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 포쾌는 곧 죽을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었다. 이제 곧 녹림 놈들의 산채가 가까워졌다.
"좀 진정하게. 안 죽으니까."
그래도 무공을 익힌 사 포쾌는 조금 나았다. 물론 오 포쾌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아무리 포두님의 무공이 뛰어나도 여기 있는 산적 놈들의 화살을 다 막아줄 수는 없지 않나!"
"그래서 면갑까지 갖춰 입은 건가? 그럴 거면 차라리 오지 말지..."
"어떻게 혼자 빠지나? 그걸 말이라고 하나?"
"조용히 하게. 저기 녹림 놈들이 있으니."
적조가 앞을 가리키며 말하자 포쾌들은 모두 기겁했다.
아직 산채가 보이지도 않았는데 녹림 놈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게 보였다.
"저, 저 놈들은 왜 산채 밖에서 저러고 있는 거지?"
"요즘 녹림 놈들끼리 싸운다던데 그것 때문에 저러고 있는 것 아닌가?"
금세라도 같은 녹림의 산채를 공격할 것 같은 흉흉한 기세에 포쾌들은 주눅들었다.
저들이 포쾌들이라고 내버려둘 것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포두님. 다시 생각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저들이..."
"어서 오시오. 진충비도."
아래 모여 있던 녹림도들은 일제히 길을 비켰다. 연우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앞으로 걸어갔다.
"...?!!"
"?!?!?"
그 모습에 포쾌들은 귀신을 본 것마냥 놀랐다.
"포, 포두님. 녹림 놈들이 대체 왜 저러는 겁니까?"
"관의 일로 왔기 때문이지. 원래 관과 무림은 서로 관여하지 않는 법이니."
"..."
"..."
연우혁의 말에 포쾌들은 어이가 없었다.
산길을 가다가 녹림 놈들 만났을 때 포쾌 요패 휘두른다고 겁먹을 놈들이 어디 있겠는가.
킬킬 웃으며 요패를 뺏으면 뺏을 놈들이었다.
관무불가침도 어느 정도 수준이 되어야 서로 존중해주는 거지 포두가 포쾌 한 무리 끌고 왔다고 '저런! 공무 때문에 오셨습니까!'하고 비켜주는 건 정말 말도 안...
그러나 다시 물어보기도 전에 연우혁은 천막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오 포쾌가 그걸 보고 중얼거렸다.
"알았다! 포두께서 놈들에게 섭혼술을 쓰신 거구나."
"..."
***
"반기를 든 장로들 중 남은 놈들은 모두 여기 철랑채에 모였네. 철랑도(鐵狼刀) 곽탁. 대대대겸(大憝大鎌) 표공. 오독귀도 여기 있고."
한기의 말에 연우혁은 물었다.
"총채주께서는 왜 저 산채를 안 치십니까?"
들었던 대로의 고수라면 그냥 혼자서 밀고 들어가면 끝이 날 것이다.
게다가 저들도 원래는 녹림도 아닌가. 총채주가 직접 나타나서 덤벼들면 아무리 용맹한 놈들도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질 터.
"소문과 달리 총채주께서 직접 싸움에 나서신 적은 없네."
"!"
연우혁은 놀랐다.
녹림대왕이 돌아와서 산채를 몇 개 박살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직접 참가하지 않았다니.
그렇다면 그냥 등장만으로도 녹림 내의 전세를 완전히 바꿔버린 것이다.
'장로들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었겠군.'
죽은 자가 살아난 것도 놀라운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 상황을 끝내버리다니.
"총채주께서는 우리끼리 알아서 마무리를 짓길 원하시네. 도움을 부탁드릴 순 없을 것 같군. 그래도 걱정할 것 없네. 내일 끝장을 볼 생각이니까."
한기는 내일 녹림의 정예를 이끌고 철랑채를 몰아칠 생각이었다.
장로, 철랑도 곽탁 또한 절정의 고수였지만 한기는 충분히 곽탁을 이길 자신이 있었다. 대대대겸 표공이나 오독귀 정도는 휘하의 다른 대주들이 제압할 것이다.
"여기 산채 이름이 철랑채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지."
"산채 위로 삐죽 솟은 저 두 개는 망루 맞습니까?"
"맞네. 곽탁은 교활한 자라, 철랑채는 다른 산채보다 방비가 좀 두텁네. 저 망루 또한 곽탁이 직접 세운 걸세. 산 아래까지 쉽게 볼 수 있도록."
"활과 화살 하나만 주십시오. 곽탁의 목을 가져다드리겠습니다."
"...?!"
녹림 총채주 실종사건 (7)
"설마 여기서 맞추겠단 건가?"
"그럴 리 없잖습니까."
연우혁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한기를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한기도 뒤늦게 느꼈는지 겸연쩍어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활과 화살 하나만으로 곽탁의 목을 가져오겠단 건가?"
"간단한 반간계입니다."
연우혁은 아무 내용도 없는 빈 편지 위에 대대대겸 표공의 이름을 적은 뒤 화살에 단단히 묶었다.
"표 장로가 서신을 받으면 곽 장로도 확인해보고 싶어하지 않겠습니까. 비어있는 내용을 보면 곽 장로는 수상하게 여길 겁니다."
"으음."
한기는 감탄하는 대신 아리송해하는 표정으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반간계는 분명 성공하면 좋은 계책이었지만, 원래 그렇게 쉽게 성공할 수 있는 계책이 아니었다. 적들도 분열하면 죽음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꾸준히 헛소문을 퍼뜨리고, 꾸준히 밀사를 보내고, 온갖 꼬드김을 다했는데도 분열이 일어나지 않아 실패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저런 서신 하나로 반간계를 성공시키려 하다니.
한기가 보기에는 영 힘이 부족해보였다.
"이것 하나로 끝인가?"
"예."
"이것 하나로는 효과가 그리 크지 않을 것 같은데..."
"내일 끝장을 볼 생각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랬지."
"그렇다면 내일이 되기 전에 결과를 보여드리겠습니다."
"...!"
자신만만한 연우혁의 태도에 한기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이제까지 봤을 때 저 젊은 무인이 아무것도 없이 허세를 부리는 무인은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확실한 게 없다면 말을 삼가는 성격이었다.
그럼 정말 자신이 있다는 뜻이 되는데...
'모르겠다, 모르겠어!'
한기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무림에서 남들이 우러러보는 절정의 경지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요즘은 막막함만 느낄 뿐이었다.
사람 같지 않은 총채주도 불가해한 존재였지만, 이 포두도 비슷하게 불가해했다.
살면서 한 번도 지모(智謀)로 부족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는데 포두 앞에서는 그냥 무식한 일개 채주가 된 기분이었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보인단 말인가?'
'저렇게 생긴 곳이라면 확실하다.'
한기가 고민하는 것도 당연했다. 연우혁이 보고 있는 건 한기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부분이었으니까.
산채 위로 삐죽 솟은 두 개의 망루, 갇혀 있는 산적들, 빈 편지와 갑자기 살해된 산적 우두머리...
연우혁에게는 철랑채에서 벌어질 사건이 보였다.
평소와 달리 벌어진 사건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사건을 일으키는 쪽이 되었지만 연우혁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이제까지 해왔던 걸 보면, 분명히 사건도 일으킬 수 있다. 빈 편지가 산채로 날아들면 사건은 일어난다!'
만약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괜찮았다. 연우혁은 녹림의 산적들 정도는 충분히 언변으로 구워삶을 자신이 있었다.
각오를 다진 연우혁은 문득 자신이 조금 마두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다. 난 마두를 잡으려고 이러는 거니까.'
***
날이 밝자 한기는 산채를 공격하기 전 마지막 사절을 보냈다.
이번 사절은 조금 특별했다. 놀랍게도 한기 본인이 사절에 참가한 것이다.
"부채주 님! 놈들이 어떤 짓을 할지 모릅니다."
"나 하나 정도는 충분히 빠져나올 자신이 있다."
"하오나..."
"설마 내 무공을 의심하는 거냐?"
"아닙니다. 죽여주십시오!"
한기가 사절에 참가한 이유에는 자신감도 있긴 했다.
현재 철랑채에 갇힌 녹림도들은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잘 알고 있을 터.
한기를 멋대로 공격해봤자 처참한 최후만 맞이하리란 걸 잘 알았다. 장로들이 섣불리 급습해봤자 휘하의 부하들이 놀라서 먼저 도망칠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 데리고 가는 녹림의 정예들까지.
상대가 급습하더라도 충분히 빠져나오고 남았다. 손익을 계산하면 한기는 차라리 상대가 급습해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보다 큰 진짜 이유는, 진충비도의 호언장담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정말로 곽탁이 죽었을까?
한기는 아직도 반신반의 중이었다. 머리는 곽탁이 그렇게 쉽게 죽을 리 없다고 외치지만, 본능은 진충비도가 믿는 구석 없이 호언장담하진 않았을 거라고 외치고 있었다.
같이 사절에 참가한 진충비도를 보니 본인은 태연했다. 표정에 별다른 변화 없이 무심하게 산채를 쳐다보는 걸 보니, 오히려 더 신뢰가 갔다.
'...정말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끼이익!
철랑채의 문이 올라갔다. 산적이 만들었다고는 믿기 힘들 만큼 잘 만들어진 산채였다. 도르래로 올라가는 문과 아래에 파여진 해자까지.
사절들이 들어오자 안에 모여있던 장로 휘하 녹림 산적들의 눈빛이 복잡하게 번쩍였다.
불안함과 기대감, 적대심과 후회가 섞여 있는 눈빛이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표 장로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놈! 감히 녹림의 부채주가 방문했는데 일개 채주가 이렇게 방자하다니! 이 자리에서 죽고 싶은 것이냐!"
녹왕대의 대원들이 살기를 피우며 산적을 노려보았다. 한기는 잘했다고 전음을 보냈다.
한기가 방문했으면 당연히 이 철랑채의 채주 노릇을 하는 철랑도 곽탁이 마중을 나와야 하는 법.
그러나 한기는 분노 대신 기대를 느꼈다. 곽탁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니.
"오... 오... 오해가 있으십니다. 곽 장로께서는 이 산채의 채주가 아니십니다. 그리고 표 장로와 곽 장로 두 분의 배분은 같지 않습니까. 표 장로께서 나오신 건 절대 방자해서가 아닙니다."
산채의 녹림도는 얼굴이 납빛으로 질렸지만 어떻게든 해명했다.
녹왕대 대원들이 윽박지르려고 하자 한기가 손짓으로 말렸다.
"됐다. 그렇다니 믿어줘야지. 곽 장로가 나를 보기 두려워하나보군."
그 말에 사절들이 기세 좋게 웃음을 터뜨렸다. 산채의 산적들이 대꾸나 욕설을 날리는 대신 노려보는 것만 봐도 형세의 곤궁함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희끗희끗한 머리와 수염을 가진 노인이 뒤에 부하들을 세워놓은 채 눈을 감고 사절을 기다리는 게 보였다. 녹림의 장로이자 대대대겸(大憝大鎌)이란 별호를 갖고 있는 표공이었다.
겸(鎌)이란 글자에서 알 수 있듯이 표공은 뒤에 커다란 낫 형태의 무기를 비스듬하게 걸쳐두고 있었다. 들어오는 사절들에게 무언의 압박을 보내는 셈이었다.
언제든지 출수할 수 있다!
그러나 사절들 중 어느 누구도 저런 협박에 넘어가지 않았다. 저런 협박에 넘어간다면 녹림도 자격이 없었다. 하물며 저건 상처 입어서 곧 죽기 직전의 호랑이 아닌가.
"반갑소. 장로."
"많이 무례해졌군. 녹호군. 네가 녹림의 부채주가 되었을 때 널 지지해준 게 누구더냐?"
"총채주가 지지해줬던 것 같소. 그 외에는 기억에 없군."
자신보다 배분이 낮은 부채주의 무례에, 표 장로의 눈빛에서 불꽃이 튀었다.
"흥, 왜 녹림이 이렇게 결딴났는지 알 거 같군그래! 저런 놈이 부채주 자리에 앉았으니!"
사절로 온 무인들의 살기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한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역시 녹호군 대협이시다!'
'이 분이 아니라면 녹림은 예전에 반으로 쪼개졌을 터.'
대원들이 감탄해하는 사이 한기는 다른 생각에 깊게 몰두한 상태였다.
'곽탁 놈이 정말 죽었나? 하지만 놈이라면 일부러 날 도발하기 위해 만나지 않으려고 한 걸 수도 있다. 그렇지만 놈이 정말 죽었다면...'
"이봐, 이봐!"
"!"
표 장로의 말에 한기는 고개를 들었다. 표 장로는 불만스럽게 수염을 휘어 감으며 한기에게 말했다.
"사절로 온 이상 협상을 해야하지 않나. 응? 원하는 게 있으니 이렇게 사절로 온 것 아닌가."
사실 곽탁이 죽었는지 확인하러 온 것에 가까웠지만 한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표 장로의 얼굴에 교활한 빛이 번뜩였다.
"밑에 모여 있는 놈들을 몰아치지 않고 사절을 보낸 걸 보니 여기 철랑채가 두렵긴 한가보군?"
"하!"
사절의 무인이 비웃었자 장로의 부하들이 분노했다.
그러나 표 장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직 어린 놈이니 그것만 보이겠지. 하지만 내 말을 들으면 생각이 달라질 거다."
'곽탁이 죽었을까?'
"총채주께서 왜 잠적했는지는 나도 모르지만, 돌아오고 나니 녹림의 꼴이 말이 아니었던 거지."
'아니다. 살았을까?'
"네놈들이야 우리가 때려죽여야 할 배신자들로 보이겠지만, 총채주께서는 우리도 녹림의 일원으로 보이실 거다."
'죽었을지도 모르겠군.'
"게다가 녹호군 저 놈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도 어느 정도 있지 않겠나? 홀홀홀. 총채주께서 아마 더 이상 피를 보지 말고 최대한 온건하게 끝내라고 하신 거겠지!"
'살았을지도...'
표 장로는 자기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연우혁은 뭔 개소리를 잘도 한다 싶었다.
"대답해라, 녹호군! 왜 아무 말도 없나! 정곡을 찔린 거냐!"
"철랑도 그 놈은 어딨소?"
한기는 무심코 묻고 후회했다. 너무 급히 질문을 던진 것 같았다.
"곽 장로? 그 놈 성격을 너도 알 텐데. 귀찮은 일은 나한테 맡겨두고 자기는 혼자 안에 있다. 네놈 보면 칼부터 휘두를 테니 만나기 싫다는 거지."
표 장로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철랑도 곽탁이 귀찮고 체면 상하는 일들은 모두 자신한테 맡긴다는 불평이었다.
그 불평에 산채의 녹림도들은 쓴웃음을 지었다. 둘의 사이가 막역하기에 저렇게 남들 보는 앞에서 불평할 수 있는 것이었다.
만약 사소한 불평에도 오해할 수 있는 사이라면 어떻게 저런 행동을 할 수 있겠는가?
'아. 정말 어렵다!'
한기가 시름에 잠긴 표정을 짓자 사절로 온 무인들은 걱정이 됐다. 대체 부채주가 왜 저러는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보다 못한 연우혁이 속삭였다.
"한 대협. 지금 혹시 곽탁이 죽었나 안 죽었나 궁금해서 이러시는 겁니까?"
"어떻게 알았나?"
"그것과 별개로 사절로 오신 이유가 있을 거 아닙니까. 그것부터 해야지요."
"사절로 온 이유는 곽탁이 죽었나 안 죽었나 확인하러 온 걸세. 애초에 그렇지 않으면 오늘 새벽에 쓸어버렸을 놈들을 무엇하러 만나겠나."
"..."
연우혁은 어이가 없었다.
설마 곽탁이 진짜 죽었나 안 죽었나를 확인하려고 사절을 보낸 거였다니!
분명 어떤 목적이 있어서 협상을 하려고 온 줄 알았는데...
"그건 그냥 쓸어버리신 다음에 확인하셔도 됐잖습니까."
"혼란스러운 상황이 아닌, 내 눈으로 확실하게 확인하고 싶었네."
'이 사람, 얼마나 궁금해한 거야?'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일단 같이 온 사절단의 수장이었다. 연우혁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럼 제가 그냥 확인시켜드리면 됩니까? 그 다음에는 아래에서 지원 오는 게 맞겠지요?"
"방법이 있나?"
"제가 잘 하는 게 뭐겠습니까. 사람 죽인 놈 찾는 겁니다."
연우혁은 벌떡 일어나더니 표 장로에게 소리쳤다.
"네 이놈! 그래도 철랑도 곽 대협이 녹림의 장로였는데 멋대로 습격해서 죽이다니. 그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
죽음보다 무거운 적막이 방 안을 맴돌았다. 사절로 온 무인들도, 표 장로의 부하들도 어안이 벙벙해져서 눈만 깜박거렸다.
그러나 표 장로는 기절할 듯이 당황했다. 평소보다 몇 배는 당황해서 머뭇거리다가 간신히 말을 씹듯이 뱉었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냐! 말을 하면 다인 줄 아느냐?"
연우혁은 일어나서 문을 벌컥 열더니 밖에도 들리게 크게 외쳤다.
"곽 장로가 저 망루 아래 묻혀 있다! 망루 아래를 보면 새 흙으로 덮여져 있을 것이다. 시체에 묻은 독기 때문에 변색된 새 흙일 터! 그 흙을 파내면 곽 장로의 시체가 있을 것이다. 표 장로가 곽 장로를 죽였다! 어젯밤 곽 장로와 말다툼한..."
"이 개새끼가!"
산채의 부하들 앞에서 은밀한 내막이 낱낱이 까발려지자 표 장로는 장로로서의 체면도 던져버리고 대겸을 꼬나쥔 채 휘둘렀다.
연우혁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쌍사보법을 펼쳐 거리를 벌렸다. 표 장로는 독기가 올라 살초를 던져댔지만, 피하는 것에만 전념하는 연우혁을 단기간에 죽이는 건 표 장로의 경지로는 무리였다.
아래에서 듣고 있던 산채의 산적들은 크게 귀담아듣지 않고 망루 아래를 확인해봤다. 놀랍게도 새로 흙을 덮은 흔적이 있고 독기가 있었다.
산적들은 대경실색해서 흙을 파헤쳤다. 그 아래에는 낯익은 무인의 시체가 있었다.
"곽, 곽 채주가 죽었다!!!!"
"곽 채주가 죽었다! 표 장로가 곽 채주를 죽였다!!!!"
표 장로는 공격을 날리던 걸 멈추고 우뚝 섰다. 산채의 녹림도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낀 것이다. 심지어 방금까지 그를 호위하고 있던 부하들도 경악의 눈빛을 던지고 있었다.
"오해다!"
"무슨 오해 말입니까, 장로님! 어떻게 곽 채주를?"
"오해라니까! 저 놈이 수작을 부린 거다!"
"내가 밤에 들어와서 곽 장로를 죽인 뒤 저기 묻을 재주가 있었으면 당신부터 죽였겠지 여기서 이러고 있겠소?"
빈정거리는 말에 표 장로는 저 정체 모를 잡놈부터 찢어죽이겠다고 이를 갈며 결심했다.
녹림 총채주 실종사건 (8)
"장로님, 설명해주십시오. 채주께서 왜 저기 계신단 말입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놈들이!'
부하들의 외침에 표 장로는 울화가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아무것도 모르는 놈들이 배신감 가득한 눈빛을 보내며 힐난하는 꼴이 견디기 힘들었다. 장로 본인이 고수가 아니었다면 심마에 빠졌을지도 몰랐다.
지금 철랑도의 죽음에 가장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표 장로 본인이었던 것이다.
표공이라고 해서 철랑도를 죽이고 싶었겠는가?
밖에 녹호군이 녹림의 정예를 이끌고 와서 턱밑까지 살기를 쏘아 보내고 있는데?
하지만 정말로 어쩔 수 없었다. 공격하지 않았다면 철랑도 본인이 먼저 표 장로를 공격했을지도 몰랐다. 철랑도보다 무공이 한 수 아래인 표 장로로서는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가 없었다.
'그 빈 편지만 아니었다면!'
표 장로는 아직도 이 모든 일의 원인이 내용 없는 빈 편지 하나 때문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아래에 있는 녹림 놈 하나가 조롱을 하려고 그랬는지 화살에 편지를 묶어서 산채로 쏘아 보냈다. 당연히 이런 것에 흔들릴 표 장로가 아니었기에 코웃음을 치며 편지를 펼쳤는데...
놀랍게도 편지는 대대대겸한테 보낸다는 말만 있고 나머지는 텅 비어있었다. 표 장로는 어느 무식한 놈이 내용이 담긴 종이를 실수로 빼먹은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철랑도의 생각은 달랐다. 텅 빈 편지를 보자 철랑도는 표 장로에게 분노와 의심을 폭발시켰다.
-지금 밖의 놈들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편지가 빠진 거 같다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입조심해라, 곽탁! 지금 내가 설마 결탁이라도 했다는 거냐!
-못할 것도 없지. 네놈만큼 꿍꿍이 수상한 놈이 녹림에 어디 있겠느냐! 내가 이길 것 같을 때에는 나한테 붙더니 내가 질 것 같자 저 녹호군 놈한테 붙으려는 것 아니냐. 왜, 내 목을 가져오면 대우해주겠더냐?
-이런 죽일 놈이!
-감히 어디서! 나가라, 표공! 이제까지 해온 게 있으니 목숨은 빼앗지 않겠다. 근신하고 반성하라! 한 번만 오늘처럼 행동하면 아무리 장로라 하더라도 용서하지 않겠다!
살기 넘치는 철랑도의 행동에, 표 장로는 가만히 있다가는 누명으로 죽겠다고 느꼈다.
밑에 있던 오독귀 또한 표 장로를 꼬드겼다.
-철랑도 놈을 믿으시는 것입니까? 그 놈은 난폭하고 거친 자라 믿을 놈이 안 됩니다. 차라리 놈을 죽여버리고 철랑채를 휘어잡으시지요.
-철랑채는 놈의 산채다. 멋대로 죽여버린다고 해서 될 게 아니야.
-크크크... 뭘 그리 어렵게 생각하십니까. 천하의 대대대겸께서 겁이 이리 많으실 줄이야. 놈을 죽인 다음에 그 사실을 숨기면 되지요. 채주가 안 나오겠다는데 문을 두드릴 놈이 있겠습니까? 그런 다음 적당한 때를 봐서 밖의 놈들이 죽였다고 하면 다 속을 겁니다.
-하지만 놈의 무공은...
-제 독과 장로님의 무공이라면 충분합니다. 오늘! 오늘 밤 놈을 해치우시죠. 망루 아래로 불러내겠습니다.
-네 독공으로는 놈을 중독시키지도 못한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평소 철랑도가 마시던 술에 독을 타놨으니 말입니다. 한 달은 넘게 마셨으니, 이제 슬슬 독을 깨울 때가 된 거 같습니다.
-너, 너...!
허락도 받지 않고 멋대로 저지른 오독귀의 행동에 분노했지만, 표공은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안 그래도 의심을 산 상황에서 오독귀의 행동까지 들킨다면 정말로 죽을 수 있었다.
결국 둘은 사투를 벌여 철랑도를 제압했다. 오독귀가 미리 중독시키지 않았다면 둘로서도 힘들었을 치열한 싸움이었다.
"...철랑도가 날 죽이려 했다."
"그렇다면 왜 저희한테 숨기신 겁니까!"
"말했다고 한들 네놈들이 귀담아 들었겠느냐!"
표 장로와 부하들이 떠드는 사이 한기는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혹시 정말 빈 편지 때문에 죽였소?"
"??"
