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온의 눈동자가 다급히 돌아갔다.
자신은 물론 라타와 러쉘도 들어왔다는 사실보다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 입이 돌아갈 기세였다.
주변에 어둠이 파도처럼 넘실거렸고, 빛도 없음에도 앞으로 이어진 길은 무척 환했다.
심지어 형광을 내는 존재가 사방에 퍼져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심해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어디서 많이 봤는데…?'
루시온의 눈동자가 반쯤 감겼다.
―우오오오! 거기 같다, 거기. 엄....
라타가 눈을 질끈 감고는 열심히 생각했다.
[죽음과 삶은 경계.]
―맞아! 대신전에서 러쉘이 보여줬잖아. 이히히, 라타는 기억하고 있었어!
"아…!"
루시온은 그제야 눈을 크게 떴다.
대신전에서 폭탄을 찾기 위해 러쉘이 자신의 어둠으로 흑마법을 사용해 정말로 죽음과 삶의 경계로 간 적이 있었다.
그때 보았던 풍경과 정말 비슷했다.
"그럼, 저 형광은 어둠입니까?"
[만약에 이곳이 죽음과 삶의 경계를 표현했다면 그렇겠지.]
루시온과 라타 근처를 맴도는 저 존재가 어둠이 아니라면 말이 되지 않았다.
루시온은 러쉘의 말을 듣고 나서야 안심하며 걸었다.
주변이 온통 어두웠지만, 모든 게 보였기에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묘하게 통증과 열감이 가라앉아 머리까지 상쾌했다.
"뭔가 있을까요?"
루시온이 걸으면서 물었다.
[글쎄.]
돌아오는 대답은 뻔했다.
러쉘과 자신이 한 번도 오지 않았던 장소이기에 앞에 뭐가 펼쳐질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루시온은 입을 다물었다.
아샤는 이곳이 자연스레 검은 구슬의 힘을 흡수하기 위한 장소라고 했다.
어떻게 흡수를 한다는 걸까.
힘 전부를 흡수할 수 있다는 걸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편하지? 숨쉬기도 좋지?
그때, 어둠이 말을 걸어왔다.
"그렇습니다."
루시온이 대답하자 어둠은 눈을 깜박거리며 몸을 배배 꼬았다.
루시온이 나한테 말을 걸어줬어. 아. 너무 기뻐!
[왜 그렇게 루시온을 좋아하는 건데?]
밖과 달리 이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애정에 러쉘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
루시온이니까.
사랑스러운 아이니까.
어둠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렇긴 한데. 루시온이 대체 다른 사람하고 뭐가 다르기에 이래?]
러쉘은 고개를 끄덕이며 재차 물었다.
순간 낯간지러움에 움찔거리던 루시온도 궁금했기에 눈동자가 어둠을 향해 있었다.
―라타는 알아! 루시온은 엄청, 엄청 다정해. 착해. 예뻐. 사랑스러워!
"라타!"
루시온은 다급히 라타를 불렀다.
'맞아, 맞아'라며 긍정하는 어둠의 말이 밖과 달리 너무도 크고, 또렷하게 들려왔다.
루시온은 낯부끄러워 죽을 맛이었다. 볼이 화끈거렸다.
―왜?
"거기까지 해."
―라타는 더 할 수 있는데.
"거기까지 해."
―피. 라타는 더 말할 수 있는데. 그래도 라타는 착하니까 여기까지만 말할 거야. 나중에 라타한테 말해달라고 하면 라타가 더 말해줄 수 있어.
"…알았어."
딱히 바라진 않았지만, 루시온은 적당히 대답했다.
[너희가 말해 봐.]
하지만 러쉘은 평소처럼 웃지 않았다.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 생각한 건지 한없이 진지했다.
너도 알고 있잖아, 러쉘.
[내가 알고 있다고…?]
러쉘이 놀라며 물었다.
어둠은 사방에 퍼져 있기에 자신이 입 밖으로 말해버리는 이상 어둠도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방금 말은 달랐다.
마치 자신의 과거를 아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아. 기억을 잃었지?
쉿, 여기까지야. 이 공간이라도 위험해.
맞아. 그랬어. 이건 말할 수 없어. 또 물어봤자 소용없어. 말할 수 없으니까.
이어지는 어둠의 말에 루시온이 입을 열었다.
"당신들의 적이 대체 누구길래 이렇게 눈치를 보는 겁니까?"
러쉘에게 물어봐봐. 그러니까, 러쉘이 기억을 찾으면.
우린 말할 수 없어. 큰일이 나.
맞아. 붙잡혔거든. 얽매여버렸어. 그게 너무 싫어.
루시온은 어둠이 최대한 던져주는 힌트를 귀에 담았다.
어떤 존재, 그러니까 어둠조차 눈치를 볼 만큼 큰 존재가 있는 건 분명했다.
뭘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그 존재가 어둠을 억누르는 것 같고.
그 때문에 특정 말이든, 중요한 말이든 입 밖으로 꺼내면 어떤 존재가 알아차리는 시스템이 아닐까.
"그럼, 스승님의 기억은 어떻게 찾을 수 있습니까?"
루시온이 물었다.
검은 구슬 있잖아. 그걸 모아.
"검은 구슬을 모으면 정말 스승님께서 기억을 되찾을 수 있습니까?"
전부를 되찾을 수는 없겠지. 그게 대가였으니까.
하지만 검은 구슬을 모은다면, 그렇다면 어쩌면 대가로 잃어버린 걸 되찾을지도.
'대가… 라고?'
루시온의 눈동자가 러쉘을 향했다.
[그래. 대가야. 내 기억이 사라진 건 어떤 흑마법을 사용한 대가 중 하나였어.]
여기까지 나왔는데 러쉘은 뭘 더 주저하겠나 싶어 말을 꺼냈다.
"스승님께서 흑마법을 사용하셨다고요? 대체 무슨 흑마법입니까?"
루시온이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어둠이 루시온 근처로 다가와 어서 움직이라며 재촉했다.
안 돼. 계속 가. 여기는 멈추면 안 돼.
아프잖아. 아프지 않으려면 걸어야 해.
별수 없이 루시온은 다시 천천히 걸어갔다.
러쉘을 바라보면서.
왜 걸어야 하는지도 궁금했지만, 가장 궁금한 건 바로 러쉘이 사용한 흑마법이었다.
[그렇게 쳐다봐도 나도 몰라. 내가 수첩에서 얻은 정보는 딱 어둠이 말한 수준과 비슷해. 두리뭉실, 핵심만 빠진 알갱이 정도?]
답답한 얼굴로 러쉘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제가 꼭 찾아드리겠습니다."
루시온은 어차피 검은 구슬을 모을 생각이었다.
검은 형체가 말한 그 뒷이야기가 궁금했고, 자신도 강해질 수 있었고.
무엇보다 지금 러쉘의 기억까지 찾을 수 있다고 하니 검은 구슬은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할 물건이 되어버렸다.
[…그래.]
러쉘은 고개를 살짝 돌렸다. 루시온에게 짐을 준 것만 같아 미안한 마음이 컸다.
"그럼 혹시 검은 구슬은 총 몇 개가 있는 겁니까?"
흄이 알려줄 거야. 훌륭한 인도자이니까.
'몇 개인지도 말을 못 하는 건가?'
얼핏 이유를 들었어도 루시온은 참 답답하다 싶었다.
공허의 손. 그 단체의 우두머리일까.
아니면 다른 존재일까.
'내가 아무리 소설을 비틀었어도 너무 달라지고 있는데?'
루시온은 자신의 존재로 달라진 상황에 죄책감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자신의 가슴을 찌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여긴 우리가 존재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공간을 따라 만들어봤어.
빛이 조금도 들어오지 않은 장소이기도 하지.
그래서 어떤 방해도 없어. 마지막까지 걸으면 그 힘을 자연스럽게 흡수할 수 있게 도와줄 거야.
어둠은 기뻐하며 말했다.
'도와주는 수준인가?'
루시온이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도 지금으로서는 나쁘지 않았다.
검은 형체는 자신을 부서진 그릇이라 불렀다.
부서진 그릇은 무얼 담아도 새어 나가기 마련이었으니까.
―라타는 여기가 너무 좋아! 포근한 이불 같아.
루시온은 어둠 못지않게 행복해하는 라타를 보며 앞으로 나아갔다.
'즐거우면 됐어.'
처음에 찰싹 달라붙을 정도로 가까이 있던 어둠은 어느새 멀리서 루시온을 지켜보았다.
루시온의 발걸음도 경쾌하게 뒤바뀌었다.
걸으면 걸을수록 몸이 가벼워져 기분도 점점 좋아졌다.
"혹시 다음에 또 와도 됩니까?"
루시온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만약 정말로 훨씬 괜찮아진다면, 혹시 다음에 또 검은 구슬을 얻어서 지금처럼 끙끙 앓느니 어떻게든 이곳에 오는 게 좋지 않을까.
응! 얼마든....
어둠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
루시온이 의문을 느끼며 뒤를 돌아보자 자신을 졸졸 따라오던 형광의 무리가 그대로 정지해 자신들끼리 속닥거렸다.
하지만 그 소리만큼은 들리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루시온이 라타를 보자 라타가 귀를 쫑긋 세울 뿐 고개를 가로저었다.
―라타한테도 안 들려. 라타도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어.
[일단 신경 쓰지 말고 차분히 걸어. 회복에만 집중해, 루시온.]
러쉘은 루시온의 고개를 억지로 돌렸다.
"신경 쓰입니다. 엄청."
[그래. 신경 쓰이겠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지금은 회복에 집중하자고.]
"혹시 아샤가 말했고, 어둠이 언급한 '그놈'이 누구인지 짐작이 가십니까?"
[기억 잃은 나한테 물으면 뭐가 나오겠어?]
"그럼 스승님의 아지트로 가서 제대로 뒤지는 건 어떻습니까?"
[아니. 그래도 찾을 수 없을 거야.]
러쉘이 딱 잘라 말했다.
"왜 그렇게 확신하십니까? 수첩에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까."
[천재인 내가 매달리고 매달려서 겨우 수첩, 그것도 종이 쪼가리에 흑마법 하나를 걸어놨어.]
러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평소와 달리 그의 언성이 조금 높았다.
[생각해봐, 루시온. 내가 나한테 알리려고 별짓을 안 했겠어? 그런데도 손바닥만 한 수첩에 흑마법을 거는 게 전부였다고. 이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
"아뇨. …이해했습니다."
최후의 최후의 발악이 수첩 하나에 걸린 흑마법이 전부였단 말이었다.
[그게 대가야. 그게… 지금 내 꼴이고.]
러쉘이 루시온의 머리에 손을 올리며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도 너라도 건졌으니 다행이지. 네가 없었어 봐라. 아마 벌써 미치고, 눈이 새빨개져서 타락한 유령이 됐겠지.]
러쉘이 키득거렸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유쾌하지 들리지 않았다.
"저도 다행입니다. 스승님이 절 건져주지 않았으면 그 방에 갇혀서 손톱이 남아돌질 않았을 테니까요."
그래도 루시온은 낄낄 웃으며 자신의 손을 펼쳤다.
그때와 달리 손톱이 반듯하게 잘 자라 있었다.
―라타는?
라타가 루시온과 러쉘 사이를 비집고 와서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래. 라타 너도 만나서 참 다행이야.]
러쉘이 라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금세 라타는 꼬리를 흔들며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내가 제일 잘한 일이 스승님을 만난 일이고, 그다음이 라타 너야."
