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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카야킨 전진 기지]

장장 1년 하고도 4개월 만이다.

원래라면 5개월 전에 이곳에 도착해야 했다.

하지만 탈로스 왕국 북쪽에 있는 차원 균열에서 이곳까진 너무 먼 길이었다. 그리고 부상병도 많았기에 행군은 늦어지고, 날씨까지 도와주질 않았다.

만약 내가 길 안내를 하지 않았다면, 이들 중에서 태반은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우린 다른 전진 기지도 들리지 않고, 지하 통로를 이동해 카야킨 6번 게이트로 진입했다.

"윌리엄 사령관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하도 원정대가 돌아오지 않아서 수색대를 파견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전진 기지 사령관인 라그르 대령이 말했다.

"당장 전진 기지의 모든 문을 폐쇄하게. 누구도 내 명령 없인 기지 안으로 들이지 말게."

"네?"

"서두르게."

"네!"

원정대 지휘관들과 전진 기지 지휘관들은 곧장 회의실로 모였다.

라그르 대령은 원정에서 생긴 일을 듣고는 큰 충격에 빠졌다.

"개자식들! 그런 비열한 수를 쓰다니······."

윌리엄 사령관이 내 부관이자, 대수림 정보대의 알베르토 중위에게 물었다.

"가디언 원정대는 언제쯤 대수림을 통과했나?"

"장벽을 통과한 시점은 모르겠지만, 6개월 전에 보르자 전진 기지를 지나간 것은 확인했습니다."

"그럼 장벽 관문을 통과한 지는 2, 3개월 정도가 지났단 말이군."

다행히 큰 차이는 아니었다.

"사령관님, 우리 비공정은 몇 대나 만들었을 것 같습니까?"

"뭐?"

내 물음에 윌리엄 사령관은 눈을 똥그랗게 떴다가 피식 웃었다.

"하긴, 자네라면 우리가 비공정을 만들고 있을 거라고 이미 짐작했겠지."

당연하다.

원정을 떠나기 전부터 비공정 생산에 들어갔을 거다.

특히 황제가 황궁에서 아리칸 공국의 비공정과 기간트 기습으로 죽을 뻔했다.

그러니 엄청난 자금 지원을 했을 것이고, 모르긴 몰라도 비공정을 벌써 여러 척 만들었을 것이다.

비행석만 오면 바로 움직일 수 있게.

"적어도 10척은 만들었을 것이네. 그리고 지금도 추가로 만들고 있을 거고."

"크기는 어느 정도입니다."

"선체 길이는 150미터 정도고 기본 골격이나 성능은 아리칸 공국에서 사용했던 비공정 수준은 될 것이네."

"기간트는 10대 정도 실을 수 있겠군요."

"그 정도는 될 것이네."

그때 다니엘 참모장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분명 놈들은 이 기회를 이용할 겁니다."

"맞습니다. 우리 원정대가 전부 몰살당했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매러덕 소장이 말했다.

"최대한 빨리 돌아가야 합니다. 언제 놈들이 국경을 넘어 침공할지 모릅니다."

윌리엄 사령관이 날 쳐다봤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전쟁은 바로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겠지."

매러덕 소장이 끼어들었다.

"무슨 말이오? 타일러 참모, 저들이 이런 기회를 놓칠 것 같소?"

"물론 저들은 공격할 겁니다. 하지만 저들도 준비 기간이 필요합니다. 전쟁이란 기간트만 가지고 할 수는 없습니다. 보급품이 필요합니다. 안드레아스도 원정 전엔 엘프 차원에 대해서 잘 몰랐을 겁니다. 괴수를 이용한 작전도 그곳에 도착해서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니 가디언 제국은 전쟁 준비를 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제야 매러덕 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기간이 얼마나 걸리겠소?"

"짧으면 6개월, 길면 1년은 걸릴 겁니다. 그리고 비공정을 이용한 강하 훈련도 해야 하고, 비공정이 생겼으니 작전도 전부 새로 짜야 합니다. 안드레아스 성격상 치밀한 계획과 준비 없인 절대 국경을 넘진 않을 겁니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우리도 전략을 전부 새로 짜야 합니다. 그리고 비공정을 이용한 훈련도 해야 합니다."

"제길 시간이 없긴 마찬가지군."

매러덕 소장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 여기 있는 기간트는 최대한 조금씩 장벽 관문을 넘어야 합니다."

마이어스 소장이 말했다.

"저들의 눈을 속이자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안드레아스는 우리가 전멸한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전력을 빼고 계산할 겁니다."

윌리엄 사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타일러 준장과 같은 생각이네. 우선 비행석만 카야킨 기지의 기간트를 이용해 관문을 넘고, 우리 기간트들은 대수림 사냥팀으로 위장해 한 번에 7, 8기 정도만 관문을 넘을 것이다. 그리고 병력은 헬다임이 아니라 할데가르 외곽에 집결할 거고."

윌리엄 사령관은 이미 세부 작전까지 세워 놓고 있었다.

이번엔 안드레아스에게 크게 당하고 나서, 각성한 것 같았다.

그런데 할데가르 외곽에 집결한다는 것을 보면, 비공정을 할데가르 기간트 공방에서 생산하고 있는 듯했다.

하긴 비공정은 황제가 독점하고 싶겠지.

일단 큰 작전이 세워졌다.

윌리엄 사령관은 지휘관들이 어떻게 언제 관문이 넘을지와 어떤 훈련을 해야 하는지도 일일이 지시했다.

하지만 나에겐 아무런 지시도 내리지 않았다.

"그럼 작전은 그렇게 실행하고, 다들 나가보게. 난 타일러 준장과 할 말이 있으니까."

윌리엄 사령관의 표정에서 비장함이 엿보였다.

하지만 곧 얼굴을 풀었다.

"고맙네."

사령관은 내게 고개까지 숙이며 인사를 했다.

"왜 이러십니까? 어색하게."

"정신이 없어 인사가 늦었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나와 우리 원정대 모두가 이 자리까지 오지 못했을 거네. 정말 고맙네. 내 이 은혜는 죽을 때까지 갚겠네."

"뭐, 그러시다면야······."

갚겠다는데 사양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지.

"자네도 알다시피 제국은 지금 위기에 빠졌네. 어떻게든 수습은 하겠지만, 큰 타격을 입을 것은 분명하네. 그러니 염치없지만, 한 번만 더 도와주게. 부탁하네."

"이데아 황궁 발굴 작업이 끝났군요."

윌리엄 사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 전에 시안 황자께서 보내신 전령과 이야기를 했네. 황궁은 이미 발견했고, 외성 안으로 들어가 거신 갑옷을 발굴하고 있다고 들었네. 그러니 지금쯤이면, 내성까지 당도하지 않았겠나?"

"거신 갑옷을 옮기는 작업을 도와달라는 말씀입니까?"

"그렇네. 우리가 병력을 움직이게 되면 저들에게 우리 존재를 알리게 되네. 하지만 자네라면 혼자서도 은밀히 옮길 수 있지 않겠나."

"제 능력을 알고, 계시군요."

"정확히는 모르네. 대충 짐작만 할 뿐이지."

그래서 내게 명령이 아니라, 부탁한다는 건가?

그는 내 인형의 집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보여준 다른 능력도 궁금했을 텐데, 묻진 않았다.

사실 나도 가디언 제국과 아베르크 제국의 기간트 전력 차를 줄일 방법은 오리지널 기간트뿐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거신 갑옷을 할데가르 공장에 넣으면 6개월이면 오리지널 기간트를 생산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제가 그걸 다 꿀꺽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그럴 생각인가?"

"글쎄요."

"할데가르 기간트 공방까지 옮겨주면, 10%를 주지. 그것도 완성품으로."

"그냥 다 챙기는 게 낫겠네요."

"15%! 더는 안 되네."

"거기서 몇 개나 나올지 알고요? 10개가 나오면, 그래 봐야 1개가 아닙니까? 반으론 기간트도 만들지 못하고요."

윌리엄 사령관이 주변을 한번 둘러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이미 외성에서 10개를 발굴했네. 내성에선 더 많은 거신 갑옷이 나오지 않겠나?"

"잘하면 오리지널 기간트로 소대 병력을 꾸릴 수도 있겠네요."

그건 상당한 수준이었다.

현재 제국의 공식적인 오리지널 기간트 숫자는 30개였다.

그런데 그만큼의 오리지널 기간트가 추가된다면 이번에 원정에서 잃은 200기의 기간트를 보충하고도 남는다.

그러니 몰래 수송해 기간트로 만들고 막상 전쟁이 시작되고 꺼내 놓는다면······.

"그럼 20%로 하죠."

윌리엄 사령관이 고민에 빠졌다.

20개를 발굴하면 4개를 줘야 했고, 30개를 발견하면 6개를 줘야 했다.

이건 적은 숫자가 아니었기에 고민하는 것이다.

"그리고 할데가르 공방에 넘기지 않고 제가 알아서 하는 조건으로 하죠. 시안 황자님이나 사령관님은 약속을 지킬 거라 믿지만, 다른 사람들은······."

"알았네. 내가 시안 황자님께 당장 편지를 써주지."

윌리엄 사령관은 편지 2개를 건넸다.

하나는 시안 황자에게 다른 하나는 케인 황제에게 전하는 문서였다.

"부탁하네. 타일러 준장."

"충! 다녀오겠습니다."

솔직히 사령관이 저렇게 부탁하지 않아도 내가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수고비를 준다는데 사양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그리고 챙길 수 있을 때 챙겨야, 내가 원하는 힘을 가질 수 있었다.

에테나와 괴조인형을 타고 발굴지로 향했다.

하지만 아베르크 제국의 발굴지가 아니라 가디언 제국의 발굴지로 가는 것이다.

가슴에 답답한 것이 있다면 풀어야지.

S급 인형술사가 화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줄 생각이었다.

110. 계획 수정.

110. 계획 수정.

쏴아아아! 투두툭! 툭!

대수림에 쏟아지던 빗줄기가 거짓말처럼 그쳤다.

거대한 싱크홀 위쪽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작업을 시작해라!]

철컥! 위이이이잉!

촤르르르르!

위에선 흙을 퍼 올리는 거대 마석 기중기들이 쉴새 없이 돌아가고, 아래에선 작업용 마장기와 수레가 쉴새 없이 흙을 나르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고, 내부는 더위에 습기까지 더해져 공기가 끈적끈적하고 후덥지근했다.

위잉! 철컥! 치이익!

"쓰벌! 더워서 못 해 먹겠네."

비숍급 마장기 기사 한 명이 해치를 열었다.

철컥! 치이익!

그러자 다른 마장기 기사들 역시 참지 못하고 해치를 열었다.

"하아! 더워 뒈지겠네."

"대체 우리가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해?"

"그걸 몰라서 물어? 발굴이 끝나야지."

"젠장!"

네 기사는 참지 못하고, 해치를 열었는데 한 기사는 묵묵히 입구 주변을 살필 뿐이었다.

"뭐야? 우리 마키아스 알브레 대령님께서는 참을 만한가 봐?"

"무슨 소리야 마키아스 소령님이지. 2계급 강등된 거 몰라서 그래?"

"아차! 죄송합니다. 마키아스 소령님. 아! 아니지 내가 중령이니까, 말을 놔야지. 아니 그런가? 마키아스 소령?"

기사들의 비아냥에도 마키아스 소령은 묵묵히 마장기에 앉아 입구를 지켰다.

"저 새끼가 대답이 없네."

"놔둬! 마장기 천재께서는 우리와 종이 다르다고."

"사관학교 최연소 입학에 최연소 수석 졸업이라는 말은 나도 들었어. 지금은 대수림까지 쫓겨나 이곳에 있으니, 우리와 다른 게 뭔데?"

"하긴, 우리보다 계급도 낮고 더 낮은 등급의 마장기를 타잖아. 인생사 참 알 수 없는 일이야. 하늘의 별도 떨어뜨린다는 알브레 가문이 저리될 줄이야. 쯧쯧."

"그러게 씨발! 누가 반란을 일으키래? 어디 루이스 황자님과 황제 폐하를 시해하려고 하더니······."

기사들이 일제히 마키아스 소령이 탄 나이트급 마장기를 노려봤다.

"루이스 황자님은 왜 저런 녀석을 살려줬는지 몰라?"

"그러니까 나 같으면 확 목을 쳤을 건데!"

마키아스의 마장기가 고개를 휙 돌렸다.

"어쭈 뭐야? 하극상이라도 벌이려고?"

[주변 순찰을 돌고 오겠습니다.]

기이잉! 쿵! 쿵!

마키아스의 나이트급 마장기가 발굴지 안쪽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기사들이 다시 뒷담화를 계속했다.

알브레 가문은 황태자와 결탁해 황제를 시해하려는 반역죄를 저질렀고 루이스 사황자에 의해 저지됐다고 공표됐다.

그 결과 황궁과 군대에 있던 알브레 가문의 사내들은 모두 교수형에 처했고, 알브레 가문은 숙청됐다.

하지만 마키아스 알브레는 2계급 강등되고 목숨은 구해졌다.

그가 죽지 않은 것은 이유는 루이스 사황자가 그의 타고난 마나량과 싱크로율, 뛰어난 마장기 전투 기술을 아까워했기 때문이었다.

루이스 황자와 마키아스는 사관학교 동기였고, 마키아스는 9살에 입학하자마자 폰급 마장기에 탔으며, 졸업했을 땐 룩급 마장기에 탔다.

그리고 24살에 가디언 제국 최연소 대령이 됐고, 20살에 벌써 룩급 오리지널 마장기에 탈 정도로 천재였다.

'제길, 그렇게 조심하라고 말씀드렸건만······.'

마키아스 소령은 이를 악물었다.

자기 아버지는 세무관으로 지방이나 영지에서 올라오는 세금을 관리하는 사람이었고, 반란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내무대신이었고, 삼촌은 황궁 경비대장이었으며 사촌 누이는 황태자비였다. 그 외에 알브레 가문의 친인척이 황궁의 주요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가문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듯했다.

하지만 자기가 있던 군대에서는 아니었다.

루이스 사황자는 군 지휘부와 마장기 기사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고, 자신이 있는 서부 전선에서도 황태자보다 루이스 사황자를 더 인정하고 인기가 있었다.

그랬기에 화를 당하기 전에 은퇴하고 지방으로 내려가라고 아버지께 조언했다.

하지만 1년, 2년 계속 미루더니 결국, 이 사달이 났다.

그때 지방으로 갔으면 최소한 교수형은 면했을 것이다.

'이제 내 인생도 여기까지군.'

가문은 숙청됐고, 자신은 겨우 목숨을 구했지만, 제국의 오지도 아니고 아예 대수림으로 왔다.

게다가 이곳은 전진 기지도 아니고, 이름 모를 발굴지였다.

사실 이곳에 도착하기 전까진 이런 발굴지가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니 이제 다시 제국으로 돌아가긴 틀렸고, 대수림을 전전하다가 인생은 끝날 것이다.

"하아! 저 비아냥만 없어도 살만할 텐데······."

가장 괴로운 것은 함께 근무하는 기사들의 계속되는 인신공격이었다.

그것도 자신은 하지도 않은 반역 죄 때문에...

마키아스 소령은 주변을 순찰하고 왔지만, 일행들은 아직도 자신의 욕을 하고 있었기에 합류하지 못하고, 입구에 서 있었다.

콰쾅! 콰아아앙!

"이게 무슨 소리야?"

"어서 마장기에 타라!"

기사들이 마장기에 올라탔다.

마키아스도 서둘러 기사들 옆으로 이동했다.

[동굴 입구 쪽이다!]

[서둘러라!]

다섯 기의 마장기가 곧바로 반대편으로 향했다.

이 입구는 작업자와 마장기가 발굴지 입구로 쉽게 진입하기 위해 뚫어 놓은 동굴이었다.

지휘관인 샤크 중령이 어두컴컴한 동굴을 향해 불빛을 비췄다.

[대체 무슨 일이지?]

[입구에 마장기가 30대나 있는데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혹시! 아베르크 제국 놈들이 쳐들어온 거 아냐?]

[에이, 저놈들의 발굴지와 전진 기지 입구는 다크엘프들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놈들의 은신술은 믿을 만하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마도 동굴 한쪽이 무너지는 소리였을 겁니다. 곧 작업반이 출동하겠죠.]

[그렇겠지.]

다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샤크 중령과 기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뭔가 온다!]

마키아스 소령이 소리쳤다.

그러자 마장기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었다.

마키아스가 재수 없는 인간이긴 하지만 실력은 최고였기에 그의 말을 무시할 순 없었다.

그리고!

기이잉! 쿵! 쿵! 쿵!

[기, 기간트다!]

동굴에서 오리지널 나이트급 기간트 한 기와 네 기의 기간트가 달려왔다.

[공격해라!]

[막아라!]

***

우린 괴조인형을 타고 저들의 발굴지 상공에 도착했다.

폭우가 쏟아진다.

하늘이 날 돕는 건가?

이 정도 폭우면 밤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마나를 눈으로 뿜어냈다.

'안드레아스, 우리 원정대의 전멸을 완전히 기정사실로 했네.'

발굴지를 지키는 병력이 많진 않았다.

하긴 그 정도 괴수 군단이 공격했다면, 개미 새끼 하나 살아남지 못한 것이 정상이겠지.

놈이 얼마나 치밀했냐면, 우리 측 진영으로는 척후병이나 감시병을 전혀 보내지 않았다. 오로지 채굴 작업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윌리엄 사령관도 방심한 것이다.

'마장기 7대라······.'

발굴지 입구 주변을 순찰하는 마장기들이 보였다.

가벼운 준비 운동으론 적절했다.

근처에 괴조인형을 착륙시켰다.

그리고 인형의 집을 열었다.

쿠쿵!

드라우켄이 무려 6대의 기간트를 등에 올리고, 양 앞발 겨드랑이에 기간트를 2대씩 끼고 모습을 드러냈다.

총 10대의 기간트를 한 번에 꺼낼 수 있는 드라우켄!

전투 외에도 쓸모가 많은 녀석이다.

"모두 기간트에 올라타라!"

척! 처처척!

내 꼭두각시들이 기간트에 올라탔다.

"타일러님, 저도 출전을 허락해 주세요."

에테나가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녀도 이젠 나설 때가 됐다.

킹콩인형이 나이트급 오리지널 기간트 로렐라이와 내 나이트급 오리지널 마장기를 꺼냈다.

전에 내가 탔던 비숍급 오리지널 기간트는 가디언 제국에 알려졌을 수도 있으니, 아직 저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오리지널 마장기를 꺼낸 것이다.

"에테나, 조심해!"

"네!"

에테나가 날 향해 경례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지금 의욕이 너무 앞서 있어 살짝 걱정됐다.

이번 전투엔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됐지만, 그녀는 기사로 기간트에 타고 나와 함께 싸우고 싶어 했다.

괴수인형들은 다시 인형의 집에 넣었다.

드라우켄이나 괴조인형은 기간트나 마장기를 공격하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것이 많았기에 내보내지 않았다.

이건 마장기를 챙길 기회였으니까.

[모두 가자!]

[가자!]

나를 빼고 모두 첫 집단 전투였다.

에테나도 10명의 꼭두각시도.

곧 비를 피해 거신목 아래에 모여 있는 7대의 마장기를 발견했다.

해치를 열고 담배를 피우는 놈도 있었고, 아예 마장기 밑에 앉아서 비를 피하는 놈도 있었다.

난 에테나를 보고 끝쪽에 경계를 서는 마장기를 가리켰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옆쪽으로 은밀히 이동했다.

이번 싸움은 에테나와 꼭두각시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녀가 잘할 것으로 믿는다.

