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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나는 라테스의 약재를 모두 확인했을 때 조금 놀랐다. 그는 한 가지 방면에선 분명 탁월한 의원이라고 할 수 있었다. 몸에서 독소를 빼내는 분야에서는 말이다. 땀을 내게 하고, 구토와 설사를 유발하는 것을 한토하汗吐下라 불렀는데, 대체로 효과를 볼 것이었다. 특히 독초에 중독되거나 돌림병이 돌 때는 탁월한 처방이었다.

하지만 사키는 좀 다르지.

그저 습하고 추운 환경 때문에 탈이 난 것. 라테스의 처방은 너무 과했다. 물론 던전에서 독초를 먹었다면 효과를 보았겠지만, 사키는 중독이 된 것처럼 보이는 증상은 없었다. 오히려 이런 공격적인 처방은 인간이 본래 가진 원기元氣를 해치게 만든다.

정확히 하자면 탈수로 인해 저나트륨 혈증이 생기지.

그러면 뇌가 붓게 되고, 사망에 이르게 될지도 몰랐다. 말 그대로 구더기 잡으려다가 초가삼간 다 태우는 격이었다.

"사키 씨, 현재 먹고 있는 약은 너무 과하게 구토와 설사를 유발할 뿐입니다. 제가 약을 바꿔서 드리지요."

사키는 대답하는 대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흘끔 라테스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었다. 아무리 기운이 없어도 분위기 파악은 할 수 있을 터. 지금으로선 일주일째 설사를 시킨 라테스의 약을 믿기 어려울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사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대답했다.

"네, 저... 부탁드리겠습니다."

당연히 라테스는 격하게 반응했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사키는 제 환자입니다!"

"가만있어 보게. 견학 중이지 않나?"

에드가 나서서 라테스를 달랬다. 라테스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에드를 쳐다보았다.

"자네가 정지오 의원을 견학 중이지 않느냐 이 말이야."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여긴 제 진료실이고...."

"아차. 그렇지. 자리를 옮기자고. 견학을 하려면 정지오 의원의 진료실에서 해야지."

에드는 여기서 나가자고 손짓했다. 라테스는 넋이 나간 얼굴로 서 있었다. 심지어 나도 어안이 벙벙했다.

에드 저 인간....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말. 그것은 농담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참말로 거짓 없으며 진실한 자기소개를 해 준 것이었다. 라테스에게서 쓴맛이 나자마자 퉤 뱉는 속도가 너무 빠르지 않은가.

반대로 말하면.

달면 삼키는 속도도 상당히 빠르다는 것. 그는 달달한 인간에 대해선 그만한 대우를 해 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면 이곳에서의 삶도 조금은 개선될 것이고,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환자를 치료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 줄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말했다.

"네, 진료소장님! 제 진료실에서 사키 씨에게 처방을 계속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오, 자네 이제 좀 빠릿빠릿하게 반응하는군."

에드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사키를 가리키며 계속했다.

"환자는 좀 부축해 주라고. 저래 가지고서야 계단을 오를 수나 있을지...."

"네, 제가 부축하겠습니다."

나는 사키의 한쪽 겨드랑이를 부축했다. 그러자 에드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계속했다.

"라테스 의원, 자네는 뭐 하나?"

"네... 네?"

"부축하란 말이 안 들리나?"

"네... 네, 알겠습니다."

라테스는 얼른 사키의 반대쪽 겨드랑이를 붙잡았다. 우리는 서로를 견학하는 와중에 사키를 부축하고 나의 진료실로 향했다. 라테스는 걸음을 옮기는 내내 한숨을 내쉬었다. 깊고 괴로운 숨이었다.

'라테스가 실력이 부족하지는 않아.'

다만, 지식의 깊이가 충분하지 않은 것이었다. 피리온이란 시골에서 익힌 의술이니 지식이 한정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진료실 안으로 들어서자 뜻밖에도 먼저 도착해 있는 사람이 있었다. 샤를이었다. 에드가 나 대신 질문을 던져 주었다.

"샤를? 자네가 여기 왜 있나?"

샤를은 늘 그렇듯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대답했다.

"저는 정지오 의원의 안내인 아닙니까. 그래서 이곳에 있었습니다."

"안내가 끝난 것 아니었나?"

"안내는 계속해야죠. 아시다시피 길드에서 주어진 임무이고, 아직 완료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뭐, 계속하게나."

에드는 몸을 돌리더니 나에게 고갯짓을 했다. 이제 들어와서 처방을 계속 내려 보라는 신호였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 사키를 앉혔다. 사키는 거의 주저앉는 것처럼 의자에 앉았다. 등받이가 없었더라면 뒤로 넘어갈 지경이었다.

"자, 그럼 해 보게."

에드는 다시 종이 쪼가리를 꺼내면서 입을 열었다. 내가 내리는 처방에 대해서도 기록을 남길 모양이었다. 그는 인성이 파탄 나긴 했어도 의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공헌하고 있었다. 결국 저러한 작은 기록들이 모여 지식이 되는 법이니 말이다.

어디 한번 아르타스의 의술 발전에 기여해 볼까.

나는 진료실 한쪽에 놓인 하얀 가운을 걸쳤다. 그런 다음 입을 열었다.

"먼저 흐트러진 기운을 바로잡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다음 약재함으로 향하는데, 옆에 수북이 쌓여 있는 침이 보였다. 분명 어제 침을 사용했지만, 숫자가 늘어나 있었다.

"어?"

"놀라지 마시게나."

샤를은 내가 놀란 이유를 알았는지 쓱 끼어들었다. 그는 씽긋 웃더니 계속했다.

"보이는 그대로야. 내가 하루에 한 번 보충하지. 매일 아침 자네가 사용한 만큼의 재료가 내가 사는 곳에 생겨나거든. 그걸 여기로 가져와 채우는 게 내 임무 중 하나야."

"아.... 그랬군요."

'하루에 사용할 양은 한정되어 있군.'

"근데 저 환자 상태가 안 좋은데 그렇게 넋 놓고 있지 말게. 어서 처방을 하라고."

"알겠습니다. 이제 정말 하겠습니다."

나는 약재함 앞에 섰다. 서랍 하나에 약재가 한 종류씩 들어 있었다. 곽향, 반하, 백출, 후박, 진피, 감초, 생강, 대조, 복령, 길경, 소엽, 백지, 대복피를 순서대로 꺼냈다. 그러면서도 에드에게 하나씩 보여 주었다. 에드는 그것들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자, 이것들로 약을 지을 겁니다. 약을 먹게 되면 위장이 안정되어 명치의 묵직한 느낌도 사라지고, 미열 또한 가라앉아 머리도 맑아질 겁니다."

"약을 짓는다고?"

에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네, 라테스 의원처럼 가루로 만들어 먹지 않고, 물에 넣어 끓일 겁니다."

"물에 넣고?"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물약인가?"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곳은 성수로 치료를 했다고 했지?

그렇다면 한약에 대한 반응은 괜찮을 것이었다. 에드는 바로 흥분했다.

"어서, 어서 해 보게!"

"먼저 냄비와 그릇들을 가져다주십시오. 아, 그리고 불을 붙이려면 바깥에 나가서 해야 할 텐데.... 바깥으로 나갈까요?"

"무슨 소린가? 동쪽에선 마법을 쓰지 않는가? 아니지. 동방의 마법사들이 얼마나 지독했는데. 라테스 의원, 자네가 나가서 도구들을 가져오게."

에드는 주절거리더니 라테스에게 지시했다. 라테스는 내켜 하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금방 바깥에서 냄비와 그릇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붉은색 덩어리 하나를 가져왔다.

샤를은 탁자 위에 붉은색 덩어리를 내려놓더니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러자 주먹에 짓눌린 자리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자, 불자리는 완성됐다네."

샤를은 붉은 덩어리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불자리요?"

"그렇다네. 이걸 모르나?"

"아, 아닙니다. 그럼 계속하겠습니다."

나는 물을 그릇에 부었다. 그리고 약재함에서 꺼낸 약재들을 깨끗하게 씻고, 하얀 약보자기 2개에 나눠서 쌌고, 하나만 물에 담가 놓았다. 시간이 조금 소요될 것이었다. 그사이 사키를 바라보았다. 그는 완전히 탈진한 상태였다.

"약을 먹으려고 해도 기운이 있어야 할 텐데, 사키에게 귀리죽이라도 줘야 할 것 같습니다."

"아, 그래야겠나?"

"네."

"그럼 먹여야지."

에드는 곧바로 라테스에게 손짓했다. 죽을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라테스는 또 툴툴거리며 바깥으로 나갔고, 금세 돌아왔다. 진료소에는 환자들에게 제공하기 위한 음식이 상비되어 있는 만큼 죽을 가져오는 것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사키는 천천히 숟가락으로 죽을 떠먹기 시작했다.

나는 물에 담가 둔 약재를 냄비에 옮겨서 불자리 위에 올렸다. 화력이 센지 금방 끓기 시작했다. 뚜껑이 움직이지 않도록 돌을 올려서 고정해 두었다.

부글부글 끓는 소리가 나더니 갈색의 거품이 살짝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냄비 곁에 모여 그 물방울을 살폈다.

"성수와 색깔이 똑같잖아?"

에드는 화들짝 놀라며 나를 쳐다보았다.

8화 한약입니다

냄비 뚜껑 아래로 흘러나온 갈색의 물방울. 그것은 겉면을 타고 흘러내리다가 금방 증발하며 사라졌다. 에드는 색깔을 더 관찰하고 싶었지만 더 이상 물방울은 나오지 않았다. 지오가 돌을 하나 더 가져와 냄비 뚜껑을 누른 탓이었다.

'내가 헛것을 본 게 아니라면....'

에드는 머리를 긁적였다. 분명 성수와 같은 색깔의 물약이 냄비에서 제조되고 있었다. 물론 효능이 보장되지는 않은 상황. 효능까지 보장된다면 신의 권능이 사라진 지금 성수에 버금가는 인기를 끌지도 몰랐다. 흘끔 지오를 바라보았다.

'저 녀석이 어쩌면!'

곧바로 3진료소의 에이스로 등극할지도 몰랐다. 만약 던전을 공략하는 실력자들이 지오의 명성을 듣고 치료받으러 온다면? 그때는 에드도 출세 가도에 오르는 것이었다. 상상만 해도 가슴이 벅차고, 심장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지오는 에드의 불타오르는 시선을 느꼈다. 왜 그런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분명 한약의 색이 성수와 같다고도 했다.

'성수가 한약과 색깔이 같았구나.'

기회였다. 실수하지 않고 처방만 잘한다면 금세 유명해질 것이고, 이곳에서도 수많은 환자를 볼 수 있을 것이었다. 거기까지만 상상해도 벌써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때 에드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물었다.

"방금 흘러나온 물방울이 성수와 색깔이 같은 것처럼 보였는데, 자네들도 그렇게 보았나?"

샤를은 어깨를 으쓱거릴 뿐 아무 말도 없었다. 라테스는 눈을 부릅뜨더니 대답했다.

"아뇨, 전 분명히 못 봤습니다."

"자네는 이제 눈도 맛이 갔나 보군."

"그, 그게... 아! 진료소장님, 혹시나 말입니다. 저는 보지 못했지만, 갈색으로 보셨습니까?"

"그랬지."

"그렇다면 여기서 의혹을 하나 제기하겠습니다."

라테스는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에드는 자신의 기분 좋은 상상을 깨 버린 라테스의 말에 인상을 팍 찌푸렸다.

"의혹이라니?"

"얼마 전 검거된 사기꾼들을 기억하실 겁니다. 흙탕물로 대충 성수의 색깔을 흉내 내다가 덜미가 잡힌 녀석들 말입니다."

"그런 녀석들이 있긴 있었지."

에드는 기억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 * *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듣다가 피식 웃었다. 라테스의 의혹은 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나는 더 참지 못하고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라테스 의원께선 정말 눈깔이 잘못된 거 아닙니까?"

"뭐, 뭐? 눈깔?"

"분명 약재들을 물에 씻고 넣었는데, 어느 틈에 흙을 섞겠습니까? 그렇죠?"

나는 에드와 샤를을 돌아보며 동의를 구했다. 그러자 샤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맞는 말이야. 내가 봐도 수작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네."

이제 모두의 시선이 에드에게로 향했다. 에드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라테스 의원, 자네는 지금 열등감에 빠져 있고, 질투에 미쳐서 헛소리를 주절거릴 뿐이야."

"미, 미치다뇨? 그럼 흙을 섞었다는 의혹은 접어 두겠습니다. 그럼 약의 색깔에 대해선 정지오 의원에게 물어보죠."

라테스는 지오를 지목하더니 계속 질문을 던졌다.

"그럼 어떻게 해서 갈색빛이 나게 했나?"

"제가 넣은 약재들이 끓는 물에서 우러나면 그런 색깔이 나오는 것뿐입니다."

"그, 그런가? 그렇게 단순한 문제인가?"

"색깔이 중요한 게 아니죠. 저는 약효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더 이상 색깔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화제를 돌렸다. 색깔은 그저 부차적인 효과일 뿐. 물론 성수와 색이 같으니 엄청난 홍보 효과는 있겠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환자를 낫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계속 이어 갔다.

"저기 있는 사키 씨의 병세가 호전되게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사키는 힘없이 죽을 떠먹는 중이었다. 이쪽에서 언성을 높이며 다투는데도 죽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라테스는 토라진 아이처럼 고개를 홱 돌렸다.

"흥. 그렇긴 하지. 하지만 자네의 처방엔 어떤 근거가 있나? 나만 해도 피리온에서 옛날부터 이어져 오던 처방을 쓴 거지."

"저도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처방을 쓴 겁니다. 라테스 의원께서 쓴 처방은 구토와 설사를 유발하여 해독 치료를 하는 토법吐法과 하법下法이라면 제 것은 중초中焦를 보존하는 처방입니다. 스승님인 허준께서도 대표 저서인 동의보감에서 이 약의 처방을 남겼지요. 처방의 이름은 곽향정기산입니다."

"과컁, 뭐, 뭐라고...?"

라테스는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 말의 대부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나로서도 더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 정도면 근거가 있다는 것쯤은 알겠지.

그때 사키는 죽을 다 먹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약이 다 지어지려면 시간이 남은 상황. 놀면 뭐 하겠는가. 사키의 몸에 침이라도 놓아 치료를 시작하는 편이 좋을 것이었다.

"사키 씨, 침상에 좀 누워 보십시오."

"아아, 저는 앉아만 있어도 괜찮습니다."

사키는 두 손을 내저으며 사양했다. 그러자 에드가 나서더니 내게 물었다.

"또 침을 놓으려는 건가?"

"그렇습니다."

"이런 질환에 대해서도 침을 놓으면 효과가 있나?"

"물론입니다."

"오호...."

에드는 두 눈을 빛내더니 종이 쪼가리를 주섬주섬 품에서 꺼냈다. 나는 다시 침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키 씨, 치료를 하려는 것이니 편히 누우십시오."

"제 몸에 침을 놓는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그런 치료가 생소하겠지만, 거의 아프지도 않을 거고 증세를 완화시키는 데에 도움이 될 겁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사키는 침상으로 향하면서도 주저했다. 그러자 에드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말을 하면 좀 듣게!"

"네, 나리."

내가 말할 땐 두 다리를 비비적거리며 걷던 사키도 귀족이 일갈하자 즉각 움직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침상에 바른 자세로 누운 것이었다.

