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50-55

50화

성자(聖者).

흔히 종교적인 관점에서 특별한 위치에 있는 이들을 일컫는 단어다.

어떤 종교라도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인물에게 수여되는 직위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잊혀진 신 블렌도어의 '성자' 자리는 그다지 쓸모가 없는 편이었다.

왜냐면, 나에게는 신성력이 일절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하기야, 신성마법 쓰려면 <스크롤 북(A)>으로 사용하는게 더 효율적이겠지."

레델 화이트의 은신처 안쪽.

아무도 없는 은신처에서 나는 현재 반지를 낀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보고 있었다.

푸른 보석이 끼워진 반지가 손가락 위에서 유유히 빛나는 중이었다.

블렌도어라는 성좌의 가호를 받아 그의 인정을 받은 성직자가 되었지만, 성자가 된 나에게 있어서 유의미한 변화는 존재하지 않았다.

유일한 효과라고 해봐야, 내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활성화 되었다는 사실 뿐.

그 이외에는 아무런 의미조차 없는 감투에 불과하다는 이야기였다.

"뭐, 반지라도 얻었으니 이걸로 만족해야하나."

그렇다고 해서 5만 포인트의 가치에 크게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S+급의 장비 아이템, <블렌도어의 약속(S+)>.

해당 아이템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으니까 말이다.

지정한 게이트를 인위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반지의 능력.

그것은 현대의 공학기술로도 도달하지 못한, 말도 안되는 기적의 산물이나 다름없는 물건이었다.

더군다나 해당 아이템에는 이미 연결되어있는 게이트가 두군데나 존재하고 있었다.

하나는 내가 현재 들어와있는 게이트, '레델 화이트의 은신처'.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성직자 레델이 간신히 보존하는데 성공한, 멸망한 세계에서 블렌도어가 남긴 마지막 유산이었다.

"[버려진 영물들의 낙원]··· 이곳도 내 눈으로 직접 한 번 확인해봐야겠지."

게이트, 버려진 영물들의 낙원.

레델이 생전에 남아있던 신수들을 특정 게이트에 모아둔 공간이었다.

비록 그들의 터전을 만든 레델은 사라져버리고 말았지만, 그가 모아둔 신수들만큼은 여전히 그곳에 자리하고 있을 터.

그렇기에 내가 직접 해당 게이트로 넘어가서, 신수들의 상태를 한 번 확인해볼 생각이었다.

찰칵-.

나는 반지에 끼워져있던 금속 프레임을 돌리고서는, 허공을 향해 반지를 낀 손을 뻗었다.

"어디보자··· 이렇게 사용하는 거였나?"

이미 반지의 사용법에 대해서는 일기를 통해 대략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상황.

그러니 이제는 직접 반지의 효과를 사용해볼 차례였다.

"—[공간연동]."

내가 허공을 향해 손을 뻗은 직후.

우우우우웅-.

묵직한 진동음과 함께 허공에 거대한 빛의 고리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확산하는 광채.

그리고 그 주변으로 뻗어나가는 거대한 마력의 흐름.

공중에 생겨난 빛의 고리가 회전하며, 그 너머의 풍경을 생생하게 그려나갔다.

"저건······."

찬란한 광채를 두른 채 펼쳐져있는 낙원의 풍경.

그것은 경건한 분위기의 건축물을 중심에 둔 채, 드넓은 목초지가 펼쳐져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고리의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 <블렌도어의 약속(S+)>과 연결되어있는 게이트의 내용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시선이 고리 너머의 풍경을 마주한 이후.

띠링-.

내 눈앞에 메세지가 출력되었다.

- [게이트 : 버려진 영물들의 낙원]이 실체화됩니다.

- 판정 등급 : S

게이트 판정 등급 S.

어마무시한 등급의 게이트가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하위 랭킹의 S급 헌터들조차 파티를 배제한 채 혼자 들어가면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공간.

그런 수준의 게이트가 내 반지와 연결되어있다는 이야기였다.

"S급 게이트··· 혼자 들어가도 문제 없는거 맞나······?"

꿀꺽-.

나는 눈앞에 나타난 간이 게이트를 보며 침을 삼켰다.

보통이라면 S급의 게이트에 혼자 들어가는 것은 미친 짓이나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허나, 지금 내 손가락에는 <블렌도어의 약속(S+)>이 끼워져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해당 아이템에는 성수와의 친밀도를 올려주는 효과가 포함되어있었다.

게이트 너머에 존재하는게 성수들밖에 없다고 한다면, 적어도 그들이 아무런 이유없이 나를 적대하지는 않을거라는 이야기였다.

"······문제가 생기더라도 한번에 죽지는 않겠지."

혹시나 안에서 문제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긴급방어]가 한번정도는 나를 지켜주지 않을까 하는 믿음도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바로 밖으로 빠져나오자.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게이트 안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파아아앗!

환한 빛이 내 전신을 휘감은 이후.

나는 머지않아 간이 게이트의 반대편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

환하게 번진 시야가 서서히 되돌아왔다.

색채를 되찾기 시작한 시야속에서, 나는 눈앞에 비추어진 장엄한 풍경을 돌아보았다.

찬란한 태양이 내리쬐는 필드의 모습이 내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화려하고 웅장한 신전의 잔해.

그 주변에는 거대한 목초지가 펼쳐져있는 모습이었다.

짐승들이 거주하는 낙원과도 같은 풍경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낙원의 풍경속에서, 나는 그곳에서 뛰어놀고 있는 수많은 신수들을 발견— 하는데 실패했다.

"뭐야. 얘네 왜 이래."

드넓게 펼쳐진 목초지의 위.

거기에는 수많은 짐승들이 널부러져 바닥을 나뒹구는 모습이었다.

그것도 가죽이 뼈에 달라붙을 정도로 바짝 말라붙은 채 말이다.

—신수(神獸).

영물이라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초라한 몰골의 짐승들이, 살가죽만 남긴 채로 축 늘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자니 영물들의 낙원은 커녕 기아지옥에 가까운 풍경이었다.

음식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사막에 짐승들을 던져놓으면 저런 꼴이 될 것인가.

나는 눈앞의 끔찍한 몰골에 의아함을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래 굶었나?"

앙상하게 말라붙은 신수들의 터전.

내가 그 황당한 풍경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으면, 머지않아 초라한 풍채의 대형견 하나가 나를 발견하고서 다가왔다.

총. 총. 총. 총.

거대한 체구를 가졌지만 살이 빠져 말라비틀어진 녀석이 내 앞에 멈추어섰다.

그리고는 나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이내 자리에 픽 쓰러져버리는 모습이었다.

털썩-.

내가 혼자 쓰러진 신수의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나를 보던 신수의 입에서 힘빠진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 왈, 왈!

- [자동번역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 "성자라는 놈이 믿음도 없고 신성력도 없네."

- 왈! 왈왈왈왈!

- [자동번역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 "우린 이제 다 굶어죽었다."

내 눈앞에 보이는 녀석에게 나름대로 지성이란게 달려있었던 것이었을까.

커뮤니티의 [자동번역 기능]은 그런 신수의 이야기를 친절하게 번역해주었다.

눈앞에서 쓰러진 신수의 이야기.

그것은 내가 성자인 주제에 믿음도 신성력도 부족했으며, 그 탓에 자기들이 전부 굶어죽게 생겼다는 이야기였다.

허나 그런 그들의 이야기에는 커다란 어폐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신수들은 내가 안왔어도 하나같이 굶어죽기 일보직전처럼 생긴 까닭이었다.

"분명 레델이 가능한 풍족한 곳으로 골랐다고 했던 것 같은데. 풀이라도 뜯어먹으면서 지내면 되는거 아닌가?"

내가 찾아온 게이트, '버려진 영물들의 낙원'은 무수한 목초지로 가득차있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사방에는 열매가 열려있는 나무들이 세워져있는 모습이었다.

육식만 고집하는 녀석들이 아니라면, 풀이나 과일로 충분히 연명할 수 있는 환경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런 내 궁금증을 풀어준 것은, 뜻밖에도 나를 지켜보고 있던 성좌 블렌도어였다.

- 성좌 [허광의 블렌도어]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허광의 블렌도어]가 신수들은 신성력을 원동력으로 삼아 살아간다고 주장합니다.

- 성좌 [허광의 블렌도어]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허광의 블렌도어]는 오랫동안 신성력을 공급받지 못한 수많은 신수들이 사라져버린 것에 안타까움을 표합니다.

성좌 블렌도어.

여기에 쓰러져있는 신수들과 관련이 있는 잊혀진 신은, 이곳에 있는 신수들이 신성력을 양분으로 살아간다고 이야기했다.

필드에 널려있는 음식을 먹는다고 한들, 신성력이 없으면 유의미한 결과를 가져오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눈앞에 있는 신수가 나를 보고 앓는 소리를 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상황이었다.

'레델 이후로 오랫동안 신성력을 공급받지 못하게 된건가.'

그들은 오랫동안 블렌도어를 따르는 성직자가 이곳에 찾아오기를 소망했을 것이다.

허나 오랜만에 찾아온 성자가 믿음도 없고 신성력도 없었으니, 더 이상 자신들에게 신성력을 공급해주지 못할거라 판단한 모양이었다.

나는 자신의 눈앞에 나자빠져있는 거대한 신수를 보면서 고민했다.

'신성력··· 그런데 굳이 내가 직접 신성력을 불어넣어야할 필요가 있나?'

신수들에게 신성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했다.

그리고 내가 저들을 써먹기 위해서는, 신수들을 유지하기 위한 신성력을 공급해야 한다는 것도 이해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신성력을 공급하는데 굳이 지원계 헌터도 아닌 내가 신성력을 사용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무리 봐도 아니었다.

신수를 보며 조용히 고민하던 나는, 허공을 향해 손을 뻗어 커뮤니티를 열었다.

"—[네트워크 접속]."

띠링-.

커뮤니티를 개방한 내 눈앞에 게시판의 모습이 출력되었다.

나는 게시판에 올라온 게시글들을 무시하고서, 곧장 [경매장] 메뉴를 터치해 접속했다.

"마법도 돈으로 해결이 되는 세상인데, 신성력도 돈으로 해결이 가능하겠지."

돈만 있으면 스크롤을 구매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세상이다.

내가 보기에는 신성력도 크게 다르지 않을 터였다.

그렇기에 내가 내린 결정은 하나였다.

띠링.

- <성수(D) >를 227포인트에 구매했습니다.

부족한 신성력도 포인트로 구매한다.

툭-.

그런 결단을 내린 내 손아귀에 성수가 들어있는 병 하나가 떨어졌다.

신성력을 머금은 특별한 물이 들어있는 소모성 아이템, <성수(D) >.

내가 해당 아이템을 손에 쥐자, 바닥에 엎드려있던 신수의 눈빛이 바뀌었다.

- 왈, 왈왈!

- [자동번역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 "저건··· 설마 성수······?"

투명한 병으로부터 느껴지는 신성한 기운을 감지한 것이었을까.

눈앞의 신수를 포함해 수많은 신수들의 시선이 나를 바라보았다.

허나 나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허공을 향해 손가락을 움직였다.

- <성수(D) >를 381포인트에 구매했습니다.

- <성수(D) >를 216포인트에 구매했습니다.

- <성수(D) >를 401포인트에 구매했습니다.

툭, 투둑-.

내가 버튼을 누를 때마다 허공에서 투명한 병이 떨어져내렸다.

푹신한 풀밭을 나뒹구는 수많은 아이템들.

나는 [경매장]에서 구매한 <성수(D) >들을 이용해 신수들의 신성력을 보충해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일단은 100개 정도만 구입해볼까."

바닥에 떨어져내린 유리병들이 너무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인가.

하나같이 신성력을 머금은 채로 빛나는 병들의 모습에, 방금 전에 나를 힐난하던 신수의 태도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발라당.

거대한 배를 까고 드러누운 성수는 혀를 쑥 내밀더니, 이전보다 공손한 울음소리를 터뜨리는 모습이었다.

- 왈왈! 왈왈왈!

- [자동번역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 "신실하신 성자님! 사랑해요!"

언젠가 티비 프로그램에서 보았던 이야기가 있다.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고 했던가.

눈앞에 있는 비쩍마른 개를 보니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하······."

