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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엘레노아가 잠에 빠진 지 약 5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데이우스 베르디와 대마법사의 제자들은 자리를 지켰고, 바깥에서는 노을이 천천히 저물고 있었다.

"허억! 허억!"

또다시 땀에 흠뻑 젖은 채로 다급하게 침대에서 일어난 엘레노아는 격한 숨을 내뱉으며 머리를 감싸 쥔다.

두통이 격하게 치고 들어오며 뭔가가 자신의 뇌를 밀어내는 감각을 느낀다.

"공주님, 괜찮으십니까?"

덤덤하니 물어오는 남자의 목소리에 엘레노아는 힐끔 눈을 돌린다.

따로 향수를 뿌린 것도 아닌데 묘하게 좋은 냄새가 나는 데이우스 베르디가 옆에 서 있었다.

데이우스는 방금 전 상황에서 뭔가를 알아냈는지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었음에도 묘한 당당함과 자신감이 얼굴에 담겨 있었다.

"무, 뭔가 좀. 알아냈어?"

그가 건네준 수건을 받아 젖은 목덜미를 닦으며 묻자 데이우스는 너무나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해결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래... 다행이네."

"암호는 도움이 좀 되셨습니까?"

"어?"

엘레노아는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응, 덕분에 꿈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어."

"다행이군요."

데이우스는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냉철하면서도 확고하게 답한다.

"내일이면 공주님의 악몽을 해결할 수 있을 듯합니다."

"저, 정말?!"

깜짝 놀란 엘레노아가 환히 웃으며 말하자, 데이우스는 아무런 문제없다 자신감 넘치게 답한다.

"그럼 저는 준비가 필요한지라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부탁할게."

엘레노아는 일단 좀 씻어야겠다 생각하며 몸을 일으킨다. 살짝 현기증이 있었으나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데이우스 베르디는 첫인상이랑 똑같이 똑 부러지고, 당당하며, 자신감 넘치면서도, 냉철한 남자였다.

정말 딱 맞아떨어진다.

....

....

.......

자신이 '생각했던' 첫인상이랑 딱 맞아 떨어진다?

다시금 코로 숨을 마시며 데이우스가 있던 자리에 남아있는 그의 향기를 맡는다.

천천히 손을 뻗어 마나를 끌어올려본다. 손끝에는 푸른빛의 마나가 영롱하니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마지막.

문고리를 잡고, 이제 나가려는 데이우스의 뒤통수를 향해 엘레노아는 침을 꿀꺽 삼키며 묻는다.

"데이우스."

"예, 공주님."

"이곳은 현실이야?"

돌아갔던 문고리를 천천히 놓자, 철컥하며 문고리가 원래 위치로 돌아간다.

데이우스는 천천히 몸을 돌려 냉랭하니 선언했다.

"빌어먹을."

"허억! 허억!"

다시 눈을 뜬 엘레노아는 방금과 똑같은 침대에서, 똑같이 축축하니 땀을 흘리며 일어난다.

바깥은 이미 어두워졌는지 방의 조명이 켜져 있었고 꿈속이랑 똑같이 데이우스 베르디와 두 제자가 자신을 지키고 서 있었다.

"...."

엘레노아는 데이우스가 아무 말 없이 넘겨준 수건으로 얼굴을 푹 감싸며 억지로 심호흡을 이어간다.

그 상태에서 엘레노아는 데이우스에게 물었다.

"여, 여, 여기는... 현실이야?"

그 말에, 데이우스는 덤덤하니 답한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수학 역사상 가장 유명한 난제입니다. 많은 수학자들이 그 앞에서 울고, 좌절하며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죠."

"...."

"허나, 문제가 세상에 알려지고 358년 만에 엔드류 와일즈가 해답을 냈습니다. 역사적인 순간이었죠."

그 말을 들은 엘레노아는 안도감에 눈물을 글썽이며 투덜거린다.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젠장."

Chapter 53 - 53. 새로운 지식

다시 방으로 돌아온 나는 몸을 풀며 한숨을 내쉰다.

대마법사의 제자들 때문에 힘을 주느라 빳빳하게 굳은 몸을 풀어주며 근육을 완화시킨다.

[고생했어요.]

이제야 대화를 할 수 있다며 슬며시 나타나는 흑령사. 내가 가만히 있으라고 몇 번이나 째려봤기에 아예 자리를 피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힐끔 보고, 재킷을 벗으며 물었다.

"엘레노아가 잠들었을 때, 뭔가 본 게 있나."

내 말에 흑령사는 단호히 부정한다.

[전혀 없어요. 정말 그 안에 악령이 있는 걸까요? 저는 보면 볼수록 아닌 것 같은데요.]

"...."

내가 입을 다물자 흑령사는 슬며시 나를 향해 다가오며 재킷을 받아주는 시늉을 한다.

당연히 그녀는 받을 수 없는지라 나는 무시하며 옷걸이에 걸쳤다.

심통이 난 듯 팔짱을 끼며 반대로 물어오는 흑령사.

[당신은요? 사실 이런 분야는 저보다는 당신 쪽이 훨씬 전문이잖아요.]

나도 알고 있다.

그녀가 모를 거라는 걸.

그럼에도 물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나 역시, 무엇도 보이지 않는다."

악령이나 요괴는커녕 정말 그 어떠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다. 잠들면 뭔가 보일 수도 있겠다 생각해서 공주에게 숙면을 제안했으나.

그럼에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서 되려 내 쪽에서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

의자에 걸터앉아 다리를 꼬았으나, 금세 커피나 차를 마시고 싶어져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 안에는 나를 위한 찻잎, 커피콩과 그라인더, 찻주전자 같은 간단한 도구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평소라면 차를 끓였겠으나 오늘은 밤을 지새워야 할 듯 했기에 커피콩을 갈기 시작했다.

드르륵 드르륵.

핸드그립을 돌리며 고소한 커피향이 톡톡 튀듯 코를 찌르고 온다.

문득, 핀덴아이가 떠오른다.

돼지오줌처럼 끓여서 차에 다시는 손대지 말라고 했더니 최근 차 끓이는 거에 맛 들려서 내가 말하지 않아도 계속 가져왔었다.

하나 같이 더럽게 맛없는 게 문제였지만. 솔직히 그냥 반쯤 뜨거운 물이었다.

'지금쯤 잘하고 있겠지.'

상당히 고난이도의 던전을 공략하고 있겠으나 아리아와 핀덴아이 조합이다.

근접전에 있어서는 최강이라 불러도 되는 수준인지라 생각하면 할수록 그들을 믿음이 커진다.

그래, 나만 여기서 잘하면 된다.

내가 사령술사로서 당당하니 왕국을 활보하기 위해서는 이번 사건을 해결할 필요가 있으니까.

커피를 다 끓이고 다시 방에 놓은 의자에 앉는다. 흑령사는 짜증난다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도 아무 것도 안 보였으니까 악령 관련된 일이 아닌 거 같은데요? 성녀 쪽도 실패했다고 들었으니까 영적 관련 사건이 아니라 다른 부분이 문제인 것 같은데.]

"...."

[아니, 애초에 정말로 악몽을 꾸고 있는 게 맞긴 해요? 그냥 정신병자인 거 아니에요? 망상증 환자나?]

"...혹시 꿈에 들어가는 방법 같은 건 없나?"

나 역시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는 있었기에, 직접 꿈에 들어가 보고 싶었다.

그러자 흑령사는 묘한 표정으로 답한다.

[있겠어요? 영혼끼리의 교감 같은 건 가능해도, 꿈에 들어가는 건 불가능할 걸요. 애초에 꿈이 어떤 원리인지도 모르니까요.]

"그건 그렇군."

내가 입을 꾹 다물고 고민에 빠지자 잠시 나를 보던 흑령사가 안타까워하며 제안한다.

[새벽이 되면 도망치시죠.]

"음?"

뜬금없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으나 그녀는 더없이 진지했다.

[이거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 아니에요. 애초에 우리 분야가 아니고요. 그러니까 도망쳐요. 어차피 흑마법사는 도망치는 게 일상이에요.]

"후우."

쓸데없는 말과 걱정이다. 나는 대답할 가치도 없다 생각하며 커피를 입에 댄다.

왕실이라 그런지 나 같은 미숙자가 끓였음에도 맛과 향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이렇게 있으면 안 된다니까요?]

어차피 설명해야할 거 한 번에 할 생각으로 입을 다물고 있자,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들어온다.

오르페우스 국왕과 대마법사 록펠리칸이었다.

원래라면 당연히 내가 찾아가야 하는 게 맞지만, 지금의 나는 사실상 수감자.

그것도 마도심판장을 이긴 고위험군이었기에 감옥이나 다름없는 이곳에서 함부로 벗어나게 하고 싶지 않은듯했다.

오히려 나는 편하고 좋았기에 별 상관없지만.

"그래, 어떻지?"

바로 내게 성과를 물어오는 오르페우스 국왕. 그의 얼굴에는 옅은 희망이 담겨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솔직하게 답했다.

"악령에 관한 사안은 아닙니다. 성녀가 실패한 것처럼 사령술도 공주님의 꿈에 나오는 존재가 무엇인지 밝혀내진 못했습니다."

"아...."

[미, 미, 미쳤어요?!]

실망하는 오르페우스 국왕과 그걸 말하냐면서 깜짝 놀란 흑령사. 시련의 실패는 곧 다시금 처형과 연결되기에 그런 거겠지만.

나는 말을 멈추지 않고 이어나간다.

"하지만 해결은 가능합니다."

"해결은, 가능하다?"

"호오."

[예?]

국왕과 대마법사 그리고 유령이 동시에 나를 바라본다. 한 번에 몰아서 설명하니 편해졌다.

"그 존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확인이 불가능하지만, 결국 공주님께서는 '꿈'이 문제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 꿈 자체를 없애면 되는 겁니다."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다.

공주의 안에서 기생하는 존재에 대해서는 결국 미궁에 빠지겠으나, 문제의 해결 자체는 가능했다.

"그게 가능한가?"

오르페우스 국왕의 물음에 나는 덤덤하게 입을 뗀다. 침착함은 상대에게 신뢰를 느끼게 해준다.

"예, 가능합니다. 세상에는 마수와는 다르게 영적 개념으로 이루어진 존재들이 있습니다."

"영적 개념?"

"극히 희귀한 존재인지라 잘 모르실 수밖에 없습니다. 여하튼 저는 그것을 사용할 생각입니다."

마알크스가 만들었던 인골충.

세티마 소녀의 소망으로 만들어졌던 천사가 바로 이러한 부류에 속하고 있었다.

악령의 원한과 같은 강한 의지가 신체를 대신하여 마나를 활성화시켜주는 것처럼.

요괴나 사념체들도 누군가의 소망이 쌓이고 쌓여서 실체를 이루게 된다.

"제가 만들 요괴는 맥이라 하여 악몽을 먹는 요괴입니다."

저번에도 한 번 말했지만 독특한 이 요괴의 코는 코끼리의 것이고, 몸통은 곰, 꼬리는 소에 호랑이 발톱을 가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바쿠라고 부른다 들었던 적이 있다.

도저히 이야기를 못 따라가겠다는 오르페우스 국왕이었기에 록펠리칸 대마법사가 끼어든다.

"단순히 혼자서 개념을 가지고 있는 뭔가를 만들겠다는 말인가? 그건 창조의 영역일세. 아무리 마법이라고 해도 그건 불가능 해."

맞다.

사실상 내가 하려는 건 창조의 영역이었다.

인골충이나 세티마의 천사 같은 경우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개념이 정립되었으나, 맥은 내 안에서만 존재하는 개념이었으니까.

"난이도는 높지만 불가능은 아닙니다. 시간이 걸리기도 하겠지만 왕실의 지원과 대마법사님의 도움이면 가능합니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시도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가문의 지하에서 성공한 사례를 본 적이 있으며.

이곳은 더욱 뛰어난 마법사와 설비, 재력이 갖춰져 있다.

게다가.

가장 큰 자신감으로는 레메게톤이라는 사기적인 성능을 가진 아이템까지 있었다.

"완전하게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딱 한 번만 다룰 수 있으면 충분하니까요."

인골충처럼 완벽한 병기를 만드는 것도 아니고 굳이 따지면 1회용 악몽 먹는 요괴를 만드는 일이었다.

제대로 정의되지 않은 개념을 다룬다는 것에 의아함을 느끼는 두 사람이었으나.

나는 단호히 답했다.

"수 년 동안 고통 받아온 이 나라의 공주님을 구하기 위함입니다. 의사? 성직자? 심지어는 성녀와 사령술사인 저마저 실패했습니다."

오르페우스 국왕을 바라본다.

그의 두 주먹은 불끈 쥐어진 채로 이미 여동생을 구하기 위한 각오를 다지고 있었기에 나는 도화선에 불을 붙인다.

"그만큼 어려운 상황입니다. 불가능이라는 것에 정면으로 도전할 필요가 있습니다."

* * *

어제 이후, 계획은 순식간에 진행을 알려왔다.

자신의 누이를 구하기 위해서는 뭐든 할 수 있다는 국왕의 명령에 따라, 겉으로는 대마법사를 중심으로 전담 연구를 시작했으나 실제로는 내가 주도하여 진행하게 될 것이다.

애초에 맥이라는 요괴에 대한 지식과 개념도 나에게 밖에 없었으니까.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서자 대마법사의 제자들이 여전히 심통이 난 표정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든 이동을 하기 위해선 양 옆에 이렇게 두 사람을 끼고 다녀야했다.

여간 불편하지 않을 수 없지만,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걷고 있자니 모퉁이에서 휙 나타난 엘레노아 공주.

공주인 그녀에게 나와 제자들은 바로 예를 차려 인사했으나, 엘레노아는 헛기침하며 어색하니 입을 연다.

"데이우스, 여긴 현실이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프랑스의 군인이었으나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를 통해 황제가 됩니다."

준비해둔 인물이었기에 술술 풀어내자 엘레노아는 멍하니 듣더니 고개를 갸웃거린다.

"프랑스? 나폴레옹? 나만 모르는 거야?"

어깨를 으쓱거리며 양 옆의 제자들에게 묻자 그들 역시 어색하니 고개를 젓는다.

"저, 저희도 잘."

"처음 들어봅니다."

"흐음, 신기하네."

공주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한층 마음이 편해진 표정으로 우리를 지나쳐간다.

아무래도 내 안에서 만들어진 간단한 소설 같은 걸로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엘레노아 공주는 뜬금없이 계속해서 나를 찾아왔다.

식사 시간에도.

"데, 데이우스? 내가 방금 깜빡 졸았거든? 여, 여기 현실이야?"

"유튜브라고 하여 동영상이 잔뜩 모인 웹사이트가 있었습니다. 저도 자주 애용하곤 했죠."

"유, 뭐? 동... 뭔 소리야."

연구를 진행하는 도중에도.

"데이우스! 지금이 현실일까?"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주장한 상대성이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주의 기본 법칙을 설명하는 중요한 이론이지요."

"...정말 전혀 모르겠어."

저녁이 되어 다시 방으로 돌아갈 때도.

"여기는 현실이야, 데이우스?"

"...핸드폰이라는 게 있습니다. 사진을 찍거나, 문자, 통화가 되는 만능적인 물건이지요."

