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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한껏 웃으며 적들을 난도질하고 있는 놈들이 하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실로 소름이 끼칠 정도로 훌륭한 합리화다.

저놈들은 그걸로 죄책감을 덜겠지. 행동에도 망설임이 줄어들 것이다.

'악마 새끼들.'

질린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수하들이 저 모양인데, 그런 수하들을 밑에 둔 상관은 어떻겠는가.

'당연하게도.'

더 미친놈이었다.

데온 하르트. 희극적이게도 '제국의 영웅'이란 칭호를 갖고 있는 자.

'영웅'이라니. 황당함에 말도 안 나온다. 저런 인간을 '영웅'으로 지정한 황제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란 말인가.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히는 공간을 자유롭게 헤집고 돌아다니는 그는, 진심으로 즐거워 미치겠다는 듯 환하게 웃고 있었다.

웃음과는 별개로 그의 손이 거치고 지나간 녀석은 어김없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의 걸음을 따라 흔적처럼 늘어진 시체는 하나같이 너덜너덜해서 누가 누구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까지 가세하자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

"...."

순식간에 다시 찾아온 정적 속, 비현실적이기 짝이 없는 공간 이곳저곳에서 흥분을 채 가라앉히지 못한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여전히 약 기운이 남은 듯 벌겋게 충혈된 기사단원들의 눈을 차마 마주할 수 없어 사내는 시선을 데온 하르트에게 고정했다.

그는 느릿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대충 상황은 정리된 것 같고."

시선을 느낀 듯 붉은 눈동자가 이쪽을 향한다.

눈이 마주침과 동시에 그는 싱긋 웃더니 성큼성큼 걸어와 어깨에 꽂힌 단검을 콱 밟았다.

단검이 더 깊숙이 밀어 넣어지고, 갑자기 가해진 고통에 반사적으로 낮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돈에 눈이 먼 건지, 멍청한 건지. 아니면 둘 다 해당되기라도 하는 건지...."

"...."

"아무리 쪽수를 많이 데려왔다 해도 그렇지, 기사단과 함께 있는데 정면으로 공격해 오는 건 또 무슨 황당한 짓이야?"

단검을 밟은 발이 천천히 흔들린다. 덩달아 단검이 위아래로 흔들리며 상처를 늘렸다.

"아프지?"

"...."

"나도 고문은 별로 안 좋아해. 그러니 되도록이면 순순히 배후를 불었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그건 힘들 것 같군.

리엔 경은 가서 단원들을 추스르도록.

온몸이 붉게 물든 악마가 단둘이 남기를 우회적으로 표했다.

***

"이레온 왕국에서 항의가 들어왔습니다."

나른한 눈으로 서류를 읽어 내리던 황제가 시선을 들었다.

맹수의 것과 같은 황금빛 눈은 지금 자신이 들은 게 무엇인지 의문을 담고 있었다.

항의라니. 누가 감히 '제국'에게 항의를 한단 말인가.

"데온 하르트 명예 백작이 그 근처에서 몬스터 토벌을 한 모양입니다. 그러다 습격을 당해 불가피한 전투를 치를 수밖에 없었고...."

"잠깐, 습격을 당했다 했나?"

"예, 그렇습니다."

"하르트 백작은 무사한가?"

"좌측 어깨에 화살을 맞아 한 달간 팔을 제대로 쓰기 힘들 것이라 합니다."

"한 달이라...."

들고 있던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턱을 괴듯 팔꿈치를 세워 입가를 매만졌다.

매끈한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계속하도록."

"예, 이레온 왕국 측은 그 전투를 무력시위라 주장하며 항의를 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보상을 원하는 듯합니다."

"전쟁은 그리 가볍게 벌일 수 있는 것이 아니기도 하고, 하르트 백작이 부상을 입기도 했으니 전쟁을 피할 것이라 판단했겠지. 그만한 장수는 드무니까."

참으로 얄팍하다.

힘이 없으면 눈치라도 있어야 하는 것을. 이레온 왕국은 눈치는커녕 생존 본능마저 없는 모양이다.

'제국'이 괜히 제국인 줄 아는가.

황제는 무력으로 '제국'의 칭호를 따냈다. 그럴 만한 무력을 지녔기에 제국이라는 것이다.

대체할 수 없는 선봉장의 부재? 물론 아쉽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쟁에서 패배하는 것은 아니다. 데온 하르트는 승률을 높여 주는 수많은 패 중 하나일 뿐, 그가 없다 하여 전력이 뚝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쪽 수뇌부가 엉망이라더니 알만하군. 이쪽 입장에서는 데온 하르트 명예 백작이 당한 습격을 저쪽의 탓으로 돌리고 역으로 몰아붙일 수도 있는데."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럴싸한 명분과 국력.

아직 한창때인 제국과 아슬아슬한 이레온 왕국. 타 왕국이 어느 쪽의 손을 들어줄지는 안 봐도 뻔했다.

"그럼 폐하께서 말씀하신 방안대로 대응을...."

"아니."

손 아래, 가려져 있던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갔다.

황제 에도아르도는 이를 드러내듯 사납게 웃으며 말했다.

"짐이 그동안 너무 얌전하게 지냈던 모양이야."

"...."

"네메세우스."

"예, 폐하."

"전쟁을 준비하도록."

"폐하!"

대답은 네메세우스가 아닌 재상에게서 나왔다.

비명을 지르듯 황제를 부른 재상이 희게 질린 얼굴로 서둘러 만류했다.

"전쟁이 끝난 지 이제 겨우 2년입니다."

"2년이면 많이 쉬었지."

"전쟁에는 돈도 많이 듭니다."

"이것들이 있는데 돈을 걱정할 필요가 있나."

탁. 황제의 손이 지도를 짚었다.

그래, 돈과 물자는 정복해 가며 얻는 것이다.

8년 전쟁 때도 그리했으니 이번 역시 그리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재상이 차마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황망히 황제를 바라봤다.

보통의 왕국이라면 협상을 하던가 정 안되면 보여 주기식으로라도 물의를 빚은 이를 벌하고 상대 왕국에 금전적인 보상을 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전쟁은 양측 모두에게 타격이 큰 수단이니까.

하물며 지금 제국에는 무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충분한 역 대응 방법이 존재하는데.

황제는 그런 쪽으로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이 상황을 야기한 하르트 백작에게는 어떠한 질책도... 없는 겁니까?"

없겠지. 권한만 있다면 직접 질책하고 싶다.

간신히 꺼트려 놓았던 황제의 전쟁 본능에 다시 불을 붙여놓았지 않나.

"그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짐은 공식적으로든 비공식적으로든 그를 질책할 생각이 없다. 그는 그저 자신의 영지를 착실히 돌봤을 뿐이니. 듣자 하니 고작 1개의 기사단만 이끌고 토벌을 나섰다 하던데, 이는 상대 왕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함이 아니었나. 그는 할 만큼 했다."

"하오나...."

"재상."

황제가 칼날처럼 웃었다.

"짐은 폭군이다."

"...."

"그렇지 않아도 슬슬 대륙 정복을 이어갈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잘되었지."

대륙 정복은 왕의 자리에 오른 순간부터 정해진 목표였다.

어쨌건 그는 형제자매들을 죽이고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그 이유가 무엇이고 진실이 무엇이었건 무책임하게 굴 생각은 없었다.

그렇기에 떠올린 목표.

스스로조차 베어 버릴 것 같은 날카로운 웃음에, 무언가를 더 말하려던 재상이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책임에 너무 집착했고, 책임은 족쇄가 되었으며, 족쇄는 재앙을 부르려 하고 있었다.

'폭군을 자처한다면 책임 따위는 내팽개치셔야지요, 폐하.'

책임 의식, 나쁘진 않다. 그러나 적당히 해야 할 것 아닌가.

애초에 우선순위가 잘못되었다. 그는 제국민들에 대한 책임보다 죽어버린 형제자매들에 대한 책임을 더 우선시하고 있었다.

죄책감이 원인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이것 때문에 폭군을 자처하고 있는 것 역시도.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만일 재앙이 발생한다면, 그 재앙이 부디 제국에게는 미치지 않기를.'

미치더라도 황제 개인에게만 미치기를 감히 바라며 재상 아르달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은밀히 예산안을 작성해 오겠습니다."

47. 전조(2)

"역시 재상은 눈치가 좋아."

그제야 황제가 표정을 풀고 희미하게 웃었다.

전쟁을 하기 전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그때까지 전쟁에 관한 것은 숨기는 게 좋겠지.

눈동자를 아래로 내려 조금 전까지 읽고 있던 서류를 눈에 담았다.

최근 빈민가에서 급격히 세를 넓혀 가는 사이비 종교에 대한 내용을 재차 훑으며, 황제가 읊조리듯 말했다.

"전쟁 중에 생기는 사이비 종교는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전쟁 전에 청소는 한번 하고 가야지."

나라가 혼란스러우면 사이비 종교가 판을 친다.

이해한다. 심리적으로 불안한 백성들이 기댈 곳은 종교밖에 없을 테니.

그러나 전쟁을 치르지도 않는데 존재하는 사이비 종교는 재고의 여지가 없다. 심지어 그것이 몸집을 위협적으로 불리고 있는 종교라면 더더욱.

전쟁이 시작되면 세력이 더 커지면 커졌지, 줄어들지는 않을 테니 전쟁 전에 깡그리 소탕해야 한다.

'누구에게 맡기는 것이 좋을까....'

바빠 보이는 재상을 손짓으로 물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역시 벌이라는 명목하에 데온 하르트에게 맡기는 것이...."

고작 광신도를 소탕하는 것이니 부상을 입은 그라 할지라도 큰 무리 없이 끝낼 수 있을 것이다.

무사히만 끝낸다면 그것으로 상을 내릴 수도 있고.

그러한 생각은 별다른 긴장감 없이 입 밖으로 나왔다.

어차피 듣는 이라고는 네메세우스 밖에 없는 데다, 전쟁에 비하면 그리 중요한 사안도 아니니 툭 내뱉었을 뿐이건만.

"폐하, 지금 데온 하르트라 하셨습니까?"

"...."

순간 아차 한 황제가 입을 다물었다.

잠시 잊고 말았다. 네메세우스는 데온 하르트의 중용을 극렬히 반대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왜 또 데온 하르트냐는 듯 드물게 똑바로 마주해 오는 단호한 눈동자를 보며, 그는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

"대장."

"내일도 싸워야 하는데 왜 안 자고 나왔.... 너 얼굴이."

"악몽을 꿔서요."

"...여기서 이러지 말고 들어가 있어. 너 지금 안색이 말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매일 밤 제가 죽인 이들이 꿈에 나옵니다. 그것도 죽었을 당시의 모습으로. 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 피를 뚝뚝 흘리며 제게 다가오는데...."

"...."

"살려 주세요. 대장의 말대로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고 몇 번이고 되뇌면서, 맨정신으론 힘들어서 가르쳐 주신 대로 약도 했어요. 그런데도 미칠 것 같습니다. 괴로워요. 약은 싸울 당시에만 먹히지, 끝나고 나면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라서...!"

"진정해. 진정하고 조금만 생각을 달리해 보는 건 어때?"

"예?"

"넌 상대를 죽이기 위해 약을 한 것이 아니라, 약 기운에 휘둘려 상대를 죽인 거야. 약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거지."

"대장...? 그건 무슨 쓰레기 같은 마인드...."

"푸하, 그래? 그럼 이건 어때? 아, 그 전에, 내가 미처 말을 못 했는데, 너 여기 다쳤더라."

"예? 어? 언제...."

"...."

"아! 만지지 마십쇼! 아프잖습니까!"

"그치, 의식하고 나니까 아프지? 사실 나 좀 전에도 그 상처 눌렀었어. 근데 넌 모르더라."

"...."

"모른 척해. 굳이 떠올리지 마. 생생하게 떠오른다 했지? 그건 의식해서 더 선명한 거야. 약을 했을 당시의 기억은 몽롱한 상태 그대로 둬. 떠오른다 해도 외면해. 그건 네가 한 게 아니니까."

"...."

"네가 한 게 아니야."

***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내 저택에 돌아와 있었다.

정신을 잃기 전까지만 해도 국경선 근처에 있었는데, 정신 차리고 나니 내 집이라니!

어깨의 상처만 아니었다면 꿈인 줄 착각했으리라.

듣자 하니 날 습격했던 놈들은 어찌어찌 잘 해결했다고 한다. 나는 그 이상 캐묻지 않고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살인귀 놈들이 같이 있었으니 알아서 잘 해결했겠지. 솔직히 그것에 대해서는 굳이 진지하게 파고들고 싶지 않다.

그놈들의 손속이 잔인한 것은 온 세상이 알고 있는 사실이거니와, 그때 맞았던 화살과 뒤따라온 화끈한 고통을 다시 상기하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행위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유야무야 며칠간의 시간이 지나고, 오늘 레멤베르가 방대한 양의 서류를 들고 조용히 대화를 요청해 왔다.

...'방대한 양의 서류를 들고'.

'불길한데.'

일단 명목은 대화 요청이니 수락하긴 했다만, 저 서류의 위용이 엄청나다.

오죽하면 레멤베르가 들어올 때 웬 서류 더미가 걸어오는 줄 알았을까. 난 내가 서류 작업 스트레스로 헛것을 보는 줄 알았다.

아무튼 서류를 든 채 대화를 할 수는 없는 노릇. 그가 근처 책상 위에 서류를 내려놓는다. '쿵!' 하는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책상이 잘게 진동했다.

"쿨럭."

"괜찮으십니까?"

"아, 예."

"피를 토하진 않으셨는지요."

"예."

아쉽게도.

"다행입니다. 어깨를 다치셨는데 피를 토하셨다면 참으로 당혹스러울 뻔했습니다"

지금 비꼬냐?

삐뚜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자 레멤베르가 부드럽게 웃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고는 나직이 헛기침을 하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운을 뗐다.

"백작님께서 토벌을 나가신 사이, 세작을 잡아냈습니다."

"오."

"아쉽게도 배후를 캐내진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가 허리를 숙인다. 군더더기 없는 몸짓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제국의 귀족들보다 더 고급스럽다. 도대체 이 집사, 뭐 하던 사람일까. 대륙 중앙에 있는 고립된 작은 나라 출신이라고는 들었는데.... 혹시 고위 귀족 출신인 거 아니야?

의심이 담긴 잡생각은 금세 이어진 목소리에 끊겼다.

"백작님 역시 배후를 캐내는 데 실패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렇다고 듣긴 했다. 그런데 그건 왜? 시비 거는 건가?

"그렇다는 것은 그 배후가 만만하지 않은 존재라는 뜻이겠지요. 후보로는 혁명군 또는 적대 왕국이나 귀족파의 수장인 일루스터 공작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시비가 아니었구나. 우리 집사님 정말 유능하시네.

저택 관리도 잘하고, 서류 작업도 잘하고, 예법도 깍듯이 잘 차리는 데다 추리까지 잘하시니.

이거 거의 만능 아니냐? 전투만 잘하면 진짜 만능인데?

'아니, 싸움도 제법 했던 것 같은데....'

그가 혁명군을 엎어치기로 제압했던 것이 떠올랐다.

레멤베르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제 사견으로는 일루스터 공작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어느 쪽이건 백작님께서 혼자 손을 대기엔 버거운 존재일 테니 여기서 물러나거나 황제 폐하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주제넘은 참견이었다면 죄송합니다."

"아뇨.... 감사합니다."

너무 넋을 놓고 답한 모양이다. 오묘한 은청색 눈이 잠시 나를 담았다.

짧은 침묵이 흐르고, 그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빙긋 웃더니 조금 전 내려놓았던 서류 더미를 향해 발을 뗐다.

어, 아니, 잠깐, 그건 왜....

"서류가 많이 밀렸습니다."

"으, 으음...."

"다행히도 다친 곳은 왼쪽 어깨이니, 펜을 쥐고 쓰는 데에는 문제가 없겠지요. 백작님은 오른손잡이시잖습니까."

쿵! 저쪽 책상에서 울렸던 소리와 진동이 이번엔 내 책상에서 울렸다.

나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앞에 쌓인 서류 더미를 보다가 슬쩍 레멤베르의 눈치를 살피고는 맨 위의 서류를 하나 집어 들었다.

[하르트 영지의 댐 건설에 관한 설계 도면....]

"아!"

"왜 그러십니까?"

"폐하를 뵈어야겠습니다."

하르트 영지의 반납을 요청해야지.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잠시 잊고 있었다.

절대 도망치는 것이 아니다. 원래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일이다.

눈치를 살펴서 분위기가 괜찮다 싶으면 지금 내 저택에서 농땡이 피우는 살인귀 기사단 놈들도 반납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겉옷을 챙겨 들었다.

뒤따라붙는 레멤베르의 시선은 끝까지 무시한 채였다.

***

왼쪽을 봤다. 황태자가 차를 마시고 있다.

오른쪽을 봤다. 황녀가 내 팔에 매달려 있다.

여긴 어디. 난 누구.

난 그냥 황제를 만나러 왔을 뿐인데, 어째서 지금 황족들과 티타임을 갖고 있는 걸까.

새삼 상황을 다시 자각하니 목이 타는 것 같아 반쯤 영혼이 나간 표정으로 차를 들이켰다.

'차향은 또 끝내주네.'

하....

누굴 탓하랴, 이게 다 타이밍을 잘못 맞춘 내 잘못이지.

조금 더 일찍 오거나 늦게 올 것을, 하필이면 황제가 누굴 만나고 있을 때 와 가지고.

항상 곧바로 황제를 대면할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례적이게도 오늘은 기다리라는 말이 돌아왔다.

먼저 온 손님이 있다는데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난 분명 얌전히 기다리려 했다. 오래 걸리지도 않는댔으니 정말 얌전히 기다리려 했는데....

[백작니이이읽! 콜록, 콜록!!]

[화, 황녀 전하?!]

[실례했군, 백작.]

[황태자 전하!]

황태자와 황녀가 등장했다.

어째서인지 황태자가 황녀의 뒷덜미를 잡고 있는 묘한 상황이었으나 오히려 그 덕에 파악은 빨랐다.

황녀가 또 나를 기습하려 했구나. 황태자가 그걸 막아 준 거고.

어휴, 죽을 뻔했네. 이 허약한 몸은 황녀의 체중을 실은 포옹조차 견디기 버거우니 그런 상황은 최대한 피하는 것이 좋다.

눈빛으로 감사의 뜻을 표하며 침착하게 예를 갖추는데, 나를 물끄러미 보던 황태자가 대뜸 폭탄을 던졌다.

[사과의 뜻으로 차를 대접하고 싶은데, 응해 주겠나?]

거절은 거절한다.

그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심지어 도망갈 구멍을 미리 막아 놓기까지 했다.

[시종이 찾으면 바로 보내 주겠네. 폐하를 알현하기 전까지 잠시 쉰다고 생각하면 되겠군.]

[아, 그게....]

[황궁에 올 때마다 종종 내게 들러 주겠다 하지 않았나. 혹, 그건 거짓말이었....]

[아닙니다. 너무 영광스러운 나머지 대답이 늦었습니다. 초대에 감사드립니다. 황태자 전하.]

그리고 지금.

나는 바짝 마르는 입술을 축이기 위해 벌써 차를 네 잔째 들이켜고 있었다.

...아닌데요. 이건 쉬는 게 아니잖아.

어딜 봐서 이게 쉬는 거야. 정신적 압박을 가하는 거지.

"차가 입맛에 맞는 모양이군."

"예, 예에...."

"돌아갈 때 조금 챙겨 주지."

"감사합니다."

사실 별로 필요 없는데.

물론 향은 좋다, 향은.

맛은... 당연하지만 달지도 짜지도 않다. 앞에 설탕이 있긴 한데, 눈치가 보여서 통 손을 뻗을 수가 없으니. 밍밍해서 향수를 잔뜩 뿌린 물을 마시는 기분이랄까.

다시 말해 내 취향은 아니라는 거다. 그냥 목이 타서 마시는 것일 뿐이지.

황태자가 찻잔을 입에 대고 가볍게 손목을 꺾어 기울인다.

그냥 차를 마시는 것일 뿐인데 행동에서 기품과 위엄이 묻어난다. 역시 황태자라는 건가.

그에 비하면 황녀는....

"백작님, 차만 마시면 물리지 않나요? 쿠키도 좀 드셔 보세요."

"...예, 감사합니다."

그냥 생각하지 말자.

황녀가 내민 쿠키를 받아 들며 여전히 별말 없는 황태자를 곁눈질로 살폈다.

그는 찻잔을 내려놓고 못 말리는 동생을 '저걸 어찌해야 하나' 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내 체념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나를 향해 시선을 틀었다.

황족 특유의 황금색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쳤다.

"부상을 당했다고 들었는데, 몸은 괜찮은가?"

"아, 예, 괜찮습니다."

반사적으로 어깨를 감싸려던 것을 간신히 제지했다.

황태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주 탓에 몸도 약해졌는데, 되도록이면 조심해야지. 어째서 직접 몬스터 토벌에 나선 건지 이해가 안 되는군."

"...송구합니다."

나선 게 아니라 끌려간 겁니다.

하지만 말해도 믿지 않겠지. 백작이 저를 모시는 기사단에 휘둘린다는 걸 누가 믿겠어.

"나한테 송구해하지 말고 본인의 몸에 송구해하게. 오래도록 폐하를 보필해야 하지 않겠나."

오래도록? 어우, 끔찍하다.

대놓고 거절의 말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긍정을 표할 수도 없어 말없이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찻잔을 들었다.

'...배부르다.'

물배가 차 버렸어.

배 속이 출렁이는 듯한 불쾌한 감각에 잠시 정신이 팔린 사이, 황태자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자네가 폐하를 잘 보필해 주었으면 하네. 자네니까 하는 말이지만, 솔직히 난 황제가 되고 싶지 않아. 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예?"

48. 전조(3)

하마터면 차를 뿜을 뻔했다.

방심했더니 훅 치고 들어오네. 자네니까 하는 말이라니, 갑자기 이게 무슨....

갑자기 확 무거워진 대화 내용에 적응하지 못하고 얼어버린 사이, 황태자의 말이 이어졌다.

"입장상 어쩔 수 없이 황태자 자리에 앉아 있긴 하지만 알 사람은 알고 있지 않나. 폐하와 내 나이 차이가 고작 8살이라는 걸. 폐하께서 은퇴할 나이가 되시면 나 역시 은퇴를 준비해야 할 나이가 되어 있겠지."

8살 차이.

황태자 엘피디우스 데세르트는 20살로, 28세인 황제와는 8살 차이다.

간혹 정보를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온 다른 왕국의 사신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변에 대고 친아들이 맞느냐 묻지만,

그럴 리가 있나.

황태자는 황제의 조카다.

'아니, 근데 왜 그걸 나한테 이야기 하냐고요....'

난 이런 무거운 개인사와는 맞지 않는다.

곤란함이 듬뿍 담긴 내 표정이 보이지 않을 리가 없는데, 망할 황태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황위에 오르는 날이 온다면 그건 폐하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일 테니. 나는 그걸 바라지 않는다네."

"...."

"그리고 무엇보다 폐하께서 일하시는 모습을 보고 확실히 깨달았지. 나는 그분처럼 하지 못해."

그리 말하는 황태자의 눈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나마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결코 부정적인 감정은 아니었다는 것 정도.

'....'

황제가 제 형제들을 모조리 죽이고,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 그들의 자식까지 죄다 죽였던 것을 생각하면 조카의 존재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물론 그 조카가 숙부를 증오하지 않는 것 역시 이상할 테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유일하게 황제의 손에 죽지 않은 형제가 하나 있었으니까.

9왕자였던 황제가 검을 빼 들었을 당시엔 이미 죽고 없었던 단 한 명의 형제, 1왕자.

