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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거신 마법사.

99. 거신 마법사.

기사들과 영웅들은 악의 씨앗인 새끼를 죽이려 달려들었지만, 초거수가 죽으며 흘렸던 피의 강에서 포자가 사방으로 뿜어졌고, 그 포자를 흡입했다.

그건 끔찍한 저주였다.

포자를 흡입한 거신들은 전부 몸집이 거대해지고, 레기우스는 몸 안에서 불꽃이 터지며 온몸이 화염에 이글거리는 괴물이 됐다.

그의 드래곤 불카누스 역시 포자에 중독돼 변이됐고, 초거수의 피를 마시고 더 거대하게 변해 화염과 재를 뿜어내는 거수가 됐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열두 기사 중에서 다섯이 더 포자에 중독되었고 이십여 명의 영웅이 저주를 받아 끔찍하게 변했다.

살아남은 기사들과 영웅들은 그들을 구할 수 없었다.

자신들 역시 저주의 포자에 중독될 수 있었기에 그저 그 자리를 피해 도망쳐야 했다.

이건 내가 화염의 탑에서 봤던 벽화의 이야기와 조금 달랐다.

초거수를 죽이고, 포자가 퍼지며 거신들과 생명체들이 변한 그림은 있었지만, 레기우스와 불카누스의 이야기는 없었다.

아마도 화염의 탑의 주인이었던 그와 마지막 화염 드래곤의 명예를 지키고 싶었나 보다.

그때 다급한 그녀의 의식이 흘러들어왔다.

'얼마 전 레기우스와 불카누스가 제국 북쪽의 도시를 공격해 잿더미로 만들었고, 우린 그놈을 사냥하기 위해 얼음 원정대를 보냈습니다.'

그 화염의 괴수들을 죽일 방법은 빙결의 오브 뿐이었다.

원정대는 다섯 개나 되는 오브를 가지고 갔지만 실패했다.

그리고 화가 난 레기우스와 불카누스가 수도 근처의 화산에 수작을 부린 것이 틀림없었다.

그 결과로 지금 제국의 수도가 화염에 잠긴다.

다른 마법사들은 살기 위해 피신했지만, 한 여자 마법사는 이곳 마법의 회당에 남았다.

그녀의 이름은 알리사 엘가.

얼음의 마법사이고, 제국의 위대한 열두 기사인 마그리스의 제자였다.

그리고 지금 나와 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콰앙!

"크윽!"

마법의 회당이 크게 흔들렸다.

화산이 뿜어내는 불덩이에 맞은 듯했다.

마법의 회당엔 방어 결계가 있었지만, 오래 버티진 못한다.

'어쩌면 당신을 위해 내가 이 마지막을 준비한 것 같군요.'

그녀는 지금 내게 속삭이고 있었다.

알리사 엘가는 지하로 내려가 상자를 열고 빙결의 오브를 3개를 꺼냈다.

이거면 충분하리라!

얼음의 마법사는 이 마법의 회당을 후대에 남기기로 했다.

이곳은 자신의 스승이 만든 곳이었고,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마법을 배우던 추억의 장소였다.

그녀는 힘겹게 회당의 지붕에 올라갔다.

거센 화염의 바람이 불어왔지만, 그녀를 막진 못했다.

그녀가 손에든 빙결의 오브를 향해 마나를 뿜어낼 때였다.

쩍! 쩌저저적!

콰앙! 퍼어엉!

쏴아아아아!

"까아악! 댐이 터졌다!"

"아아! 신이시여!"

하늘에선 화염의 불덩이가 떨어지고, 지상은 거센 물살이 강을 따라 태산처럼 밀려온다.

뭐가 먼저 올지는 모르지만, 오늘 자신과 저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은 다 죽는다.

야속하게도 거센 물이 먼저 밀려오고, 사람들은 반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 지옥에서 피할 길은 없다. 그들은 그저 본능적으로 달리는 것이다.

쾅! 쏴아아아아!

이윽고 거센 물살이 회당을 휘감자, 알리사는 빙결의 오브를 들었다.

생존 확률은 3%.

확률은 극악이었지만, 어쩌면 스승이 자신을 찾아 구해줄 수도 있었다. 이건 그녀의 마지막 희망이기도 했다.

거신 마법사가 빙결의 오브를 향해 마나를 뿜어내고 강하게 움켜줬다.

콰직! 콰직! 콰직!

3개의 구슬이 연이어 깨졌다.

알리사가 손을 높이 들었다.

손 주변으로 엄청난 냉기가 휘몰아치며 주변이 빠르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쩍! 쩌저저적!

마법사는 눈을 감고 마지막 주문을 외우고 호흡을 삼켰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크헉! 헉헉!"

거친 호흡을 내뱉었다.

그녀의 의식이 끊겼다.

난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들자, 날 바라보는 알리사.

내가 그녀의 의식을 볼 때, 그녀 역시 내 의식을 봤다.

난 지금 장면 말고도 여러 가지 장면을 봤다.

하지만 그녀는 암 드로운처럼 내 안에 더 많은 것을 들여다봤을 것이다.

그때 알리사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 뺨을 타고 볼을 적셨다.

"그랬군요. 우리는 사라졌군요."

순간 뭐라 위로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슬픔은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나도 멸망한 세상에서 왔으니까.

"마그리스 스승님도, 이데아 제국도, 거신들도 이젠 없군요."

"당신과 여기 암 드로운이 남아 있지 않소."

내 말에 알리사 엘가는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암 드로운을 쳐다봤다.

"이제야 당신을 알아보겠군요. 당신은 말라기님의 제자인 암 드로운 경입니다."

"말라기?"

암 드로운이 순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그 이름을 몇 번이나 되뇌고 있었다.

잠재된 기억이라도 있는 건가?

"말라기님은 제국의 위대한 열두 기사이고, 마법과 검을 함께 다루는 마검사셨죠. 당신을 매우 아꼈던 기억이 납니다."

"그의 기억은 없소. 난 타일러 주군을 섬기는 기사고, 그분의 검이요."

알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암 드로운 경은 저분으로 인해 다시 태어났다는 걸."

내 의식을 들여다본 알리사는 내 인형술사 능력 또한 알고 있었다.

그녀가 날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마도 제가 살아난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타일러님."

"그게 무슨 말이오?"

"타일러님과 협력하여! 괴수와 싸우겠어요. 그리고 저주받은 레기우스와 불카누스를 반드시 제 손으로 죽이겠습니다."

그녀는 암 드로운과 같은 말을 했다.

암 드로운 역시 괴수 드라우켄을 죽여달라는 유언을 했었지.

아마도 그 복수의 일념 때문에 극악의 확률을 뚫고 얼음 속에서 생존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아주 오랜 세월이 흘렀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바뀌었소."

"아닙니다. 그 괴수들은 분명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전 타일러님의 의식 속에서 이미 그 괴수를 봤습니다."

"뭐요? 어디서?"

"드워프 차원에서 보았습니다."

"서, 설마? 그 대군주?"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알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는 저주를 받아 변이된 거신 영웅입니다. 그러니 다른 거신 괴수들도 살아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왜 드워프 차원에 있는 거요?"

"그건 저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살아 있고, 언젠가 이곳 세상으로 다시 돌아올 거라는 겁니다. 그러니 전 타일러님과 협력해 함께 싸우겠습니다. 그것이 제가 살아난 이유입니다."

거신 마법사가 나와 함께 한다는 건 좋았지만, 갑작스러운 거신 괴수들의 이야기에 생각이 많아졌다.

정말 그들이 이곳 세상에 다시 온다면 우리 힘으로 상대할 수 있을까?

"이길 가능성은 있습니다. 이데아 제국에 없었던 비공정도 있고, 이계의 협력자들도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타일러님이 있고요."

그녀는 내 의식을 봤기에 내 속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리고 날 너무 높이 평가하는 것 같았다.

"인간이 대수림에 온 것이 300년이 지났소. 하지만 당신이 말한 그 거신 괴수들은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소. 그러니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소."

"물론 몇백 년이 지나도 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언젠간 올 것입니다."

"그럼 그건 다음 세대의 몫이 되겠군."

우린 그저 지금 상황에 맞게 열심히 살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겐 헬다임 장벽이 있다.

여차하면 모두 데리고 장벽 너머로 도망치면 된다.

혹여 그런 일이 일어날까, 장벽 안에 영지를 만든 것이기도 하고.

"이 마법 지팡이는 당신 것이오?"

오리지널 마장기가 들고 있는 지팡이를 가리켰다.

"아닙니다. 그건 제 스승님께서 쓰시던 지팡이입니다."

"그럼 당신이 가져가시오."

알리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어찌 스승님의 물건을 쓰겠습니까. 제게도 마법 지팡이는 있습니다."

그녀는 로브 속에서 작고 얇은 지팡이를 꺼냈다.

내가 보기엔 스승의 마법 지팡이가 크고 훨씬 좋아 보였다.

"정말 필요 없소?"

알리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전 어딜 좀 다녀오겠습니다."

"······?"

"전에 포털 마법진을 보셨지요."

순간 발굴지 입구에 있던 커다란 마법진이 떠올랐다.

"그게 포털 마법진이요?"

"그렇습니다. 그 포털은 다른 세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포털 사용은 금지됐지만, 타일러님의 기억을 보면 일부 마법사들이 포털 마법진을 이용해 그쪽 세상으로 탈출한 것으로 보입니다. 전 그들을 찾아서 이곳으로 데려오겠습니다."

