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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50

40화

시선이 마주친 짧은 순간.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메세지를 마주하고서, 눈앞의 헌터를 멍하니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저런 메세지가 떠오른 것인지 전혀 짐작조차 가지 않았던 탓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공항 밖으로 사라지기 시작한 아서의 모습에, 내 카메라는 분주하게 그 뒷모습을 쫓아갔다.

"······."

새로운 성좌로부터의 시선.

그리고 그와 함께 나타난 아서 테브란트.

과연 검성과 성좌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나에게 그러한 의문만을 남겨두고서, 아서 테브란트는 빠른 속도로 공항을 벗어났다.

내 주변을 가득채웠던 수많은 인파들 역시, 그런 검성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는 모습이었다.

'외부로부터의 접근을 거부했다고? 대체 어디에 대한 접근인거지? 설마 커뮤니티인건가?'

그렇게 아서가 사라진 자리에 남아있던 내가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던 도중.

스윽-.

어느덧 한산해진 내 옆에서 최우현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유호야. 너 뭐하냐?"

최우현은 멍하니 서있던 내 어깨를 잡고 흔드는 모습이었다.

내가 검성의 움직임조차도 신경쓰지 않은 채, 제자리에 남아있었던 까닭이었다.

그런 최우현의 모습에 나는 가볍게 머리를 털며 이야기했다.

"······잠깐 생각할게 좀 있어서."

"아서 테브란트를 앞에 두고서 무슨 생각을 해.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기회인데."

"실물로 만나니까 확실히 다르긴 하네."

"그렇지?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주선호와 비교될만한 인물이잖아."

최우현은 아서의 분위기에 상당히 감명받은 모양이었다.

허나 내 시선은 여전히 그가 아닌 다른 곳에 팔려있었다.

성좌, 황금의 라스테리오.

그는 어떠한 존재인가.

그러한 내 의문을 풀어줄만한 인물은, 어떻게 생각해도 아서 본인 이외에는 없을 터였다.

* * * * * *

그날 저녁.

나는 한국에 들어온 아서의 커뮤니티 닉네임, 'ronaldo_7'으로부터 연락을 받게 되었다.

이제서야 첫날의 일정을 마치고 호텔에 짐을 푼 것이었을까.

그는 나에게 1:1 대화를 통해 메세지를 보내왔던 것이다.

- ronaldo_7 : 방금전에 호텔에 짐 풀었어.

- ronaldo_7 : 오늘은 아마 별다른 일정은 없을 것 같아.

- ronaldo_7 : 시간 괜찮으면 저녁이라도 먹으면서 이야기할까?

검성이 나에게 보내온 메세지의 내용.

그것은 시간이 괜찮으면 같이 저녁이라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자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저녁식사를 하면서 한국에서의 일정에 대해 의논할 모양이었다.

그를 겸해 커뮤니티로만 접하던 다른 나라의 S급 헌터와 만남을 가지려는 것이 분명했다.

물론 아서에게는 무척 안타깝게도 나는 S급 헌터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당연히 가야지. 카메라도 충전해놨는데."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는 제안이었다.

검성과의 촬영은 헌터 유튜브에 있어서 치트키나 다름없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성좌와 관련된 일을 생각해서라도 한번쯤은 이야기를 나눠봐야겠지."

더군다나 아서는 오지아와 마찬가지로 성좌의 눈길을 받고 있는 존재였다.

아서로부터 성좌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렇기에 나는 검성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 거품판독기 : 나야 괜찮은데

- 거품판독기 : 어디로 가면 돼?

- ronaldo_7 : 내 호텔 주소야.

- ronaldo_7 : (사진)

- ronaldo_7 : 저 옆쪽 골목에 적당히 변장하고 숨어있을테니까 찾아와.

내가 'ronaldo_7'을 향해 약속장소를 물어보, 그는 자신이 머무는 호텔의 주소를 사진으로 찍어보내는 모습이었다.

장충동에 있는 5성급 호텔이었다.

저녁식사라는 점을 생각하면 택시를 타고 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장충동이라. 택시나 타고 갈까."

목적지를 확인한 나는 곧바로 카메라를 챙겨들었다.

그리고는 아서를 향해 그쪽으로 향하겠다는 메세지를 보냈다.

- 거품판독기 : 1시간정도 뒤에 도착할거야

- 거품판독기 : 그때쯤에 나와서 이야기해

- ronaldo_7 : 나야 문제없지.

- ronaldo_7 : 밥은 내가 살테니까 걱정하지말고 찾아오라고.

- ronaldo_7 : SIUUUUUUUU

내 메세지에 대한 아서의 답장은 상당히 에너지가 충만한 편이었다.

직접 대면하면 의외로 피곤한 스타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내 머릿속에서 들 정도로 말이다.

"진짜 현실에서 보이는 검성의 이미지랑 완전히 다르네."

공항에서 보았던 아서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누가 보더라도 범상치 않은 힘을 가진 검성처럼 보였던 아서의 모습.

허나 커뮤니티에서 하루종일 축구얘기만 하고 있는 'ronaldo_7'은 그와 완전히 정반대였다.

내가 처음으로 'ronaldo_7'의 정체를 알게 되었을 때부터, 검성에 대한 이미지가 완전히 무너져내렸으니까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이쪽도 범상치 않은건 마찬가지이기도 했다.

"사적인 자리에서 보면 또 다를지도 모르겠네."

과연 신창 주선호의 영원한 라이벌은 어떤 모습을 보일 것인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카메라를 챙겨 집을 나섰다.

철컥-.

경쾌한 소리를 내며 열린 현관문의 너머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 * * * * *

어떤 사람이라도 그 사람을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패션이 있는 법이다.

내가 검귀 천시예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선글라스를 포함한 사복차림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아서 테브란트의 복장은 내 머릿속의 이미지와 완전히 딴판이었다.

그는 지금 벙거지 모자와 선글라스로 무장한 채 밖에 나와있었으니까 말이다.

"처음 마주하는거지? 이렇게 현실에서 보니까 또 느낌이 다르네. 아, 한국어로 말해야 이해하려나?"

검성, 아서 테브란트.

벙거지 모자를 깊게 눌러쓴 그는 선글라스 너머로 나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그는 나에게 한국어를 사용해야하는지 걱정했지만, 그의 걱정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커뮤니티의 [자동번역 기능] 덕분에 의사소통에는 서로 문제가 없었으니까 말이다.

"어느쪽이든 상관없어.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으니까."

"······이거 뭐야?"

그런 내 의사를 전달받은 것일까.

나를 바라보던 아서의 표정이 갑작스럽게 딱딱하게 굳었다.

나와 그 사이에 어떤 기능이 작동하고 있는지 이해한 모양이었다.

그는 입을 쩍 벌린 채로 자신의 귀를 어루만지더니, 이내 나를 향해서 흥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설마 서로 다른 언어로 이야기해도 의사소통이 가능한거야?"

"커뮤니티에 소속되어있는 인원이라면, 언어에 상관없이 얼마든지 가능하겠지."

"대체 어떻게 이런걸 찾아낸거야?"

커뮤니티의 [자동번역 기능].

그 실체를 확인한 아서가 자신의 귀에 가져다대던 손을 내렸다.

천시예도 처음에 비슷한 반응을 보였던만큼, 아서에게도 무척이나 신기하게 다가올 터였다.

"내 생각보다도 대단한걸 알고 있었네. 역시 한국에 찾아오길 잘한 것 같아."

새로운 기능에 대한 확인이 끝난 것이었을까.

옅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아서가 나를 향해 손을 내밀어왔다.

악수를 청하는 손길이었다.

내가 그런 아서의 손을 맞잡자, 그는 격렬한 악수를 하며 나에게 이야기했다.

"아서 테브란트야. 만나서 반가워."

"신유호. 편한대로 불러."

나와 아서는 서로 악수를 하면서 통성명을 했다.

내가 자신의 이름을 아서에게 밝히자, 아서는 그런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었다.

"처음 듣는 이름이네? 그래도 일단은 우리 커뮤니티 동료니까, 그 이상 캐묻거나 하지는 않을게."

"······뭐, 사람한테는 저마다 사연이 있는 법이지."

아서는 내 이름을 처음 들어본다고 이야기했지만, 정확히 그 이유를 캐묻지는 않는 모습이었다.

나름대로 내 이름이 알려져있지 않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번 만남도 명목상은 내가 그를 배려해서 나온 것이었으니, 아서 나름대로 깊게 파고들 생각은 없을 터였다.

그렇게 아서와 짧은 통성명을 마친 내가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려던 찰나.

- 성좌 [황금의 라스테리오]가 당신을 강하게 주시합니다.

- 접근이 거부되었습니다.

이전에 마주했던 메세지가 다시 한 번 눈앞에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성좌가 나에게 보내는 시선.

그리고 성좌에 대한 접근 거부.

의도를 알 수 없는 메세지의 연쇄에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아서 테브란트."

"너도 눈치챈거구나?"

그런 내 시선에 무언가 짚히는 점이라도 있었던 것이었을까.

아서는 멋쩍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이야기했다.

"이건 다들 잘 모르는 이야기인데 말이야. 어린 시절부터 하늘의 별자리 하나가 나를 따라다녔거든."

"하늘의 별자리라고······?"

"저 넓은 하늘에서 가장 찬란한 황금색으로 빛나는 별이야."

아서의 손가락이 드넓은 밤하늘을 가리켰다.

도시의 영향을 받아 제대로 된 별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하늘.

그런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뻗은 아서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는 이해할 수 있어. 오래 전부터 내 앞길을 비춰준 북극성같은 존재였지."

성좌, 라스테리오.

그 존재를 아서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저 정체모를 성좌는 예전부터 아서와 함께해왔던 것이다.

더군다나 아서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서는 하늘의 별을 가리킨 손가락을 바라보면서 기분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런 별자리한테 굉장히 멋진 이름을 붙여줬어."

"······."

"그 이름은 바로··· '엑스칼리버'야."

- 성좌 [황금의 라스테리오]가 당신을 강하게 주시합니다.

- 접근이 거부되었습니다.

- 성좌 [황금의 라스테리오]가 당신을 강하게 주시합니다.

- 접근이 거부되었습니다.

- 성좌 [황금의 라스테리오]가 당신을 강하게 주시합니다.

- 성좌 [황금의 라스테리오]가 당신을 강하게 주시합니다.

- 성좌 [황금의 라스테리오]가 당신을 강하게 주시합니다.

아서 본인이 성좌의 이름을 직접 개명시켜버린 까닭이었을까.

불만이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성좌의 시선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연달아 떠오르는 메세지를 보고 있으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아서의 얼굴이 다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허나, 그런 성좌의 반응을 모르는 듯한 무심한 태도로, 아서는 자신의 할말만을 계속해서 늘어놓았다.

"본인은 이 멋진 이름을 부끄러워하는 모양이지만, 그래도 내 마음에 들어서 계속 이렇게 부르고 있어."

"······."

"그래서 말이야, 아무래도 내 별자리가 너를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아."

저 밤하늘을 가리키던 손가락은, 어느덧 그 방향을 바꾸어 나를 가리켰다.

어딘가에서 나와 아서를 지켜보고 있는 초월적인 존재.

그가 나를 마음에 들어한다는 것이 아서의 해석이었던 것이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나는 그 사실을 느낄 수 있거든. 그러니까 확신할 수 있어."

아서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어째서 공항에서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저 하늘의 성좌가 나에게 집착한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이 분명했다.

- 성좌 [황금의 라스테리오]가 당신을 강하게 주시합니다.

- 접근이 거부되었습니다.

그리고 어째서 이번 성좌가 '접근'이라는 것을 반복해서 시도하는지도 말이다.

황금의 라스테리오.

그는 내가 가지고 있는 [커스텀 네트워크]의 힘이 제법 간절한 모양이었다.

'신을 연결하는 힘이라.'

성좌란 대체 어떤 존재인가.

그들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우리같은 헌터들을 바라보고 있는가.

그것은 내 머릿속을 끊임없이 맴도는 의문들 중 하나였다.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많은 지식을 채워나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커스텀 네트워크]의 상황에 따라서 저 성좌조차도 커뮤니티에 가입시킬 수 있다는건가.'

어쩌면 저 접근이라는 것도, 커뮤니티에 강제로 들어가고자 했던 흔적일지도 모를 일이다.

커뮤니티에 초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상태창을 가진 헌터뿐이다.

그럼에도 시간이 조금 더 지난 후에는, 사령왕 아틀로스가 나에게 이야기했던 현실에 직면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무수한 고민을 안겨준 거대한 존재.

그에 대해 논하던 아서가 손가락을 거두어들이며 이야기했다.

"뭐, 그렇게 진지한 얼굴을 할 필요까진 없어. 나머지는 맛있는거나 먹으면서 계속 이야기하자고."

"······그래. 그게 낫겠지."

진지한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뤄두고서 밥이나 먹자는 아서의 말.

그에 나는 허탈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까지고 여기에 아서를 세워둘 수만은 없는 노릇이 아니던가.

그러니 나머지 이야기는 밥이나 먹으면서 하는게 나을 것이다.

"밥먹으러 가면서 가볍게 이야기나 해보자고. 혹시 축구는 보는 편이야?"

"자주는 아니여도, 가끔씩은 챙겨보는 편이지."

무거운 분위기를 가라앉힌 아서는 나에게 축구에 대해 물어오는 모습이었다.

가벼운 주제로 아이스 브레이킹이라도 시도하려는 모양이었다.

영국하면 축구가 떠오르는 나라인데다가, 아서 본인의 닉네임도 축구선수의 이름이 아니던가.

그러니 축구에 대한 주제를 선택한 것으로 보였다.

나는 그런 아서의 스몰 토크에 어울리면서, 미리 준비해두었던 '고기 맛집'을 향해 움직였다.

"오, 그거 마음에 드는데? 혹시 어떤 클럽을 좋아하고 있어?"

"응원하는 팀이 어디냐고?"

"맞아. 나는 맨체스터에서 태어났거든. 그래서 어렸을때부터 계속해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응원해오고 있지."

좋아하는 팀이 어디냐는 아서의 질문.

거기에 대한 대답을 결정하는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예전부터 나는 강한 것들을 좋아했다.

그건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맨체스터 시티."

"······."

"······."

"······."

"······."

한동안 나와 아서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 * * * * *

"대체 우리 집을 뭐라고 소개한거냐?"

손에 집게를 든 채 나를 바라보는 오지후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근처에 위치한 오지후의 집.

나는 현재 그곳에서 오지후가 구운 소고기를 집어먹는 중이었다.

그런 내 옆자리에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은 아서가 앉아있었고 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프라이빗하면서, 또 가장 분위기가 괜찮은 식당을 찾아낸 것이다.

물론 오지후 본인은 아서가 찾아온 상황에 대해 조금 불편한 감정이 있는 모양이었지만 말이다.

"지난번에 여동생 도와줄때는 본인이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하던데?"

"그래, 그랬지. 많이 먹어라."

오지후는 이 상황에 체념하며 어쩔 수 없이 고기를 굽는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지후 자신이 아서에게 홍어, 산낙지, 번데기를 추천한 상황이었으니까 말이다.

그 사실을 생각하면 지금의 만남이 마냥 유쾌하게 다가오지만은 않을 터였다.

치익, 치이익-.

아서는 오지후의 짓궂은 장난을 전혀 모르는 채로, 오지후가 구운 한우로 쌈을 만들어 먹고 있는 중이었다.

"쌈장이라고 했지? 이거 굉장히 맛있는데?"

"사양하지말고 계속 먹어. 부족하면 얼마든지 더 구워줄테니까."

나는 오지후의 요리에 만족하고 있는 아서를 향해 사양없이 먹을 것을 권했다.

오지후는 그걸 왜 너가 말하냐는 시선으로 나를 보았지만, 나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손에 든 와인을 들이켰다.

짠-.

허공에서 세 사람의 와인잔이 맞부딪혔다.

청량한 소리와 함께 건배를 마친 이후, 나는 손에 든 와인을 마시면서 아서를 향해 이야기했다.

"그래서, 아서. 내 제안은 생각해봤어?"

"제안? 유튜브에 대한거 말이지?"

내가 오늘 아서 테브란트와의 만남을 가지게 된 이유.

거기에는 영국의 검성을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유튜브 촬영에 대한 갈망이 더 큰편이었다.

그렇기에 오지후의 집에 도착한 이후, 함께 식사를 하면서 아서에게 그에 대한 운을 띄웠던 것이다.

흐음-.

그에 와인을 기울이며 고민하던 아서가 나에게 이야기했다.

"가벼운 부탁만 들어준다면 영상에 출연하는 것 자체는 상관없을 것 같은데?"

"내 유튜브에 나와도 상관없다고?"

가벼운 부탁만 들어준다면 얼마든지 내 채널에 출연하겠다.

아서는 그렇게 이야기해오는 모습이었다.

그런 아서의 모습에 내가 그를 향해 되묻자, 아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그 말 그대로야."

"어떤 부탁이길래 그래?"

"가벼운 부탁이지. 아마 한국에 있는 커뮤니티 멤버들이라면 그리 어렵지는 않은 부탁일거야."

검성 아서.

손에 든 와인잔을 내려놓은 그는,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나와 오지후를 돌아보며 이야기했다.

"검귀 천시예와의 대련 약속을 잡아줘."

아서가 나에게 전한 가벼운 부탁.

그것은 바로 천시예와의 대련 약속이었던 것이다.

41화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무수한 성장과정을 거쳐가기 마련이다.

시련과 고난. 역경과 극복.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삼아 도달한 모종의 성과.

저마다 그 방향성은 다르겠지만, 결국 누구나가 자신이 가진 강점들을 갈고닦으며 성장해나간다.

그리고 세상에는 남들보다도 조금 더 직관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이들도 있기 마련이었다.

- swordmaster : 준비가. 다 끝났다면. 상관없어 ㅎㅅㅎ

- swordmaster : 기대할게 ^ O ^

지금 나와 채팅을 나누고 있는 검귀, 천시예와 같은 헌터들이 대표적이었다.

그들은 스스로의 강함을 갈고 닦기 위해서 매일같이 노력하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다른 헌터들과의 대련은 그들 자신의 성취를 확인할 수 있는 객관적인 지표이기도 했다.

검객으로서의 피가 들끓었던 것이었을까.

천시예는 아서의 제안을 별다른 고민조차 하지 않고서 받아들였다.

"역시, 검귀 입장에서는 이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겠지."

같은 무기를 다루는 이들끼리 서로의 실력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천시예의 입장에서는 검성 아서와의 대련을 피할 이유가 없는 셈이었다.

두 사람의 대결을 기대하는 입장에서는 만족스러운 결과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다만, 천시예와 아서 테브란트 사이의 대련에는 두가지 조건이 붙어있었다.

그것도 현재 집에서 혼자 커뮤니티를 바라보고 있는 내가 아쉬워할만한 조건들이 말이다.

"······마음같아선 촬영도 해보고 싶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서 아쉽기는 하네."

첫번째 조건은 이번 대련의 결과를 외부에 발설하지 말 것.

당연하지만 영상을 촬영하거나 커뮤니티에 게시하는 것도 금지였다.

검귀와 검성의 대결이라는 희대의 컨텐츠를 놓친 것은 분명 아쉬운 면이 없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와 오지후의 참관이 가능하다는 것이었을까.

두 사람의 대련이 성립되기 위해 도움을 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도 옆에서 지켜볼 수 있는게 어디야."

내가 촬영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아쉬워하면서 커뮤니티 화면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내 다른 커뮤니티 유저에게서 1:1 대화가 도착했다.

띠링-.

두 사람의 대결에 필요한 두번째 조건의 경우, 지금 오지후에게서 보내져온 메세지에 그 내용이 담겨있었다.

나는 오지후가 보낸 메세지를 확인해보았다.

- tex11 : 식사하면서 이야기한대로 게이트 입장 허가는 받아뒀어

- tex11 : 길드장도 의외로 조용히 협조하더라고

- tex11 : 검귀 본인만 허락하면 문제없이 대련은 진행될거야

두 사람의 대련을 위한 두번째 조건.

그것은 대련 장소로 적당한 난이도의 게이트 하나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게이트 내부에서 대련을 벌여, 그 결과를 외부에 유출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러한 비밀유지에 가장 큰 도움을 준게 지금 메세지를 보내온 S급 헌터 오지후와 더스트 길드장이었다.

헌터협회를 통해 은밀하게 이번 토벌작전의 승인을 받아낸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S급 헌터 세명과 유튜버 한명이 동반하는 형태가 되는 셈이었다.

"서로 다른 길드의 S급 헌터 세명이 진행하는 토벌작전이라······."

명목상의 이유만 봐서는 엄청나기 짝이없는 행사였다.

해당 제목으로 영상을 올리기만 해도 썸네일 어그로는 보장될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유튜버로서는 꿈의 컨텐츠에 가까웠다.

나는 다가올 행사에 대한 기대를 품은 채로, 의자에 기대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간단한 대결이 끝나면 약속대로 검성 아서와의 컨텐츠 촬영이 이어질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기대하면서, 나는 천장의 전등을 향해 조용히 손을 뻗었다.

"확실히, 예전에 비하면 많이 대단해지기는 했네."

꿈만 꾸던 풍경들이 점차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손에 닿지 않을 것 같았던 것들 역시, 점차 손에 닿기 시작한 모습이었다.

사람들을 잇는 자그마한 커뮤니티.

그 울타리가 만들어낸 자신의 입지가, 오늘따라 유독 더 커보이고 있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만족할 수는 없지."

무언가를 연결하는 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을 만들어내는 힘이 자신에게 있다.

이 거대한 능력이 언젠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 조금은 기대하는 마음을 가슴에 품은 채—.

"······."

나는 커뮤니티의 [인기 게시글] 게시판에 접속했다.

* * * * * *

영국의 검성, 아서 테브란트의 입국으로부터 어느덧 사흘이 흘렀다.

그리고 그런 검성의 모습을 바로 앞에서 바라보고 있는 지금, 우리의 이마에서는 무수한 땀이 흐르는 중이었다.

나와 오지후가 땀을 뻘뻘 흘려가면서 아서를 지켜보고 있는 이유는 하나.

오지후가 대련 장소로 고른 게이트가 '사막 필드'에 해당하는 까닭이었다.

A급 게이트, [사막의 거대무덤].

