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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푸른 빛을 내는 번개가 헤인트를 향해 쏘아졌다.

파지직!

귀를 때리는 소리에도 헤인트는 차분하게 펼쳤던 손바닥을 쥐었다.

'…마지막 한 놈.'

파아아!

빛을 터트렸다.

한순간 시야가 차단당하자 번개가 휘어버리며 엉뚱하게도 건물 천장을 뚫어버렸다.

푸욱!

헤인트가 그 틈에 마법사의 심장에 검을 쑤셔 넣었다.

"컥!"

재빨리 검을 뽑고 빛을 둘렀다.

마법진을 둘러싼 방어 마법이 꺼지자 헤인트는 마법진을 향해 아래로 힘껏 내찔렀다.

파앙!

마법진이 빛과 함께 터져버리자 주변으로 빛이 퍼져나갔다.

'좋아. 방어용 마법진은 부서졌고. 이제는....'

퍼엉!

헤인트가 창문 밖으로 손을 뻗어 하늘로 빛을 쏘아냈다.

대기하고 있던 황실 기사단에게 공격하라는 신호였다.

자신의 집 문에 끼워져 있던 의문의 편지.

그 속에 루미노스의 아지트 위치가 적혀 있었다.

황제에게 보고 후, 편지에 적힌 내용이 사실임이라는 것까지 확인했다.

마법사 특성상 낮과 밤이 바뀌었기에 낮에 습격을 강행하라는 황제의 지시에 맞춰 제8 기사단이 움직였다.

제8 기사단은 성자 루시온을 보호하기 위해 황제가 새롭게 만든 기사단으로 그 초점이 황실이 아닌, 루시온에게 쏠려있어 이런 일이 가능했다.

반짝.

헤인트는 주변 감지용으로 바닥에 뿌려뒀던 아주 조그만 빛 알갱이가 반응하자 벽에 바짝 붙었다.

"습격인 거 확실해? 또 병신 같은 놈이 마법 실패로 방어막을 부서트린 게 아니고?"

"그러니까 그걸 알려고 여기까지 온 거 아니야. 만약 누가 마법을 실패한 거라면 그놈을 반드시 땅 구덩이에 파묻고 만다."

"기왕 묻을 거 질퍽한 진흙 속이...."

갑자기 가슴을 파고드는 고통에 마법사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커… 헉...."

헤인트는 마법사의 발로 밀침과 동시에 검을 뽑아서 그대로 다른 마법사의 목을 날려버렸다.

'두 놈인가?'

헤인트는 검에 묻은 피를 뿌리며 복도를 거닐었다.

루미노스가 있던 아지트는 평범한 빵 가게였다.

하지만 동부에 있는 마탑처럼 가게에 마법을 걸어 비밀 공간을 확장한 상태였다.

특이하게도 루미노스에는 결계 술사는 없었다.

주로 원소 마법을 사용하는 이들로 이루어져 있어 습격이 한결 편했다.

'보자.'

헤인트는 손바닥에 빛을 뿌렸다.

빛과 마법이 만나면 마법은 잠깐 일그러지는 현상이 벌어졌다.

이 힘 때문에 먼저 몇 명 부하와 함께 루미노스 아지트에 침투했다.

자신은 방어용 마법진 없애고, 나머지 부하들은 자신이 뿌려둔 빛을 통해 마법 벽을 찾고 있었다.

'여기 근처에는 마법 벽이 없고.'

복도 끝에 도달했음에도 마법의 흔적은 보이질 않았다.

"대장. 찾았습니다."

부하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헤인트는 이미 등을 돌리고 있었다.

"금방 가지."

헤인트는 부하를 따라 마법 벽이 있는 장소로 향했다.

가는 도중, 뒤늦게 습격자가 있음을 파악해 날뛰는 마법사들을 베어내며 전진했다.

"여기입니다."

부하가 피가 묻은 벽을 가리켰다.

헤인트는 망설임 없이 벽을 향해 빛을 뿌렸다.

빛 때문에 벽이 일렁거리자 헤인트는 손에 빛을 두르고 벽을 만졌다.

빛 온도를 점점 높이니 '팍' 하는 소리와 함께 마법이 깨져버렸다.

헤인트는 사라진 벽 너머로 방의 모습이 드러나자 다시 검을 뽑아 들었다.

"돌격."

그 말에 방에 있던 마법사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바, 바라옵건대 부디 그대의 손짓에 맞춰... 억!"

마법사가 주문을 외우는 시간보다 기사들의 검이 마법사를 베는 시간이 더 빨랐다.

화르르륵!

하지만 한 마법사의 손에서 탄생한 불꽃이 순식간에 새로 변해 헤인트를 덮치려 했다.

누가 보아도 그가 대장이었다.

헤인트는 당황하지 않고 빛을 두른 손을 뻗었다.

불꽃보다 더 높은 온도를 지닌 빛은 무참히도 불꽃을 씹어 삼켜버렸다.

빠각.

"비, 빛의 힘이라고?"

마법을 쏘았던 마법사가 당황했다.

이토록 공격적인 빛은 처음이었다.

헤인트는 다리에 빛을 두르자마자 마치 용수철처럼 튕겨가 어느새 마법사 앞으로 도착해 있었다.

빛이 마나와 어둠 중에 가장 빠르다는 사실을 응용한 기술이었다.

그 속도 그대로 헤인트의 검은 마법사의 목을 베어냈다.

데구르르.

목이 날아가 벽에 맞고 바닥에 굴렀다.

놈이 방에 있는 마지막 마법사였다.

헤인트는 검을 집어넣고 마법사들의 시체를 살폈다.

각자 품에 종이를 안고 죽은 마법사들을 보며 이곳이 루미노스의 핵심 장소라는 걸 알았다.

"주변을 경계하게."

"알겠습니다, 대장."

기사들은 대답과 함께 방을 나섰다.

헤인트는 우선 어지럽게 널브러진 종이가 가득한 책상을 살폈다.

주로 마법과 관련된 문서인지, 주문, 마법진이 가득 그려져 있었다.

'...?'

헤인트는 종이를 살피다 말고 혼자만 이상한 문양이 찍힌 종이를 발견했다.

'…까마귀 문양?'

헤인트는 내용을 읽어나갔다.

―그건 오해입니다. 우리는 루시온 크로니아가 탄 마차는 물론, 어디로 향하는지 위치조차 몰랐습니다. 누군가 우리 사이를 방해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사과의 의미로 우리가 알고 있는 루시온 크로니아의 정보를 보내겠습니다.

'루시온?'

헤인트의 얼굴이 구겨졌다.

루미노스와 까마귀 문양을 가진 단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두 단체가 루시온을 두고 거래를 했다.

'폐하와 카슨이 걱정한 대로 이제 슬슬 루시온을 노리는 놈들이 나오기 시작하네.'

헤인트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 * *

[루시온 공. 조금 더 그곳에 있어도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루시온이 그림자 이동을 사용한 뒤에 베델이 아쉽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뭐 하러?"

루시온은 퉁명스럽게 반응했다.

용건은 이미 끝났고, 더 어울려봤자 뭘 하겠는가.

[네 조직이잖아.]

러쉘도 한마디 거들었다.

루시온이 싫다고 해도 그의 조직인 이상 조직원과 교류가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그 말에 루시온은 가면을 벗다 말고 움찔거렸다.

"나중에 하겠습니다."

땀범벅이 된 루시온의 모습에 흄이 손수건과 물을 건넸다.

"고생하셨습니다, 도련님."

"빛 때문에 좀 고역이었지만, 고생이라고 할 건 없었어."

루시온은 땀을 닦다 장갑을 벗어 부정 수치가 나타난 손등을 바라보았다.

러쉘이 주었던 귀걸이의 효과였다.

시곗바늘은 이전과 별 차이 없어 루시온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뭐가 묻어 있습니까?"

흄이 루시온의 손등을 바라보았다.

"아니."

루시온은 물을 마셨다.

속이 여전히 좋지 않았기에 혹시 몰라 흄에게 손을 내밀어 손수건을 요구했다.

"속이 좋지 않으십니까?"

흄이 걱정스레 물었다.

"어. 그림자 이동을 한 번 더 사용하면 또 피를 쏟을 것만 같아. 빛이 좀 강했어."

―신력 알레르기는 어떻게 치료할 수 있는 걸까? 라타가 트로에 아저씨한테 부탁해볼까?

라타가 빛의 신수인 트로에를 언급하며 루시온을 빤히 보았다.

[흠.]

러쉘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빛 내성이 생긴 걸 보면 신력 알레르기는 없는 것 같은데. 네 증상을 보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참 애매하네.]

빛 내성이 없었을 때는 루시온이 빛을 쐬면 어둠이 죽기에 고통을 느끼거나 그에 동반하는 부작용을 겪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루시온이 가진 빛 내성은 20단계 중에 벌써 5단계 정도였다.

슬슬 부작용이 줄어들어야 하는 게 정상일 텐데, 마치 깨져버린 그릇 사이로 물이 흐르는 것처럼 내성이 제대로 작동하질 않았다.

"그래도 예전보다 살만합니다."

[그건 또 그래. 없는 것보다 낫지.]

러쉘은 고개를 끄덕이며 멋쩍은 듯이 대답했다.

"이제 집에 돌아가야겠습니다."

루시온은 어느덧 노을이 지고 있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서걱.

그때, 자신하고 연결됐던 붉은 실이 하나 잘려나갔다.

6개의 푸른 실은 뉴브라 왕국이 테슬라 제국에 만든 6개의 지부.

3개의 붉은 실은 소설 '어둠의 손'의 주인공인 헤인트.

'어둠의 손'의 최종 보스.

그리고 루미노스.

루시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느 쪽의 실이 잘려나갔는지 이쯤 되면 뻔했다.

91화. 추격

* * *

"요새 외출이 잦구나."

막 방문을 열려던 차, 카슨의 목소리가 들렸다.

루시온은 자신도 모르게 깜짝 놀랐고, 흄이 살짝 웃다 루시온의 시선에 입을 다물었다.

"아, 너를 혼내려고 꺼낸 말이 아니니 오해하지 말거라."

카슨이 금세 미안한 표정을 드러내며 손에 쥐고 있던 편지를 루시온에게 내밀었다.

"샤엘라한테 편지가 왔구나. 이번에는 너한테만 편지가 왔으니, 아버지께서 아시면 무척 섭섭해하실 테지. 비밀로 하거라."

샤엘라는 가출하듯이 집을 나가버리고, 제국 동부에 있는 마법사들의 집이자 안전구역이라고 할 수 있는 마탑에서 몇 년간 머물고 있었다.

간혹 '나는 잘 살아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는 한 줄짜리 편지를 보내 생존 신고를 하는 게 고작이었다.

"벌써 누님께서 생존 신고용 편지를 보낼 때가 됐습니까?"

"아니. 좀 평소보다 좀 이르구나."

카슨은 고개를 가로젓다 곧 방을 가리켰다.

"잠깐 할 말이 있으니 들어가도 되겠느냐."

"예. 들어오십시오."

"그럼, 저는 차를 가져오겠습니다."

흄이 고개를 숙인 뒤에 복도를 거닐었다.

"루시온."

"예, 형님."

"밖에서 작든 크든 문제는 없었느냐?"

"제가 밖에 나가서 맞고 들어올까 봐 걱정입니까?"

"큰 문제는 없는 듯하구나."

루시온의 농담에 카슨은 미소를 보이며 자리에 앉았다.

"루시온 너에게 해야 할 말이 여러 개가 있다."

루시온도 자리에 앉았고, 라타가 그의 다리에 올라왔다.

루시온은 라타를 쓰다듬으며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다 입을 열었다.

"최근에 사고를 친 적은 없습니다. 얌전히 지내지 않았습니까?"

"알고 있다."

"그럼 제가 어딜 돌아다니는지 궁금하십니까?"

"그건 아마 나보다 아버지가 궁금하시지 않을까 싶구나."

"그냥 크로니아를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을 뿐입니다. 제가 가본 곳이라고는 저택 근처의 도시, 변경에 세워진 성벽이 전부니까요."

"잘했구나."

말과 달리 카슨의 미소가 씁쓸하게 보였다.

[카슨이 평소랑 표정이 좀 다른데? 꼭 뭔가 중대한 일을 앞둔 사람처럼 보이네.]

러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루시온."

러쉘 말대로 카슨이 중요한 말을 하려는지 그답지 않게 몇 번이고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냈다.

"말씀하십시오."

"아마 아버지께서 말씀하기 힘든 소리이지 않을까 싶어 이렇게 찾아왔구나."

'내 외출과 관련된 일이겠지?'

루시온은 언젠가 이날이 올 줄 알았다.

헤인트가 루미노스 본거지를 털면서 뭔가 발견하지 않았겠나.

그게 아마도 자신과 관련된 문서가 아닌가 싶었다.

"일단 널 공격했던 루미노스라는 조직이 조금 전에 사라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놈들의 아지트는 완전히 무너졌지만, 아지트에 벗어나 있던 놈들도 있으니 완전히 소멸했다고 보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는구나."

카슨이 헤인트에게 들었던 일을 꺼냈다.

하지만 루미노스가 사라졌다는 사실에도 카슨이 웃질 않자 루시온 역시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너에게 이렇게 알리는 건 아지트를 무너트리는 과정에서 헤인트가 널 노리는 또 다른 조직의 존재를 파악했기 때문이란다."

"…또 다른 조직이요?"

루시온은 아마도 '공허의 손'이 아닐까 싶었다.

"까마귀 문양. 이게 아직 정확히 어떤 단체인지 모르겠지만, 또 다른 조직이 나온 이상 루시온 너를 오늘처럼 내버려 둘 수 없구나."

말을 들은 러쉘의 눈썹이 안으로 모였다.

[저런.]

베델마저 탄식을 털어놓았다.

"당분간 외출을 자제하라는 말씀입니까?"

예상과 달리 루시온은 차분했다.

"그래."

카슨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자신도 노비오도 루시온이 제발 방 밖으로 벗어나길 바라던 때가 있었거늘.

알 수 없는 적 때문에 루시온이 낸 용기를 고작 한 달 반 만에 막게 되어 가슴이 아팠다.

"…미안하구나."

카슨은 기어코 루시온에게 사과했다.

입속이 가시가 돋친 것처럼 따가웠다.

"아닙니다. 형님께서 미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루시온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조직의 방향을 대놓고 크라언에게 전달했으니 그가 알아서 잘 다듬을 테고, 사람을 구해야 했지만, 막 급할 건 없었다.

루시온은 자신의 다리에서 꿈틀거리는 라타의 움직임에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 단체가 어떤 단체인지, 얼마만큼 위험요소를 가지고 있는 건지, 제대로 파악된 후에 네 외출에 관해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지금은 저택 밖으로 나가지 않았으면 한다."

카슨은 조심히, 또 조심히 말을 이어나갔다.

"이렇게 네 움직임을 제안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또 있단다."

"또… 말입니까?"

공허의 손 말도 뭐가 또 있다는 건지.

루시온은 괜스레 바짝 긴장했다.

"뉴브라 왕국에서 보여주기식으로나마 변경에 세워진 성벽 근처를 알짱거리던 행동이 요 며칠 잠잠하더구나."

카슨의 말은 마냥 흘려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뉴브라 왕국의 목적이 루시온 자신이었으니.

"보여주기도 멈춘 건지,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건지, 지금 아버지께서 계속 파악하고 있으니 지금으로서는 무어라 장담할 수 없구나."

카슨이 불안한 듯이 자신의 허벅지를 꽉 쥐기를 반복했다.

십여 년 전, 뉴브라 왕국에서 이와 비슷한 일을 벌인 적이 있었다.

크로니아라는 이름을 가진 누구든 어릴 적부터 변경에 있는 성벽으로 가 크로니아가 지켜야 하는 게 무엇인지 확인하는 풍습이 있었다.

노비오가 황제의 부름에 불가피하게 잠깐 자리를 비웠고, 그 자리를 카슨이 대신했다.

그 당시 뉴브라 왕국에서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 카슨 자신은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노비오 대신 자신이 루시온을 데리고 가 크로니아가 지켜야 할 게 무엇인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어리석었다.