그리고 난 뒤에서 꼭두각시들을 조종했다.

쏴아아아아!

기이잉! 쿠쿠쿵!

에테나의 나이트급 기간트 로렐라이가 빗속을 뚫고 달렸다.

[응?]

끝에 있던 마장기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마장기가 검을 들어 보지만 이미 늦었다.

쉐엑! 콰앙!

로렐라이의 단검이 나이트급 마장기의 안면을 뚫었다.

마장기는 시야를 잃었다.

하지만 로렐라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로렐라이는 몸을 숙이며 검을 피하곤 곧바로 해치를 향해 검을 찔렀다.

콰앙!

하나가 당하자, 그제야 옆에 있던 기사가 소리쳤다.

[저, 적이다!]

마장기들이 무기를 뽑았고, 내 꼭두각시들이 조종하는 기간트들이 달려들었다.

챙! 채채챙!

콰앙! 쿠웅!

"크악!"

[이 비겁한 아베르크 놈들!]

[놈들을 죽여라!]

마장기 기사들이 싸우면서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내 꼭두각시들은 말을 하지 못했기에 조용했다.

[크윽! 적들이 너무 많다!]

[알리바 대위! 본대에 알려라!]

[네!]

나이트급 마장기 한 대가 전장을 빠져나가려 했다.

'너희가 막아!'

하지만 아직 투입하지 않은 2대의 비숍급 기간트를 움직여 막았다.

그리고 두 기간트가 협공해 순식간에 적 마장기를 제압했다.

쿠웅!

다른 마장기들도 오래 버티지 못했다.

[크악!]

[비겁한 새끼들······!]

'비겁? 지금 내게 비겁하다는 건가?'

난 지금 아주 정정당당하게 싸우고 있는 거다.

괴수인형도 쓰지 않았으니까!

쿠웅!

마지막으로 비숍급 마장기가 힘없이 쓰러졌다.

자기보다 큰 마장기를 쓰러트린 에테나의 기간트가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우! 실전은 조금 어렵네요.]

[처음치고는 너무 잘했어!]

에테나가 탄 로렐라이는 한 손에 검을 다른 손엔 단검을 들었다.

그녀는 두 개의 무기를 사용하길 원했고, 또 능숙하게 사용했다.

'저 정도면 비숍급 오리지널 기간트에 타도되겠어!'

로렐라이의 움직임이 매우 매끄럽고, 공격할 때는 매처럼 빠르고 날카로웠다.

[자! 주변을 정리해!]

괴수인형을 다시 꺼내 주변을 정리했다.

그렇게 1기의 멀쩡한 마장기와 부서진 6기의 마장기를 손에 넣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일뿐이었다.

우린 그 길로 저들의 발굴지 입구로 향했다.

***

난 마나를 뿜어내며 저들의 병력 규모를 살폈다.

생각보다 적은 33기의 마장기가 동굴 입구 진지에 주둔하고 있었다.

보초를 서고 순찰하는 마장기는 총 18대. 그중에 한 대는 비숍급 오리지널 마장기였다.

그리고 나머지 15대는 동굴 입구와 동쪽 진영에 세워져 있었다.

병력은 300명 정도로 크게 신경 쓸 수준은 아니었다.

이 정도 병력 규모면 계획을 수정해야겠다.

처음 계획은 저들의 발굴 현장을 타격하고 빠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이곳의 적들을 모두 처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오호! 거신 갑옷이 있네!'

감사하게도 2개나.

두 대의 마차에 꼭꼭 숨겨 뒀지만 내 눈을 속일 순 없었다.

아마도 다음 보급팀이 올 때, 그들에게 딸려 보내겠지.

가디언 제국은 우리처럼 하수도가 아닌 메인 도로를 뚫고 황궁으로 접근하고 있었기에 거신 갑옷을 발견할 확률은 우리보다 훨씬 높은 편이었다.

저 2개의 거신 갑옷도 운 좋게 발견했겠지만, 이제 내 것이었다.

길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모두 쓸어버린다.

111. 속이 좀 풀리네.

111. 속이 좀 풀리네.

'모두 다 나와라!'

자동인형들도 모두 인형의 집에서 꺼냈다.

그들이 탈 기간트도.

하지만 괴수인형은 다시 넣었다.

사실 드라우켄과 괴조 인형만 풀어놔도 이곳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제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 내가 챙길 마장기는 대부분 고물이 될 것이다.

아직 섬세한 컨트롤은 불가능했으니까.

그리고 내 꼭두각시들을 자동인형으로 업그레이드하기 위한 전투 경험이 필요했다.

지금 내 자동인형들은 모두 기간트 기사 출신들이었고, 모두 기간트에 타고 전투를 하다가 자아를 각성했다.

"주군, 제가 기사들을 지휘해도 되겠습니까?"

웨슬리 자동인형이 물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

그가 부 기사단장이었고, 난 꼭두각시들을 조종해야 했으니까.

그리고 자동인형이 10명이나 됐기에 양동작전을 시험해 보기에도 적당했다.

"웨슬리, 자넨 기사들을 이끌고 서쪽에서 공격하게. 그리고 동굴 입구를 확보하게. 난 꼭두각시들과 동쪽에서 공격하지."

"네! 주군."

"그럼 전 뭘 하죠?"

에테나가 물었다.

"저기 보면 동쪽 진영 위쪽에 마장기 8대가 세워져 있어. 1대는 보초고, 다른 마장기 기사들은 그 옆쪽 천막에 있지."

"네, 보입니다."

그녀도 세계수 열매를 먹어서인지, 눈이 매우 좋았다.

그랬기에 폭우 속에서도 목표 지점을 알려주기 편했다.

"보초 마장기를 처리하고 기사들이 마장기에 타지 못하도록 막아. 할 수 있겠어?"

"네! 맡겨 주세요."

에테나가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오리지널 기간트는 빠르고 날렵했기에 이번 임무에 적격이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마장기 숫자는 저들이 많았지만, 우린 쏟아지는 비를 엄폐물 삼아 기습할 것이고, 마장기에 타지 않은 기사들도 많았기에 실질적으론 우리 병력이 더 많은 편이었다.

이 정도면 우리에게 매우 유리한 전장이다.

물론 내가 관여한 줄도 모를 테고.

그리고 전리품도 싹 다 챙길 생각이었다.

[자! 가자!]

쿵! 쿠쿠쿠쿵!

빗속을 뚫고 기간트가 질주한다.

쾅! 콰직!

웨슬리가 검으로 단번에 울타리를 부숴버렸다.

[공격하라! 주군을 위하여!]

[주군을 위하여!]

자동인형 기사 10명이 진지 서쪽을 공격했다.

[뭐, 뭐야?]

[적이다!]

[적습이다! 막아라!]

굉음을 뿜어내는 거대 병기들이 빗속에서 서로 검과 창을 맞부딪쳤다.

쾅! 콰콰쾅!

육중한 것들이 디디는 바닥은 움푹 파이고, 거침없이 검과 창을 휘두른다.

태앵! 태태탱!

위력과 성능은 비슷하지만, 내 자동인형들은 두려움이 없다.

[물러서지 마라! 우린 주군의 검이다!]

콰앙!

[크악!]

그 시각 내가 이끄는 꼭두각시들도 동쪽에 도착했다.

콰앙!

[공격하라!]

쿠쿠쿠쿵!

나와 꼭두각시들이 보초 마장기들을 순식간에 제압했다.

[에테나! 지금이다!]

[네!]

그녀의 오리지널 기간트 로렐라이가 위쪽으로 달렸다.

그때 순찰하던 마장기들이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단숨에 제압하라!]

커다란 검과 창이 거침없이 휘둘리고 찔러진다.

난 룩급 마장기의 검을 옆으로 밀어내고, 안으로 파고들어 어깨로 가슴을 받아버렸다.

콰앙!

나보다 4미터나 큰 룩급 마장기가 두 걸음이나 밀려나며 휘청거렸다.

'덮쳐!'

쿵쿵! 팟!

옆쪽에서 비숍급 기간트가 몸을 날렸다.

콰앙!

룩급 마장기가 그대로 쓰러지고, 내가 달려가 해치를 향해 검을 찔렀다.

콰직!

그리고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저쪽은 벌써 끝났군.'

웨슬리와 자동인형 기사들은 꼭두각시처럼 일일이 누굴 공격하고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됐다.

그들의 움직임은 이미 생전의 능력을 되찾았고, 조금씩 발전해 가는 중이었다.

'에테나는?'

그녀의 로렐라이는 이미 보초 마장기를 처리했고, 마장기들 앞에 서 있었다.

그랬기에 기사들은 감히 탈 생각도 못 한 것 같았다.

쾅! 쿠웅!

두 대의 비숍급 기간트가 마장기를 넘어뜨렸고, 검을 찔러 마무리했다.

우리 쪽 꼭두각시들도 마지막으로 저항하던 마장기를 쓰러트렸다.

처음부터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우린 10대씩 두 그룹으로 뭉쳐 있었지만,

저들은 떨어져 있었기에 각개격파 당한 셈이었다.

병사들과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미 빗속을 뚫고 대수림으로 도망쳤다.

[응? 다쳤나?]

[별거 아닙니다.]

웨슬리의 룩급 기간트 한쪽 팔에 큰 상처가 있었다.

이제 보니 비숍급 오리지널 마장기를 상대하다가 당한 것 같았다.

하지만 상대 기사는 죽었으니, 승리는 웨슬리의 차지였다.

'이번에 돌아가면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를 줘야겠어.'

암 드로운이 처음에 입고 있었던 배에 구멍 뚫린 거신 갑옷을 룩급 기간트로 만들어 달라고 드워프들에게 맡겼다.

그걸 웨슬리에게 줄 생각이었다.

암 드로운은 지금 열두 기사였던 롤랑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어? 여긴 어딥니까?]

후후! 미소가 지어졌다.

꼭두각시 하나가 자아를 각성했다.

원래 룩급 기간트를 몰던 기사였기에 자동인형으로 업그레이드도 가장 빨랐다.

첫 전투에 자동인형이 될 확률은 극히 낮았지만, 이번엔 운이 아주 좋았다.

다른 꼭두각시들도 전투 경험을 계속 쌓다 보면 언젠가 모두 자동인형이 될 것이다.

[마장기를 한곳에 모아라!]

전리품은 꽤 많았다.

멀쩡한 마장기가 10여 대가 넘었고, 부서진 마장기는 그 2배는 됐다.

괴수인형들을 불러내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인형의 집에 넣었다.

오리지널 비숍급 마장기도 넣었고, 거신 갑옷도 2개 다 챙겼다.

점점 오리지널 기체가 늘어갔다.

그리고 작업용 마장기와 마석 배터리, 식량과 천막까지 진지 안에 쓸만한 물건을 싹 다 챙겼다.

[타일러님, 이제 돌아가실 건가요?]

[아니! 여기까지 왔으니 끝장을 봐야지!]

난 발굴지 안쪽 입구인 싱크홀까지 들어가 그곳의 장비도 전부 부숴버릴 생각이었다.

안드레아스가 이 사실을 알게 될 때쯤이면 우린 발굴지에서 철수했을 테니까.

[제가 선두로 나서겠습니다.]

[알았어.]

난 그녀에게 비숍급 기간트에 탄 기사 넷을 붙여 줬다.

우린 동굴 속으로 전진했다.

그리고 가다가 만난 순찰팀 마장기들을 에테나와 기사들이 단숨에 제압해 버렸다.

***

'주군! 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동굴 출구에 다 와서 더그 자동인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자!]

기이잉! 쿵쿵쿵!

서둘러 웨슬리와 앞으로 달렸다.

입구엔 부서진 마장기 4개와 부서진 기간트 3개가 쓰러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온 더그 자동인형의 비숍급 기간트는 팔 하나가 잘려져 있었다.

더그는 곧 룩급 기간트로 올려줄 정도로 실력이 좋았는데, 저렇게 당한 것을 보면, 꽤 저항이 거셌나 보다.

난 더그와 다친 자동인형들을 내 인형의 집으로 넣었다.

상처가 심했기에 운명의 실이 많이 끊어진 자동인형도 있었다. 하지만 레벨이 초기화될 정도의 상처는 아니었기에 상처를 치료하고, 다시 운명의 실을 연결하면 된다.

태앵! 탱! 탱!

한쪽에서 싸우고 있는 에테나를 쳐다보았다.

'뭐야? 오리지널 기간트를 저렇게 상대한다고?'

순간 눈이 커졌다.

양산형 나이트급 마장기 한 대가 로렐라이의 공격을 막고 있었다.

같은 나이트급이지만, 한쪽은 오리지널 기간트였다.

게다가 에테나는 비숍급 오리지널 기간트에 탈만큼 실력이 많이 늘어 있었다.

[이야!]

쉐엑! 카앙!

오리지널 기간트가 검을 찌르자 마장기가 검을 옆으로 밀어내며 뒤로 물러섰다.

로렐라이가 앞으로 구르며 거리를 좁히고, 다리를 향해 검을 휘두르자 상대는 검을 올려치며 막아냈다.

그리고 해치를 향해 찔러지는 단검.

그건 또 몸을 옆으로 틀면서 피했다.

마장기의 움직임은 투박했으나, 군더더기가 없는 동작이었다.

아니 에테나가 어떻게 공격할지 알고 미리 반응한 것 같았다.

웬만한 기사였으면, 벌써 해치에 구멍이 뚫렸을 것이다.

[주군! 상대의 실력이 대단하군요. 아무래도 제가 에테나 경을 도와야 할 것 같습니다.]

조금 전까진 일방적인 공격을 하고 있던 에테나였지만, 상대 마장기에 밀리기 시작했다.

난 눈으로 마나를 뿜어내며 마장기 기사를 살폈다.

'허! 마나량이 엄청나잖아!'

옆에 있는 웨슬리와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왜 나이트급 마장기에 타고 있는 거지?

순수한 의문이 들었다.

저 정도 마나량에 저 정도 싱크로율이면 룩급 오리지널 마장기에 타도 충분한 실력이었다.

[웨슬리! 에테나를 도와라!]

[네! 주군.]

'상대는 죽이지 말고 생포하도록!'

'네! 주군.'

웨슬리의 룩급 기간트가 달려들었다.

기이잉! 쿵! 쿵!

[에테나 경! 나도 함께하겠소!]

2대1의 싸움.

룩급 기간트와 오리지널 나이트급 기간트가 상대를 몰아쳤다.

그런데 위태위태해 보이면서도 상대는 아슬아슬하게 막아내고 있었다.

웨슬리가 실력을 다 발휘했다면 상대를 빨리 제압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생포하라고 했기에 공격이 조심스러웠다.

그래도 둘이 하나를 제압하지 못한 것은 상대의 실력이 뛰어나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와! 검술 실력이 발군이네!'

기간트의 다리 움직임이나 어깨 움직임, 그리고 사소한 몸짓을 보고 동작을 예측하고 막아낸다.

말이 쉽지, 그건 마음먹는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었다.

기간트 싱크로율이 100%에 가까운 나도 상대 움직임을 예측해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공격하면 거기에 반응해 검을 막고 빈틈을 찾아 공격하고 있었으니까.

'재미있네. 일단 제압하고 물어봐야겠다.'

왜 양산형 나이트급에 타고 있는지.

그리고 저 기사를 내 마법인형으로 만들어도 상당한 전력이 될 것이다.

스르릉!

나도 검을 뽑았다.

구형 오리지널 나이트급 마장기지만, 오랫동안 사용한 놈이기에 익숙했다.

[나도 간다!]

기이이잉! 쿵쿵쿵!

3대1의 싸움.

목숨이 오가는 전투에서 비겁함이란 없었다.

그리고 난 녀석을 꼭 생포하고 싶었다.

캉! 카캉! 캉!

[에테나 옆을 막아!]

[네!]

에테나의 로렐라이가 마장기의 퇴로를 막았다.

[벽으로 밀어붙여!]

[네! 주군!]

두 사람에게 지시를 내리고, 나도 한쪽을 막아섰다.

그러자 마장기가 나를 집중적으로 노리고 달려들었다.

내가 지시를 내린 것을 보고 나를 먼저 제압하겠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머리도 좋네!'

하지만 이때를 기다렸다.

'그림자 투영!'

갑자기 나를 향해 달려드는 마장기의 움직임이 슬로비디오처럼 느려졌다.

괴조인형의 동체 시력과 반응속도가 내게 투영됐음이다!

달려드는 상대의 머리를 노리고 검을 찌르기 위해 어깨를 움직이자, 벌써 양산형 마장기의 시선이 먼저 알아챘다.

그 순간 내 검의 찌르기를 막기 위해 벌써 상대 마장기가 검을 올려치고 있었다.

실로 놀라운 움직임이었다.

내가 스킬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당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난 검의 방향을 머리에서 어깨 쪽으로 틀었다.

'오호! 이것도 봤단 말이야!'

그 순간 상대 마장기의 시선이 살짝 움직이더니, 올려치는 궤적이 조금씩 옆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양산형 마장기론 오리지널 마장기의 속도를 따라올 순 없지.

촤아악!

상대의 검이 내 검을 위로 밀어내기 전에 어깨를 찔렀다.

콰직!

하지만 어깨를 뚫은 것이 아니라 어깨 장갑을 날리는 데 그쳤다.

그 짧은 순간에 어깨를 비틀어 치명상을 피한 것이다.

보면 볼수록 상대의 능력에 혀를 내둘렀다.

마나량은 웨슬리와 비슷했지만, 검술 실력은 이쪽이 훨씬 좋았다.

'내 마법인형으로 만들어도 이런 전투 센스를 유지할 수 있을까?'

그때 상대 마장기가 내 배를 향해 주먹을 날리는 것이 보였다.

그의 검은 이미 허공을 스쳤지만, 주먹으로 해치를 때려 충격을 주고 싶었나 보다.

내게 당했지만, 뭔가 갚아주고자 하는 의도가 보였다.

왼쪽 팔을 내려 막았다.

콰아앙!

공격이 막히자, 놈이 몸을 옆으로 날리는 것이 보였다.

내 실력을 본 녀석이 이 상황을 피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어딜!]

쿠웅!

그곳엔 이미 웨슬리의 룩급 기간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11미터의 룩급 기간트가 나이트급 기간트의 양어깨를 잡았다.

그 순간 에테나의 로렐라이가 마장기의 다리를 찔렀다.

쉐에엑! 빠각!

마장기의 무릎이 박살 나며 다리가 너덜거렸고, 난 이미 검을 마장기의 손을 향해 내려치고 있었다.

촤아악! 쿵!

[휴! 잡았다!]

마장기는 검을 든 팔과 다리 하나를 잃고, 웨슬리의 기간트에 사로잡혔다.

난 주먹으로 해치를 연신 두들겨 줬다.

쾅! 콰쾅! 쾅!

그리고 에테나가 해치를 검으로 열고, 완전히 뻗어버린 녀석을 꺼냈다.

'뭐야? 꽤 젊잖아!'

나와 비슷한 나이거나 한두 살 정도 어려 보였다.

녀석은 다른 자동인형에게 맡기고.

"이곳을 모두 박살 내라!"

에테나와 웨슬리의 기간트와 꼭두각시들이 탄 기간트가 발굴지 입구를 초토화했다.

발굴 작업을 재개하려면 시간 좀 걸릴 거다.

'이제야 답답했던 속이 좀 풀리네!'

이곳에서 마장기를 무려 50대나 챙겼다.

그건 저들에게 그만큼 피해를 준 것이었고.

하지만 아직 멀었다.

난 그 길로 블랙힐 기지로 향했다.

이제 비밀 임무를 수행할 차례였다.

'참! 암 드로운과 거신 마법사는 돌아왔을까?'

