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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한의사 정지오

'이러면 안 되는데?'

차에 치여 날아가면서 나는 생각했다. 불과 조금 전까진 환자의 등에 꽂힌 침들을 뽑으며 설명을 곁들이고 있었다.

"견정혈, 견우혈, 노수혈, 고황혈, 중저혈에 침을 놨습니다. 등과 어깨의 통증이 가라앉았을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환자는 팔을 위아래로 움직이더니 미소를 지었다. 결과가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자랑을 좀 하자면 나는 침을 잘 놓는 편이다. 이 근방 근골격계 환자들은 나만 찾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지금은 차에 치여서 날아가는 중이지만.

그는 오늘의 마지막 환자였다. 이미 간호조무사들은 퇴근한 다음인 9시 정각. 나는 365청아한의원의 불을 껐다. 그리고 길가로 나왔을 때 뭔가 휙, 하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냥 지나갔으면 좋겠지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나를 치고 지나갔다.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지나간 일들을 후회한다던가. 내 경우엔 후회보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환자를 더 보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이었다. 가족이 없는 나에겐 그들이 치료되고 환히 웃는 모습을 보는 것이 삶이 낙이었다.

'환자를 더 봐야 하는데.'

하지만 상념은 이제 끝. 나는 곧 저 벽에 충돌하고 죽을 것이다.

* * *

정지오는 급하게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하지만 아무런 충돌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오는 천천히 눈을 떴다. 놀랍게도 진료실이었다.

'꿈인가...?'

꿈이라고 하기엔 조금 전 차에 치인 기억이 너무나 선명했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불 꺼진 진료실 한쪽에서 기묘한 불빛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뭔가에 홀린 듯 불빛에 향해 다가섰다.

[꿈이 아니라네.]

갑작스레 음성이 들려왔다. 아니, 들렸다고 표현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았다. 이 묵직한 소리는 손끝에서부터 시작해 가슴을 울리고 있었다.

"뭐, 뭐야. 누구시죠?"

지오는 말을 더듬거리며 물었다. 음성은 다시 시작됐다.

[말 그대로지. 꿈이 아니다. 자네는 조금 전 사고로 죽었다네.]

느닷없는 죽음의 선고. 지오는 물끄러미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죽었다고 하기엔 너무나 잘 움직이고 멀쩡한 모습이었다.

[내 힘으로 죽음을 잠시 미뤄 두고 있을 뿐이야. 잠깐이나마 시간이 도로 흘러가게 해 보지.]

그 말이 끝나자 갑자기 온몸이 부서질 듯한 통증으로 휩싸였다. 이 통증을 침으로 해결하려면 온몸을 고슴도치처럼 만들어도 부족할 듯했다.

"아악!"

지오는 소리를 질렀다. 통증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고, 음성은 계속 이어졌다.

[정지오, 상황을 이제 이해했는가.]

"다, 당신은 신입니까?"

[아니, 신의 사자라네. 신께서 직접 나타나셨다면 자네는 이미 다 타 버려 재가 되었겠지. 난 자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러 온 것이야.]

"...."

지오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이어질 이야기를 기다렸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조금 전 들이닥친 통증의 여파가 아직도 몸 이곳저곳을 저릿하게 만들고 있는 탓이었다.

음성은 계속 이어졌다.

[자네와는 무관하지만, 다른 세계에 도움이 필요하다네. 그 세계의 이름은 아르타스.]

"아르타스...?"

지오는 이름을 되뇌었다. 사람 이름 같기도 하고, 도시 이름 같기도 했지만, 세계의 이름이라니. 나름 공부를 했어도 그런 세계의 이름은 들어 본 일이 없었다. 애초에 세계에 이름이 있다는 것조차 와닿지 않았다. 신이 아니라면 세계에 이름을 붙이지 않을 터였다.

음성은 질문에 답하듯 바로 신에 대해 언급했다.

[아르타스의 신은 얼마 전 악마들에게 봉인됐다네.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얼마 가지 못하고 그곳의 생명체들은 파멸될 거야....]

시종일관 단호하고 딱딱한 어조를 유지하던 음성이 처음으로 말끝을 흐렸다. 잠시 뜸을 들이더니 계속했다.

[우리 신께선 다른 세계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없어. 그러니 자네가 그곳으로 가 도움을 주길 원한다네.]

"제, 제가 말입니까?"

지오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평범한 30대 남성의 몸. 혈압 정상, 맥박 정상, 간 수치 정상, 골밀도 정상이긴 해도 신이 봉인된 세계에서 생명체의 파멸을 막기엔 턱없이 약해 보였다.

'차라리 이종격투기 선수들을 데려가는 편이....'

자신 없는 눈빛으로 진료실 한쪽 구석에서 일렁이는 불빛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음성은 다시 이어지기 시작했다.

[총칼을 들고 날뛰라는 것이 아니야. 자네에겐 환자를 아끼는 마음이 있고, 무엇보다도 뛰어난 의술이 있지. 365일 하루도 쉬지 않고 진료를 하는 열정도 포함해서.]

지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환자들을 진료하는 것이 좋은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365일 진료를 한 것은 한의원이 망하지 않기를 위한 방편이었다.

'이제야 자리를 좀 잡았는데....'

죽어 버렸다니. 허망했다. 좀 더 살아남아서 진료를 하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지오는 어쩐지 간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곳으로 가서 치료를 하란 말씀인가요?"

[맞아. 아르타스에서 악마, 괴수들과 싸우는 인간들을 치료하면 된다네. 그곳의 신이 봉인되면서 치료용 성수를 만들어 내는 축복이 사라진 상황이야. 그러니 가서 의술을 펼쳐 주겠나? 물론 이곳 진료실에 있는 물건들을 권능으로 계속 공급해 주겠네.]

음성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한쪽에 놓인 침, 뜸, 부항 등등의 도구들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매일 사용하는 치료 도구들이었다. 지오는 진료실 한쪽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그것 말고도 약재실에 있는 약재들도 필요합니다."

그러자 약재실에 있던 약함이 통째로 날아왔고, 눈앞에 둥둥 떠오르기 시작했다. 지오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난데없이 다른 세계에서 진료라니....'

다시 한번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직도 몸 이곳저곳에 남아 있는 통증은 날카롭고 집요했다. 꿈에서는 이렇게 아플 수 없는 법이었다. 분명한 현실이었다.

음성은 현실이라는 것을 자각시키려는지 더욱 강하게 진동했다.

[궁극적인 목적은 단 하나. 그곳의 생명체들이 악마들을 물리치고 신의 봉인을 풀도록 돕는 것이지. 그러면 자네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계속 살아갈 수 있을 걸세. 물론 자네에겐 선택권이 있어.]

"아르타스라는 곳에 가는 것도 가지 않는 것도 제 자유라는 말씀이군요?"

[정확하네. 둘 중에서 고르도록 하게.]

지오는 곧바로 대답했다.

"가겠습니다. 어차피 선택의 여지가 없지 않습니까?"

[아니라네. 분명 선택권을 줬지.]

"하지만 아르타스에 가지 않는다면 저는 이 자리에서 죽는 것 아닙니까?"

[...물론 그렇다네.]

"그럼 가겠습니다. 아픈 사람을 진료할 수 있다면 지옥에라도 가겠습니다. 게다가 그곳에서 목적을 이루고 돌아오면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고 하셨으니 말입니다."

[예상대로야. 침착하고, 지혜롭군. 아르타스로 가거든 자네를 안내해 줄 녀석이 하나 있을 거야. 녀석에게 도움을 받도록 하게.]

음성은 거기까지만 이어지고 끊겼다. 대신 진료실 구석에서 어른거리던 불빛이 서서히 커지고, 선명해지고 있었다. 빛은 지오를 집어삼킨 다음 가뭇없이 사라졌다. 어둠에 휩싸인 진료실엔 이제 아무런 기척도 남지 않았다.

* * *

정말 파랗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하늘에 대한 나의 감상이었다. 저 비슷한 색을 본 적이 있는데, 그곳은 그리스에서 본 지중해의 바닷가였다. 물론 저것은 바다도 아니고, 이곳은 그리스도 아니었다. 아니, 심지어 지구도 아닌 다른 세계였다.

'이건 무슨 옷이야.'

내 옷차림은 좀 허름했다. 가죽을 얼기설기 이어 만든 허름한 윗도리와 헝겊을 덕지덕지 덧댄 바지였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바라보았다. 나무들이 듬성듬성 자라나 있는 초원이었다. 이곳이 아르타스의 어디인지도 모르는 입장에선 함부로 돌아다니기 어려웠다.

'안내해 줄 녀석이 하나 있을 거라고 했지.'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니, 단순히 기척이라고 표현하기엔 너무나 요란했다.

"아아아악! 제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제발...! 읍...!"

누구인지는 몰라도 더 이상 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소리가 사라지자 나는 더 무서웠다.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낯선 세계로 오자마자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도망이라도 쳐야 할까.

'하지만 어디로?'

잠시 고민하는 사이에 한 중년 남자가 이미 지척에 있었다. 그는 무언가를 바닥에 질질 끌면서 다가오는 중이었다. 그 무언가는 짐짝처럼 함부로 끌려오고 있긴 해도 사람이었다. 입에 재갈이 물려 있어 '읍! 읍!' 소리만 내고 있었다.

나는 얼어붙은 상태로 앞에 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중년의 남성은 일단 덩치가 컸다. 얼굴은 그리스에서 볼 법한 생김새였다. 교과서에 나오는 철학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복장은 가죽옷과 가죽 신발. 그는 뺨에 난 흉터를 검지로 긁적이더니 내게 물었다.

"동쪽에서 올 거라고 한 의원이 자네인가?"

"그, 그렇습니다."

지구에서는 동양인이니 틀린 말도 아닌지라 어렵지 않게 대답할 수 있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내게 한 걸음 다가왔고, 손을 내밀었다.

"약속 장소에 정확히 와 있군. 반갑네. 나는 샤를이라네. 여기 이 걸레 같은 건 오는 길에 만난 도적이지."

"바, 반갑습니다. 저는 정지오라고 합니다."

나는 샤를이 내민 손을 맞잡으면서 끌려온 남자를 흘끔 내려다보았다. 그는 머리칼에 흙먼지를 잔뜩 묻힌 채 덜덜 떨고 있었다.

샤를은 도적을 가볍게 내동댕이치더니 입을 열었다.

"이 녀석이 어떤 것 같은가?"

"무척 아프고 힘들어 보이네요."

"아, 그런 게 아니라 정확히 어디가 아파 보이나? 내가 특정 부위를 아프게 만들었는데, 한번 알아맞히고 고쳐 보게나."

