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9

99화. 강령술(3)

첫 명령에 시체에 뿌렸던 피가 나무줄기처럼 전신으로 퍼져나가더니 곧 색이 검게 물들어 시체에 줄줄 흘러내렸다.

그 모습이 꼭 용암이 같았다.

'내게 오거라.'

두 번째 명령에 기묘한 떨림이 일어났다.

강령술을 펼치는 자신한테도 고스란히 전해질 정도였다.

'와....'

루시온이 순간 비틀거렸다.

자신이 가진 어둠의 절반이 빠져나가자 전신에 피가 빠져나간 기분을 느꼈다.

현기증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아찔한 감각에 아주 잠깐 정신을 잃을 뻔했다.

[버텨, 루시온. 말했잖아, 대량의 어둠이 필요하다고. 이미 순환 고리로 간 이들을 부르는 터라 엄청 힘들어.]

러쉘은 루시온이 쓰러지지 않게 붙잡으며 그를 다독였다.

푸우우우.

시체 주변으로 흘러내리던 어둠이 시체 위로 솟구쳐 어떤 형상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내게 오거라.'

마지막 세 번째 명령에 루시온은 다급히 가면을 반쯤 벗었다.

마치 어둠이 텅 비어버린 느낌에 이어 배가 찢어지는 듯한 충격이 몰려왔다.

"커헉...."

루시온이 피를 토하자 러쉘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아슬아슬하다고 생각했는데, 괜찮아?.]

―홉! 루시온!

"괜찮으십니까, 도련님?"

[러쉘.]

베델이 굳은 얼굴로 러쉘을 보았다.

[어둠이 고갈되어서 그러는 거야. 이건 어쩔 수 없어. 강령술을 사용하기에 루시온의 어둠이 간당간당했거든.]

"…괜찮아. 정말로."

루시온은 흄의 도움을 받아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흄이 내민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으며 시체 쪽을 바라보았다.

형상을 이루던 검은 액체가 마치 커다란 천에 뒤덮인 듯 누에고치가 되었다 사라졌다.

사아아.

그 자리에 유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오오!

걱정으로 뒤덮였던 라타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꼭 마술을 보는 천진난만한 아이의 눈빛과 같았다.

'이걸 또 성공했다고…?'

러쉘은 살짝 할 말을 잃었다.

루시온의 어둠이 고갈되어 당연히 강령술은 실패로 끝났을 거라 생각했다.

강령술은 어려운 흑마법이었다.

어둠이 균형 있게 시체에 퍼져야 하고.

유령이 유혹에 빠질 만큼 피가 탐스러워야 하며.

세 번 말을 하는 동안 유령에게 위치를 정확히 알려줘야 했다.

이 모든 게 정상으로 처리됐을 때 마법이 발동할 수 있었다.

'어둠이 균형 있게 퍼지는 거야 라타가 도와줬으니 가능하다 쳐. 피도 뭐, 탐스러울 수 있지. 그런데 마지막은 바로 성공하기가 어려울 텐데? 그게 엄청 어려운 건데.'

막말로 밤중에 빛을 내는 아이템 하나를 하늘에 비춰 자신을 찾아오라는 것과 비슷한 난이도였다.

제아무리 아이템의 빛이 밝다 한들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고, 정확한 위치도 모르는 거기를 어떻게 찾아가겠는가.

그런데 루시온은 바로 성공해버렸다.

러쉘은 루시온에게 놀라면서도 스스로에게도 감탄하기 바빴다.

'내가 제자 보는 눈이 얼마나 높은 거야? 캬.'

[부름을 받고 찾아왔습니다.]

유령이 눈을 떴다.

공손한 말에 이미 루시온 자신에게 지배된 것처럼 느껴졌다.

[강령술에 제한 시간이 있으니까, 용건은 간단히 해. 연장하고 싶으면 피를 더 뿌리면 될 텐데....]

러쉘은 방금 시체에 뿌려진 루시온의 피를 보고는 말을 아꼈다.

저 정도면 하루 연장은 거뜬했다.

[루시온 공, 상처도 감싸는 게 어떻겠나? 꿰매야 할 정도처럼 보여.]

베델이 루시온의 손을 쥐어 보이나, 흐르는 피를 막을 수는 없었다.

루시온은 흄에게 손을 내밀었고, 흄은 미안한 얼굴로 손수건을 주었다.

손수건이 금세 피로 물들었다.

"아프지 않습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약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약이 뭐라고. 흄은 귀중한 보석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살짝 겁에 질려 있었다.

"괜찮아. 집에 가서 치료하면 되니까."

"죄송합니다. 이제부터 꼭 들고 다니도록 하겠습니다."

루시온은 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후에 손수건을 꽉 쥐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령이 자신의 물음에 답하기 위해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널 죽인 자들은 '공허의 손'인가?"

루시온의 질문과 함께 어떤 감정도 섞여 있지 않던 유령의 눈동자에 분노가 피어나는 걸 확인했다.

'정답이네.'

이미 푸른 실을 통해 결과가 나왔지만, 루시온은 한 번 더 제대로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역시 죽음의 기사, 브로슨이 죽인 흑마법사는 공허의 손 소속 흑마법사였다.

[그, 그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유령이 당황하며 묻자 루시온은 태연하게 목소리를 냈다.

"그냥 찍었어."

솔직히 지금 나온 단체가 루미노스와 공허의 손뿐이니 찍어도 공허의 손이지 않겠는가.

―우와! 루시온 똑똑해!

라타가 방긋 웃었다.

"도련님은 원래 훌륭하신 분입니다."

흄이 굳이 잇지 않아도 될 뒷말을 꺼냈다.

루시온은 라타와 흄의 칭찬에도 흔들리지 않고 차분히 손가락으로 시체를 가리켰다.

"시체로 뭘 하려고 했지? 공허의 손에게 죽었으니 알 거 아니야."

[염치없는 부탁이라는 걸 알지만, 놈들을… 죽여줄 수 있겠습니까?]

유령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곱게 죽은 게 아닌 듯 보였다.

"네가 주는 정보에 따라서. 내 귀한 피도 바쳤으니 정보가 값져야 하지 않겠어?"

[죽지 않는 병사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혹여 다른 흑마법사....]

[뭐어…!]

러쉘이 갑자기 소리쳤다.

[너 지금 뭐라고 말했어? 다시 말해봐.]

러쉘은 손을 뻗어 유령의 멱살을 쥐었다.

[그, 그러니까 공허의 손에서 죽지 않는 병사를 만들려고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위협적인 러쉘의 목소리에 유령은 다시 말을 털어놓았다.

[죽지 않는 병사라니.]

러쉘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같은 말을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얼굴을 일그러트린 러쉘은 다시금 쥐었던 멱살을 흔들었다.

[공허의 손이 지금 그런 개 또라이 같은 짓을 벌인단 말이야?]

[예. 제가 분명히 죽기 전에 들었습니다. 정말입니다.]

[웃기지 마! 미친…!]

러쉘은 소리를 치다 멱살을 쥐었던 손에 힘을 빼냈다.

저 유령은 희생자였고, 화풀이하는 것도 우스웠다.

[가뜩이나 대우가 개차반인데, 거기서 기름을 뿌리는 것도 모자라서 불까지 지른다고? 미친 새끼들. 미친 새끼들!]

러쉘이 소리치다 입술을 깨물었다.

[…죽지 않는 병사라는 게 말 그대로인가?]

베델은 시체를 보며 자연스럽게 망자를 떠올렸고, 말을 들어보니 사실임을 알았다.

[그래.]

러쉘이 무겁게 대답하자 베델이 다시금 물었다.

[병사로서 쓸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오래 유지할 수 있는가?]

[대가가 충분하다면야 한 달은 유지할 수 있지. 죽지도 않고, 잠을 자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심지어 불평도 쏟지 않은 병사들에게 한 달이라는 시간은 나라 하나쯤은 멸망시킬 수 있을 만큼 충분하고.]

루시온은 러쉘의 반응을 통해 신전에 얼마나 많은 빚을 질 수 있는지를 다시금 파악했다.

"그래서 놈들이 어디에 있지?"

루시온이 물었다.

공허의 손이 있는 본거지는 뉴브라 왕국이었다.

그것만으로는 애매했다.

이참에 좀 더 자세히 들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것까지는 저도… 모릅니다.]

"그럼 시체들을 어디로 모으고 있는데?"

[제가 죽기 전에 동부로 가져간다고 들었습니다. 죽음의 바다라는 말도 살짝 들었고요.]

'동부랑 죽음의 바다?'

동부에는 마탑과 함께 죽음의 바다라는 생명체가 살 수 없고, 닿으면 썩어버리는 이상한 바다가 있었다.

죽음의 바다 덕에 그 누구도 동부로 침입할 수 없었기에 자연스레 변경을 지키는 가문인 크로니아가 중요해졌고.

'왜 하필 동부지?'

루시온은 잠깐 의문을 느꼈지만, 지금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라 생각해 더는 떠올리지 않았다.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제국을 골고루 돌아다닐 판이네.'

남부에는 대장장인 자마드와 아이템 제작 장인인 미엘라를 위해 광산을 얻어줘야 했다.

돈을 벌려면 자동으로 상인하고도 인연을 쌓아야 하니 북부에도 들려야 했고.

무엇보다 뉴브라 왕국이 제국 내에 만든 6개 지부도 있었다.

'…썩을.'

루시온은 저절로 일그러지는 표정을 느꼈다.

[아, 아직 시체가 부족하다, 대가가 모자란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유령은 러쉘을 신경 쓰면서도 열심히 자신이 아는 것들을 털어놓았다.

그래야 공허의 손을 부수는 데 도움이 될 테니까.

'대가가 모자란다면 역시 아직 일이 일어나기 전이라서 그렇겠지?'

루미노스도 커지기 전에 없애버렸으니, 공허의 손도 가능했다.

루시온은 주먹에 힘을 꽉 쥐었다.

'다 박살 낼 거다. 죄다.'

공허의 손과 손을 잡을 조직들은 아직 많았으니.

* * *

화르륵.

루시온은 멀리서 보이는 불꽃을 잠깐 바라보았다.

자신이 불러온 유령은 고맙다며 연거푸 인사하고 사라졌다.

저 시체들이 공허의 손에게 넘어갈 수 없으니 태워버리는 게 가장 좋았다.

'아버지께서 이 신호를 알아들었으면 하는데.'

밤중에 난 불.

누가 봐도 수상하지 않은가.

루시온은 노비오가 이를 조사해서 자연스레 흑마법사와 뉴브라 왕국 사이를 눈치챘으면 했다.

서걱.

푸른 실이 잘려나갔다.

이제 거의 다 탄 모양이었다.

'...!'

하지만 누구와 이어져 있는지는 몰라도 푸른 실이 다시 나타나 자신과 엮었다.

'붉은 실이 나타난 게 아니라 푸른 실이라니.'

루시온은 실망스러웠지만, 우선 시간부터 확인했다.

암살자들을 만날 시간이 있다는 걸 알고 베델의 뒤를 따라갔다.

그러다 문득 변경 제일 끝에 있는 성벽으로 간 노비오와 카슨이 떠올랐다.

"스승님."

루시온이 러쉘을 불렀다.

[그래, 루시온.]

러쉘은 고개를 돌려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만약 이번 일이 뉴브라 왕국이 변경에서 병사를 물린 사건과 이어져 있다면 어색하겠습니까?"

뉴브라와 공허의 손이 한 몸이라는 걸 알고 있는 지금, 두 사건 역시 따로 놀 수 없었다.

일부러 노비오와 카슨의 트라우마를 자극해 시선을 돌리게 했다면.

[…그러고 보니 이상한 게 하나 있었네.]

루시온이 제시한 가설을 듣던 러쉘이 눈동자를 굴렸다.

[흑마법사는 무리 지어 다니지 않아.]

―왜? 같이 다니지 않는 거야?

총총 따라가던 라타가 물었다.

[혹여 붙잡히면 흑마법사는 이유 불문하고 바로 죽이거든? 모여 있으면 눈에 띄고 그러니 되도록 무리 지어 다니지 않아.]

라타의 귀가 쫑긋 세워졌고, 눈이 커졌다.

[나도 알고 있다. 흑마법사가 저주를 실험했을 때도 사람이 날마다 바뀌었지, 무리를 짓고 다니지 않았어.]

베델이 러쉘의 말을 덧붙였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어색하지 않아.'

루시온은 생각하며 앞으로 걸어갔다.

―하나, 둘, 셋, 넷.

라타가 루시온을 처음으로 고개를 빙그르르 돌리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쳐다보았다.

―다섯!

라타는 깜짝 놀랐다.

―홉! 큰일이야! 다섯이야, 다섯! 우리도 무리라고!

[아니지. 둘이야.]

러쉘이 루시온과 흄을 가리켰다.

유령을 사람으로 치면 어떡하겠나.

―라타는…?

그 손가락에 라타가 빠져 있자 라타는 걸음마저 멈춰 구슬프게 러쉘을 바라보았다.

[셋.]

러쉘은 빠르게 말을 바꿨다.

금세 지어진 라타의 눈웃음에 이어 꼬리가 크게 흔들렸다.

―역시 셋이 아니라 다섯이야. 라타는 숫자를 잘 세.

[…라타는 참 착하네.]

다섯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기에 베델이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라타를 쓰다듬었다.

―맞아. 라타는 착해. 흄이 매일매일 칭찬해줘.

라타가 배시시 웃다 어느새 멀리 떨어진 루시온을 뒤쫓아 달려갔다.

팍!

공기를 때리는 거친 소리에 생각하던 루시온도 그에게 달려가던 라타도 깜짝 놀랐다.

"죄송합니다. 앞에 돌멩이가 있었습니다. 도련님께서 걸리실 것만 같아 괘씸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힘이 조금 더 들어갔습니다."

흄도 놀라며 자신이 차버린 돌멩이를 주우려는 듯이 앞으로 나가다 루시온의 손짓에 멈췄다.

돌멩이가 남아 있겠는가. 이미 가루가 됐겠지.

"스승님. 저는 생각한 결과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결론을 냈습니다."

루시온은 러쉘을 바라보았다.

시체를 옮긴다는 사실을 은닉하기 위해서는 크로니아의 시선을 어디론가 끌어야 했고, 그간 뉴브라 왕국이 병사들을 보내 성벽에 온갖 행패를 부렸던 그들로서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일 터.

평소 무리 짓지 않던 흑마법사가 단체로 움직였다는 건 죽음이 기사 브로슨을 의식해서 한 일일 테고.

[그래. 두 사건이 마치 따로 노는 것 같은데 그 속을 아는 내 눈에도 연결된 사건처럼 보여. 뉴브라와 공허의 손이 따로 놀 수는 없잖아?]

러쉘이 의견을 털어놓았고, 루시온이 자연스레 베델을 바라보았다.

[아주 좋은 유인책이라고 생각한다.]

베델 역시 동의했다.

루시온의 가면이 푸른색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생각했습니다."

[한 가지 더? 그게 뭔지 말해봐.]

러쉘이 루시온을 재촉했다.

"무사히 크로니아로 들어왔고, 브로슨의 공격도 피해 살아남았다고 치면 대체 어떻게 나가려고 했던 걸까요? 지금 루미노스 때문에 저녁 7시 이후로 뱃길도 막혔을 텐데요."

노비오가 자신을 위해 뱃길도, 크로니아로 들어오는 입구도 죄다 막아 아예 원천을 차단했다.

[해답은 간단하네.]

러쉘이 코웃음을 쳤다.

[배신자가 있는 거지. 바로 여기에.]

러쉘의 손가락이 아래를 향했다.

"예. 제 생각하고 똑같습니다."

루시온이 싱긋 웃는 소리가 들렸다.

변경 지대에 크로니아 가문만 존재하는 건 아니었다.

소수의 귀족 역시 제 영토가 있었고, 변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변경 지대의 왕은 크로니아였으며 막대한 영향력과 함께 변경이라고 하면 자동으로 크로니아를 가리켰다.

노비오가 입구를 죄다 막은 이런 상황에서 퇴로가 열렸다는 건 변경 내에 존재하는 놈들의 짓으로 좁혀졌고, 러쉘 말대로 배신자라면 누구겠는가.

평소, 아니, 늘 크로니아를 시기 질투했던 귀족 중 누군가 뉴브라 왕국과 손을 잡아버렸다.

"마침 암살자들의 실력을 확인할 수 있게 목이 뎅강 잘릴 놈들이 나타났네요. 좋습니다."

가면을 썼지만, 마치 루시온이 싱긋 웃는 것 같았다.

100화. 암살자들

변경에 있는 귀족들을 이미 다 잡은 고기라 생각했거늘, 느닷없이 뒤통수를 세게 맞으면 얼마나 아프겠는가.

루시온은 비웃음을 살짝 흘렸다.

누군지 알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푸른 실이 방향을 알려주고 있었으니.

[짐작 가는 사람이 있는가?]

베델이 물었다.

루시온이 암살자를 움직이겠다는 뜻은 곧 적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맞아."

[평소 악연이 있었나 보네?]

러쉘은 루시온이 바라보는 방향을 같이 쳐다보며 말했다.

"악연이라기보다는 말을 듣지 않는 짐승 쪽이 가깝겠네요."

이미 변경에 있는 귀족들은 가주가 바뀔 때마다 크로니아를 직접 찾아와 납작 엎드려 충성을 맹세했다.

사람으로서 스스로 한 약속을 저버렸으나, 개라고 지칭하기에는 개가 아까웠기에 짐승이라 표현하는 게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계속 가자."

루시온은 베델을 재촉했다.

온몸에 힘도 없고, 단검으로 벤 손가락이 점점 더 욱신거렸지만, 어쩌겠나.

자신의 조직을 위한 일이라 참을 수밖에.

* * *

"약을 주십시오. 아, 붕대도 있다면 주셨으면 합니다."

흄은 차근차근 필요로 한 용품을 말했다.

암살자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황당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간만에 손님이라고 생각해 기쁘게 맞이했는데 다짜고짜 약과 붕대라니?

너무 황당했으나, 가면을 쓴 남자 쪽에 피 냄새가 제법 났다.

왼쪽 팔을 다쳤는지 움직임이 다소 부자연스러운 상태였고.

암살자는 슬쩍 자신들의 대장을 바라보았다.

대장은 한숨을 팍 내쉬다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이렇게 찾아왔으니 말이라도 들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흄. 혹시 치료해본 적 있나?]

암살자들이 건넨 약과 붕대를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바라보는 흄의 눈빛에 베델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흄은 암살자들을 힐끔 쳐다보다 곧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하지만 책에서 본 적이 있었다.

따라 할 자신도 있었고.

"마음에 들지 않아도 어쩔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쓰는 약과 붕대는 저게 제일 좋은 거니까요."

암살자들의 대장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일단 눈은 좋네.]

흄이 티 나지 않게 고개를 흔들었거늘,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니.

러쉘은 베델을 향해 슬쩍 엄지를 치켜올렸다.

루시온은 소파에 앉았다.

'진짜 돈이 없긴 없나 보네.'

비싼 것들만 깔고 앉았던 자신의 엉덩이가 새것처럼 보이는 소파에 닿자마자 거부 반응을 보였다.

루시온이 가게 곳곳에 걸려 있는, 꼭 부적처럼 생긴 종이 쪼가리에 시선을 두다 암살자들의 대장을 바라보았다.

들어오면서부터 마치 목을 조르는 듯한 손의 형상에 다시금 눈길을 붙잡았다.

'저 손은 대체 뭐지?'

루시온의 시선이 고정되자 러쉘도 덩달아 고개를 돌리다가 대장의 목을 가리켰다.

[저거, 저주야. 좀 강한 저주가 걸린 걸 보니 최근에 흑마법사를 죽이거나 건드렸나 본데? 내버려 두면 손이든 발이든 어디 하나 작살 나겠다.]

'저주라니.'

루시온은 잠깐 손가락을 매만졌다.

일단 저주보다 저들의 실력부터 알아보는 게 먼저였다.

"얼마나 강합니까?"

루시온이 대뜸 물었다.

이 질문은 저 남자에게도 하는 질문이자 러쉘에게도 하는 질문이었다.

이곳은 자신이 텔라와 중부에 열렸던 연회를 통해 들었던 정보.

그리고 자신이 기억하는 소설에서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기에 기대가 상당히 컸다.

[루시온 네가 괜찮다고 생각할 만큼? 베델이 보는 눈이 좋아.]

러쉘은 처음 볼 때부터 암살자들이 만족스러웠다.

"돈이 아깝지 않을 겁니다."

대장은 당당하게 자신을 가리켰다.

저런 자신감은 무척 좋았다.

"좋습니다. 그럼, 어딘가에 얽매이는 걸 싫어합니까?"

루시온은 면접을 보듯 대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떤 얽매임을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대장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지이이잉.

루시온은 말을 하다 말고 마법 주머니 대신 일반 주머니에 넣어둔 연락용 아이템이 진동하는 걸 느꼈다.

"잠시만요."

대장에게 양해를 구하며 루시온은 밖으로 나가 연락용 아이템을 받았다.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벌써 새벽 3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이었다.

"왜?"

