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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황성 알현실 앞]

"하아!"

찰스 정보국장이 큰 한숨을 쉬었다.

"하늘을 나는 배라니! 어떻게 아리칸 공국에서 그런 기술을 습득한 걸까? 설마, 가디언 제국도 그 배를 가지고 있는 건가?"

"······."

"대체 특무대와 방첩대는 무엇을 하고 있었지? 어떻게 아무런 낌새도 차리지 못한 거야."

찰스 국장은 곧 있을 자신의 문책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 여유롭던 양반이 저러는 것을 보면, 정보국장 자리에서 잘릴까 걱정인가보다.

솔직히 누가 그런 정보를 알았겠는가.

나 말고.

갑자기 찰스 국장이 나를 쳐다봤다.

"자네 혹시, 뭔가 알고 있었나?"

순간 뜨끔했다.

"제가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전 대수림에만 있었는데요."

"아! 그렇지. 자네는 대수림에 있었지."

찰스 국장이 안절부절못하고 다시 복도를 걷고 있었다.

내 입으로 비공정에 대해 말할 순 없지.

내가 먼저 알고 있었단 사실을 알면, 모든 화살이 내게 향할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라디프 공작을 범인으로 몰아야 하는데, 증거가 없었다.

그보다 라디프 공작은 실로 무서운 사람이었다.

처음엔 이번 암살 계획이 라디프 공작의 짓인 줄 알고 나도 당황했다.

하지만 자신은 쏙 빠져나가고, 비공정만 지급하고 마르틴 공작이 황제를 암살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마치 꼭두각시를 뒤에서 조종한 것과 같네.'

자신과 관련된 아무런 증거가 없었다.

암살에 실패해 사로잡힌 병사들은 알 리가 없었고.

그리고 성공했다면, 황제와 황태자는 죽었을 거고, 단번에 삼황자가 다음 황제가 되었을 것이다.

진짜 황제가 된 호엘 삼황자 뒤에서 제국을 주무르려고 했나?

'그럼 그 거대 비공정을 가지고 뭘 할 생각이었지?'

오늘 아리칸 비공정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났으니, 당분간 그도 움직일 순 없을 것이다.

아니면 이미 움직였을지도 모르고.

라디프 공작은 처음으로 내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는 놈이었다.

그리고 엘프 차원에서 생각보다 비행석을 많이 채취한 것 같았다. 그러니 또 다른 비공정도 만들었지.

하지만 그도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내가 그의 비밀을 다 알고 있다는 거.

끼익!

알현실 문이 열렸다.

"하아!"

그리고 밖으로 나온 보로스 추밀원장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황제에게 얼마나 혼이 났는지 얼굴이 반쪽이 됐다.

그가 찰스 정보국장을 노려봤다.

"대체 정보국은 뭘 하는 건가?"

보로스는 알현실 앞이라 큰 소리는 내지 못하고, 이를 악물며 분을 삭이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당장 관련 부대를 집합시켜 아리칸 공국으로 보내겠습니다."

"지금 기술국에서 그 비행선을 조사 중이네. 그 결과가 나오면 아리칸 공국과 가디언 제국까지 모두 철저히 조사하게."

"네!"

"잘 듣게. 이번에 제대로 알아내지 못하면 내 입지가 위태로워지네. 물론 자네는 시골에서 밭일이나 해야 할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보로스 추밀원장이 이번엔 나를 쳐다봤다.

"크흠! 그런 능력이 있으면서 왜 말하지 않았나?"

"보여줄 기회가 없었습니다."

"아무튼, 이번엔 자네가 정보국의 체면을 살렸네."

추밀원의 체면도 살렸지.

상부 기관이니까.

"알현실에 들어가거든 처신을 잘하게. 묻는 말에만 대답하고."

"네! 알겠습니다."

난 알현실 문 앞에 섰다.

그러자 기사들이 문을 열었다.

수십 명의 기사가 좌우에 일렬로 기립해 있었다.

난 단상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황제와 황후는 알현실 끝에 높은 단상에 앉아 있었고, 그 옆으로 황태자와 황태자비도 보였다.

그리고 좌우로 대신들이 서 있었다.

난 황제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충! 케인 오르도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케인 황제는 날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어서 오게. 잠깐 주변을 둘러보게."

난 황제의 명으로 주변을 한번 둘러봤다.

"자네 덕분에 간밤엔 잘 잔 사람들이 꽤 있지?"

황후와 황태자 부부, 대신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덕분에 잘 잤네. 어젠 정말 죽었다고 생각했거든. 고맙네."

"아닙니다. 신하 된 도리를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황제 폐하를 구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하하! 말도 잘하는군."

케인 황제는 오늘은 여유로워 보였다.

어제 겁에 질린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역시 정치를 잘하는 황제라 다르다.

그가 일어나 단상 아래로 내려왔다.

"타일러 중령, 일어나게!"

난 자리에서 일어섰다.

황제가 손짓하자, 근위 기사가 상자를 가져왔다.

케인 황제는 상자에서 뭔가를 꺼냈다.

"원래는 어제 건국기념일 행사장에서 줬어야 했는데, 늦었군."

케인 황제는 내 가슴에 금빛 훈장을 달아주었다.

"엠페러 프라임 훈장을 받은 것을 축하하네."

"충! 감사합니다."

짝짝짝짝짝!

박수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케인은 번거롭게 다시 단상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오른쪽에 서 있는 내무 대신에게 물었다.

"이건 원래 받을 훈장이었고, 나를 구했으니, 무슨 상을 줘야 하나?"

"이미 훈장을 받아 명예 백작 작위가 있으니, 한 단계 높여 백작의 작위를 수여하심이 어떻습니까?"

"음. 백작이라······."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서 내 검과 반지를 가져오라."

기사가 바로 옆방으로 들어갔다.

진짜 백작 작위를 준다고?

잠시 후 기사가 검과 상자를 들고 돌아왔다.

케인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다시 단상 아래로 내려왔다

이럴 거면 그냥 나더러 올라오라고 하지.

케인 황제가 손을 내밀자, 기사가 검을 내밀었다.

스르릉!

"무릎을 꿇게."

척!

황제는 내 어깨에 검을 올렸다.

"나 케인 오르도는 타일러 빈스에게 아베르크 제국의 백작 작위를 수여한다."

"충! 감사합니다."

"축하하네."

짝짝짝짝짝!

다시 쏟아지는 박수 세례.

기사가 상자를 열자, 안에 반지가 들어있었다.

황제는 내게 반지를 내밀었다.

"이건 제국의 백작이 됐다는 증표네."

반지에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미리 다 준비해 놓고선 연극은······.

난 그 자리에서 반지를 손에 끼웠다.

황제는 다시 단상을 올라갔다.

그리고 이번엔 재무 대신을 쳐다봤다.

"나와 황후까지 구했는데, 작위만 줘서 끝낼 순 없지 않겠나?"

"일만 골드와 수도의 저택을 내리심이 합당한 줄 아룁니다."

"적당한 저택이 있나?"

"마침 살루스 왕국의 아칼룸 백작에게 압수한 저택이 있습니다."

"잘 됐군. 타일러 빈스 백작에게 그 저택을 하사하게."

"네! 폐하!"

수도에 저택이라니!

오! 이건 좀 인정.

황제가 그래도 통이 크네.

비호감이었던 이미지가 조금은 좋아졌다.

89. 백작보다 남작.

89. 백작보다 남작.

그때 황제가 황태자와 태자비를 쳐다봤다.

"너희도 목숨을 구했으니, 뭔가 줘야지?"

황태자가 말했다.

"새집엔 새 가구가 필요할 겁니다. 저택의 모든 가구는 최고급으로 저희가 맡겠습니다."

"아! 잘됐군."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

난 프란 황태자에게도 감사 인사를 했다.

황제는 어제 자리에 있던 대신들에게도 한가지씩 받아내어 내게 주었다.

덕분에 시녀와 하인도 생기고, 마차와 저택 경비도 생겼고, 주머니까지 아주 두둑해졌다.

***

알현실 밖으로 나오자, 발데스 프랑크 근위 기사단장과 티아스 대령, 그리고 어제 활약했던 기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충!"

난 발데스 기사단장에게 경례했다.

발데스 단장은 나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 답했다.

옆으로 이동하자, 티아스 대령과 기사들은 나와 눈을 맞추곤 고개를 숙였다.

나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공을 세웠으니, 다들 더 좋은 훈장을 받을 것이다.

그때 티아스 대령에 내게 다가왔다.

"어제는 경황이 없어서 인사를 못 했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존대를?"

그가 내 손을 쳐다보았다.

"제국의 백작이 되신 것을 경하드립니다."

"아! 고맙소."

"그런데 어제 절 도와주었던 정보국 기사들은 어떻게 된 겁니까?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모두 정보국의 비밀 기사들이니, 노출되면 곤란합니다. 비밀을 지켜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 다른 기사들에게도 말을 해 놓겠습니다."

난 웃으며 티아스 대령에게 말했다.

"소원대로 엠페러 프라임 훈장을 받게 되셨군요."

"타일러 경, 덕분입니다. 언제 크게 한턱내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봅시다."

그게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인맥은 많은 게 좋겠지.

난 다른 기사들과도 손 인사를 했다.

모두 무공 훈장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기사들이니,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이다.

***

[추밀원 본부]

보로스 추밀원장이 날 불렀다.

"그만 대수림으로 돌아가 보게."

"대수림으로요?"

"그래, 할 일이 많을 텐데, 여기서 너무 시간을 보내면 안 되겠지."

순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번에 티아스 대령도 엠페러 프라임 훈장을 받았으니, 더는 네가 필요 없겠지.

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영웅 놀이에 이젠 내가 필요 없다는 말이었다.

하긴 정보국 장교보다 기간트 장교가 훨씬 낫겠지.

"아! 그리고 이걸 받아가게."

그가 내민 상자는 나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프레디 준장의 자리를 오래 비울 수 없으니, 자네가 이제 헬다임과 대수림 지부를 맡게. 타일러 빈스 준장."

"감사합니다."

"어서 가보게."

보로스 추밀원장은 손까지 휘휘 저었다.

"충! 그럼 가보겠습니다."

몸을 돌렸다.

왠지 날 빨리 쫓아내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아무래도 추밀원장에겐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것 같았다.

뭐, 상관없겠지.

이제 정보국 의무복무 기간이 1년도 안 남았다.

게다가 이제 난 제국의 백작에 발레리온 영지의 영주가 아닌가.

밖으로 나오자, 익숙한 얼굴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찰스 국장님, 할데가르로 가신 것이 아니었습니까?"

"이따가 오후 열차로 가네. 추밀원장님께서 뭐라고 하던가?"

"진급시켜주던데요?"

"뭐?"

찰스 국장은 내 손에 들린 상자를 보았다.

"좀 달아주지. 사람이 정이 없어요."

찰스 국장이 상자를 열곤, 견장을 직접 어깨에 달아주었다.

"축하하네. 타일러 빈스 준장."

"감사합니다."

"세상에! 26살에 별을 달다니······!"

"27살입니다. 얼마 전 생일이 지났거든요."

"아무튼, 황족도 아닌데 20대에 제국의 장군이 된 것은 자네가 최초일 거네."

"계급장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어깨에 힘 좀 들어가네요."

찰스 국장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얼굴에 수심이 많아 보였다.

이제 비공정에 대한 정보를 알아 와야 하는데 그게 쉽겠나.

그렇다고 내가 알려줄 수도 없고.

"자네에게 부탁이 있네."

"네?"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이야기 좀 하지."

이제 보니, 찰스 국장은 내게 용무가 있었다.

"그러니까 가디언 제국에 비행선이 있는지 알아보라는 말씀입니까?"

"그래. 이번엔 아리칸 공국과 가디언 제국에 외교사절이 파견될 거네. 그때 자네도 함께 들어가게."

"하지만 헬다임과 대수림 지부는······."

"거긴 이미 자네가 없더라도 잘 돌아가도록 만들었지 않나."

"하지만 아직 제 영지도 가보지 않았는데······."

"프레디를 믿게. 밤낮없이 일하는 사람이야. 알아서 잘하고 있을 걸세."

"하지만······."

"뭐, 내키지 않으면 어쩔 수 없지. 하아!"

찰스 국장의 한숨이 깊다.

"그런데 아리칸 공국에도 외교사절을 보내는 겁니까?"

"물론이네."

"전쟁은요?"

찰스 국장이 고개를 흔들었다.

"자네라면 누가 내 머리 위에 떠 있는데 전쟁을 할 수 있겠나? 황제께서 1군단을 수도로 불러들이셨네. 그리고 각 기간트 생산 시설에 기간트를 3배로 배치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네. 그러니 각 전선에 있는 대영지의 기간트들도 곧 되돌아올 것이네."

하긴 마르틴 대공이 언제 어디에서 나타날지 모르니, 대비를 안 할 수 없지.

나 같아도 기간트 생산 시설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겠다.

당장은 모르겠지만 장기전이 벌어지면 그건 큰 타격이니까.

"그리고 아리칸 공국의 독립을 허락하실 것이네."

"네? 황제 폐하를 시해하려 했는데,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그럼 어쩌겠나?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야. 변수가 너무 많아."

"하지만 우리가 원한다고 해도 마르틴 공작이 받아들일 리가 없지 않습니까? 지금도 제국과 사이가 좋지 않은데, 우리가 왕국으로 인정하는 것이 의미가 없잖습니까?"

"그렇겠지. 아마도 시간을 벌기 위해선 기간트 제조 기술도 넘기지 않을까 싶네."

"네?"

이건 좀 놀랐다.

"이미 가디언 제국과 탈로스 왕국에서 마장기와 타이탄을 수입하고 있는 상황에 더는 기간트 제조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도 큰 의미가 없고, 차라리 기술을 전수하고 우방을 만드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이겠지."

"허! 어지럽군요."

도대체 정치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

서로 사이가 좋을 땐 주지 않다가 황제를 죽이려 하니까 준다고?

하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비공정 하나로 아리칸 공국의 전력이 대폭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평화를 지키기 위해선 더 강해져야 한다는 말이군.'

이미 알고 있었지만, 방금 이야기를 들으니 더 피부로 와 닿았다.

강한 힘만이 영지와 내 사람들을 지킬 수 있다는 뜻이었다.

"저기 라디프 공작에 대해서 좀 아십니까?"

"응? 물론이네. 제국의 4대 공작이고, 기간트 생산 공장도 있고. 그리고 호엘 삼황자 저하의 장인이 아닌가."

"그런 일반적인 거 말고 좀 비밀스러운 거 말입니다."

"아주 비밀이 많은 양반이지. 좀처럼 외부에 모습도 드러내지 않고. 왜? 무슨 일이 있나?"

찰스 국장이 날 빤히 쳐다봤다.

"이번에 대수림에 큰 병력을 이끌고 왔다가 돌아갔다고 하길래 물어보는 겁니다."

"뭐, 남부 영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기도 하고, 대귀족치고는 검소하기도 하지. 하지만 지금은 식민지 때문에 골치가 아플 거야."

"식민지요?"

"자넨 상관없는 이야기네."

"그냥 좀 듣고 싶습니다."

찰스 국장이 자신의 알고 있는 정보를 말해줬다.

아베르크 제국은 워낙 땅이 넓고, 영지도 많아서 황제가 모두를 관리할 순 없었다.

원래도 여러 개의 작은 왕국이 모여 하나의 큰 제국이 되었기에 토착 세력 역시 무시 못 할 수준이었고.

그래서 4명의 공작이 제국의 일을 돕고 있었다.

제국 북부의 록체스터 가문은 헬다임 장벽과 대수림 관련된 일을 주로 맡아서 했고, 동부의 헤이스팅 가문은 동부 전선에 많은 병력을 파견하기도 했다.

서부의 로드니 공작 가문은 아리칸 공국을 견제했다.

하지만 남부의 바이마르 공작가는 드와이트 대마경 외에 이렇다 할 위험이나 외부 세력이 없었다.

대신 몇 세기 전부터 선대 황제들의 팽창 정책 때문에 만들어진 식민지가 바다 건너 베른 대륙에 여러 개 생겼고, 그걸 전부 관리하는 것이 바이마르 가문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가디언 제국이나 대륙의 왕국들도 너도나도 식민지를 만들었기에 자주 패권 싸움이 일어났다.

베른 대륙의 크기는 아베르크 제국보다 조금 큰 정도로 아주 큰 대륙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시사철 날씨가 온화하고 희귀한 작물이 잘 자라서 무역을 잘하면 막대한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문제는 기간트를 파견하더라도 배에 몇 대 싣지 못하고, 바다에서 번번이 전투가 발생하는 바람에 아까운 기간트만 수몰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번에 또 식민지들이 대륙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전쟁을 시작했는데, 해군력이 강력한 탈로스 왕국에 밀리고 있다고 하네."

"정말 골치 아프겠군요."

왠지 라디프 공작의 거대 비공정이 어디로 향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하늘길을 이용해 식민지에 기간트나 병력을 보내거나, 적 식민지 주변에 50기의 기간트를 몰래 내린다면······.

식민지의 방어 수준이나 적은 기간트 숫자를 생각할 때, 라디프 공작이 베른 대륙을 통째로 손에 넣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생각보다 야심이 더 크군.'

아예 새로운 제국을 건설할 생각인가?

"자네 무슨 생각을 그리 하나?"

찰스 국장이 물었다.

"가겠습니다!"

"뭐?"

"가디언 제국 말입니다. 제가 가서 저들에게 비행선이 있는지 조사해 보겠습니다."

"오! 고맙네. 내 이 신세는 반드시 갚겠네."

찰스 국장이 활짝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그런데 아리칸 공국엔 누가 갑니까?"

"하아! 누구겠나?"

찰스 국장이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흔들었다.

"조심하십시오."

"말년에 이게 무슨 고생인가. 요즘은 목숨이 10개라도 부족해."

내가 갈 가디언 제국의 수도는 장벽과 겨우 나흘 거리로 멀지 않았다.

지난 200년간 가디언 제국은 대수림에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하고, 더 많은 마석과 더 많은 괴수 부산물을 획득해야 했다.

그래야 아베르크 제국과 벌어진 기간트와 마장기의 전력 차를 좁힐 수 있었으니까.

그 때문에 가디언의 수도 역시 대수림과 가까운 곳으로 옮겼다.