나는 잘 모르지만 '1왕자가 살아 있었다면 9왕자는 검을 빼 들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떠도는 것을 보면 두 사람의 사이는 어지간히 좋았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것 말고도 1왕자에 대해서는 소문이 많았다.

왕족 같지 않게 호구 같은 왕족. 끈 떨어진 연 신세인 9왕자에게 잘해 준 유일한 혈육.

심지어 결혼 후 아이를 낳고도 매일같이 찾아와 그와 제 자식을 함께 돌봤다고 했으니, 현 황제가 1왕자의 자식이자 제 조카인 황태자와 황녀에게 잘해 주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그만큼 정이 들었을 테지. 아마 친자식 내지는 친형제처럼 느끼지 않았을까.

그러니 실제로 '황태자'와 '황녀'로 인정한 것일 테고.

"그러니 폐하를 잘 부탁하네."

"예.... 예?"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감히 마주한 황태자의 눈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신뢰가 깃들어 있었다.

'아까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이 밑도 끝도 없는 신뢰는 대체 뭐지? 황족이라면 의심이 미덕 아닌가?'

심지어 잘 부탁한다는 상대가 무려 황제다. 8년 전쟁 때 직접 검을 빼 들고 전장을 휘저으며 영토를 점령해 나갔던 바로 그 황제!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오라버니, 백작님 부담스럽게 뭐하러 굳이 그런 말을 하세요!"

"황녀 전하...."

"굳이 말 안 해도 백작님이라면 잘하시겠죠!"

절대 아닌데요. 그러니까 '나 잘했죠?'라는 눈빛으로 보지 마.

황태자, 댁은 왜 고개를 끄덕이는건데!

"내가 실례했군."

"아, 아닙니다."

결심했다. 아무래도 도망가야겠어. 이대로는 계속 부담스러운 화제만 나올 것 같다.

말도 없이 튈 수는 없으니 적당한 핑계를 대고 몸을 뺐다가 돌아오는 것이 좋겠다. 그럼 적어도 분위기가 전환되겠지.

마침 차를 너무 많이 마신 탓에 화장실이 가고 싶었으니 그걸 핑계로 자리를 비우면 되리라.

나는 황태자와 황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차를 많이 마셨지. 다녀오도록."

손을 내젓는 황태자와 황녀를 향해 한 번 허리를 숙이고 티타임이 벌어지고 있던 정원을 서둘러 나왔다.

'살았다!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네.'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니 앞이 캄캄하지만, 일단 빠져나온 게 어딘가!

일단 볼일부터 보고 돌아올 때 좀 천천히 걸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경쾌한 걸음으로 황궁 복도를 걸었다.

그리고 호기롭게 걸었던 것이 무색하게도,

'...여기가 어디지?'

길을 잃고 말았다.

황궁에 자주 들락날락하는 주제에 길을 잃었다고 한심하게 생각하지 마라.

나는 언제나 곧바로 황제를 만나고 다른 길로 새는 일 없이 바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니 다른 길을 알 턱이 있나.

'황족들을 오래 기다리게 하면 곤란한데....'

내 목숨이 곤란하다.

만에 하나 저들이 내가 자신들을 바람맞혔다고 생각하면 그야말로 큰일 아닌가.

당혹스러운 마음에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그리 오래지 않아 한쪽 복도 구석에 서 있는 한 시종을 발견할 수 있었다.

"거기!"

"...!"

아, 너무 반가운 마음에 그만 소리치다시피 부르고 말았네.

화들짝 놀라 동그래진 눈으로 이쪽을 보는데, 미안한 마음에 살짝 웃어주었더니 어째서인지 흠칫- 몸을 떤다.

...뭐, 착각이겠지.

혹여나 도망갈까 웃음을 지우지 않고 보폭을 넓혀 성큼성큼 다가갔다.

내 악명 때문인지 잔뜩 불안해 보이는 녀석의 표정이 조금 신경 쓰였으나, 지금은 내가 더 급했다.

터질 것 같거든. 이러다 쌀 것 같다.

그게 무엇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겠다.

"여기─"

"으아아아아아!!"

...화장실이 어디냐고 미친놈아.

갑자기 칼을 꺼내 들고 내게 달려드는 녀석을, 나는 놀람보다는 황당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

"갔군."

"그러게요."

필시 도망간 것일 테지. 대화가 어지간히도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솔직히 갑작스럽긴 했지.'

하지만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쉽게 생길 리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어쩔 수 없었다.

조용히 찻잔을 들어 올리며 황태자 엘피디우스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부담을 준 것은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내뱉은 말을 철회할 생각은 없다.

평화로운 수면과 달리 물밑에서는 음습한 움직임이 바삐 일고 있고, 그것의 칼날은 명백히 숙부인 황제를 향하고 있었으니까.

숙부님이 황제가 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어 온 움직임.

[지고의 자리에 앉게 해드리겠습니다.]

[이대로면 평생이 가도 황제의 자리에 앉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귀족들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습니다.]

[부디 폭군을 처단하여 주시옵소서.]

8년 전쟁이 한창 진행되는 중에도 그들은 꾸준히 그를 찾아왔다.

그렇다 해서 그 얼토당토않은 말에 흔들린다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언제까지 이 마음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스스로조차 장담하지 못한다.

저들이 자신도 몰랐던 약점을 쥐고 찾아와 흔들려 들지도 모르니.

약점이 괜히 약점이겠는가. 그 순간이 찾아온다면 자신은 아마....

'....'

군주의 자리가 바뀐 지 10년이다. 전쟁 기간 동안은 여유가 없어 뒷수작을 부리지 못했다 하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약점 한둘 정도는 충분히 찾아내고도 남을 시간.

지금까지 황태자는 황제의 든든한 방벽 역할을 해 왔다.

황제를 끌어내리려면 그럴싸한 명분뿐만 아니라 빈 옥좌에 앉을 '황족'이 필요하니 결국 황태자가 동의하지 않으면 그들의 행동은 한낱 반란으로 끝난다.

황녀로 대체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이들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황태자가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데다 그녀 역시 이에 동의하지 않을 테니.

불순분자들의 '행동'은 계속해서 뒤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것도 이제 한계다. 아니, 한계는 진즉에 맞이했다.

놈들의 행동이 '회유'에서 '회유를 가장한 협박'으로 바뀌기 시작한 지도 어언 2년.

언제 약점을 잡혀 원치 않는 행동을 해야 할지 모르는 황태자로서는 대비책 마련을 서둘러야 했다.

그렇기에 황제가 유독 신임하는 영웅인 데온 하르트를 주목하는 것은 당연했고.

'그래도 그 말은 하지 않아서 다행이군.'

고작 그런 말에도 부담감을 못 이겨 도망친 그가 이 말을 들었다면 필시 황궁 밖으로 도망쳤을 테니. 아마 평생 나와 마주치지 않으려 했으리라.

'만일 황제를 보필하는 데 있어 방해되는 것이 있다면,'

설령 그것이 황족일지라도.

'...죽이라고.'

황녀에게 쿠키를 챙겨 주며 다정히 웃었다.

황녀가 눈을 마주하더니 이내 안다는 듯 초승달처럼 눈가를 접고 고개를 끄덕인다. 거기에 맞춰 고개를 끄덕여 주는 모습은 누가 보기에도 다정한 오라버니의 모습이었다.

늘 그랬듯 황태자의 하루는 오늘도 평화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이레온의 첩자는 나름대로 홀로 축포를 터트리고 있었다.

황제가 방문객을 상대하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 집무실에 숨어 들어가 주요 서류를 복사해 빼돌리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무려 그 '제국'에서! 한낱 소국의 첩자가! 그 엄청난 일을 성공했단 말이다!

당연히 쉽지는 않았다.

황제의 집무실은 꿈도 못 꾸고, 재상의 집무실을 노렸음에도 경비는 빡빡했다.

이레온 왕국의 뻔뻔한 요구에 폭군 황제가 손익도 저울질하지 않고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을 생각하여 사전 조사 시간의 한계를 일주일로 두었기에 더 까다로웠다.

'난 이제 내 모국으로 돌아간다 이 빌어먹을 놈들아!'

여기에 온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제 돌아가기만 하면 되건만, 세상일이라는 것이 그리 쉽게 돌아가지는 않는 모양이다.

"거기!"

"...!"

명백히 이쪽을 부르는듯한, 큰 목소리.

설마 눈치챈 것일까.

찔리는 것이 있는 터라 저도 모르게 몸을 크게 떤 첩자가 뒤늦게 아차 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부른 것일 뿐인데 화들짝 놀라는 시종이라니. 누가 봐도 수상하지 않나.

'어떡하지?'

아직 품속에는 중요한 서류가 들어 있다. 이대로 잡히면 빼도 박도 못 할 터.

도망쳐야 하나? 하지만 그건 대놓고 '나 수상한 놈입니다' 하고 소리치는 꼴이잖아.

'아니야, 침착해. 의외로 둔한 사람일 수도 있어.'

일단 상대를 확인해... 보니 이거 안 되겠네. 도망쳐야겠다.

급격히 질려 가는 얼굴을 애써 수습했다.

붉은 눈, 흰 머리. 재수도 없지. 하필이면 걸려도 그 '데온 하르트'라니.

피에 미친 존재로 유명한 인물이다. 예로부터 미친놈들은 감이 좋다는 역사적인 근거가 있었는데 눈앞의 그 역시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심지어 전쟁터에서 8년을 지내기까지 했으니 동물적인 감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모를 확률에 희망을 걸어 보려 했으나....

'저거.... 지금 웃고 있는 거지?'

명백히 이쪽의 정체를 파악했다는 듯한 웃음.

어떤 행동을 해도 넌 내 손바닥 안이라는 듯 여유로운 웃음에 첩자가 입을 꾹 다물고 안쪽 볼을 짓씹었다.

절대 상대해서는 안 된다. 상대하는 순간 분명 저놈의 장난감이 될 것이다.

'그냥 도망쳐서도 안 돼.'

황제 앞에서 무기를 소지할 자격이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가 바로 데온 하르트다. 분명 지금도 무기를 소지하고 있을 터.

단검을 휘두르는 것뿐만 아니라 던져서 목표물을 맞히는 것에도 능하다 알려진 그가 등을 돌려 달아나는 녀석을 그냥 두고 볼 리가 없다.

아마 등을 보임과 동시에 단검이 날아오리라.

복잡한 심경을 눈치챈 듯 데온 하르트가 미소를 유지한 채 성큼성큼 다가온다.

저건 더 이상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뜻인가.

어떻게든 가장 나은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첩자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시종인 척 상대하는 것은 저놈의 뜻대로 놀아나는 것이 될 테고, 그냥 도망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그를 공격하는 것' 뿐.

'당연히 상대가 되지 않을 테니 당황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자.'

척 보기에도 놀란 티를 내고 있는 어수룩한 첩자가 감히 그를 공격할 리 없다는 안이한 생각. 그 생각을 이용해야 한다.

갑작스러운 공격이라면 제아무리 그라 해도 당황하겠지. 그렇다면 잠시나마 틈이 생길 것이다. 그 틈을 타 도주한다.

계획이 세워지자 그 뒤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일단 무슨 말을 할지 들어나 보고, 첫마디가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공격한다.'

말하고 있을 때는 저도 모르게 경계가 누그러들기 마련이니까.

거기까지 생각한 첩자가 고개를 들고 데온 하르트를 마주했다.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이내 데온 하르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기─"

"으아아아아아!!"

굳이 끝까지 들을 필요도 없었다.

곧바로 칼을 꺼내 든 첩자가 지체 없이 돌진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그따위의 말을 끝까지 들을 바에야, 말하느라 방심한 틈을 노리는 편이 훨씬 이득일 테니까.

49. 전조(4)

화장실 위치를 물어봤을 뿐인데 칼을 들고 달려드는 건 또 뭘까.

밀려오는 황당함은 제쳐 두고 우선 살아야 하기에 몸을 비틀었다.

온 힘을 다해 달려들고 있었는지 녀석이 중심을 잃고 앞으로 넘어진다. 그 과정에서 칼날이 팔뚝을 스쳤으나 나는 개의치 않았다.

이 정도야 뭐, 지금까지 내가 겪어온 것들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지.

'그럼 이제 어떡한...다?'

시간이 멈췄다.

아니, 순간 멈춘 것처럼 보였다.

천천히 눈동자를 굴려 허공에서 멈춘 녀석을 시야에 담았다.

시뻘게진 얼굴. 시선을 조금 내리자 그 아래, 놈의 목을 쥐고 있는 손이 보인다.

녀석이 멈춘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불쑥 손을 뻗어 넘어지는 녀석의 목을 잡은 것이었다.

그 손의 주인을 찾아 천천히 눈을 들자─

"...형님?"

"...."

흔들림 없는 녹색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시발 뭐야, 네놈이 왜 여기에 있어.

그런 내 의문이 닿지 않았는지 크루엘이 조용히 나를 훑어보더니 제 손에 잡힌 이를 본다.

이대로 죽이기라도 하려는 건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등과 팔뚝에 힘줄이 서고, 목을 잡힌 놈의 얼굴이 붉어지며 눈에 핏발이 섰다.

"크, 으으─"

와, 살벌하다.

두 손으로 크루엘의 팔을 붙잡고 발버둥 치는 꼴이 그다지 보기 좋지 않아 아연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갑자기 시종의 발밑으로 무언가 우수수 떨어졌다.

"...서류?"

뭐야, 정말 첩자라도 되는 거야?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향해 손을 뻗는데, 앞서 먼저 종이를 주워 드는 손이 있었다.

크루엘은 아직도 녀석의 목을 조르고 있으니 그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손의 주인은....

"이거, 아무래도 황실의 주요 서류 같군요."

"...공작님?!"

"오랜만입니다, 백작."

보라색 눈이 싱긋 웃음 짓는다. 나는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지? 황제랑 사이도 좋지 않은 사람이 여길 왜 와?

"말 잘 듣는 개에게 상도 줄 겸, 잠시 폐하를 뵙고 나오는 길입니다.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요."

그의 시선이 얼핏 다친 내 어깨를 스쳤다.

...제집도 아니고, 황족도 아닌 공작이 황궁에서 개를 키우는 게 가능한 일인가?

아니 그보다, 내 의문이 얼굴에 노골적으로 드러난 모양이다.

웃음기를 담고 돌아온 대답에 괜히 머쓱해져 얼굴을 한 차례 쓸어내리는데, 아직 할 말이 더 있는지 공작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백작도 폐하를 뵈러 왔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목적으로 온 건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아, 최근에 받은 영지에 관해 청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부족해서 그렇습니까? 크기가 작다거나, 땅이 척박하다거나."

"아뇨, 그저 영지를 반납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거 흥미롭군요."

흥미를 담고 부드럽게 휘어지는 공작의 눈매를 보며, 나는 내심 곤란을 표했다.

더 물으면 어떡하지? 이유에 대해서는 이곳에서 말하고 싶지 않은데.

특히 크루엘이 듣는 앞에서는 더더욱.

이유를 물을까 전전긍긍하는 나를 눈치챈 건지, 다행히 공작은 더 캐묻지 않았다.

하지만 고맙진 않다. 화제를 돌리겠답시고 꺼낸 주제가 내겐 상당히 곤란한 주제였으니까.

그가 시선을 내려 바닥에 나뒹구는 시종을 눈에 담는다.

놈의 목을 쥐고 있던 크루엘은 어느새 공작의 뒤에 서 있었다.

조금 전까지 사람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표정은 변함없이 담담했다.

"이리 기다리는 와중에도 첩자를 잡아내다니, 역시 대단합니다."

"아니, 이건...."

"겸손할 필요 없습니다. 경계할 필요도 없고요. 공을 가로챌 생각은 없습니다. 크루엘 경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백작은 손쉽게 이 자를 제압했을 테지요."

"아니, 그러니까...."

"백작!"

아씨, 또 뭐야!

짜증을 가득 담아 소리가 들려온 곳을 돌아본 나는 이내 눈에 힘을 풀어야 했다.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이들은 다름 아닌 황태자와 황녀였으니까.

"시간이 상당히 지난 것 같은데도 돌아오지 않아 걱정했다만...."

금안이 빠르게 이 상황을 훑었다.

괜히 황태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그는 금세 상황 파악을 끝내고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이렇게 첩자까지 잡아낼 줄이야."

"그게...."

"역시 대단하세요!"

"쿨럭, 황녀 전하...."

그냥 두 분 다 입 다물고 계시면 안 되겠습니까?

둘 다 일부러 이러는 거지? 나 엿 먹이려고.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아닌 척 절묘하게 부담을 줄 리가 없잖아.

그런데 어째 주변 분위기가 이상하다. 공기가 확 바뀐 느낌이랄까.

뭔가 잘못되었나 싶어 슬그머니 고개를 들자, 눈이 잔뜩 커진 이들과 시선이 마주쳤다.

"백작님, 괜찮으세요?"

"...네?"

"어, 어떡해, 피가!"

"...?"

"궁의를 불러와라! 어서!!"

황녀의 호들갑과 더불어 황태자가 궁의를 부르는 소리가 궁전 복도를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그제야 나는 턱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뜨뜻한 액체를 느낄 수 있었다.

아, 단순히 사레들린 줄 알았더니만 이 연약한 몸은 그 작은 충격에도 상처가 나 버린 모양이다. 어쩐지 속이 좀 아프더라니.

단순 사레에 이렇게까지 됐을 리는 없을 테고, 기습에 놀란 것과 맞물려 이런 결과가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저는 괜찮...."

"거짓말 말고, 무엇 때문에 이리된 건지 한번 말해 보게. 어느 정도 유추하고 있는 바가 있을 테지?"

"아니, 정말로...."

"그러고 보니 팔에 상처가 있군. 생긴 지 얼마 안 된 것으로 보이는데."

황태자의 시선이 조금 전 칼에 스친 상처에 닿았다.

이거 생채기 수준인데. 정말 아무 문제 없는데.

아니, 내가 아무리 몸이 약하다고 해도 고작 이 정도로 피를 토할 리가 없잖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눈앞의 꽉 막힌 황족들을 납득시킬 수 있는지 고민하는데,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크루엘이 한마디 툭 내뱉었다.

"첩자를 제압하던 도중에 생긴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무기에 독이 발라져 있었을 가능성도 생각해야겠군. 궁의는 아직인가?"

...네? 독이요?

멋대로 흘러가는 상황에 벙찐 얼굴로 멍하니 앉아 있는 사이, 스친 상처 윗부분에 웬 천이 감겼다.

더 이상 독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함인지 천을 어깨에 가깝게 바짝 올려붙여 감은 황태자가 매듭을 짓는데.... 너무 꽉 묶었다.

'피가 하나도 안 통하잖아.'

아니, 그건 둘째 치더라도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다. 게다가 꽉 묶은 탓에 상처에서는 피가 더 많이 나오고.

처음에는 평범한 붉은색으로 나오던 그것은 이내 탁한 검붉은색으로 변해 방울방울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역시 독인가."

피가 안 통해서 그런 건데요. 이렇게 꽉 묶어놓으면 당연히 피 색이 검게 죽지.

그나저나 이 천은 어디서 구한 거야? 누가 도대체 이런 걸 챙기고... 아.

크루엘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 옆에서 눈을 휘어 웃으며 의미심장한 어조로 잘했다고 칭찬을 건네는 공작이....

'저 새끼가 준 거구나.'

기분이 급격히 불쾌해졌다. 마음 같아서는 이런 쓸모도 없는 것, 당장 풀어 내던지고 싶지만 황태자가 친히 묶어 준 것을 풀 수도 없는 노릇이고.

더 뭐라 할 기운도 없어 그저 체념하고 눈을 감았다.

이 모든 빌어먹을 상황을 외면하기 위한 내 나름의 조치였으나....

"백작님! 지금 눈 감으시면 안 돼요! 조금만 더 버티세요!"

"...하...."

***

궁의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상대를 살피고 있었다. 그의 손은 감이 좋은 사람이 아니면 모를 정도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 상황에 기시감이 느껴진다면 착각이 아니리라.

지난번에 연회장에서 피를 토한 데온 하르트 명예 백작을 진찰한 이가 다름 아닌 그였으니.

아, 피가 아니라 푸딩이었지. 다시 생각해도 참으로 어이가 없다.

그래서 이번에 달려오면서도 내심 마음 한구석에 의심을 품고 있었지만.

'이번엔 진짜야.'

비릿한 냄새는 가짜가 아니다. 즉, 정말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인데....

울컥 치솟는 눈물을 꾹 삼켰다.

환자의 상태는 지난번과 달라졌는데, 주변 인물들은 달라지지 않았다.

황태자 전하와 황녀 전하, 공작 각하와 영웅 크루엘까지. 그나마 황제 폐하와 네메세우스 장군님이 안 계신 것을 위안 삼으려 했으나─

"이게 무슨 일이지?"

하늘이 그를 미워하기라도 하는지, 네메세우스 장군님마저 와 버렸다.

데온 하르트 명예 백작에 볼일이 있는 듯 황태자와 황녀에게 예를 갖춘 그가 아예 자리를 잡고 서서 이쪽을 지켜보기 시작한다. 등 뒤로 식은땀이 주룩 흘러내렸다.

실수하면 분명 죽는다. 치료하지 못해도 죽을 것이다. 생명의 위기를 느낀 궁의의 손이 바빠졌다.

입안도 확인하고, 맥박도 짚고, 상처도 확인한다.

검사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궁의의 안색도 하얗게 질려 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심각하던지, 지켜보는 이들마저 불안해질 지경이라 결국 보다 못한 황태자가 초조한 듯 입을 열었다.

"그렇게 심각한가?"

"그것이...."

"괜찮으니 말해 보게."

"...특별한 이상이 없습니다."

"...뭐?"

예상과는 전혀 다른 대답에 일순 침묵이 찾아왔다.

황태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가를 파르르 떨고, 황녀가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눈을 크게 뜬다. 크루엘은 입을 꾹 다문 채 궁의만을 보고 있었다.

다른 이들이 서둘러 다른 답을 도출해내고 있는 사이, 먼저 답을 내린 이는 뒤늦게 도착해 상황을 지켜보던 네메세우스였다.

"그렇다는 건 마왕의 저주라는 뜻이겠군."

"아...."

다른 이들의 얼굴에 깨달음이 스쳤다.

그래서 그렇게 괜찮다고 했던 건가. 어차피 치료하지 못할 테니까.

괜한 염려를 사 헛수고를 시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겠지.

새삼스럽다는 표정이 각자의 얼굴에 떠올랐다 사라진다. 특히 황태자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데온 하르트를 쳐다봤다.

'속이 이렇게 깊은데.'

다른 이들은 이 모습을 알지 못하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세간에 알려진 데온 하르트의 이미지를 떠올린 황태자는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애써 고치고 화제를 돌렸다.

'그는 누군가 자신의 저주에 관심 갖는 것을 바라지 않으니까.'

동정은 그를 불쾌하게 만들 뿐이다.

간신히 그에게서 떼어 낸 시선을 뒤늦게 도착한 어느 건장한 사내에게로 옮겼다.

"네메세우스 장군. 무슨 볼일이길래 이리 직접 찾아온 건가?"

***

황태자의 이목이 다른 곳에 쏠렸다. 저주에 대해 또 뭐라 말할까 가슴 졸이던 나는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있지도 않은 저주에 관한 이야기는 어째서인지 언급될 때마다 부담스러운 설정이 더해져 나오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잠시,

"폐하께서 데온 하르트 명예 백작을 찾으십니다."

"쿠, 쿠흡!"

터져 나오려는 기침을 간신히 억눌렀다.

차, 참아야 한다. 여기서 또 기침했다간 무슨 거지 같은 상황이 펼쳐질지 몰라.

장군님의 시선이 내게 꽂힌다. 나는 손등으로 입을 꾹 누른 채 눈을 내리깔고 요동치는 마음부터 다스렸다.

...어떻게 진정은 했다만,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

장군님, 도대체 왜 직접 오신 겁니까. 시종이라는 좋은 심부름꾼은 뒀다 뭐에 쓰려고.