"음, 특이한 물건이 있구나."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엘레노아. 그녀는 다시 몸을 틀어서 돌아가려 했으나.

나는 그녀를 불러 세운다.

"공주님, 단순히 이야기를 듣는 게 즐거우신 겁니까?"

"어어?!"

무슨 소리냐며 호들갑스럽게 푸드덕 거리는 엘레노아. 그녀는 얼굴이 벌겋게 붉어진 상태로 손을 휘젓는다.

"그, 그럴 리가 없잖아! 정말로 현실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으니까 물어보는 거야!"

말은 그렇게 하지만 부끄러워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녀가 왜 이런 행동을 벌이는지 조금 알 것도 같았다.

나를 만나면 간단하게 현실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으니 그동안의 스트레스가 자연스럽게 풀리는 기분이었겠지.

그러한 감각에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그녀는 계속 나를 찾고 있는 중이었다.

"나, 나, 나는 갈게!"

휙!

몸을 틀어서 가버리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꽤나 자주 시달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Chapter 54 - 54. 폭풍전야

며칠 동안 왕실에 머물면서 맥을 만들기 위한 연구에 한창이었다.

왕국의 마법사들은 확실히 뛰어난 인재들인지라 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성과가 나오고 있었는데.

마법사라는 특성상 미지를 향한 지적 호기심이 상당하기 때문에 따로 재촉하지 않아도 그들은 늘 연구실에 상주하며 야근을 밥 먹듯이 하고 있었다.

미지를 개척한다는 만족도와는 별개로 국왕인 오르페우스가 이번 일을 해결하면 큰 상을 내리겠다 언급한 약속 또한 그들의 열정에 한 몫 단단히 했다.

나 역시 최대한 연구실에 틀어박혀서 그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수준 높은 마법사들에게서 자연스럽게 지식을 흡수할 수 있는 아주 귀한 시간이었으니까.

"일단은 이렇게 개념을 잡고 가는 게 어떨까요?"

연구실 중앙에 거대한 마나로 이루어진 맥의 형상이 띄워져 있다.

코끼리의 코를 가지고 있으며, 몸통은 마치 곰처럼 두껍고 듬직하다.

발톱은 범의 것처럼 날카로운 것이 인상적이고, 눈동자는 탐스럽게 뭔가를 찾고 있는 듯 보였다.

"좋군. 이렇게 가도록 하지."

내가 알고 있는 맥의 개념과 거의 완벽할 정도로 흡사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연구는 단순히 이성적인 결과를 통해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연구원 전체가 동일한 개념을 잡고, 동일한 요괴를 바라면서 나아가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내 대답에 몇몇 마법사들은 환호하며 작업을 다시 착수하기 시작했다.

이제 제대로 된 맥의 세분화된 설정을 짜기 위한 회의에 들어가야 했다.

악몽을 찾을 때 사용하는 코는 어떻게 움직이는지, 꿈을 먹는 방식은 무엇이며, 먹은 꿈은 어떻게 되는지 등등.

말 그대로 창조 행위와 다름없는 영역이었기에 마법사들은 긴장하면서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으나.

"데이우스!"

연구실 문이 열리며 들어온 엘레노아 공주. 그녀는 몇 번이나 그랬던 것처럼 성큼성큼 다가와서는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본다.

회의를 준비하려던 마법사들은 익숙하게 찾아온 쉬는 시간에 피로한 눈을 꾹꾹 누르거나, 커피를 홀짝거린다.

"현실이지?"

내가 몇 번이나 이 질문을 들으면서 느낀 게 꽤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하게 깨달은 건 공주가 흥미를 가지는 분야에 대해서였다.

"크롱. 저번에 말씀드렸던 팽귄의 친구로 몸이 녹색인 공룡입니다."

"으음? 몸이 녹색인 공룡이라는 건 저번에 말했던 둘리 아니야?"

"그것과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나는 꽤나 여러 방면의 정보들을 공주에게 말해줬다.

역사 속 인물부터 시작해서, 어려운 이론에 관한 지식도 말해준 적 있으며.

지구에서는 당연하던 실생활에 사용되던 도구나, 인터넷 관련 밈도 입에 담았었다.

하지만 결국 공주의 흥미를 가장 끌었던 건 다름 아닌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무슨 음식 주문하듯이 지루한 이론 같은 건 집어치우고 캐릭터에 관해서 알려달라고 했을 때는 살짝 짜증도 났었다.

"비슷한데 다르다고? 잠깐 나와 봐! 가서 좀 설명해주라!"

이제는 정말로 악몽 때문이 아니라 그냥 새로운 지식이 궁금해서 나를 찾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내가 싫다는 느낌으로 묵묵하니 버티고 서 있자 공주는 슬쩍 목소리를 높여 뒤에 있는 다른 마법사들에게 외친다.

"다들 고생하고 있어. 좀 쉬어."

"예, 알겠습니다!"

말은 잘 듣는다.

권력을 이용해 강제로 쉬는 시간을 만든 공주는 결국 내 팔목을 잡더니 밖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나를 데려간 장소는 왕궁의 정원이었다. 거대한 정원의 꽃밭 앞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엘레노아는 내게 공책과 펜을 건넨다.

"그려주라."

이것도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노트 뒷장에는 펭귄이 모티브인 캐릭터부터 시작해서, 영원히 다섯 살인 말썽꾸러기, 주머니에서 뭐든 꺼내는 고양이로봇 등.

수많은 유명 캐릭터들이 그려져 있었다.

익숙하게 펜을 움직이고 있자니, 옆에서 숨죽이고 있던 흑령사가 조심스럽게 속삭인다.

[공주가 그림은 안 보고 당신만 보고 있는데요?]

알고 있다.

그러니까 그냥 닥쳐줬으면 좋겠다.

처음에는 힐끔힐끔 쳐다만 보던 공주가 이제는 대놓고 빤히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캐릭터를 그려달라는 것도 그냥 구실이 아닐까 싶었다.

"요즘 악몽은 어떠십니까."

나는 펜을 움직이며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린다. 엘레노아 공주는 퍼뜩 정신을 차린 듯 다급하니 답한다.

"아? 어, 응. 최근에는 데이우스 덕분에 쉽게 알아차리고 있어. 실은 내가 알고 있는 현실이랑 꿈의 차이가 하나 더 있거든? 덕분에 그걸 들키지 않을 수 있어."

"흐음?"

그녀가 그것을 통해서 현실과 꿈을 구분할 필요가 없으니 악몽도 꿈과 현실의 차이를 더 찾지 못해 정체상황에 놓여있었다.

"저를 따라 하진 않습니까?"

"음, 따라 해. 하지만 이미 한 번 들었던 내용을 말하거나, 뒤죽박죽으로 이상한 내용을 말해. 내 꿈속이라서 그건 당연히 내가 알고 있는 정보들이고."

밝게 웃으며 엘레노아는 흐뭇해한다.

"데이우스처럼 참신하게 처음 듣는 걸 말할 수는 없는 것 같아."

크롱에 대해서 대강 그려준 나는 그녀에게 노트를 건넨다.

엘레노아 공주는 크롱을 보더니 환하게 웃으면서 좋아한다.

"나, 이거 마음에 들어."

평소보다 더 좋아하는 공주에게 나는 나름의 가설을 내민다.

"녀석은 공주님의 모든 걸 공유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만약 생각과 말을 전부 듣고 있다면 애초에 꿈을 통해 하나씩 현실과의 차이를 파악해갈 필요도 없다.

"또한 무지합니다. 세상의 기본적인 골자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죠."

대표적으로 향기와 마나를 꿈속에서 재현하지 않은 것.

그런 기본적이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는 부분을 녀석은 모르고 있었다.

"창의력도 썩 떨어집니다. 모방은 할 수 있으나 그것을 통해 스스로 뭔가를 재창조하지는 못합니다."

"음."

엘레노아 공주는 뭔가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으나,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간다.

"녀석은 지금 초조할 겁니다. 그러니 본인의 욕망을 손쉽게 드러내겠죠. 어떠십니까? 따로 녀석의 목표나 행동 원리가 보이진 않으십니까?"

"으음."

팔짱을 끼며 잠시 고민하던 엘레노아는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혹시 싶다며 조심스레 의견을 낸다.

"나를 따라 하는 걸 좋아해. 예법을 따라 하거나, 주변 사람들 대하는 말투, 걸음걸이 같은 거."

"...."

[대놓고 엘레노아가 되겠다는 심보네요.]

흑령사의 의견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뭔가 다르게 느껴졌다.

엘레노아가 되겠다는 맞지만 뭔가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 듯했다.

어쨌든 이제는 확실해졌다.

'게임에서 만났던 엘레노아는 이미 몸을 빼앗긴 상태였다.'

지금 내가 보는 엘레노아 공주와 게임 속 엘레노아 공주는 비슷하면서도 확연한 차이가 있었으니까.

엘레노아가 썩 이런 주제로 대화하는 걸 원치 않아 보였기에 자연스레 주제를 돌린다.

"최근에도 잠은 잘 못 주무십니까?"

"이제는 익숙해졌어. 덕분에 쉬지 않고 계속 공부할 수 있으니까 나쁘지 않으려나."

그리 말하는 눈가에는 살짝 그늘져 있었다. 하지만 나를 휙 보더니 걱정 말라는 듯 웃어준다.

"다행이지? 로베른 아카데미로 돌아가도 진도를 따라갈 필요는 없으니까. 오히려 예습이 철저해서 이번에야말로 1등을 할 수도?"

"...."

"공주인데 쪽팔리게 성적이 뒤에 있을 수는 없잖아."

굳이 답해주진 않았다.

나는 별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녀가 가지고 있는 왕족의 의무에 성적 또한 포함되어 있는 듯했다.

"그리고 데이우스. 나랑 약속 안 지킬 거야?"

"...."

약속?

무슨 약속을 말하는 거냐고 그녀를 바라보자, 엘레노아는 심통을 부린다.

"암호 말이야. 네가 나를 먼저 보면 물어보기 전에 먼저 얘기해주기로 했잖아."

아무래도 아까부터 언짢은 기색이었던 이유가 이것이었던 듯하다.

"공주님께서 매번 저를 찾아오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당연히 내가 먼저 말할 기회가 없다. 그렇게 말하니 또 할 말 없다며 공주는 팔짱을 끼고는 툴툴거린다.

"쳇, 대답도 준비해뒀는데."

"...하아."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모습을 보면 정말로 내가 알던 공주가 맞나 싶다.

주인공인 아리아 리아스는 게임 속 모습에 비해 너무 성숙한 게 문제였는데, 보스 중 하나인 엘레노아는 너무 어리광을 부려서 문제다.

나는 엘레노아 공주가 좋아할 법한 이야기를 입에 담는다.

"마법소녀라는 것이 있습니다.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소녀들이 신기한 힘을 가진 동물을 만나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악을 물리치는 내용이지요."

"...!"

그녀가 묻기도 전에, 내가 먼저 정보를 풀어준다. 이걸 원하지 않았냐고 슬쩍 눈짓하자 엘레노아는 헛기침하며 목을 풀었고.

본인이 준비해뒀다는 대사를 의기양양하게 친다.

"여긴 당연히 현실이지!"

"...고작 그걸 말씀하고 싶었던 겁니까?"

"응! 데이우스가 아니라 내가 직접 확실하다고 선언하고 싶었거든."

기분 좋다면 웃는 엘레노아는 바로 다시 내게 공책을 내민다.

"근데 마법소녀? 그건 또 뭐야? 엄청 재밌어 보이는데?"

딱 공주가 좋아할 것 같은 내용이었기에 입에 담았다. 어렸을 적에 할머니 집에서 TV만 봤던 나였기에 마법소녀도 알고 있었다.

솔직히 취향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악당을 물리친다는 건 마음에 들었다.

대게 마법소녀들은 유령 같은 걸 물리칠 때가 많았고, 나는 그걸 통해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꼈으니까.

"설명해주라!"

"...자세하게는 못 드립니다."

어렸을 적 기억이다.

나는 대강 떠오르는 걸 설명하기 시작했고.

엘레노아는 엄청 재밌다고 방방 뛰고 좋아하다가 문득, 나를 보며 묻는다.

"근데 데이우스, 이런 거 좋아해?"

"...."

괜히 말해줬다는 생각이 들었다.

Chapter 55 - 55. 고양이는 죽어있었다

약 2주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 와중에 엘레노아 공주는 점점 나를 찾는 빈도가 늘었으나 그럼에도 유능한 마법사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었기에 맥은 성공적으로 완성되었다.

"와."

마법사 중 누군가의 탄성이 들려왔다.

하나 같이 유리케이스 안에 있는 작은 요괴 한 마리를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맥이었다.

마법사들의 마나가 뒤섞인 사념이 모이고 모여, 개념이 되었고.

우리가 만들어둔 형체 속에 인공적인 생명이 깃들은 것이었다.

이렇게 보니, 인간이라는 존재도 하등 다를 게 없지 않을까 싶었다.

신도 우리를 이런 식으로 창조한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맥은 우리처럼 다채로운 사고를 할 수는 없었다. 일종의 로봇이나 AI라고 보면 되었다.

우리가 생각하고 짜놓은 대로 움직이고 행동하는 존재.

그 이상은 할 수 없는, 그런 요괴였다.

[레메게톤을 쓰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

옆에서 떠들고 있는 흑령사의 말에 솔직하게 동의했다. 레메게톤이라는 최후의 보루까지 꺼내 들지 않을 정도로 마법사들이 유능했다.

마도심판장이랑 싸울 때는 손에 쥐고 있어서 숨긴 채로 사용할 수 있었으나, 마법사들이 본다면 눈이 돌아갈 정도의 물건이었으니까.

또한 사령의 돌이라고 더 잘 알려진 이것은 왕국에서 치를 떠는 물건이었다.

"성공했군."

내 옆에 서 있던 대마법사가 감동을 받은 듯 악수를 청해온다.

부드럽게 그의 손을 맞잡으며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하셨습니다. 대마법사님과 제자 분들이 아니었다면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겁니다."

"아니, 다 늙은 나이에 이런 도전을 할 수 있게 해주어 나야 말로 고맙다네."

스스로 한계를 넘어 새로움을 터득했다고 즐거워하는 대마법사.

우리는 동시에 몸을 틀어 다시금 맥을 바라본다. 작은 강아지 정도 크기의 맥이 코를 킁킁거리며 악몽을 찾아 케이스 안을 헤매고 있었다.

드디어 성과를 낼 시간이었다.

* * *

"후우."

엘레노아 공주는 천천히 호흡하며 푹신한 침대에 눕는다.

방금 마신 따듯한 레몬차가 몸을 후끈하게 만들어줬고, 푹신한 베개와 솜이 빵빵한 이불이 익숙하게 몸을 감싸왔다.

방 조명은 꺼지고, 은은한 전등만이 켜져 있다.

혹여나 싶어서 마법사를 통해서 방에 수증기를 만들어 촉촉하게 유지해주면서 숙면을 위해 클래식 연주자들도 방의 한 귀퉁이에서 연주를 하는 중이었다.

그야말로 편안한 숙면을 위해서 있는 힘껏 공을 들였다는 느낌이었으나, 오히려 그런 부분이 엘레노아에게는 부담스럽기만 했다.

