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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뚜벅뚜벅 뚜벅뚜벅.

"...."

긴 울림과 같은 발걸음 소리가 정적뿐인 복도를 채워간다.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계속해서 앞으로 향해 나아갔다.

마치, 그것에 몰두한 사람처럼 걸음걸이 하나하나에 무게감을 두고 있었다.

특히나 국왕 오르페우스의 발걸음은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빨라지려는 기색이 보였고 그걸 눈치챈 대마법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국왕을 바라봤다.

1층 복도의 갈림길.

우측으로 가면 식당이 나오고, 좌측으로 가면 밖으로 나가 정원이 나오게 된다.

둘 중 선택하라고 강요하듯 놓여 있는 그리핀 조각상.

그 안에서 얼굴을 검은 천으로 가리고 있는 여인이 슬며시 튀어나온다.

[여기 맞아요. 당신이 말한 대로 이 안에 뭔가가 있어요.]

혹시 몰라 미리 흑령사를 보내뒀기에 확실해졌다.

나는 무덤덤하니 그리핀 조각상의 날개를 힘을 주어 밑으로 잡아당겼고.

뿌드득 소리와 함께 날개가 접히며 뒤에 있던 벽이 열리기 시작한다.

"...."

"흐으음."

그걸 보자 오르페우스 국왕과 록펠리칸 대마법사가 음색을 낮추며 침울하니 언짢아한다. 왕실에 이런 비밀 통로가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

"가시죠."

내가 먼저 앞장서서 안으로 들어간다. 문득, 두 달 전 베르디 저택에 있던 지하로 향하던 길이 떠오른다.

그곳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완성도 높은 통로를 타고 내려가니.

안에 있는 건 도서관처럼 보이는 기록실이었다. 수두룩하니 꽂혀 있는 책들과 그 중심에 놓인 거대한 책상.

"이건...."

곳곳에 찍혀 있는 그리핀의 문장들은, 왕가의 물건임을 상징하고 있었다.

쌓여 있는 먼지들을 털어내며 대마법사가 조심스럽게 책장에서 책을 하나 꺼내 든다.

그리곤 흠칫 놀라며 눈을 부릅뜬다. 책에 제목은 적혀 있지 않으나, 짙은 적색인 걸로 보아 혈조술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을 거다.

그리고 피를 다루는 혈조술 역시 사령술, 시체술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대표적인 흑마법 중 하나였다.

[정말 대단한 장소예요. 살아생전 제가 이곳을 알았다면 눈이 돌아가서 어떻게든 잠입하려 했을걸요.]

그나마 죽었으니까 흑령사가 이토록 침착할 수 있는 거지.

아니었다면 말 그대로 폭주해서는 닥치는 대로 책을 탐닉했을 수도 있다.

오르페우스 국왕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정중앙에 있는 책상으로 향했다.

그 앞에 놓인 사진과 함께 잉크가 바짝 말라 색이 바랜 글귀.

"...!"

그걸 본 국왕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온다.

사진 속에는 해맑게 웃고 있는 한 소년이 서 있었다.

겉으로 봤을 때부터 상당한 미남으로, 체격은 조금 작은 편이지만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았을 법한 미소였다.

그리고 나는 그 정체를 알고 있다.

루아네스 루덴 그리핀.

200년 전 그리핀 왕가의 막내아들이었으며, 왕의 치부라 볼 수 있는 배다른 아들.

또 다른 이름으로는 헤랄하자드.

혼자서 그리핀 왕국을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간 흑마법사이자, 지금의 그리핀 왕국이 흑마법을 향한 강박적인 증오를 품게 만든 원흉.

사진 밑에 깔린 수많은 편지들은 당시 그리핀 왕국의 국왕과 헤랄하자드가 나눈 친필 서신들이 가득했다.

전부 그가 학살을 자행하던 때에 썼던 것이며, 안의 내용은 어느 성읍의 병력이 빠졌는지, 군량이 부족한지 같은 상세한 정보가 적혀 있었다.

그 끝에 적힌 '사랑하는 나의 아들에게.'라는 문구가.

너무나 아프게 오르페우스 국왕의 가슴에 박혀 들어간다.

꾸깃.

덜덜 떨리는 손으로 거칠게 편지를 쥔 오르페우스. 헤랄하자드라는 왕국의 역병과도 같은 악역이.

실은 왕실의 자작극이었다는 걸 알리는 이 편지를 보며.

그는 눈물을 흘리며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노려본다.

"그, 대는...."

한이 담긴 목소리는 말을 짓씹어내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다... 알고 있었는가?"

눈물로 붉게 충혈 된 눈이 폭력적으로 내게 해답을 요구해온다.

덤덤하니 눈을 맞춘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쾅!

"록펠리카아아아안!"

책상을 후려치며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지르듯 대마법사를 부르는 오르페우스 국왕.

두껍게 쌓여 있던 먼지들이 사방으로 흩날린다. 그 사이를 파고들어 퍼져가는 대마법사의 방대한 마나.

록펠리칸은 차분히 눈을 감은 채로, 자신의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리며 명령을 받을 준비를 끝마쳤다.

"체...."

충격 탓에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건지, 아니면 나를 향한 죄책감 때문인지.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오르페우스 국왕은 자신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쥔다.

그 뒤에 세어 나온 목소리에서는 절망적인 감정이 뚝뚝 묻어나오고 있었다.

"체포하라."

살이 깎이는 것만 같은 고통 속에서 내려진 왕의 선언.

곧이어, 대마법사의 마나로 만들어진 쇠사슬이 내 전신을 옥죄였고.

나는 묵묵하니 그것을 받아들였다.

Chapter 63 - 63. 베르디 삼남매

"하암."

12시를 훌쩍 넘긴 시간.

사람들은 한창 바쁘게 돌아다니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식탁에 앉았을 시간에 침대 위에 웅크리고 있던 데이아가 기지개를 켠다.

꽤나 오랜만에 늦잠을 자고 일어나서인지 몸이 가볍고 상쾌하다.

절로 지어지는 부드러운 미소, 파자마차림으로 끓이기 시작한 커피, 사용인들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영지 업무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며 일어나 뭔가에 쫓기듯 일을 시작할 필요도 없다.

"그레이폰드에 들어올 때만 해도 잔뜩 긴장했었는데."

데이우스가 자수했다고 들었을 때만 해도 또 하나 거한 사건이 터지겠구나 싶었으나.

막상 와서 확인해보니 오히려 국왕의 총애를 받는 게 아닌가.

게다가 엘레노아 공주가 앓고 있던 지병을 해결했다는 얘기를 듣고는 데이아의 마음이 편해졌다.

"시련인가 뭔가 하는 걸 해결해야 한다고 하지만 어련히 잘하겠지."

후릅.

커피로 목을 축인 데이아는 슬며시 창밖으로 시선을 둔다.

왕실에 있는 손님용 방을 받은 그녀는 더없이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식사도 따로 내어준다고 들었는데 뭐가 올까.

기대감에 차올라서 힐긋 미소가 지어진다.

"휴가란 좋은 거야."

장남인 다리우스한테 영지 업무를 맡기고 왔지만 어련히 잘하고 있겠지.

다시금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맛이 좋은 게 어디 콩을 쓰는 건가 싶어서 총총걸음으로 커피콩이 담긴 포장지를 확인하려던 순간.

덜컹!

문이 열리며 우르르 몰려 들어오는 갑옷을 입고 있는 기사들. 깜짝 놀란 데이아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몸을 쭉 뒤로 빼지만.

스릉!

검이 뽑혀 나오는 서늘한 소리와 함께 그대로 목에 겨누어진다. 기사들의 행동은 깔끔했고, 군더더기 없었으며, 잘 훈련된 그것이었다.

그중 머리 장식이 혼자서 붉은색이 달린 단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말했다.

"데이아 베르디! 국가반역죄로 체포한다!"

"무, 뭐요?"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국왕한테 무릎 꿇고 좋은 이미지를 쌓아뒀는데.

'데이우스?'

하지만 데이아의 머리는 빠릿하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데이우스가 받고 있는 시련이라는 게 뭔가 잘못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데이아는 순간적으로 욱해서 외쳤다.

"데, 데이우스는! 그 사람은?!"

"닥쳐라! 죄인!"

"그거 정도는 말해줄 수 있잖아! 내 오빠라고! 데이우스 어떻게 됐냐고!"

일종의 떼를 쓰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물러날 수 없었다.

불안함이 가슴을 둔탁하니 치고 가서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뒤로 돌아간 기사 중 하나가 데이아의 후두부를 정확히 가격했고.

그녀는 불이 꺼지듯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데이아의 휴가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 * *

"끄응."

데이아의 신음소리를 들은 나는 슬며시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녀가 정신을 잃은 채로 감옥으로 던져졌을 때는 조금 당황했으나, 일단은 내 옆에 앉혀두고 어깨를 빌려주고 있었다.

누가 본다면 그냥 자는 걸로 착각할 수도 있는 모양새.

"어우, 머리야."

깨어난 데이아는 미간을 팍 찌푸리며 고개를 휙휙 돌린다.

나와 눈이 딱 마주치고, 동시에 내게 기대있었다는 걸 확인하더니 닭처럼 푸드덕거리며 멀어진다.

"와, 씨! 뭐야?!"

그래놓고 갑자기 격하게 움직여서 두통이 찾아왔는지 머리를 감싸 쥐며 인상을 팍 쓰는 데이아.

그녀가 정신을 차릴 수 있는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 자신의 어깨에 걸려 있는 내 재킷을 발견한다.

한기가 흐르는 감옥 안에서, 단순 파자마만으로는 추울 것 같아서 걸쳐뒀었다.

"어우, 추워."

힐끔 나를 보더니 자연스럽게 내 재킷을 입은 데이아는 헛기침하며 내게 묻는다.

"대충 상황 자체는 알겠거든? 그 시련인지 뭔가 하는 것 때문에 이렇게 된 거지?"

역시 데이아.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자 그녀는 "하아." 하고 짙은 한숨을 내쉰다.

"도대체 뭐였는데? 국왕께서 꽤나 너를 좋게 보셨던 것 같은데 어떻게 하루 만에 이렇게 대우가 변하냐고."

"...답할 수 없다."

이 문제는 데이아도 함부로 알아서는 안 되는 부분이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그리핀이라는 왕족 자체의 뿌리가 뽑힐 수도 있으니까.

"나도 같이 휘말렸는데, 답할 수 없다고?"

슬쩍 손을 뻗으며 이 상황을 보라고 따지고 드는 데이아였으나 그래도 답할 순 없었다.

"하아, 그래. 말 안 하겠다는 사람 잡고 흔들어서 뭐 하냐."

삐죽이면서도 슬쩍 내 옆자리로 와서는 방금 전처럼 어깨에 기대는 데이아.

"추워서 그래."

심통 맞게 한 마디 툭 뱉고는 철창 밖으로 시선을 둔다.

마도심판관들이 사용하던 감옥이 아닌, 왕실에서 직접 관리하는 지하감옥.

수감된 죄인도 많을뿐더러, 죽어서 나도는 악령들의 숫자도 상당했다.

저들을 이용하면 충분히 탈출이 가능하겠지만.

'문제는 대마법사의 제자들이군.'

그들은 나를 흉흉하니 노려보며 조금이라도 마나를 사용하려는 기미가 보이는 순간, 바로 잿더미로 만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팔목에는 마나의 일부를 차단하는 일종의 족쇄가 걸려 있었기에 속도 싸움으로 가도 무조건 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 우리 이제 같이 처형당하는 건가?"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럴 수도 있다? 다른 미래도 있는 거야?"

나는 침묵으로 긍정하며 다시 머리로 오르페우스 국왕의 마지막 반응을 떠올린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사죄와 탄식을 담아 체포를 명령했다.

'내가 봤던 오르페우스 국왕이 망가지는 모습과는 다르다.'

모든 책임을 회피하고, 완전히 정신병자가 되어 현실도피 하는 국왕 파멸 루트와는 다르다.

그는 분명하게 자신의 책임을 떠안고 있었으며, 그렇기에 진실을 덮으려고 나를 체포한 거였다.

'이런 경우는 게임 속 루트에는 없었다.'

진실을 알게 되고, 주인공인 아리아에게 왕국을 위해 침묵을 요구하거나 혹은 정신이 나가서 국왕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며 끝나는 찝찝한 엔딩뿐이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누군가를 체포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기에.

나는 여기서 희망을 보고 있었다.

책임을 짊어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나를 죽여서 완전히 덮지도 못하고 있다. 내가 체포된 의미는 그것이었다.

아마 지금쯤 오르페우스 국왕은 홀로 고뇌에 빠진 채로 머리를 쥐어짜 내고 있을 거다.

술을 퍼마시거나, 머리를 벽에 박아댈 수도 있다. 혹은 비밀 통로에 틀어박혀서 관련 일지를 정독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

그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처형까지 간다면, 무리해서라도 돌파할 필요가 있다.'

이미 왕을 알현하러 가기 전, 레메게톤은 따로 숨겨두었고. 그 장소는 흑령사와 나만이 알고 있다.

또한 흑령사는 지금 국왕의 근처를 졸졸 따라다니며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확인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감옥 안에서도 평온하니 기다릴 수 있었다. 만약 국왕이 나를 처형하는 걸로 결정을 내린다면.

'그때는 어쩔 수 없다.'

이쪽에서 목줄을 쥘 수밖에 없다.

레메게톤과 사령술을 이용해서 탈출한 뒤, 왕가의 비밀을 가지고 오르페우스의 목줄을 찰 생각이었다.

'썩, 원하던 방향은 아니군.'

결론적으로는 내가 바라는 방향으로 이야기는 흘러가게 된다.

왕은 공식적으로 나를 인정하게 되겠지.

하지만 그것이 추잡스런 진흙탕 싸움 속에서 벌어지는 게 아닌.

진정한 축복과 왕의 미소 속에서 행해졌다면 좀 더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야."

생각을 정리하던 내게 어깨로 툭 치면서 부르는 데이아. 왜 그러냐고 눈을 맞추자 데이아는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머리 정리 좀 해라. 너무 길어."

"...이런 상황에서 참 침착하군."

"이미 우리 머리는 목에서 떠났잖아. 결과는 내가 정하는 게 아니니까. 아니, 그것보다 진짜 너무 길어."

확실히.

머리카락이 금방이라도 눈을 찌르고 들어올 기세였다. 뒷머리도 길어져서 목덜미에 닿는 상황.

"나중에 내가 잘라줄게. 아주 대머리가 되면 시원할 거야."

내 머리카락을 자기 멋대로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는 데이아.

스치는 머리카락에 얼굴이 간지러웠기에 주의를 준다.

"장난도 적당히 해라."

"...심심하잖아."

투덜거리는 데이아의 목소리에 파묻혀서 들려오는 발걸음과 땅을 두드리는 지팡이 소리.

대마법사의 제자들이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인사하는 걸 보니 누군지 딱 느낌이 왔다.

대마법사 록펠리칸 라이너스.

그가 철창 밖에 서서 나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나는 굳이 일어나지도 않고 데이아와 함께 앉은 채로 그를 바라봤고.

록펠리칸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네."

그건 여러 의미가 담긴 사죄였다.

* * *

베르디의 장남.

북쪽산맥의 수호자.

북부의 거인 등.

꽤나 호들갑스럽게 불리는 다리우스 베르디는 그레이폰드에 있는 작은 호텔 방에서 팔짱을 끼고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의 덩치를 생각할 때, 방의 크기가 작은 듯했으나 그는 묵묵하니 입을 다문 채로 기다릴 뿐이었다.

덜컹.

때마침 문이 열리며 들어오는 일행들. 그들은 클락 공화국의 레지스탕스 고철상의 삼총사였다.

노크도 없이 들어오는 게 딱 예의 없는 반군스럽다. 하지만 다리우스는 그런 걸 거슬려하지 않았다.

함께 훈련하다 보니 생각보다 고철상의 멤버들과 마음이 잘 맞았으니까.

의외로 저들이 훨씬 호탕하고, 뒤끝도 없으며 시원하게 승복하는 게 다리우스는 마음에 들었다.

그들의 수장인 핀덴아이는 여전히 싫지만.

어쨌든.

고철상의 멤버가 다급하니 들어와 호들갑을 떤다.

"체, 체포된 거 맞습니다! 지금 왕실에서 베르디 가문의 마차도 압류해갔습니다!"

"크흐음."

다리우스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그레이폰드로 출발하던 데이아의 뒤를 따라, 그 역시 미행하듯 그레이폰드로 온 것.

데이아의 입장에서는 혹시라도 반역자로 데이우스와 함께 싸잡혀서 처형당할지도 모르니 다리우스는 영지에 있으라고 배려이자 충고를 했으나.

가문의 일원이 흑마법사라는 게 알려졌다.

그야말로 가문의 위기상황.

장남으로서 가만히 영지에서 기다리기만 할 수 없었던 다리우스였기에 몰래 따라붙었다.

하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꽤나 괜찮아 보였다.

흉흉한 체포나, 왕국군의 포위 같은 건 없이 데이우스와 데이아가 시내에서 포근한 시간을 보냈으니까.

그건 고철상 멤버들의 보고를 받은 다리우스도 깜짝 놀라면서도 흐뭇함이 느껴지는 정보였다.

하지만 오늘.

데이아의 진상품이 모조리 불태워지며, 마차가 압류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다리우스는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저것의 의미는 딱 하나였다.

데이우스와 데이아가 체포당했다.

흑마법사라는 것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후우."

다리우스는 자신의 검을 꾸욱 움켜쥔다.

"장남 역할을 해야겠군."

지금 여기서 함부로 움직였다가는 단순 두 사람의 목숨뿐만 아니라 베르디 가문 자체가 무너져 내릴 것이다.

아니, 사실상 시간 문제일 뿐인가?

이미 길고 긴 가문의 역사에 종지부가 찍힌 걸지도 모르겠으나.

그런 세세한 건 접어두고 각오를 다잡은 다리우스가 후 하고 숨을 내쉬며 선언했다.

"두 사람을 탈옥시킨다."

Chapter 64 - 64. 다리우스와 삼총사

"흐아암."

하품하며 자연스럽게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서는 늘어지는 데이아.

따스한 무게감을 느끼면서도 나는 경솔한 행동에 짐짓 주의를 준다.

"너무 붙어 있다."

"음?"

그러자 데이아는 여전히 내 어깨에 머리를 얹은 채로 고개만 휙 돌리며 답한다.

"감옥에 있는 것 중에 네가 제일 머리 얹기 좋으니까 이렇게 있는 것뿐이야."

"...."

"그리고 남매끼리 이 정도 스킨십은 평범한 거야."

돌아오는 건 상당히 뻔뻔한 대답.

떠오르는 남매들이라고는 굳이 따지자면 오르페우스 국왕과 엘레노아 공주밖에 없다.

두 사람은 꽤나 친근한 모양새이긴 했으니 납득은 가지만 속아 넘어가 주는 기분은 지울 수 없었다.

다시 고개를 획 돌리는 데이아.

"아, 얼굴 안 보니까 좀 더 편한 것 같아."

뭐, 그렇다면 됐다.

그냥 넘어가 주니 데이아는 풋 하고 웃더니 조금 전 대마법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어떻게 할 거야?"

"...."

"탈옥시켜 줄 수도 있다고 했잖아. 손만 잡으면 몰래 탈출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대마법사 록펠리칸이 나와 데이아에게 비밀리에 찾아와 제안한 건 다름 아닌 탈옥 계획이었다.

놀랍게도 그가 우리의 편을 들어주겠다고 제안한 것.

불가능에 가까운 세 가지 시련을 해결해낸 나에게 이런 처우는 너무 불합리하다고 그는 사과했다.

당장에 답을 주지 못했던지라 대마법사는 나중에 다시 오겠다는 언질만 남기고 떠나갔다.

보통이라면 당연히 덥석 손을 잡고 감사하다고 말해야 하겠으나.

나는 록펠리칸의 그러한 제안을 조금 회의적으로 보고 있었다.

"과연 그 제안이 정말로 우리를 위한 것일까?"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머리에 힘을 줘서 내 어깨를 꾹 누르는 데이아. 얼른 대답하라고 떼를 쓰는 느낌도 들었고, 단순히 어렵게 말하지 말라고 시위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녀의 무게감을 느끼면서, 나는 솔직하게 내 생각을 말했다.

"대마법사 록펠리칸은 지독할 정도로 충성스러운 인물이다. 선왕에서부터 이어져 온 측근 중에서도 최측근이라 부를 수 있겠지."

록펠리칸과 오르페우스 국왕은 단순히 왕과 신하의 사이 그 이상의 것이었다.

어렸을 적 오르페우스의 교육을 맡은 게 록펠리칸 대마법사였고, 오르페우스 역시 그를 영혼의 멘토처럼 따르며 배워갔다.

둘은 반쯤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이였기에 오르페우스도 굳이 록펠리칸에겐 비밀을 두지 않고 있었다.

"흐음?"

데이아는 짧은 시간 동안 꽤나 자세히 알아냈다며 감탄했으나, 실은 게임에서 봤던 내용을 말할 뿐이었다.

"록펠리칸의 모든 행동은 왕가. 그러니까 오르페우스 국왕을 위해서 시작된다."

마도심판장 타이른 올 벨로쿠스가 우직하게 국가에 충성한다면, 록펠리칸은 그리핀 왕가, 정확히는 오르페우스에게 충성한다.

이는 꽤나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만약 타이른이었다면 이런 사안을 그냥 넘기지 않겠지.'

과거 왕실에서 국민들을 학살한 흑마법사를 지원했으며, 그가 실은 왕가의 핏줄을 가지고 있다는 걸 그냥 넘기지 못한다.

록펠리칸은 다르다.

오르페우스 국왕을 위해서, 그는 이러한 사안을 묵인하고, 눈을 감으며 침묵할 수 있다.

'그런 록펠리칸이 국왕의 명령을 거스르면서까지 나를 풀어주려 한다?'

단언할 수 있다.

절대로 그럴 리 없다.

이는 반대로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억울해 보이니까 풀어주려고 하는 게 아니다.

오르페우스 국왕에게 나라는 존재가 꽤나 큰 골칫덩어리로 작용하고 있기에 치우려는 의도뿐이었다.

'나를 가지고 꽤나 고민하고 있군.'

약속을 이행하고 책임을 져야 할지 아니면 왕가와 왕국을 위해 침묵으로 칼을 빼 들지.

문득, 셰익스피어 저자, 햄릿의 독백이 떠오르는 부분이었다.