나는 침을 챙겨서 그에게 다가갔다. 먼저 손을 내밀게 했다. 그런 다음 엄지와 검지 사이의 혈 자리 합곡合谷에 침을 놓았다. 이어서 엄지발가락과 두 번째 발가락 사이의 혈 자리 태충太衝에도 침을 찔러 넣었다. 사키는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에드의 눈치를 한번 살핀 다음 입을 다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 것 같은데.

내가 먼저 물었다.

"방금 뭔가 말하려고 했죠?"

"아, 아뇨."

"저는 압니다. 뭔가 물어보려고 했잖아요."

"...네, 네. 사실 맞습니다."

"배가 아픈데, 왜 손에 침을 놓는지 물어보고 싶었죠?"

"제 마음속을 너무나 잘 읽으셨군요. 헤헤."

사키는 멋쩍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에드의 눈치를 계속 살폈다. 그러자 에드도 사키에게 맞장구를 쳐 주었다.

"아, 그런 점은 나도 궁금하군. 어제 치료한 자는 발이 아프니 다리에 침을 놓아 대번에 수긍이 갔지만, 이번 건은 의외야. 어떤 이유에서 손발에 침을 놓은 거지?"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한국에서도 정말 많이 듣던 질문이었다. '배가 아픈데 왜 손발에 침을 놓나요?' 한국인들이야 모두 기초 교육은 받았기 때문에 신경에 대해서 어느 정도 배경지식이 있었다. 그래서 답변을 주기 편했다. 합곡과 태충에 침을 놓으면 흥분 신호가 중추 신경인 뇌로 전해지면서 다시 뇌는 억제 신호를 몸으로 흘려보내게 된다. 그래서 위장의 흥분 신호 또한 멈추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아르타스. 그런 소리를 하면서 상대를 이해시키려다간 상당히 괴로워질 것이었다. 따라서 나는 우리 조상들처럼 설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방금 침을 놓은 자리는 사관혈四關穴이라고 합니다. 기와 혈이 통하는 4개의 관문이죠. 그 자리를 자극하면 기와 혈의 소통이 원활해지기 때문에 위장의 통증이 완화되는 겁니다.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까?"

내 질문에 사키는 가만히 있다가 대답했다.

"어? 정말이에요. 계속 있던 통증이 그러고 보니 안 느껴집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침빨'이 잘 받는 사람이란 것이었다. 원래는 더 많은 곳에 침을 놓아야 했는데, 합곡과 태충만으로도 통증이 완화된다면 굳이 침을 더 쓸 필요는 없었다.

"좋습니다. 제가 침을 뽑을 때까지 가만히 누워 계시면 됩니다."

"가, 감사합니다. 속이 편하니까 살 것 같네요."

사키는 눈까지 감고 누웠다. 침을 놓고 나서 저렇게 편히 누운 환자를 보면 나도 절로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그때 사키는 갑자기 눈을 화들짝 놀라며 뜨더니 에드에게 물었다.

"나리, 눈을 감고 누워도 되겠습니까?"

"눈치도 별로 없으면서 눈치는 더럽게 보네. 알아서 하게. 자네 눈이니 뜨든지 말든지."

에드는 일갈하고는 사키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런 다음엔 사키의 손을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침을 정확히 어느 자리에 놓았는지 스케치하는 것이었다. 제법 괜찮은 솜씨였다.

샤를도 옆으로 다가와 괜히 기웃거렸다. 자신의 합곡을 만지더니 내게 말했다.

"기라는 건 마나와 비슷한 개념이겠군."

"마나요?"

"모든 사람에겐 마나라는 게 있거든. 운용을 잘하면 마법사가 되겠지만, 대부분 그러지 못하지. 일단 진료를 더 보게나."

샤를의 설명에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마나 덕분에 설명이 편해지겠군.

기라고 하면 바로 마나를 떠올려 줄 테니 말이다. 다행이었다.

진료실의 분위기가 훈훈해지고 있었지만, 라테스는 멀찌감치 서서 이쪽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그러다가 혼자 코를 킁킁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 냄비에서 나는 냄새. 흙냄새 같습니다!"

또 뭔데?

나는 미간을 좁히며 라테스를 바라보았다.

* * *

라테스는 냄비에 대고 삿대질을 하면서 계속 이어 갔다.

"흙냄새가 난다는 건... 역시 흙을 넣었다는 증거입니다!"

"원래 제 약에선 그런 냄새가 납니다. 정확히 말하면 식물의 냄새죠."

"무슨 소리! 이건 마당에서 나는 냄새라고."

"라테스 의원께서 마당에서 맡은 냄새도 식물의 냄새입니다. 트집 그만 잡으십시오."

지오도 물러서지 않았다. 가운을 펄럭이며 다가서더니 하나하나 다 반박하는 것이었다.

그때 에드와 샤를도 냄비 근처로 와서 킁킁거렸다. 두 사람이나 냄비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으니 음식을 훔쳐 먹는 강아지들 같았다. 샤를이 입을 열었다.

"라테스, 이건 식물 냄새가 맞다네."

"다, 당신이야 저자의 안내인이니 편을 들겠죠."

"편을 들어?"

"그,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 생각해 보니 자네 말대로 나는 정지오 의원과 같은 편이군. 그러면 내가 자네의 주둥이를 다물게 해도 되려나."

샤를이 나지막이 말하자 라테스는 정말 조용해졌다. 분위기가 싸늘해졌고, 에드 또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지오가 침묵을 깼다.

"약은 색깔과 냄새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약효가 중요한 거죠. 이 약을 먹고 낫는다면 아무 상관없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 약효가 중요한 거야. 물론 색깔도 큰 기여를 하겠지만."

에드가 바로 맞장구를 쳤다. 그런 다음엔 소리 죽여 웃었다. 자신의 출세 가도를 상상하면서 짓는 웃음이었다.

지오는 시간을 확인하더니 말했다.

"이제 뚜껑을 열도록 하죠."

"오, 한번 보도록 하지."

모두가 냄비를 둘러쌌다. 캠핑장에 가서 라면을 끓이려고 모여드는 느낌이었다. 지오는 뚜껑을 누르고 있던 돌들을 치우고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뜨거운 수증기가 확 끼쳐 왔다.

샤를이 손을 내저어 증기를 치우자 약의 영롱한 자태가 모습을 드러냈다. 갈색의 한약이었다.

'정말 성수 색깔이잖아...!'

에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약효만 충분하다면 셀릭 왕립 3진료소의 명성은 하늘을 찌를 것이었다. 그곳의 진료소장인 에드 또한 출세는 보장된 셈.

목소리를 떨면서 지오에게 물었다.

"이, 이거, 정말 약효는 확실하지?"

"확실합니다만, 아직 약이 완성된 건 아닙니다."

지오는 대답하면서 따로 싸 두었던 약보자기를 펼쳤다. 안에는 곽향과 자소엽이 들어 있었다. 그것들을 냄비에 넣었다. 방향성芳香性 약재이기 때문에 나중에 넣어야만 했다. 처음부터 함께 끓이면 약효가 사라지게 되었다.

"곽향정기산이 완성되었습니다."

지오는 자신 있게 말하면서 그릇에 곽향정기산을 따르기 시작했다.

9화 용병 길드의 전담 진료소

나는 곽향정기산이 담긴 그릇을 두 손으로 조심스레 잡았다. 사키에게 가져다주려는데 에드가 내 손목을 잡았다.

"잠깐."

"네?"

"살짝 맛 좀 보겠네. 성수와 맛이 비슷한지 보려는 거야."

에드는 냄새를 한 번 더 맡더니 곽향정기산을 마셨다. 아르타스에서 최초로 한약을 마신 인간은 에드로 기록될 터였다. 그는 한약을 입에 머금더니 곧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소감을 밝혔다.

"좀 매운맛이 있어서 그렇지. 쓰군."

"맞습니다. 곽향에 매운맛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수와 맛은 크게 다르지 않아. 아주 마음에 들어."

에드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소감을 듣고 나자 샤를과 라테스는 귀신에 홀린 것처럼 다가오더니 곽향정기산을 바라보았다.

"정말 성수와 맛이 비슷하다고?"

"오호...."

라테스는 나에 대한 질투심마저 잊은 모양. 경외감에 찬 시선을 곽향정기산에게 던지고 있었다. 나는 어쩐지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콧대가 높아지는 기분이었다.

성수가 한약과 맛이 비슷했단 말인가.

어깨도 괜히 넓어지는 느낌. 나는 사키에게 그릇을 내밀며 말했다.

"자 일단 한잔 드십시오."

"가, 감사합니다!"

사키는 성수를 맛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성수와 맛이 비슷하다는 말에 공손한 자세로 고개까지 숙이며 그릇을 받았다. 그런 다음 맛을 보았다.

그냥 쓰고 매운 맛인데.

솔직히 하자면 맛이 없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도 한약이 맛있다는 사람을 종종 본 적이 있지만, 그들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한의사인 나도 한약의 맛이라면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맛이 있다는 사람들은 다시 진료를 보고 싶어질 지경이었는데, 사키는 싱글벙글 웃으며 벌컥벌컥 마시고 있었다.

"잘 마셨습니다."

사키는 원샷을 때린 다음 내게 씩씩한 목소리로 말했다.

"벌써 다 나은 것 같습니다!"

"그, 그럴 리는 없고, 남은 약은 포대에 담아 줄게요. 하루 세 번 식전이나 식간에 드시고 다 먹거든 이곳으로 다시 찾아오십시오."

"약을 더 주신다고요?"

"네, 3일 치가 더 있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사키는 거의 우는 얼굴로 내게 말했다. 교주를 바라보는 사이비교단의 신도 같은 모습이었다. 그때 에드가 끼어들었다.

"시키는 대로 하게. 중요한 건 자네가 여기로 다시 찾아온다는 거야. 증세가 나았는지 안 나았는지 우리가 알아야 하니까. 알겠나?"

"아, 알겠습니다. 나리! 감사합니다!"

사키는 약을 받아 들고 진료소를 떠났다. 침으로 통증을 다스려서 그런지 발걸음이 올 때에 비해 훨씬 가벼웠다. 이미 다 낫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제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아, 이것 참.

나는 올림픽에서 우승한 것 같은 표정과 함께 서 있었다. 역도 선수처럼 왠지 몸집이 커진 느낌이었다. 샤를은 그런 나를 보며 피식 웃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 에드도 마찬가지. 만면에 웃음이 피어 있었다. 그때 다시 질투심에 눈을 뜬 라테스가 입을 열었다.

"진료소장님, 아직 약에 효과가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야 물론 그렇지. 하지만 어쩐지 약효가 있을 듯하군. 사키가 벌써 힘찬 발걸음을 옮기는 건 봤잖나?"

"하지만 아직 모릅니다!"

"나를 가르치려 들지 말게."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하나 반드시 짚고 넘어갈 문제가 있습니다. 약이 성수와 비슷했지만, 효능이 없다면 신성모독으로 볼 수 있습니다!"

라테스는 목소리를 높였다.

종교재판인가.

어떤 짓을 하든 상관없었다. 사키는 3일이면 나을 것이었다. 저런 환자들 한국에서 숱하게 많이 보아 왔다.

나는 자신 있는 포즈로 서 있다가 말했다.

"알았으니까 사키가 낫는지 봅시다. 3일 치 약을 줬으니 3일 뒤에 결판이 날 문제입니다."

"그러자고. 나중에 보지."

에드는 자신이 오늘 필기한 내용을 한번 훑어보더니 밖으로 나갔다. 라테스도 콧소리를 씩씩대면서 따라나섰다.

진료실에는 나와 샤를만 남아 있었다. 조용했다. 바깥을 지나는 군인들의 잡담 소리가 작게 들릴 뿐이었다. 환자가 모두 빠져나간 진료실엔 특유의 고요함이 남았다. 누군가를 치료했다는 뿌듯함을 홀로 즐기기에 좋았다. 물론 너무 길어지면 한의원 재정에 어려움이 생기진 않을지 초조해지기도 했지만.

이젠 경영을 걱정할 필요도 없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경영자가 있는데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알아서 다 해 줄 테니 말이다.

그것 말고 궁금한 것들이 좀 있지.

나는 약보자기에 남아 있던 곽향을 물에 넣어 끓였다. 곽향차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샤를에게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샤를 씨, 조금 전 온 사키 같은 환자는 그리 강해 보이지 않더라고요."

"맞아. 아직 풋내기라네."

"근데 던전 3층까지 갔다고 기록되어 있던데요. 그런 사람들로 던전 공략하는 거 괜찮은 겁니까?"

"3층까진 수습 용병들도 들어간다네. 복도가 좁고 약한 마수들만 있거든. 수습 용병들이 3층까지 모두 정리하면 4층부터는 군대와 하급 용병들이 투입돼. 거긴 복도가 넓고, 광장이 많거든. 군대가 진형을 짜서 싸우지."

"같은 던전이라도 층마다 환경이 다르군요."

나는 곽향차를 잔에 담아 샤를에게 내밀었다. 샤를은 차의 색깔과 냄새를 한참 관찰하더니 대답했다.

"맞아. 매우 추운 층도 있고, 반대로 더운 층도 있어. 악마 놈들이 괜히 악마가 아니야. 아, 이건 맛이 좀 없군."

"속이 편안해질 테니 가볍게 드세요."

"던전만 생각하면 속이 불편해지는데... 잘됐군. 아무튼 11층부턴 다시 던전의 길목이 좁아져. 거기서부턴 중급 용병들과 훈련된 기사들만 투입되지. 16층은 정말 강한 마수들이 나와서 이름이 알려진 실력자들만 들어가고."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곽향차를 마셨다. 매운맛이 입 안에서 확 퍼졌다. 그사이에도 샤를은 계속 설명을 이어 갔다.

"처음부터 실력자들이 들어가면 쉬울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도 않아. 실력자들은 체력을 비축하는 게 중요하지. 그래서 가장 약한 수습 용병들부터 차례대로 적들을 처리하는 거야. 이 도시에 사는 사람은 모두가 자신의 역할이 있는 거지."

맞는 말이었다. 아무리 약한 사람이라도 액티아 시티에선 자신의 역할이 있을 것이었다. 그러니 이런 거대한 도시가 던전을 가운데에 두고 생겨난 것일 터.

나도 내 역할을 잘해 보자.

차를 마셔서 그런지 몸에 기운이 도는 느낌이었다. 샤를은 잔을 내려놓았다.

"근데 이건... 너무 맛없네."

* * *

3일 뒤였다. 지오는 진료실에 앉아 사키를 기다렸다. 자신이 있지만,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옆에 서 있던 샤를은 알아서 곽향을 꺼내더니 차를 끓였다.

"맛없다면서요?"

"어쩐지 중독이 된단 말이지."

"...."

샤를은 곽향차를 마시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다음 계속 말을 이어 갔다.

"그나저나 에드 말이야. 벌써 성수와 비슷한 약을 만드는 의원이 있다고 소문을 내고 있어. 덕분에 어떤 용병 길드가 3진료소를 전담 진료소로 사용하고 싶어 하나 봐."

"그거 잘됐네요."

지오는 박수까지 치며 반응했다. 전담 진료소가 되면 얼마나 많은 환자가 오겠는가. 벌써 가슴이 두근거렸다. 물론 '성수'라고 불리는 것은 과장 광고이긴 했지만, 치료에 자신은 있는 것이었다.

