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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화 공동의 적, 내부의 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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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이작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다.

"탑에 있는 녀석들은 전부 저대로 놔둘 생각이냐?"

아이작은 잠시 침묵했다.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한 이들.

푸르손에게 영혼이 바쳐진 이들.

탑에 매달린 해골들은 모두 놈의 후예다.

당장에라도 유해를 수습해 주길 바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 저 탑에 매달린 내 아이들은.!

돌아와서. 직접 추스를 것이다.

너에게 그런 신세까지 지고 싶은 생각은 없다.

놈의 결심은 꽤나 단호해 보였다.

"뭐, 그렇다면야."

나도 탑 안에 매달린 녀석들을 더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흡수할 수 있는 녀석들도 아니다.

〈뼈의 군주〉스킬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녀석들도 아니다.

이미 나에게는 밤톨이가 있다.

〈뼈의 군주〉Lv.1 스킬의 통제력을 밤톨이에게 전부 사용하고 있다.

- 달각!

옆에서 애교를 부리는 밤톨이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밤톨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살아 있을 때의 녀석과, 지금의 녀석은 어떻게 다를까.

만약 내가 죽고 다시 시작해서, 살아 있는 녀석을 만나게 된다면.

그때도 나를 이렇게 반겨 줄까.

레나의 호감과 레벨을 쌓았더니,

회귀 이후 그녀의 상태창이 변한 것처럼.

밤톨이도 변하게 될까.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스승님.?"

"아, 그래. 시작해야지."

내 수련도 중요하지만.

레나에게 검술을 가르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어떤 식으로든 이 결과가〈누적〉

된다는 걸 알았기에 더욱 그렇다.

나아가고 있다.

앞으로.

죽고 다시 시작해도, 완전히 처음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다.

세계는 원점일지라도.

레나만큼은.

나와 함께 한 인과가 어느 정도그녀 안에 누적되고 있다.

어떤 힘이 작용되지는 모르지만.

'잘 보살펴 줘야지.'

밤에는 아이작에게 결계를 배우고.

낮에는 레나를 지도하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검술 교육 Lv. 2를 활성화합니다!]

[피교육자의-]

[약점 교정 방향이.]

[집중력이 일시적으로.]

[이해력이.]

[일반 스킬의 습득 속도가.]

[??? 피교육자의 당신에 대한 호감도가.]

레나의 열의는 더없이 뜨거웠다.

[피교육자의 상태]

- 매우 높은 호감: 당신을 향한호감도가 50 이상입니다. 당신에게잘 보이고 싶어 합니다. 교육 효과가 크게 상승합니다.

- 견고한 신뢰: 당신을 절대적으로 신뢰합니다. 어떤 길로 인도해도 망설임 없이 따라올 것입니다. 모든 종류의 교육 효과가 크게 상승합니다.

- 새로운 세계: 최근 검술의 또다른 경지를 목격했습니다. 일정 기간 동안 열의가 상승하며, 교육 효과가 크게 상승합니다.

가르치는 보람이 있었다.

검술 교육 스킬 숙련도도 굉장히 빠르게 올라갔다.

이중의 즐거움.

선순환이다.

레나의 높은 열의 덕분에.

교육 스킬 숙련도가 올라가면서,

교육 효율이 올라간다.

치열한 하루가 저물고.

밤이 되면 아이작과 함께 결계 바깥으로 나간다.

구구구궁. 쿵!

결계 수업은 동굴의 기관 장치 바깥 절벽을 올라와 외부에서 이루어졌다.

외딴 지역이라서 일까?

처음에 이 근처로 접근하면서 느꼈던 것처럼, 주변에는 지나가는 인간하나 없었다. 굳이 은신 스킬을 사용할 것도 없었다.

아이작이 강의를 시작한다.

= 결계는. 원래대로라면 이어져있는 공간과 공간 사이를 분리하는 방법이다.

물론 나에게는 모두 생소한 개념들이다.

결계라는 건.

완전히 모르는 분야다.

"공간과 공간 사이라고?"

= 그래. 거기에 단절을 둬서 내가 원하는 대로 다시 조립하는 거다.

= 멀껑히 걸어 지나야 할 공간이되풀이되고, 다시금 되풀이되도록.

물리력과 최면, 암시, 온갖 환각의 종합 예술이라고 할 수 있지.

= 결계 안에 들어오는 것만으로 미치게 만들 수도 있다.

악몽 속에서 몹시 고통스러워하던 레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잠자코 놈의 설명을 듣는다.

모르는 주제는 입을 닫고 얌전히 듣는 게 상책이다.

= 숨을 참아서 죽게 만들어 버릴 수도 있고, 강력한 암시로 심장을 멈춰 버릴 수도 있지.

= 딱 죽음 한 발짝 앞까지 쾌락만 계속 느끼게 만들 수도 있다. 땅을 파 내려가는 게 자신의 행복이라고 세뇌하는 것도 가능하고.

"광산 노예로 만들었다는 게.

= 그래. 난 개네를 행복하게 만들어 준 거라고.

아이작의 성품에 내가 뭐라 말할 이유는 없었다.

"인간들이었나?"

= 드워프, 엘프, 인간. 다양하지.

"엘프라고?"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엘프는 멸종했다.

박제가 된 종족.

= 그래. 레'라지에를 추종하는 다크 엘프들이 땅을 깊이 잘 팠지.

왜, 엘프한테 관심 있냐?

"엘프는 오래전에 사라진 줄 알았는데.

= 결계 안에 잘 숨어 있었지. 지금도 찾아보면 있을 텐데? 입구를 못 느끼고 지나가게 하는 곳들이. 특히 마왕들의 제단은 그럴 거야.

'마왕들의. 제단이라고?"

= 그래.

마왕들이 직접 결계를 쳐 준 거냐는 말에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층 더 놀라운 일은.

그럼 놈은 마왕들의 결계를 돌파하고, 그 신도들을 광산 노예로 삼았다는 걸까?

아이작의 대답은 간단했다.

= 인과는 평등하게 적용되니까.

논리만 서면 얼마든지 가능하지.

그러니 닥치고 배우기나 해라.

벨'호멧 아이작.

혼란의 시대에 남부를 지배했다던 주술사가 직접 가르치는 결계술.

놈의 성품이 어떻건 실력이 진짜라는 건 확실해 보인다.

배워야 한다.

이런 기회가 또다시 올지 알 수없는 일이다.

한 발자국만 잘못 디뎌도 완전히 길을 잃고 빙빙 돌게 만드는 결계를 만들 수 있다면.

침입하려는 자들과 싸울 필요도,

신경 쓸 필요조차 없다.

침입자가 몇 명이 되었든 가끔씩 가서 시체만 치워 주면 그만이다.

더없이 편리할 터.

후작 같은 강자들이나.

먼 홋날 등장하는 용사에게는 뚫릴지도 모르지만.

그럼 더 강한 결계를 만들면 그만 아닐까?

그런 수준에 달한 나를 상상하자마음속에서 열의가 끓어올랐다.

오랜만에 드는.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방위와 왜곡에 대해 천천히 설명 을들을 때였다.

"뭐지?' = 명상과 집중을 써라. 후우.

있는 능력을 왜 안 쓰고 버티는 거지?

정말 짜증나는군.

[명상 Lv. 2를 시전합니다!]

잡념을 정화하고 마음을 진정시킴니다.

[집중 Lv. 2를 시전합니다!]

명상과 함께 사용하고 있습니다.

명상의 효과가 크게 상승합니다.

[스킬 습득 속도가 상승합니다!]

아이작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스킬을 사용하니 실제로 아이작의 설명이 이해되는 속도가 크게 빨라진 느낌이 들었다.

'이런 효과가 있었군.'

얼마나 놈과 함께할지, 어떤 변수가생길지 모른다. 뽑아 먹을 수 있는건 최대한 뽑아 먹어야 한다.

= 그럼 공간의 차단과 뒤틀림부터 설명하겠다.

반달이 지났다.

낮에는 레나를 가르치고,

밤에는 밤톨이와 함께 나가서, 아이작에게 교육을 받았다.

하나씩 결계 복구를 해 나갔다.

배움에는 현장 실습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다시 깨달았다.

= 그게 아니지. 다시 해라.

이 새끼야. 공간을 뒤틀랬더니 뇌를 뒤틀어 버렸냐? 왼쪽에 그건 고정한채로 다시 오른쪽 돌만 움직여.

아이작은 줄곧 툴툴거렸지만.

해 줄 말은 다 해 주고 있었다.

최고의 전문가인 녀석이 나름대로 신경 써서, 문외한인 내게 귀중한 수업을 해 준 것이다.

처음 만남은 잘못됐더라도.

이렇게 된 이상 놈은 나와 같은 배를 탔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 그래. 그 돌이다.

- 쿵!

외부 결계 지역.

마지막 비석을 세우는 순간.

- 지이이잉.

풍경이 미묘하게 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한 번에 느낌이 왔다.

"결계가 완성된 건가?"

= 그래. 저 비석을 기준으로 왼쪽으로 돌아. 이제 여기서 할 일은 끝이야.

반달 동안 배울 수 있는 건 일단배운 것 같았다. 놈의 강의는 단어하나하나가 깊이 핵심을 찔렀다.

정확히 정곡을 짚어 내는 설명.

말만 잘하는 자가 아니라는 건, 새롭게 생긴 스킬을 봐도 쉽게 알 수있었다.

[결계이론 Lv.1]

결계結界의 기초적인 원리에 대해 올바르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기초가 매우 잘 닦인 상태입니다.

〈결계이론〉스킬의 숙련도가 400%

빠르게 증가합니다.

〈결계작성〉스킬의 숙련도가 50%

빠르게 증가합니다.

결계 스킬이 생겼다니 짧은 시간 동안 해낸 것치고는 홀륭한 성과였다.

아이작에게 제법 신뢰가 쌓였다.

"이제 나도 결계를 만들 수 있는 거냐?"

= 뭐? 품. 아직 10년은 멀었다.

그냥 머릿속에 이론만 잔뜩 쑤셔 박아 놓은 상태지. 결계가 우습냐? 완전 타고난 애들이 3년은 하나만 잡고 수련해야 허접하게라도 만들 수 있지.

"그럼 너는?"

= 나를 너희 수준에 맞추지 마라.

= 아무튼 한참 멀었다. 회로나 좀더 확장해라.

"여기서 더?"

= 내가 처음 회로를 만들 때 깜빡한 게 있다.

"흐음 ?

= 힘을 온전히 되찾으면 당연히 내가 이기지만, 마왕의 추종자들은 지금 네가 부딪치기에 꽤나 강한 놈들이야. 할 수 있는 건 해야지.

루-륨을 더 빨리 돌게 하는 회로를 새겨 보자고.

사기를 치는 걸까? 혹시 나를 또함 정에 빠뜨리려는 건 아닐까?

하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서약까지 했다.

결계이론까지 제대로 가르쳤다.

"뭐, 그럼.

녀석이 시키는 대로 밤새 몸에 회로를 추가했다. 굉장히 신경 쓰이는 작업이었지만, 그만큼 하나하나 잘 보려고 노력했다.

그 덕분일까.

[루-륨 회로 드기를 터득했습니다.]

[해당 회로를 언제든 몸에 새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됐다!' 뿌듯함이 밀려왔다.

저번에는 엉겁결에 놓쳤지만.

이번에는 몸에 새기는 방법을 완전히 파악한 것이다.

죽더라도.

이 각인은 또 사용할 수 있다.

명백한 이득이다.

아이작이 이건 모르겠지 싶어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사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마지막뼛가루가 바닥에 떨어졌다.

- 우우웅.!

확실히.

회로를 흐르는 루-륨이 한층 더활성화된 느낌이었다.

마지막으로 레나를 가르치는 날.

[대성공!]

[레나의 검술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검술 랭크가 상승했습니다!]

[검술 Lv.5 -> Lv.6]

[레나의 호감도가 7 상승했습니다.]

[호감도: 60]

[호감도가 상한선에 도달했습니다!]

고작 반달 만에 검술 랭크가 5에서6으로 상승했다.

- 피릿!

레나도 제 실력이 한 단계 올라간걸 느끼는 듯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내게 감사를 표했다.

= 천 명에 하나 나올 법한 희귀한재능이군. 반달 만에 저 정도라니.

"그런가?"

= 흠. 나 정도는 아니지만.

그 말만 안 했으면 좋았을걸.

확실히, 아무리 교육 스킬의 힘이라도 이럴 수 있을까 싶은 속도로 레나는 성장했다.

다음에는 반년 정도를 꾸준히 가르쳐 보고 싶은 성장 속도다.

=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했지만.

저 아이에게서 기묘한 기운이 느껴진다. 뭔가에 의해서 재능이 뚫린, 아니 쌓인 느낌이다. 재능이 쌓일 수가 있나.?

'그걸 알아보는 건가?'

역시 안목이 대단한 자다.

하지만 내 회귀에 대해.

일어나는 변화에 대해서는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기스-제-라이조차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심지어 아이작이 믿는다고해도, 녀석은 한참 후순위다.

놈에게 털어놓기 전에 레나에게 털어놓아야 한다.

〈린트부름의 꿈〉을 이야기해서, 기스-제-라이를 설득시켜야 하고.

언젠가.

나를 무덤에서 살린 인간, 루비아에게도 말해야 한다.

아이작에겐 아주 나중에나 사실을 말하게 될 거다.

놈이 탑의 해골들을 마지막으로한 번 더 보고 싶다고 해서, 잠시 탑에 아이작을 데리고 올라갔다.

-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

제물로 바쳐진 수백 구의 후손을 보며 아이작은 멍하니 침묵했다.

십오 초 정도가 말없이 지났다.

= .이제 됐다. 떠나자.

146화 공동의 적, 내부의 적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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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제국 수도로 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어요."

- 다그닥! 다그닥!

레나가 내 곁에서 말을 몰았다. 그녀는 보름 동안 검술을 수련하면서도, 틈틈이 지도를 들여다보며 계획을 짜고 있었다.

"첫 번째는 하얀 다리를 건너 길라모어를 거치는 길이죠. 멀리 돌아가죠.

하지만 안전해요. 던전도 도적도 없어요."

= 일곱 살 겁쟁이나 선택할 길이겠군.

아이작이 끼어들었다.

하지만 놈의 말은 내 의사에 따라 언제든 전달되지 않을 수 있다.

굳이 아이작과 레나를 연결하지는 않았다.

= 야! 너, 왜 내 말 안 전해 주냐?

[좀 생산적인 이야기를 하든가.]

레나는 말을 이어 갔다.

"던전도 도적도 없다는 게 크게 매력적인 선택지는 아니죠. 힘은 충분하니까요."

= 봐. 내 말이 맞잖아? 안 그래?

= 이제 좀 전하지?

나는 아이작의 의사를 공유했다.

녀석은 그 사실을 느끼고 곧바로 말을 이어 갔다.

= 하얀 다리는 빛의 여신 일리엔의축성을 받았어. 그쪽이 아니면 아예 건너지를 못한다고.

"그쪽이 요?"

레나가 호기심을 보였다. 아이작이 짧게 읊조렸다.

= 인간.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여신들.

그녀들에 대해서는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세계에 실체를 가지고 강림한 것은 오직 마왕뿐이었으니까.

축성된 성물聖物.

성자聖者와 사제들을 통해 발현되는 기적.

신들이 실제하며, 힘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그녀들의 강림과 발현은 본 적도들은 적도 없다.

신은 어떤 존재일까.

우리 모두의 설계자일까? 한 꺼풀바깥의 존재일까?

조용한 관조자일지, 적극적인 조종자인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얀 다리. 누가 못 건녔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 봤어요. 역시 인간이건 널 수 있으니 상관없었던 걸까요?"

"마차나 짐 실은 당나귀, 애완동물들도 건녔을 거 아닌가. 아이작의 말을 믿을 수 있나?"

= 멍청아! 그건 다 '그쪽'이잖아.

"멍청한 짓으로 거기 갇혀 있는 주제에, 제 스승님에게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 젠장. 말해서 뭐 하겠나. 저런 놈한테 스트레스 받아 봐야 머리털이나 빠지지.

"말을 정확히 똑바로 하셔야죠. 대충 말하고 제대로 알아듣길 바라지 말고. 마魔에 속한 측은 건널 수 없다는 이야기인 거겠죠?"

= 봐 봐, 넌 제대로 알아듣잖아.

"아, 둘 다 그만하자고."

"네."

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건 아이작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쪽으로는 못 건너요. 강 너비만3km에, 유속이 굉장하니까요."

"ㅇ ≫

사실 말을 몰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긴 하지만, 자세히 지도를 들여다본 적은 없다. 대략적으로 슬쩍 훌어본 게 전부다.

변명을 하자면 밤낮 가르치고 배우느라 바빴고, 솔직히 말하면 레나가 알아서 하겠거니 하고 전부 다 맡겨놓았다.

던전 위치를 외우는 것부터 여행시뮬레이션까지 전부 다 그녀에게 일임했다.

레나가 말을 이어 갔다.

"두 번째 길은 아만을 거쳐 가는길이에요. 달리아크에 가고 싶으면 그곳으로 가면 됩니다."

"달리아크.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 이름인데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고위 정보 상과 암살자들의 임시평화 지대입니다. 건물 자체는 하나인데. 아주 크지요. 1= 흥.

아이작이 핀잔을 놓았다.

= 어차피 너희는 못 들어가는데?

달리아크의 회원권도 없질 않나. 근처도 못 가고 쫓겨날걸. 이런 것까지 하나하나 다 알려 줘야 되냐?

괜히〈다가갈 수 없는 등불〉달리아크라고 불리는 게 아니거든.

'그래요?"

레나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그건 300년 전이고, 일반인 투숙지역이 따로 생겼습니다. 이제는〈꺼지지 않는 등불〉달리아크죠. 광장에서 정보 경매를 벌이기도 한답니다, 스.승.님."

레나는 아이작의 말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듯 나만 바라보고 말했다.

= 뭐? 정보 경매? 그런 근본 없는 짓을.

"옛날 사람이라 좋으시겠네. 근본 있어서."

= 저 싸가지 없는 년이! 기초적인술법에 맛이 가서 징징 짠 주제에 입만 살아서.

나는 아이작을 차단했다.

"그쪽 길은 좀 더 빠른가?"

레나는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둣이,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훨씬 빠릅니다. 하지만 가는 길이 좀 더 위험해요. 물론 신경 쓸 정도는 아니고요. 들를 던전도 많아서 좋아요."

〈들를 던전〉들은 대부분 아이작이 털어놓은 던전들이다.

애초에 저 길로 가는 걸 상정하고 내게 말을 건넨 것 같다.

"좋아. 아만인지 뭔지 가는 쪽으로. 가 보자고."

수도로 향한 지 열흘이 지났다.

나와 레나는 사흘에 한 번 꼴로던전을 클 리어하며 길을 나아갔다.

세 번째 들른 던전은〈고문 미궁〉

이었다.

"크어어어어!"

수십 구의 시체가 꿰매고 합쳐져만 들어진 보스가 주먹을 내리쳤다.

- 쾅!

바닥이 쩌렁쩌렁 울렸다. 하지만 이미 검기에 당해서 온몸이 너덜너덜한 데다가, 힘이 빠진 상태였다.

나는 옆으로 뛰어 주먹을 피한 뒤중앙을 향해 대검을 휘둘렀다.

[냉기 폭풍 Lv.1 발동!]

하얗게 뭉쳐 있던 냉기 폭풍이 칼끝에서 강하게 뻗어 나갔다.

온몸의 마력 회로를 전부 가동한 그 공격에 밀려 거대한 좀비가 뒤로두 걸음을 물러났다.

'질주.'

나는 곧바로 따라잡은 뒤 대검을 보스의 심장에 박아 넣었다.

[격발의 플레어 Lv.1 발동!]

바람과 불꽃이 서로의 몸을 휘감으면서 검기 위에서 폭발했다.

[특전: 거물 사냥꾼 Lv.1 발동!]

[데미지 300%의 '치명타'가 발동합니다!]

작은 시체 조각들이 내장처럼 몸가운데서 쏟아져 내렸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클리 어!]

[고문 미궁의 보스, 부두 골렘을처치했습니다.]

[랭크 판정.]

[난이도 판정.]

= 콕큭. 이제 아주 익숙해지셨구만?

아이작이 낮게 큭큭거렸다.

그의 말대로였다.

나는〈섬뜩한 전갈 소굴〉과〈시든 개미 토굴〉, 〈고문 미궁〉을 별다른 가책 없이 클리어했다.

