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출도 (7)
'진충비도가 뭐하는 놈이야?'
청수귀마는 인상을 찡그렸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별호이긴 했다.
산장의 마두 놈 중 하나가 아래에 있는 무림인들에 대해 떠들 때 나온 것 같은데...
별호가 기억에 잘 남지 않았다는 건 상대가 갓 명성을 얻은 후기지수란 뜻. 청수귀마가 신경 쓸 정도의 고수는 아님이 분명했다.
그런데 왜 여기 무림인들은 진충비도란 놈한테 가서 물어보려고 한단 말인가?
'이상하군.'
들어보니 모용세가가 명령을 안 내린 것도 아니었다.
빈틈을 보이면 바로 치고 들어가라고 명령도 내려진 상태.
그런데 모용세가의 명령을 따르는 것도 아니고, 모용세가의 고수를 불러서 물어보는 것도 아니고, 처음 듣는 후기지수를 불러서 물어본다니.
산전수전 겪은 청수귀마였지만 이런 일은 또 처음이었다. 청수귀마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며 눈치를 봤다.
'아직 놈들이 의심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뭐냐. 대체?'
"진충비도 님. 이쪽입니다. 이쪽!"
어둠 속에서 횃불과 함께 일련의 무림인들이 나타났다. 청수귀마는 진충비도란 놈이 누군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아직 새파랗게 젊은 놈이었다. 복색이나 얼굴만 봐도 명가 출신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같은 무림인이라 하더라도 명가 출신들은 창백하고 부드러운 얼굴을 갖고 있는 것이다.
"산장에서 하인들이 도망쳐서 내려왔다고?"
"예!"
"공자들에게도 보고를 올렸습니다만, 아직 새 명령이 내려오지 않아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원래 명령대로 위로 올라가야 할까요?"
모용세가에 소속되지 않은 무림인들은 연우혁의 조언을 기다리며 시선을 던졌다.
원래 내려온 명령은 포위를 굳힌 상태로 적들이 빈틈을 드러내면 넘어가지 말라는 명령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적당한 수준의 빈틈이었다.
지금처럼 하인들이 도망치고 산장이 통째로 불타는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게 좋은지 알 수가 없었다.
모용세가에서 빠르게 대응해서 명령을 내리면 모를까, 공자들도 이 예상 밖의 상황은 당황스러웠는지 명령이 느려지고 있지 않은가.
이 때 믿을 수 있는 건 진충비도밖에 없었다. 심지어 좌중에는 모용세가의 무인들도 있었는데, 이들도 공자를 부르지 않고 연우혁의 답을 기다렸다.
"하인들의 말에 이상한 점은 없었나?"
"예. 하인들은 각자 갇혀 있어서 아는 게 별로 없더군요. 마두 놈들이 도망칠까봐 가옥 안에서 나오지 못하게 막은 모양입니다."
"흠."
연우혁은 하인들을 둘러보며 평범한 질문들을 하나씩 던졌다.
마두들은 누가 있었냐, 산장의 구조는 어떤 식이었냐, 어느 건물에 갇혀 있었냐, 무슨 일이 일어났냐...
청수귀마는 그 모습에 속으로 비웃음을 참지 못했다. 무림인 놈들이 불러대길래 뭔가 비범한 재주가 있나 싶었는데 하는 짓이 범속하기 그지없었다.
"잘, 잘 모르겠습니다."
다른 하인들처럼 청수귀마도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연우혁은 골똘히 고민하더니 옆에 있던 무인에게 말했다.
"안 되겠군. 공자님들에게 이걸 전해주게. 내 능력으로는 힘들겠어."
"예!"
작은 붓으로 급히 휘갈긴 서신을 무인에게 맡기는 모습에 청수귀마는 대충 다 끝났다는 걸 느꼈다.
아마 저 젊은 무림인은 자기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어서 모용세가의 공자들에게 보고한 게 분명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혼자 책임을 뒤집어 쓸 것 아닌가.
여기 모인 머저리들 사이에서야 명성을 떨쳤겠지만 그런 허섭스레기 재주는 진짜 마두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 법.
"다시 한 번 기억해보게. 정말 기억이 안 나나?"
공자들이 오기 전까지 뭐라도 하는 시늉을 내고 싶었는지 연우혁은 하인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또 던졌다. 그러나 당연히 쓸만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연우혁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곤란해했다.
"이거 곤란한데, 이거 곤란한데..."
"나, 나으리. 조금만 쉬게 해주십시오. 저희는 이틀 넘게 아무것도 먹지 못한데다가 이 추운 밤에 산길을 타고 내려왔습니다."
"이런. 조금만 기다려라. 곧 공자들께서 오실 것이다."
"천막 안에서 기다리면 안 되겠습니까?"
하인들의 행색이 워낙 딱했기에 무림인들도 동정하는 기색을 보였다. 청수귀마는 비틀거리는 시늉을 했다.
"진충비도 님. 하인들을 천막 안에서 기다리게 하면 안 됩니까?"
"안 되네. 공자들께서 오지 않았는데 멋대로 움직이게 할 수는 없지."
'애송이 놈 같으니!'
청수귀마는 속으로 비웃음을 터뜨렸다.
나름 위엄을 부린다고 한 것 같았지만 자충수였다. 누가 봐도 의미 없이 하인들을 괴롭히는 꼴 아닌가.
이런 식으로 굴어봤자 공자들이 왔을 때 더 수습하기 힘들어질 뿐이었다.
모용세가의 공자들이라 하더라도 여기 있는 세가 외부 무림인들의 눈을 전부 무시할 수는 없을 것 아닌가. 정파무림의 가면을 쓴 이상 저 놈들은 양민을 괴롭힐 수 없었다.
"으음. 진충비도께서 그렇게 말한다면야."
"무슨 뜻이 있겠지."
"?"
청수귀마는 의외의 반응에 멈칫했다. 무언가 위화감이 든 것이다.
'뭐지?'
그 위화감을 고민하기도 전에 공자들이 도착했다. 부하들을 데리고 온 공자들은 하인들의 형편없는 꼴을 보더니 진충비도를 타박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죄 없는 양민들을 이렇게 밖에 세워놓으면 어떡하나!"
"죄, 죄송합니다."
"여기 하인들에게 죽을 갖다 주게. 산장의 일이 속임수라 하더라도 포위를 굳건히 지킨 뒤 확인하면 어느 누가 도망칠 수 있겠는가."
'됐다!'
청수귀마는 마지막 난관을 넘자 매우 흡족해했다.
가장 원하던 반응이었다. 밤늦게 산장이 활활 타도록 내버려둔 뒤 올라가면 누가 청수귀마인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정파 놈들은 체면 때문에라도 청수귀마를 잡았다고 선언할 것이다.
"여기 죽이오. 드시오."
"고, 고맙습니다."
진충비도라고 불린 젊은 무인이 어두운 얼굴로 죽을 가져다주자 청수귀마는 비웃음을 참으며 죽사발을 받았다. 죽을 한 모금 목구멍으로 집어넣는데, 갑자기 살기가 느껴졌다.
모용세가의 공자들이 뿜어내는 살기였다.
아주 미약한 살기였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생사를 몇 번이고 오고 간 청수귀마는 자신의 직감을 믿고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퉷!"
한 모금 들이킨 죽과 귀식단을 토해낸 청수귀마는 전력을 다해 눈앞의 젊은 무림인에게 장법을 갈겼다.
그러나 진충비도란 놈은 제법 만만치 않았다. 바로 주먹을 뻗어 권격을 날리며 장법을 막아내더니 재빨리 뒷걸음질쳤다.
"놈이 어떻게?!"
공자들은 청수귀마의 반응에 경악했다. 완전히 속아 넘어간 줄 알았는데, 덫에 빠지기 직전 놈이 발악을 시작한 것이다.
"살기를 그렇게 흩뿌렸는데 어르신이 속을 줄 알았더냐!"
청수귀마는 노호를 토해내며 외쳤다. 모용세가의 공자들은 낯빛을 붉혔다. 연우혁이 다 파놓은 함정을 자신들이 망쳤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연우혁은 냉정했다. 물론 독이 든 죽을 먹여서 쉽게 잡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이 정도 포위망이면 잡은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다 속아놓고서 무슨 헛소리냐? 이 주변에 절진이 펼쳐지는 동안에도 가만히 있던 놈이 허세를 부리는구나. 공자들께서는 네놈을 다 잡았기에 살기를 꺼내신 거다."
모용세가의 공자들은 각자 연우혁이 자신의 편을 들었다고 생각하며 깊게 감명받았다.
다른 놈들까지 운 좋게 망신을 피한 건 아쉬웠지만 그건 어쩔 수 없었다.
"닥쳐라, 곧 뒤질 놈이!"
"큭!"
청수귀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우혁이 비틀거렸다. 청수귀마는 살기로 눈빛을 번뜩였다. 장법에 담긴 음유한 내공이 상대의 기혈을 뒤흔든 것이다.
"죽..."
덤벼드는 순간 연우혁이 재빨리 보법을 펼치더니 전력을 다해 일권을 갈겼다. 생각보다 훨씬 더 상승의 권법에, 재빨리 끝내려고 했던 청수귀마는 충격을 억누르며 물러났다.
'분명 부딪쳤는데!?'
청수귀마의 장법이 무림에서 악명이 높은 건 그 장법에 담긴 음유한 내공 때문이었다. 극히 정순한 내공이 아니라면 권장을 부딪치는 것만으로도 파고드는 음유한 장법의 내공을 견디기 쉽지 않았다.
그런데 눈앞의 젊은 놈은 분명 장법과 정면으로 부딪쳤는데도 별다른 기색 없이 멀쩡했다.
'보갑(寶鉀)!'
청수귀마는 이를 갈며 장법의 방향을 바꿨다. 주먹이 보갑으로 보호받고 있다면 장법의 힘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수많은 허초를 날려 현혹시킨 뒤 놈의 몸에 장법을 쑤셔 박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놈은 단 하나의 허초에도 속지 않고 기괴한 보법으로 거리를 벌렸다. 그 뒤로 빠지는 보법도 보법이지만 허초에 눈길도 주지 않는 것이 경악스러웠다.
'놈이 내 장법을 알기라도 한단 말인가?!'
청수귀마 입장에서는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귀식단에 독이 든 죽까지 먹었다지만, 자기보다 경지 낮은 무인 하나 쉽게 잡지 못하다니.
이건 상대방이 청수귀마가 펼치는 장법의 묘리를 모두 다 알고 있는 게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네놈은 누구냐? 어떻게 내 무공을 알고 있는 것이지?"
"?"
연우혁은 상대가 무슨 소리를 하나 싶었다.
'아. 착각하고 있나.'
하긴 들키지 않고 빠져나갈 줄 알았는데 갑자기 속은 상황이 됐으니 혼란스럽기도 할 것이다.
연우혁이 청수귀마의 무공을 알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네놈의 무공만 아는 줄 아느냐? 네놈의 수법은 이미 다 꿰고 있다. 산장에 불을 질렀을 때부터 하인 속에 숨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
청수귀마도 충격을 받았지만 진형을 구축한 무림인들도 새삼 놀랐다.
저 마두가 어떤 비열한 꾀를 부리더라도 마치 진충비도의 손바닥 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았다.
"어떻게?! 어떻게 알았지?!"
"잘 생각해봐라."
"...냉수사(冷手蛇), 냉수사 놈인가! 그 놈, 설마 내 비밀을 모용세가에...!"
"!"
연우혁은 갑자기 낯익은 이름이 나오자 놀랐지만 기색을 숨기고 동의했다.
"그렇다. 고 대협께서 네놈을 죽이라고 하시더군! 여기 백사격각편(白蛇隔角鞭)을 봐라!"
청수귀마의 눈빛이 흉폭하게 일렁였다.
아무리 원수 사이가 됐다지만 사형(師兄)으로서 자신의 무공과 약점을 정파무림인에게 낱낱이 고해바치다니!
마두 주제에 정사지간을 표방할 때부터 싹수가 뻔한 자였다.
"여기서 나가면 그 자부터 요절을 내고 말겠다."
"그 말은 나가고 나서 해라!"
싸늘한 말과 함께 모용세가 공자들의 합격진이 시작됐다. 청수귀마는 가슴팍 아래까지 치고 들어오는 서늘한 검세에 아차 싶었다.
저 어린놈의 언변에 취해 칼이 목 아래까지 들어오는데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쾅!
청수귀마의 시푸른 장력이 검과 충돌했다. 일검공자는 한 수 아래의 무인이었지만 진법의 위력은 무시할 수가 없었다.
상승의 진법을 십 년 넘게 수련할 수 있는 세가는 무림에 많지 않았다. 모용세가의 직계들이 펼치는 진법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밀하고 사나웠다.
청수귀마는 숨이 점점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빈틈을 만들어야 한다!'
청수귀마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셋째 화검공자를 향해 미친듯이 장력을 날렸다. 내력을 탕진하더라도 어떻게든 진법에 구멍을 낼 요량이었다.
그 순간 비도가 날아들었다. 살기 넘치는 공격에 청수귀마는 깜짝 놀라 몸을 틀었다.
진법이 펼쳐질 때에는 외부의 공격도 함부로 들어와서는 안 됐는데, 방금 날아온 비도는 진법을 전혀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청수귀마는 연우혁이 모용세가 무림인인가 싶어서 혼란스러웠다.
'빈틈!'
냉검공자의 검이 청수귀마의 등을 깊숙이 그었다. 청수귀마는 이를 악물며 모용현에게 장력을 내질렀다. 세가의 도련님들은 쉬이 경험할 수 없는 양패구상의 초식이었다.
그 때 또 다시 비도가 하나 날아들었다. 청수귀마는 팔을 관통하는 비도의 기세에 이를 갈았다.
"개자식이!"