1년 후에 만나기로 했는데, 벌써 1년 6개월이나 시간이 흘렀다.

서둘러야 했다.

112. 살려주면 안 되나요?

112. 살려주면 안 되나요?

[블랙힐 기지]

안드레아스의 계략에 당한 원정대의 이야기를 들은 시안 5군단장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러다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살짝 당황하긴 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시안 황자는 눈물을 훔치곤 잠시 창밖을 보다 말했다.

"기사와 병사들의 시체도 챙기지 못했겠군."

"상황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원정대 1군에 나와 사관학교 동기인 녀석들이 꽤 있네."

"저도 이번에 들었습니다."

"내가 황자라는 사실을 알고도 허물없이 날 대해준 몇 안 되는 녀석 들었지. 지금 돌아보면 그때가 내 인생에 가장 행복한 날들이었어."

시안 황자는 고개를 흔들며 나를 바라보았다.

"생존자가 십여 명이라니, 몇 명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겠군."

"정확한 명단은 카야킨 전진 기지에 있을 겁니다."

"알았네······."

시안 황자가 왜 슬퍼하는지 알 것 같았다.

젊은 날 순수했던 시절의 친구들 죽음을 슬퍼함이다.

이번 원정에 시안 황자도 가고 싶어 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어쩌면 친구들과 마지막으로 모험을 떠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사실 시안 황자의 동기생 다섯은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하지만 난 말하진 않았다.

나중에 알아보겠지.

그리고 그중에서 셋은 내 마법인형이 됐고, 하나는 이번에 자아를 각성하며 자동인형이 됐다.

인생 참······.

시안 황자에겐 그 자동인형을 절대 보이지 말아야겠다.

북부군과 5군단은 시안 황자의 정치적 군사적 지지기반이었다.

이번 일로 북부군 기사가 많이 전사했기에 제국도 큰 피해를 봤지만,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눈앞에 시안 황자일 것이다.

거기에 친구들까지 잃었고.

하지만 실망만 할 순 없었다.

"윌리엄 사령관께서 전해드리라는 서신입니다."

난 품에서 서신을 꺼내 전달했다.

시안 황자는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그러다 뭔가 감정이 울컥했는지, 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마도 친구들의 죽음도 적혀 있는 것 같았다.

"전쟁이란 참 잔혹하군."

"진짜 전쟁은 시작도 안 했습니다."

"하긴, 자네 말이 맞네. 슬퍼하기엔 우리 상황이 급박하군."

"그리고 지금 상황을 잘 이용하면, 시안 황자께선 득이 되실 수도 있습니다."

시안 황자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지금 내 상황을 알고도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이 상황을 만회하고 힘을 더 키울 방법이 있지 않습니다."

시안 황자도 바보가 아니었기에 내 말뜻을 알 것이다.

"오리지널 기간트 말이로군."

"그렇습니다. 제겐 케인 황제 폐하께 전하는 윌리엄 사령관님의 서신도 있습니다. 내용은 보지 못했지만, 아마도 제가 가져가는 거신 갑옷을 오리지널 기간트로 만들어 북부군과 5군단에 배치해달라는 내용이 있을 겁니다."

시안 황자가 고개를 끄떡였다.

"맞네."

"황제께선 이번에 상당한 비행석을 가져온 원정군의 공을 생각해서라도 그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실 겁니다. 그럼 다가올 전쟁에서 그 오리지널 기간트들이 큰 활약을 한다면, 시안 황자님의 입지는 더욱 커지실 겁니다."

"그게 거기까지 이어지는군."

"그리고 할데가르에 원정군을 몰래 집결시키는 이유도 거기서 비공정을 가지고 훈련해 오리지널 기간트를 전략적으로 쓰겠다는 윌리엄 사령관님의 뜻이 담겨 있는 거겠지요."

시안 황자가 고개를 흔들며 입을 벌렸다.

"역시 자네는 모르는 것이 없군."

"저라도 그렇게 했을 테니까요. 일단 제 임무는 거신 갑옷을 최대한 많이 할데가르로 가져가는 겁니다."

"그래 나도 아네. 그런데 20%라니, 좀 과한 건 아닌가? 오리지널 기간트를 만든다고 해도 거기에 탈 기사가 부족할 텐데?"

난 속으로 웃었다.

내가 기사가 몇 명인데······.

"이미 윌리엄 사령관님과 이야기가 된 겁니다. 하지만 시안 황자님께서 굳이 반대하신다면 저도······."

"아! 아니네. 기사도 없는데, 오리지널 기간트를 놀리면 아까워서 그러지."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지금 내 자동인형이 몇 명이고, 우리 영지에 오고 싶어 하는 기사가 몇 명인데······.

오리지널 기간트는 없어서 못 탄다.

"그럼 일주일 정도만 더 기다려 주게."

"일주일이나요?"

"지금 발굴팀이 황궁으로 보이는 건물까지 진입했네. 잘하면 몇 개는 더 건질 수 있을 거야."

"지금까지 챙겨 놓은 건 몇 개나 됩니까?"

시안 황자가 처음으로 여유 있는 표정을 지었다.

"35개네."

"오! 좋은 소식이군요."

"자네 말대로 외성부터 시작해 이데아 제국 내성 곳곳에서 상당한 숫자의 거신 갑옷이 발견됐네. 사실 삭아서 부서지거나 마법진이 지워져 못 쓰는 것이 많았는데, 그런데도 35개나 건진 거지."

난 왜 삭아서 못 쓰는 갑옷이 많은지 거신 마법사 알리사 엘가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금속으로 만든 갑옷이라 오랜 세월을 이기지 못한 것이었다.

처음엔 거신들도 여러 가지 금속이나 합금으로 갑옷을 만들다가 나중엔 내구성도 좋고 대수림에서 사냥하며 쉽게 구할 수 있는 거신 부산물로 갑옷을 만들었다.

거신 부산물의 경우 갑옷을 만들면서 마석이 깊게 스며들어 보관 기간이 반영구적으로 늘어난 까닭이었다.

그때는 이런 사실을 몰랐다고 했다.

"그 정도면 며칠 기다릴만하겠네요."

최소한 나도 7개는 확보한 상태였기에 기분이 좋아졌다.

기존에 있는 것과 이번에 확보한 것을 합하면 오리지널 기간트만 15기나 된다.

화염의 탑에서 얻은 13미터짜리 퀸급 거신 갑옷까지 기간트로 만든다면, 대영지 못지않은 전력을 보유하게 된다.

물론 오리지널 기간트를 만드는데, 시간이 좀 걸리고, 당장 기사가 부족해 전부 다 태울 순 없었지만.

"혹시 발굴지에서 무슨 일은 없었습니까?"

"응? 발굴지에서?"

"이상한 게 나왔다던가, 아니면 이상한 현상이 발생했다던가요."

"아니 없었는데, 왜? 뭔가 벌어질 것 같은가?"

"그건 아닙니다. 혹시 가디언 제국 놈들이 무슨 짓을 벌일지 몰라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다행히 암 드로운이나 거신 마법사가 발굴지를 나오면서 들킨 건 아닌 것 같았다.

설마, 아직도 넘어 오지 않은 건가?

살짝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이번 발굴만 마무리되면 나도 할데가르로 갈 것이네. 죽은 동기생들의 원수를 갚아야지."

"윌리엄 사령관께는 말씀은 드렸지만, 시안 황자님께서도 너무 눈에 띄게 행동하진 마십시오. 안드레아스는 분명 우릴 감시하고 있을 것이고, 원정군은 조용히 준비하고 있다가 그들의 허를 찔러야 합니다."

"알았네. 먼저 윌리엄 사령관님을 만나고 다음 계획을 고민해보겠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 발굴지로 가보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거신 갑옷을 모두 가져갈 수 있겠나?"

"방법은 말씀드릴 수 없으나, 분명 가능합니다."

"알았네. 나도 자넬 믿고 기다리지."

시안 황자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입술을 꽉 다물었다.

동기들의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이 느껴졌다.

난 그길로 발굴지로 향했다.

***

[이데아 제국 발굴지 내부]

이곳은 전에 얼음 절벽에서 거신 마법사를 구했던 곳이고, 아주 길고 거대한 공동에 2차 베이스캠프가 있었다.

주변에 병사도 많았고, 기간트도 제법 많이 있었다.

다행히 얼음 절벽이 녹으면서 거신 시체가 떠내려오는 일은 없었다.

얼음이 녹으면서 약해진 천장과 벽이 무너져 그곳 일대가 정말 거대한 무덤으로 변했다.

난 이곳에 묻힌 거신들을 위해 묵념했다.

"에테나, 눈을 풀어줘."

"네!"

가디언 제국 발굴지에서 데려온 마장기 기사가 밝은 빛에 눈을 감았다가 한참 만에 떴다.

그리곤 날 노려봤다.

"눈에 힘 풀어. 아니면 다시 가린다."

기사는 살짝 시선을 피했다.

지난 일주일 동안 눈을 가리고 결박당한 채로 여기저기 끌려다녔다.

다시 그 생활을 하고 싶진 않아 보였다.

"날 어쩔 셈이오?"

"그건 지금 고민 중이야. 내가 몇 가지 묻을 텐데, 대답 여하에 따라 자네 처우가 결정될 거니까 잘 생각해서 대답해."

기사는 불만이 많아 보였지만, 뭐라 하진 못했다.

"이름."

"마키아스 소령이오."

"소령? 젊은 나이에 출세했군."

마키아스가 날 쳐다보며 말했다.

"그쪽은 젊은 나이에 별을 달고 있으면서 소령에 놀라시오. 나도 원래는 대령이었소."

"하긴 그 정도 실력이면 대령 자릴 줘도 아깝지 않겠어."

"날 어떻게 할 것이오?"

"질문은 내가 한다. 넌 대답만 해."

마키아스가 입을 다물었다.

"2계급 강등이라니, 무슨 큰 죄를 지은 거지? 그래서 나이트급 마장기에 탄 거야?"

"믿지 않겠지만 반란죄요. 황제와 루이스 황자를 죽이려 했소. 내가 아니라 가문이 한 짓이지만······."

"응? 설마, 알브레 가문인가?"

"그렇소."

"하하! 이런 인연이 있나!"

웃음이 나왔다.

"그때 내가 보르자 전진 기지에서 루이스 황자를 살리지 않았다면, 지금 이 자리도 없었겠군."

마키아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오?"

"참! 세상 아이러니하지? 내가 한 행동이 이렇게 미래를 바꾸다니······."

난 보르자 전진 기지에서 알브레 가문과 반란군이 루이스 사황자를 암살하려던 것과 내가 황자를 구한 일화를 설명해줬다.

이야기를 들은 마키아스는 허무한 표정을 지었다.

"왜? 억울한가?"

"억울할 게 뭐가 있겠소. 이미 벌어진 일이고, 다 자업자득인 거지."

"그럼 루이스 사황자가 그댈 살려준 이유가 뭐지?"

"그건 나도 모르겠소. 루이스 황자와 사관학교를 같이 다니긴 했는데······."

"친분이 있군. 그런데 내가 보기엔 실력이 아까워서 살려준 거 같은데?"

마키아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넬 보니, 루이스 황자에게 원한을 품고 있지 않은 것 같군."

"아까도 말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오.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고."

"그럼 살려둘 이유가 없는데."

"뭐요?"

"루이스에게 원한이 있다면 복수할 마음이 있을 테니, 우리 쪽으로 전향하라고 권했을 텐데. 그런 게 아니면 믿을 수 없지."

난 에테나를 쳐다봤다.

"질문은 끝났어. 에테나 처리해."

"자, 잠깐."

스릉!

에테나가 검을 뽑자, 마키아스가 깊은 한숨을 쉬고 눈을 감았다.

"하아!"

몸까지 부르르 떠는 걸 보니, 죽음이 두려운 것 같았다.

하긴 이 세상에 죽음에 초연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한번 죽어본 나도 죽음은 무서운데!

그때였다!

"타일러 영주님, 이 사람 살려주면 안 되나요?"

"뭐?"

"영주님도 같이 싸워봐서 아시잖아요. 이 사람 실력이 너무 아까워요. 그리고 원한 같은 감정은 없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루이스 황자에게 충성하는 것 같지도 않고요."

"그, 그건 사실이오."

마키아스가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가 처형됐소. 내 아버지는 세무관이지 반란 같은 것에 가담할 리가 없소. 그러니 루이스 황자에게 충성을 바칠 생각은 없소."

"응? 그대도 살고 싶은가?"

"당연하지 않소.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소."

"근데 살려주기엔 위험부담이 커서 안 되겠어."

에테나가 다시 끼어들었다.

"엘프 속담에 두 번째 기회를 주면 간도 쓸개도 다 바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디언 제국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으니, 영주님께서 거둬주시면 충성을 바칠 겁니다."

"내가 아는 속담 중엔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는 속담도 있지. 인간은 상황에 따라 쉽게 변절하거든."

"난 그런 사람은 아니오."

마키아스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내가 비록 강등당하고 좌천됐지만, 마장기를 다루는 실력은 자신 있소. 그리고 어차피 가디언 제국에 다시 가봐야 난 역적의 자식이오. 평생 대수림을 전전긍긍하다 끝날 텐데, 차라리 두 번째 기회를 잡겠소."

난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부탁하는 자세가 영······."

갑자기 마키아스가 무릎을 꿇었다.

"살려주십시오.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타일러 영주님, 살려주세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대가?"

에테나는 간절한 표정으로 내게 부탁했다.

"저희 엘프도 처음엔 영주님을 믿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영주님께서 저희를 살려주어 두 번째 기회를 주셨고, 지금은 이렇게 함께 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이 사람에게 기회를 한번 주세요."

난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했다.

"대신 이 자가 도망치거나 변절하면 그대 목숨을 걸 수 있겠는가?"

에테나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입술을 깨물었다.

"알겠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제 목숨을 내놓겠습니다."

"좋다. 풀어줘라!"

에테나는 마키아스의 결박을 풀었다.

마키아스가 에테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왜? 왜 처음 본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거요?"

"저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타일러 영주님은 인재를 매우 아끼시는 분입니다. 영주님 곁에 그대 같은 뛰어난 실력자가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래도 저를 위해 목숨까지 거셨는데······."

에테나가 고개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공을 세우시면 영주께선 분명 마키아스님의 진심을 아실 겁니다. 그보다 어서 주군께 인사를 드려야지요."

"아!"

마키아스가 나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주먹을 심장에 댔다.

"신 마키아스 알브레, 타일러 영주님께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마키아스 경, 내 그대의 맹세를 믿어 보지."

"감사합니다. 영주님!"

그는 내게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난 에테나에게 살짝 윙크했다.

그리고 에테나도 나를 보며 윙크했다.

113. 거인 갑옷.

113. 거인 갑옷.

마키아스에게 운명의 실을 연결하고, 텐트에서 쉴 수 있게 배려해 줬다.

사흘 정도 굶겼더니, 식사도 잘하고 피곤했는지 잠이 들었다.

"어때?"

"확실히 거짓 맹세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루이스 황자를 말할 때 싫은 내색이 분명했습니다."

"하긴, 나 같아도 아버지와 가문의 사내들을 다 죽이고 계급까지 강등시켰는데, 목숨을 살려줬다고 고마워하진 않을 것 같네."

"그런데 이런 연극은 왜 하신 겁니까?"

"마키아스의 상황이야 전향할 만하지만, 평생을 가디언 제국에 살던 사람이잖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으로 간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게다가 난 그가 평생을 싸운 아베르크 제국의 귀족이고. 하지만 이곳에 생명의 은인이 한 명쯤 있으면 어색하고 공허한 마음도 덜하지 않겠어?"

이제야 뭔가 이해가 되는지 에테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키아스는 에테나가 자기 목숨을 구했다고 생각할 거고, 에테나를 많이 의지할 거야."

"그럼 제가 옆에서 영주님 칭찬을 하면 되나요?"

"하하!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돼. 평소와 똑같이 대하면 된다."

에테나가 피식 웃었다.

"맞아요. 타일러 영주님과 함께 있다 보면, 누구나 영주님의 매력에 빠져들 겁니다. 그리고 부하들을 많이 위해주시잖아요."

나도 피식 웃었다.

마키아스와 대화 전에 에테나와 말을 맞췄다.

에테나는 사람 표정이나 몸짓을 보고 감정과 진실, 거짓을 알아보는데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이번에도 그 능력을 조금 이용했다.

그리고 전향할 의지가 확실히 보이면 은혜를 입히라는 말도 해줬다.

이건 일종의 보험 같은 거다.

물론 내 자동인형으로 만들면 배신이나 변절할 리가 없다.

신체 능력이나 마나도 그대로 남아 있다.

하지만 마키아스의 탁월한 전투 센스는 다시 찾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건 신체 능력이라고 보기보단 그의 감각이나 깨달음이니까.

그리고 내 기사회생 성공률은 90%.

만에 하나 10%의 실패에 걸리면 얼마나 아깝겠는가.

난 인재가 필요했다.

난 조금 전에 차원 마법진이 있는 회당에 가봤다.

하지만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아무래도 암 드로운과 알리스 엘가 마법사는 다른 차원에서 돌아오지 않은 것 같았다.

일찍 오거나 늦게 오거나 돌아오면 회당에 흔적을 남기라고 했다. 하지만 전과 다름없었다.

순간 차원 마법진을 이용해 암 드로운과 마법사를 찾으러 가야 하나 고민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곳에 할 일이 있었다.

당장 비밀 임무도 그렇고, 곧 벌어진 전쟁까지.

이건 아베르크 제국의 전쟁이지만, 내 전쟁이기도 했다.

저들의 침략을 막고 빅엿을 먹일 때까진.

그저 내 거신인형인 암 드로운이 무사하길 빌었다.

***

난 이데아 제국의 황궁으로 향했다.

이곳에 오래 머물 순 없었다.

작업 상황도 확인하고,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아이템도 찾고.

이게 진짜 마지막 파밍이었다.

"충! 어서 오십시오."

기사의 안내를 받아 황궁 입구까지 이동했다.

"와! 이건 뭐라 표현할 말이 없군."

"저도 볼 때마다 놀라곤 합니다."

"안내해줘서 고맙네. 이제부턴 내가 천천히 둘러보지."

"아직 불안전한 곳이 많습니다. 조심하시길."

난 거대한 황궁을 다시 쳐다봤다.

눈앞에 에베레스트산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높다란 성벽과 뾰족한 첨탑이 벽에 박혀 있는 느낌이었다.

한 방향으로 황궁을 뚫고 들어가기 힘들었는지, 성벽 위쪽으로도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고, 첨탑의 입구나 창문으로도 진입한 흔적이 많았다. 말이 창문이지 인간이 보기엔 커다란 통로니까.

한쪽으로 이동해 눈에 마나를 뿜어냈다.

시안 황자의 예측대로 아직 발굴하지 않은 거신 갑옷이 눈에 들어왔다. 금속 갑옷에도 미량의 마석이 포함되어 있었기에 살짝 반짝이긴 했지만, 괴수 부산물로 만든 갑옷은 확실히 반짝임이 컸다.

여기선 더 챙길 것이 없겠어.

작업에 동원된 인력만 수백 명이 넘고, 작업용 기간트와 발굴 장비가 수십 대가 넘었다.

그래서 황궁을 나와 들어왔던 곳으로 다시 나갔다.

내성의 정원이었던 곳을 지나 외성문까지 나왔다.

거신의 황궁이었던 만큼 그 크기가 상상을 초월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하수도.

내 파밍은 역시 이곳부터 시작이었다.

난 메인 하수도부터 자세히 살폈다.

'아무래도 이쪽은 귀족 저택 구역은 아닌 거 같아.'

