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명궁 바리한 (3)
셀릭 왕립 3진료소는 분명 병원이었지만, 여기저기 도끼들이 놓여 있었다. 왜 그런가 하면, 제니가 사용하는 것들이었다.
도끼들은 다음과 같은 프로세스를 따라 움직였다.
1. 제니에 의해 무언가를 절단한 다음 복도에 놓아진다.
2. 일꾼들이 열나게 세척한다.
3. 도끼날을 벼른다.
4. 다시 진료실 앞 복도에 놓여진다.
그러니까 내 눈에 띄던 도끼들은 1번과 4번 상태였다. 당연하겠지만, 1번 상태의 도끼는 절대로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피와 살점이 묻어 있는 그것으로 무슨 폼롤러를 만든단 말인가. 지옥의 폼롤러를 만들고 싶지 않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4번을 찾아야 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도끼를 찾죠?"
제니였다. 그녀는 키가 큰 만큼 다리도 길어서 그런지 성큼성큼 순식간에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필요해서요."
"바리한 씨의 팔도 결국 절단해야 합니까?"
"...."
조금이라도 머뭇거렸다간 바리한의 팔이 날아갈 것 같았다. 나는 얼른 두 손을 내저었다.
"아, 아뇨!"
"그럼 뭐 하러 도끼를 찾습니까?"
제니는 목소리를 잔뜩 깔면서 물었다.
"뭔가를 좀 만들려고 합니다. 바리한 씨의 회복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물건이죠."
"그게 뭐죠?"
"그러니까 그게...."
나는 폼롤러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야 '헬스장에 있는 원통 모양 그거 있잖아. 등에 대고 문지르는 거.'라고 하면 끝날 일. 아르타스에서는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제니는 내 설명을 듣다가 두 번이나 하품을 했다.
마침내 제니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게 물었다.
"잘 모르겠지만, 통나무가 필요하다는 거죠?"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제니는 뒤춤에 차고 있던 도끼를 꺼내 들더니 계속했다.
"뒤뜰로 가죠."
"...."
제니는 앞장섰다. 진료소의 뒤뜰은 흙바닥. 한쪽에는 장작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그중에는 제법 두꺼운 것들도 눈에 띄었다. 가장 폼롤러와 유사해 보이는 것을 나는 골랐다.
"이거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압!"
내가 지목한 것은 기합 소리와 함께 흙바닥 위로 던져졌다. 제니는 침을 손바닥에 퉤 뱉더니 도끼를 고쳐 잡고는 나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다듬어 줄까?" 묻는 얼굴이었다. 손님 머리통을 들여다보는 미용사 같았다.
"일단 길이를 짧게 만들어야겠어요. 지금은 너무 깁니다. 3분의 1 정도가 적당해 보이네요."
현재 통나무의 길이는 셋이서 등을 문질러도 될 만큼 길었다. 3인용 폼롤러 따위는 없어도 좋았다.
-휘이익.
제니는 도끼로 공기를 갈랐다. 통나무가 퍽! 소리를 내면서 잘렸다. 정확히 3분의 1로 잘린 통나무가 내 발치로 굴러왔다.
"됐습니까?"
"네, 네. 됐습니다."
"다음은?"
"좀 다듬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통나무의 표면이 매끈해야 할 것 같아요. 여기에 솜을 덧대긴 할 건데, 등을 마사지하려면 울퉁불퉁한 곳이 없어야 할 겁니다."
"까다롭군."
"제가 해도 되는데."
"아니, 제가 하죠."
제니는 통나무를 한 손으로 잡더니 도끼날로 다듬기 시작했다. 울퉁불퉁한 표면이 매끈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연필을 깎는 느낌이었다.
"와."
나는 신기한 구경거리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제니는 거대한 연필을 깎으면서도 입을 열었다.
"정지오 의원."
"네?"
"3등입니다."
갑자기 3등이라니. 무슨 소리인가.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떤 말씀이시죠?"
"에드 이라쉬 남작님 아래서 가장 오래 버틴 의원을 순서대로 꼽으면 3등이란 말이죠."
"아, 그렇습니까? 하하."
"라테스 의원은 이미 쫓겨났으니 곧 2등이 되겠군요."
"제니 의원께서는 계속 1등으로 남으셨으면 합니다."
내 말에 제니는 연필을 깎다 말고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시종일관 무표정했지만, 조금은 슬픈 빛이 돌았다.
제니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아뇨. 당신이 언젠가 저도 쫓아내 주기를 바랍니다. 절단하지 않고도 사람들이 살아남아 치료받길 원합니다."
"...."
"그래서 지금도 돕고 있는 겁니다. 자, 받으세요."
어느새 통나무는 표면이 완전히 매끈한 상태. 바닐라맛 아이스크림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나는 통나무를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제니는 손을 한번 흔들어 보인 다음 다시 진료소로 들어갔다.
* * *
지오는 통나무를 끌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진료실은 텅텅 비어 있었다. 대신 창밖에선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샤를의 지도에 따라 바리한과 삼사키가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운동 중독이군.'
잠시 창밖을 바라보던 지오는 침상 옆에 놓인 이불을 펼쳤다. 그다음엔 끙끙대면서 이불을 찢었고, 안에서 솜을 꺼냈다. 솜은 그리 두툼하지도 않고, 품질이 형편없었다.
'뭐 어쩌겠어.'
지오는 솜을 꺼내 통나무를 감쌌고, 끈으로 고정시켰다. 솜으로 둘러싼 통나무 폼롤러의 탄생이었다. 그때 샤를이 진료실 안으로 들어왔다.
"자네 뭔가 만드는 것 같더니 완성했나?"
"네, 방금 만들었습니다. 후...."
지오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샤를은 흘끗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땀이 날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이미 땀이 나고 있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아하. 그렇군. 미안하네."
"미안하시면 이거 좀 밖으로 옮겨 주세요. 바리한 씨가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지."
샤를은 가볍게 통나무를 들어 어깨에 짊어졌다. 그런 와중에도 어깨를 한 번 으쓱거린 다음 걸음을 옮겼다.
"그나저나 자네는 부탁을 잘하는군. 제니가 도끼로 다 만들고, 옮기는 건 내가 하고."
"저도 땀이 났잖아요!"
"아하."
그것으로 대화는 끝. 어느새 바깥이었다. 샤를은 진료소 앞 돌바닥 위에 폼롤러를 내려놓았다. 앉아서 쉬고 있던 바리한이 다가왔다.
"의원님, 이건 뭡니까?"
"바리한 씨의 회복을 도와줄 물건입니다."
"정말입니까?"
"그럼요. 자 제가 하는 걸 한번 보세요. 그대로 따라 하시면 됩니다."
지오는 말을 마치자마자 통나무 위에 누웠고, 견갑골 아래에 통나무가 오도록 했다. 통나무가 단단했지만, 솜이불이 어느 정도 쿠션이 되어서 적당히 마사지가 되는 느낌이었다.
'좋아. 이 정도면 괜찮다.'
지오는 이어서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천천히 몸을 내렸다. 통나무는 알아서 위로 굴러갔고, 견갑골 아래서부터 시작해 견갑골의 모든 근육을 마사지해 주었다. 지오는 다시 몸을 위로 올렸고, 통나무는 다시 견갑골 아래쪽으로 굴러갔다.
"자,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근육이 마사지가 돼서 재활에 큰 도움을 줄 겁니다."
"오, 그렇습니까?"
바리한은 적극적으로 나섰다. 지오가 일어나면 바로 통나무 위에 드러누울 생각이었지만, 지오는 손을 내저었다.
"다음 자세가 또 있어요."
다음은 광배근과 가슴이었다. 모두 회전근개파열이 일어났을 때 폼롤러로 마사지하는 부위였다. 지오는 부위마다 다른 자세를 취하며 통나무와 씨름했다. 광배근을 마사지할 땐 통나무 위에 옆으로 누웠고, 가슴을 마사지할 땐 엎드려야 했다.
"후...."
지오는 다시 땀을 흘리며 일어섰다.
"바리한 씨,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바리한은 땀까지 흘려 가면서 시범을 보여 준 지오에게 고개까지 숙였다. 그런 다음 바로 통나무 위에 누워 지오가 가르쳐 준 자세를 따라 했다. 확실히 근육이 풀어지는 느낌. 시원한 기분이었다.
* * *
어느새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바리한과 샤를, 삼사키는 폼롤러를 한참 동안 연구하더니 다른 부위들을 마사지하는 법까지 터득했다.
대단하네.
나는 진료실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다가 돌아섰다. 그때 진료실 안으로 에드가 들어왔다.
"바리한에게는 약이 필요 없나?"
"사실 여기 서서 처방할 약을 고민했습니다."
"오, 그래서 고민의 결과는?"
에드는 종이 쪼가리를 꺼내며 다가왔다. 필기 로봇의 스위치에 불이 들어온 것이었다. 나는 약재함으로 다가서면서 대답했다.
"견비탕蠲痹湯입니다."
"견비탕?"
"네, 스승께서 동의보감에 적은 처방인데, 관절염, 신경통에 쓰입니다. 당연히 견비통肩臂痛이 있을 때도 먹습니다. 즉, 어깨와 팔이 아플 때 효과가 좋습니다."
"오호, 어디 어떤 약재가 들어가는지 어서 꺼내 보게."
나는 에드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약재함을 열었다. 당귀, 적작약, 황기, 방풍, 강황, 강활, 감초, 생강, 대조를 차례대로 꺼내 약보자기에 쌌다.
"이번 약은 강황이 들어가서 이전보단 노란색을 띨 겁니다."
"그런가?"
강황은 카레에 들어가는 재료. 당연히 카레처럼 누르딩딩할 것이었다. 성수와 빛깔이 달라 실망할지도 몰라 미리 약을 치는 것이었다. 에드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제 뭐든 그러려니 하는 경지에 들어선 것 같았다.
"가시죠."
나는 냄비와 불자리를 챙겨 진료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에드가 나를 붙잡았다.
"어딜 가나?"
"다들 바깥에서 수련하고 쉬는 모양인데, 기왕이면 바로 옆에서 약을 달이려고 합니다. 캠핑하는 느낌도 내고 좋지 않을까요?"
"하, 꽤나 낭만적이군 그래. 좋아. 나가자고."
에드는 흔쾌히 바깥으로 따라나섰다. 땅거미가 지자 진료소 바깥 대로를 따라 불이 켜지고 있었다. 불자리가 장착된 가로등들에 불이 들어오는 것이었다.
나는 마당 한쪽에 불자리를 놓고 주먹으로 내리쳤다. 불길이 치솟자 바리한, 샤를, 삼사키, 에드가 불가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바로 옆에는 통나무 폼롤러가 세워져 있었다. 이미 그들과 친구처럼 지내는 모양이었다.
"약을 달일 겁니다. 냄새가 좀 날 거예요."
"괜찮소. 성수와 비슷한 향이오."
삼사키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린 다음 냄비를 불자리 위에 올리고, 준비해 둔 약재를 달이기 시작했다.
"식사 가져왔습니다."
그때 에드의 하인들이 식사를 가져왔다. 빵과 고기들이었다. 스피리트 엘릭서도 물론 함께였다. 나는 얼른 바리한에게 말했다.
"바리한 씨는 금주해야 합니다."
"전 원래 술을 못 마십니다. 민망한 일이죠."
바리한은 머리를 긁으며 부끄러워했다. 삼사키는 하하 웃더니 빈정댔다.
"아르타스에 유일무이한 술을 못 마시는 용병이오."
"너무 놀리지 말게. 나도 축제 때는 한 잔 정도 마시지 않나."
"선배, 한 잔이 술이오? 용병이라면 모름지기 한 통씩 마셔야죠."
"...."
