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흑, 웨에에에엑!"
양동이를 가득 채울 기세로 피가 쏟아져 나오는데 어찌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아무튼 그런 내 꼴이 가히 심상치 않았는지 둘이 약속이라도 한 듯 멱살을 놓고 내게 다가왔다.
"실례하겠습니다, 데몬 님."
에드가 턱을 타고 흐르는 피를 닦아주고, 벤이 내 몸을 진찰한다.
벤이 피를 확인하겠다고 하자 에드가 양동이를 기울여주는 센스도 발휘했다.
저렇게 손발이 척척 맞으면서 들어올 때는 왜 서로 멱살을 잡고 들어온 건지.
내 몸 여기저기를 꾹꾹 눌러보며 마력석을 들여다보고, 질척한 핏덩어리를 확인한 벤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치료는 누워계신 사이에 전부 끝냈습니다. 지금 나오는 건 속에 고여 있던 피입니다. 쓸모없는 나쁜 피를 뱉어내는 것이니 크게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치료라니, 무엇을?
도대체 내가 취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영문도 모른 채 열심히 피를 토하는 나를 대신해 입을 연 것은 에드였다.
"그러고 보니 꽤 강하게 부딪치셨지요. 2m를 튕겨 나가셨으니 내출혈이 심했을 만도 합니다."
"그래, 무려 2m였지."
역시 대답은 벤이 했다.
들어올 때의 멱살잡이를 했던 악감정이 남아 있는 듯, 그는 잔뜩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데몬 님께서 그렇게 되실 때까지 부관이란 작자가 도대체 뭘 하고 있던 거냐?"
"...하, 네놈이야말로 데몬 님께서 이렇게 피를 토하고 계시는데 뭘 준비하느라 재깍재깍 안 온 거냐?"
"치료는 진즉에 끝냈다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네놈은 마왕님의 주치의였던 나를 의심하는 건가?!"
"그래도 전례 없이 이렇게 많은 피를 토하시는데 후딱 달려오지 않았잖은가! 아, 설마 마왕님이 아니라서 그렇게 소홀한 건가?"
"네놈!"
벤이 에드의 멱살을 와락 잡는다. 그에 질세라 에드도 벤의 멱살을 잡았다.
슬슬 잦아드는 토악질을 느끼며, 나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둘을 바라봤다.
'둘이 싸우든 말든 상관 안 할테니 그 '2m를 튕겨 나갔다'는 사건이 뭔지 좀 설명해주지그래?'
나 새끼는 도대체 술 먹고 무슨 짓을 했길래 내출혈이니 뭐니 하는 말이 나오는 거야?
아, 이제야 피가 멈췄다.
입안에 고인 마지막 피를 뱉어내고 고개를 들었다. 기척 하나는 기가 막히게 읽은 둘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그 부담스러운 시선에 몸을 뒤로 빼려던 것을 간신히 멈춘 나는 나름대로 단호히 말했다.
"일단 설명부터 해주시죠. 내가 취하고 나서부터 전부."
취해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 보니 모든 일이 마무리되어 있었다, 라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실현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기분이랄 것도 없다.
그저 어이없을 뿐이지.
"...그러니까 내가, 술을 잔뜩 먹고, 때마침 쳐들어온 마물들을 상대로, 신나게 달려나가서 싸웠다는 말이죠?"
"그렇습니다."
"그 과정에서 마물과 부딪쳐 2m나 나가떨어졌고."
"정확합니다."
"...."
그러니까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미쳤군.'
그래, 미쳤다.
나란 새끼는 도대체 정신머리를 어디에 둔 거야? 뒤에 숨어도 모자랄 판에 뛰쳐나갔다고?
차라리 잘못 들은 거면 좋으련만, 저들의 표정을 보니 그럴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저 초롱초롱한 눈을 보라.
사실상 설명에는 내 무용담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전부였다. 정말 굉장했다면서 그렇게 극찬을 하는데 어찌나 부담스럽던지.
물론 그런 무용담은 자의적으로 걸러 들었다. 뭔가 착각을 했을 것이 분명하니까.
중요한 것은 내가 술에 취해 나대다가 마물에게 한 방 맞고 골로 갈 뻔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멀쩡하게 일어나서 싸운 터라 당시엔 아무 문제가 없는 줄 알았는데, 전투가 끝나기가 무섭게 내가 쓰러졌다고 한다.
'아니, 그럼. 다른 것도 아니고 공격 의도를 가진 마물에게 부딪쳐 2m나 날아갔는데 멀쩡할 것 같냐?'
아무튼 벤이 급하게 살펴보니 속이 엉망이 되어 있었고, 그 자리에서 곧바로 응급조치를 취한 뒤, 방으로 옮겨 완전히 치료를 했댔는데… 내가 일어나자마자 피를 콸콸 쏟았으니 에드의 심정이 어땠겠는가.
직속 상관씩이나 되는 이가 죽으면 그 책임은 제게 돌아갈 테니 속으로 '이 돌팔이!'를 외치며 달려나갈 만도 했다.
그 결과, 복도에서 벤을 마주하기가 무섭게 에드가 '도대체 뭘 하길래 꾸물대냐'며 멱살을 잡았고, 벤은 벤 나름대로 '어딜 감히 환자를 홀로 두고 나왔냐'며 에드의 멱살을 잡았단다.
물론 내 상태가 우선이니 서로 멱살을 놓지 않은 상태로 나란히 뛰어 내 방에 들어왔고, 그게 바로 피를 토하던 내가 본 황당하기 짝이 없는 장면이었다는 것.
"아무튼 그래서 마물 사냥은 성공적으로 끝냈습니다. 나중엔 공포에 질린 녀석들이 도망가더군요. 그런 놈들은 군단원들이 최대한 정리했습니다."
"아, 네."
다 끝났다고 하니 좋기도 하고, 다행이기도 한데….
앞으로는 주량을 지켜서 마셔야겠다.
자칫하다간 자각도 못 한 사이에 죽어버리겠어.
'...그러고 보니 내 주량은 다섯 병 아니었나?'
너무 칼 같은 주량이라 똑똑히 기억한다.
인간계에서 대중적인 술. 제법 독한 그 술로 정확히 다섯 병의 마지막 잔을 마시면서 기억이 끊겼었지.
그런데 이번에 기억이 끊긴 시점은 한 병도 채 못 되었을 때였다.
'뭐, 하도 술을 안 마셔서 면역이 없어진 모양이지.'
그렇다 해도 너무 극단적인 변화이지만, 그리 심각한 문제도 아니다. 별것도 아닌 것에 굳이 심력과 두뇌를 소모할 필요는 없지.
그리 생각하며 남아 있던 약간의 의혹을 지워버린 나는 어느새 눈앞에 등장한 에드의 통신석을 보며 침묵에 잠겼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희미한 한숨과 함께 그 빌어먹을 것을 받아들었다.
물론 곧바로 사용하는 대신 손에 꼭 쥔 채 에드의 눈치부터 살폈다.
"...조금만 쉬었다가 보고하면 안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10분도?"
"죄송합니다. 하지만 보고가 우선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데몬 님의 부상으로 보고가 늦어졌으니 더 미루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쉬는 것은 그 뒤에 하셔도 충분할 겁니다."
그러니까 어째 지금이 아니면 쉬지 못할 것 같다고. 이걸 사용하게 되면 또 새로운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내가 무슨 힘으로 저들을 이기겠나.
결국 나는 힘없이 통신석을 활성화했다.
목록에서 마왕의 통신석 각인을 찾아 연결하니, 이윽고 통신석 너머로 마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왜.
모, 목소리가 평소와 너무 다른데? 아무래도 타이밍을 잘못 잡은 듯싶다.
쫙 깔린 목소리.
누가 듣기에도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듯한 그 목소리에 하마터면 그냥 통신을 꺼버릴 뻔했다. 사실 지금도 그러고 싶다는 충동이 실시간으로 생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내 생명도 꺼지겠지. 이미 통신이 연결된 이상 피할 방법은 없다.
나는 결국 최대한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0군단장입니다."
-아, 어! 데몬! 무슨 일이야? 아니지, 설마 벌써 일을 끝낸 거야?
다행히도 그렇게까지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빠르게 풀리는, 아니 풀렸다기보다는 확 밝아진 목소리. 그에 덩달아 긴장이 풀려, 나 역시 조금은 풀린 목소리로 답했다.
"예. 어쩌다 보니."
-'어쩌다 보니'는 무슨! 겸손도 적당해야지. 이렇게 빠르다니, 역시 너는….
낯간지러운 공치사와 함께 마왕의 수다가 이어졌다.
그리고 그 폭풍과도 같은 수다에 휘말려 그저 '네, 네'거리며 대답하던 나는….
"기다리고 있었다."
"...네…."
─정신 차리고 보니 어느새 제국과 전투 중이라는 최전방에 와 있었다.
피가 잔뜩 튄 옷을 입고 있는 1군단장이 미미한 미소와 함께 악수를 건넨다.
나는 굳어질 대로 굳어져 펴지질 않는 표정을 풀려 애쓰며 손을 마주 잡았다.
물론 속내는 엉망이었다.
'빌어먹을 마왕 놈. 아주 날 죽이려 작정했구나!'
지금 이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일단 마왕과 통신을 하던 때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까지 쌓였던 스트레스를 풀듯, 실컷 수다를 떨던 마왕이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물 흐르듯 위화감 없는 화제 전환이었다.
-막 일을 끝낸 사람에게 미안한데, 한 가지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
목소리에는 약간의 망설임과, 그럼에도 꼭 해줬으면 한다는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
미안하면 말하지 말든가.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른 말을 꿀꺽 삼키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여기서의 끄덕임은 수락의 의미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향한 끄덕임이었다.
거봐, 내 감이 맞잖아. 보고가 끝나면 쉴 수 있다고? 개 풀 뜯어먹는 소리 하네.
"무엇입니까?"
-1군단장 쪽에 지원하러 갔으면 해.
"1군단장 쪽이면… 최전방?"
