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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7화. 고결한 수정(4) >

└중급 악마가······ 또 있어?

└아니 ㅋㅋㅋㅋ 루에타가 성城 급이나 거점 급도 아니고 무슨 요새 급에ㅋㅋㅋㅋ 중급 악마가 두 마리나 됨? ㅁㅊ;;

└하.. 잘 가라 렌.. 너 덕분에 그동안 즐거웠다..

└즐거웠다는 개뿔ㅡㅡ 지금 상위 리그 네임드 열여덟 명이 다 죽게 생겼는데 그딴 소리가 나옴?

└근데 아무리 네임드가 열여덟이나 된다고 해도 요새급 하나 못 터는구나.. 새삼 고위 리그랑 상위 리그의 격차가 느껴짐.

└댓글 분위기 왜 이럼? 오히려 저 중급 악마 다 죽이고 타천사까지 죽일지 누가 알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ㅡㅡ 그게 되려면 지하 공동에 내려간 열 명이서 중급 악마 두 명에 하급 악마 수십 명을 상대해야 한다는 소린데, 그게 되면 고위 리그로 가야지 왜 상위 리그에 있냐? 생각 좀 하고 살아라 제발.

└아니 왜? 쿠 훌린이 혼자서 중급 악마 때려잡든데?

└ㅋㅋㅋㅋㅋㅋㅋ 지금 고위 리그로 언제 올라갈지 각 잡고 있는 애랑, 저기 있는 애들을 비교한 거임?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 씨발 왜 곧 죽을 애들을 한 번 더 죽여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렌님, 왜······ 헉!"

"중급 악마!"

지하 공동으로 들어온 내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자, 의아해하던 파티원들이 안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는 중급 악마를 보더니 경악했다.

"······!"

온달의 표정도 싸늘하게 굳어갔다.

지하 공동에 마성석을 지키는 악마들이 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 대상이 중급 악마일 줄은 상상도 못 한 모양이었다.

[제한 시간 : 02:49:54]

[현재 생존한 플레이어 수 : 18 명]

꽈아아아아앙! 펄럭! 펄럭!

"후후, 궁지에 몰린 쥐 표정이군."

때마침 우릴 따라 가장 먼저 지하 공동에 도착한 중급 악마, 바놉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우릴 어떻게 가지고 놀아 줄까, 하고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젠장.'

타락 천사가 도주해 오고, 우리가 그 천사를 죽이려고 루에타로 쳐들어올 것이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사실.

그렇기에 마계 측에서도 비장의 한 수를 준비해 둘 거라고는 예상했었다.

다만 하급 악마를 충원할 줄 알았지, 설마 중급 악마가 한 마리 더 있을 줄이야.

바놉은 우리가 지하 공동으로 들어가니까 옳다구나 했을 것이다.

혹시나 마성석이 깨질까 봐 중급 악마를 준비해 뒀는데, 마침 우리가 이곳으로 들어와 버린 상황.

출구가 하나뿐인 지하 공동으로 우릴 몰아넣어 빠르게 전멸시키고, 오디세우스 파티를 처리하면 각개 격파가 가능하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오디세우스 파티 쪽에도 뭔가 준비를 해 뒀을 텐데.'

이쪽에 이런 비장의 한 수를 준비해 뒀는데, 회복의 샘 쪽이라고 준비를 안 해 뒀을 리 없다.

최악의 경우, 오디세우스 파티가 전멸할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할 것 같았다.

'들어 둔 보험이 쓸모없게 돼버렸군.'

물론 오디세우스 파티 쪽에서 별다른 변수 없이 타락 천사를 처치할 수도 있긴 하지만.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움직이는 수밖에.'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럼 망설일 이유가 없지.'

"온달님! 제가 어떻게든 상대해볼 테니 남은 중급 악마 하나와 입구를!"

나는 곧장 지하 공동에 있던 중급 악마를 향해 달려들었다.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크루마]

[근력 : 227(+?)] [민첩 : 222(+?)] [체력 : 190(+?)]

[정신 : 125(+?)] [지력 : 12(+?)] [마기 : 199(+?)]

'이 정도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어.'

지하 공동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던 중급 악마, 크루마의 스텟은 또 다른 중급 악마, 바놉보다 근소하게 높았다.

하지만 이 정도라면 녀석을 쓰러트릴 순 없어도, 충분히 시간을 벌어줄 순 있을 것이다.

"아, 알겠습니다! 율리안님과 수무아붐님은 입구를 막아주세요! 마사노부님이 두 분의 등을 지켜주시고요!"

"알겠습니다!"

"예!"

내 외침에 정신을 차린 온달이 활을 인벤토리에 넣고 창을 빼 들더니, 파티원들을 향해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제가 탱커를 맡겠습니다! 하레크누드님과 오스카님은 백업을! 에디든님과 플로이드님은 상황에 맞게 마법 지원을 부탁드립니다! 양초풍님은 마법사님들을 지켜주세요!"

"알겠소!"

"예!"

파티원들도 금세 정신을 차리곤 빠르게 자리를 잡아 나갔다.

온달이 바놉의 정면에서, 그리고 하레크누드와 오스카, 양초풍이 뒤쪽에서 지원을 하고, 에디든과 플로이드가 한쪽에서 영창을 시작했고.

"모두 정지! 밀지 마! 앞에 막혔다!"

"빨리 달려! 빨리!"

"밀지 말라고! 앞에 막혔다고!"

"흐읍!"

율리안과 수무아붐이 좁은 입구 앞에 서서, 하급 악마들이 더 이상 지하 공동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섰다.

'바놉만 잘 묶어주고, 하급 악마들만 못 들어오게 하면 할만해.'

그리고 시작된 전투.

펄럭! 펄럭!

"크흐흐, 네 놈 혼자서 날 막아서겠다니. 하룻밤 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격의 차이라는 걸 보여 주지."

쐐애애애애애액!

크루마가 천장으로 날아오르더니, 빠른 속도로 쇄도해 들어왔다.

그리고는 내게 길다란 검을 휘둘렀다.

일반적인 검보다 두 배 가까이 더 긴 검이었다.

내가 들고 있는 창, 벽력섬전의 길이와 맞먹을 정도.

그리고.

콰지지지지지직!

녀석의 검에서, 전기 스파크가 튀며 뇌전이 흘러나왔다.

'녀석도 뇌전과 관련된 능력을 가지고 있군.'

"······!"

나도 크루마에게 뇌전을 담아 휘둘렀다.

달려들던 크루마의 눈이 순간적으로 휘둥그레졌고.

챙! 콰지지지지지직!

서로의 뇌전이 부딪히며, 스파크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제한 시간 : 02:47:13]

[현재 생존한 플레이어 수 : 18 명]

'속도까지 붙으니까 무시무시한 힘이군.'

검을 막자, 손아귀가 저릿저릿할 정도였다.

다만 생각했던 것보다 뇌전에 대한 데미지는 별로 없었다.

미간을 찡그리는 걸 보니 오히려 녀석이 뇌전 데미지를 더 입은 모양이었다.

챙! 콰지직! 챙! 콰지지직!

'너무 공격적인데.'

녀석은 내가 어딜 공격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내 급소만을 노리며 달려들었다.

마치 동귀어진이라도 할 기세였달까.

하지만 나는 녀석과 양패구상할 마음이 하나도 없었기에, 수비 위주로 플레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콰지지지직!

'파티원들은 충분히 바놉을 처리할 수 있을 테고.'

"이 광대 새끼들! 빨리 뚫어! 어떻게든 공동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젠장! 밀지 마! 방패 때문에 앞으로 갈······커헉!"

"마사노부님! 뒤에서 저희 좀 밀어주십쇼! 이 자식들이 힘으로 밀고 들어오려 합니다!"

"알겠소! 힘들면 얘기하시오. 바로 교대해 줄 테니!"

입구를 막고 있는 율리안과 마사노부, 수무아붐도 제법 잘 버티고 있는 상황.

결국 시간을 끌기만 해도 내게 유리한 싸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바놉을 처치하면 파티원들이 합류할 테니까.

"오랜만에 상대할 맛이 나는 녀석이구나. 하지만 그 자신만만한 모습도 얼마 가지 못할 터."

붉은 눈동자를 빛내며 나를 내려다보는 크루마.

그때였다.

띠링!

[플레이어 '크루마'의 스킬 <환륜악마幻輪惡魔 >에 걸렸습니다.]

[앞으로 10분간 어지러움을 느낍니다.]

'뭐?'

알림창을 본 나는 흠칫했다.

마력의 아니, 마기의 유동도 느끼지 못했는데.

스킬에 당했다고?

띠링!

[플레이어 '렌'의 정신 스텟이 스킬 <환륜악마 > 보다 월등히 높습니다.]

[<환륜악마 >를 방어합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알림창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다행이군.'

정신 교란은 무척 희귀한 스킬이었다.

아무리 육체 스텟이 높아도, 정신을 잃으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중급 악마답게, 녀석은 제법 치명적인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띠링!

[플레이어 '크루마'의 스킬 <환륜악마幻輪惡魔 >에 걸렸습니다.]

[앞으로 10분간 모든 사물이 두 개로 보입니다.]

[플레이어 '렌'의 정신 스텟이 스킬 <환륜악마 > 보다 월등히 높습니다.]

[<환륜악마 >를 방어합니다.]

[플레이어 '크루마'의 스킬 <환륜악마 >에 걸렸습니다.]

[<환륜악마 >를 방어합니다.]

[플레이어 '크루마'의 스킬 <환륜악마 >에 걸렸······.]

[<환륜악마 >를 방어······.]

'뭐지?'

마기의 유동도 느껴지지 않고, 크루마에게 이렇다 할 행동이 없었는데도 계속해서 스킬을 방어했다는 알림창이 떴다.

설령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스킬을 썼다고 하더라도 저렇게 연속적으로 쓴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스킬이라면 쿨 타임이라는 게 존재할 테니까.

'설마?'

문득 스쳐 가는 생각에 나는 녀석의 눈동자 대신, 어깨선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뚝 끊기는 콜.

'눈을 보고 있으면 정신 교란 스킬이 들어오는 패시브를 가지고 있던 거였군.'

그 사실을 알게 된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완전······ 개 사긴데?

만약 정신 스텟이 낮았다면 정말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할 뻔 한 것이다.

"호오. 내 눈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것이냐."

나는 다시 녀석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봤다.

어차피 정신 스텟 덕분에 걸리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이상 굳이 어깨선을 살피며 힘들게 싸울 필요가 없었다.

띠링! 띠링! 띠링!

눈동자를 본 지 3초 정도 지나자, 다시 콜이 울리기 시작했다.

3초 이상 보고 있어야 스킬이 발동되는 모양이었다.

"후후, 인정하마. 네 놈이 다른 녀석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그럼, 지금부터 진정한 힘의 차이를 알려 주지."

펄럭! 펄럭!

한 번의 격돌 후 다시 천장으로 날아오르는 크루마.

천장이 워낙 높다 보니, 지하 공동임에도 불구하고 녀석이 날아다니는 데엔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뛰면 닿겠는데.'

녀석이 날개를 이용해 완벽한 안전지대로 도망갈 수 없다는 것.

물론 함부로 점프를 뛰진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방향 전환이 불가능해, 녀석의 공격을 막아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확실한 기회의 순간이 온다면 또 모르겠지만.

챙! 콰지직! 챙! 콰지지지직! 채챙! 콰직!

그때부터 녀석과의 지루한 공방이 시작되었다.

다만 확실한 건, 공격을 주고받을 때마다 녀석의 미간이 찌푸려지고 있다는 것.

뇌신 스킬에, 벽력섬전까지 더해진 뇌전의 데미지로 인해 녀석은 속이 불에 타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제한 시간 : 02:45:32]

[현재 생존한 플레이어 수 : 18 명]

펄럭! 펄럭! 펄럭!

"플로이드님! 에디든님! 녀석이 날지 못하도록 견제를!"

[천중千重의 겁박!]

[석명유흔析銘流痕!]

콰과과과과과과과광!

"젠장! 녀석이 너무 빨라요! 마법으로 맞추는 건 한계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저쪽도 난리가 났군.'

파티원들도 날아다니는 바놉을 상대하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날개가 있다는 것,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에워싸서 레이드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딜을 넣어 줄 마법 전력부터 쓸려나갈 수도 있고.

"후후, 인정하겠노라. 하지만 다른 녀석들도 너처럼 강하진 않을 터."

그때, 크루마가 크게 날갯짓을 하더니 파티원들에게 향했다.

굳이 날 상대하는 것보다, 빠르게 파티원들을 학살함으로써 바놉과 자유롭게 날 상대하려는 것이다.

다른 파티원들은 정신 교란 스킬을 방어하지 못할 테니까.

'어딜 가려고!'

하지만 나는 녀석이 파티원들에게 향하는 걸 무시한 채, 곧장 지하 공동의 중심부에 있는 마성석을 향해 내달렸다.

"이 미친!"

그러자 크루마가 화들짝 놀라더니, 곧장 방향을 선회해 내게 날아들었다.

채챙! 챙! 챙!

그리고는 길다란 검을 휘두르며 내가 향하는 경로를 차단했다.

'나만 인질이 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지.'

나는 계속해서 녀석의 검을 쳐내며 마성석 쪽으로 향했다.

어차피 마성석을 부술 순 없겠지만, 그래도 녀석의 발을 붙잡아 두는 데에는 효과적일 것이다.

그때부터 마성석을 둘러싼 나와 크루마와의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챙! 콰지직! 콰지지지직! 챙!

'생각보다 너무 쉬운데?'

나보다 스텟이 20 포인트 가량 높은 크루마.

그런데도 녀석을 상대하는 게 너무 편했다.

"크윽! 제법이구나!"

그와 반면에 크루마는 내가 찔러 넣는 공격에 당황하고 있었다.

'피넛엘에게 고마워해야겠군.'

피넛엘과의 대련 덕분에 날개 달린 존재와의 전투가 익숙해진 것도 있었고.

"언제까지 버티나 보자!"

뭐랄까.

피의 강화 특전을 껐을 때 피넛엘과 싸웠던 것.

그리고 피의 강화 특전이 켜져 있을 때 시노엘과 싸웠던 것.

두 전투 모두 상대방과 스텟이 압도적으로 차이 났다 보니까, 오히려 20 포인트 정도는 수월하게 느껴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크루마를 몰아붙일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장기전이 되겠는데.'

전투가 길어질수록 내가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

띠링!

[<벽력 >이 발동됩니다.]

[1초 동안 근력이 +50% 상승합니다.]

[근력 : 267(+5)(+91)(+57)]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내겐 벽력이라는 사기 스킬이 있었으니까.

빛기둥이 솟구치고, 뇌전의 칼날이 크루마를 난도질했다.

내 창에 사선으로 크게 베이며, 오장육부가 통째로 터져 나간 녀석은.

털썩-

날아다니던 상태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안 봐도 즉사.

'별거 아니군.'

그 모습에 가볍게 한숨을 내쉰 나는 바로 등을 돌려 마성석 쪽으로 향했다.

아니, 향하려 했다.

'잠깐만.'

왜 킬 콜이 안 뜨지?

나는 곧장 몸을 돌리며 창을 크게 휘둘렀다.

내 바로 등 뒤에서 무언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마력장을 통해 느껴졌기 때문이다.

서걱!

피륙음과 함께 핏방울이 사방으로 흩날렸고.

"크윽! 크흐흐. 제법 아프구나."