내가 굳이 가디언 제국의 수도로 가는 이유는 하나였다.

근처에 화염의 탑이 있으니까!

난 저번에 이데아 발굴지에서 다섯 개의 속성 마석을 찾았다. 하지만 불 속성 마석만 없었다.

불 속성 마석만 있으면 발굴지에 있던 거대 마법진을 발동시킬 수도 있었고, 화염의 탑에서 기간트에 새길 불 속성 마법진도 알아 올 수 있었다.

지금 내 인형의 집엔 드워프들이 만들어준 비숍급, 나이트급, 폰급 오리지널 기간트가 한 대씩 더 있었다.

암 드로운이 원래 입고 있었던 룩급 거신 갑옷도 있었고.

그곳에 화염 마법을 새길 수 있다면, 내 오리지널 기간트들은 더욱 강해지고, 전력은 더 세진다.

그리고 앞으로 1년 안에 이데아 황궁 발굴은 끝날 것이고, 대수림에서 전쟁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때를 대비해 가디언 제국의 전력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

"와! 집 크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앨리슨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저택 앞엔 집사와 시녀, 하인, 경비병들까지 십여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타일러 백작님."

"버틀러 집사, 가구 배치는 다 끝났는가?"

"네! 어제 이미 다 마쳤습니다."

"들어가지!"

앨리슨이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

그때 버틀러 집사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앨리슨 아기씨."

"아기씨?"

앨리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타일러 삼촌, 혹시 여기 우리 집이야?"

"그래."

"우와! 우와!"

앨리슨은 입을 떡 벌렸다.

"어서 들어가자!"

"와! 정원에 분수대도 있어!"

이 정원과 분수대는 외무대신이 만들어 준 것이다.

황제가 살짝 압박을 주긴 했지만, 자기도 목숨을 구했으니, 이 정도는 충분히 받을 자격이 있지.

"우와! 이게 다 우리 집이라고?"

삼촌이 목숨 걸고 벌어왔다.

"그래 이제 여기서 학교에 다니면 돼."

"우리 완전 부자야."

앨리슨은 신기한 듯 여기저기 눈을 돌리고 있었다.

"삼촌, 그럼 친구들 불러와도 돼?"

"당연하지. 여긴 내 집이기도 하지만, 앨리슨 집이기도 해."

"헤헤! 신난다."

짹에게 이야기는 들었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귀족 자제의 생일 파티에 다녀온 후에 시무룩해진 앨리슨의 이야기를.

부족한 거 없이 해주겠다고 했지만, 아무래도 귀족들만 다니는 학교여서 자격지심이 생길 수도 있었다.

앞으로도 함께 있어 주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저택을 구해서 다행이었다.

우린 저택을 구경하고, 식사도 했다.

요리사가 있었기에 음식도 매우 훌륭했다.

그리고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넓은 2층 베란다에서 차를 마셨다.

"삼촌, 하늘을 나는 비행선 이야기는 들었어?"

"응?"

"황궁 하늘에 비행선이 나타났데! 지금 학교에서 난리야."

훗! 나 비공정 있는데.

지금 당장 보여줄 순 없으니, 비밀로 해야겠다.

나중에 한 번 태워줘야지.

'내일이면 또다시 전쟁터구나······.'

오늘의 평화로움은 당분간 안녕이다.

난 가디언 제국의 수도로 간다.

외교관 신분이었기에 목숨의 위협은 없을 것이다.

사신을 죽일 만큼 가디언 제국이 무법자들은 아니니까.

하지만 치열한 눈치 싸움과 정치 싸움, 정보 싸움, 게다가 난 저들의 보유 전력까지 알아봐야 하니, 그곳이 진짜 전쟁터였다.

하지만 이건 기회였다.

내가 몰래 화염의 탑을 오를 기회.

'아! 내가 가디언 제국의 훈장을 어디에 뒀더라.'

가디언 제국이라면 엠페러 프라임 훈장보단 라이언 크로스 훈장이 나을 테니까.

백작보다 남작이다!

내가 목숨을 구해준 루이스 사황자가 수도에 있으면 좋을 텐데······.

90. 푸대접.

90. 푸대접.

[추밀원 본부]

추밀원은 추밀원장 밑으로 6개의 부서가 있었고, 이곳 수도에 4개의 본부가 몰려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가디언 제국과 아리칸 공국으로 갈 외교사절은 추밀원의 주요 인사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 말은 상당한 숫자의 정보원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말이었다.

마차가 추밀원 정문에 멈춰 섰다.

"타일러 중령님!"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누군가 날 불렀다.

'응? 로베르트 소령?'

로베르트 소령이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설마, 기술국 장교도 가는 건가?"

"네! 비공정에 대한 정보가 있는지 국장님께서 알아보라고 하시네요."

"그런데 그런 기밀을 내게 말해줘도 되나?"

"네?"

로베르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하! 괜찮네. 나도 아는 이야기니까. 하지만 앞으로 입조심 하는 게 좋아."

"네, 알겠습니다."

추밀원장이 급하긴 급했나 보다.

정보국 요원이 아니라, 기술국 장교까지 외교사절에 포함했으니까.

"헉! 별? 별, 별!"

로베르트 소령이 안경을 제대로 쓰더니 내 견장을 보고 기겁했다.

"황제 폐하를 구했는데, 승진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아! 겨, 경하드립니다."

피식 웃어줬다.

"황제 폐하를 구했다는 그 무용담은 저도 들었습니다. 미친 들소처럼 싸우셨다고요."

"미친 들소라고? 사람들 사이에 그게 내 별명인가?"

"그러니까 힘이 아주 좋다는 뜻으로······."

반갈죽이 아닌 게 어딘가.

"알았으니까. 그만 들어가지."

"네."

로베르트 소령은 그날 있었던 무용담을 직접 듣고 싶어 했다.

하지만 적당히 넘겼다.

이런 이야기는 온종일 해도 부족하니까.

"가디언 제국은 위험할지 모르는데? 자넨, 괜찮은 건가?"

"위험하다니요? 사신단의 안전은 원래 보장된 것이 아닙니까?"

"이런 대수림의 보르자 전진 기지 일을 모르는가 보군."

"······?"

난 보르자 기지에서 가디언 제국의 군인들이 사황자와 사신단을 모두 죽이려 했던 사건을 이야기해줬다.

"히익! 그, 그럼 사신들도 위험한 거 아닙니까?"

"뭐, 재수 없으면 다 죽는 거지."

로베르트 소령은 기겁했다.

전에도 느꼈지만, 진짜 겁이 많은 친구였다.

본부 건물 앞에 도착하자, 이미 사신단의 마차가 줄지어 서 있었다. 이 마차들은 에르가드 역까지 데려다주고, 나머진 열차로 이동한다.

그리고 내가 탈 마차에 반가운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타일러님!"

에테나가 환하게 웃으며 날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더 예뻐졌네.

"에테나, 여기까지 온다고 고생했어."

"아닙니다. 타일러님께서 가시는데 제가 당연히 가야죠."

"헉! 엘프다!"

로베르트 소령은 에테나를 보며 두 눈을 똥그랗게 떴다.

"와! 진짜 엘프가 있었군요."

그는 에테나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난 피식 웃어줬다.

그리고 에테나와는 처음부터 일부러 엘프어로 대화했다.

"곧 출발하겠군. 만나서 반가웠네. 로베르트 소령."

"저기, 저도 준장님 마차를 같이 타고 가면 안 됩니까?"

"응! 안되네."

"네······."

로베르트 소령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다른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가 출발하니, 우리도 들어가지."

"네!"

마차에 오르자, 에테나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입을 실룩거렸다.

"왜? 무슨 좋은 소식이 있어?"

"네! 시노우엘님이 난민 전진 기지로 오시겠답니다."

"뭐? 진짜?"

순간 나도 놀랐다.

내게 세계수의 씨앗이 있는 건 맞지만, 이 씨앗으로 세계수를 키울 수 있는 것은 하이엘프밖에 없었다.

그러니 씨앗만 가지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하이엘프 시노우엘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방금 시노우엘이 난민 기지로 온다는 것은 내 조건을 받아들인다는 뜻이었다.

"뭔가 다른 조건을 요구한 것도 없고?"

"네, 제가 이번에 엘프 차원으로 넘어가서 있었던 일을 그대로 말씀드렸어요. 특히 힘멜 일족 엘프들을 모두 구해서 난민 기지로 데려온 일을 들으셨을 땐 눈물까지 흘리셨답니다."

"눈물을?"

뭐지? 진심은 통하는 법인가?

물론 나도 엘프가 필요해서 데리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 그들의 능력을 이용하는 것도 맞고.

"그리고 샤이닝 일족 엘프들도 모두 난민 기지로 이동할 겁니다."

"오! 그건 아주 좋은 소식이네. 호르갈 족장이 집을 짓는다고 아주 바빠지겠어."

샤이닝 일족과 힘멜 일족을 모두 합하면 엘프만 거의 천 명에 이른다.

두 일족 다 활도 잘 쏘고, 바람의 정령도 잘 다루니 세계수만 성장한다면 내겐 엄청난 도움이 된다.

그리고 엘프들이 정령을 다루고 비공정에 탄다면, 속도와 이동 거리에서 누구도 우리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거신목과 세계수를 접합할 수 있다는 건가?"

전에 시노우엘에게 이 내용을 들었기에 내가 역으로 제안했다.

난민 기지의 거신목을 이용하라고.

"저도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시노우엘님께서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러니 난민 기지로 가겠다고 하셨겠죠."

"잘됐네."

세계수는 자체적으로 뛰어난 방어 능력이 있다고 했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전진 기지는 더 안전해질 것이다.

시노우엘은 정말 엘프를 위해서 사는 것 같았다.

마치 엘프들의 엄마처럼.

"참! 라디프 공작의 소식은 알아봤어?"

"제가 도착했을 땐 이미 두 달 전에 비공정과 함께 영지에서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 거대한 비공정이 정말 50대의 기간트를 다 태우고 하늘을 날았을까?"

"시노우엘님도 그건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밤중에 몰래 이륙했겠죠."

비공정의 이동 루트는 이미 대충 알 것 같았다.

강과 산맥을 따라 계속 남하하다가 살루스의 사막을 통과해 바다로 갔을 것이다.

그쪽 사막엔 오아시스도 없었기에 들킬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그 거대 비공정의 속도가 얼마나 되는지 그걸 확인하지 못한 게 한가지 아쉬웠다.

***

[가디언 제국의 수도 파트리아]

도심지에 도착한 열차가 속도를 줄였다.

"와! 정말 가디언 제국은 크네요."

긴 여정에 에테나도 조금은 지쳐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가디언 제국의 영토는 아베르크 제국보다 1.5배나 됐으니까.

그리고 아베르크 제국의 수도는 제국의 중심에 있지만, 가디언 제국의 수도는 장벽 가까운 북부에 있었기에, 가디언 제국의 국경에 도착한 후에도 서부에서 동부로 한참을 열차로 이동해야 했고, 다시 북부로 가는 열차에 타야 했다.

게다가 열차 속도가 조금 느렸기에 이동에만 거의 2달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창밖을 본 에테나가 말했다.

"거리에 사람들이 더 많은 거 같아요."

"맞아! 내가 듣기론 인구가 2배 가까이 된다고 하더군. 국민 소득은 4분의 1수준이지만."

그런데 특이하게 일등석 수준은 아베르크보다 더 좋아 보였다.

아무래도 여기도 특권 계급은 잘 사는 듯했다.

치이이익!

열차가 도착했고, 우리 사절단은 플랫폼에 내렸다.

그런데!

"허! 아무도 마중을 나오지 않은 건가?"

"보통 사신들의 기세를 죽이기 위해서라도 성대하게 환영하는데 말입니다."

사신단의 대표인 외무대신 란돌프 후작과 그의 부관은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플랫폼 주변을 병사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기에 사신단은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다.

"어떻게 하지요?"

"기다리지. 지금 아쉬운 건 우리니까."

란돌프 후작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타일러 경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 마시오."

"네, 항상 근처에 있겠습니다."

그는 이번에 황궁에서 내 무위를 봤기에 내가 항상 곁에 있길 바랐다.

어차피 기간트가 오면 다 죽겠지만.

사람 중에선 날 당해낼 자가 많지 않을 테니까.

한 시간이 흘렀다.

슬슬 약이 오르고 화가 치밀기 시작하자, 가디언 기사들이 우리를 마중 나왔다.

마차 바퀴가 갑자기 고장 나 늦었단다.

그것도 십여 대나 되는 마차가.

"저들도 사신단에 첩자가 많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는 거 아닐까요?"

에테나가 물었다.

"그렇겠지. 갑자기 회담을 제안했으니, 충분히 의심하고 있을 거야."

우린 마차를 타고 삼엄한 감시 속에 숙소로 이동했다.

"젠장! 푸대접도 이런 푸대접이 없군요."

"이건 정말 너무합니다."

그런데 사신들이 묵는 숙소가 너무 허름했다.

황궁 내 사신관이 따로 있음에도 외부에 숙소를 마련했다.

이곳을 잡아준 이유는 회담 장소가 걸어서 20분 정도로 가깝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회담 장소도 황궁 외부에 있다는 소리였고, 회담장으로 이동할 때도 마차가 아니라 걸어서 오란 뜻이었다.

"열 내지 마라! 그럼 이미 협상에서 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하아! 알겠습니다."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나만 알고 있었다. 지금 아베르크 황실과 여기 온 사신단은 가디언 제국에도 비공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하고 있었기에 꾹 참고 있었다.

우린 각자 방을 배정하고, 그날은 일찍 쉬었다.

***

[회담장]

역시나 황성은 보안 때문에 내부로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다.

그래서 숙소에서 가까운 기사단 건물 옆에 천막을 치고 회담장을 따로 마련했다.

우린 일찌감치 회담장에 들어왔지만, 상대 쪽은 30분이 지나도록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 흰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가 들어왔다.

"응? 다들 왜 이렇게 일찍 나오셨소?"

"일찍이요? 회담은 9시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뭐요? 난 9시 30분이라고 들었는데? 허허! 이거 아무래도 실무자가 시간을 착각한 것 같소."

"험! 그럴 수도 있지요."

다들 속은 뒤집히지만 지금 아쉬운 건 우리 쪽이었다.

"외무대신 란돌프 후작입니다."

"안드레아스 원수요."

"네?"

란돌프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쪽 협상단 대표가 가디언 제국의 명장인 안드레아스였다.

그는 20여 년 전 가디언 제국을 침공한 제국군 기간트를 물리친 일화로 더 유명해진 지휘관이었다.

'허! 나이가 일흔이 다 됐을 텐데, 아직도 실무라니!'

그건 세대교체에 실패했다는 말이기도 했다.

겉으론 50대 후반으로 보였지만, 안드레아스는 이미 세 번의 큰 전쟁에 참여한 노장이었다.

게다가 안드레아스는 전장에서 빛을 발하는 지휘관이지 협상을 하는 외교관은 아니었다.

'그가 왜 이곳에 있는 거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때 안드레아스 원수 왼쪽에 낯익은 인물이 보였다.

난 고개를 살짝 숙였다.

하지만 루이스 사황자는 바로 시선을 돌렸다.

피식 웃었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날 모르는 척하기로 했나 보다.

회담이 시작되자, 난 화장실을 간다며 슬그머니 건물 밖으로 나갔다.

정치인들 입씨름은 이제 신물이 났다.

그리고 내가 온 목적은 이것이 아니기도 했고.

"어딜 가십니까?"

키가 큰 기사가 내 앞을 막아섰다.

"그냥 주변 구경을 좀 하고 싶은데 안 되겠소?"

"죄송합니다. 아베르크 사절단은 이곳 회담장과 숙소 이외는 이동하지 못합니다."

"그럼 가디언 제국의 남작은 어떻소?"

"네?"

난 가슴에 가디언 제국의 라이언 크로스 훈장을 달았다.

그러자 훈장을 알아본 기사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상부에 물어보고 오겠습니다."

"푸하하하!"

그때 한 사내가 웃으며 다가왔다.

"타일러 빈스 남작님입니까?"

"그렇소. 댁은 누구시오?"

"패로우 대령입니다. 루이스 사황자 저하께서 타일러 남작님이 건물 밖으로 나가려 한다면, 제게 호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아! 루이스 저하의 배려가 깊군요."

혼자 다니긴 다 틀렸네.

그리도 날 막으란 소리를 하지 않은 걸 보면, 루이스 황자가 날 꽤 배려해준 것이다.

"어딜 가보고 싶으십니까? 어디든 원하시는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가디언 제국의 가장 큰 마장기 공방이 수도에 있다고 하던데, 그곳도 가능하오?"

"네?"

패로우 대령의 시선이 흔들렸다.

91. 초심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91. 초심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마장기 공방은 좀 심했나? 그럼 황궁 구경은 가능하겠소?"

"네? 황궁이요?"

패로우 대령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번화가로 갑시다."

"휴! 알겠습니다."

패로우 대령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말이 호위지 24시간 밀착 감시나 다름없었다.

이래선 조사고 뭐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가이드가 생긴 덕분에 편하게 가디언 제국 수도의 이곳저곳을 돌아볼 순 있었다.

밤이 되자, 번화가 뒷골목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술집을 찾아 들어갔다.

'여기가 맛집이네!'

음식도 맛있고, 무엇보다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술맛을 당기게 하는 집이었다.

게다가 여주인이 꽤 미인이라, 손님이 많은 것도 있었다.

사내놈들이란······.

"패로우 대령, 기간트, 아니 마장기에 타시오?"

"그렇습니다."

"룩급? 아니면 오리지널?"

패로우 대령이 또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둘 다 맞습니다."

룩급 오리지널 마장기에 탄다는 말이었다.

그는 생각보다 뛰어난 기사였다.

"어쩌다 내 감시를 맡게 됐소?"

"아주 중요한 분이시니까요."

"내가 말이오?"

"남작께선 시안 황자 저하를 구하신 분이 아닙니까."

패로우 대령의 공손한 자세에서 그가 루이스 사황자의 최측근이라는 것을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 손님이 왔다.

"자넨 참 팔자가 좋군."

누군지 알아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인사를 하려는데······.

"됐네. 여기, 좋은 분위기 망치지 말게."

"알겠습니다."

