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로스 왕국 수도 마우리스.]
높은 하늘 위에서 마치 신이라도 된 듯이 아래를 내려다본다.
거대한 항구 도시이자, 탈로스 왕국의 수도는 이른 새벽부터 부산해 보였다.
항구 북쪽엔 높은 성벽과 주황빛 지붕을 얹은 왕궁이 위용을 뽐내고 있었고, 항구 남쪽엔 조선소도 있었다.
그리고 그 조선소 옆에 낮은 산이 하나 있었다.
저곳이 탈로스 왕국의 유일한 타이탄 공방이었다.
"거! 딱 벼락 맞기 좋은 날이네."
라이너 대령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구름도 없는데요?"
"응? 우리가 벼락이잖아."
"네?"
"비유야 비유."
"아! 그렇군요."
라이너 대령이 머리를 긁적였다.
옆에 있던 크리스티나 중령은 고개를 흔들었다.
"라이너 대령님께 너무 어려운 말은 하지 마세요."
그게 어려운 말이었냐?
라이너 대령은 체격은 곰 같고, 성격은 순둥이였다.
하지만 기간트를 다루는 솜씨는 발군이었다.
크리스티나 중령은 생긴 건 조용하고 얌전하게 생겼지만, 속은 여우였다. 물론 그녀도 기간트를 다루는 솜씨는 수준급.
누군가 끌어주는 사람만 있었다면 네 사람 다 엠버 대령처럼 진작 오리지널 기간트를 배정받았을 것이다.
"영주님! 마르틴 국왕의 기함에서 출격 신호가 왔습니다."
"좋아! 이제 시작이다! 모두 기간트에 올라타라!"
"네!"
기사들이 기간트에 올라타고, 오크 해병들이 갑판에 집결했다.
오늘은 오크도 지상 작전에 투입했다.
먼저 7척의 비공정이 왕궁을 향해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우린 타이탄 공방으로 향한다."
우리 비공정도 급강하했다.
사실 타이탄 공방은 처음부터 내가 공격할 생각이었다.
챙길 게 많으니까.
그리고 아리칸 왕국과 제국군은 왕궁을 공격하고 싶어 했다.
국왕을 사로잡아 협상을 자기들 유리한 쪽으로 진행하고 싶었으니까. 비행석도 챙기고.
"입구에 타이탄 보초병이 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착륙해!"
"네! 영주님."
먼저 내가 탄 비공정이 타이탄 공방 입구에서 500미터나 떨어진 곳에 내려왔다.
그리고 후면 해치를 열었다.
"모두 강하하라! 고고고!"
명령을 내리고 나도 아래로 내려가 기간트에 탑승했다.
기잉! 쿵! 쿵!
하얀 악마 기간트들이 차례로 내렸다.
완전한 착륙이 아니었기에 뛰어내릴 때 중심을 잘 잡아야 했다.
[펠릭스! 타이탄이 다가온다!]
[네! 저희가 막겠습니다.]
타이탄 공방의 유일한 출입구를 지키던 타이탄들이 우르르 달려오고 있었다.
가장 먼저 내린 펠릭스 단장과 네 기의 기간트가 등에서 방패를 꺼내 달려오는 타이탄 앞을 막았다.
쾅! 콰콰쾅!
다른 기간트들도 내리자마자, 전투에 참여했다.
라이너 대령과 크리스티나 중령의 룩급 기간트도 내렸고, 내가 맨 마지막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쿠오오오오!"
쿵! 쿵! 쿵!
오크 해병대 50명이 일제히 갑판에서 뛰어내렸다.
내가 위로 손을 돌리자, 비공정은 상공으로 날아올랐고, 에테나가 탄 비공정이 내렸다.
오크 해병대가 나이트급 타이탄을 향해 겁도 없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해병 하나가 휘두른 칼에 맞고 날아갔다.
아무리 강습 갑옷이 단단해도 거대 병기의 무기에 맞으면 저렇게 목숨을 잃는다.
[적에게 죽음을!]
마키아스의 기간트가 내려와 타이탄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뒤를 이어 트라스의 개 기간트와 후버 대령과 브라운 중령의 기간트도 내렸다.
그렇게 추가로 10기의 기간트가 내려왔고, 오크 해병대 50명도 추가됐다.
이미 우리에게 달려든 10여 기의 타이탄들은 거의 처리된 상태였다.
그렇게 기간트 20기와 오크 해병대가 모두 강하했다.
[화끈하게 쓸어버리자!]
[가자!]
[와아아아!]
기이이잉! 쿠쿠쿠쿵!
우리가 달려들자, 뒤늦게 입구로 몰려온 타이탄들은 싸울 생각을 하지 못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쾅! 콰쾅! 쾅!
입구의 바리케이드를 부수고, 타이탄을 공격했다.
놈들은 오래 버티지 못했고, 순식간에 입구를 정리했다.
그래도 타이탄 생산 공방이라 예상보다 지키는 타이탄이 많았다.
[펠릭스! 입구를 지켜라!]
[네!]
하얀 악마 기사단을 입구에 남기고 타이탄 공방을 공격했다.
[마키아스! 닥치는 대로 부숴라!]
[네! 모두 나를 따르라!]
마키아스의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가 앞서며 트라스의 개 기사단과 이번에 합류한 훈장 영웅들의 기간트가 사방으로 달리며 공방을 부수기 시작했다.
일하던 사람들과 작업용 기간트들은 도망치기 바빴고, 가끔 달려든 경비 타이탄들은 우리 기사들의 상대가 아니었다.
[쿠훌린!]
"쿠오크! 말하라 타일러여!"
[너희는 비공정을 찾아봐!]
"쿠오크! 알았다."
오크 해병들이 비공정을 찾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에테나! 날 따라와!]
[네!]
난 에테나와 타이탄 생산 라인이 아닌 반대쪽으로 달렸다.
엄청난 빛을 뿜어내는 마석 배터리가 있는 곳이었다.
쾅! 쾅!
마석 배터리를 지키던 2대의 타이탄을 가볍게 정리했다.
[그림자 기사단은 주변을 지켜라!]
