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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5화. 새로운 네임드(4) >

다음 날 아침.

나는 주창범과 모용악을 데리고 특수 대련장으로 들어섰다.

"모용악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안우진님. 제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내가 고마움을 표하자, 모용악이 양손을 내저었다.

그의 몸에선 붉은빛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지금 하는 말이 진심이라는 것.

"지금부터 두 분이서 일대일 대련을 펼칠 겁니다. 최대한 실전처럼 부탁드립니다."

"넵!"

"예."

내 말에 주창범과 모용악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상황인지 일단 봐야겠군.'

내가 두 사람에게 대련을 지시한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주창범의 현재 상태를 진단하기에 대련만 한 게 없기 때문.

아세리안의 말대로 무언가 변화가 생겼다면 분명 움직임이 달라졌을 것이다.

육체는 심경의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건강한 정신에 건강한 육체가 깃드는 법이지.'

덤으로 주창범을 좀 굴려주려는 목적도 있었고.

"그럼 시작하죠."

말을 마친 나는 손뼉을 짝! 하고 쳤다.

[맵 : 폐허 원형 투기장]

[3초 후 대련이 시작됩니다.]

검을 빼 들고 자세를 낮춘 채 긴장감을 끌어올리는 모용악.

반대쪽에선 주창범이 방패를 들어 올리곤 검 끝을 겨누고 있었다.

'주창범이 다른 플레이어들과 대련하는 건 오랜만에 보는군.'

[2초 후 대련이 시작됩니다.]

투기장에 침묵이 내리깔렸다.

들리는 건 먼지를 휩쓸며 불어오는 바람 소리와.

짧게 끊어 쉬며 긴장감을 끌어올리고 있는 두 사람의 호흡 뿐.

[1초 후 대련이 시작됩니다.]

'수준은 둘이 비슷해.'

스텟에서 모용악이 근소하게 앞서긴 하지만, 상성 면에선 주창범이 유리했다.

그렇기에 두 사람 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다.

'한 번 볼까.'

[대련 시작!]

"흡!"

그렇게 시작된 주창범과 모용악의 대련.

나는 그들보다 한발 먼저 움직여, 대련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폐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 잠깐 사이, 두 사람은 빠르게 부딪히며 서로를 향해 무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챙! 채챙! 챙!

"어딜!"

내 예상대로 주로 모용악이 몰아붙이고, 주창범은 방패를 굳건히 세운 채 수비 하는 형국이었다.

애초에 모용악이 콜로세움에 들어왔을 때부터 주창범보다 실력이 뛰어났던 것도 있겠지만.

'잘 싸우네.'

주창범도 자신이 피지컬에서 밀린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인지, 수비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괜히 공격을 잘못 들어갔다간 카운터에 맞을 수도 있으니까.

그걸 보면서 나는 더욱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변한 게 없는데?'

얼핏 보면 모용악이 유리한 것 같지만, 나는 주창범의 우세를 점쳤다.

계속해서 공격만 하는 모용악.

그리고 계속해서 수비만 하는 주창범.

그렇게 5분 가까이 흘렀는데도 누구 하나가 뚜렷하게 승기를 잡지 못한 상태였다.

'그 말은 즉, 모용악의 공격이 주창범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거지.'

수비만 해서는 상대를 쓰러트릴 수 없다.

반대로 공격이 통하지 않아도 상대를 쓰러트릴 수 없다.

그렇기에, 가장 핵심은 딱 하나였다.

'주창범이 과연 공격 타이밍을 잘 잡아낼 수 있는가.'

그때였다.

챙! 채챙! 챙! 챙! 챙!

갑작스럽게 공세로 전환하는 주창범.

'뭐지?'

순간 어이가 없었다.

저기서 도대체 왜······.

공세로 전환한 거지?

지금 상황에선 공세로 전환해 봤자 이득 볼 수 있는 게 없었다.

모용악이 일부러 틈을 열어준 거니까.

주창범이 그걸 모를 정도로 수준이 낮은 것도 아니고.

"흐읍!"

챙! 서걱!

모용악이 휘두른 검에 날아가는 주창범의 왼쪽 팔.

주창범이 빠르게 파고들자, 모용악이 뒤로 빠지며 검을 휘두른 것이다.

물론 그 공격을 막기 위해 주창범이 방패를 내밀었지만, 그 타이밍에 맞춰 모용악이 손목을 틀어, 없는 빈틈을 만들어내서 공략한 것.

'쯧.'

그 모습에 나는 혀를 찼다.

물론 모용악이 잘한 것도 있지만, 평소의 주창범이었으면 통하지 않았을 공격이었다.

녀석이 괜히 철벽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니까.

'볼 것도 없군.'

방패를 쥐고 있어도 모용악과 비등비등한 수준이었는데, 한쪽 팔밖에 남지 않은 주창범이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승기를 잡은 채 계속해서 몰아붙이는 모용악.

남은 한쪽 팔만으로 어떻게든 기울어버린 승부의 추를 원점으로 되돌리려는 주창범.

하지만 모용악은 서두르지 않고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철저하게 지켜갔다.

그들의 전투는 그렇게 오래가지 않았다.

챙! 채챙! 챙! 서걱!

"크윽!"

결국 주창범이 남은 한쪽 팔 마저 베이며 허무하게 대련이 끝난 것이다.

"······수고했다."

"고, 고생하셨어요, 악이 형."

정작 대련을 이긴 모용악도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마 모용악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주창범의 스타일이 크게 바뀌었다는 것을.

두 사람에게 다가간 나는 먼저, 모용악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수고 많았습니다, 모용악님."

"아닙니다."

"바쁘실 텐데 이만 가 보셔도 됩니다."

내 말에 모용악이 잠시 입을 우물우물 거렸다.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뜻.

'아마 주창범에게 무슨 문제가 있다고 얘기하려는 거겠지.'

그러나 내가 다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예. 제가 필요하시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띠링!

[플레이어 '모용악' 이 퇴장했습니다.]

모용악이 떠나고, 특수 대련장 내부에 침묵이 웅크렸다.

'후.'

작게 한숨을 내쉰 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주창범을 불렀다.

"주창범씨."

"······네, 형."

"스타일이 그사이에 많이 바뀌었군요."

"······."

주창범은 무슨 죽을 죄라도 졌는지 두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저는 주창범씨한테 어떤 존재입니까."

"······?"

"말 그대로 저는 주창범씨한테 어떤 존재죠?"

그제야 날 올려다보는 주창범.

"어······ 제 멘토이자, 스승님 같은 존재예요."

"스승 같은 존재. 한마디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란 거네요."

"······네."

"그럼 말씀해 보세요. 혹시 압니까. 제가 해결해 줄지."

"······."

내 말에도 주창범은 한동안 입을 떼지 못했다.

'다른 방법을 써야 하나.'

일단 아세리안의 말대로, 녀석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아예 밸런스 자체가 무너져 버린 상황.

'그나마 늦지 않게 그걸 알아차릴 수 있어서 다행이야.'

그냥 굴리는 것 정도로는 회복이 되지 않을 정도로 녀석의 상태는 심각했다.

만약 주창범이 미묘하게 달라졌다는 걸 아세리안이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지금 상태로 봤을 땐 다음 경기에서 죽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다르지.'

대부분의 정신적인 문제는 시간이 해결해 준다.

만약 이대로 주창범의 상태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당분간은 들어오는 오퍼를 거절하며 상태가 호전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혹시······. 괜찮으시면 술 한잔······."

그때, 주창범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술이라.

'차라리 잘 됐어.'

"좋습니다."

나는 주창범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철컥!

"와······ 형 방은 처음 들어와 보는 것 같아요."

내게 배정된 방 안.

10평 정도의 크기였는데, 침대와 작은 티테이블, 그리고 의자 하나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는 휑한 방이다.

그런데도 주창범은 뭐가 신기한지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런 녀석을 뒤로하고 나는 이세연에게 부탁해 가져온 안줏거리들과 술병을 티테이블 위에 세팅했다.

"아, 그 의자는 여기다 두면 됩니다."

의자가 한 개 뿐이라, 주창범의 방에 있는 의자를 가져와야 했다.

그렇게 시작된 술자리.

미묘한 정적 가운데, 나는 술병을 들었다.

"일단 한잔 할까요."

내가 건네는 술잔을 두 손으로 받은 주창범이 단숨에 들이켰다.

"크윽, 이거 되게 독하네요. 무슨 술이에요?"

"버가디 151이라는 술이더군요. 전에 한 번 마셔봤는데, 제게 딱 맞아서요. 너무 독하면 다른 술을 가져올까요?"

"아뇨, 아뇨. 저도 이게 딱 좋아요."

주창범은 빠르게 취하려는 듯 연거푸 버가디 151을 들이켰다.

독한 버가디 151을 연속으로 다섯 잔이나 마신 주창범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취기가 빠르게 오른 주창범이 어렵사리 입을 떼었다.

"제가 과연······ 상위 리그로 올라갈 수 있을까요?"

"······왜 그런 생각을 한 거죠?"

"후우. 사실 저번 경기에서 룬이라는 플레이어를 만났거든요. 요즘 하위 리그에서 유명한데, 혹시 아세요?"

주창범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플레이어 '룬'.

요즘 하위 리그 커뮤니티에서 닉네임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 플레이어였다.

실제로 서킷 브레이커가 터졌을 때 에덴에서 잠깐 스치듯 보기도 했고.

'불 속성에 특화되어 있었던 녀석이었지.'

"예. 지구에서 등장한 두 번째 네임드라고 하더군요."

"헤헤, 형도 역시 알고 계셨군요. 맞아요. 실제로 만나봤는데 정말 대단한 실력자더라구요. 저보다도 훨씬 뛰어난."

자조하듯 읊조리는 주창범.

사실 나도 룬이란 플레이어가 지구 출신이란 걸 커뮤니티에서 보고 깜짝 놀랐다.

1회차에선 들어보지 못했던 플레이어였으니까.

아무래도, 성계 대항전 특전으로 인해 생긴 나비효과인 모양이었다.

'상위 리그에 고작 다섯 명 밖에 없었으니까 확실하게 알고 있지.'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멈춰 세워야 했다.

"잠깐만요, 잠깐만요. 주창범씨도 룬이라는 플레이어에 뒤지지 않을 텐데요? 그쪽이 높은 등급의 불꽃 속성 스킬을 가지고 있다곤 하지만, 주창범씨의 테크닉이 훨씬 뛰어나지 않습니까."

"아뇨. 룬은 형처럼 대단한 강자였어요. 천 명이 참가하는 경기에서 혼자 절반에 해당하는 킬 수를 쓸어 담았거든요. 반면에 전 고작 100킬 언저리였죠."

주창범의 말을 들은 나는 어이가 없었다.

킬 수를 절반이나 쓸어 담았다고?

그게 뭐?

애초에 두 사람의 스타일이 첨예하게 다르다.

'불꽃 속성은 공격에 특화되어 있어.'

룬은 그 특성을 이용해 나처럼 저돌적인 플레이를 펼치는 녀석일 것이고, 그에 반해 주창범은 탱킹과 수비가 일품인 플레이어다.

그런 두 사람의 수준을 킬 수로 가른다?

야구 선수와 농구 선수가 농구로 승부를 본 격이었다.

"그거야······."

그래서 그에 대해 반박을 하려 했는데, 주창범이 말을 이었다.

"사실 형이 성계 대항전에서 우승하신 뒤로, 지구 출신 플레이어들 중에서도 좋은 성적을 내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었거든요. 브라질 출신의 플로리아누 모라이스, 캐나다 출신의 매켄지 터퍼 같은 사람들이요."

'일단 끝까지 들어줘야겠군.'

"그렇군요."

"근데 룬이란 플레이어는 그 사람들이랑 격이 달라요. 굳이 비교하자면 형 같은 분이었달까. 그런데 제가 형 덕분에 엄청 빠르게 강해졌잖아요. 그래서 내심 두 번째로 강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룬이란 플레이어를 보니까 현타가 오더라구요."

"······."

"그때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우진이형이나 룬이라는 플레이어처럼 되려면 뛰어난 화력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나는 수비만 좋고, 공격이 뛰어나지 않으니까 그런 게 아닐까."

말을 마친 주창범이 술을 들이켰다.

나도 주창범을 따라 버간디 151을 원샷했다.

"그 뒤로 저도 모르게 강박증처럼 공격을 하려고 달려들게 되더라구요."

그동안 알게 모르게 이 문제로 속앓이를 많이 한 모양이었다.

말을 마친 주창범의 표정은 이전의 그것처럼, 무척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웃음이었다.

'이거였군.'

그리고 나는 주창범의 문제점이 뭔지 알 수 있었다.

'멘탈이 붕괴됐어.'

인간의 정신은 무척 예민한 영역이라, 때로는 아주 사소한 일로도 무너져 내릴 때가 있다.

주창범의 현재 상태가 딱 그거였다.

"주창범씨."

"네, 형."

"룬이란 플레이어와 싸우면 질 것 같나요?"

내 물음에 주창범이 한동안 고민하더니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질 것 같아요."

"주창범씨의 수비 테크닉은 상위 리그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도 찾기 힘들 정도입니다. 오죽했으면 철벽이라고 불리겠습니까. 근데도 질 것 같다고요?"

내 물음에 주창범이 다시 한번 깊게 고민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다르지 않았다.

"네. 그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할 것 같아요."

'못 막을 것 같다고?'

룬이란 플레이어가 그 정도였어?

나는 주창범의 수비력을 굉장히 높게 평가하고 있던 상황.

하지만 두 번이나 고민했음에도 저런 대답이 나왔다면, 아마 주창범의 말이 맞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도 어엿한 하위 리그 최상위 플레이어.

보는 눈 만큼은 충분하기 때문이다.

'여기선 확실하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게 좋겠지.'

"주창범씨. 저 믿습니까?"

"네, 믿어요."

내 물음에 단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주창범.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만 믿으시죠."

플레이어 룬보다 약하다?

그럼 녀석에게 제대로 카운터를 칠 수 있게 만들어주면 그만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예. 아세리안님이 아니었다면 저도 알아차리지 못 할 뻔했습니다."

아세리안의 집무실.

내가 주창범과 나눴던 대화를 얘기해 주자, 아세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휴우. 저도 그 룬이라는 플레이어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안우진님 같은 분이 지구에서 또 나올 줄은 몰랐거든요."

"아뇨. 그런 플레이어를 키워내는 거야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아세리안의 생각과 달랐다.

"어렵지 않다구요?"

"네. 커뮤니티를 보니까 테크닉에서는 뚜렷한 강점을 보이지 않고 있다더군요."

"음······ 그랬던 거 같아요."

"그렇다는 건 높은 등급의 불 속성 스킬들로 떡칠했다는 뜻이죠.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는 플레이어라는 겁니다. 그 정도로 대단한 스킬이라면 대충 2천만 골드 정도 나오겠군요."

내 말을 들은 아세리안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실, 내가 얘기하고도 말이 안 되는 거였다.

2천만 골드.

포인트로 환산하면 200만 포인트라는 엄청난 거금이다.

그런 포인트를 일개 플레이어에게 투자하는 신이 과연 존재할까?

'투자한 플레이어가 중간에 죽으면 그 거금을 허공에 날리는 셈이지.'

내가 지금까지 벌어들인 포인트가 130만 포인트 정도 된다.

그런데 일개 하위 플레이어에게 200만 포인트를 투자한다고?

그 투자금을 회수하려면 무려 600만 포인트나 벌어야 한다는 뜻이다.

팀에서 수수료로 받아 가는 게 30프로니까.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그런 일을 벌일 녀석이······ 있을 수도 있겠군.'

세상에는 워낙 다양한 인간들이 존재하니까.

지금까지 봐온 결과, 신들이라고 해서 다를 것 같진 않았다.

분명 일개 플레이어한테 1티어 급 이상 스킬을 몰빵해준 신이 존재할 것이다.

당장 룬이라는 플레이어만 해도 그런 식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을 테고.

'경기에서 우연히 불 속성 스킬들만 여러 개를 줍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지.'

"그럼 주창범씨는 어떻게 하면 좋죠?"

"방법이 있긴 합니다."

"방법이 있어요?"

내 말에 반색하는 아세리안.

나는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아세리안님이 도와주신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네요."

―――――――――정보―――――――――

안우정의 보유 스킬(5개를 샀으나 3개만 등장)

화신 = 385만 골드

화룡의 분노 = 300만 골드

염왕 = 477만 골드

< 115화. 새로운 네임드(4) > 끝

< 116화. 새로운 네임드(5) >

"저는 당연히 도와드릴 수 있죠!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될까요?"

"가장 쉬우면서 동시에, 가장 쉽지 않은 방법이죠."

"그게 뭔데요?"

"돈입니다."

"······?"

아세리안의 커다란 두 눈이 빠르게 깜빡였다.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부연 설명을 해 주었다.

"돈으로 스킬들을 쓸어서 주창범에게 몰빵하는 거죠. 1티어 급 스킬들로."

가장 쉬운 방법이지만.

동시에 가장 쉽지 않은 방법.

그건 바로, 주창범에게 1티어 스킬들로 도배를 해주는 것이었다.

룬이라는 플레이어가 그랬던 것처럼.

"······1티어 급 스킬로 채운다고요?"

"예."

내 기준에선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가장 쉬운 법이다.

세상엔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너무나 많았으니까.

"못해도 천만 골드는 나올 텐데······."

내 예상대로 아세리안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팀 투지의 주인.

아세리안이 플레이어 하나하나에 애정을 쏟고, 꼼꼼하게 관리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가장 베이스로 깔려 있는 건 경영자의 마인드일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투자 대비 손익을 무의식적으로 계산할 수밖에 없다는 것.

"아세리안님이 생각했을 때, 주창범은 어디까지 올라갈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음······ 만약 정신적인 리스크가 없다면 상위 리그까진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주창범이 상위 리그까진 무난히 올라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상위 넘버링은 쉽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그렇겠죠."

사실, 이게 당연한 거다.

나처럼 포인트를 모아뒀다가 한 번에 몰빵을 하지 않는 이상, 하위 넘버링에서 아무리 못해도 5년 이상은 굴러야 상위 넘버링으로 올라갈 수 있다.

그리고 대다수의 하위 넘버링 플레이어들이 5년이란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죽는다.

아, 물론 시작부터 기초 스텟이 100을 넘는 네임드들은 예외였지만.

"하지만 1티어 급 스킬들로 도배해준다면 제 생각엔 상위 넘버링은 충분할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하위 넘버링에서 정말 많은 시간을 보내야겠지만 말입니다."

"······!"

내 말에 아세리안이 두 눈을 치켜떴다.

상위 넘버링.

하위 넘버링과는 차원이 다른, 천상계 초입의 세계.

그 단어가 주는 울림은 묵직했다.

'1티어 스킬로 채워주면 충분히 가능성 있어.'

물론 나도 아직 상위 넘버링 경기를 뛰어보지 못 했지만, 얼마 전에 긴급 미션을 뛰면서 상위 넘버링 플레이어들을 만나봤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스텟과 스킬, 아이템이 잘 받쳐 준다는 가정하에, 주창범의 기본기라면 충분히 통할 것이다.

"정말 주창범씨가······ 상위 넘버링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요?"

아세리안이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물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상위 넘버링까지 올라간다는 건.

정말정말정말 운이 좋다면 고위 리그까지 노려볼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당장의 포텐은 사실, 카이로시아가 훨씬 높습니다.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죠. 카이로시아는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엄청난 네임드니까."

"그렇죠."

"근데 잘 생각해 보시죠. 과연 카이로시아도 단숨에 상위 넘버링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요?"

"······."

"결국 통곡의 구간이라고 불리는, 하위 넘버링과 상위 넘버링 사이의 구간에서 한참을 헤매야 할 겁니다."

내 말에 아세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신들이 상위 넘버링, 상위 넘버링 하는 게 아니다.

하위 넘버링 플레이어들의 평균 스텟이 90에서 110 정도라면.

'상위 넘버링은 최소 150 이상이지.'

얼핏 보면 차이가 얼마 안 나는 것 같지만, 중요한 건 둘을 이어주는 중간 영역이 없다는 것.

110스텟을 가지고 있는 플레이어가 130까지 올렸다고 해서 상위 넘버링으로 올라간다?

볼 것도 없었다.

정말 높은 확률로 죽을 것이다.

"만약 주창범과 카이로시아 둘 다 통곡의 구간에 진입했다고 가정해 보시죠. 아세리안님이 봤을 때는 누구의 생존율이 더 높을 것 같습니까?"

"······주창범씨요."

그녀의 대답에 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너무나 당연한 거다.

카이로시아는 공격 성향의 마법사.

주창범은 철벽이라고 불리는 탱커다.

'아무리 많은 숫자의 적을 쓸어버릴 수 있는 플레이어라도, 칼 맞으면 죽는 건 똑같아.'

결국 더 단단한 플레이어가 살아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주창범은 룬이라는 플레이어와 아예 다른 상황입니다."

"어떤 의미에서요?"

"룬이라는 플레이어가 1티어 급 스킬로 지금의 자리에 올라왔다면, 주창범은 1티어 급 스킬이나 전설 등급 이상의 아이템 같은 외적인 요소 없이, 오로지 실력과 테크닉만으로 올라왔죠."

"아! 그럼 스킬이라는 요소까지 충족되면 룬이라는 플레이어보다 훨씬 강해진다는 거군요?"

눈을 빛내며 묻는 아세리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천만 골드라는 거금에 당황스러워하더니, 어느새 꽃이 만개하듯 활짝 웃고 있었다.

정말 팔색조 같은 모습이랄까.

"물론 제가 룬이란 플레이어와 직접 겨뤄본 게 아니라서 확답을 드리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충분히 가능성은 있죠. 녀석이 준신화 등급 이상의 아이템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말입니다."

"아······."

