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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이상한데?"

얼굴을 가릴 만큼 긴 머리카락을 가진 그는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킁킁.

아주 희미하나, 추억을 그리는 듯한 냄새가 느껴졌다.

이 냄새는.

어둠의 신수가 슬그머니 머릿속에 떠올랐다.

"저번에 내가 잘못 느낀 게 아니었어. 그렇지?"

그의 입꼬리가 길어졌다.

그냥 죽어버려.

어둠은 그저 사납게 반응했다.

"너희가 사랑하는 신수가 탄생한 게 맞지? 이건 분명히 신수 냄새인걸."

그는 한 번 더 어둠을 떠봤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언제나처럼 냉담했다.

으흠.

그는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어둠의 반응이 애매했다.

"내가 언제 확인을 해 봤더라. 좀 오래되긴 했네. 좋아, 착각이라도 괜찮아. 이참에 확인을 한 번 해 봐야겠어."

꼭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그는 마침 떠오른 생각에 활짝 웃었다.

마을 하나가 부서지다 다시 원상태로 되돌아가는, 반복되는 상황을 바라보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건 나중에 처리하지 뭐. 잠깐 내버려 둔다고 해서 문제가 터질 것도 아니고."

그가 문을 여는 시늉을 하자 바로 눈앞에 문이 나타났다.

고개를 돌려 그는 어둠을 바라보았다.

"갔다 올게. 혹여나 내가 너희가 숨기고 있던 보물을 발견하지 않게 덜덜 떨면서 빌고 있어. 너희가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짓밟아버릴 테니까."

키득키득.

"너희가 나를 진심으로 섬기게 되는 그날까지 말이야."

끼이익.

불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잠깐 침묵이 오갔다.

큰일이야. 대체 누구야? 누가 어둠의 신수에게 다가간 거야?

나는 아니야.

나도 아니야.

어둠은 서로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분위기가 너무도 무거워졌다.

아니, 누가 했든 이제 이 문제는 상관없어. 놈이 어둠의 신수를 발견하기 전에.

숨기자.

힘을 되찾아 오는 거야.

서둘러.

서둘러.

우리의 사랑스러운 신수를 위해.

우리의....

* * *

<…아. 그러니까, 6개 지부와 얽힌 놈들을 조사하고 있는 저희에게 추가로 그....>

"네바스트 신관인 '첼가'가 어떤 인물인지 알아봐, 헤로안."

루시온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살짝 섞여 있었다.

헤인트와 약속한 2시간 후에 루시온은 저택으로 돌아왔다.

―신관 이름은 첼가로 본인이 신성 국가 네바스트 신관이라고 실토했습니다.

돌아오자마자 유령의 힘겨운 보고에 루시온 역시 서둘러 헤로안에게 연락했다.

개인적으로 베델을 배신했던, 그녀의 전 주인의 수족이라던 테펠로우 셀가 후작의 조사 역시 맡기고 싶었지만, 기다리기로 약속했으니 참고 있었다.

어차피 팔찌가 목적인 테펠로우 셀가 후작은 자신에게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그 팔찌가 신성 국가 네바스트처럼 '성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확률도 꽤 높았고.

<하멜 님.>

헤로안이 부들거리며 겨우 말을 토해냈다.

"말해."

<저는 마법사가 아닙니다.>

"알아."

<하물며 퀘이트 놈처럼 막 숨고, 이리저리 옮겨 다닐 수도 없습니다.>

"그것도 아는데?"

<네바스트가 옆집입니까? 똑똑하고 두드리면 답이 나오는 줄 아십니까?>

"자신 없어?"

루시온의 도발에 헤로안은 잠깐 말문이 막혔는지 대답이 들려오질 않았다.

루시온은 침대에 누워 턱밑을 간질이며 다른 손으로 라타를 긁었다.

흄이 선선하게 바람을 일으켜주어서 편안하고 시원했다.

"누구더라, 아, 그래. 루테온 백작가를 건드린 것도 모자라 협박을 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배, 백작가와 네바스트는 다르지 않습니까?>

"헤로안. 네가 지금 뭘 착각하는가 본데. 나는 네바스트의 신관인 '첼가'를 조사하라고 했지 네바스트를 뒤지란 소리를 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넌 테슬라 제국의 백작가를 조사했어. 설마 제국이 네바스트 밑이라는 소리는 하지 않겠지."

<그건… 아닙니다. 절대 아니죠.>

[헤인트가 올라온다.]

베델이 알려주었다.

"그럼."

루시온은 조금 더 헤로안을 갈구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연락을 끊었다.

당장 가면을 벗어 품에 넣은 것도 모자라 흄에게 창문을 열라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갑자기 무슨 일로 찾아오는 거지?'

―이제 출발이야? 라타는 순례길에 가고 싶었어!

"아직 아니야. 출발은 모레야."

루시온은 라타의 입을 '툭' 하고 건드렸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던 라타는 이내 귀가 축 늘어졌다.

―아직 아니야? 라타는 순례길이 궁금했는데.

똑똑.

곧이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가 가겠습니다."

흄이 걸어가 문을 열자 헤인트가 방문 앞에 서 있었다.

"헤인트 트리아 님께서 오셨습니다."

흄의 말에 루시온은 상체를 일으켰다.

"형님?"

"아. 일어날 필요 없어. 누워 있어도 돼."

헤인트는 방으로 들어오면서 복도와 다른 온도에 주변을 살피다 창문으로 향했다.

때마침 바람이 많이 불고 있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헤인트의 눈동자가 사방으로 돌아가자 루시온은 그의 관심을 돌리려 물었다.

"그게 다름이 아니라 모레 남부를 떠나 중부를 들려 북부로 가기로 했지?"

"예. 그랬습니다."

"그렇게 가는 것보다 오늘 중부로 출발해서 조금 쉬다가 북부로 출발하는 건 어때? 사실상 남부에서 중부로 향하는 거리가 중부에서 북부로 향하는 거리보다 멀잖아."

'나야 좋은데, 왜 그러는 거지?'

루시온은 일부러 중부에 있는 어떤 행사도 잡지 않았다.

중부야말로 황실의 힘이 가장 강한 곳이 아닌가. 중립을 유지하기로 했으니 포기는 당연했다.

이제 북부에 도착하면 기회를 엿봐서 중부에 있는 3개의 지부와 그 지부를 지키던 뉴브라의 개, '가르티오 뭰'을 처리하려고 했다.

'잘됐네.'

루시온은 속내를 감추고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처리해야 할 일이라도 있습니까?"

"덥지 않아? 갑자기 장갑은 왜 낀 거야?"

헤인트가 갑자기 말을 돌렸다.

얼마나 당황했으면 루시온 자신이 몇 시간 전에도 착용한 장갑을 모를 수가 있을까.

[내가 유령....]

―23번이야!

[그래, 23번을 잡아 올게.]

러쉘은 바로 출발했다.

"아. 별일 아닙니다. 꿈자리가 사나워서 그만 부딪혔거든요."

루시온이 싱긋 웃었다.

가짜 체이톤을 쥐어패다가 상처가 났다는 걸 어떻게 말하겠는가.

"부딪혔다고?"

헤인트의 눈썹이 안쪽으로 모였다.

가뜩이나 루시온은 배의 상처도 모자라 부러진 팔도 다 낫지 않은 상태였다.

"혹시, 상처를 볼 수 있을까?"

"아버지랑 형님께 말씀드리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루시온의 당부에 헤인트는 꽤 상처가 크다는 걸 눈치챘다.

"그래서 형님. 왜 중부에서 하루 쉬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루시온은 여기까지만 알려주고는 다시 대화의 주도권을 쥐었다.

헤인트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내가 순례길을 가봤어."

"그게 정말입니까?"

루시온은 다시금 헤인트가 주인공이라는 걸 인지했다.

순례길에 초대받는 건 정말 힘들다고 노비오가 말했으니 정말 힘든 게 분명했다.

'하긴. 지금쯤 황실 기사단이 되지 않았더라면 이곳저곳 여행을 떠났을 테니까.'

"지정된 길을 걸어 다녀. 생각보다 꽤 고된 일이라서 그편이 너한테도 좋다고 생각해. 여독이라는 게 생각 이상으로 크니까."

"그럼 형님 말씀대로 한다면 하루하고 반나절 정도 쉬고 순례길에 오르겠네요?"

"그래. 그편이 낫지 않을까 싶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해.'

루시온은 비로소확신했다.헤인트가 돌아가면 유령에게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야겠다 싶었다.

"예. 그럼 그렇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루시온이 긍정적으로 나오자 헤인트의 얼굴이 환해졌다.

"고마워, 루시온. 그럼, 출발시각은 나중에 알려줄 테니까 그때까지 쉬고 있어."

"예. 나중에 뵙겠습니다."

루시온은 헤인트가 떠날 때까지 싱긋 웃다 바로 러쉘이 도중에 잡아 온 유령 23번을 바라보았다.

"신관 이외에 헤인트 형님이 무슨 말을 했는지 다 말해봐."

명령을 내린 뒤 루시온은 다시 누웠다.

라타는 침대에서 내려가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공을 물었다.

삑.

라타의 공에서 나는 소리와 유령 23번이 터놓는 말이 방을 가득 메웠다.

[…아. 황자, 그러니까 5황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걸 한 번 들었습니다. 간단하게 안부를 묻고, 누군가를 쫓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게 누구인데?"

[가르티오 뭰이라고 했습니다.]

살짝 나른한 표정을 하던 루시온이 그대로 놀란 표정이 되어서는 유령을 바라보았다.

'…미친.'

가르티오 뭰.

그 이름이 갑자기 왜 튀어나오는지.

이건 아예 자신보고 헤인트에게 가서 목을 내밀라는 것과 같았다.

'빌어먹을, 붉은 실!'

만약 헤인트가 가르티오 뭰을 잡으러 오는 걸 몰랐다면 흑마법사로서 헤인트와 마주할지도 몰랐다.

[진짜 가르티오 뭰이었어?]

러쉘이 도무지 믿기질 않는지 재차 23번을 추궁했다.

[예, 예. 진짜 맞습니다. 가르티오 뭰이었습니다. 그… 왜 쫓는지는 모릅니다. 거기까지는 말을 나누지 않았습니다.]

[하.... 왜 중부로 가서 쉬자고 제안하나 싶더니 저놈을 처리하려고 가는 거네.]

러쉘은 기가 찬 듯 인상을 쓰더니 곧 루시온을 보았다.

생각에 빠진 모습에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루시온. 잘됐네. 굳이 네가 처리하지 않아도 되겠어.]

[맞다. 공이 구태여 나서지 않아도 헤인트가 없앨 테니 위험을 자초할 이유는 없어.]

러쉘도, 베델도 말렸지만, 아주 잠깐 루시온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아니지....'

당연히 위험성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헤인트였다.

그의 생각은 지금 이 시기의 사람이 아니라 현대인과 비슷했다.

적어도 이분법에 꽉 얽매여 있는 여타 귀족들과 달랐다.

얼마 전에 붉은 실로 확인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말이 통할지도 몰라.'

마침 조직 에일과 황실의 자연스러운 접점이 필요하던 참이었다.

네바스트를 건드리려면, 세력이 지금보다 더 커지려면 방패막이 필요했다.

이전부터 제국을 훌륭한 방패막이로 생각했고.

'위기이자 동시에 기회가 온 거야.'

상대가 만약 헤인트가 아니었다면 생각도 하지 않을 기회이기도 했다.

[루시온. 루시온? 너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조용히 올라가는 루시온의 입꼬리에 러쉘은 더 깊은 불안함을 느꼈다.

"스승님."

루시온의 목소리가 꽤 부드러웠다.

찌푸리고 있던 러쉘의 미간에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안 돼. 너, 헤인트를 하멜로서 만날 생각이지?]

러쉘의 발언에 베델은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공은 흑마법사다.]

"그래서 왜 안 되는 겁니까?"

[너, 걔가 누구인지 몰라? 빛의 축복을 받은 자야.]

"하지만 형님은 꽉 막힌 사람이 아닙니다."

[그건 맞는데, 지금 너를 습격했던 공허의 손 때문에 흑마법사를 더 경계하고 있는 상황이야.]

러쉘은 답답함에 입가를 핥았다.

[잘 생각해 봐, 루시온. 네가 가르티오 뭰을 만났어. 헤인트가 이걸 보고 뭐라고 생각할지 뻔하잖아?]

"예. 같은 편이라고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스승님. 저는 헤인트 형님을 흔들 수 있는 것들을 손에 쥐고 있습니다."

루시온의 미소가 길어졌다.

"게다가 지금 쫓는 자가 같질 않습니까?"

152화. 목을 내놓고 혀를 놀리다

가르티오 뭰.

이놈을 통해서 황실에서 어떤 정보를 얻으려는지는 아직 몰랐다.

그래도 자신을 통해 더 많은 정보를 얻으면 황실 입장에서도 좋지 않겠는가.

[루시온.]

러쉘이 루시온을 강하게 불렀음에도 입을 멈추질 않았다. 헤인트와 이어진 붉은 실이 여전히 팽팽했기 때문이었다.

"그 신관이 네바스트의 신관이라는 게 밝혀졌습니다. 뉴브라 왕국은 지금 제가 벌인 일 때문에 흑마법사와 결탁했다고 압박을 받고 있죠."

루시온은 잠깐 주먹을 쥐었다.

신성 국가 네바스트가 공허의 손을 아는 이상, 어쩌면 그 압박이라는 게 사실 테슬라 제국밖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갑자기 밀려왔다.

"테슬라 제국의 귀족이었던 로베리오 놈이 흑마법사와 손을 잡았고, 저주를 만들기 위해 실험체까지 동원했다는 사실도 밝혀졌습니다."

루시온은 숨을 짧게 내쉬었다.

"게다가 스승님 말씀대로 절 노리러 온 흑마법사까지 나타났습니다. 신성 국가 네바스트를 제외하면 이 사건이 다 이어졌고, 공허의 손이 벌인 일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아마 저뿐일 겁니다."

[그래서 조각조각 흩어진 정보를 네가 이어주겠다는 말이야?]

"맞습니다. 제가 이어줄 겁니다. 그게 신뢰를 쌓는 첫걸음이 아니겠습니까?"

앞으로 헤인트에게 줄 것들은 많았다.

네바스트가 벌인 불법 노예, 6개 지부에서 모은 정보가 담기는 개미굴, 공허의 손이 야금야금 모은 시체들이 동부에 모았다는 정보 등.

[황실이 왜 가르티오 뭰을 쫓는지는 알고 있고?]

러쉘은 제일 불확실한 요소를 건드렸지만, 루시온은 여유롭게 빠져나갔다.

"당연히 알아내야죠. 물론, 찾아봐도 큰 이유가 아니겠지만요."

만약 제국이 뉴브라 왕국이든, 네바스트든 빌미를 잡았다면 이렇게 행동하지 않을 테지.

적어도 소설 시작 지점에서 2년 전인 지금의 황제라고 한다면.

케틀란 테슬라.

그는 자신의 아버지도 인정할 만큼 성군이었다.

적어도 2년 전까지는.

* * *

헤인트의 친우가 누구인가.

바로 루시온 자신의 형님인 카슨 크로니아였다.

루시온은 남부를 떠나기 전에 헤인트에게 잠깐 연락용 아이템을 빌렸다.

<…이미 죽었던 로베리오 놈이 황실 내에 사람을 풀었다고 한다. …그건 그렇고 아픈 데는 없더냐?>

'공허의 손이 황실까지 손을 뻗었다고…?'

루시온은 깜짝 놀랐다.

흑마법을 사용한 건지, 돈으로 회유를 한 건지, 그건 알 수 없었다.

[…카슨의 입이 이렇게 가벼울 줄은 몰랐다.]

베델이 당황하며 말했다.

[루시온 한정으로 저래.]

러쉘이 키득거렸다.

"예, 괜찮습니다. 저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빛을 쐤다고 들었다. 망할 흑마법사들도 나타났고.>

"그것도 이제는 괜찮습니다."

루시온은 당황하지 않았다. 애초에 크로니아의 기사들이 카슨에게 보고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

다만.