두 번째라는 사실에 라타가 충격을 받았는지 그대로 멈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루시온을 보며 라타가 울먹였다.
―라타가 첫 번째가 아니야…? 라타는… 라타는 루시온이 첫 번째인데. 전부 다 첫 번째인데.
루시온은 축 늘어진 라타를 한 손으로 들어 올려서는 다시 앞으로 걸었다.
금세 자신의 손등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 말이 그렇게도 슬픈가 싶었다.
"스승님께서 그 구렁텅이에서 날 건네준 순간이 잊히질 않아서. 그래서 그래."
힘없이 처졌던 라타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루시온이 엄청, 엄청 아팠을 때 말고 엄청, 엄청 슬펐던 때를 말하는 거야?
"그래."
라타가 고개를 돌려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어둠에서 탄생했기에 자신과 닮은 푸른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했다.
―라타가… 싫은 건 아니지?
"내가 왜 널 싫어해?"
라타의 꼬리가 흔들렸다.
―루시온이 라타를 싫어하지 않으면 됐어. 라타는 그걸로 기뻐!
[…혹시 나 몰래 혼낸 적 있어?]
러쉘이 라타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런 적 없습니다. 라타가 혼날 일이 어디 있습니까?"
가끔 자신이 마시는 차를 라타가 좋아하는 공으로 엎고, 쿠키가 좋다고 달려들다 그릇도 엎고, 꼬리를 가지고 장난치다 정리해놓은 자료도 흐트러트리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앞발로 잡아당기며 놀지만, 그 정도는 넘어갈 수 있었다.
장난기가 있어 봐야 얼마나 많겠는가.
―라타는 이제 괜찮아. 내려줘도 돼.
라타가 훌쩍이며 루시온의 품에서 바둥거리자 루시온이 내려주었다.
언제 울었냐는 듯 또 해맑게 길을 뛰어다녔다.
'회복이 빨라서 좋네.'
피식 웃던 루시온은 아직도 그대로 멈춰 있는 어둠을 바라보았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심각하게 나누는 건지.
[그런데 왜 또 안 물어봐?]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대가로 기억을 잃었다. 이렇게 쉬운 말을 알려주지 않았잖아. 화를 내야지.]
"스승님께서 준비가 덜 되셨는데 제가 왜 화를 내겠습니까?"
차마 러쉘에게 말하지 못하는 비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러쉘의 비밀을 캘 자격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진짜 잘한 건, 루시온 널 내 제자로 들인 일이야.]
높이 올라간 러쉘의 미소만큼이나 루시온의 가슴이 무거워졌다.
비밀이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존재였던가.
* * *
"...!"
흄이 눈을 떴다.
그는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다 아샤를 보았다.
"좋은 꿈 꾸셨나요?"
"…이번에는 손이 아니었습니다. 형체가 보였어요. 제가 아는 형체인데…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흄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형체가 검은 구슬이 몇 개가 있는지 알려주었다.
너무 익숙한 형상이었다.
"괜찮습니다. 꿈은 꿈이니 그렇게 억지로 기억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아샤가 흄의 이마를 부드럽게 쓸었다.
아샤는 흄이 잠들기 전까지 자신이 아는 라비엔의 이야기를 알려주었다.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에서 살았는지.
"아샤 님은 참 다정하십니다."
흄이 상체를 일으키며 아샤를 바라보았다. 아샤가 따뜻하게 웃어주었다.
"그런데 어둠께서는 왜 저한테 말씀하지 않는 겁니까?"
흄은 눈을 깜박였다.
애초에 어둠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도 않았다.
"인도자는 라비엔 중에서도 다릅니다."
아샤가 말을 하다말고 멈칫거렸다.
"이 말은 나중에 해야겠습니다. 지금 루시온 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161화. 알뜰살뜰하게
* * *
길은 멀어 보이는 것과 별개로 생각보다 짧았다.
걸으면 걸을수록 루시온은 몸을 짓누르는 어떤 힘에서 속박되는 것과 함께 어둠이 점점 커지는 기분에 휩싸였다.
루시온.
길의 끝자락 때쯤에 도착할 때 어둠이 불렀다.
루시온은 하나둘 모여드는, 형광으로 된 어둠을 바라보았다.
있지. 아샤를 통해서 이곳에 언제든 와도 된다고 말했지만, 상황이 달라졌어.
"상황이 달라졌다뇨?"
루시온이 속도를 늦췄다.
그놈이 어둠의 신수를 발견했어.
우리가 열심히 숨겼는데, 찾아버렸어.
"…라타를 말입니까? 라타를 발견한 게 왜 큰일입니까?"
루시온의 물음에 어둠은 말해도 될지 말지 망설였다.
어둠이 최대한 루시온의 귓가에 바짝 붙었다.
하지만 절대로 루시온을 만지지 않았다.
놈이.
죽일 거니까.
짧은 경고에 루시온은 온몸에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라타를 보자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저, 정말입니까?"
그저 둘러 물어보는 게 전부였다.
팔짱을 끼고 있던 러쉘이 놀란 표정을 하며 팔을 스르르 아래로 내렸다.
루시온의 표정만으로 어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차린 듯했다.
맞아. 사실이야.
어둠이 대답했다.
'…미친.'
루시온은 저절로 두 주먹이 쥐어지다 못해 파르르 떨릴 지경이었다.
왜?
머릿속에 의문이 깊게 자리 잡았다.
그놈과 라타가 무슨 관계이길래 라타를 죽인다는 건지.
―왜 그래 루시온? 라타가 뭐 잘못했어? 그렇게 주먹 쥐면 아픈데.
아무것도 모르는 라타는 그저 제 잘못인가 싶어 발을 동동 굴렀다.
"방법이 없습니까?"
루시온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시간을 버는 방법뿐이야.
그건 이미 아샤한테 알렸어. 아샤가 알려줄 거야.
루시온의 걸음이 빨라졌다.
미안해.
…미안해, 루시온.
어둠의 사과가 루시온의 귀에 닿지 않았다.
저들이 왜 사과를 하는지, 라타가 왜 노려지는지.
무엇 하나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아샤를 만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이곳으로 오고 싶다면 알려줘.
놈의 시선을 피해서 초대장을 보낼게.
어둠의 말을 마지막으로 루시온은 문을 열었다.
바로 아샤가 보였다.
"주십시오."
루시온은 무례함을 알지만, 아샤를 보자마자 그녀를 재촉했다.
"여기 있습니다."
하지만 아샤는 당황하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방울이 그녀의 손바닥에 있었다.
"놈이 다가오면 이 방울이 울릴 겁니다."
'고작 이 방울이… 해결법이라니.'
아무리 어둠이 시간을 버는 방법이라고 말했어도 너무하지 않은가.
루시온은 오만상을 쓰며 방울을 손에 쥐었다.
"…감사합니다."
말을 하는 내내 입 안이 썼다.
해결 방법이 없다는 소리가 아닌가.
―우오오! 반짝거려!
아무것도 모르고 좋아하는 라타를 보자 루시온은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카슨의 검에 찔렸을 때보다 더 아팠다.
저 어린 여우가 무슨 잘못이 있어서 목숨이 노려지는 건지.
"흄."
흄을 부르는 루시온의 목소리가 무거웠다.
흄은 당황한 표정을 애써 숨기며 대답했다. 루시온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만 같지 않은가.
"예, 도련님."
"검은 구슬이 총 몇 개인지 알아냈어?"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흄은 기어코 깜짝 놀랐다.
아직 말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을까.
"몇 개인데?"
루시온이 흄을 재촉했다.
"앞으로 5개입니다."
루시온 자신이 흡수한 검은 구슬을 포함해 총 6개였다는 소리였다.
하나는 죽음의 기사인 브로슨이.
하나는 미론스트 왕자인 브라키온 미론스트가.
이를 제외해도 3개가 어디 있는지 몰랐다.
"만들어진 것도, 만들어지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만들어지고 있는 것도 있다고?"
"예. 그렇습니다."
흄이 대답했다.
어둠은 루시온이 물었음에도 검은 구슬이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다만, 꼭 필요한 힘이라고만 반복해서 말할 뿐이었다.
'만들어지고 있는 거라니. 장소는 상관없는 건가?'
루시온은 의문을 가졌다.
브로슨이 어둠의 부탁으로 가져간 검은 구슬 말고도 자신이 처음으로 발견한 검은 구슬은 러쉘의 아지트에 있었다.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
"그럼 나머지는 어디에 있는데?"
"루시온 님."
루시온의 재촉에 아샤가 부드럽게 루시온을 불렀다.
"말씀하십시오."
"부디, 조급해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그게 마음대로 되질 않습니다. 저도 조급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루시온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라타를 노린다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러쉘이 루시온의 어깨를 쥐었다.
[그래. 진정해.]
"루시온 님."
아샤가 루시온의 손을 꼭 붙잡았다. 당장 손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이상할 만큼 너무도 따뜻해 루시온은 어깨를 살짝 늘어트렸다.
자신이 흥분했다는 걸 인지했어도 답답함은 풀리지 않았다.
"어둠의 신수는 우리에게도 무척 소중한 존재입니다."
아샤는 루시온과 라타를 보며 다정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주,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왔습니다."
아샤의 말인지. 어둠의 말인지.
어느 쪽인지 헷갈렸다.
"드디어 탄생한 존재입니다. 어둠의 신수는 아주, 아주 많은 희망을 안겨주는 존재이기도 하죠."
아샤는 무언가 내뱉고 싶은 말을 꾹 참는 듯했다.
"지키겠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루시온은 정에 호소하는 말이 아니라 자신에게 확신을 주었으면 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알려주었으면 했다.
"저항하겠다고 합니다."
갑자기 아샤가 입술을 꾹 다물며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곧이어 그녀는 어떤 각오를 다지며 말을 내뱉었다.
"…존재 자체를 걸고."
루시온은 이어지는 아샤의 말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존재 자체라니.
이건 지키겠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넘어서지 않았던가.
"꼭… 그래야만 합니까."
루시온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라타가 소중한 것과 별개로 누군가의 존재로 지켜지는 거라면, 이게 과연 맞는 걸까.
"이 방법밖에 없습니다."
아샤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방법이 그뿐이라니.'
루시온 자신이 라타의 주인이었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순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자신이 해야 하는 건 하나였다.
"제가 검은 구슬을 찾는다면. 그럼 상황이 나아질 수 있습니까?"
"예."
아샤가 굵고 짧게 대답했다.
그걸로 됐다.
루시온은 시선을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순례길을 다 돌고 오는데 못해도 4~5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자신이 순례길을 도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 몰라도 아직 해가 하늘에 떠 있었다.
잠깐 쉴 시간이 있겠지.
'침착하자.'
루시온은 길게 내뱉은 숨과 함께 불안감을 허공으로 날려버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흔들리거나 동요하는 일은 없어야 했다.
'내가 상대해야 할 적이 조금 더 커졌을 뿐이야.'
죽음에서 벗어나는 일은 마치 질척한 늪 속을 빠져나가는 일처럼 느껴졌다.
하나를 해결하면 두 개의 문제가.
두 개를 해결하면 다섯 개의 문제가.
하지만 가만히 있으면 죽는다.
적이 늘어나더라도 차분히.
머리는 차갑게.
루시온이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아샤를 향해 입을 움직였다.
"혹시 맛있는 거 있습니까?"
* * *
"어땠어?"
헤인트가 루시온을 보자마자 당장 묻고 싶었지만, 그가 마차에 오른 뒤에 잠깐 기다렸다가 자신까지 탄 후에야 입을 움직였다.