심지어 심기마저 불편해 보인다. 나를 훑어내리는 눈에 불쾌함이 서려 있었다.

바쁘게 움직이던 장군님의 눈이 현장에 있는 이들을 스쳐 지나가 낭패한 표정의 시종에게서 멈췄다.

"그 전에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제가 처리를 해도 되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부탁할 생각이었네. 참고로 첩자는 하르트 백작이 잡았으니 착오 없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저 대화에 굳이 내 이름이 들어갔다는 것이 영 불안하지만, 어쨌든 대화는 끝났다.

그럼 이제 놈을 그대로 질질 끌어다 감옥에 처넣기만 하면 되는데.... 왜 저를 보시는 거죠?

심지어 눈빛이 영 아니올시다, 다.

"어차피 폐하를 뵈어야 하고, 네가 잡은 놈이기도 하니 같이 가도록 하지."

"예?"

50. 전조(5)

"그럼 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두 분 전하."

"그래."

아니, 왜 전 빼놓고 대화하시는 겁니까. 내 의사는?

심지어 공작마저 슬쩍 몸을 뺐다.

"저도 이만 가 봐야겠군요. 실례하겠습니다."

이러니까 정말 상황이 끝난 것 같잖아.

아니, 정말 끝나 버렸다.

공작과 크루엘이 사라지고, 황태자와 황녀가 나보고 어서 가 보라며 손을 내젓는다.

네메세우스 장군님 역시 빨리 따라오라며 턱짓을 하고는 손수 놈의 멱살을 잡은 채 바닥에 흩어진 서류를 주워 들고 앞장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물쭈물하며 눈치를 살피던 궁의는....

"제가 나중에 댁으로 보약을 보내드릴 테니 잊지 말고 꼭 드십시오."

"...?"

"그러니 제발 건강하십시오. 제발."

어째서인지 필사적이기까지 한 어조로 단호히 속삭이고는 후다닥 물러갔다.

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던 나는 힐긋 장군님 쪽을 쳐다봤다.

마치 따라오지 않으면 쳐죽일 것 같은 기세로 성큼성큼 걷고 있는 모습.

'화장실은....'

분위기를 보니 아무래도 안 될 것 같군.

결국 나는 쭈뼛쭈뼛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

황궁에서 나와 공작저로 향하는 마차에 탄 공작이 출발하기가 무섭게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조금 전, 시종이 떨어뜨렸던 서류들 중 하나.

하얀 종이 위에는 전쟁을 벌일 시의 예산안이 빽빽이 정리되어 적혀 있었다.

종이의 정체가 무엇인지 눈치챈 듯 크루엘의 시선이 그를 향했으나, 공작은 개의치 않았다.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고 서류의 내용을 죽 훑은 그가 이내 피식 웃으며 그것을 접어 품 안에 넣는다.

머릿속에서는 조금 전 황제를 알현했을 때의 대화가 재생되고 있었다.

"당장은 전쟁을 하지 않을 거라 하시더니."

이렇게 예산안까지 작성해 놓으시고는.

"거짓말이 서투십니다."

공작의 얼굴 위로 명백한 비웃음이 드러났다.

이렇게 된 거, 슬쩍 도와줘 볼까.

마계가 가장 걱정이시겠지요, 폐하.

'적어도 폐하께서 대륙의 절반을 차지하기 전까지는 그들도 얌전히 있을 겁니다.'

공작은 심장 부근을 슬쩍 어루만졌다.

그리고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는 크루엘의 시선이 있었다.

***

"표정이 안 좋은데, 어디 아픈가?"

"아닙니다."

"지금 식은땀이 나고 있는데?"

"괜찮습니다."

화장실을 못 가서 그렇다고는 절대 말 못 한다. 쪽팔려서라도 절대 말 못 해.

애써 표정을 정돈하고 허리를 바로 세웠다.

테이블 건너편 의자에 앉은 황제가 내 몸 상태를 가늠하려는 듯 눈매를 좁히고 나를 훑는다.

그에 더욱 멀쩡한 척 앉아 있자, 그가 픽 웃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대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노파심에 하는 말이다만, 몸이 좋지 않은 것을 숨기지는 말도록. 그대는 제국의 중요한 전력 중 하나이니."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다시 묻지."

"...."

"첩자를 잡았다고 들었다. 몸은 괜찮은가?"

느른하고 여유로운 표정 아래, 맹수와 같은 황금빛 눈동자가 탐색하듯 날카롭게 빛난다.

차마 그 시선을 똑바로 받아칠 수 없어 나는 슬쩍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다. 놈의 칼날에 스치긴 했지만 말 그대로 스친 것뿐이고, 식은땀이나 안색이 안 좋은 것은 그저 몸 어딘가가 터질 것처럼 빵빵해서 그럴 뿐이다.

정 걱정된다면 잠시 쉬는 시간을 주든가. 그럼 정말 괜찮아질 텐데.

나는 분명 진심이었는데,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황제의 미간이 꿈틀한다.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보일 듯 말 듯 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럼 다른 걸 묻겠다. 무엇 때문에 이리 방문한 건가?"

"하르트 영지에 관해...."

"만일 반납하고 싶다거나, 그와 비슷한 것을 요청하려는 것이라면 미리 거절하도록 하지. 아, 로프티 기사단과 관련한 일도 마찬가지다."

"...그럼 일을 그만두는."

"것도 안 되지."

거절까지는 예상했다만, 말을 꺼내기도 전에 거절당할 줄이야.

마음 같아서는 멱살이라도 잡고 '주겠다는데 왜 안 받아!!' 하고 소리치고 싶다. 물론 그랬다간 내 목은 자리를 온전히 보전하지 못하겠지.

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지려는 찰나, 황제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다만 짐의 요구를 들어준다면 원하는 것을 하나 들어주도록 하겠다. 그때 다시 청해 보는 것이 어떻겠나?"

황제의 요구라니, 찝찝하다.

그렇다고 달리 그를 설득할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황제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떠보듯 물었다.

"크루엘 하르트도 같은 일을 맡기로 한 터라, 그대마저 참여한다면 먼저 성사시킨 쪽의 소원을 들어주어야 하는데, 그래도 하겠나?"

"...하겠습니다."

크루엘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그것만큼은 절대 안 된다. 무슨 소원을 빌 줄 알고.

자칫하면 내게 불이익이 오는 소원을 빌지도 모른다.

상대가 일반 귀족이었다면 모를까, 크루엘은 나와 같은 '영웅'이다.

훌륭한 '인재'인 그의 정당한 요구 앞에서 황제가 내 손을 들어줄 가능성은 한없이 적었다.

그렇기에 나는 비장한 태도로 그를 향해 말했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탐색하듯 무표정으로 나를 보던 황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네메세우스에게서 서류 한 장을 받아 내 앞에 밀어 놓는다. 자연스레 종이에 시선을 두자 가장 위에 적힌 제목으로 보이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구원교]

"...구원교?"

"그래, 구원교. 요즘 빈민가에서 활개를 치고 있는 사이비 종교지. 그들을 소탕하면 된다."

사이비 종교 소탕.

생전 처음 받아 보는 종류의 임무에, 나는 그만 멍해지고 말았다.

***

벌써부터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 데온 하르트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물러가고, 자리에 앉아 서류를 재차 읽던 황제가 눈동자를 올려 네메세우스를 쳐다봤다.

그의 표정에는 드물게도 부정적인 감정이 드러나 있었다.

황제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으며 흘리듯 말을 걸었다.

"아직도 불만인가."

"저는 반대입니다."

즉답이었다.

단호한 의지가 담긴 대답에 황제가 미간을 짚었다.

네메세우스는 데온 하르트를 싫어한다. 아니 지나치게 경계했다.

황제가 피곤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도 크루엘 하르트보다는 낫지 않나. 그는 공작의 수하이니."

[요즘 폐하께서 광신도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마침 크루엘 경이 폐하를 위해서라면 휴식 기간을 버려서라도 기꺼이 나서겠다 하더군요. 전쟁을 위해서라도 광신도들은 소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무 나갔군. 짐은 아직 전쟁을 일으킬 생각이 없다.]

[저런, 제가 착각을 한 모양입니다. 실례했습니다.]

뻔뻔한 얼굴로 제 수하를 들이밀던 공작을 떠올린 황제가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공작이 노리는 것이야, 뻔했다.

배후에 공작이 있는 영웅은 손쉽게 광신도를 해치울 것이다. 무려 '황제'가 골머리를 앓던 것들이니, 황제인 자신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보답을 해야 할 테고.

그 '보답'을 요구할 때 '반드시'라 할 정도로 공작의 입김이 강하게 들어가겠지. 필시 공작 본인에게 이득이 되는 요구이리라.

원래도 데온 하르트를 끌어들일 생각이었다만, 덕분에 확신이 섰다.

그는 의심할 나위 없는 '황제파', 정확하겐 '에도아르도 데세르트'의 편이다. 실력도 뛰어나 크루엘과의 경쟁에서 밀릴 걱정도 없고, 상대가 크루엘이기에 의욕 역시 넘쳐 난다.

실로 이상적인 패였다.

그런데 네메세우스는.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합니다."

"...."

"그는 위험합니다."

네메세우스는 단호했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황제를 설득하겠다는 듯, 그는 두 눈을 단단히 빛내며 감히 황제를 똑바로 바라봤다.

분명 무례한 행동이었으나, 황제는 그를 질책하지 않았다.

불손한 눈빛이 아니었으니까.

이리도 자신의 말을 들어 달라고 '호소'하고 있는데, 어찌 질책할 수 있을까.

쫓기듯 조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가 8년 전쟁 때 무슨 짓을 한지 아십니까?"

"적들을 난도질해 놓는 등의 잔혹한 손속을 보였다고 들었다. 그게 이유인가?"

"아닙니다. 그건 아마 녀석 나름대로의 생존 방식이었을 테고, 전략이었겠지요. 그러니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흰 머리에 붉은 눈이라 더욱더 눈에 띄던 작은 남자아이.

귀족 출신이 일반 병사로 들어온 것은 처음인 데다 자신의 밑에 있는 아이라 절로 시선이 갔었다.

터무니없이 약한 아이는, 당연하게도 사람을 죽이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일반인들도 첫 살인을 하면 후유증이 오래간다. 그러나 쉴 틈 없이 돌아가는 전쟁터에서 정신을 추스를 시간이 주어질 리 없었다.

그렇기에 성인 남성들조차 힘겨워하는데, '잔인함'을 생존 방식으로 택한 아이는 어떻겠는가.

어린아이의 정신은 성인보다 훨 약하다.

그런 아이가, 두 눈으로 보는 것조차 괴로운 시체를 제 손으로 직접 만들어야 했다.

작은 손에 버거워 보이는 단검을 쥐고, 사람을 찔러 그 감촉을 느껴야 했다.

광기에 물들고, 벗어나기를 반복해야 했다.

"그 녀석은...."

미칠 것 같았으리라.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에 한계가 오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으리라.

잔인함을 유지하며, 광기에 먹혀가며, 밀려오는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제정신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아이가 택한 방법이 무엇이었는지 아는가.

'너... 괜찮나?'

'예? 무엇이 말입니까?'

'그....'

'아, 다친 곳이라면 괜찮습니다. 그리 큰 부상도 아니었는걸요.'

'아니, 그것이 아니라 조금 전 전투에서...!'

'장군님.'

'....'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네메세우스는 떨리는 눈을 감추지 못했다.

"그 녀석은 스스로의 인격을 분리해 버렸단 말입니다!"

흔들리는 정신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혼란스러워하던 아이는 무언가 결심한 듯 술과 약을 들고 천막에 들어가 3일을 내리 처박혔고,

그렇게 두 개의 인격을 만들어 냈다.

아니, 인격이라 하기에도 애매하다. 오히려 '성격'이라 부르는 것이 더 맞겠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원하는 대로 전환할 수 있는 것을 '두 개의 인격'이라 부르기엔 무리가 있을 테니까.

아이는 스스로에게 두 개의 성격을 부여했다.

철저히 전투와 생존에만 신경 쓴, 피에 미쳐 버린 '미친 성격'과,

기억해도 정상적인 전투와 평소의 평범한 자신의 모습만 기억하는 '정상적인 성격'.

"다시 말해 스스로가 짊어져야 할 죄책감마저 저버렸단 말입니다!"

'정상적인 성격'을 표방하고 있을 때의 아이에게 '미친 성격'일 때 저질렀던 일들을 언급하려 하면, 그는 모르는 척 말을 돌렸다.

알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그저 '합리화'라는 이름 아래 모른 척하고 있을 뿐.

자신이 저지른 일을 부정하고, 외면하고.

"그런 녀석의 정신이 무너지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스스로가 짊어져야 할 죄책감마저 버거워 이리도 극단적인 방법으로 저버렸다.

하니 녀석의 정신력은 모래성만도 못할 터. 분명 현실을 직시하도록 만들기만 해도 와르르 무너질 게 뻔했다.

그런 녀석을 자꾸만 중용하다가, 놈의 정신이 무너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나 심각한 사안을 제 귀로 직접 들은 사람답지 않게 황제는 담담했다.

느긋이 다리를 꼬고 앉아 네메세우스의 말을 끝까지 들은 그가 처음으로 꺼낸 말은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하는 듯, 지독하게도 여유로운 종류의 것이었다.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꼬았던 다리를 풀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가까워진 네메세우스의 얼굴을 직시한 황제가 무표정 위로 차가운 미소를 덧그리며 말했다.

"짐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51. 구원교(1)

"...한데, 어찌!"

"그건 데온 하르트의 선택 아닌가. 그도 생각이 있어 그런 선택을 했을테고, 만일 그로 인해 일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그가 책임져야 할 일이 되겠지."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 권태로운 목소리가 나긋이 내려앉는다. 네메세우스는 말문이 막혀 잠시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상관이 없을 리가 없다. 검이 망가지면 그 여파가 사용하던 주인에게도 미치기 마련이니.

그 사실을 황제가 모를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네메세우스는 기어이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비틀어 열었다.

"...그 책임을 폐하께서 같이 지셔야 할지도 모릅니다."

"아무렴 상관없다. 황제란 본디 이런 자리가 아니던가."

"...."

"농담이다. 표정 한 번 볼만하군."

황제가 낮게 목울대를 울렸다. 목 안쪽에서 웃음과도 같은 소리가 듣기 좋게 맴돌았다.

폭군을 자처하는 작자가 성군의 정석과도 같은 말을 하니 어이가 없을 만도 하다만, 이리도 노골적인 표정을 보일 줄이야.

표정을 감추는 법을 훈련시켜야겠다고 생각하며, 황제는 천천히 네메세우스의 말에 대한 대답을 내놓았다.

거창한 이유는 없다.

아주 간단한 이야기다.

"짐은 아끼는 자의 실수 하나 감싸지 못할 정도로 무능하지 않다."

"...."

"이 정도면 대답이 되었나, 장군?"

모든 이들의 실수를 너그러이 감쌀 수 있을 정도의 성군은 되지 못하지만, 아끼는 이들에게만큼은 충분히 성군이 되어줄 수 있다.

다른 쓸모없는 것들에게까지 공평하게 쏟아부어야 할 아량과 돈, 그리고 시간과 권력을 몇몇 소수의 이들에게 몰아주는 것.

황제 에도아르도는 그럴만한 힘과 능력이 있었고, 그리해도 반박할 이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반역과 같은 어지간히 큰 사고가 아닌 이상, 웬만한 사고는 수습이 가능하리라.

"만일 그 실수가 짐이 감싸지 못할 수준의 것이라면 그땐 짐의 눈이 잘못된 것이 될 테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달라질 것은 없다. 그저 책임질 거리가 늘어날 뿐이니.

더해서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 역시 확연히 적을 테고.

"짐이 아무 생각 없이 위험인물을 곁에 둘리가 없잖은가."

"하면...."

"목줄이 있다."

크루엘 하르트.

데온 하르트의 형을 떠올리며 황제가 느른히 웃었다.

[가문을 멸문하고자 팔자에도 없는 용사의 동료까지 자처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막 마계에서 돌아와 연회장에 피를 뒤집어쓰고 난입한 데온 하르트와의 대화는 크루엘 하르트가 화제가 된 순간 중구난방으로 마구 튀기 시작했다.

아마 영웅이 된 크루엘의 소식을 들은 지 얼마 안 된 탓에 감정이 조절이 안 된 것이겠지.

응축된 감정이 폭발하기라도 한 건지, 말의 방향이 틀어지고 목소리 톤이 올라간다.

금방이라도 왈칵 쏟아버릴 듯 높아져만 가던 목소리는 황제와 눈이 마주친 순간을 기점으로 급격히 사그라들었다.

뒤늦게 자각한 것이다. 제 앞에 앉아있는 이가 누구인지.

황제는 굳이 그의 무례를 꼬집지 않았다.

데온 하르트가 가문에 가지고 있는 감정이 얼마나 극단적인지 알고 있기에.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이득이 되는지도.

증오, 살의, 분노.

녀석의 입장에서는 고작 14살에 불과했던 몸도 약한 아이를 전쟁터에 밀어 넣은 장본인들이다.

8년을 전쟁터에서 구르며 데온의 가문에 대한 증오는 그 크기를 눈덩이처럼 키워나갔고, 마침내 전쟁에서의 공을 인정받아 황제의 앞에 섰을 때, 그는 모든 보상을 마다하고 단 하나만을 요구했다.

[제 손으로 가문을 멸문시키는 것을 허락해주십시오.]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하르트 백작가가 대대로 왕가에 충성을 다해온 가문이라지만, 그건 반정으로 즉위한 자신에겐 큰 메리트가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지켜야 할 이유가 없다.

믿을 수 없는 하르트 백작가와, 잘만 하면 훌륭한 검으로서 써먹을 수 있는 데온 하르트 개인.

[좋다.]

고민할 것도 없이, 황제는 개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물론 곧바로 덥석 들어준 것은 아니었다. 이참에 다른 일도 같이 해결하면 더 좋기도 하고, 기왕 검으로서 써먹을 거면 좀 더 단단하게 제련하는 쪽이 좋지 않겠나.

[다만, 짐이 한 '가문'을 포기하고 '개인'인 그대를 선택해야 할 만큼의 가치가 있을지 조금 의문이군.]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마침 용사가 마왕을 상대하기 위해 제국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더군.]

용사의 동료로서 마왕을 상대하고 오는 것.

공작이 제안했다는 점에서 조금 꺼림칙하긴 하지만 데온 하르트라는 검을 제련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방법이었다.

결과는 훌륭했다.

그는 무려 패배한 용사의 시신을 수습해왔다. 이 정도면 '용사의 파편'을 지니지 않았다 하여 반대하던 이들도 그를 '영웅'이라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황제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무언가를 더 얹어주어야 한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그러나.

데온 하르트가 망가지길 바라지 않는 황제의 입장이 무색하게도 그는 돈과 땅, 작위 대신 출발할 때의 입장을 고수했고.

[오늘 밤만큼은 하르트 백작저의 주위가 아주 조용할 것 같은데,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폐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약속은 약속이니만큼 황제는 순순히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결단을 내린 이상 망설임은 쓸데없다. 황제는 그날 밤 곧바로 하르트 백작저 주위에 무관한 이들이 오지 못하도록 은밀히 막았고, 데온 하르트는 걸릴 것 없이 저택 내의 모든 이들을 살해했다.

한 가지 예상치 못한 점이 있다면 그날 크루엘 하르트가 저택에 있지 않았다는 것 정도일까. 심지어 하필이면 데온 하르트가 일을 치르고 있을 때 돌아왔고.

처음부터 저택에 있었거나, 모든 일이 끝난 뒤인 다음날 아침에나 왔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운명이라는 게 무엇인지, 크루엘 하르트는 데온 하르트가 집안 사람들을 살해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목격했으며, 살아남았다.

예상과는 조금 달랐으나, 결과적으로 그것은 데온 하르트를 제어할 좋은 패가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하르트가 멸문 사건으로 이목이 집중되었는데, 그 가문의 몇 안 되는 생존자인 크루엘 하르트마저 살해당한다면 그 여파가 상당할 것이다. 그걸 막아줄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결국 크루엘 하르트를 죽이기 위해선 황제와 척을 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일루스터 공작이 크루엘 하르트를 믿고 곁에 두는 이유도 이와 비슷하겠지.'

크루엘 하르트에겐 데온 하르트가 목줄일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목줄이라니, 이만큼 우스운 일이 또 어디 있으랴.

무심코 튀어나오려는 복잡한 감정이 담긴 탄식을 꾹꾹 눌러 삼키며, 황제가 손을 내저었다.

"하니 데온 하르트에 대한 건은 더 이상 언급하지 말도록."

***

와아, 무슨 마당에 저렇게 귀이이이한 것들이 가득하냐. 신종 설치 미술인가? 저러다 누가 훔쳐가면 어쩌려고.

아니면 돈지랄? 우리 집이 이렇게 돈이 많습니다- 하고 자랑하려는 건가? 누구 집인지 부럽네.

...누구 집은 무슨. 내 집이잖아!!

"시방 저게 뭐야!?"

나 저런 거 산 적 없단 말이야!

설마 또 기사단 놈들이 사고를 친 건가? 이것들을 당장 족쳐버리든가 해야지.

원인만 파악이 되면 곧바로 달려갈 생각으로 책상을 쾅 내리치며 일어섰다.

서류 몇 장이 팔랑이며 떨어졌으나 지금 그런 것에 신경 쓰기엔 창밖으로 보이는 광경이 임팩트가 너무 강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번쩍번쩍 빛나는 것들이 내 집 마당에서 작은 언덕을 이루고 있는데, 지금 서류 몇 장이 대수랴.

내가 반쯤 넋이 나간 와중에도 침착한 노인의 목소리가 느긋하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폐하께서 첩자를 잡은 포상으로 주신 것들입니다."

"필요 없, 아니 부담스럽습니다. 당장 돌려보내세요!"

"그랬다간 백작님의 혼도 왔던 곳으로 돌아갈 것 같으니 이 늙은이, 충심을 내세워 감히 반대하겠습니다."

"...."

무슨 말을 해도 저렇게....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기껏 줬는데 필요 없다고 거부하면 기분이 어떻겠어. 폭군이라면 무슨 짓을 해도 이상하지 않으니 그냥 입 꾹 다물고 받아들이자.

'...기왕 포상을 줄 거면 저런 거 말고 하르트 영지나 도로 가져가줄 것이지.'

아마 나와의 대화에서 첩자를 잡은 보상에 대한 것을 언급하지 않은 것 역시 이러한 내 생각을 예측했기 때문이리라. 젠장 폭군 주제에 머리까지 좋아가지고.

열이 뻗친 탓에 목이 타는 것 같아 책상 위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들었다.

'역시 향은 좋네.'

그러나 몇 모금 넘기지 못하고 다시 내려놓았다. 괜히 이 향을 맡으면 화장실이 가고 싶어지는 것 같달까.

황태자와 황녀와 티타임을 가졌을 때 마셨던 바로 그 차다. 궁을 나서기 전에 황태자가 챙겨줬었지.

차마 황태자의 선물을 그냥 버릴 수가 없어 집에 오자마자 대충 방 테이블 위에 던져뒀었는데, 집사 레멤베르가 이를 발견하고는 일을 할 때마다 종종 다과와 함께 내오곤 했다.

레멤베르가 내오는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똑똑.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연 레멤베르가 무언가를 받아들더니 이쪽으로 다가와 책상 위에 그것을 내려놓는다.

쟁반 위에 놓인 것은 다름 아닌 척 보기에도 써 보이는 탕약 한 그릇.

"약 드실 시간입니다."

"...그거 꼭 먹어야 합니까?"

"무려 황궁의가 보낸 것입니다. 몸에 좋으면 좋았지 나쁘진 않을 테니 어서 드시지요. 독 검사도 이미 마쳤습니다."

