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타일러 빈스 후작.
선체 길이 약 70미터.
선체 폭이 좁고 전체적으로 날렵하며, 후방과 좌우에 총 3개의 프로펠러가 달려있다.
속도에 치중한 듯한 비공정 옆구리가 열리더니, 지상을 향해 널빤지 같은 사다리가 내려온다.
그런데 수동이다.
병사들이 내린 사다리를 이용해 윌리엄 사령관과 찰스 정보국장, 엠버 대령이 내렸다.
그리고 세 사람은 내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왔다.
이곳은 영주의 집무실과 저택, 기간트 주둔지가 있는 영주관.
그들을 가까이서 보자, 나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환영 인사는 아니라도, 우릴 보고 그렇게 인상을 쓸건 없지 않소?"
윌리엄 사령관이 말했다.
"두 분이 직접 왔다는 건 좋은 소식이 아닐 테니까요."
"뭐, 그렇겠군."
윌리엄 사령관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난 비공정을 가리켰다.
"저건 뭡니까?"
"지휘 비공정이오. 기간트 수송은 포기하고 속도를 높여 정찰과 비공정 지휘를 겸하는 비공정이오."
"탑승 인원은요?"
"최대 35명이오."
"나쁘진 않군요."
난 세 사람을 보고 말했다.
"일단 제 집무실로 가시죠."
난 이번에 완성된 새 집무실로 그들을 안내했다.
자리에 앉자 찰스 정보국장이 말했다.
"하늘에서 보니, 도시가 아주 깔끔하고 도로가 반듯하더군요."
"도시의 70%를 새로 지었으니, 그럴 겁니다."
"70%나요?"
내 앞에 앉은 윌리엄 사령관과 찰스 정보국장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보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바쁘신 분들이니 용건부터 듣겠습니다."
"어험! 그래도 차 한잔 마실 시간은 있소."
"제가 시간이 없습니다."
날 선 내 반응에 윌리엄 사령관의 미간이 좁아졌다.
"말에 가시가 있소?"
"제 목엔 가시가 10개는 박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믿었던 분께 매우 실망했거든요."
찰스 정보국장은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고, 내 시선을 받은 윌리엄 사령관은 내 말뜻을 알고 있는지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흔들었다.
"경의 영지 소식을 알리지 않은 것 때문이오?"
"잘 아시네요."
"솔직히 첫 번째는 나도 몰랐고, 두 번째는 비행석 원정을 준비하는 기간이라 미처 경에게 알리지 못했소."
"두 번이나 있었군요."
"······?"
"첫 번짼 언제입니까?"
윌리엄 사령관은 괜히 말했다는 표정이었다.
"경이 대수림에서 이데아 제국 발굴지를 발견했을 때요. 아시다시피 우리 북부군과 5군단이 모두 블랙힐 기지에 모여 있었고, 언제 가디언 제국과 전투가 벌어질지 몰랐기에 전진 기지를 모두 폐쇄했었소. 그때 카야킨에 있던 커널 준장이 소식을 알리지 않았고, 내가 알았을 땐 몇 달이 지난 후였소."
"그냥 변명일 뿐이군요."
"맞소. 부하의 실수도 상관인 내 실수지."
"두 번짼 왜 그러셨습니까?"
"경도 알지 않소? 그 비행석 원정 임무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경과 엘프가 꼭 필요했소."
난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알려줬어도 전 원정에 갔을 겁니다."
대신 자동인형을 보내 영지를 수비했을 거다.
결과적으론 잘 처리됐지만, 내 영지민이나 병사가 죽거나 다칠 수도 있었다.
"그 점은 내가 사과하겠소."
"사과한다고 떨어진 신뢰가 회복되는 건 아니죠. 이제 본론을 듣겠습니다."
윌리엄이 다시 짧은 한숨을 쉬곤, 찰스 국장을 쳐다봤다.
그러자 찰스 국장이 입을 열었다.
"가디언 제국이 움직였습니다."
국장의 말투는 전과 다르게 공손했다.
두 사람 다 내가 제국의 귀족이자, 영주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벌써요? 생각보다 빠르군요."
"아직 우리를 침공한 것은 아닙니다. 저들의 기간트 수송용 비공정이 국경에 배치된 것을 확인했습니다."
"비공정을요? 몇 대나 됩니까?"
"한 번에 기간트 10기를 수송할 수 있는 비공정이 30대에 병사 200명을 수송하는 비공정도 10대나 있습니다."
"허! 비공정만 40대네요."
난 상당히 놀랐다.
그들이 채굴한 비행석이 상당했기에 40대는 많이 만든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원정에서 돌아온 지 1년도 안 돼서 벌써 40대나 만들었다는 건 놀라웠다.
그리고 수송용 비공정 30대면 한 번에 나를 수 있는 기간트가 300기나 됐다.
이건 폭탄 드랍이었다.
'제국 전역이 사정거리군.'
"그런데 왜 벌써 비공정을 공개한 걸까요?
순간 안드레아스가 굳이 비공정을 지금 공개한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저들에겐 비밀무기였고,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 군과 싸울 때 후방에 투하하거나, 수도에 투하하면 훨씬 효과가 좋을 것이고, 여러 비밀 작전에 사용할 수 있었다.
"아! 저들이 우리도 비공정이 있는걸 알았군요."
윌리엄 사령관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서 샌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것 같소. 그리고 우리가 괴수들에게 200기 가까운 병력을 피해 본 것도 알고 있을 거요."
북부군의 입은 막았다고 해도, 각 지방의 영지군까지 모두 입을 막을 순 없었나 보다.
"우린 비공정을 몇 척이나 만들었습니까?"
윌리엄 사령관이 대답했다.
"현재까지 모두 15척이고. 2척은 지휘 비공정이오."
"전에 10기를 이동하는 비공정을 만드신다고 했으니, 한 번에 이동할 수 있는 기간트는 130기네요."
"정확하오."
"비공정에 오리지널 기간트를 집중적으로 배치한다고 해도 이길 수 있을지 확신하진 못하겠군요."
"그렇소. 다행히 이번에 기간트 생산을 서둘러서 이미 24기의 오리지널 기간트가 배치됐소."
그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사실 130대300이면, 수치상으론 절대 이길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오리지널 기간트 24대가 추가됐기에 전투만 잘하면 이길 가능성도 있었다.
"그리고 저들이 국경과 국경 근처에 마장기를 집결했소. 정보국의 정보론 1,000기 가까이 된다고 했소."
"1,000기면 전면전이네요."
예상보다 숫자가 조금 적은 건 아마도 비공정에 마장기가 꽉 차 있다고 봐야 했다.
"현재 우리 군은 2개 군단과 동부군, 그리고 헤이스팅 가문의 기간트까지 700기의 기간트가 국경에서 대치 중이오. 그리고 우리 북부군과 5군단이 비공정을 타고 국경 근처에서 대기 중이고."
"휴! 역시 어려운 전쟁이 되겠군요."
윌리엄과 찰스 국장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말인데, 경의 도움이 필요하오."
윌리엄 사령관의 말에 난 팔짱을 끼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원래 가디언 제국과 전쟁엔 참전하려고 했지만, 윌리엄 사령관과 신뢰가 깨진 상태라 그냥 움직이긴 뭔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럴 줄 알고, 선물을 가져왔소."
윌리엄 사령관이 손을 들자, 엠버 대령이 문서를 전달했다.
그리고 내게 내밀었다.
"뭡니까?"
"이번에 크게 한바탕했다고 들었소."
"영지전 말입니까?"
윌리엄 사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이번에 영지전에서 얻은 베르가니 영지를 공식적으로 타일러 경에게 준다는 문서요."
"이미 제가 차지하고 있는데요?"
"그래도 황제 폐하께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과는 다르오. 그리고 록체스터 대영지는 경의 영지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황제 폐하께서 조치했소."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대영지에 저런 압박을 한다고?
그랬다간 대수림에 무슨 일이 발생했을 때, 그들의 협력을 받지 못할 것이다.
"베닝 공작이 순순히 따르던가요?"
윌리엄 사령관이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그럴 리가 있겠소? 약을 조금 쳤소. 황제께서 이번 전쟁을 돕는 조건으로 2년 후에 비공정 5대를 각 대영지에 하사하시기로 하셨소. 그리고 록체스터 가문엔 3대를 추가해 총 8대를 주기로 하고, 이곳 일을 마무리하기로 합의했소."
"3대나요?"
엘프 차원의 괴수 군단이 언제 다시 동면에 들어갈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당분간 비행석 채굴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기간트를 200기나 잃고 얻은 비행석으로 만든 비공정을 3대나 더 준다는 것은 황제로서는 내게 큰 배려를 베푼 것이었다.
그건 그만큼 전선 상황이 좋지 않다는 소리였고.
그리고 록체스터 가문이야 가만히 앉아서 공짜로 비공정이 3대나 생기는 셈이었고, 영지전이야 비공정을 넘겨받고 나서 해도 늦지 않았다.
"그리고 타일러 백작에게 저번 원정의 공로로 금화 10만 골드와 에일 영지를 하사하셨소."
"에일 영지요? 우리 남쪽에 있는 영지 말입니까?"
"그렇소. 타일러 경을 움직이려면 이 정도는 가지고 와야 할 것 같아 황제 폐하와 추밀원장을 일주일 내내 설득했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경의 능력을 어느 정도 밝혀야 했소. 이건 황제 폐하의 공식 문서요."
윌리엄 사령관이 내게 에일 영지의 소유권이 적힌 문서를 내밀었다.
"그리고 황제 폐하께서 타일러 경에게 후작의 작위를 하사하셨소."
"후작이요?"
"이제 타일러 경의 영지가 북부에서 3번째로 큰 영지요. 베르가니 영지가 규모는 중급 영지지만, 산악 지역이 많아 영지 크기가 상당히 크고, 에일 영지는 크기는 작지만, 인구가 많은 편이오. 그러니 세 영지를 합하면, 영지 크기도 크고, 인구도 많으니 후작의 작위는 과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소. 축하하오. 타일러 경."
"축하합니다. 타일러 빈스 후작님."
후작이라······.
후작부턴 대귀족으로 분류되며, 부하 기사들에게 작위를 내릴 수도 있는 높은 위치였다.
게다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에일 영지까지 얻었다.
한편으론 기분이 좋으면서 다른 한편으론 어떤 임무를 맡길지 슬슬 불안했다.
황제가 저렇게 막 퍼주는 걸 보니, 뭔가 아주 중요한 임무를 맡길 것 같은데······.
"타일러 경께서 서부전선으로 가주셔야겠습니다."
"서부전선이요? 동부전선이 아니고요?"
이건 가디언 제국과 싸우라는 말이 아니라, 아리칸 왕국 전선으로 가라는 말이었다.
순간 그 이유를 생각해봤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허! 안드레아스가 정말 무서운 자로군요."
"타일러 경이라면 짐작할 줄 알았소. 저들은 병력만 배치했지, 당장 쳐들어올 생각이 없소. 그렇다고 우리가 병력을 뺄 수도 없고."
"비공정 역시 뺄 수 없겠군요. 저들의 비공정이 언제 어디에 떨어질지 모르니······."
"그렇소. 저들은 우리를 견제하며, 계속 서부전선에서 병력을 소모하길 기다리고 있소. 결국엔 우리와 아리칸 왕국, 연합국까지 모두 큰 피해를 볼 것이고, 놈들은 어부지리를 얻으려 할 것이오."
하긴, 나 같아도 그런 작전을 쓸 것 같다.
가끔 병력을 꽉 채운 비공정으로 국경 하늘만 날아다녀도 아베르크 제국은 심장이 쫄깃할 거고, 병력을 빼지 못할 거다.
그럼 우린 아리칸 왕국으로 후방에 있는 기간트를 계속 보낼 수밖에 없고.
병력은 계속 줄어들 것이다.
난 윌리엄 사령관을 쳐다봤다.
"황제 폐하께 말한 내 능력이 비공정입니까?"
"그렇소. 솔직히 이번 엘프 원정에서 비행석을 상당히 챙겼을 것이 아니오. 그리고 타일러 경의 성격상 이미 비공정을 만들었을 거고."
윌리엄 사령관도 바보는 아니었다.
내가 알아서 챙기리라는 걸 알았으니까.
그리고 내 비공정 때문에 비행석 채취가 훨씬 빨라졌으니, 그걸 눈감아 준 거고.
이제야 나를 찾아온 목적이 확실해졌다.
이들은 내 비공정으로 탈로스 글론 연합군의 비공정을 상대해달라는 말이었다.
121. 참전.
121. 참전.
"지금 아리칸 전선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아리칸 왕국엔 1군단 말고도 서부군 기간트 150기와 로드니 가문의 기간트 100기가 합류한 상태요. 하지만 연합군의 비공정 때문에 계속해서 밀리고 있소. 마르틴 국왕이 손수 비공정을 이끌며 대응해 보지만, 비공정 1기로 비공정 7기를 막긴 역부족이요."
마르틴 국왕의 능력이야 이미 수도 황궁에서 직접 겪어 봤다.
거대한 낫을 든 13미터의 퀸급 오리지널 기간트 우가스!
홀로 수십 기의 기간트를 상대할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실제로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를 탄 1군단의 티아스 준장이 힘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처참하게 깨졌으니까.
하지만 그도 몸은 하나였다.
7척의 비공정이 나뉘어 후방을 공격하면, 그걸 어찌 다 따라갈까.
막강한 무력이 있어도 비공정은 비대칭 전력으로 어느 정도 숫자를 맞추지 못하면, 대응할 수 없었다.
"그러니 발레리온 영지군의 비공정과 기간트로 마르틴 국왕을 도와주시오. 황제 폐하께서 전쟁이 끝난 후에 추가로 포상을 약속하셨소."
순간 머릿속에 계산기가 빠르게 돌아간다.
사실 포상 따위야 큰 의미가 없다.
아리칸 왕국이 무너지면 좌우에서 협공을 받는 아베르크 제국은 상황이 더 어려워진다.
가디언 제국을 막을 수 없을 건 당연하다.
그걸 알기에 이렇게 날 찾아온 거고.
반면에 아리칸 왕국이 버틴다면, 아베르크는 가디언 제국과 일전에 집중할 수 있고, 아리칸 왕국의 도움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난······.'
이번에 마르틴 국왕에게 은혜를 입힌다면, 아리칸 왕국과 나와의 관계는 끈끈해질 것이다.
과거 마르틴 대공과 아리칸 기사들이 아베르크 제국을 위해 희생했지만, 결과는 토사구팽이었다.
언제 나도 그렇게 당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러니 이참에 마르틴 국왕과 동맹을 맺는다면!
입꼬리가 올라간다.
결론이 났다.
"좋습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오오! 고맙소."
윌리엄 사령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비공정 숫자와 병력 규모는 얼마나 데려갈 것이오?"
"저도 지금 쓸 수 있는 수송형 비공정이 2척뿐입니다. 그리고 기간트 16대를 투입하겠습니다."
"2척이라······. 숫자는 부족하지만, 거기에 타일러 경의 능력이 있으니, 아리칸 전선에 큰 도움이 될 것이오."
비공정의 공격만 효과적으로 막아도 숨통이 트일 것이다.
제국의 오리지널 기간트도 풀렸으니, 펠릭스 단장과 마키아스단장에게 오리지널 기간트를 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나와 에테나도 오리지널 기간트에 탄다면, 총 4기의 오리지널 기간트가 참전하는 것이다.
"아! 한가지 더하면 전 제국의 1군단이나 서부군 밑에서 싸우지 않고, 독립적으로 아리칸 왕국을 돕겠습니다. 명령을 받고 움직이면 그만큼 기동성이 느려지고, 저들의 비공정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없습니다."
"저들의 비공정만 막을 수 있다면 상관없소. 그럼, 마석 배터리와 보급 물자는 어떻게 하겠소?"
"그것도 제가 알아서 하죠. 대신 저들의 비공정을 나포하면 제가 챙기겠습니다."
"······?"
윌리엄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소."
이번에 참전은 제국군이 아닌, 발레리온 영지군이 참전하는 거로 해야 한다.
그래야 동맹이 성립되지.
"휴우!"
윌리엄이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소파에 등을 기대앉았다.
그러자 이번엔 찰스 정보국장이 나섰다.
"저도 따로 제안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해 보시지요."
"대수림의 정보 말입니다. 제국의 정보와 교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교환이요?"
"우리 정보국은 대수림의 병력 이동이나 가디언 제국의 전진 기지 움직임을 알아야 하고, 타일러 후작께서는 제국의 정보와 소식을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걸 서로 교환하는 겁니다."
"제가 살짝 손해 나는 느낌입니다."