다른 상황이기도 하고 문구를 살짝 비틀자면.

죽이느냐 살리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문제에 직면한 오르페우스 국왕은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었고.

차라리 그럴 거라면 록펠리칸은 아예 문제 자체인 나를 놓아줘서 선택 자체를 하지 않게 만들 생각이었던 거다.

'흐름이 나쁘진 않다.'

본편에서 루트를 잘못 탔을 때처럼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정신병에 걸리는 게 아니라.

분명하게 자신의 상황을 인지하고, 고통 속에서 고뇌하고 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도, 일단 지금은 기다릴 시간이었다.

* * *

"후우, 후우!"

늦은 새벽.

거센 호흡을 자신도 모르게 훅훅 내뱉고 있는 다리우스는 차분하게 허리춤의 검을 확인한다.

평생을 매고 다녀, 이제는 한 몸이나 다름없는 검이었음에도 불안해서인지 계속 확인하게 된다.

"와, 내가 그리핀 왕실에 잠입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대장도 같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기념품으로 뭐 가져갈까?"

반대로 함께 온 고철상 삼총사는 무슨 소풍이라도 온 것처럼 히죽거리면서 즐거워하고 있었는데 다리우스는 어이가 없다 못해 황당할 지경이었다.

자그마치 그리핀의 왕궁 안으로 몰래 잠입하는 일이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당당할 수 있는지 신기할 지경.

'괜히 그 미친 여자와 같이 다니는 게 아니군.'

평범하게 생활할 때는 몰랐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핀덴아이와 하등 다를 거 없는 자들이었다.

흉흉한 소문이 무성한 클락 공화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렇게 사람이 변하는 걸까?

'진화라 불러야 할지 아니면 그냥 망가진 건지. 구분되지 않는군.'

그나마 이것들 덕분에 조금은 긴장이 풀린 다리우스가 심호흡하며 높은 담장을 올려다본다.

주변이 어두워 자연스럽게 몸을 숨기고 있긴 했으나, 침입을 하기 위해서는 저 거대한 왕실의 벽을 넘어야만 했다.

마나를 다루면 들킬 위험이 있으니 다리우스는 그냥 기어서 올라갈 생각으로 손을 풀며 다가가자.

삼총사 중 하나가 다리우스에게 묻는다.

"그런데 정말로 괜찮으시겠어요?"

"뭐가 말이지?"

방금까지 신나하던 주제에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했으나, 의외로 건실한 조언을 해오는 게 아닌가.

"동생분들이 소중한 건 알겠지만, 이거 잘못 걸리면 진짜로 전부 목이 날아가는데요? 베르디 가문 자체가 멸족할 수도 있어요."

그 말을 들은 다리우스는 잠시 멈칫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자그마치 투옥당한 동생 두 사람을 탈옥시키려는 행위였으니까.

거기에 더불어서 그중 하나는 흑마법사.

왕국에서 극도로 혐오하는 존재였다.

아무리 가족이라고 하더라도 흑마법사를 지키려 든다면 단순히 다리우스의 목이 남아나지 않는 수준을 넘어 베르디 가문의 역사가 끝이 날 수도 있으나.

"그래, 가문은 중요하다."

다리우스에게 가장 중요한 걸 고르라고 한다면 단연 가문의 영광이었다.

북쪽 산맥을 지켜온 거인, 베르디의 이름은 다리우스에게 자랑, 그 자체였다.

하지만 두 달 전.

그동안 쌓여있던 추악함을 들춰내며 다시 새롭게 시작하게 된 가문.

꾸욱 쥔 두꺼운 주먹으로 다리우스는 단호히 선언했다.

"허나, 나 혼자만이 베르디가 아니다."

"...."

"저 둘 역시, 자랑스러운 베르디의 이름을 짊어지고 있다."

그 말을 들은 삼총사는 피식 웃으면서 맞장구친다.

"그냥 동생들이 소중하다고 말해요."

"맞아, 괜히 가문 탓하고 있어."

"그래도 처음 봤을 때랑 많이 달라지셨네."

"크흠."

다리우스가 괜히 헛기침하며 머쓱하니 있자 삼총사 중 하나가 어깨에 두르고 있던 밧줄을 건넨다.

"필요할 거 같아서 가져왔습니다. 저희가 안으로 모셔다드릴 테니 성벽에 이것만 걸어주시죠."

"음? 너희가 나를 안으로 데려다준다고?"

그게 무슨 말인가 했으나, 셋은 당당하니 벽 바로 앞에 자리 잡고는 손으로 다리우스가 밟을 점프대를 만들었다.

기가 차고, 어이가 없었으나.

"하아."

막상 벽을 기어 올라가는 것보다는 나아보였기에 다리우스는 흐름에 편승해 내달렸고.

"읏차!"

삼총사의 기가 막힌 호흡 덕분일까 다리우스는 스스로도 깜짝 놀랄 정도로 높게 점프했다.

그야말로 하늘로 붕 뜬 몸.

담장 위에 박힌 철창마저 손쉽게 넘어간 다리우스는 재빠르게 반대편에 착지를 성공했다.

"허."

아무래도 레지스탕스 활동을 할 때, 저 삼총사는 이 짓을 몇 번이고 해봤던 것 같다.

능숙하다 못해 전문적이기까지 한 걸 보면.

다리우스가 그대로 밧줄을 벽에 걸치며 삼총사가 넘어올 수 있게 지지대가 되어주려던 순간.

"흠, 꽤나 당돌하군."

소름 끼치는 노인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밧줄을 넘긴 다리우스의 목이 삐걱거리며 돌아간다.

또한 그와 동시에 허리춤에 있는 검을 바로 뽑아 들었다.

그야말로 짐승과 같은 일격.

괜히 북쪽 산맥을 오랜 시간 지켜온 거인이 아님을 자랑하듯 다리우스의 일검은 실로 날카로웠다.

특히나 핀덴아이와의 전투에서 참패를 겪은 후, 더욱 혹독한 훈련을 통해 성장한 다리우스였으나.

핀덴아이와 마찬가지로.

상대가 지독하다고 말해도 될 정도로 나빴다.

쿵!

검을 제대로 휘두르기도 전, 쏟아진 마나의 압박에 다리우스의 몸이 뒤로 밀려 벽에 부딪친다.

마치 하나의 그림처럼 박혀 버린 그는 입만 뻐끔거리면서 자신을 한 방에 제압한 존재를 확인한다.

"성급하군. 그대의 진중하면서도 묵직한 남동생과는 전혀 다른 성격이야. 남매가 체포되었다는 걸 알고 흥분한 건가?"

고목과 같은 지팡이, 화려하다 못해 신비롭기까지 한 로브, 하얀 수염이 인상적인 노인.

"애당초 왕궁의 담벼락에 아무런 마법도 걸려 있지 않을 거라 생각한 게 참 우습군. 내가 미리 발견하지 못했으면 지금쯤 자네는 통구이가 됐을 거야."

대마법사 록펠리칸 라이너스가 다리우스를 보며 혀를 찬다.

"동생들을 구하러 왔는가, 노스웨든 백작."

Chapter 65 - 65. 그리핀의 망령

"동생들을 구하러 왔는가?"

대마법사 록펠리칸의 물음에 다리우스는 어떤 답을 해야 할지 당혹스러웠다.

자신의 신념을 지켜야 할지, 아니면 일단 되는대로 거짓을 섞은 변명을 내뱉어야 할지.

솔직히 마음은 후자로 쏠리고 있었으나, 입은 그렇지 못했다.

"예."

그야말로 반역죄를 저지르겠다고 공인한 상황. 말을 하고도 다리우스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했으나 록펠리칸은 오히려 헛웃음을 치며 만족스러워했다.

"당당함 자체는 마음에 드는군, 북쪽의 거인이던 자네의 아비 다모스와 닮았어."

스르륵.

록펠리칸이 지팡이를 내리자 다리우스는 콜록거리며 겨우 벽에서 떨어졌다.

담장 밖에서는 삼총사가 괜찮냐고 묻고 있었으나 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같이 온 동료들인가? 좋군. 일단 들여보내 주겠네."

"예?"

다리우스는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어서 할 일을 하라는 록펠리칸의 턱짓에 다리우스는 슬며시 밧줄을 고정시켰고.

삼총사는 빠르게 담장을 넘어서 들어왔다.

"헉?!"

"뭐야?"

"저희를 팔아넘긴 겁니까?!"

당황한 삼총사가 바로 다리우스에게 따지고 들려 했으나, 그들은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릴 뿐 다른 답은 돌아오지 못했다.

대마법사의 마법이 그들의 모든 소리를 차단했기 때문. 갑작스런 상황에 역으로 소리를 지르는 그들의 모습은 일종의 연극처럼도 보였다.

잠잠해진 그들에게 록펠리칸은 손짓하며 답했다.

"따라오지, 두 사람에게 보내주겠네."

* * *

오르페우스 국왕은 여전히 비밀스러운 왕가의 방에 앉은 채로 일지를 넘기고 있었다.

침울한 그의 마음은, 옆에 둔 촛대의 촛불처럼 거세게 일렁이며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핀 왕가의 뿌리부터 시작되는 이야기가 담긴 일지를 읽으며 몇 번이고 흘린 눈물에 짙은 자국과 더불어 충혈된 눈이 그의 피로감을 대변했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가슴이 떨려왔고, 죄책감과 역겨움에 구토감이 밀려 들어왔다.

클락 공화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인도적인 행위에 대해서 강한 비판을 하는 입장으로서.

결국, 똥 묻은 개가 똑같이 짖고 있던 모양밖에 안 된다는 것에 수치스러울 지경.

심지어 흑마법사가 세운 나라라는 게 알려지는 걸 원치 않았기에 같은 흑마법사들을 역으로 가장 격하게 탄압했다는 건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심연.

최악이라 생각하더라도, 몇 장 더 넘기면 금방 더 악마적인 발상이 튀어나온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강하게 느껴진 건 왕족이라는 자리에 대한 집착이었다.

천대받고, 괄시받던 흑마법사 출신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원래 태생부터 핏줄에 권력을 향한 야망과 아집이 있었던 걸까.

세월이 흐르며, 저자가 변하더라도 남아있는 일종의 망집. 왕가의 이름을 지키는 것에 모든 걸 바치는 느낌이 강했다.

마치.

'어머니처럼.'

읽으면 읽을수록, 왕족이라는 것에 과히 집착하던 어머니가 떠오르는 오르페우스.

본인은 록펠리칸이 교육했기에 그 손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었으나, 누이인 엘레노아 같은 경우는 어머니인 하이란에게 지독할 정도로 시달렸었다.

그랬기에 오르페우스와 엘레노아는 왕족임에도 격식을 차리는 행위에 썩 반발감이 자리 잡혀 있었다.

"후우."

피로함에 눈이 따갑다. 짓눌러오는 죄책감 속에서도 오르페우스 국왕은 천천히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혼란스럽고, 역겨웠으며, 화가 날 정도로 싫었으나.

"책임은 피할 수 없다."

그래, 결국에는 이 모든 책임은 현 왕가가 짊어져야 하는 피할 수 없는 과업.

"미안했네, 데이우스."

낮게 읊조리며 자신이 감옥에 가둔 데이우스에게 사과한다.

그는 이러한 진실을 전부 알고 있음에도, 자신이 물어보기 전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리핀 왕국을 무너뜨릴 수 있는 천벌을 쥐고 있었음에도 그것을 놓지 않았다.

당시에는 우선 왕가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의 입단속을 위해 체포했으나.

생각하면 할수록 실로 충신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내였기에.

오르페우스는 천천히 일어났다.

늦은 새벽이지만, 지금이라도 가서 데이우스의 구속을 풀어주라 명령할 생각이었으나.

쾅!

갑자기 거세게 닫힌 문.

바람 불 곳 하나 없음에도 촛불은 목덜미를 물린 듯 휩쓸려 꺼진다.

"음?"

무슨 상황일까 싶어 손에 마나를 응축시켜 불빛을 비추는 순간.

[어리석은 놈.]

불빛에 드리운 검은 얼굴.

깜짝 놀란 오르페우스 국왕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뒷걸음질 쳤으나.

검은 얼굴은 그대로 오르페우스를 따라붙는다.

이마에 옅게 올라온 뿔은 다 자라지 못한 악마처럼도 보였고, 삐죽 튀어나온 이빨과 안개와 같은 몸은 불길함을 가중시킨다.

[내 얼마나 오랜 시간을 쌓아 올린 왕조이건만. 네놈은 그걸 고작 하루 만에 무너트리려 하는구나.]

"네, 네놈은 무엇이냐!"

다급하니 손을 휘저어보지만 그것을 통과할 뿐 어떠한 저항도 되지 못했다.

악마와 비슷한 형상을 가진 검은 얼굴은 입을 연다. 커다란 입과는 반대로 속삭이듯 낮게 깔리는 목소리는 마치 귓구멍으로 벌레 수십 마리가 들어오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이 땅의 주인.]

"...뭐?"

비밀을 전해오는 스산한 목소리의 톤이 바뀐다. 높으면서도 신경질적인 여성의 것.

뿐만 아니라.

검은 얼굴은 점차 형상을 찾아가기 시작했고 그건 오르페우스에게도 익숙한 사람이었다.

"어, 머니?"

하이란 루덴 그리핀의 얼굴을 한 검은 얼굴은 낄낄 웃으며 답했다.

[나는 네놈의 어미이며.]

이번엔 또 다른 얼굴이 된다.

짙게 주름이 잡힌 늠름하던 자신의 우상.

[네놈의 아비이며.]

다시금 변하는 얼굴.

이번에는 꽤나 기억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존재였다.

[네놈의 증조이며.]

다음은 다시 원래의 검은 얼굴로 돌아왔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며 선언했다.

[수백의 역사를 이어온, 그리핀 그 자체이다.]

"네가...!"

마치, 한 사람이 쓴 것만 같은 수백 년은 되어 있는 일지.

광기 어린 왕가를 향한 집착.

오르페우스 국왕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존재가 모든 원흉이며.

악마적인 발상을 가진 그리핀의 선조라는 걸.

[또한.]

쩌억.

거대한 입이 벌려진다.

흉측한 이빨과 탐닉하는 굵은 혓바닥이 휘몰아치며 오르페우스에게 뻗어나간다.

[이제 너이다.]

"...!"

반항하나 할 수 없었다.

오르페우스는 그것에 잡아 먹혔고, 몇 번인가 발작하듯 발버둥 쳤으나 곧이어 전신에서 검은 연기가 풀풀 풍기더니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서는 목을 뚜둑뚜둑 풀며 씨익 웃어 보이며 한마디 했다.

"어디서 기어 나온 망령이냐."

[...!]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독특하게도 스승이 제자의 명령을 따르게 된 흑령사에게 말을 걸어왔다.

"왕궁은 너처럼 버러지 같은 악령이 드나들 곳이 아니다."

오르페우스가 손을 뻗자 격렬한 마나가 투기되며 흑령사를 옥죄이려 했으나.

[버, 버러지?!]

흑령사 역시, 데이우스의 도움으로 자신의 마나를 다룰 수 있게 된 덕분에 겨우 방어한 다음, 벽을 통과해 도망쳐 버렸다.

"쯧."

생각보다 저항이 거세었으나, 아무 상관 없다.

어차피 망자였으며.

어차피 주인에게 돌아가도 결과는 똑같을 테니.

콰앙!

"후우!"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온 오르페우스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다. 몇 번이나 해봐도 살아있다는 이 감각은 기분이 좋았다.

성큼성큼 복도의 왼편으로 나서 왕궁 밖의 정원으로 나온 오르페우스.

그를 본 경계를 선 병사들이 바로 경례했으나.

"근위대장과 마도심판장, 대마법사에게 지금 당장 입궁하라 알려라."

오르페우스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왕가를 모욕한 죄인의 처형을 집행한다."

* * *

"와, 추워서 죽는 줄 알았네."

으슬으슬 추워 떨던 데이아는 드디어 옷이 왔다면서 호들갑을 떨며 좋아한다.

내 재킷을 건네주긴 했으나, 파자마를 입고 있던지라 추워 보이긴 했다.

"눈 돌려라."

고철상의 삼총사들이 옷을 갈아입으려는 데이아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어, 바로 경고하자 깨갱하고 고개를 숙인다.

어디서 함부로 눈을 부라리는지.

"풋."

데이아는 그런 나를 보며 뭔가 기분 좋은지 슬쩍 웃고는 감옥 구석으로 향한다.

"이래도 보이겠는데? 나 좀 가려줘."

나를 잡아당기며 뒤에 숨은 데이아가 파자마를 벗는다. 너무 뜬금없는 상황이긴 했으나, 일단 여동생의 나체를 가리기 위해 최대한 어깨를 펴고 인상을 쓰며 찾아온 대마법사와 다리우스 그리고 고철상의 삼총사를 바라본다.

"분명 고민해보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르페우스 국왕의 대답이 아직 나오지도 않았는데 혼자서 호들갑을 떨며 탈옥하는 건 내 계획에 없다.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자 록펠리칸도 괜히 눈을 돌리며 대답을 피한다.

다리우스 같은 경우도 나와 데이아를 구하러 온 건 고맙지만,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니 눈치만 보고 있을 뿐.

한마디 하려는데 데이아의 맨다리가 옆에서 쑥 삐져나온다. 바지를 입고 있는지 한쪽 발로 서서 내 몸에 등을 기댄다.

"부끄러움을 알아라."

다리우스와 록펠리칸에게로 가려던 한 마디가 데이아에게로 유턴했다.

"음? 네가 할 말은 아닐걸."

"...."

"오빠답지도 않은 남정네 둘이랑 같이 부대끼며 살아봐. 다 비슷할걸."

또 그렇게 말하면 입이 다물어진다. 내가 진짜 데이우스가 아니라는 건 일단 데이아만 알고 있으니까.

다리우스에게도 나중에 말해줘야 하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어쨌든 옷을 완벽히 걸친 데이아가 튀어나온다. 혁대에 마도력총까지 걸려 있는 걸 보니, 진짜로 그레이폰드로 들어올 때 목숨을 걸었다는 게 사실이었나 보다.

일단 다 반납하고, 다시 기다리자고 말하려 했으나.

[크, 크, 큰일 났어요!]

벽을 뚫고 들어온 흑령사가 호들갑을 떨면서 외쳐댄다. 그녀에겐 오르페우스 국왕의 감시를 맡겨뒀었는데.

이렇게 나오는 걸 보면 국왕이 뭔가 결정한 건가?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내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리핀 왕국의 깊은 곳에 숨어있던 악령과 그것이 역대 왕들의 몸을 차지한 것.

그리고 지금 오르페우스의 몸을 뺏은 것까지.

황당하다 못해, 어이가 없었다.

'이런 뒷내용이 숨겨져 있었다고?'

리트라이 게임 속에서 이런 내용은 없었다. 하지만 조금 생각해보면, 알 수 없었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인 듯했다.

'파티에 흑마법사가 있었던 것도 아니니까.'

성녀는 잠깐 파티에 합류하는 역할인지라 그레이폰드에서 활동할 당시에는 파티원이 아니었다.

"쩝, 그럼 우리는 헛수고를 한 건가?"

흑령사의 목소리를 못 듣는 다른 일행들은 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다리우스는 다시 돌아가야 하냐고 찝찝한 표정을 지었고, 록펠리칸도 여전히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고 있었지만.

"아니."

나는 데이아가 건네준 재킷을 걸치며 철창 밖으로 나섰다.

"상황이 바뀌었다."

저 밖에서 우르르 몰려오는 묵직한 발걸음.

적색 갑옷을 입고 있는 기사들이 줄지어 감옥에 들어온다.

그들은 록펠리칸이 이쪽에 있는 걸 보고 당황했으나.

곧이어 한 여인이 모든 혼란을 휘어잡는 기세를 지닌 채 앞으로 걸어왔다.

갑옷을 입은 기사들 중에서는 가장 키가 작고, 덩치도 왜소했음에도.

왕실 직속인 근위 기사단의 정점에 서 있는 여인.

근위기사단장 글로리아 그레이스.

마도심판장 타이른 올 벨로쿠스와도 비등한 대결을 펼치는 왕국의 가장 날카로운 검.

붉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그녀는 날카로운 눈동자라 나를 노려보며 물었다.

"왕실을 모욕한 죄인, 추악한 흑마법사, 데이우스 베르디. 폐하께서 근위기사단에게 죄인의 즉결처형을 명하셨다."

"...참 편리하군."

솔직하게 빈정거리며 답하자 글로리아의 눈동자가 살짝 꿈틀거린다.

"흑마법사라 불리면 재판이 없으며, 공정한 판결은 기대할 수조차 없어."

이게 옛 중세의 마녀심판과 뭐가 다르겠는가.

"뭐, 하등 상관없다."

그래, 전혀 상관없었다.

"불합리로 나온다면, 나 역시 불합리한 힘으로 답할 뿐이다."

내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고, 데이아와 다리우스도 뒤따르며 전투를 준비한다.

어차피 싸우지 않으면 모두가 죽는다는 걸 빠르게 파악한 것이다.

"도망칠 수 있다 생각하는 건가?"

어이가 없다며 글로리아는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근위기사들 역시 군무라도 맞춘 것처럼 동시에 검을 뽑아 든다.

좁은 통로에서 저런 검을 휘두르는 건 쉽지 않아 보였으나.

그런 건 문제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저들은 유능한 기사들이었다.

하지만 말은 정정해줄 필요가 있었다.

"나는 도망치지 않는다."

어느새, 흑령사가 가져온 레메게톤이 내 손바닥 안에서 은은한 검은빛을 뽐낸다.

눈 깜빡하는 순간 손에 카드가 들려있는 마술사와 같은 솜씨.

악령들의 울음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메아리처럼 울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도망치지 않는다?"

모욕으로 받아들였는지 글로리아는 이를 으득 물며 양손으로 검을 쥐고 자세를 잡았으나.

"나는 그저."

그 역시, 정정해준다.

"폐하를 알현하러 가는 것뿐이다."

Chapter 66 - 66. 작위적

글로리아 그레이스.

강력한 존재로 묘사가 되긴 하지만, 막상 게임 속에서 주인공과의 대립은 없다.

오히려 조력자의 포지션으로서 특정 보스 하나를 공략할 때 힘을 보태는 캐릭터.

하지만 어느 게임이든 그렇듯 적이던 존재가 아군이 되면 급격히 약해지고.

아군이 갑자기 적이 되면 어디에 저런 힘을 숨겼었나 싶을 정도로 강해진다.