"혹시… 아버지께서 화가 많이 나셨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폐하께 항의한다고 하셔서 말리느라 힘이 들었다.>

[그렇지. 노비오라면 당연히 그래야지.]

러쉘은 고개를 끄덕이며 격하게 공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형님. 저는 이제 중부에 들러 조금 쉬다 북부로 갑니다. 아버지께도 안부 전해주십시오."

<루시온.>

"예, 형님."

<무리하지 말고 뭐든 조심하거라.>

"예. 뭐든 조심하겠습니다. 그럼, 출발시각이 다 돼서 그만 끊겠습니다."

<그래.>

아쉬운 듯한 목소리가 카슨에게서 흘러나왔지만, 루시온이 먼저 연락을 끊었다.

"흄. 돌려주고 와."

루시온은 흄에게 연락용 아이템을 건네며 입술을 살짝 물었다.

'2년 뒤에 황제가 허수아비가 되고, 4황자를 제외한 황위에 오를 힘을 가진 이들이 줄줄이 죽었던 이유가 이거였어?'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을 마주한 기분에 루시온은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졌다.

자신은 주인이 누가 되든 제국을 위해 변경을 지킨다는 신념을 가진 크로니아였기에 다음 황권 다툼에 끼어들 순 없었다.

크로니아는 중립을 유지해야 했다.

"아무래도… 공허의 손이 황실 내까지 침투했나 봅니다."

루시온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놈들은 아직 간만 보다가 들킨 꼴이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덜미를 붙잡힐 리가 없지.]

'배신자는 4황자다.'

루시온은 벌써 범인을 알아버렸다.

꼭두각시가 되었든 뭐든 황세자가 된 건 4황자였으니.

원래 소설 속에서 가장 유력한 황세자 후보는 2황자였지만, 지금은 5황자였다.

5황자, 세틸 테슬라.

평화시대였기에 황녀, 황자들이 그렇다 할 업적을 이룰 수 없으니 당연히 대신전 폭파 사건을 막은 지분이 꽤 크게 먹혀들어 갔을 테지.

뭐가 됐든, 소설과 달라졌다.

자신의 개입 때문이기도 하지만, 헤인트가 주인으로 모시는 자가 다름 아닌 5황자였다.

이는 유령을 통해 확인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너도 주인공과 얽혔네.'

루시온은 왠지 세틸이 딱했다.

[루시온. 걱정하지 말라니까. 아직 실망하기엔 일러.]

루시온의 생각이 길어지자 러쉘이 그를 다독였다.

[그래도 루시온 네가 큰일을 해냈으니까.]

"예…?"

루시온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대신전 폭파 사건 때문에 네바스트와 제국 사이를 줄타기하던 제국의 대신전은 이미 황실에 굴복했어. 네 존재가 그걸 증명하고 있고.]

러쉘이 손으로 루시온을 가리켰다.

루시온은 성자였다.

성자의 호위는 당연하게도 대신전이맡는 게 맞았다.

그럼에도 루시온의 호위는 황실이 맡고 있지 않은가.

너무도 큰 약점을 잡혔기에 대신전은 네바스트와 이어진 줄을 자신들의 손으로 끊어버렸다.

[네바스트는 현재 제국으로 들어올 구멍이 막혔어. 네 존재를 붙잡고 들어오려는 거 보면 모르겠어? 뉴브라와 네바스트, 이 둘을 막는 것보다 하나만 처리하는 게 편할 테고.]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잘됐습니다. 지금 황실에서는 제가 더 필요하겠네요."

황실에는 흩어진 정보를 이을 무언가가 간절할 시기였다.

루시온은 자신의 입을 가린 러쉘을 보며 싱긋 웃었다.

[러쉘. 그대는 참된 스승이야.]

베델은 비꼬는 건지, 칭찬하는 건지 모호한 표정과 목소리로 러쉘을 바라보았다.

당장 가면을 쓴 루시온은 행동을 위해 연락용 아이템을 사용했다.

"크라언."

<예, 하멜 님.>

"중부에 있는 3개 지부를 박살 낼 시간이야. 멍멍이는 내가 없앨 테니, 3조로 나뉘어 동시에 쳐들어가."

쥐쟁이들과 남부 지부장 덕에 정보는 충분했다.

<마침 방금 퀘이트가 돌아온 참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중부에 있는 지부를 염탐하러 갔던 퀘이트의 상황을 물어보려던 참이었다.

루시온은 흡족함을 감추지 않았다.

"좋아."

<피터를 보내겠습니다.>

반드시 피터를 데리고 가라는 크라언의 강한 압박에 루시온은 잠깐 웃다 대답했다.

"그래."

* * *

루시온은 포크를 내려놓고는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오늘은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더 먹지 않고?"

헤인트가 물었다.

'내가 빨리 일어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시치미는.'

루시온은 속마음과 달리 자연스럽게 미소를 내보였다.

"많이 먹었습니다. 형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여독이 쌓였는지 조금 피곤하네요. 오늘은 제 방 주변에 기사들을 물리셨으면 합니다."

"알았어.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더 멀리 배치할게."

"감사합니다. 그럼, 형님도 오늘 고생하셨으니 이만 푹 쉬십시오."

루시온은 간단한 인사를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

[엄청 신나 보이네?]

루시온이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러쉘이 빈정거렸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도 긴장됩니다."

루시온은 말과 달리 느긋한 표정으로 자신을 환영하는 라타를 쓰다듬어주었다.

―이제 출발하는 거지? 라타는 준비됐어! 밥도 맛있게 먹고, 신나게 놀고 있었어!

삐익!

라타는 기분 좋게 공을 깨물었다.

"잘했어, 라타. 이제 곧 출발할 거야."

[헤인트와 출발 시기를 비슷하게 맞추는 게 어때? 헤인트가 자주 흄을 부르잖아.]

"그건 준비됐습니다."

루시온은 흄을 바라보았다.

"일단 제가 좋아하는 마카롱을 사 올 셈이거든요."

"예전처럼 흉내만 내면 되겠습니까?"

흄이 묻자 루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개를 처리하는 모습으로 헤인트 형님과 마주해야 그래도 점수를 먹고 들어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틈틈이 헤인트와 이어진 붉은 실을 살폈다.

다행히 아직도 팽팽한 상태였다.

만약 자신이 잘못 짚었다면 붉은 실이 다시 힘없이 늘어졌을 테지.

[루시온 공.]

"빙의를 말하려고 그러지?"

[그래. 그편이 공을 위한 길이라 생각했어.]

"그렇지 않아도 베델 너한테 말하려던 참이었어."

루시온이 싱긋 웃었다.

헤인트는 지금까지 만났던 놈들과 달랐다. 심지어 직접 싸우는 모습도 보질 않았던가.

맨몸으로 맞부딪치면 보나 마나 결과는 뻔했다.

"혹여나 내 배의 부상은 신경 쓰지 마, 베델. 일단 내가 사는 게 먼저니까."

[그걸 아는데… 왜 그렇게 무모한 행동을 하려고 하는가?]

베델은 눈을 찌푸렸다. 내내 참아왔는지 목소리도 날카로웠다.

"아니, 앞뒤가 바뀌었어. 내가 살려고 이러는 거야."

[오늘도 헤인트를 피하면 되지 않은가. 피하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베델. 내가 언제까지 흑마법사라는 사실을 숨길 수 있을 것 같아?"

루시온의 물음에 러쉘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는 건 당연했지만, 러쉘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루시온은 베델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만약 들키면. 온전히 조직에 의존하게 될 텐데 그 뒤는 생각해야지. 제국이 내 적이 아니며 나한테 배신당한 헤인트 형님의 눈이 뒤집히지 않도록, 적어도 크로니아에 영향이 덜 가도록 친분을 쌓는 게 맞지 않겠어?"

[그래서 헤인트를 공의 편으로 만들려는 건가?]

베델의 눈이 가늘어졌다.

"편? 그것까지 바라지 않아. 그저 내가 헤인트 형님의 적이 아니고, 날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나한테 있어 아주 좋은 결과지."

루시온은 그 순간을 생각하는지 정말로 기쁜 듯이 눈웃음을 지었다.

'그때가 저 망할 붉은 실이 잘려나가는 순간일 테니.'

베델은 루시온의 미소에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왜 이렇게 애달픈 미소를 그리는지.

마치 불에 달려드는 나방 같고, 아무도 없는 무대 위에서 혼자 연기하는 주연 배우 같았다.

하지만 루시온이 행동했기에 그에게 닥쳐올 위험을 피하고, 더 나아가 사람들이 휩쓸릴 뻔한 최악의 사태까지 막지 않았던가.

이를 아무도 모르는 게 안타까웠다.

루시온이 막은 건 외부에 알려진, 대신전 폭파 사건만이 아닌데.

[그래도 너무 최악만 그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베델은 자신의 손을 꼭 잡았다.

"그래. 그래야지."

루시온은 중얼거리듯이 대답하다 베델에게 손을 뻗었다.

"죽지 않게만 해줘. 그러면 충분해."

[아니. 헤인트가 공의 옷깃도 스치지 않게 해줄 거다.]

나는 공의 검이니까.

베델은 하고 싶었던 뒷말을 꾹 삼켰다. 루시온과 계약만 했을 뿐, 기사의 맹세를 한 적은 없었다.

그녀는 그저 검을 만지작거리며 굳게 다짐했다.

루시온을 지키겠노라고.

* * *

가르티오 뭰.

중부 3개의 지부를 지키는 개는 우습게도 개미굴 근처에 있는 집에 자리를 잡고 언제든지 튀어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위치는 피터를 처음 만났던 장소와 불과 두 골목 차이였다.

아마도 자신 때문에 위치를 옮긴 듯한데, 개미굴 근처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나저나 이렇게 가까이 있을 줄이야.'

루시온은 허탈감을 느끼며 피터를 슬쩍 바라보았다.

"뛰쳐 가지 않을 겁니다. 그 정도로 생각이 없진 않습니다."

"누가 생각 없이 탈주하지 않았나?"

루시온은 피터의 말꼬리를 덥석 잡았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피터는 민망함에 고개를 숙였다. 덩달아 러쉘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생각이 짧은 피터야. 오늘도 멋대로 행동하면 안 돼."

루시온은 키득거리며 연락용 아이템을 귀에 가져댔다.

<3조로 흩어져 모두 대기하고 있습니다.>

크라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모든 중심에 개미굴이 있었고, 그 개미굴을 가르티오 뭰이 지키며 놈이 있는 곳을 기준으로 북서, 북, 북동 방향으로 3개의 지부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개미굴은 물론, 중부의 지부들 역시 중요하다는 걸 알아도 이렇게 붙여 놓았다니.

'그렇게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나?'

하긴.

유령이 있으니 안심이 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전부, 베고 왔다.]

마침 베델이 돌아와 루시온에게 보고했다.

'그런데 이거 어쩌나.'

루시온은 베델을 보며 조용히 엄지를 슬쩍 올렸다.

'나한테는 유령보다 더 강한 죽음의 기사가 있는데.'

적의 감시탑이 무너졌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153화. 목을 내놓고 혀를 놀리다(2)

적의 감시탑이 무너진 와중에 뭘 망설이겠는가.

"예, 잠깐 기다리십시오. 좀 있다 연락드리겠습니다."

루시온은 크라언에게 대기 명령을 내리고는 자신의 허리춤에 찬 검과 흄, 그리고 피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러쉘에게서 신호가 왔다.

'졸병들 처리는 헤인트가, 나는 대장의 멱살을 쥐어야지.'

루시온은 가르티오 뭰이 토해낼 정보가 무엇인지 벌써 기대가 됐다.

"가자, 피터."

고개를 끄덕이는 피터를 보고는 라타가 그림자 속에서 눈동자를 반짝였다.

―그럼 간다!

루시온이 피터와 흄의 옷자락을 쥐었다.

어둠에 휘감기고, 차차 어둠이 가라앉자 테이블에 앉아 막 간식을 먹으려던 한 남자와 마주했다.

루시온은 어둠을 쏘듯 꺼내서는 놈의 입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놈은 옆으로 굴러서는 단번에 검을 쥐려 손을 뻗었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놈이 눈을 깜빡이다 다급히 고개를 루시온 쪽으로 돌렸다.

"이거 찾아?"

루시온은 이미 다른 어둠으로 빼앗은 검을 흔들어 보였다.

"누구냐. 어디에서 왔지?"

놈은 침착하게 대응하며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가르티오 뭰."

루시온이 이름을 말하자 놈은 잠깐 주춤거렸다.

그 행동에 루시온은 확신하며 가면을 노랗게 물들였다.

"반갑다. 꽤 만나 보고 싶었거든."

루시온은 한 손을 뒤로 숨기며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가르티오 놈은 일반 기사가 아니라 황실 기사였다.

놈에게 조금의 틈도 줘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다.

그림자 이동으로 어둠을 보내 디버프를 쓸 거라는 신호에 라타는 혓바닥으로 입가를 핥았다.

―응! 라타는 지금 집중했어!

루시온이 어둠을 내보내자 라타는 곧바로 가르티오의 그림자로 어둠을 이동시켰다.

"아. 널 어떻게 알아냈냐고?"

루시온은 놀려대는 자신의 혓바닥과 가르티오의 검으로 그의 시선을 끌며 놈의 두 다리에 어둠을 휘감았다.

어둠으로 찌른 후에 바로 주문과 명령을 내렸다.

'낙, 다리를 묶어라.'

그제야 가르티오가 눈치채며 아래를 보았다.

두 다리에 나타난 낙인.

'묶었다.'

루시온은 웃었고, 놈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이건 위험했다.

놈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 같았다.

[봐. 역시 훈련이 답이지?]

러쉘이 뿌듯해하며 말했다.

루시온은 잠깐 러쉘을 바라보았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릴 수 있어 참 다행이다 싶었다.

"내가 알려줄 것 같아, 멍청아?"

가르티오에게 내뱉는 루시온의 목소리에 짜증이 실려 있었다.

"...?"

이 모든 과정을 본 피터는 놀란 얼굴로 입마저 벌렸다.

직접 눈으로 보고 있어도 어둠이 움직인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너무도 조용했다.

꿀꺽.

저번 탈주 사건 때 흑마법사를 만나고도 살았던 게 어쩌면 행운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빌어먹을...."

가르티오는 다리에 오러를 끌어올렸다. 얼마나 힘겨운지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빛의 축복을 받은 자들도 저걸 떨치기 어려운데 마나를 지닌 저놈은 얼마나 힘들겠어?]

러쉘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기어코 가르티오가 움직였다.

낙인을 달고서도 단숨에 루시온을 물어 뜯어버리겠다는 열망이 눈에 어렸다.

'낙, 다리의 속도를 높여.'

루시온은 오히려 기회라고 생각하고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루시온을 향해 손을 뻗던 가르티오는 갑자기 빨라진 자신의 속도를 주체하지 못하고 루시온을 스쳤다.

루시온의 머리카락이 흔들릴 무렵, 놈은 흄과 마주했다.

[가라, 흄.]

러쉘이 흄을 살짝 밀쳤다.

흄은 그대로 손을 펼쳐 가르티오의 얼굴을 붙잡고는 바닥으로 내리쳤다.

그 바닥에는 루시온의 어둠이 깔려있었다.

소리가 어둠에 잡아먹혔다.

당사자인 가르티오는 허리가 높이 들릴 만큼 커다란 충격에 몸을 바르르 떨었다.

흄은 잠깐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적들 붙잡는 데 무엇이 효과적일까.

흄은 가르티오의 팔목을 붙잡아 바닥과 붙였다.

샤아아.

흄의 손에서 냉기가 흘러나오자 극심한 고통에 가르티오의 눈이 커졌다.

재빨리 오러를 팔에 둘러 보호하는 건 물론, 얼음을 깨부수려 다른 팔을 움직여보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런 미친!"

이건 사람의 힘이 아니었다.

가르티오의 시선이 순간 문으로 향하자 팔을 잡던 흄은 단숨에 가르티오의 목을 쥐었다.

"…커헉."

"조용히 하십시오. 시끄러운 걸 싫어하거든요."

도련님께서.

흄은 루시온이 왜 바로 가르티오 뭰의 방으로 왔는지 알고 있었다.