"거기다 주창범은 지금 룬이라는 플레이어로 인해 무척 조급해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대로 냅뒀다간 곧 죽을 수도 있을 정도로요. 이게 문제다, 라고 알려줘서 해결할 수 있다면 애초에 이런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 정도로 심각한가요?"

"밸런스가 완전히 무너졌더군요."

사실, 주창범이 아니었다면 다른 방법을 강구해 봤을 것이다.

천만 골드가 애 이름도 아니고.

하지만 주창범의 경우는 다르다.

스킬을 추가해주면 지금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데다가, 상위 넘버링까지 넘볼 수 있을 정도의 포텐을 가지게 된다.

'상위 넘버링까지 넘볼 수 있을 정도의 포텐을 가지고 있다는 게 훨씬 중요하지.'

거기다 생존율도 다른 플레이어들보다 월등히 높다.

반면에 룬이라는 플레이어?

녀석이 정말 스킬빨로만 네임드 자리에 올랐다면, 상위 리그에서 얼마 못 가 죽을 것이다.

'아무리 운이 좋아도 통곡의 구간을 넘기지 못할 거야.'

내가 괜히 카이로시아를 붙잡고, 한동안 경기도 안 내보내며 훈련시킨 게 아니었다.

카이로시아나 룬 정도의 강자는 상위 리그에 널리고 널렸으니까.

확실한 기본기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주창범은 달라.'

그런 외적인 요소 없이도 상위 리그를 노려볼 수 있는 녀석이 주창범이다.

한마디로 남들보다 리스크는 적은데, 리턴이 되게 크다고나 할까.

세상에 100프로 성공하는 투자는 있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투자하는 입장에선 이보다 좋을 수가 없었다.

"천만 골드······. 천만 골드라······."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검지로 테이블을 톡, 톡 두드리는 아세리안.

나는 그녀에게 쐐기를 박았다.

"일단 구체적인 견적부터 뽑아보시죠. 사실 1천만 골드라는 건 그 언저리쯤 한다는 거였지, 정확히 1천만 골드가 필요하다는 뜻은 아니었지 않습니까."

"그렇겠죠."

"일단 정확한 견적부터 뽑아놓고 나서 얘기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클로에가 아이템 목록 뽑아둔 것 있죠?"

클로에는 혹시 중개 거래소에 플래티넘 등급 스킬이 등장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내가 아세리안에게 건의해서 고용한 사용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플래티넘 등급 스킬의 매물이 나오지 않아, 최근부터는 아이템 목록을 정리해두는 일을 맡겨 두었다.

공짜로 놀고먹게 할 수는 없으니까.

"네, 여기요."

"주창범에게 어울릴 만한 스킬부터 같이 추려보죠."

그렇게 시작된 주창범에게 어울리는 스킬 찾기.

"주창범씨에게 부족한 게 공격력이니까, 역시 불꽃 속성이 좋겠죠?"

"아뇨. 물론 도움은 되겠지만, 제 생각엔 얼음 속성이 나을 것 같습니다."

"얼음 속성이요?"

아세리안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창범의 가장 큰 장점은 철벽같은 수비입니다. 굳이 그 장점을 가리는 것보단, 오히려 살리되 공격력을 얹어줄 수 있는 스킬이 제일 좋겠죠."

"아······. 하긴, 얼음 속성은 공수 밸런스가 좋다고 알려져 있으니까요."

"예. 수비에 힘을 실어주면서 공격력도 얹어주는 게 상위 리그로 올라왔을 때를 생각하면 훨씬 나을 겁니다. 거기다 주창범이 원하는 공격력도 충족시켜줄 수 있으니까 윈윈이죠."

"아하."

"그리고 룬이라는 플레이어가 불꽃 속성을 다루지 않습니까. 카운터 스킬로는 얼음 속성만 한 게 없습니다."

내가 생각한 방법은 얼음 속성의 스킬들을 구해주는 것이었다.

주창범은 수비에 특화되어 있다 보니, 생존율도 다른 플레이어들보다 높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공수 밸런스가 뛰어난 얼음 속성 스킬들을 채워준다면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얼음 속성은 다른 속성들보다 더 저렴하지.'

아세리안의 말처럼 얼음 속성은 공수 밸런스가 뛰어나다는 특징이 있지만, 바꿔말하면 어중간하다는 것.

불꽃이나 뇌전 속성처럼 공격에 특화되어 있는 스킬들과 달리 압도적인 모습을 연출할 수가 없다.

그저 조금 더 강해진 느낌만 받을 뿐.

그래서 플레이어들에게 외면받는 속성 중 하나였다.

'수요가 적으니, 가격이 저렴할 수밖에.'

반면에 주창범에겐 이보다 좋을 수 없을 것이다.

부족한 공격력도 채워주면서 동시에, 기존의 강점인 수비력을 더욱 극대화 시킬 수 있을 테니까.

거기다 내가 얘기한 천만 골드보다 더 싸게 구할 수 있을 테니, 일석이조였다.

물론 사는 건 아세리안이 할 몫이지만.

"이 스킬은 어때요?"

"바로 고를 것 없이 일단 따로 정리해둔 뒤에 한 번에 펼쳐두고 보시죠. 그게 나을 겁니다."

그때부터 나와 아세리안은 열심히 얼음 속성 스킬들을 골라냈다.

그리고 한 번에 깔아둔 뒤 하나씩 소거하는 방식으로 결국 다섯 개의 스킬을 추려낼 수 있었다.

[<스킬북:겨울 방패>]

[액티브]

[사용하면 마력을 소모하여 방패에 반사 기능을 덧씌웁니다.]

[방패로 적의 공격을 방어할 경우, 막는 데미지의 1%를 반사시킵니다.]

[방패가 없으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 : 없음]

[스킬 유지 시간 : 없음]

[10초 당 마력 1포인트 소모(스텟 소모 X)]

[판매가 : 1,820,000 G]

[<스킬북:동빙한설凍氷寒雪 >]

[액티브]

[사용하면 체력 소모를 2배로 늘리는 대신 근력과 민첩 스텟을 15% 상승시킵니다.]

[시전자의 몸에서 엄청난 한기가 뿜어져 나옵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 : 없음]

[스킬 유지 시간 : 없음]

[판매가 : 2,100,000 G]

[<스킬북:빙하 갑옷>]

[액티브]

[공격을 막으면 한기가 뿜어져 나옵니다.]

[공격을 막으면 체력이 회복됩니다.]

[공격의 강도가 강할수록 회복률이 상승합니다.]

[회복률은 최대 1%까지 가능합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 : 없음]

[10초 당 마력 1포인트 소모(스텟 소모 X)]

[판매가 : 1,480,000 G]

[<스킬북:한신寒身 >]

[패시브]

[마력에 얼음의 기운이 깃듭······.]

[판매가 : 1,140,000 G]

[<스킬북:극야의 섬광>]

[액티브]

[사용하면······.]

[판매가 : 1,000,000 G]

'확실히 얼음 속성이 싸긴 싸네.'

총 754만 골드.

내가 가지고 있는 뇌신과 천둥의 숨결 두 개만 해도 555만 골드였으니, 1티어 급 스킬 다섯 개 치고는 무척 저렴한 금액이었다.

"휴우. 다행히 천만 골드는 안······."

"제가 백만 골드를 지원하겠습니다."

나는 아세리안이 뭐라고 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한마디로 아세리안이 스킬들을 구입하도록 돌려서 강요하는 것과 동시에, 654만 골드는 그녀가 부담해야 할 몫이라고 딱 잘라 얘기한 것이다.

하지만 이후에 나온 그녀의 반응은 무척 의외였다.

"그걸 안우진님이 왜 부담하셔요. 당연히 제가 내야죠."

"······?"

"전에도 안우진님이 팀원들에게 장비와 스킬을 나눠준다고 천만 골드를 부담하셨잖아요. 사실, 제 입장에선 그것도 어디 쥐구멍에 들어가 숨고 싶었어요."

웃음기를 싹 뺀, 진지한 표정.

"제가 아까 천만 골드라고 했을 때 고민한 건 부담해야 할 골드가 너무 커서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

내 물음에 아세리안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안우진님께는 해드린 것도 없는데, 주창범씨한테만 천만 골드를 투자한다고 하기가 너무 죄송해서 그랬죠. 사실, 안우진님 입장에선 섭섭해할 만한 일이잖아요. 팀의 간판스타이자, 대들보인데."

"아······."

"거기다 제가 받기만 하고 있으니까 도저히 주창범씨한테 스킬북을 사주겠다고 입이 안 떨어지더라구요."

하긴.

그녀 입장에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한텐 더 이상 1티어 급 스킬도, 전설 이하의 장비도 필요 없으니까.

만약 나한테 필요한 것을 구해주려고 한다면 몇천만 골드를 훌쩍 넘었을 것이다.

"근데 안우진님이 일단 견적부터 내보자, 라고 하셨을 때 속으로 얼마나 안도했는지 몰라요. 만약 안우진님이 이 일로 섭섭해하시면 어떡하나, 라는 걱정 중이었거든요."

어깨를 움츠린 채 시선을 내리 까는 아세리안.

그녀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해 주신 게 왜 없습니까. 플레잉 코치라는 시스템으로 제게 포인트를 몰아주시려고 한 것도. 그리고 벽력섬전도 사주셨는데. 거기다 제 의견이라면 일단 물불 가리지 않고 들어주시지 않습니까."

벽력섬전은 전설 등급의 창이다.

지금 당장 중개 거래소에 천만 골드로 올려놔도 금세 팔려나갈 만큼 뛰어난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두요······."

"제 눈치 보지 마시고, 투자할 플레이어가 있다면 망설임 없이 투자하세요. 저도 만약 필요한 게 생긴다면,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내 말에 아세리안이 고개를 슬쩍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엔 다양한 감정이 동시에 깃들어 있었다.

아마도 미안함과 고마움이겠지.

"정말 필요한 게 있다면 꼬옥 말씀해주세요. 아시겠죠?"

그제야 미소 짓는 아세리안.

알게 모르게 심적 부담감이 컸던 모양이었다.

"예. 근데 저는 그렇다 쳐도, 다른 플레이어들이 섭섭해할지도 모르겠군요."

"아, 그건 주창범씨가 경기를 뛰러 들어갔다가 구했다는 식으로 얘기가 진행되어야 할 것 같아요."

"그게 맞겠죠."

"그리고, 혹시 안우진님이 전해주실 수 있나요? 경기 뛰러 갔다가 오다 주웠다는 식으로."

"······예?"

"안우진님이 문제점과 해결 방법을 모두 찾아주셨으니까요. 주창범씨가 정신적 부담을 덜 수 있도록 칭찬도 곁들이면 무척 좋지 않을까요?"

생글생글 웃는 아세리안.

나는 그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게 뭐예요 형님?"

"흠, 흠. 오다 주웠습니다."

"······?"

< 116화. 새로운 네임드(5) > 끝

< 117화. 새로운 네임드(6) >

"저······ 라파엘님."

"말해."

정신없이 서류를 보고 있는 라파엘.

그녀를 르니카엘이 조심스럽게 부르자, 까칠한 대답이 돌아왔다.

'오늘도 무척 예민하시네.'

최근 들어 라파엘은 굉장히 신경질적으로 변해 있었다.

주신들이 렌을 긴급 미션에 투입한 뒤부터 조금씩 저기압인 날이 많아지더니, 요 근래에는 매일같이 기분이 나빠 보였다.

그 모습에 르니카엘은 옅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자신이 보고할 내용을 들으면 좋은 얘기는 나오지 않을 게 분명했으니까.

"저······ 하이블러드나이트 127 경기를 개최할 포인트가 부족합니다."

르니카엘의 말에 서류를 넘기던 라파엘의 손이 뚝, 하고 멈췄다.

'으. 숨 막혀.'

그리고 흐르는 정적.

'아, 아버지······.'

르니카엘은 어서 이 침묵이 사라지길 기도했다.

"······왜?"

"······?"

"왜 포인트가 부족하냐고. 그 귀는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모양이지?"

냉기가 잔뜩 실린 라파엘의 목소리.

그 모습에 르니카엘의 다리가 잘게 떨렸다.

"서, 성계 대항전을 준비하느라······."

성계 대항전 개최를 준비하는 데 들어가는 포인트가 나날이 늘어가고 있었다.

덕분에 미리 예산을 잡아놨던 것과 달리, 훨씬 더 많은 포인트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지옥 같은 경우는 맵을 그대로 가져다 쓸 수 없기에, 포인트를 이용해 최대한 비슷한 모습으로 구현해내야 했으니까.

그런 과정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포인트가 필요하게 되었고.

"그래서? 포인트가 부족하니까 하이블러드나이트 127을 개최하지 말자고?"

"아, 아닙니다!"

"그게 아니면 뭘 그렇게 멀뚱멀뚱 서 있어. 빨리 가서 재무제표 안 가져와?"

노려보는 라파엘의 눈빛에 르니카엘이 화들짝 놀라며, 서둘러 재무제표를 가져와 건넸다.

사락- 사락-

다리를 꼬고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재무제표를 넘기는 라파엘.

르니카엘은 그녀의 앞에서 양손을 공손히 모은 채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포인트는 뭐지?"

그때, 라파엘이 재무제표의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서둘러 재무제표를 들여다본 르니카엘이 빠르게 대답했다.

"아······. 라파엘님께서 플레이어 렌에게 할당한다고 따로 빼 두라고 하신 포인트입니다."

"흠······. 렌이라······."

라파엘이 손가락으로 폭포수처럼 흘러내린 머리칼을 배배 꼬았다.

평소 무언가를 고민할 때 나오는 라파엘의 버릇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생각에 잠긴 라파엘이 꼬았던 다리를 풀며 곁에서 일하고 있던 두 명의 천사를 호출했다.

"타니엘! 주르엘!"

"찾으셨습니까?"

라파엘의 부름에 집무실 한쪽에서 정신없이 업무를 처리하고 있던 타니엘과 주르엘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렌에게 배정하기로 한 거 있지? 스킬 세 개 업그레이드 시켜주기로 했잖아."

"네, 맞습니다."

"그거 빼."

"예······?"

"예······?"

'뭐라고?'

라파엘의 말에 르니카엘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알기로 저 포인트는 성계 대항전에 혼자서 참가하는 렌에게 어드벤티지를 주기 위해 빼 둔 것이었으니까.

저걸 빼겠다는 건 성계 대항전을 안 열겠다는 거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혹시 성계 대항전을 취소하시겠다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연 주르엘.

그러자 라파엘이 코웃음을 쳤다.

"취소? 뭔 뚱딴지같은 소리니?"

"그, 그럼 이 포인트는 왜······?"

주르엘이 묻자 라파엘이 피식 웃었다.

"긴급 미션 보니까 충분히 강해졌던걸. 그 정도면 어드벤티지가 없어도 충분하잖아? 그리고 아예 주지 말자는 얘긴 아니야. 세 개를 두 개로 줄이자고."

"아, 안 됩니다! 신들께 형평성에 관한 얘기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렌이 출전 거부를 하기라도 하면······!"

열변을 토하는 주르엘과 타니엘.

하지만 라파엘은 이미 마음을 정한 모습이었다.

"제까짓 게 불만을 가져 봤자지. 오퍼를 안 주면 그만이야."

"하, 하지만······!"

"그리고 형평성 문제는, 음. 그래, 이렇게 하자. 쿠 훌린 대 렌. 두 사람의 싸움을 성계 대항전에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게시글을 퍼트려. 형평성 이슈를 완전히 묻어버릴 수 있도록."

"렌의 출전 문제는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주르엘의 물음에 라파엘이 씨익, 미소 지었다.

"이미 한 번 제대로 밟아놨어. 더 이상 까불지 못하도록 말이야. 그러니까 걱정 말고 진행해."

그녀는 무척 자신 있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에도 르니카엘의 마음속엔 불안감이 떨쳐지지 않았다.

'정말 괜찮을까.'

* * *

미션 중에 얻었다고 둘러대며, 주창범에게 스킬북을 건네준 지 일주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주창범의 스킬 활용법과 이해도를 끌어올리는 데에만 집중했다.

물론, 활용법과 이해도를 높이는 데에는 대련만 한 게 없었다.

챙! 채챙! 챙! 서걱!

"크윽!"

내 창에 목이 베이자, 주창범이 양손으로 목을 감싸며 무릎을 꿇었다.

녀석의 목에서 피가 한 움큼 뿜어져 나왔다.

'쉽지 않았어.'

나는 창을 거두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주창범과의 대련은 끝.

"허억, 헉, 고생 많으셨어요, 형."

"주창범씨도 수고 많았습니다."

"와······ 이렇게 오래 버틴 건 처음인 것 같아요. 이게 1티어 급 스킬이구나."

어느새 목에 난 상처가 회복된 주창범이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녀석이 나와의 대련 동안 버틴 시간은 12분.

간신히 5분을 버텨내던 이전과 비교하면 짧은 시간 만에 엄청나게 성장했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녀석과 스텟을 맞추기 위해 많은 페널티를 감수하긴 했다.

특전도 다 끄고, 스킬도 사용하지 않고, 저주 아이템까지 일부 착용한 채 싸운 것이다.

'이 정도면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진 않겠군.'

만약 내가 이 상태에서 스킬을 썼다면 단 1분도 버티지 못했겠지.

난 상위 리그에서도 최상위권의 플레이어고, 주창범은 그래봤자 아직 하위 플레이어였으니까.

'확실히 주창범 스타일이 얼음 속성 스킬이랑 시너지가 좋네.'

이전과 비교해서 수비가 확실하게 좋아졌다.

전에는 빠르게 치고 빠지는 변칙적인 인 앤 아웃에 애를 먹던 녀석이었는데, 스킬로 인해서 사각 범위가 훨씬 줄어든 것이다.

기교에서 통하지 않고, 힘으로 없는 공간을 만들어서 공략하는 것도 어려워졌다.

'장기전도 쉽지 않고.'

녀석의 검이나 방패와 부딪칠 때마다 차가운 한기가 내부로 침투해온다.

거기다 겨울 방패 스킬로 인해 내가 때리는 데미지의 1프로가 반사되기까지.

오히려 몰아붙이는 사람에게 더 많은 데미지가 쌓이는 것이다.

가장 고무적인 건.

'아직 스킬 이해도가 낮아.'

한마디로, 지금보다 더 성장 가능성이 높다는 뜻.

"직접 스킬을 써보니까 어떻습니까."

"아······ 확실히 수비 하기가 한결 수월해졌어요."

"그리고요?"

"제 공수 전환 타이밍이 더 뚜렷해진 것 같아요. 뭐랄까······. 형 스스로가 때릴수록 손해 본다는 생각에, 스타일을 바꾸는 순간 제가 공세로 전환했잖아요?"

"맞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형이 저를 상대할 때 애를 먹고 계시구나, 라는 게 느껴졌어요."

'애를 먹는다라······.'

주창범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녀석에게 저런 말을 듣는 순간이 올 줄이야.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마음이 이런 거였군.'

"맞습니다. 공략하기가 쉽지 않겠더군요."

"사실 그때 저는 이겼다고 확신하고 있었거든요? 그동안의 경험으로 쌓인 감이란 게 있잖아요. 아, 이 타이밍에 어디를 노리고 들어가면 쓰러트릴 수 있겠다. 근데 형한텐 그게 안 통하더라구요, 헤헤."

밝게 웃는 주창범.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조급해하며 공세로 전환하던 것도 완전히 사라졌고.

"다음 경기가 블러드나이트 253이라고 했죠?"

"네, 맞아요."

그 사이, 주창범에게 오퍼가 들어와 있었다.

블러드나이트 253이면 앞으로 3주밖에 남지 않은 상황.

"당분간 기초 스텟 훈련은 없습니다. 스킬 이해도를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 대련 위주로 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계세요."

"넵! 저는 형만 믿겠습니다!"

녀석이 힘차게 대답했다.

2주 뒤.

중간 점검을 위해 특수 대련장으로 제이스, 지그, 루치아노, 고건하, 모용악, 카이로시아를 불러 모았다.

그리고 시작된 주창범과 모용악의 대련.

"끄윽!"

"와······."

"창범이 수준이 완전히 달라졌네."

모용악이 제대로 손도 써보지 못한 채 주창범의 검에 쓰러졌고, 그 모습에 다른 사람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고생 많으셨어요, 형."

"수고했다, 창범아."

대련을 펼친 모용악과 주창범이 서로에게 인사를 건네는 사이,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티 나지 않도록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좋은데?'

스킬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할수록 빠르게 강해지더니, 이제는 모용악 정도의 실력자도 가볍게 이길 정도였다.

이제는 네임드라고 불려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

물론 룬이라는 플레이어처럼 압도적인 킬 수를 쌓는 건 여전히 불가능하겠지만, 적어도 녀석과 일대일로 붙으면 승부를 장담하기 어려울 것이다.

"다음은 고건하님이 대련해 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고건하가 대련을 위해 주창범에게 향하고, 그사이 돌아온 모용악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모용악님."

"아닙니다. 근데 창범이가 엄청 강해졌네요."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모용악.

그의 눈빛엔 의구심으로 가득했다.

제이스나 지그 등, 다른 사람들도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쯧.'

당연히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고 예상했다.

갑자기 누군가가 엄청난 스펙업을 한다면, 팀의 경영에 많은 부분 참여하고 있는 내게 의심의 눈초리가 쏟아질 거라는 건 불을 보듯 뻔했으니까.

1티어 스킬로 도배했다는 걸 다른 이들에게 언제까지 숨길 수도 없고.

'빠르게 화제를 전환시켜야겠군.'

결국 모르쇠로 일관할 수밖에 없다.

주창범 한 명에게만 좋은 스킬들을 몰아줬다는 게 알려지면 이들의 사기가 많이 떨어질 것이다.

"주창범씨가 저번 경기에서 좋은 스킬을 구했다며 찾아왔더군요.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아, 직접 대련해 보니 어떠셨습니까."