93만 헌터 유튜버, 헌잘알.

나는 그렇게 나쁜 개조차 예의를 되찾게 하는 기술을 터득하게 되었다.

* * * * * *

내가 S급 게이트의 내부에 들어온지 어느덧 한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무수한 숫자의 <성수(D) >들을 구매했으며, 그것들을 모아 신전에 거대한 샘을 만들었다.

반지에 저장된 게이트 내부에 신수들을 위한 안식처가 마련된 것이다.

신성력이 충만한 성수로 가득차있는 샘.

그것을 마주한 신수들의 반응은 무척이나 폭발적인 편이었다.

후루룹. 짭짭-.

수많은 신수들이 곧장 샘으로 달려가 샘물을 들이마시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샘에 담겨있는 물을 양껏 들이키고는, 대기하고 있던 다른 신수들과 교대하는 모습이었다.

신수들은 순번을 지키며 차례대로 물을 마셔나갔다.

"역시··· 나한테 없는걸 해결하는데에는 포인트만한게 없지."

신성한 샘이 세워진지 1시간.

나는 여전히 긴 대기줄이 세워져있는 샘을 바라보았다.

이미 수많은 신수들이 샘을 즐겼지만, 그럼에도 아직까지 남아있는 녀석들이 많이 있었다.

내가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자, 먼저 신성력을 충전한 신수들이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 짹짹! 짹짹-!

신성력을 회복해 통통해진 참새 한마리가 내 어깨에 앉았다.

참새라기에 좀 많이 거대해보이는 그것은, 내 어깨에 앉은 채로 나뭇가지를 까딱거리는 모습이었다.

샘물의 은총을 마주한 신수가 나에게 친밀감을 느끼는 것을 넘어, 진정으로 나를 믿고 따르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신수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후, 신수들 크기 좀 봐라."

구렁이. 곰. 비둘기. 오리너구리.

수많은 짐승들이 나에게 다가와 몸을 밀착시켰다.

"영물들이라 그런지 다들 상당히 덩치가 큰 편이네."

스윽-.

나는 자신의 아래에 깔려있는 푹신한 무언가를 쓰다듬으며 신수들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았다.

신성력을 보충하고 회복한 신수들은 하나같이 크고 거대한 편이었다.

처음에는 나를 비난해오던 대형견 역시, 샘물을 먹고 한껏 회복했는지 푹신한 털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근간을 이루는 신성력을 충전한 신수들이 제 본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거대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개체는, 단연코 지금 내 머리위에서 꿈틀거리는 녀석이었다.

비뚤어진 뿔을 가진 채, 한쪽 눈에 상처가 나있는 새하얀 용의 형상.

그것은 하늘에서 기다란 몸을 늘어뜨린 채로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저건 특히나··· 크기가 말이 안되네. 필드 보스로 분류되는 녀석인가?"

겉으로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능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존재.

이곳에 있는 모든 신수들을 통틀어 가장 강해보이는 존재는, 구름을 휘감은 채로 지상을 굽어보며 나와 눈을 마주했다.

지금껏 수많은 몬스터들을 내 눈으로 마주해왔지만, 저것은 여타 몬스터들과는 격이 달라보이는 존재였다.

게이트 판정 등급 S.

이 게이트에 어째서 그런 등급이 매겨졌는가 하고 묻는다면, 누구라도 저 존재를 손으로 가리킬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만큼 새하얀 용이 내비치는 위압감은 어마무시한 것이었다.

"굉장히 강력한 개체는 맞는 것 같은데. 저것도 말이 통하는 녀석인건가?"

나는 자신의 아래에 깔려있는 개를 닮은 신수— '백구'를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성수를 보자마자 배를 까뒤집고 드러누운 녀석에게 내가 지어준 이름이었다.

백구를 쓰다듬던 내가 용에 대한 의문을 품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자, 이내 그런 내 의도를 간파한 녀석이 입을 열었다.

- [자동번역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 "잊혀진 신의 성자여. 이곳에 있는 영물들은 모두 당신의 의지를 이해할 수 있다."

하늘에 드리워진 용.

녀석으로부터 간단한 응답이 돌아온 것이다.

거기에 더해 녀석은 이곳에 있는 모든 영물들이 내 의지를 이해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다시 말해서 저 용이 나와 직접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지성체··· 그중에서도 상호간에 의사소통이 가능한 개체라고?'

더군다나 녀석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샘물을 한껏 들이마셨는지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용의 형상.

순백의 용은 지상을 향해 머리를 바짝 내민 채로, 나와 시선을 마주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 [자동번역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 "이들 전부가 당신에게 의지를 전할 수 있을만큼 지혜롭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여기에 있는 모두가 마지막 성자를 진심으로 따를 것이다."

순백의 용이 나에게 전한 이야기.

그것은 그를 포함한 이곳의 신수들이 마지막 성자인 나를 진심으로 따를거라는 이야기였다.

짐승도 자기한테 밥주는 주인만큼은 알아본다고 했던가.

신수들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허나, 다른 의미에서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이것들 내가 주기적으로 밥 안주면 그냥 굶어죽는거 아닌가?'

한껏 <성수(D) >를 퍼부어 먹여살린 나에게 이렇게 신수들이 매달리는 이유.

그야 내가 없으면 이 녀석들한테 신성력을 먹여줄 사람이 없으니까 그렇다.

나를 향해 마지막 성자라고 이야기했던걸 보면, 성좌 블렌도어도 이미 한물 간 존재일 가능성이 높을 터.

내가 이 낙원에서 손을 놓아버리는 순간, 이 게이트는 겉잡을 수 없는 공간으로 변모할거라는 의미였다.

'그래도 생각보다 내 말을 잘 따르는 녀석들이야. 상황에 따라서는 급하게 전력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겠지.'

그렇다고 해도 이곳은 명색이 S급에 해당하는 게이트였다.

활용하기에 따라서 전력으로 써먹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어지간한 헌터들은 여기에 던져넣기만 해도 저항하지 못하고 신수들에게 너덜너덜하게 변할테니 말이다.

그러니 어떻게 써먹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고민해두는 편이 좋을 터였다.

"뭐, 그래. 너희들이 나를 따른다는건 알았어."

나는 눈을 감은 채 헥헥거리는 백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용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하늘에 있는 용에게 보다 본질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말이야. 너희가 정확히 어떤 방향으로 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거지?"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면 직접적인 대화를 마다할 이유가 없을 터.

나는 하늘에 있는 용에게 직접 질문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러자 지상을 내려다보던 용이 나에게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 [자동번역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 "당신이 제공하는 신성한 힘은 우리들의 양식이 될 것이다."

- "비록 오랜 시간이 지나 우리는 이곳에 묶여버리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약속의 증표가 있다면 어떠한 것도 우리의 도움을 가로막지 못할 것이다."

성자에게 주어진 약속의 증표.

용의 전언은 지금 내 손에 끼워져있는 반지, <블렌도어의 약속(S+)>을 가리키는 이야기였다.

이 반지만 있으면 언제든지 신수들이 있는 게이트 안으로 도망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정기적으로 충분한 신성력을 충전시켰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이 반지를 이용해서 게이트를 이용하라는 이야기지?"

나는 반지를 낀 손을 하늘을 향해 들어올렸다.

콰릉-!

나를 바라보던 용의 주변에서 새하얀 뇌광이 터져나왔다.

번뜩이는 광채.

그것을 한껏 머금은 순백의 용은 안광이 흐르는 눈으로 이야기했다.

- "허광의 힘은 세상을 속이고 법칙을 왜곡하며 본질을 흐리는 기적."

- "그대가 바란다면 한순간이나마 경계의 안과 밖이 뒤바뀔 것이고, 그 안에서 행해지는 옳고 그름이 모호해질 것이다."

- "그것이 잊혀진 신이 일찍이 멸망한 땅에 베풀고 사라진 기적의 결실이라."

- "그러니 그대가 더 많은 기적을 우리에게 베푸는만큼, 우리는 그대를 돕기 위한 힘을 비축해둘 것이다."

하늘을 유영하는 거대한 용.

녀석의 말을 들은 나는 잠시 고민했다.

모호하게 만드는 힘을 가진 신수이기 때문이었을까.

저 녀석이 하는 말조차 실로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었다.

다시 말해서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못알아먹겠다는 뜻이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이 게이트가 반지와 연결되어있으며, 내가 게이트를 열어 이곳에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은 이해했다.

허나 그 외의 이야기는 수능 국어 3등급인 나조차도 도무지 감을 잡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다행히도 우리의 새하얀 용은 배려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조금 더 시선을 낮춘 녀석이 나를 향해 보다 친절한 말로 설명해주었다.

- "그대가 형성한 '문'이 닫히기 전까지, 그 주변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문'의 아래에 놓일 것이다."

- "그 시간동안 우리에게 허락된 영역 역시 그와 크게 다르지는 않을테지."

- "그렇게 안과 밖이 뒤바뀐 공간의 안에서, 모두가 이 공간의 법칙을 적용받게 될 것이다."

나는 하늘의 용이 이야기해준 키워드들을 다시 한 번 더듬어보았다.

문. 경계. 법칙. 그리고 약속의 증표.

그 무수한 키워드들을 엮어나가던 내 시선이 푸른 빛을 머금은 반지로 향했다.

필드를 구성하는 경계가 완전히 사라지며, 게이트의 주변지역들이 필드의 법칙 아래에 귀속된다.

그리고 그 순간 게이트에 귀속되어있는 몬스터들 역시 밖으로 풀려나오게 된다.

그것은 이미 헌터들에게 굉장히 익숙한 현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번 발생할때마다 미디어가 통째로 뒤집어지는 현상이었으니까 말이다.

"······게이트 브레이크?"

S급 게이트의 인위적인 게이트 브레이크.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금단의 필살기를 얻게 된 순간이었다.

51화

지금은 바야흐로 캠핑의 시대다.

캠핑카부터 시작해서 차박과 텐트, 글램핑에 이어지기까지 다양한 캠핑방법들이 유행하는 상황.

그리고 그런 유행에 편승해서 나 역시도 현재 캠핑을 즐기는 중이었다.

그것도 캠핑장이 아니라 게이트 안쪽에서 말이다.

"슬슬 물건이 올라올 때가 된 것 같은데."

풀내음이 가득한 동굴의 안쪽.

나는 현재 그곳에서 랜턴을 올려놓은 채로, 소위 말하는 럭셔리 캠핑을 즐기는 중이었다.

나뭇잎으로 이루어진 침대에 누워 커뮤니티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고요하고 신비로운 분위기속에 홀로 게시판을 보고 있자니, 이것이야말로 낭만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런 자연의 분위기 속에서 커뮤니티를 바라보고 있던 도중.

띠링.

내 눈앞에 갑작스러운 알림이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내가 방금 전에 작성한 게시글에 새로운 댓글이 달렸음을 알려오는 알림이었다.

"아까 적은 게시글에 댓글이 달렸나?"

버려진 신수들을 본격적으로 키우기에 앞서, 그를 위한 게시글을 커뮤니티에 올려놓은 상황.

그런 내 게시글에 누군가의 댓글이 달린 것이다.

나는 두근대는 마음으로 커뮤니티의 게시글을 열어보았다.

툭.

내 손가락이 화면에 닿은 직후, 눈앞에 게시글의 내용이 펼쳐졌다.

[ 제목 ] 신성한 아이템 다 삽니다 경매장에 올리세요

[ 작성자 ] 거품판독기

신성력 붙어있는 물건중에 괜찮은 것들 매입합니다

장비 소모품 신경안씁니다

가격만 맞으면 전부 사겠습니다

일단 경매장에 올려주세요

[ 댓글 3개 ]

artea : 저와 비슷한 길을 걷는 동지이신가보네요.

artea : 경매장에 아이템 올렸어요. 친하게 지내봅시다.

engine555 : 전투사제 쪽이었어?

[ 공지사항 / 수정 / 삭제 ]

내가 커뮤니티에 올린 게시글의 내용.

그것은 신성력이 붙어있는 아이템들을 전부 매입한다는 글이었다.

지속적으로 신성력을 방출하는 아이템이 있다면, 신수들을 육성하는데 조금은 도움이 될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내 게시글에 댓글을 단 이용자는 총 두명.

하나는 이용자명 'artea'.