냉수사가 줄줄 불지만 않았더라도 이렇게 처참하게 농락당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청수귀마는 울분을 토해내듯 정면의 일검공자를 후려쳤다. 모용소는 검을 곧추세우고 장력의 파도를 흔들림 없이 헤쳐 나갔다.
마지막으로 비도가 날아왔다. 어깨를 노리고 날아오는 비도에 청수귀마는 피하지 않고 받아내려고 했지만, 그 순간 비도의 방향이 비틀렸다.
"!"
장력으로 비도를 막아내는 순간 세 공자의 검이 청수귀마에게 그대로 작렬했다. 청수귀마는 눈을 부릅떴다.
"여기... 여기까지인가!"
"발악하지 말고 죽어라, 마두."
"그럴 순 없지!"
청수귀마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전음을 날렸다.
-고송 놈의 비밀을 알려주마. 놈의 목이라면 모용세가가 탐낼 가치가 있겠지...!
"..."
죽기 전에 다른 자들이 들으면 안 되는 비밀을 전음으로 보내는 것까지는 이해가 갔다.
그러나 앞의 모용세가 공자들은 내버려두고, 자신한테 모용세가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꼬드기는 전음을 보내는 청수귀마의 모습에 연우혁은 당황했다.
'죽기 직전이라 정신이 혼미한 건가?'
무림출도 (8)
-청수경(靑手經), 놈은 청수경을 갖고 있다! 청수경 말이다!
청수귀마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절명했다. 숨통이 끊어졌음에도 입가에는 한 줄기 득의의 미소가 남아있었다. 자신이 남긴 말이 고송의 숨통을 끊을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무림인도 청수경이란 비급의 이름을 들으면 가만히 있지 못하리라!
"...??"
그러나 연우혁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청수경이 뭐야?'
***
"동도들, 고맙소!"
모용세가의 공자들은 자리에 모인 무림인들에게 외쳤다. 산장의 마두들과 싸우느라 다친 무림인들도 여럿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얼굴이 어둡지 않았다.
토벌이 성공적으로 끝난 것이다!
무림인의 목숨은 언제 강호에 스러질지 모르는 새벽이슬 같은 것이라지만, 남부럽지 않을 순간도 분명 존재했다. 바로 지금처럼 마두들과 싸워 승리를 쟁취했을 때였다.
오대세가 중 어느 누구도 이런 일의 보상은 아끼지 않았다. 세가의 명성에 수전노란 악명이 달라붙으면 훗날 수십 배로 피해를 봤다. 반쯤 낭인 같은 놈이라 하더라도 세가를 위해 싸웠다면 제대로 된 보상을 베풀었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 자리에 있던 무림인들은 이제 어느 곳을 가던 '영동의 청괴산장에서 마두들을 토벌했다'며 무용담을 풀 수 있었다. 자신의 이름을 강호에 알리고 싶어하는, 청운의 꿈을 가진 무림인이라면 무엇과도 바꾸기 힘든 포상이었다.
물론 가장 큰 공을 세운 건 청수귀마와 흑륵존자를 해치운 모용세가의 공자들이었다. 그러나 토벌에 참가했던 무림인들이라면 어느 누구든 한 명을 더 꼽을 것이다.
"진충비도. 토벌은 끝났소. 하지만 난 여전히 조언이 필요하오. 내 동생들은 교활하기가 뱀과 같고 음험하기가 이리 새끼들 같지. 진충비도가..."
"저는 오직 한경의 백성들을 살필 뿐입니다. 공자님! 제가 풍수를 보아하니 공자님의 운세는 제 도움이 필요 없습니다. 항상 겸손하시고 주의를 기울이시면 대운이..."
"진충비도. 처음에 내가 얕잡아본 건 사과하겠소. 나는 아직 미숙하오. 내 형은 뱀과 같고 내 동생은..."
"저는 오직 한경의 백성들이 걱정될 뿐입니다. 공자님. 제가 관상을 보아하니 공자님의 운세는..."
"진충비도..."
"제가 천문을 보아하니..."
세 공자의 뜨거운 구애를 거절하고 좌중을 빠져나온 연우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된 게 마두들을 상대할 때보다 빠져나오는 게 더 힘든 기분이었다.
청수귀마가 죽자, 천기수사는 잘했다고 칭찬한 뒤 짧게 한 마디만을 남겼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도망쳐라. 공자들 사이에 끼지 말고!
설명해주지 않아도 연우혁은 바로 이해했다.
아무리 천금을 주고 대접하려고 해도, 세 공자들 사이의 싸움에 끼는 건 절대 현명한 일이 아니었다.
모용세가의 고수들이 즐비한데 이들이 웬 외인이 끼어들어 연못의 물을 흙탕으로 만드는 걸 가만히 두고 보겠는가.
연우혁은 세 공자를 설득하기 위해 천문과 관상과 풍수까지 꺼내야 했다. 그나마 보람이 있다면 이게 은근히 잘 통했다는 점이었다.
'나중에 누군가 설득할 일 생기면 정말 도사인 척 해도 될 것 같은데.'
"고생했다!"
말을 타고 비탈길을 지나는데 앞에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떨어졌다. 천기수사 제갈우였다.
연우혁은 공손하게 인사했다. 성격이 꼬장꼬장하긴 해도 이 노고수가 이번 일에 많은 도움을 줬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천기수사 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제가 어떻게 저 범의 아가리에서 무사히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말은 잘하는구나! 그럼 어떻게 보답할 셈이냐?"
"제가 먼저 부탁을 드리지도 않았고 약속하지도 않았는데 왜 보답해야 합니까?"
건방진 연우혁의 대답에 천기수사는 오히려 좋아하며 웃었다.
"좋다, 좋아! 백견불여일행(百見不如一行)이다. 아주 제대로 배웠구나."
"사실 제가 보답을 받지 않은 것도 공자들에게 신뢰를 사기 위해서였..."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라. 모용세가 공자들에게 신뢰를 사봤자 피곤해지기만 할 거다."
천기수사는 단호하게 말했지만, 연우혁의 말을 완정히 부정하지는 못했다.
연우혁이 보답 대신 공자들의 신뢰를 사지 않았다면 흑륵존자의 일은 몇 배로 꼬였을지도 몰랐으니까.
"천기수사 님께서는 어디로 가십니까?"
"한경의 청강을 잠깐 보고 내려갈 생각이다."
"...!"
천기수사는 산고수청(山高水淸)을 즐길 사람이 아니었다. 연우혁은 천기수사가 자신을 염려해서 한경까지 동행해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감사합니다."
"뭘 말이냐?"
"청강을 봐주신다니 한경의 포두로서는 기쁠 뿐입니다."
천기수사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제갈세가의 후기지수들은 눈치가 둔해서 불만이었는데, 눈치가 빠르면 빠른 대로 귀찮은 점이 있었다.
"눈치가 빠르면 모르는 척이나 할 것이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공을 세운 군사가 가장 조심할 때는 길을 오고 갈 때다. 세가의 이름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자들은 더욱 위험하지."
무림의 명성은 장점만 있지 않았다. 그 명성을 지킬 무공이 없다면 무림의 명성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었다.
특히 무공보다는 지혜로 명성을 날린 군사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재물을 탐내는 녹림의 산적부터 시작해서 깊은 흉계를 꾸미는 사파의 무인들까지 수작을 부릴 수 있었으니까.
"안 그래도 걱정되는 게 있었습니다."
"말해봐라."
천기수사는 연우혁의 말에 흥미로워하는 시선을 던졌다.
이 뛰어난 후배가 인근에서 어떤 위험을 미리 걱정하고 있었을까?
"원래 남은 보상은 한경에서 받기로 되어 있었는데, 모용세가가 약속을 잊진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
"그러진 않겠지요?"
천기수사는 자신이 너무 후배에게 겁을 줬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름 없는 중소문파면 모를까 모용세가가 약속을 하고 어기겠느냐? 그러진 않을 거다. 약속을 하지 않아서 문제지, 약속을 한 번 하고 난 뒤라면 걱정할 것 없다."
"그런데 언제나 방심하지 말라고 하셨잖습니까."
"너는 서신만 보내도 공자들이 자기 일처럼 도와줄 텐데 무슨 겁이 그리도 많느냐!"
연우혁이 자꾸 헛소리를 해대자 천기수사는 호통을 쳤다.
머리도 좋은 놈이 자꾸 이상한 부분에 신경을 쓰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연우혁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캐물었다.
"벽력신권 대협의 보상은 어떻습니까? 아무도 보는 눈이 없었잖습니까?"
"놈이 말을 어기면 내가 나서주겠다. 됐느냐? 이제 그만해라. 네가 제대로 익혔다는 걸 확실히 알겠다!"
천기수사는 진절머리를 치며 말을 끝냈다. 이 놈이 일부러 이러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한동안 침묵하던 연우혁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모용세가나, 혹은 보상에 관련된 일이더냐?"
"아닙니다."
"그럼 물어봐라."
"청수경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야 있지. 너는 없느냐?"
"예."
"...아. 너는 포두였지. 자꾸 잊게 되는군."
천기수사는 상대가 명문정파의 후기지수가 아니라 포두 출신 무림인이라는 걸 뒤늦게 떠올렸다.
그렇다면 옛날부터 무림에 떠도는 소문들을 몰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청수경은 이백 년 전 무림을 뒤흔들었던 비급이다. 서장의 법왕이 익힌 독문무공이지."
이백 년 전 서장에서 건너 온 밀교의 법왕은 고강하고 괴이한 무공으로 중원무림을 뒤흔들었다.
구파일방 중에서는 네 개의 문파가 자존심이 꺾였고, 오대세가 중에서는 두 개의 세가가 자존심이 꺾였다. 어찌나 충격이 컸는지 법왕이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 동안 이름만 남은 법왕의 무공이 사실 천하제일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그런 무공이 있었습니까? 지금은 어디 있습니까? 소림?"
"사라진지 오래다. 애초에 남아있었으면 익힌 놈이 있었겠지. 무림을 떠도는 소문이란 게 다 그런 것 아니겠느냐."
천기수사는 닳고 닳은 노고수답게 소문에 심드렁했다.
무림을 떠도는 비급이란 것들은 대부분이 호사가가 낸 헛소문이었고, 극히 일부는 사악한 책사들의 계략이라 무림을 피로 물들이곤 했다.
고수란 결국 뛰어난 오성과 육신을 바탕으로 끊임없는 수련하는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천기수사가 보기에 비급을 얻어보겠다고 기웃거리는 놈들 중에 고수가 되는 놈은 없었다.
'청수귀마 놈. 날 무슨 병신으로 아나?'
연우혁은 청수경이 뭔지 알자 어이가 없었다.
일단 냉수사가 청수경을 정말 얻었는지도 조금 회의적이었다. 그렇게 대단한 비급을 얻었는데 왜 내공이 탁해서 범망경을 찾아 헤맨단 말인가.
냉수사가 절정의 고수라지만 그게 무림을 진동시킨 비급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따지면 마두들은 다 비급 하나씩 갖고 있을 것 아닌가.
그리고 설사 냉수사가 청수경을 갖고 있다고 치자.
연우혁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무림 동도들을 불러놓고 '여러분! 냉수사가 청수경을 갖고 있답니다! 저 마두 놈이 무림의 비급을 갖고 있게 내버려두실 겁니까!'라고 외치기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그런 짓을 했다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뒷감당은 어떡할 것이며, 무엇보다 냉수사 본인의 원한은 어떡한단 말인가.
청수귀마는 냉수사와 사이가 안 좋아서 어떻게든 죽이고 싶었는지 몰라도 방법이 너무 조악했다. 연우혁은 그냥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사람이 죽기 전이라 다급했나보군.'
물론 청수귀마는 연우혁을 모용세가 사람이라고 착각해서 세가의 힘을 동원할 것이라 생각하고 던진 말이었다.
오대세가 정도 되면 저런 소문 같은 이야기라도 확인을 해볼 힘이 있는 것이다.
...연우혁이 모용세가 사람이 아니라는 것만 제외한다면 꽤 해볼 만한 도박이었다.
"갑자기 청수경은 왜 묻느냐?"
"산장 마두 놈 중에 하나가 안다고 떠들더군요."
연우혁은 솔직하게 진실을 말했다. 그러나 천기수사는 킬킬대며 웃었다.
"왜, 천마신공을 안다는 놈은 없었느냐?"
"그런 놈은 없더군요."
"마두 놈들 말 하나하나 다 들어줄 것 없... 이런."
천기수사는 저 멀리 고갯길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마차와 수레가 있고, 호위하는 보표들이 있고, 무공을 익히지 못한 보부상들도 있고, 그 앞을 가로막고 이야기를 나누는 녹림의 산적들도 있고...
누가 봐도 녹림채가 통행세를 걷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녹림채가 최근 위치를 옮겼나보군. 귀찮은 놈들."
"그래도 오늘 커다란 교훈을 얻지 않겠습니까?"
연우혁은 천기수사가 옆에 있어서 든든했다.
지금 보부상들에게 철전을 뜯어내는 녹림 산적들이었지만, 그 뒤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안다면 대경실색해서 엎드릴 터였다.
"옛다."
그러나 천기수사는 자신의 별호를 드러내는 대신 철전을 던졌다. 딱 봐도 별 것 없어 보이는 둘의 모습에 녹림도들은 별다른 몸수색을 하지 않고 가라고 손짓했다.
"...??"
연우혁은 당황해서 천기수사를 쳐다보았다. 천기수사는 왜 그러느냐는 듯이 물었다.
"왜 보느냐?"
"어, 저는 저 녹림도들을 훈계하실 줄 알았습니다."
"많이 배운 줄 알았는데 아직 멀었구나! 여기서 녹림도들을 훈계하면 저 사람들은 어떻게 될 것 같으냐?"
"어... 바친 돈들을 돌려받고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 보부상은 그렇다 치더라도 저 상인들까지 돈을 돌려받겠지. 나한테는 한 푼 보답 없이 말이다."
"그건 제갈세가의 이름이라면 당연히..."
