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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녹색 눈이 노인의 깊고 검은 눈을 노려본 것도 잠시, 결국 크루엘은 검에서 손을 떼고 돌아섰다.

아직 그는 노망난 노인을 향해 검을 휘두를 정도로 망가지지 않았다.

***

"할머니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고 했었죠?"

산을 내려가는 내내 말이 없던 란을 슬쩍 살핀 내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이 침묵을 유지한 채 내려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걸리는 것이 있어 어쩔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나보고 '재앙'이라고 하지 않았나. 죽여야 한다는 말까지 나온 이상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난 아직 살고 싶거든. 영문도 모른 채 죽는 것은 사양이다.

게다가 하필이면 그런 말을 한 사람이 전직 주술사라 찝찝하기도 하고....

"재능은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니 알 수 없지요."

"...그럼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당신의 할머니가 당신에게 한 말이 있었죠. '너도 보았잖니'라고."

"귀인의 운명과 미래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네 그렇습니다."

그리 말하며 란은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지금도 보이고 있습니다."

"...."

나는 천천히 란의 얼굴을 훑었다. 웃음기라고는 일절 보이지 않는 표정과 맑고 또렷한 눈동자.

전혀 미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헛소리가 아니었단 말인가.

"아마 귀인께서는 조금 전 그 말을 단순히 노망난 노인의 헛소리로 치부하고 싶으실지 모르겠지만, 안타깝게도 저희 할머니께서 노망이 나신 것은 그 미래를 본 이후의 일입니다."

"...설마, 노망이 난 이유가...."

란은 씁쓸하게 웃었다.

"너무 많은 것을 안다는 것도 마냥 좋은 것은 아니더군요."

"...그 할머니가 날 알고 있었습니까? 어떻게 만나본 적도 없는 내 미래를 점칠 수 있었던 거죠?"

"사실 할머니께서 점친 것은 귀인이 아닌 한 마을 아이의 미래였습니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쳐다본다.

"귀인께서 그 아이의 운명에 깊게 얽혀있던 탓에 볼 수밖에 없었지요."

덩달아 그 시선의 끝을 좇자 한 남자가 나무 뒤에서 이쪽을 보고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깜짝이야! 저거 뭐야!'

보아하니 19살? 20살? 아무튼 옆의 란이란 여자와 나이가 엇비슷한 것 같은데, 애도 아니고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무섭잖아.

심지어 눈이 마주쳤는데도 숨지 않는다.

어두운 색의 머리와 눈이 특징인 남부인답게 어두운 눈동자가 이쪽을 똑바로 향한다.

마치 탐색하듯 이쪽을 훑어내리는 그의 시선에 잠시 얼어붙어 있던 나는 뒤늦게 더듬더듬 리엔을 불렀다.

"...리엔 경...."

"예, 주군."

"알고 있었습니까?"

"예."

그런데 왜 말을 안 한 건데 이 사람아.

"주군께서 별말씀이 없어 그냥 두고 봤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아니, 아닙니다."

맞다, 얘도 날 무지막지하게 강한 놈으로 착각하고 있었지.

차마 뭐라 말도 못 하고 한숨만 내뱉었다.

아무튼, 그러니까 저 남자의 미래에 내가 있었단 말이지? 내 미래를 점친 것도 아니고, 고작 남의 미래 속에 있는 나를 본 것뿐인데 그런 반응이었다니....

"...도대체 무엇을 보았던 건지."

"운명과 미래는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자칫 입 밖에 내었다간 오히려 그로 인해 최악의 결과가 도래할 수도 있으니까요."

"...."

"하지만 이 정도는 말할 수 있겠군요. 귀인에게 증오는 산불과도 같습니다. 처음엔 별 것 아닐지 몰라도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급격히 덩치를 키워 종국엔 모든 것을 집어삼키겠지요. 그러니 저희 할머니께서 아무것도 증오하지 말라 하셨을 겁니다."

머릿속이 더 복잡해진 기분이지만 하나는 확실히 이해가 된다.

시발 그러니까 뭔진 몰라도 내가 미래에 큰일을 치른다는 거 아니야.

되도록 평온한 삶을 지향하는 내가 어째서 큰일을 치르게 되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원흉이 '증오'라는 거고.

현재 내가 증오하고 있는 사람은 크루엘 밖에 없으니 아마 그가 도화선이 되지 않을까.

'역시 크루엘부터 처리해야겠어.'

그렇지 않아도 눈에 거슬리던 참이다.

영웅이 된 탓에 황제가 누구의 편을 들지 장담할 수도 없고, 뒤에는 공작까지 업은 데다 사교계의 주목 때문에 지금까지 차마 건들지 못했다만, 빨리 방법을 찾든가 해야지.

'암살은 시끄러워질 가능성이 크고, 저주라도 걸어야 하나....'

음? 나쁘지 않은데? 마침 옆에 주술사도 있고.

저주에 대해 슬쩍 물어볼까 생각하는데, 끝난 줄 알았던 란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저 아이는 언젠간 터질 폭발물에 가깝지요."

"아."

쟤 아직도 저러고 있었냐?

나는 떨떠름한 눈으로 아직도 이쪽을 보고 있는 남자를 쳐다봤다.

그런 내 시선을 '남자를 향한 흥미' 혹은 그 비슷한 감정으로 해석한 듯 란이 희미한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폭발물이 터지면 불이 나고, 반대로 불이 나면 폭발물이 터집니다. 그 탓에 되도록이면 저 아이와 마주치지 않길 바랐지만... 운명이라는 게 그리 쉽게 바뀌는 것은 아니겠지요."

...뭐라는 거야?

그것보단 아까부터 자꾸 운명 타령을 하는데, 어감이 좀 그렇다.

그냥 '미래에 어쩌다 제대로 얽히게 되는 사이' 정도로 명명해주면 안 되나?

그 와중에 확인할 건 다 확인했는지 남자가 뭔가 결심한 듯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온다. 덩달아 리엔이 검집에 손을 올리며 경계한다.

그녀가 검을 빼 들기 전에 걸음을 멈춘 남자가 나를 똑바로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심 긴장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황당한 말이 튀어나왔다.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61. Fate or Destiny(3)

"흐아아악!!"

"할머니?!"

"할머니! 정신 차리세요!!"

그게 이 빌어먹을 삶의 시작이었다.

그저 어쩌다 우연히 주술사 할머니께 점을 본 것이 전부였다.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할머니가 비명을 지르며 내게서 한껏 떨어졌을 때는 어찌나 놀랐던지.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날 이후 할머니는 노망이 났다. 그것은 불행의 시작이기도 했다.

단은 아직도 그녀가 한 말을 기억한다.

'재앙의 강력한 지지자, 혹은 앞잡이가 될 거라 했던가.'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 뒤로 마을 사람들이 그 말만 수군거리며 날 피하는데.

이 작은 마을에서 소문이 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단을 꺼렸고, 그것은 할머니의 손녀인 란이 말리려 들었음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부정적인 감정만 덩치를 키워 '꺼림'이 '배척'으로 변했다.

어안이 벙벙했다. 도통 적응할 수 없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웃으며 대화를 주고받던 이들이 자신을 배척한다는 사실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온종일 그 누구도 자신에게 말을 붙이지 않던 순간.

마을 축제 때 홀로 밤을 새워야 했던 순간.

언제부턴가 집 앞에 각종 오물이 놓이기 시작한 순간.

단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고작 예언 하나 때문에.'

이 얼마나 미개하단 말인가.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웃음과 달리 그의 두 눈은 금방이라도 실핏줄이 터질 듯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지금 내가 억누르고 있는 것은 눈물일까, 분노일까.

난 지금까지 이들과 무엇을 했던 거지?

작디 작은 마을에서 배척당한 사람의 삶이 각박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겠다, 그대로 이 도태된 마을을 떠나 도시로 향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단은 버텼다.

'내게서 재앙을 봤댔지.'

미래에 나와 엮인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내가 이곳에만 머물고 있으면 그 '재앙'이 이쪽으로 오지 않을까.

물론 운명이 엮여있는 이상 도시에 가서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내가 '재앙'을 알아차리지 못할 가능성이 크지 않나.

이곳에서 기다리자.

노망이 났다 해도 실력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닐 테니 할머니는 '재앙'을 단숨에 알아볼 것이다. 지금의 성격을 봐서는 그대로 배척하려 들 테고.

그때 재앙의 편에 서면 쉽게 호의와 신뢰를 얻을 수 있으리라.

재앙과 엮이지 않으려 해도 모자랄 판에 단이 굳이 재앙의 편에 서려는 이유는 단순했다.

'이렇게까지 내가 재앙의 편에 설 거라 확신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 기대를 충족시켜줘야지.'

단은 당하고 가만히 있는 호구가 아니다. 특히나 그것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면 더더욱.

아직 무언가를 행하지도 않았는데 배척당하고 있으니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그리하여 버티고 버텨 끝내 '재앙'의 얼굴을 본 순간, 그는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당신이었어?'

운명이라는 것이 뭐길래.

흰 머리와 붉은 눈. 아무리 시간이 지났다 한들 그 인상적인 외모를 쉬이 잊을 리가 없었다.

"갑자기 데려가 달라니 어이가 없군. 누가 너처럼 수상한...."

"그만."

경계심 가득한 호위의 말을 끊은 남자가 천천히 다가온다. 새빨간 눈동자가 기묘한 흥미를 담고 이쪽을 위아래로 훑었다.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분위기에 단은 마른침을 삼키며 자세를 고쳤다. 바짝 긴장한 와중에도 저를 뜯어보는 듯한 눈은 절대 피하지 않았다.

제아무리 산골 마을에서만 살아온 단이라지만 눈앞에 사내의 정체만큼은 안다. 모를 수가 없었다.

10년 전, 8년 전쟁이 터졌을 때 어느 순간부터 급격히 유명해진 이름, 데온 하르트.

'전쟁 당시에는 '피에 미친 선봉장'과 '살인귀 부대의 주인'으로 유명했고.'

전쟁이 끝난 뒤로는 마지막 용사의 마지막 동료이자 제국의 영웅으로 유명했다.

수많은 그의 칭호를 떠올린 단이 그중 가장 인상 깊은 칭호를 떠올렸다.

'뱀파이어 백작.'

그래, 뱀파이어 백작.

재앙이 되기에 손색이 없는 칭호다.

거기까지 생각한 단이 씩 웃었다.

그를 본 데온의 두 눈에 이채가 깃든다.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

정신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저택에 도착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노을이 지고 있는 하늘을 확인했다.

대충 오후 5시쯤 되었으려나. 시간을 질질 끌어서 좋을 것은 없을 테니 오늘 바로 일을 끝내는 것이 좋겠다.

...그런데.

'넌 왜 따라온 건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찍이서 나를 훔쳐보던 남자가 일행에 자연스럽게 합류되어 있는 건 뭘까.

"리엔 경. 저 남자는...."

"아, 단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여전히 저는 녀석이 못 미덥지만… 주군께서 친히 데려가겠다 하셨으니 계속 반대하는 것 역시 불충이겠지요. 시정하겠습니다."

그새 통성명까지 했어?! 아니, 도대체 언제?

리엔의 말을 들어보니 내가 데려오기로 한 것 같긴 한데…. 기억이 전혀 나질 않는다.

나는 이에 대해 깊게 고민하며 끙끙 앓기보다는 낙관적으로 생각하기로 판단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많아서 스트레스받고 있거든. 여기서 뭔가 더 얹어졌다간 골치 아프다.

'뭔가 이유가 있었겠지!'

적어도 어딘가에 쓸모가 있어서 데려왔으리라.

이를테면 싸움을 잘한다던가, 아는 것이 많다던가....

"배움이 모자라 아는 것이 적고, 전투도 영웅이신 마스터께서 만족하실 수준은 아닙니다."

"...."

도대체 얘를 왜 데려왔을까. 얜 또 왜 덥석 따라온 거고? 그리고 그 '마스터'란 호칭은 또 뭐야?

할 말은 많지만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것이 없다. 나는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단을 보다가 이내 주술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절대 현실외면이 아니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서 미뤄두는 것뿐이지.

"간단한 준비만 끝내고 바로 출발할 생각인데 괜찮겠습니까?"

"문제는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도 되겠습니까?"

"일단 말해보세요."

"귀인께서는 주도자들뿐만 아니라 무고한 이들의 목숨도 앗아갈 생각이신지요."

"무고한 이들이라 하면?"

"단순히 주도자들에 의해 홀린 이들도 포함한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하려던 나는 무언가 위화감을 느끼고 잠시 멈칫했다.

'내가 구원교에 간다고 말을 했었나…?'

따로 증명 같은 건 안 해도 되겠다. 이 사람은 주술사가 확실해. 아닐 수가 없다. 어우씨, 온몸에 다 소름이 돋았네.

오돌토돌해진 팔을 쓱쓱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사람에게 거짓말은 하고 싶지도 않고, 해봤자 금세 들통날 테니까.

나는 구원교의 일반 신도들도 모조리 죽일 생각이다.

'잘못된 종교에 홀린 이들을 과연 무고한 이들이라 할 수 있을까.'

주술사는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다.

종교에 미친 이들은 그야말로 앞뒤를 가리지 않는다. 괜히 광신도라는 말이 있겠는가.

자신들이 믿는 종교가 무너진다면 아마 그들은 여러 방면으로 미쳐 날뛸 것이다.

종교를 무너뜨린 이를 죽이려 할 수도 있고, 제2의 구원교를 만들 수도 있다.

좌절하여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것은 얌전하다고 볼 수 있을 정도의 반응들이 튀어나오리라.

그러니 괜히 찝찝하게 뒤끝을 남길 것 없이 전부 죽여버리는 쪽이 낫지.

주술사 란의 표정이 굳었다.

"벌써부터 많은 피를 흘릴 필요는 없습니다."

어감이 미묘하다.

죄 없는 제국민들을 해쳐서는 안 된다거나, 목숨은 소중하다던가, 혹은 주술사들이 흔히들 언급한다는 업보 타령을 하며 말릴 줄 알았더니만, '벌써부터' 많은 피를 흘릴 필요는 없다니.

이건 마치 앞으로 더 많은 피를 흘리게 된다는 의미 같지 않나.

"...뭔가 알고 있습니까?"

"대답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는 귀인을 위한 말이기도 합니다. 단순히 홀렸을 뿐인 이들은 제하여 주십시오. 거절하신다면 전 귀인께 도움을 주지 않겠습니다."

표정을 보아하니 목에 칼이 들어온다 해도 안 할 꼴이다.

이래서야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

결국 나는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데려갈 인원수를 늘려야겠군요."

다 죽인다면 모를까, 사람을 골라서 죽이려면 좀 더 많은 인원을 데려가는 것이 편하겠지.

"무리한 청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뇨, 뭐… 그나저나 그쪽은...."

내 시선이 닿기가 무섭게 한 남자가 지극히 공손한 어조로 답했다.

"편하게 단이라 불러주십시오."

"그래, 단은...."

"저도 따라가면 안 되겠습니까?"

"안 돼."

놈의 얼굴이 우울하게 내려앉는다. 나는 되레 어이가 없어졌다.

따라가긴 어딜 따라가. 너 싸움 못 한다며. 죽인다는 말 못 들었어?

"넌 일단… 저택에서 기다리도록 해. 레멤베르에게 말해놓을 테니 문제는 없을 거야."

싸움도 못 하는 녀석이 따라와봤자 짐만 된다.

물론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신분이 다르잖아? 나는 호위가 있지만 얜 없고. 내가 이놈을 지키라고 명령을 내린다 해도 한계가 있을 건 당연하다.

이를테면 나와 이 녀석이 동시에 위험에 빠졌을 때라던가.

내가 어떤 이유로 이 녀석을 데려왔건, 그런 식으로 허무하게 보낼 생각은 없다.

그러니까 안 돼.

"제가 짐이 되기 때문이군요."

"...."

잘 아네.

나는 입을 다물었다. 거기에서 긍정을 읽은 녀석이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한다.

그러더니 뭔가 결심한 듯 고개를 들고 나를 똑바로 마주했다.

"제게 검을 가르쳐주실 수 있겠습니까?"

"...내가?"

"제가 감히 마스터를 귀찮게 할 수는 없지요. 그저 기본적인 검술이라도 가르쳐 줄 사람을 붙여주시면 절대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무슨 가문의 검술을 알려달라는 것도 아니고 - 애초에 가문의 검술 따위 내겐 없기도 하지만 - 무리한 부탁은 아니다.

그렇게까지 날 따라오고 싶을까.

이번은 보내주겠지만 다음번엔 반드시 따라붙겠다는 의지가 여기까지 느껴져 나는 슬쩍 시선을 피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불타오르는 듯한 환영까지 보일 정도라 차마 거절할 수가 없다.

뭔가 굉장한 스토커가 생긴 것 같지만, 기분 탓일 거야.

'...그런데.'

문득 치솟는 의문에 도르륵 눈을 굴려 다시 그를 쳐다봤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의문 하나.

왜 난 이 녀석을 순순히 믿고 있는 거지?

어딜 봐도 수상하기 짝이 없는 이 녀석을, 왜?

'조만간 일대일 상담이라도 하든가 해야지.'

녀석의 목적을 확실히 알아봐야겠다.

지금은 바쁘니 일이 끝나고 돌아오자마자 대화를 나누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난 어느새 마중 나와 있는 레멤베르에게 간단하게 단을 소개하고는 말했다.

"앞으로 함께 지내게 될 테니 적당한 방을 하나 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택에서 놀고 있는 기사들이 아주 많지 않습니까?"

"아주 많습니다."

"잘 됐군요. 그 중 적당한 이에게 단에게 검술을 가르쳐주라고 전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이 정도면 대충 됐고.

"그리고 리엔 경."

"예, 주군."

"놀고 있는 기사들 중에서 그나마 정상적인 놈들로 10명 정도 차출하려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차 한 잔 정도 즐기며 기다려주시면 그 안에 끝내겠습니다."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

달그락.

나는 내 앞에 놓인 찻잔을 떨떠름한 눈으로 내려다 봤다.

또 그 차다. 마실 때마다 화장실로 날 고생시켰던 그 빌어먹을 차. 아직도 남아 있었나.

황태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이 보낸 거야? 마음 같아선 싹 다 불태워버리고 싶지만 황태자가 준 것을 함부로 대할 수도 없고.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은 단이다.

대충 적당한 기사를 붙여두라 했다만, 사실 이 저택에서 놀고 있는 기사는 미친개들밖에 없으니.

'약이라도 권하지 않으면 다행인데....'

...아니 잠깐만. 진짜 권할 것 같은데?

그놈들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나는 사색이 된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

"배, 백작님?"

"...지금 당장 가서 레멤베르에게 전해. 기사들이 단을 가르칠 때 딱 검술만 가르치게 하라고."

쓸데없는 걸 가르치지 못하게 하라고.

이를테면 약이라든가, 약이라든가, 약이라든가.

내 주변에 미친 놈이 더 늘어나는 건 사양이다.

'미친놈은 지금도 충분해.'

62. 소탕(1)

"백작님께서 그리 말씀하셨다고?"

"네."