"눈앞이 캄캄하더군요. 어떻게 공략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힐 정도였습니다. 녀석의 수비를 단숨에 뚫고 들어가는 건 거의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장기전으로 가자니 감당이 안 되겠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아차 하는 순간 승부가 결판나 있었습니다."

모용악이 허탈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주 좋군.'

내가 생각한 주창범의 공략법은 압도적인 화력으로 찍어 누르는 거다.

아니면 은신으로 다가가 암습을 하거나.

하지만 모용악은 둘 중 한 가지도 해당되지 않으므로, 현재로선 사실상 주창범을 공략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그렇군요."

"안우진님과는 다른 의미로 벽에 마주한 느낌이네요. 안우진님은 어떻게 손을 써보기도 전에 죽는다는 느낌이라면, 창범이는 너무 단단해서 깨부술 방법이 없었다고나 할까요."

"주창범씨가 저번 경기에서 천운을 만났네요. 저렇게 좋은 스킬들을 얻게 되다니."

내 말에 모용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긴가민가할 것이다.

그래서 날 떠본 거겠지.

다시 모든 이들의 시선이 대련 중인 주창범과 모용악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풋."

무표정으로 주창범과 고건하의 대련을 보던 모용악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그를 시작으로 다른 사람들도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어떻게든 웃음을 참고자 하는 모습이었달까.

"······?"

"창범이가 지금 쓰고 있는 스킬, 안우진님이 주신 거 다 알고 있습니다."

"······."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흰 별로 섭섭하지 않거든요."

모용악의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알고 계셨군요."

"팜에만 갇혀 있는 입장이라곤 하지만, 저희도 커뮤니티를 통해 다른 팀들이 어떤 식으로 굴러가는지 정도는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팀이 정말 좋은 팀이라는 것도 알고 있구요."

"······."

"아세리안님과 안우진님은 저희에게 차고도 넘치게 해주고 계십니다. 안우진님만 해도 경기에서 좋은 아이템을 구했다고 저희들에게 나눠주지 않으셨습니까.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안우진님께 무언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서킷 브레이커가 터졌던 에덴의 보물 창고.

그리고 혁명 경기를 진행하며 라 제국의 황도, 안타레스의 보물 창고를 털고 많은 아이템들을 얻었었다.

골드도 충분하겠다, 굳이 아이템을 팔 필요가 있나 싶어 이들에게 나눠주었는데, 모용악은 지금 그때 나눠준 걸 얘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저희에게 숨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흰 반복되는 호의를 권리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거든요. 지금도 안우진님께 무척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모용악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들 같은 마음이라는 것.

그 모습에 나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얘기해줘서 고맙습니다."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가 우리를 감돌고 있을 때였다.

"끄윽!"

어느새 고건하를 쓰러트린 주창범이 호기롭게 외쳤다.

"다음은 카이로시아님!"

그러자 날 힐끔 바라보는 카이로시아.

찌릿.

"안 봐줘도 되죠?"

냉기가 잔뜩 실린 느낌이었다.

'왜 그러지?'

그녀는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는 주창범에게 사뿐사뿐 걸어갔다.

뭐랄까, 평소보다 더 날카로운 모습이었다.

그리고.

[천중千重의 겁박!]

[소성의 새벽 폭풍!]

[옥죄어 오는 눈보라!]

[폭렬하는 붉은 꽃잎!]

콰과과과과과과과과과광!

물 속성, 불 속성, 바람 속성을 가리지 않고, 주창범의 스타팅 포인트로 어마어마한 마법 폭격이 쏟아졌다.

순식간에 엄청난 먼지가 사방을 휩쓸었다.

'쯧.'

무려 고속영창에다가, 원소통달, 마력관통, 거기에 천재까지.

사실 화력만 놓고 봤을 때, 팀 투지에서 화력이 제일 좋은 플레이어는 카이로시아였다.

나까지 포함해서.

"쿨럭, 쿨럭."

먼지가 걷히자, 피투성이가 된 주창범의 모습이 보였다.

"······."

"······."

"······."

주창범이 1티어 스킬로 도배를 했지만, 카이로시아는 카이로시아였다.

'왜 저러는지 알 수가 없군.'

괜히 애꿎은 화풀이를 당한 주창범이었다.

그리고 1주일 후.

주창범의 다음 경기가 돌아왔다.

< 117화. 새로운 네임드(6) > 끝

< 118화. 새로운 네임드(7) >

주창범은 우유가 너무 싫었다.

어릴 적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주창범.

그가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어머니마저도 췌장암으로 인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일찍부터 받게 된 한 통의 전화.

―창범아. 엄마가······ 우유가 너무 먹고 싶은데······. 혹시 사다 주면 안 될까?

학교에 등교 중이었던 주창범은 어머니께 하교 후 병원 가는 길에 우유를 사가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아침 일찍 어머니가 뭘 드시고 싶다고 말씀하신 게 처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리고 점심시간 무렵, 담임 선생님을 통해 듣게 된 소식.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하는구나······.

사실 어머니는 우유를 드시고 싶으셨던 게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내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 하셨던 건데······.'

그날 이후.

주창범은 우유가 너무 싫어졌다.

[경기 : 하위리그-블러드나이트253의 메인 이벤트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유형 : 수성전(개인 PvP)]

[게임명 : 붉은 돌담]

[맵 : 요동성(대)]

[관객 수 : 70,274 명]

외동이었던 데다가 일가친척이 한 명도 없었던 주창범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고아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시작된 악몽.

고아원 근처에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된 주창범은 따돌림과 학교 폭력에 시달리게 되었다.

누군가에겐 축복이라고 할 수 있는 잘생긴 외모는, 주창범에겐 양날의 검이었다.

―저 새끼, 애미애비도 없는 고아라던데?

―최이슬은 저런 고아 새끼가 뭐가 좋다고 따라다니는 거야?

―푸하하, 저 병신 바지에 빵꾸 난 것 봐. 거지새끼.

의지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친구.

주창범에겐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낯선 고아원 환경에 적응하며 그저.

고독함,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만으로 지옥 같은 삶을 살아갈 뿐.

[미션 : 요동성에 쳐들어온 적군을 퇴각시키세요.]

[적 총사령관을 처치할 경우 퇴각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요동성의 관청이 적에게 점거될 경우 미션에 실패합니다.]

[현재 생존한 플레이어 수 : 10 명]

그런 주창범의 인생이 바뀐 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아원에서 나오게 되었을 때였다.

아르바이트를 가는 길에 누군가가 다가와 명함을 건넨 것이다.

―저는 루나 엔터테인먼트의 신인 개발팀 팀장, 성하온 이라고 합니다.

대한민국에서 1, 2위를 다투는 대형 소속사의 캐스팅.

대학에 간 것도 아니고, 하루하루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내고 있던 주창범에게.

그 제안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보너스 포인트 조건이 있습니다.]

[적 총사령관을 처치할 경우 보너스를 획득합니다!]

[많은 숫자의 적군을 처치할수록 보너스가 상승합니다!]

[킬 수 현황 ― 없음]

[적 침공까지 남은 시간 : 00:59:57]

[여러분을 천제天帝께서 내려준 무사들로 소개하세요.]

그렇게 시작된 연습생 생활.

이르면 초등학생, 늦어도 중학생부터 시작한 다른 연습생들과 달리, 주창범은 성인이 되어서야 시작했기에, 그들을 따라가려면 더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저 친구, 마스크가 괜찮군. 이번에 남자 아이돌 그룹 기획하고 있지? 거기 합류시켜.

그의 노력을 알아봐 준 걸까.

아니면 운이 좋았던 걸까.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던 주창범은 금세 데뷔조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적 침공까지 남은 시간 : 00:00:10]

[잠시 후 수성전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시작된 합숙 생활.

고아원에서 나와 고시원을 전전하던 주창범에겐 이보다 좋을 수 없었다.

작은 방이었지만 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

―형,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어요?

―아······ 정말 힘들었겠다. 괜찮아요, 형! 이제부터 우리가 가족이니까!

다른 여섯 명의 멤버들도 모두 자신에게 무척 잘 대해 주었다.

데뷔곡, 데뷔 날짜가 정해지면서 바쁜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그럴수록 주창범과 멤버들은 더욱 똘똘 뭉치게 되었다.

―창범이 나이가 제일 많지? 네가 오늘부터 '스타피스'의 리더다.

그 뒤로.

주창범의 인생에 가장 행복한 날이 찾아왔다.

―이번 주 1위는!

―두구두구두구두구!

―스타피스! 축하합니다!

데뷔곡 '별자리'를 통해 음악 차트 1위를 석권하며 단숨에 인기 아이돌이 된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의지할 사람 한 명 없는 고아원 생활에, 학교에선 왕따를 당했던 주창범.

애정에 목말라 있던 그에게, 팬들의 사랑은 세상 모든 것을 가진 듯한 느낌을 주었다.

[요동성의 성문이 파괴되었습니다.]

[수성전 진행 시간 : 00:20:14]

그 뒤로 주창범의 인생은 180도 바뀌었다.

수많은 스케쥴을 소화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고, 이전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돈을 벌게 되었다.

게다가 각종 예능 출현에, 광고까지.

돈, 많은 팬들의 사랑 등.

기존에 주창범이 갖지 못했던 모든 것을 쟁취한 것이다.

[수성전 진행 시간 : 04:37:29]

하지만 행복한 시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단단하게 뭉쳐있던 멤버들 사이에 이상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형, 오늘도 스케쥴이 있어요?

―아, 응. 형 이번에 냉장고 광고 들어왔잖아. 그거 오늘 촬영하기로 했거든.

―쳇. 잘생긴 얼굴 말고는 아무것도 없으면서.

스타피스라는 그룹 자체를 좋아해 주는 팬들도 많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개개인의 인기에 따라 소외되는 멤버들이 생겨났고.

'이런 상황에선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들의 질투는 연습생 생활이 가장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비주얼 센터이자 리더가 된 주창범에게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다시 지옥이 찾아왔다.

―너희들 왜 그래? 내가 뭐 실수한 거 있어?

―없어요. 대스타 창범이형이 저희에게 실수할 게 뭐가 있겠어요.

―저희가 오히려 살살 기어야 하는 입장이죠. 그냥 저희 신경 쓰지 말고 형 하고 싶은 대로 하심 돼요.

다른 여섯 명의 멤버들이 주창범을 조금씩 따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킬 수 현황]

[1위. '주창범' 1,857킬]

[2위. '압둘 칼람' 1,332킬]

[3위. '라이시' 1,202킬]

[4위. '카롤' 1,198킬]

그때부터 주창범은 멤버들의 마음을 다시 돌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도대체 내가 무슨 실수를 한 걸까.'

시간이 지날수록 멤버들의 엇나감은 정도가 심해져 갔다.

―스타피스 멤버, 창지. 금일 새벽 음주운전으로 적발.

―서울 강남 경찰서. 불법 성매매 혐의로 스타피스 멤버, 정은 입건.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각종 이슈를 만들어내며 그룹의 이미지가 한순간에 나락으로 고꾸라졌고.

그로 인해 예정되어 있던 모든 스케쥴이 취소되고, 주창범의 인기도 사그라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다른 멤버들이 SNS에 스타피스의 최근 불화설에 대한 원인으로 주창범을 지목한 것이다.

'대체 왜?'

하루에 수천, 수만 개의 악플이 달리기 시작했다.

―방송 나와서 고아라고 사연 팔이 하더니 ㅉㅉ. 이래서 애미애비 없는 새끼들은 걸러야 함 ㅋ

―주창범 저 개새끼가 평소에 우리 오빠들 때리기도 했대요. 그래서 창지오빠가 속상한 마음에 술 마셨다가 음주운전 하게 된 거라고 함 ㅠ

―지도 왕따에 학교 폭력 당했다더니, 유명해졌다고 벌써 그 시절 다 잊은 듯. 알고 보니 왕따당했던 것도 지 인성이 쓰레기라 그런 거 아님? ㅋㅋㅋ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의 심한 말들.

'엄마······ 보고 싶어······.'

주창범은 그날부터 바깥출입을 멈춘 채, 어둡고 싸늘한 방구석에서 웅크려 지내야 했다.

그리고 결국.

'곧······ 보러 갈게······. 사랑해, 엄마.'

뿌우우우우우우―

뿔피리가 울리고, 엄청난 숫자의 시선이 주창범에게로 꽂혔다.

알싸한 피비린내가 코끝을 찌르고,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고막을 얼얼하게 만들었다.

성벽 위에서 요동성의 수비병들이 아무리 화살을 쏘고 돌멩이를 던져도, 성문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적들의 숫자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수성전 진행 시간 : 28:05:59]

수성전 이틀째.

피가 흩뿌려지고, 살육의 광기가 끓어오르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뿐인 성문을 지키고 있는 주창범의 마음은 너무나 평온했다.

'훨씬 수월하네.'

좋은 스킬을 가지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적들은 주창범에게 꼼짝을 하지 못했다.

성문 중앙에 주창범이.

그리고 주창범의 좌우로 각각 한 명의 플레이어가 적들을 막고 있다.

그렇기에 중앙에 있는 주창범이 가장 많은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

'막는 것 하나만큼은 자신 있어.'

하지만 주창범의 얼굴에선 힘든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서걱! 서걱! 서걱!

―오늘 전투가 무척 중요해지겠는데요. 어제와 다르게, 오늘은 성문과 성벽에 각각 세 명씩밖에 안 붙어 있지 않습니까?

―저는 나쁘지 않은 판단을 했다고 봅니다. 철벽이라는 이름답게, 어제 주창범이 너무나 안정적으로 성문을 사수해내지 않았습니까. 그럼 오늘처럼 성문과 성벽에 각각 세 명씩만 투입해 놓고 나머지 네 명으로 총사령관을 공략하는 게 훨씬 낫죠.

―적 병력이 충분히 성문과 성벽에 붙어야 총사령관 공략조가 출발할 수 있는 만큼, 관건은 역시 주창범이 성문을 사수할 수 있느냐가 되겠는데요. 압력을 가장 많이 받는 곳이 성문일 테니까요.

"오늘은 어떻게든 뚫어내야 한다!"

"기병대가 들어올 수 있도록 길을 터줘! 어서!"

어제의 경험으로 인해 적들도 한층 지능적으로 전술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일반 보병으로 안 되니, 중장보병이 투입되었다가, 이제는 기병대까지 투입한 것이다.

두두두두두두―

무수한 말발굽 소리가 천지에 요동쳤고.

"으으."

"주창범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그 소리에 주창범의 좌우에서 함께 성문을 사수하던 플레이어들이 동요했다.

육중한 무게에, 엄청난 속도까지 곁들인 기병대의 돌파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초인의 경지에 한 걸음 내디딘 메인 이벤터들이라고 해도 그 돌격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침착하세요."

주창범은 단호한 목소리로 그들의 불안을 잠재웠다.

물론 두 손 놓고 기다리기만 한 건 아니었다.

띠링!

[스킬:동빙한설을 활성화합니다.]

[체력 소모가 2배로 빨라지는 대신, 근력과 민첩이 +15% 상승합니다.]

[시전자의 몸에서 엄청난 한기가 뿜어져 나옵니다.]

새로 얻은 스킬인, 동빙한설을 활성화한 것이다.

쏴아아아아아-

그러자 주창범이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돌담으로 이뤄진 성벽, 뻥 뚫린 성문, 주변의 흙바닥 등등 가릴 것 없이 얼어붙었고, 순식간에 빙판이 만들어졌다.

"헉."

"갑자기 한기가······!"

그 초자연적인 광경에 기병대를 위해 길을 터주던 적 병사들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주창범을 쳐다보고 있었다.

[남은 체력 : 49%]

체력 소모 두 배.

이런 다대일 전투에서는 체력이 가장 중요하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엔 동빙한설만 한 스킬이 없었다.

두두두두두두―

"이럇! 이럇! 어어! 조, 조심!"

"이히히히힝!"

"이히히힝!"

털썩! 털썩! 털썩!

'역시!'

말들이 빙판에 미끄러지며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모습을 본 주창범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넘어지는 전마, 떨어지는 기병들, 그리고 길을 터주던 보병들이 한대 뒤엉키며 순식간에 성문 입구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말이 아무리 네 발로 달리는 동물이라고 해도, 빙판길 위에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굴러가는 자동차들도 겨울철만 되면 미끄러져서 사고가 나기 일쑤였으니까.

'우진이형은 얼음 속성 스킬도 없으시면서 도대체 이런 걸 어떻게 아시는 거지?'

기병대의 돌격에도 주창범이 쫄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안우진 덕분이었다.

그와 훈련을 하며 얼음 속성 스킬의 응용을 배우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쯤 무척 당황하고 있었겠지.

'우진이형은 정말 대단해.'

―하하, 지금 정말 재미있는 장면이 연출됐네요. 아마 경기를 보시는 관객 여러분께서도 피식 웃지 않으셨을까 싶습니다.

―그나저나, 저번 경기보다 훨씬 안정적인 주창범의 모습에서 뭔가 달라진 게 있을 거라곤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얼음 속성 스킬들 덕분이었군요.

―공수 밸런스가 뛰어난 얼음 속성 스킬입니다만, 스페셜한 장점을 가지기도 쉽지 않아, 인기가 별로 없는데요. 그러나 수비가 좋은 주창범에겐 이보다 좋은 속성이 없을듯 싶습니다.

―팀 투지가 플레이어 육성에 한해선 정말 대단한 경지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부족한 점을 채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예 플레이어를 한 단계 높은 경지로 만들어 놨네요.

"뭣들 하는 게냐! 어서 일어나지 않고!"

"하, 하지만 돌격할 수가······!"

"말이 없으면 그냥 코 박고 죽겠다는 것이냐! 모두 돌격하라! 오늘은 어떻게든 성문을 뚫어야 한다!"

적 선봉대 대장이 검을 뽑아 들고 병사들을 독려하며 돌격해 왔다.

[남은 체력 : 37%]

그렇게 다시 시작된 2차전.

'동빙한설이 좋긴 한데 확실히 체력적인 면에선 타격이 크네.'

체력 소모율이 두 배로 상승하다 보니, 주창범의 체력이 빠르게 깎여나갔다.

챙! 채챙! 챙! 챙! 챙!

거기다 기병들의 공세도 만만치 않았다.

아무리 말에서 내려 싸운다고 하지만, 기병은 기병이었다.

평소엔 둔농을 하는 일반 보병들과 달리, 그들은 밥 먹고 훈련만 하는 병종.

일반 보병들보다 훨씬 예리한 공격들이 주창범에게 쏟아졌다.

'슬슬 빙하 갑옷을 써야겠어.'

[<스킬:빙하 갑옷>을 활성화 합니다.]

주창범은 지금까지 아껴뒀던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빙하 갑옷의 효과는 공격을 막을 때마다 한기가 뿜어져 나온다는 것.

그리고.

[<빙하 갑옷> 능력으로 체력이 0.3% 회복됩니다.]

[<빙하 갑옷> 능력으로 체력이 0.2% 회복······.]

기존에 가지고 있던 타격 회복의 상위 호환 스킬이라 막을 때마다 체력이 회복된다는 것이다.

거기다 타격 회복과 다르게 유지 시간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마력 스텟 1 포인트당 10초씩, 총 930초를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을 뿐.

'앞으로 900초'

챙! 채챙! 챙! 챙! 챙!

보병들보다 스텟이 더 높은 기병들의 공격.

덕분에 바닥을 찍던 주창범의 체력이 빠르게 회복되기 시작했다.

"젠장! 저 개자식은 지치지도 않나! 모두 더 힘을 내! 죽이지 못한다면 밀어내기라도 하라고!"

"장군! 성벽 위가 거의 점령되었습니다! 차라리 성벽을 공략하심이!"

적 장군과 부관이 외치는 소리에 주창범이 힐끗 성벽 위를 살피자, 엄청난 숫자의 적색 갑주를 입은 병사들이 보였다.

요동성 수비병들이 입는 갑주는 검은색.

한마디로 성벽 위가 적들에게 거의 점령되었다는 뜻이었다.

[현재 생존한 플레이어 수 : 10 명]

'아직까지 죽은 사람은 없어.'

그렇다는 건, 세 명으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적들이 성벽을 타고 있다는 것.

"두 분은 성벽을 지원해 주세요! 제가 혼자서 막겠습니다!"

마침 체력도 어느 정도 회복됐겠다, 등 뒤로 요동성의 수비병들이 지원을 해주고 있기도 하기에, 주창범은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한동안은 혼자서 버틸 수 있어요! 근데 성벽 위를 뺏기면 요동성이 점령당하는 건 시간문제에요! 빨리!"

다급한 주창범의 외침에 두 명의 플레이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빠르게 성벽 위로 올라갔다.

"으아아아악!"

"으윽!"

성벽 위를 수비하는 플레이어의 숫자가 세 명에서 다섯 명으로 늘자, 성벽 위에 걸어 다니는 적들의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그만큼 주창범이 받게 되는 압력이 훨씬 심해졌지만.

'이 정도는 충분하지.'

스킬들 덕분에 버틸 만 했다.

―와······. 지금 혼자서 몇만 명을 막아내고 있는 거죠?

―하하······. 보다 못한 적 부대의 천부장들이 주창범을 뚫기 위해 나섰지만,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압도적인 숫자로는 안 되니까 소수 정예로 나선 모양인데, 역시 뚫지를 못하네요. 주창범이 원래 저렇게 강했던가요?

―그동안에도 정말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오늘은 차원이 다르네요. 마치 한 명의 네임드를 보는 느낌입니다. 주창범도 지구 출신 아니었던가요? 정말 대단하네요.

죽여도 죽여도 끝없이 몰려드는 적군들.

아마 룬이라는 플레이어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막아내는 데 그치지 않고 전부 불살라버렸을 것이다.

만약 안우진이었다면?