최연소 기사라는, 남들이 치켜준 상황에 취해 돌아온 대가가 무엇이었던가.

"형님."

루시온이 카슨을 불렀다.

카슨은 뒤늦게 반응하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래."

"이번에는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그래야지."

'그래야지.'라며 카슨은 또 같은 말을 작게 중얼거렸다.

"아마 뉴브라 왕국의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아버지하고 나하고 저택을 비울 것 같구나."

"예. 걱정하지 마시고, 편안히 다녀오십시오. 저는 집에 잘 붙어 있겠습니다."

노비오와 카슨이 자리를 비운다는 사실에 루시온은 표정을 다급히 숨겼다.

외출 금지라는 상황을 단번에 뒤엎을 만큼 상황이 좋게 흘러갔다.

루시온이 흔쾌히 대답하자 카슨은 불안함을 숨기질 못했다.

"루시온. 이번에는 상황이 다르니 샨드라를 타고 기사를 밀치면서 밖으로 나가거나, 안토니의 마음을 흔들려 하지 말거라."

"저는 집에 잘 붙어 있겠다고 말씀드렸는데요…?"

루시온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와 나까지 나가면 이 저택의 주인은 네가 되는 셈이나, 그 힘을 마구잡이로 사용하려 하지 말거라. 가령, 기사들에게 명령해서 저택 밖으로 나가거나...."

카슨의 잔소리가 길어지자 러쉘이 크게 웃었다.

루시온이 자신 덕에 유령이 보이지 않게 되었어도 온종일 방을 벗어나지 않는 게 일과였다.

하지만 세상을 향한 열망을 숨길 수 없는 법.

루시온이 간혹 밖으로 나갈 때 호위를 떨쳐내려고 도망치듯 밖으로 나갔고, 그 수법도 점점 다양해져 카슨의 잔소리가 길어지는 건 당연했다.

―와! 카슨이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건 라타는 처음 봤어! 우오오오!

라타는 아예 테이블에 매달려 신기한 듯 카슨을 빤히 보았다.

잔소리가 길어지자 루시온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고, 베델은 웃음을 숨기려 황급히 투구 덮개를 내렸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좋은 타이밍이다, 흄.'

루시온은 그제야 한숨 돌렸다.

"형님. 이제는 그런 일이 없을 테니 제발, 안심하셨으면 합니다."

"그래. 내가 걱정이 많았다."

순순히 말을 듣는 루시온이 아직 어색한 건지 몰라도 카슨은 아직 몇 절 더 남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실례합니다."

흄은 방으로 들어와서는 아쉽다는 표정을 한 카슨과 이제 그만하라는 눈치를 보내는 루시온을 바라보며 차를 내려놓았다.

"루시온."

"예. 하실 말씀이 또 남으셨습니까? 오늘치 말씀은 다 하신 듯합니다."

살짝 빈정거리는 말투에 카슨이 피식 웃었다.

"이제 슬슬 달리기도 다시 시작하는 게 어떻겠더냐. 답답함을 달리기로 풀어도 될 테고."

"그렇지 않아도 생각하고 있던 참입니다. 체력을 길러야죠."

루시온은 뜨거운 차를 후후 불었다.

"…그럼, 내가 돌아온 후에 재활 훈련도 같이 받아볼 생각이 있더냐?"

카슨의 제안에 루시온은 잠깐 멈칫거렸다.

"검을 배우고 싶다고 하지 않았더냐."

차마 뒷말을 이을 수 없었던 카슨은 살짝 얼버무렸다.

루시온의 몸은 크게 망가졌었다.

일상생활을 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지만, 그 이상은 불가능했다.

루시온이 지금까지 체력 훈련이라 착각했던 것들 모두 몸 상태를 정확히 알아보기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

'…이미 루시온이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인데, 더 바라도 될까.'

카슨은 말을 꺼내면서도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누구는 루시온이 평생 침대 생활을 할 거라고 했고.

누구는 루시온이 걸어 다니지 못할 거라고 했고.

또 누구는 목발을 짚고 다니는 것도 기적이라고 말했다.

다 틀렸다.

루시온은 악착같이 버티고, 버텨 지금 자신과 자연스럽게 마주하고 있지 않은가.

"예. 하겠습니다. 저도 언제까지 보호만 받을 수 없잖습니까."

너무도 눈이 부시게 반짝이는 루시온의 눈빛에 카슨은 먹먹한 목소리를 냈다.

"…고맙다, 루시온."

* * *

"궁금한 게 있으면 말해, 흄."

루시온은 카슨을 보내고 책상으로 걸어가며 입을 열었다.

"재활 훈련이라뇨? 혹시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굳이 말하면 다."

루시온이 자리에 앉았다.

늘 온몸에 족쇄를 차고 있는 기분이었다.

특히 비가 오면 죽을 맛이었다.

[루시온 공이 반드시 검을 잡을 수 있게 내가 도와줄 게.]

베델이 자신을 가리켰다.

이미 몇 번의 빙의로 루시온이 가진 문제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 고마워, 베델."

루시온은 베델이 도와준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베델이 그 말에 활짝 웃었다.

루시온을 보고 있자니 흑마법사들에게 당했던 기억 위에 행복으로 뒤덮이는 것 같았다.

좀 서툴지만, 루시온 나름대로 자신들을 아끼는 게 깊이 느껴질 정도였고.

베델은 무엇이든 루시온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라타도 도와줄 거야.

라타가 루시온의 다리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그래."

루시온이 라타를 쓰다듬었다.

[그럼, 루시온 공.]

막 피터가 넘겼던 6개 지부와 관련된 자료를 주머니에서 꺼내려던 루시온이 베델을 바라보았다.

[루시온 공이 구하고자 하는 쓸 만한 암살자들이 변경 근처에 있는지 둘러보고 올게.]

곧 루시온의 눈을 동그래졌다.

[죽기 전에 나도 수많은 기사 중 하나였지만, 죽음의 기사가 된 후로는 뭐라고 해야 하나 말도 안 될 만큼의 힘을 얻었지. 보는 눈도 좋아졌고. 한 번 나를 믿어봐도 될 거야.]

베델은 자신감 있게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베델 자신이 지켜본 결과 러쉘은 루시온 반경으로 일정 거리만큼 벗어날 수 없었다.

지금 제일 자유로운 건 자신이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걸 해야지.

"고… 마워, 베델."

루시온이 머뭇거리며 대답하자 러쉘은 웃음기가 어린 얼굴을 하다 고개를 아예 돌려버렸다.

가족이 아닌 누군가가 루시온을 위해 나서주는 건 아직 그에게 서툰 일이 아닐까 싶었다.

[그럼 내일 아침까지는 돌아올게.]

베델이 주먹을 쥔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두드린 후에 밖으로 나섰다.

[루시온. 넋 놓지 말고 손을 움직이는 게 어때?]

러쉘은 계속 웃음을 참아냈다.

"…예. 그래야죠."

루시온은 자료로 시선을 돌리다 말고 뒤늦게 러쉘을 바라보았다.

"그냥 웃으시는 게 어떻습니까?"

[아니. 계속 참아보려고.]

실실 웃는 얼굴로 러쉘은 루시온을 재촉했다.

루시온의 인상이 구겨지자 흄이 목소리를 냈다.

"혹시 마시고 싶으신 게 있으십니까?"

"아니. 조금 전에 마셨던 걸 가져와 봐."

루시온의 지시에 흄은 테이블에서 몇 개 추려 간식과 함께 차를 가져왔다.

루시온은 차를 홀짝이다 잼이 발라진 쿠키 몇 개를 입에 넣었다.

라타는 아예 책상으로 올라가 쿠키를 흡입하듯 먹었다.

와사삭.

그사이에 몇 장의 서류가 넘어갔는지 몰랐다.

비어 있는 로베리오 자작가 자리에 물음표가 있는 걸 확인한 뒤에 다음 장을 넘겼다.

가르티오 뭰.

'가르티오 뭰?'

루시온이 잠깐 멈칫거렸다.

'…어디서 본 이름인데?'

[이 이름, 편지에 적혀 있었잖아.]

러쉘의 말에 루시온은 서둘러 편지 더미를 뒤졌다.

―안녕하십니까. 황실 기사단 가르티오 뭰이라고 합니다.

'그래. 이 편지였어.'

92화. 추격(2)

안토니가 가져왔던 편지 중 하나로 나중에 읽어보려고 따로 놔두었던 것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놈이 6개의 지부를 관리하는 놈 중 하나라 이거야?'

루시온은 편지를 열어보다 말고 갑자기 기가 찬 듯이 웃었다.

"이놈이 절 아주 병신으로 아네요."

편지가 루시온 손에 구겨졌다.

자신에게 편지를 보낸 목적이 무엇이겠는가.

친해져서 목에 칼을 박아 넣으려는, 뻔하디뻔한 수작이었다.

루시온은 고민하지 않았다.

이미 죽은 로베리오 자리를 제외한 나머지 지부를 관리하는 이들이 자료에 고스란히 적혀 있었고, 루시온은 가면을 꺼내 쓴 뒤 연락용 아이템을 사용했다.

<예, 하멜 님!>

쥐쟁이의 우두머리였던 헤로안이 바로 목소리를 냈다.

"헤로안. 지금부터 네가 찾아봐야 할 사람들이 있어."

<뭐든 말씀해주십시오. 놈들의 비밀을 파헤쳐 손에 쥐겠습니다.>

헤로안의 목소리가 너무도 신나 있었다.

덩달아 루시온 역시 꽤 즐겁게 입을 열었다.

"총 5마리."

루시온은 놈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 * *

―루시온.

막 잠이 들려던 차, 라타가 조용히 루시온의 옆구리를 건드렸다.

"…왜?"

루시온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눈도 반쯤 떠서는 하품을 내뱉었다.

―라타는 루시온의 잠을 깨우고 싶지 않았는데, 2번한테 연락이 왔어.

그 말에 루시온이 곧바로 상체를 일으켰다.

"도망친대?"

―맞아! 지금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대!

높아진 루시온의 목소리를 따라 라타는 신이 난 듯이 말했다.

"2번한테 범위가 닿는 선까지 놈을 쫓으라고 해. 주기적으로 연락하라고 하고."

루시온은 라타에게 지시를 내린 뒤에 러쉘을 불렀다.

"스승님."

잠시 뒤, 벽에서 러쉘이 얼굴을 밀고 들어왔다.

[왜, 왜? 무슨 일이 생겼어?]

"그 집사가 움직인다고 합니다."

[바로 베델을 불러올까?]

누굴 쫓으려면 움직임에 제한이 없는 베델이 제격이지 않을까 싶었다.

"아뇨. 베델은 베델대로 움직이게 내버려 두십시오. 제가 쫓겠습니다."

베델의 눈이 정확하다면 자신이 포섭할 이들과 겹치게 찾아오지 않을까 싶었다.

더불어 더 좋은 이들을 찾아오면 좋고.

내일 새벽에 저택을 떠나는 노비오와 카슨을 배웅하기 전까지만 집에 들어오면 된다.

시간은 충분했다.

[흄은?]

"제가 가겠습니다."

―라타는 흄의 방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어.

"출발해."

―응!

라타가 바닥을 찰싹 때렸다.

어둠이 루시온과 라타를 삼킨 뒤, 흄의 방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흄은 이미 루시온의 어둠을 느꼈는지 자리에서 일어난 상태로 차분히 루시온을 맞이했다.

"준비됐습니다."

"좋아. 그 집사의 뒤를 쫓아야 하는데, 달릴 수 있겠어?"

모양새는 나지 않지만, 말만큼 빠르고, 말보다 더 튼튼한 흄에게 업힐 생각이었다.

"지치지 않고 뛸 자신이 있습니다."

흄이 싱긋 웃었다.

"하긴. 네가 지친 모습을 본 적이 없네."

"아닙니다. 저도 지치긴 합니다."

"네가…?"

루시온의 눈이 커졌다.

"예. 저보다 라타의 체력이 더 좋거든요."

―아니야. 라타는 흄하고 놀면 먼저 지쳐서 쓰러져. 흄의 체력은 정말 엄청, 엄청 최고야!

라타가 잠깐 엉덩이를 깔고 앉아서는 앞발을 크게 움직여 원을 그렸다.

가끔 흄이 라타를 데리고 산책하러 갈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뭘 하고 오는지 몰라도 지쳐서 기절한 라타가 흄에게 안겨서 돌아왔다.

―있지, 루시온. 흄이랑 밖에 나가면 막 달린다. 라타는 너무 신나! 바람이 씽씽! 라타가 막 하늘에 붕 떠 있는 것 같아.

'이제 보니 흄이 조카 놀아주는 삼촌이네.'

루시온은 유령 2번이 연락 오기 전까지 잠깐 흄의 책상 의자에 앉아 라타의 말을 가만히 들었다.

자신이 할 수 없는 걸 흄이 해주니 그 또한 고마웠다.

[…허. 지금 흄의 체력이 신수의 체력이랑 맞먹는다는 말이잖아.]

러쉘은 듣다 말고 깜짝 놀랐다.

"그러네요. 그런데 신수의 체력이 좋습니까?"

루시온은 대꾸하다 말고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이 반응했다.

라타는 자신한테 매달리거나, 안기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은데.

[갓 태어난 신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답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네. 어떻게 된 게 내가 평생 살아오면서 겪었던 일보다, 루시온 네 옆에 붙어 있는 한 달 반이 제일 놀랄 일들이 많은지.]

러쉘이 불안한 시선으로 자신을 보자 루시온이 키득거렸다.

'벌써 놀라시면 안 되는데.'

* * *

"…허억! 헉!"

남자는 당장 숨이 넘어갈 정도로 크게 헐떡이면서도 발걸음을 멈추질 않았다.

'붙잡히면 끝이야! 붙잡히면!'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12명이 끌려갔을 때, 그 자리에서 정말로 오줌을 지릴뻔했다.

동료는 아니었어도 비밀을 공유했던 12명의 사람이 내지르는 비명이 매 순간 자신의 귓가에 들려왔다.

크로니아의 지하 감옥으로 들어가면 영원히 빛을 볼 수 없다는, 시종들이 떠드는 말조차 미칠 것만 같았다.

어떻게 자신만 살아남은 건지 몰라도 하루하루 피가 말라가다 못해 뜬눈으로 벌써 삼 일을 보냈다.

머리가 돌아가질 않았다.

어서 잠에 빠지라고 귓가에서 환청이 속삭였다.

하지만 다리를 멈출 수 없었다.

'살아야 한다. 살아서 반드시 어머니한테 가야 해.'

사전에 문제가 생길 시 어디로 가서 보호를 받아야 하는지 들었기에 남자는 도시에 있는 한 집으로 향했다.

똑똑!

남자는 집을 확인한 뒤, 힘껏 문을 두드렸다.

"누구쇼?"

다소 험악하게 생긴 남자가 문을 살짝 열며 물었다.

"저, 정글의 머리는 푸르다."

"푸른 깃발은?"

"대대손손 물려줄 금은보화구나."

"들어오십쇼."

험상궂은 남자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남자를 방으로 들게 했다.

"혼자입니까?"

험상궂은 남자의 물음에도 남자는 겁에 질려 덜덜 떨기 바빴다.

"저, 저는 살 수 있습니까? 분명 들켜도 여기까지 오면 책임지고 보호해주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보고가 요 며칠 전부 끊어졌습니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말부터 하셔야겠습니다."

협박처럼 들리는 말에 남자의 눈동자가 굴러갔다.

방에는 덩치가 큰 남자들이 가득했다.

주변 분위기가 다소 이상했지만, 잠을 못 잔 남자가 할 수 있는 생각은 짧았다.

"맞습니다. 다 죽었습니다. 저만 살아남았습니다!"

"…하. 어디까지 불었다고 합니까?"

"모, 모릅니다. 그건 정말 모르니 약속대로 절 보호해 주십...."

자신의 배를 뚫은 검의 모습에 남자는 영문을 모른다는 표정을 지었다.

"모르면 죽어야지."

"사, 커… 헉, 살려 주...."