말을 마치고 샤를은 눈을 가늘게 떴다. 나를 시험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저런 눈빛이라면 익숙하지.'

한의사가 되고 나면 다짜고짜 맥부터 짚어 보라며 팔뚝을 내미는 사람들이 어디 한둘인가. 나는 당황하지 않고 도적의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비명 소리가 들릴 때만 해도 불안했는데, 사람을 진료하는 상황이 되니 오히려 침착해지는 기분이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도적에게 다가갔다.

"읍읍읍!"

도적은 내가 다가가자 드러누운 상태에서 조금씩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샤를이 발로 도적의 가슴팍을 발로 누르더니 다그쳤다.

"사지를 분해하기 전에 가만히 있어. 고쳐 준다잖아."

"읍!"

도적은 이제 얌전히 누워 있었다. 몸을 바들바들 떨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광대 쪽에 시퍼런 멍이 나 있었다. 그리고 재갈이 물린 입은 이상하게도 크게 벌어진 상태. 침이 질질 흘러 피와 섞여 흘렀다.

'뭔가 부자연스러운데.'

손을 내밀어 도적의 관자놀이 쪽을 매만졌다. 턱관절이 빠져 있었다. 턱뼈가 원래 있어야 할 자리보다 광대뼈 쪽으로 이동한 상태. 주먹으로 맞을 때 빠진 것이 분명했다. 물론 격투에 단련된 자들이라면 일부러 뽑을지도 몰랐다.

나는 샤를을 바라보며 물었다.

"고칠까요?"

"오호, 바로 고칠 수 있단 말인가?"

* * *

샤를은 지오를 바라보았다.

'바로 고친다고?'

사람의 관절에서 뼈를 뽑아내는 것은 쉬워도 다시 넣는 것은 어려웠다. 그것이 가능한 일인지 알지도 못했다. 뽑은 적은 많아도 넣으려고 시도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 말이다. 성수를 마셔서 치료하는 모습은 본 적이 있긴 했다.

'그때는 아주 서서히 뼈가 제 위치로 갔지....'

물론 그런 것도 신이 봉인되기 전까지의 이야기였다. 신의 축복이 성수를 내준 덕에 아르타스는 의술이 전혀 발달하지 못했다. 발달할 이유가 아예 없는 것이었다. 이젠 단순한 상처도 자연적으로 치료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동방에서 온 지오는 맨손으로 뭔가 해 보려고 하고 있었다. 벌써 도적의 턱을 두 손으로 잡고 있었다.

'동방에서도 분명 성수를 사용한다고 들었는데 어째서....'

물론 허풍일지도 몰랐다. 진짜일지 가짜일지는 곧 판별될 것이었다.

'신의 계시대로라면...!'

2화 첫 진료

지오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네, 턱관절이 빠져 있지만 넣으면 됩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가. 한번 해 보게."

샤를은 태연하게 반응했지만, 침을 꿀꺽 삼켰다. 사람의 힘으로 관절을 넣는 모습은 아직 보지 못한 탓이었다. 두 눈이 흥미롭게 빛났다.

"읍읍!"

도적은 두려운 눈빛으로 지오와 샤를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샤를의 두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반짝 빛났고, 지오는 너무나 여유로웠다. 다들 자기 몸이 아니니까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이 미친놈들이...!'

몸을 버둥거렸지만, 가슴팍을 밟고 있는 샤를의 힘이 너무나 강했다. 지오는 먼저 도적의 입에 물린 재갈을 풀어 주었다. 그러자 괴성이 터져 나왔다.

"아아아아!"

턱이 빠진 탓에 말은 못 했지만 소리부터 지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적이 없는 초원에선 그저 공허한 외침일 뿐이었다. 지오는 평소 환자들을 안심시킬 때처럼 온화한 표정으로 말을 붙였다.

"자, 저를 믿고 힘을 빼 보세요. 정말 고쳐 줄 테니까."

"아아아!"

도적은 지오를 믿지 못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자 샤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번에 힘을 빼지 않으면 영원히 힘을 줄 수 없을 거다."

"...."

도적은 공포에 질린 얼굴이 되었다. 더 이상 소리도 지르지 않았고 힘도 완전히 뺐다. 지오는 양손의 엄지손가락을 도적의 입에 넣었다. 그런 다음엔 나머지 손가락으로 턱을 쥐었다. 자연스럽게 엄지가 아래쪽 어금니 위에 올라간 상황. 지오는 손에 힘을 주어 턱뼈를 잡아당겼다.

'이쯤이면 입이 다물어질 텐데.'

그간 추나요법을 수없이 시술해 온 지오는 느낄 수 있었다. 양손에 힘을 팽팽하게 유지한 채로 도적에게 말했다.

"이제 입을 다물어 보세요."

도적은 시키는 대로 입을 닫았다. 관절이 빠져 있는 터라 내내 열려 있던 입이 이전처럼 다물어지기 시작했다. 지오는 씩 웃으며 말했다.

"자, 이제 턱뼈가 제대로 들어갔습니다."

"어? 다, 다물어졌다."

도적은 입을 꾹 다문 채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반면 샤를은 턱이 빠진 사람처럼 입을 벌렸다. 놀라움 때문에 관절이 알아서 움직이는 것이었다.

'정말 고쳤잖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성수보다도 훨씬 빠르게 치료한 것이었다. 샤를은 숨을 한 번 내쉬더니 말했다. 별일 아니라는 투였다.

"했군."

그때 도적은 괴로워하는 목소리로 이어갔다.

"어깨도 너무 아파요. 어깨 관절도 이 사람이 뽑았어요! 왼쪽 어깨예요!"

다다다 빠르게 통증을 호소했다. 샤를은 희미한 미소를 짓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 농담을 주고받는 할리우드 배우 같은 몸동작이었다.

"말이 많군. 여기 있는 의원이 직접 진단해야 하는데. 한 번만 더 입을 열면 이번엔 머리통을 뽑아 주마."

잠시나마 말문이 트였던 도적은 잠잠해졌다.

"어, 어깨도 한번 보겠습니다."

지오는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도적의 왼쪽 어깨를 만져 보았다.

* * *

완벽하게 확인할 수는 없겠지만.

어깨 탈골의 경우 골절과 함께 발생할 수 있었다. 강한 충격으로 빠지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골절이 있는 경우라면 어깨 관절을 다시 끼우더라도 계속해서 치료가 필요했다.

하지만 도적은 어깨가 뽑혔다는 표현을 썼지.

나는 다시 도적의 옷을 걷어 낸 다음 관찰했다. 뼈가 부러졌다면 붓기 시작하겠지만, 그런 징후는 없었다. 깔끔하게 관절에서 뼈만 뽑아낸 듯했다. 고개를 돌려 샤를을 바라보았다. 분명 인간의 관절을 뽑는 기술을 가진 실력자가 분명했다.

이 정도면 골절은 없다고 봐도 좋겠어.

이제 치료할 차례. 관절에서 빠진 뼈는 근육 때문에 잡아당겨져 엉뚱한 위치에 있었다. 그것을 힘껏 잡아당겨 다시 제대로 된 위치에 넣어야만 했다. 혼자서 가능할 수도 있지만, 손상 없이 처리하려면 둘이서 하는 편이 좋았다.

나는 샤를에게 도움을 청했다.

"샤를 씨, 이쪽에 서서 이 사람 몸을 꽉 잡아 주십시오. 네, 왼쪽 어깨가 빠졌으니 오른쪽에서 몸통을 잡아 주면 됩니다."

샤를은 내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도적의 몸통을 잡았다.

"좋아. 꽉 잡았다고."

도적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통증 때문에 진땀을 흘리면서도 샤를이 무서운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나는 먼저 발을 도적의 겨드랑이에 대고 몸을 지탱했다. 그런 다음 도적의 왼팔을 두 손으로 잡아당겼다. 근육이 잡아당기는 뼈가 내 쪽으로 쑥 다가왔다.

좋아. 어렵지 않아.

천천히 본래 있어야 할 자리로 뼈를 다시 넣었다. 도적의 표정이 점차 밝아졌다. 어깨를 옥죄던 통증이 사라진 것이 분명했다.

나는 어쩐지 도적이 아닌 샤를에게 말했다.

"어깨도 고쳤습니다."

"그렇군."

샤를은 고개를 살짝 끄덕거렸다. 분명 처음엔 놀란 기색이었는데, 말할 땐 최대한 감정을 감추려는 것 같았다. 말수가 적은 사람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 사람이야 얼마든지 있지.

말이 많지만 감정 표현은 최대한 자제하는 사람은 한국에도 널려 있었다. 나는 도적의 평온한 표정을 보면서 말했다.

"제가 봤을 땐 이 사람은 더 이상 아프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긴 한데, 그건 마음에 들지 않는군."

샤를은 무표정하게 도적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면서 계속했다.

"이 녀석, 사람을 다섯이나 죽였거든."

"네?"

내가 놀라는 사이 샤를은 순식간에 품에서 단검을 꺼냈다. 그런 다음 도적의 목덜미에 찔러 넣었다.

"어... 억!"

도적은 소리도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숨을 거뒀다.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지만, 샤를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미소를 지었다.

"죽어야 할 놈이 죽은 거야. 놀라지 마. 동쪽에서도 그렇지 않나?"

한국에서는 그런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이내 생각을 바꿨다.

그래. 이곳은 아르타스다.

한국을 기준으로, 지구를 기준으로 생각해선 살아갈 수 없을 터. 얼른 이곳의 가치관에 맞춰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짐짓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그래. 사람 사는 곳이 다 똑같다니까."

샤를은 도적의 시체를 발로 툭 차면서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는 조금 무섭긴 해도 전반적으로 여유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이번엔 내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

"자, 이제 우리가 갈 곳으로 가자고."

"어, 어디로 말입니까?"

"어디냐고? 그 이름도 유명한 액티아 시티지. 거기에 자네에게 배정된 진료소가 있으니 어서 출발하자고."

"제 진료소.... 알겠습니다."

분명 신이 봉인된 장소 근처일 것이었다. 그곳에서 악마들과 사투가 벌어지고 있을 테니 말이다. 내 표정은 절로 굳어졌다.

"그렇게 심각해하지 마. 서쪽의 인간들이 자네에게 그리 호의적이진 않겠지만, 내가 후견인이 되어 줄 테니까 말이야. 그러면 여기서 적응하는 데엔 큰 어려움은 없을 거야."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자 이걸 갖게나. 내가 준비한 작은 선물이지."