아르타스의 용병이란 술을 마시지 못하면 안 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때 바리한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나무를 깎아 만든 작은 피리였다.
"술을 못 마시니 연주라도 하겠습니다."
하늘엔 달과 별이 떠 있었고, 바람을 타고 구슬픈 멜로디가 퍼지기 시작했다. 불꽃이 튀면서 리듬을 맞춰 주었고, 찬바람이 불길에 섞이자 그림자들은 춤을 추었다.
잠깐. 이 광경은....
어릴 적 보았던 RPG 게임의 표지 같았다. 불가에 앉아 궁수가 피리를 불고 있고, 잘생긴 샤를은 단검으로 고기를 자르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덩치 큰 대머리 삼사키는 술병을 잡은 채 웃고, 옆에는 소환수 같은 통나무 폼롤러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물론 에드는 도무지 그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냥 RPG를 플레이하는 사람처럼 보일 뿐이었다. 현실과 낭만이 불을 사이에 두고 나뉘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때 냄비 뚜껑을 열고 말했다.
"술 대신 약을 드십시오."
"고맙습니다."
바리한에게 그릇에 담긴 견비탕을 건넸다. 그런 다음 물었다.
"축제 때는 한 잔 정도는 마신단 말이죠?"
"그렇죠. 기분이 좋을 땐 마십니다."
그렇단 말이지?
그런 사람들을 위한 술이 있었다. 40년간 한 직업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을 위해 선물을 주고 싶었다.
17화 명궁 바리한 (4)
"이것이 그 물약이군요."
바리한은 지오가 건넨 한약을 들여다보았다. 전해 들은 것보단 노란빛을 띠고 있었지만, 냄새는 정말 그럴듯했다. 이것으로 효과를 본 하츠도 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지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드십시오. 그건 견비탕이라고 합니다. 통증을 가라앉히는 데에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바리한은 그릇을 들더니 삼사키를 바라보았다. 삼사키는 술을 병째 마시다가 물었다.
"선배, 왜 그러시오?"
"건배 좀 하지."
"아, 하하하. 술이 아닌 것과 건배하는 것은 치욕스럽지만, 이번엔 특별히 해 드리겠소."
두 사람은 건배를 하더니 쭉 들이켰다. 한 사람은 술을, 또 한 사람은 약을. 지오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약이면서 술인 것을 한번 줘야겠군.'
그때 바리한은 켁, 소리를 냈다. 삼사키는 껄껄 웃더니 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하하하. 술도 아니고, 이제 약도 못 먹는단 말이오."
"이제 정말 늙었나."
"선배, 무슨 약한 소리를. 후배들에게 활을 가르치고 싶다면 어서 회복해야지 않겠소."
"자네 말이 맞아. 그래야지."
"자, 빨리 고기 드시오. 어서. 옳지."
지오는 고기와 빵을 먹으면서 그들의 모습을 보았다. 바리한은 품에 활을 안은 채 고기를 꾸역꾸역 먹었다. 눈빛이 활시위를 당기는 것처럼 날카로웠다. 몸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듯했다.
'정말 활에는 진심인 사람이네.'
바리한의 회복에 대한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 * *
"아침 식사를 두고 가겠습니다."
하인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그가 풀을 밟는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에드의 집에 머무는 것은 꽤 괜찮은 일이었다. 비록 별채에 머물고 있지만 다양한 서비스가 제공되기 때문이었다.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지금처럼 조식을 배달해 주는 것이었다.
아침이 배달된다니.
미친. 너무 좋았다. 나는 주인을 만난 개처럼 달려가 문을 열었다. 바구니에 담긴 빵과 고기를 꺼내다가 문득 바리한의 모습이 떠올랐다. 우걱우걱 먹던 모습.
그러고 보니....
그에게 줄 선물을 만들어야 했다. 필요한 재료가 있었다. 나는 에드의 저택으로 향하는 하인에게 내달렸다.
"저기요!"
"아이고, 이렇게 달려오시다니. 부르셨습니까?"
"혹시 설탕을 구할 수 있나요?"
"설탕은 귀한 것이라...."
하인은 말끝을 흐리더니 머리를 벅벅 긁었다. 나는 다시 물었다.
"설탕이 설마 남작님 저택에 없습니까?"
"아뇨. 있습니다만, 귀한 재료여서...."
"남작님의 허락을 받아야 사용할 수 있단 거군요?"
"네, 그렇습니다."
하인은 그때서야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린 다음 이어 갔다.
"허락을 받아야겠군요. 가시죠."
"네? 어딜?"
"저기요."
나는 걸음을 옮기면서 에드의 저택을 가리켰다. 하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나를 따라왔다.
"아마 식사 중이실 겁니다. 식당으로 안내하죠."
그리하여 나는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에드와 마주쳤다. 에드는 나를 흘끔 바라보더니 물었다.
"아침부터 뭔가?"
"설탕을 좀 얻을 수 있을까 해서 찾아왔습니다."
"고블린을 유인해 사냥하려고?"
"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에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네는 고블린 사냥하는 법도 모르나? 됐고. 설탕이 왜 필요한가?"
"바리한에게 줄 약에 넣어야 합니다."
"음, 설탕이 약에 필요하단 말이지?"
에드는 고민하는 눈치. 나는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효과가 탁월한 약입니다. 만드는 데에 무려 2달 이상 걸려 귀하기도 하고요. 어쩌면 그냥 설탕으로 있는 것보다 더 비싸질지도 모릅니다. 가치가 상승하는 셈이죠."
에드가 좋아할 만한 수식어를 다 붙였다. '귀한', '비싼', '가치', '상승'. 역시나 에드는 표정이 밝아지더니 물었다.
"좋아. 얼마나 필요한가?"
"한 이만큼."
나는 두 손을 모아 '한 푼 줍쇼.' 하는 모양을 만들었다. 에드는 내 두 손을 유심히 보더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진료실에서 보지. 내가 보는 앞에서 약을 만들자고."
"물론입니다."
* * *
나는 일찌감치 에드의 집에서 떠났다. 진료소가 있는 방향이 아니라 광장으로 향했다. 교수대에는 의원이 한 명 걸려 있었다. 다 타 버린 그의 목에는 [이멜다의 제자 미리는 계속된 치료 실패로 사형에 처함.]라고 적힌 팻말이 바람결에 흔들렸다. 아이들은 시체에 돌을 던지고 있었다.
미친 세상이구나.
나는 고개를 흔들면서 걸음을 옮겼다. 어느 순간 고기 잡내와 생선 비린내, 쇠붙이 냄새가 뒤섞여 기괴한 향이 났다. 시장에 도착했다는 의미였다. 수많은 천막 중 '과일'이라고 적힌 천막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어서 오시오! 아, 야만인인가."
배가 불룩 나온 남자가 나를 반기려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진열대에 놓인 과일들을 빠르게 스캔했다. 마침 찾는 과일이 눈에 띄었다. 말린 모과였다.
"이 말린 모과는 얼마예요?"
"다섯 개에 은화 2닢만 놓고 가시오."
"좀 비싼 것 같은데."
은화 10닢에 금화 1닢. 의원으로 일해서 받는 월급이 금화 1닢이었다. 그럼 고작 모과 25개가 한 달 치 월급에 맞먹는단 말인가. 하물며 귀족의 총애를 받는 내가 말이다!
"비싸다고 생각하면 썩 나가! 어딜 더러운 동쪽 야만인이!"
남자는 버럭 언성을 높였다.
이것은 인종차별!
나도 물러서진 않았다. 당연히 방책이 있었다. 한국에서 30년 넘게 살았는데, 이런 것을 이겨 낼 방법을 어찌 모르겠는가.
삿대질하면서 언성을 높였다.
"내가 누군 줄 알아?"
"더러운 야만인이지."
"내가 에드 이라쉬 남작의 집에 머물고 있는 손님인데, 어딜 야만인이야!"
"...."
"장사 그만하고 싶어?"
"저, 정말입니까? 남작님의?"
지인의 지위를 이용하는 것은 언제나 효과적이었다.
"정지오 의원, 노련하군."
그때 천막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들어왔다. 샤를이었다. 그는 품에서 단도를 꺼내더니 모과에 푹 꽂았다. 과즙이 울컥 나왔다.
샤를은 단도를 손으로 빙빙 돌리더니 물었다.
"얼마야?"
"아, 그게, 그, 그냥 가져가십시오."
"얼마야?"
"10개에 은화 1닢만...."
나는 은화 1닢을 던져 주고 모과 10개를 챙겼다. 천막을 나서자마자 샤를은 감탄했다.
"자네 늘 어리바리하더니만 여기서 사는 법을 좀 깨우쳤군."
"제가 사는 곳도 마찬가지였거든요."
"하, 사람 사는 곳이면 역시 다 똑같긴 하지. 아무튼 모과는 왜 사나? 고블린이라도 유인해서 사냥하려고 하나?"
또 고블린 사냥.
고블린이 뭐 하는 족속인지 모르겠지만, 달달한 것만 있으면 유인할 수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데에 쓰일 건 아니고, 바리한 씨에게 줄 약을 만들 겁니다."
"오래 살고 볼 일이군. 모과가 약에 쓰인다니."
"진료실에서 보여 드리죠."
"왠지 샤를 씨도 좋아할 것 같은데."
"오, 기대하지."
샤를은 대답과 함께 단도를 빙글빙글 돌리더니 품에 넣었다. 서커스단을 차리면 돈 좀 만질 것 같은 솜씨였다.
* * *
나는 에드와 샤를이 지켜보는 앞에서 재료를 손질했다. 약재함에서 꺼낸 계지, 우슬, 당귀, 천마, 천궁, 오가피, 진교, 위령선, 홍화, 속단, 의이인, 방풍을 차례대로 약사발에 넣었다. 그런 다음 유봉으로 잘게 빻기 시작했다.
에드는 바쁘게 손을 움직여 필기하면서도 질문을 던졌다.
"모과는 같이 빻지 않나? 듣자 하니 나를 팔아먹고 사 왔다던데."
"팔아먹긴요. 말씀을 하셔도...."
"아무튼 모과는 그대로 둘 건가?"
"네, 모과는 이따가 사용할 겁니다."
나는 손에 힘을 주어 약재들을 빻은 다음 모과를 챙겼다. 깨끗이 씻은 다음 진료실 한쪽에 대량으로 보관 중인 스피리트 엘릭서를 꺼냈다.
에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샤를은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모과에 술을?"
"네, 이번에 만들 약은 술입니다. 술을 마시면서도 건강해질 수 있죠."
"...?"
에드마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는 계속 이어 갔다.
"바로 활맥모과주滑脈木瓜酒입니다."
"약을 만드는 데에 두 달 이상 걸리는 것도 술을 담가야 해서 그런 건가?"
"맞습니다. 하지만 보통의 술이 아닙니다. 이 약재들이 들어가기 때문에 관절 통증에 좋고, 연골 윤활에도 탁월합니다."
샤를은 설명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군침을 삼키면서였다. 에드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이 약인지 술인지 모를 물건이 만들어지는 데까지 두 달 이상 걸린다는 것은 문제 아닌가? 바리한이 던전 공략을 하러 가기 전엔 맛도 못 본다는 말인데."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바리한은 던전을 공략하고 죽을 생각이 없습니다. 어제도 후학을 양성하겠다고 하던데, 그러려면 앞으로도 계속 어깨를 사용해야겠죠. 일단 이걸 약으로 처방해서 죽을 때까지 활을 쏠 수 있도록 도울 생각입니다."
"근데 왜 하필 술인가?"
"그가 마지막 전투를 마친 것을 축하하려는 겁니다. 일종의 축하주입니다."
내 대답에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납득했다는 얼굴이었다. 샤를의 납득과 에드의 납득은 약간 다르긴 했다.