찰스 정보국장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제국 전역의 정보를 알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인력과 시간 노력이 필요합니까. 반면에 우리가 원하는 정보는 우리 측 전진 기지의 병력 이동과 가디언 제국의 병력 이동 정도입니다. 정보의 규모가 다릅니다."
"글쎄요. 제가 누군가에 배우기로는 고급 정보란 아는 사람이 적고, 획득하기 어려운 정보라고 들었습니다. 대수림의 정보는 저만 알아낼 수 있는 고급 정보고, 제국의 정보야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내올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고 정보국에서 기밀 정보를 제공할 것 같지도 않고요."
찰스 국장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제게 정보를 제공한다고 영지에 정보국 인력을 파견할 거고, 그건 제 영지도 감시하겠다는 뜻이 아닙니까."
찰스 국장이 바로 대답하지 못하자, 옆에 있던 윌리엄 사령관이 고개를 흔들며 피식 웃었다.
"찰스 국장께서 아주 잘 가르치셨네요."
"큼······!"
내가 제국의 정보가 필요한 것은 분명했다.
특히 황태자와 황자들의 세력이 어떻게 움직이고, 대영지의 움직임을 아는 것은 제국 정세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찰스 국장이라면 내게 자세한 정보를 제공해 줄 것이고.
"이건 제가 조금 양보하지요."
"아! 감사합니다."
"대신 저희 영지에는 정보원을 파견하지 마십시오. 만약 걸리면 계약도 끝입니다."
"그건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수도에 있는 제 저택 말입니다."
"네?"
"요즘 주변에 서성거리는 자들이 있는 거 같습니다."
"우리 쪽 사람은 아닙니다.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두 사람이 급한지 본론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타일러 경, 그럼 우린 가보겠소."
"조심히 가십시오."
그들은 비공정을 타고, 남쪽으로 날아갔다.
괴조인형보단 못하지만, 속도가 빨라 수도까지도 며칠 걸리지 않을 것 같다.
난 그길로 기사들을 모았다.
***
2대의 드워프제 비공정이 영주관 위에 떠 있었다.
"쿠훌린! 이번에 오크도 참전한다!"
"쿠오크! 오크 싸운다!"
"쿠오크! 쿠오크!"
오크 해병대가 함성과 함께 무기를 번쩍 들었다.
"쿠오크! 타일러여! 그동안 훈련한 성과를 보이겠다."
"좋아! 이번에 오크 강습병의 활약을 기대하지."
그때 헬카인족 드워프 하버 족장이 다가왔다.
"왜 우리 드워프는 참가하지 않는가? 대포로 저들을 박살 내겠다."
"하버여! 드워프 포병대는 비밀 병기다. 이런 작은 전쟁엔 참가하지 않는다. 곧 큰 전쟁이 있다. 그때 마음껏 싸우게 해주겠다."
"비밀 병기? 아! 알았다 타일러여! 드워프는 비밀 병기다!"
그들이 바로 납득했다.
이번에 대포는 비공정에 싣지 않았다.
그건 가디언 제국과 공중 전투에 깜짝 등장시킬 것이다.
2척의 비공정이 영주관 앞 연병장에 내려앉았다.
비공정은 조종은 돛과 바람을 잘 다루는 샤이닝족 엘프들이 담당했다.
기이잉! 쿵! 쿵! 쿵!
비공정 옆으로 두 기사단이 나란히 섰다.
[트라스의 개 기사단 탑승 준비 완료!]
마키아스의 기간트 드라우켄에서 큰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겐 암 드로운이 입었던 거신 갑옷으로 만든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를 주었다.
이름을 드라우켄으로 지은 것은 암 드로운과 사연 때문이었다.
원래는 하얀 악마 기사단에 더 어울렸기에 펠릭스 단장에게 주고 싶었지만, 그는 아직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에 탈 실력과 마나량이 부족했다.
[하얀 악마 기사단 탑승 준비 완료!]
펠릭스 단장의 기간트 크리드 역시 큰 소리로 외쳤다.
그가 탄 비숍급 오리지널 기간트는 원래 내가 원정 때 타던 기체였다.
이번에 난 나이트급 오리지널 마장기에 탔고, 에테나 역시 나이트급 오리지널 기간트 로렐라이에 탔다.
지금 우리 발레리온 영지의 드워프 공방에선 내가 확보한 거신 갑옷을 오리지널 기간트로 만들기 위해 케네스 영감과 드워프들이 밤낮없이 작업하고 있었다.
그 오리지널 기체들은 가디언 제국과 전투에서 사용할 생각이었다.
[모두 비공정에 탑승하라!]
[탑승하라!]
쿵! 쿵! 쿵!
총 16개의 기간트가 2척의 드워프 비공정에 올라탔다.
그리고.
"쿠오크! 가자!"
"쿠오크! 쿠오크!"
오크 해병대원들이 각 50명씩 비공정에 나눠탔다.
한쪽은 쿠훌린 족장이 지휘했고, 다른 쪽은 레드불 제사장이 지휘했다.
난 기간트를 선체에 고정하고, 갑판 위로 올라갔다.
"깃발을 올려라!"
발레리온 영지의 깃발과 아베르크 제국의 깃발이 올라간다.
메인 마스트에 깃발은 우리 발레리온 영지의 깃발이었고, 후미 돛대엔 제국의 깃발을 달았다.
이번에 새로 제작한 발레리온 영지의 깃발은 강렬한 인상을 주려고 고민하다 보니, 드라우켄의 모습으로 만들게 되었다.
붉은색 깃발 안에 사자를 닮은 듯한 드라우켄의 형상과 어깨에 솟아난 두 개의 뿔이 흰색으로 새겨져 있었다.
고오오오오!
두 척의 비공정이 서서히 고도를 높였다.
일정 높이에 올라오자, 강한 바람이 느껴졌다.
"돛을 펼쳐라!"
"돛을 펼쳐라!"
팡! 파파팡!
"아리칸 왕국을 향해 전속 항진하라!"
두 척의 비공정이 서쪽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
[아리칸 왕국]
우린 곧장 아리칸 왕국의 수도로 향했다.
아리칸 서쪽 전선의 정보는 이미 윌리엄 사령관에게 받았다.
탈로스 글론 연합군은 이미 아리칸 왕국의 국토 4분의 1을 점령했고, 수도와 겨우 사흘 거리까지 진군했다.
저들에겐 비공정이 7척이나 있었기에 이미 수도까지 타격 범위였고, 저들의 비공정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기에 먼저 수도로 가서 마르틴 국왕과 합류할 생각이었다.
"배가 하늘을 날다니, 이젠 전쟁도 빨라지겠습니다."
펠릭스 단장이 말했다.
"모든 게 빨라지겠지."
"전쟁이 빨라진 만큼 더 많은 기사와 병사가 죽겠죠?"
"왜 걱정되나?"
"부하들이 다칠까 걱정됩니다. 너무 오래 함께해서 그런지 이제 가족 같은 느낌입니다."
"걱정하지 말게. 우리 기사들의 실력은 일류니까."
펠릭스는 평소에도 진중하고 농담이나 실 없는 소리도 거의 하지 않았다. 책임감도 매우 강해 전투가 벌어지면 자신보다 주변을 챙기기 바빴다.
마키아스처럼 앞서서 적의 소나기 같은 기세를 막고, 적진에 돌격해 적의 사기를 꺾는 강력한 전투 지휘관은 아니었지만, 안정적이고 부하들을 살려서 데려올 사람은 펠릭스였다.
어딘가를 공격해 탈환한다면 마키아스였고, 중요 거점의 방어 책임자를 맡긴다면, 당연히 펠릭스였다.
쿵! 쿵! 쿵!
쿠훌린이 강습 갑옷을 입고, 등에 커다란 도끼를 달고 갑판 위로 올라왔다.
"무슨 일이야?"
"쿠오크! 타일러여! 불 냄새가 난다!"
"그래?"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저 멀리 검은색 연기가 보였다.
그곳은 아리칸 왕국의 수도였다.
'벌써 적이 수도까지 진군했네!'
옆에 있던 펠릭스도 검은 연기를 발견했다.
"휴! 오자마자 전투네요. 우리 진짜 일복 하나는 타고났네요."
난 펠릭스를 향해 웃어줬다.
"가서 우리가 누군지 똑똑히 알려주자!"
"네! 맡겨 주십시오. 영주님!"
난 갑판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 전투를 준비해라! 기사들은 기간트에 탑승해라!"
"전투태세를 갖춰라!"
"오크 강습병은 갑판에 집결하라!"
"쿠오오오크!"
우리 연락을 받은 옆에 비공정도 갑판이 부산해졌다.
아베르크 제국군이 아닌, 발레리온 영지군으로 첫 출전이나 마찬가지였다.
몇 달 전에 영지전은 그냥 단합대회였고.
***
'완전히 농락당하고 있네!'
수도 상공에 도착하자 보인 것은 3척의 연합군 비공정을 쫓다 다니는 마르틴 국왕의 비공정이었다.
그리고 지상을 보자, 2척은 왕궁 안쪽에 타이탄을 내렸고, 2척은 광장에 내려 주변 건물을 마구 부수고 있었다.
불은 왕궁과 광장에서 동시에 치솟고 있었다.
왕궁엔 그래도 지키는 기간트가 있어 어느 정도 막고 있지만, 광장은 달려가는 병력이 없었다.
그렇다고 마르틴 국왕의 비공정이 광장으로 갈 수도 없었다.
하늘에 있는 3척의 비공정이 어디에 떨어질지 모르니까 그걸 쫓아가야 했다.
마르틴 국왕은 자신이 아베르크 황궁을 농락했던 것처럼 연합군의 비공정에 농락당하고 있었다.
'내가 등장하기 딱 좋은 때군!'
"2호 비공정에 연락해 왕궁으로 향하라고 해!"
"네!"
"우린 광장으로 간다!"
1호기는 곧장 광장으로 향했다.
뒤늦게 우리 비공정을 발견한 타이탄들이 공격을 멈추고 공중을 올려다봤다.
난 직접 키를 잡았다.
"고도를 낮춰라!"
위이이이잉!
좌우의 프로펠러가 맹렬하게 회전하며 비공정이 급강하했다.
"쿠훌린!"
"쿠오크!"
"오크 강습대는 적의 비공정에 올라탄다!"
"쿠오오오크!"
성난 오크들이 갑판 난간을 잡고, 뛰어들 준비를 했다.
촤르르르르!
난 키를 돌려 곧장 광장 위에 있는 적의 비공정 위로 돌진했다.
"충돌한다! 꽉 잡아라!"
"꽉 잡아라!"
난 드워프가 만들어준 비공정의 성능과 견고함을 믿었다.
122. 시작은 화끈하게!
122. 시작은 화끈하게!
위이이잉! 쿠앙!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선체가 미친 듯이 흔들린다.
"큭!"
"쿠옥!"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난간 아래를 내려다봤다.
우리 비공정 선수가 적의 비공정 선미 위에 올라탔다.
됐다!
"지금이다! 쿠훌린! 선수로 강하해!"
"쿠오오오오!"
쿵쿵쿵쿵!
괴성을 지른 쿠훌린이 거침없이 달린다.
그 뒤로 오크 해병대가 우르르 달렸다.
그들의 성난 발걸음은 힘이 넘쳤고, 그동안 참아왔던 분노가 폭발한다.
"쿠아아아!"
"쿠오크!"
팟! 파팟! 휘이잉!
선체 높이가 20미터인데 오크 강습병들은 비행석 낙하 장치도 켜지 않았다.
쿠웅! 쿵! 쿵! 쿵!
적 비공정 선미에 강렬한 충격음이 들렸다.
비공정끼리 부딪친 충격에 겨우 자리에서 일어난 연합군 병사들이 뒤를 쳐다봤다.
그곳엔 3미터 크기의 괴이한 기간트?들이 서 있었다.
"저, 저건 뭐야?"
쿠훌린이 먼저 커다란 도끼를 등에서 꺼내 들었다.
그러자 오크들도 각자 큰 칼과 도끼를 양손에 들었다.
"쿠오크! 오크 강하다! 쓸어버려!"
"쿠오오오크!"
부아앙! 쩌억!
촤아악!
"크헉!"
"으악!"
"괴, 괴물이다!"
그냥 오크도 괴물일 진데, 3미터의 강습 갑옷을 입은 오크는 그야말로 탱크나 다름없었다.
오크 강습병들이 달려들어 도끼와 칼을 사정없이 휘두르자 병사들은 속절없이 쓰러졌고, 순식간에 십여 명이 죽자 혼비백산하여 반대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오크 해병대가 비공정에 올라가는 순간 이미 전투는 끝이라고 봐야 했다.
"사, 사람 살려! 으악!"
"으아! 오지 마!"
한 병사가 오크에게 쫓겨 갑판 난간을 넘어 뛰어내렸다.
'어? 높이가 100미터는 될 텐데?'
퍼걱!
난 순간 눈을 감았다.
성난 오크 강습병들이 순식간에 갑판을 정리하고 선수로 도망친 병사들은 무기를 던지고 투항하기 시작했다.
전투는 채 10분이 걸리지 않았다.
"갑판을 장악했다! 엘프는 밧줄을 타고 내려가라!"
"네!"
샤이닝 일족 엘프 전사들이 오크가 걸어놓은 밧줄을 타고 적 비공정으로 넘어갔다.
날렵한 십여 명의 엘프는 나포한 비공정을 조종하고 갑판 아래쪽에 숨은 적들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영주님, 적 비공정이 도망갑니다."
엘프 선원의 말에 피식 웃어줬다.
옆에서 지켜보던 적 비공정은 오크가 뛰어들어 도끼와 칼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자, 감히 덤빌 생각도 못 하고 고도를 높이고 있었다.
"쫓아갈까요?"
"됐다! 우린 기간트 강하를 준비한다."
"네!"
엘프 선원들이 모두 아래 비공정으로 이동한 모습을 확인했다.
"밧줄을 풀고, 지상으로 내려간다."
위이잉!
쿠쿠쿠쿠!
비공정이 뒤로 빠지더니 지상으로 내려갔다.
여기저기 흩어져 도시를 부수고 있던 타이탄들이 하나둘 광장으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저들이 모이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해치를 열어라!"
"해치를 열어라!"
위이이이잉!
지상에 거의 내려오자, 선미 아래쪽에 커다란 해치가 내려간다.
그리고 안쪽에선 기간트들이 천장과 연결된 고리를 풀고, 뛰어내릴 준비를 했다.
나도 아래로 내려가 내 오리지널 마장기에 올라탔다.
쿠쿵!
해치가 땅에 닿았다.
[발레리온의 기사들이여! 강하하라!]
[가자!]
쿠웅!
펠릭스의 오리지널 비숍급 기간트 크리드가 내리자마자, 등에서 방패를 꺼내며 앞으로 달렸다.
기이잉! 쿠쿠쿵!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비숍급 타이탄이 창을 겨눴다.
[죽어!]
부아앙!
비숍급 타이탄이 달려오는 기간트를 향해 창을 찔렀다.
콰앙! 치이익!
크리드는 방패로 창날을 옆으로 밀어 방향을 틀고, 어깨로 타이탄의 가슴을 가격했다.
콰앙!
[크윽!]
쿠웅!
타이탄이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뒤로 넘어졌다.
그 순간 크리드가 방패로 타이탄의 해치를 내려쳤다.
쾅! 쾅! 쾅!
큰 충격에 타이탄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크리드가 천천히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양손으로 검을 잡고.
콰직!
배를 찔러 마무리했다.
[주변을 경계하라!]
펠릭스가 외쳤다.
워버린과 폴린, 콜벳의 기간트까지 4기가 먼저 내려 주변을 경계하고, 그 뒤를 이어 다른 기간트도 하나둘 비공정에서 내렸다.
난 맨 마지막으로 내렸다.
쿠웅!
내 오리지널 마장기가 손을 들고 회전시키자, 비공정의 해치가 닫히며 천천히 위로 떠 올랐다.
비공정에 타이탄이 한 대라도 달려들면, 위험하기에 적당한 높이로 올라갈 때까지 지키는 것이다.
난 마나를 눈으로 뿌리며 적의 접근을 확인한다.
[우측 3시 방향! 적 타이탄 2기가 온다!]
내가 소리치자, 펠릭스가 뒤를 쳐다봤다.
[폴린, 콜벳! 정리해라!]
[네!]
두 기간트가 방패와 검을 들고 타이탄을 향해 달렸다.
쾅! 콰쾅!
룩급과 비숍급 기간트가 비숍급과 나이트급 타이탄을 힘으로 밀어붙이곤,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쿵! 쿵!
순식간에 타이탄을 정리한 두 기사가 다시 돌아왔다.
그 사이 비공정이 안전한 고도까지 올라갔다.
강하가 성공했으니, 이제 화끈하게 날뛸 차례!
