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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정말 손을 들어 주셨습니다."

그림자 이동 후, 혹여 루시온이 궁금할까, 흄이 먼저 말을 꺼냈다.

"손이라고?"

"예. 이 손 말입니다."

흄은 자신의 손을 가리켰다.

[라인트 용병단이 누구인지 몰라서 손을 들으라고 했거든.]

러쉘이 흄의 부족한 말을 보충해주었다.

"…푸핫!"

루시온이 웃음을 흘렸다.

정말로 흄이 할 법한 행동이었다.

"혹시 제가… 실수했습니까?"

루시온이 아예 배를 잡고 웃자 흄은 불안한 시선으로 두 손을 꼭 쥐었다.

"아니, 크흡, 아니야. 실수라니. 잘했어."

루시온은 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들어가자고."

방을 빠져나와 미엘라와 초네스트의 가주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장소로 향했다.

방 밖에는 벌써 조직원들과 초네스트의 병사들이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다.

[벌써 불이 붙었나 본데?]

러쉘이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든 말든 루시온은 그들이 만든 틈 사이를 평온하게 걸고 태연하게 문을 열었다.

그들 모두 황당한 눈길로 루시온을 보았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행동이 아닌가.

"…지금 그래서 전쟁이라도 벌이겠다는 겁니까!"

문틈 사이로 언성이 높아진 초네스트 가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안에는 심지에 불이 붙은 다이너마이트와 같았기에 루시온과 흄이 방으로 들어왔음에도 그들을 보는 이들은 몇 없었다.

크라언은 루시온을 잠깐 바라보다 손에 쥐고 있던 연락용 아이템을 집어넣었다.

"퀘이트 씨."

루시온은 싱긋 웃으며 퀘이트를 작게 불렀다.

그는 주변 시선을 살피다 마치 임무가 완료됐다는 것처럼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벌써 7명 전원을 죽였다고?'

루시온은 놀란 마음을 숨겼다.

그들을 어떻게 죽였든, 암살자들을 찾아낸 베델의 안목과 암살자들의 실력에 무척 만족스러웠다.

자신이 그들을 지원한다면 앞으로 더 강해질 게 틀림없었다.

가능성.

무언가를 투자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111화. 라인트 용병단(2)

'…아. 이 정도는 얼마든지 해줄 수 있으니 그렇게 나를 띄워주지 않아도 괜찮아.'

베델은 쑥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와 빙의했다는 사실을 잠깐 잊어버렸기에 루시온은 당황했다.

베델이 애써 웃음을 삼켰지만,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소리를 막진 못했다.

루시온은 옷자락을 꽉 쥐었다.

"전쟁이요?"

대놓고 비웃음을 터트리는 미엘라의 목소리에 루시온은 손을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참으로 우습습니다. 지금 내 발밑에 무릎 꿇어 당신의 아들이 반 크로니아 집단에 들어간 사실을 숨겨달라 빌어도 모자랄 판에 제안을 거절하고, 전쟁이요?"

미엘라의 입꼬리가 뒤틀렸다.

초네스트의 가주를 보는 그녀의 시선이 점점 사나워졌다.

"좋습니다. 협상은 결렬이네요. 나는 초네스트 자작가가 얼마나 빨리 크로니아에게 짓밟힐 수 있는지 기대해보겠습니다."

"지금 그 말 사실입니까?"

"먼저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을 꺼낸 건 그쪽입니다."

"그쪽이요? 이봐요! 체프란 가주! 입이 달려 있다고 말을 막 꺼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가주를 내가 뭐라고 지칭해야겠습니까?"

미엘라는 한치도 망설이지 않고 독설을 퍼붓듯 쏘아댔다.

"이... 망할 년!"

초네스트 가주의 얼굴이 붉어졌다.

다 참았다.

모욕도, 피도 마르지 않은 저 방자한 년의 말도.

최후를 준비했지만, 적어도 협상을 한다면 굳이 피를 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체프란 가주는 정도를 넘었다.

처음부터 초네스트 가문을 노리고 이곳에 온 게 아닌가.

"네년은 이곳에서 살아남지 못할 거다!"

초네스트의 가주가 일어났다.

붉으락푸르락 변한 그의 표정과 표독스러운 손가락은 계획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되어주었다.

주변이 금세 어수선하게 변해버렸다.

크라언이 미엘라 앞에 섰고, 초네스트의 가주는 뒤로 물러나 기사들 틈에 보호되듯 둘러싸였다.

"퀘이트 씨. 먼저 가셔도 됩니다."

루시온이 편하게 목소리를 꺼냈다.

도중에 자신이 퀘이트에게 임무를 주었지만, 그는 원래 초네스트 자작가의 후계자 3명을 붙잡는 역할을 맡았다.

"괜찮겠습니까?"

퀘이트의 물음에 루시온은 피식 웃었다.

"저보다 밖으로 나가는 걸 걱정하셔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글거리던데요?"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탈출구는 미리 알아봤거든요."

퀘이트는 고개를 살짝 숙인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창문으로 뛰어들었다.

쨍그랑!

―히익!

"…푸핫!"

라타가 깜짝 놀랐고, 루시온은 퀘이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웃음을 터트렸다.

'획기적인데? 창문에 병사가 매달려 있지 않을 테니.'

[저런 행동은 따라 하면 안 돼. 자칫하다 크게 다치니까.]

루시온의 생각을 읽은 베델이 다급히 목소리를 냈다.

왠지 언제가 됐든 퀘이트의 행동을 따라 할 것만 같았다.

[베델, 너도 이제 슬슬 루시온한테 적응이 됐나 보네.]

러쉘이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가 됐든, 반드시 사용할 테지.

"…저렇게 뛰어도 괜찮은 건가요?"

미엘라가 크라언에게 속닥거렸다.

"괜찮을 겁니다. 아마도."

크라언은 초네스트 가주를 가린 병사들을 바라보며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팔목에 장착했다.

이제 퀘이트가 초네스트의 후계자를 데려올 때까지 버티면 되는 아주 간단한 계획이었다.

"내버려 둬! 쫓지 마!"

초네스트는 창문으로 향하던 자신의 병사에게 소리쳤다.

저런 얄팍한 수에 말려들 수는 없었다.

"저, 혹시나 해서 마법 아이템을 여러 개 챙겼는데 몇 개 드릴까요?"

미엘라가 크라언의 등을 살짝 두드린 후에 작게 목소리를 냈다.

크라언이 싸우는 모습을 보지 못했기에 미엘라는 그가 평범한 일반인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제겐 이게 있거든요."

피숭!

크라언의 손이 문 쪽으로 움직이자마자 작은 석궁 하나가 쏘아졌다.

팍!

정확히 목을 관통당한 병사가 비명도 내지르지 못하고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에이, 뭐야. 싸울 줄 알잖아? 라며 미엘라는 꺼내 놓은 아이템을 도로 집어넣었다.

크라언이 초네스트 가주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겼다 생각했나? 아니, 너는 네 무덤을 팠어."

크라언은 미엘라의 심부름을 하는 척하며 이미 이 장소의 방음이 얼마나 좋은지를 확인했다.

그 이유가 아니라면 초네스트의 병사가 문 쪽으로 향할 리가 없었다.

저쪽도 문을 열어야 외부에서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다.

쪽수는 초네스트 쪽이 많았지만, 문과 가까이 있는 쪽은 바로 자신들이었다.

"하! 그렇게 발악한다고 누가 먼저 죽을까? 바로 네놈들이라고! 네놈들!"

초네스트 가주는 코웃음을 치며 크라언의 말을 비웃었다.

저들은 고작해야 4명.

누가 이길지 뻔했다.

"글쎄. 난 다르게 보는데?"

루시온은 비아냥거렸다.

언제가 됐든, 자신이 루시온 크로니아라고 의심을 살 만한 실수를 하는 날이 올 테지.

그때, 그들이 자신을 루시온이라고 생각할 수 없도록 이참에 조직원에게 자신이 검을 사용할 수 있다는 이미지를 심어줘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초네스트 놈만 남겨줘.'

루시온이 베델에게 지시를 내렸고, 그녀는 루시온의 몸을 이용해 검을 뽑았다.

스겅.

언제 들어도 아름다운 소리라고 베델은 생각했다.

[알겠다.]

베델은 대답하며 적들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기선 제압으로 시작해야 했지만, 자작가임에도 이곳에 제대로 된 기사는 존재하질 않았다.

돈으로 기사의 직위를 샀을 뿐, 죄다 하찮았다.

"그래! 네놈이 미쳐서 날뛰는구나!"

초네스트 가주는 루시온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병사들을 향해 걸어오자 기쁨을 숨기질 못했다.

눈엣가시와 같아 죽여버리고 싶었던 놈이었다.

"저놈은 바로 죽이지 말고, 꼭 찢어 죽여!"

초네스트의 가주가 신나게 명령을 내리자 그를 감싸고 있던 병사 일부가 검을 뽑아 루시온에게 달려들었다.

"하멜 씨."

크라언의 목소리에 루시온은 태평하게 말했다.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적이 루시온에게 다가와 검을 내밀었다.

찌르기였다.

[모든 무기에는 일정한 궤도가 있어. 당연한 소리겠지만, 처음에는 그 궤도가 보이질 않아.]

베델은 루시온의 발목을 살짝 비틀어 적의 공격을 가뿐히 피했다.

[하지만 찌르기는 단순해. 이렇게 몸이 앞으로 나와 있으면 다음 공격도 할 수 없고.]

자신의 심장을 꿰뚫을 셈이었는지 베델 말대로 적의 몸이 앞으로 쏠려있었다.

[손목을 벨 좋은 기회지.]

베델은 검을 짧게 쥐고 무게를 실어 적의 손목을 베어냈다.

서걱.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으아악! 내, 내 손목이…!"

적은 피를 쏟으며 비명을 내질렀다.

[적이 오합지졸이라면, 첫 대상을 아주 쉽게 제압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을 심을 수 있어.]

베델이 루시온의 고개를 돌려 갑자기 제자리에 멈춘 적들을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나?]

베델의 목소리에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그녀 말대로 적들의 눈에 두려움이 자리 잡은 상태였다.

[그럼, 그럼.]

러쉘이 손뼉을 마주치며 베델의 말에 동의했다.

하나같이 루시온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이었다.

실전을 이토록 안전하고 생생하게 느낄 기회는 흔치 않았다.

[이제 적들 눈에 네가 아주 크게 보일 거다, 루시온. 지금 이 느낌을 기억해.]

그렇기에 러쉘은 루시온이 더욱 집중하길 바랐다.

빙의는 오래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 아니었다.

이제 루시온의 어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베델. 루시온의 어둠이 20% 정도만 남았어.]

―맞아! 조금밖에 남지 않았어! 라타가 막 그 말을 하려던 참이야.

러쉘의 말을 라타가 덥석 받았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곧 끝을 낼 테니.]

베델은 그들을 달랬다.

움직이지 않는 적은 아주 쉬웠다.

다가가고, 베어내기만 하면 그뿐이었다.

"으, 으아아!"

루시온이 다가가자 이미 겁을 먹은 적의 몸놀림은 너무도 어설펐다.

챙!

적의 검을 바깥으로 내치면서 동시에 날려버렸다.

루시온의 검은 비어 있는 적의 복부가 아닌 손목으로 향했다.

손목 하나가 날아갔고.

"으아악!"

비명과 함께 석궁 하나가 루시온이 손목을 베어버린 적 뒤에 있던 놈의 머리통을 꿰어버렸다.

팍!

크라언은 마냥 놀지 않았다.

"몇 놈은 괜찮지 않습니까?"

"괜찮습니다. 몇 놈이라면요."

루시온은 대답과 함께 적의 나머지 손목도 베어버렸다.

적의 손목이 베어지는 만큼 크라언의 석궁에 죽어가는 병사들도 늘어났다.

"…이힉!"

초네스트 가주는 비명을 질렀다.

자신을 호위하던 이들마저 잘린 손에 괴로워하며 고통을 호소했다.

이 얼마나 잔인한가.

완전히 죽인 것도 아니라 검을 잡는 이들의 미래를 앗아가는 행동이라니.

초네스트 가주는 자신의 손을 뒤로 숨기며 벌벌 떨었다.

"더 지껄여보지 그래?"

루시온의 가면 색이 노랗게 물들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은 개구쟁이 같은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베델과 빙의를 풀려고 했지만, 그녀가 이를 말렸다.

[잠깐만!]

콰앙!

큰소리와 함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이 개새끼 어디 있어?"

두 눈이 시뻘게질 정도로 흥분한 남자 주변으로 수십 개의 무기가 둥둥 떠 있었다.

그가 찬 안대가 바로 눈에 들어왔다.

―어! 아까 감옥에서 봤던 사람이다!

라타가 목소리를 높였다.

"라인트 용병단의 대장인 라인트입니다."

흄이 작게 속삭였다.

'…라인트 용병단의 대장이 마법사였어? 당연히 검을 잡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루시온은 속으로 혀를 살짝 둘렀다.

[어이쿠. 밖에도 난장판이 됐네. 라인트 용병단이 조직원과 합류해서 다 쓸어버렸어.]

벽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던 러쉘이 밖의 상황을 알려주었다.

'엄청 열 받았나 보네. 하긴 그럴 만하지.'

루시온이 라인트에게 다가가며 손바닥을 내보였다.

"아직은 안 됩니다."

"구해준 은혜는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은...."

라인트는 말을 하다 말고 크라언을 보자 눈을 크게 떴다.

"당신이 여길 어떻게...?"

"절 기억하고 계시겠죠? 그렇다면 살려주는 조건으로 조직에 충성을 바치겠다는 조건 역시 잊지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분이 조직원입니까?"

라인트는 마른 침을 삼킨 뒤에 루시온을 가리켰다.

"그렇습니다. 조직원입니다."

크라언은 뒷말을 껄끄럽다는 듯이 내뱉었다.

아무리 그래도 하멜을 조직원이라고 밝히는 건 익숙해지지 않을 듯했다.

라인트는 숨을 고르고, 또 고른 뒤에 입술에 피가 나도록 깨물며 주먹을 쥔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저들은 약속을 지켰다.

정말로 자신들을 구하러 이곳에 왔다.

세상에서 목숨만큼 중요한 건 믿음이었다.

라인트 용병단 전원이 라인트의 행동에 무기를 쥔 손을 아래로 내려놓았다.

"우리 라인트 용병단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무조건 내뱉은 말은 지킵니다. 그게 용병단의 규칙이죠."

[시원시원하네.]

러쉘은 라인트 용병단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내뱉은 말을 지킨다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게. 신념을 가진 용병단이 흔치는 않지.]

베델 역시 그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라인트는 루시온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저희를 구해준 은혜, 죽어서라도 잊지 않겠습니다."

흄에게도 똑같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라인트의 분노가 가라앉자 갈색빛으로 질린 그의 상태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안대를 착용하지 않은 한쪽 눈이 파르르 떨렸고, 얼굴 여기저기 피멍 자국이나 며칠을 굶어서 볼이 움푹 팬 모습까지 보였다.

하지만 라인트는 여전히 맹수처럼 눈빛이 살아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마법을 거두며 크라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팅!

푸른 실이 팽팽하게 변했다.

"오늘 이 시간 이후로 라인트 용병단은 조직 에일의 소속이 될 것을 약속드립니다."

라인트의 말과 함께 푸른 실이 잘려나갔다.

'오랜만에 속이 시원하네.'

자신에게 엉킨 실이 몇 개인가.

루시온은 즐겁게 손가락을 매만졌다.

112화. 라인트 용병단(3)

"…난리가 났네요. 다들 무사하십니까?"

퀘이트의 목소리가 가깝게 들려왔다.

―힉!

그 말에 다들 뒤를 돌아보았고 라타는 깜짝 놀라 루시온의 그림자가 살짝 떨렸다.

소리도, 기척도 없어 퀘이트를 포함한 암살자들이 다가온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조직원들은 그들 손에 끌려온, 눈물 바람이 된 3명은 누구인지 궁금한 눈치였지만, 라인트 용병단은 그 3명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아들아…!"

초네스트 가주의 간절한 목소리에 그들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었다.

'이겼네.'

루시온은 이미 결론을 내렸다.

누가 보아도 승리자는 자신들이었다.

루시온은 머리가 지끈거리자 베델과 빙의를 풀었다.

촤악!

미엘라가 초네스트의 가주에게 다가가 크라언이 건넨 종이들을 뿌렸다.

승리를 알리는 선언과도 같았다.

"네놈이 체프란 가를 협박했던 편지들이야. 협박도, 공격도 먼저 네가 시작했잖아? 나는 정당하게 나를 보호했고, 이 전쟁의 승리자가 우리가 됐을 뿐이지."

미엘라는 비아냥거리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병신 새끼. 그러게 주제를 알고 편지를 보냈어야지."

"그럼 처리는 어떻게 할까요, 하… 아니, 크라언 님?"

퀘이트는 하멜을 바라보다 곧 에일의 우두머리가 크라언이라는 걸 깨닫고 그에게 향했다.

"일단 장남은 죽이십시오.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이미 하멜하고 의견을 나눴던 부분이었다.

만약 초네스트 자작가를 장악하지 못했다면 장남은 정말로 쓸모있는 존재였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반 크로니아 집단에 들어가 초네스트 자작가를 망쳐버린 주범이 아닌가.

나중에 지금보다 조직이 커져 크로니아의 눈에 들어간다면 감당할 수 없는 부분이 되어버릴 수가 있었다.

지금 잘라내야 했다.

"자,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초네스트의 가주가 애원하며 미엘라에게 다가갔다.

"왜?"

하지만 목소리는 루시온이 냈다.

"이 정도도 감당하지 못할 거 왜 남의 걸 탐냈지?"

명백한 경고가 담긴 목소리에 그 방에 있던 대부분이 오싹함을 느꼈다.

라인트 용병단과 초네스트는 이미 계약이 끝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미 일주일 전에 일어난 코코렌 남작가 일을 꼽으며 계약을 연장해달라고 징징거리는 건 애초에 말이 되지 않았다.

아마도 초네스트 자작가는 오랫동안 체프란 가를 노렸을 테고, 마침 가주가 바뀌는 상황이 벌어져 이를 기회라 생각했을 게 틀림없었다.

그러던 중 크라언이 라인트 용병단을 눈여겨본다는 사실을 알아채 그들을 억지로 가두고 체프란에 보내는 편지 역시 직접적인 협박으로 바뀌었겠지.

하지만 초네스트 가는 여러 가지를 간과했다.

약점은 본인이 훨씬 컸으며 가문의 무력 역시 그렇게 뛰어나지 않다는 사실을.

"죄… 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제가 체프란 가를 노렸습니다! 감히 노려서는 안 될 곳을 탐냈습니다!"

초네스트 가주는 머리를 땅에 찧었다.

자신에게 말을 거는 이가 누가 됐든, 패배자는 자신이었다.

귀족끼리의 싸움은 냉정했다.

이제 초네스트는 체프란 밑에 들어가는 종신 계약을 쓸 테지.

그 계약은 제국 곳곳에 뿌려지고, 이를 어길 시 정말로 귀족이라는 이름마저 빼앗기는 신세로 전락할 테니 초네스트에게 있어 마지막 기회나 다름없었다.

"제발,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장남을 죽여서 저 두 명을 살릴 텐가? 아니면 장남을 위해 저 두 명을 죽일 텐가?"

루시온은 초네스트에게 베풀 자비는 없었다.

자신의 것을 건드렸으니 두 번 다시 넘보지도 못하게 물어 뜯어버려야지.

초네스트 가주의 얼굴이 점점 새하얗게 질려갔다.

"아, 아버지. 아니죠? 그렇죠…?"

장남은 울먹이며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루시온의 고갯짓에 퀘이트는 자신의 부하를 시켜 장남은 물론 나머지도 입을 틀어막았다.

"네놈에게도 머리가 있다면 여기가 서부라는 걸 잊지 말게."

루시온은 친히 초네스트 가주에게 현실을 알려주었다.

크로니아가 이곳을 박살 내길 원하는지, 아니면 제 손으로 자식을 베어내서라도 초네스트라는 이름을 유지할지.

초네스트 가주는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 곧 숨을 헐떡였다.

"나는 기다리는 걸 싫어해서."

루시온의 이어진 말에 초네스트 가주는 오열하면서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장남을 가리켰다.

* * *

초네스트 가주는 넋이 나간 모습으로 초네스트 가가 체프란 가에게 복종한다는 계약서를 쓰는 모습을 보며 루시온은 조용히 초네스트 가를 빠져나왔다.

나머지는 크라언이 해결할 테지.

루시온은 자신이 타고 왔던 마차 근처에 쭈그려 앉아 뚱여우가 된 라타를 쓰다듬었다.

잠깐 하늘을 보니 별이 총총 박혀 하늘이 참 아름답다 싶었다.

"스승님. …제가 냉정해 보이십니까?"

루시온이 머뭇거리다 목소리를 냈다.

초네스트 가주의 장남을 죽인 일은 후회하지 않았다.