그리고 다른 하나는 'engine555'— 그림자사냥꾼 이지성이었다.

"이지성··· 내가 어떤식으로 싸우는지 추측하고 있는건가."

이지성이 왜 이런 질문을 남겼는지야 이유가 뻔했다.

내가 갑자기 신성력이 담겨있는 물건을 매입한다기에 의문이 든 모양이었다.

이지성은 내가 싸우는 모습을 본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그건 이지성뿐만이 아니라, 다른 헌터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야 나에게 전투능력이라고 부를만한건 하나도 없었으니까 말이다.

"뭐, 적당히 답글 안달고 놔두면 알아서 판단하겠지."

물론 그런 이지성의 물음에 내가 직접 대답을 해주는건 악수였다.

여기서 가장 좋은 방법은 이지성 혼자서 착각하도록 만드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가만히 놔두면 이지성은 내가 근접전투에 능숙한 지원계통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지성과는 어떤 관계로 치닫을지 모르는만큼, 나와 그 사이의 거리감은 이정도로 충분했다.

"경매장에 아이템을 올렸다니까 한 번 확인해볼까."

게시글에 달린 댓글들을 확인한 이후, 나는 곧장 [경매장] 버튼을 눌러 매물들을 확인해보았다.

신성력이 포함되어있는 장비들은 기본적으로 지원계통의 헌터들이 애용하는 아이템들이었다.

그리고 지원계통의 헌터들은 그 비율이 다른 계통에 비해 매우 적은 편이었다.

그 대상을 S급으로 한정한다면 더더욱 그러했고 말이다.

성수와 같이 범용적인 기능을 하는 물건이 아닌 이상에야, 결국 신성력과 관련된 아이템의 소비처에는 한계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

나는 그런 틈새시장을 노려 물건들을 쓸어담을 생각이었고 말이다.

성좌들의 출현 이후로 대량의 포인트가 풀린만큼, 내가 쓸 수 있는 포인트에도 비교적 여유가 생긴 상황.

이전보다 조금 더 많은 금액을 써도 큰 영향이 생기지는 않을 터였다.

그렇기에 나는 [경매장]에서 적당한 헌터 장비를 몇가지 구매했다.

- <신성한 오브(B)>를 1388포인트에 구매했습니다.

- <성 아스리아의 축복(C)>를 677포인트에 구매했습니다.

투명한 구체와 기다란 지팡이.

겉으로 보기엔 그저 미관상 괜찮아보이는 물건이지만, 그럼에도 은은한 기운이 새어나오는 물건들이었다.

나는 그것을 낙원으로 향하는 게이트를 향해 집어던졌다.

툭. 데구르르-.

게이트 너머로 집어던진 물건들이 안쪽으로 굴러들어가는 모습이었다.

"백구야. 챙겨가라."

내가 게이트 너머에 있을 신수, '백구'의 이름을 부르면 머지않아 누군가 이쪽을 향해 헥헥대면서 달려오는 모습이었다.

푹신한 털을 두르고 있는 백구가 등장한 것이다.

백구는 신성력이 가득한 물건들을 보기 무섭게 울음소리를 냈다.

- 월월! 월월월!

- [자동번역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 "이거 맛있겠다."

녀석은 그렇게 말하면서 지팡이를 입에 물고 달려가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 뼈다귀를 물고 달려가는 대형견의 모습이 생각날 정도였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크게 다르지는 않을테지만 말이다.

"저러고 다니니까 진짜 개처럼 보이네."

나는 아이템을 물고 돌아가는 백구를 잠시 지켜보고는, 이내 계속해서 [경매장]의 내용물을 살펴보았다.

백구는 지팡이와 오브에 만족하고 돌아갔지만, 고작해야 B급과 C급에 불과한 아이템들이었다.

다양한 신수들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더 많은 아이템들이 필요할 터.

그러니 어떤 아이템들이 효율적인지 고민해보기 위함이었다.

"흠······."

경매장에는 내가 구매한 것 이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신성력 관련 아이템들이 있었다.

허나, 그들 모두가 등급에 걸맞은 가격이 책정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아무리 포인트가 많다고 해도, 지나치게 높은 가격에 물건을 사들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나는 그러한 상품들을 배제하고서 계속해서 상품들을 골라나갔다.

그렇게 한참동안 내가 상품을 고르던 도중.

띠링-.

나에게 새로운 메세지가 도착했다.

"뭐야. 지금 나한테 연락할만한 사람이 없을텐데?"

정체불명의 누군가로부터 갑작스럽게 날아온 메세지.

더군다나 나에게 메세지를 보낸 것은, 내가 지금까지 대화를 나눠보았던 사람이 아니었다.

이용자명 'nineblade'.

내가 처음 보는 닉네임의 유저가 나에게 대화를 걸어온 것이다.

"nineblade··· 대체 누구지?"

나는 1:1 대화창을 터치해 해당 유저가 보내온 메세지의 내용을 확인해보았다.

툭.

화면을 터치하자 상대가 보내온 메세지가 주르륵 출력되었다.

- nineblade : 안녕하세요, 거품판독기님!

- nineblade : 한국에 거주하고 계신 S급 헌터분이시죠?

- nineblade : 저는 현재 HETX 길드에서 근무중인 구성현이라고 합니다.

- nineblade : (사진)

- nineblade : 저희 길드는 일종의 공기업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ㅎㅎ

- nineblade : 혹시 잠깐 대화 가능하실까요?

나는 'nineblade'의 메세지를 천천히 위에서부터 읽어나갔다.

처음부터 나에게 무언가 용무를 가지고 접근해왔던 것일까.

그는 나에게 자신의 사원증부터 제시하는 모습이었다.

HETX 토벌 1팀— 구성현 팀장.

한국의 S급 헌터들 중 하나, 구성현이 나에게 1:1 대화를 걸어온 것이다.

"구성현이라고? 그 독왕 구성현?"

한국에는 오지아를 포함해 총 아홉명의 S급 헌터가 있고, 구성현은 그런 S급 헌터들 중 하나였다.

—독왕(毒王).

그 거창한 이명에 걸맞게 그는 지속형 데미지를 중심으로 하는 메이지형 딜러였다.

이지성과는 반대의 의미에서 위험한 헌터인 셈이었다.

그리고 한국 정부에게는 무척이나 다행이게도, 구성현은 정부에 굉장히 우호적인 인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 정부가 설립한 헌터길드, HETX에 소속되어있는 인물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런 양반이 다짜고짜 왜 신상부터 알려오고··· 아."

그런 구성현이 나에게 사원증부터 보여주고 시작한 이유.

그에 대해서 고민하던 내 머릿속에 한가지 가능성이 스치고 지나갔다.

대한민국 정부.

그리고 정부의 영향력 아래에 놓여있는 S급 헌터.

왠지 모르게 그리 좋은 목적으로 접근한 것은 아닐거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러한 나의 불길한 예상을 증명하듯이, 구성현으로부터의 채팅이 계속해서 이어져나갔다.

- nineblade : 사실 오랜 시간동안 작성하신 게시글을 토대로 헌터님이 주선호 헌터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 nineblade : 그렇기에 이제서야 헌터님에게 이렇게 연락을 드립니다.

- nineblade : 주선호 헌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습니다.

- nineblade : 혹시 밖에서 한 번 시간을 내서 만나뵐 수 있을까요?

HETX 소속의 헌터, 구성현이 나에게 이야기를 전한 용건.

그것은 나와 직접 만나서 주선호에 관한 대화를 나누기 위함이었다.

주선호에 대한 위험한 이야기.

그리고 S급 헌터라는 감투를 쓴 채, 정부소속 헌터와 벌이는 직접적인 만남.

어느쪽이든 하나같이 나에게 있어서 위험한 내용들밖에 없었다.

"상식적으로 가능할리가 있겠냐?"

주선호는 정부에 대해 적대적인 편이지만, S급 헌터들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편이었다.

정부는 그런 주선호를 의심하고서 나와 접촉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고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정부 소속의 헌터와 만나는 경우, 어떤 결과를 마주하게 될지는 불보듯 뻔한 것이었다.

"게다가 헌터 라이센스도 없는 상황이니, 뭐······."

더군다나 나는 현재 헌터협회에 등록되어있지 않은 미등록 헌터였다.

구성현이 나에게 연락을 취한 수단은, S급 헌터들에게만 허용되는 비밀 커뮤니티.

정부소속의 헌터와 만나서 S급 헌터라는 오해를 사는 날에는, 막대한 금액의 벌금을 낼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결국 어떤 쪽이든 구성현의 요구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 뿐이었다.

"······."

그렇게 나는 풀잎침대에 누운 채로, 구성현의 메세지에 어떤 답장을 보내야할지 고민했다.

침묵속에서 이어진 잠시동안의 고민.

그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커뮤니티의 이용자 'nineblade'에게 짧고 간단한 거절의 의사를 표한 것이다.

타닥, 타다닥-.

나는 키보드를 활성화시켜 구성현을 향해 거절의 의사가 담긴 메세지를 전달했다.

- nineblade : 혹시 밖에서 한 번 시간을 내서 만나뵐 수 있을까요?

- 거품판독기 : 삐빅

- nineblade : ?

- nineblade : 너 어디사냐?

구성현을 향해 메세지를 보낸 이후.

나는 그의 답장을 무시한 채로 대화창을 완전히 닫았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정부와는 얽히지 않는게 무조건 상책이었다.

"괜히 나갔다가 주선호한테 창맞을일 있나."

나는 허공에 손을 뻗어 [경매장] 메뉴를 터치했다.

툭-.

1:1 대화 메뉴가 사라지면서, 그 자리를 무수한 아이템목록이 대체했다.

대화가 끝났으니 이제는 다시 쇼핑을 이어갈 차례였다.

띠링. 띠링. 띠링.

나는 적막한 분위기 속에서 계속해서 경매장의 매물탐색을 이어나갔다.

* * * * * *

국적을 가지고 있는 한국에서는 비교적 조용한 편이지만, 세계 각국의 정부에게서는 무수한 경계를 받는 헌터가 있다.

S급 헌터, 독왕(毒王) 구성현.

그는 걸어다니는 생화학병기에 가까운 유형의 헌터였다.

허나 그에 대한 위험한 인식과는 별개로, 구성현은 무척이나 질서와 평화를 사랑하는 인물이었다.

그가 지금 국가직속 헌터길드, HETX에 직접 몸을 담고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하······. 주선호 이 자식 가만보면 뭔가 쌔하단말이야."

HETX의 토벌 1팀.

현재 그곳에서 구성현은 부하와 단둘이 남아서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 중이었다.

구성현은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에게 '공무원 아니면 공기업'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으면서 자란 인물이었다.

그리고 우연인지 운명인지는 몰라도, 덕분에 그는 그 사이의 애매한 어딘가에 위치한 직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한 내력을 가지고 있는 S급 헌터 구성현의 업무는, HETX에 소속되어있는 일반적인 헌터들보다 조금 더 많은 편이었다.

그는 헌터들을 포함한 대한민국 사회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전력들 중 하나였다.

국가 내에서 헌터들에 의한 소요사태가 발생했을때, 가장 먼저 출동해 진압하는 것이 구성현의 역할이었던 것이다.

"그놈이 절대 가만히 있을 놈이 아니란 말이지. 분명 뭔가를 꾸미고 있을텐데."

그리고 최근 들어서 구성현이 가장 경계하고 있는 헌터는 하나뿐이었다.

S급 헌터, 신창 주선호.

전세계에서 최강이라고 불리고 있는 헌터중의 헌터.

직접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 가장 진압이 쉽지 않을 헌터이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상징적인 헌터인 주선호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일지도 모른다는 언질이 있었던 상황.

그런 상황에서 구성현이 커뮤니티를 통해 국내의 헌터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거품판독기··· 이 인간은 이상한 사람이니까 일단 넘기고. 그 다음은 최두식··· 이 양반은 왜 커뮤니티에서 실명을 쓰고 있지?"

스윽, 슥-.

종이에 적혀있던 닉네임을 확인한 구성현이 펜으로 하나씩 닉네임을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할만한 헌터들과, 그렇지 않아보이는 헌터들을 분류한 것이다.

그렇게 분류를 통해 적당한 인원을 걸러낸 이후에는, 그들과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어볼 생각이었다.