루시온의 목소리가 자연스레 퉁명스러웠다.

그를 따라온 러쉘이 휘파람을 불며 귀를 쫑긋 세웠다.

<아! 주무시고 계셨습니까?>

쥐쟁이의 우두머리인 헤로안이 천연덕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아, 뭐야. 쥐쟁이잖아.]

뭘 기대한 건지 몰라도 헤로안이라는 사실에 러쉘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럼, 넌 이 시각에 일어나나?"

루시온은 러쉘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에이, 저는 지금 일하고 있잖습니까. 하멜 님이 시키신 일 말입니다.>

"네가 인생을 부어 만든 서류를 네 손으로 더 뜯고 싶다고?"

말 그대로 헤로안이 인생을 투자해 남의 약점을 모아 놓은 전집이 지금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상태였다.

<하멜 님께서는 잠이 없는 분이신 줄 알았습니다. 흑마법사도 잠을 잔다니, 크흠, 어쨌든, 다음번에는 반드시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울리지도 않는 굽신거림에 루시온은 기가 찼다.

"용건은?"

<일단, 불만부터 털어놔도 되겠습니까?>

"딱 하나만 말해."

여러 개를 듣기에는 자신이 바빴다.

<꼭 하나입니까? 못해도 세 가지까지는 안 됩니까? 제가 지금 속이 터지려고 합니다.>

"좋은 거 하나 더 추가해서 들어주지."

<…알겠습니다.>

헤로안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저희가 튀질 않습니다.>

"...?"

<왜 똑같이 병사 옷을 입어야 합니까? 기껏 준비했던 옷을 입지 못해서 저희가 조직에서 튀질 않습니다.>

대체 무슨 옷을 준비했는지 몰라도 더는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좋은 건?"

<지하 굴을 파기에 땅이 아주 적합합니다. 완전 마음에 드는데요?>

"그래서 용건은?"

<어디까지 정보를 캐야 합니까?>

"어디까지 캐고 싶은데?"

<전부 다요. 하멜 님께서 알려주신 이름만으로 이미 5명 전원 권력자라는 걸 파악했습니다.>

"그럼 네가 원하는 만큼 캐. 내가 필요한 건 약점 정도인데, 너희 개인적인 취미도 만족해야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허락이 떨어지자 헤로안은 용돈을 받은 아이처럼 기뻐했다.

<그런데 하멜 님.>

"왜 또?"

<왜 하멜 님이 조직의 우두머리가 아닙니까?>

미엘라 이어 헤로안도 비슷한 물음을 꺼냈다.

'내가 그렇게 튀나?'

루시온은 잠깐 생각하다 물었다.

"왜?"

<아, 크라언이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하멜 님이랑 달리, 콜록, 아닙니다. 어쨌든 참 올바른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더라고요. 개인적으로 꺼려지는 부류입니다. 전 이런 거 보면 몸이 간지럽다고 해야 하나, 뭐라고 해야 하나.>

"적응은 잘하고 있나 보네?"

<그, 음, 크라언 하고 잘 지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적응이야 제 전문이니까요.>

기존 조직원들과 싸우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루시온은 숨을 짧게 내쉬었다.

<하멜 님.>

"또 뭐?"

이제 막 끊으려던 차 헤로안이 속삭이듯 말을 꺼냈다.

<조직원들도 죄다 조사해도 되겠습니까? 지금 조직원은 물론, 들어오는 족족 말입니다.>

"해."

루시온은 고민하지 않았다.

왜 자신이 암살자들을 구하려고 했겠는가.

조직을 배신하는 놈들의 목을 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너희 인원으로 거기까지 가능해?"

지금 조사해야 할 사람이 몇 명인가.

쥐쟁이의 인원은 얼추 4~50명쯤. 조직원의 인원은 30명쯤.

지금이 최첨단 시대도 아니고, 사람을 움직여서 해야 할 텐데.

<영업 비밀입니다. 그럼, 좋은 밤 되시길 바라....>

뚝.

루시온이 괘씸한 나머지 먼저 연락을 끊고 다시 건물로 들어가려던 차, 러쉘이 말을 걸었다.

[치료라도 하고 가지 그래? 흄을 불러올까?]

"괜찮습니다. 버틸 만합니다."

루시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처 부위에 피가 거의 멎은 상태였다.

"미안합니다. 너무 기다리게 했습니다."

루시온은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암살자들에게 사과하며 흄을 쳐다보았다.

흄이 알아듣지 못하자 러쉘이 말했다.

[돈주머니를 꺼내.]

"아."

흄이 곧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서 돈주머니를 꺼냈다.

짤랑거리는 소리에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던 암살자들이 곧바로 표정을 다잡았다.

[그래. 이거지.]

러쉘이 그제야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어떻게 알고 찾아오신 겁니까?"

암살자들의 대장은 내내 궁금했던 질문을 꺼내며 분위기를 바꾸어나갔다.

하지만 루시온은 그 질문에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혹시 사람도 가려서 임무를 받습니까?"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 죽여서 밥 먹고 사는 놈인데 뭘 따지겠습니까?"

루시온이 원하던 답변에 가까워 그는 좀 더 하고 싶었던 제안을 꺼내 놓았다.

"아까 저 때문에 말이 끊어졌지만, 다시 묻겠습니다. 혹시 조직에 소속되는 걸 싫어하십니까?"

"저희를 포섭하러 오셨습니까?"

암살자들의 대장은 루시온을 미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의심과 호기심이 섞여 있었다.

"반쯤은 정답입니다."

"반이라뇨?"

"제가 자선 사업가도 아닌데 실력 없는 암살자들을 데리고 있으면 뭐하겠습니까? 그래서 대답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저흰 까다롭습니다."

"저도 까다롭습니다."

루시온은 여유롭게 되받아치며 입을 놀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 제 자존심을 긁으려는 주제넘은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지금 절 놓치면 아주 크게 후회하실 상황이 아닙니까?"

루시온이 암살자 전원을 비웃는 듯한 말을 꺼냈지만, 아무도 되받아치지 않았다.

사실이었다.

희망을 품어 조직을 세웠건만, 지금 다 같이 굶어 죽을 판이었다.

루시온은 굳어지는 암살자들의 표정을 바라보며 다시 목소리를 냈다.

"조직에 들어오면 주 업무는 조직의 배신자를 처리하는 일입니다. 그 외에 가끔 제가 시키는 일이나 조직에서 떨어지는 임무를 하시면 됩니다."

마치 이미 암살자들이 들어올 거라 판단해서 꺼내는 말 같아 너무도 오만해 보였다.

도중에 루시온을 보며 살기를 내뿜는 이들이 있었지만, 흄 역시 만만찮았다.

쾅!

함부로 덤비지 말라는 듯 테이블을 손으로 가볍게 내리쳤고, 반으로 쪼개진 게 아닌 박살이 나고 말았다.

그 모습을 자주 보았던 루시온은 평온했고, 처음 보는 암살자들은 거의 동시에 눈이 커졌다.

"명령을 내리는 입장이 되겠지만, 징검다리가 당신들에게 했던 것처럼 일방적인 횡포를 펼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돈도 만족하실 만큼 드리겠습니다. 물론, 임무 이외에 당신들의 자유 역시 존중합니다."

루시온은 암살자들이 놀라든 말든 자신의 말을 꿋꿋하게 이어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목소리가 귀에 박혔다.

"절 배신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 말입니다."

게다가 마지막 말은 이상할 정도로 살벌하기까지 했다.

때에 맞춰 베델이 기세를 올려준 덕분이었다.

"이 정도면 어떻습니까? 꽤 괜찮은 곳이 아니겠습니까?"

"갑자기… 그런 제안을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조건 자체는 파격적이었다.

누가 암살자를 이렇게 대우해주는가.

아니, 그걸 떠나 누군가의 목숨을 베어 살아가는 자신들을 사람으로 취급해주고 있지 않은가.

제안하고 의견을 묻는 가면 쓴 남자의 행동이 이미 그걸 증명해주고 있었다.

"왜 그렇게 겁을 먹고 있습니까?"

루시온이 피식 웃었다.

겁이라니.

암살자의 대장은 그 말에 머뭇거렸다.

사실 저 남자 말대로 낯설기만 한 제안에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까지 흔들리고 있었다.

애초에 누가 암살자에게 '제안'이라는 걸 하겠는가.

암살자들에게 내려오는 말은 오직 누구를 죽이라는 지시뿐이었다.

"할 겁니까, 말 겁니까?"

루시온이 좀 더 단호하게 물었다.

자신이 좀 더 여유가 있었다면 말을 더 나누면서 천천히 회유하겠지만, 아침이 밝기 전에 집으로 들어가야 해서 마음이 급했다.

"잠깐만요. 혹시 제 부하들의 의견을 물을 수 있겠습니까?"

암살자들의 대장은 단독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았다.

'사이가 꽤 좋은가 보네.'

루시온은 마음의 드는 구석을 찾았다.

암살자들의 대장은 루시온을 의식하지 않고 부하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말 대신 가벼운 행동으로 의사를 나누고 있었다.

대다수가 동의했다.

암살자들의 대장은 망설이지 않고 말을 전달했다.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임무부터 맡겨보겠습니다."

루시온은 빠른 대답에 만족스러웠다.

"줘."

루시온이 흄을 보며 고갯짓으로 암살자들의 대장을 가리켰다.

흄이 돈주머니를 내밀었고 그걸 받자마자 암살자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죽여야 할 대상이 대체 누구길래 이토록 돈주머니가 두둑한지.

101화. 암살자들(2)

"죽여야 할 대상은 변경에 있는 코코렌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작가 전원입니다. 아마 5명밖에 없을 테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루시온은 굳어진 암살자들 대장의 표정을 보고는 이미 자신의 말을 예상했다 생각했다.

귀족 중 제일 하위인 남작이었다.

그래도 귀족이라는 점이 신경 쓰이겠지만, 귀족들 사이에서도 서로를 죽이기 위해 암살을 시도하지 않는 건 아니니 전혀 이상한 행동도 아니었다.

"오늘 밤이 가기 전에 죽여주셔야겠습니다. 보고는 아침 10시 이후에 받겠습니다."

루시온은 그들에게 연락용 아이템을 하나 넘겼다.

"이건 어디까지나 임시로 지급하는 물품이니 죽이지 못하면 돌려주셔야 합니다."

연락용 아이템은 비쌌지만, 그보다 더 까다로운 건 연락용 아이템끼리 같은 마나를 맞추는 과정이었다.

서로 같은 파장을 맞추기 위해서는 2~3시간 정도 연락용 아이템을 각 손에 잡고 가만히 있어야 했다.

"돈은 의뢰비이니 실패하시면 반 정도만 돌려주시면 됩니다."

그들이 임무에 실패하면 아쉽지만, 베델의 안목을 고려해 다음에도 기회가 있을 수 있었다.

조직의 몸집이 커질수록 암살자들의 숫자 역시 늘어날 테니.

"그럼."

루시온은 할 말을 모두 끝냈으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만요."

그때, 암살자들의 대장이 루시온을 불렀다.

"설명이 모자란 만큼 돈을 드렸을 텐데요? 혹시 뒤처리가 걱정되십니까?"

루시온이 물었다.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무조건 암살자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사람을 기본적으로 잘 죽여야 했고, 흔적도 처리해야 하며 목격자조차 없어야지 진정한 암살자라고 할 수 있었다.

"어떻게 죽이면 됩니까?"

루시온은 살짝 실망할 뻔하다 들려오는 물음에 자신이 미처 말해주지 못한 부분이 있었음을 인정했다.

"아. 그렇네요. 어떻게 죽여야 할지를 잊었습니다."

암살자들은 고용자를 대신 목표를 죽이는 직업이니 죽이는 방법 역시 고용자의 의견을 따르는 게 일방적이었다.

"남작가 가주 벽에 간단하게 '내가 최고임'이라고 적어주십시오."

공허의 손에게 혼란을 주어야 했다.

이럴 땐 유치한 게 최고였다.

순간 암살자들 대장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정말 그걸 써야 하냐는 그의 눈빛에도 루시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대장의 표정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루시온은 신경 쓰지 않고 자리를 벗어났다.

가면을 쓴 남자가 완전히 가게 밖으로 벗어날 때까지 기다리던 암살자들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정말 그렇게 쓰실 생각이십니까, 대장?"

"제가 이 일로 먹고산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그렇게 유치한 말은 처음입니다. 자존심이 구겨지는 것 같습니다."

잔인하게 토막 내어 달라는 암살 요구는 들어봤지만, 이렇게 어린아이가 쓸 법한 말을 적는 건 처음이었다.

"쓰라면 쓰고, 까라면 까야지."

하지만 암살자들의 대장은 마음을 내려놓고 손에 든 주머니를 꽉 쥐었다.

"준비해."

* * *

크로니아에 쳐들어온 적들의 시체를 치우고 안토니는 조용히 중앙 저택으로 들어왔다.

집무실을 들어갈 수 있는 열쇠를 소유한 사람은 노비오와 자신뿐이었으나, 혹여 노비오의 집무실에 누군가 찾아왔을까 걱정이 되어 확인이라도 해 볼 셈이었다.

"...?"

안토니는 빛도 없이 복도를 거닐다 말고 잠깐 걸음을 멈췄다.

순찰을 돌고 있는 기사를 방금 지나쳤는데.

'발소리하고 피 냄새도 나는데?'

안토니는 곧 누구의 발소리인지 알아차리자 다급히 빛을 내는 아이템을 켜 복도 끝을 조심스레 비췄다.

"…도련님?"

역시 루시온이었다.

루시온이 빛을 보고 뒤로 돌다 말고 눈부셔하자 안토니가 다급히 불을 껐다.

"죄송합니다."

"밤중에 뭐 하는 건가, 안토니?"

그건 오히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

왜 잠이 들지 않고 복도를 서성거리는 건지.

순간, 안토니의 머릿속에는 여러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생각들은 루시온에게 다가갈수록 산산이 조각나고 말았다.

피 냄새가 짙게 났다.

"도련님. 실례하겠습니다."

안토니가 다가오자 루시온이 슬쩍 손을 뒤로 숨겼다.

"왜 그러는가?"

"혹시 다치셨습니까?"

쉿.

루시온이 조용히 소리를 냈다.

시기가 좋지 않았다.

그걸 알기에 안토니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약만 조용히 가져가려던 참이었네."

루시온이 무덤덤하게 목소리를 냈다.

"상처를 보여주십시오."

안토니가 속상한 목소리를 냈다.

루시온이 손을 내밀자 손가락이 제법 길고 깊게 베여 있었다.

안토니의 얼굴이 금세 일그러졌다.

무언가에 베여서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루시온은 그 정도가 달랐다.

뉴브라 왕국에 납치당한 뒤, 루시온은 근 3년간 날카로운 물건만 보면 입에 거품을 물고 기절하곤 했다.

치료와 약을 통해 지금은 엄청 호전된 상태였다.

그래서 루시온이 검을 배우겠다고 했을 때 다들 놀랄 수밖에 없었다.

"괜찮으십니까?"

안토니가 감정을 꾹 누르며 물었다.

"그래."

"정말 괜찮으십니까? 아프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니까."

"일단 이쪽으로 오십시오. 제가 치료해드리겠습니다."

갑자기 상처를 입은 것도 이상했고, 심지어 치료까지 되어있으면 더 이상하지 않은가.

일부러 실수인 척 안토니에게 걸렸는데.

속상함이 고스란히 드러난 안토니의 목소리와 표정에 루시온은 너무 미안했다.

[네가 나빴다, 루시온.]

러쉘도 안토니의 진심에 이번만큼은 그의 편에 서고 싶었다.

* * *

"적이 찾아왔습니다. 시체도 흔적 없이 치웠습니다."

안토니는 왜 다쳤는지, 어디에서 다쳤는지를 묻지 않고 루시온의 손가락을 치료하며 보고했다.

지금 이 저택의 주인은 루시온이었기에 돌아가는 사정을 알아야 했다.

그럴 줄 알았다며 루시온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데?"

마치 가벼운 비밀을 묻는 듯한 목소리에 안토니는 잠깐 웃었다.

문득 노비오와 카슨이 생각이 날 정도로 닮아 있었다.

"징검다리를 통해 건너온 암살자들입니다. 하지만 도련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징검다리를 흔들지 않는 이상 누가 시켰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암살자와 고용주를 이어주는 징검다리를 통해 왔다는 건 암살자들은 고용주를 모르고, 고용주도 암살자들을 알 수 없다는 말과 같았다.

"안토니."

"예, 도련님."

"이건 즉흥이 아니라 계획된 일이야. 하지만 암살자들이 동시에 쳐들어왔어도 너라면 누가 한 팀이었는지 알 거 아니야."

암살자들은 원래부터 팀을 이뤄서 행동했다.

이번 일이 계획된 일이라도 팀끼리 암살하는 방법이 다르니 티가 나지 않으려야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루시온은 자신이 어떻게 현재 상황을 알게 되었는지를 쏙 숨기고 상황을 그럴듯하게 이어나가며 안토니를 설득시켜나갔다.

"징검다리도 생각이 있으니 암살자들이 누구인지 적어 놓은 자료들을 이미 빼돌렸겠지. 그런데 털면 다 나와. 지금 딱 숫자가 비어버린 상태일 텐데 어떻게 메꿔? 일반인을 데려와서 메꾸는 건 방법뿐일 텐데."

루시온이 살짝 비웃음을 흘렸다.

상처 부위를 꿰매고 있던 안토니가 순간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모습에 정말로 자신이 아는 루시온이 맞나 싶었다.

"암살이 계획적이라면 누군가 아버지와 형님을 일부러 유인한 거겠지. 그럼, 그놈들이 누구인지 뻔하잖아."

루시온의 눈이 가느다래졌고, 상처를 치료하던 안토니의 눈썹이 안으로 모였다.

"…도련님께서는 뉴브라 왕국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안토니 자신도 뉴브라라는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인데, 루시온은 오죽하겠는가.

"그래. 놈들밖에 더 있어?"

하지만 루시온의 목소리는 너무도 태연했다.

안토니는 숨을 죽이며 루시온의 표정을 살폈다.

목소리만큼이나 표정 또한 흔들림이 없었다.

"정확히는 뉴브라와 손을 잡은 제국인일 테지. 이유를 떠나 감히 크로니아를 공격했으니 잡아야겠지? 그렇지 않나, 안토니?"

"물론입니다. 반드시 잡아야 합니다."

안토니는 목소리에 힘을 강하게 주었다.

"그럼 이미 알고 있는 징검다리부터 털어봐. 분야 자체가 좁으니 실토할 수밖에 없을 거야."

루시온이 가볍게 지시를 내렸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크로니아를 공격했는지는 몰라도 놈들은 아주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크로니아는 제국의 창과 방패였다.

노비오와 카슨이 빠졌다고 해서 부서질 만큼 약했다면 오랫동안 변경을 지킬 수도 없었을 테지.

'뭐, 시선 끌거나, 어쩌면 크로니아의 내부를 흔들려는 수작으로 암살자를 보냈겠지만, 어림도 없지.'

루시온은 이참에 손에 들어온 권력을 한 번 휘둘러보기로 했다.

개인적으로 크로니아가 얼마나 강한 힘을 가졌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안토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루시온의 손가락에 곱게 붕대가 감겨 있었다.

[빠르고, 깔끔하네.]

처음부터 끝까지 안토니의 치료를 지켜보고 있던 러쉘이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안토니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루시온의 지시를 따랐다.

지금 루시온이야말로 이 저택에 유일한 크로니아였다.

적들의 멱을 따기 위해 크로니아가 움직였다.

* * *

지이잉.

진동 소리에 루시온은 차마 눈을 뜨지 못하고 침대 옆에 놓인 탁자 쪽으로 손만 뻗어 무언가를 찾듯 허우적거렸다.

[거기 아니야. 오른쪽.]

러쉘은 진동 소리에 다급히 루시온의 방으로 들어와 일부러 반대로 말했다.

계속 손을 움직이며 연락용 아이템을 찾지 못하는 모습에 러쉘이 배를 잡고 신나게 웃었다.

―라타가 도와줄게!

라타가 빤히 보다 말고 루시온의 머리에 올라 힘차게 뛰어올랐다.

"윽."

루시온이 묵직한 무게에 눈을 반쯤 떴다.

요새 좀 많이 먹였더니 라타의 무게가 처음과 달랐다.

라타는 연락용 아이템을 물고는 침대로 내려와 루시온의 얼굴 앞에 내려놓았다.

루시온은 라타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뒤에 연락용 아이템을 사용했다.

<5명 전원, 죽였습니다.>

아이템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암살자들의 대장이었다.

<'내가 최고임'이라는 말 역시 빼먹지 않았습니다.>

루시온은 그 말에 별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서랍에 넣어뒀던 가면을 꺼내 썼다.

'벌써 아침인가.'

잠을 적게 잤더니 머리가 빙그르르 도는 기분이었다.

"잘했습니다. 나중에 찾아가겠습니다."

루시온은 말을 끝낸 뒤에 그대로 연락을 끊었다.

이미 베델이 그들의 뒤를 쫓았다.

자세한 건 베델에게 들으면 충분했다.