[펠릭스! 전방에 기간트 4기, 좌측에 2기가 다가온다!]
내 목소리를 들은 펠릭스가 소리쳤다.
[워버린과 앤소니가 좌측을 맡아라! 나머진 전방의 타이탄을 부숴라!]
[가자!]
하얀 악마 기사들이 전투를 시작했다.
숫자는 우리가 적을지 모르지만, 우린 집단 전투라면 이골이 난 베테랑 기사들이었다.
게다가 저들은 침착하게 타이탄을 집결해 뭉쳐서 달려오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무작정 달려오고 있었다.
'이렇게 고마울 때가!'
쾅! 쾅! 콰직!
거대 병기들이 집채만 한 무기를 휘두른다.
일격에 3층 집이 무너지고, 뒤로 넘어지면서 이층집을 깔아뭉갠다.
쾅! 우르르!
인간들이 감당하기에 기간트나 타이탄은 너무 컸다.
워버린과 앤소니는 2기의 타이탄을 맞이해 잘 싸우고 있었고, 펠릭스와 4기의 기간트는 4기의 타이탄을 몰아붙였다.
4기의 기간트가 4기의 타이탄을 앞에서 막아서고, 펠릭스의 오리지널 기간트가 끝에서부터 협공해 적을 상대했다.
쿵! 푸욱!
[크악!]
옆구리를 통과한 검이 타이탄에 타고 있던 기사를 찌르자, 타이탄이 힘없이 쓰러졌다.
거대 병기인 기간트와 타이탄의 급소는 머리와 배다.
머리는 주변 시야를 제공하는 중요한 곳이었고, 배는 기사가 타고 있었으니까.
한 대가 쓰러지자, 5대3이 되고, 체급에서도 밀리자 협공을 받은 타이탄 3대가 차례로 쓰러졌다.
그리고 그사이 내가 도와줘 좌측의 타이탄 2대도 쉽게 쓰러 터트렸다.
[모두 합류해라!]
나까지 8대의 기간트가 다시 뭉쳤다.
[단장! 저쪽도 이제 뭉쳤는데요!]
광장 반대편에 타이탄 11대가 뭉쳐있었다.
우리가 타이탄을 각개격파하는 모습을 봤으니, 바보가 아닌 이상 뭉쳐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놈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죽여라!]
우르르! 쿵쿵쿵!
11대가 광장을 가로질러 우리를 향해 달려온다.
[대열을 갖춰라! 놈들이 온다!]
[방패 앞으로!]
처처처척!
[내가 좀 도와줄 테니, 화끈하게 끝내라!]
[네! 영주님!]
아직 거신 마법을 제대로 맛본 적 없던 적에게 마법진을 활성화하고 손을 뻗었다.
[플레임 더스트!]
팟! 파파파파팟!
펑! 퍼퍼퍼퍼펑!
광장 가운데 불꽃이 치솟으며 저들이 달려오는 앞으로 연기가 뿜어졌다.
순간 사방이 연기에 휩싸였고, 안쪽에서 우왕좌왕하는 타이탄이 모습이 보였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자리에 멈춘 것이다.
[곧 연기가 걷힌다! 준비해!]
[네!]
2분이 다 되어 간다.
불꽃이 사그라지면서 연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펠릭스의 기간트가 검을 높이 들었다.
[하얀 악마들이여! 돌진!]
[돌진하라!]
[와아아!]
기이잉! 쿠쿠쿠쿵!
대열을 갖춘 7대의 기간트가 돌진했다.
이제야 시야가 돌아온 타이탄들이 기겁했다.
[마, 막아!]
쾅! 콰쾅! 콰앙!
[크헉!]
[아악!]
쿵! 쿠쿵! 쿵!
돌진한 기간트들이 방패로 밀어치자, 앞선 타이탄들이 충격을 받고 쓰러졌다. 그러자 그 위로 기간트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해치를 찔렀다.
쩌억! 푸욱!
타이탄 기사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귀신이 됐다.
방금 돌진 한 번에 6대의 타이탄이 쓰러졌고, 순식간에 병력 숫자가 역전됐다.
[어서 끝내자!]
[가으자!]
쾅! 쾅!
다시 내 기사들이 공격했고 타이탄들은 주춤거리다가 쓰러지고, 방패에 밀려 쓰러지고, 오리지널 기간트의 검에 쓰러졌다.
그렇게 20대의 타이탄이 차례로 모두 쓰러지자, 우린 함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
[더 없냐? 내려와라!]
그리곤 공중에 있던 적들을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놈들은 또 다른 비공정의 등장 때문에 놀랐는지, 수도의 하늘을 한 번 선회하더니, 서쪽으로 날아갔다.
그런데 돌아간 비공정이 6척이었다.
한 척은 마르틴 공작의 비공정이었으니······.
'에테나도 한 척을 나포했군!'
에테나에게 2호 비공정의 지휘를 맡겼고, 저쪽도 레드불이 이끄는 오크 강습병이 50명이나 있었으니, 한 척 정도는 나포할 수 있지 않을까 예상은 했었다.
그랬는데 진짜 성공한 것 같다.
[영주님! 비공정 한 척이 돌아옵니다.]
멀리 비공정 한 척이 오는 게 보였다.
마르틴 국왕의 비공정이 돌아오는 것이다.
적들이 완전히 물러간 것을 확인했다.
[주변에 사람들부터 구해라! 서둘러!]
[네!]
이 무식한 놈들은 제노바 협약도 없나?
거대 병기로 도시와 건물을 파괴하면 그 안에 사람들은 어쩌란 말이냐.
기간트들이 조심스럽게 부서진 건물 파편을 치우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안에 깔린 사람을 꺼냈다.
이미 죽은 사람도 많았고, 기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을 구해라!"
"건물 잔해를 치워!"
뒤늦게 아리칸 병사들과 작업용 기간트들이 달려왔다.
그 사이 아리칸 비공정이 가까이 다가왔다.
우리 비공정과 다르게 아리칸 왕국과 연합군 비공정은 속도가 조금 느렸다.
역시 드워프들의 솜씨가 좋다.
[이제 우린 뒤로 빠진다.]
구조대가 왔으니, 우리가 할 일은 끝났다.
난 1호 비공정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우리를 태우기 위해 아래로 내려왔다.
우린 비공정에 타고 아리칸 왕궁으로 이동했다.
***
[아리칸 왕국 왕궁]
사실 왕궁이라고 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었다.
위에서 본 아리칸의 왕궁은 제국 대영지의 성하고 규모가 비슷해 보였고, 내성 외성 구분은 없었으며, 50미터 정도 되는 성벽이 왕궁을 삥 둘러 있었고, 그 안쪽에 십여 개의 건물이 있을 뿐이었다.
우린 2호 비공정 옆에 내렸다.
"타일러님! 저희도 비공정 한 척을 나포했어요!"
나도 모르게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도 내려오면서 봤어. 고생했어."
"고생이야 오크 해병들이 했죠. 전 비공정에서 내리지도 않았어요. 그리고 트라스의 개 기사단이 적 타이탄 8기를 부쉈고, 5기는 비공정에 타고 도망쳤어요."
"잘했군."
우린 첫 전투부터 화끈하게 등장했다.
그런데 아리칸 왕국의 기간트와 병사들이 이쪽을 보며 경계하고 있었다.
우리가 아직 아군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타이탄을 부쉈으면 눈치껏 알아야지······.
게다가 같은 기간트잖아!
쯧쯧 혀를 찰 때였다.
마르틴 국왕의 비공정이 우리 앞쪽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안에서 기간트가 차례로 내리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거대한 13미터의 퀸급 오리지널 기간트 우가스가 내렸고, 그 뒤로 가슴에 십자 표식이 있는 크루세이더 기사단의 기간트가 내렸다.
123. 어려울 때 친구.
123. 어려울 때 친구.
위이이잉! 철컹!
치이익!
13미터의 퀸급 오리지널 기간트 해치가 열리더니, 마르틴 국왕이 내렸다.
그리고 뒤쪽에 있던 기간트에서도 해치가 열리며 기사들이 내렸다.
마르틴 국왕은 기사들과 나를 향해 다가왔다.
'실물은 저렇게 생겼구나!'
짙은 눈썹과 꽉 다문 입술.
키가 190은 되는 듯했고, 가슴과 어깨가 넓고, 흰색 제복을 입고 있음에도 온몸이 근육질인 것을 알 정도였다.
마르틴 국왕이 어깨에 살짝 반동을 주며 걸어오는데, 마치 호랑이 한 마리가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뒤를 따르고 있는 크루세이더 기사들 역시 체격이 크고 강인해 보였다.
'우리 기사들도 벌크업 좀 시켜야겠네······.'
마르틴은 올해 나이가 50은 됐다고 들었는데, 실제론 30대 후반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바로 오른쪽에는 아주 젊은 기사가 하나 있었다.
마르틴 국왕이 가까이 다가오자, 난 가슴에 손을 대고 고개를 숙였다.
"마르틴 페드로 국왕 전하를 뵈옵니다."
마르틴이 내 앞에 서더니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뒤에 선 기사들도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경과 부하들이 아니었다면, 오늘 큰 낭패를 볼뻔했소. 고맙소."
자신을 도와준 사람에게 일단 인사부터 하는 것을 보니, 마르틴 국왕이 예의가 없는 사람은 아니군.
"그리고 내 백성들을 도와주어 고맙소."
"그거야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백성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마르틴이 고개를 들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가 타이탄을 처리하고 비공정을 쫓아 준 것보다 자기 백성들을 구하는 모습을 더 인상 깊게 본 것 같았다.
"저 비공정의 기간트는 내리지 않는 것이오?"
"연합군의 비공정이 언제 다시 올지 몰라 대기 시켰습니다. 그보다 전선 상황을 듣고 싶습니다."
"아! 실례했소. 일단 안으로 듭시다."
난 마르틴 국왕과 나란히 걸으며 가장 큰 건물로 들어갔다.
우린 커다란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내부는 커다란 홀이었다.
홀 정 가운데 커다란 원탁이 있었고, 12개의 의자가 삥 둘러 있었다.
우린 큰 창문이 있는 벽 쪽 테이블로 향했다.
"이곳이 내 집무실 겸 회의실이자, 알현실이오. 가끔 침실일 때도 있고."
마르틴이 손짓했다.
"여봐라! 의자를 가져와라!"
테이블 앞에 의자 2개가 놓였다.
"잠깐 여기 앉아 계시오. 금방 돌아오겠소."
"네, 감사합니다."
에테나와 난 자리에 앉았고, 마르틴 국왕은 밖으로 나갔다.
"왕도 그렇고 기사들도 좀 정신이 없네요."
"왕궁과 수도가 공격받았으니 그랬겠지."
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홀을 천천히 살폈다.
홀 내부는 깔끔했으나, 장식물이나 조각도 하나도 없었고, 그 흔한 그림 하나 걸려 있지 않았다.
마르틴은 겉치레를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지는 않는 것 같았다.
중앙에 있는 원탁은 자세히 보니 돌을 깎아서 만들어진 것이었고, 테이블 중앙에 "원탁의 기사들"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의자마다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응? 크롬웰?'
익숙한 이름이 하나 보였다.
그리고 누군지 바로 떠올랐다.
내가 살루스 전진 기지를 차지하고 있을 때, 그곳을 노리고 온 아리칸 공국의 부대를 이끄는 자가 바로 크롬웰 대령이었다.
'그가 원탁의 기사였군.'
그때 난 우리 기지를 공격한 그들을 처리했다.
그 과정에서 기사들은 모두 죽었고, 일부 기사는 내 마법인형이 되었다.
지금은 다들 내 자동인형이 되었고.
생각보다 나와 아리칸 왕국이 깊은 인연이 있었다.
그것도 안 좋은 일로.
'내가 아리칸 공국의 계획을 두 번이나 막은 거였네.'
끼이익!
마르틴 국왕이 한 기사를 데리고 홀로 돌아왔다.
"미안하오. 피해 상황을 확인하고 오느라고 늦었소."
"아닙니다."
난 원탁을 보며 물었다.
"원탁의 기사들은 다 전장에 있습니까?"
"나와 함께 다니는 크루세이더 기사단에 셋이 있고, 나머진 전선에 있소."
그중에 하나는 내가 죽였는데, 거기까진 모르는 것 같았다.
마르틴 국왕이 자리에 앉자마자, 날 쳐다보며 머리를 갸웃거렸다.
"미안하지만 경의 이름이 뭐라고 했소?"
"아직 이름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 그렇군. 내가 오늘 정신이 없소."
마르틴 국왕도 왕궁을 공격받아 정신이 없었다.
"전 발레리온 영지의 영주 타일러 빈스 후작입니다."
"응? 타일러? 혹시 우리 구면이지 않소?"
마르틴 국왕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일전에 기간트에 타신 모습은 한번 뵀습니다. 아베르크 제국의 황궁에서요."
"아! 이제 기억나는군. 우리 병사들을 수십 명이나 죽였다는 그 기사로군."
"맞습니다. 전엔 그렇게 생사를 다투며 싸웠는데, 오늘 이렇게 마르틴 전하를 돕게 되는군요."
"그러게 말이오."
마르틴은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내가 아베르크 황제를 죽였다면, 우린 진작 연합군 놈들에게 밀렸을 것이오. 어찌 보면 경이 우리를 구했는지도 모르겠소."
지금 아리칸 왕국은 아베르크 제국의 도움 없이 전선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러니 지금 상황만 놓고 보면 내가 큰 도움일 준 것이다.
그리고 오늘 적 비공정을 몰아낸 것도 그렇고.
"어제의 적이 오늘은 동지가 되었군요."
마르틴 국왕은 살짝 허무한 웃음을 지었다.
사실 20여 년 전 자신들과 아베르크 제국이 힘을 합쳐 가디언 제국을 몰아쳤으면, 최소한 가디언 제국 서부 지역은 아베르크 제국이 가져갔을 것이고, 자신들은 약속대로 진작에 왕국이 되었으며, 기간트 생산 공장도 지어져 기간트 숫자가 배로 늘어났을 것이다.
그럼 지금 이런 상황도 없었겠지.
하지만 황제는 처음부터 사냥개에게 고기를 줄 생각이 없었다.
그걸 떠올렸기에 마르틴 국왕의 허무하고 복잡한 심경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전선 상황은 어떻습니까?"
"연합군이 우리 왕국 깊숙이 진입한 것은 알고 있을 것이오. 오늘처럼 수도가 직접 공격받을 정도로 말이오. 그리고 점점 남쪽으로 병력을 이동시키고 있소."
"전선이 더 넓어졌군요."
"연합군의 타이탄 숫자가 우리 동맹군의 기간트보다 배가 많으니, 전선을 넓혀 우리가 대응하기 힘들게 하려는 것이오. 기동력도 비공정이 있는 저들이 앞서 있고."
마르틴 국왕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기동력은 이제 우리도 갖췄습니다. 제가 비공정을 가져왔으니까요."
"그건 다시 한번 케인 오르도 황제에게 감사드리겠소."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뭘 말이요?"
"전 지금 아베르크 제국군으로 이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뭐요? 경은 아베르크 제국의 사람이 아니오?"
"그건 맞습니다만, 이곳에 비공정과 기간트를 가지고 온 것은 발레리온 영주인 제 의지로 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전쟁의 참전을 대가로 마르틴 국왕 전하와 아리칸 왕국에 받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마르틴 국왕이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
"받고 싶다?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오?"
"동맹입니다."
"이해할 수가 없군. 우린 지금 아베르크 제국과 동맹 상태요."
"아니요. 제국이 아닌 저와 아리칸 왕국의 동맹을 말하는 겁니다."
마르틴 국왕이 날 쳐다보며 엄지손가락으로 왼쪽 관자놀이를 비볐다.
지금 내 말뜻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르틴 국왕께서는 이미 한번 아베르크 제국의 배신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제국이 아리칸 왕국을 돕는 것도 자신들이 협공을 받을 위험 때문에 돕는 거고요."
"그거야 나도 너무 잘 알고 있소. 힘이 없다면, 언젠가 우리 뒤통수를 칠 거라는 것도."
"그래서 드리는 제안입니다. 아리칸 왕국과 우리 발레리온 영지가 동맹을 맺어, 나중에 발생할지 모르는 불상사에 서로 함께 대응하고 협력하자는 뜻입니다."
마르틴 국왕의 표정은 더욱 복잡해졌다.
"오늘 경의 비공정과 기간트 기사들의 활약은 잘 보았소. 하지만 동맹은 서로 비슷한 세력끼리 맺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소? 우리가 비록 연합군에게 밀리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한 나라의 왕국이오. 그리고 타일러 경은 아베르크 제국 소속인데, 배신을 당할 일이 뭐가 있겠소?"