녹림한테 구해주고 돈 받으면 그건 제갈세가가 아니라 장강십팔세가로 이름을 바꿔야했다.
"그 소문이 퍼지면 앞으로 길을 가는 놈들마다 내 복색과 얼굴을 기억하고 날 찾으려고 하겠지. 내가 옆에 있다면 내 명성을 팔려고 말이다. 이게 반복되면 녹림 놈들은 내게 원한을 품을 것이고. 이 모든 걸 철전 하나로 피할 수 있는데 그러지 않을 셈이냐?"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이렇게 진지하게 하시는 거지?'
연우혁은 속으로 어이없어했다.
그냥 철전 하나 아끼자고 남들 좋은 일 해주기 싫다는 걸 이렇게 길게 설명할 일인가?
"잠깐!"
산 위에서 산적 하나가 달려오더니, 먹으로 종이에 그린 인상착의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다른 산적들에게 뭐라고 명령했다.
"여기 진충비도란 놈 있..."
천기수사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출수했다. 산적 세 명이 그대로 점혈당해서 고꾸라졌다. 천기수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천기수사 제갈우다! 정파의 무인으로서 너희 녹림의 무리들이 선량한 행객들을 핍박하는 걸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구나!"
"천, 천기수사!!"
"제갈세가!"
상인들은 깜짝 놀라서 감격한 눈빛으로 천기수사를 쳐다보았다. 방금까지 천기수사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천기수사는 출수한 이상 명성을 최대한 드러내는 걸 머뭇거리지 않았다. 바로 연우혁을 가리켰다.
"여긴 진충비도 연우혁이다! 정파의 무인이자 녹을 받는 관료로서, 이 후배는 너희 녹림의 무리들이 선량한 행객들을 핍박하는 모습에 격노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한단 말인가?'
연우혁은 무림인으로서의 삶이 참으로 쉽지 않다고 새삼 느꼈다.
녹림 총채주 실종사건 (1)
-너도 빨리 해라.
"..."
전음이 날아오자 연우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는 외쳤다.
"나는 진충비도 연우혁이다! 정파의 무인으로서... 정파의 무인으로서..."
-너희 녹림의 무리들이 선량한 행객들을 핍박하는 걸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구나! 감히 나를 찾다니. 오늘 하늘이 의로운 자의 편인지 불의한 자의 편인지 보여주도록 하겠다!
연우혁이 말을 더듬자 천기수사는 정확하게 조언했다.
녹림 놈들이 왜 진충비도를 찾는지는 모르겠지만 찾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이상 먼저 나서서 주도적으로 협행을 펼치는 게 나았다.
찾기 시작한 다음에 나오면 아무래도 체면이 좀 덜 세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지 않았으면 모를까, 나선 이상 크고 정확하게 자신의 별호와 신분을 밝혀서 무림에 알려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남는 게 없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상인과 보부상들한테서 뭘 얻을 수 있겠는가.
"...하겠다!"
"진충비도! 진충비도가 여기 있었다니!"
"진, 진충비도가 누구여?"
"나 들어봤네. 요즘 한경에 소문이 자자한 명포두 아닌가? 귀신도 모를 난제를 척척 해결한다네. 백성들한테 한 푼도 받지 않고 말이야!"
"...한 푼도?!"
아까 제갈세가의 천기수사와 달리, 연우혁의 별호는 반응이 반으로 나뉘었다.
돌아다니느라 한경의 소문을 들은 보부상들은 알고 있었지만 소문을 듣지 못한 사람들은 뒤늦게 전해 듣고 놀라워했다.
특히 백성들한테 은자를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들 크게 놀랐다.
'포두가 무공의 고수라는 게 더 놀라워야 하지 않나!'
천기수사는 세태에 탄식하며 쓰러진 산적들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산적들이 급히 무릎을 꿇었다.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천기수사 나으리!"
"오해?"
"예! 저희는 진충비도 소협한테 어떤 해도 끼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저 모셔오란 명령을 들었을 뿐입니다! 무례를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평소 위풍당당한 녹림의 산적들은 시비가 붙어도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일개 산채의 산적이면 모를까 녹림칠십이채의 산적이라면 어느 정도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제갈세가의 장로이자 무림에 수많은 인연을 쌓아둔 괴걸(怪傑)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괜히 녹림칠십이채를 믿고 건방을 떨었다가는 머리통이 으깨지는 수가 생겼다.
산적들을 노려보던 천기수사는 힘을 풀었다.
애초에 정말로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면 점혈하는 대신 살초를 펼쳤을 것이다.
"건방진 놈들. 너희가 정파의 협객을 얼마나 무시하길래 멋대로 납치를 하려고 하느냐?"
"아닙니다, 아닙니다! 저희가 무식한 도둑놈들이라 오해가 있었던 겁니다!"
"네놈들의 우두머리를 불러와라! 얼마나 대단한 일이길래 협객을 납치하려고 하는지 봐야겠다!"
산적들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천기수사의 요구는 과한 요구가 아니었지만, 산적들에게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요구였다.
금오채 채주, 쌍패부 종광은 호락호락한 무인이 아니었다. 천기수사의 제안은 거절하지 못하더라도 그 화는 산적들에게 풀 수 있었다.
산적들은 일어나서 산채로 올라가지도, 그렇다고 천기수사의 제안을 거절하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넙죽 엎드렸다.
그 때 연우혁은 산적들에게 말했다.
"고수가 나타나서 채주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시오."
"...예?"
"웬 고수가 나타났는데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하면 채주도 책망할 정신이 없을 거요."
올라가서 곧이곧대로 '천기수사가 오랍니다'하면 두세놈은 머리통이 깨질 수 있었지만, 올라가서 '웬 고수 놈 하나가 날뜁니다'하면 채주도 다른 생각 할 여를 없이 달려오기부터 할 것이다.
산적들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다.
"기가 막힌 계책입니다!"
"그건 내가 할 소리다."
천기수사는 연우혁에게 기가 막히다는 듯이 시선을 던졌다.
"산적 놈들을 뭐하러 도와주냐?"
"무슨 일인지 모르는 만큼, 회유해서 나쁠 것 없지 않잖습니까."
"산적 놈들이 그렇게 쓸만하진 않을 텐데... 뭐, 좋다. 이건 네 일이니 네 의견을 존중하도록 하마."
산적들은 반으로 나뉘어서 일부는 산채로 올라가고, 남은 일부는 자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을 쫓아냈다.
사람들은 천기수사와 진충비도의 이름을 꼭 퍼뜨리겠다고 다짐하며 떠났다. 천기수사는 퍼뜨릴 소문의 내용까지 구체적으로 정해줬다.
"정말 치밀하시군요."
"태산은 한 줌 흙도 사양하지 않는 법이지."
'이럴 때 쓰는 말이 맞나?'
***
쌍패부 종광은 가히 녹림의 채주를 맡을 만한 무인이었다.
뛰어난 외공과 강맹한 초식, 휘하 산적들을 휘어잡는 위세, 그리고 살짝 부족한 머리까지.
부족한 머리가 왜 채주한테 필요하냐고 할 수 있겠지만, 의외로 녹림 채주에게는 필요한 능력이었다. 너무 똑똑한 채주는 녹림의 장로들이 경계하거나 의심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종광은 전형적인 녹림칠십이채의 채주였다.
-관모를 쓰고 걸어가는 선비가 있는데 입이 넷 달린 개새끼가 발목을 물어뜯었구나, 호걸은 어느 편에 설 것인가?
"환장하겠다, 환장하겠어! 어떤 놈이 이런 투서를 보내는 거냐!"
종광은 으르렁거리며 함성을 삼켰다.
최근 대(大) 녹림칠십이채의 분위기는 그리 좋지 못했다. 총채주가 두문불출하고 장로들이 연달아 다투는데 분위기가 좋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종광은 이런 일들은 잊어버리고 녹림도의 본분에 집중하고 싶었다. 녹림도들끼리 다툴 시간에 지나가는 행인의 재물을 떳떳하게 모으는 게 훨씬 옳은 일 아니겠는가.
그러나 녹림칠십이채의 탁한 분위기는 종광의 산채까지 건너왔다. 처음에는 소문으로 돌던 유언(流言)이 이제는 아예 투서의 꼴을 갖추고 종광의 산채에 던져질 정도였다.
종광은 자신의 발밑에서 무언가 움직이고 있다는 건 느꼈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어디에 물을 수도 없었다. 종광의 부하들은 하나 같이 종광보다 멍청했던 데다가, 무엇보다 녹림의 채주라면 자신의 약점을 부하한테 드러내지 않는 법이었으니까.
밤에 자다가 부하가 암습해 채주가 바뀌어도 녹림칠십이채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부하 하나 휘어잡지 못하는 채주라면 그 채주 본인의 잘못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게속 고민하던 종광의 귀에 들어온 건 어느 소문이었다.
-최근에 진충비도란 놈이 있다는데 들었나?
-놈이라니! 말 조심해라.
-아는 사이냐?
-친척이 하나 있는데, 배에서 물건을 훔쳤다는 누명을 써서 관아로 끌려갔지. 죽었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진충비도가 나와서 누명을 풀어줬다는군.
-그 누명을 어떻게 풀어줘? 관졸한테 잡혔는데? 은자를 바쳤나?
-아니라니까. 그냥 풀어줬다고.
-그러니까 관아에 끌려갔는데 어떻게... 억!
-야, 이 자식아.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무슨 주둥이가 이렇게 재잘대냐!
산적들의 대화에 흥미를 가진 종광은 부하들을 시켜서 진충비도에 대한 정보를 긁어모았다.
특이하게도 포두로 일하고 있는 무인이었다. 젊은 나이에 명문세가 출신도 아닌데 무공이 제법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특기할 점은 비범한 두뇌였다.
한경의 여러 문제들을 풀어준 것도 모자라 모용세가 놈들까지 불렀다지 않은가.
'이 놈이다!'
종광은 이 포두가 지금 난관을 물어보기 가장 좋은 인재라고 확신했다.
명문세가가 아니니 녹림의 이야기가 쉽게 새지도 않을 것이고, 채주가 되어서 녹림을 팔아먹었다는 소문도 퍼지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세력도 없는 젊은 놈이라 부르기 쉬웠다. 한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붙잡아서 물어보면 될 것 같았다.
"두, 두목!"
"무슨 일이냐?"
"웬 고수가 날뛰고 있습니다! 도와주셔야 할 거 같습니다!"
"뭐?"
종광은 일단 애병인 도끼를 챙겼다.
어떤 고수인지는 몰라도 일단 내려가서 확인을 해봐야 했다. 만만하고 이길 수 있는 놈이면 싸우고, 아니면 꼬리를 내리고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 했으니.
"가자! 뭐하는 놈이냐? 어디 출신이지?"
"그것이, 잘 모르겠습니다!"
"멍청한 놈!"
종광은 부하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며 달렸다. 저 언덕 아래에 부하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감히 누가... 헉!"
제갈세가의 장로를 알아본 종광의 눈이 커졌다.
저건 천기수사 아닌가!
***
"요즘 녹림이 혼란스러워서 지혜를 빌리려고 했다? 시시한 이야기였군."
채주한테 사정을 들은 천기수사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말했다. 종광은 멍청한 부하들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천기수사가 같이 있었으면 그 이야기부터 할 것이지, 멍청하기 그지없는 놈들이었다.
"난 또 혈교 놈들이 무슨 계략이라도 꾸미는 줄 알았네."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종광은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걸 느꼈다.
혈교와 결탁했다는 혐의는 농으로 주고받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칠십이채가 있다고 하더라도 혈교가 엮이는 순간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의 주력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올 것이다.
"저는 그저 외부인의 조언을 한 번 들어보고자 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자세한 사정이 어떻게 되느냐?"
"그... 그건..."
상대가 아무래도 제갈세가의 무인인 만큼 종광은 주저했다.
어떻게 보면 녹림의 약점을 오대세가의 무인에게 함부로 말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걸 알아차린 천기수사는 별로 불쾌해하지 않고 말했다.
"말할 수 없다면 됐다. 자리를 비워줄 테니 한 번 이야기해봐라."
"감, 감사드립니다!"
"하! 감사하긴 아직 이를 거다."
종광은 천기수사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녹림의 산적들은 자기보다 더 뛰어난 도적들이 무림에 있다는 걸 상상하지 못하는 것이다.
"큼! 진충비도 소협."
천기수사가 자리를 비워주자 종광은 헛기침을 했다. 커다란 덩치에서 드러나는 외공과, 그만큼은 못해도 받쳐주는 내공이 과연 녹림의 채주 자리를 괜히 맡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느끼게 해줬다.
"먼저 이걸 좀 봐주게."
"?"
연우혁은 투서를 받아들었다.
-관모를 쓰고 걸어가는 선비가 있는데 입이 넷 달린 개새끼가 발목을 물어뜯었구나, 호걸은 어느 편에 설 것인가?
"요즘 이런 소문이 도는데,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서..."
"혹시 총채주께서 요즘 은거하고 계십니까?"
"?!"
종광은 깜짝 놀랐다.
소문으로 들었을 때는 좀 과장이나 부풀려진 면모가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직접 경험하니 가슴이 철렁거릴 정도로 놀라웠다.
"녹림에 대해 알고 있었나?"
"몰랐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니라면 어떻게 총채주가..."
"관모(一)를 쓰고 걸어가는 선비(士)는 왕(王) 아닙니까. 입(口)이 넷 달린 개(犬)는 기(器)를 말하는 거고요. 총채주 주변에 기가 들어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부, 부채주 한기!"
"이 소문은 부채주가 총채주를 습격했다는 뜻이 되겠군요. 부채주의 반대편에 서있는 자가 소문을 퍼뜨리면서 채주들이 어디 설 거냐고 묻는 것 아니겠습니까."
연우혁은 친절하게 설명해주면서 의아해졌다.