같은 경험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이해가 되지만, 루시온은 헤인트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어떻긴 뭘 어때. 라타가 노려진다는 말을 듣고 왔는데.'
하지만 루시온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멋졌습니다. 제 평생 그런 광경은 처음입니다."
"그렇지?"
헤인트가 신나 하며 말했다.
"예. 생각 외로 포근했고요."
"어두웠지?"
"그런데 생각보다 밝았습니다."
루시온이 눈치껏 적당히 맞장구를 치자 헤인트의 입꼬리가 높이 올라갔다.
[같은 곳을 갔다고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야.]
러쉘이 헤인트를 보며 살짝 비웃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는가?]
조금 전부터 이상하게 살짝 가라앉은 분위기에 베델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루시온이 아샤랑 간식을 먹고 있었을 때도, 잡담해도, 루시온은 평소와 달랐다.
러쉘이 자신의 꼬리를 잡으러 빙글빙글 도는 라타를 바라보다 조용히 검지를 입술에 올렸다.
무슨 일이 생겼음이 틀림없자 베델은 금세 루시온이 걱정됐다.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루시온."
헤인트가 입을 열었다.
"말씀하십시오."
"이제 동부에 열리는 축제에 가면 끝이지?"
"맞습니다."
"혹시 어디 더 들릴 때가 있어? 아니면 가고 싶던 곳이나."
"북부에 잠깐 머무를 겁니다. 한 이틀 정도요."
"그래. 잘 생각했어. 여행인데 쉬엄쉬엄 움직여야지. 그렇지 않아도 네가 앞만 보는 황소 같길래 조금 쉬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보려던 참이었어."
―황소가 뭐야? 라타는 그런 거 본 적이 없는데.
라타가 빙글빙글 돌다 말고 루시온을 빤히 바라보았다.
덩달아 말을 마친 헤인트도 루시온을 지그시 보았다.
[뿔 달린 소야. 나중에 흄한테 그려 달라고 하자.]
베델이 라타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안색이 좋아졌는데?"
헤인트가 말했다.
아.
루시온이 뒤늦게 자신의 이마에 맴돌던 열감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짜 효과가 있었어?'
[…뭐야. 아까 베델이 네 이마를 짚으면서 그렇게 말했는데?]
러쉘이 곧 눈 사이를 모았다.
[루시온. 생각은 이제 그만하고 너도 좀 챙겨. 괜찮을 거니까.]
루시온이 잠깐 멈칫거렸지만, 곧 라타를 쓰다듬으며 태연하게 헤인트를 보며 말했다.
"순례길을 걸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마 그럴 거야. 나도 그랬으니까. 몸이 더 좋아졌지."
루시온은 헤인트의 미소가 오늘따라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 * *
[…대체 누가, 누가 그런 짓을 벌인단 말인가?]
낮잠을 만끽하고 있는 라타를 바라보며 베델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어떻게 저 작은 여우를 어떻게 죽인다는 소리를 할 수 있는지.
"그걸 말할 수 없나 봐."
루시온은 아샤에게 받은 방울을 보여주었다.
일단 임시로 끈을 달긴 했으나, 허술했다.
"놈이 가까이 오면 방울이 울릴 거라고 했어."
"그래서 도련님께서 그런 슬픈 표정을 짓고 계셨습니다. 저는 그것도 모르고...."
흄의 눈꼬리가 아래로 향했다.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루시온의 상태가 나아졌음에 기뻐했고, 자신과 같은 라비엔을 만나서 행복에 젖어버렸다.
"고개 들어, 흄."
루시온이 말했다.
"일단 당장 바뀌는 건 없어."
[그렇지. 당장 바뀌는 건 없어.]
러쉘도 루시온의 말에 동조했다.
[아마 라타를 계속 노리고 있었을 거야. 지금까지 어둠이 그걸 필사적으로 막았고. 어쩌면 단 한 번의 실수로 이런 결과가 나타날 수 있어. 하지만 결과적으로 바뀌는 건 없어.]
러쉘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저 일어나야 했을 일이 빠르든 늦든 일어난 것뿐이었다.
"다들 티 내지 말았으면 합니다."
루시온은 숨을 짧게 내쉬며 말했다.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루시온 공.]
베델은 살며시 미소를 내보였다.
"예. 저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흄도 루시온을 안심시키며 말했다.
[내 입이 무거운 거야 알고 있잖아?]
러쉘이 씩 웃었다.
그제야 루시온은 안심하며 라타가 먼저 쏙 들어가 있는 침대를 바라보았다.
"그럼, 잠깐 낮잠 좀 자겠습니다. 이상하게 피곤하네요."
완전히는 아니지만, 흡수되지 못했던 검은 구슬 대부분의 힘이 자신의 어둠으로 차올랐다.
처음 검은 구슬을 흡수했을 때 기절한 걸 생각해보면 지금 흡수된 양이 소량임에도 밀려드는 피곤함을 이겨내긴 어려웠다.
[잘 생각했어. 공에게 필요한 건 바로 휴식이니까. 얼른 자.]
흄이 얼른 침대로 가 이불과 라타의 위치를 살짝 바꾸었다.
"제가 나중에 깨워드리겠습니다."
"그래."
루시온은 힘이 빠진 걸음걸이로 침대를 향해 나아갔다.
침대에 궁둥이를 붙이자마자 바로 잠이 몰려들었지만, 애써 눈꺼풀을 붙잡아서는 흄을 불렀다.
"흄."
"예, 도련님."
"아샤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 말해. 어떻게든 갈 테니까."
"도련님."
"왜?"
"지금은 아무 생각하지 마시고, 푹 주무셨으면 합니다."
흄이 조심스레 말문을 떼며 이불을 걷어 올렸다.
이미 신경 쓸 게 한둘이 아님에도 루시온은 자신까지 생각해주고 있었다.
그럼 대체 언제 루시온 본인을 생각할 시간이 있을까.
흄은 그게 참 안타까웠다.
"그래. 나중에. 일어나서 말하자."
루시온은 미소를 짓다 눈을 감았다.
그제야 흄은 안도하며 루시온의 숨소리가 깊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자신도 루시온에게 할 이야기가 많았으니.
"러쉘 님."
[그래.]
"한 가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말해.]
"도련님께서는 과거에 어떤 분이셨습니까?"
162화. 알뜰살뜰하게(2)
안토니에게 이미 몇 번이나 '막내 도련님은 특히 잘 지켜봐야 한다'라는 경고와도 같은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을 돌볼 줄 모르는 사람일 줄이야.
[갑자기 왜?]
러쉘이 물었다.
"도련님께서는 원래 이렇게 자신을 돌볼 줄 모르시던 분이셨는지 궁금합니다."
러쉘은 라타와 함께 유일하게 유령에게 시달렸을 때의 루시온을 알고 있었다.
흄은 루시온의 과거가 궁금해졌다.
라타와 놀다 보면 라타가 한 번씩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곤 했다.
―루시온은 원래 라타를 좋아하지 않아. 라타는 루시온한테 사랑받았으면 좋겠어. 그러면 라타는 엄청, 엄청 행복할 텐데.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본 루시온은 라타를 정말 아꼈으니까.
라타만큼 곁을 내어주고 접촉하는 이는 드물었다.
시녀가 루시온을 치장할 때도 혹여나 루시온의 살갗에 닿지 않게 무척 조심하곤 했다.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루시온이 티를 내지 않고, 어쩌면 남들은 보지 못할 정도로 사소한 반응일지도 몰랐지만, 자신의 손이 실수로 루시온의 살갗에 닿았을 때, 눈에 깃든 공포를 보고 말았다.
거의 반사적인 행동에 가까웠다.
하지만 라타는 달랐다.
단 한 번도 공포를 내비친 적이 없었다.
[그래. 루시온을 이해해보려는 의도도 좋지만, 루시온이 원하지 않을 텐데. 나중에 본인한테 물어봐. 그런 걸로 화내지 않으니까.]
러쉘이 팔짱을 꼈다.
"…그렇습니까?"
흄이 시선을 살짝 내렸다.
[그래도 간단한 정도라면 알려줄 수는 있지.]
러쉘은 과거를 떠올리며 턱을 매만졌다.
[확실한 건 지금이랑 엄청 달랐어. 물론, 그때도 자신을 돌보지 않은 건 여전했지. 아니, 지금이 더 나아.]
[그게… 정말인가?]
베델이 속상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도 루시온이 참 걱정스러웠다. 마치 한계에 도달하기 직전까지 자신을 몰아붙이지 않는가.
[밥도 거의 안 먹어서 메말랐고, 잠도 거의 못 자서 매 순간 신경이 날카로웠어. 지금보다 소리에 더 예민했고. 뭐, 그랬지. 어땠는지 대충 감이 오지?]
"유령 때문입니까?"
흄의 눈썹이 아래로 처졌다.
[그것도 있고, 납치됐을 때의 상처와 겹쳤을지도 몰라.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잖아.]
[나는 계약하면서 납치됐을 때의 기억 중 일부를 봤어. …공이 미치질 않은 게 다행일 정도였지.]
베델이 갑옷에 둘린 한쪽 팔을 세게 쥐었다.
[그래서 흄. 나도 러쉘의 말에 동의해. 직접 물어보는 게 어떻겠는가?]
"하마터면 제가 큰 실수를 할 뻔했습니다. 도련님이 깨어나시면 그때 물어보겠습니다."
흄이 안도했다.
루시온에게 혼나는 것도 싫고, 그가 슬퍼하는 것도 싫었다.
[그래도 루시온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 생각보다 단순하거든.]
러쉘이 기특한 얼굴로 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보면 볼수록 루시온이 왜 흄에게 곁을 내어줬는지 알 것 같았다.
속이 아주 알차 있었다.
"저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습니다. 도련님만큼 편하신 분이 없고요."
흄이 방긋 웃었다.
이름도, 살 곳도, 삶도, 하다못해 사람이 아닌 자신의 존재까지 인정해주었다.
거의 모든 걸 받았다는 사실을 떠나서 그냥 루시온 곁이 참 편안했다.
"제가 행복한 만큼 도련님께서도 행복해지셨으면 합니다."
흄이 살며시 빌었다.
루시온이 바라는 행복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부디 이루어졌으면 했다.
[나도 그렇게 빌고 있어.]
베델 역시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아.]
베델이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리듯 러쉘을 바라보았다.
[혹시 그대는 루시온 공이 무얼 바라는지, 공이 원하는 행복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
흄마저 러쉘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알고 있지.]
러쉘은 자랑스럽게 자신을 가리켰다.
"정말입니까?"
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모르면 안 되지. 나는 루시온의 스승인데.]
목소리마저 힘이 들어가자 흄과 베델의 기대감이 저절로 커졌다.
[루시온이 바라는 행복은 그냥 평범하게 사는 거야.]
러쉘이 대답했다.
"평범하게요…?"
흄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평범하게.]
러쉘의 대답에 흄과 베델의 심정이 더 복잡해졌다.
평범한 삶을 살아본 적이 없었다.
"그게… 어떤 걸까요?"
흄이 어려운 문제를 만난 것처럼 인상을 구겼다.
[여기 있는 누구도 평범함이 뭔지 몰라. 평범한 삶을 살아본 적이 없을 테니까.]
러쉘이 재미있다는 듯이 미소를 그렸다.
[그렇다고 너무 고민하지 마. 결국, 행복하다는 걸 느끼는 건 루시온이니까.]