현재는 후자였다.

글로리아 그레이스는 내가 게임에서 봤던 건 세 발의 피라는 듯 적빛 마나를 흉흉하게 뿜어내고 있었다.

"대마법사께서는 배신하신 겁니까?"

"크흠."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가 록펠리칸에게 닿았을 때, 대마법사는 어색하니 목을 긁적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다네. 나 역시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응당 데이우스의 목을 칠 것이야."

그러자 데이아와 다리우스가 화들짝 놀라며 바로 전투태세를 갖췄으나.

록펠리칸은 의아하니 팔짱을 끼며 묻는다.

"허나, 정녕 폐하께서 데이우스의 처형을 결정하셨단 말인가? 아니, 그렇다 하더라도 이렇게 자네들에게 명령을 했다고?"

"예, 제가 직접 폐하의 명을 받들었습니다."

"흐음...."

이해할 수 없다는 록펠리칸의 반응. 그가 아는 오르페우스라면 나를 쳐내기로 결정했더라도, 이런 식으로 타인의 손을 빌리지 않았을 걸 알고 있었다.

오히려 이렇게까지 상쾌하게 쳐낼 수 있다면 지금껏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았겠지.

"데이우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지?"

내게 의견을 물어오는 록펠리칸. 글로리아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던 나는 슬쩍 눈동자만 돌리며 답한다.

"폐하께 악령이 씌었습니다. 그것도 그리핀 왕조의 오랜 역사를 타고 넘어오던 구렁이와 같은 놈이."

"...."

록펠리칸은 진중하니 내 말을 듣더니 글로리아 쪽을 한번 바라본다.

아직까지 글로리아의 기사단이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이 노인, 록펠리칸의 거처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나.

그는 나와 다시금 눈을 맞추더니 지팡이로 바닥을 통통 두드리며 답했다.

"내, 자네에게 빚진 것이 있으니 한번만 믿어보겠네."

"...."

"허나, 만일 이것이 거짓이었다면. 폐하의 앞에 내 목을 내놓기 전, 그대의 목은 내가 취할게야."

"마음대로 하시죠."

내 옆에 선 록펠리칸의 과격한 마나가 요동친다. 입술을 깨물고 있는 글로리아의 마나가 그저 하찮게 느껴질 정도.

"설마 당신이 배신자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대마법사."

"글로리아. 내 모든 행동은 충심과 애정에서 비롯된다는 걸 명심하게."

대지가 요동치기 시작한다. 대마법사의 마나가 사방으로 스며들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쾅! 쾅! 쾅!

굵고 두꺼운 나무뿌리가 사방에서 쏟아져 나오며 기사단을 공격했다.

갑옷을 입고 있는 기사들은 반응 자체는 느렸으나 그렇다고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몇 명 정통으로 머리에 맞아서 기절한 정도.

글로리아는 빠르게 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뒤로 후퇴하라! 대마법사가 적으로 돌아섰으면 지하에서의 싸움은 불리하다!"

쏜살같이 뒤로 빠지는 근위기사들. 실로 유쾌한 광경이었으나, 오히려 확실한 전법이긴 했다.

결국 우리는 이곳에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지하 감옥의 통로는 하나.

밖으로 나서면 빼곡하게 포위하고 있을 근위기사단이 벌써 눈에 보이는 기분이었다.

"방도가 있겠나?"

천천히 바깥으로 향하는 우리의 발걸음을 실로 무거웠다. 록펠리칸의 물음에도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제 힘이 유용하게 사용되진 못할 겁니다."

[이곳은 영혼이 너무 없어요.]

뒤에서 근심을 담아 덧붙인 흑령사.

그리핀의 선조들이 흑마법사인지라 왕실에는 남아나는 영혼이 없었다. 특히나 지금 오르페우스 국왕의 몸을 차지한 악령 같은 녀석이 뭔가 수작을 부려둔 듯했다.

'단순히 안식을 취하고 있는 망령들조차 없다.'

사람은 죽으면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든다. 그것이 안식이다.

그런데 이곳은 안식에 든 망령들조차 수가 매우 적었다. 탐탁지 않아도 레메게톤으로 그들을 깨워야 하나 싶었으나 이 정도 숫자라면 고양이 손 빌리는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아예 영혼을 소멸시켜버린 건가? 혹은 인골충처럼 흡수?'

악마와 비슷한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는 흑령사의 증언에 따르면 그럴 가능성도 충분했다.

결국 사령의 돌이라 불리는 레메게톤이 있더라도, 힘을 빌리거나 다룰 수 있는 영혼이 없다면 꽝이다.

"끄음, 아마 밖에는 심판장인 타이른도 있을 텐데. 그의 상대도 안 되겠나? 한번 압도적으로 이기지 않았나."

밖에서 묵직하니 느껴지는 둔탁한 마나가 타이른의 것이라는 건 진즉에 알아차리고 있었다.

나는 솔직하게 답했다.

"수가 없진 않습니다. 하지만 이전처럼 압도는 불가능합니다. 당시에는 처형장에 잠들어 있던 영혼들 덕분에 가능했으니까요."

"그렇겠군."

알겠다 답한 록펠리칸이 이번엔 다리우스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노스웨든 백작은 어떻지?"

"...."

어색하니 고개를 휙 돌리는 다리우스. 그가 변경을 지키는 백작이라도, 근위기사단장이나 마도심판장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그럼 그대는...."

시선을 돌려 데이아에게 묻는 록펠리칸. 데이아는 허리춤의 마도력총을 꺼내 들더니 어깨를 으쓱거린다.

"공화국 제품에 마력을 더하긴 했는데. 아마 밖에 있는 사람들한테는 간지럽지 않을까요?"

뒤에 있던 고철상 삼총사는 말할 것도 없었다.

"...후우."

자그마치 왕국의 정예 중에서도 정예이다. 우리는 지금 호랑이의 아가리 안에서도 가장 단단한 어금니에 물린 상황이라 볼 수 있었다.

"이거 정말 참담하군."

그러면서도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풀지 않는 록펠리칸.

어느새 바깥으로 향하는 계단이 눈앞에 들어왔다.

"노인네가 힘을 써보겠네."

후 하고 숨을 내쉬는 록펠리칸. 밖에는 자신의 제자들도 있을 텐데 애써 태연한 척하는 모습이 조금 안쓰러웠다.

정 안 된다면 방법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건 정말 최후의 최후까지 아껴둬야 할 보루.

그렇기에 나는 레메게톤을 꾹 쥐며 흑령사에게 말했다.

"무슨 상황이 올지 모른다. 나와 딱 붙어있어라."

[알겠어요.]

"응?"

뜬금없이 흑령사의 뒤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파닥파닥 거리며 내 등으로 흑령사가 달라붙자 뒤에 가려져 있던 데이아가 눈에 들어왔다.

데이아의 눈에는 흑령사가 보이지 않았을 테니 아마 자신에게 말한 걸로 착각한 듯 보였다.

"참나."

데이아는 괜히 휙 얼굴을 돌리며 짜증 내지만 은근슬쩍 한 걸음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래, 차라리 잘 됐다.

데이아가 혹시라도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니 내 근처에 있는 게 안전하긴 했다.

"크흡, 감동스럽군."

뒤에서 들려온 주책스런 울음소리에 나와 데이아는 동시에 뒤를 바라본다.

그곳엔 감동한 다리우스가 우리를 보면서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그래, 이게 가족이었어. 이런 게 베르디였군. 오늘, 이 자리에서 가문이 끝나더라도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동생들아, 결국 최후에 와서는 우리가 하나가 되었으니."

"나는 당신이랑 하나가 된 적 없다."

"쪽팔리니까 호들갑 떨지 마. 그리고 안 뒤질 거거든?"

나와 데이아가 동시에 부정했음에도 다리우스는 여전히 감동을 숨기지 못하고 크흡 거리면서 우리 사이로 끼고 들어온다.

그러더니 어깨동무하는데 힘 하나는 또 좋아서 쉽사리 뿌리칠 수가 없었다.

"부끄러워하긴! 그래! 우리 삼 남매가 함께 힘을 합치는데 무엇이 무섭겠냐!"

"하아."

"하지 말라고, 이 새끼야."

나는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고, 데이아는 다리우스의 옆구리를 계속 때려대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같은 날 태어나진 않았으나, 같은 날 죽는다. 이 얼마나 멋진가. 시라도 한 수 읊고 싶군."

"개소리 하고 자빠졌네. 평소에 책 한 줄 안 읽으면서 무슨 시야."

"나는 시라는 개념을 알고 있다는 것에 박수 쳐주고 싶군."

데이아와 나의 말에도 다리우스는 허접한 자작시를 읊으며 감상에 젖었다. 데이아는 쪽팔리다면서 얼굴을 푹 숙였고 나는 이제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어깨에 느껴지는 무게감과 온기.

이런 상황이 처음이기도 했고, 짜증 나기도 했기에 툭툭거렸으나.

솔직히 마음 한쪽에서는 살아야 할 분명한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기분이 들었다.

티격 거리고, 싸우고, 말로는 싫다고 해도 결국 끝에 가서는 서로를 위한다.

이게 가족이라는 걸까?

썩 나쁘지 않았다.

밖으로 나오니 새벽달이 훤히 떠 있는 모습이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그 밑에 나열된 붉은 갑옷의 기사들과 황금의 로브를 걸치고 있는 심판관들만 없었다면, 달빛을 안주 삼아 술잔이라도 기울였을 텐데.

"긴장해라. 상대는 대마법사다."

"설마 이리도 빠르게 다시 싸우게 될 줄은 몰랐다, 데이우스."

기사단장 글로리아와 마도심판장 타이른이 앞장서며 우리를 맞이한다.

투기부터가 남다르며 단순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지독할 정도로 불편한 상황.

데이아 같은 경우는 살기를 버티지 못해 살짝 비틀거릴 정도였기에 내가 옆에서 잡아줬다.

"다리에 힘을 줘라. 굳이 저들을 정면에서 마주 볼 필요는 없다."

"으응."

꽤나 힘든지 순순히 말을 듣는 데이아. 나는 그녀의 앞에 서며 숨을 고른다.

쉽사리 끝나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했으나, 막상 이렇게 저들을 눈에 담으니 고되긴 할 듯했다.

"내가 하나 정도는 맡을 수 있네. 어떤가? 그대들 남매 셋이 하나는 상대할 수 있겠나?"

슬쩍 수염을 쓸어 넘기며 물어오는 록펠리칸. 그는 힐긋 나를 보며 물었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혼자 할 수 있습니다."

계획은 수정이다.

처음부터 전심전력으로, 모든 걸 쏟아부을 생각으로 레메게톤을 심장 부근에 가져다 댄 순간.

쿠웅!

하늘에서 떨어진 무언가.

거센 흙먼지가 시야를 가렸으나, 타이른은 우리의 장난질이라 생각했는지 바로 마나를 흩뿌린다.

마찬가지로 글로리아 역시 자신의 거대한 대검을 휘둘러 먼지를 밀어냈고.

시야가 걷히며 우리와 저들 사이에 당당하니 등장한 두 사람.

찰랑이는 길고 검은 머리를 흩날리는 이 세계의 주인공, 아리아 리아스가 나를 보며 웃는다.

"교수님! 지금 막 도착했어요!"

"아리아...."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안도감을 느꼈다. 솔직하게 감사를 표하려 했으나.

옆에서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메이드복 차림의 핀덴아이가 연기를 뿜어내며 끼어든다.

"이거 개소리야. 주인놈 위기 상황에 극적으로 등장해서 반하게 만들 거라고 계속 기다렸어."

덕분에 감사의 말이 입안으로 들어갔다.

"와! 이 씨! 그거 말 안 하기로 했잖아요! 내가 케이크에 있던 딸기도 줬는데!"

"그랬냐? 나는 네가 딸기 싫어하는 줄 알았지."

얘기를 듣던 나는 슬며시 앞으로 나선다.

"둘이 케이크도 먹고, 아주 여유로웠나 보군."

날카롭게 번뜩이며 두 사람을 바라보자, 아리아와 핀덴아이는 동시에 적을 향해 몸을 돌렸다.

"저것들 처리하면 되는 거죠?!"

"주인놈을 위한 살육메이드, 핀덴아이 준비 완료! 개꿀잼이겠다!"

아리아는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고, 핀덴아이는 도끼를 어깨에 짊어진다.

"하아."

그리고 나는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Chapter 67 - 67. 악귀(惡鬼)

참으로 웃기지 않은가.

분명 조금 전까지의 전황은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근접전 최강자 왕실의 근위기사단.

안티마법사인 마도심판관.

검과 마법이 공존하는 왕국 최고의 전력이자 조합이 뒤섞여 있었으나.

막상 고작 두 사람이 합류한 것만으로도 가려져 있던 승리가 모습을 보였고, 무게추의 균형이 맞아가는 모습.

물론, 여기서 승리는 단순히 모두 처리한다거나 전부 몰살시키는 게 아니다.

"죽이면 안 된다. 길만 뚫어라."

"네?"

"뭐?"

다시금 나를 휙 돌아보는 두 사람. 얼굴에는 불만이 팍 섞여 있었다.

"아니, 교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놈들인데요? 전부 사지를 찢어서 개 먹이로 줄 생각이었는데."

"주인놈아, 나는 피가 흐르지 않는 싸움은 싸움이라고 부르지 않아. 소꿉장난 정도지."

둘이 참 다른 느낌이면서도 결론은 같게 떨어지니 신기하긴 했다.

이렇게까지 당당하게 나오니 참 허탈하면서도 확실하게 답한다.

"닥치고 그냥 따라라."

이렇게 고삐 풀린 놈들은 같이 거칠게 꽉 잡아줄 필요가 있었다. 어차피 두 사람 다 결국 내 말을 듣게 될 테니까.

"흐응! 알겠어요! 교수님!"

뭔가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리아. 그녀는 기분 좋다며 몸부림치며 검을 붕붕 휘두른다.

장난스러운 모습이었으나 그것에서조차 압박감이 느껴진다.

괜히 엔딩을 보고 온 2회차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하아, 갑자기 흥미가 팍 식네. 뭐, 도끼가 워낙 구려서 저것들 갑옷에 흠집도 못 낼 것 같긴 했어."

자신이 쥐고 있는 다리우스의 도끼를 보며 빈정대는 핀덴아이. 그러면서도 등에 메고 있던 상자를 나한테 던진다.

"아, 맞다. 이거 가져가."

"...."

상자가 바닥을 덜컹덜컹 바닥을 구르며 내 발치까지 다가온다. 그걸 보는 순간 미간이 팍 좁혀진다.

"안에 들어있는 게 뭔지 모르는 건가?"

"아는데? 그런 게 숨겨진 곳은 또 어떻게 알았데."

내가 아리아와 핀덴아이, 두 사람을 보내서까지 미리 확보하려 했던 아이템.

관점에 따라 대륙에서 가장 귀한 아이템이라고도 볼 수 있는 물건이었으나, 이렇게 다루는 걸 보면 역시 핀덴아이구나 싶었다.

일단은 누군가 맡길 사람이 필요했기에 바로 뒤에 있던 데이아에게 건넨다.

"중요한 물건이다. 잘 가지고 있어라."

"으응?"

데이아는 마도력총을 사용하니 전투에 크게 도움이 되지도 않을 거다.

그때, 나를 지나쳐 앞으로 달려가는 고철상의 삼총사.

"대장! 오랜만입니다!"

"키야! 아직도 그거 입고 계셔요?"

"왕국 놈들 아주 뻑이 가겠네!"

반갑게 달려드는 자신의 동료들을 보며, 핀덴아이 역시 장난스럽게 씨익 웃어 보였다.

"짜식들아, 얼른 무기나 들어. 쪽팔리게 고철상 얼굴에 먹칠하지 말고."

"넵!"

바로 핀덴아이와 합류한 삼총사는 방금까지 무기력하던 모습과는 다르게 생기가 넘치기 시작한다.

"지원인가."

내 곁에 선 록펠리칸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묻는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에 차 답했다.

"저 두 사람이라면 충분히 시간을 벌어줄 겁니다."

"확실히 보통내기는 아닌 듯하군. 특히나 저 어린 소녀는... 나조차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어느새 전투를 시작한 아리아는 마도심판관을 상대로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마법사를 상대하는데 특화된 심판관들이다 보니 아리아는 오롯이 검술만을 사용한다.

"교수님의 자비를 감사히 여겨, 원래는 여기서 다 죽일 거였어."

특히나 심판장 타이른이 나와의 전투에서 입은 내상이 온전히 회복되지 않았는지 움직임이 더딘 느낌이 있었기에 더욱 수월해 보였다.

"크읍!"

"교수님은, 너희가 함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뿐만 아니라 내가 부탁한 물건을 얻으면서 아리아는 자신의 검도 같이 구했는지 '리벨룽겐의 검'이라는 유니크 아이템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 핀덴아이 쪽이 조금 부실하게 느껴졌다.

그녀가 한 챕터의 보스로 활약할 당시에 쓰던 장비들이 하나도 없다는 게 상당히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제 하녀 쪽을 지원해주시죠. 아리아는 능히 혼자 감당할 수 있을 겁니다."

"크흠, 알겠네."

다시금 대지를 울려오는 록펠리칸의 마나. 마도심판관들과의 상성이 썩 좋지 않은 록펠리칸이라 기사단을 상대하는 게 마음 편할 것이다.

"나도 갈까."

자신의 검을 뽑아 들며 성큼성큼 앞으로 향하는 다리우스. 어느 쪽을 도울까 고민하더니 핀덴아이가 있는 기사단을 힐긋 보곤 반대인 아리아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으휴, 아직도 쫄아 있네."

핀덴아이에게 당했던 기억이 여전히 상처로 남아있는 다리우스를 보며 데이아가 혀를 찬다.

하지만 나는 마도심판관들에게 가려던 다리우스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기사단 쪽을 뚫는다. 나를 잘 따라와라."

다리우스 정도면 충분히 앞에서 길을 뚫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기에 따로 불렀다.

그리고 데이아에게도 손짓하며 뒤로 붙으라고 지시한다.

"나도 같이 가?"

"그래, 해줘야 할 일이 생겼다."

의도치는 않았으나, 지금 데이아가 가지고 있는 상자 안에 든 물건은 이번 사건을 해결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아이템이었다.

그렇게 우리가 근위기사단 쪽을 뚫으려고 움직이려던 순간.

콰앙!

핀덴아이의 도끼와 글로리아의 붉은 대검이 맞부딪친다. 과격한 폭음과 함께 두 사람은 호흡이라도 맞춘 듯 같은 움직임을 취한다.

"비켜라!"

하지만 안타깝게도, 기사단장인 글로리아 쪽이 한 수 위였다.

전투가 지속되면 지속될수록 강해지는 게 핀덴아이라서 조금 더 시간이 지난다면 모르겠으나.

일단 지금은 분명하게 글로리아 쪽이 압도하고 있었다.

"지랄하네!"

그럼에도 핀덴아이의 눈동자는 전혀 죽지 않았다. 오히려 더 재밌다고 웃으며 다채로운 움직임을 선보인다.

기사의 딱딱하고 정적인 움직임을 유린하는 핀덴아이의 유려한 몸놀림.

레지스탕스로 살아가며 수많은 위기에 직면해왔던 핀덴아이였기에 할 수 있는 곡예였다.

갑자기 정면승부를 피하기 시작한 핀덴아이의 대응이었음에도 글로리아는 침착하니 검을 휘두른다.

정직하면서도 단단한 모습은 기사의 표본이라고 부를 법했으나.

안타깝게도 핀덴아이는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는 타입이었다.

하얀 머리를 흩날리며 핀덴아이가 뒤로 빠지자 대지에서 솟아오른 거대한 손이 글로리아를 덮쳐온다.

"이깟 마법!"

글로리아의 검이 빠르게 휘둘러지며 거대한 손을 조각내어 다시 흙 한 줌으로 만들었으나.

흙더미에 몸을 숨긴 채로 다시 치고 들어간 핀덴아이의 일격이 정통으로 글로리아의 가슴팍을 치고 들어갔다.

도끼는 날이 상해 무기로서의 가치를 잃었기에 발을 들어 올린다.

한방만 노리고 있던 핀덴아이의 마나가 지금이라는 듯 응축되었기에.

뻥!

"큭!"

뒤로 쭉 밀려난 글로리아. 허나, 이 정도 일격에도 갑옷에는 금조차 가지 않았다.

'장비 수준 차이가 심하다.'

보면 볼수록 그런 생각이 들 뿐이었다.

그때 록펠리칸이 내 옆으로 황급히 달려와서는 외쳤다.

"길을 뚫는 것 자체도 쉽지 않네. 조금 꼼수를 쓰려하는데 괜찮겠는가?"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바로 알아차린 나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 와라, 데이아."

"어?"

"미안하다."

갑자기 자신을 부를 줄 몰랐다는 데이아. 나는 그녀의 허리춤에 손을 두른 후, 록펠리칸에게 신호를 줬다.

"무, 뭐 하는 거야!"

깜짝 놀란 데이아가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으나, 이미 우리는 바람에 휩쓸려 하늘을 날고 있었다.

"착지는 맡기겠네!"

록펠리칸의 거대한 바람에 휩쓸린 우리는 그대로 왕궁 쪽으로 날아들었다.

중간 중간에 마도심판관들이나, 기사들이 우리를 막기 위해 마법이나 검기를 쏘아댔으나.

내 뒤로 따라붙은 흑령사의 마법과 더불어 아래에서 분투하는 일행들이 보호해주었다.

"꺄아아악!"

하늘을 날고 있다는 체험이 신비로웠는지 데이아는 비명을 질러대면서도 손과 발을 내 목과 허리에 휘감는다.

데이아 때문에 움직이기 곤란했으나, 일단 왕궁으로 시선을 돌려 착지할 장소를 찾는다.

오르페우스 왕의 몸을 차지한 악령의 기운이 얼마나 강한지 왕궁 전체가 흉흉한 기운에 잠식되어 있었다.

소름이 끼치는 수준을 넘어서, 오랜만에 악령을 보고 가슴 요동치는 상황.

"하."

되려 아직까지도 악령들을 보고 놀랄 가슴이 남아 있었구나 싶어 피식 웃으며 발코니 쪽으로 몸을 돌린다.

엘레노아와의 추억이 있는 장소.

마나를 일으켜 자연스럽게 착지했음에도 데이아는 여전히 코알라처럼 나한테 매달려서는 벌벌 떨고 있었다.

"무겁다. 내려라."