그는 나무 지팡이와 가죽으로 짠 주머니를 하나 내밀었다.

"물주머니와 지팡이야. 먼 길 오느라 수고했겠지만, 좀 더 걸어야 하거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가 내민 물건들을 받았다. 그런 다음 그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는 40대 중반이나, 어쩌면 더 나이를 먹은 것 같았으나 발걸음이 몹시 가벼웠고, 통통 튀듯 사뿐사뿐 걸었다. 나로선 놓치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걸음을 옮겨야 했다.

키가 작은 나무들이 군데군데 자라난 초원을 걸어갔다. 하늘은 파랗고 땅은 초록빛으로 뒤덮여 있었다. 파랑과 초록의 경계선. 까마득히 먼 곳에는 건물들의 형상이 보였다.

* * *

샤를은 지오의 설명을 모두 듣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침이나 여러 도구로 치료한다는 것은 꽤나 낯설지만, 물약으로 치료하는 것은 우리도 익숙하지. 차이가 있다면 치료용 성수가 아니라 약초로 물약을 만든다고 했던가?"

"네, 그렇습니다."

함께 풀밭을 걸으면 지오는 자신의 치료법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침을 놓거나, 뜸이나 부항을 사용하기도 하고, 한약을 만들기도 한다고.

샤를은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면서도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계속 말했다.

"물로 된 약을 먹는다는 점에서 동방의 의술도 크게 다르진 않은 듯하군. 물론 우리가 만드는 치료용 성수는 너무나 비싸서 아무나 벌컥벌컥 마시진 못했어. 신이 봉인된 다음부터는 더 이상 성수가 만들어지지도 않아 값이 더욱 치솟고 있지. 이젠 어지간한 실력자가 아니고선 성수를 마시는 건 엄두도 못 내."

이번엔 지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강 어떤 상황인지 알겠어.'

아르타스는 의술이 발전할 이유가 거의 없는 곳이었다. 모든 질병을 성수로 치료하는 것이 일상이던 세계이지 않은가. 물론 그것도 신이 봉인되기 전까지만 유효한 말이었다. 샤를은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자네처럼 성수가 아닌 것으로 치료할 줄 아는 사람을 불러 모으는 것이야."

샤를이 가리킨 곳은 눈앞의 도시였다. 멀리 보이던 도시는 어느새 눈앞으로 성큼 다가와 있었다. 목책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모양은 유럽의 도시와 전혀 다른 느낌을 주었다. 질서라고는 없는 판자촌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무허가 건축물들이 가득 들어찬 빈민촌 같은 느낌. 도시보다는 난민촌 같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것이었다. 지오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이런 말씀이 외람될지 모르지만, 서쪽의 도시들은 보통 이런 모양입니까?"

"아아, 절대 아니야. 빠르게 커지는 도시여서 그렇지. 자네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왔구만. 도시 한가운데 있는 던전에 우리의 신 액티아께서 갇혀 있다네. 구역질 나는 악마 놈들을 무찌르기 위해 우리 인간들은 급히 모였고, 그 때문에 도시는 무질서하게 커졌지."

"아...."

지오는 발걸음을 멈춰서고, 탄식했다. 이제 이곳의 상황을 대충 알 수 있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도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자, 어서 가자고. 다 왔네."

두 사람이 따라온 길은 오솔길. 인적이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대로가 나타나자 여러 방향에서 합류한 인파가 제법 상당했다. 물자를 싣고 가는 마차들이 줄을 지어 이동했고, 갑옷을 잘 차려입은 기사들은 말을 타고 먼저 앞서갔다. 비루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은 터덜터덜 걸어가다가 기사들이 뿌리고 간 먼지를 마셨다.

"개놈들아!"

한 남자가 기사들에게 중지를 치켜세우면서 욕지거리를 뱉었다. 아르타스에서도 마음에 안 드는 놈에겐 뻐큐를 날리는 것이 지구와 같았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구나.'

사람들에게 치이기 시작하자 샤를은 얼굴의 흉터를 긁더니 말했다.

"자네는 의료 목적으로 왔으니 빨리 들어갈 수 있을 거야. 저쪽으로 가세."

그러고는 목책 한쪽에 있는 작은 출입구로 향했다. 그곳에 기대어 서 있던 경비병은 샤를과 지오의 모습을 살폈다. 특히 지오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뭐요?"

불친절하고 딱딱한 목소리. 샤를은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반응했다.

"뭐긴 뭐요. 우리를 도와주러 온 의원이지."

"의원? 하긴 요즘 개나 소나 사람 치료한다고 나설 때지. 에휴. 이름이 뭐요?"

"정지오라고 합니다."

지오는 왠지 소심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경비병은 서류를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기 등록되어 있긴 하네. 스승 이름은 뭐요?"

"스승이요?"

지오는 되물었다. 경비병은 어서 말하라고 손짓했다.

"당신이 돌팔이 짓을 하면 스승 얼굴도 먹칠하려고 묻는 거요."

3화 왕립 진료소

스승의 이름까지 먹칠한다고?

이런 곳까지 온 이상 나도 제대로 해 볼 생각이었다. 한편으론 자신도 있었다. 한국에서 무려 6년이나 공부했고, 인턴으로 1년, 레지던트로 3년을 굴렀다. 그뿐인가. 군의관으로 또 3년을 일했고, 그런 다음엔 무려 365한의원을 운영했다. 특별히 365란 숫자를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연중무휴 365일 매일 일해서 365한의원이었다. 그런 곳을 4년이나 경영해 왔으니 자신감을 좀 가져 볼 만하지 않은가.

그리하여 나는 저지르고 말았다.

"제 스승님의 이름은 허준입니다."

아아, 허준이시여. 사실 당신이 나온 드라마를 어린 시절 보지 않았다면 한의대에 가지도 않았을 테니 스승이라 부르겠습니다.

경비병은 나를 흘끔 바라보더니 종이 쪼가리 위에 무언가 끼적거렸다. 그러고는 피식 웃으면서 덧붙였다.

"자신감이 좀 있군요?"

"네, 있습니다."

"그런 자신감도 진료실로 가는 길에 다 사라지겠지만, 이제 들어가시오."

경비병은 반쯤 열려 있던 목책의 문을 힘껏 열어젖혔다. 옆에 있던 샤를은 먼저 안으로 들어서더니 지오를 돌아보며 말했다.

"희망과 절망의 도시 액티아 시티에 온 걸 환영하네."

"...."

나는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판자와 지푸라기를 대충 엮어 만든 집들이 좌우로 늘어서 있었다. 볼펜으로 아무렇게나 찍찍 그어 놓은 것을 3D프린터로 뽑아내면 나올 것 같은 형상이었다. 얼굴이 지저분한 아이들이 안에 없었다면 '집'인지도 모를 것들이었다.

샤를은 내가 주위를 둘러보는 것을 알아챘는지 설명했다.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 온 대륙의 사람들이 모였다네. 사람들이 모이면 돈이 따라오고, 돈이 있으면 그 돈을 바라는 자들도 몰려오지. 저기 사는 애들의 부모도 마찬가지야. 아비는 견습 용병이 돼서 던전에서 싸우고, 어미는 군대에서 밥과 빨래를 하지."

"그렇군요."

"그래도 돈은 잘 벌어. 저런 데에 살면서 버티는 거야."

"...."

빈민촌이라 할 수 있는 구역을 지나자 광장이 나왔다. 천막을 쳐 놓고 장사하는 상인들과 사람들로 붐볐다. 광장을 둘러싼 건축물들은 벽돌을 쌓아 올린 것들이었다. 이제 슬슬 중세 유럽 같은 느낌이 나기 시작했다.

"여긴 광장이야. 여기에 시장이 들어서 있고, 뒤쪽 건물들은 행정을 담당하는 녀석들이 있어. 아, 우리는 동문으로 들어왔거든. 그러니 이곳은 셀릭 왕국의 관리 지역이기도 해."

"셀릭 왕국?"

"셀릭 왕국도 모르나? 하긴 몰라도 돼. 일단 가자고."

샤를은 인파를 뚫고 나아갔다. 바글바글 모여 있는 사람들을 아주 쉽게 물리쳐 주었기에 뒤를 따르는 나도 편하게 지나갈 수 있었다. 조금은 한적한 곳으로 나오자 머리 위로 무언가가 보였다. 음침한 느낌이 드는 사물이 좌우로 흔들리는 중이었다.

저건 뭐야?

다시 보니 교수대였다. 교수대에 매달린 시체의 목에는 무언가 걸려 있었다.

[수라카의 제자 오일라크는 계속된 치료 실패로 사형에 처함.]

그 아래 바닥에는 '돌팔이', '쓰레기' 같은 문구들이 적혀 있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고, 이런 장면을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허준의 제자 정지오는 계속된 치료 실패로 사형에 처함.]이라 적힌 팻말을 목에 건 채 죽어 가는 장면을 말이다. 그리고 내 발아래엔 아이들이 모여 바닥에 무언가를 끼적거리고 있다. '우리 아빠 살려 내.', '악마의 하수인.' 같은 문구들을 적는 것이다.

그런 일은 벌어져선 안 된다! 각오를 새롭게 하며 심호흡을 하자 샤를이 다가왔다.

"어허, 뭐 이런 걸 유심히 보나."

"아무래도 문구가 제 시선을 사로잡을 만한 것이니까요."

"자네라면... 뭐. 아, 아니네."

"아무튼 이제 진료소로 갑시다."

나는 먼저 앞장서면서 샤를을 돌아보았다. 샤를은 씩 웃더니 입을 열었다.

"좋은 자세군. 얼른 가자고."

* * *

두 사람이 마침내 도착한 곳은 진료소였다. 나무 기둥과 벽돌을 이용해 만든 건축물에는 [셀릭 왕립 3진료소]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복도는 좁고 길었다. 좌우로는 방들이 있었는데, 분명 누군가가 안에서 치료를 하는 모양이었다.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아아악!"

지오는 연신 두리번거렸다.

'도대체 무슨 처치를 하는 거야?'

상처를 처치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처치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지오는 안을 들여다보고 싶은 호기심을 꾹꾹 억눌렀고, 그사이 샤를은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더니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어느 방 앞에 멈춰 선 다음 입을 열었다.

"샤를입니다. 정지오 의원을 데리고 왔습니다."

"들어오시오."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튜닉 차림의 남성은 살집이 두둑하게 올라 있었고, 길거리를 오다가다 보인 사람들과 달리 멀끔했다. 그는 자신의 가슴을 손으로 우아하게 가리키면서 말했다.