"그런데 다른 채주들이 움직임을 안 보였습니까?"
"딱히... 아마 대부분 이해를 못 했을 텐데."
"..."
연우혁은 소문을 퍼뜨릴 때도 생각보다 신경을 써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채주들이 다 이해를 하지 못하니 끙끙 앓기만 하고 아무도 행동에 나서지 않는 것이다.
아마 이 소문을 퍼뜨린 사람은 지금쯤 뒤늦게라도 소문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퍼뜨리고 있을지 몰랐다.
"과연, 과연. 생각보다 어렵지 않군! 고맙네. 고마워! 이제 알 것 같아."
종광의 안색이 밝아졌다.
이제야 왜 이런 소문이 돈 지 알 것 같았다.
'다른 놈들은 전혀 모르고 있겠군.'
종광은 다른 채주 놈들을 방문해서 슬쩍 떠보면서 소문을 해석해줄 생각이었다. 어지간한 놈들은 무슨 소문인지 짐작도 하지 못할 것이다.
"다 끝났나?"
"예. 별로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럼 가자."
그 사이 돌아온 천기수사는 뒤에 녹림 산적 둘과 말 한 마리, 그리고 그 위에 큼지막하게 쌓은 봇짐을 데리고 있었다.
낯익은 모습에 종광은 갑자기 섬뜩해져서 물었다.
"그... 그게 뭡니까?"
"질문에 대한 값이다."
"잠, 잠깐!!"
종광은 그제야 저 봇짐이 어디서 나온 건지 깨달았다.
저건 산채에서 채주만 아는 비밀장소에 숨겨놓은 패물들이었다!
"저걸 어떻게?!?!"
"지혜가 있다면 찾는 건 어렵지 않지."
"무슨 짓이십니까!"
"나야말로 묻고 싶군. 뭐 때문에 물어본 건진 몰라도 그만큼 중요한 질문 아니었나? 그런데 지금 보답을 아끼겠단 건가?"
"..."
종광은 산적 출신인 만큼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혈맥이 막히고 울화가 치솟는 기분이었지만, 지금 눈앞의 고수한테 건방지게 굴었다가는 정말로 죽을지도 몰랐다.
강호에 살다보면 저런 고수도 만날 수밖에 없는 법.
"...맞습니다.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 가르침은 값을 받지 않도록 하지."
'개자식이!'
연우혁은 종광이 항의를 멈추고 포기하자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저만큼 받았는데 파자만 해석해주고 가기 조금 뭐했던 것이다.
"종 대협."
"...왜 그러는가?"
"한 가지 조언을 드리자면, 잠시 산채를 비우고 숨어계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녹림 총채주 실종사건 (2)
종광은 뭔 헛수작이냐고 버럭 소리를 지르려다가 뒤에 있는 천기수사를 떠올리고 참았다.
"...그게 무슨 소린가?"
"음."
연우혁은 막상 설명해야 하자 곤란함을 느꼈다.
'관모를 쓰고 걸어가는 선비가 있는데 입이 넷 달린 개새끼가 발목을 물어뜯었구나, 호걸은 어느 편에 설 것인가?'란 파자를 연우혁이 풀 수 있었던 건 당연히 실제 사건이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산채의 산적들이 줄줄이 몰살당하기 시작한 사건.
대개 녹림의 산채들은 만일을 대비해 깊은 산속에 배치되어 있었고, 습격이 일어났을 때 막거나 도망가기도 쉬웠다. 이런 산채의 산적들이 일제히 죽어나가는 건 드문 일이었다.
그래서 이 희귀한 사건을 파고들기 시작하면 저 파자가 나왔다.
얼핏 보면 부채주가 총채주를 습격했고, 부채주의 반대편에 있는 자가 소문을 퍼뜨리면서 채주들을 규합하려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 쉬웠지만 이 사건의 내막은 좀 더 복잡했다.
부채주의 반대편에 선, 녹림의 장로들도 만만치 않게 교활했던 것이다.
장로들은 반응을 보이고 움직이는 몇몇 채주들을 습격해서 암살하고 산채를 쓸어버렸다.
대체 왜 자기들의 편에 설 채주들을 습격하나 싶겠지만 장로들은 그 허점을 노렸다. 이런 상황에서 몇몇 채주들이 습격당해서 죽으면 부채주가 누명을 쓸 거라는 걸 잘 알았던 것이다.
반대하는 세력을 끌어 모으는 건 부채주가 누명을 쓴 다음에 해도 됐다. 남은 채주들은 분노해서 순식간에 모여들 테니까.
그러니 이제 이 파자를 해석한 이상, 그 다음에 일어날 일은...
'녹림 장로들이 반응 보이는 채주들 중 무작위로 몇 군데 골라서 학살하겠지.'
하지만 이걸 그대로 말해줄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장로들이 살수를 연우혁한테 보낼 것이다.
저번에도 그랬지만 이상하게 무림에서는 옆에서 말로 설명해주는 사람이 더 원한을 살 때가 많았다.
"자. 보십시오."
연우혁은 천기수사가 챙긴 봇짐을 한 번 쳐다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이 눈앞의 산적에게 잘 대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방금 제 말을 듣고 나서 뭘 하려고 하셨습니까? 다른 채주들에게 소문을 퍼뜨리려고 하셨겠지요?"
"어... 어떻게!!"
종광은 경악해서 벌떡 일어났다.
신통력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자기가 경험하게 되자 소름이 돋았다.
"...아니, 당연히 부채주에 반대하는 사람이 낸 소문인데, 다른 채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의중을 떠봐야지요. 종 대협 같은 호걸께서 겁을 먹고 산채에 숨어계시진 않을 것 아닙니까."
"아... 그렇군!"
종광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또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신통력이라는 게 별 거 아니군그래! 나도 할 수 있겠어."
"하하."
천기수사는 먼 산의 봉우리를 쳐다보았다. 산봉우리는 천기수사의 마음도 모르고 독야청청했다.
'죽여버리고 싶군.'
끼어들지 않기로 했기에 참았지 자기 앞에서 저런 소리 했다면 바로 혓바닥에 바늘이 꽂혔을 것이다.
그리고 천기수사는 지금 연우혁이 왜 추가로 조언을 해주는지 알고 있었다.
방금 천기수사가 재물을 털어간 만큼, 원한을 사지 않기 위함이리라.
아마 십중팔구 종광은 천기수사한테만 원한을 품겠지만 무림의 일이란 건 가끔 예상을 벗어나는 법.
천기수사처럼 세가를 업은 사람이면 모를까, 연우혁 같은 포두는 저런 식으로 처세해서 적을 만들지 않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그래서 천기수사는 방해하지 않고 듣고 있었다.
왜 산채를 비우고 숨어있으라고 한 건지 궁금하기도 했고...
"그런 소문이 돌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녹림도들이 일제히 모여 총채주님의 안위를 확인하고 부채주를 쓸어내겠지!"
"그럼 이제 부채주께서는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소문에 귀를 기울이면서 먼저 움직이려는 채주를 공격할지도 모릅니다."
"헉!"
종광은 깜짝 놀랐다.
확실히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이게 함정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 과연... 잠깐. 그럼 가만히 입만 다물고 있어도 되는 것 아닌가? 왜 산채를 비우고 숨어있어야 하지?"
천기수사라면 '네놈이 비밀을 잘도 다물고 있겠다'라고 할 수 있겠지만, 연우혁은 그럴 수 없었다. 종광이 아무리 비밀을 숨기지 못하고 행동으로 다 드러낼 사람이라 하더라도 좋게 말해줘야 했다.
"종 대협. 제가 녹림의 채주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압니다. 종 대협은 채주들 중에 손꼽히게 지혜로운 사람일 겁니다."
"하, 하하... 그 정도인가?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천기수사는 더러운 말을 들은 귀를 흘러가는 냇물에 씻고 싶어서 미간을 찌푸렸다.
"보십시오. 어느 채주들이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파자를 해석하려고 사람을 불렀겠습니까? 고집을 부리지 않고 지자(知者)의 도움을 받는 것도 역시 지자입니다."
"과연!"
종광은 감탄했다.
이 젊은 포두를 산채의 부두목으로 두고 싶을 정도였다. 하는 말 하나하나가 아주 달콤했다.
"그리고 이건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종 대협이 파자를 해석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걸 믿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
종광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확실히 이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지혜가 자신의 목을 조르는 올가미가 될 줄이야.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무시무시한 음모와 계략의 무림이었다.
"종 대협께서 잠시 보이지 않으면 그 다음으로 지혜로운 채주들을 먼저 노리지 않겠습니까? 사건이 커지면 무관심하던 채주들도 들고 일어설 테니, 그 때가 바로 잠룡이 비상하고 불비불명(不飛不鳴)하던 새가 날갯짓할 때입니다!"
연우혁은 스스로에게 감탄했다.
진실을 말하지 않고도 이렇게 완벽하게 설득할 수 있다니.
실제로 종광은 매우 깊게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방금 들은 말을 고민하고 있었다.
"한 가지만 더 물어도 되겠나?"
"예."
"새가 안 날고 안 우는 게 지금 이야기랑 무슨 상관인가?"
"..."
"그만하면 됐다. 가자!"
참지 못한 천기수사가 성질을 냈다. 종광은 살기 넘치는 기세에 그대로 움츠러들었다.
말을 타고 가면서 천기수사는 연우혁에게 물었다.
"이야기가 좀 이상하던데, 원래 하고 싶은 말이 따로 있었던 거냐?"
"예. 아마 녹림 장로들이 산채를 습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뭐?!"
천기수사는 말 위에서 떨어질 뻔했다.
***
한경에 도착해서 천기수사와 갈라진 연우혁은 봇짐을 들고 방가전장의 공 총관에게 찾아갔다.
모용세가에서 받은 보수와 별개로, 종광에게서 뜯어낸 보수는 쓰고 싶은 곳이 있었던 것이다.
"여긴 어떤가?"
"만족스럽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거 참. 자네가 해준 게 얼마인데 이런 곳밖에 찾아주지 못해서 미안하구만. 요즘 한경의 저택이 남는 게 적어서..."
연우혁은 만족스럽게 저택을 쳐다보았다. 낡았지만 깔끔했고 무엇보다 공간이 넉넉했다. 본채나 사랑채 같은 건물도 건물이지만, 가운데 내원 공간이 넉넉해야 수련하기 편했던 것이다.
이제까지 연우혁이 썼던 포쾌들의 숙소나 구역 안가는 편리하고 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당장 마당에 재산을 숨겨놓을 수도 없고.'
영약이나 내단도 중요했지만 이제 슬슬 상관들에게 바쳐야 할 뇌물도 진지하게 준비해놓을 차례였다. 연우혁의 명성이 올라갈수록 한경의 관리들은 '그렇게 대단한데 왜 은자 한 푼 못 받았지?'라고 생각할 테니까.
'...생각하니까 억울하군.'
연우혁은 연줄이 없는 스스로가 분했다.
아는 황족이라도 있으면 '한경 관리 놈들이 포두를 수탈합니다'라고 투서를 보내 넣을 텐데.
"좋은 저택을 고르셨습니다. 포두님. 길 끝에 위치한데다가 담벼락이 안을 두텁게 가리고 있어서 무림인이 머물기 좋은 곳이군요."
적 포쾌가 씩 웃으며 말했다. 연우혁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담벼락이 가리고 있는 건 알겠는데 길 끝은 왜지?"
"적들이 잡으러 올 때 시간을 벌 수 있지 않습니까."
"..."
무림인이 아니라 살수가 머물 때 좋은 이야기였다. 연우혁은 못 들은 척 무시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문 들었습니다. 모용세가가 마두들을 토벌하는 걸 도우셨다고요."
"아무도 없으니 편하게 말해도 됩니다."
"정파보다 사파 놈들 사이에서 소문이 더 돌았더군."
적조는 역용술을 펼치느라 긴장된 뺨의 근육을 풀어주며 말했다.
"사파 놈들은 어째서?"
"원래 사파 놈들이 그런 건 미리미리 알아두려고 하는 법이지. 언제 자길 죽일지 모르니."
정파무림에서 소문은 아무래도 어디 출신이냐가 중요했다.
이번에 연우혁이 아무리 공을 세웠어도 결국 모용세가란 이름이 같이 있으면 모용세가가 좀 더 주목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에 비해 사파의 무림인들은 어느 놈이 위협적이고 신경을 써야 하는지를 먼저 확인했다.
"그렇게 심하게는 안 퍼졌겠지요?"
연우혁은 살짝 기대하며 물었다. 정파 사이에서 명성이 퍼지면 어디든 대접을 받았지만 사파 사이에서 명성이 퍼져서 좋을 게 없었다. 경계만 더 살 뿐이었다.
"흑륵존자와 청수귀마를 일개 포두가 죽였다고 퍼졌던데."
"컥."
연우혁은 사레가 들려서 맹물을 마당에 뱉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십시오."
"아니... 소문은 내가 낸 게 아니지. 거기 있던 놈들이 냈는데 왜 나한테 그러는 거냐. 네가 죽인 게 아니었나?"
"같이 죽인 거죠."
"같이 죽였으면 거기 있던 놈들이 그렇게 소문을 안 냈겠지. 하여간 왜 걱정하는 거냐? 누가 청수귀마나 흑륵존자의 원수를 갚으러 올까 걱정이라도 되는 건가?"
타고난 살수인 적조는 연우혁 정도의 실력이라면 그리 겁을 먹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저 정도면 무림에서 죽일 수 있는 고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심지어 한경 안에서라면 더더욱.
"그보다는 상대를 방심시키지 못하고 경계하게 만드니 그런 겁니다."
"...누가 살수인지 모르겠군!"
너무 어이없는 연우혁의 말에 적조는 할 말을 잃었다.
어느 무림인 놈이 날로 먹고 싶어해서 자기 명성을 숨긴단 말인가.
"하여간 포두님. 이거나 받으시지. 별 것 아니지만 선물이오."
