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의위다!!! 금의위다!!!"
주 공공은 번자들을 시켜 금의위가 온 것마냥 나룻배 위에서 소리치게 만들었다.
과연 효과는 썩 괜찮았다. 방금까지 술을 마시던 관리들이 우당탕 소리를 내며 객실 안에서 뛰쳐나왔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관모를 거꾸로 뒤집어 쓴 자들도 보였다.
"금의위가 왔다! 금의위가 왔다!"
"탐관오리들은 모두 죽을 것이다!"
나룻배 위에서 목청 좋게 떠들던 번자들은 관리들이 충격에서 벗어나고 욕설을 퍼붓기 시작하자 재빨리 도망치기 시작했다.
관리들은 웬 잡놈들한테 농락당했다는 사실을 깨닫자 강물 아래로 욕설을 토해냈다.
"감히 어느 놈들이 금의위를 사칭해!"
"잡히면 목을 칠 줄 알아라!"
"하여간 금의위 놈들은!"
주 공공은 금의위를 욕하는 관리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예상을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게 참으로 한심한 놈들이었다.
'너무 빨리 끝나버렸군.'
소란이 생각보다 빠르게 잦아들자 주 공공은 입술을 깨물었다.
안 그래도 관리들이 많고 혼란스러운데 이렇게 빨리 끝나면 혈교도를 찾기가 더 힘들어졌다.
일각 정도 지나 포두가 뱃머리로 다가오자, 주 공공은 크게 기대하지 않으며 물었다.
"찾았나?"
"예. 동지(同知) 어른이 혈교도 같습니다만."
"?!"
주 공공은 두 번 놀랐다. 한 번은 생각보다 높은 지위에 놀랐고, 다른 한 번은 정말로 이런 상황에서 혈교도로 의심되는 사람을 찾아온 포두에게 놀랐다.
"그 말이 사실이렷다?"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좋아! 그러면 동지 놈을 좀 더 주의 깊게 지켜봐야겠구나."
동창은 혈교도라 하더라도 곧바로 잡을 생각이 없었다.
동지가 왜 혈교에 빠져들었고, 혈교는 또 무슨 음모를 꾸미는지 확인한 다음 일망타진할 생각이었다.
"동지 놈이 무슨 음모를 꾸미는지 지켜보도록 해라. 그럴 수 있겠느냐?"
"동지 어른께서는 누각선이 멈추고 강가에 자리 잡으면 평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관리를 죽이고 자신과 손을 잡은 혈교도로 바꿔칠 생각이십니다. 이걸 대비하기 위해서는 하류에서 거슬러 올라오는 배를 접근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 배는 어부들이 타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혈교도들이 타고 있을 테니 말입니다. 또, 다음으로 주의해야 할 것은..."
"...?!!"
주 공공은 아무렇지도 않게 담담히 진상을 미리 예측하는 포두의 모습에 눈을 크게 뜨고 경악했다.
청강은 흐른다 (4)
방금까지 눈앞의 포두는 꽤 영리하고, 어느 정도는 아첨할 줄도 아는 충직한 포두였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포두는 마치 사람이 아닌 귀신처럼 느껴졌다.
그 혼란스러운 와중에 혈교도를 찾아낸 것도 믿기 힘든데, 어떻게 혈교도의 은밀한 내막까지 저렇게 낱낱이 고할 수 있단 말인가?
"설명해보거라!"
"예?"
"어떻게 알아냈는지 설명해보라고 했다. 나는 솔직히 너를 믿기 힘들구나. 지금 무슨 생각까지 하고 있는 줄 아느냐? 네가 혈교도에게 홀린 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하고 있다."
"동지 어른을 의심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금의위가 나타났다고 들었을 때 다른 관리들은 놀랐지만 동지 어른은 불안해했습니다."
"그걸로 단정 지을 순 없을 것 같은데?"
"금의위가 가짜라는 걸 알게 되자 다른 관리들은 안심했지만 동지 어른은 혼자 살기를 뿜으셨습니다. 저는 동지 어른께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지부 어르신께서 주연을 끝내고 배를 강가에 댈까 고민하시는데, 동지 어르신의 생각을 구하고 싶습니다'라고. 그러자 동지 어른께서는 매우 초조해하시며 반대했습니다. 이는 동지 어른이 다른 생각을 품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계획은? 계획은 어떻게 알아낼 수 있었지?"
주 공공은 자신도 모르게 포두를 재촉했다.
"계획 또한 지금 상황을 잘 생각하면 짐작하기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저는 동지 어른이 데리고 온 하인들의 짐을 확인했습니다. 그 짐에는 동지 어른과 품계가 다른 관리들의 관복이 들어 있었는데 그걸 보니 동지 어른께서 무엇을 하려는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혈교도가 추가로 배에 올라오기 위해서 가장 편한 방법은 이 청강을 오가는 어부로 위장하는 것입니다. 아까도 보았듯이 지금 이 시기는 어부들이 오가도 이상하지 않지요."
"!"
가면을 쓴 동창의 무인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방금 연우혁이 한 말을 되새겼다.
이 짧은 사이에 짜낸 임기응변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지혜였다.
동창의 어느 환관도 저런 모습은 보여주지 못하리라.
"네 재주를 의심한 걸 사과하겠다."
날카롭게 높아졌던 주 공공의 목소리가 다시 미성으로 변했다.
"아닙니다. 당연히 의심하실 수 있습니다."
"재주 있는 충신을 의심하는 것만큼 멍청한 사람도 없겠지. 사과할 테니 받아줬으면 좋겠구나."
"이러실 것까지는..."
연우혁이 겸양을 표하려고 했지만 주 공공은 듣지 않고 품에서 둥그런 은패를 꺼내 반으로 쪼갠 뒤 던졌다. 동창의 은패였다.
"네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이걸 꺼낸다면 한 번은 믿어주도록 하마."
"!"
생각보다 더 후한 보상에 연우혁은 멈칫했다.
저 은패는 생각보다 더 대단한 보상이었다. 동창을 상대로 어떤 말이든 한 번은 통하게 해준다니.
막말로 '지부 어른이 역적입니다' 같은 말을 해도 되는 것 아닌가.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
"됐다. 그보다 어부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면 그걸로 될 것 같으냐?"
"혈교의 무리는 사납고 끈질기니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연우혁은 뻔뻔하게 예측하는 척을 했다.
동지의 하인이 관복을 준비했을 때부터 이미 어떤 식으로 적들이 올 지 알아차렸지만, 언제나 예상은 신중하게 해야 하는 법.
"어부로 위장한 혈교의 무인들이 제 때 오지 못한다면 동지 어른이나 하인이 나설 겁니다. 계획이 틀어질 때를 대비해 다른 곳에서 대기하고 있는 혈교의 무인들도 있을 테니 말입니다."
연우혁이 알기로 혈교의 무리는 두 무리로 나눠진 상태였다.
하나는 어부로, 하나는 천천히 내려오는 누각선을 따라 강가에서 움직이는 떠돌이로.
어부가 막힐 경우 동지나 하인이 나서서 두 번째 무리를 불러오게 되어 있었다.
주 공공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안 되겠다는 듯이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자들까지 붙잡는 건 무리겠구나. 동지 어른과 하인을 지금 당장 붙잡아야겠다."
마음 같아서는 이 근처에 있는 혈교도들도 일망타진하고 싶었지만 생각보다 숫자가 많았다. 동지나 하인을 만만하다고 내버려뒀다가는 안에서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동지와 하인을 잡으면 혈교도들은 도망가겠지만...
"혈교도들은 내버려두셔도 괜찮습니까?"
"아쉽구나.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느냐? 동지가 예상 밖의 소란이라도 일으킨다면..."
"제게 맡겨주신다면 동지 어른이 쓸데없는 짓을 하지 못하게 철저하게 손발을 묶어놓겠습니다."
연우혁은 자신감 있게 말했다. 어차피 다 알고 있는 상황이라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이렇게 날로 먹을 수 있을 때 동창 환관에게 눈도장을 찍어두는 것도 좋은 장사였다.
"정말로 묶겠다는 건 아니겠지?"
"..."
"농 좀 해봤다. 그럴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하하! 너무 감탄했습니다!"
아첨은 무시하고 주 공공은 고민했다.
혈교도들과 동지 본인이 눈치 못 채게 계속 손발을 묶는다니.
일개 포두를 믿고 맡기기에는 큰일이었지만, 오늘 이 포두가 보여준 모습은 이보다 더 큰일도 믿고 맡기게 싶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좋아! 포두 널 믿겠다. 나는 혈교도들을 일망타진할 테니, 너는 동지를 막거라."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안 되겠다 싶으면 나와라. 누각선에 있는 관리 두셋 뒤져도 사직에는 별 문제 없으니까."
"하하. 농이 훌륭하십니다."
"이건 농담이 아니었는데?"
"..."
***
동지(同知), 단송기는 위로는 지부 어르신을 모시고 아래로는 군졸과 장인들을 능숙히 점검하며 대소사를 원활하게 돌아가게 만드는 한경의 고관이었다.
이런 위치의 관리들은 지극히 미움 받거나 지극히 사랑받거나 둘 중 하나였는데, 단송기는 후자에 속했다. 판관들이면 모를까 단송기의 심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단송기의 마음속에는 깊은 시기와 욕망이 언제나 들끓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는 것 없는 지부 놈이 떵떵거리는 동안 자신은 손에 얻는 것도 없이 처신만 한 것이다.
그런 끓어오르는 속마음을 혈교도들은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고 찾아왔다.
-한경의 지부는 사실상 단 대인이십니다. 저런 자를 언제까지 내버려두실 겁니까? 단 대인께서 우리를 도와주신다면 우리도 단 대인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지부를 죽이는 건 너무 위험한...
-죽일 필요 없습니다. 아니, 아무도 죽을 필요 없습니다!
-뭐라고?
-한경의 뜻있는 관리들이 조정에 지부를 고발하는 장계를 보낸다면 어떻겠습니까?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어떤 미친놈이 자기 상관을...
-어렵지 않지요. 단 대인께서 도와만 주신다면요.
혈교도들의 제안은 놀라우면서도 대담했다. 고민하던 단송기는 결국 제안을 받아들였다.
'언제 오는 거지?'
주연이 중반을 넘었다.
이제 슬슬 어부들이 부딪치거나 소란을 일으켜야 했다. 아직 일어난 소란이라고는 아까 웬 잡놈들이 금의위를 사칭한 것밖에 없었다.
진짜 금의위인 줄 알고 얼마나 놀랐던가!
거나하게 취한 금 통판은 연우혁을 보며 찡긋거렸다.
"우리 진짜 도사 포두!"
"하하. 과찬이십니다."
"혹시 다른 신통력은 없나?"
꾸벅꾸벅 졸던 지부 어른은 그 말에 솔깃해져서 고개를 들었다.
"오, 연 포두! 신통력을 보여줄 수 있나?"
"부끄럽지만 지부 어르신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흡!"
연우혁은 눈을 감더니 번쩍 떴다.
한경의 술 취한 관리들은 술렁이며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아까 가짜 도사와 달리 이 포두에게는 신통력이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던 것이다.
그리고 관리들이 보기에도 이 포두에게 신통력이 있었다. 그렇지 않기에는 보여준 일들이 너무 놀라웠다.
"헉! 앞일이 보였습니다!"
"뭔가! 뭔가!"
"지금... 지금... 누각선의 방향을 틀지 않으면 다른 배와 부딪칠 겁니다!"
"확인해봐라! 확인해봐!"
지부는 신이 나서 외쳤다. 별 생각 없이 웃으며 지켜보던 단송기는 멈칫했다.
설마 지금 올라오는 다른 배가...?
관리들도 궁금했는지 객실 밖으로 나가 뱃머리에 섰다. 놀랍게도 저 멀리 어부들이 배를 띄우려고 하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지?!"
"에이, 저걸 미리 본 거겠지."
"아니야! 계속 안에 있었잖나."
"누가 알려준 것 아닌가?"
"알려줄 사람이 누가 있다고..."
관리들은 신기해하며 다시 돌아갔지만, 단송기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무리 봐도 저 어부들이 혈교도 같았던 것이다.
관졸들이 어부들한테 배를 띄우지 말라고 외치자 어부들은 당황해서 머뭇거렸다.
'이... 이 포두 놈이...?!'
최근에 소문이 자자하다지만 설마 한경의 고관들이 많은 자리에서도 저렇게 날뛸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단송기는 초조해졌다.
"불을 붙여라."
"예?"
"불을 붙이라고! 배에 불이 나면 강가로 올라갈 거다."
하인은 침을 꿀꺽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됐지만 워낙 안이 정신없어서 불을 붙이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단송기는 이를 갈며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지부 어른은 뭐가 그리 좋은지 연우혁에게 술을 철철 따라주고 있었다.
"연 포두가 이 침몰할 배를 지켜줬군그래!"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하하."
"또! 또 신통력을 보여주게. 내 미래는 어떤가?"
"지부 어른께서는 백 년 넘게 장수하시고, 관직은 나날이 출세하셔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 앉게 되실 상입니다!"
"푸핫핫핫! 이 사람. 날 놀리나!"
"놀리다니요! 저는 한 번도 거짓을 말한 적이 없습니다!"
'저런 미친 간신배 새끼 같으니!'
단송기는 포두 놈의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보통 포두 같은 놈이 이런 자리에 오면 얼어붙어서 말도 못 해야 하는데 저 놈은 간덩어리가 세 개쯤 되는지 자리를 휘어잡고 있었다. 무슨 조고(趙高)의 환생 같은 놈이었다.
"아앗! 또 보입니다!"
"뭐가! 뭐가 보이나!"
"이층, 배의 이층에 불이 났습니다! 끄셔야 합니다!"
"가봐라! 가봐!"
지부 어른은 하인들을 재촉했다. 튀어간 하인들이 돌아오자 지부 어른은 허겁지겁 물었다.
"불이 났더냐?"
"예! 놀랍게도..."
"술을 더 갖고 와라! 하하하!"
'보통 조금 더 놀라야 하지 않나?'
연우혁은 불이 날 뻔했는데도 술을 더 갖고 오라는 지부의 배짱에 감탄하며 단송기를 힐끗 쳐다보았다.
표정은 인자하기 그지없었지만 속은 지금 연우혁을 반쯤 때려죽이고 있었다.
'오늘 무조건 동창에 잡아 넘기지 않으면 다음날부터 새 살수 찾아오겠군.'
단송기는 하인에게 소곤거렸다. 혈교도에게 받은 약을 술에 넣어서 관리 몇을 토사곽란에 걸리게 할 생각이었다.
하인들이 조심히 준비해서 술병을 갖고 왔다. 하도 쌓인 술병이 많아서 약이 든 술이 올라오기까지 반 시진은 더 걸려야했다.
'드디어...!'
"어엇!"
"왜, 왜 그러나 연 포두!"
"저기 술이 상했습니다! 드시면 크게 앓을 겁니다!"
"말도 안 되네. 연 포두.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상한 술을 올리겠는가?"
"하지만 정말입니다!"
지부 어른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술을 확인했다. 놀랍게도 술의 향과 색이 이상했다.
분노한 관리들이 벌떡 일어났다.
"이놈들을 당장!"
"관두게, 관둬! 좋은 자리 분위기를 망치지 말게. 여기 연 포두가 또 이 배를 지켜줬군그래!"
도사도 치워줬겠다, 관리들은 연우혁이 지부의 총애를 받아도 화를 내는 대신 오늘은 축하해줬다.
물론 단송기 입장에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대체 저 포두 놈은 뭘 잘못 처먹었길래 오늘 사사건건 일을 방해한단 말인가?
***
결국 누각선이 하류까지 가는 동안 혈교의 무인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멍청한 놈들, 멍청한 놈들! 이래서 무식한 무림인 놈들하고는 상종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인데!"
단송기는 잔뜩 취한 채 분노를 터뜨리며 갑판 위를 걸어갔다. 옆의 하인들은 분노가 자신한테 날아올까봐 자세를 낮추고 눈치만 지켜봤다.
"그깟 배 하나 기어오르지도 못하는 놈들을 믿었으니 내가 머저리고 내가 병신이다! 이..."
"단송기."
"?"
듣기만 해도 서늘한 목소리에 단송기는 고개를 들었다.
원래라면 '감히 어디서 함부로 이름을 부르느냐?'하며 분기탱천했겠지만, 고양이 앞의 쥐처럼 몸이 본능적으로 오그라들었다.
"동창에서 나왔다. 혈교와 손을 잡은 죄를 묻겠다."
"..."
꿀꺽!
단송기는 비명도, 도망도 치지 못하고 눈만 끔뻑였다. 동창의 무인들이 순식간에 나타나더니 앞과 뒤를 막았다.
올라오란 혈교의 무인들은 없고 동창의 무인들이 어느새 배를 장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단송기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무... 무슨. 오해입니다."
단송기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변명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가면을 쓴 동창 무인 옆을 쳐다보았다.
놀랍게도 아까 그 난리를 피우던 젊은 포두가 멀쩡한 얼굴로 옆에 서있었다.
"...너, 너, 너!!!"
"?"
"네놈이 처음부터! 감히! 죽여 버리겠다!"
"!"
단송기는 지금 상황도 잊고 눈이 뒤집혀서 달려들었다.
푹!
주 공공은 바늘 하나를 던져 상대를 점혈했다. 그리고는 재밌다는 듯이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포두만 있으면 자백시키려고 공을 들이지 않아도 되겠구나?"
"...오해십니다."
연우혁은 대체 왜 범인들이 금의위나 동창 대신 자신부터 죽이려고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청강은 흐른다 (5)
'나 말고 금의위나 동창을 먼저 공격해야 하는 것 아닌가?'
당장 잡으러 온 원한을 따지지 않더라도 그게 더 이득이었다.
금의위나 동창이 쓰러져야 퇴로가 열리지 일개 포두 하나 죽는다고 무슨 퇴로가 열리겠는가. 그리고 혹시라도 인질을 잡을 수 있다면 그게 더 가치가 높았다.
주 공공은 쓰러진 단송기를 옆으로 차서 치운 뒤 옆에 있던 동창의 무인에게 말했다.
"근처에 있던 혈교의 무리는 잡았나?"
"예!"
"잘 했구나. 연 포두. 다 네 덕이다."
자세를 낮추고 있던 동창 무인들은 깜짝 놀라서 눈썹을 꿈틀거렸다.
주 공공은 솔직히 모시기 편한 상관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다른 환관에 비해 신상필벌이 정확하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그 장점을 제외하면 지나치게 똑똑한 상관이었던 것이다.
다른 상관이라면 들키지 않았을 실수도 숨겼다가는 대번에 들통나서 엄하게 문책당하고 무난하게 일을 처리했다가는 반박할 수 없는 훈계가 돌아오니 주 공공 밑의 동창 무인들은 언제나 긴장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지금 그 주 공공이 일개 포두를 칭찬하고 있었다. 동창 무인들은 주 공공이 누군가를 칭찬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뭐하는 놈이지?'