[네!]
10대의 기간트를 꺼내 웨슬리와 자동인형을 태웠다.
그리고 괴수인형으로 마석 배터리를 모두 챙겨서 인형의 집에 챙겼다.
이제 타이탄이 마석 배터리가 부족할 일은 없었다.
[이제 어디로 가나요?]
에테나가 물었다.
마나를 눈으로 뿜어냈다.
사방이 반짝이는 가운데, 유난히 반짝이는 물체가 있었다.
[이쪽이다!]
난 그림자 기사단과 밝은 빛을 향해 달렸다.
그곳엔 2대의 룩급 오리지널 타이탄이 거의 완성 직전에 있었다.
'오오! 있다!'
내가 이쪽으로 온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었다.
타이탄 왕국의 국왕을 사로잡아서 내가 뭘 한 건가?
그런 건 정치인들이 하고.
비행석도 많았기에 굳이 그 진흙탕 싸움에 끼고 싶진 않았다.
난 실속을 챙기는 거다.
[킹콩! 이거 챙겨!]
"끄어어어!"
쿵쿵쿵!
7미터의 킹콩 인형이 11미터의 룩급 오리지널 타이탄을 양쪽에 하나씩 끼워 들었다.
묵직한 느낌에 매우 힘겨워 보였다.
'가지고 들어가!'
룩급 오리지널 타이탄 2대를 챙겼다.
아직 완성되지 못한 부분은 케네스 영감과 드워프들에게 맡기면 된다.
'이제 다 챙겼나?'
"쿠오오크!"
오크들이 날 부르고 있었다.
[저쪽이다!]
오크들의 안내로 도착한 곳엔 10척이나 되는 비공정이 제작 중이었다.
아직 대부분 반 정도밖에 완성되지 않았다.
그리고 부서진 2대의 타이탄도 있었다.
오크 해병들이 정리한 것이다.
아쉽게도 오크가 다섯이나 희생됐기에 씁쓸했다.
[쿠훌린! 비행석을 찾아라! 근처에 있을 거야!]
"쿠오크!"
오크들이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굳이 비공정을 부술 필요는 없었다.
비행석만 챙기면 되니까.
"쿠오크! 타일러여! 이쪽으로 와라!"
오크의 목소리를 듣고 달려갔다.
그곳엔 가로세로 5미터 정도 되는 거대한 철판 뚜껑이 덮여 있었다.
기간트로 그걸 들자, 안엔 물이 가득했다.
그리고.
'어?'
둥근 모양으로 잘 깎여 있는 주먹만 한 비행석 수백 개가 들어있었다.
'이게 왜 여기에 다 있지?'
이런 중요한 것은 가장 안전한 왕궁 깊은 곳에 보관하고, 필요한 만큼만 가져다가 쓰는 것이 상식 아닌가?
130. 내가 파트리스 2세다!
130. 내가 파트리스 2세다!
그 흔한 자물쇠도 없었다.
어쩌면 탈로스 왕국엔 도둑이 없는 게 아닐까?
그렇게 잘 사는 나라는 아니라고 들었는데?
아무렴 어떤가.
'득템이로구나!'
아무도 보고 있지 않았다면 덩실덩실 춤을 췄을 것이다.
이렇게 동글동글하게 깎아 만든 것도 쉽진 않을 텐데, 꽤 정성을 들였다.
균일한 크기의 비행석을 모두 그물에 담아 인형의 집에 넣었다.
대략 내가 엘프 차원에서 채취한 비행석의 1/5수준이었지만, 이 정도면 탈로스 왕국이 캔 양의 전부일 것이다.
나머지 절반은 글론 왕국에 있겠지.
이제 탈로스 왕국은 대비행 시대에 뒤처질 것이다.
아무리 동맹이라고 해도 글론 왕국이 비행석을 그냥 막 주진 않을 거고.
주변을 쓰윽 둘러봤다.
'이대로 떠나면 내가 챙긴 흔적이 남겠지?'
누군가 비행석이 이곳에 있다고 말한다면, 기지를 습격한 나를 의심할 것이다.
그럼, 어쩔 수 없이 다 태워야겠군.
인형의 집에서 횃불용 기름과 헝겊을 왕창 꺼냈다.
대수림에서 사용하는 것이라 습기에도 강하고 비가 와도 잘 꺼지지 않는 괴수 기름이었다.
[쿠훌린! 저들의 비공정에 불을 질러라!]
"쿠오오크!"
오크들이 10척의 비공정에 기름을 뿌리고, 비공정을 만들기 위해 산처럼 쌓아놓은 목재에도 기름을 뿌렸다.
탁! 탁!
화륵! 화르르르!
곳곳에 불이 붙었다.
[쿠훌린! 오크 해병대와 기간트를 모두 데리고 탈출해!]
"쿠오크, 알았다. 타일러여!"
오크들이 먼저 움직였다.
난 에테나와 맨 마지막으로 나왔다.
마나를 눈에 뿜으며 혹시나 덜 챙긴 물건이 없는지, 남아 있는 기간트는 없는지 확인하면서 나왔다.
그리고 입구에 도착할 때쯤 거센 화염과 검은 연기가 공방 내부를 가득 뒤덮었다.
[모두 다 나왔나?]
[네! 영주님.]
[네! 주군.]
[오크는?]
"쿠오크! 타일러여 전사한 오크 전사들을 빼곤 다 나왔다."
쿠훌린과 오크들이 불타고 있는 공방을 향해 가운데 있는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쿠오오오오오크!"
죽은 오크 전사들을 용감한 대전사로 인정하는 것이다.
나도 검은 연기를 향해 중지 손가락을 펼쳤다.
편히 잠들기를······.
[모두 비공정에 올라타라!]
내가 손짓하자, 공중을 선회하고 있던 비공정이 내려왔다.
우리가 한참이나 타이탄 공방을 부쉈지만, 추가로 타이탄이 달려오진 않았다.
왕궁이 쑥대밭이 나 있을 텐데, 여기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겠지.
아니면 원래 수도에 병력이 많지 않았을지도.
"고도를 높여라!"