그냥.

그냥 옆에서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데이우스 한 사람만 있어도 충분하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괜히 아닌 척 눈을 감는다.

어린아이에게 동화를 읽어주는 것처럼, 데이우스가 자신만 알고 있는 재밌는 이야기를 해주면 잠이 솔솔 올 텐데.

하지만 그런 얘기를 했다가는 그녀의 오라버니인 오르페우스 국왕이 눈에서 불을 켜고 노려볼 것이 뻔했다.

"정말로 이게 마지막인 거지?"

엘레노아는 불안함에 데이우스에게 물었다. 몇 년 동안 자신을 괴롭혀오던 꿈이 오늘로 마침표를 찍는다는 게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 공주에게 데이우스는 늘 똑같은 덤덤하면서도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답해준다.

"예, 마지막 악몽입니다."

"후."

이런 때는 조금 부드럽게 말해줘도 되는 게 아닐까 싶다가도.

저러니까 데이우스 베르디이며, 그러니까 자신이 이렇게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와 너무도 똑같은 모습은 되려 평온함을 엘레노아의 마음에 가져다준다.

"나 이제 잘게."

천천히 눈을 감는 엘레노아.

그녀의 곁에 있는 데이우스 베르디, 오르페우스 국왕 그리고 대마법사 록펠리칸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잠을 최소화한지라 늘 피로에 시달리고 있던 그녀였기에 잠에 빠지는 건 순식간이었고.

고요하게 깔리는 자장가 연주와 함께 데이우스가 들고 있던 맥이 코를 킁킁거리기 시작한다.

악몽을 찾아냈다는 신호였고, 곧이어 그것은 공주를 향해 자신의 입을 쩌억 벌렸다.

* * *

"...."

엘레노아가 깨어난 건 정원의 꽃밭이었다. 텅 비어있던 머리에 뇌수가 차오르는 느낌이 든다.

잠깐 동안, 의식이 없는 인형처럼 멍하니 서 있던 엘레노아는 퍼뜩 주변을 둘러본다.

아, 왕국의 정원이다.

지금 뭘 하고 있었지?

흐트러진 사고를 블록처럼 차근차근 쌓아나가기 시작했고.

그래, 맞다.

데이우스를 불러왔었던 기억이 있다. 왜 멍하니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데이우스는 벤치에 앉아서 무심하니 노트에 뭔가를 적고 있었다.

엘레노아는 아무 생각 없이, 그야말로 본능처럼 데이우스에게 다가간다.

그는 자신이 다가갔음에도 여전히 노트에 뭔가를 적고 있었다.

가끔은 데이우스가 먼저 암호를 말해줬으면 좋겠다고 엘레노아는 늘 생각했다.

암호를 자신이 요구하는 것보다, 저쪽이 자진해서 말해준다면 나를 소중히 여기고 있으며 또한 공주 스스로가 어리광을 부리고 있는 게 아니라는 느낌이 들 것 같았다.

게다가 대답도 준비해뒀지 않은가.

"당연히 현실이지!" 하고 악몽 따위에 지지 않았다는 느낌과 더불어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곳이 현실이라는 걸 스스로 확신하고 싶었다.

그런 아쉬움과 함께 엘레노아는 뒷짐을 진 채 사뿐사뿐 걸어가 데이우스에게 물었다.

"여기는 현실입니까? 데이우스 씨!"

조금 장난스럽게 묻자, 데이우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엘레노아와 눈을 맞추더니 입을 열었다.

"핸드폰이라는 녹색 동물이 있습니다. 웹사이트라는 장소에서 저도 자주 애용하던 것이지요."

"...."

답을 듣는 순간 엘레노아의 눈이 팍 찌푸려진다.

방금 그 대답 하나로 멍하니 느릿하던 사고가 빡 하고 얻어맞으며 깨어난 기분이 들었다.

여기는 현실이 아니다.

꿈에 있으며, 자신은 지금 이 악몽의 마지막을 위해서 잠들어 있는 상태였다.

마음이 순간적으로 요동쳤으나 이제는 이것도 끝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자니 금세 편안해진다.

저쪽의 데이우스도 멍하니 엘레노아를 보더니 천천히 형상이 뒤틀리기 시작했고.

곧이어 그것 역시 엘레노아의 형상을 취한다.

따로 아무 말도 없이 무표정하니 자신을 보고 있는 가짜를 향해 엘레노아는 확실하게 으름장을 놓는다.

"이제 끝이야. 오늘로, 이 지긋지긋한 악몽과도 작별할 거야. 밖에서 데이우스가 이 악몽을 없애고 있어."

그 말에 가짜 엘레노아는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털털하니 답했다.

"그래, 그런 것 같네. 정말로 꿈이 끝나가고 있어."

꿈의 배경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금이 가서 파편이 되고, 그 파편은 희미하게 투명해지며 색을 잃어간다.

새장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어 후련했다.

그런 마음을 읽은 걸까, 가짜는 정말 엘레노아처럼 물어왔다.

"후련해? 이제 더 이상 꿈을 꾸지 않게 됐으니까?"

"당연한 거 아니야? 나한테 밤은 늘 공포였고, 잠은 떼고 싶어도 뗄 수 없는 혹이었어. 나는 드디어 자유로워진 거야."

그 말을 들은 가짜 엘레노아는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어떻게든 현실과 꿈의 차이를 찾고, 괴리감을 없애려던 모습과는 달랐다.

포기한 걸까?

지금이라면 무엇이라도 대답해줄 것 같았기에.

엘레노아는 침을 꿀꺽 삼키고, 주먹을 꽉 쥐며 물었다.

"너는 도대체 뭐야?"

"...."

가짜 엘레노아는 질문에 천천히 일어선다.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맞춘 후에야 엘레노아는 차이점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놀랍게도.

가짜 엘레노아의 눈동자에는 열망과 욕심 그리고 굽히지 않는 신념이 담겨 있었다.

그걸 보니 문득 두려움이 눈과 입, 코를 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금, 이 가짜와 자신을 비교했을 때.

누가 더 뛰어난 엘레노아인가에 대한 의문을 지울 수가 없었고 확신조차 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는 저 정도의 신념이 없었으며,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도 없었다.

꿈의 끝자락에 닿았음에도 가짜 엘레노아의 어깨는 움츠러들지 않았고, 허리는 굽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작은 몸집과는 다른 태산과 같은 의지와 열망.

그것이 엘레노아의 몸을 폭력적으로 덮쳐오고 있었으나.

파삭, 파사삭!

세계가, 꿈이 무너져간다.

지옥 같았던 길고 긴 꿈이 드디어 끝을 알리며 막을 내리고 있었다.

데이우스가 도와주고 있다.

엘레노아는 그걸 떠올리며 다시금 마음을 다잡는다. 가짜는 그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아 보였다.

"그딴 교수 나부랭이한테 의지하는 거야? 약해 빠져가지고는."

"...."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건지 모르겠지만, 됐어. 그게 네가 원하는 거라면."

"무슨, 의미야?"

"그동안 즐거웠어."

가짜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휙 돌려 발을 내딛으며 떠나간다.

"안녕."

엘레노아의 악몽에 종지부가 찍히는 순간이었다.

* * *

"허억! 허억! 허억!"

다급하니 일어난 엘레노아. 마침 대마법사가 땀을 닦아주는 마법을 사용했기에 몸이 뽀송한 상태에서 일어났다.

"에, 엘레노아!"

오르페우스 국왕이 다급하니 엘레노아 공주에게 다가갔다. 나는 일부러 몇 발자국 물러나 짧은 이별과 재회를 방해하지 않는다.

"아...."

엘레노아는 자신의 오빠를 보더니 왈칵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해냈, 어요."

벅차오르는 감동에, 엘레노아가 몸을 맡기듯 오르페우스의 품으로 안겨든다.

뚝뚝 흘리는 눈물의 무게가 느껴지는 듯 국왕의 표정도 감동으로 일그러진다.

"이제... 밤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요."

몇 년을 담아온 한을 토해내는 엘레노아의 한 마디에 오르페우스 국왕 역시 눈물을 흘리며 그녀를 꼭 끌어안아 준다.

더 이상의 악몽은 없다.

작은 소녀에게 드디어 평온한 밤이 찾아온 것이다.

한참을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로 울던 두 사람. 대마법사는 연주자들을 밖으로 내보냈고, 왕의 눈물을 보지 않기 위해 몸을 돌렸으나 그 역시 눈가가 살짝 촉촉해져 있었다.

그 후, 엘레노아는 몸에 힘이 풀렸는지 침대에 걸터앉은 채였고 오르페우스 국왕은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러더니 손을 쭉 뻗어 그대로 나를 끌어안는다.

"정말, 정말 고맙네! 자네 덕분이야!"

"...."

솔직히 이런 격한 애정표현을 썩 좋아하진 않았으나, 왕이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 느껴졌기에 가만히 있었다.

"오늘은 연회를 열도록 하지! 아주 성대한 만찬이 벌어질 것이야!"

그리 말하며 국왕은 호탕하게 웃어 보인다.

그렇게 기뻐하는 국왕과 대마법사가 밖으로 나가고. 파자마를 갈아입기 위해 엘레노아와 시녀들만 방에 남은 상황.

마찬가지로 나가려던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몸을 돌려 엘레노아를 향해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사고실험이 있습니다."

시녀들은 무슨 말을 하냐고 나를 바라보았고, 엘레노아도 멍하니 나를 보더니 피식 웃는다.

"계속해줘."

"예전에 말씀드린 양자역학의 불완전성을 비판하기 위해 만들어진 실험이죠."

상자 안에 고양이가 한 마리 있다.

그 옆에는 50% 확률로 붕괴하는 방사능 물질을 집어 넣는다.

함께 둔 계수기가 방사선을 감지했을 때, 망치가 움직이며 독극물이 담긴 병이 깨져 고양이가 죽는다.

감지하지 않는다면 병이 깨지지 않아 상자 안의 고양이가 살아있다는 정말 유명한 실험.

이야기를 들은 시녀들이 갑자기 도대체 무슨 소리냐며 눈을 찌푸린다.

하지만 내 시선은 오롯이 엘레노아에게 향해 있었다.

"상자 안에 있는 고양이는 확인하기 전까지 반은 살아있고, 반은 죽어있는 상태가 되는 겁니다."

결국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상자를 열지 않았을 때야 의미를 가진다.

살아있을 수도 있으며, 죽어있을 수도 있는 반반의 확률 속에 공존하게 된다.

나는 문득, 슈뢰딩거가 되어버린 착각이 들었다.

확인하지 않는다면, 모든 가능성이 공존하지만.

나는 굳이 입을 열었으며.

엘레노아는 풋 하고 작게 웃는다.

그리곤 답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끼이익.

탕.

문이 닫힌다.

나는 방 밖에서 한 걸음도 떼지 않고 묵묵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슈뢰딩거는 상자를 열지 않았으나.

나는 상자를 열었고.

고양이는 죽어있었다.

Chapter 56 - 56. 울음소리

탁.

방으로 돌아오자 몸에 힘이 풀려 제대로 서 있기가 힘들었다.

애써 몸을 추스르며 침대에 걸터앉자 흑령사가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낸다.

나의 곁에서 모든 걸 함께 봤던 그녀였기에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공감하고 있으리라.

[....]

그렇기에 흑령사 역시 혼란에 빠진 나에게 굳이 말을 걸어오지 않고 그저 묵묵하니 기다려주었다.

내가 나름의 답에 도달하기까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나는 언제나 그렇듯 차분했고, 침묵 속에서 천천히 문제를 풀어가듯 현 상황에 대해서 따지고 들어갈 뿐이었다.

눈을 감고 깍지를 끼며 꼬여버린 머리를 정리하고 있자니 내게 계속 다가오던 엘레노아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아른거린다.

"후."

숨을 내쉬며 진정하고 일어서자 흑령사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짓는다.

[금방 괜찮아졌네요?]

아직 5분도 지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그녀. 하지만 오랜만에 느껴본 동요는 생각보다 길게 다가왔다.

"그래, 괜찮아졌다."

그래도 결국엔 그게 끝이었다.

찌릿함은 잠깐의 고통만을 동반할 뿐 다시 원래의 내가 되어 있었다.

[그럼요. 확실하게 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일단 물어보는 건데. 지금의 엘레노아 공주는....]

"그래, 우리가 알고 있던 꿈속에 있던 존재가 몸을 차지한 거다."

[....]

이것만큼은 확실했으며 나와 흑령사 사이에 따로 다른 의견은 없었다.

처음 나를 보자마자 이곳이 현실이냐고 물어보지 않은 것.

또한 내 암호에 그녀가 준비해뒀던 대로 대답하지 않은 것.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이제,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흑령사가 팔짱을 끼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온다.

[당신이 만든 맥이라는 요괴가 잘못되었을 가능성은 없죠?]

"일단은 확실하게 작용했다. 맥은 악몽을 삼켰고,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한 후 사라졌다."

꿈을 먹은 즉시 맥은 자신의 마지막 역할을 수행하고 사라졌다.

흑령사는 찝찝한 표정으로 잠시 나를 바라보다 침울하니 답한다.

[그럼 답은 하나이지 않을까요? 우리가 원래 만났던 엘레노아가 바로 악몽이었던 거예요.]

"...."

[솔직히, 조금 놀랍네요. 원래 악령들 중에서도 스스로가 죽었다고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잖아요?]

그래, 너무 많이 봐왔다.

거기에 더불어 실제로 몸을 빼앗으려던 악령들도 더러 있었다.

[그녀도 자신이 악몽이라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거죠. 결과적으로 맥은 정상적으로 악몽을 먹었고요. 오랜 기간 몸을 빼앗겨왔던 엘레노아 공주에게 드디어 자유가 찾아왔네요.]

"...."

[몸 주인이 원래대로 돌아왔으니 축하해줘야죠.]

일부러 확실하게 쳐내라는 듯 말하는 흑령사. 나는 몸을 일으켜 다시금 찻주전자로 향한다.

어제 미리 우려 둔 차를 다시금 끓이기 시작하며 답했다.

"그건 불가능하다."

나 역시, 처음에는 활기차던 엘레노아가 악몽이었던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예? 불가능하다고요?]

김을 뿜어대고 있는 차 주전자. 찻잔에 천천히 차를 따른 후, 손에 쥐자 온기가 스며들 듯 들어온다.

굳이 앉지 않고, 그 자리에서 한 모금 목을 축이며 답했다.

"우리가 봤던 엘레노아가 정체모를 가짜였다면, 우리가 못 알아차렸을 리가 없다."

지금 흑령사는 너무도 사령술사의 입장에서 사고를 회전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엘레노아의 사건은 사령술과는 거리가 매우 멀었다.

"그게 가능하려면, 엘레노아가 뭔가에 씌어있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 하나 보지 못했지."

[아....]

나와 흑령사는 계속해서 말했었다.

엘레노아에게는 무엇도 보이지 않는다고.

심지어는 성녀조차 제대로 원인을 파악하지 못했었다.

엘레노아를 둘러싼 이번 일은 외부의 소행은 전무했다.

"우리가 바라봐야할 부분은 악몽 쪽이다."

[악몽이요?]

"맥은 악몽을 먹었다. 하지만 무엇이 악몽인가. 그 개념을 알고 있지는 않다."