"아닙니다. 그게 어찌 제 공이겠습니까? 동창의 무인들이 혈교의 무리들을 제 때 추적하지 못했다면 이들은 도망쳐서 한경을 어지럽혔을 테니, 제가 감사드려야 합니다."
고개를 들지 않았지만 동창 무인들의 딱딱했던 표정이 살짝 부드러워졌다. 제법 분수를 아는 포두였다.
"아첨은 좋지만 적당히 하거라. 눈이 먼 장님이어도 누구 덕인지는 알 수 있었을 테니. 붙잡은 혈교 놈들은 각 몇이었지?"
"말을 타고 움직이던 자는 스물하고도 둘이었고, 어부인 척 움직이던 자는 여덟이었습니다."
"알겠다."
"?"
주 공공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연우혁은 멈칫했다.
자신이 알던 것과 숫자가 달랐던 것이다.
'설마...?'
"주 공공! 제가 질문 몇 개를 던져도 되겠습니까?"
"그러도록."
주 공공은 흔쾌히 허락했지만 동창 무인들은 마음 속으로 이 건방진 포두에 대해 적개심을 품었다.
기껏해야 흙길을 따라 도망치는 촌놈이나 잡았을 포두 놈이 뭘 안다고 감히 동창의 일에 질문을 던진단 말인가?
"어부들을 잡았을 때 주변에 빠져나간 자들이 있었습니까?"
"없었소!"
첫 질문에 동창 무인들의 불쾌함은 더욱 심해졌다.
빠져나간 자들이 있었다면 그들이 어찌 몰랐겠는가?
연우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어부들을 잡았을 때 그들은 물 밖에 있었습니까, 물 위에 있었습니까? 아마 물 밖에 있었을 테지요?"
"...그렇소. 계획이 틀어져서 땅 위에서 그물을 고치는 척을 하고 있더군."
"계획이 틀어졌다면 집으로 돌아가는 척 자리를 떠나도 됐을 텐데 왜 그러고 있었겠습니까?"
"모르겠군. 아무 생각이 없었겠지."
"혈교의 무리들은 치밀한 자들입니다. 제 생각에는 혈교의 무리들 중 도망친 자가 있습니다. 아마 우두머리 역할을 한 자일 겁니다."
"!"
동창의 무인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외쳤다.
"그럴 수 없소! 분명 그 어부들은 도망칠 수 없었단 말이오!"
"조용히 하거라."
주 공공은 부하들의 입을 막고 연우혁에게 말했다.
"잡을 수 있으니까 말을 꺼낸 거겠지? 움직이거라! 포두의 뒤를 따르도록!"
아무렇지도 않게 명령을 내리는 까탈스러운 상관의 모습에, 동창 무인들은 속으로 다시금 경악을 금치 못했다.
***
적면혈뇌 악곤홍은 눈을 감고 이번 실패에 대해 돌이켜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왜 실패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원래 귀계란 것은 실패할 때도 있고 성공할 때도 있다지만, 실패한 귀계에는 반드시 실수가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이번의 음모에는 어떤 실수도 떠오르지 않았다.
단송기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승선 전까지 감시했고, 언제라도 배에 올라탈 수 있도록 어부로 위장한 혈교 무인들을 두 달 전부터 대기시켜놨었다.
그것도 모자라 일이 틀어질 때를 대비해 떠돌이처럼 보이는 이들을 모아놓고 배를 따라 내려가게 했는데...
갑자기 계획이 순식간에 흐트러졌다.
어부로 위장한 혈교 무인들은 관졸들이 무슨 앵속이라도 했는지 갑자기 막아서서 접근도 하지 못했고, 강가에 잠깐이라도 멈춰서야 할 누각선은 바닥에 기름칠을 한 것마냥 강 위에서 유유히 흘러내려갔다.
기슭에서 달려가던 부하들은 소식이 없었지만 악곤홍은 이미 반쯤 기대를 버린 뒤였다. 이렇게 일이 틀어졌다면 아마 부하들도 습격당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횡래지액(橫來之厄, 갑자기 닥쳐오는 불행)이라고 하지만 악곤홍은 그런 말을 믿지 않았다.
세상의 불운이란 것은 얼핏 보면 그저 이유가 없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그걸 볼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으로 나뉠 뿐이었다.
"왜 그리 심각하시오?"
"하하, 이 술에 어울리는 시를 한 수 생각하고 있었소이다."
악곤홍은 옆에서 거나하게 취한 관리에게 웃으며 대답했다.
놀랍게도 악곤홍은 누각선에 타고 있었다!
어부로 위장해서 누각선에 접근하는 계획이 틀어졌을 때, 악곤홍은 망설이지 않고 혼자 나룻배에서 뛰어내려 깊이 잠수해서 누각선에 붙었다.
혼자서라도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만약 귀계가 틀어질 경우 혼자서라도 빠져나가기 위해서였다.
다른 무인이었다면 그 상황에서 빠져나갈 계획부터 꾸미지는 않았다. 무림의 어느 사람이 사소하게 일이 틀어졌다고 빠져나갈 계획부터 꾸미겠는가?
실제로 어부로 위장한 부하들도 접근이 막혔을 때 욕설만 조금 내뱉었지 일이 실패할 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었다.
하지만 적면혈뇌 악곤홍은 달랐다.
악곤홍은 계획이 조금이라도 틀어진 순간 바로 망설이지 않고 혼자서라도 빠져나갈 수 있게 움직였다. 만약 적들의 함정 때문에 틀어진 거라면 일순간도 낭비할 수 없었다.
어부로 위장한 다른 부하들은 일부러 강가에 남겨 놨다. 함정일 경우 잡혀줄 미끼가 필요했으니.
멍청한 무림인들은 책사들을 야유하고 조롱하겠지만 악곤홍은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보라!
결국 잡히지 않은 건 악곤홍이었다. 밖의 상황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별다른 소란이 일어나지 않는 걸 보니 전부 다 잡혔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제 이대로 누각선이 멈추면 유유히 하선하면 됐다.
관리로 위장한 악곤홍을 어느 누가 의심하겠는가?
"잠깐, 잠깐만 조용히 해주십시오!"
하급 관리들로 떠들썩한 일층에 지부 어르신의 시종이 들어왔다. 다들 붉어진 얼굴로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어르신께서 혹시라도 취해서 강에 빠진 분들께는 새 관복과 관모를 지급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와하하! 인심도 좋으시군!"
"자, 어서 나오십시오! 지부 대인께서 손수 하사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거 그냥 빠질 거 그랬나? 지금이라도 빠지면 안 되나?"
"아서게! 들키면 곤장으로 끝나지 않을지도 몰라!"
관리들이 떠드는 동안 악곤홍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술병을 잡은 다음 관복에 슬쩍 부어버렸다.
관모와 관복 같은 물건들은 물에 젖지 않게 따로 준비해서 갖고 있다가 배 위로 올라와서 갈아입었지만, 머리나 몸에 남은 강물이 비린내를 풍길 수도 있었다.
괜히 옆에 있던 관리 놈들이 도와주겠답시고 등을 떠밀면 귀찮아졌다. 악곤홍은 꼼꼼히 술을 부었다.
강에 빠진 관리를 찾던 시종이 나가자 웬 젊은 포두 하나와 처음 보는 무인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악곤홍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포두 놈은 몰라도 저 무인들의 정체를 직감했던 것이다.
'동창!'
동창의 무인들은 나름 정체를 숨기려고 노력해도 그 기색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환관이 드문드문 섞여있고 동창 특유의 무공이 뿜어내는 기세 때문이었다.
게다가 지금 들어온 동창 무인들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동창 놈들이 함정을 파고 있었구나!'
악곤홍은 속으로 침음성을 흘렸다.
이로써 밖에서 일어난 일을 확신할 수 있었다. 동창의 내시 놈들이 부하들을 모조리 붙잡은 게 분명했다.
'하지만 믿기 어렵다! 대체 어디서 들켰단 말인가?'
동창이나 금의위의 악명이 높다지만 악곤홍은 그런 허명에 넘어가지 않았다.
아무리 대단하다지만 결국 귀와 눈이 없으면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자들 아닌가.
그러나 이번 일은 그런 기색도 없이 대뜸 들켜버렸다. 도저히 어떻게 된 영문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악곤홍은 속마음을 감추고 표정을 관리했다.
동창이 이렇게 들어온 건 아마 관리들에게 있었던 일을 말하고 경고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혹시라도 거동이 수상쩍은 사람이 있다면 또 잡아보고.
가만히만 있는다면 절대로 잡아낼 수 없...
젊은 포두가 동창의 우두머리에게 속삭이자 우두머리는 망설이지 않고 바늘을 던졌다.
쉭!
그 바늘에 실린 막중한 내력에 악곤홍은 경악했다. 저건 떠보려고 던지는 게 아니라 정말 죽이려고 던지는 암수였다.
땅!
악곤홍은 벌떡 일어나 철선(鐵扇)을 휘둘렀다. 단단한 금속 부채가 바늘을 쳐내고 궤도를 바꿨다.
그러나 상대는 동창의 무인.
바늘 뒤에 또 다른 바늘 하나가 비틀리며 날아 들어왔다. 첫 바늘을 막아내면 그 뒤에 숨은 바늘이 방향을 틀어 움직이지 못하는 무인의 숨통을 끊어버리는, 초식 악지악각(惡知惡覺)이었다.
악곤홍은 이를 악물며 다른 한 손으로 바늘을 막아냈다. 바늘이 섬뜩한 소리를 내며 손을 관통했다. 악곤홍은 멈추지 않고 다른 손으로 점혈에 나섰다. 독이라도 있다면 피가 돌면서 온몸에 독을 퍼뜨릴 테니까.
"독은 없으니 호들갑 떨지 말거라. 혈교의 버러지야."
"동창의 말을 믿느니 소림 땡중 말을 믿겠다. 이 바쁜 어르신의 발목을 붙잡다니. 그러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악곤홍은 허세를 부리며 빠르게 상황을 확인했다.
절정의 경지에 오른 뒤 어지간한 일류 고수는 자신 있게 상대하는 악곤홍이었지만, 이번 적은 영 마뜩치 않았다.
물론 상대가 자신보다 뛰어나단 건 아니었다. 악곤홍은 방금 일합으로 느꼈다. 동창의 우두머리는 자신보다 반 수에서 한 수는 아래였다. 그렇지 않다면 아까 같은 완전한 기습을 악곤홍이 손바닥 하나로 막아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상대는 절정 직전의 고수치고는 믿기 힘들 만큼 내공이 심후했다.
바늘을 쳐냈을 때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막강한 내력이 담겨 있었다. 그 탓에 손바닥 하나를 내줘야 했다.
'탐관 놈들이 영약을 얼마나 긁어모았길래 일개 환관이 저런 내공을 갖고 있단 말이냐?'
저런 고수를 상대하는 것도 까다로울 텐데 하필이면 목숨을 아끼지 않는 동창 무인들까지 있었다. 진법을 치고 덤벼들면 득보다는 실이 많았다.
"어떻게 널 찾아냈는지 궁금하지 않느냐, 혈교의 버러지야?"
"..."
악곤홍은 상대의 말에 끌려가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무심코 귀를 기울였다.
"강물에 빠진 관리를 찾는 게 바로 함정이었다. 겁 많은 버러지라면 자기가 알아서 숨기기 위해 관복에 술을 부을 거라고 예상한 것이지!"
"...!"
표정을 관리하려고 했지만 악곤홍의 입술이 씰룩였다. 보기 드물게 평정심이 깨진 탓이었다. 그만큼 굴욕적인 말이었다.
적면혈뇌가 일개 환관한테 농락당하다니!
상대도 그걸 알고 있었는지 승리감을 담아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대답도 못하는 거 보니 어지간히도 분했나보구나! 그 꾀는..."
"저, 주 공공."
"...알겠다. 알겠어. 그 꾀는 내가 떠올렸다!"
순간 포두 놈과 환관이 짧게 이야기를 나눴지만 악곤홍은 머리를 굴리느라 위화감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면 너희 혈교 놈들이 꾸민 암계는 어떻게 찾아냈는지도 궁금하겠지? 빨리 궁금하다고 말해봐라. 그러면 말해주도록 하마!"
"...궁금하군."
굴욕으로 가슴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지만 악곤홍은 씹듯이 내뱉었다.
너무나도 궁금했던 것이다.
이걸 알지 못하고 돌아가면 계속 곱씹게 될 것 같았다.
그러자 주 공공은 다시 한 번 폭소를 터뜨리며 깔깔댔다.
"그거야 너희 버러지들이 다섯 살 먹은 꼬마도 알아차릴 만큼 허술하게 계획을 짜서 그렇지!"
농락당한 걸 깨달은 악곤홍이 분노하며 행동을 개시했다. 그러나 그보다 동창의 무인들이 먼저 진법을 완성시켰다.
주 공공의 이야기에 넘어간 대가를 치르게 된 것이다!
'큭!'
거대한 창이 노리는 듯한 압박감을 느낀 악곤홍은 진법에 달려드는 대신 빠져나가는 걸로 목표를 바꿨다. 재빨리 근처에 관리 하나를 붙잡고 방패처럼 들이댔다.
"내시 놈들 재주가 뛰어나구나! 하지만 하나는 알고 둘은 몰랐을 거다. 여기 관리 놈들을 다 죽여버리고 싶지 않다면..."
주 공공은 즉시 바늘을 던졌다. 관리가 죽던 말던 신경쓰지 않는다는 기세였다.
"이런 미친 내시 놈이!"
"보름 전에 몰래 공납품을 빼돌린 탐관 놈이구나. 여기서 죽으면 차라리 영광이겠지!"
"..."
기겁하는 관리들의 모습에, 옆에 있던 연우혁은 자신도 가면을 쓰고 왔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청강은 흐른다 (6)
'나중에 물어보면 동창 놈들이 칼 들고 협박했다고 해야겠다.'
연우혁이 주 공공을 원망하는 사이, 악곤홍은 빠르게 머리를 회전시켰다.
지금 사태는 촌각을 다투고 있었다. 조금도 망설여서는 안 됐다.
'동창 놈들한테 교의 수법으로 당할 줄이야.'
인질을 잡은 뒤 생사를 아랑곳하지 않고 살수를 날리는 건 혈교에서 즐겨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정파의 무림인들은 인질의 생사가 눈에 밟혀 제대로 된 전력을 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동창에서 나온 놈들은 그런 짓을 하기도 전에 자기들이 먼저 인질을 죽이려고 했다. 독심(毒心)만 놓고 보면 가히 혈교와 버금갔다.
첫 번째 계획이 틀어졌다고 당황하는 건 하수나 하는 일. 악곤홍은 깊게 숨을 들이쉬더니 크게 보법을 밟아 앞으로 뛰쳐나갔다.
혈원보(血怨步)라고 불리는 혈교의 절세 보법이었다. 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수가 펼치는 만큼, 그 기괴함과 난해함은 움직임을 쉽게 예측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놈이 주 공공을 노립니다!"
"?!"
포두 놈이 외치자 악곤홍도 놀라고 동창의 무인들도 놀랐다.
놀랐다 하더라도 몸은 그대로 움직이는 것이 고수. 악곤홍은 섬뜩하게 접근해 주 공공을 향해 철선을 뻗었다. 환의 묘리가 극대화된 병불혈인(兵不血刃)이란 초식이었다. 붉은 기운이 아른거리며 선실 안을 채웠다.
하지만 동창의 무인들도 만만치 않았다. 연우혁의 말을 듣자마자 바로 망설이지 않고 진법을 움직여 주 공공 앞을 막아섰다.
꽝!
힘과 힘이 충돌하고, 진법을 지키고 있던 동창 환관 중 한 명이 피를 토하며 절명했다. 그러나 악곤홍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좋지 않다!'
동료 중 한 명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창 무인들의 표정은 미동이 없었다.
한 명이 죽어서 절정 무인의 내력을 크게 낭비하게 했으니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닌 것이다.
이 또한 혈교가 즐겨 쓰는 수법이었기에 악곤홍은 입맛이 썼다. 동창 놈들이 괴팍하고 지독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왜, 더 덤벼들지 그러느냐?"
주 공공이 비웃으며 바늘을 날렸다. 얼마든지 날릴 수 있다는 걸 자랑하듯이 아까와 똑같은 내력이 담겨 있었다.
동창의 무공은 천하에 적수가 없을 만큼 다양하고 깊다고 자부했다. 온갖 무공 비급을 자유롭게 구해 와서 연구할 수 있는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금의위의 무인들은 사특하고 음기 넘치는 무공은 다루지 않고 금기시했지만 동창의 무인들은 그런 것도 개의치 않았다. 그걸 증명하듯이 주 공공의 암기술은 음산하고 지독했다.
악곤홍은 고민했다.
마음 같아서는 진법에 다시 뛰어들어서 죽이고 싶었지만, 고자 놈들이 그걸 바라는 게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목숨을 뺏는 사이 시간이 끌리고 내공이 소모되면 그 뒤는 탈출 자체가 힘들어질 수도 있었다.
차라리 선실 벽을 부수고 등을 보인 채 빠져나가는 게 맞을지도 몰랐다.
다시 한 번 날아오는 바늘. 악곤홍은 혈원보를 펼치며 짐짓 진법에 뛰어드는 허초를 보여줬다. 아니나 다를까 동창 무인들은 진법의 자세를 다지며 격돌을 대비했다.
"주 공공! 놈이 선실 벽을 부수고 도망치려고 합니다!"
"...?!!"
그제야 악곤홍은 이상함을 깨달았다.
아까 덤벼들 때도 그랬듯이 저 포두 놈이 무언가 이상했던 것이다!
'일류 정도인가? 심상치 않다!'
적면혈뇌란 별호는 투전판에서 딴 게 아니었다. 포두가, 그것도 저렇게 젊은 놈이 일류의 경지에 올랐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아까부터 보여주는 말도 안 되는 예상까지.
답은 하나였다.
'놈이 우두머리다!'
주 공공이라고 불리는 놈은 호위쯤 되고 저 포두로 위장한 놈이 고관이 분명했다. 아주 기가 막힌 위장이었다.
실제로 악곤홍도 전혀 짐작하지 못했잖는가?
그러나 이렇게 된 이상 저 포두로 위장한 고관 놈의 목숨도 여기까지였다. 악곤홍은 살기를 폭발시키며 뛰어들었다.
이번에는 포두 놈도 방향을 외치지 못했다. 바로 자신한테 덤벼들고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주먹과 철선의 그림자가 생겨나고 허공을 채웠다. 일류의 무인치고는 놀라울 만큼 정확한 초식과 투로였다.
악곤홍은 상대의 무재(武才)가 보통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저 나이에 고관인 만큼 가문이 있을 테니 내버려두면 얼마나 높은 경지에 오를지 몰랐다.