방금 당한 상처를 제외하곤 멀쩡하게 서 있는 크루마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벽력에 터지기 직전으로 시간이 되돌아간 느낌.

그뿐만이 아니었다.

방금 내가 벤 상처마저도 금세 아물어가기 시작했다.

'재생 능력!'

젠장.

정신 교란 능력에다가 이제는 재생 능력까지.

그제야 녀석이 왜 이렇게 공격적인 스타일을 구사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렇게 쉬울 리가 없지.'

어쩐지 중급 악마치고 너무 약하다 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크루마에게 달려들었다.

"흐흐, 내 능력을 보고도 투지를 잃지 않다니."

재생이 된다고?

근데 뭐?

"어디 계속 발악해 보거라. 크하하하, 마지막에 네 놈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만약 녀석이 불사신처럼 계속 되살아나는 거라면 중급 악마일 리가 없었다.

못해도 최상위 악마에서 고위 악마는 되었겠지.

"······무척 기대되는구나."

크루마가 씨익 웃었다.

나도 녀석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런 상황은 내게 너무나 익숙했으니까.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 보자고.'

[제한 시간 : 02:42:17]

[현재 생존한 플레이어 수 : 17 명]

나는 더욱 힘껏 벽력섬전을 휘둘렀다.

< 107화. 고결한 수정(4) > 끝

< 108화. 고결한 수정(5) >

푹! 콰지지지직!

뇌전이 깃든 내 창이 크루마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리고.

"후후."

서걱!

크루마의 검이 날아들어, 내 왼쪽 어깨를 살짝 베고 지나갔다.

분명 심장이 꿰뚫렸음에도, 크루마의 움직임엔 변함이 없었다.

재생 능력이 있다 보니까 여전히 공격 일변도인 모습.

'심장은 아니고.'

하지만 나는 별 감흥 없이 계속해서 크루마에게 창을 찔러 넣었다.

명치, 목, 날개, 머리 등등 다양한 급소만을 향해서.

"잘도 도망 다니는 구나!"

또다시 성난 황소처럼 달려드는 크루마.

'까다롭군.'

크루마가 워낙 동귀어진이라도 할 듯 달려들다 보니, 이전보다 수비의 비중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녀석의 공격을 확실하게 막아내는 선 안에서만 내가 창을 뻗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푹!

'목도 아니고.'

하지만 나는 조바심 내지 않았다.

약점을 찾는 순간.

지금의 전세는 단번에 역전될 것이기에.

"후후, 내가 이렇게 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

챙! 채챙! 챙!

녀석도 내가 약점을 찾는다는 걸 알고 있어서인지, 어느 순간부터인가 내 공격을 막아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 또한 크게 개의치 않았다.

'꼭 공격에 성공할 필요는 없어.'

약점이 있는 부위라면, 내 창이 향하는 것만으로도 녀석의 반응이 미묘하게 달라질 테니까.

물론 미세한 생체 반응 정도겠지만, 초감각이 있는 이상 충분히 알아챌 자신이 있었다.

다만 스타일을 조금 바꿨을 뿐.

페인팅을 섞어, 찌를 듯 말 듯 하면서 녀석을 현혹하기 시작한 것이다.

챙! 챙! 챙! 챙! 챙!

또한 녀석이 창을 막는 순간부터, 나는 최소 다섯 번의 확인을 거치며 정보를 쌓아나갔다.

'날개도 아니군.'

이번에 내가 공략한 부위는 날개.

하지만 다섯 번의 공격 중 단 한 번도 녀석의 눈동자나 호흡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다음은······ 머리."

심장이 뚫렸으니, 머리도 아마 아닐 가능성이 컸다.

그 두 군데는 생명체에게 가장 치명적인 부위였으니까.

약점이 그렇게 대놓고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

[제한 시간 : 02:41:02]

[현재 생존한 플레이어 수 : 17 명]

그런 생각을 하며 창을 찔러 넣을 때였다.

챙!

"······."

'뭐지?'

순간적으로 크루마의 호흡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크흐흐, 발악을 하는구나."

씨익 미소 짓는 크루마.

하지만 나는 녀석의 비웃음을 무시한 채 다시 한번 이마를 향해 창을 찔러 넣었다.

챙!

또다시 짧아진 크루마의 호흡.

거기다 이번엔 눈동자도 잘게 떨렸다.

'여기군.'

확신할 수 있었다.

머리 쪽에 녀석의 약점이 있다는 것을.

머리 아니, 정확하게는 두뇌 혹은 뿔.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확률적으로는 뿔일 가능성이 높아.'

천사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부위가 날개라면, 악마는 뿔이었으니까.

시노엘의 경우만 봐도, 날개가 잘리자 권능을 사용하지 못했었다.

그런 것처럼 녀석 또한 뿔에 능력이 담겨 있을 가능성이 컸다.

'잘 막아 보라고.'

하지만 나는 이내 녀석의 복부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별다른 이유는 아니었다.

그저.

내가 알아차렸다는 것을 녀석에게 숨기기 위함이었다.

콰과과과과과과광!

"하레크누드님이 지금부터 탱킹을! 저는 녀석의 날개 때문에 활을 들어야겠습니다!"

"예!"

"양초풍님 조심! 악마가 마법사님들을 노리는 것 같습니다!"

"맡겨 주시오!"

[통곡과 절망의 염혼!]

고개를 돌려 파티원들을 힐끗 살펴보니, 여전히 바놉과의 전투가 한창이었다.

여섯 명이서 상대하고 있다 보니, 오히려 날아다니는 바놉을 밀어붙이고 있을 정도.

'율리안과 수무아붐도 잘 막아주고 있고.'

좁은 입구에서 방패만큼 효율이 좋은 무기도 없기에, 하급 악마들은 여전히 지하 공동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장기전으로 가도 충분할 것이다.

'확실한 기회가 오면 그 뿔을 단번에 도려내 주지.'

전략을 정한 나는 수비 위주로 크루마를 상대하기 시작했다.

콰지지지지지지직!

"네 놈을 상대하는 것도 슬슬 질리는구나. 이만 죽여 주마!"

자신의 약점이 노출되지 않았다고 생각한 건지, 크루마가 그때부터 다시 저돌적으로 밀고 들어왔고.

채챙! 챙! 챙! 챙!

나는 마성석에 가까이 갔다, 멀어지기를 반복하며 크루마와의 거리를 조절하는 데 주력해 나갔다.

후욱!

간간이 페인팅을 섞어 주면서.

'짜증 좀 날 거야.'

거리가 많이 벌어졌다 싶으면 마성석으로 다가가고, 녀석이 쫓아오면 다시 거리를 벌린다.

그리고 또 거리가 벌어지면 마성석으로 돌진한다.

그걸 반복하며 녀석을 정신없게 만들고 있을 때였다.

'빈틈!'

띠링!

[<전광석화 > 능력을 사용합니다.]

[10초 동안 민첩 스텟이 +20% 상승합니다.]

긴 검을 찌르며 들어오다 보니, 크루마의 복부와 머리 쪽이 활짝 드러난 것이다.

'이 정도 손해는 감수해 주지.'

나는 그 검을 피하는 대신, 녀석에게 벽력섬전을 휘둘렀다.

정확히 뿔을 노리고서.

"······!"

순간 크루마가 눈을 치켜뜨며 허둥지둥 댔다.

내가 당연히 복부를 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뿔 쪽으로 공격이 날아오니까 무척 당황한 모습이었다.

그러다 보니, 녀석은 공격도 아니고 수비도 아닌 어정쩡한 움직임을 취했다.

서걱!

'쯧.'

하지만 그럼에도 녀석의 뿔을 벨 수 없었다.

녀석이 급하게 날갯짓을 하며 날아올랐기 때문이다.

"크윽, 젠장!"

결국 애꿎은 녀석의 가슴만 베어버린 나는 그대로 녀석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이미 녀석이 많이 당황해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

이대로 끝장을 낼 생각이었다.

펄럭! 펄럭!

그러자 날개를 편 채 도망가는 크루마.

'자꾸 어딜 가려고 하는 거냐.'

나는 곧장 마성석 쪽으로 향했다.

물론 깰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유인을 하기 위함이었을 뿐.

"이 개 씨발 새끼가!"

그러자 크루마가 사자후를 터트렸다.

어지간히 화났는지 턱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화날 만하지.'

녀석의 뜻대로 풀리는 게 하나도 없었을 테니까.

챙! 콰지지직! 챙! 콰직!

다시 내게 날아온 녀석이 검을 휘둘렀지만, 상대가 되지 않았다.

내가 뿔을 공격할 것처럼 페인팅을 치기만 하면 움찔움찔 댔으니까.

아무리 스텟이 높아도, 마음대로 거리를 벌릴 수도 없고, 뿔이라는 확실한 약점이 발각당한 이상 녀석이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제한 시간 : 02:39:59]

[현재 생존한 플레이어 수 : 17 명]

"바놉! 마성석을!"

그러자 녀석이 최후의 수를 꺼내 들었다.

파티원들이 상대하고 있던 중급 악마, 바놉을 부른 것이다.

"이노오옴! 감히!"

펄럭! 펄럭! 펄럭!

크루마의 부름을 들은 바놉이 순식간에 내가 있는 쪽으로 날아들었다.

그리고는 날카로운 손톱을 휘둘러 대며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혼자서 중급 악마를······!"

그제야 내가 크루마를 쫓아다니는 걸 본 파티원들이 경악했다.

핑! 핑! 핑! 핑! 핑! 핑!

"빨리 합류를!"

그 와중에도 온달은 무척 침착했다.

빠르게 판단하고 지시를 내린 것이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바놉에게 강기가 실린 화살을 무수히 퍼부었다.

[열화의 진혼곡!]

[삭풍강타朔風强打!]

그와 동시에 플로이드와 에디든이 시전한 마법이 날아들었다.

'나쁘지 않은데.'

콰과과과과과광!

바놉에게 꽂히는 화살과 마법들.

그 틈에 나는 크루마에게 쇄도해 창을 휘둘렀다.

바놉의 공격은 그냥 무시할 뿐.

크루마의 눈을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 교란 스킬이 들어오기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녀석이 쉴 틈을 줘선 안 되기 때문이었다.

잠깐의 틈이 생기면 분명 파티원들과 아이컨택을 하려 할 테니까.

"크윽! 젠장!"

펄럭! 펄럭!

바놉이 재빨리 크루마를 커버하며 내게 달려들었지만, 파티원들이 이를 악물고 바놉의 발목을 잡아준 덕분에 나는 안정적으로 크루마를 쫓아다닐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바놉의 공격을 피하며 크루마를 쫓아다니고, 파티원들은 그런 바놉을 견제하는 이상한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 : 끝까지 한 놈만 팬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존나 웃기넼ㅋㅋㅋㅋ

└개 뿜었음ㅋㅋㅋㅋㅋㅋㅋ 아 씨발 ㅋㅋㅋㅋㅋㅋㅋㅋ 어지간하면 크루마 놔주고 파티원들이랑 바놉부터 팰 법도 한데 ㅋㅋㅋㅋㅋ

└아까 쿠 훌린이랑 렌이랑 비벼지겠냐고 입 털던 신들 다 어디 갔음? 수치사라도 했냐?

└아니 근데 왜 자꾸 렌이랑 쿠 훌린을 비교함? 헥토르나 랜슬롯, 카시아, 엔키두, 시르카 등등 최상위권 네임드가 얼마나 많은데.

└ㅋㅋㅋㅋㅋㅋ 렌이랑 쿠 훌린이랑 스타일이 비슷하잖아ㅋㅋ. 거기다 둘 다 창술사니까 더 그런듯 ㅋㅋㅋ

└와 미쳤다.. 쟤는 스타일이 계속 변하네.. 거기다 마성석을 이용해서 거리 조절까지 ㄷㄷ 수준이 다름..

└하여튼 렌 빠돌이 새끼들ㅋㅋㅋㅋ 이번엔 또 뭐가 미쳤는데ㅋㅋㅋ 얘기나 들어보자.

└니들은 저 수준 높은 플레이를 보고 그냥 잘한다는 생각밖에 안듬??

└그니까 얘기해 보라고 ㅋㅋ 뭐가 쩌는 건데 도대체?

└렌이 페인팅을 섞으면서 본인의 공격을 숨기기 시작했음. 창을 찔러 넣을 때 앞발이 내딛는 위치랑 어깨 위치까지 똑같이 맞추다 보니까 크루마는 언제 진짜 공격이 들어올지 실제로 창을 뻗기 직전까지 알 수가 없는 상태였고, 그러다 보니 렌의 공격 적중률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함. 결국 렌은 페인팅을 섞은 것 하나만으로, 본인이 원하는 순간에 원하는 부위로 공격을 찔러넣을 수 있게 됨.

└어.. 예?

└왜? 얘기해 보라며 ㅋ

└ㅋㅋㅋㅋㅋ 고장 났누ㅋㅋㅋ

└저분 고위 리그만 보는 신임 ㅋㅋㅋ

└렌이 페인팅에 공격을 숨김.

바놉의 공격을 피하며 크루마를 쫓아다니고, 바놉은 파티원들의 공격을 막으며 어떻게든 나와 크루마를 떼어 놓으려 한다.

그런 바놉을 파티원들이 견제하며 내게 틈을 만들어주길 한참.

그런 난장판이 정리된 건.

쐐애애애애애액! 푹!

강기가 깃든 온달의 화살 덕분이었다.

"크윽!"

그 화살이 바놉의 날개를 꿰뚫자, 녀석이 더 이상 날지 못하게 된 것이다.

"지금입니다!"

[아련하게 내려앉거라, 부나방이여!]

[설화난무雪花亂舞!]

콰과과과과과광!

온달의 외침과 동시에 마법들이 바놉에게 쏟아졌고.

"제가 구석으로 밀겠습니다!"

"양초풍님! 이제 마법사님들을 지키지 않아도 되니, 어서 합류를!"

"알겠소!"

오스카와 하레크누드가 구석으로 모는 사이, 양초풍이 합류하면서 순식간에 에워싸며 바놉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더 이상 바놉의 견제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게 된 나는.

'제대로 한번 싸워 보자고.'

크루마를 거칠게 몰아붙였다.

콰지지지지지직! 챙! 채챙! 챙!

마성석이라는 인질이 잡혀 있는 크루마는 어쩔 수 없이 나를 맞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

"······."

그렇게 시작된 눈치 싸움.

내가 어깨를 들썩할 때마다 크루마는 움찔하며 검을 치켜세우기 바빴다.

어차피 내가 노리는 곳은 뿔, 하나 뿐.

녀석도 그걸 알기에 노골적으로 머리 쪽만 방어하려는 모습이었다.

[제한 시간 : 02:39:01]

[현재 생존한 플레이어 수 : 16 명]

'그럼 곤란하지.'

하지만 나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머리 쪽만 방어한다고?

그게 뭐?

서걱!

"크윽!"

내가 휘두른 창에 녀석의 왼팔이 잘려 나갔다.

잘려 나간 녀석의 왼팔 절단부에서 새록새록 새살이 돋아나며 재생되고 있었다.

'재생에 걸리는 시간은 대략 3초.'

초인의 세계에서 그 정도의 시간은 승패를 좌지우지할 만큼 커다란 공백이었다.

거기다 노골적으로 뿔을 노리는 척하며 녀석을 속였기에, 크루마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남은 한 팔로 자신의 머리를 보호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서걱!

