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백발 위에 여행자용 후드가 덮이고 붉은 눈동자가 가려진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보지 않을 것처럼 문을 향하던 등이, 어느 순간 돌아섰다.
"에드."
"예, 데몬 님."
"뭐 갖고 싶은 거 있습니까?"
"...예?"
"모처럼 제국에 가는 것이니, 필요한 것이라든가."
피식. 에드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아랫것을 이렇게 챙겨주는 상관이 과연 어디에 또 있을까.
그리고 이리도 도움이 많이 필요한 상관 역시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딱히 없습니다."
"흐음.... 그럼 알아서 적당히 구해 오겠습니다. 지금은 바쁘니 이야기는 다녀와서 하도록 하죠."
거기서 에드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마왕님께 들었던 제안을 언급하는 대신, 양 입꼬리를 올리며 눈가를 살짝 접었다. 그리고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예, 기다리겠습니다."
이미 거절해 버린 제안을, 굳이 꺼내서 바쁜 이의 심기를 어지를 필요는 없을 테니까.
"부디 몸 성히 다녀오시길."
그가 제국에 다녀오더라도, 에드는 여전히 그의 부관으로서 그를 맞이할 것이다.
31. 제국으로(2)
포근한 바람이 뺨을 어루만진다. 길가에 늘어선 꽃들이 그런 바람을 반기듯 잎을 흔들고, 햇살은 축복이라도 내리듯 따사로운 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 봄이다.
그것도 여름에 가까운 늦은 봄.
어느 거대한 저택의 앞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가 밀려오는 졸음에 나른히 하품을 하다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한쪽 눈썹을 까닥였다.
저 멀리, 여행자용 로브를 뒤집어쓴 누군가 이쪽을 향해 똑바로 걸어오고 있었다.
"...이봐."
"응?"
"저 사람, 수상하지 않냐?"
"뭐가 수상... 아, 그러네."
이래 보여도 나름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직업이다. 순식간에 칼 같은 기도를 드러낸 동료가 창을 고쳐 잡았다.
문지기 역시 제 무기를 단단히 쥐고 이리로 다가오는 낯선 이를 향해 숨김없이 경계심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가 코앞에 다가온 순간, 창을 내밀어 정지 신호를 보내고 말했다.
"이곳은 하르트 백작저입니다. 백작님은 현재 출타 중이시며 외부인은 함부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정 중요한 일이 있으시다면 전언을 남겨 주십시오."
몇 번이고 손님들에게 반복적으로 읊었던 말.
보통 하르트 백작을 적으로 돌려서 얻을 이익이 없기에 대부분은 그냥 돌아갔으나, 이 손님은 아무래도 다른 모양이다.
그는 아예 그 말을 못 들은 양,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당당히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아니, 오히려 한술 더 떴다.
"문 열어."
"...하?"
문을 열라니. 어쩜 이리도 뻔뻔할 수가.
황당함에 한마디 하려는 순간, 그가 로브의 후드를 벗었다.
그리고 드러난 흰 머리칼에 문지기는 순간 멍해졌고, 이어서 마주한 붉은 눈동자에 기겁하며 창을 치웠다.
"내 저택에 내가 못 들어간다는 건 말도 안 되잖아?"
"배, 백작님!"
데온 하르트 명예 백작.
몬스터 토벌을 목적으로 저택을 나섰던 그가, 장장 6개월 만에 돌아왔다.
***
"데온 하르트가 돌아왔다고요?"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던 남자가 상체를 세웠다. 보라색 눈동자가 흥미로 빛났다.
보라색 눈과 보라색 머리. 황금색이 황가의 상징이듯 제국에서 보라색은 한 가문의 상징이다.
일루스터 공작가.
제국 유일의 공작이자 귀족파의 수장이라는 황제의 대척점에 선 스타베 일루스터는 갓 들어온 따끈따끈한 소식에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데온 하르트가 누구인가. 명백한 황제의 개가 아니던가. 귀족파의 수장인 자신의 입장에서는 제거해야 하는 바로 그 '영웅'.
갑작스럽게 사라졌다가 갑작스럽게 돌아왔다지만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따지고 보면 슬슬 돌아올 때가 되긴 했더랬지.
"자아, 그럼."
시선을 돌려 줄곧 옆에 서 있던 이를 바라봤다.
동요 한 점 내비치지 않는 녹색 눈과 속내를 알 수 없는 무표정.
제 수하를 자처한 크루엘 하르트를 보는 스타베의 눈에 묘한 기색이 스치는가 싶더니 이내 그것을 감추려는 듯 휘어진다.
이어서 지독하리만치 상냥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떻게 할까요?"
네 동생이 돌아왔다는데.
아직 이 소식은 크게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공작가가 구축하고 있는 정보망이 유독 촘촘한 것뿐이니까.
자신 외에 알고 있는 이라고는 기껏 해 봐야 황제뿐이겠지.
그러한 상황에서 귀족파 수장의 수하인 크루엘이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살인 의뢰를 넣겠습니다."
"틀렸습니다. 더 가성비 좋은 패가 있을 텐데요."
마치 아이를 가르치듯 손가락을 흔들며 공작이 시선을 옮겼다.
그에 부응하듯 있는 듯 없는 듯 구석에서 서류를 들고 자신이 보고할 차례를 기다리던 한 여자가 고개를 들고 시선을 마주했다.
"사에린, 당신이 대답해 보세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혹, 혁명군을 말씀하시는지."
"맞습니다."
황제를 제거하기 위해 혈안인 그들이 황제의 개를 죽여 달라는 부탁을 거절할 리가 없다.
돈을 받고 살인을 하는 이들보다 더 열정적으로 이 일에 가담하겠지.
그렇기에 공작은 싱긋 웃으며 크루엘에게 명령했다.
"혁명군에 연락하세요."
***
후다닥. 후다다닥.
뭔진 모르겠지만 상당히 바빠 보인다.
뭔가 내가 엄청난 불청객이 된 것 같은 기분? 아무래도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운 모양이다.
하지만 마왕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괜히 눈치가 보여 머리만 긁적이고 있자니, 이윽고 분주한 사용인들 사이로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년의 남자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걸이로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오셨습니까, 백작님."
"아, 네. 오랜만입니다, 레멤베르."
내가 이 저택을 받았을 때부터 함께한 집사, 레멤베르가 인자한 미소로 나를 반겼다.
변함없이 차분한 태도를 보고 있자니 새삼 돌아왔다는 실감이 나서 한 걸음 더 다가서려는데, 진즉 끝난 줄 알았던 인사가 이어졌다.
"몬스터 토벌은 무사히 끝마치셨는지요."
"...네?"
몬스터 토벌?
...맞다, 대외적으로 나는 황제의 명을 받아 몬스터 토벌을 하러 자리를 비운 거였지.
"아, 아아, 네."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레멤베르가 얼굴 가득 중후한 미소를 띠며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마치 '어서 들어오십시오' 하고 말하는 듯한 행동에, 나는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가며 뒤따라오는 그에게 말했다.
"폐하를 알현하러 갈 겁니다. 준비해 주세요."
"먼 길 다녀오시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좀 쉬고 가시는 것이...."
"아뇨, 씻고 옷 갈아입고 바로 갈 겁니다."
나라고 쉬고 싶지 않겠는가. 황제의 눈 밖에 나는 것이 더 큰 문제라 어쩔 수 없는 거지.
현 황제 에도아르도 데세르트는 검으로써 군주의 자리에 오른 피의 황제다.
9왕자였던 그가 자신의 형님과 누님들을 모조리 죽이고 검을 질질 끌며 궁을 가로질러가 피 묻은 손으로 왕관을 집어 들어 직접 썼을 때의 그 장면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신하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될 정도로 공포스러운 장면이었다.
그런 그의 눈 밖에 나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물론 고작 바로 보고하러 오지 않은 것 정도로 사람을 죽일 정도의 폭군은 아니지만, 그래도 되도록이면 눈 밖에 날 만한 짓은 아예 안 하는 편이 가장 안전할 테니....
'...그런데 분위기가 왜 이래?'
이전이었다면 즉각 움직였을 이들이 어째 통 움직이지 않는다.
안절부절못하며 고개만 숙이고 있는 사용인들을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라보자, 레멤베르가 자연스럽게 나서 말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행동은 에드가 생각날 정도로 빠르고 신속했다.
사용인들 중 몇몇이 목욕물을 준비하고, 다른 몇몇은 수건을 들고 대기한다.
그리고 또 다른 몇몇의 손에 질질 끌려간 나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따뜻한 욕조에 몸을 푹 담그고 있었다.
오랜만이라 정신이 없긴 하지만, 처음도 아니니 그리 당황스럽지는 않다.
금세 익숙하게 노곤해진 몸을 축 늘어뜨리는데, 문이 열리더니 시종들이 들어와 내 몸을 깨끗이 닦아 주고는 가운까지 입혀 주더니 어딘가로 안내했다.
'자, 잠깐... 잠깐만.'
이쯤 되니까 정말 정신없는데? 오랜만이어서가 아니라 정말 정신이 없다.
너희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잖아. 도대체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내 표정이 보이지도 않는지 시녀들이 날 소파에 앉혀놓고 제복을 주르륵 꺼내 들더니 저들끼리 떠들기 시작했다.
"황궁으로 가신다면 이 제복이 좋지 않을까요? 적당한 장식이 달려 있어서 백작님의 미모를 돋보이게 할 것 같은데."
"아니지, 대세는 금욕적인 분위기라고! 그런 의미에서 잡다한 장식 없이 수만 놓인 이 제복이 좋을 것 같지 않아?"
"세간에 알려진 백작님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이쪽이 나을 것 같지 않아요? 뭔가 유려한 느낌이잖아. 이거면 백작님의 이미지도 조금 부드럽게 변하지 않을까 싶은데.... 이참에 병약한 귀공자 컨셉으로 가는 건 어때요?"
대체 왜 하얀 제복과 하얀 제복과 하얀 제복을 두고 고민을 하는지 모르겠다.
죄다 제복에다가 흰색이잖아. 심지어 나머지 옷걸이에 걸린 제복도 전부 흰색이다.
도대체 뭐 하자는 건지.
"백작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
내 눈엔 다 똑같은데.
젠장 어쩌다 보니 내 상징이 흰 제복이 되어 가지고.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등을 파묻었다. 반쯤 눈을 감은 뒤 대충 아무거나 손으로 가리키자 두 개의 혀 차는 소리와 한 개의 기쁨이 담긴 작은 비명이 들린다.
'혀 차는 소리 다 들린다. 얘들아....'
황당함에 눈이 떠지기도 했고, 내가 뭘 골랐는지 확인할 겸 슬쩍 시선을 올리자, '병약한 귀공자'를 외치던 시녀가 제복을 들고 눈앞에 서 있었다.
'어... 병약?'
뭔가 잘못 고른 것 같은데.
아니, 이미지를 부드럽게 만든다는 의도는 괜찮은 것 같은데, 콧김을 훅훅 내뿜는 저 시녀의 모습을 보아하니 심히 불안해진다.
지금이라도 물러야 하나?
대충 그런 생각을 하며 상체를 세우자, 시녀가 옆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에게 제복을 넘기고는 빠르게 물러갔다.
'아니, 저기...!'
나 그냥 다른 거 선택할....
탁. 문이 닫혔다.
"...."
"...."
"...저... 백작님.... 가운을...."
"아."
내가 마왕성에서 생활하며 배운 것 한 가지가 있다. 이럴 때 쓰기 아주 좋은 유용한 것.
체념.
그래, 뭐 입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제복도 그렇게 이상해 보이진 않으니 딱히 문제 될 건 없겠지.
그 시녀의 눈빛이 좀 신경 쓰이긴 하지만....
'무시하자.'
나는 순순히 가운을 벗어 시종에게 내밀었다.
팔목부터 손끝까지 붕대를 감고 흰 장갑을 꼈다. 제복을 갖춰 입자 나머지는 금방이었다.
나갔던 시녀들이 다시 우르르 들어와 멀쩡해 보이는 옷매무새를 재차 가다듬어 주고,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머리칼을 빗어 넘겼다.
'그래 봤자 시간이 지나면 다시 흐트러질 텐데.'
그 생각은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눈까지 충혈된 채 잔뜩 집중하고 있는데, 괜히 초 치는 말을 했다간 무슨 욕을 먹을지 상상도 안 가니까.
전쟁 때 특별 지급받았던 흰 망토까지 걸치고, 마지막으로 햇빛을 막기 위한 하얀 복면을 착용하자 시녀들이 아쉬운 듯한 탄성을 뱉으면서도 저들끼리 손바닥을 마주친다.
저건 뭐 하는 행태지? 아, 날 보며 입을 틀어막는 녀석도 있는걸 보니 딱히 좋은 의미는 아닌 것 같다.
입을 틀어막는다는 것은 구역질이 난다는 뜻 아닌가!
내 모습이 그렇게 별로인가? 구역질이 날 정도로?
"역시 갈아입는 게...."
"안 돼요!"
"절대 안 됩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깜짝이야! 그냥 혼잣말한 건데 뭘 그렇게 민감하게....
...설마, 얘네 짜고 날 엿 먹이려는 거 아니야?
의심의 눈초리로 씩씩대는 시녀들을 살피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레멤베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차가 대기 중입니다. 준비가 끝나는 대로 즉시 출발 가능합니다."
보아하니 더 이상 준비할 것은 없을 것 같아 대충 휴대용 단검만 하나 챙겨 들고 문을 열었다.
문 바로 앞에 서 있던 듯, 깔끔한 연미복을 입은 레멤베르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입장에서는 갑자기 문이 열린 것일 텐데도, 레멤베르는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옆으로 물러서 고개를 숙였다.
분명 내 옷차림을 봤을 텐데 아무 말이 없는 걸 보면 이렇다 할 문제는 없는 것 같고....
"아, 출발하기 전에 잠시만...."
1층으로 향하던 걸음을 돌려 내 방으로 향했다.
레멤베르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도록 한 뒤, 방 안을 둘러보자 책상 위에 왔을 때 들고 왔던 소지품들이 보였다.
'다행히 그대로 있네.'
씻으러 끌려... 그냥 들어가기 전, 내가 알아서 정리할 테니 건들지 말라고 간신히 남겨 놓았던 말을 어찌어찌 듣기는 한 모양이다.
아예 손을 대지도 않은 듯 처음 올려놓았던 그대로 놓여 있는 것들 중 식량 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마법은 마족의 전유물이니까.'
이걸 그냥 둘 수는 없다.
마법에 조예가 깊은 이들이 드물다지만, 한 번이라도 열어 보는 순간 어느 멍청이라도 이것이 마법이 걸린 주머니라는 것을 즉시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태워 버려야지.
늦봄이라 벽난로는 꺼져 있어 대충 촛불을 켜고 주머니를 태웠다.
안에 있는 식량들도 같이 타겠지만 미련은 없다. 이제 맛있는 음식들을 자유롭게 먹을 수 있을 테니까.
재가 되어 허공에 날리는 그것들을 대충 손을 휘저어 날려 버리고, 또 다른 주머니를 집었다.
'이건 그냥 태우면 큰일 나지.'
금화가 잔뜩 담긴 주머니.
방 안을 뒤져 대충 일반 가죽 주머니를 여러 개 꺼내 내용물을 옮겨 담은 뒤에야 미련 없이 태워 버릴 수 있었다.
나는 금화 주머니를 잘 정리한 뒤, 그중 두 개를 집어 들고 문을 열었다.
"이번 여행에서 번 돈인데, 백작저 재정에 보태 쓰세요."
사실 백작가에 돈은 이미 차고도 넘치니 굳이 보탤 필요는 없겠지만서도.
주머니를 받아 든 레멤베르가 내용물을 확인하더니 고개를 든다.
쉽게 볼 수 없는 독특한 은청색 눈동자가 알 수 없는 빛을 띤 채 나를 담고 있었다.
"요즘 몬스터들은 잡으면 금화도 뱉는 모양입니다."
"...아."
맞다, 난 몬스터 토벌을 하러 갔던 거지.
하도 정신이 없어서 잠시 잊고 말았다.
32. 제국으로(3)
'이걸... 어떻게 수습하지?'