독 꼬리 전갈과 거대한 개미들, 기워진 시체를 처리하는 내 모습은〈용사〉그 자체였다.

C급 던전 셋을 클 리어하고 용사 포인트를 얻었다.

이번 클 리어로.

용사 전용 상점에서 검술 재능을〈Lv. 3〉까지 올렸다.

새로운〈수련〉퀘스트도 받았다.

하지만.

[퀘스트 발생]

[검을 6, 531만 번 휘두르세요.]

[0/65, 310, 000]

[보상: 검술 Lv.1l]

'이건 못 하겠군.' 잔뜩 떠오르는 상태창들을 적당히정리하고, 보스를 내버려 둔 채 뒤로 돌아갈 때였다.

우어. 우어 어어.

소녀의 몸으로 만들어진 좀비가 내발 목을 잡았다.

〈고문 미궁〉의 보스까지 이르는 길에 걷어차 치워 냈던 좀비였다.

던전은〈클리어〉되었다.

하지만 모두 사라지지는 않았다.

던전의 묘한 기운이 아직도 시체들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 서걱!

레나가 커팅 레이피어로 좀비의 팔을 잘랐다. 양팔을 자르고, 꿈틀대는양다리를 잘랐다.

그리고 이미 멎은 심장을 몇 번이고 칼로 찔러 날려 버렸다.

앞이 빼곡하다.

툭툭 치우며 들어갔던 좀비들이,

보스를 처리하는 사이 빼곡히 일어나서 동굴 통로를 막고 있다.

- 피릿!

레나가 칼을 휘두른다.

검 길이보다 더 넓은 반경까지 정리되는 착시가 일어난다. 빠르게 발을 움직여 넓게 베어 낸 것이다.

앞줄의 좀비들이 목이 반쯤 베여덜렁거리지만, 아예 목이 잘린 채 덤벼드는 녀석도 있었다.

"너와 상성이 좋지 않군."

"인정해야겠네요."

다양한 보조 도구는 있지만, 레나의 주 무기는 길고 얇은 커팅 레이피어다.

완전히 파괴해야 멈추는 놈들을 상대하기에 적절한 무기는 아니다.

무엇보다도.

대체 뭘 하던 장소인지, 달려드는좀비들은 대부분 소녀였다.

칼의 겨냥이 낮다.

레나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살아 있는 자들을 죽일 때보다도 훨씬 힘들어 보이는 표정이었다.

"우어. 우어어어.

사방에서 이미 부서진 인간 소녀들이 꿈틀거렸다.

= 쓸어버려라. 마법 아꼈다가 뭘하려고 하지? 저년이 잔뜩 괴로워하고 있지 않냐.

나는 잠시 망설였다. 머릿속에서몇 가지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며칠 되지 않은 기억들이었다.

〈뇌격! 뇌격! 훨씬 더 강하게 할수 있잖아? 〉

〈최소한 둘 이상의 힘을 중첩해서 써 봐. 범위를 더 넓게 해야 되지 않을까? 〉아이작은 나를 계속 부추겼다.

마법을 강하게 사용할 때마다.

던전은 바닥과 벽이 벗겨진 채로박살이 났다. 기물이 산산이 바스러지면서 조각이 마구 튀었다.

곳곳에 새겨지는 흔적들.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무언가 걸리적거렸다.

'뭔가. 모순 되는 느낌인데.' 하지만 레나에게 길을 열라고 할수도 없는 노릇이다. 모든 회로에 흐르는 힘을 활성화시킨다.

[냉기 폭풍 Lv. 1을 사용합니다!]

- 부우옹!

대검을 매개체로 마법을 발한 채,

그대로 강하게 휘둘렀다.

강력한 기운이 대검 끝에서 터져나갔다. 좀비 십여 구가 한순간에 모조리 얼어 버렸다.

'모두. 부서진 채 쉬게 해 주마.'

동굴 벽 곳곳에 푸른 한기가 서려있었다. 대검에 직접 타격당해 아예 뜯어져 나간 곳도 있었고, 얇은 석벽은 아예 뚫려져 반대편이 훤히 드러난 곳도 있었다.

그 파괴의 현장을 흘끗 바라봤다.

모두 내가 만들어 낸 광경이다.

"마법을. 자주 쓰시네요."

"그런가."

아이작의 부추김에 조금 흔들리고 있었던 걸까?

하지만 딱히 수상한 기색은 없다.

내 몸을 흐르는 루-륨.

아이작이 알려 준 회로에 의해서 흐르는 이 은빛 마력액은, 분명히내 의지에 의해서 통제되고 있다.

- 다그닥! 다그닥!

말을 달려 앞으로 나아가며, 곁의레나를 흘끗 바라봤다.

함께 던전을 돈 결과.

그녀의 스탯과 직업 레벨도 꽤 나오른 상태다.

[이름: 레나]

[호감도: 60]

[도적 Lv.16]

[검사 Lv.10](new!)

[트릭스터 Lv.13]

[사냥꾼 Lv.3]

[어째 신 Lv.6]

[상인 Lv.5]

[체력: 39]

[힘: 39]

[민첩: 55]

[지혜: 41]

[특전]

재능 (B+)

전투 감각(B)

아래로 빼곡이 스킬이 펼쳐진다.

전쟁터의 최전선에 던져 놔도 혼자서 부대 하나쯤은 씹어 먹고 가볍게 돌아올 정도다.

물론, 그녀를 그런 식으로 사용할 생각은 없다.

애초에 그녀를 섭외한 건, 다양한정보를 입수하기 위한 용도다.

지금은 원래 목적이 흐려진 감이있지만, 어쨌건 그녀에게 전투원의역할은 기대한 적 없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겨울을 전한다.

구불구불한 산 위로 비치는 누런 햇빛이 납작하게 땅에 달라붙는다.

우리는 아만을 향해 걷고 있다.

저 산을 돌아가면 중부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라는 아만이 등장한다.

그곳에서 하루를 묵은 뒤.

이후는 볼 것 없이 제국 수도로 직행한다.

레나를 지부장으로 만들면 1차 목표는 달성이다.

그녀를 T&T 지부장으로 만든 이후의 특별한 계획은 없다.

지금처럼 던전을 돌아다니며 무분별하게 스탯과 용사 포인트를 획득하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인간의 전장을 배회할 생각이다.

흡수할 만한 정수를 찾을 때까지.

물론 내가 흡수할 만한 강한 녀석들은 순순히 시체가 되어 전장에 드러누워 주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직접 사냥해야 한다.

난전에 끼어들어서.

영웅으로 불리는 무리들을 하나씩 시체로 만들 생각이다.

아직은 모호한 계획이다.

그렇게 한 단계씩 올라가다 보면.

20년 뒤.

옛 마스터인 서큐버스님도 간단히 지켜 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이 계획은 살육과 포식뿐이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쫓고 죽이고빼앗는 것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거부감은 이미 흐릿하다.

- 휘이이잉!

천천히 산 아래를 돌아갈 때였다.

한차례 바람이 불었다.

'응?' 순간 기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근처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기분 탓인가.'

주시하고 있다는 눈빛도.

쫓기는 기분이나 살기 같은 것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바람이 이상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허공.

그곳이 뭔가로 막혀 있는 것처럼,

바람이.

'미묘하군.'

그냥 망상일지도 모르지만.

후작에게 한 번 제대로 추격을 당한 경험이 있는 내게 있어서는, 이런 것조차 신경 쓰이는 요소였다.

'집중. 탐지.'

주위를 연거푸 훌었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레나."

"네! 스승님! 무슨 일 있으세요?"

그녀도 별다른 건 느끼지 못한 것같았다.

나 역시 바람이 불어오는 쪽에 서있지 않았다면 전혀 몰랐을 테니.

"아만으로 가자. 정보 경매라고 했지?"

"네. 원하는 키워드를 말하면.

달리아크에 머무르는 자들이 갓 들어온 신선한 정보를 제공해 줘요."

"역추적 가능성은?"

"낮아요. 판매자가 팔고 싶은 것만 사는 대신 보안은 장점이에요. 중개자가 개입하거든요. 하지만.

레나는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듯말꼬리를 흐렸다.

"뭐지?"

"가격이. 깜깜해요. 구매자는 나 말고 누가 얼마를 불렀는지 모르니까요. 말만 경매죠. 바가지 쓰기 딱좋은 시스템이에요."

"그래도 일단 가 보자."

"네!"

- 다그닥! 다그닥!

나는 빠르게 말을 몰았다.

사냥감의 기분.

무언가에 쫓기는 기분을 느껴서일까.

높은 가격을 지불하더라도.

달리아크의 〈정보 경매〉에서 꼭알아보고 싶은 게 있었다.

바티엔느 폰 레안드로 후작.

푸른 갑옷의 검주.

그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폭풍 속에 서서 이사벨의 살해를 추궁하던 인간 남자의 모습이 떠오르자 척추로 한기가 차올랐다.

그는 이번에 왜 나를 쫓아오지 않았을까. 나를 쫓지 않았다면, 누굴쫓고 있을까.

147화 공동의 적, 내부의 적 (4)

***************************************************

"이제 곧 도착이에요!"

레나가 손을 들었다.

가지고 있던 망원경을 내리고 내 쪽을 바라봤다.

과연 저 멀리 도시의 윤곽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그라스미어보다 엇비슷하거나, 조금 더 큰 도시였다.

서서히 지는 해가 도시의 성벽을 붉은 노을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저기가 아만인가?'

물론 나는 처음 방문하는 도시다.

아만에 대해서는 거의 모른다.

점점 가까이 다가가자 도시의 모습이 조금씩 더 자세히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작의 말대로 서쪽 사막 지대의 영향을 많이 받은 도시인 둣, 도시전체를 감싸고 있는 성벽의 양식이 조금 독특했다.

= 300년 만에 오는 아만인가_아이작이 과거를 회상하려는 듯 말꼬리를 흐렸다.

= 감회가 새롭군.

나 역시 그러했다.

예전에 와 본 적은 없으나, 이런인간의 대도시들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다시 회귀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더라면.

완전히 부서진 채 전혀 움직이지못하고 있을 것이다.

기스-제-라이가 내게 전해 준 정수 흡수 능력이 없었더라면.

이런 곳에 올 수 있었다고 해도,

비교도 할 수 없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이미 늦은 시간이라서인지, 성문에길게 늘어선 줄은 없었다.

대신 경비병들이 창을 곧게 세우고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다가오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신분증을 제시하셔야 합니다."

"여기요."

레나는 그라스미어의 영주가 만들어 준 가짜 신분증 두 장을 앞으로 내밀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닙니다. 완벽합니다. 통과하셔도 좋습니다."

투구를 벗어 보라는 말도 없었다.

아만의 영주도 다를 게 없다.

그라스미어의 무기 공급에 살살 눈치를 보는 처지인 것이다.

- 다그닥! 다그닥!

순식간에 그라스미어의 특사가 된 우리는 당당하게 다섯 필의 말을 몰고 안으로 들어갔다.

수문장은 성문 양쪽을 다 활짝 열고 우리를 도시로 들여보냈다.

슬슬 해가 지는 탓인지 주위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레나는 주위를 빠르게 살피며 앞장서 나를 달리아크로 안내했다.

담이 조금씩 높아지고.

골목의 폭은 반대로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전부 부숴 버리지 않는 한 대검을 휘두르기 불편할 것 같다.

'탐지.'

탐지 스킬을 써서 사방을 다시 한번 빠르게 촘촘히 훑었다. 하지만수상해 보이는 기척은 없었다.

누군가 나를 따라오는 기척도 전혀없었다. 레나도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오던 중 바람이 불었을 때.

바로 옆으로 오는 바람이, 무언가투명한 장애물을 지나 불어오는 것 같았을 때.

그때도 기척은 전혀 없었다.

'후우.'

= 뭘 겁먹고 있냐? 갈 거면 빨리들 어가든가. 결계 처음 봐?

"뭐?"

나는 놀라서 그만 소리를 내어 아이작에게 대답해 버렸다.

= 그래. 그렇게 가르쳤는데 한 번에 못 알아보냐?

"결계라고?"

내 말에 레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 해치는 결계는 아니다. 감정을 안정시키고 평화로운 기분이 들게 해 주는 결계지. 들어가면 된다.

≪ ?. ≫

"W.?

나는 아이작의 말을 레나에게 전달해 줬다.

"그냥 얌전하게 만드는 결계라 고하는군. 넌 어떻게 하고 싶지?"

레나가 어깨를 으쪽했다.

"저 안쪽을 철저한 안전지대로 만들고 싶은 건가요? 왠지 저 녀석들 의도대로 따라가고 싶진 않네요."

"그럼 어쩌지.

= 결계의 신인 나를 두고서 대체무슨 걱정이냐? 내가 시키는 대로 걸어라. 먼저.

우리는 말에서 내린 뒤, 아이작의말에 따라 한 걸음 한 걸음을 패턴에 따라 걸었다.

한 발자국.

다시 한 발자국.

아이작의 설명은 꽤 복잡했다.

교단에서 결계를 제대로 배우지 않았더라면, 지시가 무슨 말인지도 알아듣지 못했을 듯하다.

놈의 교단 결계를 복구해 주며 나 역시 은연중에 많은 배움을 얻은 것이다.

아이작은 왔던 길을 그대로 되짚어가라고 말하기도 하고, 왼쪽 돌담에 붙어서 계속 같은 곳을 빙빙 돌게 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삼십 분 정도를 들어가자결국 골목은 여관 입구로 통했다.

- 화르록!

얼핏 보기에도 서른 채가 넘는 건물이 이어진 거대한 여관.

그 마당에 몇 개의 커다란 횃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회원이십니까?"

하얀 가면을 쓴 여자가 나를 바라보고 물었다.

마당에 서 있는 건 그 여자 하나였지만, 건물 안쪽 사방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은 기척이었다.

= 눈동자를 흐려라. 멍한 척해. 결계의 영향을 받은 척!

"아니요. 그냥 하룻밤 머물려고 왔어요. 괜찮. 을까요?"

"비회원 구역은 이쪽입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레나의 연기가 훌륭했던 걸까.

아니면 적당히 넘어갈 생각인지,

여자는 별말 없이 우리를 여관 한쪽으로 안내했다.

= 여기도 전부 결계다. 흔들리는 횃불을 쳐다보지 말고 걸어라.

아이작의 말은 레나에게도 전해지는 채였다. 여자가 안내한 곳으로 가자 약간 멍한 표정의 인간들이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했다.

= 결계에 영향 받은 녀석들이지.

[네가 만든 결계냐?]

= 흐하핫. 아니다. 이건 300년전에도 있었다. 상당히 높은 수준의결계지.

[누가.]

=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른다. 모른다고 일일이 다 묻지 마라. 내가 네가 정교사냐?

아무래도 모르는 걸 내가 물어봐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다.

= 찾을 게 있다고 하지 않았냐?

빨리 경매에나 참가해 봐라.

가면을 쓴 여자는 정보 경매에 참가하는 위치를 알려 주었다.

그밖에 다른 건 전혀 말해 주지 않은 채 우리를 놔두고 돌아갔다.

나는 여자가 안내해 준 방 밖으로 나와 주변을 천천히 돌아봤다.

가면을 쓴 자는 우리를 안내했던 여자밖에 없었고, 나머지는 모두 얼굴을 드러낸 손님이었다.

"일반인들인가."

= 다들 하나같이 멍청한 표정들을 짓고 있군.

"레나, 방값은?"

"일단은 후불이에요. 합쳐서 나갈 때 청구한다고 하네요."

장소 외에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고 가 버린 여자 대신, 레나에게 다시 한 번 경매에 대해 들었다.

회원권을 가진 판매자가 중개자 역할을 하는 달리아크에 정보를 위탁한다.

달리아크의 경매 담당관이 정해진 기간 동안 정보를 가지고 있다가, 그 시기에 가장 높은 가격을 부른 자에게 정보를 판매한다.

일정 이상의 가격을 부른 자에게 팔아넘기거나.

중개인 외에는.

누가 뭘 팔았고, 누가 뭘 샀는지전혀 알 수 없다.

나는 여자가 알려 준〈경매장〉으로 혼자 들어갔다.

경매장이라고 불리지만 사실 작은 건물이다.

오직 한 명만 입장하는 게 그곳의 철칙이었다. 레나도 나를 따라 들어올 수 없었다.

밤톨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이작은.

메달이다.

그냥 적당히 덜렁덜렁 들고 가면 상관없는 존재다.

나는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별일 없겠지? 레나에게.]

= 달리아크는 모든 종류의 폭력이매우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정보 상들과 암살자들이, 한 군데서는 편히 마음 놓고 쉬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곳이 바로 여기지.

[누가 만든 거냐?]

= 한 번에 하나씩 해, 무식한 놈.

[그건 모르는군.]

그때 였다.

"정보를 사러 오셨소이까."

장막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멍한 척해라.

""? 으음. 그렇소."

= .연기 하나 제대로 못 하냐.

반대편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말을이었다.

"인간이 아니고. 결계에 영향을 안받으셨군."

"!"

나는 놀라서 몸이 굳었다.

[어차피 다 꿰뚫어 보고 있는데?]

= 없어 보이게 쫄지 마라. 달리아크를 운영하는 놈들이 먼저 폭력을쓸 일은 없을 거다. 300년 전처럼 전통이 유지된다면.

과연 아이작의 말대로였다.

"뭐, 인외人外라도 상관은 없소.

비폭력 원칙만 잘 지켜 준다면야."

빠르게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투구도 벗지 않았다.

하지만 장막 너머의 목소리는 단한 번에 내 정체를 알아챘다.

진짜 강자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제국 안에서 〈중립적인〉지역을 운영한다는 게 강한 힘을 요구하리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 장소에, 온갖 정보 상인및 암살자들이 쉬러 온다는 걸 생각한다면.

위험한 자들에게 평화를 준다?

그러면 그 모두를 짓밟을 정도의 무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 야, 재가 너 쳐다본다.

아이작이 나를 재촉했다.

장막 뒤의 상대에게 말을 걸었다.

"으흠. 정보를 사러 왔는데.

"처음이로군."

"그렇소."

"본인이 직접 원하는 건가?"

= 누구 똘마니냐고 묻는 거다. 네가 직접 원한다고 해. 안 그러면 말이 길어질 수 있으니까.

"그거야. 당연하지."

"당연, 하다? 호오."

장막 뒤의 목소리가 잠시 침묵 을이어 갔다.

상대가 어떤 자인지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나이도.

성별도 명확하게 읽어 내기가 어려웠다.

어떤 강한 조직에 속해 있는 녀석일까?

네크론? T&T? 아니면.?

하지만 달리아크가 특정한 인간 조직에 속해 있는 장소라면.

적대 조직의 인간들이 편하게 쉴리가 없다.

장막 뒤에서 나를 살피던 상대가 하나씩 질문을 시작했다.

정보를 팔기 전에, 간단히 조사를해 보려는 것 같았다.

[원래 다 이러냐?]

평범한 인간이면 그냥 팔았을 확률이 높겠지. 해골이니까 하는 고생이라고 생각해라. 내가 시키는 대로 대답하면 될 거야.

십여 분이 흘렀다.

상대가 던지는 질문을 아이작이 시키는 대로 모두 대답했다.

상대는 적당히 안심한 것 같았다.

"좋아. 그럼 어떤 정보를 원하지?

가장 신선한 정보는 중부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관한 거야. 위치가 위치다 보니, 특히 수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알기가 쉽지."

아만에서 제국 수도까지는 닷새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다.

"나는. 바티엔느 폰 레안드로 후작에 대해 알고 싶소."

"레안드로 후작? 푸른 사자 기사단의 마스터를 말하는 건가."

"그렇소."

"음. 좋아. 그 정보는 최근에 들어왔군! 운이 좋은 친구야."

대답은 즉각적이다. 머릿속에 전부장부가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 정보는 드물게 딱 정가를 매겨서 파는 녀석이라네. 구질구질하게경매를 붙을 필요도 없지. 돈만 내고, 바로 가져가면 그만이야."

"??? 얼마요?"

"80세이론일세."

= 하. 저 새끼가.!

[비싼 거냐?]

= 당연히 바가지지!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에게 대충 팔아넘기라고 가져오는 정보다. 떨거지 같은 정보일 게 뻔한데 그걸 80세이론을 받아 처먹는다고?

"너무 비싼데.

"정가제일세. 돈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정보가 중요한 거 아닌가?"