피로 범벅이 된 손으로 험상궂은 남자에게 손을 뻗으나, 검 하나가 남자의 머리를 꿰뚫었다.

"빌어먹을. 13명 다 죽었다니."

험상궂은 남자는 오만상을 쓰더니 부하 중 한 명에게 손을 뻗었다.

부하가 종이를 건넸고, 험상궂은 남자는 당장 13명 전원이 죽었다는 사실을 적었다.

"당장 2번으로 뛰어가서 보고해. 보고가 늦으면 우린 다 죽는 거다, 알겠어?"

"누구한테 보고하는데?"

그때, 구석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둠을 덮고 나타난 가면을 쓴 남자와 소녀의 모습에 집 안에 있던 모두가 일순간 입을 다물고 넋을 잃었다.

흑마법사라니.

샤아아.

순식간에 집 안에 퍼져나간 어둠이 벽처럼 감싸 누구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았다.

"그래서 누구한테 보고하는데? 나도 알자, 응?"

가면이 노랗게 물들었다.

빠각!

부하 중 한 명의 목이 소녀의 손에 순식간에 꺾여나가자 그제야 험상궂은 남자가 반응했다.

"누, 누구냐!"

"아니, 내가 먼저 물었어. 넌 대답할 차례야."

루시온이 보낸 어둠이 험상궂은 남자의 손을 붙잡고 그대로 뒤로 꺾어버렸다.

"끄아아악!"

"쉿. 다들 자는 시각이니까, 조용히 해야지. 어릴 때 배웠을 거 아니야."

루시온은 어둠으로 놈의 입을 막아버렸다.

"말하기 싫어? 아니면 모르는 거야? …아. 네가 뭐랬더라. 모르면 죽어야지? 그래. 그랬던 것 같네."

저 남자의 가벼운 목소리가 왜 이렇게 무섭게 들리는지.

빠각!

초 단위마다 거듭하며 들려오는,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에 험상궂은 남자는 자신의 팔을 붙잡으며 주변을 살폈다.

"...."

순간, 남자의 동공에 힘이 빠져버렸다.

식은땀이 주르륵 나며 다리에 힘마저 풀려 주저앉았다.

하나같이 목이 꺾여 죽은 자신의 부하와 눈이 마주쳐버렸다.

남자는 눈을 질끈 감고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두 허벅지를 꽉 쥐었다.

머릿속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물을게. 누구야?"

루시온이 물었다.

조곤조곤한 그 물음에 남자는 발작하다시피 몸을 덜덜 떨었다.

살 수 없다고 생각했다.

모든 걸 내려놓자 눈물이 왈칵 흘러내렸다.

루시온은 남자의 상태에 말을 나눌 수 있는 상황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남자의 어깨를 붙잡고 어둠을 집어넣으려는 그때, 울먹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디, 고통 없이. 죽여주십시오."

"그래. 약속하지."

"서부에서 북부로 향하는 게이트 근처에 이 집처럼 까마귀 문양이 찍힌 집이 있을 겁니다. 그 집을 찾으십시오."

루시온이 뒤로 물러났고, 흄은 근처에 있는 검을 주워 남자의 목을 단숨에 베어냈다.

삭!

동시에 검은 깨져버렸고, 남자의 목이 바닥에 떨어졌다.

[서부에서 북부로 향하는 게이트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어?]

러쉘이 물었다.

"알고 있습니다."

루시온은 일단 누군가 오기 전에 근처로 이동하기로 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스승님."

[알았어.]

러쉘이 대답과 함께 집을 벗어났고, 루시온은 죽어버린, 집사로 일했던 놈의 품을 뒤졌다.

'별다른 건 없네.'

얼마나 급하게 짐을 쌌으면 돈이 전부인지.

"다른 쪽은 어때?"

루시온이 물었다.

"별다른 건 없습니다. 혹시 몰라 냄새를 기억했습니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흄이 대답했다.

"네가 아는 냄새는 없지?"

"예. 없습니다."

―루시온.

루시온 그림자에서 라타가 나왔다.

라타의 푸른 눈동자가 평소와 달리 일렁거렸다.

―라타 눈에 뭐가 보여.

"뭐가 보이는데?"

라타가 바라보는 곳을 확인하며 루시온이 물었다.

―잠깐만. 라타가 확인하고 말해줄게.

라타가 시체 옆으로 가서는 앞발을 내밀었다.

순간, 루시온은 자신의 어둠이 일렁거리는 걸 느꼈다.

라타가 무언가를 사용하고 있었다.

―깨어나.

라타의 말과 함께 죽었던 시체에서 반투명한 무언가가 빠져나왔다.

"...!"

누가 보아도 저건 유령이었다.

루시온은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새벽까지 집에 도착해야 했기에 유령 처리까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시도조차 하지 않았는데.

"저건 유령이 아닙니까?"

흄마저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우오오! 맞았어! 라타 생각이 맞았어!

라타는 꼬리를 흔들었다.

―라타 눈에 갑자기 뭔가 하얀 게 보였어. 꼭 유령 같아서 깨어나라고 말했는데 진짜 깨어났어!

라타는 루시온에게 당장 뛰어와 어서 쓰다듬어 달라며 꼬리를 흔들었다.

'내 어둠이 늘어나서 라타도 같이 성장한 건가?'

루시온은 라타를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작든 크든 성장은 언제나 반가웠다.

"잘했어, 라타. 그러면 나머지도 해줄래? 싹 처리하고 가는 게 좋거든."

―응! 라타가 다 해줄게. 라타만 믿어.

라타가 배시시 웃었다.

* * *

―남부 롤스호 자작가 근처 마을 3번 보고 지점. 옷 가게로 위장했고, 까마귀 문양이 찍혀 있음.

루시온은 2번 보고 지점의 대장이 적은 쪽지를 바라보았다.

종이 뒤로 벽에 얼굴을 파묻은 시체가 얼핏 보였다.

'보고 지점이 여기가 끝이 아니라 3번도 있다고?'

루시온은 놈의 눈동자에 어둠이 불꽃처럼 일렁거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명령했다.

"보고 지점이 얼마나 있는지 적어."

아쉽지만, 현혹은 자백제 효과처럼 사용할 수 없었다.

자신이 말하는 대로 한두 문장 따라 하거나 동작으로 제한되었다.

놈이 팔을 움직였다.

―4번.

'하. 이거 완전 꼬리잡기였네.'

루시온은 자신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게 느껴졌다.

하마터면 쓸데없이 돌아다닐 뻔했다.

[뭐야. 이거 완전 꼬리잡기잖아. 진짜 이 정도면 지독하다. 보고 지점이 늘어나는 만큼 보고되는 속도도 느릴 텐데 이렇게까지 한 걸 보면 어지간히도 높으신 분인가 봐.]

러쉘마저 불만을 터트렸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지막 전 단계까지 싹 다 건너뛰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루시온은 아직 현혹 마법이 유지되고 있는 지금,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마지막 보고 지점은 어디에 있는지 써."

93화. 추격(3)

2번 보고 지점 대장이 루시온의 명령에 맞춰 손을 다시 움직였다.

―동부 마탑 근처에 4번 보고 지점 위치. 무구점으로 위장했고, 까마

하지만 마지막을 적지 못하고 놈의 눈에 어린 현혹이 풀렸다.

'마탑이라고?'

루시온은 생각했고, 놈이 멍청한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금세 달아나려고 몸을 움직이자마자 흄의 손에 붙잡혀 그대로 앞으로 미끄러지고 말았다.

흄이 등을 밟았다.

빠각!

놈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허리가 뒤로 접힌 모양새로 피를 토하며 죽어버렸다.

[루시온 네 누이가 마탑에 있다고 하지 않았나?]

러쉘은 쪽지를 빤히 보다 물었다.

"예. 그랬습니다. 누님께서 마탑에 있습니다."

[혹시 네 누이한테서 온 편지, 놀러 오라는 초대장이 아닐까?]

루시온은 샤엘라의 편지를 확인하지 않았다.

"그런 초대장은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어 모르겠습니다. 주로 한 줄짜리 안부가 다였습니다."

[그런가. 어쩌면 이번에는 다를 수도 있잖아.]

러쉘의 말에 루시온은 망설였다.

"누님이 편지에 어떤 마법을 걸었는지 몰라 선뜻 손이 가질 않습니다."

[대체 무슨 마법을 걸었길래 그래?]

"생일 축하한다는 편지와 함께 화려한 불꽃용이 튀어나와 제 방을 홀라당 태웠습니다. 혹시 믿어지십니까?"

불꽃용은 샤엘라가 쓸 수 있는 마법이 아니었기에 다른 마법사에게 부탁한 듯하나, 그래도 정도가 심했다.

[…아니.]

러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크로니아라는 이름을 단 인간들은 왜 하나같이 극단적인지.

러쉘은 조용히 생각을 꾹 삼켰다.

"지금 아버지와 형님이 동시에 저택을 비운 적은 거의 처음이라 저택 분위기도 어수선할 테고, 괜히 사고 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럼 제가 하멜 님 대신 열어보겠습니다."

흄이 옷에 튄 피를 닦으며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말했다.

―그럼 라타도! 라타도 흄이랑 같이 열어볼래!

"뭐가 튀어나올지 몰라. 누님께서… 좋으신 분인데, 그, 음."

루시온은 말문이 살짝 막혔다.

샤엘라를 뭐라고 말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어쨌든, 자유분방이라는 단어와 비슷했다.

"괜찮습니다. 저는 몬스터라 튼튼합니다. 마법은 한 번도 당해보질 않았으니, 이참에 마법이 제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흄이 차분히 편지를 열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늘어놓자 라타도 질 수 없다는 듯 목소리를 냈다.

―라타는, 음, 신수라서 튼튼하고, 흄처럼 마법에 어떤 영향이 있는 알아봐야 해!

시체와 피가 난무하는 장소에서 할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한 루시온은 입을 열었다.

"진정해."

그 말에 흄이 꼭 쥔 손을 내렸고, 라타도 꼬리를 흔들지 않았다.

[참고로 말하자면 신수는 마법 공격에 영향이 거의 없어.]

―러쉘 바보! 그걸 말하면 라타는 편지를 열지 못하잖아!

라타가 울먹이며 소리쳤다.

[말해둬야지. 신수가 받는 고통은 신수를 부른 자가 감당하는 건데. 라타 너는 너 대신 루시온이 아프면 좋아?]

라타의 눈동자가 커졌다.

―아, 안 돼. 아니, 싫어! 라타는 라타 대신 루시온이 고통받는 거 싫어! 라타가 편지 포기할게. 평생 편지를 안 열어도 좋아!

라타는 당장 루시온에게 다가가 다리에 꼭 매달렸다.

―미안해, 루시온. 라타가 잘못했어.

루시온이 라타를 안아 올리며 토닥였다.

"그게 정말입니까, 스승님?"

[내가 거짓말할 이유가 어디 있어?]

"좀 불합리하게 느껴지는데요?"

[그럴 수도 있는데, 신수는 고통을 입으면 낫질 않고 그 충격이 계속 쌓여서 일정 이상 수치를 넘어가면 소멸하고 말아. 그래서 네가 대신 고통을 입는 거야. 적어도 넌 아주 느리지만, 회복이라도 하잖아?]

"…신수가 괜히 튼튼한 게 아니었네요."

루시온답지 않게 축 처진 목소리에 러쉘은 다급히 뒷말을 이었다.

[무, 물론 그 튼튼함 덕에 웬만한 공격에도 끄떡없어.]

"그렇습니까?"

루시온은 라타를 쓰다듬었다.

가면을 쓰고 있어 루시온이 어떤 얼굴을 하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씁쓸함을 숨기지 못했다.

"라타. 일단 정리 좀 하게 불러봐."

―알았어! 에헴. 라타가 실력 좀 발휘해 볼게.

방금 러쉘이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한 건지, 들었음에도 괜찮은 건지 루시온의 손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던 라타가 다시 신나며 바닥에 내려왔다.

[불러라니? 유령한테 지시할 게 있어?]

그림자 이동을 위해 잠깐 자리를 비웠던 러쉘은 라타가 뭘 배웠는지 알지 못했다.

―깨어나.

라타의 말과 함께 유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

빠르게 입이 벌어지던 러쉘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죽은 후에 유령이 나오기 전까지 일정 시간이 필요했다.

'라타가 이 법칙을 아무렇지도 않게 깨버렸다고?'

라타의 부름에 나타난 유령은 어둠의 존재 중 가장 흔해 빠진 자였다.

하지만 이 단순한 상황에서 러쉘은 라타의 어마어마한 가능성을 보았다.

흑마법의 기본은 어둠을 지배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둠의 신수인 라타 역시 언젠가는 어둠을 지배하는 존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루시온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러쉘의 표정에 흡족했다.

자신이 생각한 이상으로 러쉘은 라타의 성장이 기대되는 모양이었다.

루시온은 라타가 한 명씩 영혼을 뽑아내자 하늘로 보내버리기 위해서 어둠을 미리 꺼내 놓았다.

"도련님."

흄이 조심스레 루시온을 불렀다.

"이 방에 몬스터의 뼈로 만든 검 냄새가 납니다. 혹시 가져와도 되겠습니까?"

흄까지 성장할 거리를 얻다니.

루시온은 생각보다 많은 수확을 얻게 된 새벽 밤마실에 흡족함을 숨기지 않았다.

"그래. 가져와."

* * *

보고 지점 2번을 부수고 난 뒤, 루시온은 근처로 그림자 이동을 사용했다.

집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보고 지점 3번, 4번까지 부술 시간은 없었다.

루시온은 잠깐 숨을 돌렸다.

"…하. 좀 지치...."

검을 흡수해 조금 더 커진, 흄이 재빨리 루시온을 안고 뒤로 빠졌다.

콰콰쾅!

자신이 방금까지 있던 자리에 어둠으로 뒤덮인 무언가가 스쳐 지나가자 루시온은 말을 잃었다.

'...?'

루시온은 다급히 주변을 살폈다.

이상하게도 러쉘이 보이질 않았고, 숲속인지 어딜 봐도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누구냐!"

흄이 거친 소리를 내며 소리쳤다.

도무지 감정이 조절되지 않을 만큼 흄은 저 존재에게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아.]

무덤덤한 목소리.

까만 갑옷과 까만 망토를 휘날리는 모습은 루시온도 익히 알고 있는 형색이었다.

'죽음의 기사…?'

[장난을 친 것인가? 어쨌든 사과하지.]

죽음의 기사가 꺼내는 가벼운 말과 달리 손에 사람이 쥐어있었다.

빠각.

무심히 목을 꺾고 바닥으로 내던지는 모습이 흄과 달리 소름 끼쳤다.

죽음의 기사가 만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흑마법사뿐.

루시온은 저절로 죽음의 기사를 경계했다.

―미안해, 루시온. 라타가 슝을 사용했는데, 갑자기 어둠이 위치를 바꿔버렸어. 러쉘은 여기에 없는데.

라타가 울먹이며 앞발을 동동 굴렸다.

"어둠이… 뭐라고?"

루시온은 라타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둠이 장난을 치다니.

[어둠이 장난을 쳤다.]

죽음의 기사가 나른한 목소리를 냈다.

아니, 저자는 루시온 자신을 거들떠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너와 나는 아직 만날 때가 아니니 그냥 지나가거라.]

죽음의 기사는 바닥에 쓰러진 흑마법사를 향해 묵직한 대검을 박아 넣었다.

피가 튀는 상황을 보며 루시온은 문득 피터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제가 흑마법사가 아니라서 모르지만, 무언가 흑마법사를 죽이는 자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네가 저 흑마법사를 죽였나?"

곧 루시온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호기심이 많아.]

비로소 죽음의 기사가 루시온을 보았다.

[호기심이 좋긴 한데, 때론 좋지 않은 상황에 놓이게 하지.]

섬뜩.

죽음의 기사에게 압도된다는 기분을 느끼자 루시온의 어둠이 멋대로 날뛰었다.

[잘 다독거려라. 나는 널 해칠 생각이 조금도 없으니까.]

키득키득.