다시 돌아가도 똑같이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몸이 가라앉은 기분이 들었다.

'…이건 이하람의 기억 때문에 드는 기분일까.'

[아니. 저 조직은 네 거야. 체프란 가 역시 네 거잖아. 저들은 네 걸 탐냈어. 심지어 이미 너희를 죽이려고 준비까지 한 놈이라고.]

러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루시온 공.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고, 깊게 생각할 문제도 아니야. 루시온 공이 저놈에게 공포를 심어주지 않았다면 다시금 똑같은 일을 저질렀겠지.]

베델도 입술을 떼어냈다.

가진 걸 지키려고 하는 게 왜 냉정한가.

애초에 빼앗으려고 한 자가 잘못이 아닌가.

"모든 사람이 자신의 것을 빼앗기는 걸 싫어하겠지요. 하지만 저는 제 걸 가져본 적이 없어서, 그래서 뭐든 빼앗기고 싶질 않습니다."

루시온은 목에 힘을 차차 주었다.

크로니아에 있는 것들은 아버지의 것들이 자신의 게 아니었다.

하지만 조직은 달랐다.

온전한 자신의 것.

생각만 해도 기뻤다.

"이제 조직은 무력을 얻었습니다."

라인트 용병단의 숫자는 60 정도.

벌써 조직원의 숫자가 200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용병단이니 제대로 된 무력집단이지.]

"저를 포함해 4명에서 시작했는데 어느새 이렇게 커졌네요."

루시온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였다.

이미 조직을 이룬 이들을 데리고 온 덕에 성장이 빨랐다.

[이 속도라면 조직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빨리 커지겠지. 벌써 자작가를 두 개나 장악했잖아.]

베델이 루시온을 자랑스럽게 보았다.

"6개 지부를 다 삼킬...."

루시온은 말을 하다 말고 조용히 마카롱을 건네는 흄을 바라보았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래."

"그러니 하멜 님."

흄은 손가락으로 초네스트 자작가를 가리켰다.

―어! 루시온의 사람들이 온다!

라타가 꼬리를 흔들다 말고 얼른 루시온의 그림자로 쏙 들어갔다.

"오늘은 저쪽으로 가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멜 님을 모시러 왔네요."

그녀는 기쁜 표정으로 눈웃음을 지었다.

"하멜 씨. 한참을 찾았습니다. 퀘이트 씨가 없었으면 못 찾을 뻔했...."

크라언은 숨을 고르다 말고 루시온을 빤히 바라보았다.

라타를 쓰다듬으려고 쭈그려 앉았다 라타가 그림자로 들어가니 루시온 자신이 보아도 모양새가 영 이상했다.

"…왜 이렇게 앉아계신 겁니까?"

크라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번 계획의 공로자 중 한 명이 아닌가.

"그러게."

루시온은 민망함을 숨기며 말했다.

"초네스트는 이제 우리 겁니다."

"그래."

"초네스트가 가진 재산과 사업장의 절반 이상을 우리가 갖기로 했습니다."

"잘했네."

"좀 더 기뻐하셔야죠."

루시온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순간 멈칫했다.

계속 쭈그려 앉아 있었더니 다리에 쥐라도 온 것처럼 저렸다.

[쥐가 난 것 같은데? 하긴. 무리했지. 내일 되면 근육통에 시달릴 거다.]

러쉘이 낄낄 웃으며 루시온의 다리를 보자 흄이 서둘러 루시온을 일으켰다.

쥐가 났다는 게 뭔지 몰라도 어감이 이상하게 들렸다.

"…몸이 좋지 않으십니까? 혹시 무리하신 겁니까?"

크라언이 걱정스럽게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아니. 괜찮아."

"다들 하멜 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가 부축하겠습니다."

"아니. 쥐가 났을 뿐이니까, 걸을 수 있어."

루시온의 언성이 살짝 올라가자 크라언은 두 걸음 물러나서 루시온을 따라갔다.

"하멜 님."

"왜?"

"하멜 님께서 조직을 집처럼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생각해보고."

"예.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크라언은 저택으로 돌아가 루시온이 받을 박수갈채를 떠올리니 이토록 신이 날 수가 없었다.

왕자였던 자신이 누군가를 모신다는 게 처음에는 꺼렸지만, 생각보다 꽤 괜찮았다.

저렇게 제 몸을 아낄지 모르니 싫어하려고 해도 싫어할 수가 없지.

* * *

다음 날.

아침 식사 후 노비오가 따로 루시온을 불렀다.

노비오는 이틀 전에 저택으로 돌아와 크로니아를 습격한 암살자를 고용한 이는 물론 징검다리 역시 다 처리했다며 차분하게 알려주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디가 어떻게 사라졌다는 말이 없기에 루시온도 구태여 묻질 않았다.

"부르셨습니까, 아버지?"

루시온은 노비오에게 인사한 뒤 소파에 앉았다.

러쉘 말대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온몸에 근육통이 생겨 자리에 앉은 것도 무척 힘겨웠다.

"그래, 루시온. 할 말이 있어 잠깐 불렀다."

"말씀하십시오."

"루미노스가 괴멸됐다. 오늘 새벽에 연락을 받았구나."

노비오는 공식적으로 루미노스가 사라졌음을 알렸다.

[그래도 일주일이 걸린 걸 보면 잔당이 제법 있었나 보네.]

러쉘의 눈동자가 노비오의 책상에 쌓인 편지로 향했다.

"다행입니...."

루시온은 간단한 소감을 꺼내려다 어느새 노비오의 무릎에 올라간 라타를 기가 막힌 듯 쳐다보았다.

"이 녀석이 생긴 것처럼 참 귀엽더구나. 고기도 주고, 쿠키도 줬더니 이렇게 금세 따르지 않더냐."

노비오가 기분 좋게 웃었다.

'줏대가 없네.'

루시온은 당장 코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낯선 사람이 주는 음식은 먹으면 안 된다는 말을 라타가 찰떡같이 지키고 있으니 뭐라 말할 수도 없고.

노비오가 책상으로 손짓했다.

"너한테 온 초대장이다."

"초대장이요?"

"네가 변경으로 돌아온 지도 벌써 2주가 다 되어가질 않더냐. 슬슬 다음 행적을 고를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루시온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성자라는 칭호는 황실과 신전이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내어준 것이지, 진짜 성자처럼 살라고 준 칭호가 아니었다.

'…하지만 좋은 기회야.'

어차피 자신은 제국을 돌아다녀야만 했다.

"마냥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으면 하는구나."

노비오가 조심스레 루시온을 타일렀다.

변경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노비오 자신과 카슨하고 상황이 다르지 않은가.

"예. 알고 있습니다."

입술을 깨문 루시온의 모습에 노비오는 숨을 짧게 내쉬었다.

"네 마음은 이해한단다. 하지만 이제 네가 대중에게 알려진 이상 너를 음해할 이들이 너무도 많단다. 최소한 네가 어느 쪽에도 휩쓸리지 않게 제대로 서 있을 힘이라도 만들어야 해."

"크로니아라는 이름만으로 힘듭니까?"

"크로니아는 언제나 네 방패막이 되어줄 거란다. 하지만 전투에 있어 방패만으로 승리할 수 없다. 지금 루시온 너한테 뭐가 필요한지 이해하겠더냐?"

"검입니다. 날카롭고, 뾰족한 검 말입니다."

"그래. 네가 얻을 수 있는 검은 다 저기에 있다."

노비오는 눈짓으로 다시금 책상에 쌓인 편지를 가리켰다.

"귀족의 세계는 냉정하다. 검 대신 권력을. 화려한 기술 대신 화려한 언변이 필요한 곳이지."

말 한마디, 한마디에 깊은 걱정이 담긴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루시온은 표정을 풀고 노비오를 바라보았다.

노비오의 눈동자에 애정이 넘실거렸다.

"루시온."

노비오가 부드러이 루시온을 불렀다.

"나는 네가 어떤 싸움에서도 승리하길 바란다."

천천히 번져가는 노비오의 미소를 따라 루시온 역시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버지. 전 지금까지 제가 벌였던 싸움에서 진 적이 없습니다."

첫 죽음의 위기에서도.

유령과 싸움에서도.

세상과 싸움에서도.

죄다 자신이 이겼다.

"그래. 알고 있다. 네가 얼마나 애를 쓰는지 다 알고 있다."

자랑스러움이 가득한 목소리에 루시온은 저절로 마음이 포근해졌다.

113화. 초대장이 왔다

"석 달. 어쩌면 빠르면 두 달이 될 수 있겠지만, 신성 국가 네바스트가 변경을 찾아온다더구나."

노비오가 조금은 무겁게 목소리를 냈다.

"그렇게 확정이 났습니까?"

"그래. 날짜는 불확실하나, 네바스트가 변경으로 온다는 사실은 이미 확정이 났다."

헤인트가 말해줬던 게 사실이 되었음에도 루시온은 차분했다.

최소 기간인 두 달.

그 안에 조직도, 자신도 성장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네바스트에서 널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고, 그건 제국 내에 있는 여러 귀족 역시 마찬가지란다. 서로 같은 마음을 먹는 이들이 널 어떻게 할지 모르겠구나."

신성 국가 네바스트는 루시온 자신의 존재를 원치 않을지도 몰랐다.

신관도 아니면서.

신력 알레르기까지 있는 자신은 이단 같은 존재일 테니.

하지만 주변 시선 때문에 자신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네바스트에서 무얼 하겠는가.

"제가 이길 겁니다."

자신이 사라진다면.

아니, 죽어버린다면.

그보다 깔끔한 결말은 없을 터.

'웃기고 있네. 누가 순순히 죽어준대?'

루시온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 *

[…루시온 공이 신력 알레르기가 있으니 신관이라는 존재 자체가 암살자가 되는 셈이 아닌가?]

루시온이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베델은 참았던 말을 꺼냈다.

"그렇지. 어쩌면 최고의 암살자라고 할 수 있겠지."

루시온은 흄을 바라보았다.

"흄."

"예, 도련님."

"형님께 오늘은 할 일이 있어서 훈련은 못 한다고 전해줘."

"알겠습니다."

흄은 대답과 함께 루시온의 책상에 앉아 무수히 많은 초대장을 꺼내 놓았다.

루시온은 책상에 앉아 손가락을 풀었다.

'자, 어떻게 돌아다니면 효율적인지 초대장을 한 번 살펴볼까?'

지이잉.

막 손을 뻗던 차 연락용 아이템이 울렸다.

루시온은 한숨을 짧게 내쉬었고, 느릿느릿하게 주머니에서 가면을 꺼내 대충 덮어 썼다.

"왜?"

루시온의 언성이 살짝 올라가 있었다.

<아. 재미있는 소식이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헤로안이 실실 웃으며 목소리를 냈다.

라인트 용병단은 당분간 요양을 해야 하고, 크라언은 체프란과 초네스트 둘 다 관리해야 해서 바쁠 텐데 재미있는 소식이라니.

"6개 지부 조사는 다 끝냈어?"

<그거 말고 재미있는 소식입니다.>

"난 6개 지부 조사가 더 재미있는데?"

<그럼 하멜 님만 뺀 재미있는 소식입니다.>

"말해."

<북부에 남작가, 자작가. 남부에 백작가 하나가 싹 사라졌습니다. 정확히는 박살이 났지만요.>

"갑자기?"

<예! 갑자기 말입니다. 누가 그랬는지 짐작 가십니까?>

헤로안은 기대하며 물었다.

딱히 그의 기대감을 충족시키고 싶지 않았지만, 루시온은 문득 이틀 전에 노비오가 말한 싹 정리가 됐다는 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노비오 크로니아는 아니겠지?"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흑마법사한테 커다란 눈동자가 달려서 먼 거리도 볼 수 있다던데, 이게 사실이었습니까?>

"...."

루시온은 잠깐 할 말을 잊었다.

[대단한데…?]

러쉘이 기겁했다.

[크로니아가… 이토록 강력했다니.]

기사로서 대충 돌아가는 흐름을 알고 있던 베델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무려 귀족 가문 3개가 박살이 났다고 하질 않았나.

'아버지에게… 물어봐야겠네.'

루시온은 마른 침을 삼켰다.

아무리 노비오가 변경의 지배자라도 다른 지역에 가서 싹 쓸어버려도 괜찮은 건지 걱정이 들었다.

<어쨌든 난리가 났습니다! 저도 변경의 힘이 이 정도로 강할 줄은 몰랐습니다. 정보를 대폭 수정해야겠습니다.>

'…설마, 보여주기식은 아니겠지?'

루시온은 연락용 아이템을 만지작거렸다.

크로니아의 권력을 자신이 한 번 휘둘러 보려고 했지만, 노비오가 말려서 휘두르진 못했다.

불과 3일 전에 안토니가 크로니아를 습격한 암살자와 더불어 징검다리의 모든 조사를 마쳤다고 말했고, 노비오의 성격상 바로 박살을 냈을 텐데 3일이나 기다리지 않았던가.

'그리고 오늘 초대장을 아버지께서 넘기셨고.'

뭔가 딱딱 들어맞는 것 같아 루시온은 기뻤다.

방패막이 되어주겠다고 하시던 그 말이 사실임을 바로 확인했으니.

<…아. 하멜 님.>

"또 왜?"

<귀찮게 생각하지 마시고 좀 들어주십시오. 저도 이렇게 고용주하고 사이좋게 지내면서 정보를 가지고 신나게 떠들어보고 싶었단 말입니다. 술도 한잔하면서 말입니다.>

"말해봐."

루시온이 긴 숨을 내쉬었다.

<루시온 크로니아 말입니다.>

헤로안 입에서 자신이 나오자 루시온의 몸이 잠깐 뻣뻣해졌다.

[긴장하지 말고 들어. 뭘 그렇게 놀라?]

키득거리는 러쉘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원래 지병이 재발했다는 소문이 들려오던데, 이걸 알아보려고 해도 알 수가 없네요. 크로니아에 침투하려고 해도 아예 들어갈 방법도 없고요. 조직의 몸집이 커지면 제일 경계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까?>

"그렇지. 하지만 조직의 힘이 아직 거기까지 성장하지 않았으니 6개 지부나 빨리 마무리 지어."

<하멜 님. 저는 마법사가 아닙니다. 초네스트 자작가까지 갑자기 조사해야 해서 며칠이나 밤을 새웠는지 모를....>

"익명의 보고자는 네가 초네스트를 조사한 후에 아주 잘 먹고 잘 잔다고 보고하더라고."

<망할, 퀘이트…!>

헤로안이 소리쳤다.

곧 말을 더듬으며 수습에 들어갔다.

<그, 저, 결코, 하멜 님에게 소리를 지른 게 아닙니다!>

헤로안이 앓는 소리를 냈지만, 루시온은 초대장을 살피느라 두 박자 늦어졌다.

<…하멜 님. 너무하십니다.>

"어쩌겠어."

순간 루시온은 손이 멈췄다.

<하멜 님? 제 말 듣고 계신 거 맞으십니까?>

"그래. 듣고 있어."

루시온의 무덤덤한 목소리에도 헤로안은 다시 목소리가 밝아졌다.

<일단 가까운 남부에 있는 지부를 중심으로 알아보고 있습니다. 아, 다른 것들도 계속 신경 쓰고 있고요. 아시다시피 거리가 멀어 시간이 걸리는 점,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래. 이해해."

루시온은 쥐쟁이들이 어떻게 정보를 모으는지 알고 있었다.

정보를 모아야 하는 대상의 주변. 그리고 그 주변의 가족부터 접근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방식으로 표적 주변의 정보를 죄다 털어 결국, 표적의 정보를 얻는 방식을 사용했다.

어떻게 본다면 악질이나, 죄책감과 약점을 쥐어 철두철미하면서도 막상 표적은 자신의 주변인들이 죄다 정보가 털렸는지도 모르고 주변인을 위해 발버둥 치다 쥐쟁이가 친 덫에 자연스레 걸리는, 효과가 무척 좋은 방법이었다.

"이제 됐지?"

<잠깐만요, 하멜 님. 아직 개인적으로 나누고 싶은 말이 더....>

뚝.

루시온은 헤로안이 1절을 넘어 10절까지 이어지는 수다를 알기에 먼저 연락을 끊어버렸다.

"…하."

잠깐 한숨을 내쉬다 헤로안 때문에 미뤄졌던 초대장을 다시 살폈다.

북부 ― 로에이안 백작가.

'...?'

초대장 편지지를 보자마자 루시온은 눈을 의심했다.

곧 다른 초대장을 바라보았다.

중부 브스토론 자작가.

어느 초대장을 보아도 어느 지역이고, 가문 이름이 무엇인지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

'…이래서 초대장을 늦게 보여주신 건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루시온을 베델이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베델 자신도 루시온이 사랑받고 있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루시온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초대장을 다시금 바라보다 곧 부드러운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아버지.'

노비오의 글씨체를 잠깐 바라보다 루시온은 우선 지역별로 정리해 책상에 놓았다.

[서부는 전멸이네.]

루시온이 정리를 끝낼 무렵, 러쉘이 목소리를 냈다.

러쉘의 시선이 왼쪽으로 향했다.

북부, 중부, 남부, 동부는 있지만, 서부 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없는 게 당연합니다. 이미 저들은 크로니아에게 복종을 맹세했고, 대등한 관계가 아니니 오히려 초대장을 보내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루시온은 초대장을 열어 하나씩 확인하고 적는 걸 잊지 않았다.

똑똑.

―흄이다!

잠시 뒤에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라타가 공을 입에 물고 다급히 달려갔다.

삐이익!

반가움에 공에서 힘찬 소리가 났다.

킁킁.

라타는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냄새를 맡다 다급히 앞발로 문을 긁었다.

―과자다, 과자! 라타가 좋아하는 과자!

"도련님. 출출하실 것 같아...."

문을 열고 흄이 안으로 들어오다 말고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루시온이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혹시 제가 실수했습니까?"

목소리를 줄인 흄은 러쉘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물었다.

[아니. 초대장을 살핀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거기 그렇게 있지 말고 일단 들어와.]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흄은 안도하며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여기 내려놔, 흄."

루시온이 책상 왼쪽을 가리키자 흄이 최대한 조심스럽게 걸어와 가져온 간식을 내려놓았다.

"도련님."

흄이 라타를 들어 올려서는 조심스레 루시온을 불렀다.

"왜?"

"제가 불러드리겠습니다."

"이제 다 읽을 줄 알아?"

"완벽하다고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은 있습니다."

흄이 라타를 움직여 슬쩍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응?

라타가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라타의 시선은 쿠키가 가득 담긴 그릇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래. 불러줘. 그편이 더 빠르겠네."

루시온은 도움이 되고 싶은 흄의 간절함에 그의 표정을 보지 못한 척 쿠키를 라타에게 주며 대답했다.

"예!"

흄은 힘차게 대답했고, 쿠키를 먹은 라타의 입꼬리가 가득 올라갔다.

와사삭.

접시에 쌓였던 쿠키 반쯤 라타의 뱃속으로 사라졌을 때, 흄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왜 그래? 못 읽는 글자야?"

루시온의 말에 러쉘이 흄 옆으로 다가가 초대장에 쓰인 글자를 눈으로 읽었다.

[...?]

곧 러쉘의 눈이 커졌다.

"경매장입니다."

미엘라가 루시온에게 경매장 이야기를 했을 당시 그 자리에 없었지만, 루시온을 통해 말을 전해 들었다.

빛을 흡수해, 빛이 가진 재생력만 저장하는 아이템.

자신이 아무리 몰라도 루시온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뭐?]

베델도 놀라며 흄에게 다가갔다.

"줘봐."

루시온이 흄에게서 봉투와 종이를 건네받았다.

봉투에 '남부 데쉬아 백작가'라고 적혀 있었다.

'남부 지역이다.'

루시온의 미간 사이가 좁혀졌다.

데쉬아 백작가.

그곳이 어떤 곳인지 루시온은 알지 못했다.

즉, 소설에서 등장하지 않은 일이라는 뜻이었다.

러쉘이 눈동자를 굴리다 입을 열었다.

[남부 지역에서 열리는 경매장이라면… 미엘라의 아이템이 팔릴 예정인 곳이 아니야?]

[아직 그렇다고 판단하기에는 일러.]

하지만 베델은 섣불리 생각하지 않았다.

"베델 말이 맞습니다. 경매장은 작든 크든 자주 열리니까요."

루시온 역시 베델의 말에 동의하며 초대장을 읽었다.

―안녕하십니까, 성자 루시온 크로니아 님. 저는 세르티오 경매장을 담당하고 있는 너튼 데쉬아라고 합니다.

'…세르티오 경매장?'

루시온의 눈동자가 잠깐 위쪽으로 움직였다.

경매장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자신도 익히 들어본 경매장이었다.

경매장 중 가장 크고 오직 1%의 고급스러운 물건만 다루는 곳이 아닌가.

돈이 많은 귀족이나, 고위 귀족만 갈 수 있다는 이곳에서 초대장마저 비싼 가격에 거래가 된다는 걸 들어본 적이 있었다.

'…하. 출세했다고 생각해야 하나?'