하지만 황제의 마차에서 금괴 몇개라도 주워 왔으면 몰라도.

80세이론.

지금은 그리 간단히 지불할 수 없는 금액이라는 건 확실하다.

나는 머릿속으로 간단히 셈을 굴려보기 시작했다.

1세이론은 100로티.

80세이론은 8, (X)0로티.

루비아가 산 것 같은 풀 플레이트메일을, 200벌은 살 수 있는 금액.

"싫으면 나가시게. 제국 4검주에관한 정보라네. 살 사람은 많아."

[어떡하지?]

= 후우. 꼭 살 거라면 그걸 써라.

[그거?]

아이작은 영주가 만들어 준 증서를 상대에게 보여 주라고 했다.

장막 뒤로 증서를 보여 줬다.

상대는 그걸 하나씩 차근차근 훑어보더니 씩 웃으며 말했다.

"증서는 진품이고. 그라스미어의귀빈이셨군. 그럼 청구는 그쪽에 해도 되겠어. 이런 증서를 만들어 줄 정도면. 신용은 충분하니까."

"?. ≫

*급".?

나는 대충 얼버무리며 아이작에게 말을 걸었다.

[그라스미어 영주는 이런 녀석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거냐? 너무 그쪽에 다 던지는 느낌인데.]

= 그걸 왜 네가 걱정하지? 그냥당장 정보만 얻으면 되는 거지.

아이작의 사고방식에 할 말을 잃어가고 있을 때, 장막 뒤의 상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잠시 기다리시게.

- 쿠구구구궁.!

바닥이 꺼지는 소리 같았다. 장막저편의 단단한 돌바닥 어딘가에서땅이 꺼지고 있는 것이다.

아이작이 내게 말을 걸었다.

= 쫓아갈 생각은 없냐? 가서 다빼앗아 보든가.

물론 그럴 생각은 조금도 없다.

아이작도 진심은 아닐 거다.

아무 대비 없이 저기 몸을 던지는 건 멍청한 짓이다. 온갖 기계, 마법함정과 결계가 빼곡할 거다.

방금 전의 인간 한 명도 만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30분쯤이 지났을 때.

- 쿠구구구.!

바닥에서 올라온 상대가 나에게 두루마리 하나를 내게 건넸다.

밀랍으로 면 전체가 봉해져 있는 두루마기 였다.

"바티엔느 폰 레안드로. 후작에 관한 가장 신선한 정보일세. 판독관이80세이론을 불렀으니 그만한 가치는 있을 거야. 잘 활용하시게."

- 화르르!

옆 난로에 불이 켜졌다.

"여기서 읽고 태워 버려도 되고,

가져가도 상관은 없네. 그럼 10분후 퇴장해 주게나. 허용된 시간이거기까지 니까."

나는 두루마리의 봉인을 뜯기 전,

장막 뒤의 상대에게 물었다.

"이야기하게."

"캐빈 애슈턴에 관한 정보는 갖고 있소?"

"없네."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148화 공동의 적, 내부의 적 (5)

***************************************************

단호하게 끊어 내는 대답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조금 더 알아보겠다거나.

가지고 있는 정보 목록을 조회해보겠다거나 하는 이야기조차 없다.

일말의 여지도 없는 거절.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궁금해 하는 동안.

"그럼 들어가겠소이다."

장막 뒤의 상대는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공간. 홀로 남겨진 나는 두루마리를 풀었다.

후작에 관해 읽는다.

무슨 정보가 적혀 있을까?

혹시 이 도시에 녀석이 머무르고 있지는 않을까?

나를 쫓아오고 있지 않을까?

이런저런 추측을 하는 사이, 내 손은 어느새 두루마리의 봉인을 뜯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두루마리에 적힌 첫 줄을 확인하자 팽팽한 긴장이 순식간에 툭 끊어졌다.

바티엔느 폰 레안드로출생: 1118년, 향년 29세 / 사망 작위: [前]대상조 [前]관내후소속기관: [前]푸른 사자 기사단총단장 / 전투원수元的기사단 내 석차: 번외番外부모: .

거주지: .

취미: .

하지만 아래에 적혀 있는 것들은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바티엔느 폰 레안드로출생: 1118년, 향년 29세 / 사망사망.

사망.

사망.

바티엔느 폰 레안드로의 이름과 그 아래 적힌 사망이라는 글자를 나는 몇 번이고 다시 들여다봤다.

하지만 글자는 변하지 않았다.

물론 동명이인일 가능성은 없다.

바다로 나가서 크라켄이라도 다시한 번 사냥한 걸까?

그자가 죽었다는 게.

누가 그를 죽일 수 있었다는 게제대로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시선을 아래로 내려 자세한 사항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황실에 대한 반란을 꾀하던 중,

은밀히 살해당한 뒤 자살로 위장. 〉

두루마리에는 후작의 간략한 신상정보와 함께.

일이 처리된 뒤 국장이 치러지는 날짜와 장소가 적혀 있었다.

사망은 놀랍게도 사흘 전.

국장은 사흘 뒤에 치러진다.

서두른다면 장례가 치러질 때를 맞춰서 갈 수 있다.

= 자살 당했네.

아이작이 툭 내뱉었다. 그 웃기는 조어를 가만히 곱씹다가 녀석에게 물었다.

[반란을 꾀했다면. 공공연하게 처형하는 게 정상 아닌가?]

국장國葬.

인간들의 국가에 공로가 큰 자가 죽었을 때 치르는 예식이다.

반역자에게 그런 예우를 갖춘다는 건 명백히 괴이한 일이다.

= 큭큭큭. 고민하다 선택한 거지.

제국을 대표하던 4대 검주 중 한명이니까. 공식적으로는 한 영웅의비극적 자살로 만든 게지.

= 게다가 푸른 사자 기사단 총단장이잖아? 황실 반역죄로 처형하면 밑에 애들이 안 불안하겠어? 전쟁을 앞둔 상태에서 말이야.

[대체 왜? 누가? 자살했다고 하는 것도 이상한 건 마찬가지일 텐데.

정말 이 남자가 반역을 꾀했을까?]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였다.

아이작이 기묘하다는 듯이 내게 질문을 던졌다.

= 이유야 만들면 되지. 말수 적고외톨이인 녀석이라며? 우울증으로 자살했다면 안 믿고 어쩔 건데?

[그런가.]

= 근데 얘한테 관심 있는 이유가 뭔데? 팬이냐?

물론 아이작에게 사정을 설명해 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나저나.

후작이 죽었다면, 쫓기고 있다는 느낌은 순전히 착각이었던 걸까.

"후우."

국장이 치러지는 날짜와 장소를 머릿속에 제대로 집어넣었다.

- 화? 르르!

적당히 구긴 종이가 화로 속에서 타올랐다. 불꽃이 허공에 어지럽게 튀어 올랐다.

위험하지 않은 선에서, 후작의 죽음에 대해 알아보고 싶었다.

물론 지금 곧바로 제국 수도로 달려갈 생각은 아니다.

레나도, 다른 말들도 쉬어야 한다.

그런데 후작이 죽었다면.

그가 아니라면 누가 날 쫓아오고 있다는 이야기일까?

- 저벅.

나는 미행을 확인하기 위해 같은 골목 모퉁이를 세 바퀴 돌았다.

물론 쫓아오는 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감각에 걸리는 녀석도 없었다.

'역시 착각이었나?'

- 끼이익.

나는 마지막으로 길가의 주점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서 입구가 보이는 자리에 앉아 있으면, 새로 들어오는 자들 중에서 분명히 추적자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비회원 숙소 구역에서 들어갈 수있는 주점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불이 켜져 있으면, 영업합니다. 〉

꽤나 긴 간판을 단 주점.

권태가 눈가에 묻어나는 퇴폐적인인상의 바싹 마른 여자가 카운터에서 물 담배를 피고 있었다.

여자가 초록색 눈동자를 깜빡이면서 나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카운터 뒤쪽.

인간 서넛도 들어갈 수 있을 것같은 큰 새장에, 팔색조 두 마리가 작은 날개를 파닥거리고 있었다.

가게 안쪽을 돌아봤다.

여러 가지 무늬가 직조된 반투명천들이, 천장에 매달려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를 구분했다.

서넛이 모여 한눈에도 비싸 보이는 술을 기울이는 일행도 있었고, 비스듬히 누워 테이블에 커다란 물 담배 항아리를 놓고 피우는 자들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메뉴판을 보고 맨 위에 있는 물 담배를 주문했다.

"딸기 맛으로."

"곧 준비해 드릴게요. 테이블은 이쪽이에요."

가격은 30위젯.

동화 세 개를 먼저 지불한 뒤.

긴 갈색 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온 여자를 따라갔다. 그녀의 안내에 따라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이걸 쓰세요."

여자가 초록색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카운터에서 가져온 일회용 담뱃대를 건넸다.

자연스러운 척 입에 물어 보았다.

= 품. 거꾸로 끼웠잖아.

제대로 바꿔 물고 입구를 가만히 바라봤다. 탐지 스킬을 활성화한채 입구를 집중해서 지켜봤다.

갈비뼈 사이사이를 딸기맛 연기가 가득 메운다.

시간이 지나간다.

하지만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다.

내 주위에서 수상한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두 시간이 넘게 지났다.

테이블 위에 놓인 투명한 유리 항아리를 바라봤다.

달콤한 연기가 보글보글 끓어오르던 항아리엔 액상이 이미 반 이상 줄어들어 있었다.

= 해골 주제에 물 담배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굴지 말라고.

그때 였다.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입구 주위를 바라봤다. 회색 후드를 깊게 뒤집어쓴 누군가가 내 쪽으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혹시 날 미행하던 녀석인가?'

나는 회색 후드를 쫓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드를 쓴 수상한 자는 그 사이바깥으로 사라졌다.

녀석을 따라 입구를 나가려 할 때였다.

"고객님, 계산하셔야 됩니다."

카운터를 보는 여자가 눈을 깜빡이며 내게 흰 손을 내밀었다.

"계산? 들어올 때 하지 않았나?"

"방금 나간 분께서 손님이 이제 여기로 와서 자기 테이블까지 계산할거라고 하셨는데요?"

"무슨. 들어오는 게 아니라 지금 나가는 거였나?"

"저분, 두 시간이나 계셨는걸요."

"총 9로티 10위젯입니다."

여자가 초록색 눈동자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뭘 얼마나 처먹었길래.!"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외쳤다.

내가 주문한 물담배의 30배가 넘는 금액이 청구됐다.

"너티 볼드에 골든 시럽 다섯 스푼추가, 달 모아 브리냑에 샤토 엠플세 방울 추가. 세쿠어 에일에 노블스위티 여섯 스푼 추가.

"많이 달게 드셨어요. 전부 최고급품만 주문하셔서."

"헛소리. 난 나가겠소."

"네? 가신다고요? 돈을 안 내고가시면 곤란한데요.

카운터 여자는 어딘가 약에 취해있는 것 같았다.

내가 앉아 있는 사이 뭐라도 흡입한 걸까.

"그리고 저분이 이걸 전해 달라 고했어요."

여자가 내게 쪽지를 내밀었다.

바로 펼쳐 보니 적당히 휘갈겨 쓴 글씨로 황당한 말이 적혀 있었다.

〈곧 나에게 감사하게 될 거야. 〉

무슨 소린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기괴하게도.

어디선가 이 글씨체를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분명 낯익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순순히 카운터에 돈을 내어주지는않았을 것이다.

나는 계산서에 적힌 대로 빠르게 돈을 지불하고 바깥으로 나갔다.

소란을 일으키면 내가 곤란하다.

회색 후드를 쫓는 게 급했다.

탐지 스킬을 최대로 활성화한 채로상대를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해 봐도 여자의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빨리 범위 안에서 사라질 수는 없었다.

[아이작?]

놈의 조언이라도 청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이상하게 조용했다.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하다.

'안 부를 때는 시끄럽더니.

가능성은 하나밖에 없다.

방금 밖으로 나간 회색 후드는 내감각을 완전히 따돌린 것이다.

나는 혼자 생각에 잠겼다.

왜 나한테 돈을 내게 만들었을까.

뭘 감사한다는 걸까.

의문에 빠져 주위를 계속 살폈다.

내 바로 뒤에 있을 수도.

담장 건너 있을 수도 있다.

지붕 위에서 나를 내려 보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날 쫓던 게 정말 그 회색 후드였다는 말인가?

대체 누굴까?

정보가 부족하다.

답답했다.

'정보가. 빨리 레나를 T&T에서 키워 줘야겠군.'

어둠 속의 조력자를 키워야 한다.

레나의 시나리오를 서둘러 달성할 필요가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레나와 함께 길을 떠났다. 밤새 배회했지만, 끝내 회색후드는 찾을 수 없었다.

흘끗 레나를 바라봤다.

"푹 쉬었나?"

"네!"

레나는 어제와 달리 피부에 제법윤기가 흘렀다.

짙은 피로감에 찌들었던 어제의 모습이 겹쳐 떠올랐다.

'자고 가길 잘했군.'

밤톨이는 레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가슴에 쏙 들어간 채안에서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 다그닥! 다그닥!

우리는 이틀 동안 말을 달렸다. 중간에 있는 다른 던전들을 들를 수도있었지만, 수도까지 가는 길을 조금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바티엔느 폰 레안드로푸른 갑옷의 기사.

후작의 장례식을 내 눈으로 참관하고 싶었다.

레나를 한시라도 빨리 T&T 지부장으로 만들어서, 열람하게 하고 싶은 정보가 하나둘이 아니었다.

은밀한 욕심도 있었다.

두루마리에 적혔던, 후작이 죽은 날짜가 정확하다면.

이틀 안에 도착하면, 다시 한 번 후작의 정수를 흡수할 수 있다.

정수 흡수 기준은 점점 가파르게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후작 정도라면 문제없다.

이번에는 녀석에게 어떤 스킬을 흡수할 수 있을지 은근한 기대마저 들고 있었다.

달리아크를 떠난 뒤.

두 번째 보는 석양이 서서히 지기 시작할 무렵.

"스승님!"

- 히히히힝!

레나가 말의 달리는 속도를 천천히 늦추기 시작했다.

"뭐지?"

"이대로 직진하면〈좁은걸 협곡〉을지나야 해요."

"좁은걸 협곡?"

"네. 건 국제 세이론이 천 년 전에 지나면서 좁다고 투덜거렸던 협곡이래요. 슬슬 수도에 가까워지는 기분이 나네요. 세이론과 관련된 지명도나 오고."

"저 협곡은 길이 하나밖에 없고 좁아요. 누군가가 매복해 있으면 당하기가 쉬운 위치죠."

"돌아가면 얼마나 걸리지?

"나흘 더 걸려요. 좀 더 무리하면 아슬아슬하게 사흘 반 정도예요. 빨리 가야 될 이유가 없다면.

레나는 아무래도 협곡을 통하기 싫은 것 같았다.

하지만 고민할 것도 없다.

그때가 되면 후작의 정수를 흡수할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다.

욕심을 부리기로 했다.

"바로 협곡으로 간다."

먼저 말을 달렸다.

한 시간 정도 말을 더 달렸다.

평원이 끝났다. 험한 산악 지대가 우리를 맞이했다.

"여기지?"

"맞아요. 이 산을 넘으면 곧바로 제국 수도예요."

시나리오 달성이 눈앞이다.

후작의 장례식이 눈앞에 있다.

지형은 더 이상 말을 탈 수 없을 정도로 좁고 험해졌다.

"들고 가지 않는 이상 못 데리고가겠군."

우리는 다섯 마리 말을 전부 평원 쪽으로 멀리 풀어놓았다.

좁은 길을 달리다시피 움직였다.

수도에 빠르게 도착하는 게 중요했다.

조금씩 더 깊은 협곡으로 걸어갔을 때였다.

"스승님! 매복이에요."

망원경을 들고 주위를 꼼꼼히 살피던 레나가 낮게 말했다.

"사방에 넓게 퍼져 있어요. 수도 쪽에서 나와서 기다린 것 같아요."

그녀의 말대로였다.

앞쪽 숲에서 몸을 숨기고 있는 자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탐지 범위 바깥에서 기척이 계속하나둘씩 추가됐다.

"포위가. 얼마나 넓게 된 건지 잘감이 잡히질 않을 정도예요. 점점 조여 오고 있어요!"

나를 꾸준히 따라왔던 게 아니다.

"이게 무슨.

마치 내가 그물망에 스스로 몸을 던진 것 같은 모양새다.

이 정도 포위망을 칠 만한 상대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나에게. 그런 가치가 있나?' 레나의 관측에 따르면 적은 분명앞쪽에서 충원되고 있다.

협곡을 지나면 곧 수도가 나온다.

수도에 있는 세력이 움직였다는 이야기다.

"아이작이 뭔 짓을 한 거 아닐까?

수상한데. 너냐?"

하지만 놈은 달리아크의 주점에 들른 이후 내게 제대로 된 말을 걸지 않고 있었다.

= .글쎄.

"이 새끼가.

대답은 모호했다.

레나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일단 빠져나가야 해요."

149화 공동의 적, 내부의 적 (6)

***************************************************

"누군지 몰라도 우리 루트를 다 읽어 내고 있으니까, 아예 새로 길을 찾아보는 게 좋겠어요."

고개를 끄덕였다.

포위망이 얼마나 넓은지, 저 뒤의 깊은 협곡에 적이 얼마나 숨어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정면 돌파는 무모한 일이다.

조심스럽게 뒤로 돌아서 협곡을 빠져나가려 할 때였다.

- 쉬쉬싁!

- 피융!

폭죽은 차갑게 말라 있는 하늘에 붉은빛과 열을 비비다 사라졌다.

동시에 저쪽 멀리서부터, 사방에숨죽이고 있던 자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선두에는, 다양한 복색의 인간 아홉 명이 우리를 향해 정면에서 빠른 속도로 달려들고 있었다.

'젠장.'

"확실하네요. 우리를 노리고 있었어요. 죄송해요. 제 잘못이에요. 좀더 빨리 알아챘어야 하는데.!"

당연히 그녀의 잘못일 리가 없다.

놈들이 기척을 죽이고 넓게 포위를친 곳으로, 내가 앞장서 빠르게 말을 몰아갔던 것이다.

"네 잘못이라니, 그런 터무니없는 농담은 그만두라고."

말은 여유롭게 했지만 마음은 초조하게 타 들어갔다.

시나리오 달성과 후작 흡수가 눈앞에서 좌절될지도 모른다.

- 파앗!

'너무 빠르잖아?'

아홉 명의 인간이, 좁은 길을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말을 타고 평원을 달리는 속도에 크게 뒤지지 않을 정도다.

'인간이 맞기는 한 건가?'

나는 칼을 높이 들었다.

- 우우우우옹!

달려오는 자들은 검기를 보고 약간 경계했다.

하지만 크게 겁내는 기색은 없이 그대로 달려오고 있었다.

'저 정도의 속도를 낼 수 있는 놈들이라면.!'

저들만 상대해야 될 리도 없다.

결코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거라고생각했다.

어쩌면.

레나 혼자만 살려 보내기도 어려울지 모른다.

'설마. 또 실패인가?'

앞장서 달려온 아흡 명은 제각기우리 근처에 섰다.

- 구구구1놈들에게서 하나같이 짙은 마기魔氣가 피어올랐다.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녀석도 있었다.

완전히 뒤로 벗겨진 대머리에 눈이 움푹 들어간 남자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뒤돌아 가기엔 이미 늦었다.

빛나는 대머리에는 사자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이제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마왕 푸르손을 추종하는 놈들의 문양이 분명했다.

'이것들은 왜 항상 떼로 몰려다니는 거지?' 언제든 검을 휘둘러 공격해 나갈 준비를 하며 놈들에게 물었다.

"푸르손을 섬기는 것들이냐?"

저번 생에서 문양을 확인했기에 할수 있는 대담한 추측.

하지만.

그들은 내 날카로운 추측에도 예상외로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대신 선두에 선 대머리가 낮은 어조로 중얼거렸다.

"거참, 당연한 소리를 대단한 비밀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네?.

온몸에 길게 털이 뒤덮인 남자가 흉흉한 기세를 내뿜으며 말했다.

"그렇게 왕의 제단을 다 때려 부쉈으면서, 우리 말고 누가 널 이렇게 노릴 거라고 생각했냐?"

"제단을. 때려 부셔?"

나는 당황했다.