죽음의 기사 너머로 누군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들렸지? 어둠이 재미있다고 웃고 있는 소리를? 내가 널 부른 게 아니라, 어둠이 널 불렀다.]

"왜?"

루시온이 흄을 제지하며 물었다.

도무지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러쉘도 없어 흘러가는 분위기를 파악하기도 어려웠고.

'가만히 있어.'

루시온은 자신의 어둠을 진정시켰다.

[그건 내가 아니라 어둠에게 물어야 할....]

죽음의 기사는 말하다 말고 갑자기 귀찮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소리 하지 말고 빨리 보내. 이름이 뭐더라, 그래, 어쨌든 특이한 유령은 나도 힘드니까.]

'스승님을 말하는 건가?'

마치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죽음의 기사 모습에 루시온은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아, 혹시 안 들리는 건가?]

자신을 비웃는 듯한 목소리에 루시온은 주먹을 꽉 쥐었다.

"아까부터 대체 뭘 말하는 건지 몰라도 이만 가지."

루시온은 우선 흑마법사의 시체가 널브러진 이 장소에서 나가고 싶었다.

피터가 말한 이야기가 정말로 놈을 가리킨다면 특히 더.

[잠깐만.]

갑자기 죽음의 기사가 루시온을 불렀다.

죽음의 기사는 품에서 무언가를 내밀었다.

동그란 형상의 까만 구슬이 죽음의 기사와 이어져 있었다.

그 구슬을 보자마자 루시온의 다리를 꽉 쥐고 있던 라타가 발을 땅에 디뎠고, 흄이 갑자기 경계를 풀었다.

느닷없이 달라진 라타와 흄의 반응에 루시온이 당황했다.

'저 구슬이 뭐길래 라타와 흄이 넋이 나간 거....'

지지직.

루시온이 생각의 끝을 맺기 전에 또 텔레비전이 고장 난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일순간, 시간이 멈췄다.

루시온은 주변을 살피며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그놈인가?'

아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나, 거친 발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다.

잠깐 숨을 돌리려던 차 검은 실이 나타나 구슬과 자신을 이었다.

여전히 검은 실은 버벅거리며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저거.

그때, 글자가 자신의 눈앞에 나타났다.

당장 사라질 것처럼 흔들리고, 희미한 상태였다.

'저거라니? 저 구슬을 말하는 건가?'

루시온은 다시금 검은 구슬을 바라보았다.

치지직.

다시금 망가진 텔레비전 소리가 들려왔다.

기억하고 있어?

시간이 돌아왔는지 주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순간 답답함이 밀려왔으나, 루시온은 숨을 길게 내뱉다 말고 움찔거렸다.

'…이 목소리는.'

하나가 나타나고 사라지니 또 놀랄 거리가 생겨났다.

저번에 저주를 사용할 때도, 베델과 처음 빙의를 했을 때도 그렇고.

똑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시온이 손가락을 들어 까만 구슬을 가리키자 죽음의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것 때문인 거.]

기억하고 있어, 루시온? 어둠은 너의 전부이자 유일한 거라는 말을?

"왜 나한테 말을 걸어오는 거지? 자연에 떠도는 너희는 분명 나한테 관심 없어야 정상일 텐데."

루시온이 차분히 어둠에게 물었다.

[널 그릇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래서 나도 너를 지켜보고 있고. 그래서? 도움이 됐나?]

응. 고마워. 이제 확실해졌어.

죽음의 기사가 물었고, 어둠이 대답했다.

"그릇이라니?"

루시온은 멈칫거렸다.

죽음의 기사와 어둠이 나누는 대화가 무얼 말하고, 무얼 가리키는지 감도 잡히질 않았다.

무엇보다 이런 상황은 소설에서 나와 있지 않았다.

스르륵.

갑자기 밤에 드리운 그림자가 루시온에게 몰려들었다.

꼭 밤 자체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낯설거나,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갑기까지 했다.

찾았다.

어둠이 말했다.

너무도 기쁜 목소리에 자신에게 모여든 그림자가 배시시 웃는 듯했다.

기다릴게. 우리의....

목소리가 갑자기 끊어졌다.

죽음의 기사가 내민 까만 구슬을 집어넣고서는 다급히 대검을 쥐었다.

동시에 라타와 흄이 다시 원상태를 찾았다.

[누가.]

러쉘의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휘날렸다.

딱 보아도 눈이 뒤집힌 게 보였다.

그가 손가락을 들었다.

밤에 깔린 그림자가 꿈틀거리자 마치 공간 자체가 움직이는 듯했다.

'…허.'

루시온은 저절로 나오는 헛바람을 막지 못했다.

[감히 내 제자에게 검을 들이미는 거지?]

[자, 잠깐! 나다. 나.]

죽음의 기사가 다급히 목소리를 냈다.

러쉘은 순간 움찔거렸다.

'저놈이 여기 왜 있어?'

러쉘의 눈동자가 다급히 움직였다.

갑자기 루시온이 사라져서 찾아왔더니, 자신과 계약한 죽음의 기사와 루시온이 만나고 있다니.

"스승님."

그때, 루시온이 목소리를 냈다.

[그래, 루시온.]

러쉘은 루시온의 몸 상태를 얼른 살폈다.

절반 이상 사라진 어둠 이외에는 괜찮았다.

"이제 집으로 돌아갑시...."

루시온은 말을 다 마치지도 못하고 갑자기 비틀거리다 뒤로 쓰러졌다.

"도련님!"

정신을 차린 흄이 루시온이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기 전에 잡았다.

―루, 루시온이 갑자기 왜 쓰러져? 응? 라타는 잠깐 기억이 없어!

[잠깐만.]

죽음의 기사가 쓰러진 루시온을 보다 말고 손에 들린 대검부터 놓았다.

저 이상한 유령의 눈이 완전히 돌아버렸어도 상황을 설명해야 했다.

[맹세코,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

[닥쳐!]

러쉘이 죽음의 기사를 매섭게 노려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퍼억!

94화. 뒷걸음질하다 적의 발을 밟았다

* * *

매서운 눈길이 피어난다.

붉은 피가 튀고, 고통이 끊임없이 자신을 덮쳤다.

형은 어디로 갔을까.

누군가 자신을 잡았고, 말을 탔고, 뿌연 연기가 자신을 휘감고 나자 형이 보이지 않았다.

좁고 좁은 방에 던져졌다.

제일 처음 두 다리가 부러졌다.

'…살려주세요.'

빌어야 했다.

뭐가 꿈이고 진짜인지 알 수 없었다.

까만 어둠이 몰려왔고, 눈을 뜨면 또 사람들의 매서운 눈길이 피어났다.

'살려주세요.'

계속 빌었다.

살려달라고.

'아빠.'

눈물이 더는 나오지 않았다.

머리가 녹아버릴 만큼 이어진 고통에 나오는 건 피뿐이었다.

'…형.'

이대로 죽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피가 자꾸만 자신을 적셨다.

'누나…!'

차례대로 계속 이름을 불러보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아무도.

작은 아이야.

그때, 누군가 자신을 불렀다.

그 목소리에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던 눈물이 터져버렸다.

'살려주세요.'

가엾은 아이야. 밤이 찾아오면 이 고통도 다 사라진단다. 그때까지 옆에 있으마. 네가 걱정 없이 하늘로 갈 수 있게 자장가라도 불러주마.

필사적으로 목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보이니?

눈앞이 빨개 무슨 색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희미한 형체가 손을 뻗어오자 계속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살려주세요…!'

차디찬 느낌이 갑자기 손가락 끝에서 몰려왔다.

하지만 세상에서 제일 따뜻했다.

'…제발, 살려주세요. 더는 아프고 싶지 않아요.'

정말로 내가 보이니? 넌 우리의 축복을 받은 자가 아닌데.

'보여요.'

그래. 어쩌면 네가 그릇일 수도 있겠구나.

희미한 형체가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렇다면 네가 바라는 걸 이루어주마.

* * *

"…루시온. 혹시 잠을 설쳤더냐?"

노비오는 수척한 루시온의 얼굴을 보며 눈썹이 안쪽으로 모였다.

[루시온 공의 안색이나 얼굴이 오늘따라 나쁘긴 하지.]

막 저택에 다시 돌아온 베델조차 루시온의 거무튀튀한 안색에 놀라서 말을 못 할 정도였다.

"예. 좀 그랬습니다."

루시온은 애써 미소를 내보였다.

정말 오랜만에 악몽을 꿨다.

노비오와 카슨이 동시에 저택을 비운 일이 없었기에 그런 꿈을 꾸지 않았을까 싶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뉴브라 왕국에 끌려갔었던 그 기억을.

'…그릇.'

단지 꿈이라서 자신 마음대로 떠올렸을 수도 있지만, 그릇이라는 단어를 또 들었다.

"혹시 악몽을 꿨더냐?"

노비오가 걱정을 담아 물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요."

루시온이 안심하라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

"그래, 루시온."

"저 역시 크로니아입니다. 아버지와 형님의 자리가 비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제가 이제 이곳을 지켜 보이겠습니다."

루시온의 대답에 노비오는 그를 기특하게 바라보았다.

그토록 작고, 여리던 아이가 점점 성장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참 애틋하면서도 자랑스러웠다.

"그래. 루시온 너 역시 크로니아니 잘하리라 믿는다. 하지만 무리는 하지 말렴. 크로니아는 결코 혼자서 지킬 수 없으니."

"물론입니다."

루시온은 굳건하게 대답했다.

노비오는 곧 안토니를 불렀다.

"안토니."

"예, 가주님."

"부탁한다."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최선을 다해 도련님을 보필하도록 하겠습니다."

안토니가 미소를 띤 얼굴로 고개를 숙었다.

"루시온."

카슨이 루시온을 불렀다.

"전 괜찮습니다. 뭐든 이용해 보이겠습니다."

카슨은 루시온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래. 그러면 됐다."

"아버지, 형님."

루시온은 목소리에 힘을 주며 두 사람을 불렀다.

매번 도망치고 나가는 입장이 되었지만, 배웅은 처음이었다.

이상하게 벌써 아련한 기분이 들었다.

두 사람이 강하다는 사실을 알지만, 누구든 목숨은 하나였다.

그 사실을 알기에 루시온은 노비오와 카슨이 가는 길이 가벼울 수 있게 최대한 밝게 웃었다.

"절 믿고 부디 몸 건강히 돌아오십시오."

루시온은 노비오와 카슨이 멀어질 때까지 한참을 바라보다 안토니를 불렀다.

"안토니."

"예, 도련님."

"언제 올지 모르는 불청객을 대비해 순찰 목록을 들고 오게."

다들 티를 내지 않았지만, 크로니아에 있어 중심축인 두 사람이 빠져버렸다.

불안할 테지.

자신이 2인분은 못하더라도 최소한 1.5인분은 해야 하지 않겠나.

"도련님."

안토니가 조심스레 루시온을 불렀다.

"그래."

"실례하지만, 지금은 잠시 주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안색이 좋지 않아 보입니다."

"내 할 일은 하고 난 후에 잘 테니, 걱정하지 말고."

노비오가 워낙 꼼꼼해 크게 손 볼 건 없었다.

하지만 그 틈을 노비오나 카슨이 메꾸는 형식이라 자신에 맞춰 손을 보아야 했다.

* * *

베델이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보다 저택 지붕에서 올라오는 러쉘을 보며 물었다.

[루시온 공은?]

[라타랑 같이 자고 있어.]

[잘됐다. 하루 제대로 못 잤다고 얼굴이 저렇게까지 되지 않는데. 혹여 쓰러질까 조마조마했거든.]

[그래서 내내 루시온을 피해서 이곳으로 온 거야?]

러쉘이 키득거리며 묻자 베델이 살짝 민망해하며 대답했다.

[맞아. 내가 있으면 구하기로 한 암살자가 어디에 있는지 당장 가자고 할 것 같아서 슬쩍 나왔는데. 제대로 선택한 모양이야.]

[루시온 말이야. 꿈에 좋지 않은 기억이 나왔나 봐.]

[기억이라면....]

[그래. 베델 네가 루시온과 계약을 맺었을 때 봤던 그 기억이겠지.]

러쉘이 웃음기를 지우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속상한가?]

베델의 물음에 러쉘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이미 극복한 루시온이라면 다시 떨쳐내리라고 봐. 원래 처음 시작이 제일 어렵잖아?]

[가끔. 아주 가끔 두 번째, 세 번째에서 극복하지 못하고 넘어지는 이들이 있어. 하지만 만약 루시온 공이 그렇게 되더라도 스승인 그대가 잘 지탱해주리라 생각해.]

[…뭘 캐내려고 이러지?]

러쉘이 의심 어린 눈초리로 바라보자 베델이 기분 좋게 웃었다.

[그대도 뭐든 물어도 돼.]

[후회하지 말고 잘 생각해서 말해. 내가 제법 직설적이거든.]

[괜찮아.]

[그럼, 루시온과 계약한 지금 후회하고 있어?]

[후회?]

베델은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 오히려 루시온 공을 더 일찍 만났을걸. 살았을 때, 루시온 공의 등을 지켜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생각들이 자꾸 떠올라. 그러니까, 엄청 즐겁다고 보면 돼.]

[다행이네. 루시온은 행복해지고 싶다고 하는데, 주변에서도 행복해하면 얼마나 좋겠어?]

[그게 루시온 공이 바라는 것인가?]

베델은 뜻밖이라는 듯 물었다.

꽤 소박하지 않은가.

[그래.]

러쉘의 대답에 무언가 결심했는지 한순간, 베델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그럼, 러쉘.]

베델은 이 분위기를 이어나가고자 제일 궁금했던 사실을 물어보았다.

[그대는 왜 루시온 공을 제자로 받아들였나?]

[그거야 당연히....]

제자 칭찬에 벌써 신나던 러쉘이 한순간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기억이 또 없었다.

[러쉘…?]

베델은 아무 말 없이 굳어 있는 러쉘의 모습에 혹여 자신이 물어보면 안 될 걸 물어봤나 싶어 머뭇거렸다.

곧 러쉘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크게 쥐었다.

'…한 번도 아니고. 또? 또 기억이 없다고?'

어떻게 크로니아로 오게 됐는지.

루시온이 가진 뛰어난 정신력 말고 진짜로 루시온을 선택한 이유가 사라진 상태였다.

* * *

꿀꺽꿀꺽.

루시온은 흄이 건넨 물을 단번에 들이켜고는 입가를 닦았다.

"그래서 그 뒤에 어떻게 됐어?"

죽음의 기사가 내보인, 이상한 검은 구슬을 본 뒤로 루시온은 자신이 기절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러쉘 님이 죽음의 기사를 힘껏 때리시고, 어둠이 몰아치고, 죽음의 기사는 계속 아무것도 안 했다며 러쉘 님께 계약을 들먹였습니다."

'아하.'

루시온은 그 죽음의 기사가 러쉘과 원래 알고 있는 사이라는 걸 눈치챘다.

그건 러쉘이 오면 물어보기로 하고 흄과 라타를 불렀다.

"흄. 라타."

"예."

―응!

공을 바쁘게 쫓던 라타가 제자리에서 멈춰 대답했다.

"죽음의 기사가 내보였던 그 이상한 검은 구슬을 봤지?"

"봤습니다. 솔직히 그때, 잠깐 기억이 없습니다."

흄의 표정이 어두웠다.

―라타도 그래. 정신 차리고 보니 루시온이 기절해서 깜짝 놀랐어!

"그렇지 않아도 도련님께 말씀드려야 할 일이 있습니다."

흄이 머뭇거리다 말했다.

"말해."

"…제가 처음으로 '꿈'이라 불리는 걸 꿨습니다."

"꿈?"

흄은 잠을 자지 않아도 되지만, 좋아하지도 않았다.

가만히 창문을 바라보며 달과 별을 바라보곤 했다.

특히, 아침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제일 좋아했다.

"예. 어제 잠깐이지만, 제가 잠을 잤고 꿈을 꿨습니다."

"혹시 갑자기 잠이 왔어? 그러니까, 몸이 나른해지고, 눈이 억지로 감기는 그런 느낌말이야."

"어떻게 아셨습니까?"

흄이 눈을 크게 떴다.