시끄럽지 않고, 보다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흄이 손을 떼자 가르티오의 목에 얼음이 자리 잡았다.

그가 바둥거릴 사이에 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장에 냉기를 불어넣으면 금방 죽겠지만, 이번에는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루시온의 시선에 흄은 다리를 가르티오의 다리를 내리찍었다.

빠각.

으으읍!

루시온까지 가세해 가르티오의 입을 어둠을 막아버렸다.

'미친, 미친, 미친, 미치이인!'

분명 오러를 둘렀거늘.

가르티오의 다리가 보기 좋게 부러져버렸다.

가르티오는 밀려드는 고통에 몸을 벌벌 떨었다.

흄은 가르티오의 다른 다리를 보며 망설이지 않았다.

콰직!

으으으읍!

가르티오는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두 눈에 핏대가 서고,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를 동정하는 사람은 그곳에서 아무도 없었다.

"두 다리가, 부러졌네?"

루시온이 가엽다는 듯 목소리를 내며 검을 흄에게 넘겼다.

그녀는 힘으로 검을 동강 내고는 루시온에게 다시 주었다.

보란 듯이 가르티오 앞에 검을 떨어트린 루시온은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기절하지 않은 기사의 정신력에 감탄하며 말했다.

"이제 두 팔만 남았나?"

읍읍!

"…아차. 말할 입은 줘야지."

루시온이 가르티오의 입을 막은 어둠을 떼어냈다.

"뭐, 뭐, 뭘 원하는 겁니까!"

가르티오는 저항을 포기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공허의 손과 손을 잡은 이상 옆에서 놈들이 뭘 하는지, 어떻게 사람을 다루는지 봤을 테니까.

무엇보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까지.

공포 앞에서 그 잘난 기사도는 꺾였고, 이미 팔아넘긴 양심에 줄 하나 더 긋는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어차피 가르티오의 눈에 자신이나 공허의 손 놈들이나 똑같은 놈으로 보일 텐데.

"내게 뭘 줄 수 있는데? 말해봐."

루시온은 신경 쓰지 않고 물었다.

"나머지 지부가 어디 있는지...."

"아니."

"공허의 손...."

"네가 공허의 손 놈들이랑 손잡은 걸 알아."

"화, 황실에도 있습니다. 제가 아는 놈들은 총 13명입니다!"

"말해."

루시온이 원했던 정보는 아니지만, 어쩌다 손에 넣은 탐스러운 과일을 그냥 버리고 싶진 않았다.

가르티오는 필사적으로 13명 모두를 말했고, 이제 살려 달라는 눈빛으로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기특하긴 한데, 이거 어떡하나. 내가 원하는 정보는 아닌데."

"도, 동부에...."

"그것도 알아. 동부에 시체를 모으고 있잖아. 죽지 않는 병사를 만들 테고. 그런데 아마 상황이 지체됐겠지?"

가르티오가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알았냐는 눈빛에 루시온은 어둠으로 가르티오의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네놈 주인인 부엉이가 누구야?"

부엉이.

가르티오가 크게 반응했고, 잠깐 침묵했다.

'그래. 원하는 만큼 저울질해 봐. 결과는 뻔하겠지만.'

루시온은 느긋하게 기다렸다.

가르티오의 입술이 옴짝달싹하길 반복하다 기어코 열려버렸다.

"도, 동부에서 열리는 죽음의 바다 정화 기원 축제에 참여합니다. 가슴에 붉은 보석, 아니, 검붉은 색의 보석이 박힌 브로치를 달 겁니다! 정, 정말입니다!"

그 대답에 피터가 움찔거렸다.

이 사실은 거의 부엉이의 정체를 알려준 꼴이 아닌가.

[드디어 부엉이의 정체를 알게 되겠네.]

러쉘은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가면에 얼굴이 가렸어도 기뻐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잘했어. 개가 쓸모가 있네."

루시온은 진심으로 가르티오를 칭찬했다.

덩달아 기뻐하던 가르티오는 이어진 루시온의 말에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럼 이제 하나 더 말해야지."

"뭐,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공허의 손, 우두머리 이름."

소설에서도 그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보스' 혹은 우두머리로 통칭 되어있을 뿐이었다.

"그건 모릅니다! 진짜, 진짜 모릅니다!"

가르티오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울먹거렸다.

"부, 부엉이 이름도 모릅니다. 제가 그 정보를 아는 건, 들었습니다. 아주 잠깐, 그러니까, 제 청력으로 말입니다. 제가 일단은, 일단은 기사잖습니까."

가르티오가 일그러진 얼굴로 애써 웃으려고 했다.

두 다리가 부서졌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신전에 가서 빛의 힘으로 재생력을 높인다면, 어쩌면 걸어 다닐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직은 희망이 있었다.

아직은.

"들었다고?"

"그렇, 그렇습니다! 부엉이의 시종이 실수했는지, 뭔지는 몰라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가르티오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짜냈다.

어쩌면 살려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하니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아…! 부엉이의 시종이. 그놈이 겨, 경매장 이야기도 꺼냈습니다!"

'경매장…?'

루시온은 귀가 잠깐 솔깃했으나, 범위가 너무 넓었다.

하루에도 몇 개의 경매장이 열리겠는가.

―루시온도 얼마 전에 경매장에 갔잖아. 라타는 그 경매장이라고 생각해. 후후, 라타는 똑똑하니까!

라타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러쉘은 라타를 보며 피식 웃었다. 루시온이 갔던 경매장이라고 단정 짓기엔 변수가 너무 많았으니.

"팔찌! 그래, 소, 손목을 두드리는 행동도 취했습니다!"

―우오오! 라타가 맞췄어! 역시 라타는 똑똑해!

라타가 루시온의 그림자 속에 팔짝팔짝 뛰어다녔다.

쿡쿡.

베델마저 웃음을 흘렸다.

"범위가 너무 넓다고 생각하지 않아? 경매장에서 팔찌를 팔지 않는 곳도 있나?"

하지만 루시온은 빈정거렸다.

꼴에 확신해서 내뱉은 말은 여전히 불확실한 정보였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가르티오의 얼굴이 일그러지다 못해 당장 무너져 내릴 것처럼 구겨지고 구겨졌다.

"이제 없지?"

루시온이 목소리를 내자 가르티오가 벌벌 떨었다.

"참 괜찮은 멍멍이였는데."

마지막을 알리는 듯한 말에 가르티오는 팔로 기며 루시온에게 다가갔다.

"시, 시간만 주시면 제가 더, 더 알아오겠습니다. 아니, 제가 정보를 빼내 오겠습니다! 그러니까, 기회를, 기회를 주십...."

흄이 루시온 앞에 서자 가르티오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며 양손을 다급히 숨겼다.

두 다리가 부러졌던 아픔이, 공포가 다시 밀려오는 듯했다.

"제가… 정말로 다 알아오겠습니다. 정말로요."

가르티오는 이제 흐느끼다시피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중요하지 않았다. 가르티오보다 더 중요한 이가 이곳에 왔다.

[루시온. 너도 느꼈겠지만, 헤인트가 왔어. 이 불쾌함은 빛밖에 없지.]

러쉘이 창문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루시온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소파에 가서 앉았다.

덩달아 가르티오의 고개가 같이 움직였다.

"좋아. 기회를 한 번 줄게."

가르티오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차분히 생각해서 네가 아는 걸 더 말해봐. 없으면 끝이고."

루시온은 가르티오를 본 뒤에 피터를 바라보았다.

"피터. 준비하고 있어."

피터를 향한 루시온의 말이 귀에 닿지 않는지 가르티오는 눈마저 질끈 감으며 생각을 거듭했다.

[올라오고 있다.]

베델이 재촉하듯 말을 꺼내자 가르티오에게 걸린 디버프를 지우던 라타가 갑자기 동요했다.

―어, 어떻게 라타는 갑자기 떨리기 시작했어.

[진정해, 라타. 네가 떨 필요 없어.]

러쉘이 라타를 다독였지만, 라타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불안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있지. 만약에 루시온이 다치면 어떡해. 라타는 그런 거 싫은데. 라타는, 그런 거 진짜 싫은데.

[라타. 걱정하지 마. 내가 루시온을 지킬 테니.]

―진짜?

[내 검을 걸고 맹세할게.]

―응! 라타는 베델을 믿어.

[고마워, 라타.]

베델은 루시온의 그림자를 보며 빙그레 웃다 루시온을 보았다.

이제 빙의를 할 때였다.

피터가 루시온 앞에 섰고, 루시온은 그의 뒤에서 베델과 빙의했다.

[…와. 이건 뭐, 거의 쓸다시피 오는데?]

러쉘은 잠깐 아래층으로 갔다가 혀를 내둘렀다.

지킬 게 없는 헤인트는 거침없었다.

베고, 피하고.

이 두 동작을 반복하며 거리낌 없이 가장 위층으로 올라왔다.

'…슬슬 오네.'

루시온은 헤인트가 내뿜는 빛에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일단 대화하려면 전투를 불가피하겠지?'

어둠을 끌어 올려 빛에 저항해볼 수는 있지만, 루시온은 시도하지 않았다.

가장 자연스럽게 자신이 흑마법사라는 사실이 들통나야 했다.

[코 앞이다.]

베델이 루시온의 손으로 검을 잡았다.

콰앙!

"가르티오 뭰!"

헤인트의 우렁찬 소리에 가르티오는 화들짝 놀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154화. 목을 내놓고 혀를 놀리다(3)

"…헤, 헤인트 트리아."

가르티오가 말을 더듬었다.

어떻게 그 이름을 모르겠는가.

갑자기 5황자의 특혜를 받아 황실 기사단이 된 것도 모자라 제8 기사단이라는 신생 기사단의 대장 자리까지 꿰찬 놈을.

성자의 호위가 된 제8 기사단을 볼 때마다 얼마나 배알이 틀렸는데.

가르티오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헤인트가 이곳에 왔다는 건 황실이 냄새를 맡았다는 소리와 같았다.

가르티오의 눈동자가 굴러갔다.

어떻게든 살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흄은 루시온의 고갯짓에 바로 부러진 발을 슬쩍 건드렸다.

"이놈은… 으아아악!"

휙 하고 반대편으로 발이 돌아갔지만.

"저런, 저런. 입이 그렇게 가벼우면 금방 죽어. 나라서 널 살려두고 있는 거고."

루시온은 가르티오를 향해 혀를 차다 말고 헤인트를 보았다.

붉은 실은 팽팽해진 상태 그대로였다.

자신을 경계하는 눈빛에 아직 살기는 없었다.

"내가 먼저 왔는데. 무슨 볼일이지?"

루시온은 입부터 놀렸다.

아주 편안한 자세로.

[루시온…? 너무 편안한 거 아니야?]

러쉘은 루시온의 자세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집에 있을 때처럼 소파에 깊게 기대 금방이라도 옆으로 스르르 쓰러져 누울 것만 같았다.

[혹시 상처가 아픈가?]

베델이 묻자 루시온은 속으로 답했다.

'아니.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몸이 좀 무거웠다. 덜 흡수된 검은 구슬 때문에 열감이 다시 피어오르는 듯했다.

"누구냐?"

헤인트의 손에 들린 검 끝은 아직 바닥으로 향해 있었다.

"보통 자신부터 소개하지 않나? 뭐, 좋아. 헤인트 트리아. 네 이름을 이놈한테서 들었으니까."

루시온은 손가락으로 가르티오를 가리켰다.

"얘를 가져가려고 온 거야?"

"…어디까지 들었지?"

헤인트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자, 일단 확실히 정리하고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하는데 나는 저놈과 같은 편이 아니야. 오히려 적이지. 보이지? 두 다리가 우지끈 부러진 거."

루시온의 혓바닥이 바쁘게 움직였다.

"너도 저놈과 적인 것 같은데. 그럼 같은 적을 둔 셈이니 그렇게 날을 세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아니. 네놈이 적인지 아닌지 확인해보면 알겠지."

헤인트는 조금 전부터 자신의 빛이 반응하는 사실이 거슬리던 참이었다.

올라오면서 이곳에 빛이 깃든 물건은 없다는 걸 확인했다.

이 방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는 건 가면을 쓴 저놈이 흑마법사일 수도 있다는 말과 같았다.

"일단 이놈을 가져가, 황실 기사. 너한테 적의가 없다는 의미로 받아주면 좋겠네."

루시온은 다시 가르티오를 가리켰다.

저놈에게 캘 정보는 이제 없었다.

"날 알고 있나?"

헤인트의 경계심이 높아졌다.

일부러 사복 차림으로 오지 않았던가.

루시온은 편지를 보낸 자가 바로 자신이라고 말을 하려다 망설였다.

'지금은 아니야.'

헤인트 입장에서 얼마나 소름 끼치겠는가. 괜히 반발감을 높일 이유는 없었다.

"일부러 사복 차림으로 온 것 같아도 이놈을 잡으러 온 거면 황실 기사밖에 없지. 얘는 황실의 배신자니까. 그렇잖아?"

루시온의 대답에 헤인트는 잠깐 멈칫거렸다.

가르티오 뭰이 황실의 배신자라는 걸 어떻게 알고 있을까.

저놈이 실토한 것일까.

[당황했네.]

러쉘이 재미있다는 얼굴로 미소를 그렸다.

루시온도 대놓고 웃음을 터트리자 헤인트는 주먹을 꽉 쥐었다.

"미안. 웃으려고 한 건 아닌데. 어쨌든 데려가. 내 볼일은 끝났으니까."

루시온이 손을 휘휘 젓자 흄이 가르티오의 옷자락을 잡아 헤인트 앞에 던졌다.

고통에 신음을 흘리고 있던 가르티오는 헤인트를 보자마자 눈을 번뜩 떴다.

'준비해, 베델.'

루시온이 바짝 마른 입가를 핥으며 말했다.

자연스럽게 흑마법사라는 걸 밝힐 방법은 지금으로서 가르티오가 입을 놀리는 게 최고였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루시온 공. 난 언제든 준비하고 있으니까.]

"저, 저 흑마법사가 시켰습니다! 저는 정말로...."

깡!

순식간에 헤인트가 움직였지만, 피터의 방어 마법이 더 빨랐다.

'와우.'

루시온은 감탄했다.

헤인트 앞에 글자가 나타났다.

바로 자신을 처박은 그 글자였다.

글자는 순식간에 형태를 이뤄 아가리를 벌린 늑대가 되어 헤인트를 물어뜯으려 했다.

파직!

그때 헤인트의 빛이 뿜어나왔고, 뜨거운 열기와 함께 마법이 깨져버렸다.

"…미친놈."

피터가 질겁했다.

샤아아아.

동시에 루시온 앞에서 냉기가 휘몰아쳐 빛과 맞부딪쳤다.

"괜찮으십니까?"

흄이었다.

[오!]

흄의 행동에 러쉘은 가볍게 손뼉을 마주쳤다.

아주 훌륭했다.

"야."

하지만 루시온의 목소리가 곱지 않았다.

흄이 냉기로 빛을 막았다 한들 영향이 없는 건 아니었다.

토악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부르르 떨리는 손끝을 숨기려 애써 주먹을 쥐었다.

"빛을 가진 놈들은 어떻게 된 게 다 똑같아? 하나같이 개병신들이네."

루시온이 손가락을 까닥거리자 라타가 귀를 쫑긋 세웠다.

―신호 맞지? 그렇지? 라타가 제대로 본 거지?

[맞아. 제대로 봤어.]

러쉘이 대신 대답해주었다.

루시온은 그제야 안심했다.

어둠의 축복을 받은 자든, 빛의 축복을 받은 자든 마나를 가진 자든 누구나 그림자를 가졌고, 그 속에는 어둠이 깃들어 있었다.

라타가 확인해주지 않았던가.

까앙!

루시온은 피터가 재차 만든 방어 마법에 헤인트의 공격이 막히는 걸 보았다.

"몇 번이라도 막겠습니다!"

피터가 소리쳤다.

다시 보아도 그의 방어 마법은 훌륭했다.

루시온은 그 틈에 어둠을 보냈다.

그림자에서 올라온 어둠으로 헤인트가 눈치채기 전에 덮쳤다.

"...!"

