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보다시피 지금 나는 서류의 산에 둘러싸여 일 처리를 하는데 여념이 없다.
무려 반년 치 서류가 밀려 있는 만큼 일주일째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서류 작업만 하고 있으니, 당연하게도 눈 밑에 시커먼 그림자가 생겨 버렸다!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마음 같아서는 그냥 읽지도 않고 인장만 쾅쾅 찍어 대고 싶다만, 그랬다간 레멤베르가 가만두질 않을 테니.
우리 집 집사는 정말 대단한 것이, 절대 언성을 높이지 않고 얼굴도 찌푸리지 않는데도 사람 기죽이는 데 일가견이 있다. 지금도 저 봐라, 뭘 말하려는 건지 입을 열고 있지 않나.
아마 하르트 영지 관리에 소홀한 나를 질책하려는 것이리라.
"아직 소식을 못 들으신 모양입니다."
"...네?"
"일주일 전, 폐하께서 임시로 관리를 맡기셨던 하르트 영지를 온전히 백작님 소유로 돌리셨습니다."
"그게 무슨?!"
임시로 맡아 두는 것도 간신히 받아들였는데, 뭘 어떻게 했다고?
"이...번 농담은 조금 과했습니다, 레멤베르."
"농담 아닙니다."
"공문 같은 거, 못 받았습니다만."
"이곳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
책상 위는 물론, 바닥까지 점령한 서류 더미를 바라봤다.
망연한 표정의 나를 향해 레멤베르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이제 하르트 영지는 백작님 소유입니다. 관리를 소홀히 해서는 곤란합니다."
"...애초에 '명예 백작'에게 이건 너무 과한 것 아닙니까? 받은 영지도 한두 개가 아니고, 어째서 내가 국방 쪽까지 살피고 있어야 하는지...."
국경선 근처 영지에 몬스터 무리가 어슬렁거리고 있다는 보고가 담긴 서류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백작님의 영지 중 일부가 국경선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말입니다! 어째서 '명예 백작'이 변경백의 역할을 맡고 있어야 하는 겁니까!"
변경백, 백작, 명예 백작.
이 셋은 전부 백작이지만 그 대우나 특혜가 다르다.
명예 백작은 백작과 동등한 위치에서 동등한 대우를 받지만, 단승 작위다. 다른 이에게 작위를 물려줄 수 없고, 죽으면 그 영지는 제국에 귀속된다.
백작은? 알다시피 작위를 물려주는 것이 가능하다. 자신만의 '가문'을 당당히 내세울 수 있는 것이다.
변경백은 변경, 즉 다른 왕국과 국경이 맞닿아 있는 영지를 갖고 있는 백작을 뜻한다.
사실상 이름만 백작이지, 후작과 거의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 국방의 일부를 책임지고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혜택이랄까.
그런 의미에서 백작이 변경백이 된 것도 아니고, 명예 백작이 변경백이 되어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폐하께 따지시지요. 백작님께 명예 백작 이상의 권리와 일을 내린 사람은 다름 아닌 폐하이시니까요."
"따질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깊은 한숨과 함께 책상에 쓰러지듯 엎드렸다.
괜히 반발했다가 목이 날아간 이들이 한둘이 아니거늘, 어느 누가 황제에게 따지겠는가.
아무리 그가 황실에서 관리해야 할 영지를 내게 하사했다고 해도 말이다.
'그래, 그 영지.'
내가 변경백 역할을 맡게 만든 그 영지는 사실 변경에 위치해 있지도 않다. 오히려 중앙에 더 가까운 편이지.
다시 말해 원래는 황실에서 관리해야 하는 영지였다는 것이다.
황제는 아무것도 모르는 내게 그 영지를 하사했던 거고. 빌어먹을.
난 명예 백작에 만족하는데, 어째서 뭘 더 안겨 주지 못해 안달인지 모르겠다.
"...그보단 하르트 영지를 반납할 방도를 찾아야겠습니다."
다른 영지, 심지어 날 변경백 역할을 맡게 한 그 영지마저도 순순히 넘어갈 수 있지만, 하르트 영지만큼은 싫다.
'전' 하르트 백작가가 맡고 있던 영지인 만큼 썩 좋은 추억이 없거든.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의 배신으로 좋았던 추억이 최악의 과거로 변모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임시로 맡아두는 것도 짜증 났는데, 누구 마음대로 소유권을 넘겨?
이건 절대 못 넘어간다.
"순순히 받아 줄 리는 없을 테고...."
임시로 맡아 둔 것 자체가 황제가 억지로 떠맡긴 것이었으니.
역시 직접 만나서 도로 가져가 달라며 빌어야 하나.
뼈아프지만 한 번에 한해 황제가 원하는 것은 실행 가능한 선에서 뭐든 들어주겠다며 거래를 요청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황제가 마냥 미친놈은 아니라서 흥미로운 거래는 받아들인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조만간 폐하께 찾아가 봐야...."
똑똑.
내 말은 채 끝을 맺지 못했다.
문 너머에서 절대 가벼이 넘길 수 없는 소식이 들려왔기에.
"백작님, 네메세우스 장군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 두 눈이 크게 뜨여 있음은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장군님이? 왜? 황제의 곁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어째서 직접 온 거지? 뭔가 큰일이라도 생겼나?'
설마 날 잡기 위해 온 건 아니겠지?
벌컥 문을 열었다. 앞에 서 있던 시종과 눈이 마주쳤다.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이고 바들바들 떠는 시종을 보고 나서야 나는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 이곳에서 내 눈은 보기 거북스러운 것이었지.'
착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슬슬 인간계에 적응할 만도 하건만, 내 정신은 아직도 마계에 있는 모양이었다. 상식과도 같은 사실을 잠시나마 잊어버리다니.
방심했다.
황족들과 기사단, 레멤베르 등의 나와 관계가 깊은 이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내 눈을 보기 거북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슨 일로 오셨답니까?"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눈치 빠른 집사가 대신했다.
"이 늙은이의 생각에는 이번에 잡은 혁명군과 관련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공문 같은 거 못 받았습니다만."
"이곳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
어째, 기시감이 드는데. 그거 방금 했던 말 아닌가?
나는 다시 한번 방 안의 서류를 쭉 둘러보고는 이내 깊은 한숨과 함께 걸음을 뗐다.
어찌 되었건 장군님을 기다리시게 할 수는 없으니까.
네메세우스는 8년 전쟁 당시 내가 선봉장이 되었을 때 직속 상관이었던 사람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은근히 나와 거리를 두려 했다는 것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런 사람이 굳이 이렇게 왔다는 것은 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뜻일 터.
아마 황제의 명, 뭐 이런 것 때문이 아닐까- 하는 무의미한 추측을 이어 가며 응접실 문을 연 나는, 안에 있는 이들과 눈이 마주치고 그만 굳어 버렸다.
"오랜만이네, 백작."
"...데온 하르트가 미래의 제국을 뵙습니다."
***
"하르트 명예 백작이 저택을 습격한 혁명군을 생포했다네?"
"!"
"폭탄도 맨손으로 잡았다는군."
정원에서 황녀와 마주 앉아 차를 마시던 황태자가 들고 있던 신문을 내려놓았다. 앞에서 찻잔을 기울이던 황녀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침착하게 입안의 액체를 넘긴 그녀가 잔을 내려놓는다. 덩달아 고개가 숙어졌다.
"하르트 명예 백작...."
"아니 뭘 또 시무룩해하고 그래."
그녀의 머리 위로 먹구름이 보이는 것만 같아 황태자가 급히 꼬았던 다리를 풀며 얼굴 위에 난색을 띠었다.
연회가 있었던 이후 며칠째, 황녀는 우울해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 제가 꼴 보기 싫겠죠?"
"지금까지와 크게 다를 것 없는 행동이었는데, 새삼스럽게 무슨."
"하지만 피를 토했잖아요!"
기어이 언성을 높인 황녀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황태자는 보이지도 않는 눈치였다.
인정한다. 가만히 있어도 주변에 사람이 꼬이는 신분과 외모상 역으로 누군가를 꼬시려 든 적이 없어 서툴렀다.
애초에 다른 고급스러운 방법이 있었다 해도 사용할 수 없었겠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큰 사고를 칠 생각은 없었는데.
"망했어.... 그동안의 노력이...!"
"애초에 별로 먹히는 수작도 아니었던 것 같다만...."
"역시 사과해야겠죠?"
"직접?"
"네!"
"안 돼."
황태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지간한 것은 막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두겠지만 이건 아니다.
"네가 그의 저택을 방문하든 그가 네 부름을 받고 황궁으로 오든 직접 만나게 된다면 필시 추문이 생길 거다."
"그럼 저야 좋죠. 추문을 기정사실로 만들어서 그대로 혼인하면...."
"알레테아."
짧은 침묵이 일었다.
그는 동생을 물끄러미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넌 그를 사랑하지 않잖니."
"...."
"그리고 사과는 네 연기에도 오점을 남길 거야."
'황녀'는 고작 그런 일로 사과를 할 정도로 똑똑하지 않으니까.
그제야 황녀의 눈에 동요가 일었다.
좋게 말하면 순수하고, 나쁘게 말하면 멍청한 황녀. 그게 알레테아에 대한 세간의 평이다.
"그만두고 싶다면 나야 환영이지만."
"...됐어요."
황녀가 의도한, 황제와 황태자를 위해 뒤집어쓴 오명.
황태자의 입장에서는 동생의 희생을 증명하는 미안한 평가.
"똘똘 뭉쳐도 모자랄 판에 황위 계승 문제로 또 편을 가를 수는 없잖아요."
"그래.... 계승 싸움은 지긋지긋하지."
"그리고 하르트 명예 백작 문제라면 걱정 마세요. 그를 사랑하진 않더라도 좋아는 하니까."
저 작은 머리통이 무슨 생각을 품고 일을 진행하는지 추측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황태자는 황녀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누누이 말하지만 그만두고 싶으면 언제든 그만둬도 좋단다. 누구도 네게 무언가를 강요한 적은 없으니."
가만히 그를 보던 황녀가 배시시 웃었다.
"알아요. 그러니까 오라버니는 하르트 명예 백작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보고 오세요."
"...뭐?"
"어서요. 제가 갈 수는 없잖아요?"
"아니, 뭔가 결론이 이상한데...."
오라비의 등을 떠밀며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황녀는 감이 좋다.
그녀의 감이 데온 하르트는 제국의 가장 불안한 영웅이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런 그를 혼인을 통해 황실에 완벽하게 묶어 둘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을 뿐.
"정말 하르트 명예 백작을 꾀어내고 싶다면 방법부터 바꿔야 할 거다."
"멍청한 황녀는 이런 방법밖에 몰라서 죄송하네요!"
"...."
데온 하르트가 넘어오든 넘어오지 않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황녀'가 그에게 호감을 표했다는 것과 그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는 것.
물론 넘어와 주면 고맙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청혼서를 보내는 순간 데온 하르트는 선택해야 한다.
거절하고 평생 혼자 살 것인가, 받아들일 것인가.
'물론 어디까지나 감일 뿐이니 청혼서는 아직 보류해 뒀지만.'
"그래, 간다, 가. 어차피 하르트 명예 백작을 만나려 했으니 겸사겸사 알아봐 주마."
"역시 오라버니!"
"하지만 네 실례를 불쾌히 여기는지 정도만 확인할 거니 기대하진 말고."
***
아슬아슬하게 정신을 붙잡고 고개를 숙였다. 내 심정을 대신하듯 딱딱하게 굳어 어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 내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황태자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장군님이 아닌 황태자가!
'어째서 아무런 기별도 없이...!'