"아닌 척해도 소용없다. 제단마다까마귀의 인장을 대놓고 남기고 다니지 않았느냐? 함정인 줄 알았지만 그것도 아니더군."

까마귀의 인장이라고? 무슨 말 을하고 있는지 온통 아리송했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깊이 고민에 빠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말파스의 맥을 전부 끊어 놨다 생각했건만."

'말파스?' 이번에는 바위 위에 서 있는 긴 흑발의 남자가 날카롭게 나를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머리에 로브를 쓰고, 짙은 갈색 피부를 가진 녀석이었다.

"긴말하지 않겠다.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대놓고 깽판을 치면서 다녔는지 몰라도, 네놈은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다."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림이 하나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아이작은 말파스의 대제사장.

오면서 들렀던 세 곳은.

모두 아이작이 새롭게 알려 줬던 던전이다.

〈고문 미궁〉, 〈시든 개미 토굴〉,

〈섬뜩한 전갈 소굴〉.

거미굴 밑에 바알의 버려진 신전이 있었던 것처럼.

그곳들이 전부 푸르손의 제단이었다면 어떨까.

되짚어 보면, 아이작은 던전에 들어갈 때마다 나에게 마법을 남용하도록 살살 유도했었다.

나도 지금 아니면 다음 생에 다시마법을 쓸 수 있을까 싶었다.

검으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상황에 조금 과할 정도로 마법을 사용했다.

놈의 심리전에 말려든 셈이다.

아직 한 가지가 걸린다.

마법만 썼다고 말파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까?

아이작은 두 번에 걸쳐서 나에게루-륨 회로를 새기게 만들었다.

그 회로에 뭔가 문제가 있었던 게분명하다.

푸르손의 추종자들에게 나를 쫓게 하는 흔적을 남겼을 거다.

[이 개새끼가.!]

나는 아이작에게 소리쳤다.

= .심란하니까 좀 닥쳐 봐라.

하지만 아이작의 태도는 묘했다.

아무리 봐도 놈이 의도한 상황.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굉장히즐거워해야 할 것 같은 상황이다.

연기하는 걸까?

상황의 실마리가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오래 고민할 여유는 없다.

레나가 낮게 속삭였다.

"스승님! 뒤로. 빠져나가요!"

- 쿵!

하지만 온몸에 길게 털이 뒤덮인 남자가 발로 땅을 내려찍으며 뒤를 막아섰다.

"여기서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바위 위에 서 있던 흑발의 남자가 로브를 벗었다.

짙은 갈색 피부 위로 은은히 붉은빛이 도는 눈과, 길고 뾰족한 귀가 한눈에 들어왔다.

"엘프.?"

완전히 멸종된 걸로 알려진 엘프.

그것도 희귀종인 다크엘프였다.

"너도 푸르손의 추종자냐.?"

물론 다크엘프는 친절하게 대답해주지는 않았다.

"흥. 뭘 믿고 이렇게 날된 건지는 몰라도, 300년 전의 빚을 이 자리에서 갚아 주마."

- 휘이이이익!

그는 손에 쥐고 있는 각궁을 나를향해 겨눴다. 작은 각궁에 은은한 붉은 기운이 어려 가고 있었다.

"일단 그 건방진 투구부터 벗겨 내주지!"

- 쉬익!

섬광처럼 화살이 날아왔다.

- 까앙!

나는 정확히 목 밑으로 날아오는 화살을 칼로 쳐냈다.

검기가 서린 검에 화살은 그 즉시 튕겨졌다. 하나 경시할 수 없었다.

철제 흉갑 정도는 네 겹쯤 간단히 뚫고 지나갈 위력이었다.

평범한 철검이었으면 그 자리에서 산산이 부서졌을 게 분명하다.

- 쉬익! 쉬이익!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곧바로 후속타가 몰려왔다. 나는 다시 칼을 휘둘러 화살을 쳐내고 소리쳤다.

"잠깐!"

그러자 사자 문신이 새겨진 대머리가 큭큭대며 나를 비웃었다.

"뭐냐? 유언이라도 남길 셈이냐?"

물론 그럴 생각은 없다.

혼자라면 몰라도.

레나도, 밤톨이도 함께 있는 상황.

허무하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한심하군. 내가 설령 말파스의 부하라고 해도. 마왕들끼리 서로 힘을 합쳐야 하는 것 아닌가? 인간에게 지배당하고 있으면서도, 서로 암중에서 물어뜯기 바쁘니 뭐가 될 리가 있나!"

"크하하하하하하!"

그러자 아흡 명이 모두 일제히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스승님. 빨리 도망쳐야 될 것 같은데요.

멀리서도 포위망은 점점 좁혀져 오고 있었다.

놈들은 돌아가며 서로 한 마디씩 보탰다.

"뻔뻔하기까지 하군."

"지금 장난 하냐?"

"하긴, 아이작의 후예라면 충분히 그럴 만하지."

"지들이 잘나갈 때 우리 선조를 노예로 만들어 놓고 별소리를 다 하는군."

"헛소리는 여기까지다! 죽어라!"

- 팟!

앞에 있던 '인간' 셋이 동시에 나에게 달려들었다.

온몸에 갈기가 돋아 있던 놈의 오른팔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우둘투둘 부풀어 오른손으로 내 머리를 잡아 뜯어내려고 했다.

놈의 주먹을 지나쳐 피한 뒤 바로세 놈을 향해 대검을 휘둘렀다.

[냉기 폭풍 Lv.1 발동!]

이미 마법은 장전해 놓고 있던 상태였다. 말파스의 인장이니 뭐니 하지만 이 상황에서 마법을 안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휘이이이잉!

칼끝에 하얗게 뭉쳐 있던 기운이 앞쪽으로 넓게 뻗어 나갔다.

그때 였다.

- 촤악!

작은 지팡이를 든 붉은 단발머리여자가 스크롤을 찢었다.

- 파츠즈즈! 콰앙!

지팡이에서 두 줄기 불꽃이 터져 나와 냉기 폭풍에 작렬했다.

냉기와 불꽃이 서로를 밀어내며 강한 바람을 만들어 냈다.

바닥이 들썩이며 흙먼지가 사방에 뽀얗게 일어났다.

'마법사인가?'

전쟁터에서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아케인 하트가 없는-

준비된 재료로 승부하는 종류의 마법사였다.

손끝에서 마법을 발하는 아쥬라의마법사에게 비교할 수는 없지만, 일반병들에게 전장의 공포로 군림하는 건 매한가지였다.

- 쉬이 이익.

화염과 부딪친 냉기 폭풍은 살상 위력을 잃어버린 채 앞을 한차례 쓸어갔다.

"좀 춤군."

대머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 정도의 존재가 아흡 명.

하지만.

'살아남아야 해.'

이 자리에서 죽을 수는 없다.

나는 양손으로 검을 잡으며 다짐했다.

제국 수도로 간다.

거기서 레나를 T&T 지부장으로 만들 거다.

칼을 높이 들고, 나를 향해 사방에서 달려오는 수백 명의 적을 바라봤다.

돌파한다.

넓은 곳에서 포위에 휩싸이느니.

차라리 좁은 협곡으로 가는 편이 나았다.

- 까앙!

레나는 왼쪽에 있는 두 남자의 합공을 커팅 레이피어로 막 튕겨 내고 있었다.

"떼로 덤비는 놈들 중에 쓸 만한 녀석은 없지. 사라져라!"

[산성酸性 Lv. 5를 발동합니다!]

[격발 Lv. 2를 발동합니다!]

- 치이이이이익!

- 화르륵!

연푸른 산성 검기에 화염까지 타오르는 대검을 앞쪽의 네 명을 향해동시에 뿌리듯이 휘둘렀다.

- 콰광!

거대한 백색 방패를 꺼내 대검을 막아 내던 대머리가 뒤로 크게 물러났다. 하지만 마법을 방어하는 방패인 듯 완전히 폭발하거나 찌그러지지는 않았다.

'방어 담당인가.'

커다란 방패를 보니 서큐버스님을죽였던 용사의 시종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이성을 잃을 수는 없었다.

레나와 밤톨이의 목숨이 나에게 달려 있었다.

나는 녀석을 죽이는 대신 활을 들고 레나를 노리는 다크엘프를 노려칼을 휘둘렀다.

- 콰광!

다른 녀석이 구부러진 쌍칼로 보호했지만, 작은 폭발음이 울리며 녀석이 뒤로 떨어져 나갔다. 입고 있던 옷이 반쯤 그을린 채였다.

"잡을 수 있으면 해 봐라!"

약간의 틈을 만든 나는 레나를 공격하는 녀석들을 향해 다시 연거푸 대검을 휘둘렀다.

- 부응!

숫자에서는 밀렸지만.

모두 나보다 두 수 정도 아래의 녀석들 같았다.

비슷한 상황에 놓였을 때가 떠올랐다.

T&T 이너 서클에 포위되었을 때.

제국 3 본부장인 사슴 아에자르.

〈깨어진 이빨〉웨어울프 발도프.

보육원을 운영하던 슬라임.

그때 만난 놈들에 비하면, 상당히 떨어지는 수준의 상대들이다.

'도망갈 수 있어!'

공격을 당하는 것 따위는 조금도생각하지 않고 마구 대검을 휘둘러 길을 뚫었다.

[질주 Lv. 5를 발동!]

[일도양단 Lv. 1을 발동!]

가속을 실어 앞쪽의 상대를 향해칼을 휘둘렀다.

- 까앙!

네 개의 서로 다른 병장기가 한번에 튕겨져 나가는 게 느껴졌다.

'뚫는다!'

레나를 덥석 안아 들고 앞으로 무작정 달려 나갔다.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수백 미터를 달렸을 때였다.

- 씨이이엉!

커다란 불덩어리가 하늘을 가로질러 나에게 날아왔다.

'또 마법사인가?'

사람 머리만 한 불덩어리를 향해세로로 칼을 휘둘렀다.

- 퍼병!

검기를 두른 칼로 불덩어리를 가르는 순간 커다란 폭발이 일어나며 몸이 살짝 뒤로 쏠렸다.

- 화르르!

협곡 주위의 풀에 불이 붙어 사방으로 번졌다.

순간적으로 갑옷이 그을릴 정도의열기였지만, 화염 저항 메시지가 뜨며 체력은 거의 닳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를 자리에 멈칫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위력이었다.

"저기예요."

나무 뒤에 서 있던 마법사는 다시한 번 시약을 삼키고, 스크롤을 찢으려고 했다.

- 피비비비벅!

레나가 마법사를 향해 손목에 찬석궁을 연사했다.

마법사가 주춤하는 사이 나는 앞으로 뛰쳐나가며 몸을 축으로 삼아 칼을 그대로 휘둘렀다.

- 서걱!

거대한 아름드리나무가 통째로 베어져 나갔지만, 마법사는 뒤에서 그를 잡고 옮겨 주는 거한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눈만 내놓고 다른 곳을 전부 두건으로 가린, 전문 어쌔신처럼 보이는 검은 복장의 인간들이 주위 수풀에서 솟아나 우리를 둘러쌌다.

'다 어디서 나온 놈들이야?'

숫자는 스물.

앞에서 상대한 녀석들에게 뒤지지 않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수는 두 배가 넘는다.

나무 위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시작이다, 아이작의 후예."

[이 망할 새끼가.]

나는 아이작에게 욕을 중얼거렸지만 그런다고 상황이 나아질 리는 없었다.

게다가 아이작은 뭔가 긴장한 듯묵묵부답이었다.

- 콰과과광!

나무 위에서 중얼거리던 녀석으로부터 동시에 다섯 개의 폭탄이 날아들었다.

150화 공동의 적, 내부의 적 (7)

***************************************************

- 콰과과광!!

빠른 속도로 쏘아지는 폭탄 다섯 개를 넓은 검면으로 쳐냈다.

폭탄은 주위의 무성한 수풀 위에서 연달아 폭발했다.

하지만 무리는 날렵하게 몸을 빼내옷에 불이 좀 붙은 걸 제외하고는 다친 자는 없어 보였다.

- 피벅! 피비벅!

휘파람 소리가 신호라도 되는 듯,

사방에서 동시에 수십 발의 독침이 날아들었다.

'결빙.'

칼 전체보다 넓은 범위가 얼어붙으면서 독침들이 모두 근처에 오지 못하고 떨어졌다.

레나는 방독면을 쓴 채, 배낭을 비워내다시피 하며 사방에 폭탄을 뿌려 댔다.

- 푸슈슈슛!

폭탄을 피해 몸을 솟구친 자들에게는 연달아 화살 세례를 먹였다.

"콜록! 콜록.!"

다섯 명 정도의 어쌔신이 가스에중독되어 쿨럭 거리거나 화살에 스쳐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남은 놈들은 전혀 당황한 기색 없이, 품에서 주 무기로 보이는 커다란 전투 표창을 꺼냈다.

살과 뼈가 아니라 쇠도 뜯어낼 수있을 것처럼 흉측하게 보이는 물건들이었다.

"하하. 하하하.

간신히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포위를 뚫었다.

갑옷은 반 이상 날아가 있었고, 그사이로 들어온 무기에 갈비뼈 두엇이 부러진 채였다.

그나마 그라스미어의 3대 영주가 만들었다던 대검만은 멀껑했다.

하지만 허공에 뜬 반투명한 창이 표시하는 내 체력은 이미 30% 대로 떨어져 있었다.

레나도 몸 곳곳에서 피를 홀리고 있었다.

협곡은 절반도 돌파하지 못했다.

앞으로 가지 말고 레나의 말대로 뒤로 도망쳤어야 했나 싶었다.

도저히 포위를 뚫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네 번째로 나타난 건 굵고 거대한마상용 창과 커다란 방패를 지닌 세 명의 오크였다.

이마와 턱이 툭 튀어나온 그들은 인간보다 다섯 배는 발달된 근육을 가지고 있었다.

'오크. 이들까지 푸르손의 세력이었단 말인가? 다 어디 숨어 있었던 거지?,

"나는, 불흉터 족장 아툴루그!"

"밤헛바닥 최고 전사 고모쿠가 너를 상대한다."

"돌외침의 마지막 전사 로그둘! 오크를 노예로 만든 아이작의 후예를 여기서 죽이겠다!"

'정말 골 때리는군.'

[야, 이 새끼야.]

하지만 아이작은 끝까지 대답이 없었다.

세 오크전사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집중.'

- 까앙!

칼을 휘둘러 정교하게 찔러 오는 긴 창을 쳐냈다.

그러나 한 명의 창을 쳐내는 것과 동시에,

"으랴아아아앗!"

또 다른 녀석이 3미터가 넘는 마상돌격용 창을 세차게 찔러 왔다.

- 퍼걱!

이미 반쯤 뚫린 갑옷을 자루까지 철로 된 장창이 깔끔하게 뚫었다.

오크는 내 어깨를 꿴 창을 밀어붙여서 나를 허공에 매달았다.

- 철컥! 철컥!

레나가 화살을 쏘려 했지만 이미몸 안에 장착된 화살은 다 떨어진 뒤였다.

밤톨이도 전투에 휘말려 몸이 반쯤 불에 그을려 있었다.

- 달그락!

어깨를 뚫은 창을 잡아채 빼앗은 뒤, 앞으로 강하게 던졌다.

[투창 Lv. 1을 발동합니다!]

- 쎄애앵!

창은 빠르고 강하게 날아갔다.

세 명의 오크전사는 창을 방패로 막아 냈다.

기술보다는 힘으로 던져진 창은 비스듬히 세워진 방패에 튕겨졌다. 허공으로 멀리 날아갈 뿐이었다.

'망했군.'

굳이 탐지 스킬을 쓰지 않더라도.

다가오는 것들이 하나둘이 아니라는 건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

눈앞의 오크들도 단숨에 돌파하긴 틀려먹은 것 같았다.

온몸에 부상을 입은 채, 힘겹게 숨을 쉬는 레나를 바라봤다.

후작이 썼던 것 같은 엘 릭서는 물론 가지고 있지 않다.

어떻게 보면 슬라임에게 녹아 죽을 때보다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레나에게 잠시 시간을 벌어 주기위해 놈들에게 물었다.

"네놈들은 회유도 안 하는 거냐?

푸르손의 각인을 새기라는 말 같은건 이번에 안 하는 거냐?"

하지만 오크전사들은 그저 어이없다는 표정만 짓고 있었다.

"개소리를.

"순수한 녀석이라면 몰라도, 이미깊이 물든 이교도와 협상은 없다."

"그냥 이 자리에서 죽어라!"

마왕들끼리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건 대충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강림하기 전부터 분열이라니.'

푸르손처럼 제국 쪽에 성공적으로 세력을 심어 놓은 녀석들은, 아예자기 라인으로 인간계를 다 채우려고 하는 것 같았다.

'이래서 망하는 건가?'

그때 였다.

- 퍽!

가장 왼쪽에 서 있던 오크전사의머리가 투구 째로 터져 나갔다.

- 화악!

어떤 꿈을 띄우고 있었을지 이제알 수 없게 된, 뜨거운 뇌수가 두개골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툴.!"

옆에 선 고모쿠라는 오크전사의 허파가 크게 한 번 들썩였다. 그게 그의 마지막 호흡이었다.

- 퍽!

강한 회전이 걸려 있는 무언가가그의 머리를 멀리 날려 버렸다. 철제 투구와 단단한 오크의 두개골이 연한 두부처럼 뭉개졌다.

뜨겁게 뛰던 오크의 심장이 싸늘하게 식어 갔다.

대체 어디서 날아오는 공격인지 파악할 여유조차 없었다.

마지막 남은 오크전사 로그 둘은 탁월한 반사 신경으로 방패를 머리 위에 들어 올렸다.

- 까강!

하지만 강렬한 금속음이 터지며,

강철 방패 윗부분이 폭발하듯 흔적 없이 날아갔다.

재차 공격이 이어졌다.

방패를 들었던 오크전사 로그둘의머리가 터져 날아갔다.

방패에 공격에 가해졌을 때 처음으로 각도가 읽혔다.

왼쪽 위.

까마득한 절벽 위에서, 누군가가회색 로브를 날리며 가파른 절벽을 미끄러져 오고 있었다.

곡예에 대한 감상을 제대로 말할 틈도 없었다.

회색 로브는 그와 나 사이의 거리를 소진시키며 빠르게 다가왔다.

- 끼이이이익!

뒤쪽이 둘로 길게 갈라진, 앞 날 길이만 1미터가 넘는 낫이 절벽을 긁는 소리가 기괴하게 울려 퍼졌다.

가만히 침묵하고 있던 아이작에게 오랜만에 어떤 기색이 느껴졌다.

무언가 꽉 뭉친 괴로운 기색이다.

[뭐야, 아는 거 있냐?]

대답은 없었다.

순식간에 절벽을 달려온 회색 로브는 20여 미터 정도의 높이에서 뛰어 내 앞에 착지했다.

그리고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오며'낫'자루에 장착된 거대한 손잡이를 뒤로 잡아당겼다.

- 철컥! 핑그르르!

가운데가 텅 빈 원통이 두꺼운 낫날 뒤쪽으로 튕겨져 나왔다.

허공에 떠오른, 길이 20cm 정도의 은빛 원통을 손으로 잡아 주머니에 넣은 회색 로브가 입을 열었다.

"이름은 나냐우. 트로핀 나냐우다."

허스키한 여자의 목소리였다.

회색 후드 안쪽으로 백색에 가까운 긴 은발이 비쳐 왔다.

목소리 자체는 젊었지만, 억양에는어딘가 오래된 느낌이 묻어났다.

"너는.!"

한눈에 여자를 알아볼 수 있었다.

달리아크의 주점에서 내게 계산을 떠넘긴 인간이었다.

감사하게 될 거라는 짧은 쪽지.

쪽지에 적혀 있던 글씨가 낯익었던 이유가 있었다.

워낙 터무니없어서 곧바로 떠올리지는 못했지만.

〈. 트로핀 나냐우, 여기에 길드 규칙을 남긴다. 〉

〈단, 루-륨 1L를 가져오는 자는??. 〉

T&T의 옛 룰북에 장난처럼 적혀있던 글씨와 같았기 때문이다.

놀라는 내게 그녀가 말을 이었다.

"여기는 평화로운 남부가 아니야.

넋 놓고 산책할 만한 곳은 아니지."

"지금까지 나를 쫓아왔던 거냐?"

"트로핀 나냐우라면. 설마.!"

레나가 곁에서 나직하게 탄성을 내뱉었다.

떨리는 그 목소리에 나도 나냐우가 누군지 뒤늦게 떠올릴 수 있었다.