빈말인줄 알았더니만, 궁의는 정말로 백작저에 보약을 보냈다. 심지어 고작 1~2주짜리도 아니다. 거의 한달을 넘는 수준의 양이랄까?

마음은 고맙지만 난 쓴 거 싫어하는데....

물론 그런 내 거부는 레멤베르에겐 씨알도 안 먹혔다.

그가 빙긋 웃으며 탕약을 내민다. 행동은 정중하다만 무언의 압박이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일까.

"지금 배부릅니다만."

차를 마신 탓에 물배가 찼다.

"그래도 드십시오."

"...."

탕약은 지독하게 썼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니 입안으로 웬 사탕이 하나 들어왔다. 흠칫 놀라 고개를 들자 지그시 웃는 은청색의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이 집사가 진짜. 내가 애도 아니고.

'그래도 사탕은 맛있네. 딸기 맛인가?'

혀로 사탕을 굴리며 다시 창밖을 내다봤다. 여전히 마당에 쌓여 빛나는 것들을 보고 있으려니 머리가 아픈 기분이다.

저것들이 제일 문제인데,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손가락으로 책상을 툭툭 두드리다 멍하니 입을 열었다.

"레멤베르."

"네, 백작님."

"저것들 중 반은 레멤베르에게 맡기겠습니다. 저택의 예산으로 쓰세요. 나머지 반은 따로 저축해두고요."

"네, 알겠습니다."

"아, 일부는 따로 떼어놓으세요. 쓸 곳이 있습니다."

"네, 액수는 얼마만큼이면 되겠습니까?"

"정보를 모으는데 있어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줄을 당겨 하녀를 불렀다.

"리엔 경을 불러와."

짧게 요약하자면 따로 떼어놓은 액수는 우리 살인귀 기사단의 단장이자 유일한 정상인인 리엔 경의 손에 들어갔다.

목적은 다름 아닌 '구원교'에 대한 정보를 조사하기 위해.

착실한 기사답게 그녀는 며칠 뒤, 돈을 어디에, 어떻게, 얼마만큼 썼는지 하나하나 기록한 서류와 그리하여 알아낸 정보가 적힌 서류 두 뭉치를 들고 왔고,

지금 이렇게.

"구원교는 빈민가를 주축으로 세력을 넓혀가고 있는 신진 종교입니다. 빵과 물을 나눠주며 신도를 모으고 있더군요."

내 앞에서 자신이 알아낸 정보를 깍듯이 보고하고 있었다.

"보통의 사이비 종교답지 않게 '교주'를 믿으라던가 '돈'을 내라든가 하는 말은 없다고 합니다. 그저 '구원'을 믿으라는 말밖에는...."

"'구원'이라... 너무 추상적인데...."

52. 구원교(2)

수상한 점이 한 둘이 아니다.

사이비 종교라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구원교'는 그동안 수없이 등장하고 사라져갔던 다른 사이비 종교들과도 달랐다.

'현재 평민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추세고, 몇몇 귀족들의 후원도 받고 있댔나.'

지금이야, 몇몇 귀족들이 후원하고 있어서 사정이 좀 괜찮을지 몰라도, 시작할 때는 상당한 돈이 들었을 것이다.

즉, 일반인으로서는 쉬이 가질 수 없는 수준의 자금을 쥐고 시작했다는 것.

심지어 그 출발지점이 빈민가였으니 당시 그들의 돈 사용량은 거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대충 계산해보면 어지간한 귀족가에서도 감당하기 부담스러운 액수가 나오는데....

'돈이 목적인 것도 아니고, 자금 제공자가 스스로 교주가 되어 사람들의 우러름을 받고 싶은 것도 아니고. 도대체 뭐야 진짜.'

답답함에 찻잔에 남아 있던 미지근해진 차를 단번에 목구멍에 때려 부었다. 그리고 곧장 후회했다.

제기랄, 차를 괜히 마셨다. 이런 진지한 상황에서 화장실이 가고 싶어지다니.

보고에 대해 조금 더 고민해봐야 할 필요가 있지만....

'일단 화장실부터 다녀오고. 그 뒤에 다시 생각을....'

"역시 직접 가보시려는 겁니까?"

"예?"

문으로 향하던 걸음을 멈췄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일순간 멍해진 나와 달리, 리엔 경은 어쩐지 존경 어린 눈빛을 하며 비장하게 말했다. 얼핏 시야에 그녀가 허리춤의 검을 매만지는 것이 비쳤다.

"혼자서는 위험합니다. 따르겠습니다."

"예? 아니...어…어?"

...결국 얼떨결에 끌려와 버렸다. 화장실도 가지 못한 채로.

리엔 경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존경합니다'를 외치며 성큼성큼 앞장서서 문을 열고 기다리는데, 어떻게 그 상황에서 '저 화장실 좀....' 이라고 말할 수 있겠어.

그 탓에 능동적인 행동은 취하지 못하고 그저 저택을 나가기 전에 구원자가 등장하길 바랐으나, 현실은 냉혹했다.

'시발, 내 운이 그렇지 뭐.'

아무도 만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하녀도 있고 시종도 있었다. 심지어 계단을 내려가던 도중 레멤베르를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평소에는 그렇게나 유능하시던 우리 집사님께서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듯한 나의 표정이 보이지도 않는지 그저 "나가시는 겁니까." 하고 물을 뿐이었고, 빈민가로 갈 것이라는 리엔의 대답에 말없이 너덜너덜한 로브를 두 개 챙겨주며 다녀오시라는 차분한 인사말과 함께 친히 배웅까지 했다.

매끈한 재질의 로브나 깔끔한 여행자용 로브도 아닌 너덜너덜한 로브를 챙겨준 걸 보면 우리가 뭘 할지 대충은 아는 눈치던데. 그렇게 눈치가 좋은 사람이 왜 내 표정은 눈치채지 못한 건지.

설마 일부러 외면한 거 아냐?

"여기서부터 로브를 입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멍하니 걷다 보니 어느새 빈민가 초입이다. 근처 구석진 골목으로 나를 이끈 리엔 경이 예의 그 허름한 로브를 내밀었다.

나는 암담한 눈으로 그걸 내려다보다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받아들었다.

'정말 이대로 가게 되는 건가.'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라도 줄 것이지. 아니면 최소한 화장실을 갈 시간만이라도.

이대로 들어갔다간 정말 다른 의미의 실수를 저지르게 될 것 같아 나는 입술을 한 번 꾹 깨물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전에 잠시 어디 좀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예? 어디를...."

"잠시 저쪽에… 아주 잠깐이면 되니 절대 따라오지 마세요."

마음의 준비도 할 겸, 몸 안에 가득 차 있는 물을 버려야겠다.

아직까진 직접 겪은 적은 없지만, 사람이 너무 놀라거나 공포에 질리면 바지에 실례를 하는 경우가 있다는 이야기의 증거를 두 눈으로 목격한 적이 있었다.

참으로 꼴사나웠지. 나로서는 절대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 그러니 미리 대비를 해두는 편이 좋겠지. 아무리 빈민가라 해도 바지에 막 싸고 다니지는 않을 거 아니야.

...그런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리엔 경이 불안한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예."

아무래도 이곳이 빈민가라서 불안한 모양인데....

당연히 괜찮지. 내가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화장실도 혼자 못 갈까 봐? 게다가 너, 여자잖아. 따라와서 무슨 못 볼 꼴을 보려고.

단호한 얼굴로 리엔 경을 마주했다. 태연해 보이는 얼굴과 달리, 속내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시간 그만 끌고 이제 그만 보내줘라, 제발. 하얗게 질린 이 얼굴이 보이지도 않냐. 척하면 척하고 알아들어야지.

이러다 정말 볼일을 보고 있는 도중에 난입할까 두려워 나는 다시 한번 따라오지 말라는 말을 못 박듯 남기고 급히 골목 구석으로 달려갔다.

"자, 잠시…!"

혹여 리엔 경이 기웃거릴 가능성까지 생각해 두어 번 정도 더 꺾어져 들어가 간신히 볼일을 보는데, 문득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치솟는다.

내가 무슨 영광을 누리겠다고 이 고생을 하는지. 땅을 갖고 싶다는 것도 아니고, 영지 하나 반납하겠다는 건데!

단순히 그것만이 전부였다면 나름대로 깔끔하게 포기했겠지만, 하필이면 크루엘이 이 일을 맡고 있다고 하니 포기하는 것도 요원하지가 않다.

'빌어먹을....'

바지춤을 추스르고 로브를 뒤집어썼다.

그리고 골목을 빠져 나와 한 번 꺾어지는데,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던 골목 한가운데에 누군가 서 있다.

저 사람도 어딘가에 잠입하려는 모양이다. 그의 손에 들린 허름한 로브가 그런 내 추측을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저 사람, 어딘가 낯이 익은데. 검은 머리 하며....

막 로브를 걸친 남자 역시 느껴지는 인기척의 주인을 확인하려는 듯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아직 후드를 쓰지 않은 탓에 당연하게도, 그와 눈이 마주쳤다.

...'어딘가에 잠입'?

정정하겠다. 아무래도 저 사람 역시 구원교에 잠입하려는 모양이다. 아니, 확실하다.

"너, 끅─"

그 역시 나와 같은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테니까.

크루엘 하르트.

증오스러운 존재가 눈앞에 있음에도 나는 불쾌한 감정을 채 표현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대비하지 못한 만남에 너무 놀란 나머지─

주르륵.

"...!"

"아, 제길… 쿨럭,"

─피를 토하고 말았으니까.

어쩐지 요즘 좀 잠잠하다 했더니, 이렇게 터져버리는구나. 젠장.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기 싫어 일단 입을 틀어막았다. 손바닥을 가득 적시다 못해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붉은 액체를 보다가 시선을 들어 크루엘을 확인했다.

그는 미동도 없이 나를, 정확하게는 내 바로 앞의 피가 잔뜩 쏟아진 바닥을 보고 있었다.

"...."

"...."

바닥을 보던 녹색 눈동자가 천천히 위로 올라와 내 입가에서 머문다.

나는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제길, 쪽팔려서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고작 '놀라서' 피를 토하다니. 이 자체만으로도 쪽팔려 죽겠는데, 그것도 하필이면 저놈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일 건 또 뭐람.

이대로 있어봤자 시간만 낭비할 뿐이니 서둘러 놈을 밀치고 골목을 빠져나가려는데, 그의 뒤쪽에서 익숙한 실루엣의 누군가가 망설이듯 살며시 모습을 드러냈다.

"백작님,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

나를 확인한 리엔 경이 말끝을 흐리는가 싶더니 종국엔 입을 다문다.

그녀의 시선이 나와 내 앞에 서 있는 크루엘을 오가고.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허리춤의 검으로 슬금슬금 움직이는 그녀의 손을 보며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일단, 볼일을 보던 도중에 찾아온 것이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다.'

***

손으로 입을 가렸다지만 손가락 사이를 타고 흐르는 피를 감출 수는 없었다.

바닥을 적신 피와 붉게 물들어버린 데온 하르트의 손을 보며 기사단장 리엔 라이너는 내심 후회했다.

'그냥 보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하르트 백작을 호위할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왜 간과하고 있었을까.

생각하고 보면 징조는 뚜렷했다.

창백한 얼굴, 부들부들 떨리던 손, 식은땀과 고통을 참듯 꽉 깨문 입술에 더해─ 무언가를 감추듯 급히 골목으로 달려가는 평소의 그와 어울리지 않는 행동까지.

마왕의 저주가 발동한 것이다.

'기사 실격이다.'

제 눈이 장식으로 달린 것이 아닌 만큼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고 할 때 걱정을 담아 한 차례 묻기도 했었고.

[괜찮으시겠습니까?]

[예.]

단호한 대답과 절대 따라오지 말라는 표정에 차마 그 뜻을 거역할 수 없어 순순히 보냈던 것이 실수였다.

세간의 소문과 달리, 하르트 백작은 남에게 걱정을 끼치는 것을 싫어하는 선한 부류의 사람이다.

물론 전투 시에는 또 다른 잔혹한 면모를 보여 상당한 충격을 제공하기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투'에 한해서일 뿐.

평소의 그는 너무 물렀고, 또 착했다.

이번에만 봐도 그렇다. 정보가 부족하면 사람을 시켜 다시 조사를 지시하면 될 것을, 직접 확인해보겠다며 이 더러운 곳에 거리낌 없이 발을 들이지 않으셨는가.

아마 자신의 상태를 이리 숨기려 하신 이유도 객혈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간 돌아가자고 할 것 같아 그랬던 것이겠지. 걱정을 끼치기도 싫고, 조사도 하고 싶으셨을 테니까.

이러니 어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데....'

눈동자를 굴려 하르트 백작 앞에 서 있는 한 사내에게 시선을 옮겼다.

누구지? 위치상 뒷모습만 보이기 때문에 누구인지는 제대로 파악할 수 없지만, 백작님의 표정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우호적인 관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설마, 지금까지 기회를 노리고 있던 암살자인가? 백작님께서 약해진 틈을 타 공격하려는?

하지만 암살자가 대놓고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는 드문데.

'...이미 한 번 시도한 건가.'

저주 탓에 약해졌다고 해도 백작님은 영웅이다. 쉽사리 습격을 허용하지는 않으셨을 터.

백작님의 실력이 만만치 않은 탓에 습격이 실패로 돌아갔고, 그 후 대치 상태에 돌입했다고 하면 앞뒤가 맞는다.

'우선 저자부터 제압하도록 하자.'

백작님의 상태와 안전에 소홀했던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이지만, 그 충격에 빠져 제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더 큰 죄다.

나는 기사다. 백작님을 지켜야 하는 기사.

빠르게 평정심을 찾은 리엔이 천천히 검에 손을 올렸다.

수상한 낌새를 느낀 건지 뒤늦게 로브의 후드를 눌러쓴 상대가 몸을 틀어 이쪽을 본다.

로브 아래에 있을 시선이 제게 닿는 것을 느낀 순간, 리엔은 즉시 검을 뽑아 들고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채앵!!

살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

크루엘은 검을 맞댄 채 말없이 상대의 얼굴을 훑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이었음에도 동요는 없었다.

낯익은 얼굴이다. 데온의 휘하에 있는 기사단의 단장, 이었던가.

그녀가 거침없이 검을 휘둘러온다. 카앙! 재차 거친 소리가 고막을 쨍하니 흔들었다.

'영웅'이란 칭호를 거저 얻은 것이 아닌 만큼 크루엘은 능숙하게 공격을 막아내며 데온이 그리도 끔찍해 마지않는 녹색 눈으로 둘을 한차례 살폈다.

'역시 임무인 건가.'

데온이 저와 같은 임무를 받았다는 소식은 진작에 들었다.

그러니 지지 말라던 공작의 목소리가 다시금 머릿속에서 울려 퍼진다. 동시에 늘어나 버린 임무 역시.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나 설마 벌써부터 마주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어찌나 놀랐던지.

못 알아보고 지나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창백한 피부와 붉은 눈은 그리 흔하지 않다. 저렇게 명백한 증거를 드러내는데, 형씩이나 되어서 고작 어설픈 로브 하나 뒤집어썼다고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되레 우습지 않나.

예상치 못한 만남에 당황한 것도 잠시, 잡념은 짧았다. 흥분을 억누르지 못한 데온이 피를 토해버린 것이다.

─저건 선천적인 몸 상태 탓에 나온 것일까, 마왕의 저주 탓에 나온 것일까.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한 동생이었다. 그런 몸에 저주마저 겹쳤으면 앞으로의 수명은 얼마나 남은 것일까.

잘은 몰라도 그리 길지는 않으리라.

"...."

데온의 입가에 잔뜩 묻은 피를 지독하리만치 담담한 표정으로 살피며, 크루엘은 생각했다.

'저 녀석이 이 임무에 참여해서는 안 돼.'

다른 것들이라면 몰라도 이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팔 하나로는 부족했던 걸까.

또 의뢰라도 넣어야 하나 고민하는 크루엘에게서는 데온이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의심하는 기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확실히 보았으니까.

데온의 쇄골 위, 목과의 경계선에 새겨진 기묘한 문양의 검은 낙인을.

낙인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는 이들이 으레 생각하듯, 크루엘 역시 그것이 데온의 몸 상태와 수명을 깎아 먹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 얼마 남지 않은 수명이 다할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버티면 되는 거다.

그렇게 되뇌며 크루엘은 데온을 눈에 담았다.

생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녹색 눈이 침잠하게 가라앉은 채 한 사람만을 향하고 있었다.

53. 구원교(3)

살벌한 검격이 오간다. 아니, 일방적으로 리엔 경이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크루엘이 불리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다른 생각에 빠진 기색으로 여유롭게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심지어 이따금 힐긋 나를 보기도 했다.

그러니 평소 기사라는 작위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리엔 경의 심정은 어땠겠는가.

대놓고 무시당하는 난생처음 겪는 상황에 그녀의 눈은 그대로 뒤집혔다.

"이…! 네놈!!"

"자, 잠깐…!"

이대로 계속 싸우다간 리엔 경이 위험하다. 그녀를 죽게 둘 수는 없어 나는 급히 한 걸음 나섰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상대는 영웅인 크루엘이다. 나는 그가 받은 영웅의 칭호가 가위바위보로 얻은 것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그의 검술을 봐 왔으니까.

"물러나세요 리엔 경."

"백작님…! 하지만!"

"명령입니다."

불리한 쪽이 리엔 경이 아닌 크루엘이었다면 나도 나서지 않았을 테지만.

드물게 명령을 언급하는 내가 충격이었는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리엔 경이 입술을 꾹 깨물고는 뒤로 물러선다.

엉망진창일 그녀의 기분이 조금 신경 쓰이긴 하지만 그보다 앞서 신경 써야 할 것이 있기에 일단 시선을 정면에 고정했다.

말없이 검을 집어넣던 크루엘과 눈이 마주쳤다. 늘 그렇듯 내가 먼저 말문을 트려는 찰나, 예상을 깨고 그가 앞서 입을 열었다.

"구원교에 잠입하려는 건가?"

"...."

내용은 영 찝찝한 종류의 것이었지만.

당혹스러움에 반사적으로 입부터 다물었다. 이를 깨닫기 무섭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입술을 떼려 했으나 크루엘이 그 틈을 놓칠 리 없었다.

확신이 담긴 목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잠입하려는 거군."

"...하."

그래서 뭐 어쩌라고. 댁도 잠입할 거니까 같이 가자고 하려고?

물론 받아주지도 않겠지만.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아마 지금 그는 전혀 웃지 않는 내 눈을 보고 있겠지.

"형님께서 신경 쓰실 바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가지 마라."

"...."

무슨.

이렇게 정면으로 돌직구를 던지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물론 말문이 막힌 것과 별개로 순순히 그의 말을 따를 생각은 없다. 애초에 같은 목표를 두고 달리는 '적'의 말을 따를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래, 같은 임무를 부여받았지.'

거기까지 생각하자 머리가 차게 식는다. 당혹스러운 감정이 물러가고 굳었던 혀가 풀어졌다.

나는 이내 활짝 웃었다. 표정과 어울리지 않는 서늘한 음성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가든 말든 그건 내 마음이지."

"...."

"이제 와서 신경 쓴다고 하기엔 상황이 영 아니지 않아? ─형."

"...!"

크루엘의 몸이 움찔했다. 양심이 찔렸거나, 정곡이 찔렸거나, 혹은 친근한 칭호에 당황한 것이리라.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그는 어떨지 몰라도 나는 그 말에 별 의미를 두지 않고 있으니까.

지체없이 몸을 돌렸다. 이 기세를 이어 더 몰아붙일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저놈과 더 있기엔 시간이 너무 아깝다.

"그러니 굳이 제게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전혀 달갑지 않으니까."

"...."

"알아들으셨으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형님."

'형님'이라는 칭호를 들었을 때부터 눈을 크게 뜨고 나와 크루엘을 번갈아 보던 리엔 경을 재촉해 골목 밖으로 향했다.

나도 나지만, 리엔 경도 리엔 경이다. 역시 전형적인 기사님이라는 건가?

'내가 크루엘에게 이러는걸 본 것이 처음도 아니고. 슬슬 적응할 때가 됐을 텐데.'

아니면 크루엘을 못 알아보고 검을 맞댄 게 그리도 신경 쓰였나? 로브를 썼으니 못 알아보는 건 당연한 것인데 말이지.

부러 신경을 다른데 돌리며 걸음을 재촉하는데, 등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머리카락."

멈칫.

"흙칠이라도 해두는 게 좋을 거다."

눈동자는 감출 수 없으니.

크루엘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나 역시 못 들은 척 골목을 빠져 나왔다.

물론 머릿속은 복잡했다.

'뭐야, 저놈. 찝찝하게 왜 충고를 하고 난리야?'

물론 충고 자체는 맞는 말이긴 하다. 다만 받아들이기엔 기분이 영....

....

"리엔 경, 이 정도면 괜찮습니까?"

"예, 전혀 흰머리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떨어져 계시는지...?"

"기분 탓입니다."

"...."

회색? 아니 갈색? 아무튼 절대 흰색이라 볼 수 없는 색의 머리카락을 어색하게 매만졌다.

어깨 아래로 흙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자 동시에 빠른 속도로 내게서 멀어진 리엔 경이 눈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어째 기분이 좀 나쁘다?

"리엔 경, 저는 구원교에 잠입할 겁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설마 그곳에 저만 들여보낼 생각은 아니겠죠."

"...!"

순간이지만 낭패한 표정이 얼굴 위로 고스란히 떠올랐다.

항상 무뚝뚝하고 표정 변화 없던 사람이 저런 표정을 지으니 이건 이것대로 나름 신선하다.

나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유쾌한 감정을 가득 담아 그녀를 향해 손짓했다.

"이리 오시죠. 제가 특별히 혼신의 힘을 다해 변장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콰직.

"...생각해보니 저 혼자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요. 리엔 경은 그냥 밖에서 기다리는 게...."

"아…닙니다. 저는 분명 조금 전에 백작님을 혼자 두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기사로서 약속을 어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난 괜찮은데...."

"제가 안 괜찮습니다."

표정이 영 아닌데요. 금방이라도 누구 하나 베어버릴 것 같은데.

잠시 잊고 있었다. 리엔 경 역시 마음만 먹으면 나 하나쯤은 단번에 죽여버릴 수 있는 강한 기사라는 것을.

그 사실을 깨닫기가 무섭게 살짝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파들- 어색하게 떨렸다.

나, 이러다 죽는 거 아니겠지?

그것도 호위한테.

생명에 위협을 느낀 내가 필사적으로 만류한 덕분에 리엔 경은 가볍게 얼굴만 더럽히기로 했다.

물론 그것도 굉장히 하기 싫었던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변장했었다만.... 뭐, 그래도 머리와 얼굴 둘 다 흙칠을 하는 것보단 낫지 않나.

그리고 지금, 구원교 입구가 있는 골목 어귀에서 나는 머리에 덮어쓴 후드를 한 번 더 꾹 잡아당기며 비장하게 말했다.

"그럼 가볼까요."

"예."

"...."

"...."

...그 표정으로 들어가면 바로 쫓겨날 것 같은데?

아까부터 계속 얼굴이 험악한데, 그 상태로는 무엇을 연기하든 금방 들킬 것 같다. 흙칠이 그렇게 끔찍했나?

"리엔 경."

"예, 백작님."

"표정이 왜 그렇습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긴.

무심코 나오려던 비꼼을 꿀꺽 삼키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와중에 뛰어난 청력으로 그 소리를 들었는지 그녀가 작게 움찔했다.

어떻게 해야 이 분위기를 해소할 수 있을지 잠시 고민하는데, 그걸 무언의 압박으로 느낀 건지 리엔 경이 고개를 푹 숙이며 대뜸 말했다. 그녀의 표정은 괴롭게 일그러져 있었다.