―어! 라타도 어제 그랬어!

라타도 깜짝 놀랐다.

―그런데 라타는 어제만 꿈을 안 꿨는데. 라타는 평소에 꿈을 엄청 많이 꿔!

꿈 여부는 모르겠지만, 죽음의 기사가 가진 그 이상한 검은 구슬이 자신은 물론 흄과 라타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무슨 꿈을 꿨는데, 흄?"

"이걸 꿈이라고 봐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손가락 하나가 절 가리키며 '인도자'라는 말을 꺼냈고, 접시가 나와서 뭘 차곡차곡 쌓아갔습니다."

인도자가 나왔을 때 잠깐 멈칫했지만, 접시가 나오자마자 차게 식어버렸다.

'인도자랑 접시랑 무슨 관계야?'

루시온은 도무지 꿈을 해석할 수 없었다.

어쨌든 영향이 있다는 건 분명했다.

"스승님."

루시온은 러쉘을 불렀다.

[그래, 루시온.]

천장에서 러쉘이 내려왔다.

[자고 나니 얼굴이 한결 낫네.]

"예. 기분도 괜찮습니다. 베델은요? 내내 보이지 않던데요."

[여기 있어.]

베델도 러쉘이 내려왔던 천장에서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내려왔다.

"일단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스승님."

화도 내지 않고, 루시온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맞아. 죽음의 기사를 알고 있었어.]

러쉘은 순순히 털어놓았다.

흄이 루시온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으니 당연히 알게 되리라 생각했다.

[미안해.]

이유가 무엇이든 루시온을 속였으니, 러쉘은 어떤 변명도 하지 않았다.

[나 역시 미안해, 루시온 공.]

베델까지 사과했다.

아마도 두 사람은 이미 죽음의 기사를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루시온은 화를 내지 않았다.

자신 역시 러쉘을 속였으니 괜찮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저 죽음의 기사는 누구입니까? 누구길래 스승님과 계약을 맺은 겁니까?"

[나도 정체는 모르는데 흑마법사를 죽이는 걸 사명으로 여기고 있어.]

"혹시 그 죽음의 기사가 가진 까만 구슬을 보았습니까?"

[까만 구슬? …아니. 눈이 좀 돌아간 상태라 못 봤어.]

"그럼 죽음의 기사가 어디에 있는지는 아십니까?"

러쉘이 바닥을 가리켰다.

[여기에 살아.]

"...!"

무척 가까이에 있자 루시온은 더할 나위 없이 반가웠다.

'좋아. 그러면....'

[그런데 지금 여기에 없어. 어디로 갔는지 물어도 나는 몰라.]

"그렇습니까?"

루시온은 아쉬움을 드러냈지만, 죽음의 기사의 본거지를 알아낸 이상 얼마든지 물을 기회가 있었다.

당장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는 뒤로 빼며 루시온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했다.

"베델. 고용해도 될 만한 쓸 만한 암살자를 찾아봤어? 알다시피 암살자라는 직업상 유명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없잖아."

루시온이 걱정하는 게 바로 그런 점이었다.

소설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연 얼마나 강한지, 조직에 끌어들일 수 있는지, 이 사실이 정확하지 않았다.

유명한 암살자는 소리는 애초에 말이 되지 않았고.

몰래 죽이는 이가 유명해지면 그건 암살자가 아니라 검사가 아닌가.

[찾았다.]

하지만 베델은 무척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보였다.

역시 유령이라 그런지 찾는 속도가 남달랐다.

[루시온 공이 원하는, 약점을 잡을 만한 부분도 찾았지.]

"혹시 돈이 없어 굶주려가는 암살자들이야?"

루시온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암살자 고용은 보통 중간에 '징검다리'라고 불리는 업체를 통해 이루어졌다.

고용자와 암살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었으나, 이제는 징검다리가 없으면 고용자가 암살자를 고용하지 않으려고 해서 소위 말하자면 갑질의 대명사가 되었다.

하지만 어디든지 예외가 있는 법.

징검다리의 횡포에 암살자가 스스로 고용자를 구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맞아. 조직을 설립한 지 얼마 안 된 것처럼 보였어. 아마도 징검다리가 없이 직접 고용자를 구하려고 했나 봐.]

"딱 좋네."

루시온은 바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거기가 어딘데?"

베델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갔다.

[하루 정도 쉬어도 되지 않을까 싶어. 쥐쟁이들이 이제 막 체프란 저택에 짐을 풀었던데.]

어제 낮에 체프란 저택을 가졌고, 새벽에 루시온의 정보를 팔아넘기던 집사를 쫓아갔다고 하지 않았나.

그리고 오늘 암살단이 있는 곳으로 간다면 일정이 너무 빠듯했다.

"괜찮아. 이건 빠르면 빠를수록 좋으니까. 쉬는 건 그 후에 해도 돼."

튼튼한 조직이 되려면 뒤에서 배신자를 죽이고 정보를 빼가는 이들을 죽이는 자가 꼭 필요했다.

"안내해, 베델."

[그래. 말려도 소용없어, 베델.]

러쉘이 피식 웃었다.

이미 루시온의 눈에 확고한 의지가 보였다.

[쥐쟁이가 6개 지부를 조사하려면 시간도 필요할 테고. 그리고… 루시온.]

러쉘이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듯 루시온을 불렀다.

[그 전에 샤엘라 편지는 보고 가야지.]

95화. 뒷걸음질하다 적의 발을 밟았다(2)

―맞다! 편지!

라타가 꼬리를 높이 세우다 말고 이내 침대에 축 늘어졌다.

라타는 슬픈 눈동자로 루시온을 힐끔 쳐다보다 말고 얼굴을 이불 속에 파묻었다.

―아니야. 라타는 편지 싫어. 안 만질 거야. 라타는 참을 수 있어. 라타는 착하니까.

루시온이 떨떠름한 표정을 했다.

"꼭 편지를 확인하셔야겠습니까?"

[싫으면 말고. 강요하는 건 아니야.]

러쉘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루시온이 무어라 말을 하려다 시선이 아래로 내렸다.

라타가 이불에 얼굴을 파묻은 상태로 앞발 하나를 뻗어 자신의 바지를 조심스레 잡고 있었다.

"라타. 편지를 열어봐달라고?"

―라타는 편지를 열어보라는 말을 한 적이 없어. 라타는 아무 말도 안 했어.

이불이 좌우로 흔들렸다.

"그럼, 방이 아닌 밖에서 열어봐야 해. 저번처럼 홀라당 태우기는 싫거든."

"외출 준비할까요?"

흄이 묻자 루시온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불 속에 있던 라타를 꺼냈다.

라타의 눈동자가 너무도 초롱초롱했다.

"아니. 그냥 갈게."

"알겠습니다."

미리 루시온이 나갈 수 있게 문을 열자마자 흄은 깜짝 놀랐다.

"…아, 안토니 님."

"안토니…?"

루시온도 멈칫거렸다.

"예, 도련님."

안토니가 고개를 숙였다.

[푸하하핫!]

러쉘이 기분 좋게 웃었다.

루시온이 러쉘을 째려보자 베델이 자신의 팔을 만지작거렸다.

[혹시 안토니가 온다고 알렸어야 했나? 루시온 공에게 볼일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도련님. 이렇게 불쑥 찾아와 무척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안토니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는 흄에게 살짝 루시온의 상태를 물으러 왔는데.

"아닐세. 자네가 이렇게 왔다는 건 혹시 문제라도 터진 건가?"

"그렇지 않습니다. 도련님의 상태를 보러 온 것뿐입니다. 지금 기분이 어떠십니까?"

"나쁘지 않아."

"다행입니다. 아직 더 피곤하시면 주무셔도 괜찮습니다."

"아니야. 누님의 편지를 열어보려고 하거든."

"그럼, 제가 대신 개봉해드리겠습니다."

안토니라면 얼마든지 맡길 수 있었다.

하지만 루시온은 잠깐 흄을 바라보았다.

차마 안토니 앞에서 말이 나오지 않는 모양인지 불안한 눈빛으로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괜찮아. 흄한테 맡겨보려고 하거든."

"아, 제가 실수를 할 뻔했습니다."

안토니는 무언가 간절한 흄의 표정에 잠깐 웃었다.

샤엘라가 루시온에게 보낸 편지 때문에 루시온의 방이 타버린 이후로 사전에 편지에 마법이 깃들었는지 아닌지 확인 작업을 시작했다.

이번 편지에도 마법이 깃들었지만, 위험한 건 아니었다.

그 말을 꺼내지 않아 다행이다 싶었다.

"도련님."

"그래."

"도련님이 지시하신 대로 기사들의 모든 배치가 끝이 났습니다."

"그래."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안토니가 고개를 숙인 뒤에 조용히 물러났다.

노비오와 카슨이 자리를 비운 지금 루시온이 이 저택의 주인이었다.

하지만 저택은 평소와 똑같은 모습으로 흘러갈 뿐이었다.

* * *

"열겠습니다."

흄이 설레며 말했다.

그의 손에는 편지가 들려 있었다.

"그래."

루시온은 이미 멀찍하니 떨어져 있었고, 라타는 흄과 루시온 중간에 서서 꼬리를 흔들며 눈을 반짝였다.

편지에 어떤 마법이 깃들어 있어도 문제가 없는 곳은 연무장이었다.

때마침 순찰을 강화해 연무장이 텅 비어 있는 상태였고.

루시온은 여기까지 오면서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다뿐이지, 저택 분위기가 바뀐 걸 느끼지 못했다.

그게 참 다행이다 싶었다.

"정말 열어봐도 되겠습니까?"

흄이 재차 물었다.

[빨리 열어 봐봐.]

러쉘은 서둘러 재촉했다.

이미 편지에 마법이 깃들었음을 알아차렸기에 그 마법이 무엇인지 너무도 궁금했다.

[루시온 공. 이 정도까지 뒤로 물러나는 게 어떻겠나?]

베델도 러쉘처럼 이미 알았기에 혹시 루시온이 다칠까 두 걸음 정도 떨어진 지점을 가리켰다.

루시온은 베델 말대로 뒤로 더 물러났다.

"라타 너도 이쪽으로 와."

라타는 평소와 달리 아주 느리게 루시온에게 걸어왔다.

편지에서 튀어나오는 마법이 어지간히도 궁금한 모양이었다.

탁.

봉랍을 떼는 유달리 소리가 컸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아무 일도 없자 흄이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럴 리가.]

러쉘이 흄에게 바짝 붙어 편지를 바라보았다.

아직 마법이 발동되지 않았다.

[조건이 만족해야 발동되는 마법인가.]

러쉘은 중얼거리다 루시온을 쳐다보았다.

[루시온. 이리 와봐. 아무래도 네가 만져야 발동이 되는 건가 본데.]

"그런가 봅니다."

카슨이 자신에게 편지를 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루시온이 흄에게 다가가자 라타는 껑충껑충 뛰며 루시온의 뒤를 따랐다.

[정말 괜찮은가, 러쉘?]

베델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을 거야."

루시온은 미소를 지었다.

저번 편지도 방이 아니라 밖에서 열어볼 거라 생각하고 편지에 마법을 꾹꾹 담아놓았던 게 아닐까.

사물에 마법을 담는 건 무척 어려웠다.

마법 아이템이 비싼 이유도 그 때문이었고.

루시온은 흄이 내미는 편지를 받았다.

그 순간, 편지에서 꽃이 튀어나와 루시온 주변으로 천천히 맴돌았다.

누가 보아도 샤엘라의 마법이었다.

식물을 다루는 그녀만이 할 수 있는 마법.

등나무 꽃과 같은 보랏빛을 띤 꽃잎이 휘날리는 모습에 다시 봄이 찾아온 것만 같았다.

성자 루시온 크로니아! 빠밤!

꽃이 갑자기 글자를 이루자 루시온은 웃음을 터트렸다.

[…와. 이건 장난 아닌데?]

러쉘이 감탄했다.

이 마법을 위해 얼마나 밤을 새웠을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이 꽃은 진짜인가, 환각인가?]

베델의 물음에 루시온은 꽃잎을 바라보며 입을 움직였다.

"진짜야. 누님께서 식물을 다룰 수 있거든. 주로 꽃 마법을 사용하시고."

[꽃 마법…? 처음 듣는데?]

러쉘이 귀를 쫑긋 세웠다.

"으음, 누님의 마나가 약간 변종이라서 식물에 여러 변화를 줄 수 있다고 합니다. 예전에 누님이 설명해주셨는데 제가 마법사가 아니라서 대부분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예쁩니다."

흄이 꽃을 향해 손을 뻗어보았다.

손가락에 닿자 눈처럼 사르르 녹아내렸다.

"…꽃이 녹았습니다."

곧 깜짝 놀란 흄이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꽃잎은 녹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누님만이 마법이야. 참 특별하잖아?"

루시온의 시선은 어느덧 편지를 향해 있었다.

한 줄이 아니라 나름 빼곡하게 적힌 편지를 보자 러쉘의 말을 따르길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축하한다, 내 동생. 맨날 한 줄만 편지를 쓰려다 이렇게 길게 쓰려고 하니 손가락이 이상하게 말리는 기분이야.

당장 일그러진 샤엘라의 표정이 상상이 갔다.

―편지를 쓴 건 다름이 아니라 마탑이 30년 만에 개방되는 소식을 들었거든.

'마탑이 개방이 된다고?'

이 세계에 마법사의 이미지는 그다지 좋진 않았다.

같은 마나를 쓰는 기사와 달리 마법사들은 충성심도 없고, 복종도 싫어하며 제멋대로에, 상대적으로 무척 예민하기까지 했다.

자신만 보아도 마법사를 생각하지 않을 정도였으니.

'뭐, 얼음 마법사는 여름을 대비해서 반드시 구할 거지만.'

하지만 마법사들은 강했다.

그들이 골칫덩어리로 전락하기 전에 제국은 수를 하나 뒀다.

그게 바로 마탑이었다.

마탑은 제국에서 유일하게 허락한 마법사들의 안식처로 이곳 안에서 제국에게 돈을 지원받아 마법사로서 만들고 싶은 마법, 연구하고 싶은 것 등을 마법사의 환상을 채워주었다.

마탑이 처음 만들어질 때쯤, 마법사들이 자신들이 새냐며 거센 항의를 했지만, 막상 만들어지고 나니 새라도 좋으니 들어가고 싶다고 말을 꺼낼 만큼 엄청난 혜택에 눈이 돌아버렸다.

물론, 제국에서 공짜로 그들에게 마탑을 제공한 건 아니었다.

마탑이라는 환상적인 공간을 제공해 준 뒤, 이를 빌미 삼아 제국에게 마법 아이템, 마법 기술 등 마법과 관련된 어떤 정보든 보고 받았고, 그 정보를 인질로 삼아 마탑에 있는 마법사들은 무조건 제국의 편이 되기로 약속까지 받아냈다.

'…하지만 마탑은 분명히 소설 '어둠의 손아귀'에서 별 내용도 차지한 적이 없는데.'

루시온은 자신이 잘못 기억했나 싶어 곰곰이 소설 속 내용을 떠올려보았다.

하지만 마탑이 차지하는 비중은 고작 한 쪽.

이마저도 헤인트가 마탑을 바라보았기에 나온 설명이었다.

공허의 손이 제국 내에서 날뛰어도 마탑은 움직이질 않았다.

즉, 계속 비공개된 그 상태라는 말이었다.

제국의 편이 되어주겠다고 마탑이 약속했지만, 애초에 그들은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쪽이라 세상에 관심이 없다는 표현이 많았다.

'지금도 그렇게 되어야 했을 텐데.'

대체 뭐가 달라졌기에 마탑이 30년 만에 개방된다고 하는 거지?

[왜 그래?]

러쉘은 애써 편지를 보지 않으려 했지만, 루시온의 반응에 참기 어려웠다.

"마탑이 개방된다고 합니다."

[뭐? 뭐, 뭐라고?]

러쉘이 말을 더듬을 정도로 깜짝 놀랐다.

그렇게 폐쇄적인 집단이 개방한다니.

[어느 정도로 개방을 하는 거야? 1층부터 통째로?]