외성 부근이라 귀족 저택이 많을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좁은 하수도로 천천히 이동했다.

워낙 거미줄같이 연결된 곳이라 길을 잃을 수도 있었기에 군데군데 마석 조각을 뿌리며 이동했다.

돌아올 때 주우면 되니까.

또 안전한 파밍을 위해 거신 마력 반지도 내가 차고 있었다.

마나가 많아야 계속 마나를 눈으로 뿜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찾아 헤맬 때였다.

'오! 뭔가 있다!'

역시 두드리면 열리고, 찾으면 찾을 것이라!

그것도 상당히 밝은 빛이었다.

난 괴수인형들의 도움을 받아 하수도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발견했다.

거신 작업 공방을!

넓은 공방엔 작업했던 흔적이 있었다.

거대한 공구도 있었고, 부서지고, 미처 완성되지 못한 거신 갑옷도 있었고, 각종 거신 무기도 있었다.

아쉽게도 마법진이 새겨진 상태는 아니었기에 쓸모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곳은 1차로 갑옷이나 무기를 만들고, 마법진은 다른 곳에서 새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밑에서 봤을 때 분명 마나가 반짝였으니, 뭔가 있는 건 분명했다.

다시 마나를 눈에 보내고 반짝이는 빛을 따라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그리고!

"허! 이건 너무 크잖아!"

높이가 25미터나 되는 거대 거신 갑옷과 장비들이 세워져 있었다.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긴 했지만, 내부에 마법진도 새겨져 있었고 괴수 부산물로 만들었기에 거신 갑옷은 분명했다.

그러니까 거신들 사이에도 거인이 있었나?

거대한 갑옷과 장갑엔 날카로운 것에 긁힌 흔적도 있었고, 이빨에 물린 자국도 있었다.

이건 격렬하게 괴수와 싸운 흔적이었고, 이곳 대장간에서 1차로 갑옷을 수리하려 했던 것 같았다.

그러다 화산이 터졌고.

이건 나중에 알리사 엘가에게 물어봐야겠다.

그 거신 마법사는 그 시대 사람이니, 뭔가 알고 있을 것이다.

'이 거대한 갑옷을 기간트로 만들 수 있을까?'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곳곳에 구멍이 뚫려 마법진이 훼손되긴 했지만, 다른 오리지널 기간트와 비교하며 작업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정 힘들다면 수도에서 유학 중인 우리 천재 앨리슨에게 부탁해도 되고.

물론 제작하는 데만 엄청난 괴수 부산물과 마석이 들어갈 거고, 이걸 움직이기 위해선 상당한 숫자의 마석 배터리가 필요하겠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이걸 조종하려면 엄청난 마나량을 보유한 기사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 정도 많은 마나를 가진 기사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힘들게 만들어 봤자, 사용할 수 없었다.

그때 강렬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잠깐! 암 드로운이라면······.'

이건 시도할 만해!

일단 챙기자!

난 드라우켄을 꺼내, 거대 거신 갑옷을 인형의 집에 넣었다.

그리고 베이스캠프로 돌아갔다.

***

이데아 제국 수도 황궁에서 거신 갑옷 5개를 추가로 발굴했다.

난 그렇게 40개의 거신 갑옷과 장비를 내 인형의 집에 챙겼다. 함께 발견된 무기도.

내가 거신 갑옷을 감쪽같이 수납한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시안 황자와 발굴 작업 책임자인 파이컬 대령, 외부 경비 책임자인 로제 중령뿐이었다.

하지만 괴수인형은 보여주지 않았다.

나 혼자 있을 때 작업했으니까.

그들은 내가 고대 거신들의 마법을 사용했거나 전설로만 내려오는 아공간 가방이라도 가지고 있다고 추측하고 있을 것이다.

실제로 있는지는 나도 모르지만, 마법 반지가 있고 차원 마법진이 있는걸 보면, 그런 마법 아이템이 있을 수도 있다.

"에테나는 마키아스와 난민 기지로 가서 드워프들과 오크들을 데리고 영지로 가서 기다려! 일을 마치면 그쪽으로 갈 테니까."

"정말 혼자 괜찮으시겠어요?"

"혼자?"

"아니, 제가 옆에서 도와드려야 하는데······."

에테나는 입술을 내밀고 있는 것이 나와 같이 가고 싶은가보다.

나는 슬쩍 마키아스를 가리켰다.

내게 충성을 맹세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100% 믿을 순 없었다.

그제야 에테나도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혼자 간다고 하자, 마키아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무런 장비도 없이 그냥 맨몸으로 대수림으로 가신다는 말씀입니까?"

난 마키아스를 피식 보며 웃어줬다.

"나와 함께 있다 보면, 종종 불가능한 일을 목격하게 될 거야."

난 대수림으로 향했다.

그리고 괴조인형을 타고 곧장 난민 기지로 날아갔다.

비밀 임무도 임무지만, 나도 전쟁을 준비해야 했으니까.

***

[난민 전진 기지]

"오오! 타일러가 왔다!"

"타일러여! 어서 오게!"

라스칼과 드워프들이 날 반갑게 맞이했다.

그들의 가족과 친지, 동족을 구했으니, 내가 얼마나 이뻐 보일까?

헬카인족 족장인 하버가 소리쳤다.

"타일러여! 비공정에 대포 장착이 끝났다! 그리고 우리가 매일 같이 훈련하고 있다."

펑! 퍼퍼펑!

헬카인족 드워프 포병대가 나를 위해 비공정에서 대포를 쏘는 시범을 보여줬다.

비공정 한 척에 총 12개의 대포를 장착했기에 하늘에선 우리가 유리했다.

"좋아! 아주 좋아!"

"쿠오크! 타일러여! 오크도 준비됐다!"

"쿠오크! 쿠오크!"

쿵쿵쿵쿵!

오크 족장 쿠훌린이 오크 해병대 100명을 이끌고 왔다.

2미터의 오크가 3미터의 강습 갑옷을 입고 있었다.

갑옷보다는 기간트에 가까운 모양이었다.

실제로 드워프가 작은 기간트처럼 설계했다고 했다.

"오! 갑옷 멋진데!"

"쿠오크! 드워프 형제들이 만들어줬다!"

그들은 모두 비행석이 함유된 갑옷을 입고 있었다.

3미터로 커진 이유는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해 장갑을 두껍게 만들고 강도를 높이다 보니, 지금의 모양이 됐다고 했다.

이 갑옷은 괴수 부산물로 만들어져 있었고, 원래 갑옷 무게가 1톤에 육박했다.

하지만 비행석을 함유해 최대한 무게를 줄여 현재는 50kg까지 낮췄다.

사실 50kg도 엄청나게 무거운 편이었지만, 오크들의 힘과 근력으론 충분히 감당할 만했다.

물론 인간이 입기는 불가능했지만.

"쿠오크! 타일러여! 강습 시범 보이겠다."

"아니! 그건 나중에. 지금은 내가 급하게 할 일이 있어. 에테나가 오면 함께 영지로 가서 준비하고 있어. 곧 활약할 날이 올 거야."

"쿠오크! 알았다! 오크 이제 강하다!"

"쿠오크! 쿠오크!"

오크들의 자신감이 하늘을 찌를듯했다.

나도 어서 그들이 활약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난 우선 드워프 비공정 다섯 대를 모두 인형의 집에 넣었다.

이 큰 비공정을 장벽 밖으로 가져갈 수 있는 것은 나밖에 없었기에 내가 와야 했다.

그리고.

"호르갈이여! 카자론이여! 추가로 비공정을 더 만들어야 한다."

"몇 대나 필요한가? 타일러여!"

"숫자보단 괴수 부산물을 이용해 아주 단단하고 큰 비공정을 만들어 줘야 한다. 시간은 오래 걸려도 상관없다."

"타일러여! 하지만 비행석이 아주 많이 필요할 거다! 괴수 부산물은 매우 무거우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 아주 많이 구해왔으니까."

난 이번엔 확보한 비행석 절반을 두 족장에게 맡겼다.

스바르족은 재료를 만들거나 금속 제련을 매우 잘하는 종족이었고, 스켈야스족은 기간트를 만들 정도로 손재주가 좋은 드워프들이었다.

두 드워프 일족이 힘을 합치면 정말 크고 단단한 비공정이 나올 것이다.

난 내가 원하는 비공정의 모양과 크기를 두 족장에게 설명해줬다. 이 거대 비공정은 이곳 난민 기지에서 비밀스럽게 만들 계획이었다.

그리고 관문 장벽으로 향했다.

***

괴조인형을 타고 하늘로 날아간다.

괴조가 빠르긴 하지만, 대수림을 넘고 제국의 반을 날아가는 것은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그리고 나도 피곤했기에 중간중간 잠도 자고 휴식을 취해야 했고.

수도 외곽에 도착하자마자, 황궁이 아닌 정보국 지부부터 찾았다.

할데가르 정보국 본부에 먼저 들렸는데, 정보국장이 이곳 수도에 있다고 했다.

그를 먼저 만나보고 함께 황제를 알현할 생각이었다.

"충!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서 오게 타일러 지부장."

오랜만에 본 찰스 정보국장의 얼굴은 상당히 핼쑥해졌고, 그의 배 역시 쏙 들어갔다.

아리칸 공국과 협상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원정군 소식은 나도 들었네. 그런 일이 있었다니, 정말 피가 거꾸로 솟는군."

"이미 일은 벌어졌고, 앞일이 문제가 아닙니까."

"그렇겠지. 그런데 상황이 좋지 않아."

"마르틴 대공과 협상이 잘 안 되었습니까?"

"협상은 잘 끝났네. 이제 우리도 공식적으로 아리칸 왕국이라 불러야 하고 마르틴 국왕이라 해야 하네. 그리고 아리칸은 우리와 동맹을 맺었고, 함께 가디언 제국에 대항하기로 했네.

"그럼 뭐가 문제입니까?"

"아리칸 왕국 서쪽 국경을 탈로스 왕국과 글론 왕국 연합군이 침공했네."

"네?"

순간 어이가 없었다.

그들도 협력하는 엘프 종족이 있었고, 이번에 비행석을 많이 채취했으니, 비공정을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비공정을 만든 기간이 길어야 3, 4개월 정도였다.

그런데 벌써 국경을 넘었기에 어이가 없었다.

아마도 압도적인 병력 차로 그냥 밀어붙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베르크 제국은 가디언 제국 때문에 병력을 움직이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고.

하나도 아닌 두 왕국의 연합군이었기에 아리칸 왕국이 막아내긴 어려워 보였다.

만약 아리칸 왕국이 밀린다면, 우린 좌우에서 적을 맞게 되는 것이다.

'이것도 안드레아스의 계략인 걸까?'

크게 한번 당하자, 의심부터 들었다.

"일단 저와 황제 폐하부터 알현하시죠."

"이미 황제 폐하께도 원정대 일은 보고가 들어갔네. 비행석도 이미 할데가르 공방으로 향하고 있고."

"전 다른 일 때문에 왔습니다."

"다른 일?"

114. 사직서.

114. 사직서.

이곳은 추억의 장소 앞이었다.

황성 1층 계단 뒤쪽에 있는 긴 복도 안에 밀실 같은 회의실.

난 지금 그 앞 복도에 서 있었다.

여기서 내가 아리칸 공국의 병사들과 싸웠다.

그 야차 같이 달려드는 놈들을 수십 명이나 죽였고, 황제와 황태자를 구했다.

그런데 이제 아리칸 공국, 아니 아리칸 왕국과 같은 편이란다.

그것도 동맹국.

'하아! 무슨 회의가 나흘 내내 열리는지······.'

오늘도 3시간 전에 황제와 황태자, 3황자, 조지 마샬 원수와 추밀원장, 내무대신, 외무대신, 법무대신, 재무대신, 할데가르 기간트 공방장, 근위 기사단장, 서부군 사령관, 1군단장, 정보국장까지 높으신 분들이 왕창 들어갔다.

그런데 아직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냥 황제가 허락하면 될 것 같았는데, 오리지널 기간트라는 게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결론이 어찌 날지는 모르지만, 난 이미 8개의 거신 갑옷을 챙겼다. 그것도 룩급과 비숍급만으로.

그러니 어떻게든 빨리 결론을 내려줬으면 좋겠다.

"기다린다고 지루하겠군."

아는 얼굴이 다가왔다.

"오랜만입니다. 티아스 준장님."

"반갑네. 타일러 준장."

그는 과거 건국기념일 퍼레이드 날, 아리칸 왕국의 비공정과 기간트가 황궁을 공격했을 때, 함께 황제를 지킨 기사였다.

룩급 기간트 비올란테에 탔고, 마르틴 대공의 퀸급 기간트와 대결했다가 처참하게 깨졌지.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오늘은 에리히 레더 1군단장님을 모시고 왔네. 내가 부군단장이거든."

"아! 부군단장이 되셨군요. 축하드립니다."

"축하는 무슨, 그대나 나나 그냥 밖에서 기다리는 신세인데."

티아스 준장은 전과 조금은 다른 모습이었다.

별을 달더니 좀 진중해졌다고 할까?

그때 마르틴 대공에게 져서 맨탈이 탈탈 털릴 때 하곤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우리 1군단은 곧 아리칸 왕국으로 갈 것 같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아리칸 왕국이 탈로스 글론 연합군에 밀린다고요. 그런데 1군단이 가는군요."

"2군단은 이곳을 지켜야 하고 5군단은 대수림에 있고, 나머진 동부 전선에 있으니까. 그리고 우리 1군단이 제일 강하지 않은가."

강한 건 모르겠지만, 기간트가 제일 많긴 하지.

그래도 아베르크 제국의 지도자들이 바보는 아니었기에 1군단을 아리칸 왕국으로 보내기로 한 것 같았다.

만약 아리칸 왕국이 무너지면, 그땐 정말 양쪽으로 협공받을 수 있으니까.

그럼 난 가디언 제국의 움직임만 신경 쓰면 되겠네.

알아서 잘하겠지.

그런데 황제를 죽이려 했고, 제국의 황궁을 공격했던 아리칸 왕국을 이제 우리가 돕기 위해 간다는게 참······.

"가디언 제국의 움직임은 어떻습니까?"

"정확한 것은 모르지만 마장기를 꾸준히 늘리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네. 그쪽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이지."

고개를 끄덕였다.

연합국보다 가디언 제국이 문제긴 하지, 안드레아스도 있고.

"이제 전장으로 가면 언제 볼지 모르겠군."

"나중에 제 영지로 놀러 오십시오."

"응? 영지라고?"

피식 웃어줬다.

철컹!

그때 회의실 문이 열렸다.

티아스 준장이 내게 말했다.

"나중에 술 한잔하지."

"네. 몸조심하십시오."

티아스 준장과 나는 맨 앞에서 나오는 황제를 향해 경례했다.

케인 오르도 황제는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을 보니 그래도 일은 잘된 것 같았다.

나흘 전 찰스 국장과 함께 알현하고, 이제야 회의가 다 끝난 것 같았다.

황제와 황태자가 지나고, 호엘 삼황자가 나를 쳐다봤다.

뭔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추밀원장도 나를 살짝 쳐다보곤, 고개를 흔들었다.

반응을 보니, 윌리엄 사령관의 뜻이 어느 정도 관철된 듯싶었다.

"타일러 준장! 안으로 들어오게."

찰스 정보국장이 내게 손짓했다.

그곳엔 군청색 제복을 입은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그의 어깨엔 별 다섯이 반짝이고.

"충! 타일러 빈스 준장입니다."

"응? 생각보다 더 어리군."

"나이는 어리지만, 머리가 비상한 참모입니다. 이번엔 원정군을 구하기도 했고요."

나 대신 찰스 정보국장이 내 소개를 했다.

"됐네. 손 내리게."

조지 원수는 서류를 넘기며 물었다.

"자네가 발굴지에서 발견한 거신 갑옷을 갖고 있다며?"

"그렇습니다."

"어디에 보관했나? 헬다임? 할데가르?"

아무래도 윌리엄 사령관은 내가 아공간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말은 서신에 적지 않았나 보다.

그러니 대답을 잘해야 했다.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그래?"

조지 원수가 날 빤히 쳐다봤다.

"조금 전에 황제 폐하께서 이제부터 전시 상황이라며 모든 군 지휘권을 내게 넘겨주셨네. 그래도 말 안 할 텐가?"

"죄송합니다. 윌리엄 사령관님께서 할데가르 공방으로 전달할 때까지 비밀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뭐라?"

조지 마샬 원수가 날 노려봤다.

"상당히 건방지군. 내가 방금 군 통수권자라고 말했거늘 윌리엄 북부군 사령관의 이름을 들먹여?"

"죄송합니다."

"어허! 이 자가 그래도!"

조지 마샬 원수가 인상을 찡그렸다.

옆에 있던 찰스 국장은 얼굴이 빨개지고 당황한 모습이었다.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는 내 상관이라 불안한가 보다.

"하아! 뭐, 그렇다고 원정군을 구한 영웅을 처벌할 순 없는 노릇이고."

조지 마샬은 고개를 흔들더니, 다시 서류를 쳐다봤다.

"일단 자네가 보관하고 있는 32개의 거신 갑옷과 장비는 모두 할데가르 공방에 넘기도록 하게."

"오리지널 기간트 배정은 어찌 되는 겁니까?"

"뭐? 내가 그걸 자네에게 알려줘야 하나?"

"전 원정군이 무사히 비행석을 채취할 수 있게 다른 차원까지 길 안내를 했고, 또 가디언 제국의 책략에 걸려 괴수들에게 전멸할 수 있는 원정군을 절반이나 살려서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대수림을 통과해 비밀리에 거신 장비까지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니 그 정도는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상대로 조지 마샬의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다.

하지만 난 마지막으로 할 말은 하고 싶었다.

이미 의무복무기간도 지났고, 군대는 떠날 생각이니까.

가디언 제국과 싸움이야 영지군 자격으로 참전하면 되고.

"북부군에 12대가 배정될 거고, 5군단에도 12대가 배정될 거네. 나머진 기밀이라 알려줄 수 없네."

"그 정도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가져온 32개 중에서 24개를 북부군과 5군단이 나눠 가지게 되었다. 나머지 8개는 알아서 쓰겠지.

그래도 그 정도면 꽤 많이 얻어낸 것 같았다.

아무래도 비행석을 가져온 공이 있으니까.

그리고 윌리엄 사령관에게 말해 내 몫인 거신 갑옷을 미리 챙기길 잘했다.

이런 분위기라면 40개를 전부 건네고, 오리지널 기간트로 받으려 했다면 한 개도 못 챙길 뻔했다.

눈앞에 조지 마샬이란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는 모르지만, 전형적인 꼰대 군인 같았다.

'나랑 안 맞아.'

"자! 시간이 없네. 이 서류를 가지고 어서 할데가르 공방에 물건을 넘기게."

난 서류를 받아들었다.

"충! 가보겠습니다."

경례하고 문을 나섰다.

찰스 정보국장이 날 따라왔다.

"타일러 준장,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게."

"뭘 말입니까?"

"조지 원수 말이네. 지금 스트레스가 말이 아니야. 아리칸 왕국이 계속 밀리고 있거든. 그리고 오늘 급하게 총사령관 자리를 맡았으니 정신이 없을 거네."

"어차피 상관없습니다. 할데가르에 거신 갑옷과 장비를 넘기면 제 임무는 끝납니다. 그러니 그때 정보국 본부로 가서 옷을 벗겠습니다."

"뭐, 뭐라?"

찰스 국장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그만두겠다는 건가?"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전 이제 한 영지의 영주입니다. 영주가 계속 밖으로만 다닐 순 없지요."