"그래, 수고했네. 이만 나가봐도 좋아."

레멤베르는 빠르게 돌아가는 머릿속을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감추며 자리에 앉았다.

곧바로 기사단이나 리엔 경에게 전해도 될 것을 굳이 자신을 통해 전하려 한다.

레멤베르는 유능한 집사고 그의 주인은 제국의 영웅이다. 그는 곧바로 하르트 명예 백작이 무엇을 지시하는지 알아챌 수 있었다.

전쟁까지 겪은 이가 아무 이유 없이 이리도 비효율적인 방법을 통해 말을 전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니까 존경하는 그의 주인은, 단이란 사내를 감시하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대뜸 외부인을 머물게 할 리가 없으니.'

아마 적으로 의심되는 상대를 가까이에 두고 지켜보기 위함이리라.

근거는 충분하다. '딱 검술만 가르치도록 하라'는 말은 얼핏 들으면 살인귀 기사단원들이 단이라는 사내에게 약을 먹이려 들까 걱정한 말이지만, 파고 들어보면 검술 이상의 것을 가르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적일 수도 있으니 적당히 경계하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영웅의 집사 된 자로서 이런 곳에 주인이 신경을 낭비하지 않도록 해야겠지.'

그것이 집사의 도리이니.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노집사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러니까…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단기간에 강해지고 싶다는 거지? 검술을 배우고 싶은 것이 아니라."

"예."

"그럼 우리가 딱이긴 하지. 운이 좋네. 다른 기사단이었다면 어림도 없었을 텐데."

일반적인 기사단은 체계적인 훈련과 교육하에 '검술'을 배운다. 그렇기에 늦게 검을 잡은 이들은 목표로 한 바까지 강해지지 못하는 것이고.

연무장 한구석 나무 그루터기에 앉은 클레터가 제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단이 순순히 다가오는 것을 보며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우리 기사단에 대해 알아?"

"살인귀 기사단이라고… 아주 강한 기사단으로...."

"자식, 아부 떨 줄 아네. 뭐, 우리가 유명하긴 하지. 어느 정도 강한 것도 맞고. 그럼, 우리 중 거의 대부분이 강제 징집된 일반인, 그것도 빈민 출신이라는 것은?"

"그건... 몰랐습니다."

"그래? 이것도 꽤 유명한 이야기인데. 뭐, 모를 수도 있지.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야. 우리도 처음엔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이었어. 그것도 검을 배우기엔 너무 늦은 성인."

"맞아! 특히 저기 저 아저씨, 보여? 저 사람 올해로 마흔여섯이야. 징집되었을 땐 서른여섯이었지!"

"...밀란...."

클레터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어쩐지 이 새끼가 조용하다 했더니, 길게는 못 가는 모양이다.

잠시 쫓아낼까 생각했으나 그러면 더 시끄럽고 진득하게 달라붙을 것이 뻔해 포기하고 다시 단을 돌아봤다. 밀란의 말이 인상적이었는지 그는 '마흔여섯…' 하고 작게 읊조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떻게."

"응?"

"어떻게 그렇게 강해질 수 있었던 겁니까?"

"뭐… 사실 이유는 별거 없어."

몸을 뒤로 젖히고 앉아 과거를 회상하듯 허공을 바라보며, 클레터가 천천히 말을 뱉었다. 아니, 뱉으려 했다.

먼저 끼어든 밀란만 아니었다면.

"일단, 약한 놈들은 전부 전쟁 중에 뒈졌거든."

"밀란!"

"왜? 맞잖아."

처음 자신들은 고기방패로서 선봉에 섰다. 당시 대장이었던 데온 하르트의 말과 지휘가 있었다지만 제 인간성을 버리지 못해 결국 그의 지휘를 따르지 못한 자들은 모조리 죽어버렸다.

물론 클레터도 이를 말하지 않으려던 건 아니었다. 단지 조금 순화시켜 말하려 했는데, 이 새끼가 선수를 칠 줄이야.

한숨을 푹 내쉰 그가 전부 포기한 표정으로 나머지 이유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들이 빠져나갔기 때문이지. 한때 '부대'였던 기사단 치고는 그 수가 적다고 생각하지 않아? 지금 여기 남은 이들은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들 뿐이야."

돌아가야 할 곳이 있고 지킬 것이 있는 사람은 몸을 사리게 된다. 전쟁터에서야 방법이 하나밖에 없어 어쩔 수 없이 죽음이 두렵지 않은 척 굴어야 했다지만, 모든 것이 끝난 지금까지 그래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기에 삶에 미련이 있는 자들은 자연히 기사단을 떠나 일상으로 돌아갔다.

물론 전쟁 후유증을 이기지 못해 돌아오는 자들도 여럿 있었지만, 돌아오는 이들 중 다수를 차지하는 이유는 그저 8년이라는 긴 시간 사이 돌아갈 곳이나 지킬 것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생각하고 보니 우습긴 하다.

전쟁 중에는 죽는 것이 두려워 그 지랄을 떨었는데, 이제는 죽고 싶어서 이 지랄을 떠는 셈이니.

'뭐, 사실 죽어도 전쟁 중에는 절대 죽지 않겠다는 오기 때문이었으니 다르다고 칠까.'

그렇게 생각하며 피식 웃던 클레터의 얼굴이 한순간 굳어졌다.

처음부터 불안불안하다 했더니만, 밀란 이 빌어먹을 새끼가─

"그리고 마지막 이유로는 우리가 약쟁이이기 때문이야."

"...약쟁이, 요?"

"그래, 말은 거창하게 하긴 했지만 결국 우린 약 없으면 사람 하나 제대로 못 죽이는 반푼이거든. 그런 의미에서...."

"...?"

"하나 먹어볼래?"

"밀란!!"

굳이 소리쳐 부를 필요가 없었다.

클레터가 언성을 높임과 거의 동시에 퍼억!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밀란이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본래 그가 서 있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단장 리엔 라이너.

그녀는 무언가 말을 하는 대신 터벅터벅 밀란에게 다가가더니 그의 가슴팍을 꾸욱 밟으며 싸늘한 눈초리로 그를 내려다 봤다.

이윽고, 열린 입술 사이로 차디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설마 했더니 정말 약을 권할 줄이야. 네놈, 미쳤나?"

"아야야야.... 단장, 아픕니다. 나 죽어요…! 크학!"

"단장이 아니라 단장님이다."

"다, 단장님! 단장님!"

"그래."

"저 죽습니다!"

쯧, 낮게 혀를 찬 리엔이 천천히 발을 물렸다. 그에 기다렸다는 듯 기침을 터트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던 밀란이 너무하다는 듯 그녀를 쳐다본다.

그 와중에도 누워있던 몸은 행여나 또 밟힐까 착실히 일으키고 있었다.

그 귀엽고도 괘씸한 행태에 리엔은 한 번 코웃음을 치고는 시선을 돌렸다. 조금 더 저 불손한 녀석을 교육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지금 그녀는 이곳에 온 목적이 명백히 있었다.

그리고 지금 굳이 뭐라 하지 않아도....

"클레터."

"예, 단장님."

"준비하도록."

"아…! 옙!"

"자, 자, 잠깐! 단장! 아니 단장님! 지금 임무 갈 사람 뽑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왜 쟤만…?! 나도 심심한데!"

역시나 물을 줄 알았다. 예상했던 질문에 리엔이 피식 웃었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약간의 유쾌함과 통쾌함을 담아 얄미운 얼굴로 친절하게 답했다.

"주군께서 '그나마 정상적인' 놈들로 10명을 뽑으라 하셨으니까."

"아… 망할!"

반박은 또 안 한다.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헛웃음을 흘린 리엔이 이내 표정을 달리하고 근처 나무를 쳐다봤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부터 긴가민가했지만, 이젠 확실히 알겠다.

"나오십시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여전히 그녀는 확신했다. 고저 없이 사무적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언제까지 지켜보고만 있을 생각이셨습니까. 주군께서 친히 데려온 사람이 약을 먹을 뻔했는데도 가만히 계시다니요."

"...늙은이가 무슨 힘이 있어 장정들을 말리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말리기도 전에 리엔 경께서 먼저 막으셨지 않습니까."

헉, 클레터가 작게 숨을 들이켰다. 밀란도 놀란 듯 '어? 어?'하고 얼빠진 소리를 냈다.

그래도 8년간 전쟁터에서 고생했던 터라 기척 파악엔 도가 텄는데, 그런 자신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평소에도 평범한 집사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휘하 단원들의 반응은 싸그리 무시한 리엔이 레멤베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곳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백작님의 전언을 전하러 왔지요. 하나...."

레멤베르의 시선을 눈치챈 그녀가 단원들을 향해 말했다.

"단을 데리고 잠시 자리를 피해 있도록."

***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래 봤자 몇 분 안 늦었는데, 뭐.

리엔은 내가 딱 차 한잔을 다 마시고 얼마 안 있어 찾아왔다.

애초에 명확한 시간을 제시한 것도 아니고 내가 차를 빨리 마시기도 했으니 딱히 늦었다고 볼 수 없다만, 리엔 입장에서는 그게 아닌 모양이다.

"정말 죄송합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정말 괜찮습니다. 뭔가 이유가 있었겠죠. 이를테면 검을 가르치랬더니 약부터 권하는 기사가 있어 조금 교육을 했다던가...."

"어, 어떻게 그걸…!"

뭐야, 진짜였냐? 찍었는데?!

그나저나 그런 이유로 늦은 거라면 더욱 사과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칭찬을 받아야지.

"잘했습니다."

"예?"

"단이 약을 먹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럼 아주 잘했습니다."

리엔이 세상에 미친놈이 하나 더 등장하는 걸 막았다!

대륙 평화에 기여했는데 늦은 게 대수랴. 나는 진심을 담아 재차 강조했다. 잘했습니다.

"그럼 이제 가죠."

시선을 돌려 앞에 서 있는 이들의 면면을 훑었다. 미친개들과 리엔, 그리고 주술사 란.

음, 빠진 사람은 없는 것 같군. 그런데 수가 좀 많은 것 같다.

빈민가는 새로운 사람의 유입이 적다고 한다. 그만큼 서로가 서로의 얼굴에 익숙해져 있어 새로운 사람이 유입되면 곧장 알아차리겠지.

한두 명이면 모를까, 그런 곳에 갑자기 처음 보는 얼굴들이 우르르 몰려간다면 당연히 소식이 금방 그쪽으로 전해지지 않을까.

"...아무래도 나뉘어서 가야 할 것 같은데...."

"들키지 않으려면 번거롭지만 둘에서 셋으로 묶는 것이 안전할 것 같습니다."

동감한다. 셋도 좀 위험하지. 둘이 그나마 안전하지 않을까.

다만 문제는....

"이곳의 지리를 모르는 사람?"

"...."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뭐지? 내 말을 못 들었을 리는 없을 테고. 정말 모르는 사람이 없는 건가?

에이 설마, 말도 안....

"없습니다."

"...음?"

"저희 모두 이 근처 출신이라...."

"상황의 여건을 고려하여 이 지역 빈민 출신만 차출했습니다."

담담하게 사실을 늘어놓는 목소리 위로 뿌듯한 목소리가 겹쳤다.

역시 리엔. 유능하구만. 내가 인재복이 좀 많긴 하지.

'그 인재복, 마계에서만큼은 좀 없었으면 좋겠지만....'

서글픈 생각은 재빨리 넘겨버리고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기사들은 둘씩 짝을 지어 각기 다른 경로로 이동한다. 집결지는 구원교 근처. 위치 모르면 리엔 경에게 물어보고, 대충 눈치껏 걸리지 않을만한 곳에 모이도록."

"예!"

"리엔 경과 주술사는 저와 함께 이동합니다."

"알겠습니다."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는 놈들을 지켜보다 이내 서둘러 걸음을 뗐다.

조금은 느긋하게 움직여도 될 것 같지만 크루엘을 생각하니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그놈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설마 나보다 더 빨리 움직인 것은 아니겠지?

차라리 같이 다닐 걸 그랬나. 아니 그래도 역시....

....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이 지역 출신이라는 것이 거짓말은 아닌지 각기 다른 방향 - 심지어 한 팀은 왔던 방향으로 되돌아가기까지 했다 - 으로 움직였음에도 기사단원들은 모두 나보다 앞서 도착해 있었다.

살인귀 기사단원들 중에 빈민 출신의 비율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서로 다른 지역도 아니고 같은 지역 출신의 빈민들이 이렇게나 많을 줄이야.

"아- 그건 이곳 빈민가가 제일 규모가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병력을 충원할 때 제국이 여기부터 털었댔죠."

"아주 늙거나 아주 어리지 않은 이상 남자는 죄다 끌고 갔는데, 덕분에 규모가 많이 줄었습니다. 예전엔 사람도 더 많고 그랬어요."

이게 규모가 줄어든 거라고? 예전엔 어땠을지 상상도 안 간다.

"아무튼 이제 돌격하면 되는 겁니까?"

"얘들아 약 먹자!"

"...그거 아니니까 약 내려놔."

63. 소탕(2)

서둘러 놈들을 말리며 리엔을 돌아봤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충분히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눈치챘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나마 멀쩡한 놈들로 데려오라 했는데....'

'저게 그나마 멀쩡한 놈들입니다.'

단원들을 두들겨 패던 그녀가 곧장 눈빛으로 답을 해왔다. 노골적인 눈빛을 바로 읽어낸 나는 잠시 의문을 가졌다.

그나마 멀쩡한 게 저거라고? 정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느 정도 정상인 흉내를 낼 수 있는 놈이 한둘 정도는 있지 않을까?

리엔의 말대로 저놈들보다 더 나은 놈이 없는지 잠시 머릿속을 뒤적였다.

'...없네.'

바닥에 나뒹구는 약을 아깝다는 듯 쳐다보는 클레터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없어.'

내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지는 것과 별개로 여기서 마냥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수도 없다.

어느 정도 소란이 잦아들었다 싶을 때, 약을 빼앗기고 시무룩해져 있는 놈들을 한심하게 보던 나는 힐긋 란을 쳐다봤다.

아직도 마음이 바뀌지 않았느냐는 내 무언의 질문을 눈치챈 그녀가 작게 끄덕인다. 제길.

"...싹 다 죽이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홀렸을 뿐인 이들은 제외해야 한다. 그러니 약은 안 돼."

"너무 무르십니다만...."

"어째서 저희를 데려오신 건지 이해했습니다. 빈민 구별에는 저희가 제격이겠죠. 다만 혼란스러운 상황이 될 텐데 굳이 그 와중에 빈민인지 아닌지를 구별해야 합니까?"

나도 알아 새끼야. 근데 어쩔 수 없잖아. 주술사가 협조를 안 하면 계획이고 뭐고 끝인걸.

"건물 내부에 불을 지를 거다. 이때 튀어나오는 놈들 대부분이 종교에 홀린 일반인들이겠지. 너희 중 넷은 외부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그들 사이에 숨어있는 수상쩍은 놈들을 골라 죽이고─"

굳이 생포할 필요는 없다. 만일 일반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도망칠 수준이라면 잔챙이일 테니까. 아마 몇 명 정도는 놓쳐도 큰 문제 없으리라.

좀 높은 자리에 있는 놈들이 숨기거나 챙겨야 할 것이 있을 테니 더 깊숙이 들어갈 테지. 나는 그 '숨기거나 챙겨야 할 것'을 입수한다.

없어도 상관없다. 그런 게 있을 만한 위치는 이미 알아두었으니까.

"─나머지 여섯은 내부에서 분탕질을 한다. 마찬가지로 수상쩍은 놈들을 죽이면 돼. 연기가 보일 때 들어가면 되겠군. 아, 그리고 만일 어디론가 가려는 것처럼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녀석이 있다면 너희 중 일부가 추적하도록 해."

"불은 누가 지릅니까?"

"내가."

일부러 연기가 잘 나고 오래 지속되는 재료를 챙겨왔다. 인적 드문 곳에 불을 붙이고 던져두면 되겠지.

주술사 씨는 당연히 나와 같이 다녀야 하고, 리엔은 내가 싫다 해도 따라올 테니 결국 남은 인원은 없는 셈이다. 음, 깔끔해.

"그런데...."

"응?"

"계획이 뭔가 이상한 것 같습니다."

클레터가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냥, 뭔가...."

"지금 주군의 명령에 토를 다는 것인가?"

"아뇨, 시키면 해야죠. 그런데...."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제 기사복을 내려다보고 나를 쳐다보는 모습.

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겠다.

"빈민들을 살려 보낸다는 점에서 헷갈린 것 같은데, 이 일은 조용하게 처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야. 그러니 살인귀 기사단이 깽판을 쳤다는 걸 온 천지에 알려도 돼."

아니, 알려야지. 그래야 내 공로가 인정된다.

물론 이런 식으로 막 나가면 당연히 나를 애용하는 것으로 알려진 황제가 더 욕을 먹겠지만, 내 알 바 아니다.

황제가 욕먹는 것을 신경 쓰는 사람도 아니고, 설사 나를 질책하고 싶다 해도 그의 명을 따른 것뿐이니 큰 문제는 없으리라.

"그럼 적당한 곳에 자리 잡고 대기해."

"예."

저들을 뒤로 하고 성큼성큼 건물 뒤쪽을 돌아 창문을 하나하나 만졌다. 저번의 그 열려있는 창문을 통해 들어가려 했는데... 죄다 잠겨있네?

'하긴, 그 난리를 쳤는데 보안이 여전하면 그게 더 수상하지....'

큰일났다! 정문 외의 다른 출입구는 모르는데!

슬쩍 리엔과 주술사를 돌아보았다. 둘도 다른 방도가 없는지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민망한 바람이 우리 사이를 스쳐 지나간 것도 잠시, 그 사이 무언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란이 느릿하게 입을 뗐다.

"혹 데려온 기사들 중 창문 여는 법을 아는 이가 없는지 알아보시는 것은 어떠신지요."

"으음?"

"이곳에 데려온 기사들은 전부 빈민이라 들었습니다. 세상에 몇 번 나가보지 않아 확언을 드릴 수는 없지만, 제가 지금까지 만나본 빈민들은 대부분이 다양하고 흥미로운 기술을 익히고 있더군요."

아하.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다.

그러고 보니 제법 재밌는 손재주를 가진 단원들이 꽤나 있었지. 이를테면 소매치기라던가 문을 따는 법이라던가....

더 지체할 것 없이 리엔에게 가서 확인해보고 그런 단원이 있으면 데려오라 말했다. 그런데 평소라면 곧장 말을 들었을 그녀가 이번엔 망설임을 보인다.

"주군을 또 혼자 둘 수는...."

"혼자 아닙니다. 이렇게 주술사도 있는 걸요. 가만히 기다릴 테니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

"...?"

뭐지? 단지 그것 뿐만은 아닌 것 같은데?

영 내키지 않아 하는 기색을 보이며 멀어지는 리엔의 뒷모습을 의아함을 담아 물끄러미 바라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단원 한 명과 함께 돌아오고,

그제야 나는 무엇 때문에 그녀의 심기가 어지러운지 알 수 있었다.

'리엔은 기사였지.'