헤인트가 밑을 내려다보고 빛을 뿜어냈지만, 루시온이 더 빨랐다.

'낙, 다리를 묶어라!'

헤인트의 두 다리에 낙인이 올라오는 걸 보자마자 루시온은 어둠을 뭉쳐 헤인트의 얼굴을 후려쳤다.

부웅!

헤인트가 다급히 빛을 두른 검으로 막았음에도 묵직한 무게에 휘청거렸다.

'…죽을 맛이네.'

루시온은 속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빛의 내성 덕에 헤인트보다 사정이 낫다는 걸 알아차렸다.

헤인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으니.

"아.... 어둠만 보면 짖는 개새끼들이라는 말도 빼먹었네."

도발에 가까운 루시온의 말에 헤인트를 이를 악물었다.

"뭐라고…?"

"맞잖아. 내가 흑마법사라는 이유로 넌 황실을 배신한 놈의 말을 믿고 날 공격하고 있는 거 아니었어?"

루시온이 정곡을 찌르자 헤인트는 주춤거렸다.

"내가 네놈한테 한 말은 단순해. 널 공격할 의사는 없다. 저놈을 가져가라. 자, 여기에서 문제 될 말이 있나?"

"...."

"없지? 그러니 넌 어둠만 보면 짖는 개새끼라는 거야."

루시온은 대놓고 키득거렸다.

사실 그 말은 꼴에 신관이랍시고 폼 잡는 놈들에게 퍼붓고 싶은 말이었는데.

파직!

헤인트는 검에 빛을 둘러 피터의 방어막을 잘라냈다.

두 다리에 디버프가 있음에도 잘도 움직인다 싶었다.

만약 없었다면 얼마나 움직였을지 모를 정도로.

"평소의 네놈들이 저지른 일이 한두 가지가...."

"난 아닌데."

루시온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내가 그런 것도 아닌데 왜 엉뚱한 사람한테 와서 시비야?"

"네놈은 흑마법사다."

"빛의 축복을 받은 놈들은 단체로 흑마법사만 보면 짖으라고 교육이라도 받았어? 하는 말이 왜 이렇게 똑같은지 모르겠네. 나는 말이야. 까마귀 문양...."

헤인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방금 저 흑마법사가 까마귀 문양을 언급하지 않았던가.

'역시 같은 편인가?'

헤인트는 빛을 끌어 올려 단숨에 루시온을 향해 나아갔다.

쉬익!

팔이 잘리더라도 머리와 입만 살아 있다면 문제 될 건 없었다.

저놈이 '까마귀 문양'을 가진 놈과 한 편이라면 들어야 할 것도 많았고.

방어 마법은 깨졌다.

이제 남은 건 흑마법사뿐.

"괜찮습니다."

흄이 말과 함께 손을 들어 헤인트가 휘두르는 검을 막았다.

깡!

마치 강철 벽과 마주한 기분에 헤인트는 아주 잠깐 흄을 떠올렸다.

하지만 저 사람은 여자이지 않은가.

뒤늦게 루시온 주변에 다시 방어 마법이 펼쳐졌다.

"죄송합니다!"

피터는 사과와 함께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았다.

"개같은 빛쟁이들. 지들은 주문을 외우는 게 별로 없어서 마법을 깨부수는 게 재미있다 이거지?"

보란 듯이 입을 놀리는 피터의 시선이 무척 사나웠다.

한 겹으로 부족하면 하나 더.

거기 또 하나 추가.

피터는 주문을 빠르게 외우며 방어 마법을 층층이 쌓아갔다.

귀찮은 마방사.

헤인트의 미간이 좁혀질 무렵, 루시온은 노랗게 가면을 물들었다.

피터의 방어 마법이 이전보다 단단해졌으면 단단해졌지, 쉽게 부서질 것 같지 않았다.

이제 입을 놀릴 시간이었다.

"까마귀 문양을 찾으러 왔지?"

[이제 슬슬 시작하네.]

러쉘이 베델을 보며 속닥였다.

'…너무 잘 들리는데.'

루시온은 입가를 핥으며 헤인트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표정을 숨길 수 있어 가면이 참 좋다 싶었다.

"잘 찾아왔어. 바로 네 뒤에 문으로 열심히 기어가고 있는 저놈이 까마귀 문양을 가진 조직과 한편이거든."

헤인트는 뒤로 물러나 움직이지 않았다.

루시온이 흑마법사였기에 신중히 접근하려는 게 분명했다.

"너랑 말을 섞었던 흑마법사들이 너를 속이기만 했나 봐? 정 못 믿겠으면 올라오면서 입이라도 놀릴 수 있는 놈들을 데리고 와서 날 아느냐고 물으면 되겠네. 아, 저놈 입은 막고."

루시온은 계속 입을 움직이며 헤인트를 흔들었다.

지금 가르티오 뭰을 잡기 위해 헤인트와 함께 제8 기사단의 기사들이 찾아왔다.

자신이 편지까지 보내 제8 기사단에 배신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음에도 헤인트는 아직도 처리하지 않았다.

아마 이곳에 데려오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렇다는 건 이제 곧 배신자가 이곳에 올 예정이라는 거겠지.'

"대장!"

기사가 다급히 헤인트를 부르며 올라왔다.

"밑에는 지금 정리가 거의 정리된 상태고, 가르티오 뭰은 방에서 혼자 간식을 먹고 있다고… 그렇게… 누, 누구냐!"

기사는 말을 하다 말고 불청객을 보자마자 당장 검 끝을 겨눴다.

[타이밍 하나 끝내주네.]

러쉘이 키득거렸다.

저 기사는 흄이 찾아낸 배신자가 아니었다.

"아. 그럴 필요 없이 네 부하가 다 알려주네? 고맙게도."

루시온 자신은 가르티오 뭰과 한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당황한 표정이 헤인트의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진짜 아니야? 같은 편이 아니라고?'

루시온의 시선이 곧 가르티오에게 향했다. 덩달아 헤인트의 시선도 움직였다.

"목만 비틀어도 죽을 것 같은데. 원하는 대로 해줄까? 아니면 그 검 집어넣고 나랑 대화 좀 해 볼래?"

가르티오에게 하는 말이 아닌, 헤인트에게 하는 경고였다.

지금 가르티오가 죽으면 헤인트는 공중에 붕 뜨다 못해 증거까지 잃는 셈이었다.

"대장!"

곧 다른 기사가 헤인트를 불렀다.

기사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

"배신자 한 명이 또 왔네?"

루시온은 놈을 보고 반갑게 목소리를 냈다.

동시에 헤인트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가르티오 뭰이 황실의 배신자라는 걸 저놈한테 직접 들은 게 아니라 이미 알고 있었던 거라고? 대체… 대체 뭘 더 알고 있는 거지?'

"아. 너하고, 가르티오하고 헤인트 이렇게 셋만 있어야 했는데 나까지 있어 당황했나 봐? 검 안 뽑아?"

놈은 루시온을 보며 잠깐 멈춰 있었다.

하지만 곧 루시온의 말에 뒤늦게 검을 뽑아 들었다.

스겅.

검을 뽑는 소리에 헤인트의 미간이 좁혀졌고, 피가 묻어 있지 않은 깨끗한 검을 보자 입술을 깨물었다.

[헤인트를 여기에서 죽일 자신이 있다는 건가?]

베델이 코웃음을 쳤다.

[그렇지 않을까? 아직 자신이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여기에서 당당하게 검을 뽑을 리가 없지 않겠어?]

러쉘은 설마 하는 표정으로 배신자를 바라보았다.

'뭐가 됐든, 횡재했네.'

루시온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곳은 적의 아지트였다.

지금 이곳까지 올라오면서 검을 뽑지 않았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아니, 딱 하나 말이 되는 방법이 있었다.

저놈이 바로 배신자였기에 아지트의 지름길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속지 마십시오! 저놈은 간악한 흑마법사가 아닙니까!"

배신자는 찔린 만큼 크게 소리쳤다.

"얼른 처리합시다, 대장!"

얼마나 불안한 건지, 배신자가 쥔 검이 부르르 떨렸다.

루시온은 그 모습에 웃음을 애써 참으며 손아귀에 어둠을 내보냈다.

"황실 기사단이 황실을 배신한 놈을 보호하는 것도 우스울 테고. 내가 가르티오를 죽이는 것도 곤란하겠지? 선택해."

루시온의 어둠이 점점 커지자 헤인트가 두 기사에게 명령했다.

"물러나 있어."

"대장…?"

"아무도 들이지 마."

"대장. 지금 무슨 말씀입니까? 저놈은 흑마법사입니다!"

배신자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이건 명령이다!"

헤인트의 언성이 덩달아 높아졌다.

지금 이곳에서 위를 차지하고 있는 건 저 흑마법사였다.

마방사.

그리고 마법사.

다른 전력까지 손에 있는 상태에서 저 흑마법사가 손가락을 까닥거리기만 해도 가르티오가 죽을 수 있었다.

지금 가르티오 뭰이 죽으면 단지 다리가 끊어지는 걸로 끝나지 않았다.

―홉. 헤인트가 엄청 화났어.

라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헤인트가 딱딱하게 서 있자 루시온은 편안하게 자리를 가리켰다.

"앉아. 먹을 거라도 있으면 딱 좋겠지만, 그것까지는 바랄 수 없겠지."

루시온의 가면이 다시 노랗게 물들었다.

"당장 날 죽여버리고 싶다는 표정이니까. 좋네. 그 표정."

155화. 북부로

헤인트가 손을 부르르 떨었다.

[루시온 공…? 그, 같은 편은 아니더라도 일단 회유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베델은 점점 더 사나워지는 헤인트의 눈빛에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에이. 기선 제압은 별개지.]

'그렇습니다. 기선 제압은 별개죠.'

루시온은 러쉘의 말에 바로 동감했다.

[이게 기선 제압이라고…?]

베델은 당황했다.

누가 봐도 도발이 아닌가.

과연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 봐야 할지도 몰랐다.

"일단 적이 아니라는 기념으로 하나 말해둘게."

루시온은 짜증과 별개로 이야기가 빨리 진행되기 바랐기에 그들이 그토록 찾았던 '까마귀 문양'이 어떤 조직인지부터 알려주려고 했다.

"네놈이 그렇게 사랑하는 까마귀 문양. 그 문양을 가진 조직은 하나야. 바로 '공허의 손'이지."

분명 놀랄 거라 생각했지만, 헤인트의 표정이 달라지지 않았다.

"이거, 실망인데."

"왜?"

"놀랄 줄 알았거든."

"이름 정도는 저놈한테서도 들을 수 있겠지."

헤인트는 여전히 날이 섰고, 날카로워 보이는 그의 손가락이 가르티오를 가리켰다.

"그렇지만, 그 이름을 물으려면 손을 써야 하지. 귀찮잖아."

헤인트가 날이 섰어도 루시온은 상황이 대화로 풀어갈 수준으로 흘러가서 참 다행이다 싶었다.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지만, 마카롱이나 마카롱만 있으면 한결 부드러워질 텐데.

"나한테 묻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는데 해 봐. 아, 살기는 그만 뿌리고, 검도 내려놓고."

루시온은 태연하게 입을 놀렸다.

"목적이 뭐지?"

헤인트가 물었다.

"내가 네놈과 그리고 다른 이들이 보지 못했던 아주 착한, 음, 해가 없는 흑마법사라는 걸 네놈한테 알리고 싶어서."

"나는 빛의 축복을 받은 자다. 내 앞에서 흑마법을 사용하면 들킨다는 건 알아둬."

"삐딱하게 굴지 마. 나도 좋아서 흑마법사가 된 건 아니니까. 그렇잖아? 발현이라는 게 내가 원해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닌데.

어둠이 희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원했잖아. 바랐잖아.

우리를 부정하면, 그러면 슬퍼. 정말 슬퍼.

―…엄.

라타가 아니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한때 루시온은 유령을 볼 수 있는 상황을 원망하고 괴로워한 적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

그 사실을 기억하자 라타는 멈칫거렸다. 괜히 시무룩해져 다른 말을 꺼냈다.

―루시온은 지금 바빠. 나중에 라타한테 말해. 라타가 전해줄게.

[연기니까, 동요하지 마. 진짜 루시온을 위한다면 가만히 있어. 저기에 빛의 축복을 받은 자가 있는 거 안 보여?]

러쉘이 루시온 대신 어둠에게 목소리를 냈다.

그제야 어둠이 입을 다물고 날이 선 헤인트의 눈매가 살짝 가라앉았다.

"쫓는 자가 같아."

루시온이 툭 하고 말을 던졌다.

"뭐…?"

"나도 공허의 손을 쫓고 있어. 내 옆에 서 있는 마방사도 마찬가지고."

루시온이 피터를 가리키자 그는 차갑게 헤인트를 노려보았다.

하멜이 내색하지 않아도 지금쯤 빛 때문에 속이 속이 아니겠지.

저 기사가 짜증 났다.

"왜… 공허의 손을 쫓고 있지? 너도 흑마법사잖아."

헤인트는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원래는 대화를 나눌 생각도 없었지만, 대화를 나누자고 제안하는 흑마법사는 처음이라 멋대로 입술이 움직였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자신이 지금까지 배워왔던 것들, 사회적으로 암묵된 규칙 등 '모든 흑마법사를 처단해야 한다'라는 사실이 잘못된 거라면.

그렇다면 여태껏 죽어간 흑마법사와 벼랑 끝까지 내몰린 저들은 뭐가 되는 걸까.

"그놈들은 쓰레기니까. 쓰레기를 치워야지 모든 흑마법사가 사람을 가지고 실험하고, 저주를 때려 붇고, 시체나 되살리는 그런 개쓰레기가 아니라는 걸 알릴 수 있을 테니까."

마냥 가볍던 루시온의 목소리가 조금은 무거워졌다.

"난 말이야."

루시온은 잠깐 실소했다.

"…살고 싶어."

너한테 죽지 않고.

"흑마법사라는 사실 때문에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한 것도, 앞으로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도 싫어."

내 형님한테도 죽지 않으며.

"그러니 지금부터 나는 황실 기사단인 너와 손을 잡을 거야."

행복하게.

그렇게.

살고 싶다.

"...?"

갑작스러운 말에 헤인트는 크게 당황했다.

진심이 느껴졌다.

목소리에서 살고 싶다는 애절함이 가슴에 꽂혀올 정도였다.

헤인트는 흑마법사를 더 자세히 파악하고자 찬찬히 눈동자를 돌렸다.

"그러니까 네가 날 증명해줘야겠어. 내가 꽤 괜찮은 흑마법사라는 사실을."

"뭐…? 그게 무슨 미친 소리지?"

"미친 소리가 아니야. 감정에 휩쓸리지 말고 잘 생각해 봐. 흑마법사를 추적할 수 있는 자는 너처럼 빛의 축복을 받은 자들이 아니야. 하물며 마나를 지닌 자도 아니지."

루시온은 자신을 가리키며 가면 색을 푸르게 물들였다.

"바로 나처럼 어둠의 축복을 받은 자들이야. 이제 슬슬 인정해야 할걸? 흑마법사를 뒤쫓는다는 건 하늘의 별을 따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말이야."

헤인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동의하나, 동의하고 싶지 않은 반발감에 표정이 굳어진 것 같았다.

루시온은 헤인트의 감정을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헤인트가 흔들릴 때.

그때, 자신은 더 크게 흔들어놔야 했다.

그나마 말이 통하는 사람이니까.

"나는 놈들과 같지 않아. 놈들은 타락한 흑마법사고, 나는 그냥 흑마법사라고. 빌어먹을. 단어가 없어서 짜증 나네."

"타락한 흑마법사라니?"

헤인트는 관심을 가지며 물었다.

"그렇지. 흑마법사를 죽이기만 했으니 정보가 없을 거야. 잘 들어. 보통 흑마법사는 사람을 가지고 실험하지 않아."

[그럼, 그럼. 일반 사람은 하지 않지. 다만, 나를 죽이러 오거나, 해를 입혔을 때는 뭐, 실험체가 제 발로 굴러오는구나 하면서 반기고 새로 만든 저주가 어떤지, 이 흑마법은 어떤지 실험해보는 거지.]