―저희가 이번에 빛이라는 주제로 경매를 진행합니다. 성자께서 이 주제에 가장 어울리시는 분이 아닐까 생각해 이렇게 조심스레 초대장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경매에 모인 금액 중 일부를 보육원에 기부하는 자리 역시 마련했으니, 부디 성자께서 이 자리를 밝혀주셨으면 합니다.

[빛이라니. 이런 미친....]

러쉘이 대뜸 언성을 높였다.

보나 마나 뻔했다.

빛이 깃든 물건들이 엄청 늘어져 있겠지.

[만약 여기가 미엘라가 말한 경매장이 맞다면 루시온 공은 그래도 갈 생각인가?]

베델이 말리고 싶다는 얼굴로 루시온에게 물었다.

"만약 아니라고 해도 가야지. 내가 이 정도 급이라는 걸 보여줄 좋은 기회네."

루시온이 피식 웃었다.

주변에서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자신의 다음 행보를 주목하는 이들이 엄청 많지 않겠는가.

첫 발자국이 모름지기 중요했다.

빛과 기부라는 주제는 성자인 자신에게 딱 맞았고.

"뭐, 아버지께서 보내주실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일단 미엘라한테 확인부터 해야지."

루시온은 자신의 주머니에서 연락용 아이템을 꺼내 흔들어 보였다.

114화. 초대장이 왔다(2)

[루시온.]

러쉘이 깊게 숨을 내쉬었다.

대신전 때, 자신의 상태가 어땠는지 루시온은 그새 잊었다는 말인가.

"알고 있습니다."

루시온은 연락용 아이템을 슬쩍 내려놓았다.

"좀 더 확인한 뒤에 연락하겠습니다.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아니. 그거 말고.]

"빛 말입니까? 전 괜찮습니다. 대신전도 갔다 오지 않았습니까?"

루시온의 태연한 말에 러쉘의 목에 핏대가 솟구쳤다.

[루시온, 넌 흑마법사라고. 아침에 빛의 식물인 라트초를 먹고, 빛이 깃든 팔찌에 빛을 쐬고. 그래. 여기까지는 이해해. 빛의 내성을 키워야 하니까. 그런데....]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기 마지막에 추신이라고 적힌 부분에 '신력 알레르기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라고 적혀 있잖습니까."

루시온이 당당히 초대장에 적힌 제일 마지막 부분을 가리켰다.

이렇게 초대장에 적었으니 준비는 된 셈이 아닌가.

[하아....]

러쉘이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세 살짜리 아이도 아니고 추신에 적힌 이야기를 그대로 믿는 게 어디 있는가.

[어떻게 빛을 막을 수 있는데? 마법? 빛은 마법을 녹여. 빛을 막을 수 있는 건 같은 빛뿐이야. 빛을 막자고 빛을 쓸 순 없잖아.]

"스승님. 아직 확정된 게 아닙니다. 그러니 감정을 추스르는 게 어떻겠습니까?"

러쉘이 저렇게 화를 내는 건 자신을 걱정해서임을 알고 있기에 루시온은 기쁜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러쉘은 화를 꾹 참아내며 물었다.

[…내가 이렇게 말해도 갈 셈이지?]

"아직 확정된 게 아닙니다. 하지만 스승님. 만약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이 없다면 저는 여기를 공식 활동의 첫걸음으로 선택할 겁니다."

단호한 루시온의 말에 러쉘은 얼굴을 일그러트렸지만, 조금 전처럼 말을 꺼내지 않았다.

루시온은 자신을 가리켰다.

"저는 귀족입니다. 이건 조직의 일처럼 크라언에 맡길 수도 없는 문제이고요. 아버지 말씀대로 제게 힘이 되어줄 사람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라타는 싸우는 거 싫은데. 싸우는 거 아니지?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앞발을 핥던 라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럴 리가. 나는 스승님을 존경하는데?"

입에 발린 말이라는 걸 알지만, 그 말에 러쉘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곧 다급히 입을 가리며 감정을 추슬렀다.

[루시온. 나도 네가 어떤 상황인지 그 누구보다 이해하고 있어.]

러쉘이 차분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루시온은 지금 귀족으로서의 루시온과 조직 에일의 하멜로서, 이 두 개를 같이 끌고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얼마나 힘들겠는가.

[지금 살펴본 것 중에 성자라는 이미지가 가장 맞아떨어질 일이라서 선택하려 한다는 것도. 하지만....]

러쉘은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베델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처럼 화내는 거 아니야. 화내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안다. 루시온 공이 걱정되겠지.]

[걱정 수준이 아니야. 루시온이 자진해서 또 빛의 소굴로 뛰어들겠다고 하는데 그 모습을 어떻게 봐?]

러쉘은 주먹을 꽉 쥐었다.

"도련님께서는 빛의 내성이 높아지셨습니다. 조금 더 도련님을 믿으셔도 괜찮지 않을까 합니다."

흄이 목소리를 꺼냈다.

―맞아! 루시온은 뭐든 잘해!

[믿는 것과 별개야, 흄, 라타. 그리고 나는 언제나 루시온을 믿어.]

"그렇다면...."

[이런 부분만 빼면.]

러쉘이 루시온의 기대를 싹둑 잘랐다.

순간 루시온의 눈썹이 안쪽으로 모였다. 말과 다르지 않은가.

"일단 계속 보겠습니다. 제가 가야 하는 곳이 남부만이 아니니까요."

루시온은 흄에게 계속하라고 손을 흔들자 러쉘이 눈에 힘을 강하게 주었다.

[그래. 똑바로 찾자고. 절대로 저 경매장에 갈 순 없지.]

'신전이라면 몰라도 귀족 중 자선 행사를 하는 곳이 있으려나.'

루시온은 귀족이었기에 그 습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가진 건 내놓는 걸 싫어하는 이들이 무언가를 줄 리가 없지.

* * *

"…이미 부숴버린 걸 어쩌겠습니까, 폐하? 제가 부수는 건 잘해도 만드는 건 못합니다."

노비오가 목청을 높이 올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나는 지금 그대에게 귀족 가문 3개가 사라진, 이 상황을 물으려고 연락한 거니 웃음은 자제하게.>

"압니다. 하지만 웃음이 나는 걸 어쩌겠습니까? 몇 번을 해도 저는 놈들을 갈기갈기 부서트릴 셈입니다. 폐하께서 잘 수습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연락용 아이템 너머로 깊은숨이 들려왔다.

<노비오 공, 진짜 이렇게 나올 텐가?>

"이렇게 안 나오면 폐하께서 제 아들에게 무엇을 주실 셈이셨습니까?"

<로베리오 놈을 처리한 공을 치하하려고 했네.>

"그걸로 부족합니다. 아시잖습니까? 네바스트가 움직입니다. 그 세력은 점점 커지고 있죠."

<그러니까 로베리오 놈을 처리한 공이 더욱 필요하단 말일세. 흑마법사가 얽혀 있지 않은가. 흑마법사가…!>

"그놈들을 감히 제 아들을 공격했습니다.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니, 소신의 의견은 변하질 않을 겁니다."

노비오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루시온이 얽혔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겠는가.

<…저 팔불출. 환장하겠네.>

황제가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소신, 변경을 오랫동안 지켜왔고, 단 한 번의 반역도 마음에 품질 않았으니...."

<알았네, 알았어. 그 12번은 집어치우게. 술에 취했을 땐 제법 근사하더니, 맨정신으로 들으니 완전 끔찍하구먼.>

"감사합니다, 폐하."

<어쨌든 그대가 넘긴 자료를 잘 봤네. 뉴브라 왕국하고 흑마법사가 서로 손을 잡았다고?>

똑똑.

"아, 아들이 찾아왔으니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

<노비오 공. 짐은 황제....>

뚝.

노비오가 연락용 아이템을 끊었다.

케틀란이 황제면 뭐 하겠는가. 보면 이가 갈리는 40년 지기인데.

보아도, 보아도 좋은 아들이 낫지.

가뜩이나 루시온을 이용한 케틀란의 행동이 아직도 괘씸하던 차였다.

'…샤엘라는 밥이라도 잘 먹고 있는 건지.'

노비오는 루시온에게만 슬쩍 편지를 보낸 샤엘라에게 섭섭하다가도 또 다른 한편으로 오누이끼리 잘 지내니 다행이다 싶었다.

문이 열리고 카슨이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더냐?"

노비오는 평소처럼 무뚝뚝한 표정으로 물었다.

"폐하와 그렇게 연락을 끊으셔도 괜찮은 겁니까?"

"폐하께서 이만한 일로 나를 내쫓으실 만큼 마음이 밴댕이는 아니구나. 앉거라."

노비오가 카슨에게 앉길 권했다.

"그래. 무슨 일이더냐?"

카슨이 자리에 앉아 노비오가 다시 물었다.

"까마귀 문양을 발견했습니다."

변경에 나타난 흑마법사.

그들을 조사한 결과 까마귀 문양을 발견했다.

"헤인트가 이전에 루미노스의 아지트에서 발견한 그 문양과 똑같다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카슨의 이어지는 말에 노비오의 눈썹이 잠깐 움찔거렸다.

"얼마 전, 코코렌 남작가에서 원인 모를 살인이 발생한 걸 기억하십니까?"

"이어져 있더냐?"

"그렇습니다. 놈들이 바로 변경에 흑마법사를 푼 이들과 손을 잡은 상태였습니다."

"…내 불찰이다."

노비오는 그제야 인상을 썼다.

"다 잡은 물고기인 줄 알았더니 이렇게 뒤통수를 맞았구나."

"아버지."

"말해 보거라."

"과연 한 마리겠습니까?"

"한 마리가 아닐 테지."

노비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변경이 이 정도라면 다른 곳은 오죽하겠는가.

"변경에 등장한 흑마법사가 뉴브라 왕국과 손을 잡았다. 까마귀 문양을 가진 흑마법사들, 뉴브라 왕국. 그리고 그들과 손을 잡은 귀족 새끼들."

점점 노비오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차분했던 그의 눈동자는 어느새 설산 꼭대기처럼 싸늘했다.

"변경을 지키는 내가 바퀴벌레들을 놓쳤기에 벌어진 일이겠지."

"아닙니다, 아버지. 적이 지금까지와 다른 움직임을 취했기에 대응이 늦어졌을 뿐입니다."

"아니. 그것 또한 나의 잘못이다. 바퀴벌레들이 어디에서 들어온 건지 찾거라, 카슨."

"알겠습니다, 아버지."

카슨은 고개를 숙였다.

* * *

"미엘라가 연락을 받지 않던데? 무슨 일이 있어?"

루시온이 연락용 아이템으로 묻자 크라언은 당당히 목소리를 냈다.

<제가 받지 말아 달라고 했습니다.>

"왜?"

루시온의 목소리가 살짝 날카로워졌다.

<미엘라 씨가 바꿔치기 당했다는 아이템이 경매장으로 넘어갔고, 그 경매장이 열리는 곳의 주제가 빛입니다.>

[…썩을!]

러쉘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부디 거기만은 아니길 바랐는데.

루시온은 슬쩍 가면을 벗어 러쉘을 향해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여기일 줄 알았다.'

초대장의 80%는 쓸모없는 연회였다.

어떤 취지도 없이 단지 자신을 만나 인맥을 쌓아 보겠다는 의도만이 가득한 연회.

그런 놈들은 자신의 검이 되어줄 수가 없었다.

첫 번째 발걸음은 성자라는 자신의 이미지에 걸맞게 무난하되, 특별한 느낌을 부각해주는 곳으로 가야 했다.

원래는 대신전으로 가는 게 맞겠지만, 대신전의 힘을 키워주는 꼴이라 황실이 싫어할 테고, 자신 역시 대신전의 세력이 커지길 바라진 않았다.

'앞으로 나는 신비스러운 이미지를 잡고 가야지.'

하여 루시온은 초대장에 특별함이 붙은 곳만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 첫 번째가 경매장이었고.

<제가 주제넘었다는 걸 압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하멜 님께서 그토록 무모한 행동을 하는 모습을 마냥 볼 수는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크라언이 미안한 목소리로 연거푸 사과했다.

"아니야. 됐어. 빛이 있다는데 어쩌겠어. 가고 싶어도 못 하는 거지. 그냥 확인차 연락했어."

<…정말입니까?>

크라언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반응했다.

"그래. 난 안 가."

<감사합니다!>

"...?"

이 태도는 뭔지, 루시온은 무척 거슬렸다.

"아 참, 피터한테 연락했어?"

<연락했습니다. 경매장 전까지 올 수 있나 봅니다.>

"나한테 따로 전해달라는 말은 없었고?"

<그렇습니다.>

루시온은 턱을 매만졌다.

피터가 자발적으로 공허의 손 뒤를 쫓는 중이었기에 소식이 없다는 건 정보를 얻지 못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경매장에 피터를 데리고 가. 그러려고 조직에 합류시켰으니까."

루시온은 알겠다는 크라언의 대답을 듣던 도중 뭔가 찜찜했다.

"…그런데 초대는 받았어?"

세르티오 경매장은 상위 1%만 갈 수 있는 곳이었다.

루시온 자신이 보기에 체프란도, 초네스트도 그 속에 들 수 없었다.

<아… 뇨.>

[뭐야. 지금까지 초대도 받지 않고 말을 나눈 거였어?]

러쉘이 황당한 표정을 드러냈다.

만약 조직이 갈 수 없다면 그 아이템을 손에 넣으려고 루시온이 무슨 짓이든 할 게 뻔하잖은가.

"별수 없지. 그 아이템 제작자가 미엘라인 걸 밝혀. 증거도 몇 개 보내주고. 그럼 초대장을 줄 거야."

경매장이 앞으로 4일 정도 남아 있었다.

다른 초대장들은 기본 일주일에서 길면 삼 주 정도인 거에 비해 날짜 제법 촉박했다.

노비오가 일부러 경매장 초대장을 묵힌 게 분명했다.

<그 방법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닌데,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체프란 자작가가 가진 사업장을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돌려야지. 홍보 효과라고 생각하고 편안하게 갔다 와. 돈은 충분하지?"

<예. 저번 초네스트 자작가를 엎을 때 제게 또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럼 됐어."

<그 아이템은 반드시 손에 넣겠습니다!>

포부는 좋으나, 루시온 자신이 보기에 힘들어 보였다.

'내가 도와줘야지. 내 거니까.'

자신은 돈이 많았다.

경매장에서 손에 넣어야 하는 아이템은 하나이니 얼마나 편안한가.

"그래."

루시온은 간단하게 대답하고는 초대장을 추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은 노비오라는 거대한 벽을 넘어서야 할 순간이었다.

115화. 초대장이 왔다(3)

* * *

"…으음."

노비오는 루시온이 가지고 온 초대장들을 살피다 숨을 길게 내쉬었다.

기어코 '남부 ― 데쉬아 백작가'의 초대장이 끼워져 있었다.

루시온에게 온 초대장은 당연히 죄다 확인해 거르고, 또 걸렸다.

특히 이 초대장은 안토니와 함께 넣을지 말지를 수백 번을 고민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경매장 일은 루시온에게 있어 너무도 좋은 자리라 차마 버릴 수는 없어 넣어두었다.

"꼭...."

노비오는 입술을 깨물었다.

말리고 싶었다.

빛은 왜 자꾸 루시온을 쫓아다니는지.

빛의 신께 불경한 말이라도 퍼붓고 싶을 정도였다.

"가야만 하더냐?"

노비오는 무겁게 목소리를 냈다.

"예. 여기는 꼭 가야 합니다. 모름지기 첫 행보가 가장 중요하지 않습니까? 저를 빛내줄 가장 좋은 곳입니다."

그 사실을 알기에 노비오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루시온."

"예, 아버지."

"남부에 이어 중부, 북부도 들리겠다고?"

"예. 제 검을 만들려면 당연히 세상에 나가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루시온이 세상을 언급하자 노비오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연한 소리였지만, 이상하게도 색다르게 들려왔다.

마치 호기롭게 내지르는 포부 같지 않은가.

"괜찮겠더냐?"

노비오는 슬그머니 몰려오는 걱정을 숨기지 않았다.

이렇게 빠듯한 일정을 루시온이 버틸 수 있을까 싶었다.

"아닙니다. 겉보기에 엄청 빡빡해 보이지만, 도중에 집에 와서 쉴 시간도 만들어 놨습니다."

이는 사실이었다.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몰라 루시온은 틈 사이에 짧은 휴식 시간도 두었다.

"날짜를 이렇게 잡은 건 네바스트 때문이더냐?"

노비오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물론, 제가 생각한 이유 중 하나인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강해지고 싶을 뿐입니다. 황실과 신전에 휩쓸리지 않을 정도로 말입니다."

루시온의 눈동자는 한 치도 흔들리지 않고 반짝였다.

"이제, 저는 그 누구에게도 휩쓸리고 싶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다짐과도 같은 말에 노비오는 잠깐 주먹을 쥐었다가 풀었다.

지금 잠깐 생각해 봐도 루시온이 변하기 전까지는 늘 휩쓸리기만 했다.

아마도 손발이 꽁꽁 묶인 채 살아온 것과 다름이 없겠지.

"…그래."

루시온이 앞으로 헤쳐나갈 문제이기에 노비오는 여기서 더 루시온을 돕지 못하는 게 안타깝고, 슬플 뿐이었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하지만 루시온은 어느새 미소를 지으며 자신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별말도 아님에도 노비오는 괜스레 가슴이 일렁거렸다.

아무래도 나이 탓인지도 몰랐다.

* * *

러쉘은 저택 지붕에 앉아 햇살을 맞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도 충격적이었나?]

옆에 앉은 베델이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당연하지. 루시온이 지금까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어. 오늘만 잠시 나가 달라니. 사춘기에 접어든 자식을 보는 기분이 이럴까 싶네.]

[그간 루시온 공이 그대에게 화를 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용해서 많이 놀려먹지 않았던가. 루시온 공은 오늘만큼은 진지한 대화가 필요했겠지.]

[아무 말도 안 한다고 했다니까. 너도 들었잖....]

러쉘은 다시금 한숨을 푹 내쉬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왜?]

이 저택에 사는 또 다른 죽음의 기사인 브로슨이 자신들에게 오고 있었다.

[아니. 그냥 지나치려고 했는데 나누는 말이 참 우스워서 도저히 그냥 지나갈 수가 없더라고.]

브로슨은 키득키득하며 러쉘 앞에 섰다.

[또 처맞고 싶어서 그래?]

러쉘의 목소리가 삐딱했다.

지금 기분이 엄청 좋지 않았다.

[아니.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맞은 자리가 완전히 나았나 보네. 내 앞에서 벌벌 떨지 않는 걸 보니.]

러쉘의 눈꼬리마저 위로 올라갔다.

[그, 이름이…?]

하지만 브로슨은 오늘따라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놀렸다.

베델은 브로슨을 보며 싫은 기색을 드러냈다.

[베델이다.]

[그래, 베델. 잠깐 자리를 비켜주겠나? 싫으면 내가 러쉘과 자리를 비키지.]

[난 너하고 대화한다고 한 적 없는데?]

러쉘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란을 일으킬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브로슨의 무릎을 꿇게 할 자신은 있었다.

[대화해야 할걸? 지금 고민하는 문제가 있을 텐데?]

'...?'

순간, 러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나 그는 곧 브로슨은 미심쩍게 바라보았다.

자신을 떠보는 게 아닐까.

[널 떠본다고 생각하나? 에이, 넌 나보다 강해. 난 아직 사라지고 싶지 않으니 강자를 두고 이런 일을 저지를 정도로 배짱은 없어.]

브로슨은 러쉘의 표정에 두 손바닥을 어깨쯤에 올려 내보였다.

[네가 익숙하더라고. 왜 그런가 싶었는데, 너, 나랑 만났었어.]

[내가…?]

[그래. 이 정도까지 말했으면 슬슬 넘어올 때가 됐지 않아?]

[내가 비킬게.]

베델은 도중에 끼어들었다.

유령은 사람이 아니었다.

이미 죽었기에 태어나면서부터 죽기 전까지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러쉘이 무언가를 기억하지 못했다.

뭔가 이상했다.

[좋아. 다음에 흑마법사가 변경으로 오면 그 자리에 초대하지.]

브로슨은 흡족한 얼굴로 베델에게 특별한 권리를 선물했다.

[좋은 선물이네.]

베델의 미소가 얼굴에 잠깐 걸렸다 사라졌다.

그녀는 굳어진 러쉘의 표정을 보며 자리를 박차고 떠났다.

[빨리 말해. 곧 내 제자가 나올 시간이 됐으니까.]

러쉘은 브로슨을 노려보았다.

탁.

브로슨은 투구를 벗었다.

동시에 러쉘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 얼굴, 익숙하지?]

브로슨은 자신을 가리켰다.

[어디선가 본 것 같지 않아?]

[…몰라.]

러쉘은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분하지만, 브로슨 말대로 어딘가 익숙했다.

[진짜로 기억을 잃었네?]

브로슨은 눈을 크게 떴다.