이곳은 언데드 계열 몬스터가 자주 출몰하는 게이트들 중에 하나였다.

"포인트 받고 장소 잡아준거라면서. 왜 하필이면 이런 곳으로 장소를 정한거야······?"

"······."

이전에 내가 맞춰주었던 S급의 헌터장비, <운명검 아브락사스(S)>를 손에 쥔 천시예가 오지후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해당 필드가 워낙 후덥지근했던 탓이었을까.

오지후의 장소 선정에 대해 자그마한 불만을 표한 것이다.

그에 오지후는 휘파람을 불면서 시선을 피했다.

"사람 안들어오는 A급 게이트 구하는게 쉬운일이 아니거든."

오지후 나름대로의 변명인 셈이었다.

다만, 이 자리의 누군가에게는 그런 오지후의 실수조차도 크게 상관이 없었던 모양이다.

철컥-.

시원한 웃음을 터뜨린 아서가 모래에 꽂혀있던 강철검을 들어올리며 이야기했다.

"하하, 괜찮아. 내 부탁 들어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우니까 말이야."

아서는 그렇게 말하면서 손에 쥔 검을 살펴보는 모습이었다.

<가르티스 강철검(C)>은 C급의 헌터장비들 중에서도 가장 무난한 편에 속하는 무기였다.

커뮤니티의 [경매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무기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러니 대련을 위해 가장 적합한 장비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손에 쥐어진 검을 확인한 뒤에는, 심호흡을 하며 검을 휘두르기 위한 자세를 잡는 아서였다.

"오늘은 내 대련요청을 받아줘서 고마워. 세계에서 검을 두번째로 잘 휘두르는 검객이 한국에 있다길래, 한국에 들어온김에 꼭 한 번 검을 맞대보고 싶었거든."

"세계에서··· 두번째······."

"너도 알다시피 우리같은 S급들은 해외에 나가기가 쉽지 않잖아? 그러니 이런 기회에 굉장히 감사하고 있어."

예기가 가득한 아서의 검이 화려한 빛을 머금었다.

그런 아서 테브란트의 이야기가 그리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었을까.

후우-.

깊게 숨을 내뱉은 천시예 역시 자세를 잡으며 그를 마주보았다.

서로 마주한 두 사람의 주위에서 짙은 마력광이 터져나오기 시작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오늘 첫번째가 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온거야."

천시예는 그렇게 말하면서 시선을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귀, 천시예가 목표로 하는 대상.

그것은 세계 최강의 헌터라고 불리는 신창 주선호였다.

그 아래에 있는 모든 헌터들은 천시예가 목적지에 닿기 위한 계단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천시예에게 있어서는 눈앞의 검성조차도 넘어서야만 하는 벽인 셈이었다.

"재미있는 이야기네. 그럼 나도 여기에 있는 한국 최연소 S급 헌터를 실망시키지 않게 노력해야겠지."

천시예의 이야기에 아서 역시 무언가 자극을 받은 것인지, 그는 이전보다 환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검성과 검귀.

서로 투지를 끌어올린 두 S급 헌터의 시선이 서로를 응시했다.

그 직후, 아서의 검에서 황금빛 스파크가 튀어올랐다.

파직, 파지직-.

검신을 내달리는 스파크와 함께 강철의 검이 모습을 뒤바꾸었다.

"제대로 한 수 보여줄게."

파앗-.

찬란하게 빛나는 금빛의 칼날.

아서의 전신에서 환한 광채가 맹렬하게 터져나오면서, 그를 감싼 대기가 무겁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웅.

귓가에 울려퍼지기 시작한 이명.

전신에 금빛 광채를 두른 아서를 보며, 입술을 깨문 천시예의 검이 그를 향해 겨누어졌다.

"윽······."

사방에 퍼져나가는 황금의 마력.

어마어마한 마력의 파동을 퍼뜨리는 아서의 위압감은 거리를 벌리고 있는 나조차도 부담이 느껴질 정도였다.

천시예는 이제부터 그러한 상대를 정면에서 맞닥뜨려야만 하는 상황이다.

화력. 전투기술. 방어력.

무엇 하나 꿇리지 않는 육각형 헌터를 앞에 두고서, 천시예의 눈이 분주하게 상대를 분석하는 모습이었다.

'내가 보기에 단순한 출력으로는 아서쪽이 천시예보다 훨씬 우위에 있어. 그러니 천시예가 가진 유일한 장점인 속도를 살려야만 해볼만한 대결이 되겠지.'

나는 그런 두 사람의 전투를 보면서, 스마트폰에 있는 스카우팅 리포트를 수정했다.

지금의 전투는 나에게 있어서 상반된 전투 스타일을 가진 두 헌터의 정보를 갱신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니 이번 기회를 틈타 최대한 S급 헌터들의 정보를 수집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내가 스마트폰에 기록을 이어나가며 앞으로 시작될 전투에 대해 평가하고 있으면, 머지않아 전투개시의 신호를 내리듯이 익숙한 메세지가 떠올랐다.

- 성좌 [황금의 라스테리오]가 당신을 강하게 주시합니다.

- 접근이 거부되었습니다.

검성 아서를 주시하는 성좌, 라스테리오로부터의 시선.

그와 동시에 천시예가 검을 들고 앞으로 뛰쳐나가는 모습이었다.

가장 먼저 상대를 향해 돌진한 것은 천시예 쪽이었다.

"—[광폭화]."

콰앙!

지면을 박차고 쏘아져나가는 신형.

전력으로 이동하는 천시예의 속도는 내 동체시력으로 온전히 뒤쫓기 힘들 정도였다.

빠른 속도로 모습을 감춘 천시예가 다시금 나타난 곳은, 그녀를 바라보던 아서의 바로 뒤쪽이었다.

순식간에 아서의 뒤쪽에 나타난 천시예는 그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카앙! 캉-!

빈틈을 노리고 휘둘러지는 연격.

아서를 노리고 쇄도하는 검격을 황금의 검이 막아내는 모습이었다.

"······."

"······."

허공에서 마주한 두 사람의 시선이 뒤엉켰다.

카앙! 카가가가각-.

두 금속이 맞닿은 지점으로부터 불똥이 튀어올랐다.

서로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전투를 치르는지 이해한 것이다.

내가 보기에 천시예는 초반에 승기를 잡을 생각이 없어보였다.

오히려 계속해서 전투상황을 이어나가면서, <운명검 아브락사스(S)>의 스택을 쌓을 것으로 보였다.

'검귀가 마력 출력이 높은 스타일이 아니니까, 계속해서 공격을 가하면서 스택을 쌓는 방식으로 가겠지.'

그런 내 예상을 증명하듯이, 검끝으로 힘겨루기를 이어나가던 천시예가 다시금 사라졌다.

카앙-! 캉! 캉! 캉!

황금빛을 두르고 있는 아서의 주위에서 수차례 광채가 터져나왔다.

한계까지 속도를 끌어올린 천시예가 아서의 방어력을 갉아먹기 위한 공격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리듬을 타듯이 반복해서 터져나오는 충돌음.

그 속에서 아서의 눈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검성은 불사기사 못지않게 방어력이 높은 유형이야. 천시예가 정면에서 힘으로 돌파하려면 상당한 스택을 쌓아야만 할거다.'

검성, 아서 테브란트는 여러 헌터를 통틀어서 가장 특별한 유형의 헌터 중 하나였다.

그는 다른 헌터들과는 다르게 가장 완성형에 가까운 헌터였으니까 말이다.

아서 자신이 토벌작전에서 다양한 포지션을 도맡아서 움직이는 것부터가 그러했다.

그는 탱커의 방어력과 근거리 딜러의 전투센스를 가졌으며, 메이지형 딜러를 능가하는 마력량과 광범위 스킬을 가진 인물이었다.

혼자서 토벌 작전을 수행해도 부족함이 없는, 이른바 1인 파티에 가까운 인물.

그것이 헌터로서 아서 테브란트의 정체성이었던 것이다.

'아서도 슬슬 천시예의 속도에 적응해가고 있는 모양이야.'

나는 아서의 움직임을 보며 상황에 대한 분석을 이어나갔다.

피슝, 피슈웅-.

그런 내 뒤에서는 활을 들고 있는 오지후가 작정하고 화살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전투를 위해 적당한 장소를 잡았다고는 하지만, 이곳은 어디까지나 게이트의 내부.

두 사람이 싸우고 있는 도중에도, 어딘가에서는 언데드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언데드를 처리하는게 오지후의 역할이었다.

"앞에 세마리, 전부 처리했다."

"고생했어."

물론 오지후 본인도 그 역할에 크게 불만을 가지지는 않았다.

이번 대련을 주선하기 위해 내가 오지후에게 포인트를 지불한 상황이니까 말이다.

오지후 본인도 여기까지가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필드 선정에 대해 불만을 듣긴 했지만, 어느 정도는 책임감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오지후의 노력속에서, 두 사람의 대결은 어느덧 클라이막스를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후우··· 검귀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검술이 무척이나 야성적인데? 여기까지 찾아온 보람이 있잖아."

카앙! 캉-!

계속해서 천시예와 검을 섞으며 방어에 몰두하던 아서가 이야기했다.

그와 동시에 아서의 검이 흐름을 바꾸었다.

상당히 긴 시간동안 수세를 취하고 있던 아서가, 본격적으로 공세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것이다.

빠른 속도를 가진 대상에게 무작정 공격을 퍼붓는다고 해도, 적중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는 법이었다.

그러니 아서의 행동은 그가 천시예의 속도에 완전히 적응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훌륭한 검이었어. 저기서 지켜보는 '엑스칼리버'도 좋아하고 있고 말이야."

"······엑스칼리버?"

- 성좌 [황금의 라스테리오]가 당신을 강하게 주시합니다.

- 성좌 [황금의 라스테리오]가 당신을 강하게 주시합니다.

- 성좌 [황금의 라스테리오]가 당신을 강하게 주시합니다.

- 성좌 [황금의 라스테리오]가 당신을 강하게 주시합니다.

성좌의 반응을 완전히 무시한 채, 자신이 지은 이름을 당당하게 읊은 직후.

자세를 고친 아서의 눈빛이 뒤바뀌었다.

진지한 눈빛과 날카로운 분위기.

카앙-!

그 속에서 파고들던 천시예의 검이 갑작스럽게 이변을 맞이한 것이다.

"······!"

전속력으로 움직이던 검귀의 검이 정지하기까지는, 그리 많은 행동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서가 휘두르기 시작한 검격.

그 연격이 천시예의 움직임에 변수를 만들어냈다.

카앙-!

첫번째 감격에 천시예가 속도를 잃고 정지했다.

카아앙-!

두번째 검격에 천시예의 검이 튕겨나가며, 공격을 막아내기 위한 그녀의 가드가 무너졌다.

물 흐르듯이 부드럽게 이어지는 공격.

두차례의 검격이 연이어 터져나온 직후.

"좋은 대결이었어."

스윽-.

찬란한 광채를 머금은 <가르티스 강철검(C)>이 천시예의 목에 겨누어졌다.

압도적인 실력의 차이.

영국의 검성이 자신의 실력을 증명한 순간이었다.

"······내가 졌어."

자신의 패배를 깨달은 천시예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한국에서 두번째로 강한 헌터라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수준은 잘쳐줘야 랭킹 6위 정도였다.

신창 주선호의 유일한 경쟁자로 여겨지는 아서와 승부를 겨루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아서를 상대로 자신을 증명하겠다는 천시예의 의도는 수포로 돌아간 셈이었다.

'얼마나 많은 포인트가 있어야 천시예가 아서를 따라잡을 수 있으려나.'

그런 두사람의 대결을 보던 내 머릿속에, 여태껏 포인트에 집착해오던 천시예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여기서 더 검술을 갈고 닦는다고 해도, 천시예의 수준으로는 아서에게 닿기 힘들었다.

고작해야 4계단밖에 차이가 안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원래 정점에 가까울수록 막대한 투자가 조그마한 차이를 만들어내는 법이었다.

그러니 돌파구를 찾는다면 대량의 포인트를 사용하는 방법이 핵심이 될 터였다.

그렇다면 내가 가진 영향력을 본격적으로 행사했을때, 대략 어느 정도를 소모해야 지금의 두 사람의 격차를 좁혀나갈 수 있는가.

나는 그러한 계산을 해나가면서, 전투의 여운을 곱씹는 천시예를 바라보았다.

'S급 헌터 하나를 붙잡아서 리워드 상점을 어떻게든 제대로 확인해봐야되나? 그래야 포인트를 어떤식으로 굴려야할지 감이 잡힐 것 같은데.'

가능하다면 한 번 [리워드] 상점의 내용물을 제대로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렇게 해야 어떤 방향으로 무제한 포인트를 써먹을지 감이 잡힐테니 말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은 역시, S급에 올라온지 얼마 되지않은 오지아를 거치는 것일 터였다.

다른 S급이라면 몰라도 오지아에게는 의심을 사지 않고 조사를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만간 오지아에게 연락을 넣어야겠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천시예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오늘 대련은······."

짧은 대련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하려던 것이었을까.

나와 아서를 번갈아보던 그녀는, 이내 검을 되돌리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아, 잠깐—."

허나, 무언가를 이야기하려던 천시예는 곧장 입을 다물었다.

그런 천시예의 대화를 끊어내듯이, 게이트 내부에 메아리친 목소리 때문이었다.

게이트 내부에 벌어진 자그마한 이변.

이곳에 있는 모두에게 들리도록, 거대한 목소리가 사막에 힘껏 메아리쳤다.

- 위대한 왕의 묘소에 장송곡이 퍼져나가며 [절멸종]이 출현합니다.

- [절멸종 : 침식충 다르겐트]가 출현했습니다.

- 성좌 [황금의 라스테리오]가 당신의 미래를 엿보았습니다.

- 성좌 [황금의 라스테리오]가 당신의 행운에 감탄합니다!

어느새인가 하늘에 뚫린 거대한 균열의 너머.

그곳에서 어둠을 휘감은 벌레 한마리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42화

사방으로 깨져나간 하늘.

그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것은 거대한 벌레의 형상이었다.

어둠을 휘감은 이형.

짙은 점액을 퍼뜨리며 지면을 향해 머리를 내밀던 그것은, 머지않아 아래를 향해 강하하는 모습이었다.

철퍼덕-.

끼긱, 끼기기긱.

바닥에 내려앉아 몸을 뒤틀기 시작한 괴물의 모습에 의문이 뒤섞인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저건······."

균열 밖으로 떨어져내린 형상을 지켜보던 모두의 눈동자에 괴물의 모습이 비추어졌다.

—침식충, 다르겐트.

어둠에 뒤덮힌 이질적인 형상의 괴물.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주하는 형태의 몬스터에 모두가 당황에 빠진 것이다.

"아니, 절멸종이라는게 있었어? 필드보스나 엘리트도 아니고 분류가 절멸종이라고?"

"······침식충이라는 몬스터도 들어본 적이 없어."

여태껏 학계에 발견되지 않은 타입의 괴물이 출현했다.

헌터 시대의 개막이후 오랫동안 그 누구도 마주한 적이 없는 새로운 적이 나타난 것이다.

더군다나 해당 몬스터는 그 등장부터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치이이이익-.

일렁이는 어둠을 바닥에 흩뿌리며 꿈틀거리는 괴물.

그를 따라 주변의 사막지대가 어둠에 물들어가는 모습이었다.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어둠은 그 자리에 있던 언데드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콰직! 콰드득!

바닥에서 확산하는 어둠에 닿은 언데드들이 부서져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절멸종··· 적어도 지금까지 출몰하지 않았던 유형의 적인건 분명해보여.'

신창(神槍), 주선호는 이전부터 계속해서 주기적으로 게이트의 변화를 경고해왔다.

오랫동안 헌터 사회를 성립시켰던 게이트가 조금 더 위험한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리고 그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상위 등급 헌터들이 주축이 되어 움직여야한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런 주선호의 이야기가 냉정한 현실로부터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내가 지금 눈앞에서 마주하고 있는 것은, 주선호가 오랫동안 경계했던 변화들 중 하나일 터였다.

얼마전에 내 눈앞에서 나타났던 '이중 게이트 현상'처럼 말이다.

'과연 저 녀석이 A급이라는 게이트의 난이도에 적합한 수준일까.'

지난번에 오지후와 마주했던 이중 게이트 역시, 기존 난이도에 걸맞지 않은 녀석이 게이트에서 기어나왔다.

그렇다면 저 절명종이라는 개체 역시, A급에 걸맞지 않은 강함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툭-.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나는 곧바로 소형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새롭게 나타난 개체에 대한 정보를 기록하기 위함이었다.

"저거 상당히 위험해보이는데? 설마 저대로 놔둘 생각은 아니지?"

침식충의 모습으로부터 위험한 기운을 느낀 것은 오지후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이었을까.

스윽-.

어느새 시위를 붙잡은 오지후는 한계까지 시위를 당기는 모습이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에 마력의 화살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왜곡 화살].

오지후가 단일타겟을 처리할때 애용하는 화살들 중 하나였다.

시위를 당긴 오지후의 모습을 보던 천시예가 자세를 고쳐잡으며 말했다.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유형이야. A급 몬스터니까 일단은 기록부터······."

"촬영은 우리 유튜버님이 이미 하고 있잖아. 그것보다 나는 저게 조금 의심스럽거든."

우우우우웅-.

오지후의 손이 진동하는 화살을 침식충에게 겨누었다.

공간을 왜곡시키며 공명하는 화살.

오지후는 완벽하게 겨누어진 화살을 눈앞의 적을 향해서 쏘아내었다.

"아무리 봐도 내 눈에는 A급 수준으로 안보여서 말이야."

파아앙-!

파공성을 터뜨린 화살이 멀찍이 떨어져있는 괴물을 향해 날아들었다.

대기를 꿰뚫고 전진하는 화살.

공간을 뒤틀어버리는 오지후의 화살이 눈앞의 적을 찢어발길 기세로 뻗어나갔다.

A급의 엘리트 개체, 데스나이트조차도 한번에 머리를 날려버렸던 화살이다.

제대로 적중하기만 한다면 틀림없이 저 몬스터도 저항하지 못할 터.

그런 생각으로 모두가 화살을 바라보던 순간이었다.

- 끄르르르······.

쏘아낸 화살이 어둠에 물든 경계를 넘어선 이후.

치이이익-.

그것은 급속도로 힘을 잃고 오염되어버린 모습이었다.

오지후의 화살은 드넓은 어둠을 뚫고 어떻게든 적에게 닿았지만, 그럼에도 그 결과는 원래의 그것과 크게 달랐다.

카가가가각!

화살촉을 중심으로 퍼져나간 자그마한 왜곡영역.

뒤틀린 공간이 무척이나 작은 상처만을 남기고서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침식충 다르켄트를 둘러싼 어둠이 오지후의 공격을 약화시켰다는 뜻이었다.

- 키에에에엑······!

오지후의 공격에 맞은 직후, 침식충은 몸을 비틀며 섬뜩한 비명을 내질렀다.

살점이 패여나간 자리에서 체액을 흘리는 녀석의 비명소리가 사막에 메아리쳤다.

거대한 비명.

허나 그 원인은 비명의 강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크기였다.

패여나간 상처를 보던 오지후는 혀를 차며 자신의 머리를 쓸어넘겼다.

"내 [왜곡 화살]에 직격당하고도 멀쩡하다고······?"

"······."

"절멸종이라고 했었지? 대체 저런게 어떻게 A급이야? 도저히 이런 곳에서 기어나올만한 수준의 몬스터가 아니잖아."

쯧-.

가벼운 불만처럼 보이는 오지후의 목소리.

허나 그 이야기에 담긴 내용은 전혀 가볍지 않은 것이었다.

[왜곡 화살]은 오지후가 가진 스킬들중에서 단일 개체에게 가장 위협적인 공격이다.

그런 공격조차 저만큼 약화되었다는 것은, 결국 우리에게 단 하나의 사실을 의미하는 셈이었다.

이번 전투에 있어서 오지후가 완전히 무의미한 전력이라는 것이었다.

'오지후가 아무리 순위가 낮다고 해도, 단순 화력면에서는 못해도 중상위는 되는 인물이야.'

오지후 자신의 순위와는 별개로, 오지후라는 헌터의 화력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S급 딜러인 오지후의 화력으로도 제대로 손상시킬 수 없는 괴물이 나타났다.

그것도 판정등급 A급에 해당하는 게이트에서 말이다.

여태껏 출현했던 다른 몬스터들보다도 더 위험한 적이라는 이야기였다.

더 이상 S급 헌터가 하위 게이트에서의 무조건적인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의미인 셈이었다.

'그런 오지후가 제대로 도움이 안될 정도라면······.'

주선호가 예견했던 파국이 분명하게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원거리에서의 화력투사가 막대한 마력손실을 동반한다고 한다면, 근거리에서 직접적인 공격을 감행해야만 하는 것인가.

허나, 아직은 녀석이 침식한 영역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천시예가 섣불리 뛰쳐나갔다간 어떠한 결과가 돌아올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이번에 마주한 '절멸종'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으면, 괴물을 지켜보고 있던 아서가 바닥에 검을 꽂는 모습이었다.

콰직-.

비어있는 바닥에 검을 꽂아넣은 아서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재밌네. 파천궁이 쏜 화살에 맞고도 저만큼 버틴다는 말이지?"

"······아서."

"절멸종이라고 했었나? 다들 괜찮으면 내가 한 번 상대해보고 싶은데."

바닥에 검을 던져둔 아서가 발걸음을 옮기며 앞으로 나섰다.

화살을 겨누던 오지후의 앞으로 나선 아서는,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둘러보면서 이야기했다.

"저거 잠깐만 자리에 묶어줄 사람 있어? 작정하고 화력을 쏟아부어서 한번에 녹여버릴 생각인데."

검성, 아서 테브란트.

그의 손가락이 빠른 속도로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침식충을 가리켰다.

꿈틀, 꿈틀-.

지면을 밀어내며 다가오는 침식충 다르켄트는 어둠을 퍼뜨리며 주변을 집어삼키는 모습이었다.

그 이름에 걸맞게 주변 공간을 어둠으로 뒤덮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아서 자신이 직접 저지하겠다는 이야기였다.

"저거 저대로 여기에 방치해두면 상당히 곤란한 문제가 될 것 같아서 말이야."

"저걸 자리에 묶어달라고?"

"이번에는 상당히 큰 기술을 쓸 생각이거든."