한마디 하자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퍼뜩 놀라며 떨어지더니 헛기침을 몇 번인가 한다.

"노, 높은 곳이 생각보다 엄청 무섭네. 그냥 난간에서 내려 볼 때랑은 또 달라."

안전장치 하나 없이 그렇게 떠오르면 누구라도 무섭겠지. 사색이 된 데이아에게 나는 주의를 준다.

"등에 메고 있는 물건, 잘 챙겨라. 네 도움이 필요할 것 같다."

"...도움? 이거 뭔데?"

슬쩍 열어보려는 데이아의 손을 잡아서 말린다.

"열지 마라. 바로 탐지당한다."

왕궁 전체에 퍼져있는 거대한 기운을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틈이 보인다면 이게 무엇인지 바로 알아차릴 게 뻔했다.

"보면 무엇인지 바로 알 수 있을 거다. 너는 현명하니까."

"...으응."

믿음이 부담스러웠던 걸까. 데이아는 슬쩍 시선을 피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연회장 안으로 들어가 복도로 향하려던 순간.

쿵!

또 다른 거대한 덩치가 발코니로 떨어진다. 우리처럼 깔끔한 착지가 아닌 데굴데굴 굴러서 연회장 벽에 부딪힌 뒤에야 멈췄다.

"어억! 무릎 까졌네."

투덜거리면서도 벌떡 일어나 몸을 터는 다리우스.

"너희가 가는데 내가 따라가지 않을 수 있겠냐!"

당당하니 말하는 다리우스를 보며 나는 잠시 눈을 깜빡였으나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를 툭 두드렸다.

"잘 왔다."

이렇게 솔직하게 감사를 표할 줄 몰랐는지 데이아와 다리우스는 잠시 어벙하니 나를 보고 있었으나, 난 두 사람을 무시하고 바로 복도로 나섰고.

그제야 둘은 정신을 차리고 뒤쫓아 온다.

복도로 나서자 흑령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기운이 강해지는 곳이 있어요.]

"그래, 나도 느껴진다."

"...유령이랑 얘기하는 거였구나?"

이제야 내가 흑령사랑 말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데이아. 하지만 그걸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일반인들에게는 보이지 않겠으나, 내 눈에는 벌써 왕실의 복도가 악령의 기운으로 검게 칠해진 상태.

늦은 새벽이라서 그런 것도 있겠으나, 말 그대로 오롯이 어둠뿐이라 길도 보이지 않고, 방향 감각도 잃을 것 같았다.

이런 건 또 불편했다.

'기운은 알현실 쪽인가.'

나는 슬쩍 데이아를 보며 말했다.

"알현실로 나를 안내해줄 수 있겠나?"

"응? 어렵지는 않은데...."

"부탁하지."

악령이 보이지 않으니 기운도 보이지 않는다. 데이아는 성큼성큼 어둠 속으로 걸음을 옮겼고.

나는 그녀를 길잡이 삼아 어깨에 손을 얹고 뒤따랐는데 조금 의아한 점이 있었다.

"경비가 왜 없지?"

"복도가 허하군."

그리고 그걸 제대로 꼬집은 데이아와 다리우스. 온통 어둠뿐이었기에 몰랐던 나는 입을 다문 채 이유를 생각하지만, 딱히 나오는 답은 없었다.

덕분에 순조롭게 알현실에 도착한 우리.

문의 질감을 손바닥으로 느낀 나는 잠시 심호흡하며 두 사람을 바라봤다.

준비됐냐고 물을 것도 없었다.

왼쪽에서 다리우스의 강한 콧바람이 불어왔고, 오른쪽에서는 데이아의 쿨한 향기가 느껴진다.

끼이이익.

그렇기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문을 열자.

바깥과는 반대로 알현실은 어둠이 싹 걷혀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왕좌를 향해서 무릎 꿇고 경배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단순 경비들뿐만 아니라, 왕실에서 일하는 수많은 하인들이 줄을 짓고 있었다.

왕궁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을 위해 제공된 숙소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었다.

"무, 뭐야?"

데이아의 탄성을 들으며 나는 시선을 앞에 둔다.

원래는 붉은색이나, 새벽이라 탁한 남색으로 보이는 카펫을 쭉 따라가면 거대한 왕좌에 닿는다.

그리고 왕좌에 앉아 있는 저주받은 왕.

왕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작은 뿔이 달린 검은 얼굴이 흉흉하니 뒤에 떠 있었다.

빙의의 일종이었다.

[너, 나를 볼 수 있군?]

내가 자신의 본체를 본다는 걸 바로 알아차린 검은 얼굴이 이죽이며 묻는다.

두 사람에게 손짓해서 뒤로 물러나게 한 뒤, 나는 카펫 위를 걷는다.

"그래, 악마를 닮은 형상이 잘도 보이는군."

그러자 어이없다며 비웃는 녀석.

[악마를 닮은? 어리석긴. 나는 악마 그 자체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영생을 다루는 초월자이다.]

"허세 부리지 마라. 굳이 따지자면 악마가 되어가는 중이겠지."

[....]

꽤나 맹점을 찔렀는지 검은 얼굴은 순간 입을 다문다.

"얼마나 많은 영혼을 먹어 치웠으면. 평범한 인간의 머리에 뿔이 날 수 있는 건지. 내 상식으론 알지 못하겠군."

[자그마치 수백 년이다. 너 같은 범인에 불과한 사령술사 정도가 무얼 알겠느냐.]

잠들었거나, 떠도는 사람의 영혼을 먹어 치우며 인간을 벗어난 괴물.

놈은 내 뒤를 따라붙고 있던 흑령사를 향해 턱짓하며 웃는다.

[네년은 꽤나 훌륭하구나. 좋은 영양분이 되겠어.]

[....]

같은 사령술사이기에 흑령사도 지금 눈앞에 있는 존재가 얼마나 규격 외인지 알고 있어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뛰어난 사령술사인 흑령사조차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의 격차는 분명했다.

강하다.

그리핀 왕국을 집어삼킬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분명했다.

저것은 이제 악령을 뛰어넘은.

악귀(惡鬼)

그리고 그 너머 악마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웃기는군."

나의 입가에는 조소가 걸릴 수밖에 없었다.

[레메게톤의 소유자여. 그깟 돌 하나 믿고 있는 건가?]

쩌억 입을 벌리고는 당장이라도 삼키겠다는 듯 웃어대는 녀석.

[레메게톤의 주체는 원래 악마였다. 어미를 살리겠다는 소원을 빈 소년에게 준 축복이자 저주였지.]

"...."

[이제 그것은 내가 취하겠다. 실로 달콤한 과실이구나.]

손에 쥐고 있는 레메게톤이 공명하듯 울려온다. 나는 손을 들어 그것을 보이며 답했다.

"이깟 돌에 눈이 멀었는가."

[....]

"사령술사란 죽음과 가장 가까이 있으나, 그것에 닿지 않은 자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

그 가장 가까운 곳에서 양쪽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주는 존재.

허나, 그 선은 수평이 아닌 수직이다.

"죽은 자는 죽은 자일뿐이다. 산 자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지 마라."

내 말에 검은 얼굴을 깔깔 거리며 웃어대기 시작했다.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온다는 듯.

[내게 흑마법을 가르치느냐? 사령술을 가르치느냐? 이제는 이름 없는 그리핀의 악마가 되었으나! 살아생전 대륙을 떨게 하고, 금기의 극의에 달한 마법사가 바로 이 몸이다!]

"의미 없는 힘이다."

당당하니 자신의 업적을 외쳐대는 저 존재가, 문득 불쌍하게 느껴졌다.

평생을 넘어, 죽음 이후까지 자신이 걸어온 학문의 본질조차 꿰뚫지 못한 무지함.

"영생을 논했는가? 인간을 벗어나 악마가 되고 싶었는가?"

[....]

"죽음의 의미도, 뜻도, 무게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도망만 다닌 삼류."

화르륵.

"사자(死者)와 동행함에도, 죽음을 부정한 빌어먹을 어중이떠중이."

손에서 푸른 불꽃이 솟아오른다. 벌써 내 눈에는 이 전투의 끝이 보이는 기분이 들었다.

죽음에서 도망쳐.

인간의 탈을 벗어 던지고.

악귀가 되어버린 존재.

"보고 배워라, 숱한 죽음 속에서 무엇도 깨닫지 못한 천치야."

오로지 배움만이, 그가 내게서 가져갈 수 있는 유일한 것이며.

"네놈에게 줄 안식은 내게 없다."

오로지 소멸만이, 내가 그에게 예비해둔 유일한 것이다.

Chapter 68 - 68. 삼류

[진짜 범을 본 적 없던 개새끼는, 스스로를 범이라 여기는 법이지.]

키득거리는 검은 얼굴.

그러니까 그리핀이라는 이름의 악귀가 깔깔거리자 오르페우스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왕을 지켜라, 천치들아."

이제는 오르페우스의 입을 통해서 말을 시작한 그리핀의 악귀. 그의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주변에 있던 수많은 사용인들이 벌떡 일어나더니 곧장 달려들기 시작했다.

"후."

허나, 나의 마나가 요동치며 그들을 밀어낸다. 흑령사에게 배웠던 영혼을 다루지 않는 흑마법의 일종이었다.

발치에 일렁이는 마나로 이루어진 문양. 기가 강한 악령들에게 몸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사령술사가 가진 몇 안 되는 수비적 마법이었다.

원래라면 평범한 사용인들에게는 통하지 않았겠으나, 악귀의 힘에 잠식된 이들은 함부로 내게 다가오지 못했다.

"내, 내 뒤로 와라 데이아!"

"미안한데, 나는 조종당한다고 손속 안 둬!"

탕! 탕!

물론, 나뿐만 아니라 입구 쪽에 있는 다리우스와 데이아에게도 사용인들이 달려들고 있었으나.

다리우스가 검집에 검을 꽂은 채로 몽둥이처럼 휘둘러 그들을 몰아내었고, 데이아는 허벅지나 발바닥에 마력탄을 박아 넣으며 움직임을 제한시킨다.

"가서 도와라."

[예? 당신은요?]

깜짝 놀란 흑령사가 걱정스레 나를 보지만 내 시선은 오롯이 그리핀의 악귀와 오르페우스 국왕에게로 향해 있었다.

"혼자 할 수 있다."

[....]

"나를 믿어라."

[진짜...!]

흑령사는 손으로 나를 한 번 껴안더니 속삭인다.

[사령술의 끝을 봐야 하니까 죽으면 안 돼요! 스승님 명령이에요.]

감촉도, 온기도, 무게도 느껴지지 않음에도 이상하게도 뭔가 닿아있는 기분이 들었기에.

"그래."

나는 고개만 살짝 끄덕이며 그녀를 보내줬다.

"같잖구나."

그런 우리를 보며 국왕의 몸을 차지한 악귀가 혀를 찬다.

"이 정도 위협으로 서로 부둥켜 안고 신파를 찍는가."

그가 가지고 있는 거대한 힘의 일부조차 사용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유흥이자 여흥.

나는 레메게톤을 쥔 채로 마나를 불어넣으며 물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하! 애원인가?"

쏟아져 나오는 압박감에 순간 정신을 잃을 뻔했다. 마법을 통해서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패배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문답을 하고 싶다면 그에 맞는 수준을 보여야지."

거세지는 압박감.

그럼에도 나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로 더욱 레메게톤을 강하게 쥔다.

"흑마법사를 핍박한 이유는 무엇이냐."

지금의 그리핀 왕국은 그야말로 흑마법사라는 족속들을 혐오하는 수준을 넘어 왕국의 원수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게 바로 앞에 있는 그리핀의 악귀.

루아네스 루덴 그리핀을 헤랄하자드라는 이름으로 바꿔 악마적인 학살을 자행하였다.

그러자 놈은 깔깔깔 웃어대며 즐거워한다.

"참으로 웃기지! 우습지 않느냐? 그 학살을 통해서 내 자리는 더욱 견고해졌다."

"...."

"가장 찬란한 왕좌 위에 앉아 있었기에 보지 못했겠지! 정작 최악이라 손가락질하던 흑마법사가 실은 자신들의 왕이라는 걸!"

"...."

"실로 걸작이었다! 실로 유쾌했다! 덕분에 왕국에서는 흑마법을 극도로 규제하기 시작했고, 아예 관련 서적과 정보를 모조리 차단하더라도 환영하는 분위기가 되었지."

그리고 그것이, 지금의 그리핀 왕국.

지독하리만치 악령에게 무지해진 현 실태.

당장에 최고의 아카데미라는 로베른만 보더라도. 세티마의 천사가 사건을 일으켰을 때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했다.

흑마법사는 누구도 허락될 수 없기에.

되려 흑마법사에 무지해진 왕국.

점점 거세지는 압박 속에서 나는 이를 악물고 심호흡한다.

레메게톤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며 나를 돕는다.

고작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것도.

고작 자신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 왕국 전체를 어리석은 무지렁뱅이로 만든 것도.

말도 안 되는 규모였으나 성공했다.

하지만.

"그뿐이 아니겠지."

"...."

그리핀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미세한 틈이었으나 정곡을 찔렀다는 의미였다.

"오랜 세월을 유지해오던 왕좌였다. 어째서 200년 전, 갑자기 학살을 자행했던 걸까."

차라리 처음부터 행했으면 편했을 거다. 수백 년을 견고히 지켜오던 왕좌를 왜 갑자기 큰 출혈을 감내하면서까지 더 강화하려 했던 걸까.

내가 내놓은 답은 하나였다.

필요해졌으니까.

"같은 흑마법사가 두려웠겠지."

"...."

"200년 전, 네놈의 비밀을 알아차리고, 위협해올 수 있는 뛰어난 흑마법사가 있었다. 이게 내 추론이다."

자신의 위치를 더욱 강하게 다잡으려 한다는 건.

반대로 누군가에게 위협을 당했다는 뜻이었다.

"무서웠으니까 라는 이유가 추가되겠지."

압박 속에서도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의도한 건 아니었으나 반쯤 본능적으로 한 행동이었고 꽤나 심기를 거스른 듯 보였다.

놈의 표정이 썩 볼만하게 변했으니까.

"들어주니까 적당히 지껄이는 구나. 실로 불쾌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음은 인정하마."

무식한 마나 덩어리가 국왕의 머리 위에 뭉치기 시작한다. 실로 거대한 힘은 조금만 움직여도 알현실 전체를 소멸시킬 위력이었다.

"네놈으로 인해 흑마법사를 향한 왕국의 규제는 더욱 강화될 것이다. 그래, 200년 전 나를 찾아왔던 뺀질한 그놈과 네가 썩 비슷하다는 건 인정하마."

"...."

"네놈은 왕인 나를 위협했고, 왕궁의 일부는 네놈에 의해 반파되었으나 나는 기적과 같이 살아남아 너를 죽였다."

이번 왕은 꽤나 영웅적인 컨셉을 잡은 모양이었다.

"레메게톤으로 죽은 망령들을 찾아 헤맸느냐?"

찢어져라 웃어대는 녀석.

놈의 말에 레메게톤의 빛이 괜히 더 구슬프게 느껴졌다.

"내가 왜 너를 지켜봤는지 알고 있느냐? 결국 너 역시 널려있던 사령술사들과 하등 다를 거 없기 때문이다."

"...."

"그 돌을 이용해 강제로 망령들을 깨워서 자신의 것으로 이용하려 했던 주제에! 안식에서 깨워 억지로 사용하려 했던 주제에!"

"...."

"뭐? 사령술의 삼류? 어중이떠중이? 웃기는구나! 결국 네놈 역시, 망자를 단순히 도구로 여기는 존재였으며 나와 다를 거 없는 사령술사일 뿐이다!"

"...."

"입만 산 머저리에게 더 이상 왕의 시간을 할애할 생각 없다. 이만 죽어라."

손을 뻗은 그리핀의 악귀.

마나의 구체가 그대로 꿈틀거리며 움직이려 했으나.

구체의 형태가 망가진다.

거칠게 일렁이기 시작했고, 동시에 그 안에서 들려오는 사람의 비명소리.

"...?!"

갑자기 왜 그런가 싶어 당황하는 놈에게 나는 어이없다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지만."

무겁게 짓누르던 압박감이 점차 사라져간다.

강하게 힘이 들어갔던 허리에 여유가 생긴다. 덜덜 떨리던 입술과 꽉 물었던 이빨에 고통이 자국처럼 남아있으나 견딜만했다.

"네가 이렇듯 기본조차 모르기에 삼류일 수밖에 없는 거다."

"뭐라?!"

핀덴아이와 데이아에게 설명해준 적 있는 개념.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에게 강의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나였으나.

왕실에서 악마 언저리에게 강의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모든 영혼은 마나를 담는다."

그 크기는 천차만별이나, 영혼이 마나를 다루기 위해서는 육체를 대신할 수 있을 정도로 짙은 감정이 필요하다.

"반대로 말하자면."

내 손가락 끝이 거대한 구체를 가리킨다. 방대한 마나 속에는 사람들의 얼굴이 삐죽삐죽 튀어나오려 애를 쓰고 발광하고 있었다.

"네가 사용하고 있는 방대한 마나에는 그만큼의 영혼이 담겨 있다는 소리다."

사령술사이니까.

영혼이 소멸한다면 그 마나도 당연히 사라진다. 그런데 흑마법사인 놈이 거대한 마나를 사용하고 있다는 건.

저 악귀의 안에 영혼들이 잠들어 있고, 흡수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레메게톤은 잠든 영혼을 깨운다.

이것은 그저 빛을 발하며, 악귀의 안에 잠든 영혼을 깨웠을 뿐이었다.

악귀에게 영혼을 빼앗겼던 사람들의 의식이 돌아온다.

"실로 아이러니한 일이지."

두 달 전.

그러니까 에밀리를 만나, 인골충을 처치하고, 마알크스 연구소장에게 복수할 수 있게 만들어줬을 때.

나는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영혼의 안식과 소멸은 엄밀히 다른 개념이었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대지에 스며들어 눈을 감는다.

소멸은 영혼 자체가 아예 사라짐을 의미했다.

또한 이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기에 당시의 내 마법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런데 에밀리는 지하에 있는 동안 홀로 마알크스 연구소장을 소멸시켰다.

분명 내 마법은 불가능했다.

에밀리가 가진 마나를 마법으로 변환시켜준 게 바로 나였으니까 분명했다.

결국, 나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에밀리가 가지고 있던 원한이 나의 마법을 더욱 가중시켰다고.

복수하겠다는 욕망이 소녀에게 불가능에 가까운 힘을 주었다.

이는 소녀가 죽음 이후에 가지게 된 감정이었다.

"망자에게도 결국 의지가 있다. 감정이 존재한다.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인과관계의 반대도 성립한다는 얘기다."

원한을 가지고 죽은 게 아니라.

죽은 이후에도 원한이 생길 수 있다.

[끄아아아아아아아!]

[구해줘어어어어어!]

[악마여! 저주받을 악마여!]

[자유를! 내게 안식을!]

[차라리 소멸시켜줘!]

수백 년을 갇혀, 의식을 잃은 채로 마나만 멋대로 사용당하던 영혼들이 깨어난다.

악귀를 향한 짙고 깊으며, 끈적한 원한을 가진 채로.

"끄으으읍!"

어떻게든 떠나가려는 영혼들을 다시 붙잡으려는 그리핀의 악귀.

원래 사령술사들이 영혼을 붙잡고 고통을 주며 사역하는 행위를 해왔으니 능숙했겠으나.

레메게톤이 더욱 환하게 빛을 뿜어낸다.

깨운 영혼에게 필요 이상의 힘을 부여하는 이 돌의 특성 때문에 악귀조차 버거워 보였다.

"사령술사는 사자(死者)의 힘을 빌릴 뿐이다."

이는, 내가 감옥에서 처음 오르페우스 국왕을 만났을 때 했던 말이었다.

"악귀가 되었기 때문일까."

괴로워하는 놈을 보며 나는 비웃음을 내건다.

"인간임을 잊었기 때문일까."

다채로운 기교와 난도 높은 마법을 다룰 수 있으면 뭐하겠는가.

"그들의 힘을 빌리면서."

모든 것의 아래에서 받쳐줄 뿌리가 부실하다면, 결국 가지도 연약할 뿐이었고.

"그들을 향한 존중도, 위대함도 잊었구나."

그러한 기본이 없는 자들을, 우리는 삼류라고 부른다.

Chapter 69 - 69. 그리핀의 왕

"끄아아아아아!"

[죽이리라! 죽이리라!]

[어찌하여 우리를 놓아주지 않느냐!]

[그만하고 싶다고! 이제 그만 눈을 감고 싶단 말이야아아!]

영혼들이 빠져나간다.

자아를 가지고, 분노를 담아, 원한을 풀기 위해.

악귀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영혼들은 하나하나가 위력적인 돌팔매질이 되었다.

영혼이 담은 마나는 악귀를 통해 마법이 되었기에 소용돌이치듯 뿜어져 나온 영혼들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이곳저곳 후려치기 시작했다.

쾅! 쾅! 쾅! 쾅!

제어 불가능한 힘.

악귀를 공격하는 것뿐만 아니라 알현실을 기둥과 천장, 벽과 조명 등에 가서 부딪치는 모습들은 마치 자해를 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나의 보호마법이라도 이 정도 망령들의 폭주를 전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저들을 활성화하고 증폭시키는 레메게톤을 멈췄다가는 악귀가 다시금 영혼을 집어삼킬 게 뻔했기에.

몸을 낮춘다.

나에게도 피해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악귀 쪽의 피해가 극심했기에 꼭 필요한 절차였다.

슬쩍 뒤를 확인하니, 데이아와 다리우스 역시 영혼들의 폭주에 휩쓸려 수비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으나 금방 당해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그나마 흑령사가 지키고 있었으나 그녀 역시 유령이라는 입장이라 한계가 있었다.

이미 달려들던 사용인들은 전부 바닥에 쓰러져 기절한 상태였고, 영혼들의 폭주에 휩쓸리는 자들도 있었으나.

나라고 모두를 구할 수 있는 건 아니었기에.

우선은 악귀와 거리를 벌리며 두 사람에게로 돌아갔다.

"해, 해결된 거야?"

먼저 물어오는 데이아. 나는 고개를 저으면서도 두 사람을 내 보호마법의 범위 안으로 넣었다.

"아직 끝난 건 아니다. 놈에게 응축되어 있던 영혼들을 해방했을 뿐, 확실하게 소멸시킨 건 아니니."