-그래. 긴급 지원 요청이 들어왔어. 영웅 후보 따위가 아닌, '진짜 영웅'이 참전했다더라. 마음 같아서는 다른 녀석들을 보내고 싶긴 한데, 알다시피 영웅과 마족은 상성이 안 좋잖아?
내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시발, 분명 받아들였겠지. 수락했으니 여기 있는 거 아니겠어.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마왕이라는 지위에 눌려 반강제로 왔겠지만, 이번에는 거기에 절대 거부할 수 없는 미끼까지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니 그 선택에는 내 의사도 일부 들어가 있겠지.
누가 마왕 아니랄까 봐, 수법이 더 영악해졌다.
'하지만 '새로운 영웅'이라니. 솔직히 수락할 수밖에 없잖아.'
도저히 와보지 않을 수가 없다.
나도 모르는 새 영웅이라니.
'물론 도착하고 나서 뒤늦게 정신 차리고 후회했지만….'
새로운 영웅이라는 미끼에 정신이 팔려 전장의 상황을 잠시 잊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와버린 것을 어쩌겠어. 기왕 온 김에 그 영웅의 얼굴이라도 봐야 덜 억울하지.
그리 생각하자 반쯤 나가 있던 넋이 되돌아오는 기분이다.
나는 마주 잡은 손에 적당히 힘을 주며 1군단장 제이카르를 향해 마찬가지로 웃어 보였다.
26. 새로운 영웅(1)
마계와 인간계가 맞닿아 있는 경계선. 그런 만큼 쉬지 않고 제국과의 충돌이 일어나는 이곳은 흔히 '최전방'이라 불리는 불안전한 장소다.
1군단장 제이카르는 제 손을 마주 잡고 있는 0군단장 데몬 아루트를 빤히 쳐다봤다.
해가 있는 인간계가 바로 코앞인 만큼 검은 로브를 푹 눌러쓴 그는 드물게도 웃고 있는 듯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역시 마왕성 밖으로 나오니 표정이 풍부해지는군.'
마왕성에서는 피를 볼 수 없으니 답답했으리라. 그러니 항상 딱딱한 무표정을 하고 있었겠지.
마물 사냥으로 급한 갈증은 해소했을 테고, 이젠 제대로 된 전투를 즐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듯 밝아진 얼굴을 보며 제이카르는 내심 생각했다. 저렇게 기대를 하고 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전투에 꼭 참여시켜 줘야겠다고.
그리고 그 생각은 곧 말이 되어 입 밖으로 나왔다.
"9군단장이 죽었다는 소식은 들었겠지."
"네."
"그 탓에 상황이 여의치가 않아. 전투가 일어나는 즉시 참전해 줬으면 하는데, 괜찮겠나?"
***
내 이름은 데온 하르트.
일단은 마왕군의 0군단장이라는 과분한 자리를 맡고 있는 별 볼 일 없는 인간이다.
솔직히 이러한 상황이 부담스럽긴 했다. 모든 사실이 드러났을 때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두렵기도 했다. 그래서 그렇게 몸을 사렸던 것이기도 하고.
그러나 부담과 후환을 걱정할지언정, 이 자리를 원망한 적은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썅....'
오늘만큼 이 지위가 원망스러웠던 적이 있었던가.
나는 썩은 동태눈으로 팔에 둘둘 감기는 검은 천을 멍하니 바라봤다. 내게 있어서는 아주 익숙한 물건이다. 인간을 상대하거나 햇빛 아래에 나서야 할 때 사용하는, 마법이 걸린 천.
마왕이 직접 마법을 사용해 제작한 것이랬는데, 무슨 마법이 걸려 있다고 했었지?
"...빛을 막아 주는 것은 물론, 적정 온도를 유지해 주는 마법...이었나."
"예, 그리고 최근에 마왕님께서 한 가지 기능을 더 추가해 주셨습니다."
"깜짝이야...가 아니라 아니, 네? 무슨...."
"자동 수복 기능입니다. 완전히 찢겨 나가거나 크게 찢긴 곳은 힘들 테지만 전투 중 생기는 자잘한 흠집은 쉽게 복구될 거라 하셨습니다."
"오...."
전혀 기쁘지 않다.
내 속마음도 모른 채 에드가 천을 감는 것에 열중한다. 검은 천이라기보다는 검은 붕대에 가까운 그것은 빌어먹을 만큼 빠르게 착착 감기고 있었다.
'좀 천천히 해도 되는데....'
머릿속에서 맴돌며 몇 번이고 입 밖으로 나오려던 말은, 이내 체념이 담긴 한숨으로 변해 조용히 허공에 흩어졌다.
그래, 그만두자.
더럽게 눈치 없는 녀석을 상대로 무슨 말을 하겠어. 말해 봤자 내 입만 아프지. 오히려 역효과가 나지 않으면 다행이다.
이 새끼는 천천히 하라고 말하면 '무슨 그런 말씀을!'이라며 더 열정적으로 천을 감을 놈이니까.
"손 한번 움직여 보시겠습니까?"
어느새 손가락 하나하나까지 꼼꼼히 감긴 검은 천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에 맞춰 신축성 좋은 천이 늘어났다 줄어든다.
적당한 압박감이 짜증 나게도 딱 좋아서, 나는 괜히 속으로 욕을 중얼거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편합니다."
"다행입니다. 그럼 반대쪽 손을 내밀어 주십시오."
다른 손을 내밀자 재차 정중하게 손을 받쳐 든 에드가 검은 천을 감기 시작한다.
부관의 의무에 목메는 놈답게, 그는 할 일을 늘게 만드는 상관의 나약함을 불평하는 대신 검은 천을 빈틈 없이 꼼꼼하게 감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문득 의문이 들었다.
'맨살이 햇빛에 조금만 오래 노출되어도 문제가 생길 정도로 약한데. 얜 짜증도 안 나나?'
귀찮은 상관. 심지어 마족도 아닌 나약한 인간. 그럼에도 최전방까지 와서 스스로 위험을 자처한 어리석은 자.
이런 내가 무슨 가치가 있다고 불평 하나 없이 묵묵히 따르는지 모르겠다.
이건 단순히 성격이 좋구나,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설마 얘 마족 아닌 거 아니야?'
아니, 그건 확실히 아니다. 언젠가 한 번 봤던 에드의 맨 팔뚝을 떠올리고 고개를 저었다.
양팔에 기묘한 문양이 가득했었지. 문신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그건 절대 인간이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조금만 움직임을 자제해 주시겠습니까?"
"아."
즉시 움직임을 멈췄다. 천이 잘못 감겨서 틈이 생기면 나만 손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서로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는 이곳 경계선에서 햇빛에 노출될 일이 과연 단 한 번도 없을까.
그래, 눈치챘겠지만 나 역시 전장에 참여하게 되었다.
'제기랄.'
어차피 나중이 되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을, 나란 녀석은 왜 그런 미끼에 낚여서....
교묘한 마왕을 향해 속으로 욕설을 뱉으며 조금 전 제이카르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9군단장이 죽었다는 소식은 들었겠지.]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듣긴 들었지' 하고 생각만 할 뿐. '그래서 내가 지원을 온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시큰둥한 생각만 하고 있었다.
전투는 에드와 군단원들에게 맡기고 나는 안전하게 후방에서 상황이나 지켜볼 생각이었으니까.
마왕도 언제나 싸우고 싶을 때 싸우라 했기에 문제 될 것도 없다.
분명 그랬는데....
[그 탓에 상황이 여의치가 않아. 전투가 일어나는 즉시 참전해 줬으면 하는데, 괜찮겠나?]
나는 웃는 얼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건 아닌 것 같은데. 뭔가, 일이 꼬이고 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불길한 예감을 애써 부정하며 입꼬리를 뻣뻣하게 끌어 올리고 되물었다.
[군단원들만 말이지요?]
[아니, 그대도 같이.]
썅.
현실 부정도 실패했고, 뒤로 빠지는 것도 실패했다. 이러니 욕이 나오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어느새 매듭을 마무리 짓고 있는 에드의 신속한 손놀림을 보며 나는 허허로이 웃었다.
이걸로 오늘도 내가 죽을 날이 더 가까워졌군. 정말 보람차서 미칠 것 같다.
...제기랄.
"됐습니다. 그리고 얼굴도...."
"예에."
에드가 옆에 놓여 있던 다른 천을 집어 든다.
얼굴은 금방이었다.
코까지 검은 천으로 싸맨 뒤, 로브를 뒤집어썼다. 눈까지 완벽히 가리는 로브는 자칫 시야 확보에 방해가 될 것 같았으나, 여기에도 마왕이 손수 마법을 걸어 준 덕분에 시야에는 이상이 없었다.
더해서 스스로 벗지 않는 한, 후드가 벗겨질 일도 없게 해 놓았으니 마왕이란 작자가 할 일도 더럽게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여간 마력량 하나는 괴물 같아 가지고....'
이건 마왕이니까 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마족들이었다면 이런 곳에 마력을 낭비할 생각은 엄두도 못 냈겠지.
마족들의 마력은 한정되어 있고, 마법에 소모된 마력은 회복되지 않는다.
마법이란 세계의 규칙을 어기는 것.
별것 아닌 마법 같지만 후드가 벗겨지지 않는 마법은 중력을 거스른 것이고, 시야가 확보되는 마법은 불투명한 물체 너머를 볼 수 있게 하는, 일종의 당연하게 여겨지는 세계가 정한 규칙을 어긴 것이다.
그런 만큼 대가는 확실했다. 마력의 영구적인 소모와는 별개로 용사의 등장일이 가까워진다고 했으니.
'마왕은 그걸 알면서도 이러는 것이지만.'
용사도, 마왕도 아닌 내가 어떻게 마법의 사용과 용사의 등장을 엮어 생각하겠는가.
마왕이 본인의 입으로 말했다.
그래 놓고 이리 마법을 펑펑 써 대는 것을 보면 용사가 등장해도 이길 자신이 있다는 의미겠지.
'뭐...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눈을 가린 후드를 만지작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9군단장의 시신도 확인할 겸, 군막을 돌아보겠습니다."