"죄송합니다."

"음?"

혼내려던 건 아니었는데. 아니, 애초에 그녀가 내가 생각하는 원인 때문에 사과하는지도 확신하지 못하겠다.

불안하다. 마계에서든 제국에서든 주변인들이 저런 반응을 보일 때면 언제나 좋지 않은 결론이 도출되었다.

때문에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리자 그녀는 왠지 모르게 쫓기는 듯한 태도로 황급히 덧붙였다.

"다음부터는 절대 혼자 두지 않겠습니다."

"...어...."

무엇 때문에 그런 표정이었는지 알겠다. 그런데 말이지....

'그럼 내 사생활은?'

볼일은 또 어떻게 해결하고? 안전을 위해서라면 내 사생활 따윈 포기해도 좋다, 이거야?

역시 내 예감이 맞았어. 저 뜬금 없는 사과를 들었을 때 어떻게든 화제를 돌렸어야 했다.

그녀의 부담스러운 충성을 어떻게 거절해야 하나 고민하던 끝에 나온 결론은 단순했다.

"...고맙습니다."

일단은 수긍하고, 다음부터 밖에 나올 때는 다른 사람을 데리고 나오자.

"그럼 이만 가죠."

혹여 그녀가 이에 대해 더 물고 늘어질까 잠시 멈췄던 걸음을 서둘러 옮기기 시작했다.

조금은 기분이 나아졌는지 등 뒤로 따라붙는 가벼운 기척이 느껴진다.

그래도 혹시 몰라 그녀를 돌아본 나는 잠시 말을 잃고 말았다.

"...검은 좀 숨기시죠."

"아,"

드물게 당황한 리엔 경의 표정을 보며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이전부터 느꼈다만 이 사람, '기사'와 '검'에 관련한 것 외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하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않나?

'구원교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빈민'을 연기해야 하는 사람이 무슨 허리춤에 대놓고 검을 차?

"...대충 근처 땅에다가 묻어놓고 오세요. 전 먼저 들어가 있겠습니다."

"그, 죄송합니다. 위험합니다."

안절부절못하는 모습. 자신의 실수이니 기다려달라 하는 것은 염치없고, 그렇다고 그냥 보내기엔 걱정이 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게 눈에 훤히 보인다.

심지어 바로 조금 전 혼자 두지 않겠다 대놓고 다짐했으니 더욱 곤란할 터.

무표정 위로 곤란한 감정을 띠며 동공에 지진을 일으키는 것이, 평소라면 그냥 검을 숨겨놓고 올 때까지 기다렸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난 상당히 마음이 급했다.

'크루엘보다 빨리 처리해야 해.'

놈보다 늦는 것은 절대 안 되고, 만에 하나 도중에 내부에서 마주치는 것은 그야말로 끔찍하다.

그러니 방법은 하나다. 놈보다 빠르게 처리하는 것.

"최대한 빨리 숨겨놓고 오세요. 그럼 전 이만."

"아…! 배, 백…!"

급히 튀어나오던 목소리가 급격히 사그라든다.

쯔쯧, 장소가 장소라서 내 호칭도 제대로 부르지 못하는구만. 따로 가명이나 호칭을 정한 것도 아니니 곤란할 테고.

뭐, 그녀에게나 곤란한 거지 나한테는 잘된 일이다. 덕분에 붙잡혀서 헛되이 시간 보내지 않고 이렇게 바로 오지 않았나.

'저 여자한테 말을 걸면 되는 건가.'

저기 구원교의 입구로 보이는 곳에 한 여자가 서 있다. 나는 뒤에서 느껴지는 필사적인 무언의 외침을 모르는 척 뒤로 하고 호기롭게 발을 내딛었….

삐끗.

우당탕탕!!

"꺄악! 괘, 괜찮으세요?"

"...."

"어, 얼마나 굶으셨으면…. 저기, 많이 힘드세요? 일단 일어나보시겠어요?"

나는 엎어진 채 고개도 들지 않고 잠시 침묵했다. 바로 위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썅. 여기까지 굴러온 거냐.

아프진 않지만 쪽팔려 죽겠다. 아니, 쪽팔려서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 건가?

엎드린 채로 슬쩍 시선을 돌리자 뒤쪽에서 이쪽을 보며 감탄하는 리엔 경이 보였다.

'아니, 왜 감탄하는 건데.'

심지어 저런 찝찝한 표정만 남기고 지체없이 몸을 돌리는데.... 가냐? 진짜 가는 거냐? 어째 불안한데. 뭔가 사고 치는 건 아니겠지?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영영 엎어져 있고 싶지만 그게 가능할 리가 있나. 어쨌거나 구원교에 들어가려면 대답은 해야 하기에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 켈룩!"

"피, 피피피피가!!"

손등으로 입가를 대충 훔쳤다.

역시 쪽팔려서 아픔도 못 느낀 거였구나. 고작 넘어져서 몇 번 굴렀다고 속이 진탕이 되다니, 나 참.

일단 눈앞의 여자부터 안심시켜야겠다. 날 빈민이라 생각하고 있는만큼 전염병도 고려하고 있겠지. 이대로면 내부로 들어가기는 커녕 아예 접근 금지령이 내려질지도 모른다.

"아, 이건…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던 지병이라… 괜찮습니다. 전염성도 없고...."

"아…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안쪽에 쉴 곳이 있어요."

"그것보다 그 전에...."

의심은 미리미리 덜어두는 편이 좋겠지.

"여기에 오면 빵과 물을 받을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 네! 물론이죠!"

"대가는… 안 받는 겁니까…?"

"네, 그러니 부담 없이 들어오세요."

안심시키려는 듯 여자가 활짝 웃는다.

와, 저러니까 더 불안한데? 이거 따로 연기 안 해도 될 것 같다. 지금 내 심리가 바로 빈민들의 심리일 테니.

나는 불안과 의심을 부러 숨기지 않고 쭈뼛쭈뼛 여자의 뒤를 따랐다.

54. 구원교(4)

'역시 대단하시다.'

탁탁.

검을 묻은 리엔이 주변의 파헤쳐진 바닥을 손으로 다지며 내심 감탄했다. 그녀는 지금 구원교에 잠입할 때의 데온을 떠올리고 있었다.

잠입을 위해 몸까지 날리는 연기!

넘어져 바닥을 쓸며 여자의 앞까지 도달한 그는 누가 봐도 며칠은 굶어 다리 힘이 풀린듯한 빈민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분명 들어갔겠지. 의심할 건덕지는 없었으니까.

문제는 안에서 로브를 들췄을 때의 경우인데....

'그건 백작님께서 알아서 처리하시겠지.'

무려 백작님이신데. 그 정도는 대비하고 계시지 않을까.

데온을 향한 극한의 믿음으로 중요한 문제를 가볍게 넘겨버린 리엔이 근처에 있던 작은 바위를 들어 검을 묻은 곳 위에 올렸다.

이걸로 검을 잃어버릴 걱정은 없을 터.

그럼 이제 구원교 내부로 들어가 백작님을 만나기만 하면 되는데....

"어머, 죄송해요. 오늘은 더 이상 새로운 신도를 받기가 힘들어서...."

"...예?"

"빵과 물이 목적이실 테죠? 여기 드릴 테니 나중에 다시 와주시겠어요? 정말 죄송해요."

"...."

고의다. 일부러 안 들여보내는 것이 분명해.

얼떨결에 빵과 물을 받아든 리엔이 멍하니 눈앞의 여자를 바라봤다.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는 분명 백작님이 넘어졌을 때 앞에 서 있던 여자가 맞다.

그런데 왜 백작님과 내 대우가 다른 거지? 뭔가 눈치챘나? 아니면 차별? 하긴 백작님이 잘생기시긴 했… 아니 로브를 쓰셨는데?

이해가 되진 않지만 그렇다고 마냥 이곳에 서 있다간 되레 의심을 살 수 있기에 리엔은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돌렸다.

'근처에서 대기해야겠군.'

잠입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한 이 무능함에 대한 사죄는 백작님이 나오시면 하도록 하자.

***

'내가 들여보낼 줄 알았니?'

평생 와 보렴. 내가 들여보내 주나 봐라.

구원교의 얼굴 마담이자 실질적 총괄인 사에린이 방긋방긋 웃는 얼굴로 터덜터덜 돌아가는 리엔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녀가 조금 전의 남자는 들여보내고 저 여자는 돌려보내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저 여자는 검을 배웠으니까.'

걸음걸이가 검을 배운 자의 것이다. 절제되고, 힘이 있으며, 지나치게 규칙적인 걸음걸이.

몰락해 빈민이 되어버린 기사라는 가정을 대입해봐도 저건 말이 안 된다.

몇 날 며칠을 굶어 필사적일 빈민이 저렇게 힘 있게 걸을 리가 없잖은가.

'반면에 조금 전에 들여보낸 남자는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걸음걸이였지.'

심지어 다리에 힘이 빠져 넘어지기까지 했다.

일어날 때는 한쪽 팔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럽기도 했다. 필시 팔에 문제가 있는 것이리라.

'더해서 그 피.'

그건 연기로는 나올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어.

그런 인간을 첩자로 쓰기엔 부적절하다.

중요한 정보를 빼돌리려면 장부를 빼갈 정도의 실력이 되어야 하는데, 피를 토하는 지병에 한쪽 팔은 제대로 못 쓰고 오래 굶어 다리 힘조차 없는 인간이 중심부까지 들어가 장부를 빼돌리는 것이 가당키나 할까.

그러니 그 남자가 첩자일 확률은 0에 가까울 것이다.

'이 참에 신도나 한 명 더 늘려야지.'

자신이 들여보낸 그 남자, 데온 하르트가 전쟁터에서 구르다 스스로 검을 터득했기에 정형화된 검술이 없다는 것을 알 리 없는 사에린은 한 치의 의심 없이 다시 그를 보기 위해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

"여기 차라도 드세요."

"아, 감사합니다."

손을 뻗어 내민 찻잔을 받았다. 물론 의심 없이 냉큼 마시진 않았다. 이 안에 뭐가 들었을 줄 알고.

조용히, 자연스럽게 냄새부터 맡자 그걸 또 어떻게 눈치챈 건지 여자가 생긋 웃는다.

"그냥 흔히 볼 수 있는 싸구려 차예요. 아무것도 안 탔으니 염려 말고 드세요."

"...네."

확실히 아무 약 냄새도 안 나긴 하는데.... 에라 모르겠다. 저 여자 입장에서도 한낱 빈민인 날 죽여 얻을 건 없을 테니.

조심스럽게 차를 입에 머금고 꿀꺽 삼켰다. 따뜻한 기운이 몸 내부에 들어가 퍼지며 긴장을 풀어준다.

지금이 겨울이었다면 효과가 배 이상이었을 텐데, 조금 아쉽다. 차는 겨울에 마시는 게 최곤데.

"그런데, 안 답답하세요?"

"...아."

반사적으로 로브 후드를 매만졌다. 흠칫 몸을 뒤로 물릴 뻔하기도 했으나, 가까스로 그건 멈출 수 있었다.

기분 탓인가? 얼핏 여자의 두 눈이 번쩍 빛났던 것 같은데.

아니, 지금 그런 것에 신경 쓸 시간이 아니다.

'뭐라 답해야 하지?'

로브를 벗었다간 정체가 들킬 위험이 있다. 다행히 사교계 출입이 드물었던 덕분에 아직까진 내 얼굴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만, 붉은 눈은 나의 상징이기도 하니....

뭐라 말해야 할까.

"...괜찮습니다. 보기 흉한 모습이어서...."

"네? 그게 이유라면 더더욱 마음 편히 벗고 계셔도 돼요. 여기선 외모 가지고 뭐라 할 사람은 없으니까요."

"아...!"

얼굴을 가려주던 든든한 후드가 벗겨진 것은 한순간이었다.

나는 황급히 시선을 아래로 고정했다. 아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거나 고개를 푹 숙이고 싶었으나 그건 객관적으로 봐도 너무 과한 반응이었기에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빌어먹게도.

여자의 손이 이쪽으로 뻗어오는 것을 또렷이 보고 있었음에도 차마 거부할 수가 없었다.

거부하면 분명 의심할 테니까.

로브가 벗겨지고, 혹시나 싶어 흙칠을 해놓은 탁한 색상의 머리가 드러난다.

머리 위로 여자의 부드러운 음성이 떨어졌다.

"괜찮으니까 고개 드세요."

"...."

잠시 망설이자 지체 없이 고운 손이 뻗어온다. 양 뺨이 부드럽게 감싸지고, 고개가 들렸다.

나의 붉은 눈이 여자의 상냥을 가장한 눈과 마주쳤다.

그리고 동시에, 여자의 눈에 있던 의심이 덩치를 키우는 것이 망막에 선명히 비쳤다.

"눈이… 붉은색이네요?"

"...그...."

각오를 했음에도 저렇게 의심하는 것이 눈에 선히 보이니 말문이 턱 막혔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진 듯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이대로면 최악의 결말을 맞이하게 될 터.

'정신 차려!'

여기서 넋을 놓으면 안 된다. 서둘러 눈을 굴렸다.

최근 세가 많이 늘었다는 것이 사실인 듯 입구를 지키는 보초의 뒷모습이 보인다. 내부 역시 몇몇 무기를 든 장정들이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그냥 리엔 경을 기다릴 걸 그랬어.'

이럴 때 그녀라도 있었다면 마음이 든든했을 텐데.

탈출은 꿈도 못 꾸고, 이 상황에서 자유롭게 놀릴 수 있는 것은 입 하나뿐이다. 그러니 말해야 한다.

'무슨 말?'

무슨 말을 해야 이미 생기기 시작한 의심을 지울까?

'생각해.'

저 여자가 후드를 벗는 것을 종용할 때, 난 뭐라 말하며 거절했었지?

자연스럽게 대답할 수 있는 시간의 마지노선이 다가오고 있다. 이 이상 침묵이 길어지면 필시 수상하게 생각할 터.

시간이 흐르고. 여자의 눈에 있던 의심이 점차 확신으로 변하던 순간, 내가 입을 열었다.

절대 급한 기색 없이 천천히, 오히려 머뭇거리는 기색을 한껏 담아, 눈을 감추듯 고개를 푹 숙이며.

"...여, 역시...."

"...."

"보기 흉하지요…?"

"...."

짧은 침묵이 찾아왔다.

통했나?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표정을 볼 수가 없으니 통 알 수가 없다.

그냥 이대로 기다리기만 해도 나쁘지 않은 결과가 나올 것 같지만, 상황을 보니 몇 마디 더하는 쪽이 더 좋을 것 같다.

침묵은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

애매한 것보다는 확실하게 저울을 기울여놓는 편이 훨씬 나을 테니.

"역시 싫어하실 줄 알았습니다...."

부러 비참함과 슬픔, 체념과 억울함을 담아 입을 열었다.

연기는 어렵지 않았다. 반쯤이지만 분명한 진심이 담겨 있었으니까.

"가족조차 버린 이 눈을, 어느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아, 아뇨! 전혀 흉하지 않아요!"

됐다!

다급하면서도 상냥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데온 하르트 아시죠? 제국의 영웅 데온 하르트! 그 사람도 붉은 눈이라고 해요. 당신처럼."

"데온 하르트… 말씀이십니까?"

"네! 무, 물론 뱀파이어니 살인귀니 하는 악명도 많지만…!"

"...."

그건 말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좀 상처받았다.

뭐, 그래도 의심은 거둔 것 같으니 다행이지만.

여자도 마지막 말은 실수였는지 잠시 입을 다물더니 황급히 말을 돌렸다.

"이곳이 뭐 하는 곳인지는 아세요?"

알긴 아는데 자세히는 모르지. 그래서 이렇게 온 거고.

온전한 내 의지는 아니었다는 사실은 제쳐두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냥 이곳에 오면 먹을 걸 준다는 말만 듣고...."

"아하, 많은 분들이 그렇게 알고 오시죠. 그게 일반적이니 너무 눈치 보지 마세요."

눈치 안 봤는데. 내 얼굴을 기억할까 봐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것이 여자에게는 그렇게 비친 모양이다.

자애로운 미소를 지은 여자가 슬슬 설명하려는 듯 부드럽게 입을 연다. 나 역시 안 그런 척 귀를 바짝 기울이며 앞으로 나올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그래, 이렇게 사람을 끌어들여서 신도로 만들었겠지. 얼마나 말을 잘했으면 그렇게 세를 늘렸을까.'

그러니 어디 한 번 나도 설득해봐.

"이곳은 구원교 교단이에요."

"구원교…?"

"네, 폭군 에도아르도의 치하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종교단체죠."

맙소사.

존경하는 황제 폐하, 저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그저 듣기만 했습니다. 아니, 듣지도 않았습니다. 사실 제가 귀가 잘 안 들립니다.

그러니 살려주세요.

얘가 미쳤나. 왜 그렇게 위험한 발언을 서슴없이 하는 거야?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표정 관리, 표정 관리!'

무너지는 표정을 다잡았다.

지금 난 아무것도 모르는 빈민이다. 말 몇 마디에 쉽게 흔들리는 빈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그래서 빵을...."

"네, 여러분들이 이렇게 힘들게 사는 것 또한 황제 때문이니까요. 황제가 통치를 제대로 했으면 이렇게 살고 있겠어요?"

"그…렇군요."

존경하고 존경해 마지않는 황제 폐하! 전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또 다른 제가 멋대로 입을 나불댄 겁니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런데 황제라면 같은 입, 같은 몸뚱이로 나불댄 것은 맞지 않느냐면서 죽여버릴지도....'

그런데 어쩔 수가 없잖아. 여기서 내가 폐하를 모독하지 말라고 외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리고 이 여자는 왜 자꾸 폭탄을 던져대는 건데? 목숨이 아깝지도 않나!

아니면 설마 내 정체를 눈치챈 건가? 그래서 같이 죽자고…?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라서 더 무섭다. 하지만 여자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건 아닌 것 같고, 정말 선동이 목적인 것 같은데....

한숨이 나왔다.

'주장이 어설퍼. 어설프다 못해 어이가 없을 정도인데....'

빈민의 존재 이유가 황제가 통치를 못 해서라니. 빈민 구제는 역사를 통틀어 어느 통치자도 해내지 못한 일이다.

이러다가 넘어져도 황제 탓을 하겠네.

"당신이 넘어져서 다치는 것도 황제가 길을 제대로 닦아놓지 않았기 때문에...."

진짜였냐!

표정을 감추기 위해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희미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주장이다. 하지만 빈민들에게는 다르게 다가오겠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 여부 따위가 아니라, 빈민이어서 받은 불이익에 대한 억울함과 분노를 토해낼 곳이니까.

쉽게 말해 눈앞의 여자는 원망거리가 필요한 이들의 앞에 탐스러운 먹잇감을 던져놓고 끌어들인 것이다.

'구원교'라는 이름의 단체 아래로.

그 와중에도 여자의 설명은 멈추지 않았다.

"사이비 종교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구원교는 일반적인 사이비 종교와는 달라요. 우리는 돈도 바라지 않고, 다른 무엇도 아닌 그저 '구원'을 믿는답니다."

"...믿으면 정말 구원을 해줍니까?"

"네, 당연하죠."

"누가?"

결국 모든 의문은 돌고 돌아 단 하나에 집중된다.

'누가?'

누가 구원을 해주는 거지?

55. 구원교(5)

"그건...."

"...."

"당신이 독실한 신도가 되면 알게 될 거예요."

김이 팍 샌다. 벌써부터 지치는 기분이 들었다.

그 말은 즉 정보를 얻으려면 여기에 꾸준히 눈도장을 찍어야 한다는 것 아닌가.

얼떨결에 끌려와 잠입하게 된 것이 장기전이 되게 생겼다. 썩을.

내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앉아있자, 여자가 살살 눈웃음을 치며 몸을 일으켰다.

"시간이 너무 흘렀네요. 저는 일이 바빠 이만 가봐야겠어요."

"아...."

"음식은 출구의 보초들에게 말하면 바로 줄 테니 걱정 마시고요. 일단 오늘은 자유롭게 견학이라도 하다 가세요."

...'일단 오늘은?'

"출입금지인 곳은 지키는 사람이 있으니 그런 곳만 가지 않으면 돼요."

그 말을 끝으로 여자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나는 다 식어버린 차를 단숨에 들이키고 의자에 몸을 편히 기댔다. 긴장이 풀린 몸이 뒤늦게 축축 늘어졌다.

'저 여자, 은근 재수 없네.'

또 올 거라는 것을 확신하는 태도 하며─

물론 내가 빈민이라고 생각했으니 당연한 거겠지만. 공짜로 빵과 물을 주는 곳인데 아예 안 와봤다면 모를까, 한 번 온 이상 또 오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겠지.

'...일단은 내부부터 둘러보자.'

리엔 경은 어디서 뭘 하길래 아직까지 들어오지 않는지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그건 잠시였다.

그녀는 기사다. 그것도 살인귀라는 이름을 단 미친개들을 통제하는 기사. 그런 그녀를 걱정하는 것 자체가 사치이리라.

걱정을 해도 나를 걱정해야지.

그렇게 그녀에 대한 생각은 저 멀리 날려버리고 천천히 건물 내부를 거닐기 시작했다.

특별한 것은 없었다. 평범한 신전과 똑 닮은 생김새에, 성기사에 빗대면 딱 맞을 것 같은 보초들까지.

그래서 더 수상하다.

'이렇게 수상한 냄새를 풀풀 풍기는 주제에 깨끗하다니. 말도 안 되잖아.'

역시 보초가 있는 방에 들어가 봐야 하나.

슬쩍 경비가 있는 방들을 훑던 찰나, 그런 내 시야에 누군가 들어왔다.

세상 걱정 없다는 듯, 행복에 절어버린 미소가 너무도 이질적이라 시선이 끌릴 수밖에 없었다.

왜소한 체구. 거친 재질이지만 나름대로 깨끗한 옷차림.

한두 번 와본 것이 아닌지 거침 없이 내부를 가로질러 어디론가 향하는 그 사람은....

'...여자아이?'

대충 12살 정도로 보이는데, 이곳의 신도인 것일까. 아무래도 빈민 같은데.

혈색도 나쁘지 않고 행복하게 웃고 있다지만 특유의 굶주렸던 기색이 얼굴에 남아 있다. 필시 굶주림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터.

더해서 품에 들려 있는 빵 한 덩이를 보며 빈민 신도가 맞으리라 반쯤 확신하고 있는데, 시선을 느낀 건지 여자아이가 이쪽을 돌아봤다.

눈이 마주치고, 어색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

여자아이가 이쪽의 신분을 추측하려는 듯 눈을 데굴데굴 굴린다.

얼굴을 확인한 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내린 뒤 다시 얼굴을 보는 행동에 나도 모르게 허리를 빳빳하게 세운 것도 잠시, 변장으로 꼬질꼬질해진 몰골을 확인한 여자아이가 뭔가 알겠다는 듯 손뼉을 마주쳤다.

"아!"

"...?"

"새로 오신 신도분이시구나!"

"으, 응?"

"반가워요! 전 시이아라고 해요!"

"어, 응. 반갑다…?"

뭐야, 왜 이렇게 밝아? 빈민 맞아? 내가 잘못 추측한 건가?

어쨌거나 이 꼬맹이는 내게 명백한 호감을 가지고 있다. 마침 정보를 얻을 구멍이 필요했는데 이렇게 다가와 주면 고마울 따름이지.

고사리 같은 손을 마주 잡고 흔들었다. 덩달아 여자아이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난다.

"제가 얼굴을 모르는 걸 보면 오신지 얼마 안 되신 것 같은데. 오늘 오셨어요? 아니면 어제?"

"오늘...."

"아하, 그럼 아직까진 모든 게 어색하고 의심스러우시겠네요. 그런데 걱정하실 거 없어요. 이곳은 정말 아무 조건 없이 음식을 주는 곳이니까."