"나는 에드 이라쉬 남작이라네. 우리 셀릭 왕립 3진료소의 장을 맡고 있지."

"저는 정지오라고 합니다."

지오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에드는 인상을 찌푸렸다.

"동쪽 놈들은 역시 무례하다니까. 아무리 인력이 부족해도 저런 것들까지 들어오게 한다니...."

샤를은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지오에게 말했다.

"처음 귀족을 만나면 한쪽 무릎을 꿇고 소개해야 한다네."

"알겠습니다."

지오는 쩝, 입맛을 다신 다음에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온갖 영화와 드라마에서 본 장면이 있기에 어색하지 않게 한쪽 무릎을 꿇을 수 있었다. 에드는 한숨을 내쉬더니 일어나라고 손짓했다.

"자네 진료는 잘하나?"

"네, 괜찮게 합니다."

"동쪽 놈들 입만 살아 가지고. 하하하하하."

에드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샤를에게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저 친구 신상을 좀 보여 주게."

"여기 있습니다."

샤를은 품에서 종이 쪼가리를 꺼내 내밀었다. 경비병이 건네준 것이었다. 에드는 그것을 읽더니 중얼거렸다.

"스승의 이름이 허준이라. 뭐, 돌팔이인지 아닌지는 바로 판명할 수 있지. 지금 당장 진료를 볼 수 있나?"

비웃음을 가득 머금은 채 물었다. 지오는 샤를이 가끔 하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거린 다음 대답했다.

"네, 얼마든지요."

* * *

자신만만하게 대답하자 에드는 직접 밖으로 나갔다. 귀하신 몸이라더니 환자를 친히 데려올 모양이었다. 덕분에 나와 샤를은 그의 집무실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샤를은 무심한 얼굴로 책상 위에 놓인 양초의 불을 손끝으로 만지기 시작했다.

그는 한가했지만, 나는 덜컥 불안해졌다.

분명 침, 뜸, 부항, 약재까지 전부 권능으로 준비해 준다고 했는데.

하지만 주머니를 다 뒤져 보아도 침은커녕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이곳에도 바늘은 있을 테니 임시방편으로 그런 것을 써도 좋을 터였다.

샤를이 어느새 다가오더니 나를 툭툭 건드렸다.

"긴장하지 말게. 마음 편히 먹어."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자네 진료실은 바로 위층에 있다네. 필요한 물건들도 다 준비됐어. 풀들이 잔뜩 담긴 함도 있고, 침이랑 뜸도 있고. 그리고 뭐더라. 부앙? 그것도 잔뜩 있지."

다행이다!

역시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 다음 대답했다.

"부앙이 아니라 부항입니다."

"이름이 뭐든 상관없지. 아무튼 그거 좀 야하게 생겼던데 말이야."

"...."

어느 부분에서 야하게 생겼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젠 안심이었다. 샤를은 혼자 피식 웃더니 계속 이어 갔다.

"아무튼 남작이란 녀석도 자네 진료실로 바로 갈 테니 우리가 먼저 가 있자고."

"알겠습니다."

더 이상 걱정할 것이 없었다. 준비된 것들이 있다면 웬만한 것들은 전부 치료할 수 있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내 두 눈과 두 손이었다.

샤를을 따라 복도로 나서니 조용했다. 조금 전 비명을 지르던 사람의 처치는 끝난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 냄새는.

매우 진한 피 냄새였다. 어디선가 다량의 피가 흘러나온 모양이었다. 어쩌면 그 비명 소리는 환자가 마지막으로 뱉은 것인지도 몰랐다. 갑자기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샤를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복도 끄트머리 진료실에는 '정지오'라고 적혀 있었다. 문을 여니 내게 익숙한 것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먼저 약재함. 검은 목재에 옻칠이 된 그것 안에는 감초, 인삼, 숙지황, 녹용 등등이 들어 있었다. 옆에는 포장지에 담긴 침들과 뜸, 알콜솜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문제의 부항도 있었다.

어디가 야하다는 거야.

의문을 품을 새도 없이 진료실의 문이 열렸다. 에드와 덩치 큰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깨가 비정상적으로 넓은 여자는 피가 묻은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에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미리 와 있었군. 여기 이 친구는 제니야. 알다시피 우리 진료소의 에이스지. 절단 수술은 아마 액티아 시티에서 1인자일 거야."

절단 수술?

그러고 보니 과거에는 전쟁에서 심한 부상을 입은 병사들의 신체를 절단했다. 그렇지 않으면 상처에 감염이 생기면서 목숨을 잃게 되니 말이다. 물론 빠르게 절단하지 않으면 환자가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에 괴력의 소유자가 수술을 집도해야만 했다. 나는 제니의 두꺼운 어깨를 다시 바라보았다.

저 정도라면....

문제가 없을 듯했다. 나는 저절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저는 정지오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제니는 나를 묵묵히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내가 절단하지 않기로 판단한 환자들은 우리 진료소의 다른 의원들이 치료하는데, 대부분 형편없었습니다. 결국 고치지 못하고 상처가 악화되어서 내가 잘라야만 했죠. 당신은 다를 것이라 믿고 환자를 데려왔습니다. 들어오십시오."

그러자 한 노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한쪽 발을 절뚝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상태였다. 에드는 비릿한 웃음을 머금고 나를 바라보았다. 반면 샤를은 어깨만 으쓱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환자뿐이었다.

내가 치료에 실패하면.

발이 잘릴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몸까지 덜덜 떨고 있었다. 물론 그런 일은 없을 것이었다. 나는 남자를 안심시키기 위해 먼저 이름부터 물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데, 데이마입니다."

"한번 환부를 볼 수 있을까요?"

데이마는 발을 감싼 천을 직접 풀면서도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 * *

발을 감싸고 있던 천을 모두 풀어냈다. 두 번째 발가락이 이상하게 비틀려 있었다. 떡하니 엄지발가락 위에 올라간 상태.

데이마는 이를 꽉 다물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무리하지 말았어야 했어.'

하지만 무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3개월 전 아들이 던전에서 죽었다. 손주들을 혼자 돌봐야 하는 상황. 던전에 떨어진 물건들을 주워다 파는 일명 '이삭줍기'를 해 연명했다. 경쟁자가 많아 무리를 했는지 그때부터 갑자기 발가락이 꼬였다.

'만약 발을 자르면...'

손주들을 먹이기는커녕 다 같이 굶어 죽게 생긴 상태였다. 이제 자신의 목숨은 눈앞에 있는 이 남자에게 달려 있었다. 하지만 걱정부터 올라왔다. 무례하고, 싸움을 좋아한다는 동방의 야만인. 과연 치료를 잘할 수 있을까.

그때 지오가 발가락을 손으로 만지더니 입을 열었다.

"발가락이 나뭇가지처럼 뻣뻣하게 꼬인 걸 보니... 지금 종아리도 딱딱하게 쥐가 나죠?"

"어, 마, 맞습니다. 종아리에 쥐가 났습니다. 근데 이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시도 때도 없거든요."

"반복해서 이런 증세가 오는군요? 심지어 휴식 중일 때도?"

"네, 가만히 있을 때도 갑자기 발가락이 꼬이면서 쥐가 납니다. 잘 때도 쥐가 나고. 게다가 발가락이 꼬여서 펴지지 않는다니! 악마들이 무슨 짓을 한 게 분명합니다."

"무슨 문제인지 알겠습니다. 전근轉筋이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군요."

지오는 안심하라는 얼굴로 대답했다.

4화 발가락이 꼬여요

나는 돌바닥에 주저앉아 데이마의 두 번째 발가락을 다시 만졌다. 그것은 딱딱하게 굳은 채로 엄지발가락 위로 올라가 있었다. 종아리도 딱딱하게 굳어 쥐가 난 상황. 데이마는 다리를 쭉 뻗은 채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이런 환자는 종종 보았지.

시도 때도 없이 쥐가 나는 사람들이 있었다. 심지어 자다가도 쥐가 나는 경우도 많았다. 보통 오래 걷거나, 오래 서 있거나, 오래 쪼그려 앉으면 생기는 증세였다. 계속 차렷 자세로 서 있어야 하는 헌병도 이런 증세를 호소해 치료한 적이 있었다.

나는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반복적으로 쥐가 나기 시작한 건 최근이죠?"

"맞습니다. 얼마 전 던전에 다녀온 다음부터입니다. 분명 제 다리를 악마 놈들이...!"

데이마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나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등을 토닥이면서 계속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피곤한 상태에서 근육의 과한 수축이 생겨 생긴 증세입니다. 최근에 발생한 증세라면 만성이 아니기 때문에 완치도 가능할 겁니다."

"완치가 가능하다고요?"

"네, 가능합니다."

"설마 절단은 아니겠죠? 절단은 절대 안 됩니다!"

데이마는 다급하게 두 손을 내저었다. 그러면서 한쪽에 서 있는 제니를 흘끔거렸다. 나도 자연스레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제니는 무표정한 얼굴로 커다란 톱을 매만지면서 중얼댔다.

"절단도 좋은 방법이지."

저건 좀 무섭네.

아예 표정이 없어서 무슨 절단 로봇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데이마가 어째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 것 같았다.

그것보다도 저 에드란 녀석은.

에드는 입가를 이죽거리면서 종이 쪼가리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내가 진료하는 모습을 기록하는 것이 분명했다. 물론 보고 배우려는 목적은 아닐 터. 내가 치료에 실패했을 때 망신을 주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샤를은 그가 기록하는 모습을 손끝으로 한번 가리키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

물론 망신당할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다시 환자에게 다가서서 천천히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절단을 하지도 않을 거고, 절단보다 아프지도 않을 겁니다."

말하고 보니 이상했다. 절단보다 아픈 치료법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참아야 했는데, 놀랍게도 데이마는 안도하면서 대답했다.

"가,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감사하는 표정을 보니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이곳의 사람들에게 한의학의 치료는 매우 낯설다는 것이 나의 걱정이었는데, 그 낯설음은 절단이라는 가공할 공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었다.

나는 편한 마음으로 침을 꺼냈다. 체했을 때 손끝을 따는 것처럼 발끝을 딸 생각이었다. 26게이지의 바늘을 데이마에게 보여 주었다. 게이지 수치가 높을수록 바늘이 얇다. 26게이지는 혈당 채혈 시 사용하는 굵기였다. 당연히 신체를 절단하는 칼에 비하면 귀여운 모양새. 그 가느다란 바늘을 본 데이마는 피식 웃기까지 했다.

"이걸로 발끝에서 피를 몇 방울만 내겠습니다. 막혀 있는 순환을 정돈한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런 바늘이라면 얼마든지 찌르셔도 됩니다. 하하."