혹시라도 주선호가 다른 S급 헌터들에게 불온한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나 확인해보기 위함이었다.

"······."

그렇게 사무실에서 리스트를 정리하던 구성현이 종이를 유심히 바라보던 도중.

덜컥-.

손에 쥐고 있던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가 사무실에 울려퍼졌다.

구성현의 부하 헌터들 중 하나가 누군가와 통화를 마친 모양이었다.

구성현은 그런 부하의 모습을 무시한 채, 계속해서 자신의 작업을 이어나가려고 했다.

허나 그런 구성현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통화를 마친 부하는 곧바로 구성현에게 찾아오는 모습이었다.

"팀장님. 보고드릴 내용이 있습니다."

"어, 지우야. 무슨 일인데 그래. 나 지금 많이 바쁜 상황인데."

구성현은 그런 부하의 보고를 기다리며 그에게 되물었다.

큼, 크흠-.

짧게 목을 가다듬은 구성현의 부하는 그런 구성현을 향해 전혀 예상치 못했던 보고를 올려오는 모습이었다.

"길드장님 지시로 다음주에 저희 팀 유튜브 촬영이 있답니다."

"뭐? 유튜브 촬영?"

펄럭-.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내려놓은 구성현이 의아한 눈빛으로 부하를 바라보았다.

대체 지금 이 녀석이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 눈빛이었다.

허나 구성현의 눈빛을 받은 부하는, 여전히 진지한 시선으로 그를 마주할 뿐이었다.

"예. 이번에 유튜브를 통해 저희 이미지를 좀 개선해보신다고······."

허어-.

구성현은 허탈한 표정으로 유튜브 촬영에 대해 운운하는 부하를 바라보았다.

시대가 어느 때인데 고작해야 유튜브로 이미지를 바꿔보겠다고 한단 말인가.

더군다나 그 제안을 꺼낸 인물이 다른 인물도 아니고 HETX의 길드장이었다.

"누군데? 대체 어떤 유튜버가 촬영하러 오는데 그래?"

"헌터사전이라고, 구독자가 100만명이 넘는 헌터 유튜버가 있습니다. 비교적 조용하게 영상을 만드는 편이라서, 아마 이미지 개선에 많이 도움이 될거라고······."

"헌터사전? 100만 유튜버?"

유튜버 헌터사전.

그 이름을 듣던 구성현의 머릿속에 익숙한 채널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100만 구독자를 가지고 있는 해당 채널은 비교적 정보전달에 초점을 두는 방향으로 영상을 제작하는 곳이었다.

구성현도 몇차례 영상을 본적이 있어서 잘 알고 있었다.

"헌터사전이면··· 그나마 채널은 잘 고른 편이네."

"예. 구독자도 많고 무난한 유튜버라고 생각하긴 합니다."

헌터사전이라면 그나마 나쁘지 않은 선택이기는 했다.

적어도 같이 영상을 촬영하면서 이미지가 나빠지는 일은 없을테니까 말이다.

헌터 유튜버들 중에서는 상당히 모범적인 채널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이 상황이 그렇게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지만 말이다.

"하, 이제는 내가 유튜브까지 찍어야되나?"

"······."

"에휴, 됐다. 길드장이 정했다는데 너한테 뭔 잘못이 있겠냐. 가봐라."

길드장이 내린 결정이라면 구성현이 뭐라고 이야기한들 바뀌는 일은 없을 터.

구성현은 부하에게 돌아가보라고 손짓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쉰 이후에는, 구성현의 손이 다시금 종이를 들어올렸다.

부하를 보냈으니 이제는 다시 자신의 일을 할 차례였다.

"최두식은 됐고··· 이번에는 'swordmaster'한테 연락을 넣어볼까."

토벌 1팀, 팀장 구성현.

S급 헌터인 그는 다가올 촬영일정에 대한 생각을 머릿속에 남겨둔 채, 계속해서 커뮤니티의 헌터들과 연락을 이어나갔다.

52화

내가 성좌 '인피니튜드'의 이름으로 오지아를 육성하기 시작한지도 제법 시간이 지났다.

그날 이후로 오지아에 대한 후원은 한동안 계속해서 이어졌다.

오지아는 [리워드] 상점을 통한 능력치 상승에 더해, [경매장] 기능을 통해 값비싼 장비들까지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내 전폭적인 지원덕분에 오지아의 랭킹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오른 상황이었다.

"지금 기준으로 랭킹을 매겨보면 21위 정도는 되겠어."

모니터만이 빛을 발하고 있는 작업실.

나는 현재 그곳에서 헌터들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면서 새로운 랭킹을 매기는 중이었다.

S급 헌터, 휘광 오지아.

지금의 내가 판단하기에, 그녀의 랭킹은 대략 21위 정도였다.

18위인 그림자사냥꾼 이지성을 따라잡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황.

그럼에도 나는 슬슬 오지아에 대한 추가지원을 미루고자 생각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오지아 자신의 성장에 있어서, 그녀가 스스로 해결해야하는 부분이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뭐, 지금보다 더 위로 올라가려면 전투 스타일도 최적화하고, 향상된 능력치에 적응할 필요도 있긴 하겠네."

포인트는 유용하지만 만능은 아니다.

더 높은 능력치를 필요로 하기 이전에, 헌터 스스로가 숙달해야하는 영역도 있기 마련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지금이 오지아 스스로 경험치를 쌓아 성장할 수 있는 구간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물론 오지아의 성장을 계속해서 지켜보다보니, 다른 인물들을 후원하는 방안에 대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후보들을 꼽아보자면, 오지후나 천시예같은 헌터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오지후 정도라면 내가 조금만 후원하더라도 이쪽으로 넘어올 것 같단 말이지."

더스트 길드에 있는 남매 모두에게 성좌로서 영향력을 끼치는 방안.

해당 방안은 내가 최근 들어서 염두해두고 있는 내용들 중 하나였다.

비교적 중립적인 포지션에 있는 두 사람을 포섭해, 필요에 따라서 내 세력으로 써먹으려는 것이다.

오지후가 강하게 튀는 면이 있기는 하지만, 동생인 오지아가 함께 있는 상황에서는 어느 정도 자중하리라는 판단이었다.

"나같은 최약체 헌터가 멸망에서 살아남으려면, 아이템이든 인맥이든 뭐든지 철저하게 준비해놔야겠지."

성좌 '인피니튜드'와 헌터 유튜버 '헌잘알'.

어느쪽이든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최대한 활용해야하는 신분들이었다.

내가 그렇게 두 생활을 양립시킬 생각으로, 철저한 미래계획을 세워나가던 도중.

띠링-.

커뮤니티의 단체 대화방에 알림 아이콘이 떠올랐다.

작성자명 '망원동불주먹'.

신창 주선호로부터의 메세지였다.

"주선호? 갑자기 공지할 내용이라도 생긴건가?"

아무래도 주선호로부터 멤버들에게 공지사항이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 바로 확인해보아서 손해볼 일은 없을 것이다.

어쩌면 컨텐츠 촬영에 도움이 될만한 내용이 있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툭-.

나는 곧장 화면을 열어 주선호의 메세지를 눈앞에 띄웠다.

그리고는 주선호가 남긴 장문의 메세지를 차례대로 읽어보았다.

- 망원동불주먹 : 최근 들어서 내 뒤를 캐고 있는 녀석들이 있다.

- 망원동불주먹 : 아무래도 정부가 나를 의심하고 있는 것 같아.

- 망원동불주먹 : 특히나 HETX와 구성현쪽에서 헌터들 상대로 탐문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 engine555 : 독왕 구성현? ㅋㅋ

- 망원동불주먹 : 다들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단단히 조심하길 바라지.

- 망원동불주먹 : 가능하면 구성현과 마찰이 생기지 않게 주의하도록.

이용자명 '망원동불주먹'으로부터 도착한 장문의 메세지.

그 내용은 최근들어 주선호 자신이 경계당하고 있으며, 특히나 HETX가 그를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중에서도 HETX의 S급 헌터, 독왕 구성현을 특별히 조심하라는 이야기도 덧붙여져있었다.

하암-.

나는 해당 메세지를 바라보며 짧은 하품을 내뱉었다.

"구성현··· 하기야, 최근에도 나한테 메세지를 보내왔었지."

결국 주선호에 대한 구성현의 경계심이 주선호 본인에게까지 흘러들어간 모양이었다.

물론 주선호의 경고는 나에게 있어서는 크게 의미가 없는 내용이었다.

어지간해서는 내가 HETX와 엮일 일은 없을테니까 말이다.

나는 현재 더스트 길드에서 진행하는 컨텐츠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는 상황이었다.

길드장 강석구가 약속한 이권으로 한창 이득을 보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니 굳이 구성현에 대한 촬영까지 욕심낼 생각은 없었다.

"내가 미쳤다고 정부쪽 인간이랑 엮이겠어. 어지간하면 둘이 만날 일조차 없겠지."

구성현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S급 헌터들이라면 몰라도, 나와는 크게 관련이 없는 이야기라는 뜻이었다.

그런만큼 나는 주선호의 경고를 가볍게 흘려듣고 넘어갔다.

어지간하면 주선호가 우려하는 사태는 나에게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절대 없겠지?"

아마도 말이다.

* * * * * *

인생을 살다보면 스스로의 운세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헌터로서 고유특성을 각성했는데 그게 하필이면 커뮤니티에 게시글 올리는 능력이라거나.

B급 게이트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이중게이트가 열려서 판정 등급이 상향조정 된다거나.

S급 헌터들과 함께 게이트에 들어갔는데 재수없게 리치가 쓴 마법이 내 머리 위로 떨어진다거나.

간단하게 대련만 보고 나오려고 게이트에 들어갔더니, [절멸종]같은 해괴망측한 녀석들이 기어나온다던가.

그런 순간들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지금의 내가 생각하기에도, 나는 다른 사람보다도 큰 악운을 타고난 것이 틀림없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그런 불행한 기억속에 새로운 한줄이 추가될 것 같았으니까 말이다.

"하··· 미치겠네. 이게 말이 되나?"

지난 밤, 나는 사용하던 스마트폰을 바닥에 떨어뜨려 액정을 깨뜨리고 말았다.

하필이면 스마트폰의 액정이 바닥을 굴러다니던 물건에 찍힌 것이다.

전화위복이라는 말이 있다.

나는 기왕 스마트폰이 망가진 김에, 아예 스마트폰을 최신기종으로 바꾸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이유로 스마트폰을 바꾸기 위해 지인이 운영하는 가게에 찾아가려고 했던 것이 방금전의 일이었다.

"하필 지금 이 타이밍에 몬스터 경보가 뜬다고?"

위이이이이잉-.

허나, 하필이면 가게가 있는 동네에 도착하기 무섭게 '몬스터 경보'가 발령된 것이다.

이른바 불행의 연쇄가 일어난 셈이었다.

"며칠동안 재수가 없으려니까, 진짜 온갖 불행이 다 겹쳐서 일어나네."

더군다나 이번 불행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위잉, 위이이이잉-.

하필이면 경보시간도 애매하게 꼬여버린 탓에, 대피하기에 시간이 촉박해진 것이다.

이 동네에 있을 대피소가 정확히 어디에 위치해있는지도 모르기에, 빠르게 대피소를 찾아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산넘어 산이라더니, 지금 내 꼴이 그 꼴과 다름없었다.

"대피하기에는 이미 글러먹은거 같은데. 차라리 골목으로 들어가는 편이 더 안전한가?"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지금의 나에게 '레델 화이트의 은신처'가 있다는 점이었을까.

최악의 상황에도 죽지는 않겠다는 계산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사람이 없는 골목에서 은신처로 향하는 게이트를 연다면, 적어도 나 하나정도는 안전하게 몸을 숨길 수 있을 터.

그곳에서 경보가 끝날때까지 기다리면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선택의 여지가 없겠어."

CCTV나 타인의 시선에만 걸리지 않는다면, 스스로의 안전을 담보하는데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타닥, 타다닥-.

생존을 위한 결정을 내린 나는 가능한 빠른 속도로 인적이 드문 길목을 내달렸다.

"허억, 허어억······!"

이미 경보가 발령된지 시간이 한참 지나버린 상황.