다른 세상으로 넘어갔다고 해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흘렀기에 그들이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확신은 없었다.

운이 좋아 살아 있다고 해도 지금 이곳의 인간들처럼 작아지고, 거신 마법도 제대로 쓰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실망할 수도 있소."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거신 마법사들의 후손이라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 방문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허락해 주십시오."

알리사는 지금 내게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포털 마법진을 쓰려면 속성 마석이 필요하지 않소?"

"제게 남은 것이 있습니다. 한 번 다녀올 정도는 됩니다."

"내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가지 않을 것이오?"

"네! 저도 엘프 차원에 가서 암 드로운 경과 함께 곁에서 타일러님을 돕겠습니다."

거신 마법사가 함께 간다면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암 드로운처럼 내 마법인형이 아니었기에 인형의 집에 넣을 수도 없었고, 10미터나 되는 거신을 이곳에서 데리고 나가는 것부터가 큰 문제였다.

그리고 이번 엘프 차원 원정은 긴 원정이 될 것이다.

그동안 윌리엄 사령관과 다른 사람들의 눈을 계속 속일 순 없었다. 그렇다고 거신 마법사의 존재를 당장 알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권력가들은 알리사를 이용하려고만 할 테니까.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소?"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곳은 금지된 땅이라 정보가 없습니다."

"돌아올 때도 이곳 포털 마법진으로 오는 거요?"

"네. 그렇습니다."

"그럼 1년 후에 이곳에서 만나기로 합시다."

"알겠습니다."

그때라면 이미 이데아 황궁도 발굴했을 거고, 지키는 사람도 뜸할 것이다.

그녀를 기간트로 위장할 갑옷도 준비하면 되고.

난 얼음을 깨면서 알리사를 얼음 절벽에서 데리고 나갔다.

하수도 통로 입구를 지키는 기사와 병사들에게 음식과 술을 나눠주고 시선을 돌렸고, 그 틈에 알리사는 지하도로 내려갔다.

그리고 우린 발굴지 입구로 향했다.

***

우린 메인 하수도로 이동하다가 포털 마법진이 있는 작은 하수도로 이동했다. 안쪽으로 300여 미터를 더 들어와 하수도 상부를 뚫고, 포털 마법진이 있는 방으로 올라갔다.

다행히 지금은 흙을 외부로 퍼 나르지 않아도 됐기에 하수도에 작업용 기간트도 없었다.

알리사가 마법진 주변에 속성 마석을 배치했다.

"이제 중앙에 서서 마법진에 마나를 뿌려주기만 하면 마법진이 발동됩니다."

알리사가 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잠깐 기다리시오."

난 입술을 깨물고 거신인형을 쳐다봤다.

"암 드로운, 앞으로 나오게."

척!

암 드로운이 나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대에게 임무를 내리겠다. 지금부터 알리사 엘가를 보호하고, 1년 후에 이 자리로 무사히 돌아오게."

"주군의 명을 받습니다."

알리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암 드로운 경은 타일러님께 가장 필요한 기사가 아닙니까!"

"그렇소. 눈치를 보아하니, 그곳도 안전한 곳은 아닌 것 같소. 그러니 호위가 필요할 것이오."

"하지만 이렇게까지······."

그를 보낸다는 것은 내 전력의 절반 이상을 보내는 것과 같았다.

그걸 알고 있었기에 알리사가 저리 놀란 표정을 짓는 것이다.

"괜찮소. 그대가 나와 함께 하기로 했으니, 그대를 보호하는 것도 내 의무요. 무사히 다녀오시오."

"타일러님은 역시 다정한 분이시군요.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조금 전에 속성 마석을 내려놓는 그녀의 손이 떨고 있었기에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녀 역시 미지의 세상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우리의 전력 향상을 위해 스스로 모험을 떠나려는 것이다.

알리사와 암 드로운이 마법진 중앙에 섰다.

"다녀오겠습니다. 타일러님!"

"다녀오겠습니다. 주군!"

알리사가 손을 뻗어 마나를 뿜어내자 사방이 번쩍이더니, 두 사람이 포털 마법진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갔네.'

암 드로운을 보낸 건 잘한 걸까?

그가 없으니 왠지 허전했다.

만약에 그녀가 마법사들을 데려올 수 있다면, 그들 또한 내 전력이 될 것이기에 마음을 가다듬었다.

"주군, 그만 가시죠."

웨슬리가 말했다.

'그래! 곧 만나겠지.'

사실 알리사가 했던 말이 어제부터 계속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다.

드워프 차원의 대군주.

그리고 레기우스와 볼카누스.

다른 거신 괴수들까지.

어쩌면 나중에 그것들하고 싸워야 하지 않을까?

만약 그 불길한 일들이 벌어진다면, 거신 마법사는 큰 도움이 된다.

그녀의 마법 실력은 그녀의 의식 속에서 봤으니까.

'나도 실력을 더 끌어올려야겠어!'

난 이번 원정에 비숍급 오리지널 기간트를 타고 합류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괴수를 잡아 주춤한 레벨을 더 올려 마법인형도 늘리고, 더 강한 기간트도 많이 만들 생각이었다.

100. 원정의 목표.

100. 원정의 목표.

[블랙힐 전진 기지]

기이잉! 쿵! 쿵!

"어? 오리지널 기간트다!"

"비숍급이네, 어디 소속이지?"

일찌감치 출발 대형을 갖춘 병사들의 시선이 몰렸다.

그리고 탐승을 준비하던 기간트 기사들 역시 새로 등장한 기간트가 신기한 듯 쳐다봤다.

일반 기간트도 아니고 오리지널 기간트였기에 당연히 신경이 쓰이겠지.

[정지!]

[멈춰라!]

블랙힐 기지 주변을 지키던 5군단의 기간트들이 내 앞을 막아섰다.

[누구냐? 소속을 밝혀라!]

대답 대신 기간트 해치를 열었다.

위이이잉! 치이익!

[충! 들어가십시오. 타일러 빈스 준장님!]

날 알아본 기사들이 경례를 하고, 기간트를 옆으로 비켜섰다.

기간트를 몰고 야영지 안으로 들어갔다.

난 지금 비숍급 오리지널 기간트인 "크리드"에 타고 있었다.

"세상에! 방금 타일러 준장님이었어!"

"뭐? 정보국 준장이 기간트에도 탄단 말이야?"

"그런데 저 오리지널 기간트는 뭐지? 처음 보는데?"

기간트 기사들이 쑥덕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곳에 오기 전에 크리드에 3가지 마법진을 새겼다.

[플레임 더스트]

[파이어 버스트]

[어스 웨이브]

플레임 더스트는 십여 개의 불꽃을 쏘아 2분간 연막을 만들고, 파이어 버스트는 원하는 한 지점에 강한 화염 폭발을 일으킨다.

그리고 대지 마법인 어스 웨이브는 지면에 강한 충격을 주어 전방의 땅이 파도처럼 너울거리는 마법으로 상대의 중심을 흐트러트리고 넘어트리는 마법이었다.

세 가지 마법진 모두 괴수와의 전투를 염두에 둔 세팅이었다.

쿵! 쿵!

난 지휘 천막 근처에 기간트를 세웠다.

해치가 열리고 내가 내리자, 주변에 있던 기사들의 시선이 모였다.

그리고 에테나가 다가왔다.

"타일러님, 기간트에 타는 걸 공개해도 괜찮아요?"

"괜찮아. 이미 눈치챈 사람들도 많고. 어차피 길잡이도 해야 하잖아."

그동안은 내 실력을 꼭꼭 숨겨두었지만 이젠 드러낼 때가 됐다.

이제 난 발레리온 영지의 영주기도 하니까.

"응? 타일러 준장. 이 오리지널 기간트는 뭔가?"

막 자신의 텐트에서 나온 매러덕 소장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발레리온 영지의 기간트입니다."

"발레리온 영지?"

매러덕 소장은 처음 듣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발레리온은 중급 영지 중에서도 작은 편에 속했고, 병력도 적고 기간트가 한 대도 없었기에 들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아니지.

"설마, 이거 자네가 타고 온 건가?"

"네. 맞습니다."

"뭐라고?"

매러덕 소장은 놀람을 넘어 입을 떡 벌렸다.

"정보국 준장이 비숍급 오리지널 기간트에 타는데, 내가 그걸 몰랐단 말이야?"

"원래 정보국은 비밀이 많은 곳이 아닙니까.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난 고개를 숙였다.

"에테나! 기간트 잘 지켜!"

"네! 영주님!"

내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기에 에테나가 나를 부르는 호칭도 바뀌었다.

역시 눈치는 참 빨라요.

지휘 천막 앞에서 날 빤히 쳐다보고 있는 윌리엄 사령관을 향해 걸었다.

"근데 우리 제국에 이런 기간트가 있었나?"

등 뒤에서 매러덕 소장의 혼잣말이 들렸다.

윌리엄 사령관은 내가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벌써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타일러 준장, 자네 도대체 날 몇 번이나 놀라게 할 생각인가?"

"기간트 말입니까? 제가 마나를 느꼈다고 전에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리고 글래디스 하사가 보고했을 텐데요?"

"그랬지. 하지만 그게 2년 전이야. 그런데 오늘 비숍급 오리지널 기간트에 타고 나타났지 않은가! 이게 말이 되는 거야?"