비공정이 기간트와 오크 해병대를 태우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영주님, 어디로 갈까요?"
"저기!"
난 항구 북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도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
우리 비공정이 탈로스 왕궁 상공에 도착했을 땐 이미 상황은 끝나 있었다.
동맹국의 기간트들은 왕성을 부쉈고, 수백 명의 포로가 한곳에 모여 있었다.
그리고 상공에서 살펴보니, 주변 몇 km 내엔 움직이는 타이탄은 없었다.
'정말 자신들이 당할지 몰랐구나!'
비공정으로 적을 괴롭힐 생각만 했지, 자신들이 역으로 당할지 몰랐나 보다.
그러니 왕궁에 겨우 50여 기의 타이탄을 배치했지.
그들은 70기의 최정예 기간트에게 모두 당했다.
"내려가자!"
우리 비공정도 저들의 왕궁에 착륙했다.
기간트를 타고 마르틴 국왕에게 다가갔다.
우가스가 나를 돌아보았다.
[타일러 경, 타이탄 공방은 어찌 됐소?]
[저길 보십시오.]
난 이곳보다 몇 배는 더 거센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항구 쪽을 가리켰다.
[허! 완전히 파괴했군.]
[네! 다시 공방을 짓지 못하게 모두 다 태워버렸습니다.]
[잘하셨소.]
난 주변을 한번 둘러봤다.
아리칸 왕국과 제국의 기간트들이 주변 건물을 부수며 뭔가를 찾고 있었다.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비행석은 내가 다 챙겼는데······.
난 모르는 척 가만히 있었다.
[전하, 파트리스 왕은 찾았습니까?]
[지금 찾을 생각이오.]
마르틴 국왕의 우가스가 포로들에게 다가갔다.
[난 아리칸 왕국의 왕 마르틴이다. 누가 파트리스 2세냐?]
하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왕관을 쓰거나 화려한 복장을 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비밀 통로 같은 곳으로 탈출한 게 아닐까?
그러자 퀸급 기간트 우가스가 거대한 낫을 겨눴다.
[다시 묻지 않겠다. 이번에도 나서지 않는다면, 이 낫에 모두 죽을 것이다.]
스으윽!
우가스가 거대한 낫을 높이 들고 다시 물었다.
[누가 파트리스 2세냐?]
우가스가 포로들을 향해 낫을 움직이려 했을 때였다.
"내가 파트리스 2세다!"
수염 난 건장한 중년 사내가 한 손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그대라고?]
"그렇소! 내가 탈로스 왕국의 왕이오. 날 찾았으니, 여기 있는 사람들은 살려주시오."
마르틴의 우가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 있던 기간트가 다가와 중년 사내를 뒤쪽으로 끌고 갔다.
[왕을 찾았으니, 그럼 나머진 필요 없겠군!]
스으으윽!
갑자기 우가스가 거대한 낫을 높이 들었다.
휘두르려는 순간!
"머, 멈춰라! 나다! 내가 진짜 파트리스 2세다!"
배 나온 중년 사내가 앞으로 뛰어나왔다.
[저자는 내 기사단장이다! 내가 국왕이다!]
사내는 자기가 왕이라고 소리치며 방금 끌려간 사내를 가리켰다.
[응? 그대가 진짜 왕이라고?]
"그렇다! 항복하겠다."
사내는 허름한 시종의 옷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에 기름기가 가득하고 배가 임산부처럼 볼록 나온 것이 다른 시종들하고는 달랐다.
[그럼 한 가지 묻지. 너희가 가지고 있는 비행석은 어디 있지?]
"뭐, 뭐라?"
[국왕이 비행석의 위치를 모를 리가 없지. 왜, 모르느냐? 모르면 죽어야지.]
거대한 기간트가 다시 낫을 겨눴다.
그러자 사내가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타이탄 공방에 있다."
[뭐?]
그 순간 마르틴의 우가스가 남쪽에 시커먼 연기를 쳐다봤다.
내가 말했다.
[헉! 큰일입니다. 비행석은 뜨거운 불에 직접 닿으면 금방 바스러져 가루가 됩니다!]
[이런!]
내 말에 마르틴이 짧은 탄성을 질렀다.
이미 비행석이 화마에 휩싸였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게 내가 타이탄 공방에 불을 지른 이유였다.
[뭐라고? 비행석이 불길에 휩싸였다고?]
내 말을 엿들은 제국의 기사가 한창 비행석을 찾고 있는 티아스 준장과 다른 제국의 기사들에게 알렸다.
그러자 비행석 수색은 중단됐다.
사실 이 정도 뒤졌으면, 뭔가 나와야 정상이었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지. 왕이 아닌 자, 모두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다. 이 중에 진짜 왕이 있다면 앞으로 나서라.]
마르틴 국왕과 아리칸의 기간트들이 남은 포로들을 향해 거대한 무기를 겨눴다.
하지만 더는 자신이 국왕이라고 나서는 이는 없었다.
[좋다! 이 둘만 비공정에 태워라!]
두 사람이 끌려가고, 더는 살육은 없었다.
마르틴은 남은 사람들에게 말했다.
[파트리스 국왕은 내가 데려가겠다. 한 달 이내에 아리칸 왕국에서 병력을 물리지 않으면, 왕을 죽이겠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수도를 모두 불바다로 만들겠다.]
마르틴 국왕의 강력한 경고 후에 우린 비공정에 올라탔다.
그렇게 한바탕 수도를 휘몰아치고, 9척의 비공정은 아리칸 왕국이 있는 동쪽으로 항해했다.
이제 전쟁은 끝날 것이다.
설사 왕궁에 남은 사람 중에서 왕이 있다고 해도 탈로스 왕국은 병력을 물릴 것이다.
아니면 저승사자 같은 마르틴 국왕이 비공정을 타고 다시 올 테니까.
탈로스는 왕국과 수도를 지킬 병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타이탄 생산 공장을 잃었다.
기술력이 있었기에 다시 공방을 만들겠지만, 내가 보기엔 최소 10년 이상은 걸릴 것 같았다.