에드는 덧붙였다.
"좋은 생각이군. 바리한의 어깨가 계속 쓸 만하다면 강철의 손톱 길드에서 후학을 양성할 테니 그 술 빚는 비용도 모두 청구할 수 있을 거야. 우리 진료소 재정에 계속 보탬이 되겠지. 정지오 의원, 아주 훌륭해."
그는 내게 엄지까지 치켜세웠다.
역시 대단한 경영자로구만.
나는 그저 치료만 생각했을 뿐인데, 그는 돈을 벌 생각을 마치지 않았는가. 물론 그것은 그가 알아서 할 일. 나는 내 일만 잘하면 되었다.
"그럼 본격적으로 활맥모과주를 만들겠습니다."
깨끗이 씻은 모과들을 칼로 잘랐다. 상한 것이나 벌레 먹은 것이 무려 7개. 3개만 멀쩡했다. 나는 씨를 발라낸 모과 조각들을 스피리트 엘릭서에 들이부었다. 이어서 에드가 가져온 설탕을 넣어 주었다.
"다음은 약재를 넣을게요."
잘게 빻은 약재들을 한방차를 달일 때 쓰는 망에 담아 역시 스피리트 엘릭서에 넣었다. 이것으로 준비는 끝. 다음에 필요한 것은 시간이었다. 2달 정도만 지나면 향긋한 활맥모과주로 변할 것이었다.
샤를은 자꾸만 군침을 삼켰다. 왠지 그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겨야 할 것 같았다.
* * *
바리한은 매일 진료실로 찾아왔다. 그의 일과는 침을 맞고, 재활 운동에 전념하는 것.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는 모습이 흡사 은퇴 경기를 앞둔 슈퍼스타 같았다.
지오는 그의 정성이 갸륵해 뭐든 더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가 수련 중이던 마당으로 뛰어나가 바리한을 불렀다.
"바리한 씨, 근육을 풀어 주는 데에 좋은 걸 하나 더 알려 드릴게요."
"오, 뭡니까?"
"팔을 펴고 가슴을 뒤로 젖혔다가 앞으로 펴 주면서 손뼉을 치세요."
"이렇게 말입니까?"
바리한은 지오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더니 물었다. 지오가 대답하기도 전에 '오.' 소리를 내면서 계속 이어 갔다.
"확실히 좋네요. 어깨 근육이 부드러워지는 느낌입니다."
"좋습니다. 하나 더 알려 드리죠. 이렇게 항복하는 것처럼 두 손을 올리다가 손등이 앞으로 보이게 하면서 회전하세요. 그런 다음엔 팔을 내리면서 다시 손바닥이 앞으로 오게끔 회전하는 겁니다."
"오호. 이것도 좋습니다."
"네, 꾸준히 반복해 주시면 회복에 도움이 될 겁니다."
바리한은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마지막 전투를 제대로 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것 같았다. 그만큼 간절한 소원이었다.
* * *
시간이 흘러 셀릭 왕국이 던전을 공략할 차례였다. 먼저 견습 용병들이 3층까지 공략하고, 하급 용병들이 10층까지 공략을 마쳤다. 이제 바리한 같은 중급 용병들이 나설 차례. 바리한은 출전일에도 진료실에서 침을 맞았다.
지오가 심호흡을 한 다음 말했다.
"자, 다 됐습니다. 다녀오십시오."
"네, 다녀오겠습니다!"
바리한은 어깨를 한번 돌린 다음 대답했다. 그의 움직임은 상당히 가벼워 보였다. 그때 삼사키가 다가왔다.
"문제가 생기면 내가 지켜 줄 테니 걱정 마쇼."
"무슨 소린가. 내가 자넬 지켜야지."
그들은 대화를 하면서 나섰다. 지오는 두 손을 간절하게 모았다.
'제발 무사히!'
18화 명궁 바리한 (5)
에드는 진료소에서 빠져나가는 바리한을 붙잡았다.
"바리한, 어깨는 괜찮나?"
"정지오 의원 덕분에 아주 멀쩡합니다."
바리한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에드는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덧붙였다.
"절대 죽지 말게. 여기서 치료받은 자가 허무하게 죽어선 안 되거든."
"제 걱정해 주시는 겁니까?"
"자네 걱정은 아니야."
에드는 품에서 종이 쪼가리들을 꺼냈다. 바리한의 치료와 관련된 수십 장의 기록이었다. 정성껏 적은 글씨와 사실적인 그림들로 가득했다.
"이것들이 물거품이 될까 봐 그래."
"그렇습니까?"
"...."
에드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아냐. 솔직히 자네 걱정도 조금은 들어. 살아오면서 자네처럼 열심히 노력하는 자는 별로 본 적이 없지. 다시 보고 싶어지는 사람 중 하나야."
"...."
"살아 돌아오게. 자네가 내 부하는 아니지만, 내가 귀족으로서 명령하지."
"명심하겠습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바리한은 진료소를 떠났다. 마당에 떨어진 낙엽들이 바스락거렸다. 에드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 * *
액티아 시티 가운데에 위치한 던전은 한때 수도원이었다. 액티아를 섬기기 위해 모여든 수도자들이 모여 살던 장소. 지금은 거대한 기둥 4개만 남아 그 형태를 짐작만 할 뿐이었다. 기둥을 연결하는 대각선이 모이는 자리에는 던전으로 내려가는 거대한 구멍이 있었다. 그 어둡고 습한 구멍에서는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11층으로 진입할 용병들 집합!"
바리한과 삼사키를 비롯한 용병들이 입구 앞쪽으로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아직 짧은 검을 들고 있는 하츠도 있었다. 집합한 용병의 숫자는 모두 45명. 한 남자가 그들 앞에 섰다. 왕립 황금사자 기사단의 단장 요한 바이안츠였다.
"제군들은 11층에서 오우거들을 상대할 것이다. 첩보에 따르면 갈림길은 총 9개. 지난번보다 1개 늘어났기 때문에 5명을 새로 영입했다. 각자 맡게 된 길을 돌파해 12층으로 향하는 혈로를 뚫어 주길 바란다. 이상!"
그러자 용병들은 가슴을 주먹으로 두 번 두드린 다음 외쳤다.
"우리의 빛과 희망을 되찾길!"
"우오오!"
삼사키는 힘을 북돋기 위해 소리를 내질렀다. 그런 다음 바리한과 눈을 맞추었다. 바리한은 피식 웃고는 걸음을 옮겼다. 이제 던전으로 진입할 시간이었다.
1층은 대부분 정리되어 있었다. 피 냄새마저도 사라진 상태. 한쪽에선 이삭줍기가 한창이었다. 노인과 아이들이 한데 모여 쇠붙이를 줍고 있으니 소란이 일고 있었다.
"비켜 봐!"
"이제 내 차례야!"
한때 발에 쥐가 나 고생하던 데이마는 신들린 사람처럼 쇠붙이들을 보따리에 담고 있었다. 용병들은 그들을 지나쳐 아래로 또 아래로 내려갔다. 11층에 도착하자 습한 기운이 코를 스쳤다. 바리한은 등에 걸고 있던 활을 손에 쥐었다.
삼사키가 입을 열었다.
"첩보대로 9개의 갈림길이 있소. 우리가 맡은 곳은 여덟 번째이니 저쪽으로 가세."
용병들은 각자 자신이 맡은 길 앞에 섰다. 바리한과 하츠, 근육 덩어리 용병 두 명이 삼사키와 한 조였다. 강철의 손톱 소속 중에서도 정예들이었다.
"좋아. 가자고."
"잘해 보겠습니다!"
하츠는 힘주어 말하고는 앞으로 향했다. 근육 덩어리 용병 두 명도 삼사키의 옆에 섰다. 15개의 얼굴이 다시 모인 것이었다.
"자, 오우거 모가지를 따러 갑시다."
그들은 진형을 유지하면서 천천히 이동했다. 상대적으로 몸이 날랜 하츠는 다섯 걸음 정도 앞에서 횃불을 들고 전진했다. 나머지 인원은 자세를 낮춘 채 뒤를 따르며 나아갔다.
"잠깐."
어느 순간 삼사키는 공기가 바뀐 것을 느꼈다. 킁킁거리더니 하츠에게 뒤로 물러나라고 손짓했다.
그 순간이었다.
쿵!
육중한 망치가 대지를 내려치는 소리. 오우거의 등장이었다. 덩치가 인간의 세 배는 되는 크기. 몸의 색깔이 누런 녀석은 거대한 망치를 앞세워 그대로 돌진해 오기 시작했다. 벌어진 입에선 타액과 함께 괴성이 터져 나왔다.
"구아아아!"
입에서 괴성을 쏟아 내는 것은 용병들도 마찬가지.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우오오!"
삼사키를 비롯한 용병들도 그대로 돌격해 부딪쳤다. 갑옷이 오우거의 몸통과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양측 모두 비틀거리는 상황에서 삼사키가 명령했다.
"하츠, 발가락을 노려라! 어서!"
한 발 물러서 있던 하츠는 재빨리 움직였다. 샤를에게 배운 몸짓 그대로 검을 내질렀다. 예리한 칼날은 오우거의 발톱 밑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어서 양손으로 잡고 힘을 주자 상처가 벌어지고 피가 쏟아졌다. 오우거는 비명을 질렀다.
"선배! 지금이오!"
이제 바리한의 차례. 그는 호흡을 멈추고 활시위를 당겼다. 이전과 달리 어깨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치 20년 전, 아니, 그 이상 젊어진 느낌이었다.
'역시 정지오는 명의군.'
바리한은 천천히 시위를 놓았다. 어떤 통증도 남기지 않고 화살은 날아갔다.
-쉬이익
바람을 가르며 날아가 오우거의 눈을 꿰뚫었다. 두개골이 쪼개졌는지 몸을 기괴하게 비틀고는 이윽고 뒤로 고꾸라졌다. 즉사였다.
삼사키는 오우거의 벌어진 아가리에 단도를 넣었다. 힘껏 힘을 주자 송곳니가 쑥 빠져나왔다. 오우거들을 사냥했다는 증거. 이것을 가져다줘야 화폐를 받을 수 있었다. 바지춤에 오우거의 침을 닦으면서 바리한에게 물었다.
"선배, 어깨 상태는 어떻소?"
"아주 좋네. 믿을 수 없을 만큼."
바리한은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그때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아악!"
멀지 않은 곳이었다. 아홉 번째 갈림길에 투입된 신입 용병들이 분명했다. 비명 소리가 끊어지고, 쿵! 쿵! 소리가 연속적으로 났다. 삼사키는 검을 고쳐 쥐면서 전방을 바라보았다.
하츠는 침을 삼키더니 말했다.
"전방이 아닌 것 같은데요?"
"뭐?"
삼사키가 되물을 때 바리한은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그런 다음 뒤를 돌아보면서 나지막이 말했다.
"뒤야. 신입들을 다 죽이고 이쪽으로 오는 모양이네."
"선배, 어서 우리 뒤로 오시오!"
삼사키를 포함한 근육 덩어리들은 후방으로 돌진했다. 전형을 거꾸로 구축하는 것이었다. 삼사키의 눈에 오우거들이 보였다. 총 다섯 마리. 생각보다 많았다.
'미친! 신입놈들 엉망이잖아.'
천천히 전진해서 한 마리나 두 마리씩 신속하게 처리해야 하는데, 성급하게 움직이다가 오우거들을 잔뜩 유인한 것이 분명했다.
설상가상 뒤에서도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리한은 하츠의 횃불을 건네받아 뒤로 던졌다. 불빛에 비친 오우거는 총 두 마리. 즉, 일곱 마리에 둘러싸인 상황이었다.
바리한은 오히려 침착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삼기 좋은 싸움이다.'
