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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 *

그림자 이동을 사용해 다시 제이엘이 있던 가게 근처로 도착했다.

검은 구슬을 거의 다 흡수한 터라 어둠이 커져 라타가 사용할 수 있는 그림자 이동의 거리도 넓어졌다.

앞으로 몇 개의 검은 구슬을 흡수하게 되면 농담이 아니라 중부에서 바로 서부로 이동 가능할 만큼 범위가 넓어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제이엘 켈을 만나러 왔습니다."

루시온은 당당하게 문을 열고 말했다.

입구 근처에는 조금 전에 보지 못했던 사람이 서 있었는데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갑시다."

낯선 남자가 말했다.

"...?"

루시온은 놀라며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

"예. 제이엘 켈입니다."

제이엘은 어색한 미소를 내보였다.

그의 눈동자에 탁함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이전보다 많이 반짝거렸다.

[이발하고 나니까 사람이 달라졌네.]

러쉘은 신기한지 제이엘을 중심으로 돌아다녔다.

"당신이 말씀하시던 첼가 신관이 절 이곳까지 내몬 그놈인지 확인하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이거."

제이엘이 루시온이 놓고 간 돈주머니를 건넸다.

"아니. 네가 조직에 들어오든 말든 그건 이제 네 거야."

만약 제이엘이 조직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해도 인연을 만들어가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예…?"

"문을 고장 냈거든."

어설픈 변명에 제이엘은 오래간만에 웃음을 터트렸다.

아까까지 그렇게 강요만 했던 사람이 맞는지 믿을 수 없었다.

어쩌면 지금이 진짜 모습이 아닐까.

"예. 저희 가게의 문 값이 비싸긴 합니다."

루시온은 제이엘에게 걸어가 그의 옷자락을 살짝 잡았다.

"옷자락은 왜…?"

"간다."

뭘 망설이겠는가.

―응! 간다!

라타가 즐겁게 말하며 그림자 이동을 사용했다.

* * *

눈앞에 어둠이 가라앉자 제이엘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지, 지금 흑마법을 사용한 겁니까?"

"그래."

루시온이 뭉뚱그려 대답했다. 굳이 라타 이야기를 왜 꺼내겠는가.

제이엘은 계속 자신을 살폈고 루시온이 말을 던졌다.

"왜? 저주받았을까 봐?"

루시온을 기다리고 있던 흄이 제이엘을 지그시 바라보자 그는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신기해서요. 흑마법이라는 게, 그게… 되게 나쁜 마법으로 알려져 있잖습니까."

흄을 의식해서인지 제이엘의 말이 평소보다 느렸다.

"마법으로 죽는 사람이 많을까? 검 때문에 죽는 사람이 많을까?"

루시온은 앞으로 걸어가며 제이엘이 내뱉었던 말에 의문을 달았다.

"…당연히 검이죠."

제이엘이 대답했다.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제국에서도 마법사의 폭주를 막고 있는 상태고.

"참 웃기지 않아? 검도, 마법도, 활도 죄다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서 만들었으면서 왜 흑마법만 박해하는지 모르겠네."

"그건...."

제이엘은 말문이 막혔다.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 아닌가.

왜 흑마법사만을 나쁜 시각으로 본 것인지. 제이엘은 자신에게 의문을 느꼈다.

"아. 저기 있네."

루시온은 자신보다 먼저 도착한 헤인트를 보며 신나게 손을 흔들었다.

헤인트의 얼굴이 왈칵 구겨졌지만, 루시온과 함께 온 사람을 보자 차차 감정을 억눌렀다.

세틸에게 물어본 결과 켈 가문이 황실의 그림자 가문이었다는 사실이 맞았다.

'…하멜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

헤인트는 살짝 혼란스러웠다.

거짓과 진실을 섞은 교묘함인지. 제 눈이 진실을 보기 싫은 건지.

'내게 편지를 보낸 것도 하멜일까?'

헤인트는 오히려 그편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만약에 편지를 보낸 게 하멜이라면 처음부터 공허의 손, 아니, 뉴브라 왕국을 박살 내려고 일부러 정체를 숨기고 황실의 호의를 쌓으려고 했던 게 아닐까.

소름 끼치는 건 사실이지만, 경계심을 줄이기 위해서는 좋은 방법이었다.

솔직히 아주 큰 도움을 받았으니까.

"자. 이 사람이 제이엘 켈이야. 너도 확인했을 거잖아?"

루시온은 가까이 다가가 제이엘을 가리켰다.

"그래. 사실이었어."

헤인트는 머쓱한 듯 고개를 숙이는 제이엘의 고갯짓에 맞춰 헤인트 역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첼가가 맞지?"

루시온이 묻자 헤인트가 잡고 있던 남자가 움찔거렸다.

[첼가가 맞다.]

베델은 혹시 몰라 헤인트를 따라다녔다. 그가 데려온 신관은 첼가가 맞았다.

"그래."

헤인트는 대답 후에 자신이 데려온 첼가의 후드를 젖혔다.

입과 눈이 가려진 상태였다.

하지만 제이엘이 반응했다.

루시온은 씩 웃으며 헤인트에게 말했다.

"눈을 가린 천 풀어."

"그렇지 않아도 풀 참이니까, 명령하지 마."

"눈을 가린 천을 풀어줘. 됐지?"

헤인트가 루시온의 대답에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빈정거리는 게 취미야?"

"방금은 아니야. 네가 삐딱하게 들은 거겠지. 아, 삐딱한 게 취미야?"

"…빌어먹을."

헤인트는 애써 욕지거리를 참아내며 첼가의 눈을 가렸던 천을 풀었다.

하멜이랑 말싸움을 해봤자 말려들어가는 기분만 들 뿐이었다.

천이 풀리면 풀릴수록 첼가의 떨림이 점점 심해졌고, 루시온과 헤인트는 눈치챘다.

저놈이 맞다는 걸.

[저놈이 맞네.]

그건 러쉘도 마찬가지였다.

첼가의 얼굴 반쪽이 드러나자 제이엘이 숨을 멈췄다.

현기증이 도는지 비틀거리다 못해 헛구역질하기 시작했다.

"…저놈. 저놈… 입니다."

제이엘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가 고개를 들자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저놈이 맞습니다. 저놈입니다! 절 모함했던 놈이! 바로 저놈이라고요!"

제이엘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다 못해 절규에 가깝게 들려왔다.

"저놈이! 제 전부를 앗아간 저놈이! 저놈이 첼가가 맞습니다! 저놈이…!"

"죽이는 건 안 돼. 지금 때려서도 안 되겠지, 그렇지?"

루시온이 제이엘을 말리며 헤인트를 보았다.

"아니, 쳐도 돼. 몇 대라면."

하지만 뜻밖의 대답이 헤인트에게 들려왔다.

제이엘이 단숨에 달려 첼가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퍼억!

"일단 증인일 텐데?"

루시온이 살짝 망설이며 헤인트를 향해 입술을 열었다.

"증인을 떠나 저 분노를 터트릴 기회는 줘야지. 그리고 말려도 내가 말리니까, 신경 꺼."

'5황자의 신임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상당한데?'

루시온은 첼가의 얼굴을 묵사발로 만들다시피 한 제이엘의 분노를 바라보았다.

"거기까지입니다."

헤인트는 첼가가 딱 입을 놀릴 수 있을 만큼 맞게 한 뒤에 제이엘을 말렸다.

"으아아아…! 저 새끼, 저거 죽여야 해! 놓으라고!"

하지만 제이엘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십여 년간 쌓아왔던 둑이 풀어지면서 두 눈에 증오가 가득했다.

"제이엘."

루시온이 조용히 제이엘을 불렀다.

그 목소리에 제이엘이 반응했다.

"복수심이 치솟는 건 알겠지만, 네 목적이 고작 저 파리 새끼를 죽이는 게 전부였어?"

제이엘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다 천천히 힘을 빼고 고개를 늘어트렸다.

"…아닙니다."

하멜의 말이 맞았다.

분명 불을 붙일 심지조차 없었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첼가를 보는 순간 내내 숨어 있던 심지가 나타났고 복수가 불꽃처럼 피어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과거의 실패가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 저 자신을 속이고 있었나 봅니다."

제이엘은 더는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더는 실패로 삶을 물들이고 싶지도 않았고.

"말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제이엘은 헤인트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이제 진정이 됐으면 말해주십시오. 당신은 켈 가문의 가주가 맞습니까?"

헤인트가 물었다.

"맞습니다. 저는 마지막 남은 켈 가문의 사람이자 가주였던 제이엘 켈입니다."

"그럼 정말로 저 신관이 당신에게 반역의 죄를 씌웠던 신관이 맞습니까?"

"비록 보잘것없는 목숨이지만, 그 말이 사실임에 제 목숨과 켈 가문의 마지막 자존심을 걸겠습니다."

제이엘의 눈동자에 힘이 들어갔다.

과거에 찌든 패배감을 씻어버리려는 듯이.

167화. 은혜에 보답합니다

"좋습니다."

헤인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켈 가문의 마지막 가주의 이름은 제이엘 켈이었다.

굳이 망한 가문의 가주를 사칭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때 저 녀석은 네바스트의 대신관으로서 왔다고 했어."

루시온이 끼어들며 말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헤인트가 순간 발끈했다.

"저놈은 대신관이 될 수 없어."

"왜?"

"너도 알잖아? 저놈이 가진 빛으로 신관 자리도 위태롭다는 거."

"그래. 그런데 대신관으로 왔다고 말해줬거든. 말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는데, 혹시나 해서 물어봤지."

루시온의 말에 헤인트는 자연스럽게 제이엘을 보았다.

"사실입니다."

"정말입니까? 정말 대신관이라고 했습니까?"

헤인트는 재차 제이엘에게 물었다.

"예. 몇 번을 말해도 사실입니다."

"…그럴 리가."

헤인트의 얼굴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신관 자리도 위태로울 정도로 빛의 힘이 적은 신관이 대신관으로 위장해 황실 내부에 들어갔다.

이건 불가능했다.

네바스트에서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숨기고자 하지 않았다면.

놈들이 숨긴 게 지금으로서는 뭐가 가장 자연스러운지 몰랐다.

하지만 황실의 그림자 역할을 맡았던 켈 가문이 뉴브라 왕국 때문에 내쫓겼다고 했던 하멜의 말이 떠올랐다.

그 사실이 지금으로서는 뭘 가리키겠는가.

'…네바스트가 제국을 노린다!'

헤인트는 크게 흔들리는 눈으로 루시온을 보았다.

뉴브라에 이어 네바스트까지.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지?"

루시온의 가면이 노랗게 물들었다.

"너, 너 알고 있었어?"

헤인트가 거의 덜덜 떨다시피 하며 물었다.

"아니. 하지만 너보다는 빨리 알았어. 신성 국가 네바스트가 제국을 노린다는 사실을."

루시온의 목소리는 태연했다.

"돌아버리겠네...."

헤인트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미친 소리가 아닌가.

신성 국가.

중립을 유지해야 할 신성 국가 네바스트가 중립을 깨고 뉴브라의 뒤도 봐주면서 제국을 노린다니.

헤인트는 마른 침을 삼킨 후에 첼가를 대놓고 노려보았다.

헤인트의 살기에 첼가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소중한 증거한테 화풀이하지 말고 빛쟁이 네가 확인해야 할 게 또 있잖아?"

루시온의 말이 끝나자마자 헤인트는 흠칫 놀랐다.

"여기서… 끝이 아니라고?"

"그래. 대체 제이엘이 왜 그런 누명을 쓴 건지. 들어야 하지 않겠어?"

두려웠다.

헤인트는 말도 안 되는 일을 알아버릴까 봐 두려웠다.

[그래. 저게 정상적인 반응이지. 루시온 네가 너무 태연한 거고.]

헤인트답지 않게 갈대처럼 흔들리는 모습에 러쉘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루시온 공도 속이 속이 아닐 거다. 티를 내지 않았을 뿐이지.]

'이번에는 베델이 맞췄네.'

루시온은 속으로 낄낄거렸다.

"흑마법사와 결탁했다고 모함을 받았습니다."

제이엘은 흐름을 보았다. 자신이 유리해질 흐름이. 그래서 평소와 달리 망설이지 않고 빠르게 입을 열었다.

"...."

헤인트는 이번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흑마법사와 결탁했다는 사실을 공포하는 건 무척 어려웠다.

이를 가능케 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였다.

"흑마법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경우입니까? 흑마법사를 잡아 와 불게 한 경우입니까?"

"후자입니다."

스겅.

제이엘의 말과 함께 헤인트는 검을 뽑아 첼가가 물고 있던 천을 잘라버렸다.

"지금부터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네 손가락이 하나씩 잘려나갈 거다."

헤인트가 검을 쥐지 않은 손에서 빛을 내뿜으며 살벌하게 말했다.

'…미친!'

루시온이 황급히 뒤로 물러서다 말고 비틀거렸다.

흄이 다급히 루시온을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흄이 물었다.

'이건 너무 한 거 아니야?'

가까이에서 나온 빛 때문에 루시온의 온몸이 작게 떨려왔다.

제이엘이 복수에 폭주하다시피 했을 때 어둠을 꺼내려고 했지만, 헤인트를 생각해 일부러 내뿜지 않았는데.

[괜찮은가?]

베델이 걱정했고.

[아니! 서로 어떤 관계인지 아는데 이런 건 조심해야지!]

러쉘이 화를 냈다.

뒤늦게 헤인트가 깜짝 놀라며 빛을 거뒀다.

하멜이 있다는 걸 잊어버린 탓이었다.

하지만 지금 사과할 순 없었다.

자신이 빛의 축복을 받은 자라는 걸 알자마자 첼가가 공포에 질렸다.

빛의 축복을 받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재생력.

누군가는 말 그대로 축복이라고 하지만, 세상에서 제일 잔인한 능력이기도 했다.

상대를 죽이지 않고, 살이 잘려나갔음에도 고통을 치유하며 고문을 이어나갈 수 있으니.

놈도 빛의 축복을 받은 자이기에 빛을 보여준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네가 제이엘 켈 씨를 모함했을 당시 그 흑마법사는 누가 불렀지?"

"벌써 십여 년… 으악!"

헤인트가 망설임 없이 첼가의 엄지손가락을 잘라버렸다.

피가 줄줄 흐르자 첼가는 온몸을 비틀며 외쳤다.

"네, 네, 네바스트입니다! 네바스트요!"

"사전에 흑마법사가 올 거라고 지시를 들었나?"

"맞습니다. 들었습니다! 그냥, 그냥 종이를 주고 거기 적힌 글자 그대로 외워서 말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누가?"

"그때도 얼굴을 가려서 모릅니다! 정말입니다!"

"흑마법사와 네바스트의 관계는?"

"그, 그것도 모릅니다! 정말입니다! 저는 그저 신관 자리를 유지하고자...."

팔찌 사건 때도 들었던 변명이 튀어나오자 첼가의 검지가 잘려나갔다.

스윽.

"으아아악! 가, 같이! 같이 무언가를 협력하는 듯했습니다! 그거밖에 모릅니다! 저… 정말입니다. 제발요. 벌써 십여 년 전이라 제가 기억하는 건 그것밖에 없습니다!"

정말 더는 모르는 듯하자 헤인트는 검을 거두며 루시온을 보았다.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걸 확인하고 빛을 내뿜어 첼가의 손을 치료했다.

피가 서서히 멎어갔다.

하지만 첼가는 그만 고통에 기절하고 말았다.

그제야 헤인트가 루시온을 보며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뭐라고, 빛쟁아? 여기서는 잘 안 들려."

루시온은 가슴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벌써 목구멍에 피 맛이 맴돌았다.

누가 조금만 흔들어도 당장 피가 입 밖으로 나와 버릴지도 몰랐다.

"미안하다고!"

헤인트가 소리쳤다.

그제야 루시온이 히죽 웃었다.

"그래. 그 사과, 받아줄게."

헤인트는 그 말에 인상을 구겼다.

별말을 한 것도 아님에도 사람을 화나게 하는 재주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이 이토록 짜증이 날 일이 아니니까.

"봤지, 빛쟁아?"

루시온이 잠깐 숨을 고른 뒤에 말을 내뱉었다.

"뭘?"

"난 약속이라면 반드시 지켜."

"...."

헤인트는 입술을 열지 않았다.

맞는 말이지만, 차마 긍정이 목구멍에 떨어지질 않았다.

아직은 아니었다.

아직은.

'진짜 너무하네.'

루시온은 헤인트의 태도에 속이 쓰라렸다.

나름 정의롭고 그나마 막히지 않은 헤인트가 이러면 다른 사람들은 오죽하겠는가.

알고 있었다.

한 번 굳어진 이미지에서 벗어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자신도 '미친놈'에서 벗어나는데 얼마나 오래 걸렸던가.

하지만 빼먹을 거 다 빼먹고 저러니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까마귀 문양이 어떤 단체인지 알려줘. 공허의 손과 뉴브라가 손을 잡았다는 것도 알려줘. 방금 네바스트가 뉴브라와 흑마법사 사이의 관계를 알고도 침묵했다는 것도 알려줬는데.'

망할 자식.

루시온은 가만히 있질 않았다.

"그러니 너도 약속 지켜. 내가 썩 괜찮은 놈이라는 걸 황실에 말 좀 잘해. 쓸데없이 나를 이용할 생각만 하지 말고."

루시온은 손을 휘저었다.

"이건 또 뭔데?"

헤인트는 눈썹 한쪽을 올렸다.

"이제 볼일은 끝났으니까 데려가라고. 첼가 놈을 심문해서 정보를 캐내는 건 네 역할이잖아?"

헤인트의 시선이 제이엘에게 향했다.

"넘보지 마. 아직 내어줄 마음이 없으니까."

루시온은 칼같이 끊어냈다.

아직 하멜로서 헤인트와의 관계도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고, 하물며 황제와 황자까지 만난 적이 없었다.

천천히, 딱 갈증이 날 만큼 정보를 줘야지 한 번에 줬다간 언제든지 목이 잘리거나, 이 관계조차 끊어질 수 있다는 걸 늘 생각해야 했다.

"내가 너와 연락할 수단을 줘."

헤인트가 살짝 입맛을 다시며 손을 뻗었다.

"그건 나중에."

"불공평하지 않아?"

하.

루시온이 비웃음을 터트렸다.

"불공평? 애초에 지금 이 관계가 공평하긴 할까 모르겠네. 내가 일방적으로 정보를 주고 있잖아?"

루시온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네가 나한테 줄 수 있는 건 신뢰야. 내가 안심하고 발을 디딜 수 있게 바닥을 잘 다져놓으라고."

루시온은 그대로 등을 돌려 앞으로 걸었다.

제이엘은 헤인트에게 고개를 숙인 뒤에 루시온을 따라갔다.

눈앞에서 제이엘이 떠남에도 헤인트는 차마 붙잡을 수 없었다.

제이엘을 설득하고 이곳에 데려온 건 다름 아닌 하멜이었으니까.

'어렵네....'

헤인트는 마치 균형이 맞지 않은 판자 위에서 중심을 잡는 기분을 느꼈다.

'불공평이라니.'

자신이 내뱉었지만, 정말로 어이가 없었다.

'하멜은 제국인일까?'

그게 아니라면 뉴브라도 네바스트도 다 박살 내겠다는 의지를 낼 수 없지 않을까 싶었다.

뭐가 됐든, 오늘의 보고에 하멜의 칭찬이라도 해야 할 듯했다.

'…그런데 내 빛이 약했나?'

헤인트는 자신의 손을 빤히 보았다.

미안할 정도로 세게 내뿜은 것 같았는데.

'아마도 안 아픈 척하는 거겠지.'

헤인트도 첼가를 둘러매고 몸을 돌렸다.

* * *

"…쿨럭!"

제이엘의 가게 근처에 도착하자마자 루시온이 가면을 올려 피를 토했다.

흄이 재빨리 루시온의 머리 쪽에 서서 그의 얼굴을 가렸다.

'요새 헤인트 형님 때문에 빛 내성을 키우기가 힘들었는데, 혹시 몰라 아까 라트초를 먹길 잘했네.'

루시온은 아프지만, 흡족했다.