데이마는 아예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발을 내밀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든 괜찮다는 일종의 신호였다.

나는 지푸라기로 만들어진 침상을 가리켰다.

"저쪽에 누우십시오."

데이마는 선뜻 일어서서 침상에 누웠다. 나는 데이마의 발치에 서서 말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피를 빼기 전 먼저 데이마의 발을 마사지했다. 발끝을 따기 전에 혈액 순환을 최대한 도와주기 위함이었다. 그다음엔 알콜솜으로 엄지발가락과 두 번째 발가락을 닦아 냈고, 발톱 바로 옆에 위치한 혈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먼저 여태厲兌. 두 번째 발가락 발톱 바로 옆 바깥쪽에 위치한 자리였다. 대돈大敦은 엄지발가락 발톱 바로 옆 바깥쪽 0.1촌에 위치해 있었고, 은백隱白은 엄지발가락 발톱 안쪽 발톱과 살이 맞닿아 있는 자리에 있었다. 지구의 인간과 아르타스의 인간은 혈 자리의 위치가 다르지 않았다. 뼈의 위치와 생김, 근육의 쓰임새마저도 모두 같았다.

다행이야.

내심 걱정했지만, 정말이지 똑같은 인간일 뿐이었다. 나는 여태, 대돈, 은백 자리를 연달아 바늘로 찔렀다. 핏방울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했다. 이렇게 피를 빼는 것이 자락법刺絡法이었다.

전근은 하체의 기혈순환氣血循環이 원활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증세. 허혈虛血 상태인 근육에 기혈氣血을 공급하여 치료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려면 먼저 순환을 원활하게 해 줘야 했는데, 자락법을 통해 경락의 시작점과 끝점에 피를 내 고속도로를 뚫는 것이었다.

좋아. 이 정도면.

나는 피를 거즈 솜으로 닦아 냈다.

"으음...."

뒤에서는 불편한 숨소리가 났다. 소리의 진원지는 에드의 콧구멍이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나를 지켜보더니 입을 열었다.

"저런 사술을 쓰는 건 자네들도 똑똑히 봤겠지?"

"사술인지 아닌지는 더 지켜봐야 알겠지만, 똑똑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제니는 늘 그렇듯 무표정하게 반응했다. 샤를은 어깨만 으쓱거릴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반응이 나오지 않자 에드는 쩝, 입맛을 다셨다.

"그, 그래. 더 지켜보자고."

그러고는 망할 종이 쪼가리에 무언가를 더 끼적거리기 시작했다. 기록에 미쳐 버린 것이 분명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환자에게 집중했다. 데이마는 누워 있는 채로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이제 슬슬 나아질 텐데.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데이마가 반응을 보였다.

"어? 어?"

* * *

데이마는 천천히 발목을 한 바퀴 돌리고, 무릎을 굽혔다가 폈다. 발가락도 움직여 보았다. 놀랍게도 아프지 않았다.

'평소에는 쥐가 풀린 다음에도...'

종아리에 얼얼한 느낌이 남아 있었고, 발가락은 부자연스러웠다. 하지만 피를 몇 방울 뽑아낸 것만으로도 벌써 거의 나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데이마는 환한 표정을 지으며 지오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말을 하고 싶었는데, 아무 말도 나오질 않았다.

지오가 씩 웃더니 먼저 물었다.

"증세가 좋아졌죠?"

"네, 네! 쥐가 났던 게 풀렸네요. 벌써 효과가 있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이것만으로도 효과가 있는 겁니다."

지오는 26게이지의 바늘을 다시 들어 보였다. 실제로 쥐가 났을 때 바늘로 따는 것은 응급처치 중 하나였다.

"으음...."

에드는 다시 불편한 숨소리를 뱉었다. 샤를은 씩 웃더니 천천히 데이마의 머리맡으로 다가갔다.

"노인장, 정말 나아졌소?"

"그렇다니까요. 이 사람들이 속고만 살았나!"

데이마는 누운 채로 역정을 냈다. 침까지 튀기고 있었다. 샤를은 또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지오에게 물었다.

"그럼 이걸로 끝인가?"

"끝이 아닙니다. 데이마 씨처럼 증세가 지속되는 사람에겐 더 많은 처치가 필요합니다."

지오는 대답하면서 호침을 챙겼다. 호침은 일반적으로 한의원에서 몸에 놓은 가느다란 침. 지오가 선호하는 굵기는 0.25mm. 그것을 데이마에게 보여 주면서 계속 말했다.

"이제 이것들을 다리에 좀 놓겠습니다. 피를 뽑아내지 않을 거고, 꽂아 둔 상태로 둘 예정입니다. 움직이지 마시고, 긴장 푼 상태로 옆으로 누워 있으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데이마는 전적으로 지오를 신뢰한다는 얼굴. 이미 긴장이 풀어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절단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 애들 장난감 같은 바늘을 상대하니 이젠 여유가 넘치는 것이었다.

'정말 완치될지도 몰라!'

몇 달간 고생하지 않았던가. 던전에서 절뚝거리며 이삭줍기를 하던 시절을 떠올리니 참담했다. 일 처리가 너무나 늦어졌다. 평소 같으면 몇 시간 만에 끝낼 일인데도 다리에 자꾸만 쥐가 나 휴식 시간이 길어졌다.

'이제 이 사람이 나를....'

데이마는 옆으로 돌아누운 채로 지오를 바라보았다. 지오는 긴장하지 않고, 침착해 보였다. 아니, 정확히 하자면 너무나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수십 년 동안 침만 놓던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다리에 침을 놓고 있었다.

"어?"

침들이 이미 몸에 꽂혀 있는 상태였다. 아예 아무런 느낌도 나지 않는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아무런 느낌이 안 나는데요?"

"네, 바늘이 워낙 가늘어서요. 그냥 가만히 계시면 됩니다. 완치시켜 드릴게요."

지오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으음...."

그때 에드는 또 거친 숨소리를 뱉으며 데이마에게 다가갔다.

"자네 정말 괜찮나?"

"그렇습니다. 나리."

데이마는 정중하게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툴툴거렸다.

'이 미친놈은 내가 피 토하고 뒈지길 바라나.'

시종일관 지오의 진료가 실패하기만을 기원하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았던가. 실제로 증세가 호전되고 있다고 하는데도 에드는 인상을 찌푸리기만 했다.

'귀족만 아니면 귓방망이를....'

물론 상상일 뿐 데이마는 에드에게 어색한 웃음을 보여 줄 뿐이었다.

* * *

나는 데이마의 발에 침을 놓기 시작했다. 먼저 발가락 사이사이에 있는 팔풍八風의 혈 자리였다. 그다음은 족궐음간경足厥陰肝經의 혈 자리 태충. 엄지발가락과 두 번째 발가락 사이 오목한 곳에 바늘을 찔러 넣은 것이었다.

다음은 발이 아니라 종아리였다. 이제 발목을 따라 정강이를 타고 침을 놓기 시작했다. 족양명위경足陽明胃經과 전경골근을 따라 해계, 풍륭, 족삼리에 자침을 했고, 족소양담경足少陽膽經의 양릉천과 현종에도 침을 놓았다.

비골근과 햄스트링을 풀어 주는 데에 아주 좋지.

다음은 종아리 알이 단단하게 뭉친 곳을 노렸다. 승근과 승산에 각각 침을 놓으니 근육이 두어 번 튀어 올랐다. 침이 잘 들어갔다는 좋은 신호였다.

"후...."

수도 없이 침을 놓았지만, 어쩐지 한숨이 나왔다. 마치 365한의원을 개원한 다음 처음으로 침을 놓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낯선 세계의 새로운 진료실에서 침을 놓고 있으니 당연했다.

게다가 저 녀석이 문제였다.

에드라는 놈이 도끼눈을 뜨고 지켜보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평소보다 더 공들여 침을 놓게 되었다.

데이마가 입을 열었다.

"얼마나 기다리면 될까요?"

"15분 정도면 됩니다. 편히 계세요."

지오는 대답하고 나서 몸을 일으켰다. 그런 다음 샤를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나저나 던전 공략이란 거 말입니다. 노인들도 투입해야 할 정도로 상황이 안 좋습니까?"

"아아, 그건 아니라네. 노인들은 무구를 들고 싸우는 게 아니야. 이삭줍기를 하는 거지."

"이삭줍기?"

"뭐, 액티아 시티에서만 통하는 은어지. 용병이나 군인들이 던전의 한 구역을 정리하고 나면 노인이나 아이들을 투입해서 악마와 괴수들의 장비를 수거해야 하지 않겠어? 그게 이삭줍기야."

샤를의 설명은 명쾌했다. 그때 데이마까지 나서서 덧붙였다.

"네, 맞습니다. 문제는 할당량입니다. 가죽 포대에 쇠붙이들을 한가득 담아야 돈을 받을 수 있어서 빨리 움직여야 합니다. 안 그러면 다른 노인네들이 먼저 쓸어 가서 빈손으로 집에 가야 하거든요."

이제야 왜 데이마의 발이 저 지경까지 망가졌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후...." 하고 한숨을 내쉰 다음 말했다.

"아무튼 15분이 지났으니 침을 뽑겠습니다."

데이마의 다리에 놓인 침들을 모두 뽑은 다음 일어서라고 손짓했다. 데이마는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걸음을 옮기더니 입을 열었다.

"아, 아니! 발이 마치 피가 통하는 느낌입니다."

"증세가 생기기 전과 비슷하게 돌아왔죠?"

"네, 그렇습니다!"

데이마는 아예 공중으로 뛰어오르면서 대답했다. 나는 피식 웃었다.

역시 반복적인 전근을 치료할 땐 이런 맛이 있지.

증세가 고통스러운 것에 비해 치료가 빨리 이루어질 수 있었다. 만성화된 경우엔 완치가 어렵고 재발의 가능성이 있었지만, 데이마라면 급성이기 때문에 완치될 가능성도 컸다.

데이마는 제자리에서 발을 빠르게 놀리면서 내게 말했다.

"이런 상태면 우리 손주들 굶을 일은 없을 겁니다! 하하하. 정말 감사합니다."

"무리하지만 않으면 괜찮을 겁니다. 혹시 재발하거든 다시 오시면 됩니다."

나는 머쓱하게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이런 모습은 오랜만에 보네.

치료로 몸이 좋아지는 경우야 한국에서도 숱하게 보았다. 하지만 이렇게 격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으음...."

그때 에드가 예의 숨소리를 내더니 나섰다.

"모두 조용."