잠시동안 침식충을 붙들어놓을 사람.

그러한 질문에 아서가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천시예와 오지후.

둘 중 어느쪽도 해당 작업에 적합한 유형의 헌터는 아니었다.

철컥-.

근처에 있던 천시예가 검을 어루만지는 모습에, 나는 아서와 침식충을 번갈아보며 고민했다.

'아서 테브란트가 나선다면······.'

침식충이 집어삼킨 영역에 대한 정보가 아직 부족하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봤을때, 녀석에게 맞서는건 천시예보다 아서가 적합할 것이다.

천시예는 방어보다는 회피에 치중한 형태의 근거리 딜러였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상황에 대한 판단을 마친 나는, 천시예를 넘어 아서에게 다가서면서 물었다.

"어느 정도 묶어두면 되는건데?"

"오래 묶어놓을 필요는 없어. 잠시동안만 한자리에 잡아두면 돼. 한 번 맞으면 그대로 벗어나지 못할테니까."

짧은 고민.

그 끝에 내가 내린 결정은 하나였다.

"아서. 내가 직접 저 녀석을 자리에 묶어두고 있을게."

아서가 커다란 기술을 준비할 때까지, 내가 저 녀석을 붙들어놓겠다.

그런 내 이야기를 듣고 놀란 것이었을까.

천시예의 입에서 의문에 젖은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당신이 직접 저걸 묶어놓겠다고? 직접 움직이는거 싫어하는거 아니었어?"

"잠깐 정도라면 상관없어. 잠깐만 자리에 묶어놓으면 되는거겠지?"

허나, 나는 그런 천시예의 이야기를 뒤로한 채, 아서의 옆에 선 채로 이야기했다.

혹시 모를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긴급방어]를 사용한다면 최소한 한방정도는 견딜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판단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아서는 그런 내 판단에 만족한 모양이었는지, 입꼬리를 크게 틀어올리면서 이야기했다.

"좋아. 얼마나 묶어둘 수 있는데?"

"글쎄, 길어봐야 몇초 정도겠지."

"그 정도면 충분해. 내가 이야기할때 움직여주면 상관없어."

두 사람의 합의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콰직!

묵직한 다리를 내딛어 벌레를 짓밟은 아서는, 하늘을 향해 한쪽 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이내 눈앞의 침식충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하늘이여, 열어젖혀라."

콰릉-!

그런 아서의 한마디가 끝나기 무섭게, 새하얀 빛의 기둥이 지상을 꿰뚫었다.

환하게 가로지르는 거대한 빛줄기.

그 속에서 황금빛을 품은 거대한 대검이 바닥에 내려꽂힌 모습이었다.

검성, 아서 테브란트가 가지고 있는 고유 특성— [천상의 검(S+)].

심상치 않은 빛을 머금은 거대한 검 한자루는, 검성인 아서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다.

"후······."

철컥-.

육중한 대검을 향해 손을 뻗은 아서가 황금의 검을 쥐었다.

손에 쥔 자리로부터 확산해나가는 광채.

그의 검은 이제서야 제 주인과 재회했다는 듯이, 강한 공명을 퍼뜨리며 맥동하는 모습이었다.

쿠웅!

환하게 새어나가는 광채속에서 아서는 거대한 검을 겨누며 자세를 잡았다.

"슬슬 시작하자. 비밀이 많은 유튜버 친구."

두 다리를 이용해 바닥을 지탱한 아서가 허리를 움직였다.

핏대가 솟을 정도로 강하게 검을 부여잡은 손.

대검을 쥔 채 자세를 잡은 아서의 눈이, 눈앞에 선 적에게 전력으로 검을 내려찍기 위한 준비를 했다.

우우우우웅-.

눈부시게 터져나오는 황금빛이 아서의 거대한 대검을 휘감았다.

그것은 환하게 빛나다 못해, 뜨겁게 타오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작열하며 빛을 흘리는 눈부신 열원.

검의 형상을 한 빛을 모으기 시작한 아서가, 그의 뒤에 서있던 나를 바라보면서 이야기했다.

"이제 준비해."

"······."

육안으로 보기에도 어마무시한 마력이 응축되어있는 검이었다.

일개 인간이 휘두르는 것이라기에는 지나치게 강력해보이는 힘.

그것을 손에 쥔 채 억누르는 아서를 앞에 두고서, 나는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괴물을 바라보았다.

어둠을 휘감은 채 꿈틀거리는 괴물.

녀석은 지금 이 순간에도 나와 아서를 향해 독기를 퍼뜨리며 전진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대단한 사람들의 옆에 서고 싶은거라면, 때로는 그만한 각오도 보일 필요가 있겠지.'

천시예나 오지후를 만나기 훨씬 이전부터.

나는 계속해서 하나의 생각을 가슴속에 품어오고는 했었다.

나도 언젠가 대단한 헌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다.

그들과 함께 전장에 서고 싶다.

비록, 이 꿈은 이제 반쪽짜리 꿈이 되어 남아있었지만, 그럼에도 언제까지 보호만 받고 싶지는 않다는게 내 생각이었다.

- 키에에에엑······!

나는 그들에게 있어서 짐이 되고 싶은게 아니다.

그러니 이것은 내 나름대로의 조그마한 각오인 셈이었다.

- [에너지 증폭]이 활성화됩니다.

- 오늘은 더 이상 [에너지 증폭]을 활성화할 수 없습니다.

- [강력경고]가 활성화됩니다.

- 오늘은 더 이상 [강력경고]를 활성화할 수 없습니다.

확산하는 죽음의 시선.

이해할 수 없는 공포를 감지한 침식충이 우뚝 멈춰섰다.

내려앉은 정적.

사람의 머리를 마비시키는 공포속에서 녀석은 잠시 몸을 비틀었다.

쿠웅! 쿠우웅-!

공포를 납득하지 못한 머리가 스스로를 사막의 모래속에 처박았다.

그 속에서 아서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이만하면 충분해. 이제부터는 못 피할테니까."

고작해야 3초가 채 안되는 짧은 시간.

그럼에도 검성에게 있어서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아직 충격에서 제대로 회복하지 못한 녀석을 앞에 두고서, 아서는 전력으로 힘을 끌어모은 대검을 움직였다.

스릉-.

무기라기보단 광원에 가까워보이는 대검을 든 채, 허리를 숙인 아서의 손에서부터 묵직한 휘두름이 뻗어나갔다.

"—[플레어 스트라이크]."

초월적인 일격.

그것을 쏟아붓는 검성의 앞으로, 눈부신 황금이 반월을 그려내었다.

콰앙! 콰과과과과광-!

거대한 반월의 참격이 공간을 베어가르며 앞으로 뻗어나가는 모습이었다.

그 압도적인 흐름은 주변의 사막지대를 흔들었으며, 그 거대한 흐름에 휩쓸린 모래들은 하나의 파도를 만들어냈다.

빛과 열기.

그리고 모래가 뒤섞여 만들어진 거대한 폭풍의 참격.

화려한 번뜩임은 앞을 보던 이들의 눈을 가렸으며, 장렬한 폭음은 소리를 듣던 이들의 귀를 틀어막았다.

"······."

세계에서 두번째로 강한 기사.

아서 테브란트가 쏟아낸 빛과 열기의 향연이 반복해서 터져나왔다.

십수초간 이어지던 거대한 향연은 다리가 닿은 지면조차도 뒤흔들 정도였다.

감각을 교란시키는 영향속에서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붙잡으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한참동안 이어지던 공격이 지나쳐간 이후.

눈을 가리던 빛이 완전히 거두어지며, 귀를 틀어막던 폭음마저도 가라앉았을 때.

다시금 눈을 뜬 내가 발견한 것은 이전과 완전히 다른 풍경이었다.

- [절멸종 : 침식충 다르켄트]의 침공을 저지했습니다.

- 처음으로 [절멸종]을 처치하는데 성공했습니다.

- 당신의 힘이 조금 더 특별한 가능성을 찾아냅니다.

아서의 검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아있는 것은, 강렬한 열에 녹아내린 모래의 흔적들 뿐이었다.

산산히 부서지고 녹아내린 사막의 잔해.

반짝이며 햇빛을 반사하는 투명한 파편.

"아······."

그리고 그 속에서 내 눈앞에 출력되기 시작한 무수한 메세지의 향연.

장엄한 광경속에서 나는 눈앞에 보이는 풍경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눈앞에 존재하는 것들만이 그곳에 있는 전부는 아니었다.

아서 테브란트라는 기사가 만들어낸 기적같은 풍경보다도, 한층 더 앞선 곳에서 내 시야를 가리는 기적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지금 내 앞을 가리고 있는 상태창이라는 이름의 기적이 말이다.

- 커뮤니티의 누적 활동치가 기준치를 돌파했습니다!

- [커스텀 네트워크(B)]가 당신의 커뮤니티에 두번째 분기점을 제시합니다!

- '개방형 커뮤니티'를 선택하는 경우, 커뮤니티의 최대 인원이 9900명 증가하며, 그들을 위한 더 낮은 수준의 상점 기능이 새롭게 해금됩니다.

- '폐쇄형 커뮤니티'를 선택하는 경우, 조금 더 특별한 존재를 커뮤니티에 초대할 수 있게 되며, 그들을 위한 특별한 기능들이 새롭게 해금됩니다.

고유 특성 [커스텀 네트워크]의 두번째 분기점.

선택의 순간이 다시 한 번 찾아왔다.

43화

균열 너머에서 나타난 '절멸종', 침식충 다르겐트를 처치한 이후.

나는 소리를 잘라낸 카메라 영상을 협회에 제출하고서 집으로 돌아갔다.

내가 다른 헌터들과 함께 이번 토벌작전에 참여했다고는 하지만, 나는 엄연히 말해서 헌터가 아니라 일개 카메라맨으로 분류되는 까닭이었다.

그 덕분에 나는 헌터협회의 보고절차에서 벗어나 다른 이들보다도 먼저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물론 그런 나와는 다르게, 나머지 세명의 헌터들은 예외없이 협회에 붙잡혀 시간을 빼앗겨야 했지만 말이다.

절멸종이라는 새로운 분류의 몬스터가 나타난 이상, 그에 대한 자세한 분석을 진행하기 위함이었다.

영국에서 찾아온 손님, 검성 아서가 상대여도 예외는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아서 본인도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적극적으로 정보수집에 협조하고자 하는 모습이었다.

"후우··· 피곤하네."

철컥. 끼이익-.

문을 열고 들어온 적막한 거실.

나는 들고 있던 가방을 내팽개친 채로, 아무도 없는 거실의 소파를 향해 움직였다.

소파에 가까이 다가간 내가 그곳에 드러누우면, 푹신한 감각이 기분 좋게 등에서 전해져왔다.

사막 필드에서 힘겨운 시간을 보낸데다가, 게이트 내에서도 한차례 소란이 벌어졌기 때문이었을까.

오늘따라 유달리 피곤한 느낌이 드는 하루였다.

허나 소파에 드러누운 몸이 노곤하다고 해서, 마냥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도 내 눈앞에는 반투명한 창이 떠올라있는 상태였으니까 말이다.

게이트 내부에서부터 보류해왔던 선택의 시간이 지금까지 이어져온 것이다.

"그래도 일단 고르긴 해야겠지."

후우-.

나는 피곤이 뒤섞인 한숨을 내쉰 채, 눈앞에 보이는 화면을 응시했다.

시야를 가득채운 화면의 안쪽.

그곳에는 이미 한차례 마주한 적이 있던 익숙한 선택지가 존재하고 있었다.

- '개방형 커뮤니티'를 선택하는 경우, 커뮤니티의 최대 인원이 9900명 증가하며, 그들을 위한 더 낮은 수준의 상점 기능이 새롭게 해금됩니다.

- '폐쇄형 커뮤니티'를 선택하는 경우, 조금 더 특별한 존재를 커뮤니티에 초대할 수 있게 되며, 그들을 위한 특별한 기능들이 새롭게 해금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고유특성, [커스텀 네트워크]가 나에게 제시한 두가지 선택지.

개방형과 폐쇄형, 둘 중 하나를 고르라는 선택창이 떠오른 것이다.

커뮤니티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두가지의 길.

예전같았으면 단순히 운영방침에 가까운 선택으로 여겼겠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예전처럼 가벼운 의미만으로 보기는 어려워졌다.

[커스텀 네트워크]라는 특성에 숨어있는 비밀들을 내가 이해하게 된 까닭이었다.

"사실상 내 나름대로 새로운 시대에 대비하기 위한 전략을 짜야되는거겠지."

절멸종. 성좌. 외부로부터의 침공.

새롭게 알게된 수많은 키워드들이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주선호가 예견하던 변화가 이 세상에 찾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만큼 커뮤니티의 방향성은 더 이상 단순한 커뮤니케이션의 영역이 아니었다.

지금의 선택이 내 생존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거라는 이야기였다.

"조금 더 특별한 존재라··· '폐쇄형 커뮤니티'의 보상은 성좌와의 연결을 의미하는건가?"

무언가를 연결하는 힘.

시간이 지날수록 이러한 연결의 가치는 더욱 커져갈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이 힘으로 무엇을 연결할 것인지를 결정해야만 했다.

이 힘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서로 연결시킬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이것을 이용해 사람과 성좌를 이어나갈 것인가.

기나긴 고민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

불가역적인 선택.

그러한 고민의 흐름속에서 나는 힘이 빠진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누구를 만나더라도 분명하게 이야기하는 말이지만, 나는 헌터의 길을 걷는 이들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더 많은 헌터들이라··· 통제가 안되는 것만 아니라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았겠지."

헌터들의 이야기가 좋았다.

그들의 힘겨운 분투를 좋아했으며, 또 그들이 만들어나가는 영웅담을 좋아했다.

더 많은 헌터들의 이야기를 내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

그것이 내가 부족한 용돈을 모아 처음으로 카메라를 구입했던 계기였다.

그렇게 유튜버로서의 활동을 시작하고, 지금은 어느덧 74만 유튜버가 되었다.

무수한 고난의 순간과 역경의 시간들을 거쳐 나는 지금 이곳에 있다.

"모두가 영웅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니 어쩌겠어."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결국 내가 선택할 수 있는건 하나뿐이다.

내가 좋아하던 헌터들이 앞으로 조금 더 특별해지기 위한 선택지.

툭-.

화면을 터치해 결정을 내린 내 눈앞에 무수한 메세지가 스쳐지나갔다.

- '폐쇄형 커뮤니티'를 선택하셨습니다.

- 다음 분기점이 나오기 전까지, 더 이상 최대 인원을 확장할 수 없습니다.

- 새로운 기능, [성좌 후원]이 활성화됩니다.

- 커뮤니티에 등록된 성좌들은 [성좌 후원]을 통해 커뮤니티의 이용자들에게 보유하고 있는 포인트를 후원할 수 있습니다.

- [성좌 후원] 기능을 사용해 포인트를 후원하는 경우, 후원 대상자와의 간단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합니다.

지금까지의 내 예상을 증명하듯이, '폐쇄형 커뮤니티'의 보상은 성좌와의 연결을 이루는 힘이었다.

새롭게 추가된 기능, [성좌 후원].

해당 기능을 이용해 성좌들이 자유롭게 사용자들에게 포인트를 후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성좌 후원] 기능을 사용하는 경우, 후원을 받은 이용자와 낮은 단계의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했다.

어떤 성좌가 그토록 갈망하던 기능이 커뮤니티에 추가된 것이다.

"뭐야. 왜 이렇게 메세지가 많아?"

더군다나 이번에 추가된 기능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내 눈앞에는 그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메세지가 떠올라있는 상황이었으니까 말이다.

나는 계속해서 눈앞에 떠오른 메세지들을 읽어나갔다.

- 새로운 기능, [성좌 임무]가 활성화됩니다.

- 커뮤니티에 등록된 성좌들은 [성좌 임무]를 통해 조금 더 특별하고 위험한 임무를 제안할 수 있습니다.

- [성좌 임무]를 성공적으로 달성하는 경우, 막대한 포인트와 함께 성좌로부터의 선물을 받게 됩니다.

- 새로운 기능, [별자리 등록]이 활성화됩니다.

- 커뮤니티에 등록을 원하는 성좌들을 [커스텀 네트워크]를 통해 연결할 수 있습니다.

- [별자리 등록]을 끝마치는 경우, 모든 이용자들이 새롭게 새겨진 별을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커뮤니티에 새롭게 추가된 또 다른 기능들, [성좌 임무]와 [별자리 등록].

나는 해당 기능들에 대해서도 자세히 살펴보았다.

[성좌 임무]의 경우에는 기존에 있던 [임무] 기능의 강화판이었다.

성좌들만이 작성이 가능한 새로운 임무 게시판이 추가된 것이다.

여타 임무들에 비해 조금 더 무게감이 느껴지는 임무인 셈이었다.

"그리고 [별자리 등록]의 경우에는··· 이게 아서가 저번에 이야기했던 그건가?"

그리고 그와 함께 추가된 [별자리 등록]의 경우, 성좌를 위해 추가된 새로운 가입기능처럼 보였다.

커뮤니티에 성좌를 등록해 모두가 그 존재를 알게 만드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무래도 아서가 이야기했던 '황금의 별'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서를 지켜보는 성좌, 황금의 라스테리오.

그가 아서의 눈에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별과 같이 보였던 것처럼, 커뮤니티의 다른 헌터들에게도 비슷한 풍경이 보이게 되는 모양이었다.

"커뮤니티에 등록하면 모든 헌터가 똑같은 풍경을 볼 수 있게 되는 모양인데."

이번에 성좌들을 위해 추가된 세가지의 강력한 기능들.

해당 기능들을 이용한다면, 이전보다는 조금 더 특별한 커뮤니티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저 성좌라는 존재들이 이 방식을 크게 반겨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저 드높은 하늘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는 정체불명의 존재들.

그들은 무엇을 위해 그토록 인간과의 소통을 갈망하는가.

나에게 있어서는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아서 테브란트를 향해 '황금의 라스테리오'가 보내는 맹목적인 관심처럼 말이다.

"······뭐, 관심이 있으면 본인들이 먼저 알아서 나서겠지."

세상에는 다양한 이유로 관심과 손길이 쏟아지고는 하는 법이다.

그 모든 것을 한낱 인플루언서인 내가 이해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때로는 이용자들에게 있어서 무척이나 해가 되는 생각을 하는 성좌도 있을테고 말이다.

이런 내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도 그때도 나는 여전히 내가 할일을 해나갈 뿐이었다.

툭-.

나는 눈앞의 메세지를 닫고서, 커뮤니티의 관리자 화면에 접속했다.

관리자로서 새롭게 추가된 기능들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성좌 후원]이라··· 대체 어떤 방식으로 돌아가는지 한번 확인해볼까."

내가 가장 먼저 조사해보기로 한 것은, 성좌 시스템의 핵심 기능인 [성좌 후원]이었다.

커뮤니티 이용자와 성좌를 연결해주는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 시스템.

그것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새로운 기능을 확인하기 위해 내가 화면을 터치하면, 머지않아 낯선 메세지 하나가 내 눈앞에 떠올랐다.

- [성좌 후원]을 사용하기 위한 새로운 [성좌 이름]을 등록해주세요.

- 확인.

그리고 그 직후.

나는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메세지를 확인하고서 눈을 부릅떴다.

눈앞에 나타난 메세지의 내용.

그 내용이 나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을만큼 파격적인 것이었던 까닭이었다.

"아니··· 이거 나도 사용이 가능한 기능이었어?"

무제한 한도의 카드 보유자, 신유호.

아무래도 자신의 우월한 커뮤니케이션 실력을 뽐낼 시간이 찾아온 모양이었다.

* * * * * *

S급 헌터, 아서 테브란트.

무릇 헌터들로부터 검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존경받는 금발의 헌터는, 현재 피곤한 몸을 이끌며 자신의 호텔 객실 앞에 들어선 상황이었다.

오랜 시간동안 이어지던 헌터협회의 조사가 방금 전에 끝난 까닭이었다.

삐빅. 끼이이익-.

카드키를 대고 들어온 아서가 자신이 대여한 스위트룸에 키를 꽂으면, 전등에 불이 들어오며 환한 빛이 그를 맞이해주는 모습이었다.

아서는 스위트룸에 들어오기 무섭게 주변을 돌아보더니, 이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 더러워진 외투를 벗었다.

스윽.

모래가 묻은 외투를 적당히 던져놓은 아서는, 짙은 하품을 내뱉으며 능숙한 영국식 영어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암··· 상황이 상황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시간이 길어졌나."

방금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한 감상을 내뱉은 그는, 근처에 있던 의자 하나를 끌어다가 자리에 앉았다.

적당히 대련만 마치고서 돌아가려는 생각이었는데, 아서의 예상보다도 일이 커진 느낌이었다.

외국인인 아서 테브란트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피곤한 일정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협회 소속의 직원들이 영어에 능숙하다는 것이었을까.

그들은 [커뮤니티]의 번역기능 없이도 아서와 원활하게 의사소통을 진행하는 모습이었다.

의사소통까지 곤란했으면 지금보다 훨씬 더 늦어졌더라도 이상하지 않았을 터였다.

"아, 생각해보니 노스웨스트 더비가 방금 끝났을 것 같은데?"

영국과의 시차를 계산하던 아서는 한가지 사실을 깨닫고서 곧장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긴 시간동안 이어진 조사때문에 하필이면 경기시간을 놓쳐버린 것이다.

노스웨스트 더비는 아서가 사랑하는 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리버풀이 벌이는 중요한 경기들 중 하나다.

그런 경기인만큼 결과를 확인하는건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훌륭한 경기였다면 재방송을 챙겨볼 생각도 가지고 있었고 말이다.

"······."

스윽-.

자신의 스마트폰을 확인하던 아서는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 다시금 화면을 덮었다.

아무래도 재방송까지 챙겨볼 필요는 없어보였던 것이다.

아서가 사랑하는 붉은 팀은 매우 열정적인 팀이었고, 이번 경기에서는 우연히 붉은 로고를 가진 팀이 승리했다.

단지 그런 결과에 불과했을 뿐이다.

조금은 기대했었지만 순순히 결과에 승복한 아서는 머리에 달아오른 열을 식히기 위해 물병을 집어들었다.

"하··· 목이 마르네."

샤워를 하기 전에 물이라도 한 잔 마셔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벌컥, 벌컥-.