도둑처럼 창문을 따야 하는 이 상황이 불편했을 것이다.

언제나 우선순위에 두어야 하는 주군이 위험한 상황도 아니고, 조금만 더 조사해보면 다른 방법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굳이 창문을 따는 것을 택했으니.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입을 다물고 있을 뿐, 아마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다면 조심스럽게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말했을 게 뻔했다.

내가 뭐라 말을 해서 될 일이 아니다. 나는 리엔의 기색을 모른 척 시선을 돌려 능숙하게 문을 따내고 한껏 뿌듯해하는 단원을 돌아봤다.

"이게 여기에 이렇게 쓰일 줄이야…! 감회가 새롭네...."

"그래, 수고했어. 이제 돌아가."

"헉, 너무 매정하십니다. 좀 더 칭찬을 해주셔도 되는데...."

입은 투덜대지만 행동은 착실히 명령에 따른다. 툴툴대며 돌아서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무심코 헛웃음을 흘렸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저놈들도 말만 미친개일 뿐, 상황 파악은 참 잘한다. 눈치가 있달까.

하긴 눈치가 없으면 그 전쟁터에서 살아남지도 못했겠지만, 그래도 기특하단 말이지.

그래서일까, 나는 조금 누그러진 마음으로 놈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빨리 가."

"예에...."

단원이 멀어지기가 무섭게 우리는 열린 창문을 붙잡고 넘었다. 아, 물론 내부에 사람이 있는지 정도의 최소한의 확인할 것은 다 확인했다.

당연하다는 듯 내 두 일행도 말없이 나를 따라 창문을 넘는다. 란이 조금 버거워하긴 했지만 리엔이 번쩍 들어 올려준 덕분에 큰 문제는 없었다.

이전에 넘었던 그 창문이 아닌 터라 생소한 풍경 앞에 잠시 멈춰선 나는 짧은 고민에 빠졌다.

'어디가 좋을까....'

불이 너무 빨리 발견되어서도 안 되고, 연기가 퍼지는 것이 너무 늦어서도 곤란하다.

이곳의 지리라도 안다면 모를까, 알 턱이 없어 망설이던 찰나, 리엔이 먼저 나섰다.

"주군께서 생각하시는 적합한 장소를 말씀하시면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리엔 경? 어떻게…?"

"그, 저번에 주군을 찾을 때 대부분의 복도와 방을 가봤습니다. 지리는 어느 정도 파악해두고 있습니다."

그게 이렇게 도움이 되는구나. 세상 참....

미묘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내가 생각한 조건을 늘어놓았다. 진중한 태도로 내 말을 귀담아들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내하기 시작했다.

리엔의 뛰어난 기척 파악으로 몇 차례의 위기를 무탈히 넘기며 이동한 것도 잠시, 지리를 어느 정도 파악했다는 게 빈말은 아닌지 그녀는 생각보다 빠르게 적합한 장소를 찾아냈다.

"여기입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괜찮은 것 같군요."

"그럼...."

"네."

들고 온 재료에 불을 붙였다. 어우, 벌써부터 연기가 아주....

리엔이 내민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리며 그것을 바닥에 내던졌다.

벌써부터 시야가 가려지기 시작한 것이, 내가 재료 하나는 기가 막히게 준비한 모양이다. 다량의 연기를 뿜어내는 그것을 불안함 반, 뿌듯함 반을 담아 보다가 몸을 돌렸다.

이제부턴 시간 싸움이다. 수상함을 눈치챈 수뇌부가 중요한 증거물을 빼돌려 도망치기 전에 먼저 그것을 탈취해야 한다.

"서두르죠."

리엔의 안내 덕분에 예의 그 기도실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여전히 흰색의 벽과 보라색 천이 어우러져 신비로운 분위기를 내고 있는 내부였으나, 나는 이번만큼은 주위를 둘러보는 대신 곧바로 해결해야 할 일을 찾아 주술사를 이끌었다.

어차피 더 볼 것도 없을 테니까.

그나저나 사람은 없군. 여기가 아닐 리는 없을 텐데. 이미 안에 있는 건가? 아니면 이건 함정?

'...솔직히 증거가 남아 있으리란 확신은 없어.'

리엔이 그 난리를 쳐놓았으니까. 저번의 그 사건으로 경각심을 가진 수뇌부가 이미 중요한 단서나 증거물은 다른 곳으로 빼돌렸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곳에 다시 온 이유는,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어찌 되었건 이번 일로 구원교는 박살이 날 것이다. 재기의 가능성이나 제2의 구원교의 가능성을 제하고 보면 그렇다.

수뇌부가 주요 서류를 빼돌렸다면 크루엘 역시 그것을 찾아내지 못할 테니 상황만 놓고 보면 결국 이 게임의 승자는 내가 된다.

주요 서류는 크루엘이나 나나 둘 다 못 찾았다.

구원교 와해는? 내가 했다.

그럼 승자는 누구겠는가.

속으로만 하는 생각이지만 솔직히 수뇌부가 장부를 빼돌렸으면 하는 심정이다. 그것은 내가 찾으면 가산점의 요소가 될 뿐이지만, 크루엘이 찾을 경우 이 게임의 판을 뒤엎는 중요한 패가 될 테니까.

그래서 이렇게 막무가내식의 허술한 계획을 계획이랍시고 들고나온 것이다.

'어쨌거나 들어가 보면 알겠지.'

단상 위로 올라가 늘어진 보라색 천을 치웠다. 란의 눈동자가 곧바로 벽의 어느 한 지점에 내리꽂혔다.

"보석을 주 매개체로 한 주술인 모양이군요. 통신 기능에 파괴되면 곧바로 신호가 가게 하는 기능도 있고, 공간 왜곡 기능도 있는 것 같은데...."

"그렇군요. 이곳을 지나가기만 하면 되는데, 가능하겠습니까?"

"...."

"...?"

"...잠시, 잠시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무언가… 무언가가...."

말꼬리가 늘어진다.

처음의 담담하던 시선은 이상함을 감지한 듯 진중해졌고, 고요하던 검은 눈동자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얼마 못 가 경악으로 바뀌었다.

"...어째서… 이곳에...."

"왜 그럽니까?"

"어째서 이곳에 마법이 걸려있는 겁니까?"

"...예?"

"이건 주술이 아닙니다. 주술을 위장한 마법이지."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이건 완전히 예상 밖의 말이다.

마법이라니. 당연히 주술일 거라 생각했는데… 뜬금없이 마법이라고? 인간계에서?

이건 심각한 문제다. 아무래도 얼마 못 가 다시 마계에 가게 될 것 같은데....

'윽, 위장이....'

생각만으로도 스트레스가 쌓이는 기분이라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주술사와 리엔을 돌아봤다.

주술사인 만큼 상황의 심각성을 누구보다 확실히 느끼고 있는 란은 굳은 얼굴로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우고 있는 리엔에게 이 장치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설명을 하고는 있지만 생각에 빠진 듯한 모습이었다.

"공간 왜곡 기능을 보고 확신했습니다. 마법과 주술의 차이를 아시는지요?"

"마법은 세계의 규칙을 어기는 것이고, 주술은 일정 대가를 바치고 규칙을 살짝 비틀어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사용하는 것이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습니다만…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이 공간 왜곡을 예를 들어보자면, 아니 왜곡도 아니겠군요. 이건 아예 다른 공간을 접목한 것이니."

"접목 말입니까?"

"네, 전혀 다른 공간을 이 보석을 통해 연결해놓았습니다. 아마 이 벽을 부수면 그 뒤는 아무것도 없을 겁니다."

"그 말은 즉, 만일 보석을 부수었다면...."

"연결된 공간으로 넘어가는 것은 요원한 일이라는 뜻이 되겠지요."

그 말에 괜히 내가 찔린다. 안 부수길 잘했네.

아무튼 지금 내가 궁금한 것은 그게 아니다. 내가 궁금한 것은 두 가지다.

누가 마법을 걸었는가.

이것을 통해 '그' 공간으로 넘어갈 수 있는가.

64. 소탕(3)

"누가 마법을 걸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구조에 대해서는 어렴풋이나마 파악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지요."

예전에 여자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가 보석 위에 손을 얹는다. 알 수 없는 말이 이어졌다.

무슨 말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중얼거림에 따라 벽이 점점 흐물흐물해진다.

즉, 구조를 파악했다는 증거.

빈말이 아니라니 참 다행이긴 한데… 조금 의문이다. 주술사가 마법의 영역에 일부나마 손을 뻗치는 것이 가능한 건가?

'아무래도 평범한 주술사는 아닌 것 같은데....'

재능이 뛰어나다고 했었나. 그 재능의 범위가 내 예상을 넘을 줄은 몰랐지만....

아무렴 어떤가.

"지금 들어가시면 됩니다."

오히려 득이 되니 문제 될 것은 없거늘.

주술사가 물러서고 내가 벽 앞에 섰다.

...막상 들어가려니 영 찝찝하다. 이거 갑자기 단단해진다거나 그러진 않겠지?

슬쩍 손을 뻗었다. 손끝이 닿자 벽이 재차 출렁인다.

'으, 감촉도 영 마음에 안 드는데.'

옆에서 리엔이 자신이 먼저 들어가겠다고 하지만 여기서 물러서면 체면이 망가진다. 앞으로 쭉 봐야 할지도 모르는 얼굴인데, 매번 그녀를 피해 다닐 수도 없지 않나.

결국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벽에 몸을 밀어 넣었다.

***

"불이야!!"

"히익! 웬 기, 기사단이…!"

혼란 그 자체였다.

내부에서 분탕질을 하는 역할을 맡은 단원들은 튀어나오는 이들을 보고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어린아이, 노인, 한쪽 다리를 잃은 사람,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

모두가 빈민 중에서도 어찌할 수 없는 패널티를 안고 살아야 하는 이들이다.

그제야 단원들은 빈민들이 어째서 이런 사이비 종교에 홀린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아니, 홀려주었다고 봐야 맞겠지.

빈민들은 배우지 못한 것뿐이지 바보가 아니다.

클레터가 허탈하게 웃었다.

'분탕질을… 하라고....'

저들의 면면을 확인한 순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쉽게 물러가지 않을 것이다.

저들을 쫓아낼 정도의 분탕질이라면 누군가를 본보기로 죽여야 할 터. 최소한 팔다리 정도는 날려주어야 하리라.

들어오면서 죽인 경비들로는 부족하다. 빈민을 건드려야 한다.

'하지만 누구를?'

어린아이를? 노인을? 다리 하나 없는 사람을? 맹인을?

"불을 꺼!"

"기사단도 막아! 이곳을 지켜야 한다!"

필사적인 움직임. 저들이 왜 그러는지는 같은 빈민이었던 만큼 잘 알 수 있었다.

죽을 게 뻔한 길로 걸어가는 것은 멍청해서가 아니다.

마지막 희망인 것이다. 그것이 끝난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생각할 정도로.

애초에 빈민들에게 목숨이란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만도 못한 것이었으니 목숨을 내던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이곳에서 나가주십시오. 나리!"

"아이고 제발…!"

턱에 힘이 들어갔다.

살인귀 기사단은 말 그대로 살인귀다. 수많은 사람을 죽였고, 그중에는 노인과 어린아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적은 당연히 멸하며, 명령이 내려진 이상 그것이 무엇이든 죽인다.

'차라리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면....'

곧장 약을 먹고 쓸어버렸을 것이다. 최소한 이들이 적이기라도 했다면 망설임은 없었겠지.

그러나 이번 명령은 죽이라는 것이 아닌 분탕질을 해놓으라는 것이었고, 눈앞의 이들은 적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살인귀 기사단이 살인귀일 때는 오로지 약을 먹었을 때뿐. 약을 먹지 않은 이들은 죄책감이라는 감정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한낱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런 만큼 평소 더욱 유쾌한 모습을 보이려 하지만....

"나가아아아!!"

"...!"

"시이아!"

...이런 상황에서까지 유쾌함을 보이기는 힘들었다.

허리께에서 느껴지는 둔탁한 충격에 클레터는 멍하니 시선을 내렸다.

한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걸음을 막으려는 듯 와락 매달려 울부짖고 있었다.

"나가, 나가주세요, 제발…!"

"시이아! 위험해! 빨리 이리 와!"

멀찍이서 한 남자아이가 그녀를 부른다. 다급한 외침에 클레터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임무를 수행하는 기사의 몸에 손을 댄 이상 아이를 가만둘 수는 없다. 분위기라는 것은 이런 사소한 것에도 좌우되니까. 그러니 이 아이를 본보기 삼아....

"...제기랄."

나직이 욕설을 뱉었다.

'단장, 아무래도 이번만큼은 댁이 잘못 판단한 것 같습니다.'

그녀의 판단은 잘못되었다.

이곳에는 빈민 출신 단원이 아니라 그들을 제외한 다른 이들이 왔어야 했다.

빈민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었다면 죄책감을 느낄지언정 그 깊이는 비교적 얕았을 테니까.

원흉은 따로 있는데 애꿎은 이들만 괴로운 순간이었다.

***

아. 아아. 아.

시이아는 두 손을 벌벌 떨었다.

연기가 난다. 불이 났다는 증거. 심지어 웬 기사단이 쳐들어와 경비들을 죽이고 빈민을 위협해 내쫓고 있었다.

시이아는, 빈민들은 느낄 수 있었다.

이대로 쫓겨나면 이곳은 엉망이 된다. 엉망뿐이랴. 다시는 재기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시이아, 일단 도망치자. 도망치는 사람은 그냥 보내주는 것 같아."

옆에서 폴이 뭐라 하는 것 같았으나 들리지 않았다.

시이아에게 이곳은 하나의 신성 구역이었다. 악의도, 나쁜 사람도 없는 착한 사람들만 가득한 꿈속의 세계 같은 장소.

악의가 침범할 수도, 침범해서도 안 되는 그런 장소.

그렇기에 이곳에서만큼은 단단한 경계를 허물고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었던 것인데.

"어… 어째서...."

악의가 침범했다. 나쁜 사람이 쳐들어 와 신성한 땅을 짓밟는다. 매캐한 연기가 가득 차고 건물 한쪽 창문으로 붉은 화마가 얼핏 비친다.

상황을 눈치챈 빈민들이 기사단의 앞길을 막아서고 애원을 하는 순간, 그녀는 튕기듯 무작정 앞으로 달려나갔다.

목표는 따로 정하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 보이는 '나쁜 사람들' 중 아무에게나 달려들 뿐.

'안 돼, 안 돼...!'

겨우 살만해졌는데, 이제야 사는 것 같았는데.

"나가아아아!!"

"시이아!"

흰 기사복을 입은 한 남자를 붙잡고 늘어졌다.

"나가, 나가주세요, 제발…!"

"시이아! 위험해! 빨리 이리 와!!"

틀렸어. 아무리 외쳐봤자 시이아에게는 닿지 않는다.

"저 멍청한 애가...!"

폴이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손톱을 물어뜯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머리는 눈앞의 이들이 누구인지 도출해내고 있었다.

흰 정복을 입은 기사들.

수많은 기사단 중 흰색을 기사정복으로 사용하는 기사단은 그가 알기론 오직 한 곳밖에 없다.

살인귀 기사단.

그렇다면 이들을 이곳에 보낸 이는....

'뱀파이어 백작!'

그래, 데온 하르트.

아득- 이가 갈렸다. 높으신 분께서 왜 굳이 이런 곳에 관심을 기울이는지.

구원교가 사이비라서?

바보도 아니고, 구원교가 생각만큼 정상적인 곳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떤가. 매일 같이 그날 먹을 식사를 걱정해야 하는 것이 빈민들이다. 그런 우리에게 있어서 빵과 물을 주는 구원교는 정말 '구원' 그 자체인데.

구원을 가장한 악의 교단이어도 좋다. 수상한 꿍꿍이가 있어도 좋다. 그것이 무엇이든 굶어 죽는 것보다는 덜 괴로울 테니까.

그러니 구원교가 무너진다면, 복수할 것이다.

상대는 당연히─

'데온 하르트는 황제의 검. 그렇다면 지금의 이 움직임도 황제의 명령일 거야.'

──황제.

의도한 결과일까, 예상 외의 움직임일까.

지금 이 순간, 누군가의 검 끝이 황제를 겨누었다.

***

온몸을 짓누르는 물컹한 감각은 좀 많이 말랑한 푸딩을 통과하는 기분이었다.

괜히 몸 여기저기를 매만지며 고개를 든 나는 보이는 풍경에 잠시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뭐야? 여기 아까 거기랑 똑같잖아?"

아니, 조금 다르다.

아까 그 기도실은 의자가 나무 의자였는데, 여기는 의자가 연한 보라색이랄까. 구석에 웬 문도 있고.

하지만 그것 외에는 똑같다. 흰 벽과 신묘하게 늘어진 보라색 천 하며....

"똑같군요."

"아니요, 다릅니다."

익숙한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왔군. 괜히 돌아보거나 쓸데없는 말을 하는 대신 방 안을 훑으며 되물었다.

"다르다고요?"

"네, 이 금이 보이십니까?"

란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희미한 금이 보인다. 바닥에 새겨진 그것은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방 전체에 넓게 새겨져 있었다.

누가 봐도 주술의 매개체인 듯한 모양새.

"방 전체에 진이 새겨져 있습니다. 아마 저 문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구석에 있는 문.

내 시선이 그곳에 닿자 리엔이 곧장 가서 문고리를 잡는다. 예상과 달리 문은 순순히 열렸고, 그 너머로 보이는 풍경에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뭐… 이런...."

파릇파릇한 나무가 보인다. 한 그루가 아니다. 아주 많다.

그래, 문 너머에는 다름 아닌 숲이 펼쳐져 있었다.

"마찬가지로 주술을 가장한 마법이군요. 다른 공간을 접목해놓았으니 특정 방법이 아닌 방식으로 문을 열면 외부와 연결이 될 겁니다."

"특정 방법을 통해 열면 내부로 연결이 되고?"

"네, 정확하겐 문을 열지 않고 이 방 안에서 특정 행동을 하기만 하면 이동이 되게 되어 있군요. 나올 때는 평범하게 문을 열고 나오면 되고...."

그새 거기까지 분석한 거야? 주술도 아닌데 빠르네.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마법은 제게도 생소한 영역이라… 최소 10분은 걸릴 것 같습니다."

최소 10분. 너무 길다. 물론 방도가 있다는 것 자체에 감사해야겠지만… 내 마음은 아주 다급했다.

도중에 누가 들어오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한 번에 많이 들어올 수 없을 테니 제압은 쉽겠지.

하지만 이미 저 방 안에 누가 있다면? 챙길 거 챙기고 다른 통로로 도망치려 하고 있다면?

무사히 도망친다면 모를까, 그러다 크루엘이 그놈을 잡기라도 하면 완전히 나가리다.

"젠장."

딱히 다른 방법도 없다.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나. 정말 그것밖에 없는 건가? 정말로?

불안함에 나는 내가 이 공간을 빙글빙글 걷고 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보다못한 란이 입을 열었을 때였다.

"진정하시지요. 그렇게 초조해 해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멈칫.

