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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막심한 후회가 밀려왔다. 그때 구원교를 소개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냥 일상대로,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나았을지도 몰라. 그런 의미 없는 가정이 몇 번이고 머릿속을 맴돈다.

'...아니, 아니야.'

살인귀 기사단 그 자식들이, 아니 데온 하르트가, 아니 황제가…!

그래, 황제만 아니었다면. 그가 괜한 참견을 하지 않았더라면, 작금의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황제가 문제인 것이다.

빈민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설프게 끼어든 높으신 분들이 문제인 것이다.

폴의 두 눈에 분노가 깃든다. 분노라는 감정은 좀 더 짙어져 맹렬한 증오로 변했고, 그것은 이내 어떠한 사명감을 띤 채 차갑게 굳어졌다.

"나, 혁명군에 들어갔어."

72. 굴러가는 수레바퀴(4)

그제야 시이아의 고개가 들렸다.

저를 보고 있으나 보지 않는 듯한 공허한 눈을 마주하며 입술을 한 번 꾹 깨문 폴은 일그러진 미소를 얼굴 위에 띄웠다. 애써 밝은 목소리가 나왔다.

"나랑 같이 가자."

친하게 지내라, 그러나 정을 붙이진 마라. 였던가.

빈민가에서 맴도는 암묵적인 규칙을 떠올린 폴이 피식 냉소지었다.

'이미 늦었어.'

빈민가에서 처음 발견한 나보다 어린아이.

처음엔 호기심과 흥미였으나, 얼마 못 가 그것은 특정 감정으로 변해 가슴 한켠에 진득하게 들러붙었다.

동생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위험하다. 제가 느낀 감정의 정체를 정의하기도 전에 폴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때문에 부러 거리를 두었다. 정을 붙여서는 안 된다는 규칙을 되새기며 그 주위를 맴돌다 간혹 위험해 보일 때만 도움을 줬다.

그렇다 한들 무슨 소용일까.

이제는 안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

거리를 두기도 전부터 이미 정을 줘 버렸는데, 이제 와서 이 아이를 외면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시이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같이 가자, 시이아."

"...."

"제발...."

"...."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시이아의 눈을 마주한 폴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천천히 손을 거뒀다.

표정을 감추려는 듯 그가 고개를 푹 숙인다.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꾹 깨물렸던 입술은 몇 초간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느릿하게 달싹였다.

"...그래."

"...."

"계속 그렇게 살든지. 안 가면 너만 손해지, 뭐."

언성은 끝내 높아지지 못하고 읊조리듯 나왔다.

말을 끝낸 폴이 돌아선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화내듯 걸어간다.

그때와 달리 시이아는 뒤쫓지 않았고, 그가 돌아와 부축해주는 일도 없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천천히 걷던 폴이 어느 사내의 앞에 멈춰섰다. 입을 꾹 다문 채 신발코만 노려보고 있는데, 다정한 음성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혼자 왔네? 동생 데려온다고 하지 않았어?"

다정에 면역이 없어 결국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만큼 다정한 눈동자를 마주하자 거짓말처럼 눈물이 와르르 쏟아졌다.

"혀엉...."

"...이런."

발치에 투명한 액체가 뚝뚝 떨어진다. 화들짝 놀란 다니엘이 서둘러 손수건을 꺼내 폴의 얼굴을 훔쳤다.

아직 어린 것이 세상을 얼마나 겪었다고 벌써부터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조용히 눈물만 뚝뚝 흘리는 것이 퍽 안쓰러워 그는 뭐라 말도 못 하고 그저 눈물만 닦아주다 아이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미안, 미안해. 내가 말을 잘못 했다. 실언했어. 질문도 눈치껏 던졌어야 했는데, 그치?"

"흐끕!"

"괜찮아, 괜찮아...."

누군가의 온기가 낯선지 바르작거리는 아이의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닌지 점차 떨림이 잦아든다.

"그래 그래, 괜찮을 거야."

"...흐윽."

"동생이 안 따라오면 뭐 어때. 네가 강해져서 그 아이를 지켜주면 되지. 안 그래?"

"...네에...."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

아직도 진정이 안 되었나 싶어 폴의 얼굴을 확인한 다니엘이 피식 웃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뒤늦게 부끄러움이 몰려오는 모양이다. 새빨개진 얼굴을 재차 확인한 그가 웃음을 꾹 눌러 참고 입을 열었다.

"그럼 갈까?"

***

늘 그렇듯 세 개의 달이 뜬 어두운 하늘 아래, 마왕군의 제11군단장 리리넬은 성벽 위에 걸터앉아 뚱한 표정으로 다리를 흔들고 있었다.

부관에게는 불행하게도 그녀의 불만은 지금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길 바라는 이는 안 오고 다른 놈들만 주구장창 들어오고 있으니!

애초에 마왕성의 출입은 드물며, 그마저도 규칙적이다.

예정에 없던 출입이 있다는 것은 침입자이거나, 마왕성의 출입이 자유로이 허용될 정도의 고위직이라는 의미고.

그 '고위직'의 대표적인 예를 꼽자면 '군단장' 정도가 될 테니 마왕성 주변에 쳐 둔 결계에 반응이 있을 때마다 후다닥 달려나갔건만....

'9군단장 트로버와 5군단장 오엘. 그리고 오엘의 부관 데르니반…이었지.'

그렇지 않아도 실망했는데 트로버가 문을 열 것도 없이 마법으로 통과하겠다며 몸으로 성벽을 부수고 들어와서 더 열받았었다.

망할 녀석, 그게 어딜 봐서 마법이야! 그냥 힘으로 부수고 들어온 거지! 난 분명 '마법'으로 내 결계를 뚫고 들어올 수 있으면 어디 한 번 해보라 말했다고!

'오엘은 어디서 이상한 걸 바리바리 챙겨 들고 와서 이야기를 나누려 한 탓에 내가 먼저 도망가 버렸고....'

제가 알게 된 흥미로운 정보를 줄줄 늘어놓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말 한 번 잘못 대답했다간 계속해서 '왜?' 세례를 받아야 할 테니까.

또 그녀와의 대화는 도통 끝이 나지 않기도 하고.

'데르니반은 그 성격을 어떻게 받아주는지 몰라.'

아, 데몬 님 보고 싶다....

그렇게 데몬을 그리며 멍하니 밤하늘만 올려다보길 한참, 어느 순간 리리넬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벌떡 일어났다.

결계에 반응이 있었다. 방향은 북문!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은 서쪽 성벽이니 그리 먼 것도 아니다.

몇 번이고 허탕을 쳤음에도 되살아나는 일말의 기대는 어쩔 수 없는지, 리리넬은 곧바로 옆에 있던 빗자루를 쥐고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거센 바람이 그녀를 맞이하고 자그마한 몸뚱이가 무서운 속도로 바닥과 가까워진다.

이대로 바닥과 충돌하기 직전, 그녀는 빗자루에 올라타 급속도로 방향을 틀어 날아올랐다.

'맞다, 마법 함부로 쓴다고 마왕님께 혼났었는데.'

오엘과 트로버를 맞이할 때도 마법으로 날아갔다가 된통 혼났었다.

결계의 반응이 시전자에게만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경비대에도 전해지는 것이니까. 어차피 조금만 기다리면 상대의 신분이 보고될 테니 그건 낭비라고.

마법은 세계의 규칙을 어기는 것이다. 대놓고 규칙을 어기는 것을 두고 볼 리 없는 세계가 용사를 보내는 것이고.

결국 마법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용사의 탄생 시기가 가까워지는 것인데, 얼마나 남았는지는 마왕만이 알고 있다.

아마 지금 이 마법으로 조금이나마 또 시간이 줄어든 것을 마왕은 느꼈을 것이다.

차가운 마왕의 표정을 떠올린 리리넬이 어깨를 움츠렸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쫙 폈다.

'그래서 이번엔 빗자루를 매개체로 사용하기도 했고!'

이번 상대가 데몬 님이라면 마왕님도 적당히 넘어가 주시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북문에 도착했다.

북문에서 조금 더 마왕성 밖으로 나온 상태에서 리리넬은 결계가 반응한 상대를 찾아 바삐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리 오래 헤맬 것도 없었다.

저 멀리 숲이 있는 방향에서, 누군가 직선거리로 성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온다.

누군가의 상징인 검은 로브가 아닌 흔하디 흔한 여행용 로브였으나 그 모습에서 누군가를 연상시키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것은 문지기들도 마찬가지였다.

"서, 설마…!"

"얼 타지 말고 긴장해! 잘못하면 오늘 우리 죽는 거야."

군단장을 상대로 검문을 했다가 기분 상했다는 이유로 죽은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다른 군단장님들이어도 심각할 판에 하필이면 정보가 제일 적은 0군단장님이라니.

물론 로브를 쓰고 있어 아직까진 추정에 불과하지만, 그런 어설픈 희망에 모든 것을 맡기기에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이 너무 위험하다.

만약 정말 저자가 0군단장님이라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히는 상태이니 결국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다.

눈치껏 행동하자!

일단 흠 잡히지 않게 규칙대로 하고, 검문하려 할 때 저분이 조금이라도 심기가 불편한 기색이 보이면 그냥 보내는 거다.

'그래도, 제발 0군단장님이 아니었으면....'

그 사이, 문지기들의 앞까지 도달한 그가 로브 후드를 뒤로 젖힌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그들의 소박한 바람은 무참히 짓밟혔다.

달빛 아래 하얀 머리칼이 드러나고, 핏빛 눈동자가 그들을 직시한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익숙한 외모.

마왕성에서도 내성에만 머무르시는 분이라 단 한 번도 그 얼굴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외모만큼은 익히 들어 모를 수 없었다.

"데몬 아루트."

"화, 확인했습니다."

0군단장 데몬 아루트.

마족들에게 있어서 존경과 공포의 대상이 복귀했다.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이가 있었다.

'데몬니이이이임!!'

***

출발할 때 미친개들과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지만 어찌 되었건 무사히 마왕성에 도착했다.

역시 마계답게 군단장들이 꾸준히 마물사냥을 하고 있을 텐데도 불구하고 수많은 마물들을 마주쳐야 했지만....

나는 손끝으로 슬쩍 쇄골 위, 목 언저리의 낙인을 매만졌다.

마왕이 직접 새긴 위치 추적 마법.

어찌 보면 당연하게도 마왕의 기운이 깃든 이 마법 덕분에 마물들이 알아서 피해갔으니 일종의 과격한 통행증이라 봐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나저나 마계에 들어서기 전까지 시선이 느껴졌던 것 같은데....'

뒤쪽이 좀 소란스러웠던 것 같기도 하고....

'기분 탓인가?'

별다른 사건 없이 무사히 마왕성에 도착했으니 단순 기분 탓이리라.

오랜만의 마계라서 내가 너무 긴장한 모양이지.

그러고 보니 조금 전 문지기들에게도 너무 긴장한 나머지 반말을 하고 말았다. 다행히 트집 잡지 않고 넘어갔지만… 솔직히 조마조마했다.

그렇지만 목소리를 떨지 않고 말하는 건 그게 한계였다고.

제국에 가 있는 동안 간신히 익숙해졌던 마계가 다시 어색해졌다. 아니, 무서워졌다!

'아마 적응하기까지 조금 시간이 필요할 테니 당분간 군단장들과는 마주치지 말....'

"데몬 님!!"

히이이익! 깜짝이야!

하늘에서 웬 꼬맹이가 빗자루와 함께 툭 떨어졌다.

익숙한 얼굴의 등장에 나는 내심 좌절했다. 왜냐고? 마계에서 내게 익숙한 얼굴이라면 통 위험한 놈들밖에 없으니까.

'아니 애초에 마계에서 위험하지 않은 놈들이 있을 리가 없지.'

11군단장 리리넬.

그나마 군단장들 중 내게 있어서 가장 두렵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나는 그녀를 향해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열었다.

"오랜만입니다."

"네! 오랜만이에요! 늦었지만 도시 방어를 위해 파견 나가셨을 때, 완벽하게 해내는 것도 모자라 마물들까지 깔끔하게 쓸어버리셨다고 들었어요! 역시 데몬 님이세요!"

"아… 네."

그랬다고 들었지.

말해두지만 그때 난 기억이 날아갔었다. 술 마시고, 기억이 끊겼다가 정신 차려보니 신명 나게 피를 토하고 있었지.

부관인 에드와 주치의 벤의 말에 의하면 마물들 사이를 헤집다가 공격당해 2M를 날라 갔다 했었고.

"아 맞다! 그보다 다치신 곳은 없으세요?"

"...?"

"그게… 저번에 제가 드린 목걸이가 부서졌다는 신호가 와서 걱정했었거든요. 무사하신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아 그렇군요…가 아니라, 네?"

목걸이?

"아, 아! 물론 데몬 님의 실력을 의심한 건 아니고… 전 그냥...."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러고 보니까 어느 순간 리리넬이 준 목걸이가 사라졌었지? 대충 시기를 보면 제국에 가기도 전이었던 것 같은데....

아마 새로운 영웅이 등장했다 해서 갔던 인간계와의 경계선. 그곳에서 난리통에 잃어버린 모양이다.

그런데 부서졌다니. 그거 분명 한 번 정도는 목숨을 살려준다 하지 않았어? 그게 그렇게 쉽게 부서질 리가 없는데.

...어쨌든 잃어버렸다 말하는 것보단 낫겠지.

"...유용하게 잘 썼습니다. 고맙습니다."

"고… 아,아,아아아아니에요! 제가! 제제제가! 또 만들어드릴게요! 필요하시다면 얼마든지 말해주세요!"

뭐야, 무서워.

나도 모르게 한발 물러섰던 모양이다. 아차- 하는 표정을 지은 리리넬이 빠르게 감정을 갈무리하더니 흠흠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임무는 어떠셨어요? 아, 이건 어디까지나 소감을 여쭙는 거지 무슨 임무를 받았는지 캐내려는 건...."

"피곤했습니다."

"네?"

피곤했지. 특히 구원교 소탕은 정말 끔찍했다.

"가짜 종교를 만들어 무언가를 내세우고 그것만을 맹목적으로 믿는 이들을 만났습니다."

"...?"

아, 마계는 종교의 개념이 없나?

하긴 자신들의 어버이인 마왕만을 믿고 따르는 것이 마족들이니....

인간계에 다녀온 것이 딱히 비밀도 아니고, 무슨 임무를 맡았는지만 모르게 하면 되니 별 상관은 없다만, 설명하기 귀찮다.

그러나 이 어린아이의 의문 가득한 눈을 보고 있자니 얼버무리기도 쉽지 않다.

결국 눈빛에 못 이겨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해주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멍청하네요. 그런 의미 없는 것을 믿을 바엔 차라리 데몬 님을 믿는 게 나을 텐데...."

"네… 네?!"

"어…? 생각하고 보니 이거 좋은데? 데몬교…데몬교라...."

"저기…?"

지금 뭔가 굉장히 불길한 소리를 중얼거리신 것 같은데요.

73. 다시 마계(1)

"리리넬…?"

"아, 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데몬 님!"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

"헤헤, 그런데 그건 뭐예요?"

"...."

"아, 물론 임무와 관련된 것이면 말씀하지 않으셔도…!"

내가 지금 그것 때문에 입을 다문게 아니거든요?

그러나 군단장을 상대로 내가 뭘 하겠는가. 결국 난 한숨을 삼키며 메고 온 짐을 주섬주섬 풀었다.

솔직히 나도 식량을 꺼내려 짐을 풀었다가 상당히 놀랐다.

도대체 레멤베르는 뭘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와, 쿠키네요?! 이런 모양은 처음 봐요!"

꽤나 그럴싸한 기념품들까지 챙겨주었다.

모양만 제외하면 마왕성에서도 흔히 먹을 수 있는 쿠키인데, 처음 보는 모양이라는 것에 꽂혔는지 리리넬이 눈을 반짝이며 내 눈치를 살핀다.

뭐, 그런 반응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렇겠지. 마계에는 없는 아주 예쁜 꽃 모양 쿠키니까.

호의도 얻을 겸, 나는 쿠키 봉지를 리리넬에게 내밀었다.

"선물입니다."

"아…? 저, 정말요?! 감사합니다!"

이럴 땐 정말 영락없는 어린애나 다름없다.

"세상에, 역조공이라니…! 내 인생에 이런 날이 올 줄이야...."

"?"

간간이 이상한 말을 하는 것 같지만.

마왕군의 군단장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순수하게 기쁜 표정을 지으며 곧장 쿠키 하나를 꺼내 입에 넣는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이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근처 문지기들이 계속 우리 눈치를 살피고 있었으니까. 마력 하나 없는 인간인 나 때문은 아닐 테고, 아마 리리넬 때문이겠지. 보기엔 어린애 같아 보여도 결국 군단장은 군단장이다.

자리를 비켜준다는 내 의도대로, 리리넬은 곧장 내게 따라붙었다.

"바로 마왕님께 가시는 거죠?"

"...그래야겠죠."

가기 싫지만 어쩌겠어. 갈 수밖에.

그런 내 속도 모르고, 리리넬은 잘 됐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최단 거리로 안내해드릴게요!"