지금도 빛의 내성 덕에 이렇게 두 발로 버티고 서 있는 게 아니겠나.

"...!"

제이엘이 깜짝 놀랐다.

"괘, 괘, 괜찮으십니까?"

"별거 아니야."

루시온은 흄이 건넨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은 후에 다시 가면을 고쳐 썼다.

[걱정하지 마. 제이엘이 루시온 공의 얼굴을 보지 못했으니까.]

베델이 루시온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매번 보아도 참 안쓰럽다 싶었다.

하지만 루시온을 보는 러쉘의 표정만 달랐다.

'내가 보기에 기뻐하고 있는 것 같단 말이지.'

아침에 라트초를 먹지 않았던가.

왜 먹냐고 그랬더니 나중에 빛을 쐴 거라고 대답했고.

'설마 저런 식으로 빛을 쐴 줄은 루시온도 몰랐겠지.'

러쉘은 아픔에 길들어진 루시온의 상황이 마냥 가슴이 아팠다.

대체 납치당했을 적에 얼마나 심한 일을 당한 건지.

"정말 괜찮으십니까…?"

제이엘이 먼저 등을 돌리며 재차 물었다.

마치 마나가 역류해서 일어나는 현상 같았다.

자신도 겪어봤기에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었다.

"별거 아니라니까."

루시온은 숨을 짧게 내쉬었다.

"그럼, 안으로 드시겠습니까?"

제이엘이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첼가를 때린 후인지 몰라도 그의 표정이 조금은 밝아져 있었다.

"왜? 장부라도 보여주게?"

루시온이 실실거리며 물었다.

"예. 보여드리겠습니다."

"…뭐 잘못 먹었어? 어제 그렇게 으르렁거리더니."

"제게 은혜를 베풀어주셨으니 이 정도는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래. 이제 상인의 모습이 나오네. 만족스러워."

상인이라면 으레 이렇게 얼굴에 아주 단단한 철판을 깔 줄 알아야 했다.

뻔뻔한 모습에 루시온은 마음에 들었다.

"그게 아니라...."

"들어가자."

루시온은 제이엘의 말을 본의 아니게 잘랐다.

가게 안은 이전처럼 연기로 자욱하지 않았다.

그건 제이엘의 방 역시 마찬가지였다.

"담배 끊었어?"

루시온이 물었다.

"아뇨. 끊진 못했습니다."

제이엘이 머쓱한 얼굴로 뒷덜미를 만지작거렸다.

"그래. 어쨌든 숨쉬기 편안하네."

루시온은 만족하며 소파에 앉았다.

5점 만점에 1점.

저번에는 열 받아서 그랬는지 몰라도 오늘따라 궁둥이에 닿는 소파 감각이 불쾌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말해봐."

"제게 이런 소중한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제이엘이 고개를 숙였다.

"너 때문에 나선 건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이엘이 쭈뼛거리다 미리 꺼내 놓은 장부를 루시온에게 건네며 말했다.

"일… 하고 싶습니다."

"일하고 싶다고?"

"예. 다시 상인으로서 일하고 싶습니다."

"켈 가문의 가주가 아니라?"

"…명예를 회복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닙니다."

"난 상인이 필요하지 한 가문의 가주가 필요한 건 아니야. 우리 조직에서도 가주라면 또 있으니까."

미엘라 체프란.

조금 전에 연락이 왔지만, 받진 못했다.

좋은 소식을 가져다주면 좋겠거늘.

제이엘은 모든 망설임을 털어낸 듯 처음으로 어색하지 않은 미소를 지었다.

"상인으로서 절 써주십시오. 조직에 들어가겠습니다."

168화. 은혜에 보답합니다(2)

서걱.

푸른 실이 잘려나가고 붉은 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연했다.

뉴브라에게 모든 걸 잃은 제이엘의 적이 곧 자신의 적이었으니.

"복수는?"

루시온이 묻자 제이엘은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당신을 따라가면 복수는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까?"

"그렇지."

"이게 마지막입니다. 제 인생을 걸고 마지막으로 하는 거래라고 보시면 됩니다."

"거래가 아니라 도박이겠지."

"그렇겠지요. 도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이번에도 진다면 그땐 미련 없이 죽으려고 했습니다. 더는 추하긴 싫으니까요."

"가문의 명예는 어쩌고?"

"만약 제가 이기면 그때 가서 하멜 님께 거래를 제안하도록 하겠습니다."

제이엘의 살짝 흐릿한 눈동자에 날카로운 빛이 어렸다.

"좋습니다."

루시온은 장부를 받아들였고, 손을 뻗었다.

"조직 에일에 온 걸 환영합니다, 제이엘 씨."

갑작스러운 존대에 제이엘의 팔목에 우수수 돋아난 소름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어색하게나마 미소를 지으며 루시온의 손을 잡았다.

* * *

지금 크라언은 북부에 있었다.

헤인트와 돌아오기로 약속한 시각까지 2시간 정도 남았다.

어차피 제이엘을 소개해야 하기에 빨리빨리 조직과 만나게 하는 게 낫겠다 생각해 그를 데리고 조직이 임시로 빌린 건물로 향했다.

"어! 하멜 님, 렌탈 씨!"

입구에서 경비를 서던 라인트가 바로 루시온과 흄을 반겼다.

"몸은 어떠십니까? 아직도 좋지 않으십니까?"

"아닙니다. 일찌감치 나았습니다."

"확실히 열감이 없습니다. 진짜 걱정 많이 했습니다."

'크라언 병에 옮기라도 한 건가? 다들 무슨 걱정이 이렇게 많아?'

루시온은 헛웃음을 애써 눌렀다.

"그럼 혹시 오늘 짧게라도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있습니까?"

라인트가 너무도 기대하기에 루시온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헤인트라면 약속을 칼같이 지키니 걱정도 없었고.

"잠깐이라면 괜찮습니다."

"아 참. 피터한테 들었습니다."

라인트가 갑자기 목소리를 내리깔며 존경의 의미를 담아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너무 부담스러워 루시온은 뒤로 살짝 물러났다.

"뭘 말입니까…?"

"위대한 하멜 님의 무용담을 말입니다."

[푸핫. 크라언이 말했던 게 사실이었어? 술 취해서 흘린 말인데 앞에 '위대한'이 붙었다니. 안 봐도 뻔하다. 이야, 우리 제자님이 한순간에 조직의 영웅이 된 거 아니야?]

이때다 싶어 러쉘은 자신의 든든한 지원자를 믿고 쉴 새 없이 입을 놀려댔다.

―오오! 라타는 루시온이 위대한 거랑 영웅이 된 거랑 너무 좋아! 흄이 말했는데 원래 영웅은 위대한 거래!

[라타 말 들었지? 위대한 루시온.]

―위대한 루시온!

러쉘에 이어 라타까지 즐겁게 외쳤다.

루시온이 러쉘 좀 말려보라고 베델을 볼 때쯤에 라인트가 입을 열었다.

그의 눈동자가 제이엘을 향했다.

"아. 이쪽은 누구십니까?"

루시온은 덥석 라인트의 말을 물었다.

"앞으로 우리의 정보망이자 연락 통이 되어주실 상단주 제이엘 씨입니다."

"반갑습니다. 에일의 조직원인 라인트입니다. 현재 조직의 대장인 크라언 님의 호위도 맡고 있습니다."

라인트는 루시온에게 하고 싶은 말을 꾹 참으며 제이엘에게 손을 뻗었다.

조직의 대장이 하멜이 아니라고?

살짝 당황하던 제이엘이 고객을 응대하듯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반갑습니다. 제이엘입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라인트 씨."

루시온이 라인트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뇨. 같이 가시죠. 넌 여기 꼭 지키고 있어. 뭐가 날아오면 네 몸으로 막는 거 잊지 말고."

라인트는 제 부하에게 지시를 내리고서는 활짝 웃으며 당장이라도 궁금했던 물음을 꺼내려고 했다.

"…혹시 아십니까?"

하지만 라인트가 말을 아끼다 조심스레 물었다.

"예. 제가 흑마법사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럼 잘 됐습니다!"

루시온의 대답에 라인트는 이때다 싶어 재빨리 수첩을 꺼내 머릿속에 꼭 담아 두고 있던 질문을 루시온에게 하기 시작했다.

루시온이 몇 개의 질문에 대답했을까,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뇨! 그렇게 말고요! 그렇게 개떡같이 쓰니까 고장이 난 거잖아요!"

'…미엘라가 여기 왜 있어?'

루시온은 미엘라의 목소리에 순간 걸음을 멈췄다.

서부에 있는 체프란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았던가.

러쉘이 당장 날아가 벽에 얼굴을 박았다.

[뭐야. 진짜 미엘라잖아. 옆에 헤로안도 있는데?]

드르르르르!

곧 드릴 같은 소리에 루시온은 다급히 귀를 막았다.

손이 멋대로 덜덜 떨렸다.

한 번에 터지는 소리가 아니라 이어지는 소리였기에 마치 누군가 자신을 향해 떠들어대는 것만 같았다.

―우오오오! 라타가 좋아하는 재미있는 소리야!

꺄르르.

라타는 그림자 속에서 좋아서 팔짝팔짝 날뛰다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루시온, 루시오온. 라타가 들어봤는데 이거 나쁜 소리가 아니야. 그냥 두루루루루 하면서 재미있는 소리야.

루시온은 애써 숨을 쉬려 노력했다.

'…망할. 괜찮은데. 나는 진짜 괜찮은데 내 몸은 대체 왜 이러는 거야?'

"하멜 님?"

괴상한 소리에 정신이 팔린 제이엘과 달리 낄낄 웃던 라인트가 루시온의 이상 증세를 눈치챘다.

"아… 무것도 아닙니다."

루시온이 손을 내렸다.

곧 소리가 멈추고 헤로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 이렇게 쓰는 거였네."

"그래요! 바로 그거예요, 멍청이 씨! 기껏 예쁘게 만들었는데 왜 이상하게 써서 망가트려요?"

루시온은 태평한 소리에 흄을 보며 문을 가리켰다.

조직원들이 저마다 웃음을 터트리다 말고 갑자기 문이 열리자 순식간에 웃음을 멈추며 밖을 바라보았다.

일찌감치 루시온이 고개를 돌리고 있었기에 아무렇지도 않았다.

"렌탈 씨!"

미엘라가 흄을 보자마자 반기며 달려가다 말고 다급히 눈동자를 굴렸다.

그녀가 있다는 건 하멜이 있다는 게 아닌가.

"서부로 돌아간 게 아닙니까?"

루시온의 목소리에 미엘라는 눈을 질끈 감다 한쪽 눈을 떴다.

가면에 가렸으나 루시온이 살짝 성이 났다는 게 느껴졌다.

"그게 말이죠. 가려고 했는데, 이유가 있었어요. 그래서 연락했는데, 하멜 님이 받지 않았지만요."

"일단 크라언 님을 뵙고 오겠습니다."

이유가 있다는 말에 루시온은 평정심을 유지하며 제이엘을 데리고 크라언을 찾았다.

"저기에 있습니다. 제가 안내하죠."

루시온의 등장에 사람들이 그에게 관심을 가지자 헤로안이 굴착기 머리처럼 달린 마법 아이템을 다급히 내려놓고는 앞장섰다.

―우오오! 저게 뭘까? 라타는 너무 궁금해.

라타는 헤로안이 내려놓은 마법 아이템을 보며 눈을 반짝거렸다.

"가르쳐주지 않아도 크라언 님이 어디 있는지 알아."

헤로안의 속셈을 알기에 루시온은 어울려주고 싶지 않았다.

"에이, 오랜만에 만났잖습니까."

"이틀 전에 연락했잖아."

"목소리랑 직접 보는 거랑 다르잖습니까. 그리고 제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꾸 끊으셔서 좀 불쾌합니다."

"적당히 말해야 들어주는 시늉이라도 하지. 넌 말이 너무 많아."

"그건 무조건 하멜 님의 착각입니다. 저는 절대로 말이 많지… 왜 따라옵니까?"

헤로안은 불쾌한 듯 라인트를 보았다.

라인트 때문에 시선이 분산되질 않았는가.

"어이, 퀘이트."

라인트는 태연하게 퀘이트를 불렀지만, 그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조금 전에 창문 너머로 도망쳤다.]

베델의 말에 루시온은 순간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퀘이트가 얼마나 시달렸으면 도망을 쳤겠는가.

"그 녀석 이름은 왜 부르는 겁니까?"

헤로안이 빈정거리면서 물었지만, 라인트는 끄떡도 없었다.

"네 담당이니 부르지."

"그놈하고 엮지 마십시오. 진짜 짜증 난단 말입니다."

"방금 그 아이템은...."

루시온은 두 사람의 말다툼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갑자기 라타가 말했던 게 생각이 나 입을 열다 다급히 다물었다.

[네가 네 무덤을 팠네.]

러쉘이 키득거렸다.

언제 인상을 찡그렸냐는 듯 헤로안이 눈을 반짝였다.

"예! 좋은 질문입니다. 방금 그게 아이템이 뭐냐면 미엘라 씨가 만든 땅 파는 아이템입니다. 지부 전부를 손에 넣고 나면 중부 중앙쯤에 땅을 파서 나머지 지부랑 연결할 거거든요. 중부 지부 가운데에 정보가 가득 모인 곳이 있다고, 아, 이거 제가 말씀드렸습니까?"

'개미굴을 말하는 거네.'

중부 지부 가운데에 정보가 가득 모인 곳은 개미굴뿐이었다.

"헤로안."

"예."

"저번에 신관의 비리를 뿌리고 싶다고 했지?"

"예예! 장난 아닙니다. 상상만 해도 몸이 떨려 죽겠습니다."

"일단 내가 말하면 뿌릴 수 있게 준비라도 해봐. 기왕 뿌릴 거 골고루 퍼져나갈 수 있게."

일단 준비는 해둬야지.

루시온의 허락이 떨어지자 헤로안은 기뻐 날뛰었다.

"제이엘 씨."

밖이 소란스러운 탓인지 크라언이 방에서 나왔다.

잘됐다.

루시온은 크라언을 가리키며 말했다.

"조직 에일의 대장인 크라언 님입니다."

진짜 저 사람이 대장입니까?

제이엘은 조금 전에도 묻고 싶었던 질문을 눈으로 하는 듯했다.

"반갑습니다. 크라언입니다."

크라언은 루시온을 보며 몸은 괜찮냐는 말을 꾹 참고 제이엘에게 손을 뻗었다.

하멜이 데려온 상인이었다.

광산도 손에 넣은 마당에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많아졌는데, 마침 잘됐다 싶었다.

* * *

'…하. 지친다.'

루시온은 의자에 깊숙이 기댔다.

제이엘과 크라언을 중계해준 뒤에 밖으로 나왔고, 기다리고 있던 헤로안과 라인트에게 붙잡혀 시달렸다.

헤로안은 헤로안대로 제 할 말 만했고.

라인트는 라인트대로 꾹 눌러왔던 질문을 꺼내며 늘어놓았다.

양쪽에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꺼내 놓은 터라 죽는 줄 알았다.

도중에 하품하며 걸어 나왔던 피터까지 합류했다.

얌전히 잠이나 잘 것이지.

조직원들은 두 사람도 모자라 피터까지 자신에게 오자 말을 걸어볼 의지조차 잃어버렸는지 제 주변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라타도 시끄럽다고 귀를 막았겠는가.

도중에 흄이 도무지 참지 못하겠는지 나서려고 했지만, 당장 세 사람의 목을 비틀 기세라 다급히 막았다.

결국, 크라언이 나서서야 평화가 찾아왔다.

크라언이 이토록 반가운 건 처음이었다.

"…시끄러웠죠?"

미엘라가 차를 가지고 와서는 루시온과 흄 앞에 내려놓았다.

[엄청 시끄러웠지.]

러쉘이 고개를 끄덕였고, 베델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맞다. 시장 한복판에 서 있는 기분이었어.]

"예. 엄청 시끄러웠습니다."

흄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미엘라는 미안한 표정을 했다.

"미안해요. 원래 이래서 할 말이 없네요. 아. 하멜 님은… 마실 수 있나요?"

미엘라가 루시온의 가면을 보며 물었다.

"식으면 먹죠, 뭐."

루시온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미엘라는 남들 앞에서 차도 못 마시는 상황이 안타까웠다.

평생 비밀로 할 수 있으니까 편안하게 가면 벗고 마시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저 말이에요, 조직에 들어와서 엄청 즐거워요."

하지만 미엘라는 다른 말을 꺼내며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다행입니다. 저는 계속 이렇게 돌아다녀야겠네요. 한 번 걸리니 죽을 것 같습니다."

"다들 하멜 님이 반가워서 그래요. 죄다 하멜 님과 인연이 깊잖아요."

"제가 데려왔으니까요. 아, 라인트 씨만 빼고요."

"아뇨. 라인트 씨를 포함해서 다들 하멜 님께 은혜를 갚고 싶어해요."

"...?"

루시온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은혜라니.

그건 정당한 거래였다.

미엘라가 기울어진 루시온의 고개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흄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이것 봐요. 하멜 님은 본인에게 참 무심해요."

"예?"

"아무것도 아니에요."

미엘라는 사실을 알려주려다 이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해 입을 다물었다.

"아. 몸은 어떠세요?"

"…단체로 왜 이러는 겁니까? 무슨 내기라도 했습니까?"

루시온의 대답에 미엘라가 쿡쿡 웃었다.

"크라언 씨 같죠?"

"예."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하멜 님께서 본인 몸을 아끼지 않는데요."

"좋아서 하는 겁니다."

"알아요. 알아도 어쩔 수 없어요. 아마 다들 저하고 같은 마음일걸요?"

미엘라의 입꼬리가 휘었다.

사실 루시온도 눈치채지 못한 건 아니었다.

날이 가면 갈수록 자신을 바라보는 조직원들의 눈빛이 따뜻해졌고, 간단한 대화를 나눔에도 뭔가 몽실몽실한 기분이 밀려든다는 걸.

하지만 루시온은 그 감각이 너무 낯설었다.

너무 낯설어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연락 못 받아서 미안합니다. 무슨 일로 연락하셨습니까?"

"서부로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필요한 재료가 중부에 많아서 어쩔 수 없이 돌아왔어요."

미엘라는 일단 자신이 돌아온 이유부터 밝혔다.

루시온의 손가락이 움찔거리자 미엘라는 다시 목소리를 냈다.

"알아요. 제가 무모했다는 걸요. 아시다시피 저는 제 몸을 지키지도 못해요. 앞으로 제 역할이 얼마나 커질지도 알고 있고요. 하지만 은혜를 갚고 싶었어요."

미엘라가 품에서 목걸이를 꺼냈다.

―어! 경매장에서 봤던, 엄, 미엘라의 목걸이다! 에헴. 라타는 기억하고 있었지.

라타가 그림자 끝에까지 매달려 꼬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루시온은 하멜로서 저 목걸이를 처음 봐야 했기에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하멜 님에게 드리고 싶다고 말씀드렸던, 빛을 흡수해 재생력만 내뿜을 수 있는 아이템이 바로 이 목걸이에요."

미엘라가 목걸이를 흔들었다.

169화. 은혜에 보답합니다(3)

"혹시 완성… 됐습니까?"

루시온이 물었다.

"아뇨. 완성됐으면 저도 엄청 좋겠지만, 아직은 아니에요. 그런데 얼마 안 걸릴 것 같아요."

미엘라가 배시시 웃었다.

"빛 흡수까지는 이제 제대로 작동하고, 빛 속에 있는 재생력만 남도록 하는 작업만 남았어요. 솔직히 빛 흡수가 가장 어려웠는데 저한테 오는 지원금이 장난 아니라서 비싼 마석을 몇백 개씩 터트리다 보니 감이 오더라고요."

[…마석을 몇백 개나? 저게 다 얼마야?]

러쉘이 기겁했다.

"그래도 아직 빛이 가진 '재생력'이 낯설지만, 마법 속성을 걸러서 분리하는 작업을 다른 아이템에도 많이 해봤으니 진짜 얼마 안 남은 셈이죠!"

"필요한 게 더 있으십니까?"

"네. 있어요!"

다급히 말했지만, 미엘라는 곧 민망한 미소를 내비쳤다.