몬스터의 유형에 따라서는 몬스터가 이미 도착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이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가능한 발걸음을 서둘렀으며, 머지않아 쓰레기의 악취가 풍기는 골목 사이로 접어들었다.

이렇게 비좁은 공간이라면 커다란 몬스터는 쉽게 들어오지 못할거라는 판단이었다.

'여기라면 게이트를 설치하더라도 발견하기 쉽지 않겠지.'

골목중에서도 상당히 어둡고 깊숙한 축에 속하는 장소다.

이곳이라면 은신처로 향하는 게이트를 열어도 발견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이곳에 들어온 나조차도, 다시 여길 찾아내라고 하면 발견할 자신이 없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다시 말해서 수많은 장점이 있는 장소인 셈이었다.

'그러니 여기에 은신처로 향하는 게이트를 설치하고서 경보가 끝날때까지 숨는다.'

그렇게 나는 머리위에 수많은 전선과 간판이 뒤엉켜있는 골목에 깊숙히 파고들었고—.

머지않아 전선이 뻗어있는 벽에 달라붙어있는 '그것'과 마주했다.

- 날름. 날름.

전선과 간판들이 늘어서있는 벽면.

그곳에는 벽돌무늬를 피부에 띄운 채로, 울퉁불퉁한 굴곡을 드러내고 있는 무언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

파스스스-.

벽면에 있는 투명한 굴곡이 몸을 움직이자, 이내 그것은 온전한 형체를 되찾았다.

시시각각 색을 바꿔나가는 매끄러운 유선형의 피부.

섬뜩한 눈동자와 함께 혀를 날름거리는 기이한 분위기의 파충류.

비좁은 골목위에 숨어있던 것은 B급의 몬스터, '카멜레온 킹'이었던 것이다.

"······카멜레온 킹."

하필이면 카멜레온 킹이 이동중이던 경로에 들어온 상황.

사냥감을 쫓는 카멜레온 킹의 눈이 나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녀석을 마주하기 무섭게 다시 밖으로 돌아나갈까 고민했으나, 안타깝게도 B급의 몬스터는 그런 나보다도 행동이 빠른 편이었다.

낼름. 낼름.

기다란 혓바닥을 집어넣었다가 꺼내며 나를 노려보던 녀석이, 나를 향해서 혓바닥을 쭉 뻗어온 것이다.

찰싹!

카멜레온 킹의 혓바닥이 나를 향해 쇄도한 직후.

- [긴급보호]가 활성화됩니다.

- 오늘은 더 이상 [긴급보호]를 활성화할 수 없습니다.

퉁-.

내 눈앞에 반투명한 방어막이 펼쳐지며 녀석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하루에 한 번 사용이 가능한 스킬, [긴급방어].

그것이 자동으로 발동되면서, 녀석의 공격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준 것이다.

"······."

눈앞의 카멜레온 킹이 나를 먹잇감으로 인식하고 공격해왔다는 의미였다.

하필이면 몬스터가 있던 곳에 내 발로 걸어들어와버린 셈이었다.

찰싹-. 찰싹-.

나를 노리는 카멜레온 킹의 혓바닥이 빠르게 휘둘러지며 방어막을 두드렸다.

나는 이 재수없는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하지? <스크롤 북(A)>을 꺼내서 요격을 해야하나? 아니면······.'

카멜레온 킹을 마주한 내 머릿속에 몇가지 선택지가 스쳐지나갔다.

소란이 벌어질 가능성을 감수하고서 녀석을 요격할 것인가.

그게 아니면 다시금 이곳에서 몸을 피해서, 이 장소를 빠르게 빠져나갈 것인가.

나는 두가지 선택지를 눈앞에 놓고서 고민에 빠졌고, 머지않아 이를 악물고서 <스크롤 북(A)>을 찾아 손을 뻗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어.'

결국 나는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카멜레온 킹을 직접 요격한다.

그리고 녀석을 쓰러뜨리고서 빠르게 자리를 뜬다.

그런 결론을 내리고서 내가 몸을 움직이려던 순간이었다.

"—[포이즌 익스플로전]."

갑작스럽게 내 귓가에 울려퍼지는 누군가의 목소리.

그와 동시에 내 눈앞에 있던 카멜레온 킹의 몸이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꿀렁. 꿀렁.

풍선에 공기를 불어넣듯 부풀어오르던 녀석은, 빠른 속도로 크기를 키워나가더니 이내 겉잡을 수 없는 수준까지 부풀었다.

- 날름?

의문에 젖은 카멜레온 킹의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에게 왜 이런 변화가 생겼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이었다.

그 직후, 바람빠지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몸이 터져나갔다.

퍼어엉-!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카멜레온 킹의 체액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것들 중 일부는 내 방어막에 달라붙었으며, 나머지는 벽과 바닥에 튀어 그 주변을 부식시켜나가는 모습이었다.

치이이이이익-.

수많은 증기가 사방에서 피어오르는 가운데, 건물의 옥상으로부터 누군가 지상을 향해 뛰어내렸다.

바닥에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더니, 머지않아 사람 하나가 바닥에 가뿐히 내려앉았다.

"여기 헌터가 있는데도 긴급출동 명령이 나한테 내려왔다? 이거 좀 수상한데."

날렵한 몸놀림으로 지면에 착지한 남자의 시선이 나를 보았다.

양손에 낀 검은 반장갑.

스포츠 컷으로 잘라낸 짧은 머리카락.

그리고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있는 은색 바늘까지.

지금 내 앞에 나타난 남자는, 헌터 유튜버라면 그 정체를 모를 수 없는 인물이었다.

"카멜레온 킹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던걸 봐선 최소 B급일거고, 어이쿠··· 헌터관리 시스템에도 등록이 안되어있네?"

나에게 단말기를 들이댄 채로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의 정체.

그는 대한민국의 S급 헌터들 중 하나이자, 정부직속 헌터길드 HETX 소속의 헌터였다.

독왕, 구성현.

지금 시점에서 가장 만나서는 안될 헌터가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S급 헌터, 구성현?"

"저 알고계시죠? 그럼 이야기가 좀 편할 것 같은데."

스윽-.

자신의 손에 든 단말기를 터치하던 구성현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것도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하이에나의 시선을 보내면서 말이다.

나는 그런 구성현의 시선에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하루종일 재수가 없다 싶었더니, 이제는 하다하다 긴급출동으로 독왕이 파견된 상황이었다.

어지간하면 결코 마주할 일이 없을거라고 생각했던 독왕과 최악의 방식으로 대면하게 된 것이다.

"당신 미등록 헌터죠? 저랑 같이 협회에 좀 갑시다."

"······."

"뭐, 과징금이 좀 크긴한데 그건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몬스터 경보에 대응하기 위해 긴급출동한 구성현에게 헌터라는 사실을 들키고 말았다.

아무리 구성현이라고 해도 정확한 정보까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지금 나를 어떻게든 협회에 등록시키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HETX 소속의 S급 헌터가 어지간한 이야기로는 결코 넘어가지 않겠다는 태도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나를 바라보던 구성현은 손가락 끝으로 내 방어막을 두드리며 이야기했다.

"어차피 최소 B급 헌터인거 같은데, 상위등급 헌터면 돈 잘버는거 아시죠? 과징금 그까짓거 노력하면 금방 갚으시겠지."

독같은 비열한 공격수단을 사용하는 헌터 아니랄까봐, 구성현은 나를 보면서 제법 강압적인 태도로 나오는 모습이었다.

눈앞의 S급 헌터가 속해있는 HETX는 일반적인 헌터 길드와는 다르게 특수한 곳이었다.

상황에 따라서는 헌터 범죄를 진압하기 위해 나서며, 사회의 치안 유지를 맡는 역할도 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구성현 자신이 S급 헌터인만큼, 지금같은 상황에서는 무조건 나를 억누를 수 있다는 자신도 있을 터였다.

'하필이면 독왕 구성현한테 걸릴줄이야.'

퉁-. 퉁-.

자신감을 가진 구성현은 계속해서 내 방어막을 두드려왔다.

"이거 끝까지 안치울겁니까? 그러면 이쪽도 무력행사를 하는 수밖에 없는데."

구성현의 말대로 어지간한 헌터라면 과징금은 빠르게 매꿀 수 있는 수준이기는 했다.

나 역시도 내가 순수한 B급 헌터였다면, 그냥 협회에 등록하고서 당당하게 활동하고 말았을 터였다.

허나, 문제가 되는 것은 지금 내 처지가 무척이나 특수하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일반적인 헌터 등록절차로는 해결이 안될만큼 말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협회에 끌려가서 B급으로 판정받는건 최악의 상황이다.'

나는 일반적인 B급 헌터가 아니었으며, 그렇게 판정이 나더라도 곤란한 처지였다.

더군다나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 협회에 보고되는건 커다란 문제를 야기할 터였다.

나와 연결되어있는 수많은 S급 헌터들.

그들과 여태까지 쌓아왔던 뒤틀린 신뢰가 한번에 무너질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협회에서 공식적으로 등록절차를 거치는건 피해야한다. 대체 여기서 어떤 방법을 사용해야······.'

어떻게든 이 상황을 문제없이 넘겨야만 했다.

내가 깊은 고민을 하는 와중에도, 구성현은 계속해서 나를 압박해오는 모습이었다.

"아니, 우리도 무작정 나서서 이러고 싶지는 않은데, 당신같은 사람들이 등록도 안된 상태에서 사고치면 답이 없어서 이러는거 알죠?"

"······."

"혹시라도 위험한 생각은 하지않는게 좋을겁니다. 지금 당신 앞에 있는건 한국에도 몇명 없는 S급 헌터라는 점 알아두시고."

치이이이익-.

구성현의 손아귀에서 녹빛을 띈 기운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독왕 구성현이 본격적으로 독을 운용할 준비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더군다나 방금 전까지 나를 지켜주던 방어막 역시 옅어져가고 있는 상황.

이러한 상황속에서 나는 어떻게든 결론을 내려야만 했다.

까득-.

난감한 상황속에서 내 머리가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생각해내야만 한다. 가장 깔끔하고 현명하게 이 상황을 정리할 방법.'

이윽고, 구성현을 바라보던 내 머릿속에 한가지 아이디어가 피어올랐다.

지금까지 마주했던 헌터들과의 경험.

그러한 기억속에서 내 비상한 머리가 한가지 가능성을 찾아낸 것이다.

'역시 그 방법밖에 없나.'

피식-.

아인슈타인도 울고갈 해결책을 떠올린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구성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두근대는 심장을 억누른 채, 눈앞의 구성현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거, 참 재미있는 이야기네요. 구성현씨."

나는 구성현에게 말을 거는 것과 동시에, 내 손가락들을 분주하게 움직였다.

상당히 오랫동안 커뮤니티를 이용해온 덕분에, 나는 이제 주머니에 손을 넣고서도 타자를 치는 기예가 가능했던 것이다.

- 성좌 [인피니튜드]가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인피니튜드]가 당신이 마주할 운명을 엿보았습니다.

- 성좌 [인피니튜드]가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인피니튜드]는 당신이 너무나도 위험한 존재를 건드렸음에 안타까워합니다.

짧은 침묵.

당황한 구성현의 눈이 나를 보았다.

나는 미소가 걸려있는 입을 열어, 그를 향해 짧고 굵은 이야기를 전했다.

"위험한 생각. 한 번 들어볼래요?"

사나이 신유호.

나는 직진할땐 할줄 아는 사람이었다.

53화

HETX의 상징적인 헌터이자, 핵심전력이기도 한 독왕(毒王)— 구성현.

그는 HETX에 소속되어있는 헌터들 중에서도 가장 제압에 능숙한 인물이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독중에는 특수한 역할을 하는 것들이 존재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그리고 그런 구성현은 현재 몬스터가 탈출한 도시 한복판에서, 미등록 헌터와 혼자서 맞닥뜨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혹시라도 위험한 생각은 하지않는게 좋을겁니다. 지금 당신 앞에 있는건 한국에도 몇명 없는 S급 헌터라서요."

헌터협회의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어있지 않은 정체불명의 헌터.

상대가 어떤 유형의 헌터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구성현은 크게 걱정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그가 가지고 있는 독들은 마법적인 수단으로도 완전히 차단하기가 쉽지 않은 편이었다.