"제가 원래 천재였나 보죠."

"허!"

윌리엄 사령관이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엠버 대령은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응? 자넨 또 왜 그래?"

"시, 싱크로율이······."

엠버 대령은 내가 크리드를 타고 오는 모습을 봤으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거다.

사람이 걷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보였겠지.

난 기간트 싱크로율이 100%에 육박했으니까.

윌리엄 사령관이 날 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이렇게 기간트와 실력을 막 드러내도 괜찮은 건가?"

"이번이 제 제국군 소속 마지막 원정입니다. 그러니 제대 전에 제국의 기사들에게 소문을 퍼트려야죠. 그래야 나중에라도 우리 영지로 기사들이 좀 모이지 않겠습니까."

"응? 정보국을 떠날 생각인가? 찰스 국장이 섭섭해하겠군."

윌리엄 사령관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어떤가? 우리 북부군으로 오는 것이? 내가 아주 잘해주······."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저도 이제 제 영지를 위해 일해야죠. 발레리온 영주가 된 지도 벌써 1년이 넘었는데, 아직 영지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그게 벌써 1년이 지났다고? 허허! 시간 참······."

"그리고 영지민들은 영주가 바뀌었는지도 모를 겁니다. 그래도 사령관님께서 힘써주신 덕분에 대수림에도 영지가 생겼으니, 대수림을 오가며 얼굴은 자주 뵙겠네요."

"쩝. 벌써 마음을 굳힌 거 같으니, 어쩔 수 없군. 대신 이번 원정대에선 자네 능력을 최대한 많이 발휘해주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숨겨뒀던 기간트도 끌고 나온 거 아닙니까."

난 사령관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윌리엄 사령관이 피식 웃었다.

"그런데 저 오리지널 기간트는 어디서 났나? 난 처음 보는군."

"제국에 선보인 적이 없는 기간트입니다.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지. 우리 제국에서 훔친 건 아니지 않나?"

"물론입니다."

가디언 제국에서 훔쳤거든요.

그때 윌리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간트에 타고 온 것을 보니, 혹시 자네가 선두로 나서려는 건가?"

"네! 어차피 제가 길잡이가 아닙니까. 기간트 기사 10명만 뽑아주십시오. 갈 길이 머니 선발대를 이끌고 쭉쭉 전진하겠습니다."

"하지만 자네가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 아닌가?"

"제가 쉽게 당할 놈입니까? 위험하면 물러설 테니,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윌리엄 사령관이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자넬 믿어보지. 기사들은 바로 뽑아서 보내줄 테니 선두에서 기다리게."

"충! 가보겠습니다."

난 에테나와 입구 쪽으로 향했다.

***

드디어 원정의 시작이다.

이번엔 임하는 각오가 남달랐다.

내가 A등급 헌터로 올라간 것도 1년이 훌쩍 넘었다.

하지만 레벨은 53.

겨우 2레벨이 올랐을 뿐이었다.

이 속도면 S등급 헌터가 되기 위해선 4년은 더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이것도 전생보다는 2배나 빠른 것이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너무 느렸다.

인간형 마법인형은 운명의 실타래가 50개면 충분하지만, 거신 마법인형과 괴수 마법인형은 운명의 실타래가 훨씬 많이 필요하다.

암 드로운은 150개, 그리고 킹콩인형은 200개, 괴조인형은 거대한 날개 때문에 무려 500개나 되는 운명의 실타래를 사용해야 했다.

그랬기에 지금은 운명의 실타래가 부족했고, 마법인형을 늘릴 여유가 없었다.

인형술사가 마법인형을 늘릴 수 없으면 그건 정체되는 거다.

하지만 이걸 한 번에 확 늘릴 방법이 하나 있었다.

S급 인형술사!!

인형술사 고유 스킬 레벨이 2배로 오르고, 다른 고유 스킬도 생긴다.

전생엔 내가 S급 헌터가 되자마자, 헌터 결사대에 들어가 초거수 싸웠고, 내가 어떻게 당했는지도 모르고 일격에 죽었다.

한 마디로 S급 헌터의 능력을 제대로 써보기도 전에 죽었다.

그러니 이번엔 달라져야 한다.

'난 이번 원정을 통해 S급 헌터로 올라선다!'

그게 이번 원정의 첫 번째 목표였다.

암 드로운을 알리스 엘가에게 딸려 보낸 것에 이런 이유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난 그를 너무 의지하고 있었다.

몇 번 위기가 있긴 했지만, 괴수와 전투에서 암 드로운이 나서면 대부분 쉽게 처리됐다.

그는 A등급 괴수도 혼자서 처리할 정도였으니까.

한 마디로 암 드로운이 내 경험치의 대다수를 올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내 자동인형들과 꼭두각시들이 괴수를 사냥하거나 전투를 하면 당연히 내게도 경험치가 들어오고 레벨이 오른다.

하지만 내가 직접 사냥할 때와는 확연하게 차이가 있었다.

클래스 특징상 안전하게 뒤에 사냥했지만, 내가 직접 사냥하면 경험치가 훨씬 많이 오른다.

그랬기에 이번엔 내가 직접 레벨을 올릴 생각이었다.

그게 지금 이렇게 선두로 나선 이유였다.

기이잉! 쿵! 쿵! 쿵!

[충! 타일러 준장님! 보고드립니다.]

룩급 기간트가 9대의 기간트를 이끌고 다가왔다.

[해치를 열고 모두 내리게. 얼굴을 보고 싶군.]

[네! 모두 해치를 열고 기간트 앞에 서라!]

위이잉! 치익!

기사들이 자기 기간트 앞에 섰다.

"펠릭스 중령, 자네로군."

"제가 타일러 준장님의 선봉대 보좌를 맡게 됐습니다."

반가운 얼굴이었다.

그는 작년까지 헬다임 장벽 관문 부책임자였다.

내가 관문을 자주 지났기에 서로 농담도 주고받고, 드워프들을 이동시킬 때도 몰래 뒤에서 내 편의를 많이 봐줬었다.

그리고 그땐 비숍급 기간트에 탔었는데, 지금은 룩급 기간트에 타고 있었으니, 실력도 있다는 말이었다.

"그래도 아는 사이가 있어 다행이군."

펠릭스 중령과 악수했다.

[운명의 실타래(lv.8)를 연결합니다.]

"뒤에 기간트 기사들은 모두 자진해서 지원했습니다."

"자원했다고?"

다른 기사들을 쳐다봤다.

그런데!

"응? 콜벳 소령! 자넨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건가? 제대한 것이 아니었나?"

콜벳 소령이 힘없이 대답했다.

"제대하려고 했는데, 그냥 돌아왔습니다."

"뭐?"

"어머니께서 동생 놈에게 속아서 이미 전 재산을 모두 물려주셨지 뭡니까. 이제 토끼 같은 마누라와 여우 같은 자식들을 먹여 살리려면 어쩌겠습니까. 다시 기간트에 타야죠."

가장의 어깨가 무거워진 콜벳 스팅 소령도 합류했다.

그는 이제 나이트급 기간트에 타고 있었다.

"그럼 후방에 있지. 여긴 왜 지원했나? 위험한 임무라는 것을 모르나?"

"대수림에선 타일러 준장님 옆이 제일 안전하지 말입니다."

"뭐? 자넨 여전하군."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악수했다.

[운명의 실타래(lv.8)를 연결합니다.]

"그리고 저뿐만이 아닙니다."

콜벳 소령이 옆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가리켰다.

그곳엔 워버린 소령과, 폴린 소령이 나란히 서 있었다.

"저희도 왔습니다. 타일러 준장님!"

"역전의 용사들이 다시 뭉쳐야죠!"

순간 가슴이 살짝 뭉클했다.

콜벳과 워버린, 폴린, 이 세 사람은 얼음 계곡 원정을 함께 다녀왔던 카야킨 전진 기지의 기사들이었다.

그때 기억이 선하다.

처음엔 자신들보다 계급도 낮고, 기간트에도 타지 못하는 정보국 장교가 지휘관이 되자, 불평불만이 많았었지.

하지만 내 지휘 덕분에 몇 번의 위기를 넘기고, 거신 갑옷을 가지고 무사히 귀환했기에 나중엔 매우 끈끈한 사이가 됐다.

다들 그때 1계급 특진했고.

이미 손발을 맞춰본 사이라 두 비숍급 기사의 합류는 반가웠다.

두 기사와 운명의 실타래를 연결했다.

다음 기사 앞에 섰는데, 보자마자 인상을 찡그렸다.

블리언 빈스가 내 앞에 있었다.

"내 말이 우습나? 내가 경고했을 텐데?"

"전 빈스 가문을 위해 나선 겁니다. 공을 세워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겠습니다."

"허! 그래?"

녀석을 도끼 눈으로 쳐다봤다.

아주 입에서 곡소리 나올 때까지 굴려주마.

아니지! 네놈이 죽으면 제일 먼저 마법인형으로 만들어 주지.

[운명의 실타래(lv.8)를 연결합니다.]

블리언 빈스는 나이트급 기간트에 타고 있었다.

다음 기사를 보자, 이번엔 짧은 한숨을 흘러나왔다.

"휴! 바드 경, 그대는 왜 나왔지?"

한때 내 검술 스승이었기에 경이란 호칭을 붙여 줬다.

