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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6화. 단독 미션(8) >

사천에 있는 마교의 임시 지부.

그 안에는 두 명의 장로가 1만 명의 마인을 대동한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올 줄 알고 있었군.'

모두들 당장이라도 전투를 할 수 있도록 완전 무장을 갖춘 상태였다.

콰지지지지지지직!

'그래 봤자지만.'

서걱!

나는 단숨에 달려들어 나를 기다리고 있던 1만 명의 마인을 처치했다.

전투가 끝난 후.

앞에는 세 명의 마인이 기절해 있고, 바로 옆에는 당소소가 조용히 서 있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제법 잔인할 텐데요."

두 명은 마교의 장로, 그리고 한 명은 장로보다는 낮지만, 부대를 이끄는 대주라는 직책을 가진 녀석이었다.

지금부터 나는 이 세 명을 고문해 마교 교주의 위치를 알아낼 예정.

그러다 보면 보기 흉한 장면이 연출될 수 있기에 만류했지만, 당소소는 요지부동이었다.

"괜찮습니다."

"음. 알겠습니다."

우드득! 우드득!

고개를 끄덕인 나는 기절해 있는 녀석들을 질끈 밟아, 두 다리부터 박살 냈다.

깨어난 후에 녀석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다.

그리고는 기절해 있는 세 명의 마인들에게 미리 준비해 두었던 뜨거운 물을 부었다.

"헉!"

그러자 깨어나는 세 명의 마인.

"끄으으으윽!"

나를 발견한 녀석들이 경기를 일으켰지만, 두 다리가 망가진 이상 녀석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주를 공략해야겠군.'

셋 중에서 정신 스텟이 가장 낮기에, 고문을 당했을 때 그나마 입을 열 확률이 높을 것이다.

'나머지 두 녀석은 애피타이저에 가깝지.'

나는 왼쪽에 있던, 악대명이라는 장로의 배를 짓밟으며 입을 열었다.

"한 번만 묻겠다. 마교 교주의 위치는?"

그러자 악대명이 나를 바라보며 코웃음 쳤다.

"내게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이럴 줄 알았지.'

한동안 녀석을 내려다보던 나는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악대명의 손가락을 하나씩, 하나씩 잘라냈다.

"끄아아아아아악! 어서 죽······ 으으윽!"

그다음은 녀석의 얼굴.

우악스러운 손길로 악대명의 머리를 잡은 녀석의 얼굴에 붙어 있는 것들을 하나씩 떼어냈다.

"끄으으으윽!"

그리고는 녀석의 등을 무릎으로 찍어 누른 채 관절을 하나씩 꺾기 시작했다.

'잘 봐두라고.'

지금 내가 하는 건 보여주기였다.

원래 늦게 맞는 매가 가장 아픈 법이었으니까.

고문 또한 같은 메커니즘이었다.

'당하기 직전의 공포심이 가장 높지.'

덜덜 떨고 있는 대주를 본 나는 피식 웃으며 고문을 계속했다.

그것도 아주 천천히.

"흐으으으윽!"

이빨이 사라지자 녀석의 입에서 바람 새는 소리가 났다.

우드드득!

그 뒤로는 녀석의 뼈마디를 하나하나 부수기 시작했다.

"흐으으으으으윽!"

온몸의 뼈가 박살 나자, 녀석의 몸이 금세 퉁퉁 부어올랐다.

나는 다른 두 녀석이 들을 수 있도록 작지만 또렷하게 말했다.

"제법 잘 버티는군."

그리고는 단검으로 녀석의 피부에 회를 뜨기 시작했다.

"흐으으으······."

그러자 기절하는 녀석.

상처에 펄펄 끓는 물을 붓자 녀석이 곧바로 버둥거렸다.

아마 지금쯤 고통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을 것이다.

그 뒤로도 내 고문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띠링!

[무림인 '악대명'을 처치했습니다.]

10분간의 고문 끝에 결국 악대명이 숨을 거두었다.

나는 곧장 가운데에 있던 또 다른 장로, 송금조에게 입을 열었다.

"한 번만 묻겠다. 마교 교주의 위치는?"

"······."

악대명과 달리 송금조는 한동안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삼.

이.

일.

'끝.'

마음속으로 숫자를 센 나는 송금조의 머리를 덥석 잡았다.

"······자, 잠깐!"

그리고는 마나를 끌어올렸다.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직!

"끄으으으으아아아아아악! 화산! 교주께서는 끄으으윽, 화산에 계시오!"

중간에 녀석이 뭐라 소리쳤지만, 나는 뇌전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녀석의 몸에서 붉은빛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흐으으으으윽!"

그렇게 또 10분 동안 송금조의 몸에 뇌전을 불어넣자, 녀석 또한 이내 숨을 거뒀다.

타는 고기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친 대주, 이막지.

"으으······ 나, 나는 직위가 낮아 교주님이 어디 계신지 잘 모르오."

녀석이 앓는 소리를 내뱉으며 횡설수설했다.

'두렵겠지.'

고문에서, 단순히 고통을 주는 것은 하수나 하는 짓이었다.

진짜 일류는 고통이 아닌, 정신에 타격을 준다.

사람은 오감에 굉장히 예민한 동물이니까.

"넌 어떻게 요리해줄까."

온몸의 피를 모조리 뿜어낸 채 죽은 악대명.

죽을 때까지 뇌전 공격을 받고 타죽은 송금조.

그 시체들은 대주, 이막지의 시각과 후각을 자극했을 것이다.

움찔!

내가 천천히 다가가자, 이막지가 경기를 일으켰다.

나는 그런 녀석을 내려다보면서 물었다.

"한 번만 묻겠다. 마교 교주의 위치는?"

그러자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리는 이막지.

녀석은 결국 얼마 못 가 입을 열었다.

"······본산에 계십니다."

"거기가 어디지?"

"신강, 천산."

녀석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합격이군.'

이막지의 몸에서는 붉은빛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내 고문 전략이 성공한 것이다.

"깔끔하게 보내주지."

창을 휘둘러, 녀석의 목을 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확실한 위치를 찾았어.'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

이제 남은 열세 곳만 돌고, 바로 천산으로 이동하면 되는 것이다.

사천을 포함해 첫날에만 일곱 군데를 돌았다.

지금 페이스 대로라면 3일까지 걸리지도 않을 것이다.

"고생 많으셨어요."

곁에 있던 당소소가 다가와 깨끗한 천을 내밀었다.

내가 고문하는 동안 그녀는 단 한 번도 눈을 돌리지 않은 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표정이 많이 안 좋군.'

잔인하게 고문하던 장면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녀는 이곳, 사천에 들어올 때부터 안색이 좋지 않았으니까.

[현재 마교와 정파 무림의 균형은 14:1 입니다.]

[마교 고수를 대거 처치해 균형을 5:5로 만드세요.]

"다음 목적지로 가시죠."

"네."

사천지역은 끝.

다음 목적지인 감숙으로 향하려고 할 때였다.

"잠시만요. 혹시 조금만 시간을 주실 수 있나요?"

마교의 임시 지부를 벗어나던 당소소가 내게 양해를 구했다.

"그러시죠."

"정말 감사합니다."

대문 앞으로 다가간 당소소가 가만히 서서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두 눈을 감은 채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가족들의 넋을 빌고 있는 거겠지.'

그녀가 서 있는 자리 너머로, 대문의 현판이 보였다.

거기엔 사천당문四川唐門 이라는 글자가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었다.

사천의 마교 임시 지부는 사천 당가에 있었던 것이다.

당소소의 묵념은 10분이 넘도록 이어졌다.

옅은 달빛에 생겨난 그녀의 그림자 위로 물방울이 똑, 똑 떨어졌다.

그녀의 가냘픈 어깨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후.'

그 모습을 본 나는 등을 돌렸다.

마음이 무거웠다.

가족을 잃은 슬픔.

보이지 않는 마음의 끈이 떨어져 나간 아픔.

그건 실제로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감정이다.

괴롭고, 외롭다.

감히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시간을 뺏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잘 보내 주셨습니까?"

"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날 올려다보는 당소소의 눈망울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예상되는 소요 시간 : 178:58:33]

'당소소가 길 안내를 정말 잘 해줬어.'

어느덧 무림에 들어온 지 20시간이 흘러 있었다.

72시간 동안 스무 개의 지역을 돌아다니며 마인들을 쓸어버릴 계획이었는데, 벌써 일곱 군데를 클리어했다.

'이 정도면 잠시 쉬어도 되겠군.'

단 한 순간의 휴식도 없이 강행군을 해 온 상황.

아무리 당소소가 업혀서 왔다고는 해도, 체력 소모가 굉장히 컸을 것이다.

빠른 속도로 인해 계속해서 양팔과 허벅지에 힘을 주고 있어야 했을 테니까.

덕분에 시간도 많이 아꼈으니, 그녀에게 마음을 추스를 시간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당소소를 업은 나는 그녀를 사천의 어느 야산 한 가운데에서 내려 주었다.

"여긴 왜······?"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아, 네."

그녀에게 양해를 구한 나는 산속을 뒤져, 사슴 한 마리를 잡아 왔다.

그 사이 당소소는 근처 나뭇가지들을 모아 불을 지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똑똑하네.'

미리 얘기하지도 않았는데, 눈치껏 내가 뭘 하려고 하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손가락에 뇌전을 끌어올려, 당소소가 모아 둔 나뭇가지에 가볍게 불을 붙인 나는 품 안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경동맥을 그어 피를 뽑아낸 뒤, 가죽과 내장을 제거하고,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냈다.

"산속에서만 자라셨다는 말씀이 맞았네요. 손질에 무척 익숙하시군요."

"아, 예."

사실 하위 리그에서 경기를 한다면 도축은 필수로 할 줄 알아야 한다.

서바이벌 위주로 경기가 펼쳐지는 데다가, 가끔 인벤토리가 제한되는 맵에 걸리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2회차 땐 초고속으로 상위 리그에 올라온 덕분에 그런 경기를 만나지 않았지만.

"사실 처음 뵈었을 땐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었어요."

"산속에서만 자랐다는 거 말씀이십니까?"

내 물음에 근처 바위에 사뿐히 앉은 당소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대하는 게 굉장히 익숙해 보이셨거든요. 그렇다는 건 산속에 있더라도 생필품 같은 것들은 산에서 내려와 마을 사람들에게 구하셨다는 건데, 그러기엔 돌아가는 사정을 너무 모르시는 것 같았거든요."

당소소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린 나는 나뭇가지에 사슴 고기를 꽂았다.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겠군.'

저들에게 녹아들기 위해, 사정상 급하게 새로운 인물을 구상해야 했으니까.

디테일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혹시 성혼을 하셨나요?"

그때, 당소소가 엉뚱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아뇨."

"양친은 살아 계신가요?"

"아뇨."

"그 외의 형제들은요?"

"있었지만, 이 세상엔 없습니다."

"사부님은요?"

"마찬가지입니다."

뜬금없는 주제에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데, 당소소가 말을 이었다.

"그럼 고 문주님께서도 저처럼 이 세상에 혼자밖에 안 계신 거네요."

이 세상에 혼자밖에 안 계신 거네요.

그 말을 듣자, 가슴 한 켠이 아려왔다.

그때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모닥불의 연기가 내 쪽으로 향했다.

모닥불의 연기 때문일까.

순간 코끝이 매워졌다.

'어머니······ 형······.'

한동안 입을 떼지 못하던 나는 어렵사리 대답했다.

"······네."

"그 가면은 왜 쓰고 다니시는 거예요?"

"부적 같은 겁니다. 무사 생환을 위한."

"잠깐만 맨얼굴을 보여주실 순 없나요?"

"안 됩니다."

내가 단호하게 고개를 젓자, 당소소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가문에 대해 아시는 게 있나요?"

"아뇨. 암기와 독에 능통하다는 것 외로는."

내 대답에 당소소가 살포시 웃었다.

"저희 가문은 굉장히 폐쇄적인 편이에요. 가문의 비기가 유출될 걸 방지하기 위함이죠. 그래서 출가외인이라는 말과 다르게, 저희는 사위도 당씨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해 주었어요."

"폐쇄적이라는 건 반대로, 가문 사람들끼리는 무척 유대감이 깊겠군요."

"맞아요. 아까 전투가 펼쳐진 곳이 저희 가문의 사람들이 모여 살던 당가타唐家陀라는 곳이에요. 규모는 웬만한 마을보다 크지만, 제가 모르는 사람들이 없었죠. 그런데 현재 당씨 가문에서 생존한 사람은 저밖에 없네요."

"······."

"천마를 죽이겠다고 하셨죠?"

"······?"

"마교의 교주를 천마라고 부르거든요."

당소소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만약에 말이에요······."

한동안 입을 우물거리던 당소소가 어렵사리 말문을 이었다.

"만약에······ 천마가 죽고, 이 세상에 마인들이 사라지면······. 저와 성혼을 하지 않으실래요?"

"······!"

그녀의 물음에 나는 눈을 치켜떴다.

'결혼을 하자고?'

당소소가 내게 어느 정도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첫 만남 때의 그 눈빛.

당당하게 날 따라나서겠다던 말.

거기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게 업히기까지.

당시 다른 사람들의 반응으로 봤을 때, 무척 파격적인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결혼이라······.'

하지만 직접 들으니까 나도 모르게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건 설렘이라는 감정이었다.

'내가 당소소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나?'

순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을 정도.

한동안 곰곰이 생각한 나는 피식 웃었다.

결혼이란 말에 흔들린 건, 그녀가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그리웠던 거였어.'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렐 만큼.

내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자, 당소소가 쐐기를 박았다.

"저와 고 대협, 둘 다 동병상련의 처지잖아요. 우리가 이루어지면 서로의 아픔을 치유해줄 수 있을 거예요."

"아뇨."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줄 마음도 없고, 아니 있다고 하더라도 우린 이어질 수 없는 관계다.

그녀와 나는 상황도, 사는 곳도 다르다.

아예 정반대에 있다고 해도 될 정도로.

나는 잠시 들렀다 떠날 여행자고.

그녀는 이곳에 남아 계속해서 살아갈 사람이기에.

"죄송합니다."

그래서 단호하게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괜히 여지를 줘봤자 서로가 곤란해질 테니까.

< 126화. 단독 미션(8) > 끝

< 127화. 인연(1) >

언제나 활기가 넘치고, 사람들로 북적거렸던.

봄에는 시원한 바람이, 여름에는 수국의 꽃향기가, 가을에는 가릉강의 물소리, 겨울에는 새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이던 곳.

사천당가.

하지만 지금은 붉은 핏자국과 피비린내만이 진동하고 있었다.

그 앞에 선 당소소는 달빛을 맞으며, 눈을 감은 채 다짐했다.

'제가 반드시······ 사천당가라는 이름을 이어갈게요.'

다행히 암운이 드리웠던 강호에, 한 줄기 빛이 내려왔다.

청룡문의 문주, 고건하.

검붉은 벼락을 흩뿌리며 아군에겐 절대적 희망을, 적에겐 절망을 선사하는 사내.

'이 남자라면 분명 천마를 죽일 수 있을 거야.'

두 눈으로 직접 본 고건하의 무위는 엄청났다.

그의 창을 받아낸다는 게 쉽사리 상상되지 않을 만큼.

'가문을 재건할 수 있어.'

천마가 죽으면 무림에 다시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어떻게든 이 남자를 잡아야 해.'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당소소는 사천당가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

그녀를 손에 넣으면 사천당가의 비전들이 넝쿨째 굴러들어온다.

거기다 그녀는 무척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다.

그런 당소소를 다른 사람들이 가만히 놔둘까?

'절대 그럴 리 없어.'

정파의 사람들이라고 해서 무조건 정의로운 건 아니었다.

결국 각자 본인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물론 그녀도 더 견고한 울타리를 가진다는 건 분명 좋은 일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당가라는 이름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겠지.'

자신에게 구애를 해온 모든 남자들이 명문 정파 혹은 오대세가의 인물들이라는 것.