루시온은 아예 의자에 앉아 책상에 머리를 기댔다.

기왕 연락용 아이템이 자신의 손에 들린 김에 연락을 죄다 돌릴 생각이었다.

우선 소식이 조금도 없는 자마드부터.

하지만 연결음만 계속 들릴 뿐 받질 않았다.

'하긴. 완벽에 가까운 무기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지.'

루시온은 크라언에게 바로 연락했다.

<예, 하멜 씨. 잠시만요.>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는지 주변에 사람 소리가 제법 들려왔다.

흙을 밟는 소리가 크게 들려오자 루시온은 기다릴 겸 잠깐 눈을 감았다.

곧 숨소리가 길어졌다.

<…하멜 님?>

잠시 뒤, 루시온이 쥐고 있던 연락용 아이템에서 크라언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멜 님? 저기, 하멜 님?>

재차 묻는 말에도 루시온이 어떤 말도 하지 않자 크라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멜 님? 듣고 계십니까?>

―러쉘. 루시온이 대답을 하지 않아. 크라언이 기다리라고 해서 화가 난 건가?

침대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라타가 상체를 반쯤 일으켜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아니. 내가 보기에 자는 것 같은데?]

러쉘이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제가 너무 기다리게 했습니다. 혹시 화가 나셨으면 정말 죄송합니다. 그, 다름이 아니라 쥐쟁이들이 살 땅굴의 위치를 같이 보고 있었습니다.>

[루시온. 루시온? 지금 자면 어떡해.]

러쉘이 루시온의 어깨를 흔들었다.

"…아."

그제야 루시온이 정신을 차린 건지, 목소리를 냈다.

<죄송합니다. 제가 더 빨리 움직였어야 했는데.>

"…뭘?"

<예?>

크라언이 당황하는 소리가 들렸다.

덩달아 루시온도 의아하며 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혹시… 주무셨습니까?>

"미안. 깜박 졸았네."

사과에도 불구하고 대답이 들려오질 않자 루시온은 크라언을 불렀다.

"크라언?"

<…죄송합니다. 제가 조직을 위해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

102화. 암살자들(3)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루시온은 연락용 아이템을 얼굴 가까이 들이밀었다.

"뭐라고?"

<하멜 님께서 이렇게 피곤하신 줄도 모르고 저만 편하게 잠을 자고 말았습니다. 죄송합니다.>

크라언이 왜 이러는지 몰라도 정말로 자신에게 미안해하고 있었다.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루시온은 잠깐 멈췄던 다리를 흔들었다.

<조직도 중요하지만, 하멜 님께서는 본인의 몸도 생각하셨으면 합니다. 부디 무리하지 마십시오.>

"무리한 적 없어. 그냥 잠을 평소보다 좀 못 잔 것뿐이야."

루시온은 사실을 말했다.

오늘, 아니, 어제랑 오늘 잠을 좀 제대로 자지 못했다.

자신이 귀하게 자랐고, 체력도 좋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

크라언은 또 말이 없어졌다.

<잠을 줄이겠습니다.>

또 뜬금없는 소리에 루시온은 기가 찼다.

다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행동인데 잠은 왜 줄이겠다는지.

자신은 어쩔 수 없다지만, 크라언은 아니었다.

"잠을 갑자기 왜 줄여? 그냥 하던 대로 해."

<저는....>

"그래서 아까 뭐라고 말했는데?"

<…그러니까, 쥐쟁이들이 살 곳을 알아본다고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니야. 나도 기다리게 했으니."

<전 계속 기다려도 괜찮습니다.>

"쥐쟁이들은 어때? 말은 잘 듣고?"

<하멜 님께서 알려주신 말씀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렇지. 순탄할 리가 있나.'

루시온은 하품을 길게 내뱉었다.

<역시 제가....>

"다름이 아니라 쥐쟁이들에게 조직원을 조사하라고 시켰어. 너도 마찬가지야, 크라언. 불쾌하면 말해. 내가 넌 빼줄 테니까."

<그럼 저와 슈트라, 헬론까지 빼주셨으면 합니다.>

크라언은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아무리 졸려서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지만, 크라언이 과거를 캐는 걸 싫어한다는 게 절절히 느껴질 정도였다.

'어쩐다. 이미 크라언이 망국의 왕자라는 걸 알고 있는데.'

루시온은 당분간 모르는 척해야겠다 생각하며 크라언이 있던 왕국인 케오르티아가 사라진 이유는 개인적으로 조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알겠어. 곧 암살자들이 구해질 것 같으니까 그때 다시 연락할게. 그럼."

<하멜 님!>

루시온이 연락을 끊으려던 차, 크라언이 다급히 루시온을 불렀다.

"왜?"

<저도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뭔데?"

<지금 눈여겨보는 용병단이 있습니다.>

"용병단이라면… 어디에 소속되는 걸 싫어해서 쉽지 않을 텐데?"

<예. 그 점이 걸리나, 제가 보기에 무척 괜찮은 용병단이라 계속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름이 뭔데?"

<라인트 용병단입니다.>

'라인트 용병단?'

루시온이 눈을 깜박거렸다.

어디서 보았던 이름이질 않은가.

'…아!'

""대표님이 데리고 있는 저 사람들 말입니다. 과거에 용병단이었던 것 같은데. 맞습니까?"

헤인트가 크라언 뒤에 선 호위를 가리키며 묻자 그는 사람 좋은 얼굴로 가볍게 웃었다.

"안목도 좋으십니다. 맞습니다. 용병단이었죠. 라인트 용병단. 제 인생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이기도 하고요."

크라언은 차를 홀짝이며 행복한 표정을 했다.

"만약 놓쳤으면 후회가 아니라 절망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제 세력의 가장 강력한 아군이 될 줄은 몰랐으니까요.""

소설 속에서 크라언이 헤인트와 말을 나누던 도중에 '라인트 용병단'을 언급하는 부분이 등장했다.

크라언이 세운 세력에 주축을 이뤘던 이들이 아닌가.

'…와.'

루시온은 갑자기 잠이 한번에 깨는 기분을 느끼다 못해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조직을 키운다고 가장 중요한 이들을 잊어버릴 뻔했다.

'진짜 큰일 나는 줄 알았네.'

크라언이 세운 조직이 어떻게 성장하는지, 누굴 만나는지는 거의 몰라도 소설에서 나왔던 이들만큼은 크라언과 이어줘야 했다.

<…하멜 님?>

"듣고 있어."

<혹시 마음에 드시지 않으십니까. 다른 이들로....>

"아니!"

루시온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막 꾸벅꾸벅 졸고 있던 라타가 눈을 뜨며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용병단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 하긴, 지금 조직에서 끌어올 수 있는 무력집단이 용병단으로 제격이지.]

러쉘이 키득거렸다.

<…알겠습니다. 하멜 님의 의견이 이토록 강하시니 반드시 조직으로 포섭하겠습니다.>

크라언의 굳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꼭 잡고. 너한테 해야 할 말이 남았는데, 그건 암살자 일이 해결된 뒤에 할게."

공허의 손이 시체를 가지고 죽지 않는 병사를 만들려고 했다.

그 시체가 동부로 옮겨졌지만, 아직 정확한 위치는 몰랐다.

그 장소를 파악한 후에 신전에 알려 나중을 위해 빚을 쌓을 생각이라는 걸 크라언에게 알려줘야 했다.

<알겠습니다, 하멜 님. 오늘은 푹 쉬시고, 다음에 천천히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동안 맛있는 것도, 몸에 좋은 것도 많이 드셨으면 하고요.>

"…그래."

루시온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크라언이 자신을 걱정해준 건 고맙지만, 조금 과하다고 생각했다.

"하."

루시온은 연락을 끊고 가면을 벗어 서랍에 다시 놓았다.

그의 눈가에 아직 잠이 어려 있었다.

'동부로 가서 뉴브라 왕국이 자신의 정보를 보고하는 4번 지점을 털고.'

점점 루시온의 눈가가 무거워졌다.

'공허의 손이 죽지 않는 병사를 만들려고 시체를 모아둔 장소도 털고. …아. 6개 지부도 털고. 북부, 남부도 돌아야 하고.'

생각이 길어지자 루시온의 눈이 깜박거렸다.

'암살자들이 임무에 성공했는지 모르....'

두 눈이 완전히 감기고, 루시온의 숨소리가 길어졌다.

―쉬잇.

라타가 귀를 쫑긋 세우더니 곧 속삭였다.

―흄이 잠은 침대에 자야 한다고 했어. 라타가 흄을 불러올까?

[그래야겠네. 잠이라도 편안하게 자야지.]

러쉘은 루시온의 부러진 왼팔을 바라보았다.

강령술 때문에 상처가 하나 더 늘어난 상태였다.

라타가 조심스레 문을 걸어가다 곧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첫 난관에 부딪혔다.

―어떡해! 라타는 문을 열 수 없어. 이것 봐. 라타의 앞발이 닿질 않아.

라타가 제자리에서 껑충 뛰나 앞발이 간발의 차이로 손잡이에 닿지 못했다.

―라타가 아직 덜 커서 문을 열 수 없어. 러쉘이 흄한테 가야 해.

라타는 시무룩한 얼굴로 러쉘을 바라보았다.

[아닐걸.]

러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맞아! 라타는 여기에서 포기할 수 없어! 라타가 루시온을 위해서 뭐든 할 수 있으니까!

[그거 말고.]

막 뛰려던 라타가 귀를 축 늘어트렸다.

―라타는 러쉘이 뭘 말하는지 모르겠어.

[어둠을 시켜서 열어봐.]

―라타가?

라타는 눈을 깜박거렸고, 러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라타 네가.]

이미 라타는 그림자 이동이라고 어둠을 이용한 기술을 쓰고 있었다.

게다가 죽어버린 시체에 영혼을 바로 부를 수도 있지 않은가.

라타가 어둠을 사용하지 않으려는 건지, 사용할 생각을 못 하는 건지 몰라도 어둠의 신수이니 당연히 어둠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왜? 라타보다 러쉘이 더 빨라.

[루시온을 지키고 싶다며. 만약 주변에 도움을 청할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어떡할 건데?]

―홉!

라타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눈동자를 반짝거렸다.

―맞아! 라타도 루시온을 지켜줄 만큼 얼른 쑥쑥 커야 해!

라타는 눈에 힘을 주며 문을 바라보았다.

―좋아! 라타가 어둠을 움직여볼게.

하지만 의기양양한 말과 달리 라타는 '끄응' 소리를 내기만 바빴다.

―움직여라, 어둠아. 라타 말 들어. 라타는 얼른 이 문을 열고 싶어!

라타의 앞발이 마치 문을 닦듯 열심히 흔들렸다.

'이상하네. 어둠을 움직일 방법을 알 텐데, 반응이 없어. 아직 루시온의 어둠이 더 늘어나야 하는 건가?'

러쉘은 라타를 더는 몰아붙일 생각이 없었다.

루시온 앞에서 하면 라타가 더 실망할까 봐 일부러 루시온이 자고 있을 때를 노렸다.

[잘했어, 라타.]

러쉘은 라타를 쓰다듬으며 슬쩍 말렸고, 라타는 울먹거리며 말했다.

―라타는 힘냈는데, 아무것도 못 했어.

[아니, 잘했어. 엄청 용감했다고!]

―정말?

[그래. 해 보지 않은 걸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용감한데?]

―라타가?

그제야 라타의 눈이 반짝거렸고 꼬리가 힘차게 흔들렸다.

[그래. 잘했으니까, 칭찬하는 거야.]

―응. 라타는 장해! 라타는 착해!

[그럼, 갔다 올게.]

러쉘이 라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응!

라타가 힘차게 대답했다.

러쉘마저 자리를 비웠고, 루시온이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자 라타는 루시온 곁으로 조심스레 움직였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움직이다 말고 라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창문 주변으로 어둠이 일렁거렸다.

―쉿. 루시온은 지금 자니까, 들어오지 마. 들어오면 라타가 콱 물어버릴 거야.

신수다. 신수.

―아니야. 라타는 신수가 아니라 라타야.

라타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너무 기뻐. 정말로 우리의 신수가 탄생됐잖아? 그럼 이제....

야. 조용히 해. 놈이 듣고 있잖아.

아. 우린 아무것도 몰라. 우린 아무것도 못 봤어.

어둠이 갑자기 다급히 사라졌다.

라타는 다시금 고개를 갸웃거리다 눈에 힘을 가득 주었다.

―후후. 라타의 송곳니가 무섭긴 하지!

어흥.

라타는 흄이 읽어 줬던 책에 나오는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 * *

[깔끔했다.]

베델이 짧게 설명했다.

뭘 더 설명할 수 있을까.

목격자가 없는 암살의 정석을 보여주었는데.

[징검다리의 횡포가 듣던 것보다 더 심한 모양이야. 이토록 실력 있는 암살자들이 굶고 있다니.]

"좋네."

루시온은 만족해하며 암살자들이 있는 가게로 들어갔다.

"오셨습니까?"

암살자들의 대장이 인사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루시온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 저희가 조건을 만족한 겁니까?"

암살자들의 대장이 꺼낸 물음에도 루시온은 일단 자리에 앉았다.

"저는 흑마법사입니다."

태연하게 자신을 흑마법사라고 소개하는 모습에 대장은 '아 그렇군요'라고 대답할 뻔했다.

하지만 대장은 혹시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재차 물었다.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흑마법사입니다. 사전에 사람을 가려서 받냐고 물었고, 당신은 아니라고 대답했잖습니까. 지금 갑자기 말을 바꾸실 생각은 아니겠죠?"

루시온이 낮은 목소리를 내며 대장을 압박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의외라고 해야 할지. 제정신인 상태를 처음 봤다고 해야 할지. 음."

대장은 머뭇거리며 뒷덜미를 만지작거렸다.

"계속 말씀하셔도 됩니다."

루시온은 도중에 말이 끊기는 게 싫었기에 그를 재촉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는 만큼 흑마법사를 죽이는 의뢰가 생각보다 자주 오기는 합니다. 보통은 제정신이 아닌 상태죠."

"압니다."

암살자들의 대장이 말하는 흑마법사는 타락한 흑마법사였다.

제정신일 리가 있겠는가.

"그래서 제정신인 흑마법사는 처음 봅니까?"

루시온이 묻자 암살자들의 대장은 마치 민망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말을 섞은 것도 처음이고요. 그래서 놀란 것뿐이니 별다른 오해는 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오해하지 않습니다. 하멜이라고 합니다."

루시온이 손을 내밀었다.

"퀘이트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간단하게 계약서부터 쓰겠습니다."

"어떤 계약을 하실 생각입니까?"

계약이 익숙했기에 퀘이트는 눈만 깜박거리며 물었다.

강제로 누군가를 속박할 수 있는 건 마법 아이템뿐이었고, 사실 이것도 불법이라 암암리에 쓰이곤 했다.

전에 크라언, 슈트라, 헬론이 목에 달고 있었던 검은 목걸이가 대표적인 마법 아이템이었다.

목걸이에 마법이 걸려 있어 명령을 듣지 않으면 마법을 발동시켜 벌을 주거나 죽어버리는 용도로 쓰였고.

"조직에 있을 때는 조직을 배신하지 않는다, 조직에 나왔을 때도 비밀을 유지한다는 간단한 계약서입니다."

"혹시 어기면 죽습니까?"

무릇 간단한 계약서일수록 계약을 어겼을 때 따라오는 것들이 컸다.

"단지 죽기만 하겠습니까? 왜 다들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루시온이 생글거렸다.

103화. 차곡차곡

꿀꺽.

퀘이트는 괜스레 마른 침을 삼켰다.

눈앞에 보이는 이가 단지 마법사였다면 몰라도 상대는 흑마법사였다.

흑마법사가 자신이 볼 수 없는 무언가를 본다는 건 알고 있었다.

게다가 시체를 일으키는 힘까지 가지질 않았던가.

죽음 끝이 아니라는 말은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만약에 저희가 조직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나갈 수는 있습니까?"

"평생 입만 잘 다물 자신이 있으면요."

"일단 나갈 수는 있다는 말씀이죠?"

"그렇습니다. 조직이 맞지 않는다고 나가겠다고 하는 사람을 다짜고짜 죽일 수도 없잖습니까."

루시온이 농담 식으로 가볍게 키득거렸다.

하지만 퀘이트의 안색이 살짝 하얗게 질려 나갔다.

흑마법사와 싸워봤기에 그들이 얼마나 강하고 이상한 존재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암살자인 자신보다 더 어둠에 녹아들어, 조용하게 숨통을 조여오던 그 느낌이 문득 떠올랐다.

"…저기, 하멜 님."

곧 계약서가 될 종이를 열심히 채워 넣고 있는 모습을 보다 말고 퀘이트가 목소리를 냈다.

"말씀하십시오."

루시온은 글자가 튀지 않게, 자신의 필체임을 알아볼 수 없게 쓰느라 무척 신경을 쏟고 있었다.

퀘이트는 말을 꺼내기 전에 손가락을 입에 대 가볍게 휘파람 소리를 냈다.

주변으로 물러가라는 신호였다.

방이 하나라 보지 않아도 부하들이 문에 귀를 대고 있는 게 눈에 훤했다.

퀘이트는 부하들이 물러가는 소리를 들으며 그제야 목소리를 냈다.

"혹시 말입니다. 저, 이게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루시온은 말을 질질 끄는 퀘이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퀘이트의 시선이 흄에게 향했다.

"저는 하멜 님의 그림자 같은 존재이니 신경 쓰실 필요가 없습니다."

시선을 받은 흄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억지로 그녀를 내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퀘이트는 살짝 부끄러운 소리를 꺼냈다.

"사람이 죽으면 전부 빛의 신 곁으로 갑니다. 저도 미친 흑마법사를 만나기 전까지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루시온이 퀘이트가 무슨 이야기를 저렇게 질질 끄나 생각하던 차, 고해성사처럼 들려온 말에 피식 웃었다.

"예, 있습니다."

"…예?"

"사람을 죽였으니, 그 원한이 몸에 붙었는지 궁금하다고 물으려던 게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퀘이트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졌고, 루시온은 웃음기를 섞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있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아! 전에 러쉘이 저주라고 말했던 거 맞지?

루시온의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그래. 맞아.]

러쉘이 대답하자 라타가 기분 좋게 웃었다.

―이히히. 라타는 다 기억하고 있었어. 라타는 똑똑하니까.

"정말입니까…?"

퀘이트의 표정이 얼어붙었고, 루시온은 자신의 목을 가리켰다.

"여기에 저주의 증표가 있습니다. 혹시 최근에 흑마법사를 죽인 적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원래는 손을 대지 않으려고 했는데 돈이 급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퀘이트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얼마 전, 자신을 가리키며 광기 어린 미소로 죽어가던 흑마법사가 떠오른 탓이었다.

흑마법사가 세계의 적이나, 혹여 저주에 걸릴까, 누구도 그들을 처형하거나 죽이는 걸 꺼렸다.

하지만 거절하기에 보상이 너무도 커 어쩔 수 없이 손을 댔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어떤 집단의 흑마법사를 죽인 겁니까?"

루시온의 물음에 퀘이트는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임무 발설이야말로 암살자로서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이기 때문이었다.

"압니다. 암살자 내에서 임무를 발설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하지만 알려주지 않으신다면 저도 뭐라고 말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당당히 저주를 풀어주겠다고 말할 수 있는 실력에 도달하지 못했으니 루시온은 일단 간격을 재고 있었다.

[저주를 푸는 방법이 꼭 저주를 건 흑마법사를 죽이는 것만 있는 건 아니야. 흑마법사가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저주를 걸 때도 있거든.]

혹여 루시온이 궁금할까 봐 러쉘이 먼저 알려주었다.

[일단, 가장 빠른 방법은 퀘이트 머릿속에 새겨진 저주를 부수는 경우야. 그런데 잘못하면 정신이 무너질 수 있어. 효과가 좋은 만큼 위험도 역시 큰 셈이지.]

루시온은 러쉘의 말을 들으며 한참 망설이는 퀘이트를 바라보았다.

[두 번째로는 저주에 저주를 덮는 경우야. 이건 지금 불가능하니, 넘기고. 세 번째는 네 어둠을 퀘이트의 머리에 주기적으로 불어넣어서 저주를 흩트려 놓는 방법이야. 시간이 가장 오래 걸리지만, 가장 안전한 방법이지.]

러쉘은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금 전에 언급한, 너도 대부분 사람도 알고 있는 저주를 건 놈을 죽이는 방법. 물론, 지금 사항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지만.]

[마법이란 언제 들어도 참 복잡해.]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베델이 눈가를 찌푸렸다.

무슨 방법이 저렇게나 많은지.

"심합니까?"

몇 번이고 입술을 여닫았던 퀘이트가 드디어 목소리를 냈다.

"심합니다. 아마도 암살자 일을 그만둘 각오를 하셔야 할 정도입니다."

루시온은 러쉘이 알려주었던 사실을 살짝 바꿔 말해주었다.

"…황실입니다."

퀘이트가 속삭이듯 말했다.

저주가 엄청 두렵기는 한 모양이었다.

'황실과 흑마법사라.'