***

마왕성의 다른 정원들과 달리 중앙 정원은 언제나 출입이 제한되어 있다. 출입이 가능한 이들이라고는 마왕과 군단장, 그리고 마왕 본인이 허용한 이들뿐.

그러나 정작 마왕도, 군단장들도 자주 방문하지 않아 방치되기만 했던 중앙 정원에 모처럼 누군가의 발길이 닿았다.

"제국이 이레온 왕국을 공격했다고?"

정원 가운데 테이블 앞에 앉아 느긋하게 차를 들어 올리며 마왕이 물었다.

"단순히 거기서 그칠 것이 아니다. 황제의 목적은 대륙 정복. 이레온 왕국은 그것을 위한 초석일 뿐이지."

뾰족한 귀와 새하얀 피부를 가진, 햇살처럼 찬란한 금빛 머리의 남자가 답했다. 푸르른 녹색 눈이 마왕을 직시했다.

누가 봐도 마족 같지 않게 생긴 눈앞의 이는 예상한 대로 마족과는 전혀 다른 종족이다. 그 외 이곳에 자리한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족도, 그렇다고 인간도 아닌 어딘가의 책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종족들.

이쯤에서 한 가지 밝히자면 마왕이 존재하고 세 개의 달이 뜬 이곳의 본래 이름은 마계가 아니다. '마계'란 그저 마족들이 가장 많이 분포해있고, 가장 많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일 뿐.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마족'이 탄생하기도 전부터─

수많은 종족들이 이곳에서 살고 있었다. 당시 이곳의 이름은 '심연'.

잊혀진 듯싶던 그 이름이 아직까지도 살아있다. 그 뜻이 무엇이겠는가.

──마계, 아니 심연에는 아직 다른 종족들이 남아 있다.

"뭐, 좋아."

한 모금 마신 차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마왕이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요정왕이나 되는 자가 이곳까지 와서 거짓말을 할 리는 없으니 그 말을 믿도록 하지. 다만 내가 궁금한 것은 그 말을 왜 내게 와서 하냐는 거야. 너희들은 분명 인간계에 관심이 없지 않았나?"

"...세대교체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하여 우리가 멍청할 거란 생각은 버려라. 우리는 각 일족을 책임지는 자다. 제국이 대륙을 정복하고 나면 그 다음은 이곳이 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어."

정확하게는 '마계의 마족들'을 노릴 테지만.

인간들이 마족들을 처단한다는 이유로 이곳에 발을 들이기 시작한다면 다른 종족들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것은 시간문제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마족 다음은 자신들이 되겠지.

세계와 자연의 흐름을 중시하는 요정왕의 입장에서 '세계의 오류'나 다름 없는 마족들이 달가울 리 없으나, 그들에 대한 혐오감보다는 일족의 안정이 더욱 중요하기에 이렇게 이 자리에 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죽지 마라?"

"쓸데없이 죽어서 내 일족에게 피해를 끼치지 말라는 뜻이다."

냉랭한 말에 마왕이 피식 웃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순식간에 웃음기가 거두어지고 강한 압력이 정원 전체를 짓누른다.

"좋아, 다 좋은데 말을 좀 곱게 할 수는 없나? 요정족이 마족을 싫어한다는 것은 알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120살 요정왕이 지그시 입술을 사려물었다. 그를 무감정한 눈으로 보던 마왕이 고개를 돌렸다.

드워프 추장, 인어여왕, 뱀파이어 퀸.

7-800살 먹은 각 종족의 수장들이 지독한 압박 속에서 어떻게든 버티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동등한 '수장'의 입장이니 경어는 바라지도 않아. 그냥 그 건방진 말투 좀 어떻게 할 수 없냐? 하여간 요즘 것들은...."

"...."

혀를 쯧쯧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마왕이 힘에 짓눌려 대답도 못 하고 있는 이들을 물끄러미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됐다. 어린애들을 상대로 뭐하자는 건지."

압박이 사라졌다.

자존심이 상한 듯 요정왕이 미간을 찌푸렸으나 마왕은 못 본 척 넘어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버르장머리 없는 어린애를 교육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일이 지금 막 생겼으니까.

"제국이 이레온 왕국을 공격했다 했지? 마침 잘됐네."

제가 새겨둔 위치 추적 낙인이, '그'가 이곳에 도착했음을 알리고 있었다.

"인간계에 파견되었던 정보원이 지금 막 돌아왔거든."

"그 '정보원'이라면 나도 알고 있다."

종족 특성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는지 요정왕이 꿋꿋이 건방진 말투를 고수하며 말을 꺼냈다.

"인간 출신이라지. 첩자로 써먹기에는 아주 적합하나, 그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다."

"...."

"그 인간은 믿을 수 있는 존재인가?"

"...글쎄."

느긋하게 걸어가 정원 입구 출입문에 손을 댄 채 마왕이 웃었다.

"그가 이곳에 있는 한."

"...."

"아주 믿음직하겠지."

***

"어서 와. 그렇지 않아도 묻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잘 왔어."

두 팔 벌려 데온을 환영하며 스치듯 그의 쇄골 위를 건드린 마왕이 자연스레 그를 어디론가 이끌기 시작했다. 사라진 낙인을 매만지며 순순히 그의 손에 끌려가던 데온의 눈이 어느 순간 가늘어졌다.

그가 가는 방향은 다름 아닌 중앙 정원.

중앙 정원은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기 편하도록 온실에 가까운 형태다. 다른 정원과 달리 출입이 통제되어 있어 마왕 본인조차 자주 걸음 하지 않는 곳을 향하다니.

드물디드문 광경에 마왕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데온은 이내 별 말 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이윽고 도착한 정원에서 마왕이 의자를 하나 더 내주며 곧장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제국이 이레온 왕국을 공격했다 들었어. 황제의 목적이 대륙 정복이라지?"

마왕이 내준 의자에 앉지 않은 채 우두커니 서서 주변의 이종족들을 둘러보던 데온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들이 들을까 하는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았다.

따로 대화 나눌 기회가 있었음에도 굳이 여기까지 데려와 다른 이들이 듣는 앞에서 질문을 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을 테니까.

"황제가 네게 내린 명령은 뭐였지?"

"[마왕을 감시하고, 그가 이 판에 끼지 못하게 막으라.]"

"그리고?"

"만약 마왕이 전쟁을 결심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오라 했습니다."

"흐음, 역시나인가."

어차피 황제가 대륙의 절반 이상을 집어삼킬 때까진 두고 볼 생각이니 당장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만.

짐짓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는 척하던 마왕이 이내 고개를 쳐들고 데온을 마주했다. 마왕 특유의 역안이 부드럽게 휘어지며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밖에, 내게 할 말 같은 건 없어?"

"인간계에서 '마법'이 발견되었습니다."

"응?"

예상 밖의 말을 들은 듯 마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데온은 크게 뜬 두 눈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 감정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었다.

당황.

그래, 당황이다. 그게 전부였다. '누군가 멋대로 인간계에서 마법을 사용한 것에 대한 분노' 따위는 전혀 들어있지 않는, 순수한 당황.

그것을 찬찬히 살피던 데온이 천천히 입을 뗀다.

붉은 눈이 똑바로 마왕을 향하고,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듯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느 한 건물에서, 주술이 아닌 마법이 사용되었더군요."

"아아- 그래?"

"...."

"알았어. 한 번 조사해볼게."

그만 가 봐.

마왕은 태연히 손을 내젓는다. 무언가 느낀 듯 데온의 시선이 집요하게 들러붙었으나, 꽉 다물린 입술은 그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더 버티고 있을 수도 없어 결국 데온이 돌아서고, 그렇게 데온이 정원 입구에 향할 때까지 열리지 않던 입술은, 그가 문 앞에 서고 나서야 천천히 열렸다.

느긋하게 열린 입에서는 조금 전 대화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왼쪽 팔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럽던데, 벤한테 한 번 보이도록 해."

다정하기 짝이 없는 음성.

"...알겠습니다."

힐긋 그를 살핀 붉은 눈이 순순히 시선을 거둔다. 데온은 무언가를 더 말하는 대신 정원 문을 열었다.

데온이 사라지고, 짧은 정적을 깨트린 이는 다름 아닌 요정왕이었다.

"조사해보겠다고?"

차디찬 웃음이 침묵을 밀어내고 정원 전체에 낮게 깔린다.

차갑다 못해 서늘한 웃음을 흘리던 그는 언제 웃었냐는 듯 정색하고 마왕을 노려보았다.

"인간계에서 마법을 사용할 자가 따로 누가 있을까."

마족들은 기본적으로 마왕을 따른다. 그런 그들이 사소한 일탈도 아닌 터무니 없는 사고를 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일 터.

"네놈이지?"

"말버릇."

"지금 그게 중요한가?!"

"그렇다고 그쪽이 참견할 일이 아니기도 하지."

"후일이 두렵지 않은 것인가!"

요정왕은 결국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세계의 흐름을 민감하게 느끼는 그로서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세계가 벼르고 있다는 것을.

조만간 세계는 용사를 보낼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마왕에게 아주 위협적인 용사를 보내겠지. 아니, 이 정도로 벼르고 있다면 그를 '확실히 죽일 수 있는' 용사를 보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왕은 이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가 왜 후일을 두려워해야 하지?"

"...뭐?"

"두려워할 이유가 없잖아. 어차피 용사는 등장할 테고, 나는 그를 맞이하게 되겠지. 이건 지금까지 그래왔던 일이다. 이제와서 새삼 두려워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하...."

실소가 터져 나왔으나 그것은 잠시였다.

차갑게 얼굴을 굳힌 요정왕이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내가 상관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긴 하지. 좋을 대로 해. 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을 테니."

만남은 여기서 끝이었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일종의 일차 방어선 역할을 하고 있는 종족의 수장이라 나름대로 생각해줬건만.

마왕의 심장에 검을 꽂고 이곳까지 밀려 들어올 인간들을 생각하며 요정왕은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망설임 없이 자리를 파했다.

다른 이들 역시 하고 싶은 말이나 해야 할 말은 요정왕이 이미 했기에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을지언정 별다른 말 없이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이만 가도록 하지. 아, 그리고 마물 관리 좀 제대로 했으면 좋겠군. 최근 들어 그것들이 우리 영역 근처까지 와서 서성이던데."

"...신경 쓰도록 하지."

74. 다시 마계(2)

나는 마왕성 복도를 가로질러 내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오랜만의 마왕성이라지만 괜히 이곳저곳 돌아다닐 생각 따윈 전혀 없다. 괜히 싸돌아다니다가 이상한 놈들이랑 마주치기라도 하면 곤란하거든.

이를테면....

"...데몬…님?"

"아."

...히엔이라든가.

시간이 얼어붙은 듯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내 어색한 침묵을 이기지 못한 내가 인사라도 하려 조심히 손을 들어 올렸으나....

쨍그랑!

히엔이 멍하니 들고 있던 화분을 떨어트려 인사는커녕 내심 기겁하며 한 걸음 물러서야 했다.

키에에- 하는 힘 없는 소리와 함께 깨진 화분 파편 사이에서 기괴한 식물이 꿈틀거리며 죽어간다.

'....'

그래, 마계란 이런 곳이었지.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곳에 다시 온 건지. 그냥 이대로 인간계로 튀면 안 되나?

어정쩡하니 얼어붙은 채 그것만을 넋 놓고 보는데, 대뜸 눈앞에 그림자가 졌다.

"데, 데몬 님! 돌아오셨군요!"

"아, 어, 음… 네."

기쁘다는 건 충분히 알겠으니까 그 얼굴 좀 치워주면 안 될까? 지금 괴리감이 엄청나거든?

바닥의 괴상한 식물과 히엔의 화사한 얼굴을 번갈아 보던 나는, 정신적 충격을 받았는지 모처럼....

"쿨럭."

각혈을 하고 말았다.

"데, 데데덷, 데몬 님!!"

히엔이 호들갑을 떤다. 차마 내 몸엔 손대지 못하고 앞에서 안절부절 못 하며 얼쩡거리고 있는데, 그래. 이것만이었으면 그럭저럭 괜찮았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데몬 님?"

지나가던 내 부관 에드가 이런 날 발견했다는 것이고,

"데몬니이이이임!!"

"...."

"드디어 찾았다! 괜찮으십니까?! 하필이면 이런 식으로 만나다니…! 아, 일단 치, 치료부터...."

주치의 벤이 날 찾아왔다는 것이다.

한적하던 마왕성의 복도가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지고, 드문드문 지나가던 사용인들이 이쪽을 주목하며 수군거린다.

오자마자 이런 아름다운 이벤트가 날 기다리고 있다니.

'하하, 시발.'

어디든 숨고 싶다.

이런 내 심정은 에드가 대뜸 히엔의 멱살을 잡았을 때 극에 달했다.

"네놈, 무슨 짓을 한 거지?"

애꿎은 애한테 왜 그래. 쟤 아무 짓도 안 했.

"죄송합니다...."

"!?"

왜 사과하는 건데?!

진심인 듯 침울하게 고개를 푹 숙인 히엔의 모습에 난 순간 정말 쟤가 나한테 무슨 짓을 했나 잠시 기억을 되짚어보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얻은 것은 히엔의 결백함에 대한 확신 뿐.

"저, 에드- 큽, 쿨럭!"

"데몬 님!!"

"말하지 마십시오!"

참고로 이건 사레들린 거다. 멍청하게도 입안에 아직 피가 고여 있다는 것을 잊고 말을 했거든. 피를 잘못 삼켰다.

그러니 어떻게 되었겠는가.

기도로 넘어간 피는 그대로 역류해 기침과 함께 다시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눈 앞에 펼쳐진 대참사에 에드가 히엔의 멱살을 놓고 급히 내게 다가온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내게 닿았다.

"억지로 서 계시지 마시고, 제게 기대십시오. 천천히 숨을 쉬세요."

"콜록… 커흑,"

"네, 그렇게...."

"...콜록."

아, 간신히 진정됐다.

오랜만의 만남에서 이런 꼴 사나운 모습을 보이다니, 쪽팔려 죽을 것 같다.

그 탓에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그저 바닥만 보고 있는데, 그런 나를 보던 에드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벤을 불렀다.

"...벤, 원인이 뭔지는 알았나?"

"언제나와 같지. ─후유증."

"쯧. 그럼 따로 방법은 없다는 거군."

"그래, 정확히 어디가 어떻게, 왜 아픈지 알 수 없으니 속만 터지고."

그야 당연히... 사레들린 거니까 어디가 어떻게, 왜 아픈지 모르겠죠.

"그보다 에드, 데몬 님을 부축해드려. 방에서 나머지 치료를 해야 하니까."

"뭐? 아직 뭐가 더 남았나?"

"어. 팔에도 부상을 입으셨다."

"!"

에드가 흠칫하며 부축하기 위해 잡고 있던 내 팔을 놓았다. 그 탓에 중심을 잡지 못해 휘청이자 화들짝 놀라 급히 팔을 뻗어 내 허리를 받친다.

허리를 부축하는 그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혹, 제가 불편한 팔을 잡거나 하지는 않았습니까? 만약 그랬다면...."

그, 그랬다면 뭐.

내 감이 경고를 울린다. 뒷말을 들었다간 오늘 밤 잠은 다 잔 게 될 것 같다는, 그런 경고.

다행히도 그는 내 멀쩡한 팔을 잡았었기에 나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아니요. 멀쩡한 팔을 잡았습니다. 그러니 사과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

"다행이네. 그럼 이제 빨리 부축해드리지? 여기서 시간 다 보낼 생각인가? 데몬 님 치료 안 할 거야?"

"해야지! 죄송합니다 데몬 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벤은 늘 들고 다니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찾아 뒤적이며, 에드는 날 안다시피 부축하며 걸음을 옮긴다.

그렇다면 히엔은?

축 쳐진 채 침울한 기색을 보이는 히엔을 힐긋 돌아보자 그걸 또 놓치지 않고 잡아챈 에드가 고개를 돌려 히엔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넌 나중에 보지."

아니 그러니까… 걔 아무 짓도 안했다고.

....

"부상은 심각한가?"

굳이 괜찮다는 내 의견을 무시한 채 끝끝내 부축해가며 방에 도착해 날 침대에 앉힌 에드가 벤을 도와 내 겉옷을 벗기며 물었다.

이번에도 역시 알아서 벗겠다는 내 의사는 묵살된 상태였다.

"아니, 순조롭게 나아가는 중. 간혹 찾아오는 미미한 고통 정도야 데몬 님이시라면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실 테고, 그러니 거칠게 움직이지 않는 한 특별히 고통을 느낄 일도 별로 없을 텐데...."

중간에 뭔가 굉장히 아닌 것 같은 말이 있었으나 나는 미처 이를 부정하지 못했다. 셔츠 단추를 전부 끄르고 맨 어깨를 드러내게 만든 벤이 순간 멈칫했기에.

그의 미간이 드물게 찌푸려졌다.

"...덧나려고 하네?"

"...."

"그런데 왜 신호는...."