제아무리 상위랭크 헌터라고 하더라도, 제대로 된 대비없이 마비독에 맞으면 금세 전투불능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헌터는, 고작해야 B급 정도로 추정되는 실력을 가지고 있는 상대.

어떤 수단을 사용하더라도 구성현의 독에 저항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길어봐야 1분안에 온몸의 근육이 마비되어서 쓰러지겠지.'

그런 이유로 구성현은 눈앞의 상대가 독에 중독되어 쓰러지기만을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완전히 제압한 상대를 길드에 데려가서, 강제로 헌터등록절차를 진행할 계획이었다.

물론 자진등록을 거부한 헌터에게는 막대한 과징금을 부과할 생각이었고 말이다.

그렇게 구성현이 눈앞의 상대를 마주보며, 활성화된 독의 강도를 더 끌어올리려던 찰나.

피식-.

그가 마주하고 있던 헌터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이 상황에서 웃는다고? 그것도 S급 헌터인 나를 앞에 두고서? 겁을 집어먹고서 실성하기라도 한건가?'

옅은 미소를 지은 채로 구성현을 바라보는 정체불명의 헌터.

구성현은 눈앞에 있는 헌터의 그런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미등록 헌터가 현재 마주하고 있는 것은, 대한민국 헌터계의 정점에 위치한 S급 헌터들 중 하나였다.

국가차원에서 전략병기로 취급하는 전력이라는 이야기였다.

S급 헌터인 자신을 앞에 두고서, 정신이 완전히 나가버린 것인가.

구성현이 그런 생각을 하며 미등록 헌터를 노려보고 있자, 머지않아 그를 바라보던 미등록 헌터의 입이 열렸다.

"그거, 참 재미있는 이야기네요. 구성현씨."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

그것은 구성현을 완전히 깔보는 듯한 이야기였다.

겁을 상실한게 아니고서야 S급 헌터에게 보일 수 없는 태도였던 것이다.

그에 탄식을 터뜨린 구성현이 눈앞의 헌터를 향해 무어라 말하려던 순간.

띠링-.

낯선 메세지가 구성현의 눈앞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 성좌 [인피니튜드]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인피니튜드]가 당신이 마주할 운명을 엿보았습니다.

- 성좌 [인피니튜드]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인피니튜드]는 당신이 너무나도 위험한 존재를 건드렸음에 안타까워합니다.

상태창을 빌려 헌터들에게 이야기를 전하는 초월적인 존재.

—성좌(星坐).

그런 존재들 중 하나가 갑작스럽게 구성현에게 말을 걸어온 것이다.

'성좌··· 인피니튜드? 그런 존재가 내 운명을 엿보았다고?'

눈앞을 가득채운 상태창의 메세지에 구성현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하늘에 있을 성좌가 구성현을 향해 메세지를 보내왔다.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당혹스러운데, 그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메세지의 내용이었다.

'그것도 내가, 위험한 상대를 건드려······?'

성좌가 구성현의 운명을 엿보았다.

그리고 그런 운명속에서 구성현에게 찾아올 파멸을 마주했다.

그것이 성좌의 이야기였다.

구성현이 납득할 수 없는 메세지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그를 마주하던 헌터의 입에서 계속해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위험한 생각. 한 번 들어볼래요?"

미등록 헌터는 방금 전에 구성현이 했던 이야기를 고스란히 그에게 돌려주는 모습이었다.

위험한 생각.

구성현이 그를 자제시키기 위해 꺼냈던 단어를 이용해, 작정하고 구성현을 도발하는 듯한 말을 꺼내온 것이다.

당황스러운 구성현의 머리를 두드리듯이, 다시 한 번 성좌의 메세지가 떠올랐다.

- 성좌 [인피니튜드]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인피니튜드]는 도시의 가장 어두운 일면을 마주한 당신에게 연민을 느낍니다.

- 성좌 [인피니튜드]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인피니튜드]는 당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어떻게든 눈앞의 존재를 피해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성좌 '인피니튜드'는 계속해서 구성현을 안쓰러워하는 듯한 메세지를 보내왔다.

구성현이 마주하고 있는 인물이, '도시의 가장 어두운 일면'에 가깝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대체······."

메세지를 마주한 구성현의 입에서 의문에 젖은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엮여서는 안되는 존재.

어두운 도시의 일면.

그리고 구성현에게 파멸을 안겨줄 재액과도 같은 존재.

그런 존재를 암시하는 단어가 계속해서 성좌에게서 흘러나왔다.

'내 앞에 있는 존재가 그만큼 위험한 사람이라고? 그게 말이 되는 이야기일리가······.'

구성현으로서는 무척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눈앞에 있는 헌터의 표정이 뒤바뀌기는 했지만, 미등록 헌터는 비교적 평범해보이는 기척을 흘리고 있던 까닭이었다.

허나, 하늘에서 그를 지켜보는 성좌라는 존재가 그에게 거짓말을 할리는 없었다.

구성현도 [커뮤니티]에 접속가능한 헌터이기에 성좌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은 총애하는 헌터에게 일방적인 후원을 베푸는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구성현에게 포인트를 낭비해가면서까지 거짓말을 해야할 이유는 없을 터였다.

굳은 얼굴의 구성현을 앞에 두고서 헌터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예를 들어··· 이 도시를 통째로 지워버려서 오늘의 만남을 없던 일로 만든다던가······."

찰칵-.

구성현을 마주하고 있던 미등록 헌터의 손이, 푸른 보석이 박혀있는 반지의 금속프레임을 뒤틀었다.

그와 동시에 반지에서부터 막대한 힘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구성현은 그 모습을 보기 무섭게, 해당 반지가 어마어마한 힘을 억누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초월적인 존재.

지상을 굽어보는 거대한 무언가와 연결되어있는 듯한 감각.

상대의 존재감이 급격하게 커져가기 시작한 것이다.

더군다나 상대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어쩌면, 이 자리에서 한명이 사라지게 만드는 것도··· 굉장히 깔끔한 방법일지도 모르겠네요."

반지를 어루만지고 있던 미등록 헌터의 눈이 구성현과 시선을 마주했다.

스윽-.

의도를 알 수 없는 투명한 눈동자.

그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한 직후.

쿠웅!

구성현은 심장이 멎어버리는 듯한 기분이 들고 말았다.

"아, 아······!"

뇌를 헤집는 듯한 원초적인 감각.

그와 동시에 구성현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공포.

압도적인 공포가 빠르게 구성현의 머릿속에서 확산했다.

저항할 수 없는 공포.

그 속에서 이해할 수 없는 미지가 구성현을 죽여나갔다.

"······."

그것은 죽음이었다.

죽음이 구성현이라는 인간을 낱낱히 찢어발기고 지나간 것이다.

한순간 그는 생명의 저변에 가라앉았으며, 어느 순간에는 다시 뒤틀린 경계선을 걷고 있었다.

인간을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는 듯한 감각.

쿵. 쿠웅-.

심장이 멎고, 숨이 멈추고, 굳어버린 맥동속에서 혈류도 정지했다.

불가해의 시간속에서 구성현은 자신이 완전한 죽음에 직면했음을 깨달았다.

"허, 허억··· 허어억······!"

깊게 가라앉았던 의식.

그것이 돌아오면서 막혀있던 숨이 터져나온 것은, 구성현의 몸이 식은 땀으로 완전히 젖어버린 이후였다.

후우, 후우우-.

두 번 다시 되찾을 수 없을 것 같았던 호흡이 그에게 되돌아왔다.

한 번 죽었던 생명이 다시 한 번 선택의 기회를 얻은 것이다.

"허억··· 이, 이건··· 나는 대체······!"

"운이 좋네요. 구성현씨."

빛을 잃었던 시야가 다시금 색채를 되찾으며, 구성현 역시 의식이 되돌아온 채로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구성현의 귓가에 들려오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

여전히 그를 내려다보는 태도로 이야기하는 상대였지만, 그를 마주하는 구성현의 인식은 아까와는 완전히 반대로 뒤집혀있었다.

압도적인 실력의 차이.

인간의 범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의 힘을 가진 존재가 이곳에 있었다.

그러한 존재를, 과연 헌터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가.

무너져내린 표정으로 눈앞의 헌터를 바라보는 구성현을 향해, 처음부터 끝까지 여유로운 태도를 고수하고 있던 헌터가 이야기했다.

"구성현씨. 성좌에게 어지간히도 사랑받고 있는 모양이네요."

"······."

"아무래도 성좌 하나가 당신을 살리고 싶어하는 것 같아요."

후욱-.

자세가 무너진 채 깊은 호흡을 내뱉은 구성현을 향해서, 자신을 지켜보던 낯선 헌터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터벅. 터벅.

그는 아무런 방해조차 받지 않았다는 듯이, 구성현을 향해 여유롭게 걸어오는 모습이었다.

일찍이 구성현이 그를 향해 강력한 마비독을 사용했음에도 말이다.

'마비독이··· 효과가 듣지 않았다고······!'

털썩-.

절망에 젖은 구성현이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그를 보았다.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제아무리 신창 주선호가 상대라고 하더라도, 구성현의 마비독을 맞으면 운신에 불편함 정도는 느낄 터였다.

허나 눈앞의 남자는 조금도 불편함이 없다는 듯이, 구성현을 향해 평범하게 다가올 뿐이었다.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구성현의 어깨에 낯선 손이 올라왔다.

툭, 툭.

구성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그는, 구성현의 귓가에 들리도록 차가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구성현씨. 오늘 만남은 우리 두사람만의 비밀로 하죠."

"그, 그건······."

"그 대신에 당신도, 이 도시도 오늘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는겁니다."

불길한 제안을 남기는 악마의 목소리처럼 들려오는 소리.

찰칵-.

그와 함께 남자의 손이 다시금 반지를 원래대로 되돌렸다.

초월적인 존재의 일부가 남아있는 듯한 압박감이 사라지며, 눈앞에 있던 남자의 존재감 역시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그것을 대신해 나타난 것은, 구성현의 시야를 가리는 상태창이었다.

- 성좌 [인피니튜드]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인피니튜드]는 당신이 스스로의 눈을 가리고, 귀를 틀어막을 것을 제안합니다.

- 성좌 [인피니튜드]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인피니튜드]는 눈앞의 존재에 대해 떠올리거나 언급하는 것이 당신을 파멸로 몰고갈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엮이는 것만으로도 그 인생을 파탄으로 몰고가는 위험한 존재.

그에 대해 이해한 구성현은, 힘이 풀린 눈으로 멍하니 고개를 움직여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끄덕-.

고개를 숙인 구성현의 입에서 단내가 배어나왔다.

그런 구성현을 앞에 두고서, 남자는 구성현을 향해 의미심장한 작별인사를 남겼다.

"오늘 게이트 하나가 '우연히' 망가질 뻔 했는데, 무사히 해결되어서 정말 다행이네요. 그렇죠?"

"게이트가··· 우연히, 망가진다고······?"

"그럼, 두 번 다시 만나는 일이 없길 바라죠. 구성현씨."

구성현은 남자의 이야기에 의문을 표했지만, 그는 구성현의 물음에 더 이상 답변해주지 않았다.

그를 대신에 이 비좁은 골목을 떠나갈 뿐이었다.

치이이이익-.

몬스터의 사체와 썩은 쓰레기 냄새만이 퍼져나가는 골목길.

그곳에서 홀로남은 구성현의 시선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

오늘 하루.

그에게는 무척이나 특별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부터 없었던 일이 되어야할 터였다.

결코 입에 담을 수 없는 도시의 어둠.

그것이 더 이상 비밀이 아니게 된 순간, 그는 터무니없는 존재와 직접 대면해야 할테니까 말이다.

* * * * * *

구성현과의 만남이 있었던 저녁.

나는 은신처에서 홀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오늘 나는 무척이나 특별한 상황에 직면했고, 위험한 상황에서 기지를 발휘해서 빠져나왔다.

내가 처했던 상황을 생각해봤을때,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은 것임은 틀림없었다.

허나 나는 무사히 구성현과의 일을 해결했음에도, 여전히 어수선한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 이유는 당연히 하나뿐이었다.

"······내가 이명을 얻었다고?"

지금 내 눈앞에 출력되어있는 화면.

그곳에는 헌터의 '이명'과 관련된 내용이 적혀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상태창에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온 메세지와 함께 말이다.