'혼자서 적군을 다 죽이고도 모잘라, 총사령관까지 처치하고 오셨겠지.'

그 두 사람은 자신과 차원이 다른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주창범은 이전처럼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저 방패를 단단히 세우고.

적들의 공세를 막아낼 뿐.

'어떻게든 우진이형을 따라가고 말 거야.'

목표는 이전과 똑같았다.

어떻게든 강해져, 안우진의 곁에 서는 것.

달라진 게 있다면.

띠링!

[적 총사령관 '주우량' 을 처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적장이 죽었다!"

"적 대장기가 꺾였다!"

"와아아아아아!"

'플레이어 룬과 달리, 나만의 방식으로 가겠어.'

호쾌하게 적들 사이를 돌파하고,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서너 명의 머리가 하늘을 날고.

주창범에겐 불가능한 일이다.

아니, 할 수 있지만 자신의 강점은 그게 아니다.

'절대 뚫지 못하게 만들어주지.'

적 총사령관이 죽었음에도 적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이전보다 더욱 격렬하게 성문을 뚫고 들어오려고 발버둥 쳤다.

그럴 때마다 주창범의 주위로 매서운 겨울 삭풍이 몰아치고, 싸늘한 혹한의 추위가 찾아왔다.

―아아! 결국 성문도, 성벽도 뚫지 못한 적군들이 물러납니다!

―총사령관을 처치했기 때문에, 내일부터는 다시 성문과 성벽에 다섯 명씩 붙게 되는데요! 고작 한 명이 지키고 있는 것도 뚫지 못했으니, 이제 요동성이 함락될 가능성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총사령관을 처치한 네 명의 플레이어들도 무척 대단했지만, 제 개인적으론 혼자서 성문을 사수한 주창범에게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네임드들이나 가능한 일을 해냈어요!

―섣불리 얘기할 순 없겠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조심스럽게 꺼내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지구에 세 번째 네임드가 등장했다고!

['퍼포먼스 오브 더 블러드' 보너스로 7,000 P를 지급받았습니다. (팀 '투지' 수수료 3,000 P 차감)]

['파이트 오브 더 블러드' 보너스로 7,000 P를 지급받았습니다. (팀 '투지' 수수료 3,000 P 차감)]

< 118화. 새로운 네임드(7) > 끝

< 119화. 단독 미션(1) >

―지구에 등장한 세 번째 네임드? 그 주인공은 지금까지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던 컨텐더, 주창범!

―끊이지 않는 지구 플레이어들의 약진! 룬을 시작으로 지구 플레이어들이 대거 상위로 넘어갈 것.

―열두 성계의 밸런스가 맞춰질 날이 머지않았다.

'호평 일색이군.'

개인 집무실에서 커뮤니티의 게시글들을 확인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경기를 직관한 아세리안이나, 포르도엘에게 주창범이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객관적으로 파악하기에는 커뮤니티 게시글만 한 게 없었으니까.

근데 게시글에 주창범의 닉네임이 도배된 걸로 보아, 이정도면 충분히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경기가 끝난 이후에도 특별한 이상 징후는 보이지 않았어.'

빠르게 향상된 실력에 녀석이 제법 들떠 보이긴 했지만, 그 정도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어제 모용악이나 루치아노 등과 대련시켰을 때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고.

'더 이상 내가 신경 써야 할 문제는 없는 것 같군.'

주창범 말고도 혹시 이전과 행동이 달라진 사람이 있나 꼼꼼히 체크했다.

그리고 한 명씩 개인 상담까지 진행한 결과, 주창범과 같은 문제가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걸로 팜에 생긴 문제는 일단락된 셈.

'이제 슬슬 성계 대항전을 준비해야겠어.'

마음을 먹은 나는 아세리안의 집무실로 향했다.

이전에 계획해 두었던, 상위 리그 네임드들의 정보를 모아달라는 부탁을 하려는 생각이었다.

원래 주창범의 얘기를 듣고 바로 부탁하려 했지만, 당시 아세리안의 표정이 너무 좋지 않아 일단 주창범의 문제부터 해결한 뒤에 얘기하려고 뒤로 미뤄두었던 것이다.

똑똑-

"아세리안님, 안우진입니다."

"네에. 들어오셔도 돼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아있는 아세리안이 방긋 웃으며 나를 맞이해 주었다.

'여전히 일이 많나 보네.'

책상 위에 수두룩하게 쌓여 있는 각종 서류들.

내가 많은 부분에서 도움을 주고 있고, 또 피넛엘과 포르도엘이 들어오면서 그녀의 업무 상당수를 대신해주고 있지만, 그럼에도 아세리안의 업무는 너무 많았다.

어느덧 팀에 소속된 플레이어의 숫자가 1,500명을 넘어선 상황.

이전에 비해 어마어마하게 늘어난 숫자인데도 여전히 생존율이 높다는 것은, 다 아세리안이 그들 하나하나를 꼼꼼히 체크하고 있는 덕분일 것이다.

"여전히 바쁘시군요."

"헤헤, 먹고 살려면 열심히 해야죠. 차 한잔 하시겠어요?"

"아뇨, 괜찮습니다. 아, 커뮤니티를 체크해 보니, 주창범의 반응이 나쁘지 않더군요."

"저도 확인했어요. 바로 직전 경기에서 엄청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그 짧은 시간에 문제도 해결하고, 오히려 더 강해졌다고 모두들 놀라더라구요. 덕분에 저한테도 문의가 엄청 들어오는 거 있죠? 정말 감사해요, 안우진님."

아세리안이 두 손을 맞잡은 채 내게 고마움을 표했다.

상위 리그 승급을 앞두고 있는 주창범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질 뻔했기 때문일까.

그 탓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안색이 무척 좋지 않았는데, 이제는 다시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것 같았다.

"제가 한 거라곤 약간의 조언 뿐입니다. 결과적으로 제 조언을 따르고, 골드도 모두 아세리안님이 부담하지 않으셨습니까. 아세리안님이 과감하게 결단을 내려주지 않으셨다면 주창범은 제법 오랫동안 방황했을 겁니다."

내 말에 아세리안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우진님이 아니었다면 전 해결 방법을 찾지 못했을 거예요. 그니까 모두 안우진님 덕분이 맞아요. 전에 주창범씨의 스킬을 고를 때 제가 드렸던 말씀 있죠? 그거 빈말 아니에요. 그니까 안우진님도 뭔가 필요한 게 있다면 꼬옥 말씀해주세요. 꼭이요. 알겠죠?"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내가 원하는 대답이 나온 것이다.

"안 그래도 마침 그것 때문에 왔습니다. 아세리안님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거든요."

"응응. 주저하지 말고 말해봐요. 제가 뭘 해드리면 될까요?"

아세리안이 빠르게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원한다면 플래티넘 등급의 스킬이라도 구해줄 기세.

하지만 나는 플래티넘 스킬을 구해달라는 부탁을 하지 않을 것이다.

구해달라고 해서 구해줄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얘기했겠지만.

'하늘의 별을 따다 달라고 말하는 격이지.'

중개 거래소를 체크하는 사용인을 구해달라, 그리고 클로에한테 플래티넘 등급 스킬이 보이면 바로 얘기해달라는 식으로 아세리안에게 은연중에 내비쳤다.

그리고 내가 보유한 골드로 구입하겠다는 의사를 충분히 표현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세리안은 지금껏 아무런 액션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한마디로 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플래티넘 등급의 스킬을 구하는 게 쉽지 않다는 것.

"아무래도 곧 상위 리그 성계 대항전이 열릴 것 같더군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상위 리그 네임드들의 정보를 구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기존에 계획한 대로, 그녀에게 정보를 구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주창범의 문제를 해결해 준 대가로 치자면 무척 가벼운 부탁.

"아······."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아세리안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

흔쾌히 수락할 줄 알았던 나는 그 모습에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하위 리그 성계 대항전 당시에도 그녀가 네임드들의 정보를 구해줬었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저만 믿으세요!' 라는 식으로 나올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아세리안은 지금까지 내 부탁을 거절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한동안 눈을 빠르게 깜빡이던 아세리안이 이내 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구해드리고 싶은데 쉽지 않을 것 같아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뇨. 그런 건 아닌데요. 음······. 혹시 하위 리그는 매 경기가 몇 시간이 걸리든, 관객들에겐 무조건 딱 1시간만 소요된다는 걸 아시나요?"

"네. 그래서 매주 토요일 오후 3시에 시작해서 새벽 1시에 끝나지 않습니까."

내 대답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근데 상위 리그부터는 조금 달라요."

"어떤 부분에서 다릅니까?"

그러자 아세리안이 아무것도 적혀져 있지 않은 새 종이를 꺼내 거기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여기가 천상계, 그리고 여기가 지하 마계예요. 그 가운데에 열두 중간계가 존재하는 거구요."

"예."

"안우진님이 최근에 다녀오셨던 지옥은 지하 마계와 중간계 사이에 있어요. 일명 삼지옥이라고 불리는 곳이죠."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아세리안이 큰 동그라미 두 개를 그렸다.

하나는 천상계와 중간계, 그리고 삼지옥의 일부를.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지하 마계와 삼지옥의 절반 가량이었다.

"이 원은 신성력이 미치는 곳이에요. 그리고 이 원은 마기가 미치는 곳이죠. 전에 경기하셨던 루에타 요새의 마성석 있죠? 그런 요새와 성, 그리고 거점 같은 게 지옥 곳곳에 퍼져 있어서 삼지옥에는 신성력이 통하지 않는 곳이 많아요."

"그거랑 경기랑 무슨 상관입니까?"

"아버지의 신성력을 통해 시간을 왜곡해서 한 경기를 한 시간 만에 볼 수 있는 거거든요. 근데 상위 리그부터는 삼지옥이라든가, 혹은 중간계라고 해도 마기의 기운이 강한 곳에서 펼쳐지잖아요. 그래서 경기가 펼쳐지는 동안 관객들이 소모해야 하는 시간이 훨씬 길어요. 대략 세 배에서 길게는 다섯 배 쯤."

"······!"

* * *

높이가 30미터를 훌쩍 넘는 거대한 돔형 건물.

원형 테이블에 열두 주신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열두 주신이 뿜어내는 엄청난 신성력 덕분인지, 회당에는 엄숙함이 감돌았다.

졸본을 다스리는 주신, 환웅이 입을 열었다.

"결국 마요엘을 놓쳤군요."

"쿠 훌린 파티가 전력을 다해 뒤쫓았지만, 마요엘이 록탄 성城으로 들어갔으니. 방법이 없었을 것이오."

티르너노그의 주신, 누아다의 말에 다른 주신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열 명의 상위 플레이어들로 성을 공략할 순 없는 노릇."

"권능과 능력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게 될 테니, 마계의 죄수 입장에선 상급 악마 한 명을 얻은 셈이 되었네요."

"그나마 다행인 건 다른 타천사들은 모두 제거했다는 것이오. 만일 그들마저 넘어갔다면 타격이 제법 컸겠지."

천사라는 존재는 신들에게 있어, 중요한 전략 물자였다.

마계와의 대전쟁을 통해 지금은 중간계의 영향력을 모두 천계가 차지할 수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언제 또 쳐들어올지 모르는 일이니까.

그날을 대비해 플레이어들을 키우고 있다곤 해도, 결국 천계의 주력은 천사들이 될 것이다.

"그렇다 해도 우리의 전력이 줄어들고, 마계의 전력이 늘어난 것은 분명한 사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나중에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될 것이오. 역시 고위 플레이어들을 보냈어야 한 건데······."

무림을 다스리는 주신, 반고의 말에 주신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모두들 저마다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미 지나간 일일 뿐. 그리고 애초에 가용 가능한 고위 플레이어가 없었지 않습니까. 물론 타천사를 놓친 건 뼈아픈 일임에는 분명합니다만. 결과가 어찌 나왔든 간에, 우리로선 최선의 선택을 했습니다."

그때, 환웅이 침묵을 깨며 말했다.

"아, 환웅님을 욕보이려 했던 것은 아니오. 단지······."

"반고님이 무슨 말씀을 하려고 하신 건지는 알고 있습니다. 고위 플레이어의 숫자가 부족한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신 것 아닙니까."

"그렇소."

반고가 고개를 끄덕이자 환웅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라고 왜 아쉽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타천사를 잡는 일에 천사들을 보낼 수도 없는 일이고."

"그러다 오히려 천사들이 사로잡혀, 마계로 끌려간다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클 것이오. 이번 일은 어쩔 수 없이 플레이어들을 내보낼 수밖에 없는 일이었소. 천사가 갔다면, 저들도 고작 하위 악마들 따위를 보내진 않았을 테니까."

"······."

주신들의 입장에선 언제나 이게 문제였다.

다섯 명의 대천사들은 플레이어의 육성을 맡고, 주신들은 그렇게 성장한 플레이어들을 이용해 마계의 공세를 틀어막는다.

그게 아버지께 받은 자신들의 사명.

하지만 마계의 공세는 점점 더 심해져 가고 있는데, 보유하고 있는 고위, 초월 플레이어의 숫자는 그대로다.

그렇기에 늘 인력난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상위 리그에서 쓸만한 플레이어들이 많이 나오길 바라는 수밖에 없겠군. 요즘 상위 리그에서 쿠 훌린과 주소월의 활약이 대단하던데, 이 두 사람은 어떻소."

오딘의 물음에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주신들이 말을 쏟아냈다.

"쿠 훌린은 정말 훌륭하더군요. 센스도 좋고, 판단력도 뛰어나고. 그런데 그런 걸 다 떠나서 일단 강합니다."

"오랜만에 상위 리그에서 대단한 플레이어가 나왔다고 생각하오. 그라면 지금 당장 올라와도 웬만한 고위 플레이어들만큼 활약해 줄 것이오."

"스타일이 저돌적인데도 안정감이 있어요. 얼마 전에 라그나 로드브로크와 싸우는 걸 봤는데, 상대가 안 되더군요. 분명 고위 리그에서도 멋진 활약을 보여줄 겁니다."

"주소월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이점을 확실하게 알고 싸우는 것 같던데요. 오히려 쿠 훌린보다 주소월의 생존율이 더 높을 수도 있습니다."

"기존의 플레이어들에게선 보이지 않던 새로운 유형이죠. 강하고 약하고를 떠나, 주소월 같은 플레이어가 고위 리그로 들어온다면 분명 기존의 플레이어들과 시너지를 발휘할 겁니다."

무척 격한 반응.

모두들 두 사람을 호평하기에 바빴다.

"그 두 플레이어 뿐만이 아닙니다. 긴급 미션 3일 뒤에 경기가 예정되어 있어 참가하지 못한 헥토르나 랜슬롯, 시르카, 몽연, 엔키두 같은 네임드들도 앞전에 얘기한 두 사람 못지않습니다."

긴급 미션이 열리고, 3일 뒤에 하이블러드나이트 125가 예정되어 있었다.

거기에 참가할 플레이어가 긴급 미션에서 죽게 되면, 리그에 큰 차질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긴급 미션 명단에서 빠진 이들이었다.

죽으면 대체할 자원이 없었으니까.

아니, 대체할 자원이 모두 긴급 미션으로 끌려갔었으니까.

"을지문덕과 카시아, 예천화, 아시카가를 빼먹으셨군요. 그들도 즉시 전력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모습에 오딘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럼 그 플레이어들을 빠른 시일 내에 올리는 걸로 하겠소.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그들보다 한 단계 아래인 온달과 오디세우스, 그리고 플로이드 같은 다른 네임드들은 어떻소?"

"음······."

"······."

하지만 이어지는 주신들의 반응은 방금 전과 딴판이었다.

모두들 쉽게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탐리엘의 주신, 일루바타르가 대답했다.

"그들이 약한 건 아니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긴급 미션만 봐도, 고위 플레이어 서너 명이면 클리어 가능한 미션을 그들은 열 명이나 되는데도 제대로 깨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고위 리그로 올렸다간 첫 번째 경기에서 대부분 죽어 나갈 겁니다."

"내 생각에도 그렇소. 아직은 좀 더 담금질이 필요할 것 같더군. 언젠가 고위 리그의 한 축을 맡아 줄 소중한 인재들을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고 모두 날려 먹을 순 없으니."

무림의 주신, 반고도 일루바타르의 말에 동조했고, 다른 주신들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모두 동의한다는 뜻.

그러자 환웅이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지금 당장 올릴 수 있는 전력은 고작 열 명 정도밖에 없다는 뜻이군요."

"예."

물론 열 명만 해도 커다란 보탬이 될 것이다.

워낙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으니.

하지만 요즘처럼 마계가 빠르게 성세를 늘려나가고 있는 상황에선 택도 없는 숫자였다.

"상위 리그의 투자금을 이전보다 늘려야 할 것 같소. 더 많은 포인트를 투자해 그들을 빠르게 성장시킨다면, 분명 그들도 빠르게 성장할 것이오."

"건의하시는 겁니까?"

"그렇소."

환웅의 물음에 오딘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 모습에 환웅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건의라고 보기엔 통보에 가까웠던 탓이다.

하지만 환웅은 금세 원래의 무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때였다.

"렌은 어떤가요?"

지금껏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알프헤임의 주신, 위그드라실이 말했다.

< 119화. 단독 미션(1) > 끝

< 120화. 단독 미션(2) >

"렌이라······."

"그도 이번 긴급 미션에서 충분하다 싶을 정도의 활약을 보여준 것 같은데 말이죠. 그런데 약. 속. 한. 것처럼 앞서 얘기한 여섯 분 중 한 분도 렌을 언급하지 않으시네요."

위그드라실이 오딘과 반고, 자이로스, 제우스, 샤, 아마츠카미를 바라보며 말했다.

순간 싸해지는 회당.

그러자 알라가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헛기침하며 입을 열었다.

"실력이 뛰어나더군. 나도 그가 충분히 고위 리그에서 잘 싸워 줄 거라고 생각하오."

"상위 리그로 올라온 지 얼마 안 된 걸로 알고 있는데, 성장세가 무섭더군요. 저도 렌이라면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관객들은 벌써부터 쿠 훌린 급으로 생각하고 있더군요. 뭐, 직접 싸워봐야 결과를 알겠지만 말입니다."

그를 시작으로 누아다, 일루바타르가 위그드라실의 말에 동의했다.

하지만 좋은 반응만 있던 건 아니었다.

"난 반대하오."

"나도 반대."

오딘을 시작으로, 아까 위그드라실이 언급한 여섯 주신들의 반대 릴레이가 이어졌다.

그러나 찬성하는 신들과 달리, 모두들 아무 이유나 근거 없이 오딘처럼 짧게 반대라고만 얘기할 뿐이었다.

"그는 지구 출신 아니오? 게다가 이제 막 상위 넘버링으로 올라왔고. 아직 상위 리그에서 더 검증해야 한다고 생각하오만."

그러다 마지막으로 나선 나카츠쿠니의 주신, 아마츠카미가 이유를 곁들어 반대했다.

그 모습에 위그드라실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미 긴급 미션에서 검증이 된 거 아닌가요?"

"그니까 한 경기만 보고 판단하기에는······."

"아, 지구 출신이란 게 걸리셨던 거군요. 아마츠카미님은 천하태평이시네요?"

"뭐, 뭐라?"

위그드라실이 말을 자르며 조소를 짓자, 아마츠카미가 미간을 찌푸렸다.

순간 싸늘한 분위기가 회당에 퍼져나갔다.

"말이 지나치시군. 주신으로서의 품위를 지켜줄 수 있겠소."

오딘이 위그드라실을 타박했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더 검증한다? 충분한 실력을 보여준 것 같은데요? 아마츠카미님은 그저, 렌이 지구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색안경을 끼고 보시는 것 같아 드리는 말씀이에요."

"······."

"당장 마계에서 끊임없이 지옥을 점령해 나가고 있어요. 이번에 마요엘을 놓친 것도 마계에서 무스펠하임의 록탄 성을 차지했기 때문인 것 아닌가요? 원래 우리, 천계가 차지하고 있던."

위그드라실의 말에 다른 주신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중간계와 마계 사이의 완충지대인 삼三지옥을 모두 차지하면 그들이 중간계를 노릴 거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사실. 그런 위급한 상황에 지구 출신이라서 마음에 안 드신다고요? 모두들 벌써 대전쟁을 잊으신 건 아니겠죠?"

"어찌 대전쟁을 잊었겠습니까. 무슨 취지에서 하신 말씀인지는 알지만, 일단 좀 진정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흠, 흠. 소녀가 실례했네요."

오딘의 만류에는 듣는 시늉도 않던 위그드라실이, 환웅이 나서자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또다시 찾아온 정적.

환웅이 검지로 테이블을 톡, 톡 두드리며 생각을 정리하다 입을 열었다.

"음. 렌이라······. 다른 네임드들과 다르게, 의견이 나뉘는 것 같군요. 그렇다면 주신 회의의 오랜 관례에 따라 다수결로 정하는 걸로 하죠. 저부터 한 분씩 돌아가며 렌의 고위 리그 승격에 대한 의견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전 찬성에 한 표 걸겠습니다."

"전 찬성해요."

알프헤임의 주신, 위그드라실이 말했다.

"나도 찬성하오."

티르너노그의 주신, 누아다가 말했다.

"찬성."

탐리엘의 주신, 일루바타르가 말했다.

"찬성입니다."

바빌론의 주신, 알라가 말했다.

"반대."

나카츠쿠니의 주신, 아마츠카미가 말했다.

"반대하겠소. 뭔가 꺼림직한 기운이 느껴져서 말이오."

미드가르드의 주신, 오딘이 말했다.

"나도 반대."

무림의 주신, 반고가 말했다.

"반대입니다."

웨스테로스의 주신, 자이로스가 말했다.

"반대."

하이퍼보리아의 주신, 제우스가 말했다.

"저도 반대입니다."

발리노르의 주신, 샤가 말했다.