그들은 절대로 데릴사위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눈앞의 고건하는 당소소가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특별한 가문이 없어 데릴사위로 들어올 수 있으면서도, 혼자서 그녀를 지켜줄 수 있는 남자.

현 강호에서 그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은 고건하, 한 명 뿐이었다.

"만약에······ 천마가 죽고, 이 세상에 마인들이 사라지면······. 저와 성혼을 하지 않으실래요?"

그래서 당소소는 용기를 냈다.

이 남자라면.

사천당가를 다시 반석 위에 올려줄 수 있을 테니까.

"······."

잠깐의 뜸 들임.

그 모습에 당소소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고건하의 말에 당소소의 마음은 철렁 내려앉을 수밖에 없었다.

"아뇨."

매몰차다고 느껴질 정도로 똑 부러지는 대답.

"죄송합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당소소가 빠르게 눈을 깜빡거렸다.

'도대체 왜?'

가면을 쓰고 있지만, 청혼했을 때 그가 설렘이라는 걸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거절당한 거지?

"······."

타닥― 타다닥―

순간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장작불에 나뭇가지가 타들어가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머리가 하얗게 변했던 당소소가 다시 입을 연 건 5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혹시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러신 건가요?"

"······아뇨."

"저 집안일도 잘해요. 요리, 빨래 뭐 그런 것들이요. 그리고 저 예, 예, 예쁘지 않나요?"

말을 하면서도 당소소는 무척 민망했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그녀는 사천제일화라고 불렸으니까.

어딜 가나 남자들의 시선이 그녀를 따라다녔고, 지금까지 수십 명의 남성들이 그녀에게 구애를 해 왔다.

물론 전부 다 거절했지만.

당소소의 말에 고건하가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그녀가 기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그런 문제 때문이 아닙니다."

"그럼요? 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얘기해 주세요. 고 대협께서 원하시는 대로 어떻게든 고쳐 볼게요."

"······소소님은 예쁘고, 똑똑합니다. 그러니 다른 무림인을 만나시는 게 더 행복하실 겁니다."

'도대체 왜?'

당소소는 직감했다.

이 남자도 자기가 싫은 건 아니라고.

그런데도 거절하는 그의 모습에선 망설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

모닥불에 걸어두었던 사슴 고기를 확인하는 고건하.

고기의 상태를 확인한 그가 자신에게 사슴 고기를 내밀었다.

사슴 고기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왜······ 거절하신 걸까.'

한동안 고건하를 빤히 바라본 그녀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사슴 고기를 받아들었다.

그때부터 어색한 침묵이 그녀와 고건하 사이에 웅크렸다.

[예상되는 소요 시간 : 146:30:56]

당소소가 청혼을 거절당하고 어느덧 32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고건하는 그녀의 안내를 받으며 각 지역에 뻗어있는 마교의 지부를 박살 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벌써······ 끝났네······.'

기존에 고건하가 얘기했던 시간은 3일.

중간에 고건하가 두 번 정도 갑자기 사라지긴 했지만, 마지막 장소인 절강의 마교 지부까지 도착하는 데 고작 이틀밖에 걸리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던 그녀가 중간에 휴식을 취하자고 하지도, 그리고 식사를 하자고 하지도 않은 탓이었다.

'이제 천마를 죽이러 떠나시겠지.'

스무 곳을 돌아다니며 고건하가 죽인 마인의 숫자는 대략 30만 명.

이걸로 무림맹은 당분간 안전할 것이다.

당소소는 피를 털며 다가오는 고건하에게 입을 열었다.

"고생 많으셨어요."

"소소님도 길 안내를 해주느라 수고하셨습니다. 혹시 휴식이 필요하십니까?"

'네, 필요해요. 더 같이 있고 싶어요.'

그의 물음에 당소소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바로 가도 될 것 같아요."

"예, 그럼."

그러자 등을 내밀며 자세를 숙이는 고건하.

그녀는 익숙하게 그의 등에 업혔다.

"이쪽 방향으로 쭉 가시면 돼요."

그렇게 다시 돌아가게 된 무림맹.

'이틀 사이에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이 늘었네.'

고건하가 곳곳을 돌아다니며 마인들을 닥치는 대로 죽여댄 덕분일까.

가는 도시마다 사람이 살지 않는 폐도시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활기를 되찾은 모습이었다.

그 광경을 본 당소소가 입을 열었다.

"이젠 사람들이 조금씩 돌아다니네요."

청혼을 거절당한 뒤로 직접 그녀가 대화의 포문을 연 것은 처음이었다.

"아, 네."

"바로······ 천마를 죽이러 가실 생각이신 거죠?"

당소소의 물음에 그녀의 팔에 안겨있던 고건하의 목이 잠시 아래로 움직였다.

"예."

'기회는 지금밖에 없어.'

당소소는 다시 용기를 냈다.

"혹시 저도 함께 따라갈 순 없을까요? 분명 무언가 도움이 되실 거라고 장담해요. 천산에는 외부인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여러 겹의 진법들이 설치돼 있어요. 거기다 각종 기관들까지······."

하지만 그녀의 용기는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고건하가 중간에 말을 자른 것이다.

순간 그녀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혹시 제가 청혼한 것 때문에 그러시는 거라면······."

"아뇨. 거기선 지켜드리기가 힘들 것 같아서요. 죄송하지만, 방해만 될 뿐입니다."

"······알겠어요."

그리고 다시 시작된 정적.

그 침묵은 무림맹 근처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다 왔군요."

자세를 낮추는 고건하.

내리라는 뜻이다.

저 멀리, 무림맹의 대문이 보였다.

'왜 여기서 내려 주시는 거지?'

당소소는 고개를 갸웃하며 고건하의 등에서 내려왔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지난 이틀 동안 길 안내를 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안 들어가시게요?"

"예. 마교 교주를 죽이는 건 빠르면 빠를수록 좋으니까요. 맹주님께 진행 상황 보고는 소소님이 부탁드립니다."

그와 동시에 고건하가 등을 돌렸다.

그때였다.

"저······.포,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어떻게든 고 대협께서 절 마음에 들어 하실 수 있도록······."

이미 확실하게 거절당한 상황.

그런데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당소소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마음이 시켰을 뿐.

"아뇨. 결국 포기하시게 될 겁니다. 이제 저를 다시 보게 되는 일은 없으실 테니까요."

하지만 돌아오는 고건하의 반응은 무척 싸늘했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

차가운 목소리.

그리고.

작별 인사.

"······."

그 모습에 당소소는 자신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럼."

그런 그녀를 뒤로하고 냉정하게 등을 돌리는 고건하.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그리고.

이내 뒷모습마저 보이지 않았다.

"흑흑······."

당소소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사천당가의 재건을 위한 데릴사위.

압도적인 무력.

물론 그것들도 중요했지만.

'내가 그를······.'

고건하의 등에 안겨있을 때, 당소소는 세상 어디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안정감을 느꼈다.

그의 낮고 맑은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무척 편안하고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거기다 중간중간 그녀에게 세심한 배려까지 해 주었고.

떠나간 가족들에게 다짐하는 자리에서 말없이 곁을 지켜주었다.

세상에 혼자 남은 그녀에게.

'좋아하고 있었구나.'

희망을 안겨주었다.

그래서 더 차갑게 느껴졌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살면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연모하게 됐고.

그리고 역시.

"잘 가요······."

처음으로 거절당했다.

그가 떠나고도 한참 동안.

당소소는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예상되는 소요 시간 : 143:27:42]

'멀긴 엄청 머네.'

전력으로 세 시간이나 걸려서야 도착한 신강.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하늘에는 먹구름이 잔뜩 껴 있었다.

'저기에 마교의 본거지가 있단 말이지.'

저 멀리,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서 있는 산이 보였다.

얼마나 높은지, 시원한 가을 날씨인데도 산의 꼭대기에는 만년설이 쌓여 있었다.

'특이한 산이네.'

천산을 보면서 나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큰 산불이라도 났던 것처럼, 산 전체가 까무잡잡했었으니까.

하지만 산불이 났던 건 아닐 것이다.

곳곳에 나무가 빽빽하게 자라있었다.

'완전 천혜의 요새군.'

천산은 높이도 높이인데, 깎아지른 듯 험준한 산악 지형 탓에 대규모의 적이 쳐들어오기에 쉽지 않은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과거, 정파 무림한테 밀리는 와중에도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을 것이다.

뭐, 어쨌든.

[남은 체력 : 82%]

산 전체에서 묘한 마력이 느껴졌다.

남은 체력도 충분하겠다, 나는 곧장 천산을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여기서 내가 해야 할 것은 명확하다.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

지난 이틀 동안 30만이라는 마인을 죽이긴 했지만, 그 정도는 상위 넘버링 플레이어들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것도 체력을 회복시키는 스킬이 있구나, 라며 고개를 끄덕이고 넘어갈 것이고.

'그나마 감탄한 게 있다면 무림맹을 오가며 적들을 죽였다는 것 정도겠지.'

그런 스킬은 상위 넘버링 플레이어들에게도 흔치 않은 것이었으니까.

아무튼, 내가 이 경기에 들어오며 다짐했던,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은 분명한 사실.

'내가 상위 리그 최강자 중에 한 명이라는 걸 똑똑히 새겨주겠어.'

마침 상황도 좋았다.

무림 맹주 진초풍의 말로는 마인의 숫자가 60만에 육박한다고 했다.

근데 내가 죽인 숫자는 30만 명 뿐.

그렇다는 건, 남은 마인들 중 대다수가 천산에 있는 마교의 본거지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교주, 남은 장로들, 그리고 30만에 가까운 마인들을 한 번에 죽이면 신들 입장에서도 제법 놀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바위 사이사이를 뛰어오르고 있을 때였다.

'뭐지?'

순간 내 몸이 무언가 막에 부딪히는 느낌이 났다.

그와 동시에 마력장에서 느껴지는 주변 환경들이 확 바뀌었다.

이런 경우는 딱 하나 뿐이었다.

내 위치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바뀌었다는 것.

'결계군.'

―혹시 저도 함께 따라갈 순 없을까요? 분명 무언가 도움이 되실 거라고 장담해요. 천산에는 외부인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여러 겹의 진법들이 설치돼 있어요. 거기다 각종 기관들까지······.

당소소가 각종 진법과 기관진식들이 바로 이것이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이런 종류의 결계가 하는 역할은 거의 정해져 있었다.

지금 상황으로 봤을 땐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돌게 만드는 거겠지.

'단숨에 부수고 올라가면 돼.'

빠르게 뛰어오르자, 아까와 같은 막이 또다시 느껴졌다.

나는 그 막을 향해.

콰지지지지지지직!

뇌전이 깃든 창을 망설임 없이 휘둘렀다.

서걱!

미묘한 반발력 같은 게 느껴졌지만, 내 힘을 감당하지 못한 결계가 두부 썰리듯 잘려 나갔다.

'뚫렸군.'

넓게 퍼져 있는 결계의 막 사이에 작은 구멍이 생겨난 게 느껴졌다.

그렇게 그 구멍을 통과할 때였다.

파바바바바바바바바박!

무수히 쏟아지는 화살들.

주변에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걸로 보아, 특수한 장치를 통해 침입자에게 쏘아지는 것 같았다.

'그래 봤자지.'

하지만 나는 별 신경을 쓰지 않은 채 내달릴 뿐이었다.

현재 내 민첩 스텟은 피의 강화 특전이 비활성화 되어 230 포인트까지 떨어진 상태.

그럼에도 비정상적으로 높은 스텟이었다.

이렇게 내 빠른 움직임을, 고작 화살들 따위가 따라올 수 없었다.

그리고 도착한 산의 꼭대기 부근.

'여기가 천마신궁이군.'

드넓게 펼쳐진 고원 너머에 드높은 성벽과 악귀 형상이 새겨진 철문이 보였다.

여기가 마교의 입구일 것이다.

뇌전을 끌어올린 나는 단숨에 성문을 박살 내고 들어갔다.

"적이다!"

"감히 신성한 곳에 더러운 발자국을 남기다니!"

"어서 근위대를 호출해!"

그리고는 안에 있는 마인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하기 시작했다.

피웅! 파바바바박!

폭죽들이 먹구름으로 가득한 하늘 위로 터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엄청난 숫자의 마인들이 성문으로 뿜어져 나왔다.

'확실히 본거지에 있는 마인들이 더 세네.'

전체적으로 평균 스텟이 10에서 20포인트 정도 높은 데다가, 더 체계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각 지부에 있던 마인들이 개인의 무력을 중시하며 달려들었다면, 본거지에 있는 녀석들은 군대처럼 집단의 힘을 중시한다고나 할까.

당장 무장 상태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대열에서 이탈하지 마라! 모두 한 걸음씩!"

맨 앞 열의 마인들은 방패를 든 채 나를 옥죄어 오고 있다.

챙! 콰지직!

거기다 자기에게 떨어지는 공격만 수비하는 게 아니라, 바로 옆의 동료들까지 신경 써가며 방패를 내밀고 있었다.

한마디로 방진防陣 훈련을 받았다는 것.

"방어는 생각하지 말고 과감하게 찔러! 동료들을, 너희가 흘린 땀방울을 믿어라!"

그리고 바로 뒷 열의 마인들은 빼곡하게 세워진 방패 사이사이의 빈 공간을 통해 창을 찔러 넣고 있었다.

중거리와 근거리의 역할 분담이 확실하게 되어있다는 뜻.

'그래 봤자야.'

다른 플레이어들이라면 녀석들을 모조리 죽이는 데 시간이 제법 걸렸겠지만, 내겐 해당 되지 않았다.

군軍처럼 빼곡하게 몰려드는 적을 상대로도, 내 강점이 발휘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론 내게 더 좋지.'

띠링!

[<벽력 >이 발동됩니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때마침 엄청난 빛기둥이 뿜어져 나오며 굉음을 터트렸다.

"끄아아아악!"

"끄으윽!"

뇌전의 칼날이 사방을 휩쓸며 순식간에 스무 명 가까이 되는 마인들의 몸이 산산조각 났다.

'빼곡하게 몰려 있다는 건 광역 데미지에 취약하다는 거지.'

안 그래도 천둥의 숨결이 뇌룡의 포효로 업그레이드 되면서 벽력의 발동 확률이 5배나 상승했다.

거기다 하위 리그 성계 대항전을 통해, 한 번에 여러 명을 공격하면 그 확률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는 것도 확인한 상황.

"어서 빈 자리를 메워! 흩어지면 안 된다!"

녀석들이 계속해서 빽빽하게 몰려들수록.

띠링!

[<청천벽력 >이 발동됩니다.]

꽈과과광! 꽈과광! 꽈과과과과광!

피해가 가중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이런 미친!"

"대, 대주님! 이대로 계속 가면 피해가 심해질 겁니다!"

"모두 물러나지 마! 저건 위협용이다! 저렇게 대단한 초식을 펼치려면 내공의 소모 또한 만만치 않을 터! 이대로 물러나면 녀석의 계획대로 움직이게 될 뿐이다!"

하지만 마인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더 촘촘하게 방어선을 구축한 채 나를 압박할 뿐.

그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계속해서 밀고 들어온다고?

'개미지옥을 보여주지.'

띠링!

[<벽력 >이 발동됩니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 127화. 인연(1) > 끝

< 128화. 인연(2) >

"이런 미친! 저 녀석은 내공이 무한하기라도 하단 말인가!"

"대, 대주님 어떻게 해야······."

"이런 병신 새끼! 그럼 녀석이 성역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게 그냥 놔두라는 뜻인 게냐!"

"그, 그런 뜻이 아니오라······."

"계속 밀어붙여라! 곧 다른 타격대들이 합류할 것이다!"

마인들은 내 압도적인 위용에 쭈뼛거리면서도, 계속해서 달려들었다.

'나야 고맙지.'

적장의 예상과 다르게 내 마력 소비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벽력과 청천벽력 모두 특수 발동 스킬.