자신의 입으로도 말한 것처럼 지원금이 장난 아니었다.

귀족이었을 때 그래도 제 주머니에 들어왔던 품위 유지비보다 훨씬 더 많았다.

하지만 하멜이 가격이 얼마든 부담 갖지 말고 말하라고 했으니 진짜 부담은 없었다.

"아시다시피 빛은 엄청난 열을 낼 수 있어요. 그 빛을 담을 수 있는 용기를 제작할 장인이 필요해요. 형태는 상관없어요. 가장 단단한 광석을 다듬을 수 있는 장인 말이에요."

'…자마드가 우리 조직에 들어왔다는 걸 모르나?'

자신이 크라언한테만 이야기한 건 사실이었기에 루시온은 긴가민가했다.

"그럼 지금 저 목걸이에 박힌 보석은 뭡니까?"

"마석이에요. 어디까지나 임시일 뿐, 이걸로 충분하지 않아요. 아마 곧 깨질 거예요."

"그럼 앞으로 마석과 광석을 섞겠다는 말입니까?"

"맞아요!"

미엘라가 너무도 활짝 웃으며 눈을 반짝였다.

"마석이 빛을 잡아주겠지만, 튼튼한 벽이 필요해요. 그 벽 역할을 광석이 맡았으면 좋겠어요."

"그럼 대장장이 자마드 씨 정도면 됩니까?"

"그… 은퇴하셨던 자마드 씨 맞나요?"

"맞습니다."

"저는 너무 좋지만, 그분을 대체 어디에서 만나면 좋을지...."

루시온은 연락용 아이템을 꺼냈다.

제발 오늘은 받길 원하며.

몇십 초가 흘렀는지 몰라도 무뚝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무슨 일인가?>

"오. 웬일이십니까?"

루시온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당연히 받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 나도 사람인지라 오랜만에 묵은 떼나 벗기려고 그랬지. 크. 악취 때문에 더는 못 견뎌.>

"요구할 게 하나 더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허. 자네가 혀를 잘 놀리는 건 알았지만, 약속을 바꿀 줄은 몰랐는데. 이것 참 섭섭합세.>

"아닙니다. 제가 자마드 씨가 만든 대검을 보고 조직에 올지 말지를 결정한다던 약속은 그대로입니다. 조만간 신선한 광물도 배달할 예정이고요."

'진짜예요? 진짜 자마드 씨에요?' 하며 미엘라가 입술을 뻐끔거렸다.

"예. 진짜 자마드 씨입니다. 아, 물론 이제 갓 대장장이가 된 자마드 씨지만요."

껄껄.

연락용 아이템 너머로 자마드의 유쾌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암. 나는 새 몸과 새 마음으로 태어났지.>

"대검은 완성되어 갑니까?"

<자네. 장인이 뭔지 알고 있나? 장식 하나에도....>

"자마드 씨는 장인이 뭔지 의논할 경력이 아닌 듯합니다. 갓 대장장이가 되셨잖습니까."

루시온이 키득거렸다. 본인이 갓 대장장이가 됐다는 사실을 인정했으니 제대로 써먹어야지.

<자네 진짜 독한 거 알고 있나?>

"모릅니다. 그래서 완성되어 갑니까?"

<얼추.>

"예. 곧 만나러 가겠습니다. 어쨌든 아이템 제작장인인 미엘라 씨를 바꿔 드릴 테니 잠깐 말 좀 나눠보십시오."

루시온은 연락용 아이템을 미엘라에게 건넸다.

"저, 저 말인가요?"

미엘라는 정말 깜짝 놀라며 말을 더듬었다.

"아직,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요. 자마드 씨, 아니, 자마드 님이시라니…!"

그녀가 얼떨결에 연락용 아이템을 받고 당황하던 사이 루시온은 고개를 돌려 가면을 살짝 올려 차를 호로록 마셨다.

가면은 완전히 벗지 않으면 마법이 끊기지 않아 정말 좋았다.

'오. 제법 맛있는데. 마카롱만 있으면 딱이겠네.'

[마카롱만 있으면 딱이겠네. 지금 이 생각했지?]

러쉘의 발언에 루시온은 순간 놀래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콜록, 콜록!"

흄이 루시온의 등을 살짝 두드렸다.

"괜찮으십니까?"

문이 갑자기 활짝 열리고 크라언이 안으로 들어왔다.

루시온이 다급히 가면을 뒤집어썼다. 그의 고개가 베델에게 향했다.

[…으음.]

베델이 말꼬리를 늘이며 러쉘을 살짝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러쉘은 억울했다.

진짜 별말도 안 했는데. 쿠키는 있되, 마카롱이 없어서 한 말이었는데.

[안 봤어. …아마도. 아니, 그, 하관 정도는 조금 봤겠지. 아주 조금.]

러쉘은 루시온의 눈치를 살폈다.

"제이엘 씨하고 이야기는 끝났습니까?"

루시온은 콜록거리며 물었다.

"역시 지금도 아프십니까?"

크라언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제이엘 씨는요?"

루시온은 크라언의 말을 흘리며 물었다.

"그게...."

"아! 잠깐만요, 크라언 님. 마침 잘됐어요. 대화를 끊어서 미안해요, 하멜 님."

미엘라가 구석에서 통화하다 말고 다급히 루시온에게 다가왔다.

"혹시 빛을 구할 수 있을까요? 빛을 내는 물건 있잖아요."

"그건 제가 나중에...."

"얼마나 필요합니까?"

루시온이 크라언의 말을 자르고 물었다.

크라언은 얼굴을 살짝 찌푸렸고, 미엘라가 입을 살짝 가렸다.

"안 됩니다. 제가 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멜 씨. 잠깐만 제이엘 씨가 있는 방으로 오실 수 있습니까?"

[그래. 루시온 공. 공이 개입하지 않아도 크라언이 할 수 있는 수준의 일이야.]

베델까지 나서자 루시온은 억울했다.

그냥 돈이 얼마가 필요하냐고 물으려고 했을 뿐이었는데.

"…갑시다."

아니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크라언과 미엘라의 눈빛이 너무 진지했다.

루시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흄도 덩달아 일어나 루시온의 뒤를 따라갔다.

"금방 끝납니다."

크라언은 미엘라에게 고개를 숙인 뒤에야 발걸음을 떼었다.

'…어렸어. 목소리와 다를 만큼.'

크라언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자신은 활을 사용하기에 동체 시력이 좋았다.

하멜의 하관을 전부 본 건 아니었지만, 분명 어렸다.

크라언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제이엘이 루시온 자신을 부른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제 새롭게 단장할 조직의 지부가 있을 장소가 필요하잖습니까."

제이엘이 목소리를 냈다.

'그렇지.'

루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북부와 동부, 그리고 개미굴을 얻는다면 뉴브라 왕국이 제국 몰래 심어두었던 장소를 모두 조직 에일이 손에 넣는 셈이었다.

이야기만 들어도 조직이 커지는 게 느껴졌다.

"그렇습니다. 현재 중부에 있는 3개 지부에 연락해 개미굴에 가짜 정보를 넣도록 했습니다."

이는 자신이 크라언에게 시킨 일이었다.

크라언은 계속 입을 움직였다.

"그리고 며칠 뒤에 뉴브라에서 사람이 보내 지부를 살펴볼 겁니다. 그 전까지 지부를 모두 차지해 우리는 뉴브라 왕국이 그랬던 것처럼 은밀하게, 조용히 몸을 낮추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말씀대로 새로운 장소가 필요합니다."

"제가 제국 내에 좋은 장소를 알고 있습니다."

제이엘이 이미 펼쳐진 지도를 살짝 내리쳤다.

"그걸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크라언을 의식하며 루시온이 입을 열었다.

제이엘에 대해 모르고 들으면 마치 허망한 소리로 들릴 수 있기에 신중히 접근했다.

"이미 크라언 님께 말씀드렸으니 괜찮습니다."

제이엘의 말에 크라언이 고개를 끄덕이자 루시온은 어깨에 힘을 뺐다.

제이엘은 두 사람을 힐끔 바라보다 말문을 열었다.

"보니까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듯한데 조직 에일의 주인이 하멜 님이잖습니까. 굳이 연기하실 필요 없이 편안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루시온의 목소리가 날이 서 있었다.

덩달아 흄의 눈매 역시 살짝 올라갔다.

흄의 시선을 느꼈는지 제이엘이 슬쩍 그녀를 보다 말고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

"눈썰미로 알았습니다. 잃기 전에 이렇게 보였으면 좋았겠지만, 다 잃고 나니 오히려 더 또렷하게 보이더라고요."

[오. 눈썰미 하나 좋은데? 지금 제이엘의 가게에 지배한 유령한테서 어떤 보고도 못 받았잖아?]

러쉘이 만족스러워하며 신나게 입을 놀렸다.

철컥.

크라언이 재빨리 작은 석궁을 팔에 장착했다.

"어떻게 할까요? 원하신다면 당장 죽이고 처리하겠습니다."

[크라언도 훌륭하다. 으레 주인을 모시는 자라면 당연히 이렇게 나와야지.]

크라언을 보며 베델이 빙긋 웃었다.

그러고 보면 루시온의 안목은 정말로 최고였다.

5명 중 5명 모두 유능한 이들을 채택할 확률이 과연 얼마나 될까.

'마치 루시온 공은 미래라도 보고 온 것 같아.'

"됐어. 오히려 유능하다고 생각하면 좋지."

루시온이 크라언을 말렸다.

누군가가 자신이 조직 에일의 진짜 우두머리라는 사실을 눈치를 채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배신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였다.

'피터도 이미 눈치챘고.'

루시온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지만, 식은땀이 흐르는 모습을 한 제이엘을 향해 피식 웃었다.

그제야 크라언이 석궁을 풀며 제이엘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죽으면 어쩔 수 없죠. 제 운명이거니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어쨌든 산 김에 하멜 님께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뭡니까?"

"제가 있는 곳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모르는 편이 낫습니다. 엄청 찝찝할 테니까요. 어쨌든, 새 지부가 들어갈 자리부터 알려주시죠."

죽음 너머의 존재에게 들었다.

루시온은 이 말이 어둠의 축복을 받은 자가 아니면 어떻게 들릴지 알고 있었다.

* * *

처음엔 3명으로 시작했지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조직의 각 부분을 담당하고 있던 미엘라와 라인트, 피터, 헤로안 그리고 호출에 못 이겨 결국 다시 돌아온 퀘이트도 함께 말을 나누게 되었다.

시간이 얼추 1시간 좀 넘게 흘렀지만, 의견이 빠르게 모여 대충 마무리가 될 것처럼 보이자 루시온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먼저 가겠습니다."

"하멜 씨."

크라언이 갑자기 일어섰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주셨으면 합니다."

"아. 저도요."

"저도 질 수 없죠."

미엘라를 포함해 우르르 일어나기 시작했다.

"좀 도와줘요."

헤로안이 멀뚱멀뚱하니 바라보던 제이엘을 데리고 나갔다.

루시온은 앞다투어 나가는 그들을 보며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내가 보고 올게.]

러쉘은 입가를 핥으며 당장 날아갔다.

―라타도! 라타도 보고 싶은데!

꼬리를 잡고 놀던 라타도 그림자 속에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들어가 있어, 라타."

―웅....

라타는 눈동자를 한두 번 돌리다 다시 스르르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돌아온 러쉘은 그저 웃으며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는가?]

베델이 묻자 러쉘은 이제 실실 웃음을 흘렸다.

[좀 이따가 봐.]

[그대가 그리 기뻐하니, 좋은 일인 게 틀림없네.]

베델은 어렴풋이나마 저들이 루시온에게 무얼 할지 예상했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루시온이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자 베델은 귀띔이라고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루시온도 없어서 이런 말 하긴 좀 그렇긴 한데. 얘가 가족 외에 누군가와 어울려본 경험이 거의 없어. 서툰 거지. 뭐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루시온은 더 해. 만약 뻔한 상황을 예상하지 못해도 답답해하지 말고 그냥 지켜봐 줘.

러쉘이 멋쩍어하면서도 제법 진지하게 말했던 그 말이 떠올랐다.

달이 지고 해가 떠오를 때까지 러쉘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베델은 러쉘이 루시온을 이야기할 때마다 진짜 스승답다가도 형 같은 그 모습에 그가 얼마나 루시온을 아끼는지 정말 깊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럼 라타한테만 말해줘. 라타가 입 꾹 다물고 있을게. 응?

라타가 그림자 밖으로 앞발을 슬쩍 내밀었다.

"라타."

루시온이 말하자 라타는 내밀었던 발을 슬그머니 집어넣었다.

[이제 곧 올 거야. 차분히 기다려 봐봐, 라타.]

러쉘이 문을 가리키자마자 곧이어 활짝 열렸다.

"...?"

루시온이 그들을 보며 어리둥절했고, 흄이 활짝 웃었다.

―우오오오! 선물이 엄청 많아! 다 루시온을 위한 선물인가 봐!

라타가 그림자 속에서 팔짝팔짝 뛰었다.

"저번 파티 때 하멜 씨만 빠진 게 아쉬워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크라언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수북하게 쌓인 물건에 루시온은 움찔거렸다.

"치사하게 크라언 님만 준비하길래 저랑 피터 씨랑 준비해서 예쁘게 포장했어요."

미엘라가 배시시 웃었다.

"방어 마법...."

"쉿!"

피터가 말을 꺼내자 미엘라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피터는 곧 민망해하며 뒷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아.... 마음이 급했습니다."

"전 이전부터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은혜를 조금씩이나마 갚아야죠. 아, 안에는 별거 아닙니다. 그냥 제 부하들이 여기저기 들리는 김에 산 물건입니다. 내용보다 마음이 중요하잖습니까."

헤로안은 자신은 물론, 제이엘까지 손에 쥔 물건을 고갯짓으로 가리키며 활짝 웃었다.

'제이엘은 왜…?'

루시온은 기가 찼다.

"저도 별건 아닙니다. 저 역시 오랫동안 하멜 님의 은혜를 갚을 생각이니 편하게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아, 전 라인트 용병단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라인트의 덩치를 가릴 만큼 쌓인 선물 상자에 한약 같은 냄새가 났다.

"전 진짜 더 별거 아닙니다. 저번에 함께 마시지 못한 마음이 크실까, 비싼 술 한 병 준비했습니다."

퀘이트가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선물이 뭐가 됐든 루시온에게 있어 중요하지 않았다.

비싼 거라면 충분히 받아 받으니까.

그저 당황스러웠다.

"왜… 제게 주시는 겁니까?"

루시온이 얼떨떨해하며 물었다.

170화. 이야기를 듣다

"큰 의미 두지 않으셔도 됩니다. 조직의 탄생과 성장에 가장 큰 공을 세웠으니 마땅히 드려야 하는 게 맞습니다."

크라언이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이자 뿌듯해하는 미소가 드러났다.

"아. 혹시 들고 가지 못하실까 봐 마법 주머니도 따로 마련해두었습니다. 새것이라서 하멜 씨께서 등록하시면 됩니다."

루시온은 천천히 눈동자를 돌리며 조직 사람들을 눈에 담았다.

이상했다.

자신이 살고자 한 일인데.

루시온은 자신을 향해 방긋 웃는 사람들의 미소에 속이 간질거렸다.

낯설었다.

너무도 낯설었다.

"저는 절 위해서 한 일입니다."

"하지만 도움을 받았어요. 누구도 절 돕지 않았어요. 아무도 절 위해 무엇도 해주지 않았던걸요."

미엘라가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절 위한 일이었습니다."

루시온이 재차 말했다.

"그게 뭐 어떻습니까? 저도 하멜 님한테 죽을 뻔했던 일을 떠올리면 아직도 자다가도 이가 갈리지만, 하멜 님을 따라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훨씬, 엄청 컸는데요, 뭘. 만약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겁니다. 지금 엄청 재미있거든요."

헤로안이 크게 웃었다.

더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퀘이트가 다가오자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하멜 님을 위한 일이었을지 모르겠지만, 결국 저는, 아니 저희는 하멜 님 덕에 살았습니다. 제게 걸린 저주까지 풀어주시는 마당에 뭘 따지겠습니까?"

퀘이트는 고마움을 가득한 눈동자로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저야 초네스트 가에서 은혜를 갚기로 말씀드렸습니다.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켜야죠."

라인트가 선물을 내려놓고 당당히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첫째도 건강, 둘째도 건강입니다. 부디 건강하셨으면 합니다."

피터가 진심을 꾹꾹 눌러 담으며 말했다.

"저는 나중에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얼떨결에 헤로안과 같이 서 있던 제이엘마저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루시온을 생각하는 그들의 마음씨에 러쉘은 어느새 흐뭇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좋은 사람들이네.]

[내 생각도 그래.]

베델 역시 눈웃음을 지었다.

무엇을 샀든 선물을 준비했다는 것 자체가 루시온을 생각했다는 게 아닌가.

잘됐다 싶었다.

이대로 루시온이 기댈 곳이 더 늘어났으면 했다.

"선물은 여기에다 담아드리겠습니다."

크라언이 마법 주머니를 꺼내 흔들었다.

"진심… 이십니까?"

하지만 튀어나온 루시온의 말에 크라언이 행동을 멈췄다.

당황한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싫다는 쪽의 감정이 아니었다. 그저 처음 겪어본 사람처럼, 정말로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그저 낯설어할 뿐이었다.

크라언은 본의 아니게 하멜의 가면 속을 보았다.

하멜은 어렸다.

어렸지만, 이런 일을 충분히 체험할 수 있는 나이였다.

'…아.'

크라언은 하멜이 흑마법사라는 걸 떠올렸다.

그걸 왜 몰랐을까.

흑마법사로서 살아오면서 사람들과 가까이할 기회가 있었겠는가.

하멜에게 있어 이 상황이 낯선 건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예. 진심입니다, 하멜 님."

하멜이 안심할 수 있게.

조직이 하멜이 보금자리가 될 수 있게.

크라언은 아주 활짝 웃으며 말했다.

* * *

루시온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안 자? 라타는 자는데?]

러쉘이 벽 너머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기분이 이상합니다."

[왜?]

러쉘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물었다.

"제가. 이런 선물을 받아도 되는 사람입니까?"

[네가 뭐가 어때서?]

"…저는 절 위해서 움직였습니다. 지금도 똑같고요. 원래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루시온의 눈동자가 러쉘을 향했다.

[아니지. 보통은 이렇게까지 안 해. 너라서 특별한 거야.]

루시온은 특별함이 마냥 좋은 의미로 쓰이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도 특별하지 않았던가.

"다들… 절 싫어했습니다. 제가 바뀌기 전까지는요. 아니, 어쩌면 지금도 절 싫어하는 사람이 많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다르고 이상했잖습니까."

루시온의 손가락이 라타의 보드라운 털을 찾았다.

꽉 막힌 것 같던 가슴이 스르르 풀려나갔다.

[루시온.]

"저도 바보는 아닙니다. 조직원들이 제게 보인 건 분명 호의입니다. 하지만 저는… 두렵습니다."

루시온이 배를 잡고 상체를 일으켰다.

자신이 이하람이었기에 그 반감이 덜한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감정은 여전했다.

저 호의가 돌아서면 어쩌나.

또 차가운 시선들과 날카로운 말이 칼날이 되어 쏟아지면 어쩌나.

"그냥 두렵습니다."

루시온이 애써 미소를 지었다.

상상만으로도 두 손이 파르르 떨려왔다.

러쉘은 루시온의 어깨를 토닥였다.

[나라도 그런 일이 또 벌어지지 않는다는 장담은 못 해. 하지만 이젠 달라. 저들 모두 네 손을 거쳐 간 이들이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스승님만큼은 제게 돌아서지 말아주십시오."

[당연하지. 온 세상이 널 등지더라도 나는 무조건 네 편이야.]

"예."

루시온은 싱긋 웃었다.

"잠깐 흄한테 갔다 오겠습니다."

[내가 부를게.]

"아뇨. 그냥 걷고 싶네요."

루시온이 라타를 토닥인 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솔직히… 엄청 기뻤거든요."

러쉘의 시선을 살짝 피하며 아주 희미하게 목소리를 냈다.

[그래. 갔다 와.]

러쉘은 가볍게 웃고 말았다.