식어버린 물을 양껏 들이킨 아서는 물병을 내려놓은 채로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지금도 자신을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을 황금색 별을 향해 고개를 들어올렸다.

언제나 아서 자신을 지켜봐주었던 찬란한 별.

세상 그 누구보다도 아서를 생각하는 황금빛의 별이라면 분명 아서의 마음에 공감해줄 터였다.

"엑스칼리버. 대체 맨체스터의 붉은 영광은 어디로 가버린걸까? 브리튼의 자랑인 또 다른 아서는 이렇게 맨체스터에서 나왔는데 말이야."

하늘의 별을 보며 이야기하는 아서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밤하늘을 수놓은 황금빛 별을 보며 홀로 이야기하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온 아서의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버릇이었다.

그리고 그 버릇은 낯선 도시의 5성급 호텔에서도 사라지는 법이 없었다.

하늘에 반짝이는 아름다운 별.

그것을 보며 아서는 자신의 '특별한 친구'와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나가려고 했다.

"설마 아서왕은 맨체스터가 아니라 웨일스 출생이라거나, 그 영광은 시티가 대신 차지했다거나 하는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하려는건 아니지? 엑스칼리버, 나는 말이야······."

허나, 그런 아서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질 수 없었다.

검성, 아서 테브란트.

그의 눈앞에 나타난 새로운 메세지가 아서의 이야기를 끊어낸 까닭이었다.

띠링-.

아서의 시선이 눈앞에 나타난 메세지를 훑고 지나갔다.

- 성좌 [황금의 라스테리오]가 당신에게 1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황금의 라스테리오]가 당신의 잘못된 이름 선택을 고치길 갈망합니다.

- 성좌 [황금의 라스테리오]가 당신에게 1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황금의 라스테리오]가 당신이 제발 잘못된 이름 선택을 고치길 소망합니다.

- 성좌 [황금의 라스테리오]가 당신에게 1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황금의 라스테리오]가 당신이 제발 잘못된 이름 선택을 고치길 간절히 열망합니다.

띠링! 띠링! 띠링!

연달아 귓가에 울려퍼지는 격렬한 알림음의 향연.

그것들을 멍하니 바라보던 아서의 입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황금의 라스테리오? 이건 대체 뭐야?"

영국의 자랑, 아서 테브란트.

그가 처음으로 특별한 누군가의 이름을 정상적으로 부른 순간이었다.

44화

성좌. 저 머나먼 하늘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존재들.

나는 현재 반투명한 화면을 바라보면서, 그들을 위해 개방된 특별한 기능들을 확인하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눈앞의 화면을 바라보는 내 표정은 그리 편안하지만은 못했다.

오랫동안 이어지던 고민이 지금도 계속해서 내 머릿속을 맴돌고 있는 까닭이었다.

"하··· 닉네임을 짓는게 참 쉽지가 않단 말이지."

닉네임 생성은 예전부터 사람들을 괴롭혀온 어려운 문제들 중 하나였다.

내 커뮤니티 닉네임, '거품판독기'의 경우에도 얼마나 많은 고민끝에 만들어진 닉네임인지 모른다.

더군다나 성좌명의 경우, 내가 사용하는 닉네임처럼 '거품판독기'같은 느낌으로 짓기도 곤란했다.

다른 이용자들에게 무게감있게 받아들여져야 하는 이름인 까닭이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빠르게 닉네임을 결정하는 대신에, 성좌들을 위한 기능들부터 확인해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렇게 십여분에 가까운 시간을 투자한 노력의 결과.

나는 성좌와 커뮤니티 이용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몇가지 차이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일단은 내가 성좌들을 초대해서 데려오는 구조는 아닌게 확실해보여."

첫째로, 성좌들은 다른 커뮤니티 유저처럼 관리자의 초대를 받아 커뮤니티에 가입하는 구조가 아니었다.

그들은 기존의 커뮤니티 유저들과 최대 인원을 공유하지 않았다.

오히려 [별자리 등록]이라는 별도의 가입 기능을 이용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 [별자리 등록]은 내가 성좌들을 초대하기보다는, 성좌 자신이 나에게 등록을 신청하는 구조였다.

해당 기능이 개방되기 무섭게 어느덧 다섯이 넘는 성좌들이 등록을 신청해온 것이 그 증거였다.

"하기야··· 그쪽에서 먼저 접촉하지 않으면 내가 정보를 얻을 수 없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내가 최초로 그 존재를 알게되었던 성좌, '아프리오스'를 포함해 많은 성좌들이 등록을 신청해왔다.

이쪽에서 먼저 성좌의 정보를 취득할 방법이 없는만큼, 어떤 의미에서 보면 당연한 절차인 셈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등록을 신청한 성좌들을 전부 승인해주었다.

지금 저 하늘 위에서 빛나고 있는 다섯개의 별들이 그들의 흔적이었다.

이름 그대로 커뮤니티에 등록한 다섯의 성좌들이 하나의 별자리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성좌들에게 일부 기능이 제한되어있는 것도 확실해보이고."

둘째로, [별자리 등록]을 마친 성좌는 모든 기능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성좌들은 커뮤니티의 게시판에 게시글을 작성하는게 불가능했다.

그들은 경매장을 이용하는 것도 불가능했으며, 타인이 올린 의뢰를 수행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커뮤니티에 등록되었다고 해서 같은 커뮤니티 이용자가 아닌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커뮤니티의 이용자들을 지켜보는 단순한 관객에 불과해보였다.

"방금 전에 라스테리오랑 대화하면서 얻어낸 정보니까 확실하겠지."

제한에 대한 내용들은 내가 커뮤니티에 등록한 성좌, '황금의 라스테리오'와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검증한 정보였다.

결국 그들에게 주어진 소통수단은 단 두가지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포인트를 선물하며 이용자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성좌 후원].

모종의 의도가 담겨있는 임무를 이용자에게 공지하는 [성좌 임무].

중요한건 어느쪽이든 표현할 수 있는 내용에 한계가 있다는 점이었다.

조금은 두루뭉실한 형태의 이야기가 흘러나오는게 대부분이었으니까 말이다.

지금도 내 눈앞에 떠오르고 있는 누군가의 메세지처럼 말이다.

- 성좌 [황금의 라스테리오]가 당신에게 1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황금의 라스테리오]가 당신의 적극적인 행동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서 테브란트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성좌, 황금의 라스테리오.

그가 나에게 1포인트를 후원하면서 메세지를 보내온 것이다.

성좌의 의사를 담고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상당히 두루뭉실한 형태의 메세지였다.

이게 헌터들과 성좌들에게 허용된 최대한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이었다.

그것도 포인트가 있어야 가능한 커뮤니케이션 말이다.

"슬슬 포인트 안부족해요? 오늘 받은거 거의 다 사용했을 것 같은데?"

물론 여타 이용자들이 그렇듯이, 성좌들도 포인트에서 자유로운 존재는 아니었다.

성좌, 라스테리오가 나에게 1포인트씩 뿌리고 있는데에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저 포인트의 출처가 다름아닌 오늘의 '출석체크 보상'인 까닭이었다.

출석보상으로 획득한 100포인트를 1포인트씩 쪼개서 보내고 있는걸 보면 착잡한 심경이 들 정도였다.

- 성좌 [황금의 라스테리오]가 당신에게 1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황금의 라스테리오]가 아직 여유가 조금 남아있다고 주장합니다.

100포인트.

수치만 생각해보면 상당히 적은 편이다.

허나, 그걸 쪼개서 100번으로 만들어버리면 마냥 적은 횟수는 아니었다.

체감상 100번이 넘었을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포인트가 남아있다니 대단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저렇게 메세지를 쪼개서 보내는게 어지간히도 재밌는 일인가 싶기도 하고 말이다.

"······."

눈앞의 라스테리오 같은 성좌들은 어떤 이유로 이용자들을 후원하고자 하는 것인가.

그들에 대한 애정일까.

그게 아니면 그들의 행동으로부터 찾아오는 재미일까.

어느쪽이든 내가 그들과 비슷한 관점에서 움직이기 전에는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슬슬 미뤄두었던 닉네임을 해결할 차례였다.

"하··· 슬슬 이름을 지어야겠지."

성좌에게 어울리는 이름.

어떤 이름을 지어야 이용자들에게 있어서 나에 대한 신뢰감이 올라갈 것인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고민에 잠겼다.

멋있는 이름과 무거운 이름.

그 사이에서 고민하던 내 머릿속에 유명한 전설속의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고민되는데 그냥 '엑스칼리버'로 지어버릴까."

띠링-.

내 눈앞에 이전보다 조금 더 커다란 메세지가 떠올랐다.

- 성좌 [황금의 라스테리오]가 당신에게 1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황금의 라스테리오]가 당신에게 그 선택을 재고해볼 것을 요청합니다.

- 성좌 [황금의 라스테리오]가 당신에게 1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황금의 라스테리오]가 당신에게 그런 행동은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올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 성좌 [황금의 라스테리오]가 당신에게 1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황금의 라스테리오]가 그 이름은 멋지지 않다고 강조합니다.

아서가 애타게 찾던 이름, 전설의 명검 '엑스칼리버'.

그 이름을 언급하기 무섭게 성좌 라스테리오가 곧바로 반응해온 것이다.

아서와 있었던 일 때문에 어지간히도 그 이름에 거부감이 생긴 것인지, 해당 이름을 듣고서 질색하는 라스테리오였다.

'지금까지 본 모습으로는 라스테리오가 인간들에게 상당히 우호적인 성좌인건 확실해보이는데.'

라스테리오가 아서를 대하는 태도를 보건데, 그가 인간에게 호의적인 감정을 안고 있는건 확실했다.

적어도 나쁜 성좌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 성좌인만큼 내 나름대로도 라스테리오에 대한 배려를 해주는 것이 괜찮을 터.

나는 라스테리오의 그러한 만류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그럽시다. 다른걸로 하죠, 뭐."

그런 내 결정이 만족스러웠던 것이었을까.

이번에는 2포인트를 후원하며 메세지를 보내오는 라스테리오였다.

- 성좌 [황금의 라스테리오]가 당신에게 2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황금의 라스테리오]가 당신의 현명한 선택을 칭찬합니다.

라스테리오의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커다란 지출을 한 셈이었다.

나는 그런 라스테리오를 보면서 슬슬 성좌들에 대한 평가가 바뀌어가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압도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처럼 느껴지던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1포인트에 쩔쩔매는 현실이 퍽 우습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만큼 그들이 인간들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의미겠지만 말이다.

나는 라스테리오의 메세지를 만족스럽게 받아들이면서, 다시금 반투명한 화면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흠······."

성좌로서의 닉네임을 결정하는 화면.

어떤 닉네임을 입력해야하나 고민하던 나는, 결국 짧은 고민끝에 적당한 이름을 입력했다.

"좋아. 이걸로 할까."

타닥, 타다닥-.

반투명한 키보드를 두드려 화면에 내용을 입력한 이후.

나는 화면을 터치해 [성좌 후원] 기능을 사용할 새로운 닉네임을 확정시켰다.

- 새로운 별이 하늘에 기록되었습니다.

- 성좌 [인피니튜드]를 위한 일부 기능들이 해금되었습니다.

내가 [성좌 후원]의 기능을 위해 등록한 성좌명은 '인피니튜드'—.

그것은 원대한 뜻을 가지고 있는 훌륭한 이름이었다.

대충 내 포인트가 무한하다는 뜻이었다.

* * * * * *

도합 11개의 별을 하늘에 새기고서 잠든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내가 처음으로 마주한 것은, 내 눈앞에 떠올라있는 반투명한 창 하나였다.

내가 깊은 잠에 빠져있는 동안 출력된 것이었을까.

현재 내 시야에는 낯선 내용의 메세지가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건 또 뭐야."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어앉은 나는, 반쯤 감겨있는 눈으로 눈앞의 메세지를 바라보았다.

내가 자고 있는 동안 떠오른 메세지의 내용을 확인해보면, 그 내용은 나에게 있어서 상당히 파격적인 것이었다.

지금껏 내가 마주한적 없는 유형의 메세지였으니까 말이다.

< 별자리 관리 도구 >

- 새롭게 커뮤니티에 등록된 성좌들 중 일부가 당신에게 거래를 제안했습니다.

- 거래를 수락하는 경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용됩니다.

* 해당 거래에 참여한 성좌들이 각각 100만 포인트를 지급받게 됩니다. (총 900만 포인트)

* 독에 대한 완전한 내성을 획득합니다.

* 저주에 대한 완전한 내성을 획득합니다.

* 1177일의 추가 수명이 부여됩니다.

* 마력 능력치가 D로 조정됩니다.

* 멸망에 대한 117일의 유예가 이루어집니다.

- 해당 거래에 대한 인과율은 전부 성좌들이 부담하게 됩니다.

- <별자리 관리 도구>에 의한 거래는 그 규모에 따른 재사용 대기시간이 부여됩니다.

눈앞에 떠오른 화면의 이름은 <별자리 관리 도구>.

아무래도 <커뮤니티 관리 도구>처럼 관리자를 위해 제공되는 특별한 화면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런 화면에 적혀있는 내용은, 어제 등록한 성좌들이 제안했다는 '거래'에 대한 것이었다.

내가 100만 포인트를 그들 모두에게 지불하고, 그에 따른 모종의 대가를 받는 거래.

커뮤니티의 성좌들이 나에게 본격적으로 포인트를 요구해오기 시작한 것이다.

"······."

나는 눈앞에 떠오른 화면의 내용을 다시 한 번 유심히 읽어보았다.

내가 아홉명의 성좌들에게 900만 포인트를 지불하고 얻는 보상은 다양한 편이었다.

독 면역. 저주 면역.

수명의 증가와 마력 능력치의 향상.

하나같이 굉장히 유용한 항목들이 적혀있었던 것이다.

어째서 커뮤니티의 이용자들이 [리워드]에 환장하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었다.

"멸망에 대한 117일의 유예······."

허나 그중에서도 가장 신경이 쓰이는 내용은 하나였다.

—멸망에 대한 유예.

거래 조건으로 올라온 내용중에서도 가장 직관적이지 않은 항목이 그곳에 있었다.

멸망에 대한 유예가 가능하다는 것은, 다른 의미에서는 멸망이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것은 지금 나와 마주하고 있는 성좌들이 그러한 멸망과 관련이 있다는 의미일 터였다.

"나는 종말론같은거 별로 안좋아하는데."

하-.

입가에서 새어나오는 묵직한 한숨과 함께 순식간에 잠이 달아났다.

갑작스럽게 맑아진 정신으로 입술을 곱씹던 나는 화면을 향해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멸망이라······."

스윽-.

멸망이라는 글자가 써있는 자리를 손가락이 스치고 지나갔다.

다가올 멸망.

어쩌면 주선호가 경고했던 미래의 연장선에 해당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의 이 보상이 그런 우리의 미래에 조금은 도움이 될지도 모르고 말이다.

나는 그것에 대해 천천히 고민하다가, 이내 나를 지켜보고 있을 라스테리오를 향해 물었다.

"더 좋은 조건은 없어요?"

띠링.

이제는 조금 친숙해진 누군가로부터 익숙한 메세지가 도착했다.

- 성좌 [황금의 라스테리오]가 당신에게 1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황금의 라스테리오]가 아직은 조금 곤란하다고 주장합니다.

성좌로부터의 메세지.

그 내용을 보건데 더 나은 조건은 어려운 모양이었다.

모든 성좌가 해당 거래에 참여한 것도 아니었으니, 여기에는 성좌들 나름대로의 이유가 존재하고 있을 터.

성좌들에 의해 풀리게 될 포인트에 대해 고민하던 나는, 짧은 고민끝에 흔쾌히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툭-.

내 손가락이 화면을 터치하는 것과 동시에, 거래에 대한 메세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 거래가 완료되었습니다.

- <별자리 관리 도구>를 이용해 다음 거래를 진행하기까지 재사용 대기시간이 적용됩니다.

성좌와의 거래가 성공적으로 완료되었음을 알리는 메세지.

파아앗-.

그와 함께 전신에 미약한 활력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가 가지고 있던 마력 능력치가 상승한 덕분이 틀림없었다.

성좌들에게 900만 포인트를 지불했다고는 하지만, 무한 포인트를 가지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아무런 부담이 없는 거래였다.

나로서는 대동강 물을 팔아 막대한 이득을 취한 셈이었다.

'포인트가 풀리는 속도도 어느 정도 빨라져야된다고 느끼긴 했으니까.'

더군다나 나로서도 포인트가 풀리는 템포가 조금 더 빨라질 필요성을 느끼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런만큼 성좌와의 거래는 양쪽에게 있어서 윈-윈이 되는 거래일 터였다.

그렇게 성좌들과의 거래를 성공적으로 마친 이후.

나는 손가락을 움직여 시야에 보이는 메세지들을 모조리 닫아버렸다.

"—[네트워크 접속]."

그리고는 명령어를 이용해 커뮤니티를 호출했다.

성좌라는 존재들이 새롭게 커뮤니티에 등장했으니, 그에 대한 이용자들의 반응을 게시판에서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황금의 라스테리오와 아서같은 케이스를 생각해보면, 지난 밤에 헌터들에게 접촉한 성좌가 추가로 있으리라는 판단에서였다.

"게시글들이 열심히 올라오고 있네."

커뮤니티의 게시판에 접속한 직후.

나는 눈앞에 떠오른 게시글들의 제목을 천천히 읽어나갔다.

- 아까부터 알림때문에 잠을 못자겠어. [3] (yamazaki)

- 1포인트는 대체 뭐야? [7] (yamazaki)

- 성좌라는게 갑자기 나타났는데 [3] (frz0777)

- 축구는 왜 새벽에 하냐? [1] (tex11)

- 횐님들.야식.사진입니다. ^^ [1] (마산사나이 최두식)

성좌에 대한 내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던 것이었을까.

커뮤니티에는 성좌와 관련된 게시글들이 여럿 올라와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런 게시글들 중에는 유독 눈에 들어오는 게시글이 하나 존재하고 있었다.

이용자명, 'yamazaki'.

일본의 S급 헌터, 귀령이 올린 게시글이었다.

"밤중에 알림이 계속 울렸다고?"

제목만 보더라도 어떤 상황인지 대충 짐작이 갈 정도였다.

아무래도 포인트가 부족한 성좌 하나가 'yamazaki'에게 찾아간 모양이었다.

'yamazaki'는 그런 성좌에게 밤새도록 시달린 것이었고 말이다.

"아무래도 성좌 하나한테 잘못 물렸나보네."

툭-.

나는 안쓰러워보이는 내용을 담고 있는 'yamazaki'의 게시글을 터치해 접속했다.

그리고는 'yamazaki'가 게시판에 올린 사연의 내용을 확인해보았다.

[ 제목 ] 아까부터 알림때문에 잠을 못자겠어.

[ 작성자 ] yamazaki

[ 이용자 정보 ] 야마자키 아오 (34) / S급 / 귀령

성좌 「지옥의 바더렉스」라는 존재가 아까부터 계속 나한테 포인트를 후원하고 있다는데.

문제는 이것때문에 계속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어.

심지어 나를 후원하겠다면서 예외없이 1포인트만 주고 있는 중이야.

(╬●∀●)

어이, 내가 거지인줄 아는거냐!

그깟 1포인트 필요없어!

[ 댓글 3개 ]

[ 공지사항 / 수정 / 삭제 ]

커뮤니티 이용자명, 'yamazaki'가 작성한 게시글에는 특정 성좌에 대한 비난이 적혀있었다.

성좌, 지옥의 바더렉스.

밤새도록 1포인트짜리 [성좌 후원]을 보낸 성좌때문에 제대로 잠에 들 수 없었다는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게시글의 내용을 확인한 내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반복적으로 울리는 알림때문에 잠에 들 수 없는 S급 헌터.

그 모습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지는 기분이었다.

"1포인트는 조금 심하긴 했지."

나 역시도 그런 'yamazaki'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리 S급 헌터들이 포인트를 좋아한다고 해도, 고작 1포인트에 목을 맬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정도야 출석체크만 꼬박꼬박 하더라도 받아갈 수 있는 포인트였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yamazaki' 역시도 1포인트짜리 소통을 하겠다며 잠을 방해하는 성좌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다.

"성좌에 대한 다른 헌터들의 글도 한 번 확인해볼까."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yamazaki'이외에도, 다른 케이스들 역시 다수 존재할 것 같았다.

그렇기에 나는 게시판 목록으로 돌아가 다른 게시글들도 하나씩 확인해보기로 했다.

스윽-.

그렇게 화면을 조작해 게시판에 돌아가면, 다시금 익숙한 게시글 목록이 나를 반겨주었다.

그리고 그런 게시판의 최상단에는 방금 전에 봤던 작성자의 닉네임이 적혀있었다.

작성자명, 'yamazaki'.

내 시야에 그가 새로 작성한 게시글의 제목이 들어왔다.

- 「지옥의 바더렉스」님 1만 포인트 감사합니다! (•̀∀•́)✧ (yamazaki)

아까와는 상당히 달라진 'yamazaki'의 반응이 보였다.

1만 포인트.

1포인트의 1만배에 달하는 금액이다.

그 모습을 보니 성좌 하나가 빵빵해진 지갑의 권능을 사용한 모양이었다.

"······."

나는 조금은 초라하게 느껴지는 '지옥의 바더렉스'를 생각하면서, 손바닥으로 조용히 자신의 눈가를 덮었다.

왠지 모르게 오늘따라 유달리 피곤하게 다가오는 아침이었다.

45화

강한 힘은 그만한 책임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그것이 소속된 집단에게서 동질감을 무너뜨릴만한 수준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대한민국의 S급 헌터, 신창 주선호.

그는 헌터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후부터 많은 이들의 관심과 경계를 받아왔다.

그리고 그에게 붙어있던 경계의 시선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오늘도 일기예보가 틀렸나."

적막한 분위기가 내려앉은 집.

생활감이라고는 거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저택에서, 주선호는 현재 혼자 안마의자에 앉아있었다.

안마의자에 앉은 주선호의 눈동자에 창밖으로 쏟아져내리는 빗방울의 모습이 비추어졌다.

정답을 모르는 일기예보.

적막속에서 울려퍼지는 빗방울 소리.

그 속에서 주선호의 손가락이 조용히 허공을 더듬었다.

"—[네트워크 접속]."