토벌을 나선 지역의 근처 도시에서 감사의 표시로 줬다...고 하기엔 황명을 받아 간 것이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고.
토벌 도중 우연히 어느 동굴을 발견해서 들어갔더니 이게 있었다- 하는 꿈같은 이야기는 나라도 안 믿겠다, 젠장.
그나마 레멤베르가 믿을 만한 것을 고르자면 '감사의 표시' 정도인데, 이게 황제의 귀에 들어갔다가는 큰일 난다.
분명 '짐이 명령한 일을 행하면서 돈까지 뜯어냈다고? 뱃속에 욕심이 그득한 것 같은데, 그걸 줄이는데 짐이 한 손 보태도 되겠는가?' 하며 검을 빼 들 것이다.
어떻게 확신하냐고? 이미 전례가 있었으니까!
참고로 그 전례의 당사자는 피투성이의 싸늘한 주검이 되어 황궁 밖으로 질질 끌려 나갔다고 한다. 짐짝처럼 길가에 던져진 시신의 수습은 가족들이 알아서 해야 했고.
'그냥 솔직하게 도박으로 땄다고 말해?'
마계 이야기는 빼 버리고 도박을 좀 했다고 하면... 그래, 내 이미지가 급격히 추락하겠군.
그래도 그게 가장 괜찮은 변명이다. 아, 변명이 아니라 사실이지.
어쨌든 도박은 딱히 법으로 금지된 것도 아니고, 제국의 귀족들 역시 비밀리에 종종 즐기기도 하니 내 이미지만 조금 하락할 뿐 다른 잡음은 발생하지 않을 터.
대충 생각을 마무리하고 막 입을 떼는데, 그에 앞서 나를 물끄러미 보던 레멤베르가 희미한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농담입니다."
"...."
"이 돈은 재정에 잘 보태 쓰겠습니다. 농이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지요. 백작님께서 저택의 재정까지 생각하시니 이 늙은이가 너무 기쁜 나머지 잠시 주책을 부린 모양입니다."
"아, 하하, 하. 주책이라니요. 하하...."
다행히도 출처는 묻지 않는 건가.
내심 안도하고 있을 때, 내 속을 읽기라도 한 건지 문득 레멤베르가 대화의 방향을 훅 틀었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돈을 챙겨 넣으며 말했다.
"돈의 출처는 묻지 않겠습니다."
"...."
"백작님의 위치가 위치이니만큼, 줄을 대고 싶어 하는 이들도 많을 테지요."
"네?"
아니 잠깐만, 지금 뭔가 단단히 오해한 것 같은데?
"백작님 정도의 위치라면 주는 돈 다 받고 입 싹 닫아도 뭐라 못 할 겁니다. 백작님 성격상 먼저 뇌물을 달라고 하셨을 리도 없을 테니 큰 문제는...."
"그,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뇌물이라니!"
내가 뇌물을 받을 리가 없잖아! 애초에 받을 만한 위치도 아니고!
"고작 명예 백작에게 누가 뇌물을 주겠습니까!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리고 만약 정말로 누군가 내게 뇌물을 주려 했다 하더라도 아마 단호히 거절했을 것이다.
받았다가 황제의 귀에 그 소식이 들어가기라도 해 봐라. 내 뱃가죽부터 갈라질 것이 뻔하지 않은가.
그러니 어서 이 오해를 풀어야 한다.
'뇌물 같은 거 아닙니다!'
"내 뱃가죽 갈라질 일 있나!"
"...예?"
"네?"
"...방금 생각과 말을 바꾸어 한 것은 아니신지요."
"아."
이게 아닌데.
황급히 말을 고치는데, 당황한 나를 지켜보던 레멤베르가 얼굴 가득 잔잔한 미소를 그린다.
어쩐지 조금 전 장면과 겹치는 미소에 잠시 말을 멈추자, 그가 인자한 얼굴로 말했다.
"농담입니다."
"...."
한 대 치고 싶다.
"설마 늙은이를 때릴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눈치도 빠르군요."
"집사라면 응당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레멤베르는 농담을 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진담과 구별이 안 되니까요."
"이런, 늙은이의 유일한 유희거리조차 앗아가시려는 겁니까. 너무하시는군요. 백작님의 당황한 모습을 보는 것이 이 늙은이의 낙인데."
"고의였던 겁니까?!"
"마차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바로 가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내려가시지요."
레멤베르가 능청스럽게 허리를 숙인다.
차마 노인과 투닥거릴 수도 없어 나는 더 따지는 대신 속으로 꿍얼거리며 발을 뗐다.
어차피 격식 차려서 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아직 알려지지 않은 만큼 호위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더해서 내가 마차 안에 오래 있는것을 좋아하지 않기에 기동력을 높이기 위해 한 선택이기도 했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나는 답답한 복면을 내리고 벽에 등을 편히 기댔다.
조용해서 그런가, 자꾸만 잡생각이 떠오른다. 황제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 그런지 황제에 관한 이야기가 특히.
딱히 나쁘진 않다.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니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에 대해 되새김질해 보는 것이 나으리라.
그래서, 황제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황제는... 복잡한 사람이지.'
복잡하지 않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냐만, 내 빈약한 어휘력으로는 이게 그를 설명할 수 있는 최선이다.
오만하지만 이를 받쳐 줄 능력을 갖춘 사람. 힘뿐만 아니라 두뇌도 갖춘 사람. 심지어는 욕심도 많아 스스로의 발전을 꾀하며 인재 수집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 사람. 그리고....
'폭군.'
그는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다.
카펫 대신 제 형제들의 피를 깔고 시작된 즉위식에서 전 9왕자였던 '왕'이 한 발언이 무엇인지 아는가?
[짐은 피로써 이 자리에 올랐다. 그런 주제에 이전까지 쓰던 왕국의 이름을 그대로 쓰는 것도 우습겠지. 그러니 지금 이 자리에서 왕국의 이름을 바꾸겠노라 선언한다.]
지루한 연설 대신 시작된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는 발언.
그는 여태까지 써온 왕국의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을 올렸다.
차라리 자신의 이름을 딴 '에도아르도 왕국' 같은 것이었다면 괜찮았으련만.
새 왕이 지은 그의 왕국의 이름은─
[제국(empire)]
[이전까지의 왕국의 이름은 잊도록. 이 나라의 이름은 '제국'이다.]
광오하기 짝이 없었다.
'제국' 그 자체가 이름이라니.
당연하게도 이를 다른 왕국이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수많은 반발이 일었다.
대륙의 모든 왕국들이 나서 그를 비난했고, '제국'의 '왕'은 실로 매섭기 그지없었던 그들의 반응을 싸그리 무시했다. 아니, 오히려 도발했다.
그렇게 전쟁이 시작되었다.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길디긴 '8년 전쟁'이.
'씨발, 진짜 지옥 같았지.'
어찌나 끔찍했던지, 당시 기억의 절반은 날아가 버렸다.
딱히 기억을 되찾고 싶지도 않은 것이, 아마 내 머리가 떠올리기를 거부하는 것이리라.
8년 전쟁이 끝났을 때, 이름뿐인 '제국'은 어느 누구도 반박하지 못하는 진정한 '제국'이 되어 있었다.
대륙의 1/3을 집어삼킨, '왕'이 아닌 '황제'가 나라를 다스리는 진정한 제국.
'그리고 나는.'
전쟁에서의 공을 인정받아 명예 백작이 되었지.
그 지위를 누려보기도 전에 젠장맞게도 용사의 동료로 발탁되어 바로 길을 떠났고.
그 탓에 마왕성에 코가 꿰여 버렸다는 것까지 생각을 이어 가는데, 그 순간 마차가 덜컥- 멈췄다.
"무슨...."
―와아아아!
"...함성?"
황급히 복면을 착용하고 창문을 살짝 열었다. 호위들이 웬 낯선 이들과 무기를 맞대고 있었다.
푸른색 일색의 옷차림과 그 옷에 그려진 한 마리의 흰 새.
...혁명군이다.
8년 전쟁 당시 각 왕국을 정복한 황제가 저지른 행동 때문에 탄생한 무리.
'망할 황제. 후환을 남겨 두지 않는 것도 좋지만, 인질 정도는 뒀어야지.'
영향력이 강한 사람, 많은 인망을 가진 사람은 물론이고 왕족의 핏줄은 방계까지 샅샅이 뒤져 모조리 죽여 버렸으니 더 잃을 것 없는 이들이 어떻게 나오겠는가.
나라도 잃었고, 구심점이 되어야 할 사람도 잃었다. 이들은 말 그대로 눈이 뒤집혀버렸다.
이렇게 된 거, 황제와 모든 상위 계층의 이들을 없애 버리고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만들겠다고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나야 쟤네가 무슨 사상을 갖든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그 희생자가 내가 되는 건 별로 달갑지 않은데.'
심지어 규모도 상당하다.
각자의 왕족들(구심점)을 내세워 일어나야 할 각 왕국의 이들이 혁명군이라는 이름하에 하나로 뭉쳤으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내가 창문을 연 것을 느꼈는지, 마부가 단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습격입니다! 창문 닫으십시오!"
보통은 '도와주십시오!'가 아니냐? 내가 무슨 귀족 영애도 아니고. 이래 보여도 난 전쟁터에서 굴렀던 사람인데....
물론 정말 저 틈에 끼고 싶은 생각은 없어 순순히 창문을 닫고 자리에 앉았다. 화살이라도 날아온 건지 무언가 콱 하고 꽂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거 좀 위험한 것 같은데, 나도 싸워야 하는 거 아닌가?'
불안함에 비상용으로 챙겨온 단검을 쥐고 나가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는데, 어느 순간 컥- 하는 소리가 마부석에서 들려왔다. 너무도 익숙한 소리라 파악은 쉬웠다.
'죽었구나.'
싸한 느낌이 등골을 타고 올라온다. 동시에 마차 문에서 우직우직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무언가 부서지는 것 같은....
콰앙!!
"미친, 진짜 부서졌어."
그냥 부서진 것도 아니다. 마차 문이 아예 뜯겨나갔다.
문이 있던 곳 너머로 정신없이 싸우는 호위들이 보인다. 도대체 적이 얼마나 되는 건지, 그들 전부가 여유 한 점 없는 얼굴로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좋아, 다 좋은데... 내가 죽게 생겼다, 이 새끼들아....'
유일한 탈출로를 떡하니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몸집.
얼굴에 있는 흉터부터가 험악하게 생겨 가지고, 아예 상대에게 압박감을 주겠다는 듯 녀석은 한 손에 거대한 도끼를 들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모습.
몬스터인지 인간인지 구별이 안 가는 외형의 녀석이, 명백히 나를 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너구나. 황제의 개."
"아, 아닌데요."
"...."
"...."
침묵이 흘렀다.
"...실례지만 성함이?"
"데온 하르트."
"맞잖아, 황제의 개!"
"아닌데...."
노리는 사람이 나인 건 맞는 것 같지만 황제의 개는 진짜 아닌데.
하지만 내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녀석이 내 하얀 머리칼과 붉은 눈동자를 보더니 저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확실하군. 비리비리하게 생겼네."
"비...."
비리비리라니. 댁이 쓸데없이 큰 거 아니고?
물론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그럴 강단도 없을뿐더러, 녀석이 그 큰 손을 뻗어 내 목을 움켜쥐었으니까.
"커흑! 컥...."
"영웅이라길래 긴장했는데, 이렇게 비굴한 자였을 줄이야. 실망이군."
"이... 미치…인...."
"입만 살았나. 이 상황에서 욕을 하는 건 칭찬해 줄만 하다만."
내가 뭘 했다고.
"도대체 어떻게 영웅이 된 거지? 별 볼 일 없는 자에게 정성을 쏟아부을 황제가 아닌데."
숨이 모자라다. 설상가상으로 빌어먹을 몸이 심박수를 올리며 산소를 급히 필요로 하고 있었다.
급한대로 손에 든 단검을 녀석의 팔에 내리꽂으려 했으나, 호흡이 모자란 상태에서 어설프게 휘두른 것에 속도가 붙을 리 만무하고.
도리어 녀석이 가볍게 휘두른 도끼에 맞부딪쳐 그대로 손아귀 밖으로 튕겨 나갔다. 젠장!
'차라리 마차 밖이었다면....'
피할 공간이 많으니 이렇게 잡힐 일도 없었을 텐데.
그 생각은 머리 한구석에 치워뒀다.
'만약'이라는 아무 쓸모 없는 가정은 나중에. 지금은 벗어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젠장, 숨이....'
이 빌어먹을 호위들은 쉼 없이 몰아치는 적들을 상대하는데 정신이 팔려 있으니.
'어떻게든, 해야....'
머리는 침착해야 한다고 외치는데, 몸이 내 의지를 벗어나 멋대로 발버둥 친다.
마치 살고 싶다는 듯 내 목을 움켜쥔 단단한 팔뚝을, 부들부들 떨리는 두 손으로 꾹 쥐고 긁어내리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손에 낀 장갑이 벗겨지고 꼼꼼히 감긴 붕대가 흐트러져 창백한 손이 드러났다.
가늘고 비쩍 마른 내 손을 본 녀석이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다.
"원망은 황제에게 하도록 해. 놈이 아니었다면 너도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테니."
그러시겠지. 현 황제가 아니었다면 혁명군이 탄생하는 일도 생기지 않았을 테니.
...그런데 어떻게.
'내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그런 의문이 미처 머리를 장악하기도 전에, 정신이 혼미해진다.
무식한 악력이 목을 조르고 있는데 지금까지 나름 정신을 차리고 있었던 것이 오히려 대단할 정도였다.
마음 같아서는 나 자신을 칭찬하고 싶지만, 지금 기절하면 큰일 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저, 저 새끼 지금 도끼 집어 든 거지?!'
두 눈을 부릅떴다.
절대 정신을 놓아서는 안 된다! 놓는 순간 죽는다, 분명 죽어!
그러나 의지와는 달리 빌어먹게도 자꾸만 시야가 흐릿해진다.
부들거리는 손에 힘이 빠져나가고, 결국 녀석이 거대한 도끼를 들어 올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기억이 끊기고 말았다.
33. 제국으로(4)
팔을 쥐고 있는 두 손의 힘이 약해지는 것을 느끼며, 이 무리의 리더 역할을 맡은 사내가 한심한 눈으로 데온을 보았다.
긴장한 것이 민망할 정도로 약하다. 정녕 이자가 '영웅'이 맞긴 한 건지. 세간의 소문이 모두 헛소문이었단 말인가.
내심 실망하긴 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쉽고 빠르게 일을 끝마칠 수 있으니 나쁘지는 않다. 아니 객관적으로 따지면 오히려 좋다.
"잘 가라, 가짜 영웅."
들어 올린 도끼를 녀석의 머리를 향해 내리치는데, 한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시끄러운 목소리. 멈칫한 사내가 소란의 원인을 찾아 고개를 들었다.
"찾았다! 좀 위험해 보이는데?"
"오오, 역시 폐하! 이걸 예견하시다니!"
"대자아아앙! 무사하십니까!!"
"아니, 잠깐만! 대장 기절한 것 같은데?"
"저거 저러다 죽는 거 아니냐?"
"뭣들 해! 당장 대장부터 구하지 않고!"
"대장이 아니라 백작님이다 등신들아!"
의식의 흐름을 따라 흘러가는 대화.
듣는 사람의 혼을 빼놓는 대화에 잠시 굳어버린 사내가 서둘러 상황 파악에 나섰다.
저들은 누구인가. 데온 하르트를 구출하려 하고 있으니 일단 아군은 아니다. 데온 하르트를 '대장'이라 부를만한 또라이 집단이 뭐가 있었지?
답은 금방 나왔다.
"당장 저들을 막아! 폭탄을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
사내가 다급히 외쳤다.
살인귀 기사단이다! 8년 전쟁 당시 데온 하르트가 이끌던 선봉대!
그 선봉대가 공을 인정받아 기사단으로 승격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만큼 아주 잘 알고 있다. 저들이 제국의 치안 중에서도 혁명군을 전문으로 담당하고 있다는 것도.
그런데 왜.
"어떻게 알고 여기에...!"