"그러니까, 나한테 해를 입히지 않은 사람 말이야. 뭔지 알겠지?"

루시온은 러쉘의 말을 듣자마자 바로 덧붙였다.

구질구질해 보이지만, 어쩌겠는가. 말은 확실히 해야지.

'웃지 마, 베델.'

빙의 상태라 베델의 생각과 웃음이 고스란히 루시온에게 전해졌다.

'아. 미안하다, 루시온 공.'

베델은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그래. 무슨 말인지 잘 알겠어."

헤인트의 눈썹이 살짝 위로 치솟아 올랐다.

[허당이라고 생각하는 눈치인데?]

러쉘은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되는 사실을 손가락까지 가리키며 언급했다.

루시온은 러쉘의 웃음을 한 귀로 흘리며 다시 입술을 떼었다.

"그놈들이 바로 타락한 흑마법사야. 어둠에 사로잡혀 버린 이들. 나하고 달라."

"하지만 네가 다르다고 해도 약속을 지키리라는 보장도 없고, 하물며 네가 도망가기라도 하면? 그때는 내가 끝이야. 알고 있지?"

헤인트는 루시온을 의심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흑마법사를 옹호하는 사실만으로도 죄인으로 내몰릴 수 있었다.

"흑마법사인 나도 신의는 있어. 도망가지도 않고 약속도 지켜."

"증명해."

"뭐로 해줄까?"

"가면 벗어."

"말이 참 가볍다?"

루시온의 목소리가 다소 사나워졌다.

"내가 가면을 쓴 의미를 진짜 모르는 거야? 아니면 네가 내 모든 걸 감당할 자신이 있나 봐? 그렇다면 기꺼이 벗지."

"...."

헤인트는 잠깐 말을 아꼈다.

"방금 말은… 없던 걸로 쳐."

"좋아."

"그럼 어떻게 증명할 셈이지?"

"정보를 주지."

루시온은 어차피 줄 정보를 생색내듯 제시했다.

"정보?"

"저놈 덕에 황실에 공허의 손이 손을 뻗쳤다는 걸 알게 됐거든. 필요하지 않아?"

루시온이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탁탁.

헤인트는 한쪽 눈가를 일그러트리며 숨을 짧고 굵게 내쉬었다.

흑마법사가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도, 말도 죄다 거슬렸다.

혹여나 흑마법을 사용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신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부끄러워서 그래? 흑마법사한테 부탁한다는 게?"

재차 이어지는 말에 헤인트는 진짜 혀를 내두르고 싶을 정도였다.

'…뻔뻔한 것도 한몫하고.'

으레 자신이 보았던 흑마법사는 딱 두 부류였다.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될 정도로 광기에 사로잡혀 달려들거나, 발작에 가까울 정도로 빛을 보고 놀라 도망치거나.

저 흑마법사는 난생처음 보는 흑마법사였다.

미치지도 않았고, 자신을 보고도 도망치지 않았으니.

혹시 자신이 이미 흑마법에 걸린 게 아닐까 싶어 헤인트는 온몸의 감각을 끌어올려 보나, 뒷덜미에 맺힌 자신의 땀방울만 느껴졌다.

'분명히 흑마법은 사용하고 있질 않은데.'

헤인트는 볼까지 꼬집어 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뭘 그런 걸로 부끄러워해? 누구든 부탁할 수 있는데. 애초에 이건 부끄러울 것도 아니고 거래야. 너와 내가 동등해지기 위한 거래."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딴 개소리는 집어치워."

헤인트는 더는 들어주지 못하겠는지 낮게 으르렁거렸다.

"아. 생각 중이었어? 몰랐지."

루시온은 실실 웃었다.

[루시온 공? 혹시 헤인트한테 무슨 악감정이라도 있나?]

베델이 물었다.

루시온이 진짜 즐기지 않고서야 나올 수 없는 말들이 서서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니야. 보나 마나 연기지. 루시온이 헤인트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 거 몰라? 관심도 얼마나 많은데?]

―맞아! 라타도 많이 들었어. '헤인트 형님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헤인트 형님은 뭘 하고 있습니까?'라고 말이야!

라타가 러쉘의 말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런 건가…?]

베델이 얼떨떨해하며 대답했다.

루시온은 러쉘을 잠깐 바라볼 뿐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지금 저 말장난에 휩쓸릴 정도로 여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순간 아차 하면 저 검에 자신의 목이 떨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말해봐. 원해, 원하지 않아?"

"해."

헤인트가 고민 끝에 대답했다.

"공허의 손은 뉴브라 왕국에 있어."

루시온은 헤인트가, 나아가 헤인트에게 보고를 들을 5황자와 황제가 마음껏 상상할 수 있게 핵심을 꺼냈다.

헤인트는 순간 숨을 삼켰다.

'…나도 그렇고 저하께서도 설마 설마 했는데, 그게 진짜라고?'

"놈들은 죽지 않는 병사를 만들고 있어."

이어지는 루시온의 말에 헤인트는 더는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뭐, 뭐라고? 지금 뭐라고 했어?"

"제국 내에서 그 일이 벌어지고 있어."

"어디에서! 어디에서 그딴 빌어먹을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지금 찾고 있는데."

―아닌데. 루시온은 이미 알고 있잖아. 동부! 라타도 알고 있어.

라타의 고개가 갸우뚱하고 기울어졌다.

[어쩔 수 없어, 라타. 여기서 루시온이 다 말해버리면 큰일이 나니까.]

베델이 라타를 달랬다.

"거기까지만 손을 뻗었다면 참 다행이겠지?"

루시온은 여지를 줬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뿐. 공허의 손이 벌일 일들은 많았다.

"또...."

헤인트가 말을 하다 말고 품에서 단검을 꺼냈다.

순간, 베델이 루시온의 손가락을 움직였지만 멈췄다.

표적은 루시온이 아니었다.

단검은 가르티오에게 날아가 정확히 가르티오의 코앞에 떨어졌다.

팍!

"거기서 더 움직인다면 두 팔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거다."

헤인트는 파르르 떠는 가르티오를 지켜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조금도 요동하지 않는 모습에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자신의 공격을 보지 못한 건지, 아니면 이미 다 본 건지.

콕 집어 어느 쪽이라고 확인하기 어려웠다.

"또 놈들이 벌일 일이 있다고?"

헤인트가 다시 묻자 루시온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 하나 더 알려줄게."

루시온이 입을 열자 헤인트가 집중했다.

"신성 국가 네바스트."

마침 네바스트의 신관이 경매장에서 '팔찌'를 빼돌리려다 잡힌 참이었다.

"놈들이 제국 내에서 사람들을 노예로 부려 먹고 있더라고."

루시온은 그대로 헤인트에게 손을 뻗었다.

더 듣고 싶으면, 더 알고 싶으면 자신의 손을 잡으라고 유혹하는 것처럼 보였다.

'빌어먹을....'

헤인트는 휘둘렸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황실 기사로서 해야 하는 건 황실의 수호와 안위를 지키는 일이었다.

빛과 어둠을 떠나서 그냥 저 흑마법사가 짜증이 났다.

그럼에도 헤인트는 마냥 무거워 보일 것 같은 입술을 열었다.

"이름이 뭐지?"

"하멜."

헤인트는 손을 뻗어 루시온은 손을 잡았다.

"헤인트 트리아다."

156화. 북부로(2)

[해냈네.]

러쉘이 뿌듯해하며 말했다.

루시온 역시 히죽 올라간 자신의 입꼬리를 느꼈다.

"좋아. 좋은 선택을 했어. 아마 후회는 없을 거야. 연락 수단은… 음. 아니다. 내가 너를 찾아가지. 그편이 더 빠를 테니까."

"어떻게?"

"영업 비밀이야."

루시온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인트의 눈동자에 어린 의심이 다 사라지지 않았지만, 볼일은 이제 끝이 났다.

아주 깔끔하게.

'이제 돌아가서 두 발 쭉 뻗고....'

순간, 루시온의 손이 갑자기 움직였다.

"...?"

자신이 움직인 게 아니었다.

베델이었다.

깡!

곧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에 루시온은 깜짝 놀랐다.

헤인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살기도 싣지 않았는데 이걸 막아…?'

그저 한 대 때리고 싶었는데. 검을 쥔 헤인트의 손에 힘이 가득 들어갔다.

[놀라지 않아도 돼. 살기가 없는 검이다. 헤인트가 공을 해칠 마음은 없었어.]

베델이 루시온을 달래나, 그의 언성이 한껏 날카로워졌다.

"이게 지금 무슨 짓이야?"

아무리 빙의가 되어있다 한들, 결국 움직이는 건 자신의 몸이었다.

헤인트가 휘두른 검을 막아내면서 일어난 충격과 갑작스럽게 움직인 몸 때문에 배가 욱신거렸다.

빌어먹을.

루시온은 입술을 깨물었다.

"너한테 휘둘리는 게 열 받아서. 마지막까지 재수 없네. ...검은 또 언제 익혀서는. 짜증 나는 놈."

헤인트가 검을 내렸다.

루시온이 고통을 느끼자, 베델도 검을 내리며 다급히 그의 상태를 살폈다.

[상처가 터지진 않았는데, 많이 아픈가?]

[배에 힘이 들어가서 그래.]

러쉘이 루시온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곧 러쉘은 당황해하는 흄을 바라보았다.

[흄. 막지 못했다고 놀라지 않아도 돼. 살기가 없었어. 저건 알아채기 어려운 검이었다고.]

"저놈은 데려간다."

헤인트는 숨을 깊게 내뱉고는 가르티오를 가리켰다.

"그래. 조만간 연락하지, 빛쟁아."

루시온은 욱신거리는 배의 고통을 참으며 피터가 만들어준 좋은 별명을 같이 사용하기로 했다.

"내 이름은 헤인트 트리아라고."

가르티오를 붙잡아 올리던 헤인트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마치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흑마법사는 물론 그의 동료의 흔적도 보이질 않았다.

"제가, 제가 다...."

"입 닥쳐."

퍽!

헤인트는 가르티오의 목을 내리치며 기절시켰다.

'…제기랄. 또 당했네.'

내내 휘둘리다 기습 공격도 실패로 끝났고, 하다못해 이상한 별명까지 붙었다.

헤인트는 인상을 쓴 상태로 가르티오를 둘러업고 밖으로 나갔다.

'내가 있는 곳을 어떻게 알고 찾아온다는 거지?'

헤인트는 문득 자신에게 온 정체 모를 편지를 떠올리다 볼 안쪽을 세게 깨물었다.

감시당하는 기분에 찝찝함이 몰아닥쳤지만, 마음은 오히려 편했다.

갑자기 나타난 하멜로 인해 연결 고리가 더 확실해졌으니까.

까마귀 문양은 공허의 손이었고, 뉴브라 왕국과 연결되어 있었다.

게다가 신성 국가 네바스트까지 제국에 손을 뻗은 상태라니.

'일단 보고는 나중에 하고.'

헤인트는 배신자를 대놓고 노려보았다.

증거도 정황도 확실했으니 저놈을 처리할 시간이었다.

* * *

루시온은 피터를 데려다주는 김에 중부에 있는 3개의 지부 중 크라언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하멜 님."

지부 앞에 도착하자마자 피터가 루시온을 불렀다.

"왜?"

"…죄송합니다."

"뭐가?"

"마방사로서. 임무를…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덩달아 흄의 눈동자도 흔들렸다.

베델이 괜찮다고는 했지만, 자신도 마지막에 그 공격을 막지 못했지 않은가.

"무슨 소리야. 멀쩡하잖아."

"마지막에 제가 방심했습니다. 만약 그 공격이...."

"아니. 네 마법을 자랑스러워해도 돼, 피터."

무려 주인공의 공격을 막아냈다.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솔직히 나도 놀라긴 했어. 피터의 방어 마법이 생각보다 수준급이었거든. 루시온 네가 당할 만했다는 게 이젠 이해가 가더라.]

러쉘도 피터를 인정했다.

하지만 피터는 여전히 미안한 얼굴이 되어서는 고개를 채 들지 못했다.

은인도 지키지 못한 마방사가 낯짝을 들 양심이라도 있겠는가.

"하지만 저는...."

"됐어."

대체 공허의 손에서 얼마나 피터를 갈궜길래 이럴까.

루시온은 피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잘했어. 넌 정말 잘해줬으니까, 고개 들어. 나중에 신전에 가서 진찰이라도 받고. 무리했잖아."

"무리는 제가 아니라 하멜 님이 하셨잖습니까."

피터는 다급히 고개를 들어 황당한 얼굴로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그 기세에 루시온이 움찔거렸다.

'왜 이렇게 무섭게 말해?'

"저야 신관에게 가서 치료를 받으면 된다지만, 하멜 님은 어디에서 어떻게 치료를 받으셔야 합니까?"

"치료법은 없지. 그냥 알아서 낫는 걸 기다리는 수밖에."

루시온은 지부 안으로 걸어가며 대답했다.

빛, 어둠, 마나 중에 재생력을 가지고 있는 게 빛뿐인 걸 어쩌겠나.

미엘라가 역작을 완성하기 전까지 꾹 참고, 또 참아야지.

잠깐 묵직한 침묵이 감돌자 루시온은 뒤를 돌아보았다.

피터의 표정이 마치 크라언 같았다.

[저기 크라언이 있는데? 아무래도 퀘이트가 네가 온 걸 말했나 보네.]

때마침 들려오는 러쉘의 말에 루시온은 괜히 깜짝 놀라서는 다시 앞을 보았다.

'호랑이도 제 말만 하면 온다더니.'

크라언은 자신에게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하멜 님."

피터가 루시온을 불렀다.

"그래. 말해봐."

"앞으로 더 튼튼한 방패가 되겠습니다."

왠지 '앞으로 열심히 수련하겠다'라든지. '더 강해지겠다'라든지. 비슷한 말이 튀어나올 것만 같아 루시온이 미리 말을 꺼냈다.

"다 좋은데 갑자기 수련한답시고 탈주하지는 말고."

"그, 그런 일은 다시는 없을 겁니다. 동생한테도 엄청 혼났습니다."

피터는 민망한지 괜히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동생은 잘 지내고 있어?"

"덕분에. 하멜 님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피터가 활짝 웃었다.

자신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것도 모두 하멜 덕이었다.

피터는 곧 크라언을 의식했다.

조직 에일의 우두머리는 누가 뭐라든 분명 '하멜'이었다.

이 연극이 얼마나 갈지 모르겠지만, 피터는 하멜이 원하는 만큼 지켜줄 셈이었다.

"저는, 음,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다음에 혹시 시간이 나신다면...."

"피터.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내가 준 연락용 아이템을 사용해. 헤로안 봤지? 걔처럼 하진 말고. 걔는… 진짜 뺏어버리고 싶지만."

루시온은 숨을 짧게 내쉬었다.

"참. 퀘이트가 그 말을 했습니다."

"무슨 말?"

"진심으로 헤로안의 목젖을 그어버리고 싶다고요."

"동감이야."

루시온은 실실 웃었다.

[나도.]

러쉘이 고개를 끄덕였고, 베델도 손을 슬쩍 들었다.

[나도 그렇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몸조리 잘하셔야 합니다, 하멜 님."

"그래."

크라언이 한 명 더 늘어난 기분이었지만, 루시온은 진짜 크라언에게 걸어갔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흄과는 다른, 마치 왕을 바라보는 충신의 눈빛을 한 크라언의 눈이 자신을 향해 바쁘게 움직였다.

루시온은 잠깐 크라언을 데리고 다른 쪽으로 걸음을 옮긴 후에 조금 전 일어난 상황을 알렸다.

"황실 기사단을 만났어."

"예?"

크라언이 눈을 깜박거렸다.

"제8 기사단의 대장인 헤인트 트리아 알지?"

"알고는 있는데, 지금 그 기사를 만나셨다고요?"

빛을 사용하는 기사가 아닌가.

"같은 편 하기로 했어. 일단은."

"예…?"

"아마 이제 황실하고 연락하게 될지도 몰라. 네가 중간에서 잘해야 할 거야. 어쨌든, 네가 우두머리니까.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지 말고. 대부분은 내 선에서 해결할게."

"예에…?"