내 마력을 잡아먹는 건, 창을 휘두를 때 뿜어내는 뇌전이 고작이었다.

그것 또한 마력 소비가 별로 크지 않았고.

띠링!

[체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이걸로 벌써 40포인트나 올렸네.'

경기장에 들어온 이후로 근력 8, 민첩 6, 체력 11, 마력 15 포인트가 상승했다.

이곳에 있는 녀석들의 수준이 전체적으로 높다 보니, 스텟이 빠르게 오르고 있었다.

내게 필요 없는, 지력 스텟이 오른 것까지 합치면 70 포인트가 넘게 오른 셈이었다.

거기다 이곳에서 내가 죽인 마인의 숫자도 어느덧 천 단위를 넘어서고 있는 상황.

'잘하면 이번 경기에서 50포인트 이상 올릴 수 있겠는데.'

나는 몰려드는 마인들에게 계속해서 창을 휘두르고, 뇌전을 흩뿌렸다.

그때였다.

"젠장! 모두 비켜라! 우리가 상대할 것인즉!"

날 몰아붙이는 근위병들 뒤로 등장한 백 명 정도의 마인들.

"오오! 수라대가 도착했다!"

"뭐 하는 게냐! 어서 길을 터 주지 않고!"

기녀들이나 입을 법한, 속살이 보일 듯 아슬아슬한 옷을 입은 여인부터, 얼굴에 칼자국이 수십 개나 나 있어서 흉악스러운 얼굴의 괴인, 머리부터 수염, 그리고 하얀 장삼까지 입고 있어서 신선처럼 보이는 노인까지.

모두들 각양각색의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느껴지는 기세가 예사롭지 않은 걸 보니, 마교 내에서도 정예로 통하는 녀석들인 것 같았다.

"고작 한 놈을 어쩌지 못하고 있다니!"

"호호, 너무 노여워하지 말아요. 척 보기에도 엄청 고수처럼 보이는걸요."

"이번 기회에 우리 수라대가 왜 천마신교 최강 전력으로 통하는지 알려줍시다."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조병립]

[성향 : 광신]

[근력 : 108(+?)] [민첩 : 111(+?)] [체력 : 71(+?)]

[정신 : 66(+?)] [지력 : 30(+?)] [마력 : 109(+?)]

[업적 특전 : 천마신교의 교인]

'강자가 이렇게 많다고?'

새로 등장한 녀석들의 스텟을 확인한 나는 깜짝 놀랐다.

수라대의 평균 스텟은 110 초반.

이전까지 등장하던 녀석들보다 훨씬 높은 스텟을 가지고 있었다.

발리노르 성계로 예를 들자면 소드 마스터만 100명이 등장한 격이랄까.

'과연 4강 중 하나답군.'

솔직히 단일 세력에서 이렇게 많은 강자를 보유하고 있기가 쉽지 않았다.

당장 내가 경기를 펼쳤던 발리노르의 라 제국만 해도, 고작 열두 명의 소드 마스터만 존재할 뿐이었으니까.

물론 특전 덕분에 근력과 민첩이 비정상적으로 상승한 것도 있긴 하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마교라는 세력이 무림에서 얼마나 많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때, 가장 선두에서 수라대를 이끌던 남자가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근위대주. 근위대를 뒤로 물리시오. 걸리적거리니."

거대한 사신의 낫을 들고 있는 중년인이었는데, 녀석이 수라대를 이끄는 대주인 것 같았다.

"수라대주! 방심하지 마시오! 녀석은 천하십대고수라고 해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고수요!"

근위대주라고 불린 사내가 조심하라고 조언했지만, 수라대주는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흥. 근위대에게나 어려운 상대겠지. 잘 보시오. 수라대의 힘을 보여줄 테니. 수라대! 공격!"

"이보시오, 수라대주!"

그와 동시에 달려드는 백 명의 마인들.

녀석들은 가장 기본적인 도, 검, 창부터 시작해서 거대한 도끼나, 편, 유성추 등등 다양한 무기들을 사용했는데, 공격이 날아오는 각도가 무척 매서웠다.

확실히 마교 최고의 전력이라고 자부할 만 했다.

하지만 나는 녀석들의 등장이 오히려 반가웠다.

'나한테는.'

고수의 숫자가 많다는 건 놀랍지만, 그래봤자 하위 넘버링 수준.

그런 녀석들이 내 상대가 될 리 없었다.

'피의 흡수 제물일 뿐이지.'

나도 녀석들의 공격에 맞서, 뇌전을 끌어올리며 돌진했다.

콰지지지지지지직!

내게 날아드는 각종 무기.

녀석들이 내뿜는 찐득찐득한 살기들.

그 모든 것들이.

서걱!

내가 흩뿌리는 뇌전에 절단되었다.

순식간에 열 명이 넘게 죽자, 수라대주가 경악했다.

"미친! 모, 모두 정지! 수라염왕진修羅炎王陣을 펼쳐라!"

그때부터 전투의 양상이 바뀌었다.

무작정 달려들어 무기를 휘두르던 수라대가 체계를 갖춘 채 유기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검과 도가 쇄도하고, 동시에 창이나 철퇴 같은 중거리 무기가 날아든다.

그 사이사이에 유성추나 사복검 같은 채찍류 무기들의 공격이 들어온다.

마치 백 명 가까이 되는 마인들이 한 몸이 되어 움직이는 것 같았다.

'확실히 마법이 없다 보니까 이런 쪽으로 많이 발전했군.'

굉장히 까다로운 진형陣形.

그럼에도 내게 위협적인 상황은 연출되지 않았다.

근위대와 달리, 수라대의 숫자는 백 명 밖에 되지 않은 상황.

한 명씩 차근차근 공략하며 수라염왕진을 무너트리기 시작한 것이다.

굳이 이전처럼 개미지옥을 파놓고 녀석들의 전력을 빨아먹는 식으로 싸울 필요가 없었다.

띠링!

[<벽력 >이 발동됩니다.]

꽈아아아아아아앙!

"꺄악!"

"헉! 이럴 수가! 벼락을 부리는 무공이라니!"

단 한 번의 공격에 열 명이 넘는 마인들의 몸이 터져 나갔다.

수라염왕진을 이루는 한 축이 단숨에 사라진 탓인지, 녀석들의 움직임이 조금씩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꺄악!"

"미, 미친! 근위대! 어서 수라대를 도와라!"

'가면이 진짜 개 사기긴 하네.'

가면의 특성은 죽일수록 강해진다는 것.

그렇기에 약한 다수를 상대하는 데 특화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녀석들의 숫자가 얼마나 됐든, 무슨 무기를 사용하든, 어떤 환경에서 전투를 펼치든.

그 모든 상성들을 가면이 씹어먹는다.

한마디로 나보다 약한 존재에게는 절대적 우위를 점하게 해준다는 것.

'가면의 무서움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약자라는 기준은 결국 현재의 내 스텟이 좌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더 강해진다면?

더 많은 약자들이 생겨날 것이다.

당장 몇 개월 전만 해도 나를 쩔쩔매게 했던 하위 넘버링 수준의 플레이어들이 나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근데 만약 내가 고위 리그를 넘어, 초월 리그까지 올라간다면?

'날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거의 없겠지.'

이론적으로, 초월 리그 미만의 플레이어들은 나 혼자서도 싹쓸이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결국 내가 죽지 않고 제일 꼭대기까지 올라간다면, 아주 극소수의 최강자 몇 명을 제외하곤 날 위협할 수 있는 존재가 없을 거라는 뜻이었다.

올라가기만 하면 된다.

그럼 내가 조심해야 할 플레이어의 숫자는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못난 놈들! 고작 한 명을 어쩌지 못해서 쩔쩔매는 꼴이라니! 모두 비켜라!"

그렇게 내게 달려든 수십 명의 고수들 중 절반가량이 죽였을 때였다.

"오오! 소교주님과 사대호법께서 오셨다!"

"와아아아아아아!"

날 에워싸던 마인들이 홍해처럼 갈라지고, 그 너머로 한 명의 미남자와 네 명의 노인이 걸어들어왔다.

미남자는 거대한 대도大刀를, 네 명의 노인은 각각 검, 도, 창, 편을 들고 있었는데, 다른 이들과 다르게 제법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마교에서 제법 영향력이 있는 녀석들인가 본데.'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천무악]

[성향 : 광신]

[근력 : 156(+?)] [민첩 : 152(+?)] [체력 : 102(+?)]

[정신 : 99(+?)] [지력 : 42(+?)] [마력 : 155(+?)]

[업적 특전 : 천마신교의 소마小魔]

[종족 특전 : 악마의 권속]

악마의 눈으로 녀석들의 스텟을 확인한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중간계에서는 볼 수 없는 스텟이었다.

완전 밸런스 파괴 수준.

'교주의 악마화 하나로 이렇게까지 스텟이 올라가다니.'

뭐, 그랬으니까 상위 넘버링으로 미션이 내려왔을 것이다.

"정파의 끄나풀 중에서도 제법 쓸만한 녀석이 있었군. 어느 문파 출신이지?"

소교주, 천무악이 내게 다가오며 물었다.

그의 얼굴엔 감탄한 기색이 역력했다.

'엄청난 숫자의 마인이 죽었는데 신경도 안 쓰는 눈치군.'

그 모습에서 나는 마교라는 집단이 무엇에 중점을 둔 곳인지 알 수 있었다.

오로지 힘.

'약육강식의 세계.'

그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나는 천무악의 물음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콰지지지지지지지직!

달려들어 창을 휘두를 뿐.

"흥! 감히 내 말을 무시하다니. 본때를 보여주도록 하지."

그러자 대도를 치켜세우는 천무악.

그와 동시에 사대호법이라 불린 네 명의 노인이 각자의 무기를 휘둘러왔다.

'제법인데?'

검, 도, 창 세 가지 무기가 정면의 세 방위를 점한 채 들어오고, 각도가 없는 방향에서 편이 벼락처럼 날아들었다.

제법 높은 스텟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대호법은 호흡이 척척 맞았다.

한마디로 일대일 승부에만 익숙하던 십장로들과 다르게, 이들은 네 명이서 한 명의 강자를 상대하는 데 최적화 되어 있다는 것.

스텟도 제법 높기에, 상대하기가 제법 까다로울 것 같았다.

'일단 사대호법부터 처리해야겠군.'

전략을 정한 나는 녀석들의 공격을 여유롭게 피하며, 다섯 마인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곧장 천무악에게 창을 휘둘렀다.

다섯 마인 중에서 가장 약한 건 소교주, 천무악.

그러면서 동시에, 녀석의 신분이 가장 높은 것 같았다.

사대호법이 그의 좌우에서 수행하는 듯한 모양새였으니까.

녀석을 공략하면 사대호법에게 빈틈이 생길 것이다.

챙! 콰지직! 콰직! 챙! 챙! 콰직!

"읏!"

나와 무기를 맞댄 소교주가 뇌전으로 인해 몸을 움찔했고, 그로 인해 녀석의 곳곳에 빈틈이 드러났다.

"암경暗勁! 소마, 어서 내공을 끌어올려 방어하시오!"

무려 4중첩이나 된 뇌전.

천무악의 스텟이 높다곤 하지만, 데미지가 제법 쌓일 것이다.

뇌전은 속으로 스며들어, 내부를 파괴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으니까.

"큭! 내공을 올려도 통하지가 않소!"

"노옴! 감히!"

그걸 본 사대호법이 대경실색하며 천무악을 커버하기 위해 무기를 휘둘러왔다.

그러다 보니 철벽같았던 사대호법의 공세에 빈틈이 드러났고.

'역시.'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서걱!

"끅······!"

검을 든 호법의 목이 허공을 날았고.

서걱!

그리고 도를 든 호법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두 동강난 채 고꾸라졌다.

잠깐의 빈틈만으로도 무려 두 명이나 죽인 것이다.

"안 돼! 둘째야!"

"놈! 감히이이!"

두 사람의 죽음에 경악하는 천무악과 호법들.

'남 걱정을 하고 있을 시간이 없을 텐데?'

그 틈에 나는 뇌전을 뿌려대며 나머지 녀석들에게 창을 휘둘렀다.

챙!

"크윽!"

압도적인 근력 차이에 내 창과 부딪힌 녀석들의 팔이 기형적으로 꺾여 나갔고.

서걱! 서걱!

압도적인 민첩 차이에 창을 쓰는 호법은 내 움직임을 따라오지 못했다.

단 한 번의 공방으로도 목숨이 오가는 와중에, 움직임을 놓쳤다는 건.

딱 한 가지 결과밖에 나올 수 없었다.

서걱!

"이, 이럴 수가······! 사대호법님들도 상대가 안 된다니!"

다섯 명의 초고수가 내게 압도당하는 모습을 본 마인들이 경악했다.

이제 남은 건 소교주와 한 명의 호법 뿐.

"도대체 이런 녀석이 어디서 튀어나왔단 말인가!"

그런 내 무위에 소교주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모, 모두들 소교주님을 지켜라! 놈이 절대로 지나가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소교주님! 어서 뒤로!"

순식간에 뒤집힌 전황에 마지막 남은 호법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 사이, 다른 마인들도 개떼처럼 달려들고 있었다.

'잘 가라고.'

띠링!

[<벽력 >이 발동됩니다.]

그 순간, 빛기둥이 뿜어져 나오며 사방을 집어삼켰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앙!

< 128화. 인연(2) > 끝

< 129화. 인연(3) >

[현재 마교와 정파 무림의 균형은 7:1 입니다.]

[마교 고수를 대거 처치해 균형을 1:1로 만드세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군데군데 엄청난 크기의 구덩이들이 만들어져 있고, 온 세상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까악! 까악! 까악!

까마귀 떼들이 성문 앞으로 몰려들었다.

'후우. 드디어 끝났군.'

소교주와 사대 호법, 그리고 두 명의 장로, 수많은 고수들.

그리고 대략 5만 명의 마인들까지 모조리 죽였지만, 끝끝내 마교의 교주는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내가 직접 마교 교주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는 뜻.

온갖 시체들, 그리고 잘려 나간 머리와 팔다리들을 밟지 않도록 주의해서 발걸음을 옮기며, 마교의 본거지 안쪽으로 들어갔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크네.'

험준한 산악 지형 위에 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마교의 본거지는 엄청난 크기를 자랑했다.

산의 중턱부터 시작해서 봉우리까지 각종 높이의 건물들이 즐비했고, 곳곳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같은 것들도 보였다.

아무래도 지하 공간까지 활용하고 있는 모양.

하긴, 그렇지 않으면 60만이라는 숫자의 마인들을 수용할 수 없을 것이다.

"저, 저놈이 어떻게······?"

"수라대와 사대호법님들까지 가셨는데······!"

제법 큰 건물들은 서너 명의 마인들이 앞을 지키고 있었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 녀석들이 바들바들 떨었다.

서걱!

나는 녀석들을 죽이며, 건물들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물론 하나부터 열까지 다 뒤진 것은 아니었다.

경비병이 없거나, 작은 규모의 건물들은 모두 배제했다.

저런 곳에 교주가 있을 리 없으니까.

'수색하는 것만 해도 시간이 꽤 걸리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다음 건물로 들어갈 때였다.

"헉!"

내부로 들어가니 다섯 명의 마인이 쓰러져 있다.

그 앞에서 어떤 마인이 죽은 시체들의 품을 뒤지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곤 엉덩방아를 찧었다.

내가 아직 내부를 수색하지 않은 건물이었다.

그렇다는 건, 눈앞의 마인이 다른 다섯 명의 마인들 죽였다는 뜻이리라.

전투의 흔적이 없는 건, 면식범이라는 이점을 살려 기습을 한 걸 테고.

'뭐, 내 알 바는 아니지만.'

잠깐 고개를 갸웃한 나는 창을 들어 올렸다.

녀석이 뭘 하고 있든, 곧 죽을 것이라는 건 변함이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녀석을 베어버리려고 할 때였다.

"자, 잠깐! 나, 나는 정파인이오!"