물론 핑계다. 시간도 끌 겸, 숨을 만한 곳을 찾아보려는 것이 본심.
전투가 시작된다면 나를 찾을 겨를도 없을 테니 그 전에 타이밍만 잘 맞춰서 숨으면 된다.
대충 그런 쓸데없는 희망을 품고 밖으로 나간 나는──
"와...."
"...진짜 0군단장님이시다...."
"...."
─밖에 있던 모든 이들의 눈동자가 동시에 나를 향하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나를 본 병사들의 눈에 열기가 피어오른다.
실시간으로 쭉쭉 오르는 사기에, 나는 후드를 쓰고 있어 다행이라 생각하며 조용히 체념했다.
...숨는 건 글렀군.
***
"0군단장이라고?"
온갖 보고가 쌓여 있는 지휘관의 군막.
제국의 새로이 인정받은 영웅 크루엘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건조하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정확히 병사를 향했다.
차갑고 딱딱한 눈은 '영웅'이라는 부드럽고도 강건한 칭호와는 어울리지 않았으나 전쟁에서의 승리를 가져다주기에는 충분했기에, 병사는 한 치의 의심 없이 자세를 바로 했다.
"예, 그렇습니다. 정찰병의 말에 의하면 그 때문에 마왕군의 사기가 올라가고 있다 합니다. 반대로 우리 측의 사기는...."
"...골치 아파졌군."
말끝을 흐렸다지만 뒷말을 예측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크루엘은 짜증 어린 한숨과 함께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0군단장이라면 아주 유명한 존재 아닌가.
마왕의 조커. 마왕의 대행자인 1군단장보다도 강하다고 알려진 존재.
유난스러울 정도로 잘 알려진 것과 달리, 정작 그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려 하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 더욱 의심스러운 위화감 덩어리.
그런 존재가 합류했다면, 전황은 순식간에 뒤바뀌게 된다.
"0군단장의 존재가 사실이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우리는 승리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패배를 생각해야 해."
"...."
"정면으로 싸우는 것은 위험하다."
그렇다면 정면 대결 말고 그를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사실 답은 이미 나왔다.
누군가는 더 좋은 답을 내놓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의 머리는 이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망설이는 이유는, 그에게 달린 '영웅'이라는 같잖은 칭호가 발목을 붙잡고 있기에.
의식하지 않은 사이, 검지가 일정 간격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린다.
그렇게 침묵과 미미한 소음만이 천막을 맴돌기를 잠시, 그는 책상 위의 서류들을 척척 정리해 한쪽에 쌓아 올리더니 무언가를 꺼내 적으며 말했다.
"암살자를 보낸다."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대답은 한쪽 구석에 병풍처럼 서 있던 남자에게서 나왔다.
단호한 반박에도, 크루엘은 예상했다는 듯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즉시 답했다.
"0군단장의 실력이 진짜라면 그렇겠지."
"...."
"하지만 0군단장의 실력이 부풀려졌다면? 혹은 주위에 마왕군이 가득하니 방심하고 있을 수도 있고, 어쩌면 0군단장의 존재 자체가 마왕군에서 사기를 올리기 위해 만든 것일지도 모르지."
고작 암살자 하나로 이 중 하나라도 건진다면 그건 큰 수확이다.
0군단장의 실력에 대해 언급한 순간부터 입을 다문 눈치 빠른 제 부하를 향해, 크루엘은 질책하는 대신 차가운 목소리로 재차 명했다.
"암살자를 보내도록."
***
전투가 소강상태에 돌입했다.
이유인즉슨, 정신없이 몰아붙이던 제국의 네 번째 영웅 크루엘이 0군단장의 참전 소식을 듣고 잠시 전투를 멈췄기 때문이다.
그 이면에는 0군단장의 실력이 진짜인지 거품인지 확인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고, 이에 관한 막중한 임무를 맡은 암살자는 지금 잔뜩 긴장한 채 마왕군의 군막에 들어와 있었다.
[명심해. 우선순위는 0군단장의 목이 아니다. 실력이 진짜인지 확인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도록.]
그 말을 들었을 때,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진짜일 리가. 조금 강한 것은 사실일지 몰라도 세간에 알려진 것은 척 듣기에도 너무 과했다.
1군단장보다 강하고, 심지어는 마왕도 함부로 못 한다고?
그게 사실이었다면 이미 마왕군이 제국을 집어삼키고도 남았으리라.
'오늘 그 거품을 꺼트려 주지.'
이는 그 어떤 암살자보다도 실력이 뛰어난 자의 자신감이었다. 지금 이곳에 막중한 임무를 짊어지고 도달했다는 것 자체가 바로 그 증거.
목을 가져오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치명상을 입히고 도망칠 자신은 있기에, 암살자는 곧장 0군단장을 찾아 자신의 일을 시작했으나....
'미쳤어, 이건.'
30분 만에 패닉에 빠졌다.
0군단장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모든 병사들의 시선이 향한 곳을 찾으면 되니까.
문제는 암살을 피하는 그의 능력이었다.
처음엔 9군단장의 시신을 살피러 들어간 0군단장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다가 때에 맞춰 단검을 던졌다.
물론 쉽게 당해 주지 않으리라는 것 정도는 예상했다. 그저 실력이 거짓일 경우를 염두에 둔, 역량 파악을 위한 공격이었을 뿐.
그렇다 하더라도 진심을 다한 공격이었기에 어정쩡한 실력이었다면 언제 어떻게 당했는지도 모르고 세상을 떴을 것이다.
그런데.
"아."
마치 예상이라도 한 듯 적절한 타이밍에 아주 자연스럽게 허리를 숙이는 것 아닌가!
덕분에 단검은 허공을 가르고 지나가 어느 죄 없는 나무 몸통에 꽂혔다.
차라리 말없이 허리를 숙였다면 실력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문제는 그가 단검을 피하고 난 뒤 한 말이었다.
"여기에 웬 돌부리가...."
돌부리에 걸린 거였어?!
아니, 아니야. 저런 말에 속아서는 곤란하다. 말은 저렇게 하면서도 지금 군막 구석구석을 살피고 있지 않나.
아마 부하들이 놀랄까 봐 말을 저렇게 하면서, 나를 찾고 있는 것일 터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눈치 싸움이다.
찾아내느냐, 그 전에 죽이느냐.
27. 새로운 영웅(2)
물론 이런 상황 역시 겪어 본 적 있기에 마음은 동요 없이 차분했다.
'단검이 안 통한다면, 함정으로.'
무려 몬스터 가죽에서 뽑아낸 은사를 꺼내 들었다. 팽팽하게 설치한다면, 닿는 것만으로도 베여 버리는 그런 날카로운 실.
그의 걸음이 향하고 있는 곳에 미리 도달해 은사를 설치한 뒤 빨리 오기만을 기다리는데, 잘만 걸어오던 그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나오는 귀찮다는 듯한 한숨.
대놓고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눈치챘다.'
은사 바로 앞에 멈춰 선 것이 우연일 리 없다.
분명 육안으로는 보기 힘든 것인데, 저렇게 로브와 검은 천으로 온몸을 칭칭 가리고도 발견하다니. 역시 만만한 실력은 아니라 이거지?
어떤 반응일지 바짝 긴장한 채 지켜보자니, 잠시 짜증스럽게 서 있던 그가 돌아서서 아무 병사를 붙잡았다.
"에드가 어디에 있는지 압니까?"
"아마 막사에 계실 겁니다. 불러 드릴까요?"
"아니요, 내가 직접 가겠습니다."
이런, 침입자의 존재를 밝히려는 건가.
여기서 물러나야 한다.
그의 실력이 완전한 거짓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 이대로 돌아가도 아무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째 오기가 치민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
이러한 자신감이 가장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암살자는 밀려드는 아쉬움에 차마 포기하지 못하고 그의 뒤를 쫓았다.
"에드."
"데몬 님?"
0군단장이 입구를 가린 천막을 걷고 들어서자, 테이블 앞에 앉아 있던 매끈한 외모의 남자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일어섰다.
마왕군의 주요 인물들에 관한 서류에서 본 적 있는 얼굴이기에, 그가 누구인지는 빠르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0군단장의 부관, 에드.'
무려 군단장 후보로 거론된 남자.
밀폐된 공간에 위험인물이 둘이나 모였다. 들킬 위험이 두 배, 아니 세 배는 높아져 암살자는 좀 더 긴장을 끌어올리고 숨을 죽였다.
다행히도 눈치채지 못한 듯 0군단장은 그의 앞에 앉으며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새로운 영웅에 대해 아는 것이 있습니까?"
침입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는 줄 알았건만, 크루엘 님에 관한 것은 왜?
'무슨 꿍꿍이지?'
설마, 암살자 파견을 크루엘 님이 직접 명령하셨다는 걸 눈치챈 건가?
그렇다면 어째서? 폐하께서 명하셨을 수도 있고, 크루엘 님의 수하들 중 누군가의 자의적인 판단에 의해 왔을 수도 있는데.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른다. 암살자는 느리게 숨을 내쉬며 저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아니요. 현재 2군단장이 조사 중이라 들었습니다. 투구를 쓰고 있어서 얼굴도 볼 수 없고, 알려진 것은 그의 검술이 뛰어나다는 것밖에...."
"...."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런데 그건?"
로브에 가려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0군단장의 시선이 테이블 위의 병에 향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건 에드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아' 하는 짧은 탄성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한쪽에 놓여 있던 가방에서 잔을 하나 더 꺼내 그의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술입니다. 드시겠습니까?"
"...그래도 됩니까?"
"예, 이곳은 전쟁터니까요. 긴장을 풀기 위한 가벼운 음주는 괜찮습니다."
"그렇다면야."
0군단장이 술병을 집어 든다.
잔에 술이 채워지고, 그것을 들어 올린 순간, 암살자가 주머니에 차고 있던 작은 돌 하나를 막사 구석에 던졌다.
딱.
작지만 선명한 소리가 막사 내부에 울려 퍼졌다. 둘의 고개가 동시에 한쪽으로 돌아갔다.