자연스럽게 날 어디론가 이끌며 여자아이가 설명을 이어간다.

아이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확고한 믿음만이 담겨 있었다.

...뭔가, 이상한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확신할 수가 있지?

"종교를 믿으라고 강요하지도 않아요. 다만 믿으면 더 많은 음식을 줄 뿐이죠. 아저씨 빈민이시죠? 저도 빈민이에요. 같은 빈민이 먼저 경험해보고 하는 말이니 믿어도 좋아요."

"그렇구나."

"그리고… 아, 이곳은 기도실이에요. 음식을 목적으로 가볍게 믿기 시작하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기도를 하죠."

"...그렇다는 건 독실하게 믿는 사람들의 기도실이 따로 있다는 거…니?"

우와, 어색하다. 아이랑 대화를 해봤어야 알지.

말이 조금 어색하게 끝맺어졌으나 다행히도 뭔가 수상함을 느끼진 않았는지 아이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하에 따로 기도실이 있어요. 그곳에서 진짜 구원에 관한 사제님의 연설을 듣죠. 구원은 실재해요."

그렇게 말하는 아이의 눈은 몽롱하게 풀려 있었다. 거기서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세뇌인가? 아마 세뇌일 것이다. 저렇게 확신을 담아 말하려면 세뇌가 아니고서야 힘들 테니까.

...그렇지만.

'이상해.'

세뇌당한 이들에게서 일괄적으로 드러나는 탁한 눈동자가 아니다. 오히려 아이의 두 눈은 희망을 담고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잠시 몽롱했던 눈은 희망찬 미래를 상상하느라 잠시 풀렸을 뿐.

'왜?'

무슨 수를 쓴 거지?

신나게 조잘거리는 아이를 복잡한 표정을 내려다 봤다. 지금쯤 내 눈은 혼란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으리라.

뭐 빠지게 고민해봤자 지금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으니 일단은 그 지하에 있다는 기도실에 대해 알아보아야 한다.

복잡한 표정을 지우고 살풋 미소지었다. 그래 봤자 어설프고 희미한 미소일 뿐이지만, 어차피 지금의 난 평소 웃을 일 없는 '빈민'이니 이 정도로 충분할 것이다.

역시나, 아이는 조금의 의심도 없이 나를 마주했다.

"그 기도실은 어떻게 들어가는 거니?"

"아, '진짜 기도실'이요? 몰라요."

"...응? 몰라?"

"네. 입구는 알지만 여는 방법은 사제님만 아시는걸요."

역시 그런가. 하긴, 아무나 숨어들었다간 곤란할 테니까.

"그럼 그 기도실 입구의 위치만이라도 알려주지 않을래? 나도 네가 말한 그 '구원'을 한 번 믿어볼까 하는데, 독실한 신도가 된다면 어디서 기도하게 될지 궁금해서."

"정말요? 이제 아저씨도 구원받을 수 있겠네요. 잘됐어요!"

"그래, 그러니...."

"음, 근데 기도실 입구의 위치는 안 돼요. 저도 알려주고 싶은데, 사제님이 함부로 알려주지 말랬거든요."

...얘 전부 알고 있는 거 아니야? 물으면 뭐든지 답할 것처럼 굴면서 은근 철벽이네. 지금 나 갖고 노는 건가?

본능이랄까,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이 녀석은 틀렸어. 아무리 캐물어도 대답하지 않을 거야.

직접 알아보던가, 다른 놈을 찾아 물어봐야 한다.

고민할 것도 없이 나는 깔끔하게 직접 알아보기로 했다.

시간도 없는데 어느 세월에 이 아이만큼 괜찮은 녀석을 찾겠어. 괜히 캐묻고 다니다가 의심만 사지 않으면 다행이지.

일단 아직도 옆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이 아이부터 떼어놓도록 하자.

...라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저 멀리서 한 남자아이가 이쪽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시이아! 뭐해! 가야지!"

"아, 폴! 저기 죄송한데,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어서 가봐."

어차피 잡을 생각도 없었지만.... 이쪽을 보는 폴이라는 남자아이의 눈초리가 제법 매섭다.

여자아이와는 다르게 경계 가득한 눈빛.

보아하니 16~17살 정도 된 것 같은데, 그래서 그런가? 나름 여자아이보단 머리가 컸다 이거지?

조금이라도 수상한 기색을 보였다간 곧바로 경비에게 말할 것 같은 기세라 되도록 무해한 표정을 지어주려 하니, 아직도 가지 않은 건지 명량한 목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아, 그리고 피곤해 보이시는데, 멀리서 오셨다면 이 근처에서 머무시는 게 편할 거예요. 왔다 갔다 하는 것도 힘들잖아요?"

"그래, 조언 고맙다."

"그럼 또 봐요!"

아이가 남자아이를 따라 사라진다. 어렴풋이 "내가 처음 보는 사람이랑 함부로 대화 나누지 말랬지." 하는 타박이 들렸다.

나는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남자아이가 이쪽을 힐긋 돌아보는 순간 재빨리 돌아섰다.

그대로 천천히 입구로 향하며 흙칠이 벗겨지지 않을 정도로만 얼굴을 더듬었다. 피곤해 보인다는 여자아이의 말을 곱씹느라 나온 행동이었다.

'내가 그렇게 피곤해 보였나…?'

하긴, 서류작업 도중에 그 흔한 휴식 시간 하나 없이 이곳에 끌려왔으니 그럴만도 하지. 빌어먹을 내 팔자야.

당당하게 입구로 나간 후, 방향을 틀어 소리 없이 건물 주위의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물론 나갈 때 음식을 받아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세뇌를 했다면 주로 음식에 약을 타 세뇌하는 방식을 택할 테니 확인차 받아왔으나.

'...아무 이상도 없어.'

그냥 평범한 빵과 물이다. 의외의 결과에 잠시 사고가 멈췄다.

그럼... 어째서 그렇게 공격적으로 신도를 모을 수 있었던 거지? 설마 나도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건가? 아니면, 정말 그 허접한 주장으로 끌어들였다고? 평범하기 짝이 없는 빵과 물을 미끼로?

'....'

머리가 멍하다. 무언가에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다. 목까지 타는 듯해 확인이 끝난 물병을 입에 대고 기울였다.

그러나 채 목구멍으로 넘어가기도 전에,

"누구냐."

"푸확! 큽, 끅- 쿨럭쿨럭…!"

서늘한 음성이 몸을 짓눌렀다.

젠장 덕분에 물을 잘못 삼켰잖아. 고개까지 숙인 채 기침하던 내 시야에 잔뜩 젖은 흙바닥이 보인다. 흙이라 색 구분이 안 되는데, 저거 설마 피는 아니겠지.

음, 입안에 비릿한 향이나 짭짤한 맛은 느껴지지 않는다. 다행히 물만 뱉은 모양인데....

'...다행이 아니잖아!'

들켰나? 역시 들킨 거겠지?

여기서 잡히면 여러모로 곤란하다. 아니, 곤란을 넘어 위험하다. 대충 입가를 닦아내고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집중했다.

'3…2…1… 지금!'

아슬아슬한 상황인 만큼 판단은 빨랐고, 실행 역시 빨랐다.

나는 아무런 전조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

"아…!"

다행히도 쫓아오지는 않는지 낭패한 기색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만에 하나 뒤늦게라도 쫓아올까 나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달리며 사람이 없어 보이는 방의 창문을 하나하나 건드리다 유일하게 열려있는 곳으로 몸을 밀어넣었다.

***

정체 모를 인물이 사라진다. 리엔은 허탈한 얼굴로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쫓으려 한다면 쫓을 수 있겠지만 굳이 그러진 않았다.

괜히 소란을 피웠다간 자신은 물론이고 안에 계실 백작님마저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

'그런데 어째 뒷모습이 익숙한데....'

기침 소리마저도 익숙하다.

어디서 본 적 있는 사람인가? 난 이곳에 처음 오는 건데. 빈민이랑은 연도 없고… 응? 빈민?

그러고 보니 백작님께서 빈민으로 변장하고 잠입하셨었지.

...맙소사.

리엔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왜 거기에 계셨던 겁니까!!'

안에 계셔야 할 사람이 도대체 여기서 뭘 하신 거야!

일단 무사해 보였으니 다행이긴 한데! 아니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역시 쫓을까?'

거리를 가늠하듯 가늘어진 눈이 길목을 훑어내리다 무언가를 발견한 듯 한 곳에서 멈췄다.

길 한 가운데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축축한 흙.

흙의 특성상 무슨 액체를 쏟아도 검게만 보이니 색으로는 판별이 불가능하다만, 주변 상황과 환경을 고려해 몇 가지 가설을 세우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

'보아하니 액체가 쏟아진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그렇다면 백작님과 연관이 있다는 뜻일 테고. 더해서 조금 전 백작님께서 심한 기침을 하셨으니....'

평소라면 냄새를 맡는 방법도 생각해봤겠지만, 이곳은 빈민가다.

사방에서 온갖 오물 냄새가 나는 것은 물론, 바닥에서조차 시궁창 냄새가 올라오고 있었기에 리엔은 그 방법은 아예 뇌리에서 지워버렸다.

기어이 냄새를 맡겠다고 하면 못할 것도 없지만…. 귀족 출신의 기사인 그녀가 주군의 명령도 아닌 일에 굳이 정체 모를 젖은 흙을 만지거나 코를 박을 리 없었다.

그렇기에 정황만으로 모든 가능성을 동원해 가장 그럴듯한 가설을 세운 리엔이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설마....

"피?"

56. 구원교(6)

저건 피다. 백작님께서 기침을 하실 때 얼핏 입에서 액체가 쏟아지는 것을 보았다.

피 외에 남은 가능성이라고 해봤자 구토나 침뿐인데 구토라고 하기엔 소리도 영 아닌 데다 이렇다 할 색이나 건더기도 없고, 침을 저렇게 많이 뱉을 리도 없을 테니 결국 남는 것은....

'마왕의 저주인가? 아니면 정체를 들켜서 공격이라도 당했나?'

공격당한 것 치고는 내부가 그다지 혼란스러워 보이지 않는데. 혼란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아무 일 없었던 듯이 조용히 사건을 끝내려는 건가?

마왕의 저주. 그리고 정체를 들킨 것.

전자도 좋지 않지만 후자는 더 안 좋다. 두 개가 겹친 거라면 그야말로 최악이고.

어느 쪽일지 고민할 것도 없이 리엔은 가장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다.

'주군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는 언제나 최악을 가정해야 한다.'

그러니 백작님은 내부에 잠입했다가 정체를 들켜 죽을 위기를 겪으신 거다. 간신히 탈출하셨지만 그 과정에서 부상을 입으셨고, 설상가상으로 마왕의 저주마저 겹친 것이다.

그리고 나를 추격자로 오인해 미처 숨을 돌리기도 전에 다시 달리셔야 했고─

'내부로 다시 들어가신 건?'

만족할만한 증거를 얻지 못한 것이리라.

'세상에, 그 지경이 되어서까지 포기하지 못하시다니. 역시 백작님은....'

격해지려는 감정을 황급히 억눌렀다. 기사가 평정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

지금 중요한 것은 어떻게 대처하느냐다.

상태와 상황 둘 다 좋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는 백작님을 모시러 가야 할까, 밖에서 대기해야 할까.

'들어갈 경우 엇갈릴 수도 있어.'

그럴 경우 일이 더 복잡해진다.

하지만 백작님이 정말 위급한 상황에 처하셨다면?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젠장.'

소리 죽인 한숨을 길게 내쉬며 머리를 감쌌다. 자신은 이런 선택엔 영 젬병이었다.

그렇기에 명령만 들으면 되는 기사란 직업에 극도로 만족한 것이기도 한데, 하필이면 이런 시련이 닥칠 줄이야.

일생일대의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 리엔이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는데, 긴장으로 예민해진 귀에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에서 조금만 걸어 나가 꺾어지면 바로 보이는 곳, 구원교 입구에서.

"지금 당장 경비대장을 불러오세요."

"예?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갑자기?"

"...."

분명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인데 낯설다.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 사람이 아닌 건가?

아니. 목소리는 입구에서 생글생글 웃으며 자신을 쫓아냈던 여자의 것이 확실히 맞다. 다만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분위기가 다를 뿐.

저렇게나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라니.

상대 역시 당황한 듯 침묵하자 예의 그 싸늘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침입자가 들어왔어요. 당신들은 그것을 아직까지도 모르고 있었고."

"...!"

"상대가 영웅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당신들은 목이 남아나지 않았을 거예요. 무능한 죄로 갈아치워졌을 거라고요. 운 좋은 줄 아세요."

영웅!

리엔이 조용히 경악했다.

예상이 맞았다. 백작님의 정체가 들통난 것이다.

이어진 말은 더 충격적이었다.

"일단 그는 제 선에서 처리했으니 호들갑 떨지 말고 경비대장이나 불러오세요. 경비 강화에 대해 논해야겠으니."

처리했다니! 그렇다는 건 백작님께서...!

더 생각할 것도, 망설일 이유도 없다. 리엔은 그대로 몸을 돌려 데온이 사라진 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백작님!!'

여자가 '데온 하르트'가 아닌 '영웅'이라 말한 것도, '영웅'이 한 명이 아니라는 것도 떠올리지 못한 채였다.

와장창!

워낙 빠르게 사라진 터라 데온이 어느 창문으로 들어갔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기사 한 명이 요란스럽게 눈에 보이는 창문을 무작정 넘는다.

그리고 구원교에 재앙이 닥쳤다.

***

당연한 말이지만 구원교에는 기도실이 있다. 아무나 함부로 드나들 수 없도록 보초를 두어 특정 시간 외에는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이.

물론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것은 어디까지나 평범한 이들뿐, 영웅인 크루엘에게는 예외였다.

툭.

아무도 없어 적막감만이 가득한 공간에 작지만 이질적인 소리가 퍼져나갔다.

천장에서 뚝 떨어진 검은 머리칼의 남자, 크루엘이 익숙하게 주위를 둘러본다. 무기질적인 녹색 눈이 내부를 훑었다.

설계도와 똑같은 공간. 제대로 도착했다.

크루엘은 품 안의 종이를 떠올리며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데온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게임은 애초에 불공평한 게임이었다. 자신은 설계도를 가지고 시작했으나, 그는 아니니까.

[설계도입니다. 그러니 되도록 안전하게 이 게임을 끝내도록 하세요. 설마 그것도 못 하진 않겠지요?]

[....]

되도록 안전하게.

그 말의 뜻을 모를 수가 없었다. 크루엘은 그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 일방적인 게임의 일방적일 결과를, 데온이 과연 납득할 수 있을까?

펄펄 날뛸지도 모른다. 의혹을 제기하고, 공작 앞에서 제게 따지려 들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

무언가를 떠올린 듯 입매를 굳힌 크루엘이 성큼 걸음을 뗀다. 망설임 없이 창문으로 향하더니 이어서 잠금장치에 손을 뻗었다.

잠시 망설이는 듯 차마 섣불리 닿지 못하고 주위에서 맴돌던 손이 이내 능숙하게 그것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뭐 하세요?"

"...."

일순간 모든 행동이 멈췄다. 잠금장치에 닿았던 손이 스르륵 떨어진다.

덩달아 완벽하게 해체된 잠금장치를 흘긋 확인한 사에린이 다시 크루엘의 뒷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

낯선 침입자인 줄 알고 바짝 긴장했던 몸이 아직 덜 풀려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 대답 안 하셔도 돼요. 안 들어도 뻔하니까. 창문으로 들어온 거죠? 이 건물의 창문은 분명 전부 잠가놓았을 텐데, 어떻게 들어온 건지... 나 참."

뾰족한 눈초리로 그를 노려봤다.

같은 주인을 모시는 사이라 이렇게 담담히 말을 거는 것이지, 아니었다면 진작에 경비를 부르고도 남았을 것이다.

"당신의 목적은 알고 있어요. 무엇을 노리는지, 그게 어디에 있는지도요."

"...."

"물론 도와줄 생각은 없지만요."

사에린은 영민하다. 그녀는 모든 상황을 파악하기 무섭게 주인의 뜻을 알아차렸다.

제게 명령하면 손쉽게 해결될 것을 굳이 크루엘에게 시켰다. 그렇다는 것은 그를 시험하겠다는 뜻이겠지.

그에게 호의라도 있다면 모를까, 안타깝게도 그녀는 크루엘을 경계하는 쪽에 속했다.

"공작님은 당신을 시험할 생각이시겠죠. 전 그분의 뜻을 충실히 받들 생각이고요. 정말 필요한 정보 같은 것은 진작에 당신에게 넘기셨을 테니 굳이 제가 도울 필요는 없겠죠."

"...."

"지금 당장 경비를 부르지 않은 것만으로도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를 한 것이니 괜한 소란 일으키지 말고 조용히 볼일 보고 떠나세요. 아, 그 창문은 꼭 다시 잠그시고요. 전 경비대장을 좀 만나봐야겠으니까."

데온 하르트도 같은 임무를 받았다고 들었다.

우직한 전사 타입인 크루엘의 침입을 허용할 정도라면 날렵한 몸놀림을 가진 데온 하르트는 더욱 잡아내지 못할 테지.

상대가 영웅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래도 두 눈 멀쩡히 뜨고 순순히 당할 생각은 없기에 사에린은 서둘러 방을 나갔다.

다시 조용해진 공간 속에서, 크루엘은 그녀가 나간 문을 물끄러미 보다가 등을 돌렸다. 창문의 잠금장치는 보지도 않은 채였다.

훌쩍 몸을 날려 단상에 올라간 그가 바닥을 꼼꼼히 살피더니 그 뒤의 보라색 커튼을 확 걷는다.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벽이 드러났다.

'...설계도 상으로는 이 기도실이 가장 수상했는데.'

착각인가.

공작이 설계도를 줬다지만 완전한 것은 아니다. 비밀의 공간 같은 것은 전혀 표기되어 있지 않은 생략된 설계도였다.

공작은 정말 최소한의 정보만 제공했을 뿐, 그 외의 것들은 전혀 지원하지 않았다.

하긴, 그러니 '시험'인 것이겠지만.

어쨌든 이곳이 아니라면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조사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크루엘이 커튼을 놓고 막 몸을 돌렸을 때,

- 드르륵.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기민하게 소리를 잡아낸 그가 커튼 뒤로 숨고, 그와 거의 동시에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

내가 들어선 곳은 꽤나 신성해 보이는 방이었다. 아니, 방이라고 해야 하나?

줄지어 놓인 기다란 나무 의자. 앞에는 단상이 존재하고, 위치가 빈민가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비싸 보이는 대리석 바닥과 깨끗한 흰색의 벽까지.

더해서 보라색 커튼이 이 배경과 어우러져 오묘하게 늘어져 있으니 그에 내가 느낀 것은 같잖게도 신성함과 신비로움이었다.

'보아하니 기도실 같은데....'

생각보다 방이 넓다.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다가 이내 가장 눈에 띄는 단상으로 향했다.

가슴 높이의 단상에 손을 짚고 올라가려다 구석에 있는 계단을 발견하고 얌전히 걸어 올라갔다. 내 몸은 소중하거든.

'생각보다 별거 없네.'

금세 흥미를 잃은 난 이번엔 기묘하게 늘어진 커튼에 집중했다.

창문 주위에 늘어진 것은 이해한다만, 창문도 없을 단상 뒤의 벽에 커튼이 달려 있는 것은 조금 의외다. 물론 아무것도 없이 하얀 벽만 있으면 밋밋하고 지금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낼 수 없었겠지만, 그래도 이곳은 빈민가잖아?

맨 벽에 장식으로 커튼을 붙여놓는다는 귀족스러운 사고방식을 따르기엔 조금 어울리지 않는달까.

'아니면 설마 이 뒤에 창문이라도 있는 건가?'

일단 커튼 사이로 보이는 건 벽뿐인데.

슬쩍 커튼을 움켜쥐었다. 걷어보기 위해서였으나 그런 내 행동은 아쉽게도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문밖에서 여럿의 발소리가 들렸으니까.

아니, 어, 어떡하지?! 어디에 숨지?

빌어먹을 귀소본능은 하필 이럴 때 반응했다. 허둥거리던 나는 바로 옆에 있는 커튼을 두고 굳이 단상 아래로 내려가 들어왔던 창문 옆의 커튼 뒤에 숨었다.

그런 내 멍청한 행동을 자각한 것은 그로부터 대략 3초쯤 뒤였다.

'...나 새끼 뭐한 거냐.'

마음 같아서는 벽에 머리라도 한번 박고 싶다. 그러나 이어서 벌컥 열린 문에 나는 그대로 숨죽이고 멈춰야 했다.

커튼 틈새로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보인다. 그 틈에 섞여 있는 익숙한 얼굴들 역시도.

내게 말을 걸었던 시이아라는 여자아이와 나를 노려보던 폴이라는 남자아이가 분명했다.

그렇다는 건 여기가 바로 그 기도실인 건가?

"자 오늘도 구원을 위해 기도합시다."

사람들이 각자 나무 의자에 앉고, 이들을 데려온 한 사제복을 입은 남자가 단상 위로 올라가 책을 펼친다.

제법 고급스러운 껍데기의 책이었다.

'뭐야, 꼴에 성경도 있는 거야? 아주 가지가지 하네.'

놈이 책을 읽기 시작한다. 무슨 내용일지 기대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내용은 여타 성경이 그러하듯 그럴싸하고 지루했다.

'...게다가 길어.'

그것까지 똑같을 필요는 없잖아. 저기 눈 감고 기도하는 사람들, 사실 기도가 아니라 자는 거 아니야?

...방금 저기 한 놈, 고개 떨군 것 같은데? 설마 진짜였냐.

몇 번이고 소리 죽여 하품하기를 반복했을까, 슬슬 다리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저려와 이러다 정말 위험할 것 같다 싶을 때, 간신히 사제의 말이 끝났다.

녀석이 책을 덮으며 싱긋 웃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독실한 신도가 또 들어왔지요? 이미 알고 계시는 분이 대다수이겠지만, 새로 추가된 신도분을 위해 짧게 설명하겠습니다."

"...?"

"오늘부터는 여기서 이렇게 단순한 기도로 끝을 내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구원'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려드릴 예정입니다."

구원? 구원이면 구원인 거지, 뭘 어떻게 더 자세히 설명한단 말인가.

본능적으로 아주 중요한 내용일 것이라는 걸 직감하고 귀를 쫑긋 세웠다.

분명 짧게 설명한다고 했던 것 같은 녀석의 말은 생각보다 길었다. 심지어 요약도 가능한 내용이었다!

결국 '구원은 실재한다'고 말하고 싶은 거잖아. 레멤베르의 잔소리를 가장한 독설도 이보단 짧겠다!

"여러분은 독실한 신도만 들어갈 수 있는 방에서 따로 설명을 듣게 될 거예요."

아, 방금 말은 사제가 한 것이 아니다.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딱 맞는 타이밍에 문을 열고 들어온 여자가 한 말이었다.

몇 안 되는 아는 얼굴의 등장에 나는 잠시 눈을 크게 떴다.

'...익숙한 얼굴인데. 조금 전 그 여자 맞지?'

내 로브 후드를 벗긴 여자.

이렇게 난입했는데도 아무도, 심지어는 말을 하던 사제조차도 제지하지 않는 걸 보니 생각보다 높은 위치인 모양이다.

그녀가 걸음 속도를 높여 단상에 오르자 사제가 조용히 물러선다. 자연스러운 교체였다.

여자가 단상 뒤 커튼 사이의 벽에 손을 댄다.

의식하지 못할 만큼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으나 그 결과는 절대 자연스럽지 않았다.

'어? 어? 잠깐만, 저거 뭐야?!'

57. 구원교(7)

나는 눈을 의심했다. 상식적으로 저런 게 가능하긴 한 건가?