러쉘의 눈 사이가 살짝 좁혀졌다.
[그래도 아마 지금 루시온은 행복할 테고, 그 행복을 위해서 달리고 있을 거야.]
흄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뭘 하려고 그러는가?]
다짜고짜 흄이 소파에 눕자 베델은 눈동자를 굴렸다.
"검은 구슬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려고 그럽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잠이 오지 않아도 일단 눈을 감아봐야겠습니다."
[좋은 생각이네. 이 중에서 루시온에게 지금 가장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흄 너니까.]
기특한 생각에 러쉘은 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 *
"내가 바라는 행복이 뭐냐고?"
뜬금없는 흄의 물음에 루시온은 손에 가면을 쥔 상태로 잠깐 멈칫했다.
낮잠만 잔다는 게 그만 다음 날까지 꼴딱 자버리고 말았다.
덕분에 몸이 오래간만에 아주 가벼웠다.
요사이 흑마법사가 자신을 습격한 일도 없었고, 남부에서 중부로, 중부에서 북부로 향하는 중에도 평화로운 탓인지 헤인트는 아주 쉽게 자신의 외출을 허락했다.
'흄이 새로운 책을 읽었나?'
이따금 흄이 느닷없는 질문을 하곤 했다.
그때마다 특이한 책을 읽고 난 후였고.
―라타도 궁금해! 말해줘, 루시온!
라타의 꼬리도 때마침 흔들렸다.
루시온은 미간을 찌푸리다 말고 베델까지 자신을 바라보자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
분명 자신이 자고 있을 때, 러쉘이 나서서 쓸데없는 말을 한 게 틀림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베델까지 답을 바라는 눈빛으로 자신을 볼 리가 없으니까.
"비밀이야."
루시온은 조금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봐봐. 내 말 맞지?'라는 말을 준비했는지 러쉘은 당장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비밀이라니? '평범하게'가 아니었어?]
러쉘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것도 맞습니다. 대신 조건이 하나 붙습니다."
죽지 않는다.
그 말을 어떻게 꺼내겠는가.
"그게 비밀이라는 말입니다."
루시온이 씩 웃었다.
[그 조건이 뭔데?]
"나중에 알려드리겠습니다."
이토록 안달이 난 러쉘은 오랜만이기에 루시온은 더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제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조금 바쁘네요."
러쉘의 표정이 구겨졌지만, 루시온의 입꼬리는 높게 올라갔다.
북부에 왔으니, 진작에 구하기로 한 상단을 꿰어내야 했다.
자신이 구할 상단은 앞으로 얻을 지부와 지금 얻었던 지부, 그리고 현재 임시 거처로 쓰고 있는 체프란과 초네스트 저택까지 이을 연결 통이자 연락망으로 쓸 생각이었다.
'상단에 쥐쟁이도 붙여서 알뜰살뜰하게 이용해야지.'
루시온은 벌써 즐거웠다.
[상단 말이야?]
러쉘이 물었다.
"맞습니다."
초기 조직원, 쥐쟁이, 암살자, 라인트 용병단의 사이가 아직 막 좋다고는 볼 수 없었지만, 어느 정도 화합이 된 상태였다.
크라언은 지금 이 순간에도 조직원을 모으는 과정을 멈추지 않았고, 지부의 사람들까지 조직에 포섭한 와중에 서로의 관계가 자리를 잡으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듯했다.
[하긴. 지금 조직이 아직 따로 놀긴 하지. 뭐, 이건 시간이 흘러야 해결 가능한 문제고.]
"그렇습니다. 시간이 흘러야 해결 가능한 문제와 별개로 그 틈을 메워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상단이 그 역할을 할 존재로 아주 제격이죠."
[네가 고르고 고른 곳일 테니, 괜찮은 곳이겠지.]
러쉘이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기에 루시온은 자연스럽게 웃음을 터트렸다.
'보고 나면 그런 소리가 나오진 않을 텐데.'
자신이 구하려는 상단은 2년 후에 빛을 발하는 곳이었다.
제이엘 켈.
한마디로능력은 있는데 운이 따라주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켈 가문의 가주였고, 가문을 번성기로 이끌었지만, 단 한순간의 실수로 삐끗해 그만 몰락 귀족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가 가진 능력은 진짜였기에 자신의 가문 이름을 딴 켈 상단만큼은 어떻게든 살렸고 겨우 벌어 먹고사는 수준으로 삶은 이어나갔다.
그의 운은 2년 후에 터지다 못해 단숨에 최고 상단의 자리까지 올라섰다.
제이엘이 가진 안목과 능력, 그리고 십여 년을 버텼던 끈질김 덕분이었다.
자신이 그 운을 더 빨리 트게 해줄 셈이었다.
'황금의 손이라고 불렸던 별명도 빨리 찾아줘야지.'
* * *
[…으음.]
러쉘이 가게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농담이 아니라 흄이 발을 한 번 굴리면 가게 무너질 정도로 녹슬어 있었다.
저번에 가짜 체이온의 저택에 갔을 때보다 더 낡으면 낡았지 절대 덜하진 않았다.
[여기 맞아?]
러쉘이 재차 물었다.
"몇 번을 물으셔도 제 대답은 똑같습니다. 여기가 맞습니다."
[내부는 좀 나은 편이야.]
베델이 가게 안에서 나오며 말했다.
[그것참 다행이네.]
러쉘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또 삐거덕하고 소리가 나는 거야? 라타는 너무 좋은데. 이히히.
벌써 라타의 꼬리가 프로펠러처럼 거세게 흔들렸다.
"라타 너는 내 그림자로 들어가 있어."
설령 누군가 라타를 노린다고 해서 루시온은 일부러 과보호할 생각은 없었다.
라타도 생각보다 눈치가 빠른 편이었으니까.
―그럼 라타가 저기 앞에서 한 번만 살짝 밟고 들어가도 돼? 라타는 진짜 살짝만 밟을 수 있어.
라타가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좋아. 그 정도라면."
―라타는 루시온이 제일 좋아!
라타가 루시온에게 달려들며 그의 다리에 꼭 붙었다.
슬쩍 루시온의 눈치를 보다 라타가 중얼거렸다.
―루시온은 라타가 첫 번째가 아니지만....
머릿속에서 들리기에 라타가 소리를 줄인다고 해서 들리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루시온은 웃음을 참으며 라타의 말도, 러쉘을 지그시 바라보는 라타의 시선도 모르는 척 넘어갔다.
"그럼 노크를 하겠습니다."
흄이 문 앞에 섰다.
그 어느 때보다 문이 가엽게 보였다.
"잠깐만, 흄."
아직 크라언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어제 말하려고 했는데 깨어나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루시온은 주변을 살피다 연락용 아이템을 꺼냈다.
"크라언."
<예, 하멜 님. 이제 북부에 있는 지부를 차지하면 되겠습니까?>
3조로 나뉘었음에도 중부에 있는 지부를 차지하는 속도가 상당했다.
중부 지부를 지키는 개였던 가르티오 뭰도 죽은 마당에 북부에 있는 지부 하나가 뭐가 대수롭겠는가.
"준비는 됐나 보네?"
하지만 루시온은 놀란 듯이 물었다.
여러 가지를 재료를 가져다준 건 자신일지 모르겠지만, 예쁘게 잘 버무린 건 크라언이었다.
애착이 훨씬 더 깊을 테지.
<당연합니다. 하멜 님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든 출발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라인트와 퀘이트도 몸이 근질근질한 모양이고요.>
"저번에 열렸던 술판이 제대로 효과를 본 모양이지?"
루시온이 살짝 빈정거리며 물었다.
자신이 헤인트의 빛 때문에 앓을 때, 조직 에일에서는 축하 기념 술판이 열렸다.
사기 증진이 엄청 중요했으나, 내심 섭섭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하멜 님이 없으셔서 다들 아쉬워했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고. 북부 지부는 오늘 밤에...."
<하멜 님께서는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끼리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몸조리부터 하셨으면 합니다.>
어차피 갈 생각이 없었지만, 루시온은 '제발'까지 붙인 말에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다들 아쉬워한 건 정말입니다. 피터가 얼마나 하멜 님을 불렀는지 모를 겁니다. 황실 기사를 상대로 담판을 지으시던 하멜 님의 무용담도....>
"오늘 상단을 구할 거야."
<…하멜 님?>
크라언이 조심스레 루시온을 불렀다.
"왜?"
<혹시 몸조리가 무슨 단어인지 모르십니까?>
풉.
순간, 러쉘은 비웃음을 내뱉다 루시온의 시선에 입을 다물었다.
"미쳤어?"
<비록 몸을 돌려서 보진 못했어도 하멜 님께서 피를 토하신....>
"기분 탓이야."
<하멜 님.>
크라언이 간절하게 루시온을 불렀다.
"상단을 구하고 다시 연락할게. 그럼 끊는다."
루시온은 과감하게 연락용 아이템을 사용을 중단하고는 흄에게 말했다.
"열어."
"크라언 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열어."
"알겠습니다."
흄이 아쉬운 얼굴로 문을 아주 살짝 두드렸다.
탁탁.
가벼운 소리가 이어 들렸다.
163화. 알뜰살뜰하게(3)
살짝 두드렸음에도 문이 알아서 열려버렸다.
―우오오오!
라타가 눈을 반짝거렸다. 벌써 즐거운 모양이었다.
정말 약속대로 문 앞에 살짝 발을 내딛다 좋아서 팔짝팔짝 뛴 후에야 라타는 루시온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
러쉘의 눈동자가 좌우로 굴렀다.
겉은 이래도 무언가 다를 거라 생각했다. 다름 아닌 루시온이 택한 곳이니까.
[루시온 공.]
베델이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
[다시… 생각하는 건 어떻겠나?]
"상단을 구하는 거 말이야?"
[그래. 그, 음, 정말 공이 구하고자 한 사람이 맞는가? 아무리 봐도 공이 착각한 게 아닌가 싶어서.]
"아니. 여기가 맞아."
루시온이 확고하게 말했지만, 러쉘의 표정이 굳어졌다.
베델은 웬만해서는 루시온이 하는 일을 반대한 적이 없었다.
주로 루시온이 위험할 것 같은 일, 루시온에게 해가 될 것 같은 일에만 저렇게 나섰는데.
[대체 얼마나 이상하길래 네가 이래?]
러쉘이 입가를 핥으며 물었다.
[…음.]
베델은 말꼬리만 늘일 뿐 루시온을 생각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뭘 어떻길래 그래?'
덩달아 루시온 역시 호기심을 느꼈다.
솔직히 소설 속에 나온 제이엘 켈은 이미 성공한 모습으로 나왔다.
제국뿐만 아니라 다른 왕국까지 누빌 만큼 잘난 모습으로.
"누구십니까…?"
살짝 쇠약한 남자가 문틈 사이로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저 남자가 제이엘 켈일까.
"혹시 제이엘 켈 씨입니까?"
"소, 손님이십니까? 단장은 안에, 안에 있습니다! 단장! 손님입니다!"
단원이었는지 그는 실례한다는 말조차 없이 안으로 들어가 열심히 외쳤다.
"꺼지라고 해."
굵직한 목소리가 안에서 어렴풋이 들렸다.
순간, 루시온은 눈살을 찌푸렸다.
보아하니 간만에 손님이 온 모양인데 나와보지도 않고 다짜고짜 꺼지라니.
'뭔가… 느낌이 좋진 않네.'
"죄, 죄송합니다."
단원이 대신 사과했다.
"그… 어제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는 바람에 살짝 예민하신 상태입니다."