그래, 바로 지금이다.
손가락을 튕겨 0군단장이 얼결에 내려놓은 잔에 독약을 던져 넣었다. 테이블에 놓여 있던 에드의 잔은 덤으로.
"무슨 소리가...."
"가방 안의 물건끼리 부딪치는 소리였던 모양입니다. 방금 막 잔을 하나 빼 왔으니까요."
"그렇습니까."
0군단장 역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지 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다 댄다.
그리고 살짝 기울이더니, 액체가 잔 끝에 도달하기 전에 다시 내려놓았다.
"에드."
"네, 데몬 님."
"여기 누가 왔었습니까?"
"아니요. 데몬 님 외에는 없었습니다."
"그런가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정말 물러가야 한다. 이 이상 이곳에 있었다간....
이성인지 본능인지 모를 것의 강렬한 재촉에 슬그머니 뒤로 물러섰다.
그걸 예상했다는 듯, 여상한 목소리가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마치 너 같은 것은 언제든 잡을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한 담담한 목소리.
"파리가 심하게 꼬이는군요."
그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할 멍청이는 이 자리에 없었다.
에드가 표정을 굳히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와 거의 동시에 암살자 역시 황급히 몸을 뺐다.
여기서 싸운다면 필패다.
그에겐 살아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었다.
'보고해야 해.'
0군단장의 실력은 거품이 아니라고.
'오히려 암살자를 가지고 노는 위험한....'
***
"이...게, 9군단장이라고요?"
그게 내가 9군단장의 시신을 보고 반사적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나는 하얗게 질렸을 것이 분명한 얼굴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아는 9군단장은 분명 검은 생머리를 가진 여성체 마족이었다. 성격도 제법 호쾌해서 나름 좋게 보고 있었는데.
'이것'의 어디에 검은 생머리가 있단 말인가.
호쾌한 미소를 머금던 얼굴은 어디에 달려 있단 말인가.
다진 고깃덩어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그것을 보며,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처음에는 당황, 충격, 그리고 밀려든 감정은 걱정이었다.
'나도 이렇게 되는 거 아니야?'
아니지. 이대로 전투에 참여했다가는 '분명' 이렇게 되리라.
영웅이고 뭐고 그냥 돌아가고 싶다.
진짜 간절하게 돌아가고 싶다.
도망치듯 시신이 배치된 천막을 빠져나왔다. 어찌나 급하게 나왔던지,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하기까지 했다.
"여기에 웬 돌부리가...."
이 자식들은 길 정리도 안 하나?
최소한 군막 안에 있는 길들은 정리해야 할 것 아니야.
그런 짜증이 치밀어오르는 와중에도, 나는 숨을 곳을 찾기 위해 군막 구석구석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순간, 최면에서 깨어나듯 우뚝 멈춰 섰다.
'가능할 리가 없지.'
희미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사실 나도 알고 있다. 이렇게 많은 시선들이 모인 판국에, 숨는 것이 가능할 리가 있겠는가.
'그렇지만 가만히 있을 수도 없어.'
판단은 빨랐다.
최선이 없다면 차선을, 최악과 차악 중에서는 차악을.
도망칠 수도, 숨을 수도 없다면 선택지는 얼마 남지 않는다.
근처에 있던 아무 병사나 붙잡고 물었다.
"에드가 어디에 있는지 압니까?"
"아마 막사에 계실 겁니다. 불러 드릴까요?"
"아니요, 내가 직접 가겠습니다."
기껏 따라오겠다는 녀석 떼어 놓고 나온 건데 똥개 훈련 시키는 것도 아니고, 다시 부를 수는 없지.
에드의 막사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안에 들어서자 테이블에 앉아 있던 에드가 놀란 듯 나를 부르며 일어섰다.
무슨 용건으로 왔는지 의문을 담은 그 부름에 나는 그가 원하는 대로 용건부터 던졌다.
"새로운 영웅에 대해 아는 것이 있습니까?"
"현재 2군단장이 조사 중이라 들었습니다. 투구를 쓰고 있어서 얼굴도 볼 수 없고, 알려진 것은 그의 검술이 뛰어나다는 것밖에...."
빌어먹을. 정보도 없으면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살아남는단 말인가.
다른 방법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데, 그런 내가 화가 난 줄 알았나 보다. 조심스럽게 나를 살피던 에드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내 주변인들은 제 잘못도 아닌데 사과하는 것이 특기인 모양이다. 그게 날 더 부담스럽게 하는 줄도 모르고.
아무튼 이러다 분위기가 어색해지겠다 싶어 다른 대화 주제를 찾아 눈을 데굴 굴렸다.
그러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테이블 위의 병. 더해서 좀 전까지 마시고 있었던 듯 반쯤 채워진 잔이 날 좀 보라는 듯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술? 와....'
난 못 마시게 해 놓고, 자기만 마셨다 이거지?
"그런데 그건?"
"아."
짧은 탄성을 뱉은 그가 제 가방이 놓인 쪽을 향하더니 이내 잔을 하나 꺼내 왔다.
그리고 친절하게도 내 앞에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술입니다. 드시겠습니까?"
앞뒤가 바뀐 것 같은데? 먼저 마실 거냐 묻고 나서 잔을 가져와야 하는 거 아니냐?
하지만 에드는 나를 너무 잘 알았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껏 마시기 힘든 술을 어느 바보가 거절하겠어.
물론 냉큼 그러겠다고 대답하기엔 좀 눈치가 보여서 망설이듯 입을 뗐다.
"...그래도 됩니까?"
"예, 이곳은 전쟁터니까요. 긴장을 풀기 위한 가벼운 음주는 괜찮습니다."
"그렇다면야."
얼굴도 가려져 있겠다, 숨김없이 싱글벙글 웃으며 못 이기는 척 술잔을 잡았다.
에드가 술을 따라 주고, 그것을 집어 드는 순간.
딱.
작지만 선명한, 원인 모를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반사적으로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공간이 보인다.
"무슨 소리가...."
"가방 안의 물건끼리 부딪치는 소리였던 모양입니다. 방금 막 잔을 하나 빼 왔으니까요."
"그렇습니까."
잘못 들은 것은 아니군. 순간 환청인가 했네.
내심 안도하며 잔을 입가에 댔다. 그러나 미처 다 기울이기 전에, 손을 멈췄다. 잔을 내려놓는 손등이 화끈거리는 듯했다.
멍청하게 하관을 가린 천을 풀지도 않고 마실 뻔했다.
'쪽팔리게.'
에드가 바보처럼 보지는 않았을까. 한심하게 생각하면 곤란한데.
...화제를 돌리자.
민망한 기색을 감추며 최대한 담담히 에드를 불렀다.
"에드."
"네, 데몬 님."
"여기 누가 왔었습니까?"
너도 네 사생활이 있을 테고 누군가를 만나겠지.
그러니 화제도 돌릴 겸, 이번 기회에 너에 관한 이야기도 좀 해 보자. 이곳 병사들 중에 전 동료가 있었다든가 하는, 뭐 그런 이야기.
그러나 안타깝게도 에드는 너무도 깨끗한 사생활을 가지고 있었다.
얼마나 깨끗하냐면, 이곳에 친분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을 정도로.
"아니요. 데몬 님 외에는 없었습니다."
"그런가요...."
안쓰러운 놈.
내심 혀를 차며 안쓰러운 시선으로 그를 보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곳에 온 뒤부터 계속 왱왱거리는 파리가 너무 거슬려 미치겠다.
물론 이곳은 전쟁터이니 까마귀와 파리들이 꼬이는 것은 당연하다만, 오랜만이어서 그런가, 적응이 영 안 된다.
이 짜증을 입 밖으로 내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아, 결국 나는 여상한 어조로 지나가듯 말했다.
"파리가 심하게 꼬이는군요."
"!"
내 말이 뭔가 거슬렸는지 에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딱딱하게 굳어진 표정을 보고 나는 내심 흠칫했다.
뭐야, 왜 그러는데. 내가 그렇게 심하게 짜증 낸 것도 아니잖아? 존댓말도 제대로 썼고, 목소리 톤도 아무 문제 없었는데?
그가 막사 안을 성큼성큼 돌아다니며 구석구석을 살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테이블 위에 있던 자신의 잔을 들고 마법을 쓰는 듯 잠시 집중하더니,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밖에 있던 이들을 불렀다.
그는 잔을 악력으로 으스러뜨리며 나직이 말했다.
"침입자가 있었다."
그의 손에서 술과 깨진 파편이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그 뒤로 한바탕 난리가 났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벤이 깨진 파편과 바닥을 적신 술을 보더니 증거물을 없애면 어떡하냐며 한바탕 에드를 쏘아붙이고는 아직 내 손에 쥐어져 있는 잔을 받아 들어 독 성분을 확인했다.
그리고 맹독이 들어 있다는 것을 파악하기가 무섭게 군막은 1군단장 제이카르의 지휘하에 발칵 뒤집혔다.
모든 병사들이 신분 확인을 하고, 확인된 병사들은 침입자를 찾기 위해 뛰어다니고.
더해서 나는 미리 알아차리지 못해 죄송하다는 에드의 사과를 받고 있고....
"제가 아둔한 탓에 신호를 주셨음에도 빨리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나도 몰랐는데? 내가 무슨 신호를 줬다고...? 너야말로 그걸 어떻게 알아차린 거야? 하여간 신기한 놈.
뭐, 어쨌거나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말은 하나밖에 없다.
"괜찮습니다."
마왕성에 머물면서 지긋지긋하게 입에 달고 다니는 말.
정말 미리 알고 있었다면 마음 편히 사과를 받기라도 할 텐데, 아 진짜 양심에 찔려서 못 해 먹겠다.
어쨌든 에드 역시 수색에 참여하러 나가고, 다시 혼자가 된 나는 테이블 앞에 멍하니 앉아 술병을 바라봤다.
침입자가 있었다지만 결과적으로 아무런 피해도 없었기에 내 마음은 아주 평온한 상태였다.