짜증스럽게 목에 걸린 마력석을 들여다본 벤이 그것을 한참 노려보더니 이내 '오류인가' 하고 중얼거리며 화제를 돌린다.

잠시 나와 마력석을 번갈아볼 때 얼핏 '기분탓이겠지'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기에 나 역시 그냥 넘어갔다.

"데몬 님, 혹 이곳에 오기 전에 전투가 있진 않으셨습니까?"

"네? 글쎄요...."

전투라 할 만한 것은 딱히 없었던 것 같은데....

"아, 전투 비슷한 것은 있었습니다."

"역시! 얼마나 격했으면...."

"네… 뭐...."

격하긴 했지. 내게 있어서는 사투와도 같았으니까.

광견 놈들과의 추격전.

생각하고 보니 그때 미친 듯이 활시위를 잡아당겼었지. 당시엔 정신없어서 별 신경을 못 썼지만, 그렇지 않아도 힘없는 팔로 무리를 해댔으니 상처가 덧났다 해도 딱히 이상하진 않다.

"데몬 님께서 직접 나서셨다면 그 상대는 지금쯤 멀쩡히 살아있진 않겠군요."

"아마 땅 여기저기에 그 육신의 파편이 조각조각 흩어져 있지 않을까."

"역시 그렇겠지."

...얘네는 도대체 날 어떻게 보고 있는 거야?

기가 막혀 내가 입을 다문 상태에서도 계속되던 둘의 듣기 괴로운 대화는 치료가 끝나고 나서야 겨우 막을 내렸다.

붕대를 새로 감아준 벤이 충고하듯 어깨를 가볍게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치료는 완벽하게 끝냈습니다만, 그래도 경각심을 가질 겸 당분간은 붕대를 하고 다니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마법 사용을 최소한으로 한만큼 괜히 거칠게 움직였다가 어떤 부작용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네."

"그럼 전 이만 물러가 보겠...."

똑똑-

한순간 방 안 모든 이들의 고개가 문을 향해 돌아갔다. 심지어는 나마저도.

...이상하다. 왜 문 두들기는 소리가 무섭게 들릴까.

이곳은 마계다. 인간계와 달리 날 찾아올 이들은 어떻게 보면 거의 없고, 또 어떻게 보면 무수히 많은 그 마계.

문밖에 누가 서 있을지 도저히 예측할 수가 없으니 오히려 더 무섭다. 도대체 누구지?

'어차피 누가 있든 내게 있어서는 조심해야 할 무서운 상대라는 건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내가 잠시 넋 놓고 있는 사이 에드가 문을 살짝 열고 밖을 살핀다.

그리고 상대를 확인한 듯 삽시간에 일그러지는 얼굴을 보며, 나는 우습게도 도리어 안심했다.

에드가 사정없이 대놓고 얼굴을 찌푸릴 정도라는 것은 적어도 그 보단 지위가 낮은 마족이라는 것일 테니까!

그러고 보니 한 명 떠오르는 녀석이 있는데… 설마....

"무슨 일이지? 히엔."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신경을 바짝 세우고 둘의 대화에 집중했다. 그 기색을 눈치챈 에드가 무언가 더 말하려던 것을 멈추고 히엔을 밀며 문밖으로 나간다.

안절부절 못 하며 그대로 밀려나면서도 이상한 데에서 강단 있는 히엔이 끝끝내 입을 열었으나,

"저, 저는...."

"그 전에 나랑 할 말이 있을 텐데."

에드가 매정하게 밀어내 나와는 대화 한 마디도 나누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복도까지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으, 으음, 이거 좀 위험한 거 아닌가? 보아하니 에드가 벼르고 있는 것 같던데.

설마 죽이지는 않겠지만 히엔은 기본적으로 마왕성에서 천대받는 입장이다.

인간인 내 입장에서야 마족은 다 똑같은 마족이지만 그놈의 인큐버스, 서큐버스가 뭔지.

자칫 어디 한두 군데 부러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는 급히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데몬 님, 잠시...."

"에드."

"예?"

"히엔은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아...."

뭔가 반응이 미묘하다. 이건 내가 생각한 반응이 아닌데?

왠지 모를 불안감에 혹시 몰라 덧붙였다.

"정말로요."

"...예, 일단 알겠습니다."

"네...."

그런데 왜 나가시는 거죠. 정말 알겠는 거 맞아?

불안함 마음을 가득 담아 어느새 닫힌 문을 바라보는데, 그사이 주섬주섬 짐 정리를 끝낸 벤이 가방을 들고 내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역시 데몬 님께서는 마음도 넓으십니다."

"네?"

"지금 저 정원사가 죽을까 배려하신 것 아닙니까."

"그게 아니라 정말로 아무 짓도 안 했으니까...."

"예, 압니다. 한낱 정원사가 감히 군단장에게 해를 끼칠 리가 없겠지요. 애초에 그럴 수도 없을 테고요."

뭐야, 정말 알고 있었어? 그런데 왜....

"다만 다른 군단장에게는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았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죽을죄가 성립됩니다."

"...."

"인큐버스 따위가 감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세상에.

상상을 초월하는 대답에 나는 조용히 절망했다.

내가 이제부터 다시 그런 놈들 틈바구니에 끼어 살아야 한단 말이지.

"그럼 에드는...."

"그도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모를 리가 없겠죠. 다만 핑곗거리가 필요했을 뿐."

핑계라니…?

반사적으로 되물으려던 것을 급히 그만뒀다. 차라리 그냥 물어보지 않는게 정신 건강에 나을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그런 내 노력이 무색하게도 벤은 친절하게 그 이유까지 덧붙였다.

"애초에 0군단장 주변에 그런 놈이 얼쩡거린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

"물론 에드 성격에 데몬 님의 말씀을 어길 리는 없을 테니 데몬 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 이상 죽이거나 하지는 않을 겁니다. 다시는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게 경고하는 선에서 끝내겠지요."

"다시는…?"

히엔이 내게 다가오지 않는다, 라.

바라던 일이긴 한데, 뭔가 좀 찝찝하다. 방식이 영 아닌 것 같아서 그런가?

미묘한 기분에 침묵하는 내게 벤이 결정타를 날렸다.

"데몬 님도 귀찮아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

"...먼 길 오시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실례했습니다. 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벤이 나가고, 혼자가 된 나는 천천히 침대에 몸을 뉘였다. 익숙해진 천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피곤하다. 몸도 몸인데 정신적으로 피곤해.

두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 정말...."

에드와 벤이 착각한 것이 있다.

난 히엔을 귀찮아하는 것이 아니라 무서워하는 거다.

마족이잖아.

용사도, 그 파편을 지닌 영웅도 아닌 연약한 인간인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거라고.

'그래도....'

순수한 호의를 갖고 다가오던 히엔이 떠올랐다.

다른 불손한 의도가 담긴 것이 아닌 말 그대로 순수한 호의. 물론 그 호의가 내게 무섭게 다가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고의도 아닌데.

무엇보다 에드와 벤이 히엔을 그런 식으로 대할 때마다 그에 대한 원망은 분명 나를 향해 쏟아질 것이다.

마족의 원한이라니. 난 그런 거 받고 멀쩡히 살아남을 자신 따위 없다고.

...아, 몰라.

나중에 에드의 기분이 좀 좋아보일 때 말해보지 뭐. 다가오지 못하게 경고하는 선에서 끝낸댔으니 굳이 당장 달려가서 말리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지금은 좀 쉬고 싶다.

정신적 피로감을 이기지 못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내 천천히 손을 내리고 천장을 보는데....

'...시부레.'

왜 세상은 날 쉬게 두지 않을까.

함부로 움직였다가 베이기라도 할까, 눈동자만 굴려 목 바로 옆에 꽂힌 검을 확인하고 다시 정면을 보았다.

눈앞에는 검 손잡이를 쥔 마족이 반갑다는 듯 입꼬리를 늘려 웃고 있었다.

"안녕하세요오, 데몬 님."

"...."

"역시 데몬 님이시네요. 제 검은 반응할 가치조차 없다는 건가요?"

"드벨라니아."

"네에, 저도 반가워요. 이게 얼마만의 만남인지 저도 모르겠네요-."

2군단장 드벨라니아.

내가 제일 끔찍해 마지않는 존재가, 느른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왔다.

75. 다시 마계(3)

데몬 아루트. 그가 누구인지, 어떻게 생겼으며 무슨 일을 하는진 몰라도 그 이름만큼은 마계 전역에 널리 알려져 있다.

얼굴도 모르는 먼 지역의 마족들조차 알 정도라면 '마왕성'에서는 어떻겠는가.

마왕 다음가는 존재로 취급받는 인물의 움직임이 알려지지 않을 리가 없다. 평소 움직임이 거의 없기에 더욱이 그의 행동은 사소한 것일지라도 순식간에 마왕성 전체에 퍼졌고, 그가 귀환했다는 모처럼의 큰 소식은 당연하게도 2군단장 드벨라니아의 귀에 들어갔다.

"흐응, 데몬 님이 귀환하셨다고?"

그렇지 않아도 오랜 시간 만나 뵙지 못해 마음에 걸렸는데, 잘 됐다. 마침 두 번째 도시에 다녀오면서 옷도 좀 사오기도 했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행동은 즉시였다.

드벨라니아는 풀지도 않고 한 곳에 고이 모셔두었던 짐들을 신들린 듯 빠르게 챙기기 시작했다.

"이참에 인사도 드리고,"

그동안 타이밍이 엇갈려서 미처 드리지 못한 옷들도 전부 드려야지.

'데몬 님께 드릴 선물'을 바리바리 챙긴 그녀는 지체없이 몸을 움직였다.

....

데몬 님의 방에 잠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데몬 님의 부관이 정원사와 실랑이를 벌이는 틈을 타 열린 문 사이로 슬쩍 들어왔으니까.

나름대로 은밀하게 들어왔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데몬 님은 처음부터 눈치채셨던 모양이다.

침대에 누운 채 정확하게 내가 숨은 천장을 보시더니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두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리신 것이다.

무방비하게 누운 것도 모자라 시야까지 스스로 가리다니.

은신, 잠입, 암살과 관련된 일을 주로 맡는 2군단장으로서 솔직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조금 과하게 움직이고 말았다.

푸욱-

검이 소리 없이 침구에 박혀 들어간다. 정확하게는 데몬 님 목 바로 옆에.

그럼에도 놀란 기색 하나 없이 데몬 님이 얼굴을 가렸던 손을 천천히 내린다. 붉은 눈동자가 검을 힐긋 보더니 이내 나를 똑바로 담았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묻는 듯한 눈에 흠칫한 것도 잠시, 나는 이내 천천히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오, 데몬 님."

***

"정말 보고 싶었어요. 드릴 선물은 많은데 받아야 할 당사자가 자리에 안 계셔서...."

"...."

"그나저나 정말 제 검이 반응할 가치도 없었나요? 나름 열심히 수련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

"네? 데몬 님? 뭐라고요오?"

"사...."

"사?"

살려줘....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간신히 눌러 삼켰다.

너무 놀라 얼어버린 나머지 다행히도 꼴사납게 비명을 지르는 일은 없었지만, 그 부작용으로 심장도 순간 얼어버린 것 같았다. 하마터면 심장마비로 죽을 뻔했다.

간신히 집어삼킨 말이 궁금한 듯 드벨라니아가 눈을 빛낸다. 나른하게 내리뜬 두 눈에 감출 수 없는 흥미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사, 뭐라고요?"

"...."

별것도 아닌 것을 물고 늘어지는 집요함에 감탄한 것도 잠시, 내가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드벨라니아가 알겠다는 듯 손뼉을 짝- 마주쳤다.

"아! 살기가 없었으니까, 요?"

"...!?"

아니,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하지만 제가 어떻게 감히 살기를 드러낼 수 있겠어요. 살기를 보이는 순간 돌변해서 절 죽이려 드실 텐데."

"...."

"딱히 목숨이 아깝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과격한 데몬 님도 멋있지만 전 온건한 데몬 님이 더 좋단 말이에요. 실루아 그 변태라면 모를까, 전 부드러운 남자가 취향이라서요."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실루아가 변태라는 것 하나는 확실히 이해했다.

7군단장한테 변태라 해도 되는 거야? 이러다 군단장들 사이에서 또 싸움이 생기면 어쩌려고. 물론 실루아는 변태가 맞긴 하지만.

"아, 그보다 제가 그동안 여기저기 많이 다니면서 데몬 님께 어울릴 만한 옷들을 사왔는데요-."

그런데 너도 걔 못지않는 변태 같다. 지금 날 보는 눈빛이 아주 똑 닮았네.

거북할 정도로 반짝이는 눈동자를 피해 시선을 비껴 내리며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할 수 있다면 도망치고 싶었으나, 우연인지 의도한 건지 드벨라니아가 빠른 탈출 경로를 가로막고 있었기에 무의미한 저항은 포기하고 순순히 그녀가 내민 상자를 받아들었다.

뭐, 그래도 이거 하나라면 무난하네. 평소엔 무슨 옷을 산더미처럼 이고 와서 방 한구석에 쌓아놓더니만.

"물론 이게 전부는 아니에요. 제일 제 취향이어서 먼저 드린 것뿐이지, 나머지는 저쪽에 쌓아두었으니 일단 이것부터 입어보시고 나머지도 전부 한 번씩 꼭 입어보세요."

"...."

저건 또 어느새 갖다 놓은 거냐.

그래 하나만 줄 리가 없지. 내가 너무 순진했어.

한숨을 삼키며 상자를 열었다. 푸른색의 하늘하늘한 옷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인간계 남부의 옷차림에서 착안했다고 들었어요. 인간들은 마음에 안 들지만 그들의 문물은 제법 흥미로운 것이 많으니까요."

"그런데...."

"아, 참고로 위아래 짝이 맞춰져 있으니 아래 있는 바지와 같이 입으세요."

"그러니까 그건 이해했는데...."

남부의 옷차림을 착안했다는 게 거짓말은 아닌지 확실히 본 적 있는 디자인이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 아마 두루마기? 라 불렸던 것 같은데.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간과되지 않았나?

"안에 입을 옷은 없습니까?"

그래, 안에 입을 옷! 보통 바지까지 짝을 맞춰줄 정도면 안에 입을 옷은 반드시 챙기려 들지 않나?

내가 알기로 이건 겉옷이다. 심지어 개량된 탓인지 벌어진 앞을 가리기 위한 매듭도 없다.

물론 안의 옷은 알아서 입으라는 의미일 수도 있겠지만, 드벨라니아의 무한 옷 입히기 지옥을 경험한 나로서는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드벨라니아 성격상 겉옷을 주었다면 안에 입을 옷도 맞춰주었을 것이다.

설마, 깜빡한 건가…?

"아, 그건 원래 그렇게 입는 거예요."

"...원래?"

"인간계에서는 조금 다르게 입었겠지만 마계에서는 이렇게 입어요-."

미친.

"자, 어서 입어보시겠어요오?"

"아...."

젠장. 이래서 내가 2군단장을 피해 다녔던 거다. 식은땀만 삐질삐질 흘리며 손에 들린 옷을 쳐다봤다.

입기 싫다. 아니, 노출도와 내 취향을 제치더라도 절대 입어서는 안 된다. 내가 겪은 드벨라니아라면 분명 한 번이라도 입었다간 잘 어울린다며 입힐 계획 없었던 것들까지 전부 입히려 들 테니까. 그 끝이 옷을 사기 위한 외출 약속일 것은 안 봐도 뻔한 일이다.

하지만 상대는 무려 2군단장. 단호히 거절하지도 못한 채 머뭇거리고 있을 때였다.

똑똑.

"데몬 님, 에드입니다. 8군단장과 그 부관이 만남을 청하는데, 어찌하시겠습니까?"

"오."

역시 에드! 반색하며 드벨라니아를 돌아봤다.

대놓고 입으로 꺼지라 말하진 못하고, 그저 방금 들었다시피 바쁜 일이 생겼으니 어서 나가 달라는 무언의 시선을 보내는데....

"쳇."

"...!?"

방금… 혀를 찼…?

놀란 내 시선이 닿기가 무섭게 언제 혀를 찼냐는 듯 드벨라니아가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녀의 시선이 매섭게 문에 내리꽂혔다.

무서운 눈빛만 아니었다면 방금 내가 들은 것이 착각이었으리라 생각했을만큼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가 늘어지듯 들렸다.

"아쉽지만 입어보는 건 다음으로 미뤄야겠네요."

"그…러게요."

"만약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드신다면 말씀하세요. 나중에 같이 두 번째 도시로 데몬 님 마음에 드는 옷 사러 가요."

"...네."

절대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지. 마음에 들든 별로든 절대 말하지 말자.

그 사이 문에 다가선 드벨라니아가 손잡이를 잡고 벌컥 당겨 열었다. 들어오라 말하거나 내가 직접 나올 줄 알았던지 예를 갖출 준비를 하며 무심히 눈동자를 올린 에드가 이내 동공을 작게 축소시켰다.

"드벨라니아 님?"

"안녕?"

"계신 줄 몰랐습니다. 방해했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야아, 중요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나보단 우리 8군단장 님의 용건이 더 중요할걸. 안 그래?"

