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공동의 적, 내부의 적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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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일리는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눈동자는 분명히 흔들렸다.
저런 표정이면 거의 설득된 거나 마찬가지다.
"생각해 보시오. 내가 후작의 죽음을 꾸민 무리라면. 당신을 그냥 죽이지 않고 이렇게 살려 두겠소?"
레일리는 살짝 미간을 좁힌 채 나를 말없이 바라봤다.
"그 복장은 뭐지? 진짜 감찰국소속인가?"
"그럴 리가. 황실에 좀 더 가까이 숨어들기 위해 구한 거요. 놈들이 후작을 죽인 뒤 자살로 위장했으니까. 그분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알고 싶소."
되는 대로 녀석을 설득했지만, 어쩐지 이 방법이 분명히 먹혀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뭘 좀 알아냈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는 척해 봤자 캐물으면 곧 곤란해진다.
"그다지. 시간만 낭비하고 있지. 절박한 심정이오. 도와주시오."
레일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네게 졌다. 하지만 죽는 건 죽는 거고.
"이용당한다면 그보다 못한 꼴을 보는 거지. 한 번 더 확인을 해야겠다."
그렇게 말한 레일리가 쌍검 가운데한 자루를 던졌다.
"받아라."
잡기 쉬운 손잡이 쪽이었다.
"어쩌라는 거요?"
"다시 한 번 그분의 검술을 보여 봐라. 그럼 믿어 주겠다. 아까는.
대검을 써서 확신이 서지 않았어."
'다시 한 번 보여 보라고?' 문득 머릿속에 스치는 게 있었다.
검술.
검술 스킬 레벨 6부터는 모두 다후작에게 흡수했다.
후작이 나를 제압할 때는 워낙 간단히 움직여서 몰랐는데, 녀석이 보기에 내 검에서 확실히 후작의 느낌이 묻어나는 모양이었다.
"좋지."
나는 칼을 휘둘러 기본기를 보여주는 것에 집중했다. 굳이 후작의 검술을 떠올리며 따라할 필요도 없었다. 칼을 휘두르며 흘끗흘끗 레일리를 보았다. 그의 표정에서 점점 강해지는 확신이 느껴졌다.
칼을 휘두른 지 삼 분 정도가 지나자 레일리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에게 배운 게 확실하군. 그런 실력에 마법까지 익히다니. 정말 놀라워. 각하에게 그대 같은 친척이 있을 줄이야."
"당신도 대단했소. 칼만 갖고 싸웠다면 내가 밀렸을 거요."
"흥. 그런 소린 됐다."
- 띠링!
[마스커레이드의 지속 시간이 1분 남았습니다.]
서둘러 투구를 쓰자 레일리가 가엾다는 둣 말했다.
"여기저기서 쫓기는 건가. 당신도 고생이 많아."
한층 더 풀어진 표정이었다. 멋대로 추측하는 녀석이 우스웠지만 굳이 바로잡을 필요는 없었다. 슬쩍 말을 돌렸다.
"아까 그 관. 시체가 없는 것 같던데. 혹시 진짜 시체의 행방을 알 고계시오?"
찔러보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레일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 가는 곳은 있지."
"그걸 어떻게.!"
나를 보며 레일리가 피식 웃었다.
"나도 우연히 알게 됐다."
녀석은 후작이 언젠가부터 심상치않은 기색을 보였다고 했다.
"그게 언제요?"
"날짜가.
레일리가 말한 시기를 계산했다.
황제 암살.
이사벨의 죽음이 있던 날로부터 이주 정도 뒤였다.
'한참 동굴에서 박혀 수련하고 있을 때인가.' 2주의 마지막 날.
벽에 등을 붙인 채 칠흑 단검을꼭 쥐고 있던 때가 떠올랐다.
나를 찾아올 후작을 기다리면서,
잔뜩 긴장한 상태에서 지체 없이 자살할 준비만 하고 있었다.
며칠을 싱숭생숭한 상태로 더 기다렸지만 후작은 오지 않았다.
마구 뛰어다녀도, 크게 소리쳐도 그의 발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겼다는 걸 직감했었다.
'이사벨의 시체를 보고. 다른 데칼을 겨눈 거로군.'
레일리가 말을 이었다.
"그 뒤부터 훈련장에도 나타나지 않으시고, 나도 찾질 않으시더군. 불안해서 은근히 뒤를 밟았지."
"그게 가능하오?"
후작의 뒤를 밟았다는 게 상상이가지 않았다.
녀석이 어깨를 으쑥했다.
"뭐, 금방 걸렸어. 꽤 화내시더군.
하지만 오히려 날 걱정하는 눈빛이셔서. 도저히 거기서 그만둘 수가 없었지. 대신 좀 거리를 뒀고."
"그러던 중 갑자기 사라지셨어. 어디서인지 알고 있겠지?"
〈등불〉달리아크에서 본 두루마기에는 후작이 반역을 일으키다가 살해당했다고 쓰여 있었다.
"황궁에서?"
"당연하지."
그가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근처에 잠복하며 밖으로 나오는 녀석들을 하나씩 따라다녔고, 오늘 새벽에 수상해 보이는 무리를 발견했다고 했다.
걸리진 않았지만. 쉽게 따라잡기 힘들 정도의 녀석들이었어. 관을 메고 가더군. 위치는 파악해 놨어. 교외의 무슨 사육장 같더군. 그분을 갈아서. 닭이나 돼지 모이로 만들게 분명하다."
파드득.
나는 강하게 주먹을 쥐었다.
후작이 닭 모이로 갈려 버리면 정수 흡수가 불가능해진다. 기껏 레일리에게 접촉한 게 아무 쓸모가 없어지는 셈이었다.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군. 정체를 의심해서 미안하다."
곧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레일리의 호감도가 2 올라갔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자기 멋대로 생각하는 타입이군.'
물론 나한테는 나쁠 게 없었다.
"아니오. 그럼 갑시다! 유해는.
어디에 있는 거요?"
"미안한데, 한 시간만 기다려 줘."
레일리는 표효하는 사자가 새겨진 푸른 갑옷을 두드렸다.
"이걸 벗고 올 테니까."
"뭐라고?"
- 팟!
녀석은 잡을 사이도 없이 곧바로 사라졌다.
나를 살살 유인하던 때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은밀하고 빠른 움직임이었다.
'은신 상태에서 기습당했으면.
차가운 긴장감이 새삼 척추를 타고올라왔다.
갑자기 마법을 사용해서 레일리를교란했지만, 생각해 보면 아찔한 순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어쨌건 마냥 녀석을 기다릴 수밖에없었다. 어차피 후작의 유해에 대해단서를 잡을 수 있는 건 이 녀석밖에 없다.
두 시간이 지났다. 날이 서서히 저물고 있을 때였다.
"어이."
레일리의 목소리였다. 돌아보니 새까만 무복을 입은 녀석이 돌담 위에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단장에게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제 나는 푸른 사자가 아니야. 뭘하든 기사단과는 상관없지."
사직辭職.
제국 대표 기사단의 자리를 간단히 내팽개치고 온 것이다.
"뭘 그렇게 멍하니 서 있어? 가기 전에 한 가지 묻지."
"뭐요?"
"죽을 각오는 되어 있나?"
물론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다.
'레나 임명식은 참가해야 되는데.'
나는 펜던트를 잡았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에 발휘된다는 펜던트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자세히 보면 보이는, 은은한 빛은 아직도 그대로였다.
뭐.
문제가 있으면 이게 경고하겠지.
나는 레일리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쑥했다.
"음. 이미 해골이라."
"으하하하하!"
레일리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쾌활하게 웃었다.
- 띠링!
- 기사 레일리의 호감도가 4 올라갔습니다!
허공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냥 간단히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아무래도 내가 유쾌한 능담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런 식의 대화를 무척 좋아하나보군.
다음에 또 만나면 써먹어야 되겠다고 기억하며, 허공으로 몸을 솟구치는 녀석을 따라갔다.
우리는 수도 외곽의 산으로 깊이 들어갔다. 주위 풍경은 점점 을씨년스러 워 졌다.
적막한 오솔길을 겨울바람이 한층더 으스스하게 만들었고, 나무들은 병든 듯 살짝 기울어져 있었다.
산길을 한참 더 깊이 들어가자 작은 불빛들이 보였다.
"수도에 있던 것과 비슷하군."
"그래. 황실에서 운영하는 거야. 산 구석에 있는 축사畜舍에 마력등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커다란 건물과 울타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레일리는 잠시 숨 고르듯걸음을 멈췄다.
"슬슬 하나씩 재껴야겠군."
고개를 끄덕였다. 산으로 들어설 때부터 탐지 스킬을 활성화하고 있었다. 곳곳에 매복하고 있는 자들의 기운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모두 피해 왔다. 하지만저 앞은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경비가 촘촘했다.
칼을 고쳐 쥐며 불빛에 조금씩 더가까이 다가갔다.
"그런데.
나는 잠시 말을 망설였다.
"저 벌레들은 다 뭐지?"
사방에서 풀숲을 헤치고 무언가 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레일리도 느낀 듯 몹시 긴장한 표정이었다.
벌레? 뱀?
수십 수백이 아니었다.
가볍게 수천 단위를 넘어섰다.
[냉기 폭풍 Lv. 1을 장전합니다!]
- 우우우응.!
대검에 기운을 불어넣었다. 우리를 노리고 오는 거라면 칼질만으로 해볼 수 없다. 그 순간이었다.
"숨죽여! 최대한!"
레일리가 급하게 속삭이며 바닥에 엎드렸다. 확신에 찬 녀석의 태도에 마법을 해제했다.
[냉기 폭풍을 해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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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마리 뱀이 수풀을 헤치는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져만 왔다. 산전체가 뱀으로 이루어진 게 아닌가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 스스스스!
거대한 뱀의 무리가 사그락대는 소리가 바로 뒤까지 다가왔다.
백 미터.
오십.
삼십.
- 스르르르르르르!
채 이십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거대한 공명이, 그 자리에서 멈췄다. 그리고 살짝 방향을 틀어 산 아래로 내려갔다.
십여 분이 지난 뒤에야 레일리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폈다.
"흐아아아.
나는 녀석을 바라보고 물었다.
"방금 뭐였지?"
레일리의 대답은 간결했다.
"지금 나랑 장난.
"수도에 온 지 얼마 안 됐지?"
레일리가 내 말을 끊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뱀을 조심해라."
"밑도 끝도 없는 소리군."
"조각, 그림, 장식. 문신. 실제 뱀은 더. 나중에 알게 될 거다."
그 말을 듣자 퍼뜩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나는 직접 입에 그 단어를 올렸다.
"네크론을 말하나?"
고블린을 죽여 혈석을 채취하던,
네크론의 감독관이 기억났다.
조직의 비밀을 캐물었을 때.
목에 새겨진 검은 얼룩이 뱀으로 변해 그를 물어 죽였다.
얼굴이 새까닿게 질려 죽어 가던 놈의 단말마가 생생히 떠올랐다.
두 시간 전까지 푸른 사자 기사단이었던 남자는 허스키한 음색으로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야, 다 알면서 왜 물어봤어? 이제 가자고."
- 팟!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는 이미 훌쩍 앞으로 튀어 나간 뒤였다.
'다음에 물어봐야겠군.'
기이하게도, 수천 마리 뱀 군단이산을 휩쓸고 간 뒤 감시하는 무리들도 그 뒤를 따라 산을 내려간 것같았다.
어떻게 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이 절호의 기회.
'질주!'
후작의 시체가 있다면 어디에 섞여있어도 쉽게 찾는다.
레일리에 앞서, 몸을 날려 사육장 쪽으로 뛰어들었다.
- 픽!
커다란 문을 박살내고 안으로 뛰어들었을 때였다.
"이건.!"
사육장 안쪽의 광경은 기괴하기 그지없었다. 안에서 길러지는 건 닭이나 돼지가 아니었다.
바닥에 깔린 건 특이하게 생긴 애벌레들이었다.
길이는 10cm 정도.
앞에는 뭐든 삼킬 수 있을 것 같은 밋밋한 주둥이가 크게 뚫렸고, 몸통에서는 막 생긴 듯한 작은 팔다리가 한 쌍씩 돋아나고 있었다.
벌레들은 작은 발로 땅을 디디고,
앙증맞은 손으로 인간들을 꽉 잡고 꼭꼭 씹어 먹고 있었다.
- 츄르릅.
밋밋한 주둥이에서 연녹색 점액이 흘렀다. 빼곡하게 이빨이 돋아나 있었다.
'팔다리는 인간처럼 생겼군. 먹이를 닮아 가는 건가?'
사육장 몇 군데를 돌아봐도 모두마찬가지였다.
사료는 모두 인간의 시체.
뼈만 남기고 근막과 인대는 모두 발라 먹는지, 사육장 한구석에는 다먹히고 새하얗게 된 녀석들이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었다.
"우욱!"
뒤늦게 온 레일리가 급히 밖으로 나가 구토를 했다.
추적자 레일리.
생각보다 여린 녀석이다.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여기다!'
곧 은은한 초록빛이 밖으로 비치는 창고를 발견했다.
구토하는 레일리를 놓아두고 문을 뜯어냈다. 서늘한 기운이 뜯어낸 문밖으로 확 퍼져 나왔다.
안쪽에는 수십 명의 인간이 고기 바늘에 꿰인 채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가장 바깥쪽에 후작이 매달려 있었다.
심장과 목이 깨끗하게 관통당한 채죽어 있었다.
한눈에 봐도 검상劍傷.
'이런 강자를. 이렇게 깔끔하게?'
하지만 머뭇거릴 시간은 없었다.
뭘 하는 장소인지는 몰라도.
절대 외부에 공개하면 안 될 곳인건 누가 봐도 뻔하다.
그 사이 벌써 갑옷에 성에가 끼기 시작했다.
냉동 창고 한가운데 있는 후작의 시체에 곧바로 손을 뻗었다.
'정수 흡수.'
- 우우우우응!
다시 한 번, 강렬한 초록빛이 나에게 서서히 흘러들어 왔다.
158화 공동의 적, 내부의 적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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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우우우옹.!
강렬한 빛이 후작에게 뿜어졌다.
나에게만 보이는 빛이 온몸으로 스며들어 온다.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
배를 통째로 삼킨 크라켄을, 위장안에서 살해한 인간.
주먹으로 성을 부수는 자.
제국 4대 검주의 1인.
그의 정수를 별다른 수고도 없이두 번째로 흡수하고 있다.
- 우우우우우웅.!
'완전히 날로 먹는 기분이군.
그러나 놈에게 당한 걸 생각하면,
한참 더 뽑아 먹어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팔다리가 뒤로 묶인 채 한참 말을 달리던 끔찍한 기억이 떠올랐다.
몸서리치며 흡수에 집중했다.
어쩌면 바닷속에서 했던 첫 번째보다 중요한 순간이다.
기스-제-라이에게서 정수 흡수 Lv. 2를 획득했다.
에픽 스킬의 향상.
흡수 가능한 스탯 상한이 75까지 오른 데다가, 레어 등급까지 흡수가 가능해졌다.
[검기劍氣 Lv. 2를 흡수했습니다!]
[검기劍氣 Lv. 3을.]
[체력이 1 상승합니다!]
[체력이.]
빛이 연달아 내 몸을 휘감았다.
스킬과 스탯이 오르며 짜릿함이 온몸으로 퍼져 갔다.
'좋아!'
검기劍氣 스킬이 단번에 두 단계 올라갔다.
[검술 Lv.1l을 흡수합니다!]
[검술의 벽을 한 단계 돌파!]
[특전: 검호劍豪를 획득!]
- 치명타 확률이 추가로 5% 상승합니다.
투사 공격을 막을 확률이 추가로30% 상승합니다.
공격 속도가 15% 상승합니다.
'이건.!'
검술 레벨 10.
그걸 넘어선 순간 예상하지 못한 특전이 주어졌다.
[검술 Lv.12를.]
[검술 Lv.13을.]
내 검술을 보고 레일리는 각하의기본기니 어쩌니 요란을 떨었다.
'이제 더 심해지려나.'
두 번이나 후작을 흡수하고 있다.
이 정도면, 나중에 레안드로 놈도꽤 놀라지 않을까?
어디서 검술을 배웠냐고.
'아니, 만족할 대답을 할 때까지 끝없이 시달리겠지.
[탐지 Lv. 6을 흡수합니다!]
[특전: 심안心眼(C+)을 획득!]
- 탐지 레벨 상승에 따라, 특전이 부여 되었습니다. 생명체뿐 아니라, 일정 범위 내 지형지물과 함정까지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움직이는 녀석들뿐 아니라 함정까지 파악할 수 있다면.
자잘한 던전 함정이나 구덩이 같은건 신경도 쓰지 않고 걸어갈 수 있다는 이야기다.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유용하게 쓰일 터.
검술이 Lv.10을 넘어서면서 검호특전이 부여된 것처럼.
탐지 스킬 역시 하나의 단계를 더돌파한 것이다.
'놀라운 성과로군.!'
얻어 낸 것들에 다시금 감탄하고 있을 때였다.
- 덜커덩.
"각하. r후작의 추종자.
레일리가 비틀거리며 냉동 창고 안으로 들어섰다.
흘끗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각하.! 각하.!"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눈앞의 후작이 고기바늘에 매달려있는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슬픔과 분노가 레일리의 몸에서 유리 파편처럼 사방으로 쏟아졌다.
잠시 후.
레일리는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열은 숨이 입에서 새어 나와 하얗게 얼어 간다. 그가 나를 향해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너. 갑옷에 벌써 온통 성에가 끼어 버렸어."
뭔 소리를 하고 싶은 건지 알 수없었다.
분위기가 적응이 되지 않았다.
"나보다 충격이 크구나.
정수 흡수에 집중하는 내 모습을.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우두커니서 있는 걸로 오해한 모양이다.
그가 휘청거리며 말을 이었다.
"의심해서. 정말 미안했다."
레일리의 눈동자에 연민과 공감이느껴졌다. 호감도가 1 올라간다는 메시지가 허공에 떠올랐다.
곤란한 오해였다.
물론 한껏 슬픔에 잠겨 있는 레일리의 분위기를 굳이 찔 건 없었다.
녀석의 슬픔을 존중하며 나는 내할 일에 집중했다.
[탐지 Lv. 7을 흡수합니다!]
[지혜를 1 흡수합니다.]
후작의 시체에서 서서히 초록색 빛이 꺼져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정도면 엄청난 성과.
그때 였다.
레일리가 멍하니 서 있는 내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괴로운 건 알지만. 같이 복수를 해야지. 정신 차리게."
'이거 민망한데.'
"내가 유해부터 수습하지."
고개를 끄덕였다. 레일리는 몹시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닥에 고이 시체를 내려놓고 얼어붙은 눈을 가까스로 감겼다.
후작의 시체에서는 더 이상 초록빛정수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바라보며다 안다는 둣, 촉촉한 눈동자로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과 함께 있기가 고역이었다.
,"주위를 좀 살피고 오지그"그래. 시신을 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운 거 이해해."
"난 여기서 각하의 무구를 찾고 있을 테니까, 밖에서 혼자 가만히 시간 좀 가지라고."
"고맙소."
- 저벅.
창고 밖으로 나갔다.
볼일은 다 봤지만 아직 녀석에게 얻어 낼 정보가 더 있을지 모른다.
나름대로 빚을 지기도 했고.
"한? 동안 함께해 볼까.
축사 외곽으로 나갔다.
동남쪽을 살펴보며 내려갈 곳을 확인하고 있을 때.
"끄아아악!"
- 우지끈! 콰드드득!
철 찌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고통과 경악이 배어 있는 처참한비명이 밤을 타고 울려왔다.
'레일리가 있는 곳이다!'
그 순간이었다.
[위기회피(리가 발동합니다!]
[죽은 척 움직이지 마십시오!]
[다음 발동까지: 167:59:59.]
- 팟.
짧게 뜬 반투명한 메시지는 다시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펜던트의 미세한 빛이 사라졌다.
'이건!'
나는 놀라서 바로 엎드렸다.
[죽은 척하기 Lv. 1을 발동합니다!]
[종족: 해골]
[특성이 반영되었습니다.]
[죽은 척이 5배의 효과를 발휘합니다.]
[스킬: 은신 Lv. 5를 발동합니다.]
[죽은 척이 추가로 5배의 효과를 발휘합니다.]
- 스록. 스르르록!
파충류의 피부가 수풀을 스치는 소리가 비명 근처에서 들렸다.
소리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밤 속으로 기괴한 소음이 섞였다.
휘파람인 줄 알았지만 실은 뱀이 혀를 날름거리는 소리에 가까웠다.
소리는 점점 차갑고 역겨워졌다.