이번에는 검을 쥐고 있던 녀석의 오른팔이 잘려 나갔고.

"아, 안돼!"

그제야 또렷하게 보이는.

녀석의 당황한 얼굴.

내 공격을 막아 줄 검이 오른팔과 함께 날아간 상황.

녀석이 자라다 만 왼팔로 급하게 가드를 올렸지만.

'잘 가라.'

서걱!

나는 크게 창을 휘둘러, 녀석의 뿔을 잘라냈다.

"이럴 수가······. 내, 내가 고작 하급 광대 한 명에게······."

이어서 당혹스러워하는 녀석의 목을 베어버렸다.

서걱!

크루마의 머리가 허공을 날며 사방으로 피가 흩날렸다.

띠링!

[플레이어 '크루마' 를 처치했습니다.]

[<피의 흡수> 능력으로 극소량의 마력 스텟을 흡수합니다.]

[마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마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마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후.'

순간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한숨이 뿜어져 나왔다.

두 명의 중급 악마.

막힌 입구.

그런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내가 이겼어.'

내가 한순간에 전세를 뒤엎은 것이다.

[제한 시간 : 02:37:55]

[현재 생존한 플레이어 수 : 15 명]

물론 변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렌님! 일단 마성석부터!"

내가 크루마를 죽이는 걸 본 온달이 큰 소리로 외쳤다.

그가 한쪽 눈매를 찡긋했다.

마성석을 부수고 나오는 고결한 수정을 내가 챙기라는 뜻.

'고맙습니다.'

나는 온달에게 고개를 끄덕이곤, 곧장 자줏빛이 뿜어져 나오는 마성석을 향해 내달렸다.

그리고는 크게 벽력섬전을 휘둘러 마성석을 내리쳤다.

카앙!

'더럽게 단단하네.'

그 순간 손아귀를 타고 엄청난 반발력이 밀려왔다.

전력을 다해 휘둘렀음에도, 마성석엔 티끌만 한 상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 봤자.'

캉! 카앙! 카아앙!

'한낱 광물일 뿐이지.'

카아아아앙!

온 힘을 다해 내리칠수록, 마성석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손아귀가 터져 나갈 것처럼 아릿했지만, 이 정도 통증 쯤은 충분히 참을 수 있었다.

"안 돼애애! 이 개자식들! 비켜라! 비키란 말이다!"

내가 마성석을 두들기는 걸 본 바놉이 파티원들에게 에워싸인 채 발광했다.

카앙! 카앙! 카앙! 쨍그랑!

'드디어!'

30번 정도 내리치자, 결국 마성석이 버티지 못하고 잘게 부서져 내렸다.

띠링!

[루에타 요새의 마성석을 파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루에타에 깃든 마성력魔聖力이 사라집니다.]

[신성석을 설치하면 루에타 요새에 신성력이 깃들게 됩니다.]

[플레이어 '온달' 파티 소속 파티원 전원에게 각각 50,000 P 의 보너스 포인트를 지급합니다.]

눈앞에 뜨는 알림창.

하지만 내 시선은 한 곳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이게······.'

마성석이 부서져 내리고, 그 자리엔 작은 구슬만이 남게 되었다.

'고결한 수정.'

영롱한 오색 빛이 뿜어져 나오는, 작은 구슬.

나는 서둘러 그것을 주워들었다.

띠링!

[<소모품:고결한 수정> 을 획득하셨습니다.]

< 108화. 고결한 수정(5) > 끝

< 109화. 고결한 수정(6) >

[<소모품:고결한 수정>]

[신성력, 마기, 마력 등 다양한 기운들이 집약되어 만들어진 수정.]

[섭취 시 보유하고 있는 스킬 중 한 가지를 선택하여 강화할 수 있습니다.]

[등급 : 준신화]

아이템 정보를 확인한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온달의 말이 맞았어.'

보유하고 있는 스킬 중 한 가지를 선택하여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

그 문구를 보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기쁨을 감출 수 없을 정도.

'잠깐만.'

분명 플래티넘 급으로 올릴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그런 문구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띠링!

[<소모품:고결한 수정>을 섭취했습니다.]

[강화를 희망하는 스킬을 선택해 주세요.]

[1. <스킬:침묵의 망토>]

[2. <스킬:뇌신 >]

[3. <스킬:천둥의 숨결>]

[4. <스킬:마력 상쇄>]

[5. <스킬:그림자 표식>(선택 불가)]

고결한 수정을 먹자 나타나는 상태창.

하지만 나는 그림자 표식 옆에 떠 있는 선택 불가를 보고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림자 표식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으면 대박이었는데.'

아무래도 온달의 말처럼 플래티넘 급까지만 올릴 수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고작 이런 걸로 다이아몬드 급 스킬을 얻을 수 있을 리가 없지.'

다이아몬드 급 스킬은 고위 리그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등급.

고결한 수정으로 다이아몬드 급까지 올릴 수 있다면, 애초에 고결한 수정의 씨가 말랐을 것이다.

고위, 초월 플레이어들이 싹쓸이하고 다녔을 테니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쉬움을 털어냈다.

변한 건 없었다.

팩트는 내가 가지고 있는 스킬 중 한 가지가 플래티넘 급 수준으로 상승한다는 것.

'뭘 고르지?'

다른 스킬들에 비해, 지금까지 별로 쓸모가 없던 침묵의 망토?

적어도 플래티넘 급 스킬로 업그레이드 된다면, 침묵의 망토도 제법 쓸만해질 가능성이 컸다.

괜히 플래티넘 급이 아니니까.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침묵의 망토는 패스.'

더 좋은 스킬로 업그레이드 된다는 건 분명하지만, 결국 그 스킬도 나와 맞지 않을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

눈이 보이지 않고, 스텟도 낮던 1회차 시절이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의 내게 은신 스킬은 시너지가 좋지 않았다.

더 이상 은신한 채 숨어 있다가 치고 빠지는 식의 스타일을 구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는 오히려 압도적인 화력으로 적을 찢는 데 특화 되어 있달까.

그런 리스크 때문에 나는 침묵의 망토를 제외시켰다.

다른 스킬들을 업그레이드 하는 게 더 나을 것이다.

이런 기회가 흔치 않을 테니까.

'마력 상쇄도 제외.'

그런 의미에서 마력 상쇄도 리스트에서 지웠다.

카운터 능력인 마력 관통도 있고, 무엇보다 50프로의 마력 상쇄율만으로도 충분히 쓸만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상쇄율이 100%까지 올라간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그렇게 큰 효용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뇌신도 빼고.'

벽력섬전의 뇌전 효과와 중첩이 되어 이미 충분한 데미지를 뽑아내는 상황.

마찬가지로 큰 효용을 기대하기가 힘들었다.

결국 뇌신까지 제외하자 한 가지 스킬밖에 남지 않았다.

띠링!

[<스킬:천둥의 숨결>을 강화하시겠습니까?]

[한 번 선택하면 되돌릴 수 없습니다.]

[Yes(선택) / No]

마음을 정한 나는 망설임 없이 Yes 버튼을 눌렀다.

띠링!

[<스킬:천둥의 숨결><스킬:뇌신의 포효>로 강화되었습니다.]

[<스킬:뇌신의 포효>]

[액티브]

[사용하면 체력 소모를 2배로 늘리는 대신 근력과 민첩 스텟을 20% 상승시킵니다.]

[<뇌신의 포효> 스킬이 유지되는 동안 <벽력 > 능력을 각성합니다.]

[2차 스킬인 <뇌신 강림> 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 : 없음]

[스킬 유지 시간 : 없음]

[<벽력 >]

[공격 시 0.5%의 확률로 벽력이 치며 근력이 +50% 상승합니다.]

[이동 시 0.5%의 확률로 벽력이 치며 민첩이 +50% 상승합니다.]

상태창을 본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체력 소모율은 2배 그대로.

대신에 근력과 민첩은 15프로에서 20프로로 5프로 상승했고.

그리고 벽력의 확률이 0.1프로에서 0.5프로로 5배나 증가해 있었다.

나쁘지 않은 스펙업.

'아쉬워.'

하지만 솔직히 실망스러웠다.

그림자 표식만 봐도 개사기 스킬이라는 게 팍팍 느껴졌는데, 뇌신의 포효는 그런 수준까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스텟 상승폭의 소폭 상승.

그리고 벽력의 발동 확률 증가.

이것 말고는 늘어난 게 없었다.

물론 스텟의 5프로 상승만으로도 대단한 거긴 했지만.

'뇌신 강림? 이건 뭐지?'

띠링!

[<뇌신 강림>]

[액티브]

[<스킬:뇌신의 포효>가 활성화 되어 있는 상태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2차 스킬.]

[사용하면 체력 소모를 10배로 늘리는 대신 근력과 민첩 스텟을 40% 상승시킵니다.]

[<스킬:뇌신의 포효>와 중첩이 아닌, 각성 개념입니다.]

[<벽력 >의 발동 확률이 1%로 상승합니다.]

[마력에 강한 뇌전의 기운이 깃듭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 : 8 시간]

[스킬 유지 시간 : 없음]

"······!"

뇌신 강림의 설명을 본 나는 입을 떡하니 벌렸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미친······!'

근력과 민첩이 40프로 상승?

벽력 발동 확률이 1프로로 올라간다고?

'개사기잖아······?'

진짜 미친 스펙이었다.

그림자 표식과는 다른 의미에서 개사기 스킬이었달까.

물론 체력 소모가 열 배나 상승한다는 어마어마한 페널티가 있었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스킬이었다.

[제한 시간 : 02:37:11]

[현재 생존한 플레이어 수 : 15 명]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정신을 차린 나는 서둘러 파티원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어서 뇌신 강림을 사용해보고 싶었다.

"헉, 헉. 마사노부님, 잠시 교대를······."

"헉, 알겠소. 헉, 헉."

스킬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그 잠깐 사이에, 입구를 지키고 있던 수무아붐과 율리안, 마사노부가 많이 지쳐 있었고.

"녀석이 빠져나왔습니다!"

"양초풍님이 따라붙으시고, 하레크누드님이 11시 방향을 자르면서 대쉬를!"

"알겠소!"

"젠장, 놓쳐서 미안합니다!"

[새빨간 보석의 눈물!]

[분영지폭紛影支爆!]

파티원들도 바놉을 밀어붙이고 있었지만, 피니쉬 시키지 못하고 있는 상황.

"저도 합류하겠습니다."

나는 곧장 경계망을 빠져나가는 바놉에게 달려들어 창을 휘둘렀다.

물론 뇌신 강림을 활성화 시킨 건 아니었다.

한 번 끄면 8시간 뒤에나 다시 사용할 수 있고.

[남은 체력 : 41%]

체력 소모가 10배나 되기 때문에 지금 상황에서 키는 건 좋지 않았다.

챙! 콰지지직!

"큭! 이, 이런 개 같은······!"

뇌신 강림을 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바놉이 크게 당황했다.

'제법 아플 거야.'

왜냐하면.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렌)] [소속 : Team 투지]

[리그 : 상위리그]

[근력 : 216(+5)(+97)] [민첩 : 216(+5)(+97)] [체력 : 190(+5)(+73)]

[정신 : 168(+5)(+64)] [지력 : 66(+26)] [마력 : 149(+5)(+57)]

뇌신의 포효로 업그레이드 되며, 천둥의 숨결보다 근력과 민첩이 5프로씩 더 상승했으니까.

이제는 바놉의 스텟과 크게 차이도 안 나는 데다가, 녀석은 한쪽 날개가 꿰뚫려 날지도 못하는 상황.

서서히 조여 오는 포위망에 갇힌 녀석이 할 수 있는 건.

'하급 악마들이 우수수 쏟아져 들어오길 기다리는 것 밖에 없지.'

하지만 그런 바놉의 기대는 이어지는 온달의 외침에 와르르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다.

"오스카님, 양초풍님은 입구 지원을!"

"알겠소!"

내가 합류함으로써 추가된 전력만큼, 남은 전력을 입구에 분산시킨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가 상대하겠소!"

"헉, 헉. 감사합니다."

"고생 많으셨소."

당장이라도 뚫릴 듯 위태위태했던 입구가, 양초풍과 오스카의 합류로 인해 다시 안정을 되찾았고.

"크윽, 젠장!"

내게 속절없이 밀리던 바놉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이걸로 녀석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아예 지워진 거나 마찬가지.

[제한 시간 : 02:36:22]

[현재 생존한 플레이어 수 : 14 명]

"드디어!"

내가 정면에서 바놉을 밀어붙이고, 하레크누드가 곁에서 지원하길 한참.

결국 녀석을 지하 공동의 외곽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물론 지하 공동의 외벽이 곡선으로 되어 있어 완벽한 구석은 아니었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녀석이 여기서 빠져나가려면 사이드 스텝을 밟아야 한다는 뜻인데.

'어딜!'

챙! 콰지직!

"끄윽!"

녀석이 순순히 빠져나가도록 내가 가만 놔둘 리 없었으니까.

"얼마 안 남았습니다. 조금만 더!"

팍! 파팍! 팍! 팍! 팍!

거기다 강기가 실린 온달의 화살도 바놉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견제하고 있는 상황.

'슬슬 마무리 지을 수 있겠어.'

"끄아아아아아!"

어떻게든 구석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광하는 바놉을 차분하게 막아내며 기회를 살피고 있을 때였다.

[들이치는 격류의 메아리!]

콰과과과과과광!

'빈틈!'

플로이드의 마법이 직격하는 사이 드러난 허점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잘 가라.'

"아, 안돼!"

서걱!

내 창이 번뜩임과 동시에 바놉의 머리가 허공을 날았다.

띠링!

[플레이어 '바놉' 을 처치했습니다.]

[<피의 흡수> 능력으로 극소량의 체력 스텟을 흡수합니다.]

[체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됐어.'

이걸로 위기라고 생각했던, 지하 공동의 전투가 끝났다.

다른 파티원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감사합니다, 렌님. 덕분에 전멸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새 다가온 온달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오히려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온달이 준 정보 덕분에 천둥의 숨결이 플래티넘 등급으로 업그레이드 된 상황.

그렇기에 오히려 내가 그에게 고맙다고 얘기하고 싶었다.

물론 다른 파티원들이 알아듣지 못하도록 구체적인 언급은 피해야 했지만, 온달이라면 충분히 내 말뜻을 알아들을 것이다.

"그래도요. 처음에 중급 악마를 혼자서 상대해주시겠다고 외치지 않으셨으면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을 겁니다. 그랬으면 입구를 막을 기회조차 놓쳤겠죠."

온달의 말에 하레크누드와 에디든, 플로이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중급 악마가 하나 더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온달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을 것이다.

나도 굉장히 당황했었으니까.

그나마 내가 중급 악마 하나를 혼자서 맡겠다고 했기에 작전이란 걸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두 명의 중급 악마를 상대로 작전을 짜기엔 전력의 공백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20분이 지났군요."

"······."

내 말에 미소 짓고 있던 파티원들의 표정이 싸악 굳었다.

오디세우스의 예상과 달리, 제한 시간이 멈추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남은 제한 시간은 2시간 36분.

59분 남았을 때 루에타 요새로 돌입했으니, 어느새 23분이나 지난 상황.

지하 공동으로 들어온 시간을 기준으로 계산해도 20분이 흘러 있었다.

그런데도 미션 완료 콜이 뜨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오디세우스 파티가 타깃 제거에 실패한 모양입니다."

온달의 말에 모두들 안색이 어두워졌다.