'여기서 죽여주마!'
철선을 다루는 악곤홍은 환(幻)과 변(變)의 묘리를 깊게 파고든 무공으로 교 내에서도 악명이 높았다.
퍼져나가는 붉은 아지랑이를 쫓아 눈동자가 조금만 따라가도 숨통이 끊어지고 절명하는 것이다.
유혈성천(流血成川)!
그러나 놀랍게도 포두 놈은 죽지 않았다. 수많은 허초 속에 숨어 있는 살초를 기가 막히게 찾아내더니 전력을 다해 권격을 날려서 막았다. 그리고는 빠르게 보법을 펼쳐 뒤로 거리를 벌렸다.
"금의위 놈이냐?"
"...그렇다!"
연우혁은 내친 김에 외쳤다.
어차피 위국권법도 같겠다 금의위로 생각되는 게 나았다. 방금 몇 합을 겨눴다고 벌써 손이 욱신거렸다. 혈옥갑이 있어서 그나마 이 정도지 아니었다면 피가 흘러내렸을 것이다.
'이게 절정의 무인인가!'
절정의 경지에 오른 무인은 본 적 있었지만, 그 무인과 직접 목숨을 걸고 싸워본 적은 없었기에 연우혁은 등골을 타고 오르는 전율을 느꼈다.
절정의 경지는 실로 놀라웠다. 무공이 마치 그 무인만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것 같았다.
연우혁은 영안을 열고 싸웠기에 방금 본 혈원보(血怨步)나 철선의 초식들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저 초식들은 아무리 봐도 원래 저렇게 환(幻)의 묘리가 넘치는 초식들이 아니었다.
저 적면혈뇌란 고수가 자신에게 맞춰서 새로 무공을 재창립한 게 분명했다.
'대단하다. 하지만...'
전율과 압박을 느끼면서도, 연우혁은 무림인으로서의 뿌듯함도 같이 느끼고 있었다.
상대는 분명 강했지만, 아예 권격을 나누지도 못할 만큼 차이가 나는 건 아니었던 것이다.
남두성군의 힘을 빌리고 영안의 힘을 빌리고 혈옥갑의 힘을 빌렸지만, 연우혁의 무공이 없었다면 이렇게 짧게나마 동수를 이루지는 못했을 것이다.
무공을 익히기 전과 비교하면 괄목상대할만한 차이였다.
'특수한 외공을 익혔나? 아니. 다른 보물이라고 봐야겠군. 파사(破邪)의 보물도 있는 것 같으니...'
연우혁이 성취감을 느끼며 뒤로 물러나는 그 짧은 사이, 악곤홍도 금의위냐고 물으며 연우혁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손이 단단해서 처음에는 특수한 외공인가 싶었는데, 그보다는 보물일 가능성도 높아 보였다.
이상할 만큼 허초에 속지 않는 걸 보니 마공을 파훼하는 보주 같은 것도 갖고 있을 것이다.
어이가 없었지만 금의위 쪽에 높은 놈이라면 설명이 됐다.
"!"
다시 달려들려는 그 짧은 사이 주 공공이 달려와서 악곤홍에게 일장을 날렸다. 음유하고 심후한 내력이 깊게 파고들자 악곤홍은 기혈을 달래며 몰아냈다.
"주 공공, 물러나십시오!"
연우혁은 기겁해서 외쳤다. 막더라도 저기 진법을 세운 동창 무인들이 막아야지, 높은 위치인 주 공공이 다치기라도 하면 연우혁까지 괘씸죄로 끌려갈 수 있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죽기라도 하면 연우혁도 같이 목이...
그러거나 말거나 주 공공은 아랑곳하지 않고 장법을 펼쳤다. 그걸 본 연우혁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구궁(九宮)! 놈의 보법은 구궁의 이치를 따르고 있습니다! 곤(坤)에서 태(兌)로 옵니다!"
주 공공은 듣자마자 바로 움직였다. 장법을 막아내며 반격할 준비를 하던 악곤홍이 이를 악물며 고함을 내질렀다.
"금의위 놈아. 오늘 이 자리에서 네놈을 죽이지 못한다면 어르신께서 혀를 자르겠다!"
치열한 암계가 가득한 혈교에서도 눈앞의 금의위 놈만큼 얄미운 놈은 없었다. 악곤홍은 언제나 냉철했던 두뇌가 흐려지고 분노로 뿌옇게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離)에서 간(艮)으로! 경문(景門)!"
연우혁은 상대가 살기를 흩뿌리는데도 대꾸하지 못할 만큼 정신이 없었다. 절정의 무인을 상대할 때에는 초식 하나도 놓칠 수가 없었기에 영안도 그만큼 집중해서 사용해야 했다. 보기 드문 혹사에 상단전이 비명을 지르며 영기를 끌어냈다.
'더 깊게...!'
지끈거리는 두통을 참으며 연우혁은 악곤홍의 초식을 보고 또 보았다. 본능적으로 위험함을 느꼈는지 악곤홍은 나무로 된 바닥을 발로 찍어서 연우혁에게 투박한 암기를 날렸다.
연우혁이 피하는 사이 악곤홍은 철선을 휘둘러 주 공공을 밀어냈다. 동창 무인들이 다시 진법을 펼쳐 악곤홍을 포위했다.
그러나 그 짧은 사이 악곤홍은 노리던 걸 해냈다. 순식간에 내력이 늘어나더니 악곤홍의 눈이 붉게 달아올랐다.
선천지기를 격발시키는 혈교의 술법이었다.
"놈이 잠력을 폭발시킵니다!"
"안 그래도 죽이려고 했다. 이 주둥이 산 놈!"
"넌 비켜라!"
주 공공은 날카롭게 외치더니 동창 무인들과 합격진을 펼쳤다. 아까와 달리 짧은 사이 승부를 보려는 악곤홍은 물러나지 않고 철선을 휘둘렀다. 붉게 응축된 기운이 환관 둘을 절명하게 만들었다.
연우혁은 호흡을 가다듬고 악곤홍의 움직임을 응시했다.
쌓은 내공이 심후한 주 공공과 달리 연우혁은 악곤홍과 권법으로 손을 섞을 수 없었다. 혈옥갑으로 손은 멀쩡하더라도 내공이 몸 안 장기를 곤죽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탈혼비도밖에 없었다.
'일격에 모든 걸 건다.'
연우혁은 기다렸다. 그러나 악곤홍의 기세는 절정의 고수답게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빈틈 또한 보이지 않았다.
이러다가 악곤홍보다 환관들이 먼저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깊은 위기감 속에 연우혁의 머리가 본능적으로 입을 움직였다.
"적면혈뇌, 널 찾아낸 건 나다. 이 어르신께서 찾아냈단 말이다. 고작해야 도망치려고 부하들을 강가에 남겨놓다니. 그런 얕은 속임수로 무슨 혈뇌란 별호를 거창하게 붙이느냐?"
악곤홍은 무시하고 철선을 휘둘렀다. 그러나 연우혁은 상대의 기세가 아주 미세하게 달라졌다는 걸 영안으로 직감했다.
"어부로 위장했다가 실패했으면 떠나야 하는 법인데, 억지로 남아있는 모습에 멍청한 누군가가 수작을 부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너 같이 멍청한 놈을 상관으로 둔 혈교 무리들이 불쌍할 정도다! 단 동지도 참 안타깝구나. 좀 똑똑한 놈을 만났다면 이렇게 들키지 않았을 텐데 하필이면 멍청한..."
혈교의 부하들이 있었다면 첫 번째 멍청하단 이야기가 나왔을 때 기겁을 했을 것이다.
악곤홍에게 있어서 멍청하단 말은 그만큼 금기에 가까운 말이었던 것이다. 전에 악곤홍의 뒤에서 몰래 조롱한 혈교 무인은 껍질이 벗겨진 채로 소금 창고에 던져졌었다.
자신을 농락한 놈이 그것도 세 번을 조롱하다니. 다른 상황이었다면 냉철하게 조롱을 무시했을 악곤홍이었지만, 이번 일을 실패한 탓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무림에서 가장 아픈 조롱은 반박할 수 없는 조롱이었다.
"죽여버리겠다!"
"!"
연우혁은 마침내 악곤홍의 빈틈을 보았다. 영안을 너무나도 강하게 오래 열고 있어서 코와 입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기회를 잡은 이상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문제는 악곤홍의 빈틈이란 게 연우혁 자신을 죽일 듯이 달려오면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탈혼비도를 던지는 순간 피할 틈도 그만큼 줄어든다!
그러나 연우혁의 손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전신의 내력을 쥐어짜듯이 던진 탈혼비도가 공간을 찢으며 날아갔다. 그 모습에 연우혁은 자신이 무림인이 다 되었다고 생각했다.
목숨을 걸고 이런 짓을 벌이다니!
악곤홍은 철선 끝에 붉은 기운을 응축시켜서 휘둘렀다. 아무리 강한 내력이 담긴 비도라 하더라도 버틸 수 없을 정도로.
그러나 일직선으로 날아오던 비도는 기묘하게 비틀렸다. 그 말도 안 되는 수법에 악곤홍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허공섭물!?'
생각치도 못한 신통력. 그걸 깊게 생각하기도 전에 악곤홍의 가슴팍에 깊은 통증이 올라왔다. 치명상이었다.
악곤홍은 멈추지 않았다. 눈앞의 금의위 놈을 죽여버리기 위해 마지막 잠력을 짜내서 철선을 휘둘렀다.
놈이 기묘하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도망치기 위해서 보법을 밟는 게 분명했다. 악곤홍은 먼저 움직이며 공간을 점했다.
그러나 놈은 기가 막히게 몸을 젖히며 어떻게든 거리를 벌렸다. 이 또한 악곤홍의 예상을 뛰어넘는 보법이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끌었다가는 못 죽일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악곤홍을 서두르게 만들었다. 악곤홍은 철선을 들어 마지막 초식을 펼쳤다. 혈원골수(血怨骨髓)였다.
연우혁은 상단전의 영기를 쥐어짜서 본능적으로 주먹을 뻗었다. 그 순간 혈옥갑이 붉게 달아오르며 악곤홍의 공격을 일부 흡수했다.
"...너!!"
상대가 혈교의 보물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악곤홍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그 탓에 공격의 위력이 또 한 번 약해졌다.
"컥!"
포두가 뒤로 날아가는 사이 주 공공과 동창 무인들이 달려들어서 악곤홍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악곤홍은 핏발 선 눈을 감지도 못하고 절명했다.
'살... 았나.'
연우혁은 그대로 혼절했다. 멀리서 환관과 주 공공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공... 전하, 죽지 않았습니다."
"다행이구나. 살려라! 죽으면 너도 죽이겠다."
"예!"
청강은 흐른다 (7)
잠에서 깨어난 연우혁이 느낀 건 극심한 허기와 욱신거리는 가슴팍의 통증, 그리고 늘어난 내력이었다.
"!"
주변을 둘러보자 어느 의원의 약방처럼 보였다. 탕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옆에는 저번에 본 적 있는 인자한 인상의 중년 환관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저..."
"아. 일어났나?"
환관은 일어나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맥이나 호흡은 괜찮았지만 포두가 깨어나지 않아서 걱정이 태산이었던 것이다.
"자네, 거의 보름 동안 누워 있었네."
"보름이나 말입니까?!"
연우혁은 깜짝 놀랐다. 어쩐지 몸의 체중이 줄고 허기가 극심하다 싶었더니...
환관이 웃으며 미음(米飮)이 든 사발을 내밀었다.
"천천히 먹게. 위장이 굶주렸을 때 빨리 먹으면 크게 다치는 법이야."
"감사합니다."
연우혁은 욱신거리는 통증에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악곤홍이 남긴 상처가 아직도 흔적으로 남아있었다.
단 일격에 이런 상처를 남기다니. 연우혁은 새삼스레 운이 좋았다는 걸 깨달았다.
온갖 악조건과 난제를 주렁주렁 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처를 입히다니. 연우혁이 갖고 있던 능력 중 하나라도 부족했다면 몸이 그대로 꿰뚫렸을 수도 있었다.
미음으로 허기를 달랜 연우혁은 조심스럽게 내상을 확인했다.
영안을 혹사한데다가 마지막에는 상단전까지 열어서 내공을 끌어다 쓴 만큼 기혈이 흔들리고 핏물이 올라왔었던 것이다.
다행히 내상은 완전히 나은 상태였다. 내력까지 조금 늘어난 걸 보니 연우혁은 환관이 좋은 약재를 쓴 게 아닌가 추측했다.
"제 부상을 중관께서 치료해주셨습니까?"
"그렇다네."
"감사합니다. 내상이 심했을 텐데 어찌..."
"주 공공께서 태청단을 주셨네. 나중에 뵙게 되면 따로 감사를 표하는 게 좋겠군."
"과연. ...무당의 태청단 말입니까?!"
연우혁은 자신도 모르게 크게 외쳤다.
무당 태청단은 무당파를 대표하는 영약 중 하나로서, 도가의 비의가 담겨 있어 연우혁처럼 영기를 다루다가 다친 사람에게는 더더욱 요긴한 영약이었다.
물론 태청단의 힘은 내상이나 부상 해결에만 있지 않았다. 당연히 그 명성만큼이나 막대한 내력을 안에 품고 있었을 텐데...
그걸 그냥 내상과 부상을 치료하는데에 쓰다니. 연우혁은 자신의 목숨인데도 아까워서 피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 영약 하나면 내공이 몇 년 치란 말인가?
"그런 아까운 짓을...!"
"자네 목숨이지 않나?"
'아차.'
앞에 환관이 있다는 걸 깨달은 연우혁은 재빨리 말을 바꿨다.
"저 같은 하급 관리를 위해 그런 영약을 쓰셨다는 게 안타까웠을 뿐입니다."
"허허. 주 공공께서 자네를 좋게 보신 이유를 알겠군."
중년 환관은 연우혁을 보며 흐뭇해했다.
주 공공은 광오하고 냉정한 사람이었지만 능력이 있는 사람은 그만큼 우대해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환관은 눈앞의 젊은 포두가 쓰러진 동안 혈교 놈들을 어떻게 쫓았는지 전말을 간략하게 들었고, 그것만으로 이 포두는 우대를 받기에 충분했다.
하물며 이런 충성심까지라니.
"천천히 일어나게. 다 낫긴 했지만 아직 몸이 굳어 있을 테니까."
"주 공공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만..."
"그럴 것 같았네. 공공께서는 먼저 떠나셨네. 정무로 바쁘시거든. 떠나시기 전에 내 목숨을 걸고 자네를 살리란 명을 하고 가셨지."
"죄송하게 됐습니다!"
연우혁은 일단 숙이고 봤다. 없는 자리에서야 저잣거리의 백성도 고자 놈이라고 욕하지만, 동창 소속 환관은 그렇게 욕해도 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정말 독하게 마음을 먹으면 삼족이 같이 죽어나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환관이 자기 때문에 혼자 남아서 진맥을 하고 있었다니 얼마나 속으로 불만이 많았겠는가.
"아닐세. 당연히 내릴 수 있는 명이시지. 내가 괜히 말한 것 같군그래."
걱정과 달리 중년 환관은 별다른 불만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자신을 허 중관이라고 편히 부르라고 말했다.
연우혁은 그 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조심스럽게 물었다.
"혈교 잔당들을 소탕하고, 남은 놈들을 심문했네. 동지가 혈교와 결탁했다니 간이 철렁했겠지."
"한경은 괜찮습니까?"
"오히려 운이 좋은 편이지! 미리 찾아내지 않았나?"
"그런 뜻이 아니오라..."
원래 일반적으로 죄는 전염되지 않지만 가끔 연좌제가 터질 때가 있었다. 혈교 같은 사교도 그 중 하나였다.
동지가 혈교와 결탁했으면 그 위의 지부나 그 아래의 관원들도 혐의가 있는 것이 아닌가?
당연히 할 만한 의심이었고, 심지어 그 의심하는 당사자가 동창이라면 더더욱 포기하지 않고 할 의심이었다.
한경의 관리들 중 몇몇은 조정으로 압송됐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하. 관리들 중 책임을 물은 사람이 있나 궁금한 건가?"
"예. 어르신들만큼 충신도 없는 만큼 나랏일이 걱정됩니다."
"...그, 그렇구만."
나름 동창에서 산전수전을 겪었던 허 중관이지만 순간 당황했다. 한경의 관리들을 충신이라고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지부가 해명에 성공했거든."
"지부 어르신께서 말입니까? 혈교와 관련된 일인데 어떻게?"
연우혁은 살짝 감탄했다.
조금 만만하게 본 게 사실이었지만 역시 한경의 우두머리로서 오랫동안 정무를 봐온 사람만큼 능력이...
"재산의 삼분지일 정도를 뇌물로 바치면 조정의 어느 관료도 해명을 들어주기 마련이지."
"..."
연우혁이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자, 허 중관은 그걸 다른 뜻으로 이해한 모양이었다.
"한경의 관리들이 자네한테 원한을 가졌을까봐 걱정하는 모양인데, 정말로 그럴 걱정은 할 필요 없네. 다들 잘 넘어갔다고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자네한테 고마워하면 고마워했지, 원한을 품지는 않을 테니."
"감, 감사합니다."
"또 이번에 자네만큼 공을 세운 사람이 어딨겠는가?"
"아닙니다. 동창의 다른 무인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해낼 수 있었겠습니까. 제가 조금만 더 뛰어났더라면..."
"너무 그럴 건 없네. 어차피 죽었을 놈들인데."
"아닙니... 예?"
연우혁은 듣다가 이상해서 되물었다.
어차피 죽었을 놈들이라니.
동창의 무인들이 혹시 연우혁처럼 상단전 열린 사람들만 모아놓기라도 했단 말인가?
"이건 어디 가서 말하지 말게. 자네한테만 말해주는 거니까. 자네가 너무 자책하는 거 같아서."
"목숨을 걸고 지키겠습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주 공공을 따라다니는 동창의 환관들은 원래 궁 내에서 중죄를 지은 환관들일세. 가만히 있었으면 목이 잘렸을 이들이지. 대신 주 공공을 따라다니며 속죄하는 걸세. 그러니 죽어도 자네가 가엾어 할 필요는 없어."
"!"
연우혁은 어쩐지 동창 무인들이 살벌하게 잘 싸운다 싶었다.
자기 목숨을 신경 쓰지 않고 덤벼든다 싶더니, 죄를 씻고 원래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중관께서도 그렇습니까?"
"맞네. 나도 그 중 한 사람이지."
'이건 기회일지도 모른다.'
연우혁은 사건의 냄새를 맡았다.
이렇게 인자한 환관이 목이 잘렸을 정도로 중죄를 지었다는 건 사건의 냄새가 났다.