- 쉬이익. 쉬이이익.
기괴한 소음이 더욱 가까워졌다.
입뿐 아니라, 얼굴 몇 군데 뚫려있는 질척한 구멍들이 들숨 날숨을 내쉬며 내는 소리 같았다.
오로지 거기에만 집중하게 만드는 소리였다.
죽음이 낫질을 하며 한 걸음씩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위험해.'
레일리는 결코 쉬운 자가 아니다.
하지만 비명이 한 번으로 끝났다.
잘못된 선택이다.
레일리를 한 번에 죽인 자가 내은신을 찾지 못할 리가 없다.
죽은 척하기 같은 우스운 스킬에 넘어갈 확률은 0.
그렇게 봐도 좋았다.
- 쉬이이익.! 쉬이익.
거리가 점점 줄어 갔다.
소리는 앞뒤에서 동시에 다가오는 것 같았다.
빠져나갈 수 없다.
나를 은닉할 수도 없다.
지금이라도 질주를 사용할까?
마법을 사용한다면 어떻게든 되지않을까?
방금 얻은 능력도 있다.
하지만.
나는 펜던트를 믿어 보기로 했다.
당장의 죽음보다도, 내 감에 따른 판단으로 죽었던 실패를 다시 반복하는 게 두려웠다.
가만히 엎드린 채 버렸다.
일 분이 지나지 않았을 때.
[〈새벽을 잡아먹는 뱀〉의 권역에 들어왔습니다!]
[저항에 '압도적으로' 실패했습니다.]
[이동속도가 95% 감소합니다.]
[공격 속도가 95% 감소합니다.]
[전능全能 80% 하락.]
[모든 스킬이 봉인됩니다.]
'이런 젠장.!' 이건 확실히 잘못 선택한.
_ 스스스스스스!
온갖 끔찍한 공격을 예상했다.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마쳤다.
펜던트를 원망하면서.
- 쉬익.! 쉬이잇.!
하지만 곁에 왔던 괴기한 소음은 나를 지나쳤다.
그대로 주위를 빙빙 돌기만 했다.
섬뜩한 소리에서 어찐지 짜증이 섞이는 것 같았다.
'뭐지?'
발견하지 못할 리가 없다.
소리는 처음부터 내 쪽으로 똑바로 다가왔다.
죽은 척하기가 먹혔다고? 상황을 파악할 수 없어 당황스러웠다.
이렇게 가까이 와 놓고.
'왜 안 죽이지? 공격 안 하나?'
여전히 상대를 탐지할 수 없었다.
[〈새벽을 잡아먹는 뱀〉의 권역을벗어났습니다.]
[이동속도 감소가 회복됩니다!]
[공격 속도 감소가.]
[전능全能 하락이.]
소리가 멀어졌다.
탐지 스킬을 작동해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악몽이라도 꾼 걸까 했지만.
레일리의 기척도 사라지고 없다.
'죽었어?'
꿈이 아니다.
곧바로 움직일 수는 없다.
지금도 등 뒤에 숨어, 비웃으면서나를 노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움직이는 순간 몸을 짓눌러 부술 가능성도 있었다.
엎드린다.
펜던트를 믿었으면 끝까지 간다.
맨땅에 계속 엎드렸다.
의문이 초침이 되었다. 두려움과 추위가 분침과 시침 노릇을 했다.
열 시간 가까이가 지났다.
파리한 새벽이 막 땅 위에 금을 그어 갈 때였다.
- 저벅.
- 저벅. 저벅. 저벅.
체력이 깎여 가며 최고 수준으로발휘한 탐지 스킬에, 산 아래에서 다가오는 녀석들의 기척이 잡히기 시작했다.
좀 더 가까워지자 그들이 나누는대화까지 들려왔다.
"후우! 제사장님 덕분에 하루 푹쉬고 왔네."
"그래. 가끔 이런 날도 있어야지.
우리가 죽치고 있는 것보다야 훨씬 낫다고."
'제사장?' 놈들은 알 수 없는 말을 뱉었다.
산길을 따라 즐거운 듯 올라오는 자들. 오는 방향은 서북쪽.
'여기서 서북쪽이면. 황궁인데?'
나는 은신 상태를 유지한 채 살짝 고개를 들었다.
159화 공동의 적, 내부의 적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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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위로 다가오는 자들의 면면을 확인했다.
'인간이다.'
이족異族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인간들이었다. 축사로 오는 걸음걸이는 가볍기만 했다.
좀 더 자세히 그들을 관찰했다.
두셋씩 짝을 지어 와서, 그들의 공통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검은 얼룩.
이마나 목, 눈 아랫부분에 검은 얼룩 같은 게 묻어 있었다. 본 적 있는 얇은 얼룩이었다.
살아 있는 생물처럼 커지며 마구 꿈틀대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네크론 신사회.
그들의 문신이었다.
'저놈들이 여기에 오다니.'
[뱀을 조심해라.]
[조각, 그림, 장식. 문신. 실제 뱀은 더. 나중에 알게 될 거다.]
레일리의 말이 떠올랐다.
나중에 알게 될 거라 했지만 정작하룻밤 만에 본인이 죽어 버렸다.
조심하고 말고도 없었다.
이럴 거면 좀 더 말해 주든지.
나는 속으로 가볍게 투덜거리며,
다가오는 녀석들의 대화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런데 왜 우리 조만 먼저 왔어?
다른 놈들은 아직 자빠져서 자고 있는 거 아니야?"
"축사를 확장한다잖냐. 전쟁에 쓸 애벌레가 더 필요하다고."
"뭐? 그럼 개네 올 때까지 우리도 일하지 말자. 애들 먹는 건 알아서 잘 먹잖아."
다행히 엿듣는 사실은 모르는 듯했다.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조용히 주위를 오가며 다른 '사육사'들의 말을 들었다.
"얘들이 그렇게 강해진다고?"
"그래. 성체는 위험해서 마법사들입회하에 훈련시킨다잖냐. 가죽을 종이처럼 쫙 뜯는다고 하던데."
"후! 그래도 사육사를 잡아먹진 않겠지?"
"궁금하면 네 몸으로 한번 실험해달라고 하든지."
전쟁.
벌레.
사육.
마법사.
그런 단어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전쟁용 벌레를 사육한다니.
상당히 대규모인 것 같았다.
인간들의 전쟁에 이런 애벌레들이 끼어들었다는 소리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미래가 변하는 걸까?
알지 못했던 세계의 이면衰®에접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들리는 이야기를 하나하나 머릿속에 담아 두었다.
하지만 놈들 역시 일선 사육사에 불과한 듯, 알고 있는 정보는 꽤 제한적인 것 같았다.
나는 벽과 벽 사이에 몸을 붙이며 은밀하게 이동했다.
이 장소를 떠나기 전.
레일리의 죽음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한바탕할 것도 각오했지만.
내가 발휘하는 은신 스킬을 감지할 수 있는 녀석은 여기에 없는 것같았다.
'정말 그냥 사육사들인가.'
녀석들보다 한 발짝 앞서서, 활짝문이 열린 냉동고로 향했다.
'레일리.
입구 근처에 시체 두 구가 놓여있었다.
하나는 레일리가 보고 슬퍼했던 후작의 시체.
하나는 그보다 훨씬 상태가 좋지 않은 레일리의 시체였다.
'온몸이. 꽉 조여 죽었군.'
몸부림친 흔적은 아주 조금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어젯밤 벌어진 일은 꿈이 아니다.
레일리는 온몸이 꽉 조인 채로,
뼈가 모두 부서져서 죽어 있었다.
녀석에게 꽤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레일리가 아니면 이 장소를 알아낼 수도 없었다.
후작의 정수도 시간에 맞춰 흡수할수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서 있지도 못했을 터.
레일리가 첫 번째 목표로 노려진 덕분에 내가 살아남았다.
'그건 그거고.
[정수를 흡수하시겠습니까?]
이건 이거다.
레일리의 시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미약했다.
하지만 이제 흡수 자체가 가능한자가 많지 않은 내 입장에서는 이것도 놓칠 수 없다.
[은신 Lv. 6을 흡수했습니다!]
[특전: 자취말소(C+)를 획득!]
- 은신 레벨 상승에 따라, 특전이 부여되었습니다. 은밀히 움직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지형지물에 남긴 흔적이 깔끔하게 말소됩니다. 진정한의미의 은신은 이제 시작입니다.
레일리의 빛은 거기서 꺼졌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대단한 성과.
자취말소.
결국 후작도 저번 생에서 나의 '자취'를 따라 추격했다.
이 특전의 랭크를 올린다면.
황제 암살 현장에서, 보물을 잔뜩 갖고 유유히 걸어 나가도 후작이 나를 쫓아올 수 없다.
두 번 다시 그 상황이 반복될지는 모르겠지만.
가능성만으로도,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기분이었다.
'진작 흡수했으면 좋았을 스킬이군.'
그 순간이었다.
- 저벅.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은신 Lv. 6을 활성화합니다!]
냉동고 한쪽 구석으로 재빠르게 몸을 숨겼다.
- 끼이익.
잠시 후.
닫힌 문을 열고 사육사 두 명이 들어왔다. 그중 한 명의 손에는 긴 톱이 들려 있었다.
- 위이이잉! 위이이잉!
사육사 한 명이 연결된 긴 줄을 잡아당겼다.
톱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었다.
"얼어 있는 걸 잘라야 해. 그래야 지저분하게 피가 안 튀거든."
한 명이 다른 한 명에게 뭔가를 지도해 주는 모양새였다.
무슨 짓을 하는지 보고 싶었지만,
- 팟!
놈들이 레일리에게 톱을 대려는 순간 몸이 먼저 튀어 나갔다.
- 퍼벅!
압도적인 기본 스탯에 높은 체술 스킬까지.
이제 이 정도는 손가락 하나로도 간단히 제압할 수 있는 수준.
축 늘어진 두 놈의 품을 뒤졌다.
안감에서 무언가 바스락거리는 게만 져졌다.
- 투둑!
힘으로 안감을 확 뜯어냈다. 꽤나 익숙한 물건이 등장했다.
'이건!'
정밀한 초상화가 그려진, 특수한 재질로 만들어진 붉은색 카드.
아래쪽에는 네크론이라는 글자만 음울하게 새겨져 있다.
두 명의 안감에서 신분증을 모두 확인했다.
벤슨 프레쳐에게 봤던 것과 같은 신분증이다.
네크론 신사회.
그놈들이었다.
눈앞에서 신분증을 보니 한층 더확실해졌다.
놈들의 신분증은 벤슨 프레쳐의 것과 조금 달랐다.
첫 번째.
프레쳐의 것처럼 하나가 아니라,
두 장이 이어져 있었다.
초상화가 있는 것 한 장.
그리고 기괴한 뱀 모양의 도장이 찍힌 나머지 한 장.
'뭐지? 일 잘하면 찍어 주기라도 하는 건가?'
좀 더 살폈다. 정교하게 도금된 테두리가 눈에 들어왔다. 프레쳐의 것보다 훨씬 고급스러워 보였다.
프레쳐보다, 내 공격에 기절해 있는 두 녀석이 높은 등급이라는 건 명확했다.
tt ㅇ"
답.
프레쳐의 망치에 몇 번씩 머리가깨지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를 일으킨 사령술사를 한 번도 지켜 주지 못했던 그때의 고통과 분노가 기억났다.
지금은 프레쳐보다 높은 등급의 회원을 손짓 한 번에 간단히 기절시킬 수 있게 되었다.
루비아와 함께할 때의 나.
그리고 지금의 나 사이에 엄청난 격차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 철컥.
고개를 흔들었다.
일단 눈앞의 상황을 해결 하는 게 중요하다. 사육사 두 명을 냉동고구석에 치워 놓았다.
이어 시체 두 구를 옆구리에 끼고 창고 밖으로 나갔다.
매장해 줄 생각이었다.
후작이나 레일리가 시체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가졌는지 모른다.
비바람에 쐬어 없어지는 풍장이나 하얀 재가 되어 뿌려지는 화장을 선호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지금 물어볼 수는 없다.
어쨌건 네크론이 키우는 벌레들의 먹이가 되고 싶지는 않았을 거다.
'흡수한 값이라고 생각해 줄까.
은신을 최대로 펼쳐 조심스럽게 축사지역을 빠져나갔다.
자취말소 특전 덕분인지 추적은 붙지 않았다.
산맥을 타고 한참을 이동했다.
[탐지 Lv. 6을 발동합니다!]
대략적인 주변 지형이 파악되기 시작했다. 흐르는 냇물의 깊이와, 움푹 파이고 솟은 산의 봉우리들이 느껴졌다.
한참 산을 돌아다닌 끝에, 인적 드물고 묻기 좋은 곳을 찾았다.
높은 봉우리를 등지고.
앞에 맑은 물이 흐르는 야트막한 언덕을 발견했다.
이 정도면 적당하다.
'검기.'
- 우우우응!
푸른 검기가 순식간에 검끝까지 솟아올랐다. 주로 칼날 부분에만 맺히던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차이였다.
- 우응! 우우우응!
검면을 넘실대며 흐르는 검기는 칼끝에서 허공으로 손가락 한 마디 정도나 솟구쳐 있었다.
이게 레벨 3의 검기.
슬쩍 바닥을 향해 휘둘렀다.
- 광!
강렬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겨울바람에 꽝꽝 얼어붙은 땅이 한번의 칼질에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깊이 속살을 보였다.
- 콰광!
다시 한 번 휘둘렀다.
굉음이 울리면서 흙덩이들이 하늘높이 솟아올랐다.
움푹 파인 땅이 보였다.
'너무 자연 파괴인데.
어쨌거나 이번에는 매장 풍습을 존중해 줄 생각.
깊게 파인 땅에 후작을 던진 뒤,
레일리를 적당히 위에 엎었다.
그리고 다시 파낸 흙을 꼭꼭 눌러 덮어 줬다.
'뭐, 이 정도면 됐지.'
비석이나 관은 없다.
하지만 지형을 보면 폭우에 쓸릴 염려도 없고, 워낙 고지대라 누가 와서 파헤칠 것 같지도 않다.
내 무덤보다 낫다.
녀석들을 묻어 주고 난 뒤 산으로 숨어들었다.
향상된 탐지 스킬 덕분에 으숙한 계곡이나 동굴 같은 걸 발견하기도 쉬웠다.
일 하나를 끝마치자, 새삼 차가운 긴장감이 가슴속에 파고들었다.
어젯밤 레일리를 죽인 적은 정체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
네크론의 제사장.
그렇게만 짐작해 볼 뿐.
언제 잡혀 으스러질지 모른다.
레일리처럼.
- 쉬이이익.!
어젯밤의 그 소리가 마음속으로 파고드는 느낌에 몸서리가 쳐졌다.
독사가 긴 혀를 넣고 안쪽을 깊이훌어 내는 기분이었다.
- 첨벙!
계곡물에 담근 다리를 아래위로 흔들었다.
물 위에 떠 있던 조각구름 하나가 출렁거리며 흩어졌다.
계곡물이 다시 잔잔해지기 전에 결론을 내렸다.
'아무래도 튀는 게 좋겠어.'
너무 설쳤다.
필요한 일만 했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 보면 황당할 정도다.
처음 수도에 올 때부터 푸르손의 신도들에게 쫓기는 처지였는데.
수상한 놈들이 삼삼오오 움직이고 있던 장례 행렬에선 꽤나 눈길을 끌어 버렸고.
레일리와 싸우며 마법 회로의 흔적을 잔뜩 남겼다.
황실과 네크론이 엮인 비밀스러운 사육장까지 와서 이 난리를 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망가야 한다.
더 나대면 곤란하다.
앞으로 일주일간 펜던트의 도움도 받을 수 없다.
이곳은 나에게 마경魔境 그 자체.
탈출 방법을 고민했다.
'수도를 떠나려면.
정문으로 걸어 나가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길 확률이 높다.
푸르손의 신도들.
네크론 신사회.
황실.
지금 나는 그 세 집단에 전부 다노려지고 있다고 봐도 좋다.
'후우. 나냐우 신세를 한 번 더져야 하는 건가.'
160화 공동의 적, 내부의 적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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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를 무사히 나가려면.
처음 빠져나왔던 주점.
그곳 같은 비밀 통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나는 흙바닥에 누웠다.
얇은 얼음이 서린 것처럼 차가운 하늘을 바라보며, 앞으로의 계획을 하나씩 정리했다.
일단 수도 외곽 지역에 머무른다.
본격적으로 추격이 붙는 것 같으면 주점에 가지 않는다.
나에게 몰려올 폭풍을 나냐우나 레나에게 던지고 싶지는 않다.
5일 정도면 어떨까.
그 후에도 아무 일이 없으면 주점으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레나의 임명식에도 늦지 않도록 참석할 수 있고.'
나냐우에게 도움을 청해 수도를 탈출한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수련에 힘쓰는 게 좋겠지.
되도록 마법은 쓰지 않고서.
흡수한 스킬을 닷새간 산속에서 천천히 다듬었다.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이리저리 사용해 보니 스킬들이 익숙해졌다.
'검기.'
- 우우우우!
칼이 날카롭게 울었다.
푸른 기운이 검을 보호하고 날에 얇게 맺히는 단계를 넘어섰다.
절삭력과 폭발력이 높아진 것은 물론 공격 범위 자체를 l? cm 정도 길게 만들 수 있다.
검기의 길이는 물론 의지에 따라 조절이 가능.
얼핏 크지 않은 차이처럼 보이나,
치열하게 리치를 재던 상대를 쉽게 바보로 만들 수 있는 효과다.
공격 반경을 파악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10cm 깊게 들어오는 검.
활용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 피릿!
검기劍技의 소양도 한층 향상된 상태.
선의 궤적이 훨씬 깔끔해졌다.
심안心眼 특성이 붙은 고랭크의 탐지 스킬로 주위를 돌아봤다.
작은 짐승과 벌레들의 기척.
자세한 지형지물까지 언제나처럼 한 번에 파악된다.
추적은 붙지 않는 것 같았다.
- 팟!
내려가기 전.
마지막으로 이 산의 정상을 향해 몸을 솟구쳤다.
삼십 분 정도 험지를 달리자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났다.
이제 더 위로 올라갈 곳이 없다.
가장 높은 장소 중 하나.
꼬물꼬물 작게 움직이는 인간들이 점처럼 보였지만, 여기서 조차 수도자체는 작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넓음이 대단하게 다가온다.
생각에 잠기기 좋아, 발견한 뒤로 하루에 한 번은 올라가고 있다.
주위를 슬쩍 훑어보다 다시 서북쪽을 바라봤다.
동서남북으로 수천 미터의 면적.
넉넉히 수백 채의 건물이 들어갈 수 있을 법한 넓이가, 짙은 안개에 가려서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저긴 항상 저렇단 말이지.'
황궁이 있는 곳.
낯익은 풍경이었다.
짙은 구름과 안개는 마치 고정된 것처럼 그곳에 머물렀다.
바람에도 휩쓸리지 않고 그곳에 꿋꿋이 버티고 있다.
안을 들여다보려는 일체의 시도를 거부하는 것처럼.
궁금하기 이를 데 없었다.
황궁!
저 안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단 말인가?
이미 마왕이라도 안에 들어앉아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럼 왜 지금 당장 인간을 짓밟고 세계를 변혁하지 않을까?
확실한 건.
지금 내 힘으로 달려들었다가는,
초입에도 진입하지 못하고 굉장히 심한 꼴을 당할 거라는 사실이다.
죽고 다시 돌아갈 수 있다 해도,
아무 의미 없이 한 번의 삶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최소한 전쟁이 벌어지는 양상은자세히 한번 관찰해야 한다.
정상에 서서 곰곰이 생각했다.
돌이켜 보면 이렇게 오래 살아남은 적이 없었다.
몸을 빼앗길 위기.
포위당해 죽을 위기.
정체불명의〈뱀〉에 으스러져 죽을 위기를 기이하게 넘겼다.
그만큼 얻은 정보량이 지금까지의생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하늘에 떠 있는 푸른 구름을 보며다짐했다.
'계속 꿋꿋이 살아남자!'
하루라도 더 사는 게 남는 거다.
은신을 유지한 상태로 오솔길을 타고 산을 내려갔다.
레일리를 죽인 〈뱀〉이 생각나서아직도 등 뒤가 서늘했다.
혹시 지금도 내 뒤에 숨어 있는건 아닐까?
하지만 그런 사냥을 즐긴다면.
레일리를 그렇게 단번에 죽이지는 않았을 거다.
빼곡히 잇닿은 겨울나무들 사이를 빠르게 빠져나갔다.
한층 더 올라간 스킬의 영향인지,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길가의 나뭇잎 하나 떨어지지 않았다.