크라언은 도무지 루시온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자기 황실이 왜 튀어나온 건지.

거기부터 크라언은 머리가 멈춘 기분에 휩싸였다.

마치 다른 세계에 발을 내디딘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루시온은 잠깐 말을 멈추고, 갑자기 느껴지는 현기증에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

헤인트의 빛을 가까이에서 몇 번이고 쐤다. 몸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잠깐, 뒤돌아주십시오."

흄이 크라언에게 말했다.

"왜...."

크라언은 갑자기 나는 피 냄새에 황급히 돌아섰다.

곧이어 무언가를 토하는 듯한 음성이 들렸다.

피 냄새가 짙어졌다.

쿵쿵.

너무 놀라 크라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빛의 기사를 만났다고 했다.

당연히 빛을 쐤을 테고.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한 건가.

크라언은 자신을 자책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몸에 좋은 것들. 다음에는 꼭 몸에 좋은 것들을 챙기자.'

속으로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했다.

* * *

"…그럼요. 전하께서 화가 많이 나실 만하지 않겠습니까?"

바람을 따라 흔들리는 나뭇가지 그림자에 맞춰 손가락이 움직였다.

손등에 난 상처가 꿈틀거리고, 검은 새끼손톱이 유달리 눈에 띄었다.

"귀족들이 아직 다 들어오지 않은 경매장에 빛의 축복을 받은 자는 겨우 헤인트 한 명뿐인, 그 좋은 상황을 놓쳤으니 화가 나실 만하죠."

<알고 있겠지? 루시온 크로니아가 이번 동부에 열리는 죽음의 바다 정화 기원 축제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연락용 아이템에서 날이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준비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 너는 그 멍청한 것들이랑 다르니까. 기대해보마.>

"약속하신 것만 잊지 마셨으면 합니다."

<루시온을 없앤다면야 네가 변경을 가지는 건 금방이지.>

"그걸로 됐습니다. 죽음의 바다. 누가 죽어도 시체를 찾을 수 없는 곳이 아닙니까?"

<노비오, 그놈의 이성을 빼앗기에 딱 좋은 방법이고.>

"그럼, 그날 연락드리죠."

먼저 끊은 건 연락용 아이템 너머의 사람이었다.

공허의 손, 그 단체의 우두머리.

'아. 즐겁고, 즐겁고, 너무 즐겁네. 이 얼마나 행복한 날인가.'

손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탁.

변경이 무너져야 제국이 흔들리고.

탁.

제국이 흔들려야 지금 이 거지 같은 나라를 바꿀 수 있었다.

탁.

그러려면 결국, 변경이 무너져야 했다.

노비오 크로니아.

놈을 부서트리기 위해서는 그의 약점인, 그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자식들을 죽이는 수밖에.

탁.

첫째, 카슨 크로니아는 제 아비를 닮았다. 검 실력까지 소름 돋게도.

둘째, 샤엘라 크로니아는 마법의 천재였다. 가뜩이나 마탑에서도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 있었다.

손이 멈췄다.

남은 건 막내인 루시온 크로니아뿐.

크로니아의 수치. 유일한 일반인.

그리고 너무도 탐스러운 먹이였다.

다만, 어이가 없게도 신수의 선택을 받아 성자가 되어버렸다.

그 때문에 공허의 손이 더 안달 나고 말았다.

저 빛의 상징을 없애야 비로소 사람들이 어둠의 상징인 흑마법사를 바라보고 두려워할 테니까.

'그러든 말든 나하고 무슨 상관이겠어.'

흑마법사가 세상에 나와도 세상 자체는 변하지 않을 테지.

권력, 돈.

그 가치는 나라가 망하든 나라가 바뀌든 달라지질 않았다.

달빛을 보며 그가 흥얼거렸다. 기쁨에 겨운 소리였다.

* * *

<…폐하께서 허락하셨네.>

세틸의 목소리에 헤인트는 살짝 놀랐다.

워낙 급한 상황이라 어제저녁에 세틸과 연락했다.

세틸 역시 자신처럼 하멜을 의심했지만, 그래도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어 하멜을 반기는 눈치였다.

그랬는데 이렇게 다음 날 아침에 연락이 올 줄이야.

"정말이십니까?"

헤인트가 되물었다.

<그래. 폐하께서는 그 흑마법사에게 이용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셨네.>

"이용하고… 버린다는 말씀입니까?"

헤인트가 잠깐 주춤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 하멜이 꺼낸 그 말이 머릿속에 맴돌던 참이었다.

―난 말이야. …살고 싶어.

그건 몇 번을 생각해도 진심이었다.

―흑마법사라는 사실 때문에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한 것도, 앞으로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도 싫어.

가면에 가려져 있었지만, 표정이 저절로 상상될 정도였다.

<벌써 정을 주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헤인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나 역시 마냥 이용하는 건 반대야. 경이 말했던 것처럼 정말로, 그 흑마법사가 말한 게 맞다면, 그들 속에 내 백성이 있다는 말이 아닌가.>

세틸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흑마법사는 다 나쁘다. 누가 그렇게 시작을 했는지 몰라도 이상하게 부끄럽더군. 발현. 그래, 나는 그 부분에서 충격이었네.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왜 흑마법사에게만큼 예외로 뒀는지. 그저 너무 이상했네.>

"그건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폐하께서 이용가치 부분도 생각하셨지만, 정보를 준 그 사실에 기대어 단지 도구로서 쓰이는 것까지는 바라지는 않으셨어. 하지만 경계해서 나쁠 건 없다고 보네.>

"예. 물론입니다. 상대는… 흑마법사잖습니까."

잠깐 흔들린 건 사실이나, 결국, 원점으로 돌아왔다.

흑마법사.

그 사실이 발목을 붙잡았다.

157화. 북부로(3)

가뜩이나 신전에서 교육을 받았던 적이 있었기에 헤인트는 쉽게 흑마법사에 대한 적의를 떨치기 어려웠다.

<헤인트 경.>

세틸이 말했다.

"예, 저하."

<경이 판단하게.>

"제, 제가… 말입니까? 감히 제가 그리해도 되겠습니까?"

<나는 경을 믿네. 경의 안목 역시 믿고 있고. 지금 그 흑마법사와 가까이할 수 있는 자 역시 그대뿐이네.>

"감사합니다, 저하."

<그럼 나는 경이 넘긴 개자식들이 목록을 확인하고, 처리하겠네.>

가르티오가 죽기 전에 내뱉은 황실의 배신자들.

가르티오는 13명을 안다고 했지만, 정작 내뱉은 건 8명이었다.

나머지는 흑마법사에게 가서 빌고 얻으라며실컷 웃다 머리를 박고는 죽어버렸다.

"…아직 더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제대로 정보를 캐지 못했습니다."

<자책하지 말게, 헤인트 경. 그대가 내게 준 정보도 상당하니까 말일세. 그럼, 몸조리 잘하게.>

세틸이 꺼내는 마지막 말을 남기며 연락이 끊어졌다.

헤인트는 숨을 짧게 내쉬었다.

13명 중 5명이 비어버린 상황.

자신이 반쪽짜리 정보를 얻었다는 걸 하멜은 알고 있을까.

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헤인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이라면 꼬박꼬박 잘 챙겨 먹는 루시온이 아침을 먹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았다.

걱정됐다.

'확인하러 가야겠네.'

* * *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흄이 조용히 문고리를 돌려 몸만 빠져나왔다.

"루시온은? 혹시 아직도 자고 있어?"

헤인트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오늘따라 헤인트의 안색이 창백했지만, 흄은 조금 퉁명스럽게 반응했다.

똑같이 어둠과 빛을 쐤는데, 루시온은 아프고 헤인트는 걸어 다니는 모습에 살짝 심술이 났기 때문이었다.

"많이 아프십니다."

"뭐?"

"열이 높고, 상처에 염증도 생겨버렸습니다."

"갑자기 왜?"

'헤인트 님 때문에요.'

흄은 하고 싶은 말을 정말 간신히 참았다.

갑자기 헤인트가 미웠다.

헤인트 때문에 루시온이 또 무리했다.

특히 마지막 공격으로 하마터면 상처가 터질 뻔했고.

[흄. 힘 좀 빼. 얼굴에 표정이 다 드러나 보이니까.]

러쉘이 흄의 어깨를 가볍게 찌르자 흄은 어깨를 늘어트렸다.

"의사는 불렀어?"

헤인트가 물었다.

"예. 이제 막 잠드셨습니다."

"아. 내가 실수할 뻔했네. 혹시 나중에 루시온이 깨어나면 알려줘."

헤인트는 미안한 표정을 하며 바로 등을 돌렸다.

흄이 고개를 숙인 뒤에 방으로 돌아섰다.

"표정 관리도 못 하고 아직 집사로서 미숙합니다."

[아니야. 그 정도면 잘했지.]

러쉘이 흄을 격려했다.

흄은 루시온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간 제대로 쉬지 못해 피로가 누적된 건지, 빛을 많이 쐤기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복합적인 건지.

루시온은 자면서도 아픈지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래도 라타라도 잘 자고 있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러쉘 님."

흄이 루시온을 빤히 보다 말을 꺼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봐.]

"빛의 내성이 강해져도 왜 증상은 여전한 겁니까?"

흄의 물음에 베델도 러쉘을 바라보았다.

[빛의 내성이 강해지면 루시온 공이 빛의 영향을 덜 받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지금 알다시피 검은 구슬 때문에 루시온의 상태가 불안정해.]

러쉘은 루시온의 이마에 딱밤을 놓고 싶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경매장에서도 빛을 크게 맞았잖아? 회복이 덜 된 상태에서 빛을 쐤으니 평소 같으면 그냥 넘어갈 일도 앓을 만하지.]

"회복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까?"

[맞아.]

"그럼, 헤인트 님은 빛으로 회복해서 저렇게 돌아다니실 수 있는 겁니까?"

[그래. 그게 빛과 어둠의 차이니까.]

"…억울합니다."

흄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허벅지 위에 올린 주먹을 꽉 쥐었다.

[알아. 그래도 어쩔 수가 없어.]

"예.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억울한 기분이 사라지진 않습니다."

흄은 짧게 숨을 내쉬다 자리에서 일어나 루시온이 흘리는 땀을 닦았다.

하루빨리 미엘라의 마법 아이템이 완성됐으면 했다.

* * *

오물오물.

"순례길 가는 일정을 하루 미루자고? 왜?"

루시온은 마카롱을 먹으며 흄에게 물었다.

[루시온 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게 넘어가?]

러쉘은 언제 또 아팠냐는 듯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마카롱을 먹는 모습에 기가 찼다.

안색도 나쁘고, 식은땀도 흘리는데 어떻게 마카롱이 넘어가는지.

"예. 넘어갑니다. 맛조차 기가 막히는데요?"

루시온은 옆에서 '아' 하고 입을 벌리는 라타한테도 하나 넘겼다.

러쉘은 그 모습에 헛웃음을 내뱉었다.

"도련님께서 몸이 좋지 않으십니다."

흄이 우물쭈물하다 말했다.

[흄의 말이 맞다. 오늘은 일정을 미루고 쉬는 게 어떻겠나?]

베델까지 제안하자 루시온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뭐. 몸이 안 좋긴 해."

입을 벌리고 있던 라타가 깜짝 놀라서는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미루고 싶은 마음도 있지."

농담이 아니었다.

지금 헤인트를 본다면 쌍욕이 튀어나올 정도로 진짜 안 아픈 곳이 없었다.

하지만 참을 수 없는 건 또 아니었기에 그냥 아픔에 익숙해지기로 했다.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

"안타깝지만, 흄. 이번에는 내 마음대로 미룰 수 있는 일정이 아니라서. 아마 미룰 수 있었다면 헤인트 형님이 너한테 미리 알려줬겠지."

루시온은 흄이 내민 접시에서 마카롱을 하나 더 입에 넣었다.

순례길은 초대를 받아서 가는 곳이라, 날짜가 지나면 다신 갈 수 없었다.

이를 허용한 건 다름 아닌 제국이었기에 루시온 역시 마냥 자유롭지 않았다.

흄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도련님."

"왜?"

"아침부터 마카롱은 좋지 않습니다."

"그걸 아는데 왜 계속 먹게 했어?"

"도련님께서 명령을 내리셨고, 또 원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긴 한데. 내 명령이 마음에 안 들면 무조건 따르지 않아도 돼."

루시온의 말이 끝나자마자 흄이 얼른 접시를 거뒀다.

순간, 루시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카롱은 빼고."

흄이 다시 접시를 내밀었다.

그 모습에 루시온은 넌지시 말을 던졌다.

"혹시 화났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평소와 다름없는 대답에도 루시온은 흄을 지그시 바라보며 마카롱을 조금 천천히 먹었다.

[그럼 나와 빙의하는 게 어떻겠나? 내가 공 대신 걸을게.]

"그거 나쁘지 않은데?"

루시온은 베델의 제안에 솔깃했다.

"하지만 지금은 말고 순례길 때. 그때 잘 부탁해, 베델."

헤인트가 엄청 걸어야 한다고 했으니, 벌써 앞길이 막막하던 참에 잘됐다 싶었다.

"아, 도련님."

흄이 따뜻한 차를 넘기며 말했다.

"왜?"

"어제 크라언 님한테서 연락이 왔습니다."

"뭐하고 하던데?"

"중부 3개 지부 모두 확보했다고 합니다."

'당연한 결과지.'

루시온은 흡족한 얼굴로 웃었다.

"아직 개미굴은 건드리지 않았고, 남은 북부와 동부 역시 건드리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몸에 좋은 것들을 찾고 있다고 했습니다."

흄의 보고에 루시온은 갑자기 고무를 씹는 것처럼 마카롱을 먹었다.

하필 그때 피를 토할 게 뭐람.

크라언이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몰라 엄청 찝찝했다.

"혹시 헤로안은 연락 없었어?"

"있었습니다."

"뭐라고 했는데?"

"있었는데, 대부분 하소연이었습니다."

"다 들었어?"

"예. 지금 빠짐없이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말씀해드릴까요?"

"됐어."

루시온이 질색했다.

"아침 먹고 북부로 출발해야지."

"곧 준비하겠습니다."

흄이 머뭇거리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루시온?"

헤인트가 곤히 잠든 루시온을 조심스레 깨웠다.

어제 루시온이 크게 앓았기에 순례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되냐고 제안도 하고, 달래봤지만 소용없었다.

카슨을 통해 경험한 그 고집은 루시온 역시 가지고 있었다.

실수로 루시온에게 빈정거릴 뻔했지만, 헤인트는 그 말이 나오지 않게 정말 힘겹게 참아냈다.

"도착했습니까?"

루시온은 금방 눈을 떴다. 정말로 잠귀가 밝은 모양이었다.

"아니. 이제 곧 도착할 거야. 그 전에 알려주고 싶은 게 있어서."

"…무슨 일이 터졌습니까?"

루시온이 등을 살짝 떼며 말하자 헤인트는 미안한 얼굴로 그를 달랬다.

"아니야. 큰일이 터진 것도 아니니까 긴장하지 마."

"그렇습니까?"

루시온은 여전히 놀란 눈으로 러쉘을 바라보았다.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

그제야 루시온은 숨을 짧게 내쉬며 다시 의자에 기댔다.

움찔거리는 라타의 머리를 살살 문질러주자 다시 축 늘어져서는 잠에 빠졌다.

"내가 전에 순례길에 갔다 왔다고 했잖아."

"예. 그랬죠."

"순례길 관리자가 알려주지 않는 것들을 알려주려고 미리 깨웠어. 괜히 오지랖 부린 거라면 미안해."

헤인트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아뇨. 엄청 흥미가 있습니다."

루시온의 눈이 반짝거렸다.

지금 몸이 별로 좋지 않았다. 뭔가를 미리 준비해놓을 수 있다면 훨씬 낫겠지.

"그래…?"

"그렇습니다. 절 위해 말씀해주신 게 아닙니까. 열심히 듣겠습니다."

진정성이 있는 루시온의 말에 헤인트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잠을 깨우면 발부터 나가는 카슨과 달리 루시온은 참 착했다.

같은 뱃속에서 나와도 이렇게 성격이 다를 수 있구나 하고 다시금 느꼈다.