40년간 함께 살아온 활을 움켜쥐었다. 익숙하면서도 언제나 새로운 느낌. 어깨도 마찬가지였다. 평생을 함께해 온 어깨가 새것처럼 가벼웠다.
그는 전방으로 돌진하더니 외쳤다.
"삼사키, 날 버리고 도망쳐!"
"지랄 마시오!"
삼사키는 검을 휘두르며 바리한을 뒤따랐다. 하지만 오우거들의 숫자가 더 많은 상황.
'절대 이길 수 없어.'
삼사키의 오랜 경험이 말해 주었다. 바리한의 말처럼 한 명이 유인하고 나머지가 줄행랑치는 것이 유일한 수일지도 몰랐다.
그때 근육 덩어리 한 명이 삼사키를 붙잡았다.
"바리한 선배에게 맡기고 빠집시다."
"안 돼! 이 미친 대머리야!"
삼사키는 몸을 버둥거리며 소리쳤다. 그사이, 바리한은 오우거들을 유인하며 활로를 만들고 있었다. 근육 덩어리는 다시 말했다.
"미안하지만, 저기로 빠져나갑시다. 선배가 만들어 준 마지막 기회입니다."
"...."
삼사키는 잠시 멈칫했다.
'도망....'
검을 움켜쥐더니 입을 열었다.
"겁쟁이는 빠져라! 나중에 술 마시면서 도망쳤다는 얘기를 하느니 죽고 만다!"
"그건 맞는 말입니다."
"줄행랑을 잠깐이나마 고민한 것이 부끄러워 미치겠다. 가자!"
삼사키는 계속 외쳤다.
"우린 죽어도 함께 죽는다!"
* * *
던전 11층이 정리되었다는 소식은 늦은 밤 진료소에도 전달되었다. 나는 진료실 구석에 있는 활맥모과주를 챙겼다. 모과의 노란 빛이 술 전체에 스며들었다. 은행나무 가득한 가을이 절로 생각나는 빛깔이었다.
좋아. 잘 익은 것 같은데.
병을 궤짝에 담고 길을 나섰다. 분명 집으로 돌아갔어야 할 샤를은 어느새 옆으로 다가왔다.
"자네 바리한을 마중 가나?"
"왜 집에 안 갔습니까?"
"축하하는 자리에서 빠지는 건 사내의 도리가 아니지."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샤를의 눈길은 활맥모과주가 담긴 궤짝에서 떠나질 않았다. 나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정말 축하가 목적입니까?"
"좋은 술을 마다하는 건 사내의 도리가 아니지."
"솔직해서 좋군요."
"무거운 짐을 옮길 때 도와주는 것도 역시 사내의 도리지."
샤를은 내가 들고 있는 궤짝을 뺏듯이 들었다. 그러고는 소중히 안고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던전 앞이었다. 셀릭 왕국의 병사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쉬고 있었다. 그들 사이로 피 칠갑을 한 용병들이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보이질 않는군."
샤를은 인상을 쓰더니 중얼거렸다.
"네?"
"바리한 말이야."
"그럴 리가 없어요."
나는 던전 쪽으로 뛰어가면서 바리한을 찾았다. 부상을 입은 채 나오는 용병들의 면면을 살폈지만, 바리한은 없었다. 심지어 삼사키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어서 들것에 실린 시체들이 나왔다. 몸 여기저기가 뭉개진 상태. 본래 몸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보기도 힘든 것들도 있었다.
샤를은 궤짝을 내려놓더니 중얼댔다.
"젠장."
* * *
바리한은 오우거들에게 돌진했다. 죽기 전엔 시도해 보고 싶던 기술이 있었다. 몇몇 궁수들만 사용한다는 궁극의 스킬. 어깨가 망가져 엄두도 못 냈지만, 마지막인 만큼 시도해 보고 싶었다.
'정지오가 치료해 준 이 어깨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리한은 화살통에서 한 번에 세 개의 화살을 꺼내 활에 걸었다. 그사이, 오우거들은 사방에서 거리를 좁혀 오더니 손에 힘을 주었다. 육중한 망치를 휘두르려는 찰나였다. 오우거들이 짧게나마 머리를 움직이지 않는 순간. 바로 활을 쏴야 하는 시점이었다.
'좋아. 지금이다!'
바리한은 앞으로 몸을 맞춰 자세를 고정한 다음 세 개의 화살을 동시에 조준했다. 어깨에서부터 손가락까지 이어지는 근육은 탄력 있게 움직였다. 목표물 셋을 동시에 조준하는 것이 어쩐지 어렵지 않았다.
화살들은 부드럽게 공기를 갈랐다.
서로 다른 궤적으로 날아간 화살들은 동시에 적중했다. 두 마리는 아예 두개골을 머리를 꿰뚫린 채 그대로 쓰러졌다. 나머지 한 마리는 눈을 부여잡으며 비틀거렸고, 입으로는 괴성을 질렀다.
"구어오오오!"
그러더니 화살을 눈알과 함께 뽑아냈다. 핏물이 포물선을 그리며 튀어 올랐다.
"우오오!"
용병들은 소리를 질렀다. 다량의 출혈은 광기를 부르는 법. 그들은 광분하며 더 빠르게 내달렸다.
바리한은 활을 고쳐 쥐면서 시체들을 돌아보았다. 피에 절여진 오우거들. 믿기지 않는 광경을 보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됐어!'
궁극의 기술을 은퇴하는 시점에 사용하다니. 어깨의 힘이 되살아났을 뿐 아니라 순발력 또한 좋아졌다는 증거였다. 어깨와 손에 아직 남아 있는 감각을 다시 되살리면서 화살 세 개를 꺼내 활시위에 걸었다.
"다시 간다!"
세 개의 화살은 오우거의 머리통을 깨부쉈다. 피가 다시 튀어 올랐고, 드높은 천장에서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닥에 고인 핏물 위에 동심원이 생겨났다.
용병들은 말도 안 되는 모습을 보며 흥분했다. 삼사키는 외로이 남아 있는 오우거를 가리키더니 외쳤다.
"마지막 놈을 때려죽여라!"
우당탕 달려들었다.
"죽어라! 괴물 새끼!"
"죽어!"
"뒈져!"
이미 광기에 사로잡힌 그들은 우격다짐으로 검과 도끼를 휘둘렀다. 오우거는 걸레처럼 찢어지며 죽어 갔다.
"이겼다!"
"죽였다! 우오오오!"
용병들은 잠시 침묵하더니 오우거의 송곳니를 뽑았다. 광기는 광기고 돈은 돈. 침착하게 돈을 벌어들이는 의식을 마쳤다. 주머니에 송곳니를 넣고 다시 소리 질렀다.
"와아아아!"
"우리가 해냈다!"
그런 다음 바리한을 바라보았다. 삼사키가 대표해서 질문을 던졌다.
"선배,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요?"
"보는 것과 같지. 삼사키...."
"이게 도대체...."
"어쩌면 말이야. 내 은퇴는 미뤄야 할지도 모르겠어."
"그, 그런 것 같습니다. 이런 활약은...."
"어쩌면 내 전성기는 지금부터일지도 몰라."
바리한은 다시 오우거들의 시체를 돌아보며 말했다. 모두 화살에 눈이 꿰뚫린 오우거들. 단 두 번의 공격으로 만든 결과라니.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삼사키는 말했다.
"선배, 어쨌든 정말 살려 줘서 감사하오. 앞으로 술자리에 갈 때마다 선배를 칭송하겠소."
바리한은 어깨에 남은 부항 자국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칭송은 정지오 의원에게 하게. 이 기술은 그가 쓰게 해 준 거야."
19화 하급 용병 세리 (1)
정말 죽은 건가?
나는 황망하게 용병들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바리한도 삼사키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던전 입구에서 빛이 번쩍 일었다.
뭐야, 갑자기.
삼사키의 대머리였다. 주위에 놓인 횃불들을 반사해 번쩍거리는 것이었다. 이어서 바리한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부상을 당한 다른 용병들을 어깨에 짊어지고 힘겹게 빠져나오는 중이었다.
나는 소리를 질렀다.
"죽은 줄 알았잖아!"
"정지오 의원이 마중을 나왔구만! 하하."
삼사키는 큰 소리로 웃었다. 바리한은 부상자를 들것에 내려놓더니 내게 다가왔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위기의 순간이 왔지만, 한 번도 시도해 보지 못한 기술을 성공해서... 정말 감사합니다."
"한 번도 시도해 보지 못한 기술을 썼다고요?"
"네, 화살 세 개를 동시에 쏘는 겁니다. 그게 가능할 정도로 어깨가 강해졌습니다. 회복이 아니라 강화가 된 셈이죠."
바리한은 시위를 당기는 시늉을 하더니 너스레를 떨었다. 그때 샤를이 다가오더니 입을 열었다.
"다발 사격이 가능한 능력자였군. 아무튼 축하하네. 이걸 받게."
그는 활맥모과주가 담긴 궤짝을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여기 있는 정지오 의원이 만든 거지."
샤를은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나를 가리켰다. 나는 궤짝에서 술병을 꺼냈다.
"활맥모과주입니다. 통증을 가라앉히는 데에 탁월한 술이죠. 은퇴하는 자리에서 한잔하면 좋을 것 같아 준비했습니다. 앞으로도 한 잔씩 드시면 될 겁니다."
"오... 감사합니다."
바리한은 술병을 받아 들었다. 그러자 술꾼인지 용병인지 알 수 없는 무리들이 몰려왔다. 삼사키와 근육 덩어리들은 옆에서 군침을 흘렸다.
이 술꾼들.
나는 입을 열었다.
"불행하게도 이건 한 잔만 마셔야 약이 됩니다."
"딱 저에게 안성맞춤이군요."
바리한은 대답하더니 크게 웃었다. 삼사키는 크게 실망한 얼굴로 하츠에게 소리쳤다.
"하츠 어디 가서 투구 하나만 가져와. 딱 한 잔만 마실 거야!"
"소용없습니다."
나는 그를 제지한 다음 품에서 작은 잔들을 꺼냈다. 한국으로 치면 소주잔 크기의 술잔이었다. 먼저 바리한에게 활맥모과주를 따라 주었다. 다음은 삼사키와 근육들. 샤를과 나도 한 잔씩 채웠다.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4명의 남자들을 보면서 바리한은 싱글벙글 웃었다.
"표정들 피게."
"네, 네."
"표정이야 활짝 펴 드려야죠."
용병들은 작은 술잔들 내려다보더니 툴툴거렸다.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바리한에게 말했다.
"은퇴를 축하드립니다."
"아뇨. 의원님 때문에 은퇴는 못 할 겁니다."
"...?"
"아까 말했다시피 어깨가 더 강해졌습니다. 못 들으셨나요? 새로운 기술까지 쓰게 됐습니다!"
"그럼 은퇴를 번복하는 겁니까?"
나는 스포츠뉴스의 기자처럼 물었다. 바리한은 어깨를 만지작거리더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 의원님 덕분입니다. 기술을 더 연마해서 던전 깊은 곳으로 내려가고 싶습니다."
그러자 삼사키가 말했다.
"우리를 버리고 더 깊이 내려간다고?!"
"이제 우리는 수준 차이가 나지 않나? 화가 나면 여기 정지오 의원한테 치료받게. 하하하."
바리한은 웃음을 터뜨렸다. 용병들은 따라서 껄껄 웃더니 술을 들이켰다. 바리한도 곧장 술을 마셨다.
그런 다음 그대로 쓰러져 잠들었다.
"진정한 용병이라 할 수 없다니까. 아무튼 이 술 말이오. 한 잔만 마시면 약이고, 두 잔부터는 뭐요?"
삼사키는 내게 물었다.