계획이 틀어졌다. 이렇게 된 이상 반드시 데온 하르트를 죽이고 빠르게 물러나야 한다.
저들과 정면으로 맞부딪치면 이쪽이 손해다.
살인귀 기사단의 무서운 점은 실력이 아니라...
"어어? 야, 폭탄이랜다."
"이야, 폭탄을 사용하는 적을 상대로 피를 봐야 한다니. 이거 아무래도 맨정신으론 힘들 것 같은데?"
"약 먹어도 되냐?"
"우리가 허락받을 상대가 어딨어? 대장은 저기 기절해 있고 지금은 리엔 경, 아니 단장도 없는데."
"하긴, 그렇지?"
장난스레 키득거린 녀석이 언제 꺼냈는지 모를 약을 입에 던져 넣는다. 다른 이들도 여기저기서 약을 꺼내 입에 넣었다.
얼핏,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어쩌겠어. 살아야 하는데."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눈빛이 탁해지고 그 자리에 광기가 들어찬다. 붉게 충혈된 흰자위가 유독 소름 끼친다. 입가에는 섬뜩한 미소가 걸렸다.
"전부 죽여!"
"알지? 깔끔하게 죽이지 마!"
"흐하핫! 알 게 뭐야! 일단 즐겨!"
"미친놈아! 배운 대로 해, 배운 대로! 일단 팔다리부터 끊어 놔!"
...그래, 저들의 무서운 점은 잔혹한 손속이다. 주인을 쏙 빼닮아 잔혹하기 짝이 없는 손속.
빨리 데온 하르트부터 죽여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도끼를 재차 들어 올리는데, 어느 순간 힘이 빠져있던 손아귀에 힘이 들어왔다.
단순히 그뿐이었다면 멈추지 않았겠지만....
따끔.
녀석의 손톱이 살을 파고들고 있었기에.
시선을 내리자 하얀 복면 위, 드러난 붉은 눈이 씨익 웃음을 짓는다.
조금 전과는 다른, 소름 끼치는 눈웃음. 섬뜩한 기분에 서둘러 도끼를 내려치려는데, 갑자기 팔에서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다.
"아악! 이 미친 새끼가!!"
손톱을 세워 팔에 깊숙이 박아 넣고, 그대로 긁어내렸다.
단순히 살갗이 벗겨진 것이 아닌 마치 조각칼로 파내기라도 한듯 주욱 떨어져 나간 살점.
어찌나 깊었던지, 살점이 길게 떨어져 나간 자리가 움푹 파여 피의 골짜기를 이루고 있었다.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반사적으로 녀석을 집어 던졌다.
마차 벽에 그가 부딪치든 말든 밀려오는 고통에 사내는 도끼도 놓고 제 팔뚝을 감싸 쥐었다. 어느새 손끝에는 팔에서부터 흘러내린 피가 맺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 틈을 놓칠 데온이 아니었다.
"쿨럭."
하얀 복면이 붉게 물든다. 피가 섞인 기침을 토하면서도 그는 빠르게 몸을 날려 녀석이 떨어뜨린 도끼를 집어 들었다.
녀석이 방비할 틈도 없이 두 손으로 자루를 잡고 들어 올린 뒤, 체중을 실어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분명 세상에 하얗게 변했을 정도로 목이 졸렸던 데다, 데온 자체도 힘이 없기에 거의 도끼의 무게에 의존해 내리쳤을 뿐이건만, 얼마나 무거웠으면─
──한 방.
단 한 방에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녀석의 머리가 깨져 버렸다.
그럼에도 데온은 만족하지 않았다.
'...여기서 멈추면 안 돼.'
재차 도끼가 올라간다. 노리는 곳은 이미 깨져 버린 녀석의 머리.
'이미 죽었잖아. 더 해야 할까?'
'아니야. 더 해야 돼. 본보기를 보여야 누구도 덤벼들 엄두를 못 내지. 나는 약하니까.'
'하지만....'
팔이 부들부들 떨린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선에 선 붉은 눈동자가 쉼 없이 흔들린다.
눈빛이 또렷해졌다가 흐릿해지기를 반복한 것도 잠시, 눈에 머물고 있던 망설임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온전히 차지한 것은 다름 아닌 혼탁한 광기였다.
"엇, 대장!"
"대장...?"
데온이 홀린 듯 도끼를 들어 올렸다. 아니, 홀렸다기보다는 미쳤다고 보는 것이 옳으리라.
정신 줄을 놓은 사람처럼, 그가 장작을 패듯 쉼 없이 도끼를 들어 올렸다가 무차별적으로 내려찍기 시작했다.
콰직. 콱. 콱. 푸욱.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린다. 피가 튀고,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점차 시선이 모이고 주변 소음이 잦아드는 와중에도, 그의 행동은 거침없었다. 오히려 보란 듯이 눈을 휘어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흐."
도끼가 무겁다. 팔이 후들거린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본보기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을지 알고 있으니까.
그가 멈춘 것은 도끼가 너무 무거워 더 이상 들어 올려지지 않을 때였다.
시선을 내려 눈앞의 사람 크기만 한 너덜너덜한 핏덩이를 확인했다.
도끼를 든 손을 축 늘어뜨린 뒤, 그것을 발로 걷어차 마차 밖으로 밀어냈다.
쿵!
"...."
"...."
시신이 떨어지고, 정적이 찾아왔다.
적군 아군 할 것 없이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는 끔찍한 무언가와 피투성이의 자신, 그리고 손에 들린 피 묻은 도끼를 오가는 시선을 느끼며 데온은 곱게 눈을 접었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눈 사이로 새빨간 눈동자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내가 평화로운 삶에 찌들긴 했던 모양이야."
"그게 무슨,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몬스터 토벌을 다녀왔다는 사람이...."
"쉿, 조용히 해. 넌 눈치도 없냐."
신나게 혁명군을 난도질하던 기사단원 한 명이 동료의 손에 입이 막혀 끌려갔다.
실로 우스운 장면이었으나 그 누구도 감히 웃을 수 없었다.
아, 한 명 있었다.
데온이 웃었다. 짐짓 유쾌한 시선이 생사를 함께해 왔던 이들을 향했다.
"오랜만이야. 폐하께선 잘 대해 주셨나?"
"어휴, 말도 마십쇼. 밥값은 하라면서 어찌나 굴리시던지."
"자폭하려는 혁명군을 막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십니까."
슬그머니 폭탄을 빼 드는 혁명군의 손을 잘라내며 단원이 투덜거렸다.
데구르르 바닥을 구르는 폭탄을 재빨리 집어 들어 수거한 또 다른 단원이 주위를 둘러보며 한숨 섞인 목소리를 내었다.
"그나저나 대장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허접한 놈들만 데리고 이동할 생각을 하셨습니까?"
"돌아오자마자 이동한 거라 습격이 없을 줄 알았지. 너희야말로 도대체 어떻게 알고 여길 온 거지?"
"이미 폐하께선 다 알고 계시던걸요. 저희보고 제 주인 안전하게 모셔 오라 명하셨습니다."
"폐하께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군. 그건 그렇고...."
입은 딴소리를 하면서도 몸은 부지런히 혁명군의 목을 따는 살인귀 기사단원들을 훑어본 붉은 눈이 호위들을 향했다.
찔리는 것이 많은 호위들이 흠칫하며 시선을 피한다.
뒤늦게 서둘러 혁명군을 정리하며 그들은 밀려오는 후회를 막을 수 없었다.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이게 백작저의 기사라니."
모멸감을 주는 발언이었으나 감히 반박할 수 없었다.
확실히 무뎌졌으니까.
무려 반년. 짧다면 짧지만 길다면 긴 그 시간 동안 너무도 평화롭지 않았던가. 하루 종일 훈련만 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 탓에 나태해진 모양이다.
그런 나머지 잠시 잊고 말았다.
데온 하르트 명예 백작이 얼마나 많은 적을 두고 있는지.
"아무리 정신이 없다지만, 이렇게 덩치 큰 놈이 내게 접근하는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그걸 호위라고 할 수 있나?"
"...."
"호위부터 바꾸든가 해야지."
호위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하르트 백작저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단순히 직업만을 잃는 것이 아니다.
운이 좋으면 아무 일 없이 끝날 수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운이 좋은 경우일 뿐. 죽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딱히 하르트 백작이 무언가를 한다거나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황제였다.
백작저에서 쫓겨난 이들을 가만두지 않으니....
듣기로는 보안을 위해서라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전 사용인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배, 백작님...."
때문에 애처롭게 데온을 불러보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의 데온 하르트는 평소의 데온 하르트와는 달랐다.
온건한 성격이 아닌 소문으로만 듣던 선봉장으로서의 과격한 모습.
희게 질린 호위들을 무시한 데온이 적막감이 가득한 공간을 가로질러 근처에 나뒹구는 단검을 집어 든다.
그는 단검의 날이 적들에게 향하도록 겨누며, 짐짓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 해? 아직 적이 남았잖아. 마저 정리해야지."
"...."
"어서 죽여."
[적들에게 공포를]
붉게 물든 머리카락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진다.
이마에서부터 눈가를 타고 흘러내리는 비릿한 액체를 대충 닦아 낸 그가, 유쾌한 웃음과 함께 단검을 쥐고 적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
수없이 화려한 마차들이 즐비한 황궁 앞.
평소라면 쉽게 볼 수 없는 마차들이었으나, 지금으로서는 지긋지긋하게 봐 버렸기에 별 감흥 없이 그것들을 훑던 문지기의 눈이 어딘가를 향하더니 이내 무지막지하게 커졌다.
붉은 칠을 한 마차라니, 새로운 스타일을 시도한 건가?
유행을 선도하려는 목적이었다면 실패가 분명하다. 저건 마치 피 같지 않...
'...비릿한 냄새?'
진짜 피잖아?!
옆에 서 있던 동료 역시 그걸 눈치챘는지 황급히 창을 겨누었다.
마찬가지로 창을 겨눈 문지기가 달달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꺼냈다.
"이, 이, 이이이이곳은 황궁입니다. 초, 초대장이 어, 없으면 들어가지 못...."
"비켜."
붉은 마차 탓에 존재감이 묻혀 있는 줄도 몰랐던 한 남자가 나섰다.
...보호색인가. 왜 마차랑 색이 똑같은 거지.
이제 보니 다른 사람들도 잔뜩 있었다. 호위인지 뭐 하는 인간들인지 알 수 없는 이들이 하나같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붉게 물들인 채 눈을 형형히 빛내고 있었다.
"이 마차에 계신 분이 누구신지 알아?"
"누, 누구신지...."
"우리 대장이시다!"
"...?"
그러니까 너희 대장이 누구신데요.
문지기의 표정이 멍해졌다.
대놓고 다시 물어보기에는 상대가 너무 무섭고, 그렇다고 이렇게 수상한 무리를 그냥 통과시킬 수도 없어 눈만 불안하게 굴리는데, 구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말하면 누가 알아먹나."
"아."
모든 이들의 시선이 문도 없는 마차에서 내린 붉은 복장에 붉은 머리, 붉은 눈을 한 사내를 향했다.
그리고 문지기는 입을 쩍 벌린 채 굳어버렸다.
'저 사람이 제일 심하잖아! 피로 목욕이라도 했나?!'
절대 못 들여보낸다. 저런 꼴이면 누구라도 안 돼!
제국에서 공식으로 인정한 영웅도 저런 꼴이면 폐하께서 직접 허락하시지 않는 한 절대 못 들어간다.
"데온 하르트다."
...데온 하르트? 익숙한 이름인데. 누구였지?
아.
'뱀파이어 백작!'
그렇다면 저 형형한 기색의 무리들은 그 유명한 살인귀 기사단이리라.
제국의 영웅이라는 사실은 뒤늦게 떠올랐다.
8년 전쟁 때의 그의 활약이 너무도 컸기에, '데온 하르트' 하면 떠오르는 것은 일관되게도 부정적인 것들이었다.
'피에 미친 선봉장', '살인귀 부대의 주인', 명예 백작의 지위를 받은 뒤로는 '뱀파이어 백작' 까지.
그런데 아무래도 지금 보니 뱀파이어라는 말이 맞는 모양이다.
마차 밖은 약과였다. 마차 안에서 사람 하나 잡아먹기라도 한 건지, 문이 있어야 할 뻥 뚫린 곳으로 피가 가득한 내부가 고스란히 비쳤다.
심지어 백작 자체도 온몸이 피에 젖어 있으니!
'드, 들여보내야 하나?'
폐하께서 언제, 어떤 모습으로든 방문해도 좋다고 직접 허락하신 영웅. 하필이면 그게 바로 눈앞에 있는 데온 하르트 명예 백작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런 모습인데?'
심지어 오늘은 연회가 열리는 날이란 말이다!
그때, 피에 젖은 머리를 대충 쓸어올린 데온 하르트가 느릿한 음성을 뱉었다.
"폐하께서는 어디에 계시지?"
생존 본능 탓인지, 대답은 즉각 튀어나왔다.
"여, 연회장에 계십니다."
"연회장?"
설마 몰랐던 걸까.
그런 의문도 잠시, 문지기는 저를 보는 붉은 눈을 마주하고는 기겁하며 대답했다.
"예! 새로운 영웅의 탄생과 데뷔전 성공을 축하하는 연회가...."
"...아하."
"...."
말은 거기까지 나왔다.
심상치 않은 음성에 문지기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34. 황제의 가장 강력한 검(1)
그러나 이미 들은 건 다 들어 버린 상태.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 그러고 보니 영웅이 되었다 했지...."
"...."
"하, 하하하! 아하하하하하!!"
이 무슨 운이란 말인가. 웃음이 나왔다.
새로운 영웅이 등장했단 소식을 알리며 경계선으로 가라 했을 때, 데온은 마왕이 했던 말을 기억한다.
[알다시피 영웅과 마족은 상성이 안 좋잖아?]
"...."
웃음이 뚝 멎었다.
"친애하는 나의 형님께선."
"...."
"기어이 용사의 파편마저 손에 넣으신 모양이야."
그가 문 안으로 성큼 발을 들였다.
그의 지위와 폐하의 명, 더해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압박감에 문지기는 막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문지기의 눈이 이제 뭘 해야 하는지 저들끼리 속닥이던 살인귀 기사단원들의 눈과 마주쳤다.
"...."
"...."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
저벅.
걸음이 내디뎌질 때마다 깨끗하던 황궁 복도에 붉은 발자국이 찍힌다. 발자국을 꾸미기라도 하듯 그 주위에 핏방울이 어지러이 흩뿌려졌다.
연회장의 문을 지키던 병사가 도저히 정상이라 볼 수 없는 인물의 등장에 화들짝 놀라 창을 겨누려다가 그의 정체를 깨닫고는 황급히 물러섰다.
데온 하르트 명예 백작.
어째서 이런 꼴로, 하필 연회가 열리는 날 온 것인지.
어느덧 문 앞에 멈춰선 그가 자꾸만 시야를 가리는 붉은 액체를 닦아내며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문 열어."
"...."
열어 줘도 되는 걸까.
고민은 길지 않았으나, 하르트 백작은 그 짧은 시간마저 기다려 주지 않았다.
성큼 문에 다가선 그가 두 손으로 커다란 문을 밀어 버린다.
문이 열리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 안에 들어서는 데온 하르트를 보던 병사들은 이내 문에 찍힌 붉은 손자국을 확인하고는 얼빠진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봤다.
"내가 지금... 꿈을 꾸나...."
"현실 도피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는데, 이거 현실이야 이 친구야...."
"...소문대로 정말 살벌하네. 그런데 왜 저렇게 기분이 나빠 보이지?"
"이 연회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한 번 생각해 봐."
"아."
크루엘 하르트.
안에 들어선 데온은 잠시 멈춰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그가 들어왔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 평화로운 연회장. 아니, 근처에서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린 것을 보니 한두 명 정도는 눈치챈 모양이다.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평생이 가도 말 한마디 섞을까 말까 한 인물들일 뿐. 신경 써야 할 인물은 단 하나이니까.
'황제는....'
저기에.
단상 위, 화려한 의자에 앉아 무료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한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금발과 금안. 피의 황제라는 것이 의심될 정도로 젊고 아름다운 외모.