양손을 들어 올리며 소리친 수상한 마인의 말에 나는 창을 멈춰 세울 수밖에 없었다.

'일단 붉은빛은 흘러나오지 않았긴 한데.'

하지만 혹시 모르기에 나는 악마의 눈을 사용했다.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육소명]

[성향 : 인내]

[근력 : 48(+?)] [민첩 : 51(+?)] [체력 : 50(+?)]

[정신 : 49(+?)] [지력 : 29(+?)] [마력 : 39(+?)]

그러자 눈에 들어오는 볼품 없는 능력치.

나는 녀석의 상태창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마인들과 달리 골고루 성장한 근민체.

거기다 천마신교의 교인이라는 특전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혹시 마교에 위장 잠입하신 겁니까?"

녀석이 정파 무림의 사람이 맞다는 뜻이었다.

"마, 맞습니다! 은월각 소속의 육소명이라고 합니다!"

'나이스 타이밍.'

안 그래도 마교 교주를 찾고 있던 상황.

마교에 첩자로 잠입한 육소명이라면 마교 교주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일단 내가 정파인이라는 걸 알려줘야겠군.'

"그렇군요. 아, 그렇게 놀라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아, 알고 있습니다. 청룡문의 문주, 고건하 대협이시라고······."

"저를 알고 계십니까?"

육소명의 말에 나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날 알고 있는 거지?

내가 비록 며칠 동안 마인들을 쓸어버리고 다니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름까지 알 수는 없었을 텐데?

"예. 방금 막 맹에서 도착한 전서응傳書鷹을 받았거든요. 부각주님께서 수단과 방법을 아끼지 말고 도우라는 지시가 있으셨습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나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육소명은 은월각 소속.

그곳의 부각주라면 한 명 밖에 없었다.

'역시 당소소가 일을 잘해.'

전서응은 서신을 전해주는 매다.

엄청난 속도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녀석이라, 나보다 더 빨리 도착한 모양이었다.

덕분에 일이 편해지게 생겼다.

"혹시 마교의 교주가 주로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내 물음에 육소명이 나를 건물 바깥으로 이끌었다.

"저어기 제일 꼭대기 보이십니까?"

"예."

"저기가 천마전이라는 곳입니다. 마교의 교주는 보통 저곳에 있습니다."

육소명의 말에 나는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전 그럼 일단 교주부터······."

"근데 가셔도 아마 없을 것입니다. 이틀 전에 천산을 내려간 걸로 알고 있습니다."

'뭐라고?'

육소명의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심 그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긴 했다.

이 난리통에도 교주가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교주가 없다는 걸 직접 듣고 나자, 허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디로 갔는지는 아십니까?"

"소인이 말단이다 보니 그것 까지는······."

마교에서 높은 직책을 가지고 있을수록, 죽였을 때 세력비가 훅훅 깎여나갔다.

사대호법과 소교주, 고작 다섯 명을 죽였을 때도 1포인트나 하락했고.

그래서 천마를 죽이면 얼추 미션이 마무리될 줄 알았는데, 또다시 천마를 찾아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어쩔 수 없지.'

다시 찾으러 다니는 수밖에.

"근데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죠?"

육소명이 쓰러져 있던 마인을 가리켰다.

"이자가 지하 뇌옥의 간수장입니다. 소인은 열쇠를 찾으려고 했던 거구요."

"지하 뇌옥?"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육소명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지하 뇌옥에 무림인들이 갇혀 있습니다."

육소명의 말을 들은 나는 그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아, 어쩐지.'

세력비에 비해 무림맹에 살아남아 있는 생존자의 숫자가 너무 적더라니.

난 또 어디 깊숙한 산속에 숨어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생존자 대다수가 마교에 끌려왔던 모양이었다.

"숫자가 많습니까?"

내 물음에 육소명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몇 명이나 있는지, 그리고 누가 수감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함부로 돌아다닐 수 있는 신분이 아니거든요. 오며 가며 들은 것 밖에 없습니다."

"지하 뇌옥이 어디 있습니까?"

이곳은 평범한 주택.

이런 곳에 지하 뇌옥이 있을 리 없었다.

간혹 이런 식으로 외부를 꾸며놓고,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가 숨겨져 있다는 식으로 되어 있는 곳도 있긴 하지만 이곳은 마교의 본거지.

굳이 외부의 눈을 속여 만들 필요가 없는 곳이었다.

"아, 지하 뇌옥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여긴 지하 뇌옥의 간수장이 사는 곳이구요."

육소명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하 뇌옥에 간수들이 더 있습니까?"

"예. 서, 서른 명 정도······."

"갑시다."

육소명의 스텟을 보아하니, 이곳에서 가장 약한 마졸 한 명도 제대로 상대할 수 없을 것이다.

서른 명이나 된다면 이곳에서처럼 기습해서 쓰러트리는 것도 불가능할 테고.

어차피 세력비를 위해 정파 무림인들을 구해야 하는 상황.

'적어도 헛걸음을 한 건 아니군.'

그런 이유로 지하 뇌옥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이쪽입니다."

육소명을 따라간 곳은, 다른 곳들과 다르게 지하로 내려가게끔 만들어져 있는 건물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지하 갱도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성인 남성 세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폭에, 천장은 2미터도 채 되지 않았으니까.

'여기가 지하 뇌옥이군.'

지하로 내려가자 일자로 쭉 뻗어있는 복도가 보였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크기였는데, 그 길다란 복도를 서른 명 정도의 마인들이 돌아다니며 순찰을 하고 있었다.

'엄청난 크긴데?'

복도의 양옆으로는 두꺼운 쇠창살이 달린 작은 방들이 조르르 늘어서 있었는데, 3평 정도의 작은 방 안에 열댓 명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었다.

그렇다는 건 대충 어림잡아 계산해도 이 지하 뇌옥에 몇만 명은 수용할 수 있다는 뜻.

"음? 숙수가 이곳엔 웬일이오?"

"식사 시간이 되려면 한참 멀었는······ 헉, 누, 누구!"

육소명을 발견하곤 고개를 갸웃하는 마인들.

녀석들이 바로 뒤에서 따라오던 날 발견하곤 검을 뽑아 들었다.

아무래도 지하에 있다 보니, 밖에서 전투가 펼쳐졌다는 걸 모르고 있는 눈치였다.

"잠시 뒤에 계시죠."

나는 육소명을 뒤로 잡아끌며, 녀석들에게 창을 휘둘렀다.

서걱!

"적이다!"

"제, 젠장! 어서 지원 요청을······."

일격에 마인 세 명의 목이 달아나자, 나머지 녀석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녀석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리라.

입구는 내가 들어온 곳 하나밖에 없는 것 같고, 남은 스물일곱 명의 스텟도 특별할 게 없었으니까.

서걱! 서걱!

나는 길다란 복도를 휘적휘적 걸어 다니며 발악하는 마인들을 하나씩 죽여나갔다.

어두컴컴한 지하 뇌옥의 복도가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

갑작스러운 소란에 지하 뇌옥 안에 있던 무림인들은 창살에 달라붙은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정파 무림인이 맞군.'

모두들 아무런 특전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

나와 눈이 마주친 사람들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들의 눈동자에서 기대감 같은 게 느껴졌다.

"일단 뇌옥에 갇힌 정파인들을 구해주세요. 저는 아직 남아 있는 마인들을 죽이고 있겠습니다."

간수들을 모조리 처리한 나는 육소명에게 다가가 말했다.

"옛!"

이제부터는 육소명 혼자서도 충분할 것이기에, 굳이 시간 낭비 할 필요가 없었다.

"저는 은월각 소속 무인, 육소명입니다! 지금부터 여러분을 구해드리겠습니다!"

내가 계단을 오르자, 육소명이 복도에 대고 크게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쥐 죽은 듯이 조용하던 지하 뇌옥에 한바탕 난리가 났다.

"저, 정말이오? 정말 우리를 구해주러 온 것이오?"

"밖의 마인들은 어찌 되었소? 무림맹이 전쟁에서 이긴 것이오?"

"이보게! 여기부터 열어주게! 여기 위독한 환자가 있다네!"

수천, 아니 수만 명의 무림인들이 아우성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쪽은 더 볼 것도 없겠군.'

지하 뇌옥을 빠져나온 나는 마교의 교주가 머무른다는 꼭대기 쪽으로 향했다.

마교의 교주를 찾겠다는 생각 때문은 아니었다.

다만.

'기왕 본거지를 초토화시켰으니, 놈들의 금고라도 털어야지.'

이곳에도 꽤 많은 골드와 아이템들이 있을 것이기에.

무려 60만이 넘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먹고, 자고, 생활한다.

그 숫자를 먹여 살리려면 굉장히 많은 돈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마교 교주가 기거하는 천마전 주변을 샅샅이 뒤지고 있을 때였다.

"이놈! 여긴 절대로 통과할 수······!"

서걱!

'여기군.'

건물을 지키는 두 명의 마인을 베자마자 느낌이 왔다.

다른 곳보다 훨씬 고수가 지키고 있는 곳.

천마전의 근처에 있을 만한 건물.

거기다 다른 곳과 달리 강철로 된 철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보물창고 뿐이지.'

나는 강철로 된 철문을 힘껏 내리쳤다.

까앙!

'크윽.'

순간 창을 쥔 손이 얼얼했다.

어찌나 단단한지, 철문에는 아주 조금의 생채기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톡톡-

'제법 두꺼운데?'

나는 시체가 된 두 마인의 품을 뒤졌다.

하지만 열쇠는 들어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열쇠를 찾고 다닐 순 없는 노릇.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고.'

나는 철문을 노려보며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까앙! 까앙! 까앙! 까앙! 까앙!

온 힘을 다해 철문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

손바닥이 아려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정도 쯤이야, 금세 회복될 테니까.

그렇게 40번 정도 내리쳤을 때였다.

띠링!

[<벽력 >이 발동됩니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순간 엄청난 먼지가 건물 안을 가득 채웠다.

마력장을 통해, 먼지 너머로 뻥 뚫린 공간이 느껴졌다.

그렇다는 건, 벽력이 터지며 철문이 박살 났다는 뜻.

나는 자욱한 먼지를 헤치며,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보게 된 광경.

'뭐, 뭐야?'

오래된 나무와 종이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수천 개의 빛이 은하수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스킬북:탄지신통彈指神通 >]

[액티브]

[소림칠십이예少林七十二藝]

[손가락에 마력을 모아 방출합니다.]

[방출된 마력은 강한 회전이 깃들어 엄청난 관통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킬북:이십사수매화검법 >]

[액티브]

[화산파가 자랑하는 검법.]

[검을 휘두르면 마력으로 이루어진 매화를 흩뿌립니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매화는 강한 절삭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친······.'

밝게 빛나는 것들은 모두 오래된 서적이었다.

순간 뒷머리가 쭈뼛했다.

여긴 보물 창고가 아니었다.

다만.

오래된 서고였을 뿐.

'이게 다 스킬북이라고······?'

그리고 그 안을 스킬북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 129화. 인연(3) > 끝

< 130화. 인연(4) >

한달음에 서고 안으로 들어가려던 나는 순간 멈칫했다.

'이거 다 챙겨도 뒤탈은 없으려나?'

내부에 있는 책의 숫자는 못 해도 3천 권.

그런데 모두 다 밝게 빛나는 것은 아니었다.

스킬북으로 판정받은 책의 숫자는 대략 1천 권 정도.

나머지는 그냥 일반 서적이었다.

이 정도면 무림 성계 전체에 존재하는 스킬북의 절반가량이 이 서고 안에 들어있다는 거나 마찬가지.

'저번처럼 또 중간계의 균형을 깨트렸다며 징계를 내릴 수도 있어.'

우려가 되긴 하지만, 나는 이내 서고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려 1천 권이다.

이 정도라면 웬만한 징계를 감수하고서라도 챙기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스킬북:분광검법 >을 획득했습니다.]

[<스킬북:암향표 >를 획득했습니다.]

[<스킬북:사일검법 >을 획득······.]

'화산파? 남궁세가?'

설명을 보니, 스킬북은 모두 정파의 무공들이었다.

나는 스킬북으로 판정받지 않은 서적 중 한 권을 꺼내 보았다.

거기엔 혈마수라결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한마디로 이것도 무공 서적이라는 뜻.

'마교의 무공은 스킬북으로 인정되지 않나 보군.'

그걸 통해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마공은 플레이어들이 익힐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상관없어.'

마공이 아니어도 이곳엔 엄청난 숫자의 스킬북들이 있었으니까.

나는 스킬북들의 효과를 빠르게 훑었다.

대부분 2티어에서 1티어 수준이었다.

비율은 7대 3 정도.

2티어 스킬이 최소 50만 골드 정도하고, 1티어는 100만 골드를 넘으니, 평균값을 내보면 65만 골드다.

한 권당 65만 골드 정도의 값어치가 있는 스킬북 1천 권을, 즉 이곳에서 얻게 될 수익이 대략 6억5천만 골드 정도 된다는 뜻이었다.

만약 서고가 아닌, 골드를 보관한 창고였다면 절대 이 정도 수준의 거금이 들어있지 않았을 것이다.

기껏 해봐야 5천만 골드 정도 들어있었겠지.

라 제국의 황궁에 들어있던 돈이 4천만 골드였으니까.

'대박인데······?'

스킬북을 쓸어 담는 내 손길이 무척 빨라졌다.

└뭐냐? 설마 저게 다 스킬북임?

└와 씨발 저걸 한 명이 다 쓸어가게 해주면 안 되지ㅡㅡ 무림에서 흘러들어온 스킬북은 최소 2티어급 아님? 거기다 인기도 좋아서 값어치가 제법 나갈 텐데?

└하여튼 성지星地구석 찌질이들 ㅋㅋㅋ 원래 플레이어가 경기에서 얻는 아이템 팔아서 장비 맞추는 건데 괜히 배 아파서 지랄들 났네 ㅋㅋㅋㅋㅋ

└그거야 당연한 거긴 한데, 저건 정도가 심하잖아ㅡㅡ 한 성계에 있는 스킬북 거의 다 쓸어가는 수준이구만;;

└그거야 게임 메이커나 중간계 관리 위원회가 신경 쓸 일이지 ㅋㅋ 렌이 저걸 얻든 말든 님들이 무슨 상관임?

└뭐라 그랬냐? 응? 직접 눈앞에 있어도 그 얘기 할 수 있나 보자ㅡㅡ 발할라 중앙 공원으로 나와라

└에구 ㅠㅠ 왜케 화나쪄 ㅠㅠ 웅? 기분 나빠쪄? 구래구래~ 윗댓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해ㅇㅅㅇ! 내가 뭘 하면 되겠뉘~?

└(과도한 욕설로 인해 삭제된 댓글입니다.)

└"운영자"중간계 관리 위원회 입니다. 플레이어 '렌'이 현재 스킬북을 획득하고 있는 행위는 미션의 난이도가 너무 높은 관계로, '적합 판정'이라는 게 '아버지'와 위원회의 의견입니다.

└"운영자"시청해주신 관객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거 봐봐 ㅋㅋㅋㅋㅋ 내가 괜찮다고 했자낰ㅋㅋㅋ

└와 씨;; 팀 투지 주인이 누구지? 비싸게 살 테니까 자하신공 있으면 판매점 ㅠㅠ

└나는 태극혜검 ㅠㅠ 진짜 비싸게 살 테니까 제발 ㅠㅠㅠ

└ㅋㅋㅋㅋㅋ 적합 판정 떨어지자마자 애들 돌변하는 거 보소 ㅋㅋㅋㅋ

그렇게 한참 동안 스킬북을 주워 담고 있을 때였다.

'어?'

스킬북의 성능을 확인하며 무의식중에 인벤토리로 넣길 한참.

'뭐지?'

나는 방금 전에 뭉텅이로 집어넣었던 스킬북 중 하나를 다시 꺼내 들었다.

스킬북의 설명 중에 예사롭지 않은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킬북:천뢰십보踐雷十步 >]

[액티브]

[신비문파 청룡문의 독문 무공입니다.]