"다행이네. 괜히 깨운 게 아닌가 싶었는데."

"네. 어서 말씀해주십시오."

동화책을 읽어달라고 보채는 것 같아 헤인트는 눈웃음을 지었다.

실제로 나이 차도 좀 나는 편이라 막냇동생이 있으면 저럴까 싶었다.

헤인트는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입술을 열었다.

"순례길은 일단 어두워."

"예…?"

"그래. 나도 그랬어. 위대한 왕, 보통은 빛의 신이 걸었다고 알려져서 순례길이 엄청 밝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야. 어두워."

"불을 준비하겠습니다."

흄이 얼른 대답했다.

"맞아. 빛이 아니라 불 마법으로 준비해야 해."

흄의 말에 헤인트는 잠깐 까먹었던 사실을 떠올리듯 반응했다.

"그건 또 왜 그렇습니까?"

루시온이 호기심을 느끼며 물었다.

"빛을 잡아먹더라고."

그건 또 무슨 말인지.

'빛을 어떻게 잡아먹는다는 거야?'

루시온은 어리둥절했다.

[빛을 잡아먹는다니. 진짜 빛의 시련이라는 말이 사실인가 보네.]

지식을 충족시킨 것만으로도 기쁜지 러쉘은 아예 헤인트 옆에 가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그대는 가보질 않았는가? 건물에 갇혀 있다시피 한 나와 다를 텐데.]

베델이 물었다.

[어....]

러쉘은 잠깐 주춤거렸다.

또 기억이 비어 있었다.

루시온을 만나기 전에, 아니, 죽었을 때조차 생각나질 않았다.

이게 대가라니.

입 안이 참 쓰디썼다.

[미안하다, 러쉘. 내가 괜한 질문을 한 모양이야.]

베델은 굳어진 러쉘의 표정을 보자마자 곧바로 러쉘에게 사과했다.

[아니야. 사과할 필요 없어. 애초에 사과할 거리도 아니니까.]

루시온은 두 사람의 대화가 무척 신경 쓰였다.

'스승님께서 대체 얼마나 많은 기억을 잃어버리신 거지?'

애초에 유령은 기억을 잃는 게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런데 그 불가능을 엎을 정도라면 대체 뭘 해야 그런 일이 벌어질까 싶었다.

"아,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 루시온."

헤인트는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 루시온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

"나도 왜 빛이 사라지는지 모르니까. 딱히 나한테 해가 있거나 그러진 않았는데 빛만 유달리 과하게 반응을 하는 것 같았어."

"그래서 '빛의 시련'이라고도 불리는 겁니까?"

"맞아. 온전히 불에 의지해서 나아가야 하지."

"혹시 저만 들어가야 합니까?"

"맞아. 혼자만 들어갈 수 있어. 길목까지는 딱 한 사람하고 동행할 수 있고. 흄을 데리고 갈 거지?"

'설마 내가 널 데리고 가겠어?'

루시온은 당연한 물음에 기가 찼다.

갑자기 크게 움직였냐는 의사의 물음에 아니라고 대답해야 했고, 지금도 엊그제보다 배가 더 욱신거렸다.

하지만 루시온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예. 그렇습니다."

"미안해할 필요 없어. 보통 시종을 데리고 가니까. 아 참.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긴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숲이 아니야."

"숲이 아니라뇨?"

"여기까지만 말할게. 이건 너무 놀라지 말라고 알려주는 거니까."

'뭐야. 안 깨워도 될 내용이잖아.'

루시온은 발라당 엎어져 자는 라타의 배를 문질렀다.

"아. 그리고 진짜 마지막으로, 체감상 엄청 길어."

헤인트는 말을 하면서 갑자기 제 품을 뒤졌다.

"마카롱을 좋아한다며?"

헤인트가 들고 온 포장지를 보자마자 루시온은 어디 제품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비록 가르티오를 만나러 갈 때, 가짜로 흄을 보냈지만, 내심 흄이 사 오길 바랐던 바로 그 가게가 아닌가.

'헤인트 형님이 말한 내용도 도움이 됐고, 배도 좀 아프면 어때. 검에 찔렸으니 아픈 건 당연하지.'

루시온은 헤인트를 보며 아주 활짝 웃었다. 이틀 전 흑마법사로서 헤인트를 만났을 때의 사건이 사르르 녹을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곧이어 마차가 멈췄다.

158화. 순례길

* * *

루시온은 눈을 질끈 감았다.

계단이라니.

뒤를 돌아보자 저 멀리서 헤인트가 손을 살짝 흔들어주는 게 보였다.

'마카롱 때문에 한 번 참는다.'

루시온은 입맛을 다셨다.

―라타가 업어줄까?

라타는 진심이었기에 루시온은 웃음을 흘렸다.

"좀 더 크면."

―트리에처럼?

"그래. 트리에처럼 크면. 그때 태워줘."

―알았어! 라타가 꼭 태워줄게.

라타는 배시시 웃었다.

"그럼 라타 대신 제가 업어 드리겠습니다."

흄이 당장 루시온 앞으로 걸어가 등을 내보이며 주저앉았다.

루시온은 오만상을 썼다.

편한 건 사실이나, 뭔가 기분이 좋질 않았다.

[자존심을 내세울 때가 아니지 않을까 싶은데.]

러쉘이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로 슬쩍 루시온을 건드렸다.

"압니다."

[의사가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베델은 러쉘과 달리 진심으로 걱정하며 말했다.

"그랬지."

루시온은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고집부려봤자 상황이 변하는 것도 아니었고.

―오옹? 루시온, 루시온.

혼자서 계단을 오르던 라타가 갑자기 다급히 내려와서는 루시온의 바짓자락을 물었다.

"왜?"

―이쪽으로 오래.

"누가?"

―어둠이.

"뭐?"

―라타가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데 어둠이 저쪽에서 빼꼼히 보면서 손짓했어.

"안내해 줘."

루시온은 흄에게 업히려다 말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대체 어둠은 뭘 하고 싶은 건지.

빛보다는 많지 않지만, 어둠 역시 주변에 돌아다니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유달리 자신의 근처에 맴돈다는 느낌이 강했다.

루시온이 라타를 따라 걸어가자 나무로 된 집이 보였다.

마치 자신이 올 줄 알았다는 듯, 노인이 나와 루시온에게 공손하게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루시온 크로니아 님?"

하지만 루시온은 난데없이 나타난 붉은 실에 잠깐 시선을 빼앗겼다.

소설 속 순례길은 중요한 곳이 아니었기에 그저 '북부에 순례길이 있다'라는 정도만 언급되고 끝날 뿐이었다.

그런데 붉은 실이라니.

루시온이 미심쩍은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제가 올 걸 아셨습니까?"

"예. 제게 속삭이더군요. 귀한 손님이 오셨다고 말입니다."

'누가 속삭인다는 거지?'

루시온은 노인의 말에 눈동자를 굴렸다.

'혹시 흑마법사인가? 설마....'

[루시온. 긴가민가하겠지만, 흑마법사는 확실히 아니야.]

러쉘이 딱 잘라 말했다.

[그런데 주변에 어둠이 많아. 과할 정도지.]

주변 상황이 이상한지 러쉘은 팔짱을 낀 채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맞아. 어둠이 엄청 많아. 다 라타를 보고 방긋 웃는다? 라타도 웃어줄 거야.

라타의 꼬리가 붕붕 흔들렸다.

"제가 이번 대의 순례길의 관리자를 맡은 '아샤'라고 합니다."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순례길은 원래 저쪽이 아닙니까?"

루시온은 자신이 왔던 곳을 가리켰다.

계단은 대체 왜 있는 것인가.

"맞습니다. 저쪽도 순례길이죠. 하지만 구별을 위해서도 존재하는 곳이랍니다."

"구별이라뇨?"

"당신이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아샤의 영문 모를 말에 루시온의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초대장 이야기를 하시는 게 아닌 것 같은데. 절 왜 기다리셨습니까?"

"어둠께서 선택하신 분이니 제가 기다리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어둠이라뇨? 농담이 과하십니다."

루시온은 당장 뒷걸음질 치고 싶은 마음을 느꼈다.

흑마법사도 아닌데 당당하게 어둠을 입에 올릴 수 있다니.

루시온은 애써 침착하려 했다.

"조금 전 발언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시는 겁니까?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이곳은 괜찮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루시온은 불쾌하다는 듯이 얼굴을 살짝 일그러트렸다.

"언급이 두려우시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저는 괜찮습니다. 제게 과분한 이름이나, 저를 어둠의 종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샤가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루시온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그들은 어둠에서 태어났으며 어둠을 따르는 종이 되었다.

루시온은 순간, 검은 형제가 언급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니겠지?'

아샤는 손을 맞대고 조심스레 펼치자 손바닥에서 어둠이 일렁거렸다.

어둠이 나비처럼 모습을 바꾸며 루시온의 어깨에 앉았다.

'뭐야. 대체 뭐냐고.'

루시온은 그대로 굳어졌다.

'흑마법사가 아니라면서요.'

원망하는 루시온의 시선에 러쉘은 억울했다.

[흑마법사가 아니야. 진짜 흑마법사가 아니라니까.]

[그럼, 방금 저 어둠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그걸 모르니까 나도 미치고 팔짝 뛰겠다!]

러쉘은 베델을 보며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저는 조금 전에 언급했듯이, 과분하나 어둠의 종입니다. 그저 잔기술 하나를 가지고 있을 뿐이지요."

아샤가 대답했다.

"...?"

[…어?]

루시온도 러쉘도 멈칫거렸다.

[혹시 우리가 보이는 건가?]

베델이 놀라며 물었다. 자신을 숨기지 않았지만, 흑마법사도 아닌데 어떻게 아는 걸까.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들릴 뿐입니다."

아샤는 고개를 흔들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저는 어둠의 종으로서 오늘 일을 묵언할 것이며 제 죽음 뒤에도 오늘 일은 지켜질 겁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걸 아실 텐데요?"

루시온은 더는 부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들킨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아뇨. 저에게 있어 죽음은 끝이랍니다. 저는 어둠으로 유지가 되고, 살아가는 존재니까요."

"어… 둠으로 유지가 되다뇨?"

흄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마치 자신과 비슷하지 않은가.

자신 역시 어둠으로 유지가 되고, 움직이니.

"저는 사라지고, 잊힌 라비엔의 피를 물려받은 자입니다. 사람이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죠."

아샤는 방긋 웃으며 자신을 가리켰다.

루시온은 충격에 빠진 듯 입이 살짝 벌어진 흄을 보다 말고 물었다.

"지금 라비엔이라고 했습니까?"

"라비엔을, 그 이름을 알고 계십니까?"

아샤가 크게 반응하며 두 손을 떨었다.

당장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그녀는 간절히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라비엔과 내 운명이 뭔가 관련이라도 있는 건가?'

루시온은 입가를 살짝 핥았다.

"라비엔이 대체 뭡니까?"

"어둠에서 태어난, 어둠의 종입니다."

아샤는 어떤 의심도 없이 루시온이 물은 질문에 대답했다.

'…미치겠네. 그 검은 형체가 말했던 말이 고스란히 나왔잖아.'

이마를 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루시온은 표정을 관리했다.

라비엔이 맞았다.

검은 형체가 언급했던 '어둠의 종'이 라비엔이었다.

설마 했는데 진짜일 줄이야.

"세간에서는 '몬스터'라고 불리는 이들이지요."

이어진 아샤의 말에도 루시온은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러쉘과 베델, 그리고 흄은 달랐다.

특히 흄은 경악에 가까울 정도로 매우 놀랐다.

흄이 얼음의 힘을 가질 때 자신이 몬스터가 아니라 라비엔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실상은 몬스터와 라비엔이 같은 거였다니.

"정말 라비엔이. 라비엔이 '몬스터'라고 불리는 자입니까?"

흄이 목소리를 떨며 물었다.

자신은 불량품이 아니다.

그렇게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꽉 조인 것처럼 조급해졌다.

"맞습니다. 제 몸에 흐르는, 자랑스러운 라비엔의 피를 맹세코 거짓은 없습니다."

아샤는 다소 구부정한 허리를 펴며 기사를 닮은 눈으로 흄을 바라보았다.

"감… 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흄이 아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샤의 눈이 곧 동그랗게 변했다.

"라비엔입니까?"

흄은 대답하지 못하고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흄.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말해."

이미 자신이 흑마법사인 게 밝혀진 마당에 뭘 더 숨기겠는가.

오히려 흄에게 잘됐다 싶었다.

이미 사라져버린 라비엔의 피를 이은 자가 눈앞에 있었다.

반갑고, 또 반갑겠지.

"감사합니다, 도련님."

흄이 활짝 웃었다.

환한 미소만큼이나 자랑스러운 얼굴로 또박또박 자신을 알렸다.

"예. 저는 라비엔입니다. 물론, 완벽한 라비엔은 아니지만요."

망설임도, 고민도 다 벗어버린 것처럼 흄은 홀가분해 보였다.

"그, 그럴 리가."

이번에는 아샤가 당황했다.

"잠깐만요. 정말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하마터면 손에 쥔 지팡이를 흘릴 만큼 아샤는 허둥지둥거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혼내지 않습니까?"

루시온이 러쉘을 보며 물었다.

[혼을 왜 내?]

"제 정체가 엄청 허무하게 들켰잖습니까. 정보도 그냥 줬고요."

[그게 어떻게 들킨 거야? 어둠이 대놓고 알려준 건데. 그건 어쩔 수 없지. 그리고 네가 괜찮다면 됐어.]

"예."

루시온은 씩 웃고는 흄을 바라보았다.

"묻고 싶은 거, 알고 싶은 거 다 물어봐."

"그래도… 됩니까?"

"모처럼 기회가 왔잖아. 왔을 때 잡아야지."

"제게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도련님."

"고마워할 필요 없어. 나도 물어볼 게 있던 참이니까."

어둠이 자신을 선택했다고 했다.

그게 무슨 말일까.

루시온은 시선을 돌려 그새 풀밭을 뛰어놀고 있는 라타와 아샤가 들어간 집을 번갈아 살폈다.

"스승님."

루시온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러쉘에게 멈췄다.

[그래.]

"어둠이 절 선택했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어둠은 무엇도 선택하지 않아.]

마치 중얼거리듯 러쉘이 굳은 표정을 했다.

[나는 그렇게 배워왔고, 아마 모든 흑마법사가 그렇게 알고 있을 거야.]

"그런데 절 선택했다고 했습니다."

[그래. 나도 똑똑히 들었어. 아마 아샤가 오면 들어야 할 문제인 것 같아. 지금 어둠이 아무 말도 하지 않거든.]

러쉘은 집에서 나와 루시온 쪽으로 걸어오는 아샤를 주목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아샤가 들고 온 건 그릇과 과도용 칼이었다.

"라비엔은 어둠에서 탄생했기에 피에는 어둠이 섞여 있고, 그 피는 모두가 똑같습니다."

아샤는 간단한 설명 후에 손가락을 베어내 그었다.

피가 땅에 떨어지기 전에 얼른 그릇에 담았다.

'어둠이 섞여 있다는 것치고 평범한 피처럼 보이는데?'

루시온은 하얀 그릇을 붉게 물들인 피를 보자 의문을 느꼈다.

"혹시 베이는 걸 무서워하십니까?"

아샤가 칼을 넘기기 전에 흄을 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닙니다. 무섭지 않습니다."

아샤에게 손을 뻗은 흄의 눈동자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제야 아샤는 칼을 흄에게 넘겼다.

혹여 힘 조절을 잘못해 손가락이 날아가면 어쩌나 싶어 루시온이 긴장하며 바라보았다.

[조심해라, 흄. 손가락 날리지 말고.]

러쉘도 마찬가지였다.

[루시온 공. 러쉘. 흄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힘 조절을 잘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두 사람의 모습에 베델이 웃으며 말했다.

사제관계라는 게 느껴질 정도로 너무도 닮아 퍽 우스웠다.

슥.

흄은 걱정과 달리 피 몇 방만 나올 정도로 깔끔하게 베어내고는 그릇에 피를 떨어트렸다.

[누구는 손가락을 자르듯이 벴는데, 흄은 진짜 깔끔하네.]