황궁 안은 복마전인 만큼 선량한 관리도 눈 깜짝할 사이에 누명을 써서 목이 날아가는 곳 아닌가.
어쩌면 허 중관도 그렇게 누명을 썼을지도 모른다.
'만약 내가 누명을 풀 수만 있다면...!'
주 공공이 연우혁을 좋게 봐주긴 했지만 크게 기대할 순 없었다. 저 정도 위치의 고관에게 연우혁 정도의 부하는 그저 머리 좀 굴릴 줄 아는 놈일 터. 아마 조정으로 돌아가면 보름 후에 까먹을 것이다.
그에 비해 허 중관의 누명을 풀어준다면 그건 구명지은 아닌가. 동창에 든든한 우군이 생기는 셈이었다.
연우혁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중관께서 혹시 누명을 쓰신 게 아닙니까?"
"음!"
"괜찮으시다면 제게 말씀해주십시오. 이 연 모가 재주는 부족하지만 얄팍한 지혜는 있습니다."
"음. 그게 말일세..."
생각보다 말하기 힘든 일인지, 허 중관은 꽤 고민했다. 그러다가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사실 누명은 아닐세. 그냥 이제 와서 젊었을 적 일을 다시 말하는 게 좀 멋쩍어서 그랬을 뿐. 자네가 오해할까봐 말해주는 걸세. 알겠나?"
"...?"
"난 사실 황궁에 내 뜻으로 들어오지 않았네. 부모가 나를 팔아넘겼지. 젊은 나이에 얼마나 혈기가 끓고 답답했겠는가?"
"이해가 갑니다."
젊은 나이에 황궁에 갇혀서 평생을 보내야 한다니. 어느 누구든 답답해 할 것이다.
"그래서 끓는 혈기를 달래기 위해 무공에 몰두했네.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자 야행을 나섰지."
"협객행을 하신 겁니까?"
"아니. 젊은 관리들을 습격해서 양물을 잘라댔네."
"..."
"그러다 잡혔지. 음. 자랑스러운 이야기는 아닐세. 부끄럽군그래."
연우혁은 무의식적으로 영안을 열고 확인부터 들어갔다. 다행히 없는 사이 잘린 건 없었다.
***
정신 나간 환관이 떠나고 나서, 연우혁은 의방을 나와 포쾌들이 모이는 안가로 향했다.
포쾌들은 연우혁이 나오는 걸 보자 깜짝 놀랐다.
"연 포두님!"
"벌써 나으신 겁니까? 지부 어르신께서 더 요양하셔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난 괜찮다."
연우혁은 손사래를 쳤다.
사실 저 말을 듣자 후회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지만, 원래 연우혁 같은 아랫사람은 잘 나갈 때 더 겸손하고 헌신적으로 굴어야했다.
아프다고 느긋하게 누워서 무공 수련하면 괘씸죄로 찍힐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참. 지부 어르신께서 포두님이 자기 아들이라고 하시며 우셨습니다."
"...알려줘서 고맙군."
적 포쾌는 빙글거리며 웃었다.
저런 고관이 와서 감동의 눈물을 펑펑 흘리다가 떠나는 모습을 또 언제 보겠는가. 한경의 포쾌로 있으니 참 별의별 광경을 다 구경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두 분이셔도 되는 겁니까?"
"따지면 더 넘지."
"!?"
적 포쾌가 말문이 막혀 놀라워하는 사이, 다른 포쾌들이 말했다.
"포두님. 궁 판관께서 일어나시는 대로 와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알겠다. 지금 바로 찾아가야겠군."
***
형관에 도착한 연우혁은 하인을 따라 궁 판관이 머무는 방 앞에 섰다.
"들어와라."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연우혁은 인사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
놀랍게도 방 안은 매우 휑뎅그렁했다.
의자도, 탁자도 나무를 잘라서 붙인 것마냥 거칠었다. 지필묵을 제외한 다른 물건들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 흔한 찻잔도 없었다.
"??"
궁 판관의 지독한 성격을 봤을 때 금 의자와 금 탁자 위에서 금 붓을 놀릴 줄 알았던 연우혁은 놀랐다.
탁자 앞에 서있던 궁 판관이 손짓했다. 연우혁은 의자를 끌어서 앉으려고 했다.
"잠깐!"
"예?"
궁 판관의 고함에 연우혁은 당황했다. 궁 판관은 매우 고뇌하는 표정을 짓다가 말했다.
"...이번 일은 공을 세웠으니 앉는 걸 허락해주겠다. 앉아라!"
"...어, 원래는 앉으면 안 되는 거였습니까?"
"멍청한 놈 같으니. 의자가 닳지 않느냐!"
"..."
연우혁은 그제야 궁 판관이 왜 서있는지 깨달았다.
그러니까 지금...?
'미친 새끼 아니야 이거?'
어쩐지 그렇게 탐관오리인 것 치고는 관복이 그리 비싼 비단이 아니라서 의아했더니 미친 수전노였던 것이다!
연우혁은 안 그래도 불편한 의자에 더 불편하게 앉았다. 궁 판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이번 일은 훌륭했다. 동창을 도와 혈교의 간자를 찾아내다니. 지부 대인께서도 기뻐하고 계신다."
"다 판관 어르신의 가르침 덕분이십니다!"
"말이라도 고맙구나! 하여간 한경 관리들의 명성을 네가 지켰다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쿵!
궁 판관은 작은 궤짝을 들어서 탁자 위에 올렸다. 궤짝을 열자 안에는 번쩍이는 은이 꽉 차있었다.
"받아라! 네 몫이다."
"감... 감... 감사합니다!"
연우혁은 한경에서 관리로 일하면서 이렇게 감동한 적이 없었다.
지부 어르신이 준 건지, 아니면 다른 관리들이 각출한 건지는 몰라도 이런 은자라니.
'바로 영약부터 사야겠다.'
"내게 감사할 건 없다. 모용세가가 네게 준 거니까."
"...예? 무슨 소리십니까 그게?"
"뭐냐, 못 듣고 온 거냐? 하긴. 포쾌들은 몰랐겠군."
궁 판관은 연우혁이 쓰러진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설명했다.
아무리 동창과 함께했다지만 혈교의 절정 고수인 적면혈뇌를 쓰러뜨린 건 대단한 공로였다.
그리고 이런 공로는 관아보다는 무림에서 훨씬 더 인정받기 쉬웠다.
무림의 소문은 천리마보다 빨랐다. 놀랍게도 이틀 전, 모용세가의 사람들이 찾아와서 궁 판관에게 부탁했다.
요즘 소문이 자자한 그 포두의 재주를 좀 빌려달라고!
그리고 궁 판관은 적절한 은자만 낸다면 백성의 고충을 무시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게 된 거다."
"판, 판관 어르신. 이걸 절 다 주시면 어르신께서는..."
연우혁은 모용세가의 이름이나 무림의 소문보다 은자의 양부터 확인하려고 했다.
원래 이런 건 혼자 먹으면 탈이 날 수가 있는 것이다.
궁 판관은 연우혁의 말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과연 뛰어난 지낭답게 하나만 들어도 열을 생각할 줄 알았다.
"난 이미 따로 받았다."
"..."
무림출도 (1)
연우혁은 자신이 아직도 멀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 정도는 해야 한경의 정관 노릇을 할 수 있는 거구나!'
부하가 없는 사이 제안을 받고 교섭까지 끝낸 뒤 자기 몫도 알뜰살뜰 챙겨놓다니.
"그러니 날 생각할 건 없다. 기특한 녀석 같으니. 한경의 포두가 다 너 같다면 내가 마땅히 베개를 높게 하고 근심 없이 잘 텐데 말이다."
"판관 어르신께서 마땅한 몫을 챙기셨다니 너무나도 안심이 됩니다. 저도 밤에 잠을 못 잘 뻔했습니다. 하하."
속으로는 욕을 좀 했지만 연우혁은 겉으로는 웃는 표정을 유지했다.
사실, 연우혁이 관직을 다 내려놓고 무림인으로 살아갈 게 아니라면 이런 식의 상납은 반쯤 필수적이었다.
당장 한경의 포두가 다른 지역에 가서 일을 하고 오는데 상관을 무시하고 멋대로 움직일 수는 없지 않은가.
저건 연우혁이 비판을 받으면 자신의 이름으로 막아주는 대가라고 할 수 있었다.
'아예 못 받는 것보다는 나눠서 받는 게 낫다.'
훼방으로 의뢰를 못 받는 것보다는 이렇게 보상을 나누더라도 받는 게 무조건 이득 아닌가. 연우혁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어르신."
"이상한 점?"
궁 판관은 인상을 팍 일그러뜨리더니 연우혁의 궤짝 안의 은을 휘적거렸다. 마치 무언가 결점이라도 찾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신중하게 말했다.
"가짜 은은 아닌데?"
"...그걸 말한 게 아닙니다. 모용세가가 저를 부른 게 이상하단 겁니다."
아무리 연우혁이 보여준 재주가 신통하다 하더라도 결국 일개 포두의 한계를 벗어날 순 없었다.
한경 사람들이야 직접 경험했으니 무슨 일이 생기면 '연 포두께 지혜를 부탁드려보세!'라고 하지만 떨어진 지역의 모용세가가 그런 소문만 듣고 연우혁을 높게 평가하기는 힘들었다.
연우혁과 인연이 있는 몇몇 무림인들의 말이 있다 하더라도 결국 개인의 신분이나 명성이 이런 부탁에는 필수적인 것이다.
하물며 오대세가 중 하나인 모용세가라면 더더욱 일을 맡기는 데에 까다로울 터. 일개 포두를 이렇게 부르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궁 판관은 연우혁을 빤히 쳐다보았다. 연우혁은 부담을 느끼고 물었다.
"제가 이상한 질문이라도 한 겁니까?"
"아니다! 그저 네가 오랫동안 누워있었다는 게 사실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소문을 하나도 모르는 걸 보니. 진충비도가 뭔지 아느냐?"
"무공 초식입니까?"
연우혁은 '충성을 다한다'는 진충(盡忠)을 보고 금의위나 포쾌의 새 무공이 나왔나 싶었다.
"네 별호다."
"...예?"
"네 별호라고 했다. 무림인들은 원래 붓으로 공덕을 세우는 것은 하찮게 여기고, 칼로 악인을 베는 건 귀하게 여기지. 네가 혈교의 무리를 죽였으니 무림인들이 널 인정하는 것도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
"...!"
그제야 연우혁은 자신이 쓰러져 있는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무림의 소문이 천리마보다 빠르다는 게 이런 뜻이었다니!
일개 포두로서 신통한 재주가 있는 정도라면 굳이 오대세가에서 초청하지 않겠지만, 별호를 갖고 있는 신진 고수가 포두로 지내는데 신통한 재주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굳이 따지자면 이번 혈교의 고수를 죽인 일로 연우혁은 무림의 신진 고수이자 기인이사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무림에 괴팍한 기벽을 가진 고수들이 한둘이 아닌데 포두로 지내는 게 흠이 될 리 없었다. 연우혁은 자신이 무림인으로서 인정받았기에 모용세가로부터 초대를 받았다는 걸 깨달았다.
'잠깐.'
다른 젊은 무림인이었다면 '내가 이름을 날렸구나!'하면서 패기 넘치게 함성을 질렀겠지만 연우혁은 곤혹스러워했다.
일단 무림인으로서의 명성이 당장 쓸모가 없을 뿐더러(판관 되는 일에 별호가 있다고 더 쉬워지진 않았다), 하필이면 그 명성이...
'혈교 놈들 장로 죽인 원한이잖아!'
나름 동창 무인들에게 책임을 돌리고 자신은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누워 있는 사이 무림에 '연우혁이 혈교 장로를 죽였다더라'라고 소문이 돌았다니.
연우혁이 혈교 무인이어도 동창보다는 연우혁 먼저 죽일 것 같았다. 전자보다 후자가 만만하지 않은가.
궁 판관은 연우혁이 이해한 것 같자 진지하게 충고했다.
"포두로서 무공을 닦아 명성을 날리는 것도 좋지만, 명성에 취해 관리로서 본분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해라. 세간의 명성만큼 헛된 것도 없는 법. 진정 남는 건..."
"백성을 아끼는 애민(愛民)의 공덕 아니겠습니까?"
연우혁의 가식적인 대답에 궁 판관은 미친 놈 보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은자를 말한 거다. 무슨 공덕비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느냐?"
"..."
* * *
'긍정적인 면이 없지는 않다.'
연우혁은 혈교 살수가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치고 상황의 좋은 면을 보기 위해 애썼다.
일단 별호가 붙고 신진 고수로 인정받는다는 건 확실히 이득이었다.
앞으로 한경에 찾아오는 무림인이 취해서 칼 휘두르고 객잔 의자로 무공을 펼쳐도 '내가 진충비도인데 너는 누군데 날 무시하느냐'하면 어느 정도 설득이 될 테니까.
무림에서 인정받는 별호라는 건 생각보다 묵직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모용세가의 은자도 별호가 붙지 않았다면 받지 못했을 것 아닌가.
그건 그런데...
'하필이면 왜 비도야?'
연우혁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진충이란 별호에는 별 불만이 없었다. 조금 부끄럽긴 했지만, 다른 관리들 앞에서는 제법 호감을 살 수 있는 별호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뒤의 비도는 조금...
'포두보다는 사파, 아무리 좋게 봐줘도 정사지간의 무림인 아닌가?'
별호에 암기 들어가는 무림인치고 평가 좋은 무림인이 드물었다. 아무래도 암기란 것이 비열한 사파 마두가 쓰기 좋은 물건인 것이다.
그나마 몇 안 되는 정파무림인은 대부분 당문 소속이었고(연우혁은 이 평가가 과연 공정하게 이뤄진 건지 약간의 의심이 있었다), 그 외는 정파로 인정받는 사람이 없는 걸 보면...
'으음. 그래도 진충이 앞에 있고, 포두란 직위가 있으니 어느 정도 정파로 인정을 해주겠지.'
연우혁이 아무 이유 없이 정파무림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게 아니었다.
당장 떠돌이 무림인이 낯선 곳에 도착해서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어느 문파의 문을 두드린다면, 그 무림인이 정파냐 사파냐 혹은 정사지간이냐로 대접이 달라졌다.
정파무림의 당당한 일원이라면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같이 술잔을 기울일 수 있었지만, 정사지간의 무림인이라면 운 좋을 경우 쪽방이고 운 나쁠 경우는 쫓겨나는 것이다.
사파의 마두라면?
애초에 그런 마두는 문을 두드리지도 않았다. 괜히 두드렸다가 칼 맞을 수도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제 사파무림의 무인들은 사파 문파의 문을 두드리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사파 문파는 같은 사파라고 해서 손님을 대접하거나 하진 않았다. 죽이고 뺏으면 모를까.
연우혁이 생각하기에도 무림에서 사파 무인으로 살아가는 건 매우 힘들고 고된 일이었다. 절대로 그쪽으로 인정받아서는 안 됐다.
"형장께서는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
언덕의 모퉁이를 돌고 말을 잠깐 쉬게 할 겸 빗질을 해주는 사이, 세 명의 무림인들이 뒤에서 나타났다.
그냥 지나치지 않고 던지는 질문에 연우혁은 경계의 시선부터 던졌다.
'혈교의 살수일지도 모른다.'
영안을 열고 훑어봐도 다행히 적대심은 없었지만, 연우혁은 방심하지 않았다. 상대가 연우혁의 영안보다 뛰어나게 살기를 숨기는 혈교의 살수일지도 몰랐으니까.
"아. 죄송합니다. 먼저 제 소개부터 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저는 진검보의 장인형이라고 합니다. 혹시 최근에 적면혈뇌를 일격에 죽인 진충비도 연 포두님이 아닌가 싶어 여쭤봤습니다."
"..."
연우혁은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모를 만큼 아찔해졌다.
"연 포두 맞소. 그리고 일격에 죽인 게 아니오. 여러 명과 합공을 해서..."
"역시! 이런 곳에 관복을 입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길래 혹시나 했는데!"
연우혁의 해명은 듣지도 않고, 세 명의 무림인들은 알아서 기뻐했다.
"탈명검 단 대협께서도 포두님을 많이 칭찬하셨습니다. 그 때도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명성을 떨치실 줄이야."
"저는 진검보 소속의 연림량이라고 합니다, 연 대협!"
무림인들이 동경의 눈빛을 던지자 연우혁은 새삼 자신이 벌인 싸움이 대단한 싸움이었다는 걸 느꼈다.
무림에서 명성은 죽은 사람에게서 산 사람으로 넘어가는 법.
진검보의 무인들이 이렇게 존경을 표할 줄은...
"독혼수 대협을 스승으로 두고 사사했다고 들었습니다. 실로 기재(奇才)는 기재를 알아보는 법이군요!"
"?"
무심코 듣던 연우혁은 멈칫했다. 무언가 이상한 이야기가 나왔던 것이다.
"누굴 스승으로 뒀다고 하셨소?"
"독혼수 당등 대협이 암기술을 가르쳐주셨잖습니까?"
"...?!"
연우혁은 뭔 개소린가 싶었다.
따져 묻는 연우혁에게, 진검보 무인들은 자신이 들었던 소문을 그대로 전달해주었다.
-들었나? 한경의 연 포두란 자가 혈교의 장로를 일격에 죽였다는군! 비도 한 자루로 말이야!
-놀라운 일일세! 비도 한 자루로 혈교의 장로를 죽이다니. 그런 고강한 암기술은 근래 들어본 적이 없네.
-그런 무공이라면 분명 사문이 있을 터, 연 포두는 누구에게 무공을 사사한 것인가?
-저번에 듣기로는 독혼수 당 대협이 연 포두와 매우 친밀한 사이라고 들었네.
-아하! 당 대협께서 암기술을 사사하신 거로군. 당문의 무공은 아니더라도 분명 비범한 암기술일 걸세.
-그렇다면 당문과 아예 관계가 없지도 않군. 진충비도! 그래, 진충비도가 별호로 딱일세그래!
-훌륭한 별호다, 훌륭한 별호야! 충성스러운 포두이자 반쯤은 당문의 무인이니, 참으로 절묘하구만!
"..."
연우혁은 영안을 열지도 않았는데 두통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비도가 왜 붙었나 싶었는데 당문과의 친분 때문에 붙었다고??
'이런 미친...'
무림에 떨어진 이후 이렇게 억울한 적은 처음이었다.
제갈세가, 하북팽가, 무당파 등 여러 좋은 문파를 내버려두고 하필이면 당문과 엮여 있다는 소문이 나다니.
진심으로 억울했다. 소문을 퍼뜨린 놈들을 모조리 잡아가두고 싶을 정도였다.
"저, 연 대협...?"
"당 대협께서 가르침을 주시긴 했소. 하지만 당문의 무공은 아니었지."
연우혁은 최대한 침착을 되찾고 말했다. 무인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히 압니다. 당가 직계의 무공을 외인이 어떻게 전수받겠습니까."