[활성화 시 64방위의 생로生路와 사로死路를 표시합니다.]

[<섬전閃電 > 능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활성화 시 민첩 스텟이 +30% 상승합니다.]

[움직임에 뇌전의 기운이 깃듭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 : 없음]

[스킬 유지 시간 : 마력 1포인트 당 10초 유지]

[<섬전 >]

[사용 시 벼락이 치며 1미터 이내의 위치로 순간 이동합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 : 1분]

[1회 당 1포인트만큼의 마력 소모]

'뭐, 뭐야?'

내 손 위에 놓인, 다 낡아 떨어지기 직전의 서적.

근데 스킬의 설명은 전율이 일 정도였다.

64방위의 생로와 사로를 표시한다는 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 정도라면 낮은 등급의 스킬북이 아니었다.

직접 사용해 봐야 확실하겠지만, 내 예상에는.

'플래티넘 등급일 수도 있어.'

나는 곧바로 서적을 찢었다.

그러자 가루로 변하며 사라지는 서적.

띠링!

[<스킬북:천뢰십보 >를 사용하셨습니다.]

[현재 플레이어 '렌'에게 허락된 스킬 슬롯은 (5/5) 입니다.]

[보유 스킬 중 한 가지를 삭제하시겠습니까?]

[Yes / No]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스킬은 뇌룡의 포효, 뇌신, 마력 상쇄, 그림자 표식, 침묵의 망토까지 다섯 개.

천뢰십보를 얻으려면 이 중 한 개를 삭제해야 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Yes 버튼을 눌렀다.

[삭제하실 스킬을 선택해 주세요.]

[1. 침묵의 망토]

[2. 뇌룡의 포효]

[3. 뇌신]

[4. 마력 상쇄]

[5. 그림자 표식]

'여기서 내게 필요 없는 스킬은 한 가지 뿐이지.'

그리고는 1번을 클릭했다.

띠링!

[<스킬:침묵의 망토><스킬:천뢰십보 >로 대체되었습니다.]

'후.'

스킬을 획득한 나는 곧바로 천뢰십보를 활성화 시켰다.

그러자 엄청나게 상승하는 민첩 스텟과.

내 눈에 나타나는 무수한 움직임들.

현재는 적이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안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당장 이 서고의 출구 쪽으로 파란색 선이 그려져 있고, 적이 매복하기 좋을 만한 위치에는 붉은색 선이 표시되어 있었다.

'이게 생로와 사로를 표현한 거군.'

그 모습에서 나는 어떤 메커니즘으로 천뢰십보가 활성화되는지 알 수 있었다.

천뢰십보는 보법을 기록해둔 '무공'이다.

즉, 무림인이 천뢰십보를 익히기 시작하면 이전과 다른 움직임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플레이어는 개념이 다르지.'

천천히 익혀나갈 무림인들과 다르게, 플레이어들은 무공 스킬북을 사용하는 순간 그 무공을 완벽하게 다룰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스킬을 익힌다고 머릿속으로 스킬 내용이 들어오는 것은 아니기에, 이렇게 실선으로 알려주는 것 같았다.

정확한 건 밖에 있는 마인들을 상대하면서 알아봐야겠지만.

그전에 먼저.

'일단 남은 스킬북들을 모두 챙겨야지.'

서둘러 모든 스킬북들을 챙긴 나는 손가락에 뇌전을 피웠다.

그리고는 근처에 있는 서적 하나를 꺼내 불을 붙였다.

내부는 전부 목재로 이루어져 있고, 내용물도 종이들이니 금세 타오를 것이다.

콰직! 콰지직!

밖으로 나서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자, 몸에서 뇌전이 뿜어져 나왔다.

'움직임에 뇌전이 깃든다는 게 이런 의미였구나.'

그저 걷는 행위만으로도 사방에 뇌전이 퍼져 나가고 있는 것이다.

뇌전에 닿은 모든 것들이 잘려 나가고, 불에 타기 시작했다.

'이 능력은 돌파할 때 정말 좋겠어.'

뿜어져 나가는 뇌전은 내 창이 닿지 않는 곳까지 뻗어나가고 있었다.

다수를 상대로 좁은 공간을 돌파할 때 굉장히 효과가 좋을 것이다.

나는 내친김에 섬전도 사용해 보았다.

띠링!

[<섬전 >을 사용합니다.]

꽈광!

순간 시야가 뒤틀리며, 내 몸이 순간 이동해 있었다.

거의 그림자 이동과 비슷한 효과.

물론 고작 1미터, 단거리에 불과하지만, 쿨타임이 1분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이 정도면 활용도가 무궁무진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좋은 스킬을 얻었어.'

그런 생각을 하며 밖으로 나섰을 때였다.

"죽어라, 이 악마!"

"사부님의 복수를 하겠다!"

서고 밖은 한바탕 난리가 나 있었다.

시체만이 가득한 채 간간이 한두 명의 마인들이 돌아다니던 마교의 본거지.

그곳을 꾀죄죄한 복장의 무림인 수천, 아니 수만 명이 밖을 활보하며 보이는 마인을 족족 죽여대고 있던 것이다.

육소명이 지하 뇌옥에서 구해준 무림인들인 것 같았는데, 내가 죽인 마인들의 장비로 이미 무장까지 완료한 상태였다.

저 정도라면 내가 굳이 돌아다니며 마인들을 죽이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앗! 나오셨군요, 은공! 여러분, 이분이 여러분을 구해주신 분입니다!"

"오오!"

그러자 무림인들이 구름처럼 내게 몰려들었다.

"도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대협! 저는 화산파의 구청승이라고 하오!"

"제갈세가의 소문주, 제갈천입니다. 도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화산파, 종남파, 무당파 등등 다양한 문파부터, 제갈세가, 남궁세가, 서문세가 등등 다양한 가문까지.

모두들 내게 감사를 표하기 바빴다.

그중에 눈에 띄는 인물도 있었다.

"사천당문의 당세민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잊지 않습니다. 그러니 도움이 필요하시거든 언제든 사천으로 찾아주십시오."

내게 고개를 숙이는 중년인.

그의 뒤로 서너 명의 남자들이 함께 고개를 숙였다.

악마의 눈으로 확인하니 모두들 당씨 성을 가지고 있었다.

순간 사천당가의 현판 아래에서 눈물을 흘리던 당소소가 떠올랐다.

'살아남은 사람이 있었구나.'

아마 이 소식을 들으면 무척 기뻐하겠지.

잘 됐어.

이 세상에 그녀 혼자 남아있는 게 아냐.

'이걸로 마음의 짐을 덜 수 있겠군.'

그녀의 청혼을 거절하고, 내심 찜찜했던 상황이었다.

그 슬픔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몰려드는 무림인들에게 손을 저었다.

"모두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다만, 제가 지금 좀 바쁘니 다음에 기회가 되면 제대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이곳에서 처리해야 할 일들도 모두 끝냈겠다, 바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예상되는 소요 시간 : 138:27:42]

[현재 마교 교주의 악마화 진행률은 95% 입니다.]

마교 교주의 악마화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5일 정도의 시간이 남아있지만, 교주가 만약 마음먹고 숨은 상태라면 시간이 촉박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마교의 본거지를 내려가려던 참이었다.

'어?'

상태창을 확인한 내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림자 표식의 목록에.

당소소의 이름이 사라져 있었다.

그렇다는 건.

'······죽었군.'

그것 말고는 그림자 표식에서 지워질 이유가 없었으니까.

당소소의 마지막 위치는 무림맹.

그런 그녀가 죽었다는 건 딱 한 가지 이유밖에 없었다.

띠링!

[무림인 '진초풍'에게 <그림자 이동> 능력을 사용합니다.]

순간 시야가 반전되었다.

내 바로 앞에는 익숙한 인물의 등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엄청난 마기가 느껴졌다.

닿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저릿저릿할 만큼 엄청난 마기였다.

"맹주의 목을 가져오는 자에게 금전 1만 냥을 하사하겠다!"

"큭! 어떻게든 맹주님을 지켜야······!"

개봉의 무림맹.

맹주 진초풍이 검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마인들을 베어 넘기고 있었고, 곳곳에서도 대규모로 전투가 펼쳐지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전투도 끝날 것이다.

이미 무림맹에 살아 있는 정파 무림인의 숫자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뽑기 ㄱㄱㄱㄱ

└비나이다, 비나이다. 제발 네임드!

└난 네임드도 필요 없다. 준네임드라도 나와줘 ㅠ

└ㅋㅋㅋㅋㅋㅋㅋㅋ 대박 ㅋㅋㅋㅋ 나 점창파 장로 뽑음 ㅋㅋㅋㅋㅋ 꺼억~ 잘 먹고 갑니다~

콰지지지지지지지직!

검붉은 뇌전을 뿜어대며 창을 휘두른 나는 단숨에 주변의 마인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와아아아! 고 대협께서 오셨다!"

나를 발견한 수많은 무림인들이 소리쳤다.

죽음의 손길이 사방으로 뻗어나가고 있던 상황이 순식간에 반대로 바뀌었다.

달려드는 마인을 벤 진초풍도 날 발견하고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오! 고 문주! 또다시 이렇게 도우러 와주다니. 정말 감사하오."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소. 염치 없지만, 이번에도 잘 부탁드리겠소."

진초풍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쓰러져 있는 사람들 중에서 짙은 초록색 무복을 입은 여성이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당소소가 입고 있던 무복.

'쯧.'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인지 모르겠다.

그저.

―만약에······ 천마가 죽고, 이 세상에 마인들이 사라지면······. 저와 성혼을 하지 않으실래요?

살면서 처음으로 받은 청혼 때문일까.

―저와 고 대협, 둘 다 동병상련의 처지잖아요. 우리가 이루어지면 서로의 아픔을 치유해줄 수 있을 거예요.

아니면, 그저 나와 동질감이 느껴지는 사람이라서 그랬을까.

'부디 내세엔 편안하길.'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씁쓸했다.

순간 두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던 당소소의 모습이 떠올랐다.

'흑요석같이 빛나던 눈동자가 예쁜 사람이었지.'

이래서 콜로세움에서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려고 했는데.

매몰차게 거절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마음속 한 켠에 당소소가 스며들어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나마 다행이군.'

내가 구해준 무리 중에서 분명 당가의 인물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염원하던 사천당가의 재건은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내가 마교의 교주만 죽인다면.'

짧게나마 그녀의 평안을 빈 나는 짙은 마기가 느껴지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160센티미터 정도 될까?

작은 덩치에 꼿꼿한 자세.

깔끔한 검은색 무복에, 하얗게 센 머리는 깔끔하게 뒤로 넘겨 묶여있다.

무림에서 돌아다니는 흔한 노인을 연상하게 할 정도로 평범한 모습.

'역시 여기에 교주가 있었군.'

"그대였구나. 내가 나서게 만든 사람이."

하지만 노인의 눈동자엔 숨길 수 없는 강함이 깃들어 있었다.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였다.

'내가 지금······.'

가슴이 서늘했다.

오감이 소리치고 있었다.

'떨고 있는······ 건가······?'

도망치라고.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천세운]

[성향 : 독보]

[근력 : 293(+?)] [민첩 : 299(+?)] [체력 : 297(+?)]

[정신 : 149(+?)] [지력 : 87(+?)] [마력 : 15(+?)] [마기 : 284(+?)]

[각성 능력 : <절대자 > <천마신공 > <검성 > <패자覇者 > <아수라 > <육감 > <천재 >]

[업적 특전 : 파천자破天子]

[종족 특전 : 순수한 악마]

"유흥거리로는 괜찮겠군."

'저 녀석이······ 마교의 교주.'

교주에게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존재감이 뿜어져 나왔다.

절대자.

그런 존재들에게서나 흘러나올 법한 위압감을.

교주가 가지고 있었다.

'쉽지 않겠군.'

교주, 천세운의 스텟을 확인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파 무림인들을 보호하고, 동시에 마인들을 학살하며 세력비의 균형을 맞춘다.

거기다 시간 내에 타깃까지 제거해야 하는 상황.

그런데 문제는.

'단독 미션 치고는 난이도가 너무 높아.'

고작 중간계의 존재가 나보다 훨씬 스텟이 높다는 것.

나는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어쩐지 그 많은 스킬북을 챙겨도 별다른 제재가 없더라니.'

후우. 침착하자.

이미 천뢰십보는 활성화 되어 있는 상황.

나는 정말 오랜만에.

띠링!

[<스킬:뇌신의 포효><스킬:뇌신 강림>으로 각성합니다.]

뇌신 강림을 활성화 시켰다.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직!

검붉은 뇌전의 폭풍이 사방을 휩쓸었다.

< 130화. 인연(4) > 끝

< 131화. 인연(5) >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렌)] [소속 : Team 투지]

[리그 : 상위리그]

[근력 : 257(+5)(+128)] [민첩 : 348(+5)(+201)] [체력 : 207(+5)(+78)]

[정신 : 166(+5)(+62)] [지력 : 101(+39)] [마력 : 176(+5)(+66)]

*역천자(모든 스텟+20%) / 최강의 성계(모든 스텟+10%) / 피의 강화(모든 스텟+30%)

뇌신 강림(근력, 민첩+40%) / 천뢰십보(민첩+30%) / 달의 메아리(모든 스텟+3%)

[이름 : 천세운(천여운에서 이름 변경되었습니다.)]

[근력 : 293(+?)] [민첩 : 299(+?)] [체력 : 297(+?)]

[정신 : 149(+?)] [지력 : 87(+?)] [마력 : 15(+?)] [마기 : 284(+?)]

순식간에 교주에게 달려든 나는 곧장 창을 휘둘렀다.

무려 250이 넘는 근력이 담긴 일격.

챙! 콰지직! 콰직!

하지만 교주는 고작 한 손으로 검을 잡은 채 내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는, 너무나 여유로운 모습으로.

'언제까지 여유로울 수 있나 보자고.'

교주는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모든 존재를 통틀어 가장 스텟이 높은 존재다.

그뿐만이 아니라, 보유하고 있는 각성 능력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전부 다 특급 이상의 경지였으니까.

한마디로 나보다 스텟도 높고, 테크닉도 더 뛰어난 상대라는 것.

아마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그를 쓰러트릴 수 없을 것이다.

'어지간한 방법으론 말이지.'

나는 생각을 정리하려는 척, 두 걸음을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여태껏 아껴뒀던 능력을 사용했다.

띠링!

[<섬전 >을 사용합니다.]

꽈앙!

순간 벼락이 터지며 내 몸이 교주의 바로 앞에 도달했다.

남들이 보기엔 번개가 이동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건 교주 또한 마찬가지일······.

'뭐?'

섬전으로 인해, 순식간에 주변 사물의 위치가 바뀌고.

내 창을 막기 위해 핏빛 강기가 깃든 검을 들어 올리는 교주의 모습이 보였다.

[마력 상쇄율 : 50%]

콰지지지지지직!

스가아아아앙!

교주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핏빛 강기와 뇌전이 먼저 충돌하고.

채애앵!

그와 동시에 내 창과 교주의 검이 부딪혔다.

파아아앙!

"모두 조심!"

"이런 미친!"

순간 엄청난 충격파가 터져 나오며, 마인이고 정파이고 할 것 없이 뒤로 물러났다.

'이걸 막아?'

충격파로 인해 뒤로 밀려난 나는 눈을 치켜떴다.

섬전은 단거리에 불과하지만, 그림자 이동과 비슷한 임팩트를 보여주는 스킬.

그렇기에 치명상까진 아니어도, 어느 정도 타격을 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노오옴! 감히!"

"천마수호진을 펼쳐라! 놈이 더 이상 교주께 다가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내가 교주의 공격에 뒤로 튕겨 나가자, 그 사이로 수백 마인들이 가로막았다.

녀석들은 각자 무기를 들어올린 채, 이어질 내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다 죽이고 돌파해주지.'