[진짜로 기억을 잃다니? 이 자식… 날 떠본 거였어?]

[아니. 네가 살아 있었을 때, 나한테 기억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어.]

러쉘은 손가락을 매만졌다.

루시온 때문에 계약했을 때, 그때 처음으로 브로슨을 보았다.

그게 전부였다.

[저번에 너한테 맞다 보니까 되게 익숙한 느낌인 거야. 어디서 맞았는지 생각하니 한 흑마법사가 생각이 났거든.]

[…진짜로 날 봤다고?]

러쉘의 표정이 굳었다.

[내가 굳이 너한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아직 하늘로 갈 순 없다고.]

[날 언제 봤는데?]

[어둠한테 힘을 받은 후로 죽이지 못한 흑마법사는 없었는데. 얻어터진 적이 있었거든. 그게 너였다니.]

[지금과 달라진 건 없을 텐데?]

러쉘은 눈살마저 찌푸렸다.

유령은 죽었을 당시의 나이로 모습을 띠었다.

[아니. 그때는 저주에 걸려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고.]

[…저주라고?]

그럴 리가.

러쉘 자신은 저주에 걸린 적이 없었다.

이쯤 되면 자신의 기억이 상상 이상으로 지워졌든, 브로슨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든 둘 중 하나였지만, 러쉘은 브로슨이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래. 저주. 내가 죽음의 기사로 얼마나 오래 있었는데, 저주도 못 알아볼까?]

브로슨은 입꼬리를 올렸다.

마치 이 상황을 즐기는 듯했다.

[원래는 알려주지 않으려고 했는데, 네가 루시온을 아끼는 모습을 보고 마음을 바꿨어.]

무엇이 됐든 러쉘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좋은 표정이네. 너한테 맞았던 자리가 싹 풀리는 듯해.]

브로슨은 구겨질 대로 구겨진 러쉘의 표정에 키득거렸다.

[뭐, 장난은 여기까지 할게.]

하지만 브로슨은 한순간 웃음을 멈추고 제법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혹시나 기억을 잃는다면 이 말을 전해달라고 했다.]

[무슨 말이지…?]

['나는 성공했으니 이제 남은 건 지켜보는 일뿐이야.'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나? 어쨌든 나는 토씨 하나, 어, 조금 틀렸을 수 있지만, 전해줬어.]

브로슨은 벗었던 투구를 다시 썼다.

[루시온, 그 아이를 잘 부탁해.]

영문을 모를 말만 남기고 브로슨은 그대로 자리를 떠나버렸다.

러쉘은 멍하니 그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붙잡을 수 있었지만, 쫓고 싶진 않았다.

'…분명 기억이 나질 않는데.'

이상하게 입꼬리가 멋대로 올라갔다.

슬픔인지, 기쁨인지 모르겠지만, 러쉘은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을 꽉 눌렀다.

'수첩.'

자신이 미처 태우지 못했던 그 수첩.

'거기에 뭔가… 내가 적어놓은 게 있을까?'

러쉘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 * *

'…일단 아버지께 허락을 받았는데. 누구하고 같이 가야 하지? 변경 일도 마무리가 됐으니, 형님이 따라오려나.'

루시온은 노비오의 집무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러쉘과 베델을 찾았다.

오늘만큼은 노비오와 진지하게 대화하고 싶어 러쉘과 베델에게 잠깐 자리를 비켜달라고 말했다.

"흄. 스승님하고 베델이 다 어디로 갔어?"

"저쪽으로 가셨습니다."

흄이 천장을 가리켰다.

'지금쯤 오실 때가 됐는데. 설마, 이걸로 화가 나신 건 아니겠지?'

루시온이 막 천장을 바라볼 때쯤에 러쉘이 천장에서 내려왔다.

러쉘의 표정이 심상찮았다.

루시온은 주변을 살피다 목소리를 낮췄다.

"혹시 제 부탁 때문에 화가 나신 거라면...."

[루시온.]

"예."

[일단 네 방으로 가자.]

"…알겠습니다."

무슨 대화를 하려고 저렇게 진지한 표정을 짓는지.

러쉘은 루시온이 방으로 돌아갈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루시온. 혹시 러쉘이 아파?

오죽하면 라타가 저렇게 물어볼 정도인가.

"…베델은 어디에 있습니까?"

루시온은 슬쩍 눈치를 살피다 입술을 떼었다.

[미안하지만, 잠깐만 자리를 비켜달라고 했어. 흄, 라타. 너희도 자리를 비켜줬으면 좋겠어.]

러쉘은 조금은 초췌한 얼굴로 흄을 바라보았다.

라타가 힐끔 눈치를 살피다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았어. 라타가 자리를 비켜줄게.

"저도 나가 있겠습니다."

흄은 살짝 놀란 얼굴로 대답했다.

언제나 여유가 넘쳤던 러쉘이 이상할 정도로 초조해하고 있었다.

문제가 생긴 걸까.

"…스승님."

루시온은 흄과 라타가 나갔음에도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는 러쉘을 보며 자신이 먼저 말을 걸었다.

"괜찮으십니까?"

지금 러쉘은 너무도 이상했다.

[루시온.]

"듣고 있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유령은 기억을 잃지 않아.]

러쉘이 왜 이런 말을 꺼내겠는가.

루시온은 조심스레 물었다.

"스승님께서… 기억을 잃으셨습니까?"

[…그래.]

처연하게 들려오는 러쉘의 목소리에 루시온은 당황함을 숨기느라 힘겨웠다.

하지만 루시온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너무도 무서웠다.

유령이 기억을 잃는 건 타락의 증상이 아닌가.

"혹시 타락의… 증상입니까?"

[아니야.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그럼 왜. 어떻게 스승님께서 기억을 잃으셨단 말씀입니까?"

저절로 루시온의 언성이 올라갔다.

조금 전 두려움 때문에 괜스레 목이 막혀오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이상하지? 타락의 증상도 없는데 기억을 잃었으니.]

러쉘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확인해보려고.]

"당장 가겠습니다. 바위지대에 말입니다."

루시온은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도 불안했다.

자신의 타락은 러쉘의 죽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뭐가 됐든, 막아야 했다.

[루시온.]

"…예."

무겁게 자신을 부르는 러쉘의 말에 루시온은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얼굴 펴.]

할 말을 삼킨 듯, 러쉘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너는 내 제자니까, 가장 먼저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어. 괜히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었네.]

러쉘이 무슨 말을 삼켰는지 루시온은 알고 있었다.

만약 무슨 일이 있다면 자신의 손으로 러쉘을 하늘로 보내달라는 거겠지.

러쉘은 루시온이 눈치챘다는 걸 알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루시온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봐. 나는 타락하지 않았고, 멀쩡해.]

"…알고 있습니다."

루시온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애써 미소를 지었다.

"다음에는 괜히 무겁게 분위기를 잡지 마셨으면 합니다. 스승님답지 않습니다."

[그래, 그래. 그래도 혹시나 했지.]

그 뒤로 몇 마디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루시온은 이 어설픈 촌극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스승님."

루시온은 어설픈 웃음을 버리고 러쉘을 바라보았다.

러쉘 역시 지워버린 미소 너머로 미안함이 엿보였다.

[그래.]

"스승님께서 말씀하시려던 그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루시온은 러쉘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전에도 했던 말을 꺼냈다.

그제야 러쉘은 피식 웃으며 루시온의 이마를 살짝 쳤다.

딱!

[뭘 오해하고 있어? 그 말은 다신 안 하기로 너하고 약속했잖아.]

"입 밖으로 내뱉진 않으셨지만, 제가 바보도 아니고 왜 모르겠습니까?"

[말하지 않았으니 약속은 지킨 셈이지.]

러쉘이 가볍게 웃었다.

그제야 루시온의 표정도 차차 풀려갔다.

[루시온. 그, 정말 바위지대로 갈 거야? 아니, 갈 수 있겠어?]

바위지대로 간다는 말은 변경의 끝 너머로 간다는 말이었다.

루시온의 악몽이 시작된 바로 그곳으로.

"예. 바로 갈 겁니다. 스승님의 허락이 떨어졌는데 뭘 더 주저하겠습니까?"

116화. 수첩을 찾으러

루시온이 거리낌 없이 대답했지만, 러쉘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림자 이동으로...."

[거리가 좀 멀어. 하루를 통째로 빼야 할걸?]

루시온은 그 말에 눈동자를 잠깐 굴렸다.

수첩을 헤인트의 동료가 될 그 흑마법사가 언제 가져갈지 몰라 계속 신경 쓰고 있긴 했다.

하지만 생전에 살았던 곳을 가는 건 러쉘에게 힘든 일이지 않을까 싶어 러쉘이 허락하기 전까지 말도 꺼내지 않았다.

'당연히 나중에 갈 거라 생각하고 방법을 생각하진 않았는데.'

루시온의 미간에 주름이 점점 깊어졌다.

친구가 없으니 놀러 간다는 말도 우스웠고, 서부에 아는 귀족도 없었다.

"뭐, 없으면 만들어야죠. 아직 경매장이 열리려면 시간이 있으니까요."

경매장은 4일 후에 열렸다.

* * *

"안 된다."

노비오는 쥐고 있던 포크까지 놓으며 단호하게 목소리를 냈다.

[저럴 줄 알았어. 이게 허락하기 쉬운 일이 아니지.]

러쉘은 뒷덜미를 긁적였다.

저번 대신전 때는 어쩌다 노비오와 이해관계가 맞았다고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루시온에게 적이 많이 생겨버렸다.

노비오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러쉘은 무어라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아버지. 안 된다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하지만 루시온은 흔들림 없었다.

순간, 카슨은 놀란 눈으로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겨우 하루입니다."

루시온이 꺼낸 말 그대로 겨우 하루였다.

루미노스는 괴멸했고, 뉴브라 왕국 일도 어찌 되었건 잠잠해지지 않았던가.

지금, 자신이 여행을 간다면 딱 좋은 시기라고 생각했다.

"3일 뒤면 남부로 출발할 게 아니더냐. 굳이 지금 네가 떠나야 할 이유는 없다."

"아버지 말씀대로 3일 뒤에 출발하지, 내일은 아닙니다. 아니면 아직도 안전하지 않은 겁니까?"

루시온이 핵심을 찌르자 노비오는 잠깐 주춤거렸다.

"아버지. 일단 루시온이 어디로 가려는지 들어보는 게 먼저이지 싶습니다."

카슨은 그렇지 않아도 일주일 내내 집에만 있던 루시온이 안쓰러웠다.

"그래. 내가 흥분했다."

노비오는 계속 이성의 끈을 잡으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어디로 가고 싶길래 이 말을 꺼내는 것이더냐?"

"성벽입니다."

루시온이 대답했다.

바위지대와 가장 가까운 곳은 성벽이었다.

그 정도 거리라면 그림자 이동을 이용해서 갈 수 있다고 러쉘이 알려주었다.

탁!

카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뭐라고 했더냐?"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왜 이걸 물어보나 했는데. 아니, 바위지대로 가려면 어차피 넘어가긴 해야 하고....]

덩달아 러쉘까지 표정이 복잡해졌다.

"성벽입니다. 변경의 끝에 있는 성벽 말입니다."

루시온이 카슨을 보며 안심하라는 듯 미소를 지었지만, 카슨은 죄책감이 묻어난 표정을 띠며 손마저 부르르 떨었다.

"저도 크로니아로서 세상에 나가고 싶습니다."

루시온은 곧 고개를 돌려 노비오를 바라보았다.

노비오 역시 안색이 새파랗게 변해버렸다.

크로니아에서 태어난 누구든 성벽에 들러 자신들이 지킬 변경이 어떤 곳인지를 봐야 했다.

루시온 자신 역시 그래야만 했지만, 할 수가 없었다.

아니, 갈 수가 없었다.

그곳은 자신에게 있어, 가족들에게 있어 매 순간 끔찍한 악몽과도 같은 곳이 아닌가.

"허락해주십시오, 아버지."

그렇다고 언제까지 외면할 수는 없었다.

이건 자신은 물론, 모두에게도 필요했던 순간이었다.

자신이 적국에 납치당한 그 기억 위에 새로운 기억으로 뒤덮을 기회가 찾아왔다.

'기회는 잡아야지. 반드시.'

"…앉거라, 카슨."

노비오가 침음을 흘리며 카슨에게 말을 꺼냈다.

"하지만 아버지.... 저는, 너무 걱정스럽습니다. 그곳은… 루시온한테 있어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앉거라, 카슨."

노비오는 다시금 카슨에게 지시를 내렸다.

카슨이 저토록 동요하는 이유를 알지만,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거라 생각했기에 노비오는 카슨보다 더 침착하게 대응했다.

카슨은 입술을 깨물며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루시온."

노비오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예, 아버지."

"네가 이 말을 꺼내기 위해서 얼마나 고민하고, 또 고민했겠더냐."

"그렇습니다. 저는 이참에 절 뛰어넘어보고자 합니다."

"그래, 루시온."

노비오는 마음을 내려놓았다.

이 결정은 다름 아닌 루시온의 결정이기에 자신의 판단은 일단 저 멀리 치워놓았다.

"하지만 네가 생각한 것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네가 꺼내고 싶은 않은 기억을 꺼내게 될지도 모르고, 또 이전처럼 너 자신을 방에 가둘 수도 있겠지. …각오했더냐?"

"각오했습니다."

루시온의 대답에 노비오는 미소를 그려나갔다.

저 아이는 이제 마냥 약하지 않았다.

믿고 맡길 수 있었다.

"그래. 그러면 갔다 오거라."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제가… 따라가겠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 아버지."

카슨이 바로 말을 내뱉었다.

그의 눈동자가 불안해 보였지만, 노비오는 기꺼이 허락했다.

"그러거라, 카슨."

루시온이 먼저 성벽에 간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노비오는 허락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이 문제는 자신의 아픔이자, 카슨과 루시온의 아픔이었다.

* * *

[…그래도 무리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

베델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베델 자신의 우려대로 러쉘이 기억을 잃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게 얼마나 큰일인지 알지만, 루시온도 러쉘 못지않게 큰일이지 않은가.

"아니. 무리하지 않아. 아무리 스승님의 부탁이라도 할 수 없는 건 할 수 없다고 말했을 거야."

루시온은 씩 웃으며 서랍에서 가면을 챙겼다.

"바위지대는 어차피 가려고 했어. 그러니 스승님께서도 불편하게 절 대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미안해.]

러쉘은 차마 루시온을 보지 못했다.

이유야 어쨌건, 제자를 불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지 않았던가.

마음이 무거웠다.

"제가 가겠다고 한 겁니다. 그러니 더는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루시온은 무거워진 분위기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르르.

공을 물고 오던 라타가 이상해진 분위기에 공을 떨어트리고 열심히 고개를 돌렸다.

―싸우는 거야? 라타가 이 공 줄 테니까, 싸우지 마. 응?

라타는 다급히 공을 입에 물어 루시온 앞에 주저앉았다.

"말했잖아, 라타. 나는 스승님을 존경한다고."

루시온은 미소를 지었다.

러쉘도 라타를 의식하며 바로 대답했다.

[맞아. 싸우는 거 아니야.]

라타의 시선이 베델에게 향했다.

[나도…?]

베델을 보는 라타의 눈동자가 일렁거리자 그녀는 다급히 말했다.

[싸우는 거 아니고, 좀 진지한 대화를 나눴을 뿐이야.]

―응! 그러면 다행이야! 라타는 다 같이 사이좋게 지내는 게 제일 좋아!

그제야 라타가 꼬리를 열심히 흔들며 눈웃음 지었다.

똑똑.

―흄이다! 이제 출발하나 봐!

"도련님."

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출발할 시간입니다. 준비는 다 되셨습니까?"

자신이 챙겨봤자 뭘 챙기겠는가.

"그래."

루시온은 자리에서 일어나자 라타가 공을 물고는 신나게 그의 뒤를 따랐다.

삑!

공에서 소리가 났다.

"도련님. 혹시 남부에 들리실 때, 누구를 데리고 가실 생각입니까?"

"왜? 안토니가 너한테 슬쩍 무슨 말을 했어?"

"아니요. 말이 아니라 안토니 님이 적어놓은 명단을 잠깐 봤습니다."

"몇 명이 따라오는지 말해봐."

루시온의 지시에 러쉘과 베델이 금세 귀를 쫑긋 세웠다.

"시종은 15명입니다."

"과해."

[과하긴 하네.]

[나도 동의한다.]

러쉘과 베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는… 50명입니다."

"기사만?"

루시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예. 기사만 그렇습니다. 병사를 포함하면… 200명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

루시온은 발걸음마저 멈췄다.

순간, 자신이 전쟁이라도 나가는 것처럼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건 더 과해. 영토 전쟁이라도 벌일 셈인가.]

베델이 기겁했다.

"…아! 안토니 님이 이 숫자도 부족하다고 중얼거리는 것도 들었습니다."

당시 상황을 다시금 떠올린 흄은 빠트리고 하지 않았던 말까지 꺼냈다.

'이게 부족하다고?'

루시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지 부족하지.]

러쉘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자 루시온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반응했다.

"…정말입니까?"

[만약에 흑마법사가 나타났다고 한다면 부족해. 그게 아니라면 베델이 말한 것처럼 과하고. 여기서 가장 좋은 방법은 신관이 따라오는 건데, 그건 힘들겠네.]

'신관이라....'

루시온은 문득 불안한 느낌이 몰려왔다.

"흄."

"예, 도련님."

"안토니가 적었던 종이에 헤인트 형님은 없었지?"

"예. 거기에는 없었습니다."

"그래. 알았어."

루시온은 찝찝했지만, 일단 자신이 남부로 갈 때 데리고 가는 시종과 병사들의 숫자부터 조절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 * *

"…루시온?"

카슨의 목소리에 루시온은 눈살을 찌푸리다 말고 깜짝 놀란 듯이 눈을 떴다.

마차가 멈춰 있었다.

"제가… 잠깐 졸았습니까?"

마차를 탔을 때만 해도 내색하진 않았지만, 긴장 때문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아마 성벽에 도착하기 전까지 그 상태 그대로 갈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어. 누가 업어가도 모를 만큼 완전 잘 자더라.]

러쉘이 키득거렸다.

"잘 잤더냐?"

카슨은 미소를 지었다.

벌벌 떠는 것보다 차라리 잠이 드는 게 훨씬 나았다.

루시온은 입가에 묻은 자신의 침을 닦아내다 말고 뜨끈뜨끈하게 달아오른 허벅지에 아래를 내려보았다.

라타가 갓 구운 떡처럼 늘어져서는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자기 혼자 꼬리 잡기 놀이를 하다 나한테 놀아달라고 치근대더구나. 좀 놀아줬더니 저렇게 지쳐서 잠이 들었다."

카슨은 옆에 둔 책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라타가 지칠 만큼이라니. 역시 형님이신가.'

루시온의 시선이 창문으로 움직였다.

"도착했습니까?"

"그래. 도착했다."

카슨은 루시온의 상태를 살폈다.

아직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다행스러우나, 불안했다.

"루시온."

"예, 형님."

"혹시, 만약에 상태가 좋지 않거든 내게 말하거라."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루시온이 싱긋 웃었다.

"그래. 혹시나 이상하다면 반드시 말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일단 내리죠. 워낙 어릴 때라 변경 끝이 어땠는지 기억이 잘 나질 않네요."

루시온은 이번에는 괜찮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릴 적, 카슨과 성벽에 왔을 때, 그가 태워준 목마를 통해 세상이 넓다는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으니까.

납치를 당했을 당시 너무도 놀랐지, 성벽 자체에 좋지 못한 기억은 없었다.

"내가 안으마. 너는 아직 팔이 불편하지 않더냐."

카슨이 라타를 안고 먼저 내렸고, 루시온은 자신을 불안하게 바라보는 러쉘과 베델에게 괜찮다며 미소를 지어주었다.

탁.

발이 땅에 닿자마자 하늘에 닿을 듯 거대하고 높은 성벽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은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이 들쯤, 무겁고,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처럼 피비린내가 어깨를 짓눌러왔다.

'…와.'

공기가, 바람이, 아니, 변경의 끝에 있는 모든 것들이 죄다 뾰족하게 날이 서 있었다.

루시온은 이 무거운 분위기에 적응이 되질 않았다.

똑같은 하늘에, 똑같은 나무이건만 왜 이렇게도 다른지.

자신이 기억하던 어릴 때와 너무도 달랐다.

'…여긴 정말 전쟁터다.'

툭.

[루시온. 정신 차려.]

루시온이 분위기에 휩쓸리자 보다못해 러쉘이 그의 어깨를 강하게 쥐었다.

루시온은 그제야 정신을 차려서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루시온? 괜찮더냐?"

뒤에 소리가 없자 카슨이 뒤를 돌아보았다.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성벽이… 상상 이상으로 크네요."

[여기 주변에 유령들이 많아서 더 그래. 네가 흑마법사이니 영향을 받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지.]

러쉘은 루시온에게 유령이 얼마나 많은지 보여주질 않았다.