"가르침만으로 그런 경지에 오르다니, 두 분 모두 훌륭하십니다!"
"...세 분은 어디로 가시오?"
연우혁은 주제를 바꿨다. 더 이야기를 해봤자 분노만 치솟을 것 같았다.
이미 퍼진 소문을 어쩌겠는가?
"저희도 영동으로 갑니다. 모용세가의 일을 한몫 거들기 위해서 말입니다."
"!"
목적지가 같자 연우혁은 놀라워하며 물었다.
"모용세가에서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길래...?"
"예? 모용세가는 지금 청괴산장을 토벌하고 있습니다."
무인들은 연우혁이 너무 당연한 걸 묻자 의아해했다.
이미 연우혁도 모용세가로부터 초청을 받았다고 소문을 들었는데, 정작 당사자가 모용세가가 하는 일을 모르다니?
연우혁은 조금 머쓱해졌다.
재주를 부탁한다고 해서 당연히 사라진 사람을 찾거나 무공을 찾거나 혹은 범인을 찾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산장을 토벌하는 일이라니.
"급히 달려온 탓에 자세한 걸 듣지 못했소. 청괴산장은..."
"이 인근에서 악명이 자자했던 놈들이지요."
보통 산장이라고 불리는 가문들은 외진 곳이라는 특색을 살려 가전무공 수련에 몰두했지만, 가끔 산의 특색을 이용해 다른 부업에 나서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산적질이었다.
청괴산장은 주변을 지나가는 여행객들을 무자비하게 수탈하는 걸로 악명이 높았다.
특히 가전무공 중 장법이 일절이었는데 한 쌍의 육장(肉掌)이 휘둘러지면 나름 무공을 익힌 무림인도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문제는 그렇게 쓰러뜨린 사람 중 모용세가의 사람도 있었다는 점이었다.
청괴산장의 마두들은 나와서 부복하는 대신 산장에 웅크렸고, 분노한 모용세가는 핏값을 받아내기 위해 토벌대를 보냈다.
"청괴산장의 지세가 험악하고 술법이 교묘해서 꽤 버티는 모양입니다. 저희 진검보뿐만 아니라 여러 문파가 요청을 받았으니 말입니다."
'그럼 나는 왜 부른 거야?'
연우혁이 생각에 잠긴 사이 다른 무림인이 말했다.
"아마 대협께서 산장을 공략할 만한 좋은 꾀를 내주길 바라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럴 리가. 난 군사도 아니오. 아마 좌중에 무슨 문제가 있어서 해결할 사람을 부른 거겠지."
* * *
"진충비도 연 포두께서는 저 산장을 공략할 만한 좋은 계책을 내주셨으면 하오."
"..."
모용세가 무인의 말에 연우혁은 어이가 없었다.
"저는 군사(軍師)가 아닙니다. 그런 좋은 계책을 쉽게 낼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모든 군략을 맡길 생각은 없소. 우리 모용세가에도 군사들은 있으니. 다만 뭐든지 떠오르는 게 있으면 말해달라는 것이오. 저 앞을 막고 있는 진법의 틈을 찾을 계책이나..."
"저 진법 말입니까? 저건 해제할 수 있긴 합니다."
"..."
무림출도 (2)
모용세가 가주의 둘째, 냉검공자 모용현은 눈앞의 포두가 하는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
사람이 하는 말을 한순간에 뒤집다니.
'혹시 천기수사 님이 잘못 보신 것 아닌가?'
연우혁은 몰랐지만 연우혁을 모용세가에 추천한 건 천기수사 제갈우였다.
청괴산장의 지세와 술법이 워낙 까다로웠기에, 무림에 지혜로 명성이 높은 제갈세가의 두뇌를 빌리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천기수사는 제안을 거절했고 대신 최근에 진충비도란 별호를 얻은 신진 고수를 추천했다.
천기수사가 추천한 만큼 어쩔 수 없이 초빙했지만, 모용현은 이 연우혁이라는 포두가 영 탐탁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사천당문과 인연이 깊은 무인이기 때문이었다.
정파무림에서도 '당문의 무인이 난폭하게 구는 꼴은 사파와 다름없다'란 말이 종종 나왔고 모용현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반쯤 사천당문 출신에 일부러 포두로 지내는 괴인이라니. 성격이 얼마나 괴팍하고 천박할지 짐작이 갔다.
"진법을 해제할 수 있다고 했소?"
"예."
"지금 여긴 전장이나 마찬가지요. 아무리 세가에서 초빙한 손님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허언을 해서는 아니 되오. 다시 한 번 묻겠소. 정말 해제할 수 있소?"
모용현은 연우혁의 말을 의심하고 압박하려고 했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애초에 모용현보다 더 미친놈들을 많이 상대해 본 연우혁이었고, 무공의 경지도 그렇게 차이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정말 해제할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저 진법은 흑사청요진 아닙니까?"
"!"
진법의 이름을 바로 맞히는 연우혁의 모습에, 모용현은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모용세가에서 데리고 있는 군사들은 산장을 막고 있는 진법이 어떤 진법인지 맞히는 것만 해도 보름이 걸렸던 것이다.
'과연 천기수사 님. 이 포두는 괴팍할지 몰라도 실력은 틀림이 없군!'
한결 공손해진 태도로 모용현은 말했다.
"맞소. 진충비도의 실력이 허명이 아니라는 걸 이제야 알겠소. 진법을 해제하기 위해 조언을 듣고 싶소."
"저 진법을 뚫지 못하고 헤매는 데에는 계속해서 안의 방위가 움직이고 변화해서일 겁니다."
영안으로 진법을 뚫어져라 관찰하며, 연우혁은 입을 열었다. 모용현은 조금 더 감탄했다.
"그렇소. 세가의 군사들도 그렇게 말했소."
"진법은 미시(未時)에 강해지고 축시(丑時)에 약해질 테지요."
"맞소!"
모용현의 목소리에 흥분과 기대감이 맴돌았다. 세가의 군사와 문객들이 머리를 맞대고 짜낸 재주를 이 포두는 단숨에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축시 때에도 진법을 뚫을 수는 없었소. 왜냐하면..."
"산장의 무림인들이 상문(傷門)과 두문(杜門)에서 목숨을 걸고 막아서면 진법을 뚫기 쉽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모용현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던 무림인들 모두가 연우혁을 놀라움의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진충비도가 신통력이 있다더니 사실이로구나!'
'한경에 앉아 백 리 밖의 일이 굴러가는 이치를 본다더니...'
'당문과 인연이 깊어 괴팍한 자일 줄 알았는데.'
사실 방금 연우혁이 한 말은 옆 천막의 계서(計書)에 적혀 있던 말을 영안으로 보고 한 말이었다. 본가에 보고하기 위해 적은 내용이라 꽤 자세했다.
'어떻게 된 게 속임수 쓰는 것에만 더 능숙해지는 기분이군!'
평소 하던 대로 사람들이 완전히 집중하자 연우혁은 슬슬 영안으로 본 답을 말해줘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진법을 미시 때 공략하십시오."
"...?!"
뜬금없는 말에 무림인들은 당황했다.
"미시에 가장 강해지는 진법인데?"
"꽤 오랫동안 산장에 갇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적들이 지나치게 생기 넘치지 않습니까. 분명 다른 암로(暗路)가 있을 겁니다."
"!"
진법은 사실 수비하는 쪽에서 작정만 하면 거의 약점이랄 게 없었다.
모든 진법은 약점이 있다지만 애초에 그 약점 또한 펼친 사람이 더 잘 알 것 아닌가. 약점만 집중적으로 막아서면 보완도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었다.
하지만 진법에 약점이 없더라도 그 진법을 펼치는 사람들에게는 약점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지나가지 못하는 진법을 계속해서 펼친다면 산장 안의 무인도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게 됐다.
아사(餓死)는 피하고 싶었는지 진법 밑 땅 속에는 샛길이 나있었다. 가장 진법이 강할 때는 적들이 공격하지 않으니 그 틈을 타 몇 명이 땅 아래로 빠져나가는 게 분명했다.
"그 때 공격하면 적들이 서둘러 나오거나 움직이는 걸 알아차릴 수 있을 겁니다."
"암, 암로는 어느 방향 쪽으로 나있겠습니까?"
듣던 세가의 무림인 중 한 명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 멍청한 질문에 모용현은 수치심을 느끼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까지 물어보다니. 그걸 질문이라고 하느냐?"
"죄, 죄송합니다."
포두가 상을 차려줬으면 암로의 위치 정도는 모용세가에서 찾아야지, 그것까지 알려달라고 떼를 쓰다니.
모용세가의 무림인은 낯빛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연우혁은 개의치 않고 대답했다.
"제가 천문을 보았는데 저쪽 같습니다."
"..."
머쓱하고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누군가 속으로 생각했다.
'당문이 아니라 제갈세가의 핏줄 아닌가?'
그러고 보니 천기수사가 적극적으로 추천했는데 설마...?
* * *
"샛길이 들켰다고?"
청수귀마는 얼굴을 돌처럼 딱딱하게 굳혔다.
청괴산장은 이미 가문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밖에서 흘러 온 마두들이 많았다. 산적질을 하기 위해 마두들을 끌어모은 만큼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그런 만큼 난폭한 청괴산장의 마두들을 이끄는 건 만만치 않았다. 같은 가문의 일원이라면 억지스러운 규율도 어느 정도 참고 견딜 수 있었지만 마두들은 그런 걸 참지 못했다.
그런데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샛길이 들켜서 봉쇄당하다니. 당장 굶어죽진 않겠지만 향락에 빠져 살던 마두들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불만을 토해낼 것이다.
그보다 더 심각한 건 만일의 경우 청수귀마 본인이 빠져나갈 길도 사라졌단 뜻이었다.
"이 땡추 놈. 진법도 그렇고 절대 들키지 않을 거라고 자신하지 않았나?"
"당황스럽군! 이렇게 알아차릴 줄이야."
머리를 길게 기른 파계승, 흑륵존자는 놀라워하며 염주를 굴렸다. 청수귀마는 한 대 갈기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지금 마두들을 끌어가야 하는 만큼 내분을 일으켜서는 안 됐다.
"샛길을 들키면서 흑사청요진도 같이 파훼당했다. 내일 해가 뜨는 대로 고갯길 앞까지 모용세가 놈들이 들어오겠지. 여기 턱밑까지 들어온단 거다. 여기 마두 놈들이 그걸 보면 절반은 도망칠 거다."
"아직 절망할 때는 아니지. 지금 산장에는 귀신과 강시가 여럿 아닌가. 고갯길만 틀어막아도 쉽게 들어오지 못할 거야."
흑륵존자는 청수귀마의 손을 힐끗 쳐다보며 달랬다. 평범해 보이는 손이었지만 저기서 음한한 장법이 한 번 펼쳐지면 그대로 절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걸로는 안 돼. 마두 놈들이 도망치지 않게 확실한 게 필요하다. 무슨 괜찮은 술법이라도 있나? 마두 놈들의 기세를 확 올릴 만한 그런 술법 말이다."
"그런 게 그리 쉽게..."
말하던 흑륵존자는 말끝을 흐렸다. 청수귀마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보통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떻게든 계략을 짜내야 했다.
"...있긴 하지!"
"그게 뭐지?"
"내가 예전에 매수해놓은 일꾼 놈이 하나 있지. 위험한 일은 하지 않겠다고 뻗대겠지만, 매수당한 사실을 밝힌다고 협박한다면 어쩔 수 없을 거야."
"일꾼 놈 하나로 뭘 어쩌려고?"
청수귀마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고수를 하나 보내서 암습해도 쉽지 않을 텐데 무공도 익히지 못한 일꾼 하나로 뭘 한단 말인가.
천막에 불을 질러봤자 금세 끝날 것이다.
"하하. 자네와 달리 나는 모용세가에 대해 꿰고 있지. 모용세가의 어린놈들은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네. 가주가 강자존을 선언했기에 후계자가 되려고 경쟁하는 것이지."
"그래서?"
"이런. 이런. 이들이 서로 얼마나 반목할지 예상이 가지 않는가? 일꾼 하나가 가짜 편지를 천막 안에 던져 넣는다면? 그리고 그걸 고발하는 투서를 다른 천막에 던져 넣는다면?"
"...!"
그제야 청수귀마는 불만을 떨치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일꾼 하나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모용세가의 핏줄들끼리 내분을 일으키는 건 제법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였다.
모용세가의 공자 중 하나가 다른 형제들을 견제하기 위해 청괴산장의 마두한테 몰래 밀서를 보낸다면?
모용세가의 진세가 강하고 철저해보였지만 그건 결국 모용세가의 무림인들이 이끌기 때문. 모용세가만 내분이 나면 나머지 무림인들은 의욕을 잃고 흩어질 터였다.
"자네는 역시 지혜롭군!"
"어련하겠나."
흑륵존자는 여유를 되찾고 대답했다.
무림에서 지혜가 있다는 것은 때로는 무공의 경지보다 더 강한 힘을 발휘하기 마련이었다. 아무리 청수귀마가 난폭하더라도 흑륵존자를 쉽게 대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밑의 무림인들은 당연히 반간계를 의심할 테지만 그건 의미가 없었다.
이런 반간계에도 흔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바로 문제였다.
계책 중 하책이 몰라도 피할 수 있는 수법이고, 중책이 알면 피할 수 있는 수법이라면, 상책은 알아도 피할 수 없는 수법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흑륵존자는 자신감 넘치는 시선으로 오만하게 저 산장 아래를 굽어보았다.
* * *
연우혁은 진영에 머물면서 몇 가지 사실을 추가로 깨달았다.
먼저 이 초빙이 생각보다 편한 자리라는 것이었다. 아무도 연우혁에게 무공으로 적들을 죽여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무림에서 군사란 역할은 생각보다 편하구나!'
일개 무림인이라면 서로 대오를 갖추고 언제든 격전을 펼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지만, 군사로 존중받는다면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저 앉아서 느긋하게 산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무림인들은 '무언가 계책을 고민하는구나'하고 이해해줬다.
연우혁은 갑자기 천기수사가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지혜를 빌려달라고 부탁받는다면 절대 허술하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 행동 하나 하나가 신비로워보여야 하는 법! 상대가 불순한 마음을 품는 순간 놈들은 보상을 깎으려고 할 것이다.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천기수사 님.'
그리고 다음으로 깨달은 건 연우혁의 명성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무림인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점이었다.
"당문과 인연이 있으신 분이 왜 포두로 계시는 겁니까?"
"...당문과의 인연은 그리 깊지 않소. 그리고 포두는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에..."
"아하!"
반각 후.
"그런데 백성을 아끼고 사랑한다면 협객으로 지내는 게 더 편하지 않으십니까?"
"..."
연우혁은 '고관대작 되어서 네놈을 수탈하려고 노력중이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무림인들은 왜 벼슬에 연연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게 포두인 만큼 더더욱 그랬다.
그리고 사실 이것까지도 괜찮았다. 선량한 포두인 척 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으니.
"혹시 제갈세가와 인연이 있으십니까?"
"규 형이나 천기수사 님을 뵌 적은 있소만."
"그런 인연 말고 다른 인연은 없습니까?"
"..."
가장 곤란한 건 자꾸 연우혁이 제갈세가의 핏줄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는 놈들이었다.
여기서 괜히 이상하게 대답했다가는 '진충비도가 자기 제갈세가 사생아라더라'같은 소문이 돌고, 제갈세가의 추살대가 쫓아오는 일이 생길 것 아닌가!
'빨리 함락이나 되면 좋겠군.'
연우혁은 청괴산장을 쳐다보며 하품했다. 진법도 끝났겠다 이제 무림인들은 턱밑까지 몰려온 상태였다. 길이 좁다지만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 같았다.
함락되면 보상을 받고, 보상으로 영약을 사고...
'어느 정도는 뇌물을 바쳐야 하나? 정말로 바치기 싫군.'
"진, 진충비도 님! 큰일났습니다!"
"무슨 일이냐?"
"지금 두 공자 님께서 크게 싸우고 계십니다. 진충비도 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
* * *
"이런 가짜 서신으로 누명을 씌우다니. 감히?"
일검공자 모용소는 동생들을 쳐다보며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동생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런 협박에 물러서면 모용세가의 핏줄이 아니었다.
"서신의 내용은 우리가 대를 맡아서 공격하는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었고, 그 서신이 발견된 곳도 형님의 처소였소."
"네놈들 중 하나가 던져넣은 거겠지."
"누명이라고 외치면서 형님께서는 잘도 누명을 던지시는구려!"
"검을 뽑아라."
"얼마든지! 다만 세가에 보고를 올릴 때 누가 먼저 말했는지는 빼놓지 마시오."
"다들 기다려주십시오!"
세가 외부의 무림인들이 연우혁을 데리고 도착했다.
모용소는 동생들을 보며 일갈했다.
"진충비도. 여기 내게 누명을 씌운 놈들이 있소. 진상을 밝혀주시오."
"진충비도, 형님께서는 지금 오히려 성을 내시는구려! 그대가 진상을 밝혀줘야겠소."
보다 못한 세가의 문객 중 한 명이 외쳤다.
"이게 반간계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공자들께서는 부디 진정하십시오!"
"반간계! 말은 좋군. 그보다 더 가능성 높은 건 이 자들이 내게 누명을 씌웠다는 거겠지. 반간계라는 증거라도 있소?"
"동감하오. 반간계보다는 다른 게 더 가능성이 높겠지. 형님이 내통했다거나..."
"반간계 맞습니다. 저기 하인이 청괴산장의 흑륵존자한테 매수되어서 처소에 서신을 던져 넣은 겁니다."
연우혁의 심드렁한 말에 주변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듯이 조용해졌다.
무림출도 (3)
"뭐... 뭔...?"
"말,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사람을 뭘로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거요!"
지목당한 하인은 펄쩍 뛰며 외쳤다.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다가 지목을 당한 만큼 더욱 충격적이었다.
"여기 모인 무림인들은 다 협과 의를 위해 모인 사람들이요! 매수될 사람이 있을 거 같소?!"
'오.'
연우혁은 살짝 감탄했다.
같은 노비라도 대감집 노비는 다르다더니, 모용세가의 하인은 머리 굴리는 실력도 제법이었다.
그냥 펄펄 뛰며 부정하기보다는 주변에 있던 다른 무림인들을 바로 끌어들였다.
"진충비도. 마땅한 증좌(證左, 증거) 없이 하인이 했다고 주장하면 믿기 어렵소."
"맞소. 어느 대명천지에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오?"
연우혁의 명성에 불신을 가지거나 포두라는 신분을 의심하는 몇몇 무림인들이 바로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다른 무림인들이 고생하는 동안 혼자 유유자적했던 연우혁이었다. 이럴 때 질시가 날아올 수밖에 없었다.
"증거야 별로 어렵지 않지요."