"그냥 술이죠."
"그것참 마음에 드는 말인데... 한 잔만 더 주면 안 되오? 맛이 기가 막히네."
"바리한 씨 주려고 만든 겁니다."
"내가 이거 줄 테니까...."
삼사키는 낮게 중얼대더니 주머니에서 뭔가 꺼냈다. 커다랗고, 뾰족하고, 누리끼리한 물건이었다.
"이게 뭐죠?"
"오우거 이빨도 모르시오? 그거 하나면 금화가 한 닢이오."
"...!"
나는 주머니에 더러운 이빨을 넣고, 술병을 내밀었다. 한 병 더 담가서 바리한에게 몰래 가져다줘야 할 것 같았다.
* * *
용병들은 전리품을 제출하고, 금화를 받았다. 다들 짤랑거리는 주머니를 품에 넣은 채 귀가하거나 거리에서 술판을 벌였다. 삼사키는 당연히 후자였다. 나는 술을 들이켜는 삼사키에게 손을 흔들고 에드의 집으로 돌아갔다.
내가 묵고 있는 별채 앞에는 에드가 서 있었다. 그도 술을 마셨는지 얼굴이 벌겠다. 내게 다가오더니 말을 걸었다.
"이봐, 정지오 의원."
"네."
"소식은 들었겠지. 바리한은 은퇴를 하지 않는다더군."
웬 뒷북이야.
속마음과 달리 나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좋은 소식이군요."
"그래. 사실 처음엔 말이야."
"...."
"자네를 이용할 생각이 컸지. 몇 번 치료에 성공하면 그것을 이용해 진료소의 몸집을 불릴 요량이었어."
갑자기 왜 이래.
나는 말 없이 에드를 바라보았다. 에드는 내 어깨를 잡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술 냄새가 진동했다.
"요즘은 자네 같은 의원을 진즉 만났다면 얼마나 좋았을지 생각한다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내 아버지는 성수를 마시지 못해 죽었어. 돈이 없는 것도 아니야. 성수를 싣고 오던 마차가 산적들에게 습격당해 모두 사라진 탓이지. 치료처럼 쉬운 것이 없었는데, 우리의 빛과 희망 액티아가 몰락한 다음엔 아니었던 거야."
"그런 일이 있었다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뭐, 자네가 알 필요는 없지. 어쨌든 완전히 세상이 바뀌었어. 법, 행정 체계, 규칙, 상식 모든 것이 말이야. 신이 몰락해 버리자 이전 것들은 모두 낡아 버린 셈이지. 이런 세상에서 가장 낡아 버린 게 뭔지 아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바로 사람이야. 성수만 마시면 되던 시절이 끝나면서 사람이 급속도로 낡아 버렸지...."
에드는 말끝을 흐리더니 계속 이어 갔다.
"아무튼 정지오, 자네 같은 의원이 있었다면 아버지도 살았을 거야. 성수를 구할 수 없는 저 길바닥의 무지렁이들도 모두 살 수 있겠지. 어깨가 박살 난 궁수가 다시 활을 쏘게 된 것처럼 말이야."
"...."
"이제 정말 자네를 믿겠네. 앞으로 적극적으로 후원하지. 신이 사라진 시대엔 자네 같은 인재가 필요해. 물론 진료소의 덩치는 키워야 한다네."
"가, 감사합니다."
"들어가 자게."
에드는 그렇게 말한 다음 비틀비틀 걸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노래를 흥얼거리면서였는데, 바리한이 피리로 불던 그 멜로디였다.
* * *
나는 시장에 들러 모과를 샀다. 그리고 진료실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활맥모과주를 담갔다.
"삼사키 돼지 같은 놈."
그때 문이 열리고 삼사키가 들어왔다. 눈을 번뜩이면서 물었다.
"정지오 의원, 뭐라고 했소?"
"아, 이게 삼사 킬로는 되지? 했는데요. 제법 무겁거든요."
나는 약재들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삼사키는 수긍하는 표정을 짓더니 복도 쪽으로 손짓했다. 그러자 한 사람이 진료실로 들어왔다. 키가 큰 여자였다. 가죽옷 차림에 머리에는 커다란 두건을 쓰고 있어서 얼굴을 절반 정도 가린 상태였다.
이슬람교도인가?
그럴 리가 없는데도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삼사키는 얼굴을 반쯤 가린 그녀를 가리키더니 내게 소개했다.
"이 친구 이름은 세리라오. 우리 길드에서 꽤 실력 있던 친구라오."
"그렇군요."
'실력이 있는'이 아닌 '실력이 있던'이란 표현으로 미루어 볼 때 몸 어딘가가 크게 망가졌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세리는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나무통을 바닥에 쿵, 내려놓았다.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 돌아 버리겠어요!"
"어디가 아프신지 말씀해 주세요."
내 요청에 세리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한번 빠르게 흔들었다. 그런 다음 입을 열었다.
"창을 아무리 던져도 맞힐 수가 없게 됐어요. 하, 시발."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러니까요. 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해? 자, 직접 보세요."
그녀는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나도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딜 보라는 거지?
내 시선은 그녀의 커다란 눈과 코, 금발의 눈썹을 빠르게 오가다가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녀는 고개를 좌우로 빠르게 흔들었다.
음?
단순히 고개를 흔드는 것이 아닌 듯했다. 세리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계속했다.
"지금 봤죠?"
"네, 고개를 흔드는 거 말이죠."
"이게 문제예요. 문제는 내가 흔든 게 아냐. 이게 알아서 흔들린다니까. 돌아 버립니다, 정말!"
그녀는 격정적으로 외쳤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잠시 진정하시고, 여기 앉아서 말씀하시죠."
"하.... 액티아시여. 도와주소서."
세리는 갑자기 차분한 목소리로 신을 찾더니 자리에 앉았다. 감정이 파도를 타는 느낌. 목욕탕에서 뛰노는 어린이가 열탕에서 냉탕으로 뛰어드는 것 같았다.
나도 건너편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불안한 환자는 일단 편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대강 짐작 가는 질환이 있긴 한데요. 천천히 이야기 나누시죠."
365한의원을 운영할 때부터 익힌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농담을 던졌다.
"저는 사람을 절단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긴장 푸셔도 좋습니다."
"척 봐도 알겠네요."
"네?"
"절단하는 사람들은 보통 덩치가 정말 크잖아요."
"그렇죠. 저는 절단이 필요하지 않은 대부분의 질병을 고칩니다."
"저는 창을 던져요."
세리는 진료실의 문을 가리켰다. 삼사키는 아까 내려놓은 나무통의 뚜껑을 열어 내게 보여 주었다. 짧은 창들이 몇 개 담겨 있었다.
투창을 하는군.
다시 보니 세리는 어깨와 팔 근육이 두꺼웠다.
팔씨름을 한다면....
이길 자신이 없었다. 세리는 계속 말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창을 던지려고 자세를 잡으면... 하, 시발."
생각만 해도 욕설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다시 머리를 흔들었다. 빠르게 좌측으로 한 번, 이어서 우측으로 한 번이었다.
"아, 열 받아서 더 말을 못 하겠네!"
그녀는 다시 열탕으로 뛰어든 다음이었다. 그러자 삼사키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말 그대로라오. 고개를 흔드는 버릇이 생겼소. 창을 던질 때도 그러다 보니 균형이 무너져 버려 용병인데 쇳밥도 못 먹게 됐다오. 본래 셀릭 왕국의 군대와 함께 호흡을 맞춰 싸웠는데, 바로 쫓겨났지."
"그렇군요."
하긴....
창을 던져야 하는데, 고개가 흔들리면 그때는 끝장이었다. 마수는커녕 같은 편을 맞힐 가능성마저 있지 않은가.
삼사키는 계속 이어 갔다.
"아무튼 이 지독한 고갯짓 때문에 심란해 죽겠는데, 악마의 저주라는 이야기가 퍼지기 시작했소. 어떤 의원은 찾아와서 목을 잘라야 한다고 하더군. 그 새끼 그거 미친놈 아니오?!"
말미에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세리도 즉시 격분했다.
"그때 그놈 목을 쳐 버렸어야 하는데! 아, 액티아시여."
나는 두 용병에게 진정하라고 손짓한 다음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특정 자세를 취하려고 하면 갑자기 고개를 흔들게 됐다는 거죠?"
"모르겠어요. 갑자기 몸 어딘가가 가려운 것처럼 머리를 흔들어야만 한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녀의 대답은 내 진단에 확신을 주었다.
이건 틱(Tic)이다!
특정 행동을 반복하게 되는 질환. 소리를 내는 음성 틱도 있지만, 세리처럼 특정 행동을 하는 경우를 운동 틱이라고 불렀다. 보통은 어린아이들에게 많이 일어나고,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해소된다. 하지만 세리처럼 성인이 되었을 때 생기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어린 나이에 틱을 겪은 사람이라면 성인이 되고 나서 재발하는 케이스도 적지 않았다.
확인해야만 했다.
"세리 씨, 혹시 이런 비슷한 증세를 어릴 때 겪은 적이 있나요?"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네요."
"그랬던 것 같다고요?"
"어릴 때 얘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네요."
세리는 더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만 한번 휙휙 흔들 뿐이었다.
뭔가 감추는 느낌인데.
사실 더 캐물을 필요는 없었다. 어렸을 때 틱을 겪고 재발한 것이든 지금 새로 생긴 것이든 틱은 틱이었다. 다행이라면 한의학은 통합 심신 의료가 가능하다는 것. 세리의 심적인 문제를 다룰 지식이 머릿속에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제가 고쳐 드리죠."
20화 하급 용병 세리 (2)
틱 장애는 자신도 모르게 신체의 일부를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다. 보통은 어린아이들이 겪지만, 눈앞의 세리처럼 20세 정도의 성인도 겪을 수 있다. 이유를 짐작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당사자 입장에선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당연하던 것이 안 되는 상황. 세리는 허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액티아시여."
그런 와중에도 재빨리 고개를 흔들었다. 안타까운 마음이 절로 들었다. 나는 최대한 부드러운 투로 말했다.
"지금 겪는 질환의 원인은 스트레스입니다. 마음을 편히 먹는 것이 중요하죠."
만병의 원인이라는 스트레스. 틱 장애에도 당연히 영향을 미쳤다. 인체의 신경 경로 중 추체외로錐體外路의 중추인 기저핵은 불필요한 동작들을 제어해 주는 역할을 하는데 이곳에 문제가 생기면 쓸모없는 동작들이 늘어나며 틱 장애가 발생했다. 문제는 스트레스가 이런 현상을 더 악화시킨다는 것이었다.
나는 진료실의 침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먼저 침을 놓아 드릴게요."
"침을 놓는다고요?"
"네, 이걸로 몸을 찌르는 거죠."
"네? 뾰족한 것으로 몸을 찌른다고 마음이 편안해질까요?"
맞는 말이었다. 용병들이야말로 뾰족한 것으로 몸을 찌르는 데 특화된 사람들이지 않은가. 남들보다 먼저 찔러야만 마음이 편해지기도 했다. 침의 효능에 대해 설명을 하려는데, 삼사키가 나섰다.
"세리, 바리한 선배를 보면 알잖아. 저 침을 맞고 완전히 부활했다니까! 그러니까 너를 데려온 거지!"
언성을 높이며 흥분했다. 대머리의 색이 불긋불긋 변하기 시작했다. 세리는 두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아, 알았어요! 침 맞을게요."
"두건 푸시고, 여기 엎드리시면 됩니다."
나는 친절한 손짓으로 침상을 가리켰다. 그녀는 두건을 풀고 침상에 엎드렸다.
어쩐지 편하군.
삼사키가 대신해서 침을 맞아야 하는 이유를 알려 주니 편했다.