"T&T의. 창립자 나냐우?"

"돌보진 않았지만 만든 건 맞지.

해골, 새싹, 빨리 따라와. 난 대량학살에 별로 소질 없거든."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회색 후드가 정말 나냐우인지, 이포위망을 어떻게 뚫는다는 건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녀를 따라가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아니면 여기서 죽는다.

- 팟!

나냐우의 움직임은 환영처럼 보일정도로 빨랐다.

'질주'

나는 레나와 밤톨이를 한꺼번에 안아 든 채 나냐우의 뒤를 쫓았다.

- 철컥.

나냐우는 달리며 또다시 낫 손잡이를 가로로 잡아당겼다.

낫자루에 90도로 꺾인 손잡이가 뒤로 젖혀지며, 허공에 또다시 은빛원통이 튀어 올랐다.

"앞쪽에 또 불나방이 달려드는군."

- 푸슛!

낫의 끝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은빛 섬광이 쏘아졌다.

"주화走火. 관통."

- 화■르르!

한참 먼 길 앞쪽 수풀에서 크게 불이 붙었다.

'뭔가 맞아서. 죽은 건가?'

나냐우는 불이 붙은 수풀 근처에 가기도 전, 갑자기 커다란 바위와 나무 사이를 빙빙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갑자기 바위 아래 그늘로 들어갔다.

순간 웬 엉뚱한 짓인가 싶었지만,

그동안의 경험이 있어서인지 곧 하나의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레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결계인가요?"

"우리 새싹, 기본은 되어 있는데?"

나냐우가 여유 있게 대꾸했다.

- 구구구구.!

바위 아래가 조금씩 움직이면서,

직경 1미터 정도의 지하로 통하는 구멍이 생겨났다.

"시간 없어. 들어와. 지옥행 땅굴은 아니니까 너무 걱정 말라고."

아이작에게 결계를 배운 이후.

우연인지는 몰라도, 계속해서 그 실체를 접하고 있었다.

한 꺼풀만 벗기면 세계에 이렇게 비밀스러운 장소가 많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내가 알던 세계가 극히 피상적인 것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점점 깊이 깨달아 가고 있었다.

땅굴은 몹시 깊었다.

나냐우는 가볍게 몸을 아래로 던졌지만, 나는 사다리를 타고 조금 더천천히 내려갔다.

아래로 갈수록 점점 더 넓어지고빛이 들어왔다.

툭.

바닥에 발을 디뎠을 때였다.

"호오."

작은 탄성이 울려 퍼졌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흑발의 인간 남자가 팔짱을 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몸에 맴도는 음울한 기운이 취향이아니더라도, 충분히 전형적인 미남이라고 불릴 만한 인간이었다.

"푸르손의 추종자들에게 쫓기던 게이 녀석들입니까?"

이미 내려와 있던 나냐우가 고개를끄덕였다.

비밀 공간에 내려온 것 같은데도여전히 로브를 뒤집어쓴 채였다.

"그래."

짧게 대답한 나냐우는 단풍잎 모양시럽 병에 빨대를 꽂았다.

그리고 쪽, 하고 빨아냈다. 괴이한 광경이었다.

"새싹. 인가요?"

흑발 남자의 반대편에서 전형적인마법사 로브를 입은 여자가 걸어 나왔다. 손을 들어 레나를 가리켰다.

눈과 입가에 검은 점이 찍혀 있는 마법사는 멍한 표정으로 살짝 입을 벌리고 있었다.

나냐우가 다시 긍정했다.

"오염되지 않은, 아주 미래가 기대되는 새싹이지. 잘 키우는 건 우리몫이라구."

"치료. 할게요."

여자가 손에 든 떡갈나무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어.!"

말릴 겨를도 없었다.

나무 지팡이에서 따듯한 바람이 불어왔다. 어두운 곳을 밝히고, 거친곳을 곱게 만들고, 눈 덮인 나무에새 잎눈을 퇴우는 바람이었다.

레나의 숨소리가 순식간에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상처와 입가에서 피가 몇었다.

다친 근육이 거짓말처럼 재생되고새살이 돋아났다.

찢어진 옷과 핏자국이 없다면 아예 처음부터 부상을 당했다는 것도 몰랐을 것 같았다.

"마법인가요?"

레나도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일에 놀라서 눈을 크게 부릅떴다.

마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를 보고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해골 친구, 언데드를 치료하는 마법은 나한테 없는걸."

찢어진 갑옷 사이로 하얀 뼈가 드러났지만, 마주한 셋 중에 놀라는 자는 아무도 없다.

마법사가 큰 눈을 한 번 껌백였다.

악의 섞인 조롱은 아닌 듯했다.

"걱정하지 마라."

[골격변용骨格變容을 사용합니다!]

- 우둑! 우두둑!

충격에 어그러진 몸의 뼈 곳곳이 스스로를 조금씩 맞춰 가기 시작했다.

〈뼈의 군주〉에 내재된 부가 스킬이었다.

후작에게 잡혀 탈출하려 할 때, 꽤숙련도를 많이 올렸다.

자기 뼈를 조금씩 맞추는 것 정도는 문제없었다.

- 우두두둑!

당장 체력이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겉보기에는 조금 더 나은 꼴을 보여 줄 수 있었다.

나냐우가 나와 레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응급처치는 된 모양이네.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너희는 뭐가 불만이라서 푸르손의 제단마다깽판을 놓고 다닌 거지?"

나냐우의 말에 의아함을 느꼈다.

그녀는 세 오크전사의 머리를 간단히 날려 버렸다.

이유는 몰라도 놈들과 적대적인 세력이라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나?'

푸르손의 제단을 날려 버린 일에 무척 곤란해 하는 듯한 어조였다.

나는 녀석을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안 되는 건가? 푸르손의 제단을 망치면?"

미형의 흑발 남자가 피식 웃으며 끼어들었다.

"안 될 리가. 절대로 되지. 하지만 우리가 했어야 해. 네가 어설프게 건드려서 저것들 독만 바짝 오르게만들었잖아."

툭.

뒤에 선 마법사가 흑발 남자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페르산, 그 입 닥치세요. 시조가 말하는데 괜히 끼어들지 말고요."

"그래! 알았다고."

흑발 남자가 살짝 투덜거리며 어깨를 으쑥했다.

그 사이, 기운을 차린 레나가 회색로브를 보고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도와주셔서 감사드려요. 하지만.

당신이 정말 트로핀 나냐우인가요?

그분은 300년 전의 사람인데요?"

나냐우는 회색 로브를 벗었다.

"우리 새싹이가 질문하는데 제대로 대답하지 않을 수가 없네."

나냐우의 긴 은발이 로브에서 바깥으로 흘러내렸다.

은발 끝에서는 연한 보라색 그라데이션이 묘한 포인트를 주고 있었다.

살짝 멍한 느낌의 터키색 눈동자를 깜빡이며, 트로핀 나냐우가 하얀 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리고 칼로 손끝을 살짝 찔렀다.

"어.

- 또손끝에서 뿌려진 핏방울이 바닥에 떨어졌다. 핏방울은 바닥에 흡수되지 않았다. 흘렀다.

땅이 자신을 받아 주지 않는다는 듯 계속 흐르고 흘렀다.

나냐우의 핏방울은.

내 회로에 흐르는 것보다 진하고 찬란한 은빛이었다.

151화 공동의 적, 내부의 적 (8)

***************************************************

"이제 믿겠나?"

우리는 나냐우의 은빛 핏방울을 홀린 듯 바라봤다.

손끝에 흐르는 루-륨이, 반드시 그녀가 트로핀 나냐우라는 것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도 레나도 모두 묘하게 납득하고 있었다.

달리아크의 주점 이후, 지금까지계속 침묵하고 있는 아이작의 말이 떠올랐다.

〈나냐우 그 애새끼는 삼백 년 전에 뒈졌는데, 왜 아직 T&T가 이걸 모으고 있는 거냐? 〉나는 그녀의 손가락 끝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몸속의 피를. 전부 루-륨으로 대체한 건가?"

나냐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냐우의 손끝에서 솟아난 은빛 피는 현실과 꿈의 접면을 흐르는 것같았다.

어찐지 그녀의 발화를 신뢰하게 만드는 강력한 효과가 있었다.

나냐우가 날 보며 말을 이었다.

"던전에 남긴 말파스의 흔적들. 그건 다 어떻게 된 거지?"

"그게.

잠시 멈칫하고 있을 때였다.

= 아. 씨발," 아■여I 영혼을_ 다 바친다고 부르짖어도 연결조차 되질 않는군. 이런 개씨발.

내게 한 마디도 걸지 않고 있던 아이작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뭐야? 너, 뭐 하고 있었냐?]

= 다 망해서 기분 더러우니까 말 걸지 마라. 마왕을 부르는 대신 너 같은 병신 새끼를 꼬셔 보는 게 나았는데. 이런 개 같은.

조용히 있는 사이.

아이작은 나 몰래 무언가를 시도해본 모양이었다.

꽤나 필사적으로.

안타깝게도 정신이 탈탈 털릴 정도로 실패한 모양이지만.

"으흠.?"

나냐우가 갸웃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도움이 필요한가?"

"아니오. 잠시."

아이작은 메달 안에 갇혀 있다.

도움이 필요한 건 녀석이지 내가아니다.

트로핀 나냐우.

그가 아이작의 편이 아니라는 건명백해 보인다.

여기서는 내가 압도적으로 유리한상황이다.

'이야기나 해 볼까.'

[어이.]

= 어쩌라고?

[무슨 사정이 있는 거냐?]

= .난 널 이용하려고 했다.

[알아. 굳이 말 안 해도 돼.]

어떻게 이용했는지가 궁금했다.

놈은 내 마음을 읽는 것처럼 다음대사를 이어갔다.

= 루-륨 회로에 말파스의 인장을 새겨 넣었지. 힘을 발휘하면 그 흔적을 남기도록 말이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짐작 범위다.

푸르손의 부하들에게 쫓길 때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 푸르손의 던전에서 힘을 쓰는 것만으로도 놈의 제사가 훼손되지.

내 교단을 멸망시킨 놈들과 너를 부딪히게 만들려고 했다.

- 놈들을 죽일 수 있을 때까지 죽이면서, 널 단련시켜 주려고 한 거야! 푸르손 놈들이 이렇게까지 함정을 치고 있는지는 몰랐다!

[날 죽이려고 한 게 아니라.?]

= 그게 말이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냐? 네가 죽으면 나는 이 세상과의 연결이 끊어진다. 완전히 묻혀버리는 거라고!

전부 거짓말일까?

나는 아이작에게 물었다.

[그걸 지금 와서 말해 주는 이유가 뭐지?]

= 나냐우에게 의존하지 마라!

[못 믿을 타입인가?]

= 저 새끼가 300년 동안 도대체뭘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씨발. 지금 극적으로 나타나서 널 구출할 필요가 있었겠냐? 진작에 빼내 줬으면 됐지. 이거 전부 다 짜 고치는 거야. 쇼하는 거라고. 같은 패거리야.

[음.]

내가 약간 흔들리는 것 같자.

아이작은 한층 빠르게 나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 그라스미어 영주의 정신을 공유하면서 얻은 정보가 있거든. T&T길드는 사실 처음부터 푸르손을 섬기기 위해 만들어진 거야!

'거짓말이다.'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과거를 회상했다.

레나와 함께 녹아 죽었던 때.

우리를 둘러싸고 회유하려 했던 제국 3본부장 레트릭 아에자르와T&T의 간부들을 떠올렸다.

힘이 강하고 자리가 넘쳐 난다고 말했지만.

그들은 자신이 엄연히 '길드 내의계파'라고 말했다.

처음부터 푸르손을 섬기기 위해 만들어졌다면, 계파 따위에 그칠 리가 없다.

나는 모르는 척 말했다.

[그런가?]

아이작은 강하게 날 밀어붙였다.

= 그래! 그런데 창립자 나냐우가 너를 구출한다고? 이게 말이 되는 거라고 생각하냐?

= 지금부터 무조건 내가 시키는 대로 말해. 아주 중요한 시점이다.

여기서 발 한번 잘못 디뎠다간.!

'차단.'

나는 아이작을 차단했다.

녀석의 말에는 듣다 보면 자꾸 솔깃하게 되는 무언가가 있었다.

푸르손의 추종자들에게 회유당한경험이 없었다면, 지금보다도 더 마음이 흔들렸을 거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오류를 지적한다고 해도 아이작은또 다른 논리를 내세웠겠지.

어쨌건.

눈앞에 주어진 상황만 놓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이작이 나를 함정에 빠뜨린 건아무리 봐도 명확한 사실.

회색 로브.

자기를 트로핀 나냐우라고 말하는 여자는 나를 구했다.

간단하게 가기로 했다.

- 짤그랑.

그라스미어의 전경이 새겨진 금속메달을 나냐우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지? 기념품인가?"

나냐우가 이리저리 메달을 살펴보며 말했다.

"그럴듯하게 만들어지긴 했군."

나는 태연한 척 질문을 뱉었다.

"아이작이라고 알고 있소?"

그 순간.

- 짤. 그랑.

금속 메달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아이작의 발악인가?'

스스로는 필사적인 것 같았지만 그 움직임은 극히 미미했다.

바닥에 놓으면 제 무게를 감당치못하고 그저 가만히 있을 정도의 힘으로만 움직이고 있었다.

아이작이라는 이름이 나왔을 때.

나냐우의 몸이 흠칫 굳었다.

"??? 300년 전의 대주술사 아이 작말인가? 모를 리가 없지."

메달이 조금씩 더 떨리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메달을 향했다.

나는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그 녀석이, 여기에 갇혀 있소."

아이작을,

버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벨'호멧 아이작.

놈의 말을 하나하나 진위를 감별해가며 들을 자신이 없었다.

나 혼자였다면 모를까.

레나와 함께 있는데, 나를 위기에 처하게 만든 녀석이 괘 씹했다.

흑발의 미남자가 머리를 살짝 옆으로 젖히며 끼어들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지?"

나는 남자와, 마법사와, 나냐우를한 번씩 바라보고 말을 시작했다.

"처음에.

내 진명眞名을 찾아 무덤에 갔던 일은 제외하고.

성에서부터 아이작과 있던 일을 슬쩍 각색해 털어놓았다.

몸속에 새겨진 루-륨 회로까지도 전부 말했다.

사실에 거짓을 아주 조금 섞어서.

이야기가 쓸 만했던 모양이다.

"오오. r다들 탄성을 지르며 놀라워했다.

'이거 어째 속여 먹기 쉬운 부류들 같은데.

가장 놀란 건 트로핀 나냐우.

"맙소사. 그 아이 작이.! 이런 작은 메달에 갇힌 신세가 됐다니.

확인해 봐도 되겠나?"

이번에는 내가 놀랐다.

'봉인을 확인할 수 있는 건가?'

하긴 혼을 봉인할 수 있다면.

혼이 봉인된 걸 확인하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겠다 싶었다. 태우고 얼리는 것만 마법은 아닐 테니까.

"그런 게 가능하다면."

나냐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루네아?"

"네, 시조."

눈과 입가에 검은 점이 찍힌 마법사가 두 발자국 앞으로 다가섰다.

≪후우우."

마법사는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눈의 초점을 메달을 향해 차분히모으며, 마법사가 작게 중얼거렸다.

"봉인감정."

- 스르르륵.

지팡이에서 나온 하얀 기운이 메달을 살살이 훌었다.

마법의 냄새가 피어났다.

차가운 금속으로 만들어진 메달의 숨구멍 하나하나가 열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은밀한 그곳을 하얀 기운이 자꾸 부드럽게 쓸어 갔다.

'저런 게 마법인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10분쯤 지났을 때.

마법사의 지팡이에서 나온 하얀 기운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결과가 나온 걸까.

"아.:,

살짝 벌어져 있던 루네아의 입이한 층 더 벌어졌다.

놀란 나머지 숨도 제대로 못 쉬는 표정 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최소한. 마왕급 이상의 봉인이에요! 봉인만 보면 어떻게 손을 댈 수가 없을 정도예요."

"호오.

옆에 서 있던 흑발 남자가 작게 탄식하며 팔짱을 풀었다.

"세레네티 타워의 수석 마법사가 손댈 수 없는 봉인이라.

"페르산, 쓸데없이 시비 걸지 말아요. 별거 아닌 봉인에 아이작이 갇혀 있다면 그게 더 수상하겠죠. 봉인만 보면 확실해요. 환영幻影이나암시 하나 못 빠져 나와요."

트로핀 나냐우는 문득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마법사에게 물었다.

"봉인만 보면?"

"네. 봉인만 보면요. 하지만.

마법사가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어갔다.

"봉인의 원인을 부순다면 어떻게 풀릴 방법이 나올지도 몰라요."

"봉인의. 원인이라고?"

"봉인한 존재나, 관련된 한 축을 완전히 파괴해 버리는 거죠."

레나가 끼어들었다,

"그래서 스승님을 함정으로 몰아넣었던 거군요."

'아이작, 이 개새끼가.

"이거. 봉인이 너무 흥미로운데가지고 연구해 봐도 될까요? 어차피 제가 뭘 해도 풀리지는 않을 것 같고, 이렇게 저렇게 실험해 보는 재미가 각별할 것 같아요."

"으으. 저 영체靈體를 가지고 또 무슨 잔인한 짓을 하려고.

순진한 눈망울로 이야기하는 마법사를 보며 흑발 남자가 소름 끼친다는 듯이 몸을 떨었다.

마법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기회를 주실 거죠?"

눈과 입가에 점이 있는 마법사는, 진심으로 아이작이 봉인된 메달을 흥미로워하고 있었다.

'그냥 넘겨 버릴까?'

레나를 치료해 준 인간이다. 게다가 봉인의 수준까지 점검할 수 있는 레벨의 마법사.

잠시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레나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저. 잘 다뤄 주실 거죠? 이건 예메라의 촛대인데.

마법사는 무슨 말인지 다 안다는 듯 자비롭게 웃었다.

"아하! 축성된 물건은 저도 많이 가지고 있어요. 영체가 느끼는 고통은 실험의 중요한 요소죠. 빼놓지 않고 다룰 거예요."

"루네아, 그 이야기는 나중에 천천히 하자고."

나냐우가 마법사를 제지하고 나에게 말을 걸었다.

"봉인은 확인됐고. 이제 회로를 좀 확인해 봐도 될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 그것도 저 마법사가 하는 건가?"

나냐우가 고개를 저었다.

끝 부분에 보랏빛으로 포인트를 준 그녀의 은발이 찰랑거렸다.

나냐우는 터키색 눈동자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할 거다."

나냐우의 따듯한 손이 내 이마에 닿았다.

몸 안의 루륨이 반응했다.

몸이 저절로 움찔거려 힘을 줘서 버텨야 했다.

"편하게 있어."

- 우우우우응.!

뼈에 새겨진 회로 안에 흐르는 3L의 액체가 진동하며 발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공명共鳴.

놀라운 경험이었다.

내 몸을 한차례 점검한 나냐우가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역시 아이작의 작품이군. 이렇게 정밀한 회로를 설계할 수 있는 건 그밖에 없지."

하지만 나는 그것보다도 나냐우의 능력이 놀라웠다.

"어떻게. 손만 대도 이런 게 가능한 거냐?"

나냐우 대신 옆에 서 있는 흑발의 남자가 대꾸했다.

"시조는 300년 동안 루-륨만을 연구했어. 몸 안의 피를 전부 그걸로 바꿔 넣기 위해서. 그 정도를 못 할까 봐?"

"흐음.

그때 였다.

어색한 침묵 사이로 레나가 끼어들 그녀는 300년 전, 자신이 속한T&T를 만들어 낸 시조를 향해 당돌한 질문을 던졌다.

"저. 그런데 왜 저희를 구해 주신 거죠? 계속 기다리거나 추적하고 계셨던 것 같은데요."

하지만 셋 가운데 아무도 레나의 태도를 탓하지 않았다.

"그게. 말이지."

나냐우가 머리를 살짝 긁적이면 서레나를 향해 말했다.

"같은 편을 모집하고 있거든."

152화 공동의 적, 내부의 적 (9)

***************************************************

"같은 편?"

"그래."

나는 트로핀 나냐우를 바라봤다.

슬쩍 떠보듯 그녀에게 물었다.

"레나는 길드 정식 단원일 텐데?"

아예 모르는 척 물었다.

길드의 사정이 대충 짐작은 간다.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당사자의 상세한 설명은 언제나 많을수록 좋다.