"하하하."

그때 웃음소리와 함께 진료실 문이 열렸다. 에드였다. 함박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성큼성큼 지오에게 다가갔다.

"잘했어! 믿고 있었다고!"

이어서 사키와 라테스가 들어왔다. 사키는 혈색이 아주 좋았다. 야위어 보이던 팔다리에도 살이 붙은 느낌. 반면 라테스는 곽향차라도 마신 것처럼 인상을 잔뜩 구기고 있었다.

사키는 지오 앞에 바른 자세로 서더니 말했다.

"감사합니다, 정지오 의원님!"

"괜찮아지셨나요?"

"네, 약을 먹고 다음 날부터 설사가 멎었습니다. 입맛도 완전히 돌아오고... 지금은 다시 던전으로 가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런 다음엔 손가락뼈를 꺾어 뚝뚝, 소리를 내고 있었다. 몸이 근질근질한 모양이었다. 지오는 씩 웃으면서 반응했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몸을 회복시킨 다음 가십시오. 신난다고 무리하다가 또 아무거나 주워 먹지 말고요."

"아, 하하하. 이제 그런 실수는 다신 안 하겠습니다. 아무튼 덕분에 정말 살았습니다."

사키는 다시 감사를 표했다. 벽난로라도 튼 것처럼 분위기가 훈훈했다. 에드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중이었다.

'좋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오가 성수 같은 것을 만들어 내는데 약효도 있으니 기분이 좋아 자지러질 지경이었다. 게다가 약으로 사람을 치료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절단을 이용하면 환자는 목숨을 살린다고 해도 다시 전투에 투입하기 어려워졌다. 하지만 약으로 사람을 고치면 '재생산'이 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다리 다친 환자 하나, 설사병 환자 하나....'

에드는 이 정도면 충분히 실력자라고 판단했다. 지오를 중심으로 진료소를 운영해도 괜찮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어서 지오와 진료소의 미래에 대해 논하고 싶었다.

"자, 사키 군. 이제 다 나았으니 돌아가 우리의 빛과 희망인 액티아의 해방을 위해 노력해 주게."

"알겠습니다. 나리!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좋아. 다들 나가 있어 봐. 라테스, 자네는 아직도 있었나. 이제 우리 진료소에 오지 않아도 되네. 자네의 약 따위는 이미 다 알고 있는 정지오 의원이 있으니 말이야. 아, 그래도 기회를 줄까?"

에드는 거기까지 말하더니 지오를 바라보았다.

* * *

에드는 말했다.

"정지오 의원, 자네가 결정하게. 라테스 의원이 남을지 말지. 자네보다 여러모로 떨어져도 필요할 수도 있잖아."

나는 진료실 바깥으로 터덜터덜 걸어 나가는 라테스를 바라보았다. 퉤, 하고 뱉어진 뒷모습은 어쩐지 축축해 보였다. 그가 밖으로 나가자마자 에드에게 말했다.

"진료소장님, 음흉한 자와 함께하긴 어렵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약을 비법이라 하여 숨기는 것은 도리에 어긋납니다. 환자를 고칠 생각을 하지 않고 자신의 몸값만 높이려 하지 않습니까."

"하하. 그것참 나와 같은 생각이로군."

"또 원하는 게 있습니다."

"오, 뭐든 말하게나. 자네라면 요구할 자격이 있지."

"식사의 품질과 잠자리의 품질이 올라갔으면 합니다. 아무래도 입맛에 맞질 않아서."

나는 3일간 나를 괴롭히던 돌덩이 같은 건빵과 침상을 떠올렸다. 절로 인상이 찌그러졌다. 에드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걱정하지 말게. 기사들에게 제공하는 수준으로 올려 주지. 고기가 더 제공될 거고, 빵도 부드러워질 걸세. 침상은 오크 가죽을 이용해 만든 걸로 주지. 아주 팽팽해질 거야."

"가, 감사합니다!"

"그게 다인가?"

"아닙니다. 사실 한 용병 길드에서 우리 진료소에 관심이 많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벌써 소문이 났나?"

에드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내 마음을 떠보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가 원하는 대답을 알고 있었다.

"네, 한번 해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들의 치료를 제가 해 보겠습니다."

물론 이건 내 의지이기도 했다. 그들을 치료하고 싶었다. 에드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큭큭, 웃고는 물었다.

"자신이 있나?"

"물론입니다."

"좋아. 진행시켜."

* * *

용병 길드의 이름은 '강철의 손톱'. 하급 용병 다수와 중급 용병 일부를 알선하는 길드였다. 에드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놈들 시건방지게도 우리를 시험한다고 하네."

"시험이요?"

"우리는 절단 전문인 제니만 유명해서 전담 진료소로 정하긴 어렵다는 거야. 다른 의원의 실력을 보겠단 거지."

다른 의원은 나밖에 없잖아?

"자네 실력을 보겠단 말이라네. 아까 그 친구 들어오라고 해 봐!"

에드는 진료실 바깥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곧 한 남자가 들어왔다. 등에 메고 있는 거대한 검이 먼저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어서 얼굴과 팔다리에 있는 엄청난 양의 흉터가 보였다.

10화 하급 용병 하츠 (1)

오늘은 기분이 좋았다. 일단 오크 가죽부터 칭찬을 해야겠다. 이전엔 지푸라기만 쌓아 두고 잤으니 등허리가 박살 나는 느낌이었다. 남이 아니라 나부터 한의원에서 치료받아야 할 판이었는데, 이젠 아니었다. 쫀쫀한 오크 가죽과 함께라면 아르타스에서도 밝고 희망찬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다.

식사도 훌륭했다. 여전히 네모난 형태로 잘린 고기였지만, 부드럽고 양도 많았다. 빵도 마찬가지. 한국에 비하면 여전히 딱딱하지만, 이젠 이빨이 나갈 정도는 아니었다. 이전의 건빵은 돌이었는데, 이번 빵은 적어도 사람을 때려죽이긴 어려운 정도였다,

이 정도면....

물론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앞으로 계속 좋은 것들을 원하겠지만, 일단은 오케이였다. 기분도 좋고, 컨디션도 훌륭했다. 용병 길드 강철의 손톱에서 우리를 시험하겠다고 하기 전까진 말이다.

* * *

난데없이 시험이라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용병 길드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남자가 세 명 우르르 들어왔다. 그 얼굴의 흉악함은 어디 비할 데가 없었다. 몸집도 우락부락했다. 어깨와 가슴이 각각 머리통만 했으니 한 사람당 얼굴이 5개는 있는 것 같았다. 총 15개의 얼굴을 마주한 기분이었고, 30개의 눈이 나를 지켜보는 것 같았다.

"나는 강철의 손톱을 이끌고 있는 마스터. 삼사키라고 하오. 우린 지켜만 볼 테니 진료를 보면 되오."

얼굴은 15개 같았지만, 목소리는 한 곳에서 흘러나왔다. 자신을 삼사키라고 소개한 그는 머리털이 한 오라기도 없는 사람이었다. 대신 맨질맨질한 두피 위로 흉터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그의 인상을 대폭 흉악하게 만들어 주었다.

"네, 네."

나는 얼결에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런 다음 내 앞에 앉아 있는 환자를 바라보았다. 환자 또한 여기저기 흉터가 많았는데, 그리 험상궂은 느낌은 아니었다. 앳된 모습이었다. 한국으로 치자면 중학교 3학년 같았기 때문에 등에 거대한 검을 메고 있음에도 무섭진 않은 것이었다. 일단 환자에 대해 알아 가야 하니 질문부터 던졌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하츠."

하츠는 쏘아보는 눈길과 함께 대답했다. 눈매가 제법 매서웠다.

뭐야?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한의원에서도 반말하는 환자들이야 얼마든지 만났다. 욕설을 입에 달고 있는 사람도 여럿. 고작 쏘아보는 눈길만으로 물러서진 않았다.

"일단 어디가 아픈지 말씀해 주세요."

"여기."

하츠는 오른팔을 내밀었다. 통증이 있는지 약간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정확히 어디가 아프세요?"

"팔꿈치."

"아, 여기요?"

나는 팔꿈치의 바깥쪽 부분을 만지면서 물었다. 하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통증이 꽤 심한지 또 얼굴에 주름이 잡혔다.

꽤 참고 있나 본데.

팔꿈치가 아픈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한 가지를 금방 추측할 수 있었다. 등 뒤로 보이는 거대한 검이 벌써 병명을 알려 주는 듯했다. 물론 추측은 추측일 뿐, 제대로 된 진단을 해야 했다. 진단하는 방법도 다양하지만, 하츠처럼 나이가 어린 사람이 좋아할 만한 것이 있었다. 지금처럼 경직된 분위기도 풀어 줄 수 있는 진단법이었다. 일명 Maudsley's test.

"하츠 씨, 일단 팔을 여기 탁자 위에 올려 보세요. 손등이 위로 오도록."

"...."

하츠는 말없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나는 이어서 지시했다.

"중지만 위로 들어 보세요."

"중지라면 세 번째 손가락만요?"

그는 질문을 던지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처음으로 단답형이 아닌 문장을 구사하면서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중지를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을 모아 쥐었다. 서서히 욕하는 모양으로 바뀌었다.

나는 물었다.

"어때요? 통증이 있어요?"

"...."

하츠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큭, 하고 웃었다. 고작 가운뎃손가락을 들었다고 웃는다면 이건 분명 나이가 어리다는 증거였다.

그는 혼자 입술을 씰룩거리면 웃더니 마침내 말했다.

"통증은 없습니다."

"그럼 이제 이렇게 해 볼게요."

나는 그의 중지를 내 손으로 눌렀다. 그런 다음 다시 지시했다.

"다시 중지에 힘을 줘서 들어 보세요."

하츠는 내가 누르고 있는 상태에서 중지에 힘을 줬다. 그러자 하츠는 통증이 다시 느껴지는지 인상이 구겨지기 시작했다. 내가 조금 더 세게 누르자 그는 소리를 질렀다.

"아악!"

나는 차분하게 물었다.

"팔꿈치가 아프죠?"

"네, 엄청...."

"이제 왜 아픈지 알겠습니다."

"이유가 뭔가요?"

하츠가 물었다. 진료실 내부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궁금하긴 매한가지. 15개의 얼굴을 가진 우락부락한 용병을 포함해서 샤를과 에드도 내게 한 걸음 다가왔다. 거대한 것들이 성큼 다가오는 느낌 때문에 나는 괜히 움츠러들었다.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닌데.

"주관절 외상과염입니다."

사실 테니스 엘보라고 흔히 알려진 질환이었다. 물론 테니스 엘보라고 말하면 설명하기 너무 힘들지 않겠는가. 해골바가지로 축구 할 것처럼 생긴 용병들이 테니스를 알 턱도 없으니 말이다.

에드가 내게 물었다.

"그게 뭔가?"

"정확히 하자면 팔꿈치에 계속해서 충격을 받아 생긴 부상입니다. 저 커다란 검을 휘두르다 보면 당연히 사용하는 사람의 팔꿈치에도 무리가 오는 겁니다. 사용을 중지하는 편이 좋죠."

나는 하츠의 등에 걸린 검을 가리켰다. 모두가 그 검을 보자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츠는 고개를 젓더니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건 포기할 수 없어요."

* * *

하츠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날도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몰려오는 오크들 앞에서 몸이 얼어붙은 것이었다. 오크 떼들 사이에는 덩치가 크고 피부가 불그죽죽한 녀석도 있었다. 말로만 듣던 블러드 오크였다.

그때 형이 하츠의 목덜미를 잡아 집어 던졌다.

"빨리 가! 이 새끼야! 내가 막을 테니까!"

하츠는 바닥을 굴렀다. 함께 싸우기 위해 일어섰지만, 겁에 질린 동료들은 하츠를 붙잡고 뒤로 물러섰다.

"그래. 일단 너희 형에게 맡겨. 우리보다 훨씬 강하잖아!"

"안 돼! 같이 싸워야지!"

발버둥 쳐도 소용없었다. 동료들은 자신들이 도망쳐도 떳떳하기 위해 하츠를 놓아주지 않았다. 동생이라도 살렸다는 변명이 필요했다.

형은 돌아서더니 외쳤다.

"빨리 가라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더니 괴수들을 향해 돌진했다. 거대한 검을 움켜쥔 채로. 나중에도 형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그저 그 거대한 검만 하츠에게 돌아왔다. 길드의 마스터 삼사키는 위로 대신 말했다.

"함께 복수하자. 도와주마."

* * *

삼사키는 지오에게 말했다.

"그 검을 사용하지 않게 만들긴 어려울 거요."

"하지만 지금으로선 계속 부상을 악화시킬 뿐인데요."

"어쩔 수 없는 사연이...."

삼사키는 자신의 대머리를 슥 만지더니 말끝을 흐렸다. 이제는 지오가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사연은 들어 보겠습니다. 물론 치료도 해 드리죠. 하지만 이후의 생활 방식은 제가 권고하는 대로 바꾸는 편이 좋을 겁니다."

그때 삼사키가 입을 열었다.

"치료는 일단 가능한 거요?"

"물론이죠."

"이런 부상은 1년 정도 아무것도 안 하고 쉬면 낫긴 하는데, 그 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단 말이오?"

"당연합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서 진료를 보는 겁니다."

지오의 대답에 진료실에 있는 모든 사람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성수가 사라진 지금. 테니스 엘보는 자연스럽게 낫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지독한 질환이었다. 하지만 치료가 가능하다니. 모두의 기대감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

에드가 가장 적극적이었다. 그는 손끝에 침을 발라 종잇장을 넘기더니 말했다.

"그럼 일단 침부터 꽂나?"

"네, 침부터 시작하겠습니다. 하츠 씨, 저기 앉으세요. 아, 그 검 좀 내려놓고요. 침상에 앉으려면 검부터. 왜 이렇게 커? 네, 그렇게 앉으세요."

* * *

나는 하츠가 등에 메고 있는 검을 내려놓는 모습도 유심히 살폈다. 그는 무언가 드는 자세를 할 때마다 인상을 찌푸렸다. 들어 올리는 자세가 힘들다는 방증이었고, 테니스 엘보의 전형적인 증세였다.

걱정하지 마라. 고쳐 줄 테니.

사실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환자가 테니스 엘보로 고생하는 것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 저 무식하게 크기만 한 검을 수도 없이 휘둘렀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침을 꺼내 먼저 하츠의 손을 노렸다. 배의 통증을 잡을 때도 이용했던 합곡이었다. 이어서 손목과 엄지가 이어지는 자리의 혈 자리 양계에도 침을 놓았다. 그 반대편인 양곡도 놓칠 수 없었다.

진료실엔 침묵만이 흘렀는데, 그때 에드가 물었다.

"손목을 위주로 놓는데, 그것도 전에 말한 것처럼 기가 통하도록 하는 건가?"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하츠 씨의 증세는 팔꿈치 통증이기도 하지만, 손목에도 무리가 많기 때문이죠."

"그렇군."

에드는 또 종이에 무언가 적었다. 나는 흘끔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제멋대로인 것 같아도.

뭔가 제법이었다. 저렇게 필기하면서 뭔가 터득하고 있지 않은가. 하루 종일 공부해도 성적이 밑바닥인 학생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반면 15개의 얼굴은 그런 것엔 관심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저 치료 결과만 기대하고 있는지 나를 재촉했다.