"제가 힘이 없다면 당할 일이 없겠지요. 그저 황제와 권력자들에게 눈치나 보면 되니까요. 하지만 전 힘이 있습니다. 아리칸 왕국이 전혀 준비하지 못한 비공정이 있는 것만 해도 그렇고. 대수림에도 영지가 있지요. 물론 오늘 제가 보여드린 것은 제 능력의 반의반도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전 목표가 있습니다. 다른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그런 영지를 만드는 겁니다."
"케인 황제가 싫어하겠군."
마르틴 국왕이 피식 웃었다.
그리곤 말을 이었다.
"힘이 있는 상대라면 우리도 당연히 동맹을 맺고 싶소. 아베르크 제국이 아니라면 더욱 간절하지. 하지만 타일러 경의 힘을 아직 잘 모르겠소. 그러니 일단 그 힘을 확인해도 되겠소?"
"간단합니다. 여기서 바로 보여드리죠."
"뭐요? 바로요?"
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마르틴 국왕이 일어섰다.
그리고 뒤쪽에 서 있던 젊은 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나를 보지 말고, 이쪽을 봐주십시오."
난 창밖을 가리켰다.
"선물입니다."
마르틴 국왕이 영문 모를 표정으로 창밖을 쳐다봤다.
"어?"
창밖엔 조금 전에 연합군에게 나포한 비공정 2척이 내려왔다.
"어떻게?"
"어떻게 불러왔냐고요? 제 능력의 일부분입니다."
내 자동인형들이 그 비공정에 타고 있었다.
"그보다 제 선물이 마음에 드시지 않습니까?"
"정말 저 비공정을 내게 준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지금 시기에 비공정 2척을 선뜻 내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아베르크 황제도 못 할 일입니다. 이제 제 힘이 좀 느껴지십니까?"
마르틴 국왕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하지만 점점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1척밖에 없던 비공정이 3척이 되면, 더는 조금 전과 같은 수모를 받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지금 상황에서 이보다 더 큰 선물은 없었다.
나야 드워프제 비공정이 다섯 척이나 있었고, 지금 대수림 난민 기지에서 만들고 있는 거대 비공정도 있으니까.
"타일러 경은 힘도 있지만, 배포도 남다르시오."
"비공정 2척은 선물이고, 진짜 실력은 전선에서 보여드리지요."
"푸하하! 내가 인생을 아주 오래 산 것은 아니지만, 타일러 경 같은 사람은 본 적이 없소. 오늘 일만 해도 큰 은혜를 입은 것인데, 비공정까지 주다니!"
"그럼 동맹은 성사된 겁니까?"
"물론이오. 그 동맹은 우리 쪽에서 간절히 바라는 바이오."
비공정 플렉스를 좀 했더니, 대우가 확 달라졌다.
물론 난 그를 100% 믿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상황은 믿을 만했다.
이미 아베르크 제국에 배신을 경험한 그는 언제 다시 제국에게 뒤통수를 맞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제국 내에 믿을만한 동맹이 생기는 것이니, 반대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내가 어려울 때 돕는 친구야말로 진짜 친구니까.
마르틴 국왕은 비공정을 2척이나 받아서 기분이 좋은지, 연신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 그리고 이쪽은 원탁의 기사이자, 내 장남인 비에르 페르도요."
"비에르 왕자 저하를 뵀습니다."
내가 고개를 숙이자, 비에르 왕자도 고개를 숙였다.
"동맹의 수장이신데 편하게 불러주십시오. 타일러 후작님."
"하하! 비에르 왕자께서 영민하십니다."
마르틴 국왕이 웃으며 말했다.
"사실, 힘을 쓰는 건 나보다 못한데, 머리는 제법 똑똑하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소."
마르틴은 은연중에 아들 자랑까지 했다.
왕자를 소개해준다는 것은 이 동맹을 계속 유지하고 싶다는 뜻일 지도.
"그리고 이왕 전선에 왔으니, 제 활약을 보여드리고 싶군요."
"좋소! 이제 두려울 게 뭐가 있겠소. 함께 전선으로 갑시다."
동맹군 5척의 비공정이 그날 아리칸 왕국 서부 전선으로 향했다.
124. 베르카도 방어전(1).
124. 베르카도 방어전(1).
기이잉! 쿵! 쿵!
[서둘러! 빨리 쌓아라!]
[이쪽에 더 높이 쌓아!]
지금 아리칸 왕국의 기간트 기사들은 도시로 들어오는 입구에 건물 잔해를 이용해 바리케이드를 쌓고 있었다.
이곳은 수도 서쪽에 도시 베르카도.
이 도시가 함락되면 그다음이 바로 왕국의 수도 엔실루드였기에 아리칸의 기사들은 필사적이었다.
아무리 거대 병기라고 해도 숲을 없애고 산을 넘어올 순 없는 노릇.
진군에 가장 좋은 길은 아리칸 왕국이 닦아 놓은 가도였다.
기잉! 쿵!
비숍급 기간트가 잔해를 쌓다 말고, 시시덕거리며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아베르크 제국의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너희도 좀 돕지 그래?]
"뭐?"
[왜 우리만 방벽을 쌓는 거야?]
"그걸 지금 몰라서 물어? 지금 우린 너희를 구하러 온 거라고!"
"씨발! 이 먼 타국까지 와서 돕는데 그런 하찮은 일까지 하라는 거야?"
제국의 기사들이 발끈했다.
그들은 제국 1군단의 기사들.
지난 몇 개월간 아리칸 전선에 있었지만, 연합군과 제대로 싸운 것은 몇 번 되지 않았다.
케인 황제는 아리칸을 지켜 제국을 협공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라고 보냈지만, 군단장과 기사들은 그렇게 열심히 싸우진 않았다. 계속 밀리고 도시가 파괴되고 있었지만, 적들의 병력도 계속 줄고 있었으니까.
결정적으로 타국에서 죽으면 자신들만 손해였다.
그래서 적당히 싸우다가 밀리면 가장 먼저 후퇴했고, 지금까지 그걸 반복했다.
그랬기에 갈려 나가고, 죽어가는 것은 대부분 아리칸 왕국의 기간트 기사들이었다.
[그래도 같이 작업에 배정됐으니, 조금은 도울 수 있잖아!]
이번엔 아리칸 기사도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
이곳이 밀리면 곧바로 수도였으니까.
"야! 밥이나 먹으러 가자."
"그래, 전투하려면 든든히 먹어둬야지."
하지만 아베르크 기사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젠장! 전투도 거의 나서지 않으면서······.]
[오블론 소령 그만해! 대장이 제국 놈들은 그냥 머릿수 채워주는 거로 만족하라고 했잖아.]
[쳇! 빌어먹을······.]
가뜩이나 연이은 패전에 아리칸 왕국 기사들의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졌는데, 아베르크 제국군은 돕는다고 와 놓고선 가장 뒤쪽에서 싸웠고, 또 가장 먼저 후퇴했기에 동맹국에 대한 불만까지 쌓이고 있었다.
두두두!
그때 전령이 말을 타고 달려왔다.
"충! 리오넬 대령님, 어디 계십니까?"
오블론 소령이 전방을 가리켰다.
[입구 앞쪽으로 가보게.]
"네! 이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전령이 말을 달렸다.
그리고 도시 입구 근처에 5미터 높이의 커다란 용의 이빨을 내려놓는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의 모습이 보였다.
용의 이빨은 기간트의 전진을 방해하고, 전속력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설치하는 삼각뿔 모양의 방책이었다.
"리오넬 포일란 대령님!"
전령의 목소리에 원탁의 기사 리오넬의 기간트가 몸을 돌렸다.
[무슨 일이냐?]
"지휘관들은 당장 지휘 본부로 집합하라는 연락이 왔다고 합니다."
[하아! 적의 공격이 코앞이거늘······.]
리오넬 대령이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흔들었다.
연합군의 타이탄이 고작 하루 거리에 진군해 있었기에 방어 진지를 구축하는 일은 매우 중요했고 아리칸의 기간트 기사라면 모두 힘을 합쳐야 했다.
[누구의 명이더냐?]
[마르틴 국왕 전하의 명입니다.]
[뭐? 전하께서? 알았다. 바로 가마.]
리오넬은 그 길로 도시 중앙에 있는 지휘 본부로 이동했다.
***
[아리칸 아베르크 동맹국 지휘 본부]
한때 베르카도 시청이었던 건물은 비공정을 이용한 연합군의 타이탄 공격으로 일주일 전에 폐허가 되었고, 지금은 그 앞쪽 공터에 커다란 천막이 있었다.
초라하지만 이곳이 지휘 본부였다.
"중대 회의라니? 대체 무슨 일이지?"
"설마, 수도가 함락됐나?"
제국 1군단 지휘관들이 자기들끼리 떠들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아리칸 왕국의 지휘관들이 발끈했다.
"그런 불길한 소리 하지 마시오!"
"맞소. 수도는 마르틴 국왕 전하께서 지키고 계신 곳이오. 쉽게 함락될 리가 없잖소."
제국 기사들이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저들의 비공정이 7척이오. 타이탄을 한 번에 70기나 옮길 수 있어요.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비공정 하나의 병력으론 다 막을 순 없소."
"황궁에도 기간트가 있소. 그러니······."
아리칸 지휘관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제국의 1군단장인 에리히 레더 중장과 부군단장인 티아스 준장이 천막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 마르틴 국왕께서 회의를 요청하셨다고?"
"그렇습니다."
"왜지? 수도에 무슨 변고가 생겼나?"
에리히 중장도 방금 제국의 지휘관과 비슷한 발언을 했다.
하지만 아리칸 기사들은 뭐라고 하지 못했다.
그는 이곳 제국군 수장이었기 때문이었고, 자신들은 제국의 기간트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비공정이다! 비공정이 온다!"
유난히 아리칸 병사들의 목소리가 컸다.
마르틴 국왕이 비공정에 타고 오는 것이었다.
양측의 지휘관들이 천막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뭐야? 비공정이 왜 5척이야!"
"뭐지? 2척은 연합군 비공정인데?"
"저건 마르틴 전하의 비공정이야!"
1군단과 아리칸 지휘관들은 순간 혼란에 빠졌다.
"기, 기간트에 타라! 전투를 준비해라!"
지금 다가오는 것이 적인지 아군인지 헛갈렸기에 에리히 군단장이 소리쳤다.
그런데!
"자세히 보십시오. 아리칸 왕국의 깃발입니다."
연합군 비공정 선미 돛대 위에 백색 바탕에 검은색 십자가가 펄럭였다. 그건 아리칸 왕국의 상징이었다.
"군단장님, 뒤에 있는 비공정은 우리 제국의 깃발입니다!"
"그래?"
그리고 가장 후미에 있는 2척의 비공정엔 제국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아! 황제 폐하께서 비공정을 보내셨구나!"
"와아아!"
제국 지휘관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고오오오!
5척의 비공정은 지휘부 상공 100미터 지점에 멈췄다.
그때 마르틴 국왕의 비공정만 지상으로 내려왔다.
위이이잉!
그리고 지상에 도착한 비공정 안에서 두 사람이 내렸다.
한 사람은 거구의 마르틴 국왕.
그런데 옆에 훤칠하고 잘생긴 사람은 누군지 몰라 양측 지휘관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타일러 준장?'
1군단 부군단장인 티아스 준장이 타일러를 바로 알아봤다.
티아스는 에리히 군단장에게 귓속말로 타일러에 대해 말했다.
거구의 마르틴 국왕이 다가오자, 아리칸 왕국과 제국의 기사들이 가슴에 주먹을 대고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어서 오십시오. 마르틴 전하."
"모두 안으로 듭시다."
에리히 군단장이 마르틴과 지휘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마르틴 국왕의 왼쪽에 타일러가 함께 들어가자, 에리히는 미간을 좁혔다.
***
양 군의 지휘관들이 차례로 들어오고, 다들 간이 의자에 착석했다.
회의 시작 전에 에리히 중장이 나를 보고 말했다.
"타일러 준장, 자네가 비공정을 가지고 온 건가?"
난 에리히 중장을 보고 말했다.
"비공정을 가지고 온 건 맞지만, 전 이제 준장이 아닙니다. 6개월 전에 제대했습니다."
"뭐?"
"지금은 발레리온 영지의 영주로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황제께서 비공정을 제국군 소속도 아닌 자네에게 줬단 말인가?"
에리히 중장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난 피식 웃어줬다.
"에리히 중장님, 전 이제 제국군 소속이 아니라고 말씀드렸는데, 자꾸 실례하시네요."
"뭐라?"
"전 지금 황제 폐하께서 내리신 후작의 작위가 있는 제국의 대귀족입니다. 그런데 마치 아랫사람처럼 대하시면 큰 실례를 범하는 겁니다."
"자네, 아니 그대가 후작이라고?"
"그렇습니다."
난 대귀족의 상징인 보라색 인장 반지를 살짝 들어 보여줬다.
"그리고 비공정은 황제 폐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 저희 발레리온 영지의 것입니다."
에리히 군단장은 영문모를 표정을 지었다.
에리히가 티아스 준장을 쳐다봤지만, 그 역시 모르는 일이었다.
그때 마르틴 국왕이 손을 들고 말했다.
"그만 회의를 시작합시다. 먼저 오늘 우리 동맹군에 아주 좋은 소식이 있소. 다들 방금 보아서 알겠지만, 여기 타일러 후작께서 개인적으로 영지의 비공정 2척을 가지고 오셨소."
"오오!"
"좋았어!"
아리칸 기사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그동안 비공정이 부족해 마르틴 국왕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조금 전 타일러 후작께서 수도를 침공한 연합군을 격퇴했고, 비공정 2척을 나포했소."
"와아아!"
"오! 정말 잘 됐습니다!"
이번엔 양측 기사들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그동안 승리가 없었기에 다들 사기가 바닥이었고, 오랜만에 들린 승전 소식이었으니 기쁠 수밖에.
"아! 그래서 비공정이 5척 된 거구나!"
"이제 연합군 놈들의 비공정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겠어!"
지휘관들이 기뻐하는 모습에 마르틴 국왕도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좋은 소식은 타일러 후작께서 나포한 비공정 2척을 우리 아리칸 왕국에 선물로 주었소."
"네에?"
"비공정을요?"
양측의 기사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비공정 한 척이 기간트 20, 30대보다 값어치가 높았고, 그런 비공정을 2척이나 그냥 넘겨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타일러 경! 그 말이 사실이시오?"
에리히 중장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건 우리 제국군에 넘기는 것이 맞지 않겠소? 지금 우리도 비공정이 부족해······."
"지금은 이곳 전선만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나포한 비공정은 제 것이니 제 마음대로 줄 수 있습니다. 물론 황제 폐하께서 허락하셨고요."
"크흠."
황제가 허락했다고 하자, 에리히 중장도 더는 따지지 못했다.
마르틴 국왕이 말했다.
"자! 이제 우리에게 비공정도 생겼으니, 지휘관들에게 새로운 작전을 하달하겠소."
양측 지휘관들이 마른침을 삼키고 마르틴 국왕을 쳐다봤다.
"내일 연합군의 대대적인 공세가 있을 것이오. 그러니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전투가 예상되오."
지휘관들이 굳은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은 후퇴하면서도 적 타이탄의 숫자를 줄이는 데 최선을 다했다면, 내일은 무조건 저들의 전진을 막아야 하는 전투였다.
이곳이 뚫리면 수도였고, 수도는 사방이 뻥 뚫려 있었기에 방어할 거점이 없었다.
"작전은 간단하오. 나와 여기 타일러 후작의 병력이 적의 사령부를 치고, 후방 병참 부대를 치겠소. 그러니 여기 있는 그대들이 도시를 사수해 주시오."
기사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작전을 들은 아리칸 지휘관들은 주먹을 쥐고 결전을 다짐했다.
그러나 제국의 지휘관들은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티아스 준장이 말했다.
"적의 비공정이 아직 5척이나 있습니다. 그들이 추격하면 전하께서 고립될 수 있습니다."
"티아스 부군단장의 말이 맞습니다. 자칫하여 전하께서 잘 못 되시면 큰일입니다."
마르틴 국왕이 피식 웃었다.
"내가 그리 쉽게 죽을 것 같소? 걱정하지 마시오. 적 타이탄을 뚫고라도 돌아올 테니까."
하지만 마르틴 국왕의 의지를 꺾진 못했다.
"에리히 군단장, 이번엔 내 작전대로 해주시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반격할 유일한 기회요."
"알겠습니다. 저희 군도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그렇게 베르카도 방어전의 서막이 올랐다.
***
남쪽엔 라이덴 강이 변함없이 흐르고, 북쪽엔 일레이 산이 우뚝 솟아있었다.