조금은 강압적이지만.
어쨌든 환자들이 치료를 거부하는 일은 없으니 다행이었다. 침을 들고 다가서는데, 끼익, 소리와 함께 진료실 문이 열렸다.
"새로운 환자가 왔다고 들었네."
문이 열리고, 에드가 들어왔다. 언제나 그렇듯 에드는 종이 쪼가리를 잔뜩 들고 있었다. 세리는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에드에게 말했다.
"조금 물러서서 참관해 주세요."
에드는 흘끗 세리의 모습을 살피더니 대답했다.
"아니, 아예 나가 있겠네."
그는 순순히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나갈 필요까지는...."
"환자를 불편하게 하면 안 되잖나."
에드는 밖으로 나가더니 문을 조심스럽게 닫았다.
* * *
진료소로 들어오던 샤를은 에드를 발견했다. 에드는 복도에 멀뚱멀뚱 서 있었다.
"환자가 새로 온 것 같던데, 뭐 하십니까?"
"보는 대로지. 여기 서 있다네."
"그렇게 계시면 직무 유기 아닙니까? 들어가서 할 일을 하셔야죠."
샤를은 바쁘게 끼적거리는 시늉을 했다. 에드는 고개를 저었다.
"안에 있는 환자가 누군 줄 몰라서 하는 소리야."
"누구입니까?"
"정확하진 않은데... 분명 본 적이 있어."
"본 적이 있다는 말씀은 제가 추측해도 될까요?"
샤를의 질문에 에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샤를은 어깨를 한 번 으쓱거리더니 계속 이어 갔다.
"일단 남작님께서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극히 일부의 평민들과 대다수의 귀족으로 구성되어 있겠죠."
"비꼬지 말게."
"저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씀드릴 뿐이죠."
"솔직히 맞는 말이긴 하지. 계속해 보게."
"만약 극히 일부의 평민 중 한 명이 환자라면 굳이 나와 계실 필요도 없겠죠. 오히려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시지 않겠습니까?"
샤를은 다시 종잇장에 끼적거리는 흉내를 냈다. 에드는 피식 웃었다.
"자네 말이 맞아. 저 안에는 아무래도 귀족인 것 같은 사람이 있어. 누군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역시 그렇군요. 그럼 저도 이 문고리를 굳이 돌릴 필요는 없겠군요."
"만약 자네가 그 사람을 알아볼 자신이 있다면 얼마든지 돌리게나."
"음...."
샤를은 문고리를 잡은 채 머뭇거렸다. 그러자 에드가 계속했다.
"왜 망설이는지 모르겠군. 자네가 아는 사람이라면 극히 일부의 귀족과 대다수의 평민으로 구성되어 있을 텐데."
"하긴 귀족이라면 제가 알 턱이 없겠군요! 하하."
에드는 말없이 웃었다. 샤를은 에드의 손에 들린 종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평민을 놀리는 방법도 따로 필기해서 공부하나요?"
"그건 필기할 필요가 없지. 귀족의 피에 날 때부터 들어 있거든. 아무튼 자네 추리력은 훌륭했네. 역시 황금 금고 길드는 다르긴 하군."
"아무래도 귀중한 것을 지켜야 하니까요. 어쨌든 좋은 일이군요. 처음으로 찾아온 귀족 환자 아닙니까?"
"그렇지."
에드는 진료실 문을 한번 돌아본 다음 씩 웃었다. 샤를은 입으로 짤랑짤랑, 금화끼리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 * *
나는 에드를 내보낸 다음 입을 열었다.
"세리 씨, 지금 겪고 있는 질환은 악마의 저주 따위가 아닙니다. 틱이라고 합니다. 제가 배운 학문을 토대로 설명하자면 칠정상七情傷으로 인한 기역氣逆의 일종입니다."
"네?"
세리는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스트레스가 문제라는 뜻입니다. 물론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해서 세리 씨 같은 증상이 누구나 나타나는 것은 아니죠."
"그렇군요."
"최근 스트레스를 좀 받으셨나 봐요."
"후...."
세리는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스트레스가 극심한 사람이 보여 주는 반응이었다. 나는 엎드려 있는 그녀의 뒷목을 만져 보았다. 근육이 단단하게 뭉쳐 있었다.
"역시 뻣뻣하군요."
예상대로였다. 세리와 같이 움직임이 동반된 운동틱의 경우에는 흔히 근육 긴장이 동반되었다. 뒷목의 근육만 부드럽게 풀려도 스트레스는 가라앉는 법. 일단 후두부와 목에 침을 놓을 생각이었다.
그때 세리가 입을 열었다.
"제가 계속 뒷머리가 아프고 무거운데, 혹시 그것과 관련이 있나요?"
"맞습니다. 만져 보니 후두하삼각後頭下三角 부근이 뭉쳐 있습니다."
후두하삼각은 말 그대로 뒷머리에 있는 삼각형 공간. 대후두직근大後頭直筋, 상두사근上頭斜筋, 하두사근下頭斜筋 세 근육이 모인 자리라고 보면 되었다. 이곳의 근육이 뭉치면 혈류의 순환이 원활하지 않아 두통을 유발할 수 있었다.
"그럼 침을 놓겠습니다. 일단 두통을 잡기 위해 머리부터 갑니다."
먼저 정수리에 있는 머리 한가운데에 침을 놓았다. 머리에 안테나가 달린 것처럼 우스꽝스러워지는 이 혈 자리의 이름은 백회百會. 두통, 신경 쇠약, 의식 장애 등등에 탁월했다.
삼사키는 머리통에 침 맞는 것은 처음 본 탓인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세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별로 안 아프지? 바리한 선배가 그러던데."
"안 아프긴. 그냥 참는 거죠. 얼마나 따끔거리는데."
"그, 그래. 아무튼 나는 머리털이 없어서 맞기도 편하겠네. 하하."
삼사키는 세리를 달래려는지 농담을 던졌다. 나는 삼사키에게 옆으로 가라고 손짓한 다음 계속 진행했다.
"다음 침도 넣습니다."
이번엔 사신총혈四神聪穴이었다. 백회혈에서 동서남북 방향으로 손가락 반 마디 정도 떨어진 자리에 위치한 네 곳에 침을 찔러 넣었다. 다음은 풍부혈風府穴. 뒷목의 정중앙부로 목뼈와 머리뼈가 만나는 자리였다. 이어서 풍지혈風池穴 두 곳도 놓치지 않았다. 일명 바람이 모이는 곳인데, 뒤통수뼈가 아래에 있는 좌우의 오목한 자리였다.
"이제 아무 생각 없이 편히 계시면 됩니다. 최대한 안정을 취하세요."
나는 침을 놓고 돌아섰다. 그런 다음 커다란 천 쪼가리를 가져와 침상을 커튼처럼 둘러 주었다. 외부와 차단된 만큼 심신이 더욱 안정될 것이었다.
삼사키는 내게 다가오더니 물었다.
"정지오 의원, 머리에 침을 넣는 건 처음 봐서 그런데, 어떤 효과가 있소?"
"두통도 가라앉히고, 어지럼증도 사라집니다. 아, 그리고...."
"또 어떤 효과가 있소?"
삼사키의 머리를 보니 생각나는 효능이 있었다.
"탈모에도 좋습니다."
"...!"
"뭘 그렇게 놀라십니까?"
"탈모도 고칠 수 있단 말이오?"
괜히 희망을 줄 필요는 없었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탈모가 진행되는 속도를 늦출 수는 있어도 이미 완료가 된 사람은 고칠 도리가 없습니다."
"완료가 되다니?"
"지금 완료가 된 상태 아닙니까?"
"완료가 된 건 맞소. 하지만 완료라니? 말씀이 좀 심한 거 아니오?"
"어찌 표현해야 할지 잘 몰라서... 죄송합니다."
나는 멋쩍게 웃었다. 삼사키는 후, 한숨을 내쉬더니 이어 갔다.
"사죄하는 의미로 그 활맥모과주라고 했던가. 나중에 좀 주시오."
"그, 그러죠."
바리한에게 몰래 주려고 했던 것을 좀 나눠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삼사키를 뒤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틱은 침만으로는 근본적인 치료가 안 돼.
약을 처방하는 것이 중요했다. 에드도 보고 기록할 필요가 있으니 나는 진료실 문을 열었다. 복도에는 에드와 샤를이 큭큭 웃으며 서 있었다.
"진료소장님."
"아, 정지오 의원. 무슨 일인가?"
"잠깐 들어오셔도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런가?"
에드는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침상 근처에 커튼이 쳐진 것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아. 어떤 약을 처방할 건가? 허준 선생께서 어떤 방책을 마련했는지 봐야지."
"음.... 허준 선생께서도 스트레스에 대해서 적어 두긴 했습니다."
"아, 동의보감 말인가? 적어 두긴 했는데?"
동의보감 원문에 따르면 [기가 역란(逆亂)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아무 말도 못 하고 머리를 숙이고 있고 때로는 몸을 굽혔다 젖혔다 하며 손으로 가슴을 누르고 숨을 내쉬게 된다.]라고 적혀 있었다. 스트레스에 대한 이야기인데, 안타깝게도 나는 동의보감에 수록된 처방을 사용하지 않았다.
명나라 의서에서 나온 처방이지.
억간산抑肝散이란 약인데, 명나라 때에 편찬된 보영촬요保嬰撮要에 나온 것이었다. 이 억간산은 중국에서 편찬되고, 지금은 일본에서 많이 사용되는 약이기도 했다. 물론 한의원에서도 틱 장애 치료를 위해 처방하는 대표적인 약이니 나라고 쓰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다만 허준의 것은 아닐 뿐이지.
그리하여 나는 대답했다.
"약만큼은 다른 사람에게 배운 것을 쓸 겁니다."
"다른 사람? 누군가?"
"설개와 설기, 설 씨 부자父子입니다."
"그렇군. 아무튼 실망스럽네."
에드는 말을 마치고 혀를 쯧 찼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웬 실망이란 말인가.
"이 스승, 저 스승 찾아다니는 배신자였나?"
"스승이 여럿이면 안 됩니까?"
"그건 마치 부모님이 여럿이면 안 되느냐고 묻는 것 같군."
아르타스의 문화는 그런 모양이었다. 한번 스승은 유일한 스승이자 영원한 스승. 그럴지도 몰랐다.
하지만 뭐, 어쩌라고.
나는 한국인. 열댓 명이 넘는 교수에게 배우지 않았는가. 아르타스의 기준으로 보면 부모가 열댓 명인 패륜아답게 당당하게 말했다.
"저는 여러 스승이 있습니다."
그때 샤를이 끼어들었다.
"마법 학교도 그렇지 않습니까. 과목별로 스승이 다르지 않습니까?"
"아, 그렇긴 하지."
에드는 그때서야 납득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마법사들에게 갑자기 호감이 생겼다.
역시 마법 학교는 배운 사람들이 가는 곳인가.
나는 약재함으로 다가가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스승이 누구인가도 분명 중요하겠지만 지금 치료하는 건 이 몸입니다. 그냥 뭘 하든 제 것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십시오."
"그, 그러도록 하지. 억간산이 뭔지나 알려 주게."
에드는 더듬거리며 반응했다.
귀족이면 어쩔 건가.
나에겐 방대한 지식이 있었다. 나는 괜히 으스대며 약재함을 열었지만, 소중히 다룰 약재이기 때문에 부끄럼 많은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서랍을 당겼다.
21화 하급 용병 세리 (3)
억간산의 주재료는 조구등釣鉤藤. 덩굴성 떨기나무의 가지이다. 나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잡아 들었다. 건성으로 다루다가는 조구등의 가시에 찔려 다칠 수 있었다.
'예전에 푹, 하고 찔린 적이 있지.'