찬성 다섯 명.

그리고 반대 여섯 명.

이제 남은 주신은 단 한 명 뿐이었다.

모든 주신의 시선이 한 명을 가리켰고.

찬성표를 던진 주신들은 미소를.

그리고, 반대 의사를 밝힌 여섯 명의 주신이 고개를 저었다.

"전 찬성하겠습니다."

지구의 주신, 퀴리오스(주 라는 뜻)가 말했다.

결과가 나오자 환웅이 상황을 정리했다.

"음. 동률이 나왔군요. 혹시 지금이라도 의사를 바꾸실 분 계십니까."

"······."

"그럼 주신 회의의 의장으로서, 타협안을 제시하겠습니다."

"타협안이라면?"

환웅의 말에 아마츠카미가 물었다.

"지금 반대 의사를 밝히신 분들의 주된 의견은 렌이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인 것 같더군요."

"그렇습니다."

환웅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시험대에 올려 보는 걸로 하죠. 그것도 혼자서 말입니다."

"혼자서······?"

"예. 상위 리그를 담당하고 있는 라파엘에게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렌의 경기를 잡아달라고 하겠습니다. 단독 미션으로."

"······."

"단독 미션이라면 렌의 정확한 수준을 가늠할 수 있을 겁니다. 거기서 렌이 성공적으로 미션을 수행한다면 최대한 빨리 고위 리그로의 승급을 추진하도록 하죠. 타협안에 동의하시겠습니까?"

환웅의 말에 주신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합니다."

"동의하오."

"저도 동의하겠습니다."

그 모습에 환웅이 손뼉을 짝! 하고 쳤다.

"자, 그럼 오늘 주신 회의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위그드라실님."

"네, 환웅님. 말씀하세요."

"대전쟁을 언급하신 건 무척 좋았습니다. 우리 모두, 대전쟁에서 승리하고 경각심이 옅어진 모양입니다."

환웅이 다른 열한 명의 주신을 쓸어보았다.

"고위 악마 블라디미르와 싸우다 대신大神 아르테미스가 영면에 들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실 겁니다. 당시 저와 오딘님, 둘이나 나서야 블라디미르를 처치할 수 있었죠."

"······."

"아르테미스 다음은 우리 차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환웅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파벌 싸움을 하시려거든, 마계를 쳐부순 다음에 하시죠. 다음 회의에서는 오늘과 같은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리라 믿겠습니다."

환웅이 한 명 한 명 눈을 마주치다, 마지막에 오딘을 뚫어져라 보았다.

오딘이 그 눈빛을 똑바로 마주하더니, 잠시 후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지."

* * *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였군.'

어쩐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닌데도 그녀가 난색을 표한다 싶었다.

단순 계산을 해보자면, 한 경기당 최대 5시간으로 잡고.

네임드가 못해도 50명은 될 테니, 한 경기당 한 명을 분석한다 쳤을 때 250시간이 소요된다.

잠을 한숨도 안 자고 봐도 열흘이 넘는 시간이었다.

'분석한 걸 정리하는 시간은 그보다 배로 걸리겠지.'

잘하면 한 달 넘게 소요될 수도 있고.

안 그래도 바쁜 아세리안이 한 달 이상을 통째로 날리며 경기를 직관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내 부탁을 들어줬다간 팜의 운영이 무너질 테니까.

"제가 너무 과한 부탁을 드렸군요. 어쩔 수 없죠."

나는 아세리안에게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할 것 같았다.

"저······ 직접 분석해서 드릴 순 없지만, 자료를 긁어서 모아드릴 순 있어요."

그런 나를 올려다보며 말하는 아세리안.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자료를 긁어서 모아준다······?"

"네.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다 보면 각 플레이어별로 공략법 비슷하게 올려놓는 신들이 있거든요. 다만 제가 직접 분석한 게 아니라서 그들의 정보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지는 판단할 수가 없어요."

"아, 괜찮습니다. 안 구해주셔도 됩니다."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정보들은 아무리 모아봤자 쓸모가 없지.'

신뢰할 수 없는 정보는 정보가 아니다.

대부분의 정보가 사실이라고 해도, 거짓된 정보가 하나라도 껴 있는 이상, 나머지 정보를 다 폐기처분해야 할 테니까.

'그걸 노리고 자기 팀 플레이어의 공략집을 작성하는 녀석들도 있었지.'

90%의 사실 속에 10%의 거짓을 섞어서 뿌리는 경우는 은근히 많았다.

사실이지만 쓸모없는 정보를 통해 신뢰를 주고, 그 속에 비수를 숨기는 거다.

단 한 번의 공방으로 승패가 좌우되는 콜로세움에서, 그 10퍼센트의 거짓 정보는 무척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직접 무기를 맞대는 와중에 얻는 정보도 신뢰할 수 없을 테니까.'

"제가 어떤 무기를 쓰는지, 어떤 스타일을 주로 구사하는지 정도는 어떻게든 알아봐 드릴게요."

"너무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뇨, 이 정도는 충분히 해드릴 수 있어요! 제가 만들어지는 대로 가져다 드릴게요."

"음,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뇨, 제가 오히려 죄송하죠. 모처럼 하신 부탁인데."

제대로 도와주지 못한다는 것에 미안해하는 아세리안을 뒤로하고, 나는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변한 건 없다.

구해봤자 성향이나 다루는 무기, 예상되는 스텟 정도겠지.

어차피 분석해 봤자 어떤 스킬을 가지고 있고, 발동 조건이 어떻게 되고, 그런 중요한 정보들은 얻지 못할 것이다.

'초감각으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어.'

스텟도 악마의 눈으로 확인하면 된다.

결국 그런 정보가 없어도,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우세한 조건에서 싸운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중개 거래소 오픈.'

특수 대련장으로 향하는 길.

나는 그 잠깐의 틈을 이용해 중개 거래소로 들어갔다.

꼭 플래티넘 등급이 아니더라도, 혹시 나와 시너지가 잘 맞는 스킬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쯧.'

하지만 그다지 쓸모 있는 스킬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중개 거래소에 올라오는 매물의 숫자가 많이 줄어있었다.

아무래도 어디선가 대규모로 골드가 풀린 모양.

내가 에덴과 안타레스의 보물 창고를 털었던 것처럼, 간혹 미션 중에 대량의 골드를 얻는 플레이어들이 있었다.

그럴 경우, 지금처럼 일시적으로 매물의 숫자가 많이 줄어들게 된다.

갑자기 생겨난 꽁돈에 흥청망청 써버리는 것이다.

'성계 대항전이 시작되기 전까지 대련으로 실전 감각이나 끌어올려야겠군.'

마침 이번에 카이로시아가 승급샷 오퍼를 받은 상황.

내 실전 감각도 유지할 겸, 카이로시아, 그리고 다른 플레이어들을 마구 굴려줄 생각이었다.

카이로시아 다음으로는 주창범이 승급샷 오퍼를 받을 가능성이 높을 테니까.

그렇게 한 명씩 상위 리그로 끌어올리다 보면 플레잉 코치로 받게 되는 포인트도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특수 대련장으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우진이형!"

특수 대련장에서 나온 주창범이 나를 발견하더니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것도 평소와 다르게 무척 다급해 보이는 모습으로.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형, 형! 빨리 커뮤니티 들어가 보세요! 상위 리그에서 성계 대항전이 열린다고 공식 오피셜이 나왔어요!"

'드디어 떴군.'

분명 주창범의 후기를 확인할 때만 해도 없었는데, 방금 막 올라온 모양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바로 커뮤니티를 열었다.

―공식 오피셜. 상위 리그에서도 성계 대항전이 열린다! 총 다섯 경기!

―상위 리그 게임 메이커. "다가오는 하이블러드나이트134에서 성계 대항전 열린다.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각 성계 상위 100명까지 참가. 그런데 지구는 렌, 단 한 명? 이걸 성계 대항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방금 전까지 경기에 관련된 게시글로 가득했던 커뮤니티가 성계 대항전 얘기로 도배되어 있었다.

하이블러드나이트 134이면 앞으로 3개월.

내가 예상한, 자격 정지 6개월이 끝나고 딱 2주일 뒤였다.

"형, 이게 말이 돼요? 상위 100명이라고 해도, 지구는 형 한 명 뿐이잖아요!"

주창범이 내게 열변을 토했다.

'이게 당연한 반응이지.'

성계 대항전을 열려는 라파엘이 비정상적인 거였다.

아마 대부분의 신들 반응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쩔 수 없죠. 미리 저한테 의견을 묻기도 했고요. 그리고 제게 그만큼 어드밴티지를 주기로 했습니다."

"휴우. 형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다행이긴 한데······."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주창범.

나는 녀석에게 살짝 미소 지은 후, 게시글 중 한 개를 클릭해 들어갔다.

―각 성계 상위 100명까지 참가. 그런데 지구는 렌, 단 한 명? 이걸 성계 대항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상위 리그 게임 메이커가 다가오는 하이블러드나이트 134에서 성계 대항전을 개최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성계 대항전은 총 다섯 경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성계 상위 100명이 참가한다.

참가하는 모든 플레이어들은 다섯 경기에 모두 참가 신청을 넣을 수 있고, 최종 우승하는 성계에게는 차원 특전을 부여하기로 했다.

하지만 여기서 의문이 남는다.

지구 성계의 플레이어는 단 한 명, 렌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렌은 혼자서 다른 성계의 1,100명과 경쟁해야 한다는 것.

과연 이걸 성계 대항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필자는 의심스럽다.

그에 대해 상위 리그의 게임 메이커는 "플레이어 렌에게 특별한 어드밴티지를 제공하기로 했다." 라는 답변을 내놓았다.

어드밴티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계 대항전에 한하여, 플레이어 렌이 보유 중인 스킬 다섯 개 중, 두 개를 플래티넘 등급으로 업그레이드 해준다.

어느덧 상위 리그 최상위 네임드로 군림하고 있는 렌.

하지만 애초에 성계 대항전에 참가하는 조건이 상위 1위부터 100위까지인 만큼, 대부분 비슷한 실력일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렌이 과연 저 어드밴티지를 받아들이고 성계 대항전에 참가할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

게시글을 읽자, 내 입매가 싸늘하게 굳었다.

'내가 지금······ 잘못 본 건가?'

서둘러 다른 게시글을 클릭해 읽어보았지만, 내용은 똑같았다.

두 개의 스킬을 플래티넘 등급으로 업그레이드 해주겠다는 것.

'하, 이것 봐라.'

세 개라고 분명 얘기가 됐는데, 막판에 이런 장난을 쳐?

'정말 멍청하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막 상위 리그로 올라와, 데뷔전도 안 치렀던 그때와 지금의 상황이 같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그렇다면 정말 멍청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일단 아세리안과 얘기를 나눠봐야겠군.'

만약 미리 얘기가 된 내용이 아닌, 일방적인 통보였다면.

그것도 직접 얘기해준 것도 아닌, 이렇게 게시글을 통해 통보한 거라면.

큰 곤욕을 치르게 될 것이다.

'차라리 잘 됐어.'

안 그래도 어떻게 때려줘야 할지 고민이었는데.

자기가 알아서 맞을 짓을 하고 있었다.

< 120화. 단독 미션(2) > 끝

< 121화. 단독 미션(3) >

주창범에게 양해를 구해, 대련 일정을 취소한 나는 곧장 아세리안의 집무실로 향했다.

"마침 잘 오셨어요, 안우진님."

문을 열고 들어서니, 방금 전과 달리 무척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세리안의 모습이 보였다.

'성계 대항전 오피셜을 봤군.'

저 모습으로 보건데, 그녀 또한 아무런 얘기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제대로 확인해 봐야 할 일.

나는 그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게시글을 보니까 스킬 업그레이드가 두 개로 줄어있더군요. 혹시 이와 관련해 전달받은 사항이 있으십니까?"

"아뇨. 저도······ 게시글을 통해 알았어요."

아세리안이 불쾌하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후우."

그녀의 대답을 들은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의도한 제스쳐였다.

'여기선 내가 기분 나빠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맞겠지.'

라파엘 뿐만 아니라 아세리안에게도 빌드업을 깔아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런 내 모습을 본 아세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제가 직접 게임 메이커를 만나보고 올게요."

"부탁드리겠습니다."

모든 일엔 순서가 있는 법.

일단 라파엘이 뭐라고 말하는지 들어보고 나서, 아세리안에게 얘기를 꺼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날 저녁.

띠링

[팀 '투지'의 주인, 아세리안 님께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집무실로 좀 와주세요!

아세리안의 메시지를 본 나는 곧장 그녀의 집무실로 향했다.

"어서오세요, 안우진님."

어두운 표정의 아세리안을 본 나는 그녀가 라파엘과의 대화에서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해내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우리에게 신경 써 줄 생각이 있었으면 이런 상황까지 오지도 않았겠지만.

"고생 많으셨습니다. 게임 메이커는 뭐라고 하던가요."

"휴우. 성계 대항전을 준비하느라 포인트가 부족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하네요. 이미 협의가 끝난 부분 아니냐고 물었더니, 방법이 없다는 대답만 되풀이할 뿐이었어요."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생각보다 일이 잘 흘러가고 있었다.

"그렇군요."

"이런 변동 사항이 있으면 당연히 안우진님께 먼저 양해를 구해야 하는 건데······ 하아. 라파엘님이 이전과 달리 많이 달라지셨더라구요. 타락이 걱정될 정도로."

긴 한숨을 내쉬는 아세리안.

그녀는 머리가 아픈지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꾹, 꾹 누르고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괜찮을 것 같은데?'

포인트가 부족하다?

그건 그들의 사정이지, 내 알 바가 아니었다.

하다못해, 정말 포인트가 부족했다면 직접 찾아와서 사정을 설명해줬어야 했다.

뭐 그래봤자 결과가 달라지진 않았겠지만.

'성계 대항전에 불참해도 되겠군.'

사실 이전부터 계속해서 생각해왔던 부분이었다.

성계 대항전을 뛴다고 내가 이득 볼 게 있을까?

그 질문에 나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잘 해봐야 본전이야.'

성계 대항전에 우승하고 특전을 얻는다?

그게 뭐?

이미 지구는 최강의 성계 특전을 가지고 있는 상태.

여기서 내게 이득이 있으려면 최소 10% 이상의 특전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손해지.'

예를 들어서 모든 스텟 12% 상승이라는 특전을 준다고 치자.

그래봤자 지구는 고작 2%밖에 추가되지 않는 셈이었다.

그 2%를 쟁취하기 위해 혼자서 다른 1,100명과 경쟁해야 한다?

굳이 저울에 올려볼 필요도 없었다.

'최소 20%를 주지 않는 이상엔 고민할 가치도 없어.'

하지만 그전까진 거절하기가 떨떠름했다.

물론 성계 대항전이 말이 되냐는 신들도 있겠지만.

'절반 정도의 신들은 성계 대항전이 열리길 바랄 수도 있지.'

근데 나 하나로 인해 성계 대항전이 어그러진다?

그럼 최소 절반의 팬들이 안티팬으로 돌아설 가능성이 있었다.

'근데 이젠 아니야.'

상황이 많이 달라졌으니까.

애초에 약속했던 걸 라파엘이 먼저 무너뜨렸다.

그것도 아무런 상의도 없이, 일방적인 통보로.

'아세리안은 게시글을 작성할 수 있지.'

그녀를 통해 내 이름으로 성명서를 내면 역풍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도 무척 좋았다.

1. 혼자서 지구를 대표해 참가한다는 것.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매치다. 참가하는 것 만으로도 내겐 손해가 날 수밖에 없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관객분들을 위해 그걸 감수하고 참가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3. 다만 아예 형평성에 어긋나면 관객분들도 납득하지 못할 것이기에, 플래티넘 등급의 스킬 3개를 '임시'로 받고 싶다는 뜻을 밝혔고, 상위 게임 메이커도 제안에 수락했다.

4.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런 상의도 없이, 2개만 주겠다는 오피셜을 발표했다. 우리는 오피셜이 나오고 나서야 어드밴티지의 규모가 축소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5. 그에 대해 상위 게임 메이커에게 직접 방문해 항의했다. 하지만 우리의 의견은 묵살되었다.

이런 내용의 성명서가 발표되면 관객들은 과연 나를 욕할까, 아니면 라파엘을 욕할까.

'굳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지.'

아마 라파엘의 입장이 무척 곤란해질 것이다.

'관객들은 그렇게 설득하면 되겠고.'

이제 라파엘과의 관계를 짚어볼 차례.

처음 제안을 들을 때와 달리, 현재의 난 상위 리그 최상위 플레이어 중 한 명으로 자리 잡은 상태다.

적어도 내게 한해선 더 이상 오퍼 가지고 장난치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다른 팀원들은 다르지.'

이게 내가 성계 대항전을 거절하지 못했던 두 번째 이유였다.

내게 직접 제재를 내리지 못한다면, 내가 소속된 팀 투지를 건드릴 거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었으니까.

슬슬 팀 투지에서도 하나둘씩 상위 리그로 올라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승급샷을 받은 카이로시아.

그 뒤를 이어 올라올 주창범.

아마 녀석들에게 불이익이 올 것이다.

그 후폭풍을 감당하는 게 내가 아니라, 아세리안이 되기 때문에 지금까지 얘기를 하지 못했을 뿐.

'빌드업은 충분해.'

"저······ 아세리안님께 먼저 양해를 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나도 아세리안에게 떳떳하게 말 할 수 있게 됐다.

그쪽에서 먼저 협상 테이블을 엎은 상황.

아세리안도 내게 불만을 품지 못할 것이다.

"네, 편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성계 대항전에 불참할 생각입니다."

"······."

"포인트가 없다? 그럼 우승 이후에 받을 보상을 더 신경 써준다던가, 하다못해 어떠한 성의라도 보이는 게 맞습니다. 왜냐? 제가 없으면 성계 대항전이라는 타이틀을 쓸 수 없을 테니까요."

"그렇죠."

"그런데도 아무런 상의 없이 오피셜을 뿌렸다는 것 자체가, 저와 아세리안님을 개무시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나는 일부러 아세리안의 이름도 함께 곁들였다.

나만 맞았냐? 너도 함께 뒤통수 맞은 거야.

이런 뉘앙스를 풍긴 것이다.

내 말에도 아세리안은 미동 없이 관자놀이를 꾹, 꾹 누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 기회가 지나면 더 이상 제가 게임 메이커를 상대로 우위에 설 수 있는 무기도 없습니다. 결국 이렇게 계속 끌려다니기만 하겠죠. 이번에 제가 그냥 넘어간다면, 다음에도 또 저를 쥐고 휘두르려 할 겁니다. 그러니······."

그때였다.

"저도 안우진님 생각과 같아요. 그냥 참가하지 마세요. 저도 이번에 똑똑히 느꼈거든요."

어떤 결심이 느껴지는 아세리안의 대답.

그녀의 모습에 나는 눈을 치켜떴다.

생각보다 그녀가 너무 순순히 응했기 때문이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저야 상관없지만, 팀 투지에 상당한 불이익이 올 수도 있을 텐데요."

아세리안이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녀의 눈동자엔 어떠한 망설임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건 제가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안우진님께선 충분히 할 도리를 다하셨어요. 이후에 어떤 불이익이 오든 감내하겠습니다. 그러니 안우진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셔도 돼요."

"······."

'하.'

똑 부러지는 그녀의 말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새내기에 불과했던 팀의 주인이.

'이제야 제법 팀 주인으로서의 풍모가 느껴지는군.'

어느새 완연한 팀의 주인으로 성장해 있었다.

지금까진 초월 리그로 올라가기 위해, 그녀와 전략적 동맹을 맺은 관계였지만.

'이젠 그녀와 운명을 함께해도 되겠어.'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알겠습니다."

"다행히도 좋은 소식이 있어요."

"좋은 소식······?"

내 물음에 아세리안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일부러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것 같았다.

"네. 라파엘님의 집무실에 갔더니, 주신 환웅님이 자리해 계시더라구요. 그분이 말씀하셨어요. 안우진님께 하이블러드나이트 126의 6경기 오퍼를 주겠다고."

하이블러드나이트 126이면 앞으로 2주 뒤에 열린다.

그런데 나는 아세리안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저는 플레이어 자격 정지 중이지 않습니까? 풀리려면 두 달 정도 남았을 텐데요."

"제 생각엔 아무래도 주신님들께서 긴급 미션 당시, 안우진님을 인상 깊게 보신 것 같아요. 그래서 오퍼가 들어온 게 아닐까 싶네요. 라파엘님이 주신에 필적하는 처우를 받는다는 거지, 실제로는 주신님들이 더 높으니까요."

'어쩐지.'

성계 대항전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오퍼가 들어왔다길래 이상하다 싶었다.

라파엘이라면 절대 주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비명횡사하면 그것만으로도 큰 문제가 될 테니.

그나저나 6경기라면······.

"상위 넘버링이군요."

"맞아요. 게다가 단독 미션이에요."

"그게 뭡니까?"

"안우진님 혼자서 경기를 뛴다는 거죠."

"······!"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혼자서······ 경기를 뛴다고?

'정말로?'

1회차와 2회차를 통틀어, 처음 들어보는 개념이었다.

개인 PvP 미션이라고 해도, 결국 여러 명이서 함께 뛰었으니까.

"아마 생소하실 거예요. 고위 리그에만 있는 개념이거든요. 콜로세움이 시작된, 지난 5년 동안 상위 리그에서 단독 미션이 열리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에요."

"아······. 어쩐지, 처음 들어본다 싶었네요."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좋은데?'

안 그래도 상위 리그에 거대한 폭풍을 몰고 오려는 상황.

거센 폭풍에 뿌리째 뽑혀 나가지 않으려면, 그 전에 최대한 내 입지를 다져놔야 한다.

'빌드업은 충분하지만.'

이런 일은 리스크를 최소화할수록 좋을 것이다.