루이스 사황자가 내 앞자리에 앉자, 패로우 대령이 그 뒤에 섰다.

"너무 눈에 띄는 거 아닙니까?"

내 말에 루이스 사황자가 패로우 대령을 쳐다봤다.

"괜찮으니까 옆에 앉게."

"하지만 제가 어찌 감히······."

"아니면 밖으로 나가게."

"그럼 옆에 앉겠습니다."

패로우 대령이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난 고개를 내밀고 작게 말했다.

"루이스 황자 저하를 뵙습니다."

"예를 차리기는······."

루이스 황자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베르크 제국의 군복을 입고 파트리아 시내를 활보하다니, 간이 큰 건가? 아니면 일찍 죽고 싶은 건가?"

"여기 패로우 경이 있지 않습니까. 날 보호해 주겠죠. 그리고 저기 길 건너 사복 입은 기사들도 있고."

"험! 자네 눈은 못 속이겠군."

루이스 황자는 헛기침했다.

"한잔하시죠."

루이스 황자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조금만 마시겠네. 또 쓰러지면 안 되니까."

우린 가볍게 한 잔씩 하고, 안주를 먹었다.

루이스 황자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상당히 맛있군."

"손님이 많은 가게는 실패할 확률이 낮지요."

이렇게 루이스 황자와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자, 대수림 전진 기지에서 일들이 떠올랐다.

"언제 제게 음식을 만들어 주실 겁니까?"

"하하!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나?"

"그럼요. 저하께서는 요리에 소질이 있으십니다."

루이스 황자도 그때 기억이 났는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루이스 황자가 날 노려봤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왜 이곳에 왔나?"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사실대로 말해주기로 했다.

"가디언 제국군 전력을 확인하러 왔습니다."

"뭐?"

루이스 사황자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걸 내게 말해줘도 되는 건가?"

"안될 건 뭡니까. 이미 다 알고 계실 텐데요."

루이스 황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그 전력이라는 게 비공정을 말하는 건가?"

"네?"

"아베르크 황궁을 공격했다는 아리칸 공국의 그 비공정 말이네."

"벌써 여기까지 정보가 넘어온 겁니까?"

"우리 정보력을 너무 우습게 보는군."

"다 알고 계시니 더 숨길 것도 없죠. 우리 황궁을 공격한 아리칸 공국의 비행선이 이곳 가디언 제국에도 있는지 확인하고자 왔습니다."

루이스 황자가 피식 웃었다.

"자네가 솔직히 말해줬으니, 나도 솔직히 말해주지. 우리 가디언 제국엔 비공정이 없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응?"

"가디언 제국에 비행선이 있었다면 진작 전선에 투입했겠죠. 그리고 아리칸 공국처럼 황궁을 공격했을 겁니다. 황제가 죽으면 아베르크 제국이 큰 혼란에 빠졌을 테니까요."

"하긴 그 말도 맞겠군."

루이스 황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게 자네와 이야기하다 보면, 말리는 기분이 든단 말이야."

"기분 탓입니다."

그건 정보에서 앞서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자네가 케인 황제를 구했다고 하던데?"

"힘 좀 썼죠."

"자네 실력이야 나도 직접 봤으니, 알고 있네. 그런데 기간트는 어찌 막았나? 마르틴 대공의 우가스는 적수가 없다고 하던데?"

"제국에도 퀸급 기간트는 있습니다. 대륙 유일의 킹급 기간트도 있고요."

"하지만 타는 사람이 문제가 아닌가. 아베르크 제국은 실력보단 가문이나 계급이 먼저라고 들었네. 그랬기에 실력이 부족한 자들이 오리지널 기간트에 타는 경우도 많고."

대놓고 아베르크 제국을 디스하네.

그런데 뭐라 반발은 못 하겠다.

로제 중령만 해도, 상관보다 마나량이 2배 이상 많았는데, 나이트급 오리지널 기간트에 타고, 파이컬 대령은 비숍급 오리지널 기간트에 탔으니까.

그리고 천재 중의 천재라 불리는 발데스 근위 기사단장 역시 나이가 들어 전성기가 지났는지, 킹급 기간트의 움직임이 매끄럽진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두 사람의 대결이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발데스 기사단장이 마르틴 대공을 이기긴 힘들어 보였다.

'그럼, 아베르크 제국도 세대교체에 실패한 건가?'

"말하다 말고 무슨 생각을 그리하나?"

"아닙니다."

"술도 적당히 마셨으니, 좀 걷는 게 어떻겠나?"

"그러시죠."

난 루이스 사황자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우린 황궁 쪽으로 걸었다.

"가디언 제국은 변할 거네."

루이스 사황자가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변화가 모두에게 좋은 변화였으면 좋겠군요."

루이스 황자가 피식 웃었다.

"모두에게 좋은 변화란 있을 수 없네. 희생은 필요한 법이지."

"결심을 굳히셨군요."

"어쩌겠나, 이미 우리 제국 내부는 너무 썩어 있어. 도려내지 않으면, 곪아서 터질 거네."

루이스 사황자가 변했다.

그 변화의 시작은 이미 오래전일 것이고, 방아쇠를 당긴 것은 저번에 자신을 암살하려던 사건일 것이다.

지금 황궁 내부는 알브레 가문이 장악하고 있었고, 병약한 황자와 꼭두각시 황태자까지 그들 손에 있었다.

하지만 대세는 이미 루이스 사황자에게 기울었다.

오늘 회담장에서 안드레아스 원수가 함께 나온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사신단을 일부러 보호하신 겁니까?"

"응?"

"황궁에 사신단이 들어가면 저들의 손에 떨어졌을 겁니다. 당장 전쟁이 일어나야 내부의 문제를 외부로 돌리기 쉬울 테니까요."

"역시 자넨 눈치가 빨라. 군부엔 날 따르는 자들이 많네. 하지만 황궁은 아직이지."

"그래서 언제 시작하실 겁니다."

"모든 준비는 진작 끝냈네. 다만······."

루이스 사황자는 걸음을 멈추고 눈을 질끈 감았다.

"결심이 섰으면 망설이지 마십시오. 그럴수록 더 많은 사람이 죽을 겁니다."

"하아! 그렇겠지."

병약한 황제와 황태자를 걱정하는 것이었다.

그가 병력을 이끌고 황궁을 공격하게 되면, 황태자를 죽여야 한다. 그것도 황제를 죽이려 한 반역죄로 몰아야 했다.

아니면 자신이 반란을 벌인 것이니까.

루이스 황자가 나를 쳐다봤다.

"어떤가? 이참에 우리 쪽으로 전향하는 것이?"

"네? 지금 아베르크 제국의 백작을 스카우트하시려는 겁니까?"

"솔직히 백작이 무슨 소용인가? 난 자네가 원한다면 후작이든 공작이든 얼마든지 줄 수도 있네."

"절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거 아닙니까?"

"자네의 숨은 능력도 탐나지만, 난 자네의 머리를 더 높이 평가하네."

난 루이스 황자를 향해 미소를 지어줬다.

"죄송하지만 지금은 벌인 일이 너무 많군요. 그 마음은 잘 간직하겠습니다."

루이스 황자가 피식 웃었다.

"뭐, 그럴 줄은 예상했네."

루이스 황자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이 반지는 뭡니까?"

"가디언 제국의 백작을 상징하는 반지네. 자네도 이미 케인 황제에게 받았지 않나?"

"그건 압니다만 이걸 왜 제게 주시는지······?"

"친구에게 주는 선물일세. 또 아는가? 언젠가 이 반지가 유용하게 쓰일지?"

잠시 망설이다가 반지를 받아 챙겼다.

사실 반지가 무슨 상관이겠나?

내 마음이 중요하지.

'뭐, 이 반지를 내가 쓸 일이 있겠어?'

우린 사신단이 묵는 숙소 앞까지 이야기하며 걸어왔다.

"내일 회담장엔 내가 없을 거네. 그러니 여기서 인사하지."

"하시는 일이 잘되길 빌겠습니다."

"이렇게 편하게 마주 보는 것도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일지 모르겠군."

"그거야 폐하께서 하시기 나름 아니겠습니까."

"응?"

난 루이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그래 다음에 보지. 타일러 경."

루이스가 황성을 향해 움직였다.

그리고 어둠 속에 있던 기사들이 하나둘 나와 루이스 황자의 뒤를 따랐다.

'가디언 제국은 좋은 황제를 맞이할까?'

제발 루이스가 초심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제 나도 서둘러야 했다.

곧바로 숙소로 들어가 에테나를 찾았다.

"지금 출발 준비해."

"네? 네!"

난 에테나와 지붕을 통해 사신단이 묵고 있는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수도 외곽으로 달렸다.

"나와라! 괴조인형!"

끼이이아!

60여 미터나 되는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고 괴조 마법인형이 땅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서둘러!"

펄럭! 펄럭!

날갯짓 몇 번에 괴조인형이 하늘을 날기 시작했다.

우린 괴조인형을 타고 북쪽 장벽으로 향했다.

"무슨 급한 일이 있으십니까?"

"오늘밖에 시간이 없어!"

내일은 황제가 바뀔 거고, 사신단은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니 메제트의 탑에 들를 시간은 오늘밖에 없었다.

아니면 나중에 따로 시간을 만들어야 했다.

에테나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에테나, 혹시 가디언 전진 기지 쪽에 다른 엘프족이 있어?"

에테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말라키 일족이 그쪽에 있습니다."

"어떤 엘프들이야?"

"정령을 다루기도 하지만 그보다 다른 세계의 힘에 심취한 자들입니다. 피부도 창백하고, 다른 엘프들과는 교류가 거의 없죠. 그래도 전에 세계수 씨앗을 구하러 가는 원정대엔 참여했습니다."

다크 엘프인가?

"그런데 왜 그러시죠?"

"가디언 제국이 이미 비공정과 비행석에 대해 알고 있어."

"네?"

비공정이란 말은 엘프들만 쓰는 말이었다.

나도 엘프들과 대화나 혼잣말을 할 때나 비공정이란 말을 쓰지만, 그 외에 다른 사람하고 대화에서는 제국어인 비행선이란 말을 쓴다.

그런데 루이스 사황자는 아까 대화에서 계속 비공정이란 단어를 쓰고 있었다.

그것은 루이스가 엘프와 접촉한 상태란 말이고, 그들도 비행석과 비공정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단 말이었다.

하지만 엘프 차원이 괴수에게 멸망했으니, 감히 비행석을 찾으러 갈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비공정이 없다는 루이스 황자의 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제 아리칸 공국의 비공정이 세상에 드러났으니, 그들은 엘프 차원이 그리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고, 비행석을 캐기 위해 병력을 보낼 것이다.

아니! 이미 사냥팀을 보냈을 수도 있었다.

'우리만 아는 비밀이 아니었어!'

다른 왕국도 엘프 난민이 있었다.

엘프는 이미 오래전에 분열되어 자기들끼리 뭉친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들도 살기 위해서라면 샤이닝 족처럼 인간과 협력할 것이고, 비공정의 정보를 말할 것이다.

인간이 엘프어를 못 하는 거지, 엘프는 얼마든지 제국어나 다른 왕국의 언어를 배울 수 있었다.

'결국, 내 예상대로 대비행 시대는 이미 시작됐군.'

이제 각국의 엘프 차원 러쉬는 막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아베르크 제국만 뒤처질 순 없었다.

그들에게도 정보를 제공하고, 엘프 차원으로 기간트를 보내 비행석을 채취해야 했다.

'엘프 차원이 제2의 전장이 되겠어······.'

"저기 장벽이 보여요!"

헬다임과 똑같은 거대한 장벽.

가디언 제국이 부르는 이름은 에인션트 월.

"내려가!"

장벽 가까이 갔다간 거신 마법에 공격받을 수 있기에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내렸다.

그리고 에테나의 반향정위 능력을 이용해 은밀히 관문 가까이 접근했다.

'저기다!'

불의 탑 입구는 대지의 탑과 같았다.

거신의 키 높이에 출입 마법진이 보였다.

오늘 이 메제트의 탑을 오르고, 동이 트기 전에 아베르크 제국으로 출발할 생각이었다.

92. 불의 탑.

92. 불의 탑.

"와! 장벽 위에 이런 거대한 공간이 있다고는 누구도 생각 못 했을 겁니다."

메제트의 탑에 처음 올라온 에테나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도 처음엔 그랬지.

마치 내가 걸리버 여행기의 소인국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마치 신들의 세상 같네요."

"어? 나도 이건 놀랍네."

이곳도 대지의 탑과 비슷한 줄 알았다.

그런데 화염의 탑은 완전히 딴 세상이었다.

중앙에 작은 정원이 있었던 자리엔 지금도 조각 분수에서 연신 물을 뿜어내고 있었고, 기둥과 벽엔 아름다운 조각들이 새겨져 있었으며, 높은 천장엔 화려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대수림을 향해 나 있는 커다란 투명 벽이었다.

높이가 10여 미터에 넓이가 20미터나 되었기에 거신의 마법 기술이나 그들의 문명이 얼마나 발전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여기서 보는 대수림은 정말 아름답네요."

하늘엔 수천, 수만 개의 별이 반짝이고, 보름달 아래 대수림은 그야말로 고요한 녹음의 바다처럼 보였다.

지금 저 밑에 수많은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곤 믿기지 않았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장벽 바로 앞에 작은 섬이 있었고, 그 앞으로 커다란 호수가 두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호수 위에 기다란 다리가 놓여 있었다.

'여긴 헬다임 관문 앞처럼 성을 쌓을 필요가 없었네.'

아예 호수가 관문 앞에 있었기에 괴수들이 넘어오기 위해선 저 다리를 지나야 했는데, 다리는 도개교처럼 올렸다 내렸다 조종할 수도 있어 보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곳엔 가구도 그대로 있었고, 책장엔 내 키만 한 책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여긴 아직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았군.'

대지의 탑은 빌헬름 뢰트켄에게 발견돼서 그랬는지, 책도 없고, 좋은 물건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여긴 거신이 사용했던 생활 집기류도 그대로 남아 있었고, 장식장에도 물건이 많았다.

그때 드는 한 가지 의문.

장벽의 모든 관문은 빌헬름 뢰트켄의 기술로 만들었다고 들었는데, 왜 이곳은 멀쩡한 거지?

미처 물건을 챙길 시간이 없었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이럴 시간이 없었다.

"에테나, 뭔가 특별한 물건이나 가루가 들어 있는 항아리 같은 걸 찾아봐 줘!"

"네!"

난 인형의 집에서 암 드로운과 자동인형들을 모두 꺼냈다.

"모두 흩어져서 수색해! 이상한 게 있으면 바로 말하고!"

"네! 주군."

다들 수색을 시작했고, 난 속성 마석을 만드는 마법진이 있는 방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방은 근처에 있었다.

"어? 여긴 마법진이 다르네."

대지 속성 마석을 만드는 마법진처럼 다섯 개 재료를 모아 그 기운을 마석에 담는 방식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담는 거대한 삼각뿔이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고, 그 아래 커다란 마법진 제단과 마석을 담는 커다란 그릇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아고르 화산섬의 마그마]

마그마라고?

삼각뿔 가운데에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이 통에 마그마를 넣으라는 거야?

그 뜨거운 것을 어떻게 옮기라고?

그때 천장에 마법진이 보였다.

혹시, 마법진으로 마그마를 옮기는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재료가 하나뿐이라 좋긴 한데, 저걸 작동시키는 방법을 모르겠다.

아마도 저 화산섬에 가야 할 것 같은데······.

문제는 화산섬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화염 마석을 얻기는 쉽지 않네.'

최고급 마석은 전에 엘프 차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괴조와 괴수 사냥을 해서 몇 개 모았다.

하지만 지금 마그마를 구하기 힘들었기에 당장 화염 속성 마석을 만들 순 없었다.

일단 천장의 저 마법진을 그려야겠다.

거신들도 아마 마법진을 이용해 마그마를 옮겼을 테니까, 나중에라도 그 화산섬을 찾으면 비슷하거나 같은 모양의 마법진이 그려 있을 것이다.

그때 다시 연구해봐야겠다.

'주군! 이쪽으로 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암 드로운의 목소리가 들렸다.

뭔가를 찾은 것 같았다.

난 서둘러 암 드로운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거대한 장식장 안에 세워진 갑옷을 보았다.

[최고의 화염 기사를 기리며!]

[이데아 제국의 열두 기사 – 카디스 렌블럼 후작]

"오오! 좋았어!"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퀸급 거신 갑옷이라니!'

13미터 크기의 퀸급 갑옷이 투명 장식장 안에 세워져 있었다.

이건 엄청난 발견이었다.

에테나가 내 목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어? 이거 거신 갑옷이네요! 설마, 퀸급?"

"그래, 아주 운이 좋았어."

"와!"

에테나가 입을 벌렸다.

저 갑옷을 이제 퀸급 기간트로 만들면 큰 전력이 된다.

아! 아직 탈 사람이 없구나!

가장 실력이 좋은 웨슬리도 지금은 룩급 오리지날 기간트에 탈 수준이었지, 퀸급은 또 다른 경지였다.

"암 드로운, 저 갑옷을 입을 순 없겠지?"

암 드로운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주군, 저 정도 크기의 갑옷이면 힘들 것 같습니다."

하긴 저 갑옷은 암 드로운보다 2미터나 더 큰 거신 기사가 입었을 것이기에 움직이기 불편할 것이다.

그나마 웨슬리의 마나량이 가장 많았고, 싱크로율이 높았기에 퀸급 기간트에 탈 수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웨슬리 자동인형이 더 성장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아니면 내가 성장해서 탈 수도 있지 않을까?

"저도 어서 오리지널 기간트에 타고 싶네요."

옆에서 에테나가 입맛을 다셨다.

"벌써 오리지널 기간트에 타려고? 욕심이 큰 거 아냐? 마나를 느낀 지 1년도 안 됐는데······?"

"빨리 성장해서 타일러님을 도와드리려고 그러는 거죠."

"그런 거면 좀 느긋해도 돼. 지금도 엄청나게 빠른 거니까."

사실 에테나의 성장은 그냥 빠른 수준이 아니라 폭풍 성장을 하고 있었다.

엘프란 종족이 원래 마나 친화도가 높아서 그런지? 아니면 에테나가 특별해서인지 몰라도 그녀의 기간트 싱크로율은 매우 높았고,

거신의 마나 팔찌까지 차고 있었기에 하루가 다르게 마나가 쌓이고 있었다.