"잠시만요. 아직 끝까지 읽지 않았습니다."

루시온은 다소 심드렁한 반응인 베델과 마탑 자체를 몰라 갸우뚱거리고 있는 흄과 라타를 바라보고는 다시 편지를 읽어나갔다.

―그래서 너한테 제일 먼저 알려주고 싶어서 편지를 썼어. 아직 아버지도, 오라버니도 모르셔. 참, 언제 마탑이 개방되는지는 나도 몰라. 정확해지면 다시 편지를 보낼게.

루시온은 잠깐 씰룩거렸다.

참 샤엘라답다 싶었다.

―아, 마탑이 왜 개방되냐고? 자세히는 말을 못 하는데, (너라서 말하는 거야, 루시온) 원래 몇 년 전부터 마탑 개방을 두고 내부에서 말이 많았어. 물론, 난 찬성파! 어쨌든, 얼마 전에 마탑 개방을 반대하던 자식이 죽어버렸지 뭐야. 속이 후련해서 며칠을 웃었는지 몰라.

'그 마법사가 죽었다고?'

―왜 죽었냐고? 마법에 실패해서 방이 펑하고 터졌어. 솔직히 그럴 놈은 아닌데. 아마 마탑이 폐쇄적이니 이번 일도 조용히 묻히겠지. 어쨌든, 마탑이 개방되면 만나자. 꼭!

편지는 이걸로 끝이었다.

타이밍이 참 이상했다.

바뀐 거라고는 마법사 집단이자, 악역이었던 루미노스가 예상보다 훨씬 일찍 사라졌을 뿐인데.

"몇 층까지 개방되는지는 적혀 있지 않습니다."

루시온은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러쉘에도 알려주었다.

[그럼 왜 개방을 하는 거래?]

"개방 반대파 중에서 제법 힘이 있던 마법사가 마법 실패로 죽었다고 합니다."

[그래? 마법사로서 최악의 죽음이네. 아마도 유령으로서 주변을 맴돌겠어.]

러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뭐, 어쨌든, 봐봐. 편지를 보길 잘했지? 동부로 갈 이유가 생겼잖아.]

"그렇네요. 정말로 보길 잘했습니다."

루시온은 편지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뉴브라 왕국이 크로니아 첩자를 심었다. 그들은 총 4번에 걸친 보고 지점을 통해 정보를 전달했고, 그 마지막 지점이 바로 동부에 있었다.

"그런데 도련님."

흄이 목소리를 냈다.

"마탑이 뭡니까?"

―라타도. 라타도 궁금해.

아직도 휘날리는 꽃과 장난치던 라타도 쪼르르 달려와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 * *

밤이 찾아왔다.

크로니아의 지배자인 노비오와 그 후계자인 카슨이 자리를 비웠다.

그 사실 하나로 그간 숨을 죽였던 짐승들이 어둠을 방패 삼아 저택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누구도 크로니아의 저택 문을 넘는 이들은 없었다.

크로니아의 기사들은 크로니아의 강함이 두 사람에게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는 무식한 이들에게 죽음으로 알려주었다.

크로니아는 원래 강하다는 것을.

콰직!

안토니의 손이 두꺼운 철퇴가 적의 머리통을 깨부쉈다.

평소 끼던 하얀 장갑이 붉게 물들었지만, 그의 모습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다들 조용히 처리하게. 도련님께서 이제 잠이 드실 시각이니."

안토니는 말처럼 조용히 철퇴를 휘둘러 달려오던 적의 다리를 부서트렸다.

빠각!

적이 비명을 지르려고 하자 안토니는 그대로 발로 얼굴뼈를 으깨버렸다.

루시온이 얼마나 걱정이 됐으면 겨우 멈췄던 악몽까지 다시 꿨겠는가.

오늘 밤뿐만 아니라 매일 밤 편안하게 주무실 수 있게 집사로서 최선을 다할 셈이었다.

* * *

쉬익!

흄이 도시 쪽으로 달리던 도중에 갑자기 손을 앞으로 휘두르자 뒤에 업힌 루시온은 크게 몸을 떨었다.

"아. 깜짝아."

"죄송합니다. 상대가 저한테 살기를 뿌려서 저도 모르게 손을 휘두르고 말았습니다."

흄이 안절부절못하며 루시온의 눈치를 살폈다.

[손을 휘두른 게 아니라 머리통을 박살 냈는데.]

러쉘은 바닥에 쓰러진 시체를 바라보았다.

루시온은 별수 없이 땅으로 내려와 라타를 그림자에서 꺼냈다.

안토니 몰래 저택을 빠져나왔기에 목격자가 유령이든 간에 남기고 싶지 않았다.

"신경 쓰지 마, 흄."

죽어버린 남자가 향하던 방향이 저택 쪽이라는 게 신경 쓰였지만, 루시온은 흄을 다독이며 라타를 불렀다.

"라타."

―짠! 이제 라타가 활약할 차례야.

96화. 뒷걸음질하다 적의 발을 밟았다(3)

라타는 꼬리까지 흔들릴 만큼 몹시 신나 보였다.

―깨어나.

라타가 성큼성큼 다가가 시체를 툭 하고 건드리며 당당하게 외친 목소리를 따라 유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겅.

베델이 갑자기 유령에게 검을 들이밀며 물었다.

덩달아 라타가 깜짝 놀라 목을 숨기듯 몸을 웅크렸다.

베델이 쓸데없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루시온은 가만히 지켜보았다.

[누가 보냈지?]

베델이 날카롭게 물었다.

본인이 죽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지 여자는 피식 웃고 말았다.

[하. 내가 알려줄까 싶은가.]

[무릎을 꿇어라.]

베델이 기세를 올리자 일반 유령에 불과한 그녀는 깜짝 놀라더니 베델의 내뿜는 어둠에 곧 몸을 달달 떨며 제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누가 보냈지?]

베델은 똑같은 목소리로 똑같은 질문을 꺼냈다.

하지만 유령은 전혀 다르게 느끼는 건지 조금 전 자신만만한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공포에 젖어 있었다.

[모, 모릅니다. 저 역시 그저 징검다리를 통해 들었을 뿐입니다.]

'암살자였어?'

루시온은 피식 웃었다.

암살자를 고용하러 가는 도중에 암살자를 죽였다니.

[표적이 누구지?]

베델이 눈가를 좁히며 다시 물었다.

[루시온 크로니아입니다.]

'…나라고?'

루시온은 잠깐 놀랐지만, 곧 실소를 내뱉었다.

"잘 죽였네, 흄."

"예. 지금은 제 손을 칭찬해주고 싶습니다."

이제야 흄은 안심하며 싱긋 웃었다.

[예상하였나, 루시온 공?]

베델이 물었다.

"대충. 적들이 움직일 시기는 맞으니까. 그나저나 베델. 너는 어떻게 알았어?"

루시온은 '스승님도 몰랐는데'라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분위기와 냄새를 맡고 알았다. 나는 죽음의 기사니까. 아마 흄이 놈을 죽이지 않았다면 내가 말했겠지.]

베델의 말에 러쉘이 갑자기 헛기침을 내뱉었다.

[어떡할 텐가, 루시온 공? 공도 알다시피 징검다리가 어디인지 알아내지 않는 이상 누가 저 암살자를 움직였는지 알 수 없어.]

"알고 있는 정보는 없나?"

루시온이 암살자를 보며 물었다.

[더는…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아. 다, 다른 암살자들도 고용됐습니다.]

"죽여, 베델."

루시온은 더는 들을 필요 없다는 듯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정보가 없는 놈은 필요 없었다.

저놈 말고 또 다른 놈이 자신을 죽이러 올 거라는 건 너무도 당연하지 않은가.

―정말로, 루시온?

라타가 목소리를 냈지만, 베델의 검이 이미 암살자를 단숨에 베어냈다.

쉬익!

루시온은 하늘로 가지 못하고 죽음의 기사 손에 완전히 죽어버린 유령의 최후를 두 눈으로 담았다.

쩍.

암살자의 얼굴에 금이 생겼다.

한 번 일어난 균열은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자, 잠깐만.]

암살자는 자신의 목을 꽉 쥐며 마치 바다에 빠진 듯 허우적거렸다.

유령임에도 온몸에 핏대가 섰다.

금세 그녀의 눈에는 오직 공포라는 깊은 심해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내 몸이 이상....]

그녀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얼굴부터 부서져 내렸다.

잔해가 고스란히 바닥에 남았다.

"이대로 계속 남아 있는 겁니까?"

루시온이 물었다.

하늘로 보낸 유령과 달리 사라지지 않았다.

자신을 죽이려 한 놈이기에 일말의 동정심도 들지 않았다.

[아니. 잘 봐봐.]

러쉘은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퐁당.

무언가 어둠에서 튀어나와 조각들을 삼켜버렸다.

모습이 마치 물고기 같았다.

라타가 구슬픈 눈동자로 이제는 사라진 암살자를 바라보았다.

[저 녀석들에게 먹히고 끝나. 일명 영혼 청소부라고 해.]

최후를 보는 러쉘의 눈동자는 무덤덤했다.

―라타는… 너무 슬퍼. 다음에 루시온이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라타가 구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왜?"

자신을 죽이려 한 이를 감싸니 아무리 라타라도 루시온의 말투가 고울 리가 없었다.

싸늘했다.

―저렇게 되면 저 영혼은 영영 사라져. 아무도 저 영혼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할 거야. 라타는, 루시온이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저 영혼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의 기억마저 사라진다는 말에 루시온은 숨을 짧게 내쉬었다.

"…생각해볼게."

[마침 잘됐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말하고 싶었는데.]

러쉘은 루시온을 사뭇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막 라타를 달래려던 루시온이 행동을 멈췄다.

[만약 나나, 베델이 타락한 흑마법사에게 공격받거나, 죽음의 기사에게 공격받아 저렇게 변하면 네가 끝을 내줘.]

"…왜."

갑작스러운 말에 루시온은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가면을 써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자신의 얼굴이 일그러진 게 느껴졌다.

"그래야 합니까…?"

[나하고 베델에게 미래는 없으니까. 삶과 죽음의 순환 고리에 가느냐, 라타가 말한 대로 영영 잊히느냐, 둘 중 하나인데 어느 쪽을 선택할지 당연하잖아.]

"제가… 제가 꼭 해야 합니까?"

루시온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자신은 소설 속 루시온의 최후를 알고 있었다.

""…형님. 기억해주십시오. 저를. 그리고 제 스승님이었던, 쿨럭, 러쉘… 러쉘을 말입니다. 저는 기억했습니다. 계속 기억하려고, 잊지 않으려고....""

이제야 소설 속 루시온이 왜 그런 소리를 했는지 지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너무도 간절히 이해했다.

다른 이들처럼 평범 살고 싶었다.

그 평범함 속에서 행복을 누렸으면 했다.

매일같이 유령에게 시달리던 자신이 바라고 바라던 유일한 바람이었다.

어느 날, 러쉘이 기적처럼 자신을 찾아와 자신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그런데 자신의 행복 속에 러쉘이 없다니.

'그럴 순 없어.'

[넌 흑마법사잖아. 그리고 내 제자고. 마지막의 마지막을 너에게 맡기고 싶은 건 당연하지.]

"아뇨.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루시온은 가면을 벗어 러쉘을 바라보았다.

"절대로 스승님이 사라지지 않도록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가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겁니다."

가면이 으스러지도록 루시온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눈에 깃든 의지가 너무도 강해 러쉘이 흠칫 놀랄 정도였다.

'…이렇게까지 거부감을 보일 줄은 몰랐는데.'

루시온이라면 충분히 알아들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착각했다.

"그러니 부디. …부디, 다시는 그런 말씀을 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루시온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그 모습에 러쉘은 입술을 깨물었다.

루시온은 아직 어른이 아니라 아이였다.

[…미안.]

러쉘은 루시온의 머리에 손을 올리며 천천히 쓰다듬었다.

[미안해, 루시온. 내가 말실수했어.]

딱!

라타가 러쉘에게 몸통 박치기를 시도했다.

러쉘은 알면서도 맞아주었다.

―나빴어, 러쉘!

[맞아. 내가 나빴어.]

[뒤통수를 후려쳐도 괜찮겠나, 러쉘?]

베델은 꾹 참은 주먹을 내보이며 물었다.

[어, 루시온이 원하면?]

러쉘이 어색하게 웃으며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루시온은 다시 가면을 뒤집어썼다.

"그만 가자."

아직도 루시온의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 * *

[저기 보면 지붕이 혼자 어색하게 덧칠된 곳이 있지?]

베델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다 아예 자신이 날아가 그 지붕 위에 섰다.

[여기야.]

루시온은 잘 보인다는 뜻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러쉘을 보며 피식 웃었다.

"아직도 얼얼하십니까?"

[베델 손이 진짜 매워.]

"흄이 아니라 베델이니 다행이지 않습니까?"

루시온은 눈을 깜박거리는 흄을 슬쩍 쳐다보았다.

맞을 짓을 했다는 걸 알기에 러쉘은 살짝 건방진 말에도 간지러운 입을 꾹 참았다.

―홉! 혹시 라타가 한 몸통 박치기도 아팠어?

라타가 엉덩이를 씰룩거리다 걸어가다 말고 깜짝 놀라 러쉘을 보았다.

―라, 라타가 화가 나서 그랬는데, 아팠으면 미안해.

[라타가 제일 아팠어.]

러쉘이 웃음기를 쫙 빼며 말하자 라타는 러쉘에게 매달려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라타가 잘못했어! 미안해!

"저, 도련님."

흄이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고 루시온을 불렀다.

"그래, 흄."

"저는 도련님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해하지 못하면 이해하지 않아도 돼."

루시온은 가볍게 대답했다.

―맞아. 그래도 돼. 라타도 처음에 몰랐는데 루시온의 어둠이 늘어나면서 점점 감정을 알아가고 있어.

라타가 러쉘에게 매달린 채로 목소리를 냈다.

"사람으로 살려면 '공감'이 필요하다고 들었습니다. 제게는 그 능력이 부족하다는 걸 오늘 느꼈습니다."

"흄."

"예, 도련님."

"넌 너야. 굳이 사람으로 있을 필요는 없어. 나는 흄 너를 선택했지, 사람을 흉내 내는 흄을 선택한 건 아니니까."

금세 고민을 털어냈는지 흄의 미소가 어여쁘게 자리 잡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도련님은 제게 이정표 같으신 분입니다."

"그 뒷말은 하지 않아도 돼."

루시온이 살짝 고개를 돌리며 베델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도련님."

얼마나 걸었다고 다시 흄이 목소리를 냈다.

어쩐지 불안하게 들려왔다.

"왜 그래?"

루시온이 고개를 돌리니 흄의 오른쪽 눈이 현혹에 걸린 듯 어둠에 휩싸여 타오르고 있었다.

"…흄?"

루시온이 놀라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왜 그… 흄? 너, 오른쪽 눈이 왜 이래?]

앞장서서 가던 러쉘마저 뒤를 돌아보다 말고 기겁했다.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제 눈에 선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선이라니?"

"그것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뭔가 강한 끌림이 느껴집니다. 꼭 선을 따라가야만 할 것 같습니다."

―아파?

라타가 흄에게 다가가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아프지 않습니다. 걱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흄이 쪼그려 앉아 라타를 쓰다듬었다.

[무슨 일이 생겼는가?]

베델이 멀리서 바라보다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다시 루시온 쪽으로 날아왔다.

금세 베델의 눈이 커졌다.

[흄. 그대의 눈이… 왜 그런가?]

"베델. 아무래도 암살자를 구하는 건 잠깐 미뤄야겠어."

루시온은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그건 상관없어. 그나저나 괜찮아, 흄? 혹시 뭔가에 당한 건가?]

베델의 물음에 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갑자기 오른쪽 눈이 따끔거리면서 이상한 선이 보였습니다."

'설마....'

루시온은 짐작 가는 한 가지를 떠올렸다.

어제 죽음의 기사가 제 품에서 꺼낸 검은 구슬.