생존 플레이어의 숫자도 어느덧 14명으로 줄어들어 있었고.

우리 파티에선 사망자가 없었으니, 오디세우스 파티에서만 4명이나 죽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는 건.

"아무래도 우리가 타깃까지······ 제거하러 올라가 봐야 할 것 같군요."

오디세우스 파티가 실패했다는 뜻이겠지.

남은 네 명으로 타락 천사를 죽이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중급 악마들보다 5급 역천사의 스텟이 훨씬 높을 테니까.

'이미 도주했군.'

오디세우스에게 남겨 둔 그림자 표식.

덕분에 녀석이 어디에 있는지 실시간으로 알 수 있었다.

녀석의 현재 위치는······.

'이미 쉘터 쪽으로 가고 있네.'

혼자서 도주한 건지, 아니면 남은 파티원들을 모두 데리고 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오디세우스는 쉘터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쯧.'

남아 있는 우리 파티에 대한 의리 같은 건 기대하지도 않았다.

이곳은 콜로세움.

자신의 목숨은 자신이 챙겨야 하는 곳이다.

그렇기에 오디세우스를 욕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은혜를 갚겠다며 고결한 수정의 정보를 쥐여 준 온달이 특별한 경우랄까.

뭐 어쨌든.

"이번에도 제가 선두에 서서 하급 악마들을 뚫고 나가겠습니다."

마침 뇌신 강림을 사용해보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던 상황.

체력 소모율이 너무 높아 바놉을 상대로는 쓰지 못했지만.

'하급 악마들이라면 다르지.'

가면 덕분에 죽일 때마다 체력이 회복될 테니까.

[<피의 강화> 유지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피의 강화> 로 상승한 스텟이 초기화됩니다.]

마침 피의 강화 특전도 꺼진 상황.

녀석들을 죽이며 특전도 다시 활성화 시킬 필요가 있었다.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계속해서 렌님께 신세만 지는 것 같아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만."

온달의 물음에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저도 미션을 완수해야 하는 입장이니까요. 부담 갖지 마시죠."

"휴우.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렌님."

"잘 부탁드립니다."

플로이드, 하레크누드 등 다른 파티원들도 내게 고마움을 표했다.

'후.'

나는 곧장 창을 치켜세운 채 오스카와 양초풍이 막고 있는 입구 쪽으로 향했다.

내 뒤로 다른 파티원들이 기민하게 따라붙었고.

'시작해 볼까.'

[제한 시간 : 02:34:58]

[현재 생존한 플레이어 수 : 14 명]

그렇게 해서 나를 선두로 해서 타락 천사를 죽이기 위한 두 번째 전투가 시작되었다.

'뇌신 강림.'

띠링!

[<스킬:뇌신의 포효><스킬:뇌신 강림>으로 각성합니다.]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그 순간.

"······!"

"······!"

"······!"

어마어마한 뇌전이 사방을 집어삼켰다.

< 109화. 고결한 수정(6) > 끝

< 110화. 고결한 수정(7) >

[<스킬:뇌신 강림>]

[<스킬:뇌신의 포효>가 활성화 되어 있는 상태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2차 스킬.]

[사용하면 체력 소모를 10배로 늘리는 대신 근력과 민첩 스텟을 40% 상승시킵니다.]

[<벽력 >의 발동 확률이 1%로 상승합니다.]

[마력에 강한 뇌전의 기운이 깃듭니다.]

스킬 뇌신과, 벽력섬전.

그리고 뇌신 강림까지.

3중첩 된 뇌전은 붉다 못해, 이젠 까맣게 보일 정도였다.

'미쳤네.'

온몸에서······.

엄청난 힘이 솟구쳤다.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렌)] [소속 : Team 투지]

[리그 : 상위리그]

[근력 : 205(+5)(+86)] [민첩 : 205(+5)(+86)] [체력 : 156(+5)(+39)]

[정신 : 139(+5)(+35)] [지력 : 59(+15)] [마력 : 122(+5)(+30)]

피의 강화 특전이 비활성화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뇌신 강림으로 인해 40프로나 상승하다 보니 근력과 민첩 스텟이 205 포인트나 됐다.

이 정도면 충분히 뚫어볼 만 할 것이다.

어차피 죽일 때마다 스텍이 쌓여, 계속해서 스텟이 오를 테니까.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직!

"와······."

"미친······."

다른 파티원들도 내 모습을 보더니 입을 떡 하니 벌리고 있었다.

스킬 이름 그대로, 뇌신이 강림한 듯한 모습.

'윽.'

하지만 그와 동시에 싸늘한 감각이 전신을 짓눌렀다.

뒷목이 쭈뼛쭈뼛했다.

뇌신 강림을 활성화 시키자마자 초감각이 경고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남은 체력 : 33%]

체력 소모율이 무려 10배나 늘어났다는 것은.

'완전 양날의 검이군.'

말하자면 몸에 부담이 엄청 심한 스킬이란 뜻이었다.

위기의 순간에서나 쓰는 히든 카드 같은 느낌.

즉, 5개 밖에 존재하지 않는 스킬 슬롯에 2차 스킬이라는 이름으로 뇌신 강림이라는 스킬이 추가된 것 같달까.

하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죽일 때마다 체력이 회복될 테니까.

덕분에 나한텐 부담이 많이 낮아질 것이다.

"출발하겠습니다."

몸을 숙이며 하체를 살짝 구부리자, 허벅지가 터질 것처럼 팽창했고.

"오스카님! 양초풍님! 길을!"

"알겠소!"

온달의 외침과 동시에 오스카와 양초풍이 좌우로 비키며 내가 나갈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그 순간.

쐐애애애애애애액!

나는 전력으로 바닥을 박차며 밀려 들어오는 악마들에게 쇄도했다.

'악마의 눈.'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크루빌]

[성향 : 광신]

[근력 : 168(+?)] [민첩 : 170(+?)] [체력 : 155(+?)]

[정신 : 99(+?)] [지력 : 15(+?)] [마기 : 174(+?)]

무척 준수한 스텟이다.

피의 강화 특전이 꺼져 있는 상황.

이전이었으면 쉽게 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겠지.

하지만 나는 녀석의 스텟을 보고도 망설임 없이 돌진했다.

"무, 무슨······!"

서걱!

그리고 거침없이 창을 휘둘렀다.

띠링!

[플레이어 '크루빌' 을 처치했습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강화> 능력으로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1/30)]

[3분 이내에 다른 생명체를 처치하지 못하면 상승분이 초기화됩니다.]

'이 정도면 충분해.'

어느새 이곳에 들어올 때와 상황이 180도 바뀌어 있었다.

성인 남성 다섯 명이 겨우 지나갈 만큼 비좁은 오르막길.

좌우로 움직일 수 없기에, 여러 가지 스타일을 구사하는 내겐 커다란 페널티였지만.

서걱!

이제는 그런 페널티를 무시할 만큼 스텟이 상승한 상황.

나는 그저.

창을 휘두르기만 하면 됐다.

스타일의 상성을 무시할 만큼 스텟 차이가 압도적이었으니까.

"뒤, 뒤로 빠져! 어서!"

"밀지 말라고!"

서걱!

그렇기에 수십 명이나 되는 하급 악마들은 내 피의 강화 스텍과 피의 흡수의 제물일 뿐이었다.

띠링!

[<벽력 >이 발동됩니다.]

꽈아아아아아아앙!

"끄아악!"

"으윽!"

좁고 어두운 오르막길 안.

그곳이 순간, 빛으로 가득 찼다.

마치 번개가 번쩍하는 느낌.

'무시무시한데.'

그와 동시에 하급 악마 세 명의 몸이 갈기갈기 찢어져 나갔다.

"조심!"

그로 인해 나를 뒤따라오던 파티원들이 바닥에 널브러진 하급 악마들의 내장과 고깃덩이를 밟지 않기 위해 분주히 발을 놀려야 했다.

뇌신 강림으로 인해 벽력의 발동 확률이 1프로까지 올랐다는 건 100번 휘두를 때마다 한 번씩 벽력이 터진다는 뜻.

챙! 채챙! 서걱! 챙!

띠링!

[<벽력 >이 발동됩니다.]

꽈아아아아아앙!

'진짜 개사기네.'

그러다 보니, 이전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벽력이 자주 터지고 있었다.

"설마 고위 플레이어가 껴 있었던 건가······!"

"모두 빠져! 어서! 으윽!"

'다들 전의를 상실했군.'

벽력의 압도적인 위력을 본 하급 악마들의 눈동자에 공포라는 감정이 깃들었다.

서걱!

[<피의 강화> 능력으로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16/30)]

덕분에 하급 악마들을 상대로 벌써 16 스텍이나 쌓을 수 있었고.

그리고 그 속도는 점점 더 빨라져 갔다.

16스텍이 쌓였다는 건, 모든 스텟이 16프로 상승했다는 말이었으니까.

'정말 엄청난 스킬을 얻었어.'

이 정도라면, 밖에 있는 타락 천사도.

서걱!

충분히 죽일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임?

└쟤네 하급 악마 아니지? 그치? 하급 악마라면 렌 한 명한테 저렇게 픽픽 쓰러질 리가 업써. 내 말이 맞지?

└개쩐다.. 와..

└갑자기 씹 조용해짐 ㅋㅋㅋㅋ 방금 전까지 쿠 훌린 파티가 아무 것도 못 했다고 폭주하던 댓글창 맞나ㅋㅋㅋㅋㅋ

└ㅁㅊ 타천사 마요엘이 록탄 성城으로 도망갔는데, 쿠 훌린이 뭘 할 수 있음? 걔네도 요새 급이었으면 벌써 뚝배기 깼지 ㅡㅡ

└내가 쿠 훌린 까자고 한 얘기가 아니자낰ㅋㅋㅋ 분위기가 갑자기 바뀐 걸 얘기하는데 핀트를 못 잡네 ㅋㅋㅋㅋ 난독증 있음? ㅎ

└그게 중요한 게 아님. 렌 왤케 쎄냐. 쿠 훌린 vs 렌 투표 ㄱㄱㄱㄱ

└너 오기 전에 이미 투표 끝냄. 쿠 훌린 승.

└ㅋㅋㅋㅋㅋ 개소리하네. 누구 마음대로 쿠 훌린 승임? 혹시 눈알님 가출하심? 지금 렌이 다 뚜까 부수는 거 안보임?

└어.. 나도 쿠 훌린 한 표였는데, 지금 렌이 싸우는 모습 보니까 둘이 비등비등할 거 같기도.. 난 일단 중립 박음.

└렌 한 표.

└렌 한 표2222

└아씨 ㅡㅡ 왜 자꾸 쿠 훌린이랑 렌만 비교하냐고. 주소월이나 헥토르 무시함? 예천화랑 시르카, 엔키두 등등 최상위권 네임드가 얼마나 많은데 ㅡㅡ

└좆 까라 븅신들ㅋㅋㅋㅋㅋㅋ 약한 애들 학살하는 거랑 최강자끼리 일댈 붙는 거랑 같나 ㅋㅋㅋ 얼마 전에 라그나도 그러다가 목 댕강 당한 거 못 봄? ㅋㅋㅋㅋ

└ㅇㅇ 렌이 지금 어떤 모습을 보여주든 쿠 훌린한텐 안 됨ㅎ

한동안 정신없이 하급 악마들을 학살하며 지하 공동을 나서고 있을 때였다.

꽈아아아아아앙!

세 번째 벽력이 터지고, 근처에 있던 세 명의 하급 악마가 순식간에 터져 나갔다.

띠링!

[<피의 강화> 능력으로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30/30)]

[<피의 강화> 로 올릴 수 있는 스텟을 끝까지 채웠습니다.]

[<피의 강화>로 상승한 스텟이 30분간 유지됩니다.]

'벌써 30명이나 죽였어?'

좁은 오르막길에서 느껴지는 숨소리가 어느새 많이 줄어 있었다.

우리 파티원 10명을 제외하면, 이제는 네다섯 명 정도의 하급 악마만이 남은 상황.

"빨리 나가! 어서!"

"일단 자쿱님과 합류를······."

그러자 남은 하급 악마들이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늦었어.'

하지만 녀석들 중 그 누구도 내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피의 강화 특전이 켜지고, 내 민첩 스텟이 240 포인트에 육박했기 때문이다.

"으으······ 제, 젠장!"

'처음부터 도주를 감행했다면 모를까.'

서걱! 서걱!

창이 번뜩이자, 네 개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이걸로 지하 공동에 몰려든 하급 악마는 끝.

[남은 체력 : 37%]

'후우. 쉽지 않겠는데.'

거의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운 수준으로 40명 정도의 하급 악마를 죽였는데도 남은 체력이 37프로 밖에 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한 명 죽일 때마다 1%에 가까운 체력을 소모했다는 뜻.

문제는 우리가 지하 공동으로 들어오는 오르막길을 절반 정도밖에 오지 못했다는 거다.

'이 상태라면 밖에 나갈 때 쯤엔 체력이 20프로 미만으로 떨어지겠군.'

밖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이 더욱 조급해졌다.

뇌신 강림을 끄면 8시간 뒤에나 다시 활성화 시킬 수 있으니까.

적어도 미션을 완수할 때까지는 뇌신 강림을 유지해야 하는 내 입장에선.

'빨리 나가서 피의 흡수를 해야 해.'

어떻게든 악마들을 죽여 체력을 회복시켜야 했다.

"후우."

"왜 그러십니까, 율리안님."

"솔직히 너무 허무해서 그렇습니다."

"뭐가요?"

빠르게 밖으로 향하는 오르막길.

율리안의 한숨에 곁에 있던 플로이드가 묻자, 그가 소곤소곤 대답했다.

물론 나한테는 다 들렸지만.

"저랑 수무아붐님, 마사노부님 셋이서는 버티는 게 고작이었는데, 렌님은 혼자서 다 쓸어버리고 있지 않습니까."

"아······."

"같은 상위 플레이어라는 게 민망할 정도네요. 사실 렌님은 상위 넘버링 경기를 뛰어본 적이 한 번도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이렇게나 차이 나다니······."

"너무 자괴감 느끼지 마세요, 율리안님. 그 누가 렌님이 저렇게 강할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어요. 딱 보니까 상위 리그에선 쿠 훌린이나 주소월. 그 두 사람 말고는 상대가 없어 보이는데요."

작게 대답하는 플로이드의 말에 주변에 있던 파티원들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들 날 인정한다는 듯한 분위기.

워낙 좁은 공간이다 보니, 나 뿐만 아니라 다른 플레이어들에게도 들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반응에도 별 감흥이 없었다.

'아직 멀었어.'

기초 스텟만 놓고 보면 내가 저들의 발끝에도 따라가지 못할 테니까.

[남은 체력 : 19%]

그렇게 한참을 달려 공동의 밖으로 빠져나왔을 때였다.

"······!"

"······!"

무너져 내리고, 박살 난 전장의 뒷수습을 하고 있던 하급 악마들.

그들은 나를 보며 한동안 멍하니 있더니, 곧이어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녀석들이 어떻게······?"

"크루마님과 바놉님이 설마!"

하지만 나는 녀석들이 놀라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바로 달려들었다.

서걱! 서걱!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휴. 좀 살 것 같군.'

수직 하락하던 체력이, 피의 회복으로 인해 조금씩 회복되어 가고 있었다.

'빨리 타락 천사부터.'

나는 녀석들에 그치지 않고 바로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다.