"...."

8군단장이 뭐라 답하는 것 같긴 한데 소리가 작아서 안 들린다. 더해서 내 시선은 저들보다는 저들 너머를 바삐 훑고 있었다.

...역시, 없나.

히엔이 없다. 설마 에드, 히엔을 정원에 묻어놓고 온 건 아니겠지…?

"아무튼 난 갈게. 수고해-."

아, 드디어 가나 보다.

저들 뒤에 히엔이 없음을 확인한 나는 무심코 시선을 돌리다 그만 보고야 말았다.

드벨라니아가 등 뒤에 무기를 주렁주렁 단 8군단장을 지나치며 무기를 고정한 끈을 느슨히 당겨놓는 것을.

그 탓에 세로로 길게 교차 되어 있던 두 창이 눕듯이 스르륵 미끄러져 가로로 넓게 교차된 것을.

그 사실을 모른 채 8군단장이 문 안쪽으로 발을 디딘다.

그리고 틱.

"아."

문의 가로 폭보다 긴 창이 그만 입구에 걸려버렸다.

뒷덜미를 잡힌 것처럼 미처 안에 발을 디디지도 못한 채 8군단장이 다리를 뻗은 상태 그대로 얼어붙었다.

옆에서 그 장면을 목격한 그의 부관이 난리 났다는 듯 헛숨을 들이키고─

"나...."

"아이고야."

─8군단장이 주저앉았다.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 그가 땅굴을 파고 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난 왜 사는 걸까… 난 역시 멍청하고 쓸모라고는 하나도 없는 쓰레기...."

"아닙니다, 헬 님! 그 정도는 누구나 하는 실수예요! 게다가 헬 님은 유독 무기를 많이 지니고 다니시니까...."

"감당도 못 할 무기를 잔뜩 지니고 다니는 난 숨 쉴 가치도 없는...."

"절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아이고 두야...."

"부관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난...."

"아, 아닙니다! 헬 님 때문에 머리가 아픈 게 아니라, 이건 그러니까 만성두통이에요! 헬 님은 잘못하신 거 없습니다!"

저 새끼들은 왜 하필 여기서 이 난리를 치는 걸까.

난 죽은 눈으로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리고 이내 생각했다.

'에드와 히엔은 무슨 대화를 나눴을까?'

...아무래도 나 역시 이 미친 곳에 적응한 모양이다.

***

에드와 히엔은 데온의 기대만큼 특별한 대화를 나누진 않았다. 그가 걱정하던 유혈사태가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에드의 날 선 말이 일방적으로 히엔을 향했을 뿐.

"...그러니 다시는 데몬 님께 접근하지 마라."

군단장 후보 1순위에 걸맞는 오만한 목소리였다.

지위가 낮아 묵묵히 그 말을 듣고 있던 히엔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닿자 에드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주춤 물러선다. 얼핏 보면 혐오하는 듯한 표정과 행동이었음에도 히엔은 알 수 있었다.

저 마족은 자신을 혐오하지 않는다. 그저 병적으로 '기피'할 뿐.

'...그러고 보니.'

수없이 그와 마주쳐오며 수없이 많은 적의를 받아왔지만, 혐오감만큼은 느낀 적 없었던 것 같다.

'왜?'

"뭘 보는 거지? 눈 치워라."

역시, 혐오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한평생을 다른 이들에게 기생해 먹고 사는 인큐버스라며 수많은 혐오를 받아온 히엔이다. 다른 무엇도 아닌 저를 향한 혐오감을 구분 못할리 없었다.

그래서 용기 내어 입을 열었다.

"에드 님은 저를 혐오하지 않으시지요?"

"...!"

"확실합니다. 에드 님은 인큐버스와 서큐버스를 혐오하지 않으세요. 그런데 왜… 커흑!"

이런, 잘못 건드렸나.

본능적으로 제 목을 조른 손을 잡으려다 상황을 자각하고 몸에 힘을 풀었다. 색색. 목이 졸려 희미한 숨소리를 내쉬며 제 목을 조른 이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의 표정에는 혐오감 따윈 담겨 있지 않았다.

그 대신 드러난 것은 기피하고 싶은 것을 기피하지 못한 데에서 비롯된 분노와… 수치심?

'큭.'

목을 조르는 힘이 점점 강해진다.

온건한 성정은 아닐지라도 데몬 님의 의견을 최우선으로 존중하는 자라 생각했기에 이리 말을 꺼낸 것이었는데, 착각이었나.

그때, 에드의 팔을 잡는 손이 있었다.

76. 다시 마계(4)

"이러다 애꿎은 마족 하나 잡겠군. 데몬 님께서 그 녀석을 아낀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벤."

"설마 정말 죽이려고 했던 건 아니겠지. 이 녀석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잖나."

"데몬 님은?"

말을 돌려 버리는군. 그나마 정원사를 죽이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이런 놈은 좋게 말을 해서는 안 먹힌다.

깊은 한숨을 내쉰 벤이 대뜸 직설적인 말을 던졌다.

"데몬 님께서 탐탁지 않아 하시는 것 같더군."

"...."

"저 인큐버스가 두 번 다시 접근하지 못하게 할 거라 말씀드렸더니 마음에 안 들어 하시는 기색이었어."

스르륵, 히엔의 목을 쥐고 있던 손아귀의 힘이 풀렸다.

바닥에 주저앉은 히엔이 목을 감싸고 기침을 토해 낸다. 그러거나 말거나 머리를 쓸어 올린 에드가 쯧 하고 짜증을 담아 혀를 찼다.

그런 에드를 무시하고 지나쳐 히엔 앞에 다리 굽혀 앉은 벤이 손가락으로 그의 턱을 들어 올리며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별문제는 없군."

손을 놓고 일어섰다. 저를 올려다보는 히엔을 힐긋 본 벤이 이내 픽 웃었다. 바람 빠지는 웃음이 미묘한 정적을 몰아냈다.

"이해해라. 저놈에게는 인큐버스와 서큐버스에 관한 안 좋은 추억이 있거든."

"네?"

"벤."

"원래는 편견 없는 놈이었어."

믿기지 않는다. 히엔은 눈을 크게 뜨고 에드를 쳐다봤다.

마족들이 누군가를 대하는 기준은 크게 두 가지다. '무력'과 '생체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는 방식'.

후자의 경우 대부분의 마족들이 식사를 통해 에너지를 얻으며, 몇몇 마족들은 특별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되거나 다른 무언가를 통해 에너지를 얻는다.

어떤 방식으로 에너지를 얻든 상관없지만, 만약 다른 누군가를 통해야지만 에너지를 공급받을 수 있다면 그 마족은 천대받는다.

'누군가에게 기생하여 간신히 살아가는 역겹고도 천박한 마족. 그게 바로 인큐버스와 서큐버스인데….'

짜증 가득한 에드 님의 표정을 살폈다. 눈이 마주치자 곧장 일그러지는 얼굴. 히엔은 입 안에서 맴도는 말을 꿀꺽 삼켰다.

...편견 가득해 보이는데요.

"믿기지 않는 모양인데."

"...믿습니다."

납득이 안 되는 것과는 별개로 믿는다. 그래야 짜증을 한껏 내면서도 혐오감은 내비치지 않는 그가 이해되니까.

'그 말대로라면… 내가 문제가 아니라 '인큐버스'라서 문제라는 거지? 그것도 에드 님의 개인적인 감정 탓에 그렇다는 거고.'

그럼 에드 님 눈에만 안 띄면 되는 거 아닌가!

희망찬 결론이 내려졌다.

데몬 님께서 직접 눈에 띄지 않게 하라 명령하신 것이라면 모를까, 그분은 자신을 계속 보길 바란다고 하지 않으셨나!

데온이 들었다면 '난 그렇게 말한 적 없는데?!' 하고 펄쩍 뛸 생각을 하며 히엔이 새삼 감동받은 표정으로 데몬 님을 부르짖었다.

물론 육성으로 내었다간 저 둘의 주목이 이쪽을 향할 테니 속으로만.

그때, 들끓는 목소리가 들렸다.

"벤, 당장 꺼… 아니, 아니지. 너, 돌아가라."

"네, 네?"

"그래, 정원사. 여기 있어 봤자 좋은 꼴은 못 볼 테니 돌아가는 게 좋겠군."

이쪽에는 시선 하나 던지지 않고 서로를 응시하고 있지만 제게 한 말이 확실하다.

두 마족의 뜻이 일치했으니 걸릴 것도 없겠다, 둘의 대치를 얼떨떨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히엔이 슬금슬금 물러났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지켜보던 벤이 고개를 돌려 저를 노려보는 시선과 눈을 마주했다.

"표정 한번 무섭군. 잘하면 날 죽이려 들겠어."

"거기서 더 말했으면 정말 그렇게 됐겠지."

"더? 무엇을? 서큐버스와 인큐버스를 착각하고 잘못 고백하는 경우를 말하는…."

쾅!

벤이 서 있던 자리가 움푹 팼다.

"닥쳐."

"...여긴 연무장이 아닐 텐데."

진즉에 자리를 옮겨 피한 벤이 작살이 난 바닥을 보며 중얼거린다. 시선을 들자 에드와 눈이 마주쳤다. 드물게 벌게진 얼굴이 눈에 들어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진정해. 지금 네가 무슨 꼴인지 알긴 하나?"

"...."

"추해. 데몬 님께서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안 이상 네가 정원사에게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게다가 정원사가 무언가 크게 잘못한 것도 없지 않나."

"...."

"어서 진정하고 네가 있을 자리로 가지 그래. 지금쯤이면 데몬 님께서 돌아오셨다는 소식이 마왕성 전체에 퍼졌을 텐데. 방문객들이 많지 않겠나."

"...."

과했다. 당황한 나머지 과하게 굴어 버렸다.

이상한 데에서 당돌하던 인큐버스를 떠올린 에드가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을 가득 담아 한숨을 내쉬었다.

정원사에게 잘못이 없다는 건 안다. 다만 완벽주의자인 그의 인생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게 해 탐탁지 않았을 뿐.

마음 같아서는 피하고 싶지만 데몬 님의 부관이라는 위치상 그럴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를 틈타 치워 버리려 했다.

데몬 님께서 그자를 완전히 치우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은연중에 알고 있었지만, 그분을 위한다는 변명을 내세워 모른 척했다.

사적인 감정을 제외하더라도 인큐버스의 존재는 데몬 님의 이름을 깎아내리는 요소가 되기에 망설일 것도 없었으나,

'설마 그런 말을 할 줄은….'

자신은 0군단장의 부관.

그를 위해 행동하는 것에 사감을 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 자신의 행동은 자격 실격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에드가 정신을 차리기 위해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돌아가자.'

과거 인큐버스가 성별을 속여 그의 마음을 가지고 놀았건, 고백한 사실을 널리 알려 그를 웃음거리로 만들었건, 그건 과거일 뿐이고 정원사와는 아무 관련 없는 일이다.

잊자. 예민하게 반응할수록 우스워지는 것은 자신일 뿐이니.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기억을 덮어두고 기다리고 계실 데몬 님을 떠올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 에드가 8군단장을 만난 것은 데온의 방 바로 앞이었다.

"나 따위가… 데몬 님의 시간을 빼앗아도 괜찮을까…?"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헬 님은 어엿한 군단장이십니다! 지난 분기 땐 제대로 인사를 못 드렸으니 이번에 제대로 해야지요!"

"하지만…."

분기란 데몬 님께서 임무를 위해 나가셨을 때와 돌아와 마왕성에 머무시는 시간을 뜻한다.

특별한 계절 변화도 없고, 기본적으로 긴 삶을 사는 마족들이다 보니 시간 개념이 희박해 그분의 움직임을 보고 대충 분기를 나누게 된 것인데, 오가는 말을 들어보니 저 검은 형체가 누구인지 알 것 같다.

지지난 분기 때 데몬 님께 인사를 드리지 못한 군단장.

등 뒤는 물론 온몸에 주렁주렁 달린 각종 무기들. 그리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커먼 형체.

"8군단장님?"

"...!"

역시나.

상대의 정체가 8군단장임을 확신한 에드가 곧장 허리를 숙였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0군단장 데몬 아루트 님의 부관 에드입니다. 8군단장님께서 여기엔 어쩐 일이십니까?"

***

문 앞에 쪼그려 앉은 8군단장이 땅속으로 꺼질 듯 스스로를 자책한다. 옆에서 그의 부관이 열정적으로 그의 기운을 북돋아 주고, 이 상황을 초래한 드벨라니아가 숨죽여 키득거린다.

'...하하.'

개판이네.

나는 눈앞의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다 고개를 돌려 에드에게 시선을 보냈다.

이 개판을 어떻게 좀 수습해 보라는 의도였으나, 에드는 고개를 더욱 푹 숙일 뿐 이렇다 할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나쁜 놈….'

지가 데려와 놓고선.

차게 식은 눈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일단 이 미친 상황을 수습하는 것이 우선이다.

짝-

가볍게 두 손을 마주쳤다.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단숨에 모든 이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정적이 찾아왔다.

그러니까….

"개판이네."

"개판이…가 아니라, 마왕님?"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야, 마왕이 왜 여기에 와?! 심지어 그 뒤엔 리리넬도 있다.

2군단장, 8군단장에 이어서 이젠 마왕과 11군단장이라니. 이게 무슨 일이래.

"데, 데몬 님…."

"...?"

태연한 마왕의 표정과 달리 리리넬이 불안한 눈빛으로 초조하게 발을 동동 구른다.

덩달아 초조해져서 그녀를 바라보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흠칫하더니 이내 울상을 지었다.

"죄송해요…."

뭐, 뭐가?

"아, 다름이 아니라 리리넬이 흥미로운 걸 받았더라고. 독특하게 생긴 쿠키였는데."

싱긋, 여우처럼 눈웃음을 지은 마왕이 무언가를 흔든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다름 아닌 쿠키 봉지. 그것의 출처가 어디인지는 굳이 캐묻지 않아도 뻔했다.

그, 근데 그게 왜? 난 나름 평범한 걸 줬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괴상한 걸 군단장에게 주었다고 뭐라 하려는 건가? 인간이 주는 쿠키는 믿을 게 못 되니까?

"죄…."

"나한텐 이런 거 안 줘?"

"송… 네?"

"너무하잖아. 리리넬한테만 이런 걸 주다니."

"맞아요, 데몬 니임, 저한텐 일언반구도 없으셨으면서 리리넬한테만 그런 걸 주셨단 말이죠? 너무하세요-."

"...."

안도하기에 앞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니까, 선물 하나 안 줬다고 지금 찾아온 거야? 마왕이?

심지어 마왕이 폭로해 버린 나머지 2군단장마저 기념품을 바라기 시작했다.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한 것 같지만 에드도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고, 심지어는 8군단장까지 자책을 멈추고 뭔가 기대하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넌 그냥 계속 자책하고 있지, 왜.'

"데몬?"

"아, 네. 잠시…."

서둘러 시선을 거두고 이곳에 올 때 메고 온 짐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뭐가 들어 있었더라. 괜찮은 게 있어야 할 텐데. 뭐라도 쥐여 주지 않으면 이대로 계속 안 가고 버틸 것 같다.

이곳에 오던 도중 레멤베르가 무엇을 챙겨 줬는지 대충 확인하기는 했다만, 자세히 살펴보지는 못했기에 살짝 걱정이 되었으나….

'와… 생각 외로….'

결과적으로 쓸모없는 걱정이었다.

은색 회중시계, 흰 장갑, 쿠키. 어떻게든 의미를 끼워 맞추면 대충 선물의 모양새는 갖출 듯한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게다가 새거야.'

완벽하다.

내가 회중시계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과 장갑은 답답해서 격식을 갖추는 자리가 아닌 이상 착용하지 않는다는 것, 쿠키가 평소 그가 제공하던 쿠키와 다르게 꽃과 하트 모양이라는 것이 조금 걸리지만.

설마 레멤베르가 뭘 알고 넣었겠는가. 혹시 몰라서 넣어 둔 것이겠지.

'…그럼 이것도 혹시 몰라서…?'

귀농할 때를 대비한 건가…?

가방 한구석에서 있는 줄도 몰랐던 꽃씨를 발견한 난 그만 표정 관리도 잊은 채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회중시계?"

"네."

"이렇게 좋은 걸 받아도 될는지 모르겠네."

마왕이 싱글벙글 웃으며 주머니에 회중시계를 집어넣는다. 차게 식어 가늘어진 내 눈이 그 모습을 좇았다.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지가 바라 놓고선….

"난 쿠키를 생각했거든. 그런데 이렇게 좋은 걸 줄 줄이야. 아무튼 고마워."

"...!"

내가 속마음을 말했나?

그대로 돌아서는 마왕을 보니 그건 아닌 것 같다. 할 일이 많은지 이만 가보겠다며 자리를 뜨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 리리넬과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울상인 얼굴로 입을 뻐끔거린다.

'정말 죄송해요.'

괜찮지 않지만 괜찮다. 고의가 아닌 게 눈에 뻔히 보이는데 뭐라 할 수는 없지.