내가 초조해하고 있었나. 아니 근데,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잖아?

어쨌건 체면도 있으니 멈추긴 멈췄는데… 아니 멈췄다고 생각했는데, 왜 또 걷고 있는 걸까.

멈춰선 것도 잠시, 어느 순간 나는 다시 이 공간을 따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것도 이번엔 반대 방향으로.

그 사실을 자각하고 멈춰서는 순간, 뭘 어찌할 새도 없이 풍경이 바뀌었다.

"...씨발?"

"...."

"아니, 이건 놀라서…가 아니라."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건데?!

한순간에 풍경이 바뀌었다는 것에 놀란 것도 잠시, 나는 서류가 잔뜩 쌓인 방에서 횃불을 들고 있는 크루엘과 마주하고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

건물 어디선가 불길한 연기가 나고 침입자들이 쳐들어 왔다는 소식이 들린 시점에서, 구원교의 실질적 총괄인 사에린은 조용히 한 걸음 물러섰다.

데온 하르트다.

아마 이 건물을 포위하고 있는 이들과 안에서 난리를 치고 있는 이들은 그 유명한 살인귀 기사단일 테지.

그 외에는 다른 이를 떠올릴 필요도 없었다.

크루엘을 제외하고 구원교 소탕 임무를 맡은 이는 데온 하르트 밖에 없으니까.

'무관이지만 역시 지휘관이라는 걸까.'

불을 질러 일반인들은 쫓아내고 깊게 관련이 된 이들을 골라낸다.

숨겨야 할 것이 있는 이들은 인파를 헤집고 어디론가 향하려 할 테니 제법이라 할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사에린의 두뇌는 그의 예상보다 훨 좋았다.

그녀는 평민 출신이며, 일루스터 공작의 수하다.

평민 여자가 공작의 수하가 되었을 수준의 두뇌가 평범할 리 없지 않은가.

그녀는 이 사건이 '데온 하르트'와 연관이 있음을 눈치채자마자 순순히 물러섰다. 굳이 서류를 챙기러 어디론가 달려가지도, 허둥대지도 않고 숨죽인 채 조용히─

──구원교를 버렸다.

65. 소탕(4)

'어차피 목적은 달성했어.'

남은 일처리는 크루엘 하르트에게 넘어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데온 하르트와 달리 그는 '그 방'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잘 알고 있으니 데온 하르트가 도착했을 즈음엔 모든 정리가 끝난 뒤일 것이다.

즉, 구원교의 배후가 공작인 것을 데온 하르트가 알 도리도 없을 테고, 이 뒤로 일어날 모든 일의 결과는 크루엘이 책임질 테니 그녀로서는 이제 한 걸음 물러서서 흥미롭게 구경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입장에서 이번에 데온 하르트가 벌인 일은....

'물러.'

무르다. 과연 그가 내가 아는 '그' 데온 하르트가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자신이었으면 건물을 완전 봉쇄해 쥐새끼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 뒤, 내부인들을 모조리 죽였을 것이다.

적이 일반인들 틈에 섞여 빠져나갈 수 있지 않나.

그 사실을 전쟁까지 겪은 이가 모를 리는 없을 텐데.

'...한두 명 정도는 놓쳐도 상관없다는 건가? 어차피 잔챙이일 테니까?'

하긴, 그의 우선 순위를 예측해보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증거물 확보가 가장 중요하겠지. 그게 있어야 배후를 처단하고 구원교를 완벽히 소탕할 수 있을 테니까. 머리부터 노리는 것은 장수의 본능이기도 하고.

하지만.

사에린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결코 순수하지 않은 미소가 얼굴 전체에 퍼져나갔다.

'결국 이기는 건 나야.'

데온 하르트는 배후를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

산처럼 쌓인 서류가 보인다. 묘한 기름 냄새가 난다.

그 가운데 크루엘이 한쪽 손을 품에 손을 넣은 채 굳어 있었다.

침묵이 흘렀다.

나는 조용히 시선을 내려 어정쩡한 자세로 굳은 놈의 상체를 확인했다.

놈도 놀란 건지 품에 넣은 손이 살짝 빠져 나와 있었는데,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그 끝에 쥐어진 서류 몇 장이었다.

"...."

"...."

그 자세 그대로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던 그가 내 시선을 눈치챈 듯 서류를 품속에 갈무리한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날 한 번 보더니, 손에 들고 있던 횃불을─

──서류 더미에 던져버렸다.

'...?!'

아니, 잠깐. 이게 뭐 하는…!

현실감이 안 들 정도로 삽시간에, 아니 거의 즉시 모든 서류가 불길에 휩싸였다.

기름 냄새가 난다 했더니 이거였나!

제길, 이대로는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눈앞에서 증거물을 잃는 건 억울해서라도 그냥 못 두고 보지.

다급히 활활 타오르는 서류에 손을 뻗었다. 잠깐 잡는 것 정도로는 그리 심한 화상을 입진 않을 것이다. 이대로 낚아채서 바닥에 던진 뒤, 발로 밟으면 될 터.

그러나 내 목적은 달성되지 못했다.

턱.

"이거 놔!"

"...."

"이 미친 새끼야! 이걸 왜 태우는데!!"

미친 새끼. 또라이 새끼.

일반인들은 내가 기사단원들을 이용해 쫓아냈고, 수뇌부는 어디로 숨은 건지 보이지도 않는다. 아마 이곳을 벗어났을 테지. 한동안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즉, 남은 것은 황궁에 연락해서 이 서류들을 가져가게만 하면 되는 건데... 도대체 왜!!

손을 뿌리치려 온 힘을 다해 발버둥을 치지만 이 미약한 몸뚱이는 크루엘의 제제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오히려 버둥거리다가 불타는 서류에 내 손이 스치자, 놈은 아예 나를 번쩍 들어 어깨에 둘러멨다.

"씨발!"

빌어먹게도 짜증이 나고, 빌어먹게도 화가 난다.

날 막는 크루엘과, 그런 그 하나 어쩌지 못하는 약해빠진 내 몸뚱이. 둘 모두를 향한 복합적인 분노에 씨근덕거린 것도 잠시, 머릿속을 스친 특정 생각에 나는 나도 모르게 실 풀린 인형처럼 뚝- 모든 행동을 멈춰버렸다.

그런 내가 이상한지 크루엘이 힐끔 보는 것이 느껴지지만....

"...공작."

멈칫.

조금 전 내가 그랬던 것처럼, 녀석 역시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이내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듯이 다시 걸음을 옮기지만, 이미 늦었다. 난 이미 확신을 얻은 뒤였다.

그래, 공작이다.

어마어마한 배후가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구원교. 이곳에서만 쓰인 보라색 천. 서류를 불태우는 크루엘.

크루엘이 누구를 따랐더라?

보라색은 누구의 상징이었더라?

황족을 제외하고 가장 강한 권력을 가진 자가 누구였지?

'──스타베 일루스터.'

크루엘이 따르는 존재이며 보라색 머리와 눈을 가진, 귀족파의 수장.

"이...."

"...."

"개새끼가아아아아아!!"

분노가 터져 나왔다.

***

솔직히 그 뒤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리엔의 말로는 진에서 연기가 나더니 구석의 문이 열리며 짙은 연기와 함께 나와 크루엘이 나왔다고 한다.

크루엘은 날 들쳐멘 상태였는데, 내가 그의 옆구리에 단검을 꽂아 넣으려 하자 즉시 날 리엔에게 던져놓고는 사라졌댔다.

"그렇게 화내시는 것은 처음 봤습니다."

"그, 그렇습니까?"

"예, 화내시다가 피를 토하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때 어찌나 놀랐던지…"

"그…그랬군요...."

확실히 화가 많이 나긴 했지. 오죽하면 분노에 이성이 날아갔을까.

아니, 다시 생각해도 화가 나네. 사람을 갖고 놀았다는 거 아니야. 시발 어디 말할 데도 없고.

황제에게 말해봤자 증거가 없는 이상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오히려 패배자의 찌질한 모함 정도로 보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시발, 크루엘....'

난 못 챙긴 서류를 녀석은 챙겼으니 이 경쟁의 승자는 녀석이 되겠지. 도대체 뭘 요구하려나. 뭔진 몰라도 그게 나와는 아무 상관 없는 것이기를 바랄 뿐이다.

"아, 그보다 주술사는요?"

"돌아갔습니다."

"...네?"

"더 이상 본인이 할 일이 없으니 돌아가겠다고 하더군요."

아니 뭐, 잡아둘 이유가 없으니 보내는 게 맞긴 한데....

"그...."

"아, 주군께서 그 공간으로 이동된 이유는 방을 돌아서 그런 것이었다고 합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네? 뭐라고요?"

"어떤 방식으로든 왼쪽으로 세 번, 오른쪽으로 두 번 원을 그리면 이동하게 되어 있다더군요. 아마 편리하게 손가락으로 그려 이동할 생각이었겠지만 누가 알았겠습니까. 방 안을 돌던 백작님께서 이동되실 줄은."

"...."

"굉장한 운이십니다."

할 말을 잃었다. 그래서 내가 이동된 거였어?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설마 주술사를 그냥 보냈습니까? 빈손으로?"

주술사는 희귀한 존재이니 기왕이면 좋게 기억되는 편이 좋다. 그런데 실컷 부려먹고 아무런 보상도 없이 그냥 보냈다면?

"집사님이 사례금과 마차를 내어주셨습니다."

"아, 그럼 됐습니다."

역시 레멤베르. 덕분에 파렴치한으로 기억될 일은 없겠다.

...그나저나 조금 아쉽긴 하네. 저주에 대해 물어보려 했는데.

"리엔 경. 한 가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만, 백작님께서 피를 토하신 이유는 어깨에 얹혀진 상태에서 복부에 강한 압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고개를 들었다. 희끗희끗하게 변해가는 은청색의 머리칼이 시야에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나를 지나친 레멤베르가 테이블 위에 들고 있던 쟁반을 내려놓는다. 이를 어이없는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그런 나를 철저히 배제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분노 때문이 아니었군요. 제가 잘못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분노의 영향이 아예 없다고는 볼 수 없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그거였지요. 하나 오해했다 하여 부끄러워할 필요 없습니다. 백작님이 유리몸이셨을 뿐이니까요."

"유리몸...."

너는 또 왜 그걸 중얼거리고 있는 건데.

유능하다는 말은 취소다.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한 마디 꺼냈다.

"아니, 리엔 경. 그걸 왜 굳이 되뇌고 있는 겁니까. 그리고 레멤베르는 들어와서 한다는 말이 무슨...."

"아, 실례했습니다."

노크를 해도 답이 없으시길래.

내가 가장 지적하고 싶은 '유리몸' 이야기는 쏙 빼놓고선 레멤베르가 깍듯이 허리를 숙인다.

정중하고 흠 잡을 데 없는 행동에 차마 뭐라 더 말할 수도 없어 나는 내심 혀를 차고는 테이블 위의 쟁반에 시선을 옮겼다. 쟁반 위에는 탕약과 함께 웬 쪽지가 놓여 있었다.

으, 탕약…. 저거 아직도 남아있었어?

"...그 쪽지는 뭡니까?"

간간이 보아온 초대장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볼품 없는 쪽지.

레멤베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눈치챘구나! 내가 약 먹기 싫어서 말을 돌렸다는 걸! 저게 바로 연륜이라고 하는 건가.

괜히 찔려서 눈치만 보고 있자니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희미한 미소와 함께 답이 돌아왔다.

"주술사의 쪽지입니다. 떠나기 전에 백작님께 전해달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주술사가요?"

의아함을 담아 중얼거리면서도 쪽지에 손을 뻗었다. 쪽지를 펼치기 전, 수상한 장치를 해두진 않았을까 잠시 머뭇거리긴 했지만 망설임은 잠시였다.

적어도 내 기억에서 그녀에게 큰 무례를 저지른 적은 없었으니까.

쪽지의 내용은 생각보다 그리 길지 않았다.

[저주는 가벼이 생각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서는 술자에게 있어 가장 가치가 큰 것을 필수로 바쳐야 하지요. 귀인께서는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칠 수 있으시겠습니까.]

구깃.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침착하게 쪽지를 마저 구긴 뒤 바로 옆의 탕약에 툭 떨어뜨렸다. 새하얗던 쪽지가 시커먼 물을 머금고 검게 물들어간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쪽지의 마지막 문장을 천천히 곱씹었다.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내 목숨을 바칠 수 있냐고?'

개소리. 내 대답은 당연히 '아니오'다.

이런 내 대답조차 예측했기에 저주를 거는 방법을 적어두지 않은 것이 아닌가. 그전에 내가 이런 질문을 하려 한 것은 어떻게 안 건지.

'주술사, 란.'

그 이름을 머리 한구석에 단단히 새겨두는 사이, 레멤베르가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고개를 들자 시커먼 탕약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아니, 분명 쪽지를 담가서 못 먹게 만들었는데?!

"시종을 시켜 새로 가져왔습니다. 이렇게 피하려 드셔도 소용없으니 늙은이 속 그만 썩이고 어서 드시지요."

"...."

이거 진짜 맛없는데.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탕약을 받아들었다. 레멤베르의 시선에서 느껴지는 무언의 압박에 기어이 입에 가져다 대고. 입을 열어 이 지독한 액체를 머금으려던 찰나,

- 똑똑.

"들어와!"

슬쩍 약 그릇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너무 반겼는지 레멤베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이쪽을 쳐다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기쁜 마음으로 들어온 시종을 반겼다.

"무슨 일이지?"

"황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아."

...아?

생각보다 큰 스케일의 소식에 잠시 굳었던 머리가 끼긱끼긱 돌아간다.

초대장도 아닌 사람이 직접 찾아왔다는 시종의 말에 대한 내 감상은 단순했다.

올 것이 왔구나.

***

기절했던 것을 핑계로 몇 번이고 호출을 거절했으니 어찌 보면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다만, 이렇게 사람과 마차까지 보내서 선택지라고는 없다시피 데려올 줄이야.

게다가....

"...."

"...."

크루엘도 같이 보는 거였냐고. 따로따로 만나주면 어디가 덧나나?

'으, 어색해.'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정면에 고정했다.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들기도 한데다, 아직도 입안에 쓴맛이 맴돌고 있어 내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망할 집사님. 기어이 약을 먹이고 보낼 줄이야.

서둘러 황궁에 가기 위해 일어선 나를 붙잡은 레멤베르와, 코앞에 내밀어진 탕약. 그리고 끔찍했던 그 맛이 다시 떠오르자 절로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진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일 뿐,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나는 곧바로 표정을 고치고는 시선을 문에 고정했다.

'어디 보자, 이 화려한 문에 뭐가 새겨져 있나....'

보석도 박혀 있고, 마력석도 박혀 있고, 내게는 시선이 박혀 있고.

...옆 얼굴이 뜨끈뜨끈하다. 뭐 볼 게 있다고 그렇게 날 보고 있는 건지.

얼굴에 꽂혀 있던 시선이 서서히 내려가더니 어깨 부근에서 한 번 맴돌고는 더 내려가 어느 한 곳에서 멈춘다.

나는 놈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눈치채고는 고개를 홱 돌려 놈을 노려봤다.

그래, 나 손에 붕대 감았다. 네놈이 불태운 서류 한 번 잡아보겠다고 난리 치다가 제대로 데였다지 뭐냐. 시발 아직도 열 받네. 빌어먹을 놈.

"뭘 봅니까?"

"...."

나를 물끄러미 보던 그가 무언가 말하려는 듯 천천히 입을 연다.

그러나 미처 첫 마디가 나오기도 전에.

"폐하께서 들라 하십니다."

천천히 열리는 알현실 문에 그도, 나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고개를 정면으로 돌려버렸다.

66. 선전포고(1)

문이 완전히 열리고 안으로 들어서자 화려한 내부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누가 제국 아니랄까 봐.'

웅장하고 화려하기 짝이 없는 내부가 자칫하면 황제를 앞에 두고 눈이 다른 데로 돌아갈 위험도 있겠다 싶었으나,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런 가정은 집어치워 버렸다.

어느 누가 감히 그를 두고 다른 곳에 눈을 돌릴 수 있을까. 이 길의 끝, 가장 상석에 앉은 남자의 위압감이 여기까지 미치고 있는데.

에도아르도 데세르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이 땅의 유일무이한 황제.

공적인 자리라 그런지 더욱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드러내고 있는 그가, 바로 저기에 있었다.

잠시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옆에 서 있던 크루엘이 먼저 걸음을 옮긴다. 그에 질세라 나 역시 서둘러 정신 차리고 황제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걸음이 멈추고, 크루엘과 내 입이 동시에 열렸다.

"제국에 광명을."

전쟁 중일 때는 '영광을', 평소에는 '광명을'.

"신 크루엘 하르트가 현재의 제국을 뵙습니다."

"신 데온 하르트가 현재의 제국을 뵙습니다."

그리고 그 뒤는 똑같다.

가만히 예를 갖추고 기다리고 있자, 머리 위로 황제의 목소리가 떨어진다.

기분 탓인지 그의 목소리는 공치사를 위해 부른 것 답지 않게 그다지 기쁜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고개를 들도록."

아, 기분 탓이 아니구나. 저 얼굴 좀 봐라. 저게 어디가 기쁜 얼굴이야. 미간에 주름이 잡혀 있는데.

'왜지? 나 때문인가? 내가 뭘 잘못했나?'

생각하고 보니 내가 좀 못 미더운 짓을 많이 하긴 했다.

사이비 종교에 홀린 이들을 그냥 보내기도 했고, 그 난리를 친 주제에 서류는 한 장도 못 챙겼고....

아무래도 내가 그리 쓸만한 인재가 아니란 걸 눈치챈 모양이다. 조용히 눈을 굴려 주위를 살폈다.

'나와 크루엘 외의 다른 사람은 안 보이는 걸 보니 아무래도 공식적으로 질책할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면 내게도 기회가 있지 않을까?

일단은 최선을 다해 빌어보고, 안 되면 도망치든가 하자.

황제를 공격한다는 선택지는 당연히 넣지 않았다.

황제를 지키는 이들을 상대로 내가 이길 수 있을 리도 없을 뿐더러, 난 네메세우스 장군님과는 싸우고 싶지 않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황제는 용사의 파편을 지닌 영웅이니까.'

어떻게 아무 기반 없는 9왕자가 모든 이들을 쳐 죽이고 왕의 자리에 올랐겠는가. 어떻게 즉위한 지 8년 만에 모두가 인정하는 황제가 되었겠는가.

압도적인 무력이 있어서다.

그는 지금까지 등장한 영웅들 중에서 가장 큰 용사의 파편을 지닌 사람이다. 파편의 크기는 알 수 없지만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 영웅도 황제만큼의 무위를 보이진 못했으니까.

그런 그를 내가 죽인다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잖은가. 일반인을 상대로도 위태로운 수준인데.

'그저 빌자.'

혹시 모르잖아?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 살려둘 수도.

아니, 아니지. 황제를 상대로는 '정' 따위 보단 아직은 '스파이'로서의 쓸모가 있다는 것에 거는 것이 훨씬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나는 마왕의 곁에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니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진 사이, 황제의 공치사가 이어졌다.