산과 강 사이에 끼어 있는 도시 베르카도의 새벽이 끝나가고 있었다.
동쪽에서 해가 떠오른다.
쿵! 쿵! 쿵!
지축을 흔드는 발걸음.
아침 햇살을 받으며 푸른색 거대 병기들이 걸어온다.
도시 앞쪽 들판에 타이탄 수백 기가 집결했다.
[허! 더럽게 많이도 몰려왔네!]
[남쪽으로 간 병력도 합류한 거 아냐?]
[그건 아닐 거야. 그랬다면 남쪽을 지키던 우리 병력도 합류했겠지.]
[휴! 막을 수 있겠지?]
[그렇겠지······.]
너무 많은 타이탄을 보자, 기사들은 벌써 기가 질렸다.
[모두 마음을 단단히 먹어라!]
원탁의 기사 리오넬 대령이 소리쳤다.
그의 비장한 목소리에 기사들도 덩달아 비장해졌다.
도시 입구에 용의 이빨 방책을 몇 겹으로 두르고 건물과 건물 사이에 빼곡하게 바리케이드를 쳤지만, 얼마나 버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목숨을 다해 지킬 뿐.
지금 이곳엔 아리칸 왕국 기간트 220여 기와 1군단 기간트 160기가 주둔해 있었다.
반면 타이탄은 적어도 700기 이상의 대군이었다.
125. 베르카도 방어전(2).
125. 베르카도 방어전(2).
[적 비공정이다!]
공격 시기에 맞춰 5척의 비공정이 연합군 상공 위쪽에 모습을 드러냈다.
저 비공정 때문에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도망친 적이 몇 번이던가!
그랬기에 비공정의 등장만으로 사기가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고오오오!
"와아아아! 우리 비공정이다!"
"마르틴 국왕께서 오셨다!"
병사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도시 상공에도 동맹군 비공정이 5척이나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하늘과 땅에서의 전투.
생소한 상황에 기사들과 병사들은 더욱 긴장했다.
뿌아아앙! 뿌아아앙!
연합군의 진군나팔 소리가 들렸다.
쿠웅! 쿠웅! 쿠웅!
수백 기의 타이탄이 발을 맞춰 한발 한발 접근하는 소리에 땅이 흔들리고, 대기가 놀란 듯 묵직한 울음을 토해냈다.
저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마치 저승사자의 발걸음 같다고 느끼는 기사가 한둘이 아니었다.
저들은 사나운 맹수고 우리는 집을 지키는 파수꾼.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
그때 리오넬 포일란 대령이 다시 소리쳤다.
[들어라! 오늘은 승리가 아니면 이곳이 우리 무덤이 될 것이다! 기사들이여! 조국에 심장을 바쳐라!]
[심장을 바쳐라!]
[와아아!]
"와아아아!"
아리칸 왕국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있는 힘껏 함성을 내질렀다.
바로 뒤쪽에 대기하고 있는 제국군 기사들도 놀랄 정도였다.
위이이잉!
그 순간 동맹군의 비공정이 겁도 없이 적을 향해 날아갔다.
[마르틴 폐하께서 가신다!]
[와아아아!]
동맹군 기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건 거침없이 진군하고 있던 연합군의 타이탄 기사들도 마찬가지.
그리고 탈로스 글론 연합군의 비공정 5척도 곧바로 움직였다.
동맹군의 비공정이 진군하는 타이탄 부대 상공에 먼저 도착했다.
그런데 곧바로 적의 사령부로 날아갈 줄 알았던 비공정이 속도를 줄이고 아예 멈춰 섰다.
[뭐지? 왜 저기에 멈춘 거지?]
[글쎄?]
동맹군 비공정은 지금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지만, 선체 길이가 150미터가 넘는 비공정 5척이 겨우 300미터 상공에 낮게 떠 있었기에 아래쪽에서 볼 땐 상당히 위협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그러자 지상의 타이탄이 당황했는지 진군하는 속도가 조금 줄어들었다.
그때 연합군 비공정이 천천히 동맹군 비공정 앞으로 접근해 멈췄다.
상대 비공정을 견제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양측의 비공정의 거리는 겨우 700여 미터.
"모두가 우릴 지켜보고 있다! 가자!"
내 명령에 발레리온 비공정 2척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지금 연합군 비공정은 한곳에 뭉쳐있었다.
"전속 전진!"
"전속 전진!"
위이이잉!
고오오오!
좌우의 프로펠러가 무섭게 회전하고, 곧장 적 비공정을 향해 돌진했다.
그러자 적들 역시 속도를 높이며 앞으로 달려들었다.
연합군의 비공정은 4척.
'우리가 두렵긴 했나 보군.'
"꽉 잡아라!"
"꽉 잡아라!"
"쿠오오오크!"
위이이이!
콰앙! 콰콰쾅!
선체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선수와 선수가 부딪치자, 선수상과 선수 일부가 깨지며 지상으로 파편이 우수수 떨어졌다.
쿵! 쿠쿵!
밑에 있던 타이탄들이 흠칫 놀라며 일제히 위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또 다른 연합군 비공정이 우리 비공정 옆으로 붙었다.
쿠웅!
2대1의 싸움.
'나름 준비는 했나 본데!'
적들의 갑판엔 중갑옷을 입고 할버드를 든 많은 병력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곳곳에 3미터 크기의 작업용 타이탄이 단검과 망치를 들고 서 있었다.
피식 웃어줬다.
오크 강습병 다섯이면 폰급 기간트 한 대를 상대할 정도였다.
그런데 작업용 타이탄이 막을 수 있을까?
작업용은 말 그대로 작업을 위한 것으로 느린 속도에 출력도 낮았고, 물론 안에 타고 있는 사람도 기사가 아니었다.
"쿠훌린! 마음껏 날뛰어라!"
"쿠오오오!"
쿠훌린과 오크 강습병 30명이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휘익! 쿵! 쿵!
그들은 단숨에 적 선수 갑판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갑판에 있는 적 병사들을 향해 달렸다.
그때였다!
"우리도 넘어가라!"
"적들을 제압해!"
"와아아아!"
우현에 붙은 적 비공정에서 우리 갑판 위로 병사들이 넘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쪽에도 20명의 오크 해병이 남아 있었고, 엘프들도 있었다.
"죽어!"
"와아아!"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오크 해병을 향해 커다란 도끼를 휘둘렀다.
캉! 카캉! 캉!
"어?"
"꼼짝도 안 하는데?"
강습 갑옷은 폰급 기간트 갑옷과 같은 재질이다.
인간의 힘으론 잘해야 도끼 자국을 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성난 오크가 커다란 어금니를 드러냈다.
"쿠오오오오!"
오크 해병이 손에든 큰 칼을 휘둘렀다.
부앙! 촤악!
"크악!"
반편에 인간의 갑옷은 오크의 힘에 종잇장처럼 찢어진다.
"쿠아아아!"
퍽! 퍼퍽!
"크헉!"
"괴, 괴물이다!"
오크 해병들이 도끼와 큰 칼을 휘둘러 우리 비공정으로 넘어온 병사들을 순식간에 피떡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사체를 아래로 던졌다.
휘이이잉! 쿵! 쿵!
타이탄 위로 떨어진 시체들!
[으윽! 이게 뭐야!]
[젠장! 하늘에서 시체가 떨어지고 있어!]
타이탄 기사들은 인상을 찡그렸다.
하늘에서 시체가 떨어지는 경험이 달가울 리 없었다.
그것도 피떡이 된 아군의 시체가.
"막아!"
"으아악!"
쿠훌린과 오크 강습병들은 적 비공정 갑판을 초토화하고 있었다.
작업용 기간트는 전투용이 아니었기에 오크 강습병을 상대할 수 없었다.
쾅! 쩌억!
순식간에 해치가 뚫리고, 안에 탄 조종사는 목 없는 시체가 됐다.
"우리도 넘어가자!"
"쿠오크!"
우리 갑판에 올라온 적 병사들을 모두 처치한 오크 해병이 우측 비공정을 향해 뛰어들었다.
적 비공정이 뒤늦게 선체를 떼고 했지만, 오크들의 점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다다닥! 착!
오크 강습병이 점프와 동시에 등 오른쪽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태엽이 돌아가며 비행석을 감싸고 있던 물이 옆 체임버로 빠지며 강습 갑옷이 아주 가벼워졌다.
오크는 나는 듯 적 갑판 위로 이동했다.
그리고.
착!
다시 반대쪽 버튼을 누르자, 이번엔 물이 있던 체임버가 열리며 비행석이 있는 체임버로 물이 이동했다.
이는 드워프가 만든 강습 갑옷의 낙하 장치였다.
물에 휩싸인 비행석은 그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고, 묵직해진 오크는 적 갑판에 착지한다.
쿵! 쿵! 쿵!
"헉! 어, 어떻게? 이 거리를?"
적 비공정의 병사들은 경악했다.
지금 오크가 30미터나 되는 거리를 뛰어넘어 자신들의 비공정으로 뛰어들었으니까!
오크들이 저렇게까지 익숙하게 강습 갑옷을 다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땀을 흘렸는지 알고 있었기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실전 연습을 한다며 거신목 나뭇가지를 뛰어넘다가 강습 갑옷의 태엽이 안 감겨 있거나 풀려 있어 목뼈가 부러진 오크도 있었고, 초기 모델엔 결함이 많아 목숨을 잃은 오크도 있었다.
하지만 드워프와 오크는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지금의 강습 갑옷을 만들었고, 이젠 아주 능숙하게 다루고 있었다.
적 비공정으로 넘어간 오크 해병들이 갑판에 병사들을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오크 때문에 작은 기간트도 만들겠군.'
전쟁은 적에 맞춰 진화한다.
이번 오크 해병대의 활약은 원래 가디언 제국 전투에 쓸 생각이었지만, 일찍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니 이제 가디언 제국도 비공정을 지키고 오크 강습병에 대항하기 위해 뭔가를 만들 것이다.
십중팔구 3미터 크기의 작은 전투용 마장기겠지.
"쿠오오오크!"
쿠훌린의 함성이 들렸다.
적 비공정을 나포한 것이다.
선수로 달려가 소리쳤다.
"작업용 타이탄을 아래로 던져라!"
"쿠오크! 알았다! 타일러여!"
오크들이 작업용 타이탄을 비공정 아래로 던지기 시작했다.
쾅! 쿵! 콰아앙!
[으헉!]
[피해라!]
시체가 떨어지는 것과 작업용이지만 3미터짜리 기간트가 300미터 높이에서 떨어지는 것은 엄청난 차이였다.
직격으로 맞으면 큰 타이탄들도 머리와 몸통이 깨졌고, 스쳐도 어깨와 팔이 빠질 정도였기에 기체가 전투 불능이 된다.
"쿠오오오!"
좌측에서 들리는 오크 함성에 고개를 돌렸다.
에테나의 비공정도 한 척의 비공정을 나포했고, 또 다른 비공정은 지레 겁먹고 전장을 이탈해 도망치고 있었다.
'에테나에게 말해 적 비공정을 쫓으라고 해!'
'네! 주군!'
난 자동인형 더그에게 명령했다.
아직은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기에 명령을 깃발이나 반사경, 라이트를 이용해 전달하고 있었다.
'무선 통신도 발전하겠지.'
모르긴 몰라도 비공정이 많은 두 제국은 이미 하늘과 지상, 비공정끼리 원활한 명령과 의사소통을 위해 마석 통신기 개발에 몰두하고 있을 것이다.
에테나의 비공정이 적 비공정을 쫓아갔다.
드워프제 비공정이 속도가 빨랐기에 곧 뒤를 잡을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앞쪽에 있는 비공정뿐이었다.
"우린 앞쪽에 비공정을 공격한다!"
오크 해병대를 다시 태울 시간이 없었다.
곧바로 남은 한 척의 비공정으로 향했고, 그 순간 우리 뒤쪽에 대기하고 있던 아리칸 왕국의 비공정 3척이 전속력으로 전진 사령부를 향해 날아갔다.
[와아아아!]
"와아아아!"
밑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동맹국의 기사와 병사들이 엄청난 함성을 질렀다.
그리고 전진하던 타이탄 기사들의 사기가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들의 진군 속도가 현저하게 느려졌으니까.
'좋아! 적의 기세가 꺾었다.'
일단 적의 비공정을 공격해 기세를 한번 꺾고 가자는 내 작전을 마르틴 국왕이 받아 주었다.
그리고 아주 깔끔하게 성공했다.
이건 단순히 비공정을 나포한 것이 아니었다.
아래 갑판엔 타이탄이 있었다.
그것도 10기가.
그 안엔 기사도 타고 있었고,
문제라면 그들이 갑판 위로 올라갈 방법이 없었다.
좁은 선체 때문에 격납고의 타이탄들은 비스듬한 상태로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움직일 공간이 없었다.
그렇다고 선체를 부쉈다간 자신들이 떨어질 것이고, 아래에 있는 타이탄과 부딪쳐 함께 죽는 길뿐이었다.
그렇다고 기사들이 맨몸으로 올라갔다간, 성난 오크의 제물이 될 뿐이었다.
쾅! 콰콰쾅!
그 사이 선두 타이탄들이 방책을 넘어 도시 입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훗! 저놈들이 도망가네······.'
지휘선으로 보인 비공정이 기체를 돌리고 후방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속도를 올려라! 놈들을 쫓아!"
전장을 이탈하기도 쉽지 않았다.
우리 비공정이 더 빠르니까.
게다가 이곳 갑판엔 작업용 타이탄도 없었다.
"바짝 붙여! 내가 넘어간다!"
"네! 조심하십시오."
엘프 항해사가 선체를 적 비공정 후미에 붙였다.
"이야!"
다다다닥!
휘익! 탁!
선미 갑판에 무사히 착지했다.
선미에 있던 비공정 지휘관과 병사들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넘어온 것이 오크가 아니라 나 혼자뿐이자,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미친 새끼! 처리해!"
"죽어!"
병사들이 달려들었다.
나 혼자도 충분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크아앙!"
표범인형이 인형의 집에서 튀어 나가며 병사들을 덮쳤다.
순식간에 선미 갑판은 피바다.
촤악!
"크헉!"
난 선장을 죽이고 발로 찼다.
"치타! 나머지 놈들을 처리해!"
"크앙!"
표범인형이 갑판을 향해 달렸다.
난 방향타를 돌렸다.
촤르르르!
도망치던 비공정은 다시 전선으로 향한다.
그리고.
'나와라! 킹콩인형!'
7미터의 킹콩인형이 나오자마자, 균형을 잡기 위해 선미 돛대를 잡았다.
연합군의 비공정 역시 내 비공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엘프의 비공정에 마석 엔진을 탑재하고 선미에서 조종한다.
그리고 이미 저들의 비공정 2척을 나포했기에 조종법은 익숙했다.
"고도를 낮춘다. 밸브 열어!"
철컥!
킹콩 인형이 밸브를 하나 잡아당겼다.
그러자 비행석 상자에 물이 채워지며, 비공정이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프로펠러가 있긴 하지만, 이것만으로 공중을 날진 못한다.
난 비공정을 조종하며, 도시를 공격하는 타이탄 행렬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철컥! 철컥!
차례로 10개의 밸브를 다 열자, 비공정이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이미 갑판에 병사들은 표범 괴수가 모두 처리했다.
"킹콩! 부셔!"'
"크어어어!"
쿵쿵쿵!
가슴을 두들긴 킹콩인형이 밸브를 모두 주먹으로 박살 냈다.
이제 비공정은 추락한다.
'비공정을 가까이 붙여라!'
내 비공정이 좌현에 붙었다.
'킹콩, 이제 방향타도 부숴라!'
쾅! 콰앙!
이제 비공정은 방향을 돌릴 수도 없었다.
난 달려가 내 비공정으로 넘어갔다.
"우린 고도를 높인다!"
우리 비공정은 상승하고, 곧바로 두 괴수인형을 인형의 집에 넣었다.
타이탄 10대를 실은 비공정은 도시를 향해 진군하는 타이탄을 향해 돌진했다.
'싸움은 역시 기선 제압이지!'
126. 베르카도 방어전(3).
126. 베르카도 방어전(3).
지금 추락하는 것엔 날개는 없었다.
뭔가 섬뜩한 살기를 느꼈을까?
[이봐!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지 않아?]
비숍급 타이탄이 말을 내뱉고는 고개를 휙 뒤로 돌렸다.
하지만 그곳엔 자신처럼 곧 있을 전투를 기다리는 동료 기사의 타이탄밖에 없었다.
퉁퉁!
옆에 있던 비숍급 타이탄이 주먹으로 어깨를 두들겼다.
[스팅, 집중해! 곧 우리 부대 차례야!]
스팅 소령이 다시 앞을 바라봤지만, 도무지 전투에 집중할 순 없었다.