[...악몽이 절대적인 개념으로 자리 잡은 게 아니라는 뜻이군요.]

"그렇지. 그리고 이 경우, 먹히는 주체자의 뜻에 따라 개념이 결정되는 거겠지."

다시 말하지만 맥은 마나로 이루어진 AI와 비슷하다. 우리가 정해준 사고방식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다.

꿈이란 무엇인가를 제대로 정의하지 못하는 우리가, 맥에게 악몽에 대한 두루뭉술한 정보를 줬을 뿐 명확한 정의를 내려줄 수는 없었으니.

주체자인 엘레노아가 악몽이라 정의한 것을 먹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꾸욱.

손에 쥐고 있는 것으로부터 깊은 무게감이 느껴진다.

이제야 퍼즐이 딱딱 맞춰진다.

단순하게 문제를 해결하는데 눈이 멀어 발을 헛디뎠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아직 되돌릴 방법이 있다.

그러니까 뒤틀린 만큼 나는 다시금 이 사건을 제 궤도로 틀어볼 생각이었다.

어제 끓인 텁텁한 차를 전부 입에 털어 넣는다. 이제는 한 방울도 남지 않은 찻잔을 보며 나는 새로운 물을 끓인다.

이건 악몽에 관한 사건이 아니었다.

이건 악령이나 요괴가 들려서 소녀를 괴롭히는 사건이 아니었다.

이건 미스터리하면서도, 섬뜩한 괴담 같은 게 아니었다.

이건 명석한 탐정이 필요한 배배 꼬인 트릭도 아니었으며, 사령술사와 성직자라는 비현실적인 힘이 필요한 사건도 아니었다.

이건 작은 소녀를 악의 손아귀에서 구해야 하는 시답지 않은 촌극 따위가 아니었다.

이건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솔로몬의 판결이 필요한 재판도 아니었다.

이건....

* * *

저녁에 왕실 정원에서 펼쳐진 파티는 상상 이상으로 호화로웠다.

말 그대로 그레이폰드에 있는 모든 귀족들이 초청되어 하나 같이 공주의 쾌차를 축복하고 있다.

악몽에 관한 이야기를 어떻게 풀까 했는데, 단순히 어렸을 때부터 앓던 병이 나았다는 걸로 소개되었고.

그 병을 고친 사람이 나라는 것도 자연스럽게 귀족들에게 알려졌다.

나중에 사령술사라고 밝히기 전에, 국왕이 미리 포석을 깔아둔 셈이었다.

"마지막 시련이 남았으나, 오늘은 잊고 즐기도록 하지."

뒤에서 나를 향해 웃으며 건넨 국왕의 말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사실상 이미 오르페우스 국왕의 신뢰를 얻었다 할 수 있었다.

또한 그가 마지막 시련으로 뭘 준비하고 있는지 게임 스토리를 떠올리면 대강 예상해볼 수 있었기에 나는 자신 있었다.

귀족, 성직자, 기사들까지.

오늘은 서로를 향한 암투는 집어치우고 하나 같이 깔깔 웃으면서 공주의 쾌유를 축하했다.

"훌륭한 성과였네."

지금 나는 대마법사 록펠리칸과 함께 있었다. 그는 취했는지 연신 내 어깨를 툭툭 치면서 제자로 들어올 생각이 없냐고 꼬드기고 있었다.

"어이구, 스승님!"

"참! 너무 취하셔서 아무 말이나 하십니다!"

제자들이 다급하게 그를 데려간다. 취하셔서 헛소리를 하신다고 억지로 없던 일로 만들려 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꼴사납다.

어차피 제자로 들어갈 생각도 없는데 말이다.

[내 제자인데요.]

심통이 난 듯 짜증 내는 흑령사. 다들 정복을 입고 있는데 혼자서 점술사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니 무시하고 싶어도 눈에 띈다.

다행인 건, 내 눈에만 보인다는 거겠지만.

"공주는 어디 있지?"

[발코니 쪽에 있어요. 왕궁 안으로 들어가셔야 해요.]

미리 엘레노아 공주를 찾아두라고 시켰던 덕분에 나는 쓸데없는 시간 낭비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번 파티의 주인공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웠음에도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원래 이런 자리야 처음에만 좀 바쁘고 뒤부터는 각자 노는 곳이니까.

나는 그대로 궁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쪽은 고위 귀족들만 이용할 수 있는 장소로 입구에서부터 딱딱한 기사들이 나를 가로막았다.

"나를 모르는 건 아닐 텐데."

이미 국왕이 나를 한 번 소개한지라 당연히 통과할 수 있을 줄 알았으나 그들은 물러나지 않는다.

"공주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데이우스 베르디가 오면 막으라고."

"...."

꽤나 직접적인 수를 부리는구나.

의도치 않게 시간이 소요되게 생겼으나 일단은 다른 방법을 찾으려던 순간.

내 어깨에 얹어지는 거대한 손바닥. 묵직하면서도 힘이 강하게 실린 것은 며칠 전까지 입원해 있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마도심판장 타이른 올 벨로쿠스가 든든하니 내 뒤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보내주지."

그리고 그는 강압적으로 기사들에게 요구해왔다.

기사들은 타이른이 공주의 명을 어기려는 것에 당황했으나 타이른이 가슴을 탕 치며 선언했다.

"내가 책임지지. 뭣하면 여기서 너희를 때려눕혀도 괜찮다."

"...."

"...."

기사들이 엉거주춤 서 있을 때, 타이른이 거칠게 내 등을 밀어주었고 그대로 기사들과 내 사이에 선다.

"타, 타이른 경!"

"이건 일종의 반역 행위입니다!"

"어린 공주님이 심란한 표정이던 걸 너희라고 못 봤던 건 아니겠지. 저 남자는 명령을 위반해서라도 그걸 해결하려는 거다."

타이른은 가슴을 크게 펴며 단언했다.

"그것 또한 뒤틀린 충심이라 볼 수 있겠지."

나는 슬쩍 그를 바라봤다. 타이른은 나를 힐긋 보더니 콧방귀를 끼듯 웃어 보이며 말했다.

"다음에는 안 질 거다."

[으아, 절대 다시 싸우고 싶지 않아요.]

덩치 큰 남자의 기묘한 응원을 받은 채로, 나는 그대로 계단을 오른다.

하나하나 오를 때마다 머리가 상쾌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인생사, 언제나 옳은 길을 걸을 수는 없겠지.

실제로 원래의 데이우스는 늘 틀린 길만 걸어왔으며, 김신우 또한 옳기보다는 그른 길을 더 많이 걸어왔다.

하지만 지금의 내 안에는 확신이 서 있었다.

나는 분명, 옳은 길을 걷고 있었다.

어두운 발코니에 도달한다.

밑에는 화려한 전등과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오지만, 이상하게도 이곳까지는 닿지 못하는 기분이 들었다.

별이 수놓은 하늘보다 빛나는 광경이 아래 펼쳐져 있음에도, 유난히도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금발의 소녀.

"이 장소를 뭐라고 부르는지 사실 몰랐어. 발코니라고 하더라. 생각만큼 어울리진 않아."

평온하게 중얼거리던 엘레노아 루덴 그리핀이 천천히 나를 바라본다.

"결국 올 거라고 생각했어, 데이우스. 나름대로 이전 엘레노아를 따라 하는 연습을 했었는데, 너한텐 통하지 않겠지."

처음 듣는 차가운 목소리.

이미 자신의 정체를 들켰다 생각한 그녀는 이전의 엘레노아 공주를 연기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서는 타오르는 신념과 동시에 스스로를 향한 격렬한 믿음, 권력을 향한 열망이 엿보였다.

그리고 바로 저것이, 내가 게임에서 봤던 왕국의 반역자.

자신의 오빠인 오르페우스 국왕을 죽이고 왕좌를 찬탈하려 했던 야심가.

타락한 공주,

엘레노아 루덴 그리핀.

"기분이 어때? 네가 알던 엘레노아는 죽었어. 이제 이 안에는 없어."

당당하니 웃으며 선언하는 엘레노아. 그녀는 광소를 터트리며 손을 펼친다.

"구하고 싶었어? 그런데 어쩌지? 결국 내가 이겼어! 내가! 결국에는 승리했다고! 어때? 네가 그렇게 가지고 놀던 내가 결국에는 공주가 된 거야."

뚜벅.

"...."

뚜벅.

"너의 패배야, 데이우스 베르디."

뚜벅.

"더 이상 너에게 구원을 바라던 공주는 어디에도 없어."

뚜벅.

어느새 그녀의 앞에 도달한 나는 묵묵하니 엘레노아를 바라본다.

오만하리만치 입꼬리를 비틀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엘레노아는 어디 해보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보라고 턱짓했고.

"굳이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 없다."

시답지 않은 말 하지 말라고 위로한다.

"다 알고 있다."

"무슨 소리를...."

"투덜거리고 싶어도 할 수 없겠지, 애원하고 싶어도, 통곡하고 싶어도, 볼썽사납게 주저앉고 싶어도 할 수 없겠지."

"...."

"그것이, 네가 태어나면서부터 짊어지고 있던 권리와 의무를 책임지는 이상적인 존재의 모습이었으니까."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이를 으득이며 나를 밀쳐내려는 엘레노아였으나 손에 힘은 담겨 있지 않았다.

"날카로운 말로 마음을 숨길 필요 없다. 굳이 다른 말을 하지 못한다면 침묵을 선택해도 괜찮다."

이곳에 오기 전, 타이른 올 벨로쿠스는 이렇게 말했다.

명령을 위반해서라도 주군을 위하는 것 또한 바로 충심이라고.

그 말에 완전한 동의는 할 수 없다.

적어도, 자신의 진심을 내뱉지 못하는.

아니, 진심을 내뱉지 못하게 된 엘레노아를 위한 지금의 내 행동은 충심으로 정의할 수는 없었다.

이건 나의 실책을 바로 잡으려는 클러치 플레이.

왕족과 귀족이라는 딱딱한 입장에서 펼쳐지는 상황이 아닌.

교수로서, 학생과 가지는 시간.

"알아차리지 못해서 미안하다."

아직도 자신을 모욕하냐며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는 엘레노아였으나.

아주 미세하게 눈가에 차오른 눈물방울.

그것을 놓치지 않고 조심스레 손을 뻗어 닦아준다.

소녀의 몸이 살포시 떨려온다.

"가짜와 진짜 따위. 실은 구분할 필요도 없던 거였다."

악몽도, 악령도, 요괴도, 수수께끼도, 악마도, 사건도, 괴담도.

그 무엇도 아니었다.

이는, 울음소리일 뿐이었고.

"너 역시, 엘레노아 루덴 그리핀일 뿐이었으니까."

울고 있는 소녀에게 필요한 건, 위로와 포옹이었다.

Chapter 57 - 57. 상담

"...."

언제부터였을까.

앞에 있는 이 소녀가 자신의 짐에 허덕이며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것은.

감히 예상컨대.

영특한 소녀는 매우 어린 나이부터 세상 사람들이 자신에게 얹은 짐의 무게에 대해서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렇기에 소녀는 또 하나의 자신을 만들었다.

다른 무엇도 가지고 있지 않은.

오롯이 왕족으로서 가져야 할 긍지와 책임만을 똑 떼어낸 것이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나 역시 설명할 수는 없었다.

다만, 대륙에 퍼져 있는 마나의 이치를 설명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우리가 늘 함께하는 숙면 속에서 꾸는 꿈을 완전히 파헤칠 수 없는 것 같이.

늘 무릎 꿇고 기도하는 성직자라도 신의 뜻을 헤아릴 수 없는 것과 같이.

어떠한 논리로 설명이 불가능한 정신적인 문제였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소녀는 버티지 못했을 정도로 몰려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엘레노아는 늘 노력하고 있었다."

꿈에서도 공주로서 당당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공부하다 잠들었던 모습을 보였다.

악몽이 두려워 잠을 자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그녀는 자연스럽게 책상머리에 앉아서 진도를 쫓았다.

하지만 그 모습은 뭔가 묘했다.

공주로서의 기본을 갖추기 위해 노력은 하지만 하는 말은 썩 그것에 흥미가 없어 보였다.

늘 내게 애니메이션 캐릭터에 관해서 물어오는 것에서 그 모습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전 엘레노아는 자신에게 왕족으로서의 긍지나 책임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다."

내 말에 앞에 있는 왕족의 자긍심과 긍지로 똘똘 뭉친 엘레노아가 움찔거린다.

"그러니까 더 노력했던 거겠지. 그녀는 착한 아이였으니까, 이런 자신을 억지로 변화시키려 했던 거다."

"...."

"하지만 실은 그 반대였다. 그녀는 너무 왕족으로서의 의무를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이 자신을 망쳤기에 스스로 떼어낸 거였어."

다른 어떤 것도 없이.

오롯이 왕족의 책임감만이 남아있는 존재.

이게 바로 지금 내 앞에 있는 엘레노아의 정체였다.

찬바람이 불어온다.

그것조차 그녀에겐 참으로 귀중한 경험이라는 듯 잠시 눈을 감고 맛본 후,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맞아. 나는 엘레노아가 살아남기 위해서 떼어놓았던 의무를 책임진 인격이야."

"...."

"나는 유능했으니까. 신기할 정도로 왕족의 의무에 관한 부담감만 똑 떼어낼 수 있었어."

당당하리만치 호쾌하게 선언하는 그녀. 기본적인 지식이나 창의성이 없는 부분은 이것 때문이었을 거라고 추측된다.

정말 군더더기 없이 딱 필요한 부분만 떼어내서 기본적인 지식이 부족했던 거였겠지.

"하지만 말이야. 나도 결국엔 인격이야. 그 아이가 잊었다고 해도, 나 역시 엘레노아이고 시간이 지나면 성장할 수밖에 없어."

왕족의 의무를 떼어냈다고 하더라도 엘레노아는 계속해서 성장한다.

왕족으로서의 부담감이 사라졌으나.

오히려 반대로, 스스로에게 어째서 왕족으로서의 의무감이 없는 걸까에 대한 스트레스를 엘레노아는 다시 받기 시작한 것이었다.

"웃기지? 당시 과한 스트레스로 새로운 인격이 생겼다는 기억도 잃었으면서, 비슷한 노선을 다시 밟고 있었어."

결론적으로 엘레노아는 불완전한 사람이었다.

너무나 성실했으며, 너무나 객관적으로 자신을 볼 수 있기에.

본인에게 걸어둔 기준이 계속해서 자신을 옭아매고 압박한다.

"이대로 있으면 결국엔 다시 같은 상황에 처하게 돼. 그러니까 나는 결정한 거야, 내가 몸을 차지하자고."

선하고 유약한 인격이 아니라.

왕족으로서 통치하고 책임지며 군림하는 입장인 자신이.

"꿈을 현실과 최대한 똑같이 바꾸려 한 것도 그 이유인가."

"그래, 맞아. 내가 밖에 나와 있다면 그 아이가 있어야 할 장소도 필요했으니까."

그러니 꿈을 매개체로 이용해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려 했다.

연약하지만 성실한 엘레노아가 온전히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을.

"악몽처럼 보이려 했던 것도 그러한 이유야. 그 아이는 자신의 짐을 나한테 떠맡기는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까."