"그걸 왜 제가 고려해야 합니까?"
루시온의 말이 곱지 않았다.
적어도 사람이 왔으면 반기는 시늉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죄송합니다."
단원은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뭔가 이상하다. 그렇지, 루시온?]
러쉘이 고개를 살짝 오른쪽으로 기울였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깊게 찌든 담배 냄새가 루시온의 코끝을 간질였다.
가면을 쓰고 있었음에도 냄새가 이렇게 심하다면 실제로는 오죽할까.
흄이 견디지 못해 창문을 열었다.
"여기가 재떨이입니까?"
싫은 소리 하나 하지 않던 흄조차 언성을 살짝 높였다.
"…죄송합니다."
단원이 주눅 들며 또 사과했다.
벌써 몇 번째 사과인지.
루시온은 슬슬 짜증이 올라왔다.
'2년 전이야. 아직 제이엘이 성공하기 전이라고.'
후.
루시온이 화를 가라앉히려 속으로 되뇌었다.
"이쪽입니다."
단원이 주눅 든 상태로 흄과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문을 열었다.
매캐한 연기가 고스란히 뿜어져 나오자 흄이 단숨에 얼려버렸다.
기관지가 좋지 않은 루시온에게 저 연기는 독이었다.
"실례했습니다."
흄은 루시온에게 고개를 숙인 뒤, 담배 재를 떨어트리며 놀란 눈을 한 남자를 노려보았다.
"...?"
동시에 루시온도 놀랐다.
푸른 실이 제이엘과 자신을 이었다.
'아샤는 붉은 실. 제이엘은 푸른 실이라.'
아샤가 라비엔이기 때문에 붉은 실이 엮였다고 추측만 할 뿐, 아직 왜 붉은 실이 엉켰는지도 모르는 마당에 제이엘과 푸른 실로 감겨버렸다.
'크라언 때문인가?'
루시온은 추측만 하며 제이엘을 보았다.
덥수룩한 수염과 지저분한 머리카락, 죽은 자라고 보일 만큼 탁한 눈동자에 루시온은 제이엘이 어떤 상태인지 단번에 알았다.
'이런....'
""…왜 당신의 조직에 투자를 했는지 이유를 알려달라?"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말에 헤인트는 자신이 너무 빨리 찾아왔음을 알아차렸다.
"별거 없습니다. 제 두 눈을 믿기 때문이죠. 밑바닥에서 구르고 굴렀음에도 힘껏 버텨냈던 제 두 다리를 믿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헤인트가 돌아가려던 차, 크라언이 입을 열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죠. 제게 중요한 손님이 찾아왔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제가 너무 붙잡았습니다. 나중에 뵙겠습니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오는 헤인트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눈빛이 참 밝다 싶었다.
"누구십니까?"
헤인트가 물었다.
"현재 황금의 손이라 불리는, 제이엘 켈입니다."
여유로운 크라언의 말에 헤인트는 의문을 가졌다.
황금의 손이라 불리는 자에게까지 손을 뻗쳤다니.
대체 크라언의 정체가 무엇일까."
'뭐? '구르고 굴렀음에도 힘껏 버텨냈던 제 두 다리를 믿기 때문'이라고? 망할....'
저 모습이 어딜 봐서 버티는 모습인가.
패배자.
마치 이마에 써 붙인 것 같은 모습에 루시온은 한숨을 나올 것만 같았다.
"마법사… 입니까?"
저 맹한 목소리는 또 어떤가.
"제가 누굴 것 같습니까?"
루시온의 목소리가 사나워졌다.
"아뇨. 누구인지 상관없겠죠. 돌아가십시오."
"이야기도 들어보지 않고 말입니까?"
"듣지 않아도 뻔하니까요. 이 상품이 나중에 10배가 뛴다는 헛소리나, 거래처를 포기하라는 협박이나, 상단을 헐값에 넘기라는 소리 비슷한 걸 하시려고 오셨잖습니까."
굉장히 지친 목소리가 제이엘의 입가에 흘러나왔다.
눈동자에 의심이 어렸고, 불신이 가득했다.
그 눈빛이 사기당해 모든 걸 잃었던 미엘라보다 더 짙었다.
"이 가게가 개같은 꼴인데 그렇게 비싼 옷을 입은 당신이 나한테 일거리를 맡기러 오진 않았을 테고요."
또, 상당히 공격적이었다.
'이 와중에 이 옷이 비싸다는 걸 알아보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루시온은 피식 웃었다.
[저게 손님을 대하는 태도라고? 나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데 루시온 네가 저걸 참아?]
러쉘이 신기한 눈으로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루시온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놀라울 따름이었다.
저런 태도를 한 자를 분명히 싫어할 텐데.
[조금 전에 내가 무슨 의미로 말했는지 이해했나?]
베델은 말을 아끼며 러쉘에게 물었다.
[당연히 이해하고말고. 기본부터가 글러 먹었네.]
"맞아. 이 거지 같은 꼴을 한 곳에 내가 일거리를 맡기러 왔거든. 정확히는 인수하러 왔지."
루시온은 멋대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아니꼽게 말하는 놈이 뭐가 이뻐서 자신이 대우를 해줘야겠는가.
제이엘은 단숨에 루시온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노려보면 뭘 어쩔 건데. 내가 손님인지 아닌지도 구별 못 할 정도로 낡아 빠진 눈이 바뀌기라도 하는 모양이지?"
루시온은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본인 입으로 돈 많아 보이는 날 거절했는데 그따위 안목을 가진 상태로 상단을 손에 쥐고 있다고 뭐가 달라질까? 일찌감치 나한테 파는 게 좋잖아? 섭섭하지 않게 많이 쳐줄게."
러쉘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루시온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저렇게 사정없이 때릴 줄이야.
"아니면 담배 냄새가 진동하는 이 방에 처박혀서 온종일 담배만 물고 있으면 돈이 나오기라도 하나 보네? 네 상단원들은 무슨 죄가 있다고 저렇게 네 눈치, 내 눈치를 살피느라 절절거리는지도 모르겠고."
"지금 저한테 빈정거리러 왔습니까?"
"아니. 인수하러 왔다니까."
"빈정거리실 목적으로 오셨다면 성공했습니다. 당신 정말 짜증 나거든요."
"오, 유감이네. 짜증 나게 할 생각은 없었거든. 그냥 기분이 나쁘면 했어. 며칠이 지나도 두고두고 기분 나쁜 그 감각이 따라붙길 원했으니까. 지금 딱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아?"
"이제 다했다면 나가십쇼."
"내가 싫다면 어쩔 건데. 사람이라도 부르게? 사람을 부를 돈은 있나? 그게 아니면 단원들을 이용해서...."
탁.
루시온의 어둠이 꿈틀거렸고, 흄이 제이엘의 팔을 붙잡았다.
―홉!
그림자 속에 있던 라타가 깜짝 놀랐다.
"손이 험하십니다."
살기가 어린 흄의 목소리에 제이엘은 살짝 당황한 눈치였다.
이걸 막아?
그런 표정을 한 제이엘을 보며 루시온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렸다.
"…오!"
[검을 쓸 줄 아는 놈이다.]
베델이 제이엘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냥 상인인 줄 알았더니, 재빨리 단검을 꺼내서 자신에게 겨눌 줄은 몰랐다.
"이런 행동은 마음에 들었어. 싸울 줄 아는 상인이라니."
"지금은 또 무슨 수작입니까?"
제이엘은 손을 빼려고 했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수작이라니. 개떡 같지만 유능한 놈과 성격 좋은 무능한 놈 중에 나는 전자가 좋거든. 적어도 제 목숨은 지킬 줄 아는 거잖아. 꽤 흥미롭네."
루시온은 깍지를 껴 배에 올렸다.
이건 진심이었다.
상인에게는 늘 용병단이나 따로 호위할 이들이 붙었다.
물론 모든 이들이 그렇다는 건 아니었지만, 싸움도 잘하는 놈이 구태여 상단주가 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상단이라는 게 굉장히 복잡하고 또 배는 더 힘들 테니까.
"역시 제대로 왔네. 줘봐."
"…뭘 말입니까?"
"어쨌든 상단이니까 장부 정도는 있잖아?"
"제가 그걸 왜 드려야 합니까?"
제이엘이 황당해하며 말했다.
지금도 가면 쓴 남자와 함께 온 여자의 손에서 벗어나질 못했고.
"목숨 하나 방금 빚진 거 잊었어? 진짜 죽여줘? 아니잖아. 겁줘서 쫓아내려고만 했다는 걸 아니까 여기까지 맞춰주는 거라는 거 몰라? 그 정도 눈치는 있어 보이는데."
히죽 웃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제이엘은 온몸에 돋아나는 소름을 느꼈다.
"…미치셨습니까?"
"내가 직접 가져갈까?"
루시온은 여유로웠고, 제이엘은 아니었다.
당장 목이 날아가도 될 만한 일을 자신이 하지 않았던가.
저 가면 쓴 남자가 말한 것처럼 솔직히 공격하는 시늉만 내려고 했다.
으레 겁을 주면 도망가기 마련이니까.
"놔줘."
루시온이 흄을 보며 말하자 그녀는 당장 손을 놓았다.
"대체 왜 이런 조그마한 상단에 관심을 가지는 겁니까?"
제이엘은 부러진 것처럼 욱신거리는 자신의 손목을 매만졌다.
화를 내도 음울한 표정이 채 지워지질 않았다.
"조그마한 상단이라도 쓰임새가 있잖아? 눈에 띄지 않고, 아무도 관심을 가져다주지 않을 테고."
"마약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겠습니다! 차라리 죽이시지요!"
제이엘이 바로 언성을 내질렀다.
'뭐야. 생각보다 괜찮네.'
불법적인 일에 절대로 손을 대지 않겠다는 의지에 루시온은 안심했다.
영 글렀는가 싶더니 거기까진 아니었으니까.
"누가 마약을 판다고 했어?"
"…그러면 대체 뭡니까?"
"관심이 막 생기지? 그럴 줄 알았어."
루시온은 손을 펼쳤다.
"넌 나라는 황금 동아줄을 잡은 거야. 그러니까 내놔."
제이엘은 숨을 몰아쉬며 루시온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황당했다.
대체 저 남자는 뭘까.
뭐길래 저렇게 자신감이 넘치는 건지.
제이엘은 동시에 우울함이 밀려왔다.
밟으면 삐거덕거리는 바닥에, 비가 오면 줄줄 새는 집에, 과거의 인연으로 여기까지 버텨준 단원들까지.
모든 게 비참했으니까.
제이엘은 목구멍까지 치솟아 오른 비참함을 가까스로 삼키며 말을 내뱉었다.
"대체 무슨 목적으로 오셨습니까?"
"상단을 인수하러 왔다니까.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까."
"…재미있으십니까?"
"그런 말을 꺼낼 정도로 내가 네 인상에 오래 남았다니. 이것 참 영광이네."
"당신 눈에 제가 대체 뭘로 보입니까? 예 예. 절 자극하러 오신 거면 성공했습니다. 지금 아주 비참하거든요. 당장 쥐구멍에 머리를 박고 싶을 만큼요."
"삐딱한 건 천성인가 봐?"
루시온은 손가락을 매만지며 태연하게 물었다.
"더는 할 말 없습니다. 나가주십시오."
솔직히 루시온도 나가고 싶은 마음이 컸다.
누군가 자신을 보면 진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질척거리는 것도 짜증 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이엘이 황금의 손이 될 사람이라는 걸 아는데 이걸 왜 놓치겠는가.