부하들은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표 장로는 눈을 부릅떴다.
"너... 너... 너...?!"
그 편지가 설마 잘못 온 게 아니라 책략이었단 말인가?
"대단하군... 정말 통할 줄이야."
한기가 연우혁을 보며 말하자 표 장로는 홱 고개를 돌렸다. 본능적으로 누가 가르침을 준 건지 깨달은 것이다.
옆으로 쭉 찢어진 눈꼬리에서 살기가 줄줄 흘러나왔다. 표 장로는 귀신 같은 형상으로 외쳤다.
"네놈의 간을 씹어먹지 못하면 이 표공은 대장부가 아니다!"
"걱정 마시오. 장로. 어차피 오늘 여기서 죽게 될 텐데."
말과 함께 한기와 녹림의 정예들이 발검했다. 번뜩이는 검광이 방 안을 휩쓸고 피가 튀었다.
충격적인 사실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던 장로의 부하들은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했다. 이들은 표 장로를 지켜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신호를 보내라."
"예."
효시가 허공을 가르고 찢어지는 소리를 만들어냈다. 동시에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던 녹림의 정예들이 함성을 지르며 올라오기 시작했다.
한기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산채 전체를 호령했다.
"대대대겸 표공은 녹림도로서 하늘에 맹세한 것을 잊어버리고 질서를 망가뜨렸다! 그걸로도 모자라 철랑도 곽탁을 멋대로 기습해서 죽였다. 철랑채의 녹림도들은 지금이라도 곽탁의 원수를 갚아라! 그렇지 않다면 곽탁은 저승에 가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닥쳐라!"
표 장로는 대겸을 휘두르며 이겸차안(以鎌遮眼)의 초식을 펼쳤다. 허공에 어지러운 잔영이 생겨나더니 한기의 요혈을 위협했다.
녹호군 한기는 상대가 펼친 환의 묘리에 넘어가는 대신 우직하게 주먹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생겨난 허초들이 순식간에 뭉개지고 오히려 초식을 낭비한 표 장로의 움직임이 더뎌졌다.
"비키지 못할까!"
"나보다 강하지도 않은 자가 한눈을 팔려는 거요?"
"저 놈은 죽이고 말겠다!"
표 장로가 연우혁부터 죽이려고 집착하면 할수록 한기한테는 좋은 일이었다.
한기는 수월하게 표 장로를 밀어붙였다. 긴 거리를 잡고 상대를 움직이지 못하게 막은 뒤 치명적인 살초를 흩뿌리는 게 대겸이란 무기였지만, 지금처럼 서두르면 제대로 된 위력이 나오기도 전에 초식이 꺾여버렸다.
"오독귀, 오독귀! 어디 있느냐! 빨리 나와서 도와라!"
표 장로는 점점 수세로 몰리는 걸 느끼자 다급하게 외쳤다. 몇 없는 직속 부하들은 지금 다른 녹왕대원들을 상대하느라 여유가 없었다. 오독귀가 필요했다.
대답이 없자 한기는 연우혁에게 외쳤다.
"오독귀 놈을 잡으러 가게!"
"감사합니다. 녹호군 대협."
연우혁은 고개를 숙였다. 보아하니 표 장로는 굳이 합공을 할 필요도 없어보였다. 무공의 경지도 한기보다 높지 않은데 심지어 평정심까지 잃어버린 것이다.
'아무리 원한이 있는 관계라 하더라도 그렇지 저렇게 평정심을 잃고 덤비다니.'
"죽어라!"
표 장로가 붉어진 눈으로 연우혁을 죽이려고 보법을 펼치자, 연우혁은 바로 쌍사보법과 사심불구경공으로 거리를 벌린 뒤 오독귀를 찾으러 출발했다.
"거기 서라! 거기 서란 말이... 커헉!"
"포두는 그만 쫓고 나를 상대하시지 그러시오."
"포... 포두라니. 농지거리는 여전히 못하는군...!"
한기는 표 장로에게 사실을 설명해주려다가 말았다. 차라리 모르고 죽는 게 더 자비로울지도 몰랐다.
***
'산채가 박살이 났구나!'
오독귀(五毒鬼)는 전대의 마두들 중에서도 무공이 그렇게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조정의 고관을 죽이고도 살아남은 전대의 마두가 고작 일류 말입이라니. 보통 무공이 높지 못한 마두는 비명횡사하기 마련인 무림에서 특이한 일이었다.
대신 오독귀는 교묘하고 끈질긴 하독술을 갖고 있었고 무엇보다 위험에 대한 감각이 날카로웠다. 밖에서 함성이 들리고 안에서 싸움이 벌어지자마자 오독귀는 결과도 보지 않은 상황에서 도주를 결심했다.
'제기랄! 철랑도 놈을 기껏 죽였는데.'
석탄 가루를 개어서 진흙에 섞은 걸 얼굴과 손끝에 바른 뒤 허름한 옷으로 갈아입은 오독귀는 산채의 일개 녹림도로 변장했다.
소란이 벌어졌을 때 가장 도망치기 좋은 위장이었다. 일개 산적 놈 하나 도망치는 걸 적들도 죽어라 쫓지는 않을 터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놈을 괜히 죽였나?'
철랑도는 오독귀와 처음 만났을 때 하찮게 여기며 모욕을 주었었다. 오독귀의 뇌물을 받은 표 장로가 막아줘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녹림에서도 쫓겨날 뻔했다.
그 원한도 풀고 산채의 권력도 가져올 겸 끈질기게 하독술을 펼쳤고, 또 운 좋게 표 장로가 궁지에 몰려서 같이 철랑도를 습격할 수 있었는데...
그게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오독귀는 쓰게 입맛을 다셨다. 운이 없어도 참 더럽게 없었다.
"같이, 같이 가자!"
"!"
뒤에서 누가 부르자 오독귀는 고개를 돌렸다. 산채 목책에 몰래 만든 통로였는데 용케 그걸 알았는지 거기로 기어 나오는 놈이 있었다.
"...따라오지 마라!"
오독귀는 바로 죽이려다가 참았다. 지금 녹림의 정예들이 주변에 득시글거릴 텐데 주의를 끌어서 좋을 게 없었다. 괜히 수상해 보인다고 쫓아오면 일이 귀찮아졌다.
"나한테 은자가 있다."
"헛소리하지 마라."
오독귀는 비웃었지만 놀랍게도 산적은 전낭의 입구를 비틀어서 열어보였다. 번쩍이는 은조각들이 들어있었다.
"네놈이 어떻게?"
"틈틈이 챙겼지. 여기 길이 있는 것도 알고 있었는데 창고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라고 몰랐겠나."
오독귀의 눈빛에 탐욕이 맴돌았다. 저 놈을 조용한 곳까지 끌고 가서 은자를 뺏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같이 가지. 어디로 갈지 생각은 했나?"
"사실 저기 토벌대 쪽에 아는 놈이 있다. 포위가 없는 곳이 있다더군."
"그게 어디지?"
"저쪽. 저쪽 개울가 보이나? 저쪽은 길이 험해서 보초가 없다는군."
"안 보이는데."
"나 원 참. 저기 저 개울가가 왜 안 보이나? 이쪽으로 올라와라!"
성질을 내는 산적 놈의 모습에 오독귀는 빨리 죽여 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무 위로 올라가려고 했다.
그 순간 비도의 시푸른 칼날이 오독귀를 파고들었다.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쾌속한 암기술이었다. 오독귀는 고통과 함께 몸이 쿵 쓰러지는 것을 느꼈다.
"...!"
오독귀는 자신이 당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자기 아들뻘 놈의 수작에 당하다니.
'이 놈...!'
상대는 점혈로 죽지 않게 출혈을 막더니 옆의 바위에 앉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녹림의 정예들이 달려왔다.
"용케 여기까지 도망친 놈을 잡으셨소, 진충비도!"
"한경의 포두들은 다 이런 겁니까?"
'뭐?'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오독귀는 자기가 누구한테 잡혔는지 믿지 못하고 귀를 의심했다.
동창도, 금의위도 아니라 포두 놈이 자신을 잡았단 말인가??
***
"오독귀 놈은 멀쩡하겠지?"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연우혁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오독귀가 상처가 덧나서 죽는 것이었다. 기껏 생포하려고 고생했는데 가는 길에 죽으면 그것만큼 허탈한 일도 없었다.
연우혁이 절정의 고수였다면 가볍게 혈도만 짚었겠지만 연우혁은 상대를 봐주면서 제압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방심시킨 다음 일격에 쓰러뜨릴 수밖에 없었다.
함거(轞車)에 악검삼마와 오독귀를 넣고 출발할 준비를 하는 포쾌들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는 걸 참지 못했다.
사지에 걸어 들어와서 이렇게 마두 놈들을 데리고 멀쩡히 나가게 될 줄이야!
오독귀는 죽여 버리겠다는 듯이 살기를 내뿜었다.
그러나 하필 지나가던 게 적 포쾌였다.
살수한테 이런 협박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적 포쾌는 들고 있는 나뭇가지를 휘둘러 오독귀의 얼굴을 갈겼다.
"한 번만 더 눈을 그렇게 뜨면 애꾸로 만들어주마."
"...!"
오독귀는 믿기지 않았다. 저 포두 놈한테 잡힌 것도 놀라웠는데, 이 포쾌 놈은 대체 뭐하는 놈이길래 이렇게 겁이 없단 말인가.
"연 포두님! 연 포두님!"
"?"
포쾌들과 함께 함거를 끌고 출발하려던 연우혁은 저 멀리서 피어오르는 흙먼지에 멈칫했다.
하인이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말을 타고 달려올 정도의 하인이면 한경에서 꽤나 권세 있는, 고관이나 재산이 있는 사람의 하인이었다.
'한경에 무슨 일이 생겼나?'
"연 포두님 계십니까!"
"여기 있다. 무슨 일로 온 것이냐?"
"경축드립니다!! 빨리 한경으로 돌아오십시오!"
"...어째서?"
"칙서가 내려왔습니다! 연 포두님께서는 이제 한경의 판관이십니다!!"
연우혁과 포쾌들은 동시에 함거를 쳐다보았다. 누군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어, 그럼 굳이 저 놈들을 안 잡았어도..."
"쉿. 닥치지 못해?"
녹림 총채주 실종사건 (9)
연우혁을 비롯한 포쾌들이 기뻐하며 만세만세만만세를 외치는 대신 그냥 멈춰서 서로 시선만 교환하자 하인은 당황했다.
"포두님, 아니, 판관 어르신! 기쁘지 않으십니까? 헉! 설마 알고 계셨던 겁니까!?"
금 통판이 보낸 하인은 설마 싶었다.
이 포두, 아니 판관은 천 리 너머의 도둑을 꿰뚫어보는 것도 모자라서 길흉화복까지 점칠 수 있다고 한경에 소문이 자자했다.
본인은 그런 점은 치지 못한다 하지만, 원래 뛰어난 술객(術客, 점술가)은 겸손한 법이었다.
예전에 관로라는 유명한 점술가도 그러지 않았던가.
사람이 언제 죽을지 맞히고, 꿈을 해몽해서 앞일을 읽어냈으며, 심지어 먼 마을에서 누가 누굴 죽였는지까지 알아맞힌 점술가!
그런 관로도 결국 신선들에게 자꾸 천기를 누설하면 천벌을 받게 될 거라고 경고를 받았다.
하인이 보기에 연우혁도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본인이야 그저 깊게 생각한 후 이치에 맞게 판단했다지만 그게 어떻게 사람의 재주로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천기 때문에 겸손한 걸지도 몰랐다.
그런 사람이라면 자신이 판관이 될 거라는 것도 미리 알고 있었을지도...
"정말 몰랐다."
'역시 알고 계셨던 거군!'
떨떠름해하며 대답하는 연우혁의 모습에 하인은 속으로 확신했다.
몰랐다면 절대 저런 반응이 나올 수 없었다. 하인이 연우혁이었다면 쓰러져서 엉엉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한경 같은 대도시의 판관이라면 최소한 과거에서 장원(壯元, 1등), 방안(榜眼, 2등), 탐화(探花, 3등) 정도는 해줘야 앉을 수 있는 자리 아닌가.
아무리 커다란 공을 세웠고 한경의 다른 고관들이 인정을 해줬다지만 포두가 판관 자리에 앉는 건 정말 보기 드문 일이었다.
"다시 한 번 경축드립니다!"
"고맙다..."
"자. 어서 돌아가시지요! 통판 어른께서 서둘러 데리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하인은 뿌듯하게 말했다.
금 통판은 연우혁이 그 사이 산적이나 마두 놈한테 죽었을까봐 하인에게 빨리 달려가라고 크게 닦달했다.
기껏 판관 자리를 제수받아놓고 사지에 들어가 죽었다면 그것만큼 억울하고 분한 일도 없을 터였다.
그 사실을 아는 하인은 미친듯이 말을 몰아서 내달렸다. 도중에 말을 두 마리나 갈았을 정도로 격렬한 여정이었다. 저택에서 가장 말을 잘 다루는 자신이 아니었다면 누구라도 뻗었을 것이다.
"그런 마두 놈들은 쉽게 잡기 힘듭니다. 판관 어르신. 지금 판관 어르신께서 하셔야 할 일은 마두를 잡는 게 아니라 빨리 돌아가셔서 칙서를 받으시는 겁니다! 자!"
"마두 놈들은 이미 잡았다."
포쾌들은 떨떠름한 목소리로 하인에게 말했다.
"예?"
"여기 안에 있잖나."
"..."
함거 안에 갇힌 마두들은 포두와 포쾌한테 잡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지 눈만 끔벅거리고 있었다. 하인은 쓰러질 뻔했다.
"이, 이, 이, 이 놈들이..."
"악검삼마와 오독귀다."
"어, 어, 어, 어떻게..."
"산채에 들어가서 잡아오셨지..."
"...!!!!!"
쿵!
하인은 그대로 쓰러졌다. 포쾌들은 깜짝 놀라 달려갔다.
"아니 적 형은 왜 사람을 쓰러뜨립니까!"
"내가 쓰러질 줄 알았나! 이 놈이 급하게 뛰어와서 그런 거지!"
소란이 일어나자 녹림의 녹왕대원 한 사람이 다가왔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별 거 아닙니다. 여기 포두님께서 판관이 되셨다는군."
적조의 말에 녹왕대원은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멈칫했다.
생각해보니 군졸이 시간 지난다고 장수가 되지 않듯이, 포두도 시간 지난다고 판관이 되진 않았다.
'...포두가 원래 시간이 지나면 판관이 되나?!'
***
연우혁과 포쾌, 그리고 하인은 천천히 돌아갈 준비를 했다.
하인은 여전히 믿기지 않았는지 함거 안에 갇힌 마두들을 쳐다보았다.
"대체 이 놈들을 어떻게..."
"별로 어렵지 않다. 겁먹지 마라."
적조는 탱자나무를 꺾어 만든 회초리로 마두들을 후려갈겼다. 마두들은 원독 가득한 눈빛으로 적조를 노려보았지만 적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 대단하다!'
적조의 담력에 하인은 자기 간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일개 포쾌가 저렇게 마두들을 함부로 대할 수 있단 말인가?
무림의 고수가 포쾌 일을 하는 것도 아닐 텐데...
"진충비도. 부채주께서 부르시오."
"?"
연우혁은 갑자기 녹왕대원들이 찾아오자 의아해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런 건 아니오. 음. 당신에게는 기연이라고 할 수 있소. 절대 나쁜 일은 아닐 거요."
"...?"
녹왕대원들은 경건하기까지 한 태도로 말했다. 딱히 살의나 흉한 의도가 느껴지지 않았기에 연우혁은 일단 발걸음을 옮겼다.
'무슨 영약이라도 발견했나?'
최근 포두로서의 일을 하느라 무공 수련에 그렇게 전력으로 집중하진 못했다.
일류의 경지를 넘었지만 그건 시작일 뿐. 연우혁은 자신이 이제야 후기지수들 수준이 되었다는 걸 잘 알았다.
'영약이 필요하긴 하다.'
연우혁이 오대세가나 구파일방의 제자도 아니었고, 거기에 버금가는 명문가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었다. 믿을 구석은 오로지 영안과 상단전에 쌓아놓은 기운밖에 없었다.
'그나마 후자는 언제든지 날 죽일 수도 있는 양날의 검이고...'
이번에 마두를 바치지도 않았는데 판관이 된 건 정말 예상 밖의 행운이었다. 연우혁 본인도 이럴 수 있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아마 금의위의 보고나 한경에서 올린 장계가 생각보다 훨씬 더 파급력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일개 포두가 그렇게 공을 세우면 기특하긴 하겠지.'
언급이 아예 안 되면 모를까, 언급이 되면 기특하단 소리가 나올 법도 했다.
조정의 관리들도 포두가 쥐꼬리만한 녹봉으로 백성들의 전낭을 털고 다니는 놈들이란 걸 알 텐데 저렇게 평이 좋으면 기특하지 않겠는가.
물론 그것만으로 판관 자리를 주진 않겠지만...
'금의위. 그게 가장 클 거 같다.'
연우혁은 하 교위에게 마음속으로 감사인사를 했다. 언제 한 번 돈을 모아서 은으로 된 거북이라도 하나 선물해야겠다 싶었다.
덕분에 재산을 꽤 아낄 수 있었다.
원래 마두를 바치면서 크게 뇌물을 보낼 각오도 했었던 것이다. 이걸 다 영약으로 돌리고, 녹림에게 또 영약을 받으면...
"!"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연우혁은 숨이 막히는 압박감을 느꼈다. 어떤 살기나 위협도 없었지만, 영안으로 보는 순간 바로 두통과 함께 몸이 떨려왔다.
"신통력이 있군."
녹림 총채주, 녹림대왕 임가적은 연우혁을 보며 무심하게 말했다.
"하지만 읽어낼 수 없는 것도 있는 법이다."
'차원이 다르다!'
이제까지 연우혁이 절정의 경지에 도달한 고수들을 못 본 게 아니었다. 이들은 분명 강맹하고 사나웠지만 연우혁이 아예 상대를 못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처음으로 본 임가적은 거대한 산을 연상시켰다. 영안으로 읽으려고 해도 그저 막막해지는 기분이었다.
'아직 초절정의 경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란 말인가!?'
연우혁의 생각을 읽었는지 임가적은 이어서 설명했다.
"나는 아직 초절정의 벽을 깨지 못했다. 벽 앞에 서있을 뿐.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절정의 고수들과는 격이 다르지. 포두 네가 신통력으로 읽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의념(意念)의 차이지."
"가르침을 주십시오."
홀린 듯 연우혁이 말했다.
원래 녹림과 아무 관계가 없는 연우혁이 녹림의 총채주한테 가르침을 달라고 하는 건 뻔뻔하기 그지없는 행동이었지만, 상대의 압도적인 무위를 보니 그런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말이 나왔다.
다행히 임가적은 별다른 말 없이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절정의 경지에 오를 때 일류의 무인은 자신이 배웠던 무공을 새로이 만들어낸다. 무학(武學)은 원래 모두에게 같을 수가 없기에 스승에게 배운 절세의 무공이라 하더라도 자신에게 맞춰가는 과정이 필요하지. 그렇게 새로 무공을 만들어낸 절정의 무인은 자신이 산봉우리에 올랐다고 생각하게 된다. 중단전이 열리고 배운 초식을 대성했으니 이제 무공의 모든 걸 알았다고 말이다. 내공만 쌓으면 적수가 없지 않겠는가."
"아닙니까?"
"틀렸다. 그건 시작일 뿐. 상단전이 열리고 의념에 대해 알게 되면 그런 오만함을 부끄럽게 생각하게 될 거다. 내가 여기서 주먹을 뻗는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피하겠습니다."
"절정의 고수가 뻗은 주먹이라면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너는 익힌 무공을 완전히 이해했고 뒤로 물러나는 보법과 경신법이 좋다. 일반적인 일류 고수보다 보는 눈이 몇 수는 위인 만큼 이기진 못하더라도 피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내 주먹은 피할 수 없다. 내가 적중시키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이다."
"...??"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임가적은 천천히 주먹을 뻗었다.
그 순간 연우혁은 임가적의 주먹이 자신을 향해 오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뱀 앞의 개구리처럼 피할 수가 없었다.
마치 세상이, 임가적의 주먹을 자신에게 적중시키겠다고 못박은 것처럼 느껴졌다.
희미하게 임가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의념의 차이다. 초절정의 고수가 결심하면 그만큼 의념이 강하지 못한 사람은 거기에 저항하지 못한..."
순간 연우혁은 옆으로 비켜났다. 그리고 코와 입에서 피를 쏟아냈다.
"커헉!"
"!"
임가적은 처음으로 놀랐다.
고작 일류의 무인이 임가적의 의념에 저항한 것이다!
"총채주 님. 들어가겠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한기는 피를 쏟으며 쓰러진 연우혁과 임가적의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오해다."
"오해는 지랄...! 미친 거요?!"
안 그래도 쌓인 게 많았던 한기는 존대도 내려놓고 분노를 폭발시켰다.
총채주란 작자가 하는 것도 없이 앉아만 있다가 상황이 해결되자 쭐레쭐레 찾아온 것도 죽이고 싶었는데, 진충비도를 만나게 해달라서 만나게 해줬더니 반쯤 죽여놓으니 어이가 없다 못해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녹림이 자기 치부를 숨기려고 은인을 살인멸구했다고 알 것 아닌가!
"도와주지 못하면 가만히 있을 것이지. 네놈이 대체 녹림에 무슨 원한이 있어서 이러는 거냐!"
"오해다. 진정해라."
임가적은 손을 뻗어 한기를 제지하더니 다른 손으로 연우혁의 전신을 두드렸다.
"초절정의 고수들이 사용하는 의념을 설명하려고 했는데 진충비도의 상단전이 생각보다 훨씬 더 발달해있더군. 의념을 억지로 저항하느라 다친 거다."
쓰러진 연우혁에게 임가적은 환약을 하나 먹였다. 느껴지는 기운이 꽤나 범상치 않았기에 한기는 무심코 물었다.
"그건 무슨 약이오?"
"취구환(翠救丸)."
"...미, 미친 새끼야! 그걸 왜 네가 함부로 쓰는 거냐!!"
녹림은 그 역사가 짧고 난잡한데다가 흩어졌다 모이는 이들이라 다른 명문정파처럼 비약을 만들어 낼 능력이 부족했다. 기껏해야 금창약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 만큼 개방에서 으뜸가는 영약으로 꼽히는 취구환 같은 보물들은 개인의 물건이 아닌 녹림의 물건이었다. 저렇게 임가적이 멋대로 써도 될 게 아니었다.
"나는 아직 총채주고 이걸 쓸 권한이 있다."
"..."
한기는 다시 뒷목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다. 절정고수가 되어서 또다시 심마로 주화입마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 줄이야.
다행히 연우혁의 호흡이 돌아왔다. 임가적은 이제 한기가 화낼 이유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곧 일어날 거다."
"일어나겠지, 당연히! 취구환을 처먹었는데!!"
"뭐가 불만인지 모르겠군. 진충비도를 죽이는 게 네 뜻이었나?"
"커헉."
연우혁이 고인 피를 토해내며 정신을 차리자 한기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진충비도가 깨어나서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총채주한테 다시 덤벼들었을지도 몰랐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의념에 저항하느라 크게 내상을 입었다. 취구환으로 치유했으니 걱정할 건 없다."
"과, 과연. 그렇군요... 뭘로 치유했다고요?"
연우혁은 귀를 의심하며 물었다. 그러나 임가적은 자기 할 말만 했다.
"상단전이 그렇게 발달한 건 운이 좋다. 초절정의 벽 앞에 선다면 훨씬 더 수월하게 돌파할 수 있을 거다."