어깨를 으쓱이며 태연하게 말하던 엘레노아였으나 바로 분위기가 급변한다.

"그런데 네가 다 망쳤어."

엘레노아의 손가락이 내 가슴을 쿡 찌르고 들어온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짙은 원망과 더불어 회의감에 잠겨 있었다.

"그거 알아? 그 맥이라는 빌어먹을 요괴 때문에, 다른 인격은 완전히 소멸했어. 흔적도 없이, 깔끔하게."

"...."

"악몽을 먹어 치운다는 개념에서 서로의 신념이 충돌한 거야. 신체의 주도권에서 더 강한 신념을 지닌 내가 이겼으니까!"

퍽!

이제는 주먹으로 가슴을 한 방 크게 후려친다. 하지만 아프진 않았다.

오히려 때린 그녀가 더 아프다는 듯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리고! 그 아이 스스로가 나보다 못하다고 인정해 버렸으니까!"

"...."

"그래서 사라졌어!"

목소리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원망은 담겨 있으나 후회하지 않는다는 일갈.

작게 차올랐던 눈물은 이미 모습을 감췄고.

차가운 밤공기처럼 냉정한 표정으로 엘레노아는 선언했다.

"차라리 잘 됐어. 왕족이라면 스스로의 연약함 정도는 끊을 수 있어야 하니까."

"...."

"내 입장은 그런 거니까. 엘레노아라는 존재보다도 왕국을 우선시해야 하는 거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야."

엘레노아는 더 이상 나와 대화하고 싶지 않다며 몸을 획 돌려 발코니 난간 쪽으로 향한다.

지금 그녀에게는 연약함 따위는 없었기에 실제로 원래의 엘레노아보다 좋게 볼 여지도 있었다.

이제 더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고.

스스로를 향한 의심도 하지 않을 것이다.

리더십 있는 통치자가 되어 아카데미의 회장 자리도 어렵지 않게 얻게 될 것이고.

그리고.

학생들을 선동하여 반란의 씨앗을 뿌리게 되겠지.

자신의 오빠인 오르페우스 국왕보다, 본인이 훨씬 왕국을 잘 통치할 수 있다는 아집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지금의 엘레노아는 언뜻 왕족으로서의 의무감에 똘똘 뭉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게 아니다.

왕족으로서의 의무감에 매달리고 있는 것뿐이다.

그것밖에 없으니까.

아마, 게임에서 만났던 그녀는 지금의 인격이었겠지.

그녀의 계획대로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 유약한 엘레노아는 영원히 그 안에서 살아갔을 것이다.

결국엔 같은 학급의 아리아 리아스에게 죽는 걸로 마무리되는 그런 이야기가 되겠지.

"맥을 창조함에 있어, 우리는 여러 개념을 잡아야 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똑같은 결말을 보는 걸 썩 좋아하지 않는다.

"뭐?"

뜬금없이 무슨 말을 하냐며 인상을 찌푸린 채로 나를 노려보는 엘레노아.

대화하고 싶지 않다며 내쫓으려 했으나 나는 계속해서 할 말을 내뱉는다.

"단순하게 악몽을 먹는 요괴로만 잡고 가기에는 애로사항이 너무 많았으니까. 처음부터 새로운 동물을 창조한다는 느낌으로 시작했지."

맥이라는 요괴의 설정집을 짠다고 생각하면 편했다.

다만, 동물을 창조하는 신처럼 매우 세밀하면서도 사실적으로 할 필요가 있었다.

단순히 코끼리의 코를 가지고 있다가 아니라.

코끼리의 코를 어떻게 움직이는지, 버릇은 무엇이며, 안에 뼈는 있는지, 근육량과 길이 등.

우리는 다채로우면서도 세세하게 맥을 창조해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꿈을 먹는 거였다.

그래, 모두가 그것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반대였다.

꿈을 먹고 난 이후를 신경 썼다.

왜냐면 이중인격이라는 걸 알지 못했던 당시에는 내가 정말 보지 못하는 악령이 있는 건지 궁금했으니까.

조금 기대했으니까.

내 이야기를 들은 엘레노아의 눈동자가 크게 뜨인다. 숨기고 싶어도 기대감이 차오르는 걸 숨기지 못한다.

"공주에겐 썩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동물은 뭔가를 먹으면 배설해야 한다."

슬며시 나는 작은 구체 하나를 꺼내 든다.

"맥이 남기고 간 악몽의 파편이다. 허나, 맥은 악몽을 소화할 수 있는 거지 인격을 소화시킬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맥이 먹은 게 악몽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아무리 여러 상황을 대비했다고 해도 먹는 게 인격이라는 상황까지 고려하진 못했으니까.

"그러면...."

"아직 이 안에 그녀가 남아있다."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엘레노아. 이제는 그녀가 선택할 차례였다.

공주로서의 입장을 생각하면 지금의 모습으로 남는 게 맞겠지.

그리핀 왕국의 국민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며, 카리스마 하나로 학생들을 반란군으로 바꿔버릴 정도의 능력자.

실제로 아리아 리아스가 막지 않았다면 그녀의 쿠데타는 성공적으로 끝났을 수도 있다.

원래대로 돌아오는 건 어찌 보면 왕족으로서의 의무를 저버림과 동시에 국민들의 기대를 무시하는 행위라고 볼 수도 있었으나.

하지만 엘레노아는 오래 갈등하지 않았다.

자신의 선택에 단 한 순간도 후회하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당당하니 고개를 끄덕인다.

굳이 입에 담지 않는 것만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남겨놓은 공주로서의 소양이었으며.

공주로서의 입장보다 처음으로 자신을 우선시 한 일종의 용기였다.

"좋다."

그렇기에 나는 손에 쥐고 있는 맥의 파편과 더불어 품에서 검은 보석을 하나 꺼내 든다.

사령의 돌, 레메게톤이었다.

"그건...."

"못 본 척해라."

괜히 주의를 주며 마나를 끌어올린다. 엘레노아는 당당한 척하고 있으나 조금 불안했는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어온다.

"그런데 정말 가능한 거야? 차라리 대마법사한테 부탁하는 게 맞지 않을까?"

"웃기는군."

실로 웃겼다.

도대체 누구를 앞에 두고 누구한테 부탁하겠다는 건지.

내가 처음 엘레노아를 만났을 때, 흑령사에게 물었던 것이 있다.

꿈에 들어가는 방법은 없냐고.

그리고 그때, 흑령사는 이렇게 답했다.

[있겠어요? 영혼끼리의 교감 같은 건 가능해도, 꿈에 들어가는 건 불가능할걸요.]

그래, 꿈은 불가능하다.

"이게 지금 꿈을 다루는 일로 보이나."

꿈이 아닌 인격.

그러니까 영혼을 다루는 일이다.

두 갈래로 갈라진 소녀의 영혼을 다시 봉합시켜야 하는 상황.

그리고 이것은 놀랍도록 나의 전문 분야였다.

"내가 누구인지 잊지 마라."

생과 사의 경계와 가장 가까이 닿아 있는 존재.

영혼과 교감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위로자.

"나는 사령술사다."

나의 마나와 맥의 파편 그리고 레메게톤이 공명하기 시작한다.

Chapter 58 - 58. 공주의 무게감

영혼의 교감.

막상 말은 쉽지 나 역시 처음이었던 지라 뭔가 크게 대단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저 두 사람의 영혼을 이어준다면, 그것으로 될 거라고 생각했으나.

"여긴 또 뭐지?"

주변을 둘러보니 이곳은 거대한 방 안이었다. 내 기억 속에는 확실히 없는 장소다.

벽지부터가 고풍스러우며, 고급진 가구들이 놓여 있다. 왕궁에서 쓰던 것들과 비슷할 정도의 사치품들이었으나, 조금 더 옛날 중후한 감성이 더해져 있었다.

일단 방 밖으로 나서려 한 걸음 내딛자 바로 위화감이 든다.

데이우스보다 훨씬 두꺼운 팔목. 동양인 특유의 황색 피부색과 더불어 입고 있는 옷은 현대식 정장.

"어?"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옛날 말투.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서 몸을 확인한다.

방에 있는 거울로 얼굴을 확인하니 정말로 김신우. 원래의 내 모습이었다.

이랬던 경험이 딱 한 번 있었다.

영혼의 모습으로 데이우스를 만났을 때.

'그렇다면 나는 지금 영혼이 되어서 엘레노아의 안에 들어와 있다는 건가?'

침착할 필요가 있었다.

영혼의 교류인지, 꿈의 계속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레메게톤의 힘과 맥의 파편이 공명하여 일어난 사태 정도라고 추측된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우선은 엘레노아를 만날 필요가 있었다.

내 생각이 맞다면, 그녀는 분명 이 안에 있을 거다.

그것도 두 인격이 함께.

그 둘을 만나게 해준다면 이 상황이 끝날 거라는 생각과 함께 문고리를 열며 밖으로 이동한다.

끼이익.

중후한 복도가 펼쳐진다. 하지만 밖으로 나온 이후에야 확신할 수 있었다.

이곳은 왕궁이다.

왕국 특유의 문양과 더불어 깔끔하게 깔린 붉은 카펫바닥이 그 증거였다.

'일단은 엘레노아의 방으로 가봐야 하려나.'

바로 그녀의 방으로 향한다. 중간중간 누군가를 마주칠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나 의외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꿈속 세상이라고 친다면, 아직 미완성이니까. 이런 부분이 부족한 거겠지.'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겠다 바로 복도를 달리기 시작한다. 데이우스처럼 약과 술에 절어 있던 몸이 아니라서 그런지 확실히 뛰어다니기 편했다.

익숙해져서 몰랐는데 이렇게 움직이니 원래 데이우스가 자신의 몸을 얼마나 혹사시켰는지 확 체감이 된다.

'아니면 그냥 영혼이라서 그런가?'

잘은 모르겠으나 일단 나는 엘레노아의 방에 도착했고.

놀랍게도 그곳에서는 격한 꾸짖음이 울려오고 있었다.

"그게 지금 맞는 행동이니!"

슬며시 문을 열자 그곳에는 어린 엘레노아와 그녀의 어머니로 보이는 외모의 여인이 서 있었다.

엘레노아의 어머니.

하이란 루덴 그리핀.

다만, 직접 본 건 처음이었다. 내가 아는바, 그녀는 이미 오래전에 병으로 죽었다고 들었으니까.

꾸짖는 어머니에게 조금의 반항도 하지 못한 채로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어린 엘레노아.

"다시! 다시 하라고!"

하이란의 외침에 엘레노아는 한 걸음 물러나더니 조심스럽게 허리를 숙이며 기품 넘치게 인사한다.

하지만.

짜악!

엘레노아의 뺨을 손찌검하는 하이란.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엘레노아가 그대로 몸이 뒤로 붕 날아가 버렸음에도 그녀는 전혀 물러남이 없었다.

"장난하니? 지금 그게 맞는 거야? 병신 같은 년아! 너는 공주야! 이 나라의 얼굴이라고! 그런 네가 이딴 식으로밖에 못 하면 뭐가 되겠어! 지금 그건 연기잖아! 가지고 있는 진정한 우아함을 끌어올려야 할 거 아니야!"

"죄, 죄송해요."

"닥쳐! 제대로 못 할 때마다 이제부터 맞을 줄 알아. 어차피 자국 정도는 마법사한테 시키면 금방 지울 수 있어!"

부들부들 떨면서 뭉기적거리며 일어나는 엘레노아의 손목을 거칠게 당기며 강제로 다시 일으킨 하이란.

엘레노아는 다시 한번 인사를 했고, 그 역시 마음에 안 들었던 하이란이 손을 번쩍 드는 순간.

턱.

방 안으로 들어선 내가 하이란의 손목을 낚아챈 것이었다.

"너, 너 뭐야!"

나를 향해 앙칼지게 외치는 하이란. 하지만 내 마나가 이미 과격하게 그녀의 몸을 때리고 들어가 붕 띄워 벽에 박아 넣었다.

쿵!

어차피 꿈이다.

엘레노아의 어머니인 하이란은 이미 죽은 사람일 뿐이다.

"정신 차려."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엘레노아.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를 쓰러트린 나를 놀라지도 않은 채로 보더니 부르르 몸을 떤다.

"어? 뭐야?"

말투에서부터 딱 느껴졌다.

이 엘레노아는 왕족으로서의 의무를 짊어진 두 번째 엘레노아였다.

"어라? 나, 방금 전까지...."

"기억이 좀 나냐? 정신 똑바로 차려라."

"어? 잠깐만, 넌 누구야?"

내게 손가락질하며 인상을 팍 찌푸리는 엘레노아에게 나는 심드렁하니 답해준다.

"데이우스 베르디."

"뭐? 내가 아는 데이우스랑은 하늘과 땅 차이로 다른데? 너 뭐야?"

당황한 엘레노아였으나 설명할 시간은 없었다. 왜냐면 벽에 박혔던 하이란이 천천히 일어나고 있었으니까.

그것도 매우 거대해지기 시작하며 허리가 굽어 천장에 등이 닿는다. 길어진 손으로는 문을 쾅 닫아 나가지 못하게 만든다.

"어딜 공주가 남자랑 얘기를 하고 있어어어어어어어!"

저주와 비슷한 외침에 나와 엘레노아는 동시에 밖으로 몸을 틀었다.

다시 한번 마나를 다루어 손과 문 자체를 박살내버리며 밖으로 나왔다.

이상할 정도로 마나가 평소보다 잘 움직이는 기분.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엘레노아가 혀를 차며 답한다.

"꿈속 마나잖아. 재능이나 노력보다는 사실상 의지가 가장 중요한 거야."

"그래?"

"대신 정교한 컨트롤은 불가능하겠지."

휙 몸을 틀어서 있는 힘껏 마나를 끌어올려 본다.

문밖으로 나온 손 하나 잃은 거대한 하이란이 쿵쿵거리며 다가오려 했으나.

콰아아아앙!

범람하듯 쏟아지는 마나의 파도에 밀려 저 뒤로 밀려나더니 결국 창문 너머로 떨어져 버렸다.

"확실히, 내가 평소 쓸 수 있는 마나 이상을 사용해도 멀쩡하네."

내가 신기하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엘레노아는 입을 벌린 채로 멍하니 바라본다.

"그러려면 정신력이 꽤나 소모돼서 막 어지럽고 그럴 텐데?"

정신력이란 참 애매한 단어이지 않나 싶었지만. 어쨌든 심적인 부분으로는 웬만해선 흔들릴 일 없는 나였기에 크게 무리이진 않았다.

"...정말 데이우스야?"

나를 바라보며 물어오는 엘레노아에게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답한다.

"정확히는 데이우스의 몸을 사용하고 있는 남자라고 볼 수 있지."

지금의 모습으로는 내 스스로를 데이우스라고 소개하고 싶지 않았기에.

작은 소녀에게 손을 뻗는다.

"김신우. 그게 내 진짜 이름이야."

"김, 신우?"

손을 맞잡으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 엘레노아였으나 이 이상 시간을 허비할 생각은 없었다.

벌써 창문 너머에서 하이란의 괴상하게 일그러진 얼굴이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저건 죽지도 않네."

짜게 식은 눈으로 하이란을 노려보던 엘레노아는 내 허벅지를 툭툭 손으로 친다.