그의 나이가 이제 겨우 스물여덟 이랬던가.
따위의 잡생각을 하며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연회장 가운데를 가로질러, 황제가 있는 곳까지 일직선으로.
붉은 발자국이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똑바로 찍힌다.
그를 발견한 한 영애가 작은 비명을 내지르는 것을 시작으로, 연회장 내의 시선들이 점차 그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어머."
"세상에. 저게 무슨...."
"어찌 저리도 무례할 수가."
무례함에 대한 분노와 숨길 수 없는 공포.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담긴 시선들이 찌를 듯이 데온을 향하는 가운데, 흥미를 담은 시선이 둘 있었다.
'결국 살아서 왔군요.'
전투의 흔적을 여실히 보이는 데온 하르트를 작은 미소를 띤 채 훑어보는 공작 스타베 일루스터와,
'기사단을 마중 보내길 잘했군.'
황제, 에도아르도 데세르트. 그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고 데온 하르트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 황제와 공작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나 스치듯 그를 지나쳐 시선을 제자리로 돌린 황제가 다시 데온 하르트를 눈에 담았다.
공작의 시선 역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사라진 뒤였다.
금세 이곳까지 도달한 데온 하르트가 붉게 물든 복면을 내리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덩달아 머리카락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피가 똑 떨어졌다.
"제국에 광명을. 신 데온 하르트가 현재의 제국을 뵙습니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간간이 떨어지는 물방울, 아니 핏방울 소리뿐.
데온 하르트의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를 보던 황제가 날카로운 눈을 빛내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데온 하르트."
"예, 폐하."
"이 무슨 무례지?"
다른 누구도 아닌 무려 황제의 말이다. 연회장의 모두가 숨을 죽였다.
공기마저 얼어붙을 듯한 분위기 속에서, 데온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오는 길에 습격이 있었습니다."
"습격이라...."
이건 하나의 연극이다.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황제는 그 소식을 처음 듣는다는 듯 눈매를 찌푸렸다.
그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느릿하게 중얼거린다. 천천히 흘러나오는 목소리에는 압축된 살기가 꾹꾹 눌러 담겨 있었다.
"백작저에 세작이 있는 모양이군."
"송구합니다."
"원한다면 짐이 처리할 수도 있는데, 어찌하겠나?"
"폐하께서 굳이 손을 더럽히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흐음, 그렇다면야."
황제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데온 하르트를 보며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짐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겠지."
"...."
"짐 역시 그대에게 들을 말이 많아. 긴 대화가 될 것 같으니 자리를 옮기도록 하지."
***
금방 마련된 응접실에 앉은 황제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데온을 눈에 담았다.
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인물이다. 당장 붙은 이명부터가 극과 극을 오가는 것들뿐이니.
'뱀파이어 백작이랬나.'
아주 잘 어울리는 별명이다.
창백한 피부와 붉은 눈동자. 심지어 싸웠다 하면 피에 미치는 태도까지 보이니, 이게 뱀파이어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뿐만이 아니다.
'피에 미친 선봉장'과 '살인귀 부대의 주인', 그와 반대되는 '제국의 영웅'과 '마지막 용사의 동료'라는 칭호까지.
더해서....
'마왕을 막아서고 용사의 시신을 수습한 자.'
사실상 이것 때문에 그에게 영웅이란 칭호를 내렸더랬다.
영웅은 용사의 파편을 가진 이들만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용사의 파편을 가졌다는 것은 가산점의 역할만 할 뿐, 중요한 것은 '얼마만큼의 실력과 성과를 보였느냐'다.
그런 의미에서 데온 하르트는 최고였다.
8년 전쟁에서 그는 선봉장으로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성과를 일궈 냈다.
용사의 동료로서 길을 떠났을 때는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던 용사의 시신을 수습하는 일을 해내기도 했다.
마왕에게 패배한 용사는 그 육신마저 편히 쉬지 못한다.
사지가 잘리고, 몸뚱이는 마물에게 먹이로 던져지며, 머리는 바늘과 실로 억지로 웃는 얼굴을 만든 뒤 제국과 마계의 경계선에 던져진다.
이번 대의 용사도 데온 하르트가 구해 내지 못했더라면 필시 그렇게 됐으리라.
'실로 대단한 업적이지만... 그 대가로 마왕의 저주를 받아 몸이 약해졌지.'
시신이라는 짐을 짊어지고 무려 마왕을 상대해야 하는 일인데, 아무리 몸을 빼는 일이라 해도 쉬울 리가 없었다.
결국 데온 하르트는 용사의 시신을 수습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스스로의 몸을 지키는 것은 실패했다.
몸을 좀먹어 들어가는 마왕의 저주 탓에 시도 때도 없이 피를 토하고, 별것 아닌 충격에도 몸에 큰 부담이 간다.
인재를 아끼는 황제로서는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저주를 풀 방법은 찾았는가?"
그렇기에 그는 저주를 풀 방법을 찾고자 마왕성에 들어가겠다는 데온 하르트를 막을 수 없었다.
오히려 이를 기회로 만들어 그를 첩자로 써먹고자 했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마왕의 상태는?"
"평소와 다를 것 없습니다."
황제가 앞에 마련된 찻잔을 들어 올리며 느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제 내게 할 말을 해 보도록 하지. 오래 기다리지 않았나."
"기사단을 마중 보내 주신 것에 감사를...."
"그런 것 말고."
"...마왕성에 침입자가 있었습니다."
원하던 답이 아닌 듯 황제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영웅 후보를 말하는 건가. 별거 아니었다. 용사의 파편을 지녔다는 것 하나만 믿고 날뛴 어리석은 자였지."
"역시 죄를 지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죽으라 보내신 겁니까."
"그래. 가던 길에 죽을 줄 알았고, 용케 살아서 들어간다 하더라도 잡힐 것이라 생각했다. 더해서 그대가 위험을 감수해 가며 녀석을 구할 것 같지도 않았으니. 짐의 말이 틀렸는가?"
"...아닙니다."
침입자는 감옥에 갇혔고, 처분 권한은 마왕에게 넘어갔다.
데온은 딱 한 번 그를 본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정말 그것 외에는 할 말이 없나?"
"...."
"0군단장이 최전방에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송구합니다. 거절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아니, 그거 말고. 본 것이 있을 텐데."
"...."
데온 하르트의 고개가 올라갔다. 온전한 얼굴이 드러나고, 붉은 눈이 황제의 금안을 똑바로 마주한다.
황제는 그 시선을 여유롭게 받아치며 나올 말을 기다렸다.
이윽고, 기다리던 주제가 튀어나왔다.
"크루엘."
"...."
"그자를 어째서 영웅 자리에 올리신 겁니까?"
붉은 눈동자에는 드물게도 분노가 어려 있었다.
데온은 무릎 위에 올려 둔 주먹을 꾹 움켜쥐며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서도 아시잖습니까."
크루엘 하르트.
살아 있는 한, 절대 잊지 못할 이름.
"제게 있어서 그를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라는 것을."
그는 데온을 제외한 하르트가의 유일한 생존자다.
...이렇게 설명하면 이해를 하지 못할 테니 다시 말하겠다.
──크루엘 하르트는 데온 하르트의 손에서 살아남은 하르트가의 유일한 생존자다.
***
몬스터 같이 생긴 혁명군에게 목이 졸리고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더니... 눈앞에 황제가 있었다!
어찌나 놀랐던지, 순간 패닉에 빠져 벌떡 일어설 뻔했다.
그것도 무려 황제 앞에서!
'시부럴 뭐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빠져나가려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열심히 눈을 굴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곳은 연회장.
나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황제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고, 어째서인지 자꾸만 눈앞에 붉은 액체가 뚝뚝 떨어지고 있다. 그리고 몸 전체가 끈적끈적하고 비릿한 철 냄새가 나는 것이....
'잠깐, 내 몸 상태 왜 이래?!'
어쩐지 온몸이 욱신거린다 했더니만, 뭔 일이 터졌던 모양이다. 깔끔하던 흰 제복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누가 머리 위에서 피를 들이붓기라도 한 건지, 어디서 피가 튄 수준이 아니라 아예 푹 젖어서 짜면 피가 주르륵 나올 정도.
눈앞에 떨어지는 피가 바로 머리카락 끝에 매달려 있던 것이었다는 것까지 파악한 나는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도 한 시녀를 떠올렸다.
'병약한 귀공자' 이미지를 내세워 세간에 알려진 내 이미지의 전환을 꾀한 한 시녀를.
'...병약?'
적당히 피가 묻어 있었다면 '병약해서 피를 토했나 보구나, 하하하.' 하며 넘어갈 수 있었겠지만, 이건 아예 피범벅이다. 마치 괴담 속에서나 나올 법한 모습.
이건 병약이 아니라 병마(病魔)다 병마.
지금 내 꼴은 악마라 해도 믿어질 정도로 끔찍했다.
이런 모습으로 황제를 보러 왔다 이거지. 문을 지키던 병사들은 도대체 안 막고 뭐 한 거냐.
'썩을 놈들. 좀 말려 줄 것이지.'
아니, 그것보다 그 시녀에게 좀 미안해진다.
아무래도 나름 고심해서 골랐던 옷 같은데. 심지어 공들여서 정리해준 머리마저 엉망이 되고 말았으니.
이름 모를 시녀에게 속으로 사과를 건네며 나는 무릎을 꿇은 자세를 그대로 유지했다.
상황 파악이 확실하게 안 됐을 때는, 괜히 쓸데없는 행동을 하는 것보다 가만히 있는 것이 최고다.
그런데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데온 하르트."
"예, 폐하."
"이 무슨 무례지?"
황제가 무시무시한 말을 내뱉었다.
나는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기억이 안 난다. 황제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난 건지 알 수 있는 방법도 없다. 그렇다고 기억을 떠올릴 시간이 넉넉하게 주어진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망했다.
단지 말뿐이건만 목 앞에 칼이 드리워진 기분이다.
목을 만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나는 장렬하게...
...정신을 놓았다.
35. 황제의 가장 강력한 검(2)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황제와 독대를 하고 있었다.
아니, 다행스럽게도 이미 끝난 모양이다. 황제는 다 비운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황제가 일어나는데 감히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 덩달아 의자를 밀고 일어나자 그가 잠시 서서 나를 바라봤다.
"저쪽에서 여러모로 신경 쓸 일도 많았을 텐데, 스트레스도 풀 겸 연회에 참여하는 것은 어떻겠나. 물론 강요할 생각은 없으니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
뭔진 모르겠다만 다행히도 위기는 넘긴 듯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멀쩡히 살아서 황제와 독대하고 있을 리가 없을 테니까.
심지어 이렇게 배려하는 듯한 제안까지! 강요할 생각이 없다지만, 일이 어떻게 해결됐는지, 앙금이 남았는지 다 풀린 건지 알 수 없는 나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닙니다. 참여하겠습니다."
원래 윗사람들의 '싫으면 안 해도 돼'는 '싫어도 반드시 해'라는 뜻이다. 여기서 눈치 없이 거절했다간 내 목숨이 어떻게 될지는 안 봐도 뻔할 터.
아니나 다를까, 제대로 된 선택을 한 건지 황제가 보일 듯 말 듯 하게 입꼬리를 올린다.
그는 대놓고 날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미미한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모습으로?"
"...아."
"어쩔 수 없군. 옷을 준비해 줄 테니 씻고 연회에 참여하도록. 시녀장에게 말해두겠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내 감사 인사에 대충 고개를 끄덕인 그가, 더 이상 볼일이 없다는 듯 돌아선다.
그러더니 몇 발짝 떼기도 전에 뭔가 생각난 듯 재차 돌아섰다.
"혹시 그 옷, 중요한 옷인가?"
"...예?"
아차, 황제의 말에 되묻는 것은 엄청난 실례지.
급히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 불쾌하진 않았는지 변함없는 톤의 목소리가 설명을 위해 친절히 뒤따랐다.
"버리기 아까운 옷이냐 이 말이다."
"아...."
음 글쎄, 나는 옷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이게 얼마짜리인지도 모르니 함부로 말하기도 뭣하다.
그래서 대신 이곳에 오기 전 열심히 옷을 골라 주던 시녀들을 떠올렸다.
열띤 토론을 하며 각자 옷을 들이밀던 모습들에 더해, 눈까지 충혈되어가며 잔뜩 집중해 꾸미던 모습 역시.
그런 주제에 연회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죄다 망쳐 놓았으니.
'아마 원망하지 않을까?'
원망하진 않더라도 상당히 섭섭해하리라.
그러니 최소한 옷을 버리지 않는 편이 좋겠지. 물론 지금 꼴을 봐서는 버리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다만....
그래도 황제가 물은 것은 '버리기 아까운 옷인지'뿐이었기에 난 잠시 망설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버리기에는... 조금 아깝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애매하군. 어쨌든 이해했다."
"예."
...근데 잠깐, 이해했다고? 뭘?
미련 없이 돌아선 황제가 응접실을 나간다. 졸지에 홀로 남아 버린 나는 생각도 정리할 겸 테이블 앞 의자에 다시 앉았다.
그러나 생각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백작님."
응접실에 시녀들이 우르르 밀고 들어왔으니까.
무슨 기세가 거의 잘 훈련된 군단 수준이다.
내심 흠칫하며 뭐냐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자, 한 시녀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시녀장 벨라라고 합니다. 연회에 참여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날 훑는 시선들이 무섭다. 기분 탓인지 내가 앉았던 의자를 보는 저들의 시선이 순간이지만 싸늘해진 것 같기도 했다.
설마 내게 뭔 짓을 하겠나 싶지만....
"일단... 목욕부터 해야겠군요. 이리로 오시지요."
"네."
무서워...!
말은 정중하지만 행동은 단호하다. 나는 나를 포위한 시녀들 가운데에서 그들의 걸음에 맞춰 쭈뼛쭈뼛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어진 일련의 일들은 이전에 겪었던 백작저의 사용인들은 귀여워 보일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욕탕에 도착하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에 의해 옷이 벗겨지고, 강제로 씻겨...지기 전에 의원이 달려왔다.
그게, 내 몸 전체에 상처가 있었거든. 피멍과 피딱지 등의 나도 모르는 온갖 상처가.
심지어 진찰해 보니 내상까지 입었단다.
"급한 것은 내상입니다. 이건 거의 마차에 충돌한 수준입니다만, 어디 절벽에서 떨어지기라도 하셨습니까?"
절벽에서 떨어진 적은 확실히 없고, 마차와의 충돌은....
분명 내 기억에서는 없는데, 어째 찝찝하다.
뭐지. 내가 마차에 직접 몸을 날리기라도 했나? 아니면 누가 날 마차에 집어 던진 건가?
아무튼 일분일초가 급한 이곳 사용인들은 내게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고 치료가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나를 씻기기 시작했다.
얼마나 급하게 굴었느냐 하면, 시간이 없다며 몸을 불릴 틈도 주지 않았을 정도로.
곧바로 물을 끼얹어 피를 씻어 낸 뒤, 내 몸 여기저기를 싹싹 문지르는데....
'두 번은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어....'
다음번에 황제가 또 물으면, 그때는 무언의 압박이고 나발이고 바로 거절하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반쯤 넋을 놓은 채 그들의 손에 질질 끌려 어느 방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본 것은 다름 아닌 분명 버릴 수밖에 없을 거라 판단되었던 내 옷.
아주 말끔한 상태로 곱게 개여 놓여 있는 그것을 본 순간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분명 피범벅이었다. 버리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을 정도로.
어찌어찌 말끔하게 빨았다 하더라도 말리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텐데.
'마법? 마법인가? 아닌데. 인간은 마법을 못 쓰는데.... 그렇다면 주술?'
주술로 옷을 빨리 말리는 것이 가능했었나?
주술은 마족들의 마법에 대항하기 위해 탄생한 인간들의 전유물이다.
마법이 세계의 규칙을 어긴다면, 주술은 대가를 바치고 세계의 규칙을 살짝 비틀어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사용하는 것.
주술사가 희귀한 만큼 주술에 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기에 나는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내 속도 모르고, 시녀들은 옷을 건네며 빨리 입고 나오라고 등을 떠밀고만 있고....