그게 어느 정도냐 하면, 누군가 알았다면 경멸 어린 표정을 지었을 만한 생각을 하고 있을 정도로.
'저 술병에는 독이 들었을까, 안 들었을까?'
그래, 난 아직도 술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28. 새로운 영웅(3)
벤이 내 잔에 담긴 것만 조사했고, 독이 있다는 확언을 받기가 무섭게 난리 났기에 술병은 미처 조사하지 못했으니 약간의 희망은 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안 들었을 것 같다.
내가 막 이 막사에 들어왔을 때, 에드는 술을 마시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는 건 그때까지만 해도 그의 잔에는 독이 없었다는 뜻이고, 그 말인즉 침입자는 나와 에드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우리 둘의 잔에 독을 탔다는 것이 된다.
에드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수준의 은신이라니, 다시 생각해 보니 정말 위험했잖아?
...아무튼.
'기억상 나와 에드의 시야에서 테이블이 동시에 벗어난 적은 딱 한 번이었지.'
딱 소리가 났을 때.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린 곳을 찾아 동시에 고개를 돌렸었다.
다만 그건 아주 짧은 순간이었고, 암살자가 직접 다가와 독을 타기에는 터무니없이 모자란 시간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독을 탔을까.
'던져 넣었겠지.'
암살자는 에드의 기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가졌다. 다시 말해 독을 '던져' 넣을 만한 실력이 충분했으리라.
하지만 그렇다 해도 주둥이가 좁은 병에까지 던져 넣기에는 시간도 부족하고 위험 부담이 크다.
암살자는 모험을 자제하는 성향이 강하니,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병에 독을 탈 시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럼 확인을 해 볼까.'
슬쩍 술병을 집어 들었다.
주인이 없는데 혼자 마시려 한다는 것이 양심에 찔리긴 하지만, 어차피 내게 권하려던 것이 아닌가.
그런 뻔뻔한 생각으로 꿋꿋이 냄새를 맡았다.
역시, 없군.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나름대로 무색무취라 불리는 약을 준비한 것 같다만.'
휴대하기 간편한 고체 상태의 약은 액체를 정제해 만들든 가루를 뭉쳐 만들든 모양을 유지하기 위해 특정 재료가 들어간다.
보통은 이마저도 무색무취라 하지만, 글쎄.
'약을 많이 접해 봤거나, 후각이 말도 안 되게 뛰어난 사람이라면 눈치채겠지.'
그것이 바로 약 특유의 냄새라 할 수 있겠다.
아무튼 이 술에서는 약 특유의 미묘한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다. 그렇다는 건....
나는 씩 웃었다.
'이 술은 이제 내 겁니다.'
잔이 없긴 하지만 그건 문제가 안 된다.
혹여 누가 와서 방해할까, 나는 하관을 가린 천을 살짝 내리고 망설임 없이 술병을 기울였다.
***
"그는 위험합니다."
"흐음...."
암살자가 열변을 토했다.
크루엘은 별다른 표정 없이 묵묵히 암살자의 말을 들었다.
무표정한 얼굴과 달리, 그의 손가락은 복잡한 속내를 드러내듯 책상을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
한참의 침묵 끝에, 설명을 전부 들은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알겠으니 나가 보도록."
"예."
암살자가 나가고, 생각에 잠긴 크루엘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결국 0군단장의 실력은 아무리 못해도 저 암살자를 능가할 정도라는 것 아닌가.
그가 보낸 암살자는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
직업 특성상 정면 싸움에는 약할지언정, 은신과 암살은 크루엘 자신조차도 긴장해야 할 정도인데.
'골치 아프군.'
0군단장은 실존하며, 그의 실력도 거짓이 아니다. 이보다 더 골치 아픈 일이 어디 있을까.
천천히 눈을 감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판단은....'
이미 내려졌다. 다만 조금 아까울 따름이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고개를 젖히고 있던 그가 눈을 뜨고 느릿하게 몸을 세웠다.
분위기가 바뀐 것을 느낀 수하가 조심스레 그의 결정을 물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내게 내려진 명령은 '제국의 영토를 지키는 것'이다."
그렇게 크루엘은 밀리던 전선에 참전했고, 결과적으로 영토를 수호하는 것을 넘어 마계의 영역까지 밀고 들어왔다.
윗선들은 좋아하는 것 같다만, 명령이 '마계까지 영토를 넓혀라' 따위가 아닌 이상, 무리해서 맞부딪칠 필요는 없었다.
"나중에 다시 마족이 공격해 올 때를 대비해 할 수 있을 때 최대한 영역을 넓혀 놓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지."
그 '할 수 있을 때'는 끝났다.
욕심은 화를 부른다. 크루엘은 욕심에 휘둘리기엔 누구보다도 냉정하고 이성적이었다.
이쪽의 사기라도 높았다면 어떻게 붙어 볼 수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저쪽의 사기가 최상인 만큼 이쪽의 사기는 바닥이다.
"0군단장이 뭐길래."
차라리 그의 전투 능력만이 문제였다면 고민은 덜했을 텐데.
이쪽이 운이 없는 건지, 0군단장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사기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존재였다.
지금 이 상태 이 분위기로 저들과 맞붙었다가는 백이면 백, 처참하게 깨진다.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존재가 제국 측에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당장 이곳에 있는 것도 아니기에 크루엘의 선택지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0군단장이 있는 마왕군을 이기기 위해서는, '그 녀석'이 필요하다."
"아...."
"하지만 지금 당장은 없지. 지원 요청도 늦어."
마찬가지로 제국의 또 다른 영웅.
자신보다도 먼저 영웅이 된 누군가를 떠올리며, 크루엘은 잠시 입을 다물더니 이윽고 천천히 말을 뱉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전투를 멈추는 것이 최선이다. 0군단장의 참전을 막으려면 그것밖에 없어. 그렇지만 마족과 대놓고 협정을 맺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겨우 반격의 기회를 얻은 저들이 가만히 보고만 있을 리도 없을 테니...."
툭.툭.툭.툭.
집게손가락이 책상을 두드린다.
이것 역시 '영웅'이라는 칭호가 주는 망설임.
지켜야 하기에 얻은 칭호이건만, 오히려 발목을 붙잡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 그는 짐짓 인상을 쓰면서도 결국 머릿속의 계획을 입 밖에 내어놓았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물러난다."
"예?"
"단, 쫓아오는 놈들은 무조건 죽인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확실하게 죽여야 돼. 절대 밀리는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
약한 면을 보이지 않고 서서히 물러난다.
딱 본래 영역인 인간계까지 물러나며 먼저 인간계를 침범하지 않는 한 싸우지 않겠다는 의사를 보여야 한다.
"이제 와서 물러나면 너무 속 보이지 않을까요. 마족들도 눈치챌 겁니다."
"그래서 말했잖아. 쫓아오는 놈들은 '확실히' 죽이라고."
"...."
"물러나는 우리에게 덤벼들었다가 처참하게 깨지면 알게 되겠지."
저들은 0군단장의 소식을 듣고 물러나는 것이 아니구나.
밀리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 문제가 생겨 급히 물러나는 것도 아니야.
"그냥 갖고 있어 봤자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쓸모없는 땅, 이 땅을 위해 검을 들어야 할 의미를 갖지 못한 것뿐이다."
"...."
"그런 의미를 내비쳐야지."
공식적인 협정을 맺을 수 없지만, 암묵적인 협정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제국의 영웅으로서는 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크루엘은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영웅으로서의 첫 데뷔전을 망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
"물론 그 과정에서 0군단장이 날뛰지 않아야 가능하겠지만, 그는 마왕군이 밀려서 온 지원이니 아마 괜찮을 거다.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알아서 제자리로 돌아가는데, 굳이 나설 이유가 없지."
"하긴.... 0군단장이 직접 전투에 나서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윗분들은 결과만을 본다. 어떠한 과정을 거쳐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를 따지는 것이 아닌, 그저 결과만을.
그런 의미에서 크루엘이 지휘하는 병력이 마왕군에 밀려 다시 인간계의 침범을 허락한다면, 윗분들은 분명 그의 영웅 자격을 다시 논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래서는 곤란해.'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조용히 입술을 짓씹은 크루엘이 다시 명령을 내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말이 나오는 일은 없었다.
"지, 지휘관님!"
천막을 걷고 급히 들어온 한 불청객 때문에.
창백하게 질린 얼굴과 가쁜 호흡, 흙투성이의 옷차림을 확인한 크루엘이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사가 호흡을 가다듬고 알아서 보고하기를 기다리며, 잠시 벗어 놓았던 건틀렛을 끼고 검을 허리춤에 찬다.
다짜고짜 뛰어 들어온 것에 대한 질책은 없었다.
효과적이고 빠른 소식 전달을 위해 급하거나 중요한 일인 경우 누구든 곧바로 들어올 수 있도록 명해 놓은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으니까.
그렇기에 크루엘은 그를 질책하는 대신 조용히 전투 준비를 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고─
"마왕군이 진격을! 선두는 0군단장...."
덜컹.
병사의 보고가 채 끝맺기도 전에 곧바로 투구를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갔다.
계획이 어그러졌다.
상황은 처참했다.
전장의 상황을 전부 훑기도 전에, 이미 파악을 마친 크루엘의 눈이 투구 안에서 차갑게 가라앉았다.
굳이 볼 필요도 없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음에도 코끝을 찌르는 비릿한 피 냄새. 속수무책으로 밀려오는 전선. 더해서 들려오는 처절한 비명 소리와─
──웃음소리.
누구의 비명이고, 누구의 웃음인가.
"...하."
실소가 나왔다.
크루엘은 검을 움켜쥐고 전장을 노려보았다.
적어도 그의 휘하에 있는 병사들 중 적을 죽이며 웃는 미친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 마족들이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울분을 풀기라도 하듯 유쾌하게 웃으며 학살을 자행하고 있었다.
'완전히 넘어갔군.'
분위기가 저쪽으로 넘어갔다.