얼마나 많은 죽음이 이곳에 있었기에 유령들이 새카맣게 몰려있는지.

러쉘 자신도 마음이 동요될 정도니 루시온은 오죽하겠는가.

"그래. 나도 가끔 이곳에 압도될 때가 있지."

카슨은 미소를 지었다.

"훌륭하구나, 루시온."

"…예?"

"으레 여기에 첫발을 내딛고는 도망가는 이들이 많단다. 아마도 이곳의 분위기 때문이겠지."

카슨은 루시온의 발을 가리켰다.

카슨의 손끝을 따라 루시온은 아래를 바라보았다.

길 양쪽에 경고문이 부착된 표지판을 중심으로 길가에 굵은 선이 칠해져 있었다.

자신의 발은 선 너머로 향해 있었고.

"변경의 끝에 온 걸 환영한다, 루시온."

카슨의 말과 함께 루시온은 어디로 연결됐는지 모를 붉은 실과 마주했다.

117화. 수첩을 찾으러(2)

* * *

루시온은 바위로만 이루어진 드넓은 장소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꼭 말라버린 회색빛 사막을 보는 듯했다.

'…이게 변경 너머인가.'

크로니아라는 이름을 가진 누구든 보는 풍경.

그저 드넓고.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풍경이었지만, 루시온의 눈이 커졌다.

동시에 라타의 입이 한껏 벌어졌다.

―우오오오오! 엄청 높아! 라타는 이렇게 높은 곳은 처음이야!

라타의 감탄이 좀처럼 멈추질 않았다.

"야호!"

갑자기 흄이 대뜸 소리쳤다.

덩달아 라타까지 소리쳤다.

―얏호!

"…흄?"

루시온이 황당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옆에서 러쉘이 끅끅거리며 당장 죽어갈 듯 웃었다.

"아. 이게 아닙니까? 책에서 높은 곳에 올라가면 '야호'라고 소리를 지르라고 되어있었습니다."

"보통 산에서만 그래."

"그렇습니까? 정정하겠습니다."

흄이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주변에 기사들만 없었어도 흄처럼 소리를 내지르는 건데.'

루시온은 흄을 내심 부럽게 바라보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성벽에 오르니 이로써 확실해졌다.

붉은 실은 바위지대로 이어졌음을.

'스승님의 수첩과 연결된 걸까. 아니면 이미 수첩을 얻어 저기에서 흑마법을 배우고 있는 헤인트의 동료 놈하고 연결된 걸까.'

그 흑마법사가 언제 헤인트의 마법을 배우는 건지 알았다면 이토록 초조해하지 않았을 텐데.

루시온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기분이 좋지 않은가?]

베델이 다급히 물었다.

루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벽 너머로 개미 떼처럼 모여 있는 이들이 보였다.

아마도 뉴브라 왕국의 병사들일 테지.

그들을 보자마자 속이 들끓어 기분이 좋지 않았다.

파지지직!

갑자기 귀를 때리는 듯한 소리에 루시온은 깜짝 놀랐다.

―안 돼, 어둠아! 지금 움직이면 루시온이 큰일 나!

라타가 기겁했고, 러쉘이 손가락을 튕겨 루시온의 어둠을 눌렀다.

딱!

"괜찮습니다, 도련님. 놀라실 필요 없으십니다."

흄은 차분히 손가락을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콰앙!

번개가 성벽을 긁듯 아래에서 치고 올라왔지만, 결계에 막혀 무엇 하나 건드릴 수 없었다.

'…와씨. 큰일 날뻔했네.'

루시온은 금세 자신에게 다가오는 기사들을 보며 마른침을 살폈다.

라타와 러쉘이 막아주지 않았다면 어둠이 튀어나와 들킬 뻔하지 않았는가.

루시온은 '잘했지, 응?'이라며 칭찬을 바라는 자신의 어둠의 말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평소에 좀 잘하지 왜 급할 때만 이렇게 잘 대해주는지.

"괜찮더냐?"

카슨이 다급히 뛰어오며 물었다.

이런 공격은 이곳에서 빈번했으나, 루시온은 달랐다.

얼마나 놀랐겠는가.

"예. 약간 놀란 거 말고는 괜찮습니다."

"혹시 어지럽지 않더냐?"

"조금 어지럽습니다."

"이곳이 높아서 그렇다.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을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카슨은 루시온을 잠깐 살피다 곧 손가락을 뻗어 개미 떼를 가리켰다.

"저것들이 보이더냐?"

"예, 보입니다. 뉴브라 놈들이 아닙니까?"

"그래. 다시 활보하기 시작하더구나. 이제 구경을 끝마쳤으면 그만 성벽에서 내려가는 게 어떻겠더냐?"

"알겠습니다."

사실 조금 더 구경하고 싶었지만, 또 적들이 공격해오면 어둠이 놀라 멋대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루시온."

카슨이 루시온을 불러 세웠다.

"성벽 근처에 오질 않는다고 약속해주거라. 그 약속만 지킨다면 여기가 변경의 끝이라고 해도 네 자유를 억압하지 않으마."

이는 과거처럼 자신감이 아니라 루시온이 성벽 너머에 관심을 가지지 않기 위한 미끼였다.

이미 성벽에 올라 성벽 너머를 보지 않았던가.

사람이라면 누구든 저 너머를 향해 가고 싶을 테지.

"…정말이십니까?"

루시온의 눈동자가 순간 반짝거렸다.

어쨌든 이곳까지 왔다.

이제 남은 건 그림자 이동을 사용할 수 있는 여건과 러쉘의 아지트에 들어가 수첩을 뒤질 시간이었다.

방금 카슨의 제안으로 그 두 개가 모두 해결이 되고 말았다.

"…루시온? 왜 이렇게 좋아하는 것이더냐?"

카슨이 수상쩍다는 듯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분명 루시온이 실망할 거라 생각했는데.

"당연히 좋을 수밖에요. 구경할 때 꼬리가 붙으면 좋던 마음도 식지 않겠습니까?"

"밖이… 궁금하지 않더냐?"

"궁금하긴 한데, 위험한 행동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 이해한다."

카슨은 미안함이 섞인 미소를 지었다.

루시온에게 있어 변경 너머가 얼마나 무서운 곳일까.

여기까지 와준 것만으로도 카슨은 무척 기뻤다.

"개인적으로 성벽에도 계속 있게 하고 싶지만, 밑에 뉴브라 놈들이 있어 별수 없구나. 나도 잠깐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고."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딱 근처만 돌아다니겠습니다."

"여기 근처에도 살펴볼 곳이 많다. 필요하면 안내자 겸 호위를 붙여주마."

"괜찮습니다. 제 눈으로 직접 살펴보고 싶습니다."

"그래. 멀리 가지 말거라."

카슨은 불안함을 숨기지 않았다.

아무리 루시온이 성장했다고 한들, 그는 여전히 일반인이었다.

"흄."

카슨은 잠깐 흄을 불렀다.

"예, 첫째 도련님."

그의 손짓에 흄은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루시온이 고개를 끄덕여서야 흄이 카슨에게 다가갔다.

"말씀하십시오."

"혹시나 루시온에게 접근하는 이가 있거든 주저하지 말고 죽이거라."

카슨은 이미 모든 기사와 병사에게 루시온 근처로 접근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전에는 속았지만, 두 번은 없었다.

성벽 너머가 위험하지, 이 근처는 저택보다 훨씬 방어가 잘되어있어 루시온이 거리낌 없이 돌아다닐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흄은 눈에 힘을 주며 대답했다.

* * *

라타가 풀을 밟으며 눈을 반짝거렸다.

그림자 이동을 사용할 적당한 장소를 찾는 중이라 라타의 기분이 아주 좋았다.

루시온은 지금쯤 베델이 러쉘의 아지트에 잘 도착했는지가 궁금했다.

―루시온, 있지. 라타가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 수 있어?

"뭔지 말해봐."

―루시온이 저어기 유령들을 하늘로 보내줬으면 좋겠어.

라타가 앞발을 들어 성벽 쪽을 가리키자 그 순간, 푸른 실이 나타났다.

문제는 하나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왜…?"

루시온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커졌다.

애초에 루시온은 러쉘 때문에 지금 유령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허공과 이어진 푸른 실의 개수가 너무도 많았다.

수십.

수백.

수천.

푸른 실이 점점 늘어나다 말고 마치 오류가 일어난 것처럼 모습을 드러내던 푸른 실마저 사라지고 더는 늘어나지 않았다.

이걸 자르면 무조건 붉은 실이 나타나겠다는 생각과 함께 짙은 의문이 넘실거렸다.

'왜 이렇게 많이 나타나는 거지? 이곳 유령들이 대체 뭐길래?'

―라타가 보기에 말이야. 저렇게 내버려 두면 조금 더 있다가 큰일이 나. 라타는 루시온에게 슬픈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라타는 앞발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루시온은 고개를 들어 성벽을 보았다.

되도록 라타의 바람을 들어주고는 싶으나, 지금 상황에서 카슨과 기사들의 눈을 피해 유령들을 하늘로 보낼 방법이 없었다.

무조건 들킬 게 뻔했다.

"라타 네가 말하는 큰일이 뭔데?"

―응, 있잖아. 라타가 보기에 저 유령들이 모여서 알 수 없는 게 나타날 것만 같아.

라타는 쭈뼛쭈뼛하며 말했다.

'…알 수 없는 거? 유령들을 제물로 바쳐지든 뭘 해서 무언가가 소환된다는 말인가?'

일단 루시온은 소설 속에서 벌어졌던 일인지 아닌지를 떠올려보려다 러쉘과 눈이 맞았다.

이미 러쉘은 표정이 굳어 있었다.

[유령을 제물로 삼을 수 있는지 아닌지가 궁금하겠지?]

"궁금합니다. 라타 말처럼 제물로 바쳐서 무언가를 소환하는 것도 가능한지 알고 싶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루시온은 짐작 가는 일이 있었다.

[이론적으로는 가능해. 하지만 나는 본 적이 없어. 이렇게 유령들이 많은 건 거의 처음 본다고 생각하면 돼.]

"가능… 하다는 말씀이시죠?"

[그렇지. 유령은 결국 어둠의 존재야. 어둠을 바쳐서 흑마법을 쓰는 게 왜 불가능하겠어? 뭐, 저렇게 크로니아 기사들이 성벽을 지키고 있으니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겠지만.]

루시온은 러쉘의 대답에 푸른 실이 왜 등장했는지를 알아차렸다.

"쿠우웅!

땅을 크게 울리는 소리에 헤인트는 깜짝 놀라 밖으로 나왔다.

'저게… 뭐야?'

하늘에서 내려온 건 거인의 발이라 할 만큼 거대한 발이었다.

검은 연기를 흩날리는 발.

'…흑마법이다!'

헤인트는 저 발을 보자 확신할 수 있었다.

또, 흑마법사가 일을 시작했음을.

콰아아아앙!

발이 땅으로 내려왔고, 뒤이어 밀려오는 바람에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무너져내렸다.

헤인트가 기침하며 고개를 들었을 때, 제국을 지키던 성벽이 사라져버렸다."

제국이 그토록 자랑하던 성벽이.

크로니아가 오랫동안 지켰던 성벽이.

자신의 타락과 함께 크로니아가 무너졌고, 성벽 역시 부서지고 말았다.

'…그래. 성벽이 무너뜨린 그 발. 저 유령들이 그 발을 소환하는 데 이용당한 게 아닐까.'

루시온은 푸른 실을 바라보다 주먹을 꽉 쥐었다.

저 유령들을 하늘로 보낸다면 그 사태를 막을 수 있었다.

"스승님. 절 말리지 마십시오."

루시온은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이건 이제 할 수 있냐, 없느냐를 떠나 해야만 했다.

범인은 공허의 손이었다.

브로슨이 사명을 띠고 무조건 흑마법사를 죽이기에 정상적인 흑마법사 역시 제국으로 들어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공허의 손은 자신의 목숨 따위는 가볍게 취급하기에 얼마 전처럼 브로슨에게 죽을 걸 알면서도 계속 들어오고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누가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겠는가.

[…너, 지금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고 있어?]

러쉘이 황당함에 말을 더듬거렸다.

"압니다."

루시온은 미소를 지으며 베델이 보내는 신호를 느꼈다.

어둠이 떨려왔다.

"라타의 첫 부탁이잖습니까. 당연히 들어줘야죠."

[루시온!]

러쉘이 소리를 지르자 라타의 귀가 뒤로 접혔다.

[이건 장난도 아니고, 빙의랑 달라! 아직 넌 남들 앞에서 당당히 흑마법을 사용할 수준이 아니라고.]

"압니다. 제가 어떤 수준인지."

루시온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스승님의 제자는 바보가 아니니까요."

루시온은 가면을 꺼냈다.

"성벽 밖에서 할 겁니다. 그 누명을 뉴브라 왕국이 죄다 뒤집어써야죠."

마침 뉴브라 왕국이 시비를 걸던 중이 아닌가.

가면을 뒤집어쓰기 전에 루시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의심을 확신으로 심어줘야지.

[…루시온. 너 왜 이래? 이건 무모한 짓이라고.]

러쉘은 언성을 낮추고 루시온을 설득하려고 했다.

여기는 귀족 저택 안에서 흑마법을 쓴다는 개념과 달랐다.

어느 쪽도 루시온의 편이 될 수 없었기에 두 세력에게 공격을 받을 수도 있는, 너무도 위험한 상황이 아닌가.

"스승님. 라타의 부탁 하나 들어주지 못해서 제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미 무언가가 일어날 거라는 걸 아는데 외면하고 싶지 않습니다."

―라, 라타가....

"아니, 라타. 잘 말해줬어. 나는 내 사람들이 죽는 게 싫으니까."

루시온은 라타를 쓰다듬어준 뒤, 흄에게 가면을 넘겼다.

"너도 얼굴을 숨겨."

"알겠습니다. 후드도 입을까요?"

"좋은 생각이네."

[네 어둠을 쓰게 허락해! 이, 망할 놈아!]

러쉘은 오만상을 썼다.

자기가 불리한 일을 죽어도 하지 않던 루시온이 왜 이러는지.

분명 미친 짓이라는 걸 알지만, 러쉘은 루시온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이미 자신의 부탁에 성벽까지 오지 않았던가.

"제가 그림자 이동을 사용할 때, 새어 나오는 어둠을 막아주셨으면 합니다."

루시온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아니. 어둠까지 조절해줄 거다. 유령들을 하늘로 보내고 바로 내 아지트로 튈 거지?]

"역시 스승님이십니다."

루시온은 러쉘이 있어 이토록 든든할 수가 없었다.

쿵하면 짝이었다.

[이번 한 번만이야.]

러쉘은 목에 힘을 주며 강조했다.

자신의 도움은 루시온의 성장을 방해하는 요소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다.

제자가 죽는 모습을 바라만 볼 스승이 어디 있단 말인가.

"감사합니다, 스승님."

루시온은 진심으로 러쉘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 * *

샤악.

소리도 없이, 어떤 흔적도 없이 루시온은 그림자 이동을 통해 성벽 너머에 두 다리를 밟고 섰다.

뉴브라 왕국의 병사들이 성벽을 향해 움직이는 만큼 먼지가 뽀얗게 일어나 루시온을 가려주었다.

'속이… 울렁거리네.'

루시온은 뻣뻣해지는 자신의 몸을 느꼈다.

―루시온?

라타가 불안함이 담긴 눈동자로 루시온을 보자 그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눈앞에 닥친 일에 집중해야 했다.

[이제 내가 널 유령으로부터 모습을 감췄던 장막을 벗겨낼 거야. 괜찮겠어?]

"바로 시작하죠."

루시온은 손아귀에서 어둠을 꺼냈다.

118화. 수첩을 찾으러(3)

―라타는 준비됐어.

혹시 몰라 라타는 루시온의 그림자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그 속에서도 그림자 이동이 가능했으니.

"여차하면 제가 도련님을 데리고 도망치겠습니다."

흄은 달리기라면 자신 있었다.

[그래, 흄. 너만 믿는다.]

러쉘은 마지막으로 루시온을 걱정스레 바라보다 무언가를 거둬들이듯 손으로 당겼다.

눈앞에 장막이 걷히고, 루시온의 시선에 스르르 유령들이 보였다.

'...!'

루시온은 순간 숨을 삼켰다.

기존 성벽을 전부 에워싼 유령들이 마치 메뚜기 떼와 같이 바글거려 넋을 놓고 볼 수밖에 없었다.

루시온은 속에서 토악질이 올라올 것만 같았지만, 입술을 꽉 다물며 속을 진정시켰다.

'…저들이 타락하지 않아서, 내가 먼저 발견해서 정말 다행이다.'

루시온은 여전히 자신을 가려주는 흙먼지를 보며 그림자 이동 사용에 필요한 어둠을 빼고 전부 손바닥 밖으로 내보냈다.

[그림자 이동에 쓰일 어둠 말고, 여분의 어둠은 없어. 알고 있지?]

"알고 있습니다. 한 번에 모아서 터트리겠습니다."

루시온은 어둠을 양쪽으로 갈라 흙먼지 속으로 파고들게 해 각각 성벽 제일 끝 쪽으로 보냈다.

러쉘이 자잘한 조정을 맡아 크로니아의 기사들에게도 뉴트라의 기사들에게도, 그리고 카슨에게도 눈에 띄지 않게 해주었다.

[그만. 거기까지 됐어. 이제 주변 시선 신경 쓰지 말고 붙잡아. 여기서부터는 들킬 수밖에 없으니 빨리 처리하자고.]

루시온이 양쪽에 있는 어둠을 펼치려고 할 때쯤, 러쉘이 목소리를 크게 냈다.

[어! 야, 카슨! 잠깐만!]

갑자기 카슨이 루시온을 포착하고 말았다.

쉬익.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오러가 실린 검이 바람을 타고 루시온 쪽으로 날아왔다.

러쉘이 루시온의 어둠을 이용해 검을 잡으려 했지만, 그림자 이동을 사용할 여분의 어둠이 사라지면 안 되기에 필사적으로 참았다.

[흄을 믿어라, 루시온! 지금이다, 펼쳐!]

지금은 더 빨리 유령을 하늘로 보내주는 길밖에 없었다.

마치 날개가 펼쳐지듯 양쪽에서 나타나는 어둠에 크로니아 쪽도, 뉴브라 쪽도 당황했다.

크로니아 쪽에서 뿔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긴급이라는 의미였지만, 루시온은 최대한 넓게 어둠을 펼쳐 많은 유령을 가두는 데만 집중했다.

두 번의 기회는 없었다.

"제가 합니다!"

흄이 손을 올려 적절한 순간에 주먹으로 검을 내리쳤다.

콰앙!

흡사 금속 벽을 내리치는 소리와 함께 검이 바닥에 꽂혔다.

"...!"

흄은 검이 부서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웠지만, 아직도 검 주변에 사라지지 않은 오러에 흄은 바짝 긴장했다.

[카슨 저 미친놈! 동생을 죽일 뻔했잖아!]

러쉘은 소리치며 카슨을 노려보았다.

어떻게 그렇게 망설임이 없는지.

러쉘은 흥분을 가라앉히며 루시온을 살폈다.

그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한 번에 다 처리하기에 유령들이 너무 많은 탓이었다.

주르륵.

루시온은 코피가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라타가 더 힘낼 테니까, 힘내, 루시온!

라타가 간절히 목소리를 내며 유령들을 에워쌀 어둠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카슨…!]

러쉘이 루시온을 도와 더 빨리 수만에 가까운 유령을 어둠으로 에워싸려던 차, 다시 소리쳤다.

흙먼지가 거둬지자,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카슨이 서 있었다.

싸아아.

루시온은 온몸의 털들이 쭈뼛 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여기에서 멈출 수 없었다.

유령을 가두고 터트리기만 하면 공허의 손의 계획을 파괴하는 건 물론, 성벽이 부서지는 일도 없을 테니까.

자신의 선택이 옳다는 듯 다발로 된 푸른 실까지 팽팽해진 상태였다.

"네놈이 무슨 짓을 하든 성벽을 넘을 수 없을 것이다, 흑마법사."

카슨이 손을 뻗자 바닥에 꽂혔던 검이 그의 손으로 들어왔다.

기어코 뉴브라 왕국이 흑마법사를 불러왔다.

이 변경을 넘보기 위해서.

"공격할 의도가 없습니다."

흄이 말했다.

하지만 카슨의 시선은 너무도 싸늘했다.

"마침 살아 있는 흑마법사가 필요하던 참이었다. 뉴브라. 네놈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하거든."

"공격할 의도가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흄이 재차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정말로 그 카슨이 맞는지, 너무도 다른 사람 같았다.

"자, 흑마법사. 얌전히 따라올 테냐. 아니면 어디 하나가 잘려야 따라올 테냐."

카슨의 시선에 흄은 없었다.

뉴브라가 어떤 수작질을 부리는지 몰라도, 참 우습다 싶었다.

한 번 그랬으면 충분하지, 두 번은 당할 생각이 없었다.

카슨은 머릿속에 맴도는 루시온을 잠깐 내려놓고 흑마법사에게 다가갔다.