"업어줘. 쓰러트리는 것보다는 도망치는 게 맞을 것 같아."

"...."

"그리고 또 다른 엘레노아가 어디 있는지 알 것 같아. 거기로 가자."

"어딘데?"

솔직히 별로 업어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네 발로 기어서 오는 하이란에게서 도망치기에는 엘레노아의 보폭이 너무 좁다.

"옥상! 거기에 반쪽이 느껴져."

대답을 들으며 그녀를 등에 업자 하이란은 이마를 땅에 박아대며 외쳐댄다.

"공주가! 외간 남자! 등에 올라타!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이리 와! 이리오라고오오오오!"

무서운 속도로 따라붙기 시작한 하이란. 나는 오히려 정면대결로 마나를 쏟아내어 그녀를 밀어낸다.

나의 마나에 밀려서 그대로 한 쪽 벽면에 처박힌 하이란을 지나치며 그녀가 밖으로 밀려났던 창문을 넘는다.

바깥 풍경은 제대로 구현도 되지 않았다.

게다가 감각도 이상한 게, 왕궁의 벽이 무슨 고층빌딩 수준으로 높게 보였다.

아마 엘레노아가 어렸을 적에는 이런 식으로 왕궁이 보이지 않았을까 싶었다.

"끄앗!"

마나를 쏟아내며 하늘을 난다. 엘레노아가 다급하게 내 목에 매달렸으나 숨이 막히거나 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정교한 마법을 사용할 수 없던 지라 무슨 광풍에 몸을 맡긴 것처럼 이리저리 몸이 휩쓸린다.

그런데도 어지럽거나 구토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저기 말이야!"

세차게 때려오는 인위적인 바람 속에서 엘레노아가 외친다.

왜 그러냐고 슬쩍 고개만 돌리자 엘레노아는 거슬린다는 표정으로 물어온다.

"왜 말투가 바뀐 거야?"

"...."

"아니, 너무 달라져서 말이야. 그, 원래 데이우스는 좀... 재수 없는 말투잖아?"

왕족이라서 그런가.

정말 전혀 거리낌 없이 말하는구나 싶었다.

이런 것도 제왕의 품격 그런 걸로 넘어가 줘야 하는 건가.

"일부러 차이를 두는 거야."

간단하게 설명하며 넘어간다. 엘레노아는 당장에는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으나, 영특한 아이니 금방 알아차릴 거다.

어느새 건물의 끝에 도달한 나와 엘레노아는 붕 뜨며 옥상에 착지했다.

물을 엎은 수채화처럼 일렁이며 보이는 풍경 뒤로 몸을 웅크리고 있는 금발의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작은 엘레노아랑은 다르게 17살 소녀의 모습.

우리가 그녀를 향해 다가가려던 순간.

"오지 마!"

울먹이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참담함이 담겨 있었다.

Chapter 59 - 59. 아름다운 밤

엘레노아는 스스로가 미웠다.

어머니의 기대조차 충족시키지 못했다. 실망스러운 딸이었기에 결국 돌아가시는 그날까지도 자신을 보지 않고 눈을 감았다.

왜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던 걸까?

강박적으로 왕족으로서의 모습을 지켜야 한다고 스스로를 몰아세우던 자신이.

어느 날인가부터 갑자기 그 모든 것으로부터 홀가분해졌던걸.

왜 자연스럽게 넘겼던 걸까?

본인에게 묻고 있으나, 실은 너무나 뻔한 대답이었다. 총명한 엘레노아는 그 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게 편했으니까.

굳이 왕족의 의무에 다시 눈을 두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어린 엘레노아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무시했다.

그리고 그게.

추악하면서도, 최악이며, 어리숙하기까지 한 발악이었음을, 이제는 인정하고 있었다.

자신의 짐을.

또 다른 자신에게 넘겨버렸다.

그것을 짊어진 작은 엘레노아가 지금 저 너머에 서 있었다.

처음 보는 남자와 함께였으나, 이상하게도 작은 엘레노아를 눈에 담고 있으니 기억이 차분히 머릿속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이 이곳에서 나눈 대화가 지식처럼 머릿속에 각인된다.

저 남자는 데이우스 베르디였다.

아니, 데이우스의 진짜 정체였다.

하지만 그건 하등 중요치 않았다. 지금의 엘레노아에게 필요한 건, 혼자 있는 시간이자 사라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야."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작은 엘레노아. 하지만 가시를 세우며 대응한다.

"오지 말라고! 왜 온 거야! 연약한 내가 사라졌잖아! 강한 너만 남아 있잖아! 우리가 짊어져야 할 의무를 알잖아!"

"...."

작은 엘레노아는 답할 수 없었다.

결국 동일한 인물이다. 그녀 역시 왕족의 신념과 자긍심으로 똘똘 뭉친 본인이 몸의 주도권을 잡고 행동하는 게 옳다는 건 알고 있었다.

논리적으로는 그렇지만 감정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그녀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은 작은 엘레노아였으나, 그런 연약한 말을 입에 담는 건 그녀의 특성상 불가능했다.

왕족은 나약한 말을 하지 않으니까.

그렇기에 여기서 나선 건 데이우스 베르디.

김신우였다.

"무슨 말을 해줄까?"

원래의 데이우스와는 다른 말투와 목소리. 하지만 실로 비슷한 공격적인 어투.

"위로를 해줘? 괜찮다고 달래줘? 아니면 네가 필요하다고 해줄까?"

한 걸음 앞으로 내딛자 엘레노아가 뒤로 물러난다. 그녀의 눈동자가 떨려오며 두려움이 내비춘다.

"내가 확실하게 말해줄게. 너한테는 공주의 자격도, 권리와 의무를 향한 책임도 없어."

어이가 없었다.

실은, 이 문답 자체가 필요 없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상황 자체가 우스웠다.

엘레노아는 자신이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건 실로 당연하지 않은가.

"야! 야!"

뒤에 있던 작은 엘레노아가 다급하게 김신우에게 달려든다. 그녀는 그의 바짓가랑이를 잡고는 당기며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외치지만.

김신우는 그런 작은 엘레노아를 잡아당겨 앞으로 데려온다.

그리고 작은 엘레노아를 가리키며 더없이 확실하게 선언했다.

"이 작은 소녀를 봐. 자신의 의무에서 도망치지도 않고, 뿌리치지도 않으며 정면으로 맞서 싸워왔고 또한 왕국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온 고귀함까지 갖추고 있어."

"어? 어?"

갑자기 자신을 왜 칭찬하냐면서 당혹스러워하는 작은 엘레노아.

그러면 그럴수록 원래의 엘레노아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지며 입을 꾹 다물었으나.

그렇기에 묻는다.

"이중 누가 진짜 엘레노아지?"

동시에 "어?" 하고 되물어온 엘레노아. 하지만 그녀들은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도대체 뭘 묻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듯.

"당연히...."

"...둘 다."

둘은 머뭇거리면서 말해왔다. 옳은 답이었다. 박수라도 쳐주고 싶었다.

교수로서 제대로 제자를 기른 적은 없지만 답을 스스로 뱉어내게 유도한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 너희는 다른 사람이 아니야. 결국에는 하나의 인격일 뿐이야."

"아."

이제야 그가 하고 싶은 말을 깨달았는지 두 엘레노아는 입을 벌린 채로 서로를 바라본다.

그래.

감정이 다채로우며, 늘 해맑고, 캐릭터 이야기를 좋아하며, 꽃밭에서 떠드는 걸 좋아하는 엘레노아도.

왕족으로서의 긍지와 자존심, 명예와 신념을 똘똘 뭉친 이상적인 군주상의 엘레노아도.

결국 한 사람일 뿐이었다.

"많이 고됐다는 거 알고 있어. 힘들었고, 무너져 내릴 것 같음에도 열심히 버텨왔다는 거? 충분히 알 수 있어."

그렇게 자신의 몸에 구멍이 뚫리고, 넘어지고, 쓰러졌음에도 다시 일어나서 결국에는 여기까지 왔다.

"자, 서로를 봐."

그는 말하고 있었다.

스스로가 바라는 이상의 모습을 갖지 못했다고 자책할 필요 없다고.

왜냐면.

"그러한 고난 끝에 너는 이미, 왕족이라는 이름을 짊어질 정도로 충분히 멋지게 성장했으니까."

다른 길을 걸어왔으나, 함께 성장했음은 다르지 않다.

작은 엘레노아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웃으면서 내민 그 손길에는 오랜 방황의 종지부를 찍자는 의미가 담겨 있었고.

조심스럽게 서로의 손이 맞닿는다.

화려한 빛무리가 있을 필요도 없었다. 따로 엄청난 마나가 요동치거나 하는 것도 사치였다.

고작 한 소녀가.

자신을 똑바로 마주 보고 이제야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차린 것뿐이었다.

이 자리에 엘레노아는 쭉 한 사람이었고.

우습게도 자신이 자신을 동경해왔던 것뿐이었다.

"진짜, 바보 같네."

스스로를 향해 한심하다 말하는 엘레노아였으나 그 표정에서는 후련함과 상쾌함이 담겨 있었다.

가벼우면서도, 활기차던 그 모습 그대로였으나.

소녀의 눈동자에는 짙은 신념과 더불어 스스로를 향한 믿음과 의지가 담겨 있었다.

콰아앙!

너무나 갑작스레 건물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깜짝 놀란 두 사람은 회포를 풀 시간도 없었다.

꿈이 무너지고 있었다.

"미쳤네."

"어, 어머니?"

두 사람이 동시에 난간에서 밑을 내려 보며 소리친다.

아까 날렸던 하이란이 거대해져서는 이제 건물 자체를 먹어 치우며 이쪽으로 올라오고 있는 것이었다.

거인이 나오던 만화가 떠오르는 압도적인 모습. 당황스러웠으나 저걸 완전히 해치울 수는 없었기에.

"잠깐 실례할게."

김신우는 엘레노아의 허리춤에 손을 두른 후, 다시금 마나를 쏟아내어 하늘로 날아오른다.

정신력이 마나의 기준이었기에 이곳에서 그는 반쯤 무한한 마나를 지닌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거, 거칠어!"

다만, 정교하게 다룰 수는 없다 보니 마치 폭풍에 몸이 휘둘리는 것처럼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 * *

얼마나 날아왔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계속해서 하염없이 날았고, 이제는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미해졌다.

목적지는 없었다.

그저 품에 안겨 있는 엘레노아는 예전 그가 해줬던 가장 인상 깊은 이야기를 떠올린다.

마법소녀의 이야기였다.

평범한 아카데미의 학생이 희한한 힘을 가진 동물을 만나 굉장히 독특한 마나를 가지게 되어 정의를 위해 싸운다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엘레노아는 참으로 신비롭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이런 발랄한 이야기를 상상해냈는지 놀랍기까지 했다.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이거였다.

세상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소녀들도 평소에는 평범하게 살아가며, 평범하게 웃고 떠들며, 평범하게 사랑을 한다는 것.

그걸 듣고 조금은 위로받았다.

세상을 지킨다는 광활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작은 소녀들도 언제까지고 변신상태는 아니었다.

'나도....'

왕족이며, 공주이다.

특별해야만 하는 존재이지만.

언제까지고 특별할 필요는 없었다.

필요한 순간에만 공주로서의 모습을 보인다면, 그것이 진정으로 현명한 자였다.

늦게라도 깨달았음에 감사하며 엘레노아는 김신우를 바라봤다.

마법소녀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면.

그녀들도 사랑을 하지만 그 상대방에 대해서는 크게 부각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야기가 시작하면서부터 이미 좋아하는 상태인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그 부분은 참 별로라고 생각했었다. 뜬금없는 첫사랑? 한눈에 반하는 로맨틱함?

굉장히 작위적이며 편의주의적이라 생각했으나.

지금의 엘레노아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실로, 현실적인 이야기구나.'

괜히 떨어질 것 같다는 걸 구실로 삼아 더 강하게 허리를 껴안는다.

어지러워서 구토라도 해야 했을 상황이었으나, 멀미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왜냐면 꿈이니까.

결국 또 다른 자신에게 들키지 않았던 마지막 현실과의 차이점.

현기증이 없다는 것.

하지만 지금은, 그게 참으로 싫은 엘레노아였다.

'하필이면.'

이런 과격하게 몸이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멀미도 현기증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남자의 얼굴이 더욱 또렷하게 뇌리에 박혀 들어오고 있었다.

"차라리 정신도 못 차릴 정도로 어지러웠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으면, 이 과격하게 쏟아지면서도 가슴을 마구잡이로 울리고 있는 감정을 단순히 현기증이라고 속일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워하면서도.

이 꿈이 조금이라도 더 길게 이어지길.

그렇게 바라는 엘레노아였다.

* * *

"끄음."

조심스럽게 눈을 뜨자, 현기증이 팍 치고 올라왔다. 꿈에서 느끼지 못했던 게 이제야 뒤늦게 따라오는 느낌.

마치 마취가 풀리는 느낌에 잠시 심호흡하며 자세를 잡는다.

"으윽!"

하지만 나보다 더 심한 건 엘레노아였다.

그녀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여 발코니 난간 너머로 떨어질 뻔했으나 내가 과격하게 잡아당겨서 겨우 구할 수 있었다.

우당탕!

다만, 그 탓에 몸이 내 쪽으로 쏠려 서로 겹치듯 쓰러졌다는 게 문제였지만.

어쨌든 내 위에 올라탄 채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엘레노아.

꽤나 오랜 시간을 저 안에서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발코니 아래에서 펼쳐지는 파티는 아직 한창이었다.

내가 슬며시 옆에 있던 흑령사를 보자 그녀는 미묘한 표정으로 설명한다.

[10분 정도 지났어요. 둘이 가만히 선 채로 뭐 하는 건가 했다니까요.]

'10분.'

레메게톤의 과격한 힘에 휩쓸려서 영혼이 꿈에 뒤섞여 들어갔다고 볼 수 있긴 했지만.

'다음에 또 하는 건 무리가 있겠군.'

위험한 방식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레메게톤의 힘이 상상 이상으로 강해서 꿈과 영혼의 경계를 찢고 들어왔다.

뭐, 결과적으로는 옳지 않았을까 싶지만.

슬쩍 시야를 내리자 이제 멀쩡해졌는지 엘레노아가 품에 안긴 채로 나를 올려보고 있었다.

발그레 붉어진 얼굴을 보며, 이제 그만 내려오라고 말하려 했으나.

잠시 고민하다 그녀 너머의 밤하늘로 눈을 두며 입을 뗀다.

"나쓰메 소세키라는 소설가가 있었습니다. 사랑의 고백을 달이 아름답다는 걸로 표현해 유명해진 사람이죠."

내 말에 엘레노아는 큰 눈을 깜빡거리더니 크게 웃으며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상쾌하리만치, 후회와 미련하나 남기지 않은 목소리로.

"당연히 현실이지!"

그 대답에, 나도 모르게 초승달을 닮은 미소가 슬며시 지어졌다.

실로 달이 아름다운 밤이었다.

Chapter 60 - 60. 말괄량이

"...이거 놓으시죠."

"아, 미안. 나도 모르게."

내 재킷 소맷자락을 잡고 있던 엘레노아 공주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놓는다.