"그러지 말게. 이번 일의 공으로 자넨 이미 소장으로 진급했네. 그리고 우리 정보국에서 이번에 비공정 관련한 정보대를 새로 만들고 있네. 자네가 바로 그 부서의 부국장으로 발령될 거네. 그러니······."

"죄송합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마음먹은 일이라."

거절의 뜻을 확실히 전했다.

"그럼 대수림 정보대는 어쩌고?"

"앞으로 1년간은 알베르토 중위를 통해서 대수림의 정보를 계속 제공하겠습니다. 그다음부턴 적절한 비용을 청구하겠습니다."

"정말 그만둘 생각이군."

"솔직히 마지막에 조지 마샬 원수께서 조금 있는 미련까지 날려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허!"

찰스 국장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시간 나시면 제 영지로 놀러 오십시오."

찰스 국장에게 경례하고 황성을 나섰다.

난 곧바로 할데가르로 이동했다.

***

늦은 밤.

할데가르 공방 옆 기차역에 거신 갑옷을 차례로 내려놨다.

그리고 공방으로 가서 조지 마샬 원수가 넘겨준 서류를 건넸고, 거신 갑옷이 있는 곳을 알려줬다.

작업용 기간트들이 거신 갑옷을 모두 공방으로 옮기는 것까지 확인하고, 손을 털었다.

그리고 정보국 본부로 가서 사직서와 제복을 국장실 앞에 두고 왔다.

'시원섭섭하네!'

자리에 대한 욕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진급하면 할수록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고, 뭔가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리고 그동안 정보국 소속으로 대수림에서 활약하며, 레벨도 올리고, 마석과 괴수 부산물도 많이 얻었다.

그리고 기간트와 마법인형도 많이 늘었고.

하지만 더는 누군가의 명령으로 꼭두각시처럼 움직일 순 없었다.

명색이 내가 인형술사가 아닌가.

조종하는 거면 모를까 조종당하는 것은 별로였다. 그리고 군대는 구조적으로 명령을 받는 곳이었고.

마지막으로 가디언 제국과 전쟁이 벌어지면, 그때 한번은 발레리온 영지군으로 출전할 생각이었다.

안드레아스에게 당한 복수도 하고, 아베르크 제국의 비공정 성능도 가까이서 지켜볼 생각이었다.

그 전에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난 곧바로 괴조인형을 타고, 헬다임에 있는 내 집으로 향했다.

***

드워프 왕자 글러드가 손을 흔들었다.

"타일러여!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네!"

"미안하군. 원정대 일정이 너무 오래 걸렸어."

케네스 영감이 다가왔다.

"얼굴 까먹겠어!"

"잘 지내셨습니까?"

"잘은 지냈는데, 앨리슨, 고것이 편지를 안 쓰네. 고얀 것."

"앨리슨은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가끔 사고도 치고, 선생님을 놀리긴 해도, 공부도 전체 수석이고, 내년엔 황립 사관학교에 입학까지 확정된 상태였다.

"그보다 이제 이삿짐을 싸십시오."

"응? 이제 진짜 이사 가는 건가?"

케네스 영감이 되물었다.

"짐을 벌써 몇 번이나 쌌다가 풀었는지 몰라."

"하하! 죄송합니다. 이번엔 진짜 갑니다."

난 먼저 완성된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부터 챙겼고, 수리된 기간트와 부산물, 마석, 작업 장비까지 전부 다 인형의 집에 넣었다.

그리고 헬다임에 열차를 타러 이동했다.

그런데 헬다임 역에 아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장벽을 넘어오셨네요."

그는 윌리엄 사령관과 엠버 대령이었다.

"타일러 준장, 이곳은 보는 눈이 많으니, 저쪽으로 이동하지."

우린 한쪽으로 이동했다.

"그게 정말인가? 이틀 전에 소식을 들었네. 정보국을 그만뒀다면서."

"그렇습니다. 임무는 잘 마무리했으니, 걱정하진 마십시오."

"그거야 이미 알고 있네. 그런데 너무 갑작스럽지 않은가."

"제가 그만둔다고 한 10번은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그거야 힘드니까 그냥 불평하는 말인 줄 알았지. 아무튼, 다시 생각하게. 지금 우리 제국은 자네가 필요하네."

그동안 할 만큼 했는데 더 봉사하라는 건가?

나는 피식 웃어줬다.

"제가 어디 아베르크 제국을 떠난 답니까? 제 영지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차피 가디언 제국이 침공하면, 동원령이 발동되지 않겠습니까. 그때 제 병력을 이끌고 참전하겠습니다. 그놈들에겐 갚아야 할 빚이 있으니까요."

"그거야 그렇지만, 군에 계속 남아 있는 것과 영지군으로 참전하는 것은 천지 차이네."

"그래도 제 몫은 충분히 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아! 자네가 군을 떠난다니, 조금 허무하군."

"사령관께서도 은퇴하시면, 제 영지로 오십시오. 여기 헬다임에서도 가깝고, 노후 생활하기 좋은 곳입니다. 제가 잘해드리죠."

"휴! 이미 마음을 굳힌 것 같군."

윌리엄 사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내 마음을 돌리기엔 늦었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럼 이번에 사직서를 낸 기사들이라도 좀 말려주면 안 되겠는가?"

"네? 그게 무슨?"

115. 발레리온 영지.

115. 발레리온 영지.

윌리엄 사령관의 표정은 심각해 보였다.

"장벽을 넘어오자마자, 사직서를 낸 기사가 다섯이나 있네. 모두 자네 밑에 있던 선발대 기사들이네. 그 때문에 다른 기사들도 동요하고 있어."

'그 녀석들이 사고 쳤네······.'

내가 군대를 그만두면 내 영지로 오겠다고 하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그만둘 줄은 몰랐다.

"지금 우리 북부군은 기사 한 명이 아쉬울 때야. 그런데 실력 있는 기사가 다섯이나 빠지는 것은 큰 공백이네."

"그만두지 말라고 해도 제 말을 듣겠습니까?"

"자네 말이면, 죽는시늉이라도 하는 기사들이 아닌가."

"죄송합니다만 그들에게 그만두라고 강요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들 스스로 판단이고, 제 영지로 온다면 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겁니다."

"뭐?"

윌리엄 사령관이 날 노려봤다.

"그렇게 나온다면, 전시엔 상관의 재량으로 제대를 금지할 수 있네. 그리고 지금이 그 전시 상황이고."

"그렇게 하십시오. 사령관님 재량인 걸 제가 어떻게 하겠습니다. 다만 가디언 제국과 전쟁에서 제 도움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자네 왜 이렇게 변했나?"

"제가 변한 건 없습니다."

사람은 그대로지만 관계가 변한 거지.

난 이제 군인 신분이 아니니까.

"앞으로 대수림에 있는 영지를 어떻게 오가려고 하는 건가?"

"지금 절 협박하시는 겁니까?"

"협박이 아니라, 그냥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마음대로 하십시오. 저도 정보국으로 보내는 모든 정보를 끊겠습니다."

"어허! 왜 이렇게 감정적으로 하는 건가."

"지금 감정적이신 것은 사령님이십니다."

윌리엄 사령관이 고개를 흔들었다.

"말로는 못 당하겠어."

"전에 제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전 밑에 두기보단 동업자가 어울린다고. 지금도 그 조건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전 이제 한 영지의 영주고, 제국의 백작입니다. 그러니 그것에 맞춰 대우해 주시면 우리 관계는 지금처럼 계속 유지할 겁니다."

"그럼 기사들은?"

"기사들이 제 영지로 온다고 해도 제가 전장으로 가면 당연히 따라올 겁니다. 그때를 생각해서 좋게 보내주는 것도 미덕이 아니겠습니까. 솔직히 그들이 이번 원정군의 선발대로 많은 활약을 했으니, 오히려 포상을 두둑이 줘서 보내는 것이 북부군 사기에도 좋을 겁니다."

윌리엄 사령관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래저래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군."

"인생이 원래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옆에 있던 엠버 대령이 다가와 말했다.

"열차가 곧 출발합니다."

"알았네."

윌리엄 사령관이 날 빤히 쳐다봤다.

"내 다시 연락하겠소. 다음에 봅시다. 타일러 경."

"살펴 가십시오. 사령관님."

윌리엄과 엠버 대령은 열차에 올라탔다.

두 사람은 수도로 향하고, 우리가 탈 열차가 도착했다.

'드디어 내 영지로 가는구나!'

살짝 설레는 마음이 들었다.

지금까지 계속 금화만 들어가고, 내 영지가 있다는 말만 들었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니까.

궁금증과 기대감을 안고 드워프들과 열차에 올라탔다.

***

열차는 달린다.

산과 숲을 지나고, 강을 건너고, 골짜기 위를 아슬아슬하게 지난다.

그렇게 이틀을 달리자, 너른 들판이 보였다.

"와! 꼭 우리 고향 같네!"

"그러게 저기 황금색 들판을 봐!"

"오오!"

글러드 왕자와 드워프들은 잔뜩 신이나 있었다.

그동안 감옥 아닌 감옥에서 생활해야 했으니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이제 마음 놓고 거리를 활보하고,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겠지.

내가 영주니까.

'그러게 정말 황금빛이네.'

나도 창밖을 한참 넋 놓고 보았다.

지금, 눈앞에 모든 곳이 내 영지였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자, 집들이 많아지고, 열차는 도심지로 들어섰다.

이곳은 영지에서 가장 큰 도시인 발레리온.

영지 이름과 도시 이름이 같다.

덜컹! 끼이이익!

치이익!

열차가 서고, 우린 플랫폼에 내렸다.

그리고 눈앞에 반가운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타일러 빈스 영주님."

"반갑네. 프레디 준장, 아니지 이제 뭐라고 불러야지?"

프레디가 피식 웃었다.

프레디는 내게 깎듯이 존댓말을 했다.

역시 돈의 위력인가!

"그냥 프레디 시장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시장? 난 그런 직책을 내린 적이 없는데?"

"어쩔 수 없었습니다. 영주께서 안 계시니, 누가 제 말을 따르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스스로 발레리온 시의 시장으로 취임했습니다."

"뭐, 잘했군. 그런데 마중 나온 사람은 그대 혼자인가?"

프레디 시장이 갑자기 날 노려봤다.

"지금, 이 영지에 일거리가 얼마나 많은 줄 아십니까? 누구 때문에 일꾼 한 명, 병사 한 명의 손도 절실합니다. 영주께서도 어서 일을 시작하셔야죠."

프레디가 까칠하게 나왔다.

하긴 그동안 나 없이 3년을 영주 대리로 영지를 관리했으니, 스트레스가 많을 것이다.

나와 드워프들은 프레디 시장의 안내를 받아 이동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길이 잘 깔려있었고, 건물이 반듯했다.

그리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과 드워프들도 보였다.

'아! 내가 드워프 난민을 거의 2천 명이나 이곳으로 보냈지.'

그게 벌써 2년이 다 됐다.

시간 참 빠르군.

프레디 시장이 말했다.

"이곳이 신시가지입니다. 보다시피 거리와 집들은 드워프들의 도움으로 정비가 거의 끝났습니다. 상하수도를 만드는 것도 드워프들의 역할이 컸습니다."

"아까 열차역 주변하고는 분위기가 다르군."

"그곳은 이미 오래된 구시가지입니다. 영지민들도 지금은 이곳 신시가지를 더 좋아합니다. 걷기 좋거든요."

깔끔한 거리.

곳곳에 작은 광장과 공원도 마음에 들었다.

수도나 할데가르처럼 규모가 크진 않지만, 아기자기하고 뭔가 예술적인 느낌도 들었다.

아마 곳곳에 있는 분수대에 조각상과 건물에 새겨진 고풍스러운 문양과 조각 때문일 것이다.

'이거 관광 수익을 기대해봐도 되겠는데?'

계속 걷다 보니, 한창 짓고 이는 큰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엔 많은 사람과 드워프들이 일하고 있었다.

"여긴 뭐지?"

"영주관입니다. 집무실과 저택 건물을 동시에 짓고 있습니다. 원래 진작 완성돼야 했지만, 드워프들 거주 구역을 만든다고 계속 미뤄졌다가 얼마 전에 시작했습니다."

프레디가 손을 들었다.

그러자, 안전모를 쓴 여자가 달려왔다.

"어서 오십시오. 영주님!"

"누구지?"

"제니퍼 부시장입니다."

"부시장?"

"제 아내입니다. 관리 인력이 부족해 제가 고용했습니다."

"하하! 고생하시오. 부시장."

"아닙니다. 제 적성을 찾은 거 같아 일이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돈 받고 하는 일인데요."

프레디 시장이 물었다.

"언제쯤 완공되겠소?"

"장비가 부족해. 시간이 좀 걸릴 듯싶은데요. 요청한 장비는 아직입니까?"

"영주님 들으셨죠. 작업용 기간트가 있으면 일이 훨씬 빨리 끝날 겁니다."

"알았네. 바로 준비해주지."

우린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부부가 시장, 부시장이라 가족끼리 다 해 먹는 거 아닌가?"

"저도 부시장을 자르고 싶습니다. 사사건건 요구하는 게 얼마나 많은지 아주 골치가 아픕니다."

도착한 곳은 허허벌판이었다.

"여긴 아무것도 없는데?"

"영주께서 전에 말씀하셨던 곳입니다."

"아! 기간트 공방."

"여기도 진작 시작했어야 했는데, 드워프 거주 구역을 만든다고 손을 놓고 있었습니다."

난 글러드 왕자를 쳐다봤다.

그리고 이곳에 기간트 공방을 지어야 한다고 말했다.

"타일러여! 여긴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

"그래 아무래도 공방을 쓰는 사람이 짓는 게 좋겠지."

드워프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측량을 시작했다.

"프레디 시장, 이곳은 드워프들이 알아서 할 테니까. 자재나 잘 공급해 주게."

"오! 희소식이네요."

그때 케네스 영감이 나섰다.

"응? 내 저택이 안 보이는군."

프레디가 대답했다.

"원래 이곳에 지을 예정이었지만, 역시나 시간이······."

내가 케네스 영감을 달랬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드워프들에게 말해 전보다 더 크고, 좋게 지어드리겠습니다."

"드워프들이 자주 방문하니까, 테라스하고 베란다가 넓었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난 글러드 왕자에게 케네스 영감의 요구사항을 추가해줬다.

"일단 케네스 공방장님과 드워프들의 숙소는 근처 여관에 마련해뒀습니다."

"휴! 어쩌겠소. 집이 완성될 때까지 그곳에서 지내야지."

다행히 케네스 영감은 이해해줬다.

여관 하나를 통째로 빌려 드워프들과 당분간 함께 사용하도록 했다.

"그리고 비행장도 하나 필요한데."

"비행장이요?"

프레디가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

난 비공정에 대해서 알려줬다.

"허! 세상이 많이 변하겠군요."

"그렇지. 이제 대비행 시대라고 할까."

"비공정이 쉽게 접안할 수 있게 탑을 짓고 정박지를 만들어야겠군요."

"잘 이해했군."

"하아! 또 일거리가 늘었네요."

"걱정하지 말게 이젠 내가 있으니까."

프레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 시청으로 가시죠."

"시청도 있어?"

"네, 임시로 만들었습니다."

시청으로 가는데 구시가지 시장을 지나야 했다.

모퉁이에 과일 행상이 소리쳤다.

"어이! 시장님, 어디 가?"

"일하러!"

"이거 하나 먹고 가!"

휘익! 탁!

사과 하나를 귀신같이 받은 프레디.

"옆엔 누구야?"

"어! 우리 영지 영주님."

"영주라고?"

행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헉!"

기겁하더니 나를 향해 바짝 엎드렸다.

"아이고 몰라뵈어 죄송합니다."

"일어나게. 모른 건 죄가 아니지."

상인을 일으켰다.

"나도 사과 하나 주게."

"얼마든지 가져가십시오."

난 사과를 하나 들어 깨물었다.

아작!

과즙이 입안에서 터졌다.

역시 사과는 맛있어.

대수림에서 제일 귀한 게 신선한 과일이었다.

"신선한 과일을 파는군. 자네 이름이 뭐지?"

"존 웨인입니다. 영주님."

"잘 먹었네. 존."

금화 하나를 내밀었다.

"거스름돈은 됐어."

"금화를 주셨는데요?"

"괜찮아. 나는 좀 뽑아 먹어도 돼. 금화가 많으니까."

"네?"

존은 멍한 표정을 지었고, 우린 시청으로 향했다.

[발레리온 시청]

"이게 시청이라고?"

"네, 뭘 기대하셨습니까?"

구시가지 끝에 있는 허름한 2층 건물이었다.

"전에 영주가 살던 저택이나 쓰던 건물은 없어?"

"전 영주가 아주 개망나니라 영주 저택도 노름으로 날렸습니다. 지금 그 저택은 다른 사람 소유라 아무리 영주님이라도 어쩔 수 없습니다."

"뭐, 덕분에 헐값에 영지를 넘겨받았으니,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내부로 들어가니 1층에 일하는 직원이 셋밖에 없었다.

다들 나를 한번 쳐다보곤 일에 집중했다.

하긴 내가 영주인지도 모르겠구나.

그리고 얼마나 일이 많은지, 시장을 봐도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실무 위주로 뽑았더니, 다들 일밖에 모릅니다. 시장실은 이쪽입니다."

2층 끝방으로 들어갔다.

거기가 시장실이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래도 영주님이 오셨는데 제가 커피라도 한잔 타 오겠습니다."

프레디 시장이 밖으로 나갔다.

말이 시장이지, 아무 권위 의식이나 권한도 별로 없어 보였다.

발로 뛰는 사장 느낌이다.

2층 창문 밖을 쳐다봤다.

한쪽은 구시가지 시장이었고, 다른 한쪽은 신시가지였다.

시청?은 그 중간에 있었다.

'내가 사람은 잘 뽑았네.'

그동안 금화를 꾸준히 보낸 보람이 있었다.

골목이나 길가에 아이들이 뛰놀고, 드워프와 인간이 자연스레 어우러져 길을 걷는다.

뭔가 가슴이 꽉 찬 느낌이 들었다.

이제 이 모든 것이 내 영지고, 내 집이었다.

그리고 모두 내가 지켜야 할 소중한 일상이고, 지켜야 할 사람들이었다.

"자! 한잔 드십시오."

프레디 시장이 커피를 타왔다.

"커피 한잔 타는데 왜 이렇게 늦어?"

"직원들 커피도 한 잔씩 타주느라고 늦었습니다."

"허! 커피도 직접 타서 주나?"

"직원을 한번 시켜봤는데, 더럽게 못 타지 뭡니까. 그다음부턴 제가 타서 한 잔씩 돌립니다."

프레디 시장이 건넨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오! 커피믹스 그 맛이네.

추억의 맛에 살짝 놀랐다.

커피는 역시 설탕이지.

"내 커피도 앞으로 시장이 타게."

"네."

"그런데 여기 건물이 너무 낡았어. 시청도 하나 만들어야겠는데?"

"그런 건 나중에 해도 됩니다. 그보다 영지 병사와 기간트가 더 시급합니다."

"기간트는 왜?"

"서쪽 베르가니 영지 때문입니다."

"응?"

"영주가 바뀌었단 소문이 들리자마자, 기간트를 앞세워 강제로 서쪽 3개 마을을 점거하고, 그 일대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우겨? 서류가 없다는 소리네?"

"있긴 한데, 죄다 만들어진 시기가 의심스러운 것뿐입니다. 우리에게 영지를 넘긴 그 망나니 영주가 베르가니 영지에 의탁하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그놈들이 내 영지를 무단 점거하고 있다는 말이네."