그걸 본 뒤에 흄은 처음으로 꿈을 꾸었고, 뜬금없이 접시가 나오기는 했으나, 흄을 가리켜 '인도자'라는 말을 꺼냈다고 하지 않았던가.

"안내해."

루시온은 망설이지 않았다.

암살자들을 오늘 하루 만나지 않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지만, 흄은 달랐다.

애초에 소설 속 흄은 중간 보스 루시온의 부하였고, 힘이 강하다는 설정 이외에 특별할 것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실제로 만난 흄은 흑마법사의 손에 탄생한,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몬스터였다.

어둠을 주 에너지원으로 삼았고, 자신한테 일정 주기마다 어둠을 받아야 하는 사실.

그 주기마다 어둠을 넣지 않는다면 흄이 실제로 몸의 통제를 잃어 말조차 하지 못하는 살아 있는 인형이 되는 것까지 확인한 상태였다.

'그런데 갑자기 선마저 보인다니.'

루시온은 놀랐지만, 점점 달라지는 소설 속 내용에 만족스러웠다.

소설 속 흄은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뭔가 크게 달라질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흄을 따라 얼마나 걸어갔을까, 갑자기 러쉘이 목소리를 높였다.

[잠깐만.]

"왜 그러십니까?"

루시온이 물었다.

[그 녀석이 있는데?]

"그 녀석이라뇨?"

[…저번에 너하고 만났던 죽음의 기사.]

스겅.

베델이 느닷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녀는 몹시 분노하며 망토마저 휘날리고 있었다.

그녀가 내보이는 살기에 루시온은 흠칫 놀랐다.

"베델?"

[흑마법사다.]

베델이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더 사납게 변했다.

[저기에 흑마법사 놈들도 있다!]

딱!

러쉘이 손가락을 튕기자 휘날리던 베델의 망토가 잠잠해졌다.

[진정해, 베델. 저 흑마법사는 널 죽였던 놈들과 다르잖아. 예전이라면 몰라도 루시온하고 계약한 이상 분노를 억누를 필요가 있어. 혹여 네가 타락하면 루시온한테도 영향이 있으니까.]

[…실례했다.]

베델은 검을 꽉 쥐었다.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이봐."

루시온이 죽음의 기사에게 다가가 목소리를 내자 신나게 흑마법사를 썰고 있던 그가 반응했다.

[너는....]

루시온을 보며 아는 척을 하려던 죽음의 기사는 갑자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곧 러쉘을 보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검을 힘없이 놓아버렸다.

97화. 강령술

[오늘은 안 때리니까, 놀랄 필요 없어.]

러쉘이 죽음의 기사에게 다가가자 부드럽게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죽음의 기사는 마치 딸꾹질을 하듯 몸을 크게 떨었다.

[그냥 내 제자 말에 잘 대답해주면 돼.]

[…너는 진짜 이상한 유령이야. 아니, 애초에 유령이 맞는지 모르겠군.]

죽음의 기사는 마른침을 삼키다 다시 대검을 들어 도망치는 흑마법사의 등을 향해 던졌다.

강한 어둠이 실린 검이 흑마법사의 배를 뚫고 나왔다.

푸욱!

[멋대로 건들지 말게. 저것들은 내가 처리해야 하니.]

죽음의 기사는 고개를 돌려 강한 살기를 뿌리는 베델을 향해 낮게 경고했다.

동시에 베델 역시 죽음의 기사를 노려보았다.

[내가 왜 그대 말을 들어야 하는가? 그대가 이곳의 왕이라도 되는 것도 아닌데.]

베델의 물음에 죽음의 기사는 코웃음을 치며 흑마법사의 시체를 깔고 앉았다.

[왕? 꼬맹이답게 말이 유치한데? 왜? 너도 이놈들을 죽이고 싶어?]

[꼬맹이? 지금 그대가 내게 무슨 소리를 했는지 알고 있는가?]

베델은 당장 어둠이 어린 검을 휘두를 듯이 살벌하게 기세를 드러냈다.

베델과 죽음의 기사가 벌이는 신경전에도 루시온은 우선 이곳이 어디인지부터 살폈다.

나무 틈 사이로 강과 배 일부분이 보였다.

그리고 차차 시선을 내려 죽음의 기사 손에 죽어간 이들을 보았다.

죄다 흑마법사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지만, 얼추 15명이 넘어 보였다.

'만약 저들이 흑마법사라고 한다면 왜 여기에 이렇게 우르르 몰려든 거지?'

루시온은 의문을 가진 채로 흄을 보았다.

흄의 눈가에 피어오른 어둠의 불꽃이 죽음의 기사와 가까워질수록 더 솟구쳤다.

"제가 보이는 선이 저 죽음의 기사를 향해 있습니다."

흄이 루시온에게 확신을 줬다.

러쉘이 흄의 말에 잠깐 귀를 쫑긋 세우다 말고 당장 전투가 일어날 것처럼 싸늘한 두 죽음의 기사부터 말렸다.

[둘 다 거기까지 해.]

안타깝지만, 베델은 죽음의 기사를 상대할 수 없었고.

[알고 있다.]

베델은 이미 각오했다.

기사답게 루시온을 지키기로.

[하지만 저 녀석이 만약 루시온 공을 공격한다면 나는 사라지더라도 루시온 공을 지킬 뿐이야.]

아마 저 죽음의 기사가 러쉘이 말했던 그 죽음의 기사일 테지.

흑마법사를 증오하는 자신이 할 말은 아니나, 눈앞에서 죽음의 기사가 흑마법사를 죽이는 모습을 목격했다.

게다가 자신과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사명이라고는 하나, 저 죽음의 기사 역시 흑마법사를 증오하고 있었다.

혹시나 저 대검이 루시온을 향한다면 단숨에 꿰뚫려 싸늘하게 식어가겠지.

[아.... 그러니까, 루시온 때문에 이렇게 날을 세운 건가?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죽일 마음은 전혀 없으니까.]

죽음의 기사는 가볍게 웃음소리를 내었다.

"이봐, 죽음의 기사."

상황 파악을 끝낸 루시온이 죽음의 기사를 불렀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봐. …아, 잠깐만.]

죽음의 기사가 갑자기 엉덩이를 자리에서 뗐다.

그의 눈길이 흄에게 향했다.

[너 눈동자가 왜 그래? 저번에는 그런 눈동자가 아니었잖아?]

"왜 저렇게 됐는지 알고 있나?"

루시온이 자연스럽게 물었다.

[정확히는 몰라. 한쪽 눈에서 어둠의 불꽃이 피어오르는 자를 인도자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인도자?"

루시온은 손가락을 매만졌다.

같은 단어가 또 나왔다.

한 번은 우연이지만, 두 번째는 우연이 아닐 수도 있었다.

―홉! 흄이 말한 거잖아!

라타의 꼬리가 바짝 올라갔다.

[그래. 하지만 나도 옛날에 들었을 뿐이고 더는 캐려고 해도 불가능하니까, 나한테 묻지 마.]

"왜?"

[이미 다 사라졌으니까. 사라진 걸 내가 어떻게 하겠어? 그러니 내게 물어도 소용이 없어. 어디까지나 나는 들었을 뿐이니까.]

죽음의 기사는 지루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알지 못하면 물을 의미가 없었다.

루시온은 빠르게 다음 질문을 꺼냈다.

"네가 저번에 말했던 그릇이 뭐야?"

[글쎄. 나도 어둠이 너보고 '그릇'이라고 말하기에 따라 했을 뿐이라서. 진짜 궁금하면 네가 직접 물어봐도 되지 않나 싶네. 넌 흑마법사잖아?]

못하는 걸 알면서도 빈정거리는 목소리에 루시온은 살짝 짜증이 일어났다.

하지만 애써 감정을 삼키며 다시 물었다.

"그럼 네 몸속에 있는 그 구슬은 뭔데?"

[음, 어둠의 힘을 증폭시키는 거…? 꽤 오래 가지고 있어도 이게 뭔지 나도 몰라.]

"왜?"

이어지는 루시온의 질문에 죽음의 기사는 살짝 늘어지는 듯한 태도를 보이다 러쉘과 눈이 딱 마주쳤다.

러쉘이 주먹을 올렸고, 죽음의 기사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있잖아, 루시온.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크게 쓸모 있는 놈이 아니야. 내가 한 행동이라고 해 봤자, 지금처럼 흑마법사를 죽인 게 다 거든.]

"아는 것만 말해."

[좋아. 하지만 부분만 알려주지.]

"왜?"

[어둠이 그걸 바라니까. 넌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고 하네?]

죽음의 기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어쨌든, 어둠이 이걸 나한테 넘겼고, '때가 되면 그걸 돌려줘야 한다'고 속삭였어.]

과거 일을 떠올리는지 죽음의 기사는 하늘을 살짝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힘의 대가로 나한테 일을 하나 맡겼고.]

"그게 흑마법사를 죽이는 일인가?"

[정확히는 제국으로 들어오는 흑마법사가 없길 바라고 있었어.]

[어둠이…?]

러쉘이 대화에 끼어들며 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너무도 이상한 말이지 않은가.

흑마법사는 어둠의 축복을 받은 자들. 어둠이 흑마법사를 해칠 리가 없었다.

[그래. 어둠이.]

죽음의 기사가 낄낄 웃었다.

[이상하지? 너도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나도 그래. 어둠이 어둠을 따르는 자를 막다니.]

죽음의 기사는 천천히 걸어갔다.

묵직한 갑옷의 소리가 뒤따라 들려왔다.

[그, 루시온.]

죽음의 기사가 루시온을 불렀다.

"말해."

[내가 다는 몰라도 이 이상한 상황은 네가 만들었다는 것 정도는 알겠더라고. 어둠이 '그릇'이라고 부르는 자는 너뿐이니까.]

―루시온은 루시온인데.

라타가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어쨌든, 이렇게 계속 만날 것 같으니 이름이라도 터놓는 게 어떻겠나?]

루시온이 가면을 벗었다.

죽음의 기사는 이미 자신의 얼굴을 알고 있었기에 필요 없었다.

그를 보는 루시온의 시선이 사나웠다.

[그 눈빛은 뭔가?]

예상외의 반응에 죽음의 기사는 자신이 던진 대검을 줍다 말고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즐거웠나?"

[뭘 말하는 거지?]

"내가, 그 거지 같은 놈들에게 시달릴 때 너도, 어둠도 즐거웠냐고 묻고 있는 거다."

루시온의 목소리가 조금 올라갔다.

[…아. 뭘 말하나 싶더니.]

죽음의 기사가 루시온에게 다가갔다.

흄이 루시온 앞에 섰고, 러쉘과 베델이 죽음의 기사를 경계했다.

죽음의 기사는 더는 다가가지 않고 목소리를 내뱉었다.

[루시온. 넌 지금 살아 있지 않은가.]

마치 자신이 살려줬다는 듯한 오만한 태도에 루시온은 잠깐 숨을 삼켰다.

곧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물었다.

"네가 날 살려줬다고…?"

[생각해 봐. 귀족을 증오하는 유령 틈에서 흑마법사의 힘도 없던 네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죽음의 기사는 살짝 경박스러운 말투를 버리고 제법 진지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내버려 둔 것도 사실이니 입 밖으로 꺼내기가 우습지. 이제 와서 저택의 유령들을 다 죽이는 것도 우스울 테고.]

루시온은 천천히 숨을 내쉬며 화를 삼켰다.

분수를 알아야 했다.

지금 자신의 실력으로 죽음의 기사의 투구도 날리기 어려웠다.

"…넌 흑마법사를 죽여야 한다고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나를 왜 살려둔 거지? 그때는 스승님을 만나기 전이었을 텐데."

스승이라는 말에 죽음의 기사는 괜히 러쉘을 힐끔 바라보는 듯했다.

[아니. 그건 말하고 싶지 않아. 어쨌든, 나는 브로슨. 같은 저택에서 사니 인사나 하고 지내자고.]

"잠깐만."

[진짜 말이 많네.]

브로슨은 자리를 떠나려다 말고 귀찮다는 듯이 반응했다.

[왜? 뭐?]

"흑마법사가 왜 변경으로 온 거지? 그것도 이렇게 집단으로?"

[시체를 옮기고 있던데? 아마도 시체를 살려서 소꿉놀이라도 하려는가 보지.]

"시체… 라고?"

루시온은 그 말을 그냥 흘려듣지 않았다.

시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푸른 실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브로슨은 여러 사람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대검을 질질 끌며 루시온에게 다가왔다.

[어쨌든, 강해져라. 어둠도 나도 그걸 바라고 있으니까.]

죽음의 기사는 손을 루시온의 머리를 툭 하고 얹어 가볍게 쓰다듬었다.

"...?"

루시온의 눈이 커졌고, 브로슨은 기분 좋게 웃으며 어딘가를 향해 날아갔다.

베델은 그제야 숨을 골랐고, 흄은 다시 루시온의 뒤에 섰다.

[진짜 이상한 녀석이네.]

러쉘이 굳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루시온은 다시 가면을 쓰고 라타를 바라보았다.

라타와 눈이 마주치자 루시온은 움찔거렸다.

―라타는 루시온이 라타를 부를 거라고 생각했어. 지금 라타가 나설 차례야! 라타가!

라타는 한껏 들떠서는 꼬리를 살랑거렸다.

[그나저나 흑마법사 이렇게 떼로 몰려왔다는 건, 분명 어떤 실험을 강행하고 있다는 뜻인데. …역겨워.]

베델이 분노가 섞인 목소리를 냈다.

[그렇겠네. 시체까지 옮긴다는 걸 보면 확실하지. 제발 내가 생각한 게 아니라면 좋을 텐데.]

러쉘은 라타와 반대편으로 이동해 시체를 하나씩 살폈다.

루시온도 가만히 놀고 있을 수 없었다.

푸른 실이 강가 쪽으로 향했지만, 일단 시체를 뒤져 정보를 알아볼 참이었다.

흄도 루시온을 뒤따랐다.

"저도 살펴보겠...."

[멈춰, 라타!]

러쉘이 갑자기 소리쳤다.

―홉!

막 앞발을 뻗으려던 라타가 깜짝 놀라며 다급히 앞발을 숨겼다.

"왜 그러십니까?"

덩달아 놀란 루시온이 말을 꺼냈다.

[이 녀석들, 타락한 흑마법사야. 이미 영혼마저 타락해서 정보를 캘 수도 없고, 아마 영혼도 불리지 않을 거다. 괜히 손을 더럽힐 필요가 없어. 다른 곳, 그러니까, 저기 배나 뒤져봐.]

러쉘이 강가 쪽에 세워진 배를 가리켰다.

[…개자식들.]

먼저 배로 움직인 베델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시체가 가득해?"

뒤따라온 루시온의 물음에 베델은 역겹다는 눈빛으로 죽어버린 흑마법사들을 바라보았다.

[맞아. 배가 시체로 매워져 있어.]

루시온은 푸른 실이 사람이 아닌, 시체에 이어진 상황에 기가 찼지만, 차분히 러쉘을 불렀다.

"스승님."

이제는 척이면 척이었다.

러쉘은 코웃음을 살짝 치며 물었다.

[뭘 알려달라고?]

"예. 이들을 자유롭게 할 방법을 혹시 알고 있습니까?"

시체와 푸른 실을 보자마자 루시온은 눈치챘다.

저 흑마법사는 공허의 손이고, 흑마법사가 가지고 가려던 시체는 소설 속에서 놈들이 벌였던 중심 사건 중 하나에 쓰인다는 걸.

헤인트가 발견하지 않았다면 제국의 절반을 부서트릴 수도 있었던 최악의 사태.

지금 그 사태를 벌이기 위해 공허의 손은 시체를 이용해 병력을 차곡차곡 쌓고 있는 듯했다.

죽지 않는 병사.

이 얼마나 최악의 적인가.

많은 나라에서도 이 사태를 막기 위해 되도록 시체를 불태우는 방법을 택하고 있었다.

"아니면 시체를 가지고 장난칠 놈들에게 엿을 먹이는 방법이라든지 말입니다."

루시온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공허의 손이 엮인 일인데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상대는 타락한 흑마법사야. 걔들은 아예 흑마법의 법칙을 무시하는 이들이라 시체를 사용하지 못하게 불태우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 망자를 일으키려면 뼈다귀라도 있어야 하는데 가루로는 뭣도 못 하거든.]