"여기서 끝이오? 어쩐지 더 해야 할 것 같은데."

"네, 더 하겠습니다. 치료는 제가 할 테니 다들 보기만 하십시오."

"...."

15개의 얼굴은 한발 물러섰다. 다시 침묵에 휩싸인 진료실. 나는 완요골근과 팔꿈치 내외측, 상완삼두근 끝 지점으로 침을 놓았다. 척택혈, 곡지혈, 수삼리혈, 주료혈이었다. 완요골근을 노린 이유는 테니스 엘보로 인한 통증이 팔의 바깥쪽으로 내려오기 때문이었다. 마침 수삼리에 침을 넣을 때는 근육이 튕겼는데, 침이 잘 들고 있다는 증거였다.

마음에 드는군.

이 정도면 끝날 수도 있지만, 이젠 나만의 침술 노하우를 펼칠 시간이었다. 테니스 엘보에 잘 드는 방식이 있었는데, 삼두근에도 침을 놓는 것이었다. 삼두는 외측두, 내측두, 장두 세 개를 합쳐 부르는 말이다. 그중에서 장두에 살짝 침을 찔러 넣으면 테니스 엘보로 인한 통증을 다스리는 데에 직방이었다.

"이게 마지막 침입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하츠의 팔뚝을 노렸다. 근육이 많은 덕분에 장두와 외측두 사이의 공간으로 침을 넣기가 용이했다.

"후, 이제 이 상태로 15분만 기다리겠습니다."

"정말 나아지는 거죠?"

하츠는 조심스럽게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물론 하루 만에 낫진 않습니다. 1주에서 2주만 꾸준히 와서 치료받으면 좋아질 겁니다."

"1주에서 2주 만에 낫는다고?!"

악을 쓰듯 질문을 던진 것은 삼사키였다. 1년 동안 쉬어야 할 질환을 1주에서 2주로 줄여 주니 흥분한 것이었다.

"네, 가능합니다."

"이런 미친!"

삼사키는 흥분해서 소리쳤다. 샤를은 그런 모습을 보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

"용병들은 좀 저런 경향이 있지."

그를 위한 변명까지 해 주었다. 그때 하츠도 흥분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그런데 여기선 성수 비슷한 약도 준다고 들었는데... 약은 없나요?"

"약은...."

나이도 어린 게 한약 좋은 줄은 알아 가지고...

물론 테니스 엘보 치료에 도움을 줄 만한 약이 있지만, 아직 약을 권할 타이밍은 아니었다. 나는 약을 내어 주면서 그와 거래를 하고 싶었다.

11화 하급 용병 하츠 (2)

흥분해서 내내 소리를 지르고 있던 삼사키. 갑자기 차분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의원은 치료 기간이 1주에서 2주로 줄어든다고 말했지만 그건 지켜봐야 하오. 어디까지나 우린 진료소를 검증하기 위해 온 거요."

그런 다음 헛기침을 했다. 달아올랐던 분위기는 다시 지오의 치료 결과를 지켜보는 쪽으로 돌아왔다. 모두의 시선이 지오에게로 모여졌고, 지오가 나섰다.

"저는 자신 있습니다. 경과를 지켜봐야죠. 일단 시간이 됐으니 침을 뽑겠습니다."

지오는 꽂았던 침들을 하나씩 제거했다. 하츠는 침을 꿀꺽 삼키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정말 효과가 있을까?'

의문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침을 놓아 치료했다는 이야기는 사전에 들었고, 심지어 효과가 있다고도 했지만, 아직까지 확신을 갖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지오는 침을 하나씩 뽑다가 하츠에게 물었다.

"물약이 먹고 싶다고 했죠?"

"네, 네! 그랬습니다."

"물약을 드릴 수는 있어요. 하지만 저에게 협조한다고 약속하면 드리겠습니다."

"협조?"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 15개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치료만 하면 됐지, 협조를 구한다니. 용병 길드를 뒤에서 조종이라도 할 셈인가. 삼사키는 얼굴 근육을 제멋대로 찌그러뜨리면서 지오에게 다가왔다.

"협조라니? 물약을 주면서 우리를 수하로 삼겠다는 말이오?"

"그게 뭔 소리입니까?"

지오는 되물었다.

"당신은 의원이니 치료만 하면 될 일 아니오?"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치료에 성공하려면 환자도 노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치료하는 행위에 협조하란 뜻입니다."

"아...."

15개의 얼굴은 팟, 하는 느낌으로 평소처럼 돌아왔다. 다시 의심의 눈초리만 발사하는 것이었다. 지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샤를은 평소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품속에 한 손을 넣고 있었다. 단도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에드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종이 쪼가리에 뭔가를 끼적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뭐 이런....'

이상한 세계인 줄은 진즉 알았지만, 저 용병들은 한 차원 더 괴상했다. 다혈질도 이런 다혈질들이 있을까. 화를 가라앉히는 한약을 가스 형태로 만들어 용병들의 코에 살포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지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다음에 입을 열었다.

"치료 효과가 궁금하죠?"

"그렇소."

삼사키가 대신 대답했다. 지오는 삼사키에게 손을 내저었다. 조용히 있으라는 의미. 15개의 얼굴은 동시에 새빨개지며 분개했지만, 지오는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하츠를 돌아보면서 물어볼 뿐이었다.

"침의 효과가 좋으면 제 치료에 협조해 줄 겁니까?"

"그러겠습니다."

이번엔 하츠가 대답했다. 지오는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계속 이어 갔다.

"좋습니다. 하츠 씨가 협조해 준다고 하면 저도 물약을 제공하죠."

"아,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보시죠. 자, 침을 모두 뽑았습니다. 하츠 씨, 팔을 움직여 보세요."

"...."

하츠는 조심스럽게 팔을 들어 올렸다. 통증이 예상되는 동작이기 때문에 인상을 잔뜩 찌푸리면서였다.

"어?"

거짓말처럼 모든 통증이 사라져 있었다. 팔이 아주 부드럽게 움직였다.

* * *

나는 허허 웃었다. 재롱떠는 아이를 바라보는 아빠의 얼굴로 하츠를 지켜보았다. 그는 통증이 사라진 것이 신기한지 이리저리 팔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앳된 얼굴이 상기되고 있었다. 상기되는 것을 넘어 폭발할 것 같은 상태로 변한 것은 15개의 얼굴이었다.

"오, 정말 아프지 않단 말이야?"

"네."

"이런 미친!"

삼사키는 침을 튀기며 소리 질렀다.

이제 알겠느냐.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하츠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의원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뭘 이 정도로."

"그나저나 제가 어떤 협조를 하면 될까요?"

"저쪽의 검 말입니다."

나는 진료실 한쪽 벽에 기대선 검을 가리켰다. 검신의 길이가 어지간한 성인 남성의 키와 비슷했다. 얼핏 보면 사람이 서 있는 줄 착각할 것 같았다. 하츠는 검으로 시선을 옮기더니 대답했다.

"네, 저 검."

"사용을 중단했으면 좋겠습니다. 저걸 계속 사용했다간 이 통증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겁니다."

"그건 안 됩니다."

하츠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도 얼른 고개를 따라 저었다.

"저 검으로 무언가를 내려칠 때마다 팔에 막대한 충격이 와서 이 사달이 벌어진 겁니다. 더 작은 검을 사용하십시오."

"...."

그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순간 두 눈에 슬픔이 엿보였다.

뭐지?

그때 삼사키가 다가왔다. 아직도 흥분 때문에 벌게진 얼굴이었다. 그는 자신의 대머리를 세수하듯 손으로 만지더니 말했다.

"저 검엔 사연이 있소."

"사연이요?"

"저 녀석 형의 유품이오. 몇 달 전, 던전에서 저 녀석 대신 목숨을 잃었지...."

삼사키는 말끝을 흐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츠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 그런 요구를 들어줄 수는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죠."

나는 흔쾌히 대답했다. 사람에겐 포기할 수 없는 게 있는 법이니까. 나도 그렇긴 했다. 차에 치여 날아가는 순간에도 더 진료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방법은 생각해야지.

계속 저 거대한 검을 쓰고도 팔이 멀쩡하게 유지될 방안. 그것을 생각해 내야만 했다. 고민하던 내 눈앞에 하츠의 앳된 얼굴이 들어왔다. 몸에 제법 근육이 많지만, 피부가 뽀얀 얼굴 말이다. 아직 어리다는 증거였다.

"아!"

그 순간 해결책이 하나 떠올랐다. 어쩌면 그가 치료에 협조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이었다.

"하츠 씨, 잠깐 손 좀 줘 볼래요?"

"손이요?"

하츠는 질문을 던지면서도 자신의 오른손을 내밀었다. 뽀얀 얼굴과 달리 거칠거칠한 손이었다. 거대한 검을 쥐고 휘두르느라 굳은살이 잔뜩 생긴 것이었다.

"자 힘을 좀 빼 보세요."

나는 힘을 빼 달라는 요청과 함께 양손으로 하츠의 손을 잡고 뼈마디를 만지작거렸다. 거친 피부 아래 단단한 뼈들이 있었고, 뼈들 사이엔 공간이 있었다.

역시 이럴 줄 알았지.

절로 미소를 지어졌다. 삼사키는 하츠의 손을 주물럭거리더니 웃는 나를 보고는 툭 질문을 던졌다.

"그거 취향이오? 난 존중하는 편이지."

그러자 하츠는 슬쩍 자신의 오른손을 뺐다. 나는 허공을 양손으로 쥐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 상태 그대로 대답했다.

"취향은 아니지만, 얘기를 듣고 나면 날 존중하게 될 겁니다. 하츠 씨가 다시 저 검을 사용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거든요."

"뭐, 정말이오?"

모두가 나를 지켜보았다. 에드는 다시 주섬주섬 종이를 꺼내 들고 있었다. 나는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계속 이어 갔다.

"내가 방금 한 행동은 취향 같은 것이 아니라 일종의 검사입니다. 검사 결과에 대해 말하기 전에 하나만 묻죠. 하츠 씨의 형은 키가 하츠 씨보다 컸습니까?"

"네, 저보다 한 뼘은 더 컸죠."

하츠의 대답. 삼사키도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거들었다.

"그 녀석 키만 큰 게 아니라 덩치도 우람했지. 힘이 장사여서 우리 길드의 유망주였소. 그래서 저런 검을 휘둘러도 위화감이 별로 없었소."

"역시 그랬군요. 이제 검사한 결과를 말씀드리죠."

"그러시오. 그게 무슨 검사요?"

"성장판이 열려 있는지 확인하는 겁니다. 검사 결과 하츠 씨의 성장판은 아직 열려 있습니다."

X-ray를 찍을 수 있다면 확실하게 볼 수 있었겠지.

물론 그런 것은 없었다. 한국에서도 쓰지 못한 기계를 아르타스에서 어떻게 쓰겠는가. 이런 때엔 직접 만져 보는 것만이 방법이었다. 손의 뼈 사이에 공간이 있다면 아직 성장판이 열려 있는 것. 다행히도 하츠의 성장판은 열려 있었다.

삼사키는 다시 흥분하기 시작했다.

"성장판? 뭔지 모르겠지만... 하츠의 키가 더 클 수 있단 말이오?"

"네, 그렇습니다. 얼마나 더 클지 모르겠지만, 하츠 씨의 형님만큼 커질지도 모르죠."

"오오!"

15개의 얼굴이 다시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에드는 바쁘게 종이에 적기 시작했다.

* * *

'키가 더 큰다고!'

하츠 또한 흥분하기 시작했다. 키가 더 클지도 모른다고 막연히 생각은 했지만, 지오가 더 큰다고 얘기를 하니 확신이 생기는 것이었다. 침 몇 방으로 통증을 잡아 준 의원의 말이니 철석같이 믿을 수밖에.

'이 사람 말이라면 믿어야지.'

침을 놓는 것만으로도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상황이지 않은가. 지오는 샤를처럼 어깨를 으쓱거린 다음 계속 말했다.

"하츠 씨, 그러니 지금은 작은 검을 씁시다. 몸집이 더 불어난 다음에 저 검을 사용하는 것이 더 좋을 겁니다."

"...."

하츠는 대답하는 대신 검을 돌아보았다. 눈빛에 아련함이 가득했다. 시선은 검을 향해 있지만, 형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지오는 차분하게 기다렸다. 그에게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터였다.

그때 삼사키가 다가왔다. 하츠의 팔을 툭 치더니 입을 열었다.

"하츠, 저 사람 말을 한번 믿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솔직히 저 검은 아직 네게 무리야. 너도 알잖아?"

"...."

하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사실이었다. 형처럼 자유자재로 검을 휘두르긴 어려웠다. 아무리 수련해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었다.

'몸집이 더 커진다면....'

하츠는 지오가 주물거렸던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때는 가능해질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그땐 형의 검으로 던전 공략에 일조해 마수들을 이 땅에서 쓸어 버릴 수 있을 것이었다.

지오는 하츠의 표정 변화를 읽었다.

'저 정도면 확실하게 협조해 주겠군.'

그렇다면 천만다행이었다. 지오는 하츠가 적극적으로 협력했을 때의 상황을 상상해 보았다.

하츠가 완치된 다음 거대한 검을 들고 활약한 다음의 상황이었다.

"저 친구 뭐야?"

"왜 저렇게 세? 원래 팔꿈치 아프다고 하지 않았어?"

"셀릭 왕립 3진료소의 정지오가 치료했대."

용병들 사이에 바이럴 마케팅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3진료소가 명성을 떨칠 뿐 아니라 지오의 이름도 유명해질 터였다.

"여기 정지오 의원 있소?"

"나도 치료 좀 해 주시오!"

제3진료소 앞은 바글바글 인산인해. 에드는 입이 귀에 걸리고, 지오의 소원대로 끊임없이 진료하는 환경이 만들어질 것이었다.

"다 나았다!"

"나도 나았소!"

이러면 정말 강력한 자들이 치료를 받으러 올 것이었다. 그럼 던전 공략도 수월해지지 않겠는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액티아 시티에서의 생활도 더 윤택해질 것이었다.

'에드는 나에게 더 많은 것들을 주겠지.'

당연했다.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자가 아니던가. 하츠가 몸을 완전히 회복한 다음 거대한 검을 다시 휘두르기만 하면 일석삼조의 결과가 나오는 셈이었다.

"물약을 지어 줄게요. 통증을 잡고, 몸이 회복되는 속도가 더 빨라질 겁니다. 작은 검을 수련하는 동안에도 몸을 키우는 데에 좋은 약을 더 드리죠."

"저, 정말인가요?"

"네, 원 플러스 원입니다."

"감사합니다!"

하츠는 눈물을 글썽거릴 것 같은 얼굴. 삼사키도 감동했는지 자신의 대머리를 손바닥으로 때렸다.

착, 하는 소리가 났다. 에드가 물었다.

"정지오 의원, 몸을 키우는 데에 좋은 약도 있단 말인가?"

"네, 성장을 돕는 약입니다!"

"성장을 돕는다고?!"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성수도 그런 효과를 내진 못했기 때문이었다. 매사에 무심하던 샤를마저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오는 씩 웃었다.

'성장 한약도 내가 전문이지.'

12화 하급 용병 하츠 (3)

무엇이든 잘해야 했지.