기사 바드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영지 후계자인 블리언 빈스가 지원했으니, 테레니스 영지군 책임자인 에라든 남작이 보모 역할로 바드를 내보낸 것이었다.

그도 참 먹고살기 힘들어 보였다.

"타일러 준장님, 최선을 다해 싸우겠습니다!"

"최선은 됐고, 목숨이나 챙기시오."

고개를 흔들었다.

기사 바드의 실력은 알고 있었다.

비숍급 기간트에 타고 검술도 뛰어나다.

타일러가 재능이 없어서 제대로 못 배웠지, 스승의 실력은 훌륭했다.

[운명의 실타래(lv.8)를 연결합니다.]

룩급 기간트 1대, 비숍급 기간트 4대, 나이트급 5대.

그렇게 총 10대의 기간트가 선발대로 나를 따르기로 했다.

난 그들과 모두 운명의 실타래를 연결했고, 드디어 원정대를 출발시켰다.

"모두 기간트에 타라! 우리가 선두다!"

엘프 차원으로 가는 길은 두 번째지만 여전히 미지의 땅이었다.

101. 하얀 악마.

101. 하얀 악마.

내 비숍급 오리지널 기간트의 손바닥과 팔에 걸터앉아 있던 에테나가 허리를 곧추세우고, 두 귀를 쫑긋 세웠다.

샤이닝 일족의 고유 능력인 반향정위에 뭔가 포착된 것이다.

"타일러님! 괴수 네 마리가 접근합니다."

에테나가 경고했다.

[모두 전투를 준비해라!]

난 피하지 않았다.

잠시 후.

"뀌이이이이!"

"꽤에에엑!"

전방에 B등급 괴수 메지낙 네 마리가 우릴 발견하더니 무섭게 울부짖었다.

[대장님! 메지낙이 4마리나 됩니다. 지원팀을 부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 정도는 우리가 선발대가 처리한다!]

기이잉! 쿵!

내가 앞으로 나섰다.

[방패 들어!]

[방패 들어!]

척! 처처척!

다들 기간트 등 뒤에 있는 방패를 꺼내 들었다.

나도 크리드의 등에서 방패를 꺼냈다.

"꽤애액!"

"뀌이익!"

두두두두! 두두두!

메지낙이 우리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삼각 대형으로! 내가 중앙을 맡겠다.]

[삼각 대형으로!]

멧돼지를 닮은 9미터 크기의 거대 메지낙이 3개의 날카로운 뿔을 세우고 무섭게 달려든다.

한 마리의 위력도 룩급 기사가 정면으로 받아내기 힘들 정도였기에 다들 긴장감에 몸이 빳빳이 굳었다.

[방패 앞으로!]

[방패 앞으로!]

다들 방패를 앞으로 내밀어 몸통을 가리고 팔과 어깨로 단단히 고정했다.

쿠쿠쿠쿠!

놈들이 지척에 오자, 강력한 진동에 땅이 들썩인다.

난 방패를 든 손을 왼쪽 가슴에 대고 마나를 뿜어냈다.

파지지직!

황금빛 마법진이 번쩍인다.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내게는 너무나도 선명하다.

"꿰에에에엑!"

"쿠에엑!"

[버텨라! 절대 밀리지 마라!]

"어스 웨이브!"

방패를 높이 들어 땅을 향해 내리찍었다.

콰앙! 쩌엉!

땅이 크게 울리니!

쿠쿠쿠쿠쿵!

땅의 파도가 코앞까지 다가온 멧돼지 괴수들을 덮쳤다.

"꿰익?"

쿵! 쿠쿠쿵!

중심을 잃은 것들이 무슨 힘을 쓸까!

내 방패에 막힌 멧돼지 괴수 하나!

난 곧장 검을 들어 놈의 목을 향해 쑤셔 박았다.

푸악!

"뀌이이이익!"

푹! 푸푹!

돼지 멱따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놈이 피를 흘리며 절명했다.

그 순간 경험치가 쏟아져 들어왔다.

다른 놈을 죽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한 놈은 옆으로 미끄러져 룩급 기간트 방패에 막혔고, 좌우의 기간트들이 일제히 검을 찌르고 있었다.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워버린 소령과 폴린 소령의 비숍급 기간트가 또 다른 메지낙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그런데 끝쪽의 방패진이 밀렸다!

블리언 빈스와 콜벳 소령의 나이트급 기간트 두 대가 넘어져 있었고, 멧돼지 괴수 역시 부딪친 충격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2대가 하나를 못 막아?'

게다가 어스 웨이브에 중심을 잃고 앞으로 꼬꾸라진 놈이었다.

그때 멧돼지 괴수가 고개를 흔들며 일어섰다.

그리고 넘어져 있는 블리언의 기간트를 향해 달렸다.

멍청하긴!

쿠쿠쿠쿵! 콰앙!

"퀘엑!"

방패로 달려드는 괴수의 옆구리를 받아버렸다.

괴수는 옆으로 쓰러졌고, 그때 바드의 비숍급 기간트가 달려들어 괴수의 배를 찔렀다.

푸욱!

"꿰이이이!"

[어서 일어나! 찔러라!]

콜벳 소령의 나이트급 기간트가 벌떡 일어서더니 검으로 멧돼지 괴수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리고 내 검도 놈의 목을 사정없이 찔렀다.

파악!

메지낙이 격하게 부르르 떨더니, 곧 옆으로 쓰러졌다.

'역시 막타야!'

괴수를 죽일 때마다 경험치가 들어오지만, 중간에 공격했을 때보다 마지막에 숨통을 끊었을 때가 더 경험치가 많았다.

조금 전에 괴수의 옆구리를 받아버린 빠르고 신속한 움직임은 오리지널 기간트 크리드의 장점이었다.

그리고 내 싱크로율이 높은 것도 있고.

그때 내 눈에 이제야 일어나는 블리언의 나이트급 기간트가 보였다.

[멍청한 녀석! 방진이 밀릴 순 있다. 하지만 그렇게 누워서 어떻게 괴수를 잡겠다는 거냐?]

녀석을 보자, 짜증이 치밀었다.

[죄, 죄송합니다.]

[어리광부리지 마라! 누구도 너를 돕지 못한다. 여긴 대수림이다!]

나이트급에 탄 기사가 저렇게 굼떠서야.

자기 말로는 드와이트 대마경에서 괴수도 잡아봤다고 하더니, 실력이 형편없었다.

난 곧장 마나를 보는 눈으로 괴수들을 살폈고, 메지낙 한 마리의 배를 갈랐다.

그리고 고급 마석을 하나 챙겼다.

선발대를 하는 이유가 이 마석을 챙기는 것도 있지.

[부산물 정리는 뒤쪽에 맡기고 출발한다!]

[네!]

우린 다시 길을 출발했다.

'아직 갈 길이 멀구나.'

고작 B등급 괴수 넷을 잡는데, 이렇게 힘이 들다니!

암 드로운이 있었다면 혼자서 순식간에 다 잡았을 것이다.

그의 빈자리가 다시 느껴졌다.

확실히 마법인형 없이 괴수를 잡는 것은 더디기도 하고, 효율적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경험치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이 들어왔다.

***

후두두둑!

쏴아아아아아!

대수림 하늘에 구멍이 뚫렸다.

이런 날에는 대낮에도 행군을 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원정군의 긴 행렬도 멈춰 섰다.

우린 억수 같은 폭우를 피해 거신목 아래 모였다.

"비까지 지독하네요. 여기에 비하면 우리가 사냥하던 대수림은 그냥 동네 뒷산 수준입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길은 더 험해지고, 이틀에 한 번은 이런 비가 쏟아질 거야. 그리고 더 강한 괴수가 계속 나올 거고."

"정말 징글징글하네요."

워버린 소령이 고개를 흔들며 진저리를 쳤다.

블랙힐 기지를 떠난 지 벌써 2개월째.

아직 엘프 차원 균열까지는 1개월을 더 가야 했다.

그나마 안당고낙이 보급품과 짐을 나르고 있었기에 행군 속도가 2배는 빨라진 것이다.

우리 선발대는 그동안 괴수 수백 마리를 죽였고, 이틀 전에는 A등급 괴수를 피해 없이 죽였다.

그리고 내 레벨도 54로 올랐다.

'응?'

옆에 있던 에테나가 내 옆구리를 찔렀다.

그녀는 경계를 서고 있던 기간트를 향해 턱짓했다.

뭔가 다가오고 있다는 경고였다.

'블리언의 기간트로군.'

난 그냥 모른 척했다.

"크르르릉!!"

[괴수다!]

C등급 5미터 길이의 늑대형 괴수가 블리언의 기간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크아앙!"

파팟!

턱!

"크웩?"

나이트급 기간트가 한 손으로 괴수의 목을 움켜잡았다.

그러더니 검으로 배를 갈랐다.

촤아아악!

괴수의 내장과 피가 쏟아지고, 곧 축 늘어졌다.

놈의 죽음을 확인하자, 무심히 옆으로 던졌다.

쿵!

"대장님, 막내 녀석이 이제 제법입니다."

워버린 소령이 피식 웃었다.

"2개월이나 괴수를 잡았는데, 저 정도도 못 하면 나가 죽어야지."

옆에 있던 콜벳 소령이 투덜거렸다.

선발대에서 가장 실력이 떨어졌던 블리언이 이젠 자신을 앞지르자, 배알이 꼴린 것 같았다.