"그렇습니다."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뭔가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하지만 얼굴은 차갑게 웃고 있었다.

116. 합의하에.

116. 합의하에.

"베르가니 영지의 병력은 얼마나 되지?"

"기간트가 75기, 병력은 천명 정도 됩니다."

"뭐? 중급 영지가 왜 이렇게 기간트가 많아?"

갑자기 프레디 시장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장인이 베닝 록체스터입니다."

"록체스터? 그 록체스터 가문?"

"그렇습니다."

하필 제국 북부에서 기간트를 생산하는 대영지를 가진 사람이 장인이라니!

"아무리 그래도 75기면 너무 많은 거 아냐?"

"기간트 3분의 2가 50년 전 구형 모델입니다."

"구형?"

"베닝 록체스터 공작이 워낙 짠돌이라 신형은 자신들이 쓰고, 남아도는 옛날 기간트만 몰아 준 거 같습니다. 그리고 기간트 대부분이 폰급과 나이트급이고, 비숍급은 넷뿐입니다. 룩급 기간트는 아예 없고요. 그래도 기간트라 강제로 밀고 들어와서 어쩔 수 없이 마을과 그 일대를 내줬습니다. 저희는 기간트가 한 대도 없으니까요."

"이런 중대한 사항을 왜 내게 알리지 않았나?"

"예?"

프레디 시장이 입을 살짝 벌리고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현타가 온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아! 나 담배 끊었지······."

"담배를 끊었다고? 하루에 3갑씩 피우던 그대가?"

"네! 끊었습니다. 머리가 점점 퇴화하는 느낌이 들어서요."

담배를 피우지 못하자, 프레디 시장이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그러니까······."

"잠깐! 더 말하지 말게. 무슨 말인지 알았으니까."

"전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다 안다니까."

입맛이 쓰다.

난 대부분 대수림에 있었으니, 내게 소식을 알리려면 장벽 사령부밖에 없었을 것이다.

내가 정보국 소속이긴 하지만, 정보국은 대수림에 손을 놓고 있는 것을 전 정보국 지부장이었던 프레디가 모를 리가 없으니까.

'좀 괘씸하긴 하네.'

십중팔구 윌리엄 사령관이 내게 알리지 않았겠지.

그때는 대수림에서 임무 중이었으니까.

중간에 내가 영지로 가겠다고 하면 곤란했을 것이다.

"에이! 내가 이래서 군대를 나온 거야. 사람보다 임무가 먼저니까."

"갑자기 무슨 소립니까?"

"아니네."

나중에 윌리엄 사령관을 만나면, 한 마디 해야겠다.

그리고 손해배상도 받아야지.

"아무튼, 놈들이 영지를 점거했지만, 저항하지 않았기에 인명 피해는 없었습니다."

"대체 왜 우리 영지를 노리는 거지? 내가 알기론 베르가니 영지는 꽤 부유한 영지일 텐데?"

"저도 궁금해 좀 알아봤는데, 초창기엔 철도 사업을 해서 몇 대가 먹고 살 만큼 많은 금화를 벌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사업이 정체되자 여러 곳에 투자를 많이 했고, 큰 손해를 봤다고 들었습니다."

정보국 출신답게 프레디가 그들의 상황을 잘 조사했다.

그들은 영지 대부분이 산악지대로 철광석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었고, 마석 산업혁명과 동시에 괴수 부산물과 기간트의 수송 문제가 이슈로 떠오르자, 광산 사업과 철도의 근간이 되는 철로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황실과 대영지에 강철 철로를 납품해 큰 부를 축적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미 수도와 헬다임, 각 대영지와 국경을 잇는 주요 철도 라인은 완성되었고, 철로 유지보수만으론 그렇게 큰 이익을 남길 순 없었다. 그러다 무리하게 투자를 했고 결과는 지금처럼 좋지 못했다.

"아니! 아무리 구형이라도 기간트가 그렇게 많으면 대수림으로 가서 괴수를 잡고 부산물로 돈을 벌면 되지. 왜 남의 땅을 노리는 거야?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군. 헬다임 장벽도 코 앞인데······."

난 진짜 이해할 수 없었다.

놈들이 점거한 마을들은 우리 영지에서 밀 생산량이 가장 많은 곳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남의 영지의 밀 경작지를 공으로 먹겠다는 거다.

도둑놈들!

"그런데 저렇게 강제로 막 다른 영지를 점거해도 되는 거야?"

"아마도 분쟁 지역으로 만들려는 심산 같습니다."

"분쟁 지역?"

"아베르크 제국은 기본적으로 영지전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아까운 기간트가 파괴되는 일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예외가 있는데, 바로 분쟁 지역입니다. 서로 영지가 겹치거나 지도가 정확지 않아서 실제 가보면, 애매한 지역이 있습니다. 그런 곳에 분쟁이 발생할 때, 서로 합의하에 영지전을 벌입니다."

"그냥 막 싸우는 게 아니군."

"물론입니다. 그리고 보통 영지전까진 가지 않고, 세력이 약한 쪽이 양보하고 끝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싸우면 더 큰 손해가 발생하거든요."

프레디 시장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같은 경우는 영지를 양도받았지만, 전 영주가 아직 살아있기에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겁니다. 나중에 문서를 조작해 만들거나 딴소리를 할 수 있거든요. 물론 법정으로 가면 결국, 우리가 100%이깁니다. 문제는 시간이······."

"전엔 이런 문제를 몰랐나?"

"전 영주인 매드 파크 남작은 그럴 위인이 되지 못했거든요. 자식도 없었고요."

"알만하군. 옆에서 누군가 살살 꾀었겠군."

그 누군가는 분명 베르가니 가문일 테고.

난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딜 가십니까?"

"충분히 상황 파악했으니까, 영지전 합의하러 가야지."

"네? 하지만 우린 기간트와 기사가 없지 않습니까?"

"기간트는 생길 거고, 기사들은 곧 올 거야."

물론 나 혼자도 충분하지만.

난 그 길로 베르가니 영지를 찾았다.

***

[베르가니 영지 영주성]

"누구라고요?"

"발레리온 영지의 영주인 타일러 빈스 백작이네. 영주님을 뵙고 싶네."

성문 경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성문 경비가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제대로 엿을 먹이는구먼!'

그러다 경비와 한 기사가 밖으로 나왔다.

"발레리온 영지의 영주시라고요?"

"그렇네. 자네 주군을 좀 만나게 해주게."

"일단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기사는 날 영주 집무실로 데려갔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기사가 나가고.

역시나 한참 동안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 흔한 물 한잔 내오지 않았고.

피식 웃음이 나온다.

참으로 사람이란 간사한 동물이란 말이야.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면, 무시하고 무조건 깔아뭉개려고 한다.

지금처럼.

여기 귀족 놈들은 다 이런 식인가?

저녁 식사 시간이 다 돼서야 영주와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미안하오. 영지 업무가 바빠서. 그래, 발레리온 영지의 영주시라고요?"

"그렇습니다. 타일러 빈스 백작입니다."

"내가 이곳 영주인 오웬 베르가니 백작이요. 그런데 여기까지 기사도 없이 혼자 오셨소?"

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아직 기사들이 도착하지 않아서요."

"아! 발레리온에 기사가 있긴 있군요."

"물론입니다. 기간트를 다루는 기사들도 있습니다."

오웬 베르가니 백작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내려왔다.

그는 이미 우리 영지에 대해 조사를 끝냈을 것이고, 기간트와 기사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베르가니 영지는 원정군에 참가하지도 않았고, 대수림에 전진 기지도 없었으니 나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듯 했다.

"그런데 여기까지 무슨 일이시오?"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영지에 있는 기간트와 병사들을 물려 주십시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발레리온 영지에 우리 기간트가 있다고요?"

"그렇습니다. 타온 마을과 알레이 마을, 글레온 마을에 있는 병력을 물려 주십시오."

오웬 베르가니 백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타일러 백작, 경이 뭔가 잘 못 알고 계시오."

"네?"

"방금 말씀하신 그 세 마을은 우리가 몇 년 전에 매드 파크 남작에게 구매한 지역이요. 금화도 이미 지급했고."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제가 가진 문서엔 그 세 지역은 분명 매드 남작이 제게 남긴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허허! 지금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그런 것이 아니라, 제가 가진 문서에 분명······."

"어허! 나도 문서가 있다니까!"

오웬 백작이 인상을 찡그렸다.

나도 여기서 물러설 순 없었다.

"계속 이러시면 수도에 가서 정식으로 법무부에 문제를 제기할 겁니다."

"뭐요?"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긴 뭐하지만, 전 황제 폐하와 대신들을 구하고 엠페러 프라임 훈장을 받았습니다. 수도에 제법 연줄이 많습니다."

"아! 그래요. 그대의 활약은 나도 소문으로 들었소. 법적으로 하겠다면 그렇게 하시오. 나도 문서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 문서는 나중에 만들어진 겁니다. 분명 제 문서에는······."

"나중에 만들었다는 증거가 어디 있소? 내 문서에도 분명 매드 남작의 인장이 찍혀있고, 날짜가 적혀 있소."

"하지만 매드 남작의 인장은 이제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제가 가진 문서에 이미 제 영주 인장만 유효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오웬 백작이 고개를 흔들었다.

"난 그런 거 모르겠고, 정 억울하면 그대 말대로 수도에 가서 법에 호소하시던가. 조사관 파견하고 변호사끼리 싸우다 보면 적어도 5년은 걸리겠지."

"네?"

"이보시오. 타일러 백작. 제국의 법이 당신을 도와줄 거로 생각하시오."

"그야 당연히······."

"쯧쯧! 딱한 양반, 정말 모르겠소? 제국은 힘으로 움직이는 거요. 영지와 영지의 관계도 그렇고. 5년 후에 판결이 나왔다고 해도 발레리온의 다른 마을을 내게 팔았단 문서가 또 나온다면, 난 다른 마을을 점거하면 그만이요. 그럼 또 그 땅을 찾기 위해 5년은 걸리겠지."

"어떻게 그런 짓을······."

"서로 계속 피곤한 짓은 하지 맙시다. 그냥 그 세 마을과 주변 일대만 넘기는 거로 하고 마무리합시다. 나도 더는 욕심을 부리지 않겠소."

"원래 제 것인 것을······."

"어허! 계속 같은 말 하게 하지 말고."

"하지만······."

"자꾸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온다면 다음에 발레리온 시를 넘긴다는 문서가 나올지도 모르오. 도시가 파괴되고 피눈물을 흘려야 정신 차리겠소?"

이젠 대 놓고 협박한다.

사람이 이렇게 뻔뻔할 수도 있구나.

귀족이라 뻔뻔한 거겠지?

아무튼 협박은 충분히 들었다.

"그럼 저도 실력행사를 할 겁니다."

"뭐요? 실력행사? 푸하하하!"

"하하하!"

영주와 기사들이 배를 잡고 웃는다.

"제 기사들이 오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가만있지 않으면? 영지전이라도 하려고요?"

오웬 백작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하겠습니다. 영지전!"

"응? 타일러 경, 영지전에 뭔지나 아시오?"

"싸우는 거 아닙니까. 제 땅을 지키려면, 저도 싸울 수밖에요."

그 순간 오웬 백작의 눈빛이 반짝였다.

"휴우! 영지전을 원한다면 받아주겠소. 종이를 가져와라!"

오웬 백작이 직접 문서를 2부 작성했다.

그리고 내게 내밀었다.

"시작은 한 달 후요. 그쪽이 영지전에서 지면 깔끔하게 그 세 마을을 내놓으시오. 내가 지면 완전히 물러날 테니까. 한번 확인해 보고, 거기에 서명하고 인장을 찍으시오."

난 문서를 다 읽고, 서명했다.

반지의 인장까지 찍었고.

한 장을 챙겼다.

"그럼 다음 달에 두고 봅시다."

난 밖으로 나갔다.

***

"크하하하! 멍청한 녀석."

오웬 백작은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러자 기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뭐가 그렇게 좋으십니까?"

"그럼 좋지, 안 좋겠느냐? 발레리온 영지의 곡창지대를 통째로 먹게 생겼는데!"

"네? 하지만 영지전에 이겨도 세 마을만 얻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그럼 지금과 차이가 없지 않습니까?"

오웬 백작이 흐뭇하게 웃었다.

"마지막 줄에 영지전은 양쪽이 합의하에 끝낸다고 적혀 있거든."

그래도 기사는 알아듣지 못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쪽이 합의를 해주지 않으면, 영지전을 계속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난 발레리온 곡창지대를 다 점거할 때까지 합의할 생각이 없거든."

"오! 대단하십니다."

"와! 어떻게 그런 생각을!"

기사들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때 한 기사가 말했다.

"저렇게 자신 있는 걸 보면, 테레니스 영지에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닐까요? 그래도 빈스 가문의 장자가 아닙니까."

"여기서 테레니스 영지가 어디라고. 아무리 빨리 온다고 해도 서너 달은 걸린다. 기간트를 가져와야 하는데 그게 쉽겠나? 그 시간이면 못 버티고 항복할걸. 그리고 이건 엄연히 두 영지의 영지전이다. 다른 영지가 끼어들면 오히려 유리하지. 여기서 보름 거리에 장인어른의 영지가 있지 않은가. 여차하면 도움을 청하면 된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웬 백작은 기분이 매우 좋았다.

"다들 잘 준비하게. 이번 일만 잘 끝나면 두둑한 포상을 약속하지."

"네! 영주님!"

눈 앞에 펼쳐진 황금빛 들판이 손에 잡힐 듯 아른거렸다.

117. 영지 단합대회.

117. 영지 단합대회.

'고맙게도 영지전을 끝내는 날짜가 없다니!'

게다가 마지막에 양측이 합의해서 끝낸다는 단서가 붙었다.

이렇게 고마울 때가!

내가 합의해주지 않으면 아무리 저놈들이 항복해도 영지전을 끝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다.

그럼 이건 녀석들을 혼내주고 영지를 되찾는 게 아니라, 합법적으로 영지를 늘릴 기회가 아닌가!

'아주 영혼까지 탈탈 털어주마!'

다 정보가 부족해서 저러는 거다.

내가 만만히 보였겠지.

대수림 원정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지금 함구령이 떨어졌기에 나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을 거다.

내가 황제도 구하고 훈장도 받고 제국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지만, 기간트를 보여준 것은 이번 원정뿐이었으니까.

아쉽게도 이번 영지전에 비공정은 쓰지 못할 거 같다.

아직 비공정이 나올 시기가 아니니까.

물론 비공정이 없어도 상관은 없었지만.

난 그 길로 괴조인형을 타고 베르가니 영지의 지형을 자세히 살펴봤다.

그리고 영지로 돌아갔다.

***

"네? 한 달 후에 영지전이요?"

내가 준 문서를 읽은 프레디 시장은 목덜미를 잡았다.

"헉! 끝내는 날짜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우리가 항복하면 끝난다는 조항도 없고요. 이거 크게 실수하셨습니다."

난 피식 웃어줬다.

"왜? 우리가 질 것 같은가?"

"네!"

"기간트가 없어서?"

"기사도 없지 않습니까."

"곧 온다니까."

프레디 시장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영주께서 윌리엄 사령관이나 장벽 사령부와 친하다고 해도 도움을 청할 순 없습니다. 영지전은 외부 세력이 끼어들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대수림에 사냥팀을 파견하는 곳도 아니고. 하아!"

프레디 시장의 한숨이 깊다.

이해는 간다.

내 돈 버는 능력과 임무를 해결하는 능력은 알고 있지만, 기간트를 운용하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테니까.

그리고 최근엔 영지에서 일만 하다 보니, 북부군이 원정군을 꾸리고 대수림에 갔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비공정도 몰랐고.

역시 제국 내에도 정보원이 필요할 것 같다.

제일 좋은 건 정보국을 이용하는 건데······.

"아! 그래도 윌리엄 사령관께서 북부에 영향력이 크시니, 중재를 부탁할 순 있겠군요. 그나마 다행입니다."

난 그냥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 병사들이 많이 넘어올 테니까. 그들이 주둔할 은밀한 장소를 준비해둬. 식량이나 생필품 같은 보급품도 준비해주고."

"병사도 온다고요?"

"이계 난민 기지에서 드워프와 엘프, 오크 병사들이 꽤 올 거야."

"알겠습니다. 병사는 많을수록 좋지요. 발레리온 도시 외곽에 작은 숲이 하나 있습니다. 그곳에 야영지를 만들어 놓겠습니다."

***

며칠 후.

반가운 사람들이 영지로 온다고 연락이 왔다.

난 이른 아침부터 기차역에 마중 나갔다.

'왜 이렇게 안 와?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지?'

그때 멀리서 열차가 보였다.

순간 가슴이 뛰었다.

연인을 만나는 것도 아닌데, 벌써 가슴이 벅차오른다.

이게 전우애인가?

끼이익! 치이익!

열차가 멈추고, 익숙한 얼굴들이 플랫폼에 내렸다.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반가워 달려가고 싶었지만, 최대한 무심한 표정을 지었다.

난 무게감 있는 영주니까.

녀석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대장! 저희 왔습니다!"

"대장님, 얼굴이 확 피었습니다!"

난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사고 치지 말라고 했지?"

"네? 사고라니요?"

"내가 그만둔다고 네놈들까지 그만두면······, 하아!"

부대원들이 날 빤히 쳐다봤다.

"잘 왔다! 이 녀석들!"

"크하하! 역시 대장이야."

"역전의 용사들이 다시 뭉쳤네요!"

"어서 오게. 펠릭스, 워버린, 폴린, 콜벳, 앤소니, 로버트, 크리스."

난 일일이 이름을 부르며 반겼다.

이번 원정 1년 6개월 동안 생사고락을 함께한 만큼 서로의 유대감은 어느 부대보다 컸다.

다들 내 덕분에 실력도 일취월장했고.

펠릭스 중령이 말했다.

"마크는 가족들을 데리고 온다고 영지로 갔고, 블리언과 바드는 테레니스 영지로 내려갔습니다."

"그래, 갈 사람은 가야지."

블리언 빈스는 영지 후계자니까 당연히 가야 했지만, 바드는 아쉬웠다.

타일러의 옛 검술 스승이기도 하고, 원정 기간 내내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속을 터놓는 사이가 됐다.

사람이 진중하고, 생각이 깊기에 기사로 삼고 싶었다.

하지만 가족과 삶의 터전이 그곳에 있으니, 가는 게 맞겠지.

"콜벳, 자네 식구들은?"

"일단 자리부터 잡고 연락해 데려올 생각입니다. 집이라도 주신다면 그 기간이 엄청 빨라지겠죠."

"녀석! 그건 내가 해결해 줄 테니까, 일단 짐을 챙겨. 야영지로 이동한다."

"야영지요?"

"저택이나 성으로 가는 거 아니었습니까?"

"곧 영지전이 벌어진다."

"네?"

부하들이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오자마자, 싸움입니까?"

"내 영지의 기사가 된다는 녀석이 벌써 싸움이 두려운 거냐?"

"허! 도착하자마자, 부려먹으시네."

"시끄럽다. 검이 무뎌졌으니, 연습해야지! 난 너희가 오래 살길 바라는 사람이다."

"네네! 어련하시겠습니까."

부하들은 투덜거리면서도 짐을 챙겨 따라나섰다.

[발레리온 시 북동쪽 야영지.]

일부 병사들만 야영지를 지키고 있었다.

"아니 야영지는 이렇게 큰데, 달랑 우리만 쓰는 겁니까?"

"그러게 너무 텅 비었는데요."

"왜? 너희들끼리만 싸울까 겁나는 거냐?"

워버린이 피식 웃었다.