형식적인 말들이 떨어지고, 마침내 그가 본론을 꺼냈다.

"데온 하르트 명예 백작은 사이비 종교에 홀린 일반인들을 그냥 보내주는 등의 무른 행동을 보였으나 적극적인 행동을 하며 배후를 잡을 수 있는 길을 열었고, 크루엘 하르트는 어떻게 움직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배후를 알아내고 그 증거를 가져왔다."

'어떻게 움직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에서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 것 같은 건 착각일까.

황제는 아까보다 더 심기 불편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고생한 둘 모두에게 소원권을 주고 싶지만, 소원권은 하나이기에 한 명만 선택해야 하지. 그렇기에 짐은 고심 끝에 보다 결정적인 역할을 한 크루엘 하르트의 손을 들어주기로 결정했다."

"황송합니다."

쳇. 역시나인가.

여기서 저 새끼가 서류를 불태웠습니다! 라고 외칠 수도 없고.

그나마 다행인 건 황제가 내가 지른 불 때문에 서류가 불탔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생각했을 수도 있겠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은 이상 그것으로 무언가 불이익을 주진 않을 테니 그게 어딘가.

"그래서, 무엇을 바라지?"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가 묻는다.

크루엘은 한 번 더 깊게 허리를 숙이며 담담히 답했다.

"현재 데온 하르트 명예 백작이 소유하고 있는 하르트 영지를 제게 주시길 감히 청합니다."

...뭐?

"...하르트 명예 백작의 생각은 어떤가."

아니, 잠깐만. 하르트 영지는 내 땅이잖아!

물론 갖기 싫다며 온갖 생떼를 다 부리고 황제에게 달려가 따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빼앗기는 것은 기분이 더럽다. 사실상 당사자의 동의 여부는 고려하지 않은 영지 소유권 이동 아닌가.

황급히 고개를 돌려 황제를 바라봤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

선택의 여지는 없다. 여기서 거절했다간 내 체면만 상한다. 내가 뭐라 말하든 그렇게 갖기 싫다며 난리 치던 영지이니 상관없지 않느냐는 대답 하나면 와르르 무너질 테니까.

황제도 그걸 알기에 선택권을 주는 척, 내 생각을 물은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부담스러웠던 영지입니다. 감사할 따름이지요."

이를 악물고 크루엘을 노려봤다. 분명 내 시선을 느꼈을 텐데도 놈은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불편한 내 심기를 황제가 모를 리가 없다. 그는 모르는 척 가볍게 팔걸이를 두드려 자신에게 이목을 모으고 입을 열었다.

"하르트 영지의 소유권을 크루엘 하르트에게 넘기는 것에 앞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영지를 갖기 위해서는 작위가 필요하지."

흠칫, 나와 크루엘의 몸이 동시에 떨렸다.

'...응? 뭐야, 얘는 왜 떨어?'

아니 나야 저놈이 작위까지 갖게 된다는 것에 위기감을 느껴서 그렇다 치더라도, 크루엘 너는 왜?

"이전에도 말했지만, 크루엘 하르트. 아직도 그대의 생각은 변함없는가?"

"...소신은 하르트가를 잇고 싶지도 않고, 성을 바꾸고 싶지도 않습니다."

"...!"

아, 무슨 말을 하는지 눈치채버렸다. 나도 같은 이유로 황제의 제안을 거절했었으니까.

내가 그저 '명예 백작'의 자리에서 멈춘 것에 대한 직접적인 이유.

8년 전쟁이 끝나고 처음 황제를 대면했을 때, 그는 내 공로를 칭찬하며 자신이 밀어줄 테니 하르트가의 가주 자리에 앉아보라 했었다.

지금의 명예 백작 자리 따위가 아닌, 유구한 역사를 가진 '진짜' 하르트 백작가의 가주 자리에.

보통의 차남들이었다면 조금은 욕심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 나는 하르트가의 이름만 들어도 진저리를 칠 정도로 가문을 혐오하고 있었다.

그토록 혐오하는 자리에 내가 앉을 리가 없지 않은가.

딱 잘라 거절하자 그 다음으로 황제가 추천한 것은 다른 작위였다. 기본 백작위, 황제가 좀 더 힘을 쓰면 후작위 정도는 가뿐히 얻어낼 수 있다고 했었지.

물론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하르트'의 성을 버려야 하는 것만 아니었다면 냉큼 받았을 정도로.'

본인이 새로운 성을 짓거나, 황제가 새로운 성을 하사하거나.

어쨌건 이미 '하르트 백작가'가 존재하는 이상 똑같은 성의 다른 작위가 등장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듣고 나는 깔끔하게 작위를 포기해버렸다.

그런 내게 황제가 기어코 쥐어준 것이 바로 '명예 백작' 자리였고.

명예 백작은 단승 작위여서 내가 죽으면 자연스럽게 그 맥이 끊긴다. 즉 '하르트가'가 두 개가 생겨 후에 혼란이 빚어질 여지는 없다는 것.

원래 황제는 명예 후작 자리를 주고 싶어 했으나 역사상 '명예' 작위는 백작위까지 밖에 주어지지 않았기에 그렇지 않아도 전쟁 후 뒷처리로 대신들과 싸울 일이 많았던 황제는 여건상 어쩔 수 없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크루엘도 비슷한 제안을 받았었구나.'

하긴, 당연하다. 그도 이젠 '영웅'이니.

생각하고 보니 현재 제국에 존재하는 공식적인 영웅들 중 크루엘 하르트만 작위가 없다.

내가 하르트의 성을 버리기 싫어하는 이유가 분노와 복수심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면, 녀석은 그리움 때문일까.

어쩌면 그 역시 복수심 때문일지도 모른다. 가족들을 눈앞에서 죽인 나를 향한 복수심.

녀석이 하르트가의 가주 자리를 거부하는 것도 어쩐지 이해가 간다.

아마 괴롭기 때문이리라.

"곤란하군. 명예 백작 작위는 이미 같은 성을 가진 이가 갖고 있는데. 그렇다고 그보다 더한 공을 세우지 못한 그대를 명예 후작 자리에 앉힐 수도 없고, 무려 영웅을 고작 명예 자작이나 남작 자리에 앉힐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거짓말. 그냥 주기 싫은 거면서.

아무리 그래도 작위가 아예 없는 것보단 있는 편이 낫다. 그 탓에 귀족파에서도 몇 번 이 문제로 항의한 적이 있었는데, 황제는 그때마다 싸그리 무시했다.

아마 공작에게 휘두를 수 있는 패를 더 쥐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희한하게도 공작이 이 문제에 대해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아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이지만….

묵묵히 다음 말을 기다리는 크루엘을 향해 황제가 심기 불편한 얼굴로 목소리를 내었다.

"하르트 영지의 소유권을 일루스터 공작에게 넘기도록 하지. 어떤가?"

그대는 공작의 수하이고, 그대가 원한다면 공작은 흔쾌히 그대를 영지의 관리인으로 임명할 테니.

어쩐지 그런 속마음이 들리는 듯 했다.

잠시 침묵하던 크루엘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폐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해결됐군. 하르트 명예 백작만 남고 다들 물러가라."

크루엘이 날 힐긋 보더니 물러간다. 부릅뜬 내 눈은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빌어처먹을 새끼. 도대체 무슨 속셈인 거야?

아니, 그보다....

'...왜 저만 남기신 겁니까, 폐하. 무섭잖아.'

드디어 올 게 온 건가.

내가 인재가 아니란 걸 들통난 그 순간이.

하르트 영지에 관한 문제는 일단 뒤로 미뤘다. 지금은 황제의 분노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만 생각해야 한다.

나는 조용히 숨을 내쉬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

하여간 형제가 하나같이 고집불통이다. 죽어도 하르트 백작가는 잇지 않으려는 것 하며....

둘은 지금 주인 없는 백작가가 망하기 직전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을까. 거의 남이나 다름없는 방계가 모여서 주인 노릇하겠답시고 짖어대고 있는데.

하긴, 모를 리가 없겠지. 단지 신경 쓰지 않는 것뿐이리라.

황제는 한숨을 삼키며 홀로 남은 데온 하르트를 눈에 담았다.

'표정이 안 좋군.'

하르트 영지를 빼앗긴 탓일 터.

굳이 그것을 언급해 긁어 부스럼을 만들 생각은 없기에 황제 에도아르도는 순순히 다른 화제를 입에 올렸다.

너무 강렬한 말이어서 하르트 영지 따위는 순식간에 잊혀질 수준의 그런 화제를.

"알현 뒤에 바로 회의를 할 예정이니 그대도 곧 알게 되겠지만, 지금 미리 말해두지. 짐은 전쟁을 할 생각이다."

"...!"

꽤나 놀란 모양이다. 하긴, 전쟁이 끝난 지 이제 고작 2년 지났을 뿐이니.

온전하게 드러난 적안을 마주하며 황제가 슬쩍 웃었다.

"구원교 소탕이 아주 적절한 시기에 끝났지. 마침 이레온 왕국이 슬슬 못 봐줄 정도로 짖어대고 있던 터였다."

"이레온 왕국과… 전쟁을 하시려는 겁니까?"

"시작은 그렇게 되겠지."

시작은.

끝은 대륙 통일이 될 것이다.

말뜻을 눈치챈 데온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지긋지긋했던 8년 전쟁을 떠올리고 있는 것일 테지.

그러나 자신도 부상자를 전쟁에 내보낼 만큼 매정하진 않다. 아, 그래. 솔직하게 인재를 그런 식으로 허무히 잃고 싶지 않을 뿐이다.

단지 전쟁 준비를 명할 생각이었다면, 조금 뒤에 있을 회의에서 말해도 됐을 텐데 왜 굳이 이렇게 따로 만났겠는가.

"그대에겐 마계를 부탁하고 싶다."

대륙 정복 자체는 별 문제가 없지만, 마계는 거슬린다.

제국이 대륙을 집어삼키는 것을 마왕이 순순히 지켜보고만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데온 하르트는 효용 가치가 아주 높다.

그는 제국의 영웅이며 마왕군의 군단장이다. 마왕의 곁에 있을 수 있고 놈의 신뢰를 얻은 유일한 인간이다.

"마왕의 곁에서, 마왕군이 이 전쟁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최대한 손을 쓰도록."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대가 돌아올 때까지 로프티 기사단은 짐이 맡아두겠다. 그대로 저택에 두었다간 언젠가 백작저마저 무너뜨릴지도 모르니."

"...."

"그리고."

가을이 다가오고 있긴 하지만 여름은 여름이라 가벼운 옷차림 사이로 드러난 쇄골에 시선을 고정했다.

정확하게는 쇄골 바로 위, 검은 낙인에.

[마왕의 저주.]

입안에서 굴리기만 해도 절로 쓴 웃음이 나오는 그 단어를 되뇌며 손을 뻗었다.

"...다음에는 이것이 사라진 상태로 만났으면 좋겠군."

67. 선전포고(2)

상처를 어루만지듯 느릿한 손길이었다.

그러나 어쩐지 금방이라도 내 목을 잡아챌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나는 그저 가만히 굳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낙인은....

'저주 같은 게 아니란 말이지.'

물론 마왕이 한 것은 맞긴 하다. 다만 제국 쪽 인물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몸이 약해지고 뭐 그런 저주스러운 용도는 아니었다.

누누이 말했다시피 내 몸은 외부의 영향을 받아 약해진 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약한 것일 뿐이다.

그러니까 이 낙인은, '위치 추적' 마법이다.

생각해보라. 마왕이 뭘 믿고 날 순순히 인간계로 보내겠는가.

아무리 마계에서 잘해준다 해도 결국 나는 고향이 '인간계'인 인간이다. 별다른 불평불만 없이 순순히 마계에 머문다지만 인간계를 보게 되면 흔들릴 만도 하지 않나.

그렇기에 마왕은 내가 인간계로 갈 때면 언제나 위치 추적 마법을 걸곤 했다.

'처음 마왕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제국으로 갈 때도 그랬지.'

용사의 시신을 힘겹게 고쳐 안고 제국에 다녀오겠다 했을 때, 마왕은 내게 위치 추적 마법을 걸었다.

말로는 내 안전을 위해서,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하기 위해서 라지만... 결국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찾아가겠다는 뜻이 된다.

완벽하게 코가 꿰여버린 나는 차마 뭐라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비척비척 용사의 시신을 끌고 제국으로 돌아갔고, 용사의 시신을 둘러메느라 엉망으로 흐트러진 옷차림을 자각하지 못한 채 황제를 비롯한 제국의 주요 인사들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무리하게 체력을 소모한 탓에 용사를 내려놓자마자 울컥 피를 토하고 말았다.

당시 나는 내 몸을 추스르는데 집중한 터라, 저들의 시선이 내 얼굴을 비껴가 좀 더 아래에 멈춰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상태였다.

전에 없던 검은 낙인, 그리고 각혈. 싸늘하게 식은 용사의 시신과, 이를 수습한 그의 동료.

그들의 생각이 '마왕의 저주'에 미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런 게 아니라고 해도 듣지 않고, 그렇다고 마왕군 군단장이 되었다고 대놓고 말할 수 없어서 입을 다물었는데....'

이제는 들키지만 않길 바랄 뿐이다.

황제까지 속인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마계에 돌아갈 핑곗거리가 필요했으니까.

사지 멀쩡한 내가 마계에 다시 가야겠다고 하면 도대체 뭐라 생각하겠는가. 당연히 '이 새끼가 대놓고 배신하겠다 이거지?' 하는 생각부터 들지 않겠나.

그렇기에 나는 저주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이를 풀기 위해 마왕 곁에 있어야 한다는 설정을 살짝 집어넣었다.

고로 해명하기엔 너무 늦었다. 진실을 알게 되는 순간 농락당한 것이 되어버린 황제가 친히 내 목을 댕강 썰어버리겠지. 장담한다.

그렇기에 내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노력하겠습니다."

다음번엔 저주가 풀린 상태로 만났으면 좋겠다는 상대를 향해, 애초에 저주에 걸린 적도 없는 사람이 답했다.

***

"하르트 영지라... 의외로군요."

이건 내게도 별 쓸모없는 땅인데. 물론 손익을 따져보면 손해보다는 이득에 가깝긴 하지만....

공작 스타베 일루스터가 늘 그렇듯 별 대답 없는 크루엘을 힐긋 눈에 담았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황궁 복도에서 하르트 명예 백작을 만났을 때, 그가 영지를 반납하고 싶어 왔다고 했던가요."

그때 그 자리에 크루엘 하르트도 있었다.

아니지. 그가 먼저 그 자리에 있었고, 자신이 뒤늦게 도착했다. 그리고 데온 하르트와 대화를 나눴었지.

[백작도 폐하를 뵈러 왔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목적으로 온 건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아, 최근에 받은 영지에 관해 청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부족해서 그렇습니까? 크기가 작다거나, 땅이 척박하다거나.]

[아뇨, 그저 영지를 반납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거 흥미롭군요.]

말로만 흥미롭다 했을 뿐 굳이 그 영지가 무엇인지 조사는 하지 않았지만, 크루엘이 개인적으로 조사하려 했다면 알아내지 못할 것도 없다.

그때 그 대화에서의 '영지'가 바로 이 '하르트 영지'는 아닐까?

눈을 가늘게 뜨고 크루엘의 표정을 샅샅이 뜯어보던 공작이 이내 피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 조금 뒤에 있을 회의 탓에 예민해진 모양이다.

단지 하르트 영지가 제 가문을 무너뜨린 이의 손에 있는 것이 불쾌했을 뿐이겠지.

'설마 데온 하르트를 위해서겠어?'

거기까지 생각한 공작이 크루엘을 향해 싱긋 웃었다.

늘 그렇듯 상냥하게 눈을 휘어 보인 그는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듯 말했다.

"질책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번 일은 단순히 경에게 포상을 주기 위한 가벼운 이벤트였을 뿐이니."

"...."

"그 밖의 특이 사항은 없습니까?"

[개새끼가아아아아아!!]

당시의 외침과 데온의 태도를 떠올린 크루엘이 굳은 듯 딱 붙어 있던 입술을 천천히 뗐다. 녹색 눈동자가 바닥을 향하고, 흔들림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딱히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

"알겠습니다. 선물은 고맙게 받지요. 원한다면 하르트 영지의 모든 관리 권한을 경에게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크루엘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들끓는 분노가 압축된 '개새끼가'라는 거대한 외침이 고막을 뒤흔드는 듯해서, 그는 무심코 데온이 배후를 눈치챘던 그때의 그 상황을 다시금 떠올렸다.

[아주 그냥 날 갖고 노느라 즐거우셨겠어? 안 그래? 이 개새끼야!!]

온갖 욕설이 쏟아진다. 크루엘은 '공작'이란 말이 나온 그 순간부터 얼어붙은 지 오래였다.

눈치챘다.

이러라고 창문을 열어준 것이 아니었다. 그저 적당히 만족할만한 성과를 얻고 떠나길 바랐는데, 설마하니 배후의 정체까지 유추해낼 줄이야.

'그러고 보니 어릴 때 제법 영특했었지.'

전혀 기쁘지 않다.

한쪽 팔로는 여전히 아이를 들쳐멘 채 다른 손으로 허리춤을 더듬어 검 손잡이를 잡았다.

'공작이라면....'

배후를 눈치챈 이 아이를 죽이길 바랄 테니까.

카앙! 불꽃이 튀었다.

불편한 자세에서 용케 데온의 공격을 막아낸 크루엘이 힐긋 붉은 열기가 가득한 내부와 제 동생을 번갈아 보고는 서둘러 걸음을 뗐다.

1초라도 빨리 이 뜨거운 공간을 벗어나기 위해 속도를 높이며, 크루엘은 조용히 데온에게 속삭였다.

데온은 여전히 욕을 내뱉으며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살고 싶다면 이곳에서 알게 된 것들을 입 밖에 내지 말아라."

너는 영특하니 말해선 안 되는 것들이 무엇인지 구분할 수 있겠지.

그리고 데온의 단검이 재차 옆구리에 내리꽂히려는 순간, 문을 열고 나간 크루엘은 눈앞에 보이는 리엔이라는 동생의 기사를 발견하고 곧장 데온을 던졌다.

'....'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이 없는 크루엘을 조용히 살피던 공작 스타베가 자연스러운 미소를 그리며 시선을 돌렸다. 언제나와 다름없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방 안을 메웠다.

"...그리고 사에린."

"네, 공작님."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구석에서 둘의 대화가 끝나길 기다리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구원교의 총괄이라는 귀찮은 일을 기꺼이 해낸 여자. 공작은 그녀를 향해 달큰하게 눈을 휘어 보였다.

"수고했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한 박자 늦은 대답이 돌아왔다. 공작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아주 은밀하게 물 밑에서 움직이세요. 황제에게 걸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구원교에서 걸러내고 걸러내어 남은 진실된 신도들을 앉혀놓고 세뇌하듯 가르치는 말이 있다.

황제는 죄악이요, 공작은 구원이다.

공작은 구원이다.

'스타베 일루스터는 구원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교의 목적이다.