나냐우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길드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온몸의 피를 루-륨으로 대체할 수있는 방법만 계속 찾아다녔지.

나냐우는 잠시 말을 끊었다. 숨을 들이쉬었다.

붉은 피 대신 은빛 마력액이 몸에 돌고 있는 여자지만 살아 있는 인간이라는 게 새삼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문득 레나가 끼어들었다.

"그사이. 길드를 다른 녀석들 이장 악했군요."

나냐우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 돌아보니 어느새 마왕의 신도들이 T&T를 삼켜 버렸더군. 대부분의 멤버는 아직 내가 살아 있는지도 몰라. 영향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셈이지."

"에이, 시조. 영향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건 아니잖아요. 시조가 존재를드러내면, 셋 중 한 명은 확실히 당신 편을 들 거예요."

이번에는 입과 눈가에 점이 찍힌 마법사가 끼어들었다.

마법사의 눈 밑에 찍힌 점은 꽤 특이했는데, 찍혔다기보다 번지는 먹처럼 엷고 넓게 퍼져 있었다.

"안 돼. 그러면 길드에서 재앙에 가까운 내전이 일어날 거야. 후손들이 서로 싸우는 모습은 정말 끔찍하겠지.

"완전히 준비를 마친 다음, 한 번에 압도적으로 엎어야겠네요."

레나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바로 우리가 지금 하려고하는 거라고! 나냐우, 이 친구 섭외하길 정말 잘했는데요?"

흑발 남자가 끼어들었다.

T&T의 시조는 남자를 무시하고 곧장 레나에게 말했다.

"먼저. 레나, 가져온 루-륨으로일 단 지부장 등급을 내주지."

나냐우가 이마를 덮은 긴 은발을 슬쩍 뒤로 넘겼다. 하얀 손을 들어 넘어간 머리를 뒤로 묶었다.

차가울 정도로 깨끗한 피부가 눈에 들어왔다.

저런 피부가 루-륨의 효과일지도 모른다는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길드를 다시 찾아가는 대로 그 이상의 지위를 약속한다.

그게 룰북을 찾은 목적 아니었나?"

'드디어!' 그 말에 주먹이 쥐어졌다.

매력적인 제안이다.

그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레나의'시나리오' 클 리어가 이제 눈앞.

하지만 단번에 승낙할 줄 알았던 레나는 의외로 약간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자, 나냐우는 나를 바라보고 말했다.

"네게도 같은 제안을 하지. 입단절차는 간단하고. 루-륨은 충분히 가지고 있을 테니까."

나는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확인해야 할 게 몇 가지 있었다.

"너희는. 누구를 섬기지?"

푸르손의 적인 건 확실하다.

하지만 엉뚱한 마왕의 노예라면그쪽도 곤란하다.

나냐우의 대답은 명쾌했다.

"아무도."

"각인 같은 건 없는 건가?"

"그딴 거 없다."

사슴 아에자르에게 들었던 말이 문득 떠올라 물었다.

"의심 없는 믿음 같은 건. 안 가져도 되겠지?"

"의심은 믿음의 일부잖아. 그게 무슨 소리지?"

그때 였다.

"자세한 얘기는 가면서 하시죠. 분명 우리가 제일 늦었을 거예요."

마법사가 끼어들었다.

'회의에라도 참석하는 건가?'

나냐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차피 길이 같을 테니까.

너희도 수도로 가는 중이었지?"

"그렇다."

"그럼 이 길이 최고지. 걸으면서천천히 생각해 보고 대답해 줘."

우리는 이동하기 시작했다. 곧게 뚫린 땅속으로 걸어가는 일은 꽤 묘한 느낌이었다.

터널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넓어졌다.

단순한 비밀 통로가 아니라 안에서인 간들이 한참을 지낼 수 있는 요새 같았다.

나냐우의 무리는 앞으로 멀찍이 떨어져 걸었다. 의논할 시간을 주기위해서인 것 같았다.

나는 T&T 합류에 대해 생각을 정리했다.

저들은 푸르손과는 달랐다. 힘을 준다고 꼬드기지 않는다. 각인이나믿음을 강요하지 않는다. 가져온 루-륨을 대가로 약속한 걸 준다고 말한다.

그리고 터무니없이 강하다.

앞으로도 이 정도 급의 존재들과'같은 편'이 되어 지낼 기회가 많을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합류한다면 더 넓은 세계로 한 발짝 발걸음을 떼는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녀석들과 친분을 맺고 또 다시 정을 준다면.

루비아와 레나의 경우처럼 마음을 계속 옭아 멜 가능성이 높았다.

레나는 밤톨이를 안은 채 묵묵히 걷고만 있었다.

"표정이 밝지 않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혹시. 뭐 감이라도 안 좋은 건가?"

얼굴을 보다 보니 문득 불안해져서 물었다. 번번이 맞았던 그녀의 감을 더 이상 무시할 수는 없었다.

심지어 협곡에 매복이 있을 거라는 것마저 예측했으니까.

레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걱정이에요."

"아직 저들의 세력이 약한 게 걱정인가? 하지만.

마왕의 세력은 어차피 10년 뒤 반드시 패퇴한다고 이야기를 꺼내야하나 멈칫하던 순간.

레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제가 지부장이 되면. 스승님은 저를 떠나실 거죠?"

"떠나다니?"

"시조와 함께하게 되면, 저를 여기 두고 떠나실 거잖아요."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미 어느 정도 마음을 굳혔다.

자꾸 실패했던 문제.

레나를 지부장으로 만드는 일은 이제 손만 뻗으면 된다.

계속 나를 따라다니던 시나리오.

번번이 죽으면서도 이렇게 클리어에가까워진 건 처음이다.

물론 그 후에 무슨 일이 있을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큰 변화가 없다고 하면.

이들과 레나를 합류시키고, 슬쩍빠지고 싶은 게 사실이었다.

"저를. 어딘가에 안착시키려고 하시는 거 알아요. 이유는 몰라도 저에게 책임감을 느끼시는 것도요. 그렇지만 제가 지부장이 되면 그것도 끝이겠죠."

그녀가 말을 이어 갔다.

"궁금해요. 대체 왜. 저한테 그런 책임감을 갖고 계시는 거죠?"

나는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뗐다.

"너와는 이번 생에서만 만나고 있는 게 아니니까."

시나리오 클리어.

어쩌면.

이제 레나와 영영 헤어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루비아를 땅에 묻기 전으로 돌아가지못하듯, 내 운명이 어떻게 될지 알수 없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미친 취급을 받더라도, 레나에게 사실을 털어놓고 싶었다.

"뭐라구요?"

레나는 경악했다.

나는 몇 번의 회귀를 거듭하며 있던 일을 털어놓았다.

그녀를 처음 만난 동굴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던전에 갇혀 멍하니 있던 나를 레나가 구해 주려 했던 일.

거미굴에서 레나를 기절시킨 후,

그라스미어의 불에 타 죽었던 일.

푸르손 일당에게 둘러싸여 슬라임에 녹았던 일을 모두 털어놓았다.

레나는 매번 나를 어떻게든 도우려고 했다.

루비아와 기스-제-라이에게, 비록그녀들이 믿지는 않았지만 회귀에 대한 사실을 털어놓았다.

레나에게도 한 번은 제대로 이야기를 해 주는 게 그녀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한참 동안 멍하니 눈만을 깜빡였다.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이야기를 하는 도중 우리의 걸음은 한층 더 느려진 상태였다.

나냐우와 다른 두 인간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지만, 어차피 길은 하나밖에 없었기에 앞으로 가는데 지장은 없었다.

"그래서 원장님 쪽으로 정보를 캐지 말라고 하신 거군요."

십여 분 정도를 침묵하던 레나가 꺼낸 말이었다.

'설마 믿는 건가?'

의외였다. 처음으로 회귀를 믿어주는 존재가 나타난 것이다.

온몸의 피를 루-륨으로 바꿨다는 나냐우라는 존재를 목격해, 현실 인식이 조금 더 말랑해진 탓일까?

하지만 레나는 뜻밖의 이야기를 꺼"수수께끼를 푼 기분이에요."

"수수께끼라고?"

"네."

레나는 가벼운 숨을 뱉으며 말을이었다.

"왜 스승님께 더 기대고 싶은지.

왜 그렇게 도와드리고 싶은지. 왜자꾸. 그런 꿈을 꾸는지."

꿈.

인간은 꿈을 꾼다.

얄은 잠에 들 때면 현실의 그림자들이 물결처럼 밀려든다고 들었다.

레나는 그 꿈에 대해 이야기한다.

"가 본 적도 없는 장소들에서, 스숭님과 함께하는 꿈을 꿨어요. 비웃으실 게 뻔하다고 생각해서 말씀은 드리지 않았지만요."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동굴에서 잠꼬대를 하며 깨어나던 레나.

전생을 거듭하면서 조금씩 능력치가 보정되기도 했다.

'설마, 기억도 계승된다는 건가?'

별도의 세계선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세계들이 분명히 조금씩 겹쳐 왔는지도 모른다.

"으음.

잠시 침묵하던 레나가 내게 말을걸었다.

"될게요. 지부장."

"왜지?"

"스승님이 잠시 떠나도, 언젠가 다시만 난다는 확신이 생겼으니까요. 이번 생이 아니라면 다음 생에서라도."

"말씀대로 제가 조금씩 변화한다면. 길드의 핵심이 된 채로가 더 좋을 테니까. 그러면. 다음 생에서는 제가 스승님을 도와드릴 위치에 있지 않을까요?"

마음 어느 한구석이 꾹꾹 눌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말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도움이라면 내 쪽이 훨씬 더 받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지금까지 회귀를 말하지 않고 있었는데도, 내게 기만당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듯했다. 높은 호감도의 영향일까.

꾹꾹 눌리는 마음은, 터질 듯 터지지 않고 그저 무겁기만 했다.

시원하게 한번 원망이라도 받았으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고통스럽지 않다는 둣, 아무것도 슬프거나 참고 있지 않다는 듯이 시원스럽게 다시 웃으며 말했다.

"이번 생에 움직인 만큼. 다음 생에 쌓인다니 무척 고무적인데요. 길드 장을 목표로 할까요?"

- 달. 그락.

발걸음이 흐트러지지 않은 채.

아무렇지도 않은 척, 태연히 걷는 일은 아쉽게 실패했다.

한 시간쯤 더 걷자, 멀리 앞서가던 나냐우가 내게 다가왔다.

"어때? 논의는 다 끝났어?"

레나가 입을 뗐다. 자신감에 넘치는 말투였다.

"절 지부장으로 만들어 주시면 후회하지 않게 해 드리죠."

"아주 좋은 자세야."

나냐우가 씩 웃으며 나를 봤다.

"그쪽은?"

"직접 몸담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레나가 당신들과 합류한다면. 나는 그녀와 친구다. 같은 친구와 같은 적을 가지겠지."

"뭐, 좋아! 다시 말했지만 언제든 문은 열려 있다고. 그나저나.

미소를 띠고 어깨를 한 번 으쑥해보인 나냐우가 문득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말했다.

"이 동굴, 멋지지 않아?"

말투에서 자랑스러움이 잔뜩 묻어났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러했다. 무엇보다 땅굴은그 거대함만으로도 인상적이었다.

끄덕임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라는둣, 그녀는 즐겁게 말을 이었다.

"천 년 전, 과거 사도에게서 피하려고 인간들이 판 거야. 세상에 흩어진 루-륨을 찾다가 내가 발견한 장소지."

놀라웠다. 이런 대규모 땅굴을 판다는 건 웬만한 노동력과 기술력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지금껏 접한 던전 따위와 비교가 되지 않는 규모다. 아이작의 무덤보다도 수십 배는 넓었다.

'이런 공간을 만들 힘이 있는데.

사도에게서 피해야 했단 말인가?'

의문이 들어 곧바로 나냐우에게 물었다.

"세이론 이전 시대의 인간들은.

단순한 가축처럼 전해지고 있던데.

이 정도 힘이 있는데도 그냥 당하고 살았다고?"

나냐우가 장난꾸러기처럼 피식 웃었다. 그러고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뭐, 그쪽 기록이 더 궁금하면 황실 비밀 서고나 뒤져 봐."

"근처에도 가기 전에 몇 번씩이나 부서지겠지만 말이지."

안 가르쳐 준다는 이야기일까?

땅굴 위를 흘끗 바라본 나냐우는,

저 앞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화제를 돌렸다.

"다 왔어."

빛.

기다란 사다리 한 줄 위로 뻥 뚫린 작은 구멍이 보였다. 나냐우가 먼저 가볍게 몸을 날렸다.

빛의 구멍은 마치 공중에 떠 있는것 같았다.

지금껏 곳곳에 박혀 있는 야광주와는 다른 느낌의 빛이다.

'바깥인가.?'

나는 레나와 마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장의 빛을 향해 올라갔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이 지하 터널 안쪽에서 레나와 좀더 걷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아래에 묻어 둔 채 위로 올라갔다.

- 철컥.

철제 사다리는 튼튼했다. 함부로 올라가도 삐걱거리지 않았다.

한 칸 한 칸이 서로 잘 복제된 사다리의 마지막을 차분히 올라갔다.

빛의 구멍으로 머리를 내밀고, 몸을 올렸다. 레나가 아래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주위를 빠르게 돌아봤다. 호젓이 넓은 석실이 눈에 들어왔다.

나냐우와 흑발 남자, 마법사를 포함한 십여 명의 느슨한 시선이 나를 향했다. 경계하는 자는 없었다.

모두가 인간은 아니었다.

'모임이 있는 것처럼 말하더니.

이거 였나.'

묘족强族도 있었다. 인간의 옷을 걸치고 리본 넥타이를 했지만 얼굴과 손발은 그대로 흰 고양이였다.

푸른 눈동자를 빛내는 고양이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아무 생각도 할 틈 없이 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153화 공동의 적, 내부의 적 (10)

***************************************************

흰 고양이의 푸른 눈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함정인가? 최면? 암시?'

하지만 5초도 지나지 않아 다시 몸이 풀렸다. 고양이는 평범한 인간여자로 변해 갔고, 푸른 눈에서도 서서히 빛이 사그라졌다.

"이게 무슨.

완전히 인간으로 변한 흰 고양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악의는 없는 것 같군요. 자유의 길을 알고 있지만. 살려 보내도 될 것 같습니다."

'자유의 길이라고? 비밀 통로를 이야기하는 건가?' 그때 였다.

한쪽 벽에 몸을 기대고 서 있던 나냐우가 피식 웃었다.

"예언자가 검증을 마쳤으니 다들 불만 없지?"

"나냐우, 애초에 예언자 아니면 그렇게 깐깐한 사람이 없어요."

"그렇다니까."

적대하는 자는 없었다.

밑에서 올라오는 레나의 손을 잡아끌어 올려줬다.

- 탁레나가 석실에 발을 디뎠을 때.

나냐우가 손가락으로 흑발 남자의 등을 쿡 찔렀다.

"어이, 현직."

"깜짝이야!"

동굴에서 마주쳤던 남자가 어깨를 앞으로 웅크렸다.

"놀란 척하지 말고. 네가 해라, 페르산."

"음. 음음!"

앞으로 떠밀려 나온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정식으로 내 소개를 하지.

T&T 7대 길드장 페르산이다. 다른 분들은 나냐우를 지지하는 제국과엠버의 길드 간부들이고.

'저 녀석이. T&T 길드장?' 레나를 흘끗 바라봤다.

그녀는 놀라지도 않고 침착하게 있었다.

하긴 창립자인 나냐우와 아무렇지 않게 농담을 주고받던 남자다.

T&T라는 조직의 분위기가 원래 그렇다고는 해도, 보통 인간이 아닌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크흠!"

한 번 헛기침을 한 길드장이 말을 이어 갔다.

"이곳은 제국 수도 비밀 본부지. 3층짜리 큰 선술집의 지하실이야. 저 바깔으로 나가면. 제1 가닛 스트리트."

"가닛. 스트리트?"

"그래. 제국에서 제일 땅값 비싼 거리에 온 걸 환영한다, 친구들."

제1 가닛 스트리트.

그 말에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없었다.

아는 이름이었다.

제국 수도의 지명중에서, 유일하게익숙한 이름이다.

'레안드로 후작의. 장례 행렬이 시작되는 장소잖아?'

〈등불〉달리아크에서 얻은 정보.

장례 행렬은 분명 제1 가닛 거리에서 시작한다고 했다.

하지만 길드 장은 내 경악을 다른 뜻으로 해석한 것 같았다.

녀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서북쪽에 곧바로 황궁이 위치한 거리지. 의외로 인간세계에 대해 상식이 풍부한데? 살아 있을 때기 억이라도 있는 거야?"

부담스러운 태도에 손을 내저었다.

"별로 그런 건 아니다. 그냥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 지금 시간을 알수 있겠나?"

"한밤중이야. 한창 동쪽 거리에서 열심히 손님 모집할 시간이지. 지금어딜 가려고?"

한밤중.

아직 운구 행렬이 지나가기까지는 시간이 남았다.

달리아크의 문서에 따르면, 행렬은내일 점심때쯤 출발한다.

"지금 나갈 생각은 아니지만.

"그래. 잠깐만 남아 달라고. 지금당신과 관련 있는 얘기를 막 시작할참이니. 자, 그럼.

- 딱딱.

길드 장은 작은 돌로 탁자를 두 번 두드렸다.

"지금부터 T&T 간부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길드장의 권한으로 첫 번째 안건을 우선 상정하겠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석실에 자리 잡은T&T 간부들은 모두 터널을 빠져나온 레나를 바라봤다.

따로 회의를 할 것도 없이, 앞서다 이야기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길드장은 말을 이어 갔다.

"안건은, 아시다시피 레나. 단원명부에 성은 등록하지 않았는데, 따로 있나요?"

길드장의 질문에 레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좋아요. 룰북에 따른 레나의 지부장 승급 건입니다. 이의가 있는 분들은 말씀해 주십시오."

침묵이 이어졌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없습니다, 라는 소리가 작게 몇 군데서 들렸다.

한쪽에 기대 서 있는 나냐우가 씩웃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흑발의 길드장이 말을 이어 갔다.

"좋습니다. 해당 T&T 단원의 지부장 승급을 허가합니다. 그런데.

어느 지부를 맡겨야 할까요?"

- 꿀꺽.

레나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이걸로 끝인가? 이렇게 간단히?'

눈앞의 상황이 놀라웠다.

벌써 세 번이다.

그녀의 T&T 지부장 승급은 내가세 번을 죽은 끝에 도달할 만큼큰일이었는데, 이렇게 간단하게 이뤄질 줄은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레나의 침 삼키는 소리는 아주 짧은 시간만 회의실을 장악했다.

"나! 내가 원한다!"

"카타페스트의 지부를 맡아 줘!"

"제발 에나르드에 와 줬으면.

"나 혼자선 이제 한계야. 시비나스지부는 완전히 망해 버릴 거라고."

탁자를 둘러싸고 앉은 T&T 간부들 모두가 다들 손을 들고 힘차게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가만히 침묵하며 뒤로 빼던 자들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급격한 태도 전환이었다.

"이게. 무슨 ?"

나는 벙한 채 페르산을 바라봤다.

흑발의 길드장은 씩 웃으며 말했다.

"요즘 다 인력난이거든."

"인력. 난? 지부는 있는 건가?"

동굴을 함께 지나온 마법사가 차분한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저분들, 할줄 아는 건 싸움박질뿐이지만. 지위는 있어요. 믿을 만한 단원 수급이 영 어려워져서 그렇지."

시조를 지지하는 간부들은.

푸르손과 완전히 관계없는 레나를꼭 자신의 직속 라인으로 만들고 싶은 것 같았다.

나는 주위를 돌아봤다.

나냐우는 물론, 길드장과 마법사는 탁자 위의 경쟁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 있었다.

하지만 그 셋을 제외한 대부분은 치열하게 레나를 원했다.

처음 날 바라봤던 묘족_街族 여자가 진지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내가 제일 필요해. 나는 엠버와 이곳을 동시에 오가야 되잖아? 한참 떨어져 있는 두 군데를 맡고 있는데 신경 써 줘야지."

그러자 손목에 붉은색 가죽 보호대를 감은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타인의 돈을 숨 쉬듯 털어 봤을 것같은 인상의 성마른 남자였다.

"유능한 비서가 필요하다. 믿을 수 있는 놈들은 하나같이 멍청하고, 눈치 빠르고 셈 밝은 것들은 전부푸르손의 추종자들과 붙어먹었다."