뇌신 강림이 꺼지기 전에 단기 결전을 펼칠 생각이었다.

"제, 젠장!"

건물 입구를 지키고 있던 두 명의 하급 악마가 날 막아서기 위해 무기를 들어 올렸지만.

꽈아아아아아앙!

때마침 터진 벽력 덕분에, 산산조각이 난 채 사라졌다.

그리고 보이는 바깥 모습.

'난리가 났군.'

건물 곳곳이 무너지고, 콘크리트로 되어 있던 바닥은 완전히 개박살이 나 있고, 죽은 플레이어들의 시체는 한쪽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하급 악마의 숫자는 열세 명.

그들은 주변 잔해를 치우거나, 상처를 치료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펄럭! 펄럭!

그 사이로 존재하는 한 쌍의 검은 날개를 가진 악마.

'역시 여기에도 중급 악마가 있었어.'

녀석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움찔했다.

"······전멸하기 전에 이판사판으로 마성석을 깨부순 줄 알았거늘. 설마 크루마와 바놉이 죽었을 줄이야."

녀석은 우리의 모습을 보자마자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한 것 같았다.

"정말 대단하······."

'말 많네.'

나는 녀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변의 하급 악마들에게 달려들었다.

서걱! 서걱!

한가하게 녀석의 말이나 들어줄 상황이 아니었다.

줄어드는 체력을 어떻게든 유지해서, 중급 악마와 타락 천사까지 죽여야 했으니까.

"모두들 렌님의 엄호를! 타깃이 보이면 바로 말씀 부탁드립니다!"

내가 하급 악마들을 도륙하는 걸 신호로, 파티원들도 전투를 시작했다.

사실 전투라고 할 것도 없었다.

고작 열세 명?

모든 특전이 활성화 되어 있고, 뇌신 강림까지 사용한 이상 녀석들은 그저.

"이 광대 새끼들이!"

"죽어!"

서걱!

내 피의 회복 제물일 뿐.

"각개격파 당하지 말고 어서 뭉쳐! 저놈은 내가 상대하겠다!"

쐐애애애액!

그러자 중급 악마가 크게 소리치더니, 내게 달려들었다.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자쿱]

[근력 : 224(+?)] [민첩 : 229(+?)] [체력 : 192(+?)]

[정신 : 126(+?)] [지력 : 29(+?)] [마기 : 196(+?)]

'별거 아니군.'

그 모습에 나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현재 내 근력과 민첩 스텟은 239.

스텟이 더 낮을 때도 크루마를 쓰러트린 내게, 녀석의 돌진은.

띠링!

[<벽력 >이 발동됩니다.]

꽈아아아아아아앙!

"미친······!"

그저 우스워 보일 수밖에.

때마침 터진 벽력.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 건지, 녀석이 뒤로 쭉 빠졌기에 즉사는 면했지만, 검을 쥐고 있던 한쪽 팔이 통째로 사라져 있었다.

'잘 가라고.'

나는 도망가는 녀석을 향해 곧장 쇄도해, 창을 휘둘렀다.

내 공격을 막아낼 무기가 없는 이상, 녀석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

띠링!

[<벽력 >이 발동됩니다.]

꽈아아아아아아앙!

< 110화. 고결한 수정(7) > 끝

< 111화. 고결한 수정(8) >

띠링!

[플레이어 '자쿱' 을 처치했습니다.]

[<피의 흡수> 능력으로 극소량의 근력 스텟을 흡수합니다.]

[근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1%의 확률을 두 번이나 뚫고 연속으로 터진 벽력.

'하. 하하······.'

그 광경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고작 두 번의 공격만으로 죽일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미친!"

"자쿱님이······!"

자쿱이 내게 단숨에 죽자, 주변에 있던 하급 악마들이 크게 동요했다.

'그럴 만하지.'

아무리 나라고 해도 온달 정도 수준의 강자가 고작 두 번의 공격에 쓰러졌다면 굉장히 당황했을 테니까.

물론 놀란 건 하급 악마들만이 아니었다.

"저거······ 필살기 같은 스킬 아니었어?"

"저런 식으로 연속 공격이 가능했다니······."

지금껏 내가 싸워 오는 모습을 쭉 지켜봐 왔던 파티원들 마저도 뒤따라오다 말고, 멍하니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파티원들을 뒤로하고 온달에게 외쳤다.

"온달님, 나머지 녀석들도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중급 악마가 죽은 이상, 어차피 하급 악마들은 내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런 녀석들을 파티원들과 함께 정리하는 것보단, 차라리 체력 회복을 위해 혼자서 죽이는 게 더 나을 것이다.

"그럼 저흰 타깃을 찾겠습니다! 지금부턴 율리안님이 선두를!"

"알겠습니다!"

다행히 온달도 나를 도와 하급 악마를 정리하는 것보단, 타깃을 찾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기존의 선두였던 나를 대신해, 기사인 율리안을 앞세워 건물 옆에 나 있는 샛길로 향했다.

회복의 샘이 있는 방향이었다.

'남은 악마의 숫자는 열한 명. 적어도 11프로의 체력은 회복시킬 수 있어.'

"마, 막아!"

그러자 하급 악마들이 다급하게 파티원들을 뒤쫓으려고 했지만.

'어딜.'

내가 곧장 앞을 막아서자, 모두들 주춤하며 뒤로 물러났다.

감히 내게 덤벼드는 녀석이 없었다.

"씨발······."

그저 욕지거리를 내뱉을 뿐.

자신들이 감히 어쩌지 못하는 자쿱을 내가 단숨에 죽여버린 모습을 보고 사기를 잃은 것이다.

모두들 이미 체념한 채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달까.

덕분에 나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도.

서걱! 서걱! 서걱!

녀석들을 모조리 죽여버릴 수 있었다.

[남은 체력 : 25%]

'그래도 간당간당할 것 같은데.'

뇌신 강림은 정말 무시무시한 사기 스킬이지만, 페널티가 너무 컸다.

체력 소모 10배.

기존에 1시간 움직여서 소모할 체력을, 지금은 단 6분 만에 소비한다는 것.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애초부터 뇌룡의 포효처럼 유틸기로서 만들어진 스킬이 아닌 것이다.

필살기처럼 쓰라는 거겠지.

'그냥 다섯 개밖에 없는 스킬 슬롯이 여섯 개가 되었다고 생각해야겠군.'

아예 별개의 스킬로 생각하면 이만한 스킬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쿨 타임이 8시간이나 되는 만큼, 정말 중요한 순간 외에는 사용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기왕 켠 거, 타락 천사까진 죽여야 해.'

나는 서둘러 치료의 샘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싸우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기에.

'이미 다른 곳으로 이동한 건가.'

마성석 가동이 중단된 순간부터 타락 천사가 이곳에 있을 이유가 사라진 셈이었으니.

아무래도 뇌신 강림을 꺼야 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파티원들에게 향하고 있을 때였다.

"렌님! 조심!"

급하게 내 쪽으로 달려오는 온달과 파티원들.

그리고 온달의 외침과 동시에.

'뭐지?'

사락. 사락.

내 귓가를 자극하는, 아주 미세한 소음.

그리고 마력장에 걸려드는 아주 미세한 움직임까지.

'은신······!'

순간 소름이 돋았다.

초감각과 마력장은 은신 스킬의 카운터나 다름없는 능력.

덕분에 지금까지 암습 계열 플레이어를 상대하며 단 한 번도 애를 먹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온달의 경고를 듣기 전까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어디냐.'

심지어 위치도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마력장에서 무언가가 느껴지긴 하는데, 그 움직임이 파동처럼 퍼져나가, 도무지 어디에서 움직이는 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곧장 자세를 낮춘 채, 정면에 창을 겨누고 사방을 경계했다.

'젠장.'

이마에서 식은땀 한 방울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

'이대로는 선공을 당하기 전까진 찾아내기가 쉽지 않을······.'

그 순간, 달려오던 온달과 눈이 마주쳤다.

끄덕.

그리고는 무언의 눈빛 교환에 고개를 끄덕인 온달이 곁에서 마법을 영창중이던 플로이드의 어깨를 툭 쳤고.

[폭루유성爆淚流星!]

플로이드의 외침과 동시에 하늘에서 엄청난 숫자의 유성이 내가 있는 곳으로 떨어져 내렸다.

엄청난 광역 마법.

'제법이군.'

하지만 내게 직접적으로 떨어지는 유성은 하나도 없었다.

플로이드가 섬세한 마나 컨트롤로 조정했다는 뜻.

광역 마법 특성상, 세이프 존을 정확하게 설정하기 쉽지 않을 텐데, 플로이드가 그걸 해낸 것이다.

'이 틈에 찾아야 해.'

마법이 쏟아지면 먼지가 피어오르겠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녀석도 마법을 피하기 위해 은신을 풀어야 할 거고, 그러면 초감각과 마력장으로 충분히 녀석을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찾았다.'

쐐애애애애애액!

그리고 내 예상대로, 바로 옆 1미터 떨어진 부근에서 누군가 내게 빠른 속도로 쇄도해 들어오고 있었다.

움직이기 편해 보이는 순백의 가죽 갑옷를 착용한 천사였는데, 왼쪽 날개는 모두 뜯겨 나가고, 오른쪽엔 딱 한 개의 날개만이 남아있는 상태였다.

뜯겨 나간 날개들은 절반가량 남아있었는데, 마치 자라다 만 것 같은 모습이었달까.

아무래도 회복의 샘에서 6시간 정도 회복한 덕분인 것 같았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날기 어려울 테지만.

'그래 봤자야.'

내게 뻗는 단검이 유성에 반사되어, 마치 한 줄기 빛이 번쩍하는 느낌이었다.

챙! 콰지직! 채챙! 콰지지지직!

"······!"

내가 완벽에 가깝게 막아내자, 상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을 때나 무서운 거지.'

녀석이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뇌신 강림까지 활성화 되어 있는 나를 압도할 수는 없을 테니까.

콰과과과과과과광!

'어딜!'

유성이 떨어지면서 피어오르는 엄청난 먼지 속.

타락 천사가 몸을 숨긴 채 빠져나가려고 하기에, 나는 곧장 창을 내질렀다.

띠링!

[<청천벽력 >이 발동됩니다.]

꽈과과과과과과광!

"······!"

때마침 발동한 청천벽력.

까만 하늘이 번쩍! 하더니 열 줄기 벼락이 떨어지며 주변을 난도질했다.

'잡았군.'

그로 인해 타락 천사는 어둠 속으로 숨어들지 못한 채 내 창과 뇌전들을 막아내야 했다.

"수무아붐님, 하레크누드님이 지원을! 율리안님과 오스카님은 후방을 맡아주세요! 양초풍님과 마사노부님은 퇴로를 부탁드립니다! 플로이드님과 에디든님은 바로 영창을 시작해주세요! 저는 엄호하겠습니다!"

"알겠소!"

"예!"

"알겠습니다!"

내가 타락 천사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사이, 파티원들은 온달의 지휘하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순식간에 타락 천사를 에워싸고 레이드 형태의 진형이 만들어진 것이다.

거기다 양초풍과 마사노부를 입구 쪽 방향으로 배치해, 혹시 모를 탈출의 가능성까지 지워버린 이상, 타락 천사는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쯧. 마계로 넘어가는 것이 쉽지 않을 거라고 예상은 했다만."

그걸 느낀 것인지, 타락 천사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남은 체력 : 17%]

'체력이 너무 간당간당한데.'

문제는 내 체력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이 상태라면, 5분을 채 버티지 못할 수도 있었다.

'뇌신 강림을 꺼야 하나?'

결정하려면 빠르게 해야 했다.

이미 한계에 달했을 땐, 뇌신 강림을 해제해 봤자 움직일 수 없는 건 똑같을 테니까.

챙! 콰지직! 콰지직!

'아냐. 그 전에 끝낼 수 있어.'

날개를 다 잃은 시노엘을 죽일 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지금은 주변에서 몰려드는 몬스터도 없고, 나라는 확실한 매인 탱커가 있는 상황.

거기다 암살 계열의 타락 천사다 보니, 리치에서도 내가 훨씬 유리하다.

이대로만 진행된다면 3분 안에 타락 천사를 죽일 수 있을 것이다.

빠르게 결정을 내린 나는 타락 천사를 밀어붙였다.

└방금 봄? 중급 악마 딱 두 번에 댕강 당하는 거? 쿠 훌린도 저건 불가능함 ㅋㅋ

└ㅇㅈㅇㅈ 렌이 쿠 훌린보다 더 센듯.

└헛소리를 존나 진지하게 하고 있네 ㅋㅋㅋ 대충 앞구르기 하면서 생각해도 쿠 훌린이 이김 ㅋㅋ

└님들 쿠 훌린이 싸우는 거 한 번이라도 제대로 보고 씨부리는거 맞음? 상위 리그 투톱이라고 불리던 라그나 로드브로크가 순삭 당한 걸 보고도 렌이 이긴다고 하는 건 지능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님? ㅋㅋㅋㅋ

└아오 지긋지긋해 ㅡㅡ 아직도 그걸로 싸우고 있냐? 쿠 훌린 vs 렌 매치업 해달라고 요청을 해 차라리 븅신들아..

└ㅋㅋㅋㅋㅋ 존나 시간 아깝긴 함 ㅋㅋ 여기서 백날 입털어봤자 변하는 거 하나도 없는뎈ㅋㅋㅋ

└와.. 진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쿠 훌린이 부동의 원탑일 줄 알았는데, 그 사이에 렌이라는 괴물이 나타났네.. 이래서 콜로세움이 재밌음 ㅎ

└ㅇㅈㅇㅈ 영원한 최강자라는 수식이 붙기가 힘들지.

'확실히 중급 악마보다 5급 역천사가 훨씬 강하네.'

벽력이 터지기 직전.

빛기둥이 생성되는 걸 본 타락 천사가 뒤로 쭈욱 빠져나갔고.

꽈아아아아앙!

덕분에 벽력이 터진 내 창은 빈 허공을 때려야 했다.

암살자 스타일의 타락 천사라서 그런가, 민첩 스텟에 특화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움직임이 너무 빨라, 따라가기가 힘들 정도.

"율리안님, 오스카님! 더 압박을! 타깃을 렌님 간격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해 주세요!"

"예!"

쐐애액! 서걱!

"하레크누드님이랑 수무아붐님이 무너지면 안 됩니다! 렌님 옆구리가 비어요!"

"알겠습니다!"

그럼에도 타락 천사를 상대하는 게 무척 수월했다.

"지금이에요! 렌님이 밀어붙일 때 뒤쪽에서 더 푸쉬를!"

정면에서 타락 천사를 밀어붙여 줄, 나라는 메인 탱커가 존재했으니까.

거기다 상황에 따라 하레크누드와 수무아붐이 위치를 스왑해 주었고, 율리안과 오스카가 후방에서 튼튼하게 버티고 있는 상황.

파티원들의 수준도 높다 보니, 큰 어려움 없이 타락 천사를 공략해 나갈 수 있었다.

그때였다.

"저깄다!"

멀리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외침.

힐긋 고개를 돌리니, 달려오는 네 명의 존재가 보였다.

'얘네는 또 언제 온 거지?'

쉘터까지 도망갔었던 오디세우스.

그리고 그의 파티에 소속되어 있는 세 명의 플레이어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

"······?"

다른 파티원들도 그들의 등장에 의아하다는 고갯짓을 할 정도.