***
우리가 아리칸 왕국으로 돌아오고, 보름 후에 연합군은 메로스시에서 퇴각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난 것이다.
지금 아리칸 알현실엔 기사들과 제국의 지휘관들이 모여 있었다.
"그럼 우리 서부군과 1군단은 돌아가겠습니다."
서부군 사령관 길라드 대장이 말했다.
"고생하셨소. 길라드 사령관."
"약속드린 대로 우리 아베르크 제국군은 최선을 다했으니, 가디언 제국과 전쟁에 도움을 부탁드립니다."
"그건 알고 있소. 그런데 기간트 공방은 언제 만들어 주는 거요?"
길라드 대장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제가 언제라고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아시다시피 제국은 지금 전쟁을 준비 중입니다.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또 미루는 거요?"
"그것이 아니라, 지금은 정말 그럴 여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저희가 이렇게 큰 피해를 봐가면서 아리칸 왕국을 도운 것을 잊으셨습니까? 황제 폐하께서 기간트 공방을 지어 주기로 하셨으니, 약속을 지키실 겁니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마르틴 국왕이 미간을 꿈틀거렸다.
이번에 아베르크 제국의 기간트는 100기 가까이 파괴되었다.
100기가 적은 건 아니었지만, 아리칸 왕국의 기간트는 400기 이상 잃었다.
"알겠소. 기다리지."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서부군과 1군단의 지휘관이 고개를 숙이고 알현실에서 나갔다.
마르틴 국왕이 주먹을 불끈 쥐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역시 이번에도 미루는군요."
"전하! 해도 해도 너무하는 것이 아닙니까!"
"저들은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습니다!"
아리칸 기사들이 분통을 터트렸다.
"마르틴 전하, 찰스 정보국장이 협상하러 왔을 때, 기간트 생산 기술도 넘겨주기로 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내 질문에 마르틴이 고개를 흔든다.
"기술 이전은 아니고, 5년에 걸쳐서 수도 인근에 기간트 생산 공방을 만들어 준다고 합의했소. 그런데 전쟁이 터져서 공사가 중단됐소."
"가디언 제국과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공사는 다시 시작되지 않겠군요."
"그럴 거요."
그래야 마르틴과 아리칸 왕국의 기간트를 가디언 제국과 전쟁에 사냥개로 부려먹을 수 있을 테니까.
만약 참전하지 않는다면 그걸 핑계로 기간트 생산 공방은 만들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참전하더라도 전쟁이 끝나면 아리칸 왕국은 다시 토사구팽당할 가능성이 컸다.
그땐 아베르크 제국에 비공정이 몇 배는 많을 테니까.
기간트도 압도적으로 많을 거고.
솔직히 기간트 생산 공장을 만드는 건 2년이면 충분했다.
일부러 5년을 부른 것은 질질 끌다가 결국엔 갖은 핑계를 대고 만들어 주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내가 좀 도와줄까?'
하지만 그게 나에게 이득일까?
난 잠시 고민에 빠졌다.
아리칸 왕국의 기간트는 전부 금화나 괴수 부산물을 대량으로 넘겨주고 제국에서 구매한 것이다.
아베르크는 가디언 제국과 팽팽한 대치 상황에서 서쪽 탈로스 왕국과 글론 왕국의 타이탄을 막아줄 방패가 필요했기에 그들에게 기간트를 팔긴 하지만, 생산 기술은 절대 넘겨주지 않았다.
그래야 그들에게 계속 조공도 받고,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을 테니까.
아리칸 왕국은 그렇게 300년을 속국으로 살았다.
그걸 뒤집으려 한 마르틴 국왕의 시도가 대단한 것이었다
'결국은 다시 옛날로 돌아갔지만······.'
한가지 궁금한 점이 있어 물었다.
"우가스는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
내 갑작스러운 질문에 마르틴 국왕이 눈을 깜빡였다.
"제국이 오리지널 기간트를 쉽게 만들어 주지 않았을 것 같아서요."
마르틴 국왕이 피식 웃었다.
"우가스는 150년 전에 만들어진 기체요. 대수림에서 아베르크 제국과 가디언 제국과 전쟁이 벌어졌을 때, 우리 아리칸이 아베르크 제국을 도왔고, 운이 좋게 내 선조께서 빼돌린 것이오."
아! 주운 거였어.
성능 좋은 우가스를 얻은 것이 이들에겐 행운이었다.
물론 그 우가스에 탈 수 있는 마르틴 국왕의 재능이 더 큰 행운이지만.
난 다시 물었다.
"그럼 아리칸 왕국의 다른 오리지널 기간트도 그런 식으로 얻은 겁니까?"
마르틴 국왕은 어색하게 웃었다.
"대부분 그렇소."
아리칸 왕국엔 오리지널 기간트가 몇 대밖에 없었다.
제국은 그들에게 귀환 오리지널 기간트를 내줄 생각이 없었다.
다행인 것은 오리지널 기간트는 오래된 것이라고 해도 성능의 차이가 크지 않았다.
다만 마석 배터리 소모량이 많고, 더 오래가는 신형 마석 배터리를 장착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었다.
아리칸 왕국은 기간트를 어느 정도 수리를 할 수준은 되지만 기간트를 생산할 만한 능력은 되지 않았고, 마석 배터리도 만들 못해 전량 수입했고, 겨우 충전만 하는 수준이었다.
문제는 마석 배터리도 수명이 있어 충전하면 할수록 효율이 떨어지고 나중엔 사용할 수 없었기에 꾸준히 수입해야 했다.
아리칸 기사들이 죽으라고 대수림에서 괴수를 잡은 것이 아니다.
그것만이 왕국을 지키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석도 광산에서 채취해 제국에 넘기고 마석 배터리를 받았는데, 점점 마석 채취량이 줄어들어 왕국의 마석 배터리 보유 수량도 줄고 있다고 들었다.
"제가 우가스를 좀 타봐도 되겠습니까?"
131. 공짜는 아닙니다.
131. 공짜는 아닙니다.
기사들이 시선이 일제히 내게 모였다.