루시온은 금세 어떤 사건인지 짐작 갔다.

"혹시 로베리오 백작과 얽힌 흑마법사를 죽이는 일이었습니까?"

퀘이트는 티 나지 날만큼 고개를 끄덕였다.

'로베리오 얽혔던 공허의 손 소속 흑마법사인가 보네. 사건이 희한하게 얽히고 얽히네.'

루시온은 그게 참 신기하다 싶었다.

[하긴. 이게 제일 좋은 방법이지. 흑마법사의 꼬리도 못 잡았는데 괜히 황실이 흑마법사를 자극할 게 뭐가 있겠어?]

러쉘은 팔짱을 꼈다.

자신도 흑마법사였으나, 그들의 집착과 복수심이 얼마나 깊은지를 알고 있었다.

걸리면 재수 없는 정도가 아니었다.

퀘이트처럼 저주에 걸리든, 병에 걸리든 어디 하나가 망가진다고 생각하면 편했다.

[황실이라는 거대한 몸이 직접 움직이면 아무래도 잡음이 많이 들리겠지. …아쉬워. 미리 알았다면 죽이러 갔을 텐데.]

베델은 입맛을 다시며 검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뭐, 어쨌든 조직이 안정화될 때까지 암살자들을 묶어둘 구실이 생겼네.'

루시온은 두 사람의 의견을 떠나 지금 상황이 무척 만족스러웠다.

강제로 퀘이트의 목에 목줄을 걸 수 있다니.

'저 저주는 공허의 손 소속 흑마법사가 펼쳤겠지. …하지만 지금 써먹기엔 아까워.'

루시온은 공허의 손을 증오하는 이들이 늘어나길 바랐다.

그래야 공허의 손을 박살 내는 데 도움이 될 테니.

"좋습니다."

루시온의 입에서 긍정적인 말이 떨어졌음에도 퀘이트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어떤 조건이 있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저주를 풀기 위해서 지금으로서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빠른 만큼 위험도가 무척 높은 것, 느린 만큼 안정적인 것. 뭘 고르시겠습니까?"

루시온은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무 평범한 물음처럼 들려 퀘이트는 자신도 모르게 고민에 먼저 빠질 뻔했다.

"대가는… 왜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같은 조직원이 될 사이인데 대가는 됐습니다. 그냥 임무를 더 열심히 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 말에 퀘이트는 놀란 마음을 도무지 진정시킬 수 없었다.

그는 잠깐 루시온의 눈치를 살피다 목소리를 작게 낮췄다.

"점술가가… 얼마 뒤에 제게 귀인을 만난다고 말했습니다."

[뭐…?]

느닷없는 소리에 러쉘이 눈을 크게 떴다.

[으음....]

베델이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그녀는 이미 퀘이트가 코코렌 남작가로 가기 전에 알 수 없는 의식을 치르는 걸 보았기에 이쯤 되면 확신했다.

미신을 맹신하는 사람이라는 걸.

자신이 기사였을 때 아주 드물지만 이와 비슷한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이상한 게 아니라 으레 죽음과 가까이 사는 이들이 저마다 하나씩 가지고 있는 지병에 가까웠다.

"반드시, 제 인생을 바꿀 분이라 잡으라고 하더군요."

[캬아. 어딘지 몰라도 참 용하네.]

러쉘이 감탄하며 당장이라도 손뼉을 마주칠 기세였다.

"그럼, 저와 조직을 배신하면 더더욱 안 되겠네요? 점술가 말대로 제가 당신의 인생을 바꿔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루시온의 가면이 노랗게 물들었다.

농담인 듯했지만, 퀘이트는 이상하게 협박처럼 들려왔다.

정말로 눈앞의 흑마법사는 자신의 인생을 바꿔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렌탈, 지금 몇 시지?"

"오후 4시 12분입니다."

흄이 품에서 시계를 꺼내 확인했다.

"바쁘십니까…?"

퀘이트가 물었다.

루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 저녁 식사를 위해 안토니가 자신의 방에 들릴지도 몰랐다.

"예. 걸리면 큰일이거든요."

'신관에게 쫓기고 있는 건가?'

퀘이트의 눈동자가 살짝 위로 올라갔다.

"그래서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루시온은 퀘이트를 재촉했고, 그는 잠깐 생각을 멈췄다.

"후자입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희가 하멜 님의 문제를 깔끔하게 처리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아주 강하거든요."

안토니가.

"그럼 서명하시죠."

시간을 확인 후에 루시온의 마음이 급했기에 그는 종이를 두드렸다.

"…알겠습니다."

퀘이트는 펜을 잡고 생각했다.

대체 얼마나 강한 신관에게 쫓기고 있는 건지.

* * *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루시온은 움찔거렸다.

막 흄을 방에다 데려다주고 오는 길이었다.

'왜 벌써 와?'

불평을 터트리기 전에 루시온은 다급히 목소리부터 냈다.

"잠깐만."

옷가지를 벗고 대충 이불 밑에 쑤셔둔 뒤에 예쁘게 정돈된 옷을 다급히 입었다.

[나, 난 나가 있을게.]

베델이 순식간에 방을 벗어났다.

―빨리, 빨리!

라타가 정신없이 루시온 주변으로 돌아다녔다.

"정신 사나우니까, 돌아다니지 마, 라타!"

―아, 알았어!

돌아다니지 말라고 하니 라타는 이제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빨리, 빨리!

[푸하하핫!]

둘 다 난리가 나자 러쉘이 배를 잡고 크게 웃었다.

"…하."

루시온은 겨우 옷을 입고 숨을 내쉬었다.

그림자 이동으로 중거리, 단거리를 이동하고 어둠이 그림자 이동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차오를 때까지 뛰고.

이것도 여러 번 하니 체력 훈련 못지않게 힘들었다.

"들어오게, 안토니."

루시온은 곧 평온한 목소리를 내며 안토니를 불렀다.

"실례하겠습니다, 도련님."

안토니는 고개부터 숙였다.

"도련님."

그가 다시 고개를 들자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채고는 루시온을 불렀다.

"말하게."

"어딜 다녀오셨습니까?"

루시온에게 옅지만, 여러 가지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나보다 자네가 더 잘 알지 않은가."

루시온은 살짝 조여오는 안토니의 수사망을 피하고자 시치미를 뚝 뗐다.

"땀도 흘리셨고."

"안에서 운동했어."

"옷가지마저 헝클어지셨습니다."

"뭐,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은가."

"실례하겠습니다."

안토니가 루시온이 잘못 잠근 단추를 바로 하고, 구겨진 주름도 펴고, 바지에 살짝 들어간 옷도 빼내며 금세 루시온의 옷가지를 단정하게 정리했다.

홀린 듯이 안토니의 솜씨를 구경하던 러쉘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진짜 깔끔한 솜씨네. 괜히 집사장이 아니야.]

―응응. 흄도 잘하는데 안토니가 더 잘해.

라타도 엉덩이를 바닥에 깔고 안토니의 솜씨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가? 오늘은 평소보다 빨리 오지 않았나."

"오늘은 주치의를 만나야 하는 날입니다."

주치의라는 말에 루시온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벌써 그렇게 됐나?"

루시온에게 신력 알레르기가 있기에 당연하게도 크로니아 내에 주치의가 항상 대기하고 있었다.

입이 무겁고, 실력이 좋고, 루시온이 싫어하지 않으며, 크로니아에만 거주가 가능한 주치의를 찾아보니 몇 번이나 바뀌었는지 몰랐다.

"예. 벌써 그날입니다."

하지만 안토니가 말한 주치의는 정신과 의사였다.

"이제 만날 필요 없는 거 아니야?"

루시온이 슬쩍 말을 꺼냈다.

불과 한 달 전까지 끊었던 약을 다시 먹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왔지만, 이제 자신은 정말로 괜찮았다.

'…뭐, 완전히 괜찮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가주님의 명령이십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안토니는 고개를 숙였다.

"아니야. 용건은 그게 다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안토니가 갑자기 제 품을 뒤지더니 예쁘게 포장이 된 선물 상자를 꺼냈다.

러쉘이 금세 반응했다.

[텔라가 보낸 거네!]

얼마 전에 텔라가 루시온에게 보낸 편지에 루테온 가문이 또 루시온에게 도움을 받았다며 고맙다는 말과 함께 선물을 보낸다고 적혀 있었다.

"텔라 루테온 영애께서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안토니의 얼굴에 따스한 미소가 자리 잡았다.

104화. 차곡차곡(2)

―우오오! 선물이다!

라타가 다급히 일어나 안토니 주변을 빙그르르 돌았다.

"궁금하니, 라타?"

안토니가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라타에게 물었다.

―응! 라타는 선물 안에 뭐가 들었는지 너무너무 궁금해!

"라타가 마치 말귀를 알아듣는 것 같습니다."

안토니는 움직임을 멈추고 자신을 빤히 보는 라타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감탄이 흘러나왔다.

―맞아. 라타는 귀가 있기도 전부터 잘 들었어!

"…아차."

라타에게 손을 뻗던 안토니는 금세 자신의 무례를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아니야. 한 번 쓰다듬어줘. 엄청 기대하고 있네."

루시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토니는 잠깐 고민하다 선물부터 루시온에게 건넸다.

선물 상자를 받자마자 루시온은 이상하게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보자.]

러쉘이 선물 상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

러쉘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는가?]

복도가 시끌벅적하자 물러가 있던 베델이 돌아와 물었다.

[선물은 좋은데. 왜 또 빛이 깃든 물건을 주는 거지?]

[빛이라고? 나는 모르겠는데?]

러쉘의 대답에 베델은 상자를 살피다 말했다.

'빛이라고?'

뜻밖의 말에 루시온의 눈동자가 러쉘 쪽으로 옮겨갔다.

[약하지만 있어. 마치 저번에 루시온이 선물 받은 그 팔찌 같네.]

'라르비스의 눈물을 말하는 건가?'

루시온은 어서 선물 상자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의 표정을 확인한 안토니가 목소리를 냈다.

"그럼 저는 여기서 잠깐 기다리겠습니다."

"그래."

루시온은 상자를 들고 얼른 방으로 들어갔다.

'빛이 깃든 물건이라니. 설마 또, 헤인트가 얻어야 할 물건들은 아니겠지?'

루시온의 입가에 잠깐 미소가 어렸다 사라졌다.

설마.

[그렇게도 좋아?]

루시온의 미소에 러쉘은 빈정거렸다.

누군가 루시온에게 선물을 주는 건 기뻤으나, 하필 그 선물이 빛이 깃든 물건이라니.

―선물을 받으면 누구나 다 기뻐한다고 흄이 말해줬어.

라타가 벌써 책상을 올라 꼬리를 흔들며 기다리고 있었다.

루시온이 상자를 만지자 러쉘은 얼른 목소리를 냈다.

[열 때 조심해라, 루시온.]

아무리 빛이 약하더라도 일단 빛이 깃든 물건이었다.

어쩌면 루시온의 어둠에 반응해 빛이 커질 수도 있었고.

"조심하겠습니다."

[바로 사용할 생각도 하지 말고.]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지? 빛의 내성을 키운다고 아침에 저 브로치까지 사용하면 안 된다는 거? 지금은 팔찌의 빛만으로도 충분해.]

이어지는 러쉘의 말에 루시온은 잠깐 말을 멈췄다.

[루시온? 왜 대답이 없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루시온은 귀를 틀어막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상자를 뒤덮은 리본부터 풀었다.

안에는 편지와 함께 또 다른 상자가 보였다.

시선 너머로 라타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자꾸만 시선을 뺏자 루시온은 손을 잠깐 멈추고 라타를 보았다.

―안 돼, 루시온! 멈추지 마! 라타가 너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어. 빨리, 빨리 열어줘!

라타의 앞발이 다급하게 동동 움직였다.

루시온이 다시 상자에 손을 뻗자 라타의 눈동자가 초롱초롱하게 빛이 났고, 손을 떼자 급격히 식어갔다.

몇 번 반복하려 했지만, 라타가 루시온의 손에 앞발을 올리며 제법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루시온! 라타는 지금 장난할 기분이 아니야!

루시온은 피식 웃다 상자를 열어보았다.

―우오오오오!

라타가 내지르는 소리와 함께 베델이 덩달아 입꼬리를 높이 올렸다.

[예쁘다.]

상자 안에는 나뭇가지에 걸린 꽃들이 세밀하게 표현된 브로치가 있었다.

꽃 속에 박힌 보석들은 물론, 나뭇가지 사이에 커다란 보석은 한눈에 보아도 예사롭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저 보석에서 빛이 새어 나오는 게 아닌가 싶었다.

'자, 기억해보자.'

루시온은 브로치를 살피며 자신의 기억에 의존했다.

소설 내용을 통째로 기억하는 이상한 능력.

자신이 왜 이런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깊게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애초에 머리를 맞았다고 과거 기억을 알게 되는 것부터 이상했으니까.

곧 루시온은 마른 침을 삼켰다.

'…뭐지?'

저 브로치 역시 헤인트가 제국을 돌아다니다 손에 넣었던 빛의 힘을 증폭시켜주는, 성물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이번에도 텔라가 헤인트의 물건을 내게 줬다고?'

저번도 우연, 이번도 우연이라면 이쯤 되면 텔라에게 어떤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빠르지 않을까 싶었다.

루시온은 브로치를 내려놓고 텔라의 편지를 읽었다.

―안녕하세요, 공자님. 그간 잘 지내셨나요? 공자님 덕에 루테온 은행도 평온을 되찾고 요새 눈코 뜰 새도 없이 바빠졌답니다. 아마 조만간 다른 지역에도 새로운 은행을 개점할 수 있을 듯합니다.

저번 편지에서는 쥐쟁이를 잡아줘서 고맙다는 말이 가득 적혀 있었다.

새로운 지점이 열린다는 걸 봐서 아무래도 그 뒤로 일이 잘 풀린 모양이었다.

'암. 잘 풀려야지. 나도 루테온 은행의 VVIP가 됐는데.'

덕분에 은행에 맡긴 돈의 이자가 얼마나 달콤한지 몰랐다.

―이 브로치는 절대로 뇌물도 아니고 루테온 가문과 상관없는, 저번 팔찌와 비슷한 상황의 물건 중 공자님하고 어울리면서도 제일 가치가 있는 걸로 보내드렸으니 부디 편하게 받아주셨습니다.

라르비스의 눈물과 비슷한 상황이라면 은행에 물건을 맡긴 소유자가 죽어서 가족들이 제시간 안에 찾아가지 않아 은행 소유가 되는 걸 말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 헤인트가 돌아다니지 않았기 때문인가?'

―제 개인적인 감사의 선물과 가문에서 보낼 선물은 조만간 크로니아에 도착할 겁니다.

[또 선물을 보내? 아니다, 보낼만하지. 암, 어떻게 보면 루시온 네가 루테온 가문을 살린 건데 은행 지점 하나 정도는 받아도 될 만큼 크지.]

"스승님."

루시온은 편지를 빤히 보고 있는 러쉘을 쳐다보자 그는 자연스럽게 눈길을 돌리더니 애써 기침을 내뱉었다.

[…크흠. 눈이 좋아져서 큰일이야.]

―(중략) 아, 이건 추신입니다! ◇추신◆ 누군가 라르비스의 눈물을 물어봤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공자께 드린 팔찌요. 직원이 말하는데요, 누가 물었는지 얼굴이 가려져서 모른다고 하네요. 혹시나 몰라 편지에 남깁니다.

'팔찌를… 물어봤다고? 다 지난 후에 왜?'

루시온은 괜히 찝찝해졌다.

하지만 이미 자신의 손에 들어온 이상 돌려줄 생각은 없었다.

그 팔찌 덕에 요새 빛 내성이 늘어나는 속도가 엄청 빨라졌기 때문이었다.

루시온은 편지를 고이 접고는 브로치를 툭 하고 건드렸다.

'이건 약간 방패처럼 쓰였지? 이렇게 건드린 후에 내 어둠을 불어 넣으면 브로치 안에 있던 빛이 놀란 듯이 튀어나오....'

[루시온…!]

러쉘이 목소리를 높이자 루시온은 깜짝 놀랐다.

[방금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잖아. 여기서 피를 토해봐라. 집안이 난리 난다. 당장 손가락 내려.]

루시온은 자신의 손가락에서 튀어나온 어둠을 다급히 집어넣고는 미소를 내보였다.

[이건 웃어도 안 통하니까, 브로치를 상자 안에 넣고 나중에 건드려 봐.]

[…그럼 나중에는 건드려도 되는가?]

베델은 러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멈칫했다.

루시온이 빛의 내성이 있다는 말을 들었어도 직접 빙의해본 결과 빛은 여전히 그에게 있어 날카로운 검과 같았다.

[말려도 건드릴 텐데, 어쩌겠어.]

러쉘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루시온은 아쉬운 표정으로 편지와 브로치가 든 상자를 서랍에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었지, 베델? 너도 말릴 생각하지 마."

하지만 곧 루시온의 입꼬리가 자랑스럽게 올라갔다

* * *

'…가르티오 뭰. 가르티오 뭰.'

헤인트는 여전히 수상쩍은 놈을 머릿속에 계속 생각했다.

'안 되겠다. 쉬는 날에 제대로 조사해봐야겠네.'

"…헤인트 트리아 경? 헤인트!"

뒤이은 큰 소리에 헤인트는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5황자인 세틸 테슬라 역시 덩달아 놀라서는 곧 얼굴을 찌푸렸다.

"실례했습니다, 저하."

"황실 복도에서 왜 다른 생각인가?"

"그게 말입니다...."

"날 따라오겠나? 나는 마침 경에게 볼일 있던 참이네."

세틸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예. 따르겠습니다."

헤인트는 고개를 숙였다.

"루시온 공은 어떠한가?"

복도에 발소리만 들릴 무렵 세틸이 목소리를 냈다.

"잘 지내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 카슨 공이 바빠 연락을 못 했고요."

"그러한가?"

말을 아끼는 듯한 세틸의 반응에 헤인트 역시 그의 방에 들어설 때까지 더는 묻지 못했다.

"노비오 공과 카슨 공이 현재 크로니아 저택을 비운 상태네."

세틸은 자신의 방으로 와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쉬잇.

당혹스러운 헤인트의 표정에도 세틸은 목소리를 낮추길 지시했다.

헤인트는 고개를 끄덕였고, 세틸은 방 안에 또 다른 방으로 들어와서야 원래 목소리를 내었다.

"나도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변경에 문제가 생긴 모양일세."

"뉴브라 왕국 때문입니까?"

"아마도 그렇겠지. 그게 아니라면 두 사람이 같이 움직일 이유가 없을 테니까."

'그럼, 지금 저택에 루시온 혼자 있다는 말이잖아?'

헤인트는 신경을 쓰지 않을래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속한 제8 기사단은 루시온을 위해 탄생 되었고, 루미노스 말고 루시온을 노리는 또 다른 단체의 존재를 직접 확인하지 않았던가.

'뭐 하는 거야, 카슨? 너라도 저택을 비우면 안 되지.'

원래 제8 기사단은 루시온 곁에 있어야 하나, 변경을 생각해 황실이 한발 뒤로 물러난 상태였다.

"내가 이 말을 왜 자네에게 꺼낸 줄 알고 있나?"

세틸이 물었다.

"루시온 공 때문입니까?"

"맞네. 동시에 황실을 위해서이기도 하지."

세틸은 자리에 앉았고, 헤인트는 서 있었다.

"황실 기사단 쪽에 로베리오 백작과 연관된 이들과 얽힌 자들이 골고루 퍼져 있는 상태네. 즉,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는 말일세."

세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폐하께서는 변경을 믿고 계시지. 나 역시 그렇고. 하여, 변경의 차기 지배자라 불리는 카슨의 친우인 헤인트 경 역시 믿고 있네."

"영광입니다, 저하."

"혹시 최근에 기사단에서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 이가 없던가?"

헤인트는 이 말이야말로 세틸이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는 걸 알았다.

황실 기사단이 되자마자 제일 먼저 들은 소리가 '차기 황제가 될 황자, 황녀 중 줄을 잘 서야 살아남는다'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헤인트는 그 사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세틸이야 말로 제8 기사단을 진정으로 아꼈으니.

"있습니다, 저하."

"누구인가?"

"가르티오 뭰입니다."

한 치도 망설이지 않는 헤인트의 말에 세틸의 얼굴에 어느덧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대는 참 망설임이 없네. 만약 이게 다른 형제들의 덫이었다면 어쩔 뻔했는가."

"저하께서 그러실 리가 없으니까요."

헤인트의 눈동자에 흔들림이 없었다.

"그래. 나를 믿어줘서 고맙네, 헤인트 경."

세틸이 미소를 지으며 헤인트에게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저하, 이건 무엇입니까?"

"듣자 하니, 빛을 강화해주는 물건이라고 하더군. 이번 루미노스 일로 자네의 공을 높이 판단한 폐하께서 직접 내리신 물건일세."

"...!"

"원래는 폐하께서 자네에게 직접 주어야 하나, 황실은 당분간 적과 아군을 구분하기 위해서 조용히 있을 셈이네."