금세 온달에게 다가온 오디세우스가 입을 열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어쩔 수 없이 빠져나가면서도 걱정이 정말 많았습니다."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다시 오신······?"

"네 명이나 죽어서 어쩔 수 없이 후퇴해야 했지만, 안에 계신 온달님과 파티원분들이 걱정돼서요. 요새 근처를 돌아다니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거짓말.'

오디세우스의 말에 나는 창을 휘두르면서도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림자 표식 덕분에 오디세우스가 쉘터로 도망갔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내 입장에선 어이가 없었다.

'그게 아니겠지.'

당연히 우리 파티도 전멸할 줄 알고 쉘터로 도망갔더니, 요새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리니까 다시 온 게 분명했다.

벽력의 소리가 워낙 컸어야지.

결국 저들도 어떻게든 타락 천사를 죽여야 하는 입장이었으니까.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희도 바로 합류하도록 하죠!"

오디세우스와 세 명의 플레이어들이 서로 눈을 맞추더니, 우리가 레이드하고 있는 사이사이로 끼어들었다.

어떻게든 밥값을 해보겠다고 이러는 것 같은데.

'어림없지.'

나는 비집고 들어오는 오디세우스를 슬쩍 밀어내며 타락 천사에게 창을 휘둘렀다.

이미 타락 천사는 그로기에 빠진 상태.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끝낼 수 있는 상황에서, 내가 녀석들에게 길을 내줄 리 없었다.

내 소중한 피의 흡수 제물이었으니까.

띠링!

[<벽력 >이 발동됩니다.]

'나이스 타이밍.'

또다시 발동된 벽력.

"······!"

빛기둥이 뿜어져 나오자, 타락 천사가 눈을 치켜떴다.

이번에는 율리안과 오스카가 제대로 후방을 차단하고 있었기에, 이전처럼 뒤로 빠져서 피할 수가 없는 상황.

"아, 아버지······."

그걸 알기에 타락 천사의 눈동자에 체념이 깃들었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뇌전이 하늘로 솟구치고, 내가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엄청난 충격파가 발산했다.

띠링!

[5급 역천사 '레시엘' 을 처치했습니다.]

[<피의 흡수> 능력으로 극소량의 근력 스텟을 흡수합니다.]

[근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근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벽력으로 인해 피어난 먼지가 사라지자, 상반신이 통째로 사라진 타락 천사의 시체가 보였다.

'뇌신 강림 해제.'

그 모습을 보자 긴 한숨이 뿜어져 나왔다.

이렇게 두 번째 미션도 끝난 것이다.

띠링!

[승리 조건 : 루에타 요새로 숨어든 타천사를 척살하라]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루에타 침투> 미션을 완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긴급 미션 <루에타 침투> 경기가 종료되었습니다.]

[기본급 x 1 의 승리 수당이 지급됩니다.]

"끝났다······."

"하. 모두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특히 렌님. 제일 고생 많으셨네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파티원들.

내게 고마움을 표하기에, 나 또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띠링!

[공헌도에 따른 보너스를 책정합니다.]

[공헌도]

[렌 : 40%] [온달 : 9%] [율리안 : 7%] [플로이드 : 6%] [양초풍 : 6%]

[하레크누드 : 5%] [에디든 : 5%] [수무아붐 : 5%] [오스카 : 4%] [마사노부 : 3%]

[몽연 : 3%] [오디세우스 : 2%] [게르하르트 : 1%] [거스테이브 : 1%] [룬디네 : 1%]

[라울 : 1%] [레너드 : 1%] [하부 아스미 : 0%] [리샤르 : 0%] [뭄베인 : 0%]

[긴급 미션의 공헌도 1위를 기록했습니다.]

[공헌도 1위를 압도적으로 달성하셨기 때문에 50,000 포인트의 보너스를 지급받게 됩니다.]

[중급 악마를 3명이나 처치했습니다.]

[하급 악마를 54명이나 처치했습니다.]

[추가로 x 3 의 보너스 포인트를 지급받게 됩니다.]

그리고 온달과 다른 파티원들이 있는 곳으로 향하려 할 때였다.

갑자기 오디세우스가 내 앞을 가로막더니,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자는 뜻.

'쯧.'

"정말 엄청난 실력자셨군요.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음에는 같은 팀원으로 만났으면 좋겠군요."

나도 오디세우스의 손을 맞잡아 주었다.

"마지막에 도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오디세우스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시는 보지 말자고.'

도망간 것 자체를 비난할 생각은 없었지만, 이후에 보인 행보는 무척 실망스러웠다.

마치 주변에서 우릴 돕기 위해 아등바등 했던 것처럼 얘기했었으니까.

'기회주의자.'

하지만 나는 그런 속내를 내비치지 않았다.

언제 또 어떻게 만날지 모르는 사이였기에.

지금으로선 그의 기회주의적인 성향을 파악했다는 것에 만족할 뿐.

"그럼 또."

나는 오디세우스에게 가볍게 목례한 후, 그를 지나쳐 온달에게 다가갔다.

"온달님."

"아, 렌님."

그리고는 깊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온달님."

[상위리그-긴급 미션 <루에타 침공> 경기를 종료합니다.]

[파이트 머니로 217,000 P 를 지급받았습니다. (팀 '투지' 수수료 93,000 P 차감)]

[기본급 +55,000 P / 승리 수당 +55,000 P / 추가 보너스 +150,000 P / 마성석 파괴 보너스 +50,000 P / 수수료 -93,000 P]

[다음 경기부터는 기본급을 70,000 P 로 책정합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네요. 덕분에 살았습니다.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렌님."

한동안 묘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온달.

그가 이내 씩 웃었다.

"상위 넘버링에서 다시 봅시다. 같은 팀으로."

< 111화. 고결한 수정(8) > 끝

< 112화. 새로운 네임드(1) >

마계의 최하층.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의 불빛이 대전大殿을 옅게 비추고 있었다.

이번 긴급 미션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5급 역천사, 마요엘.

그녀가 대전 한가운데에서 한쪽 무릎을 꿇으며 왕좌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저를 받아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고개를 숙인 그녀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그저, 앞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존재감이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다.

―내 어찌 너를 잊겠느냐, 마요엘이여.

작게 읊조린 목소리에도 대전이 쩌렁쩌렁 울리는 것 같았다.

'으으.'

그 안에 담긴 힘을 느낀 마요엘이 몸을 움찔 떨며, 더욱 깊숙이 머리를 내리깔았다.

―고개를 들라.

마요엘이 홀린 듯 고개를 들었다.

왕의 목소리에는 항거할 수 없는 절대자의 권위가 들어 있었다.

고개를 드니, 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왕의 모습이 보였다.

―그대에게 은혜를 하사하겠노라. 기대하는 바가 크노니, 부디 나와 형제들을 위하여. 그리고 마계를 위하여 애써주거라.

왕이 한쪽 팔을 뻗자, 그의 손끝에서 자줏빛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흘러 나와, 마요엘의 몸을 휘감았다.

연기에 휩싸인 마요엘의 온몸에서 우드득- 우드득- 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대단해.'

엄청난 힘이 샘솟았다.

이게 마기魔氣의 힘.

몸속에서 마기와 신성력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 자줏빛 연기 안에서, 마요엘은 다시 한번 머리를 조아렸다.

"예."

마계의 왕이자.

또 한 명의 초월자에게.

"첫 번째 대천사시여."

고개를 숙인 그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 * *

[남은 포인트 : 444,730 P]

"하."

긴급 미션을 완수하고, 무사히 경기를 마친 기념 파티를 즐긴 다음 날.

집무실에 앉아 보유 포인트를 확인한 나는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고작 한 경기를 뛰었는데, 보유 포인트가 44만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미친 거 아니야?'

시노엘을 죽이면서 23만 포인트.

그리고 루에타에서 26만 포인트.

거기다 마성석을 부순 보너스 5만 포인트에, 퍼포먼스 오브 더 하이블러드에 선정되며 또 추가로 5만 포인트까지.

수수료 30%를 떼고도 내 수중에 41만 포인트나 들어온 것이다.

'거기다 플레잉 코치로 3프로 페이백 받은 것도 있지.'

3% 페이백이 무려 8500 포인트.

거기에 팀 투지의 다른 플레이어들로 인해 들어온 포인트까지 합치자 44만 포인트나 됐다.

'운이 좋았어.'

긴급 미션 한 경기를 뛰었을 뿐이지만, 미션이 두 개였기 때문에 벌어들이는 포인트의 양이 무척 많았다.

거기다 마성석이라는 보너스 미션까지.

덕분에 고작 한 경기를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위 리그 첫 번째 경기였던 죽음의 구도자, 그리고 두 번째 경기였던 혁명 경기까지 합친 포인트를 벌게 된 것이다.

보유 포인트를 본 나는 책상을 검지로 툭, 툭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근력이랑 민첩. 슬슬 둘 중에 한 개를 선택할 때가 됐어.'

체력 스텟은 애초에 고민도 하지 않았다.

뇌신의 포효만 해도 체력 소모율이 2배로 상승하기에, 효율이 떨어진다.

어차피 가면 덕분에 체력을 꾸준히 회복할 수 있기도 하고.

'근력이랑 민첩, 둘 다 나쁘지 않아.'

이미 기초 스텟 120을 앞두고 있는 상황.

이젠 어지간한 강자와 붙는 게 아니라면, 근력이 부족해 공격을 막아내지 못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건 민첩도 마찬가지고.'

루에타 요새에서 죽였던, 레시엘이라는 타락 천사와 싸울 때 충분히 느꼈다.

이젠 나보다 더 빠른 상대를 만난다 해서, 손도 못 써보고 거리를 허용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결국 어느 쪽에 더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달렸군.'

압도적인 화력이냐, 아니면 상황별로 대처할 수 있는 유연성이냐.

뇌신과 벽력 덕분에 현재 내 화력은 상위 리그 탑 클래스.

거기에 이제는 뇌신 강림이라는 또 하나의 무기를 손에 쥔 상황.

여기서 더 화력을 끌어올린다면 아마 상위 플레이어들 중에서는 내 창을 받아낼 존재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역시 민첩을 올리는 게 낫겠어.'

압도적인 화력이 과연 고위 플레이어들에게도 통할까?

그런 생각까지 이어지자, 근력의 메리트가 너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근력이 높다고 한들, 상대할 수 있는 플레이어의 폭이 너무 적어.'

개중에는 나보다 화력이 더 센 녀석들도 있을 것이다.

당장 상위 리그에서만 예를 들어 봐도, 쿠 훌린이라는 최상위 네임드가 있었고.

물론 내가 그를 직접 상대해 본 건 아니지만, 그동안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며 신들이 남긴 댓글을 통해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신들이 화력만큼은 내가 쿠 훌린한테 떨어진다고 그랬지.'

그런 플레이어와 상대하게 된다면, 더 높은 화력을 가진 쪽이 유리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

벼르고 벼른 회심의 무기가 쓸모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런 상황에 자주 직면하게 되겠지.

'하지만 민첩을 올리면 그런 상황에 직면해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어.'

민첩 스텟 자체는 그저 움직임이 빨라지게 해준다거나, 반응 속도가 상승한다거나, 더 유연해지는 등의 효과밖에 없지만, 그런 것들이 의외로 엄청 다양한 부분에 영향을 미친다.

특히 초감각과 마력장을 이용해 다양한 스타일을 구사하는 내게 있어서, 그 영향은 더욱 클 것이다.

'생존에서도 훨씬 유리하겠지.'

근력 스텟을 찍어 화력을 올린다면 대다수의 플레이어들에게 압도적인 위용을 보일 수 있겠지만, 명심해야 할 게 있었다.

백 명의 플레이어들을 죽여 봤자, 결국 나보다 강한 단 한 명의 플레이어를 만나 죽는다는 것.

결국 내가 추구해야 할 방향은 나보다 강한 플레이어를 만났을 때 어떤 스텟이 더 유리한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민첩을 올려야겠군.'

마음을 먹은 나는 시스템 상점으로 접속했다.

사실 근력과 민첩, 결국 뭘 올리든 간에 내가 지금보다 강해진다는 건 분명하기에, 스텟을 구입하는 내 손길엔 한 줌의 주저함도 들어있지 않았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민첩 스텟이 1 상승합니다.]

[13,000 P 를 소모하셨습니다.]

[민첩 스텟이 1 상승합니다.]

[13,000 P 를 소모하셨습니다.]

[민첩 스텟이 1 상승합니다.]

[15,000 P 를 소모······.]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렌)] [소속 : Team 투지]

[리그 : 상위리그]

[근력 : 115] [민첩 : 143] [체력 : 113]

[정신 : 99] [지력 : 44] [마력 : 91]

민첩 스텟 143 포인트.

'아주 좋네.'

그 수치를 본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웬만한 강자들을 만나더라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빠른 스타일 전환을 통해 적어도 상성에서는 먹고 들어갈 수 있을 테니까.

'다음으로 체크해야 하는 건······.'

포인트 사용을 마친 나는 커뮤니티로 들어갔다.

'슬슬 성계 대항전에 대한 오피셜이 나올 때가 됐는데.'

내게 6개월이란 자격 정지가 내려진 이유에 대해, 나는 성계 대항전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슬슬 성계 대항전이 열린다는 얘기가 흘러나와야 한다.

그래야 홍보를 충분히 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내가 찾는 게시글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긴급 미션에 대한 후기들밖에 없었달까.

―쿠 훌린은 역시 쿠 훌린. 파이트 오브 더 하이블러드에 선정되며 상위 리그의 최강자임을 다시 한번 증명하다!

―왕좌를 위협하는 새로운 신예, 렌. 하위 리그에 이어 상위 리그에서도 왕좌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인가.

―하위 리그 관객들. "렌이라면 그럴 줄 알았다. 지구 출신인 건 아무런 페널티도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를 돋보이게 해줄 장신구일 뿐."

'내 게시글도 엄청 많네.'

긴급 미션 이전과 비교하면 엄청난 성과였다.

대가의 제단이 있었던 '죽음의 구도자' 경기, 그리고 서킷 브레이커가 터졌던 '혁명' 경기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줬다고는 하지만, 그래봤자 하위 넘버링 경기였으니까.

상위 넘버링과 하위 넘버링의 격차가 워낙 크다 보니까, 하위 넘버링에 괜찮은 유망주가 나왔네, 정도의 반응밖에 나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젠 다르지.'

내 닉네임이 박힌 게시글의 숫자가 증명하고 있었다.

함께 긴급 미션을 뛰었던 쿠 훌린, 그리고 주소월과 엇비슷할 정도로 내 닉네임이 많이 언급되고 있었으니까.

'정말 다행이야.'

이름값이 높아진다는 건, 기본급이 상승한다는 뜻.

하위 리그에서 한창 난리 칠 때 내 기본급이 1만 포인트였다.

그런데 지금은 7만 포인트까지 오른 상황.

이 정도라면 상위 리그에서도 100명 안에 들 정도로 높은 기본급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다행이라고 생각한 건 고액의 기본급 때문이 아니었다.

'라파엘.'

하위 리그와 다르게, 상위 리그에서는 게임 메이커가 날 쥐고 계속해서 흔들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고 할 수 있었다.

관객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쿠 훌린 vs 렌 가즈아아아아아아!

└긴급 미션 보는데 진짜 소름 돋았음. 움직임이 이전이랑 완전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좋아졌던데?

└ㄹㅇㅋㅋㅋㅋ 네임드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상위 리그에서도 이 정도 존재감을 보여줬다는 것 자체가 애초부터 클라스가 달랐다는 뜻임.