어차피 이 안에선 교주를 제외하곤 나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몇 명이나 앞을 가로막든 피의 회복 제물이 될 뿐이었다.

그때였다.

"모두들 물러나라."

순간 귓가에 천둥이 치는 것 같았다.

가슴 한 켠이 서늘했다.

'엄청난 마력이군.'

작게 읊조린 것임에도 불구하고 웅혼한 마력이 깃든 교주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존명!"

그러자 빠르게 길을 터주는 마인들.

덕분에 무림맹의 앞뜰에는 나와 교주를 제외하곤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다.

'침착하자.'

지금껏 나보다 강한 존재를 지금껏 얼마나 많이 상대해 왔던가.

심지어 교주와 내 스텟 차이는 이전에 상대했던 시노엘보다도 훨씬 적게 난다.

계속해서 상대하다 보면 분명 공략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들려고 하는 불안감을 짓누르며 교주를 노려보았다.

"청룡문의 후예였는가. 멸문한 줄 알았거늘."

그런 내 모습을 보며 교주, 천세운이 말했다.

"······."

하지만 나는 교주의 말에도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청룡문의 후예가 아닐뿐더러, 대답하려는 순간 집중력이 흐트러질 걸 염려한 것이다.

교주는 잠깐의 방심으로도 승패가 갈릴 정도로 대단한 강자였으니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천세운이 무림 맹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날 앞에 두고도 전혀 긴장하지 않은 모습.

"맹주. 그대가 믿고 있었던 게 이 자인 모양이구려."

"그렇소."

진초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대와의 오랜 인연으로 충고하겠소. 지금이라도 투항하시오."

"해와 달은 함께 떠오르지 않는 법. 노부가 굴복하는 일은 없을 것이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진초풍의 대답.

그러자 천세운이 피식 웃었다.

"껄껄, 아무래도 피를 봐야 끝이 나겠군. 녀석이 어떻게 죽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시오. 아무리 거센 벼락이라도 날뛰는 교룡을 멈춰 세울 순 없을 것인즉."

그와 동시에 천세운이 핏빛 강기를 뿌리며 내게 쇄도했다.

채애애애앵!

'크윽.'

근력 차이가 심하다 보니, 창대를 쥔 손바닥이 얼얼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스강!

내 창을 여유롭게 막아낸 천세운의 검이 뱀처럼 휘어지며 내 수비를 파고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강기가 깃든 교주의 검이 공기를 찢으며 내 귓가를 스쳐갔다.

'젠장!'

나는 천세운이 더 이상 거리를 좁히지 못하도록 견제하며 곧장 뒤로 빠졌다.

이런 식의 근접전이 장시간 지속되어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챙! 콰지직! 채챙! 챙! 콰직!

"제법이구나."

하지만 천세운은 쉽사리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매서운 검격들을 쏟아내고, 중간중간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마력이 담긴 주먹과 발차기가 나를 파고들었다.

'좋지 않은데.'

챙! 콰지직! 콰직! 챙! 콰직!

핏빛 강기와 뇌전이 계속해서 부딪히고, 천세운의 검이 내 몸을 스쳐 지나가는 횟수가 점점 늘어났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콰지지지지지직!

뇌신 강림, 천뢰십보, 벽력섬전, 뇌신까지 4 중첩이나 된 뇌전 공격이 천세운을 괴롭히고 있다는 것.

챙! 채챙! 콰직! 챙! 콰지직!

뇌전은 상쇄라는 개념이 없다.

닿으면 내부로 침투해 데미지를 쌓는다.

당장 소교주나 사대호법이라는 녀석들도 내 뇌전에 얼마나 쩔쩔맸던가.

그것과 마찬가지로, 천세운에게도 뇌전의 데미지가 축적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닿을 때마다 몸을 움찔 떨며 빈틈을 드러낸 건 아니었다.

그저 눈살만 찌푸릴 뿐.

'최대한 장기전으로 끌고 가야겠군.'

뇌신 강림으로 인해 체력이 빠르게 소모되고 있지만, 그 부분은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주변에 잡아먹을 마인들의 숫자가 무척 많았으니까.

체력이 떨어지면 천세운을 밀어붙여, 전장을 마인들이 있는 한복판으로 옮기면 된다.

'천뢰십보의 스킬 이해도가 더 올라가면 승산이 있어.'

계속해서 내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알려주고는 있지만, 익숙하지 않은 탓에 아직까지 제대로 활용하고 있지 못한 상황.

조금만 더 익숙해지면 상대하기가 한결 수월해질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수비에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띠링!

[<벽력 >이 발동됩니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앙!

뇌신 강림으로 인해 1프로까지 상승한 벽력.

'피했어?'

하지만 회심의 공격을, 교주는 너무나 쉽게 피해냈다.

특별한 능력을 사용한 건 아니었다.

그저, 전체적인 스텟이 높다 보니, 벽력마저 반응할 정도로 움직임이 좋았을 뿐.

'누가 더 잘 버티냐의 싸움이 되겠군.'

벽력으로 피니쉬를 시키긴 어려운 상황.

결국 뇌전 데미지가 쌓일 때까지 내가 버텨내느냐, 아니면 버티지 못하느냐가 관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제법 성가신 무공이로고. 지금부턴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겠다."

뇌전의 칼날이 사라지자마자 다시 거리를 좁히는 교주.

핏빛이었던 천세운의 검이 어느새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싸아아아아아―

'뭐지?'

순간 머리털이 쭈뼛했다.

초감각이 위험하다고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심지어 천세운의 방향으로 붉은 실선이 그려졌다.

천뢰십보가 교주와 맞서 싸우는 게 사로임을 알려오고 있는 것이다.

'맞상대해선 안 돼.'

나는 최대한 뒤로 빠지며 교주가 달라붙지 못하도록 견제했다.

어차피 내 민첩 스텟이 훨씬 높으니까 이대로······.

"아이야. 내가 무섭더냐."

'뭐?'

순간 나는 눈을 치켜떴다.

거리를 좁히지 못하도록 찔러 넣은 공격을 교주가 현묘한 움직임으로 피하며 들어온 것이다.

'미친!'

단숨에 내 품속으로 파고든 천세운의 검이 내 심장으로 날아들었다.

이미 피하긴 너무 늦은 상황.

띠링!

[<섬전 >을 사용합니다.]

꽈앙!

마침 쿨타임이 종료된 섬전을 사용해 천세운과의 거리를 1미터로 벌린 나는 곧장 바닥을 박차며 뒤로 쭈욱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곧장 자세를 낮춘 채 이어질 교주의 공격에 대비했다.

"똑똑히 보아라. 이게 격의 차이니라."

그런 내 모습에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 치며 달려드는 천세운.

'맞상대해선 안 돼.'

외곽을 돌며 최대한 공격을 흘려낸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핏빛으로 물든 천세운의 검을 피해 사선으로 움직일 때였다.

'사로死路······?'

그러자 두 눈에 보이는 붉은 선.

천뢰십보가 내가 향하는 방향이 사로임을 알려오고 있었다.

순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걸 느끼며,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멈춰 세웠다.

쐐애애애애애액!

그와 동시에 들려오는 파공음.

그리고.

"······!"

내 코앞을 스쳐 지나가는 천세운의 주먹.

그 광경에 소스라치게 놀란 나는 재빨리 뒤로 빠졌다.

천뢰십보가 아니었다면, 강기가 깃든 천세운의 주먹에 머리가 터져나갔을 것이다.

"제법이구나, 이 공격을 피하다니. 그래도 맹주가 영 맹탕을 믿고 있던 건 아니었던 모양이군."

'죽을 뻔했어.'

소름이 돋았다.

창대를 쥐고 있는 손바닥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불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충분히 버틸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젠장.'

천세운의 공격을 피한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짙은 피로감이 나를 짓눌렀다.

그 짧은 순간, 1초가 1년처럼 느껴질 정도로 긴장했던 것이다.

검 뿐만 아니라 주먹, 그리고 발차기까지 경계해야 하니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이게 고작······ 상위 넘버링이라고?'

천세운과의 전투에서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신들이 왜 스킬북을 챙기게 놔뒀나 했더니.

'교주가 본거지에 있었으면 스킬북을 챙길 수가 없는 난이도였군.'

애초에 내가 거기까지 들어가서 서고를 탈취할 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야.'

조금씩 천뢰십보라는 스킬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감이 오기 시작했다.

사로를, 그리고 생로를 어떻게 피하는지도 조금씩 적응이 되어가고 있었다.

쐐애액!

검에선 엄청난 열기가.

파앙! 파앙!

그 공격들을 막아내는 사이사이에 싸늘함이 깃든 주먹이 파고들고.

파바바밧!

거리가 조금 벌어진다 싶을 때 태선처럼 무거운 발차기가 날아든다.

"제법!"

그때마다 나는 천세운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창을 휘둘렀다.

서걱! 챙! 챙! 콰지직!

솔직히 천세운의 수준은 나보다 훨씬 높았다.

검술이나, 권각술 뿐만 아니라, 어떻게 움직이고 어떤 타이밍에 무슨 공격을 해야 하는지 마저도.

하지만 이전처럼 막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렇게 움직이라고 계속 신호를 보내고 있었던 거구나.'

직전의 공방을 통해, 새로 얻은 이 스킬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깨달았으니까.

천뢰십보는 단순히 생로와 사로를 보여주는 스킬이 아닌, 한 단계 더 높은 경지의 움직임을 알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지금껏 보지 못했던.

'이런 표현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새롭게 눈을 뜬 기분이었다.

'이게 천상계 수준의 강자들이 보는 시야.'

아슬아슬하게 피하기 바빴던 천세운의 공격들이 더 이상 위협적이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였다.

"잔재주도 여기까지다."

'뭐지?'

사아아아아아아아아

주변의 공기가 천세운의 검으로 빨려 들어간다.

순간 머리털이 쭈뼛했다.

심장이 쿵쾅쿵쾅 거렸다.

'도대체 뭘 하려고?'

단순히 공기가 빨려 들어가는 광경임에도, 초감각이 위험하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내 턱에 맺힌 한 방울의 땀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흡!"

짧은 기합성과 함께 천세운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아니.

쐐애애애애애애애애애액!

챙! 콰지직! 콰직!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짙은 마기가, 눈 앞을 가린 것이었다.

순식간에 내 앞에 나타난 천세운이 검을 내리쳤다.

그의 검에선 지옥의 겁화가 이글이글거리고 있었다.

'씨발······!'

그의 공격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지금 여기서 창을 뻗어봤자.

난 저 일격을 막아내지 못할 거라는 걸.

'피해야 해.'

천세운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몸을 틀려고 할 때였다.

'생로······!'

붉은 선으로 가득한 와중에 나타난, 눈앞의 파란색 실선.

내가 피하려고 생각했던 모든 방향들이 사로임을 알려왔다.

그리고.

'여기로 가라고?'

생로는 오히려 천세운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내가 반드시 죽을 거라고 생각했던 곳이었다.

'젠장!'

나는 반사적으로 천뢰십보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는 본능이 시키는 대로 창을 휘둘렀다.

왜 이쪽으로 가라고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이미 한번 날 살려줬던 스킬이었으니까.

서걱!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나와 천세운의 몸이 순간, 겹쳤다가 떼어졌다.

그러자 들려오는 무언가가 얇게 베이는 소리.

그와 동시에 등 뒤에서 엄청난 열기가 느껴졌다.

"후우. 후우."

"······."

내가 서 있던 자리엔 엄청난 크기의 구덩이가 파여 있었고, 그 앞에서 천세운이 조금은 놀란 표정으로 서 있었다.

'뭐가 잘렸나 했더니.'

그의 무복 앞섶이 미세하게 잘려 있었다.

처음으로 내 공격이 천세운에게 닿은 것이다.

천세운은 한동안 잘려 나간 앞섶을 내려보더니, 이내 고개를 들었다.

시종일관 여유롭던 그의 표정이 어느새 차갑게 굳어 있었다.

"범이었는가······. 하룻강아지인 줄 알았거늘."

작게 읊조린 천세운이 다시금 달려들었다.

쐐애애애애애애애애액!

챙! 콰지직! 콰직!

여유가 느껴지던 이전과 다르게, 천세운의 공격에는 어떻게든 날 죽이고야 말겠다는 필살必殺의 각오가 깃들어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도 움직일 수가 있구나.'

반대로 나는 조금씩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더 이상 천뢰십보가 가리키는 붉은선과 푸른선이 필요가 없었다.

어떤 방식으로 움직여야 하는지, 확실하게 깨달았으니까.

나는 그의 공격을 막는 데 중점을 두며 최대한 뒤로 빠져나갔다.

서걱!

그리고 닿지 않던 내 창이, 천세운의 옷깃을 조금씩 베어나갔다.

"······!"

그런 내 변화를 느낀 것인지, 놀랍다는 표정을 짓는 천세운.

어느새 그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띠링!

[<벽력 >이 발동됩니다.]

쏴아아아아아아아―

또다시 발동된 벽력.

빛기둥이 뿜어져 나오는 모습을 본 천세운이 뒤로 쭉 빠져나갔다.

이대로라면 이번 벽력도 별다른 의미 없이 소진되겠지만.

'여기선 이렇게 움직여야 했어.'

이전과 달라진 게 있었다.

뒤로 빠지는 그의 모습에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공격 루트가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띠링!

[<섬전 >을 사용합니다.]

꽈과광!

나는 곧장 섬전을 사용해, 뒤로 빠지던 천세운의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는 그의 머리 위로 벽력이 깃든 창을 내리쳤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띠링!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특급창술 >이 플레이어 '렌' 만의 고유 창술 <뇌신창雷神槍 >으로 각성합니다!]

< 131화. 인연(5) > 끝

< 132화. 인연(6) >

'결국 못 죽였군.'

벽력을 정통으로 얻어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천세운은 죽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 그의 몸에 강기가 둘러졌던 탓이었다.

물론 이전까지 옷깃만 스쳤던 것과 다르게 가슴을 크게 베인 데다가, 뇌전의 칼날이 휩쓸었기 때문에 온몸이 피범벅인 상태였지만.

"쿨럭. 호신강기護身罡氣까지 꿰뚫고 들어오다니."

천세운이 피를 토하며 작게 읊조렸다.

'지금 끝내야 돼.'

나는 곧장 천세운에게 달려들었다.

몸 추스를 시간을 줘서는 안 된다.

즉사는 면했지만, 승부의 추가 내 쪽으로 확 기운 상황.

[남은 체력 : 31%]

거기다 체력도 어느새 바닥을 치고 있었고, 피의 강화 특전도 2분밖에 남지 않았다.

이 상태에서 어떻게든 천세운을 몰아붙여서 끝장을 내야 했다.

'이게 특급 이상의 경지.'

하위 리그에서 내 분신과 싸우며 특급 창술을 각성한 지 어느덧 1년 3개월째.

드디어 특급 창술이 한 단계 상승했다.

그리고 그런 내 변화를 천세운은 금세 눈치챘다.

이전까진 창을 쳐내며 내 간격을 마음껏 유린했다면, 지금은 더욱 신중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

처음으로 천세운에게서 긴장이라는 감정이 느껴졌다.

챙! 콰직! 채챙! 콰지직!

'수비가 되니까 전투가 한결 수월하군.'

여전히 천세운의 검술과 그 사이사이 파고드는 주먹이나 발차기는 매서웠지만, 이전처럼 위협적인 장면은 연출되지 않았다.

'어딜!'

거리를 좁혀 들어오려다 내 창에 가로막힌 천세운이 몸을 움찔 떨었다.

띠링!

[<청천벽력 >이 발동됩니다.]

꽈광! 꽝! 꽈과과광!

하늘에서 떨어지는 열두 줄기의 벼락.

"크윽."

그 공격에 천세운의 입에서 처음으로 신음 소리가 튀어나왔다.

순간 고기 타는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한계에 달했군.'

아마 뇌전이 천세운의 내부를 태우면서 나는 냄새일 것이다.

챙! 파밧! 팟!

그때부터 전투의 양상이 바뀌었다.