S급 헌터, 주선호는 오래전부터 외톨이로 살아왔다.

그에게 대의에 함께하는 '형제'는 있지만 친구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래전에 벌어졌던 '불운한 사고'.

모든 것이 이해관계의 부산물로 보이기 시작한 이래, 그는 타산적인 소통만이 가능한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여전히 외톨이였다.

그에게 아첨하는 사람도, 그를 찾는 사람도 무수히 많은 편이었지만, 그는 이해타산 없이 대화가능한 사람을 만드는 법을 더는 알지 못했다.

단지 자신에게 주어진 거대한 사명을 따라서, 함께 그 사명을 짊어진 '동료'들과 함께 움직일 뿐.

화려한 S급 헌터의 이면은 언제나 피와 고요에 잠겨있는 편이었다.

"······."

그런 이유로 주선호는 언젠가부터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기 시작한 [커뮤니티]를 좋아하게 되었다.

아무런 이해관계없이 지구 반대편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

더군다나 그곳에서 만나는 이들은, 하나같이 주선호와 비슷한 입장에 처해있는 이들이다.

무수한 시선과 두려움을 안고 살아왔던 S급 헌터들.

그럼에도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지고 여전히 하루하루 몬스터를 사냥해나가는 이들이 그곳에 있었다.

"오늘도 글이 많이 올라와있군."

다양한 이야기를 전하는 다양한 사람들.

주선호는 그들에 대한 흥미를 가진 채로, 그가 가진 얼마 안되는 취미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커뮤니티]에 올라온 수많은 게시글들.

무심한 눈으로 천천히 그것들을 바라보던 주선호의 시선이 [인기 게시글]의 최상단을 훑었다.

오늘은 어떤 글이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런 주선호의 시야에, 방금 전에 올라온 누군가의 게시글이 들어왔다.

- 현직 창술사가 말하는 신창 주선호의 한계 [11] (xkingx)

망원동불주먹, 주선호의 이목을 끈 게시글 하나.

해당 게시글의 제목은 '현직 창술사가 말하는 신창 주선호의 한계'였다.

주선호의 눈이 게시글을 작성한 작성자의 닉네임을 확인했다.

이용자명 'xkingx'.

최근 들어서 수차례 주선호와 관련된 게시글을 작성한 사람이었다.

"xkingx··· 또 그 녀석인가······."

익숙한 닉네임을 바라보던 주선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S급 헌터들만 모여있어 수준이 높을거라고 생각되는 곳이지만, 그런 [커뮤니티]에도 저렇게 저열한 유저들은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저마다의 관점을 공유하기 위한 고차원적인 이야기를 해도 모자랄 마당에, 터무니없는 이야기만을 반복하며 대중의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자들.

아무리 경험치가 받고 싶다고 하더라도, 선을 넘은 그들의 행태는 주선호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중국의 S급 헌터, 나선창 첸다오가 올린 게시글이겠지."

쯧-.

도를 넘은 제목 선정과 악질적인 닉네임을 확인한 주선호는 혀를 찼다.

경험치를 위한 패악질에 짜증을 느낀 주선호가 비추천 버튼을 누르기 위해 손을 뻗으려던 순간.

- 성좌 [파멸의 알라티오]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파멸의 알라티오]가 당신의 계획에 강한 흥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띠링-.

익숙한 알림음과 함께 주선호의 눈앞에 반투명한 화면이 나타났다.

100포인트.

하루에 한 번 주어지는 출석보상과 같은 액수의 포인트를 누군가 주선호에게 후원한 것이다.

더군다나 눈앞의 메세지에는 주선호에게 포인트를 보낸 인물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성좌, '파멸의 알라티오'.

그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주한 존재가 주선호 자신에게 포인트를 보내온 것이다.

"성좌··· 성좌라고······?"

성좌. 그리고 포인트.

눈앞에 보이는 메세지를 마주한 주선호의 머리가 빠르게 상황을 분석했다.

그가 이용하는 [커뮤니티]의 유저 이외에도, 다른 유저들에게 포인트를 보낼 수 있는 존재가 있다.

그리고 그들중에 하나가 상태창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알려온 것이다.

그 사실을 이해한 주선호가 허공을 가리키던 손가락을 내렸다.

"성좌라고 했나? 대체 어떤 의도로 나한테 포인트를 보낸거지?"

주선호는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고개를 들어 이야기했다.

주선호에게 포인트를 보낸 정체불명의 존재, '파멸의 알라티오'가 그를 지켜보고 있다면 응답할거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런 주선호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던 것이었을까.

머지않아 주선호는 방금 전에 보았던 것과 동일한 양식의 메세지를 받아볼 수 있었다.

- 성좌 [파멸의 알라티오]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파멸의 알라티오]는 당신의 존재가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파멸의 알라티오가 보낸 메세지.

거기에는 알라티오라는 성좌가 주선호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적혀있었다.

헌터들 중에서도 유달리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존재.

그가 주선호의 존재를 계속해서 눈여겨보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대체 그 이유가 뭐지? 단순히 내가 지구의 헌터들 중 가장 강해서인가?"

띠링.

주선호를 향한 알라티오의 메세지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 성좌 [파멸의 알라티오]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파멸의 알라티오]가 당신이 숨기고 있는 비밀을 만족스러워합니다.

- 성좌 [파멸의 알라티오]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파멸의 알라티오]는 당신의 야망이 언젠가 빛을 발할거라고 생각합니다.

- 성좌 [파멸의 알라티오]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파멸의 알라티오]는 당신의 계획에 약간의 도움을 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비밀. 야망. 그리고 도움.

몇가지 키워드를 이야기하는 알라티오의 모습에 주선호의 눈빛이 뒤바뀌었다.

단순히 질문에 대답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500포인트나 되는 포인트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그런 존재가 지금 주선호를 돕겠다고 선언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주선호가 진지한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가진 비밀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던거냐."

주선호가 가지고 있는 오랜 비밀에 대한 질문.

그가 던진 진지한 질문에 곧바로 성좌로부터의 대답이 돌아왔다.

- 성좌 [파멸의 알라티오]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파멸의 알라티오]는 하늘 아래 영원한 비밀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후우-.

성좌의 이야기를 들은 주선호의 입에서 짙은 한숨이 터져나왔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이 [커뮤니티]같은걸 보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는걸 깨달았다.

주선호는 자리에 앉아 [커뮤니티]를 하는 대신에, 안마의자를 멈춰세우고서 몸을 일으켰다.

터벅, 터벅.

아무도 없는 집안을 걷던 주선호는, 물컵을 꺼내 거기에 냉수를 따랐다.

컵을 기울여 물을 한껏 들이키자, 시원한 냉수가 주선호의 머리를 차갑게 식혀주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성좌··· 나한테 포인트를 지원해줄 수 있는 존재라."

주선호는 냉정해진 머리로 자신이 직면한 기회에 대해 고민했다.

상태창을 통해 공식적으로 주선호에게 포인트를 지원해줄 수 있는 존재가 있다.

그리고 그 존재는 주선호에게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앞으로 인류가 항거할 수 없는 난관에 직면하게 될거라고 생각한다. 무엇을 버려야할지 제대로 결정하지 않으면, 더는 돌이킬 수 없을만큼 커다란 피해를 입게 되겠지."

그가 생각하기에, 앞으로 헌터들에게 들이닥칠 난관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다가올 난관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다.

그리고 결단이 필요했다.

"앞으로 들이닥칠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나는 그 상대가 누구라도 얼마든지 도움을 받을 생각이 있다."

주선호가 언젠가 한차례 게이트 너머에서 마주하고서, 상부에 보고를 올릴 생각을 포기했던 '그것'을 생각해서라도—.

주선호는 도움이 될 수 있는거라면 뭐든지 손을 잡을 생각이었다.

짧은 고민 끝에 결심을 마친 주선호가 하늘을 바라보며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성좌, 파멸의 알라티오. 당신은 나한테 어떤 방식으로 도움을 줄 수 있지?"

하늘을 향해 못박혀있던 주선호의 시선.

그곳에 성좌로부터의 마지막 대답이 떠올랐다.

- 새로운 [성좌 임무]가 개방되었습니다.

- 달성 보상 : 500,000 포인트

새롭게 개방된 [성좌 임무].

해당 임무의 달성 조건을 확인한 주선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 * * * * *

커뮤니티를 처음 운영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나는 커뮤니티 자체의 신뢰도에 집중하면서 운영했다.

헌터들이 상태창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신뢰도.

그것을 이용해 커뮤니티 자체를 신뢰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받아들이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S급 헌터들이 커뮤니티를 상태창의 일부로 여기는 상황이었다.

그 누구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태창이 거짓말을 할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아마 성좌가 하는 이야기도 비슷하게 받아들여지겠지."

그렇다면 상태창을 통해 메세지를 전달하는 '성좌'의 이야기에 대해서 헌터들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헌터들 대부분은 성좌의 이야기를 전적으로 믿을 것이 분명했다.

상태창을 통해 그들과 접촉하고서, 포인트까지 주는 존재가 거짓말을 할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을테니까 말이다.

나는 그런 발상으로부터 한가지 아이디어를 착안해냈다.

"[성좌 후원]을 통해서 하는 말은 어지간하면 전부 믿을거야. 그러니 그걸 이용해 계획을 진행시키는 수밖에."

주변의 의심을 사지 않도록 포인트를 풀면서, 자연스럽게 내 편을 만들어나가기 위한 과정.

나는 성좌의 권위를 빌어 S급 헌터들을 움직이는 방법을 떠올린 것이다.

물론 그를 위한 첫 타겟 역시 선정해두었다.

나와 친분을 가지고 있는 헌터들 중 하나가 그 대상이었다.

"내가 가진 포인트로 오지아를 확실하게 아군으로 만들어야만 한다."

파천궁 오지후의 동생, S급 헌터 오지아.

그녀는 S급 헌터들 중에서도 비교적 하위권에 해당하는 커뮤니티의 신입 회원이었다.

오지아는 S급 헌터나 커뮤니티에 대한 이해가 얕을뿐더러, 비교적 휘둘리기 좋은 성격을 가지고 있는 편이었다.

더군다나 그녀의 포지션은 그림자사냥꾼 이지성과 어느 정도 겹치는 면이 있었다.

오지아를 키우는 것으로 어느 정도 이지성에 대응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언제까지고 다른 헌터들에게 끌려다니기만 할수는 없지."

지난 여정을 통해 나는 많은 것들을 깨달았다.

비록 나 자신이 B급 특성을 가진 헌터에 불과하다고 해도,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의 무게마저 B급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언제까지 거대한 흐름에 휘말려서 살아갈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는 자신의 손으로 흐름을 주도해야할 차례였다.

"이제는 내 수족으로 써먹을만한 아군을 만드는 수밖에."

압도적인 정보망이 자신에게 주어졌으면 그걸 써먹어야만 한다.

가능한 많은 것들을 알아내야만 했다.

그리고 가능한 많은 것들에 대비해야만 했다.

그것만이 다가올 미래에서 자신의 생존을 담보하는 수단이 될테니까 말이다.

- [성좌 후원] 기능을 활성화했습니다.

- 어떤 이용자에게 후원하시겠습니까?

그렇기에 나는 한국의 S급 헌터, 휘광 오지아를 향해 성좌로서의 메세지를 보냈다.

성좌, [인피니튜드].

어제의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성좌를 이용해서 말이다.

띠링-.

100포인트짜리 메세지가 오지아에게 전송된 이후.

흐릿한 풍경을 담은 창 하나가 눈앞에 떠올랐다.

거기에는 후드를 뒤집어쓴 채로 방구석에 앉아있던 오지아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허공에 손가락을 움직이던 모습을 보건대, 아무래도 커뮤니티를 하고 있던 것처럼 보였다.

- "······누, 누구세요?"

반투명한 화면 너머로 후드를 깊숙히 눌러쓴 오지아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처음 마주하는 성좌와의 대화가 어색했던 것이었을까.

오지아는 나를 향해 그 정체를 물어오는 모습이었다.

"누구긴 누구야. 미래의 100만 유튜버지."

나는 그런 오지아를 향해서 정직한 내용을 담은 메세지를 보냈다.

방구석 성좌 [인피니튜드]로서의 첫걸음이었다.

- 성좌 [인피니튜드]가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인피니튜드]는 세상의 미래를 위해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 "······제 도움이요?"

[성좌 후원] 기능을 통해 전달된 메세지에 조금 들뜬 목소리로 묻는 오지아였다.

아무래도 성좌의 흉내를 내는 내 태도에 흥미를 느낀 모양이었다.

타닥, 타다닥-.

나는 그런 오지아를 향해 계속해서 메세지를 전송했다.

최소한의 사명감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반응할만한 내용이었다.

- 성좌 [인피니튜드]가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인피니튜드]는 세계를 구할 영웅을 구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 성좌 [인피니튜드]가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인피니튜드]는 당신이 거기에 무척이나 적합한 인물이라고 전합니다.

- "······네? 제가 영웅이라구요?"

세상을 구할 영웅.

그리고 그를 돕기위한 정체불명의 존재.

어찌보면 정석적인 클리셰라고 할 수 있을만한 전개였다.

성좌 [인피니튜드]의 이야기를 듣던 오지아는, 이내 난감해하는 표정으로 시선을 돌리며 이야기했다.

- "······제가 그런 사람일리가, 없는데요."

- 성좌 [인피니튜드]가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인피니튜드]는 조금 더 자신감을 가질 것을 요구합니다.

- 성좌 [인피니튜드]가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인피니튜드]는 당신이라면 가능할거라고 주장합니다.

성좌를 사칭한 내가 전하는 이야기를 부담스러워하는 오지아.

그녀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감으며 시선을 피해보였다.

허나, 대화를 나눌수록 쌓여가는 포인트에 기쁜 것인지 입꼬리를 꿈틀거리는 모습이었다.

대화만 나눠도 포인트를 주는 존재.

그런 존재와 대화를 나누는 이 순간 자체가 무척이나 만족스러울 터였다.

나는 멈추지 않고 오지아와 계속 대화를 나누었다.

- "······커뮤니티를 보니까 성좌님들은 그, S급 헌터들을 도와주시는 것 같은데요."

- 성좌 [인피니튜드]가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인피니튜드]가 그 사실을 긍정합니다.

- "······그렇지만 저는 다른 헌터들처럼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막상 도움을 주시더라도 전혀 쓸모가 없을지도 몰라요."

오지아는 자신감을 핑계로 부담스러워하는 태도를 내보였다.

허나 그녀의 입꼬리는 그런 자신의 의사와는 정반대의 감정을 나타내고 있었다.

온라인 게임에서 타이밍 거래, 파티탈퇴 먹튀, 에스크로 사기 등을 당해본 내 경험상, 저건 제안에 넘어오기 거의 직전이나 다름없는 상황인 것이다.

협상의 달인인 나에게는 밀고 당겨야할 때가 명확하게 보인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지금은 살짝 밀어낼 차례였다.

"이걸로 완전히 끝났네."

오지아의 심리를 파악한 나는 그녀가 거부할 수 없을만한 딜을 걸기로 했다.

1포인트 연타를 날리는 성좌들과는 다르게, 파격적이고 화끈한 딜을 말이다.

나는 오지아를 향해 마지막으로 두줄의 [성좌 후원]을 보냈다.

- 성좌 [인피니튜드]가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인피니튜드]가 당신의 선택에 매우 아쉬워하며 눈물을 머금고 물러서기로 합니다.

- "······괘, 괜찮아요. 훌륭한 헌터가 금방 나올거에요."

- 성좌 [인피니튜드]가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인피니튜드]가 남아있는 100만 포인트를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 "여기, 제가 할게요! 뭐든지 다 할게요!"

눈앞에 보이는 반투명한 화면의 너머.

그곳으로부터 나는 처음으로 오지아의 커다란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럼 그렇지."

가짜 성좌 [인피니튜드]가 진행하는 비밀 프로젝트.

S급 헌터, '휘광' 키우기의 시작이었다.

46화

S급 헌터, 휘광 오지아.

한국의 또 다른 S급 헌터, 파천궁의 동생인 그녀에게는 커다란 결점이 있었다.

바로 남들과의 의사소통이 지나치게 부담스럽다는 점이었다.

오랜 시간동안 은둔형 외톨이로 지내왔던 그녀에게 있어서, 타인과의 대화는 상당히 어려운 일에 속했다.

헌터 일때문에 마지못해 밖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사람들 앞에 서면 여전히 목소리가 작아지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최근 들어서 대부분의 시간을 [커뮤니티]에서 보내오던 그녀였으나—.

"네? 저, 정말요······?"

오지아는 자신의 입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오지아가 오늘 처음으로 마주한 존재, 성좌 '인피니튜드'.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에 처음에는 부담스러웠지만, 그녀는 이내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서 완전히 날려버리게 되었다.

그녀가 마주한 성좌가 얼마나 엄청난 존재인지 깨달아버렸기 때문이었다.

S급에 도달한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상당한 포인트 빈곤에 시달리고 있는 오지아였다.

성좌 인피니튜드는 그런 그녀를 향해 막대한 포인트를 베풀겠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 성좌 [인피니튜드]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인피니튜드]는 당신이 이미 함께하기로 결정했다면, 당신에게 충분한 도움을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 성좌 [인피니튜드]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인피니튜드]는 당신이 [리워드]에서 구매하고 싶은 것을 이야기해달라고 요구합니다.

성좌라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어마어마한 액수의 포인트.

그것을 이용해서 [리워드] 상점에 있는 상품을 사주겠다는 의미였다.

깜빡, 깜빡-.

제자리에서 멍한 표정으로 메세지를 바라보던 오지아가 손을 들어올렸다.

혹시나 자신이 들은 이야기가 거짓말은 아닌 것일까.

그런 고민을 하던 오지아는 눈을 질끈 감고서 [리워드] 상점창을 열었다.

"서, 성좌님··· 5500포인트짜리 <마력 소모량 감소 : 4%>가 가지고 싶어요!"

그리고는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성좌를 향해, 그녀가 가지고 싶은 상품을 이야기했다.

오지아가 현재 마주하고 있는 [리워드] 상점에서 세번째로 비싼 상품.

그것을 하늘의 성좌에게 부탁한 것이다.

'······너무 비싼 물건을 부탁해버린거 아니야?'

혹시 지나치게 비싼 선물을 부탁한건 아니었을까.

그런 걱정을 하던 오지아의 눈앞에 다시금 메세지가 떠올랐다.

띠링-.

알림음을 들은 오지아가 한쪽 눈꺼풀을 들어올리며 메세지를 확인했다.

- 성좌 [인피니튜드]가 당신에게 55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인피니튜드]가 당신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겠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 오지아의 눈에 들어온 것은, 저 '인피니튜드'라는 성좌가 그녀에게 5500포인트를 후원했다는 메세지였다.

성좌의 후원.

그것을 확인한 오지아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후우, 후-.

지금 이 순간이 꿈은 아닐까 싶어서 볼을 꼬집어보아도, 통증만이 느껴질뿐 아무런 변화도 없는 모습이었다.

"······구매할게요."

성좌의 후원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오지아는, 손가락을 움직여 [리워드] 상점에서 해당 아이템을 구매했다.

툭.

버튼을 누른 오지아의 눈앞에 구매사실을 알려오는 메세지가 출력되었다.

- <마력 소모량 감소 : 4%>을 5500포인트에 구매했습니다.

- 모든 스킬의 마력 소모량이 4% 줄어듭니다.

오지아의 눈에 보이는 결제 메세지.

그와 함께 오지아가 후원받았던 5500포인트가 사라졌다.

어지간한 S급 헌터들조차 쉽게 누리지 못할 사치를 오지아의 손으로 저지른 것이다.

오지아는 결제 메세지를 보며 얼굴을 감싸쥔 채로, 하늘에 있는 성좌를 향해 감사인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성좌님! 저 앞으로 열심히 할게요!"

성좌를 도와 세상을 구하기로 약속한 것만으로도 5500포인트짜리 선물을 받았다.

더군다나 그녀에게는 성좌와 대화를 나누면서 누적된 포인트가 1000포인트 넘게 쌓여있는 상황.

방금전에 소모한 5500 포인트를 제외하더라도, 아직 많은 포인트가 남아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기쁨에 젖은 오지아는 성좌를 향한 감사인사를 멈추지 않았다.

"진짜 열심히 할게요! 감사합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성좌 역시 그녀의 대응에 만족했던 것이었을까.

오지아는 상품 하나를 선물했음에도 메세지를 보내는 것을 멈추지 않는 성좌를 바라보았다.

- 성좌 [인피니튜드]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인피니튜드]가 당신에게 필요한 다음 상품을 물어봅니다.

5500포인트를 사용한 성좌 인피니튜드가, 오지아에게 다시 한 번 필요한 상품을 물어본 것이다.

그것도 다음 선물을 구매해도 문제없다는 듯한 태도로 말이다.

"네? 선물을 또 사주신다구요?"

설마 자신에게 또 한차례 선물을 전해주려고 하는 것인가.

두근, 두근-.

이야기를 듣는 오지아의 심박이 조금 이상해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지아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흐물흐물해진 표정을 지으면서, 조금은 의심에 젖어있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4100포인트··· <지속시간 증가 : 2%>요······."

오지아가 두번째로 요구한 선물.

그것은 리워드 상점에 있는 4100포인트짜리 상품이었다.

<지속시간 증가 : 2%>.

지속성 스킬과 소모성 아이템 효과의 유지시간을 2% 늘려주는 상품이었다.

퍼센트 단위의 효과에 중첩이 가능하다는 장점을 가진 상품이었다.

"조금, 비싸죠······?"

혹시나 비싼것만 주문한다는 이유로 거절당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걱정을 하고 있는 오지아에게 익숙한 알림음이 울려퍼졌다.

띠링-.

오지아의 눈이 메세지를 천천히 읽어나갔다.

- 성좌 [인피니튜드]가 당신에게 4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인피니튜드]가 그런 금액쯤은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4100포인트.

이번에도 상품의 금액에 해당하는 금액이 오지아의 계정에 들어왔다.

오지아는 떨리는 손으로 화면을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

"이, 이번에도··· 살게요······?"

혹시나 잘못 보낸 것은 아닐까.

그런 의심을 가지고 되물어도, 성좌에게서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

입을 꼭 다문 오지아가 이번에도 물건을 구매했다.

툭-.