소멸이 그렇게 쉬운 것도 아니고, 단순히 영혼들이 빠져나간다고 해서 그가 갑자기 평범한 유령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반칙과 같은 힘이 사라지는 것뿐이지, 본신의 힘은 여전히 남아있을 거다.

당연히 상대하기 몇 배는 쉽겠지만.

"이것들은 도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

다리우스의 질문에는 따로 답할 수 없었다. 수백 년 동안 악귀가 먹어온 영혼은 상상 이상으로 많았고.

그들의 원한 역시 매우 깊게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하는 수 없나."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레메게톤 때문에 더 강해진 영혼들. 아무래도 이걸 얼른 멈출 필요가 있어 보였다.

정말 자칫 잘못했다가는 왕실 전체를 부숴버릴 기세였으니까.

[어떻게 하시게요?]

흑령사의 물음에 나는 다시금 악귀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답했다.

"기다릴 시간이 없다. 먼저 깨부수고 들어간다."

만약 여기가 아무것도 없는 들판이나 황폐한 평야였다면 당연히 기다렸을 것이다.

기다리기만 해도 결국 악귀의 힘은 전부 빠져 충분히 지금의 나라도 할 만한 상황이 될 테니까.

하지만 그가 잡고 있던 영혼들의 폭주가 너무 심했기에 사용인 중에서도 피해자가 나올 가능성이 높았으며, 왕실도 엉망이 될 기세였다.

다행인 건, 아까보다 훨씬 약해졌다는 것과 빠져나가는 영혼들 때문에 놈이 정신없다는 점.

"흑령사는 여기서 데이아를 지켜라. 다리우스가 나랑 같이 간다."

"나, 나도 갈 거야!"

발끈하며 답하는 데이아였으나,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말렸다.

"그 상자를 잘 지켜라. 내가 신호를 준다면 그걸 사용하는 거다."

데이아는 매고 있는 상자에 도대체 뭐가 들어있냐고 묻고 싶은 듯 입이 움찔거렸으나 굳이 다시 물어 오진 않았다.

그냥 권총을 꼬옥 쥐며 납득하지 못했으나 받아들인다.

"내 뒤에 서라."

나와 다리우스가 몸을 낮춘 채로 함께 앞으로 이동한다. 마법으로 보호해주려는 생각이었으나, 오히려 다리우스가 반대로 앞으로 치고 나섰다.

"아니, 네가 내 뒤에 서라."

"...."

"지금 폐하의 몸을 뺏은 저 악귀를 상대할 수 있는 건 너밖에 없다, 데이우스. 몸을 사려라."

실로 옳은 의견이었다.

설마 다리우스가 직접 나서서 방패를 자처할 줄은 몰랐다.

"데이우스."

그렇게 조심스럽게 앞으로 향하던 와중, 갑자기 입을 연 다리우스.

나는 굳이 답하지 않았으나, 그는 말을 이어간다.

"나는 우리에게 이런 미래가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

"아버지의 뒤를 따르며, 가문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만 했지. 정작, 그 가문이 무엇인지는 몰랐던 거야."

슬쩍 고개를 돌린 다리우스와 눈이 마주친다.

처음이었다.

그가 믿음직스럽다고 생각한 적은.

"아버지는 어떠셨을지 모르지만, 내게는 너희가 베르디이며, 가문이다. 그러니 내가 만약 여기서 죽는다면...."

[그 돌을 내놔라아아아아!]

쿠우우웅!

우리가 다가가고 있음을 알아챈 악귀의 반격이 시작된다.

밑 빠진 독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막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전부 쏟아지기 전에 나를 해치워 레메게톤을 앗아가겠다는 전략이었다.

땅에서 솟아오른 검은 손들이 사방에서 우리를 덮쳐온다.

다리우스는 검을 뽑아 들어 유려하게 그것들을 베어 넘기며 말을 맺는다.

"다음 가주는, 네가 하는 거다."

쿠득!

그는 상당히 뛰어난 무인이다. 당장에 상대들이 말도 안 될 정도의 강자들뿐이라서 허접해 보였을 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그마치 수백 년을 살아온 사령술사가 상대이니만큼 그의 검은 몇 번 휘둘러지지도 못하고 한쪽 무릎을 꿇었으나.

"가만히 있어라."

그의 어깨를 꾹 짓누르며 앞으로 나섰다.

"쓸데없는 유언 남기지 마라. 아비의 그늘에서 이제 막 벗어났다는 정도로 만족하며 눈을 감을 생각이냐."

"...."

나의 마법이 다리우스를 보조한다. 조금 여유가 생긴 그는 힐끔 나를 보더니 호탕한 미소와 함께 벌떡 일어났다.

"그래, 북부의 방벽을 하기엔 너는 너무 호리호리하지!"

다시금 강하게 쥔 검.

그는 나의 앞으로 또 한 번 나서며 물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를 지키겠다. 너는 다른 생각은 말고 저 불경한 놈을 처리할 생각만 해라!"

"그래."

나는 다시금 레메게톤을 꺼내 들었다.

마법으로는 어떻게 해도 이기지 못한다. 애초에 몸은 오르페우스 국왕의 것인지라 함부로 해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지금 내가 해야 할 건.

웃기게도 더 강하게 영혼들을 깨우는 것이었다.

왜냐면 아직 가장 중요한 사람이 잠들어 있었으니까.

게임에서 봤던 오르페우스 국왕은 진실을 알아차린 이후, 딱 두 가지 결과밖에 없다.

망가지거나, 이겨내거나.

하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이겨낸 건, 오르페우스 국왕이 아니었다는 걸.

'악귀가 몸을 차지했을 뿐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간단하게 넘어가 버린 거겠지.

반대로, 망가진 건.

오르페우스의 신념이 너무 딱딱하고 올곧았으니까 부러진 것뿐이었다.

이번에는 그딴 결말은 없을 거다.

내가 그리 만들겠다.

더욱 빛을 뿜어내는 레메게톤과 함께, 나는 입을 열었다.

"폐하, 들리십니까."

* * *

진흙탕 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그것도 병균과 벌레가 한 무더기로 함께 어우러져 전신을 기어 다니는 기분.

찝찝하다 못해 역겨웠으나, 그렇다고 도망칠 수는 없었다.

눈도 뜨지 못하고, 냄새도 맡지 못하며, 입을 열 수도 없다.

죽음 이후에는 잠이 든 것과 같은 안식을 취한다고 들었으나.

이것을 안식이라 부를 수 있을까?

반쯤 고문에 가까운 행위 속에서.

오르페우스 국왕은 희미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이고 있음을 느낀다.

무덤덤하면서도 스스로에게 확신을 가지고 있는 단단한 목소리.

하지만 그러한 목소리가 들렸음에도 사고가 닿지 못했다. 익숙하지만 누구인지 떠올리지 못한다.

잠이 들기 직전과 같은 상황 속에서 오르페우스는 서서히 눈을 감으려 했으나.

툭.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잡는 느낌이 들었다.

그건 하나가 아니었다.

순식간에 전신에 달라붙은 손들은 다급하면서도 부드러이 그를 깨우고 있었다.

'음?'

감겨오던 눈을 천천히 뜬다.

주변을 둘러볼 수 있을 정도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기에 누가 자신을 잡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목소리 자체는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 폐하, 이제 다 왔습니다.

"데, 이우스?"

분명, 데이우스 베르디의 목소리였다. 어디서 들려오는 건지 모르겠으나 그의 목소리가 들려올수록 점차 몸에 힘이 들어온다.

- 이제 폐하만 각오를 다잡고 일어나시면 됩니다. 그러면 그리핀의 왕조에 똬리를 틀고 있던 이 거대한 악을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내가...?"

각오를?

무슨 각오를 말하는 거지?

- 그리핀 왕조가 지금까지 자행한 수많은 악행들을 보셨겠지요.

"아...."

맞다.

지하에 있던 일지에서.

빌어먹을 정도로 악랄하던 그리핀 왕조의 만행을 전부 봐왔다.

비록, 그것이 악귀에게 몸을 빼앗긴 채로 행해왔던 일이라도 결국 그 악귀가 바로 그리핀의 선조였다.

- 자격이 없다 생각하셨겠지요. 스스로가 왕위에 앉아 있을 사람이 아니라고 괴로워하셨겠지요.

"...."

그래.

차라리 왕관을 집어 던지고 어딘가 멀리 도망치고 싶다는 욕망을 꾹꾹 눌러 담을 수밖에 없었다.

- 하지만 폐하, 자격이 없는 것과 책임이 없는 것은 다릅니다.

"...."

- 단순히 자신도 피해자라고 말씀하시기엔 짊어진 것이 너무 많으십니다. 왕은 이끌고 책임지는 자이지, 변명하고 도망치는 자가 아닙니다.

"아."

- 실로 옳습니다. 그리핀 왕조는 이 왕국의 태양으로 서기엔 이미 그 자격을 잃었습니다. 왕의 자리에서 무능은 죄가 됩니다.

날카로운 저 말속에 담긴 의미를 알았기에. 오르페우스는 자신이 아마,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 허나, 책임은 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형적인 구조가 되어버린 이 왕국을 다시 원 상태로 돌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 잘못을 저질렀으니 자리에서 내려온다? 단순히 즐길 것만 즐기고 도망치는 꼴이지 않습니까.

아마 데이우스도 지금쯤 자조적인 미소를 띠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은 결국 하나였으니까.

- 그러니 모든 걸 떠안은 채로, 다시 왕좌에 앉으시죠.

"...."

- 기침하실 시간입니다, 폐하.

사고가 부웅 떠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물 밖에서 누군가 자신을 끌어올리는 느낌.

허리가 휘며 당겨지는 의식 속에서 고개를 돌려 자신을 흔들어 깨웠던 손의 주인들을 바라본다.

아는 얼굴도 있었고, 모르는 얼굴도 있었으나.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아버지, 어머니."

이미 오래전, 악귀에게 잡아 먹혔던 선왕 오페르트 루덴 그리핀.

그리고 어머니인 하이란 루덴 그리핀.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악귀에게 잡아 먹혀 육체를 빼앗겼던 수많은 그리핀 왕조의 주인들.

"아아, 그리하여 제게 어리석으라 하셨습니까."

이제야, 오르페우스 국왕은 자신의 아버지가 했던 유언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다.

그저, 항상 어리석어라.

"제가 진실을 알지 못하길 바라셨습니까."

꾸욱.

쥐어진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가슴속에 타오르는 열망은 전신으로 퍼져 나간다.

"그리핀의 추한 실태를 모르길 바라셨습니까."

등에서 느껴지는 주름진 손바닥.

그것이 아버지의 것임을 알아차린 오르페우스는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실로 멀리 계시다 생각했습니다. 제게는 너무나 존경스러운 아버님이셨으니까요."

툭.

"저 멀리 있던 아버님의 등이, 이제는 보입니다."

부드러이 등이 떠밀리는 걸 느낀다.

지금.

바로 지금.

그리핀 왕조의 누구도 도망치지 못했던 악귀의 손아귀에서.

길고 긴 연쇄의 사슬 속에 갇혀 있던 왕가의 억압이 끊어진다.

"소자, 당신을 넘어서겠습니다."

곧이어.

눈앞에 보이는 건 반파된 알현실과 함께 믿음이 담긴 미소를 짓고 있는 데이우스 베르디였다.

* * *

"허억! 허억!"

거친 호흡과 함께 가슴을 부여잡은 오르페우스 국왕이 왕좌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고통스러워한다.

나는 곧장 레메게톤의 빛을 거둬들였고 언제까지고 미친 파티를 벌일 듯하던 망령들이 점차 잠잠해지기 시작한다.

"되, 된 건가!"

악귀의 공격 속에서 가까스로 버텨오던 다리우스는 이미 상처투성이가 되어, 발바닥 밑에는 핏물이 고여 있을 지경.

치료가 필요하겠으나,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끄아아아아아아아!]

오르페우스 국왕에게서 떨어진 악귀는 발버둥 치며 자신에게 남은 마나를 흩뿌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단순히 본능 속에서 발버둥 치는 악귀.

마치 가시가 날아드는 것만 같은 감각 속에서, 나는 손을 뻗었다.

마나를 통해 둘러진 혼의 형상화가 떠오른다.

내가 가문의 저택에서도 사용했던 악령을 흡수하는 마법.

사령술사들이 악령을 자신의 것으로 완전히 종속시킬 때 사용하는 방식으로, 술사의 영혼 주변에 악령을 두른다.

[미쳤구나아아!]

내가 자신을 종속시키려 한다고 생각한 악귀가 입을 쩍 벌린 채로 달려든다.

검은 머리는 그대로 나를 삼켰고, 곧이어 몸의 주도권이 넘어가기 시작한다.

"끄, 으륵!"

[결국 네놈도 똑같은 사령술사일 뿐이었다! 감히 나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들어? 미쳤구나! 어딜 함부로...!]

원래의 데이우스가 내게 빙의했던 것처럼.

악귀도 나의 몸을 앗아가기 시작한다. 비틀거리며 한쪽 무릎을 꿇었으나, 동시에 내 눈동자는 저 멀리 있는 여인에게 닿았다.

눈치 빠른 여동생은 바로 자신의 등에 있던 상자를 열어든다.

"어?"

말도 안 된다는 데이아의 탄성과 함께 어둡던 알현실 전체에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다.

단순히 존재만으로도 악령들은 도망쳤고, 망령들은 눈을 감는다.

레메게톤은 사령술을 위한 사기적인 아이템이다.

하지만 게임에서는 한쪽에 일방적으로 사기적인 무기를 쥐어주지 않는다.

저것은 단순히 레메게톤의 반대급부가 아닌, 모든 악한 것들을 정화하는 신의 선물.

대륙에 있는 것 중 가장 완벽한 물질.

세상의 모든 걸 담는 은잔.

데이아는 상자에서 성배를 꺼내 들며 당황했으나 나는 악귀와의 주도권 싸움을 하며 외쳤다.

"지금이다."

[미쳤구나아아아!]

이제는 상황이 반전된다.

내 몸에서 도망치려는 악귀와 반대로 붙잡는 나.

성배를 보는 순간 도망칠 걸 알았기에 확실하게 잡아둘 수 있는 일종의 족쇄가 필요했고, 나는 그걸 자처했을 뿐이었다.

한 손에 성배를, 다른 손에 마도력총을 쥔 데이아는 망설임 없이 나를 겨누었다.

그 눈동자에는 둘째 오빠인 나를 향한 원한이 아니라.

신뢰가 담겨 있었기에.

성배에서 비롯된 신성력이 데이아의 마나와 섞여들어 손을 타고 총구에 닿는다.

[신의 힘을 빌리느냐아아! 부끄럽지도 않느냐아아아아! 사령술사아아아아!]

어이없는 발악에 나는 피식하고 비웃는다.

"악귀가 되어 신의 축복도 받을 수 없는 존재가 된 너와 나는 다르다."

타앙!

총구가 불을 뿜고, 신성력이 가득히 담긴 총알이 나를 향해 직선으로 날아들었고.

"망자는, 망자로 있어야 했다."

푸욱!

정확하게 왼쪽 어깨에 박혀든 총알. 신성력이 전신으로 쏟아졌기에 다급히 레메게톤을 떨어트렸고.

[끄아아아아아아아악!]

신성력에 닿은 악귀가 비명을 토해내며 신의 심판에 타들어 가기 시작한다.

어깨에 느껴지는 격렬한 통증 속에서도 입가에 그려진 미소는 지워지지 않는다.

"너를 소유할 거라고 착각한 게 실책이었다."

내가 분명 말했음에도, 그는 가르침이 전혀 효과가 없는 학생이었다.

"내가 예비해둔 건, 소멸뿐이라 했거늘."

욱신거리는 어깨를 손으로 감싸 쥐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구멍이 숭숭 뚫린 알현실로 태양빛이 들어온다.

늦은 새벽이 떠나가고.

볕이 부드러이 내려옴과 동시에.

그리핀의 망령은, 완전한 소멸을 이루었다.

Chapter 70 - 70. 달빛 아래 술파티(1)

"키야! 달 한번 죽이는군!"

만신창이가 되어 전신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음에도, 다리우스는 환히 웃으며 달을 감상한다.

반만 똑 잘라 놓은 것처럼 보이는 달이 꽤나 시원하리만치 우수에 젖은 빛을 쏟아 내리고 있었다.

쿵!

굴리며 가져온 오크통을 세운 다리우스. 밤의 정원이라는 운치 있는 풍경 속에서 오늘 밤, 술잔을 기울이기로 했다.

감옥을 나오면서 보았던 달을 안주 삼아 취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긴 했으나, 설마 이렇게 기회가 빨리 올 줄은 몰랐다.

그리핀의 악귀가 소멸하고.

오르페우스 국왕은 다시금 몸을 추스르게 되었다. 또한 자신이 악귀에게 몸을 빼앗겼다는 걸 언급하며 근위기사단과 마도심판관들을 막아 세웠다.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그렇게 며칠 후, 왜인지 왕궁 정원에서 밤의 술잔치를 벌이게 되었다.

굳이 지금 해야 하는 건가 싶기도 했으나, 어차피 알현실 수리도 있으니 할 거면 바로 하자는 국왕의 제안에 결국 이렇게 모이게 되었다.

"튼튼한 게 장점이라곤 생각했는데 진짜로 저렇게 튼튼할 줄은 몰랐네."

내 옆에서 술잔이 가득 담긴 수레를 옮기는 데이아.

도와줄까 싶다가도 왼쪽 어깨의 총상 때문에 쉽사리 손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캬아! 술이 드아아!"

그리고 내 앞을 바로 지나쳐 나가는 핀덴아이. 하녀복을 입은 채로 신이 나서 가장 큰 잔을 들고 휘두르는 모습이 무슨 어린애처럼 보였다.

"대장 같이 가요!"

"파티다아!"

"아싸!"

고철상 삼총사는 핀덴아이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가는 모습들.

벌써 한잔씩 걸친 게 아닌가 싶은 텐션에 데이아가 주의를 준다.

"야! 밤이니까 조용히 하라고!"

사용인들이 따로 있지 않고, 우리끼리만 가지는 조촐한 자리인지라 괜히 소란을 피웠다간 그들이 쉬는 걸 방해할 수도 있다.

사용인들은 캠프파이어처럼 불을 피울 수 있게 세팅만 해주고 갔는데, 벌써 대마법사 록펠리칸과 그의 제자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불꽃을 피우고 있었다.

누가 가장 적은 마나로 불을 피울 수 있는지 내기를 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엘레노아와 종종 앉던 화단 앞에 있는 벤치에 자리 잡았다.

록펠리칸이 피어올린 거대한 불구덩이가 간헐천처럼 솟구쳐 올라가 하늘을 밝힌다.

"왁! 화력이 너무 커졌어!"

"스, 스승님! 이거 어떻게 해요!"

"기, 기다려라!"

꽤나 화려하게 저질러주고 있는 마법사들을.

[와, 와! 저 잠깐 구경 좀 다녀올게요!]

큰불이 화려하게 터지는 게 보기 좋았는지 흑령사는 물 흐르듯 마법사들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턱을 괸 채로 멀뚱히 불을 감상하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에 앉는 여학생.

아리아 리아스가 손에 맥주잔을 들고는 내게 건네 온다.

"교수님도 한잔하세요."

나는 그걸 받아들며 주의를 줬다.

"학생이니 마실 생각은 하지 마라."

엄중히 경고하자 아리아는 싱긋 웃으면서 반대 손에 들고 있는 잔을 내민다.

향긋한 오렌지 향이 코에 닿는다.

"저는 주스예요. 교수님은 학생이 학생답지 않은 일을 하는 걸 싫어하시잖아요."

교수니까 라는 답은 굳이 하지 않았다. 사실 교수로서 제대로 일한 적이 손에 꼽았다.

멍하니 불을 보고 있자니 아리아가 슬며시 웃으며 묻는다.

"불멍이라고 하죠?"

"...."

"옛날에 교수님이 말씀해주셨어요. 엄청 옛날!"

1회차를 말하는 건가.

나는 굳이 답하지 않은 채로 술을 홀짝인다. 맥주잔이었지만 들어있는 건 와인으로, 왕실에서 제공해준 거라 그런지 꽤나 훌륭하게 입을 적셔왔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아, 걱정은 하지 마세요! 뭘 하시든 저는 교수님 편이니까요."

"무엇을 하든 말인가."

술을 다시금 입에 대며 묻자, 아리아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예, 그럼요."

잔을 입에 댄 채로 잠시 고민한 나는 천천히 손을 내리며 다시 물었다.

"만약, 내가 헤랄하자드처럼 왕국의 대부분을 숙청하려 든다면?"

조금은 망설이지 않을까 싶었다.

아니, 최소한 되묻는 시늉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을까 했으나.

"네."

일말의 고민도 없이 해맑은 미소와 함께 답해온 아리아.

"뜻이 있으시겠죠!"

그녀가 알지 모르겠다.

방금 그 대답이, 얼마나 내 가슴을 아리게 만들었는지.

내가 직접 플레이했던 캐릭터이다. 그녀의 첫 발걸음부터 시작해서 모든 스토리를 보았고, 함께 싸워왔던 입장에서.

주인공이던 아리아 리아스라는 소녀가 이토록 망가진 걸 보는 건 생각보다 고되었다.

"후."

툭.

나는 여전히 눈을 불꽃에 둔 채로 천천히 손을 뻗어 아리아의 머리 위에 얹었다.

깜짝 놀란 아리아가 멍하니 나를 보고 있다는 게 느껴졌으나, 지금 그녀를 보고 싶지 않았다.

다만, 그만큼 불쌍했기에.

"많이 힘들었구나."

가능한 내가 할 수 있는 위로를 건넨다.

"아...."

이렇게 망가질 때까지, 그녀가 얼마나 많은 고뇌와 고통 속에 있었을지 공감할 수는 없으나 이해할 수는 있었다.

"다 잘될 거다. 어깨에 힘을 풀어라."

"아, 아, 교수님!"

손을 뻗으며 와락 안기려던 그녀였으나.

이미 내 손은 아리아의 머리 위에서 내려와 얼굴에 닿아 그녀를 밀어냈다.

"거기까진 아니다."

"...아니었어요?"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아리아는 쳇 하고 투덜거리면서도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움직여 내게 더 다가왔다.

허벅지와 허벅지가 맞닿는 정도의 거리.

거슬렸으나, 좋아하고 있는 아리아를 보니 굳이 따지고 들고 싶지는 않았다.

나름 분위기가 좋다고 생각했는지 아리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으나.

그런 분위기를 깨며 등장한 자유를 추구하는 야만전사.