"아, 아닙니다. 저는 결코 보상을 바라서 한 일이 아닙니다!"

헤인트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자신에게 온 그 이상한 편지가 90% 이상을 다 해 먹지 않았던가.

"제8 기사단, 헤인트 트리아 경."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진중한 세틸의 목소리에 헤인트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예, 저하."

"자네가 보았다던 까마귀 문양을 가진 조직을 알아내는 건 물론, 가르티오 뭰을 조사하게. 이는 폐하의 명일세."

"소신, 명을 받들겠습니다."

* * *

[…루시온?]

러쉘이 책상 앞에서 멍하니 있는 루시온에게 다가가 손을 휘둘러보았다.

분명 두 결과가 모두 좋았다.

루시온의 정신도, 부서진 팔도.

하지만 의사에게 갔다 와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루시온은 빈 노트를 펼쳐 하염없이 벽만 바라보고 있었다.

[내버려 둬, 러쉘. 루시온 공이 해야 할 일이 많을 테니 머릿속이 얼마나 복잡하겠나.]

베델은 러쉘을 잡고 당겼다.

[그렇긴 해도 이런 모습은 처음인데…?]

러쉘은 베델에게 끌려가면서도 루시온에게 눈길을 떼지 않았다.

―상처가 정말 늦게 나으십니다.

의사의 목소리가 루시온의 귓가에 맴돌았다.

내내 미뤄뒀던 현실과 갑자기 맞닿는 기분을 느꼈다.

'…그래. 상처가 너무 늦게 나아.'

루시온은 펜을 내려놓고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한 손가락을 썼으니 다 나을 때까지 남은 기회는 9번인가.

―그거 아홉이야! 라타는 숫자를 아주 아주 완벽히 알고 있어.

루시온의 무릎에 앉아 있던 라타가 책상에 매달려서는 배시시 웃었다.

"스승님, 있잖습니까."

[어, 그래!]

러쉘이 활기찬 목소리를 냈다.

"상처가 빨리 낫는 흑마법은 없습니까?"

소설에서 보면 잘린 팔을 뚝딱 붙이는 흑마법사도 있었는데.

[있지.]

러쉘의 표정이 금세 일그러졌다.

"그럼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여러 가지가 있지. 물론, 타락한 흑마법사가 되는 빠른 길 중 하나인데 해 볼래?]

"아닙니다. 못 들은 척해주십시오."

루시온은 스르르 책상에 얼굴을 기대서는 눈을 깜박거렸다.

'역시 미엘라가 만들 빛을 흡수해 빛이 가진 재생력만 저장하는, 그 아이템밖에 없는데. 이걸 내가 먼저 말할 수도 없고.'

지이잉.

그때, 연락용 아이템에 진동이 울렸다.

105화. 차곡차곡(3)

'누구지?'

루시온은 일단 가면을 꺼내 썼다.

<하멜 님!>

미엘라였다.

타이밍이 왜 이렇게 좋은지.

루시온의 목소리가 절로 밝아졌다.

"예, 미엘라 씨."

<괜찮으세요?>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크라언 님이 하멜 님의 상태를 매번 걱정하시던데 정말로 목소리가 좋지 않네요. 나중에 통화할게요.>

"아닙니다. 지금 통화할 수 있습니다."

미엘라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몰라 루시온은 살짝 기대에 젖어 있었다.

혹시나 미엘라의 역작, 빛을 흡수해 빛이 가진 재생력만 저장하는 그 아이템을 언급하는 게 아닌가 하고.

<정말요?>

"예. 괜찮습니다."

'으음' 하고 미엘라가 말꼬리를 늘이다 조심스레 목소리를 꺼냈다.

<제 아이템들을 모조리 훔쳐서 하멜 님께 손목이 뎅강 잘린 그 쓰레기들을 기억하시죠?>

"기억합니다."

<아이템을 다 돌려받은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아이템이 가짜였네요. 빌어먹을. 임시 작업장을 빨리 정했어야 했는데 이놈의 집구석이 너무 넓어서. …아, 하멜 님을 탓하는 건 절대 아니에요.>

미엘라의 목소리가 순간 날카로워졌다가 금세 눈이 녹듯 풀렸다.

지금 목소리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루시온은 갑자기 다급해졌다.

미엘라가 가진 가장 중요한 아이템이 무엇이겠는가.

"그 아이템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아니, 크라언 씨도 알고 있는 사실입니까?"

크라언이 알았다면 헬론을 움직여 정보를 알아냈을 테지.

<아니요, …그게, 음. 혹시 조직의 돈을 빌려도 될지 여쭤보려고 연락했어요. 나머지는 정말, 정말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돈이라뇨?"

<그러니까....>

미엘라가 말꼬리를 계속 늘렸다.

"미엘라 씨. 돈 문제는 정확해야 합니다. 말하지 않으면 저도 함부로 돈을 내어줄 수 없습니다."

<제가 만든 물건이.>

미엘라는 그제야 목소리를 죽이며 우물쭈물 말을 시작했다.

<남부에 있는… 미안해요, 장소는 들었는데 그때 너무 황당해서 지금 기억이 나질 않네요. 장소는 다시 헬론 씨한테 물어볼게요.>

"괜찮습니다. 차분히 말씀해 보세요."

루시온의 말에 러쉘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미엘라보다 루시온 네가 침착해야 할 것 같은데? 다리를 갑자기 왜 이렇게 떨어?]

원치 않았지만, 루시온은 조바심이 났다.

애초에 미엘라를 조직에 끌어들인 건 그녀가 만들 역작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역작이 사라졌다는 게 아닌가.

―라타가 매달려도 돼?

라타는 달달 떨리는 루시온의 다리를 보며 너무나도 재미있겠다는 표정을 했다.

루시온은 라타를 자신의 무릎에 앉혀 쓰다듬었다.

"…하."

손가락에 보드라운 촉감이 감도니 루시온은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혹시 화났어요?>

"아닙니다. 제가 화를 왜 내겠습니까? 계속 말씀하십시오."

<헬론 씨가 말하길, 제가 만든 아이템이 경매장으로 넘어갔다고 하는데. 아마 고가로 팔릴 가능성이 크대요. 그건 당연한 사실이라서 별로 화는 나지 않아요. 하지만 제가 진짜 화가 나는 건 따로 있어요.>

[보통 여기에서 화를 내는 게 맞지 않아?]

러쉘이 자신의 뒷덜미를 만지작거렸다.

<그거 미완성이에요! 진짜 부끄러워서 고개를 어떻게 들지 모르겠어요! 미완성인 제 마법 아이템이 경매장에 나가다니…! 아. 죽을 것만 같아요.>

미엘라의 말은 무척 빨랐고, 그만큼 격앙되어 있었다.

"미완성이 더 걱정입니까?"

듣다못해 루시온이 물었다.

<당연한 소리죠! 차라리 바꿔치기 당한 상태로 물에 빠지든, 망가지는 게 훨씬 나을 정도라고요. 이건 최악이에요, 최악!>

미엘라는 여전히 흥분한 채로 목에 힘을 강하게 주었다.

"그래서 경매장은 언제 열립니까?"

마침 루시온은 남부에 볼일이 있던 참이었다.

어차피 대장장이 자마드를 위해서 광산을 얻어야 했고, 덤으로 자신의 정보를 팔던 적의 3번 보고 지점도 박살 내면 좋았다.

<이번 일은 제 책임이니 제가 알아서 할게요.>

"미엘라 씨는 이제 조직원이잖습니까."

<그럼, 크라언 님한테 부탁해볼게요. 저도 크라언 님처럼 하멜 님께서 일을 너무 많이 하신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미엘라의 역작은 반드시 자신이 손에 넣어야 했다.

그 누구한테도 뺏길 수는 없었다.

<저, 하멜 님....>

미엘라는 다시 망설이며 루시온을 불렀다.

<죄송해요.>

"죄송할 필요 없습니다. 미엘라 씨를 조직에 끌어들인 건 다름 아닌 저입니다."

<그게 아니라, 그 아이템을 완성 시켜서 하멜 님께 드리려고 했거든요.>

"아이템을 저한테요?"

루시온은 짐짓 놀란 목소리를 냈다.

<처음에는 신력 알레르기를 가진 사람을 보고 만들었지만, 저번 체프란 저택을 얻는 과정을 보니 하멜 님께 드려야겠다고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보니까, 하멜 님은 앞으로 계속 위험한 행동을 할 것 같아서요.>

[정확하네. 루시온은 저기가 불구덩이라고 해도 필요하면 뛰어들 테니까.]

러쉘이 낄낄 웃으며 땅을 가리켰다.

루시온은 잠깐 가면을 벗어 억울한 표정으로 러쉘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바보도 아니고 왜 불구덩이에 왜 뛰어들겠는가.

루시온은 다시 가면을 썼다.

"대체 어떤 아이템이길래 그렇습니까?"

<미완성이라서 아직 이렇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는 없지만, 일단 저는 빛이 가진 재생력만 흡수해서 그걸 저장하고 다시 내보낼 수 있는 치료용 아이템을 만들고 있었어요.>

[…뭐라고?]

방금까지 낄낄 웃던 러쉘이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얼이 빠진 얼굴로 재차 물었다.

[베델.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아?]

[그래. 제대로 들었어. 저게… 애초에 가능한 일인가?]

베델도 러쉘 못지않게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루시온은 입을 열지 않고 마치 아이템의 존재를 처음 안 사람처럼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반응했다.

'그렇지. 역시 이거일 줄 알았어.'

가슴이 뛰었다.

소설에서는 사라졌지만, 지금은 반드시 완성되어야 했다.

<현재 20% 정도는 완성한 상태에요. 그러니까 빛을 흡수할 수 있는 정도죠.>

"지금 빛을 흡수할 수 있는 아이템도 없지 않습니까. 가격이 높게 매겨질 만합니다."

이는 사실이었기에 루시온은 놀란 목소리로 반응했다.

<…하멜 님의 반응을 들어보니 역시 이건 위험한 아이템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제 고민이 옳았어요.>

'…뭐?'

갑자기 돌아가는 분위기가 이상했다.

<하지만 세상에 단 하나. 이것만큼 완성해서 하멜 님에게만은 드리려고 해요.>

루시온은 뒤늦게 숨을 내쉬며 순간 새어 나온 땀을 닦았다.

너무도 무서운 말이었다.

<그…, 하멜 님. 어쨌든, 제가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정말 빈말이 아니라, 하멜 님께 너무 미안해서 그래요. 제가 계속 받기만 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너무 미안해요.>

"그럼, 일단 알겠습니다."

루시온은 간절히 비는 듯한 미엘라의 목소리에 더는 밀어붙이질 못했다.

사실 꼭 자신이 가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라 러쉘과 크라언이 자신을 뜯어말릴 것만 같았다.

<네. 꼭 맛있는 것도 챙겨 드시고, 잠도 푹 주무세요. 절대로 끼니를 거르면 안 돼요.>

대체 크라언에게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가진 돈이 많으면 잘 먹고 잘 자는 건 자연스레 따라오는 생각이 아닌가.

"…알겠습니다."

루시온은 껄끄러움을 숨긴 채 대답했다.

연락이 끊고 그는 가면을 벗었다.

"베델."

[듣고 있어.]

"내가 불쌍해 보여?"

[…그게 무슨 소리인가?]

"아니 크라언도 그렇고 미엘라도 하는 말을 들어보면 내가 엄청 혹사하는 것 같아서."

[솔직히 말해도 되겠나?]

"그래."

베델은 침대를 가리켰다.

[루시온 공은 쉴 필요가 있네. 어서 누웠으면 해.]

루시온의 눈동자가 베델과 반대쪽으로 향했다.

베델이라면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이야기를 할 것 같았는데.

러쉘이 낄낄 웃었다.

[베델이 제대로 봤네. 그러니까, 경매장 일은 손 떼, 루시온. 거기까지 신경 쓰다가는 몸이 두 개라도 모자라. 일단 어떻게 남부로 갈 건데? 동부는 샤엘라라도 있지. 남부에는 아무것도 없잖아?]

"…행복이라는 목표가 왜 이렇게 까마득한지 모르겠습니다."

앞에 '죽지 않고'라는 말을 뺏지만, 루시온의 말은 자연스레 이어졌다.

―루시온은 행복하지 않았어? 라타만 행복했던 거야?

라타가 큰 충격을 받은 듯이 꼬리가 축 처졌다.

"아니. 내가 원하는 행복이 조금 특별해서."

―어떻게 특별한데?

라타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음."

루시온의 말꼬리가 늘어졌다.

죽지 않고 계속 살고 싶다는 말을 어떻게 잘 표현할 수 있을지 생각하다 그냥 입을 다물고 라타를 쓰다듬었다.

―라타는 루시온의 마음을 읽을 수 없어서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데.

"나중에 말해줄게."

루시온은 라타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어디 가게?]

"아버지하고 연락해보게요. 아버지와 이어진 연락용 아이템을 안토니가 가지고 있거든요. 잘 도착했는지 알고 싶네요."

루시온이 싱긋 웃었다.

* * *

"안토니가 뭐라고 합니까?"

카슨은 성벽에 올라 서 있는 노비오에게 걸어갔다.

제국의 가장 끝에 있는 성벽은 언제나 산꼭대기처럼 높아 변경 너머로 펼쳐진 바위지대가 한눈에 보였다.

두껍고, 두꺼운 저 벽이 부서지고, 고쳐지기를 얼마나 반복했던가.

이 성벽에 처진 결계만 해도 몇십 개이던가.

죽은 이들을 무덤으로 만들었다면 이미 성벽의 높이를 훌쩍 뛰어넘었겠지.

하지만 그 앞에 늘 개미처럼 몰려들었던 적이 오늘은 없었다.

카슨은 익숙하던 풍경이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졌다.

"습격이 있었다더구나. 누가 암살자를 보냈는지, 루시온의 지시로 조사하고 있고. 아, 칼은 내가 휘두른다고 루시온에게 전해달라고 했다."

노비오의 시선은 성벽이 아닌, 크로니아의 저택이 있는 곳을 향했다.

카슨 역시 노비오의 시선을 따라갔다.

"뻔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 뻔하지. 하나, 그 뻔함도 참으로 화가 나는구나. 뉴브라 왕국이 이번에는 또 무슨 수작을 부린 건지 알아내야 한다는 것 역시 화가 나는구나."

노비오는 숨을 내쉬고 카슨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어찌 되었더냐."

새벽에 강가 근처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마치 누군가에게 보라는 듯 너무도 정직하게 피어오른 불꽃에 노비오는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흑마법사입니다. 이미 신관들을 통해 확인을 끝낸 뒤입니다."

"카슨."

"예, 가주님."

"뉴브라 놈들이 사라지고, 변경에 흑마법사가 나타났다. 어찌 생각하더냐?"

"뻔하지요. 놈들은 늘 뻔합니다. 제국을 넘보기 위해서 이제는 손을 잡으면 안 될 이들에게 손을 내민 게 분명합니다."

"또… 루시온을 노리겠구나."

노비오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루시온은 성자가 되었다.

세상에서 유일한, 신수의 축복을 받은 이가 되었다.

흑마법사가 성자를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질 않은가.

"그렇습니다, 가주님."

"내 결단이 남은 상태야. 내 결단이."

루시온이 성자가 된 후로 노비오는 입에도 담기 싫은 '빛'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흑마법사를 내쫓기 위해서 빛의 힘이 필요한 상태였으니.

지이잉.

눈치도 없게 울리는 연락용 아이템의 소리에 노비오는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왜 그런가, 안토니? 자네답지 않게 왜 이렇게...."

<아버지.>

짧고 강렬한 목소리에 노비오의 눈가가 부드럽게 휘었다.

루시온이었다.

"루시온입니까?"

카슨이 슬쩍 입가를 가렸다.

노비오를 저렇게 웃게 하는 사람은 루시온뿐이니 눈치를 채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연락해서 죄송합니다. 혹시 지금 저와 말씀을 나누실 수 있습니까?>

"괜찮다."

근엄한 목소리와 달리 노비오의 눈가는 계속 휘어진 상태였다.

<탈 없이 도착하셨습니까?>

"그래, 루시온."

<밥은 드셨습니까?>

"넌 어떠냐? 집에 좋지 않은 일이 있었다고 들었다. 잠은 잘… 잤더냐?"

<개운하게 잤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버지께서 열심히 일궈놓은 이들이 아닙니까?>

"그래."

노비오는 기어코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의 인생을 바쳐 쌓아왔던 모든 것들을 아들 입에서 칭찬받을 줄이야.

기분이 꽤 괜찮았다.

"루시온."

<예, 아버지. 듣고 있습니다.>

"내일 다시 카슨이 저택에 돌아갈 테니, 안토니에게 그렇게 전해주거라."

<그래도 됩니까…? 뉴브라 왕국에서 이유 모를 행동하지 않았습니까?>

"그 문제는 이미 해결됐다. 그러니 더는 걱정하지 말고 몸 건강히 잘 있거라. 오늘 네 결과가 좋다는 걸 들어 무척 기쁘구나."

<알고 계셨습니까?>

살짝 머뭇거리는 듯, 뜻밖이라는 듯, 루시온의 당황한 목소리에 노비오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당연하지 않더냐. 너는 내 아들인데."

106화. 차곡차곡(4)

<....>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자 노비오는 살짝 섭섭한 표정을 했다.

<저도… 아버지의 아들인 게 너무도 자랑스럽습니다.>

하지만 귀를 겨우 기울여야 들을 수 있을 만큼 작은 목소리에 노비오는 너무도 환하게 웃었다.

뚝.

연락이 끊기자 노비오의 웃음소리가 높아졌다.

"그렇게도 좋으십니까?"

카슨이 물었다.

"부럽더냐?"

"이해합니다."

노비오는 여전히 자신의 눈에는 어린아이 같은 카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특하구나."

루시온과 다르게 무덤덤한 목소리였지만, 카슨은 그 반응이 익숙했다.

"아버지께서는 이곳에 남을 생각입니까?"

"놈들과 어울려줘도 나쁘지 않겠다 싶구나. 요새 서류에만 시달렸더니 온몸이 뻐근하고. 잠깐 놀다 오마."

"알겠습니다. 저는 바로 출발하죠."

"내가 분명히 너는 내일 간다고 말하지 않았더냐?"

"빈손으로 집에 돌아갈 순 없잖습니까. 내일은 루시온이 좋아하는 마카롱 가게가 쉽니다."

"가거라."

노비오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카슨은 슬쩍 고개를 돌려서는 웃음을 힘껏 참아냈다.

* * *

저녁 식사 후, 느닷없이 집으로 돌아온 카슨의 귀환에도 루시온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반가웠다.

노비오가 자신이 보낸 메시지를 제대로 읽었다는 걸 증명하는 셈이니.

―내일부터 조용히 밖에 나가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카슨은 조금 전 마카롱을 건네며 노비오의 전언도 함께 가져왔다.

우물우물.

루시온은 마카롱을 먹으며 소파에 늘어져 있었다.

편해 보이는 모습과 달리 계속 어둠을 빙그르르 돌리고 있어 땀이 삐질삐질 흘러내렸다.

―아.

라타가 입을 벌렸고, 루시온은 마카롱을 넣어주었다.

"어때, 살살 녹지?"

루시온이 키득거리며 물었다.

외출 금지가 빨리 풀린 것도 좋았지만, 역시 제일 마음에 드는 건 카슨이 사 온 마카롱이었다.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제과점에서 파는 마카롱이 아닌가.

우물거리던 라타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갔다.

―홉! 라타가 매일 먹던 그 맛이 아니야! 너무 맛있어! 라타는 먹기 위해서 태어났나 봐!

[그렇게 기쁜가?]

베델이 라타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응! 라타는 지금 엄청 행복해!

[루시온. 경매장 일은 깔끔하게 포기한 거지?]

막 마카롱 하나를 더 입에 넣으려던 차 루시온은 마카롱을 손에 쥐며 러쉘을 바라보았다.

"완전히 포기한 게 아니라서 계속 생각하고 있습니다."

동부로 가려면 샤엘라의 다음 편지를 기다려야 했다.

그 편지가 언제 올지도 모르니 지금은 시간이 있었다.

'크라언한테 암살자를 구했다고 연락해야지.'

우물우물.

[루시온.]

"예, 스승님. 저 지금 놀고 있는 거 아닙니다. 자세는 이래도 훈련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으십니까?"

러쉘의 목소리가 살짝 낮아 루시온은 그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거 말고.]

"텔라가 준 브로치의 빛은 곧 확인할 겁니다. 말리셔도 소용없습니다. 저는 빛의 내성을 키우는 데 이용할 테니까요."

빛의 내성이 단계가 올라갈수록 더 많은 빛이 필요해지는 건 사실이었다.

텔라의 선물은 무척 유용했다.

[…독한 놈. 그걸 또 아침에 쓰려고? 라트초에 팔찌에 이젠 브로치까지…? 안 돼. 나중이라면 몰라도 아직 브로치까지는 허락할 수 없어.]

러쉘의 목소리가 점점 올라갔다.

"이 이야기가 아니셨습니까?"

루시온은 마카롱을 한입 베어 물며 눈을 깜박거렸다.