심지어 그걸 아무도 알리지 않았다.
날카로운 눈으로 '네메세우스의 방문'만을 알린 시종을 노려보았다. 놈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찰나, 황태자가 부드럽게 나를 불렀다.
"사용인들을 질책하진 말게. 내가 말하지 말라 했으니."
"...네, 전하."
황태자의 앞이다. 즉시 자세를 바로 했다.
약간의 여유가 생기고 나서야 뒤늦게 네메세우스 장군이 눈에 들어왔다. 연회장에서는 하도 정신이 없어 대충 보고 넘어갔던 그의 모습이.
전장을 휘젓느라 햇빛에 그을린 피부.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터.
전쟁 당시와 변함없는 모습을 한 자신의 전 상관은,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듯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눈치로 살펴보건대, 아무래도 황태자가 따라온 것이 불만인 듯싶다.
즉, 황태자가 멋대로 따라왔다는 건데...
왜?
"폐하께서 자네가 잡은 혁명군의 인도를 원하시네. 뭐, 그건 장군에게 말씀하신 것이니 나와는 상관없지만.... 개인적으로 흥미가 생겨서 말이야."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자네, 날아오는 폭탄을 맨손으로 잡았다면서?"
"...."
순간 썩은 표정을 지을 뻔했다.
상대가 황태자라는 것을 자각해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불손한 태도로 끌려갈 뻔했네.
그나저나 그 소식은 어디서 들은 거야?
그때 유난히 큰 감명을 받은 것 같았던 리엔 경을 떠올린 순간 황태자가 나직한 웃음을 터트렸다.
"어디서 그 소식이 새어 나간 건지 고민할 필요 없네. 그날 많은 이들이 목격하지 않았나. 자네가 모든 사용인들의 입을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설사 막았다 하더라도 우연히 그 앞을 지나간 누군가 말을 퍼트렸을 수도 있지."
덧붙여서 친절하게 이미 수도에 소문이 파다하다고까지 말해 주시니.... 위가 쓰리다.
이런 식으로 실력이 부풀려져 봤자 황제의 기대가 커지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이득도 없는데.
참고로 난 황제의 기대 따위 전혀 반갑지 않다. 위험한 일에 더 자주 끌려 나가게 될 테니까. 더해서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커지는 법이다.
이렇게 내 수명이 더 짧아지는구나....
"농이네."
"네?"
"여기에 온 이유 말이야. 자네가 폭탄을 잡은 건 대단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 아닌가. 내가 이곳에 올 이유는 못 되지."
"아, 그럼...."
"연회 당시에 있었던 황녀의 무례를 대신 사과하러 왔네."
"아...."
뒤에서 급습한 걸 말하는 건가. 한두 번도 아니고 이젠 익숙해서 괜찮은데.
게다가 진심으로 공격하려는 의도도 아니고 단순한 호감 표시이니 내 입장에서는 이를 뭐라 할 수도 없다.
그걸 알 텐데도....
"미래의 황제라는 자리는 참 무거워서 사과도 함부로 못 하더군. 사적으로 찾아가면 다른 이들의 이목을 끌게 될 테니 이렇게 공적인 일을 핑계로 따라왔네."
"...."
"황녀는 내가 따끔히 혼내 두었으니 당분간 이런 일은 없을 거야."
...당분간?
황녀의 성격을 보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너무 솔직하신 거 아닌가? 그래도 황태자인데.
황태자는 스스로가 뱉은 '당분간'이라는 말이 양심에 찔렸는지 잠시 다른 곳을 바라보더니, 이내 다시 눈을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사과를 받아 주겠나? 백작."
"...물론입니다. 애초에 사과하실 필요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그랬겠지. 하나 자네는 피를 토하지 않았나."
"...."
그거 피 아니었는데.
차마 말하지도 못하고 눈만 데굴데굴 굴리는 사이, 황태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흘리듯 말했다.
충격적인 내용과 달리 여상한 말투였다.
"불쾌히 여기지 않는다니 다행이야. 사실 폐하께서 신임하시는 자네와 친해지고 싶었네."
"...네?"
"자네는 너무 바쁘지 않은가. 그간 친분을 쌓았다고는 하나 거기까지일 뿐인 친분일 테니."
"...."
"그래서 알레테아가 무례를 저지르고 그 일로 자네가 피를 토했을 땐 망했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지."
망했....
지금 내가 뭘 듣고 있는 거지...?
"때문에 사과도 할 겸 친분을 쌓으러 이렇게 직접 왔네만, 이런 내가 거북한가?"
"아, 아닙니다."
"그렇다는 건 자네와 친해지려는 내 노력이 괜찮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다행이군. 그럼 앞으로 황궁에 올 때마다 종종 내게 들러 줄 수 있겠나?"
"...네?"
지금 빠져나올 수 없는 무언가에 걸려든 기분인데.
어째서 이런 말이 나오게 된 건지 상황을 되짚으며 얼빠진 얼굴로 눈만 깜빡이자, 그런 내 기분이 정답이라는 것을 알려 주듯 황태자가 얼굴 가득 따스한 미소를 피워내며 덧붙였다.
"굳이 날 보러 찾아와 달라곤 하지 않겠네. 황궁에 온 김에 들러 주면 돼. 같이 차도 마시고 검도 맞대며 대화를 나눠 보도록 하지."
41. 명예 백작 데온 하르트(6)
와. 와아.... 역시 황태자는 황태자구나. 솔직은 개뿔.
이제 보니 뱃속에 능구렁이가 한 마리 들어앉아 있다. 앞으로 황궁 근처엔 얼씬도 하지 말아야지.
한 마리의 낚인 물고기가 된 기분에 멍하니 있다가 네메세우스 장군님의 매서운 시선을 느끼고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후 무서워라, 저 충성심.'
누가 제국의 첫 번째 영웅 아니랄까 봐.
황제와 황제가 인정한 황족들을 향한 그의 충심은 제국 내에서도 아주 유명했다.
"그럼 이만 난 가 보겠네. 사실 충동적으로 나온 거라 이 이상 자리를 오래 비우면 곤란해. 배웅은 나오지 않아도 되네."
"아, 네. 안녕히...."
가만, 지금 황태자가 자리를 비우면 저 무시무시한 장군님이랑 단둘이 남게 되는 거 아닌가?
황태자와 대화를 나누는 지금까지 병풍처럼 서 있던 사내를 힐긋 확인했다.
역시나 무서운 표정.
황태자가 떠나고 난 뒤 어떤 분위기가 될지 자연히 상상돼 나는 잠시 마른침을 삼켰다.
차라리 황태자가 남아 있는 게 더 나을 수도....
"...가십시오...."
하지만 내가 어떻게 감히 제국의 황태자를 붙잡아둘 수 있을까. 결국 눈물을 머금고 그를 배웅했다.
황태자가 자리를 뜨고, 그제야 미동도 없이 서 있던 건장한 사내가 마련된 자리에 앉는다.
예상했던 침묵이 찾아왔다.
"...."
"...."
숨이 막힌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식은땀만 삐질삐질 흘리며 정면에서 직시해 오는 그의 눈을 슬그머니 피했다. 그의 시선에서 불쾌한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져 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은 왜 그렇게 날 싫어하는지 모르겠다.
아니, 싫어한다기보다는... 혐오한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이 사람이 내게 부정적인 감정을 가졌음은 확실하다.
차마 이쪽에서 먼저 운을 떼지 못해 더 길어진 듯한 이 불편한 침묵은 몇 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간신히 깨졌다.
"이렇게 인사를 나누는 건 오랜만이군."
"예.... 그렇습니다. 장군님."
"몸은 괜찮은가?"
"예. 멀쩡합니다."
"그럼."
공기가 바뀌었다. 시시콜콜한 대화는 여기서 끝이라는 듯, 장군님의 눈빛도 바뀌었다.
그가 허리를 곧게 편다. 앉은 상태에서도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키 탓에 자연히 시선의 높낮이가 달라졌다.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곳에 온 목적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질문 몇 개만 하지. 붙잡힌 혁명군은 한 명이라 들었다."
"그렇습니다."
"습격한 이들은 셋이었고."
"그것도 맞습니다."
"그중 죽은 사람은 둘."
뭔가 좀 불안한데....
어째 추궁당하는 기분이지만 일단은 사실이다. 미약하게 경고해 오는 직감을 애써 무시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장군님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하나는 폭발로 죽었다고 보고되어 있으나, 나머지 하나의 죽음이 애매하더군."
"...어...."
"그러니 묻지. 그자는 어떻게 죽은 건가?"
***
네메세우스는 어느 무엇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듯 날카로운 눈으로 데온 하르트를 쳐다봤다.
그의 눈빛은 순수한 의문보다는 상대가 어떻게 대답하는지 시험하려는 눈빛에 더 가까웠다.
사실 원인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다. 다만 그의 대답이 궁금할 뿐.
데온 하르트가 당혹스럽다는 듯 머뭇거린다. 그마저도 가증스러워 슬쩍 미간을 좁혔다.
네메세우스는 이유 없이 사람을 싫어하는 편협한 인간이 아니다. 그가 데온 하르트를 싫어하는 데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8년 전쟁 때, 데온 하르트의 변화를 실시간으로 지켜본 이가 누구겠는가.
네메세우스는 데온 하르트가 선봉장이 아니었을 때부터 그를 지켜봐 왔다.
그런 만큼 그는 데온 하르트의 극단적인 성격 변화의 진실에 대해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였고,
그렇기에.
'단순히 '싫어한다'의 수준으로 말할 수는 없겠지.'
그가 가진 감정 역시 진실의 무게만큼 무거웠다.
그러나 영웅까지 된 인물을 언제까지고 싫어할 수는 없는 노릇.
전쟁이 끝난 지도 2년이나 지났으니 조금은 괜찮아지지 않았을까 하여 이렇게 직접 와 봤건만.
"...공교롭게도 제가 그때 그 자리에 없었던 터라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해 들은 바로는 들개들이 물어뜯었다 하더군요."
──변한 것은 없었다.
"...그런가."
미련 없이 몸을 일으켰다.
데온 하르트의 시간은 아직도 전쟁 당시에 머물러 있었고, 네메세우스는 두 번의 기회를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혹시나, 했던 물렁한 마음을 단단히 굳히고 보류해 두었던 판단에 마침표를 찍는다.
데온 하르트는 위험 분자다.
'이런 놈을 폐하의 곁에 두어서는 안 돼.'
하르트 백작저 앞마당에 들개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예상하건대, 놈을 죽인 이는 분명 데온 하르트 본인일 것이다.
필시 자신의 '성격'을 이용했겠지. 언제 봐도 역겨우리만치 편리한 성격이다.
"알았다. 그럼 본 목적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그가 사악하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다. 나약함이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나, 폐하께서도 말씀하셨지 않았나.
'같은 죄라 하더라도 자리에 따라 그 무게가 달라지고, 일반적으론 죄가 아닌 것들도 자리에 따라 죄가 될 수 있다고.'
중책에 앉은 자의 나약함은 그 밑의 이들에게 재앙이 된다.
이를 가르친 사람이 다름 아닌 폐하이시건만, 어찌 놈을 곁에 두고 보시는지.
황제를 주군으로 모시는 기사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는 탓에 네메세우스는 그저 다시 한번 설득을 시도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데온 하르트를 노려봤다.
사무적으로 이곳에 온 목적을 읊는 그의 눈빛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
솔직히 좀 당황했다.
혁명군의 사망 원인을 묻다니. 제국의 입장에서 혁명군은 죽어도 상관없는 존재가 아니던가.