대부분은 이 새끼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며, 눈으로 욕하고 있었다.
"그러시오."
하지만 마르틴 국왕은 바로 대답했다.
그러자 기사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르틴 전하, 그것은 그렇게 바로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우가스는 우리 왕국 유일의 퀸급 기간트입니다. 혹시라도······."
기사들의 말뜻은 이해가 갔다.
내가 혹여 우가스를 타고 도망치기라도 하면 아리칸은 가장 강한 기간트를 잃게 되는 것이니까.
물론 난 지금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를 타고 전투를 벌일 수 있을 정도로 마나량이 늘었다.
전투는 힘들겠지만, 이동하는 것이라면 퀸급 오리지널 기간트도 가능했다.
"하하하!"
마르틴이 크게 웃었다.
그리고 정색하며 기사들을 쳐다봤다.
"다들 지금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군. 지금 우리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앉아서 편히 대화하는 것 같나? 우리에게 비공정 7척을 준 것이 누구인가? 그리고 타일러 경이 우리 아리칸의 후작인 것을 잊었느냐?"
"죄송합니다. 전하 노여움을 푸십시오."
마르틴의 목소리가 커지자, 리오넬 대령이 나섰다.
"제가 타일러 후작님을 격납고로 모시겠습니다."
"아니다. 내가 함께 갈 것이다."
난 마르틴 국왕과 기간트 격납고로 향했다.
***
거대한 13미터의 퀸급 오리지널 기간트.
난 지금 우가스에 탔다.
마나를 눈으로 뿜어내고 주변을 살폈다.
'없네.'
속성 마법진이 없었다.
그 말은 거신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퀸급이라 기체도 크고 마나도 많이 필요하지만, 속성 마법진 한두 개 정도는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이 이 우가스는 거신 마법사나 마전사가 아닌 순수한 거신 기사가 입었던 갑옷 같았다.
'여기에 마법진을 새기면, 더 좋을 텐데······.'
우가스의 공격력이 워낙 좋으니, 방어를 할 수 있는 대지나 얼음 마법진을 새기면 상호보완할 수 있었다. 아니면 아예 극단적으로 공격 마법진을 추가할 수도 있고.
그리고 마석 배터리 장착 부분도 신형으로 개조하면, 효율이 더 높아질 거고.
하지만 여기선 방법이 없었다.
내 영지의 기간트 공방으로 가져가면 모를까.
철컹! 치이이익!
우가스에서 내려 마르틴에게 다가갔다.
"뛰어난 기체입니다. 빠른 움직임과 높은 방어력에 특화된 기간트라 마르틴 국왕 전하께 어울립니다."
"하하! 그렇소. 타일러 경이 기간트를 보는 눈이 있는지 몰랐소."
"이 기체를 제국에서 돌려달라고 하지 않던가요?"
마르틴은 고개를 흔들었다.
"대수림에서 사냥할 때를 제외하곤 일부러 최대한 사용을 자제했소. 그러다 20여 년 전에 가디언 제국과 한바탕할 때, 화끈하게 보여줬지."
"그런데 제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군요."
"그렇소."
난 우가스를 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이 좋은 기체를 이제 얼마 쓰지 못한다니 아쉽군요."
마르틴과 기사들이 눈동자가 흔들렸다.
마치 자신들의 비밀을 들킨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아리칸의 오리지널 기간트 중에서 쓸 수 없는 기체도 있지 않습니까?"
그때 리오넬 대령이 나서서 물었다.
"타일러 후작께서는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간단하오. 아까 전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아리칸의 오리지널 기간트는 대부분 오래된 것이오. 제국에서 더는 구형 마석 배터리를 생산하지 않으니, 구형 마석 배터리를 최대한 구해 반복 충전해 사용했을 거요. 그러니 수명이 얼마나 남았겠소?"
"하아! 경의 말이 맞소."
마르틴 국왕이 한숨이 깊었다.
"다 알고 있으니 뭘 더 숨기겠소. 우리가 보유한 오리지널 기간트 대부분은 지금 창고에 있소. 지금 사용할 수 있는 기체는 우가스를 포함해 4기밖에 없소. 그것도 1기를 제외하고 모두 구형이라 오래 쓸 순 없소."
난 마르틴 국왕을 향해 피식 웃었다.
"아리칸 왕국은 운이 좋군요. 좋은 동맹을 두었으니까 말입니다."
"······?"
"우가스와 구형 오리지널 기간트를 제게 맡겨 주십시오. 모두 신형 마석 배터리를 장착할 수 있게 개조해 드리지요."
마르틴과 기사들이 순간 다양한 표정을 지었다.
누군 의아한 표정이었고, 누군 어이없는 표정, 누군 믿지 못하는 표정, 누군가는 살짝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그게 가능하시오?"
"물론입니다. 제게 오리지널 기간트가 많은 것을 보지 않으셨습니까."
난 지금 15기의 기간트와 1기의 마장기를 가져왔다.
그중에 4개가 오리지널 기체였으니, 숫자상으론 아리칸 왕국과 같았다.
"제게 전부 맡겨 주시면 6개월 안에 개조해 드리지요. 아! 물론 공짜는 아닙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대수림에서 오리지널 기간트만 챙긴 것은 아닐 텐데요? 오리지널 마장기는 몇 대나 있습니까? 파손된 것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니까 파손된 오리지널 마장기를 넘겨주면, 우리 기간트를 모두 개조해 주겠다는 말씀이시오?"
"그렇습니다. 어차피 오리지널 마장기는 마석 배터리를 구할 수 없으니 사용할 수 없지 않습니까."
"파손된 오리지널 마장기가 있긴 있다고 들었소. 마석 배터리가 없어서 수리하지 않은 채로 있긴 하지만······."
마르틴은 유일하게 기대하는 눈빛을 보였다.
"잠깐, 나를 따라오시오."
난 마르틴 국왕과 기사들을 따라 격납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한 층을 내려가자, 거대한 동굴 같은 곳에 기간트가 보관되어 있었다.
"오리지널 기간트가 8기나 있었군요!"