나는 눈앞에 떠오른 메세지의 내용을 확인해보았다.

- 공포를 이용해 타인을 지배하는 당신의 위업에 시스템이 경의를 표합니다!

- 새로운 이명 [폭군]을 획득했습니다.

- 플레이어가 사용하는 모든 위압효과가 30% 증폭됩니다.

- 플레이어에게 적용되는 모든 위압효과가 효력을 잃습니다.

새로운 이명, [폭군].

내 상태창에 기록될 특별한 이명이 주어진 것이다.

최근 들어서 수많은 이들에게 겁을 주고 다닌 덕분이었을까.

신창이나 검성, 뇌제와 같은 이명이 나에게 생긴 모양이었다.

폭군(暴君)— 신유호.

그것이 이제부터 나를 지칭하는 헌터로서의 이름이었다.

"아니, 그런데 이거 추가 효과도 있는거였어?"

더군다나 그런 이명에는 특수한 효과마저 붙어있는 상황이었다.

내가 사용하는 모든 위압효과에 30%의 증폭효과 발생.

다시 말해서 내가 가진 스킬 [강력경고]의 위력이 지금보다 30% 더 강해진다는 의미였다.

지금도 S급 헌터들을 두려움에 빠뜨리고 다니는 마당에, 여기서 30%가 증폭된다면 얼마나 더 강력해질 것인가.

상상만 해도 정신이 아득해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명을 가지고 있는 헌터들은 이런 효과를 받고 있었구나."

거기에 내가 받는 위압효과를 무효화시키는 기능까지 달려있었다.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독 면역과 저주 면역에, 이번에 새롭게 위압효과 면역까지 추가된 것이다.

사실상 대부분의 디버프 효과를 적용받지 않는 셈이었다.

그 수치를 보고있자니 기존에 이명을 가지고 있던 헌터들이 얼마만큼의 추가효과를 받는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내가 이정도인데 대체 '신창'정도 되면 어떤 효과가 달려있는거냐."

신창 주선호.

전설적인 이명에 대한 궁금증을 억누른 채, 나는 눈앞에 보이던 메세지를 닫아버렸다.

오랜만에 자신의 상태창이나 한 번 확인해볼 생각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바라보면서 익숙한 단어를 입에 담았다.

"—[상태창]."

띠링-.

알림음과 함께 내 앞에 상태창이 출력되었다.

< 플레이어 정보 >

- 이름 : 신유호

- 이명 : 폭군[Tyrant]

- 헌터 등급 : B

- 근력 : D

- 체력 : D

- 민첩 : E

- 지능 : E+

- 마력 : D

- 회복 : E

< 고유 특성 >

- [커스텀 네트워크(B)]

나는 눈앞에 나타난 상태창의 내용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상태창을 열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새롭게 획득한 이명이었다.

폭군[Tyrant].

그 아래에는 고유특성의 성장과 함께 B등급에 도달한 헌터 등급, 그리고 내 보잘것 없는 능력치들이 나와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능력치들의 수준에 나는 헛웃음을 머금었다.

"하··· 이게 B급 헌터가 가지고 있을 능력치냐?"

내가 가지고 있는 고유특성 [커스텀 네트워크(B)]는 이미 B급에 도달했지만, 그럼에도 내 신체 능력치는 C급보다 못한 수준이었다.

특성의 성장을 능력치의 성장이 따라잡지 못한 것이다.

물론 그 이유야 어느 정도 짐작이 가기는 했다.

내가 가진 특성의 기능부터가 커뮤니티 관리에 특화되어있으니, 성좌를 커뮤니티에 가입시켰다고 한들 크게 변하지는 않은 것이다.

그나마도 최근에 있었던 성좌들과의 거래가 없었다면 더욱 초라했을 능력치였다.

"······저질 체력부터 일단 어떻게든 해결해야 될 것 같은데."

S급 헌터들에게 그들과 똑같은 S급으로 오해받고 다니는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움직임조차 제대로 간파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언제쯤 되어야 그들과 어깨를 견줄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할 것인가.

점점 더욱 다양한 컨텐츠를 가진 커뮤니티 관리자로 변모해가는 자신을 보고 있으면, S급이 되더라도 아이템 효과에 의존하고 있는건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내가 그렇게 상태창을 보며 짧은 신세한탄을 하고 있자니, 갑작스럽게 눈앞에 열린 게이트 너머에서 기척이 전해져왔다.

총. 총. 총. 총.

통통 튀는 발걸음 소리를 내며 게이트 앞에 다가온건 백구였다.

녀석은 게이트 너머에서 나를 바라보면서 눈빛을 발사했다.

- 왈! 왈왈왈?

- [자동번역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 "오늘은 뭐 없어요? 하루나 기다렸는데."

할짝-.

마치 물건이라도 맡겨놓은 것처럼 혀를 날름거리는 백구를 보며, 나는 조용히 눈앞에 띄워져있던 상태창을 닫았다.

"······백구야. 너 폭군이 뭔지 아냐?"

햇빛이 들어오는 동굴의 천장.

오늘따라 서늘한 바람속에서 약간의 무더위가 느껴졌다.

아무래도 조만간 은신처에 복날이 찾아올 모양이었다.

S급 헌터 커뮤니티의 흑막이 되었다 54화

54화

오래 전에 지구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구조물, '게이트'는 저마다의 판정 등급을 가지고 있다.

게이트의 판정 등급은 시스템에 의해서 결정되며, 더 높은 판정 등급을 받을수록 더욱 위험한 경향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런 게이트들 중에서도 C급에 해당하는 게이트에 들어온 상황이었다.

C급 게이트, 고블린의 숲.

어떤 일행도 데려오지 않은 채, 나 혼자서 C급 게이트에 들어온 것이다.

다만, 내가 게이트에 혼자 몰래 들어왔다고 해서, 전투까지 혼자 치를 생각으로 입장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아무도 없는 게이트에 찾아온 것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으니까 말이다.

"—[샤프니스]."

고블린들로 가득 들어차있는 C급 게이트의 안쪽.

현재 내 주변에는 나를 노리고 다가온 수많은 고블린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작은 몸체를 가진 채로 점점 거리를 좁혀오고 있는 고블린들.

그럼에도 녀석들 중 나에게 접근하는데 성공한 녀석은 누구 하나 존재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 이유는 당연하게도 녀석들과 나 사이에 열려있는 자그마한 게이트 때문이었다.

- 그르르륵······!

- 왈! 왈왈왈왈!

고블린 무리와 대치하고 있는 새하얀 털의 신수.

내가 개방한 게이트, '버려진 영물들의 낙원'에서 신수 '백구'가 빠져나온 것이다.

녀석은 사람만한 덩치를 내세운 채로 고블린 무리와 대치하고 있는 중이었다.

늠름한 풍채를 자랑하며 서있는 백구의 아래쪽에는, 몸의 절반이 사라져버린 고블린들이 쓰러져있었다.

나를 향해 다가오다가 백구의 이빨에 갈갈이 찢겨나간 녀석들이었다.

"흐음··· 백구가 가지고 있는 신수로서의 능력은 총 세가지인 셈인가."

나는 그런 백구의 전투장면을 바라보며, 스마트폰의 메모앱에 손으로 메모를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게이트 너머에서 빠져나온 신수에 대한 스카우팅 리포트였다.

내가 판단하기에, 신수로서 백구가 가지고 있는 능력은 도합 세가지 정도였다.

첫째. 모든 신수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능력.

게이트의 경계를 뒤집어 필드효과를 밖으로 확장시키는 능력이었다.

"아무래도 나오는 숫자에 따라서 소모값이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신수가 게이트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다고 보는게 맞겠어."

필드효과를 뒤집는 것으로 기존에 게이트에 적용되어있던 효과를 상쇄하고, 일시적으로 이중게이트를 개방하는 셈이었다.

그렇게 형성된 이중게이트에서는 신성력을 머금은 신수들이 자유롭게 운신할 수 있었다.

물론 신수로서의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기에, 막대한 소모는 피할 수 없는 모양이지만 말이다.

게이트 밖에서 전투를 치른 이후에는 반드시 신성력을 보충해줘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는 백구처럼 자가재생에 특화되어있는 신수들도 따로 있는 모양이고."

둘째로, 백구 자신이 입은 상처를 빠른 속도로 치유할 수 있었다.

신성력을 원동력으로 삼아 움직이는 신수인 까닭이었을까.

백구를 포함한 신수들 중 일부는 커다란 상처를 입어도 빠른 속도로 재생할 수 있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백구의 상처가 아물어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 왈! 왈! 왈왈왈!

- 그르르르르!

치이이이익-.

전신에 증기를 내뿜으며 재생해나가는 백구의 모습.

신성력을 소모해서 자신의 상처를 빠른 속도로 치유해나가는 것이다.

불사기사라고 불리는 최두식 못지않은 재생력을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더군다나 백구의 능력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저 경계를 뒤바꾸는 능력까지··· 신수들의 전투능력 자체가 아무래도 상당한 편인 것 같은데."

내가 평가를 끝마친 백구를 향해 시선을 옮긴 직후.

내 앞에 서있던 백구가 자신의 입을 쩌억 벌렸다.

크게 벌어진 입.

허공에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는 것과 동시에, 백구의 주변에 있던 고블린들의 몸이 짓이겨졌다.

콰직! 콰드득-!

입에 닿지 않은 것조차 짓이겨버리는 마법같은 풍경.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능력이, 백구의 치악력으로 주변 반경의 모든 것을 씹어삼키게 만든 것이다.

말 그대로 보이지 않는 이빨이 몬스터들을 파고든 셈이었다.

- 그륵······!

- 그륵, 그르륵······!

백구의 이빨에 걸린 몬스터들은 처참한 몰골이 되어 바닥을 나뒹굴었다.

지성을 가진 신수는 눈앞의 몬스터를 작정하고 짓뭉개기 시작했다.

콰직! 콰아악!

수많은 인챈트를 받은 백구의 이빨이 공간을 일그러뜨리며 사방을 물어뜯었다.

콰드득! 콰드드드득-!

섬뜩한 소리와 함께 푸른 피가 바닥에 튀는 모습이었다.

무수한 고블린들이 백구에게 달려들었지만, 백구 하나를 제압하지 못한 채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그렇게 백구가 주변을 감싼 고블린들을 정리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S급 게이트에 소속되어있는 신수.

그 강함의 격차를 C급 게이트의 고블린들에게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순진해보이는 백구의 모습과는 다르게 상당히 폭력적인 결과물이었다.

"안그래도 등급차이가 심하게 나는데, 강화마법까지 걸어주니 전투가 금방 끝나버렸나······."

나는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백구가 만들어낸 처참한 풍경을 눈에 담았다.

수많은 몬스터들을 순식간에 찢어발긴 직후.

주변의 몬스터들을 쓰러뜨린 백구는, 순진해보이는 얼굴로 나에게 다가왔다.

헥헥-.

녀석은 나를 바라본 채 혀를 늘어뜨리며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 왈왈! 왈왈왈!

- [자동번역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 "열심히 싸웠는데 신성력이 부족해서 머리가 좀 어지러워요!"

나를 바라보던 백구가 전해온 내용.

그것은 자신이 몬스터들을 정리하느라 상당한 신성력을 소모했으니, 그것을 지금 보충해달라는 이야기였다.

백구를 포함한 모든 신수들이 전투에 있어서 신성력을 소모하는 까닭이었다.

"백구야. 너가 좋아하는 공 여깄다."

나는 그런 백구를 바라보다가, 이내 주머니에서 <신성한 오브(B)>를 꺼내 바닥에 던져두었다.

툭, 데구르르-.

동그란 구슬이 바닥을 구르며 멀찍이 굴러가는 모습이었다.

녀석은 반짝이는 눈으로 오브를 향해 달려가더니, 그것을 입에 문 채 꼬리를 흔드는 모습이었다.

살랑. 살랑.

꼬리를 격하게 흔든 백구가 <신성한 오브(B)>를 물고서 나에게 되돌아왔다.

그 모습이 영락없이 공을 물고 돌아온 개와 똑같아보일 정도였다.

"오브··· 신수들이 좋아하는 간식··· 이렇게 메모해두면 되겠어."

나는 특식을 발견해 기뻐하는 백구를 보며, 신수들의 기호에 대해서 스마트폰에 메모했다.