이 추세라면 머지않아 나이트급 기간트도 충분히 탈 수 있어 보였다.

"암 드로운, 저 갑옷을 좀 꺼내 봐! 무슨 마법이 새겨져 있는지 보게."

"네! 주군."

퀸급 갑옷을 바닥에 내려놓고, 안으로 들어가 눈에 마나를 뿜어냈다.

[파이어 ······]

[파이어 버스트]

[플레임 블라스터]

'좋았어!'

당장 쓸 수 있는 화염 마법진이 3개나 있었다.

특이한 것은 마법진이 새겨진 위치였다.

가슴에 하나가 있었고, 양쪽 허벅지에 반쪽짜리 마법진이 1개씩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마법 발동을 위한 나머진 반쪽 마법진은 양 손바닥에 1개씩 있었다.

그런데 가슴에 새겨 있는 마법진의 반쪽은 팔과 손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시동어도 파이어밖에 보이지 않았고.

아무리 찾아도 없길래 밖으로 나왔다.

"이상한데? 왜 나머지 반쪽 마법진이 왜 없지?"

"주군, 여기에 있습니다."

"응?"

암 드로운이 장식장에서 대검을 꺼냈다.

"정말이네."

마나를 보는 눈으로 검 손잡이에 반쪽 마법진이 새겨진 것을 확인했다.

마법진 시동어는 파이어 스워드.

검에 불꽃을 입힌다는 건가?

"그럼 거신은 검에도 마나를 전달할 수 있었다는 건가?"

난 암 드로운을 쳐다봤다.

"할 수 있겠어?"

"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

암 드로운이 정신을 집중하더니, 마나를 팔과 손을 향해 뿜어냈다.

그리고 내 눈엔 보였다.

검 손잡이로 뻗어진 마나가.

'거신은 이게 되는구나!'

반면에 인간은 불가능해 보였다.

나도 오리지널 마장기에 타지만, 인간은 크기도 작고 형편없는 마나량 때문에 기간트나 마장기를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랬기에 마석 배터리의 마나를 외부에서 끌어와 거대한 기간트를 조종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간트 기체가 아닌 손에 들린 무기까지 마나를 전달하려면 몇 배나 많은 마나를 쏟아부어야 할 것이다.

어쩌다 성공한다고 해도 마나를 너무 많이 소모해 기간트를 얼마 조종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래도 무기에 마법진을 새겨 쓸 수 있는 것은 암 드로운이 유일할 것 같았다.

"일단 다 챙기자!"

퀸급 갑옷과 대검을 챙겼다.

"주군, 이 큰 책은 어떻게 합니까?"

"기간트 꺼내! 모두 한곳에 모아!"

내 인형의 집 공간은 아직 많이 남았기에 일단 이곳에 있는 물건은 다 챙기기로 했다.

그리고 벽에 새겨진 화염 마법진도 에테나에게 부탁해 똑같이 그리게 했다.

물론 마법서로 보이는 거신의 책도 많았기에 마법진이 그려져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일일이 살펴보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일이었다.

거신의 언어를 완벽히 구사하는 나도 거신의 마법 원리까진 알지 못했다.

화염 속성 마석은 구하지 못했지만, 필요한 재료도 알아냈고, 퀸급 거신 갑옷도 얻었다.

이만하면 운수 대통한 날이었다.

그때 자할리 자동인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군, 이곳에 벽화가 있습니다.'

'벽화? 알았다. 그리 가지.'

전에 헬다임에 있는 대지의 탑에서 대수림 장벽이 6개 메제트의 탑을 이어서 만든 것임을 알아냈다.

이번에도 뭔가 거신들이 중요한 것을 후대를 위해 남겨 놓았을 것 같았다.

"뭐지? 유성? 아니 혜성인가?"

강렬한 빛을 뿜어내는 혜성이 긴 꼬리를 달고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엔 엄청난 충격과 함께 지상에 떨어진 그림이 보였다.

수많은 거신이 죽었고, 살아남은 거신들은 놀라서 도망쳤다.

거신들이 다시 그곳에 갔을 땐 거대한 분지와 괴수가 한 마리 있었다.

'설마, 그 혜성이 괴수였나?'

이 괴수가 얼마나 컸는지 주변에 있는 거신들을 개미처럼 작게 그려 놓았다.

어째 생김새가 지구를 멸망시킨 카르마탄과 흡사했다.

거신들은 이 초거수와 싸웠다.

그리고.

'뭐야? 이겼어!'

수많은 거신들의 시체와 그 위에 죽은 초거수.

그리고 주변에 살아남은 소수의 거신들이 환호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다음 그림에 죽은 초거수의 몸에서 초록색 포자가 나와 주변에 있던 거신들과 숲, 생명체들을 변이시키고 있었다.

아마도 이것이 대수림의 탄생 같았다.

게다가 죽은 초거수의 몸에서 작은 괴수가 하나 태어났다.

작다곤 했지만, 거신보다 수십 배는 큰 거수였다.

그리고 마지막에 거신들이 대수림의 확장과 괴수를 막기 위해 거대 장벽을 쌓는 그림이 있었다.

많은 것을 느끼게 하는 그림이었다.

거신들은 초거수를 죽여 이 세상을 구했지만, 이 세계가 변이되는 것을 막진 못했다.

"다 챙긴 것 같아요. 그만 가죠."

에테나가 다가왔다.

"그래. 가자."

밖으로 나와 곧장 아베르크로 돌아가려다가 아직 해가 뜨지 않았기에 가디언 제국의 수도인 파트리아로 방향을 틀었다.

***

[수도 파트리아 황궁]

곳곳에 화염이 치솟고, 검은 연기가 뿜어지고 있었다.

바닥에 시체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부서진 마장기가 제법 많이 보였다.

아무래도 치열한 공방이 오간 것 같았다.

'성공했겠지?'

살짝 걱정되어 하늘을 몇 번 선회했다.

루이스 황자가 성공했다면 당분간 가디언 제국은 정치 상황을 수습한다고 정신없을 것이다.

반대로 실패했다면, 아베르크 제국은 그들을 더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병약한 황제와 꼭두각시 황태자.

그리고 그들을 뒤에서 조종하는 알베르 가문이 득세할 테니까.

"와아아아!"

"루이스 황자 전하 만세!"

"루이스 전하 만세!"

황궁 곳곳에 함성이 울려 퍼졌다.

이제야 편하게 방향을 틀 수 있었다.

아직 황제는 아니지만, 현 황제는 병약했고, 더는 루이스의 경쟁자가 없었다.

'다음에 만나면 루이스 황제 폐하가 되어 있겠군.'

난 그 길로 괴조인형의 머리를 아베르크 제국이 있는 서쪽으로 돌렸다.

***

[헬다임 북부군 사령부]

"충! 타일러 빈스 준장입니다."

윌리엄 사령관은 날 보자마자 입을 떡 벌렸다.

"자넨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건가? 볼 때마다 계급이 달라지더니 이젠 장군이라고······?"

"이번에 수도에서 황제 폐하를 구하는 데 공을 세웠습니다."

"그건 나도 들었네. 미친 들소처럼 싸웠다며?"

어째 미친 들소란 별명으로 이미지가 굳어진 것 같았다.

"전 그냥 달려드는 암살자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을 뿐입니다."

윌리엄 사령관이 입술을 내밀더니 엠버 대령을 쳐다봤다.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기겠나?"

"네?"

나보다 엠버 대령이 더 당황한 것 같았다.

"그런데 자넨 지금 가디언 제국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외교사절로 간다고 들었는데?"

"급한 일 때문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사령관님께 드릴 고급 정보가 있습니다."

"고급 정보?"

93. 드워프제 비공정.

93. 드워프제 비공정.

윌리엄 사령관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고급 정보라, 그거 찰스 국장이 자주 하던 말인데? 그걸 알기 위해선 내가 대가를 줘야 하는 거겠지?"

"그냥 작은 성의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대신 사령관께서 얻는 것이 훨씬 많을 겁니다. 시안 황자 저하에게도 좋을 거고요."

"내게 이득이란 말이지······."

윌리엄 사령관이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먼저 내가 줘야 할 것부터 말해보게. 불가능하다면 고급 정보를 아예 듣지 않으면 되니까."

난 미소를 지었다.

"난민 전진 기지를 제게 주십시오."

"응? 지금 그곳의 관리는 자네가 하고 있을 텐데?"

"그러니까 제게 완전히 주십시오. 제 영지로 삼고 싶습니다"

"뭐? 영지?"

윌리엄 사령관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거긴 대수림이야. 거길 누가 영지로 삼아? 그리고 지금까지 그런 선례는 없었네."

"그럼 이번에 최초의 선례가 되겠네요. 어차피 대수림은 제국에서 직접 관리하는 땅도 아니지 않습니까."

윌리엄 사령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기가 내 관할이긴 한데, 영지로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

"그럼 황제 폐하를 만나서 허락을 받아 오시면 되겠네요."

"뭐? 나더러 수도에 가란 말인가?"

"네, 제 정보를 들으면 어차피 가셔야 할 겁니다."

"황제 폐하를 알현해야 할 정도로 고급 정보란 말이지?"

윌리엄 사령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건 내가 허락을 받아보지."

"그리고 하나 더 있습니다."

"또?"

"두 번째는 쉽습니다. 난민 기지에 있는 이계 난민들을 모두 발레리온 영지민으로 등록할 생각입니다. 그러니 장벽 관문을 자유롭게 통과하게 해주십시오."

"뭐, 그거라면 내가 해줄 수 있겠군. 그곳에 이계 난민 숫자가 얼마나 되나?"

"한 3천 명 정도 됩니다."

"뭐라고? 3천?"

윌리엄 사령관의 눈이 똥그래졌다.

"이계 난민이 그렇게 많아?"

"최근에 숫자가 좀 늘었습니다. 지금도 계속 늘고 있고요."

"허! 너무 많은데······."

사령관이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게 해주지. 대신 고급 정보가 아니면 모두 취소네."

난 윌리엄 사령관을 향해 웃어줬다.

"우리 황궁을 공격했던 비행선에 대한 정보입니다."

"뭐라?"

내 이야기를 들은 윌리엄 사령관은 큰 충격에 빠졌다.

"비공정이라······, 그러니까 그런 게 이제 더 많아질 거란 말이군."

"그렇습니다. 이미 가디언 제국은 비공정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비행석을 확보하기 위해 엘프 차원으로 대규모 병력을 보냈을 겁니다. 그리고 또 다른 엘프 일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탈로스 왕국이나 드로리안 왕국도 우리 황궁을 공격한 비공정에 대한 정보를 들었을 테니, 사냥팀을 꾸리고 있을 겁니다."

윌리엄 사령관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골치 아프군. 이제 전쟁에서 하늘까지 염두에 둬야 한단 말인가······."

"아니요. 그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이제 비공정이 없으면 어떤 전쟁에서도 이길 수 없습니다."

"하아! 그래서, 자네 생각은 어떤가? 내게 이런 정보를 준 이유가 있겠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비행석을 채취하러 가는 대규모 원정팀을 꾸리는 겁니다. 다행히 저희 쪽 엘프도 차원 균열과 비행석 광산이 있는 장소를 알고 있습니다."

"원정팀이라······, 자네가 예상하는 병력 규모는 얼마나 되지?"

"기간트는 최소 200기 이상, 병력은 3천 이상, 그리고 식량과 물자는 적어도 1년은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윌리엄 사령관이 입을 떡 벌렸다.

"준비하는 데만 엄청난 금화가 들겠군. 준비할 시간도 꽤 필요할 거고."

"그래도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번에 황궁 습격 사건에서도 보다시피, 아리칸 공국의 비공정을 우리가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곧 가디언 제국과 다른 왕국도 비공정을 확보할 텐데, 우리 기간트가 아무리 많아도 저들의 기동력을 이길 순 없습니다."

"그렇겠지."

"그래도 기간트 200기면 좀 과하지 않나?"

"절대 아닙니다. 전 오히려 부족한 감이 있습니다. 저희의 적은 대수림의 괴수만이 아닙니다. 어차피 엘프 차원의 비행석 광산에 가디언 제국과 다른 세력도 전부 모일 겁니다. 우리 병력이 적다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입니다."

"하긴, 거기가 전장이 될 수도 있겠군."

"그리고 이 원정팀은 금화가 얼마가 들던, 반드시 북부군이 주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윌리엄 사령관님과 시안 저하의 힘이 강해질 것이 아닙니다."

윌리엄 사령관이 시가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그는 늘 중요한 결정이나 생각을 할 때면, 저런 습관을 보였다.

"인정할 수밖에 없군. 이건 정말 고급 정보야."

"감사합니다."

"자넨 우리 라인이 아니라면서 이런 정보를 내게 줘도 되는 건가?"

"잊으셨습니까? 우린 동업자 관계가 아닙니다. 사령관님과 시안 저하의 세력이 커지면 제 사업도 커질 겁니다."

"사업이라, 또 원하는 것이 있다는 거로 들리는군."

"어차피 원정팀을 꾸릴 때, 저희 안당고낙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윌리엄 사령관님을 봐서 특별히 10% 할인해서 드리죠. 그리고 길잡이 비용도 적당히 받겠습니다."

"자네가 직접 가려고?"

"어차피 엘프가 있어야 길을 찾을 거고, 저희에게 협조하는 엘프는 모두 제 영지민이니까요. 그리고 저보다 대수림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요?"

윌리엄 사령관은 시가를 피우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제국의 누군가에게 이 고급 정보를 공유해야 했다.

아니면 아베르크 제국만 뒤처질 테니까.

그리고 보로스 추밀원장에게 알려주는 것보단 윌리엄 사령관이 훨씬 나았다.

보로스 추밀원장은 황태자의 사람이었다.

아무래도 황궁에 있으면서 자주 접하기도 할 것이고, 황태자가 다음 황제가 돼야 자신이 계속해서 추밀원을 장악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황태자와 추밀원장의 행보는 너무 느렸다.

안전한 황궁에 앉아서 제국을 주무르다 보니, 라디프 공작 같은 외부 세력의 변화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라디프 공작을 견제할 수 있는 것은 황태자와 추밀원장이 아니라 시안 7황자와 윌리엄 사령관이야.'

라디프 공작과 나는 이미 관계가 틀어졌다.

원래 별다른 관계가 없었지만, 시노우엘과 샤이닝 일족 엘프를 내가 빼돌린 것을 알 것이다.

원래 세계수의 씨앗과 엘프들에게 땅을 제공해 준다는 빌미로, 계속 부려먹으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그 엘프들이 내게 왔으니, 화살은 내게 향할 거다.

그리고 내가 비행석을 찾으러 가는 길잡이까지 자청했으니, 자신의 계획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겠지.

다행히 라디프 공작은 남쪽 베른 대륙의 식민지를 점령하려고 제국을 비웠으니 이건 기회였다.

윌리엄 사령관이 시가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좋아! 내가 당장 수도로 가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자네 말대로 이 사안은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나. 게다가 대수림은 내 관할이 아닌가!"

"맞습니다. 원정대 준비 기간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윌리엄 사령관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빨리도 반년은 걸릴 거네."

"그럼 블랙힐 기지에 집결하는 것은 더 오래 걸리겠군요."

"기간트보다 식량과 마석 배터리 같은 보급 물자를 구하는데, 더 오래 걸리네."

"그럼 전 미리 길을 알아보러 대수림에 가 있겠습니다. 엘프들을 통해 안당고낙을 먼저 보낼 테니, 9개월 후에 블랙힐 기지에서 만나기로 하죠."

"무슨 일이 있어도 그때까진 준비해서 가겠네. 그런데 혹시 자네가 오지 않으면 어찌 되는 건가?"

"제가 언제 약속을 어긴 적이 있습니까?"

윌리엄 사령관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조심하게. 이젠 자네 혼자만의 몸이 아니네. 제국의 안위는 자네 손에 달렸어."

"알겠습니다. 더욱 조심하겠습니다."

남은 기간이 9개월.

시간은 충분하다.

드워프 차원에서 드워프들을 구할 시간은.

***

"타일러여! 비공정이 완성됐다!"

글러드 왕자와 호르갈 족장, 그리고 드워프들이 날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그들의 눈은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난 수도로 떠나기 전 엘프들의 비공정을 놓고 갔다.

그들에게 비공정 샘플을 남긴 것이었다.

"그런데 비공정은 어디 있나?"

"우릴 따라와라!"

난 드워프들을 따라 근처 숲으로 향했다.

이 주변엔 인가가 전혀 없었기에 좁은 기간트 공방 대신 이곳에서 작업한 것 같았다.

그리고 곧 숲 가운데 완성된 5척의 비공정과 내가 준 엘프 비공정이 보였다.

"어? 완전히 모양이 다르네."

그런데 드워프가 만든 비공정의 모습은 내가 준 샘플 비공정과 사뭇 달랐다.

길이는 120미터로 조금 더 컸지만, 가장 큰 변화는 선체 두께가 커지고, 좌우에 날개가 4개나 달린 것이다.

그런데 배를 만들어 달라고 했는데, 돛대가 보이지 않았다.

"타일러여! 기간트를 수송할 수도 있다고 했기에 여러 기능을 넣었다."

글러드 왕자가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비공정 선수에 있던 드워프들이 바삐 움직였다.

위잉! 두두두두두!

곧 엔진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마석 엔진은 시간이 없었기에 열차에서 쓰던 것과 똑같이 만들었다."

"똑같이 만든 것도 기술이지."

쿵! 기이이잉!

그때 선미 하부가 열리더니,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곤 땅에 닿았다.

"오! 그래, 이런 기능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지."

"이젠 비공정을 완전히 착륙하지 않아도 이쪽으로 기간트를 싣거나 내릴 수 있다."

내가 지나가면서 했던 말을 잘도 기억하고 있었다.

"기간트는 몇 대나 실을 수 있어?"

"룩급 기간트 이하는 최대 10대까지는 가능하다."

이건 아리칸 공국의 비공정과 비슷했다.

"한 척에 인원은 얼마나 태울 수 있는데?"

"기간트가 있는 경우 150명을 태울 수 있고, 기간트가 없는 경우엔 그 2배인 300명을 태울 수 있다."