365일 굴러가는 한의원의 원장이라면 말이다. 환자들이 무엇을 요구하든 척척. 성장 한약이요? 여기 있습니다. 저런, 여름이라 기운이 떨어진다고요? 보약입니다. 그렇게 몇 년 살다 보면 이것도 저것도 잘하게 된다. 아마 365한의원을 운영하는 원장들이라면 공감해 줄 테지만.

아르타스에 한의사는 나뿐이다.

여기서도 성장 한약을 만들게 될 줄은 몰랐다. 물론 그것은 팔꿈치의 통증을 잡은 다음의 일이었다.

"우오오!"

"몸을 성장시키는 약이라니!"

"그럼 더 큰 검을 만들자!"

삼사키 이하 용병들은 진료실에서 광분하고 있었다. 이미 다른 약을 먹은 것 같았다. 나는 그들에게 진정하라고 손짓한 다음 말했다.

"저, 그만. 이제 그만. 그래요. 그거 부서질 뻔했잖아요. 일단 하츠 씨, 몸집이 커지기 전까지 작은 검을 사용하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그럼 팔꿈치의 통증을 잡는 데에 좋은 물약을 만들어 드릴게요."

"약속해야죠. 어차피 덩치가 커질 거라면!"

"네, 좋습니다. 그럼 먼저 팔꿈치 통증에 탁월한 약부터 지어 봅시다."

나는 약재함 앞에 섰다. 모두의 시선이 내 등에 와서 꽂혔다. 에드는 아예 내 옆에 와서 자리를 잡았다.

"정지오 의원, 무슨 약을 쓸 생각인가? 지난번과는 다른 재료들을 쓰겠지?"

"네, 다른 약재들을 사용할 겁니다."

"어떤 거지? 하나씩 보여 주게."

"잠시만...."

통증을 다스리는 한약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하츠에게 가장 잘 들 만한 것은 아무래도 타박상에 좋은 약일 것이었다.

마침 그런 것이 있지.

자동차 사고로 찾아온 환자들에게 지어 주는 한약. 타박상 및 충격으로 인한 통증에 탁월한 한약. 두들겨 맞고, 두들겨 패는 것이 직업인 사람에게 가장 어울리는 한약. 바로 당귀수산이었다.

"그래. 당귀수산當歸鬚散으로 하겠습니다."

"당귀수산?"

"네, 하나씩 약재를 꺼낼 테니 적으세요."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약재함의 서랍을 열었다. 당귀미, 오약, 소목, 향부자, 적작약, 도인, 계지, 감초, 홍화를 차례대로 그릇에 담았다. 에드는 내가 꺼내는 약들의 이름을 물어보면서 하나씩 종이에 적었다. 나는 그사이 약재들을 물로 씻고 약보자기에 담았다.

그런 다음 진료실 한쪽에 놓인 불자리와 냄비를 가져왔다. 한때 샤를이 주먹으로 내리치자 불길이 치솟은 불자리. 그것은 붉은색의 지점토 같았다.

이걸 주먹으로 내리치면 불이 난다 이 말이지?

그것을 주먹으로 내리쳤지만, 불길이 오르지 않았다. 약간의 불꽃만 튀어 오를 뿐이었다. 편의점 라이터의 동그란 부분을 긁은 것처럼.

"왜 안 되지?"

"우리 같이 힘이 약한 사람은 주먹으로 내려칠 자리를 얇게 펴고 해야지. 동쪽엔 불자리가 정말 없는 건가?"

에드는 구시렁거리더니 직접 불자리를 얇게 펴 주기 시작했다. 그때 샤를이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다가왔다.

"진료소장님 말씀이 맞다네. 자네 팔뚝 정도라면 그것보다 더 얇게. 아냐. 더 얇게 해야지. 그렇지. 그래야 겨우 불이 나겠어. 딱 그 정도야."

붉은색의 지점토는 얇다 못해 투명해서 돌바닥이 보일 지경이었다. 시스루 패션을 바라보는 심정이 되자 조금은 자존심이 상했다.

"제가 이렇게 약할까요?"

"어디 한번 해 보게."

나는 얇디얇은 불자리를 내리쳤다. 불꽃이 확 치솟았지만, 불이 붙진 않았다. 샤를은 큭, 소리를 죽여 웃더니 물었다.

"자네야말로 팔꿈치 통증이 있는 것 같은데?"

"...."

"내가 해 주겠네. 줘 보게."

나는 흑, 소리를 내며 불자리를 건넸다. 그는 받자마자 딱밤을 때리는 자세를 취했다. 검지를 동그랗게 말고, 엄지를 가져다 대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불자리를 딱밤 때리듯 때렸다. 그러자 불길이 치솟았다. 내가 주먹으로 내리쳐도 안 되던 것이 딱밤으로 해결된 것이었다.

"뭐야."

"뭐긴 뭔가. 활활 타오르는 자네의 부끄러움이지."

"...."

"하하. 이제 어서 약을 만들게나."

샤를은 내 등을 치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그때 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겨우 손가락으로 불자리를?"

"대단한데... 힘이 얼마나 센 거야?"

15개의 얼굴과 하츠가 놀란 눈으로 샤를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딱밤으로 불을 켠 것은 대단한 일인 모양이었다.

그때 에드가 물이 담긴 가죽 포대를 내밀었다.

"자 다음은 뭔가? 물은 여기 있다네."

나는 포대를 받으면서 물었다.

"혹시 술도 있습니까?"

"술...?"

에드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샤를이 끼어들었다.

"부끄러워서 술이라도 마셔야겠나?"

"그게 아닙니다. 이번 약은 술을 함께 넣어 지어야 효과가 좋습니다."

일명 주수상반酒水相半. 한약을 지을 때는 물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었다. 짓는 약이 무엇이냐에 따라 술을 섞을 때도 있었다. 이번에 만들 당귀수산도 마찬가지. 주수상반으로 달여야만 했다.

문제는 술의 종류였다.

한국에선 청주와 물을 섞어서 주수상반을 했는데, 아르타스에선 무슨 술을 마시는지 생각하기 어려웠다. 청주처럼 첨가물 없이 맑은 술이어야만 했는데, 유럽과 비슷하다고 한다면 보드카 같은 것이 괜찮았다.

에드는 또 종이에 무언가 적더니 입을 열었다.

"술을 섞어 약을 짓는단 말이지?"

"네."

"어떤 술이 좋겠나? 술이야 종류별로 우리 집에 다 있으니 말만 하게."

"맑은 증류주여야만 합니다. 독하지 않으면 좋겠는데요."

"맑은 증류주도 있지. 스피리트 엘릭서 말이야. 독한 것도 있고, 순한 것도 있으니 말만 하게."

종류별로 다 있단 말이지.

다행이었다. 일단 스피리트 엘릭서를 죄다 가져오라고 해서 맛을 본 다음 청주와 비슷한 것으로 고르면 될 일이었다.

"죄송하지만, 스피리트 엘릭서를 전부 가져오실 수 있습니까?"

나는 에드에게 요청했다. 에드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지. 내가 하인에게 말해서 가져오게 할 테니 좀 기다리게."

* * *

에드의 하인들이 술병을 잔뜩 가져왔다. 스피리트 엘릭서는 종류가 다양했지만, 모두 물처럼 맑은 형태였다.

에드가 말했다.

"자, 이게 가장 독한 거고, 이게 가장 순한 거라네. 여기 그려진 별을 보면 알 수 있지."

지오는 두 개의 술병을 받아 들었다. 가장 독한 것에는 별이 10개가 그려져 있었고, 가장 순한 것에는 별이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용병들은 술병들을 보자마자 혀를 달싹거렸다. 에드가 귀족이 아니라면 당장 약탈할 것 같은 기세였다. 샤를은 성큼성큼 걸어가 별이 7개 그려진 병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의 취향은 7개였다.

지오는 먼저 별 10개짜리를 열었다. 독한 술의 냄새가 확 끼쳐 왔다.

'이, 이건...!'

아주 진한 보드카의 향과 비슷했다. 보드카를 진탕 마시고 신촌 거리를 기어 다니던 기억이 바로 떠올랐다. 고개를 저어 개처럼 짖어 대던 기억을 애써 지운 다음 별 1개짜리를 열었다. 이번엔 향이 그리 강하지 않았다.

"이게 적당할 것 같은데 한번 마셔 보겠습니다."

지오는 잔에 스피리트 엘릭서를 따라 마셨다. 청주와 비슷했다. 도수는 10% 내외로 추정되는 알싸함. 아무런 첨가물이 없어 맛도 깔끔했다. 주수상반에 사용하기에 최적이었다.

"이겁니다! 앞으로 제 진료실에 별 1개짜리를 좀 가져다주실 수 있습니까?"

"그러지."

에드는 흔쾌히 대답했다.

"오...."

"부럽군...."

용병들은 저도 모르게 중얼댔다. 그런 다음 한쪽에 쌓인 술들을 보면서 쩝, 군침을 삼켰다. 샤를은 여전히 7개짜리를 손에 쥐고 있었다. 에드가 허락하면 바로 목구멍에 쏟아부을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 지오는 불자리 위에 냄비를 올렸다. 약재들을 모두 넣었다. 그런 다음 물을 붓고, 술도 같은 양을 부었다. 냄비의 뚜껑을 덮었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지오가 말했지만, 용병들의 관심은 이미 술이었다. 에드는 그런 그들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마시고 싶으면 마시게."

"저, 정말입니까?"

삼사키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에드는 계속 이어 갔다.

"그렇긴 하지만, 이번 치료가 성공적으로 끝나면... 자네 길드에서 우리를 전담 진료소로 지정해 주지 않겠나?"

"그야 물론입니다."

"이미 침을 놓아서 치료에 거의 성공했다고 봐도 좋으니 축하주로 마시면 어떻겠나?"

"그건...."

삼사키는 다시 머뭇거렸다. 하츠의 통증은 사라진 상황이지만, 아직 완치가 됐는지는 모르는 상황. 술 때문에 전담 진료소로 지정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너무나 마시고 싶어....'

스피리트 엘릭서는 고가의 술. 용병 길드의 마스터라고 해도 꽤 무리해야 구할 수 있었다. 게다가 종류별로 다 갖추고 마시는 것은 꿈도 못 꿀 일.

결국 타협을 시작했다.

"하츠, 다 나은 것 같지?"

"네?"

"일단은 말이야. 다 나은 것 같은데?"

"일단은 그렇지만...."

하츠가 망설이는 그때 지오가 나섰다. 삼사키 앞에 마주 서더니 입을 열었다.

"술 때문에 다 나은 것처럼 일을 꾸밀 필요는 없습니다. 정말로 나을 거니까요. 제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1주에서 2주 이내에 확실히 고치고, 성장에 도움을 줄 물약까지 주겠습니다. 그러니 미리 축하주를 마셔도 됩니다."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오오오오!"

용병들은 술병을 향해 돌진했다. 지오는 던전에서 용병들이 싸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마수들과 싸울 때도 저렇게 저돌적으로 움직이진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들은 콸콸 입 안에 술을 들이부었다.

"저도 좀 마시겠습니다."

샤를은 계속 소중히 품고 있던 별 7개짜리를 마시기 시작했다.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에드는 그들을 보더니 중얼거렸다.

"그냥 술만 사 줬어도 전담 진료소로 지정되는 거였군."

"원래 용병들은 저렇습니까?"

"아무래도 목숨을 내놓고 살고 있으니 이해해야지. 저들이 있는 덕에 던전 공략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나. 우리의 빛과 희망을 되찾으려면...."

에드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나이가 어린 하츠는 자신의 선배들을 바라보면서 쯧쯧, 혀를 찼다.

* * *

"그때 너 죽을 뻔했는데, 내가 구했잖아. 빨리 고맙다고 해."

"무슨 소리야. 잘 따져 보면 네 머리통은 내가 5번은 다시 붙여 줬지!"

"오크한테도 죽을 뻔했던 주제에 무슨 개 잡소리야!"

시끌시끌 북적북적. 한쪽에서 술판이 벌어지는 동안 약은 지어지고 있었다. 한약 특유의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당귀수산에선 나무의 향 같은 것이 났다.

이제 다 됐군.

나는 냄비의 뚜껑을 열었다. 당귀수산이 완성된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그릇에 따라 하츠에게 건넸다.

"드세요. 앞으로 통증을 잡는 데에 도움을 줄 겁니다."

"가, 감사합니다! 이거 정말 성수와 색이 똑같네요...!"

하츠는 그릇을 받아 들더니 황송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술을 마시던 용병들도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정말 성수와 색깔이 같아!"

"우오오오!"

"액티아시여!"

그들은 갑자기 술병을 높이 치켜들고 소리를 질렀다. 하츠는 환호성 속에서 약을 마셨다. 한국에선 다들 쓰다고 생각하는 것이 한약인데, 어쩐지 이곳에선 대환영을 받고 있었다.

그냥 여기 눌러살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가죽 포대에 남은 당귀수산을 담았다. 하츠에게 건네주며 설명했다.

"하루에 세 번, 식사하기 전에 드세요. 그리고 매일 와서 침 맞고 가고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츠는 입가에 묻은 약을 닦아 다시 핥으면서 대답했다. 나는 허허 웃으면서 계속했다.

"그렇게 하고 1주일 정도 경과를 지켜봅시다."

"네, 의원님!"

하츠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때 에드가 내 어깨를 토닥거리더니 말했다.

"수고했어. 자네도 한잔 마시게나."

"감사합니다."

정말 아르타스에 눌러살아도 되겠구먼.

그때 하인들이 뭔가를 가져왔다. 과일과 빵, 고기. 안주들이었다. 슬쩍 빵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부드럽고 고소했다.

편의점 빵 같았다고 하면 과장일까. 나도 모르게 용병들과 함께 소리를 질렀다.

"우오오!"

13화 하급 용병 하츠 (4)

마시고 또 마셨다. 우리는 MT라도 온 대학생들처럼 진료실에 둘러앉아 스피리트 엘릭서란 것을 즐겼다. 안주도 고급이었다. 빵은 편의점 빵 같고, 고기는 패스트푸드점 패티 같았다.

에드 녀석은 매일 이런 걸 먹는단 말이지?

부러웠다. 딱딱하고, 질긴 것들에 길들었던 나는 입질을 멈추지 않았다. 용병들도 매한가지. 끊임없이 들이붓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에드는 한쪽에 기대서서 뭔가를 필기하고 있었다. 독일의 비밀경찰처럼 눈을 희번덕거렸다. 도대체 여기서 뭘 끼적거리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딘지 모르게 독일 사람처럼 생기긴 했어.

그때 별 7개짜리 술을 홀짝거리던 샤를은 안주만 축내던 하츠에게 다가갔다.

"작은 검도 좀 사용해 봤나?"

"아뇨. 원래 사용하던 것도 좀 컸어요."

"형제가 대형 무기를 선호했나 보군."

"그런 셈이죠. 하하."

하츠는 멋쩍게 웃었다. 샤를은 품에서 단도를 꺼내더니 손안에서 빙글빙글 돌리다가 계속 이어 갔다.

"나는 지금 안내인이 되는 바람에 묶인 몸인데, 원한다면 진료소 앞에서 검술을 가르쳐 줄 수 있지."

"저도 실력은 충분한데요. 팔이 좀 아플 뿐이지."

"아냐. 자네는 딱 봐도 애송이야."

"하.... 자신 있어요?"

"술에 취했어도 자네 같은 건 손쉽지."