레나의 지부가 있는, 제1 가닛 거리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한 건물 앞에 몰려 서 있는 여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 모두 내가 나왔던 주점 앞에서 있었다.
나냐우 파의 T&T 지부.
'대체 무슨?'
한순간 긴장했지만.
몰려 있는 여자들은 아무리 봐도 전투원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두 분, 제니엘 님-!"
안에서 들려오는 종업원의 호명.
"와! 우리가 들어갈 차례야!"
귀한 집에서 자랐을 것 같은 여성 두 명이 손을 잡고 일어났다.
이런 분위기였나.
틀림없이 내가 나왔던 곳인데.
그 천편일률적인 느낌의 주점이 이렇게까지 변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앞쪽에는 이름을 적는 곳까지 있었다.
제니 엘이라는 이름에 줄이 그어졌다.
그 아래로도 대기자가 빼곡하다.
우아하게 차려입은 분홍빛 뺨의 여자가 들어갈 때, 슬쩍 옆에 붙어나도 가게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예전 단계였으면 위험했을 상황.
하지만 은신 능력이 올라서인지, 점원도 손님도 코앞에 있는 나를 간파해 내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웬만한 도시는, 성문만 활짝 열려있다면 슬쩍 들어가면 될 것 같다.
굳이 마스커레이드 스킬을 사용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막 가게로 들어섰을 때였다.
"야옹."
"냐- 아옹."
"냐아아옹?"
'뭐지.?' 당황한 채 서서, 주위에 가득한고양이들을 바라봤다.
어떻게 된 일일까.
가게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곳곳에 고양이들이 다닐 수 있는 통로가 있었고, 손님에게 내미는 메뉴판도 술 대신 차와 도수 없는 칵테일 종류로 채워져 있었다.
"고양이 간식 하나 주세요!"
"손님, 오늘 고양이들이 먹을 간식은 다 팔았답니다."
"흐- 에. 너무 아쉬운걸."
"제니엘! 걱정하지 마! 여기 아이들은 간식 안 줘도 달려오거든."
그 말대로였다.
복슬복슬한 고양이들은 처음 보는 인간들을 향해 적극적으로 다가가 찡긋 눈인사를 했다.
"나, 나한테 막 다가왔어!"
'뭐 하는 곳이지.
가게 안은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 인간들과, 느긋한 태도로 그들과 놀아 주는 고양이들로 가득했다.
신기한 광경이었다.
고양이는 경계심이 강한 동물.
저렇게 서슴없이 인간에게 안기는 모습은 낯선 것이었다.
주 고객층은 달라졌지만, 저번에 왔을 때에 비해 손님 숫자는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고양이. 주점.?'
'아니, 술을 안 파니 카페라고 해야 하나.'
나냐우와 함께 만난 사루니안처럼 묘족强族인가 싶었지만, 그자들이 이렇게 흔할 리가 없다.
몇 번을 봐도 평범한 고양이들.
몸을 숨긴 채로,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 덜컥.
다시 문이 열렸다. 익숙한 얼굴이 가게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들어온 여자에게 종업원이 재빨리 다가섰다.
"오셨습니까."
여자가 종업원에게 물었다.
"리본 찾는 손님은?"
"오늘은 없었습니다. 방울 장사만호황이네요."
"그래."
들어온 여자는 레나.
종업원과 대화하는 그녀의 태도는 무척 자연스러워 보인다.
'암구호인가? 벌써 잘 적응했군.'
내가 사라져 줘서 잘 살고 있나싶었지만, 얼굴 한편에 서려 있는 수심이 마음에 걸렸다.
뭔가 신경 쓰는 게 있는 눈치다.
안쪽 방으로 들어가는 그녀를 슬쩍 따라갔다.
레나조차 내가 따라붙는 걸 눈치 못 채는 것 같았다.
그녀가 무언가에 신경을 빼앗기고 있는 탓인지도 모르지만.
은신 스킬이 한 단계 성장했다는 무척 확실한 증거다.
- 드르륵.
문이 작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처음 내가 들어온, 비밀 통로와 연결된 장소는 아니다.
지부장이 따로 쓰는 공간인 것 같았다.
함께 들어간 종업원이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말씀하신 사항은 알아봤는데. 본부장이나 '스위퍼'급은 지금 다 움직일 수 없는 상황입니다."
"역시 그렇구나."
"가장 빨리 도와줄 수 있는 스위퍼는 린-렌 자매입니다만, 그래도 삼 주는 기다려야 합니다."
"알았어. 나가 봐."
종업원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밖으로 나가려던 종업원이 잠시 멈칫하고 레나에게 말을 걸었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그냥 직접도움을 요청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본부장인 사루니 안 님이라도 직접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실 텐데.
"안 돼. 개인적인 일이잖아. 다들 바쁜 걸 아는데 그럴 수 없어."
"하지만 동생분을 그렇게 걱정하시면서.!"
'그 아이 때문인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자 짐작 가는바가 있었다.
레나의 하나뿐인 여동생은 유블람 근처 보육원에서 자라고 있다.
지부장이 되고, 자리를 잡은 뒤에 함께 살 계획이라고 말했던 동생.
그 아이는 슬라임의 보호 아래서자라고 있다.
나냐우 파에 몸담은 레나의 입장에서는 불안한 게 당연하다.
데리고 올 필요가 있다.
여동생의 존재를 뻔히 알면서도, 내가 너무 무신경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레나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지만 속이 얼마나 타들어 갔을까?
미안함이 밀려왔다.
잠시 부하와 동생 이야기를 하던 레나가 짧게 대답했다.
"혼자 있게 해 줘."
"알겠습니다."
종업원은 살짝 목례한 뒤 밖으로 사라졌다.
- 탁.
문이 닫혔다.
"후우.
레나가 한숨을 푹 쉬었다.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타닥타닥 타오르는 횃불이 그녀의 심란한 마음을 반영하는 듯했다.
나는 그녀 앞에 나타나 물었다.
"그거, 내가 하면 안 될까?"
- 덜커덩!
레나는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표정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스승. 님?"
161화 매듭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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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나타난 나를 보고 레나의 눈이 커졌다.
"어. 어떻게? 기색을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나도 놀고먹은 건 아니라서."
"그래도 고작 7일간 어떻게. 스승님은 정말 저를 놀라게 하시네요."
레일리에게 흡수한 은신 레벨.
고작 한 단계 차이였지만.
일반 등급과 레어 등급의 차이가 여기에서 구분되는 건가 싶었다.
한숨을 푹푹 내쉬며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고는 해도, 어쎄신 직업레벨까지 가지고 있는 레나가 나를알아차리지 못했다.
'확실히 달라졌군.'
하지만 은신을 얻게 해 준 레일리 본인이 으스러져 죽은 모습을 생각하자 우풀한 기분은 곧 사라졌다.
손을 내저으며 화제를 전환했다.
"그것보다, 네 동생 말인데."
레나는 말을 듣기도 전에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요. 그럴 수 없어요."
의외의 거절이었다.
"왜 안 된다는 거지?"
나만 한 적임자는 없다.
푸르손 일당과 적대 관계다.
게다가 보육원 근처 지리까지 모두 다 꿰뚫고 있다.
심지어 그 내부까지.
'한두 번 가 본 게 아니니까.'
신뢰도나 경험면에서 나만큼 그 부탁을 잘 들어줄 수 있는 존재는 없다.
레나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실력이 문제인가?"
하지만 슬라임과 싸워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도망칠 정도의능력은 충분히 있다고 자부한다.
레나는 두 손을 내저으며 강력히 부인했다.
"그럴 리가요! 아니에요."
"그럼 왜?"
대답을 추궁하는 것처럼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레나는 고개를 숙인채 작게 말했다.
"전. 항상 받기만 했는데. 이런 큰일까지 부탁드릴 수는 없어요."
그녀의 얼굴과 손짓 위에 그려진많은 감정이 읽혔다.
걱정과 미안함, 부담감 같은 것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받기만 했다고? 그거 참 황당한 소리인데.'
레나는 크게 생각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녀가 나에게 해 준 건 하나둘이 아니다.
옆에서 도와주지 않았다면, 여기 도착할 때까지 다섯 번 정도는 더죽었을 터.
'며칠 전만 해도 마찬가지지.'
레나에게 받은 펜던트.
시나리오 클리어의 상징이라는, 그'계승 아이템' 덕분에 다시 한 번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살아났다.
게다가. 레나와 함께하며, 그녀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게 꽤 즐거웠다. 새삼 고마운 감정이 다시 올라왔다.
"우리가 그 정도는 서로 해 줄 수있는 사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사이라니.
레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때.
"냐옹."
테이블에 앉아 있는 흰 고양이 한마리가 울었다.
- 철컥!
깜짝 놀라 움찔했다. 나도 레나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파란 눈의 고양이는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슬쩍 꼬리를 흔들었다.
본 적 있는 모습이었다.
"너는. 그때 그.!"
고양이가 흰 수염을 종긋거렸다.
[어. 오랜만이야.]
레나의 직속 상사.
자신을 쓰다듬어도 된다며 지부를 맡아 달라고 했던 녀석이었다.
'털만 부드러운 게 아니었군.'
내 탐지를 무효화할 정도로 뛰어난은신 능력에 감탄이 나왔다.
"본부장님!"
레나가 날카롭게 외쳤다.
이번에는 의외로, 내가 나타났을때 만큼 놀라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익숙한 건가.'
- 스르르록.
고양이는 곧 부스스한 백발의 인간여자로 변했다.
"레나? 재가 한다고 하잖아. 그냥좀 하게 놔두는 게 어때?"
"본부장님! 본부장님은 하실 일 있잖아요! 오늘 간다고 하시고는!"
여자는 몸을 흠칫 응크리곤 머리를긁적 였다.
"그치만. 역시 네 임명식은 보고가고 싶은걸?"
"하아. 본부장님도 정말."
"왜 샤루라고 안 해 주는 거야?"
"제 말을 잘 들으셔야죠. 엠버까지 먼 길을 가셔야 하는데 아직도 출발안 하셨으면 곤란해요."
어이쿠, 상사가 말을 잘 들으면 친근하게 부른다는 이야기인가.
레나에 대한 상대의 의존도가 짧은 대화에서 곧바로 읽혔다.
"흐이 잉.
기괴한 소리를 내던 백발의 묘족이다시 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미리 감사하지. 나도 얘기 들었어.
꼭 내가 해 주고 점수 따고 싶지만,
아쉽게도 쌓인 일이 많아서."
"하아.
레나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본부장님은 또 어떻게 아셨어요?"
"에이. 내가 몰랐겠어? 요즘 내 관심의 절반은 너한테 있는걸."
레나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여자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정식으로 의뢰하지. 그녀의 동생을 그곳에서 빼내 줘. 대가는 내가지불하겠어."
샤루니안은 그사이 레나한테 몹시빠져든 듯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의뢰 성립이다."
"스승님.!"
레나를 무시하고 계속 샤루니안에게 말을 걸었다.
"착수금은 수도를 안전하게 빠져나가게 해 주는 걸로."
명색이 정보 길드다.
상대는 최고위 간부.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지금쯤은 파악했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역시, 알아들은 듯 상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 동안 꽤 세게 놀았던데?
그리 싼 대가가 아닌 건 알지?"
"레나도 아무 인력은 아니니까."
T&T 길드.
그곳에 레나가 필요한 존재라는건 이미 확인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레나의 동생을 구해 오는 일이다.
이 정도도 해 주지 않으면 말이되지 않는다.
동의하는 걸까.
새초롬하게 경계하는 것 같던 샤루니안의 얼굴이 문득 풀어졌다.
그녀가 작은 입을 열어 오물오물말을 하기 시작했다.
"맞아. 레나가 뒷골목 고양이들을 불러 모으라고 했을 때, 나는 얘가완전히 농담하는 줄 알았다니까? 매출이 열 배 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상상도 못 했지!"
역시 이 주점은 레나의 아이디어인 모양이었다.
나는 한마디를 보랬다.
"위기에선 더 유능하다고. 아니지,
애초에 말만 잘 들으면 위기가 닥칠일도 없겠지만."
"얘기하는 걸 보면 예전에 말 좀안 들어 봤나 봐?"
"몇 번은."
레나의 말을 안 듣고 동굴에 박혀있었던 일, 푸르손의 제단으로 향했던 일이 떠올랐다.
모두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래도 덕분에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한동안 나와 샤루니안은 레나를 코앞에 두고서 그녀를 계속 칭찬했다.
"레나는 정말 뭘 해도 잘할 거야.
손만 대면 성공할 거 같아."
샤루니안 역시 귀한 보물을 아끼고 자랑하는 듯한 말투였다.
그 태도에 괜히 내가 자랑스럽고 뿌듯했다.
몇 번의 생을 함께 거치며 성장한 그녀는, 가만히 보다 보면 내가 키운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러분. 저, 여기 있는데요.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나는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어, 내가 칭찬할 때는 이런 표정 아니었으면서 너무한 거 아니야?"
샤루니안이 미간을 좁히며 입술을 살짝 앞으로 내밀었다.
묘족 샤루니안.
실제 나이는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인간 모습은 레나보다 다섯살은 어려 보이는 모습의, 양 갈래머리를 좌우로 길게 늘어뜨린 여자아이가 그런 모습을 취하니 꽤 우스꽝스러운 느낌이었다.
나는 칭찬 세례에 얼굴이 새빨개진 레나를 바라보고 말했다.
"이미 네 상사에게 의뢰를 받아들였다. 무르진 못해."
또 안 된다고 할까 봐 얼른 말했다.
그렇지만 레나는 더 이상 거부하지않았다. 그저 몸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끓어오르는 듯 울컥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해요."
나는 못 들은 척을 하면서 슬쩍 한구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가 천에 덮여 있었다.
고맙다며 눈시울을 붉히는 레나를보기 민망해서, 말을 돌리기 위해질문을 던졌다.
"저건 뭐지?"
"아. 잠시만요."
레나가 천을 벗겨 보였다.
반짝거리는 한 벌의 갑옷이 모습을드러냈다.
"원래 쓰시던 갑옷이에요. 아끼는물건 같아서 고쳐 놨어요."
"고맙다."
루비아가 사 줬던 갑옷이다.
'이것도 여러 번 수리되는군.'
"그런데.
레나가 미간을 좁혔다. 그녀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와 샤루니안을 번갈아 바라봤다.
"스승님이 일주일 동안 세게 놀았다는 게 무슨 소리죠?"
"그렇게 됐어. 빠져나가는 편이더 안전하지."
〈뱀〉과 정수 흡수에 관한 사실을 제외하고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레나는 속이 바싹 타들어 가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그럼 한동안 수도로 돌아오지않으시는 게 좋겠네요."
"그래야겠지."
레나는 조심스레 손을 맞잡았다.
복잡한 심경일 것이다.
"본부장님."
"응."
"이거 언제부터 아셨어요?"
"나도 오늘 알았어. 너한테 알려주려고 여기 쫓아온 거 아니겠니."
"후우.
레나는 깊게 한숨을 쉬며 나에게말을 걸었다.
"동생은 그라스미어에 맡겨 주시면 좋겠어요 챈들러는 믿을 만한 사람 같았으니까生 좀" 재수 없기는 했지만."
'그랬었나?'
레나가 챈들러를 대하던 방식은,
확실히 조금 묘했다.
'죽이려고도 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날 듯 말 듯 했다.
"괜히 스승님한테 끈적거릴지도 모르니 거리는 확실히 두세요. 오해를 사면 큰일이에요."
tt ㅇ"
W.
"제가 찾아서 연락드릴 때까지는,
이쪽으로 오지 말아 주시고요."
"그러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에서 붉은 신분증의 네크론이 암약하는 모습을 파악하고 싶지만, 일단 살아남는 게 먼저다.
여기 있다가 레나에게까지 피해가 미치게 하느니 당분간 멀리 떨어져지내는 게 현명하다.
"본부장님?"
"이야기하렴."
"우리 스승님한테 뭐 드릴 만한 거없을까요?"
"비밀 통로를 이용하게 해 주려고 했는데.
"부족해요."
"수도에서의 흔적을 될 수 있는 대로 말끔히 지워 주도록 하지."
"부족해요. 좋은 걸 많이 가지고 계시잖아요. 제가 열심히 일할게요."
"그럴 것까지야.
내가 끼어들었지만 레나는 아무 말하지 말라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하이고. 이거 참. 언제쯤 되면너만큼 나를 좋아해 줄까?"
샤루니안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나를 향해 불평을 내뱉었다.
"이거 받아."
그녀는 품에 손을 넣더니, 철사에종이를 꼬아서 만든 것 같은 묘한팔찌를 내밀었다.
"뭐지?"
"마법의 흔적을 지우는 부적이야.
네 회로에는 특정한 각인이 새겨져있어서 추적당하기 쉬워."
tt 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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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비하지 말고 조심히 써. 엄청비싼 거니까. 죄다 물 건너온 걸로만든 거라서 구하기도 어려워."
"이런 걸 줘도 되는 거냐?"
"누가 너 예쁘다고 줘? 레나 동생구하러 가는 거니까 주지."
뾰로통한 말투가 싫지 않았다.
"종이 다 타면 끝난 거니까 알아서잘 봐 둬."
샤루니안은 팔찌를 들고 잠시 동안나에게 설명해 줬다.
흔적을 지울 때마다 조금씩 철사에 꿰인 종이 부분이 타들어 가는 방식이었다.
"확실히 알아보기는 쉽겠군."
"한 번 정도는 온갖 난리를 다 펴도 될 거야. 적당 적당히 꼭 필요할때만 나눠 쓰라고."
"그러지. 고맙다."
"샤루, 고마워요."
"뭐.
레나의 말에 백발의 묘족은 어깨를 으쪽하며 은근히 좋아했다.
고양이의 갸르릉 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가 건넨 부적 팔찌를 품에 넣었다.
기름 먹인 종이가 꼬여 있었는데,
허술한 겉보기와 달리 만져도 전혀 짓눌리지 않는 게 상당한 내구성이있어 보였다. 보존 마법이라도 걸린걸지도 모른다.
'역시 괴물이 많아.' 잠시 후, 혼자 2층 장난감 방에서놀고 있던 밤톨이와 만났다.
- 달각! 달각!
달려오는 녀석을 보고 바로 자세를 낮출 수밖에 없었다. 녀석은 미친듯이 꼬리를 흔들며 내 품에 안겨 몸부림쳤다.
바닥으로 갔다 다시 뛰어 안겼고,
안긴 채 마구 꼬리를 흔들다가 다시뛰어내려 주위를 빙빙 돌며 뛰어다녔다.
"흠. 심하게 반가워하네."
백발의 묘족은 탐탁치 않은 기색이었다.
"나랑 둘이서 놀 때보다 훨씬 신나보이는걸.
"샤루는 고양이 형태로 밤톨이랑 여기서 많이 놀았어요. 꽤 친해진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스승님이 더좋은가 봐요."
"데리고 가지는 않으실 거죠?"
"그래야지."
어쨌건, 위험한 길이다.
밤톨이를 데리고 간다고 했다간,
혹시 레나가 자기도 갈 거라는 소릴할지도 모른다.
밤톨이와 한참 놀다 보니 어느새 임명식 시간이 됐다.
저녁에 치러진 임명식은 생각보다 절차가 간단했다.
무척 바빠 보이는 트로핀 나냐우가 헐레벌떡 나타나더니 빠르게 배지를하나 달아 주는 게 끝이었다.
"다들 뭐가 바쁘다고 레나 임명식에도 안 오는 거야!"
샤루니안은 회의에서 봤던 인원이 거의 오지 않아 분통을 터트렸지만 나냐우 편으로 보내온 선물 몇 가지를 보고 조금 분이 풀린 듯했다.
"엠버에서 보낸 선물들이야. 먼저 현혹과 공포를 떨쳐 주는 반지."
"흐응.
"이건 관절을 보호해 주는 목걸이.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도 안전하지."
"〈급소를 노리는 장갑〉에다, 〈발소리를 죽이는 신발〉까지 가져왔어.
이 정도로 용서해 주라고. 다들 정신 없으니까."
선물을 한 아름 받아 든 레나가 나를 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거 다.
"나한테 준다는 소리면 거절하지."
내가 선수를 쳤다. 더 이상 받을 필요는 없다.
게다가 지부장 기념 선물들을 내게넘겨 버린다면, 레나의 입지가 길드내에서 나빠질지도 모른다.
"흐응.
"이제 수도를 빠져나가는 방법을 알려 줘."
사정을 들은 나냐우는 한참 동안 비밀 통로를 지나는 법을 자세히 설명했다. 지도를 보여 주며 구석구석을 짚어 가며 말했다.
"여기서 네가 지나야 할 통로는??.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다고.