'쩝! 운이 좋았네······.'

콜벳 소령의 말처럼 그동안 잡은 괴수가 몇 마리인데 저것도 못 하면 죽어서 내 마법인형이 돼야지!

파파파팟!

그때 뒤쪽에서 뭔가 빠르게 다가왔다.

"경계해!"

경계를 서던 블리언과 바드의 기간트가 앞을 막아섰다.

척!

"타일러 준장님!"

빗속에서 안당고낙에 탄 전령의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냐?"

"거대 괴수가 본진을 공격했습니다."

"뭐? 거대 괴수?"

"기간트 6대가 파괴되고, 안당고낙 4마리가 잡아 먹혔습니다."

순간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설마, 그 녀석인가?'

"모두 기간트에 타라! 본진으로 돌아간다."

"네!"

***

[아베르크 제국 원정군 지휘 천막]

"충!"

"타일러 참모 어서 오게."

윌리엄 사령관과 지휘관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오면서 보니까 병사들도 꽤 많이 당한 것 같았다.

"사령관님, 무슨 일입니까?"

"괴수가 우리 행렬의 후미를 공격했네. 그래서 내가 선발대를 불러들였네."

"피해가 심각합니까?"

그때 제4군 대장 아몬 대령이 앞으로 나섰다.

"며칠 전부터 안당고낙이 한 마리씩 없어져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저 도망갔거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엔 빗속을 뚫고 놈이 공격해왔습니다. 경계를 맡은 기간트들이 속절없이 당했고, 병사들도 이십여 명이나 죽었습니다."

"놈이 어떻게 생겼소?"

"놈을 본 기사들의 말에 의하면 온몸에 백색의 털이 가득했고, 머리에 큰 뿔이 박혀 있어며, 어깨높이가 20미터는 되고, 몸길이는 40미터나 됐다고 했습니다."

그놈이다!

드라우켄!

S급 괴수이자, 과거 암 드로운과 거신 기사들을 죽인 그 괴물.

"그 정도 크기면 최소 재앙급 괴수가 아닙니까!"

기사들의 표정이 어두웠다.

재앙급 괴수는 웬만한 기간트로는 상처를 입히지 못할 정도로 강했다. 비숍급 이상의 기간트와 오리지널 기간트들이 힘을 합쳐야 겨우 잡을 수 있었다.

전에도 웨슬리의 사냥팀이 공격했다가 절반이나 되는 기간트를 잃고 놈을 놓쳤다. 그리고 그땐 놈이 다친 상태였고, 지금은 상처를 모두 치료했을 것이다.

"며칠 전부터 안당고낙이 사라졌다면, 놈이 우릴 따라오고 있는 겁니다."

윌리엄 사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러니 여기서 놈을 잡아야지, 아니면 원정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피해가 더 심해질 거네."

그때 매러덕 소장이 나섰다.

"사령관님, 제가 한번 잡아보겠습니다."

"그대가?"

다니엘 참모장이 옆에서 거들었다.

"놈이 안당고낙에게 맛을 들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안당고낙 5마리를 한곳에 모아서 놈을 유인하고, 매러덕 소장님과 기사들이 매복하고 있다가 한꺼번에 덮치는 방법을 쓰면 좋을 것 같습니다."

윌리엄 사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작전이군. 다니엘 참모가 매복 위치를 선정하고, 매러덕 소장은 전투 지휘를 맡게. 그리고 1군과 2군에서 비숍급 이상 기간트 30대를 뽑아가게."

"네!"

"한 번에 성공해야 하네. 놈을 놓치면 다시는 이런 기회가 없을 거야."

"네! 반드시 놈을 죽이겠습니다!"

매러덕 소장과 다니엘 참모가 경례하곤, 밖으로 나갔다.

매러덕 소장은 오리지널 룩급 기간트에 타는 기사였고, 전투 경험이 많았기에 내가 봐도 이 작전의 적임자였다.

"나머진 방진을 갖추고, 놈의 공격을 대비하게."

"충!"

지휘관들이 우르르 나갔다.

윌리엄 사령관이 자리에 앉더니, 내게 손짓했다.

"자네도 좀 앉지."

"네. 감사합니다."

"놈을 잡을 때까진 당분간 움직일 수 없으니, 자네와 선발대도 이참에 좀 쉬게. 괴수와 무슨 원수가 졌다고 그렇게 씨를 말리려는 건가."

"가는 길에 보여서 잡은 것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안 하면 어차피 본진에서 처리해야 하는 일이 아닙니까?"

윌리엄 사령관이 또 머리를 흔들었다.

"행군에 지장이 없으니 상관은 없지만, 자네 몸도 생각도 해야지. 자네가 뻗어버리면 엘프 차원 균열까진 어떻게 가라고?"

"대충 길은 알려드렸지 않습니까? 시간은 걸리겠지만, 거신이 만들어 놓은 표지석을 따라가다 보면 차원 균열 입구까진 찾아갈 수 있을 겁니다."

"표지석을 찾는 게 더 힘들어. 사방이 다 똑같잖은가!"

하긴 대수림에서 길 찾는 게 쉽진 않지.

나도 두 번째 가는 길이었지만, 헛갈렸으니까.

그래도 에테나가 있어 헤매진 않았다.

엘프들은 이 대수림에서도 길을 귀신같이 잘 찾았다.

"매복팀이 성공할 것 같습니까?"

"잘하겠지. 자네도 걱정은 그만하고. 이런 일은 전문가들에게 맡기게."

내가 전문간데?

대수림에서 괴수를 잡는 일이다.

나보다 더 잘할 사람이 있을까?

아직도 사령관은 내가 정보국 장교인 줄 안다.

천막 밖으로 나왔다.

쏴아아아아!

밖은 아직도 굵은 비가 쏟아진다.

이건 쉽게 그칠 비가 아니었다.

우리팀 야영지로 돌아왔다.

"대장, 우리도 며칠 쉬는 겁니까?"

선발대 기사들이 기대하는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난 조용히 짐을 챙겼다.

"다들 마석 배터리 새로 갈고, 사냥 준비해."

"네?"

내 눈엔 실패가 뻔히 보였다.

다른 놈도 아니고 S급 괴수 드라우켄이다.

잘하면 상처를 입힐 순 있겠지만, 놈은 달아나는데 선수였다.

그러니 내가 드라우켄을 잡는다.

그놈을 잡으면 암 드로운의 복수를 하는 셈이었다.

그리고 엄청난 경험치도 얻을 거고.

***

매복지에서 500미터나 떨어진 곳에 대기했다.

우리 때문에 괴수를 놓쳤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이곳은 3군단의 야영지.

커널 준장과 기사들도 여차하면 매복지로 투입할 수 있게 기간트에 타고 대기하고 있었다.

[타일러 참모, 매러덕 소장과 매복팀이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소?]

[전에 제가 얼음 계곡 원정 후에 드렸던 보고서 읽어 보셨습니까?]

[물론이오.]

[그때 보고드렸던 괴수의 흔적 기억하십니까? 수십 마리의 늑대형 괴수 무리를 전멸시켰던······.]

[설마, 지금 우리를 따라오는 괴수가 그 괴수란 말이오?]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커널 준장은 말이 없었다.

그도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을 직감한 것 같았다.

"쿠아아아아!"

괴수의 울음이 대수림을 덮쳤다.

그리고.

쾅! 콰콰쾅! 쾅!

'시작됐군!'

이를 악물었다.

오늘 네놈을 잡고, S급 헌터로 올라선다!

102. 숫자가 깡패.

102. 숫자가 깡패.

[지금 어떻게 돼가는 거야?]

[잡은 거야? 뭐야? 제길! 뭐가 보여야지.]

[아니야! 가끔 괴성이 들리잖아!]

3군의 기사들이 초조한지 연신 무기를 잡은 손가락을 폈다가 쥐었다 반복하고 있었다.

[정신 사납다! 무기를 제대로 들어라!]

3군 대장 커널 준장이 한마디 하자, 기간트들이 무기를 다시 꽉 잡았다.

폭우까지 내리고 있었기에 이곳에서는 아무 상황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난 다르지.

내 마나를 보는 눈은 최대 1km까지 마나를 탐지한다.

'허! 엄청나군!'

지금 난 드라우켄이 뿜어내는 마나량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놈의 심장은 순수한 마나로 이루어졌는지 500미터나 떨어진 곳에서도 짙은 푸른빛이 번쩍인다.

마나 때문에 저렇게 큰 몸집도 가볍게 움직일 수 있는 건가?

그에 반해 달려드는 기간트 기사들의 마나 밝기는 작고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매러덕 소장이 이름값은 하네.'

괴수보단 작지만,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 아바돈 역시 밝은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지금 드라우켄의 공격을 제대로 막고 있는 것도 아바돈뿐이었다.

'드라우켄, 정말 교활한 놈이다!'

드라우켄 정도의 거대한 덩치면 기간트들과 그냥 맞부딪혀 싸울만했다.

하지만 놈은 그러지 않았다.

아바돈이 드라우켄의 공격을 막는 사이에 기간트들이 놈을 포위하기 위해 앞뒤로 막아서며 모여든다.

그럼 놈은 완전히 포위당하기 전에 근처 거신목 위로 올라가 엄청난 점프력으로 다른 거신목으로 이동하고, 그 근처에 있는 기간트를 공격했다.