베델이 두 사람의 대화에 웃음을 터트렸다.

보고만 있어도 재미있었다.

스승과 제자 사이가 참 좋아 내심 부럽기도 했고.

[좀 쉬라고.]

러쉘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베델이 웃음을 뚝 멈췄고, 루시온이 벌떡 일어났다.

"아프십니까? …아니지. 유령이 아플 수 없잖습니까.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왜 그러긴. 내 제자가 걱정돼서 그렇지. 네가 조직의 모든 일을 감당하지 않아도 되잖아. 지금은 베델이 말한 대로 쉬어도 되지 않을까 싶네. 훈련하면서 말이야.]

"...?"

루시온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만지작거렸다.

훈련과 쉬는 게 어떻게 공존할 수 있단 말인가.

[아. 평소의 러쉘이다. 깜짝 놀랐어.]

베델은 놀란 자신이 민망한지 투구 덮개를 괜히 만지작거렸다.

―아.

라타가 입을 벌리자 루시온은 러쉘을 빤히 쳐다보며 마카롱을 넣어주었다.

[루시온. 훈련을 훈련이라고 생각하면 힘들어. 삶의 일부. 뭐 이렇게 생각해야 편하지. 아까 네 모습은 누가 봐도 한가로운 귀족의 모습이지만, 계속 어둠을 돌리며 훈련하고 있잖아?]

"스승님께서 매번 언제든 어둠을 움직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렇지. 내가 쉴 때도 계속 돌리라고 말을 했지? 그러니 봐봐,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이니 얼마나 좋아? 잘했어, 루시온.]

러쉘의 칭찬에도 루시온은 전혀 기쁘질 않았다.

생각해보니 지금 마카롱을 먹고 있는 도중에 왜 어둠을 돌리고 있던 건지 의문이 들었다.

'…이게 세뇌인가?'

루시온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내일 나갈 일도 없겠다. 이참에 쉬면서 훈련도 하자. 강령술을 쓴 뒤에 적한테 목덜미를 붙잡히는 일은 없어야 하잖아.]

"일단 크라언한테 연락부터 하겠습니다."

루시온은 슬쩍 상황을 빠져나가고자 말을 돌렸다.

카슨도 왔겠다, 러쉘처럼 훈련하자고 말이 나올 것 같아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달리기로 체력을 다 쓰고 어둠을 움직이는 훈련은 정말로 못 할 짓이었다.

러쉘의 눈이 가늘어졌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 * *

다음 날.

아니나 다를까, 아침 식사 시간에 카슨이 훈련을 시작하자며 말을 걸어왔다.

아침밥도 아직 소화가 덜 됐거늘, 루시온은 일단 달렸다.

오랜만의 달리기에 숨이 막 차오를 무렵 카슨은 재활 운동에 필요한 동작을 하나씩 알려주며 천천히 조심스럽게 루시온을 도왔다.

이미 좋지 않은 형태로 굳어져 버린 몸들이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기 위한 새로운 자세에 비명을 질렀고, 그건 루시온 역시 마찬가지였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다 못해 땀이 금세 흘러내려 연무장을 적셨다.

하나. 둘.

카슨의 입에서 늘어나는 숫자를 따라 몸이 삐거덕거리는 듯한 느낌까지 받았다.

루시온이 휘청거리자 카슨은 거기서 숫자를 멈췄다.

"고생했다."

카슨은 수건과 물을 건네며 훈련을 따라와 준 루시온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방으로 갈 수 있겠더냐?"

"…좀 쉬다 가겠습니다."

"금방 씻을 수 있게 흄에게 말해두마."

카슨은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잘했어, 루시온.]

재활 훈련 내내 안타까움에 얼굴을 찌푸리고 있던 러쉘이 겨우 목소리를 냈다.

생각한 것보다 루시온의 몸은 엉망이었다.

―맞아. 잘했어, 루시온.

라타가 꼬리를 흔들며 말했다.

"베델. 형님이 가르쳐 준 동작을 전부 기억했어?"

루시온은 땀을 닦으며 베델에게 말했다.

재활 훈련을 거듭할수록 자신의 몸이 납덩어리가 되어버렸다는 게 느껴져 분했다.

모두가 걸을 수 없다고 말했을 때, 자신은 절망하지 않았다.

이미 절망이 무엇인지 알아버렸으니까.

온몸이 으스러지는 그 고통보다 훨씬 가벼웠으니까.

목발도 버리고 걸어 다닐 수 있을 때, 이제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했거늘.

'이러면 안 돼. 이러면.'

어쩌면 카슨이 가망이 없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베델이 자리에 앉아 루시온과 눈을 마주했다.

그는 마치 겁에 질린 듯했다.

[다 기억했다. 루시온 공이 지금 원하는 건 훈련인가?]

베델은 조심스레 목소리를 냈다.

"그래. 나와 빙의해서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확인해줘."

[내가 공을 대신해 몸을 만들어 줄 수 있다.]

"아니. 그건 필요 없어. 거기까지 부탁하고 싶지도 않고."

[왜인가? 그게 더 빠르지 않은가?]

"베델. 이건 내 몸이야. 누구한테도 맡길 생각은 없어."

겁에 질렸던 눈빛에서 금세 불꽃이 피어올랐다.

베델은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공은 검을 잡길 바라는가?]

직접 루시온의 입을 통해 듣지 않았기에 베델은 제대로 듣고 싶었다.

"그래."

루시온은 지쳤지만, 확고하게 말을 내뱉었다.

흑마법사인 자신이 강해지는 만큼, 귀족인 자신도 강해져야 했다.

[저택 근처에 괜찮은 공터를 발견했어. 현재 그림자 이동으로 두 번… 반 정도 거리에 있는 곳인데. 훈련 장소로 괜찮을 듯해.]

루시온이 진심이었기에 베델 역시 마음이 쓰였다.

더 빨리 루시온이 무겁고, 딱딱한 몸에서 벗어날 수 있길 바랐다.

"고마워, 베델."

루시온의 눈동자가 휘었다.

* * *

크라언은 편지를 구겼다.

'또 이놈들인가?'

초네스트 자작가.

체프란 자작가 근처에 있는 자작가로서, 자꾸만 자신들에게 잘 보이라는 식의 협박 편지를 보내는 놈들이었다.

이제는 아예 대놓고 체프란에서 가진 무기와 아이템 제작 설계도를 싼값에 팔라며 협박까지 했다.

'벌써 몇 통째인지.'

똑똑.

"들어오십시오."

크라언은 언제 짜증이 났냐는 듯이 온화한 목소리를 띠었다.

"반갑습니다. 암살자 퀘이트라고 합니다."

퀘이트는 크라언을 보며 업무용 미소를 띠었다.

"반갑습니다. 조직 에일을 이끄는 크라언 젤이라고 합니다."

크라언 역시 입꼬리만 올렸다.

"당신이 이곳의 우두머리입니까?"

퀘이트가 살짝 의아한 듯이 크라언을 바라보았다.

복장은 일단 집사였다.

"그렇습니다. 믿기지 않습니까?"

크라언은 반 박자 늦게 대답했다.

자신이 아니라 하멜이 이곳의 주인이라는 말을 참느라 잠깐 늦어졌다.

'하멜 님께서 데려오신 암살자는....'

비록 소국이었으나, 자신은 왕자였다.

어릴 적부터 좋은 것들만 보고 자란 덕에 사람을 보는 눈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퀘이트라는 이름을 가진 암살자는 만족스러울 만큼 괜찮았다.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퀘이트 역시 늦게 대답했다.

크라언이 퀘이트를 살피는 것처럼 퀘이트 역시 크라언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많이 죽인 만큼 사람을 보는 시각 역시 달라졌다.

저 인간이 표적이 될지 아닐지를 판단할 수 있었다.

'표적이 될 놈이네.'

표적이 된다는 뜻은 곧 너무도 거슬릴 만큼 유능하거나, 지금 죽여야 탈이 없을 만큼 괜찮은 사람을 말했다.

"하멜 씨에게 무얼 해야 하는지 들으셨습니까?"

크라언이 자리를 권하며 물었다.

퀘이트는 자리에 앉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들었습니다. 조직을 위해 불필요한 요소들을 죽이는 게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조직이 잘 굴러갈 수 있게 돌멩이들을 치워주셔야 합니다. 일단, 저보다는 쥐쟁이라고 하는 정보 담당과 자주 얼굴을 맞댈 겁니다."

"이름이 쥐쟁이입니까?"

"아닙니다. 과거 조직의 이름이 쥐쟁이였고, 정보 담당이라는 딱딱한 말보다 쥐쟁이라고 불러주길 원해서 계속 쓰고 있습니다."

쥐쟁이 이야기를 본인이 꺼냈으면서 크라언은 피곤한 얼굴로 이마를 쓸어 올렸다.

퀘이트는 그 모습에 자신 역시 피곤해지리라는 걸 예감했다.

"바로 소개하죠. 위치도 파악할 겸 돌아다니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크라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치는 환영이나, 소개는 쥐쟁이로 됐습니다."

퀘이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직원들을 죽여야 하는 처지라 굳이 친하게 지낼 필요는 없었다.

"그것보다 원래 여기는 우두머리가 안내하는 겁니까?"

퀘이트의 목소리에 의문이 가득했다.

책상에 무슨 서류인지 몰라도 처리해야 할 것들이 한가득 아닌가.

"그게… 좀 복잡한 사정이 있습니다. 이건 저택을 돌아다닌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크라언이 말꼬리를 흐렸다.

"알겠습니다. 일단, 안내해주십시오."

* * *

직업 특성상 빠져나올 수 있는 곳과 시체를 숨기기 좋은 곳, 죽여도 들키지 않는 곳 등이 퀘이트 눈에 바로 들어왔다.

그리고 자신들을 노려보듯 바라보는 기사들과 병사들까지도.

이곳은 참 이상했다.

자작가를 조직의 본거지로 삼다니 도통 간이 큰 게 아니었다.

"흠."

그리고 쥐쟁이들의 우두머리였던 놈도 이상했다.

그는 인사가 먼저가 아니라 수첩을 들고 퀘이트 주변을 빙그르르 돌았다.

크라언의 오른팔이자 암살자인 헬론과 혼자서 결계를 만드느라 반쯤 죽어가던 슈트라, 그리고 마법 아이템을 만들던 이 저택의 가주인 미엘라 등 본의 아니게 저택을 빠져나가는 도중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런데 이렇게 인사도 하지 않는 사람도 처음이었고.

탁.

"크라언 님. 일단 저 사람도 얼른 똑같은 옷으로 갈아입혀 주십시오. 저 사람만 튀는 건 반대입니다. 정 싫으면 저도 이런 병사 옷 말고 원래 옷으로 입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갑자기 불평을 터트리는 것도 처음이었고.

"네가 좀 튀어 보이려고 입에 마스크를 쓴 것 같은데. 여기서 가장 튀어야 할 사람은 바로 나야!"

다짜고짜 손가락질은 또 무엇인지.

'쟤는… 뭐지?'

퀘이트는 헤로안을 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107화. 합이 맞는 듯 아닌 듯

"…하."

크라언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무래도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 듯한 모습에 퀘이트는 눈동자만 굴렸다.

"헤로안 씨. 오늘 오신 분입니다."

크라언은 살짝 싸늘한 눈매로 헤로안을 바라보았다.

"이번에 조직에 들어오게 된 암살자 퀘이트입니다."

퀘이트가 손을 내밀었다.

막 손을 잡으려던 헤로안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퀘이트를 바라보았다.

"암살자… 요?"

갑자기 뒤에 어설픈 존댓말이 붙었다.

문득 하멜이 자신에게 단단히 일러뒀던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곧 암살자가 조직에 합류할 거야. 쓸데없는 객기 부리지 말고 서로 잘 타협해서 임무 진행에 잡음이 들리지 않게 해.

쓸데없는 객기.

이미 자신이 부렸지 않은가.

딸꾹.

헤로안은 너무 놀라 딸꾹질을 하면서 수첩을 접었다.

"헤, 헤로안입니다. 저, 제가 밤샘 작업을 해서 잠깐 실수한 거니 절대로...."

헤로안이 퀘이트에게 한발 다가가 목소리를 낮췄다.

"하멜 님한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하멜 님이 그렇게 무서우신 분이십니까?"

퀘이트가 물었다.

뭔가 말려든다는 느낌이 강했지만,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절대 아닙니다."

"맞습니다."

크라언과 헤로안의 말이 엇갈렸다.

그러자 퀘이트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멜 씨는 매 순간 조직을 위해서 밤잠을 아껴가며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훌륭한 조직… 원이죠."

크라언이 목소리에 힘을 줬다.

"그건 인정합니다. 새벽이든 밤이든 언제든 연락용 아이템을 받으시거든요."

헤로안 역시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옆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움찔거렸다.

"헤로안 씨…?"

크라언의 눈썹이 미간 쪽으로 내리막길을 타고 있었다.

"방금 그 말 사실입니까? 밤이라면 몰라도 새벽이요…?"

"어제까지 그랬습니다. 제 말씀을 진지하게 들어주시는 분은 하멜 님뿐이거든요."

당당한 헤로안의 목소리에 크라언은 짧게 숨을 내쉬며 머리카락을 이마 너머로 옮겼다.

"생각해보십시오. 조직을 유지할 돈을 혼자서 감당하고 있는데 하멜 씨께서 밥도 제대로 드시고, 잠도 제대로 주무시겠습니까?"

"…그게 정말입니까?"

놀란 건 퀘이트였다.

이미 계약서 작성과 함께 하멜에게 돈도 두둑이 받아 오랜만에 비싼 고기로 위장을 채우고 온 후였다.

조직이 돈이 많다고 생각했지 하멜이 돈이 많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예, 그렇습니다."

크라언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여러 곳에 투자했지만, 지금 당장 돈이 나올 곳은 하멜의 주머니뿐이었다.

가뜩이나 조직은 더 커졌기에 하멜의 부담이 이전보다 더 늘어났을 테지.

크라언은 걱정을 하지 않으려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짜 바쁘셨구나. 신관에게도 쫓기고 있던 것 같았는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크라언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퀘이트의 말을 고스란히 주워들었다.

"저와 계약할 때 '걸리면 큰일이다'라는 말을 꺼내셨거든요. 흑마법사인 하멜 님께서 그럴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하.

크라언의 한숨이 깊어졌다.

흑마법사였기에 당연한 사실을 왜 이제 와서 눈치챈 건지.

지금까지 하멜이 체프란 저택에 머물지 않았던 것도, 설령 머물러도 빨리 자리를 떠났던 것도 모두 신관 때문이지 않았을까.

"…헤로안 씨. 들으셨죠?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면 저한테 오십시오. 가뜩이나 주무시는 시간도 없을 만큼 힘든 하멜 님을 괴롭히지 마시고요."

크라언은 자신의 눈을 피하는 헤로안을 빤히 쳐다보았다.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노력은요."

웅얼거렸지만, 어쨌든 알겠다는 대답에 그제야 크라언은 멋쩍은 미소를 입에 걸었다.

"그럼, 퀘이트 씨.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헤로안 씨가 짧게나마 조사했던 정보를 토대로 이곳 저택을 정리해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퀘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직 합류 후 바로 첫 임무가 떨어졌다.

배도 든든했고, 주머니도 묵직했기에 얼마든지 움직일 생각이 있었다.

"이봐, 퀘이트."

크라언이 가자마자 헤로안이 바로 말을 놓아버렸다.

"그래."

그래서 퀘이트도 편안하게 반말로 대답했다.

헤로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까 무례는 잊어버려. 알겠지?"

"생각해보고."

"너도 하멜 님이 진짜 이 조직의 우두머리라고 생각하지?"

"내가 처리해야 놈이 누구지?"

퀘이트는 정치 싸움에 휘말릴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이 은혜도 모르는 놈. …그런데 하멜 님이 어떻게 혼자 돈을 감당하는지 궁금하지 않냐?"

화를 내는 척하다 헤로안이 넌지시 퀘이트에게 물었다.

"내가 처리해야 할 놈이 누구냐고. 아직 짐도 못 풀어서 바쁘니까."

"쯧. 날 따라와. 이 은혜도 모르는 놈."

헤로안이 혀를 차더니 땅굴을 위해 삽질을 하는 자신의 부하들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갔다 오마."

* * *

"저 세 놈 보이지? 홀쭉이, 좀 덜한 홀쭉이, 근육 돼지."

체프란 저택으로 돌아온 헤로안이 태연하게 손가락으로 목표를 짚었다.

지금 딱 순찰을 돌고 있을 시간이라 운이 좋았다.

"알겠다. 처리해야 할 목표가 얼마나 더 있지?"

"딱 저 세 놈이면 충분해. 반란을 일으킬 주동자거든. 원래 대가리들부터 깨야 밑이 흔들리고, 밑이 흔들리면 병신같이 자신들끼리 물어뜯고 싸우게 되어있지."

"조직원 중에 죽여야 할 사람들은 있나?"

퀘이트의 물음에 헤로안이 수첩을 펼쳐 손가락에 침을 묻혔다.

촥촥.

수첩이 몇 페이지를 넘기자 그곳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아직은 없어. 조짐을 보이는 이들은 있지만."

대답이 없자 헤로안은 고개를 돌렸다.

퀘이트가 없었다.

그리고 제일 먼저 홀쭉이가 사라졌다.

"...?"

헤로안은 눈을 깜빡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퀘이트를 발견했다.

'저 미친놈 저거...!'

언제 순찰 경로를 파악한 건지, 퀘이트는 '저러다 들키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좀 덜한 홀쭉이의 뒤를 조용히 따라가고 있었다.

퀘이트가 그토록 가까이 있음에도 놈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지 편안히 발을 움직였다.

기회를 포착했는지, 퀘이트는 단숨에 놈의 입을 가리고 손에 쥔 단도로 목을 그었다.

그 상황이 너무도 조용해 헤로안은 자신의 숨소리가 크면 어쩌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저건 너무 대범하잖아.'

그래도 정원 한복판이었다.

대체 시체를 어떻게 처리할까 걱정이 들 무렵, 퀘이트가 새끼손가락을 들어 까닥거렸다.

갑자기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튀어나와서는 시체를 엎고 마치 사물에 녹아들 듯 사라져버렸다.

'...?'

엄청난 위장술인지 마법인지 모르겠지만, 헤로안은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제 마지막 한 놈이 남았다.

퀘이트는 제 앞마당을 거닐 듯 근육 돼지 쪽으로 걸어가 조용하고, 부드럽게 목을 긋고, 그가 몸이 무너질 때 심장에 단검을 박아넣었다.

팍.

소리가 나지 않게 시체를 눕힌 퀘이트는 헤로안을 바라보았다.

다 처리했다.

그렇게 말하는 뻔뻔한 표정을 보자 소름이 헤로안의 몸 전체를 휩쓸고 지나갔다.

헤로안은 오싹함에 몸을 부르르 떨며 차차 입꼬리를 올렸다.

하멜이 왜 첫날부터 암살자들에게 임무를 시켰겠는가.

직접 자신의 눈으로 암살자들의 실력을 보라는 게 틀림없었다.

'그래. 저들이 앞으로 우리 쥐쟁이를 지켜줄 사람이다!'

하멜이 자신들을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잊지 않고 지켰다.

헤로안은 자신에게 걸어오는 퀘이트를 보며 수첩을 꽉 쥐었다.

암살자들이 움직이는 순간은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바로 쥐쟁이인 자신들이 만들어 나가겠지.

헤로안의 눈동자에 강한 생기가 꿈틀거렸다.

정보를 얻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사람이 움직이는 건 생각보다 더 재미있는 일일지도 몰랐다.

'좋아. 나도 조직에 힘이 되고자 더 힘내볼까.'

헤로안이 처음으로 조직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 * *

"…아. 그래서 퀘이트가 반란의 주동자를 다 죽였다고?"

루시온은 크라언의 보고에 실소를 내뱉었다.

잠이 들기 전에 듣던 빗소리처럼 참 좋은 소식이 아닐 수가 없었다.

<예. 그렇습니다. 밤중에 죄송합니다. 한시라도 빨리 알려드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미안해할 필요 없어. 아직 잘 시간이 아니라서."

침대에 누워 창문을 바라보니 둥근 보름달이 떠 있었다.

[아니. 잘 시간인데?]

러쉘이 코웃음을 쳤다.

막 잠이 들려던 루시온의 잠을 크라언이 깨웠다.

어떻게 얄밉지 않을 수가 있을까.

가뜩이나 재활 훈련으로 고될 텐데.

베델이 천장에서 얼굴만 내밀어 러쉘을 재촉했다.

[러쉘. 그대가 있으면 루시온이 신경 쓰여서 잠이 드는 시간이 늦어지니 빨리 와.]

[잠깐만. 먼저 가 있어.]

크라언이 얄미운 것과 별개로 러쉘은 크라언이 무슨 말을 할지 참 궁금했다.

베델이 피식 웃다 곤히 잠든 라타를 잠깐 바라보고는 천장 너머로 사라졌다.

<그래서 지금 계속 체프란 기사단 내에 분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이제 됐네. 미엘라를 해하려는 죄로 대충 엮어서 보내버려."