시비나 도발에도 연우혁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한경의 관리들에 비하면 무림인들의 시비는 귀여운 애교처럼 느껴졌다.
"하인이 머무는 천막을 뒤져보면..."
'하!'
하인은 속으로 비웃었다.
깜짝 놀랐지만 곧 연우혁이 망신을 당할 거라고 확신한 것이다.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딱 거기까지구나! 마두 놈들이 이야기하는 걸 듣기라도 한 모양인데, 외부인 주제에 모용세가의 하인인 날 몰고 갈 수는 없을 거다.'
"...아무것도 없을 겁니다. 그야 이런 일을 하면서 자기 천막에 뇌물을 두는 놈이 어디 있겠습니까."
연우혁은 하인의 감정을 읽으며 말을 능숙하게 수정했다.
기억이 맞다면 이 반간계 사건에서 하인이 받은 재물을 숨겨놓은 곳은 두 군데 중 하나였다.
하나는 이제 천막이었고, 가끔은 천막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변경될 때가 있었다.
천막을 말했을 때 하인이 안도한 걸 보니 다른 곳이 분명했다. 실제로 해결할 때는 한 군데 찾아서 안 나오면 체면이 깎이고 명성이 떨어지니 이런 잔꾀가 필수적이었다.
"저 하인의 팔꿈치와 무릎을 보십시오. 흙을 털어냈지만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 색이 짙습니다."
"넘... 어진 겁니다!"
연우혁은 일일이 대꾸하지 않았다. 어차피 어떻게 의심했는지 일대일로 대꾸하다보면 연우혁만 피곤해졌다. 애초에 대답할 말도 마땅치 않았고.
중요한 건 기세였다. 사람들이 '아, 저 포두의 말이 맞나보다!'라고 생각만 하면 일사천리였다.
"모용세가의 공자들은 하나 같이 기재에, 무림에 명성이 높은 준걸들입니다. 만약, 정말 만약이지만, 이 분들 중 한 분이 흑륵존자와 손을 잡았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럼 자기 처소에 서신을 두겠습니까? 바로 태우지 않았을까요?"
"저는 그래서 누군가 일검공자께 누명을 씌운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문객 중 한 명이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 좋은 참여에 연우혁은 잘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했다.
"만약 다른 공자 분이 누명을 씌웠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럼 이렇게 허술하게 서신을 두겠습니까? 누가 봐도 반간계를 의심할 수 있는 상황인데? 저는 그래서 공자들 중에는 범인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
서로 사이가 좋지 못한 모용세가의 공자들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어느 누구도 불평하지 않고 조용히 들었다.
진충비도의 말이 그들의 체면을 살려주면서 해결안을 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인가? 허술한 방법을 쓸 수밖에 없고, 처소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 여전히 많았습니다만 저 하인의 무릎과 팔꿈치가 눈에 띄었습니다. 넘어졌을 수도 있지만 하인의 안색을 보니 이 소란 와중에도 혼자 득의(得意)한 기색이 있더군요."
무림인들은 숨도 쉬지 못하고 연우혁의 말에 집중했다.
수십 명이 넘게 몰려와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공자들을 제외한 뒤 수상한 사람을 찾아내다니.
누군가 중얼거렸다.
"과연 제갈세가...!"
"전 제갈세가 아닙니다. 그런 이유로 저 하인이 매수되었다고 생각한 겁니다. 아까 증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만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하인이 이런 상황에서 가봤자 얼마나 멀리 가겠습니까. 여기서 동쪽으로 여덟 장하고도 네 척 떨어진 저 나무 보이십니까? 저 밑에 파묻었을 겁니다."
"저, 저건 어떻게?"
"오면서 둘러봤는데 혼자 흙색이 다르더군요."
"...!!!"
"잡아라!"
모용소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하인이 비명을 질렀다.
"공, 공자님!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그러고도 살길 바라느냐? 끌고 가라!"
일갈을 마친 모용소는 연우혁에게 포권하며 정중하게 말했다.
"진충비도의 도움에 감사드리오. 덕분에 억울함을 벗을 수 있었소."
다른 두 형제도 똑같이 포권했다.
큰 형의 명성을 끝장낼 수 있었다는 속마음과 별개로, 지금 이 많은 무림인들 앞에서 연우혁에게 속좁게 굴었다가는 대번에 명성에 흠이 갔다.
"하찮은 재주일 뿐입니다. 정파무림의 동도들 사이에 피가 흐르지 않았으니 기쁠 뿐!"
사방에서 쏟아지는 찬사를 받으며 연우혁은 좌중을 빠져나왔다. 마치 누군가를 찾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연우혁의 모습에, 진검보에서 나온 장인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뭘 찾으시는 겁니까?"
"하인 말고 매수당한 사람을 확인하고 있었소. 몇 명 더 있군."
"...!!"
장인형은 연우혁을 경외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이 젊은 무림인은 제갈세가와 비교해도, 아니 제갈세가보다 더 뛰어난 책사일지도 몰랐다.
* * *
흑륵존자는 부하가 들어오자 잔뜩 기대하며 재촉했다. 뿌린 씨앗에서 싹이 틀 때만큼 즐거운 일도 없었다.
과연 저 아래의 진영은 어떻게 되었을까?
"말해라. 어떻게 됐느냐?"
"그, 그것이..."
"뭐냐? 무슨 일이냐?"
"하인 놈이 붙잡혔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흑륵존자는 살기를 폭발시켰다. 갑자기 칼날처럼 쏟아지는 날카로운 기세에, 경지가 낮은 부하는 견디지 못하고 컥컥댔다.
"정... 정말입니다."
"이건 말도 안 된다. 이건 말도 안 돼! 왜 반간계가 통하지 않았지?"
방 안을 서성이며 흑륵존자는 중얼거렸다.
밖의 포위도 포위였지만 이 말을 들었을 때 청수귀마가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었다. 난폭하기 그지없는 자라 아군한테 일장을 날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분명 모용세가 공자놈들의 사이라면 통할 텐데...
"그, 이건 제가 소문을 들은 건데, 진충비도란 놈이 진영에 있답니다."
"진충비도?"
"최근에 적면혈뇌를 죽인 놈이랍니다."
"아, 적면혈뇌를 죽였다는 그 포두 놈?!"
흑륵존자는 그 말에 진충비도가 누군지 기억이 났다.
최근 포두 주제에 무림 고수를 죽였다는 소문이 돌아서 코웃음을 쳤었는데...
"다른 놈들이 같이 있었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랬겠지.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무공이 제법이란 소리다. 적면혈뇌 같은 고수 앞에서는 합공을 펼친다 하더라도 목숨부지도 쉽지 않으니! 그보다 놈의 꾀가 더 궁금하다. 꾀로 소문났다는 건 들었지만 실로 제법이구나."
"하인 놈이 실수를 한 게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들킬 리가 없습니다."
부하는 아첨하듯이 말했다. 청수귀마만큼은 아니어도 흑륵존자도 만만찮게 괴팍하고 성질 더러운 사람이었다. 기분이 나빠지면 저 선장(禪杖)을 휘둘러 부하를 때려죽일 수도 있었다.
"그래... 그럴 거다."
흑륵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봐도 새파랗게 어린 놈이, 그것도 어느 세가 출신도 아닌 놈이 흑륵존자의 간계를 간파하고 짓밟아 뭉갰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분명 하인 놈이 실수를 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설명되지 않았다.
"하지만 청수귀마 놈은 나한테 책임을 물을 텐데..."
"흑륵존자 님!"
"?"
"제가 다른 놈들과 접선했습니다. 저희 돈을 받아먹은 놈들 말입니다. 협박을 하니 겁에 질려서 알겠다고 하더군요."
"잘했다!"
흑륵존자의 칭찬에 부하는 기뻐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대로 돌아가면 죽을 것 같아 어떻게든 매수한 놈들을 찾아가봤는데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놈들에게 수상한 기색은 없었더냐? 함정일 수도 있다."
"없었습니다. 그리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디서 만날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상대가 함정을 파놨다 하더라도 여러 군데를 돌며 시선을 분산시키면 무용지물이 됐다. 흑륵존자는 흡족해하며 선장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시간이 없다. 놈들을 불러와라!"
"예!"
부하가 나간 뒤 흑륵존자는 살기를 가다듬으며 선장을 붙잡았다.
안 그래도 강시가 부족했는데, 이번에 매수한 무림인 놈들이 오면 몇 구 보충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어차피 모든 놈들이 철저하게 말을 듣지는 않을 테니 가장 고분고분한 놈들만 살려두면 됐다.
'...함정일 리는 없겠지.'
순간 자신이 너무 성급하게 다음 모책을 준비하나 생각이 든 흑륵존자였지만, 고개를 흔들며 그 생각을 떨쳤다.
치밀하고 교활한 책사답게 흑륵존자는 바로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 없었다. 흑륵존자가 있을 곳은 절암봉, 이 산에서도 가장 외지고 인적 드문 곳 중 하나였다.
흑륵존자가 거기서 기다리고 있다는 건 부하도 알지 못했다. 부하는 매수된 무림인들을 데리고 산 주변을 빙빙 돌 것이고, 적당할 때를 봐서 흑륵존자가 아래로 내려올 것이다.
이러면 상대의 어떤 함정도 무의미했다.
어느 누구도 흑륵존자가 절암봉에 있다는 걸 알지는 못할 테니까.
* * *
"진충비도 님. 천기수사 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뭐라고?!"
연우혁은 의외의 손님에 깜짝 놀랐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꼿꼿한 자세로 천막에 들어오는 제갈세가의 장로를 보자, 연우혁은 서둘러 일어났다.
"아니. 천기수사 님께서도 초빙을 받으셨습니까?"
"받았었다. 거절했지만. 그래서 널 추천한 것 아니겠느냐?"
"!"
천기수사의 말에 연우혁은 그제야 모용세가 무인들이 자신을 왜 초빙했는지 깨달았다.
아무리 최근 명성을 쌓았다지만 모용세가가 부르기에는 너무 갑작스러운 것 아닌가 싶었는데, 제갈우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추천한 모양이었다.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천기수사 님께서는 왜 받지 않으셨습니까? 혹시 모용세가와 무슨 문제라도..."
"아니. 삯이 마음에 차지 않았다."
"...아, 예."
"목소리 낮춰라! 모용세가 놈들한테 왔다고 자랑하고 싶지는 않으니."
심지어 제갈우는 모용세가 무인들에게 말하지 않고 조용히 진영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연우혁은 놀라워하면서 자세를 바로잡았다.
"내가 왜 왔는지 맞춰봐라!"
"저를 추천하셨으니, 제가 일을 제대로 하는지 걱정이 되신 것 아닙니까?"
"틀렸다. 네가 일을 제대로 할지 걱정이 됐다면 애초에 왜 추천을 했겠느냐? 머저리냐?"
"..."
듣고 보니 맞는 말이긴 했다. 연우혁은 상대가 왜 찾아왔나 고민했다.
모용세가를 도와주려고 온 것도 아니고, 연우혁이 잘 할까 걱정되어서 온 것도 아니면...
"...설마 제가 삯을 제대로 받지 못할까봐 오신 건 아니겠지요?"
연우혁은 천기수사가 희고 긴 수염 너머로 빙그레 웃는 걸 처음 보았다. 괴팍한 얼굴에 주름을 잔뜩 잡으며 웃은 천기수사가 입을 열었다.
"맞다!"
"...감, 감사합니다. 이러실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만..."
"하!"
제갈우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비웃었다.
"소문을 듣지 않았다면 내가 찾아오지도 않았겠지. 들어보니 모용세가의 첫째 공자 놈에게 걸린 누명을 풀어줬다고?"
"예."
"그걸로 뭘 받았지?"
"...어, 저는 이미 은자를 받고 왔습..."
제갈우는 기습적으로 출수했다. 연우혁이 영안으로 보고 막으려고 했지만 제갈우는 순식간에 천변만화하는 초식으로 연우혁이 알면서도 당하게 만들었다.
딱!
"머저리 같은 소리 하지 마라!"
"죄, 죄송합니다."
잘못한 게 없었지만 연우혁은 일단 사과를 했다. 상대가 자신을 불같이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였다면 첫째 공자한테 따로 접근했을 것이다. 누명을 깔끔하게 풀어주면 뭘 해줄 거냐고 말이다."
"..."
"그 다음에는 둘째, 셋째 공자한테 또 접근했을 것이다. 첫째 공자의 누명을 풀어줄 생각인데, 둘의 체면을 망치지 않게 협조시켜주겠다고. 그러면 일거삼득이 된다! 원한도 쌓지 않고 모두의 체면을 존중하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이냐!"
'궁 판관 소개시켜드리고 싶군.'
연우혁은 갑자기 자기 상관을 소개하고 싶어졌다.
제갈우는 쯧쯧쯧 혀를 계속 차더니 말했다.
"이제부터라도 자기 몫을 챙기도록 해라. 네가 받은 은자는 진법을 풀어준 값으로도 부족하니까!"
"예. 명심하겠습니다."
갑자기 밖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승리의 함성이었다.
천기수사는 재빨리 불길함을 감지하고 물었다.
"뭐냐? 무슨 일이냐?"
"그, 실은 제가 말입니다."
"...?"
연우혁은 천기수사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마두 중에 흑륵존자란 놈이 있는데, 그 놈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모용세가 공자들한테 놈의 위치를 말해줬..."
"야, 이 염병할 놈아!"
무림출도 (4)
천기수사는 군사 망신이란 망신은 다 시키는 무림 말학 후배에게 자신도 모르게 고함을 쳤다.
무림에 저렇게 능력이 출중하면서도 멍청하게 구는 놈은 또 없을 것이다.
청괴산장의 흑사청요진을 풀어줬으면 이미 제 값을 다 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일검공자의 누명을 대가 없이 풀어주더니 이제는 흑륵존자란 마두 놈을 그냥 바치고 있었다.
"무림의 군사나 책사로 자처하는 자들이 이걸 들으면 네놈의 살점을 씹어 먹을 거다!"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
씩씩대며 한참을 타박하던 천기수사는 간신히 진정을 되찾고 연우혁을 노려보았다.
"그래서? 모용세가 공자들한테 흑륵존자 놈을 잡게 해줬다고? 잠깐. 흑륵존자라면 보통 교활한 놈이 아닐 텐데."
흑륵존자는 그 무공의 강함만 따지고 보면 천기수사 같은 고수가 기억할 만큼 강하지는 않았지만, 교활한 심성과 끈질긴 조심성, 그리고 사악한 술법으로 악명이 높은 마두였다.
보통 마두들은 급격하게 쌓아올린 고강한 무공을 갖고 있어도 자신의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자멸하기 마련이었지만 흑륵존자 같은 마두는 쉽게 죽지 않았다. 언제든 다시 머리를 내밀고 사파 놈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역할을 했다.
당연히 이런 놈을 잡는 건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모용세가의 공자 놈들은 내공이야 심후해도 아직 젊고 경험 부족한 후기지수들 아닌가. 이런 놈들이 흑륵존자 같은 마두를 잡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흑륵존자가 매수한 자들이 있길래 잡지 않고 내버려뒀습니다. 초조해지면 또 다시 접촉하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상한 대로 흑륵존자가 보낸 부하가 진영에 들어오더군요. 흑륵존자 같은 마두는 말씀하신 대로 조심성이 높고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테니 산장 주변 지형 중 가장 외지고 인적 드문 곳에 대기하다가 확신이 섰을 때만 내려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성격은 다른 마두나 부하한테도 자기 위치를 말하지 않을 테니 위치만 맞춰 급습하면 쉽게 잡지 않겠습니까."
"...천기수사란 별호는 네가 가져라!"
제갈우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를 앞에 앉아있는 무림 후배에게 던졌다.
어디서 이런 머리를 타고 난 놈이 굴러왔단 말인가?
"아닙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천기수사한테는 헛소리로 들리겠지만 연우혁은 반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애초에 자신이 아는 사건으로 상대가 굴러들어오는 건 어느 정도 운의 영역이었으니까.
만약 흑륵존자가 매수한 놈들을 불러서 여럿 죽일 살심을 품지 않고 그냥 대화만 하고 돌려보냈다면 연우혁도 흑륵존자가 꾸미는 사건을 아예 몰랐을 가능성이 컸다.
결국 흑륵존자는 자신의 살심에 발목이 잡힌 셈이었다.
"그런 운이면 천하제일인도 죽이겠구나. 하지만 아직 머리를 쓰는 게 부족하다. 천기수사가 아니라 천치수사 정도지."
"...가르침을 주십시오."
시시껄렁한 말장난은 못 들은 척 하고 연우혁은 공손하게 말했다.
"너도 머리가 달린 놈이니, 네가 보상 없이 알려준 실수 정도는 이미 눈치 채고 있을 것이다!"
"예. 반성하고 있습니다."
방금 그렇게 화를 냈는데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이 일은 사실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다. 무림의 군사로서 삯을 받아내는 것 다음으로 중요한 일은 삯을 받아내면서 원한을 사지 않는 일이지."
'맞는 말이다.'
연우혁은 깊이 공감했다.
가끔 겁 없는 자들이 무림인에게 과분한 대가를 요구하는 일들이 있었지만 보통 그런 일들의 끝은 좋지 않았다.
지금이야 다급해서 어쩔 수 없이 값을 지불한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사람의 마음이 그대로일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자신의 그릇 이상으로 값을 뜯어낸 자는 그만큼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었다.
"내가 맞춰보마! 흑륵존자를 잡을 방법을 떠올렸을 때 너는 모용세가의 하인에게 말했을 것이다. 그 모용세가의 하인은 셋째인 화검공자 모용렴에게 먼저 보고했을 것이고. 모용렴 그 녀석이 무공이나 독심은 반 수 부족해도 인망은 조금 살 줄 아는 놈이니 말이다. 그에 비해 일검공자 모용소는 아랫사람을 돌보는 면모가 부족하지. 네 보고를 들은 모용렴은 무릎을 치며 이렇게 외쳤을 게 분명하다. 아, 하늘이 나를 도와 저 멍청한 포두를 보냈구나! 은자 몇 푼으로 이렇게 지혜를 빌릴 수 있다니!"
"..."
너무 말도 안 되는 음해에 연우혁은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기뻐한 모용렴은 이제 공을 세우려고 궁리를 했겠지. 흑륵존자의 목을 자른 공이라면 세가에서도 크게 인정을 받을 테니까. 하지만 흑륵존자는 만만한 놈이 아니다. 게다가 모용렴은 아랫사람한테 인망은 있어도 세가의 무인들에게까지 크게 신뢰를 받는 공자는 아니고. 그러면 어떨까? 아하, 당연히 모용렴은 다른 형님한테 같이 잡자고 부탁을 할 수밖에 없겠구나! 첫째 모용소와 같이 공을 세웠다가는 그 차이가 영원히 벌어질 테니, 상대는 당연히 둘째 냉검공자 모용현일 것이다."