핏방울이 뚝뚝 떨어진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조구등의 '조구'는 낚싯바늘을 의미했다. 실제로 이 조구등이란 약재의 가지에는 낚싯바늘처럼 생긴 가시가 일정한 간격으로 두 개씩 박혀 있었다. 상처가 그리 깊게 나진 않겠지만, 조심해야 했다.
이렇게 지켜보는 사람이 많을 때는 더욱.
나는 조구등을 꺼낸 다음 뒤를 돌아보았다. 에드, 샤를, 삼사키가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중이었다. 왠지 모르게 기대감에 찬 시선. 그들 앞에서 의원이 약재를 꺼내다가 피를 뿌리면 무슨 개망신이란 말인가.
에드가 물었다.
"그건 뭔가?"
"이건 조구등입니다."
"조구등...."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열심히 필기했다. 나는 이어서 약재함의 다른 서랍들을 열었다. 당귀, 천궁, 시호, 감초, 백출, 복령을 꺼냈다. 조구등만 따로 빼 둔 다음 나머지 약재는 물에 씻어 약보자기에 담았다.
"이걸로 약을 만들 겁니다."
"호오, 그럼 억간산이 나오는 건가?"
"그렇습니다."
나는 불자리를 내리친 다음 냄비를 올렸다. 슬슬 약 달이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나에겐 한의원 특유의 향이었는데, 이들에겐 의미가 약간 달랐다.
"역시 성수와 비슷한 냄새...."
샤를은 작게 중얼거렸다. 에드와 삼사키는 공감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최소한 여기 있는 자들은 성수를 마신 적이 있다는 말이었다.
하긴....
에드는 귀족이니까 그렇다고 치더라도 샤를과 삼사키는 성수를 제법 마셨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얼굴, 목, 팔, 다리. 잠깐 보아도 자잘한 흉터부터 큼직한 칼자국까지 발견할 수 있었다. 일부러 상처를 수집하는 인간들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이제 그들은 냄새를 수집하는 멍멍이들처럼 냄비 근처에서 킁킁거렸다.
나는 침상으로 다가갔다. 커튼 앞에 서서 물었다.
"이제 침을 뽑으려고 하는데, 들어가겠습니다."
"네, 알겠어요."
세리의 목소리를 듣고 나는 커튼을 열어젖혔다. 정수리와 후두부에 안테나처럼 심은 침을 모두 뽑았다. 그러자 세리는 큰 숨을 내쉬더니 눈을 감았다.
나는 물었다.
"좀 어떠세요?"
"오? 두통이 있던 게 완전히 사라졌어요! 뭐지?!"
"좀 안정된 느낌이 들 겁니다."
"맞아요! 안정됐어요!"
세리는 조금도 안정되지 않은 것 같이 반응하더니 냄새를 맡았다.
"이 냄새는 성수?!"
"네, 약을 달이고 있거든요. 소문을 들으셨겠지만, 저는 성수와 비슷한 향이 나는 약을 만듭니다. 성수의 효능엔 못 미쳐도 지금의 증세를 호전시키는 데엔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나는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세리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살폈다. 샤를, 삼사키와 비교한다면 전장을 오랜 시간 누볐다는 느낌을 전혀 주지 못했다. 상처를 수집하는 것이 취미라면 세리는 이제 입문자에 겨우 들어서는 수준이었다.
물론 무기의 차이도 있으려나.
샤를과 삼사키는 검을 들고 휘두르는 것에 비해 이쪽은 투창. 상처를 입을 확률이 더 낮기는 했다.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
상처도 별로 없는 하급 용병이 성수의 냄새를 안다는 것이 조금 의아했다. 삼사키가 데리고 온 것으로 보아 귀족도 아닐 터. 어떻게 냄새만 맡고 바로 안단 말인가.
세리는 두건으로 머리를 다시 감싸더니 내게 물었다.
"약은 지금 바로 주실 수 있나요?"
"아뇨. 아직 멀었습니다. 저걸 다 달인 다음엔 조구등이란 약재를 후하後下해야 하거든요. 꽤 걸릴 겁니다."
"음...."
세리는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저는 먼저 갈 테니 약은 나중에 찾아도 되겠죠?"
"네, 바쁘시면 먼저 가도 됩니다."
"그럼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물론입니다."
세리는 진료실을 빠져나갔다. 나가면서 다시 증세가 도졌는지 고개를 좌로 한 번 우로 한 번 흔들고는 중얼댔다.
"아, 시발."
"어, 어, 어디 가?"
삼사키는 세리를 따라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쿵쿵, 발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샤를은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에드에게 물었다.
"저 용병, 누군지 기억이 났습니까?"
"그렇다네. 누군지 알겠어. 오르헨 백작 가문의 영애야. 이름이 세리프였는데...."
샤를은 입으로 짤랑짤랑 동전끼리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 * *
에드는 기억을 더듬더듬 짚어 가면서 말했다.
"우리 이라쉬 가문은 오르헨 백작 가문 밑에서 성장했어. 영지를 조금 하사받았고, 대대로 뒤를 따랐지. 당연히 세리프 공녀님도 수차례 뵌 적이 있지."
"아, 그래서...."
지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다면 이해가 가는군.'
세리는 분명 억간산의 냄새를 맡자마자 성수를 떠올렸다. 역시 일반적인 하급 용병이 아니란 것이었다.
"그래서 성수의 냄새를 금방 알아챘겠군요."
"그랬겠지. 내가 알기로는 어렸을 때 몸이 안 좋으셨어."
"혹시 기억나십니까? 공녀께서 어렸을 때도 지금과 같은 증세를 겪었나요? 가끔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것 말입니다."
지오는 얼른 질문을 던졌다. 어렸을 때 틱 장애를 겪었다면 지금의 증세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에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랬을 거야."
"그랬을 거라고요?"
"내 말이 웃기지만,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어. 어지간한 병은 다 걸렸다고 들었지. 그러니 지금과 같은 증세도 겪지 않았겠어?"
"묘하게 설득력이 있군요."
웬만한 병은 다 가지고 살았으니 지금 걸린 병에도 걸렸을 것이라는 추측. 개소리 같지만 나름 신뢰가 가는 듯했다.
에드는 덧붙였다.
"성수가 없었으면 이미 죽은 목숨이라는 이야기가 돌 정도였다네."
이번엔 샤를이 나섰다. 얼굴의 흉터를 긁적거리면서 물었다.
"성수를 물 마시듯 마실 수도 있고, 휘하에 남작님도 거느린 백작 가문의 영애가 어째서 저러고 있을까요?"
"저러고 있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병에 걸린 것이 문제란 건가?"
"아뇨. 병이야 누구든 걸리죠. 어째서 삼사키 같은 사람 밑에서 개같이 박박 구르고 있는지가 궁금한 겁니다. 귀족이라면 그에 걸맞은 동료들과 던전을 공략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개같이 박박 구른다니. 표현이 왜 그렇게 거친가? 상대도 귀족이니 예를 갖추게."
"삼사키처럼 뇌도 근육으로 이루어진 술고래 밑에 있으면 그런 표현이 과하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긴 하지."
에드는 금세 수긍했다. 이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도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세리프 공녀께선 가출했다네."
"가출이요?"
샤를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웃었다. 에드도 피식 웃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들에겐 한번 웃고 넘길 가십 거리이지만, 지오는 달랐다. 치료에 필요한 중요한 정보가 있을지도 몰랐다.
* * *
부귀영화를 다 누릴 백작 가문의 영애가 가출한다고?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그것이 틱 장애의 원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나는 에드에게 물었다.
"혹시 오르헨 가문의 분위기는 어땠나요? 좀 억압적이었나요?"
"자네들 미쳤나? 귀족 가문에 대해 못 하는 말이 없군."
"진료소장님, 치료에 필요한 정보를 얻으려는 겁니다. 공녀께서 겪는 틱 장애는 주변 환경의 스트레스 때문에 발생하는 겁니다."
"스트레스가 있다면 있겠지. 가문의 위세가 클수록 가문에 소속된 자들은 의무가 많아지니까. 어릴 때부터 여러 가지 공부를 하지. 나도 마찬가지였다네."
에드는 대답한 다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귀족이라도 어린 시절이 행복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계속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공녀께선 투창으로 용병을 할 만큼 솜씨가 있군요?"
에드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몸이 나쁘니 어렸을 때부터 무술을 가르쳐 체력을 키워 준 거지. 귀족들은 대개 그렇지만 공녀께서는 액티아의 열혈 신자야. 액티아가 몰락하자마자 더욱 수련했다고 들었네."
"그러다가 아예 용병의 길로?"
"그런 셈이지. 백작님께서 던전으로 싸우러 가는 걸 허락했을 리는 없어. 지금 보니 가출한 이유를 알겠군. 직접 액티아를 구하기 위해 가출한 거군."
"대단히 신실하군요. 편히 지낼 집까지 두고 떠나다니."
내 말에 샤를은 피식 웃었다. 단도로 웃자란 손톱을 자르면서 입을 열었다.
"평민 입장에선 정말 웃기는 소리군."
"그래. 귀족도 힘들어. 너무나 억압적이라서 자유를 위해선 가출해야 한다고."
"...."
샤를은 단도를 얼른 품속에 넣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휴, 겨우 넣었습니다. 칭찬해 주십시오."
"노력하는 거 나도 봤네. 잘했어."
나는 냄비로 다가가 뚜껑을 열었다. 이제 조구등을 넣고 조금 더 달일 차례. 약재를 넣으면서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했다. 세리가 머릿속을 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대강 알겠어.
고개를 돌려 에드에게 말했다.
"계속 두건을 쓰는 것은 정체를 감추려는 것일 겁니다."
"그렇겠지."
"또 하나. 분명 지금도 억압적인 상황에 노출된 것이 분명합니다. 가출했으니 집안 문제는 아니고 용병단에서 발생한 문제일 겁니다."
"그럴까? 삼사키가 그런 스타일은 아니잖아."
"아뇨. 분명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한번 삼사키 씨에게 물어보죠."
그렇게 말하자마자 진료실의 문이 열렸다. 삼사키였다. 그는 대머리에 맺힌 땀방울을 손으로 닦더니 말했다.
"세리가 말하길 치료는 만족스럽다고 하오. 약은 대신 받아 가려고 왔소."
"곧 완성되니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잠깐 여기 앉으시죠."
나는 삼사키에게 자리를 권했다. 삼사키는 영문을 몰랐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자리에 앉았다.
"내 몸에 문제라도 있소?"
"아뇨. 지나치게 건강해 보입니다. 술을 그렇게 마시는데도 안색이 좋군요."
"술이라도 안 마셨으면 너무 건강해서 죽었을 테니! 하하."
나는 정신 차리라는 의미로 손을 내저은 다음 계속했다.
"지금 묻고 싶은 것은 세리에 대한 겁니다."
"세리? 뭐가 궁금하오?"
"강철의 손톱은 용병단의 규율이 엄합니까?"
"그럴 리가 있소? 굳이 따지면 우리는 개판이오."
"개, 개판이요?"
"매일 정해진 훈련만 받으면 자유롭게 행동하면 되오. 용병단 중에 우리처럼 편한 곳이 없소. 대신 해 주는 것도 별로 없어서 장비를 정비할 비용은 스스로 마련해야 하지만. 하하."
삼사키의 말은 사실이었다. 먼발치에 선 샤를이 목뼈가 고장 난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여 준 덕분에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서 스트레스가?
일단 내가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은 장소를 떠올렸다. 바로 군대였다. 운 좋게 공중보건의가 되었지만, 훈련소에서 보낸 3개월은 30년처럼 느껴질 만큼 스트레스가 심한 곳이었다.
그러고 보니 세리도 마찬가지!
나는 얼른 질문을 던졌다.