미엘라가 우선 체프란 기사들을 돈으로 회유했지만, 그들을 처리해야 하는 건 정해진 순서였다.

기회가 왔으니 처리해야지.

<알겠습니다.>

"아, 미엘라가 체프란 가문의 가주가 됐다는 소문은 퍼트리고 있어?"

<예. 계속 주변으로 소문을 퍼트리고 있습니다. 다만....>

"왜?"

<조직 내부가 좀 어지럽습니다. 아무래도 암살자들까지 합류해 기존 에일에 소속됐던 이들, 쥐쟁이와 함께 마찰이 조금씩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문제는 당연히 일어나리라 생각했다.

서로 다른 조직에 속했으니 어떻게 바로 적응을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 문제는 자신이 아니라 크라언이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아무리 바지사장이라도 사장 노릇은 해야지.

"네가 잘 조율해봐."

루시온이 가볍게 말을 던졌다.

<…너무 쉽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러려고 그 자리에 너를 앉힌 거야. 일해야지, 크라언."

<하지만....>

뚝.

루시온은 불평이 나오기 전에 연락용 아이템을 끊어버렸다.

[루시온. 너....]

러쉘은 뒷말을 삼켰다.

조직의 모든 일을 감당하지 말라고 말한 건 다름 아닌 자신이지 않은가.

루시온은 대충 누워서 서랍에 연락용 아이템과 가면을 넣고는 러쉘을 향해 씩 웃어 보였다.

"좋은 밤 되십시오, 스승님."

그대로 루시온은 눈을 감았다.

* * *

일주일이 흘렀다.

체프란은 온전히 조직 에일의 것이 되었고, 크라언으로부터 에일, 쥐쟁이, 암살자 사이에 나름 합의점을 찾았다고 알려주었다.

무슨 규칙을 정했다고 했는데, 크라언이 우물쭈물하며 말을 해주지 않기에 루시온도 묻질 않았다.

<저번에 말씀드렸던 용병단 말입니다.>

크라언이 드디어 본론을 꺼내 놓았다.

"포섭했어?"

<아닙니다. …아무래도 다른 용병단으로 알아봐야 할 듯합니다.>

"왜…?"

자신이 듣기에도 실망스러운 목소리가 그대로 튀어나왔다.

[용병단이야 다른 이들을 구하면 되는 거 아니야? 왜 이렇게 실망해?]

듣다 보니 이를 이상하게 여긴 러쉘이 물었다.

하지만 루시온의 귀에 그 말이 닿질 않았다.

크라언이 만든 제3 세력의 주춧돌은 라인트 용병단이나 마찬가지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은 데리고 와야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틀어지면 곤란했다.

<그게…, 요 며칠 소식이 끊어져서 이상하다고 생각해 헬론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좋지 않은 일에 휘말렸다더군요.>

크라언이 곤란한 목소리를 냈다.

"좋지 않은 일이라니."

루시온은 갑자기 목이 바짝 탔다.

<귀족과 좋지 않게 얽힌 모양입니다. 그 문제를 해결해주면 우리 조직으로 들어오겠다고 하는데, 꼭 그럴 필요가 있는지 싶어 이렇게 연락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귀족…?"

용병단이 돈에 따라 움직여 귀족과 엮이는 건 흔했다.

또 그만큼 귀족과 문제가 터지는 일 역시 흔했다.

'아. 난 또 뭐라고. 별일 아니네.'

용병단을 고용할 정도라면 별 볼 일 없는 귀족일 테지.

'박살 내지, 뭐.'

108화. 합이 맞는 듯 아닌 듯(2)

루시온은 그제야 천천히 물을 마셨다.

이 정도는 해결이 가능한 문제였다.

이제 조직 에일에 필요한 건 무력이었다.

라인트 용병단이 추가됨으로써 그 부분을 채워줄 테지.

기왕이면 불안한 요소가 가득한 것보다 미래가 확정된 이들을 끌어오는 게 훨씬 안전했고.

<아시다시피 조직이 아직 귀족과 비등할 정도로 성장한 건 아닙니다. 다소 아쉽기는 하나 다른 방향으로 알아보는 게 더 빠를 듯합니다.>

'...?'

이어 들려오는 크라언의 말에 루시온은 잠깐 행동을 멈췄다.

'왜 이렇게 쉽게 포기하는 거지?'

[루시온, 생각해봐.]

가면을 썼어도 러쉘은 루시온이 당황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루시온은 고위 귀족으로 태어나 자랐다.

당연히 이 부분은 모를 테니, 알려줘야 했다.

[현재, 네 조직은 아직 걸음마 단계라고. 그런데 귀족하고 부딪힌다고? 귀족하고 엮이면 피만 보겠어? 물러서는 게 상책이지. 크라언이 현명하네.]

러쉘의 말에 루시온은 그제야 이해했다.

자신은 아직도 권력자였고, 크라언은 아니었음을.

한때, 높은 곳에 서봤던 크라언이기에 귀족들이 보이는 지독하고 악랄한 면모를 누구보다 알고 있을 테지.

<면목이 없습니다. 용병단을 데려오겠다고 하멜 님께 말씀드렸는데. 이번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크라언."

루시온이 크라언을 부드럽게 불렀다.

<예, 하멜 님. 말씀하십시오.>

"네가 보기에 그 용병단을 대체할 수 있는 이들이 있다고 생각하나? 정말로 놓쳐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

<예. …아뇨. 그렇지는 않습니다. 후회할 것 같습니다.>

크라언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래서 그 귀족이 누구고 어떤 일에 휘말렸는지부터 말해봐."

<하멜 님도 알고 계시는, 초네스트 자작가입니다.>

초네스트 자작가라면 꼴에 힘이 세다고 체프란 자작가를 꾸준히 협박한 놈이 아닌가.

루시온도 계속 거슬렸던 참이었다.

<얼마 전에 코코렌 남작가에서 일가족 전원이 죽은, 이상한 일이 일어났잖습니까.>

코코렌 남작가는 크로니아를 배신하고 뉴브라 왕국에 붙은 이들이었다.

루시온은 퀘이트가 이끄는 암살자들의 실력을 확인할 겸 코코렌 남작가의 씨를 말려버리라는 의뢰를 하나 제안했다.

그들 전부 죽었고, 더는 코코렌이라는 남작가를 유지할 수 없어 그곳은 현재 황실의 소유가 된 상태였다.

"그래. 일어났지."

루시온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 일 때문에 초네스트 자작가에서 호위로 두었던 라인트 용병단에게 계약을 연장하길 바랐나 봅니다. 하지만 그 전에 라인트 용병단은 이미 우리와 대화를 나눴고, 계약 만료가 됐을 때 우리 쪽으로 오기로 약속해 당연히 계약 연장을 거절했습니다.>

"결국, 앙갚음이라 이거지?"

<그렇습니다. 라인트 용병단의 대장은 귀족을 모욕했다는 죄로, 나머지 절반은 억울하게 누명을 써 현재 초네스트 감옥에 있습니다.>

"역시, 부숴버려야겠네."

<…예?>

진심으로 놀란 목소리가 크라언에게 새어 나왔다.

"귀족. 그래, 엄청 무서운 존재들이지.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우리는 독립적인 세력이 되어야 하고 나를 지킬 수 있어야 해. 결국, 귀족과 다툼은 불가피하다는 뜻이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조직은 귀족의 힘에 대항할 만한 무엇도 가지고 있질 않습니다.>

"아니. 가지고 있어."

대충 걸친 가면 너머로 루시온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보였다.

"체프란 자작은 너야, 크라언."

루시온은 크라언이 잠깐 잊었던 사실을 알려주었다.

상대도 자작가. 체프란도 자작가.

뭐가 꿀리는가.

<…제가 실수했습니다. 가장 좋은 수단을 손에 쥐고서 이걸… 잊다니.>

입술을 깨무는지 크라언의 발음이 살짝 뭉개져 있었다.

"아니야. 익숙하지 않으니 잊을 수밖에. 이참에 라인트 용병단을 구출할 겸 자작가 하나를 더 가져도 나쁘지 않겠다고는 생각이 드네. 활동 범위도 넓어지면 좋고."

좋은 게 좋은 게 아니겠나.

어차피 크로니아는 이 정도 움직임에 관심도 없을 테니.

무엇보다 조직을 단합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하멜 님.>

"그래."

<이번에는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총 32통의 편지가 일주일 안에 왔습니다. 언제가 됐든 기회가 되면 밟아주고 싶었거든요.>

"아니. 내일 갈 거니까, 준비해둬."

마침 외출 금지가 풀린 상태였다.

<…내일이요?>

크라언이 어리둥절하며 말했다.

"거슬려서 이미 헤로안한테 말해뒀거든. 자세한 정보는 헤로안한테 들어. 아마 어떤 계획이 필요한지 바로 답이 나올 테니까."

<일단 알겠습니다. 하멜 님, 제가 너무 오래 붙잡아 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꼭 편안하게 주무시고, 식사는 거르시지 않으셨으면....>

뚝.

루시온은 길어지는 크라언의 말에 먼저 연락용 아이템을 끊어버렸다.

가면을 벗고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제가 그렇게 굶고 다니는 사람처럼 보입니까?"

[그럴 리가. 귀티가 넘치다 못해 아예 줄줄 흐르는데?]

러쉘이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계속 듣다 보니 러쉘도 기가 찬 모양이었다.

'체프란 저택이 심어둔 유령 20번한테도 딱히 이상한 소문이 돈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루시온은 시선을 내려 자신을 바라보았다.

'이참에 옷도 바꾸지 뭐.'

자신의 꼴이 보기 나쁜가 싶어 옷을 새로 살 생각이었다.

* * *

"…아. 오셨습니까? 예상 시각보다 일찍 오셨습니다."

크라언은 어둠에 뒤덮여 등장한 루시온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옷이 바뀌셨네요."

"그래."

루시온은 흐뭇하게 대답했다.

이제 크라언한테서 어처구니없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겠지.

"아, 피터는 계속 연락이 없던데. 소식이 있어?"

루시온은 피터에게 연락용 아이템을 주지 못했다.

곧바로 공허의 손과 관련한 정보를 찾으러 떠날 줄은 몰랐기에 시기가 갈렸다.

현재 그의 동생만 저택에 남은 상황이었다.

6개 지부를 알려준 것도 방어 마법을 전문으로 익힌 마방사인 피터의 도움이었는데.

"그렇지 않아도 그 문제로 하멜 님께 여쭤볼 생각이었습니다. 피터 혼자 독단적으로 움직여도 괜찮겠습니까?"

"아니."

피터는 적이 많았다.

비록 로베리오 놈이 죽었더라도 그의 존재를 아는 이가 공허의 손에게 있겠지.

기껏 얻은 마방사가 죽지 않았으면 했다.

"동생하고 연락이 되지?"

"예. 됩니다. 저도 피터의 동생을 통해 살아 있다는 소식을 가끔 듣고 있습니다."

"그럼 당장 조직으로 돌아오라고 해."

루시온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지시를 내리며 소파에 자리에 앉았다.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아니. 나도 때를 놓쳐서 너한테 하지 못한 말이 있어."

루시온은 크라언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집사 복장이 크라언과 잘 어울렸다.

그만큼 체프란 저택에 잘 적응했다는 뜻이었다.

"말씀하십시오."

크라언도 소파에 앉아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변경에 나 말고, 흑마법사가 들어왔어. 그 흑마법사는 시체를 이용해서 죽지 않는 병사를 만들려고 하거든. 그래서 내가 이 사건을 이용해 신전에 빚을 지게 할까 해. 네 생각은 어때?"

깜박깜박.

크라언은 눈만 깜박거렸다.

[그렇게 말하면 이해하겠어?]

러쉘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정말 잘 요약했지만, 갑자기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큰 사실이었다.

[좀 더 풀어서 차근차근....]

"좋습니다!"

크라언이 엉덩이를 떼며 말했다.

[…뭐?]

"아주 좋은 계획입니다. 하멜 님의 적이 신전이 아닙니까. 빚을 지게 해서 저희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 된다면야 하멜 님께서는 정말로 안전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힘주어 말하는 크라언의 말에 흄이 눈을 반짝거렸다.

'…도련님이 안전해진다고?'

"네가 이렇게 기뻐할 줄은 몰랐는데?"

루시온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기뻐할 수밖에요. 하멜 님께서는 신관에게 들키면 큰일이잖습니까."

가뜩이나 쫓기고 계시는 분이.

크라언은 뒷말을 삼켰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상황이 심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기에 크라언은 애써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긴 하지."

루시온은 가볍게 대답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더 자세한 상황은 일단 놈들의 거처부터 찾은 후에 이야기할게. 이제 슬슬 움직이자."

초네스트 자작가로.

"잠깐만요, 하멜 님."

크라언이 갑자기 루시온을 붙잡았다.

"왜? 할 말이 더 있어?"

어차피 약속을 잡고 초네스트 자작가로 향하는 터라 급할 건 없었다.

그저 먼저 가서 라인트 용병단이 어떻게 생겼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을 뿐이었다.

"밥… 드시겠습니까?"

크라언이 망설이고 망설이다 목소리를 냈다.

[…크흡.]

러쉘이 필사적으로 입을 막았고, 베델은 투구 덮개를 내리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

루시온은 저택에 오기 전에 신나게 만찬을 즐기고 온 후였다.

―라타는 좋아! 또 먹을 수 있어! 라타는 쑥쑥 자라야 하거든!

"이미 먹고 왔어."

루시온은 변명할 거리도 생각이 나지 않아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정말입니까?"

"그래. 굶고 다니지 않으니까 더는 신경 쓸 필요가 없어."

"조직원의 수가 늘어나서… 혹시 자금은 괜찮으십니까?"

"그래."

루시온은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루테온 은행의 VVIP가 되어 솔직히 은행의 이자로도 조직은 충분히 돌아갔다.

꼬박꼬박 나오는 용돈에 로베리오 백작가가 가졌던 재산과 그놈이 가졌던 비자금은 후작가 하나와 맞먹었고, 피이자트 가문의 사업장을 싹 밀고 건물도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

그렇지 않아도 자금을 불려가려고 북부에 들리면 상단 몇 개를 포섭할 생각이었다.

"이제 됐나?"

루시온이 물었다.

"잠은...."

크라언의 이어지는 말에 루시온은 그의 말을 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 * *

"…으함."

루시온이 마차에서 하품하자 같이 마차에 타고 있던 미엘라, 크라언이 거의 동시에 자신을 바라보았다.

퀘이트와 흄만이 유일하게 차분했다.

'…뭐야.'

루시온은 순간 당황했다.

이번에는 자신이 나설 일이 없을 것 같아 마음이 편안한 탓에 하품이 나온 것뿐인데.

'왜 이렇게 다들 예민해?'

[이렇게 뭉쳐서 뭘 하는 건 처음 아니야?]

'하긴, 그렇다면 긴장될 만도 하지.'

루시온은 러쉘의 말에 수긍했다.

"…크라언 님."

미엘라가 크라언을 째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또 루시온이 혹사했냐는 물음이 가득했다.

"아닙니다. 절대로."

크라언이 변명하듯 꺼내자 루시온은 무슨 말을 하냐며 목소리를 내려다 정찰을 갔다 온 베델의 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루시온 공.]

루시온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초네스트에서 고용한 새로운 용병단은 별 볼 일 없다. 머리 쪽수만 채웠을 뿐이지. 하지만 공격 준비는 되어 있어. 적들의 배치는 도착하면 말해줄게.]

'그럴 줄 알았다. 초조하겠지.'

루시온이 등받이에 깊숙이 기대며 다리를 살짝 흔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루시온은 놈들이 자신의 조직을 건든 것도, 라인트 용병단을 가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던 참이었다.

'장남이 반 크로니아 집단에 가입했다는 걸 들켰으니 이거 어쩌겠어.'

이미 그 사실은 크라언이 초네스트 자작가에게 편지를 보내놓은 상황이었다.

초네스트 내부가 어떻게 됐겠는가.

'발칵 뒤집히다 못해 미칠 지경이겠지.'

서부에 있어 반 크로니아라는 말은 이미 목이 잘려서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기에 당연한 반응이었다.

초네스트 자작가가 부디 대화로 해결하자고 했고, 크라언은 기꺼이 찾아가 주었다.

'…보자. 초네스트 자작가를 손에 넣으면 무슨 용도로 써야 하나.'

루시온은 벌써 신이 났다.

초네스트가 이를 대비해 열심히 준비를 해봤자, 어차피 자작가였다.

이미 헤로안을 통해 초네스트의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 파악했다.

조직원과 암살자들로 충분하다는 결론이 났다.

게다가 초네스트 자작가의 후계자는 셋.

즉, 둘을 죽여도 하나가 있으니 대가 끊이질 않는다는 말이었다.

'살아남는 놈이 누구든 조직을 위해 꼭두각시로 쓰면 되겠네.'

루시온이 즐거운 생각을 이어나갈 때쯤에 마차가 멈췄다.

109화. 합이 맞는 듯 아닌 듯(3)

"다들 역할을 잊으면 안 됩니다. 저는 집사, 미엘라 씨는 가주, 렌탈 씨는 시녀, 퀘이트 씨와 하멜 씨는 호위 담당입니다."

크라언은 내리기 전에 각자의 역할을 확고히 다져놓았다.

미엘라와 퀘이트가 내리고 크라언이 루시온을 보았다.

"초네스트 자작가에 빛이 깃든 물건은 없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래."

이미 베델을 통해 들었던 이야기였다.

루시온이 마차에 내리려다 말고 크라언을 바라보았다.

"혹시 이번에도 두렵나?"

"아닙니다. 두렵지 않습니다. 이전과 달리 제 목표와 지켜야 할 게 확고해졌으니까요."

조직 에일은 단 한 명의 흑마법사를 지키기 위해 세워졌다.

크라언 역시 그러겠노라 결심했기에 이를 향한 행보에 어떤 망설임도 사라졌다.

"그래."

루시온은 가볍게 대답하며 마차에서 내렸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터져도 편안하게 가겠네.]

러쉘은 루시온의 허리춤에 찬 검을 가리켰다.

조직 내에서 루시온이 흑마법사라는 사실을 아는 것과 조직 외의 사람이 루시온을 흑마법사라고 아는 건 차이가 났다.

"예, 그렇습니다."

루시온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베델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흑마법사라고 생각하지 않게 그녀와 빙의를 할 생각이었다.

'이참에 실전 경험도 쌓고.'

루시온은 살짝 즐겁다 말고 순간 깜짝 놀랐다.

자신의 정신 훈련은 러쉘이.

육체 훈련은 베델이.

서로 번갈아 가며 훈련을 시키니 어느새 진짜 재미가 들린 건지.

아니면 이렇게라도 해야 자신이 버틸 수 있기에 재미있다고 세뇌를 한 건지.

루시온은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왜 그래, 루시온?

그림자에서 라타가 물었다.

루시온은 고개를 살짝 가로저으며 미엘라 뒤를 따라갔다.

미엘라 뒤에 크라언과 흄이.

크라언과 흄 뒤에 루시온과 퀘이트.

그리고 조직원들과 섞인 암살자들이 병사로 위장해 그들을 따랐다.

[나는 루시온 공을 생각해 놈들의 손목이나 발목만 자르겠다. 이 정도는 괜찮은가, 러쉘?]

초네스트 자작가의 정문이 보이자 베델이 러쉘을 보며 말했다.

손목 발목이라는 말에 루시온이 멈칫했다.

누가 보면 취미를 말하는 것처럼 말이 너무 가볍지 않은가.

[좋지. 아주 좋고말고. 그 두 개만 잘라도 완벽한 제압이지.]

러쉘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손은 대부분 마법사의 마나 출구 역할로 쓰였다.

마나를 육체적인 부분으로 사용하는 오러 사용자들 역시 마찬가지라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루시온에게 부정도 쌓이지 않고, 적도 개박살 내고.

[좀 아쉽다 싶으면 몇 번 밟아줘도 괜찮아.]

러쉘은 베델을 생각해 조언도 잊지 않았다.

[알겠다. 하지만 나중에 루시온 공을 가르칠 때는 급소도 알려줄 생각이야. 그건 괜찮겠지?]

[그건 당연하지. 부정이 쌓이더라도 죽일 땐 죽여야지!]

"어서 오십시오!"

귀를 치고 들어오는 비굴한 목소리에 루시온은 자신도 모르게 비웃음이 튀어나왔다.

분명 그 웃음을 들었음에도 초네스트의 가주는 미엘라를 보며 방긋 웃기 바빴다.

[…와. 나, 이만큼 비굴한 놈은 처음 본다.]

러쉘은 자신의 이마를 가볍게 치며 당황스러워했다.

[저런 놈은 생각보다 자주 있어. 저 목을 베면 얌전해질 텐데.]

중얼거리는 듯한 베델의 말에는 뼈가 가득했다.

아무래도 비굴 거리는 놈들을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친히 가주께서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미엘라가 입꼬리를 비틀며 목소리를 냈다.

그녀 역시 초네스트에서 동맹이라는 허울로 위장해 협박하던 편지에 짜증이 난 상황이었다.