'...그래, 아무렴 어때. 황제가 내어 주는 옷보다는 내 옷이 훨 낫지.'
부담스럽지도 않고.
이때의 나는 몰랐다. 내가 씻는 사이 수도의 모든 옷가게의 디자이너들이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황궁에 끌려왔다는 것을.
그리고 나갈 땐 일주일은 밤을 새운 사람처럼 하나같이 퀭한 얼굴로 터덜터덜 나갔다는 것을.
백여 명은 되는 사람들이 전부 퀭한 얼굴로 비척비척 황궁을 빠져나간 것을 본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는 여담 역시 이때는 듣지 못했다.
[30분이다. 30분 내로 이것과 똑같이 만들도록.]
[불가능하다 했나?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정녕 불가능하다고?]
안 되면 되게 하라.
이것이 황제가 틈만 나면 하는 말이라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
분명 소동이 있었음에도 연회장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금세 평화를 되찾았다.
바닥에 선명하게 찍혀 있던 붉은 발자국과 핏방울은 시종들이 빠르게 닦았고, 음악은 다시 연주되기 시작했으며,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소동이 있기 전과 다를 바 없는 풍경.
그러나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수다를 떠는 이들의 시선이 하나같이 어느 한곳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시선 끝에는 말끔한 흰 제복을 입은 하얀 머리칼의 사내가 근처 의자에 앉아 턱을 괸 채 지루하다는 듯 나른하게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겉보기엔 그저 어느 한 가문의 귀공자일 뿐이지만, 그의 실체를 알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근처에 다가가지도 못하고 그저 힐긋힐긋 시선만 둘 수밖에 없었다.
"다크서클이 사라졌네요. 마지막으로 봤을 땐 눈 밑에 그늘이 가득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몬스터 토벌을 다녀왔다고 들었는데, 피를 봐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역시 뱀파이어라는 소문이 사실인 걸까요?"
"폐하께서 그리 두둔하시는 걸 보면 맞지 않을까 싶네요. 그렇지 않고서야 그에 대한 정보를 꽁꽁 숨기고 있을 필요가 없을 테니...."
데온 하르트 명예 백작.
8년 전쟁에서 선봉장으로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용사의 동료로서 그의 시신을 수습한 전무후무한 사내.
사실 황제가 단승 작위인 '명예 백작'이 아닌 그 이상의 지위를 내리려 했으나 본인이 거절했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 온갖 소문이 무성한 그는 사교계에서 좋은 대화 주제였다.
특히 유독 자주 언급되는 주제 중 하나는....
"그렇다면 하르트가의 멸문 역시 그가...."
"쉿, 목소리 낮추세요."
아무도 사건의 전말을 모르는 하르트가 멸문 사건.
대대로 황가에 충성을 다해온 하르트가가 어느 날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사건은 귀족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사건의 전말은 모르지만, 그렇다고 추측까지 못 하는 것은 아니다. 귀족들은 드러난 모든 정보를 총합해 제법 그럴싸한 가설을 내세우고 있었다.
이를테면 '데온 하르트와 황제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와 같은.
근거는 충분했다.
대대로 '데세르트'의 피를 아주 잘 따랐던 개가 죽어 버렸음에도 황제는 침묵했으니까.
하르트가는 충성스러운 가문이다. 심지어 남작가나 자작가도 아닌 무려 백작가였고.
그런 가문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는데 침묵한다? 이건 누가 봐도 수상했다.
"애초에 인재를 아끼는 폐하께서 고작 명예 백작 자리만을 주신 것부터가...."
"네, 수상했죠. 공식 영웅으로 인정하는 것을 미루기까지 하셨고."
8년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데온 하르트는 공을 인정받아 황제와 독대했다.
거기서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 결과 그는 후작 작위를 받은 다른 영웅들과 달리 고작 '명예 백작' 작위를 받았다. 이는 인재를 아끼는 황제의 특성과는 맞지 않았다.
사실 '명예 백작' 작위에 더해 어마어마한 금전적 포상을 받은 것으로도 모자라 그때부터 지금까지 현재 진행형으로 야금야금 영지를 양도받은 탓에 현재 후작에 버금가는 규모의 영지를 갖고 있다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작위'에서 이런 시원찮은 결과가 나왔지 않은가.
그래서 이런 추측이 나왔다.
[데온 하르트는 황제가 제안한 높은 작위를 거절하는 대신 하르트가의 멸문을 원했다.]
데온 하르트는 가문의 돌연변이다.
새하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 더해서 창백한 피부. 어쩌면 정말 어디선가 어린 뱀파이어를 주워 와 키운 것일지도 모른다.
진실은 알 수 없지만, 돌연변이든 뱀파이어든 둘 다 거부감이 드는 것은 마찬가지이니 가문에서도 그를 꺼렸을 테고.
그래서 학대를 가했을 수도 있다.
8년 전쟁에 참전하기 전까지 그는 저택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으니, 이런 추측이 마냥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복수를 위해 하르트가를...."
"이번 연회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면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다니, 그것참 대단하군요."
"고, 공작님!"
화들짝 놀라 인사를 하는 이들을 향해 손을 내저으며, 스타베 일루스터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뒤에 서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이 연회의 주인공 크루엘 하르트.
한껏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이들을 향해 묵묵히 고개만 숙여 보인 그는 신경 쓰지 않는 듯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이 자리를 떴다.
어색한 침묵이 찾아오려는 찰나, 크루엘을 향한 시선을 돌리듯 손뼉을 두어 번 마주친 스타베 공작이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농담입니다. 사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유명한 이야기잖습니까? 그러니 그리 놀랄 필요는 없어요. 크루엘 경도 이미 다 알고 있을 겁니다."
"...."
그래, 아주 잘 알고 있으리라. 소문에 대한 조사를 도운 이가 다른 누구도 아닌 크루엘이었으니까.
사교계에 몇 번 드나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이야기.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한 공작에게는 흥미 없는 소문이었으나, 수하이자 그 사건의 직접적인 연관자인 크루엘이 의문을 갖고 있어 그를 이용해 사건을 깊게 파헤쳤었다.
36. 명예 백작 데온 하르트(1)
자연스러운 정보 전달을 위한 행동은 사교계의 소문을 좀 더 자세히 풀어 놓은 것과 같은 가설을 내었다.
──모종의 이유로 가문에 원한을 가진 데온 하르트는 다른 모든 이익을 포기하는 대신 하르트가의 멸문을 바랐고, 모처럼 등장한 인재에게 뭐라도 쥐여 주고 싶은 황제는 기어이 명예 백작의 지위와 돈을 안겨 주고 이를 반쯤 수락했다.
물론 그렇게 중대한 결정을 고작 그것만으로 결정지을 수는 없어 내건 조건이 바로 용사의 동료로서 마왕을 물리치는 여정에 참여하는 것이었고.
'공식 영웅으로 인정하는 것 역시 미뤘지.'
별 의미는 없는 행동이지만.
데온 하르트는 이미 8년간의 전쟁을 치르며 영웅이라는 칭호가 붙었다. 황제가 인정을 하든, 하지 않든 그는 이미 영웅인 것이다.
그럼에도 미룬 것은 그가 전쟁 영웅들 중 유일하게 용사의 파편을 지니지 않아서.
'차별이 아니라 혹시라도 그 이유를 들먹이며 반발할 다른 이들의 입을 막기 위해 더 공을 쌓게 한 뒤 주려고 했을 테지.'
용사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데온 하르트는 살아서 돌아오기만 하면 공이 된다.
황제의 속을 알기는 하는 건지, 데온 하르트는 이마저 수락하고 작위를 받기가 무섭게 용사의 동료로서 다시 길을 떠났다.
황제가 대대로 데세르트에게 충성을 다해 온 하르트가와, 혜성처럼 등장해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강한 이미지를 남긴 데온 하르트를 두고 무게를 잰 결과였다.
'보통은 생각할 것도 없이 전자를 택했겠지만, 현 황제는 반정으로 군주의 자리에 올랐으니 저들의 충성을 믿을 수 없었겠지. 그렇기에 무게추가 어느 정도 동일해졌고.'
그만큼 여정의 결과에 따라 황제의 결정 역시 달라졌으리라.
살아 돌아오기만 했어도 황제는 충분히 그를 아꼈을 테지만, 결과적으로 데온 하르트는 용사의 시신을 수습해 오며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였고, 황제는 기꺼이 그의 조건을 수락했다──
─라는 것이 그가 크루엘을 이용하여 온갖 소문과 정보를 긁어모아 조합해 낸 가설이다.
그 가설을 내리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이가 바로 크루엘 하르트였고.
'그때 그의 표정이 어땠더라.'
힐긋 시선을 돌려 한쪽에 앉아 있는 데온 하르트와 그에게 다가가고 있는 크루엘 하르트를 본 스타베가 다시 고개를 돌려 침묵한 채 저를 보고 있는 이들을 향해 싱긋 웃었다.
"그래도 이곳에서는 입을 조심해 줬으면 합니다. 이번 연회의 주인공은 다른 누구도 아닌 하르트가의 사람이니까요."
"예, 예! 실례했습니다!"
***
인생은 원래 혼자 사는 거랬다.
올 때 혼자 왔고, 갈 때도 혼자 갈 테니 굳이 인맥을 만들 필요가 있을까.
...그래, 사실 이런 건 다 헛소리고.
'나도 누군가와 대화 좀 나누고 싶다! 근데 아무도 안 와!'
심지어 다가갔더니 도망가더라 시발....
이쯤 되면 눈치가 없는 사람도 눈치챌 것이다. 지금 난 명백히 모두에게 외면당하고 있었다.
아, 외면은 아니지.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모든 시선이 나를 향했으니까. 다만 다가오지 않고, 내가 다가가도 도망갈 뿐.
'음식이나 구경하자. 맛있어 보이는 게 많네....'
근처 의자에 아무렇게나 앉아 턱을 괴고 가까운 곳에 놓인 디저트를 눈으로 훑었다.
가장 기본적인 쿠키부터 시작해서, 마카롱, 케이크, 푸딩... 오, 저 푸딩 맛있어 보인다. 딸기 푸딩인가?
선명하고도 투명한 붉은색이 한 번쯤은 먹어 보고 싶게 만든다.
'...먹어도 되겠지?'
애초에 먹으라고 둔 것일 테니까.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으로 향하는데,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얼핏 '하르트 백작님' 하고 부르는 것 같았는데.... 에이, 착각이겠지. 목소리가 귀에 익은 것도 착각이리라.
적어도 이곳에선 아무도 내게 다가오지 않는걸.
"하르트 백작님!"
"...어?"
착각이 아니었다! 나를 부르는 이가 있었어!
반가운 마음에 푸딩을 손에 든 채 고개를 돌리자 저쪽에서 이쪽을 향해 척척 걸어오는 한 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큰 보폭으로 순식간에 내 앞에 오더니 가슴에 주먹을 얹고 깍듯이 기사의 예를 취했다.
"리엔 라이너가 백작님께 인사 올립니다."
"리엔 경!"
세상에 이리도 반가울 수가 있나!
리엔 경은 내 휘하의 기사단장이다.
내 휘하에는 한 개의 기사단이 존재하는데, 사실 그건 기사단이라 부를 수 없다. 광견들의 모임일 뿐이지.
'결론이 이상한데?'
...의식이 이상한 곳으로 흘렀는데, 아무튼 내 휘하에 로프티 기사단이라는 이름조차 거지 같은 기사단이 존재한다.
말이 기사단이지, 원래는 8년 전쟁 때 나와 함께 싸웠던 선봉대가 공을 인정받아 기사단으로 승격한 것일 뿐이니 보통의 기사단처럼 반듯한 모습을 떠올리면 곤란하다.
그놈들이 이전엔 '살인귀 부대'라고 불렸다면 이해가 되겠는가.
사실 지금도 '로프티 기사단'이라는 이름 대신 '살인귀 기사단'이라 불리고 있으니 말은 다 한 셈이다.
아무튼, 그런데 어째서 리엔 경을 그리도 반기냐고?
'그녀는 낙하산이니까!'
즉, 8년 전쟁 때 적들을 찢어발기며 미친 듯이 웃던 그놈들과는 다른 아주 정상적인 족속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반갑게 맞이하는 내가 이상했던 모양이다. 고개를 갸웃한 리엔 경이 한층 조심스러운 어조로 운을 뗐다.
"표정이 좋지 않으신데. 혹, 몸이 안 좋으신 겁니까?"
"...아닙니다."
내 표정이 어땠길래.
"그러지 말고 이쪽에 앉으십시오. 쓰러지시기라도 하면 곤란합니다."
친절하게 의자까지 빼 주니 거절할 방도가 없다.
테이블 위에 숟가락과 딸기 푸딩을 슬쩍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화제를 돌릴 생각으로 여전히 내 안색을 살피고 있는 리엔 경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갑자기 웬 연회랍니까?"
"예? 모른 척... 하시는 겁니까?"
"...?"
"역시 농담이시죠? 하하하, 훌륭한 현실 부정이었습니다."
웃으며 박수 치던 리엔 경이 여전히 의문 가득한 내 얼굴을 보더니 점차 표정을 굳혔다.
"설마, 정말... 모르셨습니까?"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내 눈치를 살피며 우물쭈물하더니,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과 함께 천천히 말을 뱉었다.
"새로운 영웅의 탄생과 데뷔전을 축하하는...."
"데온."
리엔 경의 말을 끊고 서늘한 목소리가 훅 들어왔다.
낯설면서도, 더럽게 익숙한 목소리.
기분이 확 나빠져 고개를 돌리자 차갑게만 보이는 단단한 녹색 눈과 눈이 마주쳤다.
...아하.
상황 파악은 끝났다. 리엔 경의 말을 굳이 끝까지 듣지 않아도 얼추 알 수 있었다.
언제나 당당하던 기사가 저리도 대놓고 내 눈치를 살피고 있는데, 눈앞의 기분 나쁜 사내가 이리도 당당히 연회의 주인공이라 티 내고 있는데.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누구신가 했더니."
명백한 적의가 섞인 내 말에도 녹색 눈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게 더욱 짜증이 나 왈칵 인상을 찌푸린 나는 표정도 감출 겸, 순식간에 치솟는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천천히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아마 지금 내 눈에는 숨길 수 없는 살의가 깃들어 있을 것이다.
위험하게 빛나고 있을 눈동자를 이곳에서 고스란히 드러낼 생각은 없어 보란 듯이 환히 눈을 접었다.
"오랜만입니다, 형님."
나와는 다른 녹색 눈, 검은 머리카락.
더 이상 볼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하르트가의 상징.
참으로 오랜만에 마주한 얼굴은, 기억 속 모습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환한 웃음에 당황한 듯 잠시 얼굴을 굳힌 크루엘이 이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랜만이군."
"영웅이 되셨다고요."
"운이 좋았다. 용사의 파편을 얻었지."
"형님께선 이전부터 검에 능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용사의 파편이 아니더라도 언젠간 영웅이 되셨을 테지요. 축하드립니다."
"...전장에서, 0군단장과 맞붙었던 적이 있다."
움찔한 것도 잠시, 내 입가에는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저건 뭔가 짚여서가 아닌, 그냥 말을 돌리는 거다.
가식적인 칭찬과 웃음이 역겨웠던 모양이군. 아니면 검 실력을 칭찬한 것에서 무언가 뜨끔했다던가.
"그래서요?"
"그 자체보다는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져서 고생했었지."
"저런. 그래도 잘 해결되었잖습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이곳에 있을 리 없는 데다, 이런 연회는 애당초 열리지도 않았을 테니.
"너는 역시 사기를 다루는 것에 능하다고 들었다. 네가 있었다면...."
"아하하하, 형님!"
크루엘이 입을 다문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는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보나 마나 내가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고생하진 않았을 거라는 등의 말을 하려 했겠지.
지랄.
"그런 가정은 굳이 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형님과 같이 싸울 리가 없잖습니까?"
같이 싸우는 척하다가 죽이려 든다면 몰라도.
애초에 우리 사이를 잘 아는 황제가 같이 싸우게 붙여 둘 리도 없을 테지만.
"...."