따라가면서 놀리고 싶었지만, 오늘은 꾹 참기로 했다.

좋은 기억은 오래오래 간직해야지.

* * *

[…루시온 공?]

루시온은 흄의 방으로 가다 말고 베델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지금 잘 시각이 넘은 것 같은데 왜 돌아다니는가?]

걱정스럽게 자신을 보자 루시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따뜻한 우유나 마시려고."

[그럼 내가 흄을 부를 테니까 돌아가 있어.]

"아니. 여기 옥상에서 주변 경치를 보면서 마시고 싶어서. 보니까 그네 의자가 있다고 하네."

[루시온 공.]

베델이 차분히 그를 불렀다.

"그래."

[잠깐 이야기를 해도 되겠나?]

"좋아. 적적하지 않아서 좋네."

루시온은 기꺼이 허락했다.

흄의 방에 들려 따뜻한 우유 한 잔만 달라고 말한 뒤에 먼저 옥상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배가 살짝 욱신거렸지만, 참을 만했다.

루시온은 그네 의자에 앉아 숨을 깊게 내쉬었다.

천천히 그네 의자가 흔들렸다.

밤공기가 전혀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여름의 냄새가 밀려들며 곤충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루시온은 반쯤 감긴 눈동자로 그네를 밀며 하늘을 보았다.

새삼 다리는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다 싶었다.

이미 상처 때문에 불편했지만, 더 불편해질 테니까.

앞으로 조심해야지.

[…오래 걸려서 미안해.]

베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런 소리 하지 않아도 돼. 기다리겠다고 한 건 나니까."

[내가 더 빨리 말해줬다면 공이 예측할 수 있는 상황이 더 넓어지지 않았겠나.]

"그랬겠지."

루시온은 무미건조하게 말을 던졌다.

"하지만 건드리면 안 될 게 있어. 그건 죽은 후에도 마찬가지고."

[공을 만날 수 있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베델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녀의 눈동자에 망설임이 사라졌다.

[날 배신하고, 내가 공허의 손이 진행하던 저주의 실험체가 되게 했던 전 주인.]

루시온은 살짝 고개를 돌렸지만, 입 안이 바짝 말랐다.

[트웰로....]

말하는 것만으로도 괴로운지 베델의 목소리가 벌벌 떨렸다.

[…스프리카도.]

"...!"

루시온의 눈이 커졌다.

트웰로 스프리카도.

신수 탄생 연회에서 자신을 도와줬던 후작이자, 자신이 성자가 된 걸 축하하는 자리에서 수상함을 내뿜었던 자가 아닌가.

트웰로의 영지는 동부 끝에 있었고, 그의 부하를 변경에서 붙잡은 적이 있다고 카슨이 말하기도 했다.

'…분명 그때는 실이 반응하지 않았는데?'

실이 반응했다면 알았을 테지.

놈에게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그자의 이름이다.]

하지만 베델이 말을 마치자 붉은 실이 단숨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는 붉은 실이 나타나지 않았고, 지금은 나타났던 건 베델이 있고 없고의 차이란 생각이 들었다.

베델은 소설 속에서 공허의 손 보스가 가졌던 죽음의 기사 중 하나이자 그들을 통솔했던 자로 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소설 속과 달리 타락에서 벗어났고,놈이 지배하고 있던 죽음의 기사도 되지 않았다.

'공허의 손 보스가 이용할 죽음의 기사들을 트웰로가 가져다준 걸까. 아니면 베델만이 놈이 가졌던 죽음의 기사들을 통솔할 수 있는 걸까.'

어느 쪽이든 운명을 저항할 기회가 돌아왔다.

[혹시 알고 있었나?]

"만났어. 신수 탄생 연회 때와 내가 성자가 되어 황실에서 열었던 연회 때. 이렇게 두 번."

[첫 번째는 모르겠지만, 두 번째는 공을 염탐한 게 분명하다. 놈은 강한 자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어. 꼭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더라도 정신적으로도 마찬가지지.]

"저주 때문에 찾는 거였어?"

[…아니.]

조심스러운 루시온의 물음에도 베델은 괴로운 듯 말을 토해냈다.

[그 당시 나는 부끄럽지만, 힘에 취해 있었다. 천재까지는 아니라도 월등히 강했으니까.]

베델은 한 손으로 다른 팔을 꽉 쥐었다.

[내게도 스승님이 있어.]

"만나고 싶겠네."

[이미 만나고 왔어. 공이 중부에서 서부로 돌아가던 사이에 포탈이 있던 마을에서.]

"아. 그래서 그때 잠깐 자리를 비웠던 거였어?"

[그래. 스승님께서는 흑마법사가 아니니 나를 보지 못하셨지만.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참 좋았다. 건강하셔서 다행이었고.]

"나한테 말하지. 내가...."

베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스승님을 만나러 갈 수 없어.]

"왜?"

[스승님께서 그놈에게 가는 걸 반대했지만, 나는 그 당시 내 능력을 알아준 놈이 고마웠고, 날 말리는 스승님이 미워서 도망쳤거든.]

베델은 잠깐 쓴 미소를 지었다.

[멍청했지. 너무 멍청했어. 그 길이 내 인생에 있어 최악의 선택인 줄도 모르고.]

베델이 주먹을 쥐었다.

[그런데 루시온 공.]

루시온은 베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주먹 쥔 손도, 입가도 조금씩 떨려왔다.

[지금 와서 보면 내가 참 멍청했지만, 나는. 나는… 그 당시 정말 행복했다. 기사로서, 검을 쓰는 자로서 누군가를 지키고 모실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다.]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으려는 베델의 모습에 루시온은 말없이 그녀의 손등을 토닥였다.

[진심으로 내 목숨을 걸고 트웰로, 그놈을 지키고자 했어. 그래서 놈이 날 배신했을 때 믿을 수가 없었다. 스승님 외에 날 처음으로 인정해줬고, 기사로서 꿈을 펼칠 수 있게 도와줬고, 앞으로 살아갈 길을 제시해줬으니까…!]

베델은 기어코 소리쳤다.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믿었는데. 정말 믿었는데, 다 착각이었다. …전부 다 착각이었어. 처음부터 나는.]

베델은 자신의 가슴을 꽉 쥐며 잠깐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죽음의 기사를 만들기 위해 쓰일 재료였을 뿐이야.]

"…뭐라고?"

루시온이 엉덩이를 떼며 일어났다.

[내 인생은, 아니, 나는 누군가를 위해 쓰일 죽음의 기사가 될 재료였다고!]

그때의 분노가 몰아닥치자 베델 자신의 목소리가 멋대로 커져 버렸다.

엉망진창이었다.

이렇게 루시온에게 이야기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하지만 한번 터져버린 분노가 쉽게 가라앉질 않았다.

[내가 죽음의 기사가 된 건 원해서가 아니었어.]

멍청했다.

다시 생각해도 멍청했다.

[하지만 나를 나락으로 떨어트리고, 내 전부를 이용한 놈을 용서할 수 없었다. 절대로. …설령 놈이 원하는 대로 죽음의 기사가 될지언정 끝까지 버텨서 그 목에 내 검을 박아 넣겠다고, 그렇게 다짐하면서 버티고 버텨서 나는 죽음의 기사가 됐지.]

베델은 자신을 가리켰다.

그녀는 울지 않았다.

오히려 절벽 위에 자란 단풍나무처럼 고고했다.

[그래서 나는 놈이, 흑마법사가 증오스럽다.]

루시온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이 싫고 밉다.]

루시온을 보는 베델의 눈동자는 한없이 따뜻했다.

[…그래서 나는, 날 용서할 수 있게 도와준 공이 고맙고 내게 기회를 준 공을 따르고 싶었어.]

루시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공. 그거 알고 있나?]

베델의 눈동자가 천천히 일렁거렸다.

기어코 그녀는 루시온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죽은 후에도 소망을 꿈꿀 수 있다는 걸?]

"...?"

[내 소망은 루시온 공이야.]

베델이 루시온의 손을 꼭 잡았다.

"내가…?"

루시온은 눈을 크게 떴다.

[죽기 전 내 소망은 루시온 공이 이루어줬어. 지하에 갇힌 채, 저주의 실험체들이 되었던 그들을 구하고 싶었거든.]

"...."

[그래서 루시온 공이 행복해지면 좋겠어. 공의 바람이 이루어지면 좋겠어. 그게 내 유일한 소망이야.]

거짓이 아니었다.

자신을 향해 바라보는 베델의 눈동자는 그 어떤 별보다 더 반짝거렸다.

[비록 육신이 없어서 언제 사라질지 모르겠지만, 내 의식이 있는 한 나의 유일한 소망을 위해 공에게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나?]

"그래. 얼마든지."

[공의 기사가 될 수 있게 허락해주겠나?]

루시온은 베델의 부탁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베델이 참 강하다 싶었다.

기사로서 배신당한 그녀가 다시 기사가 되고자 했다.

왜 들어주지 못하겠는가.

"고마워."

루시온은 깊은 고마움을 담았다.

베델의 눈물이 더 굵게 떨어졌다.

"날 선택해줘서."

루시온의 눈마저 부드럽게 휘었다.

처음이었다.

자신도 누군가의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었다니.

그게 기뻐서 다시 눈을 뜬 루시온의 푸른 눈동자마저 일렁거렸다.

가슴이 벅찼다.

심장이 기분 좋게울렸다.

스겅.

베델이 검을 뽑고 루시온의 발밑에 무릎을 꿇어 검을 내려놓았다.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사라졌다.

하지만 그 씁쓸함은 이제 그녀에게 있어 큰 문제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다시 기사가 될 수 있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저 베델 레비스티는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루시온 크로니아의 검이 되겠노라 맹세하겠습니다.]

마지막 주인에게 바치는 기사의 맹세였다.

루시온은 기사의 맹세를 받아들일 때와 똑같이 베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진중한 목소리를 냈다.

"그대가 나의 검이 되길 허락하노라."

171화. 이야기를 듣다(2)

* * *

[…혹시 어제 다 들었나?]

베델이 넌지시 러쉘에게 물었다.

계속 실실 웃는 게 너무 수상해 보이지 않은가.

[내가 무슨 맨날 염탐만 하는 줄 알아?]

러쉘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반응했다.

[그대의 기척을 느꼈다.]

이어진 베델의 말에 러쉘은 움찔거렸다.

[루시온이 하도 안 오니까, 그, 뭐냐, 네가 검을 내려찍는 그때만 봤어. 진짜야.]

루시온이 눈동자를 돌려 러쉘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왜? 내가 이상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닌데?]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스승님께서 찔리시는 모양입니다."

루시온이 마차 창문틀에 팔꿈치를 걸고 손등에 얼굴을 기대며 싱긋 웃었다.

[아니. 전혀.]

러쉘의 눈동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내 귀가 밝은 걸 어쩌겠어.]

오히려 입꼬리를 길고 높게 올렸다.

[러쉘 그대는 어디까지 들은 건가? 어차피 그대에게도 말해주려고 했었다.]

베델이 빤히 보자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 러쉘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다.]

곧 헛기침을 내뱉으며 슬쩍 두 사람의 눈길을 피했다.

순간 마차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마차 안을 쉴 새 없이 뛰어다니던 라타도 멈춰서는 한쪽 귀를 쫑긋 세웠다.

―아직 마차가 출발 안 했는데, 라타가 뛰면 안 되는 거야?

라타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

"아니야. 나중에는 못 뛸 테니까, 지금 신나게 뛰고 있어. 흄도 아직 안 왔잖아."

―응!

라타가 배시시 웃으며 창문이고 뭐고 우다다 뛰어다니기 바빴다.

"으함."

루시온은 하품했다.

지금 마지막 여행지인 동부로 출발하려고 한참 준비하고 있었다.

다시 중부로 들려야 하니 기존에 잡아두었던 저택과 연락을 취해야 할 테고, 짐도 다 싸야 할 테고, 할 일이 산더미일 테지.

유일하게 자신만 바쁘지 않았다.

'어젯밤에 크라언이 북부 지부도 차지했고.'

베델이 꺼낸 기사의 맹세를 받아들인 후에 흄이 가지고 온 따뜻한 우유를 마시며 셋이서 가볍게 말을 섞던 와중에 푸른 실 하나가 잘려나간 걸 확인했다.

이제 푸른 실은 2개 남았다.

저 2개를 잘라내면 누구와 연결된 붉은 실이 나올지, 벌써 궁금해졌다.

똑똑.

누군가 마차 문을 두드렸고, 루시온이 문을 열자 흄이 보였다.

우다다 뛰던 라타가 다급히 걸음을 멈추고 얌전히 루시온의 무릎에 올라갔다.

―라타는 안 뛰었어. …어, 어, 방금.

흄은 라타를 쓰다듬어주고는 마차에 올라탔다.

"이제 출발 준비가 끝났습니다. 곧 출발할 겁니다."

"고생했어."

루시온은 미소를 내보이며 말했다.

"아닙니다. 저야 고생할 게 어디 있습니까? 도련님께서는 힘들지 않으십니까? 여독이 많이 쌓였을 텐데요."

"내가 이번 여행을 계획했으니까, 어쩌겠어."

솔직히 이번 여행이 무식한 건 사실이었다.

용병이면 몰라도 어느 귀족이 2주 안에 제국 전역을 돌겠는가.

이것도 포탈이 있어서 망정이지 만약 없었다면 한 달 넘게 걸릴 뻔했다.

루시온이 피식 웃었다.

똑똑.

노크에 이어 문이 열렸다.

헤인트였다.

"이제 곧 출발할 겁니다."

헤인트는 간단하게 말한 뒤에 마차를 올라탔다.

루시온 자신이 여기저기 다닐 때, 그는 첼가를 집중적으로 심문했다.

첼가 입에서 나온 건 별거 없었다.

고위 신관이 되기 위해 위에서 내려온 지시를 따랐다는 것과 이번에 경매장에서 물건을 훔친 게 마지막 명령이었다는 것 정도.

그가 말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제 그를 잡았으니 적의 뿌리까지 끊기지 않게 조심스럽게 파고드는 게 문제일 테지.

루시온은 그래서 첼가를 알아보고 있는 헤로안의 지시를 거두지 않았다.

아마 그가 이곳저곳 쑤시고 다닌다면 반드시 뭐라도 걸리지 않을까 싶었다.

'아. 트웰로에 관해 물어보는 걸 잊었네.'

카슨이 제격이나, 아마 의심할 테지.

차라리 이미 정보를 가지고 있을 헤로안에게 묻는 게 나았다.

"어제 재미있었어?"

문을 닫고 나서 헤인트가 물었다.

구경은 개뿔.

허겁지겁 오기 바빴다.

하지만 루시온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 조금 더 시간이 있었으면 했지만요."

그래도 제국 절반을 돌았지만, 느긋하게 경치고 뭐고 구경할 시간이 나질 않았다.

제대로 기억이 나는 건 하늘과 산, 마차를 타면서 보았던 풍경뿐이었다.

하늘과 산은 크로니아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데.

망할.

다시 생각해도 열이 받았다.

여행을 왔는데 여행이 여행이 아니었다.

쉴 시간도 넣었는데 쉴 시간에도 일하고 있었다.

'…망할.'

"여행 기간을 조금 더 느긋하게 잡지 그랬어. 처음에 여행계획을 들었을 때, 루시온 네가 누군가에게 쫓기는 줄 알았다니까."

헤인트가 실실 웃었다.

'형님한테 쫓기고 있습니다. 목이 간당간당합니다.'

루시온은 속과 달리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싶지만, 제가 오래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이번에는 다를 거라는 말을 꺼내려다 헤인트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그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는가.

"루시온."

"예."

"혹시 이상한 사람이 주변에 얼씬거리는 거 못 봤어?"

"이상한 사람이라뇨?"

"그, 되게 반들반들한 가면 쓰고 있는 사람."

―루시온이다! 라타 말대로 루시온 맞지?

라타가 눈을 크게 떴다.

[그래. 루시온을 말하는 거야.]

러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히히! 라타가 정답이야! 아니, 정답을 맞혔어! 야후후.

라타의 꼬리가 붕붕 흔들렸다.

"아뇨. 보지 못했습니다."

루시온의 대답에 헤인트가 자연스레 흄을 바라보았다.

흄은 말 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제야 헤인트가 어깨를 살짝 늘어트렸다.

"그럼 다행이고. 만약 보면 나한테 말해."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루시온이 묻자마자 헤인트는 얼굴을 구겼다.

"있어. 재수 없는 자식."

'그건 형님이고요.'

루시온은 급히 입이 가려웠다.

이렇게 뒷담화 같은 앞담화를 들을 줄이야.

푸하핫!

러쉘이 옆에서 웃음을 터트렸다.

"혹시 그분하고 싸우셨습니까?"

루시온이 물었다.

"아니. 그건 아닌데. 그, 뭐라고 해야 하나. 내가 좀 오해하던 사람이거든."

"오해요?"

"나만 그런 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의 오해도 많이 사고 있던 사람이야."

"그런데 그 오해가 풀렸습니까?"

"반쯤. 아니, 반의반쯤. 아니, 반의반의반쯤일지도몰라. 어쨌든 아예 의심하는 건 아니야. 진심을 봐버렸거든."

헤인트는 잠깐 숨을 깊게 내쉬었다.

마차가 움직였다.

'…코앞에서 저런 말을 들으니 소름이 돋아나네.'

루시온은 라타를 쓰다듬으며 필사적으로 참아냈다.

"요즘은...."

헤인트가 말을 하려다 잠깐 주저했다.

이 이야기를 갑자기 왜 루시온에게 하는 건지 몰랐다.

하지만 저렇게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니 들어갈 말도 다시 나오지 않겠는가.

"요즘은 그 오해가 점점 더 풀어져서. 그래서 좀 그래."

"그게 왜 문제인 것처럼 말씀하시는 겁니까?"

"내가 오해했던 게 과연 누구의 기준으로 그랬는지 점점 헷갈려서. 아니. 내가 부끄러워서 그래. 그 오해가 오해인 줄 알면서도 똑바로 바라보는 게 어렵거든."

"주변의 눈 때문입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형님께서는 주변 시선을 신경 쓰시는 편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빛의 축복을 받으셨음에도 신관이 되지 않고 기사가 되셨잖습니까. 정확히는 몰라도 그게 무척 어렵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루시온의 말에 헤인트는 순간 숨을 멈췄다.

'…기사.'

헤인트는 살짝 흔들리는 눈동자로 옆에 놔둔 검을 바라보았다.

신관이 되는 편한 길을 내버려 두고 왜 이 검을 왜 쥐었는가.

정의감?

아니. 자신에게 그런 숭고함은 없었다.

그저 자신에게 떳떳한 사람이 되고자 했다.

빛의 힘을 이용해 누군가를 차별하고, 특별해지고, 이런 같잖은 행동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신관이 되고 싶지 않았다.

자신도 저들과 똑같은 힘을 가졌기에 언젠가 자신의 행동에 부끄러움도 모르는 인간이 될까 그게 두려웠다.

비록 귀족으로 태어났지만, 이 신분 역시 그냥 주어진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누군가의 피와 눈물로 이루어진 자리였다.

그렇다고 특권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저 자리에 걸맞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검은 오직 적을 벨 뿐.

다른 건 필요 없었다.

그래서 기사가 되고자 했다.

그래서 검을 쥐었다.

'…사람부터 되기로 했잖아?'

헤인트는 주먹을 잠깐 쥐다 풀었다.

자신의 행동이 비겁했음을 알자 부끄러움이 크게 밀려왔다.

자리에 먹히지 말고 사람이 되고자 했는데, 자리에 먹혀버렸다.

"형님…?"

루시온은 갑자기 깊게 고민하는 헤인트의 모습에 당황했다.

'뭐지? 설마 각성 장면은 아니겠지?'

으레 주인공은 깨달음을 얻으면 각성하곤 하지 않은가.

[뭐 하는 거지?]

러쉘이 빤히 헤인트를 바라보았다.

영문 모를 행동에 의아함을 느낀 건 베델도 마찬가지였다.

루시온은 다른 건 몰라도 헤인트와 이어진 붉은 실이 여전히 팽팽해져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아. …미안. 그냥 문득 과거 일이 떠올라서."