적조는 찻잎 단지와 술병 몇 개를 창고에 쌓았다. 영안으로 보니 꽤 괜찮은 물건들이라 연우혁은 놀랐다.
"어디서 나셨습니까?"
"그, 술을 기막히게 잘 알던 친구가 있던데. 오 포쾌였나?"
"아. 그렇긴 합니다."
"그 포쾌의 술을 좀 갖고 왔다."
"...부하 분은 어디 가셨습니까?"
"부하? 아. 매파(媒婆) 노릇을 하고 있지."
"??"
연우혁은 적조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목소리를 낮추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살수의 일을 하러 가신 겁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니다. 진짜 매파 노릇을 하고 있다고."
"적 대협이야말로 뭔 미친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정 소저 말이다. 정 소저. 정 소저의 서신을 상대에게 전해주고 있다."
"상대가 누구길래요?"
적조는 뻔한 걸 묻는다는 듯이 대답했다.
"당연히 제갈규지."
"...아니, 그렇게 너무 억지로 보내면 상대방이 꺼려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속이 보이면..."
"서신은 그놈이 먼저 보내서 답장해주는 거야."
"..."
연우혁 안에서 제갈규의 평가가 크게 내려갔다. 천기수사가 왜 제갈세가의 젊은 후기지수들을 영 못마땅해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하여간 알겠습니다. 전 여기 술병이나 챙겨서 고관 어르신들을 뵙고 와야겠습니다."
"뭐? 아니, 마시라고 준 걸 왜 돼지 새끼들을 주냐?"
"그게 다 지혜 아니겠습니까. 한 달 넘게 떠나있었는데 당연히 바쳐야지요."
"안 그래도 돼! 어차피 모용세가 놈들이 대신 다 해줬는데."
"뭘 말입니까?"
"?"
적조는 연우혁이 모르자 놀라워했다.
"왜 네가 모르냐? 벽력신권 놈이 사흘 전인가 와서 관리 놈들한테 네 이름으로 은자를 쫙 뿌리던데."
"..."
연우혁은 벽력신권 모용태의 화끈한 보답에 전율했다.
그리고 아주 조금 아까웠다.
'...그냥 그걸 내가 챙겼으면 영약이...!'
언젠가 눈치껏 바치긴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바치게 되니 생각보다 많이 괴로웠다.
"뭘 했길래 그런 무시무시한 놈과 인연을 맺은 거냐?"
"세가 내의 일을 좀 도와드렸습니다."
'보물 훔쳐서 도망친 하인 놈이라도 잡아줬나?'
"공자들끼리 다투길래 중재를 해드렸거든요."
이번에는 적조가 마시던 술을 내뿜었다. 연우혁은 유연하게 신법을 펼쳐 술을 피했다.
"아니, 미친 놈인 건 알고 있었는데 진짜 미친 놈이잖아! 어떤 놈이 처음 보는 외인에게 세가 직계의 일을 맡기는 거냐?!"
"적 대협도 살막의 일을 처음 보는 외인에게 부탁하셨잖습니까."
"..."
적조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녹림 총채주 실종사건 (3)
"...그건 조금 다르지. 야. 그건 조금 다르다."
"예."
"...다르다고."
"알겠습니다."
적조는 머쓱해져서 술잔만 기울였다. 생각해보니 살막의 무인들도 적조와 이 포두의 내막을 알게 되면 기겁할 것 같았다.
"모용세가 놈이 와서 그렇게 체면을 세워줬으니, 너도 한경 안에서 제법 면목이 서겠군."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연우혁은 기대감을 숨기기 위해 애쓰며 말했다.
가능성은 그렇게 높지 않았지만, 지금 연우혁은 비어 있는 한경의 판관 자리가 다시 채워지기 전에 앉는 걸 노리고 있었다.
일개 포두가 그런 자리를 노린다면 언감생심 소리를 듣겠지만 연우혁이 세운 공은 일개 포두라고 하기에는 너무 대단했다.
게다가 한경의 정관들에게 계속해서 눈도장을 찍고 있지 않은가.
약간의 행운이 도와준다면 연우혁이 아주 드문 사례의 당사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런 행운에는 명성 높은 세가와의 인연도 들어갔다. 방금 적조의 말에 연우혁이 기대하는 것도 당연했다.
"사실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모용세가의 이름이 있는데 어째서?"
"당문과의 인연이 있었는데 그리 효과가 있진 않았거든요."
"당연히 당문은 좀 그렇지."
적조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다른 오대세가와 달리 당문은 인연이 있다고 해서 한경의 관리들한테 대접을 받기 힘들었다.
"일단 거리가 멀지 않나."
"하긴 거리가 멀면 받은 것도 그만큼 없을 테니..."
"그리고 괴팍하기도 하고."
"...괴팍은 모든 오대세가들이 다 괴팍하지 않습니까?"
"아니. 당문이 특별하지."
적조는 냉정했다.
한경 관리들 중에 당문을 두려워하는 놈들은 있어도 당문과 친밀한 관계인 관리는 드물었다.
관리들이 연우혁을 뒤에서 밀어주고 앞에서 끌어주려면 관리들이 신세 진 가문의 입김이 필요했던 것이다.
"지부 어르신이 당문하고 꽤 친하다고 들었는데..."
"그건 그 놈이 이상한 거다. 내가 보기에 그 무골호인 놈은 마교 천마하고도 좋게 지낼 거야. 하지만 모용세가는 확실하다. 나름 입김이 있지."
연우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조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꽤나 믿음직스러웠던 것이다.
'고맙습니다. 벽력신권 님.'
자리에 없는 모용태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보내며 연우혁은 나중에 서신이라도 한 통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쿵쿵쿵!
"?"
누군가 저택 문을 다급하게 두드리는 소리에 둘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녁이 넘은데다가 곧 통금이라 돌아다닐 사람도 없었다. 포쾌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이 시간에 포두를 부를 리 없을 테고...
"수상한데. 조심해라."
"예."
둘은 자세를 바로잡았다. 무림에서 사는 만큼 보복은 예상하지 못할 때에 찾아올 수 있었다. 언제라도 방심해서는 안 됐다.
"확인해보겠습니다."
"조심... 엇."
적조는 확인하겠다고 문 가까이 걸어간 연우혁이 재빨리 정문을 열자 당황했다. 아는 사이가 아니라면 저 치밀한 포두가 허튼 행동을 할 리가 없었다.
"들어오십시오."
"아는 사이였ㄴ... 아는 사이셨습니까?"
"쌍패부 대협."
"쌍패부면..."
"녹림의 채주."
"아."
너무 사파스러운 별호에 뭐하는 놈인가 당황했던 적조는 뒤늦게 이해했다. 녹림의 채주라면 저런 별호가 어울렸다.
"아니, 녹림 채주는 어떻게?"
"모용세가의 일을 해결해주고 돌아오면서 도움을 줬지. 이 저택을 그걸로 산 거다."
"허, 녹림 놈들한테서 용케...!"
적조는 녹림의 채주가 저녁 늦게 찾아온 것보다, 녹림 채주 상대로 적지 않은 재물을 뜯어낸 것에 대해 더 놀라워했다.
녹림 놈들만큼 수전노가 또 없었던 것이다.
그런 놈들 상대로 일을 하나 해결해줬다고 이 저택을 살 만한 재물을 구했다니. 정말 귀신 같은 재주였다.
연우혁은 종광을 쳐다보았다. 종광의 얼굴과 의복에는 피가 말라 붙어있었고 눈빛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게다가 혼자가 아니었다.
옆에 있는 무인은...
'절정의 경지다!'
무공을 숨기고 있었지만 이 자리에 있는 무림인들 중 가장 고강한 경지였다. 적조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가 연우혁의 시선을 보고 위화감을 깨달았는지 몸을 긴장시켰다.
무공의 경지가 잘 느껴지지 않았지만, 지나치게 흔들림 없는 자세에서 느껴지는 불길함이 살수의 본능을 자극한 것이다.
"종 대협. 여긴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한경 한복판에 녹림의 채주께서 돌아다니시면 해를 입으실 수 있습니다."
"미, 미안하네. 물 좀 주겠나?"
적조는 술을 가져다주었다. 상대를 방심시키고 혀를 가볍게 만들려는 속셈이었다. 종광은 그것도 모르고 감사해하며 꿀꺽꿀꺽 마셨다.
"자네 충고를 듣고 생각했네. 옳은 충고라고."
"예."
"그래서 다른 채주들을 만나러 갔지."
"...잠, 잠깐 기다려주십시오."
연우혁은 순간 당황했다.
분명 연우혁이 했던 충고는 '지금 녹림에 풍랑이 불 테니, 휘말리고 싶지 않으면 머리를 땅에 박고 끝나길 기다려라' 아니었나?
대체 왜 다른 채주들을 만나러 갔지?
'내가 말을 이상하게 했었나? 아니다.'
"벗들이 있는데 내버려둘 순 없지 않나."
친한 채주들한테만 전해주려고 했다는 종광의 말에 연우혁은 아찔해졌다. 뒤에 있던 적조도 어이없어하는 기색이었다.
'미친놈인가?'
살막에 있었던 만큼 적조는 문파 내 정쟁에 익숙했다. 문파에서 정쟁은 말싸움으로 끝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저런 안일함이라니.
"그, 그렇군요. 종 대협의 우의(友誼)에 감탄했습니다. 그런데 그 상처는..."
"다른 산채에 소식을 전하고 나오는 길에 습격이 있었다."
종광은 지친 한숨을 내쉬며 설명했다.
세 번째 산채를 방문하고 나올 때, 어떻게 알았는지 산길에 매복한 무인들이 일제히 진법을 구성하고 달려든 것이다.
독하고 사나운 기세에 종광은 이대로 죽는 건가 싶었다. 그 때 나타난 고수가 없었다면 틀림없이 절명했을지도 몰랐다.
"인사드려라. 진충비도. 여기 녹호군(綠虎君) 한기 대협이시다."
"!"
연우혁도 놀랐고 적조도 놀랐다. 녹호군 한기는 적조도 알 만큼 유명한 무인이었던 것이다.
녹림칠십이채의 총채주를 보필하는 부채주이자, 본인도 절정 고수로서의 무위를 자랑하는 걸물.
"한 대협께서는 장로들이 녹살대를 은밀히 움직이는 걸 보고 내가 습격당할까 걱정됐다고 하시더군. 그래서 뒤를 몰래 따라왔다고."
"자네가 아니라 그냥 어느 채주든 습격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한기는 점잖게 지적하려고 했지만 종광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덕분에 목숨을 건졌지. 하지만 부채주님 덕분만은 아니다. 이걸 보라고."
종광은 옷 안에 갖춰 입었던 갑주를 꺼냈다. 갑주 위에는 몇 군데나 깊게 패인 흔적이 있어서 얼마나 격렬한 싸움이 있었는지 짐작케 했다.
"진충비도 네 조언을 듣고 이걸 언제나 입고 다녔다. 하하! 그 멍청한 놈들은 상상도 못했을 거다."
"그런 조언이 아니라..."
더 이상 참지 못한 적조가 지적하려고 하자 연우혁이 손짓으로 말렸다. 이미 논쟁을 해봤자 별 쓸모가 없다는 걸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종 대협. 감히 여쭙겠습니다. 한 대협께서 들으면 무례한 질문일수도 있습니다만, 부디 허락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괜찮네. 하게."
한기는 상관없다는 듯이 재촉했다.
"소문만 들었을 때는 부채주께서 총채주를 암습한 것 아닌가 싶었는데, 어떻게 한 대협을 믿으신 겁니까?"
연우혁이야 사건의 내막을 아니까 당황하지 않았다지만 종광 입장에서는 어느 누가 수상하고 위험한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연우혁도 종광이 쓸데없는 행동을 할까 걱정되어서 사건의 내막을 알려주는 대신 숨어있으라고만 하지 않았던가.
"그거야 쉽지."
"?"
"여기 부채주 님이 내 목숨을 구해주셨잖나. 그런 분이 배신을 할 리가 있나."
"...그, 그렇군요."
한기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지만, 영안을 열어놓은 연우혁은 한기가 민망함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포두 앞에서 채주의 멍청함을 자랑해서 기쁠 일이 무엇 있겠는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왜?"
"부채주 님께서 날 구해주고 나신 다음에 물으시더군. 암습을 예상했던 것 같은데 어떻게 예상했냐고. 그래서 내가 대답했지. 나는 녹림에 도는 소문의 뜻을 완전히 알고 있다. 파자 아니냐. 그래서 조심하려고 한다. 잠룡이 비상하고 새가 짹짹 지저귈..."
"...그 뒤는 내가 말하도록 하지."
한기는 피곤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나섰다.
"여기 쌍패부 종광은 무공은 제법이지만 심계가 깊거나 하진 않네. 그래서 누군가 조언을 해준 사람이 있지 않을까 싶었지. 캐물었더니 진충비도의 별호를 불더군."
"여긴 한경이오."
이들이 왜 찾아온 지 깨달은 적조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종광이 발끈했지만 적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녹림의 일과 엮이느니 여기서 한바탕 무공을 겨룬 뒤 밖으로 도망치는 게 나았던 것이다. 어차피 녹림의 고수들은 여기서 오래 있지 못했다.
"내 무림의 일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포두에게 자기네 산채 일을 해결해달라고 부탁하는 산적이 있다고는 들어본 적이 없소."
"..."
'자기는 살막 일 해결해달라고 했으면서!'
연우혁은 뻔뻔한 살막 무인을 쳐다보았지만 적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기는 같잖은 포쾌 놈이 기어오른다고 화를 내지 않았다. 그 모습에서 연우혁은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걸 느꼈다.
과연 녹림칠십이채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고수다운 풍모였다.
"맞는 말이야.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이지. 일단 들어보지 않겠나? 포두한테도 나쁜 일은 아닐 거라고 장담하지."
"재물입니까?"