"괴수 놈들도 때려잡았는데, 뭐가 두렵겠습니까. 기간트만 주십시오!"

"기간트는 저기 있다."

야영지 한쪽에 세워둔 기간트로 이동했다.

오늘 새벽에 부하들이 탈 기간트를 꺼내 놓았다.

"오! 정말 기간트가 있네!"

"대장, 이걸 다 어디서 구한 겁니까? 혹시 북부군에서 삥땅 친 겁니까?"

"그건 알 거 없고, 각자 자기 기간트를 골라."

그때 콜벳이 손을 들었다.

"대장, 나이트급 기간트가 없는데요?"

"넌 이제 비숍급 기간트에 타야지."

"하지만 제 실력으로 되겠습니까?"

"일단 타봐! 자신을 믿고."

콜벳이 비숍급 기간트에 올라탔다.

다른 기사들은 그런 콜벳을 쳐다봤다.

콜벳은 부대원 중에서 가장 실력이 떨어졌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연습하고 노력한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마음으로 응원하고 있었다.

기이잉! 쿵! 쿵!

그리곤 거침없이 야영지를 돌기 시작했다.

[오! 이게 되네요!]

"하하! 언제 실력이 저렇게 늘었데!"

"근데 저 녀석이 비숍급에 타면, 난 룩급에 타야 하나?"

워버린 소령이 말했다.

"당연하지. 자네와 폴린, 앤소니는 룩급 기간트에 타고 연습하게. 로버트와 크리스도 비숍급에 타고."

"네! 해보겠습니다."

다들 한 단계씩 높은 기종을 준비해줬다.

내 눈엔 다들 충분히 탈 실력이 됐으니까.

부하 중에서 유일하게 룩급 기간트에 탔던 펠릭스 중령은 원래 비숍급 오리지널 기간트를 주려 했지만 다음으로 미뤘다.

아직은 오리지널 기간트가 풀리면 안 되는 시기였다.

다행히 기사들은 금방 적응했고, 그날부터 바로 훈련에 들어갔다.

그리고 기사들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프레디 시장이 야영지를 방문했다.

"헉! 기, 기간트가?"

프레디 시장이 입을 떡 벌렸다.

"내가 뭐라고 했나? 기사들도 오고, 기간트도 생길 거라고 했지."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리신 겁니까? 룩급 기간트가 4대에 비숍급 기간트가 3대라니요!"

"이 정도로 놀라면 곤란한데. 곧 다른 기사들도 올 거야. 기간트도 더 생길 거고. 그러니 프레디 시장은 거주 구역을 조금 더 늘려주게. 영지전이 끝나면 모두 우리 영지에 살 거니까."

"알겠습니다!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프레디 시장과 제니퍼 부시장이 더 바쁘게 생겼군.

그리고 난 고민에 빠졌다.

'기사단 이름을 뭐라고 짓지?'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타냐 블랙과 부하들은 이미 '트라스의 개'라는 기사단 이름이 있었다.

그러니 이들도 기사단을 따로 만들어서 서로 경쟁시킬 생각이었다.

마침 이름이 하나 떠올랐다.

'하얀 악마 기사단!'

하얀 악마라 불리던 드라우켄을 함께 때려잡았으니까.

그리고 숫자가 가장 많은 내 마법인형들은 '그림자 기사단'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림자처럼 늘 나와 함께 다니고, 그림자처럼 감쪽같이 사라지니 딱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

하얀 악마 기사들이 상위 기종에 완전히 적응할 때쯤 기다리던 일행이 도착했다.

"타일러 영주님!"

에테나가 손을 흔들고 달려왔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답다.

그녀의 뒤에는 늘 화가나 보이는 쿠훌린과 오크 해병대, 드워프 포병대, 엘프 비행대, 그리고 트라스의 개 기사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에테나, 왜 이렇게 늦었어?"

"오크들을 열차에 태워주지 않아서 걸어서 이동했습니다."

"아!"

지금 오크 해병대는 분신과 같은 3미터짜리 강습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서슬 퍼런 무기를 들고 있으니, 누가 열차를 태워주겠는가.

다른 영지를 무사히 통과한 것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아니 장벽 사령부에서 도움을 줬다고 했다.

"어서 오게. 쿠훌린이여!"

"쿠오크! 오크 준비됐다! 오크 싸운다!"

"쿠오크! 쿠오크!"

쿠훌린과 오크 해병대를 반갑게 맞이했다.

아쉽지만 이들은 이번 영지전엔 참여시키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들은 비밀 병기였고, 비공정 강습 부대니까.

가디언 제국과 전쟁에서 선보일 예정이었다.

"타일러여! 어서 대포를 쏘고 싶다!"

"하버 족장이여! 조금만 기다리게. 이번 일이 끝나면 얼마든지 연습하게 해주지."

헬카인족 드워프 300명이 도착했다.

지금 내 인형의 집에는 대포가 탑재된 5척의 드워프 비공정이 있었다. 이들은 그 비공정의 포병대원들이었다.

그리고 샤이닝 일족 엘프 200명도 함께 왔다.

샤이닝족은 바람과 돛을 잘 다루는 엘프들이었기에 비공정의 조정을 맡았다.

"어서들 오게. 트라스의 개!"

타냐 블랙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기사단 이름을 바꿔야겠습니다. 왠지 욕하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난 좋은데?"

"나도 좋슈! 개처럼 끈질기게 물어뜯어야지!"

서열 2위인 대머리 기사 월터가 말했다.

"나도 우리 기사단 이름이 좋은데!"

"나도!"

서열 3위의 트라볼라와 4위인 허버튼, 5위인 오드리, 6위인 갈라일까지 모두 찬성하고 나섰다.

얘네들은 왜 맨날 자기들끼리 서열을 매기는지는 모르겠지만, 서열이 36위까지 있다.

그리고 1위부터 12위까지 기간트에 탈 수 있었고, 7위부터 12위까지는 전진 기지를 지키고 있었다.

척!

"신 마키아스, 주군을 뵈옵니다."

주변의 시선이 젊은 기사 마키아스에게 향했다.

"왔군. 옆에 서 있게."

"네."

난 먼저 도착한 기사들을 불러 트라스의 개 기사단과 인사시켰다.

"다들 인사들 해! 이쪽은 하얀 악마 기사단이야."

"하얀 악마? 기사단 이름이 구린데?"

"맞아! 촌스러워."

트라스의 개 기사들은 용병 출신답게 입이 거칠었다.

그러자 워버린과 폴린이 나섰다.

"트라스의 개보단 100배쯤 낫지."

"무슨 기사단 이름에 개가 들어가냐? 개 기사단이라니!"

"뭐라고?"

"개한테 한번 물려볼 테냐?"

"악마가 더 세거든!"

"이런 유치한 놈!"

두 기사단의 기사들은 서로 안면이 있었고, 몇 명은 임무도 함께 한 사이지만, 만나자마자 으르렁댔다.

그도 그럴 것이 한쪽은 카야킨 전진 기지의 기사 출신이었고, 한쪽은 카야킨 기지에서 용병 생활을 했던 기사들이었다.

기사들은 용병 출신을 깔보고, 용병 출신들은 자격지심이 있었다. 내가 이들을 함께 통합하지 않은 이유였다.

그리고 서로 좋은 자극이 될 수 있고.

내가 나섰다.

"기사들이 입만 가지고 싸울 거야?"

"네?"

"기간트에 타고 싸워야지."

"좋습니다. 머리통을 아주 박살 내주죠."

타냐 블랙이 먼저 나섰다.

그녀와 트라스의 개 기사들은 내가 알려준 롤랑의 마나 수련법으로 계속 노력하고 단련했기에 상당히 성장했다.

특히 타냐는 곧 룩급 기간트에 탈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

하지만.

"근데, 싸움이 되겠어? 이쪽 애들은 룩급 4대에 비숍급이 3대인데?"

"네?"

타냐와 트라스의 개 기사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자신들은 비숍급 3대에 나이트급 3대가 전부였으니까.

게다가 하얀 악마 기사들은 나와 실전을 지겹게 치렀기에 전투에 이골이 난 베테랑들이었다.

"그럼 이건 어때? 여기 있는 기사를 트라스의 개 기사단에 넣어주지. 그럼 싸움이 될걸."

난 마키아스를 가리켰다.

그러자 타냐 블랙과 기사들이 도끼눈을 뜨고 마키아스를 쳐다봤다.

"아무리 그래도 누군지도 모를 기사를 막 받을 순 없습니다. 그리고 저희끼리 입단 규정을 정했습니다."

"입단 규정? 너희 그런 것도 있냐?"

"서열 맨 밑에 막내부터 꺾고 올라오는 거지요. 기간트 기사라면 12위부터 대결을 벌여서 이기거나 비겨야 입단할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선 서열 6위인 갈라일이 제일 낮으니까. 최소한 갈라일의 공격을 10번은 막아야 합니다."

난 마키아스를 쳐다봤다.

"그렇다는데?"

에테나가 옆에서 말했다.

"마키아스 경. 영주님과 영지 기사들 앞에서 실력을 보일 기회입니다."

에테나의 말을 들은 마키아스가 매서운 눈빛을 보이며 앞으로 나섰다.

"주군, 여기 여섯과 한꺼번에 대결하겠습니다. 제가 너무 유리하니 전 나이트급 기간트에 타겠습니다."

"뭐라고?"

"허! 이 새끼가 미쳤나?"

타냐 블랙과 트라스의 개 기사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것이 영지 단합대회의 시작이었다.

118. 성공적.

118. 성공적.

타냐 블랙이 날 쳐다봤다.

"영주님, 이 녀석이 지금 뭐라고 하는 겁니까?"

"여기 있는 트라스의 개, 모두하고 한판 뜨고 싶다는 거잖아."

"아니 그게 아니고 정말 하는 겁니까?"

난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자신 있다고 하잖아. 왜? 자신 없어?"

"네?"

타냐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아닙니다! 아주 정신을 못 차리도록 두들겨 주겠습니다."

타냐가 이를 갈며 트라스의 개 기사들을 쳐다봤다.

"모두 준비해!"

"네!"

기사단 이인자인 월터가 희번덕거리는 눈깔로 마키아스를 노려봤다.

"너! 아주 갈기갈기 물어뜯어 주지!"

난 이미 준비한 기간트를 트라스의 개 기사들에게 제공해줬다.

"모두 기간트에 오른다!"

"탑승하라!"

위이잉! 치이익!

여섯 명의 기사가 먼저 기간트에 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키아스가 나이트급 기간트로 향했다.

"이거 대결이 되겠어?"

폴린이 1대6의 대결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워버린이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보기엔 불가능해. 전부 다 나이트급이면 그래도 모르겠는데, 비숍급이 셋이잖아."

"맞아! 실컷 두들겨 맞고 끝나겠지."

하얀 악마 기사단 기사들은 압도적으로 트라스의 개가 이긴다는 반응.

그때 콜벳이 말했다.

"우리 대장님이면 가능하잖아."

"대장님이야 괴수 십여 마리도 혼자서 쓸어버리는데, 가능하겠지."

"나도 대장님이면 인정."

이 녀석들은 전에 S급 스킬인 그림자 투영 스킬을 사용해 사물이 느려지는 것 같은 효과로 원정군을 포위한 괴수를 뚫어버리는 내 모습을 봤기에 저런 소리를 한다.

그건 나만 되는 겨!

난 흐뭇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기간트는 무기를 들어라!"

기이잉! 쿵! 쿵! 쿵!

기사들의 기간트가 일제히 강철로 된 검과 도끼를 들었다.

이 강철검과 도끼는 기간트 연습용으로 날이 무디고, 마석이나 마법진 같은 것도 새겨지지 않아 기간트에 어느 정도 충격은 줄 수 있지만, 기체에 큰 상처를 입히지는 못했다.

"모두 물러서라!"

나와 기사들, 이계인들, 병사들이 모두 뒤로 멀찌감치 물러섰다.

기간트 대결이었기에 근처에 있다가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기간트의 급소를 공격당했거나 넘어지면 행동불능으로 판단할 테니, 즉시 대결에서 물러나라! 알겠나?"

[네!]

[네!]

결과는 뻔히 보였지만, 대결의 목적은 저 녀석들이 납득할 정도의 실력 차를 보이는 것이다.

"자! 시작해!"

기잉! 쿠쿠쿵!

굉음을 내며 마키아스의 기간트가 달려들었다.

"뭐야? 먼저 움직였어?"

"빠, 빠르다!"

기겁한 서열 6위 갈라일이 찔러오는 검을 막기 위해 나이트급 기간트의 검을 올려쳤다.

부우웅!

하지만 어쩐 일인지 자신의 검은 허공을 그었고, 뒤늦게 찌르기가 들어왔다.

콰앙!

[헉!]

목을 찔린 나이트급 기간트는 충격을 받고 뒤로 주춤거렸고, 마키아스의 기간트가 다리를 살짝 걸었다.

탁! 쿠웅!

나이트급 기간트는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젠장!]

갈라일의 기간트가 땅을 한번 치더니, 뒤로 물러섰다.

"뭐야? 벌써 한 대가 끝났다고?"

타냐가 소리쳤다.

[정신 차려! 놈을 포위해!]

[포위해라!]

5대의 기간트가 마키아스를 포위했다.

그리고 마키아스의 등을 향해 서열 4위인 허버튼의 나이트급 기간트가 접근했다.

그때 마키아스의 기간트가 슬쩍 뒤를 한번 쳐다봤다.

쿵쿵!

[너 끝났어!]

부웅!

검이 내려치는 순간 마키아스의 기간트가 오른발을 축으로 90도 회전했다.

부우웅!

검은 허공을 내려쳤고, 그 순간 마키아스의 검 끝이 허버튼의 기간트 해치를 찔렀다.

퉁!

[어?]

허버튼의 기간트는 순간 멈칫했다.

자신이 방금 당하긴 했는데, 강도가 세지 않았기에 어찌할지 모르는 것이었다.

[멍청아! 넌 뒈졌어!]

타냐가 소리쳤다.

그러자 허버튼이 구시렁거리며 뒤로 빠졌다.

기사 워버린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방금 기간트 고개를 살짝 돌린 거로 검의 궤적을 정확히 읽은 거야?"

"그런 거 같은데? 그랬으니 피했겠지."

"그게 가능한 거야?"

"글쎄······."

하얀 악마 기사들은 다들 놀라는 눈치였다.

타탕!

콰앙! 쿠웅!

"뭐야! 또 한 대가 쓰러졌어!"

방금은 좌우에서 동시에 비숍급 기간트가 검을 찌르며 공격했고, 짧은 시차를 두고 오드리의 나이트급 기간트가 뒤에서 공격했다.

그런데 마키아스의 기간트가 회전하며 두 비숍급 기간트의 검을 쳐내더니, 원심력을 이용해 검을 머리 위에서 회전시키며 오드리의 나이트급 기간트의 목과 어깨 사이를 내려쳤다.

달려들던 나이트급 기간트는 중심을 잃고 그대로 쓰러진 것이다.

"뭐야? 어떻게 저렇게 정확한 타이밍에 검을 쳐낸 거지?"

"마지막에 회전력을 이용해 뒤에 있는 기간트를 쓰러트린 게 더 대단하지."

"미친! 동작 3번에 기간트 3대를 쓰러트리다니!"

지켜보던 기사들은 지금 혼란스러워했다.

나도 마키아스와 직접 싸워봤기에 그 느낌을 잘 알지.

반응 속도가 워낙 좋아서 내 움직임을 모두 알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지.

'자! 타냐 블랙, 이제 어떻게 할 거냐?'

[제길! 그냥 밀어붙여!]

[가자!]

타냐의 선택은 닥치고 공격!

[죽어!]

월터의 도끼가 머리를 향해 휘둘리고, 타냐의 검은 다리를 노린다. 트라볼라는 옆으로 따라붙었다.

'나름 머리를 썼는데!'

자신과 월터의 공격은 사실 상대를 현혹하기 위함이었고, 진짜 공격은 트라볼라.

해치나 기간트 머리를 노리겠지.

태앵! 태태탱! 탱!

두 비숍급 기간트의 공격을 나이트급 기간트가 너무 잘 막아낸다.

특히 상대의 검이나 도끼의 힘이 최대치가 되기 전에 미리 검을 휘둘러 막기도 하고, 옆으로 흘리면서 힘을 분산시켰기에 체급 차이는 없다고 봐야 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마키아스의 기간트가 도끼에 밀리며 휘청거렸다.

[죽어!]

기회를 포착한 트라볼라의 기간트가 달려들면서 해치를 향해 검을 찔렀다.

'쯧쯧! 딱 봐도 함정인데······.'

다닥! 팟!

마키아스의 기간트가 몸을 틀면서 비숍급 기간트의 검을 옆으로 밀더니, 앞발을 살짝 들었다.

터억! 쿠웅!

치이이익!

트라볼라의 기간트는 앞으로 꼬꾸라지고, 7미터나 쓸려가 멈췄다.

[으! 젠장!]

쾅! 쾅!

트라볼라 역시 분한지 땅을 주먹으로 치더니, 일어서 뒤로 물러섰다.

셋이 둘이 되자, 이제 마키아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곧 두 사람을 몰아쳤다.

'보면 볼수록 대단하단 말이야.'

마키아스의 수준이 어느 정도나 될까?

서로 같은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에 탄다면 웨슬리 자동인형과 초반엔 우열을 가리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키아스가 더 유리해 보였다.

상대의 검이 눈에 익으면 대응을 훨씬 잘했으니까.

'월터도 끝났네!'

부웅! 콰앙!

나이트급 기간트가 무릎으로 비숍급 기간트의 얼굴을 올려쳤다.

그러자 비숍급 기간트가 공중으로 붕 뜨며 뒤로 떨어졌다.

충격이 꽤 클 것이다.

마지막으로 타냐가 홀로 남아 분투하고 있었다.

'용병 출신들이라 그런지, 개성이 너무 강해.'

트라스의 개 기사들은 개성이 강해 서로 연계가 잘되지 않았기에 다수의 장점을 살리지 못했다.

타냐 블랙은 기간트 전투 센스는 좋은데, 힘으로 누르려는 경향이 있었다.

체급이 높으면 당연히 기간트 위력은 좋지만, 그게 절대적이진 않다. 지금처럼.

부우웅! 쿵!

그녀가 내려친 검을 마키아스는 받아치는 척하며 옆으로 흘렸다.

그녀의 검은 땅을 내려쳤고, 마키아스는 여유롭게 주먹으로 해치를 가격했다.

콰앙!

[큭흡!]

짧은 신음과 함께 타냐 블랙의 기간트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검이 아닌 기간트 주먹으로 가격을 당했기에 충격이 커 보였다.

"대결은 끝났다! 기사들은 모두 모이도록!"

워버린이 고개를 흔들었다.

"와! 저 사람 완전 괴물이잖아!"

"대장님은 어디서 저런 기사를 데려온 거야?"

'응! 가디언 제국에서.'

기간트에서 내린 타냐와 기사들은 씩씩거리고 있었다.

자신들이 승부에서 졌지만 그렇다고 의기소침할 녀석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

마키아스가 다가오자.

"대체 어떻게 한 거지? 그 귀신같은 움직임은?"

"쓰벌! 눈깔이 뒤에도 달린 거요?"

"아까 내 검을 어떻게 피했지?"

타냐와 기사들은 거침없이 물었다.

내가 끼어들었다.

"그게 궁금하면 앞으로 마키아스에게 기간트 검술을 배우면 되겠네."

"네?"

타냐와 기사들이 날 쳐다봤다.

"마키아스가 이제 서열 1위잖아."

타냐와 월터가 인상을 찡그렸다.

"젠장! 내가 2위로 밀리다니!"