한 통이면 몰라도 자그마치 서른 두통이나 왔으니, 성격 좋은 사람도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편지에 와서는 체프란과 전면전을 벌이겠다 협박까지 한 상황이었다.

"체프란 가주께서 귀중한 걸음을 하셨는데 맞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뻔뻔한 초네스트의 가주의 입놀림에 미엘라가 열 받는 건 당연했다.

―미엘라 씨. 크라언 님도 계시니 걱정하지 마시고 신나게 입을 놀리셔도 됩니다.

하멜이 마차에서 꺼낸 말을 기억하며 미엘라는 걱정하지 않고 신나게 달렸다.

"그럼 얼마나 절 위해 공들여 준비했는지, 한번 봐봅시다."

"…예?"

"못 들으셨습니까? 초네스트 가주께서 절 위해 얼마나 공들여 준비하셨는지 한번 보겠다는 말을요?"

부드럽게 타이르는 미엘라의 말에 루시온은 대놓고 웃음을 흘렸다.

애초에 웃음을 참을 생각이 없었다.

왜 참아야 하는가?

어차피 다 뒤집어놓을 건데.

[루시온 공은… 정말 뒤가 없어.]

베델은 그 모습이 웃기면서도 참 걱정스러웠다.

"거기, 가면 쓴 자네! 지금 나를 비웃었는가?"

한 번은 참았지만, 두 번은 견딜 수 없었는지 초네스트의 가주는 루시온을 표적으로 삼았다.

"아뇨. 갑자기 웃긴 생각이 나서 웃었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제 생각을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다음부터는 주의할 테니 부디 가주님께서 너그러이 용서해주십시오."

비아냥이 섞였지만, 루시온의 말 자체는 사과에 가까웠다.

하지만 감정이 담기지 않았기에 사과마저 초네스트의 가주를 비웃는 것 같았다.

[푸하핫!]

러쉘은 루시온 다운 행동에 배를 잡고 낄낄거렸다.

분명 일부러 초네스트 가주의 화를 돋우려는 게 틀림없었다.

"네놈…!"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미엘라가 바로 초네스트의 가주에게 말을 쏘아붙였다.

"가주께서도 똑똑히 들었잖습니까! 저놈이...."

"저놈이라뇨? 내 호위입니다. 가주께서 내 호위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는 건 내 얼굴을 더럽히는 행위입니다. 사과하십시오."

약점을 잡혔기에 어차피 우위는 미엘라에게 있었다.

어쩔 텐가.

크로니아와 대적할 수도 없고.

"…가주의 호위에게 언성을 높여...."

초네스트 가주는 이를 악물었다. 목에 핏대가 서는 게 보일 정도였다.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모르고 저지른 일이니 어쩌겠습니까? 안으로 들어가시죠."

미엘라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마치 자신이 이곳의 주인이 된 듯 앞서 걸었다.

하지만 초네스트의 가주는 아랫배가 부글부글 끓는 심정을 꾹 누를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래. 네년이 지금 날뛸 시간은 지금뿐이다.'

귀족의 힘은 혈통에서 나왔다.

체프란 가문의 후계자는 미엘라 체프란뿐.

저년만 죽인다면 체프란 자작가를 자신이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실질적으로 그럴 힘도 있었고.

초네스트의 가주는 수십 년을 다져왔던 얼굴을 억지로 움직였다.

누가 보아도 방긋 웃는 모습으로 미엘라의 뒤를 쫓다 아주 잠깐 루시온을 노려보았다.

'네놈도 갈기갈기 찢어 죽여주… 헛!'

초네스트는 갑자기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미엘라가 데려온 시녀와 눈이 맞았다.

마치 짐승의 발톱과도 같은 매서움에 다리가 저절로 떨려왔다.

[거기까지 해, 흄.]

러쉘이 흄을 조용히 타일렀고, 흄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돌렸다.

* * *

루시온은 무언가를 가지러 가는 크라언에게 살짝 붙어 작게 속닥거렸다.

"렌탈과 함께 잠깐 빠질게."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산책."

"…산책이요?"

크라언이 미심쩍은 눈으로 루시온을 보았다.

적들이 칼을 갈고 있는 지금 적의 저택에서 산책을?

[가만히 있으면 크라언이 해결해 줄 텐데, 왜 가만히 있질 못해?]

러쉘은 바로 척하고 알아들었기에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후후. 라타가 슝을 사용할 시간이야!

루시온의 그림자가 잠깐 흔들렸다.

"지금 말입니까?"

크라언이 재차 물었다.

"재미있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조짐이 보이면 연락해."

루시온의 가면이 노랗게 물들었다.

루시온은 크라언의 계획을 방해하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는 어차피 초네스트 가주가 미엘라를 먼저 공격했다는 명분을 손에 쥐려고 하는 거니까.

거기에서 라인트 용병단이 갇혀 있든 아니든 크라언의 계획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어차피 저택을 엎을 거, 아군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않겠는가.

"아. 계획에 조금 손을 대도 되겠나?"

루시온이 개구쟁이처럼 묻자 크라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하셔도 됩니다."

루시온은 허락을 맡자마자 퀘이트의 어깨를 가볍게 쳐 따라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아직은 초네스트의 가주가 움직이지 않을 테지.

주변이 어수선한 분위기를 이용해 자연스럽게 방을 벗어나면서 루시온은 베델과 빙의했다.

중얼거리는 듯한 루시온의 말에 퀘이트가 잠깐 그를 바라보았지만, 아무도 루시온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이미 베델은 정찰을 통해 초네스트 자작가의 위치를 알고 있었기에 어디가 비어 있고, 어디에 사람이 배치됐는지를 파악하고 있었다.

베델은 루시온의 몸을 움직여 사람이 없는 방으로 들어갔다.

[이제 말해도 괜찮아, 루시온 공.]

베델은 루시온에게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퀘이트 씨."

루시온이 목소리를 냈다.

"죽여야 할 놈들이 누구입니까?"

퀘이트가 지도를 내밀었다.

쥐쟁이들이 정찰하고 만든 간단한 초네스트 저택 내부 지도였다.

'눈치가 좋아.'

루시온은 흡족했다.

베델이 루시온의 손을 움직여 퀘이트가 함께 건넨 펜을 이용했다.

죽여야 할 대상의 특징을 간략하게 적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놈들만 미리 죽이면 됩니까?"

퀘이트가 묻자 루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온은 크라언의 계획을 앞당길 생각이었다.

"그렇습니다."

"알겠습니다. 재빨리 처리하도록 하죠."

"그럼. 먼저 가시죠."

루시온이 문을 가리키며 퀘이트가 나가길 재촉했다.

"하멜 님께서는… 무슨 역할을 맡으셨습니까?"

마차에서는 보는 시선이 많아 차마 물을 수 없었기에 퀘이트가 이번에 목소리를 꺼냈다.

크라언이 계획을 설명할 때 하멜은 없었다.

아니, 아예 하멜을 언급도 하지 않았기에 당연히 이 계획에 참여하지 않는 줄 알았다.

"전 구경… 아니, 아무 역할도 없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관람객입니다."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가 루시온에게 흘러나왔다.

이미 구경하러 왔다고 똑똑히 들은 퀘이트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담이 큰 건지.

걱정이 없는 건지.

"하멜 님은… 참 알 수 없는 분이...."

"속이 깊으신 분입니다."

흄이 반박하듯 목소리를 꺼냈다.

[아니, 뒤가 없는 거지.]

러쉘은 당장 루시온의 머리를 쥐어박고 싶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안 할 줄 알았더니 그새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뭔지 모르는 것처럼.

"…그, 알겠습니다. 그럼."

퀘이트는 자신을 잡아먹을 듯 쳐다보는 그녀의 시선에 귀찮은 일에 휘말릴까, 고개를 숙이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

흄은 미간을 찌푸리려다 급히 루시온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까 일도 그렇고, 조금 전 일도 죄송합니다."

"뭐가?"

"제 태도가 무례했습니다. 하멜 님의 얼굴에 먹칠하지 않았을까 무척 걱정스럽습니다."

"넌 지금 흄이 아닌데? 내가 하멜일 때 너도 집사가 아니니까 마음대로 해."

흄이 얼빠진 얼굴로 눈을 깜박거렸다.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 루시온은 다시 차근차근 알려주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집사로서 행동하지 않아도 된다고."

"아. 이해했습니다."

흄의 표정이 아직도 굳어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 제 행동에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생각보다 참을성이 없었습니다. 참을성을 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도 괜찮아."

"그렇습니까?"

―응! 흄은 참을성이 좋아. 라타는 눈앞에 과자가 있으면 막 꼬리가 마음대로 흔들리고, 정신 차리면 접시가 텅텅 비어 있는데 흄은 라타한테 흄이 먹을 것까지 나눠주잖아! 흄은 착해!

라타가 기분 좋게 목소리를 냈다.

"그럼 저는 참을성이 있었네요. 다시 정정하겠습니다."

흄은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라타와 흄의 대화에 루시온은 황당해했고, 베델이 살짝 웃음소리를 냈다.

곧 그녀는 흄을 쓰다듬으려다 루시온의 손임을 알고 다급히 내렸다.

[그래서 뭘 하려고, 루시온?]

러쉘이 팔짱을 끼며 묻자 루시온은 즐겁게 목소리를 냈다.

"라인트 용병단이 갇혀 있어야 할 이유가 있나 싶어서요. 같이 털면 좋잖습니까."

110화. 라인트 용병단

[하긴 그렇지. 호의도 얻고, 크라언이 살펴본 라인트 용병단이 얼마나 괜찮은지도 알면 좋고.]

러쉘의 눈동자가 루시온과 빙의한 베델을 향했다.

러쉘이 무얼 요구하는지 알았기에 베델은 침음을 잠깐 흘렸다.

[…음. 다들 상태가 좋진 않아서 솔직히 모르겠어.]

"일단 이동부터 하자고."

루시온은 앞뒤 다 자르고 라인트 용병단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 * *

러쉘은 빙의한 베델을 대신해서 먼저 라인트 용병단이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뒤이어 그림자 이동을 사용해 그곳에 루시온은 주변을 살폈다.

감옥이 아니라 지하로 내려가는 길목이 아닌가.

아래쪽에서 갑자기 나타난 푸른 실을 보자 확신했다.

저 밑에 라인트 용병단이 있음을.

'…이상하네.'

라인트 용병단만큼은 원래 흐름대로 돌리려고 했는데 이게 자신의 운명을 벗어나는 일이 될 줄이야.

루시온은 푸른 실은 둘째 치고, 왜 감옥이 아니라 감옥으로 향하는 길에 러쉘이 서 있었는지가 궁금했다.

"스승님? 밑에 제가 보면 안 될 거라도 있었습니까?"

[아니. 그런 건 없었어.]

베델이 대답했다.

[루시온.]

"예, 스승님."

[여기 밑에 감옥이 있는데… 좁아. 괜찮겠어? 좁은 방과 좋지 않은 기억이 있잖아.]

러쉘이 걱정할 정도라면 얼마나 좁길래 그럴까.

루시온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아마 괜찮을 겁니다."

'아마도'라며 루시온이 중얼거렸다.

"저만 내려갔다 와도 괜찮습니다. 라인트 용병단을 풀어주고, 상황을 설명하는 것쯤은 이제 무던히 할 수 있습니다."

흄의 제안에 루시온은 잠깐 고민하다 일단 내려가기로 했다.

"내려가자."

루시온은 앞장서서 내려갔다.

흄이 미덥지 못한다는 게 아니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과연 좁은 곳에도 자신은 이제 괜찮을 수 있을까.

'그건 별로 좋지 못한 생각 같아, 루시온 공.'

베델이 슬쩍 말을 걸어왔다.

'왜?'

'공이 힘들잖아.'

베델의 대답에 루시온은 자신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느꼈다.

'괜찮아.'

루시온은 가벼운 대답만큼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 감옥은 생각보다 금방 도착했다.

체감상 지하 3층의 높이였다.

덜컹.

루시온이 문을 열려다 잠가져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흄을 불렀다.

"흄. 열어봐."

뽝!

거대한 소리와 함께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조용...."

루시온은 뒷말을 꺼내다 말고 가면을 쓸어내렸다.

자신이 한발 늦어버렸다.

―우오오! 문이 종이가 되어버렸어! 라타는 한 번 더 보고 싶어!

라타가 얼마나 신났는지 그림자 속에서 발을 동동 굴리는 소리가 들려올 정도였다.

쿠웅!

쾅!

[크흡...!]

곧 나머지 한쪽 문도 떨어지자 러쉘이 코를 먹으면서까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다.

"…아. 죄송합니다."

흄이 쭈뼛쭈뼛하다 바로 고개를 숙였다.

"아니야. 뚫리니 속이 후련하네."

루시온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자신이 아닌 베델이 움직였다.

[온다.]

지하 감옥으로 들어가는 문이 부서졌으니 당연히 지하 감옥을 지키는 병사가 나올 테지.

"베델."

[듣고 있어.]

"날뛰어봐."

루시온은 베델이 칼춤을 추길 허락했다.

그녀가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이겠는가.

[기대에 부응하겠어.]

베델의 기쁨이 루시온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하지만 루시온이 앞으로 움직이려던 그때, 러쉘이 잠깐 그의 어깨를 잡았다.

[베델. 손목, 발목. 알지?]

[알고 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베델은 웃음기를 누른 듯한 목소리를 냈다.

그제야 러쉘이 손을 뗐고, 루시온은 고개를 돌려 흄을 보았다.

"렌탈."

"예, 하멜 님."

"부숴버려."

"물론입니다. 뒤따라가면서 하나씩 처리하겠습니다."

흄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대답을 들으며 루시온은 걸었다.

큰 소리에 허겁지겁 달려온 병사들이 루시온을 발견하자마자 침입자라며 크게 외치길 준비했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아무도.

베델이 기세를 올렸고, 그들은 그 기세에 짓눌려 다리를 오들오들 떨기 바빴다.

[루시온 공.]

"듣고 있어."

[어떤 싸움이든 기선 제압이 먼저다.]

검을 쥔 루시온의 손이 올라갔다.

[한 번 생긴 두려움은 이미 무너진 댐과 같아서 절대로 막을 수가 없지.]

베델은 루시온의 다리에 힘을 주었다.

마치 근육이 부글부글 끓는 듯한 느낌에 루시온은 멈칫거렸다.

[이 느낌을 기억해, 루시온 공.]

몸을 한순간 튕기듯 자리를 박찼다.

마치 물 위를 걷는 듯 몸놀림이 너무도 가벼웠다.

다리가 몇 번 움직였는지 몰라도 어느새 제일 가까웠던 초네스트의 병사와 마주했다.

스윽.

베델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고, 그대로 힘으로 이용해 병사의 손목을 베어버렸다.

'...?'

말도 안 될 만큼 깔끔하고, 빠르게 절단되자 루시온은 깜짝 놀랐다.

다시 보아도 감탄이 나올 만한 솜씨였다.

[행동은 간단하게.]

베델은 이미 루시온의 고개를 돌려 다음 적을 보고 있었다.

[루시온의 공의 시선은 이미 쓰러트린 적이 아닌 쓰러트릴 적을 향해 있어야 해.]

탁.

가벼운 발소리.

쉬익!

검이 휘둘러지면서 나는 매섭고 빠른 바람 소리.

그리고 터지는 핏방울.

이 박자가 한 명을 벨 때마다 계속 유지되고, 이어졌다.

"…하아. 하악."

고동 소리가 거칠어져 루시온은 자신도 모르게 들이마신 숨이 폐에 가득 차자 베델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고생했어.]

베델은 파르르 떨리는 루시온의 몸을 느끼며 그를 칭찬했다.

짧지만, 실전을 버틸 만큼 재활 훈련을 통해 루시온의 몸이 달라지고 있었다.

루시온은 숨이 너무 차 가면을 반만 벗으며 고개를 돌렸다.

빠각.

마지막으로 살아 있던 놈인지 흄의 손과 함께 고개가 180도 이상 돌아간 채로 스르르 땅으로 무너져내렸다.

사라진 손목과 틀어진 고개가 공존하는 시체를 보며 루시온은 파르르 떨리는 손에 힘을 주었다.

'언젠가 나도 저 경지에 이를 수 있겠지?'

'그래, 맞아. 루시온 공이라면 할 수 있어.'

루시온이 그린 미래를 베델 역시 보았기에 그녀는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숨이 거치십니다. 괜찮으십니까?"

흄은 피가 묻지도 않은 자신의 손을 옷에 열심히 닦은 후에 주머니를 뒤져 물을 꺼냈다.

루시온의 고개가 좌우로 살짝 흔들렸다.

온몸에 진이 빠진 기분이었다.

지금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이 너무도 무거웠다.

[고생했어, 루시온, 베델.]

러쉘은 루시온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실전은 루시온을 더 강하게 할 테지.

[잠깐 빙의를 풀어도 괜찮겠나?]

베델이 물었다.

물을 벌컥벌컥 마신 후에야 루시온이 대답했다.

"아니. 아직. 버틸 만해."

라인트 용병단은 아직 조직원이 아니었다.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기에 준비는 해둬야 했다.

'어둠도 괜찮아.'

빙의로 어둠이 절반 가까이 사라졌지만, 다시 빠르게 차오르고 있었다.

루시온은 가면을 다시 제대로 쓴 후에 초네스트의 병사들이 왔던 곳으로 걸어갔다.

그때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다.

―루시온의 다리가 막 흔들려. 라타가 보기에 잠깐 쉬는 게 좋은 것 같은데.

라타가 그림자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걸을 수 있어."

루시온은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러쉘은 그를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이제 곧 감옥이 나올 순간이었다.

짧은 복도를 걷고 열린 문틈 사이로 좁디좁은 감옥이 보였다.

루시온의 손가락이 바짝 펴져서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루시온…?]

러쉘은 그 모습에 조심스레 루시온을 불렀다.

"…괜찮습니다."

루시온의 목소리가 떨렸다.

쿵쾅쿵쾅.

눈치 없게 심장이 뛰는 속도가 갑자기 빨라졌다.

[아니. 괜찮지 않아.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베델이 억지로 루시온의 몸을 움직여 고개를 돌려버렸다.

[천천히 숨을 내쉬어, 루시온 공.]

숨을 쉬는 법을 잊어버린 건지, 바짝 굳어버린 루시온을 대신해 베델이 숨까지 내쉬었다.

"하멜 님. 제가 갔다 오겠습니다."

흄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감옥으로 들어갔다.

'…윽.'

역한 냄새에 흄이 몸을 부르르 떨며 코를 막아버렸다.

감옥에는 제법 많은 이들이 갇혀 있었다.

저들 모두 라인트 용병단일까.

흄이 자신을 따라온 러쉘을 보았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도 몰라. 내가 잘났지만, 사람 얼굴만 보고 이 사람이 누구라는 건 알 수 없지. 그건 점쟁이가 할 일이니까.]

별수 없지.

흄은 차분하게 목소리를 냈다.

"라인트 용병단이 누구신지 손 좀 들어주시겠습니까?"

[...?]

러쉘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손을 들라니.

[흄 너… 그거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전 라인트 용병단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흄이 작게 속삭였다.

"그럼 지금 다시 돌아서 하멜 님께 물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야. 내가 갔다 올게.]

잠깐 자리를 떠났어도 루시온이 걱정됐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더 말렸어야 했는데. 좀 더 강하게 말했어야 했어.'

하나를 극복했다고 해서 다른 하나까지 자연스레 극복할 수는 없었다.

[루시… 온?]

러쉘은 루시온에게 향하다 말고 바로 그와 마주치자 깜짝 놀랐다.

딱 감옥으로 들어서는 입구 앞에 루시온이 걸음을 멈췄다.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꼭 유령을 본 것처럼 말입니다."

루시온의 가면이 노랗게 물들어갔다.

[너, 지금 이렇게 일어나도 괜찮아? 잠깐이라도 앉아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저번에 처방받은 약을… 혹시 몰라 챙겨뒀습니다. 약은 죽어도 싫지만, 어쩌겠습니까."

말 속에 가시가 돋아 있었다.

무엇을 향한 가시인지 러쉘은 알 수 없었다.

"괜찮습니다."

[정말 그래, 베델?]

러쉘은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하기에 베델에게 물었다.

[아니. 루시온 공은 괜찮지 않아.]

[루시온.]

베델의 말에 러쉘은 루시온을 단호하게 불렀다.

"저는 흄을 믿지만, 흄이 해결하기에 어렵습니다. 때를 잘 맞춰야 하니까요."

루시온은 연락용 아이템을 꺼내 흔들었다.

우지끈.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에 루시온은 깜짝 놀랐다.

곧이어 발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하멜 님."

흄이 서둘러 달려와 루시온을 불렀다.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제가 라인트 용병단 분들을 힘으로 탈출시켰습니다. 그러니 억지로 이쪽으로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흄은 감옥으로 들어가는 문을 가리켰다.

"앞으로도 하멜 님께서 하기 힘든 일은 제가 계속 감당하겠습니다."

"…그래."

살짝 웃음을 흘리는 소리가 루시온에게서 들렸다.

아무래도 자신이 흄을 과소평가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