레나와 밤톨이와 헤어지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기약 없이 떠날처지가 되니 조금 마음이 복잡했다.
그라스미어에 동생을 데려다주고 난 뒤에도 나는 수도에서 먼 곳들을 떠돌며 수련할 테니까.
수도의 문제가 정리된다면 레나가 연락해 주기로 했지만.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생각하면,
수도는 점점 더 마경 그 자체가 될게 분명하다.
다시 죽지 않는 한.
레나를 보는 건 이번이 마지막 일지도 몰랐다.
왠지 지금 이 순간은 한 번밖에오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삶이 반복되더라도 만날 수 없을것 같은 느낌이었다.
"듣고 있는 거야? 잘 봐 두라고.
꽤 복잡하니까."
나냐우가 내 주의를 환기시켰다.
설명을 마친 그녀는 문득 묘한 눈빛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실상을 좀 접하니 어땠어?"
"실상?"
"사육 시설 봤잖아. 어때, 더 깊이 파고들고 싶지 않아?"
"나중에 천천히 생각해 보지."
"그럴 시간 없을지도 모른다니까?
전쟁 터지면 진짜 정신없을 거야.
난 지금도 정신없지만."
?. W■타".?
"뭐, 일 다 터지고 나서 합류하는게 어쩌면 나을 수도 있지. 그럼, 둘이 작별 인사 나눠."
T&T 의 시조는 나와 레나만 통로앞에 남겨 놓은 채 사라졌다.
어색한 침묵이 잠시 이어졌을 때,
레나가 나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동생에게 줄 편지예요. 글씨체는 틀림없이 알아볼 거고, 우리 둘만 알 만한 얘기도 잔뜩 썼어요."
"암호도 넣었으니까, 협박 당해서 썼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거예요.
편지로 충분해요."
"잘 전달할께."
"무엇보다. 꼭 조심하세요."
"걱정 마. 펜던트가 날 위기에서지켜 주거든."
나는 레나가 준 펜던트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펜던트 위에 반투명한숫자가 떠올랐다.
[다음 발동까지: 28:59:59.]
얼마 남지 않았다.
레일리처럼 온몸이 으스러질 위기에서 피한 지도 벌써 엿새 가까이지났다.
펜던트의 권능이 곧 활성화된다.
"스승님, 그런 말씀까지.!"
레나는 감동해서 울먹거렸다. 아무래도 상징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는것 같았다.
'아니, 진짜 지켜 준다니까.
레나를 나를 힘주어 와락 껴안으며 붉어진 눈시울에서 눈물을 홀렸다.
'으음.
"스승님.
레나를 나를 껴안았다가 한 발자국 물러선 채 가만히 바라보고, 다시 달려들어 껴안고를 몇 번 반복했다.
'많이. 진행됐군.'
호감도도.
그녀의 지위도.
레나는 다음 생에 어떻게 변해 있을까?
동굴에서 만나게 될까?
아니면 다른 곳에서? 다음 생에도 그녀에게 접근해야 할까?
거듭 안기며 머릿속은 더 복잡해 질뿐이었다.
자신의 삶을 잘 살아가고 있다면 그대로 놓아둬도 좋을지 모른다.
괜히 내가 끼어들어 파란을 일으킬 필요가 있을까.
홋날 등장할 용사들을 쓰러트릴 만큼의 힘을 얻고 싶다.
그 길은 고난으로 가득 차 있을게 분명하다.
'웬만하면. 내가 가는 길에 엮어봤자 좋은 꼴은 못 보겠지.'
- 팟!
어렵게 이별을 마친 뒤 나냐우가알려 준 비밀 통로를 달려갔다.
'역시 대단한 곳이야.'
이런 곳이 던전으로 취급된다면,
도대체 어느 정도의 난이도로 책정될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나냐우가 지도를 주며 설명한 곳은통로의 일부에 불과한 것 같았지만, 꼬박 하루를 넘게 달려야 했다.
- 위이잉.
목에 매달린 펜던트에서 부드러운 진동이 전해져 왔다.
[권능 발동이 다시 가능해집니다.]
'벌써 다시 된 건가.' 비밀 통로에서 위기에 처할 일은전혀 없었다.
삼십 분 정도를 더 달렸을 때.
펜던트가 회복되는 시간에 맞춘 듯눈앞에 높은 사다리가 나타났다.
출구였다.
162화 매듭 (2)
***************************************************
밖으로 나가는 출구 앞에는 현재위치가 적혀 있다.
회색 통로는 단조롭다.
안에 있으면 여기가 어딘지 감도 잡을 수 없다.
그래서일까.
곳곳에 표지판이 있다.
출구 앞의 표지판과 제국 지도를 번갈아 확인했다.
'멀리도 왔군.'
제국 지도로 보면 걸어서 사흘씩 걸릴 거리를 벌써 도착해 버렸다.
이 통로는 은밀하다는 것 외에도 기동성에서 탁월하다.
상하좌우로 돌지 않는다.
어떤 장애물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일직선으로 지하를 뚫어 놓았다.
새삼 이 통로를 만든 인간들의 대단함이 느껴졌다.
이런 기술력을 가진 옛 인류.
그런 그들을 고문용 장난감으로 사육한 사도들.
'사도라는 건. 어떤 존재지?'
다시 한 번 궁금해진다.
그런 내 질문에, 300년을 살아온인간인 트로핀 나냐우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관련 기록이 궁금하면 황실 비밀서고를 뒤져 보라고.
물론 샤루니안의 기척도 못 느낀내가 황실에 숨어들어 간다는 건 꿈도 못 꿀 일.
'황궁 전체가, 관측이 불가능하게 안개로 뒤덮여 있었지.'
나는 이리저리 상상을 뻗어 간다.
〈사도〉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건국제 세이론에게 갈가리 찢겨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하던데.
남아 있다면 무엇을 위해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혹시 내가 그들에게 뭔가 얻어 낼수 있을까?
'엘프도 멸종했다고 했지만.'
협곡에서 나타난 푸르손의 신도 가운데는, 분명히 엘프의 외양을 가진 개체도 있었다.
혹시 그 사도라는 것들도 어딘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건.
지금 내 수준에서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 철컥.
그저 한 걸음씩 디뎌 보는 수밖에.
사다리를 타고 출구로 올라갔다.
나냐우가 알려 준 대로 뚜껑 안쪽의 손잡이를 조작해 열었다.
비밀 통로의 개폐 방법.
무척 민감한 정보다.
길드원도, 간부도 아닌 내게 여기까지 알려 줬다.
이건 분명한 호의다.
텅 빈 갈비뼈 안쪽이 조금 반응할정도의 호의.
내가 아닌 레나를 향한 호의라도, 반가운 건 마찬가지.
- 끼이이익.
통로 출구를 열었다. 작은 금속성소리가 울려퍼진다.
- 후우욱.
겨울밤의 공기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불쾌한 바람이 찐득이 사방에서 달라붙는다.
스멀거리는 까만 바람은 지독한 원념怨念이 쌓인 찌꺼기.
〈사형수의 늪〉
나냐우가 골라 준 몇 개의 출구가운데 일부러 여기를 골랐다.
인간의 거주지와 꽤 떨어져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레나의 동생을 데리러 가기 전, 한 번 싸워 봐야 할 상대가 이 늪지대에있다.
'탐지.'
이 장소는 악의로 가득 차 있다.
- 애애애애앵.!
온갖 질병을 다 가진 벌레들이, 흡혈 육식을 위해 활발하게 날아다닌다.
- 저벅.
한 발자국만 잘못 디디면 차갑고 찐득한 늪으로 빠져든다.
- 스스스슥
노란 눈을 빛내는 악어들이 먹이 근처로 빠르게 다가온다.
물론 나에게는 아무 해당 사항이 없다. 날벌레에 물릴 걱정 따위는 당연히 전혀 없다.
탐지 스킬은 이미 지형지물까지 모두 파악하는 수준에 이르렸다. 발을 잘못 디딜 걱정도 없다.
악어 같은 건.
[공포 Lv. 1을 사용합니다!]
[대상: 3개체]
[체력이 0.19% 소모됩니다.]
[당신과 먹이 사이의 스탯 차이:
절대적.]
입을 쩍 벌린 채.
나를 뜯어 부수려 달려들던 악어세 마리가 굳어 버린다.
- 툭.
나는 그중 한 녀석을 슬쩍 발로 걷어찼다.
"뭐가 이렇게 커?"
악어가 바르르 떤다.
유황불을 흉내 내던 노란 눈동자가 흐물흐물하게 힘을 잃어버렸다.
스킬의 강도를 살짝 낮췄다.
악어들이 가죽과 살점을 종이처럼 잡아 뜯을 수 있는 커다란 아가리를 조심스레 닫는다.
머리를 푸욱 수그리고 네 다리를 움직여 슬금슬금 물러간다.
그냥 내버려둔다.
저런 것들을 죽여 봐야 경험치도 거의 주지 않는다.
무시하고 걸어간다.
호수가 썩어 변한 커다란 늪 주위에는 수억 마리 날벌레가 산다.
그중 한 덩어리가 검은 바람이 되어 나에게 달려든다.
- 위이이이이이이잉.!
악어들처럼 쫓아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스킬로 저들 하나하나지정하는 건 불가능하다.
공포의 광역 오오라 같은 걸 사용할수 있다면 좋겠지만.
'크라켄을 한 번쯤 더 흡수해야 가능하려나.'
- 파츠츠춧!
검 전체에 기운을 실어 넓게 칼을 휘둘렀다.
수만 마리 날벌레가 칼에 닿지도 못한 채 잿더미가 되어 스러진다.
'레나는 이런 데 데려오면 절대 안되겠군.'
문득 엉뚱한 생각이 난다.
그녀는 인간을 잡아먹는 커다란 식인거미도 징그러워하지 않고 무척 잘잡았다.
하지만 이건 비위나 미감美感의 문제가 아니다.
난이도다.
피와 살을 가진 녀석들은 이곳에 발을 들이는 것 자체가 어마어마한 도전일 터.
공기 반 날벌레 반인 이런 공간에 있다간, 자기가 뭘 들이쉬는지도 모르고 안팎으로 살점을 뜯기면서 금세 뼈만 남게 된다.
'나야 뭐. 애초에 뼈밖에 없고.'
썩은 호수를 지나자 수풀이 훨씬더 빼빽해진다.
서로 얽히고설킨 잡목과 수풀은 오랫동안 시체를 먹고 자라서인지 억세고 질기다.
- 서걱!
물론 내가 휘두르는 칼날에 저항할정도는 전혀 아니다.
탐험용 넓적칼처럼 쓰고 있지만, 이래 백도 그라스미어의 3대 영주가 만들었다는 걸작.
2미터에 달하는 크기 덕분에 슬쩍가볍게 휘둘러도 넓은 길이 난다.
높의 중심으로 향할수록, 공기가 점점 더 끈적거린다.
'슬슬 나올 때가 됐는데.
이 장소가 던전은 아니다.
하지만 나냐우가 나에게 전해 준다양한 정보 가운데, 이 장소로 접근하면 높은 확률로 만나게 될 녀석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90% 이상의 랜덤 인카운터.
- 꾸룩.
'그렇지.'
반가운 소리다. 오래지 않아 놈이 모습을 드러냈다.
- 꾸르르르르록.!
늪에서 끈적거리는 점액 덩어리가 솟아오른다.
시체 썩은 늪이 손, 다리, 얼굴을 갖추고 꿈틀거리며 늪과 땅의 경계쪽으로 기어 온다.
[늪의 악령과 만나셨습니다!]
[늪의 악령]
[랭크: C트리플 플러스]
[늪에 버려진 수많은 사형수의
악의와 원념이, 오랜 세월 쌓여서 만들어진 사악한 정령입니다.]
[고통과 악의를 전파합니다.]
[주위의 수원을 오염시킵니다.]
[난이도 판정: 절망]
보스급 몬스터의 등장이다.
난이도 판정을 눈여겨본다.
이번 생을 꽤 길게 싸워 오면서 레벨이 꽤 올랐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40 정도의 레벨로 이놈에게 덤비는 건 미친 짓인 모양이다.
- 꾸우우우우우우!
'슬슬 난폭해지는군.' 크기는 하다.
팔 길이만 해도 무려 십여 미터.
- 후두두둑! 치익!
검은 점액이 연기를 내며 주위를 뒤덮는다.
'공기 오염이라도 시키나?'
- 꾸루. 꾸루루,
하지만 악령은 아무 반응도 없는 나를 보고 당황한 눈치다.
"뭐 하냐?"
슬쩍 녀석을 바라봤다.
피부와 호흡기에 데미지를 받아, 패닉에 빠져 울부짖는 모습이라도 기대했던 걸까.
- 부우웅!
반응이 없자 거대한 주먹이 똑바로 날아온다.
'시작이군.'
- 파츠츠춧!
[검기 Lv. 3을 발동합니다!]
연푸르게 물든 검으로 늪 정령의 거대한 왼팔을 베어 냈다.
- 꾸어어어!
끈적거리는 왼팔을 녀석이 다시 주워몸에 붙인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1미터가 넘는 얼굴로 웃는 표정을 짓는다.
부정형不定形의 적.
나도 예상한 바다. 어차피 놈은 연습상대에 불과하다.
[산성酸性 Lv. 5를 발동합니다!]
- 치지지지지지직!
검기가 연초록을 띤다.
강한 부식성을 띠는 검기지만.
- 치익! 치이이익!
그라스미어의 대검은 아무렇지도 않게 버텨 낸다.
- 꾸어! 꾸우우어어어어!
한 번에 잡아먹으려 달려들었던 입 쪽이 녹아서 타들어 간다.
늪의 악령은 꽤 타격을 입은 듯 심하게 비틀거린다.
'느낌이 오는군.'
레나 동생을 구하러 가야 하는데 엉뚱한 곳에서 늪 정령과 싸우는 이유는 간단하다.
보육원장 슬라임.
그 실체는 푸르손 계파의 간부.
충돌은 가능하면 피하고 싶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꿈틀거리는 녹색 점액질이 단번에 내 갑옷 사이사이에 스며들어 녹여버리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는 반항할 엄두조차 못 내고 당했다.
'반복할 순 없어.'
연습이 필요하다.
- 꾸워워어어어!
덮쳐 오는 오른팔을 연녹빛 검기로 지져 버린다.
악의와 원념으로 꿈틀거리는 늪이 부분적으로 소각된다. 이 녀석은 슬라임과 비슷한 부류.
이런 점액질 부정형 몬스터에게 어떤 공격이 얼마나 통할지 한번시험해 볼 필요가 있다.
멀쩡히 있던 늪의 악령으로서는 아닌 밤중에 흥두깨겠지만, 상대의 사정 따위는 봐줄 생각이 없다.
- 치이이이익! 퍼걱!
끈적거리는 시꺼먼 한 부분이 또다시 터져 나간다.
점액으로 된 악령의 몸에서 몇몇파편이 튀어나온다.
사슴 모양, 인간 모양, 나귀 모양, 작은 새 모양의 점액 덩어리들이 끈적거리며 밖으로 흩어진다.
'이런 걸 먹었다는 건가?'
자그만 점액 덩어리들은 꿈틀대며 악령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다.
악령은 커다란 손을 휘둘렀다.
그들을 다시 몸에 쓸어 모으려는 듯한 움직임이다.
물론 그대로 놓아둘 생각은 전혀없었다.
'공포.'
부정형의 적.
그럼에도 공포가 먹힌다.
바다의 광망狂妄 크라켄의 권능이 새삼 대단하다는 게 실감된다. 악령의 움직임이 한순간 멈칫한다.
'결빙.'
- 사가가각!
칼에서 싸늘한 냉기가 몰아친다.
동시에 화르록, 하는 소리와 함께 샤루니안이 준 부적이 타올랐다.
한 매듭.'
부적 팔찌는 마흔아홉 매듭이다.
생각보다 감당하는 용량이 크다. 이정도면.
슬라임과 본전을 치를 때 충분히 마법을 활용할 수 있을 듯하다.
- 까앙!
얼어붙은 점액 부분을 부쉈다.
사방으로 파편이 튀었다. 악령이 울부짖는다.
하지만 내장 하나만 떼어도 죽어버리는 인간 따위와는 다르다.
압도적 재생력을 가진 트롤 같은 부류와도 차원이 다르다.
끊임없이 서로 뭉치며, 그 몸을 구성하는 재료 자체를 아예 전부 휘발시켜 버려야 한다.
한 번에 안 되면,
- 치이이이익!
조금씩이라도.
- 부우응!
내가 딛고 선 단단한 바닥을 늪의 악령이 연달아 물컹거리는 주먹을 휘둘러 공격한다.
악취를 풍기는 시꺼먼 점액이 꽤 불쾌하다. 하지만 이미 크기가 꽤 줄어든 상태.
이 정도라면 정면으로 받아쳐도 어디로 튕겨 나갈 염려 따윈 없다.
- 퍼엉!
최대로 뽑아낸 연녹색의 검기를 악령의 주먹에 정면으로 부딪쳤다.
튕겨 난 검을 바닥에 댄다.
'발도'
검집도 없는 대검. 하지만 스킬이라는 건 꽤 편리하다.
본령을 파악하고 있다면 기괴한 방식으로 적용할 수 있다.
- 끼기기긱!
얼어붙은 땅을 그어 가며 추진력을 얻은 뒤.
[참격 Lv. 2를 발동합니다!]
- 퍼거거걱!
눈부신 연초록 섬광이 큰 반원을 그리며 공간 전체를 베어 나갔다.
- 꾸르르르르.! 꾸어어어.!
칼이 지나간 부위가 상하로 녹아내렸다.
악령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지만, 소멸되려면 한참 멀어 보인다.
'검술만 갖고 싸우려면. 좀 지겹겠군.'
몇 번 검기를 더 뿌린 뒤, 나는 부적 팔찌의 매듭이 조금 더 타는것을 각오했다.
'격발.'
화? 르르르!
매듭 마흔아홉.
그중 넷이 불타 재가 되었다.
늪의 악령을 두 번 얼리고, 두 번태웠다.
아깝지는 않다.
소중한 정보를 얻었으니까.
'얼린 뒤, 폭발시켜 부수는 식이면 되겠군.'
게다가 루-륨의 흔적을 지워 주는 부적 팔찌도, 생각보다 그 소모가 심하지 않다.
마음이 꽤 가벼워졌을 때였다.
- 띠링!
[클리 어!]
[랜덤 인카운터:〈사형수의 늪〉의 악령을 처치했습니다.]
[난이도 판정으로 용사 포인트가 400% 가산됩니다.]
용사짓을 했다는 메시지가 눈앞에 떠오른다. 내가 타자를 착취했다는 명백한 증거다. 하지만 거기에서 씁쓸함을 느낄 생각은 없다.
원하는 상대를 지켜 주지 못했을 때의 참담함과 무력감은 어떤 일이 있어도 다시 맛보고 싶지 않다.
그걸 위해서라면 기꺼이 착취의 사슬에서 싸워 나가겠다.
착취자로서의 나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철저한 가해자가 되겠다.
마음을 다잡으며 눈앞에 떠오르는 반투명한 메시지들을 읽어 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뭔가 다른 것 같다.
163화 매듭 (3)
***************************************************
[지역 오염원을 처리하셨습니다.]
[해당 지역의 정화 프로세스가
시작됩니다.]
[원래 숲으로 복구될 경우, 숲의 정령이 당신에게 기본 호감도를 가지게 됩니다.]
[당신의 기여에 따라 복구 예상시간이 달라지며, 숲의 정령에게 더높은 호감도를 획득할 수 있게 됩니다.]
[현재 생태계 복구 예상 시간:
51년 1이일 14시간.]
'오염 지역. 처리?' 수도를 떠나기 전.
나냐우가 내게 해 줬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원래 이 장소는 숲이었다.
사형수들을 죽인 뒤에 버리는 곳이었는데, 시체가 쌓여 썩으면서 늪으로 변하고 악령이 생겨났다.
'한가해지면 숲이나 키워 볼까.'
아주 한가해져야 가능한 일이다.
오염된 토양과 식생을 내가 단번에 바꿀 수는 없다.
허공에 뜬 메시지처럼 50년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본적으로 오랜 세월이 필요할 게 분명하다.
어쨌건 지금 할 일은 아니다.
게다가.
늪지대에서 살아가는 악어와 흡혈모기떼들을, '복구'된 숲에 새롭게 생겨날 짐승들보다 낮게 평가할까닭도 없다.
'으음.'
부서진〈늪의 악령〉의 시체를 보고 있자니, 곧 허공에 원래 떠야 할 상태창이 뜬다.
[용사 포인트를 산정합니다!]