단둘이 있을 때도 이런 행동은 썩 달갑지 않았으나 지금처럼 주변에 사람들이 있을 때.

"크흠."

특히나 국왕인 오르페우스가 있을 때는 자제해줬으면 했다.

괜히 이상한 오해를 받을 수도 있으니까.

지금 우리가 왕궁 정문에 모인 이유는 엘레노아 공주의 배웅을 위함이었다.

사건이 해결되고, 다시 로베른 아카데미로 돌아가야 하는 그녀였기에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으나.

"...데이우스도 교수니까 같이 가면 되는 거 아니야?"

뭔가 불만족스러운 듯 엘레노아는 나와 국왕을 힐끗 보면서 요구해온다.

그걸 들은 오르페우스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젓는다.

"아직 그는 왕실에서 할 일이 남아있다."

마지막 세 번째 시련만 해결한다면 그리핀 왕국에서 처음으로 국왕이 인정한 흑마법사가 될 수 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시련을 끝낸다고 하더라도 바로 아카데미로 돌아갈 수는 없을 거다.

큰 소란이 일어나게 될 테니까.

"그러면 나도 그냥 있다가 같이 갈까? 어차피 움직일 거 한 번이면 되잖아."

악몽 탓에 만성피로로 시달리던 공주가 다시금 활발해진 모습은 좋았으나, 그 정도가 과하다 생각했는지 오르페우스는 난감한 듯했다.

그렇다고 동생의 요구를 냉정하게 쳐내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었기에.

"이제 곧 중간고사입니다. 이번에는 수석을 차지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끄응."

내가 끼어들자 엘레노아는 뭔가 삐진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푸념하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나는 엘레노아 루덴 그리핀이니까."

자신이라는 존재의 의미와 무게를 알고 있기에 그녀의 입가에 걸리는 미소는 찬란하리만치 아름다웠다.

나 역시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여준다.

"좋은 대답입니다."

엘레노아도 자신감 넘치는 미소와 함께 그대로 마차로 향했다.

그대로 배웅을 끝내려 했으나 오르페우스 국왕과 대마법사 록펠리칸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은지라 나는 헛기침하며 다시금 엘레노아에게 다가갔다.

"응?"

마차 창문을 열고 무슨 일 있냐고 갸웃거리는 엘레노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다시금 헛기침을 하며 일부러 국왕과 대마법사의 주의를 끌어준다.

엘레노아는 한없이 진지한 내 목소리에 살짝 기대감에 차올라 발그레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킨다.

"어, 응. 말해도... 괜찮아."

힐끔힐끔 자신의 오빠의 눈치를 보던 엘레노아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차갑게 단언했다.

"로베른 아카데미에서는 교수와 학생의 신분이니 존댓말을 하도록. 지금처럼 함부로 굴지도 말고."

"...."

"공주이니, 예를 차리는 법은 잘 알겠지."

그렇게 말하며 몸을 휙 돌리자 국왕은 얼떨떨하면서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어 보인다.

그리고 뒤에서 울려오는 노기 어린 비명.

"너 이...!"

대마법사가 다급하게 소리를 차단하는 마법을 사용해서 공주의 입에서 나오는 험한 말이 새어 나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마차가 덜컹거리면서 공주는 밖으로 튀어나오려 했으나 대마법사의 손짓에 마부가 다급하게 말을 몰아 출발했다.

"그대는 참으로 신비하군."

덤덤하니 공주의 마차를 마중하는 나를 향해 오르페우스 국왕은 질린다며 투덜거리다가도 슬며시 물어온다.

"그대, 정확하게 올해로...."

"...스물여덟입니다."

김신우의 나이는 스물다섯이지만 데이우스는 3살이 더 많았다.

"끄음, 나이 차이가 썩 나는군."

"...."

"그대의 현 입장과 상황을 잘 생각하고 잊지 않길 바라네."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일축하고 싶었으나, 막상 그렇게 말했다가는 본인 여동생이 어디가 부족하냐며 따지고들 국왕의 모습이 선했기에.

그냥 입만 다문 채로 침묵을 통해 유려하게 흘러 넘긴다.

오르페우스 국왕도 엘레노아의 마차가 시야에서 안 보일 때쯤이 돼서야 한층 진지한 분위기로 말했다.

"다음 시련은, 내일 주도록 하겠네. 한동안 연구 때문에 꽤나 고되었겠지."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대를 찾아온 손님도 있네."

"...?"

무슨 뜻인가 싶었으나 엘레노아가 떠나간 길로 그대로 들어오는 또 다른 마차.

이미 내가 몇 번인가 타봤던 마차로 노스웨든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마차에 타고 있던 검은 머리의 여인은 다급하게 내리더니 바로 정중하게 국왕과 대마법사에게 무릎 꿇어 예우를 차린다.

"노스웨든 백작의 누이, 데이아 베르디라 하옵니다. 이렇게 왕궁 출입을 허가해주셔서 감사하옵니다."

"됐네, 북부의 변경백이라면 늘 환영이지. 우리는 이만 자리를 비켜주도록 하지. 마차 뒤에 있는 건 진상품처럼 보이는데 나중에 풀어도 되니 우선 남매끼리 회포라도 풀게."

"넘치는 배려 감사합니다."

데이아를 보더니 오르페우스 국왕은 장난스럽게 내 어깨를 툭 친다.

"데이우스, 그대보다 여동생이 훨씬 낫군."

"...."

젊은 주제에 허허 늙은이처럼 웃으며 가버리는 오르페우스 국왕과 그 뒤를 따라 가는 록펠리칸 대마법사.

덩그러니 남아있는 나와 데이아.

국왕이 떠나갈 때까지 일어나지 않던 데이아는 발걸음 소리가 끊어지자 그대로 슥 일어나더니 나를 노려본다.

"할 말 없어?"

팔짱을 끼며 대놓고 본인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데이아에게 나는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잘 지냈나?"

"잘, 지냈나...?"

그러자 데이아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깊게 내쉬더니.

"잘 지냈을까? 어?! 잘 지냈을 것 같아! 누가 미친놈처럼 흑마법사라고 자수해서 간이 떨려 죽는 줄 알았는데! 수도에 들어오면서 바로 같이 반역죄로 싸잡혀서 나까지 처형당하는 거 아닌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내가 사령술사라는 걸 자수해서 체포당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는 데이아.

그녀의 입장에서는 수도인 그레이폰드로 들어오는 것조차 목숨을 건 도박이나 다름없었겠지.

"...그러면서도 들어왔군."

내가 찌르듯 묻자, 데이아는 목이 탁 막힌 듯 우물쭈물 거리더니 괜히 짜증을 버럭 낸다.

"어쩔 수 없잖아! 일단 상황 파악은 해야 하니까!"

말괄량이가 하나 가버리니 말괄량이가 하나 늘었다. 그것도 이쪽은 입도 험하고 나를 향한 증오도 얼룩덜룩 묻어 있는지라 더 피곤하다.

'차라리 시련을 받는 게 편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들켰는지 데이아는 삐죽이며 나를 노려본다.

딱히 할 말이 없었기에 나는 바로 물으려 했다.

원래 오빠인 데이우스 베르디의 몸을 차지한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녀라면 분명 답을 내놓은 채로 나에게 도달했을 거라고 확신하며 입을 열었으나.

"잠깐."

데이아는 손을 뻗어 내 말을 멈춘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마를 손으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네가 노스웨든을 떠난 게 대충 두 달 정도 됐거든?"

그래, 떠나던 시기가 3월이었는데 이제 5월이다. 그레이폰드의 시내에는 꽃향기가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었다.

"한 달을 30일이라고 치고, 네가 나한테 5분을 달라고 했던 걸 계산하면...."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하기 시작한 데이아. 그녀는 손가락을 펼치며 뭔가를 계산하기 시작한다.

"한 달이면 150분. 두 달이니까 300분이야. 이걸 시간으로 계산하면 5시간."

척.

다섯 시간이라며 손가락을 쫙 펼친 데이아가 눈을 부릅뜨면서 외친다.

"너는 내 5시간을 사용할 수 있어!"

"...."

"자, 어때."

도대체 뭘 원하는 건가 싶었다. 대충 진득하니 자리를 잡고 대화를 하고 싶기는 하지만, 본인이 먼저 제안하고 싶지 않다는 오묘한 감정 정도는 읽을 수 있었다.

"필요 없...."

"뭐?"

그깟 다섯 시간에 휘둘리지 말고 그냥 따로 카페라도 가자고 하려고 했으나, 데이아는 흉흉하니 눈을 치켜뜬다.

아무래도 자신은 억지로 끌려간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싶어 보였기에.

그녀의 선택에 따라 이번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기에, 오빠로서 배려해준다.

"5시간이면 시내로 나가지. 이번 일 때문에 아마 그 정도는 허락해주실 거다."

아마 대마법사의 제자들이 멀찍이서 나를 미행하기는 하겠으나, 그래도 입장을 생각하면 시내로 나가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거였다.

'그레이폰드라.'

생각해보니 그레이폰드는 게임 속에서는 자주 거닐었지만, 직접 내 발로 걸어본 적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약간 기대가 되기도 했다.

"그레이폰드 시내? 나도 처음인데 혹시 뭐 아는 곳 있어?"

"...그래."

아는 곳이라.

물론, 많이 알고 있다.

소소하면서도 잡다한 서브 퀘스트와 이벤트가 많은 장소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 머리에 들어있는 정보들을 꺼내 든다.

"메르센이라는 식당이 있다. 아마, 그곳의 음식이 네 입에 맞을 거다."

"...."

"가도록 하지."

내가 먼저 그녀를 지나치며 걷자, 우물쭈물하던 데이아의 발걸음이 곧바로 내 뒤를 쫓았다.

Chapter 61 - 61. 오빠

"고기로 먹고 싶어. 노스웨든의 질긴 짐승 고기 말고 부드러운 걸로."

"주문이 많군."

"이 정도 가지고 뭔. 내 동갑내기 귀족 영애들 보면 얼마나 까탈스러운지 알아? 노스웨든의 여장부라서 그나마 이 정도인 거야."

추운 북부에서 살아간다는 것에 묘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데이아가 당당하니 가슴을 내민다.

당연히 나는 이해하지 못할 감정이라 고개만 저으며 무시한 채로 거리를 걷는다.

그레이폰드는 확실히 번화가이며 대도시였다. 로베른 아카데미가 있는 로베른도 꽤나 큰 도시였으나, 비교하기엔 로베른이 좀 불쌍했다.

사람들의 무질서한 발걸음, 마차 굴러가는 바퀴소리와 흥정하는 상인들의 신경전 등등.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백색소음이었으나 그것도 수가 지나치게 많아지니 거슬릴 지경이었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걷고 싶어도 데이아는 헤 하고 입을 벌린 채로 고개를 휙휙 돌린다.

24살이 될 때까지 노스웨든 같은 변방에 콕 박혀서 살았으니 신기한 것 투성이겠지.

쓰읍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총총걸음으로 내 옆으로 와서 발걸음을 맞추며 키득거린다.

"나는 아무래도 태어날 곳을 잘못 고른 것 같아. 천성이 도시 여자야. 딱 공기부터가 마음에 들어."

"...시내로 나온 지 10분도 안 지났다."

"그러니까 더 확실한 거 아니야? 운명의 상대를 알아차린 느낌?"

"노스웨든의 여장부는 어디 갔지?"

"사람은 진화하는 법이지. 내 몸이 여기서 살아 숨 쉬는 걸 기뻐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

손을 쫙 뻗고는 코로 깊게 숨을 마시는 데이아를 보며 한심하다 눈을 찌푸린다.

"24살까지 노처녀로 살았으면서 운명의 상대를 만난 느낌을 어떻게 아는 거냐."

"이 개색...."

입술을 꾹 깨물더니 주먹을 쥐고는 나를 노려본다. 그러더니 힘이 탁 풀린 듯 한숨을 내쉬며 답한다.

"후우, 내가 트라우마가 좀 있어서 안 한 거야."

"...미안하군, 실언했다."

마치 진짜 여동생의 투정을 받아주는 느낌이었기에 나도 모르게 말을 함부로 했다는 걸 인정하며 사과한다.

그녀가 타인을 향해 혐오를 가지게 된 이유가 바로 데이우스였으니까.

그런 나를 보며 데이아는 손을 휘젓는다.

"됐어, 진짜 그 새끼도 아니면서."

"...."

그 뒤 우리 사이에 딱히 대화는 없었다. 생각해보면 원래 이게 평소의 데이우스와 데이아였다.

그레이폰드라는 대도시가 잠깐 데이아를 소녀로 만들어줬지만 금방 냉담한 현실을 마주 본다.

타이밍 딱 맞게 음식점에 도착했다. 영업 중이라는 포근한 나무 팻말이 걸려 있는 메르센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어서 오세요!"

급사의 활발한 인사와 함께 들려오는 북적거리는 사람들의 대화 소리.

손님이 많은 걸 보며 데이아도 "오오."하고 조금 기대감에 찬 눈으로 주변을 둘러본다.

"두 분이세요? 자리 안내해드릴게요!"

급사가 안내해준 곳은 꽤나 구석진 자리였다. 방금까지 손님이 있었는지 급하게 테이블을 정리한 모양새였다.

"메뉴 여기 있습니다! 주문 정하시면 불러주세요!"

널찍한 메뉴판을 건네주는 급사. 나는 그걸 받아 데이아에게 먼저 건넸다.

"먼저 봐라."

"...."

뭔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나를 보면서 휙 메뉴판을 낚아챈 데이아.

하지만 그녀는 금세 메뉴판에 빠져들어 꽤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로스트비프인데 치즈퐁듀가 같이 나와? 와, 이거 뭐야?"

"...."

"이쪽은 샐러드랑 같이 곁들여 먹기 좋겠는데? 건강식 느낌인가? 아스파라거스가 많이 들어갔을 것 같네."

"...."

"세트 메뉴를 시키면 열쇠고리를 주는 이벤트를 하고 있네. 와, 노스웨든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인데."

거의 10분을 메뉴만 주구장창 보면서 혼자서 호들갑을 떠는 데이아를 묵묵하니 바라본다.

한참을 몰두하던 데이아는 메뉴판 너머의 나와 눈이 딱 마주치더니 괜히 부끄러워져 얼굴을 휙 내리깐다.

"나는 이거, 치즈퐁듀 로스트비프로 먹을래."

"...그럼 세트로 시키지. B세트로 주문하겠다."

"어?"

대충 메뉴판을 훑듯이 본 나는 바로 급사를 불러 주문했다. 따로 음료까지 간단히 시킨 나는 팔짱을 낀 채로 데이아를 바라본다.

그녀는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메뉴를 너무 대충 고르는 거 아니야? B세트에 다른 메뉴가 뭔지도 모르잖아."

"상관없다. 어차피 거기서 거기니."

"...."

그 뒤, 우리 사이에는 다시금 침묵이 내려앉았다. 전생이었으면 핸드폰이라도 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볼 게 아예 없는 건 또 아니었다.

대도시라서 그런지 유령들이 아주 넘쳐난다. 해를 가할 수 있을 정도의 악령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을 가지고 떠돌아다니는 것들이 과히 많았다.

음식이 나오고 고소한 향기가 코를 통해 위장을 자극한다.