헤인트가 뒤늦게 목소리를 냈다.

"어쨌든, 루시온 네 말이 옳아. 오해가 풀어지는 건 문제가 아니지. 고마워. 도움이 됐어."

"예. 도움이 되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뭐가 됐든, 루시온은 헤인트가 자신을, 아니, 하멜을 어떤 색안경도 끼지 않고 봐줄 때가 한 발 더 가까워진 것 같아 다행이다 싶었다.

"아. 형님."

루시온은 문득 자신이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왜?"

"중부에서 하루 쉬고 동부로 향하는 게 맞습니까?"

"또 어디 가려고?"

헤인트가 자신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지만, 당연하게 튀어나오는 말에 루시온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예."

"루시온 네가 약속도 잘 지켜줘서 정말 고마운데 30분 거리 내에 볼 게 그렇게 많았어?"

"이번에는 정해진 약속이 있습니다."

"약속이라고?"

"제 친우인 텔라 영애를 만나기로 했습니다."

"아."

헤인트가 갑자기 실실 웃었다.

그 웃음이 마치 러쉘과 비슷했다.

"당연히 가야지."

분명 허락이 떨어졌음에도 루시온은 이상하게 찝찝했다.

특히 저 웃음이 기분 나빴다.

[뭘 좀 아는 친구네.]

헤인트에게 동조하는 러쉘도 언짢게 느껴질 만큼.

* * *

텔라가 있는 루테온 백작가를 방문하는 건 비공식 일이기에 루시온은 누가 봐도 수상할 만큼 꽁꽁 싸서는 변장한 황실 기사와 크로니아 기사와 함께 백작가에 당도했다.

이번에도 기사들을 모두 떨쳐내고 가려고 했지만, 크로니아의 기사들이 필사의 의지로 제발 자신들 좀 살려달라고 말하기에 오늘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데려왔다.

자주 도망쳐 내심 찔리기도 하던 참이었다.

"누구십니까?"

루테온 백작가의 정문을 지키고 있던 기사가 수상쩍은 무리를 보자 바로 경계했다.

흄이 앞으로 나서 크로니아의 문장을 내보였다.

"이미 이야기가 되어있을 겁니다."

"아, 실례했습니다. 어서 들어가십시오."

문장을 확인한 기사는 주변을 살피더니 다급히 문을 열었다.

성자, 루시온 크로니아가 오면 그 어떤 물음도 꺼내지 말고 은밀히, 조용히 안으로 들여보내라는 가주의 명이 떨어진 참이었다.

루시온 일행이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정문이 다시 닫혔다.

기사들은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았다.

그저 성자의 모습을 보지 못한 사실에 아쉬움을 느꼈다.

* * *

루시온은 미리 대문 앞에 서 있던 집사의 안내를 받아 대문으로 들어왔다.

"혹여 크로니아 공께서 불편해하실까, 가주님께서 잠시 시종들을 물린 상태니 여기서는 불편하신 옷들을 벗으셔도 됩니다."

"아, 고맙네."

루시온은 그제야 후드와 얼굴을 가릴 용도로 썼던 천, 그리고 후드 안에 입었던 외투를 벗었다.

얼굴이 붉어져 있었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이 짓 두 번 하다가 죽겠다.'

이제 낮에는 더웠다. 밖에 나가고 싶지 않을 만큼.

차라리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는 편이 시원했다.

흄이 루시온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곧 시원한 걸 올리겠습니다."

집사가 루시온을 보며 잠깐 말을 잇지 못하다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루테온의 집사로서 오래 일하면서 별의별 손님들을 봤지만, 이렇게 길게 시선을 빼앗긴 건 처음이었다.

누가 뭐라든 저 사람이야말로 성자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주겠나?"

온화한 루시온의 말투에 집사는 괜스레 바짝 긴장해서는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토록 오래 걸었던 저택이거늘, 왜 이렇게 낯선지.

접객실에 도착해서야 집사는 긴장을 조금 풀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금방 시원한 음료수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천천히 하게."

루시온이 싱긋 웃었다.

"감사합니다."

집사가 넙죽 고개를 숙였다.

[…와. 루시온.]

러쉘은 느낄 수 없는 소름을 느끼며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문이 닫힌 후에야 루시온은 피식 웃었다.

"스승님, 잊으셨습니까? 저 성자입니다."

172화. 이야기를 듣다(3)

[그렇긴 한데. 진짜 소름 돋는다. 누가 보면 이중인격인 줄 알겠어.]

"귀족의 세계에서는 흔한 일입니다. 아마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진 사람도 많을 겁니다."

―정말?

라타가 그림자에서 쏙 나와서는 루시온의 다리를 타고 기어올랐다.

―정말 얼굴이 여러 개야? 우오오. 라타는 한번 보고 싶어!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었어."

루시온은 키득거리며 라타의 코를 건드렸다.

―아니야? 피. 라타는 엄청 기대했는데.

라타는 고개를 흔들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라타의 시선 끝에 흄이 닿았고, 흄은 잠깐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뛰지도 말고, 물건을 부숴도 안 됩니다."

―응! 라타는 그런 거 잘해.

'아니면서.'

루시온은 라타가 부순 그릇이 몇 개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릇 몇 개가 대수인가.

'그나저나 루테온 가주가 나한테 할 말이 뭐가 있길래 이렇게 초대한 거지?'

루시온은 흄이 내뿜는 시원한 바람에 눈을 살짝 감았다.

자신의 공식 일정을 알고 있음에도 루테온의 가주가 텔라를 이용해 자신을 불렀다.

분명 중요한 이야기일 테지.

하지만 그 이야기가 무엇일지 좀처럼 감이 잡히질 않았다.

루테온 가문은 가문의 이름을 딴 루테온 은행을 운영하고 있었다.

지금 한창 성장 중인 은행이라 열심히 발을 넓히는 와중에 혹시 크로니아와 관련된 거라도 발견한 모양일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러쉘이 재빨리 문밖으로 나갔다.

[오, 텔라다.]

"들어오십시오."

루시온의 말과 함께 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공자."

텔라가 루시온을 보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루시온도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텔라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지내셨습니까?"

―텔라다! 텔라!

방을 두리번거리던 라타가 빠르게 걸어서 텔라에게 향했다.

"안녕, 라타. 아, 저야 공자 덕에 정말 잘 지내고 있죠. 공자께서는 몸은 괜찮으신가요?"

루시온의 눈썹이 순간 꿈틀거렸다.

요새 자신이 가장 많이 듣는 말을 꼽으라고 한다면 '괜찮냐'라는 질문이었다.

텔라가 경매장 일로 묻는 건 알겠지만, 크라언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반응하고 말았다.

크라언의 효과가 너무 컸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경매장 일이라면 이제 괜찮습니다."

루시온은 웃음으로 감정을 묻어버렸다.

"그 사건을 듣고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연락용 아이템을 사용할까 말까 고민도 정말 많이 했고요."

텔라는 들고 온 상자를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루시온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상자다! 라타가 좋아하는 상자!

라타는 다급히 테이블에 올라가 상자를 앞발로 조심스레 건드렸다.

루시온의 시선이 닿기 전에 흄이 당장 라타를 품에 안아 올렸다.

―라타는 아무것도 안 했어. 그냥 살짝. 아주 살짝 건드렸어. 라타 혼낼 거 아니지? 응?

라타가 흄을 보며 눈을 반짝거렸다.

흄이 고개를 끄덕여서야 라타가 흄의 품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이히히. 흄이 최고야!

"아무래도 제 여우가 저 상자 안에 뭐가 들었는지 무척 궁금한 모양입니다."

루시온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흐음.]

러쉘이 말꼬리를 늘이며 상자를 빤히 보았다.

'왜 그러시지?'

루시온은 러쉘을 힐끔 쳐다보았다.

"아. 일단 앉으세요."

텔라는 자리를 권했다.

자리에 앉은 그녀는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 자꾸 제 취향이 섞인 물건만 드리는 것 같아 민망하네요."

"마카롱을 좋아합니다."

루시온이 서슴없이 말하자 텔라가 손뼉을 마주쳤다.

"그럼 저번에 갔던 그 디저트 가게의 마카롱이...."

"끝내줬습니다. 정말로요."

루시온은 신나게 입을 열었다.

"…사실 그때, 정말 좋아하시는 줄 몰랐어요."

텔라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나름대로 맛있다고 열심히 표현했는데 제가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그, 그게 아니라 가짜로 표정을 꾸미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저는 그런 줄 알고 멋대로 오해했어요. 죄송해요!"

텔라는 정말 당황하며 얼굴까지 빨갛게 익어갔다.

"농담입니다."

루시온이 가볍게 웃었다.

"…정말요?"

텔라가 눈을 깜박거렸다.

"힘드시겠습니다."

"네…?"

"루테온 가문이 은행을 관리하다 보니 이를 노리고 접근하는 이들이 많나 봅니다."

"…맞아요."

텔라가 살짝 어두워진 표정으로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렸다.

"많죠. 은행이 돈을 불릴 수 있는 수단 중 하나잖아요? 제게 접근하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죠."

"저도 그랬습니다. 크로니아라는 이름만 보고 제게 접근한 이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미친놈이 되니 그런 놈들은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들은 그저 재미있는 부분을 물고 늘어지는 법이니까요."

루시온의 말에 텔라가 싱긋 웃었다.

"강해지셨네요."

"...?"

루시온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텔라의 미소가 길어졌다.

"저랑 어떻게 친우가 됐는지 기억나지 않으시는 건 아니죠?"

상처받은 길고양이 같던 루시온의 모습이 지금도 훤했다.

루시온이 크게 당황했다.

"…부디, 그날은 잊어주십시오."

―라타도 알고 있는데!

라타까지 껴들자 루시온은 손바닥이 간지러운 느낌에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니 공과 텔라가 어떻게 친우가 됐는지 듣지 못했어.]

베델이 미소를 띠며 말하자 루시온은 다급히 화제를 전환했다.

"서, 선물은 뭡니까?"

"원래는 다른 걸 준비했는데 이번 사건을 통해 똑똑히 알았어요."

텔라가 상자를 열자 라타의 눈이 커졌다.

―우오오오! 반짝이는 검이다!

루시온의 눈이 살짝 감겼다.

갑자기 피부에 불쾌감이 맞닿았다.

'설마 아니지…?'

루시온은 입가를 핥았다.

한 번도 아니고 무려 세 번이었다.

이쯤 되면 텔라는 가히 빛의 손이라도 봐도 무방했다.

"장식용처럼 보이지만, 호신용으로 쓰기 좋은 단검이에요."

텔라가 미소를 지었다.

[빛이… 깃든 물건이다.]

러쉘이 단검이 모습을 드러내자 입을 움직였다.

'진짜라고…?'

루시온은 놀랐다.

흄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움직였다.

[이쯤 되면 이상한데? 그렇지 않아?]

러쉘 자신은 텔라를 의심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왜 주는 것마다 빛이 깃든 물건일까.

분명 루시온의 체질을 알기에 사전에 검사했을 텐데.

[그대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가? 이건 저번에 텔라가 브로치를 선물해줬을 때처럼 빛이 거의 없다시피 한데.]

러쉘이 말한 뒤에야 베델은 단검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빛을 알아차렸다.

정말로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옅었다.

[내가 비운의 천재 흑마법사잖아? 빛을 느껴본 세월이 얼마인데 이 정도도 모르면 천재라고 할 수 없지.]

러쉘이 콧대를 높이며 크게 웃었다.

―맞아! 러쉘은 천재야!

라타까지 동조하자 러쉘의 목소리는 더 높아졌다.

"단지 평범한 단검이었다면 공자께 선물을 드리지 않았을 거예요."

루시온이 놀라자 텔라는 기뻐했다.

역시 선물은 선물을 받은 상대가 놀라야 기쁜 법이니까.

"이 단검이 어둠을 감지해요."

"예…?"

[뭐라고?]

루시온도 러쉘도 기겁했다.

지금 이게 무얼 뜻하겠는가.

텔라의 미소가 길어졌다.

"그러니까 어둠을 감지하면 빛이 반짝반짝하고 나온대요. 아, 걱정하지 마세요. 신전에 검사 결과 공자께 영향이 정말 없을 만큼 정말 옅은 빛만 나온다고 했거든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였다.

루시온은 계속 설마 하며 물었다.

"혹시 검사를 대신전에서 하셨습니까?"

"예. 대신전에서 검사했어요."

"제게 선물하신 다른 물건도 그랬습니까?"

"호, 혹시 제가 건넨 물건 때문에 어떤 문제라도 발생했나요?"

텔라가 갑자기 사색이 되어서는 두 손을 꽉 쥐었다.

"제가… 공자의 체질을 아니까 혹시 몰라서 상위 신관님에게 몇 번이나 검사를 받았어요. 공자께서 다치면 안 되잖아요."

'성물이다....'

루시온은 허벅지를 세게 쥐었다.

[역시 성물인가.]

베델은 참다 참다 짐작한 내용을 터트렸다.

[그래. 성물이겠지.]

러쉘도 동의했다.

―라타는 모르겠는데? 엄. 트로에가 안 느껴져.

[작동하지 않아서겠지.]

―오오! 러쉘은 역시 똑똑해!

라타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저 단검은 분명히 성물이야.'

루시온은 텔라가 성물임을 모르자 살짝 안도했다.

성물은 오직 신수를 가진 신관만이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에게 선물했던 다른 물건도 상위 신관에게 맡겼을 테니 확인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그럼 그 브로치도? 아니, 성물이 왜 또 나한테 오는 건데?'

라르비스의 눈물과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자신은 흑마법사인데.

어둠의 축복을 받은 자인데.

'이것도 붉은 실 때문인가…? 자꾸 붉은 실을 자르니까 그냥 빛 맞고 죽으라고 운명이 막 보내는 건가?'

루시온은 괜스레 트로에의 축복이 담긴 이마를 긁적였다.

'아니면… 이 축복 때문에?'

어느 쪽도 싫었다.

"아닙니다.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습니다."

루시온이 미소를 짓자 그제야 텔라가 어깨에 힘을 빼냈다.

"다행이에요. 저는 진짜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정말 이 단검이 어둠을 감지합니까? 그걸 어떻게 확인할 수 있죠?"

"큰소리쳤지만, 아직 확인은 못 해봤어요. 흑마법사를 제가 붙잡아 올 수도 없고 제 가까이에 있다고 확정할 수도 없으니까요."

[아닌데. 바로 눈앞에 있어.]

러쉘이 루시온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미안해요. 제가 확인할 수 있었던 건 소문뿐이었어요."

텔라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미안해할 필요 없습니다. 텔라 영애가 단지 소문에 휘둘릴 사람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알고 있습니다."

루시온의 말에 텔라는 눈에 힘을 조금 줬다.

"그냥 소문이 아니라고 느꼈던 게 제가 이걸 산 후에 어떻게 알고 왔는지 자신에게 단검을 팔라고 제안하는 자들이 나타났어요."

"누구인지 아십니까?"

"아뇨. 저도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어요. 제가 산 가격에 무조건 10배를 쳐주겠다고 하는데. 그때 느꼈죠. 이건 평범한 물건이 아니라는 걸 말이에요."

"다음에는 그 물건을 제게 팔았다고 말씀하십시오."

"그럴 순 없어요. 저번 쥐쟁이 때는 제가… 무모했다는 걸 인정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루시온이 냉큼 선물을 쥐었다.

"이제 제 거니, 제가 가져간 건 사실입니다."

"…치사하네요. 자꾸 이렇게 빚을 쌓아서 또 저한테 선물을 받으려는 속셈이죠?"

"어떻게 아셨습니까?"

능글맞은 루시온의 대답에 텔라가 키득거렸다.

"공자께서 저 단검을 사고자 했던 사람들이 궁금하다면 조사해볼게요. 그 정도 능력은 돼요."

"감사합니다."

"아!"

텔라가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리듯 말했다.

"라르비스의 눈물을 찾는 사람이 또 있었어요. 요새 부쩍 늘어난 기분이에요."

"혹시 그 외에도 주인을 잃은 물건을, 가족 외에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까?"

"맞아요! 이런 일은 없었는데, 돈이 얼마가 됐든 자꾸 사려고 하는 거 있죠."

'혹시 성물을 찾으러 다니는 건가? 네바스트, 아니면 뉴브라? 어느 쪽이지?'

루시온은 라르비스의 눈물을 찾으러 오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고 보니....'

루시온은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갑자기 잊어버렸다.

'뭐지? 내가 뭘 물어보려고 했지?'

"그것도 신경 쓰이면 알아봐 줄게요."

텔라가 의욕을 가득 내며 두 주먹을 쥐었다.

"예. 알아봐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어험. 지금 이자는 마음에 드시나요, 손님? 이런 혜택은 아마 앞으로도 없을 걸요?"

"혹시 더 올려주실 수 있습니까?"

[거기서 더 올리면 완전 날강도잖아, 루시온.]

러쉘이 인상을 썼다.

"성자께서 알고 봤더니 완전 날강도네요."

텔라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봤지?]

러쉘은 텔라 쪽으로 가서는 루시온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농담이었습니다."

루시온은 두 시선에 슬그머니 속내를 감췄다.

173화. 대신전에 또?

* * *

"…식사는 입에 맞으셨습니까?"

루테온의 가주가 루시온에게 물었다.

"예. 요리사의 솜씨가 무척 좋습니다."

―맛있어! 라타는 너무 좋아!

루시온 옆에서 그릇에 얼굴을 파묻던 라타가 '어흥' 하며 기분 좋게 울었다.

―아! 루시온이 여우는 이렇게 우는 거 아니라고 했어! 엄.... 여우는 어떻게 울어? 라타는 몰라.

라타가 러쉘하고 베델을 바라보았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우가… 참 독특하게 울부짖습니다."

가주가 애써 말을 돌리자 루시온은 넙죽 받았다.

"여우가 어떻게 우는지 모르시는 분들이 많으십니다."

"어쨌든 입에 맞으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오늘 은인께서 오신다고 했는데 무얼 좋아하는지 몰라 무척 난감했습니다."

가주는 음식을 죄다 물린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내가 왜 크로니아 공을 불렀는지 이야기해 보도록 하죠."

"이래서 식사 자리에 텔라 영애를 오지 못하게 한 겁니까?"

루시온이 묻자 가주는 싱긋 웃었다.

"맞아요. 그 아이가 들어서도 안 되고, 들어봤자 할 수 있는 게 없을 테니까요."

가주는 부정하지 않았다.

묘한 말에 루시온은 모르는 척 다른 말을 꺼냈다.

"가주께서 절 왜 부르신 건지 감이 잡히질 않습니다."

"나는 아주 바쁘답니다."

식사 때와 다른, 살짝 날카롭게 올라간 가주의 눈꼬리를 보자 루시온은 바로 맞대응했다.

"그건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 오해하지 마세요. 그런 의미로 말씀드린 게 아니니까요."

가주는 아주 자연스럽고, 능숙하게 뒤로 물러섰다.

'내가 앞으로 나서지 않았으면 다른 행동을 취하려고 했겠지.'

루시온은 그녀를 처음 봤을 때부터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판단하려는 그 눈빛이 손에 칼만 쥐지 않았지 용병처럼 노련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을 파악하는 중이었다.

소문으로 들었던 자신과 실제의 자신이 다를 테니까.

그리고 그녀가 가진 노련미로 자신을 주무르려고 하고 있었다.

"예. 부디 오해하지 않게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이런 상황이 조금 예민합니다."

루시온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순간, 가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요것 봐라.

참 재미있다는 얼굴이었다.

"그 전에 한 가지 확실히 하고 싶습니다."

루시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비록 그녀가 한 가문의 가주였지만, 자신은 꿀릴 게 없었다.

"말씀하세요."

"저는 비공식으로 이곳에 왔습니다. 후에도 비공식으로 계속 유지가 됐으면 합니다."

내가 온 사실이 외부로 새어 나가면 안 된다.

부탁과 경고가 뒤섞인 말에도 가주는 미소를 유지했다.

"물론입니다. 겨우 저택 하나도 관리하지 못해서야 가주로서 면목이 없지요."

"감사합니다, 가주님."