"마석 배터리나, 물, 식량, 물자를 모두 빼면 몇 명이나 더 태울 수 있지?"

"그럼 100명은 더 태울 수 있을 거다."

"아주 훌륭하군."

글러드 왕자의 표정에 뿌듯함이 묻어 있었다.

"그리고 선체 좌우 4개의 날개에 프로펠러 장치를 달아 빠르게 고도를 높이거나 낮출 수 있고, 공중에서 빠르게 선회하거나 방향 전환을 쉽게 할 수 있다. 그리고 갑판엔 자동으로 펼쳐지는 돛을 달았다."

"자동이라고?"

신호를 보내자, 선수부터 돛대가 2개씩 총 3쌍이 나란히 올라오더니, 중간에 돛이 하나 펄럭였다. 그리고 선미 맨 갑판 위에 방향 전환을 위한 커다란 삼각돛이 하나 달려 있었다.

"시연을 위해 하나만 달았지만, 두 개의 돛대 사이엔 3개의 돛을 달 수 있고, 총 9개까지 펼칠 수 있다. 그리고 선체 상부 좌우에 프로펠러 장치를 이용해 속도를 더 낼 수도 있고, 바람의 힘만으로도 이동할 수 있다."

"이걸 6개월 동안 다 만들었단 말이야?"

그동안 얼마나 노력했을지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드워프 차원으로 가족을 구하러 간다는 내 말에 100명의 드워프가 밤낮없이 작업했을 것이다.

어쩐지 다들 수척해 졌더라니······.

난 이곳과 난민 기지의 드워프들을 구했다.

그들은 내게 목숨을 빚진 것과 같았다.

그래서 지금 내 일을 돕고, 최대한 열심히 일하면서 갚고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희생만 강요해서는 제대로 된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이제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을 들어줘야 할 때였다.

그래야 앞으로 10년, 20년 후에도 계속 좋은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지!

"좋아! 다들 마무리를 해라! 우린 드워프 차원으로 간다!"

"와아아아!"

"가자!"

드워프들의 함성이 오늘따라 컸다.

며칠 후 비행석을 선체 곳곳에 달고, 야간 시험 비행을 마쳤다.

난 암 드로운과 괴수 마법인형을 모두 꺼내 완성된 드워프제 비공정을 한 대씩 인형의 집에 넣었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선체 좌우에 커다란 프로펠러가 6개나 달린 엘프 비공정을 넣었다.

엘프 비공정은 내 주문에 따라 기간트 수납을 포기하고, 마석 엔진만 넣고 빠른 속도를 위해 프로펠러만 추가로 달았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제 드워프들의 가족을 구하러 간다!

제발 저들의 가족이 무사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드워프 영지민들이 밝게 웃었으면 좋겠다.

94. 헬카인, 스바르.

94. 헬카인, 스바르.

[드워프 차원]

'그러니까, 거신도 처음엔 금속으로 갑옷을 만들었단 말이군.'

지금 보고 있는 책은 불의 탑에서 찾은 것으로 여러 금속 제련법이 적혀 있는 거신의 책이었다.

검이나 창 같은 무기 제조법이 나와 있는 책도 있었다.

그리고 이런 금속이나 갑옷은 대부분 아고르 화산섬의 대장간에서 만들었다고 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단단하기도 하고, 대수림에서 구하기 쉬운 괴수 부산물로 자연스레 넘어간 것 같았다.

'여기서 아고르 화산섬이 또 나오네.'

언젠가 한 번은 가봐야 할 것 같다.

화염 속성 마석 재료인 마그마도 그곳에 있으니까.

그리고 또 알게 된 사실.

거신도 처음부터 하나로 뭉친 건 아니었다.

각 탑을 중심으로 여섯 개의 왕국이 있었고, 속성 마법을 중심으로 국가가 발전한 것 같았다. 그러다가 괴수에 대항해 제국을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고.

그 제국이 바로 화산에 삼켜진 이데아 제국이었다.

'이데아 제국이 멸망하지 않았다면, 헬다임 장벽도 없었겠지?'

장벽이 없었다면 타일러 빈스도 없었을 거고,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도 모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개레렉!"

"케렉!"

괴수들의 소리가 더 커졌다.

드워프 차원 균열을 넘자마자 수천 마리의 개렉이 우리를 그림자처럼 따라오고 있었다.

여섯 개의 다리와 등 뒤에 솟아난 4개의 촉수 그리고 긴 꼬리까지.

다리 끝엔 낫처럼 생긴 발톱이 있고, 촉수는 늘 먹잇감의 급소를 노린다.

"으! 징그러워."

개렉이 일제히 촉수를 날름거리자, 옆에 있던 에테나가 기겁했다.

"저것들은 무지막지한 놈들이다!"

글러드 왕자가 선미로 올라와 말했다.

"동물이나 식물, 광물까지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고, 극히 일부지만 스스로 진화까지 하는 놈들도 있다. 그리고 저 밑에 우리를 따라오는 놈들은 신체 능력은 가장 약한 개렉이지만 4개의 촉수 끝을 포처럼 쏘아대기에 포개렉이라고 부른다."

촉수가 네 개라 포개렉이야?

아니면 촉수를 포처럼 쏴서 포개렉이야?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아니기에.

"포개렉은 최소 수천 마리씩 움직이기에 아주 위험한 놈들이다."

"설마 저 촉수가 여기까지 날아오진 않겠지?"

"놈들의 사정거리는 길어야 40, 50미터다!"

다행히 지금 우린 100미터 상공이라 살짝 가슴을 쓸어내렸다.

저 수천 마리가 동시에 촉수를 쏘면 이 비공정도 위험했을 테니까.

"그리고 위험한 개렉은 드워프와 융화된 놈이다."

"뭐? 드워프와 섞인 거야?"

"드워프를 잡아먹고, 진화하는 거다. 진화하는 숫자는 극히 일부지만 체격도 몇 배로 커지고, 지능이 높아 대부분 우두머리급으로 발전한다. 우린 그런 놈들을 군주라고 불렀다."

"그럼, 그 군주란 놈들이 가장 센 놈이야?"

"아니다! 가장 강한 것은 대군주다!"

갑판에 있던 드워프들이 대군주란 말에 일제히 인상을 찡그렸다. 몇몇은 진저리까지 치는 것이 꿈에서도 보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대군주는 기간트보다 훨씬 크다. 내가 본 놈은 키가 20미터나 됐고, 이족보행을 했다."

"이족보행이라고? 특이하군."

대수림에도 킹콩 같은 이족보행을 하는 괴수도 있지만, 그 종류가 많진 않았다.

"그런데 그 대군주도 차원 균열엔 얼씬도 하지 않는다는 거지?"

"그렇다. 무슨 일인지 아무리 강한 개렉도 차원 균열 쪽으론 가까이 가지 않는다."

신기한 일이었다.

엘프 차원을 거의 멸망시킨 괴수들도 대수림과 연결된 차원 균열로는 들어가지 않았다고 했다.

대수림을 두려워하는 건가?

아니면 대수림의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건가?

비공정이 방향을 틀자, 개렉들이 한 덩어리처럼 우르르 방향을 틀었다.

"글러드 왕자여! 저기 개렉들이 마치 한 몸처럼 같이 움직이는데?"

"그렇다. 타일러여! 저놈들은 꼬리를 흔들어 괴이한 소리를 내고, 수 킬로미터까지 의사를 전달할 수 있으며, 서로 소통해 먹잇감을 추격한다. 그리고 군주 같은 더욱 진화한 개체가 우두머리 역할을 한다."

"혹시 날 수 있는 개렉도 있어?"

"다행히 놈들은 날지 못한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난 하늘을 나는 개렉 수천 마리와는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개렉은 군체 의식이 있는 것 같았다.

"놈들이 뒤처진다!"

포개렉 무리가 우리를 따라오다 멈췄다.

자신들이 우릴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이제야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나마 지능이 떨어져서 다행이야.

우린 며칠 동안 드워프 차원을 항해했다.

그리고 드디어 글러드 왕자의 토그족이 피난한 섬을 발견했다.

"어떻게 된 건가? 서, 섬이 사라졌다!"

글러드와 드워프들이 경악했다.

"무슨 말이야? 섬이 사라졌다니?"

"부, 분명 이곳은 섬이었어야 했다. 그런데 섬은 사라지고 육지와 연결됐다."

"아아! 어찌 이런 일이!"

토그족 드워프들은 실망을 넘어 절망했다.

육로가 연결되어 있다면 개렉 무리를 피할 수 없음이다.

"글러드여! 아직 희망을 놓지 마라! 그대의 일족들은 배가 있으니, 다른 섬으로 갈 수도 있다."

"아! 타일러여! 그대 말이 맞는다. 다른 섬을 찾아보자!"

우린 해안가를 따라가며, 드워프들이 피신할 만한 섬들을 찾아다녔다.

그런데 스켈야스족이 피신한 섬과 다른 드워프 일족이 피신한 4개의 큰 섬이 이미 육지와 연결되어 있었고, 드워프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크게 실망한 드워프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지형이 바뀐 것이 아니었고, 섬이 육지와 연결됐다.

괴수가 다리를 만들었다고?

의문을 가지고 육지와 가까운 섬을 뒤지고 있을 때였다.

"타일러여! 저길 봐라!"

글러드 왕자가 망원경을 가져왔다.

"개렉이 돌과 나무를 나르고 있다!"

"뭐?"

그제야 육지가 늘어나 섬과 연결된 이유를 알았다.

수십만 마리의 개렉이 근처 산에서 돌과 나무를 물어와 바다를 메워 다리를 만들고 있었다.

허! 이게 가능하구나!

그리고.

"세상에!"

"대군주다!"

드워프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바닷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확연하게 큰 괴물이 서 있었다.

그런데 4족 보행인 개렉이 아니라 그 형태가 인간에 가까웠다.

그리고 온몸에 광물이 덕지덕지 붙어 있어 흉측했다.

그 순간 대군주가 고개를 돌려 우리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놈이 이 수십만 개렉 군단을 이끌고 있었다.

펑! 퍼펑! 펑!

'응? 대포?'

쾅! 콰쾅! 쾅!

쏴아아아! 촤아아아!

"깨릭!"

"께렉!"

포탄이 떨어지자 바다를 메우던 개렉들이 우르르 쓰러졌다.

하지만 놈들은 멈추지 않았다.

죽은 개렉의 사체까지 물어와 바다를 다시 메웠다.

"헬카인족이다! 그들이 살아있다!"

글러드 왕자가 소리쳤다.

"저 대포를 쏘는 것이 드워프들이란 말이야?"

"그렇다! 타일러여! 드워프 일족 중에서 유일하게 대포를 만들어 쏘는 일족이다."

대포라니!

살짝 한숨이 흘러나왔다.

지금 바다를 메우고 있는 괴수들의 숫자는 수십만에 달했다.

저 많은 숫자를 상대로 대포라니······.

그것도 화약이 터지는 포탄이 아니고, 쇠공이 날아가 직접 타격을 주는 방식이었다.

그래도 제대로 적중하면 1.5미터의 개렉을 한 번에 대여섯 마리씩 쓸어버리긴 했다.

"그런데 지금 위험한 거 아냐?"

이미 섬과 다리 끝의 거리가 겨우 100여 미터로 상당히 가까웠다.

그리고 드워프들은 해안에 30여 대의 대포로 개렉이 쌓아 만든 다리를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있었다.

"그어어어!"

그때였다!

대군주가 후방에서 소리치자, 수백 마리의 개렉이 물로 뛰어들었다.

놈들은 허우적거리며 섬으로 헤엄치기 시작했다.

절반은 파도에 밀려 떠내려가고 물속으로 사라졌지만, 절반은 섬에 상륙했다.

"타일러여! 저들을 도와다오!"

"저 섬으로 이동해!"

"네!"

촤르르르르!

키를 잡은 에테나가 비공정을 섬으로 몰았다.

펑! 퍼퍼펑!

한쪽에선 계속 대포가 불을 뿜었다.

그때 파도를 넘어와 살아남은 수백 마리의 개렉이 대포를 향해 무섭게 달리기 시작했다.

"케레렉!"

"개렉!"

그러자 갑옷을 입고 커다란 방패와 망치를 든 수십 명의 드워프가 대포를 보호하며 앞을 막아섰다.

그때 유난히 큰 드워프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우린 은빛 철갑을 두르고, 손엔 강철 방패와 불멸의 망치를 든다."

"우와!"

타앙!

그가 방패에 망치를 부딪치자, 금속 굉음이 울려 펴졌다.

그리고 다른 드워프들도 일제히 망치로 방패를 두들겼다.

그러자 달려들던 개렉의 속도가 줄고,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케레렉!"

거리가 가까워지자, 포개렉들이 일제히 4개의 촉수를 겨눴다.

팡! 파파파팡!

수백 개의 촉수가 날아갔다.

탕! 타타타탕!

하지만 드워프의 커다란 방패에 막히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촉수를 다 쏜 포개렉이 달려들었다.

"우린 죽기 위해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저들을 죽이기 위해 살아남은 것이다! 스바르의 형제들이여! 괴수를 죽여라!"

"와아아아!"

"죽여라!"

쾅! 콰콰콰쾅!

괴수의 발톱과 방패가 먼저 부딪쳤다.

하지만 개렉들이 방패에 막히며 뒤로 밀렸다.

그러자 무지막지한 망치가 날아왔다.

부웅!

퍽! 퍼퍽! 퍽!

망치에 맞은 개렉들이 순식간에 피떡이 됐다.

숫자는 개렉이 몇 배나 많았지만, 눈앞에 드워프들은 용맹했고, 또 강했다.

그리고 하루 이틀 싸워본 솜씨가 아니었다.

"제법이군!"

"타일러여! 저들은 뛰어난 제련사이자, 드워프 최고의 전사 스바르족이다. 아직도 살아남다니 역시 그들답다."

비공정이 섬 상공에 도착했다.

하지만 드워프를 돕진 않았다.

우리가 없어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크하하! 저놈들에게 쇠 맛을 일깨워 줘라!"

"쏴라!"

펑! 퍼퍼펑! 펑!

다시 30여 대의 대포가 불을 뿜었다.

쾅! 콰콰쾅! 쾅!

그리고 개렉들이 돌과 나무를 쌓아 만든 다리에 적중했다.

앞으로 튀어나온 30여 미터 길이의 다리가 파괴되어 파도에 힘없이 쓸려갔다.

하지만 개렉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다리를 쌓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다로 뛰어들진 않았다.

병력 손해가 너무 컸다.

그리고 드워프들은 이 틈에 잠시 쉬었다.

"고도를 낮춰!"

우린 헬카인족의 섬에 도착해 비공정을 천천히 내렸다.

글러드 왕자와 드워프들이 고개를 내밀고 손을 흔들자, 드워프들은 우릴 공격하진 않았다.

"반갑다! 난 토그족 왕자 글러드다!"

"난 헬카인족 족장 하버다!"

"난 스바르족 카자론 족장이다."

"스켈야스족 호르갈이다."

네 족장이 먼저 서로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글러드가 뒤에 있는 날 인사시켰다.

"이쪽은 타일러다! 우리 드워프를 보호하고 돕고 있다."

"다른 차원에 사는 종족인가?"

"그렇다!"

"그대들은 자존심도 없는가? 드워프가 다른 차원의 생명체에게 목숨을 의지하다니!"

스바르족 족장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헬카인족 족장 역시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들은 내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응?"

"어떻게?"

내가 드워프어를 너무 자연스럽게 말하자, 두 족장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난 괴수로부터 저들을 보호하고, 저들은 괴수와 싸울 수 있는 무기를 만들어 준다. 그럼 누가 누구에게 의지하는 것이지?"

두 드워프 족장은 순간 대답을 하지 못했다.

드워프가 무기를 만들어 주지 않으면, 나도 싸울 수 없으니, 서로 공생관계라는 것을 바보도 안다.

"보아하니 그대들은 버틸만한가 보군."

"그렇다! 우린 지난 5개월 동안 저 괴수들과 싸워 이곳 섬을 지켰다."

"우리 드워프는 강하다!"

순간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두 족장은 버럭 화를 했다.

"지금 우리를 무시하는 것이냐?"

"당장에 허리의 검을 뽑아라!"

난 손을 살짝 들었다.

"미안하군! 하지만 그대들의 말이 웃겨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뭐라?"

"그렇지 않은가? 강하다면서 지금, 이 모습은 뭐지? 괴수에게 쩔쩔매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이 강한 모습인가?"

내 말에 헬카인족 족장 하버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스바르족 족장 카자론은 여전히 화를 냈다.

"그렇게 자신 있다면, 나와 한번 싸워보겠느냐?"

카자론이 방패와 망치를 들었다.

"싸움엔 응하겠다. 대신 스바르족 전사들 모두 한꺼번에 덤벼라!"

"뭐라?"

"푸하하하!"

"크하하! 어리석은 것이 망치에 머리통이 깨져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스바르 전사들이 날 비웃었다.

쿵! 쿵!

그때 내 옆으로 암 드로운이 인형의 집에서 나왔다.

"뭐, 뭐냐?"

"괴물이다!"

키 150cm밖에 안 되는 드워프들 앞에 11미터의 암 드로운이 나왔으니 당연히 놀랄 수밖에.

하지만 암 드로운으로 스바르족 전사들을 상대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건 정말 불공평하니까.

"너희 상대는 그 뒤에 있는 여자다!"

95. 비행석 원정대.

95. 비행석 원정대.

긴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에테나가 암 드로운이 꺼낸 오리지널 나이트급 기간트 로렐라이에 올라탔다.

이건 글러드 왕자와 토그족 드워프가 가디언 전진 지기에서 챙긴 거신의 갑옷으로 만든 기간트였다.

기이이잉! 쿵! 쿵!

[자! 모두 덤벼라!]

암 드로운보다 작았지만, 로렐라이도 나이트급으로 키가 7미터에 달한다.

크기에 놀란 드워프들이 주춤거렸다.

"왜 자신 없는가?"

내 말에 카자론 족장은 이를 갈았다.

"좋다! 모두 전투 대형으로!"

"전투 대형으로!"

처처처척!

카자론은 혼자 덤비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70여 명의 스바르족 전사들이 로렐라이를 삼중으로 포위했다.

"공격하라! 스바르족의 용맹함을 보여라!"