게임 내에서도 캐릭터들의 극찬이 쏟아졌던 음식점인지라 확실히 비주얼부터가 상당했다.

"여기 세트 열쇠고리요!"

음식과 함께 두고 간 열쇠고리. 작은 곰 인형이 달린 고리를 슬며시 데이아 쪽으로 밀어 넣었다.

"가져라."

"...."

"나는 필요 없다."

함께 나온 샐러드를 묵묵히 먹기 시작한다. 안에 새우가 들어있어 꽤나 나쁘지 않았다.

그런 나를 멀뚱히 보던 데이아는 찜찜한 듯 열쇠고리를 받아 들더니 주머니에 넣는다.

"나 이거 가지라고 일부로 세트 메뉴 시킨 거 아니지?"

"아니다."

"...."

말은 그렇게 했어도 찝찝했는지 데이아는 힐끔힐끔 나를 봤으나.

치즈퐁듀에 고기를 한 번 푹 찍어 먹자, 정신이 팔려서는 먹어대기 시작했다.

식사를 끝마치고.

우리는 근처 카페에 들렀다.

소화를 위해 걷는 게 어떠냐고 물었으나, 데이아가 디저트를 먹고 싶다고 말했기에 그냥 카페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와, 이게 그레이폰드? 고기 육즙이 미쳤던데."

"맛있었다면 됐다."

정신이 팔렸는지 칠칠맞게 입에 묻히고 먹던 걸 주의 주느라 이쪽은 꽤나 고생했지만.

"평소와는 다르군."

턱을 괴며 말하자 커피를 마시던 데이아의 몸이 움찔거리며 슬며시 나를 바라본다.

말하지 않는 게 그녀가 바라던 것일 수도 있겠으나 그렇다고 이렇게 시간만 허비할 수는 없었다.

이제 내일이면 나는 왕의 마지막 시련을 받아야 하니까.

그렇기에 조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데이아는 커피 안에 둥둥 떠 있는 얼음을 빨대로 톡톡 두드리며 속삭이듯 작게 답한다.

"그냥, 그레이폰드가 좋아서 들떠 그런 거라고 넘어갈 수는 없는 거야?"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알겠다."

데이아가 원치 않는다면 굳이 그 이상으로 파고들 생각은 없었다.

나 역시 덤덤히 커피를 마시자 데이아는 커피잔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더니 꽤나 결심한 표정으로 입을 뗀다.

"이름."

"...."

"원래 이름이 뭐야?"

그녀의 질문에 천천히 커피잔을 입에서 떼며 나는 담담히 답했다.

"김신우."

"김, 신우?"

"그래, 여기서 듣기에는 독특한 이름이겠지만 내가 살던 곳에선 평범한 이름이었다."

"김신우...."

내 이름을 곱씹듯 중얼거린 데이아가 계속해서 물어온다.

"원래 나이는? 스물여덟이야?"

"스물다섯이다."

"한 살 차이구나. 그래도 오빠네."

조금 의외였다.

설마 데이아가 나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물어올 줄 몰랐다.

흐름을 타기 시작했는지 데이아는 하나둘 계속해서 질문을 쏟아냈다.

잠그고 있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는 기세였다.

"거기서도 사령술사였어?"

"비슷하다 해두지. 유령을 볼 수 있는 건 데이우스의 체질이 아니라 내 체질이다."

"그렇구나."

생각보다 대화는 길게 이어졌다. 말을 많이 해서 목이 아프면 커피를 다시 시켰고, 달콤한 케이크를 시켜 당을 보충했다.

그러면서도 데이아의 질문은 그치지 않았다.

"동생은 있었어?"

"외동이었다."

"그래? 그럼 결혼은 했었어?"

"애인도 없었다."

"그러면서 아까 나한테 노처녀 그딴 얘기를 한 거야?!"

굳이 답하진 않는다.

애인이 있었던 적은 없지만 인기가 없진 않았다.

입을 꾹 다물고 조용히 있는 모습의 어디에서 매력을 느꼈는지 종종 고백해오던 여자아이들은 있었으니까.

하지만 귀신이 보이던 나는 그런 고백을 함부로 받을 수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원한을 사기 딱 좋은 게 커플이었으니까.

"그럼."

한참 질문을 이어가던 데이아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다시금 말한다.

"데이우스도 지금 네 안에 있어?"

처음으로, 그녀의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데이아도 그걸 눈치챘으나 눈동자는 내가 다른 답으로 도망치게 두지 않았고.

나 역시 거짓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

"데이우스 베르디는 이미 안식에 들어갔다."

나와 함께 에밀리 사건을 해결했던 데이아인지라 그 말뜻이 무엇인지 모를 리는 없었다.

거기서부터 나는 차분하게 나와 데이우스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내가 이미 빙의를 했을 때, 데이우스는 죽은 상태였고.

그는 나를 죽이려고 했으며.

결국, 최후에는 나는 그와 대면하여 장례식을 치러줬다고.

"그는 불쌍한 사람이었으나, 동정받을 사람은 아니었다."

"...."

"그래도 최후에는 자신의 삶을 후회하면서 떠나갔다."

용서를 바라거나, 그 역시 좋은 사람이었다는 말은 해주지 않는다.

데이아가 들어봤자 전혀 공감하지 않을 테니까.

다만, 그가 슬퍼했다는 것 정도.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행동을 해온 걸 후회한 정도는 말해줬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하지만 데이아는 이를 으득 갈며 답했다.

"그 새끼가 후회를 했든, 참회를 했든, 나한테 울면서 빌었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뒤졌다고? 차라리 잘 됐어. 나한테는 필요 없는 놈이었어."

그 분노는 합당했기에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입을 다문다.

"그리고 정말 미안한데. 나한테는 당신도 똑같이 보여. 하지만 노스웨든에서 보여준 행동이랑, 오늘의 모습을 보면... 당신은 분명 다른 사람이야."

"...."

"데이우스보다 몇 배, 몇십 배는 훨씬 멋진 사람이라는 걸 인정할게. 정말 이런 가족이 있었다면 싶은 마음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하고 덧붙이는 데이아.

"그래도, 결국에는 데이우스잖아. 그 빌어먹을 면상이, 나한테는 일종의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어."

"이해한다."

아무리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결국 몸은 데이우스다.

데이아에게 이해해달라고 하는 것 자체가 지독할 정도로 이기적인 부탁이었다.

"틱틱거리는 건 미안해. 그 얼굴을 보면 나도 모르게 화가 나버려."

"당연하다."

그 역시 실로 당연한 반응이라 이해해주자, 데이아는 쓴웃음을 짓는다.

"진짜 오빠가 된 것처럼 말하네."

"그렇게 되려 노력할 거다."

"...."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이었기 때문일까. 데이아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며 입을 벌린다.

"나의 가족은, 아주 어릴 적부터 망가져 있었다. 내가 뭔가를 해보기도 전에 부서져 있었지."

유령을 보는 나를 혐오하는 어머니.

나에게 겁을 먹고 도망친 아버지.

그나마 할머니가 나를 위로해주셨으나, 군대에 가 있는 동안 돌아가셨다.

유령이 되어도 뵐 수 있지 않을까 했으나, 할머니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내게 가족은 이미 망가진 것이며,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언제나 부러워했던 것이기도 하다.

"너는 원치 않을 수도 있으나, 나는 네가 자랑스럽게 여길 오빠가 되기 위해 노력할 거다."

그게 데이우스 베르디와의 마지막 약속이기도 했으니까.

그런 나를 멍하니 보던 데이아는 피식 웃으면서 창밖으로 눈을 돌린다.

그녀의 입가에는 여전히 쓰라린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우린 서로, 가족을 향한 상처와 동경이 있었네."

"그렇군."

고개를 끄덕이자 데이아는 조심스럽게 나와 눈을 맞춘다. 애써 웃어주려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입꼬리.

아직은 데이우스의 얼굴을 보며 환하게 웃을 수 없다는 뜻이었으나.

그럼에도 그녀는 어색한 미소와 함께 솔직한 심경으로 답해줬다.

"당신이, 진짜 내 오빠였으면 좋았을 텐데."

Chapter 62 - 62. 헤랄하자드

"...."

오르페우스 국왕의 알현실로 들어온 나는 묵묵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올린다.

다른 귀족이나 신하들이 봤다면 무례하다면서 발광할 광경이었으나, 이건 일종의 독대나 다름없었기에 굳이 과한 예우를 차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게 마음에 든 오르페우스 국왕은 호쾌한 미소를 짓는다.

"그대는 사람을 참 잘 보는군. 내가 과한 예우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어."

데이아가 처음에 무릎을 꿇으며 예법을 지켰던 모습을 보고 바로 돌아갔던 것에서 알아챘다고 간단히 말하지만.

실은, 그냥 게임에서 그렇게 말했던 기억이 있었기에 했을 뿐이었다.

"여동생과 시간을 잘 보냈나?"

"예, 덕분에 왕도를 둘러보았습니다."

"흠. 의외로군. 그대는 여동생이나 다른 가족들에게 썩 관심이 없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턱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던 오르페우스 국왕은 왕좌에서 벌떡 일어나 걸어온다.

왕의 오른편에 서 있던 대마법사 록펠리칸도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라왔다.

"그래, 이제 마지막 시련만 남아있네. 보통이라면 하나도 힘들 시련을 자네는 실로 훌륭하게 두 개나 해결해냈지."

"...."

"첫 번째 시련에서 마도심판장 타이른을 이겨냄으로 자네는 스스로의 능력을 입증했네."

대단한 업적이라며 오르페우스는 내 어깨를 두드린다.

"두 번째 시련에서 내 누이인 엘레노아가 오랜 시간 시달려온 악몽을 깨트림으로써 위로와 치유를 보여줬네."

국왕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굳세게 내 어깨를 잡은 그는, 마치 내가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는 듯했다.

"마지막 시련만이 남아있네. 이것만 끝내면 왕국에서는 자네를 공식적인 흑마법사로 인정해줄 것이야. 아주 세기의 대사건이지."

극도로 흑마법사를 배척하는 왕국에서 직접적으로 흑마법사를 채용하며, 직위까지 따로 준다?

아마 몇 년은 이걸로 떠들썩할 수도 있으며, 역사에는 무조건 내 이름이 새겨지게 될 것이다.

물론, 그런 건 하등 상관없었지만.

"그리고 내가 봤을 때, 자네는 마지막 시련이 뭔지 이미 눈치채고 있는 것 같군?"

"...."

굳이 답하지 않는다.

첫 번째, 두 번째랑은 다르게 마지막 시련만큼은 감옥에 처음 수감되었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사실상 마지막은 국왕 개인의 소망.

앞의 두 가지랑은 궤를 달리하는 문제였다.

"이 쪽지, 기억하겠지?"

오르페우스 국왕이 펼친 손에 얹어진 꾸겨진 쪽지.

그건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 나를 향한 믿음이 흔들린다면 읽으라고 건네줬던 쪽지였다.

안에는 오르페우스 국왕의 아버지. 선왕 오페르트가 아들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이 적혀 있었다.

- 그저, 항상 어리석어라.

이제 왕위를 물려받는 아들에게 선왕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라고 보기에는 이해가 안 되는 말.

어떻게 돌려보더라도 축복보다는 저주임이 확실한 문구였다.

자신의 손바닥에 들린 쪽지의 내용을 내려다보던 오르페우스 국왕은 안에 담긴 깊은 뭔가를 토해내듯 입을 오물거린다.

내 어깨에 놓인 한쪽 손에 힘이 꾸욱 들어갔는데 억지로 내게 기대어 서 있는 모양새처럼 보였다.

"마지막 시련은 이것이다. 그대는 이미 알고 있어 보이니, 실상 가장 쉬운 시련이라 할 수 있겠군."

쪽지에서 시선을 떼며 억지로 여유로운 척 웃으며 나를 보는 오르페우스 국왕의 모습은 참으로 위태로워 보였다.

"아버님은 어째서, 이 왕국을 짊어져야 하는 내게 어리석어라 말씀하셨지?"

사실상 영원토록 풀 수 없을 줄 알았을 궁금증.

앞의 두 시련은 그리핀 왕국의 시민들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평가받는 자리였다면.

마지막은 그저.

그저, 왕의 의문을 해소하는 일이었다.

문득, 옛날에 봤던 성서 속 이야기가 떠올랐다.

파라오가 꾼 꿈을 해몽하는, 야곱의 12명의 아들 중 하나인 요셉.

그가 꿈을 해몽하여 파라오의 신뢰를 받았던 것처럼.

나 역시 선왕의 유언이 가진 뜻을 풀어낸다면 그의 신뢰를 받게 되겠으나.

선뜻 입이 열리지 않았다.

몇 번이고 상상해왔던 자리였음에도, 오르페우스 국왕이 과연 버틸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지금의 내겐 오롯이 그것만이 걱정이었다.

게임 속에서도 루트를 잘못 탄다면 진실을 깨달은 오르페우스 국왕은 그대로 망가져 버린다.

건망증부터 시작해서, 망상증, 환각, 환각통 등. 그리핀 왕국을 멸망시킬 기세로 뒤흔든다.

하지만.

분명, 그 모든 걸 이겨내고 성장하는 루트도 있기에. 더 이상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며 개심하는 루트도 있으니까.

그런 미래를 봤던 나였기에, 흑마법사임을 자수할 수 있었다.

"지금부터."

뜸을 들인 나는 두근거림을 참지 못하고 동공이 커진 오르페우스 국왕에게 차분히 말을 이어간다.

"침착하게 제 말을 들으시길 바랍니다."

"...."

꿀꺽.

국왕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알현실을 울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그가 긴장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이건 게임에서도 있는 에피소드였다.

오르페우스 국왕으로부터 받게 되는 연계 퀘스트로 메인 에피소드에 영향을 줄 정도로 큰 줄기를 관통한다.

당시에도 오페르트 선왕의 유언에 대한 의문점을 첫 시작으로, 왕국 내에 있는 여러 비밀들과 왕가가 지금까지 끈적하게 숨겨온 비밀들을 풀어내게 된다.

단순히 아들을 저주하는 유언으로 들을 수 있겠으나.

이는, 그리핀 왕국 전체를 뒤흔들 정도로 무게감 있는 발언이었으며.

흑마법을 향한 왕국의 절대적인 적의가 어디서부터 파생되었는지, 이유는 무엇인지 알게 되는 입구이며.

지금까지 왕족의 정체성과 깊게 내린 그리핀의 뿌리가 실은 썩어 있었음을 암시한다.

"폐하의 아버님. 선왕이신 오페르트 국왕께서 그러한 유언을 남기신 이유는, 오롯이 폐하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 그게 무슨 의미지?"

아버지로서 조금이라도 그가 진실에 닿지 않기를 바랐으나, 역설적으로 그 유언 때문에 오르페우스는 진실에 닿게 된다.

그리핀 왕가의 지독하리만치 역겨운 내로남불.

위선이자 위악을 자행하며, 수천만 국민들을 속여 왔고.

실은 그동안 쌓아 올린 시체 위에 자신들이 서 있었다는 걸.

"수많은 전쟁과 승리를 통해 그리핀이라는 찬란한 신수의 왕조를 세운 폐하의 선조분들은...."

케케묵어 먼지가 잔뜩 쌓여있던 진실이, 세상의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흑마법사였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