기대감 섞인 연우혁의 말에 한기는 그 뜻을 오해했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진충비도가 사사로이 뇌물을 받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왔네. 녹림을 도우면서 녹림의 재물을 받진 않겠지. 급박한 와중에 시험은 이쯤하면 되지 않았나."
"하지만 부채주 님. 저 포두는 제 산채의 보물을..."
"그건 종광 네 개인의 목숨값 아니더냐. 녹림의 중대사를 해결하는 건 다른 이야기지."
'아닌데.'
연우혁은 재물도 환영이라고 하고 싶었지만 한기는 이미 종광을 꾸짖은 뒤였다.
"악검삼마(惡劍三魔)와 오독귀(五毒鬼)를 아는가?"
"예."
무림의 역사를 훤히 꿰고 있지는 않았지만, 연우혁도 나름 무림에서 지낸 시간이 길어진 만큼 몇몇 자들은 관련이 없어도 주워들어서 알고 있었다.
게다가 악검삼마와 오독귀는 관아와도 상관이 있는 인물이었다.
이들은 무려 십오년 전 조정의 고관을 죽이고 도주한 무림인이었던 것이다.
어지간해서는 관과 무림이 서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지만 가끔 선을 넘는 마두들이 나오기 마련.
당시 악검삼마와 오독귀를 쫓아서 바치기 위해 정과 사를 가리지 않고 무림에서도 추격대가 구성되었다고 했다.
그 후로도 몇몇 군관들이나 금의위가 어디에서 소문을 듣고 급습하기도 했지만, 전부 헛소문이었던 탓에 이제 무림에서도 반쯤 잊혀진 별호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별호가 나오다니.
"그들은 녹림에 있네. 장로들 밑에서 신분을 바꿔서 머무르고 있지. 이건 나밖에 모르는 사실일세. 만약 부탁을 들어준다면 이 자들을 잘 묶어서 관아에 던져놓지. 뇌물은 거절하더라도 이건 괜찮지 않나."
"거절하셔야 합니다."
적조는 낮게 속삭였다. 한기 정도의 고수라면 들을 수 있겠지만, 사실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다. 두 녹림도 중 하나라도 발끈하면 그 핑계로 저택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저걸 믿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고, 저 정도 되는 마두를 바친다는 건 그만큼 위험한 일이라는 겁니다."
한기는 화를 내지도 반박하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하던 말을 계속했다.
"나는 총채주 님을 찾으려고 하네. 지금 장로들의 패악을 막기 위해서는 그것밖에 없으니. 들어보니 진충비도의 지혜가 그렇게 뛰어나다던데 조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겠나. 장로들은 알지 못할 걸세."
"저것 보십시오."
적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살수들도 사람 속이는 데에는 재주가 있었지만 산적들도 만만치 않았다.
아무리 연우혁의 재주가 뛰어나도 한참 전에 사라진 녹림의 총채주를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아마 저 한기란 놈도 그걸 기대하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의도는 뻔했다. 조언을 듣겠다는 핑계로 데리고 가서 슬쩍 녹림 내부의 정쟁에 발을 담그게 하는 것이다.
장로들이 연우혁을 부채주의 편으로 인식하면 연우혁도 살기 위해서 계략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저 자와 같이 산채로 들어가서 총채주의 흔적을 뒤지는 순간 늪에 걸어 들어가는 겁니다. 여기서 바로 할 수 있는 조언이 아니면 받아서는 안 됩니다."
"음. 적 포쾌."
"예?"
"사실 산채로 안 들어가도 총채주께서 어디 계실지는 짐작이 가긴 하는데."
쾅!
둘은 깜짝 놀라 시선을 돌렸다. 한기가 앉은 채로 급히 일어나려다가 탁자를 넘어뜨리고 겸연쩍어하고 있었다.
녹림 총채주 실종사건 (4)
"...그게 정말인가?"
한기는 넘어뜨린 탁자를 다시 세우며 물었다. 어지간히 충격이었는지 오늘 내내 평정심을 잃지 않은 무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짐작이 가는 곳은 있습니다."
사실 확신에 가까웠지만 연우혁은 상대방이 받을 충격을 세심하게 계산하고 있었다.
말로 설명이 되는 재주는 신통력이었지만 그 이상을 넘어가버리면 이제 사술 취급을 받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들어보고 싶군. 조언을 부탁하네."
"그 전에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조언이 틀린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조언이 틀려도 악검삼마는 던져주겠네. 그러나 조언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오독귀는 주지 않겠네."
"과연."
영안으로 상대의 제안이 진심이었는지 확인한 연우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언이 틀릴까봐 물어본 게 아니라 상대의 보상이 진심이었는지 확인한 질문이었다. 천기수사가 본다면 분명 감탄해서 칭찬했으리라.
'저 마두들로 포두로서의 공에 화룡점정을 찍겠다!'
이런 기회가 온 이상 연우혁은 한 번 해볼 생각이었다.
마두들을 붙잡고, 영약 구매는 잠시 미룬 뒤 모은 재산들을 전부 사용한다.
한경의 고관들은 물론이고 조정의 고관에게도 뇌물을 보내서 제대로 도전해보겠다!
실수하면 은자만 날리는 꼴이 됐지만 연우혁은 한 번 해볼만한 도박이라고 생각했다.
악검삼마와 오독귀는 조정에 악명이 높은 마두였다. 일개 포두가 잡아서 바친다면 한경을 넘어서 분명 조정까지 명성이 닿으리라.
그렇지만 그 전에...
"악검삼마는 붙잡으셨지만 오독귀는 아직 붙잡지 못하신 거군요."
연우혁은 말로서 가볍게 초식을 출수했다. 상대를 설득하고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신비감과 위압감이 있어야 했다.
"!"
한기는 속으로 놀랐다.
저 진충비도의 말이 맞았다. 악검삼마는 장로들과의 대립이 터지자마자 급습해서 생포했지만 오독귀는 아직 장로들 밑에 있었던 것이다.
"그게 무슨 소리냐? 난 악검삼마 그 놈들이 장로 밑에 있는지도 몰랐는데, 부채주 님께서 그 놈들을 어떻게..."
"맞네. 데리고 있지."
"?!"
종광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부채주를 쳐다보았다. 한기는 담담하게 인정했다.
"장로들이 헛소문을 퍼뜨리고 흉계를 꾸미는데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지. 악검삼마 놈들은 장로들의 손발이 되어서 무림을 주유하던 놈들. 놈들의 혀를 비틀면 그 일들이 줄줄 나올 거다."
"허... 대, 대단하십니다."
종광은 머쓱해졌다.
녹림의 일이란 건 산채의 시설을 보수하고 주변 고갯길과 산길을 갈고 닦아 행객을 늘리는 것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 녹림에 이렇게 거센 풍랑이 치고 있었을 줄이야.
"하지만 거짓말을 한 건 아닐세. 오독귀도 잡을 자신이 있어. 장로들만 처리한다면..."
"믿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녹림대왕의 행방을 이야기해보겠습니다."
기세를 휘어잡은 연우혁은 본론을 꺼냈다.
녹림칠십이채의 총채주 임가적은 녹림대왕이라는 거창한 별호를 달고 있었지만, 무림의 어느 누구도 그 별호를 비웃지 못했다. 녹림의 역사상 임가적만한 고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이 마흔에 절정의 경지에 올라, 정사를 가리지 않고 여러 고수들과 생사결을 벌여 승리한 일은 녹림도들이 아직도 자랑하는 일화였다.
고루한 정파의 무인들도 임가적의 무공 실력까지는 부정하지 못했다. 절정의 경지라 하더라도 그 안에서는 초입부터 말입까지 차이가 났는데 임가적의 전적은 누가 봐도 말입에 가까운 실력이었다.
몇몇 녹림도들이나 호사가들은 더 과감하게, 임가적이 말입을 넘어 초절정 직전에 도달했으며 곧 벽을 깰 것이라고 떠들어댔다.
그러면 무림에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드문 초절정고수가 한 명 더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십 년 전 이야기였고, 녹림대왕 임가적은 최근 십 년 사이 공적인 자리에 얼굴을 내민 적이 없었다.
절정의 경지에 올랐을 때는 생사를 계산하지 않고 무림을 쏘다니던 자가 저렇게 은인자중하자 무림인들이 의아해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심마에 빠졌다느니, 아니면 면벽수련을 하고 있다느니, 배신을 당해서 내공을 잃었다느니 여러 헛소문이 돌 정도로.
부채주와 장로들의 정쟁이 터진 것도 따지고 보면 녹림대왕의 부재 탓이 컸다. 총채주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면 어느 누구도 쉽게 경거망동하지 못했으리라.
"녹림대왕께서는 폐관수련을 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맞네."
녹림도들은 총채주의 이야기를 외부에 하는 걸 꺼렸지만, 한기는 순순히 대답했다.
상황도 상황이지만 저 포두라면 확신을 갖고 말하는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기간으로 따지면 십 년도 넘었지."
"허! 실로 대단하십니다. 저는 일 년도 버티지 못할 것 같은데."
종광의 말에 한기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도 마찬가지일세. 어떻게 사람이 빛 한 점 들지 않는 동굴에서 십 년 넘게 버틴단 말인가? 그것도 벽곡단과 이슬만 마시고."
"그러니 총채주를 하시는 겁니다."
"말 마저 해도 되겠습니까?"
"아. 미안하군. 계속하게."
"폐관수련을 하고 계신 분을 사라졌다고 하시는 걸 보면, 어느 순간부터 안에 계시지 않다는 걸 알아차리신 거겠지요. 그 기간이 얼마나 되었습니까?"
"이년 반 정도 되었군. 실제로는 더 길 수도 있네. 폐관수련 때는 말을 많이 걸지 않으니."
폐관수련을 하는 무인에게 계속 말을 거는 얼간이는 없었다. 몇 개월에 한 번 벽곡단과 물을 안으로 집어넣을 때가 아니라면 녹림대왕이 있는 동굴에는 아무도 접근하지 않았다.
녹림에 급한 일이 있어서 의견을 구하러 가지 않았다면 지금도 모를 수 있었다.
"의견을 여쭤보았는데 아무 대답도 들어오지 않더군. 나를 비롯해서 장로들이 모두 찾아가 외쳤지만 묵묵부답이었네. 그 때 우리는 총채주께서 사라졌다는 걸 알았지."
"그냥 안에 계시는데 무시한 거 아니오?"
적조는 의아하해며 물었다. 그러자 한기는 물론이고 종광까지 적조를 비웃었다.
"어이구, 무식한 포쾌 놈 같으니.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녹림은 하나의 산채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수십 개의 산채가 모여서 만들어진 힘이다. 오합지졸이 아니라 녹림으로 묶이기 위해서는 어느 누구보다도 똘똘 뭉쳐야 한단 말이다!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분이 총채주신데, 부채주 님과 장로 님들이 찾아갔는데도 무시한단 말이냐? 산채들이 흩어질 수도 있는데!"
졸지에 종광 같은 우락부락한 채주한테 멍청하다고 욕을 들은 적조의 얼굴이 붉어졌다. 살수 인생에서 손으로 꼽을 만한 수치였다.
"그만해라. 무슨 안건이었는지는 말해주지 못하지만 정말 중요한 일이었네. 총채주께서 계셨다면 절대 무시했을 리가 없는 일이었고. 그 다음부터는... 자네도 짐작하고 있으리라 믿네."
폐관수련을 하고 있는 줄 알았던 녹림대왕이 사라지자 부채주는 물론이고 장로들도 발칵 뒤집혔다.
처음에는 녹림의 위세를 생각해 진실을 은폐했던 이들이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슬슬 다른 마음이 생겼다.
총채주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누군가 현명한 자가 녹림을 다스려야 하지 않겠는가?
"천벌 받을 개자식들! 우라질 놈들, 총채주 님을 찾을 생각은 하지 않고!"
종광은 이를 갈았다. 산채의 채주로서, 장로들이 하고 있는 짓은 믿을 수 없는 배신이었다.
그러나 한기는 반응하지 않고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사실, 진충비도가 이 이야기에서 무슨 비밀을 찾아낼 수 있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애초에 한기를 비롯해 장로들이 총채주를 그리 찾지 않았던가.
온갖 흔적과 단서를 조사하고 하오문까지 동원했는데도 발견하지 못했는데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행적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귀신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부채주 님. 지금이라도 채주들을 불러주십시오. 무림의 채주들이 일제히 달려들면 총채주 님을 못 찾겠습니까?"
"그만둬라. 이미 찾아볼 만큼 찾아봤으니. 무림에 괜한 소문까지 퍼뜨려야 하겠느냐?"
한기의 말에도 종광은 불만을 숨기지 못했다. 부채주는 지친 표정으로 설명했다.
"총채주께서는 정인(情人)이 있으셨다. 그 사이에서 자식도 하나 얻으셨지."
"!!!"
종광은 기절할 듯이 놀랐다.
녹림대왕의 자식이 있었다니!
"말, 말도 안 됩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돌보고 있었으니 잘 안다. 혹시 이 둘에게 온 것 아닌가 싶었지. 기다려봤는데 아무도 오지 않더군. 또 총채주께서 젊은 시절 세운 산채가 있었다. 혹시 폐관수련을 하시다가 그쪽으로 가신 건가 싶어 찾아가봤었는데... 물어보니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하더군."
녹림대왕이 직접 신뢰하고 맡긴 만큼 한기는 총채주에 대해 가장 아는 게 많았다.
장로들 몰래 총채주가 갔을 법한 장소를 모두 찾은 한기는 강호에 더 이상 찾을 곳이 없다고 누구보다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아까부터 경청하던 적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뭐? 포쾌 놈아."
"혹시, 돌아가신 거 아니오?"
"이 미친 포쾌 놈이 뚫린 아가리라고 어디서 감히!"
종광은 발작하려고 했지만 한기가 그보다 빠르게 대답했다.
"음!"
"부, 부채주 님!"