[C트리플 플러스 랭크 인카운터 클리어:
205포인트]
[난이도 가산: 820포인트]
[1025포인트를 획득하셨습니다!]
〈늪의 악령〉을 쓰러트리고 얻은 정확한 용사 포인트가 확인된다.
[상점 이용 권한을 산출합니다.]
[권한이 상승했습니다!]
[보상 선택 풀 확대!]
[상급 견습생 (Apprentice High)으로 이용 권한이 인정됩니다.]
- 다음 등급까지: 1, 968/2, 048
[제시되는 세 가지 보상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 주십시오.]
[주의하세요! 견습 단계를 지나면, 당신은 더 이상 보호받지 못합니다.]
[능력 스캔 중.]
[플레이어 스캔 중.]
'더 이상 보호받지 못한다고? 언제뭘 보호해 주기라도 했다는 건가?' 어쨌거나, 단번에 승급했다.
용사 포인트를 조금만 더 모으면 견습 단계를 지날 것 같다.
C트리플 플러스 급 보스를 간단히 처리해
버릴 정도니 뭐로든 '견습' 취급을 받는 게 우습기는 하다.
허공에 뜨는 창을 쪽 훑어본다.
[선택을 시작합니다.]
[사용 가능한 포인트가 최초로
1, 000을 초과했습니다.]
[레어 보상이 개방됩니다!]
1. 암흑 저항
- 당신은 그물 같은 암흑 속에서도 빛을 붙들 수 있습니다. 암暗 속성공격에 대한 저항력이 60 상승합니다.
2. 늪지대 적응
- 단 한 번도 높에 빠지지 않고 늪지대의 인카운터 보스를 처리했습니다.
늪지대에서의 이동 패널티가 75%감소됩니다.
3. 악령 제압(Rare)
- 형태를 가진 악령을 처음으로 제압했습니다. 세계의 또 다른 악령들을 잠재우거나 갈가리 찢어 버리십시오. 당신의 공격이 영체에게 1.3%의 유효 데미지를 안깁니다.
'호오.
전반적으로 보상이 상당히 세다.
거미굴에서 웹슬링거를 처리했을 때와 비교하면 수치 자체에서 큰 차이가 난다.
늪지대 패널티 감소,
암흑 속성 저항.
모두 높은 수치고, 옵션 자체가 무시할 수 없이 매력적이다.
늪지대 적응을 선택한다면, 많은 자들이 기피하는 장소를 역으로 최적의 전장으로 활용할 수 있다.
암흑 저항을 선택한다면, 언제 어디서 부딪힐지도 모를 마왕의 수하들과 한층 더 효율적으로 싸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으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답은 둘 다아니다. 나는 3번을 선택했다.
[선택이 완료되었습니다!]
[악령 제압(Rare) 획득!]
[모든 종류의 공격이 영체에게도 타격을 입힐 수 있게 됩니다.]
- 공격력의 1.3%가 적용됩니다.
- 경우에 따라, 속성 공격의 경우 추가적인 타격이 가능합니다.
제령 制靈.
지금까지 쌓아 왔던 능력들과는 전혀 다른 영역이다.
영들이 어느 정도로 공격을 버틸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적용되는 수치는 몹시 미미하다.
그래도 이 특전을 선택한 이유가있다.
'아이작.'
그 녀석 때문이다. 놈이 처음 내몸에 달려들었을 때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다시 느끼고 싶지 않은 더러운 기분이다.
새로 얻은 이 특전이 어느 정도 유효할지는 모르겠지만. 빙의 같은 영적인 공격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첫걸음 정도는 되리라 생각한다.
게다가 일단 혼자서 레어 등급의 특전이다.
암흑 저항과 지형 적응은 차차
얻어 나갈 확률도 높아 보이니까.
특전을 선택하고 나니 반투명한 푸른상태창이 사라진다.
남은 건, 인카운터 보스의 커다란잔해뿐.
그대로 지나치지 않고 이리저리살핀다. 역시 눈길을 끌며 까맣게 빛나는 뭔가가 있다.
다가가 손으로 잡는다. 젤리처럼 끈적거리는 물건이다. 가지고 있는 루-륨 공병에 넣기 적당한 크기.
[〈사형수의 원념 (Rare)〉을 획득하셨습니다!]
참회하지 않는 죄인들의 원념이 액화된 물체입니다.
예메라의 교단에 가져가실 경우, 정화의 증거로 사용해서 교단과 친밀도를 올리실 수 있습니다.
퀘스트 아이템인가.
물론 예메라의 교단과 친밀도를 올릴 생각은 조금도 없다.
친밀도를 올리기는커녕.
그 반경 수십 킬로미터 안으로
다가가기도 싫다.
참회의 여신 예메라의 사제들.
놈들은 내 정체를 알아채는 대로, 〈정화〉시키기 위해서 달궈진 쇠로 내리칠 게 분명하니까.
'그 용도로는. 기각.'
아이템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무언가의 제작 재료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감정이 필요하다.
'슬라임에게 감정을 부탁할 수도 없고.'
우스꽝스러운 생각이 머릿속에 잠시 스쳐 간다.
당분간 보관할 수밖에 없다.
그 외에도 잡다한 아이템이 많이 떨어졌다.
〈살인자의 참수 도끼〉, 〈길 잃은 자의 비수〉, 〈고통으로 얼룩진 어깨갑옷〉같은 것들이 나왔다.
지금 쓰는 무기에 비하면 모두 잡템에 불과하다. 하지만 레나가 생각난 탓일까. 모두 습관적으로 챙겨버렸다.
'가다가 버려야겠군.'
51년 후에 숲으로 복구된다는 늪지대를 벗어나는 데는 다시 세 시간이 걸렸다.
눈앞에 황무지가 펼쳐졌다.
깜깜한 밤의 황무지를 걷는다. 황무지에는 살아 있는 것들이 적고, 나는 편안해진다.
황무지에는 침략과 약탈이 없다. 냄새와 욕망이 없다. 황무지는 깨끗하다.
파리한 새벽이 동쪽에서 조금씩 스며든다. 새벽이 밝아 오는 시간에 인간들의 도로를 찾았다. 표지판에 아만으로 가는 길이 보인다.
아만.
고위 정보상과 암살자들의 임시 평화지대, '등불' 달리아크가 있는 도시.
후작의 죽음에 대한 정보도 그곳에서 얻었다.
무엇보다, 캐빈 애슈턴.
자꾸 신경 쓰이는 그 이름과 엮여있는 곳이라고 추측된다.
애슈턴에 대한 정보를 요구하자, 달리아크의 중개인은 더 들으려고도 않고 단번에 없다고 잘라 냈으니까.
결국 힘이 부족한 게 문제다.
황실 비밀 서고로 다짜고짜 쳐들어가는 것도, 달리아크에서 애슈턴에 대한 정보를 억지로 빼내는 것도 지금 수준에서는 불가능하다.
'아직 한참 멀었어.'
나는 이 거대한 판 앞에서 한없는 무력함을 느꼈다.
제국 4대 검주인 레안드로 후작도 당했다. 그의 시체가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다.
몇 번씩 죽으면서 연달아 기연을 얻어 왔지만, 이 판에 끼어들기에 나는 아직도 터무니없이 약하다.
강해져야 할 이유들이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생겨난다.
지도와 주위를 번갈아 보며 계속길을 걸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길을 걷다보니 어느새 인적이 드문 산으로 접어들었다.
산길을 오르고 또 올랐다.
눈 쌓일 준비를 하는 듯 가시처럼 앙상히 마른, 나무 사이로 비치는 겨울 햇빛이 차갑다.
간밤에 얼어붙은 흙이 발에 밟혀서걱거린다.
아직 얼어붙지 않은 계곡물이 졸졸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계곡물 소리에 섞여 인간의 처절한 비명 소리도 울린다.
눈을 뽑는다고 윽박지르는 소리, 즐겁게 킥킥거리는 소리, 온몸을 구타하는 소리는 더 크게 들린다.
산길 한쪽에서 인간 셋이 하나를 사냥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이지만, 나는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다.
탐지 스킬은 비활성화.
하지만 그 상태로도 멀리 놈들의 존재는 세세히 감지된다.
비명은 높게 거듭되다 잦아들었다.
아무도 구해 주러 오지 않는다는 걸, 비명은 상대를 쾌감에 차게 만들 뿐이라는 걸 깨달은 걸까.
소년은 살해당하지는 않았다.
묶인 채로 끌려가고 있다.
'노예사냥인가.'
신경 쓰지 않고 계속 걸었다.
적당히 그들을 지나쳤다.
갑작스런 나의 등장에 움찔거리던 인간 셋은 내가 별말 없이 지나치자 안도한 것 같다. 그들을 지나 계속발걸음을 떼려 할 때였다.
- 파밧!
소년이 빠르게 내 뒤에 숨었다.
목과 팔다리가 묶인 상태에서도, 단번에 구르듯 내 뒤에 몸을 숨긴것이다.
세 인간이 나를 보고 잠시 정신이 팔린 사이 감행한 도박이다.
"도와주세요!"
세 남자가 나를 보고 다시 몸을 긴장시킨다.
나는 그들을 완전히 무시한다.
그리고 소년을 향해 물었다.
"내가 왜?"
당연하게 구출을 요구하는 태도가 약간의 호기심을 일으킨다.
"도와, 도와주세요!"
질문에 답하는 대신, 목에 밧줄이 걸린 소년은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한다.
"이들은 악당이에요! 노예사냥꾼이 란 말이에요!"
물론 그것도 대답은 되지 않는다.
나는 고개를 갸웃한다. 그대로 지나가지 않는 나를 보고 세 인간은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못이 촘촘히 박힌 쇠몽둥이를 든, 검은 머리칼의 남자가 옆에 대고 작게 속삭인다.
"저거 별로 좋은 갑옷 아니야.
칼이 무식하게 커서 쫄았는데, 속이 텅 빈 허세용인 거 같아."
"확실하오?"
"내가 이 짓 하기 전에 대장장이 견습했다니까."
빠르게 상의를 끝낸 사냥꾼 대표가 나를 향해 위협적으로 한숨을 푸욱내쉬며 말한다.
"하아. 씨. 거, 우리 장사하는 중이니까 빨리 가던 길 가지?"
"우리는 네크론 신사회라고."
"네크론인가."
여기가, 잡템을 버리기 꽤 적당한 장소인지도 모른다.
"그래! 일 크게 만들기 싫으면.
- 퍼걱!
배낭에서 '살인자의 참수 도끼'를 꺼내 던졌다.
뚱뚱한 놈의 배를 뻥 뚫고 날아간도끼는 저 멀리 날아가 나무그루를 뚫고 땅에 박힌다.
"이러면 일이 커진 건가?"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이어 '고통으로 얼룩진 어깨 갑옷'을 꺼냈다. 한숨을 쉬며 위협하던 놈의 어깨를 단번에 짓뭉개 버렸다.
뼈와 살이 뒤섞여 피와 함께 사방으로 튀었다.
강철 견갑은 아예 놈의 오른팔을 날려 버리고 폐 부위에 깊이 박혔다.
아무런 기술도 쓰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쌓아 온 힘 스탯은 이 정도의 능력을 발휘한다.
견갑과 함께 데구루루 굴러가며, 비명도 못 지를 고통에 꺽꺽거리는 놈에게서 흘끗 고개를 돌렸다.
하나 남았다.
"히, 그1, 끄아, 히익.
덜덜 떨며 뒷걸음치며, 어디로 도망칠지 필사적으로 생각하는 놈의 발목에 '길 잃은 자의 비수'를 던졌다.
잘린 발목에서 피가 뿜어진다.
사방이 고통으로 시끄럽다가, 곧잦아든다. 아까 소년의 비명이 잦아들던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다.
'망했군.' 셋 다 쇼크로 금세 죽어 버렸다.
한동안 규격 외의 것들만 상대해서 잠시 잊고 있었다.
인간은 원래 이렇게 약하다.
길을 지체한 데다가, 이런 식이면 얻는 것도 하나 없다.
살려 뒀으면 하다못해 근처 네크론신사회에 대한 정보라도 고문으로들을 수 있었을 텐데, 충동적으로 짓이겨 버린 거다.
늪의 악령에게 얻었던 세 잡템은 역시 수거하지 않기로 했다.
닦고 쓸 가치도 없어 보인다.
혹시나 쓸 게 있나 싶어서 대충시체를 뒤졌다.
붉은색 신분증 세 장이 나왔다.
'역시 네크론이군.'
사칭하는 것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무래기다.
어디서 죽어 자빠져도 누가 찾기는 할까 싶었는데, 그중 한 놈의 품에 꽤 두꺼운 수첩이 들어 있다.
'이 수첩은. 익숙한 느낌인데.'
수첩에는 페이지마다 왼쪽 상단에 인간의 이름이 적혀 있고, A, B 같은 등급과 함께 가격이 적혀 있다.
문득 특이한 문장이 눈에 띈다.
〈레나, 탈주 중. 〉
〈현상금 10세이론. 〉
164화 매듭 (4)
***************************************************
수첩을 앞으로 넘겼다.
왼쪽 위에 인간들의 이름이, 옆에는 각각의 등급이 기록되어 있다.
'레나, A등급, 10세이론.
다시 그 문장에 눈에 간다.
처음 봤을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넘겼던 기록이다.
사냥 장부.
레나의 이름이 대체 왜 여기 적혀있었던 걸까?
한 가지 가설이 머릿속을 스친다.
루비아와 함께 있을 때는 레나가 사냥당해 있었고, 동굴에서 만났을 때는 탈출해 있던 거다.
그렇다면 얼핏 맞아떨어진다.
레나가 대부분의 인간은 그저 자신을 착취하려 한다고만 말하던 게 연이어떠올랐다. 그 착취에, 노예로서의 생활이 포함되어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인간을 혐오했던 게.
- 철컥.
고개를 흔들었다.
곧 생각을 지워 버렸다.
어쨌건 레나는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본인 입으로 말하지 않는 이상 멋대로 짐작할 필요는 전혀없다.
물론 여기 적힌 인간이 그냥 같은 이름일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으. 으으어.
수첩을 펄럭이고 있는데, 옆에서 작은 신음 소리가 들려온다.
소년이 있는 것도 깜빡 잊었다. 험하게 맞아 멍든 얼굴이 보인다. 얼굴에 공포가 가득하다.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기로 했지만, 레나도 혹시 이런 꼴을 겪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소년이 한층 더 가엾게 생각됐다. 녀석을 바라보고 말을 걸었다.
"이 정도면 도와준 건가?"
"히끅!"
소년이 딸꾹질을 하며 덜덜 떤다.
도와달라고 자신감 있게 외치던 녀석이 보이던 태도로는 어색하다. 고맙다고 귀찮게 달라붙을 줄 알았는 데, 예상외의 모습이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곧 상황을 이해했다.
소년의 발치에, 그가 말한 '악당'들의 몸이 참혹히 짓이겨져 있다.
물론 구해 주길 바랐을 거다.
하지만 정작 압도적인 폭력의 맨살을 마주하자, 고마움보다 공포를 먼저 느껴 버린 게 아닐까.
어깨 갑옷이 몸 절반을 으깨 버린 검은 머리 남자의 시체가 소년의 가장가까이에 있다. 놈의 시체는 내가 봐도 좀 징그럽다.
쇼크가 너무 심했던 탓일까? 하얀수정체가 안와 밖으로 약간 튀어나와있다. 소년은 몸이 굳은 채 이만 딱딱 부딪친다.
'버리고 갈까.'
역시 버리고 갈까 했지만, 덜덜 떠는 모습을 앞에 놓고 보니 문득 루비아도 생각난다. 약간은 신경 써 줘도 좋을지 모른다.
"어이, 인간."
"으. 으어.
실패다.
소년은 한층 더 햇햇이 굳어 말을 더듬었다.
나는 곧 내 잘못을 깨달았다.
'호칭이 잘못됐나.' 별생각 없이 불렀다. 인간이라고 부르는 순간, 상대가 나에 대해서 무슨 생각을 할지는 뻔하다.
- 꿀꺽.
침을 삼키며 심호흡하는 소년을 향해슬쩍 돌아섰다.
수습이 필요하다.
[가면무도회Masquerade 활성화!]
[짧은 시간 동안 얼굴에 '인간'의 모습을 덧씌습니다.]
[변신: 바티엔느 폰 레안드로]
[65% 흡사합니다.]
[남은 부분은 무작위 처리됩니다.]
[제한 시간: 10분]
[다음 사용까지: 6시간]
오래간만에 쓰는 스킬이다.
어차피 근처 도시에 갈 때까지는 한참 남았다. 투구를 벗어 소년을 안심시킬 생각이다.
이제 신뢰할 수 있는 말끔한 인간으로 보이지 않을까?
- 철컥.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으, 으, 으아아!"
소년은 뭉개진 시체를 밟고 마구뒷걸음질 쳤다.
'뭐야, 반응이 왜 이러지?'
예상과 전혀 다르다.
압도적인 폭력을 목도하고 가만히 굳어 있기만 하던 소년은, 이번에는 아예 악몽에 나오는 귀신이라도 본듯 겁에 질려 뒤로 물러났다.
"유, 유령이.!"
'유령이라고?'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나와 소년뿐이다.
칼을 들어 비치는 모습을 확인했다.
스킬은 이상 없이 제대로 먹히고있다. 뭐가 잘못됐는지 당장 깨닫기는 힘들다.
"히, 히익.!"
- 철퍽!
소년이 으깨져 흐르는 내장을 밟고 미끄러지듯 바닥을 굴렀다.
온몸에 피로 칠갑을 한 채 어떻게든 발버둥 치며 내게서 도망가려 한다.
'어쩌겠다는 거지?'
팔짱을 끼고 가만히 녀석을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위기회피(리가 발동합니다!]
[소년을 살해하십시오!]
[다음 발동까지: 167:59:59.]
'뭐야? 이런 허약한 인간이 내위기가 된다고?' 은은히 돌던 펜던트의 빛이 다시 사라졌다.
레나에게 받은 펜던트.
시나리오 클리어 아이템이라며, 특별한 권능이 부여된 아티팩트.
레일리와 함께한 밤에 나를 살린 펜던트의 권능이 다시 발휘된다.
하지만 농담에도 정도가 있다고 불평하고 싶은 심정이다.
눈앞에서 떠는 소년은 손가락으로 살짝 눌러도 죽을 것 같은 인간.
- 철컥.
그럼에도.
몸이 펜던트를 신뢰한 탓일까.
대검을 잡은 손에 조심스레 힘이 들어갔다.
'정말. 죽여야 되나?'
- 흠칫!
꽉 잡은 대검을 보고 뭔가 눈치챈건지, 소년의 몸이 경련한다.
- 철퍽!
벌떡 일어선 녀석이 본격적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산책하듯 가볍게 녀석을 쫓는다.
주위에는 어차피 나와 소년 말고는 아무도 없다.
아직도 혼란스럽다.
"으아아아아아!"
소년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간다.
펜던트를 흘끗 바라봤다. 그 위에 뜨는 창을 확인한다.
[??? 살해하십시오.]
[다음 발동까지: 167:58:59.]
걷듯이 뒤를 쫓으며 생각한다.
흙덩이를 뭉쳐 던져도 죽일 수 있을것 같은 약한 인간이라, 오히려 살해가 망설여진다.
너무 쉽게 깨어질 작은 유리잔 앞에서는 오히려 내 쪽이 조심스러워지기 마련이다.
왜 펜던트는 이 상황을 위기라고 판단했을까? 소년을 놓치는 것에 대한 걱정보다 그게 더 궁금했다.
- 쏴아아아. I
길이 조금씩 좁아졌다.
낭떠러지라고 부를 만한 곳이 왼편에 펼쳐지고, 저 아래 깊이 빠르게 흐르는 강물 소리가 들린다.
나는 소년의 네 걸음 뒤에서 그를 쫓는다.
잡으려면 언제든 잡을 수 있다. 죽이려면 언제든 죽일 수 있다.
그러나 대체 뭘 하는지 보고 싶은 마음이 살해와 포획을 막는다.
그때 였다.
"히, 히익!"
뒤를 힐끗 돌아본 소년은, 내가 바로 뒤에 있는 걸 확인하고 놀라 발을 삐끗한다.
'이런.,
"으아아아아아악!"
깡마른 몸뚱이가 아래로 빠르게 떨어진다.
새는 가끔 땅 위를 걷지만 인간은 하늘을 날지 못한다.
찢어질 듯한 비명이 계속 절벽을 타고 울리다가.
- 첨벙!
마무리된다.
'잡았어야 했나.'
소년은 강이 흐르는 낭떠러지 아래로 멸어졌다. 굳이 몸을 날린다면 살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소년을 죽이라는 펜던트의 메시지가 나를 주춤하게 했다.