'그 전이 문제 아닌가...?'
거기까지 가기 전에 귀신 들려서 뒤질 수도 있는데 뭔 개소린가 싶었다. 연우혁은 피를 옆으로 퉤 뱉었다.
"음. 가르침 감사합니다. 대협."
"녹림의 일을 도운 빚을 갚았다."
"이미 녹호군께서 값을 치루셨습니다만."
"빚은 마음 안에 있지 종이와 먹물 위에 있지 않다. 오욕칠정에 얽매이면 의념을 유형화시켜서 벽을 넘을 수 없지. 잘하고 있으니 계속해서 세속의 욕망을 떨쳐내도록."
"...예?"
연우혁은 무슨 소린가 싶었다.
'내가 오욕칠정을 떨쳐내고 있었나?'
판관 연우혁 (1)
당장 지금 하고 있는 생각만 해도 오욕 중 재욕에 칠정으로는 근심(憂)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러나 한기는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저 포두한테는 흔히 볼 수 있는 벼슬아치들과는 다른 초연함과 신비함이 있었다.
"도술을 익혀서 그런지 탐욕과 거리가 멀긴 하지요."
"그러한 자세가 초절정의 벽을 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자질 중 하나다."
'으음.'
연우혁은 임가적의 말에 떨떠름해했다.
임가적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지금 본 것만으로도 임가적이 보통이 아니라는 건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누가 자신의 평생을 바친 곳에 대해 저렇게 냉정하게 대할 수 있단 말인가.
당장 연우혁만 해도 저렇게 할 자신이 없었다.
'거의 사람 자체를 바꾸는 수준 아닌가?'
"녹림의 일을 도운 빚은 갚으시는 분이 녹림의 일은 왜 신경 쓰지 않는 겁니까?"
한기는 아직도 불만이 쌓여 있었는지 쏘아붙였다.
"한기. 난 녹림에 빚진 게 없다. 십 년 넘게 녹림의 성세를 이끌고 휘하 산채를 칠십이채로 만들었다. 내가 왜 신경을 써줘야 하나?"
"..."
대답에 부채주의 말문이 막혔다.
논리는 타당했다. 임가적만한 총채주는 녹림의 역사에도 드물었으니까.
하지만...
저건 녹림도가 아니라 장사치의 논리 아닌가?
말문이 막힌 한기 대신 연우혁이 물었다. 아직 방금 나눴던 문답이 이해가지 않았던 것이다.
"오욕칠정을 버리지 않으면 초절정의 벽을 넘을 수 없는 겁니까?"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 그렇지 않다면 한낱 범부(凡夫)가 어떻게 신선에 가깝게 될 수 있겠는가."
"저로서는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사람이 갖고 있던 감정을 전부 버렸는데도 여전히 그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까?"
연우혁의 말에 한기는 잘하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고 있네. 더 설득해보게.'
물론 한기를 위해서 녹림대왕을 설득하고 있던 게 아니었던 만큼 연우혁은 당황했다. 무공에 대한 질문이었지 녹림에 남아달란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그게 네 길이다."
"!"
임가적은 까마득하게 먼 무림의 후배가 자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서 화를 내지 않았다.
"나는 이게 맞는 길이라고 생각할 뿐. 이 길로 오지 않는다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해주겠는가."
"으음!"
"논파되면 어떡하나? 힘 좀 써보게."
"아니..."
연우혁은 멀고 먼 초절정의 경지에 대해 고민하려는데 옆에서 말을 걸어오는 한기가 성가셨다.
하지만 한기도 총채주 때문에 상당히 필사적이었다.
"녹림의 보물인 취구환을 먹었지 않나. 자네의 재주를 부려서 설득 좀 해보게."
"취구환?! 개방의 보물 아닙니까?"
"그 정도는 되어야 녹림의 보물이지. 부탁하네."
'어쩐지 내공이 늘었다 싶었다.'
갑자기 일류 중입에 가까울 만큼 내공이 늘었기에 녹림대왕이 뭘 했나 싶었는데, 개방의 보물인 영약을 먹인 모양이었다. 취구환이라면 이렇게 내공이 급격하게 상승하는 것도 당연했다.
받은 게 있는 만큼 연우혁은 뭐라도 해주고 싶긴 했지만 영 막막했다.
초절정의 벽을 앞에 두고 자기 길을 확실하게 정한 사람에게 무슨 말이 통하겠는가. 문파며 가족이며 이미 다 버리지 않았던가.
그 때 연우혁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무언가가 있었다.
"대협."
"말해라."
"대협께서 정말 말씀하신 대로 다 버리셨다면 왜 이렇게 나오신 겁니까?"
"한기가 성가시게 굴 테니까."
"녹호군을 죽이셔도 됐을 텐데요."
"..."
한기는 배은망덕한 진충비도의 대답에 경악했다. 그러나 임가적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럼 다른 자들이 왔겠지."
"그 자들도 죽이셨으면 됐을 겁니다."
"..."
임가적이 말없이 연우혁을 쳐다보자, 연우혁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무림에서 무공을 출수하는 것보다 남들을 설득하는 걸 더 많이 한 만큼 자신이 있긴 했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영 긴장이 됐다.
"제 생각에 대협께서 이렇게 나오신 건 일말의 감정이 남으셨기 때문입니다."
"감정이 남았다?"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평생을 바친 문파의 일에 무감정할 수 있겠습니까? 대협께서는 지나치게 급히 인연을 끊으신 것 같습니다. 그 미련이 지금 이렇게 나오는 거지요."
임가적은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지자 연우혁은 실수했나 싶었다. 딱 봐도 제정신이 아닌 고수의 심기를 거슬렀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럴지도 모르겠군."
"!"
그러나 임가적은 분노해서 출수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혁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좋다. 십 년 동안 녹림의 일을 더 보도록 하지. 그 사이 미련을 끊을 수 있도록 준비해보겠다."
"훌륭하신 생각이십니다."
"진충비도의 명성이 왜 대단한지 알겠군."
임가적이 말을 마치고 천막 밖으로 나가자 한기가 고함을 지르며 연우혁의 등을 두드렸다.
"잘했네, 잘했어! 정말 고맙네!!!"
"별 거 아닙니다. 제가 말하지 않았어도 총채주 님께서는 곧 깨달으셨을 겁니다."
"아니야! 절대 그렇지 않네."
녹호군은 그 명성에 걸맞지 않게 눈시울을 붉히며 고마워했다.
이 정도까지 잘 설득해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자네가 화살 하나로 곽탁을 죽였을 때 정말 사술을 쓰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방금 보여준 건 그 이상이야."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셨군...'
"녹림은 절대 이 은혜를 잊지 않을 걸세.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게. 녹림의 이름이 자네 뒤에 있을 걸세."
"대협. 감사합..."
대답하려던 연우혁은 멈칫했다.
그런데 판관이 저런 이름을 달고 다녀도 되나?
***
어사화를 꽂고 삼일유가(三日遊街)를 받진 않았지만, 한경에 돌아온 연우혁은 그에 버금가는 축하를 받았다.
위로는 지부 어르신부터 아래로는 한경의 백성들까지.
어느 누구 하나 축하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궁 판관은 축하하면서도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정말 아쉽게 됐군. 너만한 포두가 또 어디 있겠느냐? 앞으로 백 년 동안 한경에서 너만한 포두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판관 어르신...!"
"이제 어르신이라고 부르지 마라. 너처럼 은자를 긁어내는 포두가 사라졌으니 이제 어디서 은자를 받을까."
궁 판관은 창밖을 쳐다보며 근심 어린 목소리로 시름에 잠겼다. 연우혁은 방금 받은 감동이 바로 싹 식는 걸 느꼈다.
사건 해결을 잘 해서가 아니라 은자를 잘 바쳐서 좋아했던 거였다니!
"이제 판관이 되었으니 네가 몇 가지 알아야 할 일들이 있다."
"가르침을 주십시오."
연우혁은 관복을 입었지만 매우 공손했다.
과거에 급제해서 각종 학식을 쌓고 판관 자리를 제수받은 판관과 달리 연우혁은 아래에서 올라오지 않았던가. 일에 대해 경험한 게 많다 하더라도 놓치는 게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경의 동쪽을 맡고 있는 궁 판관이 도와주지 않고 심술을 부린다면 실수가 많아지고 공격받을 수 있었다. 안 그래도 벼락출세한 만큼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했다.
'판관의 일이란 게 사실 포두보다 더 어렵다.'
포두는 그냥 저택에 누워 포쾌들 부리며 잔돈푼을 뜯어내도 됐지만 판관이 그런 짓거리를 했다가는 대번에 목이 날아갈 수 있었다. 권한이 큰 만큼 책임도 커지는 것이다.
아침 일찍 나와야 하고(한경의 길거리를 보면 하급 관리들이 허겁지겁 노점(露店)이나 객점(客店)의 떡이나 만두를 들고 달려가는 걸 볼 수 있었다), 관청의 형관(刑館)에 도착하면 단정하게 정리한 관복에 먼지 한 점 묻히지 않고 자리에 앉아야 했으며, 그 뒤로는 쉬지 않고 백성들의 하소연을 들어주며 사건의 대소사를 확인해야 했다.
판관이 그냥 대뜸 판결해버리고 끝내버리면 차라리 편했을 테지만 일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일정 이상 처벌을 내린 사건은 위에 보고를 올려야 하는데, 이 보고가 틀리면 바로 문책이 날아왔다. 이런 문책을 몇 번 받으면 중앙 조정으로 승진하는 건 기대하기 힘들어질 뿐더러 심한 경우 파직될 수도 있었다.
게다가 한경이 속한 커다란 지역을 다스리는 관찰사나 지휘사, 황제의 명령을 받고 나온 순안어사 등 한경 밖의 고관들은 일손이 필요하면 하찮은 포두를 부르지 않았다. 어느 정도 급이 되는 판관을 불러서 협조를 시켰다.
정말로 재수 없을 경우에는 내각이나 육부, 도찰원에서도 판관을 직접 불러서 증언을 시키거나 일에 관여시켰으니 이 일의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벌써부터 걱정하진 말자.'
연우혁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벌써부터 안 좋은 가능성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사실 위의 일들은 대부분 가능성 낮고 희박한 일들이었고, 판관이란 자리는 장점이 훨씬 많았다.
게다가 연우혁은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이 자리에 앉지 않았던가. 지금은 뿌듯해해도 될 때였다.
"음. 그래."
궁 판관은 연우혁의 공손한 자세가 흡족했는지 입을 열었다.
"먼저 첫 번째."
"예."
"이번에 판관이 되면서 받은 선물들이 있을 텐데."
연우혁이 판관이 되자 한경에 있는지도 몰랐던 가문들과 상단들이 축하의 뜻으로 선물을 보내왔다. 한경의 정관이라면 당연히 받을 자격이 있는 물건들이었다.
덕분에 평소에 무공을 수련하던 저택의 마당에 선물들이 가득 쌓여있었다.
'알겠군.'
연우혁은 씩 웃었다. 이제 궁 판관의 마음을 읽을 자신이 생긴 것이다.
"알겠습니다."
"오. 말해 보거라."
"저를 물심양면으로 돌봐주신 한경의 고관들에게 선물을..."
궁 판관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 있어 하길래 기대했는데 아직 모자란 점이 많은 놈이었다.
"판관이 됐는데 왜 한경의 관료들한테 선물을 바치느냐? 선물을 바칠 거면 조정에 바쳐야지. 그리고 지금은 조정에 바로 뇌물을 바치지 마라. 너무 속이 보이니, 한 일 년 정도 지난 다음에 바치는 게 좋을 것이다."
"그, 그렇군요."
연우혁은 머쓱해졌다.
그럼 선물 이야기는 왜 꺼낸 거지?
탁!
궁 판관은 두꺼운 장부책을 던졌다.
"이걸 읽어보고, 네놈에게 선물을 바치지 않은 놈들의 이름을 적어 놔라."
"어... 어디에 쓰는 겁니까?"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것이냐? 그 놈들이 원통함을 풀어달라고 찾아오면 절대 풀어주지 마라."
"..."
연우혁은 그제야 선배 판관의 뜻을 이해하고 아찔해졌다.
선물 안 바친 놈을 하나하나 다 적어놓으라니!
'정신 나간 집요함이다!'
한경의 부자들도 설마 판관이란 작자가 돈 많은 놈들을 하나하나 다 기록해놨을지는 몰랐을 것이다. 심지어 장부책에는 재산 규모까지 대략적으로 적혀 있었다.
"아, 알겠습니다."
연우혁은 대답만 하고 장부책을 꽂아놓으려고 했다. 이런 정신 나간 짓에 쓸 시간은 없었다. 차라리 자기 관무실에 가서 무공을 수련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지금 써라."
"예?"
"지금 쓰라고. 네놈은 맺고 끊는 게 무르고 돈에 헤퍼서 잊을 수 있다. 지금 써라!"
궁 판관의 눈에서는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평생 한경의 판관으로서 보낸 사람만이 뿜을 수 있는 기세였다.
결국 연우혁은 첫 판관으로서의 업무를 오전 내내 뇌물 안 바친 놈 명단 작성으로 마쳐야했다.
***
"다... 다 했습니다."
"이건 매일 품속에 넣고 다닌 뒤, 아침에 세 번, 저녁에 세 번 읽고 이름을 외우도록 해라. 절대 한 명도 빼서는 안 된다."
"예..."
궁 판관은 그제야 흡족한 표정을 짓더니 자신의 관무실로 가버리려고 했다. 연우혁은 당황해서 궁 판관을 불렀다.
"일에 대해서는 안 알려주십니까?"
"아. 일. 흠... 일단 포두를 뽑아라. 눈치가 빠르고 부지런하며 한경에 발이 넓어야 한다. 무공이 뛰어나야 하고 삼족 중에 도적이나 무림인이 없어야 하며 시신을 보고도 놀라지 말아야 한다. 또..."
궁 판관은 좋은 포두의 조건을 설명해줬다.
연우혁 본인이 워낙 뛰어난 포두였기에 고르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포두는 필요한 법이었다.
판관은 앉아서 일을 해결하는 만큼 수족 노릇을 해줄 자들이 필요한 것이다.
지금 한경 서쪽에도 포두들이 몇 있었지만 전 판관이 고용한 자들이라 능력이 부족하고 충성심도 의심스러웠다. 확인하고 갈아버린다 하더라도 그 전까지 포두 하나 정도는 자기 심복으로 박아놔야 했다.
"감사합니다."
"그래. 난 가보겠다."
"...잠, 잠깐. 판관 어른. 이게 다입니까?"
"뭘 말이냐?"
"판관으로서 해야 하는 일 말입니다."
"네가 아는 일을 말해봐라."
연우혁은 대답했다.
아침 일찍 나와서 의복을 정갈하게 차려입고 백성들의 대소사를 들어주고 일을 처리하면 보고를 작성하고...
"전에 하던 놈보다 더 잘 아는구나. 그런데 왜 물어보느냐?"
"보고를 작성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이나..."
"그건 주부(主簿) 놈 시켜라. 그 놈이 할 일이다."
"위에서 판관에게 의견을 묻는 문서가 날아오면..."
"그건 전사(典史) 놈 시켜라. 그 놈이 할 일이다."
"..."
연우혁은 예상했던 것보다 판관 노릇이 쉬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판관 연우혁 (2)
'...아니다. 정신줄 놓지 말자.'
궁 판관이 간 뒤 연우혁은 정신을 차렸다.
생각해보니 궁 판관이야 과거에서 방안(榜眼, 2등)을 차지한 수재였고 한경의 명문가 출신이니 미친놈처럼 탐학질을 해도 뒤탈이 없는 거였지, 연우혁 같은 사람이 저걸 따라해서는 안 됐다.
뱁새가 황새를 억지로 따라했다가는 뒷일이 좋지 못한 것이다.
주부나 전사를 부르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연우혁은 붓을 놀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영안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일일이 읽는 대신 한 번에 내용 흡수가 가능했다.
"연 판관 있나?"
"아버지, 절 받으십시오!"
"우하하하! 그래, 그래!"
놀러 온 금 통판은 연우혁이 넙죽 엎드리자 좋아 죽으려고 했다.
사실, 여기 오면서 금 통판은 조금 걱정했었다.
실권으로만 따지면 자기보다 높은 자리에 앉게 된 셈 아닌가.
원래 감탄고토(甘呑苦吐)하는 놈들이 한둘도 아닌 만큼 타당한 걱정이었다.
그러나 연우혁은 한 치의 달라짐도 없이 넙죽 엎드렸다.
이 기특한 젊은이는 판관이 되고 나서도 조금도 오만해지지 않은 것이다!
금 통판은 이 일화를 충신효자도(忠臣孝子圖)에 새로 실어서 한경의 젊은이들한테 뿌리고 싶을 정도였다.
"일어나게, 일어나! 판관이 되고 나서 이 무슨 짓이란 말인가!"
"금 아버지께서 저를 돌봐주지 않으셨다면 제가 어떻게 이 과분한 자리에 오를 수 있었겠습니까?"
"으하하, 으핫! 사람 참. 일어나게! 어서!"
금 통판은 엎드린 연우혁을 잡아당겼다. 내공 하나 없는 힘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일류 고수인 연우혁이 슬슬 끌려나왔다.
"궁가 놈이 뭐라고 하지는 않던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저것 알려주셨습니다."
"흠! 궁가 놈이 자네를 좋게 본 것 같긴 하네. 원래 은자 아니면 관심을 안 가지는 놈이거든."
금 통판은 칙사가 왔을 때 궁 판관이 연우혁의 편을 같이 들어줬다고 설명했다. 원래 궁 판관의 성격을 봤을 때 믿기 힘든 일이었다.
"아마 자네의 재주 때문이겠지!"
'은자 때문일 겁니다.'
연우혁은 아직도 궁 판관이 모용세가한테 얼마를 받은 건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액수는 몰라도 궁 판관이 저렇게 챙겨주는 걸 보니 적지는 않을 것이다.
"물어볼 건 없나? 원래 한경을 돌아다니다가 앉아서 붓을 놀리면 좀이 쑤실 것 같은데. 게다가 자네는 무공을 익혔다면서?"
"신경써주신 덕분에 견딜 만 합니다. 혹시 아버지께서 해주실 조언이 있으십니까?"
질문을 하면서 연우혁은 살짝 기대했다.
금 통판은 궁 판관보다는 훨씬 더 제정신인 사람이었다. 새로 자리에 앉은 관리로서 신경 써야 할 일들을 제대로 가르쳐 줄 가능성이 높았다.
"흠... 새 포두를 뽑게."
"예."
"그리고 자네에게 선물을 바치지 않은 놈들을 적어두게. 절대 용서해선 안 되지."
"...보고를 작성할 때 주의할 점은 없습니까?"
"그건 주부나 전사를 시키면 되네. 으핫핫!"
"..."
***
도움이 안 되는 관리들이 많긴 했지만 연우혁은 그럭저럭 적응해나갔다.
사서 일을 맡은 덕분에(덕분에 관청의 주부나 전사들이 찾아와서 왜 일을 안 시키시냐고 걱정할 정도였다) 처음에는 저택의 선물들을 확인하지 못할 정도였지만, 요령이 붙자 빠르게 해나갈 수 있었다.
보름이 지나자 연우혁은 일을 점심 전에 끝내고 내공을 소주천시킬 여유까지 확보했다.
"판관 어르신. 약재 시장에서 싸움이 났습니다. 정 노인은 분명 멀쩡한 당삼(黨參)을 팔았다고 하는데, 의원은 그게 속이 썩어 있는 놈이라 탕약이 전부 망가졌다고..."
"당삼이 아니라 양유(羊乳, 더덕)일 거다. 둘은 비슷하게 생겨서 착각하기 쉽지. 정 노인이 파는 다른 당삼을 챙겨서 한경의 의원들에게 물어보도록."
하는 일 또한 포두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포두였을 때도 이제 다른 구역의 포두들이 난처한 문제다 싶으면 연우혁을 찾아와서 지혜를 구했는데, 판관이 되자 공손하게 찾아와서 묻는 정도였다.
연우혁이 사라졌는데 포두들이 어디에 묻겠는가?
처음에는 곤장이라도 맞을까 벌벌 떨면서 찾아왔던 포두들도 연우혁이 친절히 대답해주자 안심하고서 물었다.
"으음!"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적 포쾌는 연우혁이 하도 진지하게 고민하자 이상함을 느끼고 물었다.
어떤 어려운 난제도 눈 한 번 깜박하고서 해결하는 사람이 저렇게 고민하다니.
"뇌물을 언제부터 얼마나 받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
적조는 괜히 물어봤다고 생각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다. 너무 빨리, 노골적으로 받으면 탐관오리라고 소문이 날 것이고 아예 받지 않으면 돈을 모을 수가 없지."
"잘 하실 겁니다."
"적 포쾌는 고견 없나?"
적조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살막의 대주한테 뇌물 받는 요령을 묻는 걸 보니 저 포두, 아니 판관도 보통 미친 놈이 아니었다.
"판관 어르신 계십니까?"
"들어와라."
연우혁의 말이 떨어지자 관졸이 달려왔다.
"정 거사께서 판관 어르신을 뵙고 싶어하십니다."
"정 거사라면...?"
연우혁은 물론이고 적조의 표정까지 같이 변했다.
한경의 명문가인 청군 정씨의 가주이자, 적조가 신경 쓰고 있는 장로 손녀의 할아버지 아닌가.
그 사이 관졸 한 명이 더 찾아왔다. 궁 판관 쪽 형관에서 온 관졸이라 연우혁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판관 어른께서 무슨 일로 사람을 보냈느냐?"
관졸은 급히 뛰어왔는지 헉헉대며 서신을 건넸다. 연우혁은 서신을 열고 내용을 확인했다.
청군 정씨는 제대로 된 선물을 보내주지 않았으니 청탁을 무시하란 궁 판관의 조언이 적혀 있었다.
"...오늘 퇴청하고 나서 직접 찾아뵙겠다고 전해드려라."
안으로 불렀다가는 궁 판관이 무슨 짓을 할 지 몰랐기에 연우혁은 밖에서 만나기로 마음먹었다.
'솔직히 내가 거절할 위치는 아니다.'
정 거사면 지부 어른하고도 안면이 있고 한경의 여러 관리들과 관계가 있는데 뇌물 좀 안 줬다고 안면몰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상대도 내가 거절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텐데, 괜히 원수 만들 필요 없지.'
***
"오지 않을 줄 알았네."
"?!"
꼿꼿한 태도로 앉아 있던 노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비쩍 말라서 바람에도 흔들릴 것 같았지만 눈빛에는 정광이 가득했다.
정 거사는 소문으로 들었던 것보다 훨씬 더 완고해보였고, 또...
...가난해보였다.
'명문가가 가난할 수도 있나?'
연우혁은 살짝 당황했다. 상대가 깨끗한 의복을 갖춰 입고 있었지만 연우혁의 영안 앞에서 가난함을 완전히 숨기기는 힘들었다. 당장 관과 도포도 낡은 게 느껴졌다.
"한경의 판관이 어떻게 백성의 부탁을 거절한단 말입니까?"
"선물을 바치지 않았으니까. 궁 판관은 부임할 때 선물을 바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형관에 출입을 막았지."
'미친 놈 아니야 이거?'
연우혁은 질색했다.
이 사람은 뒷감당이 무섭지 않단 말인가?
그러나 연우혁의 질색과 별개로 정 거사는 출입을 막은 것에 대해 별도의 악감정은 없어보였다.
한경의 관리라면 당연히 할 수 있는 권리였던 것이다.