그리고 다시 아바돈이 달려오면 몇 번 공방을 펼치다가 또 기간트들이 포위하면 다시 나무를 올라 점프한다.

그렇게 몇 번 반복하자, 부서지는 것은 기간트뿐이었다.

이건 확실하게 적의 숫자를 줄이는 전략이야!

인간과 많이 싸우다 보니, 머리가 더 똑똑해 졌나?

화염을 뿜어내지도 않는 놈이 왜 S급 괴수인지 알 것 같았다.

'이러다 전력이 너무 줄어들겠는데······.'

벌써 7기의 기간트가 박살 났다.

우리의 목적은 놈을 잡는 것이 아니고, 무사히 엘프 차원에 가서 비행석을 채취하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저놈 하나 때문에 벌써 총 13대의 기간트가 박살 났다.

게다가 병력을 더 투입해도 저런 방식이면 놈을 잡을 수 있을지 고민이 들었다.

'역시 내가 개입해야 하나?'

그때였다.

윌리엄 사령관이 명령을 내린 걸까?

1군의 기간트들이 매복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아마도 이렇게 계속하다가는 병력만 손해 보고 괴수를 놓칠 거 같아서인지, 기간트를 왕창 더 투입한 것 같았다.

허! 숫자가 깡패네.

'이런 놈이 도망간다!'

수십 대의 기간트가 몰려오자, 놈은 싸우기를 포기하고 포위망을 뚫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역시 놈은 영악했다.

그러니 그 옛날 거신 기사들도 놈을 쫓다가 하나둘 당했지.

아바돈과 수십 대의 기간트들이 뒤를 쫓았지만, 억수처럼 쏟아지는 비 때문에 추격이 쉽지 않았고, 놈은 워낙 빨랐기에 결국 놓쳤다.

하지만 난 아직 놈을 놓치지 않았다.

'어라? 놈이 2군 쪽으로 가네!'

자신을 잡으려 해서 화가 난 걸까?

아니면 다른 적을 찾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그냥 막 달리는 건가?

왠지 지금은 기간트들을 피해 막 달리는 느낌이었다.

놈은 2군단이 있는 야영지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곳엔 그녀가 있었다.

푸른 빛의 비숍급 오리지널 기간트 베가스.

고양이와 같은 민첩함과 기간트임에도 빠른 검술까지.

딱 엠버 대령의 모습이었다.

'역시 잘 싸운단 말이야.'

괴수가 갑자기 나타났음에도 엠버 대령과 기간트들은 빠르게 대형을 잡고 놈을 공격했다.

베가스는 9미터의 크기의 비숍급이지만, 실력은 앞서 싸운 룩급 아바돈 못지않았다.

기간트들이 사방에서 우르르 몰려들어 놈을 포위하며 공격하자, 놈도 더 버티지 못하고 물러섰다.

그리고!

[괴수가 이쪽으로 온다!]

[뭐?]

내가 소리치자, 커널 준장의 기간트가 고개를 돌렸다.

난 놈이 달려오는 방향으로 팔을 뻗었다.

[저쪽이다! 전투를 준비해라!]

커널 준장의 기간트가 몸을 돌렸다.

[전투태세! 우리가 괴수를 잡는다!]

3군의 기간트들이 일제히 무기를 겨눴다.

이들은 정규군이 아닌 대부분 영지군으로 이루어져 대형을 제대로 갖추진 않았지만, 기간트는 무기만 겨누더라도 충분한 위협이 된다.

[놈이 지척이다! 창은 앞으로!]

처처처척!

내 목소리를 듣고 창을 든 기간트들이 맨 앞줄에 섰다.

아무래도 오리지널 비숍급 기간트가 주는 힘이 있었기에 다들 자연스레 내 명령을 따르고 있었다.

지금 이곳에선 내가 제일 강했으니까.

[내가 신호를 주면 일제히 창을 찔러라!]

[네!]

쏴아아아! 후두두두두!

억수처럼 쏟아지는 빗방울이 창과 기간트의 몸을 거칠게 때렸다.

놈이 빠르게 다가오지만, 대수림의 나무와 숲, 그리고 굵은 빗줄기에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점점 커지는 빗소리에 놈이 달려오는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나를 제외한 모두가 놈을 보지 못했다.

그건 놈도 마찬가지!

[지금이다! 창을 찔러라!]

[공격하라!]

[이야!]

쉐엑! 쉑엑!

파앗!

놈이 풀숲에서 나오자마자,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푹! 푸푹!

콰아앙! 쿠웅!

놈은 달리던 힘을 이기지 못해 기간트를 덮쳤고, 일곱이나 되는 기간트가 쓰러졌다.

그 말은 일곱이나 되는 기간트의 창에 찔렸다는 소리였다.

"끼아아아아!"

고막을 찢을 듯한 괴성을 질렀다.

놈의 흰털이 피로 물들고, 바닥에 빗물 또한 피와 섞여 흘렀다.

[공격하라!]

[와아아아!]

커널 준장의 명령에 검과 도끼를 든 기간트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푹! 쩍!

[죽어라. 괴물!]

"크아아아아!"

부아앙!

파파팍!

[크헉!]

[으악!]

놈이 커다란 앞발을 휘두르자, 기간트 셋이 맞고 쓰러졌다.

[창을 던져라!]

커널 준장이 명령했다.

휘익! 휘익!

기간트의 창은 투창용이 아니었기에 무겁고 멀리 날아가지도 못했다.

그리고 적이 다수라면 그냥 무기를 버리는 짓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차피 한꺼번에 달려들지 못했기에 모든 힘을 동원해야 했다.

휘익! 푹!

"끼아악!"

힘껏 던진 커널 준장의 창이 놈의 허벅지에 제대로 박혔다.

놈은 고통스러워하며 뒤로 주춤거렸다.

[놈이 물러선다! 몰아쳐라!]

[공격해라!]

붕붕붕!

쩍억!

커다란 도끼가 날아가 놈의 어깨에 박혔다.

놈은 크고 강했지만, 숫자가 깡패였다.

이곳에도 거의 100기나 되는 기간트가 있었기에 그 위력은 바위를 부수는 강물처럼 강력했다.

"크앙!"

놈이 크게 앞발을 휘두르더니, 몸을 돌려 반대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쫓아라! 놈이 도망간다!]

[잡아라!]

[와아아아!]

3군의 기간트들이 우르르 괴수의 뒤를 쫓아갔다.

[대장! 우리도 쫓아야죠!]

워버린 소령이 내게 물었다.

하지만 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놈이 가는 방향을 계속 확인했다.

기간트들이 놈을 바짝 뒤쫓았다.

하지만 조금씩 거리가 벌어지더니 하나둘 추격을 포기했다.

이 빗속에선 조금만 떨어져도 사물을 구별하기 어려웠다.

놈이 피를 많이 흘리고 있었지만, 장대비는 놈의 흔적을 삽시간에 지워버렸기에 더 추격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내 추격은 뿌리치지 못하지.

'역시 바로 방향을 트는군. 영악한 놈!'

놈이 가는 방향을 읽었다.

[너희는 나를 따라와라!]

난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놈의 뒤를 쫓았다.

그러다 잠시 멈춰서 놈을 다시 찾았다.

폭우가 쏟아지지만, 놈의 몸에서 마나를 뿜어내는 이상 날 뿌리치진 못했다.

[다들 이쪽이다!]

[네!]

내 부하들은 내 명령이면 철석같이 따랐다.

지난 2달간 괴수를 상대하면서 보인 내 지휘 능력은 그들의 상상을 훨씬 상회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내가 오리지널 기간트를 모는 실력도 한몫했고.

너무 바짝 쫓진 않았다.

난 그저 놈이 1km 범위 밖으로 벗어나지 않게만 따라갔다.

평범한 방법으론 놈을 잡지 못한다.

다리에 상처를 입었기에 놈의 움직임이 매우 느려졌다.

하지만 바로 덮치는 실수는 하지 않는다.

놈이 충분히 방심할 때까지 기다린다.

드라우켄이 멈췄다.

[정지! 여기서 기다린다.]

[대장, 비 때문에 놓치는 거 아닙니까?]

[그냥 조용히 따라와!]

[네, 죄송합니다.]

놈은 자신의 몸에 박힌 창과 도끼를 빼내는 중이었다.

기간트의 무기도 대부분 괴수 부산물로 만들었고, 마석이 일부 포함되어 있었기에 놈의 행동을 확인할 수 있었다.

400기나 되는 기간트가 있어도 겁 없이 공격했던 놈이었다.

하지만 상처를 입자, 더는 무리하지 않고 도망친다.

드라우켄은 원래 그런 놈이었다.

놈과 우린 점점 본대와 멀어졌다.

드라우켄이 다시 움직였다.

[가자!]

우리의 추격은 다음 날까지도 계속됐다.

폭우는 멈추지 않았고, 놈도 우리도 지쳤다.

하지만 상처를 입은 놈이 훨씬 빨리 지치는 법.

놈은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방향을 바꿨고, 점점 더 험한 대수림으로 들어갔다.

'오호! 드디어 쉴 곳을 찾았나?'

놈이 멈춰 섰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았다.

나와 대원들은 놈의 500미터까지 접근했다.

그리고 다시 300미터까지 다가갔다.

그래도 움직이지 않자, 200미터까지 접근했다.

그런데도 놈은 움직이지 않았다.