한 걸음.

살기가 루시온의 온몸을 짓눌렀다.

두 걸음.

루시온의 두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것도 모자라 속에 있던 어둠이 날뛰었다.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참을 수 있어. …이 정도는.'

[빨리, 빨리!]

러쉘은 애간장이 탔다.

자신도 그렇고 루시온의 계획 속에 카슨에게 이렇게 빨리 들킨다는 계획은 없었다.

그만큼 지금 상황이 어처구니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빨리! 어서! 어서 움직여, 어둠아!

라타의 긴박한 말과 함께 루시온의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됐....'

드디어 어둠을 하나로 뭉쳐 터트린 그때, 루시온은 자신의 코앞으로 다가온 카슨을 보았다.

카슨의 눈빛은 너무도 섬뜩했다.

검날이 자신의 배에 닿자 붉은 실이 나타나 자신과 카슨을 휘감았다.

"헤인트에 이어 하멜의 검이 무자비할 정도로 루시온의 배를 꿰뚫었다.

"…커헉!"

루시온이 피를 쏟으며 배를 잡고 비틀거리자 하멜은 루시온이 회복할 시간을 주지 않으려는 듯 다시금 놈의 가슴에 검을 박아 넣었다.

푸욱!

오러가 가득 실린 검이 루시온의 가슴에 꽂혀버렸다.

"크헉…!"

루시온이 피를 토했다.

한 번, 두 번.

마치 온몸의 피를 쏟아내듯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챙그랑.

하멜이 검을 손에 놓으며 당장 가면을 벗었다.

얼굴을 일그러트린 하멜이 쓰러지는 루시온을 받으며 무릎을 꿇었다.

뚝. 뚝.

하멜의 눈물이 루시온의 얼굴을 적셨다.

"…형…님."

루시온은 시선이 흐릿한 와중에도 알아차렸다.

하멜이 자신의 형인 카슨이었음을.

그리도 그리워하던 형이었음을."

왜 갑자기 소설 속 장면이 떠오르는지 루시온도 알지 못했다.

빨리 찾아온 카슨이 살짝 원망스러웠다.

루시온의 눈동자가 굴러갔다.

카슨 뒤에 절박한 표정으로 움직이는 흄이 보였다.

누가 봐도 늦은 것처럼 보였다.

자신이 안일했던 것인지, 아니면 카슨의 실력을 얕봤던 것인지.

어느 쪽도 알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이제 저 검이 자신의 배를 꿰뚫을 테니.

―괜찮아, 루시온.

하지만 그때, 머릿속에 울리는 라타의 밝은 목소리에 갑자기 몸의 긴장감이 풀어졌다.

검은 어둠이 아닌, 보랏빛을 띠는 어둠이 자신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와 주변에 맴돌았다.

어둠은 라타가 되었다.

분명 라타인데, 무언가 달랐다.

라타의 눈동자에 푸른 안광이 피어올랐다.

―어둠이 루시온을 지키니까, 무서워할 필요 없어. 라타가 루시온을 지키는 자로서 도와줄게.

라타가 루시온의 팔에 매달려 앞발로 그의 손가락을 움직였다.

팅!

"...!"

카슨의 눈이 커졌다.

한순간 루시온과 카슨 사이에서 네모난 모습을 띤 보랏빛 유리가 반듯하게 올라와 카슨의 검을 막아버렸다.

온 힘을 다해 찔렀거늘, 유리에는 어떤 흠집조차 없었다.

놀란 건 루시온 역시 마찬가지였다.

[루시.... 뭐야 저건?]

러쉘은 루시온에게 다가가 말고 그대로 멈췄다.

저건 루시온의 어둠이 아니었다.

자연에 떠도는 어둠같이 보이나, 저토록 정돈된 모습과 보랏빛 색은 또 무엇인가.

'…하.'

루시온은 참았던 숨을 내쉼과 함께 눈을 깜박거렸다.

조금 전 라타는 어디로 갔는지, 자신을 감싸고 있던 보랏빛 어둠마저 사라진 상태였다.

―루시온! 다들 하늘로 올라가고 있어!

라타가 즐겁게 외쳤다.

―이제 라타가 슝을 사용할게!

마치 조금 전 일은 모르는 것처럼.

[흄! 달려!]

러쉘이 외쳤다.

흄이 달렸고, 루시온은 손을 뻗었다.

흄과 손이 닿자 라타가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간다!

루시온은 자신이 어둠에 휩싸이기 전, 잠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터트렸던 어둠이 유령의 몸에 들어갔다.

마치 밤이 찾아온 듯 하늘이 까맣게 물들었다.

그리고 별빛의 조각을 담은 듯 반짝거리며 유령도, 어둠도 차차 사라졌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무수히 많은 말들이 루시온에게 쏟아졌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가슴이 묵직해지면서 눈가가 파르르 떨려왔다.

하지만 루시온은 그 감정이 무엇인지 몰랐고, 그들에게 답을 할 수도 없었다.

그저 하나씩 잘려나간 푸른 실이 하늘에 쏘아진 꽃가루처럼 휘날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푸른 실이 땅으로 떨어지기 전에 하나씩 뭉치더니 붉은 실로 변했다.

서걱.

그 붉은 실마저 다시 잘려나갔다.

"네놈…!"

카슨이 당황한 모습을 마지막으로 루시온이 보는 풍경이 뒤바뀌었다.

'…하.'

카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자신이 놓쳐버렸다.

분명 벨 수 있는데 갑작스럽게 나타난 마법에 베지도 못했다.

카슨은 검을 꽉 쥐었다.

'저놈은 대체… 정체가 뭐지?'

고요했던 카슨의 마음에 큰 파도가 쳤다.

* * *

"…쿨럭!"

루시온은 가면을 벗어 던지고는 핏덩어리를 쏟아냈다.

제자리에서 엎어져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겨우 몸을 지탱했다.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느낌에 눈앞마저 핑그르르 돌았다.

―루, 루시온!

그림자 밖으로 나오던 라타가 바로 루시온에게 찰싹 매달렸다.

'어둠이 아직 소량이라도 남아 있는데....'

루시온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마치 어둠을 전부 써버린 것처럼 배가 욱신거린 것도 모자라 힘까지 빠졌다.

루시온이 배를 부여잡자 뜨거운 무언가가 만져졌다.

'…찔렸나.'

자신의 눈으로 피를 확인하자 루시온은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느낌에 눈을 질끈 감았다.

―홉! 어떻게! 피가 나! 피가!

라타가 혼비백산해서는 루시온 주변으로 빙글빙글 돌았다.

[이럴 줄 알았다! 라타 너는 가만히 있고. 흄! 빨리 약하고 붕대 꺼내!]

러쉘은 서둘러 흄을 재촉했지만, 흄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너까지 왜 그래, 흄?]

흄까지 무언가 이상해 보이자 러쉘은 미치고 팔짝 뛸 기세였다.

흄이 얼굴을 가렸던 손을 내렸다.

그의 오른쪽 눈이 어둠에 휩싸여 타오르고 있었다.

"눈이 또… 이상합니다. 여기에 그때 보았던 선이 보입니다."

"스승님께서...."

[넌 가만히 있어, 루시온. 흄. 움직일 수 없어?]

"아닙니다. 움직일 수 있습니다. 바로 치료하도록 하겠습니다."

흄은 주머니에서 미리 준비했던 각종 치료용품을 꺼내 놓았다.

[할 수 있겠어…?]

러쉘이 조심스레 물었다.

"예. 도련님께서 흑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손가락을 베신 그날부터 열심히 의학을 공부했습니다. 응급조치라면 할 수 있습니다."

흄도 알고 있었다. 직접 해 보는 것과 공부는 다르다는 걸.

그럼에도 흄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실례하겠습니다, 도련님."

[…러쉘?]

베델이 말을 더듬거리며 눈을 크게 떴다.

[이게, 이게 무슨 일인가?]

바위지대 주변을 탐색하다 말고 루시온이 이곳으로 왔음을 알자 막 달려오던 참이었다.

"살짝 찔렸을 뿐이야. 걱정하지 마."

루시온은 진땀을 흘리며 피식 웃었다.

[아니, 이게… 대체 어떻게....]

베델은 지금 상황이 너무도 당황스러웠으나, 흄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루시온은 흄이 내민 진통제를 삼키며 카슨하고 이어져 버린 붉은 실을 바라보았다.

생각해보면 헤인트만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자신을 죽인 이는 헤인트와 카슨이었으니까.

"…하하."

루시온은 괜스레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지금 뭘 좋다고 웃고 있어? 가만히 있으라고!]

러쉘은 당장 루시온의 이마를 때리고 싶다는 듯한 얼굴로 목에 핏대를 세웠다.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요."

루시온이 지친 얼굴로 웃었다.

방금 자신은 죽을 뻔했다.

피했다고 생각했지만, 헤인트와 카슨에게 죽임을 당하는 운명은 아직도 여전하다는 걸 확인했다.

이번에는 러쉘이 자신의 어둠을 움직이는 데 도움을 줬다.

어둠에 가장 민감한 대신전에서도 어둠을 사용했던 러쉘이었다.

그런데 카슨이 등장했다.

그 빌어먹을 붉은 실이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었다.

잠시 뒤, 흄이 손을 뗐다.

루시온의 배에 붕대가 두껍게 감겼다.

"아프십니까?"

흄이 루시온의 옷을 바로 하며 걱정스레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루시온. 루시오온. 진짜 괜찮아? 라타는… 흑.

대충 피를 닦아낸 손으로 루시온은 눈물을 흘리는 라타를 쓰다듬었다.

"아니. 이제 괜찮아."

[거짓말하지 마.]

러쉘은 눈살을 찌푸렸다.

오러에 둘린 검에 찔렸는데 어떻게 괜찮겠는가?

지금도 당장 쓰러질 것처럼 안색이 새파랗지 않은가.

"아지트가 어디에 있습니까?"

루시온은 흄의 부축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시온!]

[루시온 공.]

러쉘과 베델이 루시온을 말렸다.

루시온은 자신을 중환자 취급하는 두 사람에게 괜찮다는 의미로 힘껏 바위를 밟았다.

"상처가 얕...."

그 순간, 갑자기 바위였던 바닥이 사라졌다.

'...?'

루시온의 눈동자가 미처 커지기도 전에 아래로 추락했다.

'미친....'

지금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루시온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헤인트의 동료였던 그 흑마법사가 러쉘의 아지트에 들어오던 장면이랑 똑같았다.

[…아. 내가 입구도 안 닫았네.]

멋쩍은 듯한 러쉘의 목소리가 루시온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119화. 검은 구슬을 얻었다.

'스승님…!'

갑자기 떨어져도 어둠을 사용해 착지하면 되니 걱정이 되지 않았다.

그저 황당함에 루시온은 점점 멀어지는 러쉘을 바라보았다.

'입구를 닫지 않았다고…? 그래서 헤인트의 동료였던 흑마법사가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거고?'

"도련님. 제가 갑니다."

흄이 당장 바위를 타고 루시온을 안고 바닥에 가뿐히 착지했다.

"괜찮으십니까, 도련님?"

그렇다고 심장이 벌렁거리지 않는 건 아니었다.

루시온은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왔다.

'스승님답지 않으시네. 뭔가 급한 일이라도 있었나?'

루시온이 한 발자국 내딛자 어둡던 아지트에 불이 환하게 켜져 침실로 보이는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위 속이라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정교하게 깎인 장소는 마치 바위 재질처럼 보이게 하는 벽지를 바른 듯했다.

팅!

붉은 실이 팽팽해진 모습에 이미 휘둥그레진 루시온의 눈이 더 커졌다.

'흑마법사가 오기 전에 내가 먼저 왔다는 건가?'

그렇다는 건.

루시온은 붉은 실을 따라갔다.

테이블에 너무도 정직하게 올려진 수첩과 이어져 있었다.

"…혹시 스승님께서 찾으시던 수첩이 바로 이겁니까?"

[오! 그거 맞아!]

러쉘이 활짝 웃으며 수첩을 반겼다.

"…윽."

루시온이 뒤늦게 일어나는 통증에 배를 잡았다.

얕아도 칼에 찔린 상태였다.

루시온은 흄의 부축을 받고 일단 소파에 앉았다.

'...?'

자신의 엉덩이가 인정할 만큼 최고급이었다.

[그, 루시온.]

러쉘은 수첩을 발견해 기쁘다가 지그시 자신을 보는 루시온의 눈빛에 뒤늦게 제 발이 저렸다.

수첩도 태우지 못했고, 입구도 닫지 않았고.

솔직히 자신의 행동이라고 하기엔 도무지 믿기질 않았다.

칠칠찮든, 엄청 다급했든, 이상했다.

[러쉘. 그대의 칠칠하지 못한 행동으로 루시온 공이 큰일 날 뻔했다는 걸 인정하는가?]

베델마저 러쉘을 쏘아보며 언짢은 목소리를 냈다.

러쉘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무조건 인정해.]

―우아아아아!

흄은 위에서 폴짝 뛰어내린 라타까지 받았다.

아직 눈물이 그렁그렁했지만, 라타가 배시시 웃었다.

―라타는 이렇게 높이 뛰어내리는 건 처음이야! 엄청 재미있었어!

"기운이 나서 다행입니다."

흄은 활짝 웃는 라타를 보며 쓰다듬었다.

"일단 문부터 닫는 게 어떻겠습니까?"

루시온이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이곳이 얼마나 깊은지 가늠이 가질 않을 정도로 입구가 제법 작아 보였다.

그 흑마법사는 떨어지는 도중에 벽에 튕겨 상처는 입었지만, 소파에 떨어져 살 수 있었다.

우연이 연이어 벌어져 기연을 얻은 셈이었다.

그렇다는 건 이 와중에 그 흑마법사가 아래로 떨어지는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다는 말이기도 했다.

[잠깐만.]

러쉘은 차오른 루시온의 어둠을 확인하고서야 어둠을 이용해 문을 닫았다.

[일단 설명부터 해주겠나?]

베델은 모든 게 진정되고 난 후에 비로소 입술을 떼었다.

대체 왜 루시온이 상처를 입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는 이해가 가질 않았다.

―…라타의 부탁 때문이야.

방금까지 방긋 웃던 라타가 루시온 옆에서 서서히 몸을 웅크리며 울먹였다.

―라타가 할 수 없는 부탁이라는 것도 모르고 루시온한테 부탁했어.

"라타."

루시온은 부드럽게 라타를 불렀다.

그 말에 라타는 얼굴을 소파에 파묻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라타가 잘못했어. 다 라타 때문에 루시온이 다쳤어.

"라타."

루시온의 목소리가 전보다 더 올라가자 라타는 힐끔 고개를 올렸다.

루시온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라타한테 화 안 났어?

"화를 왜 내?"

루시온은 흄에게 피가 묻은 손을 내밀었다.

흄은 얼른 손수건을 꺼내 열심히 루시온의 손을 닦아냈다.

"스승님께서 말리셨는데, 내 고집 때문에 벌어진 일이야. 성벽에 있는 유령들을 대거 하늘로 보냈거든."

[카슨이 있는 상황에서 그 유령들을… 말인가?]

"그래."

[…정말. 정말 그랬는가?]

베델의 이어지는 물음에 루시온이 할 대답은 뻔했다.

"맞아."

베델은 점점 굳어지는 표정을 막지 못했다.

기어코 그녀의 목소리마저 높아졌다.

[루시온 공. 공이 무모했다. 공의 습득력이 빠르다는 걸 알지만, 강자와 약자를 구분할 줄 아는 눈을 가졌어야 했어. 카슨은 그대를 삼킬 만큼 강자다.]

"알아. 무모했다는 것도 알고. 내가 미친 짓을 벌였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반드시 해야 했던 일이었어."

카슨에게 배까지 찔렸지만, 루시온은 후회가 없었다.

공허의 손이 저지를 일을 막지 않았던가.

[꼭 그대가 해야 했나?]

"그래. 내가 해야 했어."

―라타가....

루시온은 라타의 입을 붙잡았다.

어차피 머릿속에서 들린다는 걸 알지만, 라타는 말을 멈췄다.

[…언성을 높여서 미안했다, 루시온 공.]

베델은 루시온에게 고개를 살짝 숙인 뒤 미소를 지었다.

루시온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면 정말로 해야 하는 일일 테지.

[하지만 루시온 공. 공의 목숨은 하나야. 나는 해야 하는 일보다 공의 목숨을 더 소중히 했으면 좋겠어.]

"그래. 주의할게."

루시온이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나오면 내가 할 말이 없잖아, 베델.]

[러쉘 그대는 지금 할 말이 없어도 되질 않던가?]

베델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러쉘은 눈을 힐끔 피했다.

할 말이 있어도 저절로 없어지게 하는 그런 눈빛이었다.

"그럼, 스승님. 지혜를 빌려주시지요."

루시온은 잠깐 한숨을 놓았다.

일단 죽을 뻔한 위기도 넘겼고, 수첩이 그 흑마법사 손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았으니 저절로 긴장이 풀어졌다.

[말해 봐. 다 알려줄게.]

러쉘은 목에 힘을 주었다.

"형님께 어떤 변명을 하면 좋겠습니까."

[....]

시작부터 곤란한 물음에 러쉘은 입을 다물었다.

루시온의 시선이 베델로 향하자 그녀 역시 난감한 표정으로 입가를 핥았다.

[이건 숨길 수 없겠는데…?]

루시온은 자신의 옆에 딱 붙은 라타를 조용히 쓰다듬었다.

"…향수를 뿌리면 가려질까?"

[아니. 피 냄새는 지워지질 않지.]

베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괴한이 왔다고 하면 이상합니까?"

흄이 물었다.

"이상하지. 엄청 이상하지. 크로니아 저택보다 더 삼엄한 곳에 괴한이 들이닥쳤다? 그런데 그 괴한이 나를 찔렀고 아무도 몰랐… 을 수는 있는데 그러면 나를 지키지 못한 네가 질책을 받을 거야."

순간 루시온은 유령들을 하늘로 보내기 위해 어둠을 뿌렸던 순간이 생각나 말을 바꾸었다.

흑마법사 때문에 흄이 시선이 빼앗길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도 이상했다.

"…아니지."

루시온은 곧 턱을 매만졌다.

"흑마법이라면 흄 네가 몰랐을 수도 있으니 가능하겠네."

어차피 뉴브라 왕국이 흑마법사를 고용했다는 사실에 확신을 주기로 하지 않았던가.

기왕 이렇게 된 거 자신이 그 희생양이 되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널 미끼로 내던지겠다고?]

"그렇습니다, 스승님. 괜찮지 않습니까?"

[그럼, 남부로 떠나는 여행은 어쩔 건데? 습격만 받은 게 아니라 다쳤는데 노비오가 잘도 순순히 보내주겠다.]

러쉘이 내던진 말에 루시온은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러려니 해도 상처 쪽을 해명하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여행가는 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

"…살고 싶은데, 왜 이렇게 팍팍한지 모르겠습니다."

루시온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가만히 있으면 그대로 소설 속 내용대로 죽어버릴 것 같아 움직였더니 왜 이렇게 힘이 드는지.

"아무래도 형님께서 절 찾으실 듯하니 일단 빨리 용건부터 해결하는 게 좋겠습니다."

루시온은 배를 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통제를 먹어도 욱신거리는 게 거슬렸다.

[어둠을 좀 빌리마.]

러쉘은 수첩을 잠깐 바라보았다.

"예. 사용하십시오. 그럼 저는 흄을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냥 여기에 앉아 있지?]

"짧게나마 구경하고 싶습니다."

[괜찮겠어?]

"좀 아픕니다."

루시온은 식은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하지만 흄의 눈이 왜 저렇게 된 건지, 대체 뭘 안내하고자 그러는 건지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습니다."

[곧 갈게.]

러쉘은 어둠으로 수첩을 띄웠다.

"예, 스승님."

저 수첩 안에 뭐가 적혀 있는지 역시 궁금했으나, 루시온은 떼를 쓰지 않았다.

[내가 잘 지켜볼 테니 러쉘 그대는 그대가 잃은 기억이 무엇인지 찾은 데 집중해.]

베델은 언제 러쉘을 노려봤냐는 듯 따뜻한 목소리로 그를 다독였다.

[그래. 살펴봐야지. 루시온이 헛짓거리하지 않게 잘 좀 봐줘.]

[그래.]

베델이 싱긋 웃었다.

"흄."

"예, 도련님."

"안내해."

"제가 업어 드릴까요?"

"...."

루시온은 잠깐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체면이 무슨 상관인가.

사실 몸에 힘이 없는 게, 구경도 하기 전에 쓰러질 것만 같았다.

"라타 너도 이리 와."

루시온의 손길에 라타는 쭈뼛거리다 마지못해 루시온의 손을 잡고 대롱대롱 매달렸다.

루시온은 흄에게 업혀 마치 빌딩 구조처럼 깔끔하게 지어진 모습을 구경했다.

"흄."

"예, 도련님."