게다가 난 그놈이 왜 죽었는지 모른다. 나중에 감옥에 가 보니 한 명밖에 없어 의아함에 물어봤더니 돌아오는 대답이라고는 '들개들이 물어뜯었습니다' 뿐.
그 말을 하는 레멤베르의 눈빛이 오묘하긴 했지만, 나는 딱히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혁명군의 죽음 따위, 심문할 상대 하나만 남아 있다면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레멤베르도 딱히 자세히 말하지 않은 것일 테고.
당혹스러움에 어물거리자 장군님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명백히 짜증이 드러나는 표정에 결국 나는 억지로나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비틀어 열었다.
"공교롭게도 제가 그때 그 자리에 없었던 터라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해 들은 바로는 들개들이 물어뜯었다 하더군요."
"...그런가."
짧은 침묵 끝에 돌아온 것은 간단한 대답이었다.
온갖 복잡한 감정들이 꾹꾹 압축된 듯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한 것도 잠시, 장군님이 자리에서 일어나신다. 덩달아 일어나며 우연찮게 그에게 시선을 둔 나는 볼 수 있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그의 눈빛을.
...아니, 도대체 왜?!
"알겠다. 그럼 본 목적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영문을 알 수 없는 그의 태도가 당황스럽지만 화제가 바뀐 탓에 물어볼 수도 없다.
일단 입을 다물자 지극히 사무적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폐하께선 그대가 잡은 혁명군을 넘겨받길 원하신다. 목적은 혁명군의 본거지 파악과 완전 소탕."
"그렇...."
"물론."
말이 끊겼다!
"잡은 이는 그대이니 그대가 원하지 않는다면 넘겨주지 않아도 좋다 하셨다. 그러니 이렇게 칙서가 아닌 사람을 통해 말을 전하신 것이겠지."
"...그렇습니까. 영광입니다."
하지만 그 말은 굳이 내 말까지 끊어 가며 해야 할 정도로 의미 있는 말은 아니었다.
황제가 넘겨받길 원한다는 말이 나온 이상 나는 별다른 반발 없이 넘겨줄 생각이었으니까.
가둬 두고 있어 봤자 크게 쓸모가 있지도 않을 짐덩이를 가져가겠다는데 왜 반대하겠나. 이걸로 황제의 호의도 살 수 있을 테니 주는 쪽이 훨 이득이다.
더해서 복수든 완전 소탕이든 내가 하는 것보다는 황제 측에서 하는 편이 성공 가능성이 더 높을 테니.
나는 입 아프게 뭐라 말하는 대신 응접실의 줄을 잡아당겼다.
"혁명군을 데려와."
"아니. 이곳이 아니라 저택 입구로 데려가도록."
"네? 네, 알겠습니다. 여기가 아니라 저택 입구로 데려가."
장군님이 미련 없이 문으로 걸어간다.
누가 봐도 가려는 듯한 모습에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레 말을 붙였다.
"가시는 겁니까?"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정문까지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그대가 바쁘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
명백한 거절 의사. 나는 내심 어깨를 으쓱하고 물러섰다.
뭐, 내가 따라가봤자 대화는 일절 없고 싸늘한 공기만 내내 흐르겠지. 게다가 내가 처리해야 할 밀린 서류까지 생각하면 배웅은 확실히 비효율적이다.
그럴 시간에 레멤베르와 서류나 하나 더 처리하고 있는 게 낫지.
아, 서류.... 생각하니까 또 스트레스가 쌓이는 기분이다. 미치겠네, 진짜.
"안녕히 가십시오."
"그래."
건조한 인사를 끝으로 장군님이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나는 기다렸다는 듯 푹신한 소파에 몸을 파묻고 축 늘어졌다.
"끝났다...!"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네.
이런 나날이 매일같이 반복된다면 신경 쇠약에 걸릴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건 분명 걸린다. 안 걸리는 게 이상해.
소모된 심력 회복을 위해 잠시 멍 때리고 있다가 어기적어기적 몸을 일으켰다.
'서류... 마저 처리하러 가야지....'
끔찍하지만 그렇다고 피했다간 더 늘어난 서류만 맞이하게 될 뿐이니 방도가 없다.
아 정말 하기 싫다. 그냥 마계로 튈까?
깊은 한숨과 함께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억지로 옮겼다.
***
황태자와 네메세우스 장군이 방문했다는 것을 제외하면 이제까지와 크게 다를 것 없는 하루가 다시 흐르고 있었다.
...분명히 말한다. 흐르고 '있었다'.
빌어먹을 서류를 처리하고 있는 도중에 또다시 들려온 노크 소리만 아니었다면 그럭저럭 오늘을 끝마칠 수 있었을 텐데.
우당탕탕!
똑똑.
"백작님 계십니...."
"으아아아, 안 돼!!"
"이 손 놓지 못해?! 먼저 시작한 쪽은 네놈들이다!"
"고작 그거 가지고 그러기냐? 기사씩이나 되어 가지고 쪼잔하잖아!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이인데!"
"아무 사이도 아니잖나!"
이건 또 뭘까.
잔잔한 레멤베르의 미소를 보다가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무래도 내 인생에 평탄할 날은 영영 오지 않을 모양이다.
목소리를 듣자 하니 한쪽은 광견들 중 하나일 테고, 다른 한쪽은 우리 백작저의 기사 같은데....
어느 쪽이 문제일지는 안 봐도 뻔하다.
'황궁에 간다면 저것들 반납부터 말해야지. 진짜 말할 거야.'
살인귀 기사단 놈들.
저놈들이 아니고서야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던 백작저의 기사가 내 집무실에 올 리가 없다.
"들어와."
"안 돼애애애!"
"실례하겠습니다."
벌컥.
문이 열리고,
콰앙!
닫혔다.
문밖에서 다시 소란이 일었다.
"뭐 하는 짓인가?!"
"진짜 말하려고?"
"그럼 거짓으로 말하겠나!"
"아씨, 그래 우리가 잘못했으니까 이번 한 번만 넘어가자."
"사과하는 태도가 글러 먹었다."
벌컥.
기어이 문이 열리고 한 기사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 다리에 매달려 질질 끌려오는 이는.... 역시나 살인귀 기사단원.
아, 그래. 충분히 예상한 상황이다.
'다만 이건 미처 계산에 넣지 못했는데.'
나는 광견 놈의 몸부림에 마구잡이로 흐트러지는 문 근처의 서류를 보다가 펜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며 레멤베르에게 말했다.
"...리엔 경을 불러오세요."
"알겠습니다."
그 와중에 리엔 경이라는 말을 듣긴 들은 모양이다.
기사의 다리를 잡고 늘어지던 녀석이 벌떡 일어나 하얀 제복을 착착 정리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매정하게 고개를 돌려 그걸 아연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기사를 불렀다.
"그래서 무슨 일로...."
"아, 백작저의 모든 기사를 대표하여 감히 청하건대, 저놈들과는 같이 못 있겠습니다."
"!?"
너무 단도직입적인 거 아니냐?
그 전에, 말에 굉장한 감정이 담겨 있는 것 같은데? 그 정도로 저놈들이 싫다는 건가?
하긴, 이해한다.
"저도 살인귀 부대, 아니 기사단을 대표해서 말씀드리는데, 저 샌님들하고는 같이 못 있겠습니다!"
"그럼 나가."
"그럴 수가!"
이 새끼들은 예뻐하려 해도 예뻐할 수가 없거든.
리엔 경은 아직인가? 빨리 이놈 좀 끌고 나갔으면 하는데.
아, 그 전에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기사들이 같이 못 있겠다고 하는지 좀 궁금하다. 다시 기사를 쳐다봤다.
아마 이름이 카인이었을 것이다. ...맞겠지?
"카인 경."
"네, 백작님."
다행히 맞는 모양이군.
"저놈들이 무슨 짓을 한 거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에 감동한 표정을 짓던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마치 악귀 같은 표정에 흠칫하자, 그가 실례했다며 표정을 고치고는 분노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백작저 기사들 몫의 식사를 저들이 다 먹었습니다."
"...음?"
42. 명예 백작 데온 하르트(7)
"연무장의 무기들로 나무 맞추기 놀이를 하다가 무기 11개를 망가뜨리고 나무 네 그루를 쓰러뜨렸으며, 후에 그건 우리 측 기사들을 노리는 놀이로 변화했습니다."
나는 말없이 살인귀 기사단원을 노려봤다.
그러자 민망한 듯 눈을 굴리던 녀석이 이내 뻔뻔해지기로 한 건지 가슴을 쫙 폈다.
"훈련이야, 훈련."
"닥쳐라! 쉬어야 하는 시간에도 습격을 하면서 훈련이라고?!"
"적이 쉬는 시간을 가려서 공격해오는 건 아니잖아. 익숙해져야지."
"그럼 우리 몫의 식사를 뺏어 먹은 건!"
"식량이 부족한 상황을 대비한 훈련?"
"허윽, 위장약이...."
저 튼튼한 기사가 위장약을 찾게 되다니....
그것도 고작 일주일만이다. 나는 탄식을 감추지 못했다.
기어이 품에서 위장약을 찾아 먹은 카인 경이 간절히 나를 불렀다.
"위장약을 복용하고 있는 기사들이 늘고 있습니다. 부디 저 개새.... 기사단을 어떻게 해 주십시오."
"너 방금 개새끼들이라고 말하려 했지?"
"아니다."
"지랄하네! 진짜 개새끼가 뭔지 보여 줘?"
분명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백작저의 기사들은 혈색이 좋았던 것 같은데.
초췌한 카인 경의 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날뛰고 있는 미친개를 다시 노려봤다.
짐승 같은 감각으로 내 시선을 알아챈 녀석이 알아서 수그러드는가 싶더니, 머리를 긁적이며 어설픈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사실 그건 변명이라고 볼 수 없었다.
"그래도 황궁에 있을 때보다는 적당히 한 건데...."
"황궁에서도 이랬냐?!"
아니, 오히려 더했다고? 이 미친 새끼들이!
후두둑.
피가 떨어졌다.
그럼 그렇지. 오늘 이런저런 일로 피곤했는데 혈압마저 오르니 몸이 버틸 수가 있나.
"백작님!"
"대장, 아니 백작님!"
나는 급히 코를 부여잡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빌어먹을, 모처럼 피를 안 본다 했어.
시야가 흐릿하다.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는가 싶더니, 이내 암흑이 찾아왔다.
마지막으로 언뜻 보인 것은, 레멤베르와 리엔 경으로 보이는 이들이었다.
'다행이다. 어서 이 새끼 내 눈앞에서 치....'
익숙한 이불 냄새가 난다. 눈을 뜨자 마찬가지로 익숙한 천장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상황 파악이 되질 않아 눈을 깜빡이고 있기를 잠시,
"정신이 드십니까."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차분한 목소리를 내는 이는 내 기억상 단 한 사람밖에 없다.
"레멤베르."
"예, 백작님."
"내가 얼마나 누워있었습니까?"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습니다. 정확히 1시간 24분이 되겠군요."
고작 코피 터져서 기절한 것 치고는 오래된 것 같은데?
내가 쓰러진 사이 주치의를 불렀는지,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주치의가 다가와 내 몸을 이리저리 살피며 진찰하기 시작했다.
그런 주치의는 안중에도 없는 듯, 레멤베르는 또렷이 나를 응시하며 담담히 말을 꺼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네?"
"백작님의 심기를 어지른 기사단원은 현재 리엔 경의 손에 끌려갔습니다. 부르신다면 금방 오겠지요."
은청색 눈동자가 오묘하게 빛난다.
단 한 번의 눈 깜빡임도 없이 그를 마주 보던 나는 먼저 시선을 내리고 답했다.
"그렇다면 불러 주겠습니까?"
"예, 바로 불러오지요."