정 거사는 지부 대인한테 이런 걸 말할 생각도 없었다. 일단 말하는 것 자체가 '나는 가난해서 새 판관한테 선물 하나 못 준다'라는 뜻이 됐고, 말한다 하더라도 지부는 판관의 편을 들어줄 게 분명했다. 이건 판관의 권리였으니까.
'술법을 쓰지도 않았는데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기분이군.'
설명을 들은 연우혁은 아찔해지는 정신을 바로잡으며 말했다.
"궁 판관께서도 나쁜 뜻은 없으셨을 겁니다."
"그랬겠지. 여하튼 진충비도의 소문이 틀리지는 않았나보군."
정 노인은 여전히 연우혁이 온 게 신기했는지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포두 출신 판관이면 더 악독해도 모자랄 판에 쫄래쫄래 찾아온 게 신기한 모양이었다.
기왕 멍청해진 김에 연우혁은 청백리처럼 굴기로 결심하고 말했다.
"그래서 무엇 때문에 부르셨습니까? 억울한 일이 있다면 도와드리겠습니다."
"억울한 일은 아닐세. 걱정되는 일이지. 제갈세가에 대해 아나?"
"...예."
연우혁은 살짝 찔려서 늦게 대답했다.
제갈규를 정여혜와 만나게 해준 게 연우혁 본인이었으니까.
그 뒤로 들어보니 제갈규가 지나치게 사랑에 빠진 것 같아서 조금 죄책감이 들었지만, 연우혁은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아니었어도 제갈규는 누구든 미색 반반하면 사랑에 빠졌을 거다.'
"알고 보니 제갈세가의 청년이 손녀에게 푹 빠진 모양이더군."
"이럴 수가!"
연우혁은 가식적으로 반응했다. 정 거사는 눈치채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 잘 나가지도 않는 규중처녀를 무림의 청년이 어떻게 만났나 싶었네."
"정말 세상 일이란 알 수 없이 묘하군요."
"음."
정 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매파 이야기가 나오고 있..."
"커헉."
연우혁은 사레가 들렸다. 노인은 하인을 불러서 새 차를 따라오게 했다. 비싼 찻잎을 쓰지 못하는지 차의 맛이 조금 약하고 가벼웠다.
"놀랐나?"
"조금 놀랐습니다. 제갈세가의 청년과 혼인이라니."
"나도 놀랐네. 아직 결정된 건 아니지만, 둘 다 슬슬 혼사를 고민해야 할 나이이니."
"혹시 제갈세가가 마음에 들지 않으셔서 부르신 겁니까?"
정 거사는 연우혁의 질문에 고개를 저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런 불평을 하려고 한경의 판관을 부르는 자가 어디 있겠나. 제갈세가는 마음에 드네. 명성이 높고 무림의 가문답지 않게 학문 또한 뛰어나지."
말을 마친 정 거사는 목함을 하나 꺼냈다. 단단하게 잠겨서 열리지도 않는 특이한 목함이었다.
"이 함은 어렸을 적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물건일세."
정 거사의 말에 따르면, 이 목함은 먼 옛날 정 거사의 아버지가 무림인을 구해주고 받은 물건이었다.
단단하게 잠겨 있는 만큼 정 거사의 아버지 또한 신기해하며 열어보려고 애썼지만 소득이 없었다. 정 거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잊어버린 뒤 가문의 창고 잡동사니 어딘가에 던져놨었는데...
"...얼마 전 이런 서신을 받았네."
정 거사는 서신을 펼쳤다. 내용은 간결했다. 목함을 내놓지 않으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협박이었다.
"어떤 놈들입니까?"
"나도 모르네. 많고 많은 무림인 놈들 중 이걸 보낸 놈을 어떻게 찾겠나. 원래라면 제갈세가와 인연을 맺은 김에 물어봐야 하겠지만, 가문의 일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사돈 될 사람들에게 의존하고 싶진 않더군."
"너무 위험하시지 않겠습니까? 협박이 날아올 정도면..."
"저택은 걱정할 것 없네. 지부 어른에게 부탁해 병사들을 배치해놨으니. 문제가 생기면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는 병사들도 추가로 온다더군."
"?"
연우혁은 멈칫했다.
'군병을 그렇게 멋대로 써도 되나...?'
당연히 안 됐다. 하지만 연우혁은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 군선을 유람선으로 개조하는 사람한테 병사 이야기를 꺼내서 무엇하겠는가.
"지금 같은 상황에 조언을 해줄 수 있겠나?"
"일단 잠깐 보겠습니다."
연우혁은 목함을 받고 영안을 열었다. 그런 뒤 천천히 확인하기 시작했다.
"흠."
"알겠나?"
"열어봐야 알 것 같습니다."
"그걸 누가 모르나."
정 거사는 어이없다는 듯이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아버지부터 시작해서 정 거사까지 저 목함을 열려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었다. 각종 서책을 뒤지고 토수(土手)나 이공(泥工)을 불러서 이런 것에 대해 아냐고 물어봤을 정도였다.
하지만 당연히 아무 소용도 없었다.
열어보면 좋겠지만 안 열리니 이렇게 찾아온 것 아닌가.
"열어봐도 됩니까?"
"열 수 있다면 그러게."
정 거사는 혀를 차며 한숨을 내쉬었다. 영리하고 재주가 많은 청년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덕분에 과신이 과한 면이 있었다.
노인은 눈을 감고 기다렸다. 적당히 두들기고 만져보다가 안 되겠다 싶으면 포기하리라.
"거사 어른.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보게."
감았던 눈을 다시 뜨며 정 거사는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젊은 판관은 옥시(玉匙, 옥으로 된 열쇠)를 손바닥 위에 둔 채 말을 이어나갔다.
"제 생각에는 제갈세가의 무인들을 동원해야 할..."
"그 열쇠는 뭔가?"
"목함 안에서 꺼냈습니다. 제 생각에는 제갈세가의 무인들을..."
"목함 안에서 꺼냈다고?!!!"
정 거사는 기절할 듯이 놀랐다.
판관 연우혁 (3)
오늘 본 것 중 가장 놀라운 일이었다. 정 거사는 물론이고 정 거사의 아버지까지 열려고 시도한 목함 아닌가.
심지어 둘이서만 고민한 게 아니라 다른 직공들도 불러서 물어봤었는데...
대체 저걸 어떻게 열었단 말인가?
"어떻게 열었나?!"
"거사 어른.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자꾸 말을 끊자 연우혁도 짜증이 나서 탁자를 손으로 쳤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데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걸 자꾸 물어대니 짜증이 난 것이다.
목함을 어떻게 열었는지가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중요한 건 안에 든 물건이었다.
그제야 젊은 판관 앞에서 자신이 실례했다는 걸 깨달은 정 거사가 헛기침을 했다.
"미안하네. 계속 말하게. 그런데 정말 어떻게 열..."
"제갈세가의 무인들을 동원해야 하는 이유는, 이 열쇠가 흑염방(黑染幇)의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정확히는 그들이 확보한 백월비고의 열쇠지요."
흑염방.
무림과 연관이 없는 정 거사도 이름을 알고 있을 만큼 규모가 큰 사파 문파였다. 흑도칠문 중 하나였으니 어떻게 보면 아는 게 당연했다.
정파무림에 오대세가와 구파일방이 있다면 사파무림에는 흑도칠문이 있었다. 이들은 오대세가나 구파일방처럼 서로 끈끈하게 협력하기보다는 싸우고 다투는 일이 더 많았지만, 그래도 사파 무인들이 어디 가서 자기 별호를 내세울 때 최소한의 자부심 역할을 해줬다.
-나는 흑염방 소속 금 아무개다!
-헉! 그 흑도칠문의...!
오대세가나 구파일방과 비교하면 좀 엉성하고 역사도 짧게 느껴졌지만 사실 이들의 힘이 비웃거나 무시해도 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역사도 전통도 의미 없는 사파무림에서 저만한 이름을 가지려면 오로지 세력의 크기밖에 없었고, 역으로 말하자면 흑도칠문에 소속될 정도의 문파라면 가진 세력 하나만큼은 뛰어나다고 봐도 됐다.
연우혁이 알기로 아마 흑염방의 분타도 한경에 있었다. 한경이 치안이 좋은 만큼 개방 분타처럼 대놓고 드러내지는 못했지만 없지는 않았다.
"이 백월비고는 예전에 흑염방이 사들인 도관(道觀)의 비고입니다. 흑도의 문파들은 그 무공이 사납고 기세가 드높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무공이 가진 허점과 단점을 알기에 남몰래 도가나 불가의 무공을 찾아다니지요."
당장 냉수사 고송만 봐도 알 수 있었듯이 사파나 마도의 무공을 익힌 자들은 대다수가 고수의 경지에 도달하면 그 한계를 느끼게 되어 있었다.
남들이 가지 않는 지름길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파나 마도의 무공을 익힌 무인들은 그 부작용이나 단점을 해결해 줄 무공이나 환약을 찾아다녔다. 이 백월비고도 그런 시도 중 하나였다.
설명을 들은 정 거사는 놀라워하면서도 의아해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립(而立, 서른)도 안 된 청년이 보여줄 만한 박학다식이 아니었다.
"자네는 그걸 어떻게 아는 건가?"
"...저는 원래 영특해 어렸을 때부터 위로는 천문을 깨달았으며 아래로는 지리를 통달했습니다."
연우혁은 설명하는 대신 판관으로서의 위엄으로 밀고 나갔다. 판관이 되고 나서 좋은 점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려도 상대가 뭐라고 하기 힘들다는 점이었다.
정 거사도 황당해하며 말문이 막혔지만 뭐라고 하진 못했다.
능력을 보여주면서 자기가 통달했다는데 어쩌겠는가.
"가장 좋은 방법은 제갈세가의 무인들을 부르는 겁니다. 흑염방도 제갈세가의 손에 넘어가면 깔끔하게 포기하겠지요."
연우혁은 모처럼 깔끔하고 편하게 해결했다 싶었다.
제갈세가의 손에 백월옥시가 넘어가면 흑염방도 포기할 터. 그러면 정 거사의 체면도 섰다.
하지만 정 거사는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께서 구해주신 무인은 아마 그 도관 출신의 도인이었던 모양이군."
"예. 그랬을 겁니다."
"흑염방은 도관을 샀다고 했나?"
"새로 들어오는 도인이 없어서 쇠락해가던 도관을 통째로 샀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 물건은 흑염방의 물건이겠군. 돌려줘야겠네."
"...?!"
예상 밖의 말에 연우혁은 당황했다.
그러나 정 거사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하인이 창고 열쇠를 남한테 준다 해서 창고가 남의 소유가 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건... 그렇습니다만..."
너무 예상 밖의 논리에 연우혁은 당황했지만, 따지고 보면 정 거사의 말이 맞긴 했다.
흑염방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도관을 샀는데 도인들이 열쇠는 안 주고 웬 알지도 못하는 놈한테 몰래 넘겼으니 얼마나 화가 나겠는가.
하지만 연우혁은 기본적으로 사파 문파들한테 도둑질하는 게 그렇게 큰 잘못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 놈들도 도둑질하는 놈들이니까!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원래라면 정 거사의 물건이니 정 거사가 돌려준다고 하면 그러라고 했을 테지만...
'돌려주면 피바람 부는데, 이거.'
연우혁은 자신이 아는 사건의 내막을 떠올리며 머뭇거렸다.
정 거사가 놀랄 정도로 연우혁의 견문이 넓었던 게 아니라, 당연히 알고 있는 사건이라서 저렇게 입을 놀릴 수 있었던 거였다.
원래 흑염방은 협박을 하던 도둑질을 하던 저 열쇠를 어떻게든 손에 얻어냈다.
그러자 이제 다른 흑도칠문 중 하나인 천화회(天火會)가 갑자기 시비를 걸어왔다. 알고 보니 천화회도 저 도관의 일부를 산 것이다.
누가 먼저 샀는지는 연우혁도 몰랐다. 어쩌면 도관이 동시에 같이 판 걸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제 흑도칠문답게 서로 양보하지 않고 피비린내 물씬 나게 찾은 곳에서 혈투를 벌이고...
...문제는 찾은 곳이 한경이란 점이었다. 한경에서 혈투가 벌어진다는 것 아닌가.
"거사 어른. 의기는 존중합니다만, 이 열쇠는 흑염방만 탐내는 게 아닐 겁니다. 흑염방의 손에 들어가면 바로 소문이 퍼질 거고 흑도 문파들끼리 싸움이 벌어질 텐데, 그러면 한경도 혼란에 빠질 것이고..."
정 거사는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다. 연우혁의 말뜻을 바로 알아들었다.
흑염방 같은 곳은 방회(幫會)인 만큼 기밀이 새어나가기 쉬웠다.
"누군가 중재를 해주면 어떤가?"
"흑도칠문들이 싸우는데 중재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만..."
연우혁은 떨떠름해했다. 이런 사안에서 중재라는 건 두 문파를 권위로 억누르고 서로 양보하게 해야 했는데, 무림에서 그게 가능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음. 무송진인도 힘든가?"
"무송진인이요? 어느 문파 출신이십니까?"
"무당 출신일 걸세."
"무당파의 무송진인이면..."
'송자배 무인? 왜 들어본 거 같지?'
연우혁은 어디서 들어본 것 같으면서도 낯선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깨닫고 경악했다.
'태극검존!'
현재 무림맹의 맹주이자 무당파 출신 최고수, 지금 무림에서 손꼽히는 초절정의 고수 아닌가!
워낙 전대 고수인데다가 무림맹의 맹주인 만큼 무당파의 진인이라고 들었을 때 바로 떠오르지 않은 것이다. 연우혁은 무림맹주와 아는 사이라고 뻔뻔하게 말하는 정 거사를 경악의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만약 상대가 오 포쾌나 적조 같은 놈이었다면 대번에 거짓말 하지 말라고 윽박질렀을 것이다.
"태극검존과 아는 사이셨습니까?!"
"그, 그렇지. 아버지의 친구 분이셨네."
연우혁의 기세를 느꼈는지 정 거사는 당황해서 대답했다. 그 대답에 연우혁은 새삼 왜 한경에서 청군 정씨가 재산도 그리 많지 않은데 대접을 받는지 알 것 같았다.
'인맥이라는 게 정말 보통이 아니구나!'
무림맹주를 부탁으로 부를 수 있는 인맥이라니. 연우혁은 자신이 정 거사한테 실례한 게 있는지 고민했다.
"애초에 그럼 태극검존께 물어봐도 되는 것 아니었습니까?"
"이게 무슨 목함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런 부탁을 드리나? 지금 부르려는 건 두 무림 문파가 서로 헛되이 피를 흘리지 않게 하려는 걸세."
정 거사가 굳은 의기와 기개를 보여주는 동안 연우혁은 생각에 잠겼다.
'초절정의 경지를 넘은 고수를 한 번 보고 싶긴 하다.'
당장 임가적 같은 벽을 넘지 못한 무인을 만났을 때도 정말 많은 걸 배웠는데, 과연 초절정의 경지를 넘은 무인을 만난다면 어떨까?
이제 와서 연우혁이 가진 난제를 한 번에 해결해줄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지만 어떤 배움을 얻을 수 있을지 궁금한 건 사실이었다.
"부르실 수만 있다면 당연히 중재가 가능할 겁니다."
"그렇다면 잘 됐네. 참. 자네도 진충비도란 별호를 갖고 있는 무림인으로 알고 있는데, 괜찮다면 검존께 자네의 무공을 한 번 봐달라고 해도 되겠나? 관직에서 일하는 사람을 이렇게 따로 불렀는데 아무것도 보답해주지 못해 민망하군그래."
"...거사 어른!!!!"
연우혁은 거사(居士)가 사실 거사(巨士)였다는 걸 깨달았다.
한경에 이런 절개 높은 선비가 어디 있겠는가!
그 반응에 오히려 정 거사가 더 당황했는지 손을 내저었다.
"감사합니다. 거사 어른. 그럼 검존께서 오실 때까지는 저도 포쾌들을 풀어 주변을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나랏일로 바쁜 사람들을 내 멋대로 더 부릴 수는 없으니. 오늘 말해준 것만으로 충분하네."
대화가 끝나고 떠나는 연우혁을 배웅하고 나서야 정 거사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목함은 어떻게 열었던 거지?'
* * *
"진충비도 나으리!"
연우혁은 길을 막아서는 낯선 놈을 보고 멈칫했다. 연우혁보다는 낮은 이류의 경지였지만, 이류의 경지도 충분히 괜찮은 경지였다.
"누구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조용한 곳으로 가시지요!"
무인은 길옆의 다관(茶館)을 가리켰다. 번영한 도시인 한경에는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다관들이 많았다.
꼭 고리타분한 문인들만 쓴 차를 마시는 게 아니라 상인이나 일꾼들도 찾아와 과즙이나 빙당을 녹여 넣은 차가운 냉차를 마시는 만큼 앉아서 이야기해도 나쁘지 않았다.
연우혁은 무인을 확인하고, 다관을 확인한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안내해라."
무인은 다관에 미리 말을 해놨는지 이층의 밀실로 안내했다. 연우혁은 문이 닫히자 무인의 뺨을 후려갈겼다.
짝!
"?!"
"이런 건방진 놈!! 한경의 판관한테 감히 네놈이 누군지 밝히지도 않고 이래라 저래라 하다니. 네놈이 한경의 정관을 우습게 보는 것이냐!!"
"아, 아니. 그것이..."
"당장 네놈을 붙잡아 가둬야겠다!"
연우혁은 극도로 분노해서 날뛰는 시늉을 했다.
이미 상대가 흑염방에서 보낸 무인이라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무인은 아마 연우혁을 같은 무림인이라고 생각해서 충분히 예의를 갖췄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 별 거 없는 놈이 판관을 이렇게 불렀다가는 진짜 두들겨 맞는 수가 생겼다. 판관은 무림인이나 시정잡배가 아닌 것이다.
물론 연우혁은 별로 화가 나진 않았다. 얼마 전까지 포두였는데 갑자기 자존심이 생길 리 없지 않은가.
다만 흑염방에서 사람을 보냈다면 기선을 제압해둬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사파 무인들은 어떻게 날뛸지 몰랐다.
"용서해주십시오!"
드르륵!
아니나 다를까 흑염방에서 나온 다른 무인이 재빨리 문을 열고 무릎을 꿇었다. 연우혁이 방금 파악해놨던 무인이었다.
"이 놈이 한경의 사정에 어두워서 판관 어르신을 몰라 뵈었습니다! 죽여도 시원찮으나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무림인 놈들이 날 얕보다니!"
뺨을 맞은 사파 무인은 어안이 벙벙했지만 일단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자긴 나름 무림인으로서 존중해서 불렀다고 생각했는데 보통 미친놈이 아니었다.
'미친 놈 아닌가, 이거!'
"네놈들이 누군지 알겠다. 흑염방 놈들이지! 네놈들이 지금 날 협박하려고 부른 것이냐!"
"아, 아닙니다!"
흑염방 무인은 기겁해서 대답했다. 상대가 설마 흑염방에서 나온 것까지 이렇게 쉽게 맞힐 줄은 몰랐던 것이다.
"저희는 그저 제안을..."
"네놈들의 뇌물 같은 건 받지 않는다. 나를 누구로 보느냐!"
연우혁은 여유를 주지 않고 쏘아붙였다.
사실 얼마를 줄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열쇠 때문에 찾아온 거겠군!'
열쇠 때문에 협상하거나 캐물으려고 찾아왔을 테지만 연우혁은 해줄 말이 없었다.
무림맹주 불렀으니 두 문파가 알아서 처리해야 한다고 대답해주면 아무리 흑염방 놈들이라도 '뇌물 돌려주시오!'라고 외칠 가능성이 컸으니까.
"제안도 필요 없다. 꺼지거라! 다시는 한경의 판관 상대로 이런 얕은 수작을 부리지 마라!"
"어, 어이쿠!"
연우혁이 쉬지 않고 날뛰자 결국 흑염방 무인들은 포기하고 밖으로 도망쳤다.
"무슨 일이요? 저들은 누구고?"
다관의 점원은 그 광경에 감탄해서 자신도 모르게 손님들에게 설명했다.
"저 자들은 흑염방에서 나온 자들입니다. 새 판관 어르신에게 뇌물을 바치려고 했는데 망신만 당하고 쫓겨나는군요!"
"허어!"
판관 연우혁 (4)
'안타깝군.'
연우혁은 도망치는 흑염방 무인들의 뒷모습을 미련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만약 다른 용건으로 만났다면 흑염방과 좋은 사이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서로 선물을 주고 받는 그런 좋은 사이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미친놈처럼 호통을 치고 뺨을 후려갈기며 쫓아냈으니, 겁을 먹고 기선은 제압당했을지언정 다시 접근해서 뇌물을 바치지는 않을 터였다.
연우혁은 괜히 가슴이 쓰라렸다. 왜 궁 판관이 판관으로 부임했을 때의 선물에 집착했는지 잘 알 것 같았다. 받을 수 있을 때 받지 못하니 마음이 아팠다.
***
짝!
놀랍게도 흑염방 무인만 뺨을 맞지 않았다. 천화회에서 보낸 하인도 뺨을 맞았다. 연우혁은 속으로 한탄했다.
'이런 아둔한 놈들. 흑염방 무인이 뺨을 맞았다는 소식을 왜 듣지 못한 것이냐!'
그걸 들었다면 얌전히 물러나야지 이렇게 뇌물을 바치려고 오다니. 그럼 연우혁은 더더욱 뺨을 때릴 수밖에 없었다.
열쇠 관련된 일에 참가하지 않으려고 흑염방 무인의 뺨을 쳤는데 천화회하고는 협상하면 흑염방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역시 새 판관 어른은 다르셔도 뭔가 다르시다!"
"한경 백성들에게 실로 홍복이구나!"
허둥지둥 도망치는 천화회 하인들을 보자 한경의 사람들은 고소해하며 외쳤다.
한경의 관리들이 탐욕스럽다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건 한경만 특별한 게 아니었다.
애초에 탐욕스럽지 않은 사람은 관리가 되기 힘든 것이다.
위에 뇌물을 바쳐야 부임이 되는데 혼자 청백리 노릇을 해봤자 어떻게 지방에 부임이 되겠는가.
그런 점에서 연우혁 같은 청백리는 보기 드문 한경의 명물이었다. 벌써 몇몇 호사가들은 한경에 명판관이 났다고 다른 지역에 소문을 퍼뜨리고 있었다.
"쯧."
연우혁은 못마땅한 얼굴로 관청을 향해 걸었다. 옆에서 칭송이 쏟아져도 못 받은 뇌물이 아른거려서 영 아쉬웠다.
"판관 어르신. 서신이 하나 와있습니다만..."
"?"
관졸의 말에 연우혁은 멈칫했다. 상대가 눈치를 보는 꼴을 봤을 때 정식으로 날아온 서신은 아니었다.
보통 부정한 청탁을 할 때 이런 식으로 서신이 날아왔다. 관청 문지기를 하는 하인한테 얼마 쥐어주고 서신을 전해달라고 하면, 하인은 또 관청 안을 돌아다니는 다른 하인한테 얼마 쥐어주고 서신을 전해달라고 하고, 또 그 하인은 관졸한테...
이런 식의 수입은 관졸이나 하인들에게 실질적인 녹봉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장 포쾌도 녹봉이 거의 없어서 백성들한테 뜯고 다니지 않았던가.
연우혁은 관졸이 겁먹지 않도록 말했다.
"꺼내봐라. 어느 누구든 백성의 부탁을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지."
"예!"
관졸은 얼굴이 환해지더니 고개를 꾸벅였다. 연우혁은 살짝 기대에 찬 마음으로 방문을 열었다.
'흑염방인가? 아니면 천화회?'