'음'에 담긴 뜻을 느낀 종광은 절망한 눈빛으로 한기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한기는 각오를 다진 얼굴이었다.
"나도... 그 생각을 하긴 했다."
"부채주 님!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널 이해한다. 쌍패부. 나도 일 년 넘게 부정했으니. 하지만... 총채주께서 사라지셨어도 녹림은 녹림이다. 남은 자들은 식솔들을 돌봐야 하지."
한기는 어두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누군가... 누군가, 폐관수련을 하던 총채주 님을 밖으로 불러냈을지도 모르지. 녹림의 급한 일이라면 총채주 님은 아무리 폐관수련 중이더라도 밖으로 나오셨을 테니. 장로들일수도 있고, 장로들과 결탁한 외부의 고수일수도 있다. 총채주 님이 쌓은 원한이 있으니 누구든 가능하겠지."
녹림대왕은 절정의 고수가 되고 나서 정사를 가리지 않고 원한을 쌓았다. 어느 누구든 보복을 해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총채주 님께서 지실 리 없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무림에 무적은 없다. 어느 고수든 철저하게 기습당하고 매복당하면 패배하기 마련이지. 총채주 님한테 목숨을 잃었던 고수들도 자기가 갓 절정의 경지에 오른 애송이한테 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거다."
말을 하던 한기는 자신의 가슴 속을 무겁게 짓누르던 돌덩어리 같은 게 사라지는 걸 느꼈다.
계속해서 외면해오던 진실을 인정한 덕분이었다.
그 순간 한기는 진충비도가 왜 '산채로 안 들어가도 총채주께서 어디 계실지는 짐작이 간다'라고 말했는지 깨달았다.
저 총명한 포두는 이미 총채주가 사라지고 녹림의 장로들과 부채주가 내분을 일으켰을 때부터 확신한 것이다.
총채주가 죽지 않고서야 이런 내분을 내버려둘 리 없었으니까.
진충비도를 쳐다보니 머뭇거리는 얼굴로 한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한기는 연우혁이 입을 열지 않았음에도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 것 같았다.
"그렇군. 진충비도.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가?"
"녹호군 대협."
"더 말할 필요 없네. 이제 이해했네. 자네가 왜 산채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는지. 내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외면하고 있었으니 답답했겠지. 무림의 선배로서 부끄럽군."
한기는 후련하게 말했다.
이제 이 사실을 인정한 이상 더 이상 미망(迷妄)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원수를 찾아내 그 심장의 살점을 씹어 먹고 말리라.
"고맙군. 진충비도. 자네가 처음부터 말을 꺼냈다면 나는 다시 부정했을 걸세. 내 스스로 말을 꺼내게 유도해주지 않았다면 인정하지 못했겠지. 이제야 자네의 명성이 이해가 가네."
무림에 자신의 총명함을 뽐내는 군사들은 많았지만 진정 사람을 설득할 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한기가 보기에 진충비도가 바로 그 드문 사람 중 하나였다. 저렇게 젊은 포두가 무림에 명성을 날리는 것도 당연했다.
'그런 거였나!'
적조는 새삼 감동했다.
아까 산채로 들어가지 않아도 안다고 했을 때는 대체 무슨 귀신의 조화인가 싶었는데, 연우혁은 상황만으로 녹림대왕의 죽음을 확신한 것이다.
그렇다면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적조는 이런 대단한 지혜를 목격하는 사람이 자기밖에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악검삼마와 오독귀는 반드시 잡아서 자네에게..."
"녹호군 대협!"
연우혁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크게 소리쳤다. 한기는 물론이고 종광, 적조까지 깜짝 놀라서 당황했다.
"왜... 왜 그러지?"
"녹림대왕께서는 안 돌아가셨습니다. 그냥 면벽수련하던 동굴 안에 계실 겁니다."
"..."
녹림 총채주 실종사건 (5)
뜬금없는 연우혁의 말에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적조는 당황해서 말했다.
"포두님. 그건 말이 안 됩니다."
"왜 말이 안 되나?"
"그야... 들으셨잖습니까. 동굴 앞에서 부채주와 장로들이 계속해서 불렀는데 대답이 없었다고."
적조도 살막의 대주였던 만큼, 한 조직의 장(長)을 맡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았다.
총채주 자리를 맡은 녹림대왕이라면 그 누구보다도 책임을 진중하게 받아들였으리라.
"그리고 또 정인과 자식도 있었다잖습니까. 살아계셨다면 궁금해서라도 대답을 했을 겁니다."
연우혁은 적조를 설득하는 대신 한기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폐관수련하던 동굴의 입구는 열어보셨습니까?"
"...열어보지 않았네."
폐관수련하는 무인이 머무르는 곳의 문을 함부로 여는 것은 무림에서 금기에 해당됐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피해서 집중하기 위해 폐관수련을 하는데, 밖에서 멋대로 문을 열면 본말전도였다. 정말로 불운할 경우에는 주화입마나 내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녹림대왕 임가적이 폐관수련을 위해 머무르는 동굴은 녹림대산의 심처(深處)였다.
한 때는 다른 이름을 가진 산이었지만 칠십이채 중 으뜸가는 산채이자 총채 역할을 하는 녹림대왕의 산채가 자리잡고 나서는 녹림대산이라고 불리게 된 산.
당연히 그 흔한 땅꾼이나 채삼꾼도 여기에는 없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동굴 앞에는 다섯 치 두께의 철문이 출입을 막고 있었다. 운철을 섞어 만든 이 철문은 다른 문파의 어느 고수가 와도 쉽게 부술 수 없을 터였다.
이 모든 걸 폐관수련을 방해하는 외적을 막기 위해 준비했는데, 녹림도들이 자기 손으로 부술 수 있을 리 없었다.
실제로 부채주나 장로들 중 어느 누구도 불경스럽게 문을 건드리지 못했다.
"왜 열어보지 않으셨습니까?"
"폐관수련을 하는 무인을 방해하지 않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하지만 녹호군 대협께서는 총채주께서 안에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계시잖습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멋대로 동굴의 문을 여는 건 멍청한 짓일세. 장로들이 뭐라고 지껄이겠나? 건방진 걸 보니 총채주께서 왜 사라졌는지 알겠다고 소문을 퍼뜨리겠지. 텅 빈 걸 확인하기 위해 왜 그런 짓을 해야 하는가?"
"저는 총채주께서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연우혁은 단호하게 말했다.
확실한 증거를 보여줄 수 없을 때에는 더 강하게 나가야 했다.
"총채주 님이 암습당했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그럴듯했지만 오히려 가능성이 낮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총채주 님은 무공만 높은 무인이 아닙니다. 본인 또한 채주로 시작해서 녹림의 대소사를 겪고 올라온 분이지 않습니까. 자기 자식도 쉽게 드러내지 않을 만큼 심계가 깊은 분이 녹림의 급한 일이라고 해서 몰래 밖으로 나와 허무하게 암습을 당한다? 아무리 믿음직스러운 장로들이라 하더라도 저는 가능성이 낮다고 봅니다."
"....."
한기는 혼란스러웠다. 듣고 보니 또 이 포두의 말에 이치가 기울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면 다른 곳으로 가신 거 아닌가?"
"녹림대왕 정도 되는 분이 밖에 나온 이상 아무리 정체를 숨겨도 소문이 안 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소문도 하나 없고, 갈 만한 곳을 전부 다 뒤졌는데도 없다면 답은 간단합니다. 애초에 나가질 않으신 거지요."
"하지만... 하지만..."
"녹호군 대협."
증거가 없는 만큼 연우혁은 여기서 대화를 강하게 끝내야 한다고 판단했다.
"저는 녹림대왕께서 왜 대답이 없으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제가 귀신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저를 믿고 철문을 열어보실지, 아니면 저를 믿지 않으실지. 그건 녹호군 대협께서 판단하십시오. 저는 강권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다른 말도 안 되는 장황한 가능성들보다는 가장 간단한 답이 맞는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겠네. 고맙군."
한기는 오랫동안 침묵하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종광은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아 머뭇거리다가 뒤늦게 눈치를 보며 서둘러 일어났다.
"좋은 결과가 있길 기대하겠습니다."
"동감이네."
녹림도들이 돌아가고 나자 적조는 답답해 죽겠다는 듯이 물었다.
"저 놈들이 돌아갔으니 이제 속 시원히 설명해줘라. 대체 녹림대왕이 안에 있다는 게 뭐냐? 그럼 왜 대답을 안 한 거지?"
"눈치 못 채셨습니까? 저는 적 대협이라면 채셨을 줄 알았는데."
"도저히 모르겠다. 왜 대답이 없었던 거지?"
"적 대협은 무림에서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수를 만나본 적이 있으십니까?"
적조는 고개를 저었다.
살수로서 무림에 다섯도 안 되는 초절정고수를 만나지 않았다는 건 행운이었다. 만났다면 이렇게 이야기를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만났다면 땅 속에 묻혀서 떠들고 있었겠지."
"그럼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수들에게 어떤 특징이 있는지 아십니까?"
"글쎄...? 무공의 경지가 초월적이다, 사람 같지 않은 놈들이다, 뭐 이런 쓸데없는 말밖에 기억이 안 나는데."
"방금 잘 말하셨습니다."
"무공의 경지가 초월적이다? 그게 왜?"
"사람 같지 않은 놈들이라고 하셨잖습니까. 제가 보기에 절정의 벽을 넘고 초절정으로 가려면 어딘가 도통(道通)하는 게 있는 것 같습니다."
연우혁은 청허진인이 설명해준 무공의 경지와, 자신이 알고 있는 녹림대왕의 진실을 토대로 그럴듯한 가설을 세웠다.
"소림승들은 오욕칠정을 버리고 해탈의 경지에 오르려고 노력한다잖습니까? 초절정의 경지도 비슷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 전까지는 그렇게 집착했던 세속의 가치들이 덧없게 느껴지는 거지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은데? 무공의 경지가 오른다고 머리가 맛이 간다는 건가?"
"하지만 전 그것 말고는 짐작 가는 게 없습니다. 그런 상태가 되었다면 밖에서 녹림의 일이 급하다고 외쳐도 무시할 수 있지요."
"난 녹림대왕이 안에서 주화입마에 빠진 탓에 대답을 못하나 싶었다. 중독됐다면 그럴 수도 있잖냐."
"그런 고수가 벽곡단에 독 좀 넣었다고 중독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주화입마도 마찬가지고요. 훨씬 더 가능성 낮은 이야기입니다."
"내가 보기엔 이번엔 네가 틀린 것 같은데..."
적조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이상하게 들렸던 것이다.
"그럼 내기하시겠습니까?"
"좋다, 얼마든지!"
흔쾌히 수락하던 적조는 멈칫했다.
"왜 그러십니까?"
"예전에 장로가 해준 말이 갑자기 떠올라서."
"뭐라고 하셨는데요?"
"너보다 똑똑한 놈이 내기를 하자고 제안하면, 아무리 유리해보여도 내기를 하지 말라고 하셨었지."
"하하. 과장이 심하시군요."
"..."
적조는 연우혁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
"...결정했다. 문을 연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한기는 결정을 내렸다. 종광은 물론이고 휘하 무인들은 모두 놀랐다.
"부채주 님! 장로들이 이걸로 공격하면..."
"모두 그만.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다. 따라오도록."
달도 보이지 않는 시커먼 밤.
한기는 휘하 무인들과 함께 동굴 앞에 도착했다. 시커먼 철문은 어둠을 머금고 음산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모두 물러나라."
"예!"
부하들이 보초를 서는 사이 한기는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절정의 고수가 뿜어내는 심후한 초식이 한 점을 정확하게 때리자, 문에 점점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얼마나 두드렸을까.
한기는 땀에 흠뻑 젖은 채 철문에 난 구멍으로 쇠막대를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돌려서 문의 빗장을 풀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한기는 연우혁의 말이 떠올라서 심란해졌다.
정말 이 안에 총채주가 있는 게 맞을까?
"총채주 님. 한기입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기는 캄캄한 동굴 속으로 걸어갔다. 구석에 쌓인 벽곡단과 이슬이 담긴 그릇이 보였다.
'속았나?'
한기는 순간 두려움이 몰려왔다.
군사란 놈들이 얼마나 혀를 잘 놀리는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걸 알면서도 당했다면 한기는 어디 가서 말하지도 못할 만큼 수치스러울 터였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카락과 수염이 너무 길어서 알아보기도 힘들었지만, 한기는 그 사람이 누군지 즉시 알아보았다.
녹림칠십이채의 총채주, 녹림대왕 임가적이었다.
"총... 총... 총채주!!"
임가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앉아서 명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총채주 님. 저 한기입니다. 대답하십시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한기는 흥분해서 발걸음을 앞으로 내딛으려고 했다.
그 순간 임가적이 입을 열었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마라."
"예?"
"더 이상 다가오지 마라. 한기. 나가서 문을 닫고, 아무도 여기 오지 말라고 해라."
"그...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왜 대답하지 않으셨던 겁니까?!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하지도 않으십니까? 당신의 자식이 어떻게 지내는지...!"
임가적은 눈을 떴다. 그 눈빛을 마주하자 한기는 가슴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살기나 적개심 때문이 아니었다.
상관의 눈빛에 드러난 감정은 완전한 무관심이었다.
"궁금하지 않다. 한기. 왜 대답하지 않았냐고? 귀찮았기 때문이다. 무공에 집중해도 모자랄 시간에 산적 놈들이 아옹다옹하는 걸 돌봐줘야 한다니. 터무니없는 소리 아닌가."
"터무니없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총채주 아닙니까!"
임가적은 차고 있던 한 자루 도(刀)를 한기 앞에 던졌다. 평범한 도검이 아니었다. 녹림의 신물이었다.
"오늘부터 총채주는 너다. 수고해라."
"미... 미친 놈...!"