"아니요. 이곳이 아니라 집무실에서 대기하라 하세요."
"...그리하겠습니다."
의외라는 표정이지만 되묻지는 않는다.
레멤베르가 문을 살짝 열더니 밖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에게 말을 전한다. 그리고는 나가는 대신 다시 돌아와 침대에서 한 걸음 떨어진 곳에 섰다.
왜 굳이 이곳에 있기를 고집하나 했더니, 주치의 때문인 모양이다.
"몸 자체가 약한 데다 피로가 많이 쌓였을 뿐, 큰 이상은 없습니다. 피로와 스트레스를 주의하라는 말 밖에는 딱히 드릴 말이 없군요."
"그렇습니까. 서류가 많이 밀렸는데.... 곤란하군요."
이거 아무래도 날 걱정해서 그런 게 아니라, 어떻게든 서류 작업에 써먹기 위해 진찰 결과를 들으려 한 것 같은데...?
소름이 돋아 몸을 부르르 떨자 놀란 주치의가 다시 달려와 진찰을 시작했다.
나는 몇 번이고 괜찮다는 말을 하고 나서야 간신히 그를 떼어 낼 수 있었다.
그나저나 지금쯤이면 그 녀석도 집무실에 도착했겠지. 슬슬 만나 봐야겠다.
침대에서 내려오자 자연스럽게 레멤베르가 따라붙는다.
그는 내 집사니까 당연하다 치고....
'댁은 왜 따라오는데?'
어째서인지 주치의까지 같이 와 버렸다. 돌아봤을 때 그가 있어서 어찌나 놀랐던지.
아까부터 우물쭈물하며 눈치를 살피더니만, 어지간히도 간이 작은 사람인지 갈 타이밍을 놓치고 얼떨결에 내 뒤를 따라온 듯싶다.
나는 내심 혀를 차며 힐긋 그를 보고는 집무실 문을 열었고─
나를 따라온 주치의의 선택에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크흡-"
어지간히도 얻어맞았는지 팅팅 부은 단원의 얼굴.
그 탓에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려다 그만 코피가 다시 터지고 말았다.
서둘러 주치의가 내게 손수건을 내민다.
그걸로 코 중간 부분을 잡고 있으라는 그의 말을 순순히 따르며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녀석을 쳐다봤다.
'얼굴은 익은데.... 얘 이름이 뭐였더라? 밀? 말? 말라?'
"이름이 뭐였지?"
"예? 설마 제 이름을 까먹으신 겁니까? 밀란입니다. 세상에 까먹을 게 따로 있지, 하필이면 제 이름을...."
"네놈!"
밀란의 책임자로서 함께 있던 리엔 경이 금방이라도 주먹을 날릴 듯 울컥한다.
원래 저런 놈인걸, 뭐 어쩌겠어. 나처럼 어느 정도 포기하면 편할 텐데.
서둘러 그녀를 말리며 터벅터벅 걸어가 집무실 책상 의자에 앉았다.
코피를 그렇게 흘렸음에도 다행히 서류는 멀쩡했다.
...흰 종이에 붉은 자국이 좀 남긴 했지만 글자가 멀쩡하니 됐지, 뭐.
아무튼.
"밀란,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런데."
"얼마든지 물어보십시오."
"황궁에서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냐?"
이게 바로 그를 부른 이유다.
애초에 난 그를 벌할 생각이 없었다.
이래 보여도 8년 전쟁 때 함께 전쟁터를 구르며 서로 살리겠다고 난리 친 사이다.
특히 모자란 지휘관인 나도 상관이랍시고 지키겠다며 그 난리를 치던 놈들인데, 어떻게 무거운 벌을 내리겠는가.
"음.... 혼내지 않으실 겁니까?"
"너!"
"리엔 경, 괜찮습니다. 혼내지 않을 테니 어서 말해 봐."
솔직히 좀 불안하긴 하다.
무슨 사고를 쳤길래 저 남 눈치 안 보는 놈들이 혼내지 않을 거냐 물어봐?
만에 하나 혈압이 올라 뒷목 잡고 쓰러지기라도 할까, 슬그머니 나가려는 주치의를 눈짓으로 붙잡아 두고 짐짓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밀란이 뺨을 긁적이며 천천히 운을 뗐다.
"사소한 것부터 말씀드리자면, 혁명군 잡으려다 건물 몇 채 무너뜨렸습니다."
"사소한.... 아니, 그 전에. 혁명군이라니?"
내가 탄 마차를 습격하고, 저택에 폭탄을 던졌던 그놈들은 왜?
혁명군이 얘네를 노리는 건 이해가 되는데, 얘네가 혁명군을 잡겠다고 난리 치는 이유는 뭐지?
"그, 마차 습격 때 말씀드렸다시피 폐하께서 밥값 하라며 제국 수도에서 난리 치는 혁명군 제압을 맡기셨거든요."
"...."
그랬어? 몰랐는데. 그때 기억이 날아갔어서.
그럼 그때 날 구한 게 이놈들이었겠구나. 어쩐지, 죽을 줄 알았던 내가 왜 황궁 연회장에 와 있나 했네. 정신 차리고 얼마나 당황했던지.
'그렇다면 그때 내 몸이 피범벅이었던 것도...?'
가늘어진 눈초리로 녀석을 훑자 괜스레 찔린 놈이 변명이랍시고 개소리를 허둥지둥 늘어놓는다.
물론 그 내용은 뒷골 당기는 말투성이었다.
"그, 그래도 물어내라는 말은 안 하셨습니다. 재상님이 우릴 좀 노려보시긴 했지만...."
노려봤다는 걸 알아채다니, 눈치가 좀 늘긴 했네.
그나저나 이놈들을 당장이라도 황궁에 보내야 하는 거 아닌가? 자칫하다 그 건물 몇 채, 내가 물어내게 생긴 것 같은데.
내 침묵이 어지간히도 불안했던 모양이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눈치를 살피던 녀석이 에라 모르겠다며 적반하장으로 마구 내뱉기 시작했다.
"포, 폭탄 들고 설치는 혁명군을 피해 없이 제압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십니까? 건물 몇 채 정도는 무너뜨릴 수도 있지!"
"...그 몇 채가 정확히 얼마인데?"
"어.... 한 열두 채?"
"...."
"...."
옆에서 리엔 경이 눈빛을 보낸다. '끌고 갈까요?'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건물 몇 채 무너뜨린 게 사소한 일이라면 다른 더 큰 사고도 쳤다는 뜻일 테니, 그것까지는 들어봐야지.
"그것 말고 다른 사고는?"
"근위대랑 한판 붙었습니다."
"근위대랑...."
"어쩌다 보니 시비가 붙어서 패싸움을 좀 했죠."
"패싸움...."
"아, 물론 지지는 않았습니다. 무승부로 끝나고 말았죠. 무려 황실 근위대를 상대로 말입니다!"
"...."
"사실 좀 수세에 몰리긴 했는데, 제가 근위대장의 귀를 물어뜯어서 말입니다! 근위대장씩이나 되어 가지고 그거 하나 못 참고 빈틈을 내보이는데, 얼마나 우습던지. 물론 전 그 틈을 놓치지 않았고 말입니다! 흐하핫!"
리엔 경, 저거 끌고 나가세요.
패도 됩니까?
마음껏.
"어, 어? 단장님? 왜 제 멱살을 잡으시는.... 저기요? 백작님? 백작니이이이임!!"
혼내지 않을 거라면서요오오오오....
철컥.
소음은 친절하게도 문을 닫아 준 레멤베르 덕분에 금방 차단되었다.
혼내지 않겠다 했지 화내지 않겠다 한 적은 없다. 물론 개소리지만.
저놈도 개소리를 당당하게 지껄이는데 나라고 못 할쏘냐.
언제부턴가 뒷목을 주무르던 손을 내려 코 밑을 매만졌다. 다행히 코피는 안 터졌군. 내 뒷목도 멀쩡하고.
'저놈을 어떡하냐....'
아니, 그냥 기사단 놈들 전체가 문제다. 이 망할 미친개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깊은 한숨과 함께 여전히 주위에서 얼쩡거리는 주치의에게 물러가라는 말을 던지고 눈앞의 아무 서류나 집어 들었다.
그리고 얼마 못 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거다!'
저놈들이 사고를 치는 것은 체력이 남아나서다.
그렇다면 체력을 소모시키면 되는 것 아닌가!
마침 국경선 근처 영지에 몬스터들이 얼쩡거리고 있다고 했다. 저 꼴 보기 싫은 놈들을 눈앞에서 치워버릴 겸, 체력도 소모하고 오라고 보내면 완벽할 터!
한시름 덜어 낸 나는 속으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명령서를 작성하기 시작했고,
"백작님! 저기 몬스터가 보입니다!"
"...그래...."
계획과는 달리 빌어먹을 놈들과 함께 몬스터 토벌에 끌려오고 말았다.
***
몬스터 토벌을 다녀오라는 명령서를 받았을 때, 로프티 기사단원들의 반응은 평범한 다른 이들과는 달랐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몬스터 토벌. 심지어 그 위치는 국경선 근처다.
자칫하면 생사가 오가는 전투를 치러야 함에도, 그들은 경악이나 분노 대신 환호성을 질렀다.
혼내시는 줄 알았는데, 이런 재미난 일거리를 주시다니! 이건 거의 휴가가 아닌가!
"와 역시 백작님! 심심해서 미치는 줄 알았는데! 우리가 괜히 사고를 친 게 아니라는 걸 알아봐 주시는구나!"
"바쁜 와중에도 심심해할 우리를 챙겨주시다니! 우리 백작님 욕했던 새끼 누구냐?!"
"욕 아니었거든?! 그냥 백작저 기사들과 우리 기사단에 대한 백작님의 온도 차이를 논했을 뿐이지!"
"네놈이구나아아!!"
말끔한 흰 기사복을 입은 장정들이 하늘을 날았다. 착지점은 기겁하며 몸을 웅크리고 있는 한 남자, 밀란.
이어서 처절한 비명이 터지자, 그나마 침착한 성격의 한 단원이 간신히 정신 차리고 저 멀리 구석에 처박힌 채 잊힌 명령서를 집어 들었다.
장담하건대, 분명 이 새끼들은 끝까지 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나라도 제대로 읽어 놓아야지.
아니나 다를까.
"우리 기사단만 가잖아? 백작님도 같이 안 가시고."
"...응?"
"뭐?"
정적이 찾아왔다.
밀란을 두들겨 패던 이들이 일제히 이쪽을 바라본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둥그레진 눈들을 보며, 단원 클레터는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글은 끝까지 읽어야지 새끼들아...."
43. 명예 백작 데온 하르트(8)
"아니, 애초에 평민인 우리가 글을 뗀 것이 기적 아니냐? 거기까지 읽은 걸 뿌듯해해야지."
"흐핫, 교사들이 고생 좀 하긴 했지."
"고생은 무슨. 달달 떠는 게 재밌어서 장난 몇 번 쳤더니만 다들 그만둬 버리고. 그 탓에 네메세우스 장군님께 글을 배웠잖아. 무서웠다고."
"그래서, 우리 기사단만 간다고? 백작님도 없이?"
의식의 흐름대로 흘러가던 대화가 순식간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런 식의 대화법은 로프티 기사단의 특징이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클레터가 한숨 쉬듯 답했다.
"그래."
"왜?"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한심하단 눈빛이 바로 내리꽂혔다.
녀석이 상처받았다느니 어쩌니 하며 웅얼웅얼 물러나고, 침묵이 찾아왔다.
골똘히 머리를 굴리던 클레터가 생각보다 길어지는 침묵에 문득 동료들을 둘러봤다.