러쉘의 시선이 대놓고 루시온을 향했다.

강령술을 할 때, 긴장하는 바람에 손가락을 엄청 깊게 벴지 않은가.

"…스승님."

[아니. 뭐 그렇다는 거… 뭐야?]

살짝 사나워진 루시온의 시선에 러쉘이 키득거리다 말고 입을 벌렸다.

아샤와 흄의 피가 섞이자 그 속에서 어둠이 꿈틀거렸다.

아샤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입을 가렸다.

"세상에...."

믿을 수 없다는 아샤의 표정만큼이나 러쉘도 경악했다.

[뭐야. 진짜였어? 핏속에 어둠이 섞였다는 게 비유가 아니라 진짜였다고?]

분명 피가 섞인 듯하나, 어느 한쪽에서 유달리 더 많은 어둠이 튀어나왔다.

'흄의 피다.'

저 어둠이 루시온의 어둠이었기에 러쉘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샤는 피를 찍어 흄의 이마에 그었다.

아샤의 눈과 흄의 눈이 호수에 비친 햇살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다.

―홉! 라타가 좋아하는 반짝반짝이야.

라타가 다급히 다가와 아샤와 흄을 바라보았다.

[…공명하는 건가?]

숨을 죽였던 베델이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보여. 아까 피가 똑같다고 했잖아. 우리는 모르는 어떤 확인법을 사용하고 있는 듯해.]

러쉘은 두 사람을 아름답게 바라보았다.

이건 미친 발견이었다.

당장 기록할 수 없는 게 너무도 애통할 정도였다.

"…아."

두 눈에 빛이 꺼지자 아샤가 그릇을 내려놓고는 당장 흄을 안았다.

"이날을 기다렸습니다. 라비엔의 피가 아직도 꺼지지 않고 살아 있었다니. 오늘."

아샤가 울먹거렸다.

"오늘, 바라던 일들이 왜 이렇게 한꺼번에 일어나는지. 주책맞게 눈물을 흘려서 죄송합니다. 그저 늙은이가 노망이 났다고 생각해주십시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슬프면 눈물을 흘러야 합니다."

"외롭지 않으셨습니까?"

"외롭지 않았습니다. 제게 많은 사람이 있었거든요."

흄이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다행입니다. 외롭지 않으셨다니 참 다행입니다."

아샤는 다급히 눈물을 닦아내고는 흄의 손을 꼭 잡았다.

"혹시 꿈을 꾸셨습니까? 저는 불가능하지만, 이토록 피가 진한 당신이라면 가능하겠지요."

159화. 순례길(2)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무리 루시온 자신이 허락했다지만 흄은 어떤 의심도 없이 술술 입을 열었다.

너무도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역시. 당신이라면 꿈을 꿀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답니다."

아샤가 기뻐하며 다정하게 웃었다. 덩달아 흄 역시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제가 꿈을 꿨습니다."

"네."

"누군가 절 향해 인도자라고 했습니다."

"역시 그랬습니다. 역시 인도자셨습니다."

아샤는 입술을 움직이다 말고 곧 몸을 돌려 루시온에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귀중한 손님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닙니다. 흄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면 뭐든 해도 됩니다."

흄이 인도자라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아샤가 가진 정보는 분명 흄에게도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겠지.

"배려해주신 점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루시온 님께서는 이곳을 언제든지 오실 수 있으니 언제고 다시 천천히 대화를 나눌 시간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초대를 받아야 이곳에 올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실과 다릅니까?"

루시온이 물었다.

"초대는 그저 루시온 님을 찾아내기 위해,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미끼였단 말입니까?"

"그렇답니다. 어둠. 이 단어만으로 죄인이 되는 시기가 아닙니까? 저 역시 자유로울 수 없으니 이곳을 숨기고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는 불특정한 다수를 순례길에 초대하는 일뿐이었습니다."

'좋은 생각이네. 그런데 결국, 왜 나지? 내가 부서진 그릇이라서?'

하고 싶은 말이 루시온의 입안에서 맴돌았다.

[뭐야. 결국, 빛의 시련이니 뭐니 다 거짓말이었다는 거잖아?]

천천히 웃음보를 터트리던 러쉘이 기어코 배를 잡고 웃었다.

순례길을 만든 이유는 모르겠지만, 결국, 어둠의 축복을 받은 자를 위해 만든 셈이 아닌가.

그런 상황도 모르고 빛의 축복을 받은 자들이 성역이니, 뭐니 하면서 떠들어댔다니.

아주 우스웠다.

[와. 진짜 간만에 속이 후련하네!]

러쉘은 좀처럼 웃음을 멈추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루시온 님께 보낸 초대장만큼은 진짜였습니다. 어둠께서 선택하셨고, 위가 아닌, 이쪽으로 오지 않으셨습니까?"

'난 두 개 다 통과했다 이건가?'

루시온은 아샤의 말에 자신이 모르던 시험이 두 가지나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라타가 없었다면 몰랐을 텐데.

"아샤 님."

루시온이 아샤를 불렀다.

"아샤라고 불러주십시오. 님은 제게 너무 과분합니다."

"그, 음, 조금 전 어둠이 절 선택했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저는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아샤는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어둠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모릅니다. 그저 저는 어둠께서 선택하신 결정에 따라 움직일 뿐이니까요."

―맞아. 어둠이 지금 라타한테도 아무 말도 안 해.

다시 풀밭으로 뛰어가려던 라타가 살짝 심술이 난 목소리로 말하고는 '흥'하며 달렸다.

"그럼 정말 절 선택한 건 맞습니까?"

루시온은 일부러 라타를 언급하지 않았다. 혹시 라타도 알고 있을지, 마지막으로 남겨둔 의심이었다.

"맞습니다."

"만약 우연이라면...."

"그럴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당신에게 초대장을 보낸 것도, 선택한 것도, 전부 어둠의 뜻이니까요."

연거푸 부정하는 아샤의 태도에 루시온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신경 쓰이는 점이 있었다.

지금까지 태도를 보아 그녀는, 아니, 라비엔은 정말 말 그대로 어둠의 종처럼 보였다.

그럼 흑마법사가 가진 어둠은 대체 뭐란 말인가.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더라도마치 다르게 들렸다.

"더 물어봐도 됩니까?"

"예. 얼마든지 물어보셔도 됩니다."

"흑마법사가 사용하는 어둠과 아샤… 가 말하는 어둠이 같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마침 그 점이 궁금했던 러쉘은 루시온의 물음에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다릅니다."

아샤는 단호할 정도로 확실하게 말한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흑마법사가 사용하는 어둠은 제가 모시는 어둠의 일부일 뿐입니다."

흑마법사가 가진 어둠은 아샤가 말한 어둠의 일부라니.

"그건 저도 마찬가지겠지요?"

루시온은 슬쩍 떠봤다.

아샤가 어둠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그들이 무어라 말하는지 알 테지.

"아닙니다. 루시온 님께서는 다르십니다."

"왜 저는 다릅니까?"

루시온의 물음에 아샤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미안한 표정으로 예상 가능한 말을 꺼냈다.

"거기까지는 저도 모릅니다. 어둠께서 알려주지 않으셨습니다."

루시온은 알맹이는 없는 정보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단 그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할 듯싶었다.

그래도 꽤 많은 정보를 얻은 셈이었으니까.

"그럼 이제 저는 다시 계단으로 올라가면 순례길을 걸으면 되는 겁니까?"

루시온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아샤와 나눌 수 있는 말은 대충 다 들었으니 이곳에 온 목적을 달성해야 할 차례였다.

"아닙니다. 저 위쪽에 있는 길은 아까도 언급한 것처럼 구별을 위해 존재하는 곳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아샤는 손으로 집이 있는 방향을 가리키며 걸었다.

"혹시 저 순례길도 미끼입니까?"

루시온이 묻자 아샤는 방긋 웃었다.

"맞습니다. 꽤 그럴듯하게 꾸몄는지 참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하죠."

다들 아샤의 손에 놀아난 셈이 아닌가.

웃겼다.

"그럼 진짜 순례길은 뭐가 다릅니까?"

"혹시 몸이 이상하게 아프지 않으십니까?"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색이 검정인 구슬을 흡수하셨죠?"

"...."

루시온이 우뚝 섰다.

[나 지금 소름 돋았다.]

러쉘이 팔을 문질렀다.

대체 뭐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몰라도 이곳에서 검은 구슬이 무엇인지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베델은 당장 아샤에게 다가가 물었다.

"저는 그저 들은 대로 전달했을 뿐입니다."

[그럴 리가. 저한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베델이 의심 어린 눈빛으로 아샤를 보았다.

자신은 죽음의 기사였다.

어둠이 어디에 있는지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과 달리 어둠은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예. 맞습니다. 어둠께서 저한테만 전달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유가 뭐죠?]

"들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누가요?]

"저도 이름은 모릅니다. 다만, 어둠께서 자신들의 목소리가 그놈에게 흘러 들어가면 안 된다는 걸 압니다."

[그놈이라뇨? 혹시 루시온 공의 적이기도 합니까?]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어둠의 종으로서 어둠께서 원치 않으면 말을 꺼낼 수 없습니다."

다소 구부정한 그 모습으로 아샤가 고개를 숙이자 베델은 당황했다.

자신이 너무 아샤를 몰아붙이고 말았다.

[미안합니다. 제 마음이 너무 앞서서 그만 실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베델은 어쩔 줄 모르고 지팡이를 꼭 쥔 아샤의 손을 만졌다.

하지만 그녀와 계약을 하지 않았기에 베델의 손은 아샤를 통과했다.

베델은 오래간만에 느끼는, 텅 비어버린 감각에 괜스레 손을 뒤로 숨겼다.

"아닙니다. 저 역시 많은 걸 알려드릴 수 없어 죄송스럽답니다."

아샤가 따뜻한 미소로 베델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씁쓸한 표정을 하는 베델을 보며 루시온이 대신 대답했다.

"죄송스러울 필요 없습니다."

루시온은 앞을 가리켰다.

"그래서 이제 제가 순례길을 걸어야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아샤가 천천히 걸었다.

루시온과 흄도 덩달아 움직였다.

"색이 검은 구슬에 담긴 힘은 너무 큽니다. 몸이 감당하기 벅찰 정도로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힘을 흡수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그게 순례길입니까?"

"그렇습니다. 어둠께서 당신을 위해 만든 공간입니다."

"제가 올 걸 알고 있던 것처럼 들립니다."

"꼭 지금이 아니더라도 오래, 아주 오래 기다렸을 겁니다."

아샤가 씁쓸한 미소를 그렸다.

아샤의 집을 넘어서자 한 나무가 보였다.

주변 나무와 별다를 게 없었지만, 아샤가 지팡이로 나무를 몇 번 두드리자 스르륵 문이 나타났다.

"여기가 진짜 순례길이랍니다."

"…안에 뭐가 있는지 물어봐도 됩니까?"

[무서운 건 아니지?]

러쉘이 슬쩍 루시온을 찔렀다.

"그런 거 아닙니다. 뭐가 있는지 정도는 들을 수 있잖습니까."

"길이 있습니다. 그저 나아가기만 하면 된답니다."

아샤는 가볍게 웃다 루시온의 물음에 대답했다.

―루시온, 루시온.

라타가 다급히 뛰어왔다.

루시온이 문을 열기 전에 라타를 바라보았다.

―라타도 같이 들어가면 안 돼?

"혹시 사람 한 명 동물 한 마리는 가능합니까?"

[거기다 유령 두 명은 어때?]

러쉘이 덧붙였다.

요컨대 따지자면 사람은 아니었으니.

뜻하지 않은 물음에 베델은 얼굴을 살짝 쓸어내렸다.

[왜? 너도 궁금하잖아.]

러쉘이 베델을 보며 핀잔이 섞인 목소리를 냈다.

베델은 부정하지 않았다.

내심 저 안이 궁금하긴 했으니까.

"시도를… 해 본 적은 없답니다."

아샤가 당황하며 말했다.

"그러면 시도해보겠습니다."

루시온이 몸을 구부리려고 하자 흄이 얼른 라타를 들어 루시온에게 내밀었다.

"저도 같이 들어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한쪽 팔로 괜찮으시겠습니까?"

흄이 걱정을 담아 물었다.

"라타가 요새 무거워졌어도 그 정도는 들어."

―아니야. 라타는 깃털이야!

라타가 앞발을 흔들며 씩씩거렸다.

"그렇게 앞발을 계속 흔들 거면 데려갈 수 없어."

―라타는 깃털이야!

라타가 앞발을 내려서는 씩씩거렸다.

루시온은 웃음을 참으며 혹시 몰라 아샤에게 물었다.

"만약에 진짜 저만 들어갈 수 있는 거라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냥 들어가지 못할 뿐입니다. 다치지 않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러쉘이 루시온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베델이 눈을 깜박거리다 말고 피식 웃었다.

"…왜 그러십니까?"

러쉘답지 않은 행동에 루시온은 온몸에 돋아나는 소름을 느꼈다.

[혹시 몰라서. 나도 좋아서 그러는 게 아니니까 눈치 주지 마.]

"일단 알겠습니다."

루시온은 한 발자국 걷다 베델을 바라보았다.

"내 옷자락 안 잡아?"

[나는 흄하고 있으려고.]

"전 괜찮습니다. 혼자도 아니니까요. 궁금하면 다녀오셔도 됩니다."

흄이 베델을 향해 웃어 보였다.

[아니. 어딘가 갇히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 싫어서 그래. 주변 경치도 보고 싶고.]

"그럼 그렇게 해."

루시온은 구태여 더 묻지 않았다.

베델이 타락한 유령들이 우글거리는 그 지하에서 얼마나 있었는지 물어본 적이 없었다.

평소 지하에도 잘 들어갔다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원한다고 나갈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기에 베델 입장에서는 충분히 꺼려질 수 있었다.

[고마워.]

베델이 루시온에게 다가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공은 잘하고 올 거야. 러쉘이 있으니까 무서워할 필요 없어.]

"무섭지 않다니까."

루시온이 인상을 쓰자 베델이 가볍게 웃었다.

루시온은 콧바람을 세게 불고는 흄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갔다 올게, 흄, 베델."

―라타도 갔다 올게.

[그래. 조심해서 갔다 와.]

"예. 다녀오십시오."

흄은 루시온과 러쉘, 그리고 라타가 문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마냥 바라보았다.

"자, 그럼 루시온 님께서 돌아올 때까지 저와 이야기를 나눌까요? 여기라면 꿈을 더 잘 꿀 수 있을 테니까요."

아샤가 흄에게 손을 내밀었다. 흄은 기꺼이 손을 붙잡았다.

"좋습니다. 저도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럼, 나는 잠깐 주변을 둘러보고 올게.]

베델이 흄에게 말하고는 오른쪽으로 날아갔다.

흄은 아샤를 부축하며 집으로 향했다.

* * *

"으흠."

문을 빼꼼히 열자 멈춰진 세계가 보였다.

"아무도 없는데? 내가 너무 늦었나? 아니면 여기가 아닌가?"

그는 긴 머리카락을 흔들며 밖으로 나왔다.

자신이 발견했던, 어둠의 신수의 냄새가 엄청 옅었다.

마치 사막에서 보석을 찾는 정도로 힘든 수준이었다.

그는 주변을 바라보았다.

산이라기에는 평평했고, 뒤쪽에 광산이 보였다.

손으로 바닥을 쓸고 손가락에 묻은 흙의 냄새를 맡았다.

히죽.

그가 웃었다.

동시에 어둠이 불안에 떨었다.

"이거 어떡하나. 이걸 어떡해. 그렇게 숨겼을 텐데. 그렇게 애타게 내 눈을 가렸을 텐데."

어둠의 신수가 분명 이곳에 있었다.

바로 이 장소에.

어둠의 신수가 탄생했다는 건 당연한 사실 하나를 알게 했다.

"그릇이 누군지 몰라도."

그는 어둠을 바라보며 다시 히죽 웃었다.

"내가."

그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나는 그의 눈마저 반원은 그리고 있었다.

소름 끼칠 만큼 섬뜩하게.

"찾아버렸네…?"

160화. 순례길(3)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