한기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았다. 눈앞의 무인이 자신과 함께 녹림의 산채들을 휘어잡던 무인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어디 도 없이 한 번 막아봐라!"
한기는 분노해서 출수했다. 같은 절정이라고 해도 녹호군의 실력은 녹림대왕에 비하면 몇 수나 아래였다.
그러나 한기는 상대를 죽이려는 게 목표가 아니었다. 방금 던진 녹림의 신물을 다시 붙잡게 만드려는 게 목표였다.
도법을 자랑하는 녹림대왕이 권법을 장기로 삼는 한기를 맨손으로 막아내지는 못하리라!
그러나 놀랍게도 임가적은 도를 잡지 않고 주먹을 뻗었다. 처음 보는 권법에 한기의 권법이 막혔다. 한기는 경악으로 눈을 부릅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안 보는 사이 총채주의 무공은 훨씬 더 심후해져 있었다. 이게 초절정의 경지가 아니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순식간에 허공에서 십여 초식이 지나갔다. 한기는 그대로 날아갔다.
"...죽여라!"
"한기. 왜 화를 내는지 모르겠군. 총채주가 꿈이 아니었나?"
"이딴 식으로 될 생각은 없었다!"
임가적은 귀찮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다. 되고 싶지 않다면 다시 맡아두지. 밖의 상황을 말해라."
"상황을 말하라니?"
"밖의 상황이 시끄럽다고 하지 않았나?"
"지금... 지금, 다시 무공을 수련하려고 해결하겠다고 하는 건가?!"
한기는 다시 한 번 경악했다.
무공에 집중하려고 밖의 상황을 정리하겠다니.
"싫나? 싫다면 네가 알아서 해결해라. 난 다시 수련에 집중하겠다."
"..."
번민하던 한기는 입술을 깨물고 무릎을 꿇었다.
"총채주 님께서 나서주십시오!"
"알겠다. 대신 일을 끝내면 방해하지 마라."
"...예."
"한기. 그런데 내가 안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나?"
"최근에 용하다는 포두 놈한테 물어봤습니다."
"원래 농지거리에 능하진 않았지만 더 심해졌군. 가자."
임가적은 자포자기해서 대답하는 한기의 말을 무시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
사 포쾌의 천객객잔은 요즘 연 포두 휘하의 포쾌들이 자주 모이는 장소였다.
원래는 철전 한 푼 동료에게 쓰기 싫어하는 사람이었지만, 연우혁 덕분에 죽을 고비를 넘기자 사 포쾌는 사람이 완전히 달라져있었다.
"이보게! 다들 한 잔씩 하게. 내가 사는 걸세."
적조는 기뻐하며 싸구려 탁주를 받았다. 살막에 있을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술이었는데 포쾌로 일하니 이상하게 입에 쩍쩍 붙었다.
"소문 들었나? 산적 우두머리 놈이 살아있었다는군!"
"뭐? 녹림대왕 말인가?"
"그래. 몰랐는데 녹림 놈들이 자기네 우두머리가 사라진 줄 알고 꽤 치열하게 싸웠나보더라고. 그런데 우두머리가 갑자기 돌아오니, 안 돌아올 줄 알고 날뛰던 놈들은 큰일 난 거지. 벌써 산채 몇 개는 박살이 났다더군."
"그게 어딘가? 그쪽은 좀 편하게 다니겠군!"
"컥."
적조는 탁주를 마시다가 사레가 들려서 컥컥댔다. 사 포쾌는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쯧쯧 찼다.
"거 아무리 공짜로 줘도 그렇지... 천천히 좀 마시게. 자. 한 잔 더 줄 테니까."
"그... 그게 아니라..."
"그래. 알겠네. 오늘 특별히 인심 좀 쓰지. 자!"
적조는 일단 다 마시고 녹림 놈들 이야기를 캐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녹림 총채주 실종사건 (6)
술에 취한 보부상들은 질문 몇 마디를 던지자 신이 나서 최근에 주워들은 녹림의 정세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녹림끼리 내분이 나서 치고받고 한다는 말에 포쾌들은 물론이고 다른 행객들까지 발을 구르고 함성을 질렀다.
평소 강호를 돌아다니다 보면 한 번쯤은 녹림에게 돈을 지불해야 할 때가 있었고, 허전해진 전낭의 한구석을 보면 어느 누구나 녹림에게 가벼운 원한 정도는 쌓이기 마련이었다.
포쾌들은 돈 뜯긴 원한은 없었지만 그냥 무림에서 싸움 났다는 소식을 즐거워했다. 더군다나 도둑놈들끼리 싸웠다니 얼마나 흥미진진한가.
"적 포쾌. 왜 그렇게 울상인가?"
"하... 말 걸지 말게."
"어허. 그럴 수 있나. 자. 한 잔 더 마시고 말해보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아. 잠깐. 알겠군!"
오 포쾌의 날카로운 눈빛에 적조는 깜짝 놀랐다.
명포두 밑에 약포쾌는 없단 법인가?
설마 방금 적조의 반응만으로 무언가 알아차리다니...
"자네 혹시 녹림 출신인가?"
"..."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어. 유랑민으로 떠돌다보면 녹림 좀 할 수 있는 게 사람 일 아니겠나. 내 모르는 척 해줄 테니 걱정하지 말게."
"아니다!"
"아니야? 미, 미안하군. 화내지 말게."
적조가 발끈해서 고함치자 오 포쾌는 허둥지둥 물러났다. 그 모습에 적조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괜히 놀랐군.'
살막 출신이라 그런지 녹림 출신이라고 의심을 받아도 괜히 놀라게 됐다.
'정말 녹림대왕이 살아있었을 줄이야...!'
적조는 장로의 조언을 무시하고 자기보다 똑똑한 놈과 내기한 자신을 탓했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멀쩡하게 살아있는 놈이 죽은 사람 노릇을 했단 말인가?
"산적들은 모두 죽어라! 하하하!"
"칠십이채가 삼십육채가 되고, 삼심육채가 십팔채가 될 테니, 관군을 보내서 토벌해버리세!"
"나는 녹림대왕이다. 이놈! 너희 산적 놈들이 통행세를 걷어가다니. 용서하지 않겠다!"
"아이고, 대왕님. 지나가는 놈들한테서 돈을 걷지 않으면 무엇을 바칩니까요?"
"어이쿠. 그렇구나! 그럼 앞으로 두 배로 걷어라!"
"에라이, 저 도둑놈 같으니! 죽여라! 죽여!"
객잔은 외지인들과 포쾌들이 섞여 매우 시끌벅적해졌다. 그러는 사이 문이 조용히 열렸다.
새로 방문한 손님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건 적조였다. 적조는 한기가 들어온 걸 보고 눈을 끔뻑거리다가 경악했다.
'아, 안 돼!'
저걸 내버려뒀다가는 한경 한복판에서 녹림 놈들의 칼부림이 일어나게 됐다. 적조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취해 떠드는 놈들의 입을 다물게 할 각오를 다졌다.
그러나 한기는 피곤한 얼굴로 적조에게 손짓했다. 밖으로 나오란 신호였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찔리는 구석이 많은 적조는 밖에 나와서 객잔을 힐끗 쳐다보았다. 눈치 없는 놈들이 녹림에 대한 노래를 아직까지 부르고 있었다.
"포두 말이 맞았더군."
"예... 뭐."
"객잔 때문에 그러는 건가? 신경 쓸 필요 없네. 지금 저런 놈들한테 일일이 손을 쓸 만큼 여유가 있지도 않으니."
객잔에 걸린 등불에 비춰진 한기의 얼굴은 저번에 만났던 것보다 십 년은 더 늙어보였다. 적조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녹림대왕께서 살아계셨던 거 아니오...?"
"맞네."
"그런데 왜? 아, 혹시 장로의 편을 든 산채들이 많아서? 그것 때문에 이렇게 지치신 거요?"
"...아닐세. 포두는 어디 있나?"
"따라오시오."
적조는 연우혁의 자택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연우혁은 먹과 붓을 치워둔 채 종이를 읽고 있었다.
"?"
평소 연우혁이 무공을 수련하는 건 많이 봤어도 먹을 갈아서 글씨를 쓰는 것은 보지 못했기에, 적조는 뭘 쓰고 있나 의아해했다.
"녹호군도 왔나?"
연우혁의 질문에 적조는 깜짝 놀랐다.
"그 자가 오늘 올 것까지 알고 계셨습니까?"
"...자네 뒤에 서있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연우혁의 말에 적조는 그제야 한기가 기다리지 않고 따라 들어왔음을 깨달았다. 적조는 얼굴을 붉히며 따졌다.
"예의도 없소?"
"산적 놈이라 예의가 없지. 예의가 있다면 산적을 하겠나?"
"..."
비열하게 산적 핑계를 대는 한기의 태도에, 적조는 이를 악물고 등을 노려보았다.
'확 찔러버린 다음에 살수 핑계를 대버릴까보다.'
"진충비도. 자네 말대로 총채주님께서는 살아계셨네. 아주 멀쩡하시더군."
"다행입니다."
"다행... 그래, 다행이지."
한기는 씁쓸해하며 대답했다. 적조는 이해가 가지 않아서 캐물었다.
"대체 왜 대답이 없으셨던 거요? 심마라도 빠지셨던 거요?"
"아니. 나를 포함한 녹림이 전부 다 수련에 방해가 되었다고 하시더군."
이미 알고 있는 연우혁은 놀라지 않았지만 적조는 깜짝 놀랐다.
저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살막의 막주가 갑자기 '너희가 수련에 방해가 되니 나를 부르지 말거라'라고 하는 꼴이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나도 모르겠네. 그만하지. 설명은 다 된 것 같으니. 진충비도. 오늘 온 건 저번에 이야기한 악검삼마와 오독귀 때문이네. 어떻게 가지고 갈 생각인가?"
악검삼마와 오독귀를 넘겨받기로 약속했지만, 사실 이런 마두들은 은자 주고받듯이 쉽게 넘길 수 없었다.
당장 악검삼마 셋을 잘 묶어서 관아에 데리고 가면 무슨 이야기가 나오겠는가.
어떻게 잡았는지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시전에서 물건 훔친 도둑놈이야 어떻게 잡았는지 묻지 않겠지만 악검삼마와 오독귀는 예전에 고관을 죽인 뒤 십 년 넘게 추격을 따돌린 놈들 아닌가.
그렇다고 '허허 제가 녹림 총채주의 실종을 앉은 자리에서 해결하고 그 대가로 받았습니다'같은 말을 했다가는 '저 미친 마두 놈이 본색을 드러냈구나!'같은 반응이 돌아올 것이다.
그러니 넘겨주더라도 적절한 준비가 필요했다.
조금 조잡하긴 하지만 연우혁이 다른 지역으로 친척을 보러 가는데, 길가에 쓰러진 놈이 있어서 누군가 확인해봤더니 낯익은 죄인의 얼굴이어서 목을 베었다거나...
"오독귀는 잡으셨습니까?"
"어디 산채에 있는지는 확인했네. 악검삼마는 저번에 말한 대로 붙잡아놓은 상태고. 자네가 어떻게 받을지 말해주면 오독귀까지 붙잡아서 정해주겠네."
"감사합니다. 사실은..."
쿵!
저택 문 두드리는 소리에 적조는 또 누가 왔나 싶었다. 그 때 마침 연우혁이 읽던 종이의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신 우혁이 삼가 아뢰옵니다... 스스로를 무림이라고 일컫는 무뢰배들이... 감히 조정의 신료들을 해치우고... 하찮은 포두지만 일말의 재주를 가지고 있어서 이들을...
"..."
무슨 거창한 출사표 같은 글줄에 적조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게 대체 무슨?
쿵!
밖의 사람은 기다릴 생각이 없었는지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왔다. 한경의 정관 중 하나인 금 통판이었다. 살찐 몸을 이끌고 뛰어왔는지 온몸이 땀에 푹 젖어있었다.
"연... 연 포두! 미친 건가! 포쾌들을 이끌고 마두를 잡으러 간다니. 목숨이 열 개라도 부족할 거다! 내 너를 아들처럼 여기고 잘 대해주려고 했거늘, 무엇이 아쉬워서 사지로 기어가는 것이냐?! 당장 지부 어른께 말씀드려라! 지금이야 질책으로 끝나겠지만 정말 이끌고 떠나면 절대 무사히 돌아오지 못할 거다!"
금 통판의 외침에 적조는 연우혁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이 포두 놈은 포쾌들을 이끌고 마두를 붙잡아 오겠다고 지부한테 계서를 올린 것이다!
'저... 저런 뻔뻔한 놈!'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한경의 관리들한테 연우혁은 녹림의 내분을 틈타 포쾌들만 데리고 가서 마두를 붙잡아오겠다는 미친 포두처럼 보일 것이다.
진짜 난 놈은 난 놈이다!
"지부 어르신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지부 어르신께서는 좋아하시면서 수락하셨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전부 다 반대했다! 이게 무슨 미친 짓이냐!"
금 통판이 발작이라도 일으킬 것 같자 연우혁은 뜨겁게 외쳤다.
"아버지!"
"...!"
"이 아들이 언제 틀린 계책을 내놓은 적이 있었습니까? 녹림이 혼란스러운 지금이 아니라면 마두들을 붙잡아 올 수 없을 겁니다. 또, 마두들이 아무리 무공이 고강하다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의로움이 없습니다. 의롭지 못한 자가 의로운 자를 어떻게 이기겠습니까?"
"하... 하지만..."
금 통판은 어떻게든 연우혁을 말리려고 했지만, 고작 금 통판이 연우혁을 언변으로 이길 수는 없었다.
결국 금 통판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외쳤다.
"좋다, 가라! 가서 마두들을 잡아와 한경 관리의 의기를 높이 알려라! 만약 죽기라도 한다면 너는 더 이상 내 아들이 아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금 통판이 돌아가고 나자 한기는 못 볼 걸 본 표정으로 적조에게 물었다.
"방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