전쟁은 사기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불리한 전쟁일지라도 사기가 드높으면 약이라도 빤 듯 미친 듯이 적들을 처치해 나갈 수 있고, 제아무리 유리한 전쟁이라 할지라도 사기가 바닥일 경우 고전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니 지금 이 싸움은 제국 측이 불리하다.
'안 돼.'
주먹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대로는 안 된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리도 허무하게 밀려서야.
손을 써야 한다.
──어떻게?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모든 감각이 선명해진 상태에서, 크루엘은 어느 한 곳을 바라봤다.
시끄러운 전장 속, 유일하게 공간이 단절되기라도 한 듯 고요하기 그지없는 곳.
그곳에, 악마가 하나 서 있었다.
***
"흐핫, 아하하하핫!!"
단검이 손안에서 자유자재로 돌아갔다.
묘기라도 부리듯 똑바로 쥐어지기도 하고 역수로 쥐어지기도 하며 때로는 손등을 타고 넘어가기까지 하던 단검은 여기에 잠시라도 홀린 이들을 잡아끌어 또 하나의 희생자를 만들어 냈다.
그렇게 몇 명이 희생되었던가.
단검이 뽑혀 나온 자리에서 피가 솟구친다. 이제는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는 동료의 희미한 신음 소리가 주위에 있던 이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눈앞의 검은 악마는 절대 상대를 쉽게 죽이지 않았다.
힘줄을 끊든, 손을 잘라 내든, 혹은 눈을 찔러서라도 반격의 여지를 완전히 차단해 버리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된 이를 즐겁다는 듯 웃으며 난도질했다.
혹여 실수로 바로 죽였다 하더라도 그 시신을 갈기갈기 찢어 본인의 잔혹함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아, 악마...."
어디선가 떨리는 목소리가 신음처럼 새어 나왔다.
아마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겠지.
전장에서의 약한 소리는 사기를 위해서라도 좋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그를 나무랄 수 없었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 있는 병사 자신조차도 그랬다.
간신히 억눌러 놓았을 뿐인 감정이 발버둥 치며 저 말에 강력한 동의를 표하고 있었으니까.
'그래, 악마.'
저치를 두고 악마라 할 수 없다면, 누구더러 악마라 하겠는가.
손이 덜덜 떨린다. 다리가 땅에 박힌 듯 굳어 잘 움직이지 않는다.
상대를 난도질하는 저 뒷모습은 무방비하기 그지없건만, 병사는 차마 함부로 무기를 겨눌 수 없었다.
겨누는 것 자체는 쉽다.
무기를 들어, 저 무방비한 등을 향하게만 하면 된다.
다만, 그랬다가는.
'나 역시 저렇게 되겠지.'
싫다. 두렵다.
행동을 했을 때 당면하게 될 결과를, 병사는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도망치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다.
등을 돌리는 즉시 눈앞의 악마가 쫓아오리라는 것을 본능이 알려 주고 있었기에.
달려들지도 못하고 도망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끝내 병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희게 질린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누가 제발.'
──살려 줘.
짧디짧은 외침이 폐부에서부터 솟구치듯 올라왔다가 목구멍에서 눌려 삼켜진다.
이변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쨍그랑!!
"...어?"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강한 바람이 불었다.
화악 불어오는 흙먼지에 눈을 감았다 뜨니, 언젠가 멀리서 본 적 있는 갑옷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동시에 병사는 무기를 든 팔을 축 늘어뜨렸다.
"아, 아아...."
살았다.
안도가 굳어 버린 몸을 다정히 토닥인다.
금방이라도 풀려 버릴 것 같은 다리에 간신히 힘을 주고 서서, 병사는 눈앞의 존재를 또렷이 눈에 담았다.
제국의 새로운 영웅. 전장의 별. 이성적인 지휘관.
크루엘.
그가, 여기에 도착했다.
29. 새로운 영웅(4)
"!"
세 번째 도시의 성벽 위에 앉아 결계를 두들기는 마물들을 한심한 눈으로 보던 리리넬이 불에 덴 듯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두 눈은 크게 뜨인 채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리리넬 님? 무슨 일이십니까? 혹시, 네 번째 도시에 무슨 문제라도...."
"깨졌어."
"예?! 결계가 깨졌다는 말씀이십니까?!"
"내가 데몬 님께 드린 목걸이가 깨졌어!"
"...예?"
순간 부관의 사고가 멈췄다.
데몬 님? 데몬 님이라면.... 그래, 데몬 아루트. 마왕군의 제0군단장.
제게 있어서 함부로 생각하는 것조차 버거운 하늘 같은 존재이기에 잠시 생각하는 게 늦었다.
그러니까 그분께 뭘 드렸다고? 아니, 도대체 언제? 게다가 그게 깨져? 왜?
"어떡하지? 그거 정말 '즉사'할 수준의 공격에만 반응하게 해 놓았단 말이야!"
"아.... 그거 정말...."
...위험한 건가?
부관의 표정이 어색하게 변했다.
공감해 주고 싶어도 통 공감하기가 어렵다.
0군단장님이 위험에 처하셨다고? 죽을 위기라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상상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만약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심각한 사안이 된다.
그분을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을 수 있을 정도라는 것은 다시 말해 마왕님께도 위협이 된다는 뜻 아닌가!
"아무래도 가 봐야겠어!"
"예? 아니, 일단 진정하시고 잠시... 아, 제발."
리리넬이 어딘가를 향해 손을 크게 휘젓는다.
그렇지 않아도 열심히 마물들을 지워 나가고 있는 군단을 향해 더 서두르라는 신호를 보내다니!
그것도 모자라 곧바로 어디론가 이동하려는 그녀를 급히 붙잡으며 부관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정말이지....'
마왕님의 명령이 떨어진 것도 아니고, 군단이 전멸한 것도 아니니 맡은 임무는 완수하고 정석대로 절차를 밟아 돌아가야 한다. 그게 상식인데.
그걸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어느 쪽이든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부관 그만두고 싶다....'
누군가의 고뇌가 담긴 한숨이 소리 없이 허공에 흩어졌다.
***
"단번에 죽일 생각이었는데."
차가움이 물씬 묻어나는 목소리가 투구 안에서 흘러나왔다.
명백한 도발에도 데온은 그저 가만히 서서 주위에 흩날리는 파편을 눈에 담았다.
이건 그도 예상치 못한 장면이다.
데온은 생존과 관련된 것에 한해서는 침착했고, 제법 머리를 쓸 줄 알았다.
그렇기에 그는 상대의 말에 넘어가 달려드는 것 대신, 지금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파악하는 것에 집중했다.
그러니까, 조금 전에 일어났던 일을 다시 생각해 보자면.
갑자기 몸 주위에 투명한 막이 생김과 동시에 깨져 버렸고, 이어서 리리넬이 준 마력석 목걸이가 바스러져 지금 이렇게 흩날리고 있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다.
'힘을 다했다.'
마력석에 담겨 있던 마법이 사용되었다는 뜻이다.
즉, 조금 전에 생겼던 투명한 막은 일종의 방어 마법으로 강력한 기습을 막아 주었고, 제 역할을 다한 마력석은 그대로 바스러져 버렸다는 것.
...이게 한 번 정도는 즉사를 면하게 해 줄 거라 했던가.
'한 방에 죽을 뻔했다는 뜻이군.'
목걸이를 내려다보던 눈이 올라가 공격의 주범을 담는다.
투구에 가려져 얼굴을 볼 수 없지만, 아마 그가 병사들이 신나게 떠들어 대는 바로 그 '새로운 영웅'이겠지.
거기까지 생각하자 검은 천에 가려진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네가 바로 그 새로운 영웅이구나."
"과분하게도 그렇게 불리고 있더군."
"...흐음."
손에 들린 단검이 빙글빙글 돌아간다.
아까와는 달리, 데온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향해 단검을 겨눴다.
불편한 심기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태도였다.
"너, 이상하게 목소리가 낯익은데. 거슬려."
"나야말로 거슬리는군. 나는 이제껏 마족과 만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투구 한번 벗어 봐."
"지금 적 앞에서 투구를 벗으라 말하는 건가?"
명백한 거절.
카앙! 크루엘의 눈앞에 불꽃이 튀었다.
각, 가가각.
단검과 장검이 얽혀 거슬리는 소리를 낸다.
그 상태에서 크루엘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데온이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비정상적이기 짝이 없는 웃음은, 진득하고도 선명한 광기를 담고 있었다.
"영웅이란 칭호가 과분하다 했지?"
"...."
"정말 과분한지 아닌지 내가 한 번 확인해 주지."
폭풍과도 같은 공격이 크루엘을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카앙, 캉! 카아앙!!
빠른 공방이 오간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몰아치는 공격 속에서, 크루엘은 침착하게 모든 공격을 하나하나 막아 내고 있었다.
막아내고만 있었다.
0군단장은 그가 반격할 틈을 전혀 내주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크루엘이 무작정 불리한 것도 아니었다.
'공격이 가볍다.'
속도에만 치중한 탓인지 그게 원래 공격 수준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무도 가벼운 공격.
차라리 일반 병사들의 공격이 더 무겁다 생각될 정도였기에 버거운 속도임에도 막아 내는 것 자체는 큰 무리가 없었다.
카아앙!
날아오는 단검을 타이밍에 맞춰 강하게 쳐 내자, 힘없이 0군단장의 손아귀를 벗어난 단검이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무기를 잃었음에도 0군단장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손에 든 단검을 휘둘러 거리를 벌리며 빈손을 로브 안에 감추더니, 이내 똑같이 생긴 단검을 또 꺼내 들었다.
스스로도 자신의 약점을 아는 듯, 익숙하고도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힘과 체력으로 몰아붙이면 어떻게 될 것 같군.'
크루엘이 그런 판단을 내렸을 때, 데온 역시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슬슬 물러나야 한다.'
저 목소리가 너무 짜증이 나서 생각보다 더 시간을 지체했다. 머리가 좀 돌아가는 자라면 이미 약점을 눈치챘으리라.
어차피 이길 생각은 없었다.