뭔가 다가올 위험이 느껴졌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자신에게 큰 위협이 오면 항상 심장이 두근거렸고 손가락 끝이 찌릿한 느낌이 들었다.
그럴 때면 항상 주변을 둘러봤고, 그러다가 위기를 넘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금 그 기묘한 촉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이건 큰 위기가 온다는 뜻!
스팅 소령의 타이탄이 다시 고개를 뒤로 돌렸다.
이번에도 아무것도 없자, 고개를 들었다.
[헉! 씨발!]
스팅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 나왔다.
다가오는 위험을 알았건만, 이건 피할 수가 없었다.
거의 35도의 각도로 곤두박질치는 150미터 길이의 비공정이 자신을 향해 오고 있었다.
[뭐야?]
[으아! 맙소사!]
[피, 피해라!]
뒤늦게 동료 기사들이 하늘을 쳐다보며 소리쳤지만,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스팅 소령과 타이탄들을 그대로 덮쳤다.
콰앙! 콰콰콰콰콰콰콰앙!
쿠쿠쿠쿠쿵! 쿠앙!
굉음과 굉음!
그리고 또다시 굉음!
무언가 쓸리고, 덮이고, 부서지고, 박살 나는 소리가 전장을 휘감았다.
갑자기 찾아온 침묵.
[으으······.]
[으아아악!]
[살려줘!]
침묵을 깬 것은 다친 타이탄 기사들의 비명과 구조 신호였다.
그나마 비명을 지른 기사들은 좀 나은 축이었다.
비공정이 추락하면서 휩쓸린 타이탄과 비공정에서 떨어져 나간 타이탄과 부딪친 기사들은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대부분 즉사했으니까.
[허! 뭐, 뭐야?]
[이게 무슨 일이야?]
[우리 비공정이 우리 머리 위에 추락했어······.]
거대한 비공정이 휩쓸고 지나간 거리가 400여 미터나 됐다.
그리고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있던 타이탄이 100기가 넘었다.
지금 신음을 흘리는 타이탄은 추락한 충격에 옆으로 튕겨 날아간 기체와 큰 충격에서도 살아남아 비공정 밑에서 기어 나오는 찌그러진 기체들이었다.
[와아아아!]
"와아아아!"
갑자기 도시 안쪽에서 동맹군의 엄청난 환호성과 함성이 들렸다.
그 반대로 전진하던 타이탄들은 이 지옥 같은 광경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마치 끔찍한 악몽을 꾸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계속 전진해라!]
[도시를 무너트려라!]
탈로스 글론 연합 왕국의 일선 지휘관들이 소리쳤다.
[동료들의 원수를 갚아라!]
[공격해라! 도시를 점령해라!]
하늘에서 전투는 이미 기울었지만, 지상은 아직 기회가 있었다.
비록 100여 기의 타이탄이 한순간에 전투 불능이 됐지만, 살아남은 기사들도 있었고, 아직 거대 병기는 연합군이 더 많았으니까.
'완벽한 추락이었어!'
솔직히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충격이 훨씬 더 컸다.
타이탄 10대가 있었기에 무게가 더 무거워졌고, 고도를 높여 속도를 최대로 올렸다가 비행석의 능력을 하나씩 제거했고 추락시켰다.
아마 후미에서는 추락하는 비공정을 발견했을 것이다.
하지만 타이탄이 진군하는 소리와 전장에서 거대 병기들이 싸우는 소음에 추락을 경고하는 소리가 전방까진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기에 피해가 더 커졌고.
'역시 무선 통신기가 필요해!'
타이탄끼리 혹은 부대 지휘부와 무선 통신이 가능했다면, 추락을 미리 경고했을 것이고 피해는 크지 않았을 것이다.
마석 통신기 개발이 빨리 필요해 보였다.
방금 내가 펼친 작전은 적도 할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리고 전에는 이런 위협이 없었다.
방금 추락한 비공정은 아깝지 않았다.
비공정이야 얼마든지 재료가 많으니 다시 만들 수 있었다.
다만 가장 필요한 재료인 비행석이 중요했는데, 저 추락한 비공정에 비행석은 그대로 있을 것이다.
전투에서 이기면 회수할 수 있겠지.
그때 멀리서 에테나의 비공정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피식 웃음이 흘렀다.
역시 혼자가 아니다.
그녀의 비공정도 2척의 적 비공정을 나포했다.
나도 오크들이 나포한 적 비공정들을 한곳에 모았다.
그리고 엘프 조종사들을 다른 비공정에 나눠 태웠다.
나포한 4척의 비공정은 후미로 보냈다.
그리고 에테나와 난 오크 해병대를 태우고 마르틴 국왕이 날아간 적 사령부로 출발했다.
"서둘러라!"
우린 전속력으로 항진했다.
마르틴 국왕이 이끄는 크루세이더 기사단은 아리칸 최고의 기사단이었다.
원래는 100기의 기간트로 이루어진 국왕 직속 기사단이었지만, 지금 적진으로 날아간 비공정은 3척.
그러니 고작 30기의 기간트로 적 사령부를 공격하겠다는 말이었다.
게다가 오리지널 기간트도 퀸급 1대밖에 없었다.
'마르틴이 무사해야 할 텐데······'
애써 얻은 동맹이었다.
위험하면 비공정으로 탈출하라고 말을 했지만, 마르틴 국왕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 자신의 도시가 공격받고 있었고, 자신의 기사들이 죽기 살기로 싸우고 있었다.
그들을 살리기 위해선 적 사령부를 궤멸시키고, 마석 배터리 같은 병참 물자를 파괴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러니 죽기를 각오하고, 아니!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싸울 사람이었다.
"저기다!"
전장에서 멀지 않은 곳!
아니! 이곳도 전장이었다.
야전 천막과 텐트가 몰려 있는 적진을 뚫고 마르틴 국왕과 크루세이더 기사들이 사방에서 돌진하고 있었다.
비공정이 공격받을까, 타이탄이 없는 사령부 근처에 기간트를 내린 것 같았다.
그리고 3면에서 공격해 들어간 모습이었다.
그런데!
'허! 저걸 다 부셨다고?'
그들이 지나온 자리엔 수십 기의 타이탄이 부서져 있었고, 지금도 마르틴의 퀸급 기간트와 크루세이더 기간트들이 사정없이 타이탄을 부수고 있었다.
크루세이더 기간트 기사들도 강했지만, 마르틴 국왕의 우가스는 마치 전장의 사신 같았다.
그는 지금 주변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었다.
'무시무시하군!'
이미 아베르크 황궁에서 그의 실력을 살짝 봤지만, 그때 보여준 모습은 새 발의 피였다.
우가스의 낫이 휘둘리면 어김없이 타이탄 하나가 사라지고, 그의 낫에는 눈이 달린 듯 정확히 타이탄의 해치만을 노렸다. 살벌한 낫 공격에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도 동맹 하나는 잘 골랐네······.'
우리에게 비공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적 사령부도 나름 대비는 한 것 같았다.
사령부 진지에 100기 가까운 타이탄을 배치한 것을 보면.
'여긴 이미 끝났군.'
남은 타이탄이 아직 40기 정도 있었지만, 마르틴 국왕을 도울 필요는 없어 보였다.
우가스와 크루세이더 기간트는 아직도 쌩쌩했으니까.
"우린 저들의 병참 부대로 가자!"
마르틴 국왕의 정보라면 사령부 서쪽에 적의 병참기지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없네? 없어?'
지금 오크와 엘프들도 다 함께 살펴보고 있었으나 적의 병참기지가 없었다.
적 사령부를 날려버리고 지휘부를 궤멸시키는 것은 적의 사기를 꺾고 혼란에 빠트리는 중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부대를 이끌고 전선에서 싸우는 일선 지휘관들이 있었기에 어느 정도 버틸 순 있었다.
반면에 병참기지를 날려버리는 것은 지금 싸우고 있는 적들에게 실질적인 위협이 된다.
기간트나 타이탄은 마석 배터리 하나로 보통 열흘에서 보름 정도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냥 걷기만 하고, 밤엔 쉴 때 상황이었다.
반면에 격렬한 전투를 하게 되면, 마석 배터리는 하루도 안 돼서 소모된다.
특히 타이탄은 기간트나 마장기와 비교하면 배터리 소모량이 많았다.
탈로스 왕국의 기술력이 아직은 두 제국을 따라가지 못함이다.
그러니 병참기지를 박살 내면, 마석 배터리를 교체할 수 없었고, 거대 병기는 오래지 않아 그냥 고철 덩어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식량이나 물자 없이 오래 버티지 못한다.
"저쪽 숲으로 가봐!"
"네!"
비공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이 근처엔 병참기지가 없었다.
'아! 우리 비공정이 추가된 것을 알고, 옮긴 것이구나!'
연합군 사령부도 바보는 아니었다.
에테나가 탄 비공정도 적 병참기지를 발견하지 못했다.
"고도를 더 높여라!"
우린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지상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비공정을 나포한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다.
땅속에 기지를 만들 시간은 당연히 없었다.
그러니 기지를 옮기더라도 뭔가 엄폐물이 필요할 것이다.
지금 가장 좋은 것은.
'그래, 숲이다!'
우리 영지에 비밀 야영지를 숲에 만든 것도 적의 눈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걸 알 테니, 꼭꼭 숨겼을 것이다.
기간트가 지키고 있을 것이고, 1,000기 가까운 대규모 타이탄 부대의 병참이었으니, 작은 숲은 아닐 거고 좀 규모가 있는 숲이라면······.
'저기겠군!'
피식 웃었다.
북쪽에 제법 큰 규모의 숲이 보였다.
거리도 사령부와 그리 멀지 않았고.
두 척의 비공정을 이끌고 숲으로 이동했다.
'정말 꼭꼭 잘 숨겼네.'
하지만 내 눈을 속일 순 없었다.
마나를 눈에 뿜어내며 지상을 살폈다.
그러자 숲 동쪽 가장자리에 저들의 보급 부대가 보였다.
나름 위장한다고 했지만, 거대 병기는 쉽게 감춰지는 것이 아니다.
대략 50기의 타이탄이 지키고 있었다.
예상보다 숫자가 많았다.
연합군도 우리의 비공정 숫자가 많아지자, 나름대로 대비하고 있었다.
"고도를 낮춰라! 기간트를 내려라!"
시간이 없었기에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숲 동쪽 벌판에 비공정을 내렸다.
"모두 강하하라!"
[발레리온의 기사들이여! 강하하라!]
[가자!]
기이잉! 쿵! 쿵!
14기의 기간트가 숲 동쪽에 내렸다.
그리고 나와 에테나도 기간트에 타고 내렸다.
[마키아스! 펠릭스! 저들의 병참기지가 저 숲에 있다. 그대들은 이대로 전진해 적들의 병참기지를 공격하게.]
[네! 주군]
[그리고 숲으로 들어가지 말고, 적들을 밖으로 유인하게. 나와 에테나는 숲을 돌아 뒤를 치겠다.]
펠릭스 단장이 말했다.
[그런데 2척으로 되겠습니까?]
[그림자 기사단을 출격시킬 것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아! 알겠습니다.]
그림자 기사단이란 말에 펠릭스와 마키아스의 기간트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트라스의 개와 하얀 악마 기사단의 기사들은 이미 내 마법인형인 그림자 기사단을 알고 있었다.
영지에서 전투 훈련을 할 때, 그들을 불러왔었다.
그리고 그림자 기사단과 두 기사단은 자주 합동 훈련과 집단 전투 훈련을 함께 했다.
주로 인간 기사단과 마법인형 기사단의 대결이었지만, 근소하게 인간 기사들이 이겼다.
기간트 숫자는 14대20으로 인간들이 적었지만, 협력하거나 임기응변 능력이 더 뛰어났고, 오리지널 기간트가 2대나 있었고, 천재 마키아스 때문에 매번 인간 기사들이 승리했다.
그러나 내가 마법인형 군단 쪽에 붙으면 항상 이겼다.
모든 마법인형들은 내 지시를 받아야 전장에서 빛이 나고, 강렬한 활약을 할 수 있었으니까.
물론 암 드로운이 합류한다면 내가 없어도 압도적으로 이기겠지만.
'그런데 암 드로운은 왜 돌아오지 않는 거지?'
아무래도 전쟁이 모두 끝나면 내가 차원 마법진을 통해 암 드로운을 찾으러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때까지 무사했으면.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전투에 집중해야 했다.
[어서 서둘러라!]
[네!]
기이잉! 쿵! 쿵!
두 기사가 두 기사단을 이끌고 저들이 숨어 있는 숲으로 이동했다.
***
트라스의 개와 하얀 악마 기사단이 숲 동쪽으로 접근할 때, 나와 에테나는 숲을 돌아서 병참기지로 달렸다.
얼마나 들어왔을까?
'모두 나와라!'
자동인형과 꼭두각시가 먼저 나오고, 괴수 마법인형들이 기간트를 꺼냈다.
[모두 탑승해라! 이번 전투는 꼭두각시들의 기간트가 선두에 선다!]
전투도 전투지만, 꼭두각시들의 자아 각성도 중요했다.
현재 나와 함께 있는 자동인형은 13.
이번에 영지에서 전투 훈련하면서 꼭두각시 둘이 각성해 자동인형이 열셋이 되었다.
남은 7명의 꼭두각시도 빨리 자동인형으로 업그레이드해야 그만큼 작전 범위가 넓어진다.
자동인형은 비공정에 따로 태울 수 있었지만, 꼭두각시는 항상 700미터 범위 내에 있어야 했다.
아니면 운명의 실이 모두 끊어지니까.
127. 베르카도 방어전(4).
127. 베르카도 방어전(4).
그리고 이젠 마법인형을 더 자주 사용해야 했다.
그래서 운명의 실타래(lv.14) 스킬 레벨을 올려야 했다.
전생에 S급 헌터가 됐을 때, 난 수백 명의 마법인형 군단을 지휘할 수 있었다.
그때는 20년이나 인형술사 헌터를 했었고, 늘 마법인형을 데리고 전투를 했기에 운명의 실타래 레벨이 상당히 높았다.
하지만 지금은 내 실력을 숨겨야 했기에 마법인형을 전투에 많이 내보내지 못했고, 짧은 기간에 S급 헌터가 됐기에 스킬 레벨이 높진 않았다.
그러니 앞으로 마법인형을 많이 써 운명의 실타래 레벨을 올리고, 운명의 실타래를 늘릴 생각이었다.
지금 내 인형의 집엔 아직도 허수아비 마법인형이 많았다.
그들 모두 기간트 기사였기에 운명의 실타래 스킬 레벨만 올린다면, 바로 꼭두각시로 만들 수 있고, 그럼 오래지 않아 자동인형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럼 20대의 기간트가 아니라, 수십 대의 기간트를 운용할 수 있었다.
[모두 이동한다!]
우린 숲을 통과해 병참기지 서쪽에 도착했다.
내 마나를 뿜어내는 눈으로 살피자, 병참기지 동쪽에 내 기사단과 타이탄이 싸우는 모습이 보였다.
내 명령대로 펠릭스와 마키아스가 달려들지 않고, 저들을 숲 밖으로 유인하고 있었다.
[자! 가자! 한 번에 몰아친다!]
에테나의 기간트가 검을 뻔쩍 들었다.
[기사들이여! 적을 쓸어버려라!]
'응? 에테나가 저런 말을?'
우린 적의 병참기지를 공격했다.
쿵! 쿠쿠쿠쿵!
[적에게 죽음을!]
꼭두각시들과 자동인형이 탄 기간트가 우르르 병참기지를 지키는 적 타이탄을 향해 달려들었다.
마나인형 꼭두각시들의 자아 각성은 기간트 전투 중 훨씬 많이 일어났기에 이번 전투도 기회였다.
그들은 기간트 기사들이었기에 내 마법인형이 되었어도 잠재의식 같은 것이 남아 있는 듯했다.
쾅! 콰콰쾅!
[밀어붙여라!]
[놈들을 공격해!]
숲 밖에선 두 기사단이 공격했고, 숲 안쪽에선 내 마법인형이 군단이 공격했다.
양쪽에서 정신없이 몰아치자, 숫자가 많았음에도 타이탄 기사들은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그리고 하나둘 내 마법인형들에게 쓰러졌다.
[운명의 실타래(lv.14) 레벨이 올랐습니다.]
[운명의 실타래(lv.14) -> 운명의 실타래(lv.15)]
'오! 좋았어!'
그동안 거의 오르지 않았던 스킬 레벨이 올랐다.
우리 기간트끼리 5개월 동안 치고받고 대결을 펼치고 훈련을 했어도 경험치는 많이 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생사를 건 전투와 비슷한 능력의 적을 죽이면 경험치도 많이 오르고 스킬 경험치도 훨씬 많이 오르기에 스킬 레벨이 올랐다.