내가 정말 대단한 활약을 보여줬다곤 하지만, 나는 하위 넘버링에서 두 경기, 그리고 긴급 미션 한 경기밖에 뛰지 못한 상황.

온달이나, 오디세우스 같이 수십 경기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준 네임드들과는 처지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상위 넘버링은 한 번도 뛰어보지 못했고.'

그런 의미에서 이번 단독 미션은 내게 딱 맞는 미션이었다.

모든 관객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 테니까.

이번 기회에 주신들, 그리고 관객들에게 렌이라는 닉네임을 제대로 각인시켜 줄 것이다.

'판을 깔아주겠다니, 제대로 보여주지.'

나는 조용히 각오를 다졌다.

―언제까지 최초 기록을 써 내려갈 것인가. 떠오르는 신예, 렌! 하이블러드나이트126에서 상위 리그 최초로 단독 미션을 수행한다.

└와 단독 미션 ㄷㄷㄷㄷ 심지어 상위 넘버링이네.. 상위 리그에서 성계 대항전이 열리기 전에 렌 제대로 띄워주려는듯..

└ㅁㅊ 게임 메이커가 관객들 제대로 우롱하네. 지구에 꼴랑 한 명 있는데 성계 대항전이 가당키나 하냐니까 렌한테 단독 미션 줘서 성계 대항전 이슈 묻으려고 하는 거자나ㅡㅡ

└윗댓, 대가리가 있으면 생각 좀 하고 사셈 ㅋㅋㅋㅋ 오히려 렌이 단독 미션 뛴다는 걸로 어그로가 더 끌리지, 뭘 이슈가 묻혀 ㅋㅋㅋㅋ 당장 게시글만 봐도 성계 대항전에 대한 글이 폭발적으로 올라오는뎈ㅋㅋㅋㅋ

└근데 렌한테만 너무 특혜를 주는 거 아님? 단독 미션은 선 넘었지 ㅡㅡ

└누구한테 들은 건데, 주신 환웅께서 직접 렌에게 단독 미션을 내렸다는 소문이 있음.

2주일 후, 하이블러드나이트 126 경기가 열리는 날.

"부디,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다녀오겠습니다."

배웅해주는 아세리안에게 고개를 끄덕인 나는 경기장으로 입장했다.

[모든 상태를 100%로 회복합니다.]

게이트를 넘어서자, 우거진 나무와 덤불들이 보였다.

태양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산속이군.'

챙! 채챙! 챙! 챙! 챙!

어둠이 내리깔린 산속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숫자는 대략 200에서 300.

검은 무복을 입은 무리와, 각양각색의 무복을 입은 무리 간의 전투였는데, 검은 무복을 입은 무리가 압도적으로 다른 이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장로님! 장로니이이임! 이 마구니 자식이!"

"크윽······. 반드시 네 놈만은 길동무로······ 커헉!"

'처절하게도 싸우네.'

곧 전멸할 것이 분명함에도, 각양각색의 무복을 입은 이들은 눈에 불을 켠 채 검을 찌르고, 휘둘렀다.

심지어 팔이나 다리 한쪽이 잘려 나간 채로 덤벼드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띠링!

[경기 : 상위리그-하이블러드나이트126의 6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유형 : 척살(개인 PvP)]

[게임명 : 이무기 사냥]

[맵 : 개봉(대)]

[관객 수 : 1,056,667 명]

[미션1 : 마교 교주가 마공을 극성으로 익힌 탓에, 악마화惡魔化가 진행 중입니다. 마교 교주를 처치하세요.]

[미션2 : 마교의 준동으로 인해, 정파 무림이 궤멸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마교의 고수들을 대거 죽여, 마교와 정파 무림의 균형을 유지시키세요.]

[현재 마교 교주의 악마화 진행률은 92% 입니다.]

[악마화 진행률이 100%가 될 경우 마교 교주가 완벽한 악마로 진화합니다.]

[마교 교주를 죽인 뒤에 반드시 <봉마의 화살>을 꽂아야 합니다.]

[예상되는 소요 시간 : 199:12:17]

[현재 마교와 정파 무림의 균형은 20:1 입니다.]

[마교 고수를 대거 처치해 균형을 5:5로 만드세요.]

'여기가······ 무림인가 보군.'

그들의 복장을 보자 이곳이 어디인지 대략적으로 유추할 수 있었다.

이번 단독 미션의 맵은 무림 성계였던 것이다.

< 121화. 단독 미션(3) > 끝

< 122화. 단독 미션(4) >

[주의!]

[외부적 요인 없이, 스스로 악마화 진행을 통해 악마로 진화할 경우, 상급 이상의 악마가 탄생합니다.]

[반드시 악마화 진행이 완료되기 전에 마교 교주를 처치하세요!]

[경기 시작!]

알림창을 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1회차, 그리고 2회차를 통틀어 무림은 처음이었다.

유독 잘 안 걸리는 몇 개 성계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무림.

'한 번도 가보지 못했지.'

그리고 지구.

[Tip]

[이들은 믿는 신이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원활한 미션 진행을 위해서, 자연스럽게 무림 성계의 인물로 녹아들어야 합니다.]

이어지는 알림창에 나는 눈을 치켜떴다.

원활한 미션 진행을 위해서 무림 성계의 인물로 녹아들라고?

'연기를 하라는 뜻인가 본데.'

팁으로 나온 내용을 본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저들은 모두 무복을 입고 있었다.

근데 나는 로브에, 그 안에는 가죽 갑옷을 입고 있다.

아마 저들에겐 내 복장이 무척 생소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내게 맞는 무복을 구할 수도 없는 상황.

'산속에서 혼자 살아왔다는 식으로 가는 게 좋겠군.'

지금으로선 내 복장 때문에 저들이 경계심을 가지면, 어떻게든 둘러대서 넘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플레이어 '렌'이 <화살:봉마의 화살>을 획득했습니다.]

[<화살:봉마의 화살>]

[죽은 사람의 영혼을 봉인시킵니다.]

[죽은 뒤 마계로 넘어가는 걸 막기 위해 만들어진 화살입니다.]

[<화살:봉마의 화살>을 사용한 뒤 반드시 회수해야 합니다.]

내 손바닥에 한 개의 화살이 나타났다.

검은색 바탕에 붉은 깃으로 이루어져 있는 화살이었다.

'일단 지금 싸우고 있는 사람들에게 마교의 교주가 어딨는지 정보를 얻어야겠군.'

콰지지지지지지직!

미션 내용의 파악을 끝낸 나는 곧장 검은 무복을 입은 사내들에게 달려들었다.

굳이 누가 마교고 누가 정파인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악마의 눈.'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광무해]

[성향 : 광신]

[근력 : 83(+?)] [민첩 : 86(+?)] [체력 : 59(+?)]

[정신 : 58(+?)] [지력 : 18(+?)] [마력 : 81(+?)]

[업적 특전 : 천마신교의 교인]

검은 무복을 입은 녀석들의 업적 특전에 천마신교의 교인이라고 떡 하니 쓰여 있었으니까.

마교로 추정되는 사람의 숫자는 200명.

하지만 그들의 숫자가 몇 명이나 되든 상관없었다.

녀석들의 평균 스텟은 70에서 100 사이.

그런 녀석들이 백 명이 됐든, 천 명이 됐든.

서걱!

내 앞에선 무의미한 숫자일 뿐.

"누구냐!"

"감히 천마신교天魔神敎의 행사를 방해하다니!"

단숨에 마인 세 명의 목을 베어버리자, 전투가 한창이던 다른 녀석들이 내게 덤벼들었다.

띠링!

[<벽력 >이 발동됩니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앙!

천둥의 숨결이 뇌룡의 포효로 업그레이드 되면서, 한층 더 검붉어진 뇌전이 사방을 휩쓸었다.

피의 강화 특전이 켜져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크기의 구덩이가 만들어지며, 단숨에 열 명의 몸이 터져나갔다.

"미, 미친!"

"엄청난 고수다!"

벽력의 위력을 본 마인들이 그때부터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상대가 안 되지.'

사실, 이들은 하위 리그 플레이어들이나 상대할 법한 수준.

이제는 중급 악마와도 일대일로 싸울 수 있는 내게, 녀석들은 불에 달려드는 부나방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서걱! 서걱! 서걱!

띠링!

[<피의 강화> 능력으로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30/30)]

[<피의 강화> 로 올릴 수 있는 스텟을 끝까지 채웠습니다.]

[<피의 강화>로 상승한 스텟이 30분간 유지됩니다.]

가볍게 창을 서너 번 휘둘렀을 뿐인데 어느새 30명을 넘게 죽인 모양이었다.

피의 강화 특전까지 켜지면서 내 근력과 민첩이 200 중반대로 올라섰다.

"끄아아악!"

콰직! 콰지지직!

덕분에 200명 정도의 마인들을 단 3분 만에 전멸시킬 수 있었다.

'상위 넘버링 경기치고는 너무 쉬운데?'

왜 이런 미션이 상위 넘버링에서 나온 거지?

'아냐. 분명 뭐가 있어.'

일단 현재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부터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살아남아 있는 무림인들에게 다가갔다.

모두들 얼이 빠진 표정.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친 정파인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일단 이들에게 현재 위치와, 상황, 그리고 마교 교주가 어디 있는지 정보를 알아내야 하기에, 나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모두들 괜찮으십니까?"

"아, 아수라!"

"아수라가 분명해······."

"······후우."

그 말을 들은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들이 또 시작이네.

└ㅎ.. 쟤들 입장에선 무서울 수밖에 없징.. 일단 거울부터 보고 오라구..

└ㅋㅋㅋㅋㅋㅋ 아수라가 쟤들 기준으론 악마 같은 거지?

└맞음 ㅋㅋ

└ㅋㅋㅋ 근데 얼핏 보면 마계에서 올라온 인물 같긴 함 ㅋ

'가면 때문에 그런가?'

어딜 가도 모두들 날 악마로 오인하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가면을 버릴 수도 없는 노릇.

가볍게 고개를 저은 나는 정파인들에게 다가갔다.

"저는 아수라가 아닙니다. 산속에서만 혼자 살아와서 복장이 이럴 뿐."

"······."

"혹시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

"······?"

그러자 정파인들이 똑같은 거리만큼 뒷걸음질을 쳤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저들을 도와주기 위해 온 내 입장에선 어이가 없는 상황.

'쯧.'

하는 수 없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멈춰선 나는 정파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여기, 대장이 누굽니까."

"······내, 내가 주장主將이오만······."

내 물음에 똘똘 뭉쳐 있던 무림인들 사이에서,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짙은 남색 무복을 입고 있는 노인이었는데, 가슴께까지 흘러 내려온 길다란 수염이 무척 중후해 보이는 인상을 주었다.

"현재 상황을 좀 듣고 싶습니다만."

"현재 상황이라면······?"

"여긴 어디고, 여러분은 여기서 왜 싸우고 있었고, 현재 무림맹 상태는 어떤지. 마교는 어디까지 내려왔는지 등등 전체적인 전세를 알고 싶다는 뜻입니다."

긴급 미션이 떨어졌던 무스펠하임에서와 다르게, 여기선 지도가 나타나지 않았다.

한마디로 내가 현재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는 뜻.

미션 내용이 나오기 전에 맵에서 개봉이라는 말이 나오긴 했지만, 무림 초행길인 내게 있어서 그건 있으나 마나 한 정보였다.

"아······ 나는 청성파의 남우태라고 하오. 과분하게도 강호의 동도들께 청성삼검이라는 별호로 불리고 있소. 혹시 귀하의 존성대명을 여쭤봐도 되겠소?"

뜬금없이 통성명을 하는 노인.

잠시 고민한 나는 입을 열었다.

"······저는 모용악······."

"······."

"······의 친구인 고건하라고 합니다."

관객들이 보고 있는데 내 실제 이름을 밝힐 수도 없고.

그렇다고 렌이라는 닉네임을 말하자니, 저들에겐 무척 생소한 이름일 것이다.

그래서 모용악이라고 하려 했는데, 저들의 눈초리가 매서워지는 걸 본 나는 곧장 고건하라고 바꿔 얘기했다.

"오······ 모용 공자의 친우분이셨구려! 실례했소이다. 모용 공자의 일은 들었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

"아, 예."

"미안하지만, 우린 현재 급히 어딜 가고 있던 길이라오. 혹시 다음에 얘기하면 안 되겠소?"

임기응변으로 급히 고건하라는 이름으로 바꿨음에도 불구하고, 청성파의 남우태라고 소개한 노인의 몸에선 붉은빛이 흘러나왔다.

급히 어딜 가고 있다는 것, 아니면 다음에 얘기하자는 것.

둘 중 하나는 거짓말이라는 뜻이었다.

―여 소협. 장로님께서 왜 저분을 데려가지 않으려고 하시는 거죠? 마인들을 죽였으니, 정도를 걷는 분이시지 않을까요?

―적의 기만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가 없소. 복장도 이상하고.

―하지만 혼자서 200명이나 되는 마인들을 죽였잖아요.

―마인들이라면 기만계를 위해 충분히 그럴 수 있소. 적인지 아군인지 속단하긴 너무 이르오. 그래서 장로님께서도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것이고.

―하긴······.

그때, 남우태의 뒤쪽에서 뭉쳐 있던 무림인들이 소곤거리는 게 들렸다.

마인들을 닥치는 대로 죽여댔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날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당장 눈앞에 있는 남우태도 웃는 낯을 하고 있지만, 끊임없이 내 여기저기를 살펴보고 있었다.

'어쩔 수 없군.'

싸아아아아아아―

내 몸에서 찐득찐득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급히 어디를 가야 한다라······. 그럼 묻는 말에 빠르게 대답해 주시면 되겠군요."

"······!"

"······!"

내 살기에 노출된 무림인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모두들 식은땀을 흘리며 온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이런 방법을 쓰고 싶진 않았는데.'

나는 이들에게 정보를 얻고, 협력해야 하는 입장.

그래서 되도록 강압적인 방법은 피하고 싶었는데, 당장 대화가 안 통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분명 찾아보면 다른 방법도 있겠지만, 문제는 내가 시간이 촉박하다는 것.

'상위 넘버링이 이렇게 쉬울 리 없어.'

적들이 아무리 많아봤자 결국 하위 플레이어들 수준이었다.

한마디로 미션 난이도가 너무 낮아 보인다는 뜻.

그런 의미에서 되도록 빠르게 마교의 교주를 처치하고 싶었다.

'여기서 변수는 교주라는 존재밖에 없지.'

미션창에선 분명 악마화가 끝나면 상급 이상의 악마가 탄생한다고 했다.

직접 만나본 중급 악마의 스텟은 200 중반대.

그렇다면 상급 악마는 300이 넘을 수도 있었다.

'문제는 상급 이상이라고 했단 말이야.'

최악의 경우 최상급 악마가 등장할 수도 있다는 것.

그렇기에 최대한 빨리 교주를 처치하는 것만이 변수를 줄일 수 있는 길이었다.

'여기서 낭비할 시간이 없어.'

힘은 곧 법이다.

만고불변의 법칙답게, 그 효과는 굉장했다.

"무, 묻는 것에 답해 주겠소!"

처음엔 저항하려는 기색이던 남우태의 반응이 180도 달라졌다.

'살기를 통해 내 경지를 가늠해 본 모양이군.'

현재 내 스텟을 보면 저항이라는 게 무의미하게 느껴질 테니까.

그의 대답을 들은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헉, 허억, 헉."

"우웩. 우우웩."

어느새 특급의 경지로 올라선 살기라서 그런지, 짧은 시간 노출되어 있었음에도 모두들 숨을 몰아쉬고, 개중엔 헛구역질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이들을 뒤로하고, 나는 남우태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하나씩 하죠. 마교 교주는 어디 있습니까."

"······그걸 알고 있었다면 우리가 먼저 그 천하의 마구니를 도륙하러 갔을 것이오."

'마교 교주가 어디 있는지는 따로 알아봐야겠군.'

남우태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린 나는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마교의 본거지는 어디입니까."

"신강의 천산이오."

"지도 있습니까?"

"없소."

"······."

"······여기 있소."

내가 한참을 노려보자, 남우태가 마지못한 표정으로 품속에서 지도를 꺼냈다.

그리고는 바닥에 펼쳐, 서북쪽 끄트머리의 한 산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가 천산이오. 거리가 제법 있는 편이지."

"우리가 현재 있는 위치는 어디입니까?"

"······?"

"······."

"여, 여기가 개봉이오."

'제법 먼데?'

남우태가 가리킨 곳은 지도의 중심 부근.

이 지도가 몇 배율의 축척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나의 성계인 만큼 아마 상당한 거리가 있을 것이다.

"현재 마교와의 전황은 어떻습니까."

내 물음에 한동안 날 빤히 쳐다보는 남우태.

그가 한숨을 내쉬며 개봉을 가리켰다.

"여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마교의 손에 들어갔소."

'생각보다 더 최악의 상황이군.'

굳이 예를 들자면, 서울을 제외한 모든 지역이 북한군에게 떨어졌다고 볼 수 있을 정도.

거의 궤멸 당했다고 봐도 될 것이다.

"개봉만 남았군요."

"아니. 정확히는 무림맹만 남았소."

"······."

정정해야겠다.

청와대만 남겨놓고 다 뺏겼다는 것으로.

하지만 남우태의 말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쯤 마교의 총공세가 시작되었을 것이오. 외부에 숨어 유격전을 펼치던 우리는 그 소식을 듣고 무림맹으로 지원을 가던 길이었고."

"······!"

'뭐라고?'

"무림맹이 정확히 어딥니까."

나도 모르게 싸늘한 말투가 튀어나왔다.

현재 위치는 깊은 산 속.

심지어 여기가 무슨 산인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지도를 봤음에도 무림맹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었다.

"이, 이쪽으로 쭉 가면 되오. 한 삼십 리 정도······."

남우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바닥을 박찼다.

[현재 마교와 정파 무림의 균형은 20:1 입니다.]

[마교 고수를 대거 처치해 균형을 5:5로 만드세요.]

승리 조건은 마교 교주를 처치할 것.

그리고, 5:5로 균형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파 무림의 비율이 0이 되면.

'마교의 교인들을 모조리 죽인다고 해서 5:5 비율을 인정해줄 리가 없어.'

아마도 미션 실패로 처리될 것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지금 마교의 교주부터 족치니 어쩌니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씨발! 늦지 않았길······!'

< 122화. 단독 미션(4) > 끝

< 123화. 단독 미션(5) >

"와아아아아아!"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챙! 채챙! 챙! 챙! 챙!

무림맹에 도착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늦지 않았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체도 별로 없고, 피를 묻은 사람들도 거의 없었다.

그렇다는 건, 이제 막 전투가 시작되었다는 것.

서걱!

나는 곧장 창을 휘두르면서 마인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뭐지?'

근데 뭔가 이상했다.

'마인들의 스텟이 너무 높은데?'

무림맹에 쳐들어온 마인의 숫자는 대충 어림잡아도 5천 명 이상.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연정만]

[성향 : 광신]

[근력 : 86(+?)] [민첩 : 84(+?)] [체력 : 59(+?)]

[정신 : 58(+?)] [지력 : 18(+?)] [마력 : 80(+?)]

[업적 특전 : 천마신교의 교인]

그런데 그들 하나하나의 스텟이, 하위 리그 코메인 이벤트 급이었다.

아무리 무림이 열두 성계 중 가장 강한 네 개의 성계라곤 하지만,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였다.

'발리노르의 소드 마스터들도 100을 겨우 넘겼는데.'

사실, 아까 만났던 청성파의 장로, 남우태가 싸우던 마인들도 비슷한 스텟이었다.

그땐 200명밖에 안 돼서 그냥 마교의 정예들인가 보다 했는데, 알고 보니 그들도 모두 마졸에 불과했던 것.

'이게 가능한 건가?'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게다가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근력이랑 민첩, 마력이 비정상적으로 높아.'

보통 근력과 민첩을 단련하다 보면 체력은 자연스럽게 상승한다.

뭘 수련하든 체력을 소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근민체를 묶어서 부르는 것.

그런데 이들은 근력과 민첩에 비해 체력이 너무 낮았다.

'근력과 민첩을 인위적으로 보정 받았다는 뜻이군.'

거기다 중요한 건.

'업적 특전에 천마신교의 교인?'

저들 모두 업적 특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냥 마교에 소속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특전을 받는다고?

혹시 일부 마인들만 그런 건가 싶어, 다른 마인들도 확인해봤지만 모두들 업적 특전을 가지고 있었다.

'뭔가 있군.'

일단 여기 있는 마인들을 모조리 죽인 뒤에, 정파인들에게 정보를 구해봐야 할 것 같았다.

"흑살대! 저 가면 녀석부터 처치하라!"

"옛!"

그때, 중심부에 있던 누군가가 마인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녀석이 적장.'

이런 집단전에선 대장부터 처치하는 게 정석.

나는 몰려드는 마인들을 베며 적장에게 내달렸다.

'악마의 눈.'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궁소무]

[성향 : 광신]

[근력 : 138(+?)] [민첩 : 134(+?)] [체력 : 96(+?)]

[정신 : 91(+?)] [지력 : 34(+?)] [마력 : 142(+?)]

[업적 특전 : 천마신교의 장로]

[종족 특전 : 악마의 권속眷屬]

'미친.'

적장의 상태창을 확인한 나는 어이가 없었다.

마교의 교주도 아니고, 고작 장로에 불과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근력과 민첩이 130을 넘어가고 있었다.

중간계의 존재가 상위 리그, 그것도 하위 넘버링에서 최상위 수준이라는 뜻.

거기다 녀석은 종족 특전까지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악마의 권속?'

아마 저 악마라는 게 마교의 교주를 뜻할 것이다.

[현재 마교 교주의 악마화 진행률은 92% 입니다.]

저 단어를 통해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추가로 알 수 있었다.