생각을 하는 건지 멍을 때리는 건지, 드물게도 얌전히 앉아 있는 모습.
"...침 흐른다."
"쓰읍."
그래, 이놈들한테 뭘 바라겠어. 사고나 안 치면 다행이지.
결국 운을 떼는 역할을 하는 것은 이번에도 이쪽이다.
"일단 우리 기사단만 가는 건... 근처에 국경선이 있어서일 테고."
한 개의 기사단으로만 몬스터 토벌을 나서는 경우는 드물다.
토벌해야 할 몬스터의 수가 많을수록 운용하는 기사단의 수가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보통 아무리 적어도 2개에서 평균 3개의 기사단이 움직이는데, 그런 의미에서 일반적인 기사단이었다면 이번 토벌은 조금 위험할 수도 있었겠지만....
클레터는 피식 웃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기사단의 경우일 뿐.
'몬스터가 감정이 있는 한, 걱정은 없지.'
전부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쫓아낼 수는 있으리라.
그렇다면 남은 것은 백작님이다.
백작님 성격을 생각하면 반드시 같이 가려 하셨을 텐데. 심지어 피를 본 지 꽤 된 데다 하루 종일 집무실에서 살고 계시니 분명 상당히 답답하셨을 것이다.
그런 분의 눈앞에 이리도 좋은 탈출로가 생겼건만, 어째서 안 가시는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려던 찰나, 초를 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게 왜?"
클레터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이것들이 멍청하다 멍청하다 했더니만, 두 배로 멍청해진 모양이다.
근처에 국경선이 있어서 한 개의 기사단만 움직인다는 말이 그리도 어려웠을까.
"등신아, 일반 몬스터 토벌을 하듯이 여러 기사단이 우르르 가면 상대 왕국 입장에서 어떨 것 같냐?"
"뭐 이 등신아? 그 정도는 나도 알거든?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우리 기사단만 가는 게 뭐가 문제냐고. 백작님은 혼자서 가시기도 했잖아."
"아 그거? 그 지역 근처 영주의 군대를 통솔하여 토벌했다고 들었으니 엄밀히 말하면 혼자가 아니지. 그리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백작님이...."
"같이 안 가시는 거? 난 이유 알 것 같은데."
익숙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근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리자 여기 있다는 듯 밀란이 손을 번쩍 든다.
실컷 얻어맞았는지 꼴이 아주 엉망이다. 옷에 묻은 흙이라도 털 것이지. 흰옷이라 눈에 잘 띄어도 너무 잘 띈다.
생각은 그리하면서도, 클레터는 남의 옷에 오지랖을 부리는 대신 그의 말에 주목했다.
"알 것 같다고? 뭔데?"
"내가 전에 집무실에 방문했을 때 서류가 바닥까지 꽉꽉 차 있었거든. 일이 어지간히도 밀린 모양이던데."
"한 마디로, 너무 바빠서 토벌을 나갈 여력조차 없다?"
"세상에."
"우리 백작님, 안쓰러워서 어째...."
단원들 사이에 동요가 일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엔 코피를 흘리며 기절하셨댔지. 그게 다 밀린 서류를 처리하느라 무리한 탓인 듯하다.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모든 단원들의 머릿속엔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역시 백작님도 토벌에 데려가야겠어."
"아무래도 백작님을 구출할 사람은 우리밖에 없는 것 같지?"
"마침 의사도 피로랑 스트레스를 조심하라 했댔고."
"스트레스... 역시 몬스터 토벌이 답이네."
"피로도 몬스터 토벌을 다녀오면 싹 풀리지 않을까? 얼마 전에 백작님 홀로 토벌을 다녀오셨을 때, 얼굴이 아주 반질반질해져서 오셨던데. 솔직히 누가 봐도 피로가 싹 풀린 얼굴 아니었냐?"
살인귀 기사단은 데온 하르트를 좋아한다.
상관으로서는 존경스럽고, 전쟁터에서는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었으며, 고작 평민인 자신들을 신분으로 차별하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최대한 잃지 않기 위해 애쓴 훌륭한 지휘관이다.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기에 그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티를 내진 않았어도 적지 않게 놀랐다.
몸이 약한 그의 특성상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길 바라는 것은 욕심이지만, 그래도 되도록이면 그 횟수가 줄어들길 바라는 기사단원들로서는 나름대로 최선의 방법을 강구했고,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의 상황이었다.
"가자! 백작님을 조르러!"
백작님을 위해서 반드시 백작님을 몬스터 토벌에 데려가야 한다!
흰 기사복을 입은 장정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우르르 집무실을 향해 몰려간다.
위장약을 들고 비척비척 걸어가던 한 백작저의 기사가 우연히 이 장면을 목격하고 약통을 떨어뜨렸다.
"또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
살인귀 기사단을 토벌에 보내겠다는 판단을 내린 후, 나는 한결 홀가분한 기분으로 일 처리를 하고 있었다.
드디어 그 미친개들이 내 눈앞에서 사라진다니 벌써부터 숨통이 트이는 것만 같다.
위치가 국경선 근처라 좀 불안하긴 하지만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그놈들이 사리 분별을 못 하는 얼간이도 아니고.
"백작님?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아, 아니요. 멀쩡합니다."
가장 큰 골칫거리도 대충 해결했겠다, 나는 집사 레멤베르와 백작저의 '세작'에 대해 논하고 있었다.
그래, 내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신속하게 적에게 알려 황궁에 갈 때 습격받도록 만든 그 새끼. 그 새끼를 그냥 두고 넘어갈 리가 없잖은가.
그렇다고 사용인들을 싹 다 갈아엎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떻게든 최대한 손해가 적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녀석을 걸러내야 하는데....
"백작니이이이임!!"
"저희끼리만은 토벌 못 갑니다아!!"
"같이 가시죠!"
빨리 꺼졌으면 하는 놈들이 쳐들어왔다.
뭐, 이 새끼들아? 어딜 같이 가자고?
내 손에 들린 펜이 툭 떨어졌다. 이 상황이 꽤나 흥미로운 듯 레멤베르의 눈이 인자한 주름을 만들며 휘어졌다.
나는 황망한 얼굴로 집무실 한쪽을 당당히 차지한 놈들을 바라봤다.
이거 지금 내가 네놈들을 위험한 곳에 보낸다고 반항하는 거지?
설마, 날 죽이려고 같이 가자는 건가? 토벌 지역에 도착하자마자 쓱싹하려고?
"정확히... 너희끼리만은 아니잖아. 리엔 경도 같이 갈 텐데?"
"리엔 경도 우리 기사단 소속 아닙니까! '저희끼리'가 맞는 말이죠!"
얼씨구. 낙하산이니 어쩌니 할 때는 언제고.
물론 어디까지나 장난을 치려는 의도일 뿐 진심으로 무시하거나 경멸하지는 않았다만, 그래도 낙하산 타령하며 리엔 경을 외부인 취급을 했던 것은 이놈들이다.
황당함에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데, 상황을 지켜보던 레멤베르가 느릿하게 나섰다.
"주제넘은 참견입니다만, 늙은이의 오지랖이라 생각하고 들어주십시오. 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내가요?"
"예, 최근 일주일간 이 늙은이가 백작님을 많이 괴롭혔잖습니까. 그에 대한 사죄이니, 짧은 휴가라 생각하고 다녀오시지요."
사죄면 보통 내가 좋아하는 걸 해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하도 어이가 없다 보니 이젠 나도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 내 애매한 표정이 어떻게 비쳤는지 레멤베르가 얼굴 가득 중후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마침 주치의도 피로와 스트레스를 주의하라 했으니 중간에 한 번은 쉬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쉬어'야지.
몬스터 토벌은 쉬는 게 아니라 극악한 난이도의 '일'이라고!
보통 몬스터 토벌을 다녀오면 '피로'랑 '스트레스'가 둘 다 쌓이는 게 당연한 상식 아닌가?
나 역시 그 '보통'의 범위에 속하는데, 도대체 날 어떻게 보고 있으면 그런 말이 나오는지....
"얼마 전에 백작님께서 홀로 몬스터 토벌을 다녀오셨을 때, 얼굴이 활짝 피어서 오시지 않았습니까. 그 짙던 눈 밑 그늘도 사라져 오셨던데, 말은 못 드렸지만 이 늙은이도 많이 놀랐습니다."
"아, 그건...."
마계에서 푹 쉬었으니 그런 겁니다만.
거기서는 서류 작업 같은 거 없이 하루 종일 뒹굴거리기만 하는데, 당연히 다크서클이 사라지고도 남지.
아, 생각하니 또 마계로 가고 싶다. 그곳에서는 정신만 피곤했는데, 여긴 육체까지 피곤하니 정말 미치겠다.
뭐, 정작 그쪽에 가면 다시 인간계를 그리워하겠지만.
"어차피 밀린 일입니다. 더 밀려봤자 티도 나지 않을 테니 마음 편히 다녀오십시오. 서류 정리는 제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놓겠습니다."
"그게...."
"맞습니다, 백작님! 같이 가시죠!!"
"그러니까...."
난 가기 싫은데.
얼굴이 활짝 핀 것도 그게 이유가 아니고.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 다크서클이 어째서 사라졌는지 설명해야 할 테고, 필연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될 테니.
결국 내게 선택지는 없었다. 더해서 덧붙인 레멤베르의 말이 결정타였다.
"백작님께서 움직이시면 백작저에 숨어 있는 녀석도 같이 움직이겠지요. 이 늙은이가 확실하게 잡아낼 테니 백작님께서는 그저 즐기다 오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세작을 잡아내겠다는데 뭐라고 해. 반대할 이유가 없잖아.
결국 나는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긍정을 표했고,
그리고 지금.
"백작님! 저기 몬스터가 보입니다!"
"...그래...."
"쳐부수러 가즈아앍!"
"상관의 명령도 없이 그렇게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건 어디서 배웠지?! 당장 정렬하지 못하나!"
"쿨럭, 쿨럭.... 단장...."
"단장이 아니라 '단장님'이다."
여긴 어디. 난 누구.
나는 왜 이 위험천만한 곳에서 미친놈들과 함께 있는 걸까.
그 와중에 리엔 경은 한 줄기 빛처럼 확실하게 이 미친개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리엔 경이 낙하산으로 오게 된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지.
처음에는 이놈들 중 가장 잘 싸우는 밀란을 단장 자리에 앉혔는데, 지휘를 해야 할 녀석이 적을 보기가 무섭게 이렇다 할 말도 없이 가장 앞장서서 우렁찬 함성과 함께 달려 나가더라.
그래서 그다음은 가장 침착한 클레터를 단장 자리에 앉혔고.
[자아 새끼들아, 저기 적이 보이지?]
[그럼 가자아! 돌겨어어어억!!]
나는 깨달았다. 저놈은 침착한 것이 아니라, 침착해 보이는 것일 뿐이었다는 것을.
결국 저놈도 미친개들 중 하나일 뿐이다.
'돌격'만 외치면 지휘인 줄 아나.
절대 이놈들 중에서 단장을 뽑아서는 안 되겠다. 그랬다간 망해. 분명 망한다.
그리하여 온 사람이 바로 리엔 라이너다.
이런 식의 낙하산이 아니더라도 정식으로 좋은 기사단에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실력인데. 그녀에게는 미안할 따름이다.
그래서 언제나 애를 잘못 키운 어미의 심정으로 내심 리엔 경의 눈치를 살피곤 했는데, 이 몹쓸 것들은 내 마음도 모르고 눈치 없이 따박따박 말대꾸에 사고를 쳐 댔다.
심지어 그건 오늘도 그랬다.