검지에 입을 가져다 대면서였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추며 입을 열었다.

"잘 됐어. 나았다니 다행이야. 이제 모두들 나가 보게. 자네만 여기 남고."

그는 나를 지목했다. 샤를은 또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밖으로 나갔다. 제니도 데이마도 차례대로 나섰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에드는 지금까지 무언가를 써 갈기던 종이 쪼가리를 들고 내게 다가왔다.

"자네 말이야...."

5화 견학

에드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이렇게 치료가 된다고?'

제3진료소가 세워지고, 진료소장을 맡게 된 지도 어언 3개월. 여러 의원의 치료하는 모습을 꼼꼼하게 관찰해 왔다. 지오의 치료법은 충격적이었다. 아니, 방법 자체는 충격적이지 않았다.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은 제니가 하는 절단이었다. 문제는 결과였다.

'침을 몇 방 맞더니 다 나아?'

에드는 데이마가 방방 뛰는 모습을 떠올렸다. 절뚝거리던 노인이 갑자기 그렇게 된다니. 지오는 절대 치료하지 못할 것이라 여겼지만, 예상과 다른 결과를 보여 주었다.

"이봐, 정지오 의원."

"네, 진료소장님."

"사실 자네의 실력을 의심했어. 뭐, 자네도 심심하면 침략해 오는 동쪽 인간이니까 그 정도는 이해하겠지."

지오는 고개를 들어 에드를 힐끗 바라보았다.

'사과하려고 다른 자들을 내보낸 건가.'

의외로 담백한 사람일지도 몰랐다. 낯선 사람을 경계하다가 상대방에 대해 잘 알게 되면 친절해지는 사람은 한국에도 수두룩했다. 결국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오는 대답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물론 심심하면 침략했다는 것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었다.

'몽골인들처럼 쳐들어왔나 보지.'

대강 그 정도의 추측만 할 뿐이었다. 에드는 계속 이어 나갔다.

"일단 자네는 이곳에서 진료를 보도록 허락하겠네. 다만, 진료에는 순서가 있어. 먼저 환자가 찾아오면 제니가 진찰하지. 외상이 심해 절단이 필요하다 싶으면 제니가 시술을 시작할 거야. 그렇지 않은 경우엔 무조건 라테스 의원이 진료하는 거야."

"라테스?"

"그래. 라테스는 우리 진료소의 단 두 명밖에 없는 의원 중 하나지."

"단 두 명뿐이라고요?"

지오의 물음에 에드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부터 세 번째 의원으로 지오가 합류하게 되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었다.

지오는 질문을 이어 갔다.

"그렇다면 조금 전 치료한 데이마도 제니가 먼저 살폈겠군요."

"정확해. 제니가 절단은 불필요하다고 여긴 경우지. 이번엔 자네를 시험하기 위해 라테스 의원에게 가진 않았지."

"그렇군요. 그럼 저는 일단 서열이 세 번째라고 보면 되겠군요. 앞선 두 사람이 위중하지 않다고 판단한 환자만 보니까요."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군. 또 하나를 알려 주지. 라테스는 소화기에 문제가 발생한 환자도 맡아. 자네는 소화기와 관련된 것도 진료하나?"

에드는 자신의 배를 만지작거리면서 물었다. 지오는 얼른 고개를 끄덕거렸다.

'소화기는 원래 잘했지.'

365한의원을 운영할 때에도 배탈 환자들을 잘 치료하기로 유명했다. 몇 개의 블로그에서 지오를 극찬해 준 덕분이었다.

"소화기 진료도 자신 있습니다."

"오호, 좋아. 라테스가 먼저 진찰하고, 위중하다고 판단한 환자는 라테스가 진료하지만, 그렇지 않은 환자는 자네에게도 보내도록 조치를 하지."

에드는 종이에 무언가를 또 끼적거리고는 계속 말했다.

"이제 나에 대해 좀 이야기하지. 나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사람이야."

* * *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자기소개를 저렇게 하는 인간이 또 있을까. 한국에서도 본 적이 없는 유형이었다. 대단히 직설적이고, 오만하고, 폭력적인 소개였다.

귀족이기 때문에 저렇게 함부로 말할 수 있나.

나는 어이가 없어서 에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에드는 두둑한 턱살 위에 자라난 수염을 매만지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자네는 쓰지 않다는 것을 입증했어. 뱉을 일은 없을 거야. 하지만 앞으로는 달콤해지도록 노력하게."

"알겠습니다."

달콤해지도록 노력하라니.

말도 안 되는 문장을 곱씹었다. 아무리 신분제 사회라도 충분히 꺼낼 수 있는 말은 아닐 것 같았다. 어쩌면 생각보다도 에드는 권력이 있는 자일지도 몰랐다.

더 많은 환자를 보려면....

에드의 입맛에 맞출 필요는 있었다. 즉, 달콤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 나는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고 에드에게 말했다.

"진료소장님, 제가 비록 낯선 땅에서 온지라 이곳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하지만, 한 말씀 올려도 괜찮겠습니까?"

공손함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말투였다. 나의 노력이 가상했는지 에드도 흡족한 표정을 짓더니 대답했다.

"그러게나."

"이곳 셀릭 왕립 3진료소에 저 같은 새로운 의원이 배정된다는 것은 신설 진료소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게다가 의원은 고작 3명뿐이죠."

"그렇지. 세워진 지 고작 3개월밖에 안 되기도 했고, 마음에 안 드는 의원은 모두 쫓아냈으니까."

"제니와 라테스 같은 고참은 분명 1진료소나 2진료소에서 활동하던 자일 것입니다."

"정확하네."

"그럼 그런 에이스들에게 배울 점이 있으리라 판단됩니다. 제니의 절단은 저처럼 평범한 체격으론 어려울 터. 라테스의 의술은 배울 점이 있을 겁니다. 견학을 시켜 주십시오."

나는 견학을 제안했다. 일단 에드는 만족해할 것이 분명했다. 에이스의 의술을 알아서 배우겠다니. 달콤해지기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이 아닌가. 게다가 라테스에게서 배울 점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것이 아니라면 반대로 라테스를 가르쳐 줄 필요도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환자들이었다. 그들이 제대로 진료를 받도록 해야 했다.

그리고 에드한테 뭔가 요구를 해야 할 텐데.

에드를 만족시켰다면 당연히 내게도 콩고물이 떨어져야 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생활한 지 불과 몇 시간. 무엇을 요구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에드를 먼저 만족시킨다면 무언가를 나중에 받아 내기 편할 것이었다.

에드는 알아서 견학한다는 내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스스로 발전하고자 하는 의지! 배우고자 하는 자세! 동방에서 온 인간치고는 정말 대단하군."

"네, 진료소장님. 그런 의지와 자세를 모른 척하지 말아 주십시오. 이곳 진료소에서 이 한 몸 불사르겠습니다."

나는 굽실거리며 반응했다. 정말이지 스윗해지는 중이었다. 설탕 인간이라 불려도 될 것 같았다.

"좋아. 견학을 허락하지. 설령 라테스가 거절한다고 해도 말이야!"

에드는 나의 노력을 받아 주었다. 나는 손바닥에 맺힌 설탕물 같은 땀을 옷에 닦아 내면서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진료소장님!"

* * *

안에서 달콤한 대화가 오가는 사이. 제니는 커다란 톱을 한번 휘두른 다음 데이마에게 말했다.

"정지오 의원이 말한 것처럼 너무 무리하지 말고, 재발하면 다시 찾아오게."

"저, 절대 재발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데이마는 다급하게 대답한 다음 도망쳤다. 누가 뒤에서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빠른 발걸음이었다.

샤를은 그 모습을 보더니 피식 웃고는 입을 열었다.

"제니, 그나저나 방금 진료에 대해서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솔직히 놀랐습니다."

"어떤 점에서?"

"모든 점에서 그랬죠. 몸에 침을 꽂아 치료한다는 것도, 순식간에 치료가 됐다는 점에서도 말입니다. 특히 꼬여 있는 발가락이 되돌아오다니. 그대로 굳어 있다면 잘라 줄 생각이었습니다."

제니는 톱날을 흘끔 내려다보더니 대답했다. 샤를은 손을 내저었다.

"그거 좀 내려놓게. 내가 헛소리라도 하면 혀를 자르겠군."

"그래서인가."

"뭐가 말인가."

"내 앞에선 아무도 헛소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

샤를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면서 지오가 있는 진료실 문을 슬쩍 바라보았다.

'제니 같은 베테랑도 놀란단 말이지.'

역시 신의 계시는 확실했다. 아직 어디까지 치료할지는 미지수였지만, 다른 질환도 뚝딱 고쳐 준다면 던전을 함락시킬 가능성은 대폭 커질 것이었다.

-끼익.

그때 문이 열렸다. 먼저 에드였다. 밝은 미소를 머금은 채 걸어 나왔다. 샤를을 발견하자마자 말을 걸었다.

"샤를, 정지오 의원도 그렇고 자네도 그렇고 먼 길을 걸었으니 오늘은 좀 쉬게. 배정된 숙소로 안내해 줘."

"알겠습니다."

샤를은 고개를 숙였다.

* * *

나는 에드가 나간 사이 진료실 안쪽을 뒤적거렸다. 신의 사자가 보내 주었다는 품목은 침, 부항, 뜸, 약재들이었다. 그리고 하얀 가운이 있었다. 약재함 위에 올려 둔 것이 어쩌다가 같이 온 것 같았다.

지금 입고 있는 옷과는 비교가 안 되지.

가죽을 얼기설기 이어 만든 옷 위에 가운을 걸쳤다. 거울을 볼 수는 없지만, 기분이 벌써 산뜻해지는 것 같았다.

"숙소로 안내해 주겠네."

어느새인가 안으로 들어온 샤를이 말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면서 답했다.

"아, 아. 감사합니다."

"뭘 그리 놀라나. 가자고."

나는 가운을 다시 진료실에 두고 밖으로 나섰다. 숙소는 진료소와 꽤 거리가 있었다. 나는 샤를의 뒤를 따라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샤를은 건물과 건물 사이에 멈춰 서더니 전방을 가리켰다.

"저기가 던전이라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샤를이 가리킨 쪽을 바라보았다. 기둥 몇 개가 세워져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봐서는 잘 모르겠군요."

"그렇지. 저 기둥 아래로 지하로 향하는 통로가 있다네."

"깊이가 깊습니까?"

"그건 확답을 줄 수가 없군. 일단 인간은 지하 17층까지 내려간 상태야.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는 아직 몰라."