러쉘은 자신이 아는,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을 알려주었다.

"다른 방법이 있질 않습니까?"

루시온은 자신이 원하는 답을 러쉘이 말하길 일부러 유도했다.

러쉘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흑마법사이기에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을 루시온 역시 사용하려는 것 같았다.

망자를 일으키는 흑마법.

흑마법사를 싫어하지 않던 이라도 보면 질색하게 만드는 그 마법.

'그게 아니라면 혹시 그 방법을....'

"시체를 이용해서 유령을 불러오는, 강령술 같은 거 말입니다."

하지만 루시온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생각보다 평범해 러쉘과 베델이 동시에 놀랐다.

루시온도 덩달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골이 된 시체든, 부패한 시체든 흑마법을 이용해 그들을 살아 있는 사람처럼 움직이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배워야 하는 마법이 아니었다.

망자를 일으키는 흑마법은 눈에 띄고, 요란하며, 흑마법 중 유일하게 시끄러운 마법이었다.

이미 중부로 향하는 게이트에서 직접 보지 않았던가.

지금 여기서 그 마법을 배워서 쓴다면 잠자고 있던 신관들이 다 튀어나올 게 뻔했다.

"대체 제가 무슨 마법을 요구할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두 사람의 반응에 루시온은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대신전에서 의자로 창문을 깬 뒤로 정말 얌전히 지내질 않았던가.

98화. 강령술(2)

[그러니까....]

러쉘이 말을 더듬었다.

혹여 타락에 영향이 있을까, 타락한 흑마법사의 시체를 손댈 수 없으니 남은 건 당연히 그들이 옮기고 있던 시체가 아닌가.

시체를 일으켜서 어디에서 왔는지 안내하라고 하면 간단했고.

루시온도 이들이 누구인지, 본거지는 어디인지 알고 싶어하는 눈치가 아니었는가.

러쉘은 일단 넘어갔다.

[어쨌든, 언젠가는 배워야 할 흑마법이긴 하지. 죽음의 기사는 진짜 몇 없고, 이마저도 일반 사람을 공격할 수 없으니 그 단점을 보완할 마법이고.]

사람들이 꺼리든 말든 흑마법사라면 당연히 배워야 할 마법임은 분명했다.

"다른 흑마법사도 쓰는데 저라고 왜 배우지 않겠습니까? 배울 겁니다. 그것보다 스승님하고 베델이 너무 싫어하는 거 아닙니까?"

루시온은 피식 웃다 슬쩍 라타를 바라보았다.

라타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만약 정말 이상하다면 조금 전 베델이 유령이 된 암살자를 죽였을 때처럼 자신에게 타박할 텐데.

이어지는 루시온의 시선에 베델이 두 손을 다급히 저었다.

[아, 나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망자를 일으킨다는 게 나한테는 아직 어색해서 그런 것뿐이니까.]

[베델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보기엔 되게 악덕한 마법처럼 보이는데 타락한 흑마법사만 빼면 실제로는 다 망자한테 허락받고 일으키는 거야. 엄청 억울하지.]

[그게 정말인가, 러쉘?]

베델의 눈이 커졌다.

허락을 맡다니.

갑자기 웃음이 삐질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당연하지. 흑마법사는 강도가 아니니까. 나는, 그 흑마법을 사용하면 뭐라고 해야 하나, 고양감? 뭐, 그런 비슷한 감정에 루시온이 취할까 봐 그게 걱정되어서 그렇지.]

러쉘이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명령만을 듣는 군대가 생기면 누구 할 것 없이 힘에 사로잡히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루시온은 태연하게 자신을 가리켰다.

"전 애초에 힘을 가진 자입니다. 겨우 그 정도로 감정에 취하진 않습니다. 실제로 병사를 움직일 힘도 있고요."

황제가 준, 병사를 움직일 수 있는 패가 자신의 손에 있었다.

[내가 귀족이 되어 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말할 수가 없네.]

러쉘은 자신만만한 루시온의 태도에 어렵다는 눈썹을 높이 치켜올렸다.

[어쨌든, 루시온. 네가 지금 사용할 수 없는 흑마법이야.]

"그렇습니까?"

다소 아쉬운 목소리가 루시온에게서 흘러나왔다.

그는 숨을 짧게 내쉬며 시체가 가득 들어 있는 배를 바라보았다.

저것들을 다 태워버려야 했다.

"있잖습니까, 스승님."

루시온이 목소리를 냈다.

이번 일도 헤인트에게 넘기려다 방금 막 좋은 생각이 났다.

흑마법사를 가장 싫어하는 곳이 어디겠는가.

바로 신전이었다.

[…루시온.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위험한 거 아니지?]

표정을 봤으면 더 정확했겠지만, 아쉽게도 루시온이 가면을 쓴 상태였다.

"신전이 흑마법사한테 빚을 지면 되게 웃기지 않겠습니까?"

[신전이… 흑마법사에게 빚을 진다고 말했나? 그게 가능한 일인가?]

베델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베델, 지금 내가 누구인지 잊었어?"

루시온은 키득거렸다.

[…아.]

베델이 뒤늦게 호들갑스럽게 반응했다는 걸 알고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루시온은 성자이질 않은가.

제국과 제국의 신전, 그리고 신성 국가 네바스트의 대신관인 에올이 인정한 성자.

[네가 말하는 신전이라는 건 어딜 말하는 거야?]

러쉘은 손가락 두 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신성 국가 네바스트와 제국의 신전이 같은 신을 모시나 두 곳의 성질이 달랐다.

"제국의 신전입니다."

루시온은 네바스트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

성자인 자신을 우습게 여기는 이들이 아닌가.

게다가 기왕이면 가까운 쪽이 나을 테고.

[그래서 뭘 하려고?]

러쉘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제가 개별로 지금 벌어진 일을 조사하고 해결해도 되지만, 조직이 이번 일로 신전과 인연을 쌓아나간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니까, 신전과 줄부터 만든다고?]

러쉘이 눈을 깜박거리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나중을 대비하면 꽤 괜찮지 않겠습니까? 물론 일단 조직의 이름만 팔 생각입니다. 접근하는 것도 자제할 거고요. 처음에는 의심하겠지만, 몇 개 가져다주면 의심을 환심으로 바꿀 수 있을 겁니다."

[확실히 신전이라면 이번 일을 제대로 처리하겠지. 하지만 네가 생각한 것처럼 신전은 착하지 않아.]

루시온 의견에 동의하나, 러쉘은 딱 잘라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 게 아니라 네가 한 행동들을 마치 자신들이 한 것처럼 싹 빼돌릴 수 있다니까?]

러쉘이 다시 루시온을 타일렀다.

전 세계가 유일신을 믿기에 빛의 이미지가 워낙 좋지만, 실제로는 달랐다.

빛은 대개 태어나면서부터 발현하는 것이었고, 신을 믿는다고 해서 빛이 커지는 개념이 아니었다.

루시온처럼 훈련을 통해 성장할 수 있었다.

"신전에 트로에가 있습니다."

루시온은 해결책을 바로 제시했다.

빛의 신수인 트로에는 루시온 자신이 이미 흑마법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이 죽어서도 안 되고, 타락해서도 안 된다고 트로에가 직접 말했으니 아마 힘을 보태주지 않을까 싶었다.

―트로에! 맞아! 트로에라면 루시온의 편이 되어 줄 거야.

라타가 배시시 웃었다.

[아. 맞네. 트로에가 중개를 해주면 되겠네. 뭐, 그렇다면 얼마든지 신전에 빚을 지어도 괜찮겠어. 아니, 괜찮을 정도가 아니라 엄청 좋지!]

빛의 신수는 신전의 얼굴이자 상징이었다.

나중에 트로에가 흑마법사를 도왔다는 사실이 밝혀져도 상징이자 얼굴인 신수를 내쫓아내겠는가.

오히려 흑마법사의 이미지가 뒤바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자세한 상황은 크라언과 의논을 해 봐야겠습니다."

루시온은 긍정적인 반응에 흡족한 목소리를 냈다.

[…저기, 트로에가 누구인가?]

베델만 이야기를 따라잡지 못했다.

트로에라는 이름의 신관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빛의 신수야. 나한테 축복을 준 신수지."

루시온이 자신의 이마를 가리키고는 태연하게 러쉘을 보았다.

"그럼 스승님. 강령술이라도 가르쳐 주십...."

[…뭐! 그, 그러니까 빛의 신수가 인정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베델이 깜짝 놀랐다.

"맞아."

루시온이 다시 베델을 바라보았다.

[그게… 그게 가능한 일인가? 공은 흑마법사이지 않은가. 빛과 어둠은 서로 상극이 아닌가.]

―아니야. 트로에가 루시온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아! 라타도 좋아하고.

라타까지 거들자 베델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인상이 빠르게 구겨졌다.

아무리 이해를 시키려 해도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기에 루시온은 그녀를 내버려 두었다.

베델을 힐끔 쳐다보던 러쉘이 귓가를 만지작거리며 목소리를 냈다.

[좀 아슬아슬한데, 그래도 할 거야?]

"방법이 없잖습니까."

주변에 이 사태를 알릴 유령들도 죄다 흑마법사를 피해 도망치거나 하늘로 올라갔겠지.

[…강령술이, 이것도 제법 좀 힘든 마법이거든. 망자를 일으키기 위한 전 단계이기도 하고, 고위 마법까지는 아닌데 대가가 살짝 필요해.]

"또 어둠을 머리로 보내야 합니까?"

[아니. 대량의 어둠과 이정표라고 할 수 있는 네 피가 필요해.]

"...!"

루시온은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어둠은 당연한 거고, 피라니.

소설 속 흑마법사들이 종종 자신 손목을 베어내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때는 왜 저렇게 하나 싶었는데.

―그건 아프잖아!

라타가 기겁했다.

"꼭 해야만 하는 겁니까?"

조용히 있던 흄까지 목소리를 냈다.

[그래. 망자를 일으키는 데 피만큼 싸게 먹히는 대가가 없지.]

"혹시 앞으로 계속 피가 필요합니까?"

루시온이 곤란한 듯이 물었다.

아픈 건 싫었다.

베이는 것도 당연히 싫었고.

[음.]

왠지 루시온이 껄끄러워할까 봐 러쉘은 일부러 말을 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맞아.]

러쉘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루시온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주로 강령술이나 망자를 일으키는 부분에 많이 쓰여. 그 외에도 자잘하게 쓰이고, 아, 흑마법을 일시적으로 강화할 때도 무조건 필요해. 하지만 아프고, 빈혈도 올 수 있으니까 그냥 부지런히 시간 날 때 어둠을 단련하는 게 제일 좋아.]

'피가 흑마법을 강화할 수 있다니....'

루시온은 헤인트가 성물과 성물에 가까운 아이템을 모아 강해진 걸 비교하면 차라리 잠깐 피를 뿌리는 게 빠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체 언제 돌아다녀서 물건을 모으겠는가.

'어둠도 강화할 수 있는 아이템이 있으면 좋....'

루시온은 잠깐 죽음의 기사, 브로슨이 가졌던 검은 구슬을 떠올렸다.

구슬이 꼭 하나라는 법이 있는가.

루시온의 시선이 일순간 흄에게 향했다.

'구슬과 가까워지면 흄의 눈동자가 변했지?'

[자, 설명은 여기까지 하고 바로 해보자고. 하는 방법은 간단하니까.]

러쉘은 손뼉을 가볍게 마주쳤다.

지금까지 루시온은 말도 안 되는 습득력을 보여주었다.

솔직히 그건 불가능했다.

말을 이해한 것과 몸으로 직접 하는 건 달랐으니.

하지만 루시온은 이번에도 빠르게 익힐 거라 보았다.

[루시온. 안토니한테 걸리면 어쩌나 걱정하지 말고 집중해.]

루시온이 순간 뜨끔해 움찔거렸다.

"듣고 있습니다."

사실 제일 무서운 건 안토니였다.

왜, 계속 웃던 사람이 한 번 화를 내면 엄청 무섭지 않은가.

[제일 처음에 할 건 뭐니 뭐니 해도 저 시체에 어둠을 꽉 차게 집어넣는 거야.]

루시온은 러쉘의 말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바닥을 구르고 있던 시체 하나를 찾았다.

라타의 보조를 받으며 러쉘 말대로 시체에 어둠부터 집어넣었다.

[하지만 어둠이 싫다고 할 거야. 당연히 시체에 들어간다는 데 누구라도 싫어할....]

러쉘은 그대로 이번만큼은 루시온의 어둠이 말을 듣지 않을 거라 생각했으나, 곧 생각을 철회했다.

[그래, 살다 보면 말을 잘 듣는 어둠도 있을 수 있지. 물론, 네가 처음이지만.]

러쉘 자신이 보기에 루시온의 어둠도 다른 어둠 못지않게 자기주장이 강했다.

하지만 아무리 라타가 보조를 맞춰준다고 한들 저렇게 말을 잘 들을까?

'이상한데? 이전보다 더 얌전해졌잖아.'

이상함은 루시온이 먼저 느꼈다.

뭘 해도 이따금 '싫어!'라며 중얼거리던 목소리도 정말 많이 사라졌다.

―우오오오. 루시온의 어둠이 이제 라타와 루시온의 마음을 알아주나 봐. 더 착해졌어.

어둠이 잘 움직일 수 있게 도와주던 라타가 감격하며 말했다.

[이제 시체를 어둠으로 다 채웠으면 네 피를 흘려보내. 무조건은 아닌데, 피의 양은 시체가 살았을 때 강함과 비례해서 네가 강한 이의 영혼을 불러낼 것 같으면 피가 많이 필요하고 그 반대는 당연히 적겠지?]

러쉘이 시체를 가리켰다.

[이 시체는 보통 사람처럼 보이니 서너 방울 정도면 충분하겠네.]

루시온은 러쉘의 말을 들으며 주머니에서 단검을 꺼냈다.

호신용으로 가지고 있었는데 이렇게 쓰일 줄이야.

[피를 바치는 이유는 대가라는 측면도 있는데, 네 위치와 함께 이쪽으로 오라고 유혹하기 위해서야. 응답은 시체가 하는 거고, 넌 기다려야 해.]

'참 불합리하네. 타락한 흑마법사는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부른다는 거잖아?'

루시온은 투덜거리다 단검으로 손가락을 벴다.

서걱.

손가락에 들어오는 검의 섬뜩함에 루시온은 아프기보다는 역겹다는 기분을 느꼈다.

갑자기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읏.

마치 라타가 아픈 듯 신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후두둑.

생각보다 깊게 베였는지, 피가 후드득 떨어졌다.

떨어지는 피를 보자 러쉘이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루시온? 너무 깊게 벤 거 아니야? 서너 방울 정도면 된다니까.]

[깊게 벴어. 긴장 때문에 손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간 탓이야.]

베델이 말했다.

[천천히 심호흡해, 루시온 공.]

"괜찮아."

루시온은 오래간만에 느끼는 섬뜩함에 가슴이 놀란 모양이었다.

앞으로 검을 잡을 텐데, 베이는 공포에 휩쓸릴 순 없었다.

"계속 알려주셔도 됩니다."

루시온은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러쉘이 루시온을 힐끔 살피다 작게 숨을 내쉬었다.

신경 쓰였지만, 우선 강령술이 먼저였다.

[여기 보여?]

러쉘이 루시온의 피가 떨어진 곳을 가리켰다.

물을 끓이듯 어둠이 보글 보글거렸다.

[이 현상은 일명 영혼이 미끼를 물었을 때 발생해. 자세히 말하자면 대가가 충분해서 네 강령술에 응하겠다는 뜻이야. 네가 피를 많이도 뿌려서 좋아하는 거 봐봐라.]

"기억했습니다."

[그럼, 이제 너한테로 오라고 3번 명령하면 돼. 그 느낌만 살리면 되니까 무슨 말을 하든 괜찮아.]

루시온은 고개를 끄덕인 후에 명령했다.

'내게 오거라.'

99화. 강령술(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