"막무가내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에게 달려드는 것은 백작님께서 가르쳐 주셨는데...."
"맞아, 무조건 달려들라고 하셨지."
"미친놈도 꺼리는 미친놈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나?"
더해서 모함까지!
내가 언제?! 기껏 저택에서 지내는 걸 허락해 줬더니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기냐?
슬쩍 리엔 경의 눈치를 살폈다. 설마 오해하는 건 아니겠지.
누가 봐도 질린 듯한 안색이지만, 오해한 건 아닐 거야.
'젠장....'
그럴 리가 없잖아. 확실히 오해했구만.
저러다 기사단장을 그만두겠다고 하면 어쩌지. 그나마 그녀가 있어서 저놈들이 통제 가능한 건데.
이러다 정말 사직서를 내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함에 서둘러 해명을 시도했다.
"저...."
"백작님을 모욕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말을 제대로 꺼내 보기도 전에 진중한 사과가 훅 치고 들어왔다.
아니, 애초에 내가 그런 걸 가르치지 않았을 거란 가정은 없는 거냐? 저놈들의 모함이라는 가정은?
한 치의 의심도 없는 굳건한 눈동자에 나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44. 명예 백작 데온 하르트(9)
황제가 직접 하사한 것으로 유명한 하르트 백작저.
그곳에서도 인적이 드문 저택 내 뒤쪽 숲에 한 시종이 발을 디뎠다.
불안한 몸짓, 떨리는 동공. 절대 순수한 의도는 아닌 듯 몇 번이고 주위를 살피던 그는, 이내 고개를 들고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푸드득.
어디서나 흔히 볼 법한 새가 손 위에 내려앉았다.
그는 가볍게 새를 쓰다듬더니 발목에 흰 종이를 묶고는 지체 없이 허공에 날려 보냈다.
괜히 시간을 끌었다가 다른 이의 눈에 띄면 곤란해지기만 할 테니 나름 서둘렀건만.
"다 끝난 겐가?"
"!"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았다.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 깔끔한 연미복을 갖춰 입은 노인이 나무 옆에 서서 저를 보고 있었다.
이 저택의 사용인이라면 절대 모를 수 없는 얼굴이다.
은청색의 눈과 하얗게 물들어 가는 은청색 머리카락이 특징인 이 저택의 집사, 레멤베르.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저 멀리 날아가는 새를 보더니, 이내 시선을 내려 시종을 마주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만, 설마 정말로 자네가 세작일 줄이야."
"지, 집사님."
당황은 잠시였다. 시종은 뭐라 변명하려던 입을 꾹 다물었다.
변명하기엔 그가 본 것이 너무나도 명확하다. 그러니 남은 방법은 그를 죽이는 것뿐.
다행히 이곳은 인적이 드문 숲이고 그 외에는 목격자도 없다.
심지어 건장한 사내였다면 모를까, 상대는 노인이니 일반인에 불과한 자신이라 해도 그를 죽이는 데 무리는 없을 터.
물론 눈앞의 노집사가 혁명군도 엎어쳐 제압한 심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무기를 사용할 예정이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빠르게 판단을 내린 시종이 주머니 속의 단검 손잡이를 슬며시 쥐었다.
눈치를 살피는 듯 레멤베르를 살피는 두 눈엔 어느새 살기가 맴돌고 있었다.
"배후를...."
"으아아아아!"
"...알아야겠지만."
서걱!
시종의 머리가 잘렸다.
머리가 먼저 땅에 떨어지고, 뒤늦게 달려오던 몸이 고꾸라진다.
레멤베르는 처음의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무너져 내리는 몸뚱이를 바라봤다.
갑자기 시종이 죽었음에도 그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 놀라거나 당황한 기색 역시 없었다.
그저 담담한 눈으로 그것을 보고는 천천히 그 뒤로 시선을 옮겼다.
언제 어디서 나타난 건지, 시종이 있던 곳 뒤에 서 있는 검은 옷의 남자.
레멤베르는 그의 손에 들려 있는 피 묻은 검을 눈에 담으며 느릿하게 말을 마저 뱉었다.
"배후야, 안 봐도 뻔할 테고."
보나 마나 귀족파나 적대 왕국, 혹은 혁명군 정도일 것이다.
그중 가능성이 높은 쪽을 점치자면 귀족파, 그중에서도 수장 격인 스타베 일루스터 공작 정도가 되겠지.
백작저 내부까지 세작을 심어두기 위해서는 어지간한 영향력을 갖추지 않은 이상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적대 왕국은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고, 제대로 된 기반조차 갖추지 못해 숨어 다녀야 하는 혁명군이 영웅의 저택에 세작을 심는다는 건 요원했다.
물론 그것만으로 확신을 할 수는 없지만, 방금 날아간 새로 인해 정보를 캐낼 또 다른 사람이 생겼으니 굳이 이 시종에게 집착할 필요는 없으리라.
'조금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혼자라면 모를까, 기사단과 함께 계실 테니 걱정은 사치다. 오히려 피에 취한 그들이 습격자들을 모조리 죽이지 않길 바라야겠지.
명을 기다리듯 가만히 서 있는 남자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순식간에 사라진 그에겐 조금의 관심도 두지 않고, 레멤베르는 숲 바닥을 붉게 적시고 있는 시체를 내려다보며 툭 던지듯 말했다.
이렇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은청색 눈동자에는 이렇다 할 감정 하나 담겨 있지 않았다.
"집사의 권한으로 자네를 해고하도록 하지."
***
"데온 하르트가 국경 지대로 몬스터 토벌을 하러 갔다는군요. 그것도 고작 기사단 하나만 이끌고 말이지요."
쪽지를 촛불에 불태우며 공작 스타베가 느릿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여유로움이 가득 담긴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여 크루엘을 담는다.
대답을 종용하는 눈빛에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크루엘이 답했다.
"살인 의뢰를 넣겠습니다."
"또 그 답이군요."
"...."
"저번에도 그랬었지요. 그때는 단순히 혁명군이라는 선택지를 잊은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아닌 것 같군요.
보라색 눈동자에 날카로운 기색이 스친다. 크루엘은 눈을 살짝 내리깐 채 그 시선을 묵묵히 받아 냈다.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크루엘의 표정을 샅샅이 뜯어보던 공작이 조금 더 떠보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어째서지요? 의뢰를 넣는 것보다 혁명군을 이용하는 편이 훨씬 효율이 좋을 텐데."
단지 의뢰라서 죽이려 드는 것보다 확실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죽이려 드는 쪽이 더 열심일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돈도 아끼고 더 확실하게 죽일 수 있다.
그럼에도 크루엘은 굳이 의뢰를 넣는 쪽으로 은근히 몰아가고 있었다.
"...설명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군요."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럴 리가."
"...."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공작이 보란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바스러져 책상 위에 떨어진 재를 툭툭 털어 내며 평이한 어조로 말했다.
"뭐, 좋습니다. 어디 한번 마음대로 해 보세요. 중요한 것은 결과이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어설프게 굴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그저 우스워 보일 뿐이니까."
"명심하겠습니다."
대화가 끝났다.
새로운 서류를 들고 훑어 내리며, 공작은 힐긋 크루엘의 표정을 살폈다.
늘 그랬듯 일말의 감정도 내비치지 않은 사내가 그 자리에 서 있다.
저 얼굴에서는 그 무엇도 얻어 낼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재차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그는 속으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난 말 잘 듣는 개가 좋습니다.'
지켜보지요.
쓸데없는 수작을 부리는지, 안 부리는지.
***
"진심이십니까?"
크루엘이 마계의 경계선에서 전투를 벌일 당시에도 묵묵히 그를 보좌했던 한 사내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되묻는 것은 실례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어쩔 수 없었다.
"그래."
"괜찮으시겠습니까? 공작 각하께서는 분명...."
공작이 이를 모를 리가 없으니까.
센제르는 공작이 크루엘의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심히 걱정스러웠다.
공작은 머리가 좋은 데다 의심도 많은 사람이다. 그가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크루엘의 목숨도 왔다 갔다 할 것은 자명했다.
때문에 센제르는 그가 공작이 시킨 일만 행하길 바랐으나,
"살인 의뢰를 넣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니 괜찮겠지."
크루엘은 단호했다.
"의뢰를 넣되 조건을 추가해. 부상만 입혀도 약속한 금액의 절반을 주겠다고."
"추가 조건으로 발생하는 비용은...."
"내 사비로 충당한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그는 데온 하르트를 어떻게 하고 싶은 것일까.
그가 데온 하르트에게 가진 감정의 정체를 유추할 수조차 없어 크루엘의 표정을 살피던 센제르는 이내 생각을 포기하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
침묵은 오해를 낳았다. 그러나 뒤늦게 해명해 봤자 믿지도 않을 테고, 이러다 몬스터들이 사라지기라도 하면 곤란하니 몬스터 토벌이 우선이라는 명목으로 급히 화제를 돌린 나는 리엔 경과 말 위에서 나란히 토벌을 지켜보고 있었다.
리엔 경이 싸우지 않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우선 살인귀 기사단의 실력이 미친 것만큼이나 뛰어나기도 했고, 무엇보다 연약한 내게는 호위가 한 명 정도 꼭 필요했으니까.
이런 곳에 끌려온 것도 서러운데, 죽어 버리기까지 하면 실로 억울할 것이다. 아마 납득하지 못하고 원귀가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를 고르자면, 저 광경에 리엔 경이 끼어드는 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 정도?
"으랴아아아!!"
"야, 이 새끼야! 너 뭐해! 몬스터가 이리로 다 오잖아!!"
"네놈이 만만한 게 내 잘못이냐?!"
"저 새끼가 뒤지려고!!"
"닥치고 쳐 죽여!"
콰악! 콱!
사방에 피가 튀고, 몬스터가 찢겨 나간다.
붉은 푸딩을 숟가락으로 으깨 놓으면 저런 모습이 나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놈들은 몬스터를 잘게 다지고 있었다.
저런 놈들 속에 리엔 경이 들어가서 같이 싸운다고?
저어어언혀 어울리지 않는다.
리엔 경은 기사의 정석이라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다.
깔끔하게 적의 목을 날려 처리하는 스타일인 그녀가 저 틈바구니에 끼면 본인이 별다른 짓을 하지 않아도 금세 피투성이가 될 것이다.
그건 꽤나 불쾌한 경험이겠지. 자칫 사직서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 한, 내겐 그녀를 말려야 할 이유가 충분했다.
그렇게 한참 상념에 빠져 있을 때였다.
"네놈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음?"
분노 가득한 목소리에 문득 고개를 들었다.
왜 화를 내는 것이냐 물으려 했으나, 내 시선은 거대한 장벽에 가로막혀 리엔 경에게 도달하지 못했다.
대신 코앞에 위치한 웬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
"...."
잠시 생각을 멈췄다.
시커먼 얼굴, 거대한 몸뚱이, 원한과 분노를 담아 나를 노려보는 눈. 더해서 씩씩대며 금방이라도 나를 물어뜯을 듯 드러난 송곳니까지.
그러니까 이건....
'시발, 이건 뭐야?!'
어찌나 놀랐던지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다.
나는 하얗게 질린 채 얼어붙어 몬스터의 눈을 하염없이 마주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기절했으면 싶은데, 언제나 내 뜻대로 움직인 적 없는 이 몸뚱이는 이번에도 기대를 배반했다.
평소에는 잘만 픽픽 쓰러지더니만 이번엔 왜 이렇게 잘 버티는지. 그나마 꼴사납게 비명을 지르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나는 굳어 버린 몸을 풀기 위해 애쓰며 뻣뻣한 입술을 힘겹게 달싹였다.