"선조들께서 대수림에 전쟁이 날 때마다, 하나둘 어렵게 모은 것이오. 아쉽게도 너무 구형이고, 더는 마석 배터리도 남아 있지 않아 이렇게 세워둔 것이오."
"기간트 공방을 만들면 이것들을 개조해서 사용하려 하셨습니까?"
"그렇소."
이들이 기간트 공방을 빨리 지으려는 이유 중에는 이 오리지널 기간트들도 있었다.
이게 모두 투입되면 아리칸의 전력이 증가하니까.
"부서진 마장기들은 어디 있습니까?"
"그건 장벽 도시에 보관되어 있소."
난 고개를 끄덕였다.
"조건은 같습니다. 부서진 오리지널 마장기를 주시면, 오리지널 기간트를 전부 최신형으로 개조해 드리겠습니다."
"전하. 이것은 심사숙고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타일러 후작님께서 우릴 도와주고 계시지만, 우리 오리지널 기간트와 우가스까지 10기를 제국으로 가져가는 겁니다.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기간트 생산, 개조 기술을 보유한 곳은 아베르크 제국에서도 5곳밖에 없다고 들었습니다. 타일러 경께서 하실 수가 있을지······."
기사들이 일제히 반대하고 나섰다.
물론 나도 이해는 한다.
이번 전쟁에서 내 도움으로 승리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굳이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을 테니까.
"저도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곳에 일주일 정도 머물겠습니다. 충분히 상의하시고 결정하십시오. 어떤 결정을 내리든지 제가 아리칸의 동맹이란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알았소. 그만 올라갑시다."
***
아침 식사를 하는데, 귀가 따갑다.
"발레리온 영지의 비공정이 정말 단단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단단하면서도 빠르게 만드셨습니까?"
"글쎄요. 제가 직접 만든 것이 아니라서요."
드워프들이 만들었으니까.
설계나 구조 등에 내가 참여한 것도 아니었기에 나도 진짜 몰랐다.
내가 그쪽 전문가도 아니고.
"그럼 다른 영지에서 만든 겁니까?"
"글쎄요······."
나흘 전부터 나를 따라다니는 껌딱지는 비에르 페르도 왕자였다.
그는 내 바로 위에 후계 서열 3위의 후작이기도 했다.
아리칸 왕국의 후계 구조는 제국이나 다른 왕국과 완전히 달랐다.
300년간 공국이었기 때문인지, 작위에 따라서 후계 서열이 매겨지며, 작위는 전장에서 공을 세워야 얻을 수 있었다.
아무리 공작의 아들이라도 작위가 낮으면 다음 공작이 되지 못했고, 오리지널 기간트 역시 실력이 없다면 받지 못했다.
비에르 페르도 왕자는 마르틴 국왕 수준은 아니었지만,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에 탈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고, 크루세이더 기사단의 기사로 공을 많이 세웠기에 2년 전 후작이 됐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서열 3위였고, 현재 서열 1위와 2위의 후작들은 다른 원탁의 기사였다.
이건 어찌 보면 그들의 생존 방식이었다.
지도자가 강하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는 주변 환경 때문이었다.
그때 기사들이 식당으로 들어왔다.
"타일러 후작 저하. 원탁 회의실로 오시라는 마르틴 전하의 명이십니다."
"오! 어서 갑시다."
마르틴의 부름이 이렇게 반가울 때가.
하지만 비에르가 뒤를 따라왔다.
그 역시 원탁의 기사였으니까.
근데 왜 회의는 참석하지 않고, 날 계속 따라 다녔을까?
"오리지널 기간트를 타일러 경께 맡길지 정해졌나 보네요. 어떻게 됐을 거 같습니까?"
"글쎄요. 전 어떤 결과가 나와도 상관없습니다. 아리칸 왕국은 크게 다르겠지만요."
난 미소를 지었다.
"맞습니다. 제발 후작께 오리지널 기간트를 맡겼으면 좋겠군요. 제국에서 기간트 공방을 만들어 준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알현실이자, 회의실이자, 집무실로 들어갔다.
원탁의 기사들은 미리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어서 오시오. 타일러 후작. 그쪽으로 앉으시오."
'응? 내 자리가 있네.'
빈 의자에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날 원탁의 기사로 임명했다더니, 정말이었네.
나와 비에르 왕자도 자리에 앉았다.
이제 보니 마르틴 국왕을 포함해 자리는 모두 12개였다.
"타일러 후작, 이 문제는 원탁의 투표에 부치기로 했소."
"아! 그렇군요."
그냥 왕이 독단적 결정해도 될 것 같은데, 굳이 이러는 이유는 잘 모르겠다.
"이제 투표를 합시다."
"난 찬성하오."
"반대합니다."
"반대합니다."
"찬성합니다."
마르틴부터 시작해 시계방향으로 투표를 했다.
나와 비에르 왕자는 당연히 찬성했고.
마지막 한 사람을 남겨뒀을 땐 5대6으로 반대가 우세했다.
모두의 시선이 리오넬 대령을 향했다.
그는 아리칸의 참모였다.
"전 찬성합니다."
"응? 공교롭게 6대6이군. 그럼 원탁의 수장으로 내가 결정하겠소. 타일러 경에게 우리 아리칸의 오리지널 기간트의 개조를 맡기겠소."
원탁의 기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일단 결정이 나자, 다들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빠르게 움직였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마르틴 전하."
"조심히 가시오. 타일러 경."
마르틴 국왕은 섭섭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동안 함께 싸우면서 꽤 정이 들었나 보다.
나도 사실은 조금 섭섭했다.
그의 든든한 어깨가 그리울 것 같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충! 다녀오겠습니다."
비에리 왕자와 리오넬 대령이 우리와 동행했다.
그리고 관문 책임자이자, 장벽 사령관인 헥토르 후작도 비공정에 함께 탔다. 그는 전쟁에 참전했다가 원래 근무지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총 2척의 비공정이 우리를 따라왔다.
비공정 1척에 10대의 구형 오리지널 기간트를 실었고, 나머지 1척은 관문 도시로 가서 부서진 마장기를 싣고 내 영지로 돌아갈 용도였다.