묘한 기분이었다.
가만히 아쾌를 바라봤다. 까마득하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탐지도 안 되는 높이다.
'죽었겠지.'
머리를 흔들었다.
아래까지 찾아가서 수색하기에는 갈 길이 멀다.
나는 계속 걸었다.
더 이상 시끄러운 일에 얽혀들고 싶지 않았다.
은신 스킬을 사용해 숨어 걸었다.
해가 지고 다시 솟아나고, 달은 희미하다 다시 또렷해졌다.
표지판을 따라 사흘쯤 걸었을 때, 익숙한 회색 성벽이 보였다.
유블람이 었다.
성벽에 천천히 겨울 노을이 졌다.
성문으로 횃불을 든 경비병 둘이 나와 자리를 잡았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도시에 볼일이 있는 건 아니다.
보육원 근처 마을로 걸어갔다.
커다란 목재소에서 나무 켜는 소리가 들린다.
저 멀리 와인 양조장이 보이고, 앞쪽에 이 층짜리 보육원 건물이 금방 눈에 들어온다.
날이 추워서인지 밖에서 뛰노는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다.
레나를 감싸고 좋아하던 아이들은 이제 없다.
'탐지.'
여기부터 조심해야 한다.
슬라임의 영역이다.
'역시. 다들 건물 안에 있어.'
하지만 예전에 본 슬라임 원장이 느껴지지 않는다.
잠시 자리를 비웠거나.
아예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예전 생에서도, 슬라임은 이곳을 다른 인간에게 맡기고 떠났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관리하는 성인자체가 없다. 위화감이 느껴진다.
'아예 보육원을 버린 걸까?'
그러면 일이 편해진다.
은신 상태로 안쪽으로 파고들어 갔다.
당연히 나를 발견한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레나 동생의 얼굴은 분명히 기억한다.
2층에서 곧 그녀를 발견했다.
'독실.?'
레나의 선명한 이목구비를 빼다 박은 여자아이가 얌전히 두 손을 모으고 의자에 앉아 있다.
놀라게 하지 않으려면 조심해야 한다.
일부러 밖으로 나가서 문을 두드렸다.
- 똑똑.
"들어오세요."
'들어오라고?' 의외로 침착하다.
말투가 달라졌다.
자매의 시간을 방해하기 싫어서 아이와 말은 거의 섞지 않았지만, 보육원을 거점으로 3개월이라는 긴시간을 보냈다. 자매가 함께하는 모습은 많이 지켜봤다.
적극적이고 귀여운 성격이었는데.
물론 레나와 함께일 때와, 혼자 있을 때 태도가 확연히 달라지는 건지도 모른다.
어쨌건 얼굴은 분명 그녀다.
은신을 해제했다. 그대로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두 개의 그린 듯한 새까만 눈동자가 나를 가만히 바라본다.
아이는 진심으로 궁금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묻는다.
"그런데 누구세요?"
"레나 친구다."
"언니 친구요? 이런 친구가 있는 줄몰랐네요."
나는 레나가 쓴 편지를 내밀었다.
"봐. 증거야."
여자아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편지를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진짜 언니 글씨네요."
"그럼."
"절 데려오라고 했다고요?"
눈을 반짝반짝 빛낸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아이는 조금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석연찮은 기분이 들어 물었다.
"혹시 가기 싫은 거니?"
"무슨 소리예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같이 가요."
아이는 내 손을 잡고 흔들었다.
몸에 약간 헐렁한, 붉은 로브를 입은 아이를 가만히 바라봤다.
아이는 어딘가 텅 빈 느낌이었다.
하지만 전에 본 것과 정확히 같은 인상착의다. 착각은 아니다.
뭔가 이 인간 소녀의 마음에 좋지 않은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난 그저 의뢰를 받았을 뿐인 처지.
지금은 빼내는 게 급하다.
- 팟!
아이를 안고 그대로 2층 창문으로 솟구쳤다. 감시자의 기척도 없다.
몸이 한참 날아 저 멀리 떨어졌다.
그라스미어로 갈 일만 남았다.
늪의 악령과 싸워 가며 대비한 게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렇게 쉽게 되나.'
빨간 로브를 입은, 품에 안긴 아이는 잠시 조용했다.
금세 그라스미어로 가는, 잘 닦인길로 접어들었다.
아이가 내게 물었다.
"둘은 언제부터 친구가 됐어요?"
"언제부터 라.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동굴에서 처음 만난 시점으로 대답했다.
"금방 친해졌네요. 신기하네."
노을이 사라지고 점점 더 사위가 어두워졌다.
아이는 흔들림 없는 까만 눈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투구는 언제 벗을 거죠?"
이제 곧 그라스미어에 도착한다.
하루에 한 번밖에 쓸 수 없는 스킬을 남용하는 것도 좋지 않다.
투구를 벗을 생각은 없었다.
말을 돌리기 위해, 다른 질문을 생각해 냈다.
"글쎄. 혹시 뭐 필요한 거 없니?"
지나치게 늦은 질문 같기도 하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담을 거 있나요?"
"담을 거?"
"구슬 두 개 담을 만한 거요."
인적이라고는 없는 깜깜한 길에 마른나무들이 띄엄띄엄 서 있다.
구슬 두 개.
나는 배낭을 뒤지기 위해 걸음을 약간 늦췄다.
그리고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구슬은 어디 있는데?"
- 투둑.
그린 듯이 새까만 두 눈이 앞으로 밀려 나왔다.
안쪽에 눌려 있던 두 개의 눈이 솟아났다.
한쪽은 붉고, 다른 한쪽은 초록인 무기질의 두 눈이 겨울밤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떨어진 까만 구슬 두 개를 쥔
아이가 말을 이었다.
"힘들게 세공한 거라, 버리기가 좀아깝거든요."
165화 매듭 (5)
***************************************************
"너는.!"
나는 깜짝 놀라 소녀를 바라봤다.
그 얼굴에서 새로 솟아난 두 개의 눈은 익히 알고 있던 것이었다.
성인 남자에서, 요염한 젊은 여자로 몸이 바뀌면서도 유일하게 변하지 않았던 한 쌍의 오드아이.
슬라임이 다.
"저를. 아세요?"
- 스르록.
질문을 하는 입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처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틈도 없었다. 물컹거리는 액체로 변한 소녀의 손이 건틀렛 사이로 녹아들어왔다.
'위험하다!'
또 같은 꼴을 당할 수는 없다.
칼을 잡고 뒤로 몸을 솟구쳤다.
하지만 미끌거리는 점액은 이미칼자루 전체를 도포한 뒤였다.
뒤로 당기려 해도 마찰력이 전혀없었다.
쑥, 하는 느낌과 함께 칼자루가 가볍게 손을 빠져나갔다. 어떻게든 다시 잡아채려는 순간이었다.
- 펑!
슬라임의 상체가 크게 늘어나며 파도치듯 얼굴을 덮쳐 왔다.
- 철컥!
갑작스러운 공격에 나동그라지듯몸을 굴려 물러났다.
몇 바퀴를 구른 뒤 급하게 일어나앞을 노려봤다.
슬라임은 아예 대검 절반 정도를 끈적거리는 몸으로 감싸고 있었다.
점액질로 이루어진 몸은 날에 전혀상하지 않았다.
'당했다.'
완벽하게 기만당하고, 기습당했다.
슬라임이 아이의 형태로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설마 정보가 유출된 건가? 그럼어디까지? 왜 혼자 나를 기다리고있지? 어떤 사태가 벌어지든 혼자 감당할 수 있어서인가? 아니면.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난타했다.
아직 소녀의 형태를 유지한 녀석이 입술을 작게 꼼지락거렸다.
"칼을 못 쓰게 되셨군요."
멍청하게 슬라임을 쳐다보다가, 그만 엉뚱한 말을 내뱉어 버렸다.
"네 몸은. 산성 액체 아니었나?"
보육원에 시비를 걸러 온 인간을 녹여 죽이는 모습을 본 적 있다.
나도 녹아 죽었다.
그러자 슬라임은 왼쪽 입꼬리를 비뚜름히 찢어 올렸다. 인간이라면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길이였다.
"호오. 그런 것도 알고 계세요?
저에 대해 꽤 조사하셨나 보군요."
"부식시키는 것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미끄러지는 건 더 쉽죠."
슬라임은 나와 말을 섞고 싶은 듯했다. 정체를 파악하고 싶은 걸까.
대꾸하지 않았다.
반격을 준비해야 한다. 손목에 두른부적 팔찌를 확인했다.
'마흔다섯.'
불타지 않은 매듭 마흔다섯 개가 남아 있다. 말파스의 인장을 남기지 않고 마법을 쓸 수 있는 한계다.
잠시 녀석을 가만히 노려봤다.
슬라임은 몸을 앞쪽으로 늘이며 말을 이어 갔다.
"레나는 어떻게 된 거죠? 갑자기 길드 지부장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리더군요. 혹시 당신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
'벌써 아는 건가.' 하긴 계파가 달라도 같은 길드다.
녀석을 그때 본 이너서클의 고위간부라고 생각하면 정보가 빠른 것도 자연스럽다.
"그래도 동생은 생각나나 봐요.
어떻게 된 일인지 본인을 꼭 만나보고 싶은데, 데려와 주시죠."
"어디 있는지 안다면, 직접 가서 만나지 그러나?"
슬라임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쪽도 사정이라는 게 있어서.
귀찮은 게, 그 아이 근처에 붙어있기도 하고요."
샤루니안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진짜 동생은 어디 있지?"
"레나가 직접 오면 만나게 해 줄거예요. 아니면.
"아니면?"
"절 이겨 보세요. 알려 드릴지도 모르죠. 무기도 벳긴 주제에,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지만."
'젠장.' 그녀의 말대로다. 어처구니없는 기습으로 칼을 빼앗겼다.
물론 애초에 금속으로 벨 생각은 아니었다. 늪의 악령으로 연습할 때부터 결심했다.
마법으로 제압한다.
하지만 매개로 검이 필요하다.
검아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꼭 그렇지는 않다. 그저 매개체에 지나치게 익숙해진 건지도 모른다.
맨손으로는 안 될까?
- 철컥.
주먹을 쥐었다. 아이작이 몸을 점거하고 있을 때를 떠올렸다. 그는 창가로 걸어갔다.
창문을 열고, 칠흑 같은 밤을 곧장 맨손으로 얼렸다. 얼어붙은 공기에 번개를 흘렸다.
'된다.'
칼에 익숙해져 있을 뿐.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점은 있었다.
아이작이 맨손으로 발동했을 때는 마법의 위력이 가벼웠다.
혼합 마법도 쓰지 않았다.
위력이 약한 건지, 약하게 써야만 했던 건지는 알 수 없다.
어느 정도로 출력할 수 있을까?
마흔다섯 개의 매듭을 태우기도 전에 몸이 부서질지도 모른다.
어쨌건 선택권은 없다.
이대로 맞아 죽거나 또다시 녹아죽지 않으려면, 해 볼 수밖에.
"이기면, 정말 알려 주는 건가?"
소녀의 모습을 한 슬라임은 몸을 물컹거리며 씩 웃었다.
"당연하죠."
"그럼. 나도 날 이기면 레나에게 안내해 주도록 하지."
물론 거짓말이다.
싸우다 죽더라도 레나를 위험에 처하게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결빙.'
오른쪽 주먹에 조용히 차가운 기운을 불어넣었다.
얼음의 힘으로 슬라임을 구속해 볼생각이었다. 늪의 정령에게는 몹시효과적으로 먹혔던 공격이다.
손목에 두른 부적 팔찌에서 은은한 열이 느껴졌다. 오른쪽 주먹에 차가운얼음이 맺혀 갔다.
'된다.'
아이작만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몸의 주인인 나도 가능하다.
'더블 캐스팅, 질풍.'
왼쪽 주먹에는 바람을 힘을 불어넣었다. 부적 팔찌에서 또 하나의 매듭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어라?"
슬라임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질주.'
- 팟!
앞으로 달려 나가며 곧장 주먹을 휘둘렀다.
[냉기 폭풍 Lv. 1을 발동합니다!]
[분출 매개체가 없습니다.]
[현재 기준, 초당 체력이 0.241%감소합니다.]
- 타닥!
샤루니안이 매 준 부적 팔찌 매듭세 개에 주화況火가 붙었다.
바람을 타고 얼음이 뻗어 나갔다.
푸른 냉기가 빠르고 넓게 밤을 얼려갔다. 질주의 가속력으로 뻗은 주먹끝에, 하얗게 뭉친 폭력이 슬라임을 직 격했다.
- 펑!
새까만 밤이 폭발하듯 깨졌다.
하지만 슬라임은 여전히 의연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저도 차가운 건 좋아해서."
점액으로 된 얇은 막이 소녀 앞에 원형으로 쳐져 있었다.
신체 일부로 만든 장막의 겉면은 차갑게 얼어붙었지만, 본체는 흔들림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법. 저항?"
소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저희를 고문해 왔지요."
w.r
"형체가 없다고 고통을 느낄 수 없는건 아니에요. 진화할 수 없는 것도 아니지요."
씁쓸하게 웃는 슬라임 근처로 부서진 얼음 조각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런데, 마법검사인가요? 아니면 칼은 위장? 어느 쪽이건 놀랍네요.
예측 못 한 공격이었어요."
슬라임이 고개를 좌우로 갸웃하며 허리를 뒤로 젖혔다.
- 우두둑!
본뜬 인간 소녀가 척추동물이라는 사실을 재현하는 것처럼, 등 주위에서 묘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연기 스킬이 있다면 높은 랭크를 자랑할 것 같은 녀석이다.
'너무 과소평가한 건가.'
인정해야만 했다. 제단에서 보여 준힘이 슬라임의 능력 전부가 아니었다.
비단 전투력뿐만 아니다. 정보력과 성격도 생각 이상이다.
어떻게든 도망은 갈 수 있으리라생각했는데, 레나 동생을 일찍부터 숨겨 놓고 자기가 분장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너는. 대체 누구냐?"
"제가 묻고 싶은 말이군요."
장막으로 마법을 막아 낸 슬라임의 붉은 눈동자가 은은한 빛을 냈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당신 같은 분이 갑자기 어디에서 나타난 거죠? 힘을 숨기고 있는 게 저뿐만은 아니겠지만, 요즘 들어유난히 그 사실을 자주 깨닫네요."
그녀는 투창을 하는 것처럼 오른쪽몸을 뒤로 젖혔다. 강한 탄력을 주며 주먹을 앞으로 뻗어 냈다.
슬라임의 녹색 눈이 반짝였다.
- 쌔앵!
'맞으면.!'
그대로 부서진다.
몸을 젖혔다. 주먹이 가슴팍을 스치며 갑옷을 우그러뜨렸다. 자세가 무너지며 뒤로 데굴데굴 한참을 굴러나가떨어져야만 했다.
'강하다.'
칼을 들고, 최상의 컨디션에서 정면으로 싸워도 밀릴 것 같은 힘과 빠르기 였다.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강한 마법저항력까지.
승산은 낮다.
다른 수단을 쓰지 않는 한.
- 휘이이앙
문득 차가운 밤바람이 불어왔다.
겨울 해는 더 빨리 지고, 겨울밤은 더 어둡다.
가까스로 다시 일어서 슬라임을 노려봤다.
아직 8할 정도는 가녀린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달도 없는 밤인데 주위로 집채만 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 같았다.
어둠보다 짙은 그림자가.
- 달그락.
가슴팍을 점검했다.
갈비뼈 두 개가 부러져 있었다.
이대로라면 여기서 곧 파괴된다.
승부수를 던져야 한다.
나는 뭘 믿고 슬라임을 해치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걸까?
갑옷 안쪽에서 뭔가 걸리적거린다.
부러진 갈비뼈는 아니다.
기스-제-라이의 칠흑 단검.
'이거다.'
후작의 입에서마저 감탄사를 뱉게 했던 무기다.
문제는 이걸 어떻게 쓸 것인가.
아무리 날카로운 날도 닿지 않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
- 꾸르르록.
슬라임은 몸을 넓게 늘어뜨리며 내주위를 천천히 흐르듯 감싸고 있었다.
몸은 정해진 부피가 없는 것처럼 끝도 없이 늘어났다.
가만히 놓아둘 수는 없었다.
끈적거리며 바닥을 덮어 가는 액체에 간헐적으로 마법을 시전했다.
차가운 기운이 발작적으로 흩뿌려졌지만, 슬라임은 붉은 눈을 반짝이며 빠르게 장막을 쳤다.
물컹대는 몸은 일부만 바스러지며 점점 더 나를 가까이 감싸 왔다.
샤루니안이 매 준 팔찌의 매듭은 어느새 서른두 개로 줄어들었다.
냉기 폭풍을 연달아 사용한 영향이라도 되는 것처럼, 주위의 기온은 점점 더 내려갔다.
- 투둑.
뒤로 한 걸음 물러났지만 도망갈곳은 없었다. 갑옷의 관절 부위에 낀 얼음만 부서져 나갈 뿐이었다.
조금만 더 끌어들인다. 한 번에 승부를 보아야 한다.
"차가운 건, 저도 좋아한다니까요.
슬슬 끝을 봐도 되겠습니까?"
길게 몸을 늘어뜨린 소녀는 이제고작 다섯 걸음 떨어져 있다.
위험할 정도로 끌어들였다.
체력은 20% 정도 깎였지만, 매개없이 시전하는 마법에도 어느 정도 감을 잡았다.
반격할 차례.
이게 먹히지 않으면 끝이다.
"그럼 뜨거운 걸로 하지."
나직이 내뱉으며 온몸의 회로를 가동시 켰다.
[질풍Blast Lv. 1을 발동합니다!]
[격발 Lv.2 & 질풍 Lv. 1을 혼합사용합니다!]
[숙련도가 매우 낮습니다.]
[마력 소모량이 300% 상승.]
[너울거리는 불꽃.]
온몸에 새겨진 〈회로〉가 뜨겁게 달궈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대로 발동하지 않았다.
혼합 마법의 장점은 그 위력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2차 마법을 하나의 단독 장전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
[마법 장전]
[더블 캐스팅]
한 차례 더 혼합 마법을 압축시켰다.
두 줄기의 새빨간 불꽃 바람이 양손에 축적됐다.
[체력이 초당 3.7% 감소.]
한계다.
[격발의 플테어 Lv. 1을 발동합니다!]
양손에서 강렬한 화염이 전방으로 터져 나갔다. 슬라임은 흠칫 놀라면서도 곧바로 십여 겹의 방어막을 쳤다.
차갑게 얼어붙었던 밤에 불덩어리가 꽂히며 사방에서 하얗게 수증기가 일어났다.
- 콰과광!
"제법이군요. 하지만 힘을 낭비하시는.!"
- 치아아아악!
시야가 완전히 가려졌다.
걷히려면 이틀 밤은 지나야 할 것 같은 자욱한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실패.'
하지만 불꽃은 끝내 장막을 뚫지 못했다. 온몸에서 단번에 힘이 쑥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매듭 열 개가 한 번에 타올랐다.
건틀렛은 용광로에 들어간 쇳덩이 처럼 붉게 달아올랐고, 갑옷 안의 뼈는 녹아내릴 듯 뜨거웠다.
[주의! 체력이 30%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맨손으로 행한 무리한 마법 압축의 대가는 컸다. 하지만 이게 내가 생각한 승부수는 아니다.
'검기.'
- 우우응!
품에서 뽑아 든 기스-제-라이의 칠흑 단검을 쥐고 앞을 향해 뛰어들었다. 오랜만에 잡은 단검이 진동하며 속삭였다.
'죽여라.'
166화 매듭 (6)
***************************************************
'죽여라.
손이 파르르 떨렸다.
어두운 의지가 좌리를 틀듯 몸을 타고 맴돌았다.
〈그 단검은 원하는 것을 행하는 단검인걸. 〉
기스-제-라이의 말이 떠올랐다.
이게 내가 원하는 거라고?
그녀는 죽었다. 내가 직접 부서진 유해를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지금 그 말이 사실인지, 이 칼은 사실 그저 마음을 빼앗는 마검인지 물어볼 방법은 없다.
'죽여.
속삭임은 흙 속을 파고드는 뿌리처럼 정신을 잠식했다.
아이작에게 빙의당했던 악몽이 다시 한 번 떠오른다.
이 위험한 느낌이 단검 사용을
망설여 왔던 이유다. 하지만 죽음의 위기가 고작 반걸음 앞에 닥쳤다.
이것저것 가릴 여유는 없다.
'아낄 것도 없지.'
자욱한 수증기 속, 이제 거리는 0.
도박을 걸 시간.
새하얀 글자들이 꿈틀거리며 살아움직이는 단검을 내질렀다.