"눈이 아프지는 않고?"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이런 구조는 대체 뭡니까? 저는 처음 봅니다."

[나도 처음인데? 루시온 공을 기다릴 때, 땅속에도 들어갈 볼 걸 그랬어.]

그러고 보니 베델이 바위지대 주변을 돌아다녔다고 하지 않았던가.

"혹시 주변을 살피면서 누구 없었어?"

루시온의 물음에 베델은 잠깐 생각했다.

[있었어.]

"누가?"

[남자였는데, 정확히 러쉘의 아지트 쪽으로 오고 있더라고.]

"아지트 쪽으로...?"

루시온의 눈이 커지자 베델은 안심하라는 듯이 웃었다.

[일반인이었으니 루시온 공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바위지대 쪽 말고 미론스트 왕국 쪽으로 경유하면 될 텐데 왜 황무지나 다름없는 여기를 건너는지 모르겠지만.]

베델이 볼을 살짝 긁적였다.

'…그놈이다!'

루시온은 몸에 힘을 꽉 주다 곧 욱신거림에 주먹에만 힘을 주었다.

'그놈이 지금 여기에 지나가는 거였어.'

그 흑마법사를 죽일지 말지 아주 잠깐 고민하던 루시온은 주먹에 힘마저 풀었다.

아지트의 문을 닫았고, 수첩은 러쉘의 손에 들어갔다.

놈이 이곳으로 떨어질 이유도 없었고, 수첩을 손에 넣을 방법 역시 없어진 상태였다.

가만히 내버려 둬도 변경을 흑마법사로부터 지키는 브로슨 손에 죽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고 보니 브로슨은 왜 소설에서 등장하지 않았을까.'

무려 어둠에게 검은 구슬을 받았던 죽음의 기사가 아닌가.

꽤 중요할 텐데도 등장하지 않았다.

'혹시 그 흑마법사한테 죽은 걸까. 이유는 몰라도 브로슨을 대신해 흑마법사가 사명을 대신하고 있던 거고.'

좋은 흑마법사든 나쁜 흑마법사든 흑마법사라는 이유만으로 닥치고 죽이는 게 닮았다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이유는 영영 모르겠네.'

루시온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 * *

샥. 샥

수첩을 넘길 때마다 러쉘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없어.'

샥.

'…여기도 없어.'

흑마법과 관련된 연구, 사용법, 새로 개발한 흑마법 등 죄다 자신이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흑마법과 관련된 내용뿐이었다.

그러다 러쉘의 손이 멈췄다.

제일 마지막 장.

이는 글자가 아니라 흑마법이 심겨 있었다.

'내가 여기에… 흑마법을 사용했다고?'

분명 자신의 어둠이었다.

러쉘은 놀란 눈으로 잡힐 리 없는 수첩을 잡으려 했다.

'진정하자.'

러쉘은 심호흡을 하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루시온의 어둠으로 흑마법을 건들자 허공에 좌우 7개씩 총 49개가 나타났다.

이 흑마법은 자신이 만든 것으로 정확한 장소에 정확한 순서로 어둠을 넣어야 풀리는 암호 마법이었다.

러쉘은 루시온의 어둠을 이용해 암호를 입력했다.

두두두두.

암호 배열이 완료되자마자 수첩이 떨렸다.

수첩에서 마치 흑마법을 토하듯 검은 덩어리가 바닥에 떨어지더니 곧 허공에 날아다니며 글자가 되었다.

―어이, 러쉘. 넌 기억을 잃었어도 역시 천재였어!

장난스러운 시작에 러쉘은 자신이 적었음을 확신했다.

―놀랐겠지. 당황스럽겠지. 유령이 된 네가 기억을 잃다니!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이는 대가의 한 부분이니까.

'…내가 기억을 잃은 건 대가의 한 부분이다?'

대가라니.

무엇의 대가라는 말인가.

120화. 검은 구슬을 얻었다(2)

눈으로 계속 편지를 읽던 러쉘은 번뜩하고 생각을 떠올랐다.

'내가 흑마법을 사용한 거야. 그것도 아주 커다란 흑마법을.'

―의문스러울 거야. 무엇의 대가인지 너무도 궁금하겠지. 하지만 러쉘. 네가 나라면 아마도 여기서 생각할 테지. 대가가 너무도 큰 흑마법을 사용했다는 걸.

'그래. 이게 그 대가야. 하지만 대가는 하나가 아닐 거야. 브로슨이 내가 저주에 걸렸다고 했으니까.'

―그리고 그 대가는 단순히 기억을 잃은 데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도.

편지에 적힌 그대로 러쉘 역시 생각하고 있었다.

―러쉘. 이제부터 잘 기억해. 이 흑마법은 딱 한 번밖에 사용할 수 없는 흑마법이야. 아, 대가에 얽매여 다 설명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젠장.'

러쉘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우선 너는 성공했어. 그건 자랑스러워해도 돼.

이미 브로슨에게 들었던 말이었다.

무언가가 성공했다는 걸.

그 무언가가 조금 전 언급한 흑마법이 아닐까 싶었다.

―이 세계에 어둠은 죽었어. 어둠이 죽으니 빛 역시 죽고 있지. 내가 말하려고 하는 건 균형을 의미하는 게 아니고, 네가 알고 있는 그 어둠도 아니야.

'그럼 뭔데?'

러쉘의 표정이 금세 삐딱해졌다.

―하지만 네가 성공했어.

'...?'

두 번이나 이어진 성공이라는 말에 러쉘은 감을 잡았다.

그 어둠이 자신의 흑마법 덕에 살아났음을.

―타락, 아니야.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 어쨌든 놈이 널 쫓을 거야. 놈은 너도, 그 어둠도 노리고 있어. 부디 어느 쪽도 죽지 마라.

'놈이라니? 타락과 비슷한 건가?'

러쉘은 이 부분을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아 참. 아지트에 닫힌 문, 알지? 거긴 절대 열지 마. 아니, 이런다고 네가 들을 거란 생각은 안 해. 좋아. 진실을 알고 싶으면 열어. 난 말렸으니까.

어둠은 '말렸으니까'라는 찝찝한 글자를 마지막으로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감이… 오질 않네.'

러쉘은 주먹을 꽉 쥐었다 숨을 내쉬며 펼쳤다.

최대한 대가에 걸리지 않게 피해서 썼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어둠이라는 게 내가 아는 어둠이.... 그래, 헷갈리니까 까망이라고 하자. 어쨌든, 그 까망이가 원래는 죽었는데 내 흑마법으로 살아났다고?'

러쉘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사람을 살리는 흑마법은 세상에 없었다.

아니, 누구도 순리를 거스르는 건 불가능했다.

'살아났다는 의미가 내가 아는 부활했다는 말이 아닐 거야. 아마도 다른 의미겠지.'

러쉘은 제 할 일을 마친 수첩이 혼자가 불타오르는 걸 바라보았다.

화르르.

러쉘은 깊은숨을 내쉬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러쉘. 대체 넌 뭘 한 거야…?'

러쉘의 눈이 불꽃에 휩싸여 같이 타올랐다.

하지만 대답이 들릴 리가 없었다.

* * *

서걱.

갑자기 잘리는 붉은 실에 루시온은 깜짝 놀랐다.

'스승님께서 수첩을 찢어버리셨나?'

"왜 그러십니까?"

흄이 루시온의 움직임에 반응하며 물었다.

"혹시 아프십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러쉘의 수첩을 보지 못해서 아쉽다는 말을 어떻게 입 밖으로 내뱉겠는가.

루시온은 주변을 구경하기 바쁜 라타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흄은 루시온의 부탁으로 일부러 한 층을 다 돌고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한 층을 구경할 때마다 똑같은 모습처럼 보이는 장소에 루시온은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스승님께서는 아지트가 아니라 지하 속 빌딩을 지으셨네.'

루시온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현대의 느낌에 차차 젖어갔다.

치지직.

"...?"

루시온은 마치 텔레비전이 고장 난 듯한 불쾌한 소리에 움찔거렸다.

루시온의 눈동자가 다급히 주변으로 움직였다.

또 시간이 멈추진 않았다.

다만, 방 하나가 루시온의 눈에 들어왔다.

"…잠깐만 흄. 멈춰봐."

루시온의 말에 흄은 곧바로 걸음을 멈췄다.

[왜 그러는가, 루시온 공?]

이번에는 베델이 물었다.

루시온의 안색이 여전히 창백했고 붕대에도 피가 살짝 엿보였다.

[많이 아픈가?]

"아니.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루시온은 방 하나를 가리켰다.

―어? 문 색이 혼자만 달라.

라타가 눈동자를 동그랗게 떴다.

[내가 확인하고 올게. 잠깐 기다려봐.]

베델이 문으로 움직였다.

러쉘의 허락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뒤지는 게 내심 걸리기는 하나, 하나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파지직!

[…크흑!]

하지만 베델은 문에 손을 대자마자 갑자기 격렬한 고통을 느끼며 다급히 손을 뗐다.

―홉!

"왜 그래, 베델?"

라타와 루시온은 눈을 크게 떴다.

[강한 어둠으로 방어되어 있어. …이건 러쉘의 어둠이다.]

베델은 괴로운 얼굴로 부르르 떨리는 손을 움켜쥐었다.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루시온은 난감했다.

애초에 유령을 치료할 수 있는가.

[미안, 베델. 내가 정신이 없어서 경고하는 걸 잊었어.]

러쉘의 멋쩍은 목소리에 루시온은 고개를 돌렸다.

[괜찮다. 그대 역시 정신이 없었을 테니.]

베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러쉘이 일부러 이런 짓을 한 것도 아니었다.

"스승님. 베델은 괜찮은 겁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루시온 공. 나는 죽음의 기사기에 조금만 지나면 상처가 나아. 특히 공과 계약했기에 더 빨리 나을 수도 있고.]

루시온의 물음에 베델은 미소를 내보였다.

그제야 루시온은 안심하며 어깨를 살짝 내려트렸다.

"그나저나 스승님. 저 방은 대체 뭡니까?"

[내 비밀이 담긴 곳이라고 하네? …뭐, 나도 저기 안에 뭐가 있는지 정확히 모르겠어.]

러쉘이 곤란한 얼굴로 대답했다.

죽어도 저곳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은 표정이었기에 루시온은 러쉘이 직접 말하기 전까지 더는 묻지 않았다.

"흄. 다시 출발하자."

* * *

"여기입니다."

흄이 루시온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옆 방이든, 다른 방이든 똑같이 생긴 방 중 하나였다.

라타가 땅으로 내려와서는 앞발로 바닥을 한 번 문질렀다.

―반들반들해서 라타가 보여. 바닥이 꼭 거울 같아!

바위의 종류가 무엇인지 모르기에 루시온은 라타의 말에 아래를 한 번 쳐다보고 말았다.

"여기는 들어가도 되는 방입니까?"

루시온은 흄이 문을 열기 전에 혹시 몰라 러쉘에게 물었다.

[…어? 아. 여긴 괜찮아. 창고로 쓰인 곳이거든.]

잠깐 넋을 잃고 있던 러쉘이 뒤늦게 대답했다.

곧 그는 한쪽 눈썹을 올렸다.

[루시온. 넌 내가 수첩에서 뭘 봤는지 안 궁금해?]

"궁금합니다."

[그럼 왜 묻질 않아?]

"스승님께서 곤란한 표정을 짓고 계셨습니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가지면 고민이 얼마나 깊은지 알고 있어 쉽게 물을 수도 없고요."

대답을 들은 러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사람이 아니라 그저 상처받은 짐승 같던 루시온이 이렇게 자신을 생각할 만큼 달라졌으니 스승으로서 너무도 기쁠 따름이었다.

"…스승님. 또 그 시선으로 보지 마십시오."

루시온은 흐뭇함이 짙게 깔린 러쉘의 표정에 부담스럽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어딜 보아도 내 제자다워서. 그래서 그러지. 네가 날 생각도 해주고. 기특하잖아.]

러쉘은 눈웃음마저 지었다.

너무 기특해 좀처럼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루시온.]

"…예."

루시온이 삐딱하게 대답했다.

[나중에. 내 마음이 정리되면. 그때, 알려줄게.]

"꼭 시기를 두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스승님께서 편하실 때 언제든 들어줄 수 있으니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되고요."

루시온은 밋밋한 목소리를 내며 흄에게 고갯짓했다.

드르륵.

흄이 힘을 주자 문이 손쉽게 열렸다.

러쉘 말대로 조금 전과 달리 어떤 흑마법도 걸려 있지 않았다.

흄이 앞장서고 베델이 제일 마지막에 들어갔다.

―오오… 오?

고개를 빼꼼히 내밀던 라타의 귀가 접혔다.

―여긴 비밀 장소가 아니야. 라타는 실망했어.

라타의 눈꼬리가 축 처졌다.

[창고라고 말했는데?]

러쉘이 키득거렸다.

―그래도 라타는 반짝이는 보석들이 있을 줄 알았어. 안토니가 창고를 열 때 봤는데 보석이 어엄처엉 많았어!

[나도 보석이 어엄처엉 많았으면 여기에 아지트를 짓지 않았겠지.]

러쉘은 계속 웃었고, 라타는 그때를 떠올리는지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그건 또 언제 본 거야?'

루시온은 기가 찼다.

자신이 다른 일을 할 때 라타가 참 부지런히도 저택 안을 돌아다닌다 싶었다.

루시온은 고개를 돌려 흄을 보았다.

"여기가 맞아?"

"예. 여기가 맞습니다. 선이 짙어집니다."

당장 무언가를 찾을 듯한 목소리와 달리 흄은 가만히 서 있었다.

"스승님. 이곳을 뒤져도 괜찮겠습니까?"

루시온은 러쉘에게 허락을 구했다.

[마음대로 해. 여긴 창고라니까. 어차피 올 사람도 없는데.]

러쉘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그제야 흄이 움직였다.

그의 행동에 더는 망설임이 없었다.

[넌 여기에 앉아 있어.]

러쉘은 루시온에게 못을 박고는 베델과 함께 흄을 따라갔다.

마침 잘됐다 싶었다.

루시온은 라타에게 물어볼 게 있었다.

"라타."

―응?

루시온이 라타를 부르자 라타는 앞발을 핥다 말고 고개를 올렸다.

"형님이 날 찌를 때, 그걸 막은 게 너야?"

―아니야. 라타는 열심히 루시온을 돕고 있었어.

"그럼, 내 그림자에서 보랏빛 어둠이 튀어나와서 라타 네가 된 것도 몰라?"

―라, 라타는 라타 혼자뿐인데? 라타가 또 있었어? 이럴 수가…!

라타가 놀라며 발을 동동 굴렀다.

"정말로 기억 안 나?"

―…어.

라타는 눈을 깜빡거렸다.

곧 라타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었다.

―어?

라타는 뭔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그때, 어둠이 잠깐 라타에게 속삭였어.

"뭐라고?"

―라타한테 힘을 빌려달라고. 라타는 루시온이 죽을까 봐 무서워서 알겠다고 대답했어. 라타가… 또 잘못한 거야?

"쉬쉬."

루시온은 배를 잡고 주저앉아 또 눈물이 맺혀버린 라타를 쓰다듬었다.

"라타. 넌 잘못한 거 없어."

―하지만 라타 때문에....

"라타. 잘 들어. 더는 말하지 않을 거야."

루시온의 목소리가 조금은 엄해졌다.

라타의 눈망울이 일렁거렸고, 귀가 접혔다.

"이 상처는 내 고집 때문에 벌어진 거지 라타 네 탓이 아니야. 오히려 라타 네가 나한테 유령들 때문에 벌어질 일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아마도 더 큰일이 났을 거야."

―라타는… 정말 잘못한 거 없어?

라타는 울먹이며 물었다.

"그래, 라타. 네 덕에 많은 사람을 구했어."

―…응. 라타는 착해. 흑, 라타는 장해.

라타는 루시온의 품에 파고들어서는 훌쩍였다.

얼마나 서러웠는지 라타는 아까와 달리 좀처럼 눈물을 멈추질 못했다.

루시온은 문에 기대 피식 웃으며 라타를 토닥였다.

라타는 동물로 따지면 아직 두 달도 되지 않은 새끼였다.

'서러울 만하지.'

라타의 눈물로 옷이 축축해졌지만, 루시온은 신경 쓰지 않았다.

"...?"

―으응?

갑자기 루시온과 라타는 동시에 흄이 움직인 곳으로 쳐다보았다.

라라라.

옅은 음악이 들려왔다.

―루시온, 혹시 들려?

"음악 소리?"

―응! 루시온이랑 라타를 부르고 있어! 라타는 저쪽으로 가고 싶어.

라타는 조금 훌쩍였지만, 꼬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루시온은 배를 잡고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랫소리를 따라가자 근처를 열심히 뒤지고 있는 흄이 보였다.

[루시온. 너는 가만히 앉아 있으라니까.]

루시온이 다가오자 러쉘은 언성을 높였다.

찾으면 알아서 흄이 가져갈 텐데. 절뚝이며 걷는 게 마음이 쓰였다.

"혹시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으십니까?"

루시온의 물음에 베델이 입술을 뗐다.

[루시온 공도 들리는가? 흄도 그 말을 했다.]

"너는 안 들려?"

[나랑 러쉘은 들리지 않아.]

베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온이 흄에게 한 발자국 더 나가자 진동이 느껴졌다.

쿠웅.

흄마저 뒤지고 있던 손을 멈췄다.

책 더미 속이 흔들리고, 마치 저것이라며 알리듯 흄의 눈에 깃든 어둠의 불꽃이 화르르 타올랐다.

책 더미 속에 까만 구슬이 튀어나와 허공에 떴다.

고요했고, 깊었다.

감히 감당하기 어려운 심연의 속에 있는 듯했지만, 루시온은 이상하게 반가운 감정을 억누르기가 어려웠다.

러쉘의 눈이 커졌다.

[저게 루시온 네가 말하던 검은 구슬이야…?]

"맞습니다. 저 구슬입니다. 브로슨의 어둠을 강화해준 구슬말입니다."

루시온은 검은 구슬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한 번은 우연이나, 두 번은 우연이 될 수 없었다.

인도자.

흄이 꿨던 꿈속에서 그를 인도자라고 지칭했다고 말했다.

그 말이 맞았다.

흄은 검은 구슬로 누군가를 안내하는 인도자였다.

121화. 검은 구슬을 얻었다(3)

곧 흄의 눈에 어렸던 어둠이 잠잠해졌다.

웅성웅성.

그리고 주변이 소란스럽기 시작했다.

[저 구슬 때문에 어둠이… 움직이는데?]

러쉘이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

검은 구슬에 어떤 힘이 담겼는지 몰라도 러쉘은 부담스러웠다.

마치 거대한 산과 마주한 기분이었다.

잡아.

제발, 잡아줘.

저거야. 저게 맞아.

어둠이 루시온을 향해 몰려서는 간절히 목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루시온이 어둠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기에는 아직 일렀다.

러쉘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 저렇게 어둠이 매달리는 거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풍경에 의문을 가진 건 베델 역시 마찬가지였다.

[러쉘. 어둠이....]

[아니. 흔치 않아. 사실… 나도 처음 봐.]

베델이 무얼 물을지 알았기에 러쉘은 바로 대답했다.

"무슨 말을 나누고 있는 겁니까?"

루시온은 잠깐 러쉘과 베델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말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노랫소리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러쉘의 물음에 대답하던 루시온은 손가락을 매만졌다.

―라타는 들려! 루시온 보고 얼른 잡으라고 하는데?

"정말 잡아도 괜찮겠습니까?"

루시온은 러쉘을 보며 마른 군침을 삼켰다.

검은 구슬이 뭔지 몰라도 브로슨을 통해 이미 어둠을 강화하는 효과가 있다는 걸 확인하지 않았던가.

탐이 났다.

가지고 싶은 욕망이 들끓었다.

'이걸 허락해야 해, 말아야 해?'

러쉘은 잠깐 고민했다.

어둠이 브로슨에게 제국으로 들어오는 흑마법사가 없길 원하지 않았던가.

서둘러. 빨리.

제발, 넌 우리의 목소리가 들리잖아. 전해줘. 저 아이에게 말해줘. 저걸 잡아야 한다고.

이 와중에도 어둠은 루시온에게 저 구슬을 잡아달라고 애원까지 했다.

러쉘은 자신이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여 러쉘은 어둠의 간절함을 믿었다.

[잡아.]

"알겠습니다."

루시온은 신이 난 얼굴로 검은 구슬을 잡았다.

"...?"

아무 반응도 없었다.

적어도 요란한 반응이 있을 줄 알았던 루시온은 무척 실망스러웠다.

목소리를 내려 했지만, 갑자기 주변의 소리가 멀어졌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 채 루시온은 눈을 깜박였다.

눈앞에 코피를 흘리며 있는 자신이 보였다.

바닥이 거울 같다며 좋아하던 라타의 말이 괜스레 떠올랐다.

* * *

"...!"

긴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 그는 갑자기 손을 멈췄다.