***
[아리칸 왕국 장벽 도시 에미트]
우린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요새 지하로 향했다.
그곳엔 부서진 마장기가 놓여 있었다.
대부분 해치가 파괴되어 있었고, 팔다리가 없는 기체도 있었다.
그런데 그 숫자가 14기.
대부분 수리하면 쓸 수 있어 보였다.
10기 고쳐주고 14기를 챙긴다!
이건 완전히 수지맞는 장사였다.
그리고 이 오리지널 마장기를 다 수리하면 현재 내 기사들을 모두 오리지널 기간트와 마장기에 태울 수 있었다.
오리지널 기갑 군단이라니!
"모두 비공정에 실어라!"
부서진 마장기 숫자가 많았기에 비어있던 아리칸의 비공정 1대와 내 비공정 2대에 남은 공간까지 이용해 실었다.
내가 이곳에서 하루를 쉬고, 다음날 출발하자고 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메제트의 탑을 들릴 생각이었다.
이곳 관문엔 얼음 속성의 메제트의 탑이 있으니까.
밤에 몰래 올라갈 생각이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파밍은 해야지!'
또 아는가?
불의 탑에서처럼 13미터의 퀸급 거신 갑옷을 챙길 수 있을지.
***
그날 저녁이었다.
헥토르 후작과 비에르, 리오넬 대령과 식사 중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관문을 지키는 장교였다.
장교는 헥토르 후작에게 뭔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뭐라? 그게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오늘 낮에 노바스 전진 기지의 사냥팀이 확인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헥토르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헥토르 경, 무슨 일이길래 그리 표정이 어둡습니까?"
헥토르는 나를 쳐다봤다.
"제가 나가 있을까요?"
"아니요. 어차피 다 알려질 일이니 그냥 말하겠소. 장벽에서 보름 거리에 차원 균열이 생겼소."
"차원 균열이요?"
이렇게 가까운 곳에 차원 균열이 생겼다고?
지금까지 차원 균열은 대수림 깊은 곳에서 발생했다.
왠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132. 얼음의 탑.
132. 얼음의 탑.
헥토르 후작은 아리칸 왕국의 후계 서열 1위로 장벽 사령관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마르틴 국왕보다 나이가 많아 그가 다음 국왕이 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였다.
그는 30년 전부터 대수림 전진 기지에서 근무하면서 아리칸을 위해 수많은 괴수 부산물을 벌어다 준 일등 공신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3년 전부터는 장벽 사령관으로 사냥을 그만두고 관문과 전진 기지들의 통합 관리자가 되었다.
"헥토르 경, 차원 균열에서 괴수는 나오지 않았습니까?"
내 물음에 헥토르 사령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다른 차원 균열과 같소."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른 차원 균열처럼 안에 있는 괴수가 밖으로 나오는 일은 없었다.
"혹시 사냥팀이 균열 안에 들어가 봤다고 합니까?"
"그렇소. 입구 근처만 살펴봤는데 사방이 폐허가 되어 있다고 들었소. 다행히 괴수도 보이지 않았고."
엘프나 드워프 차원처럼 이곳도 괴수들에게 멸망한 것 같았다.
"그리고 탈로스 왕국 관문 쪽에도 비슷한 차원 균열이 생겼소."
"탈로스 쪽에도요? 그럼 아베르크 제국 쪽에도 생겼습니까?"
"거기까진 확인하지 못했소. 탈로스야 전쟁 중이라 저들의 전진 기지를 정찰하고 있었기에 알 수 있었고."
새로운 차원 균열이라, 당장 확인하고 싶었지만, 가장 가까운 곳이 관문에서 보름 거리면 괴조를 타고도 한참 거리였다.
그리고 이 밤중에 관문을 열어달라고 할 수도 없고.
일단 영지로 가서 일을 정리하고, 우리 쪽 관문을 넘어 차원 균열을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았다.
난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일 새벽에 출발하려면, 오늘은 일찍 자야겠습니다."
"편히 쉬시오."
난 방으로 들어가서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어둠을 틈타 장벽 관문으로 향했다.
그곳에 있는 메제트의 탑을 오르기 위해서였다.
***
'오! 다행이네. 이곳도 털리지 않아서.'
얼음의 탑 상층부에 도착했다.
이곳은 화염의 탑처럼 거신 시대 거신이 살았던 모습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다. 각종 거신 서적이 책장에 그대로 있었고, 책상과 의자도 조금 전까지 썼던 것처럼 멀쩡했다.
아마도 빌헬름 뢰트켄이 아베르크에 있는 대지의 탑만 털었나 보다.
그리고 얼음 속성 마석을 만드는 마법진도 발견했다.
역시나 화염 속성 마석처럼 얼음 마석을 만들기 위해선 특별한 재료가 하나 필요했고, 최고급 마석이 필요했다.
"자! 모두 뒤져라!"
[네, 주군.]
"쓸 만한 건 모두 중앙으로 가져오고."
[네!]
내 자동인형들이 총출동했다.
자아를 가진 마법인형이 많으면 이게 좋다.
자동인형이 기간트를 몰고, 챙길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다 가지고 왔다.
난 그중에서 괜찮은 것들만 인형의 집에 넣으면 되고.
'주군, 이곳에 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좋아! 뭔가 찾았구나!
웨슬리의 보고에 나도 기간트를 타고 움직였다.
'어? 이건 뭐지?'
얼음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거대한 문이었다.
[웨슬리 부숴!]
[네! 주군.]
웨슬리의 룩급 기간트가 거대한 도끼를 휘둘렀다.
쩡! 쩡! 쩡!
도끼질할 때마다, 얼음이 깨지고 움푹 파였다.
하지만 순식간에 다시 얼어붙더니, 제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만!]
어딘가에 얼음 마법진이라도 있나?
부수면 계속 얼어버리니, 이건 다른 자동인형과 합심해도 깨지 못할 것 같다.
눈으로 마나를 뿜어냈다.
그런데 얼음에서 푸른 빛이 반짝여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었다.
역시 안에는 뭔가 중요한 것이 들어 있는 게 분명했다.