"박살 내자!"

"와아아!"

다다닥!

쾅! 쾅! 쾅!

스바르 전사들이 망치로 로렐라이를 공격했다.

하지만 소리만 요란했지 로렐라이는 망치에 맞아도 끄떡없었다. 그래도 본체를 보호하는 장갑 일부가 조금 찌그러지긴 했다.

'힘은 오크보다 떨어지지만, 장비가 좋군.'

그들이 쓰는 금속이 제법 단단해 보였다.

그때였다!

부우웅! 콰아앙!

"으악!"

"크학!"

에테나의 로렐라이가 겨우 팔을 한번 휘둘렀을 뿐인데, 넷이 날아갔다.

[자! 그동안의 특훈을 보여주지!]

로렐라이가 드워프들 사이를 다니며 팔과 다리를 휘둘렀다.

드워프는 방패를 이중으로 쌓아 방진을 만들었지만, 돌진 한 번에 와르르 무너졌다.

처음부터 싸움은 일방적이었다.

에테나가 최대한 조심스럽게 싸웠지만, 한 대 맞은 드워프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족장 카자론 역시 날아오는 주먹을 방패로 막았지만, 방패와 함께 날아가 해변에 꼬꾸라졌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본 헬카인족 족장은 경악했다.

난 헬카인족 족장을 보며 이죽거렸다.

"하버 족장이여! 그대들의 대포로 한번 해보겠나?"

"뭐라? 대포를 직접 맞아 보겠다는 것이냐?"

난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강력한 대포로 해보게."

"타일러여! 후회하지 마라!"

헬카인족 드워프들이 후방에서 포신 길이가 7미터나 되는 커다란 대포를 끌고 왔다.

화약과 포탄을 넣고, 쏘기까지 한 참이 걸렸다.

"날려버려라!"

"헬카인족 대포의 위력을 보여주지!"

"쏴라!"

퍼엉! 휘이잉!

콰앙!

"헉! 마, 막았어?"

드워프들은 경악했다.

방패도 아니고, 두 팔을 모아서 팔목 장갑만으로 포탄을 막았다.

글러드 왕자와 호르갈 족장은 이미 기간트의 성능을 알고 있었기에 결과를 알고 있었지만, 헬카인족 드워프들은 강철인형의 강함에 놀라고 자신들의 대포에 크게 실망했다.

"카자론 족장! 그만 일어나지! 물을 뿌리기 전에."

"험! 방금 깨어났다."

바닷가에 누워있던 카자론 족장이 일어났다.

난 두 족장을 향해 말했다.

"방금 이 강철인형을 누가 만들었는지 알아?"

그리고 글러드 왕자를 가리켰다.

"재료는 내가 준비해줬지만, 전부 토그족 드워프들이 만들었다. 그리고 저 비공정은 스켈야스족의 드워프들이 만들었고. 자! 이제 다시 묻고 싶군. 저 드워프가 강할까? 그대들이 강할까?"

"······."

"······."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나다! 저들은 자존심을 숙이고 나와 협력했기에 지금 저렇게 괴수를 잡을 수 있는 강한 무기를 만들 실력을 갖추게 된 거다. 만약 그대들처럼 계속 위대한 드워프 최고만 외쳤다면, 괴수에게 당하기만 하고 끝났을 거다. 그러니 때론 자존심을 굽힐 줄도 알아야 도움도 받고, 더 강해질 수 있는 계기도 생기는 거다."

난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글러드 왕자와 호르갈 족장이 자존심이 상한 두 족장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드워프 마음은 드워프가 잘 알겠지.

"너무 심하게 몰아붙인 건 아닐까요?"

에테나가 물었다.

"시간이 없잖아. 그리고 난 자존심만 세고, 굽힐 줄 모르는 드워프들을 설득할 방법이 없어. 그냥 패는 거면 모를까."

토그족과 스켈야스족은 인간 밑에서 오래 노예와 같은 생활을 했기에 자존심이 바닥인 상태였다.

그랬기에 내 제안에 흔쾌히 수락했고, 글러드 왕자와 라스칼은 드워프가 변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말이 잘 통했다.

하지만 이곳의 드워프들은 아직 자존심이 너무 강했다.

'저 대포와 화약은 그래도 탐나는데······.'

솔직히 두 드워프 일족이 없어도 내 전력엔 전혀 지장이 없었다. 하지만 헬카인족의 대포는 조금 탐이 났다.

대포 자체의 위력은 사실 그리 크진 않았다.

폰급 기간트만 해도 방패 하나만 든다면 몇 발이고 피해 없이 막을 수 있었고, 최하급 괴수라면 어느 정도 타격을 받겠지만, D등급 이상의 괴수에게는 마찬가지로 거의 피해를 줄 수 없었다.

'하지만 비공정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선체를 강철로 전부 두른다면 사실 대포도 소용없었다.

하지만 그럼 기간트를 몇 대나 싣겠나?

비공정을 만드는 취지가 사라진다.

물론 비공정에 비행석을 아주 많이 장착한다면 불가능하진 않다.

하지만 강철을 두른 비공정 한 대 만들 때, 상대는 일반 비공정 네다섯 대는 더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기간트 수송량에서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

그러니 가볍고 내구성이 좋은 나무로 선체를 만들어야 기간트를 많이 실을 수 있게 되고, 비행석도 훨씬 적게 들 것이다.

이때 대포는 공중전에서 강한 무기가 될 수 있었다.

선체를 파괴하고, 비공정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을 공격할 수 있으니까.

'남들은 이제 비공정을 만들어 하늘을 날기 시작할 때, 난 비공정에 원거리 무기까지 탑재하는 거지.'

그리고 이 비밀무기는 언젠가 하늘에서 대규모 전투가 발생할 때, 한번은 아주 크게 효과를 볼 것이다.

한 마디로 남들보다 한 발 더 앞서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오래 걸리네······.'

글러드 왕자와 호르갈 족장이 비공정이 착륙하기 전에 두 드워프 족장을 자신들이 설득하겠다고 했다.

그때였다!

네 명의 드워프 족장들이 내게 다가왔다.

"헬카인족은 타일러를 따라가겠다!"

"우리 스바르족도 타일러를 따라가겠다."

난 두 드워프 족장들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었다.

"둘 다 고맙다! 그리고 조금 전에는 미안했다. 카자론 족장이여!"

"아니다! 타일러여! 자존심만 세워선 일족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행히 글러드와 호르갈의 설득이 통했다.

"그런데 타일러여! 배가 한 척뿐인데, 우리 일족은 400명이다. 다 태울 수 있겠나?"

"우리 헬카인족은 500명이나 된다. 그리고 대포와 화약도 실어야 하고."

난 웃으며 암 드로운과 괴수 마법인형을 이용해 비공정을 2대 더 꺼냈다.

그리고 괴수인형을 본 두 일족의 드워프들은 다시 한번 더 경악했다.

대포와 포탄, 화약은 내 인형의 집에 넣었다.

"타일러여! 서쪽 섬에 드워프들이 있다!"

"오! 그래."

그리고 헬카인족 드워프들에게 희소식을 들었다.

섬에서 탈출한 드워프들이 서쪽 끝에 있는 섬에 피난해 모여 살고 있다고 했다.

우린 세 척의 비공정을 끌고 서쪽으로 향했다.

***

"글러드 왕자여!"

"오오! 토그 신이여! 감사합니다."

"호르갈 족장이여!"

드워프들이 서로 얼싸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부인과 아이들의 생사를 확인한 가장과 무사히 살아 돌아온 자식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부모.

피를 나눈 형제와 의리를 나눈 형제들도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가족이란 이런 의미로구나.

타일러 빈스의 가족은 왜 이런 감정이 아닐까?

"그래도 다행이네요. 많이 살아있어서."

옆에서 지켜보던 에테나도 눈물을 글썽거렸다.

물론 모두 가족 상봉을 한 것은 아니었다.

괴수를 피해 계속 도망 다니면서 많은 드워프가 죽었고, 부족한 식량으로 병들어 죽은 드워프도 있었다.

섬은 좁고, 드워프는 많으니 이곳의 드워프들도 아사 직전이었다.

난 인형의 집에 있는 식량을 먼저 풀었다.

이때를 위해 헬다임과 주변 영지에서 식량을 대량으로 구매했었다.

"모두 새로운 집으로 가자!"

"출항이다!"

서쪽 섬에 있던 드워프들은 이천여 명에 달했다.

그들을 모두 6척의 비공정에 모두 다 태웠다.

이곳에서 구한 드워프가 모두 3,000여 명에 달했다.

원래 한 척에 최대 400명까지 태울 순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추가로 더 태워야 했다.

다행히 내 인형의 집에 마석 배터리나 식량, 물 등을 따로 챙길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린 그렇게 차원 균열을 향해 출발했다.

그리고 해안가에서 전에 헬카인족과 스바르족을 공격했던 대군주와 마주쳤다.

그는 여전히 수십만 마리의 개렉을 지배하고 있었다.

거대한 대군주는 우리가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아니겠지?'

왜인진 모르겠지만 대군주에게 거신의 느낌이 들었다.

차원 균열에 도착했다.

사실 진짜 여정은 지금부터였다.

대수림을 무사히 지나가길 빌었다.

***

대수림을 건너는 것은 여전히 위험하고 짜증 나는 일이었다.

드워프 차원 균열 근처에 거대한 S등급 괴수가 날아다니는 것을 발견했다.

날개 길이가 100미터가 넘고, 몸길이가 30미터나 되는 이놈은 A등급 괴조도 사냥해 잡아먹는 놈이었다.

무리 생활을 하는 괴조들도 감히 이놈 근처엔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

그래서 우린 보름 동안이나 한곳에 갇혀 있어야 했다.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여정은 지체되고, 또 좁은 선상 생활로 인해 병에 걸린 드워프도 많았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난민 전진 기지.

드워프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라스칼과 드워프들이 난민 기지 내부를 아예 거대 도시로 만들어 놓았다.

내부가 그리 크지 않았기에 아파트처럼 높은 건물을 세웠고, 서로 이동이 자유롭도록 건물 중간에도 길을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샤이닝 일족 엘프도 이주했고, 새로 3천 명이나 되는 드워프가 추가되었기에 전진 기지는 과밀현상이 심했다.

그래서 이곳에서 한 달을 쉬고 드워프 절반은 발레리온 영지로 이주시키기로 했다.

프레디 영주 대리가 아주 골머리를 앓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시노우엘은 어디 간 거지?"

마르실 족장이 대답했다.

"다른 엘프들을 설득하러 가셨다."

"뭐?"

"세계수를 심기 전에 최대한 많은 엘프 일족을 만나고 오신다고 하셨다."

마르실의 표정은 왠지 슬퍼 보였다.

엘프를 더 데려오려나?

엘프들을 만나서 뭘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다.

이번에 세계수의 씨앗을 건네려 했지만, 시노우엘이 없었기에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난 안당고낙 100마리를 끌고 블랙힐 기지로 향했다.

***

[블랙힐 전진 기지]

내가 없는 9개월 동안 많은 것이 변했고, 또 많은 것이 변하고 있었다.

'많이도 모였군.'

예상보다 더 많은 기간트와 병력에 살짝 놀랐다.

기지 밖이 이 정도면 안쪽엔 더 많은 병력이 있다고 봐야 했다.

나를 알아본 5군단의 아이온 중령이 달려왔다.

"충! 어서 오십시오. 타일러 준장님."

"이 안당고낙은 시안 군단장님께 드리는 거니까. 잘 관리하게."

"네! 알겠습니다."

아이온 중령이 손짓하자, 병사들이 달려와 안당고낙을 인수했다.

"시안 군단장께선 어디 계신가?"

"지금 사령관님과 영지 대표들과 회의를 하고 계십니다."

"응? 윌리엄 사령관님도 오셨다고?"

"네! 북부군을 직접 끌고 오셨습니다."

사령관이 직접 올 정도의 북부군이라면 적어도 기간트 200기는 확보됐다고 봐야 했다.

"그런데 영지 대표는 뭐지?"

"이번 원정에 각 영지의 영지군도 합류했습니다."

순간 자리에 멈춰 섰다.

"영지군의 병력 규모는?"

"기간트가 200기입니다."

"원정대 규모가 더 커졌군."

"그건 가디언 제국의 원정대 규모가 더 커졌기 때문입니다."

가디언 제국은 루이스 황자의 반역자 처벌 사건 이후 500기나 되는 마장기와 5천 명이나 되는 대규모 원정대를 보냈다고 했다.

'루이스 황자의 행보가 너무 빠르군.'

권력을 잡자마자 대규모 원정대를 조직해 보냈다는 것은 이미 정치적으로 안정을 찾았다는 의미였고, 루이스 황자 역시 다가올 대비행 시대를 앞서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탈로스 왕국과 글론 왕국이 연합해 400기의 타이탄을 포함한 원정대를 보낸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탈로스와 글론 연합까지 대규모 원정대를 조직했으니, 엘프 차원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다.

3파전이라...

블랙힐 기지 안으로 들어가는데, 낯익은 기간트가 보였다.

'응? 테레니스 영지군?'

야영지 한쪽에 빈스 가문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96. 마지막 전쟁.

96. 마지막 전쟁.

"타일러 도련님?"

'도련님?'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몸을 돌리자, 타일러의 기억 속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정말 타일러 도련님이시군요. 접니다. 바드."

"오랜만이군."

타일러를 그래도 열심히 가르쳤던 검술 사범이다.

재능 없는 제자를 가르친다고 욕도 많이 먹고, 고생하긴 했지.

"와! 너무 변해서 못 알아볼 뻔했습니다. 키가 이젠 저보다 크십니다."

"자네는 변함없군. 지금도 테레니스 영지군에 있는 건가?"

"네. 저 같은 일개 기사가 어딜 가겠습니까. 도련님 소문은 들었습니다. 그런데 소문이 진짜로군요."

그는 내 계급장을 보고 놀라고 있었다.

"앞으로 날 부를 땐 뒤에 도련님이란 호칭은 빼게."

"네?"

"소문을 들었다면서? 난 이제 빈스 가문의 도련님이 아니라, 정보국 준장이자, 발레리온 영지의 영주인 타일러 빈스 백작이네."

"아! 실례했습니다. 백작님."

"지금은 군인 신분이니, 계급으로 부르게."

"네, 타일러 준장님."

기사 바드는 당황한 표정이었다.

솔직히 그는 아무 잘못도 없지만, 타일러의 옛 기억이 떠오르자, 가문에 좋지 못한 감정이 먼저 치고 나왔다.

"테레니스 영지군을 이끌고 온 것은 누군가?"

"에라든 기사단장님입니다."

"그리고 또 누가 왔지?"

"블리언 도련님과 아덴 도련님께서 함께 오셨습니다."

막내 타미엘을 빼고 빈스 가문의 아들들이 전부 이곳에 모였다.

"기간트 숫자는?"

"21대입니다."

생각보다 많은 숫자를 보냈다.

영지군의 기간트가 200기라고 했으니, 10%나 되는 병력을 테레니스 영지군이 보낸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전에 라디프 공작의 바이마르 원정대에 테레니스 영지군은 없었다.

'라디프 공작에게 미움을 받는 건가? 아니면 반항하는 건가?'

테레니스는 윈데르 왕국과 국경을 접했고, 드와이트 밀림 대마경과 인접했기에 기간트와 병력이 중급 영지치고는 상당히 많았다.

그래도 기간트를 생산 수입할 수 있는 곳이 라디프 공작의 바이마르 대영지였기에 일종의 갑을 관계가 성립되어 있었다.

그건 다른 남부의 영지들도 마찬가지.

그랬기에 저번 바이마르 대수림 원정에 남부의 다른 가문의 기간트가 참가한 것이다.

"에라든 남작과 다른 기사들에게도 전하게. 앞으로 날 부를 땐 호칭을 똑바로 하고, 공적인 용무가 아닐 땐 아는척하지 말라고."

"네? 네······."

기사 바드가 힘없이 대답했다.

냉정하게 보일진 몰라도 앞으로 족히 1년은 함께 할 텐데, 타일러의 옛 핏줄 때문에 신경 쓰긴 싫었다.

난 타일러지만 옛날의 타일러는 아니니까.

***

[블랙힐 기지 회의실]

안으로 들어가자 윌리엄 사령관과 북부군 지휘관들, 각 영지군 대표까지 이십여 명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지금 회의를 하고 있었다.

"충!"

"어허! 타일러 준장, 자네가 안 오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란 줄 아는가!"

"그럴 리가 있습니까."

"어서 이리 오게."

가까이 다가가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이제 별을 단 커널 리넉스 준장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커널 준장도 내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는 대수림 전진 기지에서 사령관으로 3년을 근무하고 이번에 별을 달았다. 그리고 카야킨 전진 기지 사령관 자리는 그의 나이 많은 동기인 라그르 중령이 진급해 발령받았다.

"자! 다들 인사하시오. 이쪽은 이번 원정대 참모를 맡은 타일러 빈스 준장이요."

"오! 만나서 영광입니다."

"타일러 경의 영웅담은 잘 들었습니다."

"이렇게 어린 분일 줄은 몰랐습니다."

영지 대표들의 칭찬이 이어졌다.

난 그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화답했다.

그런데 내가 참모라고?

윌리엄 사령관을 슬쩍 쳐다보자, 그는 미소를 지었다.

'능구렁이 같은 영감탱이······!'

그때 윌리엄이 거구의 사내를 가리켰다.

"아! 서로 인사하지. 이쪽은 원정대 부사령관이자, 기간트 전투 지휘관 매러덕 소장이네."

"충! 반갑습니다."

"나도 반갑네. 보로스 추밀원장께서 칭찬이 자자하시더군."

보로스 추밀원장이 날 칭찬해?

그럴 리가 없는데, 비꼬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은 건가?

그리고 곧바로 추밀원장의 이름을 들먹이는 걸 보면 아무래도 매러덕 소장은 황태자 라인인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늦었나? 자네 하나 때문에 여기 있는 이 많은 사람이 기다려야 하겠나?"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전 정확히 시간을 맞춰 왔습니다만."

"뭐라?"

매러덕 소장이 인상을 찡그렸다.

"어험! 타일러 준장은 시간을 맞춰 왔네. 우리가 좀 일찍 온 거지."

윌리엄 사령관이 끼어들었다.