둘은 갑자기 싸우는 느낌을 풀풀 풍겼다. 그들을 말리려고 일어서는데 다리가 휘청거렸다. 넘어졌다가 일어나서 보니 두 사람은 팔씨름을 시작했다. 어느새 용병들이 모두 모여 팔씨름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뭐야?"

나는 다시 앞으로 엎어졌다.

* * *

기억은 딱 거기까지만 났다. 그다음부터는 이가 빠진 것처럼 몇 장면만 기억에 남아 있었다. 얼굴을 각각 5개씩 가진 용병들과 호형호제를 하는 장면, 팔씨름을 하는 족족 다 지는 굴욕적인 장면이 뇌리를 스쳤다. 마지막엔 대학교 응원가를 함께 부르던 기억이 떠올랐다.

오오, 우동의 기상. 세상에 나아가리.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나는 골치가 아팠다. 숙취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잡고 진료소로 출근했다. 하츠는 아침 일찍부터 진료실에 도착해 있었다.

"의원님,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안녕하지 않지만, 거짓 인사를 건넸다. 그런 다음 하얀 가운을 입었다. 그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계속했다.

"어제 시키신 대로 약도 먹었어요. 정말 신기한 게 지금까지 통증이 없어요. 벌써 다 나은 건가요?"

"아닐 거예요. 통증을 가라앉히는 약을 마셔서 그래요. 오늘도 침부터 맞읍시다. 그리고 절대 무리해서 움직이지 말아요. 일단 제가 다 나았다고 할 때까지."

"알겠습니다. 의원님 말씀은 무조건 들어야죠."

말 잘 드는 환자의 전형적인 태도. 마음에 들었다. 이런 환자는 치료도 빨리 되는 편이었다. 그때 진료실로 들어선 샤를이 말했다.

"하츠, 침 다 맞거든 앞으로 나오게. 간단한 동작만 알려 줄 테니."

운동을 한다고? 내가 얼른 막아섰다.

"무리하면 안 된다니까요."

"무기는 손에 쥐지 않고 동작만 알려 주는 거니 걱정 말게나."

"다시 아프게 되면 책임져야 해요."

"걱정 말게. 짧게 할 거야. 게다가 저 친구 하체가 좀 부실해서 키워 줘야 돼."

샤를은 그렇게 말하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무리하지 않고 적당히 움직이는 것은 재활에 도움을 줄 수도 있었다. 게다가 하체를 단련하는 것은 언제나 좋은 법.

나도 어깨를 으쓱거린 다음 말했다.

"자 그럼 앉으세요. 침을 놓을 테니."

하츠는 벌써 침 맞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 * *

하츠는 1주일간 꾸준히 치료를 받았다. 테니스 엘보는 금세 나았다. 지오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츠는 샤를의 지도 아래 짧은 검을 쥐고 수련 중이었다. 돌바닥 뒤로 땀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때 에드가 진료실로 들어서더니 씩 웃었다.

"방금 그 대머리... 누구더라? 강철의 손톱 용병 길드 마스터 말이야."

"삼사키 말입니까?"

"아, 그래. 삼사키가 왔다가 갔다네."

"뭐라고 했습니까?"

"우릴 전담 진료소로 지정하겠다고 했다네. 수고했어."

에드는 거기까지 말하고 지오의 등을 토닥거렸다. 그러면서도 큭큭, 소리 죽여 웃었다.

'매달 받을 금액이 쏠쏠해지겠어.'

짤랑거리는 금화들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명성도 자자해질 터. 에드는 싱글벙글했다.

지오 또한 반색했다. 진심으로 기다리던 일이었다.

"드디어 됐군요!"

일단 환자들이 용병 길드에서 계속 찾아온다는 점이 좋았다. 환자들이 와야 의사도 존재하는 법. 기쁜 일이었다.

'게다가....'

콩고물이 떨어지지 않겠는가. 지오는 헤헤 웃었다. 에드는 입을 열었다.

"사실 자네 덕분이지. 1년이나 걸릴 치료가 1주일 만에 끝났으니 말이야... 자, 자네 얼굴을 보아하니 뭔가 원하는 눈친데?"

"맞습니다."

"뭐든 말하게나. 우리 이라쉬 가문의 격언 중엔 이런 게 있지. '기분 좋을 땐 약속하지 말라.' 하지만 정말 기분이 좋으니 특별히 약속해 주지."

에드는 말을 마치고 팔짱을 꼈다. 지오는 은근한 눈빛을 쏘며 말했다.

"지난번에 술을 마시며 먹었던 안주들 말입니다."

"아, 그것들."

"그걸 식사로 제공받을 수 있을까요?"

"...."

"어렵습니까?"

"우리 집에서 살겠다는 말인가?"

에드의 질문에 지오는 침을 꿀꺽 삼켰다.

'같이 사는 건 좀 그런데.'

좀이 아니었다. 어떻게 저런 비밀경찰 같은 인간과 같이 산단 말인가. 그러나 에드는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말했다.

"내 저택엔 별채가 있으니 거기서 지내게."

"괜찮은데...."

"나와 마주칠 일은 없을 테니 지내게."

"그렇다면!"

지오는 얼른 승낙했다. 그런 다음 창밖에 있는 하츠를 가리키면서 계속했다.

"이제 성장을 돕는 약을 처방하겠습니다."

에드는 필기 로봇답게 바로 종이 쪼가리를 꺼냈다.

* * *

원래 성장 한약이란 것은 정해진 바가 없었다. 사람에 따라, 환경에 따라 다르게 제조해야 했다.

하츠라면....

바로 생각나는 약이 있었다. 귀룡탕歸茸湯. 당귀와 녹용을 넣어 달인 약이라 귀룡탕이라 불렸다. 면역력과 체력을 증진시킬 때 쓰였는데, 하츠처럼 수련으로 체력이 고갈되는 유형의 청소년은 귀룡탕이 제격이었다. 성장에 필요한 체력까지 운동에 쓰이기 때문에 에너지를 마구마구 공급해 주는 약인 것이다.

"진료소장님, 귀룡탕을 짓겠습니다."

"알았네. 약재를 꺼내 주게."

나는 바로 약재함으로 가서 당귀신當歸身부터 꺼냈다. 에드는 약재의 생김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건 당귀신이라고? 지난번에 지은 당귀수산에 들어간 당귀미와 어떻게 다른가? 생긴 게 좀 다른데?"

"오, 맞습니다."

에드의 지적에 나는 약간 놀랐다.

당귀와 당귀미가 다른 것을 바로 알아채다니.

역시 필기 로봇다운 면모였다. 이전에 당귀수산에 쓰인 당귀미는 자잘하게 잘린 모양이지만, 이번에 귀룡탕에 넣을 당귀는 상대적으로 큼직한 편이었다. 얼핏 보면 알아채기 어려운데, 에드는 바로 차이점을 찾아낸 것.

에드는 어쩐지 훌륭한 학생 같았다. 나는 신이 나서 설명해 주었다.

"네, 지난번 당귀미는 잔뿌리입니다. 이번에 쓰는 당귀신은 뿌리의 몸통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당귀미는 피를 잘 돌게 하는 효능이 있다면 당귀신은 피를 만드는 데에 탁월하죠. 즉 에너지를 만드는 겁니다."

"아하, 그럼 성장에 확실히 도움을 주겠군."

"그렇습니다. 그 필기가 헛되지 않군요."

"책으로 출판해 명성을 떨쳐야 하지 않겠어?"

에드는 중얼거리면서 당귀신과 당귀미의 차이점을 적어 내려갔다.

잠깐. 책을 쓴다고?

갑자기 가슴이 벅차올랐다. 정지오의 지식이 이곳에 남는다고 생각하니 그럴 수밖에. 물론 액티아가 풀려나면 그땐 필요 없어지겠지만, 그때까진 허준급의 명성을 날릴지도 몰랐다. 오, 허준이시여. 당신의 이름도 드높이겠습니다.

나는 둥당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하면서 약재함의 서랍을 열었다.

"다, 다음은 녹용입니다."

시베리아산 녹용이었다. 춥고 척박한 지역에서 구한 것일수록 약효가 좋은 법. 그리하여 가장 비싼 녹용이었다. 너무 고가인 탓에 한국에선 약을 지을 때마다 손이 바들바들 떨렸는데, 이젠 자동 리필이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왕창 집어서 약보자기에 넣었다. 책도 쓴다고 하니 에라, 모르겠다, 한 줌 더 집어넣었다.

이것이 플렉스인가.

한국에서 팔면 거의 150만 원은 그냥 넘어갈 법한 양이었다. 아이 세 명은 거뜬히 성장시킬 만큼의 양. 허허, 웃음이 나왔다.

에드는 물었다.

"이것도 주수상반인가?"

"네, 물과 술을 반씩 써서 달일 겁니다."

"알겠네."

에드는 제법이었다. 이제 약 짓는 방법도 알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녹용이 들어갈 때는 방법이 또 다르다는 것은 모를 터. 나는 불자리를 얇게 펴고 주먹으로 있는 힘껏 내리쳤다. 겨우 불길이 솟았다. 그런 다음 먼저 주수상반으로 녹용부터 달이기 시작했다.

에드가 바로 물었다.

"당귀신은 같이 안 달이나?"

"녹용은 따로 달여야 합니다. 별도로 달인다고 해서 별전別煎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해야 녹용의 약효를 최대한 끌어낼 수 있습니다."

"그렇군."

에드는 모든 것을 세세하게 기록했다.

'별걸 다 기록하네.'

나는 냄비 뚜껑 사이로 나오는 물방울을 괜히 수건으로 닦았다. 그러자 에드는 그것마저 기록했다.

멍충멍충하구만.

시간이 흐르자 냄비 안은 누렇고 비릿한 액체로 가득했다. 정말 약인가 싶겠지만, 녹용의 엑기스였다. 이제 당귀신을 넣고 다시 끓이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창밖을 바라보니 수련장에 삼사키까지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삼사키도 샤를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 그의 대머리에서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뭐야.

기억엔 없지만, 술자리에서 샤를과 무슨 일이 있던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약이 다 지어질 때까지 계속 수련했다.

나는 해 질 무렵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에게 밥 먹으라고 소리 지르는 기분으로 외쳤다.

"약 먹어라!"

하츠는 배고픈 아이처럼 허겁지겁 뛰어왔다.

* * *

진료소 앞에선 하츠의 수련과 성장이 계속되고 있었다. 지오는 진료실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열심히 하는구먼.'

일주일 만에 하츠의 키가 1.5cm나 컸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제 작은 무기를 들고 싸울 때는 팔꿈치 통증이 없기 때문일까.

"하츠를 데리고 던전으로 갈 생각이오."

삼사키가 내게 말했다. 나는 바로 수긍했다.

"만만한 상대와 싸운다면 문제없을 겁니다."

"오크 떼와 싸우게 할 생각이야."

그는 말을 마치고, 하츠를 돌아보았다. 하츠는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분명 오크 떼와 관련된 사연이 있을 것이었다.

'마수와 관련된 사연이라면....'

복수와 원한 같은 것일 터. 이성을 잃고 달려들다가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다. 나는 노파심 때문에 덧붙였다.

"혹시 모르니까 혼자 보내진 말고, 보호자를 대동하세요."

"물론이오. 나만 믿으시오."

삼사키는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때리며 말했다. 뒤에 있던 샤를은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거들었다.

"삼사키라면 감당할 수 있을 거라네."

다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하츠는 시종일관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 *

던전의 6층. 셀릭 왕국의 군대와 함께 하츠와 삼사키도 진입했다. 군대의 신임을 얻고 있는 삼사키였기에 별동대를 조직해 군대와 따로 다닐 수 있었다.

삼사키는 검을 허공에 한 번 휘두른 다음 말했다.

"던전 6층은 샛길이 많아서 이번에는 우리 둘만 다닐 수 있게 됐어."

"이번 기회에 활약해 볼게요!"

"그래. 네 형이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해라."

그는 하츠의 등 뒤에 걸려 있는 검을 가리켰다. 하츠의 형이 사용하던 대검. 하츠는 사용하지도 않을 검을 일부러 가지고 온 것이었다.

"너무 긴장하지 말고. 이제 가자."

삼사키는 횃불을 들고, 여덟 사람 정도가 지나갈 만한 통로로 앞서 걸어갔다. 하츠는 검을 움켜쥔 채 자세를 낮추고 따라붙었다.

"취이...."

전방에서 소리가 났다. 하츠는 검을 고쳐 쥐었다.

"오크예요."

"그래. 네가 원한을 품은 그 소리지. 가자. 우리는 무조건 돌격이다!"

삼사키는 횃불을 전방으로 던졌다. 불덩이는 휙휙 돌며 날아갔고, 전방을 비춰 주었다. 그쪽에서도 오크들이 달려오는 중이었다.

"취이이이!"

삼사키는 빠르고 강하게 검을 휘둘렀다.

"죽어!"

-퍽!

검으로 내려치는데, 도끼에서 날 법한 파열음이 났다. 오크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처박혔다. 파열음은 계속됐다.

-퍽!

-퍽!

소리 하나당 한 마리씩 오크가 바닥에 나자빠졌다. 하츠도 그 뒤를 따라가면서 삼사키의 공격을 피한 오크들을 상대했다.

"내가 죽여 주마!"

하츠는 오크가 휘두르는 도끼를 피한 다음 검으로 올려쳤다. 이전과는 다른 힘. 오크는 도끼로 막으려 했지만, 도낏자루와 함께 목이 잘렸다. 하츠는 스스로의 힘에 놀랐다. 이후 솟아오르는 핏물 때문에 한 번 더 당황하기도 했다.

"이 더러운 피가...!"

그는 얼굴에 묻은 피를 닦으며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약을 먹고 난 뒤로 뭔가 달라진 것이 틀림없었다.

"하츠, 이 녀석 맞지?"

그때 앞에서 삼사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앞에는 피부가 불그죽죽한 오크가 있었다. 형의 목숨을 빼앗은 블러드 오크. 하츠는 대답하는 대신 검을 움켜쥐고 달려갔다.

"죽여 버릴 거야!"

"도와주마."

삼사키는 블러드 오크를 향해 나아가며 위에서 아래로 검을 벴다. 녀석도 검을 휘둘러 막아 냈지만, 무지막지한 힘 때문에 몸이 휘청거렸다. 다시 내리치자 녀석은 아예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어느새 코앞까지 당도한 하츠는 검을 아래서 위로 올려 쳤다.

"죽어!"

블러드 오크는 간신히 균형을 잡으며 하츠의 공격을 막아 냈다. 하지만 삼사키가 다시 내리치면 목이 날아갈 상황. 최후를 직감한 녀석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직접 해라."

삼사키는 공격을 하다 말고 뒤로 물러섰다.

"용병이라면 스스로 극복해야 할 때가 있다. 지금까지 연습해 온 것을 보여 줘."

하츠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검을 블러드 오크의 얼굴로 던졌다. 녀석은 당황하며 얼굴로 날아온 공격을 쳐냈지만, 이어지는 공격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부우우웅

하츠는 어느새 등에 메고 있던 대검을 꺼내 양손으로 내리찍고 있었다. 복수를 다짐하며 내리친 횟수가 수천 번. 손이 다 부르트도록 검을 휘둘러 왔다.

-쾅!