"사수, 이거 봐. 여기 있는 사람들다 똑같거든?"

얼굴에 십자 모양 칼자국이 있는,

각진 인상의 남자가 끼어들었다.

정보 길드보다 무투 길드가 어울릴 것 같은 인상의 인간이지만 왜 여기 있냐고 따질 이유는 없었다. 그가 혈기 넘치는 목소리로 외쳤다.

"결투다! 결투로 해결하자."

모두 한심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완전한 무시였다. 심지어 닥치라는 소리조차 하지 않았다.

"자, 그럼."

길드장은 계속 회의를 진행했지만,

시간이 지남에도 불구하고 다들 한 치도 양보할 기색이 없었다.

'슬슬 감이 잡히는군.

이야기를 들을수록, 레나를 두고저들이 치열하게 싸우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여기 있는 자들은 정치적인 고려 같은 건 전혀 못 한다.

정보 길드 주제에 모략이나 음모,

장사 같은 일에 무척 약하다.

길드는 내팽개친 채, 수백 년 동안루-륨을 연구해 온 나냐우와 함께하는 자들.

이유는 간단하다.

나냐우와 비슷한 부류니까.

'어휴.

회의 끝에 열 명 가운데 여섯이 양보했지만, 넷은 끝까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꽤 합리적인결론이 내려졌다.

"확인합니다. 그럼 레나 본인에게 결정을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레나, 이분들을 보아 주시겠습니까?"

"ㅇ"

ㅍ.

"지금까지 회의 내용을 모두 들으셨을 터. 넷 가운데 골라 주십시오."

그 순간이었다.

엠버와 제국 수도를 번갈아 지내서 불편하다고 했던 여자가 난데없이 변신을 시작했다.

처음 보여 준 모습과는 반대로.

인간 여자의 몸에서 갑자기 작고하얀 고양이로 변해 가고 있었다.

"예언자님.?"

"어이, 샤루니안!"

"당신 설마.

[시끄럽다.]

- 폴짝흰 고양이는 돌 탁자를 뛰어 넘어가더니 레나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뭘 하는 거지.?,

그리고 털이 보슬보슬한 머리를 숙여 레나의 손아래 가져다 댔다.

[쓰다듬어도 된다.]

"??? 정말요?"

[그래. 하지만 꼭 내 지부를 맡아줘야 한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흰 고양이가 둥글게 몸을 말았다.

[갸르릉.]

"저래도 되는 거요?"

"길드장, 저건 반칙 아닌가?"

"젠장.

"음. 각자 자기 어필은 자유롭게 하셔도 좋습니다.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레나는 의외로 고양이를 쓰다듬지 않았다.

'동물을 좋아했던 것 같은데.

대신 낯선 환경에서 긴장해 굳어있는 밤톨이를 쓰다듬으며 고양이에게 물었다.

"이 장소를 담당하시는 분이죠?"

[응. 샤루니안이라고 해.]

고양이는 레나가 자기를 만지지 않자 조금 자존심이 상한 듯했지만, 그보다 인력 섭외가 먼저라는 둣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나한테 올 거니?]

다들 레나의 반응에 종긋 귀를 기울였다.

"네. 길드장님? 저는 이분으로 선택했어요."

흰 고양이는 복실복실한 꼬리를 좌우로 흔들려다, 채신이라도 생각한건지 급히 멈췄다.

"하아.

"아이고.

아쉬움의 한숨이 탁자를 둘러싼 곳곳에서 새어 나왔다.

고양이는 이 사실을 굳히려는 둣,

레나에게 지부에 관한 정보를 자세히 털어놓기 시작했다.

[3층짜리 커다란 주점이야. 첩보가 많이 들어오는 곳이지. 사실, 주점 운영만으로도 힘들어서 정리도 제대로 안 되고 있지만.]

길드장 페르산은 레나와 고양이의 의사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말을 이었다.

"정식 임명식은 일주일 후에 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 레나는 T&T의 제국 제7 지부를 맡게 되었음을 공표합니다."

- 땅, 땅, 따앙.

탁자에 돌 두드리는 소리가 지하실안에 낮게 울려 퍼졌다. 그 울림은참 길었다.

레나 시나리오 클리어에 애타게 마음 졸였던 시간들이, 그 소리에 모두 낡은 과거가 되어 버렸다.

작은 메아리가 모두 사라진 순간이었다.

띠링!

[레나가 T&T 지부장으로 승급했습니다.]

[B급 시나리오, '레나 이야기'를 클리어 하셨습니다.]

[레나가 T&T에서 본격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올 것이 왔다!

나는 아래로 한 글자 한 글자를 차분히 읽어 나갔다.

[레나에게 '암흑가의 초급 간부' 칭호가 새롭게 생겼습니다.]

- 레나와 일정 이상의 호감도를유지한다면, 그녀의 영향력을 직접적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 범죄 참여 및 의뢰 등, 다양한활동이 가능해집니다.

이런 게 아니라도.

호감도가 떨어질 만한 짓은, 물론조금도 할 생각이 없다.

메시지는 계속 이어졌다.

['어둠 속의 조력자' 시나리오가 활성화됩니다.]

[상시 발동 시나리오입니다.]

[레나의 영향력이 계속 커질 경우,

관련 이벤트가 생성됩니다.]

'랭크나 클리어 목표는 별도로 나타나지 않는다.

'딱히 목표는 없는 건가.?,

[시나리오 슬롯이 1개 추가되었습니다.]

[현재 슬롯: 2/3]

[동화율이 내려갑니다.]

[74.3%.]

동화율이 떨어졌다.

머리가 뜨거워지며 다시 시야가 크게 흔들렸다. 메시지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시나리오 클리어에 따라, 현재의경로 변경을 확정합니다.]

본 적 없는 글씨체로.

메시지는 기괴한 긴장을 만들며 허공에 적혀 내려가고 있었다.

"응? %%#@ 멍!! % &&$@야?"

"생각 *#$&@# 잠겨 #! $@$."

주변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멀었다. 흐릿하게만 느껴졌다. 낮고 작은 소음에 불과했다.

"#승님? 스승님.?"

인식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공에 뜬 반투명한 메시지 너머,

지금까지 나와 함께했던 레나를 바라봤다.

생생하게 실존하는 그녀를.

그녀에 대한 내 감흥을 털어놓는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이만 나가 보지."

154화 공동의 적, 내부의 적 (11)

***************************************************

"이만 나가 보지."

자리를 지키고 있을 이유는 없다.

레나는 T&T 지부장에 등극했다.

모두가 그녀를 원하는 의외의 모습까지 확인했다.

수도로 온 두 가지 주요 목적 중하나는 달성이다.

이제 다른 하나를 실행할 차례.

'정수 흡수.'

다시 한 번.

레안드로 후작을 흡수한다.

이번에는 크라켄도, 바다도, 레드 플레이크도 필요 없다.

이미 죽어 있으니까.

사망했다는 날짜에서 아직 7일이 지나지 않았다.

내일까지 정수 흡수가 가능하다.

협곡을 정면으로 돌파한 것.

서둘러 수도로 달려온 건 이유가 있었다.

더불어 가능하다면, 후작이 죽은 자세한 내막을 알고 싶었다.

누가 그 괴물을 죽였단 말인가?

앞으로의 전생 과정에 있어 분명중요한 정보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임명식 때. 오실 거죠?"

레나의 목소리가 나를 일깨웠다.

"가야지."

정수 흡수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도 아니다.

운구 행렬을 따라가는 도중, 혹은그 행렬의 끝에서 흡수하면 된다.

- 달그락! 달그락!

나가려는 걸 알아챘는지, 긴장하고 있던 밤톨이가 달려들어 다리를 물고 흔들었다. 토닥토닥 쓰다듬었지만 좀처럼 달래지지 않는다.

"안에 있어."

검지 뼈를 천천히 흔들며 암시를 보냈다. 아이작에게 배운 방법이다.

그가 시키는 대로 말들에게 최면을 걸던 때를 떠올리며 손가락을 흔드니 효과가 있었다. 밤톨이가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저.:

레나가 나를 불렀다.

"무슨 일이지?"

깊은 눈 속에 안타까움이 보인다.

레나는 품을 뒤적여 뭔가를 꺼내 건넸다.

"이거, 받아 주세요."

주머니에서 나온 건 펜던트였다.

대단한 보석이 붙어 있지도.

딱히 아름다운 형상이 새겨지지도 않았다.

줄마저 낡아 있다.

그곳에 있는 거라고는 세월의 흔적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 펜던트의 의미를 안다.

어머니가 전해 준 소중한 유품.

"저한테는 의미 있는 물건이에요.

가져 주시면 제가 행복할 거예요."

저렇게 이야기하는데 안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신경 써서 갖고 있지."

"받아 주셔서 고마워요."

줄을 감아쥐어 든 순간이었다.

- 띠링!

경쾌한 효과음이 울려 퍼졌다.

허공에 뜬 반투명한 푸른 창에 메시지가 빼곡히 떠올랐다.

[계승 아이템을 획득했습니다!]

[레나의 펜던트]

- 가짜 보석이 박힌, 레나가 건네준 오래된 펜던트. 상품으로써의 가치는 없지만, 그녀가 무엇보다 소중하게 간직하는 물건이다.

[시나리오 클리어에 의해, 다음의 능력이 임의로 부여됨.]

- 히어로급 이하의 스킬 숙련이15% 빠르게 상승합니다.

- 일주일에 한 번, 높은 확률로〈올바른 판단〉을 내리게 해 준다.

'뭐라고?'

평범한 낡은 펜던트.

다른 생에서도 동굴의 시작 지점에서 펜던트를 받은 적 있다.

그때는 이런 능력이 없었다.

낡고 오래된 고물에 불과했지만.

'터무니없군.'

터무니없이 엄청난 부가 효과를 가지는 아티팩트가 되어 버렸다.

히어로급 이하의 스킬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숙련도를 15%나 빠르게 상승시켜 준다.

간접적으로나마 접한 스킬 중에, 이 특전의 혜택을 못 받는 건 에픽스킬인〈정수 흡수〉와 유니크 스킬인〈뼈의 군주〉정도다.

'게다가〈올바른 판단〉이라니.

임의로 발동되는 건지, 의식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위기 상황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건, 사실상 일주일마다하나씩 충전되는 목숨 여벌을 가지는 것과 다름없었다.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면, 정서를 반영하는 물건에 특별한 힘이 부여되기라도 하는 걸까.

'계승 아이템이라니.!'

물론 물어볼 대상은 없다.

시나리오와 퀘스트에 관련된 이런 메시지들이, 오직 나에게만 뜬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손에 쥔 펜던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어이, 친구. 나도 줄 게 있는데."

벽에 기대어 있던 나냐우의 목소리가 멍하니 잠겨 있던 의식을 밖으로 끄집어냈다.

뭘 또 준다는 말인가?

묘하게 기대감 어린 시선을 보내버린 탓일까.

나냐우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어어, 별건 아니고. 설마 그 상태로 나갈 생각은 아니겠지?"

그녀가 나를 아래위로 훌었다.

시선을 내려 갑옷을 돌아봤다.

나냐우의 말대로 입고 나갈 만한상태는 아니었다.

포위망을 돌파하며 달려온 터라,

곳곳이 찢기고 뚫려 안이 휑하게 드러나 있었다. 인간이 빼곡한 곳에서 입고 걸었다간 혼자 전쟁을 치뤄야할 판이다.

"대신 이걸 입어 봐. 눈짐작으로 골랐는데, 아마 맞을 거야."

언제 챙긴 건지 그녀의 손에 은빛의 갑옷 세트가 들려 있다.

금속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얇고활동성이 좋아 보인다.

관절 부위마다 제대로 잘 구부러지게 되어 있는 은빛 판금.

tt ㅇ"

ㅍ.

"황실 감찰 국에서 입는 옷이야. 입고 나가면. 경비한테 시비 걸릴 일은 없어서 편할 거다. 고위 귀족 자제들이 경력 쌓는 조직이거든. 아무도 안 건드려."

- 철컥.

나냐우가 내게 갑옷을 안겨 줬다.

받아 들고 훌어봤다. 깨끗하다.

"문양 같은 건 없나?"

"없어. 그 디자인에, 문양 없는 게 특징이지. 보면 웬만한 놈들은 다 알아서 길거야."

"아, 이것도 받아."

그녀는 수도 곳곳에 상세히 나와 있는 두루마리 지도까지 건네줬다.

감찰국, 작전 비밀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었다.

"이건.

받아 든 지도를 펼쳤다.

거미줄처럼 퍼진 수도의 뒷골목이 모두 한눈에 들어왔다.

"감찰국은 잘 뚫어 놨거든. 우리위치는 지금 여기고.:나냐우는 지도 한쪽을 새하얀 손가락으로 쳤다. 주점이라고 표시된 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손가락을 조금 서북쪽으로 옮겼다.

- 톡톡.

"아쉽게 여긴 없어."

"없다니?"

지도에 표시된 곳은 공원이었다.

다른 장소보다 조금 덜할 뿐, 이런저런 지도 기호가 그려져 있었다.

"공원인 거 같은데.

나냐우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황궁이야."

보안 때문이라는 건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외부로 도는 지도는 아니지 않나. 황실 감찰 국이 쓰는 지도인데 황궁을 이런 식으로 숨겨버린다고?"

나냐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들은 모두를〈외부〉자로 생각하니까."

"그들?"

몸에 피 대신 루-륨이 도는 은발의 여자는 거기서 말을 끊었다.

"지금 확실히 말해 줄 수 있는 건별로 없어. 더 궁금하면 같이 알아보자고."

명백하다. 함께하자는 제안이다.

나냐우는 아직 나를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겪는 인력난은 아까 회의에서 충분히 체감했으니 이해는 된다.

에둘러 거절했다.

"나도 지금 여기서 대답하기는 곤란하군. 이건 고맙게 받지."

나를 위기에서 구해 준 뒤, 선물까지 안겨 준다. 배려가 느껴졌다.

스스로 깨닫고 있을지 몰라도 마음의 빚을 지우는 데 탁월한 행동이었다. 그녀에게 칼을 들이대기는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수도 처음이지? 안내 붙여 줘?"

"괜찮은데.

"소중한 예비 단원인데 안내도 못 붙이니 서운한걸. 그럼 쭉 올라가.

방이 나올 거야. 거기서 느긋하게 쉬고 가도 되고."

예비 단원이라.

역시 어딘가에 속할 생각은 없다.

'대신 뭐라도 도울 일이 있으면 좋겠지만.

지금은 그저 막연할 뿐이었다.

새 갑옷과 지도를 든 채 계단을 올라갔다.

- 드르륵!

계단 끝에서 옆으로 문을 밀었다.

청소 도구와 각종 물품이 쌓여 있는 커다란 방이 나왔다.

'직원용인가.'

열어 놓은 문을 객실 안쪽에서 다시 살펴봤다. 손잡이는커녕 아무 무늬도 없는 평범한 벽이다.

감쪽같았다.

누군가가 지하 터널을 발견하고,

그중 한 출구에 주점을 세워 놓은 것 같았다.

'나냐우가 한 걸까.

객실에서 곧 갑옷을 갈아입었다.

갑옷은 날 위해 맞춘 것처럼 몸에딱 맞았다.

- 끼이익.

안에서 잠긴 두꺼운 문을 열었다.

놀랍게도 밖은 무척 떠들썩했다.

상들 리에가 천장에서 은은한 빛을 뿌렸다. 밤이 늦었는데도 경쾌하게 떠들며 술잔을 기울이는 인간들이 많았다.

'안에서는 조용했는데.

명색이 정보 길드 지부답게 방음은 무척 잘된 건물인 듯했다.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앞치마에 고양이가 그려진 유니폼을 입은 종업원이, 나에게 자연스레 눈인사를 했다.

길드 멤버인 듯하다.

주점 안에는 크고 작은 고양이 조각과 그림이 많았다.

샤루니안이라는 묘족.

아래에서 봤던 녀석은, 아무래도저 좋을 대로 주점을 운영하는 모양이었다.

밤을 떠들썩하게 지새우고 있는 인간들을 일별하고 밖으로 나왔다.

'이것이. 제국 수도.?'

넓었다. 그라스미어와도 비교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밤이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은은한 빛을 내는 등이 스무 걸음마다 설치되어 있었다.

처음 보는 장치들.

마법이 적용된 탓일까.

기계공학 스킬을 발동했지만 원리파악이 어려웠다.

휘적휘적 보도를 걷는 인간들이 많았다. 차가운 밤공기 사이로 인간들의 발소리가 저벅저벅 울렸다.

화려한 거리에 홀려 이리저리를 돌아다녔다. 서북쪽으로 갈수록 인적도 불빛도 점점 더 드물어졌다.

그때 였다.

"정지."

어둠 속에 묻혀 있던 두 인간이 양쪽 골목에서 튀어나왔다.

달빛을 은은히 반사하는 롱소드로나를 겨누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남자를 바라봤다. 상대의 정체는 모른다. 쓸데없는 말은 먼저 꺼내지 않는 것이 좋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짧았다.

침묵은 그들이 나를 아래위로 바라보는 순간 끝났다.

두 남자는 호들갑을 떨며 머리를 꾸벅 숙였다.

"아, 이거 실례했습니다! 감찰국원이시군요! 외궁外宮 숙소 쪽으로 돌아가는 길이십니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탐지.'

주위를 훌고, 골목 저편을 바라봤다. 서쪽 북쪽으로 열 걸음마다 빼곡히 배치된 남자들이 보였다. 가만히 서 있는 걸로 보아 행인은 절대 아니다.

'다들. 경비병이군.'

서 있는 자세, 느껴지는 기운으로 보아 만만한 자들은 아니다.

만만하게 느껴지면 더 위험하다.

기운을 감추고 있는 거니까.

"항상 수고가 많소."

나는 은화 몇 닢을 두 녀석에게 슬쩍 찔러줬다. 혹시 뭐라도 들을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녀석들은 고개를 저었다.

"이크! 감찰 국에서 왜 이러십니까.

장난이 심하십니다."

'??? 이게 아닌가.' 놈들은 나를 경계하는 기색이다.

액수의 문제 같지는 않았다.

"흐음."

나는 자연스러운 척 뒤를 돌았다.

서북쪽으로 더 가려면 위험부담이클 것 같다.

어차피 이쪽은 후작의 장례 행렬동선에도 없다.

'돌아갈까.

다시 남동쪽으로 돌며 머릿속으로 동선을 그려 보았다.

아예 은신 스킬을 사용한 채였다.

동쪽 거리로 갈수록 점점 소란스러워졌다. 잘 통제되지 않는 거리인둣,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인간이 많았다.

- 훌쩍!

몸을 날려 건물 위로 올라갔다.

- 팟!

건물과 건물 사이를 가볍게 뛰어넘었다.

'여기가 행렬이 지나는 장소.'

관에 자연스럽게 접근할 때까지의 걸음을 하나씩 세어 보았다.

'스물일곱 걸음.'

'슬퍼하는 인간들에게 섞여 앞쪽으로 가면. 열세 걸음까지 줄일 수 있다.'

흰 꽃이라도 뿌리는 무리들에게 섞여 천천히 걸으면서 정수 흡수를 시도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갑옷이 있는 이상 일이 좀 더 쉬워진다.

경비병들에게 섞이면 그만.

뭔가를 확인하는 척하면서, 더 가까이 가도 감찰국원으로서 대충 얼버무리면 된다.

'쉽다.'

성공할 수 있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애초에 시체 보호 따위. 누가 큰 관심이 있을까.

운구 행렬에 접근할 동선을 몇 번이고 꼼꼼하게 확인했다.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장소들을 머릿속으로 전부 외웠다.

'이곳. 그리고 저곳.'

이동 시간을 계산하며 걸었다.

- 팟!

다시 위로 올라갔다. 높은 건물의 옥상 위에서 아래를 조망했다.

마지막 확인이다.

각양각색의 지붕들이 보인다.

분 냄새와 술 냄새, 유블람에서 맡았던 아편 냄새가 위로 연하게 올라왔다. 욕망과 망각의 냄새였다.

도시는 작은 숲 같았다.

나무를 타듯 이 옥상에서 저 옥상으로 이동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동쪽 거리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보였다. 어떻게 올라갔는지 그곳에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월광 욕을 즐기던 고양이는 나를 바라보곤 꼬리를 세웠다.

- 갸르릉.