"그럼 17층까진 마음대로 갈 수 있겠군요. 18층도 금방이지 않을까요?"

나의 질문에 샤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늘을 가리키면서 입을 열었다.

"정확히 4주에 한 번 보름달이 떠. 그때가 되면 다시 던전의 모든 구역에서 악마와 괴수들이 튀어나오지. 그때 괜히 던전 안에 있으면 집중 공격을 당한단 말이야. 보름달이 뜰 때가 되면 모두 철수하지.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던전을 공략하는 거야."

샤를은 시무룩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내 입에서도 마찬가지.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4주에 한 번 리셋이라.

던전 공략도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어느 순간 군대의 주둔지가 나타났다. 동그란 형태의 천막이 줄지어 설치되어 있었고, 사자의 얼굴이 그려진 깃발이 천막의 개수만큼 깃대에 꽂혀 있었다. 그것들은 천천히 바람에 나부끼며 흔들렸다.

나는 물었다.

"저들은 던전을 공략하러 온 군대입니까?"

"그렇다네. 셀릭 왕국의 군대지. 얼마 전 보름달이 뜨면서 공략이 끝났고, 이제 휴식기야."

"퇴각한 다음 바로 공격하는 게 아닙니까?"

"아니야. 던전을 중심으로 네 개의 왕국이 각각 동서남북에 진을 치고 있지. 동쪽의 셀릭 왕국이 공략을 마쳤으니 이제 남쪽의 네스타가 던전을 공격 중이야."

샤를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제 대강 알 수 있었다. 바로 질문을 던졌다.

"그럼 액티아 시티의 구성도 똑같겠군요. 액티아 시티의 동쪽은 셀릭 왕국이 다스리고, 나머지 지역은 각각의 왕국이 다스리는 것 아닙니까?"

"맞아."

"그리고 4주에 한 번 보름달이 뜨니까 각 왕국은 12주를 쉬고 4주 동안 던전을 공략하는 거군요."

"그렇지. 물론 그건 군대만 그렇고, 용병들이나 이삭줍기를 하는 자들은 어느 왕국이 공략하든 자유롭게 활동하는 편이야. 아, 그리고 자네 숙소는 여기라네."

그때 샤를은 주둔지 반대편에 있는 집을 가리켰다. 아주 자그마한 목조 주택이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열쇠 하나를 꺼내더니 자물쇠에 넣고 돌렸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짚단으로 만든 침상과 투박하게 생긴 탁자와 의자가 전부였다.

감옥인가.

그런 생각이 들 지경이었는데, 샤를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침상의 짚단을 손으로 눌러 보더니 감탄했다.

"상당히 잘 깔아 줬군. 하하. 느낌이 팽팽하다고."

"...."

나는 속는 셈 치고 침상에 걸터앉았다. 생각보다 괜찮았다.

군대에서 주는 것보단 낫잖아.

비교 대상이 한국의 군대이지만, 사람이 쓸 만한 물건이란 뜻이었다. 샤를은 그때 또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뭔가를 꺼냈다.

"아, 시계를 주지. 이건 마법 시계야. 이걸 보고 아침 9시까지 진료소로 오면 된다네."

그가 내민 것은 시침과 분침이 달린 일반적인 탁상시계였다. 한국에서 보던 것과 차이가 있다면 건전지를 넣는 곳이 없다는 것 정도였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내일 보자고."

샤를은 밖으로 나섰다.

* * *

라테스는 몸이 비쩍 마른 사람이었다. 당장 한약이라도 먹여야 할 것 같은 인상이었는데, 날카로운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환자를 볼 때 절대 방해하지 말게. 진료소장께서 부탁한 것이 아니었다면 당장 쫓아냈을 거야."

그때 그의 진료실로 한 남자가 들어왔다.

"라테스 의원님, 설사가 멈추질 않아요."

6화 명의 등장 (1)

에드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긴 아직 어려웠다. 그의 눈에 들어 총애를 받기라도 한다면 무엇을 달라고 해야 할까. 진료소에 있을 때는 알기 어려웠다.

이젠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전부.

하나부터 열까지 불편한 곳이었다. 식사로는 건빵과 귀리죽, 작은 고깃덩이 하나가 주어졌다. 여기서 건빵은 군대에서 별사탕과 함께 주는 과자 같은 것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잘못 깨물었다간 바로 이빨이 나갈 정도의 딱딱함을 가진 물건이었다. 결국 손도 대지 않고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다음은 귀리죽. 걸쭉한 느낌이라곤 전혀 없고 밍밍했다. 고기가 그나마 나았는데, 이것도 상당히 질겼다. 음식의 질을 높일 필요가 있었다.

잠자리도 불편했다. 군대에 비해서 좋다고 했지만, 그때는 20대였다. 30대로 접어선 나의 허리에게는 지옥 체험이었다. 지푸라기를 더 많이 깔고 솜이불을 같은 것을 구할 필요가 있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나에게 라테스는 소리를 질렀다.

"환자를 볼 때 절대 방해하지 말게!"

"알겠습니다."

나는 대답을 한 다음 라테스의 진료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한쪽 벽면에 목재로 만들어진 함이 있었다. 함이 살짝 열려 있었는데, 거기엔 나름의 약재들이 들어 있었다. 라테스가 사용하는 것이 분명했다.

"오...."

내 시선이 그곳에 멈춰 서자 라테스는 황급히 다가왔다. 그는 내 앞에 서더니 다시 윽박질렀다. 그런 다음 함을 거칠게 닫았다.

"훔쳐보지 말게!"

이미 다 봤어.

그는 다양한 약재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고작 몇 개. 약재만 봐도 그가 어떤 식으로 진료하는 스타일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물론 라테스의 심기를 너무 건드리는 편은 안 좋았다. 아직 에드는 나보다 그를 훨씬 신뢰할 테니 말이다. 나는 얼른 손을 내저으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고의는 아니니 용서해 주십시오."

"하! 자네가 내 진료실을 견학한다고 했을 때부터 수상했지. 나는 2진료소에 있을 때부터 실력자였으니 말이야."

"...."

자부심이 장난 아니네.

자부심 하나만으로는 이미 허준도 넘어설 것 같았다. 그는 숨을 씩씩거리며 계속 이어 갔다.

"내가 실력자가 되는 건 운명이었어. 피리온이 어디인 줄 알아?"

"모, 모릅니다."

알 턱이 있나.

"액티아의 사제들도 찾아오지 않던 서쪽 끄트머리 산골이지. 사람들은 스스로 치료해야 했어. 그곳에서 태어난 나는 밑바닥에서부터 의술을 공부했지. 자네! 그런 내 노하우를 훔치려고 견학을 신청한 거지!? 어!"

"아닙니다. 피리온이 어디 있는 줄도 모릅니다."

"모른다고 말만 하면 다인가! 제니한테 부탁해서 자네는 혀를 잘라 버려야 돼!"

라테스는 광분해서 외쳤다. 그때 진료실의 문이 열렸다. 에드였다.

"하하. 라테스, 그만하게."

"아, 진료소장님! 안녕하십니까."

에드가 등장하자 라테스는 얼른 허리를 숙였다. 나도 얼른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소리 높여서 인사하니 대학 병원에서 레지던트를 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회진을 돌기 전 교수에게 그러곤 했다.

에드는 흡족한 미소를 짓더니 안으로 들어섰다. 라테스의 어깨를 한번 만지더니 계속했다.

"어쨌든 정지오 의원의 견학을 허락한 것은 나이니 좀 너그럽게 받아들여 주게."

"걱정 마십시오. 진료소장님!"

라테스는 허허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시골에서부터 힘겹게 성공 궤도에 오른 인물이라 그런지 윗사람 말이라면 무조건 오케이 하는 사람인 듯했다.

대단하네.

라테스는 몸을 돌리더니 내게 나지막이 말했다. 거의 중얼대는 느낌이었지만,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약재는 절대 훔쳐보지 말게."

이미 다 봤다고.

"알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환자를 볼 때 절대 방해하지 말게. 진료소장께서 부탁한 것이 아니었다면 당장 쫓아냈을 거야."

"...."

나는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피골이 상접하고, 누렇게 뜬 얼굴이었다. 팔다리도 가늘었다.

그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라테스 의원님... 서, 설사가 멈추질 않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더 심해진 것 같습니다. 똥물을 하도 싸다 보니 소변도 안 나와요."

"뭐? 아직도?"

라테스는 당황하며 되물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진료실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안쪽에 앉아 있던 에드가 종이 쪼가리들을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자네 사키 라슈가 맞나?"

"네, 그렇습니다...."

"설사로 진료소에 찾아온 지 벌써 일주일이군. 그럼 일주일째 설사를 하고 있단 말인가?"

"네...."

사키는 힘없이 대답했다. 나는 똥색으로 변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라테스의 치료 방법에는 문제가 있어.

치료법을 근본적으로 바꾼다면 환자는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에드가 직접 지켜보고 있는 지금이라면? 그에게 총애를 받을 기회가 찾아온 것인지도 몰랐다.

* * *

사키는 수습 용병이었다. 액티아 시티엔 여러 용병 길드가 있었지만, 어느 곳이든 정식으로 소속되려면 던전에서 활동한 증명이 필요했다. 1층에서 3층까지는 수습 용병도 공략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용병이 되고자 하는 청년들은 그곳에서 실력을 뽐내고자 했다. 사키도 그런 자들 중 하나였다.

라테스는 고민 끝에 물었다.

"정말 기억나지 않나? 뭘 주워 먹었는지? 알면 실마리가 있을 텐데...."

"네.... 너무 어두웠거든요."

사키는 주눅이 든 얼굴로 대답했다. 던전 바닥에서 뭘 주워 먹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나 한심했다.

'젠장, 너무 무리했던 거야.'

사키가 던전 3층에서 만난 악마들은 키가 작고 피부가 녹빛인 고블린. 너무 만만하게 본 것이 화근이었다. 그들과 싸우는 데에 심취해 너무 깊숙이 들어갔다가 길을 잃고 말았다. 혼자서 길을 찾을까 고민도 했지만, 잘못했다간 홀로 악마와 괴수들에게 둘러싸일지도 모르는 상황. 좁다란 골목에 앉아 다른 수습 용병들이 와서 찾아 주기만을 기다렸다.

시간은 계속 흘렀다. 비상식량으로 챙긴 육포도 동이 나고, 물도 다 떨어졌다. 심지어 손에 쥐고 있던 횃불도 다 타들어 갔다. 불빛은 사라졌다. 그러자 자신의 숨소리만 선명하게 들렸다.

"헉... 헉...."