대검은 녀석의 몸을 가른 다음 바닥에 부딪혔다. 굉음이 울렸고 핏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삼사키는 대머리에 묻은 핏물을 털어 내고, 바닥에 떨어진 살점을 툭툭 걷어차 치우더니 말했다.

"잘했다."

"...."

하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다음엔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삼사키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앞을 보았다.

"취이이."

적은 아직도 많았다.

"이젠 양보 안 한다. 잘 따라와."

삼사키는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하츠도 눈물을 한 번 훔친 다음 뒤를 따랐다. 이제 형보다 앞서갈 차례였다.

* * *

그리고 몇 주가 흘렀다. 용병 길드에선 바로 다음 환자를 보내겠다고 했다. 에드는 말했다.

"이번에 온다는 친구는 말이야. 한때 상급 용병이었어. 상당한 실력자란 말이지."

"'한때'라면 나이가 좀 있는 환자겠군요."

"그런 셈이네. 그나저나 자네는 우리 집에서 비싼 밥 먹는 것치곤 아직도 좀 부족하군."

"...."

갑작스러운 비난에 지오는 말을 잊었다. 에드는 손가락을 까딱까딱 흔들면서 계속했다.

"한때 실력자였다고 하는데, 거기서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유추하다니. 그보다 중요한 게 있지 않나?"

"무슨 말씀이신지...."

"실력자라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네. 실력자란 곧 유력 인사란 말이야. 그런 자의 치료가 성공적으로 끝나면 어찌 되겠나?"

에드의 질문. 여기까지 도움을 줬으니 지오도 에드가 원하는 대답을 할 수 있었다.

"부와 명성이 따라옵니다."

"그렇지. 자네도 앞으로 나처럼 필기 좀 하게. 좀 배워야겠어."

"네, 네."

지오는 건성으로 대답한 다음 물었다.

"아무튼 그 환자 언제 온다고 합니까?"

"곧 올 거라네."

에드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 * *

나는 삼사키가 데려온 자를 올려다보았다. 머리는 반백. 중년과 노인 그 사이를 지나가는 중인 것 같았다.

그는 키가 컸는데, 정말 말도 안 될 정도로 컸다. 그리고 모든 신체 부위가 길었다. 팔다리뿐 아니라 손가락도 길었고, 심지어 얼굴도 길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바리한이라고 합니다."

"네, 어디가 불편하셔서 오셨는지...?"

"어깨입니다."

바리한은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왼팔로 오른쪽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버릇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어깨에 오랜 통증이 있었음이 분명했다.

삼사키까지 나서서 거들었다.

"바리한 선배께선 평생 활을 쐈소. 흔히 명궁이라 칭한다오."

그러면서 자신이 대신 짊어지고 있는 활을 보여 주었다. 바리한의 키에 걸맞은 어마어마한 크기의 활이었다.

"늘 어깨에 무리가 있었죠. 성수를 이따금 마셔서 회복했지만, 이젠 성수가 너무 비싸진 바람에...."

"그러니까 반복적으로 활을 쏘는 동작을 해서 어깨가 망가진 셈이군요?"

내 질문에 바리한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면서 계속했다.

"부탁입니다. 다음번 던전 공략까지 마치고 은퇴할 생각입니다. 단 하루라도 좋으니 마음껏 활을 쏠 수 있게 해 주세요."

노년을 앞둔 사람의 간절한 부탁이었다.

14화 명궁 바리한 (1)

에드는 진료소에선 잘나가는지 몰라도 귀족 중에서는 핫바리였다. 귀족들이 모여 사는 언덕에 저택이 있었는데, 에드의 것은 언덕 초입이었다. 나머지 귀족들은 죄다 저 위쪽. 그러니까 그들 발밑에서 매일 굽실대며 살아가는 셈이었다.

물론 그 사실도 며칠이 지난 다음에 알았지.

그전에는 눈앞에 음식에 눈이 멀어 알아채지도 못했다. 에드의 집에 머물게 된 다음부터 부드러운 빵과 기름지고 야들야들한 고기들을 먹을 수 있지 않았겠는가. 이젠 벽돌 빵과 질긴 고기는 안녕. 혹시 다른 세계로 또 떠나게 되더라도 먹고 싶지 않은 것들이었다.

나는 아침부터 빵 사이에 고기와 채소를 넣고 햄버거처럼 먹곤 했다. 편의점 햄버거에서 소스만 뺀 것 같은 맛이지만, 내 처지에선 아주 훌륭하고 만족스러웠는데, 고개를 들면 언덕이 보이는 것이었다. 찬란한 햇빛이 언덕의 경사면을 따라 내려와 눈이 부셨다.

슬슬 욕심이 더 나네.

한국만큼은 아니어도 분명 더 좋은 것들이 분명 있을 터였다. 언덕 위에 사는 녀석들은 뭘 먹고 어떤 권력을 누리고 있는지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그 자리로 가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진 않았다. 더욱 열심히 진료해서 허준의 이름을 알리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내 명성도 드높일 필요가 있었다.

그러려면 먼저 이 사람부터 치료해야지.

나는 자세를 고쳐 앉으면서 물었다.

"그럼 몇 가지를 묻겠습니다."

"그러십시오."

바리한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갑자기 부드러운 인상이 됐다. 평생 싸워 온 용병 같은 느낌이 아니었다. 바로 옆에 선 삼사키는 척 보면 척인데, 그렇지 않은 것이었다.

이 사람은 신사네.

말투도 점잖고, 표정도 온화했다. 첫인상이 좋은 환자는 더 잘해 주고 싶은 법. 나도 한번 미소 지어 보인 다음 질문을 던졌다.

"어깨가 아프다고 하셨는데, 정확히 어떤 동작을 할 때 아프신가요?"

"가장 중요한 동작이 어렵죠. 활시위를 당길 때 힘이 안 들어가요. 당연히 통증도 있고요."

바리한은 대답과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절망에 빠진 사람 특유의 어두운 기운이 퍼지고 있었다.

나는 바리한 옆으로 가서 그의 오른팔을 잡았다. 그런 다음 계속 이어 갔다.

"한번 천천히 팔을 들어 볼게요. 어느 지점에서 통증이 발생하는지 확인하겠습니다."

"네."

바리한은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렸다. 통증이 없는 것처럼 서서히 올라왔지만, 어깨높이까지 들어 올리자 '윽' 하고 바리한이 소리를 삼켰다. 통증이 상당한 모양이었다.

삼사키는 옆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물었다.

"이런 것도 고칠 수 있소?"

"완전히 고칠 수는 없지만, 통증을 완화할 수는 있을 겁니다. 바리한 씨께서는 다음번 공략에 마지막으로 참여하고 싶다고 하셨죠?"

내 질문에 바리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발 부탁드립니다. 40년간 활을 쏘며 살아왔습니다. 마지막 싸움에서 웃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

말문이 막혔다. 40년이라니. 한 가지 일을 오랜 시간 해 온 사람에겐 절로 고개가 숙어졌다. 제대로 치료해 보고 싶다는 욕망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고작 빵과 고기 때문이 아니야!

잠시나마 헛된 욕망에 휘둘렸지만, 이다음에도 분명 정신없이 욕심을 부리겠지만, 이젠 다시 진심 모드였다.

나는 주먹까지 쥐어 보이면서 바리한에게 말했다.

"네, 제가 한번 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우오오!"

삼사키는 갑자기 비장한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나름의 응원인 모양이었다. 나는 삼사키에게 요청했다.

"윗옷을 벗어 보실래요? 어깨를 자세히 보고 싶어서."

"알겠습니다. 이봐, 삼사키. 좀 도와주게."

바리한은 혼자서 옷을 벗는 것도 힘든지 삼사키에게 부탁했다. 그는 팔을 들어 올리는 동작을 아예 하지 못하고 있었다.

삼사키는 우악스러운 팔로 윗옷을 잡더니 안내했다.

"자, 이쪽으로. 네, 그쪽으로 팔 빼시고."

몇 번의 교통정리 끝에 바리한은 윗옷을 벗었다. 은퇴를 앞두고 있다고 말했지만, 온몸이 근육 덩어리였다. 몸 곳곳에 흉터도 있었다. 40년간 용병 생활을 해 왔다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어깨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오른쪽 어깨가 앞쪽으로 살짝 밀려 있었다.

"자, 다시 한번 팔을 조금만 들어 볼게요."

바리한은 내 지시대로 움직였다. 확실히 어깨의 움직임에 문제가 많았다. 팔을 들어 올릴 때 견봉(어깨의 툭 튀어나온 부분)과 상완골上腕骨은 부딪치지 않아야 했다. 근육이 상완골을 잡아 주어 그 끝부분이 견봉 아래쪽으로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바리한의 어깨는 그 움직임이 제대로 되지 않으니 아플 수밖에 없었다. 뼈가 충돌하면서 심지어 드드득, 하는 소리까지 날 정도였다.

역시 견봉과 상완골이 충돌하고 있어.

나는 견봉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플 때 딱 여기가 아프죠?"

"맞습니다."

바리한은 통증 때문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내가 정확히 알아맞혔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복잡하고도 미묘한 표정이었다.

일단 의심이 가는 질환은 회전근개파열. 한국의 양궁 금메달리스트도 겪은 일이었다. 회전근개의 근육은 극상근棘上筋, 극하근棘下筋, 소원근小円筋, 견갑하근肩胛下筋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4개의 근육은 근육의 동그란 모양을 형성하고 있으며 안정적인 움직임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준다. 문제는 이것이 파열됐을 때. 움직임이 어긋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40년이나 활을 쐈다면....

성수라는 것을 매일 원샷했다고 해도 어깨충돌증후군이 발생했을 것이었다. 어깨를 움직이는 반복 동작을 40년간 했다면 무조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저 활. 말도 안 되게 커다란 활이었다.

엄청난 힘을 들여 쏘겠지.

어깨충돌증후군이 맞는지 진단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호킨스 테스트를 하면 됐다.

"바리한 씨, 바른 자세로 앉아 주세요."

그런 다음 바리한의 오른팔을 잡아 올렸다. 바리한은 어깨가 아픈지 이미 표정이 일그러졌다. 회전근개파열이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통증은 그래도 참을 만하죠?"

"네, 이 정도면 그냥 참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럼 이번엔 어떤지 보세요."

나는 어깨와 수평이 된 팔을 고정시킨 다음 팔꿈치를 꺾었다. 그런 뒤 천천히 바리한의 팔을 내회전시켰는데, 곧바로 바리한은 소리를 삼켰다.

"윽!"

어깨충돌증후군이 확실했다. 나는 바리한에게 물었다.

"이 통증이 문제 아닙니까?"

"맞습니다."

"이건 어깨충돌증후군입니다. 반복 동작으로 어깨를 혹사시켜서 근육이 회복탄력성을 잃은 상태죠. 이미 섬유화가 되었고, 끊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바리한 씨는 회전근개가 이미 파열됐을 겁니다. 제 예상대로면 극상근이 문제일 겁니다. 극상근이 상완골두의 위치를 제대로 잡아 주지 못해 지금의 통증이 발생하는 거죠."

"...."

바리한은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삼사키가 나서서 물었다.

"이게 무,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소."

"다시 설명해 드릴게요. 근육의 손상으로 어깨의 관절이 고장 났다고 생각하면 쉽습니다. 뼈와 뼈가 부딪치는 겁니다. 지붕에 해당하는 뼈와 기둥에 해당하는 뼈가 충돌하기 때문에 통증이 발생하는 거죠."

"대, 대충 알 것 같소. 젠장할. 뼈를 어디서 사 와서 다시 붙일 수도 없고...."

삼사키는 대답한 다음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 * *

바리한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40대가 된 다음부터 발생한 고질병이었다. 옛날에는 성수를 마시면 몇 년 동안 멀쩡해졌다. 다시 통증이 발생해도 성수를 구하면 그만. 해결하기 쉬운 질환이었다. 물론 통증이 발생하는 주기가 점점 짧아지긴 했다. 게다가 성수를 구하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가 되어 버린 상황이지 않은가.

'분명 그때 무리한 것이 화근이야.'

가장 최근 공략에서 무리하고 말았다. 통증이 좀 있어도 막상 싸움이 시작되면 그런 것들은 잊었다. 달려드는 오우거들을 보면서도 어깨가 아프다고 악! 소리를 지르는 머저리는 아니었다.

삼사키를 비롯한 강철의 손톱 소속 동료들이 앞에서 막아서는 동안 거대한 오우거의 눈을 꿰뚫어야만 했다.

"선배, 뒤에서 엄호해 주시오!"

근육 덩어리 같은 용병들이 오우거에게 돌진하면 제아무리 거대한 괴수라도 진심으로 싸워야 했다. 그러면 오우거의 얼굴은 무방비. 그때 침착하게 눈을 노려야 했다.

-휘이이익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화살은 오우거의 눈을 꿰뚫었을 뿐 아니라 두개골까지 관통했다. 기뻐할 새도 없었다. 오우거들의 숫자가 생각보다 많았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 많은 활을 쏴야만 했다.

마침내 오우거들을 모두 쓰러뜨리고 삼사키는 도끼를 휘두르며 기뻐했다.

"우오오오!"

강철의 손톱의 중급 용병들은 자신들의 할당량을 모두 채우고 던전에서 빠져나왔다. 금화가 가득 담긴 주머니를 받아 들고 삼사키는 말했다.

"선배 덕분이오. 정말 백발백중이라니까! 하하하."

바리한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통증은 잊고 우당탕 싸웠지만, 던전 밖으로 나와서 보니 어깨가 너덜너덜한 느낌이었다. 팔이 어깨에 딱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대롱대롱 간신히 매달린 기분.

'이래도 되나?'

싶었는데, 역시 그래선 안 되었다. 다음날부턴 팔을 들어 올리는 것조차 힘들었다. 이제 용병으로서 쇳밥 먹는 것은 끝장. 소원이라면 마지막으로 시원하게 싸워 보는 것이었다. 더 욕심을 내자면 후배 활잡이들을 가르치면서 여생을 마치는 것이었다.

* * *

지오는 침상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일단 침을 놓겠습니다. 이런 치료가 좀 이상할지도 모르겠지만, 삼사키 씨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죠?"

"아. 그렇지. 선배, 저 침이 보통 침이 아니오. 하츠 그 꼬맹이도 저걸 맞고 나았으니 믿어도 좋을 거요."

바리한은 고개를 끄덕거린 다음 침상으로 향했다. 침상에 걸터앉더니 비장한 얼굴로 지오에게 말했다.

"꼭 좀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옆으로 누우시면 됩니다. 통증이 있는 오른쪽 어깨가 위로 오도록 말이죠."

"알겠습니다."

바리한은 침상 앞에서 머뭇거리다가 옆으로 누웠다. 근육으로 가득한 몸이었지만 몸짓은 연약했다. 백전노장이라도 세월 앞에서 무너지는 것이었다.

'피날레는 화려하게 장식하도록 해 주자!'

지오는 평소보다 훨씬 더 진중한 마음으로 침을 손에 쥐었다. 마음가짐은 이미 임금님 앞에 선 허준이었다.

"자, 침을 놓겠습니다."

먼저 목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자리의 견정혈肩井穴을 찾았다. 흔히 남의 어깨를 주물러 줄 때 누르게 되는 자리였다. 근육이 크고 잘 보여서 교과서를 보는 기분이었다.