원래 폭포처럼 쏟아지는 비는 녀석에게 유리했었다.

우리에게 은밀하게 접근할 수도 있었고, 도망칠 때도 시야에서 금방 사라질 수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반대지.'

이 거센 비가 우리의 냄새를 지우고, 우레처럼 쏟아지는 빗소리가 우리 기척과 주변 모든 소리를 감추었다.

난 대원들을 가까이 불러 모았다.

[잘 들어! 지금부터 나 말고는 절대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 마라!]

부하들의 기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괴수는 지금 200미터 전방에 있고, 우리가 놈을 사냥한다! 절대 치명상을 입히려거나 단번에 끝내려 하지 마라! 놈은 상처 입었고, 시간은 우리 편이다. 알았나?]

부하들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만약 내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더는 괴수를 쫓지 말고, 그 자리에 기다려라.]

기간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내가 아니면 괴수를 쫓을 수도 없었고, 본대가 있는 야영지로 돌아가는 길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다들 숙지했으면, 지금부터 작전을 설명하겠다!]

놈을 공격할 작전을 설명하고, 일어섰다.

기간트들이 나를 따라 일제히 일어섰다.

[방패와 검을 들어라!]

척! 처처척!

여태까진 놈이 우릴 사냥했지만, 지금부턴 우리가 놈을 사냥할 시간이었다.

[가자!]

우린 조심스레 괴수 100미터 앞까지 접근했다.

역시 놈은 방심하고 있었다.

부하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 펠릭스, 콜벳, 워버린은 우측으로!

- 폴린, 바드, 블리언은 좌측으로!

- 나머진 전면으로!

이미 작전을 지시했기에 움직임에 망설임이나 혼선은 없었다.

우리는 최대한 은밀히 놈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바위 아래 엎드려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상처를 핥고 있는 드라우켄이 보였다.

"크릉?"

놈이 고개를 들더니, 우측 거신목 뒤쪽으로 접근하던 기간트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격하라!]

[와아아!]

기이이잉! 쿵쿵쿵!

펠릭스 팀의 기간트 3대가 우측에서 달려들었다.

"크앙!"

놈은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

인간들이 여기까지 따라왔을 거라곤 생각 못 했을 거다.

드라우켄은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곳엔 다른 기간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괴수를 죽여라!]

[와아아!]

기이잉! 쿵쿵!

폴린 팀의 기간트들이 방패를 들고 검을 세우며 달려들었다.

그러자 놀란 드라우켄이 급히 정면으로 방향을 틀었다.

[모두 공격해라!]

[와아아아!]

하지만 그곳도 4대의 기간트가 곧바로 달려들었다.

그렇게 10기의 기간트가 삼면에서 공격했다.

순간 멈칫한 놈은 달아날 곳이 없었다.

아니! 한 곳이 남았다.

놈이 몸을 돌리더니, 바위를 향해 달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바위를 딛고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여기엔 내가 기다리고 있다!'

놈이 바위 위로 올라오는 순간 난 마나를 온몸으로 뿜어내며 검을 찔렀다.

쉐엑! 푹!

"끼이아!"

가슴을 찔린 놈이 바위로 올라서지 못하고 괴성과 함께 아래로 떨어졌다.

콰앙!

기간트 3대?

놈이 맘만 먹는다면 손쉽게 처리할 수 있다.

아니! 10대의 기간트도 절대 놈의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상처 입은 놈은 극도로 조심스러웠고, 소수의 기간트가 달려들었지만 피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리고 지금 그 선택 때문에 내 일격에 맞은 것이다.

[죽여라!]

[놈을 잡아!]

선발대 기간트들이 우르르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103. 드라우켄.

103. 드라우켄.

[멈춰! 가까이 가지 마라!]

하지만 아직이었다.

내가 명령하자, 달려들던 기간트들이 얼음처럼 멈춰 섰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드라우켄이 몸을 일으켰다.

'제길! 조금 얕았나!'

놈의 눈은 시뻘겋게 충혈됐고, 몸은 피범벅이었으며, 사나운 이빨을 드러낸 상태였다.

[포위하고 달려들지 마라!]

드라우켄이 내뿜는 입김이 빗줄기 사이에 보였다.

놈은 지쳤다.

나도 아래로 내려갔다.

기이잉! 쿵!

"크릉!"

놈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노려봤다.

자신을 상처입혔으니, 얼마나 달려들고 싶을까?

하지만 놈은 내게 덤비지 않았다.

"크앙!"

팟! 다다닥!

놈은 가장 작은 블리언의 기간트를 향해 달렸다.

블리언의 나이트급 기간트가 방패를 세우고 놈을 막아섰다.

7미터의 기간트론 높이가 20미터에 달하는 괴수를 막을 수 없다.

하지만!

쿵! 쿵!

좌우에서 바드와 워버린이 방패를 함께 세워서 막았다.

놈도 피하기엔 늦었다고 판단했는지 그대로 돌진했다.

콰아앙!

[크윽!]

[커헉!]

3대의 기간트를 기어이 뚫고 놈이 달렸다.

하지만 쓰러지면서 바드가 놈의 앞다리에 검을 찔렀다.

[쫓지 마라!]

명령을 내리고 쓰러진 바드의 기간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바드의 비숍급 기간트가 내 기간트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바드, 고생했다.]

[휴! 무슨 망치에 얻어맞은 느낌입니다.]

그때 폴린 소령의 도움으로 일어선 블리언이 말했다.

[대장님, 지금이 기회입니다. 놈을 쫓죠!]

난 고개를 흔들었다.

[공을 세우고 싶으냐? 그렇다면 말리지 않겠다.]

네 눈엔 보인다.

아직도 공을 세우기 위해 혈안인 녀석이.

저러다가 일찍 뒈지는 거지.

[죄송합니다. 제가 성급했습니다.]

블리언의 기간트가 뒤로 물러섰다.

아주 바보는 아니군.

서두르다가 암 드로운과 거신 기사들도 당했다.

지금 놈의 부상은 그때와 거의 흡사하다.

그 말은 아직 암 드로운을 죽일 정도의 힘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노련한 사냥꾼은 상처 입은 짐승을 잡을 때 서둘지 않는다.

난 놈이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었다.

[가자! 이쪽이다!]

거센 빗속에도 우리의 추격은 계속된다.

***

다시 하루가 흘렀지만, 놈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이젠 비가 멈췄기에 드라우켄이 흘린 피는 고스란히 흔적을 남겼다.

[대장, 여깁니다!]

A등급 괴수인 악토리움이 죽어 있었다.

놈은 곰처럼 생겼고 몸을 세우면 20미터에 달하는 괴수였다.

악토리움은 워낙 뼈가 단단해 기간트 무기를 만들 때 가장 선호하는 놈이었다.

하지만 지금 팔 하나가 잘렸고, 목을 뜯긴 상처와 심장이 뻥 뚫린 치명상을 당해 죽었다.

아마도 상처 입은 드라우켄을 보고 겁 없이 달려든 것 같았다.

역시 드라우켄은 아직 힘이 남았다.

난 악토리움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는다.

'그래도 챙길 건 챙겨야지.'

부아악!

죽은 악토리움의 배를 찢고, 최고급 마석을 꺼냈다.

[콜벳, 잘 챙겨라!]

[네네!]

콜벳 소령이 마석을 가방에 챙겼다.

[자! 다시 출발한다.]

드라우켄의 움직임이 현저하게 느려졌다.

그러다 놈이 멈췄다.

펠릭스 중령이 말했다.

[대장, 여기 핏자국이 있습니다.]

나뭇잎 위에 핏자국이 선명했다.

놈과의 거리는 500미터.

[여기서 대기한다.]

비가 그쳤기에 이젠 놈도 우리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놈은 지금 거신목 뒤에서 숨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난 그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더는 마나를 눈에 뿜어내지 않아도 됐다.

녀석의 가슴을 찔렀을 때, 운명의 실타래를 연결했으니까.

'일부러 흔적을 남겨 우리를 유인하는군.'

놈은 반나절이나 숨어 우릴 기다렸다.

그러다 더는 참을 수 없었는지, 밤이 되자 우리 쪽으로 은밀히 다가오고 있었다.

[놈이 온다! 전투를 준비해라!]

놈도 이젠 한계라는 것이 느껴졌다.

도망칠 기력이 있었다면, 도망쳤지 우리를 공격하는 무리수를 두진 않았을 거다.

이제 사냥의 끝이 보인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라!]

척척척!

놈이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가끔 거신목 사이에 놈의 붉은 두 눈과 거대한 실루엣이 보였다.

상처 입은 짐승은 더 사나운 법.

다들 잔뜩 긴장했다.

놈이 조금씩 거리를 좁힌다.

시간은 놈의 편이 아니다.

그러니 반드시 먼저 달려들 것이다.

"크앙!"

다다닥!

[콜벳 쪽이다!]

[막아라!]

콜벳 쪽으로 기간트가 모였다.

콰앙!

놈의 돌진에 콜벳과 펠릭스의 기간트가 뒤로 밀리며 쓰러졌다.

[죽어!]

푹!

워버린 소령의 비숍급 기간트가 놈의 왼쪽 앞다리를 찔렀다.

"쿠아아!"

부웅! 퍼억!

놈이 휘두른 오른쪽 앞발에 비숍급 기간트가 뒤로 날아 떨어졌다.

쿠웅!