대충 괜찮다는 의사를 표현하니 얼굴이 확 밝아진 그녀가 허리를 꾸벅 숙이고는 서둘러 마왕의 뒤를 쫓아 사라진다.

나는 그대로 시선을 돌려 에드를 눈에 담았다. 그는 장갑을 바꿔 끼고 있었다.

'똑같은 모양에 똑같은 색인데 왜 굳이…?'

언제나 흰 장갑에 가려져 있던 손등의 검고 기묘한 문양이 드러났다가 모습을 감춘다.

괜히 섬뜩해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자 흡족한 에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사합니다, 데몬 님."

뭐… 마음에 들었으면 된 거겠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가방에서 쿠키 두 봉지를 꺼냈다.

당연하지만 이건 2군단장과 8군단장의 것이다.

마침 쿠키도 딱 두 봉지 남았으니 망정이지, 자칫하면 큰일 날 뻔했다. 군단장의 원망을 듣기엔 아직 내 간이 작거든.

그런데 쿠키와 8군단장을 번갈아 보는 드벨라이나의 표정이 이상하다.

뭐랄까, 심술과 장난기가 섞인 듯한 느낌?

"흐응-."

"...?"

"이봐, 8군단장님."

대답은 없지만 부름에 반응한 헬이 고개를 들었다. 드벨라니아가 히죽, 불길한 웃음을 지었다.

77. 다시 마계(5)

"첫 번째 도시에서, 데몬 님에 대해 외부인에게 떠벌리는 놈이 있더라."

"!"

"아, 아니…! 헤, 헬 님!!"

화들짝 놀란 그의 부관이 무언가 말하기도 전에, 헬이 사라졌다. 말 그대로, 땅으로 꺼지듯.

놀란 것도 잠시, 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쟤 그림자 출신이었지.'

비유적 표현이 아닌 말 그대로의 그림자.

마왕의 힘은 순수하게 자기들끼리만 뭉쳐 마족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오우거에 깃들면 오우거 출신의 마족이 탄생하고, 사물에 깃들면 그 사물 형태의 마족이 탄생한다.

8군단장 헬은 그림자에 마왕의 힘이 깃들어 탄생한 마족이다.

그래서인지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입체감을 가지고 일어난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지만, 설마 저런 능력도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그런데 왜 사라진 거지?

"본인의 임무도 다하지 못한 녀석이 데몬 님의 쿠키를 먹을 자격은 없지. 그러니까 데몬 님."

"네, 네?"

"두 개 다 저 주시면 안 될까요오?"

"드벨라니아 님!"

내가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헬이 사라진 곳에 무릎 꿇고 앉아 망연히 바닥을 들여다보던 부관이 버럭 소리쳤다. 정작 그에 기겁한 것은 나였다.

부관이 군단장을 향해 큰소리를 치다니. 그것도 본인의 직속상관이 아닌 다른 군단장이다.

쟤가 미쳤나, 진짜!

'여기서 이러지 말고 나가서 싸워, 새끼들아….'

내 방에서 피 튀기지 마.

***

자신의 영역에서 으르렁거리는 두 마족이 퍽 불편했는지 데온은 드벨라니아와 헬의 부관 나인에게 쿠키 봉지를 하나씩 쥐여 주고는 밖으로 내보냈다.

아니, 정확하게는 '데몬 아루트'의 불편한 심기를 눈치챈 둘이 알아서 자중하며 먼저 물러선 것에 가까웠다.

여기서 더 했다간 필시 사달이 터졌을 테니까.

그의 분노가 얼마나 무서운지는 익히 알고 있다. 평소 온건한 사람이라 하여 우습게 볼 만큼 둘은 어리석지 않았다.

그러나 한 사람 때문에 일시적으로 멈춘 다툼이 그대로 끝날 리 없다.

방 밖으로 나오고, 문이 닫히기 무섭게 나인이 쿠키 봉지를 품에 꼭 끌어안으며 드벨라니아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드벨라니아의 눈에 흥미가 돌았다.

"어머, 지금 날 노려본 거니?"

"우리 헬 님 좀 그만 괴롭히십시오!"

"내가? 왜애, 난 그냥 맞는 말을 한 것뿐인데?"

"그렇지 않아도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분인데, 양심도 없으십니까?! 너무하십니다!"

8군단장 헬. 모든 무기를 제 몸처럼 다룰 정도로 무기술에 통달한 자.

그림자 출신인 그가 가지고 있는 고유능력은 잠입과 관련된 임무에 적합한 듯하여 처음엔 마왕조차 그를 2군단장에 앉히고 싶어했으나,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

바로 자존감이 터무니없이 낮다는 것이다.

'내게 이런 중요한 일을 맡길 리가 없어', '나 따위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어', '나 같은 게 이런 걸 해도 정말 괜찮을까?'

그래 놓고서는 조금만 실패를 하면 '역시 나 같은 쓰레기는 나가 죽어야 해', '난 왜 사는 걸까?', '역시 난 숨 쉴 가치도 없는 쓰….'

"쓰레기… 난 역시 쓰레기야…."

발밑 그림자에서 불쑥 튀어나와 그대로 주저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는 제 상관을 보며 나인이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새 일 처리를 다 끝내고 왔는지 옷 끄트머리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는 핏방울.

이렇게 빨리 일을 처리하고 온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몇 번이고 설명했건만….

"아뇨! 지금이라도 정리를 하고 오신 게 어디입니까! 누구나 실수를 합니다. 수습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법이죠. 그런 의미에서 헬 님은 훌륭하게 뒷수습을 하셨습니다! 아주 잘하셨어요!"

"...정말?"

"물론입니다! 만약 헬 님께서 정말 큰 잘못을 하셨다면 데몬 님께서 이렇게 쿠키를 주셨을 리도 없지 않습니까! 이것 보세요."

"정말 그게 내 거야…? 데몬 님께서 내 몫으로 주신 거라고…?"

"예!"

사실 2군단장과 신경전을 벌여 가면서 악착같이 얻어 낸 거지만.

시치미를 뚝 뗀 나인이 보란 듯이 쿠키 봉지를 흔들어 그의 시선을 끌었다.

"그러니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어서 일어나세요. 방에서 이 쿠키 좀 드시면서 휴식을 취하자고요."

이 광경을 보면 고작 데몬 님에 관한 이야기가 외부에 돌고 있다는 소식일 뿐인데, 왜 8군단장이 자책하느냐는 의문을 갖는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당연했다.

마물로 인한 소동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무슨 임무를 맡았는지 알려지지도 않고,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도 않아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던 8군단장이 현재 맡은 대외적인 임무는 '마계 주요 도시 경계'.

그러나 그 전부터 그가 맡아 온 비밀스러운 임무가 있다.

데몬 아루트가 마왕군에 합류한 그 순간부터 맡게 된 임무.

[데몬 아루트의 외형에 관한 정보가 인간계에 새어 나가지 않게 하는 것.]

어째서 0군단장에 관한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일까.

어째서 제국은 0군단장의 생김새에 대해 갈피조차 못 잡고 있는 것일까.

이 모든 것이 과연 우연으로 느껴졌던가.

헬은 임무를 받은 그 순간부터 꾸준히 움직였다.

마왕성 밖으로 휴가 나간 사용인이 아는 이에게 '데몬 아루트'의 생김새에 대해 떠들려 할 때, 데몬이 마물 사냥을 나가 첫 번째 도시의 도박장에서 민낯을 드러낸 채 정체를 들켰을 때, 인간계와의 경계선에서 영웅과 전투를 벌였을 때도.

그는 꾸준히 그 흔적을 쫓아 죽이고, 입막음했다.

낮은 자존감과는 정반대로 한 치의 실수도 없는 훌륭한 솜씨였다.

지금도 보라, 2군단장의 제보가 있기 무섭게 곧장 움직여 상대를 처리하고 돌아오지 않았나. 떠벌렸다 했으니 그 이야기를 들은 이들도 같이 처리했을 텐데, 이 모든 일을 해치우는 데 걸린 시간을 생각하면 터무니없을 정도다.

'그놈의 자존감만 어떻게 좀 하면 될 텐데… 하아.'

나인이 한숨을 삼키는 사이, 간신히 진정한 헬이 쭈뼛쭈뼛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에 안심시켜 주듯 나인이 웃으며 정중히 손을 내밀고, 헬이 그 손을 잡으려던 순간.

"애초에 실수를 하지 않는 게 중요한 거 아닌가?"

"...!"

"드벨라니아 님!"

헬이 모래성처럼 다시 무너진다. 즉각 돌아오는 반응에 드벨라니아가 키득거렸다.

이래서 8군단장을 괴롭히는 걸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재밌으니까.

드벨라니아 님과 상관없는 일인데 왜 자꾸 딴지를 거냐는 둥, 마족이 실수 좀 할 수 있지 왜 우리 애… 상관 기죽이냐는 둥, 마왕님께 이를 거라는 둥 왁왁거리는 나인을 뒤로한 채 돌아섰다.

'이러면 당분간 방해할 생각은 꿈도 못 꾸겠지.'

조만간 데몬 님을 설득해 두 번째 도시로 옷을 사러 갈 생각인데 그때도 방해가 들어오면 곤란하다.

데온은 갈 생각도 없는데 벌써부터 무슨 옷을 살지 행복한 고민에 빠지며 드벨라니아는 경쾌한 발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건방진 8군단장의 부관의 외침에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리며.

***

이레온 왕국은 난장판이었다.

"제국군이 벌써 도시 한 개를 짓밟고 이곳을 향해 진격하고 있다고 하오! 곧 있으면 다음 도시에 도착할 것 같다는데, 상황이 이렇게 될 때까지 도대체 무엇을 한 것이오? 무슨 대책이라도 내놓아야 할 것 아니오!!"

"댁도 못 내놓는 대책, 우리라고 별수가 있겠습니까!!"

"그럼 이대로 다 같이 죽자는 말이오?!"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탁상 앞에 앉아 목소리를 높이는 것 외엔 할 수 없는 이들이 제 목숨 아깝다며 활개 치고, 밖에서는 죄 없는 백성들이 죽어 나간다.

신성해야 할 회의장은 이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자리가 아닌 싸우기 위한 투기장으로 변한 지 오래였다.

'개판이군.'

옥좌에 앉아 있던 이레온의 국왕은 지그시 미간을 눌렀다. 분명 약을 먹고 왔는데도 벌써부터 두통이 오는 듯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러게, 황제를 건들지 말자 했었다. 우연히 마주했던 그의 두 눈에서 검은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기에.

붉은 불꽃이 아니다. 그것은 흔히들 장작이 되는 열정, 분노, 증오, 복수심 따위를 바탕으로 타오르고 있지 않았다.

공허하나 삶의 의지를 잃지 않고 악착같이 타오르는 불꽃. 굳이 색을 붙인다면 '빨강'이 아닌 '검정'에 가까운.

그래, 검은 불꽃이다. 그것이 무엇을 목적으로 불타오르고 있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지만, 건드려서 좋을 게 없을 것이라는 것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전부터 이 나라는 글러 먹었다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무너지게 되는군.

국왕의 말은 먹히지 않는다. 왕의 권위는 땅으로 떨어졌고, 귀족들은 제 잇속을 채우기 바빠 백성을 돌보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름 정치를 하는 자들이라 그런지 아예 멍청하지는 않았으나, 이번만은 계산 착오였다.

귀족들이 마냥 돈에 눈이 멀어 제국에 보상을 요구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행동 밑바탕에는 제국이 곧장 요구를 들어주지는 못할지언정 최소한 '협상'을 시도해 올 것이라는 예상이 깔려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라. 어찌 되었건 국경선 근처에서 작은 전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이는 관점에 따라 이레온 왕국에게 위협으로 느껴지기에 충분하다.

더해서 전쟁에는 많은 돈과 인력이 들어간다. 8년 전쟁이 끝난 지 이제 겨우 2년이 지났을 뿐이니 이런 상황에서 제국이 쉽게 '전쟁'이란 패를 꺼내 든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심지어 8년 전쟁 당시 훌륭한 선봉장이었던 데온 하르트마저 부상으로 쉬어야 하는 상태이니, 그 누가 전쟁을 예상할까.

물론 어디까지나 '상식적'으로만.

'소심하게 툭 건든 것에 온 힘을 다한 주먹이 돌아왔으니.'

당황한 귀족들을 내버려 둔 채 국왕은 입가를 가렸다.

황제가 무엇을 바라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아서, 자칫하면 침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아서.

'…황제는 처음부터 전쟁을 바라고 있었나.'

조심스러운 추측은 이내 확신이 되었다.

황제는 전쟁을 벌일 수 있는 '명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레온 왕국은 그가 칼을 뽑아 들 기회를 착실히 마련해 주었고, 그 칼의 첫 번째 희생양이 되겠지.

이 사실을 진즉에 알았더라면….

'...그래도 똑같았겠지.'

그때도, 지금도 그는 힘없는 국왕이고, 그의 목소리는 귀족들의 발언에 묻힐 테니까.

"항복을…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난장판이 된 회의장 안에서 귀족들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발언했다. 기다렸다는 듯 눈을 빛내는 다른 귀족들을 보며 국왕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 역시 예상했다.

잃을 것이 많은 자들은 싸우기를 두려워한다. 충신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나가거나 실종되었고, 그나마 깨끗했던 이들마저 흙탕물에 물들어 버렸다.

이곳엔 간신들밖에 남지 않았다. 제 뱃속이 우선인 자들이 나라를 위할 리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 이리 입맛이 쓴 것인지.

"전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언제 싸웠냐는 듯 한마음 한뜻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들을 마주하며, 이레온의 국왕은 힘없이 미소 지었다.

"항복을 준비하도록 하지."

***

어느덧 마왕성에 온 지 한 달이 지났다.

그리고 나는 그동안 간과하고 있었던 아주 중요한 사실을 하나 떠올릴 수 있었다.

"심심해…."

바로 마왕성은 더럽게 할 게 없다는 것! 올 때 재밌는 놀 거리라도 가져올 걸 그랬다.

짤깍. 막 맞춘 큐브를 침대 한쪽에 던진 뒤 그 옆으로 몸을 날렸다. 고개를 틀어 베개에 얼굴 반쪽을 파묻고 바닥을 내려다봤다.

그곳엔 완성된 대형 퍼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방 벽에 장식할 거리가 하나 더 늘었군. 저게 몇 피스짜리였더라. 6000피스였나.

아마 그 정도는 될 것이다. 예전에 자괴감에 던진 적 있는 퍼즐이라 어렴풋이나마 기억하고 있거든. 그걸 결국 맞춰 버리다니, 나도 참….

'아, 몰라.'

한 달간 푹 쉰 덕분에 인간계에서 만들어 온 눈 밑의 그늘은 사라졌지만, 사람이 아무 짓도 안 하니 미칠 것 같다.

"...밖에라도 나가 볼까."

78. 다시 마계(6)

밖에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괴물들이 득실거린다지만, 그래도 방에만 처박혀 있는 것보단 움직이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걸쳤다.

마왕성 밖으로 나가는 것도 아니고 주변만 둘러볼 생각이니 꼼꼼하게 준비할 것도 없이 대충 챙길 것만 챙기고 문 앞에 섰다.

문을 열기 전, 나는 힐긋 뒤를 돌아보았다. 보이는 것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완성된 퍼즐.

잠시 치워야 하나 고민했으나, 따로 치워 둘 곳도 없고….

'내버려 두면 에드가 알아서 정리하겠지.'

늘 그랬듯이 액자에 끼워 벽에 걸어 둘 것이다.

더 신경 쓸 것이 없음을 확인한 난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밖에 나갔다.

....

"아, 데몬 님!"

그래, 왠지 그럴 것 같았어. 대충 만날 것 같다 예상하고 있긴 했는데… 설마 진짜로 만날 줄이야.

간이 쓸데없이 크다는 건 대충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뻔뻔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에드가 다시는 접근하지 못하게 경고하려 따로 끌고 갔던 것이 마치 없었던 일인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히엔이 다가온다.

나는 그를 만날 때를 대비해서 챙겨왔던 비장의 무기를 슬그머니 꺼내 들었다.

나라고 언제까지고 그에게 휘둘릴 수는 없지 않나. 이런 용도로 사용하라고 레멤베르가 챙겨 준 것은 아니겠지만… 이걸 어떻게 사용하든 그건 내 마음이다.

'설마 설마 하면서도 이렇게 챙겨 나오긴 했는데… 이걸 정말 사용하게 되다니.'

아니나 다를까, 히엔이 내 손에 들린 것에 곧장 관심을 보였다.

"데몬 님? 그게 뭐예요…? 보아하니 씨앗 같은데…."

"꽃씨입니다."

"꽃이요? 어떻게 생긴 꽃인가요? 눈이나 입이 달렸나요? 아니면 촉수? 이렇다 할 것이 없다면 생명체를 홀리는 능력이나 독을 뿜는 능력이라도 있나요? 먹이는요? 인간을 먹나요, 마족과 마물을 먹나요? 아니면 양쪽 다?"

뭐야 얘, 무서워.

눈을 번뜩이며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민 히엔을 피해 슬그머니 고개를 뒤로 빼며 급히 말을 뱉었다.