"아닙니다. 크로니아 공께서 우릴 도와주신 것에 비하면 한참 모자랍니다."

"과찬이십니다."

루시온은 자신이 루테온 백작가에 해준 일을 겉치레 식이라도 부정하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가주는 진짜 귀족이었으니.

아차 하면 물어뜯길 게 분명했다.

귀족 사이에도 의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손해 보는 짓은 죽을 만큼 싫어했다.

의리보다 이득을 더 챙기길 좋아하는 자들이기도 했다.

'상대가 귀족이니 역시 까다롭네.'

"나는 바쁘답니다."

가주가 똑같은 말을 꺼냈다.

루시온은 이번에는 얌전히 기다렸다.

"내 시간이 곧 돈이고, 정보이기 때문이죠. 은행을 굴리기 위해서는 엄청난 정보가 필요합니다. 누구보다 빨라야 하고, 귀가 뜨여 있어야 하죠."

저 거창한 말에는 별 의미가 없었다.

그저 진짜 바쁘다고 둘러, 둘러 말했을 뿐이었다.

"바쁘시니 핵심만 말씀하셔도 됩니다."

루시온도 바쁜 건 마찬가지라 딱 잘라 말했다.

"혹시 둘러 말하는 걸 싫어하시나요?"

가주가 물었다.

"듣기 좋은 편은 아니겠죠. 하지만 필요하다면 사용하기도 합니다."

루시온의 대답에 가주는 작게 실소했다.

둘러 말하면서 자신을 비꼬는 게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

"시간을 오래 잡아먹지 않을게요. 나도 공도 바쁜 사람이니까요."

가주는 힘을 살짝 빼며 자신을 가리켰다.

"그리고 가주이기 전에 나는 딸 아이의 어미예요. 딸의 친우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을 해보지 않을 수 없겠죠? 부디, 무례를 용서해주세요."

기 싸움은 여기까지라고 가주가 먼저 선언했다.

루시온 크로니아.

텔라가 말한 것처럼 막 착한 건 아니었지만, 저 정도면 충분했다.

귀족치고 나쁘지 않았다.

"당연하게 들리시겠지만, 귀족 중에 루시온 공을 노리는 무리가 있어요."

가주는 바로 용건을 꺼냈다.

"누구입니까?"

루시온의 눈동자에 흔들림이 없었다.

으레 고위 귀족의 자제일수록 목숨을 위협받는 일이 많았지만, 너무 차분하다 싶었다.

"미리 조사를 끝냈어요. 공이 편할 수 있게."

가주는 슬쩍 종이를 꺼내 루시온에게 내밀었다.

"신진 세력인지 아닌지까지는 몰라요. 하지만 누가 뒤에서 흔들고 있더라고요."

"실례합니다."

루시온은 가주가 내민 종이를 손에 쥐었다.

"출처가 재미있었어요."

가주는 입가심으로 차를 한 모금 마신 뒤에야 자연스럽게 입을 놀렸다.

"뉴브라 왕국."

'…빌어먹을.'

루시온은 하마터면 입 밖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을 뻔했다.

가주의 말이 맞았다.

그녀가 넘긴 종이에 적힌 가장 첫 줄부터 제이엘에게 들었던 놈의 이름이 적혀 있었으니까.

하지만 루시온은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표정을 유지했다.

[진짜 끈질기네. 뉴브라 놈들, 대체 뭘 얼마나 해 먹은 거야?]

러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모든 걸 쏟아부었겠지. 하지만 이걸로 뉴브라를 압박할 무기는 점점 완성되어가는 게 아닌가?]

베델마저 불쾌감을 드러내며 입을 움직였다.

[그렇긴 한데, 이제 황실에서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다르지. 루시온은 황실과 손을 잡길 원하지만, 놈들이 루시온이 가진 정보만 먹고 튄다면?]

러쉘의 전제에 베델은 잠깐 고민했다.

상황이 복잡한 만큼 어려웠다.

[어려운 문제야. 지금 뉴브라와 네바스트를 감당할 수 있는 나라는 오직 테슬라 제국뿐인데.]

[그러니까. 지금 제국이 제대로 하지 않으면 온 나라가 난리가 나겠지.]

러쉘의 시선이 루시온에게 향했다.

본인 입으로 자신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는 우습게도 평화를 위해서 누구보다 애쓰고 있었다.

'뭐. 루시온은 자신이 그런 행동을 하는지 모르는 모양이지만.'

러쉘은 입을 가리며 살짝 웃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루시온이 뒤늦게 물었다.

"돈의 흐름은 아마 내가 제국에서 가장 깊고,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을 거예요. 공을 죽이려던 귀족들에게 흘러 들어간 돈이 뉴브라 왕국에서 나온 걸 확인했어요. 증거도 여기 있고요."

가주는 추가 자료를 루시온에게 주었다.

'그럴 줄 알고 내 돈과 조직 자금 쪽은 확실하게 감췄지.'

루시온은 계속 표정에 신경 썼다.

기 싸움이 끝났다고 한들, 약점을 잡혀서는 곤란했다.

"내가 왜 이걸 넘기는 줄 알고 있죠?"

가주의 손가락이 루시온에게 넘긴 종이를 가리켰다.

"은혜를 갚는 겁니까?"

"맞아요."

가주는 짧게 대답하고, 곧이어 이를 살짝 갈았다.

처음으로 그녀는 감정을 크게 내비쳤다.

"그리고 놈들이 내 은행에 손을 댔거든요. 자금이 대거 빠져나갈 뻔했어요."

"둘 다, 손을 댄 겁니까?"

"맞아요. 내가 막았지만요. 어쨌든 우선, 저 세력에 있는 놈들부터 밟아주세요. 뿌리째로. 크로니아에서 가장 잘하는 거잖아요."

"제가 크로니아의 가주가 아니기에 장담은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럼 노비아 공께 말씀을 잘 드려주시길 바랄게요."

가주는 차로 다시 입을 축였다.

오도독.

루시온은 쿠키를 먹으며 가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 사실도 무척 중요하지만, 겨우 이것만으로 자신을 부를 리가 없었다.

'먼저 말할 생각이 없다면야.'

루시온은 찻잔을 쥐며 넌지시 말을 던졌다.

"차가 참 따뜻합니다. 웬만큼 식지 않으면 먹기 어려울 만큼 뜨겁네요. 한 입 먹어보고 싶었는데 갈 길이 바빠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할 말이 없으면 그만 일어나겠다는 말에 가주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아, 미안해요."

그녀는 손으로 입가를 살짝 가렸다.

웃음을 짓고 있을지, 아니면 자신을 비웃을지는 확인하기 어려웠다.

"은행을 운영하면서 몸에 밴 버릇이라 쉽게 떨어지질 않네요. 할 말이 더 남았어요. 이건 조금 더 개인적인 말이겠네요."

마치 시험에 통과했다는 듯 가주는 손을 떼어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목적이 무엇이든 떠본다는 사실에 루시온은 기분이 나빴다.

"방금 내가 준 이 정보로는 아마 공에게 입은 은혜를 갚기엔 부족할 거예요. 귀족들이 공을 노리는 건 당연할 테고, 크로니아라면 얼마든지 위기에 대처할 수 있으니 그저 제가 놈들을 더 빨리 알아낸 것밖에 없겠죠?"

"그럼 뭘 주실 겁니까?"

"크로니아와의 친밀한 관계를 바라고 있어요."

'그렇지. 이게 귀족이지.'

루시온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뻔뻔함에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귀족은 귀족으로서 대해야지.

"이게 가주께서 말씀하신 은혜 갚는 법입니까? 참 재미있습니다."

"크로니아와 거래를 하는 다른 은행보다 조금 더 친밀해졌으면 하는 것뿐이니 그렇게 날카롭게 말하지 않았으면 해요."

"그걸 정하는 건 제가 아니라 크로니아의 가주이십니다. 그걸 모르시지 않을 텐데, 왜 그런 발언을 하시는지 조금 언짢습니다."

천천히.

조금씩.

루시온은 주도권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가주께서 공을 아끼시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여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순간 덜미를 붙잡혔지만, 가주는 부드럽게 빠져나갔다.

하지만 루시온은 그냥 두지 않았다.

크로니아는 크고 강했다.

자신만 아니었다면 수백 년이 넘게 제국을 지킬 벽이 될 수 있는 곳이었다.

'보아하니 아버지를 만나지 못한 모양이네.'

루시온은 가주의 눈빛 속에 깃든 탐욕을 보았다.

루테온 가문을 도와준 것과 별개로 나타나는 귀족들의 탐욕.

충분히 이해하고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루시온은 한층 편안한 얼굴로 가주에게 입을 놀렸다.

"지금도 충분한데 굳이 왜 루테온 은행을 선택해야 합니까?"

"혜택을 더 얹어드리겠습니다."

'이제 알겠네.'

루시온은 왜 루테온 은행이 지금이 아니라 텔라가 가주가 되면서 성장했는지 알았다.

보기보다 시야가 좁았다.

루시온은 허벅지에 올려둔 손을 올려 테이블을 가볍게 쳤다.

"크로니아의 가주께서는 아주 깐깐하신 분입니다. 혜택을 더 얹어 주는 수준으로는 그분의 마음을 휘어잡을 수 없지요. 아니면 그분의 마음을 휘어잡을 수 있을 만큼의 혜택을 주실 생각이십니까?"

루시온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루테온 백작가의 사정으로 그게 가능하냐고 루시온은 그렇게 물었다.

이제 성장하고 있다는 말은 곧 지금까지 성장하지 못했다는 말이었다.

루시온은 루테온 은행이 아니라, 텔라가 운영하는 루테온 은행에 돈을 넣어두었다.

이번 일로 딸에게 주었던 지점을 도로 가져가는 것도 퍽 우스울 테고.

뒤는 마련되어 있었다.

"…실례했습니다."

가주가 먼저 물러섰다.

어리고, 세상 물정 모를 거라는 생각에 섣불리 덤볐다가 큰코다칠 뻔했다.

"예. 재미있는 농담이실 줄 알았습니다."

루시온은 가주의 제안을 모조리 태워버렸다.

그가 대놓고 '지금까지 너와 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라고 말을 꺼내도 가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눈앞에 들어온 황금에 눈이 돌아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렸으니.

"그럼. 이제 일어날까요?"

대신 루시온이 제안했다.

이제 이 만남은 끝내자고.

"미안… 해요."

가주가 고개를 숙였다.

"내 무례는 크로니아와 아니, 텔라에게 영향이 없었으면 해요."

"저도 텔라 영애와 잘 지내고 싶습니다. 이건 진심입니다."

루시온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제게 원래 주려고 했던 자료들을 넘겨주세요."

루시온이 손을 뻗자 가주는 잠깐 말을 잇지 못했다.

이제껏 자신에게 뾰족한 창만 들이대던 모습과 너무도 달랐다.

왜 이렇게 변했는지 생각한다면 너무도 잘 알 수 있었다.

"...."

가주의 눈꼬리가 아래로 내려갔다.

곧 그녀는 어색한 표정으로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살짝 내렸다.

"내가… 오래 찌들었나 봅니다. 내가 공의 순수한 마음을 짓밟았어요. 정말 면목이 없네요. 미안해요, 루시온 공. 미안합니다."

가주는 유감스럽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루시온이 텔라를 위해 왔음에도 자신이 그 마음을 짓밟고, 그만 돈놀이를 하고 말았다.

부끄러웠다.

[…어후. 이제야 숨을 돌리겠네.]

러쉘이 긴 침묵을 깨고 말했다. 루시온의 집중을 흐트러트리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는가.

"제가 아버지께 최대한 좋게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루시온은 가주가 내민 손을 잡았다.

그제야 가주는 진심으로 고마움을 드러냈다.

"고마워요. 하지만 이제 그렇게 애를 쓰지 않아...."

"아뇨. 제가 가주께 빚을 다는 겁니다."

앞으로 텔라가 루테온 가문을 받을 테니. 루시온은 그때를 위한 포석을 깔아두었다.

174화. 대신전에 또?(2)

루시온의 당돌한 말에 가주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처음으로 가주의 진짜 모습을 보는 듯했다.

"루시온 공."

"예."

"우리 딸이랑 친하게 지내줘서 고마워요. 텔라가 요새 매일 행복한 건 다 공 덕분이에요. 부디 텔라 루테온 말고 텔라로서 대해줬으면 좋겠어요."

"물론이죠. 즐거웠습니다, 가주님."

루시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때는 조금 더 부드러운 자리이길 바라겠습니다."

"예. 또 초대할 수 있게 허락해줘서 고마울 따름이에요."

가주도 자리에서 일어나 루시온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미안함과 고마움만이 가득했다.

* * *

'아무래도 대신전에 가봐야겠네.'

루시온은 루테온 저택을 나와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생각했다.

텔라에게 들었던 이야기와 자신에게 성물이 모이는 이유가 너무 신경이 쓰였다.

이게 우연이라고?

'우연일 리가 없어.'

루시온은 따로 시간을 빼는 것보다 기왕 중부에 온 김에 대신전을 들리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흄."

"예, 도련님."

"대신전으로 마차 방향을 돌리라고 해."

루시온의 지시에 러쉘이 제 이마를 때렸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웬일로 조용하나 했어.]

[루시온 공. 공의 마음은 알지만 이건 너무 즉흥적이야.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생각한 뒤에 행동해도 늦질 않아. 그곳은 대신전이잖은가.]

"베델. 내가 누구인지 알잖아? 그런데 성물이 나한테 왔어. 무려 3개나. 이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들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확인해야 해."

[그래. 공이 지금 얼마나 불안할지 알고 있다. 하지만....]

베델이 말을 멈췄다.

주르륵.

루시온의 코에 피가 흘러내렸다.

흄이 재빨리 손수건을 꺼내 루시온에게 넘겼다.

―홉! 루, 루시온 지금 아파?

마차 안을 우다다 뛰어다니던 라타가 얼른 루시온에게 다가가 그를 빤히 보았다.

"괜찮으십니까? 몸이 좋지 않으셨습니까?"

호들갑스러운 흄의 말에 루시온은 코를 움켜쥐며 말했다.

"아니. 피곤해서 그런 거야. 별거 아니야."

[…공의 몸이 먼저가 아니겠나.]

베델이 뒤늦게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각오를 다졌는지 그녀의 표정이 재활 훈련을 했을 때처럼 엄했다.

[밤잠도 줄이고, 낮잠도 거의 자지 않은 상태로 움직이고, 또 움직이니 몸이 남아돌겠는가? 공의 몸 상태가 원래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지 않은가.]

구구절절 맞는 말에 러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럼. 다 맞지. 다 맞는 말이지.]

―…엄. 그래! 맞아! 라타도 베델 말이 옳다고 생각해. 사람은 잠을 안 자면 죽는데.

빙그르르 돌던 라타의 눈동자가 나름 진지해졌다.

하지만 곧 깜짝 놀라서는 다급히 루시온의 품을 파고들었다.

―홉! 죽으면 안 돼, 루시온! 라타는 루시온이 죽는 거 싫어!

"안 죽어."

죽지 않으려고 이렇게 발버둥 치고 있는데 죽긴 왜 죽어.

루시온은 손수건을 내려놓고는 라타를 쓰다듬었다.

"베델. 네가 말려도 나는 갈 거야."

[루시온 공!]

"이제 불안한 건 딱 질색이야. 옆에 날 죽일지도 모를 물건이 있는데 확인하지 않는 게 이상하잖아. 트로에를 만나야겠어. 만나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할 거야."

전혀 흔들리지 않는 루시온의 시선에 베델은 다급히 러쉘을 바라보았다.

[나도 말리고는 싶지만, 이번에는 루시온이 맞아. 성물이 왜 루시온한테 모이는지 확인해야지.]

러쉘이 자신의 편을 들자 루시온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역시 스승님이십니다."

[당연하지. 난 무조건 네 편이라니까.]

러쉘이 허리춤에 손을 올려서는 콧대를 살짝 세웠다.

'텔라와 함께 있으면 텔라 편이고요?'

루시온은 코웃음을 치려다 그만뒀다.

* * *

딸랑.

루시온은 방울 소리에 흠칫 놀라며 눈을 떴다.

임시지만, 아샤에게 받았던 방울에 줄을 매달아 팔찌처럼 쓰고 있었다.

루시온이 다급히 방울을 보았다. 흔들림이 없었다.

"…악몽을 꾸셨습니까?"

흄이 걱정스레 묻자 루시온은 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런가 봐. 방울 소리가 내 귀에 들렸거든."

"방울은 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래. 울리지 않아야지."

―그 방울, 소리 나는 거 아니야. 라타가 몇 번 건드려봤는데 소리가 안 나. 이상해.

"이 방울은 소리가 나지 않아야 좋은 거야."

―우오오. 신기한 방울이었어! 라타는 그런 것도 모르고....

끼이이익!

갑자기 마차가 멈췄다.

덩달아 루시온의 몸이 덜컹 움직였지만, 흄이 재빨리 그를 잡아 균형을 잡았다.

―으어어. 라타는 진짜 놀랐어. 진짜 깜짝 놀랐어.

라타의 눈이 당장 튀어나올 정도로 휘둥그레져 있었다.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흄이 나섰다.

[…벨로스다.]

하지만 그보다 한 발 더 빠른 러쉘이 마차를 멈춘 장본인이 누구인지 알아냈다.

벨로스라면 빛의 신수인 트로에의 현 주인이 아닌가.

[벨로스가 누구인가?]

베델이 물었다.

[지금 빛의 신수를 불러낼 수 있는 신관. 루시온 하고도 안면이 있어.]

러쉘의 대답에 베델은 눈을 크게 떴다.

[그자가 대체 무슨 일이길래 루시온 공이 오는 걸 알아서 이렇게 막아섰단 말인가?]

[글쎄. 내가 보기에 벨로스가 아니라 신수 쪽에서 루시온한테 볼일이 있는 것 같은데. 이것 참. 서로 통한 건지, 아니면 우연인지. 어느 쪽도 신기하네.]

러쉘은 턱밑을 엄지로 문지르듯 만졌다.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흄이 문을 열자 마차를 몰고 있던 기사의 높아진 언성이 들려왔다.

"흄."

루시온이 흄을 불렀다.

"예, 도련님. 말씀하십시오."

"기사에게 진정하라고 말한 뒤에 벨로스에게 가서 무슨 일이냐고 슬쩍 물어봐."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트로에 아저씨! 라타 여기 있어!

라타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한쪽을 보며 방긋 웃었다.

마차 안이 잠깐 반짝거리다 새끼 호랑이가 마차 안에서 나타났다.

―반갑구나, 라타, 루시온.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트로에의 근엄한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흘러나왔다.

[...!]

트로에를 처음 본 베델만이 기겁했다.

라타보다 컸지만, 빛의 신수라고 들었던 그 모습과 너무 달랐다.

―놀라지 말거라, 어둠의 아이야. 내 덩치가 크기에 모습을 줄인 것뿐이니.

트로에가 베델을 달랬다.

―우오오오! 그러면 라타도 나중에 트로에 아저씨처럼 커졌다가 줄어들었다가 할 수 있어?

라타의 초롱초롱한 눈동자에 트로에가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이지. 얼마든지 가능하단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십니까? 오늘도 이전처럼 너무 갑작스럽지 않습니까?"

루시온이 팔짱을 낀 채로 물었다.

―루시온 네가 올 줄 알고 마중 왔단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둠이 내게 알려주더구나. 어서 너에게 가보라고.

"…또 어둠이 그랬습니까?"

루시온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트로에가 루시온에게 다가가 그의 무릎을 토닥거렸다.

―너무 언짢아하지 말거라. 그들은 지금 그대를 지키기 위해서 안달이 나 있으니까.

"이유가 대체 뭡니까?"

루시온은 굳어진 표정 그대로 물었다.

왜 자신만 특별한가.

이 물음에 대답해주는 이는 없었다.

자신은 특별한 게 싫었다.

특별함은 자신에게 있어 늘 고통만 안겨주던 단어였으니까.

―그건 조금 있다가 말해주마.

트로에가 루시온을 향해 '후'하고 바람을 일으켰다.

상쾌하지만, 이상하게 끝이 불쾌한 기분에 루시온은 미간에 주름을 잡고는 눈을 깜박거렸다.