"주인놈은 술 마실 때도 혼자서 홀짝이네."

"...."

"...핀덴아이 씨, 지금 우리 중요한 얘기 중이니까 저리 꺼지시죠?"

바로 일침을 날려 오는 아리아였으나 핀덴아이는 씨익 웃으면서 답했다.

"주인놈 냄새 맡는 게 그렇게 중요하냐? 주인놈도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모른 척한 거야."

"...예?"

녹슨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아리아의 고개. 나를 빤히 바라본 아리아가 드물게도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묻는다.

"호, 혹시 아셨어요?"

일부러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와서 숨을 쉬는 척하면서 냄새를 맡으려 했던 걸 말하는 거라면.

"그래."

알고 있었다.

그러자 아리아는 벌떡 일어나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는 거센 발걸음으로 달아난다.

아리아가 앉았던 자리를 차지하는 핀덴아이.

껄렁하게 벤치에 손을 얹고, 반대 손으로는 맥주잔을 들고 있다. 한쪽 발을 반대편 허벅지에 얹은, 치마를 입은 상태에서는 하면 안 되는 자세를 취하는 핀덴아이.

"다리 내려라."

내가 바로 인상을 찌푸리며 경고하자 핀덴아이는 이죽거릴 뿐이었다.

"왜? 흥분되시나? 옛날 난봉꾼 시절 생각나? 오늘 밤시중이라도 화끈하게 해드려?"

"...선 넘지 마라."

"쳇, 술 마셨으면 사람이 농담도 좀 하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면서 자신의 술잔을 내 쪽으로 내미는 핀덴아이. 한숨을 내쉬며 나도 술잔을 내밀어 살짝 부딪쳐준다.

짠이라기보다는 퉁이 어울리는 소리였으나.

그것마저도 만족스럽다며 핀덴아이는 벌컥벌컥 술을 마셨고, 나 역시 다시금 술을 입에 머금었다.

"한동안은 그레이폰드에 머무르는 거야?"

슬쩍 물어오는 핀덴아이에게 나는 덤덤하게 답했다.

"그래, 아직 끝나지 않았다."

왕의 시련은 모두 극복했다. 나를 왕국 소속 흑마법사로 인정하는 일만 남았지만, 사실상 그게 시작이었다.

무수히 많은 비판이 쏟아지고, 토론회장에 끌려가게 될 미래가 벌써부터 눈에 훤히 보였다.

"단순히 소란스럽기만 하진 않을 거다. 암살이나 납치를 노린 자객들도 많이 오겠지. 그건 네가 처리해야 한다."

아리아는 이제 아카데미로 돌려보낼 생각이었으니까.

그 말을 들으며 핀덴아이는 자신의 주머니를 뒤적인다.

"암살자? 재밌겠네. 사흘에 한 번은 도끼를 휘둘러야 한다니까?"

품에서 연초를 꺼내서 문 핀덴아이. 내가 지그시 그녀를 바라보자 투덜거리며 괜히 먼저 변명한다.

"아, 버릇이야. 입에 그냥 물고만 있을게."

"후."

하여튼 어떤 상황에서도 핀덴아이는 핀덴아이였다. 알딸딸하니 얼굴이 발그레 붉어진 상태에서도 녀석은 심상치 않은 화두를 툭 꺼내 든다.

"잘됐네. 그레이폰드에는 우리 동포들이 좀 있다고 들었거든. 고철상이랑은 다른 레지스탕스가."

"...."

"가서 합류도 좀 하고. 정보도 구해봐야겠다."

자신이 레지스탕스임을 잊지 말라는 듯 꺼내든 화제에 나는 묵묵하니 들어주기만 했다.

그래, 단순 그레이폰드뿐만 아니라 몇몇 주요 도시에는 클락 공화국에서 넘어온 레지스탕스들이 있었다.

그들은 각기 이름도, 내세운 신념도 다르다.

핀덴아이와 주인공인 아리아가 싸우게 되는 챕터에서는 그들이 주요 악역으로 나오며, 모든 레지스탕스를 통합시킨 핀덴아이가 보스로 등장한다.

'물론, 그러한 세계선은 이미 없어졌지만.'

핀덴아이가 나의 하녀로 들어오면서 이미 그런 미래는 사라졌다.

그러니까 아리아도 굳이 핀덴아이를 건드릴 생각하지 않는 거겠지.

꽤나 심각한 대화 속에서 핀덴아이가 슬쩍 나를 바라본다.

"주인놈아, 나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말해라."

심각해 보이는 표정에 나도 모르게 감화되어 집중했으나.

"내가 똥꼬 핥아준다고 했던 거 거절했을 때, 솔직히 후회했지?"

"...."

"맞지? 그치?"

"핀덴아이."

머리가 지끈거린다. 취기는 아님이 분명했기에 나는 자연히 지어지는 혐오의 표정으로 답했다.

"꺼져라."

Chapter 71 - 71. 달빛 아래 술파티(2)

"왼손은 괜찮은가."

"...."

투덜거리는 핀덴아이를 보내버리자, 이번에는 또 색다른 얼굴들이 찾아왔다.

마도심판장 타이른 올 벨로쿠스와 근위기사단장 글로리아 그레이스.

두 사람은 평소 입던 로브나 갑옷이 아닌 사복을 입고 있었는데, 이 역시 왕의 배려였다.

이번 사건으로 대마법사는 물론이고, 나와도 서로 대척하게 되었으나 실은 오해였으니 감정의 골이 있으면 술자리에서 해결하라는 뜻.

"크흠."

그렇기에 글로리아는 괜히 어색하니 헛기침하면서도 확실하게 말한다.

"저는 폐하의 명령을 따르는 자입니다. 그분의 검으로 그분께서 원하신다면 움직일 뿐입니다."

"...."

"만약 다음에도 폐하께서 같은 명령을 내리신다면 저는 잠자코 따를 것입니다. 허나...."

말이 길어진 걸 보며 옆에 있던 타이른이 허탈한 미소를 토해낸다. 나는 묵묵하니 앉은 채로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고.

"폐하께서 잘못되셨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자신이 알아차렸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라는 자책과 검으로서 국왕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죄책감.

그것을 담아 내게 고개를 꾸벅 숙인 글로리아를 보며 나는 술을 홀짝인다.

"상관없다."

"...."

"너는 네 역할을 했을 뿐이다. 그것에 아무 감정 없으니 걱정 마라."

내 대답에 천천히 고개를 든 글로리아. 옆에 있던 타이른이 껄껄 웃으면서 말한다.

"봐라. 그런 걸 신경 쓸 사람이 아니다? 대인배다."

"으음, 또한 앞으로 왕실 소속이 된다고 들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글로리아는 악수를 청해왔으나, 내 한쪽 손은 붕대로 감싸여 있었고 다른 손은 잔을 들고 있었다.

실수라 생각했는지 글로리아는 손을 빼려 했으나, 나는 잔을 내려놓고 손을 잡았다.

"잘 부탁하지."

스토리의 진행을 생각하면 그녀는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기에 일단은 돈독한 관계 정도는 만들어둘 생각이었다.

"둘이 말 놓지? 어차피 같은 왕을 섬길 동료가 된 것 같은데."

"으음, 그러면...."

"마음대로 하지."

슬쩍 눈치를 보던 글로리아가 내 대답에 한층 편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잘 부탁할게."

두 사람과의 대화는 그게 끝이었다. 어차피 길게 대화를 이어갈 정도로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굽고 있던 거대한 고기가 슬슬 익어가는지 그 주변으로 몰려가는 사람들.

나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술만 홀짝이고 있었다. 딱히 취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자리가 비는가?"

그때 내게 다가온 또 다른 남자. 안정을 취하고 있어야 할 오르페우스 국왕이었다.

나는 일어나려 했으나, 그가 손짓하며 옆에 툭 앉았다.

"나도 마시고 싶지만 일단 안정을 위해서 참으라더군."

허전한 듯 손을 쥐었다 폈다 하는 오르페우스. 악귀에게 씌었던 것 때문에 당장에는 휴식이 필요했다.

그는 불가로 시선을 돌리더니 씩 웃었다.

"그래, 세 가지 시련을 모두 극복했군. 축하하네. 솔직히 해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난이도가 높은 것들뿐이었으니 당연합니다."

"큭큭, 그렇지. 내가 생각해도 악랄하다 느낄 수밖에 없네."

마도심판장 타이른 올 벨로쿠스를 쓰러트리고.

엘레노아 루덴 그리핀의 악몽을 해결했으며.

마지막으로 왕가의 비밀이라 할 수 있는 선왕의 유언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었다.

"자네에겐 충분한 보상이 주어지겠지만, 정말 괜찮겠는가?"

"...."

그의 시선이 어느새 내게로 닿아 있었다. 그 안에 담긴 감정은 걱정과 근심이었다.

"꽤나 혼란스러운 시간이 될 거다. 생각 이상의 조롱과 비판, 심지어는 그 이상의 무언가를 받게 되겠지."

"그건 저뿐만 아니라 왕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내가 짊어져야 할 책임이지 않은가."

옳은 말이었다.

그저 옳았기에 나도 모르게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왕가에서 흑마법사와 관련해서 비판과 비난을 받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그 주체가 내가 된다는 게, 오르페우스는 마음에 들지 않는 거였다.

"차라리 흑마법사를 향한 법률을 개정하면서 차근차근 나아가는 게 어떻겠나?"

일단 그들을 향한 인식을 없애는 편이 좋지 않겠냐는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너무 늦습니다. 또한 더욱 받아들이지 못할 겁니다."

"흐음."

"걱정 마시지요."

내가 단호히 답하자, 오르페우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 말한다.

나를 향한 그의 무한한 신뢰가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아 참."

어울리지 않게 박수를 짝 치며 슬쩍 떠보는 오르페우스.

"자네 나이가 어떻게 된다고 했지?"

"스물여덟입니다."

"음, 그렇군."

괜히 과장되어 고개를 끄덕이던 오르페우스가 헛기침하며 의도적으로 주제를 돌린다.

"그, 내 여동생이랑 여기서 종종 시간을 보냈었지?"

"예, 맞습니다."

"둘이 꽤나 자주 시간을 보낸다고 들었으니 보통보다는 꽤나 친밀한 사이겠군?"

"...."

"...티 났나?"

뒷머리를 긁적이는 오르페우스에게 나는 굳이 답하지 않고 술로 입술만 적셨다.

에휴 하고 한숨을 내쉰 그는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생각해보게. 엘레노아도 자네를 꽤나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고, 나도 자네 정도면 충분히 환영하겠네."

"...."

"그리고 스물여덟이면 이미 혼인을 하고 아이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지 않은가."

잔에서 입을 뗀 나는 천천히 답했다.

"약혼녀가 있습니다."

"뭐라?!"

정말 상상도 못 했다는 표정으로 당황하며 나를 바라보는 오르페우스.

"끄음, 내가 선을 넘을 뻔했군. 미안하네."

떨떠름하니 말을 물린 오르페우스.

기드온과의 관계를 정리하기 수월하게 해주려고 에리카와의 약혼을 파혼하지 않았으나.

'나도 쓸데가 있군.'

그녀와의 약혼 관계라는 건 다른 사람들의 쓸데없는 참견을 다물게 하는 좋은 방편이 되어준다.

'아마 아카데미로 돌아가면 충분하겠지.'

분명, 에리카라면 이제 파혼서를 가져올 만큼 충분히 원래의 자주적이던 모습을 찾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뒤부터는 약혼녀라는 방패를 사용하지 못하겠지만 어쨌든 지금 쓸 수 있을 때 많이 사용할 생각이었다.

"자네가 연정을 둔 여인이 있을 줄은 몰랐군."

"가문끼리의 혼약입니다."

"그럼 그렇지."

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 뭔가 거슬렸으나.

저 멀리서 시녀가 달려오는 게 보인다. 아무래도 오르페우스 국왕을 찾아서 온 듯 보였다.

"이런, 들켰군. 나는 이만 가보도록 하지."

"편안한 밤 되시길 바랍니다."

"그래, 자네도 적당히 마시게. 이제는 왕국에서 인정하는 유일한 흑마법사이니. 귀한 몸이야."

어깨를 툭툭 두드려준 오르페우스 국왕의 발걸음에는 힘이 담겨 있었다.

이번 사건을 통해서, 정신이 붕괴되지도 않고 악귀에게 몸을 빼앗기지도 않았다.

분명 한층 성장한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지어지는 미소를 술잔으로 감추었다.

"데이우스! 이리 와서 좀 먹어라!"

다 구워진 고기를 들고는 허공에 휘두르며 나를 부르는 다리우스.

데이아도 힐끗 나를 보면서 손짓했기에 나는 천천히 일어나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안주 먹으면서 마셔라. 저택에서처럼 취해서 뻗지 말고."

옛날 데이우스가 인사불성이 되어서 저택을 돌아다녔다는 얘기는 꽤 많이 들었다.

얼마나 술에 내성이 있는지, 아무리 마셔도 취기조차 올라오지 않고 있으니까.

"아, 손."

고기를 건넨 데이아가 내 왼손을 보더니 잠시 머뭇거린다.

그러곤 천천히 내 입을 향해 고기를 내밀었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책임도 내가 지는 거야."

"...안 먹어도 된다."

굳이 고기를 먹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청량한 밤이니 적적하게 술만 음미하고 싶었으나.

"부끄럽게 만들 거야?"

짜증 내며 나를 톡 노려보는 데이아. 하는 수 없이 한숨을 내쉬며 그녀가 건넨 고기를 받아먹었다.

"오, 오오!"

그걸 옆에서 보던 다리우스는 감동받은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나와 데이아의 표정이 동시에 썩어 들어갔음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술잔을 내밀었다.

"자아! 우리 삼남매의 돈독함이, 곧 베르디 가문의 견고함을 의미한다! 잔 내밀어라!"

"아 씨, 아저씨도 아니고."

옆에서 데이아는 바로 인상을 쓰면서 다리우스를 노려봤으나.

툭.

나는 손을 내밀어 술잔을 부딪쳤다.

"오! 오오오!"

그것에 감동을 받은 다리우스가 반쯤 울먹였고, 나와 그의 시선이 동시에 막내에게로 향했다.

"배신이야?! 에이, 진짜."

결국 떠밀리듯 잔을 내민 데이아.

우리 세 사람의 잔이 캠프파이어의 불꽃을 배경 삼아 부딪치며 경쾌한 울림을 낸다.

삼국지에서 봤던 도원결의가 문득 연상되는 장면에 나는 천천히 술잔을 뺐다.

"감동적이다! 가족애 같은 건 우리에게 없을 줄 알았는데!"

덩실덩실 즐거워하는 다리우스가 나와 데이아의 사이에 껴서 어깨동무를 한다.

순간, 내 왼쪽 어깨의 총상 탓에 휙 몸을 빼자 역으로 데이아가 화를 버럭 냈다.

"취했어?! 쟤가 너인 줄 알아! 조심해야 할 거 아니야!"

"미, 미안하다."

바로 꼬리를 말고 사과하는 다리우스. 사실 부상 정도로만 따지면 다리우스 쪽이 더 심하긴 했다.

"어휴, 괜찮아?"

나에게 이목이 쏠린 두 사람. 왼쪽 어깨를 슬쩍 본 나는 걱정하는 데이아에게 무심코 말했다.

"좀 살살 쏘지 그랬나."

"...음?"

"응?"

동시에 같은 목소리를 내며 서로를 바라본 두 사람. 그러더니 긴장한 표정으로 뭔가 횡설수설 얘기를 시작한다.

"초, 총이 살살 쏠 수도 있던 거였어? 아! 하긴, 마나를 담은 총이니까 그걸 조절하면...."

"그런 것까지 가능했나? 사용자의 실력에 따라 위력이 정해지는 거라면 꽤나 정교한 물건인 듯하군."

상당히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두 사람을 보며, 조금 어색한 느낌에 괜히 툭 던지듯 말했다.

"농담이다."

쩌적 굳는 두 사람.

다시금 동시에 나를 바라보더니 약 3초 후.

탄성을 내뱉는다.

"농다아아아암?! 데이우스가? 그 데이우스가 농담을 했다고오오?!"

"아니, 어디서 그런 걸 배워온 거냐! 하긴 그렇지! 매일 술이랑 여자만 끼고 살던 놈이니...!"

소란은 일순 전파되었고.

"교수님이 농담을 하셨다고요? 지, 진짜요? 뭐라고 하셨는데요?!"

"주인놈 내 말은 개무시하더니, 지는 어떤 말을 했나 들어나 보자."

[제자도 은근 귀여운 구석이 있네요?]

몰려드는 사람과 귀신을 보며.

"하아."

짜증이 물밀듯이 밀려 들어왔다.

Chapter 72 - 72. 겸업작가

6월 중순.

그리핀 왕국의 수도인 그레이폰드에서 퍼진 왕의 공문은 놀랍게도 왕국을 뻗어 대륙 전체에도 큰 파동을 주고 있었다.

흑마법사 헤랄하자드가 짙은 상처를 남기고 갔던 그리핀 왕국에서.

자그마치 왕실 소속 흑마법사에게 직위를 내려준 것.

왕실 소속되어 있는 흑마법사로, '위령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될 남자의 이름은.

데이우스 베르디.

북쪽의 방벽이자 거인이라 불리는 노스웨든 백작의 남동생이었다.

흑마법사에 적대적이던 그리핀에서 드디어 문을 열었다며 주변 국가들은 갑작스런 변화에 긴장하는 기색이었으나.

정작, 그리핀 왕국에서는 변화를 진보라 보는 사람보다는 타락으로 여기는 사람이 훨씬 많았고, 덕택에 폭풍처럼 논란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원래 그가 소속되어 있던 로베른 아카데미까지 영향력이 퍼지고 있었다.

"...하아."

에리카는 분주한 발걸음으로 학장실로 향하고 있었다.

학생들의 수군거림이 날이 갈수록 커져간다. 데이우스가 흑마법사로 자수한 이후, 아카데미도 꽤나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저번 세티마의 천사 사태에서 자퇴서를 내밀었던 학생들을 설득하고, 다시 격려하며 겨우겨우 제자리를 찾아가는 와중.

중간고사가 끝나면서 이제야 다시 아카데미가 정상화되었다고 생각했으나.

다시금 데이우스에 대한 이야기가 화두로 오르며 소란스러워졌다.

노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간 에리카. 이미 안에는 보건교수인 케런과 기드온이 자리하고 있었다.

기드온은 에리카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으나, 그녀는 일말의 시선조차 주지 않고 말했다.

"데이우스 교수를 다시 파면시키는 건 말도 안 됩니다."

냉정하면서도, 차분하게.

옛적의 에리카 교수를 보는 듯한 서늘한 목소리에 학장은 치를 떨 듯 어깨를 움츠리며 답했다.

"아직 확정은 아니네. 하아, 이런 상황에선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교수 역할을 하지는 않았지만, 데이우스는 교수진에 이미 이름이 올라간 상태다.

지금은 서류상으로 그가 계약 당시 요구했던 분기별 출장을 나가 있는 상태였다.

여기서 기드온이 나섰다.

"지금 학부모들에게 얼마나 많은 연락이 오는 줄 아십니까? 학생들은 흑마법사에게 배울 게 없다면서 다시 자퇴시키려는 학부모들이 많습니다!"

"끄응."

그게 문제였다.

세티마 천사 사건으로 이제야 일단락이 되었는데, 또 이런 사건이 터져 버렸으니 이제는 진짜로 학생들을 붙잡고 있을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다시 에리카가 치고 들어온다.

"자그마치 왕실에서 데이우스 교수에게 위령사 라는 새로운 직책을 준 겁니다. 그를 파면시키는 건 왕실의 뜻을 무시한다고 보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장기적으로 보면 데이우스를 데리고 있는 게 이득이 될 수밖에 없다는 에리카의 말에 또 학장은 갈등한다.

슬쩍 보건교수인 케런을 보지만, 그녀는 어깨만 으쓱거릴 뿐 중립의 위치를 고수했다.

데이우스란 남자는 왜 이리도 자신을 어지럽게 만드는지.

가서 좀 따지고 싶은 심정인 학장이었다.

계속해서 서로를 향해 날카로운 언사를 주고받으며 언쟁을 펼치는 에리카와 기드온.

기드온의 불같은 성격과 에리카의 차가운 말투는 그야말로 상극처럼 서로를 향해 쏘아지며 기 싸움을 벌였으나.

벌컥!

다시금 학장실 문이 열리며 들어온 한 소녀.

교복을 입고 있는 그녀에게 어딜 함부로 들어 오냐 일갈하려던 학장은 그대로 입을 벌린 채 굳었다.

왕가의 권위이자 자긍심을 상징하는 찬란한 금발. 이번 중간고사에서 당당하니 1학년 수석을 차지한 엘레노아 루덴 그리핀.

그녀는 고압적인 발걸음으로 에리카와 기드온 사이를 가로질러 서는 선언했다.

"최근 아카데미 내에서 말이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 자리의 엘레노아는 학생의 신분이 아니었다.

오롯이 공주로서, 자신의 위엄과 권위를 발휘하고 있었다.

"자그마치 제 오라버니인 폐하께서 인정한 데이우스 베르디에 대한 이야기더군요."

"아...."

"설마, 왕실 공인의 위령사를 함부로 대하진 않겠죠. 자그마치 흑마법사인 데이우스가 왕실 소속이 된 겁니다. 그만큼 폐하께서 그를 총애하신다고 충분히 생각이 닿을 수 있습니다."

에리카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발언에 힘을 실어주었다.

천천히 학장에게 다가간 엘레노아는 그를 바라보며 섬뜩하니 선언했다.

"저번 사건을 굳이 공론화하지 않는 걸로 이미 한 번 눈 감아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왕실의 의사를 무시하는 행위를 한다면...."

휙 하고 엘레노아는 몸을 틀며 단언했다.

"며칠 내로, 그 자리에서 내려오셔야 할 겁니다."

명백한 협박.

하지만 분명하게 설득력이 있으며, 따르지 않을 수 없는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학장은 녹아내리듯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숨을 내쉰다.

차라리 잘 됐다.

결정하기 힘들었는데, 이렇게 일방적으로 선택지를 하나로 좁혀줬으니까.

"데이우스 교수는 아카데미에 필요한 인재입니다. 파면은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그 말에 기드온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으나 그 역시 무슨 말도 할 수 없었다.

자그마치 공주가, 학생의 신분을 버리고 움직인 거니까.

학장의 답을 들은 엘레노아가 밖으로 나가기 직전, 힐끗 에리카를 바라본다.