"나도 모릅니다."

"...네?"

"일반적인 마계의 식물과는 다른 특별한 식물의 씨앗이라는 건 알겠는데, 정확히는 잘 모르겠습니다."

대놓고 인간계의 씨앗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 아니, 말해도 큰 문제는 없을 테지만 지금 상황에서 밝히면 내가 곤란하다.

난 이걸 미끼로 히엔을 돌려보낼 생각이거든.

이걸 들려서 보내면 한동안은 이 씨앗 발아에 몰두하느라 내 앞에 나타나지 않겠지. 이게 내가 정한 그와 나 사이의 거리다.

'곁에 둘 수도, 완전히 쫓아낼 수도 없으니 어쩌겠어.'

이런 식으로라도 거리를 둬야지.

"이걸 키워 보겠습니까?"

"네? 제가요?"

"네."

"정말 제가 이 귀한 것을 키워도 될까요…?"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귀한 것도 아니고… 이건 장미 씨앗이거든. 다만 마계에서는 키울 수 없을 뿐이지.

인간계의 식물은 대부분이 기본적으로 햇빛을 필요로 한다. 해가 뜨지 않는 마계에서는 절대 키울 수 없을 터.

나중에 시무룩한 얼굴로 나타날 히엔을 생각하면 조금 양심이 찔리긴 하지만, 그래도 이걸로 눈앞의 그를 빨리 돌려보낼 수 있다면 양심에 찔리는 것 정도는 별것도 아니다.

히엔이 손을 덜덜 떨며 꽃씨를 받아든다. 그가 감동에 젖은 얼굴로 씨앗을 품에 꼭 안고 허리를 푹 숙였다.

"감사합니다! 꼭 꽃을 피워 내서 데몬 님께 보여 드릴게요!"

"음… 네, 응원하겠습니다."

당장 시작하려는 듯 히엔이 꾸벅 인사하고는 후다닥 어디론가 달려간다.

좋아, 처치했다.

시한폭탄 하나를 깔끔하게 처치한 스스로에게 찬사를 보내며 멈췄던 걸음을 옮겨 느긋하게 복도를 가로질렀다.

할 것도 없겠다, 1층에 내려가 볼까. 여차하면 밖에 나가서 건물 주위라도 돌아봐야지.

1층에 내려가는 것은 잠시 미뤘다. 내려가던 도중 도서관을 발견했거든.

나는 고개를 들어 어마어마한 위용을 뽐내고 있는 거대한 문을 눈에 담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도서관에 들른 적이 있었나?'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참에 들어가 볼까. 그런데 들어가도 되는 건가…?

걱정이 무색하게도, 내가 문 앞을 기웃거리자 도서관 입구를 지키던 두 마족이 즉시 옆으로 물러서며 길을 텄다.

경직된 눈들이 내 행동을 좇는다. 들어가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헷갈렸으나 나는 그들의 눈빛보단 행동을 믿기로 했다.

당당히 안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책이 아닌 사서였다. 자리에 앉아 책을 읽던 사서가 상대를 확인하려는 듯 힐긋 나를 보더니 다시 책에 시선을 고정한다.

"...."

"...!"

벌떡! 쿠당탕탕!

책이 바닥에 떨어지고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데… 데데데데몬 님! 여긴 어쩐 일로…!"

아, 상대 파악이 느렸구나. 올 거라 생각하지 않은 상대가 와서 놀란 건가?

어쩌면 와서는 안 되는 사람이 와서 놀란 것일 수도 있다. 마왕군이니 군단장이니 해도 결국 난 인간이니까.

"그냥 둘러보고 싶어서 왔습니다만… 안 됩니까?"

"안 되긴요! 얼마든지 둘러보셔도 됩니다! 만약 찾는 책이 있으시다면 꼭 말씀해 주시고요."

사서가 후다닥 물러간다. 자리로 돌아가 주섬주섬 뒷정리를 하는 모습을 보던 난 고개를 돌려 넓은 공간을 차지한 수많은 책장을 훑었다.

그저 구경 온 것뿐이기에 이 공간을 죄 헤집으며 돌아다닐 생각은 없다. 대충 입구와 가까운 책장에 손을 뻗었다. 손에 닿는 책을 꺼내 표지를 살폈다.

[현 제국의 영웅들에 관한 정보]

[저자: 이델리아, 드벨라니아]

'현 제국?'

그 '현 제국'이 내가 생각하는 '현 제국'이 맞는다면, 정보가 새로 들어올 때마다 바로바로 내용을 추가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이 책이 가까이에 있었구나.

책을 펼쳤다. 익숙한 초상화와 눈이 마주쳤다.

[첫 번째 영웅. 네메세우스.]

[…9왕자였던 현 황제 에도아르도 데세르트가 반정을 일으킬 당시 적극적으로 그를 도운 공으로 백작이 됨. 이후 '8년 전쟁'에서 총사령관으로 활동하여 후작위를 받음. 현 제국의 귀족들 중 유일하게 '성'이 없는 귀족.]

[평민 출신으로 돈이 필요해 검투장의 검투사로 활동하다가 현 황제 에도아르도 데세르트와 만남. 당시 9왕자였던 에도아르도는 그의 검 실력을 높이 사 제 사람이 되는 조건으로 후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어째 남의 사생활을 캐는 기분이다. 서둘러 다음 장으로 넘겼다.

여전히 장군님에 관한 정보가 나온다. 또 페이지를 넘겼다.

'도대체 얼마나 조사한 거야… 왜 장군님의 입맛까지 알고 있는데.'

팔랑팔랑 장을 넘기는 손이 빨라졌다.

바삐 움직이던 내 손이 멈춘 것은 새로운 인물이 나왔을 때였다. 형형한 눈빛의 초상화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두 번째 영웅. 스티그마 프리미로.]

[로우펠 자작가의 사생아. '8년 전쟁' 당시 공을 인정받아 새로운 성과 후작위를 받음. 제국의 남쪽 경계선에서 야만족 소탕에 주력하고 있으며, 압도적인 무력을….]

어… 잠깐, 이런 식이면 나에 대한 것도 적혀 있겠네?

서둘러 책장을 파라락 넘겼다. 스티그마에 관한 정보가 끝나고, 내 이름이 등장했다.

그곳에 초상화는 없었다.

[세 번째 영웅. 데온 하르트.]

[마왕님의 명으로 조사가 금지됨.]

[호기심을 가지지 말 것.]

긴장이 탁 풀렸다.

그렇지. 마왕이 일을 허술하게 처리할 리가 없지.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텅텅 빈 장을 넘기자 다시 초상화가 나타났다. 검은 머리와 녹색 눈. 차가운 분위기를 두르고 정면을 응시하는 표정 없는 남자.

[네 번째 영웅. 크루엘 하르트.]

[세 번째 영웅 데온 하르트와 혈연관계로 알려짐. 황제의 사람이 아닌 그와 대립하는 공작의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보기만 해도 짜증이 일어 그만 책을 덮었다. 제자리에 돌려놓고 가려는데, 눈길을 사로잡는 책이 하나 있었다.

누군가 손으로 직접 쓴 듯, 고풍스러운 필체의 제목.

[용사와 마왕, 영웅에 대하여]

[저자: 카베르]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뻗어 책을 꺼냈다.

[용사.]

[세계가 마왕을 죽이기 위해 직접 선택하고 힘을 부여한 인간.]

[무기술에 대한 재능, 타고난 힘, 두뇌, 심지어는 수명까지. 대상을 이루는 모든 것이 인간의 규격을 한참 벗어남.]

[용사는 죽을 때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는데….]

뭔가 특별한 게 있을 줄 알았는데, 뭐야. 다 알고 있는 거잖아?

대충대충 책장을 넘기다 아예 두세 장씩 한 번에 넘겼다. 그렇게 몇 번 넘기자 '영웅'에 관한 설명이 나왔다.

[…용사의 찌꺼기. 제국 말로 용사의 파편이라 불리는 그것은 다른 말로 '재능의 파편'이라 할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잡히지도 않는 상태로 떠돌던 파편은 어떠한 전조도 이유도 없이 순수한 우연에 따라 인간에게 흡수되는데, 이들이 바로 용사의 파편을 지닌 '영웅'이다. 용사만큼은 못하지만 인간의 평균치를 뛰어넘은….]

[※본디 용사의 파편을 지닌 인간을 '영웅'이라 칭했으나, 제국에서 칭하는 '영웅'에 용사의 파편 유무와 관계없이 모두가 인정할 만한 공을 세운 인간이 포함되며 뜻이 혼동되기 시작했다. 주로 '영웅 후보', '진짜 영웅'을 용사의 파편을 지닌 인간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니 상대가 헷갈릴까 걱정된다면 이 두 단어를 상황에 맞춰 적절히 사용할 것.]

이것도 대충 알고 있는 거고… 마왕에 관한 건 좀 다르려나?

마왕, 마왕… 아, 찾았다!

[마왕.]

[세계가 용사를….]

문장을 채 끝까지 읽기도 전에,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뭐 해?"

"!"

귀! 귀에 숨결이 닿았어!

화들짝 놀라 책을 떨어뜨렸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책의 페이지가 마구 넘어가더니 어느 한 곳에서 멈춘다.

헉, 책이 상한 건 아니겠지? 책을 관리하는 마족이 내게 앙심을 품기라도 할까 급히 손을 뻗었다.

마지막 장인 듯 펼쳐진 페이지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는 핵심을 정리한 듯 단 한 문장만이 적혀 있었다.

[용사와 마왕은 이 세계가 미숙하다는 증거다.]

미숙이고 나발이고 책은 무사한가?

다행히 눈으로 봤을 때 크게 손상된 곳은 없는 것 같다. 표지까지 확인을 마친 뒤 겉면을 툭툭 털었다.

그러고 나서야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을 하나 떠올릴 수 있었다.

"어…."

"이제야 날 보네."

애초에 내가 책을 떨어트린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누군가 갑자기 말을 걸어서 그런 것 아니었나.

뻣뻣하게 굳은 고개를 간신히 들었다. 가면 같은 웃음을 지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씨이…발….'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억누르자, 신음 같은 목소리가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마…왕님?"

"응."

"여긴… 왜…."

"가져갈 책이 있어서."

그가 턱짓으로 내 손에 들린 책을 가리킨다.

책과 그를 번갈아 보다가 이내 책을 내밀었다. 자연스럽게 내 손에서 책을 거둬 간 마왕이 아무렇지 않게 그것을 옆구리에 끼고 나를 불렀다.

"너야말로 여긴 왜 왔어?"

"아… 그냥 둘러보고 싶어서…."

"아하."

"...."

"...."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다른 마족들이라면 모를까, 마왕과 이런 적은 없었는데.

처음 겪는 상황에 차마 자리를 뜨지 못하고 눈만 굴리기를 잠시,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보던 마왕이 '아' 하는 탄성과 함께 입을 열었다.

"미안,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네. 여기에 더 있을 거야?"

"아뇨."

마왕까지 만났는데 내가 미쳤다고 여기에 더 있겠어?

"만약 나 때문에 가려는 거면 나도 갈 거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아닙니다."

어차피 이곳에 있어 봤자 할 것도 없다. 그냥 예정대로 건물 밖에 나가 봐야지.

진심인지 아닌지 가늠하듯 빤히 날 보는 마왕의 시선을 피해 도망치듯 서둘러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계획대로 밖에 나오는 것까지 성공했으나... 길을 잃었다.

79. 다시 마계(7)

확언하건대, 마왕성은 아주 넓다. 외성과 내성으로 구분해 따로 봐도 말도 안 되게 넓다.

마왕성 자체를 하나의 도시로 봐도 무방할 정도라 말하면 이해가 될까.

그러니까 내가 여기서 길을 잃은 것은 어쩔 수 없다는 뜻이다. 멍청해서가 아니란 말이지.

'여기가 어딜까….'

내성이라는 건 확실한데.

목적지 없이 마구잡이로 걸은 내 발을 욕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텅 빈 공터.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정돈된 흙바닥. 주위에 늘어져 있는 무기들.

'....'

이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머리로 떠올리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선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왜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일까.

'이거 아무래도….'

"데몬 아루트?"

흠칫.

"여긴 무슨 일이지?"

"...."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떠올린 감상은 오직 하나였다.

미…이친.

누군가의 연무장이라는 것은 눈치챘지만, 설마 1군단장의 연무장이었을 줄이야. 하고많은 군단장들 중에 하필이면 1군단장이라니.

삐걱거리는 목을 돌려 목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연무장 바깥쪽에서 한 손에 검을 든 채 물을 마시던 제이카르와 눈이 마주쳤다.

"...오랜만입니다."

"그래, 오랜만이군. 돌아왔다는 소식은 들었다. 그래서 여긴 무슨 일이지?"

"...."

"...."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 그냥 꾹 다물었다. 답을 요하듯 제이카르의 시선이 따라붙었으나 애써 외면했다.

어, 어쩔 수 없잖아. 심심해서 나와봤다가 길을 잃어버렸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렇게 어색한 침묵이 찾아온 것도 잠시,

"아."

제이카르가 뭔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0군단장 전용 연무장은 저쪽 방향이다. 하도 사용하지 않아서 위치를 헷갈린 모양이군."

"아…."

"5군단 전용 연무장을 가로지르면 빨리 갈 수 있다."

그게 아닌데.

사용하지 않아서 그렇지, 나도 내 전용 연무장이 어디에 있는지 정도는 알고 있다. …아마도.

그러나 제이카르는 아예 확신하는 듯 흡족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렇지 않아도 통 수련을 하는 것 같지 않아 걱정했는데 다행이군. 물론 그대의 실력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대는 실전을 통해 강해지는 타입이라지만… 그래도 아예 연습을 하지 않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 아닌가."

어디서 무슨 헛소리를 들으셨나. 내가 실전을 통해 강해지는 타입이라고? 실전을 겪으면 나 죽어, 이 망할 마족아.

"만약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면, 나와 대련이라도 하기 위해 온…."

"방향이 저쪽이라고요? 고맙습니다."

"5군단 연무장은 찾기 쉬울 거다. 그렇지 않아도 무슨 기념 파티를 벌인다고 한바탕 난리를 쳤으니. 파티는 끝났을지 몰라도 그 흔적은 아직 치우지 못했겠지."

"네…."

여기서 더 어물쩍거리다가는 정말 1군단장과 대련이라도 하게 될 것 같아 서둘러 자리를 떴다.

제이카르의 말대로 5군단의 연무장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쭉 걸었더니 난장판이 된 공터가 나왔으니까.

엉망으로 널브러진 의자, 바닥에 나뒹구는 쓰레기, 테이블 위의 빈 접시와 술병들.

아무도 없는 걸 보아하니 5군단원들은 쉬러 들어간 모양이다. 덕분에 난 마음 편히 이 모든 것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이를테면 술병이라든가.

아, 딱히 먹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것도 맞긴 하지만… 이건 인간계에서 보편적으로 널리 퍼진 술이거든.

크게 비싸지도 않고, 조금 독하긴 하지만 오히려 그것을 장점으로 내세워 평민들 사이에서 맥주와 양립하는 술. 귀족들도 간혹 즐겨 먹는 데다 나 역시 즐기던 술이기에 확신할 수 있다.

이게 왜 여기에….

'5군단장이구나.'

바닥에 액체가 조금 남아 찰랑이는 술병을 집어 들었다.

오엘이 돌아왔다면 이 술도, 여기저기에 널브러진 정체 모를 물건들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녀의 호기심은 마왕조차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니까.

오죽하면 마왕이 밖으로 내돌렸을까. 명목이야 정찰 겸, 정보 수집을 위해 마계 전역을 돌아다니게 했다지만 결국 그 왕성한 호기심, 괜한 마족 괴롭히지 말고 바깥에서 풀라고 내보낸 것이다.

효과는 좋았다. 다만 돌아올 때마다 뭔지 모를 이상한 것들을 바리바리 싸 들고 와 소개를 해서 그렇지.

그래도 차라리 그게 무한정 질문을 받는 것보단 나으니 계속 외부로 돌리고 있는 거지만.

"자자, 빨리 마저 뒷정리하자고."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정리를 하려는 건지 사용인 둘이 집게와 쓰레기 담을 통을 들고 이곳에 들어서고 있었다.

눈치를 보니 아직 날 발견하지는 못한 것 같다. 날 봤다면 분명 어떤 방식으로는 호들갑을 떨었을 테니까.

들키기 전에 어서 몰래 빠져나가야지.

그렇게 몸을 돌리던 때였다.

"5군단장님이 돌아오신 지 꽤 되지 않았어? 이제 와서 갑자기 무슨 파티래?"

"5군단장님 성격 몰라? 그동안은 이상한 물건 여기저기에 소개하면서 활용하는 데 푹 빠지셔서 파티를 미뤘던 거지. 그리고 이건 단순한 복귀 기념 파티가 아니야."

"그럼…?"

"데르니반 님 알지? 5군단장님의 부관 데르니반."

"그야, 당연히 알지."

"글쎄, 5군단장님이 그분이랑 사귀신댄다. 그래서 기념을 겸해 축하 파티를 여신 거고."