'악마화 진행률이 100퍼센트 다 차야만 되는 게 아닌가 본데.'

하긴, 인간인 상태에서 진행률이 100%가 됐다고 뿅! 하고 악마가 되진 않을 것이다.

내 생각엔, 신체 일부가 서서히 악마화 되어가는 과정에서, 악마의 능력을 조금씩 사용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뭐, 어쨌든.

"크윽······. 도, 도대체······?"

서걱!

고작 세 번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마교의 장로, 궁소무의 머리가 하늘을 날았다.

'굳이 뇌신강림을 쓸 필요도 없지.'

중간계의 상식에서 벗어나는 스텟을 보유했기에 놀란 거였지, 그게 내 상대가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피의 강화 특전이 활성화되며 내 근력과 민첩은 250을 넘어섰으니까.

"이럴 수가! 장, 장로님이!"

궁소무가 죽자, 마인들이 크게 동요했다.

"젠장! 빨리 맹주부터 처치해!"

내가 엄청난 고수라는 걸 알아차린 마인들이 그때부터 등을 돌려 정파 무림인들에게 달려들었다.

'멍청하긴.'

서걱!

덕분에 나는 등을 보인 마인들을 추풍낙엽처럼 쓰러트렸고.

"크아악!"

그때부터 내 독무대가 펼쳐졌다.

꽈광! 꽝! 꽈아아아아아아앙!

벼락이 흩뿌려지고, 간간이 벽력이 터지며 순식간에 마인들을 도륙해나간 것이다.

한 번 창을 휘두를 때마다 너덧 명의 마인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띠링!

[<피의 흡수> 능력으로 극소량의 체력 스텟을 흡수합니다.]

[체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후우.'

30분 남짓한 짧은 시간.

5천 명이 넘는 마인들을 모조리 죽인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상위 넘버링 경기이기에 쉬운 미션이 나오지 않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일단 상황부터 파악해야겠어.'

정파인들은 계속해서 마교와 전쟁을 치루어 왔을 터.

저들에게 물어보면 마인들의 스텟이 원래부터 저렇게 높았던 건지, 아니면 마교 교주의 악마화가 시작되면서부터 벌어진 일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정파인들에게 향했다.

악마의 눈을 사용해 보니, 대부분이 평균 스텟 60.

가장 높은 사람의 근력과 민첩이 130에 턱걸이로 걸쳐 있었다.

'역시 마인들의 스텟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거였군.'

"무량수불······."

다가갈수록 뒷걸음질 치는 정파인들.

'쯧.'

청성파의 장로 남우태도 그렇고, 이곳에 있는 정파인들도 나를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마인들을 학살했음에도 아군이라고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엔 또 뭐라고 둘러대야 하려나.'

그래도 일단 말문을 트긴 해야 한다.

마인들이 원래부터 저렇게 강했는지, 그리고 현재 정파의 상황은 어떤지.

마교의 어디를 공략해야 하고, 마교 교주를 어떻게 해야 만날 수 있는지 알아내려면 이곳에서 평생을 살아온 저들의 도움이 꼭 필요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였다.

'뭐지?'

다른 정파인들과 다르게, 우두커니 서서 날 빤히 바라보고 있는 20대 중반 정도의 여자가 있었다.

너무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기에, 한순간 날 아는 사람인가? 라는 의문이 들었을 정도.

싸우기 편하게 머리칼을 위로 틀어 올려 동그랗게 묶고, 짙은 초록색 무복을 입은 여인이었는데, 길다란 검이 하늘하늘 거리는 걸로 보아, 연검을 사용하는 것 같았다.

'저 사람에게 물어봐야겠군.'

마침 모두들 뒤로 물러서고 있어서, 계속 다가가면 여인과 정면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

나는 그대로 여인에게 똑바로 걸어갔다.

* * *

"맹주님을 지켜라!"

"한 놈이라도 더 길동무로 데려가야 한다!"

검은 무복을 입은 마인들 무리가 단체로 무림맹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마치 검은 태풍이 불어오는 모습.

검은 바람에 닿을 때마다 무림인들이 픽픽 쓰러져 나갔다.

'하아. 하아.'

그 광경을 보면서 당소소는 숨을 몰아쉬었다.

검을 쥔 그녀의 손에서 식은땀이 한가득 배어 나왔다.

'적의 숫자가 너무 많아.'

마교의 공세는 무척 매서웠다.

천하 오대 세가라고 불리는 사천당가.

정파 무림을 대표하는 무림맹.

그리고 정파 무림을 구성하는 다양한 문파들.

오랜 역사, 오랜 전통, 그 안에 담긴 많은 사람들의 땀과 눈물.

그 모든 것들이 오늘부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겠지.

거센 태풍 앞에서, 아름답게 핀 작은 꽃송이는 버티지 못할 테니까.

'한 명이라도 더 내 손으로 죽이고 말겠어.'

당소소는 친우와 선배들을 베어 넘기는 마인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녀의 검이 팔랑팔랑 휘며 적의 급소로 날아들었다.

챙! 채챙! 챙! 챙!

하지만 당소소의 검은 마인들에게 너무나 쉽게 제지당했다.

강호에 이름난 마두가 아닌, 마졸들임에도 불구하고.

"호오. 제법 반반하게 생긴 년이구나."

"엉덩이라도 흔들어 볼 테냐? 그럼 살려주도록 하지."

당소소를 본 두 명의 마인이 히죽히죽 웃으며 다가왔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귀를 씻어내고 싶을 만큼 치욕적인 모욕이었지만, 당소소가 할 수 있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지?'

오랜 전쟁으로 인해, 독과 암기들은 모두 떨어진 상태.

하지만 그것들이 있어도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름 없는 마졸들조차, 전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했으니까.

마교에 소속된 무인들 전부가, 천하에 이름난 영약을 하나씩 먹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아무리 휘둘러도 당소소의 검은 저들에게 닿지 않았다.

"앙칼진 년이군.'

"후후, 차라리 잘 됐어. 이런 년들이 길들이는 맛이 있는 법이지."

당소소는 모욕적인 말을 들을 때마다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챙! 채챙! 챙!

그럼에도 마음 한켠엔, 절망이 내려앉았다.

저들은 그녀를 상대하면서도 웃고 떠들며 장난치고 있었다.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수준 차이가 난다는 것.

'곧······ 만나러 갈게.'

죽는 건 두렵지 않았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제도, 자매도.

그리고 친구들도.

모두 저 더러운 마인들의 손에 죽었으니까.

다만, 한 명이라도 더 죽이지 못한다는 게 천추의 한일 뿐.

'천지신명이시여.'

많은 걸 바라지 않겠나이다.

부디 제가.

단 한 명의 마인들이라도 더 벨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당소소가 작게 읊조렸다.

그때였다.

쾅! 콰과과광! 콰광! 쾅! 쾅!

짙게 깔린 어둠 속에서 빛이 번쩍였다.

열 줄기 벼락이 암흑으로 잠긴 하늘을 갈랐다.

천둥소리에 당소소의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

"누구냐!"

"끄아아아아악!"

"이런 미친!"

그와 동시에 무림맹의 대문을 넘는 마인들 쪽에서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무슨?"

그 소란에 당소소를 압박하는 마인들의 시선이 잠시나마 대문 쪽으로 향했고.

'빈틈!'

당소소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커헉······."

서걱! 서걱!

바로 자세를 낮춘 채 파고들어, 마인들의 목을 베어버린 것이다.

"하아. 하아."

당소소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왼쪽 어깨가 화끈거렸다.

그녀가 목을 베기 전, 마인들이 반사적으로 휘두른 검에 당한 것이다.

'이깟 상처쯤은 아무것도 아니야.'

부욱- 부욱-

소매를 뜯어 어깨에 난 상처를 감싼 그녀는 곧장 다음 상대를 물색했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

순간, 대문 쪽에서 엄청난 빛기둥이 하늘로 솟구쳤다.

비명 소리를 동반한 엄청난 굉음이 그녀의 귀를 때렸다.

그리고 보게 된 광경.

'저게······ 사람이 보일 수 있는 위용이라고?'

가면을 쓴 채 온몸에서 검붉은 벽력이 뿜어져 나오는 괴인.

그의 창이 한 번 번뜩일 때마다 마인 서너 명의 목이 하늘을 날았다.

'아름다워······.'

무척 잔인한 광경임에도 불구하고 한순간 당소소가 그런 생각을 할 정도였다.

너무 빨라 눈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지만, 한 번 나타날 때마다 춤을 추듯 창을 휘둘렀다.

그때마다 피가 흩뿌려졌는데, 붉은 꽃이 사방으로 흩날리는 느낌이었다.

꽈광! 꽈과과과광!

암흑에 잠긴 하늘이 번쩍! 하고, 열 줄기 벼락이 괴인의 곁을 산산조각 냈다.

마치 강한 벼락이 검은 태풍을 찢어발기는 것 같았다.

'뇌공雷公······?'

뇌공은 천제天帝의 명을 받아 천둥 번개를 일으켜 악한 인간이나 귀신, 요괴들을 징벌한다는, 전설 속에서나 등장하는 존재다.

한마디로 허구 속의 존재라는 것.

꽈아아아아아아아앙!

"끄아아아아악!"

하지만 괴인의 무위는 당소소가 뇌공을 떠올릴 정도로 대단했다.

"이, 이럴 수가! 저 악귀 궁소무가······!"

"무량수불······."

천하백대고수 중 한 명이라는 마교의 화우신군火羽神君 궁소무가 고작 세 번의 공격을 받아내지 못한 채 죽었으니까.

서걱! 서걱! 서걱!

'천지신명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신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당소소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저 사람이라면.'

아버지와 남자 형제들을 잔인하게 죽이고.

어머니와 자매들을 겁탈한, 악마들.

이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되는 불구대천의 원수들을 모조리 죽일 수 있을 것이다.

"······."

"······."

마지막 남은 마인의 머리가 떨어지는 걸 끝으로, 무림맹 내부에 싸늘한 정적이 깔렸다.

그의 근처로 수천 구나 되는 시체들이 쌓여 있었다.

괴인이 살아남은 사람들을 한 번 쓸어보자, 그 눈길에 닿은 사람들이 몸을 움찔 떨었다.

당소소도 괴인의 붉은 눈동자와 마주치자 순간 숨이 멎을 정도였다.

후우―

길게 한숨을 토한 괴인이 팔을 한 번 크게 털자, 창에 묻은 피가 후두둑 쏟아졌다.

모두들 검을 들어 올린 채 침을 꼴깍 삼키며, 괴인을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뚜벅. 뚜벅. 뚜벅.

"으으······."

그리고 자신들을 향해 걸어오는 괴인.

붉은 피안개를 동반한 괴인이 다가오자, 모두들 뒷걸음질을 쳤다.

죽음을 각오하고 마지막 결사 항전을 펼치던 무림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포에 질린 것이다.

하지만 당소소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괴인을 똑바로 바라볼 뿐이었다.

어깨에 난 상처와 마인들을 죽이며 뒤집어쓴 핏물이 뚝, 뚝 흘러내렸다.

"다, 당 소저!"

"위험하오! 어서 뒤로!"

주변에 있던 동료들이 그녀를 불렀지만, 당소소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

그렇게 마주하게 된 두 사람.

가까이에서 본 괴인의 인상은, 그가 무척 강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슬픔을 간직한 눈동자야.'

분명 흔들림 없는 강한 눈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녀는 괴인의 눈이 무척 슬퍼 보였다.

그때였다.

"피를 흘리고 계시군요. 괜찮으십니까?"

괴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묵직한 저음.

그 목소리가······.

그리고.

희망이라는 단어가.

그녀의 가슴에 팍! 하고 꽂혔다.

< 123화. 단독 미션(5) > 끝

< 124화. 단독 미션(6) >

"당 소저! 어서 뒤로!"

"당 소저에게 털끝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반드시 도륙을······!"

여인과 조금씩 거리가 좁혀지자,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던 무림인들 사이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눈앞의 여인은 카이로시아와 비견될 정도로 엄청난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젊은 남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내게 달려들어 검을 휘두를 기세였다.

"모두 경거망동하지 마시오!"

하지만 그 소란은 여기서 스텟이 가장 높은 한 노인의 외침과 동시에 사그라들었다.

유일하게 스텟이 130에 걸쳐 있는 노인이었다.

'일단 내가 적이 아님을 먼저 보여줘야겠군.'

여인에게 다가간 나는 가장 먼저 그녀의 안부부터 물었다.

"피를 흘리고 계시군요. 괜찮으십니까?"

"······아, 네."

고개를 끄덕이는 여인.

나는 품속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

"피가 많이 묻으셔서요. 일단 이걸로 닦으시죠."

"가, 감사합니다."

그러자 여인이 두 손으로 내 손수건을 받아들었다.

'이 정도면 적이 아닌 건 충분히 보여줬겠지.'

나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지금 정파 무림의 상황을 듣고 싶습니다만."

"······."

하지만 그녀는 내 물음에도 건네준 손수건을 빤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지 얼마 안 돼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후.'

한숨을 내쉰 나는 소란을 진정시킨 노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곳의 책임자 되십니까?"

그러자 노인이 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눈앞의 여인을 걱정하는 내 모습에서 적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매, 맹주님! 안 됩니다!"

"뭣들 하는 게냐! 당장 맹주님을 안 모시고!"

그와 동시에 열댓 명의 정파인들이 무림 맹주 뒤로 우르르 따라왔다.

모두들 숨을 짧게 끊어 쉬고 있는 게, 많이 긴장한 것 같았다.

"진초풍이라고 하오. 과분하게도 무림 맹주 직을 맡고 있소. 이렇게 도와주어서 감사하오."

내게 다가온 노인이 허리를 살짝 숙이며 주먹을 감싸 쥐었다.

나도 어색하게나마, 노인을 따라 주먹을 쥐고 허리를 숙였다.

"고건하 입니다. 제가 산속에서만 살아와 세상 물정을 몰라서 그러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 좀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혹시 사문을 여쭈어도 되겠소?"

내 물음에도 불구하고 무림 맹주 진초풍은 내 출신 성분부터 물었다.

"······."

'젠장.'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보면 출신 성분을 묻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것만큼 적아를 나누는데 효율적인 게 없을 테니까.

문제는 내가 무림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것.

당신네들의 신이 보내준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싶지만, 미션 소개에서도 나왔듯 이들은 믿는 신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당신들을 구하러 온 신의 전사라는 말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랬으니까 상태창에도 자연스럽게 무림의 인물로 녹아들라고 팁을 준 거겠지.

우물쭈물하는 내 모습을 본 진초풍이 입을 열었다.

"내 생각이 맞다면, 귀하는 청룡문의 문주 같소만."

"······."

청룡문?

그게 뭐지?

진초풍에서 붉은빛이 흘러나오지 않는 걸로 보아, 날 떠보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청룡문이 맞다는 얘기를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이곳에 청룡문이라는 곳의 문주를 아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

남우태에게 모용악이라는 이름을 꺼내자마자 알아봤듯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여기서 괜히 내가 입을 잘못 놀렸다가, 거짓말이라는 게 들통난다면 시작부터 신뢰 관계가 깨지는 셈.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진초풍이 말을 이었다.

"내 전해 듣기로 일인전승의 신비 문파, 청룡문은 벼락을 자유자재로 다루는데, 강호에 큰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등장해서 정파 무림인들을 구해주었다고 들었소. 이번에도 정파 무림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자 은거를 깨고 등장한 것 아니오?"

진초풍의 말을 들은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일인전승, 신비, 은거.

언급한 키워드들로 미루어 봤을 때, 이곳에 있는 누구도 청룡문이라는 게 실존하는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

'차라리 잘 됐어.'

무림이 다른 성계보다 이런 쪽으로 더 깐깐하다는 것은 충분히 느꼈다.

거기다 마침, 나는 뇌전 속성에 특화되어 있다.

적당한 신분이 없는 내게, 청룡문은 저들에게 녹아들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숨기려고 했는데, 한눈에 알아보셨군요."

내 대답에 진초풍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정파 무림이 내 대에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줄 알았소. 그래서 등선하신 선배님들을 뵐 낯이 없었지. 그런데 이렇게 은거를 깨고 나와주어 감사하오. 정말 감사하오."

진초풍이 아까보다 더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그와 동시에 뒷걸음질 치던 다른 무림인들도 한 명씩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경계심이 한결 사라진 모습이었다.

파밧! 파바밧! 파바밧!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무림맹의 정문으로 빠르게 달려 들어왔다.

"오! 청성삼검께서 무사히 돌아오셨다!"

아까전에 내가 구해준 정파인들이었다.

정파인들은 나를 보고는 흠칫 놀라더니, 이내 빠르게 다가와 진초풍 앞에서 허리를 숙였다.

"맹주님을 뵈옵니다."

"맹주님을 뵈옵니다!"

"모두들 얼굴이 말이 아니구려. 고생 많으셨소."

"아닙니다. 더 빨리 오지 못해 죄송할 뿐입니다. 그런데······ 이분은······."

남우태가 말끝을 흐리자, 진초풍이 나를 한 번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아, 이쪽은 청룡문의 문주, 고건하 대협이시오. 마교 천하가 도래할 위기에 처한 걸 알고, 은거를 깨고 나온 귀인이시지. 조금 전에도 혼자서 간악한 마구니들을 모조리 도륙했소. 그 중엔 화우신군 궁소무도 있었지."

"······!"

진초풍의 말에 남우태가 나를 보더니 입을 벙긋거렸다.

그 모습에 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또 만나는군요."

"음? 두 분 이미 일면식이 있으시오?"

진초풍의 물음에 남우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오는 길에 마교의 흑풍대와 마주쳐 전멸할 위기에 처했었는데, 고건······ 고 대협께서 구해주셨습니다."

"역시 청룡 문주님!"

"하아. 천지신명이시여······ 정말 감사합니다······."

남우태의 말에 그동안 긴가민가하던 무림인들이 완전히 나에 대한 경계를 풀었다.

모두들 앞다퉈 다가와 내게 고마움을 표하기 바빴다.

그런 이들을 뒤로하고, 나는 진초풍에게 본론을 꺼냈다.

"마인들이 원래 저렇게 강했습니까?"

계속해서 떠나지 않는 의문이었다.

마교의 일반 병사들조차 근력과 마력이 70을 넘는다는 것.

근데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였다.

만약 사후에 콜로세움으로 들어온다면 준네임드 급으로 분류될 정도였으니까.

'근데 그런 녀석들을 내가 방금 5천 명이나 죽였지.'

당장 콜로세움에 준네임드 급 플레이어 5천 명이 풀린다면 혼돈의 도가니가 될 것이다.

무림인들이 하위 리그를 씹어 먹는 건 당연한 거고.

거기다.

'정파인들과 마인들 간의 스텟 차이가 너무 커.'

처음부터 세력의 균형이란 게 이루어질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무림맹의 건물들을 보면 꽤 오랜 역사가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는 건.

'원래 정파와 마교 간에 균형을 이루고 있었을 거야.'

아니면 정파가 조금 더 우세했거나.

"음······. 후우. 원래는 그렇지 않았소. 그동안 끊임없이 서로를 견제해 왔지만, 그래도 정파 무림이 더 우세한 편이었지. 그런데 석 달 전쯤부터 무슨 영약을 단체로 집어 먹은 건지, 갑자기 일반 마졸들도 어지간한 대문파의 제자들을 능가하기 시작했소."

진초풍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내 생각대로 마인들은 인위적으로 강해진 것이었다.

'대충 짐작 가는 부분은 있어.'

현재 마교 교주의 악마화 진행률은 92%.

남은 시간은 198시간 정도.

퍼센트 당 시간이 비례한다고 쳤을 때, 3개월 전부터 악마화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교주의 악마화가 진행되면서 모든 마인들이 특전을 얻은 거였어.'

그렇지 않고서는 지금 상황이 설명되지 않았다.

"현재 상황은 어떻습니까."

"음. 상황을 설명할 것도 없소. 이곳, 무림맹에 있는 인원이 남은 정파 무림인의 전부요."

"마교는 몇 명 정도 됩니까?"

"각 문파에서 마지막으로 날아온 전서구들을 종합해 봤을 때, 60만 정도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소."

'60만이라······. 뭔가 이상한데?'

현재 무림맹에 있는 인원은 대략 5천에서 6천 정도.

미션 알림창이 설명한 전력 비율은 20대 1이었다.

거의 100배나 차이 나는 숫자.

그런데도 세력비가 20대 1이라는 건.

'어딘가에 정파 무림인들이 숨어 있는 모양이군.'

그렇지 않고서야 저 전력 비율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마교 교주는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진초풍이 무겁게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도 백방으로 수소문 해봤으나,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었소."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상위 넘버링이었군.'

내가 죽여야 할 타깃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을 지키며 마교 교주를 찾아내 죽여야 한다는 것.

궁소무라는 장로의 스텟으로 추정해 보건데, 마교 교주의 스텟은 200을 넘을 가능성이 컸다.

그런 상황에서 제한 시간까지 걸려 있다.

'신경 써야 할 게 너무 많은데.'

하지만 어떻게든 해내야 한다.

나는 하나씩 차근차근 풀어나가기로 했다.

띠링!

[무림인 '진초풍'의 그림자에 표식이 등록되었습니다.]

"앞으로 3일을 드리겠습니다."

"······?"

"3일 동안만 여러분을 위해 창을 휘두르고, 그 뒤로는 마교 교주를 찾으러 다닐 겁니다."

"그 말은······?"

"3일이란 한정된 시간 동안, 저를 이용해 최대한 많은 마인들을 죽이란 뜻입니다."

미션창에선 분명 악마화 '예상' 시간이라고 했다.

오차 범위가 있을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최대한 빨리 마교 교주를 처치할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일단 정파 무림이 안전해져야지.'

그 시간 동안 정파 무림의 안전을 위해 마인들의 숫자를 대폭 줄일 것이다.