"...?"

무슨 문제라도 있나 싶었으나, 엘레노아는 입술을 꾹 깨물고 문고리에 힘을 주며 벌컥 열었다.

"내가 이길 거야."

어느새 그녀는, 다시금 사랑을 하는 풋풋한 여학생으로 돌아와 있었다.

* * *

"끄으응!"

마차에서 내린 여인은 몸을 이리저리 풀면서 스트레칭을 한번 한다.

땋아서 어깨 위에 올려둔 머리카락은 특이하게도 고귀한 백은이 연상되는 색상이었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는 머리를 얼른 후드를 써서 감춘 후, 안경까지 깔끔하게 착용한다.

마지막으로 손에는 두꺼운 복음이 아닌 비교적 얇은 로맨스 소설.

순식간에 다른 인물이 된 그녀의 이름은 루치아 세인트.

그리핀 왕국에서는 국왕인 오르페우스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가장 유명하다고 말해도 될 신의 선택을 받은 여인.

성녀였다.

'그레이폰드라니 진짜 오랜만이네.'

교주들이 따로 마차를 준비해주겠다고 했으나, 그녀는 남은 일을 처리하느라 어쩔 수 없이 전용 마차를 보내고 정기적으로 운행하는 마차를 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쁘진 않았다.

덕분에 여유롭게 바깥 풍경도 보고, 오랜만에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으니까.

게다가 생각할 시간도 충분했다.

'흑마법사라.'

뜬금없이 흑마법사를 왕실 소속 마법사로서, 위령사라는 이름을 준 사건에 대해서 교주들은 성녀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곧 있을 시민공개의 대토론회에서 성녀인 자신이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입지를 공고히 다질 수 있다는 주교들의 얄팍한 계략이었다.

솔직히 이런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은 게 성녀의 솔직한 심정이었으나.

궁금하기는 궁금했다.

비밀리에 전해진 정보로는 자신도 해결하지 못한 엘레노아 공주의 악몽을 해결했으며, 그리핀 왕국에 잠들어 있던 악귀라는 존재까지 소멸시켰다 들었다.

'영혼을 위로해주는 자라는 의미에서 위령사겠지?'

자신이 아는 흑마법사들과는 조금 궤를 달리하는 인물일 듯했으나.

솔직히 성녀인 루치아는 회의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봐왔던 흑마법사들은 그야말로 이기적인 미치광이가 대부분이었으니까.

악의가 없고, 오롯이 연구 성과나 마법적 성취를 위한다는 게 더 질이 나빴다.

죄책감조차 없다는 소리이지 않은가.

'하아.'

시내를 걷기 시작하자, 곳곳에서 들려오는 시위 소리.

시민들은 용기를 내어 팻말을 들고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이고 있었는데, 팻말 내용들은 꽤나 과격했다.

- 국왕이 흑마법사에게 조종당한다.

- 우리의 땅은 악에 물들지 않는다.

- 철회하라. 간악한 악마에게 패배하지 말라.

- 여신께서 지켜보고 계신다.

등등.

극단적이다 못해 당장이라도 체포당해도 할 말이 없는 과격한 문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순교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거리로 나온 듯했으나.

"흐음?"

정작 왕국군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무력으로라도 진압하지 않을까 했으나 오히려 멀뚱히 지켜만 보고 있는 상황.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루치아는 거리의 분위기를 살피며 자연스럽게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메르센이라는 음식점.

점심 식사를 하기엔 조금 늦은 감이 없잖아 있으나, 그게 오히려 더 좋았다.

루치아가 그레이폰드에 오면 꼭 들리는 식당으로 맛집 중에서도 맛집이었다.

특히나 창가에 있는 자리에서 커피를 마시며 거리의 풍경을 보는 게 그녀에겐 소소한 행복 중 하나였다.

메르센의 주인장도 단골인 그녀를 보고는 눈웃음으로 인사를 건넨다.

정체를 알고 있지만, 모른 척해주는 고마운 사람이었다.

"아...."

평소에 앉는 자리로 싱글벙글하며 가던 루치아는 자신의 지정석에 누군가 앉아 있는 걸 보고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었다.

그곳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머리가 조금 길었기에, 뒷머리를 꽁지로 묶은 그는 겉보기에도 상당히 훤칠한 미남이었다.

왜인지 뺨에는 거즈가 붙어 있었는데, 누군가에게 맞은 것처럼도 보였다.

커피를 한 잔 시켜두고, 햇볕을 쬐며 차분하니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은 지나가는 뭇 여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기 충분했으나.

루치아에게 있어선 단순히 자신의 자리를 빼앗은 불청객일 뿐이었다.

'아쉽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루치아 자리라고 이름이 적힌 것도 아니고, 저 손님도 그냥 널리고 널린 자리 중 하나에 앉은 것뿐이니까.

그렇게 다른 자리를 찾아서 이동하려는 순간.

벌떡.

그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향했다.

커피잔과 책을 들고 가는 걸로 봐서는 자리가 났구나 싶어서 루치아는 냉큼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운이 좋네."

여신께서 동행해주시는 걸까?

그리 생각하며 메뉴판을 피고 행복한 고민을 하던 루치아였으나.

툭.

반대편 의자에 누군가 앉았다.

방금 그 남자가, 커피를 리필한 다음 앉은 채로 루치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달은 루치아는 얼른 일어나려 했으나.

남자는 루치아의 손에 들린 책을 보곤 담담하니 말했다.

"로즈 메리. 좋은 책입니다."

인상과 딱 맞아떨어지는 차분하면서도 일면에는 서늘함마저 담긴 목소리.

남자는 자신의 자리에 앉은 루치아를 크게 불편해하지 않고 눈짓하며 자신이 읽던 책의 북 커버를 벗긴다.

그것 역시, 로즈 메리의 최신권.

"아."

탄성과 함께 루치아가 묘한 표정을 짓자, 남자는 책을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

"마음에 드는 작가입니다. 루세 라는 이름의 필명을 쓰면서 공식적으로 얼굴을 보인 적 없으나, 꼭 한번 보고 싶은 작가이죠."

"그, 그렇군요...."

루치아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성녀임에도 불경하게도 몰래 연애 소설을 써서 연재 중인 입장이었기에.

루치아 세인트라는 이름과 성의 앞부분만을 따서 대충 만든 '루세'라는 필명이었기에.

막상 이렇게 자신의 애독자와 만나게 된 적은 처음이었기에.

루치아는 부끄러워하면서도 다시 자리에 앉았다.

Chapter 73 - 73. 그레이폰드의 휴일

"좋은 소설이죠."

과장되거나 화려한 포장 없는 남자의 덤덤한 목소리가 오히려 더욱 큰 칭찬처럼 느껴졌다.

저렇게 감정이 잔잔해 보이는 사람조차 좋다고 생각할 정도로, 로즈메리는 좋은 소설이라는 뜻이었으니까.

"그런가요? 혹시 어떤 점이 좋았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으세요?"

너무 뜬금없이 보였을까?

하지만 궁금해도 너무 궁금했다.

성녀로서 불순하게 로맨스 소설을 집필한다는 걸 알릴 수는 없었기에 이렇게 직접적으로 자신의 독자와 만난 적은 처음이었다.

편집부에서 반응이 좋다고 말을 해주긴 해도, 루치아는 직접적으로 독자의 의견이 듣고 싶었다.

"여자 주인공의 감정선 자체가 굉장히 다채롭고 풍부했죠. 특히나, 3장에서 나오는 레이첼과의 다툼은 썩 놀라웠습니다."

마치 준비해뒀다는 듯 소설의 내용을 풀어가면서도 진득하게 자신의 의견과 조금 아쉬운 부분까지 콕 집어 준다.

아쉬운 부분을 오히려 보완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머리에 집어넣은 루치아.

어느새 자연스럽게 합석을 하게 된 상황이지만 루치아는 썩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과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다.

신께서는 오늘의 이 만남을 자신을 위해 예비해두신 게 아니었을까?

이번엔 반대편인 남성이 물어왔다.

"숙녀분은 어느 부분이 가장 인상 깊으셨습니까?"

"아, 저요?"

작가인 나한테 글의 인상적인 부분을 물어오다니. 짓궂은 장난을 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으나 루치아는 나름 진지하게 고민했다.

"마지막 부분이요. 결국 메리가 사랑을 찾아서 자신의 모든 걸 버리고 떠나는 그 장면이 참 인상 깊었어요."

"...."

남자는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마치 작가의 바람처럼 느껴지던 부분이었습니다. 속세의 모든 걸 끊어버리고 자신의 마음 가는 곳으로 발걸음을 내딛고 싶은."

"아."

어쩜 이렇게 정확하게 자신의 의도를 알아차린 걸까.

루치아에게 있어 로즈메리의 주인공 메리는 자신의 마음속 이상을 투영한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괜히 마음이 들춰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자 부끄러움에 억지로 고개를 돌린 루치아.

카운터에서 시켰던 커피가 때마침 테이블 위에 놓인다. 서버는 뜻밖에도 만남의 장이 된 테이블을 보며 찡긋 윙크하며 가버렸다.

'그런 거 아닌데....'

이상한 오해를 하게 만들었구나 싶어 커피잔을 양손으로 쥐고 입가로 가져간다.

힐끔힐끔 커피를 마시는 척하면서 남자의 얼굴을 살핀다.

뺨에 붙어 있는 거즈는 상처를 감싸기 위함이었으나, 그걸 제외하고는 피부가 매끈하고 고왔다.

북부 사람들이 보통 순백색 피부가 많은 편인데 아마 그쪽 출신이 아닐까 싶었으며.

보면 볼수록 여러 여인을 울렸을 법한 외모였다. 성녀인 자신 역시 여러 미남들에게 구애 받아왔으나, 하나 같이 밝고 빛이 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는 정반대였다.

굳이 따지자면 달빛.

추상적이긴 해도, 그를 딱 봤을 때 연상되는 이미지는 고즈넉한 밤하늘에 옅게 내리쬐는 푸르스름한 달빛이 떠올랐다.

"앗 뜨!"

남자의 얼굴을 눈이 쫓았다보니 뜨거운 커피를 마신다는 걸 잊었다.

입안으로 울컥 치고 들어온 커피에 혀가 데이며 깜짝 놀란 루치아.

평소 같았으면 바로 신성력을 사용해서 치유했겠으나 지금은 정체를 숨기고 있기도 했고.

이상하게도 이 남자에게는 굳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싶지 않았다.

성녀나.

작가가 아닌.

그냥 사람과 사람으로서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렇기에 루치아는 쓰라림을 참으며 흘린 커피를 닦는다.

혀가 아리다며 살짝 내밀고 있자니 남자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으에?"

너무 뜬금없는 상황에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얼굴 앞에서 멈춘 그의 손은 참으로 고왔으며.

손끝에서 흘러나온 서리와 같은 한기가 조심스럽게 데인 혀를 감싸왔다.

자연스럽게 쓰라린 통증이 사라진다.

'마법사였구나.'

다시금 손을 뺀 남자는 덤덤하니 커피를 마신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세심한 배려가 고맙게 느껴졌다.

혀를 내밀고 있던 건 조금 부끄러웠지만.

그 뒤로도 두 사람의 대화는 꽤나 길게 이어졌다. 포근하면서도, 따듯한 시간.

목이 마르면 커피를 리필했고, 배가 고프면 빵과 케이크를 주문했다.

로즈메리를 통해서 투영된 작가의 마음을 감상평으로 쏟아내는 그를 보며, 누구도 모르는 자신의 이해자를 만난 기분이 들었다.

책 속에 집어넣은 자신의 욕망과 이상을 자연스럽게 풀어내면서도 폭넓게 이해하는 그의 현명함에 감탄했다.

책 이야기는 어느새 퍼지고 퍼져 단순 개인사 혹은 현 그레이폰드에 대한 생각 등.

화제는 끊이지 않았고 대화는 계속 이어졌으며, 루치아는 생각 이상으로 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그를 보며 놀랐다.

긴 대화가 이어짐에도 두 사람은 서로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마치 그것이 서로의 암묵적인 규칙이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졌으며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맞다는 하나의 증거처럼 여겨졌다.

썩 즐거운 시간은 어째서 이렇게 빠르게 흘러가는 걸까.

벌써 바깥은 어두워졌으며, 성녀인 자신은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실은 지금도 꽤나 선이 아슬아슬할 때까지 있었던 거니까.

"저는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루치아가 천천히 일어나자 반대편의 남자 역시 차분히 일어났다.

그는 약간의 탄식을 담아 중얼거린다.

"생각보다 즐거워 시간 가는 줄 몰랐군요."

그 역시, 자신과의 대화가 썩 유쾌했기에 억지로 시간을 이어왔던 걸까.

나쁘지 않았다.

슬며시 지어지는 미소를 감추며 루치아는 천천히 악수를 청했다.

순간 입술이 달싹거리며 여러 충동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쳤다.

정말 소설과 같은 이 만남을, 계속해서 이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름을 말해준다면, 다시 시간을 잡고 약속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성녀라는 입장을 생각하면 절대로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연애는 물론이고, 남성과 함께 개인적인 시간을 보낸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가십거리가 될 테고 그건 성녀라는 이미지에 큰 타격을 줄 테니까.

'하아.'

루치아는 솔직하게 인정하기로 했다. 미약하게나마 이성으로서 앞의 남자에게 끌리고 있음을.

사랑에 빠졌다는 말은 아니었으나, 그렇게 될 가능성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루치아의 고민을 알아차리지 못한 척 남자는 부드러이 악수했다.

그게 끝이었다.

서운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오히려 루치아의 고민을 남성이 미리 끊어준 기분이 들었다.

"언젠가, 신께서 인도하신다면 다시 만나길."

무뚝뚝하지만 그 안에 느껴지는 배려에 루치아 역시 부드러이 미소를 지어주었다.

"예, 신께서 인도하시겠지요."

그래, 만약 그와의 인연이 운명이라면. 신께서 진정 점지해주신 사람이라면 이렇게 끝나진 않겠지.

어디선가, 분명 다시 만날 수 있겠지.

두 남녀는 그렇게 함께 가게를 나와 각기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미련은 남지 않았다.

잠깐의 만남조차 실로 아름다울 수 있으며, 이별이 단순히 아련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기대가 될 수도 있다는 걸 루치아는 처음 깨달았다.

작가로서 경험해야 할 것을 경험한 기분. 당장이라도 펜을 놀리고 싶었으나 그럴 시간이 없었다.

그레이폰드에서 가장 거대한 교회 중 하나이자, 공식적으로 성녀가 소속되어 있는 장소.

정의를 관철하는 유스티아 여신을 섬기는 교회로 저울과 검을 든 여신의 동상이 뇌리에 강하게 남는 장소였다.

그리고 그 앞에, 웬일인지 붉은 겉옷에 후드를 걸치고 있는 자신의 오랜 친구가 서 있었다.

"어? 글로리아?"

"루치아!"

근위기사단장이 이렇게 교회 앞에서 서성거려도 되는 건가 싶었으나, 글로리아는 바로 루치아를 강하게 껴안으며 웃었다.

"오늘 온다고 해서 계속 기다렸는데 어디 갔었어!"

"아하하."

방금까지는 말 그대로 소설 속에 들어가 있었던 것만 같은 감각이었는데, 오랜 친구인 글로리아를 보니 이제야 찬물이 확 끼얹어지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싫진 않았다.

글로리아도 오랜만에 봐서 기쁘기도 하고.

"잠깐 누굴 좀 만나서. 너는 휴가라도 냈어?"

"응, 너 온다고 했으니까 하루만 빠져나왔지."

근위기사는 휴가도 사용하기 상당히 어렵다고 들었는데 꽤나 고생했을 친구를 오래 기다리게 만들었구나 싶었다.

"그런데 나 지금부터 할 일이 있는데...."

왕실에서 선택한 위령사를 대적하기 위해 온 성녀이다.

왕실 소속 근위기사단장인 글로리아와 함께 있으면 그림이 이상해진다.

그걸 알고 있기에 글로리아도 쓴웃음을 지으며 한 걸음 멀어진다.

"알고 있어. 그냥 너 보고 싶어서 왔던 거뿐이야."

어쩌다 보니 서로의 입장상 반대편에 서게 되었으나 그래도 두 사람의 친구라는 입지에 흔들림은 없었다.

"...혹시 위령사라는 사람도 만나봤어?"

이런 걸 물어도 괜찮은 건가 했으나, 크게 문제는 없는 글로리아는 묘한 표정으로 답했다.

"으음, 보긴 했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어. 사람이 엄청 과묵한데 능력은 또 뛰어나."

"...."

"솔직히, 흑마법사라는 선입견만 없으면. 썩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그, 래...."

잠시 고민에 빠진 루치아. 글로리아는 손을 휘적거리며 인사를 건넸다.

"나는 이만 가볼게, 힘내."

"응, 고마워."

그렇게 절친과의 아쉬운 헤어짐을 뒤로한 채.

루치아는 자신의 안경을 벗어 품에 넣었다. 후드를 벗어 자신의 은빛 머리색을 밝히며 교회 안으로 향한다.

"서, 성녀님!"

"성녀님이 오셨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환호성.

작가이자 친구이던 루치아는 이제 없다.

이곳에는 그리핀 왕국의 모든 악한 것을 정화하고, 신이 선택을 받은 고귀한 성녀.

루치아 세인트만이 있을 뿐이었다.

* * *

[실력 좋네요?]

"...."

[저는 난봉꾼이었다는 소문을 믿지 않았는데, 이런 거 보면 진짜였긴 한가 봐요.]

"...."

[저한테도 좀 그렇게 친절하시면 안 돼요?]

아까부터 성녀 루치아와 내가 시간을 보낸 게 불쾌한 듯 투덜거리던 흑령사.

혹시라도 걸릴 수 있기에 일부러 흑령사는 따로 멀리 떨어트려 놓았는데 어떻게 재주도 좋게 대화 소리는 들은 모양이었다.

[어차피 이제 싸워야 할 입장인데. 적보다는 늘 함께 있어 주고, 가르침도 주는 스승한테 좀 친절해야 하지 않나 싶네요.]

그냥 두면 아주 하루 종일 투덜거릴 기세였기에 나는 슬쩍 흑령사를 바라본다.

검은 천 너머로 그녀의 기대감이 담긴 미소가 보였으나.

"조용히 좀 있어라."

내가 짜증을 담아 한마디 하자 바로 토라져서는 어딘가로 가버렸다.

Chapter 74 - 74. 대토론회

왕실과 교회.

양측의 공방을 둔 대토론회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주제는 당연히 위령사인 데이우스 베르디의 필요성부터 시작해서 이단 여부 등등.

수많은 교단에서 워낙 많은 혐의를 가지고 들고 일어섰기에 제대로 나열하기도 힘들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교회 측에서도 온건파와 강경파가 나뉘어졌다.

온건파의 경우는 대토론회를 통해서 논파를 하자는 입장으로 성녀가 이쪽에 속해 있었다.

반대로 강경파의 경우에는 강력하게 들고 일어나서 당장에라도 데이우스를 끌어내려야 한다는 쪽이었다.

하지만 당연히 격렬한 강경파의 입지 쪽에 좁은 건 물론이거니와, 굳이 그렇게까지 나갈 필요가 없는 게 현 상황이었다.

아무리 흑마법사가 왕실에 똬리를 틀고 있는 모습을 보기 힘들다고 해도 강경파는 반쯤 반역을 하자는 소리나 다름없었으니까.

'말도 안 되죠.'

시대가 어느 때인데.

대토론회는 시민들도 볼 수 있는 자유공개였다.

이는 교회 측의 제안이었는데 설마 왕실에서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

어쨌든 루치아는 위령사라는 남자의 행보를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었다.

단순히 거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자신이 봐왔던 흑마법사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설파할 생각이었다.

이기적이면서도 자신밖에 모르는 인간과는 다른 종족처럼 느껴지는 섬뜩한 분위기.

물론, 흑마법사라고 다 똑같은 건 아니겠으나 아직 시민들이 받아들이기엔 흑마법사란 존재는 너무 일렀다.

'차라리 교회 측에 미리 얘기를 하셨으면 이렇게 공개적으로 대척하는 그림은 안 나왔을 텐데.'

그게 못내 아쉽다가도 또 아닌가 싶기도 했다.

'쩝, 완고한 주교님들이라면 절대로 안 된다고 했을 수도.'

애초에 이런 안건이 올라오기도 전에 묵살됐을 수도 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니 이렇게 기습적으로 위령사를 세운 건 왕실 나름의 작전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시민들이 납득할 수 있게 설득을 할 수 있다는 걸까?

결국 토론회란 상대방보다는 민중을 설득시키는 싸움이다.

당장에는 교회가 시민들을 등에 업고 있었기에 자신 있었으나, 왕실 측에서 과하게 모든 걸 받아주는 현 상황이 조금 불안하기도 했다.

"흐음."

고개를 갸웃거리며 루치아는 자신의 턱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린다.

고민을 아무리 해도, 왕실에서 주교뿐만 아니라 선입견이 콱콱 박혀 있는 시민들은 어떻게 설득할지 그게 의문이었다.

"누군지 몰라도 얼굴 한번 팔리면 왕국에서 살기 힘들 텐데."

위령사 데이우스 베르디.

노스웨든에서 살아가는 백작의 남동생. 로베른 아카데미의 교수라는 소문은 벌써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흐으음."

복잡하다는 표정을 짓던 루치아가 괜히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스트레칭을 하던 순간.

"성녀님, 추가 자료 얻어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신자의 품에 가득 담긴 종이다발. 교회 측에서 이번 일에 얼마나 진심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아이구."

하지만 그걸 읽어야 하는 입장에서는 끔찍했다.

이래서는 복음보다도 데이우스 베르디에 대한 정보를 더 빠삭하게 알게 될 것만 같았다.

"여기 그가 로베른 아카데미에 냈던 이력서입니다."

"이력서?"

생각해보니 얼굴도 보지 못했구나 싶어서 바로 받아 든 루치아.

이래도 괜찮나 싶을 정도로 텅 비어있는 이력들을 무시한 채로 맨 위에 붙어있는 사진을 보는 순간.

"어...?"

루치아의 표정이 기괴하리만치 일그러졌다.

* * *

"키야! 장난 아닌데?"

어느새 왕실 입구까지 밀려온 시민들을 보며 혀를 내두르는 핀덴아이.

그들은 하나 같이 과격한 언어가 담긴 팻말을 들고 흔들면서 왕실의 어리석음과 억척스러움을 비판했다.