충격이 크겠지만, 그를 챙길 여유는 없었다.

뒤로 돌아 놈의 뒷다리를 검으로 그었다.

촤악!

"끼이아!"

드라우켄이 몸을 돌리며 어깨에 뿔을 휘둘렀다.

난 뒤로 물러섰다.

부웅! 콰앙!

[으헉!]

치이이익! 쿵!

하지만 내 옆쪽에 있던 폴린 소령의 기간트가 맞고, 10미터나 밀려나 거신목 뿌리에 부딪혔다.

[죽어!]

쿵쿵쿵! 파악!

블리언의 나이트급 기간트가 몸을 날리며 놈의 엉덩이를 찔렀다.

부앙! 퍼억!

놈이 휘두른 뒷다리에 맞고 나이트급 기간트가 뒤로 날아갔다.

"크아아아!"

쾅! 콰앙!

놈이 거칠게 몸을 휘두르자, 다른 기간트들도 힘없이 튕겨 쓰러졌다.

이게 치명상을 입은 괴수의 위력인가!

놈은 아직도 힘이 넘쳤다.

쿠쿠쿵! 촤악!

"끼아!"

놈의 뒷다리를 공격했다.

조금 전에 내가 공격했던 그 자리였다.

놈의 기동력을 줄였다.

"크앙!"

파파팟!

놈이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도망쳤다.

쓰러진 기간트들이 힘겹게 일어났다.

[놈은 내가 쫓겠다!]

야간 시야라면 나도 자신 있었다.

난 놈의 뒤를 쫓았다.

물론 혼자는 아니었다.

'모두 기간트를 꺼내라!'

토우인형과 킹콩인형, 괴조인형이 인형의 집에서 기간트를 꺼냈다.

그리고 내 자동인형들이 기간트에 타고 함께 뒤를 쫓는다.

'인정사정 보지 말고 공격해!'

[네! 주군!]

기이잉! 쿵쿵쿵!

촤악!

"끼이아아!"

웨슬리가 탄 룩급 기간트가 옆에서 달려들어 놈의 배를 검으로 그었다.

내 자동인형들은 두려움이 없다.

그래서 겁 없이 놈을 공격했다.

콰직!

드라우켄이 웨슬리의 룩급 기간트 머리를 물더니 완전히 뜯어버렸다.

하지만 괜찮다.

웨슬리를 인형의 집에 넣었다.

또 다른 룩급 기간트 2대가 방패를 들고 앞에서 돌진했다.

"크아앙!"

놈은 앞발을 휘둘렀다.

콰쾅!

기간트들이 크게 휘청이긴 했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놈도 많이 지쳤다.

[파이어 버스트!]

퍼어엉! 화르륵!

"끼이이이이이!"

화염 마법진을 발동해 놈의 등에 화염 폭발을 일으켰다.

그 순간 비숍급 기간트 둘이 좌우에서 창을 찔렀다.

다다닥! 푹! 푹!

"끼아아!"

놈의 비명이 대수림을 울렸다.

'괴조! 머리를 공격해!'

쉐에에엑! 파앗!

괴조인형이 날아가 놈의 얼굴을 발톱으로 할퀴고 지나갔다.

얼굴과 눈에 상처 입은 드라우켄이 고통 속에 발버둥 쳤다.

그리곤 거신목 위로 뛰어들더니, 힘겹게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도망치려는 것이다.

"우어어어!"

킹콩인형이 거신목 위에서 놈을 향해 뛰어내렸다.

부웅! 콰앙!

"쿠엑!"

쿠우웅!

두 손을 모아 머리를 때리자, 놈이 추락했다.

떨어진 충격에 놈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모두 한꺼번에 공격해!'

"크앙!"

"끼이이아!"

표범인형이 달려들어 놈의 꼬리를 물어뜯었다.

킹콩인형이 놈의 머리에 매달려 주먹으로 마구 때렸다.

괴조인형이 날개를 펄럭이며 두 발톱으로 놈의 목을 움켜잡았다.

기간트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어 드라우켄의 다리과 몸통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쿠웅!

놈이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지독한 놈! 아직도 살아있다니!'

운명의 실이 아직도 놈이 살아있음을 말해준다.

나도 달렸다.

막타는 내 것이다!

놈의 등에 올라탔다.

그리고 목을 향해 검을 찔렀다.

[좀 죽어라!]

파악!

칼끝이 놈의 가죽과 살을 뚫고, 목뼈를 으스러트렸다.

"꿰이엑!"

괴이한 울음을 울더니!

쿵! 털썩!

놈의 머리가 땅에 처박혔고, 그 순간 운명의 실이 검은색으로 변했다.

됐다!

[인형에게 기사회생(lv.5) 스킬을 사용했습니다.]

과연 결과는?

마음을 조리며 지켜봤다.

[허수아비(lv.1) 마법인형을 만들었습니다.]

순간 긴장감이 풀리며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괴수의 기사회생 성공률은 지독하게 낮았지만, 이런 중요한 때에 내게 행운을 베풀어줬다.

드디어 암 드로운의 원수를 갚았다.

그리고 S등급 괴수가 내 마법인형이 됐다.

[기사회생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기사회생(lv.5) -> 기사회생(lv.6)]

[레벨(lv.55)이 올랐습니다.]

[레벨(lv.56)이 올랐습니다.]

[레벨(lv.57)이 올랐습니다.]

[레벨(lv.58)이 올랐습니다.]

[레벨(lv.59)이 올랐습니다.]

반가운 알람과 메시지!

레벨이 다섯 계단이나 성큼 올라갔다.

이제 2레벨만 오르면 나도 S급 헌터!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운명의 실타래가 부족했기에 당장 드라우켄을 꼭두각시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망은 하지 않았다.

S급 헌터가 되면 운명의 실타래도 배 이상 늘어날 테니까.

그리고 그 고지가 멀지 않았다.

'모두 주변을 정리해!'

부서진 기간트와 자동인형, 괴수인형들을 모두 인형의 집에 넣었다.

그리고 마나를 뿜어내는 눈으로 내게 다가오는 움직임을 확인했다.

난 일부러 드라우켄을 인형의 집에 넣지 않았다.

[세상에! 대, 대장님!]

[헉! 대장님이 하얀 악마를 잡았다!]

뒤따라온 기사들이 경악했다.

[나 혼자 한 것이 아니다! 너희가 도왔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다들 고생했다.]

힘들게 여기까지 온 부하들에게 격려의 말도 잊지 않았다.

[우리가 재앙급 괴수를 잡았다!]

[와아아아!]

[타일러 대장님 만세!]

[와아아아!]

다들 장갑이 부서지고 깨진 기간트들이지만, 이 정도는 정비사들이 고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기이잉! 쿵! 쿵!

블리언의 나이트급 기간트가 검을 들고 드라우켄에게 향했다.

[블리언, 뭐 하는 거지?]

[마석을 채취해야죠!]

[이미 확인했다. 마석은 없었다.]

[아!]

블리언과 기사들이 아쉬움의 탄성을 질렀다.

[자! 서둘러 귀환한다.]

[네? 재앙급 괴수인데 그냥 놓고 가나요?]

[마석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 저 큰 것을 끌고 갈 힘은 없다. 돌아갈 기운은 남겨둬야지.]

[그럼 발톱이라도 하나 챙기겠습니다.]

그건 말리지 않았다.

전리품을 챙기고 싶은 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지만, 하나만 허락했다.

이젠 드라우켄은 내 마법인형이니까.

블리언의 나이트급 기간트가 10분이나 걸려 드라우켄의 뒷발에서 발톱을 하나를 힘겹게 뽑았다.

[으헉! 방금 놈이 움직였습니다!]

블리언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기분 탓이다! 서둘러라! 본진으로 돌아간다.]

나도 살짝 놀랐다.

방금 드라우켄 허수아비가 진짜로 움직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뭐지? 정말 기분 탓인가?'

우린 본진으로 향했다.

드라우켄과 500여 미터 정도 떨어지자, 인형의 집에 넣었다.

***

이틀 후 원정대 본진엔 엄청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우리가 하얀 악마를 잡았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다들 믿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블리언이 챙겨온 성인 키만 한 드라우켄의 발톱을 보고 다들 경악했고,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놈이 다시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우린 다시 엘프 차원 균열을 향해 전진했다.

가면서 A등급 괴조 무리와 조우했다.

하지만 워낙 기간트 숫자가 많았기에 괴조들도 무리하게 덤비진 못했다.

그런데도 야간에 괴조의 기습으로 기간트 4대와 병사 몇 명이 희생됐다. 하지만 우리의 전진을 막을 순 없었다.

블랙힐 전진 기지를 출발한 지 넉 달 보름 만에 엘프 차원에 도착했고, 다시 일주일을 행군해 드디어 저 멀리 비행석 광산이 눈앞에 보였다.

[정지!]

내가 멈춰서자, 선발대가 멈췄고 뒤를 따르는 본대도 차례로 멈췄다.

부사령관인 매러덕 소장의 기간트가 달려왔다.

[타일러 준장, 왜 멈춘 거지?]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옵니다.]

[뭐?]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두 무리가 곧장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하나는 가디언 제국의 마장기였고, 다른 하나는 탈로스와 글론 연합의 타이탄이었다.

'역시, 놈들이 먼저 도착했네.'

[저놈들이 왜 오는 거지?]

[먼저 왔다고 텃세를 부리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