데온은 자신의 몸을 너무도 잘 안다. 약한 만큼 잘 알아야 했다. 그래야 이 몸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 그가 파악한 현재의 몸 상태는 그닥 좋지 않았다.
슬슬 가빠 오기 시작하는 호흡. 이미 몇 번이고 상대와 맞부딪친 탓에 힘이 빠져 후들거리는 손.
좀 더 싸우려 한다면 그럴 수 있겠지만, 이런 쓸데없는 일에 모험을 할 이유가 없기에 그는 미련 없이 크루엘의 배를 걷어차 거리를 벌리고 물러섰다.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누구 마음대로."
"원한다면 내일 또 보면 되지. 안 그래?"
"...."
그렇게 하기에는 손해가 너무 크다.
0군단장의 실제 실력이 어떻든, 결국 전장의 사기를 좌우하는 것은 그의 이름값이다.
심지어 이번에 크게 데였으니 또다시 그가 참전한다면 아마 우리 측의 사기는 지금보다 더 떨어지리라.
그렇다고 이미 저렇게 거리를 벌린 0군단장을 쫓아가 전투를 마무리 지을 자신도 없었다.
이미 한 차례 전투를 치르면서 그의 속도를 실감한 크루엘이다. 자신이 그에게 도달하는 것보다 그가 도망치는 것이 더 빠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한 크루엘의 망설임을 읽은 듯, 데온이 짐짓 유쾌하게 웃었다.
그는 단검을 로브 안에 감추며 딱 크루엘에게 닿을 만큼의 목소리로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뭐, 사실 난 우리 측이 너무 밀려서 온 거라 마계의 땅만 되찾으면 돌아갈 생각이지만. 나라고 이런 곳에 오래 머물고 싶겠어? 잔인한걸 그닥 좋아하지 않는데."
퍽이나.
크루엘의 미간이 좁아졌다.
"애초에 너희 측이 먼저 시비를 걸어오지 않았나. 9군단장인가 하는 마족이 경계선을 넘나들지만 않았어도 이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 내가 이곳에 올 일도 없었겠지."
"아...."
9군단장이 심심하다고 난리친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설마 경계선을 넘었을 줄이야.
보나마나 경계선을 두고 인간계에 발을 들였다 빼며 도발했겠지. 그렇지 않아도 마계의 움직임에 예민한 제국이 그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었을 리 없다.
눈앞의 영웅이 오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황이 예측되어 데온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마계의 땅만 돌려준다면 우리 측 애들이 그 뒤를 쫓지 않도록 특별히 막아주지."
"...사과라면 됐다. 어차피 내겐 이득인 일이었으니. 대신 그 호의는 기쁘게 받도록 하지."
"좋아, 그럼."
대화가 끝났다.
크루엘은 순식간에 시야 밖으로 사라지는 검은 로브의 사내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돌아서서 말했다.
"우리도 물러난다."
경계선까지.
***
제국군이 물러간다.
실로 통쾌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이곳에 오고 나서 얼마나 고생했던가. 지금까지의 고생을 생각하면 이 정도로는 성에 차지도 않는다.
그건 병사들도 마찬가지인 듯, 그들은 희열에 가득 찬 얼굴로 함성을 내지르며 제국군의 뒤를 쫓고 있었다.
말릴 생각은커녕, 이 기세를 몰아 제국군을 쫓으려던 1군단장 제이카르는 이내 무언가를 확인하고는 빠르게 명령을 바꿨다.
"전군, 돌아와라."
이유는 하나다.
0군단장 데몬 아루트. 그가 저 멀리서 부정의 뜻이 담긴 수신호를 보내고 있었으니까.
위기의 연속이던 이 상황을 숨통이 트이게 만들어 준 이가 바로 저 인간이다. 의견을 존중해 주는 것이 당연했다.
더해서 무려 영웅을 상대로 몰아붙였던 그가 중간에 그만두고 돌아왔다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일 테고.
무엇보다,
'그의 심기를 거슬러 굳이 문제를 일으킬 필요는 없지.'
고개를 돌려 비척비척 다가오는 0군단장을 눈에 담았다.
"수고했다."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의아함에 눈썹을 까닥인 제이카르가 재차 입을 연 순간, 0군단장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아...."
...아?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0군단장의 다리가 훅 꺾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당황한 제이카르가 황급히 그를 잡아 주려 했을 때, 그보다 한 발 더 빨리 부축하는 손길이 있었다.
미리 준비라도 하고 있었던 듯 자연스럽게 그를 받아드는 손길.
0군단장의 부관, 에드랬던가.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지, 그는 모래성처럼 무너져내리는 0군단장을 능숙하게 받아들고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괜찮으십니까."
"...빌어먹을...몸뚱이...."
맞닿은 몸에서 얕은 진동이 전해진다. 거의 모든 힘을 소진했다는 증거.
에드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더니, 이내 좀 더 편하게 자세를 고쳐 잡고는 상냥하게 속삭였다.
"몸도 좋지 않은데 무리하신 모양입니다. 쉬십시오."
그제야 긴장이 풀린 모양이다. 0군단장의 몸이 축 늘어졌다.
그를 들다시피 한 에드가 누군가를 향해 고개를 까닥인다. 자연스럽게 주치의 벤이 다가와 진찰을 시작했다.
이 모든 일련의 과정들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제이카르는 엉망으로 흐트러진 병력을 수습하는 것도 잊은 채 그저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약해진 몸으로 무리를 한 탓에 피로가 쌓인 모양입니다. 단순 기절입니다."
벤의 보고가 자신을 향한 것이라는 걸 깨달은 것은 3초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아, 하는 짧은 탄식을 내뱉으며 제이카르가 뒷목을 문질렀다. 그 행동에는 잠시 정신이 팔렸었다는 부끄러움이 담겨 있었다.
"0군단장을 제대로 모시도록."
"예."
본래 하려던 질문이 있었지만, 굳이 쓰러진 사람 붙잡고 물어볼 정도는 아닐뿐더러 이미 스스로 답을 찾았기에 굳이 0군단장을 깨우진 않았다.
그가 쫓지 말란 수신호를 보냈던 이유.
자신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그랬으리라.
이 이상 무리해서 싸웠다가 적 앞에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전황은 다시 뒤바뀔 테니까.
그뿐이랴, 그것을 본 제국군의 생각이 어떻게 바뀌겠는가.
0군단장이라는 자가 생각보다 별거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 것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0군단장의 참전은 저들을 뒤흔들지 못하겠지.
쫓지 말자는 의견은 실로 납득이 가는 판단이었고, 그의 말을 따른 것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다.
만약 따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생각하기도 싫은 가정에 제이카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축 늘어진 채 에드의 품에 안겨 들어가는 데몬 아루트를 쳐다봤다.
'존중하기로 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군.'
갑자기 들어와 자리 잡은 0군단장.
이를 두고 수많은 군단장들이 고민했더랬다.
[그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하는가, 밀어내야 하는가.]
내색은 안 했지만 제이카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그는 1군단장이라는 이전까지 가장 높은 숫자를 단 군단장이었기에 더욱 깊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내려진 결론.
[인정하자.]
처음부터 선택지는 없었다.
용사의 자폭을 막아 냈다든가, 전 7군단장을 죽였다든가 하는 것을 제치더라도 마왕님께서 직접 데려온 자다. 인정하지 않으면 어쩌겠는가.
그리고 그 선택은 실로 옳았다.
0군단장은 무작정 적을 쫓는 장수가 아니었다. 상황을 적절하게 판단하고, 자신의 욕구를 억누를 줄 아는 지휘관이었다.
'더 싸우고 싶었을 텐데.'
아마 조금 무리했다면 좀 더 싸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멈춘 것은 그만큼 위험부담이 증가하기 때문이겠지.
0군단장의 패배는, 그저 그 하나만의 패배가 아닌 마왕군 전체의 사기와도 직결되는 것이니까.
새삼스러운 눈으로 데몬을 보던 제이카르는 이내 피식, 작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30. 제국으로(1)
"데몬 님, 어디 불편하신 곳은 없으십니까?"
"없습니다."
"혹, 머리가 아프시다거나...."
"멀쩡합니다."
"물 좀 드시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제... 제 마음입니다!"
"...?"
살인 예고인가.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앞에 내밀어진 기괴한 꽃을 쳐다봤다.
그러자 꽃을 내밀었던 녀석이 그 많은 인파 사이로 쑥 끌려가더니 이내 둔탁한 소리와 함께 소란이 일었다.
"미쳤냐!"
"데몬 님께 감히 꽃을 선물해? 마음은 또 뭐야?!"
"악! 윽! 데몬 님 꽃 좋아하시거든?! 존경하는 내 마음 표현이다, 왜!"
"데몬 님이 꽃을 좋아하신다고...?"
"그래! 정원 산책을 즐기시는 걸 봤단 말이야! 인큐버스를 정원사라는 이유로 옆에 두고 걸을 정도면 얼마나 좋아하시는 거겠냐? 아무것도 모르는 것들이!"
"그럼 뇌물을 바친 거네!"
"끄아악!"
뭔진 모르겠지만 고생하는구나....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현재 나는 마차 안에 얌전히 앉아 있다. 깨어났을 때 내가 있는 곳이 마차 안이라는 것을 깨닫고 어찌나 놀랐던지.
설마 빌어먹을 마왕이 술 취한 틈을 타서 나를 제국에 팔아넘긴 건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상황 파악을 위해 창문을 열고 나서야 그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으나, 나는 다른 의미로 놀랐다.
'왜, 왜들 그렇게 보는 건데.'
창문을 연 것과 동시에 쏠리는 수많은 시선들.
묘한 열기를 담고 나를 향한 그 눈들에,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마 에드가 내게 다가오지 않았더라면 계속 그 상태였을지도 모른다.
에드는 창문 너머로 내 안색을 살피며 몸은 괜찮은지 물었고,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상 차마 이게 무슨 일인지 묻지도 못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또 내가 취해서 뭔가 일을 저질렀다고....
전쟁에서 엄청난 활약을 했다는 걸 보니, 전쟁터에 뛰어든 것 같은데....