내가 따라다니며 공격을 퍼붓고, 천세운이 나와의 거리를 벌리기 시작한 것이다.

[무림인 '천세운'의 그림자에 표식이 등록되었습니다.]

마침 그림자 표식 쿨타임까지 돌아온 상황.

'여기서 반드시 죽이고 말겠어.'

나는 더욱더 천세운을 몰아붙였다.

"오오! 고 대협께서 천마를 밀어붙이고 계신다!"

"와아아아아아!"

그 모습에 지금까지 숨죽인 채 나와 천세운의 싸움을 보고 있던 정파인들이 탄성을 터트렸고.

마인들은.

"어서 교주님을 구해라!"

"하, 하지만 지금 끼어들었다간 교주님의 명예가······."

"잔말 말고 어서! 모든 건 내가 책임질 것이다!"

천세운을 구하기 위해 공터 안쪽으로 들어온 수천 명의 마인들이 순식간에 나와 천세운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러자 천세운의 얼굴이 잠깐 찌푸려졌지만, 이내 한숨을 내쉬며 뒤쪽으로 빠져나갔다.

지금 상황에서는 날 쓰러트릴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놓칠 줄 알고.'

나는 망설임 없이 마인들이 세운 방어벽에 뛰어들었다.

"저 비열한 놈들! 모두 갑시다! 고 대협을 도와야 하오!"

"내 오늘 마구니들의 씨를 말리고 말겠다!"

그 광경에 얼마 남지 않은 정파 무림인들도 검을 빼 들고 달려들었다.

그때부터 무림맹에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차라리 잘 됐어.'

나는 몰려드는 마인들에게 창을 휘두르며 천세운을 뒤쫓았다.

마침 체력도 거의 바닥난 데다가, 곧 있으면 피의 강화 특전도 종료된다.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마인들이 끼어들어 준 게 나한테는 더 유리했다.

어차피 마인들의 숫자가 얼마나 됐든, 천세운은 도망가지 못할 테니까.

꽈광! 콰지지지지직!

"끄아아아악!"

창을 휘두를 때마다 뇌전의 폭풍이 사방을 휩쓸었다.

개미 떼처럼 마인들이 날아들어 인간 장벽을 만들었지만, 내 공격을 단 한 번이라도 막아내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피를 흩뿌리며 무의미하게 죽어갈 뿐.

아니, 내 체력의 제물이 될 뿐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마인들을 뚫고 있을 때였다.

"교주님을 뫼시어라, 어서! 우리가 녀석에게 최대한 시간을 끌어보겠다!"

검은색 장포가 펄럭이며 내 앞을 막아서는 두 명의 노인.

'마교의 장로가 아직 남아 있었군.'

한 명은 쌍검을,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양손에 동그랗게 생긴 이상한 무기를 들고 있었다.

저 무기를 1회차 때 상대해 본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건곤권이라고 그랬나?'

뭐, 그다지 중요한 부분은 아니지만.

"사 장로! 정면 대결로는 승산이 없소! 내가 저 창을 최대한 묶어볼 테니, 그 틈에 파고드시오!"

"오랜만에 마음이 맞는군!"

쌍검을 든 장로가 내게 똑바로 달려들고, 건곤권을 쥔 장로가 그림자처럼 바로 뒤에서 따라붙었다.

두 사람의 대화에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개소리하고 있네.'

스텟이 고작 130 정도밖에 안 되는 것들이, 내게 시간을 끌어?

창을 묶어둬?

'어디 한 번 받아보시지.'

나는 쌍검을 든 장로에게 전력으로 창을 내리쳤다.

"······!"

꽈아아아아아아아앙!

때마침 터진 벽력.

무려 근력 스텟 320 포인트에 육박하는 일격에 두 장로의 상반신이 통째로 사라져 있었다.

"이럴 수가······!"

"두 장로님들이 고작 한 번의 공격도 막아내지 못하시다니!"

[<피의 강화>로 상승한 스텟이 30분간 유지됩니다.]

거기다 방금 공격으로 인해 피의 강화 특전까지 다시 켜졌다.

'다시 교주를 사냥해 볼까.'

마인들이 빼곡하게 몰려 있어, 벽력이나 청천벽력의 발동 확률도 올라간 상황.

그때부터 1분에 한 번씩 무림맹에 빛기둥이 솟구치고, 열두 줄기의 벼락이 내리꽂혔다.

└와 미션 난이도 개미쳤는데 결국 이걸 깨네 ㅋㅋㅋㅋㅋㅋ

└뭘 미침ㅋㅋㅋㅋ 이 정도면 딱 상위 넘버링 수준이구만.

└으응.. 딱 상위 넘버링 수준이지.. 한 열 명 참가했을 때 기준으로..

└요인 호위 + 타깃 제거 + 대학살 + 타임어택 ㅋㅋㅋ 미션에 네 가지 키워드나 들어가 있음.. 진짜 극악 난이도임 ㄹㅇ ㅋㅋㅋ

└근데 타깃은 상급 악마 수준에, 학살은 최소 50만 명은 죽여야 되고, 타임어택은 꼴랑 1주일 줌 ㅋㅋ

└근데 렌이 진짜 세긴 하네. 초반에 돌아다니면서 촥촥촥 마인들 정리해놓고, 중간중간 슉슉슉해서 무림맹 호위하고, 거기다 지금은 상급 악마랑 대등하게 싸우고 있자나 ㅋㅋㅋ

└와ㅅㅂ 성계 대항전 너무 기대된다 ㅠㅠ 빨리 오라구우 ㅠㅠㅠ

└아 결국 렌이 스킬북 다 꿀꺽하겠네 ㅡㅡ

└아모른직다. 곧 천마가 상급 악마로 각성해서 렌 다시 뚜까 팸. 이 글은 곧 성지가 될 거임.

└너어어어는 진짴ㅋㅋㅋㅋ 이 새끼 마계에서 보낸 첩자 아니냐? ㅋㅋㅋㅋㅋ

[현재 마교와 정파 무림의 균형은 5:1 입니다.]

'안 도망치네.'

한동안 막아서는 마인들을 죽여대며 길을 뚫고 있을 때였다.

마인들이 세운 인간 장벽을 부수고 나오자, 양손을 뒷짐 진 채 날 기다리고 있는 천세운의 모습이 보였다.

그 광경에 나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교주님! 어서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훗날을 도모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흥! 나 또한 한 명의 무인. 눈앞의 상대를 두고 도망칠 수야 있겠는가."

"하, 하지만······!"

도망칠 것을 권하는 마인들.

그러자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내젓던 천세운이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어디에 웅크려 있든, 놈은 나를 찾아낼 것이다. 그렇지 않느냐."

"······."

천세운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피를 제법 흘리고 있는 데다가, 뇌전 데미지도 많이 쌓여서 이미 체력이 바닥난 상태였다.

거기다 천뢰십보로 인해 민첩 스텟이 30%나 상승해서, 내 민첩이 천세운보다 더 높은 상황.

'도망가 봤자지.'

얼마 못 가 내게 따라잡혔을 것이다.

설혹 나를 따돌린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녀석에겐 그림자 표식이 등록되어 있었으니까.

어디로 숨든 그림자에 표식이 등록되면 위치가 표시된다.

지금 당장은 천세운이 날 따돌린다고 해도, 결국 붙잡힌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후후, 건방진 놈이로고. 본좌를 궁지로 몰아넣고도 아무 감흥 없는 표정이라니. 좋다. 다시 한번 시작해 보자꾸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천세운이 핏빛 강기를 흩날리며 달려들었다.

나도 뇌전을 끌어올리며 미션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챙! 콰과과과광! 콰과광! 콰직!

이전과 같은 위험한 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미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군.'

뱀처럼 꿈틀거리며 날아들던 검도, 총알처럼 쇄도하던 그의 주먹도.

그리고 태산도 부숴버릴 것처럼 뿜어져 나오던 그의 발차기도.

서걱!

이젠 보이지 않았으니까.

'차라리 아까 도망치지 말았어야 했어.'

그랬으면 천세운에게 조금이나마 승산이 있었을 것이다.

"천하를 발아래에 두었다 생각했거늘······."

하지만 지금은 이미 피의 강화 특전도 다시 켜지고, 체력도 전부 다 회복된 상황.

녀석이 날 상대로 살아남을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그러자 씁쓸하다는 듯 읊조리는 천세운.

"나 또한 이무기에 지나지 않았는가."

'잘 가라고.'

서걱!

검을 쥐고 있던 천세운의 오른팔이 허공을 날았다.

그리고 인벤토리에서 꺼낸 봉마의 화살을.

푹!

천세운의 이마에 꽂았다.

띠링!

[무림인 '천세운' 을 처치했습니다.]

[승리 조건1 : 악마화가 완료되기 전에 <화살:봉마의 화살>로 마교 교주를 처치하라]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승리 조건2 : 마교 고수를 대거 처치해 정파 무림과의 균형을 1:1로 만들어라]

[현재 마교와 정파 무림의 균형 : 1:1]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기본급 x 1 의 승리 수당이 지급됩니다.]

그러자 나타나는 경기 종료 콜.

"천마가 죽었다!"

"고건하 대협이 천마를 쓰러트렸다!"

그와 동시에 정파 무림인들이 소리를 질렀다.

'드디어 끝났군.'

나는 천세운의 이마에 꽂힌 화살을 뽑아 들었다.

붉은색으로 이루어져 있던 화살 깃이 어느새 까맣게 변해 있었다.

아마 천세운의 영혼을 흡수한 거겠지.

[마교 교주의 악마화를 저지하는데 성공하셨습니다.]

[보너스로 100,000 P 를 지급합니다.]

[킬 수에 따른 보너스를 책정합니다.]

[킬 수 현황 ― 1위. '렌' 399,862 킬]

[압도적 킬 수를 기록하셨습니다.]

[추가로 x 3 의 보너스를 지급받게 됩니다.]

꽈아아아아아앙! 과과과과과과광!

몰려드는 마인들에게 크게 창을 휘두르자, 벽력과 청천벽력이 동시에 떨어졌다.

순식간에 수십이 넘는 마인들의 몸이 터져나갔다.

"고 문주!"

그리고 내게 다가오는 무림 맹주, 진초풍.

하지만 나는 그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제 헤어지게 될 테니까.

[상위리그-하이블러드나이트126의 6경기를 종료합니다.]

[파이트 머니로 308,000 P 를 지급받았습니다. (팀 '투지' 수수료 132,000 P 차감)]

[기본급 +70,000 P / 승리 수당 +70,000 P / 추가 보너스 +300,000 P / 수수료 -132,000 P]

[다음 경기부터는 기본급을 100,000 P 로 책정합니다.]

[소속된 팀의 팜으로 이동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순간 하얀빛이 내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 빛은 점점 강렬해지더니, 이내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였다.

나는 개운하면서도, 조금은 씁쓸한 마음으로.

그 빛에 몸을 맡겼다.

띠링!

[모든 상태를 100%로 회복합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안우진님!"

"수고 많았다. 이번 경기에서 엄청 많이 성장했더군. 이제는 내가 그대에게 상대조차 되지 않을 것 같더구나."

"안우진님, 안우진님! 대애애애박! 이번에 스킬북 엄청 많이 얻으셨다면서요? 저도 쫌만 구경시켜주시면 안 돼요?"

그러자 날 반겨주는 아세리안, 피넛엘, 그리고 포르도엘.

그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아니, 피식 웃으려고 했다.

웅성웅성―

"······뭡니까?"

아세리안과 천사들 뒤로 엄청난 숫자의 플레이어들이 나와 있었다.

거의 수천 명에 달하는 엄청난 숫자였다.

그 탓에 주창범을 포함한 2기수 사인방과, 3기수들, 그리고 모용악과 고건하, 카이로시아까지 모두 나서서 플레이어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군.'

그렇다는 건.

고개를 돌리자 나와 시선을 피한 채 발끝을 쳐다보고 있는 아세리안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 그녀를 대신해 포르도엘이 말했다.

"아, 이번 경기에서 무림 성계의 네임드들이 많이 죽었잖아요. 마침 7기수 뽑을 차례니까 제가 아세리안님께 랜덤 뽑기를 하자고 했어요!"

"그렇군요."

"아세리안님은 아무 잘못 없어요! 안우진님 돌아오시면 하겠다는 걸, 제가 하자고 조른 거거든요! 헤헷."

해맑게 웃는 포르도엘.

그녀의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잘못한 게 있는 강아지마냥 시선을 피하고 있었던 거군.'

원래는 다음 주 쯤에 랜덤 뽑기를 하자고 아세리안과 얘기가 되어 있었는데, 그걸 지키지 못해서 저러고 있는 것이다.

나는 매뉴얼이 흔들리는 걸 원치 않았으니까.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뭐, 특수한 상황이었으니까요."

내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끄덕이자, 아세리안이 살포시 내 눈치를 살폈다.

"그래서, 네임드들은 좀 뽑혔습니까?"

나는 분위기를 전환시킬 겸 화제를 돌렸다.

어차피 뽑을 신입들이었고, 포르도엘의 말처럼 특수한 상황이었으니까.

굳이 이 문제를 계속 언급해봤자 좋을 게 없었다.

한동안 내 눈치를 살피던 아세리안이 이내 배시시 웃었다.

"아, 네! 정말정말 많이요!"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몇 명이나 나왔죠?"

"이번에는 준네임드 급이 13명이나 나왔어요. 네임드 급도 한 명 있구요!"

'준네임드 급이 열셋?'

그녀의 대답에 나는 깜짝 놀랐다.

무려 4천 명이나 뽑은 거긴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엄청난 숫자.

거기다 네임드 급까지 한 명 나왔다니, 이건 무조건 이득이었다.

'카이로시아 급이 나왔으면 좋겠는데.'

나는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그때였다.

"고건하님?"

'어?'

목소리가 무척 낯이 익었다.

"고건하님!"

아니, 익숙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왜냐하면.

"고건하님 맞죠?"

바로 직전까지 저 목소리의 안내를 받으며 무림을 돌아다녔으니까.

'우리 팀으로······ 들어왔군.'

바로 옆에서 포르도엘이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평소 웃음기가 별로 없는 피넛엘 마저도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세리안은.

"······?"

웃는 것도 아니고, 찡그리는 것도 아닌, 무척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뒤로하고 당소소에게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예?"

엉뚱한 곳에서 나오는 대답.

고개를 돌리니,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고건하가 보였다.

"······?"

그 모습에 나는 관자놀이를 꾸욱 눌렀다.

하.

'오늘 하루는 제법 길겠는데.'

< 132화. 인연(6) > 끝

< 133화. 후폭풍(1) >

"안우진님이시라구요?"

"예.

내 집무실.

당소소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하니 그녀가 죽어서 우리 팀으로 들어왔을 줄이야.

'어이가 없군.'

미션이 끝나면 다시 볼 일 없을 줄 알았는데.

"무림인도 아니시구요?"

"저는 지구 출신입니다. 무림인들 사이에 녹아들라는 조건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같은 팀에 있는 고건하님의 이름을 댄 겁니다. 제 닉네임이 무림에선 낯설 수밖에 없거든요."

내 대답에도 당소소는 무척 혼란스러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럴 수밖에.

'사후 세계라는 게 실존한다는 것만 해도 놀랄 정도니.'

그런데 사실 자신이 알고 있는 세상 말고 열한 개의 성계가 더 있으며, 그들이 콜로세움에 모여 싸운다는 얘기를 한 번에 납득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천마는······ 어떻게 됐나요?"

"죽였습니다. 애초에 미션의 조건이 그거였거든요."

내 말에 당소소의 몸이 잘게 떨렸다.

"아······."

그녀의 얼굴엔 기쁨으로 가득했다.

뭐, 이해는 된다.

굳이 비유하자면 자신의 가족을 잔혹하게 죽인 강도가 길 가다가 차에 치여 죽었다는 소리였으니까.

교주, 천세운은 정말 압도적인 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어느 무엇으로도 심판할 수 없는 절대자.