―보거라, 벌써 불쾌한 게 따라붙었구나. 주제도 모르는 것이 어느새 뿌리처럼 뻗어내렸다니.

순례길을 다녀오지 못했다면 트로에가 내뱉는 말이 무엇인지 몰랐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 불쾌한 것이라는 게 혹시 어둠이 '그놈'이라고 부르는 존재입니까?"

―그래.

'방울 소리를 내가 잘… 못 들은 게 아니었어.'

루시온은 전신에 피가 바짝 빠져나간 듯한 느낌에 숨이 조금 가빠졌다.

놈이 자신의 근처까지 왔다는 건가?

[그럼 처음부터 알고 있었단 말이야?]

갑자기 러쉘이 언성을 높였다.

만약 트로에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면 루시온에게 미리 말해줬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적어도 루시온이 지금만큼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됐을 텐데.

―내게 그놈의 존재를 알고 있었냐고 묻는다면 알고 있었을 거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단다.

'알고 있었을 거라고? 말이 이상한데?'

루시온은 트로에를 빤히 바라보았다.

트로에의 시선이 러쉘을 향하자 베델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혹시 우리가 보입니까?]

―보인단다.

[신수는 빛의 존재일 텐데 어떻게 우리를 볼 수 있는 겁니까?]

―빛이 어둠의 존재를 볼 수 없게 되어버린 게 더 이상하지 않은가?

트로에는 오히려 되물었다.

"원래는 볼 수 있었다는 말씀입니까?"

루시온이 밖을 신경 쓰며 물었다.

―이곳은 자리가 좋지 않아. 벨로스가 안내해 줄 테니 따라오렴. 그때, 내가 대답할 수 있는 만큼 대답할 테니.

트로에는 라타에게 머리를 비비적거리다 말고 눈을 깜박이는 사이에 사라졌다.

마치 신기루에 시달린 것처럼 루시온은 트로에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마차 안에 짙은 침묵이 자리 잡았다.

―이히히! 트로에 아저씨도 슝을 쓸 수 있네!

트로에를 만나 신난 라타만 제외하고.

* * *

루시온은 마차에 내리자마자 온몸을 짓누르는 불쾌감에 몸이 부르르 떨려올 지경이었다.

대신전에 감도는 빛이 이전에는 정말로 약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때의 빛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쪽입니다. 조금만 버텨주십시오."

벨로스가 안절부절못하며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빛은 빛으로 물려야 하지만, 대신전에서 빛을 쏘는 건 지금 신수의 부탁을 외면하는 일이자 루시온을 곤란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했다.

루시온이 대신전으로 발을 내디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조금 전에 피곤해서 흘러내린 코피와 달랐다.

온몸을 찌르는 통증과 동반하는 코피였다.

'빛의 내성이 있는데도 이 모양이라니....'

루시온은 자신을 부르는 많은 목소리에도 침착하게 흄이 내민 손수건을 받았다.

분명 소설 속에서 공허의 손 보스는 빛에 어떤 영향도 없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었다.

라트초를 먹은 후에 빛을 쐰다.

이 방법 이외에 혹시 뭔가 빠진 게 있는 걸까.

'아니면… 내가 부서진 그릇이라서?'

부서진 그릇.

무언가를 담기에 완벽하지 않은 존재.

루시온은 순간 놀란 눈으로 베델을 바라보았다.

이전에 러쉘은 괜찮다는 걸 확인했지만, 베델은 아니었다.

[나는 죽음의 기사야. 웬만한 빛으로 사라지지 않으니 공부터 생각했으면 좋겠어.]

그제야 루시온은 안도하며 벨로스를 따라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대신전에 존재하는 낯선 장소에 도착했다.

다른 곳과 달리 이곳만큼은 빛이 옅기에 루시온은 겨우 숨을 제대로 내쉬었다.

벨로스 옆에서 무언가 반짝하더니 트로에가 본 모습을 드러냈다.

트로에가 꼬리를 흔들자 벨로스가 다급히 종이와 펜을 꺼냈다.

종이와 펜은 빛에 둘러싸여 무언가를 열심히 적어나갔다.

―벨로스. 잠깐 나가줬으면 해.

트로에의 메시지에 벨로스는 바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근처에서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벨로스는 트로에를 향해 고개를 숙인 뒤에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성자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벨로스입니다."

"반가워요."

루시온은 미소를 지으며 벨로스를 반겼다.

"저번에 연회 때는 경황이 없어서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벨로스 님."

"아닙니다. 빛의 신을 모시는 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혹여 몸이 더 나빠지신다면 언제든 절 불러주십시오.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솔직히 벨로스를 보고 대화를 나눈 건 몇 안 되지만, 그만큼 신에게 헌신적인 사람은 보질 못한 것 같았다.

왜 빛의 신수가 그에게서 탄생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착한 아이란다. 몇 번을 말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저 아이가 여전히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뿐이구나.

트로에가 살짝 구슬픈 듯이 목소리를 내었다.

왜 신수의 주인이 신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건지.

베델은 의문 가득한 얼굴이 되었지만, 아직 묻지 않았다.

트로에가 창백해진 루시온의 안색에 앞발을 들어 올려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하구나, 루시온. 어둠을 따르는 그대를 빛이 가득한 이곳으로 끌어들여서.

"아닙니다. 어둠이 말한 대로 저는 트로에를 보러 왔습니다."

트로에의 시선이 루시온의 그림자로 향했다.

―괜찮니, 라타?

―라타는 아까 전까지 힘이 하나도 없었어. 하지만 여기는 괜찮아! 라타는 튼튼해! 걱정해줘서 고마워, 트로에 아저씨!

이히히.

라타가 그림자에서 나오며 꼬리를 힘껏 흔들었다.

라타를 보며 흐뭇하게 미소를 짓던 트로에는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내게 성물에 관해 물으러 온 걸 알고 있단다.

트로에가 던진 말에 루시온은 바로 물었다.

"이것도 어둠이 트로에에게 말한 겁니까?"

175화. 대신전에 또?(3)

―아니란다. 어둠은 거기까지 말할 수 없어.

트로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놈' 때문입니까?"

―그래. 어둠이 아마 그대에게 말했을 텐데. 묶이고, 얽혀버렸다고.

"그리고 말할 수 없겠죠. 그렇지 않습니까?"

―잘 알고 있구나. 하지만 조바심을 내지 말렴.

트로에는 루시온의 머리를 다시금 쓰다듬었다.

"어떻게 조바심이 나질 않습니까."

―이해한단다. 이상한 놈이 나타났으니 무섭기도 하겠지.

"단지 무서운 게 아닙니다. 저는...."

라타를 잃는 게 정말 끔찍이도 싫습니다.

루시온은 아무것도 모르는 여우를 위해서 그 말을 삼켰다.

―하지만 어둠은 널 위해 움직이고 있어. 지금도 계속.

"왜 저입니까?"

루시온은 계속 맴돌던 의문을 터트렸다.

동시에 표정이 깊게 일그러졌다.

"대체 제게 왜 이러는 겁니까? 저는 절 위해 어둠이 움직이는 걸 바란 적이 없습니다. 하물며 어떤 이유인지조차 말해주지 않았는데 제가 왜 이해해야 합니까?"

[그래. 왜 루시온만이 어둠에게 사랑을 받는 거지? 어둠은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텐데. 말할 봐. 여기는 신전이잖아.]

러쉘마저 루시온의 의문에 힘을 실었다.

―설령 빛 아래일지라도 어둠이 존재한단다. 어둠의 존재인 그대도 이곳에 있질 않은가.

트로에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러쉘과 베델을 바라보았다.

순간, 러쉘은 옳은 말에 말문이 막혔다.

―어둠이 있는 곳은 전부 '그놈'의 영향력 아래에 있지. 그대의 의문을 해결하려 말을 내뱉는 순간, 루시온 그대가 위험해. 놈이 아주 혈안이 되어있으니까.

트로에는 말하길 꺼렸다.

'대체 '그놈'의 영향력이 얼마나 넓길래 이래?'

그 모습에 더 큰 의문이 루시온을 덮쳤다.

이곳은 빛으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하다못해 눈앞에 빛의 신수도 존재했다.

하지만 트로에가 정말로 자신을 걱정했기에 루시온은 언성을 높이질 못했다.

자신만 얽힌 게 아니라 라타도 있었으니까.

'역시… 안전하게 정보를 얻을 수단은 검은 구슬밖에 없나.'

―솔직히 나는 그대라고 생각하지 않았어. 그대에게 맥이 끊어진 어둠의 존재가 탄생되었을 때도 전혀 떠올리질 못했으니.

"떠올리지 못했다뇨?"

―아. 일단 앉으렴. 그대에게 피 냄새가 짙게 올라오니까.

트로에는 앞발로 루시온의 배를 가리켰다.

―마음 같아서는 그대를 치료해주고 싶지만, 내 빛이 그대를 공격할 테니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고는 그대가 편안하게 앉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게 전부야.

―그럼 라타는? 라타는 루시온이랑 똑같은 어둠이 흐르는데?

루시온이 자리에 앉을 동안 라타가 트로에에게 다가가 물었다.

―있지, 라타는 베델의 타락도 정화했어. 라타가 할 수 있지 않을까?

라타의 눈동자에 기대감이 어렸다.

―라타.

트로에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응! 트로에 아저씨!

―빛은 재생력을. 어둠은 정화를. 이 고정된 법칙은 누구도 바꿀 수 없단다.

―왜? 라타는 루시온을 돕고 싶은데. 라타는 아무것도 못 하는데. 라타는… 라타는 바보야.

루시온이 라타의 입을 잡았지만, 라타는 기어코 말을 마쳐버렸다.

―아니란다, 라타. 이미 네 존재가 루시온을 돕고 있단다.

트로에의 말에 라타는 눈을 크게 떴다.

―라타가?

―그래, 라타. 너는 루시온을 지키기 위해 탄생했고, 인도자인 그대 역시 루시온을 위해 존재하는 자이니까.

트로에는 라타뿐만 아니라 흄까지 바라보았다.

―라타가?

"제가… 말입니까?"

라타와 흄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반응했다.

[잠시만요. 혹시 그 사실을 어둠이 알려줬습니까?]

베델은 무언가 이상해 물었다.

어둠이 알려주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정보이질 않은가.

―정답일세.

[빛… 과 어둠은 천적이 아닙니까?]

재차 묻는 베델의 말에 트로에는 잘못된 사실을 바로잡았다.

―아니. 빛과 어둠은 서로를 위해 존재들이란다.

빛과 어둠의 공존을 믿던 러쉘은 만족스러운 미소로 이야기를 들었다.

―조금 전에 그대가 내게 어떻게 어둠의 존재를 보고 들을 수 있는지 물었을 거야.

[예. 그랬습니다.]

베델이 대답했다.

―빛이 없으면 어둠이 죽고, 어둠이 없으면 빛이 죽어버리지. 균형을 이뤘던 시절은 이제 없어. 지금 어둠이 사라지고, 빛은 꺼질 줄을 몰라. 그래서 빛은 가장 환하게 타오르다 서서히 죽어가고 있단다.

트로에가 그리움이 가득한 눈으로 시선을 위로 올렸다.

―빛의 축복을 받은 이들이 어둠의 존재를 보지 못한 것도, 내 목소리도 듣지 못한 것도 그 이유지. 너무 타올라서, 볼 수 있는 눈도, 들을 수 있는 귀도 잃어버린 거야.

씁쓸함이 깊게 묻어나자 라타의 귀가 접혔다.

―라타는 트로에 아저씨의 말을 들을 수 있어. 루시온도 그래.

―고맙구나, 라타.

트로에는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려 다시 루시온을 보았다.

―루시온. 그대가 마지막이야.

"제가… 마지막이라뇨?"

루시온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흐르는 이야기가 소설에서 너무 벗어났다.

원래 이런 내용이 아니었을 텐데.

헤인트의 이야기가 왜 이렇게 뒤틀려버렸을까.

아니면 소설 속 자신이 이미 죽었기에 벌어지지 않았던 일일까.

―그대가 사라지면 끝이야. 그대는 어둠을 담을 마지막 그릇이니까.

기어코 트로에 입에서도 '그릇'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루시온의 손끝이 떨리다 멈췄다.

'어둠을 담기 위한 마지막 그릇이라니.'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또.

자신은 또 특별해졌다.

원치 않은 특별함이 자신의 목을 쥐는 느낌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라타의 얼굴이 루시온의 손을 파고들었다.

마치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 루시온은 가만히 입술을 다물며 숨을 토해냈다.

'…괜찮아. 아직은 괜찮아.'

[그릇이라니…? 마지막 어둠이라니?]

러쉘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대체 뭔데? 뭐길래 루시온이 그릇이 되어야 한다는 건데?]

재차 물어도 트로에는 그저 입을 다물었다.

[망할! 왜 중요한 알맹이만 빠트려! '그놈'이 대체 뭐길래 이러는 거냐고!]

불안감을 터트려도 루시온이 해야 했지만, 그는 하지 못했다.

두려움에 잡혀버려 안색이 창백해졌다. 지금 목소리를 낸다면 당장 무너질 것처럼 아슬해보였다.

그래서 러쉘이 터트렸다.

답답해서.

애가 타서.

자신의 존재보다 더 소중한 루시온에게 큰일이 생길까 봐.

―그대는 루시온이 죽길 바라나?

하지만 트로에는 가장 잔인한 말로 러쉘의 입을 막았다.

재촉하지 말라고.

재촉하면 할수록 루시온을 죽게 하는 거라고.

베델도, 흄도 트로에의 말에 그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루, 루시온이 왜 죽는다는 거야? 라타는 모르겠어!

두 귀를 접던 라타가 기어코 소리쳤다.

트로에의 말도. 러쉘의 말도.

라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해하지 말거라, 라타. 나조차 너무 부당해서 이해하고 싶지 않은 일이니까.

―왜? 루시온은 그런 거 바라지 않아. 루시온은 그냥, 그냥 행복해지고 싶어서 계속 노력하는데. 왜 자꾸 루시온이 행복할 수 없게 막는 거야? 라타는 그런 거 싫어!

트로에는 가엾은 아기 신수가 더 큰 혼란에 빠지기 전에 라타의 눈을 감겼다.

트로에의 앞발이 라타를 쓰다듬자 라타는 축 늘어졌다.

―걱정하지 말거라. 라타를 재운 것뿐이니까. 루시온. 너도 그걸 바랄 테고.

"…예. 맞습니다. 라타가 더는 듣지 말았으면 했습니다."

루시온은 숨을 깊게 내쉬었다.

"계속 말씀하시지요."

루시온의 눈동자에 어떤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

트로에는 그게 안타까웠지만, 그렇다고 지금 이 소중한 시간을 낭비할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성물이 그대에게 끌려오는 거란다. 가장 어두운 곳이야말로 빛이 가장 밝게 비칠 테니까.

[왜 미리 말해주지 않았지?]

러쉘이 따졌다.

―할 수 없다고 말하면 믿을 텐가?

"할 수 없었다뇨…? 트로에는 빛의 신수지, 어둠과 관련이 없잖습니까. 아니면 어떤 제약이라도 있는 겁니까?"

루시온이 묻자 트로에는 꼬리를 살짝 흔들었다.

―빛의 신수는 누구에게 탄생됐든 똑같은 빛을 풍긴다는 걸 들어봤을 거야.

"들어봤습니다."

―현재 빛의 신수는 나를 포함해 총 셋이지.

루시온은 본의 아니게 네바스트의 비밀을 알아버렸다.

그들은 신수가 얼마나 있는지 절대 공개하지 않았다.

신수들을 너무 꼭꼭 숨겨 세간에서는 사실 신수가 다 죽어버린 게 아닌가 하고 말이 나오기도 했다.

아니었다.

무려 둘이나 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숫자가 적지 않은가.

"네바스트에 있습니까?"

―그래. 이들이 사실 하나라면 믿겠는가?

[뭐, 뭐라고?]

내내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었던 러쉘이 한순간 눈을 반짝였다.

미친 발견이었다.

흩어져 있는 신수가 사실 하나였다니.

"빛의 신수도… 라타처럼 하나였습니까?"

루시온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의 빛은 어둠을 죽일 뿐. 그래서 나누어졌고, 흩어졌단다. 우리는 하나이되, 하나가 아니며 심지어 공유할 구심점마저 잃어버린 상태지. 그래서 기억을 공유할 수 없었어.

'…몸은 따로 있지만, 의식은 원래 하나였다는 말인가?'

루시온은 트로에의 뒷말을 기다렸다.

아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까지 흘러가는 기분이라 어떤 말도 꺼내기가 조심스러웠다.

―게다가 나는 얼마 전에 태어났단다.

트로에가 꼬리를 흔들다 주저앉았다.

―나는 예전에도 존재했지만, 새로 태어났기에 과거의 기억을 찾는 시간이 늦어졌단다. 그래서 루시온 그대에게 말을 할 수 없었고, 이렇게 늦어버리게 된 거야.

[…잠깐. '그놈'이 과거에도 있었다는 말이야?]

트로에의 말을 유심히 듣던 러쉘은 당장 생각나는 의문점을 꼽았다.

[좋은 질문이다. 나도 마침 궁금하던 참이었으니.]

베델은 바짝 긴장한 얼굴로 무겁던 입술을 떼어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란다. 당연하지. 어둠은 조용하니까. '그놈'이 움직여도 눈치채지 못하는 게 당연해.

트로에가 인정하자마자 루시온이 매섭게 쏘아붙였다.

트로에는 처음부터 '그놈'을 알고 있었다.

'그놈'은 지금 라타와 자신을 노리고 있었고.

어둠이 사라지면 빛도 죽는다고 말했던 트로에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이상했다.

"그럼 왜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 겁니까? 과거에도 트로에가 있었다면, 다른 신관에게 탄생하고 난 후에 늦든 빠르든 기억을 되찾았을 텐데 왜 움직이지 않으셨습니까?"

―....

트로에는 말을 하지 못했다.

"왜 꺼내지 못하는 겁니까? 꺼낼 수 없는 말과 얽혀 있는 겁니까?"

루시온의 언성이 올라갔다.

―말은 내뱉어지는 순간 흘러간단다. 이 말로 나는 마지막 불꽃을 꺼트리고 싶지 않구나.

'…빌어먹을!'

루시온은 겨우 입술을 깨물며 말을 삼켰다.

'빌어먹을....'

―루시온.

트로에는 부르르 떨리는 루시온의 주먹을 보자 목소리를 꺼냈다.

―빛과 어둠은 공동체야. 빛이 커지면 어둠이 죽고, 어둠이 커지면 빛이 죽어버리지.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같은 말을 꺼냈다.

―흑마법사가 사용하는 어둠은 제가 모시는 어둠의 일부일 뿐입니다.

루시온은 아샤가 꺼냈던 말을 기억했다.

'아샤가 모시는 어둠은 흑마법사가 사용하는 어둠보다 위에 있었어.'

루시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둠이 말하는 '그놈'은 어둠보다 더 위에 있고.'

순간,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모든 전제가 깔렸지 않은가.

트로에는 조금 전부터 계속 그 단어만 피한 채 자신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어둠이 죽으면 빛이 죽는다.

"혹시 '그놈'이 어둠과 밀접해서 그놈이 죽는다면 어둠이 죽을 수 있습니까?"

루시온이 둘러 물어보았다.

트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게 아니라 할 수 없었던 거야? 협박해서?]

이어 러쉘도 물었다.

만약에 '그놈'이 죽어버리겠다고 한다면 어쩔 텐가.

트로에가 또 고개를 끄덕이자 러쉘은 불같이 화를 냈다.

[…와. 와. 미치겠네. 치졸한 새끼. 뭐 그딴 새끼가 다 있어? '그놈'이 대체 뭐길래 어둠이 죽는다는 거야?]

점점 분위기가 어두워지자 트로에는 상황을 바꾸는 말을 내던졌다.

―지금까지는.

176화. 변화

[지금까지라뇨? 혹 루시온 공 때문입니까?]

베델이 얼른 트로에를 재촉했다.

―그렇단다. 이젠 상황이 다르기에 그대를 불렀고, 그대에게 이런 말을 꺼낼 수 있는 거야.