공작, 스타베 일루스터에게 맹목적인 사람들을 만드는 것.

겸사겸사 황제를 향한 민심을 악화시키기도 하고.

"맡겨주세요."

"든든하군요."

한 번 웃어준 뒤 몸을 돌렸다.

여자의 존재는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크루엘을 향해 말했다.

"그럼 이만 가죠. 회의에 늦겠습니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뒤에서 일정 간격을 두고 따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앞서 걷는 공작의 눈은, 조금 전 모습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

공작이 회의장에 들어섰을 땐, 이미 황제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모여있는 상태였다.

귀족파와 황제파. 척 보기에도 두 부류로 완벽히 갈려 앉아있는 모습.

그 모습이 제법 우스웠으나, 공작은 자연스럽게 표정을 갈무리하며 짐짓 부드러운 인사말을 꺼냈다.

"제가 늦은 모양이군요."

귀족파의 수장이자 황제 다음가는 권력자가 꺼낸 말이다. 귀족파의 이들이 앞다투어 손사래를 치기 시작했다.

"아닙니다. 폐하께서 들어오시지 않았으니 아직 회의는 시작한 것이 아니지요."

"딱 좋을 때 오셨습니다."

"아직 의제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여기 앉으시지요."

공작이 안내에 따라 귀족파 자리 중에서도 황제와 가장 가까운 자리인 상석에 앉는다.

당당하고 자연스러운 태도에 황제파 이들의 얼굴이 찌푸려졌으나 딱히 뭐라 하지는 않았다.

원칙대로도 그가 저 자리에 앉는 것이 맞으니까. 단지 저 인간 자체가 원체 재수 없다 보니 무슨 짓을 해도 못마땅해 보일 뿐이다.

"...갑작스러운 회의라니. 무슨 일인지 걱정이 되는군."

"무엇인지는 몰라도 중요한 일이겠지요. 폐하께서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큰 회의를 여셨을 리가 없잖습니까."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야, 전쟁이지.

여태껏 황제를 봐온 주제에 아직까지도 감을 못 잡고 있다니. 공작은 입 밖으로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앙큼하게 예산안을 따로 작성해둘 때부터 이런 상황이 올 것은 충분히 예측하고 있었다.

아마 예산안 작성을 모르고 있었다 하더라도 이리 회의를 소집한 이상 '전쟁'과 관련된 내용일 것은 충분히 예측했을 것이다.

'그' 황제이지 않은가.

제 핏줄을 모조리 베어 넘기고 올라온 자가 군주로서의 자격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쥐고 있던 검 끝을 외부로 돌리는 것이다.

정복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

'그것이 그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고, 또─'

─패륜황제보다는 정복황제로 기억되는 것이 훨씬 나을 테니까.

'정복황제는 그래도 영토를 넓혔다는 칭찬 거리가 있으니....'

"공작 각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 생각 말입니까?"

문득 던져진 질문에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폈다.

귀족파는 물론, 황제파조차 자신의 대답이 궁금하다는 듯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예, 폐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실지...."

"글쎄요. 폐하의 깊은 속을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아...."

내심 기대했던 모양이다. 무언가 알고 있다는 듯, 의뭉스러운 몸짓과는 달리 모른다는 대답이 돌아오자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입 밖으로 나온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이들이 아니다. 저들의 눈에는 미묘한 확신과 의심이 서려 있었다.

이쯤에서 적당히 응해줘야겠지.

여전히 의뭉스러운 미소를 보이며, 공작이 흘리듯 툭 덧붙였다.

"다만 최근 들어 이레온 왕국이 계속 시비를 걸고 있다던데, 그것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지."

회의장에 싸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침묵이 기꺼워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은 것도 잠시, 조심스러운 부름에 공작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 말은… 전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씀이십니까?"

"그저 추측일 뿐이지요."

대놓고 긍정하진 않았지만 부정은 결코 아니다.

긍정의 의미가 가득한 대답에 회의장의 사람들이 입을 다문 순간, 문밖에서 황제의 등장을 알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서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고 네메세우스를 대동한 황제가 들어선다.

걸릴 것 하나 없다는 듯 정면을 향해 성큼성큼 나아가는 걸음과 그의 사나운 기세에 움찔한 것도 잠시, 모두의 입에서 일괄된 인사가 흘러나왔다.

"제국에 광명을."

"모두 앉지."

낮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척 듣기에도 심기 불편한 목소리에 자리에 앉은 이들이 반사적으로 황제의 표정부터 살폈다.

무표정.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서늘한 느낌의 무표정이다.

지금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 수틀리면 목부터 날아가는 황궁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눈치껏 황제의 기분을 파악하고 내심 마음을 다잡았다.

입 잘못 놀리면 죽는다. 최대한 다물고 있자.

"일단, 바쁜 와중에도 갑작스러운 회의에 참여해 준 그대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그야, 몇 년 전에 한 명이 바쁘다는 이유로 불참했다가 작위를 잃은 적이 있으니....

"모두 각자의 일을 하다가 급히 왔겠지. 그 점을 감안해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

"지금부터 삼일 뒤, 짐은 전쟁을 선포할 예정이다."

"...!"

68. 선전포고(3)

이건 회의가 아니라 선언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어이가 없을 지경인데, 심지어 삼일 뒤라니. 이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최대한 입을 다물고 있자고 다짐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무수히 많은 말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폐하께서 종전을 선언하신 것이 불과 2년 전입니다. 어찌하여 또 전쟁을 하신단 말씀이십니까!"

"짐이 종전을 선언한 이유는 더 이상 기어오르는 왕국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과 2년 사이에 제국의 공포를 잊은 왕국이 생긴 모양이더군."

이레온 왕국.

황제가 손가락을 튕기자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각 귀족들 앞에 서류를 내려놓는다. 이를 읽은 이들이 나직이 신음했다.

확실히 제국이 잘못했다 할만한 것은 없다. 하지만 그래도 전쟁은 아니다. 얻는 것보단 잃는 것이 더 많지 않나.

이득에 눈이 먼 어리석은 왕국을 향해 이를 갈며 어떻게 황제를 설득할지 고민하는데, 그들의 귀에 조금 전보다 더 충격적인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리고 기왕 전쟁을 치르는 것이니, 이참에 짐은─"

"...."

"─대륙정복을 목표로 움직일 생각이다."

"!?"

"이미 오래 전부터 생각해왔던 일이다. 이레온 왕국을 쓸어버리는 김에 한 번에 끝내버리는 것이 낫겠지."

"폐하! 그게 무슨…!"

오래 전, 군주의 자리에 오른 순간부터 정한 목표다. 대신들이 뭐라 하건 황제는 물러설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지금 상황에서 건방진 것은 이레온 왕국만이 아니니까.

데온 하르트의 부상 소식이 물밑에서 소리 없이 퍼진 이후 제국을 대하는 다른 왕국들의 태도에 여유가 생겼다.

그 정도인 것이다. '데온 하르트'라는 이름의 무게가.

'그럴 만도 하지.'

난세는 영웅을 낳는다.

8년이라는 긴 전쟁 기간 동안 수많은 '영웅'들이 탄생했고, 그 명성이 의미 없을 정도로 허무하게 죽어 나갔다.

전쟁이 끝난 당시 살아남은 이들은 고작 세 명뿐.

데온 하르트는 이들 중 가장 늦게 영웅으로서 명성을 떨친 동시에, 가장 유명했다.

각자가 맡은 지역이 있던 다른 영웅들과 달리, 전쟁 내내 다양한 지역을 돌아다니며 선봉장으로서 활약했기 때문이다.

본래 이는 당시 데온 하르트를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었기에 실행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예상치 못한 효과를 드러냈다.

다름 아닌 '데온 하르트'에 대한 공포.

그렇지 않아도 붉은 눈과 흰 머리라는 독특한 외모를 소유한 그다.

이것은 소문이 퍼지는 와중에 변질되어 적들에게 악마 그 자체로 알려지게 되었다. 단순히 독특한 것만이 아니라 훈훈하기까지 한 외모로 아군에게도 여러 의미로 유명세를 끈 것은 덤.

어떤 의미로 알려졌건, 그의 '유명세'는 존재만으로도 적들의 기세를 반쯤 꺾어놓았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의식 중에 '제국 전력의 대부분은 데온 하르트가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니 데온 하르트의 부상 소식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다른 왕국들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어 올릴 만도 했다.

'사실이 아니니 상관은 없지만.'

귀찮다.

기가 살아날 때마다 짓밟아 눌러주고, 또다시 고개를 들고, 눌러주고....

어차피 대륙 정복이 목표인데 굳이 이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러니 이참에 모두 끝내자.

그렇게 내려진 결론이었다.

당연히 다른 대신들은 기함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물건 사러 가는 김에 건물도 산다는 말이나 다름없지 않나!

말려야 한다.

생각이 바뀌었다. 이레온 왕국과의 전쟁은 어쩔 수 없다 쳐도 대륙 정복만큼은 막아야 한다.

희게 질린 귀족들이 앞다투어 입을 열기 시작했다.

"대륙 정복은 아직 이릅니다! 준비할 것도 상당하고, 예산도…!"

"기본적인 준비는 이미 전부 끝냈다."

도대체 언제 준비한 건지, 깔끔하게 정리된 예산안이 각 귀족들 앞에 놓였다.

"전쟁은 제국에도 큰 피해를 입힐 겁니다! 꼭 적들이 우리 영토에 들어와 짓밟아야만 피해가 생기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제국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짐이 그것도 고려하지 않았을 것 같은가."

"아직 혁명군을 뿌리 뽑지 못했습니다! 내부에 적을 둔 채 전쟁을 치르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래서 짐이 그대들을 부른 것이다. 방안을 마련해야 하지 않겠나."

"아직 8년 전쟁의 여파가 완전히 수습되지 않았습니다. 제국민들이 불안해할 겁니다. 제국의 안정을 생각하셔서라도...."

"8년 전쟁 때 적들이 제국민들의 터전까지 밀고 들어온 적이 있었던가. 이번에도 그들은 안전할 것이다."

"하, 하오나... 심리적인 불안감이...."

그 뒤로 나온 말들은 대부분 엇비슷했다.

제국을, 제국민들을 생각해서라도 대륙 정복만큼은 보류해달라, 뭐 그런.

귀족들은 황제가 우선시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책임.

에도아르도 데세르트는 의무와 책임을 중요시 여긴다. 황제가 된 이상 그는 내키지 않을지라도 제국을 책임지고 제국민들을 돌보는 일을 절대 소홀히 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폭군이라 칭하는 것과 어울리지 않는 행보였다.

그러니 제국과 제국민들을 들먹인다면 조금은 다시 생각해줄지도 모른다 생각했으나, 황제는 역시 강적이었다.

"제국을 위해서, 라고?"

서늘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던 목소리가 삽시간에 사그라들고, 황제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다. 귀족들을 둘러보는 그의 금안은 자존심이 건드려진 맹수처럼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무언가 잘못 되었음을 피부로 느끼고 실감한 순간, 황제가 으르렁거리듯 공작을 불렀다.

"일루스터 공."

"예, 폐하."

"황제를 향해 하는 인사가 무엇이었지?"

...아아.

공작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일을 이런 식으로 해결하려 하다니.'

이렇게 나오신다면야, 이용당해드려야지요.

우아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가슴에 손을 얹고 황제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입에서는 옅은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가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신 스타베 일루스터가 '현재의 제국'을 뵙습니다."

"그래."

당연하다는 듯 황제가 시선을 뗀다. 그대로 얼어붙은 귀족들을 둘러보며 머릿속에 되새겨주듯 강하게 말한다.

"짐이 곧 제국이다."

"...."

"제국을 걱정하는 것에 대한 짐의 대답을 들었음에도 계속하여 이를 언급한 것은 짐의 말이 말 같지 않다는 뜻인가?"

"다, 당치도 않습니다!"

"저희는 단지 충심으로...."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긴장감이 회의장을 짓누르자 여기저기서 필사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황제가 분노를 터트리면, 반드시 누구 하나는 죽어 나간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제 목이라도 날아갈까 추스르는 기색이 역력해 황제는 잠시 입을 다문 뒤 한층 누그러진 기색으로 천천히 입을 뗐다.

"경들의 충심은 잘 알고 있다. 하나 짐을 모욕하고 싶지 않다면 이 이상의 말은 삼가는 편이 좋겠군."

"명심하겠습니다."

귀족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내심 한숨을 삼켰다.

완전히 말려들었다. 이렇게 되면 황제를 설득하는 것은 물 건너간 셈이다. 황제도 이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을 터.

역시나 황제가 할 말은 다 했으니 이만 회의를 파하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못을 박듯 말했다.

"전쟁은 확정되었다. 이후 한 번 더 회의를 열 테니 그대들은 그때까지 혁명군에 대한 방안을 마련해오도록."

"...명을 받듭니다."

"그리고 일루스터 공."

저를 향한 황제의 시선을 마주하며, 공작이 소리 없이 입꼬리를 올렸다.

회의는 끝났다. 모여들었던 귀족들은 저마다 심각한 표정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회의장은 텅 비었다.

본래 그들 사이에 섞여서 돌아갔어야 할 공작은 다른 방에서 황제를 마주하고 있었다.

여전히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는 공작을 매서운 눈으로 보던 황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작."

"예 폐하."

"덕분에 구원교의 배후를 잡을 수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일단 감사를 표하지."

"그것은 제가 아니라 크루엘 경이 한 것입니다."

역시나 고작 그 정도로 쉽게 넘어가진 않는다. 황제는 조용히 미간을 찌푸리며 공작을 똑바로 노려봤다. 공작 역시 지지 않고 웃는 얼굴로 마주했다.

허공에서 두 시선이 맞부딪쳤다.

어느 누구도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있길 한참, 여전히 공작을 노려보며 황제가 짓씹듯 말을 뱉었다.

"공교롭게도 그 배후가 귀족파 내에서 공과 대립하던 자더군."

"그래도 귀족파는 귀족파입니다. 전력 손실을 어느 누가 반기겠습니까. 같은 귀족파로서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지요."

웃기는 소리.

공작은 자신에게 반(反)하는 자를 가만두지 않는다. 대놓고 황제파를 노릴 수는 없으니 귀족파 내에서 거슬리는 자를 골랐겠지. 뻔한 일이다.

조금 더 떠볼까.

상대에 따라 몰아붙이는 꼴이 될 수도 있지만, 공작이라면 분명 유들유들하게 빠져나갈 것이다. 제아무리 몰아붙여도 떠보는 꼴밖에 되지 않겠지.

하지만 그 떠보는 것조차 지금은 도움이 되기에.

"최근 들어 재미있는 이야기가 들리던데."

황제는 입을 열었다.

"황제는 '죄악'이요, 공작은 '구원'이랬던가."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몽매한 자들의 헛소리입니다. 구원교도 소탕되었으니 이제 굳이 신경 쓰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차앙!

한순간이었다. 공작은 입을 다물고 조용히 시선을 내려 제 목을 겨눈 그것을 확인한 뒤 다시 황제를 쳐다봤다.

제 뒤에 있던 네메세우스의 검을 빼든 황제가 공작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그는 드물게 빈정거리듯 입꼬리를 올리며 검을 살짝 추켜올렸다. 덩달아 공작의 고개 역시 올라갔다.

"확실히 헛소리지. 짐은 '죄악'보다는 '재앙'에 가까울 터이니. 그렇지 않은가, 공작?"

"...."

입을 다물자 한순간 황제의 표정이 변했다.

언제 웃었냐는 듯 살기 가득한 표정으로, 금방이라도 죽일 듯이.

"짐이 그리도 우습게 보이더냐."

분노 가득한 음산한 목소리가 떨어져 내린다. 황제의 몸에서 나오는 살기가 공기를 짓누르고 있었다.

주륵.

검이 파고든 환부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보라색 눈동자가 아래로 내려가 그것을 확인하더니 이내 황제에게 고정된다.

공작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폐하께서는, 저를 죽이지 못하십니다."

재앙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눈앞의 황제는 사람을 가린다.

고로, 너는 재앙이 아니다.

그렇기에 내가 너의 권력을 탐하는 것이다. 재앙을 상대로는 알력 다툼이 아무 소용 없으나 너를 상대로는 가능하니.

"...공은 짐이 이미 한 개의 공작가를 밀어버렸다는 사실을 종종 잊는 것 같더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마지막 남은 공작가라 하여 짐이 망설일 것 같으냐."

"그 이유 때문에 망설이지는 않으시겠지요. 하나, 그럼에도 폐하께서는 저를 죽이지 못하십니다."

굳이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네겐 나를 죽이지 못할 이유가 많다.

'짐이 못 죽일 것 같으냐.'

'못 죽입니다.'

무수히 많은 눈빛이 오간다. 분노에 가득 찬 황금빛 눈을 마주하며, 공작은 보란 듯이 웃었다.

나를 죽이면 넌 상당히 귀찮아질 것이다. 수많은 귀족들의 반발을 사야겠지. 힘으로 누르는 것도 한계가 있다.

전쟁을 하고 싶겠지. 대륙 정복을 하고 싶겠지. 그러기 위해서는 내부의 안정부터 꾀해야 한다.

그런 네가, 나를 죽일 리가 없지 않은가.

'노려도 전쟁 중에 노리겠지.'

물론 그마저도 쉽진 않겠지만.

검을 거두느냐, 그대로 베어버리느냐.

한참의 기싸움 끝에, 결국 먼저 물러선 쪽은 황제였다.

그는 검을 거둬 네메세우스에게 다시 건네며 씹어뱉듯 말했다.

"짐더러 죄악이라더니, 죄악은 따로 있었군."

69. 굴러가는 수레바퀴(1)

황제, 전쟁, 대륙 정복, 마계, 감시, 시바아알…!

백작저로 돌아온 나는 집무실 책상에 얼굴을 박고 연신 욕을 읊조렸다.

미친 놈들이 득실거리는 그곳으로 다시 가야 한다니!

황제의 명을 거역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황제와 마왕의 손에서 평생을 도망다닐 정도로 내 각오가 굳건하지 않기에 결국 나는 퀭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짐이나 싸야지.'

또다시 시한폭탄 같은 놈들을 주위에 끼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위장이 쓰린 기분이지만 뭐 어쩌겠어. 상대가 황제랑 마왕인데. 하하하. 하하하하.

...시발.

"으으으...."

"저, 마스터…?"

"...?"

"돌아오셨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습니다만… 어디 아프십니까?"

이 지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외모의 사내가 문밖에서 고개만 들이민 채 눈치를 살핀다.

검은 머리와 검은 눈. 이쪽 북부인보다는 남부인에 가까운 외모.

그러니까… 이름이 단이랬나? 주술사의 마을에서부터 날 따라와 검을 배우고 있는… 그런데 왜? 뭔가 문제라도 생겼나?

"아니, 괜찮아. 무슨 일이지?"

곧장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허리를 펴고 대응했다. 그런 내 태도가 황당했는지 잠시 침묵하던 그가 이내 천천히 입을 연다.

약간의 망설임을 담고 열린 입술이 머뭇머뭇 말을 뱉었다.

"저...."

"백작님!"