오지아의 손가락이 화면을 터치한 직후.

상품의 구매를 알리는 화면이 출력되었다.

- <지속시간 증가 : 2%>을 4100포인트에 구매했습니다.

- 모든 지속형 효과의 지속시간이 2% 증가합니다.

<지속시간 증가 : 2%>.

이번에도 상품을 구매하는 동안, 성좌는 그저 얌전히 그녀를 지켜볼 뿐이었다.

오지아는 그제서야 어느 정도의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녀와 접촉한 성좌라는 존재가, 오지아 자신의 생각보다도 훨씬 대단한 존재라는 사실을 말이다.

'약속만 지키면 괜찮겠지?'

오지아가 성좌의 도움을 받는 조건.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녀가 성좌의 계획에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그가 바라는 영웅이 되기만 한다면, 성좌가 주는 보상들은 충분한 대가라고 말할 수 있을 터.

그러니 가능한 눈에 띄지 않는 선에서, 조용히 성좌에게 도움을 주어야겠다는게 오지아의 생각이었다.

그렇게 오지아가 가슴속의 부채의식을 느끼고서 침대 구석에 파고들려던 순간.

"······네?"

띠링-.

이번에도 여지없이 성좌로부터의 메세지가 날아왔다.

- 성좌 [인피니튜드]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인피니튜드]가 당신에게 [리워드]에서 구매하고 싶은 상품들을 전부 말해달라고 부탁합니다.

- 성좌 [인피니튜드]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인피니튜드]는 당신의 가능성을 강하게 믿고 있습니다.

성좌, 인피니튜드가 오지아를 향해 새롭게 남긴 메세지.

그것은 오지아가 방금 전에 봤던 내용보다도 한층 더 파격적인 것이었다.

갖고 싶은 상품을 전부 이야기해라.

오지아로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에, 그녀는 어안이 벙벙해진 것을 느꼈다.

"저, 저, 저, 전부요······?"

[리워드] 상점에서 갖고 싶은 것들이 있다면 전부 구매해주겠다.

그런 성좌의 이야기는 오지아에게 어린 시절의 꿈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화려한 옷가게와 귀여운 인형가게에서, 부모님이 오지아에게 가지고 싶은걸 전부 말하라고 이야기하는 듯한 기분.

물론 그 시절의 꿈은 단 한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었고, 오지아는 결국 본인이 그 소원을 직접 이룰만한 재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럼에도 성좌의 이야기는 오지아로 하여금 어린시절의 망상을 떠올리게 만들만한 충격으로 다가온 것이다.

"정말 전부 다 사버려도 괜찮아요······?"

어떻게 생각해도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다.

오지아는 마음속에 떠오르는 무수한 의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성좌에게 물었다.

허나, 성좌의 태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있는 모습이었다.

오지아의 눈앞에 성좌의 대답이 떠올랐다.

- 성좌 [인피니튜드]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인피니튜드]는 당신에게 별의 인도를 의심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 성좌 [인피니튜드]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인피니튜드]는 당신이 주어진 책무를 다한다면 영원한 후원자로 남아있겠다고 주장합니다.

상점에 있는 상품들중에 원하는 것들을 전부 다 사주겠다.

파격적인 성좌의 진심에 오지아는 입을 다물었다.

너무 충격적이여서 입에서 말도 제대로 안나올 정도였다.

원래부터 목소리가 제대로 안나오기는 했지만, 그보다도 한층 더 말문이 막힐 것 같은 상황이었다.

허나 그녀는 S급 헌터의 초월적인 능력치를 이용해 간신히 입을 여는데 성공했다.

"가, 감사합니다아······. 그러면 일단 가지고 싶은거 전부 다 말할게요······?"

오지아의 이야기에 성좌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성좌의 침묵은 긍정이었다.

어디 한 번 가지고 싶은걸 말해보라는 이야기였다.

'그냥 아무거나 다 부르면 되는걸까?'

가지고 싶은 것이 뭐냐고 물으면, 솔직히 말해서 상점에 있는 것들이 전부 다 가지고 싶었다.

오지아는 자신의 [리워드] 상점에 있는 것들이 하나같이 자신에게 유용하다고 느끼고 있던 까닭이었다.

그녀는 성좌 인피니튜드의 압도적인 권능—'대량의 포인트'를 찬양하면서 자신의 요구사항을 이야기했다.

일단은 [리워드] 상점에서 가장 비싼 것부터 순차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선은 10500포인트짜리 <근력 능력치 1단계 보정(30일)>부터 살게요······."

무제한 한도의 카드를 이용한 [리워드] 상점 쇼핑.

오지아는 백화점을 전세낸 기분으로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상품들을 전부 구매했다.

조금이라도 이득이 되는 상품으로 보인다면, 포인트 대비 효율이 나쁘더라도 일단 구매하고나서 생각했다.

그렇게 오지아의 쇼핑은 한참동안 이어졌다.

- <근력 능력치 1단계 보정(30일)>을 10500포인트에 구매했습니다.

- <은밀한 발걸음 : 기척 제어>를 3900포인트에 구매했습니다.

- <명중치 보정 : 15%>를 2500포인트에 구매했습니다.

.

.

.

.

.

.

- <피로 감소(30일)>을 500포인트에 구매했습니다.

- 해당 효과는 앞으로 30일동안 유지됩니다.

띠링. 띠링. 띠링.

오지아의 시야에 계속해서 구매를 알리는 메세지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와 함께 성좌의 후원 메세지 역시 반복해서 출력되었다.

성좌에게 후원을 받고, 그걸로 물건을 구매한다.

계속해서 선물을 받고, 계속해서 상품을 구매하기를 수십차례.

점점 길어지는 메세지의 길이에 적응해가던 오지아는 무언가를 마주하고서 고개를 들어올렸다.

"······저기, 성좌님."

하늘의 성좌를 찾는 오지아의 시선.

오지아는 처음과 똑같이 떨리는 목소리로 성좌의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그런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은, 어떤 S급 헌터라도 아직 겪어본적이 없을만한 상황이었다.

"······더 이상 상점에 물건이 없어요."

S급 헌터, 오지아.

그녀는 <상점 초기화권>을 제외한 [리워드] 상점의 모든 상품을 구매했다.

* * * * * *

S급 헌터 휘광(徽光)— 오지아에게 후원을 하기 시작하고서 어느덧 며칠이 흘렀다.

그 기간동안 헌터 오지아에 대한 성좌 [인피니튜드]의 영향력은 크게 확대되었다.

이제는 [인피니튜드]가 시키는 일이라면 어지간해서는 전부 따르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오지후와 친하게 지내는 일이나, 사람이 많은 곳에 찾아가는 것 같은 일들은 여전히 어려워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언제든지 도움이 될 수 있는 전력이 생겼다는건 커다란 장점이었다.

전부 커뮤니티에 추가된 [성좌 후원] 기능 덕분이었다.

"······."

내가 만든 가짜 성좌, [인피니튜드]를 제외하고도 성좌들의 출현은 헌터들에게 많은 변화를 불러왔다.

성좌들은 저마다 마음에 드는 헌터들을 후원했으며, 그들에게 필요한 임무를 내걸었고, 또 그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늘어나기 시작한 성좌들과의 교류는 S급 헌터들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기존에 커뮤니티에 유통되던 포인트 흐름에 막대한 유동성을 공급하기 시작한 성좌들.

그로 인해 이제 성좌와 헌터들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거대한 흐름에 자연스럽게 휘말려버린 것은, 영국의 S급 헌터 '검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엑스칼리버라는 이름이 그렇게 마음에 안들었나봐."

검성, 아서 테브란트와 약속했던 컨텐츠 촬영날.

현장에 도착한 아서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성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왔다.

당연하지만 아서가 이야기하는 성좌는 그가 오랫동안 어울려왔던 존재, 황금의 라스테리오에 대한 것이었다.

원래부터 자신의 이름을 정정하고 싶어했던 성좌가, 아서와의 소통이 가능해지자 대놓고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지켜봤던 라스테리오의 성정으로 볼때, 아서는 지난 며칠동안 끊임없이 라스테리오에게 시달려왔을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엑스칼리버라 부르지 못해 아쉬워하는 아서의 앞에서, 라스테리오를 향한 지지의 의견을 표명했다.

"마음대로 이름을 바꿔서 부르면 당연히 누구라도 마음에 안들어하지 않나?"

"그 이야기를 며칠동안 질리도록 라스테리오한테 들었거든······."

"뭐··· 그러면 앞으로 제대로 부르면 되겠지."

나와 아서의 대화를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띠링-.

알림음과 함께 허공에 메세지가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 성좌 [황금의 라스테리오]가 당신에게 1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황금의 라스테리오]가 당신의 의견에 격하게 동의합니다.

성좌, 라스테리오.

그는 아서에게 이야기하던 내 의견에 격하게 동의하는 모습이었다.

내가 꺼낸 이야기가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피식-.

그런 라스테리오의 태도를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터져나올 정도였다.

'1포인트는 뭐야.'

100만 포인트를 받아놓고도 여전히 1포인트를 보내는 모습에, 나는 [성좌 후원]의 최소 후원 포인트를 조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1포인트는 너무 없어보인다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말이다.

적당히 100포인트 정도로 상한을 올려놓는다면 헌터들도 성좌들도 전부 납득할 터였다.

그렇게 내가 라스테리오의 메세지를 보며 카메라를 세팅하고 있으면, 차에 기대어 선 채 나를 지켜보던 아서가 물었다.

"그래서, 오늘 촬영한다는 컨텐츠는 어떤거야?"

아서는 카메라를 세팅하는 나를 향해 오늘의 컨텐츠를 물어오는 모습이었다.

영국의 S급 헌터이자, 랭킹 2위의 헌터인 아서를 데려다놓고 진행할 컨텐츠.

평범한 유튜브라면 분명 랭킹 1위와의 대결에 대해 상정하거나, 전형적인 몬스터 토벌 방송을 진행할 터였다.

"아서. 오늘은 특별한 컨텐츠 촬영을 준비했어."

허나, 그런 것들은 영국에 있는 헌터 유튜버들이 이미 오랫동안 진행해왔던 컨텐츠였다.

비슷한 영상을 찾으면 영어로만 수십, 수백개는 더 나올거라는 이야기였다.

내가 이곳에서 똑같은 컨텐츠를 진행한다고 해봐야, 해당 영상들의 한국어 자막 버전밖에 안되는 셈이었다.

'그런 영상들을 따라해봐야 100만 유튜버에 도달하기는 솔직히 글러먹었지.'

그렇기에 오늘만큼은 특별히 내가 가장 싫어하는 유튜버, '헌터마스터'와 비슷한 방향성을 가지고 촬영해보기로 했다.

특별한 게스트를 모시고서만 진행할 수 있는 무척이나 특별한 방송.

그것도 검성 아서 테브란트가 이곳에 있기에 촬영가능한 엄청난 컨텐츠.

짝, 짝, 짝-.

나는 가볍게 박수를 쳐서 분위기를 띄워올리며 이야기했다.

"아서. 오늘 이 공터에서 진행할 컨텐츠는 요리방송이야."

"뭐? 요리방송?"

"[신성의 검(S+)]으로 요리해보자."

툭-.

나를 바라보던 아서의 손에서 스마트폰이 떨어져내렸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시선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컨텐츠가 반드시 흥행할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야, 썸네일에 대검을 들고서 감자를 썰고있는 아서의 모습을 넣으면 대박날테니까 말이다.

"검성이라면 어떤 검으로도 요리가 가능하겠지. 검성의 실력을 보여줘, 아서."

"친구, 아무래도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아서 테브란트지, 고든 램지가 아니야."

바닥에 떨어진 스마트폰을 주워든 아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허나 이 컨텐츠는 내가 생각하기에 무척이나 참신하고 건전한 컨텐츠였다.

천하의 아서 테브란트를 데려다 놓고서, 여기서 먹기 어려운 한국 음식들을 먹이고 있을 수는 없지 않던가.

그러니 이것이 우리가 진행가능한 최선의 컨텐츠인 셈이었다.

"너는 할 수 있어, 아서."

옛말에 만류귀종(萬流歸宗)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길은 결국 하나의 깨달음으로 귀결된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무학의 길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검의 극치를 뒤쫓는 아서라면 대검을 들고서도 훌륭한 요리가 가능할 터.

그렇기에 나는 차량의 트렁크에 요리를 위한 재료들을 가득 채워넣었던 것이다.

"오늘만큼은 대검을 들고 요리해보자."

"······차라리 검이라도 바꿔줘. 아무리 생각해도 [천상의 검]을 쓰는건 안돼."

아서는 마지못해 요리 컨텐츠를 수락하는 모습이었다.

그 대신 아서는 나에게 검을 바꾸자고 제안했다.

아서가 평소에 사용하는 [천상의 검]이 아닌, 적당히 멋있는 외견을 가진 양손검으로 말이다.

"형태만 멋들어진 검이라도 괜찮잖아. 그렇지? 차라리 그게 더 낫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천상의 검]을 쓰는건 멍청한 짓이야."

"본인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썸네일에는 내가 직접 합성해서 넣을게."

"그래. 차라리 썸네일만 그렇게 만들자고. 내가 요리하다가 이 주변을 통째로 날려버리는걸 원하는게 아니라면 말이야."

아서 본인도 어느 정도는 흥미가 생긴 덕분이었을까.

우리는 아서가 사용할 검을 바꾸는 선에서 컨텐츠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아서가 경매장에 있는 전투용 검을 들고서, 피쉬 앤 칩스와 비프스튜를 요리하기로 한 것이다.

검성 아서가 대검을 들고서 직접 만드는 영국요리.

상상만 해도 조회수가 미쳐날뛸 것 같은 컨텐츠를 기대하면서, 나는 아서 테브란트의 요리과정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잘 촬영해둬. 피쉬 앤 칩스 시작한다."

쾅! 서걱-.

그날, 아서는 고기와 감자 대신 도마 아홉개를 잘라내었다.

47화

지구촌 시대.

누구나가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으로 연결될 수 있는 시대다.

그리고 그런 시대에서, 전세계의 S급 헌터들은 조금 특별한 방식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S급 헌터들에게만 공개되는 소규모 비밀 커뮤니티.

그곳에서는 오늘도 그들만의 치열한 논쟁이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진짜 전세계 사람들 다 모인곳 아니랄까봐, 온갖 주제가 다 나오는구나."

나는 오늘도 유튜브 영상을 편집하면서, 그런 커뮤니티의 모습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온 세상의 사람들이 저마다 가슴속에 자신만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사람들의 숫자만큼 많은 이야기들이 존재한다는 의미였다.

그런만큼 오늘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된 내용 역시 상당히 특별한 편이었다.

게시판을 점령하고 있는 대화주제.

그것은 '인간이 몬스터를 길들일 수 있는가'에 대한 내용이었으니까 말이다.

"뭐 이런걸 가지고 그렇게 치열하게··· 아니, 헌터들이라서 오히려 이쪽이 더 어울리는 주제인건가."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눈앞의 게시판을 바라보았다.

게이트 너머에 존재하는 몬스터들.

그들에 대한 헌터들의 견해는 상당히 다양한 편이었다.

- 머리가 달려있으면 보통은 그런 생각 안해 [7] (frz0777)

- 아니 그때 웨어울프가 내 말 진짜 잘듣더라니까 [3] (tex11)

- 위험한 도박에 시간을 쓸바에 그냥 깔끔하게 죽이는게 맞는 일이다. [11] (망원동불주먹)

- 너희 말 듣고 바다형 필드에 신붓감 찾으러간다 [3] (yamazaki)

- 솔직히 말해서 의사소통 가능한 지능이 있는건 확실해요 [5] (artea)

- 중국에서 진행했던 몬스터 병기화 프로젝트 영랑靈狼에 대해서 [7] (xkingx)

- 저는 한때 뇌조를 길들이려고 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9] (thundershock)

몬스터를 길들이는게 멍청한 짓이라고 주장하는 'frz0777'부터, 중국에서 위험한 프로젝트가 진행된 적이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xkingx'까지.

몬스터 사냥에 있어서는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S급 헌터들이, 저마다의 관점에서 자신의 주장을 올린 것이다.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주제인만큼, 헌터들의 이야기 역시 저마다 방향성이 나뉘어져있었다.

대표적으로 보이는게 일단 죽이고 생각하라는 '망원동불주먹'의 이야기였다.

"주선호야 게이트 재해를 경계하는 입장이니까 당연하겠지."

이용자명 '망원동불주먹', S급 헌터 주선호의 경우에는 다가올 게이트 재해를 경계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주선호의 입장에서는 몬스터를 길들이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가 쓸모없는 것처럼 느껴지는게 당연했다.

물론 그와는 반대로 아주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뽐내는 인물도 있었다.

여태까지 나에게 극과 극을 달리는 이미지를 심어주었던 인물, 이용자명 'yamazaki'.

일본의 S급 헌터, 야마자키 아오의 글이었다.

"그런데··· 신붓감 찾으러 간다는 글은 대체 뭐냐?"

대체 어떤 발상을 해야 저런 글을 올릴 수 있는 것인가.

나는 그런 'yamazaki'의 창의력에 감탄하며 해당 게시글을 클릭했다.

그러자 상당히 독특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 'yamazaki'의 게시글이 화면에 출력되었다.

[ 제목 ] 너희 말 듣고 바다형 필드에 신붓감 찾으러간다

[ 작성자 ] yamazaki

[ 이용자 정보 ] 야마자키 아오 (34) / S급 / 귀령

몬스터도 지성체고 대화도 통한다면 말이야.

바다형 필드에 있는 세이렌과도 친해질수 있는게 아닐까?

조만간 찾으러 가야겠어.

[ 댓글 3개 ]

- firefox : 아니.. 세이렌한테 노랫소리 들으면 바다에 끌려가서 죽어요.....

ㄴ yamazaki : 나는 저주 내성이 높아서 괜찮을지도 몰라.

- frz0777 : 그냥 죽어라

[ 공지사항 / 수정 / 삭제 ]

이용자명 'yamazaki'가 작성한 게시글의 내용.

거기에는 바다형 필드에 거주하는 B급의 몬스터, 세이렌과도 친해질 수 있지 않냐는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인간을 노랫소리로 매혹시켜서 잡아먹는 수생 몬스터에 대한 내용이었다.

나는 'yamazaki'의 기발한 발상에 동의하진 않지만, 그와는 별개로 나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내용이었다.

"몬스터의 지성이라······."

게이트 너머의 몬스터들이 지성체에 필적하는 지성을 가지고 있는가.

그 사실에 대해서 논하자면, 내가 얼마전에 게이트 앞에서 겪은 경험을 빼놓을 수 없었다.

게이트 브레이크의 여파로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었던 필드보스, '사령왕 아틀로스'.

녀석은 머리가 잘려 사라지기 전에, 나에게 내가 가진 고유특성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나에게 이야기를 전달했다는 뜻이었다.

"게이트 너머의 존재들 중에 인간에 필척하는 지성체가 있는건 확실하지. 내가 직접 이야기를 들은 경험이 있으니까 말이야."

나는 커뮤니티의 [자동번역 기능]을 통해 필드보스의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몬스터가 일방적으로 나에게 이야기를 전하는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할거라는 의미였다.

물론 상호간의 대화의 경우에는 크게 다른 문제이기는 했다.

해당 기능을 통해 번역된 내용을 듣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커뮤니티의 이용자들처럼 [커스텀 네트워크]에 연결되어있는 인물들 뿐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말이 통하는게 아니니, 싸우고 말고는 전혀 다른 문제겠다만."

결국은 'yamazaki'의 가정대로 몬스터와의 공존을 꾀하는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이쪽에서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고 해도, 이쪽의 의견을 전하는건 별개의 문제니까 말이다.

상호간의 소통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나더라도 이루어지지 못할 터였다.

그리고 그것이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올거라는 생각조차도 들지 않았다.

"오랜만에 헌터 전문가인 내가 게시글을 하나 남겨줘야하나?"

나는 그러한 자신의 의견을 오랜만에 게시글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간의 의견교류는 중요한 법이다.

건강한 논쟁은 사회를 발전시키는데 도움이 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더군다나 오늘의 토론주제는 S급 헌터들간에 이루어지는 양질의 의견교류.

그런만큼 나는 헌터 전문가로서 가능한 유익한 글을 작성해야할 사명감을 느꼈다.

"다들 내 글을 보고서 좋아해주면 좋을텐데 말이야."

게시글 작성 버튼을 누른 이후, 나는 반투명한 키보드에 손가락을 올렸다.

그리고는 논리적이고 냉철한 내용을 게시글에 적어나갔다.

타닥, 타다닥-.

반투명 키보드 위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던 내 손가락이 아름다운 명문을 쏟아나갔다.

그렇게 길게 장문의 글을 적은 뒤에는, 버튼을 터치해 해당 게시글을 게시판에 업로드했다.

- 게시글이 작성되었습니다.

EX급 헌터 유튜버, '헌잘알'이 직접 게시한 장문의 논평.

분명 모든 헌터들이 감탄할 것이라고 생각한 게시글이 게시판에 올라갔다.

기나긴 게시글을 업로드한 이후.

나는 이용자들의 댓글이 달리기를 자리에서 천천히 기다렸다.

"금방 댓글이 달렸네."

내가 올린 훌륭한 게시글의 내용을 헌터들이 알아본 것이었을까.

다행히도 금세 게시글에 댓글이 달리는 모습이었다.

툭-.

나는 게시글을 터치해 누군가 나에게 작성한 댓글의 내용을 확인해보았다.

그러자 한명의 유저가 내 게시글에 작성한 댓글을 확인할 수 있었다.

[ 댓글 1개 ]

- frz0777 : 자기 망상을 길게도 써놨네

이용자명, 'frz0777'.

러시아의 S급 헌터가 내 게시글에 첫번째로 댓글을 남긴 것이다.

"······."

나는 눈앞의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건강한 논쟁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법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논쟁을 받아들이는건 아니었다.

때로는 이성과 논리를 저버린 채로 직접적인 인신공격으로 대응하는 이들도 존재하는 법이다.

바로 지금 내 눈앞에 있는 'frz0777'처럼 말이다.

"하."

나는 짧은 탄식을 내뱉으며 'frz0777'의 댓글을 다시금 읽어보았다.

상대가 아무리 야만적으로 나왔다고 해서, 자신조차 그에 끌려가는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무릇 지성인이란 타인의 무례조차 자신의 교양으로 품어주는 법.