"제이엘 켈."
루시온은 살짝 방향을 바꾸었다.
팅.
바로 푸른 실에도 영향이 왔다.
'…망할.'
실컷 입을 놀린 게 이름을 말하는 것보다 못하다니.
루시온은 무척 실망스러웠지만, 제이엘은 처음으로 눈동자를 반짝거렸다.
164화. 얽히고, 이어진다
'아. 망한 가문을 누군가 기억해준 게 그렇게 컸나?'
루시온은 곧 생각을 바꿨다.
입을 놀린 행동이 소용없다는 게 아쉬웠으나, 반응이 있으니 그걸로 됐다.
"절… 알고 계십니까?"
"거래하러 온 상대방의 이름을 아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 싶은데."
루시온의 대답에 제이엘은 구미가 당긴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가를 핥았다.
자신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그 표정이 너무도 빤히 보여 루시온은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지금까지 네 이름을 아는 놈이 없었나 보네?"
"이런 곳까지 굴러온 놈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습니까?"
"내가 예의를 지켰으니, 너도 예의를 지키는 게 어때?"
"이름이… 뭡니까?"
"하멜."
제이엘은 순간 눈이 커졌다. 이렇게 순순히 이름을 알려줄지 몰랐다는 눈치였다.
"이렇게 제게 이름을 알려주셔서 되는 겁니까?"
"알려주지 못할 이유라도 있어?"
"지금까지는 있었습니다. 제가 조금 전 내뱉은 무례한 말들이 모두 예시가 되었으니까요. 비웃어도 괜찮습니다."
"별로 재미없는 말이라서. 나중에 알아서 비웃어줄게."
"…좋습니다. 하멜 씨."
제이엘은 잠깐 일어나 방의 창문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열고 싶어 죽겠다는 표정을 하던 흄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방에 가득 찼던 연기가 사라진 탓인지, 이름을 불린 게 기뻐서인지 제이엘의 탁한 눈동자가 조금은 맑아진 듯 보였다.
하지만 얼굴에 찌든 패배감은 아직 사라지질 않았다.
[너도 참 끈질기다, 루시온.]
러쉘은 기어코 대화의 장을 연 루시온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고집이 세긴 참 셌다.
[루시온 공의 인내심이 얼마나 좋은지 그대도 알지 않은가.]
내내 걱정했던 베델의 얼굴이 활짝 퍼졌다.
비로소 루시온이 원하던 일이 펼쳐졌다. 지금은 그 사실만으로도 무척 컸다.
루시온도 조금은 달라진 제이엘의 태도에 대화할 마음이 생겼다.
"조직의 연락망이자 정보통이 되어줄 상단을 찾고 있어. 그 상단이 당신의 상단이었으면 하고."
"이유가 뭡니까?"
"당신을 조사했기 때문이지."
루시온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실제로 텔라와 연락을 취해 상단 몇 개를 추렸고, 과거에 켈 가문이 있었고, 가주였던 제이엘이 켈 상단을 이끌었다던 전적도 자연스럽게 들었다.
더불어 소설 속 켈 가문이 왜 망했는지 몰랐지만, 텔라는 귀족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아. 텔라하고 나눴던 말이 이거였어? 도중에 와서 중부에서 약속 잡는 것부터 들어서 몰랐지.]
러쉘이 이제야 속이 후련한지 방긋 웃었다.
―맞아! 라타는 들었는데, 러쉘은 못 들었네.
라타가 우쭐거리며 말했다.
'우쭐거릴 일도 아닌데.'
루시온은 입꼬리를 올리며 표정이 어두워진 제이엘을 살폈다.
동부에 가기 전에 어차피 다시 중부에 들려야 했다.
자신의 여행 때문에 주지 못했던 선물도 줄 겸 루테온 가주가 만나서 감사 인사도 하고 싶다고 텔라가 저택에 초대했다.
거절할까 하다 선물에 혹해서 그만 허락하고 말았다.
'비공식으로 가야 하니까 돌아가면 헤인트 형님한테 말해서....'
"어디까지 아십니까?"
루시온을 보는 제이엘의 눈동자가 살벌해졌다.
"실례지만, 살기는 거두시는 어떠십니까?"
흄이 제이엘을 향해 제안했다.
"대답부터 들어보겠습니다."
하지만 제이엘이 이를 거절했다.
"아뇨. 살기부터 거두시지요. 제가 당신의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으니까요."
흄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제이엘은 주춤거렸다.
그녀의 힘을 이미 경험해 봤기에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는 것 역시 알았다.
―켈 가문이 황실의 측근이자 명문가였나 봐요. 그런데 모종의 이유로 망해버렸어요. 그 이유가 음, 반역이라고 알려져 있더라고요.
루시온은 텔라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입을 놀렸다.
어떤 이유로 망했다고 알려졌는데 그 이유가 설마하니 반역일 줄이야.
"나름 명문가였던 켈 가문이 어떤 이유로 망했다."
루시온은 제이엘의 표정을 보며 말을 던졌다.
단숨에 굳어진 얼굴 너머로 제이엘은 떨리는 손으로 옆에 구르고 있는 담배를 하나 손에 쥐었다.
"안 됩니다."
흄이 딱 잘라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루시온의 상태가 걱정되던 참이었다.
먼지에도 기침하기 일쑤였으니.
"그 켈 가문이 어떻게 망했다고 알려져 있습니까?"
제이엘은 담배를 뭉개버릴 정도로 세게 쥐며 물었다.
"반역."
루시온은 더도 말고 자신이 아는 걸 말했다.
"…그렇습니까?"
씁쓸한 미소가 제이엘의 얼굴에 그려졌다. 가뜩이나 탁한 눈동자에 암울함까지 드러났다.
"아직도 반역으로 알려져 있다니. 하긴. 제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 사실이 바뀔 리가 있겠습니까?"
'뭔가 조짐이 안 좋은데.'
루시온은 팽팽해진 푸른 실을 보며 긴가민가했다.
"아직도 켈 가문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성을 쓰고 있잖아."
"아뇨. 성은 이미 버렸습니다. 살아가려면 버려야만 했죠. 간혹 술에 취해 어쩌다 제가 실수로 내뱉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기억하며 찾아와준 건 당신이 처음입니다."
제이엘이 자신의 두 손을 마주 잡고는 불안한 얼굴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저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지금도 또 실패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 너무 큽니다."
[…지금 뭔가 오해하고 있는 거 맞지?]
러쉘이 가만히 듣다 말고 물었다. 루시온도 지금 막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조금 전 모습이 나을 정도로 소름 끼쳤다.
[이름을 듣고 태도를 바꾼 걸로 봐서는 루시온 공이 마치 저자를 도와주러 온 것처럼 느낀 게 아닌가 싶다.]
'내가…?'
루시온은 베델의 말에 순간 헛웃음을 칠 뻔했다.
이미 망한 가문을 되살리는 건 제이엘의 몫이지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 아니었다.
손에 넣으려는 건 딱 황금의 손을 가진 제이엘의 안목과 실력뿐, 사생활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혹시 진실을 듣고자 찾아오신 거라면 잘못 찾아오셨습니다."
"아니. 조직이 운영할 상단을 구하러 온 거라니까."
"더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아니. 이미 늦었습니다."
귀를 막은 건지. 귀를 막고 싶은 건지 몰라도 제이엘은 갑자기 제 할 말만 내뱉었다.
'어이가 없네. 벌써 몇 번이나 상단을 소유하러 왔다고 말했는데.'
루시온은 멋대로 쓸쓸한 분위기도 잡고, 세상의 짐이란 짐은 혼자 짊어진 것처럼 고독함도 뽐내는 제이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디까지 이야기할까 내심 궁금하기도 했고.
"지금쯤 황실 내에 뉴브라 놈들이 회유하고, 꼬드긴 귀족들이 넓게 퍼졌을 테니까요."
'…응?'
루시온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매만지다 말고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뉴브라라니? 뉴브라 왕국 말이야?"
갑자기 그놈들 이야기가 왜 나오는 건지.
베델도 러쉘도 난데없는 이야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맞습니다. 십여 년 전에 뉴브라가 황실에 손을 뻗을 계획을 실행했다는 사실을 알고 오셨잖습니까."
"아닌데?"
"…제, 제가 황실의 개였다는 것도 알고 오신 거 아닙니까?"
"그것도 아닌데?"
황당해하는 제이엘만큼 루시온도 당황스러웠다.
저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술술 털어놓을 줄은 몰랐다.
[입이 가벼운 거야? 아니면 생각보다 멍청한 거야?]
러쉘도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으음....]
베델의 말꼬리가 길어졌다.
[루시온 공이 자신을 도와주러 왔다고 착각한 게 틀림없어 보이네. 방금 십여 년간 제이엘 켈을 기억한 사람이 없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연의 일치로 공이 그 조건에 딱 맞아떨어진 거지.]
"그럼 제 조사를 왜 하신 겁니까?"
"…미치겠네."
루시온은 그새 배신당한 사람처럼 구는 제이엘을 보자 답답했다.
"내가 지금까지 뭐라고 했어? 조직에 필요한 상단을 구하러 왔다고 했잖아. 내가 개인적으로 돌릴 상단도 아니고 조직에서 운영할 상단인데 조사도 안 해오는 게 말이 돼?"
루시온의 가면 색이 붉게 변했다.
"네가 지금까지 어떤 놈들을 만났는지 대충 감이 오긴 하는데, 조사는 기본이야. 너도 똑같잖아. 거래처를 조사도 안 하고 일을 맡진 않을 거 아니야."
"그, 그럼...."
"그래. 네 입으로 홀라당 다 말해버린 셈이지."
루시온은 그제야 속이 후련한 목소리로 말했다.
드디어 몇십 분 만에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제이엘이 알아들었다.
'내 인내심에 손뼉을 치고 싶네. 오늘만큼 자랑스러운 순간이 없었어.'
"이, 이… 멍청한 놈!"
짜악!
제이엘이 갑자기 자신의 얼굴을 세차게 때렸다.
―홉. 저러면 아픈데. 라타도 라타 꼬리 잡다가 맞아봤는데 엄청 아팠어.
그림자 속에 있던 라타가 귀를 살짝 접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게 때려봤자 네 얼굴만 아플 뿐이지. 자. 본의 아니게 네 비밀을 알았고, 날 죽이려고 했던 것도 넘어가 줬으니 이제 장부를 넘겨."
루시온은 귀찮은 듯 손을 내밀었다.
"이 멍청한 놈! 너는 왜! 왜 이렇게 멍청한 거야? 가문도 날려 먹고, 재산도 날려 먹고. 대체 어디까지 바닥으로 떨어져야 속이 후련하냐고! 죽어! 그냥 죽으라고…!"
제이엘은 자신의 머리를 마구마구 치다 말고 하멜을 공격하려고 쓰던 단검을 떠올리며 손에 쥐었다.
탁!
그때, 무언가 제이엘의 손을 후려쳤다.
"이거 미친놈 아니야?"
루시온은 당장 자리에서 일어서 멍청한 낯짝을 한 제이엘의 뺨을 후려쳤다.
짜악!
"야. 정신 차려. 상단 구하러 왔다가 내가 피까지 봐야겠어?"
제이엘은 아픔에 차차 정신이 돌아왔는지 자신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흑마법사?"
조금 전 제이엘 자신의 손을 후려쳤던 건 분명 어둠이었다.
[눈이 제법 좋다.]
베델이 덧붙였다.
"그래."