이 와중에도 저 단단한 녹색 눈동자는 깨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깨지기는커녕 흔들림조차 없어 나는 내심 입술을 비죽이며 테이블 위의 푸딩을 숟가락으로 헤집다가 한 스푼 크게 떴다.
이쯤 했으면 알아서 가겠지.
서로 얼굴 보면 기분 상하는 것은 피차일반이니 어서 꺼졌으면 좋겠다.
사실 기분이라면 이미 상할 대로 상해 버렸지만, 여기서 난리를 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푸딩이나 먹고 속을 삭이는 수밖에.
"...몬스터 토벌을 다녀왔다고 들었다."
무슨 이득이 있다고 자꾸 말을 붙이는지 모르겠다.
숟가락을 기울여 위에 얹어져 있던 푸딩을 접시 위에 투둑 떨어뜨리고 귀찮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크루엘이 나를 위아래로 훑으며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다친 곳은 없나?"
"...푸흐─"
아, 이런. 너무 어이가 없는 나머지 그만.
나를 전쟁터에 밀어 넣을 땐 언제고, 이제 와서 걱정하는 척이라니. 뒤늦은 후회라도 하는 것일까.
우습기 짝이 없다.
14살에 불과했던 나를 전쟁터에 밀어 넣은 작자가 누구네였던가. 건강하다 못해 검술도 뛰어난 3살 위의 형을 두고 몸이 약한 나를 전쟁터에 보낸 작자는 누구들이었던가.
그리고, 그런 그들을 그저 방관하고만 있던 자는 누구였는가.
크루엘 하르트.
한때는 사랑해 마지않던 내 친형.
바로 너잖아.
"새삼스럽게 뭘 묻고 그러십니까. 제 한 몸은 제가 잘 간수할 줄 압니다. 이제 와서 신경 쓰는 척하실 필요 없어요. 적어도 형님 앞에선 아주 멀쩡할 테니까."
네 앞에선 다쳐도 티를 내지 않을 거다.
적에게 약점을 드러내는 멍청한 짓을 할 수는 없으니까.
전부는 아니어도 내 말의 의미를 대강 파악했는지 크루엘의 표정이 희미하게 굳어졌다.
그게 제법 유쾌해 나는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 형님께서는 늘 그렇듯 그저 보기만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가 전쟁터에 끌려갈 때 방관했듯이. 그렇게.
"...."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불편한 침묵 속에서 크루엘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고, 나 역시 지지 않고 그의 눈을 마주 노려봤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챈 근처 사람들은 진즉에 거리를 벌린 상태였다.
본의 아니게 상관의 집안싸움을 목격하게 된 리엔 경만이 차마 자리를 피하지도, 그렇다고 말리지도 못하고 나와 크루엘을 번갈아 보고 있을 뿐.
...뭐 합니까, 리엔 경. 빨리 말리지 않고.
'눈 아파 죽겠다.'
자존심상 피하진 못하고 있는데, 벌써 한계인 듯 눈이 시큰거린다.
다시 한번 속으로 리엔 경을 부르는 순간, 나를 보던 크루엘의 시선이 내 어깨 너머를 향했다.
무언가를 본 듯 원래의 무표정으로 돌아오는 얼굴.
리엔 경 역시 어딘가를 눈에 담고는 한껏 경직된 표정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주위의 다른 이들의 시선도 전부 한곳을 향하고 있었다.
'...뭐야?'
의문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뭔진 몰라도 나와 관련된 건 아니겠지.
나와 관련된 거였으면 나를 봤을 테지 저렇게 다른 곳을 보고 있을 필요가 없을 테니까.
대충 신경을 끄고 주위의 시선이 떨어진 틈을 타 크게 뜬 푸딩을 입에 밀어 넣었다.
'아, 딸기가 아니라 체리였네. 어쩐지 색이 좀 많이 빨갛다 했더니만.'
입안에 도는 새콤한 맛과 향이 딱히 나쁘진 않다.
입을 움직여 푸딩을 으깨 삼키려는데, 어디선가.... 그래, 사람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상 깊은 우애로군요."
"...?"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한쪽으로 느슨하게 묶어 내린 보라색 머리카락이었다.
머리카락으로서는 흔치 않은 색. 보라색이 어느 가문의 상징이었지?
아, 일루스터 공작가였지.
...응? 공작가?
"...?!"
진짜 공작이잖아? 스타베 일루스터 공작!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푸딩은 슬쩍 밀어 저 멀리 치워 놓고, 어떻게든 허둥지둥 인사를 올리려 했으나....
'아직 푸딩 못 삼켰는데!'
말을 할 수가 없다.
공작 앞에서 대놓고 우물거리며 뭔가 먹고 있다는 티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냥 삼키기에는 조금 버거운 크기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어떡하지...?'
37. 명예 백작 데온 하르트(2)
일단 최대한 볼이 부풀지 않게 조심히 입에 머금고 있는데, 보통이라면 기분이 상해 돌아섰을 상황에서 공작이 기어이 상냥한 웃음과 함께 인사를 해 왔다.
"이렇게 직접 대면하는 것은 처음이지요? 반갑습니다, 하르트 백작. 소문은 많이 들었습니다."
"...."
"백작?"
공작이 오자마자 한 걸음 뒤로 물러선 크루엘의 시선이 나를 향해 따갑게 내리꽂힌다.
리엔 경의 얼굴은 푸르죽죽해졌고, 주위 사람들의 안색 역시 창백하게 질렸다.
'알아, 나도 안다고.'
일개 명예 백작 따위가 지금 감히 공작의 말을 씹고 있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고!
안 되겠다. 이러다 쓸데없이 적을 하나 더 늘리겠어. 목구멍이 찢어지는 한이 있어도 이걸 넘기고 답하든가 해야지.
서둘러 입안 가득한 푸딩을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억지로 목울대를 움직인 그 순간.
"백작니이이임!!"
"쿠흡!"
굉장한 습격이었다.
반쯤 넘어갔던 푸딩이 다시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나는 연회장 바닥을 망친 붉은 액체와 덩어리들을 망연히 보다가, 내 등에 찰싹 붙어 있는 이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쿨럭.... 화, 황녀 전하...."
***
"오랜만이군, 일루스터 공."
"예, 전하.... 그런데...."
"요새 황궁에 발길이 뜸하던데, 많이 바쁜 모양이야."
"송구합니다. 그런데 전하...."
"아니면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아닙니다, 전하. 그...."
"아,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다면 사과하지. 실례했어."
황녀가 하르트 백작의 시선을 돌리고, 황태자가 공작의 시선을 돌린다.
이 모든 것은 공작이 하르트 백작에게 말을 건 순간 즉석에서 계획된 것이었다.
일루스터 공작은 귀족파의 수장이다. 그런 그가 황제의 훌륭한 검인 하르트 백작과 대화를 나눠서 좋을 게 뭐가 있겠는가. 분명 음흉한 속셈이 있을 테지.
황태자와 황녀는 그런 속 시커먼 계획에서 하르트 백작을 빼돌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황녀가 너무 과하게 군 모양이다.
"황공하오나 전하, 지금 하르트 명예 백작이...."
"음?"
순간, 째지는 황녀의 비명이 들렸다.
"꺄악, 백작님! 피, 피가!"
"!?"
얼핏 하르트 백작이 '아니, 이건...'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 목소리는 어떤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소란에 묻혔다.
그냥 피도 아닌 덩어리까지 진 피다. 어느 누가 이를 그냥 넘어갈까.
"궁의! 궁의를!"
서둘러 궁의를 부르며 황태자는 슬쩍 황녀를 흘겨보았다.
그러게, 뒤에서 육탄 공격을 가하는 건 조심 좀 하라니까. 하르트 백작의 몸은 마왕의 저주 때문에 유리와도 같은 상태라고 누누이 말했는데.
'하르트 백작을 꾀어내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건 과했어.'
이 사건이 해결되면 다시 황녀를 앉혀놓고 주의를 줘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황태자는 서둘러 데온 하르트에게 다가갔다.
***
"꺄악, 백작님! 피, 피가!"
"아니, 이건...."
"말하지 마십시오."
피가 아니라 푸딩인데....
해명하기도 전에 리엔 경이 내 입을 손수건으로 틀어막았다.
당황해 허우적거리다가 간신히 그녀의 손을 떼어낸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손수건에 스며 나오는 상큼하기 짝이 없는 그것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연회장은 난리가 난 뒤였다.
"궁의! 궁의를!"
궁의를 부르는 황태자부터 시작해서.
"무슨 일이지?"
시발, 황제까지.
심지어 그 뒤에 따라오는 이는 분명 8년 전쟁 당시 총사령관이자 내 상관이었던 네메세우스 장군이다. 근래 들어 한 번도 못 봤다지만 얼굴을 가로지르는 저 흉터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러니 빌어먹을 영웅 크루엘과 스타베 공작까지 합하면 나는 지금 제국의 모든 거물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내가 정말 피를 토했다면 큰 문제는 없겠지만....'
문제는 이게 피가 아니라는 것이다.
연회장 가득한 향수 냄새 때문에 피 냄새가 묻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이러다 진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심장이 멈춰 버릴 것 같은 와중에 들려온 황제의 중얼거림은 더했다.
"마왕의 저주 때문인가."
아뇨, 애초에 마왕한테 저주받은 적도 없는데요.
내가 용사의 시신을 챙겨 들고 황궁에 돌아온 날, 체력이 부족한 나머지 황제의 앞에서 울컥 피를 토한 적이 있었다. 어쩌다 보니 그게 마왕의 저주로 알려져서 이렇게 되어 버렸는데....
'맙소사, 저거 궁의 맞지?'
시, 시발 망했다.
진짜 궁의까지 와 버렸다.
***
궁의는 드물게 심각한 표정으로 상대를 진찰하고 있었다.
사실 심각하다기보다는 표정이 굳어버렸다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무려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 황녀 전하, 귀족파의 수장인 일루스터 공작에 이어서 네메세우스 장군과 영웅 크루엘 하르트까지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집요하게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상대 환자는 무시무시한 이명을 잔뜩 가지고 있는 그 유명한 영웅 데온 하르트다.
무언가 심기에 거슬리기라도 했다간 목숨이 온전치 못할 터.
그렇기에 잔뜩 긴장한 채 혼신의 힘을 다해 꼼꼼히 진찰하고 있는데.
'왜....'
아무 이상이 없는 걸까?
몸이 지나치게 허약하다뿐이지, 정말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심지어 피를 토했다면 비릿한 향이라도 남아 있어야 하는데, 놀라우리만큼 피 냄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엔 향수 냄새에 묻힌 줄 알았다. 이곳은 온갖 향수 냄새가 가득한 연회장이니까.
그에게서 진하게 풍겨오는 체리 향 역시 어딘가에서 묻혀 온 향수 냄새인 줄 알았다.
'그런데 입에서까지 체리 향이 날 리가 없잖아!'
정말 피를 토한 게 맞긴 한 건지 확인을 위해 살짝 입을 벌리자 피비린내 대신 진한 체리 냄새가 훅 풍겼다.
거기서 궁의는 하르트 백작이 피를 토한 것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입에서 튀어나온 붉은 액체와 덩어리가 문제인데....
'체리 향이 나는 것을 보니 체리와 관련된 것일 테고.'
그러고 보니 디저트 중에 체리 푸딩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무래도 이거, 푸딩을 먹다가 사레들린 것 같은데....
짜게 식은 눈으로 시종들에 의해 깨끗이 치워지고 있는 붉은 덩어리들을 보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말해야 할까?'
다른 이들이 알아차리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처음에야 정신이 없는 데다 주위에 가득한 향수 냄새 때문에 눈치를 못 챘다 하더라도, 결국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태반이 피를 경험한 이들이다.
반정으로 자리에 오른 것도 모자라 즉위와 거의 동시에 8년 전쟁을 시작한 폭군 에도아르도 데세르트, 8년 전쟁의 총사령관이었던 네메세우스 장군, 당연히 전투와 떼어놓을 수 없는 영웅 크루엘.
피라면 지긋지긋하게 봐 온 만큼, 조금만 여유가 주어진다면 금세 상황을 파악할 수 있으리라.
때문에 심각하게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무심코 고개를 든 궁의의 눈이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새빨간 눈동자와 딱 마주쳤다.
'...히익!'
저건 분명 말하면 죽이겠다는 눈빛이다!
반사적으로 헛숨을 들이켰다. 그걸 심각하게 받아들인 주변 이들의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으나, 궁의는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폐하께 거짓을 고하느냐, 아니면 죽을 각오로 진실을 고하느냐.
생사의 기로에서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이, 이곳에 올 때 습격이 있었다 하셨지요. 그때 입었던 내상에 피로가 겹쳐진 나머지 각혈을 하신 모양입니다."
두 눈을 질끈 감고 당장의 목숨을 택했다.
***
"이, 이곳에 올 때 습격이 있었다 하셨지요. 그때 입었던 내상에 피로가 겹쳐진 나머지 각혈을 하신 모양입니다."
살았다! 내 간절한 애원의 눈빛이 통한 모양이다.
말을 조금 더듬긴 했지만, 주치의는 훌륭하게 둘러댔다.
솔직히 그가 두 눈을 질끈 감았을 땐 사실대로 말하려는 줄 알고 심장이 철렁했다.
정말이지 사실대로 말했으면 어쩔 뻔했어.
쪽팔린 것도 있고 다른 이들의 분노도 샀을 테지만, 그전에 황제의 반응부터가 예상이 안 간다.
어쩌면 능멸죄로 날 죽이려 들지 않았을까.
"휴식 외에는 따로 치료할 방도가 없으니 아무래도 푹 쉬시는 것이...."
"그런가."
태연하게 답하며 반강제로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났다.
드디어 일어나네. 부담스러워 미치는 줄 알았다. 환자는 앉아야 한다며 의자를 내미는데, 심장이 어지간히 튼튼하지 않고서야 황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홀로 앉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 황제조차도 서 있는 와중에!
아마 황제가 명령이라는 말만 하지 않았다면 나 역시 끝까지 꿋꿋하게 서서 진찰을 받았을 것이다.
'아무튼 대충 해결된 것 같고.'
이제 이걸 핑계로 집에 돌아가면 되겠지. 설마 환자를 붙잡으려 들까.
황제를 향해 몸을 틀었다. 이대로 가볍게 허리를 숙이고 돌아가겠다는 말을 하려는데, 불행히도 내 몸은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냐 하면, 그만 다리가 풀려 버릴 정도로!
분명 마음은 무리 없이 황제를 향해 인사를 올리고 있었는데 말이지. 어째서 내 몸은 앞으로 고꾸라지고 있는 걸까.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몸뚱이를 느끼며 나는 속으로 욕을 읊조렸다.
'아, 젠장.'
황제 앞에서 별의별 꼴을 다 보이는구나. 연회장의 사람들은 날 얼마나 우습게 볼까.
사교계에 드나들 일이 없었던 만큼 이번 일로 난 저들의 뇌리에 단단히 각인될 것이다.
황제 앞에서 꼴사납게 넘어진 명예 백작으로.
'내 사교계 인생은 망했군.'
그런 생각과 함께 가까워지는 바닥을 멍하니 바라봤다.
──아니.
'가까워지지 않고 있는데?'
시간이 원래 이렇게 느리게 흐르던가.
아 그건가, 주마등? 아닌데. 주마등은 예전의 기억도 떠올라야 하는데.
여러 가지 실없는 생각을 떠올리던 나는, 몇 초간의 시간이 더 흐르고 나서야 누군가 내 팔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누구지? 근처에 있던 사람들 중 날 잡아 줄 사람이라면.... 리엔 경인가?
흐트러진 중심을 잡고, 팔을 잡은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기며 입을 뗐다.
"고...."
...맙지 않아!
입 밖으로 나오던 감사 인사는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쑥 들어가 버렸다.
감사 인사를 해야 하는 만큼 호의가 담겼던 눈은 싸늘하게 식었고, 그와 거의 동시에 나는 극심한 혐오감을 드러내며 몸을 받쳐 주던 손을 뿌리쳤다.
"...."
"...."