"쿨럭."

아, 이런. 당황한 나머지 기침이… 피는 안 나왔나? 음, 다행히 멀쩡하군.

데르니반이라면 나도 알고 있다. 호기심 덩어리인 오엘과는 정반대의 인물. 차라리 언데드가 더 감정이 많겠다 싶을 정도로 무감정한 마족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런 데르니반과 오엘이 사귄다고?

상상조차 되지 않는 장면에 잠시 멍하니 있는데, 그런 내 의식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저… 0군단장님…?"

안쓰러울 정도로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 얼떨결에 고개를 들자 잠시 잊고 있었던 사용인들과 눈이 마주쳤다.

뭐야, 왜들 저래?

내 지위 때문에 알아서 수그린다고 하기엔 너무 심하게 겁을 먹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안색이 날 보더니 새하얗게 질려 있었으니까.

사용인의 시선이 내 손에 들린 술을 향하더니 이내 내 앞의 테이블 위에 늘어진 빈 술병을 훑는다.

하나, 둘, 셋… 수가 늘어갈수록 사정없이 떨리던 동공이 다섯을 넘기자 기절할 듯이 커지고, 그 뒤로 아예 수를 세기를 포기한 듯 둘의 대화가 속삭이듯 이어졌다.

"테이블 위에 있던 술병 중에서… 멀쩡한 술은 원래 몇 개였지?"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렇단 말이지…?"

"...."

"...."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문 둘이 눈빛을 주고받는다.

도대체 뭣들 하는가 싶어 기다리다 못한 내가 슬그머니 입을 떼려던 찰나,

"비상, 비사아아앙!!"

"0군단장님께서 술을 드셨다!!"

...?

비명을 내지르며 후다닥 달려 나가는 둘의 행동에 황망히 뒷모습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뭐야…?"

***

-특급 경보, 특급 경보. 0군단장 데몬 아루트가 술을 마심. 일동 방어 태세.

-다시 한번 알린다. 0군단장 데몬 아루트가 술을….

마왕성 곳곳에 설치된 확성 마법이 걸린 통신석에서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내성, 외성 할 것 없이 마왕성 전체에 울려 퍼진 경보에 마왕성에 있던 모든 이들이 망설임 없이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일개 마구간지기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말에게 먹이를 주다 말고 주섬주섬 무기를 챙기는 선배를 본 신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0군단장은 아군 아닌가. 고작 아군이 술을 마신 것뿐인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긴장을 하는 건지.

이건 뭐, 전쟁을 치른다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다.

"선배, 왜 무기를…?"

"뭐? 야, 너 근무 수칙 안 읽었어?"

"네? 네, 아직…."

"미쳤어?! 이게 죽으려고 작정했나!"

근무 수칙이 한두 개도 아니고, 그걸 언제 다 읽겠는가. 들어오자마자 일부터 시켰으면서.

오늘 저녁에 완독할 생각이었는데.

펄펄 날뛰는 선배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한 불안이 스멀스멀 밀려와 이를 감추기 위해 부러 입술을 비죽였다.

"오늘 다 읽을 생각이었단 말이에요."

"하… 그래, 지금 상황이 상황이니… 일단 중요한 것만 설명할게. 잘 들어."

신참의 허리춤과 등 뒤를 힐긋 살핀 선배가 이마를 짚었다.

이 새끼, 무기도 안 챙겼다. 근무 수칙에 분명 '호신을 위한 무기를 항시 소지하고 있을 것'이라고 적혀 있었을 텐데.

급한 대로 단검을 하나 내밀었다.

"일단 무기부터 들어. 0군단장님께서는 일정량 이상 술을 드시면 눈에 들어온 이들을 마구잡이로 베어 넘기시니까, 죽고 싶지 않으면 그거 잘 들고 있는 게 좋을 거야."

"네? 네…."

"네가 기억할 건 세 가지야. 첫째, 0군단장님께서 적이냐는 질문을 하실 경우 즉시 아니라고 답할 것. 둘째,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유를 물을 시 최대한 확실하게 설명해 드릴 것. 셋째, 네 대답에 의심을 하실 경우 즉시 방어 태세에 돌입할 것."

"네… 그런데 왜 굳이 방어 태세일까요? 살기 위해서는 방어보단 역시 공격이…."

"0군단장님께 상해를 입히면 마왕님 손에 죽어."

"히익."

그렇다는 건 말 그대로 최소한의 방어만 해야 한다는 뜻이다. 괜히 과하게 대응했다가 0군단장님의 몸에 상처라도 나면….

반사적으로 목을 감싸고 바르르 떨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데? 상대는 무려 0군단장이다. 혼신의 힘을 다해도 모자랄 판에 괜히 망설였다간 자각도 못 하고 목이 날아갈 터.

그러니 이건 거의 그냥 죽으라는…?

공포와 억울함, 살고 싶은 마음이 뒤섞인 신참의 눈동자를 본 선배가 피식 웃으며 제 무기를 고쳐 쥐었다.

"제압은 마왕님께서 하신다. 우린 그냥 최대한 살아남는 걸 목표로 하면 돼."

시간만 끌면 마왕님께서 오셔서 제압해 주실 테니까.

그리 말하는 그의 목덜미는 식은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

갑자기 마왕성 전체에 '특급 경보'가 뜬 것으로도 모자라, 그 이유가 '나'라는 소식을 들었다면 기분이 어떨까?

어떻긴 뭐가 어때, 말할 것도 없이 잣됐다 싶은 거지.

심지어 이유마저 사실과 거리가 머니 억울해서 미치고 팔짝 뛰겠다.

내가 술을 마셨다고? 아니 술을 마셔서 경보가 뜬 것도 어이가 없는데, 더 어이가 없는 건 난 술에는 입도 안 댔다는 것이다. 마시긴커녕 냄새도 못 맡았다고!

'지금이라도 확 마셔?'

그렇게 생각하며 비교적 남은 양이 많은 술병을 지그시 쳐다보는데, 저 멀리서 방패를 든 이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어디서 전쟁이라도 터진 것처럼 비장한 표정으로 달려온 그들은 내 주위에 일정 거리를 두고 원을 이루어 서더니 들고 있던 거대한 방패를 일제히 바닥에 찍어 세웠다.

쿵!

땅이 한 차례 진동했다.

"...."

당황 이전에 떠오른 감정은 황당함이었다.

내가 뭘 했다고 참… 빈틈도 없이 완벽하게 세워 놓았다. 완벽하게 포위됐네, 하하하.

뭔가 익숙한 장면이 떠오르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일까.

그래, 마치 시골에서 마을에 쳐들어온 멧돼지를 사냥할 때 이런 식으로 포위망을 좁혀 가면서….

시발, 장난해?!

'내가 멧돼지냐?!'

와락 미간을 찌푸린 것도 잠시, 나는 얼른 표정을 풀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신경질을 내 봤자 죽도 밥도 안 된다. 오히려 저들의 손에 죽을 확률만 높아지겠지. 지금도 봐, 고작 미간 좀 찌푸렸다고 흠칫하고 있잖아. 경계심이 더 올라간 게 보인다고.

이 빌어먹을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선 일단 저들의 경계심부터 풀어야 한다. 그래야 설득이든 뭐든 할 수 있을 터.

그래서 짜증을 억누르고 억지로나마 미소 지었더니만,

"히익."

"지…지금 웃으신 거 맞지? 이제 우리 죽는 거지?"

"무, 물러서지 마. 한 명이라도 물러서면 다 죽는다. 방패 단단히 잡고, 긴장해."

역효과가 났다.

...너희 8군단 아니었냐? 무식하게 큰 방패를 보면 분명 8군단이 맞는데.

일반 방패병도 아닌 놈들이 왜 이렇게 소심해? 군단장 때문인가? 군단장한테 영향을 받은 거야?

이래도 긴장하고, 저래도 긴장하고… 나보고 어쩌라는 건지.

'그냥 확 걷어차 버려?'

철벽과도 같은 방패를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지, 그랬다간 내 발목만 나간다.

성질은 나는데 그걸 마음대로 표출하지도 못한다. 이 망할 상황에 대한 분노를 육체적으로 표출하는 대신, 정색하고 방패를 노려보았다.

이걸 원인으로 또다시 조금 시끄러워지긴 했으나 그건 잠시였다.

"저 너머에 데몬이 있다고?"

방패 너머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어, 시발…?'

상황과 달리 여유가 흘러넘치는 목소리였으나 도리어 내 심장은 쿵 하고 바닥까지 곤두박질쳤다.

마왕이다. 조금 전 도서관에서 만났던 인물이 이곳에 와 있었다.

80. 다시 마계(8)

보이는 것이라고는 방패뿐이라 직접 확인할 수는 없지만 분명 그였다.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만나게 될 줄은 전혀 몰랐는데.

등장만으로도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진정시킨 듯 어느새 조용해진 이들 가운데에서, 그가 느긋하게 질문을 던졌다.

"단계는?"

"1단계로 추정됩니다."

"추정? 아직 제대로 확인 못 한 거야?"

"죄송합니다."

"됐어. 벤이나 불러와."

"예."

"그럼─"

─열어.

사형선고와도 같은 말이 떨어졌다.

빈틈없이 맞물려 있던 방패가 옆으로 치워지고, 그 사이로 마왕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한 걸음 안으로 들어와 치워졌던 방패와 완전히 닫히기를 기다린 뒤, 얼어붙은 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데몬."

"...."

"데몬, 내 말 들려?"

들리긴 하는데,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상황을 내가 수습하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렸어.

"네가 이 거리에서 하는 말을 못 들을 리는 없으니 들리면서 무시하는 것 같은데, 듣기만 해도 좋으니 그냥 말할게."

"...."

"일단 이곳에 있는 이들은 적이 아니야. 누구도 널 공격할 생각이 없고, 지금 네가 누군가를 죽여야 할 필요도 없어."

"...."

...압니다. 알아요.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전쟁은 끝났고, 전투는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일어나지 않으며, 나는 현실을 살고 있다는 것을.

뜬금없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람.

진지한 태도로 날 진정시키기 위해 나긋이 말하는 마왕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나올 것만 같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내 침묵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마왕이 재차 입을 뗀다. 그리고.

"그러니까 조금 진정하고, 일단 손에 든 그 술병부터 내려놓…."

"마, 마왕님!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디 다치신 데라도…!"

아, 이 목소리. 벤이다.

주치의는 왜 부른 거지? 설마, 날 반 죽여 놓고 치료하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마왕의 태도가 너무 유하다. 온화하게 웃으며 상대를 죽이는 타입은 아니… 아니지 않나?

...아닌가?!

내가 진지한 고찰에 들어간 사이, 방패를 치워 벤을 들인 마왕이 여전히 내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냉랭히 명했다.

"데몬이 술을 마셨다. 지금 몇 단계인지 확인해 봐."

"네, 아, 알겠습니다."

몇 단계?

알 수 없는 대화에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벤이 나섰다.

비장한 표정으로 한 걸음 나선 그가 마른침을 삼키며 나를 쳐다본다. 그리고 그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상체를 낮추고 두 손을 밀듯이 살짝 들어 올린 채

"데몬 님, 저는 적이 아닙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하는 내내 내 눈을 피하지도, 들어 올린 손을 내리지도 않았다.

마치 내가 무슨 맹수라도 되는 것 마냥… 어, 시발 이거 맞는 것 같은데?

"자, 그럼 데몬 님? 제 말이 들리시면 대답을 해 주시겠습니까?"

"...네."

"!?"

마지못해 한 대답에 벤이 쩡하니 얼어 버렸다. 그 옆에 있던 마왕도 마찬가지.

덩달아 흠칫한 내가 뭔가 잘못 말했나 싶어 기억을 되짚어 보지만, 한 말이라고는 '네'하고 대답한 것밖에 없다.

뭐지 싶어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눈치를 살피는데, 두 눈을 크게 뜨고 있던 벤이 더듬더듬 입 밖으로 말을 뱉었다.

"데몬…님?"

"네."

"데몬 님?"

"네."

"덷, 크흠, 데몬 님 지금 존댓말을…?"

"네? 네."

원래도 존댓말 썼는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무슨.

"...취한 게 아닌가 보군."

"네, 제가 생각하기에도…."

이쯤 됐으면 누구 하나 내게 상황을 설명해 줄 법도 한데, 나는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다.

마왕과 벤이 나를 덩그러니 내버려 둔 채 무언가 진지하게 속닥거린다.

간간이 '허위신고', '처벌', '죽일까' 등의 살벌한 말이 오가는가 싶더니 이내 뚝 그치고, 마왕이 고개를 번쩍 들어 나를 주시했다.

"데몬, 술을 마셨어?"

"안 마셨습니다."

이제야 말하네. 속이 후련한데 뒷일이 좀 걱정된다. 이렇게까지 일이 커졌는데 과연 쉽게 넘어가 줄까.

그러나 걱정과 달리,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내 앞에서 언성을 높인 적 없는 마왕은 이번에도 변함없는 태도를 보였다. 상황을 보고 대충 예상한 듯 담담히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그 모습 어디에서도 갑작스러운 소란에 끌려 나온 분노나 짜증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 그럼 손에 든 그 술은?"

"이곳에 있던 겁니다. 인간계에서 흔히 알려진 술이라 신기해서…."

"마왕님, 제 생각엔 마시려다 미수로 걸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데몬 님께서 술을 두고 그냥 넘어가실 리가 없잖습니까."

...내가 뭘.

벤은 도대체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거기에 대고 고개를 끄덕이는 마왕은 또 어떻고.

그것만으로도 황당한데, 여기를 어떻게 알고 무슨 목적으로 온 건지 방패를 훌쩍 뛰어넘어 들어온 2군단장 드벨라니아의 말이 가관이었다.

"아무래도 데몬 님이 심심하신 모양인데, 잠시 외출을 허용해 주시는 건 어때요? 이를테면 저와 함께 두 번째 도시에 옷을 사러 갔다 온다든가…."

밑도 끝도 없는 뜬금포 발언에 난 어이없음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픽 웃었다.

지랄. 내가 갈 것 같냐? 난 안전한 마왕성에만 처박혀 있을 생각인데. 그리고 만약 가게 된다고 해도 너랑은 절대 안 간다. 내가 왜 가?

──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

뒤통수를 맞았다.

누구에게?

"드벨라니아와 두 번째 도시에 좀 다녀올래?"

"네…?"

마왕에게.

소란스러웠던 술 사건이 끝난 지 일주일이 흐른 뒤에서야 나온 제안, 아니 명령이었다.

일주일이 되도록 부르지 않길래 좀 안심했더니만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오네. 치사하게 시간차를 두고 공격하다니.

어처구니없는 술 사건은 흐지부지 끝났다. 애초에 술을 마신 적도 없었으니 당연한 결과겠지.

칼을 뽑아 들었으면 누군가의 목이라도 썰어야 성미가 풀리는 마족의 특성과 어울리지 않게 누구도―특히 내가―죽지 않고 조용하게 끝났다는 것은 너무 마음에 들지만, 작금의 상황은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두 번째 도시에, 드벨라니아와 함께라니!

"그냥 편하게 놀러 간다고 생각하면 돼. 아, 대신 직선 방향으로 가지 말고 외곽으로 조금 돌아서."

"...2군단장과… 함께… 말이지요."

"응."

"...."

안 가면 안 되나?

"갈 수 있을 때 가 두는 게 좋을 거야."

떨떠름한 내 기색을 눈치챈 듯 마왕이 싱긋 웃으며 내게 다가온다.

단순히 다가오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내 양어깨를 짚은 채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댄 그가 이내 무언가 속삭였고, 그 말을 들은 나는─

"그게 무슨 상관…."

"정말 그렇게 생각해?"

"...가겠습니다."

여전히 가기 싫은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긍정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교활한 마왕 같으니. 나와 전혀 상관없어 보여도 '정말 그렇게 생각해?'라고 말하면 불안해서 갈 수밖에 없잖아.

외곽으로 돌아서 간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았더라면 그가 어떤 말을 하든 절대 가지 않았을 텐데. 씨발.

***

[곧 전쟁이 시작될 테니까.]

그러니 네 도움이 필요해. 그렇지 않아도 각 이종족들이 마물 문제로 항의를 해 오더라고.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내가 널 이곳에 묶어 두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길 바라.]

[...가겠습니다.]

단숨에 데온을 설득한 마왕 카베르가 닫힌 문을 물끄러미 보다 의자에 등을 기댔다. 마왕 특유의 역안이 낮게 깔린 채 음습한 빛을 띠었다.

제국이 이레온 왕국의 항복을 받아 냈다.

애초에 제대로 된 전투도 없었다고 한다. 수도로 향하는 직선거리에 있는 도시 두 개를 짓밟았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전의를 잃은 이레온의 국왕이 항복을 선언했다고.

아니, 항복 소식은 두 번째 도시를 막 짓밟았을 때 도착했다 했으니 정확하게는 도시 한 개가 짓밟혔을 때 항복을 결심한 것이리라.

그리 쉽게 무너질 거였으면 왜 굳이 쓸데없는 도발을 한 건지.