저런. 나름대로 각오를 하고 입을 연 것 같았는데.

나는 삽시간에 말이 잘려버린 그를 향해 속으로 혀를 쯧쯧 차고는 갑작스럽게 난입한 시종을 쳐다봤다.

따로 질책은 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하얗게 질린 저 얼굴이 퍽 안쓰럽거든. 여기서 나까지 혼냈다간 심장마비로 죽을 것 같달까.

게다가 우리 백작저 사용인들은 나를 향한 예의만큼은 철저하게 지키려 노력하니까.

그러니 예의조차 잊을 정도로 무언가 큰일이 터졌다는 뜻일 것이다.

...젠장.

"화, 화, 화화화...."

"화, 뭐?"

"황태자 전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오, 황태자 전하가? 거봐, 큰일 맞잖아.

아니 잠깐만.

...황태자가?!

"또 왜!!"

"히익!"

왜 또 기별도 없이 찾아온 건데!

책상을 쾅 짚으며 벌떡 일어섰다. 최소한의 예를 갖추기 위해 겉옷을 걸치며 어느새 옆에서 패닉이 된 채 '죄송합니다'를 주문처럼 외우고 있는 시종에게 시선을 던졌다.

"황태자 전하께선 어디에 계시지?"

"죄송합니다! 예? 아니, 으, 응접실에 계십니다. 집사님께서 대접하고 계ㅅ…"

어쩐지 웬일로 레멤베르가 아닌 다른 이가 보고를 하러 왔다 했더니 상대가 황태자여서 그런 거였구만.

시종의 말을 더 들을 것도 없이 서둘러 걸음을 뗐다.

뒤에서 눈만 굴리며 눈치를 살피는 단의 존재는 까맣게 잊은 뒤였다.

***

"신 데온 하르트가 미래의 제국을 뵙습니다."

"그래,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갑작스러운 방문일 텐데도 차분하게 인사해오는 데온 하르트 명예 백작을 보며 황태자 엘피디우스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도 오늘만큼은 평소보다 더 차분한 상태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부터 꺼낼 말은 조금 예민한 말이니까.

"마계에 간다지?"

"...."

순간 데온의 눈이 방 안을 빠르게 훑었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눈동자가 이내 황태자를 직시한다. 새빨간 눈과 황금색 눈이 마주쳤다.

경계심 가득한 붉은 눈을 물끄러미 본 것도 잠시, 이내 황금색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렇게 볼 필요 없네. 설마 내가 자네에 대한 비밀을 모를 줄 알았나?"

"...."

"나는 차기 황제라네. 나이가 나이인 만큼 내가 황제가 된다면 정당한 절차를 밟는 것이 아닌 폐하께 변고가 있어 갑작스럽게 그 자리를 물려받는 것이 될 테지. 그러니 언제, 어느 때 황제가 되건 별 문제 없이 제국을 이끌어갈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철저히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

다시 말해 황제가 모든 주요 정보를 공유해주고 있다는 뜻이 된다.

"...실례했습니다."

"아니야. 경계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지."

아무튼─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다리를 꼬았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폐하께서 미처 하지 못한 말을 전할 겸, 자네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라네."

"...."

"당분간 못 볼 얼굴, 지금이라도 실컷 봐두어야 하지 않겠나."

무언가 반대로 말한 것 같지만 사실이다.

하르트 명예 백작이라면 굳이 이 말을 전하지 않았어도 알아서 잘 했을 테니까.

그의 머리가 보통 이상임을 알고 있는 엘피디우스는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더하며 느긋이 입을 뗐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폐하께서는 만일 마왕이 전쟁을 결정하면 곧바로 복귀하라 하셨네."

"알겠습니다."

"그 무슨 일이 있어도."

"...."

"반드시 복귀하라 말씀하셨지."

데온은 황태자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어쩐지 섬뜩하기까지 한 붉은 눈이 미동도 없이 엘피디우스를 향한다.

이번만큼은 엘피디우스도 피하지 않았다. 웃음기 하나 없는 맹수의 것과 닮은 황금색 눈동자가 시선을 맞받아친다.

얼마간의 침묵 끝에 먼저 물러선 쪽은 데온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순순한 대답과 달리 두 눈은 기묘하게 빛난다.

이내 아래로 내리깔려 소리 없이 감춰진 눈빛을 황태자는 조용히 지켜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네의 노고에 언제나 감사를 표하는 바네."

***

엘피디우스는 데온 하르트 명예 백작에 대해 관심이 많다.

그것은 긍정적인 의미이기도 했고,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도 했다.

데온 하르트가 누구던가.

결코 좋지 않은 칭호와 '영웅'이라는 칭호를 동시에 가졌으며, 마왕을 막아서고 용사의 시신을 수습한 자가 아닌가.

'또한,'

마왕군의 군단장인 자.

그래, 무려 제국의 영웅인 동시에 마왕군의 군단장인 자다.

그렇기에 차기 황제인 엘피디우스로서는 그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고 있어야 했다.

제가 다룰 검에 대해 잘 모른 채 휘둘렀다간 되레 자신이 다칠 수도 있으니까.

'강압적인 관계보다는 친근한 관계를 맺고 싶은데.'

유대감은 그 어떤 것보다도 든든한 족쇄가 된다.

황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엘피디우스는 데온 하르트의 배신을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기반이 이곳에 있는 만큼 그럴 가능성은 적겠지만, 만약 저쪽에서 '인간계'의 장점을 뛰어넘을 정도의 환경과 이득을 제공한다면....

"오라버니! 하르트 백작은 잘 만나고 오셨나요?"

"...알레테아."

"저는 쏙 빼놓고 말이죠."

저도 백작님 보고 싶은데-.

상념은 거기서 멈췄다. 곧장 다정한 미소를 띤 엘피디우스가 성큼 제 동생에게 다가갔다.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해서 어쩔 수 없었다. 그러게 네가 황태자가 되지 그랬니."

"그런 귀찮은 자리는 사양이네요. 오라버니나 하세요."

뒤따르던 시종에게 정원에 티테이블을 준비하라 명한 그가 알레테아의 걸음에 속도를 맞춰 걸으며 정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걸음을 유도하며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그가 한 단계 소리를 낮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알레테아, 숙부님과 나 다음은 너란다."

"알아요. 그래서 배울 건 다 배우고 있잖아요. 오라버니는 뭐가 그렇게 조급하세요?"

"...."

내가 조급했던가?

어쩐지 정곡을 찔린 듯한 기분에 엘피디우스가 입을 다물었다.

생각하고 보니 최근 들어 조급해하긴 했다.

이전에 하르트 명예 백작에게서 인도받은 혁명군은 끝끝내 본거지 불지 않은 채 죽어버려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한 데다 그렇게 혁명군이 멀쩡히 버티고 있는 상태에서 숙부님은 전쟁까지 선포하셨으니.

게다가....

생각보다 침묵이 길어진 듯 어느새 정원에 도착했다.

준비된 티테이블에 앉아 주위를 깔끔하게 물린 엘피디우스가 그제야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을 천천히 뗐다.

그를 조급하게 만든 가장 큰 문제.

"숙부님께서 환각을 보신다."

황제의 상태가 생각보다 좋지 않다.

황제가 악몽을 꾸고 있음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태의를 부르려 했으나 숙부의 단호한 거절에 어쩔 수 없이 두고 보았을 뿐.

그랬더니만 설마 환각으로 이어질 줄이야.

하긴, 제법 오랜 시간 악몽을 꿔 왔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황제의 악몽은 그가 군주의 자리에 올랐을 때부터 시작되었으니까. 그것은 8년 전쟁을 치르며 극도로 심해졌고.

'결국 이렇게....'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아니, '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알면서도 태의를 부르지 않았다는 자신의 '행동'이지.

죄책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여전히 태의를 부를 수 없었다.

"네? 아니, 도대체 언제부터… 아니 그 전에 태의는, 태의는 부르셨나요?!"

"숙부님께서 거절하셨어."

"그렇다고 그냥 그대로 둘 수는!!"

"숙부님의 고집을 내가 어떻게 꺾겠니."

그깟 이미 죽은 자들이 무어라고.

살아있는 자신의 숙부가 몇 배는 더 소중하기에 낮에 다시 그를 찾아가 재차 설득을 시도했었다. 진즉에 했단 말이다.

그러나 숙부는 단호했다.

"숙부님의 병적인 책임감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야."

"말은 바로 하셔야죠. 책임감이 아니라 죄책감이에요."

"그래, 죄책감."

정확하게는 죄책감과 책임감의 지랄맞은 조화라 할 수 있겠지.

죽은 자들에 대한 책임까지 짊어지려던 숙부를 떠올린 엘피디우스가 조용히 한숨을 삼키고 드물게 굳은 표정의 알레테아를 보았다.

"알겠지, 알레테아? 우린 시간이 없어."

서두르지 않아 생길 문제는 크지만 서둘러서 나쁠 것은 없다.

환각 문제를 알아챈 그 날부터 황태자는 황제로부터 거의 모든 인수인계를 끝마쳤다. 언제 문제가 터져도 곧바로 자리를 이어받아 일 처리를 이어갈 수 있도록.

──적어도 황제가 다른 문제에 신경쓰지 않고 마음껏 전장에서 날뛸 수 있도록.

이제 남은 것은 데온 하르트에 관한 문제 뿐.

아무것도 몰랐던 처음에는 단순히 숙부님의 신임을 얻는 자라 생각하고 접근했다. 황태자로서 친분을 쌓아둬서 나쁠 것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모든 정보를 공유받은 지금으로서는 시선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군단장이라니. 이중첩자라니.'

물론 그 뒤로도 평소와 다름없이 아무렇지 않게 접근했지만....

시선이 달라지고 보다 더 그를 자세히 살피게 된 오늘, 미묘하게 신경에 거슬리는 것이 생겼다.

'정확하게는 발견했다고 해야겠지.'

정체를 확언할 수 없는, 어쩐지 위화감 가득한 구석이 있어 아직 완벽하게 정의하지 못한 그에 대해 떠올리며 엘피디우스는 중얼거리듯 말을 맺었다.

"...그러니 알레테아 넌 지금 배우고 있는 것에 집중해라. 나는 나대로 노력할 테니."

"상황이 상황인데, 최소한 전쟁이라도 말려야...."

"지금까지 우리의 설득이 먹힌 적이 있었니?"

"...."

확실히.

그 말대로 자학에 가까운 황제의 행동을 둘은 몇 번이 말리고 막으려 든 적이 있었다.

그때 성공했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도 않았겠지.

알레테아의 어깨가 축 처졌다.

"...노력할게요...."

직접적으로 숙부를 위할 수 없다면 간접적으로나마 돕는다.

알레테아와 엘피디우스에게 있어 에도아르도 데세르트는 세상을 적으로 돌려도 상관없을 정도의 소중한 가족이기에.

[미안하다.]

아직도 귓가에 생생한 숙부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날과는 달리 지독하리만치 맑고 깨끗한 하늘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내 탓이다. 전부 책임지겠다.]

'아니요,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제와서 속으로 답한들 뭐가 달라질까.

사과하지 않아도 될 것을 사과하고, 책임지지 않아도 될 것을 책임지려 하는 숙부의 목소리에 이제서야 속으로 답하며 엘피디우스는 태연히 식은 찻잔을 들어 올렸다.

시간은 그때로부터 한참이 흘렀고, 자신들의 숙부는 책임지지 않아도 될 것을 책임지려다 끝내 더 큰 책임을 떠안게 되었다.

그때는 모두가 어렸다. 단지 황궁에서 어린 것은 죄가 되었을 뿐.

──차가 떫다.

70. 굴러가는 수레바퀴(2)

의미심장한 말만 남긴 채, 황태자가 떠났다.

황태자를 배웅하고 집무실로 돌아온 데온은 책상 앞에 앉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서류를 들었다. 태연한 태도와 달리 서류를 보는 그의 시선은 초점이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번들거리는 새빨간 눈으로 서류 한구석을 노려보며, 데온이 생각했다.

'뭘 알고 있는 거지?'

그리고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황제는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전하게 했을까.

"...마스터?"

"...."

상념을 깨뜨리는 목소리에 순간 굳은 그가 이내 작은 한숨과 함께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얼마나 정신이 팔려 있었으면 존재조차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표정 없는 얼굴로 단을 쳐다봤다.

무미건조한 시선이 이쪽을 똑바로 향하자 소파에서 엉거주춤 일어나 조심스럽게 그를 살피던 단이 작게 움찔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괜찮으십니까?"

그의 목소리는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 저택에 머물며 다양한 기술을 배우는 동안 저택 주인의 성격이 극과 극을 오간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다.

실제로 그에게 대뜸 저를 거두어달라 말했을 때, 그러한 면모를 직접 보기도 했었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차원이 다르다.

심기가 불편한 듯 은연중에 흘러나오는 분위기가 날카롭게 벼려져 모든 것을 찢어발길 듯 사방을 겨누고 있었다.

말문을 떼기가 무섭게 수많은 칼날이 이쪽을 겨누는 듯한 기분은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러고 보니 할 말이 있다고 했었지."

"네? 네!"

"말해봐."

"다름이 아니라...."

이런 분위기의 그에게 과연 이 말을 꺼내도 될 것인가.

몇 번이고 꺼낼 말을 입안에서 굴리며 말할지 말지 고민하던 단은 결국 데온의 눈초리에 못 이겨 두 눈을 질끈 감고 입을 열었다.

"돈을… 빌려주셨으면 합니다."

"...뭐?"

황당함을 가득 담은 음성이 돌아왔다.

이렇게 된 거, 말은 확실히 끝맺어야 한다. 이대로 멈춰버리면 엄청난 오해만 사게 될 테니까.

단이 황급히 말을 덧댔다.

"돈에 욕심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저는 그저...."

"...?"

"...돈을, 굴려보고 싶습니다."

데온의 고개가 기울었다.

돈을 굴림으로써 들어오는 모든 수익을 제게 주겠다는 단의 말을 말없이 듣던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무실 책상을 빙 돌아 나와 단의 맞은편 소파에 앉아 천천히 다리를 꼬고 고개를 갸웃하며 입가를 매만진다.

얼핏 천진해 보이기까지 한 행동이었으나, 이어서 나온 목소리는 소름 끼칠 만큼 낮았다.

"원래부터 돈을 굴릴 줄 알았나?"

"...아니요."

"그렇다는 것은 이곳에서 배웠다는 뜻일 텐데. 이상하네? 네가 배우고 싶다는 것은 분명 검술이었을 텐데. 내가 잘못 들은 걸까, 아니면 집사가 내 말을 어긴 걸까?"

새빨간 눈동자가 핏빛으로 빛난다.

그 속에서 슬그머니 드러나는 미친 자 특유의 눈빛에 단이 잠시 숨을 멈췄다.

마주하는 것만으로 숨통이 조이는 듯한, 음습하고 진득하며 소름 끼치는 온갖 감정이 뒤섞인 눈빛.

숨을 멈춘 것과는 별개로, 그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거짓 미소가 아니다. 진심이 담긴 미소에 데온의 눈매가 가늘어졌으나 단은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정말로 기뻤으니까.

'재앙이라면 응당 이래야지.'

역시 나는 틀리지 않았다.

남아 있던 일말의 의심조차 날려버린 단이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몸을 떨고 있을 때, 데온이 꼬았던 다리를 풀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맹수가 먹잇감을 향해 나아가듯 테이블을 짚고, 상체를 그 너머까지 들이밀어 단의 얼굴 가까이에 제 얼굴을 가져간다.

단의 시야를 가득 차지한 붉은 눈동자가 슬며시 휘어진 눈꺼풀 사이로 숨어들었다.

"네 목적이 뭔지 생각해봤어. 넌 나를 따르겠다 했으면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지."

"...."

"지금도 마찬가지야. 기껏 와서 부탁한 것이, 돈을 굴려보고 싶다고? 그걸로 버는 수익은 모두 내게 주고?"

이런 건 '바라는' 수준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그의 눈에 담긴 감정이 마음에 들어 받아들이긴 했으나 그렇다고 마냥 아무 생각 없는 것은 아니었다.

생판 남을 아무 이유 없이 따를 리가 없다.

데온은 그 진리와도 다름없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두 가지 가정을 꺼내 들었다.

"지금까지 나온 추측은 두 가지야."

"...."

"네가 요구할 것이 너무 큰 나머지 일단은 신뢰부터 쌓으려는 것일 수도 있고─"

"...."

"아니면 나를 따르는 것 자체가 네 목적일 수도 있을 테지."

그리고 지금, 그의 미소를 보고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느릿하게 숙였던 상체를 펴고 제자리로 돌아간 데온이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다. 입가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린 채였다.

"네가 이 저택 사용인들을 어떻게 꼬여내서 무엇을 배웠는지 캐묻진 않겠어."

"...!"

"그보다, 돈을 굴려보고 싶다고 했지?"

***

한쪽 옆구리에 서류를 낀 레멤베르가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황태자의 방문에 대한 충격에서 아직 못 벗어난 탓에 정신 놓고 멍하니 있던 내게 군더더기 없는 태도로 인사를 올린 그가 갑자기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이 늙은이를 불렀다는 것은 결론이 내려졌다는 뜻이겠지요."

"?"

"아무래도 투자를 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을 것 같은데, 맞습니까?"

"...투자?"

가출했던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다. 갑자기 투자라니?

이거 정신 놓고 있다가 졸지에 웬 날벼락을 맞게 생겼다.

투자 한 번 잘못하면 골로 간다는 건 투자에 관심 없는 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인데, 이게 무슨....

좀 더 자세히 캐물으려는데, 내 말을 가로채는 이가 있었다.

"네, 마스터께서 제게 돈을 맡기겠다 하셨습니다."

깜짝이야! 단이랬나?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던 거지? 아니, 그보다....

내가 그랬다고?!

"그렇군요. 나쁘지 않은 판단입니다. 단의 실력은 제가 직접 확인했으니 말이지요."

이 사람들이 나를 빼놓고 뭔가 굉장히 중요할 것 같은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미친 척 끼어들어서 막아야 하나?

상황 파악을 위해 눈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던 찰나, 내 시선을 확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바로 레멤베르의 옆구리에 끼워져 있는 서류.

양이 미칠 듯이 많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서류… 양이 적어 보이는데...."

"아, 이것 말씀이십니까. 모두 저 단이라는 사내 덕분입니다."

또 단이다.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사뭇 경계하던 초반과 달리 단을 따스한 눈으로 보며 레멤베르가 시키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밀린 서류를 보더니 도움이 되고 싶다며 가르침을 청하길래 기본적인 것만 가르쳤는데, 일 처리를 아주 잘하더군요."

그렇게 말하며 어째서인지 날 쳐다본다.

어쩐지 '백작님보다도 말입니다' 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그래서 호의적이었냐?! 처리할 서류가 줄어들어서?

"심지어 비효율적인 체계를 골라내 좀 더 효율적으로 바꾸기까지 했습니다. 그 결과가 이겁니다."

그의 손가락이 내 앞에 놓인 서류 뭉치를 가리켰다.

이전과 달리 4 - 5 시간이면 충분히 처리 끝낼만한 양의 서류 뭉치.