루시온은 부정하지 않았다.
"네, 네놈도 황실을 집어삼킬...."
짜악!
루시온은 손등으로 제이엘의 반대편 뺨을 후려쳤다.
흄에게 지시하면 제이엘의 목이 돌아갈 것만 같지 않은가.
"내가 그놈들과 같았으면 벌써 네 멱을 땄다."
"...."
"제대로 말해봐. 십여 년 전에 네가 황실의 개였다고?"
원래 제이엘의 사생활에 개입할 생각은 없었지만, 뉴브라 왕국이 언급된 이상 그냥 넘어갈 순 없었다.
"…저는 이제 죽습니까?"
"말부터 하라고, 미친 새끼야."
루시온의 재촉에 제이엘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아련한 눈으로 자신의 가게를 보더니 무언가를 내려놓은 듯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예. 아는 이들이 손에 꼽을 정도겠지만, 켈 가문은 황실의 개였습니다. 황실의 그림자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황실이 대외적으로 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가문이죠."
제이엘이 죽을 자리를 알아보는 행동을 취하든 말든 루시온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쩌면 가르티오 뭰에게서 듣지 못했던, 뉴브라 왕국과 손을 잡은 귀족들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왜 반역이라는 죄로 누명을 썼는데?"
"제가 뉴브라 왕국과 손을 잡은 귀족들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역시.
루시온은 이어진 제이엘의 말에 흡족해했다.
"그리고 그 세력이 아마 지금 4황자, 오웬 테슬라를 지지하는 세력이 됐을 겁니다. 그때도 4황자 편에 섰으니까요."
[4황자라고? 뉴브라와 손을 잡은 황자가 4황자였다니....]
베델이 기겁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정보였다.
[이 사실을 늦게 알았으면 큰일 났겠네. 분명 지금 5황자를 죽이려고 수작을 벌이고 있을 테니까.]
러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나저나 아무리 황좌가 탐이 났어도 황자나 되는 놈이 제 조국을 배신해? 저놈이 황세자가 되어 봐라. 나라 꼴이 어떻게 돌아가겠어?]
'2년 후에는 막장으로 돌아갑니다.'
루시온은 미래를 알고 있기에 잠깐 웃다 말았다.
지금 4황자보다 급한 건 바로 '부엉이'를 찾는 일이었다.
과거부터 뉴브라와 손을 잡았던 놈이자 그 중심에 있던 놈이라면 분명 놈이 부엉이일 테지.
"트레이안, 가토윈, 쵸비톨, 비레스틴, 오웰로트...."
루시온이 가르티오 뭰에게서 들었던 13명을 전부 언급했다.
제이엘에게 신뢰를 얻기 위함이었다.
"이놈들 중에 네가 알던 세력이 있어?"
"…어, 어떻게 아십니까?"
"내가 뉴브라 놈들과 손을 잡았던 개새끼 한 명을 족쳐서 얻었거든."
루시온이 주먹을 살짝 쥐어 보였다.
"물론 여기에 언급이 되지 않은 놈들도 있고, 네가 들어보지 못한 놈들도 있을 거야."
"그렇습니다."
"그 당시 중심이 누구였지?"
165화. 얽히고, 이어진다(2)
루시온의 물음에 제이엘은 잠깐 망설였지만, 그는 더는 주저하지 않았다.
"거기까지는 도달하지 못하고 누명을 써서 내쫓겼습니다. 하지만 중심축에 속했던 인물은 알고 있습니다."
"누군데?"
"테펠로우 셀가 후작입니다."
'이 이름이 여기에서 나올 줄은 몰랐는데.'
루시온은 베델이 신경 쓰였다.
테펠로우 셀가.
경매장에서 자신과 반쪽짜리 라르비스의 눈물을 두고 경쟁했고, 베델의 전 주인이었던 놈의 수족이 아닌가.
[...!]
베델이 크게 움찔거렸다.
[테펠로우… 셀가.]
베델은 그 이름을 읊조리다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죽어서까지 발목을 붙잡힐 줄이야.
그것도 기사로서 진짜 주인으로서 모시고 싶은 루시온의 발목을.
[…미안하다, 루시온 공. 내가 더 빨리 말했으면. 내가 더 빨리 마음을 잡았으면 됐을 텐데.]
베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루시온이 기다려 준다고 했지만, 사실 말하는 게 옳다는 걸 알고 있었다.
왜 죽기 전에도, 죽은 후에도 이렇게 미련한지.
"베델. 진정해. 나는 억지로 네 입을 열 생각이 없으니까. 그러니 사과하지 않아도 돼."
루시온은 베델을 바라보며 말했다.
덩달아 시선을 옮긴 제이엘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바라보다 몸을 부르르 떨었다.
소름이 돋았다.
"무얼… 보고 계신 겁니까?"
"죽음 후의 세계를 보고 있어."
"그게 무슨 말입니까? 죽은 후에는 빛의 신께서...."
"아니. 죽음은 끝이 아니야."
루시온의 목소리가 낮게 울리자 제이엘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더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넌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루시온이 물었다.
"폐하의 도움 덕입니다. 그래서 저는 폐하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너를 내쫓았는데 너를 도왔다?"
"예. 제가 흑마법사와 결탁한 죄로 내쫓겼기에 폐하께서도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선두에 있던 로베리오 놈이 있었는데 얼마 전에 죽었잖습니까."
'또 로베리오 놈이야?'
루시온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로베리오가 빠지지 않는 곳이 없었다.
'잘 죽었네.'
"누명을 쓰고, 제 가문이 망하고 난 뒤에 그렇게 크게 웃었던 적이 없을 겁니다."
제이엘은 처음으로 미소를 내보였다. 그도 오래간만에 짓는 미소인지 무척 어색해했다.
[이상하네. 분명 신관한테 확인을 받았을 텐데? 흑마법사와 손을 잡은 적도 없는데 그 죄로 내쫓겼다는 건 엄청 이상하지. 냄새가 나지 않아, 루시온?]
킁킁.
러쉘의 말에 그림자 속에 있던 라타가 갑자기 코를 벌름거렸다.
―맞아! 라타는 이 냄새 싫어! 이상한 냄새야! 라타 코가 아파.
루시온은 배에 깍지를 꼈던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러쉘이 언급한 일은 자신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흑마법사와 신관이 서로 손을 잡았거나, 신관이 거짓말하지 않았다면 벌어질 수 없는 일일 테니까.
만약에.
정만 만약에 신성 국가 네바스트가 오래전부터 뉴브라 왕국이 흑마법사와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랬다면 네바스트는 대체 뭘 노리는 걸까.
루시온이 곧 피식 웃었다.
답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신성 국가가 아니라 신성 제국이 되고 싶은 거겠지.'
빛과 어둠이 붙는다면 필연적으로 둘 다 죽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둠의 축복을 받은 자들의 숫자가 줄어 빛의 축복을 받은 자들이 그들을 관리할 수 있는 수준까지 이른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미친놈들.'
루시온의 손가락이 세게 구부러지고 깍지 낀 손이 부르르 떨렸다.
이게 만약에 진짜라고 한다면 지금까지 어둠의 축복을 받은 이들을 이단 취급하며 세뇌했던 신관들의 행동은 모두 계획된 일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이전에 모든 신관은 무조건 네바스트에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했으니.'
교육은 대물림 되고, 세뇌도 대물림이 된다.
빛의 축복을 가진 자들만이 가지고 있는 재생력.
그 재생력은 사람의 눈을 홀리고, 자연스럽게 신성하다는 느낌을 받게 했다.
유일하다는 그 사실 하나로.
'…아니야. 여기까지 생각하자. 모든 신관이 그런 행동을 한 건 아니니까.'
루시온은 도중에 생각을 멈췄다.
모든 신관을 증오하는 건, 모든 흑마법사를 증오하는 이들과 똑같아지는 셈이 아닌가.
그런 건 질색이었다.
"그 당시 널 감시했던 신관이 누구인지 기억해?"
루시온이 물었다.
지금 중요한 건 추측이 아니라 사실이었으니까.
"그놈의 얼굴과 이름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당장 욕이라도 퍼붓고 싶은 얼굴로 제이엘이 말했다.
"첼가입니다."
'…빌어먹을.'
루시온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응? 첼가라니? 경매장에서 루시온 네 팔찌를 빼돌리는 데 협력했던 그 신관이랑 이름이 같잖아.]
러쉘이 눈을 깜박거렸다.
[과연 단순히 이름만 같을까?]
베델은 의심했다.
지금 신성 국가 네바스트 쪽에서 너무도 수상한 일을 벌였다.
단지 우연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당황하지 말자.'
루시온은 침착하게 숨을 내쉬었다.
소설의 끝은 간단했다.
최종 악역이자 공허의 손 보스를 헤인트가 물리치며 끝이 났다.
이때 제국과 네바스트, 심지어 제국과 앙숙이던 뉴브라까지 대통합해 흑마법사와의 싸움을 마쳤다.
겉보기에는 해피엔딩처럼 보일 만큼 완벽한 결말이었다.
제국과 뉴브라 왕국이 화해하고.
헤인트는 빛의 상징이자 영웅이 되어버렸고.
신성 국가 네바스트의 입지는 더욱 견고해졌으니.
그럼 그 뒤에는.
아쉽게도 에필로그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소름 끼쳤다.
대체 누구를 위한 결말인가.
사실 4황자는 뉴브라 왕국과 손을 잡고 제국을 배반한 배신자였으며.
뉴브라 왕국은 공허의 손과 손을 잡아 제국을 밑바닥부터 긁어내리고 있었고.
신성 국가 네바스트는 공허의 손을 알고도, 이놈들과 손을 잡은 뉴브라 왕국을 알면서도 못 본 척 침묵했다.
설마 소설 마지막에 제국과 뉴브라가 화해한 그 장면이 이미 뉴브라가 제국을 삼킨 순간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소설 속 시작인 2년 후.
뉴브라 왕국과 제국 사이에 있는 미론스트 왕국이 처음으로 무너졌다.
하지만 노비오가 지키는 크로니아는, 변경은 견고했다.
'내가 흑마법사라는 게 밝혀지기 전까지.'
흑마법사를 배출한 크로니아는 제국, 당시 실세였던 4황자에 의해 이름을 잃었고.
그 죄로 노비오가 죽었고.
결국, 변경이 무너졌다.
이 모든 게 계획된 일이 아니었을까.
자신을 중간 보스 자리에 앉혀 놓은 건 사실 크로니아를 무너트리고, 뉴브라가 승리했다는 상징의 용도가 아니었을까.
루시온은 부르르 떨리는 손을 애써 숨기며 차분히 물었다.
"십여 년 전에 첼가라는 이름을 가진 신관이 널 검사했다 이거지?"
"예. 절 흑마법사와 내통했다고 내몰았습니다."
"그 당시 그놈은 그저 신관이었나?"
"대신관이라고 했습니다."
"그래."
루시온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첼가는 그때도, 지금도 대신관이 아니었다.
아니, 될 수 없었다.
―그, 일단 첼가라는 놈은 신관도 아닌데요? 음. 신관인데 신관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니 일단 신관인데 신관이 될 만큼 빛의 힘이 강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뒷거래가 있었나 봅니다. 내 그럴 줄 알았습니다. 신관이랍시고 고고한 척하더니 역시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죠. 하, 너무 재미있습니다. 혹시 정보를 얻은 후에 뿌려도 됩니까? 그럼 제 이름, 아니 아니, 우리 조직을 모르는 이들이 없을 것 같은데.