'한 30만 명 정도 죽이면 저들도 우왕좌왕하겠지.'

잘하면 나를 저지하기 위해 마교의 교주가 직접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고.

'나는 스텟 쭉쭉 빨아먹고.'

일석이조라고 할 수 있었다.

촤락!

나는 남우태에게 강탈한 지도를 꺼내 바닥에 펼쳤다.

"어디를 먼저 부셔드리면 되겠습니까?"

저들은 지금까지 계속해서 마교와 전쟁을 해왔다.

내가 임의대로 돌아다니는 것보다, 저들이 원하는 곳을 부셔주는 게 훨씬 전략적일 것이다.

"······일단 섬서에 있는 마인들부터 정리해주면 좋겠소."

"그다음은요?"

"······?"

"계속 쭉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순서대로 돌아다니면서 처리해 드릴 테니까요."

난 저들보다 월등한 신체를 소유하고 있고, 가면 덕분에 체력적인 부담도 없다.

하루에 서너 군데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그럼 섬서, 호북, 안휘······."

진초풍이 이름을 쭉 나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더 얘기해 보라는 듯 턱짓하자, 최종적으로 스무 곳 정도가 추려졌다.

"그럼 그렇게 알고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지도를 돌돌 말아, 품속에 넣었다.

그때였다.

"저, 저도 데려가 주세요."

지금까지 날 빤히 쳐다보고 있던 여인이 나와 진초풍 사이로 끼어들었다.

"산속에만 계셨다고 그랬죠? 그럼 아무리 지도가 있다고 해도 길을 찾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소소. 네가 낄 자리가 아니다."

그러자 진초풍이 그녀에게 한마디 했지만, 소소라고 불린 여인은 포기하지 않았다.

"3일이란 시간밖에 없다고 하셨죠? 근데 길이라도 잃으면요? 시간이 낭비되지 않겠어요? 전 무림맹의 모든 정보를 맡고 있는 은월각의 부각주. 제 머릿속엔 마인들이 어디에 있는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요. 절 데려가시면 분명 쓸모가 있을 거예요."

사실 여인의 말처럼 길잡이가 있으면 지도를 보고 혼자서 무작정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효율적일 것이다.

물론 250이 넘는 민첩을 따라오진 못하겠지만, 그거야 내가 업고 뛰면 된다.

체력적으로 손해 보는 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피의 회복 덕분에 계속해서 체력이 회복될 테니까.

'근데 여자라면 말이 다르지.'

이곳은 딱 봐도 지구의 조선시대 쯤 되는 세상.

과연 여인이 외간 남자의 등에 업히려고 할까?

나는 진초풍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길잡이가 있으면 더 효율적인 건 분명한 사실. 하지만 저는 데려가야 한다면 한 명만 데려갈 겁니다. 제 속도를 못 따라올 테니까 업고 달릴 생각이거든요."

'괜히 방해만 될 뿐이니까 길잡이를 붙여주려면 알아서 남자로 골라주시죠.'

그런 속뜻을 담아 얘기했다.

연륜이 풍부한 노인답게, 내 말뜻을 알아들을 것이다.

하지만 진초풍보다 소소라고 불린 여인이 더 빨랐다.

"그럼 더 잘됐네요. 남성분들보다 제가 훨씬 가벼우니까 절 데려가면 체력 소모도 더 적으실 거예요. 거기다 여기서 마인들이 어디 있는지 저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어요. 절 데려가 주세요."

당소소라는 여인이 근거를 들어, 자신을 데려가 달라며 설득한 것이다.

뭐, 체력 소모가 적은 건 내 입장에선 별로 큰 메리트가 아니었지만.

그러자 진초풍이 여인을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현재 당가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소소, 너 뿐이지 않느냐. 당가는 데릴사위를 들인다는 전통도 있으니, 네가 살아있다면 대가 끊겼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목숨을 보전하거라. 내 알아서 영민한 사람을 붙여줄 것인즉."

하지만 소소라고 불린 여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전 반드시 당가의 사람을 해친 마인들이 도륙당하는 모습을 직접 봐야겠습니다."

"하지만······."

"맹주님도 고 문주님이 화우신군을 단숨에 베어버리는 걸 직접 보지 않으셨나요? 고 문주님을 따라간다고 제가 위험할 거라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저는 길 안내만 할 뿐,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않을 거예요. 한쪽에 숨어 있겠습니다."

여인이 뜻을 꺾지 않자, 곁에 있던 미남자도 앞으로 나섰다.

"그럼 제가 당 소저와 함께하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남자를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말씀드렸다시피 동행은 한 명만 받을 생각입니다. 제 속도를 따라올 수 있다면야 모르겠지만요."

"그럼 당 소저 대신 저를······."

그러자 여인이 미남자의 말을 잘랐다.

"팽 공자."

"예?"

"당장 첫 번째 목적지인 섬서 어디에 마인들이 주둔하고 있는지는 아시나요? 전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곳으로 가는 최단 거리도 제 머릿속에 있죠. 그리고 말씀드렸지만 저는 양보할 생각이 없어요. 반드시 마인들이 죽는 걸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말 거예요."

"하지만 업고 달린다고 하지 않소! 당 소저는 지금 고 문주님의 등에 업히겠다는 뜻이오?"

"네. 그래야만 절 데려가 준다면요."

'시간이 아깝군.'

이대로는 끝나지 않을 것 같기에 나는 먼저 선수를 쳤다.

"맹주님. 그냥 저 혼자 가겠습니다."

하지만 진초풍이 한 손을 들어,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손짓을 했다.

"소소야. 정녕 꼭 가야만 하겠느냐?"

"예. 은혜는 열 배로, 복수는 천 배로. 그게 저희 당문입니다. 직접 죽일 수 없다면 제 두 눈으로나마 똑똑히 보고 싶습니다."

당소소가 단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러자 진초풍이 눈을 질끈 감더니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런 그가 다시 눈을 뜬 건 1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제 아비의 고집을 그대로 빼다 박았군."

당소소를 보는 그의 눈빛이 무척 아련했다.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는 모양.

작게 한숨을 내쉰 진초풍이 말을 이었다.

"알겠다. 그래도 몸조심해야 한다."

"제 억지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맹주님."

기뻐하며 고개를 숙이는 당소소를 뒤로하고 진초풍이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염치없지만 잘 부탁드리겠소."

진초풍의 말에 뭐라 말하려던 나는 당소소와 눈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싫다고 하면 혼자서라도 따라올 기세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3일간의 시간 동안, 나는 당소소와 함께 다니게 되었다.

< 124화. 단독 미션(6) > 끝

< 125화. 단독 미션(7) >

3일간 내가 해야 할 것은 명확하다.

[현재 마교와 정파 무림의 균형은 20:1 입니다.]

[마교 고수를 대거 처치해 균형을 5:5로 만드세요.]

무림맹 근처의 마인들을 최대한 죽여, 세력비의 균형을 이룸과 동시에 정파 무림인들의 안전을 확보할 것.

그 과정에서 피의 흡수를 통해 스텟을 상승시킨다.

또한, 마인들을 고문해 마교 교주의 위치를 파악한다.

그런 이유 때문에, 발걸음을 옮기는 내 움직임엔 망설임이 없었다.

쐐애애애애애액!

한 번 바닥을 박찰 때마다 발아래로 빽빽하게 솟아있는 나무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얼마나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는지, 바람이 갈리는 소리가 날 정도였다.

팟!

"힘들면 바로 말씀해주세요."

"······괜찮아요."

바닥을 힘차게 밟으며 질주하자, 당소소가 두 다리로 내 허리를 조였다.

한 번 반동이 생길 때마다 내 목을 끌어안은 그녀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예상과 다르게 당소소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내게 업혀 왔다.

덕분에 누군가의 속도에 맞출 필요 없이 전력 질주할 수 있었던 나는 첫 번째 목적지인 섬서까지 30분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에요······."

섬서의 서안.

대도시라는 당소소의 설명과 다르게, 달빛에 비친 서안의 모습은 버려진 폐도시를 연상케 했다.

야시장이다 뭐다, 하며 시끄럽게 돌아다녀야 할 길거리에는 돌아다니는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고, 음습한 기운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이쪽으로."

등에서 내려온 당소소가 조용한 목소리로 나를 이끈 곳은 거대한 대문이 딸린 대저택이었다.

대문 위의 현판엔 구룡파 라는 글씨가 적혀져 있었고, 대문을 통해 검은 무복을 입은 무인들이 빠르게 오가고 있었다.

근처 골목길에 숨은 채 그 모습을 보던 내게, 당소소가 작게 속삭였다.

"여기가 섬서에 있는 마교의 지부예요. 원래 구룡파라는 문파가 있었는데, 멸문시키고 자신들이 전진기지처럼 사용하고 있는 거죠."

"저 안에는 몇 명이나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전서구를 주고받을 때만 해도 1만 명 정도의 마인들이 쳐들어왔다고 했어요. 마교의 십장로 중에선 세 명이 왔다고 했구요."

"십장로라면 제가 무림맹에서 죽였던 궁소무 같은 녀석을 말하는 겁니까?"

"네, 맞아요."

당소소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들을 통해 마교 교주의 위치를 알아내야겠군.'

"안전한 곳에 숨어서 기다리세요."

말을 마친 나는 곧장 구룡파로 내달렸다.

기습이고 뭐고 필요 없었다.

녀석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도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부수고 이동할 뿐.

"누구냐!"

"고수다! 모두 조심······!"

단숨에 대문을 지키던 네 명의 마인을 도륙한 나는, 곧바로 구룡파 내부로 들어갔다.

피우우우웅! 파바바박!

그와 동시에 새카만 하늘 위로 여러 개의 불꽃이 터졌다.

누군가 침입했다는 걸 알리는 신호용 폭죽일 것이다.

그러자 구룡파 내부에 있는 여덟 개의 건물에서 검은 무복의 마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고작 한 명 때문에 폭죽을 터트렸다고?"

"곱게 죽을 생각 하지 마라, 정파의 끄나풀이여."

'악마의 눈.'

나는 습관처럼 녀석들의 스텟을 하나하나 체크했다.

딱히 날 위협할만한 존재는 보이지 않았다.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직!

그때부터 학살이 시작되었다.

30분 후.

서걱!

"크윽······."

"마교의 교주는 어디 있지?"

"네, 네까짓 게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있는 분이······."

서걱!

"다시 한번 묻겠다. 마교의 교주는 어디 있지?"

"크윽, 교주님께서 왕림하시면 네 놈을 틀림없이 찢어 죽이실 것이다."

우드드득!

"다시 한번 묻겠다. 마교의 교주는 어디 있지?"

"퉤! 차라리 날 죽여라!"

우드드득!

"커······커헉······!"

털썩―

'쯧. 결국 실패했군.'

십장로 중 한 명인 소천세의 몸이 축 늘어졌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두 다리를 자른 뒤, 손가락부터 몸에 붙어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떼어냈다.

그다음은 눈알을 뽑고, 코를 베고, 온몸의 관절 마디 하나하나 다 부숴놓았다.

그럼에도 소천세는 끝까지 마교 교주의 위치를 발설하지 않은 채 고통을 감내하다 죽은 것이다.

'고통 증폭의 물약을 미리 챙겨두지 않은 게 아쉽네.'

다른 두 장로의 몸뚱이도 그리 보기 좋은 편은 아니었다.

뇌전으로 지지고, 꺾고, 뽑아내고, 잘라낸 상처가 녀석들의 시체에 한가득이었다.

[현재 마교와 정파 무림의 균형은 19:1 입니다.]

[마교 고수를 대거 처치해 균형을 5:5로 만드세요.]

마당에 쌓인 1만의 시체를 뒤로하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구룡파를 나섰다.

사실 마교의 교주는 본거지가 있다는 천산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고문을 통해 교주의 위치를 알아내려는 건 별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확신할 수가 없지.'

만약 3일이란 시간 동안 교주의 위치를 알아내지 못하면, 첫 행선지는 천산이 될 것이다.

다만, 가는 길에 있는 모든 도시에 들러 마인들을 족칠 게 분명했다.

천산에 있을지 확실하지가 않으니까.

'다음 장소로 가야겠군.'

현재 남은 체력은 99프로.

체력적인 부담도 없고, 나를 위협할 만한 고수가 없었기에 정신력의 소모도 별로 없었다.

이제 다음 목적지를 향해 이동할 생각이었다.

당소소가 숨어있던 골목길로 향하자, 곁에 쓰러져 있는 다섯 개의 시체가 보였다.

"아, 고 문주님. 고생 많으셨어요. 잠시 쉬실 만한 공간을 알아뒀어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나는 시체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뭡니까?"

"도망치려는 마인들이 있어서 죽였어요."

말을 하는 당소소의 연검에서 피가 뚝, 뚝 떨어졌다.

방금 막 죽인 모양.

나는 그녀의 몸 상태부터 체크했다.

'다친 곳은 없군.'

"도망치는 게 아니라 아마 전령이었을 겁니다. 앞으로는 그런 녀석들이 있으면 그냥 놔두세요."

"왜요?"

"그래야 더 많은 숫자로 똘똘 뭉칠 테니까요. 잘하면 마교의 교주가 나타날 수도 있고."

내 말에 당소소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앞으로는 도망치는 마인들이 있어도 굳이 뒤쫓지 않을게요."

"네. 그럼 다음 목적지로 가시죠."

"안 쉬고 바로 출발하시려구요?"

"예. 시간이 없어서요."

나는 당소소에게 등을 보인 채 자세를 숙였다.

그러자 그녀가 풀쩍 뛰어 내 등에 업히고는, 양팔과 양 허벅지로 내 목, 허리를 감쌌다.

"어디로 가야 합니까?"

"다음 목적지가 호북이죠? 이쪽으로 쭉 가면 소양촌 이라는 마을이 나와요. 거기서 북쪽으로 꺾는 게 제일 빠른 길이에요."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나는 다시 힘차게 바닥을 박찼다.

당소소가 나를 꼬옥 껴안은 채 등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 어디서 이런 괴물이······."

띠링!

[무림인 '송윤탄' 을 처치했습니다.]

[<피의 흡수> 능력으로 극소량의 마력 스텟을 흡수합니다.]

[마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마지막 남은 마인을 벤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고생 많으셨어요."

그러자 한쪽에 숨어있던 당소소가 쪼르르 달려와 내게 깨끗한 천 하나를 내밀었다.

몸에 한가득 묻은 피를 닦아내라는 뜻이었다.

'확실히 길잡이가 있으니까 훨씬 빠르군.'

무림맹의 정보를 다루는 은월각의 부각주, 당소소는 굉장히 유능했다.

단순히 어디 있는지 설명하는 것을 넘어, 내 속도와 상태에 최적화된 길로 안내해준 것이다.

그녀와 동행한 지 어느덧 16시간째.

애초에 첫날 계획했던 건 섬서, 호북, 안휘, 강서, 이렇게 네 지역이었다.

그런데 벌써 다섯 번째 지역이었던 호남을 넘어, 우리는 호북의 무한까지 온 상태였다.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나는 깨끗한 천을 가리키며 물었다.

"쉬실 만한 공간을 찾다가 얻었어요."

무한 역시 사람이 많지 않았다.

마인들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모두들 도주한 것이다.

당소소는 그런 빈집들을 돌아다니며 내가 쉴 만한 곳이 있나 찾으러 다닌 것이고.

"따로 안가安家를 찾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겠습니다. 혹시 시장하지 않으신가요? 제가 요리할 만한 거리들도 구해놨거든요. 저 요리도 잘해요."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함께 동행한 모든 순간, 당소소는 내가 따로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필요한 것들을 구해두었다.

안전하게 쉴 수 있는 공간, 배고플 때 먹을 수 있는 육포나, 피를 닦을 수 있는 천까지.

그걸 통해 그녀가 무척 세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눈치가 빠르고, 똑똑하네.'

문제는 내가 일반인의 범주를 아득히 뛰어넘은 초인이라는 것.

그리고 이들과 다르게 인벤토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가면 덕분에 체력도 꽉 차 있고, 배가 고프면 인벤토리에 넣어둔 빵을 꺼내 먹으면 된다.

물론 그 안에 피를 닦을 천 또한 존재하고.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딱히 바라는 게 없었다.

"앞으로는 쉴 공간도, 요리 준비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게 길 안내를 해주기 위해 따라오신 거지, 허드렛일을 하러 오신 게 아니지 않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예. 다음 목적지는 어디죠?"

"다음 목적지는 사천······이네요."

당소소가 말끝을 흐렸다.

지금까지 표정 변화 한번 없던 그녀가 처음으로 동요하고 있었다.

안색이 무척 창백했다.

'고향이 사천이라 그랬지.'

아마 심란할 것이다.

지금까지 가는 곳마다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다.

아마 그건 그녀의 고향이라는 사천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려서부터 자라온 고향이 초토화 되어 있는 모습을 직접 보려고 한다면 겁이 날 수밖에 없을 터.

그래서일까, 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겠지.'

마침 타이밍이 좋았다.

어느덧 '16시간'이 흘렀으니까.

"잠깐만 이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

"굳이 따라오진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자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내게 살포시 미소 짓는 당소소.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이는 그녀를 뒤로하고 나는 근처에 한적한 골목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그림자 표식 목록을 펼쳤다.

[표식 목록]

[무림인 '진초풍']

[무림인 '당소소']

[남은 재사용 대기 시간 : 없음]

어느덧 쿨타임이 돌아온 상황.

나는 진초풍에게 그림자 이동을 사용했다.

"막아라!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저놈이 무림 맹주다! 무림 맹주의 목을 따는 사람에게 금전 1만 냥을 내릴 것인즉!"

그러자 보이는 아수라장.

'이럴 줄 알았지.'

나는 곧장 적아가 뒤엉켜 있는 곳으로 달려들었다.

서걱! 서걱!

"미, 미친!"

벽력섬전이 한 번 번뜩할 때마다 마인들 너덧 명의 목이 허공을 날았다.

"고건하 대협이다!"

"고건하 대협이 왔다!"

"와아아아아아아!"

뇌전을 흩뿌리는 내 등장에 정파 무림인들이 소리를 질렀다.

얼핏 보기에도 마인의 숫자는 수천을 넘는 상황.

나는 곧바로 적장부터 찾았다.

물론 적장을 찾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악마의 눈.'

다른 녀석들보다 평균 스텟이 훨씬 높은 녀석이 적장일 테니까.

거기다 특전에 쓰여 있기도 하고.

띠링!

[<전광석화 > 능력을 사용합니다.]

[10초 동안 민첩 스텟이 +20% 상승합니다.]

전광석화까지 발동시키자, 내 민첩이 305를 찍었다.

안 그래도 몸에서 뇌전이 뿜어져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305에 이른 민첩의 움직임은.

서걱! 서걱! 서걱!

움직일 때마다 벼락이 뿌려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검마劍魔가 죽었다!"

"소마신군燒魔神君도 전사했다!"

적장부터 쓰러트린 내 판단은 정확했다.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녀석들이 죽은 것만으로도 전세가 역전된 것이다.

'여기에 쳐들어온 녀석들까지 다 죽이면 세력비가 더 빨리 회복되겠는데.'

내가 각 지역을 휩쓰는 동안, 전령들을 내버려 둔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고 했다.

내가 곳곳을 부수고 다니면, 마교 쪽에서 무림맹으로 쳐들어올 거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사실.

'덕분에 시간을 아꼈군.'

녀석들이 무림맹으로 공격해 들어오면, 굳이 마인을 찾으러 다닐 필요가 없었으니까.

각 지역을 초토화 시키는 데 걸리는 시간은 30분에서 1시간 남짓.

하지만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2시간에서 3시간 정도 걸렸다.

그런데 적들이 알아서 그림자 표식이 등록된 진초풍에게 달려든다면?

'찾으러 다닐 시간을 아낄 수 있어.'

덕분에 나는 수천에 가까운 마인들을 가만히 앉아서 잡아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전투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현재 마교와 정파 무림의 균형은 15:1 입니다.]

[마교 고수를 대거 처치해 균형을 5:5로 만드세요.]

나 혼자 처리해도 30분이면 되는 녀석들을, 정파 무림인들까지 힘을 합치자 고작 15분 만에 정리가 된 것이다.

"고 문주! 우리가 공격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와주셨구려. 헌데 소소는······?"

"현재 호북에 있을 겁니다."

내 대답에 진초풍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소소를 어찌 혼자 두고······?"

"아, 괜찮을 겁니다. 안전한 곳에 있거든요."

띠링!

[무림인 '진초풍'의 그림자에 표식이 등록되었습니다.]

"그럼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이, 이보시오. 고 문주!"

진초풍의 그림자를 밟은 나는 곧바로 무림맹의 대문 밖으로 내달렸다.

그리고는 아무런 인적이 느껴지지 않은 곳에서 그림자 이동을 사용했다.

순식간에 시야가 뒤틀리고, 멍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당소소가 보였다.

"어, 언제 제 뒤에······?"

"아, 지금 막 왔습니다."

이제 남은 그림자 표식은 진초풍 한 개.

앞으로 다시 여덟 시간을 기다려, 당소소의 그림자에 표식을 남긴다.

그리고 또 여덟 시간이 지나면 쿨타임이 끝난 상태로 진초풍에게 그림자 이동을 사용한다.

다시 진초풍의 그림자를 밟고 당소소에게 그림자 이동을 사용한다.

그렇게 하면 16시간에 한 번씩 별다른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무림맹에 다녀올 수 있었다.

'진짜 개사기 스킬이라니까.'

"좀 괜찮아지셨습니까?"

내 물음에 당소소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다시 출발하시죠."

내가 등을 내밀자 당소소가 폴짝 안겼다.

그녀의 고향이라는.

사천으로 향할 시간이었다.

< 125화. 단독 미션(7) > 끝

< 126화. 단독 미션(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