너무나 배가 고팠기 때문에 바닥에 자라난 풀을 있는 대로 뽑아 먹었다. 안개와 이슬이 낀 풀인지라 허기도 가시고 갈증도 해결이 됐다. 다른 수습 용병들도 제때 찾아와 그를 구출해 주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설사가 멈추질 않았다. 한 번만 더 던전 공략에 참여하면 용병 길드에 정식으로 가입할 자격이 생기는데, 설사 탓에 던전이 아니라 화장실만 들락날락거렸다.

사키는 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라테스에게 보여 주었다.

"시키신 대로 이 약들을 계속 먹었습니다. 하지만 늘 증세는 그대로입니다. 종일 배가 아픕니다. 식사를 하긴 하는데, 물에 가까운 설사로 그대로 나갑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라테스는 중얼거리며 자신이 지어 준 약을 받아 바라보았다. 가루로 된 약이 종이에 싸여 있었다. 지금까지 배탈이 난 환자들은 이것만으로도 십중팔구 해결이 되었다. 며칠 심해질 수는 있어도 이내 곧잘 낫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것이었다.

'젠장. 왜 이러는 거야.'

자연스럽게 에드의 눈치를 살피게 됐다.

"으음...."

에드는 불편한 숨소리를 뱉고 있었다. 라테스는 얼른 사키를 윽박질렀다.

"자네 혹시 술을 마시거나 하는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 술 마실 돈도 없습니다. 일주일째 일을 못 하는 상태 아닙니까?"

사키도 억울함 때문에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다음엔 다시 기운이 빠졌는지 손을 배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진료실엔 다시 침묵이 흘렀다. 지오가 슬쩍 한 걸음 앞서면서 입을 열었다.

"진료소장님, 제가 좀 봐도 괜찮겠습니까?"

"오, 자신이 있으면 한번 해 보게."

에드는 손짓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인간다웠다. 라테스에게서 쓴맛이 나자 바로 뱉는 것이었다. 라테스는 당장 반발했다.

"진료소장님! 제 환자입니다. 제가 책임지고 치료하겠습니다. 피리온에서부터 갈고 닦은 의술입니다."

"피리온에서 갈고닦아 봤자 아닌가. 견습 용병 똥구멍 하나 못 닦고 있잖아. 일주일째 설사를 해서 똥구멍이 다 찢어지게 생겼다고."

"지, 진료소장님...!"

라테스는 에드에게 다가서며 애원했다. 하지만 에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단 정지오에게 시켜 봐. 만약 저 친구가 못 고치면 그때 다시 자네에게 맡기지."

"...."

"한번 지켜보자고."

에드의 말에 라테스는 표독스럽게 눈을 뜨고 지오를 노려보았다.

'저 새끼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두 손이 바들바들 떨릴 지경이었다. 실패하기만을 바라며 동쪽에서 온 야만인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 * *

나는 먼저 에드에게 다가갔다.

"진료소장님, 혹시 사키에 대한 기록을 봐도 괜찮겠습니까?"

"아, 보게나."

에드는 종이 쪼가리를 내게 건넸다. 거기엔 사키가 어쩌다 설사를 하게 되었는지 적혀 있었다. 던전에서 아무 풀이나 주워 먹다가 탈이 난 것이었다.

이거라면....

짐작이 가는 것이 있었다. 종이 쪼가리를 에드에게 돌려주고 사키에게 다가섰다. 이마에 손을 올렸다. 약간의 열감이 있었다. 이어서 손발을 만져 보았다. 손발은 차가웠다. 다음은 배를 촉진할 차례.

"잠깐 배를 만져 볼게요."

"네, 네."

양손을 뻗어 사키의 배에 손을 댔다. 배는 미묘하게 물렁한 느낌이었고, 늑골각을 누르니 꿀렁, 하는 물소리가 났다.

마지막으로 손목에 엄지를 대고 맥을 짚었다. 사키는 내가 하는 대로 순순히 있었지만, 맥을 짚자 입을 열었다.

"이, 이건 뭘 하시는 건가요?"

"맥박을 살피는 겁니다."

맥박은 전체적으로 미약했다. 나는 사키에게 물었다.

"명치 밑이 묵직한 느낌이지요?"

"네, 굳이 표현하자면 그, 그렇습니다."

"몸도 노곤하고, 머리도 아플 겁니다."

"네, 그렇습니다!"

확실했다. 이제 점쟁이처럼 다른 증상도 알아맞힐 만큼 명확하게 진단할 수 있었다. 이건 풍한습사風寒濕邪의 침습과 상한음증傷寒陰證으로 인한 설사였다.

풍한습사는 서늘한 바람과 습한 환경을 뜻했다. 던전에서 축축한 풀을 먹었다는 기록만 봐도 던전에 있는 것만으로도 풍한습사가 몸에 침습할 가능성이 있었다. 상한음증은 손발이 차고, 식욕이 떨어지고 맥박이 약해지는 것. 축축한 던전에서 눅눅한 음식을 먹어 일어난 사달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이런 약을 먹이다니.

나는 라테스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라테스 의원님, 이런 환자에게 도대체 무슨 약을 처방한 겁니까? 환자를 죽이려고 작정했습니까?"

"뭐, 뭐?! 이 새끼가 뚫린 입이라고 말을 함부로...!"

라테스는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에드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키가 품에 넣고 있던 약은 그저 가루일 뿐. 무엇인지 알기 어려웠다.

"자네 이것만 봐도 라테스가 무슨 약을 처방했는지 아나?"

"솔직히 말하면 약재함이 살짝 열려 있어서 보았습니다. 거기 있는 약재들은 한가지 목적성을 가지고 있죠."

"동일한 목적성?"

에드는 더욱 흥미로운 얼굴이 됐지만, 라테스는 낯빛이 어두워졌다. 나는 목소리를 높였다.

"말라비틀어진 과체의 꼭지가 있었고, 윤기 있게 까맣고, 각이 져 있는 씨앗이 있었죠? 흡사 참외 꼭지, 나팔꽃 씨앗 같습니다. 이것들로는 증세만 더 악화시킬 뿐입니다!"

"자, 자네가 뭘 안다고!"

라테스는 부들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에드가 나서서 물었다.

"정지오 의원, 자네는 그 약재들의 효능을 전부 알고 있나?"

"당연하죠."

에드는 표정이 밝아졌지만, 반대로 라테스는 당혹감으로 어두워졌다.

7화 명의 등장 (2)

"정지오 의원, 어서 라테스가 지은 약의 효능에 대해 말해 보게."

에드는 닦달한 다음 씩 웃었다.

'라테스 자식....'

라테스는 자신의 약이 비법이라며 에드에게도 감추었다. 당연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쫓아냈다간 의원이 없는 상황이니 애써 참아 왔다.

'이제 라테스 따위는 필요 없어질지도 몰라.'

그사이, 지오는 라테스의 약재함에 들어 있던 물건들을 다시 떠올렸다. 참외나 오이의 기다란 꼭지 같은 것들이 있었고, 또 반질반질하고 까만 씨앗들이 있었다. 아르타스는 지구와 다른 식물들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박과의 식물처럼 꼭지만 달렸고, 명칭이 다를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에드와 라테스의 반응을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흡사 참외 꼭지, 나팔꽃 씨앗 같습니다. 이것들로는 증세만 더 악화시킬 뿐입니다!"

이렇게 외쳐도 그들은 문제 삼지 않았던 것이다. 지오는 지구에서 사용하는 약초들이 이곳에도 같은 이름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에드는 재차 효능에 대해 물었다.

"그럼 그 약재들의 효능에 대해 말해 보게."

"네, 먼저 참외 꼭지는 과체瓜蒂라고 부릅니다. 구토를 유발하는 약재입니다. 나팔꽃 씨앗은 견우자牽牛子라 하는데, 이는 설사를 유발합니다. 둘 모두 몸 내부에 있는 독소를 배출시키기 위해 사용하지만, 부작용으로 탈수 증세를 부를 수 있죠."

"오호... 그런가."

에드는 기록에 미친 사람처럼 종이 쪼가리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지오의 말을 빠르게 받아 적는 것이었다.

라테스는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얼핏 본 것만으로 약재가 뭔지 알아맞히고, 효능까지 안다고?'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그때 에드는 라테스의 표정을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라테스 의원이 놀라는 걸 보니 정지오 의원의 말이 맞는 모양이군. 어디... 잠깐."

"진료소장님! 뭐, 뭘 하시려는 겁니까?"

"가만있어 보게. 정지오 의원이 정말 실력자인지 자네는 궁금하지도 않나?"

라테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에드는 약재함을 열어젖혔다.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약재함의 경첩이 너덜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약재함의 깊숙한 곳에는 참외 꼭지, 나팔꽃 씨앗 말고도 다른 것들이 더 있었다. 에드는 알밤 같은 재질이지만 길쭉한 무언가를 꺼내 지오에게 보여 주었다.

"이게 뭔지 아나?"

"감수甘遂입니다. 버들옻의 덩이뿌리에서 나오는 겁니다. 코르크 부분은 벗기고 사용해야 하는데, 그것 또한 구토와 설사를 유발하는 약재입니다."

"그럼 이건?"

이번에 에드가 내민 것은 굵기가 가느다란 뿌리였다. 머리서 보면 사람의 수염이나 동물의 털처럼 보였다. 지오는 손을 내밀어 그것을 한번 만져 보았다.

"파의 뿌리군요. 총백蔥白이라고도 합니다. 파의 밑동을 통째로 사용하면 좋지만, 장기간 보관을 하려면 이렇게 뿌리만 써도 좋을 겁니다."

"이건 효능이 어떤가?"

"이건 땀을 내는 데에 쓰입니다. 그러니까 앞서 설명해 드린 것들과 동일한 목적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두 몸의 독소를 배출시키기 위해 사용되는 거죠."

에드는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라테스에게 물었다.

"정지오 의원의 말이 모두 맞나?"

"...."

"맞느냐고?"

재차 묻자 라테스는 얼빠진 얼굴로 대답했다.

"그, 그렇습니다."

지오의 말이 맞는데도 선뜻 믿어지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피리온에서 갈고닦은 의술이지 않은가. 어째서 동방에서 온 녀석이 전부 다 알고 있단 말인가.

그때 지오가 입을 열었다.

"처방을 바꿔야 합니다. 계속 저런 것만 먹게 두면 탈수 증세 때문에 큰 문제가 생깁니다."

내내 가만히 있던 사키는 기운이 없는지 손을 살며시 들더니 물었다.

"저, 정말 저 살 수 있는 건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살려 드릴 겁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