"괜히 보지 마. 기분만 나빠져."

반쯤 소파에 눕듯이 앉아 있는 데이아가 투덜거리자 핀덴아이는 씨익 웃으면서 답했다.

"그리핀은 참 살기 좋은 나라야."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이냐며 슬쩍 고개를 든 데이아. 핀덴아이의 핏빛 눈동자에는 묘한 회의감이 담겨 있었다.

"저 지랄을 해도 왕이 칼을 뽑아 들지 않잖아. 클락 공화국에서는 이미 저것들 혀 뽑히고 손가락이랑 다리 잘려서 산 채로 도시에 효수됐을걸."

"으윽, 진짜로 그런다고?"

반쯤 괴담처럼 전해져 오는 클락 공화국의 잔혹한 철권통치. 데이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답했으나 핀덴아이는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공화국은 게임에서도 잔혹한 장소로 나올 뿐 큰 비중은 없었기에 나도 잘 모르는 장소였다.

하지만 알면 알수록 전혀 가고 싶지 않아지는 곳이기도 했다.

나는 뺨에 붙은 거즈를 떼어냈다. 며칠 전까지 느껴지던 욱신거림은 이제 사라졌다.

"이제 좀 괜찮아?"

괜히 관심 없는 척 시선은 다른 곳으로 돌리며 물어오는 데이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 말라고 답했다.

그러자 핀덴아이는 재밌었다며 킥킥거리고 웃어댄다.

"아주 시원하게 때리고 갔지? 미안해하면서도 속으로는 엄청 통쾌했을걸?"

"...."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리우스가 내 뺨에 주먹질을 하면서 은근슬쩍 입꼬리가 올라가던 걸 봤으니까.

노스웨든을 오래 비워둘 수 없는 입장인 다리우스는 이미 며칠 전 떠났다.

그 전에, 내 뺨에 상처가 남을 정도로 주먹으로 강하게 치고 가라고 했다.

필요에 의해서였다.

"토론회 전에 나아서 다행이군."

토론회에서도 거즈를 붙이고 나갔다가는 첫인상부터 망가진 채로 시작했을 거다.

참고로 아리아도 아카데미로 떠났다.

한사코 나와 함께 있겠다는 걸 억지로 떼어내면서 보냈다. 나도 아카데미로 합류할 거라는 약속과 함께 학생은 학생답게 있어야 가장 아름답다고 해줬더니 금세 가버렸다.

원래라면 데이아도 다리우스와 함께 떠나야 했으나.

오랜만의 휴가를 즐기고 싶다면서 그레이폰드에 남았다.

솔직히 위험할 수도 있기에 가능하면 떠났으면 했으나. 뭐, 어쩔 수 없지.

"캬, 내일 토론회 겁나 기대되네."

흥얼거리는 핀덴아이. 실은 그녀가 기대하고 있는 건 토론회가 아니라 그 다음일 것이다.

아마 그때부터는 암살자들이 사방에서 몰려오지 않을까?

왕실에 있더라도 순교라는 이름으로 신앙에 목숨을 걸고 뛰어드는 놈들이 태반일 것이다.

그만큼 내일 있을 토론회는 혼돈과 불신의 향연일 테니까.

"...."

문득, 성녀인 루치아가 떠올랐다.

그녀는 게임에서 내가 봤던 것처럼 친절하면서도 풋풋한. 또 순박하지만 신념이 굳건한 여인이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토론 상대가 나라는 걸 알아차렸겠지.

그녀와는 미리 만나둘 필요가 있었다.

어떠한 판단을 하기도 전에, 아무런 선입견도 없는 상태에서의 나를 만났다.

충분히 좋은 이미지로 각인된 상태이기에 단순히 흑마법사라고 악하다 단정하며 토론에 임할 수는 없을 거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길 거다.'

비겁하다고 할 수도 있으나, 그만큼이나 이번 일에서 성녀의 입장은 중요했다.

그녀가 무조건적으로 나를 적대하는 게 아니라 조금이라도 어중간한 위치를 잡는 순간.

이쪽은 승기를 굳힐 생각이었다.

* * *

다음날.

왕실과 교회 측의 대토론회가 벌어지는 장소는 우습게도 내가 이미 한번 가봤던 장소.

바로 그레이폰드 처형장이었다.

콜로세움을 모티브로서 만들어진 좌석에 빽빽하니 들어선 사람들. 꽤나 공들여 준비했는지 단순 처형장이던 정중앙에는 토론을 펼칠 수 있게 거대한 무대와 더불어 원형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어휴, 엄청 빡세네."

"설마 그렇게까지 막아설 줄은 몰랐어."

식은땀을 닦아내는 핀덴아이와 데이아. 우리가 왕실에서 처형장까지 마차를 타고 가는 걸 방해하던 시민들이 꽤나 있었기에 그걸 치우고 오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오르페우스 국왕과 알프레도 대마법사는 이미 귀빈들이 있는 장소에서 토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귀족들끼리도 꽤나 편이 갈렸는지 귀빈석에 있는 저들끼리도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

국왕과 대마법사는 모든 소란과 비난의 시선 속에서도 억지로 침묵을 선택했다.

굳이 자신들이 지금 힘을 빼며 목소리를 높이거나, 무례하다며 처벌을 내리진 않을 거다.

왜나면 오늘 있을 대토론회가 끝나면, 결국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서는 왕의 눈치만 살살 보고 있을 테니까.

현명한 국왕은 역전의 때를 기다리며 침묵하고 있으나, 머릿속에서는 목소리 큰 자들의 이름을 적는 명단을 작성하고 있을 것이다.

"저쪽은 이미 나왔는데?"

데이아가 손으로 토론장 쪽을 가리킨다. 각 신들을 섬기는 주교들.

그리고 중앙에 서 있는 성녀 루치아 세인트.

음식점 메르헨에서 봤을 때랑은 확연히 다른 분위기.

당시에는 땋아뒀던 은발을 이번에는 풀어헤친 채로 두 손을 모으고 기도 중이었다.

나는 준비해온 종이 뭉치와 토론 도중 마실 철제 물병을 챙겨 들었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핀덴아이와 데이아가 나를 보며 웃어주고 있었다.

"저것들 다 족쳐버리고 와."

"솔직히 교회랑 적대하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닌데, 해야 하면 아예 박살을 내버려."

나름의 응원을 들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향했다.

"우우우우!"

"꺼져라아아아!"

"그리핀 왕국에 흑마법사가 서 있을 장소는 없다아아!"

"처형해라! 처형!"

쏟아지는 야유.

심지어는 쓰레기나 음식물을 던지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마도심판관들의 보호마법이 자연스럽게 그것들로부터 나를 지켰다.

결국 토론회장 앞에 선 나는 주교들의 냉담한 시선 속에서도.

혼자서 갈피를 잡지 못한 듯 나를 보고 있는 루치아와 눈을 마주쳤다.

Chapter 75 - 75. 신의 뜻

토론에 나선 주교들은 하나 같이 유명한 얼굴들뿐이었다.

당장에 정의를 담당하는 유스티아 여신을 섬기는 성녀 루치아 세인트부터 시작해서.

화로와 불을 담당하는 헤르티아 여신, 축제와 기쁨의 신 벨라스, 풍요와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 번개와 구름의 신 라이제르 등등.

수많은 유명 신들을 섬기는 주교들이 하나 같이 자리에 착석한 상태로 나를 마음에 안 든다며 노려보고 있었다.

저들에게 있어 나는 당장이라도 교수형에 처해야 하는 죄인이나 다름없겠지.

비단 날카로운 시선은 주교들에게서만 오는 건 아니었다.

시민들은 조금만 풀어줘도 횃불을 들고 와서는 나를 태워야 한다면서 소리를 질러댈 정도로 폭주 중이었다.

그 와중에도 성녀는 차분하게 내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문득 며칠 전 음식점에서의 마지막 인사가 떠오르는 장면이었다.

"오랜만입니다."

내가 그때와 똑같은 말투로 속삭이자 루치아는 무표정하니 내게 물어왔다.

"알고, 있었나요?"

"...."

시민들 사이에서 성녀님의 손이 더럽혀진다고 격노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왔기에 나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놓았다.

사회자를 맡은 대마법사의 제자 중 하나가 헛기침하며 마이크를 잡는다.

사용자의 마나를 이용해서 목소리를 크게 울리게 만들어주는 방식의 도구였다.

"자, 그럼. 토론을 시작하기에 앞서. 주제에 대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토론의 주제는 위령사인 나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에 대한 얘기였다.

당연히 벌써부터 우레와 같은 야유와 함께 처형을 집행하라는 소리가 또 터져 나왔으나.

"지금부터 원활한 토론을 위하여, 대마법사님께서 토론회장에 사일런스 마법을 거시겠습니다."

귀빈석에서 벌떡 일어난 대마법사의 찬란한 마법이 펼쳐진다.

좌중은 입을 열고 뭐라 소리를 지르고 있었으나 강제적 침묵을 하게 되었고 결국 제풀에 지쳐 다물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야 고요해진 토론회장.

먼저 발언한 건 헤르티아 여신을 섬기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주교였다.

마이크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고는 입을 연다.

"헤르티아 여신님을 섬기는 멕도렌 피르엔체입니다. 여러분, 저는 애초에 이 토론 자체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강렬하면서도 단호한 발언에 일각에서 박수갈채가 쏟아져 나온다. 물론, 행동만 보일 뿐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그리핀 왕국이 지금까지 어떻게 이어져 왔다고 생각하십니까?"

다 늙은 줄로만 알았던 멕도렌의 눈동자는 아직도 열정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괜히 화로의 여신 헤르티아를 섬기는 주교가 아니었다.

"흑마법사가 없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겁니다. 시체를 일으키고, 사람의 피를 마시며, 신의 곁으로 향해야 할 영혼을 착취하는 괴인들을 원천에서 봉쇄했기 때문입니다."

"...."

"흑마법사들에게 그리핀 왕국은 불모의 땅으로 불립니다. 그들은 저희의 땅으로 발을 내딛는 것 자체를 두려워합니다."

쾅.

초장부터 기를 확실히 죽이겠다며 책상을 주먹으로 후려치는 멕도렌.

"그렇기에 그리핀은 안전했으며, 무탈하게 지금까지 이어져 올 수 있었던 겁니다. 만약 위령사라는 저 남자를 받아들인다면, 다른 흑마법사들도 신성한 그리핀의 땅을 기웃거리기 시작할 게 분명합니다!"

나 하나를 받아들이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다른 흑마법사들도 점차 그리핀으로 들어오기 시작할 거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쯧, 토론회장이 아니라 청문회가 되어버렸군.'

처음부터 감정적으로 격하게 나오니 자연스럽게 나를 비판하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저쪽에서 준비해온 수작질인 듯했으며, 관중들은 연신 환호하며 멕도렌의 말에 동의했다.

차례가 끝나고, 발언기회를 얻게 된 나는 마이크를 집었다.

"흑마법사가 없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말은 일부 동의합니다."

실제로 흑마법사들은 대부분이 괴인이라 말해도 될 정도로 기이한 인간들이었으니까.

하지만 독초도 약이 될 때가 있다.

덩치를 불린 그리핀은 이제, 흑마법사라는 독초도 약초로 사용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럴 수 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현재 왕국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현상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몇몇 주교들이 찔린다는 듯 고개를 휙 돌린다. 허나 성녀 루치아만큼은 내 말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녀는 그야말로 기현상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존재였으니까.

"동쪽 이스트솔라에서 10명의 마을사람이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동시에 죽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마나로 이루어진 거대한 화면이 띄워진다. 잔혹한 사건의 사진이었다.

전생에서처럼 PPT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쪽 세상에선 그림을 띄우는 게 고작이었다.

"이건 서쪽 페르난에서 발견된 몸통만 남은 시체입니다. 각기 사지는 왕국의 동서남북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거리상 불가능에 가까워 보이는 살인사건. 인상적인 건 한 사람의 신체임에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사망 시각이 각기 다르게 나왔다는 점이었다.

"당장에 그리핀에도 동냥하던 죽은 소년이 계속 쫓아다닌다며 괴로워하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주교님들은 아시겠죠?"

내 말에 주교들은 헛기침을 하며 괜히 못 들은 척한다.

"신성력이 없는 주교님들이 눈과 귀를 닫고 무시한 사건, 제가 해결했습니다."

내가 며칠 전 해결해준 사건으로 원래는 교회 측에 방문했지만, 그들이 해결하지 못해서 목숨을 걸고 왕실로 방문했던 여인이다.

"이렇듯 현재 그리핀 왕국에는 원인모를 미제 사건들이 즐비해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계속해서 넘어가는 잔혹한 사진들에 시민들의 입은 점차 다물어지고, 아이와 함께 있는 사람들은 눈을 가려준다.

"그동안 잘 해왔다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보장할 순 없습니다. 당장에 옆 나라인 클락 공화국이나 제르만 왕국에서는 벌써 흑마법사를 군용으로 사용하는 추세도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건 그리핀 왕국만이 흑마법사를 과하게 탄압한다는 거였다.

"계속 무지한 채로 있다가는 결국 도태되고 말 것입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이번에는 벨라스 신을 섬기는 주교가 마이크를 잡았다.

"우습군요!"

이제 시작된 청문회와 비슷한 토론.

우리는 일진일퇴의 공방을 주고받는 것처럼 계속해서 마이크를 잡고 설전을 나누었다.

"여기 보이십니까? 시체를 사용하고, 피를 뽑아대던 흑마법사가 만든 참상입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흑마법사의 야만적인 행실은 오늘 다 보여드릴 수 없을 정도로 수없이 널려있습니다!"

주교들이 그동안 흑마법사가 자신들에게 보여준 일을 가지고 나를 물고 늘어진다면.

"성급히 일반화하지 마시죠. 모든 흑마법사가 그런 건 아닙니다. 대표적으로 제르만 왕국에 있는 콜트먼이라는 흑마법사는 선한 행실로 모두에게 귀감이 되는 남자입니다."

나는 모든 흑마법사가 그런 건 아니라고 반박한다.

"헤랄하자드가 만들고 간 200년 전의 참상을 벌써 잊었단 말입니까! 우리는 그날의 역사를 잊어선 안 됩니다!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의 과거를 잊는 순간, 우리의 정체성이 훼손되는 것입니다!"

200년 전.

왕국이 흑마법사를 더욱 과격하게 탄압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사건을 들먹인다면.

"당시에도 그리핀 왕국은 흑마법사를 향한 차별이 즐비해있던 시기입니다. 당시 흑마법사에 대한 지식이 더 있었다면, 왕국군은 잘못된 작전으로 시체를 제공하거나 하지 않았을 겁니다."

나 역시, 당시의 시대상으로 반박한다.

"역사를 잊어선 안 된다. 실로 옳은 말씀입니다. 허나, 단순히 기억만 하고 있으면 후회하는 자일 뿐입니다. 선조들의 피 흘림을 답습하지 않고자 배우고, 깨달으며, 나아가야 합니다. 흑마법이 두렵기에, 더욱 그것을 자세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목이 따끔거렸다.

물병으로 눈이 갔으나, 아직 마실 차례는 아니었다.

"그리핀 왕국에서 가장 많은 신자가 있는 건 정의의 여신 유스티아 님이십니다. 망자는 모두 여신의 품에 안기게 됩니다. 당신네 흑마법사들은 결국 그러한 여신을 정면으로 부인하고 있을 뿐입니다."

종교적인 교리를 들먹인다면.

"적당히 하시죠. 지금 우리는 그리핀 왕국에 흑마법사가 필요한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여신의 뜻은 실로 중대하나. 이 나라의 최고 통수권자는 유스티아 여신이 아닌, 오르페우스 루덴 그리핀 전하라는 걸 잊지 마셔야 할 겁니다."

나는 왕가의 권위를 가지고 반박한다.

계속해서 서로를 향해 펀치를 주고받는 상황. 당장에 흐름은 내게 유리하게 보였으나, 중요한 건 시민들의 시선이었다.

아무리 대화를 이어가고, 논리적으로 반박하더라도 결국 시민들의 고까운 시선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걸 알기에 주교들도 억지스럽더라도 더욱 강렬하게 침을 튀기며 나를 향해 비판하고 있는 중이었다.

논쟁을 소규모의 전투로 친다면, 이쪽의 연전연승이었으나.

결국 토론이자 청문회로 변절되어 버린 이 자리의 승자는 교회 측이 될 게 뻔해 보였다.

모든 사람이 신을 믿는 건 아니다.

당연히 이 자리에 있는 관객들 중 신을 믿지 않는 사람도 있겠으나.

흑마법사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게 상당히 큰 차이가 되어 아무리 좁히려 해도 좁힐 수 없는 입장차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말하면 말할수록 그리핀 왕국에 담긴 흑마법사를 향한 원망이 뼈저리게 느껴지는 상황.

여기서 지금껏 입을 다물고 있던 성녀 루치아가 천천히 일어나 마이크를 잡았다.

주교들은 마지막 한방을 때리라며 팔짱을 끼고는 호기롭게 그녀를 바라 본다.

나와 눈이 마주친 루치아.

이런 자리에서 만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그녀도, 이제는 안정을 찾은 뒤 차분히 입을 열었다.

"당신의 뜻은 알겠습니다. 흑마법사라는 존재에게 과한 선입견이 씌워져, 왕국 전체가 이야기도 듣지 않고 혐오했다."

"...."

"또한 우리에게 변화가 필요하다. 저 역시 실로 동의합니다. 왕국 각지에서 일어나는 기현상을 해결하는 존재는 저 혼자만으론 부족하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고 뒤에 덧붙이는 루치아.

"그렇다 하여도, 과연 시민들이 당신을 믿을 수 있을까요? 폐하께서 공인하셨다 하더라도, 결국 우리의 안에 짙게 깔린 선입견은 부술 수 없습니다."

어찌 보면 불경하다 할 수 있는 발언이었으나, 그야말로 신의 선택을 받았다 일컬음 받는 성녀이기에 가능한 말이었다.

"위령사. 죽은 혼을 달래주는 자라 들었습니다. 필요할지라도, 당신의 손길을 달갑게 반기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겁니다. 죽은 가족을, 애인을, 친구를 가지고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요."

"...."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리핀 왕국에서 당신은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주교들 중 몇몇이 귀빈석. 그러니까 오르페우스 국왕 쪽을 힐끔힐끔 바라 본다.

그가 일갈하며 함부로 판단하느냐 외쳐도 할 말이 없겠으나.

아직도 국왕은 차분하니 회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러분이 저를 믿을 수 없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사실 이번 토론을 통해서 나를 믿어주길 바란 건 아니었다.

단순히 무대가 필요했을 뿐이지.

나는 테이블 위에 놓아둔 물병을 통해서 목을 축인다. 천천히 스며들어오는 포도주가 묘하게 내장을 뒤틀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마이크를 잡고 앞으로 나선다.

나를 올곧게 노려보고 있는 성녀를 향해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성녀님은 어떻게 성녀가 되셨죠?"

"...유스티아 여신께서 저를 지명하셨고, 그 증거인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뜬금없다며 묘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는 성녀.

나는 그 대답에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기껏해야 수녀원에서 일하시던 루치아 님께서는 어느 날 문득, 신의 선택을 받고 신성력을 얻게 되어 갑자기 성녀가 되었습니다."

파도처럼 술렁거리는 관중들.

소리가 차단되어 있지 않았으면 다음 말을 내뱉기까지 꽤나 큰 소란이 있었을 거다.

"어떤 능력을 보였던 것도 아닙니다. 대단한 성과를 보였던 것도 아닙니다. 그리핀 시민들이 성녀님을 알고 있던 것도 아닙니다."

"...."

"단순히 신에게 선택을 받았기에,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당신을 성녀라 추앙하고, 칭송하며, 아낌없는 찬사와 믿음을 보냅니다."

"감히 신의 선택을 모욕하는 겁니까!"

"어딜 함부로 입을 놀리느냐 악마야!"

"그 본성을 드디어 보이는구나!"

성녀의 뒤에 있던 주교들은 기회라 생각했는지 하나 같이 얼굴을 붉히고 침을 튀겨대며 외친다.

내가 신을 모욕했다는 걸 절대 놓치지 않고 꼬투리 잡겠다는 의지가 보였으나.

"무슨, 의미시죠."

성녀인 루치아만큼은 또렷이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이 이상은 한계였다.

속이 끓어오르고, 몸에서 거부반응이 일어났기에.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찬란한 하얀빛이 내 손에서 뿜어져 나온다.

그야말로 지고지순한 순백.

사람에게 위로와 사랑 또한 신의 증거라 여겨지는.

대륙에서 유일하게 한 사람만이 사용할 수 있는 신의 자비.

"신, 성력...?"

그 주인이라 부를 수 있는 루치아의 떨려오는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생생하니 회장 전체로 퍼져 나간다.

벙찐 표정으로 혼란에 빠진 주교들과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보는 성녀, 놀라서는 아무런 반응도 못한채 굳어 있는 시민들.

그리고 빙그레 올라가는 나의 입꼬리.

종교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다.

보통 현대에서 과학과 종교가 대립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나, 실은 두 가지는 궤를 달리했다.

과학은 탐구하고 변화하나.

종교는 굳건하며 흔들리지 않는다.

과학은 새로운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면 낡은 것을 폐기한다.

종교는 새로운 상황이 벌어지면, 기존에 있던 신앙의 틀에 어떻게든 맞추려 든다.

복음은 곧 진리이니.

신께서 내려주신 신성력을, 저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기에 나는 이 자리로 오는 단 한 순간도 부담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시민들은 나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당연하다.

그런데 어쩌라는 소리인가.

나의 존재를 해석하고, 믿음을 주고, 설명하는 건 내가 할 일이 아니었다.

신의 말씀을 따른다며 배만 부른 채로 자리에 앉아있는 저치들이 할 일이지.

"저는 데이우스 베르디. 노스웨든 변경백의 남동생이며, 흑마법사 중에서도 영혼과 동행하는 사령술사."

거창하지 않게 스스로를 소개한다. 그리핀 왕국의 누구라도 듣는 순간 치를 떨 소개문이지만.

"그리고."

그 뒤에, 당신들이 절대로 눈을 돌릴 수 없는 한마디를 덧붙인다.

"신께서 선택하신 사람입니다."

실로 유쾌했기에 웃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너희에게 문제를 줬다.

답은 나도 모르겠으나, 짜맞추는 건 너희의 몫이었다.

신의 뜻은 무엇일까?

Chapter 76 - 76. 서로의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