이제 운명의 실타래 여유가 900개 정도 됐기에 꼭두각시를 10개는 더 늘릴 수 있었다.
그럼 30개의 기간트를 운용할 수 있었다.
오늘 부서진 50개의 타이탄과 타이탄용 마석 배터리도 수천 개나 획득할 테니, 거대 병기가 부족할 리는 없었고.
기간트가 30대라······.
진짜 항공모함이 되어 가는군.
[덤벼라!]
'응?'
에테나의 로렐라이가 겁도 없이 혼자서 적 지휘관을 향해 달려들었다.
적은 룩급 타이탄!
타이탄이 들고 있는 거대한 도끼에 맞으면 오리지널 기간트라도 박살 난다.
쿵쿵쿵! 촤악!
에테나의 나이트급 오리지널 기간트가 커다란 도끼를 피해 바닥에 미끄러지며, 검으로 룩급 타이탄의 다리를 공격했다.
휘익! 쩌엉!
무릎을 공격받은 룩급 기간트가 휘청였다.
벌떡 일어선 로렐라이가 뒤쪽에서 달려들었다.
쿵쿵! 퍼걱!
그녀는 방금 공격했던 무릎을 다시 공격했다.
[크윽!]
룩급 타이탄이 버티지 못하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쿵!
타이탄 기사도 당하지만은 않았다.
등 뒤로 도끼를 휘둘렀다.
부아아앙!
거센 바람을 일으켰지만, 로렐라이는 이미 뒤로 물러선 상대.
아니, 반대편으로 돌아 달려들고 있었다!
[이야!]
쾅! 콰직!
그녀의 단검이 고개를 돌리던 룩급 타이탄의 안면을 뚫었다.
다시 타이탄이 도끼를 휘둘렀지만, 그녀의 기간트는 벌써 뒤로 빠졌다.
시야를 잃은 타이탄이 허우적대고, 로렐라이는 전면에서 달려들어 검으로 머리통을 날려버렸다.
콰앙!
'허! 역시 움직임이 다르네······.'
난 고개를 흔들었다.
보통 기간트 기사들은 저렇게 싸우지 않는다.
그녀는 기간트에 탔어도 꼭 엘프처럼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저렇게 날렵한 행동을 보이기까지 무던히 연습하는 모습을 보았다.
쾅! 쿠우웅!
룩급 타이탄이 배를 찔리며 앞으로 꼬꾸라졌다.
'이겼네!'
오리지널 나이트급 기체는 보통 양산형 룩급과 비슷한 수준으로 친다.
힘에선 크기가 더 큰 룩급 양산형이 유리했지만, 움직임은 오리지널 기간트가 더 빨랐다.
하지만 이건 비슷한 실력의 기사가 탔을 때 이야기고.
에테나처럼 기체와 싱크로율이 높은 기사가 오리지널 기간트에 탔을 땐, 방금과 같은 결과가 나온다.
물론 상대 룩급 타이탄의 움직임이 조금만 더 좋았다면, 에테나가 당했을 수도 있다.
'에테나도 비숍급 오리지널 기간트를 줘야겠네.'
그게 더 안전했다.
전에도 느꼈지만, 그녀의 실력이 너무 빠르게 늘고 있었다.
지금은 마나 팔찌도 내가 차고 있는데······.
[주군님! 적들을 모두 쓰러트렸습니다!]
마키아스 단장이 탄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가 다가와 말했다.
숫자야 우리가 십여 대나 적었지만, 질적인 차이가 너무 컸다.
[피해는?]
[일부 기간트가 조금 긁힌 정도입니다.]
[잘했다.]
두 기사단장과 기사들이 늠름했다.
적어도 두 기사단의 기간트가 두세 대 정도는 파괴될 줄 알았는데 피해가 경미했고, 오히려 내 마법인형이 탄 기간트 2대가 파괴되었다.
그래도 이번 전투는 대승이었다.
[시간이 없다. 부서진 타이탄을 모두 모아라!]
[네!]
사실 병참기지를 파괴하거나 내 인형의 집으로 들어가거나 결과는 마찬가지였기에 내가 모두 챙기기로 했다.
아까우니까!
기사들은 먼저 비공정에 태웠고, 괴수인형을 꺼내 부서진 타이탄과 병참기지의 물건을 인형의 집에 넣었다.
거의 1,000기 가까운 타이탄 부대를 위한 병참이었기에 드라우켄까지 도왔음에도 제법 시간이 걸렸다.
이제 난 타이탄까지 보유하게 되었다.
타이탄의 전체적인 성능이 기간트와 마장기보다 조금 떨어지지만, 일부 마법진과 마석 배터리 효율 부분만 손보면, 거의 비슷한 성능을 낼 수 있었다.
"천막과 텐트에 불을 질러라!"
화륵! 화르르르!
마지막으로 적의 병참기지였던 곳에 불을 질렀다.
그래야 전방에서 싸우고 있는 타이탄들이 자신들의 병참기지가 당했다는 것을 알 테니까.
"고도를 높여라!"
"고도를 높여라!"
시커먼 연기를 보고 마르틴 국왕의 비공정이 우리 쪽으로 날아왔다.
그들도 적 사령부를 초토화하고, 병참기지를 찾고 있었다.
그렇게 합류한 비공정은 베르카도로 향했다.
***
[크윽!]
리오넬 대령이 이를 악물었다.
바리케이드가 부서지고, 건물이 무너지며 입구가 돌파당했다.
아리칸의 기사들이 필사적으로 막고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2차 방어선으로 물러서라!]
리오넬 대령이 소리쳤다.
[2차 방어선으로!]
아리칸의 기간트들이 뒷걸음질 치며, 조금씩 물러섰다.
비공정 추락 후 연합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지만, 여전히 수적인 압박이 유효했다.
타이탄들이 밀고 들어오며, 시가전이 벌어졌다.
[제장! 더럽게 몰려오네!]
쾅! 쾅!
리오넬의 룩급 기간트 기드온이 달려드는 타이탄을 향해 도끼를 사정없이 내려치지만, 뒤로 밀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만 그가 시간을 벌어주자, 주변에 있던 기간트들이 뒤로 무사히 후퇴할 수 있었다.
아리칸의 기간트들이 300여 미터 뒤쪽에 있는 2차 방어선으로 후퇴했다.
[너희는 조금 쉬라고!]
[우리가 실력을 보여주겠다.]
그곳엔 제국 1군단의 기간트들이 있었다.
[놈들이 온다!]
[헉! 너무 많잖아!]
쿠쿠쿠쿵! 쿠쿠쿵!
푸른색 기갑이 우르르 몰려오자, 1군단 기사들이 깜짝 놀랐다.
이곳을 지키란 명령을 받았기에 이번엔 후퇴할 수도 없었다.
여기서 밀리면 연합군은 수도로 진군하고, 더는 막을 수 없음이다.
1군단의 기간트가 주춤거릴 때였다.
[모두 대열을 지켜라!]
그때 부군단장 티아스 준장이 소리쳤다.
그리고 그가 탄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 비올란테가 앞으로 나섰다!
[제국의 기사들이여! 적을 막아라!]
[싸워라!]
[와아아아!]
쾅! 콰콰쾅!
또다시 시작된 2차전.
1군단의 기간트가 타이탄과 싸우기 시작했다.
[죽어!]
쿵쿵쿵!
티아스 준장의 비올란테가 달려드는 타이탄의 머리통을 찔렀다. 그리고 발로 타이탄의 배를 걷어찼다.
퍼억! 쿠웅!
쓰러진 타이탄을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달려드는 또 다른 타이탄을 상대해야 했으니까.
콰앙!
검과 검이 부딪치고, 육중한 것들이 어깨를 밀고 힘 싸움을 시작한다.
이곳은 도시 입구처럼 바리케이드도 없었고, 건물과 기체만으로 막아야 했다.
[크윽! 밀리지 마라!]
[적들을 막아!]
비올란테와 1군단의 기간트가 분전했지만,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워낙 넓은 지역이었고, 적들은 많았으니까.
[제국의 기사들을 도와라!]
[앞으로 가라!]
뒤쪽에서 잠시 쉬고 있던 아리칸의 기간트가 다시 합류했다.
그들은 지금 젖먹던 힘까지 내고 있었다.
동맹군이 모두 힘을 합하자, 균형이 어느 정도 맞춰졌다.
[버텨라! 마르틴 전하께서 오실 것이다!]
리오넬 대령이 도끼를 휘두르며 소리쳤다.
오늘 아리칸 기사들과 제국의 기사들이 처음으로 함께 결사 항전을 벌이고 있었다.
옆에 쓰러지는 동료가 있어도 도울 수 없었다.
자신이 밀리면 다른 동료가 밀린다.
쿵! 우르르르!
건물이 무너지고, 도로가 파였다.
도시는 엉망이 되고 사방에 부서진 기간트와 타이탄이 나뒹굴었다.
리오넬 대령이 이를 악물었다.
버티고 버텼지만, 조금씩 밀린다.
여기서 밀리면, 지휘 본부고.
그곳엔 남은 기간트도 없었다.
그때였다!
검은 그림자가 전장을 뒤덮었다.
[비공정이다!]
[마르틴 전하께서 오셨다!]
비공정은 후방에 내렸고, 마르틴 국왕과 크루세이더 기간트가 달려와 전장에 합류했다.
[전군 돌진 하라!]
막으라는 명령이 아니었다!
[앞으로 공격하라!]
마르틴 국왕이 우가스가 커다란 낫을 들고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크루세이더 기간트들이 타이탄들을 공격했다.
그리고 뒤쪽에서 날아온 비공정!
"투하하라!"
[투하!]
휘익! 휘익!
휘이이잉!
[뭐, 뭐야?]
[헉! 위험해!]
쿵! 쿠앙!
건물 잔해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비공정으로 잔해를 싣고 300미터 높이에서 떨어트려 충격을 준다.
난 지금 그걸 하고 있었다.
비공정에 잔해가 떨어지면 후방으로 가서 다시 잔해를 싣고, 전방으로 날아간다.
그리고 안에 탄 2기의 기간트가 잔해를 아래로 떨어트리는 것이다.
비공정으로 하늘을 지배하면 이런 전략도 가능하다.
[피해라!]
[미친! 저걸 어떻게 막아!]
사실 잔해에 맞아 부서진 타이탄 숫자는 몇 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닿을 수 없는 높이의 비공정.
막을 수 없는 건물 잔해.
언제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공포심이 전장에 퍼졌다.
기사들의 몸은 굳고, 타이탄의 진군은 느려진다.
[뭐야? 사령부가 당했다!]
[병참기지에 불이 났다!]
일선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지휘관들뿐만 아니라 기사들도 뒤쪽에서 치솟는 검은 연기를 보았다.
이젠 사기가 떨어지는 수준이 아니었다.
죽을 수 있다는 공포감이 밀려든다.
쿠아앙!
타이탄이 쓰러지며 건물을 뚫고 도시 밖으로 튀어 나왔다.
그리고 그 구멍으로 13미터 크기의 퀸급 기간트 우가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왕국을 침범한 적들을 쓰러트려라!]
[와아아!]
우가스를 시작으로 크루세이더 기간트가 몰려나왔고, 도시 입구에서도 동맹군의 기간트가 도시 밖으로 나와 진군하기 시작했다.
연합군 지휘관들은 혼란에 빠졌다.
명령을 받아야 할 사령부도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었고, 병참기지도 당했다.
게다가 전선도 밀리기 시작하자, 자신들도 어떤 명령을 내릴지 몰랐다.
[후, 후퇴하라!]
한 지휘관이 소리쳤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후퇴하라!]
[병력을 물려라!]
타이탄들이 몸을 돌려 동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도망치게 놔둘 것이냐! 저들을 쓸어버려라!]
원래 맞서 싸울 때보다 후퇴할 때 더 큰 손해를 입는 법.
등을 보인 타이탄을 향해 기간트의 검과 창이 찔러졌다.
힘을 중시해 체격을 키운 타이탄은 기간트보다 속도가 느렸다.
피해가 가중됐다.
"우리도 북쪽에 착륙해라!"
발레리온 영지의 기사단도 합류해 적을 쫓았다.
그리고 나와 에테나는 비공정으로 적들이 도망치는 방향을 알려주었다.
'이제 큰 거 한방이면 이 전쟁도 끝나겠군.'
난 탈로스 왕국이 있는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128. 잘하시는 거 있지 않습니까?
128. 잘하시는 거 있지 않습니까?
쏴아아아아! 후두둑!
거센 소나기가 무너진 도시를 적시고 지나갔다.
덕분에 사방에 비산한 먼지가 조금은 걷혔고, 뜨거웠던 전투의 열기도 식혔다.
"마르틴 전하 대승입니다! 남쪽으로 도망치던 타이탄 부대를 격퇴했습니다!"
"타이탄 12기를 포획하고 기사들을 사로잡았습니다!"
각 부대를 이끌고 적을 추격하던 지휘관들이 속속 지휘 천막으로 들어와 보고했다.
마르틴 국왕은 그때마다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고생했네."
오늘은 아리칸 왕국과 제국의 기사들 모두 축제 분위기였다.
몇 개월간 후퇴만 거듭하다가 단 한 번 반격에 대승을 거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장 기뻐할 마르틴 국왕의 얼굴엔 수심이 엿보였다.
"그럼 상황 보고를 하겠습니다."
리오넬 대령이 마르틴 국왕과 제국 1군단장에게 고개를 숙이고 보고를 시작했다.
"오늘 전투에서 연합군 타이탄 542기를 격퇴하고, 127기를 포획했습니다. 그리고 타이탄 기사 169명과 장교 32명, 병사 500여 명을 포로로 사로잡았습니다. 우리 동맹군 피해는 기간트 112기가 파괴되고 기사 89명이 전사했습니다."
"오오!"
"이제 숨통이 조금 트이겠습니다!"
그야말로 대승이었다.
1군단 기사들은 좋아했지만, 마르틴과 아리칸 기사들은 웃지 못했다.
아리칸 기사가 너무 많이 죽었다.
그동안 연합군에게 밀리면서 죽은 기사와 오늘 전투에서 죽은 기사들까지, 이번 전쟁으로 너무 많은 기사를 잃었다.
그리고 폐허가 된 도시들까지.
이 모든 걸 복구하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피땀이 들어가야 할지,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몰랐다.
"리오넬 대령, 이제 저들의 타이탄은 얼마나 되나?"
"남쪽 전선에 있는 타이탄과 후퇴한 타이탄을 합하면 대략 1,100기 정도로 예상됩니다."
"아직도 많군. 우리 기간트는 얼마나 되지?"
"양쪽 전선의 병력을 다 합하면, 우리 왕국군의 기간트는 총 450기 정도고, 아베르크 제국의 기간트가 350기 정도 됩니다."
1,100대800.
마르틴 국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싸울만한 수준까진 올라선 것이었다.
게다가 동맹국은 비공정이 있었다.
"저들의 움직임은 어떻게 될 것 같나?"
"제 예상으로는 이번 피해로 저들의 병참과 보급품이 부족해 병력을 후방으로 물릴 것 같습니다. 그리고 메로스시로 집결할 것으로 보입니다."
리오넬 대령은 뛰어난 야전 지휘관이기도 하지만 작전 참모이기도 했다.
"메로스란 말이지. 그럼 결전은 그곳에서 벌어지겠군."
마르틴 국왕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메로스시는 아주 오래된 도시였고, 기마 시대에 역사적인 상징물이 많은 도시였다. 기간트가 나오기 전엔 그곳이 아리칸 왕국의 수도였고.
하지만 300년 전 마석 산업 혁명이 일어나고 기간트가 발명되면서 수도는 엔실루드로 옮겨졌다.
하지만 이건 자신들의 의지는 아니었다.
아베르크 제국은 기간트를 앞세워 아리칸 왕국을 침공했고, 아리칸은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항복했다. 그리고 왕국의 지위도 잃고 공국으로 지난 300년간 조공을 바치는 속국의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제국과 더욱 가까운 곳으로 수도를 옮기라는 요구까지 한 것이다.
과거를 보면 아리칸 왕국은 아베르크 제국과 원수나 다름없었지만, 지금은 이렇게 힘을 합쳐 적과 싸우고 있었으니, 역사의 흐름은 알 수 없었다.
"지금 연합군의 사기가 떨어졌으니, 우리도 서둘러 병력을 집결해 저들을 공격하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리오넬 참모의 말에 1군단의 에리히 군단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1군단도 같은 생각입니다. 저들이 방어 준비를 끝내면 전투는 더욱 힘들어질 겁니다. 그러니 최대한 빨리 병력을 집결하고 메로스시를 공격하는 게 상책입니다."