글자 하나가 칼날을 뛰쳐나온다.
- 찌이이익!
기괴한 소리와 함께 첫 번째 막이 단번에 크게 찢어졌다.
- 뚜둑.! 뚜두둑.!
얇은 종이처럼 찢긴 첫 번째 막과 다르게, 견고한 느낌의 두 번째방어막은 약간 버렸다.
그러자 한 글자가 더 뛰쳐나왔다.
눈처럼 새하얀 글자들이 두 번째방어막을 갉아먹었다. 방어막은 곧폭설 쌓인 나뭇가지처럼 뜯겼다.
- 파직! 파지지지직!
"마법은 눈가림이었나?"
슬라임이 세 번째 막에 힘을 끌어모았다. 자욱한 수증기 안쪽의 붉은 눈과 초록색 눈이 번갈아 번뜩였다.
사방을 점거한 슬라임의 '몸'이 출렁거리며 크게 움직였다.
글자들을 덮치듯 감싼 뒤 그대로 찌그러뜨리려 하는 것 같았다.
- 치익! 치이이익!
하지만 글자 하나가 단검에서 더빠져나와 강한 빛을 내자, 덮쳐 오던 점액의 파도는 놀랄 정도로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슬라임의 몸이 순조롭게 찢어졌다.
상대의 〈눈〉뒤에 이어진 희미한 신경망 같은 게 단검을 쥔 나에게 느껴지고 있었다.
'약점인가.?'
슬라임의 몸을 찢어 가는 글자들이 내게 힘을 더 달라고 요청했다.
산장까지 쫓아온 후작에게 저항할때와 비슷한 상황이다.
그때는 줄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뼈 아래, 아이작이 빼곡하게 새긴루-륨 회로가 충분히 예열된 채로 작동 중이다. 몸 곳곳에 뻗은 회로가 단검에 힘을 전달했다.
- 파지지직!
방어막이 한층 더 격렬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슬라임은 뒤로 물러났고, 글자들은 신이 난 듯 쫓아갔다.
핵을 보호하는 슬라임의 몸을 찢고 깨뜨리며 착실히 부피를 줄여 갔다.
"어디서 이런 걸.!"
슬라임은 발작적으로 반격을 시도 했지만 이미 힘 빠진 상태였다.
피하거나 막아 내기도 쉬웠다.
그나마 손 주위로 오는 공격들은 하얗게 빛나는 글자의 위세에 눌려근처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단검에는 절반 정도의 글자가 남아있었지만, 더 사용하지 않아도 이대로 충분할 것 같았다.
슬라임의 몸은 이제 1/5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갉아먹힌 몸은 하얀 재로 변해
사방에 흩어졌다. 다시 본체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승리는 금방.
하지만 불안감이 느껴졌다.
'안. 떨어져?'
진동하는 단검이 손에 착 달라붙어떨어지지 않았다.
힘을 계속 빼앗아 가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단검이 멋대로 힘을 뽑아가며 팔을 휘두르고 있었다.
팔뿐만 아니라 몸 전체로 칼의
지배력이 퍼져 나가는 게 느껴졌다.
아이작에게 몸을 빼앗겼던 기억이 겹쳐 왔다.
이대로는 위험하다. 날카로운 경각심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아직은 괜찮다. 하지만 언제 완전히 칼에 홀려 버릴지 알 수 없었다.
'격발.'
힘을 전달하지 않았다. 손끝에서 칼자루를 향해 화염을 터트렸다.
- 퍼벙!
- 파각!
단검이 땅 아래로 박혀 들어갔다.
땅이 몇 갈래로 깊이 갈라졌다.
키 70cm 정도로 작아진 슬라임이 균열 근처에서 휘청거리다 겨우자세를 잡았고, 갉혀 부스러진 잔해는 균열 사이로 흘러 들어갔다.
'이 정도라니.!'
기스-제-라이의 단검.
여섯 글자가 새겨진 주술 단검의 힘은 생각보다 훨씬 더 강했다.
소모성이긴 했지만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한 번 극복하게 해 준것이다.
한편 씁쓸한 마음도 들었다.
'기스-제-라이는 나에게 이런 걸 줬는데. 그녀가 죽는 모습을 그냥지켜봐야 했다니.'
"제가 졌어요."
내 골반 즈음에 머리가 올 정도로 줄어든 슬라임이 작아진 입을 오물거리며 말했다.
승리의 쾌감은 없다.
아직 세 글자가 남아 있는 주술단검을 바라봤다.
몸이 지배당해서 그대로 슬라임을 죽일 뻔했다.
살해했다면 어떨까.
속삭이던 단검의 메아리가 아직도 머리를 맴돌고 있다.
살해. 정수 흡수.
애초에 그것을 위해 네크로멘서가 내게 넘겼던 단검이었다.
죽여 버릴까?
마법 저항과 산성, 의외의 물리력, 익히 알고 있는 감정勤定 능력.
레나 동생 따위 어떻게 되든 신경쓰지 않고, 기스-제-라이의 단검이 속삭이는 대로 죽이고 빼앗는다면.
슬라임에게 레안드로 후작 정도는 아니더라도, 기사 레일리에게 흡수한 것 이상은 넉넉히 가져갈 수 있었을 것이다.
아깝다는 생각이 비릿하게 머리를 맴돌았다.
단검은 멀리 내던졌지만 머릿속에 죽이라는 속삭임이 오히려 점점 더또렷해진다.
"패배를 인정합니다."
슬라임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러니 죽여야지.'
'빼앗아.'
'먹어 치워.'
- 철컥.
무심코 단검을 향해 걸어가는 내모습을 발견하고 억지로 다리를 멈춰 세웠다.
'나는.
어지러운 마음을 진정시켰다.
정수 흡수는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지겨울 정도로 할 수 있다.
일단은 레나 동생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야 한다.
작게 줄어든 슬라임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슬라임은 겁먹거나 흠칫하며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꽤 유쾌해하는 느낌이었다.
"진짜 아이는 어디 있지?"
그러자 질문이 되돌아왔다.
"글쎄요. 먼저 한 가지 여물죠."
"말해 봐라."
"제가 이겼다면, 레나에게 절 데려가셨을 건가요?"
그 자리에 발을 멈췄다. 전부 읽히고 있었다는 생각에 당황해서, 적절히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여기로 동생을 데리러 올 정도니레나를 무척 아끼시는 것 같은데, 위험에 노출시키셨을까요?"
슬라임은 빙그레 웃으면서 정곡을 찔렀다.
화도 내지 못하고 녀석을 멍하니 바라봤다. 할 말이 없어지자 결국협박이 튀어나왔다.
"너를 이대로 죽여 버릴 거라는 생각은 안 하나?"
단검은 땅에 꽂아 버렸지만 다시 주우면 된다.
이렇게 앙증맞을 정도로 작아진 상태라면, 마법으로 상대해도 먹힐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방어막을 만든 부피조차 잃어버린것 같았다. 하지만 슬라임은 조금도 풀이 죽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보고 당당히 말했다.
"레나 동생을 영영 안 찾을 생각이 라면 그러셔도 되겠죠."
흠칫하는 사이 슬라임은 오물거리며 말을 이어 갔다.
"제가 죽으면 제국 제3 본부에서 당신의 흔적을 찾아 곧바로 추적이 들어갈 겁니다."
〈정식으로 소개하지. 나는 제국 3본부장 레트릭 아에자르. 〉인간을 '줄이고자' 하는 T&T 내부의 마왕 추종 집단.
슬라임은 숨기지 않는다.
내게 사실을 그대로 툭 터놓고
이야기하고 있다.
"레나를 조사해 보라는 편지도, 사홀 뒤에 자동으로 어딘가에서 수도로 발송될 거구요."
레나 동생으로 공들여 분장하고, 구하러 오는 누군가를 차분히 기다리고 있었다. 거짓말이나 허풍은 아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냐?"
"지키지 않을 약속을 하셨으니, 저도 한 가지 조건을 걸겠습니다.
일단 당신께서 저희 쪽으로 오시는건 어떨까요?"
"너희. 쪽으로?"
"그렇습니다. 저희 편이 되어 주십시오. 레나 동생은 바로 넘겨드리겠습니다. 전, 이제 그녀보다 당신에게 훨씬 관심이 갑니다."
"뭐라고?"
"인간도 아니시지 않습니까? 그 힘을 가지고 지금 여기서 뭘 하고 계시는 건지 모르겠어서 말입니다. 당신을 꼭 제가 속한 그룹에 소개하고 싶어지네요."
정체가 들켜 버렸다.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는 것도 우습다.
눈앞의 슬라임은 스킬로 놀라운 감정勤定의 권능을 가지고 있다.
한차례 격렬한 전투를 거치면서, 내 정체도 파악하지 못했다는 편이 생각해 보면 오히려 부자연스럽다.
앙증맞게 줄어든 슬라임의 입이 오물오물 말을 이어 갔다. 발음은 또박또박 명확했다.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저와 함께하시죠. 제 얘기를 좀 들어보시겠습니까?"
슬라임은 사슴 아에자르가 푸르손의 제단에서 내게 했던 이야기를 다시 되풀이했다.
녀석들이 나를 설득하는 건, 이제이걸로 두 번째.
"거절한다."
내 단호한 대답에 슬라임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이 세계를, 이대로 놓아둬도 괜찮으시 겠습니 까?"
"마음대로 착각하지 마라. 너희들처럼 마왕 따위에게 구속받고 싶지 않을 뿐이니까."
"호오.
"너희들이 섬기는 왕이 강림을 하건 안 하건, 그딴 놈에게 이쪽이 의지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고."
"하하핫.
슬라임은 유쾌한 듯 보였다.
신성모독이니 어쩌니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호의적 태도로 말을 이었다.
"좋습니다. 그럼 말해 드리지요."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고개가 갸웃해졌다.
"뭘?"
"찾고 계시는, 그 아이의 행방에 대해 말입니다."
"동생의 위치를 알려 주겠다고?
그래서, 조건이 뭐지?"
슬라임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제 조건은. 급한 건 아닙니다."
"말해라."
"인간도 마왕도 아닌 제3의 길이 있다면 저도 그리로 가고 싶네요.
그런 길을, 언젠가 찾게 되면 말씀해주세요."
"괜찮으시죠? 나중에 제가 그런 길을 함께 걸어가도."
이 슬라임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푸르손의 충실한 추종자가 되기에는 고민이 좀 많은 녀석인지도 모른다.
"괜한 오해는 곤란해. 딱히 그런 걸 생각해 본 적은 없다고."
"알고 있어요. 지금은 그냥 되는 대로 사시는 거 같지만."
"보험은 걸어 놓는 거죠. 일종의 분산투자라고나 할까. 그럼, 아이 위치를 알려 드릴게요."
슬라임은 나를 묵묵히 안내했다.
언제 싸웠냐는 듯이 자연스럽게 유블람 쪽으로 걸어갔다.
인적이 드문 탓일까.
위쪽은 아직 인간의 모습이지만, 하반신은 슬라임의 모습을 숨기지도 않고 출렁거리며 걸었다.
작아진 몸이 시간의 변화에 따라조금씩 불어나는 것 같았다.
'압도적인 자기수복修復.
절반 정도의 글자만 칼날에 남은, 품속의 단검이 새삼 의식됐다.
당장 슬라임을 죽이면 저 능력을 빼앗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는 아니더라도, 파편이라도.
하지만 내키지 않았다.
꼭 레나가 위기에 처해서라거나, 그 동생을 구해 줄 수 없다거나, T&T의 내부 서클이 나를 추적해서 라고만은 말하기 어려웠다.
녀석을 해치고 싶지 않았다.
슬라임에게 잔뜩 신세를 진 뒤 그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이모저모로 고맙군. 내가 당신에게 해 줄 만한 건 없나? 〉〈글쎄요. 언젠가, 다른 슬라임을 보신다면 약간의 호의를 보여 주시겠습니까? 전 그걸로 충분합니다. 〉
"무슨 생각에 그렇게 빠져 계시는 건가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세계에 남은 슬라임은 극히 드물다.
마왕군 발호 이후에도 같다.
사실상의 멸종減種.
그때 녀석이 동족에 관해서 내게 했던 부탁은, 사실은 녀석 자신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적용될 거다.
나는 약속했다.
슬라임을 보면 호의적으로 대하겠약속은 썩은 잎보다 가볍고 물에 쓴 글씨처럼 지워지지만 전생자가 의지할 건 그것뿐이다.
아직 힘이 남아 움찔대는 단검을 무시한 채 가만히 걸었다.
다시 보육원을 지날 때였다.
"혹시 여기 있는 건가?"
탐지 스킬에는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마법으로 막힌, 내 능력이 차단되는 장소에 그녀가 있을지도 모른다.
슬라임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는 아니랍니다."
모두 뜯겨 황량해진 밤의 밀밭을 걸어갔다.
경비병과 육중한 성문이 자세히 눈에 들어온다.
루비아가 수레에 실려 나온 도시, 유블람이 다.
몇 시간 동안 걸어오며 슬라임은 성인 남성 한 명의 모습을 갖출정도로 부피를 회복했다.
처음 레나와 함께 만났던 말끔한 모습이었다.
'옷 모양까지 다 저렇게. 역시 대단하군.'
"오시죠."
고민할 것도 없이 슬라임은 똑바로 성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가 패를 꺼내 보이자 경비병은 한 마디 토도 달지 않고 딱딱하게 굳은 자세로 곧장 성문을 열었다.
밤의 성문이 놀랄 정도로 쉽게
개방됐다.
"여기도 너희 조직이 있나?"
"요즘은 더 쉬워졌습니다. 원래 다른 것들도 있었는데, 왜인지 다 죽고 도망가서 말이지요."
167화 매듭 (7)
***************************************************
"음."
"갑자기 4대 검주 중 한 명이 나타나서, 마약 밀매 패거리를 모두 몰살시켰다고 하더군요."
'이거, 내 얘기잖아?' 홈칫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으려애썼다. 주먹을 꽉 쥐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4대 검주라고?"
"유명인이 강림하셨죠. 레안드로 후작이 왔다더군요."
"후작이란 자가 한가한 모양이지?
이런 먼 곳까지 오다니."
"저도 좀 의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목격자들의 말에 따르면 검기劍氣를 자유롭게 쓰는 수준에다, 외모도 소문과 일치한다고 하더군요."
"외모?"
"특유의 회청색 머리칼이라든가.
잘 나오지 않는 색상이죠."
'이런.,
녀석 앞에서 마스커레이드를 쓰면 절대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투구를 벗고 스킬을 사용한다면, 그 학살극이 내가 벌인 일인 걸 곧바로 알아첼 게 분명하다.
어떤 반응을 보일까?
예측하기 어렵다.
쓸데없는 모험은 하고 싶지 않다.
슬라임이 말을 이었다.
"유블람 영주에게 심판받기 전에 자살하라고 명령하고, 정작 본인은 안 오고 다른 곳에 갔다더군요."
"혹시 사칭 같은 건 아닐까?"
슬쩍 떠보는 내 말에도, 슬라임은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글쎄요. 갑자기 바쁜 일이 생긴걸지도 모르죠. 어쨌건 유블람은.
그 뒤로 꽤 괜찮은 도시가 되었습니다."
"괜찮은 도시라고?"
"후작이 안 온 탓에, 오히려 언제올지 모른다며 행정관들이 제대로 일하기 시작했으니까요."
"죽었다는 소문이 여기까지 자자한 지금은 그런 걱정도 없을 겁니다만."
확실히 후작의 죽음을 왜곡해서 널리 퍼트리는 녀석들이 있었다.
뭘 감추려고 하는 줄은 몰라도.
전 국토에 퍼졌다고 해서 이상한것은 없다.
슬라임이 말을 이었다.
"어쨌건 힘의 공백이 생겼고, 제조직이 적당히 그 빈자리를 채워 놓고 있습니다."
"마왕을 섬기는 녀석들인가?"
"꼭 그런 건 아닙니다. 길드와는 관계없어요. 사적인 조직이죠."
하긴, 녀석이 숨기고 있는 역량을 생각한다면.
굳이 푸르손 패거리의 지원을 받지 않고도, 이런 성域 하나 정도는 가볍게 먹어 치울 수 있을 거다.
후작이나 기스-제-라이 정도는
아니라도, 웬만한 녀석들 기준에서도 격외格外의 마물임은 분명하니까.
이제 유블람은 슬라임의 조직이 관리한다는 이야기.
내가 벌인 일의 여파다.
생의 초반 벌였던 한 편의 자잘한 학살극.
경비대 패거리를 청소하는 일.
'그게 이렇게 이어지다니.'
거리를 걸을수록 느낌이 달랐다.
슬라임 말대로, 행정관들이 일을하는 건지, 거리는 예전보다 훨씬깔끔해져 있었다.
결국 인간을 움직이는 건 공포인지도 모른다.
레나와 함께 왔을 때 짙게 배어있던 마약 냄새도 희미했다. 슬라임은 대로를 익숙하게 걸어갔다.
서서히 동이 렀다.
"저기입니다."
붉은 벽돌을 쌓아 지은, 깔끔한 집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이는 저곳에 있습니다."
나란히 놓인 침대에서 뒤척이는 아이들이 탐지에 잡혔다.
안에 머무르는 아이는 네 명.
그 가운데 레나 동생처럼 보이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보육원 같지는 않군."
"예. 일반 가정집입니다. 저와. 서로 신뢰하는 '인간'들이죠."
성인 남녀 한 쌍이 한창 식사를 준비하는 게 느껴졌다.
- 똑똑.
문을 두드린 슬라임은 곧 안으로 들어갔다.
"아, 선생님.! 어서 오십시오!"
식사를 준비하던 40대 후반의
여자가 서둘러 나와 슬라임의 손을 맞잡았다.
작게나마 손님을 맞는 응접실이 있었다.
"하시는 일은 잘되고 계십니까?"
"물론입니다. 모두 선생님 덕분이지요."
"다행입니다. 더 도와드릴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에이, 여기서 어떻게 더 해 주신다고 그러십니까? 오늘은 헤일리를 보러 오신 건가요?"
"예."
"차는 어떤 걸로. 바로 아이를 불러오겠습니다."
슬라임은 손을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여기서 기다릴 테니, 아이가 느긋하게 식사를 끝낸 뒤 불러주십시오."
완고한 눈빛에 부인이 더 토 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여자는 주방으로 돌아갔다.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나에 대해 물어보지 않는군.'
바로 곁에 서 있었는데도, 전혀언급하지 않았다.
슬라임은 내가 느끼는 위화감을 읽어 낸 듯이 먼저 대답했다.
"제 쪽에서 말하지 않으면, 먼저묻지 않는다. 그게 이들이 지키는 예의니까요."
"흐음."
좁은 응접실에 가만히 서 있는데, 지긋이 나를 바라보는 슬라임의 시선이 느껴졌다.
"뭔가 할 말이라도?"
슬라임이 머리를 긁적였다.
만들어 낸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놀라운 디테일을 자랑했다.
"그게. 갖고 계신 칼 말입니다.
조금 더 자세히 봐도 되겠습니까?"
"이거 말인가?"
"예. 좀 어려운 부탁입니다만.
"상관없지."
2미터에 달하는 대검을 녀석에게 비스듬히 눕혀 건넸다.
그라스미어의 3대 영주가 만들었다는대검.
어차피 이 칼로 녀석에게 타격은 줄 수 없다.
벨 수도 짓누를 수도 없다.
"감사합니다."
슬라임이 한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리고.
칼자루를 받아 챈 손이 흐물거리며 검 표면을 덮어 가기 시작했다.
'감정 勤定.?'
손만으로는 부피가 모자란 건지, 팔 한쪽이 형체를 잃어 가며 녹아대검 전체를 덮어 가고 있었다.
"흐으응.
아예 몸 반쪽 정도로 대검을 뒤덮은 채, 입을 열어 한숨을 토하는 슬라임의 모습은 몹시 기괴했다.
하지만 녀석의 '표정'은 그 어느때보다도 진지하다.
'무척 몰입하고 있군.:
내가 이런저런 아이템을 보육원으로 가져올 때도, 저런 성실한 표정으로 하나하나 감정해 주었던 녀석의 모습이 떠올랐다.
감정勤定이야말로 슬라임이 진정즐기는 취미인지도 모른다.
십 분 정도가 홀렸다.
'오래 걸리는데?'
녀석이 아이템을 감정하며 십 분이상 걸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길어야 7-8분.
하지만 이십 분이 지나고, 삼십 분이 지났을 때에야.
슬라임이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를 내뱉었다.
"이건. 프리모. 파이트.?"
처음 듣는 단어였다.
"뭐라고?"
"금속입니다."
"생소한 이름이군."