길게 말한 천기수사는 찻잔에 따른 뜨거운 물을 홀짝였다. 이 포두 녀석은 찻잔에 찻잎도 없이 백탕을 마시고 있었다.
"둘째, 셋째에게 은혜를 베풀어준 건 좋은 일이다. 삯이 아깝지만 그건 어쩔 수 없으니 넘어가자꾸나."
'아까부터 넘어가자고 하셔놓고 수십 번을 말하셨습니다.'
"하지만 첫째 일검공자는 어떻게 생각할까? 저 포두가 자기만 빼놓고 두 공자한테 은혜를 베풀었다고 원한을 품지 않겠느냐? 아무리 네가 모용소의 누명을 풀어줬다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은 받은 건 잊고 못 받은 것만 앙심을 품는 법이다!"
"저, 천기수사 님."
"왜 그러느냐?"
"사실 하인한테 말하면 세 공자 중 자기가 충성하는 사람한테만 말할까봐 그냥 세 공자를 한 자리에 모은 다음에 흑륵존자의 위치를 알려줬습니다."
천기수사는 눈을 부릅떴다. 감탄과 경탄의 부릅뜸이었다.
"너는... 너는...!"
연우혁은 천기수사가 감탄하자 살짝 뿌듯함을 느꼈다.
이건 확실히 칭찬을 받아도 될 만한 세심한 처세술이었던 것이다.
"대가는 머저리처럼 안 챙기는 놈이 처세술은 입신(入神)의 경지에 달했구나!"
"...넘어가신다고 하셨잖습니까."
연우혁은 결국 참지 못하고 말을 내뱉었다. 천기수사는 무시하고 자기 할 말을 했다.
"잘했다. 이건 정말 영리한 짓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럼 지금 저 함성은 세 놈이 같이 잡은 거겠군. 숨통을 끊은 가장 큰 공이야 한 놈이 세웠겠지만, 다른 놈들은 아쉬워하더라도 너한테는 감사만 표할 것이다."
그 때 천막 밖에서 헛기침 소리가 났다. 천기수사는 너무 길게 떠들었다고 중얼거리더니 말했다.
"그래, 미안하다. 들어와라!"
"!"
천기수사의 말에 처음 보는 중년의 무림인이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연우혁은 깜짝 놀랐다.
'절정의 경지다!'
게다가 저번에 상대했던 적면혈뇌 악곤홍보다 더 높으면 높았지 낮지는 않았다. 잘 벼린, 한 자루의 검 같은 무인이었다.
"벽력신권(霹靂神拳) 모용태다. 모용세가의 장로지. 아무리 내가 몰래 들어왔다 하더라도 허락도 없이 다른 세가의 진영에 그냥 들어갈까?"
사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연우혁은 속마음을 숨기고 놀라는 시늉을 했다.
"역시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벽력신권 대협은 제가 뵌 적이 없습니다만, 혹시..."
"네 생각이 맞을 거다! 공자 놈들을 감시하고 있지."
모용태는 거북하다는 듯이 말했다.
"천기수사 님. 감시가 아니라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아하. 도움이 필요할 때를 대비하시는 거군요."
"그렇다."
연우혁이 좋게 말해주자 모용태는 반색했다.
사실 지금 모용세가의 장로가 이 인근에서 대기하는 건 여러 이유가 함께였다.
하나는 공자들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을 때 합류하기 위해서였고...
다른 하나는 공자들을 감시하기 위해서가 맞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감시가 아니라 평가였다. 모용태의 형이자 모용세가의 가주는 세 공자 중 가장 뛰어난 자에게 가주 자리를 물려주고 싶어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면밀한 평가가 필요했다.
벽력신권 모용태가 여기 온 것은 혹시라도 모를 일을 대비한 세가의 무력이자 공자들을 평가하기 위한 심사관이었다.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하지. 진충비도. 소의 누명을 풀어주고 흑륵존자를 잡아낸 그 계책에 감탄했다."
"감탄했으면 제대로 보상이나 해라!"
"...일이 끝나면 제가 소협에게 따로 보상하겠습니다."
천기수사는 그제야 만족한듯 입을 다물었다. 모용태는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그렇게 보상을 원하시면 천금을 드릴 테니 세 공자들을 좀 평가해주십시오."
"!"
연우혁은 천기수사의 높은 명망에 감동했다.
한 줄로 천금을 사다니. 저게 진정한 일자천금(一字千金)의 경지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천기수사는 딱 잘라서 거절했다.
"다른 세가 후계 정하는 일에 발을 들이미는 머저리는 없는 법이다."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저 혼자 보겠습니다."
"자기 혼자 보겠다는 놈의 말을 믿는 머저리는 없는 법이다."
꼬장꼬장한 무림의 늙은 선배를 설득해봤자 답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모용태는 더 이상 부탁하지 않았다. 어차피 크게 기대하지도 않았었다.
"셋의 사이를 걱정해서 배려해준 것도 감탄했다. 혹시 한 가지만 더 부탁해도 되겠나?"
"들어보고 판단하겠습니다!"
"???"
연우혁은 자신이 말하지 않았는데도 자신의 목소리가 나오자 깜짝 놀랐다.
모용태도 그걸 느꼈는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연우혁의 목소리를 흉내 낸 천기수사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왜, 들어보고 판단하면 안 되나?"
"...아닙니다. 별 건 아니다. 이번 산장 토벌이 끝날 때까지 세 공자들을 최대한 싸우지 않게 해줄 수 있겠나? 셋 다 의욕이 넘치는 만큼 세간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검을 휘두를까 두렵군."
연우혁과 모용태는 동시에 천기수사를 쳐다보았다. 천기수사는 짜증스럽게 일갈했다.
"이 정도는 알아서 판단해라."
"아. 예. 그럼 노력해보겠습니다."
대답을 하고 나서 연우혁은 움찔하며 천기수사의 주먹을 쳐다보았다. 다행히 공격은 날아오지 않았다. 이건 받는 게 맞는 모양이었다.
"벽력신권이 약속을 어기는 무인은 아니다. 공을 세우면 그만큼 보상을 할 녀석이지."
"..."
자기 앞에서 자기 평을 뱉는 천기수사의 모습에 모용태는 불편해했다.
"그리고 흑륵존자까지 죽었으면 저기 마두 놈들은 오래 버티지 못할 거다. 일치단결해서 싸우면 더 버틸 수 있겠지만 애초에 그게 가능하면 마두가 아니지! 재물 때문에 모인 놈들이 그럴 수가 있겠느냐? 이제 세가의 공자들이 싸울 일도 없을 테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이고, 공자님들! 검을 거두십시오!
-검을 거둬주십시오! 밖에서 온 무인들도 보고 있습니다!
-보라고 해라! 냉검공자가 내 공적을 도둑질하려고 했다는 걸 말이다.
-하. 제가 할 이야기입니다. 형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시려고 하시는구려!
"..."
"...그럼 열심히 해봐라!"
연우혁은 무림 선배의 조언이라고 해서 꼭 맞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
'생각해보니 꼭 들을 필요는 없긴 하다.'
천막을 나오면서 연우혁은 이 싸움을 꼭 자신이 말려야 하나 싶었다.
설마 벽력신권 모용태가 못 말린다고 약속한 보상을 안 줄 리는 없을 테고, 노력했는데 안 되겠다고 하면 어쩌겠는가?
공자들을 내버려둔 다음 자기들끼리 해결하게 하는 게 상책일지도 몰랐다.
'천기수사 님이 이 계략을 들었어야 했는데.'
자신의 계략에 스스로 감탄하던 연우혁에게 무림인들이 달려왔다.
"진충비도! 진충비도. 빨리 오시오! 공자들이 싸우고 있소!"
"헉! 놀랐습니다! ...그런데 왜 저를?"
"진충비도가 아니면 누가 해결한단 말이오?"
연우혁은 어이가 없었다.
혹시 이 자리에 모인 무림인들은 연우혁이 아니라 모용우혁으로 알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잠깐, 잠깐! 저도 외인입니다. 다툼이 있으면 세가 사람들끼리 해결을 해야지요. 제가 섣불리 작은 명성만을 믿고 끼어들었다가는 비웃음만 살 겁니다. 세가에도 뛰어난 지혜를 가진 문객 분들이 많습니다."
"공자들도 진충비도가 해결하면 불평하지 않고 받아들이겠다고 했소만..."
"....."
무림인들의 말에 연우혁은 그냥 흑륵존자까지는 잡게 해주지 말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천기수사 님의 말에 틀림이 없었구나!'
무림출도 (5)
모용세가의 직계쯤 되면 무공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 자존심이 더 강하기 마련이라 외부인에게 필요 이상으로 부탁을 하지 않았다.
하물며 지금처럼 공자들끼리 서로 시비가 붙은 일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자기들끼리 해결을 보거나, 최소한 자기 가문에 머무르는 문객의 지혜를 빌려 해결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바로 연우혁을 부르다니.
이건 세 공자 모두 다 '진충비도라면 공정하게 해결해줄 것이다'라고 믿지 않았다면 일어나기 힘든 일이었다.
이것도 대단하다면 대단한 거였지만 연우혁 입장에서는 별로 기쁘지 않았다.
'이 자식들이 과연 자기 편을 안 들어줬을 때도 날 똑같이 믿어줄지 모르겠는데...'
무림인들의 겉과 속이 다른 행태는 이미 몇 번 봐서 알고 있었다. 만약 한 공자의 편을 들어주면 바로 '진충비도, 흑륵존자를 잡아내서 믿었는데 허명이었구나!'하고 발광할지도 몰랐다.
"진충비도. 난 그대가 부럽소."
"?"
연우혁이 속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착잡해하는 사이, 옆에 있던 무림인 하나가 말을 걸었다.
"나는 청서 출신의 막광이오. 이번 일에는 모용세가가 무인을 모은다고 해서 명성을 떨칠 겸 참가했소. 하지만 별다른 공적을 세우지는 못했소. 마두 놈들의 숫자는 적고 여기 모인 무림인들은 많았으니까. 그리고 모용세가 무인들의 무공은 내 보잘것없는 무공보다 뛰어났으니까. 그러나 진충비도 그대는 다르오. 지혜 하나로 모용세가 무인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난제들을 단칼에 베어버렸으니, 어느 누가 통쾌해하지 않겠소?"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이야!"
"진충비도! 그대가 아니었다면 여기 무인들 중 몇 명은 저 차가운 땅바닥에 드러누워 있었을 거요!"
"모용세가의 공자들이 다투는 것도 어서 따끔하게 훈계해주시오!"
"..."
무림인들은 진충비도의 별호를 외치며 환호했다.
이들에게 진충비도는 단순히 머리 뛰어난 책사나 군사가 아니었다.
이들에게 진충비도는 모용세가나 오대세가의 무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재주 하나로 명성을 떨치는 젊은 무인이었다.
심지어 이제는 모용세가의 무인들까지 사람을 보내서 진충비도의 도움을 부탁하고 있지 않은가.
"진충비도! 진충비도!"
자신의 별호를 외치며 환호하자 연우혁은 착잡함을 삼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고맙습니다, 동도 여러분! 이 진충비도. 반드시 싸움을 말리고 오겠습니다. 지켜봐주십시오!"
저 멀리 천막 안에서 천기수사 쯧쯧거리며 혀를 차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 * *
진검보에서 나온 장인형과 연림량은 연우혁 옆에 붙었다.
진법을 해제한 것도 모자라 흑륵존자의 목까지 손쉽게 따온 재주를 보자, 둘은 눈앞의 포두가 가진 능력을 마음 속 깊이 흠모하게 되었다.
"무엇이든 물어봐주십시오. 대협."
"흑륵존자를 척살할 때 저희도 함께했으니, 도와드리겠습니다!"
"...고맙소. 어디 한 번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연우혁은 일단 착잡한 마음을 거두고 사건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야 고민도 할 수 있을 테니까.
흑륵존자가 절암봉에 있다는 사실을 들은 세 공자는 각자 휘하의 무인들을 이끌고 절암봉을 포위했다.
뒤늦게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은 흑륵존자는 다급히 반격에 나섰다. 밀교의 환술과 요술, 진법과 강시들이 동원되어서 무인들의 눈을 가리려고 했다.
그러나 흑륵존자는 혼자였고 모용세가의 무인들은 이미 철저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아무리 수작질을 부려도 포위망을 뚫는 건 쉽지 않았다.
강시들이 박살나고 환술과 요술은 흩어졌으며 진법이 불러낸 안개는 약해졌다. 마침내 모용세가의 세 공자는 흑륵존자를 직접 둘러싸고 합격진을 펼쳤다.
-대(大) 모용세가의 핏줄을 이은 무인들이 비겁하게 합공이냐!
-네 혓바닥을 손수 뽑고 싶어 하는 무인이 여럿이라 어쩔 수가 없구나!
"흑륵존자란 마두 놈이 정말 독하긴 독하더군요. 그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도망을 치려고 요술을 부리는데, 주변에 독안개가 자욱해지고... 그러다가 결국 안개가 걷혔는데 놈이 죽어있지 뭡니까. 가슴팍에 제대로 검을 맞고서 말입니다."
여기까지 들은 연우혁은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
세 무인과 시체 하나.
설마...
"혹시 누가 흑륵존자의 숨통을 끊었는지 확실하지 않은 거요?"
"맞습니다! 역시 진충비도 대협다우십니다."
다 듣기도 전에 예상하는 연우혁의 모습에 두 무인은 기뻐하며 손뼉을 쳤다. 이제 곧 해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나 연우혁은 더욱 더 골치가 아파왔다.
이건...
'큰일났군.'
혼란스러운 상황 중에 흑륵존자가 죽었는데, 세 공자 중 누가 가장 커다란 공을 세웠는지 알 수가 없다. 어느 누가 흑륵존자에게 치명상을 입혔겠는가?
일검공자의 일격이라고 보기에는 결이 거칠었고, 냉검공자의 일격이라고 보기에는 흔들림이 많았으며, 화검공자의 일격이라고 보기에는 포악함이 엿보였다. 세가의 무인들도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을 꺼내가며 다투고 있을 만큼 알쏭달쏭한 문제였다.
하지만 연우혁은 답을 알았다.
'흑륵존자 이 놈. 죽을 거면 얌전히 죽을 것이지.'
정답은 흑륵존자 본인의 자진(自盡)이라는 믿기 힘든 답이었다.
포위된 상황에서, 자기가 살아날 방도가 없다는 걸 깨달은 마두의 독심!
평소 모용세가 공자들의 관계를 잘 아는 교활한 마두였기에 가능한 계략이었다. 흑륵존자는 혼란 속에서 세 공자의 검격과 조금씩 닮은 일격을 자기 가슴팍에 찔러 넣은 것이다.
적만 아니었다면 제법 대단한 계략이라고 감탄했을지도 몰랐다. 실제로 연우혁이 아니었다면 이 계략은 통했을 가능성도 높았다. 지금 벌써 공자들끼리 서로 으르렁대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연우혁에게 들킨 이상 그럴 일은 사라진 셈이었다.
문제는 어떻게 말하느냐였다.
'당신들 셋이 흑륵존자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다고 말한다면 아주 좋아하겠지.'
연우혁은 천기수사가 한 조언을 기억하고 있었다. 답을 찾아주는 것도 좋지만 상대에게 원한을 사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과연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 * *
"과연 괜찮겠습니까?"
벽력신권 모용태는 천기수사에게 손수 차를 타주며 물었다. 사람 없는 포두의 천막은 주변도 조용했다. 무림인들이란 무림인들은 온통 공자들이 있는 쪽에 몰려간 탓이었다.
뒤늦게 심복한테 상황을 전해들은 모용태는 과연 진충비도가 이걸 해결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공자들이 생각보다 훨씬 격렬하게 타협을 거절했던 것이다.
"괜찮겠냐고? 글쎄. 우리 세가도 얼간이들이 많은데 다른 세가의 어린놈들까지는 잘 모르겠군."
"...공자들을 말한 게 아닙니다. 아시잖습니까."
천기수사는 묵묵히 차를 홀짝였다.
"그런 질문을 하는 걸 보니 저 포두가 꽤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군."
"저 재주를 보고 어느 누가 놀라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더 놀란 건 천기수사 님 때문입니다. 무림의 후배에게 이렇게 관심을 가지시는 일이 드무시잖습니까."
제갈우는 제갈세가의 장로이자 원로로서 그 명성이 무림에 드높은 고수였지만, 그런 것치고 세가에서 입김이 그리 세지는 않았다. 워낙 괴팍한 성격이 발목을 붙잡은 탓이었다.
장로로서 세가의 젊은 무인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훈련을 시켜줘야 하는데 멍청한 놈들과 놀기 싫다며 훌쩍 떠나 무림을 주유하니, 세가의 젊은 무인들과 사이가 소원한 것도 당연했다.
그런데 그런 괴팍한 무인이 세가의 핏줄도 아닌 외인한테 관심을 가지니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몇몇 떠도는 소문에는 제갈세가의 숨겨진 방계가 아니냐는 조심스러운 소문도 있었다.
"그건 네가 군사가 아니라서 모르는 거다."
"...?"
"군사로서 당연히 갖춰야 할 덕목이 있는 법인데, 그 덕목이 없다면 재주가 있어도 스스로를 다치게 할 뿐이지. 그걸 알려줬을 뿐이다."
"그게 마음에 든다는 뜻 아닙니까?"
"이래서 천박한 무부(武夫)하고는 대화가 안 통한다는 거다. 군사의 일이 뭔지도 모르지."
천기수사는 짜증을 냈다.
이 벽력신권이라는 놈이 무림에서 군사가 차지하는 역할과 정당한 대가를 받아내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 뭘 알겠는가?
"저야 어르신만큼 재주가 있지 않으니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 일은 해결이 잘 될 것 같습니까?"
"어렵겠지."
천기수사는 담담하게 말했다. 고민 없이 말하는 모습에 모용태가 깜짝 놀랄 정도였다.
"어째서 말입니까? 그렇게 재주를 칭찬하셔놓고?"
"이건 재주로 될 일이 아니다."
차를 호로록 들이킨 천기수사가 입을 열었다.
"가끔 무림에서는 상황 자체가 진상을 밝히지 못하게 만들 때가 있다. 지금이 바로 그렇다. 마두 놈들이 쌩쌩하던 때면 모를까 토벌은 반쯤 끝난 상황. 하늘 아래 무서운 것 없는 공자들이 눈치를 보겠느냐. 내 생각이지만 흑륵존자는 아마 자결했을 것이다."
"말도 안 됩니다. 무슨!"
모용태는 부정했다.
마두만큼 자기 목숨을 아끼는 이들도 없었고, 흑륵존자는 마두들 중에서도 가장 끈질기고 치밀한 놈이었다.