"이게... 무슨,"
"너무 저희만 즐긴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정신 차리고 보니 남은 게 이놈밖에 없었습니다. 대부분이 도망가 버려서요."
"공격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수단이 잘려 나가서 재미는 없겠지만, 없는 것보단 나을 겁니다. 백작님도 즐기셔야죠."
"저희를 배려해서 지켜보기만 하신 거죠? 굳이 양보하지 않으셔도 됐는데, 감동입니다."
이게 무슨 개소리래. 즐기긴 뭘 즐겨 미친놈들아. 내가 지들이랑 동류인 줄 아나?
차라리 장난이라면 이해를 하겠는데, 저게 전부 진심이라는 게 선명하게 느껴지니 더 막막하다.
심지어 리엔 경의 반응은 더했다.
"아, 그런 건가?"
어째서 수긍을 하는 건데?!
단원들의 대화를 조합해 보면 저들이 내게 뭘 바라는지는 금방 답이 나온다.
그러니까 이 몬스터를 죽이라는 거 아니야.
백작님'도' 즐겨야 한댔으니 저들이 한 것처럼 최대한 잔혹하게 죽이라는 뜻일 테고.
따라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놀러 온 것이 아닌 만큼 나 역시 완전 무장을 했으니까. 몸 곳곳에 매어진 단검 중 하나를 꺼내 들고 눈앞의 저항 못 하는 몬스터를 찢어 놓으면 된다.
'하지만 썩 내키지도 않고.'
그렇게 했다간 내 안의 무언가가 무너질 것 같단 말이지. 아니, 망가진다고 해야 하나.
때문에 잠시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
목덜미가 오싹하며 소름이 돋는 듯한 기분에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다.
그저 본능적으로 오싹함의 근원지를 찾아 몸을 돌린 것에 불과했으나, 운이 좋게도 그게 날 살렸다.
푹!
"윽!?"
"백작님!"
어깨에 충격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화끈한 감각이 화악 퍼졌다.
나는 본능에 따라 어깻죽지를 감싸고 고개를 틀어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확인했다.
"화살?"
위치를 보아하니 원래는 내 목을 노렸던 듯싶다.
몬스터가 화살을 쏠리는 없을 테고, 기습인가?
그렇다면 누가? 전쟁을 바라지 않는 한, 국경선도 넘지 않은 우릴 상대 왕국이 노렸을 리는 없을 텐데.
'...침착해.'
전쟁터에서 괜히 8년씩이나 살아남은 것이 아니다.
전장에서의 감각이 되살아나며 머리가 팽팽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앞뒤 파악은 나중에 해도 된다. 일단 중요한 것은 습격자의 수와 위치.
빠르게 눈을 굴려 화살이 날아온 위치를 훑었다.
'많이도 왔네.'
말까지 타고 쫓아왔는데, 화살이 닿을 거리가 되도록 몰랐다니.
아, 몬스터 토벌을 하느라 귀와 눈이 가려졌었지. 이놈들 덩치가 좀 크고 시끄러워야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내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세상이 하얗게 물들며 사고가 끊겼다.
그리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을 땐, 모든 게 끝난 뒤였다.
45. 명예 백작 데온 하르트(10)
"배, 백작님, 괜찮으십니까?!"
한껏 당황한 와중에도 위험요소가 될 수 있는 몬스터를 두 동강 내 버린 리엔이 황급히 데온의 상태를 살폈다.
제대로 맞았는지 어깨에 깊숙이 파고든 화살. 맞은 위치를 살펴보니 뒤쪽에서 날라온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국경선 쪽에서 날라온 것은 아니라는 건데....
짧은 시간에 정리를 마치고 다시 데온을 부르던 리엔이 이어진 그의 반응에 잠시 멈칫했다.
"후우...."
"...백작님?"
주춤-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소름 끼치는 거부감이 밀려왔다.
미쳐 날뛰는 살인귀 기사단원들의 기운을 합쳐 놓는다면 이런 느낌일까.
느릿하게 내뱉는 숨결에서 감출 수 없는 흥분과 광기가 드러난다.
까드득- 하고 기괴한 소리가 들려 시선을 내리니, 그가 제 어깨를 쥐어뜯다시피 감싸 쥐고 있었다.
날카롭게 선 손톱이 상처를 더 늘리고, 어깨를 감싼 손이 피로 인해 흠뻑 젖었음에도.
데온 하르트는 웃고 있었다.
"리엔 경."
"예, 예!"
"이거 잘라 내."
"...예?"
"어서."
재촉하듯 내보이는 화살대를 보며 리엔은 잠시 머뭇거렸다.
말하는 폼을 보아하니 튀어나온 부분을 위화감 없게 아예 바짝 자르라는 것 같은데, 그런 식으로 화살대를 잘라내면 당장은 편하겠지만, 후에 화살촉을 제거할 때 후폭풍이 상당하다.
움직일수록 화살촉은 더 안으로 파고들 것이고, 그걸 빼내기 위해서는 그 주위를 더 깊게 째고 상처를 늘려 빼내야 한다.
그만큼 회복 시간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했다.
데온 하르트가 황제의 검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말려야 하건만.
스르륵 움직여 제게 초점을 맞추는 새빨간 눈을 마주한 순간, 리엔은 홀린 듯 검을 뽑아 휘둘렀다.
삐죽 나와 흔들리던 화살대가 툭 떨어지고, 거추장스러운 것이 사라진 데온이 만족스럽게 웃는다.
"자아, 그럼 얘들아."
다그닥.
말이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감과 동시에 그가 고개를 살짝 튼다.
그러자 언제 날아온 건지, 또 한 대의 화살이 귓가를 스치고 바닥에 푹 하고 박혔다.
기함하는 리엔을 뒤로하고, 데온은 피 묻은 손으로 흰 로브의 후드를 뒤로 넘기고는 단원들을 둘러봤다.
초여름의 강한 햇살이 버거운 듯 빛 아래 드러난 눈이 가늘어졌으나, 입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약 먹을 시간이다."
전투다! 단원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이 알던 녀석들이 아닌 것 같아 리엔이 흠칫 몸을 떨고.
데온은 피로 흠뻑 젖은 손을 느릿하게 로브 자락에 문질러 닦으며 느긋이 저들의 준비가 끝나길 기다렸다.
그 와중에 시간을 더 지체할 생각 없는 습격자들이 말을 타고 돌진해오기 시작했으나, 리엔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조급해하지 않았다.
"너 약 있냐?"
"딱 내 것만."
"제길. 그럼 클레터, 너 혹시 남은 약...."
"만일을 대비해 챙겨 온 하나가 전부라서. 너 설마 아무것도 안 챙겨왔냐?"
"몬스터 토벌이잖아. 사람을 상대하게 될 줄은 몰랐지."
밀란이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거칠게 털었다.
약을 챙기지 않은 사람이 그뿐인 것은 아닌지 다른 몇몇도 약을 얻기 위해 단원들 사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데온이 어느새 말끔해진 손으로 품에서 주머니를 하나 꺼냈다.
"밀란."
"예? ...헙!"
반사적으로 날아온 무언가를 잡아챈 밀란이 그것의 정체가 주머니라는 것을 깨닫고 조심스레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 안에 가득 들어 있는 것은 새하얀 약들.
그게 무엇인지 곧바로 알아챈 밀란이 고개를 들고 의아한 눈으로 데온을 쳐다봤다.
"백작님은 이런 것 없이도 잘 조절하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걸 왜...."
"폐하의 명을 수행하러 갔을 때, 간이 부은 약쟁이한테서 받았지."
"네? 아... 아무튼 감사히 쓰겠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몬스터 토벌을 하러 가서 간이 부은 약쟁이를 만나는지 의문이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밀란은 냉큼 약을 하나 입에 넣었다.
그러고는 바로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약의 재질이 물잔 같은 것에 넣으면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녹아드는 형태다.
다시 말해 썩 좋은 용도로 만들어진 약은 아니라는 것. 덕분에 섭취가 쉬우니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좋게 볼 수도 있겠지만....
'이런 약은 부작용이 있기 마련인데....'
고급 약도 찝찝할 판국에, 심지어 싸구려다. 이걸 제공한 사람이 백작님이 아니었다면 곧바로 뱉었으리라.
'뭐... 백작님께서 주신 약에 문제가 있지는 않을 테니 부작용이라고 해 봤자 그리 심각하지는 않겠지.'
혀끝에서 빠르게 녹아내리는 약을 밀란이 찜찜한 표정으로 막 삼키려 하고, 그 말고도 약을 찾아 헤매던 이들이 와서 너도나도 약을 집어가 입에 넣으려는 찰나,
"아, 거기에 수면제랑 마비약도 섞여 있으니 알아서 잘 구분해라."
"...퉷!!"
"투헷! 퉷!"
여기저기서 무언가 뱉는 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들렸다.
손바닥에 있는 축축한 약을 냄새까지 맡아 가며 다시 확인한 이들 중 몇몇이 안도한 얼굴로 다시 그걸 입에 넣고, 몇몇은 떫은 표정으로 바닥에 내버린다.
어디선가 투덜대는 목소리가 나왔다.
"어느 정도 면역이 있다지만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구별 못 한 본인 잘못이지."
"이제 보니 수면제랑 마비약은 부작용이 아주 심한 종류로 보이는데요. 백작님이 그러고도 사람입니까?"
"지금은 사람 아닌데."
"아."
"지금부터 벌일 일 생각하면 사람이어서는 안 되지."
"하여간...."
눈앞에서 벌어진 납득할 수 없는 장면에 상황을 지켜보던 리엔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백...작님, 저건 무슨, 약입니까...?"
"마약."
"쿨럭- 마, 마약이라니. 마약은 제국에서 금지된 약 아닙니까! 말리셔야 할 백작님마저 그러시면...!"
"우리 기사단에 한해서는 암묵적으로 허용하고 있지. 대놓고 걸리지만 않으면 돼."
"그게 무슨...."
"지금 그런 것에 신경 쓰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거기까지 말한 데온이 말 안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가볍게 리엔을 넘어 허공에서 몸을 비튼 그가 리엔을 향해 달려드는 녀석의 목에 팔을 감더니 함께 바닥에 떨어져 내린다.
낙마라니! 자칫하면 큰 부상을 입는 것을 넘어 죽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화들짝 놀란 리엔이 데온을 쫓아 시선을 내렸을 때, 그는 요령껏 상대를 쿠션 삼아 착지하고 놈의 양어깨에 단검을 꽂아 바닥까지 꿰어놓고 있었다.
양어깨, 그다음은 양손. 상대가 고통에 발버둥 치자 스르륵 아래로 시선을 내리더니,
"다리에도 해 놓아야 하나?"
"...."
진심이 담긴 말이다.
입맛을 다시듯 번들거리는 붉은 눈동자를 본 녀석이 얼어붙다시피 행동을 멈췄다.
데온은 그를 향해 씨익 웃어 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단검의 양이 넉넉했다면 필시 그리했겠지만 아쉽게도 남은 것은 두 개가 전부다.
때문에 이미 전투에 돌입한 단원들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그는 검을 빼든 채 대기하고 있는 리엔을 향해 툭 던지듯 말했다.
"리엔 경."
"예, 백작님."
"이 녀석, 죽지 않게 잘 지켜."
"명을 받들겠습니다."
이쪽은 이제 신경 쓰지 않아도 될 테고.
한쪽에서 미친 듯이 전투를 치르는 단원들을 눈에 담았다.
하나같이 눈이 맛이 간 게, 일반인들이 보았더라면 확실히 정신 줄을 놓았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데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 뭐 하는 거지?"