싸한 침묵 속에서 크루엘이 제 손과 나를 말 없이 번갈아 보더니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나 역시 입술을 꾹 깨물고 뒤로 두어 걸음 비척비척 물러났다.
나도 황제 앞에서 이렇게까진 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다. 이건 반사적인 행동이었으니까.
8년을 전쟁터에서 구르며 몇 번이고 증오를 곱씹었다.
혐오감이 각인 수준으로 뿌리 깊게 남아버렸는데, 어찌 놈의 손길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게 아무리 나를 위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말이지.
다행히 침묵은 금세 깨졌다.
"...몸이 상당히 좋지 않은 모양이군. 이만 돌아가 쉬는 것이 어떻겠나."
"송구합니다."
순순히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황제가 한 말은 흔히 연회에서 주최자가 상대에게 내리는 축객령이다.
쓰임에 따라 모욕이 되기도 하고, 배려가 되기도 하는 이 말은 지금 내게 있어서는 배려였다.
내가 크루엘에게 가진 감정이 어떻건 이 연회의 주인공은 크루엘이며, 주최자는 황실이다.
그런 만큼 자칫 큰 문제가 될 수 있었던 나의 무례를 '몸이 좋지 않은 탓'으로 포장하고 황제가 먼저 나서 가볍게 질책함으로써 누구도 대놓고 나를 질책하지 못하게 막았다.
황제는 확실하게 나를 감싼 것이다.
'그는 인재에게 너그러운 사람이니까.'
그래서 더 부담스럽다. 난 댁이 생각하는 그런 인재가 아닌데.
그 기대가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순간 황제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벌써부터 두렵다.
새삼 자각하니 다시 다리에 힘이 빠지는 듯해, 나는 옆에서 부축해오는 리엔 경의 손길을 거절하지 않고 서둘러 연회장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크루엘에 관한 일은 의도적으로 잊은 채였다.
38. 명예 백작 데온 하르트(3)
데온 하르트 명예 백작이 연회장을 나가고, 어느덧 연회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하나, 둘 연회장을 빠져나가는 귀족들 틈에 섞여 나온 스타베 일루스터와 크루엘 하르트는 근처의 개방된 황궁 정원을 조용히 거닐고 있었다.
스타베 공작이 앞서 걷고 크루엘이 뒤따라가는 식으로 움직이길 한참, 말없이 인적이 드문 곳으로 나아가던 스타베가 어느 순간 걸음을 멈췄다.
"내게 후원자가 되어 달라며 나의 편을 자처했을 때─"
몸을 돌려 크루엘 하르트를 마주했다.
속을 알 수 없는 단단한 녹안을 직시하며, 스타베 역시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얼굴 위에 덧댔다.
"나는 경에게 이유를 물었었지요."
"...."
"──지키기 위해서, 였었나."
멸문한 가문의 둘밖에 안 되는 생존자.
정황상 원흉으로 보이는 데온 하르트를 제외하면 유일한 생존자나 다름없는 크루엘 하르트.
그가 모든 것을 잃고 저를 찾아와 후원자가 되어 달라 했을 때, 스타베는 곧바로 쫓아내거나 승낙하는 대신 어째서냐며 이유를 물었다.
무례하게도 대답은 짧았다.
고작 '지키기 위해서'라니.
「무엇을?」
주어도 목적어도 없는 짧디짧은 말이었으나, 스타베는 그 이상 캐묻지 않았다.
지킬 것이 있는 사람은 그 누구보다 충실해진다. 제 발로 굴러들어온 충실한 개를 걷어찰 정도로 그는 멍청하지 않았다.
빠진 목적어가 무엇인지 대충 알 것 같기도 하고, 그게 아니더라도 언젠간 알게 될 텐데, 굳이 캐물어 거부감을 느끼게 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오늘, 적의를 넘어 살의가 가득한 데온 하르트의 눈을 본 순간, 그는 '목적어'에 무엇이 들어가는지 확신을 내렸다.
「나.」
「나를 지키기 위해.」
그게 아닌 것 같다고, 무언가 더 있을 것 같다는 본능의 외침은 이성이 눌러 버렸다.
"데온 하르트에게서 크루엘 하르트,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였던 겁니까?"
"...."
돌아오는 것은 침묵뿐.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스타베 공작이 피식 웃는다. 크루엘은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피곤을 쫓기라도 하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어렴풋이, 나긋한 공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의 사정을 알 리 없는 내가 함부로 할 말이 아니긴 하지만... 미련하군요."
순전히 살아남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방법은 수없이 많았을 텐데.
'그래도 이쪽 입장에서는 반길만한 선택이었지만.'
스타베가 웃었다.
그는 공작이자 귀족파의 수장이다. 어지간한 것은 무마할 권력이 있으며, '황제의 개'인 데온 하르트를 제거해야 할 이유 역시 충분하다.
아니지. '황제의 개'라는 것은 부가적인 이유일 뿐, 그 이유를 제하더라도─
'데온 하르트는.... 반드시 죽여야 하는 인물이지.'
이 땅의 암적인 존재이니.
심장 부근을 매만지며 설핏 웃었다.
"...."
크루엘은 굳이 답하지 않았다.
어느새 검게 덮인 망막 위로 그때의 장면이 다시 떠오르고 있었기에.
아무도 지키지 않는 저택 입구. 피로 가득한 복도. 그리고 방 안에서 아버지의 심장에 꽂힌 단검을 뽑으며 이쪽을 돌아보는─
[형님.]
...데온.
내 친동생.
갈가리 찢긴 다른 이들에 비해 비교적 멀쩡한 어머니와 아버지의 시신을 힐긋 본 크루엘이 다시 시선을 올렸다.
붉게 물들어 버린 머리카락에서부터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피가, 눈꼬리에 잠시 맺히더니 이내 뺨을 타고 다시 흘러내린다.
눈물처럼 흘러내린 그것과 달리 데온은 웃고 있었다.
양손에 들린 단검에서 피가 뚝뚝 떨어진다.
[...너.]
그것을 보던 크루엘이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데온이 들고 있던 단검을 던졌다.
***
황궁에서 벗어나자마자 끝까지 부축해 주겠다는 리엔 경을 거절하며 기어이 내 발로 저택에 돌아온 나는 순간 체면도 잊고 눈을 비볐다.
내 집에 없어야 할 사내들이 우글우글 보이는데, 이거 내 눈이 이상한 거 맞지?
심지어 평범한 복장도 아닌 새하얀 기사 정복까지 갖춰 입고 있다.
그 옷이 눈에 익다는 건 일단 차치하고.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내 집 앞마당이 왜 활활 불타고 있을까.'
역시 환각인가? 환각이겠지. 요즘 들어 스트레스를 너무 받은 모양이다. 아니면 늙었든가.
"...그럴 리가 없잖아. 씨발, 이게 뭐야!!"
피부에 느껴지는 열기까지 환각일 리 없다.
내 외침에 불타는 마당 한쪽에 옹기종기 모여 무언가를 에워싸고 있던 놈들이 이쪽을 돌아본다.
그리고 상황 파악 못 하고 한없이 밝아지는 얼굴들에, 나는 무심코 뒷목을 잡을 뻔했다.
"대장님!"
오냐 이 망할 새끼들아.
"대자아아아앙! 크헉!"
"대장이 아니라 백작님이라니까!"
"백작님!"
"백작니이이임!!"
하.
머리가 아파 와 관자놀이를 짚고 피곤이 듬뿍 담긴 눈으로 저들의 면면을 훑었다.
왜 내 집에 광견 새끼들이 있는 걸까. 언제부터 내 저택이 개 사육장이 되었지?
로프티 기사단. 아니, 살인귀 기사단.
그 단원들이 죄다 내 집 마당을 당연하다는 듯 떡하니 차지하고 있었다.
문지기들은 그 모습을 식은땀을 뻘뻘 흘려 가며 지켜보고 있었고.
'대체 안 막고 뭐 한 거냐....'
이래서야 문지기를 둔 이유가 없잖아.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꿈인가 싶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오늘 있었던 일들이 너무 현실적인 데다, 저 불의 열기와 한 걸음 뒤에 서 있는 리엔 경의 기척 역시 너무 생생하다.
심지어 그녀는 미쳐 날뛰는 저들을 향해 호통까지 치고 있었다.
"전체 정렬!"
"!"
오, 순식간에 줄 맞춰 서는 것 봐라.
낙하산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수식어가 안타까울 정도로 리엔 경은 확실하게 저들을 휘어잡았다.
깔끔하게 올려 묶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그녀가 날카롭게 외쳤다.
아, 단순히 외친 게 아니다. 머리가 휘날렸다고 난 분명히 말했다.
퍼억!
"지금 뭐 하는 짓이지?!"
"크헉, 다, 단장...."
"단장이 아니라 단장님이다. 그리고 주군을 봤으면 인사를 해야지, 집 나간 부인 찾듯 부르짖는 건 또 무슨 정신머리인가! 백작님 마당은 왜 불타고 있는 거고!"
퍼억, 퍽.
무자비한 손속에 단원들이 기겁하며 내게 뒤늦은 인사를 올린다.
나는 활활 타고 있는 마당과 단원들을 번갈아 보고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리엔 경을 불렀다.
"리엔 경."
"예, 백작님."
"더 패세요."
"알겠습니다."
"예? 아, 아니, 잠시! 백작님! 잠시만 이야기를!! 크억!"
이야기는 무슨.
마음 같아서는 내가 직접 나서서 패고 싶다. 그랬다간 내 손목이 먼저 나갈 것 같아 참았지만.
그나저나 이게 무슨 일인지.
리엔 경의 자비 없는 손속 아래 하나둘 바닥을 구르기 시작하는 녀석들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딱히 고소해서 그런 건 아니고. 도대체 놈들이 뭘 둘러싸고 있던 건지 궁금해서.
열기 때문에 다가가진 못하고 눈에 힘만 주자, 옹기종기 모여 있을 땐 보이지 않던 무언가가 놈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니까, 푸른색을 바탕으로 흰 새가 그려져 있는 옷이....
'혁명군?'
뭐야, 혁명군이 왜 내 집 앞마당에 있어? 설마 저 광견들이 제압한 건가?
그러고 보니 아까 녀석들이 뭔가 설명하려 했었지, 아마?
"리엔 경, 잠시."
"예."
자초지종을 들어볼 생각으로 그녀를 제지했다.
리엔 경은 기사답게 즉시 행동을 멈췄으나 이 빌어먹을 놈들이 같잖게 우는 척을 한 탓에 몇 대 더 두들겨 팬 뒤에서야 사건의 전말을 들을 수 있었다.
"이 녀석이 내 집 앞마당에 폭탄을 던졌다고?"
"예! 마침 그걸 본 저희가 곧바로 잡은 거고요!"
"뭐.... 일단 이해는 했어. 그런데...."
찔릴 것 없다는 듯 당당한 눈빛들이 내게 쏟아진다.
나는 그 시선들을 하나하나 마주치며 가감 없이 의구심을 드러냈다.
"어째서 딱 그때 너희가 이곳에 있었을까?"
"어...."
"혁명군은 어째서 내가 없는 내 저택을 습격했고? 내 저택엔 놈들이 이끌릴 만한 것이 없는데 말이지."
"그게...."
조금 전의 그 당당한 눈빛은 어디로 간 건지 하나같이 고개를 틀고 딴청을 피운다.
운이 나빠 내 시선을 정면에서 마주한 녀석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머리 굴러가는 소리 다 들린다."
"!"
덕분에 원인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었다.
이 녀석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난 그렇게까지 둔하지 않거든.
"너희, 혁명군이 오기 전부터 이곳에 머물고 있었지?"
"...!"
"그, 그걸 어떻게...!"
역시.
혁명군 때문에 이놈들이 온 것이 아니라, 이놈들 때문에 혁명군이 온 것이었다.
혁명군은 황제에게 손실을 주고 싶어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게 피해를 주는 방법이 그나마 효과적일 테니까.
내게 피해를 주기 위해서는 가장 큰 전력이라 할 수 있는 기사단을 건드리는 것이 좋았을 테고, 마침 위치도 내 저택이었으니 망설일 이유 따윈 없었으리라.
나는 차게 식은 눈으로 이 사건의 원흉들을 쳐다봤다.
당장이라도 저 뒤통수를 한 대씩 갈기고 왜 온 거냐 이유를 묻고 싶지만....
"...일단, 뒷정리부터 하자."
저 불도 좀 끄고.
부러 거리를 벌리고 있었음에도 눈이 조금 시큰거린다.
무심코 손을 들어 눈을 비비려는데, 텅 비어 있어야 할 손에 이물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동시에 들려오는 필사적인 외침.
"백작님!!"
"...?"
리엔 경이 저렇게 소리를 칠 때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때뿐이다.
본능에 의거해 우뚝 행동을 멈췄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없던 무언가가 내 손에 들려 있다는 것을 알아챈 건 바로 그때였다.
"...뭐야, 이거?"
익숙한 모양새가 영 불길하다. 이걸 어디서 봤더라?
...그래, 생각났다.
나는 거의 즉시 그것을 내던졌다. 이 끔찍한 물건을 내 손에서 떨어뜨리는 것만이 목표라는 듯, 필사적으로.
위로 던졌다 생각했던 그것은 내 뒤로 날아가 바닥에 떨어지더니 데구루루 굴러 누군가의 발 앞에 툭 부딪히며 멈췄고.
퍼엉!!
"대, 아니 백작님!!"
"괜찮으십니까?!"
리엔 경과 단원들이 우르르 몰려와 내 안위를 살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멍하니 폭발이 일어난 곳을 바라봤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폭탄이 날아와도 딱 내 손 안에 날아올 줄이야. 우연히 잡은 덕분에 살았지만, 솔직히 기쁘진 않다.
내 시선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한 건지, 그쪽으로 걸어간 리엔 경이 검집으로 까맣게 탄 시체를 툭 건드리며 말했다.
"죄책감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이 녀석 혁명군입니다."
그러면서 날 쳐다보는 게.... 눈빛만으로 '마음도 따뜻하시군요!'를 외치는 것 같다.
그런 거 아닌데.
"설마 동료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저놈이 폭탄을 던져 혼란을 야기한 사이 다른 녀석이 붙잡힌 동료를 데리고 탈출할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만... 결과는 보시다시피."
리엔 경의 시선이 향한 곳을 눈으로 좇았다.
그리고 그 끝에서 나는 동료를 업고 도망치던 혁명군을 가차 없이 엎어쳐 제압하는 노집사를 볼 수 있었다.
...아니, 레멤베르?!
'할아버지가 저래도 되는 거야?!'
"그나저나 감탄했습니다."
"...네?"
"저는 꼼짝 없이 백작님께 큰일이 닥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폭탄을 잡아채실 줄이야."
"아.... 그건...."
"역시 대단하십니다."
그거 우연인데.
초롱초롱한 눈빛이 영 부담스럽다.
차마 그녀의 눈빛을 똑바로 마주할 수 없었던 나는 결국 대충 상황을 정리하기 위한 명령 몇 마디만 남기고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모셔다드리겠습니다."
"...."
물론 그마저도 여의치 않게 만든 그녀였지만.
아무래도 방에 올라가자마자 위장약부터 찾아야 할 것 같다.
제기랄.
***
"젠장, 죽을 땐 죽더라도 황제의 개는 죽이고 죽어야 했는데...."
완벽히 제압당한 혁명군의 입에서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황제를 끌어내리기 위한 길에는 큰 걸림돌이 몇 개 있다. 가장 굵직한 이들만 추려 내자면 셋 정도가 되겠지.
8년 전쟁 당시 총사령관이었으며 현재 황제의 개인 호위인 네메세우스.
전쟁 당시와 현재를 가리지 않고 훌륭한 정책과 자금 운영 방식으로 황제를 향한 민심을 안정시키는 재상 아르달.
8년 전쟁 당시 선봉장이었으며 현재 황제의 개로서 그의 명령이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는 명예 백작 데온 하르트.
이 중 가장 거슬리는 자는 데온 하르트다.
다른 둘은 양지를 주 무대로 삼고 있기에 행동에 제약이 있어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고 감시에도 용이하지만, 데온 하르트는 음지가 주 무대다.
즉, 어디로 튈지 예측이 힘들고 감시도 어렵다는 것.