...설마.

고개를 번쩍 들었다. 흐뭇한 표정의 레멤베르와 눈이 마주쳤다.

괜히 기대했다가 실망할까 봐 직접 묻는 대신, 나는 조심스레 눈빛으로 물었다.

'설마, 이게 끝?'

'예, 그렇습니다.'

"...합격."

절로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레멤베르가 왜 그렇게 호의적이었는지 이해된다.

이런 녀석은 반드시 붙잡아야지! 놓치는 놈은 붙잡아서 양 싸대기를 날려야 한다.

"그러니까… 돈을 맡겨달라고?"

"네."

"알았어. 어디 한 번 마음대로 해 봐. 예산은 레멤베르가 배정해줄 거야."

"아…! 감사합니다. 절대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럼 나가봐."

성공하든 실패하든 상관없다. 레멤베르가 어련히 알아서 잃어도 타격 없을 만큼의 돈을 주겠지.

그보단, 레멤베르가 나가지 않고 있는 것을 보니 할 말이 있는 듯 싶은데.

아니나 다를까, 마지막까지 감사 인사를 하며 단이 나가기가 무섭게 레멤베르가 한껏 얄팍해진 서류를 집무실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양이 적어졌다고는 하나 서류 작업이 싫은 것은 결국 매한가지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그 앞에 앉았다.

맨 위의 서류를 집어 들자 곧장 레멤베르의 설명이 들려왔다.

"하르트 영지에 대한 인수인계는 모두 마쳤습니다."

"아...."

할 말이 이거였나. 곧바로 내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빼앗아가는 주제에 인수인계까지 절차대로 하다니. 기분이 더 더럽다. 마치 내가 동의한 것 같지 않나.

'아니 동의한 건 맞긴 하지만, 그래도.'

더 듣기 싫어 대충 고개만 끄덕이고 화제를 돌렸다.

그래도 집사인데 어디 간다는 말은 해두어야지.

마계에 간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소리소문없이 훌쩍 사라질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한동안 또 자리를 비울 예정입니다."

"그러십니까. 이제야 예전의 백작님의 모습을 되찾으신 것 같은데, 아쉽군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 왜 내 다크서클을 보는 건데. 피로에 찌든 모습이 내 원래 모습이냐?

그래도 어디를, 무슨 목적으로 가는지 묻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다시 거뭇해진 눈가를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삼켰다.

"준비되는 대로 출발할 겁니다. 그러니 최대한 빨리 준비해주세요."

"예상 이동 시간은 저번과 같게 하면 되겠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대로 돌아나가려던 레멤베르가 뭔가 깜빡했다는 듯 '아' 하는 탄성을 뱉으며 다시 돌아섰다.

"그리고 백작님께서 들이신 저 단이라는 사내 말입니다."

"...네에."

내가 투자까지 하게 만든 그 단 말이죠.

검만 배운다더니 서류 작업까지 배우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투자까지 하게 만든 '그' 단 말이지요오.

물론 그 녀석이 회계를 배운 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다시 생각해보니 왠지 낚인 기분이랄까. 아무튼 좀 미묘한 심정이다.

"백작님의 명대로 수상한 점은 없는지 감시했습니다만, 별다른 이상 행동은 보이지 않더군요."

"예?"

"아직 신뢰를 쌓는 시기라 그런지, 아니면 정말 아무것도 없는 건지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만...."

"예?"

"이 늙은이의 개인적인 견해로는 아무래도 후자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잠깐만. 내가 명령했다고? 감시를? 도대체 언제?

그리고 집사님, 댁의 '개인적인 견해' 말입니다. 정말 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로군요. 눈빛에서부터 호감이 뚝뚝 묻어나고 있잖아.

"검술에도 제법 재능이 있더군요. 천재까지는 아니지만 수재 정도는 된다고 들었습니다."

이건 거의 뭐, 손주에게 홀딱 빠진 할배의 꼴이다.

고작 서류 작업 하나로 레멤베르를 이렇게 만들다니. 그 녀석이 대단한 거야, 아니면 내가 그 정도로 서류 작업을 못 한 거야…?

"무엇보다 그가 확실하게 두각을 드러내는 쪽은 서류 작업입니다. 이건 확실히 아시겠지요."

"아… 네."

그 줄어든 서류 보고 내가 투자까지 했으니까, 뭐.

좀 찝찝하긴 하지만 후회는 없다. 이런 인재는 꼭 붙잡아야 하거든. 그가 바라는 것이 고작 돈의 일부를 맡겨달라는 것이면 더더욱.

...그런데, 조금 전까지는 레멤베르가 어련히 알아서 잘 배정하겠지 싶었다만… 이제 보니 좀 불안하다.

"아무튼 그래서 단이라는 사내, 꽤 괜찮은 아이 같습니다."

"...."

괜히 이쁘답시고 돈 왕창 쥐여주는 건 아니겠지…?

늦바람이 든 손주 바보 할배를, 난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훑을 수밖에 없었다.

71. 굴러가는 수레바퀴(3)

좀 불안하긴 하다만 어쨌든 레멤베르는 부정할 수 없는 훌륭한 집사다.

나는 집사가 은밀하고도 빠르게 준비해준 짐을 챙기고 여행용 로브까지 뒤집어쓴 뒤 저택 계단을 내려갔다.

1층에 도착하자 입구에서 말 고삐를 쥐고 대기하고 있던 레멤베르가 고삐와 함께 촉 대신 고무공이 달린 화살과 활을 건넨다. 나는 그것을 말없이 받아들었다.

갑자기 웬 활과 화살이냐 하면, 지금부터 한바탕 일을 치르게 될 테니까.

역시나, 내가 막 말 위에 올라탔을 때였다.

"백작니이이이임!!"

"가신다면서요? 우릴 버리고 가신다면서요?!"

"인사도 없이 떠나시다니,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아니, 그보다 폐하께서 다시 저희를 맡으신다던데 그것만이라도 좀 막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저 멀리서 흰 기사복을 입은 놈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튀자.

저건 미친개다. 미친개한테 물리는 일은 상상도 하기 싫다.

급히 말 배를 걷어찼다. 정문이 이미 열려있는 덕분에 도망치는 데 큰 무리는 없었다. 레멤베르, 고맙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놈들이 아니다.

순조롭게 도시를 빠져나가 벌판을 달리는데, 아니나 다를까 뒤에서 여러 개의 말발굽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백즈악니이이임!"

"거기 서시죠!"

"지금 순순히 멈춰선다면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잡아라!!"

"시발 꺼져 이 미친놈들아!!"

뒤에서 흙먼지가 자욱하게 인다. 흡사 뭉게구름과도 같은 광경에 나는 속으로 비명을 토했다.

저런 미친놈들! 리엔은 어디서 뭐 하는 거야? 네 주군이 지금 위기에 빠졌는데!

"네놈들! 당장 안 멈춰?!"

"...아."

있긴 있었구나. 쟤들이 말을 안 들었을 뿐.

우르르 달려오는 말 무리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무시무시한 기세로 쫓아오는 말을 확인한 나는 질린 표정으로 등 뒤를 더듬었다.

조금 전에 챙긴 화살통이 만져진다. 거기서 화살을 하나 꺼내 들었다.

활시위에 화살을 걸고 달리는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상체를 틀어 가장 앞에서 달리는 녀석의 말머리를 조준했다.

화살촉 대신 고무공이 달려 있으니 별 문제는 없겠지. 자칫하면 위에 있는 놈이 말에서 떨어질 수도 있겠지만 괴물 같았던 놈들을 생각하면 그리 위험할 것 같지도 않다.

지가 알아서 위험을 피하거나, 다른 놈들이 알아서 건지겠지.

"백작님!! 전 황제, 아니 황궁이 싫다고요! 폐하도 그렇고 장군님도 그렇고, 무섭으갹!"

저놈이 누구까지 같이 죽이려고!

'아차, 실수했다!'

말의 머리를 맞추려고 했는데, 놈의 이마를 맞춰버렸다!

자칫 황실 모독죄가 생길뻔한 놈의 고개가 튕기듯 뒤로 꺾였다. 고삐를 꽉 쥐고 있던 손이 일순 풀리고, 몸이 스르륵 옆으로 떨어진다.

바로 뒤에서 오는 말발굽에 짓밟힐 수도 있는 아찔한 상황이었으나 놈이 바닥에 처박히기 전에 건져 올리는 손이 있었다.

"와잣! 잡았다!"

"오, 나이스!"

"하핫...."

"하...."

"...역겨우니까 이제 그만 비키지 그래?"

"나라고 네놈 무릎 위가 좋은 줄 아냐?! 비켜! 내가 고삐 잡을 거니까!"

한쪽에서 알콩달콩 연애(?)를 하는 사이, 다른 한쪽은 난리가 났다.

주인 잃은 말의 경로가 다른 말들과 엉킨 것이다.

직선으로 달리는 멀쩡한 말 앞에 끼어들기도 하고, 그러다 다른 말과 충돌해 넘어지기도 하니 뒤에서 따라오던 다른 말들이 한꺼번에 넘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으갸아아악!!"

"후! 피했다!"

"봤냐? 내 낙법 실력?"

바닥에서는 나름대로 안전하게 착지한 놈들이 그 위로 우르르 떨어지는 놈들을 피하며 뻐기고 있고,

"멍청이들, 난 먼저 간다!"

"으럇!"

말고삐를 쥔 다른 놈들은 그런 녀석들을 훌쩍 뛰어넘어 계속해서 나를 추격한다.

내가 아는 놈들이었다면 한 명이 넘어진 순간 다른 방법은 생각도 못 하고 다 같이 우르르 넘어졌을 텐데, 저런 대처까지 할 수 있게 되다니…?!

물론 그래 봤자 일부긴 하지만, 그래도 말이지. 도대체 황궁에서 뭘 가르친 거야?

레멤베르가 화살을 넉넉히 챙겨줘서 다행이다.

집사의 훌륭한 준비성에 찬사를 보내며 나는 다시 시위를 당겼다.

***

데온 하르트가 비밀리에 황명을 받고 백작저를 떠났다.

대화를 나누던 도중 정보원을 통해 이 소식을 접한 공작 스타베 일루스터는 힐긋 상대를 쳐다봤다.

부러 그의 앞에서 정보를 전해들었다. 아마 본인의 예상이 맞다면 지금쯤 반응이....

"데온 하르트라 하셨습니까. 이번 기회에 그자가 어디로 가는지 알아낼 수 있겠군요."

역시.

"네, 사람을 붙여야겠습니다."

"각하께 수고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그간 많은 신세를 졌으니 이번엔 저희 측에서 사람을 붙이겠습니다."

의도했던 반응에 공작이 눈을 휘었다. 음흉한 보라색 눈동자가 눈꺼풀 뒤로 숨어들었다.

"신세라니요. 그리 말씀하실만한 일은 행한 기억이 없는데 말이죠."

"그리 말씀하시니 할 말이 없습니다. 그나저나… 조금 전부터 신경이 쓰였는데 말입니다. 목의 그 상처는 어쩌다 다치신 건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아."

반사적으로 붕대가 감긴 목을 매만졌다.

"별 것 아닙니다. 앙탈이 조금 심한 아이가 있어서 말이지요."

"조카가 있으셨습니까?"

"글쎄요. 그보다 아까 하던 이야기 말입니다."

영양가 없는 화제를 이어갈 이유는 없다. 공작은 노골적으로 화제를 돌렸다.

상대 역시 특별히 흥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에 순순히 바뀐 화제를 따랐다.

"아, 황제가 대륙 정복을 선언했다는 이야기 말씀이시지요? 각하를 감히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유는 여쭤야겠습니다."

"...."

"왜 움직이지 말라는 겁니까?"

공작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남자가 이유를 말해주면 경청하겠다는 듯 자세를 고치며 물었다.

괜히 혁명군의 수장이 아니라는 건지, 사람들을 이끄는 자 특유의 묵직한 분위기가 방 안을 장악한다.

황제에게서 익히 보았던, 그런 분위기.

본인은 백날 노력해도 가질 수 없었던 바로 그 분위기에 눈을 가늘게 뜬 공작이 이내 싱긋 웃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운을 뗐다.

빼앗긴 주도권을 되찾겠다는 듯, 공작 본인 특유의 분위기가 조금씩 조금씩 방 전체를 잠식해나가기 시작했다.

"혁명군은 황제가 대륙의 반을 먹을 때까지는 본격적으로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대체 왜…!"

"전쟁이 무르익었을 때. 그래서 더 이상 황제의 마음대로 전쟁을 멈출 수 없는 상황일 때, 그때가 적기입니다."

혁명군의 수장이란 자리는 멍청한 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내, 다니엘이 입을 다물었다.

제국이 대륙의 반을 먹었을 때쯤이면 다른 왕국들은 이미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행여 판단이 늦어 가만히 있었다 해도 상황이 그쯤 되면 움직이기 시작하겠지.

위협을 느꼈을 테니까. 이 상황을 그냥 두고 볼 리가 없다. 황제가 만족해서 물러나고 싶다 해도 쉽게 물러날 수 없는 상황이 된다는 뜻이다.

앞선 전쟁을 통해 잃은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황제는 황궁을 포함한 각지에서 그곳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병력을 제외한 대부분의 병력을 끌어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제국 안에서 혁명군이 날뛴다 해도 쉽게 제압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들을 막을 인원이 부족할 테니까.

"...역시 공작님이시군요. 실례했습니다."

납득한 다니엘이 물러가고, 스타베는 곧바로 움직였다.

지금쯤 혁명군 한 명이 데온 하르트의 뒤를 밟고 있겠지. 이대로 좋게 끝나면 좋겠지만, 황제가 그리 만만할 리 없다.

[지금 출발했다고 했나. 보나 마나 날파리들이 들러붙겠지. 그것들을 처리하고 돌아오도록. 하르트 명예 백작의 뒤를 쫓는 일 없이 날파리만 처리하고 돌아와야 한다.]

자신이 괜히 혁명군이 움직이도록 유도한 것이 아니다. 데온 하르트의 뒤를 밟는 혁명군은 곧 죽을 것이다.

곧 죽을 혁명군원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런 의미 없는 짓을 하는 데에는 그리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가 노리는 것은 다름 아닌 황제를 엿 먹이는 것 그 자체.

'뒷정리를 위해 보낸 사람이 돌아오지 않으면 꽤나 속이 타겠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살았다면 배신한 것일 테니 제치더라도 죽었다면 일 처리는 끝내고 죽었는지, 아니면 그 전에 죽었는지 등등.

꽤나 속이 탈 황제를 생각하며 싱긋 웃은 공작이 크루엘에게 명령을 내렸다.

[혁명군의 흔적을 쫓다 보면 황제의 명을 받고 데온 하르트의 뒤를 봐주는 이가 있을 겁니다. 그자를 죽이세요. 그리고 만일 데온 하르트를 쫓을 여건이 된다면 그가 어디로 가는지 확인하고 오도록 하세요.]

푸욱!

현재진행형으로 혁명군을 죽이고 있었기에 그 '뒤를 봐주는 사내'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공작의 명대로 복면의 사내를 죽인 크루엘이 고개를 들었다.

그 탓에 뺨에 튄 피가 턱선을 따라 굴러내려 바닥에 뚝 떨어졌으나, 그의 시선은 흔들림 없이 한 곳만을 향했다.

저 멀리, 타고 온 말을 돌려보내고 숲으로 걸어 들어가는 데온이 보인다.

흔적이 남을 까봐 그런 것일까.

한참을 그 뒷모습을 쳐다보던 크루엘이 데온이 나무 사이로 사라지기 직전, 저벅- 숲에 발을 디뎠다.

딱 데온이 시야에 들어올 정도로의 거리를 둔채 크루엘 역시 숲의 나무 사이로 사라지고,

그 후 얼마나 흘렀을까,

'....'

크루엘이 숲 밖으로 나왔다.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와 표정.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녹안이 물끄러미 제가 나온 숲을 돌아본다.

그것도 잠시, 크루엘은 몸을 틀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매어두었던 말을 찾아 타고,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을 향해 달린다.

가을이 온 탓인지 날카로워진 바람이 그를 매섭게 몰아쳤다.

....

"왔군요, 일은 잘 처리했습니까?"

"예."

"그럼, 데온 하르트가 어디로 향했는지는 알아냈습니까?"

"...."

"...."

"...제가 일을 처리했을 땐, 이미 데온 하르트는 자리를 벗어난 뒤였습니다. 죄송합니다."

***

"떠났네."

"응."

"떠나셨어."

"우릴 버리고 말이지."

"난 이마에 멍도 들었다고!"

"입이 노는 걸 보니 여유가 있는 모양이군. 연무장 10바퀴 추가하도록 하지."

"아, 단장님!!"

"저희 죽습니다!"

"시끄럽다! 계속 그렇게 떠들 때마다 10바퀴씩 추가할 테니 입 다물고 뛰도록!"

사납게 일갈해 기사단원들의 입을 막은 리엔이 한숨을 쉬며 흐릿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어두운 하늘이 마치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만 같아 더욱 울적하다.

리엔은 다시 한번 한숨을 푹 내쉬고는 고개를 내렸다. 언제 울적했냐는 듯 또렷한 두 눈이 비장함을 담고 결연하게 빛났다.

주군께서 인사 한마디 없이 떠나신 것은 그만큼 내가 못 미더워서다.

그러니까....

'다시 만나게 되는 날까지 더욱 믿음직한 기사가 되어 있겠습니다.'

아무도 듣지 못할 한 기사의 굳건한 다짐이 소리 없이 허공에 흩어졌다.

***

구원교가 무너졌다. 구원은 없었다.

시이아는 불타 없어져 잔재만 남은 공터 앞에 주저앉아 망연히 허공을 바라봤다. 멀쩡했을 당시의 구원교를 그리듯, 두 눈은 흐리게 물들어 있었다.

툭. 투둑.

차가운 빗방울이 그녀의 몸을 두드린다. 한두 방울씩 떨어지던 비는 이내 정신 차리라는 듯 폭우가 되어 온몸을 거세게 내리쳤다.

물벼락이나 다름없는 폭우 속에서도 시이아는 쉬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구원교는 그녀의 처음이자 마지막 안식처가 될 예정이었으니까.

따뜻한 빵과 깨끗한 물을 꾸준히 제공하고, 주변인들을 경계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가 존재했다니.

한순간의 따뜻했던 꿈을 꾼 기분이다. 차라리 꿈이었다면, 그랬다면 더 나았을 텐데. 눈앞의 잔재가 꿈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어서, 시이아는 더더욱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꿈조차 꿀 수 없게 되었으니까.

아무것도 하기 싫다.

그냥 이대로 죽어버렸으면.

그렇게 모든 것을 놓아버린 한 아이의 시야에 누군가의 다리가 멈춰 서는 것이 비쳤다.

"시이아."

"...."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

"...제발, 시이아."

대답만이라도 해 줘.

쥐어 짜내는 듯한 목소리가 애원하듯 흘러나왔다.

여전히 묵묵부답인 시이아를 보며 폴이 어두운 표정으로 허벅지 근처의 옷깃을 꽉 쥐었다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