"아! 그리고 매러덕 소장은 황태자 전하의 검술 스승이기도 하고,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에 타는 아주 뛰어난 기사라네."

"과찬이십니다."

윌리엄 사령관은 갑자기 매러덕 소장을 칭찬했다.

황태자 라인이니까, 부딪치지 말라는 소린가?

하긴 모든 지휘관을 자기 사람으로만 채울 순 없었겠지.

이 원정에 제국의 운명이 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매러덕 소장은 상당히 고지식한 것이 전형적인 군인 스타일 같았다. 나와는 잘 맞지 않을 것 같다.

"자! 이제 모두 모였으니, 원정군의 지휘 체계를 발표하겠네. 커널 준장."

"네!"

커널 준장이 앞으로 나섰다.

최고 사령관에 윌리엄 대장.

매러덕 소장과 마이어스 소장이 부사령관에 임명됐다.

매러덕 소장은 1군과 2군을 지휘했고, 마이어스 소장은 3군과 4군을 지휘했다.

그리고 다니엘 준장이 참모장.

나와 맥카시 대령이 참모 자리를 맡았다.

이때 난 순식간에 원정군 서열 5번째로 올라섰다.

제1군 대장은 알렉스 준장, 제2군 대장은 도노반 준장, 제3군 대장은 커널 준장, 제4군 대장은 아몬 대령이 임명됐다.

보급군지휘관은 라이어 대령, 부 지휘관은 위스터 중령이 맡았다.

보병대 지휘관은 율리안 준장이 맡았다.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지."

윌리엄 사령관이 회의를 끝났다.

지휘관들과 영지군 대표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갔다.

난 윌리엄 사령관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대영지에선 병력을 하나도 보내지 않았더군요."

"어쩔 수 없는 일이네. 헤이스팅 가문은 동부 전선에 이미 많은 병력을 보냈고, 바이마르 가문은 식민지를 관리하고, 로드니 가문은 아리칸 공국 국경에 병력을 보냈으니까."

"네? 아리칸 공국과는 아직도 협상이 끝나지 않았습니까?"

"그게 쉽겠나? 20여 년 동안 원수로 지내왔는데?"

"그렇군요. 그런데 록체스터 가문은 왜 오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5군단과 이곳을 지켜야지. 언제 발굴이 끝날지 모르니까."

"그렇군요."

그때 테레니스 영지 대표인 에라든 남작이 다가왔다.

"타일러 공자님 오랜만입니다."

"응? 공자님?"

기사 바드도 도련님이라고 부르더니, 에라든 남작도 호칭으로 내 신경을 긁었다.

"그대는 아직도 내가 빈스 가문의 공자로 보이시오?"

"네?"

"지금 난 원정대 참모요. 그리고 정보국 준장이고. 공석인 자리에선 항상 호칭을 조심하시오."

"아! 죄송합니다. 타일러 준장님."

"그럼 나중에 봅시다."

내가 말을 끊자, 뻘쭘해진 에라든 남작이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윌리엄 사령관이 말했다.

"에이, 그래도 자네 가문의 기사가 아닌가? 그렇게까지 할 건 없지 않나."

"이미 인연이 끊어진 가문입니다. 제겐 어떤 의미도 없지요."

"허허! 사람이 매정하긴, 그래도 개리 백작이 내 체면을 생각해 영지 중에서 가장 많은 병력을 보내 왔네. 그러니 잘 좀 대해주게."

"전 공평하게 대할 겁니다."

윌리엄 사령관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데 자네는 왜 안 나가나?"

다들 나갔는데 내가 가만히 서 있자, 윌리엄 사령관이 물었다.

"제게 하실 말씀이 없습니까? 제가 왜 갑자기 원정대 참모가 된 겁니까?"

윌리엄 사령관은 고개를 흔들더니 손짓했다.

"그래, 이리와 앉게. 이젠 서 있기도 힘들군."

"감사합니다."

나와 윌리엄 사령관은 자리에 앉았다.

"긴 원정이 아닌가. 자네에게 어느 정도 지위와 힘이 있어야 이 많은 병력을 이끌고 우릴 엘프 차원으로 데려다주지 않겠나? 자네가 대수림 전문가기도 하고."

"휴! 그런 의미라면 어쩔 수 없군요. 그런데 시안 황자께선 어디 가셨습니까?"

"내가 일부러 회의에 참석하지 말라고 했네. 젊은 혈기에 원정에 얼마나 가고 싶으시겠나."

"그럼 사령관님 대신 시안 황자님을 보내시죠."

윌리엄 사령관이 피식 웃었다.

"누굴 뒷방 늙은이로 만들려는 건가?"

"그것이 아니라 앞으로 일정은 장벽에서 블랙힐 기지에 오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걱정돼서 드리는 말입니다."

윌리엄 사령관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나도 아네. 훨씬 더 힘들겠지. 하지만 이번이 내 마지막 전장이 될 거 같네."

"일흔이 다 된 가디언 제국의 안드레아스 원수도 아직 현역인데, 너무 엄살이 심하신 것이 아닙니까?"

"그 양반도 이번에 마지막이야."

"설마, 안드레아스 원수도 가디언 제국의 원정대에 참가했습니까?"

"참가가 아니야! 그가 가디언 제국 원정대 총사령관이네. 그래서 내가 가는 것도 있지. 우린 동부 전선에서 10년이나 싸웠지만, 서로 승리했다고 부를 정도의 전공은 세우질 못했네. 그리고 지금 전쟁도 힘든데, 비공정이 하늘을 난다고 생각해 보게, 그 수많은 변수를 어찌 다 계산하겠나? 나나 안드레아스 원수가 활약할 시대는 이게 마지막이라고 봐야지."

윌리엄 사령관의 눈빛은 어딘가 공허하면서도 비장했다.

자신의 시대가 끝났음을 알고 있었기에 공허했고, 가디언 제국의 명장인 안드레아스를 마지막으로 이겨보고 싶은 마음에 비장함이 깃들어 있는 것 같다.

"자신 있으십니까?"

윌리엄 사령관이 피식 웃었다.

"물론이네. 그리고 이번엔 자네가 있잖은가."

"네?"

이제 보니 날 제대로 부려먹으려고 참모를 시켰나 보다.

"전 최대한 전투를 벌이지 않고 무사히 돌아올 생각인데요? 우리가 사는 세상도 아니고, 다른 차원에 가서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건 나도 마찬가지네. 전쟁은 원하지 않지. 하지만 저들이 가만있겠나?"

"가만있게 만들면 되죠."

"그것 보게. 저들은 기간트를 500기나 보냈어. 그런데 무사히 돌아가면 우리가 이기는 거지."

"그런가요?"

뭔가 헛갈리는 말이었다.

"제가 준비하라고 한 물건을 모두 챙기셨습니까?"

"물론이네. 갈고리와 밧줄, 그물도 넉넉하게 챙겼고, 비행석을 넣을 상자도 챙겼네."

"그럼 준비는 끝났군요. 출발은 언제입니까?"

"그거야 자네가 정해줘야지. 길잡이는 자네가 아닌가."

"그럼 사흘 후 새벽에 출발하겠습니다. 그때 뵙죠."

자리에서 일어섰다.

"또 어디 가는 건가?"

"저도 출발 준비를 해야죠."

"늦지 말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충!"

윌리엄 사령관에게 경례하고 밖으로 나왔다.

'여기까지 왔는데, 챙길 건 챙겨야지.'

거의 1년을 이데아 발굴지에 방문하지 않았으니, 챙길 물건이 얼마나 많겠는가!

오늘 밤에 괴조를 타고 발굴지로 갈 생각이었다.

***

밤일을 대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방해꾼이 오자, 얼마 자지 못하고 눈을 떴다.

똑똑.

"네."

문이 열리고.

블리언 빈스와 아덴 빈스가 안으로 들어왔다.

"형님! 저희가 왔습니다."

"형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순간 어이가 없었다.

97. 얼음 무덤.

97. 얼음 무덤.

"형님? 누가 너희 형님이냐?"

"왜 그러십니까. 형님?"

한 번도 타일러에게 형이라고 부른 적도 없고, 늘 무시하던 둘째 블리언 빈스와 후처의 소생이라 따로 살아서 얼굴도 몇 번 보지도 못한 셋째 아덴 빈스가 내게 형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연락 한번 없던 것들이 단체로 질척거리는군.

"바드와 에라든 남작이 내 경고를 전하지 않았나?"

"말은 전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기사들이나 해당하는 이야기지 그래도 우린 피를 나눈 형제가 아닙니까?"

"피를 나눈 형제?"

순간 두 사람을 노려봤다.

어릴 때부터 타일러를 대놓고 무시하고선 이젠 형제라는 건가?

"그땐 제가 너무 어려서 철이 없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형님."

블리언 빈스가 내게 90도로 고개를 숙였다.

"저도 지금까지 찾아뵙지도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덴 빈스도 내게 고개를 숙였다.

순간 너무 어이가 없었지만, 뭐라고 하는지 이야기나 들어볼 생각이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자리에 앉았다.

"용무가 뭐냐?"

"일단 경하드립니다. 정보국 준장으로 진급도 하시고, 황제 폐하를 구해 백작 작위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그리고 혼자 힘으로 발레리온 영지까지 얻으셨다면서요. 이는 우리 빈스 가문의 영광입니다."

"그래?"

"아버지께서도 매우 흡족해하시며 타일러 형님을 칭찬하셨습니다."

"거짓말을 하는군."

"네? 거짓말이라니요?"

"개리 해링턴 빈스 백작의 성격상 죽으면 죽었지, 날 칭찬할 분이 아니시지. 누가 내게 아부하라고 시켰느냐? 백작부인이냐?"

블리언 빈스와 아덴 빈스의 눈동자가 동시에 흔들렸다.

거짓말도 못 하는 녀석들이군.

타일러가 전에 이런 녀석들에게 무시와 놀림을 받았다니, 조금 한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난 지금 그 타일러가 아니지.

"다시 묻지 내게 원하는 게 뭐냐?"

"그러니까······."

"그게······."

둘 다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이미 짐작하고 있었기에 내가 대답해줬다.

"내가 맞춰 볼까? 가문을 위해 비행석을 빼돌려 달라고 부탁하라더냐?"

"······!"

"······예?"

두 녀석이 눈을 똥그랗게 떴다.

대답은 하지 않아도 표정으로 이미 대답했다.

난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날 죽이려 했던 백작부인이 어이없는 부탁을 하는군."

"어머니가 형님을 죽이려 했다고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둘째 블리언 빈스가 격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 없다? 내가 왜 집을 나왔는지 백작부인이 말하지 않더냐?"

"그게 무슨?"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지."

떠올리기 싫었지만, 타일러의 기억을 하나 소환했다.

"어느 날 아침에 음식이 나왔다. 난 너희들과 달리 방에서 혼자 식사했기에 자연스러운 일이었지. 그리고 습관처럼 그 음식들을 조금 덜어내 고양이에게 주었지. 그런데 그 고양이가 어찌 됐는지 아느냐? 피를 토하며 죽었다. 바로 그날이 내가 집을 도망친 날이었다. 그리고 수도로 가서 군대에 입대했지."

"진짜 어머니가 형님을 죽이려 했다는 겁니까?"

"아무리 백작부인이라도 그렇지! 어찌 영주의 자식을 죽입니까?"

블리언과 아덴이 경악했다.

이 둘은 당연히 모르는 일이겠지.

날 죽이는 것은 하녀 한 명만 동원하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이었으니까.

타일러는 늘 불안했다.

아버지가 둘째 블리언 빈스를 후계자로 삼는다곤 공표했지만, 그래도 내가 장남이었기에 방해가 될 거로 생각했는지, 백작부인은 타일러를 볼 때마다 경멸의 눈빛을 보였고, 그는 불안에 떨었다.

그래서 조심하는 습관이 생겼고, 고양이를 키운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타일러는 검술이나 마나의 재능은 없었지만, 머리는 제법 뛰어났던 것 같다.

백작부인의 마수를 벗어나기 위해 수작을 부리기 힘든 제국군에 입대한 것도 그렇고.

"그런 일이 있었다면 아버지께 말씀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아덴이 살짝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셋째는 백작부인의 아들이 아니었기에 편을 들진 않았다.

"내가 말한들 뭐가 달라졌을까? 아버지란 사람이 날 멀리하고 대화를 하지 않은 것이 그때 거의 2년이나 됐지. 못 믿겠으면 바드에게 물어봐라. 그러니 내가 이야기한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묻혔을 것이다."

블리언과 아덴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반쪽짜리 귀족인 나와 달리, 어머니도 귀족 출신인 녀석들이 내 처지를 이해할까?

어림도 없다.

"이래도 내가 너희의 형님이냐? 피가 섞였다고 다 가족이 되는 건 아니지. 썩 꺼져라! 다시 나를 형이라고 부르거나 오늘처럼 따로 찾아온다면, 그땐!"

콰앙!

주먹으로 애꿎은 책상을 부쉈다.

두 녀석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밖으로 달려나갔다.

'이젠 다시 귀찮게 하진 않겠지.'

내가 직접 겪은 일은 아니었기에 이 정도로 마무리했다.

타일러 빈스가 원한이 있는 것은 백작부인이었다.

사실 타일러의 어린 동생들이 그를 대놓고 무시한 것도 다 백작부인이 시켜서 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난 고지식한 개리 백작도 싫었고, 빈스 가문과 엮이는 것 자체가 싫었다.

윌리엄 사령관의 당부가 없었다면, 갖은 핑계를 대서라도 테레니스 영지군은 놓고 갔을 거다.

'그런데 저 녀석들 아무리 봐도 사고 칠 것 같은데······.'

그땐 군법으로 다스려야지.

***

[이데아 제국 수도 발굴지]

익숙한 나이트급 오리지널 기간트가 나를 향해 경례했다.

[충! 오셨습니까!]

로제 중령이 기간트 해치를 열었다.

"로제 중령, 어떻게 내가 올 때마다 자네가 근무를 서는 건가?"

"인연 아니겠습니까?"

"하긴 우리가 보통 인연은 아니지."

"예?"

로제 중령의 볼이 갑자기 빨개졌다.

"우린 시안 저하와 함께 적진에서 싸운 사이가 아닌가."

"아! 그렇지요."

왠지 아쉬워하는 표정이다.

"발굴 작업은 어느 정도 진행됐나?"

"저도 정확히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중간에 긴 동공을 발견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시간이 상당히 단축됐고, 그곳을 통해 황궁까지 남은 거리를 어느 정도 파악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알았네. 직접 확인해 보지."

"그런데 이제 걸어가시기엔 최종 발굴 현장까지 거리가 너무 멉니다. 안당고낙에 타고 가시죠."

발굴지 입구에 안당고낙 세 마리가 묶여 있었다.

"저 녀석들 말은 잘 들어?"

"네! 밥도 잘 먹고, 착한 녀석들입니다."

맨 처음 에테나가 키웠던 녀석들이었다.

가장 힘이 좋은 녀석을 끌고 발굴지로 내려갔다.

아마도 이것이 마지막 파밍일 것이다.

그러니 남은 사흘 동안 다 뽑아먹어야지.

***

'여기선 뭔가 건져야 할 텐데······.'

이곳까지 하루를 꼬박 하수도로 이동하면서 살폈지만,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그러다가 로제 중령이 말한 장소에 도착해 위로 올라왔다.

'허! 이 거대한 공간은 뭐지?'

화산재가 덮여 있어야 할 도시에 아주 긴 터널 같은 것이 있었다.

높이와 폭이 이백여 미터는 될 것 같았고, 길이가 수십 km은 되는 것 같았다.

주변 건물은 거의 다 파괴되어 잔해만 남았으며, 곳곳에 이끼와 물이 흘렀던 흔적만 남아 있었다.

"충! 어서 오십시오. 라임 소령입니다."

"여긴 어떻게 발견했나?"

"하수도의 막힌 부분을 뚫다가 갑자기 천장이 무너졌고, 물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그러다가 발견한 곳입니다."

"물이라고?"

"아무래도 오래전에 이곳에 지하수가 흘렀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흔적이 곳곳에 있습니다."

"다친 사람은 없나?"

"다행히 물의 양이 많지 않아 하수도로 흘러갔습니다."

살짝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수도로 막대한 지하수가 흘러 들어갔다면 작업자들은 모두 수몰당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이곳은 오랜 세월 지하수가 흐르며 흙이 쓸려서 길고 큰 구멍이 생긴 것 같았다.

"지하수 덕분에 시간을 많이 단축했습니다. 그리고 큰 공간이 생겨 흙을 외부로 빼내지 않아서 작업량도 줄었습니다."

"그건 다행이군."

그런데 한쪽에 계속 물이 흐르는 곳이 있었다.

"그런데 저 물은 어디서 흐르는 거지?"

"저쪽 끝에 흙이 무너지며 거대한 얼음 지대가 드러났습니다. 그곳의 얼음 일부가 녹아서 여기까지 시냇물처럼 계속 흐르고 있는 겁니다."

"얼음이라고? 화산 지대에?"

"네. 저도 왜 이런 곳에 얼음 지대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알았네. 여기부턴 내가 직접 살펴보지."

"시냇물을 쭉 따라가다 보면 차가운 바람이 나오는 갈림길이 있을 겁니다. 거기서 꺾어지지 마시고, 곧장 직진하십시오. 그럼 발굴 현장이 보이실 겁니다. 그리고 지반이 약해 무너지는 곳이 있습니다. 조심하십시오."

"고맙네."

난 소령이 말해준 대로 시냇물을 따라 한참을 이동했다.

그러다가 차가운 냉기 바람을 느꼈다.

난 발굴지가 아닌 얼음 지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설마 암 드로운처럼 살아 있는 거신이 있는 거 아냐?'

이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연적으로 생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암 드로운을 발견한 얼음 계곡처럼 뭔가 신비한 거신의 마법이 작동했을 수도 있었다.

'그래! 암 드로운이 썼던 얼음 마법을 다른 거신이 썼을 수도 있다.'

한참을 이동하자, 얼음물과 흙이 뒤섞여 고여 있는 커다란 웅덩이에 막혔다.

그리고 그 끝에 땅속에 박혀 있는 거대한 얼음 절벽을 발견했다. 지금 보는 것도 높이가 200여 미터나 되는데, 이 안엔 얼마나 큰 얼음이 박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대수림의 얼음 계곡보다 몇 배는 더 커 보였다.