지금 흑염방이나 천화회가 서신을 보낼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새 판관한테 무례를 저질러서 미안했고,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다, 우리도 한경에 분타가 있으니 너무 핍박하지 말아달라...
그런 거라면 연우혁도 얼마든지 못 이기는 척 관계를 회복할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서신의 내용은 예상 밖이었다.
'독망검(毒忘劍) 서광!'
연우혁도 이름을 들어본 적 있는 흑염방의 고수였다. 무려 절정의 경지에 도달한 고수 아닌가. 그런 사람이 자신의 이름으로 사죄하는 서신을 보내자 연우혁은 깜짝 놀랐다.
한경은 치안이 좋은 곳이라 흑염방의 분타가 그리 세력이 크지 않았다.
당연히 분타를 책임지는 자도 별 명성 없는 자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독망검이 서신을 보내다니.
대체 독망검이 왜 한경에 와있나 의아해하며 연우혁은 서신의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사실 독망검이 한경에 와있는 것보다 더 이상한 건 연우혁에게 직접 사죄의 서신을 쓰는 이유였다.
독망검이 연우혁에게 굽신거릴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물론 연우혁이 작정하면 한경의 흑염방 분타를 매우 피곤하게 만들어줄 수 있었지만, 말했듯이 한경에서 흑염방은 세력이 별로 크지 않았다. 얼마든지 포기하고 물러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대체 왜...
...우리는 한경의 질서를 어지럽힐 생각이 조금도 없소. 그저 한경의 새 판관이 무불통지(無不通知)로 뛰어나다기에 묻고 싶은 게 있을 뿐이오. 최근에 목함 하나를 얻었는데, 이 목함을 열고 싶소...
"..."
이유를 깨달은 연우혁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자식들, 목함은 무조건 얻었다고 생각하는구나!'
하긴 흑염방 입장에서는 정 거사가 거절하거나 천화회가 훼방을 놓으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을 터.
당연히 얻었다고 생각하고 여는 방법을 찾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미 열어서 맹주까지 불렀는데.'
연우혁은 어떻게 해야 하나 깊게 고민했다. 그리고는 결정을 내렸다.
"이 서신을 전해주고 오도록."
연우혁이 내린 결정은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기다리기였다.
'어차피 초절정 경지에 오른 고수가 올 테니까.'
***
독망검 서광은 한경의 흑염방 분타 건물 안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곳과 달리 한경에서 흑염방은 문파의 이름을 걸고 있지 못했기에 그 규모가 그리 크지 않고 허름했다. 기존 흑염방 무인들은 혹여라도 서광의 심기가 뒤틀릴까봐 전전긍긍하며 눈치를 봤다.
그러나 서광은 그런 허름함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서광의 머릿속에는 목함 생각만이 가득했다.
'백월비고의 열쇠는 반드시 내가 손에 넣고 말겠다.'
흑염방이 도관이나 절 여럿을 확보해 무공 비급을 뒤진 건 하루 이틀 된 일이 아니었다. 서광이 아는 곳만 해도 수십 군데가 넘었다.
하지만 그런 곳들 중 제대로 된 무공이 나오는 곳은 극히 드물었다. 대부분은 검증이 끝났고 그나마 확인이 안 되고 남은 곳 중 하나가 백월비고였다.
오래 전에 열쇠가 사라져서 관심을 받지 못했지만, 최근 백월비고에 관한 몇몇 소문이 돌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그 탓에 흑염방의 고수들은 분명 백월비고에 마공의 단점을 해결해 줄 상승의 도가 심법이 있을 것이라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저렇게 꽁꽁 잠가놓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서광도 그런 무인 중 하나였다.
'방주가 가장 먼저 열쇠를 손에 넣은 무인에게 들어갈 권한을 주겠다고 약속했으니...'
서광은 자신이 지금 열쇠에 가장 가깝다고 확신했다. 이제 남은 건 날파리들이 꼬이기 전에 목함을 열고 열쇠를 손에 넣는 것이었다.
진충비도한테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서신을 보낸 건 조금 걱정이 됐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 보내지 않았다면 진충비도는 무시할 수도 있었다.
상대는 특이하게도 포두, 아니, 판관의 자리에 오른 무림인이었으니까.
"답신이 늦는데 설마..."
"멍청한 소리 하지 마라."
무인 한 명이 걱정스럽게 말하자, 대주가 혹시라도 서광이 들을까봐 급히 입을 막았다.
"흑염방의 이름이라면 모를까 진충비도 또한 무림인! 독망검이란 별호를 듣고서 무시하진 않을 것이다."
절정의 경지에 오른 무인이라는 건 정사를 떠나서 막강한 의미가 있었다. 이런 무인의 부탁을 듣지도 않고 거절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체면을 무시하고 원수를 질 생각이 아니라면 무엇하러 그러겠는가.
새 판관은 지혜롭기로 소문난 사람이니만큼 사소한 부탁을 거절하면서 모욕을 줄 리 없...
"답, 답신이 왔습니다. 그런데..."
"?"
"그게..."
서광은 불길함을 느끼며 무인의 손에 들린 서신을 뺏었다. 놀랍게도 안에는 공사가 다망하여 시간을 낼 수 없다는 답장이 적혀 있었다.
"?!!"
서광은 분노하기보다는 당황했다. 흑염방하고 무슨 원한이 있는 게 아니고서야 진충비도가 이럴 이유가 없었다.
"네놈들. 혹시 진충비도와 충돌이 있었던 건 아니겠지?"
"저, 저희가 어찌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대인께서 오시기 전까지 아무런 충돌도 없었습니다."
"혹. 혹시..."
무인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그 무인에게 쏠렸다.
"무어냐? 말해봐라."
"진충비도는 청백리로 이름 높은 사람인데, 그래서 우리 제안을 받지 않는 것 아닌가..."
서광의 눈썹이 분노로 꿈틀거렸다. 안 그래도 짜증이 치솟는데 부하란 놈이 헛소리를 하니 칼에 피를 먹여주고 싶은 살심이 솟구쳤다.
그러나 의외로 흑염방의 다른 무인들은 동의하는 기색이었다.
"그, 그럴듯한 거 같습니다."
"맞습니다. 그 자는 정말 다른 관리들과 달라서..."
"닥쳐라."
살기 찬 목소리에 무인들은 입을 다물었다. 서광은 이를 악물고 내뱉듯이 말했다.
"진충비도 네놈. 오늘 일은 절대 잊지 않..."
-서광. 나오려무나.
"?!"
서광은 정체불명의 전음에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주변에는 전음을 보낼 만한 고수가 없었다. 흑염방 무인들이 전음을 보내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다른 고수가 보냈다 하더라도 인근에 보여야 하는데 아무도 없었다.
-서광. 안에는 아무도 없다. 난 문 앞에 있으니 나오도록 하려무나.
"어떤 미친 놈이...!"
분노해서 달려 나가려던 서광은 그제야 깨달았다.
문 닫힌 방 안에 있는 자신에게 대문 밖에서 전음을 보낼 만한 고수가 있나? 본인도 그럴 수가 없는데?
"어... 어느 고인께서...?"
-서광. 나는 무송진인이다. 늙은이를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게. 백월비고 건으로 왔으니.
"..."
잠시 상대가 누군지를 고민하던 서광은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려서 무기도 던지고 뛰쳐나갔다.
그 체면 없는 뒷모습에 흑염방 무인들은 독망검이 미친 게 아닌가 의심했다.
***
'미친 놈, 미친 놈, 미친 놈, 미친 놈, 미친 놈...!'
정 거사의 저택에 도착한 서광은 연우혁을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저건 정신 나간 놈이었다.
차라리 그냥 거절을 하던가, 아니면 자신이 태극검존과 인연이 있다고 말을 하던가(믿진 않았겠지만).
목함 좀 열어달라고 했다고 태극검존을 부르는 놈이 어디 있단 말인가. 진충비도가 정사지간의 괴인이란 말은 들었지만 정말 괴팍하기 그지없는 놈이었다.
앞을 보니 천화회에 소속된 고수, 탈령장 추수욱이 보였다. 저 놈도 서광 못지않게 넋이 나간 상태였다. 왜 불려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태극검존의 등장에 충격을 받은 게 분명했다.
'오해를 하고 있군.'
연우혁은 흑도칠문의 무인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에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아마 정 거사가 아니라 자신이 불렀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이런 허름한 저택의 주인이 그런 능력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상관없지.'
연우혁은 그런 오해를 푸는 대신 태극검존을 쳐다보았다.
태극검존은 백발이 성성하고 혈색 좋은, 길을 걷다보면 참 선하고 서글서글하게 생긴 노인이구나 싶은 도사였다. 어딜 봐도 무인이 내뿜는 칼날 같은 기세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서광. 추수욱. 둘 다 와줘서 고맙네. 늙은이가 불렀다고 불만은 없겠지."
"예, 예."
"없... 습니다."
둘은 여전히 혼이 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극검존은 자상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늙은이가 여기 온 건 백월비고를 여는 백월옥시의 주인을 확실하게 정해주기 위해서네. 여기 저택의 주인은 백월옥시를 주인에게 돌려주고 싶어하더군."
태극검존의 말에 서광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눈빛을 빛냈다.
역시 예상대로 이 저택의 주인인 늙은이는 괜한 평지풍파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하는 모양이었다.
"그렇습니까?"
"그런데 여기 추수욱은 자기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더구나."
"예?"
서광은 살기 넘치는 눈빛으로 추수욱을 쳐다보았다. 속셈을 들킨 추수욱은 움찔했지만 이미 들킨 만큼 부정하지 않고 대답했다.
"백월비고를 산 건 우리 천화회도 마찬가지다."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지금 백월비고를 누가 갖고 있는지 알고 있느냐??"
"강제로 뺏고 있는 거겠지."
"이 놈이 감히...!"
서광의 눈빛에 살기가 짙어지자 태극검존은 손짓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살기가 흩어졌다. 서광은 자신이 뭘 당했는지 몰라 눈을 깜박였다.
'술법!'
연우혁은 태극검존이 술법을 썼음을 깨달았다. 영안으로 한 번 봐서는 알기 힘들 만큼 대단한 술법이었다.
"늙은이 피곤하게 떠들지 말아주게. 둘이 잘 이야기해서 백월비고를 어떻게 할지 결정하게나. 싸우지는 말게. 둘 다 죽여 버릴 테니. 보름 안에 결정을 마치게. 보름 안에 마치지 않으면 백월옥시는 내가 갖도록 하지."
태극검존이 열쇠를 흔들자 둘은 깜짝 놀랐다.
"검존께서 여신 겁니까?!"
"여기 판관이 열었네. 자넨 날 따라오게."
연우혁이 태극검존의 뒤를 쫓아 사라지자, 두 무인은 자리에 남은 정 거사에게 외쳤다.
"어떻게 열었소?!"
"..."
판관 연우혁 (5)
방에 들어간 태극검존은 '끙' 소리를 내더니 먼저 의자에 앉았다. 그 모습이 마치 늙은 촌부 같아서 믿기 힘들 정도였다.
"뭐하나? 앉게."
"아. 감사합니다."
"상단전이 열렸군. 영기가 아주 많이 쌓였고."
"!"
연우혁은 태극검존의 말에 놀랐다.
아직 진맥을 하거나 가까이서 보지도 않았는데 태극검존은 연우혁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한 것이다.
"제가 처한 상황을 아시는군요!"
"그럼 알지 모르겠나. 나이 들면 생기는 건 주름과 연륜뿐인데. 아마 청허진인 그 친구가 별 도움이 안 되었겠지?"
"아닙니다. 무공만으로 감사할 뿐입니다."
이건 진심이었다. 청허진인이 해결해주지 못했다 하더라도 현청벽사신공 같은 심법을 전수해준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은혜였으니까.
"심성이 됐구나. 청허진인이 왜 전수해준지 알겠다. 현청벽사신공은 좋은 심법이다. 네 상황과 잘 맞겠지. 귀신 들려서 죽는 건 막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해불택신공하고 같이 익히는 것도 훌륭하다. 아마 너 정도 지모라면 그것도 같이 계산해뒀겠지?"
무공을 이야기하는 태극검존은 어느새 젊은 시절로 돌아와 있었다. 방금까지 늙은이처럼 굴던 건 어디 갔는지 쾌활하고 빠른 속도로 이야기했다.
연우혁은 그 변화에 당황하면서도 일단 대답했다.
"무슨 소리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현청벽사신공을 익히고 나서 하해불택신공을 익힌 게 아니었나?"
"예... 하해불택신공을 먼저 익혔습니다."
"사파의 심법이란 걸 못 느꼈나?"
"당장 칼 맞아 뒤질 수도 있는 포쾌라서 일단 내공을 쌓고 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
태극검존은 오늘 처음으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무모한 놈이었다.
"두 심법은 잘 어울린다. 현청벽사신공은 영기를 사용해 삿된 침입이 없도록 몸을 굳건하게 하는 심법. 하해불택신공은 삿된 기운까지 끌어들여서 내공으로 만드는 심법. 현청벽사신공이 걸러주는 역할을 하니 서로 상승의 효과가 있는 것이다."
"!"
연우혁은 놀랐다.
'그러고 보니 하해불택신공의 부작용을 딱히 느껴본 적이 없었다.'
이제까지는 경지가 낮고 내공이 별로 쌓이지 않아서 불순한 내공을 느끼지 못한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던 것이다.
영안을 갖고 있었음에도 생각하지 못하다니.
"눈앞에 있어도 알지 못하면 보지 못하는 게 있는 법이지."
태극검존은 무형의 장력을 만들어냈다. 격공장이라는 절정의 수법이었다. 허공에서 아무런 전조도 없이 장력을 격발시키는 고절한 수법에 연우혁은 감탄했다.
"눈이 좋다고 자만하지 말고 언제나 깊게 생각해라."
"명심하겠습니다."
"좋아! 슬슬 본론을 꺼내보자. 정 거사 그 친구는 한 수 가르쳐달라고 부탁하더군. 인연도 있고 제법 기특하기에 이렇게 왔다."
"기특하다면...?"
"무인이 판관 노릇을 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정 거사 같은 자를 아무 대가 없이 도와준다는 건 더 놀라운 일이니까."
"판관은 원래 백성의 청을..."
"원래란 건 없다. 정파 무인 중 진짜 협객이 얼마나 있겠나? 사파 무인 중 진짜 악인이 얼마나 있겠나? 판관이 아무 대가 없이 청을 들어주는 건 흔치 않은 일이고. 그래서 보답해주고 싶었다. 저 녀석은 나름 어렸을 때부터 봐온 인연이 있으니."
연우혁의 얼굴에 떠오른 미약한 혼란스러움을 읽었는지 태극검존은 씩 웃으며 말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군. 태극검존하고 인연이 있을 정도의 사람이 왜 이렇게 가난하게 살고 있는지. 맞나?"
"예. 솔직히 놀랐습니다."
연우혁이 정 거사를 만났을 때 느낀 건, 가문의 명성에 비해 너무 가난하다는 것이었다.
당장 청군 정씨면 한경의 명문가고 지부 어른과도 친분이 있는 가문이라는데 그런 가문이 판관한테 뇌물 하나 주지 못할 만큼 가난하다니?
"간단하다. 벼슬도 안 하고 돈놀이도 안 하니 가난하지."
명문가가 존중받는 건 그 힘 때문이었다. 명성뿐만이 아니라 재산과 권력들이 합쳐져서 명문가의 힘을 만들었다.
그러나 정 거사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돈놀이가 싫으면 땅이라도 빌려줘야 하는데 그것도 수탈하기 싫다고 한사코 거부했고, 벼슬은 탐관오리들과 어울리기 싫다고 거부했다.
이러니 가문의 힘이 남아날 수가 없었다. 명성이야 남아있다지만 그런 명성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중앙에 올라갈지도 모르는 지부 대인이야 나중에 요긴하게 쓸지도 몰라 정 거사를 챙겨준다지만(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친하게 지내는 걸 수도 있었다), 대부분 평생을 한경에서 보낼 관리들이 정 거사를 챙겨줄 이유는 별로 없었다.
잘 해줘봤자 덕 볼 게 뭐가 있다고 대접을 해주겠는가. 친하게 지내봤자 상소문에 욕이나 안 달리면 다행이었다.
"충고해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충고라니. 무슨 충고?"
"친하시다면 뭐라도 자구책을 만들어줘야..."
"내버려둬라. 정 거사에게는 정 거사의 길이 있다. 그리고 그 길이 딱히 틀린 길도 아니지. 저 녀석이 재물을 모으고 권력을 얻는 방법을 모르겠나? 알지만 참는 거다. 한경의 관리들은 아마 정 거사를 멍청하다고 생각하겠지. 돈을 벌 기회도 스스로 마다하고, 벼슬도 스스로 마다하니."
태극검존은 허허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잘 생각해봐라. 탐욕을 부리다가 서로 싸워서 공멸한 가문이 몇 개더냐? 벼슬에 나갔다가 가문이 멸문한 벼슬아치는 몇 명이고? 그러나 정 거사의 명성은 날이 갈수록 빛날 뿐 더럽혀지진 않을 것이다. 후손들도 이 이치를 안다면 영원히 명예롭겠지. 만약 정 거사가 이렇게 살아오지 않았다면 제갈세가가 매파를 보내고 내가 도우러 왔겠나?"
"!"
연우혁은 솔직히 놀랐다.
솔직히 정 거사가 지나치게 검약한 것 아닌가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볼 수 있다니.
만약 정 거사가 다른 한경의 명문가처럼 적극적으로 축재했다면 태극검존은 정 거사의 서신을 무시했을 것이다. 버렸기에 오히려 얻은 것이다.
"이건 너한테도 적용되는 말이다. 너는 축재할 기회를 버리고 백성들의 청원을 들었으니."
"제가 딱히 은자를 거절하는 건 아닙니다."
연우혁은 솔직하게 말했다.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 고수 앞에서는 거짓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차이 없다. 욕심이 없지만 행실은 탐욕스러운 자. 욕심은 많지만 행동은 청빈한 자. 내가 보기엔 후자가 훨씬 더 욕심 없는 사람이다. 대개 사람의 심정이란 건 정(精)과 기(氣)의 영향을 많이 받기에 믿기 힘들다. 때로는 스스로도 속이곤 하지. 욕심이 있다 해서 청백리가 아니겠나? 정 거사도 욕심은 있다. 참을 뿐이겠지."
"..."
태극검존의 말은 이상하게 연우혁을 생각에 잠기게 만들었다. 반쯤은 무의식적으로, 연우혁은 질문을 던졌다.
"태극검존 님. 최근에 임 대협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연우혁은 녹림대왕 임가적과 그 임가적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초절정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오욕칠정을 버려야 한다니.
"정말 벽을 넘기 위해서는 임 대협의 말이 맞는 겁니까?"
"임가에게는 그 길이 맞을 거다. 그 놈은 녹림에 지나칠 정도로 열정을 쏟았다. 자신의 무공보다 녹림을 더 사랑했지.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달았을 거다. 자신이 벽에 막혔다는 것을."
태극검존은 말을 하고 나서 손을 뻗었다. 연우혁이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알고 막은 것이었다.
"나는 무당에서 무공을 수련했지만 무당의 일에는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립까지는 무공에 몰두했고 불혹부터는 술법에 관심을 가졌지. 지천명 때는 협행을 다녔다. 평생을 내가 추구하는 도(道)를 위해 살았지 어느 누구를 위해 살지 않았다. 초절정의 경지는 그것뿐이다."
"..."
자신은 어떻게 하면 되는지 물으려던 연우혁은 태극검존의 말에 압도되었다.
"관로(管輅)가 천기를 누설하면 천벌을 받게 될 줄 알면서도 남두성군과 북두성군의 일에 왜 개입해서 조안의 수명을 늘려주었겠나? 그게 자신의 업이고 신선이 되기 위한 공덕을 쌓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너도 알고 있을 것이다. 네가 쌓은 선업이 영기로 모여 있으니. 계속해서 정진해라. 두려워하지 말고."
"!"
태극검존의 말은 연우혁이 이제까지 해왔던 생각을 바꾸게 만들었다.
이제까지 연우혁은 상단전에 쌓았던 영기가 골칫덩이라고 생각했었다. 신통력이나 술법은 쓸 수 있다지만 그걸 제외하면 목숨만 위협하는 양날의 검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태극검존은 그 영기야말로 나중에 초절정의 벽을 깰 힘이니 더욱 정진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영기만 더욱 충만해진다면... 지금 가진 내공과 단전만으로 정기신을 하나로 만들 수 있습니까?"
"그건 아니다. 내공을 쌓고 육신을 단련해라. 정과 기가 너무 허약하다."
"...예."
살짝 기대했던 연우혁은 시무룩해졌다.
대답을 마친 태극검존은 허공에서 파초선(芭蕉扇)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연우혁을 탁 쳤다.
기묘한 영기의 흐름과 함께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운이 몸에 깃들자 연우혁은 놀랐다.
"자. 이게 한 수다. 분명히 가르쳐줬다."
"감, 감사합니다?"
이해는 하지 못했지만 연우혁은 일단 감사의 뜻을 밝혔다.
현 무림에서 제일인으로 손꼽히는 몇 안 되는 고수가 이렇게 문답을 해준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은혜였다.
"감사하다고?"
"예? 예."
"그럼 이제 네가 내 부탁을 하나 들어줄 수 있겠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밖의 서가 놈하고 추가 놈은 아마 자기들끼리 결정을 마치지 못할 테니, 네가 둘의 이야기를 듣고 결정을 내려라. 저런 시시비비를 가리면서 시간을 낭비하기에는 내가 너무 늙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태극검존의 허리가 구부정해졌다. 무공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젊어진 것과 반대로 다시 순식간에 늙어진 것 같았다.
"잠ㄲ..."
연우혁은 당황해서 다시 말하려고 했지만 이미 태극검존은 일어나서 밖으로 나간 뒤였다. 느릿하게 걷는 것 같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거리가 멀어져 있었다.
"잠깐 기다려주십시오!"
뛰쳐나오자 태극검존은 보이지 않고 서광과 추수욱만 남아 있었다. 둘은 당혹스러운 시선으로 연우혁을 쳐다보고 있었다.
연우혁은 그 시선에서 이미 태극검존이 말을 마치고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진충비도. 천화회 놈들의 수작을 너라면 알고 있을 거다. 들어봐라! 이놈들은 비고를 갖고 있지도 않으면서 자기한테..."
서광은 다급하게 말했다. 그러자 추수욱이 말을 끊었다.
"판관 어른! 저희 천화회의 사정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언제가 괜찮으시겠습니까?"
"...!"
서광은 할 말을 잃었다.
탈령장 추수욱이 서광만큼의 고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버금가는 고수였다. 그런 놈이 자기보다 훨씬 배분도 낮은 무림의 후배한테 저렇게 공손하게 굴다니.
'저런 역겨운 놈 같으니!'
"추 대협의 제안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관청으로..."
"잠깐! 진충비도! 저 놈의 말에 속지 마ㄹ..."
"서 형은 무공은 뛰어나도 예의라고는 조금도 찾을 수 없구려! 한경의 판관에게 저게 무슨 무례인지!"
"이 놈이...?"
서광은 눈에서 불꽃을 튀겨가며 발검하려고 했지만, 추수욱은 씩 웃으며 덤벼보라는 듯이 가만히 서있었다. 만약 서광이 검을 뽑기라도 한다면 크게 다칠 텐데도 어떤 움직임도 취하지 않았다.
그 여유만만한 태도에 서광은 다시 한 번 태극검존의 말을 떠올렸다. 순간 머리에 피가 올라서 분노했었지만, 지금 일은 태극검존의 체면과 관련된 일이었다. 서광이 멋대로 무시할 수는 없었다.