└쿠 훌린 vs 렌 보고싶다아아아악!

└꽤 가능성 있는 유망주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슈퍼스타였누 ㄷㄷ

└난 이번 긴급 미션에서 렌을 처음 봤음.. 그동안 언급은 자주 됐는데, 그래봤자 하위 리그 임팩트 빨이라고 생각해서 그냥 믿거 하고 있었거든? 그런 생각으로 과거의 경기를 안 본 내 뒤통수를 한 대 쳐주고 싶을 정도였음.

└애초에 승패를 떠나 쿠 훌린 vs 렌 따위의 언급이 나온다는 거 자체가 넘사벽 클라스란 거임 ㅋㅋㅋㅋ

└근데 렌 도대체 왜 자격 정지 6개월이나 받은 거냐. 다시 생각해 봐도 어처구니 없네 ㅡㅡ 징계 사유도 ㅈㄴ 어이 없음 ㅋㅋㅋ 미션을 제대로 수행했는데 게임 메이커 오더 안 따랐다고 징계 ㅇㅈㄹ ㅋㅋㅋㅋ

└요즘 상위 게임 메이커가 미친 거지. 난 그래서 바로 민원 넣었음. 아직도 자격 정지 3개월이나 남았네 ㅅㅂ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요즘 상위 게임 메이커 집무실로 민원 ㅈㄴ 들어온다고 함. 민원실 천사들 과로사 직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당장 신들의 댓글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유야무야되며 묻혔던 내 징계 건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오퍼가지고 협박하는 건 통하지 않아.'

물론 남들에게 2개의 오퍼를 줄 때, 나한테는 1개만 준다든가 하는 장난질은 칠 수 있겠지만.

그나저나.

'슬슬 성계 대항전을 준비해야겠네.'

내가 최상위권 네임드로 자리 잡은 건 맞지만, 아직까진 최강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당장 쿠 훌린, 주소월만 해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강자들이었으니까.

다만 쿠 훌린과 내가 자주 비교되는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둘 다 창술사라는 점.

그리고 압도적인 화력으로 적을 섬멸하는 데 특화되어 있다는 것.

'아직 멀었어.'

하지만 상위 리그엔 쿠 훌린만 있는 게 아니었다.

졸본의 네임드 을지문덕.

무림의 몽연과 예천화.

그외에 시르카, 카시아, 랜슬롯, 엔키두 같은 네임드들까지.

분명 모두들 나보다 떨어지지 않는 실력자들일 것이다.

'아세리안한테 정보 좀 모아달라고 해야겠군.'

어떤 약점을 가지고 있는지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적어도 어떤 스타일을 주로 구사하고, 어떤 무기를 잘 다룬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분석할 수 있을 터.

그런 기본적인 정보들만 알아둬도 분명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미리미리 얘기해 놔야지.'

아세리안의 집무실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날 때였다.

똑- 똑-

"안우진님, 계신가요?"

때마침 들려오는 노크와 아세리안의 목소리.

안 그래도 그녀에게 가려고 하던 참이었기에, 나는 흔쾌히 대답했다.

"예. 들어오셔도 됩니다."

방긋 웃으며 집무실로 들어오는 아세리안.

오늘도 무척 활기찬 모습이었다.

"좋은 아침이네요! 잠시 시간 괜찮으세요?"

"아, 네. 저도 마침 아세리안님을 만나 뵈려던 참이었습니다."

나는 아세리안이 앉을 수 있도록 맞은편 의자를 슬쩍 빼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앗, 고마워요."

그러자 눈웃음을 짓는 아세리안.

'일단 방문한 이유부터 듣고 나서 꺼내야겠군.'

나는 바로 용건부터 물었다.

"팜에 또 무슨 일이 있습니까?"

"네? 아하하. 생각해 보니까 제가 항상 무슨 문제가 있을 때만 안우진님의 집무실로 찾아왔었네요. 아이참, 민망해라."

"아뇨,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만."

"헤헤, 그런데 이걸 어쩌죠? 오늘도 안우진님께 뭔가를 부탁드리려고 온 건데."

아세리안이 생글생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또 저 웃음이군.'

그 모습을 본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세리안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싶을 때마다 저런 미소를 지었으니까.

초감각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세리안이 저렇게 웃을 때마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부탁이라면······?"

"주창범씨 때문에요."

"주창범······?"

< 112화. 새로운 네임드(1) > 끝

< 113화. 새로운 네임드(2) >

*2연참 입니다!

"주창범씨가 요즘 좀 이상한 것 같아요. 못 느끼셨나요?"

"이상하다고요?"

"네. 지금도 되게 잘 해주고는 있는데, 뭔가 쎄한 느낌이 들어서요. 마치 위태위태한 외줄 타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달까."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주창범이 이상하다고?

'평소랑 똑같아 보였는데?'

주창범.

나와 같은 지구, 그리고 대한민국 출신 플레이어.

'아이돌 가수라고 그랬던가.'

그래서일까, 무척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다.

물론 나는 주창범이라는 아이돌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TV도 안 보고, 심지어 걸 그룹도 아닌, 보이 그룹을 기억할 리 없으니까.

특징은 웃음이 많고, 성격이 쾌활함.

여태껏 인상 찡그리는 걸 한 번도 보지 못했을 정도로 밝은 녀석이었다.

'팜 내의 분위기 메이커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지.'

덕분에 3기수나, 4기수 플레이어들.

그리고 모용악이나 고건하 같은 준네임드 급 플레이어들까지.

모두 주창범의 친화력과 도움 덕분에 금세 팜에 녹아들 수 있었을 것이다.

'특이사항으로는 우유를 정말 싫어함.'

아니, 거의 혐오하는 수준이었다.

모두에게 아침 식사로 빵과 우유, 수프가 나올 때, 주창범만은 커피나 티 같은 게 나왔으니까.

뭐, 어쨌든.

'어제까지만 해도 별다른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는데.'

주창범은 팀 투지의 입장에선 무척 중요한 플레이어다.

일단 하위 플레이어임에도 불구하고 상위 리그에서도 보기 드물 정도로 기초가 잘 잡혀 있다.

그동안 내가 해온 걸 옆에서 빠트리지 않고 봐 온 탓인지, 그는 절대로 기초 훈련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렇게 기초가 훌륭한 데다가 방패까지 사용하고 있으니, 어지간한 플레이어들은 그의 수비를 뚫고 들어갈 수 없을 정도.

'이대로만 성장하면 상위 리그로 올라오는 건 시간 문제지.'

그래서 주창범은 팀 투지의 경영자인 아세리안 뿐만 아니라, 나한테도 무척 중요했다.

상위 리그로 넘어오는 순간, 훨씬 많은 포인트를 벌어다 줄 녀석이었으니까.

"어떤 부분에서 이상함을 느끼셨죠."

"사실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묘하게 눈이 가긴 했어요. 안우진님은 주창범씨가 한 번이라도 인상을 찡그리는 걸 보셨나요?"

"못 봤습니다."

"제 말이 그거예요. 희로애락 중에서 희만 빼놓고 남은 감정은 아예 없는 것 같은 모습이잖아요. 그걸 평범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러고 보니.'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지금까진 그저, 아이돌 가수라는 이유로 언제나 웃음을 달고 산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직업병 같은 거라고나 할까.

하지만 아세리안의 말을 들어보니,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아무리 아이돌 가수라고 해도, 사람인 이상 카메라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까지 웃음을 달고 살진 않을 것이다.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군.'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창범은 마치 뭔가에 씌인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주변 인물과의 유대감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건 나한테도 마찬가지였고.

―형. 근데 언제까지 존댓말 하실 거예요?

―존댓말이요?

―네. 다른 사람들은 이제 형누나동생 하면서 친하게 지내는데, 형은 끝까지 존댓말만 하시잖아요.

―그게 그렇게 이상합니까?

―음······ 별다른 뜻은 아니에요. 그냥 형이 다른 사람들에게 벽을 세워두고 계신 거 같아서요.

긴급 미션에 들어가기 전.

주창범이 했던 말을 통해서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아무도 나와의 관계를 지적하지 않았는데, 유일하게 그걸 아쉬워했던 게 주창범이었으니까.

"음. 언제부터 이상함을 느끼셨죠."

내 질문에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곰곰이 생각하던 아세리안이 입을 열었다.

"아마······ 저번 경기를 뛰고 온 뒤로 그랬던 거 같아요."

"피넛엘님이나 다른 분들도 이상함을 느꼈답니까?"

"안우진님께 오기 전에 먼저 얘기해 봤죠.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모용악님이라든가. 아니면 피넛엘이라든가. 근데 아무도 그런 걸 못 느낀 모양이에요. 그냥 평소와 같은 모습이란 것 뿐?"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이상함을 감지하지 못했으니, 다른 사람들이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세리안님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원래도 눈여겨보고 있던 플레이어였거든요. 아시다시피, 주창범씨는 제가 직접 뽑은 첫 번째 플레이어잖아요."

아.

맞네.

'아세리안이 직접 뽑은 첫 플레이어가 주창범이었지.'

나도 외부에서 영입해 들어온 케이스고, 내 손에 죽었던 트리오도 외부 영입으로 들어왔던 플레이어였다.

그 뒤에 뽑은 게 주창범을 비롯한 사인방이었으니.

뭐든 처음은 의미를 가지는 법이다.

내가 아세리안이 갖게 된 첫 번째 플레이어라면, 주창범은 직접 뽑은 첫 번째 플레이어.

애착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더 꼼꼼히 살펴보고 있었군.'

"거기다 웃는 모습이 마치 가면처럼 느껴져서 더 눈이 가기도 했구요."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에서 이상해졌습니까?"

"주창범씨가 원래부터 신입 플레이어들을 잘 챙겼잖아요. 모르는 게 있으면 알려주고, 잘 적응할 수 있도록 고민 상담 같은 것도 많이 해주고. 근데 뭐랄까······ 요즘은 자기가 훈련해야 할 시간에도 남들을 도와주느라 통 집중을 못 하고 있더라구요. 거기다 전에는 없던 손톱을 깨무는 버릇까지 생겼구요."

"음."

"물론 제 기분 탓일 수도 있어요. 그래서 주창범씨를 불러다 물어보기 전에 안우진님께 온 거예요."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 느끼신 게 맞을 겁니다. 원래 정신적으로 불안을 느끼는 사람이 기존에 갈구하던 것에 더 집착하는 증상을 보이거든요. 아마 저번 경기에서 주창범한테 정신적으로 뭔가 문제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나는 관자놀이를 꾹, 꾹 눌렀다.

'골치 아프네.'

사실 콜로세움을 뛰는 플레이어들은 정신적으로 무척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죽음의 압박을 받으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고층 건물에서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엘리베이터를 타는 느낌이랄까.

불안감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야 한다.

거기다 쳇바퀴를 돌듯, 매일같이 고된 훈련도 수행해야 하고.

'미치지 않으면 다행이지.'

그런 의미에서 정신적으로 이상 증세를 보이는 사람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문제는, 지금 그걸 겪고 있는 사람이 상위 리그의 승급을 앞두고 있는 주창범이라는 것.

"제가 한번 주창범과 얘기해 보겠습니다."

"안우진님이 직접요?"

"예. 일단 문제점을 파악하는 게 중요하니까요. 같은 플레이어인 제가 대화를 나눠보는 게 문제를 찾기 더 쉬울 겁니다."

내 말에 아세리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감사해요, 안우진님."

"아닙니다. 주창범은 어딨죠?"

"아, 곧 경기를 앞두고 있어요. 오늘 블러드나이트 249가 열리거든요."

"오늘······?"

내가 어제 경기를 뛰었는데?

'아, 긴급 미션이라 평소 리그가 열리지 않는 날에 들어갔다 왔지, 참.'

나는 아세리안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경기가 끝나고 나오면 제가 얘기를 나눠보겠습니다."

* * *

나카츠쿠니 성계, 해룡의 군도.

그곳엔 크고 작은 섬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쾅! 쾅! 쾅!

그 한가운데에서 수백 척의 배가 파도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저들끼리 부딪혀 깨져나갔다.

박살 난 배의 잔해물들, 그리고 각양각색의 복장을 한 시체들이 바다 위를 새까맣게 뒤엎고, 바다에 사는 온갖 몬스터들이 몰려들어 그 시체들을 물어뜯었다.

"끄아아아악!"

"살려줘!"

개중에는 살아있는 채로 바다에 빠진 이들도 있어서, 피라냐 같은 몬스터들에게 살점이 뜯길 때마다 허우적거리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몸부림칠 때마다 붉은 핏물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갔다.

[승리 조건 : 경기 종료 시점에 생존해 있는 자]

[게임명 : 절망의 소용돌이]

[맵 : 해룡의 군도群島]

[현재 생존자 수 : 782명]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00:37:29]

'시간이 부족해.'

주창범은 바다 위에 널브러져 둥둥 떠다니는 나무판자들 사이를 빠르게 넘나들며 적들에게 검을 찔러 넣고, 방패를 휘둘렀다.

갑옷에, 검, 방패까지 착용하고 있다 보니 무게가 많이 나갔지만, 다행히 바다에 떠다니는 나무판자들은 주창범의 무게를 잘 견뎌 주었다.

챙! 채챙! 챙! 챙! 빡!

나무판자가 주창범과 상대방이 움직일 때마다 무게 중심이 바뀌며 크게 흔들렸고, 그때마다 적은 이리저리 휘청거렸다.

하지만 적을 상대하는 주창범의 검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안우진과의 대련을 통해 이런 상황엔 이골이 나 있었던 것이다.

발이 푹푹 빠져드는 사막이라든가, 늪지대 뿐만 아니라, 이렇게 배 위에서 대련했던 경험도 있었으니까.

"크윽!"

하지만 다른 플레이어들은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은 모양.

파도에 의해 나무판자가 계속해서 흔들리고 있다 보니,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플레이어들은.

서걱!

주창범에겐 아주 좋은 먹잇감들이었다.

걸음마도 제대로 못 하는 녀석들을 상대로, 주창범이 고전할 이유가 전혀 없었으니까.

"끄아아아아악!"

주창범의 검에 찔린 플레이어가 바다로 빠져 허우적댔다.

그가 한 번 버둥거릴 때마다 피가 튀기고 살점이 뜯겨져 나갔다.

바다에 사는 물고기형 몬스터들이 순식간에 몰려들어 플레이어를 물어뜯고 있는 것이다.

'더 많이 죽여야 돼.'

주창범은 이번 경기에서 어떻게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잔인한 광경임에도 불구하고, 주창범은 곧장 다른 플레이어들을 물색했다.

하지만 경기 종료 시점이 임박한 상황.

플레이어들이 보이지 않았다.

[이름 : 주창범(닉네임 : 주창범)] [소속 : Team 투지]

[리그 : 하위 리그]

[근력 : 86(+5)(+7)] [민첩 : 85(+5)(+7)] [체력 : 82(+5)(+7)]

[정신 : 82(+5)(+7)] [지력 : 44(+4)] [마력 : 93(+5)(+8)]

[각성 능력 : <최상급검방술 > <최상급살기 > <상급검술 > <상급방패술 > <최상급마나운용 > <상급단검술 > <상급박투술 > <하급치료술 >]

[보유 스킬(5/5) : <타격 회복> <수호의 의지> <마력 방패> <결자해지 > <심판의 갑옷>]

[업적 특전 : 없음] [차원 특전 : 최강의 성계(모든 스텟 +10%)] [종족 특전 : 없음]

그때였다.