흐물흐물해진 벽. 잘못 본 것이 아니다. 여자의 손은 마치 물에 담근 듯 유동하는 벽에 반쯤 들어가 있었다.

'드디어 내가 미친 건가?'

그것도 아니다. 새로 추가되었다는 신도들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져 있었다.

나는 눈을 의심하는 것을 그만두고 대신 다른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저런 게 가능하지? 마법…은 아닐 테고, 주술? 주술로 저런 게 가능한가?'

주술에 대해 아는 것이 통 없다 보니 영 답답하다.

그 와중에도 여자는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듯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자, 따라오세요."

여자가 벽 안으로 사라진다. 이미 겪어본 적 있는 듯한 신도들이 망설임 없이 그 뒤를 따르고, 새로 온 듯한 신도들 역시 머뭇거리다 벽에 몸을 밀어 넣었다.

마침내 모두가 들어가자, 벽은 언제 그랬냐는 듯 본래의 딱딱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유일하게 그곳에 들어가지 않고 남아있던 사제마저 다른 할 일이 있는 듯 방을 나가고, 다시 고요함이 찾아오기 무섭게 나는 곧바로 커튼 뒤에서 뛰쳐나가 여자가 손을 대었던 벽 앞에 섰다.

'뭐지? 뭘 어떻게 한 거지?'

분명 손을 댔고, 무언가를 작게 중얼거렸다.

그것만으로는 알 수 없어 벽을 이리저리 더듬었다. 몇 번 더듬자 손 끝에 미묘한 감촉이 전해진다.

육안으로도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잘 다듬어져 손으로 만져야지만 간신히 존재를 알 수 있는─

'보석?'

의아함은 잠시였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이건 주술이다.

귀중한 대가를 지불하고 마법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것이 주술 말고 달리 뭐가 있겠는가.

마족의 마법에 대항하기 위해 인간들이 발견해낸 일종의 방식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도대체 배후가 누구길래 이런 수준의 주술까지....'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이거 점점 불안해지는데, 여기서 그만두면 안 되나? 일반적인 사이비 종교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예상했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주술이라니.

일반인은 일생을 다 살아도 주술사를 만나는 횟수가 10번을 넘기지 못한다. 그만큼 주술사는 고용하는 것도 힘들고 비용도 어마어마하게 드는데, 여기서 주술이 등장한다는 게 말이나 된단 말인가.

당장이라도 황궁으로 달려가 황제를 붙들고 못해 먹겠다고 외치고 싶지만....

'그놈의 크루엘....'

황제가 쉬이 포기하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크루엘이 문제다.

그 녀석에게 소원권이 넘어가는 꼴은 두 눈에 흙이 들어가도 못 본다. 차라리 여기서 깽판을 치고 말지.

'...진짜 해버려? 같이 망해버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배후를 놓친 이상 구원교는 다른 곳에서 또 일어설 테지만, 일단 본거지는 부쉈으니 황제에게 쓴소리들을 일도 없을 테고.

깽판을 친다면 어떻게 깽판을 칠지도 생각하자 너무 몰입했는지 밖이 좀 소란스러운듯한 기분마저 든다.

'진짜 깽판을 치게 된다면... 이것부터 깨부수게 되겠지.'

아무래도 이 주술의 매개체는 눈앞의 보석으로 보인다. 이걸 깨버리면 주술은 파훼될 터.

...부술까?

보석을 노려보며 고민에 잠겨있는데, 갑자기 바로 옆 커튼 뒤에서 손이 불쑥 튀어나와 내 팔을 덥석 잡았다.

그것만으로도 기겁하며 놀랄만한데 그 손은 멈추지 않고 강한 힘으로 나를 휙 끌어당겼다.

모두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필이면 화살에 맞았던 팔이라 고통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흐읍?!'

'쉬이─'

물론 그마저도 내 입을 틀어막는 손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만.

당황해 시선을 위로 올리자 나를 내려다보는 담담한 녹색 눈과 눈이 마주쳤다.

동시에 치밀어오르는 혐오감을 이기지 못하고 거칠게 뿌리치려 했으나,

벌컥!

조금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한 사제복을 입은 남자 탓에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 그 사제는 아니다. 처음 보는 얼굴의 사제는 다급한 표정으로 이쪽을 향해 거의 뛰다시피 오더니, 조금 전까지 내가 노려보고 있던 보석을 꾹 누르고 옆으로 비틀었다.

"빨리빨리…!!"

...왜 저렇게 다급해 보이지? 아니, 근데 밖은 왜 이리 시끄러워?

어렴풋이 '주군을 내놓아라!' 등의 외침이 들리는 것이 어째 좀 불길하다. 그러고 보니 리엔 경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수 초의 시간이 흐르고, 보석에서 약간의 잡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금세 선명해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일이죠?"

"침입자가 들어왔습니다!"

"...그렇군요. 수는 얼마나 되죠?"

"한 명입니다!"

"...한 명이라고요?"

"예, 지금 '주군'이란 사람을 찾으며 건물 내부를 헤집고 있습니다!"

콰아앙!!

타이밍 한 번 끝내주게 굉음이 울렸다.

이미 열려있는 문을 재차 발로 걷어차 이목을 모은 여자가 당황한 채 멍청히 서 있는 한 사제를 발견하고는 애써 침착함을 가장한 목소리로 거칠게 말했다.

그녀의 손에는 이곳 경비에게서 빼앗은듯한 검이 한 자루 들려 있었다.

"주군께선 어디에 계시지?"

"...."

"...."

황당함과 당황스러움에 그 누구도 말을 잇지 못하고 보석 너머의 목소리조차 침묵하는 사이, 나는 골때리는 침입자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슬그머니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위에서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으나 애써 무시했다.

저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난 모르는 일이다. 난 저 사람이 누군지도 모른다. 아무튼 모른다.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야.

'...제기랄.'

댁이 왜 거기서 나오는 건데…?

***

와장창!

"뭐, 뭐야!"

요란스러운 침입이었던 만큼 경비는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몸에 붙은 유리 조각을 털어낼 시간도 없이 리엔은 그들이 아직 얼빠져 있는 틈을 타 재빠르게 근처에 있는 놈의 뒷목을 가격해 쓰러트리곤 검을 빼앗았다.

자신의 검이 아니라 조금 어색하지만 큰 문제는 없다. 그럼 이제 백작님의 행방을 알아야 하는데....

검을 고쳐 쥔 리엔이 주위를 죽 훑었다. 그녀의 실력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시선이 닿은 이들이 저마다 흠칫하며 물러선다.

"...주군께서는 어디에 계시지?"

자신은 고용된 것일 뿐이지 충성맹세를 한 것이 아니니 본래는 주군이 아니라 백작님이라 불러야겠지만.... 이 상황에서 백작님의 존재를 널리 알려서는 안 되니.

'죄송합니다 백작님. 이 책임은 반드시 지겠습니다.'

속으로 짧은 사과를 남기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덩달아 한 걸음 물러서는 꼴들이 제법 볼만했으나 지금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이렇게 시간을 지체하고 있는 사이, 백작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찌한단 말인가!

"아무도 모르는 건가?"

"...."

"그렇군. 그럼...."

"그, 그 주군이라는 사람이 누군데!!"

아무도 모른다면 그냥 보내주고 다른 사람을 찾아보려 했는데, 뜻밖의 다급한 외침이 돌아왔다.

멈칫한 리엔이 그 말을 한 이를 돌아봤다.

...그러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데온 하르트 백작? 영웅? 어느 쪽이든 정체를 밝히는 셈이니 말해서는 안 될 테고.

잠시 깊은 고민에 빠졌던 그녀는 결국,

"...내 주군이시다."

이렇게 얼빠진 대답만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순간 제 귀를 의심하는 듯 멍해진 놈들을 그대로 지나쳐 문으로 향했다.

이놈들은 운이 좋다. 이 소란을 널리 알릴 이들이 필요하지만 않았다면 지금쯤 엉망으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을 테니까.

'나름대로 고민을 해봤지만....'

역시 자신은 계략, 계책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효율적으로 백작님을 찾아 구출하는 방법 따위, 모른다.

그러니 자신은 오늘 이곳에서 소위 말하는 '깽판'을 친다. 웬 기사가 '주군'이란 사람을 찾으며 날뛴다면 분명 찔리는 이가 한둘 정도는 나오겠지. 놈들은 분명 누군가에 보고를 하든 자신이 해결을 하든 무언가 움직임을 보이려 할 테고, 자신은 그런 놈들을 쫓으면 되는거다.

"주군을 내놓아라!"

"아, 그러니까 그 주군이 누구냐고!!"

"네놈은 모르는 모양이군."

"에이씨 진짜!!"

리엔은 검을 휘두르며 구원교 내부를 거침없이 헤집기 시작했다.

죽이진 않았다. 백작님의 명령이 떨어진 것도 아닌데 굳이 살인을 해 일을 키울 필요는 없으니까.

무슨 이유에서인지 마침 일반인들도 보이지 않아 한 층 더 거리낌 없이 난리를 치기를 한참, 드디어 그녀의 눈에 한 수상한 사제가 들어왔다.

이 난장판을 보더니 기겁을 하며 어디론가 달려가는 모습.

'저놈이다!'

저놈을 쫓아가면 백작님의 행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한 척, 계속해서 종횡무진 건물 내부를 활보하며 자연스럽게 그 뒤를 쫓았다.

그 과정에서 그녀가 가는 길에 수많은 이들이 흔적처럼 늘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바삐 뛰던 녀석이 어느 복도 끝의 문을 열고 쏙 들어간다.

놈의 뒤를 따라 들어가기 전에, 그녀는 문득 한 가지 가정을 떠올렸다.

'어쩌면 이건 함정일지도 몰라. 만약 그렇다면....'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더 강하게 들어간다.

어쩐지 살인귀 기사단원들에게 물들어버린 듯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어차피 안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저 안에 몇이나 있을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지.

제 휘하의 기사단원들을 떠올린 리엔이 피식 웃었다.

'어차피 난 미친개들의 통솔자이니.'

제대로 미친개가 되어 날뛰어주마.

콰아앙!!

이미 열린 문을 걷어차 빛나는 인성을 선보이며 그녀가 안으로 난입한다.

자신이 쫓았던 사제로 보이는 이를 발견해 검을 겨누는 것이 첫째였고, 주위에 몇이나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둘째였다.

눈앞의 사제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에 당황한 것도 잠시, 리엔은 애써 침착한 척 제 감정을 숨기고 낮게 물었다.

"주군께선 어디에 계시지?"

***

- 주군께선 어디에 계시지?

"...."

사에린은 보석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기껏 경비를 강화하라는 말도 해놓았건만, 이렇게까지 무능할 줄이야. 크루엘 하르트가 들어온 것도 눈치채지 못했을 때부터 알아봤다.

같은 주인을 모시는 사이라 망정이지, 건물 내부에서 딱 마주쳤을 때는 얼마나 놀랐던가.

간신히 놀란 마음을 다스리기 무섭게 떠올린 것은 데온 하르트도 같은 임무를 받았다는 소식이었다.

크루엘의 침입을 눈치채지도 못했다면 데온 하르트의 침입은 더욱 쉽게 허용할 것이라는 생각 역시도.

거기까지 생각하자 문득 붉은 눈의 빈민이 떠올랐으나 다시 나와 그를 찾았을 땐 이미 사라진 뒤였기에 더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랬더니만 '주군'을 찾으며 쳐들어온 기사라니.

'확실해.'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문 앞에서 쫓아냈던 그 수상한 기사다.

'주군'을 찾으며 쳐들어온 '기사'. 그리고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각에 방문했던 붉은 눈의 빈민.

사에린은 평민 출신이지만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편이다. 이렇게나 딱딱 맞는 단서가 나온 이상 상황 파악은 순식간이었다.

'데온 하르트구나. 분명 보초들이 나가는 걸 봤다고 했는데, 둘이 엇갈렸나? 아니, 어쩌면 아직 이 안에 있을지도.'

물론 상황을 파악했다 하여 무언가 조치를 취할 생각은 없다.

조치할 수도 없거니와, '구원교'의 소기의 목적은 이미 달성한 지 오래고, 남은 것은 정리뿐이니까. 그저 이곳을 정리하는 이가 데온 하르트가 아닌 크루엘 하르트이기를 바랄 뿐이다.

이대로 지켜보다가 데온 하르트가 먼저 핵심에 도달하려는 낌새가 보일 때, 그때만 내가 직접 나서 정리하면 되겠지.

그전까지 나설 필요는 없다. 공작님께서도 그리 말하셨기에 사에린은 평소와 같이 행동하는 것 외에 무언가를 굳이 나서 할 생각이 없었다.

'난 할 만큼 했어.'

경비도 강화하라 경고했고, 중요한 서류는 가장 깊숙한 곳에 꽁꽁 숨겨놓았다.

지금 상황에서 최우선으로 생각할 것은 저 기사에게 벽에 박힌 보석의 존재를 들키지 않는 것.

분명 알아차리기 무섭게 깨버리리라.

주술이 깨져서가 아니다. 절대 들켜서는 안 되는 것이 들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공작님의 모든 것을, 심지어는 그분의 목숨조차 위협할 수도 있을 정도의 비밀이....

'그러니 절대 들켜서는 안 돼.'

혹여나 숨소리마저 저쪽으로 넘어갈까 조심하며, 사에린은 가차 없이 바깥과의 연결을 끊고 돌아섰다.

방의 문을 열고 나간 그녀는 주르륵 앉아 이쪽을 바라보는 이들을 향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잠시 실례했네요. 그럼 계속할까요?"

58. 구원교(8)

리엔 경이 쫓아왔다는 것에 경악한 사제가 뭐라 말도 못 하고 입만 뻐끔거린다.

이제 보아하니 어지간히도 쫓긴 듯 녀석의 몰골이 엉망이다.

단정해야 할 옷차림새는 엉망으로 흐트러졌고, 얼마 없는 머리숱은 민들레 홀씨처럼 흩어져 그의 두피에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었다.

더해서 벽에 입이라도 맞출 기세로 찰싹 달라붙어 있는 모습까지.

물론 그건 다급한 소식을 전하느라 그런 것이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보면 미친놈으로 보일법한 모양새였다.

역시나 그렇게 생각한 것이 나만이 아닌 듯, 그를 위아래로 훑어본 리엔 경이 김샜다는 듯 한숨을 폭 내쉬며 겨눴던 검을 거뒀다.

"잘못 쫓았군. 어디가 모자란, 아니 불편한 사람이었을 줄이야."

'흐읍-!'

웃을뻔했다. 크루엘이 입을 막고 있지 않았다면 진짜 웃을뻔했어.

소리내어 웃진 못하고, 여전히 놈의 손에 입이 틀어막힌 채 어깨만 부들부들 떨고 있자니, 내 입을 막고 있던 손이 살짝 느슨해진다.

이 틈을 타 뿌리칠까 잠시 고민하는 사이, 조금은 누그러진 리엔 경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실례했군. 해칠 생각은 없으니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

"...."

"그대도 잘못 홀려서 이곳에 얽히게 된 것 같은데, 이곳은 좋지 않은 곳이다. 그러니까… 지지? 지지다. 오면 안 돼. 그 옷도 지지이니 어서 갈아입고."

'프흐흡-!!'

살려줘. 웃겨서 죽을 것 같아.

사정없이 일그러진 사제의 얼굴도 웃기고, 진지한 얼굴로 '지지' 타령을 하는 리엔 경도 웃기다.

그냥 이대로 웃음을 터트리며 커튼 뒤에서 나가도 별 상관은 없겠지만 저 보석 너머에서 누군가 여전히 엿듣고 있을 가능성과, 리엔 경이 나를 큰 목소리로 부를 가능성을 생각해 최대한 숨을 죽이자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런 옷까지 입을 정도면 이곳에 꽤 오래 있었을 테니 길 정도는 알고 있겠지. 이대로 저 문을 나가서 왔던 곳으로 돌아가라. 다시는 이런 곳에 오지 말고."

"...."

"알겠나?"

그래도 바깥까지 데려다주겠다는 소리는 안 하네. 현 상황의 우선순위를 확고히 해둔 것이 눈에 보인다.

흐뭇한 리엔 경의 대처와 달리 그녀의 말을 듣는 남자의 두 눈은 지진이라도 난 듯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야 그렇겠지. 멀쩡하다는 것을 증면하면 목숨이 위험하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기엔 너무 수치스럽고 자존심이 상할 테니까.

목숨과 자존심. 두 선택지를 잠시 갈등하는 듯하던 놈은,

"아, 알았어."

어찌보면 당연하게도, 목숨을 택했다.

조금 전까지 또렷하게 보고할 땐 언제고 저 어눌한 대답이라니. 또다시 웃음이 터질 것 같아 턱에 잔뜩 힘을 줬다.

어마어마한 수치심에 몸을 부들부들 떨던 녀석이 눈가에 눈물을 매달고 시뻘개진 얼굴로 문밖을 뛰쳐나간다.

그 뒷모습에 '어지간히도 무서웠던 모양이군.'하고 중얼거린 리엔 경이 또 다른 문은 없는지 방안을 쭉 둘러보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제야 나는 입을 막고 있던 손을 풀어내고 비척비척 커튼 밖으로 나와 무릎을 꺾었다.

그런 나를 급히 부축하려는 손이 있었으나 그 손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나는 탁 소리 나게 뿌리치고는 기어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

"...크흡, 흑...."

아이씨, 웃겨서 미치겠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란 걸 알고 있기는 한데, 웃긴 걸 어떡하라고.

시간이 없다는 것을 몇 번이고 되새기며 간신히 진정하고 일어섰다. 생각지도 못한 기능을 갖고 있던 보석도 다시 확인해봐야 하고 점점 멀어지고 있을 리엔 경도 붙잡아야 한다.

보석을 살피기에 앞서 힐긋 열린 문밖부터 확인했다.

저 멀리, 먹이를 찾는 맹수처럼 번뜩이는 눈으로 고개를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거침없이 직진하는 리엔 경이 보인다.

'...쟤는 여기 길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저렇게 당당하게 걷냐.'

누가 보면 이곳에 10년은 산 줄 알겠네.

그나마 정상이라고 생각했던 그녀마저 저 모양이라니. 정녕 내 주변엔 정상적인 존재가 없단 말인가.

어쨌거나 저리 내버려 두었다간 또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른다. 그녀가 이곳에 난입했을 때의 충격과 공포를 다시 떠올린 나는 서둘러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곧장 기도실 밖으로 한 걸음 나와 멀어지는 그녀를 불렀다.

"리엔 경."

"...."

"리엔 경!"

"아…?! 백, 주군! 무사하셨군요!"

백주군은 또 누구냐.

그나저나 리엔 경이 날 주군이라 부르다니 의외다. 아무리 날 지칭할 말이 없다고 해도 그렇지, 설마 주군이라 부를 줄이야.

대부분의 기사는 평생동안 단 한 명의 주군만을 모신다.

리엔 경과 나의 관계는 단순한 계약 관계. 내가 살인귀 기사단을 통솔할만한 존재를 위에 요청했고, 황제가 친히 리엔 경을 알선해주었다.

황제가 소개한 이상 고용은 당연한 것이지만… 어쨌든 결국 그녀와 나는 단순한 돈으로 묶인 사이일 뿐 주종관계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나 역시 그녀에게 존대를 사용한 건데....

그런 내 반응을 눈치챈 건지 리엔 경이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변명하듯 설명을 덧붙였다.

"지칭할 말이 없어 부득이하게 주군이라 칭하게 되었습니다. 기분이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좀 놀랐을 뿐이지.

"부득이하게 부르게 되었다지만 책임은 질 생각입니다."

"...예?"

"무, 물론 억지로는 아닙니다. 이전부터 백작님을 존경해오기도 했고… 그러니 저 리엔 라이너, 이 자리에서 맹세하겠습니다."

얘가 왜 이래? 심지어 말까지 더듬었다. 이러니 더 불길하네. 뭔진 모르겠지만 그냥 하지 마. 아니, 하지 말아주면 안 될까?

불편한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리엔 경이 검을 거꾸로 세우더니 한쪽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는 진지한 어조로 - 평소에도 진지했지만 지금은 더 진지한 어조로 - 비장하게 말했다.

"저 리엔 라이너는 데온 하르트를 주군으로 인정하고 모실 것이며, 그와 그의 명령이 황제 폐하의 뜻에 반하지 않는 한, 평생을 목숨 걸고 따를 것을 맹세합니다."

'그와 그의 명령이 황제 폐하의 뜻에 반하지 않는 한'.

주군을 정하지 않은 제국의 기사들은 기본적으로 제국과 황제를 따른다. 후에 주군이 정해지면 주군과 황제 둘 중 누구를 우선시할지 정하는데, 리엔 경은 황제를 우선시하기로 한 모양이다.

그나저나 얘도 참 특이하지. 좀 미뤄뒀다 돌아가서 해도 될 것을 굳이 이 난장판 속에서 하고 싶을까.

물론 이건 내게 이득이 되는 것이기에 나 역시 그에 맞춰 엄숙하게 답했다.

"그대의 충성이 헛되이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맹세합니다."

좋아, 좀 뜬금없긴 했지만 이로써 평생 미친개들을 책임져줄 사육사가 생겼다. 항상 불안했는데 이제 좀 마음이 놓이네.

그럼 이제 잠시 미뤄뒀던 일을 할 시간이다. 나는 돌아서서 다시 기도실 안으로 들어가 단상 뒤, 벽의 보석을 손끝으로 쓸었다.

살짝, 아주 살짝 들어가 손끝으로 만져야지만 느껴지는 존재감. 손을 얹고 무언가를 중얼거리자 문이 열렸고, 누르고 옆으로 비틀자 연락이 됐었다.

그렇다면 다른 기능도 있지 않을까?

"유능한 주술사가 필요하겠군."

"...저도 압니다. 아직도 안 가셨습니까?"

"...."

짜증스러운 내 말에 크루엘이 순순히 사라진다.

아니, 순순히가 아니라 나보다 먼저 주술사를 찾으러 간 거겠지. 나도 질 수 없다.

"리엔 경. 돌아가죠."

"예."

저 멀리서 수많은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들으며 나와 리엔 경은 다시 창문을 넘었다.

***

데온 하르트가 구원교에서 아등바등 움직이고 있는 한편, 그에게 명령을 내린 황제 에도아르도 데세르트는 늦은 낮잠을 자고 있었다.

본래 정해진 시간이 아니면 잠을 자지 않지만, 최근 들어 수면 부족이 극심해졌기에 이렇게 쪽잠이라도 자지 않으면 버티기 힘들었다.

수면 부족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에도아르도는 군주의 자리에 오른 이후 단 한 순간도 제대로 된 잠을 자지 못했다.

자신이 죽인 사람들이 밤마다 찾아와 괴롭히는데 어찌 편히 잠을 잘 수 있을까.

왕의 자리에 오를 때, 그리고 '황제'의 칭호를 갖기 위해 치른 8년 전쟁 때, 그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아마 그 시체들을 한곳에 모아둔다면 산 하나는 충분히 이루고도 남으리라.

그 정도로 많은 이들이 악몽으로 찾아오는 것이다. 어지간한 이들이라면 불면증을 넘어 진즉에 미쳐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는 버텼고, 망자들은 그런 그가 괘씸했던 모양이다.

"!"

황제가 튕기듯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던 그가 잠시 뒤, 조금은 진정한 듯 깊은 한숨과 함께 축축히 젖은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묻어난다.

그리고.

손바닥이 삽시간에 시커멓게 물들더니─

──손 전체가 일그러지며 기괴한 사람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피눈물을 흘리는 분노한 얼굴. 너를 증오하고 저주한다며 외쳐대는 악의 가득한 목소리.

[황제여, 너를 증오한다.]

[죽어, 죽어, 어째서 너만이 살아있는 거지? 나는 이렇게 죽었는데, 너는 왜!!]

지금 이건 꿈이 아니라 현실일진대.