"이 세계에는, 엄밀히 분류해 보면 6천 종류가 넘는 금속이 있지요.
이걸로 말씀드리자면.
그 순간이었다.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에 반투명한 상태창이 떠올랐다.
[스캔 완료됨]
[영웅급 대검 - A(이름 없음)]
[뛰어난 장인의 손에서 만들어진 대검입니다.]
[희귀 금속 프리모파이트가 35%함유되어 있습니다.]
[고르게 분포되지 않았습니다.]
[마력 전달 효율 5% 증가]
[검기 전달 효율 10% 증가]
[순수 프리모파이트로 재구성할 경우 부피 50% 추정 감소.]
[마력/검기 전달 효율이 커스텀에 따라 증가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눈앞에 뜨는 창을 바라봤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슬라임이 하는 말이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제대로 가공되지 않은 프리모파이트 원석으로 제작한 검입니다.
녹인 뒤 광석을 재구성한다면, 그가치가 폭증할지도 모르겠군요."
"직접 다룰 수는 없는 건가? 산성으로 녹여서 다시.
은근한 기대감에 차서 그를 바라봤다.
슬라임이 간단히 내 갑옷을 수리해주던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녀석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일반적인 강철 따위와는 전혀 달라서. 제 역량으로는 한참 부족합니다."
"동부 산맥 깊숙이 숨어 산다는, 드워프들 정도면 모르겠군요. 그중에서도 '흑색' 등급의 장인匠人을 찾아가셔야 할 것 같은데.
"흐음.
이 칼을 쓰면서도 뭘로 만들어져있는지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잠자코 있는 내게 슬라임이 계속설명했다.
"언제고 그쪽에 가실 일 있을 때, 꼭 한번 수소문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희귀한 금속이면, 서로 다뤄 보겠다고 앞다뤄 손을 내밀가능성이 크니까요."
"좋은 정보 고맙다."
놀라운 역량을 가진 장인匠人인, 그라스미어 3대 영주가 만들어 낸대검.
그자 역시 희귀 금속을 제대로
추출하는 데는 실패한 듯하다.
어쨌건 무척 귀중한 정보였다.
마력과 검기의 효율을 여기서 더높일 수 있다면 전투에 큰 도움이 되리라는 건 명확하다.
'동부 산맥이라.
가야 할 이유가 하나 늘었다.
홉고블린 직스가 내게 말해 줬던 고블린 마법사.
공간 왜곡 주머니를 만들었다던, 마법사 머드캐쉬를 만나는 일도 꽤 기대되니까.
'취이익, 휙, 취익! 이랬나.'
그라스미어를 들른 뒤 동부 산맥에 가도 좋을 것 같다.
직스가 말해 준, 고블린 마법사를 부르는 말을 천천히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바깥에서 인기척이 나는가 싶더니, - 끼익.
양치까지 모두 마친 소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랜만이군.'
이번 생에는 처음 보는 소녀.
하지만 레나와 보육원을 근거지로 삼고 활동했을 때, 이 아이를 본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원장님?"
"헤일리, 어서 오렴."
아이는 나를 흘끗하며 원장에게 물었다.
"이 아저씨는 누구예요?"
"네 언니의 친한 친구란다."
"언니. 친구?"
슬라임의 설명에 아이의 얼굴이 살짝찌그러진다.
제 언니보다 조금 동그란 얼굴의, 연갈색 머리칼의 여자아이는 눈을 깜빡이며 가만히 나를 바라봤다.
간단히 아이의 상태를 체크했다.
'몸은 건강하고.'
학대나 폭력의 흔적은 전혀 없다.
낯선 나를 봐도 겁먹지 않는다.
정서도 건강하다.
'잘 지낸 모양이군.'
"레나 언니 친구예요?"
"그래."
고개를 끄덕였다.
안주머니에서 레나가 쓴 편지를 꺼냈다. 잘 봉인된 편지를 천천히 건네며 말했다.
"언니가 보낸 편지, 볼래?"
"네."
아이는 봉인을 뜯고 편지를 바로 펴서 읽었다.
동그란 갈색 눈이 몇 번씩 빠르게 깜빡였다.
선 자리에서 한 번에 편지를 모두 읽어 내린 아이가, 편지를 접어 봉투안에 넣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저, 아저씨 안 따라갈래요."
"뭐라고.?"
아이는 귀를 종긋 세우고 화난
고양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언니는 계속 없었어요. 나한테 연락도 안 했어요. 갑자기 이렇게 편지만 써서 오라고 해?"
아이의 갈색 눈동자에 그렁그렁눈물이 맺혀 가기 시작했다.
"안 가! 헤일리는 다른 데 절대 안갈 거야. 여기서 친구도 생겼단말이야."
"음.
'이런 반응이라니
상상해 본 적 없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전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혹시 편지를 못 믿는 거니?"
아이가 훌쩍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레나에게 화난 게 확실한 것 같았다.
나와 그녀의 입장에서야 정신없이 돌아다니느라 바빴지만.
아이가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어쩌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스킬 중에 화난아이를 달래는 건 없다.
그저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아이작이 우리에게 준 정보를 검증해야 했을 때, 나는 레나가 슬라임과 접촉하는 걸 막아섰다.
묘하게 아쉬워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 동생을 보고 싶어 했던 건지도 모른다.
'역시 내 탓이다.'
"헤일리, 그게 아니라.
슬라임이 앞에 나서 달래 보려고 했지만 슬쩍 막아섰다.
"내가 얘기하지."
열 살이 채 안 된 아이.
하지만 충분히 말은 알아들을 수 있는 나이다.
아이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키를 맞췄다.
투구는 벗지 않았다.
"레나는 나 때문에 연락을 못 한거다."
"아저씨 때문에?"
"그래."
고개를 끄덕인 뒤 말을 이었다.
"내가 레나를 빼앗아서, 그동안 마음대로 독점해 버렸어."
"그럼, 언니 남자 친구?"
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글세.
"언니가 편지 쓴 거 보면, 엄청좋아하는 거 같던데. 아저씨한테도 보여 줄까요?"
뭐라고 썼는지 크게 궁금하지는 않았다.
보면 화끈거릴지도 모른다.
"괜찮아. 그건 널 위한 편지니까.
하지만 나는 이제 더 이상 레나 곁에 있지 않을 거야."
"왜요?"
"나 혼자서 해야 할 일이 많이 있거든."
T&T에 자리를 잡은 그녀를, 더는 내 삶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
아이가 빨개진 눈으로 나를 보고 물었다.
"언제까지요?"
"앞으로 계속."
"계속이요? 죽을 때까지?"
그렇다.
내 죽음은 단독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니까, 네가 레나 곁에 있어 줬으면 좋겠어."
아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조금씩 울음이 멈추고 있었다.
"아저씨가 나를 다른 도시에 데려다줄 거라고 써 있는데요?"
"여기보다 더 안전한 곳이란다. 잘지내고 있으면, 언니가 연락도 많이 하고, 널 찾으러 올 거야."
지금보다 더 제대로 자리를 잡고, 언젠가 그녀가 말한 것처럼 '삶'을 살게 된다면.
"친구인 내가 없어도, 네가 대신레나를 지켜 줬으면 좋겠어."
"내가. 언니를.?"
"물론이지. 네가 꼭 필요할 거야."
아이는 예쁜 얼굴로 가만히 고민에 잠겼다.
지금까지의 삶에서, 이미 레나의 마음을 수없이 지켜 줬을 귀여운표정이었다.
어느새 눈물이 그쳐 있었다.
168화 매듭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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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 구변이나마 진심이 전해진 탓일까.
호감도가 7 올랐다는 상태창이 소녀의 머리 위로 작게 떠올랐다.
잘 달랠 수 있을지 불안했었는데, 무척 다행이었다.
어차피 내가 그라스미어에 직접데려가야 할 아이.
신뢰 관계를 쌓을 필요가 있다.
생각보다 내 말들이 소녀의 마음을 움직인 둣, 꽤 높은 수치의 호감도가 올랐다.
'초반일수록 호감도가 잘 오르나?'
아니면 나 혼자만 기억하고 있는, 함께 보낸 시간들이 소녀와 이야기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지도.
'으음.'
호감도가 올라간 건 소녀뿐만이 아니다. 슬라임의 호감도가 올라갔다는 메시지가 녀석의 머리 위에 떠올랐다.
'의외인데.'
녀석은 결국 인간을〈줄이는〉편에 가담했다.
그가 푸르손의 신도라는 사실.
마왕 강림을 고대하는 추종자 중하나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돌본 아이에 대해 약간의 정은 가진 모양.
슬라임은 아이를 더 안심시키기 위해자잘한 설명을 이어 갔다.
"그럼, 아저씨 따라가면 되죠?"
헤일리가 나를 보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종 승낙을 얻자 그제야 완전히 긴장이 풀린 기분이었다.
어린 여자아이 하나 달래는 일이, 사형수의 원념이 뭉쳐 만들어진 늪의 악령을 처리하는 일보다 훨씬 더어려웠다.
"바로 준비할께요."
"하루 정도는 더 여기 머물러도 괜찮은데.
"아까 다 울어서 괜찮아요."
그라스미어.
먼 도시는 아니다.
너무 스트레스를 주는 건 아닌지 걱정됐지만, 소녀는 어느새 밖으로 나가 있었다.
잠시 침묵에 빠져 있던 나는 슬라임을 돌아봤다. 그와 헤어지기 전 꼭 묻고 싶은 게 있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예. 말씀하십시오."
굳이 돌리지 않고 바로 물었다. 그럴재간도 시간도 없었다.
"혹시. 핏빛 사슴 고블린 부락에 대해서 알고 있나? 이곳에서 그리멀지 않은 위치라던데."
고블린 부락.
그들의 존재가, 동부 산맥 드워프의 이야기를 듣고 연달아 떠올랐다.
공간의 마법사 머드캐쉬.
그 존재를 내게 알려 준, 고블린 직스키세스 붐텅.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번 생에서는 슬라임과 함께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당연히 핏빛 사슴 고블린 부락을 도와달라는 의뢰도 받지 않았다.
아직도 잔학하게 감금된 채 양식養殖당하고 있을까?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다.
머드캐시에 대한 정보는 뻔히 내머릿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정보를 준 고블린들이 아직 고통속에 허우적대고 있다면 무언가가, 공평하지 않은 느낌이다.
"호오.
슬라임의 입에서 낮은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그들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이런저런 정보를 찾다, 〈등불〉
달리아크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등불이군요.
적당히 핑계를 둘러댔다.
"맞아. 등불에서 얻었어."
그러자 슬라임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흘러나왔다.
"〈등불〉의 정보라고 보기에는 꽤 적시성이 떨어지는군요. 이제 그곳에 고블린 부락은 없습니다."
- 달그락.
깜짝 놀란 나머지 갑옷 안의 뼈가 크게 움직였다.
"뭐, 없다고?"
"예. 얼마 전 사라졌습니다."
"사라졌다니.
내가 아니라 다른 녀석에게 처리를 위임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자신이 직접 처리했거나.
"고블린들은 어떻게 됐지?"
"그들을. 걱정하시는군요."
짐작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슬라임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그려지며, 머리 위에 호감도가 3 올랐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난 그냥.
"모두 해방되어 안전한 곳으로 갔지요. 마음 놓으셔도 좋습니다."
"내가 언제 걱정했다고."
슬라임은 그저 씩 웃기만 했다.
날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서 묘한 기대감이 느껴졌다.
'좀. 부담스러운데
슬라임과 헤어진 뒤.
헤일리와 밖으로 나와 걸었다.
말을 한 필 빌릴까 했지만 어차피가까운 거리인 데다, 헤일리를 안고 질주를 쓰는 게 더 빠르겠다 싶었다.
'그래도 못 안겠군.'
어색했다.
결국 나는 헤일리의 걸음에 맞춰 터덜터덜 걸어갔다.
"아저씨."
"말해."
"나, 본 적 있어요?"
"글쎄."
"왜 그렇게 수상하게 말해요?"
"계속 투구 쓰고 있던데. 얼굴에 화상이라도 있어요? 나도 어릴 때 뜨거운 물 쏟아서 다리에 흉터 있어요.
보여 줄까요?"
"아니."
걸으면 걸을수록 별로 할 말이
없었다.
어색해야 할 쪽은 일면식도 없는 아이 쪽일 텐데, 오히려 내 쪽이 같이 있는 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무슨 말을 하지.
한참을 걷던 중.
헤일리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아저씨, 다리 아파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
"그럼. 들어 줄까?"
아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아 들고 앞으로 발을 박찼다.
시린 바람이 팔 사이로 들어온다.
낮이지만 바람이 차다. 마법으로 헤일리의 몸을 따듯하게 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정도로 정밀한 온도 조절은 무리.
나야 상관없지만 이렇게 연약한 몸이라면 감기에 걸릴지도 모른다.
'기침은 하지 않으려나?'
달리면서도 걱정하고 있었는데, 아이의 흥분된 목소리가 그 고민을 깨트렸다.
"아저씨, 너무 재밌어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아이는 놀이 기구라도 탄 것처럼 무척 즐거워보이는 얼굴이었다.
이대로도 만족하는 모양새다.
'질주.'
속도를 높이자 아이가 비명을 질러댔다. 연갈색 눈동자가 반짝반짝빛났다.
유블람에서 그라스미어로 넘어가는 길은 무척 잘 닦여 있었다.
널따란 대로를, 아이를 안은 채 달리기를 한참.
저 멀리 높은 성벽이 보였다.
이중 구조로 된 거대한 성.
그라스미어의 귀빈증이 있으니 통과는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성벽의 분위기가 꽤나살벌했다.
'하나, 둘, 셋, 넷.?'
멀리서도 보이는 거대한 병기 네 기가 바깥을 겨누고 있었다.
성문 앞에는 경비병도 없었다.
아예 출입자를 받지 않을 기세로 꽉 닫혀 있었다.
높다란 성벽에는 장궁을 멘 병사들이 빼곡했다.
'뭐. 무턱대고 쏘진 않겠지:
어느새 품에 잠들어 있는 아이를 안은 채 천천히 걸어갔다.
화살이나 병기 같은 게 날아와도 가뿐히 피할 자신도 있었다.
성벽 양쪽을 휘휘 둘러봤다.
빼꼼히 머리를 내민 경비병들은 별다른 말도 없이 위에서 이쪽으로 장궁을 겨누고 있었다.
경고 같은 것도 없나 싶어 주위를 슬쩍 바라봤다.
이제 보니 성문 오십 미터 정도 앞쪽에 흰색 금이 그어졌고, 안에 커다란 글씨가 쓰여 있었다.
〈접근 금지〉
'뭐야? 여기 왜 이래?'
전에 그라스미어에 왔을 때와도 다르다.
'전쟁이 가까워져서? 아니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품 안에 잠들었던 아이가 비척거리며 일어났다.
"으으. 우리 안 들여보내 주는 거예요?"
경비들을 좀 더 눈여겨 바라봤다.
'수상하군.'
주로 내성에만 있었다고 해도, 꽤 오래 그라스미어에 머물렀다.
경비들의 옷차림 정도는 간단히 알아볼 수 있다.
절반 이상의 경비병이, 전혀 낯선디자인의 갑옷을 입고 있다.
게다가 훈련된 상태가 하나같이 범상치 않다.
날렵하고 다부진 체격.
그 매서운 눈빛부터가, 수도 없이 전장에서 마주했던 일반병들과는 전혀 다르다.
'다른 세력에게 점령당했나?'
고개를 갸웃했지만 일단 성문으로 다가갔다.
성벽 위의 병사들도 평범한 인간수준에서 제법이라는 것.
회귀를 이미 수차례 거듭한 내 상대가 될 정도는 전혀 아니다.
아이를 보호하면서도 도망 정도는 충분히 갈 수 있다.
나는 하얀 선 위에 서서 외쳤다.
"특사증을 보이겠소! 문을 열어주시오!"
한동안 반응이 없었다.
잠시 기다리자,
- 끼이이익.
닫혀 있던 성문이 작게 열렸다.
- 다그닥! 다그닥!
세 기의 기병과, 열 명의 보병이 우리를 둘러쌌다.
기병은 모두 낯선 복장이었다.
보병 가운데도 익숙한 디자인의 갑옷을 입은 녀석은 다섯뿐.
'저들만 그라스미어 소속인가.'
기병 가운데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나에게 정중히 예를 취하며 말했다.
"제국군 남부 제3 특작연대 소속라인버그 남작입니다. 귀공께서는 특사라고 하셨습니까?"
흡수한 제국법을 떠올렸다.
그라스미어 정도 되는 대도시의 특사特使는 최소 자작 이상.
게다가 파견한 그 도시 자체에서 유력한 자인 것은 당연할 터.
녀석이 공손한 태도를 보이는 건 이해할 수 있다.
궁금한 건 내 쪽이다.
'제국군. 특작연대? 그런 자들이 대체 왜 여기에. 어떻게 된 거야?'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인지 말투는 정중했지만, 낯선 복장의 녀석들은 모두 손을 칼자루에 얹어 놓았다.
한눈에 봐도 경계하면서, 의심을 숨기지 못하는 모양새.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야기한 대로다. 여기. 신분증을 확인해도 좋다."
나는 허버트 영주가 만들어 줬던 가짜 신분증을 내밀었다.
효력은 당연히 있다.
"틀림없습니다!"
그라스미어 경비 복장의 보병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검은 콧수염의 라인버그남작은 왼쪽 눈썹만 찡긋 위로 올리면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특사님, 송구합니다만 투구를 좀벗어 주시겠습니까?"
"투구를.?"
"예. 현재 그라스미어는 제3 특작연대에서 경비를 맡고 있습니다.
귀빈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용모는 꼭 제가 확인하고 싶습니다."
"안전?"
"예. 영주님과 남부 제국군 사령관의 위임을 받았습니다. 원활한 치안 관리를 위해 부디 협조해 주시지요."
놈은 말투만 부드러운 척을 하며 은근히 단호하다.
수틀리면 꼬나든 기병용 장창이라도 날아올 것 같은 느낌.
하지만.
투구를 벗자 깜짝 놀라며, 절벽 아래로 떨어진 소년이 생각났다.
녀석을 생각하며 깨달았다.
분명〈가면〉에 뭔가 문제가 있는상황. 후작이 살해당한 것과 관련있을지도 모른다.
투구를 벗는 건 역시 껄끄럽다.
나는 녀석을 바라보고 말했다.
"싫은데?"
"예.?"
분위기가 단번에 험악해졌다.
그라스미어의 경비병들은 중간에 끼어서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조용히 해결하고 싶은데.'
힘을 쓰면 여기서 다 죽여 버리는건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죽도 밥도 되지 않는다.
헤일리와 함께 있다는 사실 역시 마음에 걸린다.
보호한 상태에서 제국군을 모두 죽이는 건 간단하지만.
내장과 뇌수가 철퍽철퍽 사방에 튀기는 모습을 동생이 본다면 레나가 슬퍼할 게 분명하다.
부드러운 방법을 쓰기로 했다.
"못 들었나? 싫다고 했는데."
'공포.'
[공포 Lv.1 스킬을 사용합니다!]
[대상: 단일]
[체력이 0.22% 소모됩니다.]
[당신과 먹이 사이의 스탯 차이:
어마어마함.]
- 딱딱딱딱딱.
말 위의 남자는 공포로 이를 따닥따닥 부딪쳤다.
그 눈빛이 죽음보다 더한 망각의 공포로 파르르 떨렸다.
"아. 아으으.
제대로 균형을 잡고 있던 탓일까.
팔다리가 풀린 채로도 낙마하지는 않았지만, 옆에서 툭 치면 그대로 떨어져 목이 부러질 모양새였다.
'얘는 계속해도 심장마비는 안 걸 리겠군.' 전신에서 식은땀이 솟아났지만, 근육 경련까지는 없다.
예전에 레나의 편지를 전했던 소녀와는 다르다.
말 위에서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앉아 있는 녀석에게 물었다.
"꼭 벗어야 돼?"
"으. 아으. 아, 아닙니다.!
시, 시, 싫으시면.
녀석이 덜덜 떨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나는 불만족스러웠다.
공포 스킬의 한계를 직면한 기분이었다.
'스킬 시전 상태에서도 멀쩡하게 입을 놀리다니. 어느 정도 강한 놈에게는 벽이 있군.' 게다가 스킬이 적용되지 않는 다른 놈들은, 나를 몹시 경계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 기병 두 명이 서로 눈길을 교환하며, 창을 쥔 손에 슬쩍 힘을 더해 가는 찰나.
- 다그닥! 다그닥!
성문이 활짝 열리며, 맞은편에서 익숙한 얼굴이 말을 타고 빠르게 달려왔다.
- 히히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