"젠장! 내가 3위로 밀리다니!"

그러자 다른 기사들도 서열이 밀림을 아쉬워했다.

그때 에테나가 말했다.

"그럼 이제 마키아스 경이 단장인가요?"

타냐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쩝. 단장, 잘 부탁하겠소."

"나도 잘 부탁하겠수."

"나도요!"

서열정리가 끝나자, 상황도 순식간에 끝났다.

자기들끼리 서열을 만들더니, 서열이 밀리자 단장 자리도 순순히 내놓았다.

"나야말로 잘 부탁하지."

난 에테나와 눈을 쳐다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자 에테나도 나를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계획대로 마키아스가 트라스의 개 기사단의 단장이 됐다.

누군가 타냐와 용병 출신 기사들의 실력을 끌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마키아스는 동료가 필요했고.

타냐와 트라스의 개 기사들은 거칠고 험했지만, 일단 자기 식구라고 생각하면 목숨도 내놓는 의리파였다.

그것이 100년이나 대수림 전진 기지에서 용병으로 버틸 수 있는 힘이었다.

가디언 제국군이라고 차별할 녀석들도 아니고.

"자! 기사들은 모두 모여라!"

난 두 기사단의 기사들을 불렀다.

"자! 그럼 이제 본격적인 대결을 시작하지."

"네?"

"또 대결해요?"

"메인 이벤트 해야지."

난 하얀 악마 기사들과 트라스의 개 기사들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7대7 데스매치!"

결과는?

영지 첫 단합대회 데스매치의 승리는 트라스의 개가 차지했다.

나도 결과가 궁금했지만, 천재 하나가 있다는 게 전투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진지 직접 보게 됐다.

집단 전투에서 하얀 악마 기사들이 우위를 보였지만, 최종적으로 3대1이 됐다.

펠릭스와 워버린, 폴린, 세 사람이 마키아스와 대결을 펼쳤는데, 룩급 기간트에 탄 마키아스를 초반에 밀어붙이는 것은 성공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기사들의 동작이 익숙해지자, 마키아스가 차례로 물리쳤다.

하얀 악마 기사들은 충격을 받았고, 트라스의 개는 새로운 단장의 실력에 함성을 질렀다.

그날 이후로 하얀 악마 기사들은 다음엔 꼭 이기겠다며 이를 갈면서 더욱 열심히 기간트 훈련을 시작했고, 트라스의 개는 마키아스 단장의 기술을 배우겠다고 열심히 훈련했다.

그날의 단합대회는 꽤 성공적이었다.

***

시간은 흘러.

영지전 시작은 다음 날 낮 12시.

저들이 점거한 장소와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었기에 야영지는 전날 밤부터 부산했다.

"영주님, 베르가니 영지군이 기간트 50기를 한곳에 모았답니다."

"50기? 그놈들도 영지전을 한 번에 끝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나 보네."

난 피식 웃어줬다.

그들의 의도야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저렇게 노골적으로 남의 영지를 노리는데, 화끈하게 싸워줘야지.

프레디 시장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런데 괜찮겠습니까? 기간트 숫자가 우리가 너무 적은데요?"

"싸움은 숫자로 하는 게 아니지. 그러고 저들은 대부분 구형 기간트라 힘도 제대로 쓰지 못할 거고."

신형 기간트의 성능은 구형보다 전체적으로 15% 정도 향상됐다고 들었다.

가장 큰 차이는 싱크로율이었고, 출력도 조금 높아졌고, 마석 배터리 효율도 차이 났다.

전체 수치로 보면 15% 차이는 크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싱크로율의 차이는 치명적이다.

기긴트의 반응 속도에서 밀린다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 1대1에선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우린 룩급 기간트도 많잖아."

나도 이번엔 룩급 기간트에 타기로 했다.

원정 전부터 비숍급 오리지널 기간트에 탈 수 있었기에 룩급 기간트는 충분했다.

그리고 에테나와 타냐도 룩급 기간트를 배정해 줬다.

타냐는 원래 탈 만한 실력이었고, 에테나는 아직 마나가 조금 부족했지만, 단기전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자! 출발한다!]

[출발하라!]

우린 일부러 발레리온 시의 옆으로 지나갔다.

영지민들과 이계 난민들에게 기간트의 위용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곧장 저들이 점거하고 있다는 마을로 향했다.

119. 와준다면 고마운 일.

119. 와준다면 고마운 일.

수확이 끝난 황량한 밀밭에서 베르가니 영지군의 기간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썩을 놈! 수확한 밀을 전부 가져갔어.'

주먹이 부들거렸다.

오웬 베르가니 백작이 영지전을 한 달 후로 잡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덕분에 내 기사들이 다 모일 수 있었지만.

기이잉! 쿵! 쿵! 쿵!

우린 저들의 300미터 앞에 멈춰 섰다.

[주군, 저놈들이 우리 기간트를 보고 놀란 것 같습니다!]

펠릭스 단장이 말했다.

[그럴 만하지. 우리 쪽에서 최대한 많이 모아봤자, 5대 정도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리고 자신들은 비숍급 기간트가 한 대뿐이었고, 나머진 나이트급과 폰급이었다.

그에 반해 우린 룩급 기간트가 8대에 비숍급이 5대, 나이트급이 3대니까.

[슬슬 영지전 시간이 다가오네요.]

[이건 영지전이 아니야. 우리 2차 단합대회지.]

[네?]

위이잉! 치익!

내가 해치를 열자, 에테나도 기간트 해치를 열었다.

우린 기간트에 내려서 앞으로 걸었다.

그리고 150미터를 남기고 멈췄다.

그러자 상대 쪽 비숍급 기간트 해치가 열리더니, 중년 사내가 내렸다.

그리고 뒤쪽에 병사들과 있던 얍샵하게 생긴 사내와 함께 다가왔다.

두 중년인은 다가오면서 연신 내 뒤에 있는 기간트들을 보며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베르가니 기사단장 프란데 남작입니다."

"베르가니 참모 불룸 자작입니다."

"발레리온의 영주 타일러 빈스 백작이오."

짧은 소개가 끝나자, 갑자기 침묵이 찾아왔다.

난 프란데 남작을 보며 입을 열었다.

"딱 한 마디만 하겠소. 전투가 시작되면, 무조건 항복하시오."

"네?"

"그게 그대와 기사들의 목숨을 살리는 길이오."

옆에 있던 불룸 자작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쪽 기간트가 훨씬 많습니다. 항복이라니요. 그건 우리가 할 말입니다. 발레리온의 곡창지대만 넘기면 우리 영주께서 항복을 받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항복하십시오."

난 불룸 자작의 말을 무시하고 뒤쪽 기사들을 쳐다보며 다시 말했다.

"프란데 남작, 저들도 누군가의 부모고 누군가의 자식이기에 마지막 기회를 주는 것이오. 어리석은 주군 때문에 기사들을 희생하지 마시오."

내 할 말은 다 했기에 난 몸을 돌렸다.

그러자 뒤쪽에서 두 사람의 말 소리가 들렸다.

"참모,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저들의 기간트가 왜 이렇게 많습니까!"

"무슨 상관입니까. 우리 기간트가 훨씬 많은데요."

"체급이 달라요. 체급이!"

"그냥 숫자로 밀어붙이세요. 설마 우리 숫자가 이렇게 많은데 먼저 달려들겠습니까? 그리고 영주님의 명을 거역할 겁니까?"

"하아!"

프란데 남작의 한숨 소리가 깊다.

우린 자리로 돌아와 기간트에 올라탔다.

남은 시간은 겨우 5분.

난 앞으로 나서며 기사들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대결을 한다. 두 기사단 중에서 누가 더 많은 기간트를 쓰러트리는지 대결이다. 승자에겐 큰 포상을 약속하지.]

[오오! 포상이라니!]

[이건 꼭 이겨야 해!]

내 말이 끝나자마자, 양 기사단장이 기사들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뭔가를 지시했다.

상대 기간트 숫자가 3배 이상 많았지만, 비숍급 한 대를 제외하곤 모두 구형 기간트.

우릴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구형 기간트만 모두 모아 왔을까!

방심하지 않는다면, 승리는 당연했기에 새로운 대결을 제안한 것이다.

두 기사단장이 맨 앞에 섰다.

기간트들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무기를 검을 겨누며 당장 달려들 듯이 으르렁거렸다.

그러자 상대 베르가니 영지군의 기간트는 서로를 연신 쳐다보고, 긴장했는지 무기를 놓치는 기간트도 있었다.

12시가 됐다!

[지금부터 대결을 시작한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펠릭스 단장이 소리쳤다.

[이번엔 우리가 이긴다! 공격하라!]

[가자!]

그러자 마키아스 단장도 질세라 소리쳤다.

[영지를 침범한 놈들이다! 공격하라!]

[다 죽여!]

[와아아아!]

쿠쿠쿠쿠쿵!

지축을 울리며 발레리온 영지의 기사들이 폭풍처럼 질주했다.

그래도 숫자가 깡패라고, 혹시나 밀리는 쪽이 있으면 나와 에테나가 지원할 생각이었다.

쾅! 콰콰콰쾅!

굉음과 흙먼지와 함께 전투가 시작됐다.

14기의 기간트는 거침없이 밀어붙였다.

이미 상대 기사들은 기가 질린 상태라 속절없이 밀렸다.

[밀어붙여! 이번에도 지면! 내 손에 뒈질 줄 알아!]

잔뜩 흥분한 펠릭스 단장의 목소리가 유난히 컸다.

[으아아!]

쾅! 콰직!

내려친 검에 폰급 기간트의 머리통이 반으로 갈라졌다.

나이트급 기간트가 방패로 막아보지만, 발로 차자 속절없이 뒤로 넘어졌다.

7미터와 5미터 크기의 기간트 사이에 11미터 룩급 기간트의 위력이란 그야말로 군계일학.

그런 룩급 기간트가 4대나 있었다.

게다가 하얀 악마 기사단은 집단 전투에 익숙했기에 순식간에 십여 대가 박살 났다.

[영지를 침범한 자들에게 죽음을 내려라!]

[와아아!]

쾅! 쾅!

룩급 기간트가 2대밖에 없었지만, 트라스의 개 기사들은 기세가 좋았다.

그리고 뛰어난 실력의 마키아스 단장이 맨 앞에서 적의 대열을 뚫고 들어가고, 그 뒤를 이어 기사들이 달려드는 방식으로 전투를 이끌었다.

그리고 꽤 효과가 있었다.

난 전투의 승패보다 두 기사단의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대결이 더 흥미로웠다.

[우리가 나설 필요도 없네.]

[조금 아쉽네요.]

오늘 처음 룩급 기간트에 탄 에테나도 전투에 참여하고 싶어 했다.

[기다려봐! 진짜 전투는 저놈들의 영지에서 펼쳐질 거니까.]

[네? 이게 끝이 아니에요?]

[물론이지. 내가 만족할 때까지 전투는 계속될 거야.]

철광석 광산이 있으면 아무래도 영지에 도움이 되겠지.

드워프들에게 철제 비공정을 만들게 할 수도 있고.

대포를 추가로 제작할 수도 있었다.

또 철근을 이용한 건축도 가능하고.

영지에서 헬다임으로 향하는 직통 철로를 만들 수도 있다.

[으아아! 악마다!]

[이건 살육이야!]

순식간에 태반이 넘는 기간트가 파괴되고 기사들이 죽었다.

영지를 침범한 자들에게 자비란 없었다.

[이, 이건 전투가 아니야!]

홀로 분전하던 프란데 남작이 소리쳤다.

[무기를 버려라! 투항해라!]

[목숨을 구해라!]

전투 시작 10여 분 만에 프란데 남작을 시작으로 기간트들이 무기를 버렸다.

[기간트에서 내리지 않은 자들은 저항 의사로 판단하겠다!]

저들의 기간트에서 기사들이 해치를 열고 내렸다.

[병사들은 저들을 포박하라!]

발레리온의 병사들이 달려와 기사들과 병사들을 포박하기 시작했다.

"맨날 동네북인 우리 영지군이 이겼어?"

"그런 거 같은데?"

"허! 오래 살고 볼 일이네."

발레리온의 병사들은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은 것 같았다.

그때 에테나의 기간트가 검을 높이 들었다.

[타일러 빈스 영주님 만세!]

"영주님 만세!"

"와아아! 우리가 이겼다!"

병사들이 환호할 때, 두 기사단의 기사들은 자신들이 부순 기간트 숫자를 세기 바빴다.

결과는 하얀 악마 기사단의 승리.

미세한 차이였지만, 그들은 집단 전투에서 확실히 우위를 보였다.

[이대로 저들의 영지를 공격한다!]

***

[베르가니 영지 영주성]

"큰일 났습니다. 놈들이 북쪽의 베다니 광산 마을을 점거했습니다."

"뭐라? 거긴 우리 영지에서 가장 큰 광산이 아니더냐!"

오웬 백작은 손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대체 카엘 남작은 뭘 하고 있는가?"

"그것이······."

영주의 부하들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카엘 남작이 이끄는 신형 기간트 부대와 소식이 끊긴 것이 이미 사흘 전이었다.

일부 부하들은 그들이 싸우고 있어서 연락이 안 된 것이라고 자기 위로를 했지만, 기사들은 알고 있었다.

대부분 사로잡혔거나 죽었다는 것을.

전령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영주님! 큰일 났습니다."

오웬 백작은 손을 휘휘 저었다.

"베다니 마을 이야기는 이미 들었다."

"그것이 아니오라 지금 이곳 영주성을 향해 기간트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뭐, 뭐라?"

오웬 백작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영지전을 시작한 지 겨우 일주일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곳에 기간트가 있단 말이냐!"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기간트가 하늘을 날아서 왔단 말인가?

쾅! 쾅! 쾅!

성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영주가 기겁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이, 이제 어찌한단 말이냐?"

"영주님, 도망쳐야 합니다!"

"하지만 내 영지를 놔두고 어디로 가란 말이냐?"

"일단, 록체스터 영지로 가시죠."

"그래! 장인이 있었지. 가서 병력을 빌려서 오면 된다!"

오웬 백작이 벌떡 일어섰다.

"서둘러라! 록체스터 영지로 간다!"

"후문으로 이동해!"

콰앙!

알현실 문이 부서졌다.

"뭐, 뭐냐?"

그리고 한 사내와 두 여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이군. 오웬 백작!"

"타일러 백작?"

"이미 내 기사들의 기간트가 성안으로 들어왔다. 그만 포기하시지."

그 순간 오웬 백작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렇지! 잡아라! 놈을 잡으면 영지전도 끝난다!"

"잡아!"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오웬 백작은 끝까지 구제불능이었다.

에테나와 타냐 블랙이 앞으로 나섰다.

취링! 취링!

"크악!"

"으악!"

에테나의 검에 달려들던 기사들이 허무하게 쓰러졌다.

촤아악!

검과 검이 맞부딪히기도 전에 상대를 쓰러트리는 기술은 세계수 열매를 먹어 강해진 에테나만의 검술이었다.

푹!

"크헉!"

쿵!

타야 블랙의 검이 상대 기사의 목을 뚫었다.

그렇게 마지막 기사가 쓰러지자, 이제 남은 것은 오웬 백작뿐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영지전에 이겼으니, 원래 영지를 돌려받으면 끝내야지, 왜 남의 영지를 공격하느냐?"

"응? 무슨 말씀이시오? 여기 내게 영지를 순순히 양도한다는 문서가 있소."

"뭐라?"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타냐가 비릿하게 웃더니 오웬 백작에게 다가갔다.

"오, 오지 마라! 저리 가!"

타냐가 주먹을 내질렀다.

퍽! 퍽!

코피가 흐르고, 앞니가 빠졌다.

오웬 백작이 흐느적거리자, 타냐가 손에서 반지를 빼서 내게 가져왔다.

난 들고 있던 문서에 오웬 영주의 인장을 찍었다.

"어? 문서는 여기 있네."

난 문서를 흔들며 오웬 백작을 향해 웃어줬다.

"상대 영지를 먹으려 했다면, 내 영지도 먹힐 각오를 하고 덤볐어야지."

정신을 차린 오웬이 소리쳤다.

"그것은 가짜다!"

"이게 가짜라는 걸 어떻게 증명할 건데? 영주 인장도 찍혀있는데? 억울하면 법에 호소하던가."

"크윽!"

난 녀석이 내게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줬다.

"감히! 내 장인이 누군지 알고 있느냐?"

"베닝 록체스터 공작이시겠지."

"그걸 알고도 날 공격했다는 말이더냐?"

"억울하면 베닝 공작께서 영지전을 신청하시겠지. 과연 사위를 위해 영지전까지 하실지 나도 궁금하네."

"네놈! 반드시 이 수모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타냐가 주먹을 내질렀다.

퍽! 퍽!

"커헉! 그, 그만······."

"네놈을 살려주는 이유는 하나야. 내가 이 영지를 양도받았다는 증명을 해줘야 하니까."

퍽!

타냐가 오웬 백작의 동공이 풀린 것을 보고 주먹질을 멈췄다.

"이놈은 지하 감옥에 가두고, 매드 파크 남작을 찾아라! 근처 술집이나 도박장에 있을 거야."

"네!"

난 놈을 죽여 화근을 없앨 생각이었다.

타냐가 오웬 백작을 끌고 갔다.

에테나가 물었다.

"정말 괜찮을까요? 상대는 대영지인데요?"

"어차피 넘어야 할 산이야! 한 지역에 패자가 둘일 순 없지."

저들이 와준다면 나야 고마운 일이다.

먼저 사신을 보내 협상하는 척하며 강압적으로 사위를 풀어주고 영지를 돌려주라고 하겠지.

난 적당히 핑계를 대며 잠시 시간을 끌면 된다.

그럼 어느 순간에 참지 못하고 영지전을 신청하게 될 거고, 난 순순히 받아줄 생각이었다.

그럼 놈들은 내 영지까진 기차를 이용할 수 없으니, 근처 영지에서 병력을 내리고, 진군할 것이다.

그럼 난 록체스터 영지로 날아가 드라우켄과 그림자 기사단으로 록체스터 가문의 기간트 공방과 성을 박살 내고, 베닝 록체스터 공작을 사로잡을 생각이었다.

기간트 공방이 쑥대밭이 돼도 영지전을 계속할 수 있을까?

결국엔 기동력 싸움이고, 아직 비공정이 없는 시기였기에 전투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영지전이 끝나면 큰 피해를 본 록체스터 가문이 복구하는 동안 2개의 영지를 확보한 나도 더 강해질 테고, 저들이 나중에 비공정을 확보해 공중으로 날아오면, 대포를 단 드워프제 비공정으로 공중에서 박살을 내줄 생각이었다.

처음 영지전을 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부터, 난 어떻게 하면 대영지와 싸움에서 이길지 계산하고 있었다.

***

넉 달이 지나도 록체스터 가문에선 아무도 오지 않았다.

소식이 가도 벌써 골백번도 더 갔을 텐데, 사위가 소중하지 않나?

베르가니 영주성을 공격할 땐, 이미 베닝 공작의 딸과 그 가족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 록체스터 가문으로 피했을 테니, 이곳 상황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사이 우리 영지는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드워프들의 빠른 건설 속도로 영주 집무실과 저택, 기간트 공방도 완성됐고, 거주 구역도 완공됐다.

그리고 베르가니 영지를 내게 양도한다는 문서와 서류도 진작 수도로 보냈다.

기다리는 손님은 오지 않고, 뜻하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

윌리엄 사령관이 내 영지를 방문했다.

그것도 비공정을 타고서!!

이제 대비행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근데 왜 온 거지?'

120. 타일러 빈스 후작.

120. 타일러 빈스 후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