눈앞에 나무 수십 그루가 혼자서 뽑혔다, 다시 원상태로 되길 반복하는 이상한 상황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듯 쭈그려 앉아 있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맞지? 그렇지?"

머리카락 사이로 슬쩍 웃는 입꼬리가 보였다.

"너희가 날 속이려고 해도 소용없어."

그가 보는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수많은 어둠이 보였다.

증오.

분노.

역겨움.

원망.

수많은 부정적 감정이 섞여 있었다.

어제오늘 일이 아니기에 그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 어둠을 지그시 바라보다 달라진 게 없자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릴 뿐이었다.

"…아닌가. 내가 착각했나? 또 내 환청이 시작된 건가? 아. 모르겠네."

그의 입꼬리는 다시 원래대로 내리막길을 타서는 머리카락을 세게 쥐었다.

"귀찮아. 귀찮아. 귀찮아."

그는 손에서 어둠을 꺼냈다.

손가락을 가볍게 젓자 뽑히고 원상태로 돌아오길 반복하던 나무들이 제자리를 찾았다.

돌려줘! 돌려내라고!

아니, 꺼져버려! 사라지라고!

"언제까지 이럴래? 이제 슬슬 날 인정해."

아니. 널 우리는 널 인정하지 않아. 영원히.

"그래. 그래도 소용없어. 내가 찾아낼 거니까. 그리고 죽여버릴 거야. 그러면 너희가 날 인정하겠지?"

그는 곧 이빨을 내보일 정도로 크게, 사납게 웃었다.

죽어버려!

죽어버리라고!

저주를 퍼붓는 어둠의 소리에 그는 웃음을 멈췄다.

탁.

"다음에 또 보자."

그는 문을 열고 그 속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 * *

빛 하나 없는 까만 어둠 속에 루시온이 숨을 죽이며 조용히 눈동자를 굴렸다.

'기절했나?'

마지막으로 바닥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기억한 루시온이 입가를 핥았다.

카슨은, 아니 노비오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 엄청 걱정이 들었다.

라라라.

누군가 그곳에 서 있었고, 콧노래를 불렀다.

검은 구슬에 들리던 그 노랫소리와 똑같았다.

'어서 와.'

부드러운 목소리가 루시온을 맞이했다.

얼굴도, 표정도 없는 검은 형체가 루시온을 보며 마치 웃는 듯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루시온이 물었지만, 입이 아니라 머릿속에 제 말이 울렸다.

'그렇구나. 너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구나. 슬퍼. 속상해. 괴로워.'

하지만 검은 형체의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섞여 있질 않았다.

'나는 너의 모든 것이자, 유일한 것이야.'

이상한 말로 대답하자 루시온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이전에 어둠에게 들었던 말과 비슷했다.

'이제 하나를 얻었어.'

검은 형제가 말했다.

검은 구슬이 여러 개라는 건 지금 구슬을 발견했을 때부터 루시온은 이미 짐작했다.

검은 형체가 짐작을 확신으로 바꾸었다.

'드디어. 드디어.'

검은 형체는 루시온에게 다가왔다.

'이날이 오기만을 기다렸어. 정말 오래 기다렸어.'

얼굴도 없었지만,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반가웠다.

검은 형체는 루시온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부서졌구나. 깨져버렸어. 그래서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거였어.'

검은 형체는 마치 루시온을 위로하듯 토닥였다.

'괜찮아. 이제 한 개일 뿐이니까. 부서진 그릇은 다 고쳐질 거야. 그때는 나를 기억하겠지.'

'부서진 그릇이라고? 날 말하는 건가?'

'그들은 어둠에서 태어났으며 어둠을 따르는 종이 되었다.'

'…뭐라고?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갑자기 다른 소리를 하기 시작하는 검은 형체에 루시온은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검은 형체는 마치 손가락을 든 것처럼 손을 올려서는 루시온에게 말했다.

'이제 한 개야.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면 어서 들으러 와줘.'

싱긋 웃는 소리가 뒤이어 들렸다.

그 목소리만큼은 이상하게 구슬퍼 루시온은 가슴이 떨렸다.

'너....'

화악.

갑자기 무언가가 자신을 끌어당기는 느낌과 함께 주변에 있던 어둠이 걷어졌다.

루시온이 눈을 깜박였고, 라타와 제일 먼저 시선이 맞았다.

―루시온!

라타가 입에 물었던 공을 버리고서는 다급히 루시온을 꼭 끌어안았다.

―루시온! 루시오온! 이제 괜찮아? 안 아파? 라타는 엄청 걱정했어!

"괜찮냐니…?"

루시온의 시선이 주변으로 향했다.

자신의 방이었다.

'방금은 일은 꿈이었나?'

루시온은 자신의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그래. 네 방이 맞아.]

러쉘의 목소리가 들리자 루시온은 고개를 돌렸다.

의자에 앉아 물끄러미 자신을 보고 있었다.

왠지 러쉘이 퀭해 보여 루시온은 슬쩍 웃음이 났다.

[검은 구슬이 녹으면서 루시온 너한테 흡수됐고, 그대로 코피를 흘리면서 쓰러졌어. 여기까지는 기억이 나겠지?]

"아뇨. 검은 구슬이 녹은 것도, 저한테 흡수가 된 것도 다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루시온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베델이 루시온의 이마에 손을 올리자 그는 덜컥 놀라며 물었다.

"…혹시 열이 났어?"

[그래. 밤새 끙끙 앓았다. 지금은 괜찮아 보여.]

베델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도 오셨고?"

[물론이지. 루시온 공의 부친께서 오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베델의 대답에 루시온은 입이 바짝 말랐다.

검은 구슬이 그런 상황을 일으킬 줄은 몰랐다.

만약 힘을 얻더라도 그저 잠깐만 아프다 말겠지 생각했는데.

'형님께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변명도 다 생각했는데, …빌어먹을.'

루시온은 창문 너머로 햇살이 들어오는 이 분위기가 무척 곤란스러웠다.

일단 하루는 흐른 셈이 아니겠나.

[노비오만 왔겠어? 카슨도 오고, 안토니도 오고, 방금까지 계속 흄이 앉아 있었지.]

러쉘이 키득거리며 꼰 다리를 흔들었다.

그 모습에 베델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이렇게 보아도 아까 전까지 루시온 공이 언제 깨어날지 몰라서 제일 전전긍긍했다.]

[베델…!]

러쉘이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맞아! 라타도 봤는데 막 이런 표정으로 왼쪽으로 갔다가 오른쪽으로 갔어!

라타는 눈에 힘을 주며 왼쪽을 말할 때 왼쪽으로, 오른쪽을 말할 때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루시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대로 러쉘을 보려다 루시온은 무언가 이상해 라타를 보았다.

라타의 꼬리와 다리가 조금이지만, 한층 더 길어져 있었다.

루시온은 눈을 비비다 아예 상체를 일으켰다.

'윽' 하며 소리를 냈지만, 라타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라타, 너 자랐어?"

라타의 미소가 길어졌다.

―응! 라타가 컸어! 이히히!

라타는 루시온에게 안기듯 다가와 얼굴을 비볐다.

"왜 갑자기 자란 거야?"

―루시온의 어둠이 엄청 커졌거든! 그래서 라타도 자랐어!

라타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라타가 루시온을 태워줄 수 있겠지? 그렇지?

하지만 루시온은 라타의 물음에 대답해줄 수 없었다.

그저 놀란 표정으로 러쉘을 바라보았다.

[직접 살짝 움직여 보는 게 어때?]

러쉘이 씩 웃었다.

어둠을 한 바퀴 돌려본 뒤 루시온 역시 씩 웃었다.

이전에 빛의 신수인 트로에가 자신에게 축복을 해줬을 어둠이 1.5배 정도 늘어났었다.

검은 구슬은 그 이상.

어쩌면 2배에 가까울 정도로 늘어났다고 판단이 될 정도라 루시온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미쳤다.'

라타가 자라는 게 당연한 수준이었다.

'흄이 해낸 거야.'

중요한 건 검은 구슬이 하나가 끝이 아니란 점이었다.

[몸은 어때? 혹시 이상한 점은 없고?]

러쉘은 루시온이 멀쩡하다는 사실을 눈으로 담고서야 물었다.

자신이 놓친 부분이 있을 수도 있었다.

"예.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제 옷을 입은 것처럼 편안합니다."

정말이었다.

루시온은 검은 구슬을 쥐었을 때 느꼈던 오싹함과 반가움을 잊을 수 없었다.

[루시온. 나는 네 몸에 들어간 그 구슬이 뭔지 몰라. 왜 내 창고에 있는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때, 어둠이 네가 그걸 가져야 한다고 애원했어.]

"…어둠이 말입니까?"

―맞아. 라타도 들었어.

[나도 들었다.]

베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어둠이 어둠의 축복을 받은 자를 해칠 리가 없겠지만, 세상에 대가가 없는 힘은 없어. 그래서....]

"스승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더라도 제가 잡았을 겁니다. 강해질 수 있다는 데 왜 망설이겠습니까?"

루시온은 배의 상처를 통해 똑똑히 느꼈다.

죽고 싶지 않으면 힘을 키워야 한다는 걸.

[루시온. 강해지는 건 좋아. 하지만 최악의 선택만큼은 해서는 안 돼.]

"당연합니다. 저는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타락한 자는 행복해질 수 없지요. 그러니 절대로, 스승님께서 말씀하시는 최악의 선택은 하지 않겠습니다."

루시온이 눈웃음을 지었다.

―흄이다! 흄!

라타가 귀를 쫑긋 세우더니 당장 문으로 뛰어갔다.

―흄! 루시온이 깨어났어!

문을 긁는 라타의 행동에 조심스레 문이 열렸고 방으로 들어온 흄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루시온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도련님."

"잘못이라니?"

루시온이 눈을 깜박거리며 흄을 바라보았다.

곧 그가 가지고 온 수건과 온수가 담긴 대야로 잠깐 곁눈질을 줬다.

"제가 도련님을 위험에 빠트렸습니다."

"형님께 말실수라도 했어? 그 정도는 괜찮아. 내가 다시 말씀드리면 되니까."

루시온은 걱정이 되질 않았다.

러쉘하고 베델도 있으니 설령 흄이 잘못 말했다 해도 수습할 수 있게 도와주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걸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검은 구슬. 그게 도련님을 위험하게 빠트릴 줄은 몰랐습니다."

"흄."

"…예, 도련님."

"고개 들어."

흄이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그는 두려움과 죄책감이 묻어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고맙다."

루시온의 미소가 길어졌다.

"네 덕에 좋은 걸 얻었으니까."

루시온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한 흄에게 다시 천천히 알려주었다.

"검은 구슬. 그게 날 강하게 만들었어."

"제가 잘못한 게 아닙니까?"

"그래."

"제가… 도련님을 위험에 빠트린 것도 아닙니까?"

"그래."

흄은 그제야 안도했다.

마치 사람을 살린 것처럼 크게 환희하며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고마운 건 나야, 흄."

루시온은 피식 웃었다.

"내가 깨어났다고 아버지한테 말씀드려줘. 나눠야 할 말이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흄은 문 앞까지 걸어가서는 손잡이를 쥐다 말고 자신 없는 목소리로 루시온을 불렀다.

"…도련님."

"그래."

"어쩌면, 쓸데없는 소리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말씀…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조심스러운 흄의 물음에 루시온은 부스스한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뭐든 말해. 들어줄 테니까."

"도련님께서 검은 구슬을 얻으시고 난 후에 말입니다."

"그래."

"또 꿈을 꿨습니다."

흄은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그때 봤던 그 손가락이 아래를 가리켰고, '남부'라는 말을 제게 했습니다."

"…남부?"

이번에도 무얼 의미하는 건지.

루시온은 입술을 꽉 다물며 한쪽 눈썹을 올렸다.

* * *

흄의 말을 듣자마자 노비오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몸은 괜찮더냐?"

창백한 낯빛을 한 루시온을 보자마자 노비오는 다시금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괜찮습니다. 아버지도 아시잖습니까."

루시온은 자리를 권했다.

노비오가 자리에 앉자 루시온은 길게 끌 것 없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버지, 흄에게 어떤 말을 들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루시온."

"예."

"그 이야기라면 걱정하지 말거라. 내 네가 남부로 가는 걸 막지 않으마."

[뭐?]

소리는 엉뚱하게도 러쉘에게서 튀어나왔다.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그 팔불출인 노비오가?

122화. 남부로 출발

[노비오가 맞긴 맞아?]

러쉘은 노비오에게 바짝 다가가 이쪽저쪽을 살폈다.

[…노비오인데. 아무리 봐도 노비오가 맞는데.]

차차 얼굴을 일그러트린 러쉘은 깊은 의문에 빠져버렸다.

"진심… 이십니까?"

루시온 역시 믿기 어려웠다.

노비오라면 당연히 반대할 거라 생각해 변명거리를 몇 개 준비하던 참이었다.

"흄이 말하길, 흑마법사가 너를 공격했다고 했다. 맞더냐?"

'뭐야. 설명도 제대로 된 것 같은데, 아버지가 이렇게 나오신다고?'

루시온은 잠깐 눈을 깜박거렸다.

성벽 너머에 크로니아와 뉴브라가 싸우는 상황을 이용해서 자신이 유령들을 하늘로 보내버렸다.

이미 노비오와 카슨은 뉴브라 왕국이 흑마법사와 손을 잡았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하여 모든 상황을 이용해 뉴브라 왕국이 이젠 대놓고 흑마법사를 이용한다는 사실을 만들어버렸다.

"맞습니다."

루시온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내가 좀 더 빨리 너한테 지금 상황을 말해줬어야 했다. 너를 공격한 그 흑마법사는 아마도 뉴브라 왕국과 손을 잡은 흑마법사일 터."

'아버지께서 믿고 계신다는 건 나머지 사람들도 내가 만든 가짜 상황을 믿고 있다는 말이잖아.'

노비오는 자신이 본 사람 중에 가장 신중했다.

"물론, 아직 여러 의문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니 확실한 건 아니다."

루시온이 우쭐함을 느낄 때쯤, 노비오가 재를 뿌렸다.

키득키득.

러쉘이 옆에서 웃음을 흘렸다.

"어쨌든, 변경에 흑마법사가 나타났다. 이는 확실한 정보이며 내가 너의 여행을 반대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단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너를 꼭꼭 숨긴다고 해서 이미 나타난 흑마법사가 사라지지 않겠지."

루시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노비오의 말에 반응했다.

"놈들은 네가 이곳 변경에 머물며 공포에 떨길 바라고 있을 터. 또한, 우리가 소극적으로 나가길 바라고 있겠지. 하여 나는 네가 누구보다 빛날 곳으로 보내고 싶구나."

말과 달리 노비오는 불안한 시선을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더는 숨지도 말고, 공포에 떨지도 말고. 크로니아뿐만 아니라 너를 보호할 수많은 방패를 손에 쥐고서 당당히 섰으면 한다."

"…아버지."

진심을 담은 노비오의 말에 루시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가 놈들의 발목을 붙잡고 있을 테니, 너는 네 검을 가지거라. 네가 빛날수록 흑마법사는 너에게 쉽게 접근할 수 없을 테지. 하여, 너는 뒤에서 누가 흑마법사인지 판단할 시간을 벌 수 있지 않겠더냐?"

루시온은 그제야 노비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챘다.

흑마법사가 자신에게 오기 힘들어지도록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으란 소리였다.

장소가 노출되는 만큼 흑마법사가 숨을 곳 역시 줄어들 테니 흑마법사를 더 빨리 찾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에 큰 문제점이 있었다.

"아버지의 말씀이 일리가 있으나, 흑마법은 가장 조용한 마법입니다. 사람이 많을수록 표적이 되기 쉽습니다."

"헤인트 경이 이번 네 여정에 호위가 되기로 했다."

"...!"

"네가 언급한 대로 흑마법은 가장 조용한 마법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점을 보완할 방법은 빛의 힘을 지닌 자뿐이지."

루시온은 갑작스러운 말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렇지 않더냐, 루시온?"

노비오가 물었다.

[와.... 허를 찌르네. 맞는 말이긴 한데, 이게 음....]

러쉘이 턱을 매만졌다.

[루시온 공의 부친께서 큰 결심을 한 모양이다.]

베델은 노비오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빛이 루시온에게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허락한 걸 보면 얼마나 큰 고민을 했겠는가.

루시온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래. 아버지께서도 빛의 축복을 받은 자가 없다는 사실이 신경 쓰이셨겠지.'

호위가 많든 적든 흑마법사를 막을 수 있는 존재는 같은 흑마법사나 빛의 축복을 받은 이들뿐이었다.

아마도 자신이 변경 너머에 모습을 드러낸 일이 노비오가 마음을 먹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누굴 원망해?'

루시온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아무리 생각해도 헤인트뿐이었다.

신관도 아니고, 하물며 빛의 힘이 외부로 새어 나오지도 않는 사람은.

다만, 헤인트는 황실 사람이 아닌가.

루시온은 입술을 떼어냈다.

"형님도 따라옵니까?"

"카슨은 이번에 아마도 못 갈 듯하구나. 호위는 네가 조절해달라는 그대로이니 여기서 추가되는 인원은 황실 기사단뿐이다."

"괜찮겠습니까?"

"황실과 변경이 서로 견제를 한다는 헛소문을 말이더냐."

"헛소문입니까?"

"그래. 폐하와 내가 만든 헛소문이지. 크로니아는 언제나 황실에 충성하니 걱정하지 말거라. 오히려 내가 묻고 싶다. 괜찮겠더냐, 루시온?"

"괜찮습니다."

루시온은 어쩔 수 없이 허락했다.

아마 노비오의 제안이 아니더라도 황제가 억지로 자신 때문에 만든 제8 기사단을 붙였을 테니.

[정말 자신 있어? 헤인트가 어둠에 특히 더 예민하던데?]

러쉘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루시온은 대답할 수 없었다.

헤인트가 자신을 따라오는 건 정황상 어쩔 수 없었고, 어쩌면 붉은 실 때문에 벌어졌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해야 했다.

저 붉은 실을 잘라내기 위해서는.

루시온은 눈동자에 의지를 태웠다.

'무조건.'

* * *

탁!

남자는 이를 갈며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은, 후드를 걸친 이에게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던졌다.

팍.

그중 두꺼운 조각상 하나가 후드를 입은 자의 머리를 강타했다.

주르륵.

피가 흘러내렸다.

"…이제 속이 후련하십니까, 전하?"

중저음을 내며 남자가 물었다.

"속이. 속이 후련해? 지금 자네가 나에게 그리 물었는가?"

왕은 이를 빠드득 갈았다.

"지금 네놈들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 정녕 몰라서 그따위 질문을 하는 건가?"

"저희는 아닙니다."

"네놈들이 아니면 대체 누구인가! 누구냔 말이다!"

"전하께 드릴 말씀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이번 일은 저희가 아닙니다."

"이 망할 새끼들! 다 죽어가던 네놈들을 받아준 건 나다!"

"알고 있습니다, 전하. 그 은혜가 너무도 큽니다."

"날 도우라고 했지, 내 뒤통수를 때리라는 소리는 한 적이 없네!"

"그 또한 알고 있습니다."

꼬박꼬박 말대답하는 모습에 왕은 참다못해 왕좌에서 내려와 후드를 뒤집어쓴 자에게 다가가 멱살을 쥐었다.

"테슬라 제국 변경에 나타난 흑마법사가 네놈들이 아니면 누구인가? 어느 미친놈이 자신이 흑마법사라고 밝히면서 돌아다니냔 말이다!"

"흑마법사는 저희만 있는 게 아니니 진정하십시오, 전하."

그렇지 않아도 그 일로 짜증이 난 건 왕뿐만이 아니었다.

제물이 될 유령들 대부분이 사라져버렸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하필 변경 너머에, 내 군대가 크로니아를 자극할 그 순간에 흑마법사가 나타났다. 누가 보아도 내 나라, 뉴브라 왕국이 저지른 일이지 않은가!"

"…두려우십니까?"

섬뜩.

왕은 후드 너머로 드러나는 흑마법사의 침울한 미소에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아차.

흑마법사는 뒤늦게 깜짝 놀라서는 기세를 거두었다.

"저희 공허의 손이 있는 한 제국은 전하의 것입니다. 그러니 전하. 부디 안심하십시오."

왕의 손에 힘이 풀리자 흑마법사는 그에게 넙죽 엎드렸다.

콜록.

왕이 기침하자 흑마법사는 부드럽게 목소리를 내었다.

"저희가 저지른 일이 아니지만, 이번 일은 제대로 수습하겠습니다. 그러니 전하. 전하께서는 황좌를 손에 넣는 그 순간을 위해 부디 건강에 신경 쓰셨으면 합니다."

왕좌로 돌아간 왕은 힘이 빠진 얼굴로 입술을 떼었다.

"…루시온 크로니아가 남부로 향한다. 준비하게."

지긋지긋한 변경.

저 변경만 넘으면 제국은 자신의 것임을.

왕은 기침하며 왕좌의 팔걸이에 힘을 주었다.

"예. 루시온 크로니아의 목을 전하께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흑마법사가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