"...연, 연 판관. 나도 흑염방의 사정을 말하고 싶소."
"예. 서 대협의 제안에도 감사드립니다."
다행히 연우혁은 서광을 타박하지 않았다. 서광의 얼굴이 밝아졌다. 과연 진충비도가 공명정대하단 소문이 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연우혁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골치 아픈 일이군.'
두 문파 중 어느 누가 백월비고를 가져야 하는가?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납득의 문제였다.
태극검존이 뒤에서 중재를 해준다지만 서로를 납득시키지 못하면 원한이 괜히 연우혁한테까지 흘러올 수 있었다. 태극검존의 이름이 평생 연우혁을 지켜주지는 못할 것 아닌가.
"일단 한 명씩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추 대협. 한 번 말해보십시오."
"고맙습니다. 판관 어른. 저희 천화회가 백월비고를 갖고 있지 못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분명 백월비고가 있는 도관을 샀는데, 지도에 나와 있는 곳은 전혀 다른 곳이었습니다. 그 탓에 조금 늦었는데..."
"도인이 가짜 지도를 보여준 겁니다."
"그건 아닙니다. 처음에 분명 지도를 보고 확인까지 했습니다만..."
"시간이 지나면 지워지는 먹이 있습니다. 그걸 섞어서 그린 지도라면 처음에는 정확해도 시간이 지나면 부정확해지지요."
"..."
젊은 판관을 말로 꼬드겨보려다가 자기들이 도관 주인한테 어떻게 당했는지를 깨달은 추수욱은 입을 떡 벌렸다.
판관 연우혁 (6)
'감히...!'
도관 주인이 의심쩍다는 건 사실 머리가 달린 무인이라면 누구나 짐작하고 있었다.
아무리 옛날 일이라도 두 문파가 도관 하나를 비슷한 시기에 같이 사들이는 건 우연으로 생각하기 힘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당했는지까지 듣게 될 줄이야.
진충비도가 일의 내막을 단숨에 꿰뚫어보는 재주가 마치 젊은 시절의 천기수사 같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괜히 말씀드린 겁니까?"
연우혁은 추수욱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자 의아해하며 물었다. 추수욱은 황급히 부정했다.
"아닙니다. 그 당시 천화회 내에서 놈의 뇌물을 받고 지껄이던 놈들이 생각났을 뿐입니다."
수상하면 바로 추적에 나서야 하고, 그러지 못하면 언제 새외로 빠져나갈지 모르는 일인데 뇌물을 받은 자들이 '정확한 사정을 모르는 상황에서 함부로 죽일 수는 없지 않느냐' 같은 소리로 시간을 끌었던 것이다.
결국 도인이 속인건지 천화회 무인들이 착각한 건지 알 수 없어서 흐지부지됐는데 이런 내막이 있었다니.
분노를 가라앉힌 추수욱은 헛기침을 하며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판관 어른의 안목이 이렇게 고절하니, 백월비고에 관련된 문제는 그리 걱정할 게 없겠습니다. 판관 어른. 그 괘씸한 도인 놈이 속임수를 썼다는 건 알겠습니다. 이번 일에서 가장 큰 잘못을 저지른 건 그 도인 놈이겠지요. 하지만 그건 이미 옛날 일이고, 판관 어른께서는 문제를 해결해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감히 한 말씀을 드리자면, 이런 경우에는 도관을 먼저 산 사람이 그 주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천화회가 도관을 먼저 샀다는 겁니까?"
"예!"
추수욱은 자신이 있었는지 안색이 밝아졌다.
"분명 입하(立夏, 5월 5일) 때 도관을 샀습니다. 문서도 얼마든지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판관 어른. 부디 저희 천화의 억울함을 풀어주십시오! 힘이 없다고 해서 의(義)마저 지켜지지 않는다면 실로 원통할 겁니다!"
연우혁은 추수욱의 말은 적당히 걸러서 들었다.
애초에 천화회가 흑염방에게 밀리는 세력도 아니었다.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도관에 별 관심이 없었던 건 그들도 백월비고의 열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정말 도관에 관심이 있었다면 힘으로라도 되찾으려고 했으리라.
아마 백월비고의 열쇠가 발견되었다는 소문을 듣자 그제야 생각이 나서 한 몫 챙길 생각으로 대기하고 있었을 텐데...
"예. 최선을 다해 확인해보겠습니다."
***
독망검 서광은 무인으로서의 자존심과 이번 일에 관한 실리 때문에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연우혁은 굳이 절정 고수에게 존대를 받고 싶진 않았기에 편하게 말했다.
"서 대협. 편하게 말씀해주십시오."
"고... 고맙소."
"도인이 한 도관을 두 문파에게 판 게 문제의 근원이지만, 지금 해결해야 하는 입장으로서는 결국 누가 가져야 하는가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역시 누가 먼저 샀는지가 중요할 것 같습니다만..."
"그거라면 어렵지 않소! 입하 때 도관을 샀소. 분명 천화회보다 먼저 샀을 것이오."
'이런 젠장.'
혹시라도 들킬까봐 철저하게 같은 날에 처리한 도인의 세심함에 연우혁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날짜까지 같으면 어느 편을 들어줄 근거가 없어졌다.
'사기 사건이 뭐가 있었더라...'
"진충비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오."
"말해보십시오."
"천화회 놈들이 한 악행에 대한 증거가 있소."
'당신 흑염방 소속이잖아...'
명색이 흑도칠문 중 하나인데 한다는 짓이 상대의 악행을 고발하는 짓이라니.
조금 체면이 없는 짓이었지만 어쩔 수 없기도 했다. 태극검존이 서로 검을 휘두르는 걸 금했으니 이렇게라도 상대를 깎아내려야 하지 않겠는가.
"얼마 전 내 부하 중 하나가 천화회 놈들에게 매수되어서 백월비고의 정보를 넘겼소. 천화회 놈들이 정말로 자신이 있다면 이런 짓을 왜 했겠소?"
누가 먼저 샀는지와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였지만 연우혁은 어떻게 잡아냈는지 궁금해져서 물었다.
"어떻게 잡아내신 겁니까?"
"주연(酒宴)을 즐기는데 패물이 하나 사라졌소. 부하 놈들을 뒤지려고 했는데 한 놈이 몰래 빠져나갔지 뭐요. 패물이야 나중에 찾았는데 그 자리를 그렇게 황급히 빠져나갈 이유가 뭐가 있겠소. 들키면 안 되는 게 품속에 있었던 거지."
"그 부하 분은 자백하셨습니까?"
"안 했소. 뻔뻔한 놈이지. 내가 그렇게 믿었는데 말이오. 언젠가 자백할 염치가 생기면 뇌옥에서 꺼내 그 낯짝을 한 번 봐야지."
"잘하셨습니다."
최근 소문이 자자한데다가 백월비고의 열쇠까지 꺼낸 진충비도한테 저런 말을 듣자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는지, 서광은 씩 미소지었다.
"내가 제갈세가 출신인 진충비도만큼은 아니어도 머리를 쓸 줄 알지."
"...제갈세가 출신 아닙니다."
"아니었소?! 이런."
"그리고 잘하셨단 건, 죽이지 않고 뇌옥에 가둔 걸 잘하셨단 겁니다. 정말 첩자였다면 그 자리에서 빠져나온 뒤 바로 천화회로 달려갔지 뭐하러 가만히 있다 잡혔겠습니까? 그 부하 분은 첩자가 아닐 겁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요? 그러면 왜 쥐새끼처럼 자리를 빠져나갔던 거요?"
"제 생각에는 아마 그 부하 분에게 가난한 친족이 많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주연의 음식은 달고 부드러운 게 많으니 친족들에게 가져다주고 싶었겠지요. 다만 음식을 주머니 속에 챙겼다는 게 들키면 보통 수치스러운 게 아닐 테니..."
연우혁의 말에 서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짚이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그 친구에게 노모(老母)가 있긴 한데."
"가서 확인해보십시오. 친족들이 여전히 가난하게 지내고 있다면 첩자가 아닐 겁니다."
서광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홱 돌아섰다.
독망검이 경공을 펼쳐서 멀리 사라지고 나서야 연우혁은 뒤늦게 깨달았다.
'...아차, 백월비고 이야기를 했어야 했는데!'
누가 먼저 샀는지 알아내야 하는데 웬 쓸데없는 사건을 풀어버린 것이다.
***
다음 날 서광은 밝은 얼굴로 관청을 찾아왔다.
"놈이 날 배신한 게 아니었소!"
"축하드립니다."
"정말 기쁘군. 하긴, 그럴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나도 이번에는 좀 많이 배웠소."
"그럼 이제 백월비ㄱ..."
"방에서 받는 녹봉으로는 친족들을 다 보살펴줄 수가 없더군. 그래서 오해를 사과할 겸 금고에서 은자를 꺼내 쥐어줬소. 어찌나 기뻐하던지."
독망검 서광은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믿었던 부하였던 만큼 배신감을 크게 느끼고 있었는데 아니었을 줄이야.
"그럼 백월ㅂ..."
"이 일에 보답하고 싶어서 은을 좀 가져오려다가 저번에 다른 부하 놈이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라서 관뒀소. 대신 개방 놈들에게 찾아가 은자를 맡겼지. 판관의 이름으로 한경의 가난한 사람들한테 좀 뿌려달라고. 내 살면서 거지 놈들한테 돈 준 적은 처음이오."
"..."
연우혁은 욕이 나오는 걸 순간 참아야 했다.
상대가 자신보다 고수기도 했고 태극검존에게 들었던 말도 있었기에 참을 수 있었다.
'이 미친 사파 새끼가 왜 안 하던 짓을 하지?'
"그럼 이제 백월비고 이야기를 하고 싶소만..."
"예. 안 그래도 추 대협께서도 곧 오실 겁니다."
"탈령장 그 놈은 없는 게 이야기하기 더 편할 텐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추수욱이 안으로 들어왔다. 추수욱은 의도적으로 서광을 무시하고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판관 어른. 일에 진척은 좀 있으셨습니까?"
"아. 예."
"!"
연우혁의 말에 두 무인은 긴장한 표정으로 각오를 다졌다.
'나는 오는 길에 판관의 이름으로 은자를 뿌렸다. 개인적인 호오로 내게 불이익을 주지는 않을 거다.'
'독망검은 내내 무례하게 굴었다. 저 자의 손을 들어주지는 않을 거다.'
"음. 흑염방과 천화회 모두 입하 때 도관을 사셨더군요."
"!!"
둘은 경악해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나중에 가필(加筆)한 거 아닙니까? 어떻게?"
"천화회 놈들은 첩자를 풀어서 우리를 염탐하던 놈들이오. 우리가 산 날짜에 맞춰서 바꾼 거요!"
"두 분 다 진정하십시오. 이런 거래는 문서가 관에도 남아 있는 만큼 가필하기 쉽지 않습니다. 아마 도인이 작정하고 같은 날을 노렸을 겁니다."
두 무인은 이를 빠득 갈았다. 흑도칠문이 웬 듣도 보도 못한 도인 놈 하나한테 이렇게 농락을 당할 줄이야.
"그, 그러면 어떻게 결정을?"
"음. 두 분. 혹시 두 분께서 타협하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비고 안의 물건을 꼭 혼자서 독점해야만 하는 건 아니잖습니까."
"절대 그럴 수 없소."
"판관 어른! 부당한 말씀입니다. 어떻게 정당한 주인이 도둑하고 같이 물건을 쓸 수 있습니까?"
연우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반반으로 나누라고 했을 때 애초에 들을 사람들이었다면 태극검존이 그냥 반반으로 나누라고 했을 터였다.
다행히 연우혁은 이들을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면 한 가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입하 전날에 도관을 산 분이 한 명 더 계십니다."
"..."
"..."
두 무인은 무슨 소리인지 몰라 눈만 끔뻑거렸다.
"산 사람도 아마 크게 관심이 없었는지 잊고 있다가 다른 사람한테 넘겼고, 또 그 다른 사람도 별 관심이 없었는지 다른 거래를 할 때 같이 넘겼는데... 하여간, 지금 갖고 계신 분은 이제 저기 옆채에 계시는 궁 판관이십니다. 본인께서는 갖고 계신지도 모릅니다만."
어제 서광이 신나게 달려가고 나서 연우혁은 뒤늦게 무슨 사건인지 떠올렸다.
둘이 내 도관이니 네 도관이니 다투다가 결국 존재도 모르는 다른 사람이 갖고 있었던 사건!
그러나 이번 사건에는 치명적인 맹점이 있었다.
두 무인 놈을 납득시키려면 서고에 먼지가 켜켜이 쌓인 수많은 장부들 중 그 당시의 거래에 찍은 직인을 찾아내야 했던 것이다.
영안이 있어서 망정이었지 아니었다면 보름 내내 뒤지다가 끝났을지도 몰랐다.
"말... 말도 안 됩니다!"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오?!"
"이거 보십시오."
연우혁은 낡디 낡은 장부를 하나 꺼내서 내밀었다. 직인이 찍힌 장부에 적힌 내용을 본 두 무인의 얼굴이 납빛으로 변했다.
"그럼 이제 두 분께서 타협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타협하겠소."
"하겠습니다..."
두 무인은 고개를 푹 떨구고 대답했다.
눈앞의 진충비도와 칼 한 번 맞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무시무시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
"보통 판관이 사파 놈들이 나눠먹는 자리를 직접 감독하러 나오는 겁니까?"
"아니."
적 포쾌의 말에 연우혁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둘의 뒤에는 흑염방과 천화회 무인들이 눈을 부라리며 서있었다.
-태극검존 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둘이 타협하고 안의 물건을 나누기로 했습니다.
-잘 했구나. 허허. 백월비고까지 따라가서 감시하다니. 자네 같은 명판관이 또 어디 있겠나. 이 늙은이가 보는 눈이 있긴 있어.
-...예? 백월비고까지 따라가서 봐야 합니까?
-그래야지. 저 무부들을 뭘 믿고 맡기겠는가?
태극검존은 거절하려고 해도 한사코 연우혁을 백월비고로 밀어 넣으려고 했다.
당연히 연우혁에게는 거절할 힘이 없었다. 결국 두 무인과 같이 백월비고 안에 들어가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무슨?"
"태극검존 같은 무인이 판관님을 백월비고 안에 보내려는 건 무언가 의도가 있어서 아니겠습니까? 솔직히 저 같아도 저 두 놈들에게는 주기 싫을 겁니다."
"!"
확실히 그럴듯한 말이었다.
도관의 비고란 건 결국 도가의 무공일 텐데, 흑도칠문의 마두들한테 넘기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터.
'설마 챙겨 가지고 나오란 건가?'
연우혁의 얼굴에 수심이 어리자 적 포쾌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좋은 기회 아닙니까?"
"결국 두 절정 고수 사이에서 몰래 비급을 훔쳐 갖고 나오란 소리잖나?"
"판관님이면 쉽게 하실 겁니다."
"..."
너무 어이없는 말을 태연하게 하자, 연우혁은 순간 적 포쾌가 시비를 거나 싶었다.
그러나 적조는 진지했다.
"무슨 자신감으로..."
"진충비도."
독망검 서광이 먼저 도착해서 연우혁을 불렀다.
"여긴 저번에 말한 내 부하, 팔사편(八蛇鞭) 운영이오."
"대인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연우혁은 손을 내저었다. 언덕 위에서 도관의 비고 입구가 힐끗 보이자 서광은 문득 생각이 나서 물으려고 했다.
"사실 흑염방에서도 예전에 그 목함을 한 번 열어보려고 했었소."
흑염방의 군사로는 그 명성이 자자한 흑교서(黑狡鼠) 우거가 있었다. 나름 사파에서는 천기수사와 버금가는 명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흑교서도 저건 열지 못하고 도인 놈이 사기를 쳤다느니 악담을 늘어놓았었는데...
"좀 더 시도하셨으면 분명 열었을 겁니다."
"아니, 시도도 많이 했소..."
"이런 기관진식에 별 관심 없는 사람이 열려고 했겠지요."
"..."
흑교서가 들으면 자기 수염을 잡아 뜯을 소리를 태연하게 늘어놓는 젊은 판관의 모습에, 서광은 무림 후기지수 중에 괴인이 하나 나오긴 했다고 실감했다.
판관 연우혁 (7)
서광은 흑교서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이 젊은 판관도 흑교서가 열려다가 실패했단 사실을 들으면 생각이 좀 달라질 터였다.
그러나 그 때 마침 탈령장 추수욱이 도착했다.
미운 놈은 뭘 해도 밉다더니 그 말이 딱이었다. 서광은 인상을 찌푸렸다. 물어볼 기회를 놓친 것이다.
"늦었군."
"네 녀석이 빠른 거겠지. 판관 어른. 안녕하십니까."
"예. 반갑습니다."
"..."
둘이 서로 훈훈하게 인사를 주고받자 서광은 괜히 초조함을 느꼈다.
"...저번에 개방에 맡긴 은자는 확인해보셨소?"
"예. 독망검 대협께서 베푼 은혜에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고 있습니다."
사실 개방의 한경 분타를 맡고 있는 협걸개가 한 말은 '독망검이 뒤질 때가 됐나?'였지만 연우혁은 좋게 말해줬다.
그제야 좀 안심이 됐는지 서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판관 어른. 이건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목함 말입니다. 저희 천화회에서도 그걸 한 번 만져본 적이 있습니다만 열지 못했습니다."
"하하. 시간이 부족하셔서 못 여신 겁니다."
"아니... 저희 천화회에 지모(智謀)로 유명한..."
"..."
서광은 묵묵히 입을 다물고 탈령장이 하는 말을 들었다.
이상한 이야기였지만, 처음으로 저 밉살스러운 놈과 마음이 통한 기분이 들었다.
***
백월옥시를 끼워넣자 온갖 기관진식이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비고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림의 기관진식은 허가 받지 않은 침입자들이 힘으로 부수고 들어오는 걸 경계했기에 외부의 침입자들을 막음과 동시에 유사시 안의 물품들을 파괴하는 역할도 담당했다.
서늘한 공기가 안에서 밀려들어왔다. 꽤 오랫동안 밀폐되어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먼지 냄새는 나지 않았다. 안의 기관진식이 공기가 썩지 않도록 잘 순환시켰다는 뜻이었다.
'진짜 뭐가 있나?'
영약이나 상승무공에 관심 많은 연우혁이 백월비고와 관련된 옥시를 봤을 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건, 백월비고에 크게 기대하는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백월비고와 관련된 사건 중 연우혁이 알고 있는 건 두 가지.
하나는 간 큰 도인이 두 문파한테 사기쳐서 같이 팔아먹은 사건이었고, 다른 하나는 목함에 든 열쇠를 꺼내달라고 찾아온 사건이었다.
둘 다 별로 대단한 사건은 아니었다.
심지어 후자의 경우에는 흑도칠문이 찾아오지도 않았었다. 웬 이름 모를 작은 무관이 새로 건물을 사들였다고 찾아왔다.
백월비고에 정말 대단한 무공이 있었다면 그것과 관련된 무슨 일이라도 좀 일어났을 텐데 연우혁의 기억에는 그런 게 없었다.
'정말 대단한 무공이 있다면 원래 있던 도관이 모르는 것도 이상한데.'
한 도관을 둘, 아니 셋한테 팔아먹을 정도로 영리한 자가 정말 대단한 무공 비급을 그냥 내버려뒀을 것 같진 않았다.
연우혁은 적조가 태극검존의 뜻을 오해한 것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그냥 두 마두가 싸우지 않고 일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붙여놓은 걸 수도...
"이쪽부터 시작하지."
두 무인은 서고에 꽂힌 서책들을 하나씩 읽기 시작했다. 빠르게 훑어 내려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상대의 움직임을 경계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암습을 걱정하기보다는 상대가 비급을 먼저 발견하고 몰래 치울까 걱정하는 기색이었다.
'양생법 책, 외단 만드는 책, 역사서...'
연우혁은 영안을 열고 두 무인이 보는 책들을 확인했다. 도관의 책들이라 그런지 도가에 관한 잡서들이 많았다.
건강해지기 위한 양생법 책은 원시적인 심법 책에 가까웠고 외단 만드는 책은 유익한 구석이 별로 없는 사이비 책이었다.
반 시진 정도 지나자 두 무인은 고개를 들었다. 확인을 모두 끝낸 것이다.
"다 끝났군."
"혹시 독망검이 수상쩍은 행동을 하지는 않았겠지요?"
"쓸만한 서책을 몇 개 찾았지. 네놈이 눈치챘을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책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잡서들 중에서 쓸만한 책을 찾았다니 독망검의 명성도 곧 무너지겠군!"
둘이 날 선 말을 주고 받는 사이 연우혁은 앞으로 걸어갔다가 돌아왔다.
"다음 서각으로 가시죠."
"잠깐. 진충비도. 여긴 진법이 있소."
서광은 팔을 뻗으며 말렸다.
군사나 책사처럼 진법이나 술법에 능하지는 못하지만, 절정의 경지에 오를 정도의 무인은 이 둘에도 어느 정도 견문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서광은 물론이고 추수욱도 여기 들어왔을 때부터 앞에서 느껴지던 진법의 기운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예. 생문을 찾아서 해제하고 왔습니다. 가시죠."
"..."
"..."
두 무인은 갑자기 스스로가 멍청해진 기분을 받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탈령장 추수욱은 속으로 생각했다.
독망검 놈이 똑같이 멍청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
세 시진 후.
서광은 책을 벽에 집어던졌다.
"빌어먹을 놈! 잡히면 포를 떠서 죽여주마!"
"이미 늙어죽었겠지."
"놈의 친족이라도 남아있겠지!"
"잡히면 말해라. 나도 머리통을 으깨버릴 테니."
두 무인은 허탈한 표정으로 서고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뒤졌음에도 불구하고 쓸만한 비급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원래 문파나 도관의 책들이란 게 대부분은 허섭스레기였다. 구파일방 정도는 되어야 역사가 있고 서고의 비급도 생기는 거지, 이름 모를 무관이나 도관에 비급이 있을 만큼 강호는 만만하지 않았다.
둘도 당연히 그걸 알고 있었지만 허탈함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냥 순순히 받아들이기에는 들인 시간과 노력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연우혁은 조용히 기다렸다. 태극검존의 이름이 있다지만 두 절정의 무인이 아주 예민할 때 잘못 건드렸다가는 순간적으로 이름을 잊을 수도 있었으니까.
'...저런 곳이 있었나?'
기다리던 연우혁은 서각 사이에 난 길 끝에 처음 보는 모퉁이를 발견했다.
기억에 따르면 지도에 저런 길은 없었다. 들어와서 둘러봤을 때에도 저런 길은 없었고.
연우혁은 별 생각 없이 발을 내밀었다. 영안으로 봤을 때 이상한 함정이나 진법은 없었다.
모퉁이를 돌자 그 끝에는 연무장이 있었다. 도관의 연무장이 참 특이한 곳에 있다 싶어서 연우혁은 두 무인을 불렀다.
"여기 연무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연우혁은 당황해서 고개를 내밀었다.
방금까지 있었던 두 무인은 보이지 않고 캄캄한 어둠만이 서고를 채우고 있었다. 그 이질적인 상황에 연우혁은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꼈다.
쿵!
갑자기 날아오는 공격에 연우혁은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어느새 연무장에서 적이 튀어나와 연우혁 앞까지 도착해 있었다. 적은 현란한 움직임으로 주먹을 지르고, 회수하고, 휘두르고, 웅크렸다.
연우혁은 쌍사보법으로 물러나며 공격을 피했다. 영안으로 볼 틈도 주지 않고 매섭게 날리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공간을 점령하고 있다!'