그곳의 근육은 손끝에 걸릴 정도로 단단히 뭉쳐 있었다. 침을 찔러 넣자 굉장히 뻑뻑한 느낌. 일단 힘을 줘서 넣었다.

'이럴 땐 재삽과 염전을 해야지.'

재삽은 침을 두어 번 넣었다가 빼는 것. 염전은 침을 회전시키며 넣는 것. 침술의 테크닉들이었는데, 단단히 뭉친 근육을 풀어 줄 때 직방이다. 지오는 침을 손끝으로 잡고 시계 방향으로 회전시키면서 3번 뺐다가 다시 넣었다. 이전과 달리 근육에 들어가는 느낌이 부드러워졌다.

"으윽!"

바리한은 신음을 흘렸다. 당연히 고통이 수반되었다.

'나으려면 어쩔 수 없지....'

지오는 이어서 날개뼈 위에 위치한 혈 자리 천종天宗에 침을 놓았다. 다음은 어깨에 위치한 혈 자리들. 견료肩髎, 견우肩髃, 노수臑兪에 각각 침을 꽂았다. 모두 어깨의 치료에 탁월한 혈들이었다. 이것만으로도 몇 시간은 통증을 느끼지 못할지도 몰랐다.

그때 바리한이 말했다.

"생각보다 깊이 넣는군요."

"네, 그렇습니다."

"처음엔 아팠는데 이후엔 생각보다 아프지도 않고요."

"물론이죠."

그런 대화를 나누는 중에 에드가 슬쩍 다가왔다.

"당연하다네. 이 침술은 이미 여러 환자를 통해 검증된 거지."

"음?"

"믿고 맡기게나. 정지오 의원의 스승인 허준 선생께서 이미 수많은 임상을 거친 것이니. 완치도 가능할 거네."

에드의 홍보에 바리한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100% 믿는다는 표정으로 지오를 지켜보았다.

'완치는 힘들 텐데....'

아니, 불가능할 것이었다. 한 번의 전투는 가능하게 해 주어도 말이다. 그때 바리한이 선수를 쳤다.

"감사합니다!"

삼사키도 나섰다.

"역시 명의라니까!"

지오는 침을 꿀꺽 삼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에드는 '네가 알아서 해.' 하는 얼굴. 샤를은 어깨만 으쓱거릴 뿐 도움이 전혀 되지 않았다.

'그래. 일단 해 보자. 허준의 이름까지 팔아먹었잖아.'

지오는 대답했다.

"네, 완치 한번 해 봅시다."

일단 지르고 보는 것이었다.

15화 명궁 바리한 (2)

완치할 수 있다고?

침을 맞아야 할 것은 그런 말을 꺼낸 내 입이 아닐까 싶었다. 먼저 바람을 잡은 에드는 혀에 부항을 떠야 정신을 차릴 것이었다. 하지만 마냥 에드를 탓하기도 어려웠다.

저 녀석 언제부터 저런 눈을....

나를 바라보는 에드의 눈에는 확신과 광기가 서려 있었다. 영화에서 보던 광신자의 눈빛과 매우 흡사했다. 정말 내 의술이 바리한을 완치시킬 것이라 믿는 것이 분명했다.

내 생각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듯 에드가 말했다.

"허준의 제자 정지오 의원이니 믿으시게나."

종교 행사에서 나올 것 같은 발언이었다. 삼사키와 바리한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샤를도 마찬가지. 게다가 나도 이미 완치시키겠다고 말한 상황.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법이니 이젠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다른 수도 좀 써야겠네.

지금까진 침만 놓고 치료를 끝냈다. 이후에 약을 처방해 주긴 했어도 말이다. 하지만 이번엔 시술을 하나 더 할 생각이었다.

"시간이 됐으니 일단 침을 뽑겠습니다."

나는 바리한의 몸에 꽂힌 침들을 하나씩 뽑았다. 바리한은 옆으로 누워 있는 자세에서 몸을 일으켜 바로 앉았다. 팔을 조금씩 움직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삼사키가 다급하게 물었다.

"어떻습니까?"

"이건...."

"역시 나았죠?"

"그렇다네. 약간 아프지만, 이 정도는 전과 완전히 달라."

바리한은 팔을 천천히 움직이면서 대답했다. 삼사키는 하하하 웃음을 크게 터뜨렸다. 에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필기했다.

"흑...."

갑자기 울음소리가 났다. 소리의 진원지는 바리한. 그는 침상에 앉아 눈물을 삼키고는 내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마지막 싸움을 허락해 주셔서."

"...."

진료실의 모두가 침묵했다. 40년 경력의 용병이 눈물 흘리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만큼 무거운 눈물이었다.

나는 머리를 한번 긁적거린 다음 말했다.

"하지만 몇 시간만 흐르면 통증은 곧 다시 느껴질 겁니다. 만성적이기 때문에 침 한 번으로 다 낫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죠."

"그렇습...니까?"

"네, 마지막 싸움을 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마지막 싸움을 하기로 예정된 시기가 언제죠?"

내 질문에 삼사키가 대신 대답했다.

"바리한 선배는 중급 용병 중에서도 에이스. 셀릭 왕국에서 아예 전속으로 고용되었소. 물론 나도 그렇지만. 하하. 아, 아무튼 셀릭 왕국의 다음 공략에 참여하게 될 거란 말이지. 흠흠."

"셀릭 왕국의 공략은 언제죠?"

다시 이어지는 질문. 삼사키는 대머리를 한번 만지작거리더니 손가락을 꼽으면서 입을 열었다.

"네스타 왕국이 공략을 시작한 지 2주 정도 흘렀으니.... 녀석들 좀 싸울 줄 알지만, 성공할 리가 없지. 그러니 2주 뒤엔 철수하지 않겠소? 다음은 서쪽의 갈리오인데 거기 돼지놈들이 4주 까먹고, 다음은 북쪽의 야만인놈들이 4주를 낭비할 것이오. 그러니까 우리가 던전을 공략하는 데까진 대략 10주 정도 남았군."

"10주라...."

다행이었다. 10주라면 그래도 여유가 있는 편. 완치는 어렵다고 해도 다음번 던전 공략에선 불편함 없이 싸울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박수를 한 번 친 다음 말했다.

"해 봅시다! 그럼 치료 효과를 높여야 하니 다른 시술을 좀 해 보죠."

"다른 시술?"

에드는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당연히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모아졌다. 나는 진료실 한쪽에 놓은 부항을 하나 집으며 대답했다.

"바로 이겁니다."

"그건...!"

샤를이 즉각 반응했다.

"부앙이었나?"

"부항입니다."

"아, 그랬지. 부항. 조금 야하게 생긴 거."

"이게 어딜 봐서 야합니까?"

나는 손에 쥔 부항을 다시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샤를은 말없이 어깨를 으쓱거렸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삼사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야한 게 맞소."

"...?"

에드마저 동조했다.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종이 쪼가리에 뭔가 적었는데, 뭐라고 적는지 심히 궁금해졌다, 바리한은 묵묵히 있었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점잖은 사람인지라 표현을 애써 안 하는 듯했다.

도대체 이놈들은....

부항을 보면서도 야하다고 하는 머리통들이라니. 일상생활이 가능하단 말인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다음 바리한에게 다가갔다.

"아무튼 이걸로 시술할 겁니다. 치료에도 도움을 주지만, 당장의 통증도 더욱 가라앉을 겁니다. 침상에 엎드리면 됩니다."

"기대하겠습니다."

바리한은 내 지시대로 엎드렸다. 부항 시술은 처음인 만큼 모두가 조용히 나를 지켜보았다. 언제 소문을 듣고 찾아왔는지 구경꾼 중에는 제니도 있었다. 제니는 손에 커다란 톱을 든 채로 서 있었다.

도대체 저건 왜 들고 와서....

야하고, 무섭고. 아르타스란 동네는 정말 위험하고도 불건전했다. 나는 심호흡을 한 다음 바리한이 침을 맞은 자리를 알콜솜으로 한번 닦고 부항을 올려 두었다. 그런 다음엔 부항건을 꺼냈다. 다시 말하자면 '부항 + Gun'이었다. 부항에서 공기를 빼 음압 상태로 만들어 주는 기구였다. 그러면 피부를 잡아당기는 효과가 생겼다.

"오...."

"저런 신기한...."

구경꾼들은 한마디씩 꺼내며 웅성거렸다. 바리한의 등가죽이 볼록 솟아오른 모습은 신기할 터였다. 총 5군데였다. 견정혈, 천종혈, 견료혈, 견우혈, 노수혈이었다. 내가 부항건을 주머니에 넣자 에드가 얼른 다가왔다.

"이 부항은 어떤 효과가 있는지 어서 말해 주게."

흥분한 얼굴에 빠른 어조였다. 다른 사람들도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어서 내 대답이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 * *

에드는 늘 부항이 궁금했다. 생긴 것도 이상한 그 물건. 분명 치료할 때 쓰이는 줄은 알았지만, 이런 결과를 보여 줄 줄은 몰랐다.

'이건 도대체....'

사람의 등에 거머리처럼 착 들러붙어 있는 모양새. 바리한은 별로 아프진 않은 모양인지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표정을 보니 좀 개운해 보이기도 했다.

도대체 이것이 무엇인지 너무나 궁금했다. 하여 지오를 닦달했다.

"어서 이 부항의 효과를 말해 주게."

"네, 이 부항 요법은 피부를 잡아당기는 효과가 있습니다."

지오는 바리한의 등을 가리키더니 계속 말했다.

"이 당김은 피와 모세 혈관에 자극을 주게 되죠. 우리의 목적은 근육의 치료 아닙니까? 근육 내 혈관 기능을 활성화하기 위해 하는 겁니다."

"아, 그런가?"

에드는 바쁘게 적어 내려갔다. 지오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성실한 학생이구만.'

책을 써서 유명해지겠다는 욕망이 다분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하는 학생은 보기 좋은 것이었다. 지오는 계속 이어 갔다.

"근육의 혈관이 확장되면서 혈액의 흐름이 촉진됩니다. 이로 인한 추동으로 림프의 흐름까지 좋아지는데, 결국 국소 부위의 순환을 활발히 한다고 보면 됩니다."

"좋아. 좋아."

"게다가 피부의 감각 신경을 자극해서 과민성 통증도 억제하는 효과도 있죠."

지오는 거기까지 말하고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삼사키는 이미 못 알아듣겠다는 얼굴. 어깨와 가슴의 거대한 근육들이 사람 머리처럼 커다랗다고는 해도 그것이 지능 발달에 도움을 주지는 못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머리가 5개처럼 보여도 이런 때엔 소용이 전혀 없었다.

제니도 비슷했다. 이미 지오의 말은 듣고 있지 않은 듯했다. 그저 톱날을 바라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냥 자르면 될 것을...."

샤를은 제니에게서 슬그머니 한 걸음 멀어지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도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오는 모두를 돌아본 다음 총평을 내렸다.

'모두가 이해할 필요는 없지.'

다시 생각해 보니 여기서 지오의 말을 온전히 알아듣는 것은 에드뿐이었다. 그리하여 에드에게 말했다.

"필기를 더 열심히 해서 꼭 책으로 냅시다."

"물론이라네."

에드는 흔쾌히 대답했다. 지오는 슬쩍 다가가 에드의 종이를 바라보았다. 거기엔 부항이 그려져 있었고, 부항에 대한 첫인상이 적혀 있었다.

[다시 봐도 매우 야하게 생겼다!]

'아르타스 놈들은....'

지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 *

이제 시간이 되었다. 나는 바리한의 어깨에 달라붙어 있는 부항을 하나씩 떼어 냈다. 뽕, 뽕, 새로 산 과일 음료수를 열 때 나는 소리가 나면서 떨어져 나갔다. 바리한의 등엔 빨간 부항 자국이 남았다.

"이제 일어나셔도 됩니다."

내 지시에 바리한은 몸을 일으켰다. 그런 다음 천천히 팔을 움직였다.

"어?"

"훨씬 좋아졌죠?"

"어, 어?"

바리한은 팔을 더 움직이더니 갓난아기처럼 옹알이를 시작했다. 그저 '어?' 소리만 낼 뿐이었다. 나는 다시 물었다.

"좋아졌죠?"

"네, 네. 좋아진 정도가 아닙니다. 한 10년 전으로 돌아간 기분입니다! 감사합니다!"

내내 점잖던 그가 언성을 높이며 좋아했다. 진심으로 기쁘다는 방증이었다.

"우오오!"

삼사키는 괜히 소리를 지르며 바리한에게 달려왔다.

"선배, 아예 통증이 사라졌소?"

"그렇다네. 이건 정말 신기하군."

바리한은 어깨에 남은 빨간 부항 자국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보기 흉한 자국인데도 그들은 영광의 상처를 바라보듯 비장한 표정이 되었다. 그 모습을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게 내 삶과 직업의 보람이지.

이런 모습을 보기 위해서라도 진료는 죽을 때까지 하고 싶은 것이었다. 물론 아직 치료는 시작 단계일 뿐. 남아 있는 10주 동안 몸을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바리한 씨, 10주 동안 천천히 재활해서 싸울 수 있는 몸을 만듭시다."

"네, 죽을힘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바리한은 엄숙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 그가 지난 40년간 어떤 삶을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목숨을 걸고 노력해 온 인생. 그를 최대한 돕고 싶었다. 그런 기분은 나만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몸을 만드는 것이라면 나도 돕겠네."

샤를이 바로 나섰다. 하츠의 수련을 도울 때도 느꼈지만, 샤를은 그런 부분에선 꽤 전문가였다. 다치지 않고 근육을 단련하는 법을 알고 있는 것이었다.

삼사키는 샤를의 합류를 환대했다.

"아, 선배, 저 친구는 샤를이란 사람이오. 저도 여기서 알게 됐는데, 수련이라면 제법 일가견이 있죠."

"샤를이라면 이미 알고 있다네. 그렇지 않소?"

바리한은 샤를을 바라보며 물었다. 샤를은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되물었다.

"우리가 구면이었던가?"

"물론 당신은 기억하지 못하겠지. 나는 당신 뒤를 따르던 용병 중 한 명일 뿐이었으니."

뒤를 따르는 용병?

샤를의 뒤를 따르던 용병이란 의미가 분명했다. 그렇다면 샤를이 꽤 거물이란 이야기였다.

그런 사람이 왜?

지금은 나의 안내인에 불과하지 않은가. 의문에 답이라도 하듯 샤를이 입을 열었다.

"다 지나간 일이지. 지금은 같은 용병일 뿐이라네."

"아직 황금 용병단 소속이지 않소?"

"아니라네. 다 옛날 일이지. 지금은... 그저 작은 길드 소속의 안내인이지."

샤를은 거기까지 말하고, 더 묻지 말라는 듯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 바리한도 더 말하지 않았다. 그들의 문답은 의문만 더 남길 뿐이었다.

그래. 남의 인생사 뭐가 중요한가.

나에겐 치료와 재활이 중요할 뿐이었다. 바리한에게 말했다.

"일단 샤를과 수련을 하십시오. 어깨는 절대 무리하지 말고요."

"알겠습니다."

"저는 몇 가지 선물을 준비하죠."

내 말에 에드가 물었다.

"무슨 선물인가?"

"보시면 압니다."

나는 소매를 걷으며 진료실을 나섰다. 혼잣말을 하면서였다.

"도끼를 어디서 봤는데, 어디 있더라?"

폼롤러를 만들어 재활 훈련을 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