"하지만 '그놈'의 정체가 뭔지 말할 수 없는 건 그대로이지 않습니까."

루시온의 물음에 트로에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앞발로 땅을 휘젓는 행동을 했다.

―그게 놈이 바라는 행동이기에 할 수 없단다. 몇 번을 물어도 그래. 적어도 지금은.

여지를 남기는 말에 루시온은 동영상 속 광고를 건너뛸 수 있는 버튼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일단 얌전히 있었다.

―아마 그대에게 어둠이 어떤 방법을 알려줬을 테야.

"맞습니다."

검은 구슬을 얻어라.

그게 어둠이 자신에게 알려준 방법이었다.

―나는 그 방법을 듣진 못했지만, 어둠은 절대로 그대를 위험에 빠트리지 않아. 그건 내가 내 존재를 걸고 장담할 수 있단다.

"그렇죠. 제가 필요할 테니까요. 어둠의 불꽃을 담을 마지막 그릇이라는데 필요하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대놓고 비아냥거리는 루시온의 말에 트로에는 그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빛의 축복을 받은 자와 대화를 나눌 수 없는 게 몇백 년이 훌쩍 넘겼지만, 말을 할 수 없는 게 이토록 답답하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야.

트로에는 답답함을 호소했다.

―루시온 그대가 뭘 생각하는지 알겠지만, 절대로 어둠은 그대를 이용하지 않아. 오히려 모든 걸 제자리로 돌리려고 할 뿐이니. 부디, 오해하지 말았으면 한단다.

"…좋습니다. 그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나중에 두고 보면 알겠지요."

트로에에게 물어야 할 말이 이것만이 아니기에 루시온은 우선 한발 물러섰다.

"조금 전에 신수끼리 의식을 공유할 수 없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랬지.

"그럼 의식을 공유할 수 있게 된다면 상황이 어떻게 좋아집니까?"

―네바스트에 존재하던 신수 다섯 중 셋이 이 땅에 사라졌다.

"혹시 흑마법사 짓입니까?"

입 안이 텁텁해 왔지만, 당장 신수를 죽일 자를 떠올리니 흑마법사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모르기에 알고자 하는 거란다. 의식을 공유한다면 그 죽음의 이유를 알 수 있을 테니까.

"어떻게 말입니까?"

―의식을 공유하게 된다면 흩어진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지. 그렇다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테고.

"그럼 그 의식을 공유할 수 있게 하는 구심점이 대체...."

―성물.

트로에가 단번에 털어놓았다.

[…진짜 평생 연구해도 듣지 못할 게 막 흘러나오네. 빌어먹을.]

새로운 발견에 러쉘은 좋아해야 할지, 말지 갈등하며 입을 놀렸다.

―그대가 얻은 성물이 곧 나의 힘이 되어줄 수 있단다.

"제가 얻은 성물이 몇 개입니까?"

―완전한 건 두 개고, 아직 하나는 완전하지 않아.

"혹시 그 힘을 사람이 쓸 수 있습니까?"

자신이 빛의 내성을 키우기 위해서, 경매장에서도 라르비스의 팔찌를 사용했지만, 아직 성물이 되기 전이었다.

두 팔찌가 합쳐져 성물이 된 지금 헤인트 때문에 본의 아니게 사용한 적이 없었다.

―한 가지 예외가 있지만, 보통 빛의 축복을 받은 자이면서 성물이 허락한다면서 쓸 수 있지. 하지만 우선순위는 나란다. 성물은 내가 있는 한 다른 이를 허락하지 않을 테고.

'…미치겠네.'

휘리릭.

붉은 실이 트로에와 자신을 연결했다.

당연했다.

아니, 오히려 붉은 실이 늦게 나왔다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트로에의 적이 곧 자신의 적이었으니.

루시온은 두 눈을 잠깐 길게 감았다가 떴다.

2년 후에 헤인트가 성물을 사용했다.

자신의 힘을 키우는 데도, 공허의 손 보스를 물리칠 때도.

'트로에까지 죽었다는… 뜻이겠지.'

2년 후는 '그놈'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뜻과 같았다.

공허의 손 뒤에 사실 뉴브라 왕국이 아니라 그놈이 있는 걸까.

"성물이 얼마나 더 필요합니까?"

루시온은 자신이 가진 완성한 성물과 불완전한 성물을 내려놓았다.

라르비스의 팔찌, 브로치, 단검.

라르비스의 팔찌 말고 둘 중에 어느 물건이 불완전한 성물인지는 몰랐지만, 지금은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아직은 받을 수가 없구나.

하지만 트로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유가 뭡니까?"

―성물은 성물을 부르는 법. 성물이 그대를 다치게 하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트로에가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루시온에게 걸어왔다.

―미안하구나, 루시온.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라타를 위해섭니다. 저는 라타를 잃고 싶지 않습니다."

일그러진 루시온의 표정에 트로에는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표적은 라타뿐만 아닌데.

―안다. 그대의 마음을 알아.

트로에는 루시온에게 자신의 머리를 비볐다.

―내가, 그리고 성물이 그대를 지켜줄 테니 걱정하지 말렴.

"아뇨. 저 말고 라타를 지켜주십시오. 저는 괜찮습니다."

자신은 다쳐도 언젠가는 상처가 나을 수 있었다.

하지만 라타는 사라진다.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원했던 만남은 아니었지만, 루시온은 제 마음에 깊게 자리 잡은 라타를 떼어놓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사랑해주는 라타를 어떻게 잃겠는가.

―…그대가 바라는 일이라면.

"감사합니다, 트로에."

―그대의 앞날에 축복이 있길.

트로에는 루시온에게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며 축복을 빌어주었다.

이전처럼 빛이 뿜어져 나오지 않았지만,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 * *

"…변명거리는 이미 만들어 두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밖으로 나온 루시온을 보자마자 벨로스가 입을 움직였다.

"순전히 저의 잘못으로 성자님께서 마차 사고를 당할 뻔했습니다. 치료의 목적으로 잠깐 대신전에 들린 것이니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감사합니다."

루시온이 입술을 열었다.

지쳤다.

대화라는 게 이렇게 기가 빨리는 행동일 줄은 몰랐다.

감당하기에 너무도 벅찬 일 때문인지, 빛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다리가 무거워 앞으로 나아가는 게 힘들 지경이었다.

하늘까지 아득해 보였다.

순간, 루시온이 비틀거리자 흄이 그를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벨로스는 거듭 사과했다.

빛을 막아주지 못해 너무 미안한 얼굴이었다.

"괜찮습니다. 버틸 수 있습...."

루시온은 잠깐 말을 멈췄다.

자신과 얽힌 붉은 실이 연결된 신관이 멀리서 지나가는 게 보였다.

'저건… 제이엘과 연결된 실인데.'

소름이 우수수 솟아났다.

제이엘이 흑마법사와 결탁했다고 거짓으로 증언한 신관은 네바스트의 신관인 첼가였다.

제이엘과 이어진 푸른 실이 잘려나간 뒤 새롭게 연결된 붉은 실이었기에 루시온은 방금 자신이 본 신관이 누구인지 알아챘다.

'네바스트의 신관이든, 네바스트와 손을 잡은 신관이든… 배신자가 여기에도 있네?'

루시온의 눈동자에 탐욕이 잠깐 비쳤다 사라졌다.

동부로 가면 뉴브라 왕국이 열심히 만든 죽지 않는 병사와 그 장소를 부술 생각이었다.

대신전과 인연을 만들기에 딱 좋지 않은가.

[흄. 안 되겠다. 루시온을 업어야 할....]

루시온이 제자리에 우뚝 서 있자, 가뜩이나 빛 때문에 창백한 안색이 더 안쓰러워 보여 러쉘이 입을 놀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탐욕이 깃든 루시온의 눈빛에 기겁했다.

[루시온? 너 지금 무슨 생각 하는 건데? 뭐든 안 돼! 절대 안 돼!]

순간 루시온의 입꼬리가 순간 씰룩거렸다.

'눈치도 빠르셔라.'

[왜 그러는가?]

호들갑스러운 러쉘의 말에 베델이 물었다.

[방금 루시온 표정 봤지? 사고 치기 전 표정이라고!]

[사고라니? 지금 여기서? 러쉘. 루시온 공을 조금 더 믿어줘. 이곳에서 사고를 치면 곤란한 건 다름 아닌 루시온 공이야.]

하지만 베델은 러쉘의 말을 곧 부정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제발.]

"혹시 아시는 신관님이십니까?"

벨로스가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저분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당연합니다. 신관이 되고자 한다면 모든 신관님의 얼굴을 기억하는 건 당연하… 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잘난 척을 하고 말았습니다."

신나게 입을 놀리던 벨로스가 다급히 제 입을 막았다.

"누구입니까?"

"세피로 상위 신관님입니다."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주십시오."

[…왜 그래 루시온? 네가 본 적 없는 신관이잖아.]

러쉘이 의문을 느끼며 물었다.

"아. 아무래도 본 적이 있겠네요. 성자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자리에 있었으니까요."

[아. 난 또 뭐라고. 그나저나 루시온 너 기억력이 엄청 좋잖아? 신관들을 기억하고 있었어?]

벨로스의 대답에 그제야 러쉘이 안도했다.

아는 사람을 본 것뿐인데 자신이 요란하게 굴었다 싶어 괜스레 민망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네바스트의 신관 쪽과 사이가 좋아 보였어요. 네바스트에서 오래 있어서 그런가 봅니다. 아. 괜한 이야기를 꺼내 시간을 잡아먹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세피로 상위 신관님께서 네바스트에 오래 있었다고 했습니까?"

"예. 몇 년 있었다고 했습니다."

벨로스는 루시온의 물음에 대답하면서 그의 표정을 살폈다.

살짝 불쾌해 보였다.

[루시온 공. 나는 그 자리에 없어서 모르겠지만, 혹시 벨로스가 말한 것처럼 저 신관이 네바스트 신관과 어울리는 걸 보았는가?]

벨로스가 실없이 꺼낸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베델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네바스트가 제국의 신전에도 첩자를 심었다면 대신전에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었다.

[베델. 너 지금 설마 저 신관이 네바스트의 첩자라고 생각하는 거야?]

러쉘의 물음에 베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루시온 공이 괜한 물음을 꺼낸 적이 있었나? 게다가 가장 자연스러운 만남이 가장 수상한 만남으로 이어지는 법이지. 첩자 노릇을 하는 자들은 으레 그랬다. 우연히 만난 척, 과거에 인연이 있었다며 둘러대곤 했지.]

베델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말을 꺼냈다.

[게다가 신관이 되려면 무조건 네바스트에서 신관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이상한 법이 철폐된 지 언제인데 굳이 교육을 받으러 그곳까지 간다는 건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혹 다음에 대신전에 공식으로 오게 된다면 제가 대신관님께 말씀드려서 저분을 물리도록 하겠습니다."

벨로스가 몇 박자 늦게 말을 꺼냈다.

루시온에게 있어 네바스트는 없는 억지를 쥐어 짜낸 곳이 아닌가.

성자의 몸으로 흑마법사 취급을 받았으니 언짢은 게 당연했다.

"배려 감사합니다."

루시온은 벨로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자연스럽게 넘어갔으니 그걸로 됐다 싶었다.

* * *

흄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로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트로에가 꺼낸 말은 하나같이 루시온을 찌르는 말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루시온이 그토록 슬픈 눈동자로 트로에를 보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곤히 잠에 빠진 라타를 쓰다듬는 루시온이 공허해 보여 흄은 입술을 옴짝달싹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렇게 빤히 보지 말고 말해."

루시온은 마차에 깔린 침묵을 먼저 깼다.

"무엇이… 도련님을 그토록 슬프게 합니까?"

"전부 다."

조심스러운 흄의 물음에 루시온은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특별한 게 싫었어."

"...."

"알아. 고위 귀족으로 태어났으면서 특별함을 운운하고 있으니 얼마나 웃길까."

"조금도 웃기지 않습니다. 태어나는 건 선택할 수 없으니까요.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함은 내게 고통만 줬어."

루시온은 잠깐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과거를 생각하는 걸까.

흄은 묻고 싶은 게 아주 많았다.

"그런데 나는 계속 특별하네."

눈을 뜬 루시온의 입가에 쓰디쓴 미소가 다시금 걸렸다.

"걱정하지 마, 흄. 나는 무너지지 않아."

루시온이 확신하며 말했지만, 절벽 끝에 걸린 사람처럼 너무도 아슬아슬해 보였다.

"…어떻게 그렇게 장담할 수 있습니까?"

"이미 무너져봤으니까."

루시온의 눈동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미소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흄은 왜 이렇게 그가 구슬프게 보이는지 몰랐다.

"그래서 무너지지 않아."

루시온의 대답에 흄은 입 안이 바짝 마른 기분을 느꼈다.

"도련님을 이렇게 만드신 뉴브라에 복수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복수?"

루시온이 코웃음을 쳤다.

"아버지께서 처리하지 못한 그놈들을 보면 어쩌면 이성의 끈을 놓아버릴지도 모르지. 하지만 복수는 하지 않아."

"어째서입니까? 저는 도련님의 과거를 모릅니다. 하지만 얼마나 참담했을지는… 짐작이 갑니다."

흄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루시온의 옷을 준비하면서 이따금 흉터를 보곤 했다.

옷으로 가려지는 곳에 흉터가 훨씬 많았고,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하는 의문이 매번 들게 할 정도였다.

루시온은 잠깐 베델을 바라보았다.

베델은 복수를 원했다.

트웰로 스프리카도, 그놈의 목에 검을 집어넣길 바라고 있었다.

자신의 말이 좋지 않게 들릴 수도 있었다.

[괜찮아. 나와 공의 생각이 다를 수 있으니 편하게 말해도 돼.]

베델이 미소를 짓자 루시온은 그제야 편하게 입을 놀렸다.

"복수는 나를 갉아먹는 존재니까. 나는 더 이상 내 감정으로 나를 갉아먹고 싶지 않아. 근 십여 년간 그랬으면 충분하잖아?"

넓은 저택만큼 자신의 방은 넓었지만, 세상이라는 이름을 쓰기엔 너무도 좁디좁았다.

커튼마저 창문을 가려 빛이 들어오지 않는 방.

약 두 달 전까지 자신의 유일한 세상이었다.

러쉘은 입을 다문 채로 루시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온이 그만큼 고통받았으면 충분했다.

"나는 행복해지고 싶으니까."

루시온이 활짝 웃었다.

조금 전과 다른 미소에 흄도 덩달아 입꼬리를 올렸다.

"아. 물론 가만히 둔다는 의미는 아니야. 뉴브라 왕국은 내가 박살 내버릴 거거든. 그다음이 네바스트야."

루시온은 뒤척이다 배를 내보이는 라타의 배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당한 건 갚아줘야지."

177화. 변화(2)

* * *

"…보고를 들으셨을 겁니다."

루시온은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벌써 마중 나와 있는 헤인트를 보며 먼저 말을 꺼냈다.

참 보고가 빠르다 싶었다.

"그래. 다친 곳은 없어?"

헤인트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보다시피 다친 곳은 없습니다. 혹시 몰라 꽁꽁 싸맨 채로 움직였고, 신관하고 입을 맞췄습니다."

실제로 벨로스가 달리던 마차에 달려든 건 사실이기에 자신과 함께 움직였던 기사들 역시 진실과 가짜를 섞은 거짓말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다치지 않았다니 다행인데 갑자기 대신전은 왜 간 거야? 그렇게나 중립을 유지하려고 했잖아."

헤인트의 물음에 루시온은 준비했던 변명을 꺼냈다.

"신수가 보고 싶어서요."

성자인 자신이 신수가 보고 싶다는데 누가 뭐라고 할 텐가.

헤인트는 황당해했지만, 차마 뭐라고 말을 꺼내지 못했다.

거의 사실이기도 했고.

"돌발 행동을 해서 죄송합니다."

루시온은 그가 말문이 막혔을 때 먼저 사과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헤인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무사히 돌아온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그래도 얼굴이… 창백하네."

"빛 때문입니다. 그럼, 저 먼저 올라가겠습니다. 엄청 피곤하네요."

"아, 잠깐만 루시온."

헤인트가 저택으로 들어가려는 루시온을 붙잡았다.

"예, 형님."

루시온은 미소를 보이며 헤인트의 말을 기다렸다.

"너한테 편지가 왔어."

"아버지께서 보내셨습니까?"

루시온은 눈을 깜박거렸다.

'어제도 통화했는데?'

대체 크로니아의 기사 중 누군지 몰라도 자신의 살이 빠졌고, 얼굴색이 창백하다며 보고를 한 모양이었다.

노비오가 걱정에 걱정을 더한 말을 끊임없이 늘어놓곤 했다.

"아니. 샤엘라야."

"…누님이요?"

루시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약 3주 전에 마탑이 개방될지도 모른다는 편지를 보내지 않았던가.

편지를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이 너무도 놀라웠다.

'보자. …한 3주만인가? 혹시 누님께서 어디 아프시나?'

―우오오오! 샤엘라의 편지다! 라타는 너무 좋아! 또 꽃이 붕붕 휘날리겠지?

길게 하품하던 라타가 제자리에서 폴짝 뛰었다.

흄의 눈동자도 덩달아 반짝거렸다.

루시온은 편지를 받고 바로 저택의 뒷마당으로 향했다.

또 마법이 걸려 있다는 러쉘의 말 때문이었다.

[어서 열어 봐.]

러쉘이 재촉했다.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지만, 베델도 같은 마음인지 눈에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탁.

루시온이 편지봉투를 열자마자 꽃이 휘몰아치며 마치 그를 쓰다듬듯 주변을 맴돌다 사라졌다.

―어어. 왜 이렇게 빨리 사라져? 라타는 꽃을 잡으려고 했는데.

라타가 시무룩한 목소리를 내자 루시온은 감았던 눈을 떠 주변을 살폈다.

아쉬운 대로 바닥에 떨어진 꽃을 만지던 라타가 꽃이 녹는 모양에 곧 꺄르르 거리며 꽃을 잡으러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뭐지?'

루시온은 의문을 느꼈다.

샤엘라 마법치고 온순했다.

루시온은 봉투 안에 든 편지를 꺼내 눈으로 확인했다.

―놀랐지?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확인해본 거야. 아마 지금쯤 나는 네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있겠지.

'…빌어먹을. 난리가 나겠네.'

루시온은 첫 줄을 읽자마자 한숨부터 내쉬었다.

"왜 그러십니까? 좋지 않은 내용입니까?"

흄이 의문을 느끼며 물었다.

"아니. 그냥 좀 난감해서."

[혹시 샤엘라도 뒤가 없어?]

힐끔 편지를 보던 러쉘이 목소리를 꺼냈다.

"맞습니다. 뒤가 없죠. 저보다 더요."

[뭐? 너보다 없다고?]

[그럼 큰일이지 않은가!]

러쉘도, 베델도 호들갑을 떨자 루시온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왜 그게 큰일입니까? 전 되게 얌전합니다."

―…엄. 엄.

라타마저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고, 흄은 아예 입을 다물었다.

"…됐습니다."

루시온은 아무도 믿지 않자 콧바람을 세게 불다 편지를 마저 읽어나갔다.

자신만큼 얌전한 사람이 어디 있는가.

―동부에 온다는 소식 들었어. 마탑에서 나가려면 황실의 허락이 필요한데, 내가 담당자의 멱살 잡고 허락해달라고 졸랐지. 동부에서 보자!

루시온은 편지를 다시 편지봉투에 넣었다.

고개를 들자 눈을 크게 뜬 러쉘과 눈이 맞았다.

'이 스승님이 또?'

루시온이 살짝 화가 난 표정을 지었지만, 러쉘은 손가락으로 편지를 가리켰다.

[설마 진짜 멱살을 잡은 건 아니지?]

"진짜 잡았을 겁니다. 단지 잡기만 했겠습니까?"

루시온은 피식 웃으며 한 걸음 떼다 말고 코밑에서 흐르는 뜨거운 감각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또 코피야?'

"…도련님."

흄이 사색이 되어서는 루시온을 불렀다.

"괜찮아. 잠깐 잠을 자야겠...."

순간 하늘이 핑그르르 돌더니 루시온의 몸이 무너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