타닥, 타다닥-.

나는 'frz0777'의 댓글에 교양있는 내용의 답글을 하나 달아주었다.

[ 댓글 3개 ]

- frz0777 : 자기 망상을 길게도 써놨네

ㄴ 거품판독기 : 삐빅

ㄴ frz0777 : ?

그날 오후.

내 게시글에는 58개의 댓글이 달렸다.

* * * * * *

한국에 찾아왔던 S급 헌터, 아서 테브란트는 지난밤에 일정을 마치고 귀국했다.

그는 영국 여왕의 전용기를 타고, 서울공항에서 영국으로 돌아간 것이다.

비록 영국의 검성은 자국으로 돌아갔지만, 떠난 아서가 남긴 흔적만큼은 여전히 한국에 남아있었다.

아서 테브란트와 내가 촬영했던 컨텐츠.

'헌터 장비로 요리하기' 영상이 홍보용 쇼츠 알고리즘을 타고 대박이 난 것이다.

그것도 조회수 380만이 넘는 초대박 영상으로 자리잡았다.

"아,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도 여러분 덕분에 이렇게 기념비적인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네요."

그 결과, 내 유튜브 구독자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수직상승했다.

73만명에 불과하던 유튜브 구독자가 어느덧 90만을 넘어선 것이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빨랐던지, 90만 기념 라이브 방송을 진행하는 지금 시점에서는 91만이 되어있을 정도였다.

이 속도라면 머지않아 골드버튼을 받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헌터마스터가 왜 그렇게 예능을 좋아하는지 알 것 같은데.'

유명한 헌터를 데려다놓고 벌이는 소소하지만 즐거운 컨텐츠.

마치 친구와 터무니없지만 우스꽝스러운 짓을 벌이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생각나는 영상이었다.

그런 컨텐츠로 히트를 치고 나니, 헌터마스터가 어떻게 300만 유튜버가 됐는지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나는 헌터마스터가 아니고, 나와 그 사이에는 서로 다른 길이 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구독자가 늘어서 즐거운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이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수많은 헌터분들, 특히 최근에 도움을 주신 검성 아서님께도 무척 감사드립니다."

나는 여태껏 내 유튜브 채널에 출현했던 다양한 헌터들과, 최근에 컨텐츠를 같이 촬영해준 아서에 대한 감사인사를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들이 없었다면 내가 이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거라는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니 조금은 겸손한 마음을 담아, 그들을 향해서도 감사를 전했다.

물론 최고의 기여는 내 탁월한 편집능력에 있었지만 말이다.

그런 내 이야기에 감동받은 것이었을까.

라이브 방송에 수많은 채팅들이 쏟아져내리기 시작했다.

- @gndlashqoqtb : 아서 영상 넘 재밌었어요 ㅠㅠㅠㅠ

- @gdnqoqn : 진짜 검성 어떻게 섭외한거죠 ㅋㅋㅋ

- @fgqet3646 : 좋은 영상이었습니다 100만까지 가실거에요 파이팅!

- @dhzlgn99 : 진짜 10만 단위마다 라이브로 울궈먹네 ㅋㅋ 양심이 없냐?

- @zlwhsdlwltjd : 내가 헌잘알 1만때부터 지켜봤는데 진짜 내가 다 감격스럽다

- @hgdfnsq : 재료는 최상급. 요리사는 동네 분식급. 초등학생이 편집해도 이거보단 나음.

최고의 헌터 유튜버인 내 영상을 사랑하는 이들만 모인 까닭이었을까.

라이브 방송의 채팅창에는 하나같이 칭찬 일색뿐이었다.

나는 그런 시청자들의 환호에 감동받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진정한 프로라면 박수칠때 떠나야만 한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나를 응원해줄때, 라이브 방송을 아름답게 끝맺어야한다는 이야기였다.

즐거운 시간이 영원히 이어질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까 말이다.

"다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에는 100만 기념 카운트다운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나를 사랑하는 시청자들과의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툭-.

나는 짧은 인사를 전하고 스마트폰의 어플리케이션을 종료했다.

유튜브 채널의 라이브 방송을 끝마친 이후, 나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분명히 어제 다 떨어졌던 것 같은데. 꺼내놔야지 생각만 하고서, 저걸 아직도 바깥에 안꺼내놨네."

자리에서 일어난 뒤에는 커피를 찾으러가기 위해, 복도 한구석에 마련해둔 창고방으로 향했다.

상자에 들어있는 커피캡슐을 거실에 꺼내놓기 위함이었다.

"90만이라··· 벌써 여기까지 왔나. 구독자 10만 찍었던 당시에는 하늘을 다 가진 것 같았는데."

유튜브를 시작한 이후로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온갖 우여곡절이 있기는 했지만, 내가 유튜브를 촬영하면서 행복했던 것만큼은 틀림없었다.

그러한 마음들을 가슴속에 간직한 채로, 나는 적막한 복도 위를 걸었다.

터벅, 터벅-.

아무도 없는 복도에 내 발걸음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렇게 창고방에 도착한 이후에는, 문고리를 잡고 방문을 열어젖혔다.

끼이익.

경첩 특유의 마찰음이 울리며, 그 내용물을 드러내기 시작한 창고방.

커피 캡슐이 담긴 상자를 찾기 위해 시선을 돌리던 나는, 이내 그 너머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서 입을 다물었다.

"······."

나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우리 집에 결코 있어서는 안되는 무언가가, 창고로 사용하던 방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여기가 우리 집이 아니라 옆집이라고 하더라도, 곤란한 상황이라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을 터였다.

저건 평범한 가정집의 어디에도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거짓말이지?"

나는 현실을 부정하는 듯한 시선으로 계속해서 그것을 바라보았다.

허나, 아무리 의심의 시선을 향하더라도, 눈앞에 보이는 괴현상이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선명한 빛을 발하며 허공에 피어난 거대한 균열.

그리고 그 주변에 일렁이는 기이한 빛깔의 아지랑이.

헌터 유튜버라면 절대 모를 수 없는 무언가를 마주하고서, 나는 난감한 얼굴로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게이트가 왜 여기에 있냐?"

내가 최근에 장만한 한강뷰 아파트의 창고방에 나타난 그것.

저것은 틀림없이 다른 차원의 공간과 연결되어있는 '게이트'였다.

우리집 창고에 말 그대로 게이트가 열린 것이다.

나는 눈앞에 나타난 게이트에 스마트폰을 들고 고민했다.

일반 가정집에 게이트가 나타난 것은 굉장히 심각한 문제였다.

지금 헌터 협회에 연락해서 게이트 등록을 진행하고 대피해야할만한 상황인 것이다.

"하··· 이건 좀 아닌데."

하지만 문제는 해당 절차를 진행하는 경우, 내가 사랑하는 집을 포기해야만 했다.

이대로 그냥 물러서기에는 <스크롤 북(A)>의 주인으로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기도 했다.

쩌적, 쩌저적-.

그렇게 내가 고민을 하고 있는 도중에도, 게이트는 서서히 그 크기를 키워나가고 있었다.

저 거대한 균열이 게이트로서 '완성' 되어가고 있다는 의미였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저 게이트를 이용해 반대편으로 입장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걸 어떻게 한다."

<스크롤 북>을 들고 들어가서, 혼자 포인트를 쏟아부으며 적을 정리할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내가 알고 있는 인맥들 중 하나의 힘을 빌릴 것인가.

제자리에서 오랫동안 고민하던 내 머릿속에 자리잡은 결론은 하나였다.

새로 구매한 한강뷰 집을 오자마자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

그러니 다른 헌터의 힘을 빌려 일을 처리하는게 가장 합리적이었다.

"설마 최상위 등급의 게이트가 열리진 않았을테니, 어지간하면 S급 헌터 혼자서 해결가능하겠지."

S급 헌터, 검귀 천시예.

단독 전투에 능숙한 그녀의 힘을 빌린다.

그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집에 바퀴벌레가 나타나면 세스코를 부르는게 당연하듯이, 집에 게이트가 나타나면 S급 헌터를 부르는게 당연한 셈이었다.

게이트 처리는 전문가에게 맡기는게 정답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런 이유로 나는 1:1 대화창을 열어, 이용자명 'swordmaster'를 향해 메세지를 보냈다.

- 거품판독기 : 검귀님 계세요

- swordmaster : ^ O ^

다행히 'swordmaster'가 커뮤니티에 접속해있던 모양인지, 천시예에게서 금방 답장이 돌아오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런 천시예를 향해 지금의 상황을 최대한 온건하게 표현할 수 있는 메세지를 전달했다.

천시예가 가지고 있는 나에 대한 이미지를 망가뜨리지 않고, 그녀에게 무난하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만한 메세지를 말이다.

- 거품판독기 : 우리 집에서 게이트 보고갈래?

- swordmaster : ?

내가 천시예에게 정중한 초대의 메세지를 보낸 이후.

쩌저저적-.

머지않아 내 눈앞에서 격렬한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창고방에 등장하기 시작한 찬란한 빛의 균열.

그것이 환한 빛을 발산하면서 맥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

그리고 나는 그걸 허탈한 얼굴로 지켜볼 수밖에 없는 신세였다.

스윽-.

나는 주머니에 있던 <스크롤 북(A)>을 꺼내든 채, 눈앞에 보이는 게이트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수차례 터져나오는 맥동.

그 뒤를 따라 번져나오는 빛이 내 시야를 어지럽혔다.

쿵! 쿠웅-!

그러한 과정이 계속해서 반복된 이후에는, 내 눈앞에 어느덧 완성된 게이트의 형상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 [게이트 : 레델 화이트의 은신처]가 실체화됩니다.

- 판정 등급 : A+

게이트 판정 등급, A랭크 오버.

—마경(魔景).

나는 그것을 확인하기 무섭게 천시예에게 게이트의 사진을 찍어서 보냈다.

S급 헌터의 도움이 절실해진 순간이었다.

48화

내 호출을 받은 천시예가 집에 도착한 것은 그날 저녁의 일이었다.

일정을 마친 그녀는 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야 우리 집에 찾아온 것이다.

물론 천시예의 복장은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완전무장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런 천시예를 문을 열고서 환영해주었다.

위기에 빠진 한강뷰 하우스를 구해줄 영웅이 찾아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나한테 보낸 메세지 진짜인거 맞지?"

끼이익. 쿵-.

천시예는 내 집에 들어오기 무섭게 주변을 살펴보며 나에게 물었다.

헌터 장비인 <운명검 아브락사스(S)>를 직접 들고오기 곤란했는지, 천시예의 등에는 기타 케이스가 매여있는 모습이었다.

기타 케이스에 헌터 장비를 집어넣어서 가져온 것이다.

공적인 일이 아닌 사적으로 찾아온만큼, 어찌보면 당연한 복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무슨 이득이 있다고 S급 헌터 상대로 그런 거짓말을 해?"

"······이러고서 막상 들어가면 장난이었다고 말하는거 아니야?"

"나도 진지한 상황이야. 이번에 열린 게이트의 판정 등급이 A+거든."

마경(魔景).

그 존재에 대해서 들은 천시예의 눈빛이 뒤바뀌었다.

아무리 내가 유튜버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만한 규모의 게이트를 가지고 장난을 치지는 않을거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흐음-.

짧은 고민에 잠겨있던 천시예는 등에 매고 있던 기타 케이스를 내려놓고서 말했다.

"알았어. 안에 들어가보자. S급이 둘이나 있으면 아무런 문제도 없겠지."

"······뭐, 그렇겠지."

자연스럽게 나를 S급 헌터로 취급하는 천시예의 행동에, 슬슬 아무런 양심의 가책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마음속의 삼각형이 전부 닳으면 그 다음부턴 양심이 반응조차 하지 않는다고 하던가.

하도 주변에서 S급 소리를 듣다보니, 이제는 나조차도 자연스럽게 S급인 것처럼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실상은 모든 능력치를 끌어모아도 D급 하위권에 불과한 신세였지만 말이다.

"그래서, 게이트는 어디에 있는건데?"

"저쪽. 창고방에 있어."

나는 천시예의 물음에 손가락으로 한구석에 있는 창고를 가리켰다.

천시예의 앞에서 이 집을 안내하고 있으니 감회가 조금 색다른 기분이었다.

따지고보면 이 집도 천시예에게 포인트를 팔아서 구매한 집이 아니던가.

왠지 모르게 집을 사준 사람한테 새로운 집을 소개하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철컥-.

집을 둘러보던 천시예는 기타케이스를 열어 <운명검 아브락사스(S)>를 꺼내들었다.

"행운이라고 해야할지, 불행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네. 그래도 S급 헌터의 집에 A+급 게이트가 열린거니 나름대로 행운이겠지?"

"······나는 아직 집을 바꾸고 싶은 생각이 없어. 확인해보고 문제가 없으면 게이트를 처리하는 방향으로 가야지."

"그 부분이 곤란한거구나. 알았어."

무기를 챙기는 것으로 천시예는 완전히 준비가 끝난 모양이었다.

게이트 내부를 정리해줄 헌터 본인이 준비를 마쳤으니 이제는 출발할 차례였다.

나는 천시예를 데리고 게이트가 열린 창고방으로 이동했다.

끼이익-.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환한 빛을 토해내고 있는 균열의 모습이 보였다.

A+급 게이트, [레델 화이트의 은신처].

이름만으로는 어떤 필드효과가 발생할지 짐작조차 하기 어려운 게이트였다.

가정집에 나타난 게이트를 처음 마주한 것이었을까.

천시예는 눈앞에 있던 게이트를 자세히 보더니, 이내 오묘해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레델 화이트의 은신처]··· 정말 A+급 게이트였구나."

"처음부터 진짜라고 이야기했잖아."

"솔직히 말해서 믿기 쉬운 이야기는 아니었어. 평범한 가정집에··· 그것도 이런 고층 건물에 게이트가 생기는건 처음 봤거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게이트를 향해 손을 가져다댔다.

우우우우웅-.

천시예의 손 주변에 희미한 아지랑이가 흘러나오며 게이트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게이트 너머로 빨려들어가기 전의 전조증상이었다.

"게이트가 제대로 완성된 것 같네. 원한다면 바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

해당 게이트가 작동가능한 상태라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게이트의 상태를 확인한 그녀는 나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바로 안으로 들어갈거야?"

"천하의 검귀가 여기에 있는데 미룰 필요가 어디있겠어. 바로 들어가야지."

"알았어. 그럼 나부터 먼저 안으로 들어갈게."

내가 문제없다는 신호를 그녀에게 보내자, 천시예는 그에 고개를 끄덕이며 응하는 모습이었다.

파아아앗!

새하얀 빛이 천시예의 몸을 감싸더니, 머지않아 천시예의 모습이 빛의 입자로 뒤바뀌었다.

천시예가 게이트 내부에 입장한 것이다.

나는 게이트 너머로 사라진 그녀를 보면서, 창고방에 놓아두었던 소형 카메라를 챙겼다.

"······어지간하면 별일 없겠지."

게이트 너머의 풍경에 따라 내 소중한 집의 미래가 달려있는 상황.

나는 가슴에 들어찬 긴장을 풀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후우-.

커다란 호흡을 내쉬고 난 이후에는, 카메라를 들고 게이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게이트가 공명하며 나를 끌어당기기 시작하는 모습이었다.

"어디 한 번 확인해보자고."

앞을 향해 한걸음 더 발을 내딛자, 자신을 끌어당기던 빛이 한층 더 강해졌다.

파아아앗!

나는 환하게 터져나오는 빛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 [게이트 : 레델 화이트의 은신처]에 진입했습니다.

- 통신 효과 및 탐지 효과가 해당 공간에서 금지됩니다.

처음으로 마주하는 미확인 게이트 진입의 순간.

이른바 '게이트 언박싱'의 시간이었다.

* * * * * *

게이트를 넘어선 내가 처음으로 마주한 풍경.

그것은 끝없는 어둠이었다.

짙은 어둠.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풍경속에서 사람이 내는 소리가 동굴에 메아리쳤다.

귓가에 들리는 것은 두 사람의 숨소리였다.

하나는 먼저 이곳에 들어와있을 천시예의 숨소리.

그리고 다른 하나는, 지금도 귓가에 선명하게 울리고 있는 자신의 것이었다.

"아무래도 동굴 형태의 필드인 것 같아."

몇걸음 앞쪽에서 천시예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런 천시예의 뒤에서는 가느다란 소리가 퍼져나갔다.

툭. 투둑-.

집중하지 않으면 제대로 들리지 않을만한 자그마한 소리.

아무래도 어딘가에서 물방울이 떨어져내리는 모양이었다.

'시야를 확보하려면 일단 불부터 켜야겠지.'

S급 헌터라면 암순응만 끝나더라도 충분히 여유롭게 움직이겠지만, 나같은 가짜 헌터는 빛이 없으면 적응하기 곤란했다.

빛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나는 결국 스마트폰을 꺼내 플래시 라이트를 켰다.

파앗!

환한 빛이 터져나오자 나는 그제서야 주변의 풍경을 마주할 수 있었다.

스마트폰의 플래시가 닿는 공간마다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 것이다.

"여기는······."

사방이 돌로 가득차있는 거대한 동굴의 풍경.

그런 동굴의 벽면에는 이끼와 함께 기이한 그림들이 그려져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그림들은 동굴의 안쪽까지 쭉 이어져있는 모습이었다.

마치 우리보고 그림을 따라서 안쪽으로 들어오라는 것처럼 말이다.

그림들을 살펴보던 천시예는 파여있는 벽을 손끝으로 어루만지며 이야기했다.

"근처에 몬스터는 따로 없는 것 같아. 안으로 더 들어가보자."

"······그래야겠네."

천시예의 이야기에 따르면 저 앞에서 몬스터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 모양.

그러니 그녀의 이야기를 믿고서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봐도 될 것 같았다.

나는 천시예의 옆에 선 채 플래시라이트를 들고 움직였다.

요즘 스마트폰의 플래시 출력이 워낙 강한 덕분이었을까.

적당히 손에 들고 있기만 해도 멀리까지 보이는 상황이었다.

"벽에 새겨진 그림들을 보면 아무래도 사람이 살았던 흔적같은 느낌인데."

동굴의 벽에 있는 그림을 보던 내 입에서 흘러나온 평가.

그것은 벽면에 새겨진 그림들이 지나치게 인위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런 내 감상에 천시예 역시 동의하는 것인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림들을 바라보았다.

"내 눈에도 그런 것처럼 보여. 게이트 너머에는 가끔씩 건축물이 나오는 필드도 존재하니까 당연한 일이겠지만."

보통은 언데드들이 나오는 필드들이 이런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경향이 있었다.

일전에 검귀와 검성의 대결이 펼쳐졌던 사막 필드처럼 말이다.

그렇게 나와 천시예가 동굴 안쪽으로 들어가다보면, 점차 밝은 공간이 펼쳐지기 시작하는 모습이었다.

기나긴 동굴이 뻗어있는 너머.

그 너머에서부터 환한 빛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동굴의 깊숙한 곳으로 나아갈수록, 점차 플래시가 필요없을 정도로 밝아지기 시작했다.

터벅, 터벅-.

계속해서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나조차도, 어느 순간부터는 스마트폰의 배터리를 아낄겸 플래시 라이트를 꺼버릴 정도였다.

"햇빛이 들어오는건가?"

그리고 그러한 빛을 만들어내는 원인은, 동굴의 천장에 뚫려있는 구멍이었다.

간헐적으로 천장에 만들어져있는 구멍.

그곳에서부터 환한 빛이 쏟아져내리는 모습이었다.

환한 빛은 동굴 내부의 풍경을 비추고, 동굴의 내부에는 서서히 녹음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

"······."

선명하게 느껴지는 풀내음.

발걸음을 내딛을수록 점점 그 밀도가 높아져가는 이끼.

깊숙히 나아가는 풍경속에서 신비감이 맴도는 동굴의 모습이 드러났다.

메아리치던 걸음소리는 점점 작아졌으며, 사방에 늘어선 식물들은 장식과도 같이 빛을 흘렸다.

시야를 스쳐지나가는 몽환적인 풍경들.

동화속의 요정이 가꾸는 듯한 아름다운 식물들은 벽을 한가득 채워버린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풍경들을 가로지르는 우리의 발걸음이, 어느덧 장엄함을 간직한 목적지에 이르렀을 즈음.

나는 사람의 생활감이 묻어있는 기이한 물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레델 화이트의 은신처."

나와 천시예의 앞에 나타난 거대하고 신비로운 동공.

그곳에는 사람이 사용하던 것으로 보이는 무수한 도구들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옛날 이야기의 마법사가 터전을 잡고 살아간다면, 이러한 공간에서 자리를 잡고 지냈을 것인가.

눈앞의 공간은 어째서 해당 게이트의 이름에 '은신처'라는 단어가 붙어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풍경이었다.

"이건··· 게이트 너머에 이런 공간이 숨어있었단 말이야?"

은신처의 풍경을 마주한 천시예의 입에서 감탄에 젖은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이 풍경을 보고서 감상에 젖은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나 역시도 해당 게이트의 모습에 무수한 감정이 동시에 스쳐지나간 것이다.

'말 그대로 진짜 은신처의 기능을 하는 곳이라고?'

나와 천시예는 은신처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으면서, 주위에 있는 물건들을 하나씩 확인해나갔다.

풀잎과 나무로 이루어진 책상.

덩굴이 얽혀 만들어진 의자.

정갈하게 정리되어있는 거대한 책장.

그 한구석에는 거대한 풀잎을 쌓아 만들어낸 간이 침대까지 보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은신처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그중에서도 책상 위에 있는 책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은신처라는 컨셉에 맞게 놓여있는 책인가. 표지에 적혀있는건 글자인 것 같은데.'

가죽 표지로 만들어진 두꺼운 책.

그곳에는 유려한 필체로 쓰여있는 알 수 없는 글자가 적혀있었다.

내가 표지에 적힌 글자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으면, 머지않아 익숙한 메세지 하나가 눈앞에 떠올랐다.

정체불명의 책을 마주한 상태창이 메세지를 띄운 것이다.

- [자동번역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 레델 화이트의 일기.

커뮤니티의 [자동번역 기능].

해당 기능이 이제 책에 적힌 글자까지 번역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눈앞에 놓여있는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 사실을 깨달은 나는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이트에서 나온 책에 적혀있는 문자를 내가 이해할 수 있다고?'