허공을 채우는 권영에 연우혁은 자신이 수세에 몰렸음을 느꼈다. 안 그래도 좁은 서고 복도 때문에 쌍사보법의 위력은 크게 줄어든 상태.
연우혁은 작정하고 주먹을 내질렀다. 손해를 보더라도 상대의 기세를 잠깐 끊어야지 거리를 벌릴 수 있었다.
금의위가 시전하는 제대로 된 위국권법이 연우혁의 손에서 펼쳐져 나왔다. 그 사이 증가된 내공과 쌓은 경험이 연우혁이 영안으로 처음에 이해했던 무리(武理)와 합쳐져 상승의 효과를 만들어냈다. 연우혁은 전력으로 뻗은 자신의 권초가 생각보다 강맹해 놀랐다.
상대의 내공은 다행히 연우혁에 비해 높지 않았다. 권격끼리 부딪치자 둔탁한 소리와 함께 상대의 권영이 점점 줄어들었다. 연우혁은 상대를 몰아붙이기 위해 더욱 더 집중했다.
'답답하다.'
연우혁은 답답함을 느꼈다. 좁은 복도에서 싸우느라 답답함을 느낀 게 아니었다. 상대에게 기습을 받은 뒤 우위를 점하지 못해서 느낀 것도 아니었다.
놀랍게도 답답함은 자신의 무공에서 나오고 있었다. 연우혁은 자신이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어서 혼란스러웠다.
평소 연우혁은 무공의 경지가 낮고 부족하더라도 별다른 불만 없이 상황에 맞게 최선의 선택을 했었다. 지금 당장 없는 내공, 없는 초식에 불만을 가진다 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연우혁은 자신의 권법이 이상할 정도로 답답하고 불만스러웠다.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기분이었다.
'...무공을 바꿔보자.'
연우혁은 어떻게든 틈을 타 탈혼비도를 꺼내보려고 했다. 지금 뻗을 수 있는 가장 강한 초식인 충칙진명(忠則盡命)을 펼쳐 상대를 친 뒤 몸을 비틀어서 탈혼비도를 준비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상대는 연우혁의 생각을 읽었는지 귀신 같이 따라붙었다. 연우혁은 답답함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생각해라! 탈혼비도를 쓰려면...'
연우혁은 더욱 더 깊숙이 생각에 잠겨들었다. 이는 위국권법과 탈혼비도의 근원적인 무리(武理)에 대한 고민이었다.
동시에 영안은 열려서 주변의 상황을 자연스럽게 읽어내고 빨아들였다. 평소와 다른 과감한 사용에 영기가 줄줄 소모되고 코피가 흘러내렸지만 연우혁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왜 위국권법은 탈혼비도와 같이 이어서 펼칠 수 없는가?
애초에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같이 이어서 펼칠 수 있는가?
'알맞게 바꿔야 한다!'
순간 연우혁의 뇌리에 번개가 치는 듯한 충격이 찾아왔다.
절정의 경지에 도달한 무인은 자신이 배운 무공을 다시 새로 만들어낸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무슨 소리인지 크게 와닿지 않았지만, 이제 연우혁은 그게 무슨 소리인지 느끼고 있었다.
두 무인이 같은 무공을 배우고 똑같이 완전히 대성했다 하더라도, 둘이 펼치는 초식의 투로는 분명 다를 것이다. 초식의 순서와 변화까지 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이 논리는 가장 처음으로 무공을 만든 선인에게도 들어맞았다. 선인과 후인이 같은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같은 위력이 나오겠는가?
후인은 결국 자신의 무공을 새로 깨달아야 했다.
연우혁의 답답함은 수많은 경험을 쌓고 깨달음을 얻으면서 자신의 무공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에 찾아온 것이었다.
태극검존의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눈앞에 있어도 알지 못하면 보지 못하는 게 있는 법. 무공을 완전히 이해했어도 끝은 없었다.
상대의 움직임을 꿰고 거리를 벌리며 정확한 빈틈에 탈혼비도를 쓸 수 있도록 권법과 보법을 변화시킨다. 연우혁의 생각이 무공을 조금씩 움직였다. 아직 고작해야 일류의 내공이었기에 변화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상대는 연우혁의 움직임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처음으로 빈틈을 드러냈다. 연우혁은 이를 악물고 탈혼비도를 펼쳤다.
푹!
짜릿한 소리와 함께 상대의 몸이 아래에서부터 흩어지기 시작했다. 믿기 힘든 기현상에 연우혁은 놀라서 쳐다보았다.
상대는 연우혁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영안이 있는데 진법에 걸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의문이 풀리기도 전에 다음 적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궁 판관의 얼굴을 한 적이었다.
"..."
질색하면서, 연우혁은 주먹을 뻗었다.
***
"헉, 헉...!"
연우혁은 온몸이 비명을 지르는 걸 느꼈다. 전신이 노곤해서 그냥 쓰러지고 싶었다. 내공은 물론이고 상단전까지 영안 혹사로 인해 욱신거렸다.
그러나 연무장의 적은 쓰러뜨릴 때마다 나왔다. 궁 판관은 물론이고 지부 어른까지 은자를 쏘아내더니 이번에는 오 포쾌가 쾌검을 뽑아냈다.
이쯤 되자 연우혁도 이게 서고의 무슨 시험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아까 새로 열린 길이 시험으로 인도하는 길인 모양이었다.
문제는 연우혁 수준으로 시험을 통과하기 힘들다는 거였다. 벌써 쓰러지기 직전인데 시험은 끝날 기색이 없었다.
'젠장. 아무리 그래도 퇴로는 보여야 하지 않나?'
영안으로 봐도 빠져나가는 길이 없었다. 아까 싸움에서 하도 혹사시킨 탓에 더 깊게 볼 힘도 부족했다.
순간 오 포쾌가 찌른 검이 어깨를 관통했다. 연우혁은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주먹을 휘두르게!
걸걸한 목소리와 함께 연우혁의 주먹이 갑자기 앞으로 뻗어져나갔다.
'강신술(降神術)?!'
자기가 쓴 적도 없고 익힌 적도 없는 술법이 펼쳐지자 연우혁은 당황했다. 그러나 연우혁의 몸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연자여. 당황해하지 말고 기억하게!
쾅!
권격이 터져나오자 오 포쾌가 일격에 사라졌다. 연우혁은 그 위력에 경악했다. 아까 새로이 초식을 변화시키며 뿌듯함을 느꼈는데, 그게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강신술이란 게 원래 이름은 거창하게 들려도 그렇게까지 극적으로 강해지지 않았다.
당장 연우혁이 남두성군의 힘을 빌리는 술법을 쓴다지만, 그걸 정말 남두성군의 힘이라고 한다면 모두가 비웃으리라.
당연히 쓰는 사람의 한계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위력은 그런 상식을 부수고 있었다.
"제 주먹이..."
-연자여. 뿌듯함은 미뤄두고 집중하게!
"...박살나고 있습니다!"
-...여긴 심상 속이니 상관없네. 다시 말하지만 집중하게!
판관 연우혁 (8)
'심상 속이라고?'
연우혁은 믿기지가 않았다.
환술이나 술법에 걸렸다고는 생각했지만, 이 자체가 현실이 아니라 심상 속이었다니.
손에서 통증이 몰려왔다. 아까 말도 안 되는 위력의 권격을 뻗은 탓에 손이 버티지 못한 모양이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고 살점이 드러났다.
'혈옥갑이 없다!'
그제야 연우혁은 이게 심상 속이라는 증거를 깨달았다. 살벌한 위력을 자랑하던 혈교의 신물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연자여.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질 걸세. 자네가 깨달아야 해!
말과 함께 연우혁의 몸이 멋대로 권법의 초식을 출수했다. 손이 망가진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아까보다 위력은 더욱 강맹했다.
연우혁은 통증을 참고 집중했다. 영안이 스스로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관찰했다.
'이건... 위국권법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런 강맹한 초식을 가진 권법이 위국권법이었다니?
이미 충분히 혼란스러웠지만 연우혁은 더욱 홀린 기분이 들었다. 연우혁은 이미 영안으로 위국권법의 초식을 완전히 이해한 상태였다.
그런데 연우혁의 예상을 넘어서는 위력이 어찌 이렇게 쉽게 나온단 말인가?
연우혁은 관찰하고 관찰했다. 주먹이 박살나서 뼈까지 드러날 지경이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 순간 연우혁은 다시 한 번 깨달음을 얻었다.
'의념이다!'
초절정의 벽 앞에 도달한 임가적이 연우혁에게 보여준 경지.
서로 같은 초식을 펼치고 동등한 수싸움을 하더라도 의념을 사용하는 고수의 일격은 피할 수가 없었다. 세상의 섭리가 고수의 일격에 따라 순간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강신술로 들어온 혼령은 순간순간 의념을 사용해 위국권법의 위력을 극대화시키고 있었다. 같은 진충보국 초식이라 하더라도 의념을 사용하자 뚫지 못하는 걸 뚫고 맞추지 못하는 걸 맞췄다.
순간 연우혁은 온몸의 기혈이 뒤흔들리는 듯한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 누군가 연우혁의 몸을 안에서 찢어발기는 기분이었다.
피를 토할 뻔한 걸 참는 사이 혼령이 다급히 사과했다.
-미안하네! 권강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강기는 무리였군!
"..."
연우혁은 대답할 기운도 없었다. 혼령은 마지막으로 연우혁의 몸을 비틀더니 자세를 잡았다.
'탈혼비도...!'
혼령이 탈혼비도를 쓰려고 한다는 걸 깨달은 연우혁은 눈을 부릅뜨고 집중했다.
복잡하지 않은 단순한 무리(武理)를 가진 탈혼비도는 빠르게 격살시키는 것에 모든 것을 건 암기술이었다. 그러나 혼령이 보여주는 탈혼비도는 무언가 달랐다. 연우혁이 아무리 내공을 많이 끌어모은다 하더라도 저 속도보다는 느릴 것 같았다.
푹!
'늦게 던졌는데... 어떻게...?!'
믿기 힘들었지만 연우혁은 분명히 보았다.
상대의 몸에 비도가 꽂힌 뒤 연우혁이 던지는 모습을!
말도 안 되는 빠르기였다.
-연자의 절초는 바로 이거였군. 나 한종리(漢鍾離)가 보여준 수법을 잊지 말게. 지금은 무리더라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연자의 무공은 올라갈 걸세!
연우혁은 그제야 끝났다고 생각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심상 밖으로 나가 현실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심상은 끝나지 않았다.
"...한, 한 대협. 돌려보내주십시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
일단 이 혼령의 강신술은 태극검존의 수법이 분명했다. 최근에 이렇게 고명한 술법을 굳이 연우혁에게 걸어줄 사람은 태극검존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심상은 백월비고의 절진으로 발동된 심상이었다.
즉...
'둘은 아무 상관이 없군!'
연우혁은 아찔해졌다.
당연히 몸이 망가지더라도 싸움이 끝나면 돌려보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니. 연우혁은 자신을 한종리라고 밝힌 자를 욕했다. 이거 완전 미친 놈 아닌가.
태극검존도 보통 미친 사람이 아니었다. 연우혁이 보기에 태극검존은 이 비고에 이런 함정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게 확실했다. 그게 아니라면 연우혁을 억지로 들여보낼 이유가 없었다.
그냥 들여보냈다가는 연우혁이 허무하게 깨질지 모르니 이런 술법을 걸어준 것이리라.
문제는 지금 연우혁의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하단 것이었다. 내공은 바닥이고 팔다리도 후들거렸다. 연우혁은 태극검존이 자신의 수준을 너무 과대평가한 게 아닌가 싶어 걱정이 됐다.
'이 상태로는 그냥 오 포쾌가 나와도 힘들 것 같은데...'
연우혁은 비틀거리며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연무장에서는 새로운 적이 나오지 않았다. 위에 발을 올리는 순간 연우혁의 머릿속에 깨달음의 덩어리가 들어왔다.
-...명시처주(明時處主)...지소설법문(指所說法門)...
범망공(梵網功)의 구결과 함께, 연우혁은 심상 속에서 깨어났다.
***
태극검존은 자리에 앉아 정 거사가 가져온 찻잔을 들어올렸다. 정 거사는 주름 잡힌 얼굴에 민망함을 드러내며 말했다.
"대접이 변변치 않아서 부끄러울 뿐입니다."
"네가 떳떳하면 그걸로 충분하단다. 아해야."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오래 계셔도 되시겠습니까?"
정 거사는 개인적인 친분으로 태극검존 같은 정파의 거두를 너무 오래 붙잡아놓는 게 아닌가 걱정했다.
태극검존이 문파의 문객마냥 문지기 노릇을 시켜도 될 무인은 아니지 않은가.
"일이 마무리되는 걸 보고 갈 거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그리고..."
"정 거사님, 정 거사님 계십니까!"
밖에서 들려오는 젊은 포두의 목소리에 태극검존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라고 하게."
연우혁은 매우 혼란스러운 얼굴로 들어왔다. 유약한 촌부 같은 모습으로 앉아있던 태극검존이 물었다.
"비고는 어땠나?"
"역시 알고 계셨습니까?!"
"술법이 사라진 걸 보니 종리권을 만난 모양이로군... 깨달음을 얻었길 비네. 팔선의 심득이 저렇게 선명하게 담긴 보물은 찾기 힘드니."
"!"
태극검존의 설명에 연우혁은 자신이 겪은 경험이 어떤 경험인지 깨달았다.
놀랍게도 태극검존은 신선이 남긴 심득을 자신한테 써준 것이다!
"팔, 팔선이라면 저도 알 만큼 유명한 신선들인데, 그런 심득을 무당의 제자가 아닌 제가 받아도 되는 겁니까?"
"원래는 안 되지. 무당의 제자들 앞에서는 말해주지 마라."
연우혁은 황당했지만 눈앞의 고수한테는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무공 이야기를 하자 태극검존은 젊어지는 것 같았다. 아까보다 훨씬 더 기운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깨달음을 얻었지?"
"의념을 어떻게 쓰는지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의념을! 좋구나! 보통이라면 초식의 버릇을 고쳐줬을 텐데."
연우혁 같은 경우는 영안으로 무공을 이해하고 펼쳤기에 초식에 군더더기가 없고 잘못된 버릇을 찾기 힘들었다.
그렇기에 종리권이 남긴 심득도 그 다음 단계를 가르쳐준 것이리라.
"네 수준에서는 가장 손에 익은 초식을 펼쳐야 이해가 될까 말까 할 텐데, 어떤 초식을 보았나?"
"탈혼비도란 암기술을..."
"권법이 아니라? 판관이 익힌 무공치고는 너무 사파 같은데."
연우혁의 얼굴이 흐려지자 태극검존은 농이었다고 말했다.
"암기술이든 권법이든 중요한 건 달라지지 않는다. 중요한 건 계속해서 정진해나가는 거지. 보고 겪은 심득을 잊지 말고 정진해나가라."
"감사합니다. 태극검존 님."
연우혁은 예를 갖춰 절했다.
다른 건 몰라도 태극검존이 이번에 베푼 은혜는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여러 술법을 봐왔던 입장에서 저렇게 생생한 심득이 담긴 술법의 가치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자. 그럼... 비고에서 뭘 갖고 나왔나?"
"범망공이 있었습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대충 짐작만!"
태극검존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설명했다.
범망공은 불문의 무공, 그것도 중원이 아닌 서장 불승들이 익히는 독특한 심법이었다.
불순하고 탁한 내공을 정순하게 만들어주는 내가기공!
연우혁도 냉수사 고송이 그걸 애타게 찾아다니는 걸 봤던 만큼 범망공을 비고 안에서 배웠을 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마 도관을 세운 도인이 숨겨놓았던 거겠지. 도가의 무공은 아니니 도관의 사람들이 보게 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이런 비급을 태워서 없애버릴 순 없으니."
"왜 저만 볼 수 있었던 겁니까?"
"욕심이 없었으니까! 비급을 뒤지러 온 놈들은 절대로 절진을 발동시키지 못했을 거다."
도관을 세운 도인은 범망공이란 비급을 처리하기 위해 꽤나 고민을 했던 모양이었다.
다른 문파의 비급을 멋대로 태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도인들에게 익히게 할 수도 없고...
그 결과가 서고에 깃든 절진이었다. 태극검존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덕분에 일이 만족스럽게 해결되었다. 두 놈은 성이 풀릴 때까지 비고를 직접 뒤져보았으니 더 이상 미련을 가지지 않겠지. 범망공은 수고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해라."
"감, 감사합니다."
사실 연우혁은 범망공이 별로 필요가 없었다. 이미 하해불택신공의 단점은 현청벽사신공이 막아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 생각을 읽었는지 태극검존은 담담하게 말했다.
"네게 필요 없는 무공이라고 생각해서 버리지 말고 곰곰이 고민해보도록 해라. 범망공은 흔히 볼 수 있는 무공이 아니니까! 공부하다 보면 네게 도움이 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대화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연우혁은 떠나지 않고 머뭇거렸다. 그러자 태극검존이 왜 그러느냐는 듯이 물었다.
"할 말이 더 있나?"
"혹시... 도관을 판 도인 말입니다. 태극검존께서 아시는 분 아닙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지?"
연우혁은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도관에 대해 유난히 자세히 아는 것도 그렇고, 일개 도인이 흑도칠문의 두 문파를 속였다는 게 매우 믿기 힘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정 거사의 일도 그랬다. 태극검존쯤 되면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고수들이 여럿 될 텐데 그들을 보내서 전언을 전해도 됐다.
그러지 않고 직접 왔다는 건 무언가 의미심장한 부분이 있었다.
"...제법이야, 제법이야! 맞네. 도관을 판 놈은 내가 아끼던 녀석이었네."
"무당의 제자였습니까?"
"꼭 무당의 제자여야만 아낄 수 있는 건 아니지. 녀석은 무재(武才)는 부족해도 도사의 자질이 뛰어났네. 차라리 관주로서의 자질이 뛰어났어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녀석은 도관을 팔면서 자신을 핍박한 문파들에게 보복하고 싶어했네. 그래서 도와줬지."
태극검존은 옛날 생각이 났는지 빙그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꼿꼿했던 허리가 굽어져 있었다.
"녀석이 갖고 도망친 열쇠가 정 거사의 손에 들어갔을 줄 누가 알았겠나... 세상 일은 언제나 예상하기 힘든 법일세. 경지에 올랐어도 그건 달라지지 않지. 진충비도.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사물을 세심히 살펴본다면, 한경에서 억울한 사람은 없을 걸세그려."
태극검존은 연우혁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연우혁이 고개를 들자, 태극검존은 이미 모습을 감추고 사라진 뒤였다.
***
"흑염방하고 천화회를 아나?"
"예. 무슨 일이십니까?"
일이 마무리되고 평소처럼 관청에 나온 연우혁은 궁 판관의 질문에 의아해했다.
"이 놈들이 나한테 선물을 보냈는데, 아무 말도 없이 보내서 당황스럽군그래!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
"...판관 어른의 명성을 존중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냥 받으시지요."
연우혁은 왜 두 문파가 선물을 보냈는지 알았다. 궁 판관 몰래 도관을 뒤지고 팔아치웠으니 혹시라도 나중 일을 대비해 선물을 보내놓은 것이다.
"그건 틀릴 소리다. 공물(空物)만큼 위험한 것도 없지. 하물며 저런 사파 놈들이라면 더더욱."
궁 판관은 꽤나 신경이 쓰였는지 혼자 중얼거리며 골똘히 고민에 잠겼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났는지 물었다.
"맞아. 정 거지 놈 일을 그냥 도와줬다면서?"
"헉. 급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연우혁은 다급히 일어났다. 궁 판관에게 무슨 욕을 얻어먹을지 두려웠던 것이다.
"덕분에 지부 어른이 크게 기뻐... 일 그렇게 열심히 할 필요 없다니까!"
궁 판관은 벌써 저 멀리 뛰어가는 연우혁을 보며 외쳤다. 무공을 익힌 놈이라 그런지 몸놀림이 보통이 아니었다.
'위험했다.'
연우혁은 앞으로 보름 정도는 궁 판관을 피해다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그런데 방 안에는 낯익은 얼굴들이 있었다.
"중관 어른... 아니, 주 공공!"
혈기 넘치는 시절에 젊은 관리들의 양물을 잘라댄 허 중관과, 허 중관의 윗사람인 주 공공까지 앉아있자 연우혁은 깜짝 놀라 급히 인사했다.
허 중관은 특유의 인자한 미소를 띠우며 축하했다.
"판관의 자리에 오른 걸 축하하네. 난 자네처럼 재주 좋은 포두는 분명 출세할 거라고 생각했지. 왜, 낭중지추란 말도 있지 않나."
"아닙니다.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하 교위께서 제 공을 제대로 써주신 덕분에..."
"..."
눈치 없이 다른 사람에게 감사하는 연우혁의 말에 허 중관은 자신도 모르게 주 공공을 쳐다보았다. 미동도 없었지만, 허 중관은 다급히 연우혁에게 눈짓했다.
'...아차!'
연우혁은 자신이 최근 판관의 자리에 오르고 무공 수련에 몰두하느라 둔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동창 환관들 앞에서 금의위를 칭찬하다니!
"사실 하 교위께서는 오만하고 교만한데다가 무례한 분이었습니다! 그 일을 도우면서 얼마나 괴로웠던지!"
"그, 그게 아닐세."
백성의 믿음직스러운 친구 동창 (1)
"아닙... 니까?"
연우혁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허 중관이 무슨 암시를 보내는 것 같았는데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그, 조금 더 생각해보게. 자네가 판관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 말이야. 물론 자네의 재주가 매우 뛰어나지만, 알다시피 조정의 관직이란 건 혼자서의 힘만으로는 될 수 없..."
"아!"
그제야 연우혁은 허 중관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깨달았다.
연우혁은 절대 배은망덕한 놈이 아니었다. 판관의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을 잊을 리 없지 않은가.
"지부 대인께서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
허 중관은 보기 드물게 인자한 표정을 무너뜨리며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자네는 그렇게 재주가 뛰어나면서 왜 눈치가 없나?"
"아, 아니..."
"그 작자는 확실히 발이 넓고 원수가 적은 호인이지만 딱 거기까질세. 자기 자리에 만족하는 만큼 분수에 넘치는 짓은 하지 않지. 자네에 대해 물어보면 좋게야 말해주겠지만 먼저 나서서 포두를 판관 자리에 추천할 리는 없지 않나."
'그럼 대체 누구를 말하는 거야?'
연우혁은 혹시 예전에 도와준 적 있는 현령인가 싶었다. 결국 허 중관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 공공..."
"예?"
"주 공공! 주 공공께서 자네 공을 확실하게 써서 상신하셨단 말일세!"
"?!"
믿기 힘든 말에 연우혁은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동창이었기 때문이었다.
일개 포쾌도 동창의 악명은 잘 알고 있을 만큼, 동창은 만만한 조직이 아니었다.
이들은 환관들로 구성된 만큼 폐쇄적이었고 관리들의 뒷조사를 하는 만큼 위협적이었다. 가끔 지역의 관리들을 시켜 일을 돕게 했다지만 이들이 보상하는 건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주 공공이 저번 혈교 관련 사건에서 연우혁의 공을 정확히 써서 보고해줬다니.
놀라움과 동시에 연우혁은 바닥에 엎드렸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흑흑, 눈이 있어도 은인을 알아보지 못하다니. 이런 눈은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에잇, 에잇!"
"진, 진정하게."
연우혁이 이마를 바닥에 쿵쿵 부딪치자 허 중관은 다급히 말렸다. 기세가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그만두어라."