지난 며칠동안 나는 다양한 신성력 아이템들을 구매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유용했던 아이템은 단언컨데 <신성한 오브(B)>였다.

형태가 구체여서 그런 것일까.

그게 아니면 구체에 담긴 신성력의 밀도가 높아서 그런것일지도 모른다.

게이트 너머에 있는 대부분의 신수가 오브만큼은 호불호없이 챙겨가고는 했던 것이다.

- 왈! 왈왈왈!

-[자동번역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 "허억··· 이거 왜 이렇게 맛있지."

나는 오브를 만족스럽게 핥아먹는 백구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오브를 마주한 신수들의 반응은 대개 백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죽하면 낙원을 지키던 순백의 용조차도 오브에 대해서는 호감을 표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신성력의 용량도 그 순도도 하나같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신수들의 신성력을 회복하는데 있어서 커다란 장점을 가지는 물건인 셈이었다.

"오브 하나정도면 전투 후에 보충하는 수준으로는 넉넉한 것 같고··· 백구 하나로도 C급 게이트는 정리가 가능할 정도.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만 적어둘까."

나는 해당 게이트 안쪽에서 신수들이 벌인 전투를 통해, S급 게이트— '버려진 영물들의 낙원'에 대한 대략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었다.

<블렌도어의 약속(S+)>을 통해 연결된 게이트는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C급 게이트는 우스울 수준이었고, B급도 아마 비슷한 양상을 보일거라고 여겨졌다.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소환계 헌터를 상회하는 역할을 충분히 이행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스크롤 북(A)>을 통한 인챈트 마법과도 상당한 시너지가 나는만큼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한동안은 같이 사냥이나 다니자, 백구야."

스카우팅 리포트의 작성을 마친 나는 백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왈왈! 왈왈왈!

내 손길을 받아들인 백구는 열심히 꼬리를 흔들며 짖었다.

당분간은 백구와 함께 게이트 내부에서 토벌경험을 쌓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앞으로도 열심히 사냥하자고. 이게 다 서로 좋자고 하는거 아니겠냐."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백구를 마냥 대가없이 부려먹는건 아니었다.

이런 짓도 아무에게나 허용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백구를 비롯한 다양한 신수들의 유지비에는, 말도 안되는 양의 포인트가 들어가는 편이었다.

신수들의 연비가 지나치게 나쁜 까닭이었다.

하나같이 평범한 몬스터로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호사를 누리는 셈이었다.

"백구야. 너도 정말 운이 좋은거야. 어디 중동 왕족이 키우는 사자쯤 되어도, 이만한 대접은 절대 못받는거 알지?"

오일머니로 부를 쌓은 중동의 부자들.

그들이 키우는 맹수조차도 이러한 호사를 누리긴 어렵다는 이야기였다.

D급 아이템을 물처럼 마시고, B급 아이템을 간식처럼 먹어치우는 나날들.

어지간한 부자조차도 이런 사치를 애완동물에게 베풀기는 쉽지 않았다.

제아무리 신창 주선호라도 이런 짓을 벌였다가는 포인트 부족에 허덕일 터였다.

내가 그들이 받는 대우의 특별함에 대해 이야기하자, 백구가 혀를 내밀며 내 손을 핥아왔다.

- 왈! 왈왈왈!

내 이야기에 대답을 하듯이 우렁차게 터져나오는 소리.

그것을 들으며 나는 백구에게 계속해서 손을 내어주었다.

오랜 시간동안 날선 공기속에 줄타기를 유지해왔지만, 이제는 주변에 휘둘리기만 하는 시간도 완전히 끝이었다.

무엇이든 비장의 수단이 있다는건 무척이나 든든한 일이었다.

"조만간 둘이서 같이 다닐 게이트라도 하나 찾아서 기록해둬야겠네."

나는 그 사실에 상당히 만족하면서, 백구의 입가에 <신성한 오브(B)>를 물려주었다.

무제한 포인트를 바탕으로 한 무지막지한 신수 활용법.

이제는 석유부자를 뛰어넘는 포인트 부자의 시대였다.

* * * * * *

인플루언서(Influencer).

콘텐츠 크리에이터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저마다 목표로 하는 숫자가 있기 마련이다.

얼마만큼의 구독자를 모아야 훌륭한 인플루언서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그 기준은 사람마다 다른 편이겠지만, 유튜브는 그중에서도 기념적인 숫자들을 정해서 선물을 보내주고는 했다.

10만. 100만. 1000만. 1억.

이렇게 다양한 숫자들에 저마다의 숫자를 상징하는 기념품들을 보내주는 것이다.

"오늘은 굉장히 특별한 일이 있어서, 다들 이렇게 초대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오늘, 나는 특별한 숫자를 기념해서 두명의 S급 헌터들과 식사자리를 가졌다.

천시예와 처음 저녁 식사를 함께했던 고급 일식집.

그곳에서 두번째의 식사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내 정면에는 중후한 인상의 중년인이 앉아있었으며, 내 옆자리에는 빛이 바랜 머리카락을 가진 헌터가 자리하고 있었다.

불사기사 최두식. 그리고 검귀 천시예.

두 사람이 내 특별한 날을 기념해주기 위해 자리에 참석한 것이다.

"아무래도 두 사람 덕분에 기세를 타기 시작했으니, 기왕 공개한다면 두 사람 앞에서 공개하는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특별한 날에는 특별한 물건이 필요한 법.

나는 그런 두 사람의 앞에서, 내 자랑스러운 보물 1호가 담긴 상자를 꺼내들었다.

스윽-.

내가 자신의 옆자리에서 꺼낸 보물.

그것은 '헌잘알' 채널의 100만 구독자를 기념해 유튜브로부터 받은 보물이었다.

"여기서 처음 공개하겠습니다. 이게 바로 제 골드 버튼입니다."

—골드 버튼(Gold Button).

유튜브의 재생버튼을 형상화한 특별한 기념품이 이제서야 도착한 것이다.

내가 골드 버튼을 공개하기 무섭게, 맞은편에 있던 최두식이 나를 향해 축하인사를 건네왔다.

"허허, 나는 우리 아우가 진작에 백만 유튜버가 될거란걸 알고 있었다. 축하한다, 아우야!"

내가 오랫동안 TV에서 지켜봐왔던 S급 헌터가, 이제는 내 앞에서 100만 구독자를 축하해준 것이다.

더군다나 이 자리에 참석한 것은 불사기사 최두식만이 아니었다.

내 옆에서는 천시예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박수를 치고 있었다.

"······축하해. 여러 헌터들을 많이 찾아가더니, 결국 어떻게든 100만을 달성했네."

짝, 짝-.

무미건조한 박수소리가 프라이빗룸에 가볍게 울려퍼졌다.

허나 지금의 나에게는 그조차도 감미로운 오케스트라처럼 들릴 따름이었다.

구독자 100만명.

내가 유튜브를 시작한 이래, 꿈으로만 여겨왔던 숫자가 드디어 나한테 찾아온 것이다.

"다들 감사합니다. 두 사람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절대 못왔을겁니다."

"아우야, 그렇게 겸손해할 필요는 없다. S급 헌터가 직접 헌터들을 분석하는 내용인데, 눈이 옹이구멍이 아닌 이상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지!"

"감사합니다, 최두식 형님."

걸걸한 최두식의 목소리가 방안에 메아리쳤다.

동경만 하던 헌터들에게 기념비적인 날의 축하인사를 듣는 상황.

이 상황을 얼마나 많은 유튜버들이 꿈꿔왔을 것인가.

나로서는 감격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커뮤니티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도달하지도 못했겠지.'

S급 커뮤니티가 없었다면 과연 이런 풍경을 마주할 수 있었을까.

지금까지의 기억을 돌이켜보아도, 커뮤니티를 통해 쌓은 추억들이 적지 않은 편이었다.

다양한 S급 헌터들의 이야기를 알게되었다.

그들과의 특별한 공감대를 형성했으며, 많은 헌터들과 수많은 이야기들을 쌓아나갔다.

방구석에서 일궈낸 조그마한 커뮤니티가 내 인생을 이렇게까지 바꿔버린 것이다.

'물론 거기에 더해 내 뛰어난 편집 능력도 한몫 했겠지만 말이야.'

S급들과 인연을 쌓아오며 촬영한 수많은 컨텐츠들.

거기에 내 압도적인 편집능력이 더해져 지금에 이른 것이다.

나는 그러한 추억들을 회상하면서, 감회에 젖은 채로 술잔을 들어올렸다.

술잔을 든 내 맞은편에서 최두식이 입꼬리를 틀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이런 기념비적인 날에 술이 빠질수는 없지. 막내야, 잔 들어라. 우리 유튜버님을 위해 한잔 해야겠다."

"······응. 알았어."

건배를 주장하는 최두식의 이야기.

그 모습에 천시예는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들어올리는 모습이었다.

나 역시 감회에 젖은 채 잔을 들어올리자, 최두식은 나를 향해 뇌리에 남을만한 건배사를 건넸다.

"아우야, 이따가 펜 꺼내서 나한테 갖고와라. 내가 명색이 원로 헌터인데, 아우의 골드 버튼에 직접 싸인을 해줘야겠지."

"예?"

"자, 건배!"

짜안-.

의문에 젖은 내 목소리를 뒤로 한 채, 허공에서 세 사람의 잔이 맞부딪혔다.

허공에 울려퍼지는 청명한 울림.

그 직후, 최두식이 시원하게 한잔을 들이키는 모습이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어느새 잔을 깨끗이 비운 최두식의 모습에 술잔을 기울였다.

'······좋은게 맞나?'

나 역시도 한잔을 쭉 들이킨 채, 비워버린 잔을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후우-.

알콜냄새가 감도는 숨결이 입밖으로 퍼져나온 이후.

옆자리에서 나를 지켜보던 천시예가 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말이야, 궁금한게 하나 있는데······."

압도적인 신체능력치를 보유한 S급 헌터라 그런 것일까.

천시예는 취기조차도 안느껴지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기다렸다는 듯이 한가지 질문을 던져왔다.

"혹시 어떤 이명을 가지고 있는거야?"

"······이명?"

"응. S급 헌터쯤 되면 이명 하나 없지는 않을거 아니야."

이명(異名).

천시예는 나를 향해 내 상태창에 적혀있는 또 다른 이름에 대해 물어온 것이다.

나는 갑작스러운 천시예의 질문에 당황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천시예가 갑자기 그런 질문을 꺼내올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더군다나 천시예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예를 들어서 나같은 경우에는,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검귀'라는 이명이 있잖아? 아저씨도 어울리진 않지만 '불사기사'라는 이명을 가지고있고."

"막내야. 내가 뭐 어떻길래······."

"보통은 S급에 도달하기 전부터 이명을 얻기 마련이니까, 능력은 숨기더라도 이명에 대해서는 알려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스윽.

천시예의 검은 눈동자가 내 눈을 빤히 바라보며 물어왔다.

두 사람의 이명은 이미 알려져있으니, 이번에는 내 이명을 여기서 말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어떤 이명을 가지고 있어?"

그러한 요청에 나는 깊은 고민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걸 내 입으로 말하는게 맞나?'

내가 고민에 젖은 이유는 하나.

내가 받은 이명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까닭이었다.

허나, 두 사람이 저렇게까지 궁금해하는데 계속해서 입을 다물고 있기도 곤란한 상황.

내가 이명이 없다고 말하더라도 거짓말로 치부할 것이 분명했다.

결국 나는 두눈을 질끈감고 술잔을 들어올리며 이야기했다.

"······폭군(暴君)."

"응?"

"폭군이라고."

두 사람을 향해 밝혀버린 내 이명.

그 직후, 방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

"······."

갑작스럽게 난감해진 분위기 속에서, 나는 무거워진 손으로 스스로의 잔에 술을 채웠다.

쪼르륵-.

그렇게 술을 따른 잔을 들고서, 나는 자신을 바라보는 두 사람을 향해 조용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나에게 향하고 있는 기묘한 시선들을 향한 자그마한 변명이었다.

"저 그런사람 아닙니다."

꿀꺽-.

목구멍을 넘어가는 술맛이 오늘따라 조금 쓰게 느껴졌다.

S급 헌터 커뮤니티의 흑막이 되었다 55화

5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