고 있습니다.]

[걱정 강도: 매우 높음]

[마스터의 체력과 정신력이 초당

0.0017%씩 소모됩니다.]

[서번트의 체력과 정신력이 30%빠르게 회복됩니다.]

이건 또 뭘까.

루비아 덕분에 빠르게 깨어난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좀 늦게 깨어나는 게 낫지, 그녀의 정신이 소모되는 건전혀 내키지 않는데.

"걱정하지 마라."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한참 이나 기절해 계셨다고요."

왜 기절을 한 걸까?

당황스러웠다.

머리를 맞은 적은 없는데.

지나치게 무리한 탓에 두개골까지 금이 간 걸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시야가 흔들렸다. 뭔가가 정신의 영역에서 나를 강하게 억제하면서 충격을 가했다.

내 곁에서, 거의 독수리만큼이나 거대해진 아이작이 말을 걸었다.

- 깨우는 데 엄청 비싸게 들었다.

몸을 좀 보지 그래?

고개를 들어 팔을 내려다봤다.

갑옷이 벗겨진 몸 곳곳이 은은히 빛나고 있다.

"이건.!"

- 온몸에 여기저기 실금이 잔뜩갔더라고. 루-륨도 잔뜩 남았겠다.

그런 김에 회로를 제대로 넓혔지.

검기 한번 써 봐라.

녀석의 말을 듣고 대검에 검기를 발현시켰다.

[검기 Lv.3 최대출력.]

- 우우우옹!

대검 전체를 푸른 기운이 덮었다.

하지만 검기가 칼 위로 몇 센티씩 솟는다거나, 빛깔이 더 진해지거나하는 건 없었다.

"강해진. 건가?"

- 이 멍청한 놈! 계속해 봐라.

검기를 몇 분간 계속 유지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실은 그게 무척 놀라운 일이었다.

아무런 부담이 가해지지 않는 것.

지금까지는 무리하게 마력을 쓰면 회로가 뜨겁게 달궈지면서 무리가갔다.

온몸에서 힘이 쑥 빠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

- 이제 칼날에. 불꽃과 얼음을 동시에 만들어 봐라.

의아했다.

그런 짓을 해 봐야 마력 소모만 극심하고 좋을 일은 전혀 없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녀석은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 치이이이익!

불과 얼음이 동시에 솟아나면서 당연히도 서로를 계속 상쇄했다.

터무니없는 마력의 낭비.

그럼에도.

전혀 부담이 가지 않는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루-륨을 나한테 주입한 거냐."

아이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이 녀석이 고생했다. 단검어디 있어?

아이작이 고개를 돌려 루비아를 바라봤다.

그녀가 작은 단검을 손으로 살짝주워 들었다.

"이분이 부리로 쪼는 대로 회로를 새겼어요. 그럼 빨리 일어나실 거라고 해서요."

- 흠흠. 주술을 써서 사도의 피가 네 몸에 스며들도록 했느니라.

자세히 몸을 내려다봤다.

아예 활짝 열어 놓고 작업한 둣, 천천히 아무는 뼈가 보였다.

루비아의 존재 덕분일까.

그런 실금들이, 혼자 있을 때보다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회복되는 느낌이었다.

- 그나저나.

아이작이 주위를 성큼성큼 돌며 물었다.

- 어떻게 그렇게 잘 해치웠지?

"나도 모른다."

정말이다.

검기를 둘러서 썰어 봤자 칼날이 한 치도 안 들어가는 강력한 적이었는데, 그런 놈을 상대로 나조차 믿을 수 없는 음직임을 행했다.

덕분에 뼈 곳곳에 금까지 갔고.

- 투자 가치가 있는 모습이었다.

아주 대단했느니라.

"그러냐."

아이작이 자기가 아닌 남을 보고 대단하다고 말하는 건 처음이다.

그 대상이 내가 될 줄은 솔직히 상상도 못 했는데.

어떻게 움직인 걸까?

무언가에 씌인 듯한 느낌.

잠깐 동안 몸을 지배하던 감각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보려 했다.

눈앞의 적이 한심하고, 미숙하고, 우습게 느껴졌던 감각.

도망치는 녀석을 잡으라고 아이작에게 명령을 내렸던 감각.

조금 전 일어난 일임에도, 현실감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환각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분명히 일어난 일이었다는 것을 내게 알려 주는 이 뚜렷한 물증이 없다^?.

은은한 빛이 아이작과 루비아의 뒤편에서 비쳐 온다.

거대한 부스러기의 사체가 내는 은색빛이다.

- 달그락.

몸을 일으켰다.

기스-제-라이의 정수 흡수 스킬로 적의 능력을 얻을 수 있던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초록이 아닌 은빛이지만.

흡수할 수 있다는 게 직관적으로 느껴지고 있다.

녀석을 흡수하면.

뭘 받게 될까?

진지한 분위기에 압도된 두 명은 나를 멀뚱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이 형태일 때도 나를 구석으로 쉽게 몰아붙이던 힘인데.

손을 뻗었을 때였다.

- 쉬이이이이익!

은은한 은빛이 내게 스며들면서 허공에 상태창이 떠올랐다.

[전직 권한을 습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