제국 1군단도 이젠 빨리 결전을 치르고 싶어 했다.
전엔 아리칸 왕국을 포기하더라도 연합군의 병력을 충분히 줄이자는 계산이었다면, 이젠 대승도 했겠다 비공정도 있으니, 자신들이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그리고 언제 가디언 제국과 전쟁이 벌어질지 몰랐기에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이번이 기회입니다!"
"맞습니다. 놈들을 모두 궤멸시켜야 합니다."
아리칸 지휘관들과 제국군 지휘관들이 오랜만에 한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마르틴 국왕은 고민하고 있었다.
위이이잉!
그때 지휘 천막 근처에 비공정이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타일러 경이 왔는가?"
밖에서 병사가 대답했다.
"네! 타일러 후작님의 비공정입니다."
"오! 내가 나가 보겠네."
마르틴 국왕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천막 밖으로 나갔다.
그는 아까부터 타일러 후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
기분이 좋았다.
전투에서 대승한 것도 그렇고.
연합군을 추격하면서 멀쩡한 타이탄도 40여 대나 더 확보했다.
저들이 도망치는 길목을 확인하고, 비공정에서 기간트를 내리고 막아서자, 기사들은 타이탄을 버리고 도망쳤다.
그렇게 몇 번 반복하자 20여 척을 얻었고, 전투를 벌이다가 도망쳤는지 마석 배터리가 떨어져 버려진 타이탄 10여 기까지 말 그대로 그냥 주웠다.
'부지런한 자가 먹이를 먹는 법이지.'
게다가 꼭두각시 마법인형 셋이 자아를 각성해 자동인형이 됐다.
난 이제 자동인형이 열여섯이 됐고, 인형의 집에 있는 허수아비 마법인형 20명 중에서 10명을 꼭두각시로 업그레이드시켰다.
이제 남은 운명의 실은 400개가 조금 넘었고, 꼭두각시는 14명이 됐다.
웨슬리와 자동인형들은 새로운 꼭두각시를 일대일로 교육하고 있었기에 곧 기간트 30개를 운용할 수 있었다.
'응? 왜들 나와 있지?'
지휘 본부 옆에 마르틴 국왕과 기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 전장의 영웅께서 왜 이제야 오셨소!"
마르틴 국왕은 날 보자마자, 칭찬부터 했다.
"대체 그 작전은 어떻게 생각한 거요? 비공정을 추락시켜 적 타이탄을 100기나 부숴버리다니! 난 도저히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오."
"그건 우리가 돌아왔을 때, 우리 측에 남은 병력이 거의 없을 것 같아 적의 사기를 더 꺾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깝지만, 비공정 한 척을 희생한 겁니다."
"아! 우리 기사들까지 생각해 주시다니 타일러 경의 은혜가 큽니다. 그리고 적의 병참기지까지 불태우고, 오늘 전투의 일등 공신은 타일러 후작이시오."
"맞습니다! 타일러 후작님의 공이 큽니다."
"타일러 후작님, 덕분에 목숨을 구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마르틴 국왕과 기사들이 부담스럽게 내 칭찬을 했다.
그리고 지휘관들은 내게 허리까지 숙이고 인사를 했다.
난 마르틴 국왕과 지휘관들의 환대를 받으며 지휘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1군단의 지휘관들은 날 보곤, 그냥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자신들도 오늘은 최선을 다해 전투에 임했고, 나름 공도 세웠다.
하지만 내가 워낙 큰 공을 세웠기에 자신들의 공이 조금 하찮게 느껴진 것 같았다.
"내 이번 전쟁이 끝나면, 타일러 경에게 좋은 선물을 드리리다. 그거 이리 가져오게."
마르틴이 손짓하자, 기사가 상자를 하나 가져왔다.
"보다시피 당장은 이곳에서 챙겨줄 만한 것이 없소."
상자에서 훈장을 꺼냈다.
"그래서 이걸 챙겼소. 이건 우리 왕국의 최고 훈장이오."
"아! 영광입니다."
검은색 십자 훈장을 가슴에 달아줬다.
아리칸 최고의 무공훈장이란다.
"그리고 타일러 경에게 아리칸 왕국의 후작 작위를 내리겠소."
"네?"
"하지만?"
아리칸 기사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리오넬 대령이 말했다.
"전하 지금 왕국에 후작 작위가 세 분밖에 안 계십니다. 그렇게 되면 타일러 경이 후계 서열 4위가 됩니다."
"괜찮소. 공이 있으면 당연히 받는 것이지."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왜 후작 작위를 받는데, 후계 서열 이야기가 나오지?
"리오넬 대령, 방금 회의한 내용을 타일러 경에게 설명해 주게."
"네, 알겠습니다."
리오넬 대령이 방금 회의한 내용을 내게 말해줬다.
그리고 마르틴 국왕이 내게 물었다.
"타일러 경의 생각은 어떠시오?"
"전 반대입니다."
양측의 지휘관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봤다.
마르틴 국왕도 의외의 대답이라고 생각했는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1군단 부군단장인 티아스 준장이 나섰다.
"타일러 경, 전쟁에 사기가 중요하다는 것은 병법의 기초입니다. 숫자는 우리가 부족하지만, 우린 이번에 대승을 거뒀습니다. 그러니 이 기세를 이용해 적을 몰아쳐야 합니다."
"부군단장의 말이 맞소. 저들에게 시간을 주면 방어는 더 견고해지고, 우리 피해도 더 커질 것이오."
"하지만 우리 측 기간트도 많이 상하겠지요. 기사들도 많이 죽을 거고."
1군단장 에리히 중장이 고개를 흔들었다.
"전쟁에서 기사들의 희생이야 어쩔 수 없소. 지금은 승리만 생각하시오."
"그리고 우린 비공정이 있지 않습니까. 도시 곳곳에 기간트를 내리고 저들을 흔들면, 사기가 더 떨어질 겁니다."
티아스 준장의 말도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쥐도 구석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입니다. 저들이 한번 패했으나 아직 병력이 많고, 도시를 거점으로 버티면 아무리 우리 기세가 강하다곤 해도 피해가 클 겁니다. 특히 기사들은 다시 키우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제국이야 황립 사관학교 졸업생도 계속해서 나오고, 각 영지에 기사들도 있으니, 기간트만 수리하고 생산한다면 병력을 빨리 회복할 수 있지만, 아리칸 왕국은 이번에 너무 많은 기사를 잃었고, 다시 키우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릴 겁니다."
마르틴 국왕이 한숨을 쉬었다.
"휴우! 내 생각도 그렇소. 그래서 쉽게 공격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소. 그렇다고 저들을 그냥 놔둘 수도 없고."
마르틴 국왕의 고심이 깊었다.
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은 방법이 있는데, 뭘 그리 고민하십니까."
"뭐요? 타일러 경, 무슨 방법이 있으시오."
"간단합니다. 저들이 스스로 물러가게 하는 겁니다."
마르틴 국왕과 지휘관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마르틴 전하께서 잘하시는 거 있지 않습니까?"
"그게 뭐요?"
"이번에 제가 추가로 챙긴 비공정이 4척입니다. 그럼 우리가 보유한 비공정은 모두 9척이죠. 그 9척의 비공정에 기간트를 잔뜩 태우고 탈로스 왕국의 수도를 공격하는 겁니다."
"······!"
"······!"
지휘 천막에 모인 지휘관들이 일제히 입을 벌리고 경악했다.
"아베르크 제국의 황궁도 공격하신 분이 탈로스 왕국의 왕궁이 두려우십니까?"
"그, 그게 아니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하셨소?"
"제가 직접 옆에서 지켜보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저들의 수도와 왕궁에 타이탄이 있어야 얼마나 있겠습니까. 한 번에 90기 가까운 기간트가 그것도 최정예 기사들이 떨어진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거기에 왕궁을 파괴하고 국왕을 사로잡으면 더 좋고요."
"하하하! 단번에 전쟁이 끝나겠군."
"저들도 비공정으로 재미를 봤으니, 당할 때 기분을 알려줘야죠. 그리고 굳이 단번에 성공하지 않아도 몇 개 대도시만 순회한다면, 항복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겁니다."
마르틴 국왕과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1군단의 티아스 준장도 내 작전을 듣더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 상황에서 병력 손해가 더 나면 제국도 좋진 않았다.
가장 좋은 것은 피를 흘리지 않으면서도 적에게 최대한 타격을 주고 전쟁을 끝내는 거다.
"그리고 이참에 저들이 타이탄 생산 공장을 박살 내는 겁니다. 그럼 다시 회복하려면 몇 년은 필요할 겁니다."
나도 타이탄용 마석 배터리를 더 확보하고.
"오! 좋소! 당장 구체적인 작전을 짜봅시다."
***
"서둘러라!"
"마석 배터리를 최대한 실어라!"
"식량과 물은 상갑판 위로 올리고."
9척의 비공정에 천명 이상의 병력이 붙어서 물자를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으로 이번 임무에 함께 갈 기간트가 서 있었고, 그 옆쪽으로 기사들이 1미터 50센치의 단상에서 뛰어내리며 훈련하고 있었다.
"기간트 강하훈련을 한 번도 안 받은 기사가 대부분인데 괜찮을까요?"
에테나가 잔뜩 긴장한 듯한 기사들을 보며 말했다.
"어쩔 수 없지. 이번 작전은 시간이 생명이거든."
적의 수도와 왕궁을 타격하는 일이다.
만에 하나라도 정보가 새면, 효과는 크게 반감될 것이다.
그리고 무선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고, 저들은 지금 아리칸 왕국 깊숙이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저들의 왕궁까지 이곳 소식을 전하려면 적어도 보름에서 한 달은 걸릴 것이다.
그러니 그전에 우리가 적의 수도를 친다면, 전쟁을 단번에 끝낼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공격을 서두르고 있었다.
이번 기습 작전은 동맹군이 모두 참가한다.
3척의 비공정엔 제국 1군단과 서부군의 기간트 30척이 탑승하고, 마르틴 국왕과 크루세이더 기사단 40기가 나머지 4척의 비공정에 탐승한다.
그리고.
기이잉! 쿵! 쿵!
"저기 우리 비공정에 추가로 탈 기간트가 오네요."
4기의 기간트가 다가왔다.
129. 전쟁의 끝을 향해.
129. 전쟁의 끝을 향해.
비공정 9척에 기간트를 꽉꽉 채워야 했기에 나와 에테나의 비공정에 남아 있는 2자리에 제국군 기사 4명을 선발해 보내기로 했다.
"응? 룩급 기간트가 4대라고?"
예상외로 실력 있는 기사들을 보냈기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저들은 우리 명령을 받아야 하고, 자기 부대와도 떨어져야 한다. 그리고 적진도 아니고, 적의 수도를 공격하는 것이다.
이번 임무의 위험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비공정을 타고 가는 것이었기에 대부분 기사는 추락을 두려워했다.
처음엔 아리칸 왕국의 기사를 태울까도 생각했지만, 우리 기사단의 능력을 옆에서 지켜보고, 제국으로 돌아가면 동료 기사들에게 떠들 것이고, 자연스럽게 제국의 기사들에게 홍보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우린 기사가 너무 부족했다.
[충!]
룩급 기간트들이 나를 향해 경례했다.
난 경례를 받았다.
[오랜만입니다! 타일러 후작님.]
"응? 누구지?"
위이잉! 철컥!
치이익!
덩치 큰 기사가 해치를 열고 기간트에서 내렸다.
"하하! 오랜만이군. 라이너 중령. 아니 이젠 대령이군."
"영주님이 되시더니, 얼굴이 좋아지셨습니다."
당연하지 세계수의 열매를 삼 분의 일이나 먹었는데!
"자네, 서부군에 있었나?"
"그렇습니다. 그리고 저뿐만이 아닙니다."
라이너 대령이 뒤를 가리키자, 다른 기사들도 해치를 열고 기간트에서 내렸다.
"충! 오랜만입니다."
"저도 왔습니다."
"허! 제국의 영웅들이 모두 모였군."
이들은 모두 황제의 훈장을 받기 위해 건국기념일 퍼레이드에 참석했다가 아베르크 황궁이 공격받을 때, 나와 함께 아리칸의 기간트를 막았던 기사들이었다.
"누가 갈 거냐고 하길래 그냥 자원했습니다."
"맞습니다. 그때 지휘를 잘 해주셔서 황제 폐하도 구하고 1계급 특진했습니다."
"잘 왔네. 후버 대령, 크리스티나 중령, 브라운 중령."
황제를 구한 공으로 다들 진급도 했고, 훈장도 한 단계 높은 훈장을 받았다.
다들 대마경과 국경에서 특출한 활약을 펼쳐 황제에게 훈장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기사들로 실력은 모두 최고 수준이었다.
그리고 아리칸 왕국을 상대하기 위해 서부군에 배치되었다가 이번엔 아리칸 왕국을 돕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과거의 인연이 다시 만났다.
"모두 환영하네."
"그런데 저거 타고 가는 겁니까?"
"그래."
"안전한가요?"
다들 비공정을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주 재미있을 거야."
난 피식 웃어줬다.
그때였다!
"기사들은 비공정에 탑승하라!"
"탑승하라!"
출발 준비가 끝나자마자, 기간트들이 하나둘 비공정에 탑승하기 시작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가면서 하지."
"네!"
룩급 기간트 4대를 우리 비공정에 2대씩 나눠 태웠다.
'네 사람 다 오리지널 기간트에 충분히 탈 실력인데, 아직도 받지 못했네······.'
이번에 이데아 수도 발굴지에서 거신 갑옷을 32기나 할데가르 공방에 넘겼고, 모두 오리지널 기간트로 만들었지만, 북부군과 5군단에 24대가 지급됐기에 8개밖에 남지 않았다.
남은 오리지널 기간트는 어디로 갔을까?
십중팔구 황궁을 지키는 근위 기사단에 지급됐을 것이다.
그러니 저들 네 기사가 오리지널 기간트를 받기 위해선 오리지널 기간트에 탄 기사가 죽어야만 자기 차례가 올 것이다.
'잘만 구슬리면 우리 영지로 오겠군!'
난 오리지널 기간트가 많으니까.
이건 뜻하지 않은 행운이나 마찬가지였다.
몰래 기사를 빼간다는 소리를 들어도 어쩔 수 없었다.
우리 영지는 기간트는 많은데 기사는 부족했으니까.
그리고 내가 이렇게 제국을 위해 싸우고 있었으니, 제국도 절대 손해가 아니었다.
'티아스 준장도 가는군.'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 비올란테가 비공정에 올라타는 모습이 보였다.
난 아리칸 왕국에 추가로 나포한 4천의 비공정을 넘겨주었다.
아리칸 왕국은 비행석이 없었기에 앞으로 비공정을 추가할 수 없었다.
그에 반해 두 제국과 연합군은 비행석이 있었기에 꾸준히 비공정을 늘릴 수 있었다. 그들과 조금이라도 균형을 맞추기 위해선 아리칸 왕국도 비공정이 필요했기에 넘겨주었다.
그 때문에 마르틴 국왕은 날 더욱 신뢰했고.
마침 비어있던 원탁의 기사로 임명하기까지 했다.
사실 빈 자리는 대수림 난민 기지에서 내가 죽인 크롬웰 대령의 자리였기에 살짝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비공정이 7척이 된 마르틴 국왕은 원래 자신의 손발이나 마찬가지인 크루세이더 기사단의 기간트를 비공정에 꽉 채워서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제국군의 요청을 무시할 순 없었다.
특히 티아스 준장은 비공정을 직접 경험해 보고 싶어 했다.
1군단도 머지않아 비공정을 배정받을 텐데, 그때를 대비해 실전 경험을 쌓고, 자신이 그 비공정을 지휘할 생각인 것 같았다.
비슷한 이유로 제국 서부군 역시 기간트를 합류시킨 거고.
물론 진짜 속내야 자신들이 탈로스 왕국의 파트리스 2세 국왕을 사로잡으려는 것이다.
그럼 정전 협정을 자신들이 주도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비행석을 확보하려고 하겠지······.'
현재 가장 중요한 비행석은 아무래도 왕궁에 보관할 가능성이 컸다.
아리칸 왕국은 비행석이 없으니, 그걸 확보해 자신들도 공중에서 밀리지 않으려 할 것이고, 제국군은 아리칸 왕국이 비행석을 확보하지 못하게 자신들이 챙기려 할 것이다.
한 마디로 여러 이해타산이 얽히고설킨 연합 특공대였다.
어쨌거나 그날 아리칸 왕국의 공격으로부터 황제를 구한 여섯 영웅이 모두 아리칸 왕국을 돕기 위해 함께 출동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졌다.
"서쪽으로 전속 항진하라!"
우린 지금 전쟁의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