'나 도대체 뭘 한 거야? 무슨 정신으로....'
어쩐지 왜 그냥 돌아가나 했다.
그냥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끝났기에 돌아가는 것이다.
분명 적당히 마셨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주량이 줄어든 건가? 그렇다 해서 딱히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좀 아쉬운데.
아무튼 그게 어지간히도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돌아가는 내내 군단원들이 열린 창문으로 기웃거리며 내게 말을 붙여왔다.
언제나 표정이 경직된 채 나와 거리를 두던 놈들이...!
"배는 안 고프십니까?"
"안 고픕니다."
처음에는 얼떨떨했고, 그다음은 무서웠고, 지금은....
'지친다.'
이런 것도 한두 번이어야지.
본인들은 한 번씩 말을 거는 것이겠지만, 그걸 받아 주는 나는 입이 부르틀 지경이다.
창문을 닫기에는 계속해서 말을 건네오는 놈들이 있어 사정이 여의치 않고, 그걸 그냥 무시하고 닫았다간 내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도 있으니.... 정말이지 미치겠다.
그때, 창문 앞에 모여든 군단원들을 헤치고 에드가 나타났다.
반가운 얼굴의 등장에 내가 상체를 창가로 기울이자, 그는 허리를 한 번 숙여 보이고는 말했다.
"도착했습니다."
드디어!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몸은 언제나 피로했으니 잘 모르겠는데, 정신이 너무 피곤하다.
이러다 정말 제정신이 아니게 될 것 같아 빨리 쉴 생각으로 나는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내가 언제 방으로 올라왔지?'
너무 피곤한 나머지 기억마저 가물가물해진 모양이다.
언제, 어떻게 올라왔는지 모르겠다.
***
"아, 왔어?"
마왕이 고개를 들었다.
여느 때처럼 무표정으로 눈앞에 서 있는 백발의 사내를 보며, 그는 싱긋 눈을 휘었다.
"이번에 큰 활약을 했다며? 수고 많았어. 새로운 영웅을 만난 소감은 어때?"
"...드릴 말씀이 있어 왔습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음에도, 마왕은 무례를 지적하는 대신 얼굴에 미소를 그렸다.
마침 아주 흥미로운 정보가 들어왔으니까.
눈앞의, 데온 하르트와도 연관이 있는 아주 중요한 정보가.
"그래? 그 전에 이걸 한번 보는 게 어때? 2군단장이 새로운 영웅에 대한 정보를 가져왔거든."
흠칫.
2군단장이라는 말에 데온의 몸이 떨렸다.
"...2군단장이 왔다고요."
"그래. 웬 남자 옷을 잔뜩 들고 왔던데?"
"...."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재차 몸을 부르르 떤 데온이 아까와는 달리 급하게 서류를 집어 들었다.
눈동자가 좌우로 움직이며 글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실 읽을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다.
다만.
"그 새로운 영웅의 이름은...."
그 얼마 되지 않는 글에 무거운 정보가 담겨 있어서.
"크루엘 하르트."
"...하."
데온 하르트는 아까의 급함은 잊은 채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붉은 눈이 번들거린다. 입꼬리가 올라가며 적의와 살의를 드러냈다.
너무도 익숙한 이름.
평생이 가도 잊기 힘든 친형의 이름을 되뇌며, 그가 말했다.
"그냥 그때 죽여 버릴 걸 그랬군."
무리를 해서라도.
서류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흰자와 검은자가 뒤바뀐 마왕 특유의 역안이 무슨 말을 할지 다 안다는 듯 웃음기를 담고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제국에 갈 생각이지?"
"...."
때로 침묵은 긍정이 된다.
느긋하게 책상을 정리한 마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데온에게 다가갔다.
무엇을 할지 이미 다 안다는 듯, 의아한 기색 하나 없이 그 자리에 서 있는 데온의 쇄골 위, 목과의 경계선을 손가락으로 툭 치며 그가 말했다.
그의 손가락이 닿은 자리에 검은 낙인이 찍혔음에도 둘 중 어느 누구 하나 개의치 않았다.
"다녀와. 제국 측에서도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면 의심하는 사람이 생길 테니까. 물론 쓸 만한 정보가 있으면 알려 주고."
마왕이 씩 웃었다.
그가 데온을 아끼는 이유.
그것은 데온 하르트가 자신조차 할 수 없는 일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외견상 인간과 다른 부분이 한 군데 이상 존재하는 마족들로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
첩자 노릇.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데온 하르트.
그는 마왕군의 군단장이며,
제국의 영웅이다.
***
한참의 고민 끝에 간신히 기억의 파편 한 조각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 나 마왕과 만났었지. 돌아오자마자 상관에게 보고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니까.
그리고 어렴풋이 기억나는 대화 내용 중 하나.
'2군단장이 돌아왔다고.'
그래서 난 제국으로 튈 생각을 했고, 용케 마왕이 다녀오라고 허락한... 건가?
어쩐지 내 입맛대로의 기억 같지만 아무렴 어떤가.
결과적으로 제국에 다녀오라고 허락한 것은 분명하다.
[다녀와. 제국 측에서도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면 의심하는 사람이 생길 테니까. 물론 쓸 만한 정보가 있으면 알려 주고.]
마왕의 이 말만큼은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으니까.
그렇다면 허락도 받았으니 2군단장이 여기에 오기 전에 빨리 떠나도록 하자. 분명 날 발견하기 무섭게 이것저것 옷을 입히려 들 거야.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싸기 시작했다.
어차피 제국으로 가는 데 필요한 짐은 얼마 안 된다. 햇빛에 노출되지 않게 조금만 복장에 신경 쓰고, 가는 동안 먹을 식량만 챙기면 끝.
'이야, 완벽하네.'
2군단장과 마주치지 않고 식량을 챙길 수 있을지 조금 걱정이 되지만....
웬 옷을 잔뜩 들고 왔다는 2군단장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옷을 전부 입어 보기 전까지 절대 놓아주지 않겠지.'
나쁜 녀석은 아닌 것 같지만, 사람이 옷을 입고 벗는 것만으로도 녹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무시무시한 마족이다.
서둘러 식량을 챙기기 위해 문손잡이에 손을 얹는데, 잠깐.
'식량은 어디서 구하지?'
식당엔 군단장들이 있을 테니 곤란하고.
...일단 나가 볼까.
손잡이를 돌리는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라 문에서 멀어졌다.
'설마 벌써 2군단장이?'
발이 저절로 뒷걸음질을 친다.
차마 누구냐 묻지도 못하고 머뭇거리는 나를 안심시켜 주기라도 하듯, 문 너머로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몬 님, 에드입니다."
***
"왔으면 이리 앉지."
서류를 살피던 마왕이 고개를 들고 턱을 까닥였다. 데온을 상대할 때와는 달리 진중한 얼굴.
순순히 자리에 앉으며 에드는 조용히 머리를 굴렸다.
분명 데몬 님이 보고를 하셨을 텐데, 어째서 부르신 거지? 설마 뭔가 석연찮은 부분이라도 있었나?
그사이, 서류를 정리해 한쪽에 쌓아 놓은 마왕이 나직이 에드를 불렀다.
"질질 끄는 것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니 바로 말하지."
"...."
"군단장이 될 생각 없나?"
"!"
온갖 가정과 각오가 무색하게도 머릿속은 백지가 되어 버렸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주제에 멍해진 것도 잠시, 에드는 빠르게 상황 파악을 마칠 수 있었다.
"9군단장의 자리가 빈 것 때문입니까?"
"그래. 이전까진 군단장의 자리가 전부 차 있었으니 0군단장의 부관 자리에 있었다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자리가 비었다.
그 자리의 선택권이 후보인 에드에게 주어진다는 것은 당연했다.
언제나 기다려 왔던 일이다. 어떻게 이걸 잊고 있었는지.
그러나 그렇게 기다려 왔던 일임에도, 에드는 쉬이 입을 열 수 없었다.
"제가 군단장이 되면, 데몬 님의 부관은...."
"새로 하나 뽑아야겠지. 너 다음가는 녀석으로."
"그럼 거절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 새로운 부관이 될 녀석에게 군단장 제의가 돌아가겠지."
"그...렇습니까."
거기까지 말한 에드가 입을 다물었다.
표정에서부터 고뇌하는 기색이 드러난다. 마왕은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는 듯, 의자에 느긋이 몸을 기댔다.
공기가 풀어지고, 시간이 멈춘 듯 부드러운 고요함이 방 안에 내려앉는다.
그러한 공간 속에서도 한동안 입을 떼지 못하던 에드는, 창밖에 늘어서 있던 세 개의 달이 다시 겹치기 시작하고 나서야 간신히 말을 꺼냈다.
"저는...."
마왕과 대화를 마친 에드는 당연하다는 듯 데온의 방으로 향했다.
늘 그렇듯 두 번 노크를 하고, 항상 하던 말을 꺼낸다.
"데몬 님, 에드입니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방 안에 서 계시는 제 상관이 보인다. 에드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금방이라도 나갈 듯 완전 무장을 한 모습.
예상치 못한 모습이었으나, 이전에 마왕님을 만났다는 것을 생각하면 무언가 밀명이라도 받았을 거라 예측할 수 있었기에 그는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고 마저 문을 닫았다.
"나가시려는 겁니까?"
"예, 조금 오래 걸릴 겁니다."
"아...."
평소답지 않게 머뭇거리며 눈을 굴렸다.
그런 에드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본 것도 잠시, 굳이 캐물을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데온이 이를 언급하는 대신 조금 늦은 설명을 덧붙였다.
"인간계에 다녀올 겁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식량이 필요하겠군요."
에드의 행동은 역시 빨랐다.
알아서 챙기겠다는 그를 극구 말리며 마법이 걸린 작은 주머니를 허리춤에 꼼꼼히 묶어 준 에드가, 슬쩍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저...."
"아, 고맙습니다. 그럼 전 이만 가 봐야겠군요."
인사를 받으려 한 것이 아닌데. 에드는 자리에서 일어서는 데온을 멍하니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