그런 놈이 왜 자결을 한단 말인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네가 아직 마두 놈들을 덜 상대한 것이다. 흑륵존자 같은 놈은 자기가 죽을 때가 되면 독충처럼 독을 뿌릴 놈이지.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실제로 공자들이 다투고 있지 않느냐?"
"..."
그제야 뒤늦게 이해한 모용태는 흑륵존자의 독심에 놀라고, 그걸 알아차린 천기수사의 지략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이걸 진충비도가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겁니까?"
"아니. 나도 알아차렸으니 진충비도도 알아차렸겠지."
"그런데 어째서..."
"공자들이 흑륵존자 손에 놀아났다는 걸 인정하겠느냐? 남들 앞에서 이렇게 호언장담을 했는데? 아마 흑륵존자가 수작을 부렸을 거다. 공자들이 자기가 죽였다고 확신하도록 말이다. 진충비도가 사실을 밝혀봤자 공자들은 자존심 때문에 인정하지 않을 거다."
모용태는 인상을 찌푸렸다.
세가를 책임져야 하는 공자들이 영 미덥지 못하고 어리숙했던 것이다.
"성질 부리지 마라. 세가의 젊은 놈들 중에 그 정도 자존심 부리지 않는 놈은 없으니까."
"사태가 커지면 제가 가서 막겠습니다."
"됐다. 내가 갈 생각이었으니. 녀석에게는 좋은 교훈이 되겠지."
천기수사는 상황이 커지면 직접 나서서 연우혁의 말에 힘을 실어줄 생각이었다.
진충비도의 이름은 무시해도 천기수사의 이름까지는 무시할 수 없을 테니까.
모용세가 쪽에서는 자존심이 상해하겠지만 그건 천기수사가 알 바 아니었다.
"천기수사 님께서는... 아닙니다."
모용태는 진충비도가 참 마음에 든 것 같다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천기수사의 괴팍한 성격을 봤을 때 괜히 역정을 낼 수도 있었다.
그런 생각도 모르고 천기수사는 말을 이어나갔다.
"녀석은 재주는 뛰어나지만 아직 미숙한 부분들이 있다. 세가 놈들에게 잘못 걸리면 은자 한 푼 받지 못할 수 있지."
"그러니까 그건 제가 보답하겠다고 말씀드렸..."
"돌아왔습니다."
연우혁은 천막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둘은 놀라워하며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일은 어떻게 되었나?"
"휴. 잘 해결했습니다."
"...어떻게?! 그럼 흑륵존자를 죽인 건 누구의 공으로 된 거지?!"
"세 공자께서 같이 나누기로 하셨습니다만..."
모용태는 물론이고 천기수사까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어떻게 그 놈들을 설득했지?"
"음. 조금 부끄러운 일입니다만..."
"흑륵존자가 자결한 게 아니었느냐?"
"알고 계셨습니까? 맞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연우혁은 천기수사의 말에 감탄했다.
연우혁이야 반칙에 가까운 능력으로 전말을 안다지만 천기수사는 혼자만의 추론으로 알아낸 것 아닌가. 실로 대단한 머리였다.
"그건 됐고, 공자들을 어떻게 설득한 거냐? 흑륵존자가 자결했다고 하면 절대 인정하지 않을 놈들인데?"
"아...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연우혁은 그렇게 말하고 슬쩍 모용태를 쳐다보았다. 그 뜻을 알아차린 모용태는 단호하게 말했다.
"어떤 이야기를 듣더라도 절대로 책망하지 않겠네."
"감사합니다. 벽력신권 대협."
천기수사는 빨리 말하라는 듯이 재촉했다. 연우혁은 찻물로 목을 좀 축였다. 급하게 돌아다닌 탓에 목이 말랐다.
"아니. 이 찻잎...?!"
"야, 이 염병할..."
"죄송합니다. 너무 비싼 찻잎이라 좀 놀랐습니다. 그, 천기수사 님. 사실 흑륵존자가 자결했다는 건 공자들한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각 공자께 찾아가서 실은 다른 공자가 죽였다고 설득한 다음, 못 본 척 덮어줄 테니까 세 공자가 같이 죽인 걸로 하자고 하니까 다들 흔쾌히 받아들이시더군요."
"..."
천기수사는 경악해하는 모용태를 보며 조용히 충고했다.
"모용세가 가주가 누가 되든 간에, 저 마두 녀석은 세가에 오지 못하게 하게."
무림출도 (6)
"말씀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닙니까?"
연우혁은 살짝 억울한 마음에 항변했다. 천기수사 때문에 모용태까지 연우혁을 경악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만큼 더더욱 억울했다.
"저는 천기수사 님에게 배운 대로 행동했을 뿐입니다!"
"나는 받은 만큼만 지혜를 치러 주라고 말했지, 세가의 공자들을 갖고 놀라고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천기수사는 떨떠름한 시선으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아는 문일지십(聞一知十)의 천재가 있다지만 그 천재도 모용세가 공자들을 다 갖고 놀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어디 한 번 자세히 말해봐라! 공자들이 얼마나 멍청한지 들어보자꾸나. 여기 벽력신권도 아주 궁금해 할 거다."
***
연우혁은 일검공자 모용소를 먼저 찾아갔다. 공자들 중 조금이나마 지위가 높은 편인 만큼 가장 먼저 설득하는 게 편했다.
-공자님.
-어서 오시오. 진충비도. 그대의 활약 덕분에 저 마두들을 거의 다 몰아넣을 수 있었소. 특히 흑륵존자는 그대가 아니었다면 잡기 힘들었을 것이오.
-감사합니다. 저는 언제나 일검공자 대협께서 모용세가의 공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해왔었습니다.
-...그렇소?
-예. 사실 흑륵존자의 목도 일검공자께서 베어야 옳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다른 두 공자께서 자리에 멋대로 참석하시는 바람에...
-그런 거였다니!
모용소는 분한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다른 공자들이 와서 듣는 게 이상하다 싶었는데, 이 눈치 빠른 아우들이 끼어든 것이었다.
-부끄럽기 그지없군. 진충비도. 이렇게 말하기 부끄럽지만, 내 아우들은 하나같이 지독하고 비열한 자들이오. 언제 나한테 누명을 씌워도 이상하지 않은 놈들이지.
-예. 밀서가 나왔을 때 혈육을 믿지 않고 누명을 씌우는 모습에 저도 적잖이 실망했습니다.
-그렇지! 어떻게 된 놈들이 그런 상황에서 누명부터 씌운단 말이오?
-공자님.
연우혁은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적당히 신뢰를 쌓았으니 이제 시작할 때였다.
-실은 흑륵존자의 숨통을 끊은 건 냉검공자 모용현입니다.
-...말도 안 돼! 분명 내가 죽였소. 손끝에 느껴졌단 말이오!
모용소는 진심으로 부정했다. 그 자리에서 싸운 사람으로서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 또한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흑륵존자는 교활하고 끈질긴 마두입니다. 이런 마두는 합격진을 상대할 때 가장 위협적인 적을 우선시합니다. 바로 공자님이시지요.
-...
-다들 흑륵존자의 몸뚱아리는 샅샅이 뒤졌지만 저는 놈의 선장(禪杖)을 뒤졌습니다. 이 커다란 지팡이 끝에 금이 가있더군요.
모용소는 자신도 모르게 연우혁의 말에 집중했다. 확실히 이 진충비도는 달라도 뭔가 달랐다. 사람이 아니라 병장기에 주목하다니.
-이건 공자님의 일격을 막아낸 탓에 생긴 금입니다. 흑륵존자는 세 공자님이 달려드는 순간, 일단 공자님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선장을 뻗은 겁니다. 그 탓에 공자님의 공격은 아주 조금 늦었고, 냉검공자가 틈을 타 비열하게 먼저 심장에 검을 꽂은 겁니다.
-빌어먹을!
모용소는 분통을 터뜨렸다.
자신의 무공이 뛰어난 탓에 공을 늦게 차지하게 되다니.
-하지만 공자님. 저는 공자님이 흑륵존자를 죽였다고 생각합니다.
-...?
-생각해보십시오. 완전히 적을 제압한 무인과, 그 제압된 적을 끌고 가서 숨통을 끊은 사람. 어느 누가 그 적을 쓰러뜨린 사람이겠습니까?
-전자지. 그럼 진충비도. 혹시 내 편을...
-예! 말씀드렸듯이 저는 언제나 일검공자 대협께서 모용세가의 공자들 중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고맙소! 진충비도. 반드시 보답하겠소.
-공자님.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공은 아우들과 나누셔야 합니다.
-어째서 말이오? 진충비도 그대가 말한다면 사람들은...
-사람들은 납득하겠지요! 하지만 두 아우 분들은 납득하지 않을 겁니다. 다른 군사를 불러 찾아보겠다고 하면 어쩌시렵니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입니다.
-으음... 같이 나눈다고 해도 놈들이 받아들이겠소?
-다른 아우 분들께는 공자님이 흑륵존자를 죽였지만, 다툼이 오래가는 걸 원하지 않아 양보하겠다고 전하겠습니다. 그러면 그들도 반성하는 게 있을 겁니다.
-과연 그럴지 모르겠소.
-반성하진 않더라도 받아는 들이겠지요. 아예 못 얻는 것보다는 일부라도 공을 나눠가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공자님께서 먼저 도량을 보여주셨다는 겁니다. 세가의 어르신들께서는 이 점을 귀하게 여기실 테지요.
-...이해했소. 진충비도! 진충비도는 가히 나의 장자방이오. 만약 내가 가주가 된다면 진충비도를 귀하게 쓰겠소!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저는 대협 같은 분께서 모용세가의 가주가 되는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정파무림의 기치를 어느 분께서 지키시겠습니까!
-진충비도!
-대협!
그 다음 연우혁은 냉검공자 모용현을 찾아갔다.
-공자님. 처음 공자님께서 저를 경계하고 하찮게 여겼을 때, 저는 공자님이야말로 모용세가의 공자들 중 가장 뛰어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마두 맞군."
"아닙니다."
"어느 장자방이 주인을 돌아가면서 계책을 바치느냐?"
천기수사는 기가 막혔다. 성질 더럽고 깐깐한 세 공자들한테서 '그대가 내 장자방이오!' 같은 소리를 듣다니.
저런 놈이 혈교 마두가 아니라서 천만다행이었다. 혈교 마두였다면 모용세가는 반 년 쯤 지나서 결딴이 났을 것이다.
"저는 이 일을 하면서 일말의 이득도 보지 못했잖습니까."
"그게 아쉬운 점이지."
천기수사는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처세술은 정말 훌륭했지만 그 과정에서 아무것도 받지 못하다니.
하지만 이것까지 뭐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원한을 사지 않고 위기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고, 또 저렇게 구워삶아 놓으면 언제든지 대가를 받을 수 있었다.
모용태도 진상을 다 듣자 생각이 달라졌는지 연우혁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맙다. 진충비도. 셋이 싸움을 멈춘 것은 오로지 네 공이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반드시 보답하겠다. 그리고... 음..."
모용태는 머뭇거렸다. 벽력신권이 저러는 건 보기 드문 모습이었기에 천기수사는 궁금해하며 재촉했다.
"뭔 이야기를 하려는 거냐? 빨리 말해봐라."
"나중에 모용세가에 방문할 일이 생기면 내 처소로 찾아와라. 공자들은 방문하지 말고."
"..."
"..."
연우혁과 천기수사가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자 모용태는 다급하게 변명했다.
"공자들이 아직 미숙하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지 그러나. 공자들이 너무 멍청해서 속아 넘어갈까봐 걱정된다고."
"그게 아닙니다."
모용태는 저 포두의 성정이 악하거나 교활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공자들이 자기들이 해결해야 할 일들을 저 포두에게 맡길까봐 걱정되었다. 공자들도 자존심이 있다지만, 저 포두의 능력은 그런 자존심도 굽히고 부를 만한 가치가 있었다.
"아니긴 무슨. 이해는 간다. 그런데 젊은 놈들이 다 저렇지 않더냐? 여기 마두 녀석이 교묘한 거지 공자들이 특별히 멍청한 건 아니다."
"그렇습니까?"
모용태의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
공자들이 너무 한심해서 속으로 앓고 있었는데 천기수사가 저렇게 말하니 살짝 마음이 가벼워진 것이다.
"흠. 잠시만. 아니다. 조금 멍청한 건 맞다. 아직 마두 놈들이 남아있는데 싸우는 건 멍청한 게 맞지."
"...하여간 앞으로 잘 부탁하지."
모용태는 연우혁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표했다. 세가에 이렇게 뛰어난 젊은 무인이 없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
마두들이 모인 산장의 분위기는 최악에 가까웠다. 흑륵존자가 죽은 뒤부터는 안에서 계책을 세울 놈이 없어진 만큼 더더욱 그랬다.
청수귀마는 어제 도망치려다가 잡힌 마두 세 놈을 손수 효수했다. 하인 놈들도 절반 넘게 도망갔는지 별채 안이 온통 먼지투성이었다.
"모여라, 모여! 이 잡놈들아!"
산장의 마두들은 불안과 두려움을 숨기며 청수귀마 앞에 나타났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상황인 만큼 청수귀마가 어떤 지랄을 할 지 예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오?"
"네놈들에게 기쁜 소식이 있다. 내일 아침! 우린 이 산장을 빠져나갈 거다."
"!"
마두들은 기뻐하기보다는 당황했다.
예전이면 모를까 진법도 파괴되고 산장 앞까지 포위망이 바짝 완성된 지금은 나가고 싶어도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쥐새끼 하나 도망칠 틈이 없지 않은가.
"모용세가 놈들이 앞까지 있는데 어떻게?"
"힘으로 뚫는다. 다 같이 흩어져서."
"...?"
마두들은 웅성거렸다. 예상 밖의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누구나 도망이나 탈출은 생각하고 있었다지만 이렇게 무식한 방법은 생각하지 못했다.
시퍼렇게 날을 세운 포위망에 그냥 무작정 뛰어든다고?
"위험하지 않겠소?"
"그 반대지. 네놈들에게 기쁜 소식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다 같이 흩어져서 도망치면 저 아래 놈들이 누구를 쫓아오겠느냐?"
"!"
그제야 뒤늦게 청수귀마의 말뜻을 이해한 마두들이 놀라워했다.
모용세가의 무인들이 가장 얻고 싶어하는 목은 이번 일을 일으킨 청수귀마의 목이었지, 그 밑의 하찮은 부스러기들이 아니었다.
굴욕적이긴 했지만 마두들에게는 차라리 다행인 일이었다. 청수귀마만 죽으면 그들은 목숨을 건질 확률이 높아졌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할 경우 청수귀마는 더더욱 위험해졌다. 모용세가의 주력들이 모두 다 죽이려고 달려올 것 아닌가.
마두 중 하나가 신중하게 물었다.
"청수귀마 당신이 너무 위험하지 않겠소?"
"오, 말 잘 꺼냈다. 네놈이 나하고 같이 가면 되겠구나."
"아... 아니. 아니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라, 잡놈들아!"
청수귀마는 탁자를 손으로 박살내며 웃었다. 그리고는 부하에게 남은 술항아리와 소금에 절인 고기를 갖고 오라고 명령했다.
"사내가 한 번 큰 뜻을 품었으면 사소한 것에는 굴하지 않는 법이다. 흑륵존자 그 놈이 어처구니없게 죽었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여길 빠져나가서 모용세가의 낯짝에 먹칠을 해주겠다!"
대마두의 외침에 가슴이 뜨거워진 마두들이 함성을 질렀다. 그들은 술을 벌컥벌컥 들이키더니 외쳤다.
"청수귀마, 어느 누가 당신을 상대하겠소? 모용세가의 새파란 애송이들은 당신의 장법만 보고도 오줌을 싸며 도망칠 거요!"
"말 잘했다! 더 마셔라, 더!"
산장의 마두들은 남은 술과 고기를 아낌없이 마시고 먹어치웠다. 다들 거나하게 취해서 고개도 들지 못하자 청수귀마는 차갑게 눈빛을 빛내며 부하에게 말했다.
"준비해라!"
화르륵!
청수귀마의 부하들은 망설이지 않고 별채에 불을 놓았다. 미리 기름을 부어놓은 탓에 불은 순식간에 타올랐다.
"빠져나오는 놈을 확인할까요?"
"필요없다! 몽혼약 때문에 일어나지도 못할 거다."
"역시 청수귀마 님이십니다."
부하들은 실실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청수귀마의 계략은 악독한 마두들도 속아 넘어갈 만큼 대단했다.
산장에 불을 질러 태워 죽인 뒤, 자신은 변장해 하인인 척 내려가 '마두들이 자기들끼리 서로 죽였다'라고 한다니.
지금 붙잡혀 있던 하인들은 별채의 불을 보고 기회다 싶어서 사방으로 도망치고 있을 것이다.
더더욱 청수귀마와 부하들이 사이에 끼어들기 좋았다.
"그래!"
청수귀마는 순식간에 출수했다. 허공에 장영이 펼쳐지더니 음산한 내력이 부하들의 가슴뼈를 부수고 내장을 녹였다.
"컥!"
"개자식...!"
"날 원망하지 마라! 무림이란 게 원래 이런 것이니."
부하들을 타오르는 별채에 던져 넣은 청수귀마는 역용술을 펼치고 귀식단(龜息丹)을 입에 던져 넣었다.
원래는 뱃속에 들어가면 진기의 흐름을 막아버리는 일종의 산공약이었지만, 청수귀마는 의술에 뛰어난 다른 마두에게 훔쳐낸 비방으로 단약을 아주 천천히 녹게 만들었다.
모용세가의 놈들을 속여 넘긴 뒤에는 단을 뱉어서 진기의 흐름을 원활하게 만들면 그만이었다.
역용술은 물론이고 귀식단까지 사용하자 청수귀마는 누가 봐도 겁먹은 하인 같았다. 청수귀마는 어둠을 따라 달렸다. 저 멀리 하인들이 도망치는 게 보이자 청수귀마는 빙그레 웃었다.
"멈춰라!"
"살,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저희는 마두가 아닙니다! 붙잡혀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청수귀마가 외치지 않아도 붙잡혔던 하인들이 알아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무림인들이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마, 마두들끼리 술을 마시다가 싸운 것 같습니다. 시끄럽게 떠들다가 갑자기 불이 났는데..."
"제대로 말해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저희는 멋대로 움직이면 크게 벌을 받아서... 밖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거 빨리 올라가야 하는 거 아닌가? 모용세가에서 그랬잖나. 적들이 빈틈을 보이면 넘어가지 말라고."
각자 건물에 갇혀 있던 하인들은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청수귀마는 속으로 웃었다.
몇 가지 질문을 하고 풀어줄 줄 알았는데 분위기를 보니 그것도 없을 것 같았다.
"흠. 그래도 혹시 모르니 진충비도께 물어보세."
"아하. 그러면 되겠군."
"???"
무림출도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