그리 크지도, 특정한 감정이 담기지도 않은 단조로운 목소리. 그럼에도 어째서인지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적들의 시선은 그렇다 치더라도, 약에 취해 핏발이 선 눈들이 자신을 보는 것은 제법 부담스러울 만도 했으나 데온은 개의치 않았다.
저벅.
이성과 본능의 사이, 아슬아슬한 광기가 흐르는 그곳을 향해 그가 천천히 걸음을 내디딘다.
말들이 가득한 곳에 들어간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지만, 망설이는 기색은 없었다.
"오랜만이라 감을 잃었나..."
"...."
"아니면 기사가 되었더니 이제 좀 사람으로 싸워도 될 것 같아서 그런 건가."
"!"
한순간 자리에서 사라진 그가 적이 탄 말 바로 옆에 나타나더니 상대의 허벅지를 단검으로 쑤신다. 예상치 못한 고통에 균형이 흐트러지자 틈을 놓치지 않고 손톱을 세워 상처를 긁으며 옷을 움켜쥐고 끌어 내렸다.
떨어짐과 동시에 단검을 거침없이 내리꽂는 모습은 그에 익숙해지다 못해 직접 행하기까지 한 단원들조차 시선을 돌릴 정도였다.
그래, 저거.
정말 정신 줄을 놓았다면 저렇게 시선을 돌리지 않았을 것이다.
데온의 입가에 조소가 떠올랐다.
"왜 약 기운을 억누르고 있어?"
기껏 약을 먹어 놓고 한다는 행동이 평소와 다를 바 없으면, 굳이 약을 먹은 보람이 없지 않나.
본인들조차 몰랐는지 단원들이 눈을 크게 뜬다. 데온은 저를 향한 시선들을 하나하나 마주하며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너희 아직 그 정도 실력 안 되잖아."
잔인해지지 않고 살아남을 실력이 안 된다.
그렇다고 잔인한 손속에 면역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행동의 희생양에 대한 죄책감 역시.
그러니 약에 취해야지. 약 기운으로 기억을 날려 버려야지.
"내가 누누이 말했을 텐데."
푸욱-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반달처럼 휘어진 눈 속, 새빨간 눈동자가 옆을 향한다.
정신이 팔린 틈을 타 기습을 하려던 건지, 그곳엔 무기를 쥔 채 접근해 오던 한 녀석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서 있었다.
언제 휘두른 건지 녀석의 심장을 파고 들어간 단검.
그대로 손에 힘을 주어 단검을 비틀이며 뽑아냈다. 피가 잔뜩 튀며 흰 머리칼과 뺨에 붉은 얼룩이 생긴다.
데온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녀석의 머리칼을 붙잡아 고개를 젖히고는 얼굴을 향해 단검을 연속적으로 내리찍기 시작했다.
거칠다 못해 광기까지 느껴지는 행동과 달리, 목소리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차분했다.
"이성은 적아를 구분할 정도만 있으면 된다고."
미처 스며들지 못한 피가 앞머리를 타고 내려와 뚝 떨어진다.
그리고 그 뒤에 숨어 있던 같은 빛깔의 붉은 눈을 마주한 순간,
[광기에 먹혀라.]
뇌리에 강렬하게 남았던 그 말이 들려오는 듯해, 단원들은 그만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
데온과 살인귀 기사단이 갑작스럽게 등장한 적들을 상대하고 있는 한편, 국경선 너머의 왕국 쪽에서는 큰 혼란이 일고 있었다.
국경을 수비하는 중대한 역할을 맡은 지휘관이 멍하니 한 곳을 보며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스스로 말하면서도 믿기지 않는 듯, 목소리에는 짙은 불신이 담겨 있었다.
"저거 데온 하르트 맞지? 제국의 영웅."
"흰 머리를 보아하니 그런 것 같습니다."
"싸우는 스타일을 봐도 맞는 것 같습니다."
"멀어서 눈 색은 안 보이지만 흰 복장을 보아하니 그런 것 같습니다."
"같이 있는 녀석들의 제복은 분명 살인귀 기사단의 것입니다. 그러니 아마 맞을 겁니다."
"젠장."
도대체 이쪽엔 왜 온 건지.
단순한 몬스터 토벌이라 하기에도 수상쩍은 감이 있다.
몬스터 토벌은 기본 두 개 이상의 기사단이 움직이는데, 저건 너무 소수 아닌가.
단순한 몬스터 토벌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소수 정예를 뽑아서 염탐하러 온 것이라는 가설에 마음이 더 기울고 있던 찰나, 더한 문제가 터졌다.
"저건 또 뭐야?!"
갑자기 날아온 화살에 데온 하르트로 보이는 이가 어깨를 맞았다.
그리고 새로이 등장한, 척 보기에도 수상해 보이는 이들과 다시 전투가 벌어졌다.
저쪽이 혼란스러운 만큼, 이쪽도 다른 의미로 혼란스러웠다.
뭐지? 무려 제국의 영웅을 해하려 들 정도라면 어지간한 높은 자리의 인물이 뒤에 있을 텐데. 내분인가? 제국에 내분이 심한가?
아니면 우리 왕국을 향한 무력시위? 아니지, 무력시위라 하기엔 화살이 제법 깊게 박혔다. 아마 당분간 팔을 제대로 쓰긴 힘들 터.
...응? 당분간...?
46. 전조(1)
"...야, 저 정도 부상이면 회복에 얼마나 걸릴 것 같냐?"
"화살대를 바짝 잘라 버렸으니 좀 더 오래 걸릴 듯싶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어지간히 깊게 박힌 모양이던데, 아무는데 최소 한 달은 걸리지 않을까요. 후유증까지 생각하면...."
"그렇단 말이지...."
까슬까슬한 턱을 쓸어내렸다.
8년 전쟁이 끝난 지 이제 고작 2년이 지난 상황이다. 제국 입장에서도 전쟁은 부담스러울 터.
게다가 데온 하르트가 부상을 입었다. 전쟁 당시 그를 이곳저곳에 보내며 가장 많이 활용했던 만큼 그 없이 전쟁을 치를 확률은 낮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이용해 이득을 챙길 수도 있지 않을까?
"저거 아무리 봐도 무력시위로 보이지 않냐?"
"예?"
"우리 왕국에 보내는 무력시위로 보이지 않냐고."
"아무리 봐도 무력시위라기보단 일방적인 습격으로 보이....윽!"
다행히 눈치 빠른 녀석이 하나 있었다.
재빠르게 동료의 발을 밟아 입을 막은 녀석이 싹싹하게 긍정했다.
"예! 무력시위로 보입니다!"
"그렇지? 왕궁에 연락해라. 아니, 내가 직접 연락하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말씀드려야 한다. 잘하면 무려 제국으로부터 보상을 두둑이 얻어 낼 수 있을 것 같다고.
보아하니 몬스터 토벌을 명목으로 염탐하러 온 것 같던데, 이 정도 대가는 받아야 공평하지.
지휘관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걸렸다.
***
데온 하르트의 말은 애써 외면하고 있던 진실을 푹푹 찔렀다.
그도 딱히 대답을 바라는 것 같지 않고, 단원들 역시 대답할 경황이 없었기에 이 작은 전쟁터에는 어느덧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무서운 것이 아니다. 아니, 무서운 것도 맞긴 하다만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원래 저렇게 말을 잘하셨나?'
'잘하시긴 했지. 저렇게 날카롭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집사님께 배우셨나.'
'집사님, 대체 왜 그러셨습니까.'
단원들이 쓰린 속을 쓸어내렸다.
욕설 하나 섞이지 않은 말인데도 아프다.
아픈 곳을 후벼 파는 공격에 단원들의 넋이 나간 반면, 적들 사이에서는 다른 의미의 침묵이 맴돌고 있었다.
'먼저 움직이는 놈부터 죽는다.'
한창 전투를 치르던 상대가 굳어버린 지금이 기회이건만, 수많은 의뢰를 받아 오며 단련된 본능이 죽음을 경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데온 하르트와 눈이 마주쳤을 때 확신으로 변했다.
피와 같은 색의 붉은 눈, 샐쭉이 휘어지는 눈매, 어서 누구 하나 움직이길 기다리듯 설핏 올라간 입꼬리까지.
'시발.'
상대를 잘못 골랐다.
사실 본능의 경고 어린 외침은 처음 의뢰를 받았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다만 돈을 너무 많이 준 나머지 홀랑 넘어가 버렸을 뿐.
반드시 죽이라는 것도 아니고, 부상만 입혀도 된다는데 이를 누가 거절하겠는가.
사실상 의뢰를 거절하지 않았더라도, 최소한 처음 화살을 맞췄을 때 무리하지 않고 물러갔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상황이다.
'제길, 괜히 욕심을 내어 가지고.'
돈 욕심에 더해, 그의 부상 정도를 확인했을 때 해 볼 만하단 판단이 들어 공격을 감행했다.
그의 태도나 행동을 보아하니 소문이 과장된 것 같기도 했고.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돌변할 줄이야.
누구의 희생도 없이 이 상황을 뒤엎는 방법은 단 하나다.
그 사실은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문제는 신뢰지.
'셋 하면 동시에 공격하는 거다.'
'하나... 둘, 셋!'
'....'
'....'
'더러운 새끼들.'
'남 말하고 있네.'
이 짓거리만 벌써 세 번째다.
기가 막히게도, 누구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움찔거리는 이조차 없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눈치를 주고 있을 때, 정적이던 분위기를 뒤바꾸는 목소리가 들렸다.
"정보를 얻을 녀석은 이미 하나 잡아 놓았으니─ 점잔 떨지 말고 죽여."
"...!"
"말도 잘 못 타는 것들이 어울리지 않게 뭐 하는 짓거리야."
단원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는 단순히 피를 즐기는 '미친놈들'이었다면, 지금은 적을 사람으로조차 보지 않는 눈빛.
그들이 이쪽을 향해 씨익 웃는다.
그 모습이 가히 심상치 않아 말을 뒤로 물리기가 무섭게, 안장을 박찬 놈들이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려 왔다.
낙마의 위험성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 듯 과감한 행동이었다.
"미친!"
경악이 욕설로 승화해 튀어나왔다.
쿠웅! 쿵!
여기저기서 둔탁한 소리와 나직한 신음이 울려 퍼지고.
조금 전과는 비교가 안 되는 광기와 피비린내가 넘쳐흐르는 공간에서, 제대로 된 진흙탕 싸움이 시작되었다.
난장판이었다.
겁도 없이 제일 먼저 덤벼들었다가 바닥에 꿰여 버린 사내가 고통도 잊고 눈앞의 상황을 멍청히 바라봤다.
욕설과 비명이 난무하고, 온갖 더러운 술수가 가득하다.
더해서 무엇보다 잔인했다.
눈에 흙을 뿌리는 것은 이해한다. 물어뜯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죽었을 것이 분명한 이를 굳이 찢어 놓아야 하겠는가. 이건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다.
절로 몸이 떨렸다.
'살인귀.'
정식 이름이 따로 있건만, 눈앞의 기사단은 여전히 '살인귀'란 명칭을 달고 있다고 했다.
황제가 내린 이름을 두고 왜 굳이 좋지도 않은 이름을 언급하는지 의아했는데, 이젠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 웃으며 적을 찢어놓는 모습은, 누가 보기에도 살인에 미친 귀신 같았으니까.
8년 전쟁 때 저런 놈들이 선봉에 섰다고 했지. 이기는 것이 당연하다.
저놈들을 눈앞에서 마주하고 제정신일 수가 있을까. 상대가 누구였건 그놈들은 분명 공포에 떨었으리라.
심지어 저들이 중얼거리고 있는 말은 공포에 그 무게를 더했다.
[모든 것은 생존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