낄낄 웃으며 좋아 죽던 헤로안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기회를 주지."
루시온이 제안했다.
"기회라뇨…?"
"널 망하게 한 그놈들의 멱을 따고 싶지 않아?"
"이미 늦었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늦지 않았어."
루시온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지금 황실이 내부에 숨은 뉴브라 놈들을 쳐내기 위해 움직이고 있어."
"…황실이요? 정말로 황실이 직접 움직이는 겁니까?"
제이엘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래. 널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던 네바스트의 신관 첼가. 내가 손을 살짝 잡은 황실 기사가 데리고 있는 상태야."
이어진 루시온의 말에 제이엘은 혼란스러웠다.
'…대체 저 사람 정체가 뭐지?'
갑자기 찾아와서 다짜고짜 이상한 소리를 지껄인 것도 모자라 장부를 요구하더니 이제는 황실하고 손을 잡은 상태라니.
그것도 살짝만.
되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걸 알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진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멜이라는 저 남자가 언급한 가문 중에 자신이 찾아냈던 가문도 있었고, 첼가라는 신관의 이름만 꺼냈지 네바스트의 신관이라는 소리는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하멜은 알아맞히지 않았던가.
"넌 나랑 함께 가서 첼가가 네가 아는 첼가인지 아닌지 확인만 해. 그 후에 조직에 들어올지 말지 결정하고. 조금 있다 찾아오마."
루시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인트를 이렇게 다시 빨리 만나러 갈 줄은 몰랐다.
"자, 잠시만요!"
제이엘이 덩달아 일어나서는 다급히 루시온을 불렀다.
"왜?"
"제가, 병신같이 다 잃어본 제가 감히… 그런 기회를 손에 넣어도 되겠습니까?"
"모르겠는데. 나는 네가 아는 첼가가 황실 기사가 붙잡은 첼가인지 확인하고 싶을 뿐이야. 정 기회를 얻고 싶으면 나한테 매달리던지. 아. 그 전에 주변 좀 살펴. 멍청하게 담배나 피지 말고."
루시온은 제이엘을 비웃으며 밖으로 나왔다.
제이엘은 어깨를 늘어트리며 루시온의 뒷모습을 마냥 바라보았다.
자신이 으깬 담배를 내려놓고 새 담배를 꺼냈다.
불을 붙인 후에 깊게 빨아들였다.
후.
연기와 함께 새어 나가는 한숨이 오늘따라 개운했다.
매 순간 이 자욱한 연기와 함께했음에도 늘 안개 속을 걷는 것만 같았는데.
'돈은 또 언제 놔두고 간 거야?'
제이엘은 루시온이 앉았던 자리에 놓인 돈주머니를 발견했다.
한눈에 봐도 제법 묵직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이네.'
제이엘은 수북하게 쌓인 재떨이에 담배를 대충 지지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을… 살펴보라고?'
아무래도 오랫동안 묵힌 먼지를 털 시간인 듯했다.
"단장님. 저, 죄송합니다. 제가 함부로 손님을 들게 했습니다."
문 앞에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서성이는 단원을 보자 제이엘은 그제야 단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 만에 제대로 본 얼굴인지 모를 정도로.
대체 언제 저렇게 나이를 먹었는지.
"그간… 미안했습니다."
제이엘은 고개를 숙였다.
입 안이 너무도 쓰디썼다.
저들은 가문이 망했음에도 시종이 아닌 단원으로서 자신의 옆에 남아준 이들이었다.
전부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렇게 혼자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가주, 아니 단장님. 왜 그러십니까?"
"수염 하고 머리 좀 자를 건데,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너무 길어서 혼자서는 불가능할 듯합니다."
"그거야 얼마든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하멜을 이곳까지 데려오고, 사과한 저 남자는 한때 자신을 보필했던 집사였다.
그는 너무도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솜씨를 발휘해 보겠습니다, 가주님."
* * *
섬뜩.
헤인트는 서류를 작성하다 말고 당장 검을 쥐고 창문을 열었다.
아래를 내려보자 하멜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 미친놈!"
진짜 자신이 있는 곳까지 찾아올 줄이야.
어떻게 자신이 있는 곳을 알았는지 강한 의문이 넘실거렸다.
하멜은 가운뎃손가락을 두 개나 올리며 마치 따라오라는 듯 비웃음을 내뱉다 담장을 넘었다.
"저 새끼...."
헤인트가 얼굴을 일그러트릴 때쯤, 부하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제 부하들도 실력이 나쁜 건 아닌데 하멜이 코앞까지 왔음에도 눈치채지 못하다니.
만약 하멜이 조금이라도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얼마나 죽어 나갈지.
'…소름 끼치네.'
헤인트는 부하들을 돌려보내고 하멜이 향했던 곳으로 따라갔다.
* * *
"왔어?"
루시온이 태연하게 물었다.
[놀란 표정 봤지? 봐봐. 빛쟁이들을 부를 때는 이 방법이 최고라니까.]
러쉘은 키득거리며 자랑스럽다는 표정을 했다.
루시온은 아직 그림자 이동이 있다는 사실을 헤인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지만, 도무지 저택의 경비를 뚫고 헤인트에게 도달할 마땅한 방법을 찾을 수도 없었다.
베델이 빙의해서 헤인트가 있는 곳까지 올라탈 수 있다고 했지만, 곧 자신의 상처를 떠올렸는지 갑자기 없던 일로 하라며 입을 다물었다.
결국, 러쉘이 우쭐거리며 어둠을 내뿜으라고 말했고 그가 알려준 대로 하자 헤인트는 바로 반응했다.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헤인트가 인상을 구기며 묻자 루시온은 여유롭게 목소리를 냈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 너무 인상 쓰지 마."
"무슨 일로 왔는데?"
"용건이 있으니 왔겠지."
"그러니까 말하라고."
"왜 이렇게 서둘러? 기왕 오는 김에 맛있는 것 좀 가져오지. 눈치 없긴."
"쓸데없이 입 놀리지 말고 당장 용건을 말해."
"저번처럼 한 대 치겠다?"
루시온이 깐족거리자 헤인트는 주먹을 꽉 쥐며 부르르 떨었다.
하멜이 흑마법사라는 걸 떠나 진심으로 치고 싶은 마음이 꿈틀거렸다.
"그런데 이거 어쩌나. 주먹이 나가면 곤란할 텐데? 나한테 들어야 할 말이 있잖아."
헤인트의 주먹을 보자 루시온은 가면을 노랗게 물들이며 피식 웃었다.
"가르티오 뭰한테 얻지 못한, 13명 중에서 5명이 대체 누구인지 알아야 하지 않아?"
166화. 얽히고, 이어진다(3)
역시 하멜은 가르티오 뭰이 뉴브라 왕국과 내통한 이들을 다 알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빌어먹을....'
헤인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어떻게 아는 건지, 환장할 지경이었다.
난데없는 살기에 헤인트의 눈동자가 흄을 향했다.
'아무리 봐도 흄과 닮은 구석이 없는데....'
헤인트는 그녀와 맞부딪쳤던 그 감각 때문에 아직도 긴가민가했다.
자신이 흄과 훈련했을 때와 너무도 비슷했다.
"혹시 켈 가문을 알고 있나?"
헤인트의 입을 막았으니 루시온은 상쾌한 기분을 느끼며 물었다.
[이것도 기선 제압의 일종인가?]
베델이 러쉘을 보며 물었다.
자신이 보기에 루시온이 즐기고 있다는 느낌이 너무 강렬했다.
[물론이지. 아직 서로 탐색 중이잖아. 봐봐. 헤인트는 어쨌든 황실 기사야. 헤인트 위에 바로 5황자인 세틸이 있고, 세틸 위에 황제가 있지?]
[그렇지.]
[그런데 루시온이 아니라 하멜로서 뭐가 있어? 조직이 커지긴 했지만, 제국에 비교할 수도 없고. 위에 누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다고 루시온이 헤인트에게 굽실거리길 원해?]
[절대 아니지.]
베델이 목소리에 힘을 줬다.
[그러니까 지금 몇 번 안 봤을 때 헤인트를 눌러놔야지. 내가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다. 날 건드리면 곤란하다. 막 이렇게 해야 앞으로 편할 거 아니야?]
[그렇다면 루시온 공이 참 잘하고 있다. 내가 만약에 헤인트였으면 벌써 주먹이 나갔을지도 모를 정도니까.]
[그렇지! 완전 장난 아니게 잘하고 있지.]
그제야 러쉘도, 베델도 흡족해하며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오. 라타는 하나 배웠어. 기선 제압하려면 저런 말을 써야....
[아니야, 라타! 그건 나쁜 말이다.]
[맞아. 절대 아니야. 그런 말 쓰면 흄한테 혼날걸?]
베델과 러쉘이 다급히 입을 열었고.
―아, 알았어! 라타는 흄한테 혼나는 거 싫으니까 절대 그런 말 안 할 거야!
라타도 다급히 말했다.
'헤인트 형님이 고민하고 있어서 망정이지. 미치겠네. 적당히들 좀 하세요.'
루시온은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셋이 참 잘 논다 싶었다.
"…반역했다가 사라진 가문을 왜 들쑤시고 다니는 건데?"
헤인트는 겨우 기억했는지 딱딱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루시온이 실실 웃었다.
"만약 반역이 아니라면."
"그게 무슨 말이야?"
"만약 반역한 게 아니라 억울하게 쫓겨났다면 어쩔 건데."
모호한 말에 헤인트는 눈썹을 가운데로 몰았다.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네가 데리고 있는 신관 첼가를 잠깐 빌려줘."
"…미친놈. 이건 또 어디에서 들은 건데?"
"흑마법사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요란 떨지 마."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아니. 대부분."
루시온은 러쉘이 이전에 말했던, 아무리 흑마법사라고 해도 모두가 유령을 지배할 수 없다는 말을 떠올리며 다급히 덧붙였다.
그래도 흑마법사라면 누구든 유령을 볼 수 있으니 영 틀린 말도 아니었고.
"…하. 방금 욕 나올 뻔했네."
헤인트는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
흑마법사가 대체 어떤 흑마법을 사용하는지는 몰라도 엄청 무서운 말이었다.
"지금 눈으로 욕하고 있는데?"
"네 욕이라면 속으로도 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고맙다. 네 덕에 오래 살겠어."
루시온이 절대 물러서지 않자 헤인트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신관은 내줄 수 없어."
"그럴 줄 알았지. 애초에 네가 나한테 머리카락 하나라도 내어 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어."
루시온은 땅을 가리켰다.
"그럼 첼가 데리고 여기서 잠깐 기다리고 있어."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켈 가문이 황실의 그림자를 담당한 가문이었고, 억울하게 쫓겼으니까. 바로 뉴브라 왕국 때문에."
"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어."
루시온은 빠르게 뛰어갔다.
'이전에는 사라지더니....'
헤인트는 열심히 뛰고 있는 하멜을 어처구니없어하며 바라보았다.
혹시 그때 창문 너머로 뛰어간 게 아닐까 생각하니 괜스레 웃음이 터졌다.
'이런 미친.'
헤인트는 자신의 입을 가렸다.
저놈은 흑마법사였다.
저런 모습까지 일부러 꾸며놓을 수 있으니 조심해야 했다.
'보기보다 노련한 놈이야.'
헤인트는 머리를 긁적이다 곧 숨을 길게 내쉬었다.
'켈 가문이 진짜 황실의 그림자 가문이었는지부터 확인해야겠네.'
품에서 연락용 아이템을 꺼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