피로 세워진 '제국'이 도발을 그냥 넘어갈 줄 알았던가. 만약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쪽은 구제의 여지도 없는 멍청이였던 거다.

쓸데없이 잠자는 사자를 깨워 가지고는 생채기조차 내지 못하고.

'생각보다 빨리 제국과 부딪치게 되겠어.'

이제 황제는 대륙 정복의 목적을 감추지 않고 날뛰기 시작했다.

이미 한 번 동시에 여러 왕국들과 전쟁을 벌였던 황제다. 한 번도 쉽게 했는데 두 번이라고 못할 것도 없을 테지.

제국이 대륙을 집어삼키는 것을 순순히 두고 볼 생각은 없다.

대륙을 집어삼켜 커질 대로 커진 힘의 방향은 결국 이곳, 마계가 될 것이 자명하기에.

대륙의 반 정도를 집어삼켰을 때, 그때 움직이려 생각하고 있긴 했지만 생각한 것보다 시간적 여유가 없을 것 같다.

고개를 젖혀 등받이에 뒤통수를 대고 천장만을 쳐다보던 카베르가 천천히 상체를 세우며 책상 위에 손을 뻗었다.

이윽고 통신석이 손에 쥐어지고, 마왕성의 모든 간부들과 연결이 된 것을 확인한 그의 입에서 웃음기 하나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부터 마계 전역에 마법 금지령을 내린다. 일상에서 이미 도구에 각인되어 사용하는 마법 외에는 절대 사용하지 말도록. 단,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때는 그 순간에 한해 사용을 허용한다."

용사의 등장 따위, 평소의 그에게 있어 크게 신경 쓸 거리가 아니지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만약 제국과 전쟁 중에 용사가 등장하게 된다면 상당히 귀찮아질 터.

마법의 사용을 대폭 늘려 전쟁 전에 용사의 등장을 종용하든가, 마법의 사용을 중지해 등장 시기를 늦추든가.

제국과의 전쟁까지 시간적 여유가 없기도 하고, 운이 좋아 전쟁 이전에 용사가 등장한다 해도 황제가 그 시국에 용사를 마계로 보낼 리도 없으니 결국 선택지는 하나였다.

'세계가 의도대로 따라 줄지는 미지수지만….'

태풍을 어찌 예측하고 막을쏘냐.

그저 할 수 있는 방비를 최대한 해 두는 것이 최선일 뿐.

그리하여 한 종족의 운명을 책임진 군주가 명한다.

"2군단장과 4군단장, 8군단장에게 추가 임무를 부여한다. 타당한 이유 없이 마법을 쓰는 녀석이 있다면 색출해 응당한 처벌을 받게 하도록."

그냥 죽이라는 뜻이다.

이런 방식은 이전에도 늘상 사용해 왔으니 어색할 것도 없으리라.

2군단장이 이런저런 정보를 물어오면 4군단장이 각 정보를 조합해 보다 의심되는 이들의 범위를 줄이고, 8군단장이 하나씩 확인해 타깃을 색출해 죽인다.

0군단장의 외모를 다른 곳에 퍼트린 놈들을 색출해 제거할 때도 사용한 방법이니 이제 와 새삼 문제가 생길 일도 없을 테지.

"이상."

이날 이후, 마계 전역에서 마법 사용이 뚝 끊겼다.

겉보기에는 별 차이 없는 이 변화는 용사의 운명적 적수인 마왕과 세계의 흐름에 민감한 요정왕만이 느낄 수 있는 변화였으며, 이 변화를 느낀 요정왕은 자신의 숲 한가운데에서 낮게 조소했다.

[이미 늦었어.]

마왕은 용사의 등장 시기가 가까워지는 것만 대략적으로 느낄 수 있을 뿐이니 모르겠지.

세계는 이미 모든 준비를 끝냈다. 단지 타이밍을 엿보고 있을 뿐.

세계가 용사를 보내는 순간이 마왕에게 있어서는 최악의 순간일 터이니.

그 끝은 필시 죽음이리라.

81. 격동하는(1)

허무할 정도로 빠른 이레온 왕국의 항복 소식은 삽시간에 대륙 전역에 퍼졌다.

그리고 이는 당연하게도 제국의 소식에 잔뜩 집중하고 있던 혁명군의 귀에 거의 즉시 도달했다.

혁명군원들은 조용히 분노했다.

혁명군이 어떻게 탄생한 단체인가. 에도아르도 황제의 강제 정복 행위에 반발하고 분노한 자들이 모인 단체 아닌가.

무엇보다 그들 중 대부분이 황제의 손에 의해 멸망한 왕국 출신이다.

거침없이 진격해 한 왕국의 항복을 받아 낸 황제의 행동은 혁명군원들의 쓰라린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뼈아픈 기억을 불러왔다.

많은 왕국들이 지도상에서 사라져갔던 지긋지긋한 8년 전쟁. 그리고 그 '많은 왕국'에 포함되어 사라진 자신의 나라.

'모든 활동을 멈춘 지도 꽤 됐어. 언제까지 이렇게 숨죽이고 있어야 하지?'

'황제를 죽이지 못해도 좋아. 그에게 엿을 먹일 수 있다면.'

'왜 이제 와 새삼 활동을 멈춘 거지? 어차피 우리가 지금까지 움직인 이유도 황제를 죽이기보다는 그의 전력에 구멍을 뚫고, 지지도를 떨어뜨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수장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움직이고 싶다. 황제의 전력에 구멍을 뚫고 싶다. 황제의 얼굴이 처참히 일그러지기를 바란다.

황제의 행동은 혁명군의 복수심에 불을 질렀다.

그러나 이 소식과 혁명군원들의 반응을 들은 수장의 답은 간단했다.

[지령 변화 없음.]

그대로 전력을 보존하고 있을 것.

당연하게도 많은 이들이 반발했다. 하지만 이어서 전해진 수장의 말은 삽시간에 그들의 목소리를 잠재웠다.

[황제의 목을 칠 준비를 하라.]

혁명군 사이에서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

한편, 이 모든 지령을 내린 혁명군의 수장 다니엘은 조용히 본부를 나설 채비를 하고 있었다.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난 그의 얼굴은 미묘하게 굳어 있었다.

그가 겉옷을 걸치며 희미한 한숨을 뱉었다.

'피곤해.'

몸은 그럭저럭 버틸 만한데, 정신적 피로감이 말이 아니다.

분노에 휩싸여 무작정 앞으로 튀어 나가려는 이들을 제어하는 일이 쉬울 리가 없다는 것은 진즉에 알고 각오했지만, 날이 갈수록 더 힘겨워지는 기분이다.

거사가 뒤로 밀리면 밀릴수록 아마 이 자리는 더더욱 위태로워지겠지.

솔직히 억울하다.

'지금까지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뭉쳐 있는 것이 누구 덕분인데.'

각 왕국 출신들이 모였는데, 파벌이 생기지 않을 리가 없다.

서로 파벌을 나눠 대립하고 으르렁거리는 이들 가운데에서 서로를 조율하고 흩어지지 않게 붙잡아두는 이가 바로 다니엘이었다.

당장 그 하나만 잘못되어도 혁명군은 제대로 뭉치지 못하고 흩어지리라.

"형."

"아, 폴."

"어머니께 가시는 거예요?"

"그래. 그러니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다녀올게."

폴을 뒤로하고 어두운 길을 걸어 나갔다. 오래된 비밀 통로답게 불빛 하나 없는 길을 가로지르고 있자니 온갖 잡생각이 떠오른다.

그리고 다시금 떠올린다. 혁명군이 모인 이유를.

시작은 아주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나의 왕국이 멸망했다. 화가 나고 복수하고 싶은데, 구심점이 되어 군대를 일으킬 왕족이 없다.]

잔혹한 황제가 왕족의 핏줄은 방계까지 모조리 찾아 죽여 버렸기에. 왕족이 아닌 인물이라 할지라도 인망이 있다면 가차 없이 죽여 버렸기에.

들고일어나고 싶은데, 구심점이 없다.

그렇게 스스로를 억누르며 눈치만 살피던 중, 이들의 마음을 대변하듯 누군가 나섰다.

[황제를 죽일 거다. 동참하고 싶은 자는 모이도록. 출신은 상관하지 않는다.]

황제를 죽인다는 자신과 일치하는 목적, 출신을 가리지 않는다는 마지막 말까지.

수많은 이들이 모여들었다.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많은 수였다. 금방이라도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자 아직 무언가 진행한 것도 없건만, 여유가 생긴 이들의 머릿속에 거사 후에 대한 걱정이 떠올랐다.

[황제와 황족들을 모조리 죽이면 그 빈자리는 어떻게 하지?]

황태자나 황녀를 꼭두각시로 내세울 수는 없다. 그들은 죽어야 하니까.

그렇다고 해서 자신들 중 누군가가 그 빈자리에 앉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생길 것이다.

이들은 황제에 의해 짓밟힌 각 왕국의 이들이 모인 단체다. 누군가 자리에 앉는다면 다른 왕국 출신의 이들은 불만을 가질 게 분명했다.

무언가 뚜렷한 방안을 내놓지도 못한 채 서로 미묘한 눈치싸움만 하던 중, 누군가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빈자리를 꼭 채워야 하나? 그 '자리' 자체를 없앨 수는 없어?]

단순히 황제를 죽이면 우리는 반군이 될 뿐이다.

'혁명'이라는 이름하에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 보자. 이참에 신분제를 없애고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거야.

이 발언은 대다수의 동의를 얻어 혁명군의 핵심 이념이 되었다.

그리하여 복수심과 분노가 주를 이루어 탄생한 과격하고 폭력적인 단체는, 단순히 나라를 잃은 이들뿐만이 아닌 민간인들에게도, 심지어는 제국민과 학자 일부에게도 지지를 받는 지금의 혁명군으로 변모했다.

'많은 이들의 입맛을 사로잡았으니 당연한 것이지.'

나라를 잃은 것에 분노한 이들은 황제를 죽인다는 폭력적인 면에 반해서,

학자들은 신분제를 없앤다는 새로운 개념에 반해서,

민간인들은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라는 꿈 같은 미래에 홀려서.

하지만 그들은 과연 알까.

이 모든 과정과 결과는 결코 우연이 아닌 누군가의 철저한 계획에 의해 등장한 것이라는 것을.

어느새 도착한 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선 다니엘이 이윽고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

-똑똑.

"어머니. 저 다니엘입니다."

"들어오세요."

'황제를 죽인다'라는 명목하에 사람들을 모았던 '누군가'.

거사를 치른 이후에 벌어질 일에 대해 걱정하던 때, '차라리 빈자리를 없애고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만들자'라고 했던 '한 사람'.

다니엘은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라는 개념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왕과 귀족이 없고, 신분제가 없는 세상. 모두가 나라의 주인이며 모두가 나라의 일꾼인, 그런 세상.

"어서 와요, 아들. 다친 곳은 없나요?"

방 안에는 고상한 분위기를 가진 여인이 흔들의자에 앉아 그를 반기고 있었다. 세상을 꿰뚫는 듯 바다처럼 맑고 깊은 눈, 부드러운 미소를 자주 지은 듯 곱게 생긴 주름.

뜨개질을 하고 있었던 듯 무릎 위에 어느 정도 모양을 갖춘 목도리를 내려놓은 여인이 다니엘과 눈을 마주한다. 여인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 자리에 서 있던 다니엘이 그녀와 닮은 눈웃음을 지으며 멈춰 있던 걸음을 뗐다.

"없습니다. 어머니야말로 몸은 괜찮으신지요."

...그의 어머니는 평민과 도망쳐 결혼한 귀족가의 영애였다.

그저 사랑에 미친 한 어리석은 사람의 이야기라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녀는 상당히, 아니 상상 그 이상으로 영특했다.

그녀는 평민과 사랑에 빠지며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던 기본적인 규칙에 의문을 표했다.

기본적인 규칙을 넘어, 근본에 가까웠던 사상.

신분제.

다니엘은 어려서부터 자신을 무릎에 앉히고 그러한 당신의 생각을 털어놓는 어머니의 말을 들어왔다.

아버지와의 소박한 결혼생활을 이어 가면서도, 아버지가 귀족에게 잘못 걸려 돌아가셨을 때도,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은 어머니 당신께서 몸이 쇠약해지셨을 때조차.

그녀는 자신의 생각과 방법을 다니엘에게 늘어놓았고, 다니엘은 그러한 지식들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쇠약해져 가는 어머니를 보며 결심했다.

당신께서 생각하는 그런 세상을, 눈 감기 전에 보여 드리겠노라고.

"난 괜찮답니다. 아들, 오늘은 무슨 일로 온 건가요?"

"이레온에 다녀오려 합니다."

이제는 왕국이 아닌 제국령의 한 지역이 되어 버린 이름을 말하며 다니엘은 어머니의 발치에 꿇어앉았다.

거사가 있을 때까지 전력을 더 키워야 한다.

8년 전쟁 때와 다르게 이레온 왕국은 국왕과 그의 혈통들이 살아 있지만, 어쨌건 제국이 강제적인 항복을 얻어 낸 것은 변함없다. 당연히 이 결과에 불만을 가진 자 또한 있겠지. 잘하면 국왕의 지원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혁명군 이념 때문에 껄끄러워하려나.'

높으신 분들의 지원이 아니더라도, 현 상황에 불만을 가진 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위험할 텐데요."

"많은 이들이 죽었습니다."

어머니의 무릎에 얼굴을 기대며 눈을 스르륵 감았다.

스스로의 목숨을 내던진 이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이대로면 목적을 이룰 수 없습니다. 전력 보충이 필요해요."

"아들."

"어머니, 저는 죄인입니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적어도 혼자 죽진 말라며 폭탄을 지급한 것도 자신이요, 죽을 게 뻔한 짓을 행하게 한 사람도 자신이다.

그러다 가끔 민간인이 휘말려 죽었다는 소식이라도 들려오면, 다니엘은 온종일 괴로움에 시달려야 했다.

눈을 떴다. 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손길조차 느껴지지 않는 듯 다니엘은 두 눈을 결연하게 빛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목적은 꼭 이루어야 합니다."

"직접 가려는 건가요?"

"예, 직접 가지 않고서 어찌 그들의 신뢰를 살 수 있겠습니까."

"황제는 예상하고 있을 겁니다. 어쩌면 병사를 대기시켜 놓을지도 몰라요."

황제는 머리가 좋다. 그가 이러한 혁명군의 생각을 모를 리 없었다.

이런저런 일로 바빠 정신이 없다면 모르겠지만… 글쎄.

"...황제는 또다시 전쟁을 치를 겁니다. 확신합니다. 황제는 멈추지 않아요. 이번을 기회로 끝까지 갈 겁니다. 그러니…."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회의적인 가정을, 끝끝내 늘어놓는다.

"이쪽까지 신경 쓰지는 못할 겁니다. 게다가 최근 들어 혁명군이 크게 사고 친 적도 없으니 우선순위를 뒤로 미루었을지도 모르죠."

그러한 속내를 눈치챈 듯 여인은 굳이 반박하는 대신 자애롭게 미소 지었다.

"이 어미를 설득하려 할 필요는 없어요. 아들, 아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아…."

"하지만 떠나기 전에 한 가지, 아들에게 받고 싶은 선물이 있는데… 줄 수 있을까요?"

"어머니께서 원하신다면 그게 무엇이든."

미소를 머금은 여인의 입이 열리고, 이어서 나온 말에 가만히 듣던 다니엘의 얼굴이 이내 희게 질렸다.

....

"형, 오셨어요?"

"그래. 별일 없었지?"

"네."

"아, 폴. 이람 씨에게 괜찮은 인원 몇 정도 차출해 달라고 전해 줄래? 물론 너는 같이 가는 걸로 하고."

"네? 네. 그런데 형 괜찮으세요? 표정이 안 좋으신데…."

"아."

반사적으로 얼굴을 매만졌다.

"...별거 아니야. 그보다 폴, 하나 더 전해 줬으면 하는 말이 있어."

"말씀하세요."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는 독약을… 구해 달라고."

"...!"

"부탁할게."

놀란 표정의 폴을 보며 다니엘이 쓰게 웃었다.

이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어느 어미가 자식을 잃고 멀쩡히 살 수 있을까요.]

[아들, 반드시 무사히 돌아와야 합니다.]

[아들이 죽으면 이 어미 역시 따라 죽을 테니.]

그는 어머니를 말릴 수 없었다.

***

예상과 달리 황제는 혁명군은 신경조차 쓰고 있지 않았다. 두 번째로 소집한 회의에서 제 목 귀한 줄 아는 각 귀족들이 혁명군에 대한 방안을 들고 왔으니까.

생각 외로 다양했던 것 같다. 그 방안을 하나하나 들어 본 황제는 가장 쓸 만한 것을 골랐고, 그 이후의 일은 다른 이들에게 맡겼다. 그러니 굳이 그런 곳에 신경을 낭비할 필요가 없지.

'이레온 왕국이 정복되면 그곳에 혁명군이 걸음 할 테니, 군사를 대기시켜 놓자고 했었나.'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대충 한 마디 던졌던 것으로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