이번에 어디로 뭘 하러 갔다 온 건지 알 수 없다는 것부터가 그랬다.
'순수하게 몬스터 토벌을 하러 간 것은 당연히 아닐 테니....'
이런 식으로 자꾸 행적을 놓치면 곤란하다.
그렇기에 혁명군은 위험한 변수인 데온 하르트부터 제거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아쉬움과는 별개로 후회 한 점 묻어나지 않는 목소리에 잠시 멈칫한 살인귀 기사단원들이 주위를 살폈다.
백작님과 단장님은 저택으로 들어갔고, 집사님은 마당의 불을 끄기 위한 인력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대화를 엿들을 사람도, 자신들의 행동을 제지할 사람도 없다는 뜻.
"누가 황제의 개라는 거야."
즉시 들개들이 이를 드러냈다.
39. 명예 백작 데온 하르트(4)
"백작님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이런 말은 입 밖으로 내지도 못했을 새끼들이."
"그게 무슨...."
"말 안 해 줄 거야. 정 궁금하면 재주껏 알아보시든가."
"...."
알아내지도 못하겠지만.
황제의 개? 우습지도 않다. 아마 8년 전쟁에 참여했던 이들 중 황제에 대한 충성도가 가장 낮은 이를 뽑으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자신들과 대장이 뽑힐 것이다.
단원들의 눈 위로 특정 감정이 덧씌워졌다.
광기를 바탕으로 분노, 증오 등의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떠오르고 사라지기를 잠시, 간신히 감정을 정리한 한 단원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렇지 않아도 힘드신 분 그만 괴롭히고─"
주위의 시선을 가리기 위해 단원들이 슬금슬금 모여들었다.
어차피 하나만 살려 두어도 충분하니까 건방지게 입을 놀린 녀석 하나 정도는 죽여도 괜찮겠지.
조용히 무기를 빼 든 단원이 누가 봐도 거짓인 듯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죽어."
***
리엔 경의 부담스러운 눈빛 공격을 버텨 내며 용케 내 방에 도착한 나는, 아직도 나가지 않고 버티는 그녀의 시선을 피해 짐짓 모르는 척 창밖에 시선을 고정했다.
'저것들 또, 또 모여 있네. 저렇게 옹기종기 모여서 뭐 하는 거야?'
설마 또 사고 치는 건 아니겠지.
아니 그 전에, 저놈들이 왜 내 집에 있었던 거지? 황궁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리엔 경."
"예, 백작님."
"경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고 있습니까?"
"혁명군의 공격에 관한 것 말씀이십니까?"
"아니요, 왜 저놈들이 이곳에 있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아, 폐하께서 백작님의 부재 기간 동안 잠시 맡아 두었던 기사단을 돌려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잠시 맡아 두기는 개뿔. 먹어치우려다가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 돌려보낸 거겠지.
물론 전쟁이 끝나고 용사의 동료로서 길을 떠나기 전, 황제가 부재 기간 동안 로프티 기사단은 잠시 황실에서 맡아 두겠다고 말하긴 했었다.
그렇지만 어느 순진한 사람이 그걸 그대로 믿을까.
맡아 두겠다고 하고 은근슬쩍 꿀꺽해 버리는 사건은 당장 아무 역사서만 뒤져 봐도 흔히들 나오는 사실이다.
황제가 그러려 했다는 나름의 증거도 있다.
지금까지 내가 이곳에 오래 머무는 일이 없었다지만 돌려줄 틈은 충분히 있었다는 것.
그럼에도 이제야 돌려주는 것은 어떻게든 다스려보려 했던 단원들의 성격이 하나같이 감당이 안 돼서일 것이다.
망할 황제.
'황제조차 감당이 안 되는 놈들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먹었으면 그냥 입 싹 닦고 있을 것이지, 굳이 내게 돌려줘서는.
배려였다면 전혀 고맙지 않고, 물 먹이려 한 것이면 실로 탁월한 선택이다.
내 표정이 처참히 썩어 들어가는 와중에, 정리를 끝낸 건지 레멤베르가 노크와 함께 허락을 구하고 들어왔다.
새하얀 장갑과 주름 없는 연미복. 한결같이 깔끔한 복장이다.
─조금 전에 혁명군을 엎어쳤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만큼.
가늘어진 내 눈초리를 늘 그렇듯이 노년인 특유의 중후한 미소로 넘겨 버리며 그가 보고했다.
"마당의 불은 완벽히 진압했습니다. 정원의 소생을 위해 유능한 정원사를 한 명 더 고용하고자 합니다만, 백작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레멤베르가 알아서 하세요."
유능한 집사님이시니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지.
예상치 못한 그의 능력이 상당히 어이없긴 하지만, 덕분에 황제가 내게 떠넘긴 폭탄(미친개들)에 대한 분노가 사그라들었으니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어차피 캐물어 봤자 뭔가 얻어 내지도 못할 테고.
그보단 강제로 떠맡게 된 놈들부터 어떻게 하는 것이 우선이다.
"레멤베르."
"네, 백작님."
"기사단에게 따로 숙소를 내줬으면 합니다만, 가능하겠습니까?"
"하르트 백작저는 크고 넓습니다. 아예 기사단 전용 숙소를 따로 내어 주도록 하지요."
역시 유능하긴 유능하다. 조금의 당황한 기색도, 망설임도 없는 빠른 일 처리!
그놈의 의뭉스러운 태도만 조금 어떻게 하면 완벽할 텐데.
속으로 입맛만 다시고 있자니, 레멤베르가 시선을 돌려 리엔 경을 바라봤다.
"리엔 경께선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무래도 성별이 다르다 보니 머무르시겠다면 따로 방을 준비해야...."
"아, 저는 이곳으로 출퇴근하겠습니다. 그러니 제 숙소는 준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리엔 경은 귀족이었지.
드물게도 평민 출신으로만 이루어진 살인귀... 아니 로프티 기사단을 보다 보니 기사라 해도 딱히 귀족이 생각나지 않는다.
'생각하고 보니 이거 큰일이네. '기사' 하면 '광견'이 자연스럽게 생각나잖아. 이래서야 다른 기사를 만나도 선입견에 눈이 가려질 것 같은데....'
"그나저나 폐하께서 백작님을 많이 아끼시는 모양입니다."
"...네?"
누가 누굴 아껴?
황당함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내가 생각에 잠긴 사이 상황 정리를 끝냈는지 기사단원은 온데간데없었고, 정리를 끝낸 당사자로 보이는 리엔 경은 묵례와 함께 물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 남은 이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뱉은 레멤베르.
"방금, 뭐라고...."
"폐하께서 백작님을 많이 아끼시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레멤베르, 휴가가 필요한 것 같지 않습니까?"
"주신다면 감사히 받겠지만, 벌써부터 노망난 늙은이 취급을 하시면 섭섭합니다."
하지만 황제가 나를 아낀다니. 기사단을 보고 하는 말 같긴 한데, 말도 안 되잖아.
대체 어딜 봐서?
"보통은 반역 위험 때문에 다른 가문의 기사단을 황궁에 주둔시키는 것도, 다시 내어 주는 것도 쉽지 않잖습니까. 아마 보통의 믿음과 각오가 아니고서야 이리할 군주는 없을 겁니다."
"...."
그게 내 생각에는 꿀꺽하려다가 영 안 되겠어서 떠넘기다시피 돌려준 것 같다니까?
하지만 말해서 뭐 하겠는가. 남 놀리기 좋아하는 우리 집사님께서는 듣고 싶은 것만 들으실 테지. 오히려 이걸 트집 잡아서 또 뭔가 놀리려 들 것이다.
결국 난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쉬겠습니다."
"예, 푹 쉬십시오. 아마 내일부터 많이 바빠질 테니까요."
"...?"
"백작님께서 자리를 비우신 사이 일이 많이 밀렸습니다. 최대한 제 선에서 처리할 수 있는 것은 처리했습니다만, 백작님의 승인이 필요한 서류가 한두 개가 아닌 터라."
"윽."
"참고로 피하신다 하여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만큼 일이 더 밀릴 테지요."
"...피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아주 조금 하긴 했지만... 실행하지 않았으면 됐지, 뭐.
아, 그냥 뒹굴거리기만 해도 되는 마계가 그리워진다.
'내가 마계에 돌아가고 싶어 할 줄이야.'
서류 작업의 위용을 체감하며, 나는 미묘한 웃음기가 담긴 레멤베르의 시선을 피해 서둘러 욕실로 향했다.
피곤하다. 어째 연회장에서 쌓인 피로보다 여기 와서 쌓인 피로가 더 많은 것 같다.
'...기사단 전용 숙소를 아예 따로 짓는 게 낫겠어.'
최대한 내가 머무는 공간에서 먼 곳으로.
이게 다 그놈들 때문이다. 그렇게 왈왈대며 남의 진을 다 빼 놓는데, 피곤하지 않으면 내가 사람이 아니지.
그러고 보니 저택 뒤쪽 숲이 백작저 안에 있는 것 치고는 제법 규모가 되는 것 같던데, 거기 한가운데에 지어 놓으면 좀 조용하지 않을까?
'나중에 레멤베르랑 한 번 진지하게 상의해 봐야지.'
***
빈민가에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
각박한 삶 속에서 어떻게든 정신 붙잡고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진 규칙.
[친하게 지내라, 그러나 정을 붙이진 마라.]
....
빈민가는 보기와는 다르게 온갖 소문에 민감한 곳이다.
귀족들의 분위기가 이들의 생계와도 직결되어 있으니 어찌 민감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귀족들의 기분이 좋지 않으면 앵벌이를 하는 아이들이 굶게 된다.
귀족들이 전쟁 준비로 여유가 없을 땐 몸을 파는 이들이 배를 곯았다.
모종의 이유로 귀족들의 외출이 적어질 때는 마차 앞에 몸을 던져 돈을 얻어 내는 사람들이 나무뿌리를 씹어야 했다.
그런 만큼 소문이 빠른 빈민가에서 '새로운 영웅의 탄생'과 '데온 하르트의 귀환'은 이미 한물간 소문이었다.
그리고 그 빈자리는 금세 다른 소문이 채우고 들어왔다.
어쩌면 빈민가의 이들에게 희망이 되어줄 수도 있는, 구원과도 같은 소문.
실제로도 '구원'과 관련이 있는── 그런 소문.
시이아가 며칠을 굶어 희미해진 목소리로 반문했다.
"구원교?"
"그래, 빈민가에서 공짜로 빵과 물을 나눠 준다나 봐."
"공짜로?"
"공짜로."
"말도 안 돼. 거기에 약 탄 거 아니야?"
목소리는 작았지만 거기에 담긴 의심은 선명했다. 더불어 시이아의 얼굴에도 미심쩍은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져 산발이 된 머리, 꼬질꼬질한 얼굴.
그래, 시이아는 빈민가 사람이다.
빈민가에서 태어나 빈민가에서 살아온, 그런 만큼 호의를 의심 없이 덥석 받을 수 없는 찌들 대로 찌들어 버린 바로 그 빈민가의 아이.
그렇기에 그녀는 상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다.
공짜로 빵과 물을 나눠 준다고? 아무런 이득도 없을 텐데? 게다가 구원교라면 종교 아니야? 종교라면 후원금이 필요할 텐데, 빈민가의 사람이 돈이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러니 이건 거짓말이다. 믿어야 할 이유가 어디에도 없어.
"아니야. 옆집의 절름발이 아저씨가 먹어 봤는데, 아무 일도 없었대. 심지어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그냥 보내 줬다더라."
"...거짓말."
절름발이 아저씨라면 시이아도 알고 있다.
삶에 미련이 없는 만큼 거침없이 마차 앞에 몸을 내던져 귀족들의 돈을 받아 내는 남자.
아마 그라면 약이 들었든 안 들었든 신경 쓰지 않고 일단 먹었을 것이다. 적어도 그에게 삶과 죽음은 별 의미 없는 것이니.
아마 산다면 사는 것이고, 죽는다면 죽는 것이라 생각했겠지.
그리고 살았단다. 시이아는 여전히 믿을 수 없었다.
그 아저씨가 거짓말을 할 리는 없을 테고, 그렇다면 눈앞의 이 남자아이가 거짓말을 하는 걸까.
그렇다면 왜? 무슨 이유로? 어떤 이득이 있길래?
"진짜라니까?! 네가 일주일째 쫄쫄 굶고 있는 것이 불쌍해서 기껏 알려 줬더니만.... 믿기 싫으면 믿지 마! 나 혼자 갈 테니까! 안 가면 너만 손해지, 뭐."
폴이 얼굴을 와락 구기며 돌아섰다.
아, 기분 상했나 보네. 저렇게 힘줘서 걸으면 금방 힘이 빠지고 배도 빨리 고파질 텐데.
시이아는 멍하니 멀어지는 뒷모습을 생기 없는 눈으로 좇았다.
그나저나 혼자 간다고 했지?
폴이 간다고 한 걸 보면 아예 신빙성 없는 소문은 아닌 듯싶다.
"구원교랬지...."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해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바람 새듯 흘러나왔다.
소매치기에 실패해 실컷 두들겨 맞은 이후 일주일째 뭔가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소매치기를 해야 할 손목은 부러졌고, 조금 회복된 지금 와서 다시 시도하기에는 몸에 힘이 너무 없었다.
이대로는 죽는다.
언제나 곁에서 함께해 오던 죽음이 손을 뻗어 오는 것이 느껴지고 있었다.
빈민가에서는 언제나 사람이 죽어 나간다.
어제 이야기를 나눴던 이가 시체가 되고, 그제 소문을 공유했던 이가 자살을 한다.
시체들은 아무런 위로도 받지 못하고 그저 전염병 방지를 위해 불에 태워진다. 언제나, 누구도 애도하지 않았다.
'내가 죽으면, 나도 그렇게 되겠지?'
그렇겠지.
지금은 죽어 없는 주정뱅이 아저씨가 항상 한탄하듯 하던 말이 있었다.
[남이 죽을 때 울어 주지 않았는데, 누가 나를 위해 울어 줄까.]
그리고 그 아저씨가 자살했을 때, 그의 말대로 누구도 울어 주지 않았다. 시이아도 울지 않았다.
이곳은 아이의 울음에 매정한 곳이니까. 눈물은 그저 체력 소모를 부추길 뿐이다.
그래서 울지 않았다.
그러니 시이아가 죽는다면 늘 그랬던 것처럼 아무도 울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신기하게도 구원교에 관심이 생겼다.
'빵과 물에 이상한 것을 타면 어때.'
굶어 죽으나, 독 먹고 죽으나, 심지어 실종되어도 이곳 사람들의 반응은 똑같을 것이다.
그리고 기왕 죽을 것이라면 배고파 죽는 것보다 먹고 죽는 쪽이 더 낫지 않겠는가.
힘없이 늘어져 있던 몸을 일으켰다.
팔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것이 느껴졌으나 시이아는 힘겹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제는 까만 점이 되어 멀어지는 폴의 뒤를 쫓으며 바짝 메마른 목소리로 힘겹게 그를 불렀다.
'구원이든 뭐든 상관없어.'
그냥 소문대로 빵과 물만 준다면.
어느새 돌아와 투박하지만 조심스러운 손길로 부축해 주는 폴에게 몸을 맡기며, 그녀는 힘없이 눈을 감았다.
40. 명예 백작 데온 하르트(5)
연회가 있었던 이후 일주일이 흘렀다.
숲 한가운데에 처박아두고 싶었던 살인귀 기사단 놈들은 예산 낭비를 할 수 없다는 레멤베르의 반대에 결국 운 좋게도 멀쩡한 숙소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고,
나는....
"댐을 하나 더 만들겠다고? 그거 하나 만드는데 시간과 돈이 얼마나 드는데. 심지어 영지가 하르트 영지?! 미쳤어. 도대체 이걸 누가 올린 거야?"
"접니다."
"아.... 생각하고 보니 하나 더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아무리 임시로 맡아둔 영지라지만 관리를 소홀히 해서는 곤란할 테니, 가뭄이나 홍수를 방지할 수 있다면야.... 승인하겠습니다."
쾅.
인장이 찍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