마나를 거둬들이고 문을 열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근데 이 자국은 뭐지?'
얼음벽 옆쪽에 괴이한 모양의 구멍이 파여 있었다.
혹시 열쇠 구멍인가?
열쇠 구멍치고는 모양이 너무 불규칙적이고, 괴이했다.
순간, 이 구멍에 맞는 물건이 떠올랐다.
난 인형의 집에서 마그리스의 지팡이를 꺼냈다.
이건 위대한 열두 기사인 얼음의 마법사 마그리스의 지팡이였다.
마그리스는 내게 충성을 맹세한 거신 마법사 알리사 엘가의 스승이었으며, 이 지팡이는 이데아 발굴지에서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이곳은 마그리스가 관리했던 얼음의 탑.
그러니 이 지팡이를 세워서 구멍에 넣으면.
쓱! 쓰윽! 착!
'어! 들어갔다.'
지팡이를 살살 돌리다 보니 딱 맞아떨어지는 위치가 있었다.
역시 이게 열쇠였네.
그런데 왜 문이 열리지 않지?
마나를 주입해 한번 돌려봤다.
지팡이가 푸른빛으로 번쩍이더니!
위잉! 드르르르르! 쿵!
얼음 문이 열렸다.
얼음 문의 두께가 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두꺼웠다.
[웨슬리, 여기 잘 지켜!]
[네! 주군.]
난 홀로 안으로 들어갔다.
기간트에 타고 있음에도 살이 떨어져 나갈 듯한 추위가 몰려왔다.
천천히 안으로 이동하자, 안쪽 중앙에 3개의 제단이 보였다.
'응? 얼음 속성 마석을 만드는 마법진은 이미 찾았는데, 이건 뭐지?'
끝쪽 제단 앞의 글자를 읽었다.
얼음 속성 마석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여기엔 얼음 속성 마석을 올리라는 거고.
반대편엔 다바르의 심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괴수 이름인가?
아무튼, 이 제단엔 다바르의 심장을 올리란 뜻이었다.
그리고 중앙의 제단은 무언가를 제작하는 마법진이었다.
마법진 가운데 반원 모양의 그릇이 있었고.
'뭘 만드는 건 분명해 보이는데, 뭔지는 잘 모르겠다.'
더 특별한 것은 없어 보였다.
마지막으로 마나를 눈으로 뿜어내며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뒤쪽 벽 앞에서 뭔가 강렬한 하얀 빛이 반짝였다.
'오! 얼음 속성 마석이다!'
가까이 다가갔다.
얼음 속성 마석이 5개나 있었다.
일단 챙겼다.
이곳에 더 있다간 얼어 죽을 것 같아 몸을 돌렸다.
'차라리 대수림이 낫지.'
뼛속까지 시리다.
기잉! 쿵! 쿵!
'어?'
한쪽 벽에 적혀 있는 거신의 언어가 눈에 들어왔다.
[빙결의 오브 제작 방법]
순간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니까 이곳이 빙결의 오브를 만드는 곳이란 말이야!
빙결의 오브가 어떤 물건인가?
단 하나만 해도 주변 500미터 내에 모든 것을 얼려버린다.
거기에 물이 더해진다면, 몇 배 더 거대한 얼음 덩어리가 되고!
한 마디로 누구도 피하지 못할 정도의 가공할 얼음 원자폭탄이었다.
난 천천히 벽에 적혀 있는 오브 제작 방법을 읽었다.
얼음 속성 마석이야 방금 구한 5개가 있었고, 얼음 절벽에서 파밍한 3개까지 8개나 있었다.
그런데 다바르의 심장을 구하는 것이 문제였다.
설명에 보면, 다바르는 온통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툰다라 대마경에 사는 괴수인데, 크기가 드라우켄만큼 큰 파충류 괴수였고, 입에서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냉기 브레스를 뿜어낸다고 한다.
그런데 냉기 브레스의 사정거리가 무려 500미터.
'미친! 이걸 잡으라고 적어 놓은 건가?'
아니 거신들은 잡았겠지.
그러니까 냉기의 오브가 있었던 거고.
거신들도 이걸 잡으려면 상당한 출혈을 각오해야 할 것 같았다.
적어도 다바르는 S등급 괴수였고, 냉기 브레스를 생각하면 가까이 접근하기도 싫은 괴수였다.
'일단 여기서 나가자!'
피까지 얼어버리기 전에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마그리그의 지팡이를 돌려서 뽑았다.
드르르르르! 콰앙!
얼음 문이 닫혔다.
휴! 다시는 들어가고 싶지 않은 방이었다.
'내가 이 방을 다시 들어올 일이 있겠어?'
아니, 빙결의 오브를 만들 필요가 없었다.
내 인형의 집엔 이미 빙결의 오브가 3개나 있었으니까.
모두 아데아 발굴지 얼음 계곡에서 얻은 것들이었다.
문제는 이걸 사용하려면 마나를 강하게 뿜어내며 오브를 부셔야 하는데, 그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거신 마법사인 알리사 엘가도 그 때문에 너무 오랜 세월을 얼음 지옥에 갇혀 있었다.
[여기 있는 거, 다 챙겨 넣어!]
난 괴수인형을 이용해 얼음 마법 관련 거신 서적들을 모두 인형의 집에 넣었다.
거신 갑옷은 얻지 못했지만, 그래도 얼음 마법진의 정보를 얻었으니 만족했다.
그리고 얼음 속성 마석을 제작하는 방법도 알았다.
툰다라 대마경의 푸른 얼음과 최고급 마석만 있으면 해결된다.
일단 시범적으로 지금 드워프들이 만들고 있는 내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에 얼음 마법진을 새겨넣을 생각이었다.
양심적으로 발굴지에서 내가 먼저 챙긴 8개의 거신 갑옷은 3개는 룩급, 3개는 비숍급, 2개는 나이트급이었다.
그리고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 하나에 얼음 마법을 여러 개 새겨서 내가 탈 생각이었다.
"이제 집으로 가자!"
다음날 우리 일행은 새벽같이 아베르크 제국으로 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