얼마나 분노했으면 이리 현실에도 나와 괴롭히려 들까.

황제가 말없이 이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 막 잠에서 깬 그를 배려한 듯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저녁 식사까지 시간이 남았습니다."

황제가 눈동자만 돌려 한 곳을 바라봤다.

그의 시선이 닿자 방문 근처 벽에 기대 서 있던 황태자 엘피디우스가 천천히 몸을 세워 다가왔다.

"최근 식사량이 많이 줄었다 들었습니다. 해서 어디 편찮으신가 걱정했는데...."

"...."

"또, 악몽을 꾸신 모양이군요."

황제의 앞에 선 엘피디우스가 제 숙부의 상태를 확인했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가운 자락 사이로 식은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근육이 보인다. 마찬가지로 식은땀에 젖은 황금색 머리칼은 평소보다 짙은 채도를 띠고 있었고, 눈 밑의 미세한 그늘은 숨길 수 없는 피로를 담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초췌한 모양새였다.

이대로면 위험하다.

적이 얼마나 많은 사람인데, 여기서 몸 상태까지 나빠지면 어떡하나.

"역시 의원을 부르는 것이...."

"됐다."

"숙부님."

황제를 설득하기 위해 그를 부른 엘피디우스가 순간 멈칫했다.

황제의 눈의 초점이, 어딘가 이상하다.

그의 시선은 자신을 비껴가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었다.

뒤를 돌아보지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평범한 방안 풍경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돌리자 피곤한 듯 제 두 눈을 한 손으로 꾹 누르는 황제가 보였다.

"숙부님…?"

"...귀찮게 구는군."

...설마.

얼마 전부터 느껴지던 위화감을 떠올린 엘피디우스의 표정이 한층 더 심각해졌다.

"설마… 이젠 환각도 보시는 겁니까?"

"일상생활에 문제는 없다."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당장 태의를…!"

"엘피디우스."

"...숙부님...."

그 새 정신을 다잡은 듯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 된 에도아르도가 조카의 걱정 가득한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엘피디우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는 이 악몽과 환각을 쫓을 생각이 없다.

오히려 기껍다 하면 과연 믿을까.

"최근 전쟁과 관련한 서류를 처리하다 보니 피곤함에 잠시 헛것이 보인 것이다. 별일 아니니 신경 쓰지 말거라."

"도대체…!"

제 죄를 잊고 편히 살아갈까 걱정이었는데 이렇게 찾아와준다면 절대 잊을 일은 없을 테니까.

애써 침착하려는 듯 엘피디우스가 몇 번이고 마른세수를 한다. 그러고도 감정이 제어되지 않는지 그의 목소리는 그로부터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나서야 힘겹게 나왔다.

"...이 상태에서도 전쟁을… 굳이 하셔야겠습니까."

"짐은…."

"저는 '폐하'께 여쭙는 것이 아니라 '숙부님'께 여쭙는 겁니다."

"...무슨 대답을 할 것 같으냐."

엘피디우스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그럼 또 명단을 외우실 거잖습니까!"

59. Fate or Destiny(1)

8년 전쟁 당시 황제는 바쁜 와중에도 전사자들의 명단을 꼭 외웠다. 그저 유족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내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거늘, 그는 없는 시간을 쪼개 굳이 아군 전사자들의 명단과 제가 죽인 이들의 얼굴을 곱씹었다.

"그야, 짐이 아니었으면 죽지 않았을 이들이니까."

피할 수 있었다. 8년 전쟁은 오롯이 그의 선택에 따라 벌어진 전쟁이었으니.

군주의 자리란 선택 한 번에 수많은 이들의 목숨이 오가는 자리다.

에도아르도는 제 이기적인 선택의 희생양이 되어버린 이들을 죽었다 하여 쉬이 잊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한 나라의 우두머리가 제 선택에 따라 벌어진 일의 책임을 지지 않으면 도대체 누가 책임을 지겠는가.

제 선택에 따른 결과에 대한 책임.

이것은 군주이기 이전에 사람이라면 응당 짊어져야 하는 것이었다.

"적이든 아군이든, 어쨌건 짐이 한 선택의 희생양 아닌가."

그랬더니 이렇게 꿈과 환각으로 찾아왔다. 그로서는 기쁜 일이었다.

엘피디우스는 쉽게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결국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간신히 튀어나온 말은 단 한 마디였다.

"...미련하십니다."

감히 황제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이었으나, 에도아르도는 그저 웃었다.

평소와 달리 힘없는 웃음이 넓은 방 안에 허무히 퍼져나갔다.

"안다. 이것도 병이지."

방 한구석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이들을 마주 보며 황제가 중얼거렸다.

"입맛이 없으니 오늘 저녁은 건너뛰지. 알레테아와 둘이 먹거라."

나는 저들과 놀아주어야 하니.

망설이던 엘피디우스가 나가고, 혼자 남은 황제는 제게 다가오는 이들의 익숙한 면면을 머릿속에 새겨두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환각이 맞긴 한 모양인지 눈을 감았음에도 저들이 다가오는 것이 훤히 보인다.

걱정은 없다. 어차피 저들은 자신을 직접적으로 해치진 못하니까. 그거면 된 거다.

목을 졸라오는 환각들을 생생히 느끼면서도 그는 그저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

고작 이런 것들에 무너지기엔, 그가 짊어진 것들이 너무 많았다.

***

그 후로 빌어먹게도 3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3일이면 마냥 짧다고만 볼 수 없다. 그 사이에 크루엘이 유능한 주술사를 찾았을지 누가 알겠나.

사실 주술사를 찾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주술사들은 백에 아흔아홉이 남부 출신인데 제국 땅은 거의 대부분 북부에 있으니까.

아흔아홉을 제외하고 남은 한 명마저 스승이 남부 출신이었으니 결국 주술사를 찾기 위해서는 남부로 가야 한다는 것인데, 유능한 집사 레멤베르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주술사를 찾아달라는 내 무리한 요청에도 아무런 불평불만 없이 용케 주술사가 있다는 가장 가까운 마을을 찾아내 보고했다.

이를 생각하면 3일은 말도 안 되게 짧은 시간이었다만, 크루엘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으니 영....

"...그런데 리엔 경."

"예, 주군."

"뒤통수가 따끔거립니다만...."

"기분 탓입니다."

산 중턱에 있다는 마을을 찾기 위해 팔자에도 없는 등산을 하는 것은 괜찮다. 힘들지만 참을 만하니까.

하지만 뒤통수에 콕콕 박히는 이 시선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전 괜찮다니까요."

"제가 안 괜찮습니다. 감히 주군의 뒤통…뒷모습 하나 제대로 기억하지 못해 사태를 일으키다니.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이번에 머릿속에 새겨놓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방금 뒤통수라고...."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백작님께선 제 주군이십니다."

지금 말 돌린 거 맞지? 나는 뚱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말을 편하게 하라니.'

그녀는 귀족이다. 명예직에 불과한 나와 달리 세습이 가능한 높은 가문의 귀족. 가주가 아니라지만 그렇다고 집안의 권력이 어디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기에 주종관계에도 불구하고 내겐 그냥 상호존대를 하는 쪽이 더 편했다.

그러니 반말은 속으로 하는 것으로 적당히 타협하자.

"전 이게 편합니다... 아, 저기!"

"마을이군요. 작다고 듣긴 했습니다만 이렇게 작을 줄이야."

한눈에 들어오는 마을 규모에 나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 정도는 되어야 주술사가 살 법하지. 주술사는 보통 은거하는 존재다. 그런 의미에서 저 작은 마을은 그런 주술사가 살기에 아주 적합해 보였다.

레멤베르가 정말 주술사가 있을지 장담은 못한다고 했지만....

"빨리 가죠."

"예."

역시 기대감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 리엔과 나는 서둘러 마을 입구로 향했다.

그리고.

"어 씨발?"

"...."

"아, 제가 입으로 말했나요? 죄송합니다 형님. 너무 놀란 나머지 그만."

공교롭게도 크루엘과 마주치고 말았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나. 이쯤 되면 날 스토킹하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다.

하지만 그런 비합리적인 의심을 하기 이전에 이 마주침을 설명할 수 있는 확실한 이유가 존재했기에 나는 입을 다물고 미간을 좁혔다.

'주술사를 찾으러 왔구나.'

레멤베르의 말대로라면 이곳을 제외한 주술사는 가장 가까운 이조차 전부 훨씬 아래쪽에 산댔으니, 그도 정보력이 있다면 이곳으로 올 수밖에 없었겠지.

하지만 기분이 나쁜 것은 어쩔 수 없다.

때문에 인상을 쓴 채 입을 꾹 다물고 그를 노려보는데, 어째서인지 놈의 눈이 점점 커진다. 어디선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 잠시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데?

──퍼억!

시야가 흔들렸다. 잠시지만 내 정신도 날아갔다.

***

"이 마을에서 썩 꺼지거라!!"

"아이고 할머니, 진정하세요! 저분들 옷차림 좀 보시라고요! 높으신 분들이에요! 이봐, 누가 할머니 좀 말려!!"

"재앙이, 재앙이 찾아왔다! 쫓아내야 해! 아니 죽여야 해!!"

"주군! 괜찮으십니… 아, 피가...."

"...하."

고개를 숙인 채 미동도 없던 데온이 짧은 실소와 함께 고개를 들었다.

웃었다.

황당함과 어이없음을 담고 올라간 입꼬리를 멍하니 보던 리엔이 그의 눈을 확인하고는 흠칫 물러섰다.

그때의 그 눈이다. 습격이 있었을 때, 광기를 담고 번들거리던 그 눈.

"주, 주군...."

"...."

머리카락과 함께 맞은 부위를 쓸어올린 데온이 제 손바닥을 내려다 봤다.

흥건한 피. 지금도 뜨뜻한 액체가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리는 게 느껴지고 있으니 상처가 꽤 큰 것이리라.

피를 흘린 탓인지 더욱 소름 끼치게 빛나는 새빨간 눈동자가 스르륵 굴러가 난리를 피우고 있는 노인을 향한다. 늙은 사람이 힘은 어찌나 센지, 장정들이 매달려 있음에도 노인은 기어코 손에 쥔 돌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온이 손에 묻은 피를 대충 털어내고 걸음을 옮겼다.

핏방울이 후두둑 흙바닥 위로 흩뿌려짐에 무심코 그를 향한 시선들이 불안함과 두려움에 휩싸여 얼어붙었다. 차마 함부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피로 엉망이 되어버린 머리. 미미한 광기를 담고 번들거리는 눈.

그렇지 않아도 그에게서 느껴지는 이질감과 진득하고 음습한 분위기에 짓눌려있던 이들의 안색이 그의 걸음이 향하는 곳을 확인하고는 급격히 질려가기 시작했다.

그건 리엔도 마찬가지였다.

"주군…!"

"안 죽인다."

누가 봐도 노인을 죽이려는 모양새이지만 주군의 말을 의심할 수는 없는 법. 단호히 쳐내는 말에 리엔은 그 자리에 멈췄다.

어떻게 좀 해보라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애써 외면했다.

주군이 확언한 이상 더 막아서는 것은 그를 의심한다는 뜻이고, 기사가 주군을 의심한다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니까.

게다가 그녀는 이미 두 가지 잘못을 했다.

하나는 주군을 지키지 못한 것. 다른 하나는 그가 돌에 맞았을 때 곧장 검을 빼 들고 대응하지 못한 것.

그런 그녀가 무슨 자격으로 그를 막아서겠는가.

'주군과 주군의 형님의 대치 상황에 너무 집중했어.'

모시는 상관과 그의 가족의 불화는 다른 의미로 신경을 낭비하게 만든다.

그런 나머지 외부의 위협 요소를 간과해버렸다.

설마 이 산골짜기 시골 마을에서 주군에게 위협을 가할 사람이 있을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아니, 이건 변명이지.'

주군이 돌에 맞은 순간 검을 들지 못했다는 점에서 앞의 변명은 무용지물이 된다.

'상대가 노인이라 해도 망설여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데....'

리엔이 주먹을 꾹 쥔 채 식은땀을 흘리는 사이, 느릿하게 걸어 기어이 노인의 앞에 선 데온이 살짝 허리를 굽혀 노인과 눈을 마주했다.

허리를 굽혀 시선을 마주한 행동은 배려로 보이기에 충분할 터이건만 어째서인지 조롱으로만 보여 고개를 갸웃한 것도 잠시, 리엔은 이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억지로 홉뜬 눈과 소름 끼치는 붉은 눈이 미동도 없이 서로를 응시한 끝에 불안불안하게 시작된 대화. 그 대화에서─

"이봐, 노인네."

"재, 재앙이!!"

"그래, 나보고 재앙이라고?"

저를 노려보는 노인을 똑바로 마주하며 데온이 씩 웃는다.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웃는 모습이 가히 기괴해 모두가 숨을 멈추고.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이윽고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니지. 난 '재앙'이라기보다는 '죄악'에 가깝지. 안 그래?"

"이, 이…!!"

***

난 무언가 바락바락 외치며 난리를 치는 할머니를 멍하니 바라봤다.

나이답지 않게 기운이 넘치시네. 이건 단순히 난리를 치는 게 아니라 거의 악을 쓰는 수준인 것 같은데.

그 와중에 머리는 또 깨질 것처럼 아프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그러고 보니 웬 돌에 맞았었지. 그리고 이 할머니가 외쳤었다. 난 재앙이니 죽여야 한다고.

재앙. 재앙이라....

'글쎄.'

굳이 따지자면 재앙보다는 죄악에 가깝지 않을까.

고개를 틀어 크루엘을 찾았다. 놈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도통 알 수 없는 복잡한 눈으로 날 지켜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자연스럽게 내 너머로 시선을 옮기고 이쪽으로 다가온다. 아니, 정확하게는 난리를 치고 있는 할머니와 장정들에게.

"주술사를 찾으러 왔다만."

지독하게 냉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친 날 걱정하는 모습은 애초에 기대도 안 했다. 나는 리엔이 내민 손수건을 받아 다친 머리에 대고 상황을 지켜봤다.

"사, 사실은 이 할머니가 주술사입니다만… 얼마 전에 노망이 나서...."

"이거 놓아라 이것들아! 난 저놈을 죽여야 한다!!"

"...그럼 이 마을에 더는 주술사가 존재하지 않는 건가?"

"아, 그게...."

장정의 눈이 도르륵 굴러간다. 그의 눈은 어느새 다가와 할머니를 붙잡고 조곤조곤 설득하고 있는 여자를 담고 있었다.

"할머니, 진정하세요."

"란아, 저 놈을 죽이거라. 너도 보았잖니. 응?"

"물론 보았죠. 하지만 안돼요. 할머니께서 늘 말씀하셨잖아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로 사람을 대해서는 안 된다고."

우뚝. 노인의 몸부림이 멈췄다.

머리라도 한 대 얻어맞은 듯 어쩐지 멍한 눈으로 있던 노인이 이내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멍하니 중얼거린다.

"...그래, 그랬지."

노인이 고개를 홱 돌려 나를 쳐다본다.

그 기세에 짓눌려 찔끔 물러서려 했으나, 그런 내 미약한 반응은 어깨를 단단히 틀어쥔 노인에 의해 무산되고 말았다.

아파! 장정들이 쩔쩔맬 때부터 알아봤더라니, 역시 어지간히 힘이 센 노인이다.

"아이야."

"네, 네?"

"절대 아무것도 증오해서는 안 된다."

"...예?"

"절대로. 알겠니?"

아까는 돌을 던지고 죽여야 한다고 난리를 치더니 이제는 어깨를 붙잡고 부드럽게 어르고 충고한다.

이런 걸 노망이라고 하는 건가? 노망난 사람을 봤어야 알지.

...아무리 노망이라 해도 그렇지, 억울한 건 억울한 거다. 여기 크루엘도 있고 리엔도 있는데 왜 나한테만…!

'아아아! 이 할머니가 진짜!'

거기 화살에 맞았던 곳이라고!!

대답이 없자 어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무시할 수 없는 악력에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만족한 듯 노인의 손이 떨어지고.

나는 욱신거리는 어깨를 매만지며 불퉁하게 말했다.

"주술사가 필요해서 왔습니다만, 이 할머니가 주술사라고요?"

날 죽이려 든 것도 모자라 어깨마저 부술뻔한 이 할머니만큼은 절대 안 된다.

아무것도 증오하지 말라 했지? 솔직히 인간이라면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당장 지금의 나부터가....

"...."

크루엘을 한 번 본 뒤 고개를 홱 돌렸다.

...아무튼, 다른 주술사가 필요하다. 어쩔 수 없이 남부까지 내려가야 하나? 그럼 얼마나 걸리지?

"제가 따라가도록 하지요."

60. Fate or Destiny(2)

"...음?"

젊은 여자의 목소리. 무심코 상대를 확인한 나는 내심 놀랐다.

주술사는 늙은 사람들이 많지 않았나? 저 여자는 이제 막 20살이 된 것 같은데.

하긴, 뭔가 범상치 않은 분위기이긴 했다. 당장 난리 치던 할머니를 진정시킨 것부터가 평범한 건 아니었으니....

"먼저 사과부터 드리겠습니다.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 네."

"저는 란이라 합니다. 저기 계시는 할머니의 손녀 되는 사람이지요. 저 역시 할머니의 피를 이은 터라 주술에 능합니다. 무엇을 목적으로 주술사가 필요하신지 모르겠으나, 저를 데려가시면 목적하신 바를 충분히 달성하실 수 있을 겁니다."

"어려서 못 미더울 수도 있겠지만, 이 마을에서 란은 할머니보다도 뛰어난 재능을 가진 것으로 자자합니다."

어차피 다른 선택지랄 것도 없어 조금 부족하더라도 데려갈 생각이었다만, 마을 사람의 추가 설명을 들으니 귀가 솔깃하다.

나는 냉큼 고개를 끄덕이다 한쪽에 서 있는 크루엘을 발견하고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참고로 저기 서 있는 남자는 일행이 아닙니다. 저 남자와 일행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면…."

"전 귀인을 따라가겠습니다."

확신을 주겠다는 듯 여자의 두 눈이 또렷이 나를 담는다.

별다른 반박 없이 이쪽의 상황을 지켜보는 크루엘을 힐긋 본 나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며 손을 내밀었다.

"그럼 잘 부탁합니다."

***

주술사를 놓치는 것은 상관없다. 쓸모를 증명하는 것과 별개로 공작은 자신의 승리를 바라고,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새 주술사를 구해주든 다른 방법을 알려주든 할 테니까.

마침 이곳에 남아 하고 싶은 일도 생겼겠다, 크루엘은 굳이 딴지를 걸지 않고 순순히 하나뿐인 주술사가 데온 일행에 속하는 것을 지켜봤다.

그럼, 이제 바로 가지 않고 굳이 이곳에 남아 있던 목적을 달성해야 할 차례다.

멀어지는 데온 일행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크루엘이 시선을 돌렸다. 투박한 녹색 돌을 깎아놓은 듯한 눈동자가 주술사였다던 노인을 담았다.

그녀와는 나누고 싶은 대화가 많다.

날아온 돌, 죽여야 한다는 외침, 그리고 재앙. 하나같이 날이 바짝 서 있었다는 것을 생각한 크루엘이 입을 꾹 다물고 노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지친 숨을 몰아쉬던 그녀에게 거친 기세를 은연중에 드러내며 말을 거는 순간, 노인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고, 노인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아가도 왔구나. 바쁠 텐데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되겠누?"

"...!"

금방이라도 휘몰아칠 듯한 기세가 순간 주춤했다.

조금 전 데온을 대하던 모습이 마치 거짓말인 것처럼, 맑고 투명한 눈을 한 노인이 이쪽을 올려다본다.

뛰어난 주술사였다면서 그가 데온의 형이라는 것을 모르는지, 노인은 현숙한 태도로 부드러이 양팔을 벌려 보였다. 경계라고는 조금도 없는 모습.

"이리 오렴. 한 번 안아보자꾸나."

"...."

"어서."

노망이 났다더니, 지금 이 모습도 노망의 일부인 것일까.

손해 보는 것도 아닌 일로 굳이 노인의 증세를 악화시킬 생각은 없기에 크루엘은 어색하게 그녀에게 걸어갔다.

노인은 그런 아주 천천히 다가오는 그의 팔을 살짝 당겨 품에 끌어안으며 제 손주를 대하듯 다정히 속삭였다.

"네가 고생이 많구나."

"...."

"정말 고생이 많아."

크루엘은 안타까움이 절절히 묻어나는 노인의 얼굴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숫제 울 듯한 표정이었음에도 그의 두 눈은 미동도 없이 고요했다.

"아가야."

"...."

"너는 멸망의 시작이 될 아이란다."

"...!"

"걱정 마려무나."

혹여나 그녀가 제게도 해를 끼치려 들까 황급히 물러서려는 그를 꽉 잡아 끌어안으며 노인이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너를 미워하는 일은 없을 테니. 나마저 너를 싫어하면 이 세상에 너를 사랑하는 이가 한 명도 없게 되잖니."

이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이러려고 데온을 먼저 보낸 것이 아닌데.

머릿속이 빙빙 도는 기분이다. 온갖 의심과 계산이 머릿속에 섰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왜 내게는 다정히 대하는 거지? 조금 전과는 태도가 다른 이유는 뭐지? 같은 사람이 맞긴 한 건가? 이런 식의 노망도 있던가?

모든 것이 연기일 가능성은? 그렇다면 무엇을 바라는 거지? 이 노인은, 전직 주술사는 도대체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혼잡해진 머리를 차마 부여잡지도 못하고 크루엘은 그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조금 전보다 더 단단해진 눈동자가 노인을 쳐다봤다.

그에 보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노인이 눈을 감은 채 빙긋 웃었다.

"사랑받지 못한 생명체는 수명이 짧기 마련이란다. 오래 살아야 하지 않겠니."

─동생과의 암묵적인 내기에서 이겨야 할 테니.

파악! 그 순간 크루엘이 노인의 양어깨를 잡아 거칠게 떼어놓았다. 그의 손아귀에서 노인의 몸이 힘없이 흔들렸다.

퍽 보기 안 좋은 장면임에도 크루엘은 이를 신경 쓸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단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떻게?'

도대체 무슨 수로.

노인의 말대로 자신은 데온과 암묵적인 경쟁을 하는 중이다. 따로 말을 주고받은 것은 아니다. 무언가 신호가 오간 것도 아니었다.

그저, 각자의 목적을 위해 달려가다 보니 이리 되었다.

누가 더 오래 살아남느냐의 싸움을.

아마 데온은 '누가 더 먼저 상대를 죽이느냐'의 싸움을 하고 있겠지. 다르다고 보면 다를 수 있겠지만, 제게는 거기서 거기인 같은 내기다.

어차피 자신이 죽을 때는, 이미 데온이 죽은 뒤여야 하니까.

"부디 이기려무나."

"...."

"네가 이기면 재앙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럼 멸망의 시작도 아예 오지 않겠지. 그러니 정 죽을 것 같거나 죽고 싶거든 먼저 그 아이를 죽이고 죽거라."

"...하."

노망이 났다는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닌 모양이다. 이렇게 할 말과 못할 말을 구분 못 하는 것을 보면.

안절부절 못 하며 슬그머니 다가온 마을 청년을 향해 거칠게 그녀를 밀었다. 속절없이 밀려난 그녀가 청년의 품에 안착한다.

크루엘은 그녀를 싸늘하게 쳐다봤다.

'같잖은 애정을 미끼로 쓸데없는 간섭을....'

무슨 말을 무슨 목적으로 하는지 궁금해 그냥 두고 봤더니만, 이렇게 선을 넘을 줄이야.

'죽일까.'

오른손이 검 손잡이 근처를 맴돈다. 그 모습에 노인을 부축하던 청년이 헉하고 작게 숨을 들이켰으나 정작 당사자인 크루엘과 노인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담담했다.

짧은 침묵이 흐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