주 공공이 오늘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연우혁은 이마로 나무바닥을 부수던 걸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금의위가 도와줬다고 생각하는 것도 어쩔 수 없었겠지. 동창의 악명이 있으니."
"아닙니다! 제가 보는 눈이 없어서..."
"됐다. 그만두자꾸나."
주 공공의 목소리에서는 미세한 쓸쓸함이 느껴졌다. 연우혁은 위험신호를 느꼈다. 여기서 정말 그만뒀다가는 눈앞의 환관이 보여준 호의가 회수될지도 몰랐다. 원래 사람이 한 번 빈정상하면 쉬이 풀어지지 않는 법 아닌가.
"제가 주 공공을 생각지 못했던 건 제 공이 너무나도 보잘것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공을 누가 장계에 적어주리라 생각했겠습니까?"
"..."
허 중관은 속으로 어이없어했다.
'저건 좀...'
솔직히 저번 혈교 토벌 때 진충비도의 공이 작다고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억지였다. 본인도 그걸 알 텐데 저렇게 뻔뻔하게 외치다니.
'...효과가 있잖아?!'
허 중관은 주 공공이 말을 끊지 않고 가만히 듣는 부분에서 희망을 느꼈다.
평소 주 공공의 성격이라면 그만두라고 했을 때 지껄이는 놈의 혓바닥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가만히 듣는 것 자체가 희망적인 징조였다.
'힘내게, 연 판관! 자네는 할 수 있어!'
"한경에 돌아와서 포두로 일하면서도, 주 공공을 따라 돌아다니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한경의 일을 우습게 보는 것은 아니지만 제 자신을 진정 우국지사로 느꼈던 것은 그 때 갑판 위뿐이었습니다! 어찌나 그립던지!"
"금의위는?"
묵묵히 듣고 있던 주 공공이 질문 하나를 던졌다.
"예?"
"금의위와 같이 일을 해결했을 때와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흡족했는가?"
"어떻게 보름달과 반딧불을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말씀드렸듯이 금의위 교위들은 무례하고 무능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 교위!'
연우혁은 나중에 사과하기로 마음먹고 외쳤다. 하 교위라면 분명 이해해 줄 것이다. 동창 당두가 칼 들고 앞에 서있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주 공공의 지모와 비교하면 참으로 답답하고..."
"그랬단 말이지!"
주 공공은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아까와 달리 미약한 흡족함이 담겨 있었다. 연우혁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더."
"예?"
"더 말해보거라. 궁금하구나!"
"..."
연우혁은 그 후로 이각 정도를 더 금의위와 동창을 비교해가며 주 공공을 찬양해야 했다. 온갖 아부를 짜내면서 연우혁은 다짐했다.
'앞으로는 더욱 더 조심하겠다...!'
말 한 마디 실수로 이렇게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될 줄이야.
들을 만큼 들은 주 공공은 냉정하게 말했다.
"물론 금의위 또한 나라를 위해 충성을 바치는 조직이지. 하지만 이들 중에 무식한 무부(武夫)가 많고 더벅머리 선비들이 많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탓에 실수를 저지르는데, 드러낼 생각은 하지 않고 숨기기만 하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실로 옳은 말씀이십니다."
"동창에 대한 악명도 대부분 이들이 퍼뜨린 것이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연우혁이 노회한 관리는 아니었지만 동창에 대한 악명이 일개 조직이 허위로 만들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 정도는 잘 알았다.
그리고 사실 금의위의 악명도 만만치 않았다. 자기들도 욕을 먹는데 무슨 동창한테 뒤집어씌운단 말인가. 그냥 이 둘은 자기들이 한 짓으로 욕을 먹는 것에 가까웠다.
"아주 나쁜 놈들입니다!"
"그래. 연 판관. 그렇게 동창과 같이 일하는 게 좋았다니 여기 이렇게 오길 잘했구나. 네 재주를 조금 빌려볼까 생각했었는데."
갓 판관의 자리에 오른 연우혁은 동창과 어울려서 좋을 게 없었다.
주 공공이야 좋게 봐준다지만 다른 당두들이나 환관들이 좋게 봐줄지는 알 수 없는 일이고, 무엇보다 한경의 관리들이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걱정이었다. 아마 연우혁이 역병 걸린 것처럼 쳐다볼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제 평판과 명성, 앞길을 위해 주 공공과 거리를 두고 싶습니다 헤헤'라고 말할 만큼 연우혁이 멍청하진 않았다. 오늘은 무조건 아부를 해야 하는 날이었다.
"너무나도 기쁩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이걸 받아라."
주 공공은 서신 하나를 던졌다. 글자가 빼곡히 들어선 서신이었다.
연우혁은 그걸 훑어 내려가다가 하도 내용이 많아 그냥 영안을 열었다.
"읽으면서 듣도록 하거라. 장우촌에서 일어난 일인데, 거기 촌장의 고희(古稀) 축연에서 갑자기 촌장이 쓰러졌다는구나.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지만 평소에 워낙 정정하던 자라 의심쩍었다."
"혈교도와 상관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맞아!"
주 공공은 가면 너머로 미소 지었다. 충성스러운 부하도, 무력이 뛰어난 부하도 그리 귀하지 않았지만 그녀 본인보다 똑똑한 부하는 정말로 귀한 존재였다.
"저주나 술법으로 사람을 주살(呪殺)하는 건 혈교도들의 장기지. 고관대작은 물론이고 무림인들까지 이런 촌락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사소하다고 관심을 가지지 않지만, 진정 중요한 단서는 이런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저도 동의합니다."
연우혁은 살짝 감명받았다.
다른 당두들은 관리들의 뒤를 캐서 협박을 하고 뇌물을 받는 동안, 주 공공은 그래도 혈교를 쫓아 남들은 관심도 가지지 않는 자질구레한 잡무까지 보고받는 것이다.
꽤 높은 자리처럼 보이는데 대단한 의기였다.
"하지만 이건 혈교도들의 짓이 아닐 겁니다."
"어째서지?"
"보아하니 장우촌은 한 해 내내 서늘한 지하동굴이 있어 거기에 장빙고(藏氷庫)를 뒀다고 하는군요. 축연에는 거기에 있던 얼음을 꺼내 썼고 말입니다. 얼음 안에 독을 넣은 뒤 촌장에게 대접했겠지요."
시간이 지나면 얼음이 녹고 독이 나오기 마련.
그러나 허 중관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이보게. 연 판관. 알다시피 이런 축연 자리에서 독살은 하기 힘드네."
독의 고수라고 하면 언제 어느 상황에서든 간에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기 쉬웠지만, 독의 고수일수록 때와 장소를 가리기 마련이었다.
독이란 건 한 번 풀려나오면 피아를 가리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독의 고수들이 제일 까다로워하는 상황이 이런 연회나 축연 자리였다.
얼핏 보면 식기나 잔에만 독을 타면 될 것 같지만, 이런 자리는 음식이 오고가느라 식기나 잔이 쉽게 바뀌고 독이 전염됐다.
촌장 옆에는 촌장의 친족들이 앉아 있었고 이들도 얼음이 깔린 음식을 같이 즐겼는데, 독살이라면 왜 이들은 멀쩡하단 말인가?
"그야 그들이 범인 아니겠습니까? 아마 무슨 문제가 생겨서 촌장을 죽이려고 결심했을 겁니다."
"무, 무슨... 독은?"
"얼음이 녹기 전에 음식을 해치우면 그만입니다. 도중부터는 배가 부르다고 하면 될 테니 말입니다."
주 공공은 깊게 생각하더니 허 중관에게 말했다.
"촌장의 시신을 검시해보라고 하도록."
"예!"
"장우촌까지 갈 필요는 없겠구나."
주 공공은 서신에 불을 붙여서 태워버렸다. 그리고는 다음 서신을 꺼냈다.
"읽어보도록!"
"예."
"이 관리는..."
"이 관리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습격을 당했다는 건 거짓말일 겁니다."
서신을 읽은 연우혁은 바로 설명에 나섰다.
젊은 관리 하나가 부임지로 가다가 캄캄한 밤에 도적떼를 만난 모양이었다.
이 관리는 사로잡힌 뒤 갖고 있던 물건들을 전부 빼앗겼지만 목숨은 건드리지 않아 도적떼가 떠난 뒤 간신히 포박을 풀고 탈출에 성공했다.
이것도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었지만 주 공공은 혹시라도 혈교가 관리의 증표나 문서를 훔친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다.
"한밤중에 도적떼를 만났는데 도적놈들이 도(刀)를 쓰는지 부(斧)를 쓰는지, 두건을 썼는지 안 썼는지 지나치게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도적들도 빼앗은 물건을 봤을 때 관리인 걸 알았을 테니 얼굴을 봤다면 죽였을 겁니다. 아마 관리가 어딘가에서 물건을 잃어버리고 가짜 도적을 만들었겠지요."
"과, 과연!"
허 중관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다.
생각해보니 굳이 가서 확인해보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듣고 나니 이렇게 당연한 걸 왜 스스로 못 떠올렸나 싶을 정도였다.
'어엇?!'
감탄하던 허 중관은 주 공공을 쳐다보았다. 기뻐하실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불만스러운 기색이 느껴졌다.
'추측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
허 중관은 방금 연우혁이 말한 것 중에 무슨 문제되는 게 있나 생각해봤지만,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찾을 수가 없었다.
분명 제대로 일을 해냈던 것이다.
주 공공은 다음 서신을 꺼냈다. 또 다음 서신도, 다음 다음 서신도...
연우혁은 그 때마다 앉은 자리에서 해결해갔다. 허 중관은 그 때마다 감탄했고, 주 공공의 기분은 조금씩 안 좋아져갔다.
마지막 서신이 하나 남았을 때쯤 되자 연우혁도 눈치 챌 정도로 주 공공이 못마땅한 기색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제가 무슨 실례라도 저질렀다면 용서해주십시오."
"아니... 잘 하고 있다. 그래. 오늘 이 자리에서 다 해결하면 좋은 일이지. 하. 우국지사가 따로 없구나."
'뭘 잘못한 거지?'
연우혁은 허 중관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허 중관도 짐작이 가지 않았는지 희미하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마지막 서신이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주 공공은 말하다 말고 멈춘 채 기다렸다. 연우혁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설명하기 전에 알 것 같으면 지금 말해도 된다. 이 자리에서 해결하면 좋은 일이니까!"
"이것만으로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연우혁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가서 확인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아예 짐작이 안 가는 건 아니었지만 어떤 사건인지 확실하진 않아서 직접 가 확인해봐야 할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못마땅해하던 주 공공이 화를 내기라도 할까봐 연우혁은 눈치를 봤다. 그러나 놀랍게도 주 공공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래? 정말로?"
"예. 재주가 부족해서 죄송합니다."
"아니. 지금 해결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거다. 자랑스러워해도 좋다. 어느 판관이 이렇게 빨리 난관들을 해결할 수 있었겠느냐?"
"감사... 합니다?"
상대의 기분이 다시 좀 좋아진 것 같자 연우혁은 더욱 더 혼란스러워졌다.
'조울증이 있나?'
"준비하도록 해라. 가서 직접 확인해볼 테니."
주 공공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방에서 나갔다. 연우혁은 허 중관에게 질문을 던졌다.
"제가 무슨 실수를 저질렀습니까? 혹시 너무 잘난 척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면..."
"아니, 자넨 잘난 게 맞지. 으음. 나도 모르겠군그래."
연우혁은 물론이고 허 중관도 지모로는 부족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조금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실로 진정한 난제였다.
백성의 믿음직스러운 친구 동창 (2)
고민에 잠긴 채 밖으로 걸어 나오자, 궁 판관이 하급 관리와 이야기하는 게 보였다. 연우혁은 가볍게 목례했다.
"잠깐 와봐라."
"무슨 일이십니까?"
"여기 이놈의 고충을 네가 좀 해결해봐라."
궁 판관의 부름에 연우혁은 살짝 뿌듯함을 느꼈다.
판관이 다른 관리의 일을 해결해준다는 건 각종 민사에 끼어들어서 판결을 내려준다는 뜻. 당연히 궁 판관처럼 은자에 미친 새끼는 한 몫 챙길 기회였다.
그런 기회를 자신한테 양보해준다는 건 그만큼 연우혁의 능력을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뜻이었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어떤 일이길래?"
"그게 말입니다..."
하급 관리는 하소연을 시작했다.
한경에서 남쪽으로 이십 리 정도 떨어진 곳에 마을이 하나 있는데, 이 관리는 거기에 제법 큰 전답(田畓)을 갖고 있었다.
전답이 있으면 물을 대는 저수지와 보(洑)도 근처에 있기 마련. 이 시설은 농사에서 생각보다 중요했다.
그런데 작년부터 근처에 생긴 문파와 충돌이 생긴 것이다.
-여기 수당(水塘)은 우리 쪽에 더 가까운데 왜 네놈들이 멋대로 쓰는 것이냐?
-무슨 소리십니까? 분명 이 수당은 여기와 가장 가까운데...!
-헛소리하지 말고 꺼져라!
문파라고 하기에는 민망할 수준의 무관이었지만 마을에서는 제법 규모가 됐고 또 관주가 사업 수완이 있는 모양이었다. 전답의 주인이 관리라는 걸 알자마자 재빨리 한경에 뇌물을 바쳤다.
통판이나 판관 정도 되는 한경의 고관이면 모를까 일개 하급 관리들까지 챙겨주진 않는 것이다. 그 때부터는 그냥 누가 더 뇌물을 잘 바치나의 승부였다.
그리고 여기 이 하급 관리는 궁 판관이란 연줄을 붙잡은 게 분명했다.
"저런."
"억울해 죽겠습니다. 똥물에 빠뜨릴 무림인 놈들! 국법이라고는 신경도 안 쓰는 화적떼 같으니라구!"
궁 판관은 이해한다는 듯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인 놈들만큼 귀찮은 도적떼도 없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 상황은 꽤 귀찮게 꼬였다.
원래 촌락의 농사와 관련된 문제는 예민한 문제라 권력자가 아니라면 잘 건드리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도 목숨이 걸린 만큼 결사저항할 가능성이 높은 문제였다.
즉 무관 관주가 '저 저수지는 우리에게 권리가 있고 이런저런 근거가 있습니다'하면서 열심히 뇌물을 바치면, 하급 관리 입장에서는 결정적인 반론이 없는 한 뒤집기 쉽지 않았다. 보기에 둘 다 논리가 비등하면 그냥 내버려두는 게 제일이었으니까.
연우혁은 가만히 듣다가 물었다.
"무관 쪽 전답이 원래는 더 멀었습니까?"
"어떻게 아셨습니까? 맞습니다!"
만약 상대 관주가 사들인 전답이 원래 더 가까웠다면 억울하지도 않았으리라.
그러나 관리가 알기로 관주가 사들인 전답은 원래라면 저수지에서 더 먼 전답이었다.
궁 판관이 옆에서 말했다.
"아마 저번에 잘못 쟀거나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진 거겠지. 흔한 일이다."
땅이 가만히 있는데 거리가 바뀌는 게 말이 되나 싶었지만 원래 측량 기술이 형편없으면 잴 때마다 거리가 달라지기 마련이었다.
궁 판관은 어제 잰 길이가 오늘 달라지고 하는 일을 몇 번이고 봐왔기에 하급 관리의 억울함에 크게 귀 기울이지 않았다.
상대 관주의 땅이 원래 더 가까운 걸 지금 알아챘을 가능성도 높은 것이다.
"전답도 그렇고 못도 아마 마을에서 꽤 떨어져 있을 텐데, 거리를 어떻게 잽니까?"
"마을 밖에 관개비(灌漑碑)가 있습니다. 마을의 자랑 같은 거라 아직도 잘 관리가 되고 있지요. 그게 표식이라 거기서부터 출발해 거리를 잽니다. 서쪽으로 쭉 가면 전답들이 나오지요."
"침반(針盤)으로 방향을 재고 가겠지요?"
"예. 당연히. 측량하는데 방향은 잡아야 하잖습니까."
"다음부터는 측량할 때 옆에 있는 사람의 소매 안을 확인해보십시오. 아마 지남철(指南鐵)을 넣어서 방향을 틀었을 겁니다. 그러면 걷는 길이가 늘어나지요."
"...?!"
생각치도 못한 말에 하급 관리는 눈을 크게 떴다.
"그, 그런...?!"
"보아하니 꽤 오래된 전답 같은데 길이가 갑자기 달라지는 건 실수를 했다 하더라도 이상합니다. 속임수일 텐데, 관개비를 보고 서쪽으로 걸어가는 식이라면 방향을 조금만 틀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확인해보겠습니다!"
하급 관리는 지옥에서 부처를 만난 것마냥 감사해하며 물러났다. 연우혁은 궁 판관을 보며 말했다.
"다행히 잘 해결했습니다."
그러나 궁 판관은 흡족해하는 대신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내 잘못이다. 내 잘못. 말부터 해줬어야 했는데!"
"예? 그게 무슨..."
"내가 저 사건을 청탁받은 게 얼마 전인지 아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일 년 전이다."
"예...?"
일 년 전에 부탁을 받은 게 뭐가 중요한 건가 싶어서 연우혁은 의아해했다. 궁 판관은 답답해 죽겠다는 듯이 주먹으로 가슴을 쾅쾅 두드리며 외쳤다.
"나는 일 년 동안 그 핑계로 은자를 계속 받아냈단 뜻이다!"
"..."
그제야 말뜻을 이해한 연우혁은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었다.
'미친 놈 아닌가?'
"그걸 저렇게 한 번에 해결해버리다니. 아니다. 네가 저런 문제도 한 번에 해결해버릴 줄 몰랐던 내 잘못이지!"
"하, 하지만 판관 어른. 같은 관리인데 그렇게 일부러 기간을 늘리는 건 조금... 가혹하지 않습니까?"
"나는 내 일을 하는 것뿐이다. 저 녀석은 저 녀석의 일을 하는 것뿐이고."
누가 들으면 판관의 업무가 일 년 동안 동료 관리한테 은자 뜯어내는 거라고 생각할 당당함이었다. 연우혁의 말문이 막힌 사이 궁 판관은 마저 설명했다.
"저 녀석은 사사로 일하고 있는 만큼 이 근처의 식량을 관리하고 점검할 거다. 가서 열어보면 알겠지만, 아마 절반 정도는 모래가 섞여 있을 거다. 저 녀석부터 저 녀석의 전임자까지 야금야금 챙겨갔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그걸 핑계로 저 녀석의 은자를 갈취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럼 녀석도 내 힘을 빌릴 때는 마땅히 대가를 지불해야지!"
"아... 예..."
"행여라도 저 놈을 가엾게 생각하지 마라."
궁 판관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연우혁의 성정을 어느 정도 아는 만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한 것이다.
"저 놈이 마을 사람들에게 잘 대해줬다면 온 지 얼마 안 되는 무관 놈들 편을 들어줬겠느냐? 아마 무관 놈들도 처음에는 물값을 내겠다고 했을 것이다. 객지에 온 놈들이 무슨 배짱으로 횡포를 부렸겠나? 하지만 저 놈은 거절했지. 자기 전답밖에 모르는 놈이니까. 그래서 무관 놈들이 마을 사람들과 손을 잡은 거다. 마을 사람들도 원한이 있으니 도와준 거고."
"...!"
연우혁은 궁 판관의 안목에 감탄했다.
사건이 어떻게 굴러갔는지는 몰라도, 궁 판관은 오랫동안 판관으로 일한 사람답게 전후관계로 정확한 짐작을 하고 있었다. 실로 놀라운 안목이었다.
그 안목으로 자기 돈벌이에만 집중해서 그렇지만...
"그런 사연이 있었다면 괜히 알려준 것 같습니다."
"됐다. 어차피 달라질 건 없으니까."
"?"
"저 놈은 멍청해서 알려줘도 못 쓴다. 아마 지남철을 꺼내려고 할 텐데, 마을 사람이나 무관 놈들이 없앤 다음 증좌가 어딨냐고 하면 어쩌겠느냐. 게다가 지부 어른은 이미 무관 관주 편을 들어준 적이 있다. 체면이 있는데 바로 말을 바꾸시진 못하지. 저 놈도 그걸 깨달으면 포기하고 무관 놈들과 타협할 거다. 무관 놈들도 찔리는 구석이 있을 테니 적당히 양보하겠지."
"판관 어른께서는 정말 대단한 명판관이십니다!"
"족히 일 년은 더 받을 수 있었는데 무슨 명판관 같은 소리를 하고 있냐!"
"예..."
괜히 아부했다가 욕만 먹은 연우혁은 입을 다물었다.
'아. 맞아.'
뒤늦게 동창의 일이 떠오른 연우혁은 입을 열었다. 공공연히 자랑할 일은 아니었지만 자리를 비우는 만큼 궁 판관에게는 말해두는 게 나았다.
"판관 어른. 제가 잠시 자리를 비울 일이 생겼습니다."
"마음대로 해라."
원래 마음대로 하면 안 되고 엄연한 규율이 있었지만 궁 판관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판관이란 직위는 핑계를 붙이려면 얼마든지 붙일 수 있어서 백 리 밖의 강산을 유람하고 와도 괜찮았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갔다 왔다고 하면 누가 뭐 어쩐단 말인가.
"잠깐. 설마 또 거지 놈들 돕나?"
"개방 말입니까?"
"개방 놈들은 의외로 돈을 낸다. 그보다도 못한 놈들이 수두룩하지. 저번의 정 거사 같은 놈들 말이다."
"아."
"그런 놈들은 밑 빠진 독이라고 생각해라. 한 번 잘 해주면 계속 징징대는 놈들이지. 문제를 해결해줬으면 감사한 마음으로 자기들끼리 해결을 봐야지, 이리 와달라, 저리 와달라... 이런 곤장을 쳐도 모자랄 괘씸한 놈들 같으니!"
궁 판관이 싫어하는 부류 중 하나가 한경 밖의 호족 가문들이었다.
호족이면 차라리 낫지 재산도 별로 없는 주제에 가문의 명성만 믿고 '판관이 와서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하면 뇌옥에 가둬버리고 싶었다.
"정 거사가 거지는 아닙니다만... 그리고 그 분 아닙니다. 동창에서 중관들이 나오셨는데, 일을 좀 도와달라고 하셨습니다."
"동창에서?"
"예. 그래서 얼마 동안은 한경 밖에 나가있을 것 같습니다."
궁 판관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서있었다.
그러다가 한숨을 쉬더니 자신이 쓰는 별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궁 판관은 상자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가슴팍에 댔는데도 비틀거리는 걸 보니 꽤나 무거운 모양이었다.
"네 녀석이 재산을 모았을 리는 없고, 이걸 갖다 바쳐라!"
"이게 뭡니까?"
연우혁은 의아해하며 상자를 열었다. 열자마자 안에서는 눈부신 은빛이 가득 뿜어져나왔다.
놀랍게도 이 커다란 상자에 묵직한 은덩어리가 가득 들어가 있었다!
"이, 이건...?"
은도 놀라웠지만 이걸 궁 판관이 줬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은을 내놓을 바에는 죽음을 선택할 사람 아닌가.
궁 판관은 동창에 대한 증오심을 눈동자에 드러내며 씹어먹듯이 말했다.
"그거라도 바쳐야 네 녀석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거다."
"판, 판관 어른...!"
연우혁은 살짝 감동했다.
궁 판관이 이렇게 챙겨줄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제가 만난 중관들은 이런 재물에 크게 관심이 없으신 분들이었습니다."
"...닥치고 그냥 가져가기나 해라!"
안 그래도 속이 쓰린데 젊은 판관 놈이 헛소리를 자꾸 해대자 열이 받은 궁 판관은 빽 고함을 질렀다.
저 놈은 대체 동창을 뭘로 생각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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