"세리 씨는 던전을 공략할 때 군대와 같이 진입한다고 했죠?"
"그렇소. 하급 용병이니까 군대와 함께 진형을 짜고 들어가서 토벌하오. 4층에서 10층까진 마수들도 진형을 짜는 바람에."
"혹시 그곳의 규율이 엄한가요?"
"거기도 지휘관에 따라 다르지만... 아, 그러고 보니 세리가 소속된 중대의 지휘관이 바뀌었지. 아랫사람을 개같이 박박 굴리는 스타일이라고 하더군."
슬슬 정답에 다가가는 느낌이었다. 억압이 심한 환경에 다시 속하게 되니 틱 장애가 재발하게 된 것이 확실했다.
나는 삼사키에게 물었다.
"그 사람 이름이 뭔가요?"
"누구 말이오?"
"새로 왔다는 중대의 지휘관 말입니다."
"핀이라던가."
나는 에드를 돌아보았다. 에드는 종이 쪼가리에 핀이라고 적더니 씩 웃었다.
22화 하급 용병 세리 (4)
나는 완성된 억간산을 포대에 담기 시작했다. 1주일 동안 먹을 만한 양이었다. 삼사키는 나를 바라보더니 물었다.
"거기에도 술이 들어가오?"
"안 들어갑니다."
"하하. 그냥 물어봤소."
삼사키는 큰 소리로 웃었다.
나는 포대에 담긴 한약을 건네다가 품에 안았다. 갓 달인 약은 아직도 뜨거운 열기를 품고 있었다.
진료를 더 제대로 하려면.
약을 직접 가져다주면서 복약 상담을 하는 것이 좋을 터. 스트레스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낸 이상 다시 상담을 진행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상대는 귀족이니 더 신경 쓸 필요가 있었다.
출세에 미쳐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정체까지 감춰야 하니 스트레스가 더욱 많을 터. 이야기를 삼사키를 통해서 전달하다 보면 오해가 생길지도 몰랐다. 직접 대면하는 편이 좋았다.
삼사키가 내게 물었다.
"왜 약을 안 주시오? 잘못 만들었소?"
"제가 직접 가져다줄 생각입니다."
"역시 술로 빚은 약인가? 왜 나를 믿지 못하시오?"
그때 에드가 나섰다.
"약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직접 설명하려는 모양이니 허락해 주게. 세리에게도 고맙다는 말이 듣고 싶은 모양이지."
"그렇다면 그러시오."
삼사키는 내게 따라오라고 손짓하더니 진료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삼사키의 뒤를 따라 걸었다. 어느새 샤를도 내 옆에서 걷고 있었다.
"자네 이제 처세를 제법 잘하는군."
"네?"
"상대가 귀족인 걸 알자마자 더 챙겨 주는 것 아닌가. 남작도 아주 흐뭇해하던데."
"...."
귀족이라서 특별히 잘 보이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 눈에는 그렇게 보일 것이 분명했다. 치료의 품질을 올리려는 것뿐이었다.
"그게 아니라... 출세야 치료를 잘하면 알아서 따라오는 콩고물 아닙니까?"
"내숭 떨지 말게. 출세에 미친 자네의 자세. 아주 훌륭해."
샤를은 지그시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기특해하는 표정이었다.
* * *
던전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는 정규군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대륙 동부의 셀릭 왕국은 3시 방향에, 대륙 남쪽의 네스타 왕국은 6시 방향에, 대륙 서부의 갈리아 왕국은 9시 방향에, 마지막으로 북부의 부족 연합은 12시 방향이었다.
정규군이 차지하고 남은 자리에는 온갖 용병단들의 캠프가 자리하고 있었다. 삼사키가 이끄는 강철의 손톱은 굳이 따지자면 2시 방향이었다. 모닥불을 중심으로 통나무집 몇 개와 천막 몇 개가 설치된 상태였다.
"하아아!"
"야아!"
하츠를 비롯한 몇몇 용병들은 기합 소리를 내며 대련을 하는 중이었다. 나는 삼사키에게 물었다.
"세리 씨는 어디 있나요?"
"저기 있소."
삼사키가 가리킨 천막으로 들어가자 세리는 멍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지오는 포대를 내밀었다.
"자, 아까 짓던 약이 완성돼서 가지고 왔습니다."
"고마워요. 침을 맞은 덕분인지 몰라도 지금은 전보다 좀 나아요."
세리는 자신의 머리부터 목까지 손으로 쓸어내리면서 대답했다. 평소에 말을 듣지 않고 혼자 움직이는 근육들을 타이르듯 만지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약이 정말 많네요."
그녀는 포대를 손으로 한번 만지더니 말했다. 부풀어 오른 물풍선처럼 포대는 약으로 출렁거렸다.
"네, 1주일 동안 마실 양입니다."
"아까 침 맞은 비용도 그렇고... 이 약은 또 얼마죠?"
세리는 걱정스러운지 미간을 좁혔다. 귀족 출신이지만 가출한 이상 돈에 쪼들릴 수밖에 없었다. 용병 생활도 더 이어 가지 못하는 몸이니 더욱 그랬다.
"용병단에서 대신 지불하는 게 아닌가요?"
"용병단이 먼저 지불하지만, 다음번 제 급료에서 약값의 일부를 차감하죠. 문제는 이 병이에요. 제가 이 낫지 않으면 갚을 수 없단 거예요."
그녀는 대답을 마치자마자 고개를 흔들었다. 다시 스트레스가 상승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지오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고 보니....'
지오는 자신의 진료를 대가로 진료소가 얼마를 벌어들이는지 알지 못했다. 에드가 알아서 약값을 청구하는 시스템이었다.
'돈보다는 치료가 우선이지.'
지오는 곧장 말했다.
"제가 그냥 외상으로 드릴게요."
"네?"
"용병단에 청구하지 않고, 그냥 세리 씨 개인에게 외상으로 드린다는 말이에요. 여유가 생기면 그때 갚아도 됩니다."
"어째서 그런 호의를?"
세리는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정체를 알아챘다는 여긴 것이었다. 지오는 태연한 표정으로 계속했다.
"제겐 치료가 우선입니다. 돈은 부차적인 문제예요."
"그, 그게 정말인가요?"
"네, 게다가 세리 씨의 병은 스트레스가 원인입니다. 돈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면 치료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제 스승과 저의 명예를 걸고 이곳에 온 이상 치료에 성공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거기까지 말하고 지오는 그릇에 약을 따라 건넸다. 세리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한 번에 약을 들이켰다. 지오가 볼 땐 한국인보다 한약을 더 잘 마시는 느낌이었다.
'어렸을 때 성수를 자주 들이켰다더니....'
세리는 입가에 묻은 약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그런 다음 '후' 하고 다시 심호흡을 했다. 약효 때문인지 기분 탓인지 몰라도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가슴이 좀 편해진 기분이에요."
"약효도 있겠지만, 사실 스트레스가 감소한 것도 영향이 있을 겁니다."
"스트레스요?"
"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치료비 때문에 걱정이 있었잖아요."
"아, 그랬죠."
세리는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미소를 띠었다. 지오는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또 다른 스트레스가 있으시죠? 아마도 군대와 관련된...."
질문을 듣자마자 세리는 즉각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바로 새로 온 중대장 핀의 얼굴이었다.
* * *
핀은 얼굴이 네모지고, 입이 큰 사람이었다. 투구를 깊이 눌러쓰고 말하기 시작하면 입만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용병들이라고 해도 셀릭 왕국의 군대와 전쟁에 임한 이상 군인과 같은 정신을 가져야 한다! 알겠나?!"
새로 온 지휘관은 용병들을 모아 놓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는 규율을 지킬 것을 강조했고, 기초 훈련부터 다시 시작했다. 세리의 투창도 마찬가지였다.
"세리, 잘 맞히면 뭐 하나? 자세가 틀려먹었잖아!"
"아니, 뭐가 틀렸다는 겁니까?"
어린 시절, 밥 먹고 싸움질만 하던 기사에게 배운 투창이 틀렸을 리가 없었다. 전문 업자가 가르친 것이 틀릴 리가. 세리는 속으로 욕설을 씹어 삼켰다.
'시발.'
핀은 박박 우겼다.
"훈련 교본에 나온 대로 하라고! 멋 부리지 마!"
전문 업자의 노하우를 배제할 것을 요구했다.
"자세를 고치지 않으면 전투에 참여하지 못한다! 용병!"
"내가 누군 줄 알고...."
물론 정체는 밝힐 수 없었다. 집에 돌아가면 던전에서 싸우는 것은 정말 끝이었다. 자세를 고치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세를 바꾸니 정확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핀은 이제 실력을 지적했다.
"실력이 형편없잖아!"
"자세를 바꾸래서 바꿨잖습니까!"
"실력을 키워! 연습하라고!"
그때부터였다. 세리의 몸에 이상 반응이 나타났다. 고개가 알아서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어?"
그 움직임은 통제가 불가능했다. 마치 말을 듣지 않고, 집에서 탈출한 세리와 같았다. 신경을 쓸수록 증세는 심해져 갔다.
"창을 왜 안 던져? 고개는 왜 흔들어?"
세리는 괴성을 질렀다.
"으아아악!"
"뭐야?"
핀은 직접 세리에게 다가가 물었다. 투구에서 툭 튀어나온 입술은 비죽거리며 물었다. 세리는 간신히 화를 억누르고 대들었다.
"용병은 잘 싸우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잘 싸우기만 하면 된다고? 그러면 그냥 곰이나 호랑이를 데려오지 왜 인간을 데려온단 말인가!"
"용병은 자세보다 싸우는 실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 기가 막히게 실력이 좋은가 보지? 어디 한번 그런 멋 부리는 자세로 얼마나 잘 싸우는지 유심히 지켜보겠다."
핀은 검지로 자신의 눈동자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얼마 뒤 마수들과의 전투가 벌어졌다. 오크들이 진형을 갖추고 다가오고 있었다. 방패병들이 앞으로 나서 그들의 진격을 막는 사이 창병들이 오크들을 찔렀다. 투창병들의 임무는 하나. 옆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적들을 하나씩 조준해서 척살하는 것이었다.
'좋아. 고개만 흔들지 않으면 돼.'
하지만 창을 던지려고 자세를 잡으면 갑자기 고개가 흔들렸다. 균형이 숫제 무너진 상태. 방패 사이로 빠져나온 오크가 도끼를 들어 올리는데도 창은 손에서 떠나질 못했다.
'뭐, 뭐야.'
세리는 온몸이 굳었다. 틱 때문에 고개만 계속 까딱거릴 뿐이었다. 그때 다른 투창병이 던진 창이 오크의 가슴을 꿰뚫었다.
"이 미친 새끼야! 전선이 무너지면 우린 다 죽어!"
다른 병사가 그녀를 꾸짖었다. 적이 피를 흘리지 않으면 바로 아군이 피를 흘리는 것이 이 전쟁. 명백한 세리의 실책이었다.
그때 뒤에 서 있던 핀이 다가왔다.
"잘 싸우면 된다고 하지 않았나? 호기롭게 주둥이를 털더니 아무것도 못 하는군."
"...."
"이젠 주둥이도 못 터나?"
"다시 해 보겠습니다."
"하하. 더럽게 추하군. 고개나 더 흔들어 보게."
투구 아래로 나온 입술은 저 혼자 비웃더니 물었다. 세리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고개만 좌로 한 번, 우로 한 번 흔들 뿐이었다. 치욕스러웠다.
핀은 부관에게 말했다.
"부관, 이 용병은 쫓아내게. 혹시 돌아오거든 나에게 오도록 조치하게. 다른 지휘관을 괴롭힐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세리에겐 사형 선고였다. 틱이 사라져도 다시 핀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