그런데!

'여기도 얼음이 녹고 있네!'

암 드로운을 발견했던 얼음 계곡도 녹아내리고 있었다.

아마도 얼음 마법의 힘이 다했던 건 아닐까?

그래서 비슷한 시기에 녹고 있는 거고.

난 곧바로 암 드로운을 꺼냈다.

"부르셨습니까. 주군."

"암 드로운 마나의 눈으로 저 얼음 내부를 살펴봐!"

"네! 주군."

암 드로운과 나는 곧바로 마나를 눈으로 뿜어내며 얼음 절벽 내부를 살폈다.

하지만 내 마나 수색 범위는 넓지 않았기에 별다른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암 드로운의 탐색이 끝나길 기다렸다.

암 드로운의 탐색 범위는 나보다 훨씬 넓었으니까

그때 암 드로운이 내게 고개를 돌렸다.

"어때? 뭐가 보여?"

"제 탐지 범위 끝쪽에 다수의 마나가 포착됩니다."

"오! 그래! 움직임은?"

"움직임은 전혀 없습니다. 주군."

마나가 포착됐다는 것은 최소한 마나가 포함된 건물이나 장비, 아니면 거신의 갑옷이 있다는 소리였다.

문제는 당장 저 거대한 얼음을 뚫고 들어갈 방법과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난 사마귀 꼭두각시를 얼음 절벽으로 보냈다.

그리고 곧 절벽 가운데 작은 틈이 있는 걸 발견했다.

암 드로운의 탐색 범위 끝이면 내 운명의 실타래 범위를 넘어서는 깊이였다. 결국, 뭔가 챙기려면 내가 직접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래 뗏목을 만들자!'

인형의 집에서 널따란 괴수 부산물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비행석이 담긴 상자 하나를 묶자, 그럴듯한 뗏목이 됐다.

난 뗏목에 타고 부산물로 만든 노를 저어 앞으로 나아갔다.

얼음 절벽 안으로 들어오자, 생각보다 틈이 넓었다.

킹콩인형 정도는 지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여기 얼음이 녹은 건 몇 년 됐나 보네······.'

내가 지나고 있는 길은 도시의 골목으로 길은 건물과 건물 사이의 길이었다.

좌우로 40, 50미터 높이의 집들이 보였고, 어떤 집은 얼음이 많이 녹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얼음물 위에 떠 있는 거신의 시체도 보였다.

혹시 몰라 손을 대봤지만 죽어 있었다.

다행히 차디찬 얼음물 때문에 시체의 부패는 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음 속에도 죽은 거신 시체가 제법 많이 보였다.

킹콩인형에게 망치를 들려줘서 얼음 깨서 살펴봤지만, 역시나 모두 죽어 있었다.

마나를 다루는 기사가 아니어서 그런지, 아니면 암 드로운이 특별한 건지 살아 있는 거신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아이들과 갓난아이를 들고 도망치는 여자 거신도 있었다.

그들 대부분 무언가에 놀라 한쪽으로 도망치고 있었고, 절망에 휩싸인 표정이었다.

이곳은 거대한 얼음 무덤이었다.

난 죽은 거신들의 명복을 빌어줬다.

한참을 더 들어가자, 길 끝에 커다란 돔형 건물이 보였다.

그리고 그 건물 위쪽 얼음 속에 양손을 높이 들고 있는 10미터 크기의 여자 거신 한 명이 보였다.

그녀는 백색의 로브를 입고 있었다.

98. 마지막 파밍.

98. 마지막 파밍.

분명 거신 마법사다!

전에 발굴지 초입에서 툭 건들자마자 마나 반지를 떨구고 먼지가 되어 흩어졌던 거신 마법사와 색깔만 다르지 똑같은 로브를 저 여자 거신이 입고 있었다.

지금 돔 건물 위쪽은 얼음에 완전히 덮여 있었고, 거신 마법사는 그 지붕 위에 있었다.

'아무래도 저 거신이 있는 곳까진 얼음을 깨 봐야겠지?'

상당한 시간과 노동력이 필요해 보였다.

하지만 지금 에테나가 끼고 있는 마나 팔찌 같은 마법 아이템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조금의 수고로움은 당연한 것이다.

'암 드로운! 그리고 다들 기간트를 가지고 나와!'

쓰으윽!

쿵! 쿵! 쿵!

다행히 돔 앞쪽은 거의 얼음이 녹은 상태라 공간이 넓기에 내 마법인형을 총출동시켰다.

"다들 잘 들어, 이제부터 저기 지붕까지 얼음을 깨고 올라가야 해! 그리고 저 거신을 바닥에 내리는 거야."

[주군, 시간이 꽤 많이 걸릴 겁니다.]

"어쩔 수 없지."

[천장의 얼음이 언제 무너질지 모릅니다. 그러니 일단 한쪽 얼음을 깨서 구멍을 뚫고, 계단을 만들어 올라가 보겠습니다.]

내 자동인형 웨슬리가 의견을 냈다.

나도 그의 의견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리고 시간이 없었기에 작업을 서둘러야 했다.

그때 암 드로운이 돔 내부를 살피고 돌아왔다.

"주군! 돔 내부의 얼음은 거의 녹은 상태입니다."

"그래?"

"차라리 내부에서 비공정을 꺼내. 천장까지 올라가서 돔 지붕을 깨고, 저 위로 접근하면 어떻겠습니까?"

"아! 그래 우리에겐 비공정이 있지!"

마음이 급했기에 미쳐 비공정을 생각지 못했다.

드워프제 비공정 5척은 대포를 장착하기 위해 난민 기지에 놓고 왔지만, 엘프 비공정은 가지고 왔다.

돔 안으로 들어가 암 드로운과 제일 작은 폰급 기간트 2대를 비공정에 태웠고, 자동인형 둘이 비공정을 조종하게 했다.

거신 마법사를 꺼내는 작업은 암 드로운에게 맡겼다.

그리고.

"웨슬리와 나머진 이 주변의 얼음을 깨고 쓸만한 물건을 찾아봐."

[네! 주군.]

그리고 난 마나를 뿜어내는 눈으로 다른 자동인형들과 돔 내부를 뒤졌다.

이 돔 전체와 기둥에서 희미한 푸른빛을 뿜어내고 있었기에 외부에선 마나를 제대로 탐지하지 못했기에 내부를 돌아다니며 일일이 조사해야 했다.

'오! 있다!'

그리고 뭔가를 발견했다.

복도 끝에 있는 방에서 여러 가지 빛이 반짝인다.

서둘러 달려갔다.

하지만 그 방은 얼음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웨슬리! 이리 와서 이 얼음 좀 부숴!"

[네! 주군!]

웨슬리가 룩급 기간트에 타고 다가왔다.

기이잉! 쿵! 쿵!

그리고 메이스로 방 입구의 얼음을 부수기 시작했다.

인간의 힘으로 거신의 방에 있는 얼음을 다 깨려 했다면, 엄청나게 오래 걸리겠지만, 11미터의 기간트가 쉴새 없이 때리자, 안쪽에 얼음이 쫙쫙 갈라졌다.

그리고 곧 입구에 얼음이 부서졌다.

[모두 이쪽으로 와서 얼음을 부숴라!]

웨슬리가 입구를 뚫고, 다른 기간트를 불렀다.

기간트 5대가 추가되자, 작업은 훨씬 빨라졌다.

거기에 괴수 마법인형들까지 꺼내서 부순 얼음 덩어리를 한곳으로 치웠다.

[주군, 큰 얼음은 모두 치웠습니다.]

"고생했다!"

나 역시 나이트급 오리지널 마장기에 올라탔다.

아무래도 거신의 눈높이와 비슷해야 수색이 수월했으니까.

그리고 방 내부로 들어가 커다란 책장의 아래를 열었다.

그러자 그 안에서 반짝이는 물체를 찾았다.

'오! 속성 마석이다!'

여섯 가지 색깔의 속성 마석들이 보라색 보자기에 잘 싸여있었다. 게다가 크기도 상당히 컸다.

속성 마석이 새겨진 아이템도 좋았지만, 지금 내겐 눈앞에 속성 마석이 더 필요했다.

마법진이 부족하거나 없는 오리지널 기간트가 있었으니까.

'와우! 화염 속성 마석도 2개나 있네!'

이 화염 마석만 있으니, 이제 화염 마법진을 기간트에 새길 수 있었다.

그리고 발굴지 입구 근처에서 맨 처음 찾았던 거신 마법진을 활성화할 수도 있었다.

마지막에 득템했네.

속성 마석들을 조심히 챙겼다.

그리고 다시 마나를 품은 눈으로 방을 뒤졌다.

'이건 뭐지?'

벽장 안에 긴 상자가 하나 있었다.

상자 내부에서 아주 진한 푸른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하지만 상자가 잠겨 있었다.

[웨슬리, 이거 부숴!]

[네! 주군.]

웨슬리의 룩급 기간트가 메이스로 사정없이 때리자, 상자가 박살 났다.

그리고 안에서 5미터 길이의 나무 몽둥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그건 지팡이였다.

'마법의 지팡이인가?'

지팡이 끝에 푸른 마석이 박혀 있었고, 상당한 마나가 느껴졌다.

S등급 마석인가?

자세히 보니 지팡이에 크고 작은 수십 개의 마법진이 그려 있었다.

[웨슬리, 지팡이를 들어.]

[네!]

웨슬리가 지팡이를 들었다.

[어때? 뭔가 변화가 있어?]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변화가 없어?]

조금 아쉬웠다.

거신 전용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게 주게.]

내 오리지널 마장기로 지팡이를 직접 들어봤다.

'뭐, 뭐야?'

화아아아아!

순간 입을 떡 벌렸다.

지팡이에서 내 몸속으로 마나가 미친 듯이 밀려왔다.

등 뒤에 있는 마장기의 마석 배터리에서 나온 마나와 합쳐지더니, 내 몸과 마장기 주변을 계속해서 휘몰아쳤다.

순식간에 엄청난 기운의 마나가 느껴졌다.

'마나 증폭이구나!'

단순히 마나만 늘어난 것이 아니었다.

뭔가 마나의 밀도가 커졌다고 해야 할까?

몸속의 마나가 팽창하며 끓어 오르는 느낌도 있었다.

왠지 지금 상태면 나도 기간트에 타고 검이나 다른 무기에 마나를 불어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 겪어보는 느낌에 기대감이 차올랐다.

그런데 난 지팡이의 마나가 느껴지는데, 웨슬리는 왜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했지?

치이잉! 철컥!

마장기에서 내려 지팡이를 직접 만졌다.

그러자 조금 전처럼 내 몸속에 마나가 증폭됨을 느꼈다.

"웨슬리, 이리 와서 직접 만져봐."

웨슬리도 기간트에 내리게 하여 지팡이를 만지게 했다.

"주군! 마나가 엄청나게 늘었습니다!"

직접 만지면 웨슬리도 큰 변화가 있었다.

그러니까 마장기나 기간트에 타서는 아무나 이 마법 지팡이의 기운을 느끼지 못한다.

잘은 모르지만, 나처럼 기간트나 마장기 싱크로율이 100% 가까이 돼야 이 마법 지팡이의 기운을 느낄 수 있어 보였다.

그럼 암 드로운도 가능하겠네.

다시 마장기에 올라탔다.

해치가 닫히고 오른손으로 지팡이를 들자, 다시 마나가 폭풍처럼 밀려왔다.

'한번 실험해 볼까?'

왼 주먹을 쥐고 가슴에 댔다.

그리고 마나를 가슴과 손으로 동시에 보냈다.

파지지지직!

선명한 붉은 마법진이 손바닥 위에서 이글거렸다.

손바닥을 앞으로 펼쳤다.

[플레임 더스트!]

팟! 파파파파팟!

손바닥 마법진에서 십여 개의 불꽃이 퍼지며 날아갔다.

펑! 퍼퍼퍼퍼펑!

큰 화염과 함께 불꽃들이 터지고, 주변이 뿌연 연기로 가득했다.

'오오! 블레임 더스트 마법의 위력이 커졌어!'

시뻘겋게 타오르는 불꽃도 배 이상 크고 강해졌고, 연기도 더 진해지고, 멀리 퍼졌다.

게다가 아직 마나도 많이 남았다.

와! 이건 정말 득템이네!

이 지팡이를 들고 있으면 거신 마법을 연속으로 여러 번 쓸 수 있었다.

'화염 속성 마석도 있으니, 이참에 마장기에 화염 마법진도 더 그려야겠다.'

화염의 탑에서 그려온 화염 마법진을 이제야 쓸 수 있었다.

'더 뒤져보자!'

난 계속해서 마나를 눈으로 뿜어내며 돔 내부를 샅샅이 뒤졌다.

평소엔 이렇게 오래 마나를 뿜어내는 눈을 유지할 수 없었지만, 이 마법의 지팡이 덕분에 가능했다.

아쉽게도 십여 개의 방을 모두 뒤졌지만, 별다른 아이템은 없었다.

그런데 지하실에서 뭔가 포착됐다.

'뭐지? 백색 아지랑이?'

백색의 빛과 함께 이글거리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모두 뚫어!]

웨슬리와 자동인형의 기간트를 이용해 지하실로 향하는 얼음을 깨고, 지하실로 들어갔다.

그곳엔 커다란 상자가 있었다.

난 상자를 열었다.

'헉! 이, 이거 그거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다들 뒤로 물러서!]

자동인형들을 뒤로 물렸다.

그래 맞아! 암 드로운이 썼던 그 얼음 구슬이야!

성인 몸통만 한 구슬이 상자 안에 들어 있었다.

이건 냉기의 핵폭탄과 같은 물건이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셋!

원래 열두 개가 들어 있었던 상자였는데, 지금은 3개만 남았다.

난 다시 조심스럽게 상자를 닫았다.

'휴! 저게 터지면 끝장이야!'

어쩌면 십만 년 후에나 내 시체가 누군가에게 발견되겠지······.

이걸 어쩌지?

여기에 그냥 놔둘까? 아니면 챙겨?

내가 이걸 쓸 일이 있을까?

그 순간 암 드로운의 일화가 생각났다.

괴수를 상대하다가 최후의 순간에 이걸 썼었지.

어쩌면 나도 쓸 일이 있을지도 몰랐다.

'주군! 천장을 뚫었습니다.'

'알았다. 그리 가지.'

일단 상자를 조심스럽게 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엔 얼음에 뒤덮인 거신 마법사가 있었다.

마장기에서 내려와 거신 마법사를 올려다보았다.

"와! 아름답네."

백옥 같은 피부와 흰색 로브 때문인지 꼭 천사 같았다.

엄청나게 큰 천사.

"암 드로운, 조심스럽게 깨!"

"네! 주군."

암 드로운이 혼자 맡아서 거신 마법사 주변의 얼음을 깼다.

그러다 거신의 얼굴 부위 얼음이 떨어져 나갔다.

쿵!

"헉! 눈을 떴다!"

척! 처처척!

순간 자동인형들도 놀라서 기간트의 무기를 겨눴다.

"괜찮으니까, 다들 물러서!"

아직 몸은 얼음에 갇혀 있음에도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였기에 소름이 돋았다.

'정말 살아 있다니!'

게다가 몸에 상처도 없어 보였다.

암 드로운은 서둘지 않고, 거신 마법사의 얼음을 하나씩 제거했다.

곧 몸통이 나오고, 팔과 다리의 얼음 속박이 풀리자.

쿵! 쿵!

"커억!"

거신 마법사가 무릎을 꿇고 숨을 토해냈다.

"하악! 하악!"

그녀는 머리를 크게 흔들기 시작하더니, 양손으로 머리통을 쥐어짜듯이 움켜잡았다.

"으아아아아악!"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목소리에 기운이 펄펄 느껴지는 것이 다행히 신체는 건강해 보였다.

얼음 속에 인고의 세월을 버텼을 텐데, 어떻게 버틴 거지?

뇌가 버티지 못해 미쳤나?

궁금증이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거신 마법사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렸다.

그녀가 갑자기 일어섰다.

눈빛이 고요해지더니,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암 드로운을 보며 시선이 멈췄다.

"그대에게 냉기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얼음의 마전사여!"

암 드로운은 나를 쳐다봤다.

"주군! 이 여자가 정신을 차린 듯 보입니다."

그 순간 여자 마법사가 날 내려다봤다.

"주군? 주군이라고?"

"놀라지 마시오. 마법사여!"

여자 마법사는 내가 거신어를 완벽하게 하자 눈을 똥그랗게 떴다. 살짝 놀란 것 같았다.

"궁금한 것이 많을 것이오. 내 의식을 들여다보시오. 그럼 이해할 것이오."

그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온통 검은색으로 변하며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

이건 거신의 의식 마법.

어느새 난 그녀의 의식 속을 들여다본다.

휘이이이잉!

하늘에서 거대한 불꽃이 떨어진다.

콰앙! 쾅!

"으악!"

"도망쳐!"

콰콰쾅!

사방에서 화염이 치솟고, 건물이 무너지고, 사람이 죽는다.

"으아아악!"

뜨겁다!

사방이 불길이다.

'여긴 불지옥이네!'

그때 그녀의 의식이 흘러들어온다.

의식의 흐름 속!

이곳은 이데아 제국의 수도.

이곳 화산은 역사를 기록한 후로 한 번도 활동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대지가 들끓고 곳곳에 지진과 화산이 터지고 있었다.

이데아 제국의 마법사들은 이 사태의 원흉을 알고 있었다.

레기우스와 불카누스!

몸길이가 3km나 되는 화염의 거수 불카누스가 입에서 화염을 뿜어내면 단숨에 산도 녹일 정도였다.

그리고 그 불카누스를 조종하는 20미터 크기의 거신 괴수 레기우스!

그는 한때 이데아 제국의 위대한 열두 기사였다.

화염 마탑의 주인이자, 이 땅의 마지막 드래곤 불카누스의 주인.

레기우스와 불카누스는 이 땅에 떨어진 초거수를 상대하기 위해 수많은 영웅과 또 다른 열두 기사와 함께 저주의 땅으로 향했다.

원정대는 최강의 전력이었지만,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보았다.

그래도 수백 일 동안 치열한 싸움 끝에 초거수를 죽여 승리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초거수의 새끼가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