처음 보는 문자를 읽을 수 있다.

그것도 게이트 너머에서 출토된 아이템에 적혀있는 문자를 말이다.

물론 이게 가능한 것은 해당 아이템이 '게이트와 관련되어있는 물건'이라는 판정을 받은 까닭일 것이다.

허나, 게이트 너머에서 발견한 책을 읽을 수 있다는건 적지 않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대체 어디까지 인식이 가능한거지?'

나는 의아함을 가지고 손에 잡힌 책의 페이지를 넘겨보았다.

사락-.

표지를 넘겨 그 내용을 확인해보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핏방울이 번져있는 짧은 문구였다.

책의 서두에 적혀있는 문구.

나는 그것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눈으로 읽어보았다.

- 신들이여. 어찌하여 우리를 버렸는가.

비장한 내용이 담겨있는 문구.

거기에 번져있는 핏방울은 글을 적은 사람의 심경을 조금은 이해하게 만들 정도였다.

묵직한 문구를 확인한 나는 다음장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사락-.

오래된 종이의 냄새와 함께 책장이 넘어갔다.

일기의 다음장에는 서두와 다르게 핏자국이 남아있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 대신 해당 페이지에는 빽빽하게 글씨가 들어차있었다.

- 멸망은 서서히 세상을 집어삼켰다.

- 무수한 이들의 섬김을 받던 신들은 다가오는 멸망의 앞에서 모두 침묵하였다.

- 절멸종. 세계를 집어삼키는 재앙의 표상들은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을 흩뿌렸다.

-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문'이 열렸으며, 그 너머에서 찢겨나간 세계의 흔적이 드러났다.

- 무수한 세월동안 영광을 이어왔던 제국조차도 멸망의 앞에서는 그 영광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세상이 멸망했다.

신들이 자신들을 버렸다.

일기에는 비극과도 같은 내용들이 순차적으로 나열되어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내가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는 단어들 역시 존재하고 있었다.

'절멸종··· 그리고 문······.'

익숙한 단어들이 그곳에 적혀있었다.

아서 테브란트와의 여정에서 마주했던 정체불명의 괴물, '절멸종'.

그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일기에 쓰여있는 '문' 역시, 게이트를 가리키는 내용일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설마 이 일기의 작성자가 게이트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건가?'

지나치게 의미심장한 내용들이 그곳에 있었다.

나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계속해서 일기를 읽어나갔다.

- 간헐적으로 열리는 '문'은 이미 무너져버린 세계의 잔해를 담고 있다.

- '문'의 너머를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나는 그곳에 있는 무수한 저항의 흔적들을 마주하게 될 뿐이었다.

- 다가오는 멸망을 앞에 두고서, 나는 그것을 막아내기보다 도망치는 것을 선택했다.

- 이미 무너져내려 찢어져버린 공간은 더 이상 멸망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 그렇기에 나는 의도적으로 이 공간을 찢어냈으며, 그것과 연결하기 위한 '문'을 발생시키는 장치를 만들어냈다.

- 그리고 그것을 내가 가지고 있던 오래된 반지에 담아내었다.

- 나는 세계의 모든 이들을 내버려두고서 이 자그마한 은신처에 홀로 도망쳐온 것이다.

멸망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은신처.

이 일기를 작성한 레델 화이트는, 이 공간을 일컬어 은신처라고 칭하는 모습이었다.

일기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그는 말도 안되는 위업을 이뤄내었으며, 멸망한 세계로부터 홀로 도망치는데 성공한 것이다.

허나, 레델 화이트가 남긴 일기의 첫페이지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나는 계속해서 일기를 이어나갔다.

일기의 첫페이지는 번져나간 잉크와 제대로 마무리짓지 못한 글자로 끝나있었다.

- 허나 이 공간도 언젠가는 멸망속을 표류할 것이며, 누군가는 이 자그마한 은신처로 향하는 '문'을 발견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 그리고 나 역시도 끝나지 않는 고독으로부터 영원히 저항하지는 못할 것이다.

- 그러니, 이 자그마한 일기를 발견한 후인이여.

- 나를 죽여—.

쿵!

책을 들고 있던 내 뒤에서 울려퍼지는 묵직한 소리.

그러한 소리를 들은 내가 시선을 돌리면, 나는 머지않아 삐걱거리는 바위를 마주할 수 있었다.

스릉-.

날카로운 검을 뽑아낸 천시예가 외쳤다.

"조심해! 벽 너머에 공간이 있어!"

그런 천시예의 외침에 반응하듯이, 거대한 벽은 계속해서 흔들렸다.

쿠웅! 쿵!

콰드드드득-!

육중하게 흔들리던 벽이 무너져내리는 순간.

그 너머에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 오염된 신성이 확산하며 [필드 보스]가 등장합니다.

- [보스 : 타락한 신관 레델]이 출현했습니다.

필드 보스.

은신처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49화

삐걱거리며 흔들리는 뼈.

뒤틀린 채로 전진하는 다리.

머리에는 썩어가는 모자가 씌워져있으며, 그 손에는 불에 타버린 경전이 쥐어져있었다.

필드 보스, 타락한 신관 레델.

이 은신처를 만들어낸 창조자이자, 일기의 주인이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필드 보스······?"

비좁은 필드 환경에 이러한 사태를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을까.

천시예는 모습을 드러낸 몬스터를 경계하며 바라보았다.

음침한 기운을 흘리는 언데드의 몸에서 기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그어··· 어어어어······.

번역되지 않으며 이해할 수 없는 음성.

허나 그 음성의 주인은 먼 옛날 사람의 형체를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다.

—레델 화이트.

이 은신처를 만들어낸 장본인은 처음부터 자신의 미래를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멸망을 막아내지 못한 인간의 최후.

그것은 내 눈앞에 서있는 것처럼, 제대로 된 지성도 유지하지 못한채 걸어다니는 망자였다.

'레델은 게이트에 연결된 공간을 떼어내서 은신처로 사용할만한 실력을 가진 강자다.'

그런 레델이 필드 보스로 분류되는 이유야 뻔했다.

그가 살아생전에 어마무시한 실력을 가진 강자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은신처를 만들만한 실력을 가졌던 남자가 언데드로 변모했다.

그 수준이 결코 낮지 않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으어어··· 그어어어어······!

입을 쩍 벌린 레델은 입에서 사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를 마주한 천시예는 검을 쥐고서 녀석을 향해 겨누었다.

<운명검 아브락사스(S)>.

전투 지속시간에 비례해 강해진다는 S급의 장비가 빛을 퍼뜨렸다.

마력을 휘감은 천시예의 검은 상대를 노리고 뻗어나가더니, 이내 팔을 휘두르는 레델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카앙! 캉-!

퍼져나가는 묵빛의 파동.

그 속에서 나는 <스크롤 북(A)>을 꺼내들었다.

전투를 치르고 있는 천시예에게 미약한 도움을 주려는 생각이었다.

"—[홀리 웨폰]!"

촤라라라락-.

빠르게 페이지가 펼쳐진 <스크롤 북(A)>에서 강한 빛이 퍼져나갔다.

B랭크의 인챈트 마법, [홀리 웨폰].

스크롤을 통해 저장해놓은 마법이 증폭효과를 받아 펼쳐진 것이다.

새하얀 빛이 천시예의 검을 휘감더니, 머지않아 서늘한 광채가 검 끝에서 흐르기 시작했다.

파아앗!

내가 두르고 있는 장비 아이템에 의해 말도 안되게 증폭된 인챈트 마법.

그 효과를 적용받은 천시예의 검이 이전보다 한층 더 매섭게 휘몰아쳤다.

"평소에 이런걸 가지고 다닌거야?"

매끄럽게 휘어져 들어가는 칼날.

카앙! 서걱-!

천시예의 검이 레델의 팔 일부를 베어내었다.

검에 베인 미친 신관이 섬뜩한 비명을 내질렀다.

- 그어어··· 그워어어어······!

나는 그런 신관의 비명에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천시예를 향해 자연스럽게 준비된 변명을 이야기했다.

"휴대하기 간편해서 좋아하거든. 성수를 통째로 들고다니는 것보단 효과적이잖아?"

"그렇긴 하겠네. 그래도 그거 상당히 비싼 물건 아니었어?"

휘릭-.

반바퀴 뒤집힌 천시예의 검이 레델을 타격하기 위해 물러섰다.

그 순간, 레델의 몸이 어둠을 그러모았다.

강력한 스킬을 사용하기 위한 전조.

단독으로 A+급의 필드 보스 판정을 받은 적이니만큼, 그 위력은 결코 나약하지 않을 터였다.

확산하는 어둠.

그것을 마주한 나는 곧장 녀석을 억제할 준비를 했다.

"내가 묶을테니까 계속해서 공격해!"

커다란 목소리가 동굴에 울려퍼진 직후.

내 시선이 녀석을 훑고 지나갔다.

- [강력경고]가 활성화됩니다.

- 오늘은 더 이상 [강력경고]를 활성화할 수 없습니다.

퍼져나가는 죽음의 공포.

이미 죽음을 맞이한 언데드조차 항거할 수 없는 종언의 풍경이 스쳐지나갔다.

짙은 어둠을 그러모으던 레델 화이트의 몸이 한순간 경직되었다.

비어버린 동공은 나를 응시했으며, 저항하던 손은 완전히 굳어버렸다.

그리고 그 틈새를 비집고서 천시예의 검이 재빠르게 휘둘러졌다.

"———."

콰앙! 콰드드드득-!

빈틈을 내보이는 목을 파고드는 선명한 검광.

그 움직임조차 제대로 포착하기 어려운 번뜩임이 레델의 목을 베었다.

새하얀 검광속에서 레델의 머리가 사라졌으며, 그 아래에서 어둠을 품고 있던 육체는 자리에 멈추어섰다.

S급의 검객에게 찰나의 순간을 허락한 대가는 가볍지 않았다.

쿵! 데구르르-.

지탱할 목을 잃어버린 머리가 멀찍이 날아가 바닥을 나뒹굴었고, 힘을 잃은 육체는 중력에 이끌려 바닥에 쓰러졌다.

털썩.

머리를 잃은 몸이 무너져내린 이후.

쓰러진 필드 보스를 바라보던 천시예가 손을 들어올리며 다가왔다.

"고생했어. 나쁘지 않은 호흡이었네."

"검귀가 있는데 내가 나서봐야 방해만 될테니 이게 정답이겠지."

짜악-.

나는 그런 천시예와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슬슬 내 머리를 지배하기 시작한 S급 헌터가 준비한 변명을 내뱉었다.

내가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검귀가 우리나라에서 두번째로 강한 헌터라는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적당히 그녀를 띄워두는게 나쁘지 않을거라는 판단이었다.

그녀를 믿고 있었기에 보조를 선택했다는 간단한 답변.

검귀 역시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만족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너무 겸손할 필요까지는 없는데."

"랭킹 6위를 상대로 겸손이라고 할것까지야."

"흠, 흠··· 랭킹 6위······."

천시예는 내 이야기를 겸손으로 치부했지만, 애석하게도 지금 이 상황조차 나에게는 오만이었다.

나는 서서히 오만해져가는 자신을 애써 받아들여가면서, 바닥에 쓰러진 언데드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신관, 레델 화이트.

살아생전 신을 섬기던 성직자였으며, 자신을 버린 신의 이름을 끝까지 부르짖던 남자.

레델의 죽은 육신을 살펴보던 내 시선이, 그의 손가락 끝에 끼워져있는 반지를 바라보았다.

"이건······."

레델 화이트가 작성한 일기에서 일찍이 반지에 대한 내용을 확인했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레델이 착용하고 있는 반지에 묘하게 시선이 가는 것을 느꼈다.

스윽-.

나는 앙상하게 마른 레델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레델을 향해 뻗은 내 손가락이 반지에 닿은 직후.

띠링-.

내 눈앞에 반투명한 화면이 출력되었다.

< 블렌도어의 약속 (S+) >

[ 아이템 설명 ]

- 잊혀진 신 블렌도어가 교단에 내린 성물을 가공해 만들어진 물건입니다.

- '은둔자' 레델 화이트에 의해 변형되었습니다.

- 블렌도어의 인정을 받은 성직자만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 아이템 효과 ]

- 공간연동 : 지정된 게이트를 임의로 개방할 수 있습니다.

- 신앙의 증표 : 성수가 당신에게 강한 친밀감을 느낍니다.

- 공명 : 방문한 게이트를 지정해 기록할 수 있습니다.

* 이미 게이트가 등록되어있는 상황입니다. (2 / 5)

[ 등록된 게이트 ]

- 게이트 : 레델 화이트의 은신처

- 게이트 : 버려진 영물들의 낙원

손가락에 닿은 반지에서 출력된 메세지를 본 나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그것을 응시했다.

판정 등급 S+.

말도 안되는 등급의 장비가 레델의 손에 끼워져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해당 장비에는 터무니없는 효과들이 붙어있었다.

게이트를 기록하고 연결하는 능력.

다시 말해서 해당 게이트를 레델이 이야기했던 '은신처'로서 기능하게 만드는 힘이었다.

"그 아이템은··· 아."

내 손에 들려있는 반지의 설명을 확인한 것이었을까.

어느새 내 뒤에 가까이 달라붙은 천시예가, 난감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반지를 바라보았다.

<블렌도어의 약속 (S+)>을 바라보던 천시예는 내 옆에 쪼그려 앉은 채로 이야기했다.

"등급은 높은데 못써먹는 물건이겠네."

"못써먹는 물건?"

"이런식으로 신앙과 관련된 제약이 있는 물건은 조건을 달성하기가 어렵거든. 애초에 잊혀진 신에게 우리가 인정을 받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잖아."

천시예는 그렇게 말하며 레델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쓰다듬었다.

마력을 품은 가느다란 손가락이 반지를 훑고 지나갔지만, <블렌도어의 약속 (S+)>은 미동조차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천시예가 반지를 사용하기 위한 조건을 채우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녀는 반지에 대한 욕심이 없었던 것인지, 레델의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서 나에게 내밀었다.

"자. 여기."

스윽-.

반지를 내민 천시예와 시선을 마주하면, 그녀는 반지를 향해 눈짓하며 이야기했다.

"유튜브 소재로 써먹으면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천시예의 이야기를 들은 나는 허탈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실제로는 못써먹지만 등급은 높으니 유튜브 소재로 써먹으라니.

생각해보면 실로 효율적이고 현명한 아이디어였다.

나는 천시예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반지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외관은 괜찮게 생겼으니 패션 아이템으로 끼고다녀도 괜찮을 터였다.

"방금 전에 봤던 언데드 이외에는 몬스터가 없는 것 같은데, 쓰러뜨리고 나서도 폐쇄절차가 진행이 안되고 있네."

자리에서 일어난 천시예는 주인을 잃은 은신처를 둘러보며 이야기했다.

해당 필드의 모든 몬스터가 토벌되었음에도, 필드는 여전히 그 효과를 유지하는 모습이었다.

당분간은 창고방에서 게이트가 사라지지 않을거라는 이야기였다.

이 경우에 내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둘 중 하나였다.

게이트 브레이크가 발생하기 전까지 해당 게이트를 그대로 방치하던가.

그게 아니라면 헌터 협회에 연락을 취하고서, 집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도망가던가.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래?"

몬스터를 잃어버린 게이트를 바라보던 천시예가 나에게 물었다.

게이트의 처분에 대한 결정.

그녀의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저녁 사줄테니까 밖으로 나가자."

나는 지금의 한강뷰 하우스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 * * * * *

그날 저녁.

레델 화이트의 일기와 반지를 챙긴 나는, 천시예에게 저녁을 대접하고서 그녀를 돌려보냈다.

창고방과 연결되어있는 게이트를 한동안 제자리에 방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레델의 말대로 저 게이트가 은신처로 작동한다면, 한동안은 내가 창고로 사용하더라도 문제가 없을테니 말이다.

물론 천시예가 돌아간 이후에도, 나에게는 생각할거리가 많이 남아있었다.

대표적으로는 레델이 남긴 일기에 대한 내용이 그러했다.

"게이트와 절멸종이 가져오는 멸망이라······."

성직자 레델.

그는 일찍이 게이트 사태를 경험하고, 멸망해버린 세계를 살아가던 주민이었다.

비록 그의 세계는 갈갈이 찢겨나가, 지금은 게이트 너머의 필드라는 형태로 변하고 말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그가 남긴 마지막 이야기가 나에게 전해졌다는건 무척이나 큰 행운이었다.

"성좌들이 약속한 멸망의 유예라는게 그거랑 관련된 내용일지도 모르겠네."

나는 손에 쥔 반지를 살펴보면서 레델의 일기에 대해서 고민했다.

레델이 남긴 일기의 뒷장에는 다양한 내용들이 적혀있었다.

그가 첫장을 작성하기에 앞서, 은신처에서 경험했던 일들을 기록으로 남겨놓은 것이다.

최후의 성전에 남겨진 신수들을 보관한 게이트에 대한 이야기나, 그가 잘라낸 공간의 너머에서 키우던 신비한 식물에 대한 이야기들.

그리고 레델 자신이 멸망한 세계의 마지막 인류가 되어 남긴 무수한 후회가 담겨있었다.

그는 멸망을 막지 못하고 도망친 것을 무척이나 후회했다.

혼자만의 삶을 얼마나 오랫동안 영위한다고 한들, 결국 그것이 부질없다는 사실을 깨달아버리고 만 것이다.

"대체 그 블렌도어라는 작자는 왜 자기 신도들을 놔두고 잠적한걸까."

레델은 자신이 섬기던 신, 블렌도어를 포함한 모든 신들이 인간을 저버렸다고 이야기했다.

다가오는 멸망으로부터 사람들을 지키는 것을 완전히 포기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가 찢겨나간 공간들 중 하나에 신수들을 숨겨놓은 것은, 그의 가슴속에 남아있던 마지막 신앙의 단편이 작용한 까닭일 터였다.

"결국 우리집 창고방에 100평 넘는 공간이 무료로 확장된걸로 끝인건가."

책상에 앉아 턱을 괴어놓은 채로, 내가 멍하니 반지를 바라보며 고민하고 있던 도중.

띠링-.

갑작스럽게 내 눈앞에 메세지 하나가 출력되었다.

- 성좌 [허광의 블렌도어]가 당신에게 1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허광의 블렌도어]가 당신이 가지고 있는 반지에 흥미를 가집니다.

성좌로부터의 후원.

그것도 고작 1포인트짜리 후원에 불과한 메세지였다.

평소라면 그냥 보고서 넘겼을만한 메세지다.

성좌들이 이러한 관심을 보내는건 하루 이틀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번 메세지의 경우, 평소에 오던 메세지와는 다르게 조금 특별했다.

정확히는 나에게 메세지를 보낸 성좌의 이름이 문제였다.

"뭐? 블렌도어라고?"

성좌, 허광의 블렌도어.

방금 전까지 내가 읽던 일기에 언급되던 존재가 나에게 메세지를 보낸 것이다.

내가 블렌도어의 등장에 의문을 표하고 있으면, 성좌로부터의 메세지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 성좌 [허광의 블렌도어]가 당신에게 1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허광의 블렌도어]는 당신이 레델에게 선사한 안식에 커다란 감사를 표합니다.

블렌도어는 1포인트와 함께 나한테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나와 천시예가 레델에게 안식을 준것에 감사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러한 블렌도어의 메세지 덕분에, 성좌라는 존재들이 어디에서부터 기원한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멸망해버린 세계의 잊혀진 신.

그러한 존재들이 바로 성좌인 것이다.

"아니, 신도들이 애타게 찾을때는 안나타나더니 대체······."

나는 그런 블렌도어의 등장에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게이트 너머에서 내용물을 확인할 때는 가만히 있더니, 자기 이름이 불리자마자 나타나는 모습이 퍽 우스웠다.

더군다나 나에게 1포인트 후원을 난사하고 있는걸 보아하니, <별자리 관리 도구>를 통한 거래에도 참여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며칠동안 받은 출석보상을 쪼개서 나한테 메세지를 보내온 것이다.

그런 내 이야기에 무언가 항변이 필요했던 것이었을까.

허광의 블렌도어는 나에게 추가로 메세지를 전송했다.

- 성좌 [허광의 블렌도어]가 당신에게 1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허광의 블렌도어]는 오래전에 일어났던 재해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 성좌 [허광의 블렌도어]가 당신에게 1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허광의 블렌도어]가 그날의 후회를 덮어버리기 위해, 당신에게 작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오래 전에 일어났던 멸망에 대해서는 자신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나를 위해 자그마한 도움을 주겠다.

그것이 블렌도어로부터의 주장이었던 것이다.

"······."

충분한 도움.

내가 그 의미를 되묻는 듯한 시선을 하늘로 보내면, 머지않아 블렌도어로부터 충격적인 메세지가 날아왔다.

- 성좌 [허광의 블렌도어]가 당신에게 1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허광의 블렌도어]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당신을 최후의 성자로 임명하겠다고 주장합니다.

- 성좌 [허광의 블렌도어]가 당신에게 1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허광의 블렌도어]는 그것을 위해 5만 포인트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성좌, 블렌도어가 나에게 전한 제안.

그것은 나에게 성자의 자격을 내려, <블렌도어의 약속(S+)>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에게 5만 포인트를 지불한다면 말이다.

나는 대놓고 포인트를 받고 자격을 팔겠다는 블렌도어의 제안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5만 포인트에 성자 자리를 팔겠다니.

이 무슨 터무니 없는 주장이란 말인가.

타락한 종교에서 이루어지는 성직매매도 아니고, 말도 안되는 제안이 따로없었다.

"······."

대체 어떤 정신머리가 박혀있어야 저런 제안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저런 터무니 없는 제안에 대한 내 대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나는 손에 쥔 반지를 강하게 움켜쥐고서 하늘에 떠있는 별자리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성좌를 향해 내 선택을 당당하게 전달했다.

- 성좌 [허광의 블렌도어]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허광의 블렌도어]가 당신의 훌륭한 선택을 지지합니다.

- 성좌 [허광의 블렌도어]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허광의 블렌도어]는 당신이 멸망을 막아낼 인류의 희망이 될거라고 주장합니다.

- <블렌도어의 약속(S+)>이 당신을 주인으로 선택했습니다!

그날 저녁.

나는 S+급 장비 아이템의 주인이 되었다.

5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