그렇기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는데, 천세운이 죽었다고 하니 기뻐하는 건 너무나 당연할 것이다.

'아, 그것도 전해줘야겠군.'

생각해 보니 그녀가 기뻐할 만한 소식이 한 가지 더 있었다.

"당세민이라고 아십니까?"

"······저희 당숙의 존함이에요."

"당소천, 당군명, 당군세는요?"

"저희 오라버니들이시구요."

'역시 사천당가 사람들이 맞았군.'

그녀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들은 살아계시더군요."

내 대답에 눈을 동그랗게 뜨는 당소소.

"뭐, 뭐라구요?"

"마교 본거지의 지하 뇌옥에 수만 명의 무림인들이 갇혀 있었습니다. 그중에 그 네 분도 계시더군요. 본거지에 있는 마인들은 모두 쓸어버렸으니, 아마 모두 무사하실 겁니다. 그러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내 말에 당소소가 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녀의 손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정말이죠?"

"예."

"흑흑······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그러더니 이내 감정에 북받쳐,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사천당가의 명맥이 끊기는 줄 알고 걱정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그랬으니까 콜로세움에 들어온 거겠지.

'잠깐만.'

당소소와 긴 시간을 보낸 건 아니지만, 그녀의 소원이 뭔지 짐작은 할 수 있었다.

대충 사천당가를 일으켜 세우게 해달라는 식의 소원을 빌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마교를 모두 쓸어버린 데다가, 당가의 생존자들이 존재하는 상황.

'설마 플레이어 자격을 포기하겠다는 소리를 하진 않겠지?'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당소소]

[성향 : 집념]

[근력 : 49] [민첩 : 61] [체력 : 58]

[정신 : 63] [지력 : 55] [마력 : 50]

[각성 능력 : <독공毒功 > <독종毒種 > <최상급연검술 > <상급검술 > <최상급살기 > <고급암기술 > <고급투척술 > <상급은신술 > <최상급역용술 > <상급박투술 > <상급마나운용 > <고급치료술 >]

당소소는 어린 나이에 무림맹의 부각주가 될 정도로 무척 준수한 능력치를 가지고 있었다.

모용악의 초기 스텟보다도 훨씬 높은 데다가, 가지고 있는 각성 능력도 뛰어나다.

거기다 근접 물리 계열치고 지력도 굉장히 높았는데, 아무래도 독을 다루기 때문인 것 같았다.

'의대생들이 괜히 공부를 미친 듯이 하는 게 아니지.'

약과 독은 동전의 양면 같은 거니까.

독을 잘 다루려면 결국 방대한 양의 의학 지식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잘만 키우면 상위 리그에서도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녀는 준네임드 급과 네임드 급 사이에 걸쳐 있는 소중한 자원.

'한번 잘 구슬려 봐야겠군.'

결국 인간이란 존재는 언제나 무언가 한 가지 이상의 욕망을 품고 살 수밖에 없었다.

당장 첫 번째 소원이 이루어졌으니, 두 번째 소원도 있을 터.

그걸 자극해 그녀가 콜로세움에서 계속 활동하도록 꼬셔봐야 할 것 같았다.

한참 동안 숨죽여 눈물을 흘리던 당소소가 감정을 추스른 건 5분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결국 제 소원을 고건······ 안우진님이 대신 이루어주신 셈이네요. 정말 감사드려요."

당소소가 자리에서 일어나,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확실히 명가의 자손이라서 그런지,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도 숨길 수 없는 기품이 배어 나왔다.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이는 그녀를 만류했다.

"아뇨.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미션을 수행했을 뿐입니다."

마교를 부수고 교주를 죽인 것도.

그리고 지하 뇌옥에 갇힌 무림인들을 구해준 것도.

전부 다 순전히 내 이익을 위한 행동들이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감사받을 일을 한 것도 아니고, 받아서도 안 된다.

하지만 당소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도요. 안우진님이 아니었으면 제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했을 거예요. 은혜는 살에 새기고, 원한은 뼈에 새긴다. 그게 사천당문의 금언金言입니다."

"······."

"소녀는 이미 소원을 이룬 몸. 저는 앞으로 안우진님이 소원 이루는 걸 돕도록 하겠습니다. "

"저를 도와주시겠다고요?"

"네. 뭐든 시키셔도 됩니다. 업무를 보조해 드릴 수도 있고, 하다못해 육체 단련을 하신다면 그것도 곁에서 도와드릴 수 있어요."

그녀의 대답에 한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이거 잘만 하면 서로에게 유익하겠는데.'

물론 그녀에게 은혜를 베풀었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다만, 나는 포인트를 벌어서 좋고, 그녀는 두 번째 소원을 이룰 수 있어서 좋고.

서로 윈-윈을 할 수 있는 방법이랄까.

나는 집무실 문을 가리켰다.

"······?"

"전 업무를 도와줄 비서도 필요 없고, 지금은 기초 스텟 단련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절 도와주고 싶다면 최소한 제가 있는 리그까진 올라오셔야 합니다."

"어······ 상위 리그요?"

"예. 그 정도는 되어야 절 도와주고 싶다고 말할 자격이 생길 것 같습니다. 지금은 너무 약하시거든요."

"······."

내 말에 당소소가 빠르게 눈을 깜빡거렸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당황하는 모습.

물론 나는 곧 있으면 고위 리그로 올라갈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고위 리그까지 따라올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한 번 회귀한 데다가, 온갖 기연들을 다 끌어모은 나조차도 이제야 고위 리그의 문턱을 밟을 예정.

각 성계에서 괴물 소리 듣던 녀석들도 상위 리그에서 픽픽 고꾸라지기 일쑤인데, 준네임드 급에 불과한 그녀가 고위 리그로 올라온다는 건 기적이 일어나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얘기했던 건.

'상위 리그는 충분히 가능성 있어.'

그녀가 보다 더 높은 목표를 가지고 정진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런 내 말에 당소소가 이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반드시 안우진님이 계신 리그까지 올라갈게요."

"아마 쉽지 않을 겁니다. 집무실로 들어오기 전에 공터에서 모용악님을 보셨죠? 그분조차 이제 상위 리그의 문을 두드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저도 아직 고위 리그를 밟아보지 못했으니까요."

"상관없어요. 노력이라면 자신 있으니까요. 그럼 전 나가보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당소소의 눈동자에, 마치 불꽃이 이글거리는 것 같았다.

'성향이 집념이라더니.'

무림맹에 있을 때 나를 따라나서겠다고 한 것도 그렇고, 혼자서 쓰러진 문파를 다시 세우려고 했던 여인이다.

새로운 목표를 심어주었으니 아마 빠르게 성장할 것이다.

'모용악에게 육성을 맡겨야겠군.'

이번에 뽑은 7기수, 5천 명의 플레이어 중 태반이 무림인이었다.

물론 그들 중 대다수가 검 한 번 잡아보지 못한 농민이나 양민이었지만, 준네임드 급과 네임드 급의 숫자도 제법 많았다.

나는 준네임드 급 이상의 플레이어들을 모용악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같은 무림인이니까 팜에 적응하는 방법이라든가, 훈련에 대한 메커니즘을 더 잘 설명해줄 테니까.

게다가 지금까지 모용악을 지켜봐 온 사람으로서, 그는 누군가를 가르치는 데 재능이 있었다.

'그러니까 주창범의 변화를 금방 알아차렸겠지.'

성격도 모난 데가 없었으니, 아마 잘 이끌어줄 것이다.

'후우. 이걸로 당소소 문제는 해결됐군.'

당소소가 나가는 걸 본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인벤토리를 열었다.

그러자 보이는 엄청난 숫자의 스킬북들.

'정말 말도 안 되는 잭팟이 터졌어.'

지금까지 내가 번 골드를 모두 합쳐도 1억 골드가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그 몇 배를 한 번에 얻었다.

뿐만 아니라 천뢰십보라는 플래티넘 등급의 스킬도 하나 건졌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1억 골드 정도는 팀에 투자해야겠군.'

사실 내 입장에선 골드가 아무리 많아봤자 별다른 쓸모가 없었다.

플래티넘 등급의 스킬이나, 준신화 이상의 아이템은 중개 거래소에 풀리질 않으니까.

골드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내게 와닿는 골드의 가치가 낮아질 수밖에.

결국 인벤토리에 계속 썩혀둘 텐데, 그래서야 이 스킬북들을 쓸어온 보람이 없었다.

차라리 이번에 번 골드 중 1억 골드를 팀에 투자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인벤토리에서 하릴없이 잠재우는 것보다, 플레잉 코치로 들어올 포인트를 증가시키는 게 훨씬 이득일 테니까.

'어차피 1억 골드를 투자해도, 남은 골드는 충분해.'

혹시 중개 거래소에 내가 원하는 매물들이 올라오더라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

그렇기에 기회비용 측면에서 그게 훨씬 나을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아세리안을 만나 볼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똑똑―

"안우진님.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집무실 밖에서 들려오는 아세리안의 목소리.

"예. 들어오셔도 됩니다."

순간 불안감이 엄습했다.

'왜 온 거지?'

아세리안은 신입 플레이어들이 대거 들어오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상황.

그런 그녀가 날 찾아왔다는 것은 한 가지 이유밖에 없었다.

'설마 스킬북을 싹 쓸어온 것에 대한 징계인가?'

어쩐지 찜찜하더라니.

한숨을 내쉰 나는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세리안에게 곧장 용건을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하지만 이어지는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아, 마침 혼자 계셨네요. 당소소씨는요?"

당소소?

갑자기 그녀는 왜?

'징계 관련된 얘기를 하려고 하는 게 아닌가?'

만약 징계가 내려왔다면 그것부터 얘기했을 것이다.

워낙 민감한 사항이었으니까.

"방금 막 나갔습니다. 혹시 제게 징계 내려온 게 있습니까?"

그래도 나는 혹시 몰라,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자 활짝 웃는 아세리안.

"징계요? 아! 스킬북 때문에 그러신 거죠? 그거라면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경기 중에 신들이 그걸로 말이 많았거든요. 근데 중간계 관리 위원회에서 적합 판정이라고 한 번에 교통정리를 해줬어요. 한마디로, 정당한 행위였다는 거죠."

그녀의 말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대로라면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경기 내에서 얻은 아이템들은 모두 플레이어가 정당한 방법으로 획득한 것.

만약 스킬북을 얻었다고 징계를 내린다면 해당되지 않을 플레이어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계속 신경이 쓰였던 건 바로 직전에 라파엘한테 어이없는 이유로 징계를 먹었기 때문이었다.

"계속 신경 쓰이셨나 보네요."

"바로 얼마 전에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징계를 먹었으니까요. 그런데 집무실엔 어쩐 일로······?"

징계 때문이 아니라면 도대체 왜 온 거지?

그러자 아세리안이 양손을 척! 하고 책상 위로 올렸다.

"안우진님."

그리고는 눈을 똑바로 뜬 채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결심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예."

"안우진님께 제안을 하나 하기 위해서 왔어요."

"제안이라면?"

'스킬북 때문이군.'

물어보면서도 내심 어떤 부분의 제안인지는 예상할 수 있었다.

내가 마교의 본거지에서 엄청난 숫자의 스킬북을 쓸어 담는 걸 아세리안도 봤을 테니까.

그게 아니라면 그녀가 내게 따로 부탁할 만한 것들이 없었다.

"혹시 스킬북 때문에 오셨습니까?"

"네, 맞아요. 그런데 일방적인 부탁을 드리려고 온 건 아니에요."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흥미로운 미소를 지었다.

애초에 나는 1억 골드를 투자하기로 결정한 상황.

그렇기에 아세리안과 굳이 협상을 할 필요는 없지만.

'최근에 아세리안이 정말 많이 성장했어.'

파이팅만 넘치던 초반의 모습에서, 이제는 완숙한 팀 주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그녀.

여기서 과연 아세리안이 어떤 제안을 할지 기대가 됐달까.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네. 이걸 좀 봐주시겠어요?"

아세리안이 인벤토리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거기엔 온갖 숫자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이게 현재 팀 투지의 수익이에요."

"엄청나군요."

"이건 팀 투지의 성장률이구요."

"대단하네요."

나는 그녀가 말할 때마다 추임새를 넣었다.

전부 다 알고 있는 내용들이긴 하지만, 일단은 열정적으로 설명하는 그녀에게 맞춰줄 생각이었다.

"팀원들의 성장세는 뚜렷해요. 완곡한 상승 곡선을 띠고 있죠. 거기다 생존율도 높아서 리스크도 많이 줄어든 상태구요. 그래서 저는 안우진님께 1억 골드를 투자받고 싶어요."

"1억 골드라······."

"여기, 이게 1억 골드를 투자한다고 가정했을 때, 팀원들이 얼마나 성장할 것이고, 그로 인해 얼마의 포인트가 들어올지 예측한 표에요. 보시면 당장 1년 안에 300프로가 넘는 성장률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어요."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검지로 테이블을 톡, 톡 두드렸다.

'대단한데?'

솔직히 깜짝 놀랐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세세하게 분석해놨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뭔가 아쉬웠다.

"말씀하신 대로라면 투자할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습니다. 근데 문제가 있죠."

"투자 대비 수익이 너무 낮다는 거죠?"

"맞습니다."

내 말에 아세리안이 배시시 웃었다.

뭔가 개구쟁이 같은 미소였다.

"저는 앞으로 2주일 후면 상급 신으로 승격하게 될 거예요."

"······아, 축하드립니다."

갑작스러운 화제전환.

너무나 생뚱맞은 소리에 나도 모르게 말문이 막혔다.

여기서 갑자기 승격 얘기는 왜 꺼낸 거지?

물론 축하받을 일이긴 하다만, 앞뒤 맥락에 전혀 맞지 않는 주제였다.

"헤헤, 축하해주셔서 감사해요. 아무튼, 상급신으로 승격이 되면 이전에는 할 수 없었던 여러 가지를 할 수 있어요."

"여러 가지라면?"

"뭐, 예를 들면 팜의 크기가 커진다든가, 지금까진 짓지 못했던 다양한 효과의 건물들을 지을 수 있다든가······."

"······."

"그리고 플레이어들에게 받는 수수료율을 올리거나 낮출 수 있다든가."

"······!"

아무 생각 없이 아세리안의 말을 듣던 나는 순간 눈을 번쩍 떴다.

'수수료율을······ 올리거나 낮출 수 있다고?'

"현재 안우진님이 팀 투지에 벌어다 주시는 비율이 32프로 정도예요. 원래는 50프로가 넘었는데, 팀에 소속된 플레이어들의 숫자가 많아지다 보니, 최근에 많이 내려갔어요."

"예. 6기수에서 천 명이나 들어왔고, 7기수에서 4천 명이 넘게 들어왔으니까요."

"만약 1억 골드를 투자해주신다면, 안우진님이 팀 투지에 내던 수수료 30프로를 20프로까지 낮춰드릴 생각이에요."

수수료를 20%까지 낮춘다면 앞으로 내가 얻는 포인트의 양이 16%나 올라간다.

대신 팀 투지에서 벌어들이는 포인트가 낮아지겠지만, 아세리안은 내게 투자받을 1억 골드로 플레이어들을 육성시켜, 줄어든 포인트를 채워 넣겠다는 뜻이었다.

그녀와 나, 둘 다에게 윈-윈 이랄까.

하지만 그녀의 말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상급신이 되면 플레잉 코치 정산율도 올릴 수 있어요. 5프로까지."

"······!"

순간, 나는 처음으로 지력 스텟이 많이 상승한 것에 감사했다.

굳이 종이에 쓸 필요 없이 내가 얻게 될 추가 수익률을 속으로 계산할 수 있었으니까.

플레잉 코치의 정산율까지 5%로 올려주면 기존에 들어오던 포인트보다 66%나 상승하게 된다.

게다가, 내가 투자한 골드로 인한 분수효과까지 생각하면······.

계산을 끝마친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대박인데?'

< 133화. 후폭풍(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