쿵!

주창범이 올라타 있는 나무판자가 근처에 떠다니는 배와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챙! 채챙! 챙! 챙!

그리고 들려오는 쇳소리.

'배 위.'

주창범은 손을 뻗어, 바로 곁으로 다가온 배 위로 올라갔다.

바다를 떠다니며 서로 부딪히고 있는 배의 종류는 판옥선.

직접 노를 저어 이동하는 배인 만큼, 선체가 그렇게 높지 않았다.

배가 움직이려면 노가 바닷물과 닿아야 했으니까.

한달음에 노 젓는 부분을 통해 배 위로 오른 주창범은, 곧바로 계단을 올라 갑판 쪽으로 향했다.

챙! 채챙! 챙! 챙! 챙!

전투가 한창인 여덟 명의 플레이어들.

현재 킬 순위를 곁눈질로 힐끔 살핀 주창범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여기서 시간 낭비를 하면 안 돼.'

주창범은 망설이지 않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플레이어들에게 달려들었다.

"철벽의 주창범······!"

"젠장. 결국 여기서 만나다니······."

그런 주창범의 모습을 본 플레이어들이 이내 싸움을 멈추곤, 주창범을 곁눈질했다.

하위 리그에서 제법 이름이 알려진 탓에, 그를 경계하는 것이다.

"이 개 같은 자식!"

"죽어!"

주창범이 달려들자, 주변 플레이어들이 눈빛을 교환하더니, 이내 한꺼번에 달려들기 시작했다.

경기의 룰은 서바이벌.

한마디로 이곳에 참가한 모든 플레이어들은 서로의 적이라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선 주창범을 먼저 처리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빨리!'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나무판자보다 흔들림이 적어, 모두들 균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는 것.

주창범 또한 달려드는 플레이어들을 향해 거칠게 방패를 휘두르고, 검을 찔러 넣으며 날뛰었다.

서걱! 서걱!

잘려 나간 팔과 목이 허공을 날며 온갖 피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 113화. 새로운 네임드(2) > 끝

< 114화. 새로운 네임드(3) >

*2연참 입니다!

띠링!

[<스킬:타격 회복>을 사용합니다.]

[액티브]

[공격을 막으면 체력이 회복됩니다.]

[공격의 강도가 강할수록 회복률이 상승합니다.]

[회복률은 최대 1%까지 가능합니다.]

[유지 시간 : 600 초]

챙! 챙! 채채챙!

'더 빨리!'

남은 플레이어의 숫자는 네 명.

주창범은 갑판 위를 빠르게 돌아다니며 남은 녀석들에게 미친 듯이 공격을 퍼부었다.

이곳은 배 위.

등 뒤에는 바다가 펼쳐져 있다.

어차피 적들은 손발도 맞지 않고, 이동하는 것에도 제한이 있으니 조금만 있으면 충분히 다 죽일 자신이 있었다.

[<타격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0.1% 회복됩니다.]

[<타격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0.1% 회복······.]

챙! 챙! 후욱!

두 명의 검객이 검을 휘두르고, 그 반대편에선 창술사가 창을 찌르며 들어온다.

하지만 주창범은 그 공격들을 방패와 검을 이용해 손쉽게 막아냈다.

'우진이형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야.'

주창범은 안우진이라는 괴물과 밥 먹듯이 대련을 한 몸.

공격력도 어마어마한 데다가, 안우진은 창, 검, 활, 단검, 사슬낫, 채찍 등등 못 다루는 무기가 없었다.

공격 방식도 창의적이고, 범위도 훨씬 넓어, 분명 막았다고 생각한 공격에도, 뒤 돌아보면 베여 있는 경우가 허다했달까.

그에 비하면 이들의 공격은 과장 좀 보태면, 웃으면서 막아낼 수 있을 정도였다.

└와 오늘따라 주창범이 되게 거치네 ㅋㅋㅋㅋㅋㅋㅋ

└화끈한 공격! 가즈아아아!

└오늘 작정했는데? 숨겨둔 야성을 오늘 뿜어대는 듯한 모습임.

└저게 더 낫다는 애들은 도대체 눈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임? 애가 전보다 훨씬 퇴보했자나 ㅡㅡ

└평소에 갖고 있던 안정감은 어디로 간 거지? '철벽'이란 별명에 어울리지 않는데?

└ㅇㅇ 더 터프해지긴 했는데, 평소에 갖고 있던 장점이 묻힌 느낌임.

└오늘 모습은 실망이 크네.. 팀 투지가 육성 방법을 바꿨나? 갑자기 애가 맛이 간 거 같음;;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00:04:22]

챙! 챙! 챙! 챙!

"씨발······!"

한동안 주창범과 정신없이 싸우던 플레이어들이 이내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남은 세 명으로는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어딜!'

주창범은 서둘러 그들을 뒤쫓았다.

―확실하게 죽일 수 있거나, 뒷날 다시 만났을 때 위험하다 싶은 녀석들이 아니면 무리해서 뒤쫓지 마세요.

그 순간, 안우진이 평소 귀에 박힐 정도로 했던 얘기가 떠올랐지만.

서걱! 서걱!

"끄아악!"

주창범은 녀석들을 뒤쫓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서걱!

"끅!"

바닥을 구르는 주창범의 왼팔과 방패.

마지막 남은 검객을 뒤쫓고 있는데, 녀석이 순간적으로 뒤를 돌며 검을 휘두른 것이다.

워낙 정신없이 뒤쫓고 있었던 주창범은 그 공격에 미처 반응할 수가 없었다.

평소라면 하지 않을 실수.

"후후, 멍청하긴!"

쉬익! 쉬이이익!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건지, 검객이 도망치지 않고 계속해서 검을 휘둘러왔다.

한쪽 팔과 방패를 잃은 주창범은 녀석의 공격을 막는 데 급급해야 했다.

'내가······ 고작 이런 녀석에게······.'

잘려 나간 팔에서 느껴지는 아픔?

그런 통증 쯤이야 주창범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고통에 무척 익숙했으니까.

다만 주창범이 충격받은 것은.

'이런 녀석에게······ 공격을 허용했다고?'

별것도 아니라고 생각한 플레이어에게 팔이 잘렸다는 것 때문이었다.

"죽어!"

그때, 녀석의 검이 주창범의 가슴을 향해 빠르게 날아들었다.

녀석의 검 끝은 흔들림 없이 심장을 겨냥하고 있었다.

'이대론 죽을 수도 있어!'

그 광경을 본 주창범이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순간적으로 몸을 비틀며 상대에게 검을 휘둘렀다.

푹! 서걱!

뒤이어 들려오는 피륙음.

띠링!

[플레이어 '모데스테' 를 처치했습니다.]

"허억, 허억, 허억, 허억."

주창범은 검을 바닥에 꽂은 채 남은 한 팔로 복부를 꾸욱 눌렀다.

상대의 검이 복부를 관통하긴 했지만, 다행히 위험한 부위는 아니었다.

문제는 더 이상 플레이어들을 사냥하러 돌아다닐 수 없다는 것.

주창범은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젠장. 젠장!'

입술에서 흘러나온 피가 턱을 타고 뚝, 뚝 떨어졌다.

다행히 주창범이 있는 배 위로 올라오는 플레이어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대로는 플레이어들을 상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아. 하아.'

그렇게 한동안 복부를 감싸 쥔 채 속으로 욕을 내뱉고 있을 때였다.

어느새 저 멀리, 수평선 끝에서 태양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띠링!

[경기가 종료되었습니다.]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00:00:00]

때마침 울리는 경기 종료 콜.

12시간이란 짧으면서도 길었던 경기가 막을 내렸다.

순간 몸에 힘이 쭈욱 빠졌다.

'역시······ 난 그 녀석처럼은 안 되는구나.'

띠링!

[경기 종료 시점까지 생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주창범' 승리!]

[기본급 x 1 의 승리 수당이 지급됩니다.]

[킬 수에 따른 보너스를 책정합니다.]

[1위. '케일' 148킬]

[2위. '주창범' 146킬]

[3위. '고건무' 123킬]

[4위. '도로시' 101킬]

[5위. '이든 호크' 98킬]

그렇게 미친 듯이 날뛰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작 146명 밖에 죽이지 못했다.

킬 수 1위 등극에 실패한 것이다.

'녀석이었다면 분명 압도적인 1위를 찍었겠지.'

주창범은 저번 경기에서 만났던 플레이어를 떠올렸다.

푸른 불꽃이 온몸에 이글거리고.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서너 명의 플레이어가 잿더미로 변한다.

그 압도적인 위용은, 주창범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킬 수 ― 146 킬]

[높은 킬 수를 기록하셨습니다!]

[추가 보너스를 받습니다.]

[2위에 해당하는 146 킬을 달성하셨기 때문에 기본급 x 1의 보너스를 지급받게 됩니다.]

'내가 우진이형의 뒤를 잇고 싶었는데.'

플레이어 '룬'.

주창범이 그렇게 소망했던······ 지구의 두 번째 네임드라는 칭호를 가져간 자.

'난 우진이형처럼 될 수 없는 걸까.'

무거운 패배감이 전신을 짓눌렀다.

[하위리그-블러드나이트249 의 메인 이벤트 경기를 종료합니다.]

[파이트 머니로 14,700 P 를 지급받았습니다. (팀 '투지' 수수료 6,300 P 차감)]

[기본급 +7,000 P / 승리 수당 +7,000 P / 추가 보너스 +7,000 P / 수수료 -6,300 P]

[다음 경기부터는 기본급을 8,000 P 로 책정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가면 갈수록 안우진과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어, 안 그래도 스트레스를 받던 상황.

그런 와중에 뒤이어 등장한 누군가의 추월은 주창범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온몸에 쩔어 있는 피비린내.

잘려 나간 왼팔과, 피가 철철 흘러나오고 있는 복부.

지금껏 경험해왔던 경기 중에서, 오늘이 가장 만신창이였다.

경기 내용도 정말 형편없었고.

'하아. 돌아가면 술부터 한잔 해야겠어.'

온몸이 잘게 떨렸다.

긴장이 풀리자 그 찝찝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술 생각이 너무 간절했다.

[모든 상태를 100%로 회복합니다.]

경기가 끝나고, 팜으로 돌아온 주창범은 눈앞의 인물을 보고 눈을 치켜떴다.

익숙한 인물이 혼자서 주창범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진이형?"

칠흑 같은 검은 로브에, 악귀 형상이 그려진 가면.

자신과 같은 지구 출신으로, 최초로 상위 리그까지 올라간 플레이어.

지금도 상위 리그에서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으며, 지구 출신으론 최초로 고위 리그 입성을 앞두고 있는 대단한 강자.

한 번도 살육이란 걸 해본 적 없는 주창범이 지금까지 잘 버텨올 수 있었던 정신적 지주.

안우진이었다.

"고생 많았습니다."

안우진이 건네는 말에 순간 주창범이 울컥했다.

왜 눈물이 나려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고생 많았다는 저 말이, 심장에 콱! 하고 박혔을 뿐.

하지만 주창범은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아냈다.

그리고는 활짝 웃으며 안우진에게 말했다.

"고, 고생은요, 형. 잘 다녀왔습니다. 근데 다른 사람들은요?"

경기가 끝날 때마다 팀의 주인인 아세리안, 트레이너 엔젤인 피넛엘부터 시작해서 루치아노와 제이스, 모용악까지 주창범을 기다려주곤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안우진 한 명밖에 보이지 않았다.

주창범의 물음에, 안우진이 턱 끝으로 식당을 가리켰다.

"오늘 마지막 경기가 주창범씨였더군요. 그래서 제가 모두들 식당에서 편하게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앗, 형이 대신 기다려주신 거군요, 헤헤. 전 그게 더 좋아요."

주창범이 헤실헤실 웃었다.

안우진은 주창범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안정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아빠라는 존재가 있었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았을까.

'정말 대단해.'

대한민국.

검 한 번 쥐어본 적 없는 사람이 태반에, 밤거리를 돌아다닌다고 해서 목숨이 위험하지도 않다.

휴전 중인 분단국가에 살고 있었음에도, 전쟁을 직접 겪어 본 적도 없었고.

애초에 살생이란 걸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상황.

그렇기에 초월 리그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라는 물음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대단해······.'

지구인은 모두 약해 빠졌다.

그런 편견을 정면으로 부숴버린 플레이어가 눈앞의 안우진이었다.

거기다 혼자서 성계 대항전을 우승으로 이끌기까지.

덕분에 주창범은 자신도 지금처럼 꾸준히 해나간다면 언젠가 초월 리그에 올라갈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난 안 돼.'

주창범 뿐만이 아닐 것이다.

루치아노도, 제이스도, 모용악도.

모두가 존경하는 사람이 안우진이었다.

그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리더랄까.

그래서 주창범은 안우진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기뻤다.

그런 주창범의 모습을 본 안우진이 피식 웃었다.

"이만 가죠. 술 한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창범은 서둘러 안우진의 곁에 서서 보조를 맞춰 걷기 시작했다.

안우진은 일부러 느긋하게 걷고 있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듯한 몸짓.

'내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나?'

그런 모습에 주창범이 의아해하고 있는데, 때마침 안우진이 입을 열었다.

"지낼 만 합니까? 힘든 건 없구요?"

"아, 네. 다른 형들이랑도 다 친하게 지내고 있고, 경기 성적도 잘 나오고 있어서 그런가 너무 좋아요."

"다행이군요. 앞으로도 힘든 일이 있으면 바로 얘기하세요. 전처럼 혼자서 끙끙대지 말고."

"넵!"

주창범이 애써 힘차게 대답했다.

팜이 작다 보니, 느긋하게 걸었는데도 어느새 식당 앞에 도착해 있었다.

"오, 창범이 왔다!"

"고생 많았어요, 창범씨!"

"얼른 들어와! 같이 한잔 해야지!"

주창범을 본 동료들이 주창범을 환대해 주었다.

그 모습에 활짝 웃은 주창범이 한걸음에 식당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아, 내일부터 주창범씨의 일정이 좀 바뀔 겁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안우진의 목소리.

순간 걸음을 멈춘 주창범이 고개를 돌려 안우진을 바라보았다.

"제 일정이요?"

"예. 앞으로 한동안 제가 직접 주창범씨를 관리할 거거든요."

"관리······라고 하시면······?"

말끝을 흐리는 주창범의 물음에 안우진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닙니다. 그냥 스케쥴을 당분간 제가 맡겠다는 뜻이죠. 음······ 쉽게 얘기해서 제가 곁에 붙어서 전담으로 케어한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군요."

"아! 그건 좋아요! 그런데 갑자기 저를 왜······?"

"내심 주창범씨가 저를 이어 팀 투지의 두 번째 상위 플레이어가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평소 신입 플레이어들이나 다른 분들에게 대하는 태도, 그리고 훈련에 임하는 주창범씨의 마음가짐. 그런 게 무척 마음에 들었거든요."

"앗, 정말요? 정말 감사해요, 형!"

주창범은 무척 기분이 좋았다.

자신이 존경하는 안우진이 전담으로 관리해 준다면, 분명 지금보다 한 층 더 강해질 것이다.

"그럼 내일부터 빡세게 달려 봅시다."

안우진의 말에 주창범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식당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

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안우진.

그 눈빛에 주창범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자신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펴보는 것 같았으니까.

< 114화. 새로운 네임드(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