'경계하는 건가?'

신경 쓰지 않기를 바라며 멍하니 달을 바라봤다. 오늘은 반달이었다.

피곤해 보이는 반달이 한숨처럼 구름을 내뱉었다.

다시 맞은편 옥상을 보니 고양이는 사라져 있었다.

"가 버렸군."

가장 높은 장소를 선선히 양보해준 건지도 모른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 옥상으로 몸을 솟구쳤다.

고양이가 앉아 있던 자리에 착지했을 때.

바닥에 떨어져 있는 얇은 종이 묶음을 발견했다.

여섯 장 정도의 두께였다,

거리를 뒹굴다 바람에 실려 날아왔다고 보기에는 상태가 좋았다. 더럽혀지지도 구겨지지도 않았다.

〈시대의 거울〉

'신문인가? 거창한 이름이군.'

≪ㅇ"

ㅍ.

내용을 쪽 훌어보니 전형적인 황색잡지였다. 동선 정리도 마친 김에 집어 들고 읽어 보기로 했다.

〈충격! 황실 기사단의 프리마돈나이사벨 백작, 레안드로 후작과 나눈 사랑과 죽음〉비밀 임무 중 사망한 이사벨 백작의 죽음.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 레안드로 후작. 단독 입수! 레안드로 후작이 주변에 밝혔던 참담한 심정과 고백.

첫 번째 기사부터 강렬하게 시선을 사로잡았다.

짐작하고 있던 두 사람의 사연이지나 치게 자세하고 구구절절하게 적혀 있었다.

그렇지만 별로 쓸모 있는 정보는 없었다.

수도 기사단의 ??? ??.

'이사벨은 나를 먼저 유혹했지만,

레안드로 후작과 잘되자 모른 척.'

거액의 유산은 이제 누구의 것?

후작의 혼 외자를 자칭하는 소년 등장, 하지만 얼굴은 영 딴판!

두 사람이 생전에 계획한 비밀 결혼식을 알아보자!

대신 영혼결혼식이라도 올려 주자는 사교계 여론 쇄도.

아니, 전혀 없다고 봐도 좋았다.

그 외에도.

제국의 황족, 귀족, 상류층 등의 인간들에 대한 정보가 마구잡이로저 좋을 대로 적혀 있었다.

종이가 아깝다고 생각하며 슥숙 넘겨 갔다.

마지막 장을 펼쳤을 때.

신문 아래에 적힌 작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발행자 - 캐빈 애슈턴〉

155화 공동의 적, 내부의 적 (12)

***************************************************

'캐빈. 애슈턴이라고? 그 이름이 대체 왜 여기서 나오지?'

상상도 못 한 곳에서 그의 이름이 튀어나온다.

이제는 익숙한 이름.

캐빈 애슈턴의 책을 본 것도 이제 한두 번이 아니다. 터무니없게도, 그가 쓴 책을 읽으면 지혜가 올라갔다.

지금은 오르지 않았다.

'정독하지 않은 탓일까?'

동명이인일지도 모른다.

확인은 간단하다.

다시 한 번 첫 페이지를 펼쳤다.

레안드로 후작의 죽음에 대한 부분은 이미 정독한 상태.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R 가문의 공녀 A〉

- 두피를 빗으로 긁어 주면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 좋아한다고 함.

머리카락이 잡아당겨지면, 등에 털이 다 설 정도로 두피가 성감대.

〈아쥬라에서 파견 온 마법사 K〉

- 밋밋한 인상으로 아직까지는 사생활이 깨끗한 걸로 보임. 퇴근 후집에서는 창문에 검은 천을 붙이고하루 종일 고양이와만 있다고 함.

키우는 고양이가 무려 아홉 마리.

고양이와 안에서 무슨 짓을 하는 건지 현재 조사 중임.

〈D 백작의 막내아들 S〉

하루라도 여자 없이 못 지낸다는 소문이 파다함. 훌륭한 마스크와 몸에도 불구하고, 자기보다 최소 10살 이상 많은, 아이 딸린 여자만 만난다는 소문이 있음.

특히 미혼모를 좋아한다고 함.

'한심하군.

신빙성이나 출처라고는 전혀 없는 뜬소문.

그중에서도 선정적이고 자극적인소문들만 잔뜩 적혀 있었다.

내용을 믿을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참고 한 글자 한 글자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 차락.

페이지 넘기는 소리가 어둠 속으로 부서졌다. 마지막 문장을 읽고 다시한 번 발행인이 적힌 공간에 도달했다.

- 지혜가 1 올랐습니다!

'진짜다.'

- 털썩.

신문을 옥상 바닥에 내려놓았다.

바삭바삭한 긴장감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이걸 발행한 자는 '진짜' 캐빈 애슈턴이다. 지속적으로 내 지혜를 올린 그자가 맞다.

- 철컥.

나는 주위를 빠르게 돌아봤다. 신문이 깨끗한 상태로 놓여 있다. 혹시 이걸 갖다 놓은 녀석을 캐 볼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건물 옥상은 조용하기만 했다. 탐지 스킬을 써도 이곳을 빠져나가는 녀석은 잡히지 않았다.

아래쪽 거리에서 비틀비틀 걷는 취한 인간들만 빼곡하다.

조금 전까지 이곳에 있던, 검은 고양이의 기척마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홀린 기분이었다.

"캐빈. 애슈턴."

나는 그 이름을 작게 읊조렸다.

대체 그자는 누구란 말인가?

슬라임은 캐빈 애슈턴이 아쥬라의 마법사라고 했다.

본인이 쓴 책에서도 그는 자신을 대공大公 가문의 직계 장자長子라말 했다.

하지만 온갖 종류의 책을 다 집필하는 것 같았다.

한 명의 존재하는 인간이 맞기는한 걸까?

어떤 집단은 아닐까?

전승되는 이름이라거나.

혹 트로핀 나냐우처럼 긴 세월을 살아오는 존재일지도.

갖가지 추측이 머릿를 스쳐 간다.

나와 연관이 있다는 건 분명하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내게 접근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새삼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 캐빈 애슈턴의 책이 내 앞에 놓여 있던 상황들.

우연일까?

슬라임이나 에라스트 영주의 서재에서 읽은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렇게 보기에 어색하다.

처음 그의 책을 본 건.

바닥에 엎질러진 수레에서였다.

산적들이 책장수를 습격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혈흔도 싸움의 흔적도 없었다. 엎어진 수레 외에는 다른 것들이 지나치게 깔끔했다.

산장의 책도 마찬가지.

사냥꾼들의 큰 산장에 있던 책도 마찬가지다.

트롤을 사냥하는 무리. 그에 관한 책이 있는 건 자연스럽다.

하지만 산장에 달랑 한 권 있는 책이 꼭 캐빈 애슈턴의 책이어야 한단 말인가?

이상한 점은 더 있다.

아만의〈등불〉달리아크에서 캐빈애슈턴의 정보를 요구했다. 단번에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중개인은 주저하지 않았다.

목록을 찾으려는 노력도 없었다.

'정말 없었을까.'

돌이켜 보면 캐빈, 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그 뒤는 듣지도 않고 거절한 것 같았다.

수상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달리아크로 되돌아가기도 애매하다. 가서 대답을 요구해도 소용없으리라.

퍼뜩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나냐우에게 물어볼까?'

그녀는 내게 호의적이다.

하지만 나냐우의 신세를 지는 건 마지막까지 피하고 싶다.

함께하자는 요청을 거절해 놓고 정보만 얻어 갈 염치는 없었다.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힘이 있다고 했다.

혹시 이렇게 부르면 될까?

"어이, 판단이 필요한데."

그 순간이었다.

- 띠링!

'허, 진짜 되잖아?'

허공에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나는 메시지에 집중했다.

[현재 설정:〈사망 및 그에 준하는 위기 시 자동 발동〉]

[설정을 변경하시겠습니까?]

[발동 후 7일 동안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사용되는 능력:〈위기회피(B)〉]

- 어린 시절부터, 온갖 종류의 위험을 숨 쉬듯 피해 온 여자가 갖게 되는 수준의 특수 능력. 동물적인직감에, 인간으로서의 배움과 궁리가 결합되어 있다.

'호오 ?

나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곧 결정을 내렸다.

"사용하지 않는다. 그대로 놔둬."

[초기 설정을 유지합니다.]

- 팟.

반투명한 메시지가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펜던트의 위기회피 능력은 이대로 놓아두는 편이 옳다.

특히 이 도시에서는.

북방의 끝, 아쥬라의 탑을 제외한다면 제국 수도만큼 강한 인간이 들끓는 곳은 드물 터.

위험에 빠질 일은 많고도 많다.

게다가 당장 몇 시간 뒤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다.

이곳을 지나가는 장례 행렬에서 후작의 정수를 흡수해야 한다.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른다.

옥상에 몸을 숨기고 조용히 숨어 기다렸다.

날이 부옇게 밝아 왔다.

술과 약에 취해 맴돌던 무리는 햇빛을 피해 곳곳으로 숨었다.

거리마다 가벼운 무장의 경비들이 들어섰다. 호위보다 운구 행렬이 지나갈 거리를 청소하는 데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거리가 말끔히 정리됐고, 통제한 행렬의 좌우로 경비들이 줄을 쳤다.

'시작인가?'

놈의 죽음에 이 정도의 인파가 몰리는 게 신기했지만 수도에서는 꽤 유명한 존재인 것 같았다.

인파가 수군대는 소리를 들으니 팬클럽도 있던 모양이다.

"흑흑흑. 그렇게 잘생긴 분이 돌아가셔야 하다니.

"미남박명이로구나.! 내 낭만도 여기서 끝이이:.

물론 그런 무표정하고 살얼음 떨어지는 인상이 뭐가 좋다는 건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집착도 정신병적인데.

수십 마리 하피를 반 토막 내며 내장을 흩뿌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두 눈에서 푸른 줄기를 뿜어내며내 목을 잡아채던 놈의 얼굴이 생생하다.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은 기억이다.

- 철컥.

고개를 흔들어 회상을 흩트렸다.

계속 기다리자 슬슬 장례 행렬이 출발하는 모습이 보였다.

- 훌쩍!

단숨에 아래로 내려갔다.

은신 스킬을 쓴 상태.

웬만한 녀석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여기가 첫 번째 지점.

후작의〈관〉과 여덟 걸음 거리로 갈 수 있는 장소다.

밤에 빼곡히 흥청거렸던 거리는,

유명인의 운구 행렬이라는 이벤트에 한층 더 바글바글했다.

추도의 음악이 울려 퍼졌다.

사방에서 후작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숨겨 둔 연인의 죽음에, 모든 힘과 지위를 내버리고 끝을 택한다.

이 이야기는 시민들에게 꽤 큰 감흥을 준 것처럼 보였다.

"화장해 달라고 하셨다면서요?"

"비밀의 연인을 따라 저세상으로 가셨군요."

"아까운 사람. 아름다운 사람.

"슬프지만 낭만적이에요.

군중 속을 파고드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체술과 은신을 결합해 조금씩 인간들을 헤치며 앞줄로 나아갔다. 저 멀리서 다가오는 운구 행렬은 무척 느렸다.

할 수 있다.

충분히 할 수 있다.

행렬을 정면으로 바라봤을 때.

- 철컥.

순간적으로 놀라며 몸이 굳었다.

관을 호위하는 십여 명의 기사가 모두 후작과 비슷한 디자인의 푸른 갑옷을 입고 있었다.

'후. 괜히 놀랐군.' 갑옷에 새겨진 사자 형상.

놈들의 정체는 새삼스레 고민할 것도 없다.

레안드로 후작이 단장이었다는 푸른 사자 기사단이다.

놈들을 꼼꼼히 살폈다.

하나하나가 만만치 않아 보였다.

걸음걸이만 봐도 대략적인 수준의판단이 가능하다.

머릿속에서 싸움을 그렸다.

검술만으로 둘은 이긴다.

마법을 사용하면 넷까지도.

하지만 다섯 이상은 확신이 가지 않았다.

놈들을 바라보며 기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황실 기사단보다. 더 강하잖아?'

부딪쳐 봐야 정확히 알겠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도 황제를 호위하던 녀석들보다 최소한 한 수에서 한 수 반은 앞서 보였다.

- 저벅.

외곽에 선 경비들과 한 걸음도 떨어지지 않은 지점까지 나아갔다.

"어어, 더 오시면 안 됩니다만.

어리바리한 인상의 경비가 나를 제지했다. 하지만 옆에 서 있던 너구리 수염 경비가 나서 놈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어이쿠, 감찰국 나으리께서 어찐 일이십니까?"

"나도 평소 후작을 흠모해 왔다.

오늘은 가까이서. 그의 마지막을 배웅하고 싶군."

내가 말하면서도 어이가 없었지만 억지로 헛웃음을 참았다. 다행히 녀석의 반응은 무척 긍정적이었다.

"이런! 그럼 제 자리를 내드리겠습니다. 헤헤, 이쪽으로 오시죠."

"고맙다."

다섯 걸음.

생각보다도 가까운 거리.

나냐우가 준 갑옷이 이 정도로 결정적인 역할을 할 줄은 몰랐다.

나는 잡히는 대로 은화 몇 개를 꺼내 녀석에게 건넸다.

"감찰국원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주는 거니 받아 둬라."

"방패! 11 경비대 한스! 한스라고 합니다!"

한 스는 냉큼 돈을 받아 들고, 얼른 안주머니로 숨겼다. 이제 놈을 신경 쓸 정신은 없었다.

느릿하게 눈앞으로 후작의 관이 다가오고 있었다. 경비들 사이에 섞여 슬쩍 손을 뻗었다.

'정수 흡수!'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긴장과 당혹이 나를 옭아 떴다.

'흡수한다.'

마찬가지였다. 관에서 빛이 새어나오지도 않았다.

거리가 짧은 탓은 아니다.

장애물에 막힌 탓도 아니다.

황제 암살의 현장에서 경험했다.

초록색 빛은 마차를 뚫고도 선연히 비쳐 왔다. 이렇게 아무것도 없을 수는 없다.

'후작이. 없어?'

당황해서 굳어 있는 나를 푸른 사자 기사단이 흘끗거렸다.

나는 몸을 숙이고 뒤로 물러났다.

눈에 띄지 않도록 인파에 섞여 이동했다. 가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두 번째 지점, 세 번째 지점에서도 흡수를 시도했지만 아무 반응도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후작 각하! 잘 가십시오!"

건물 2층에서 뿌리는 하얀 꽃잎들이 몸에 떨어졌다.

행렬을 호위하는 녀석들 중 눈썰미 좋은 놈이 나를 수상쩍게 보기 시작했다.

굳이 펜던트를 사용할 것도 없다.

좋지 않은 상황이다.

다시 그늘에서 은신 스킬을 썼다.

뒷골목을 돌아 옥상에 올라갔다.

- 팟!

거리 전체를 조망하기에 딱 좋은곳을 알고 있다.

황색 지를 발견한 장소에서 머릿속으로 몇 가지 사실을 정리했다.

첫 번째. 관 안에는 후작의 시체가 없다.

두 번째. 거리에 낭만적인 추모 분위기를 조장하는 자들이 있었다. 예쁘고 젊은 여자나 잘 차려입은 중후한 남자들.

그들은 주위에 꽃을 나눠 주고 후작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퍼트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계속 행렬을 따라 이동하다 보니몇몇 얼굴이 눈에 익었다.

모두 민간인 복장이었지만, 발걸음이나 움직임에서 고도로 훈련받은 티가 났다.

'조직이 있다.'

〈등불〉달리아크에서는 암살이라고 했는데, 수도에서 자살로 소문이 퍼진 건 그들의 소행이 분명하다.

납치해 볼까 했지만, 두셋씩 조로 움직이고 있었다. 무리였다.

좀 더 신중하게 지켜보기로 했다.

모든 걸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자,

관 주위에서 말을 모는 푸른 사자기사단원 가운데서도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자는. 누구지?'

다른〈푸른 사자〉들보다 조금 더화려한 갑옷을 입은 남자가 유독 눈에 띄었다.

이를 악문 듯 단정한 입술이 굳게다 물려 있었다. 얼굴 근육은 잔뜩 경직되고,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있었다.

슬픔이 아니었다.

분노.

분명한 대상이 있는 강렬한 분노였다.

156화 공동의 적, 내부의 적 (13)

***************************************************

'왜 저렇게 분노하고 있는 거지?'

몹시 궁금했다.

녀석이 누군지 알고 싶었다.

사건의 전말을 찾는 단서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다가가는 건 무리다.

행렬이 끝나는 위치에서 다가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보는 눈이 많아.'

단순한 군중이 아니다.

옥상에서 거리를 조망하며 수상한자들이 잔뜩 깔려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후작의 죽음이 정말 암살이라면.

저 녀석은 둘 중 하나다.

사방에 잔뜩 깔린 '눈'들에게 포착되어 조만간 제거 되거나, 아니면 녀석 자신이 '눈'들이 깔아 놓은 미끼인 셈이다.

'일단 정체부터 확인해야겠군.'

나는 군중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백백한 인파를 헤치고 어지러운 소음 속으로 리듬을 타며 들어갔다.

뒷짐을 지고 서 있는 키 큰 노인에게 다가갔다.

"혹시 저자가 누군지 아시오?"

"크흠! 흠흠.!"

노인은 나를 흘끗 바라보곤 대꾸하지 않았다. 아까처럼 경비들에게 다가가 물어보면 확실하다.

이 갑옷은 꽤 먹히는 모양이니까.

하지만 동시에, 감찰국원의 신분으로 기사단의 중요 멤버를 모르면 수상하게 보일 거다.

양날의 칼인 셈.

'혹시 부단장 정도라도 되면 빼도 박도 못하겠는데.:만만한 게 식당이었다.

거리가 잘 보이는 2층 식당으로 들어갔다.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

중간 가격의 술 한 병을 시키고, 그만큼의 돈을 추가로 더 쥐어 주며물었다.

"저기 저 남자 말인데."

"앗, 누구 말씀이십니까?"

"저 파란색 머리카락의.

졸리고 의욕 없던 웨이터가 돈을 쥐어 주자 빠릿한 태도로 변했다.

"아, 기사 레일리 말씀이십니까?

추적자 레일리라고 하지요. 유명한 녀석입니다."

"추적자라고.?"

"모르시는구나. 헤헤.

웨이터가 눈을 빛냈다.

"음?"

"헤햇.

아무래도 돈을 좀 더 달라는 소리 같았다. 메뉴판을 슬쩍 훌어보고, 가장 비싼 술만큼의 돈을 웨이터의 주머니에 찔러줬다. 은화 몇 개가 들어가자 그의 입에서 말이 술술 쏟아져 나왔다.

"예. 추적자 레일리. 도둑 길드〈부드러운 전갈〉의 유망주였습죠."

'이 녀석은 무슨 정보 길드라도 되나.?' 느슨해져 있던 눈빛이 돈이 들어가자 탁 변하면서 말을 쏟아낸다. 평범한 웨이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자세한 뒷사정은 알 바 아니었다. 나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리전트 다이아몬드 도난사건으로 도둑 길드가 와해됐지요.

그때 레안드로 후작의 눈에 들어 기사가 됐습니다."

"흐음.

나는 후작에게 흡수한 제국 법률을 떠올렸다.

"범죄자를 사면할 권한이 있나? 사면 발의는 최소한 대공 이상의 작위가 필요할 텐데."

"역시. 수도 분이 아니시죠?"

고개를 끄덕였다.

웨이터가 납득하며 말을 이었다.

"길드를 와해시킨 게 바로 후작 본인이니까요. 황실의 보물이라고 해도, 길드 다 부수고 혼자 물건 찾은 사람 요청은 들어줘야죠."

≪ 으. W"W.?

거리를 지나는 '추적자 레일리'를 계속 바라봤다.

"근본도 모를 놈을 주워 왔다고 반대가 많았지요. 하지만 레안드로 후작이 누굽니까?"

나는 무심코 대답했다.

"정신병자?"

웨이터가 깜짝 놀라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쉿! 말을 조심하십시오."

누가 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테이블 사이의 거리는 꽤 떨어져있었고, 다들 각자의 이야기에 정신이 없었다.

"개미 터럭만큼도 남의 의견에 신경을 안 씁니다. 그래서.

웨이터는 술을 가져온 뒤에도 한참동안이나 말을 이어 갔다.

나는 짧은 시간 동안 레일리라는 기사에 대해 많은 걸 알게 되었다.

'추적자 레일리'는 기사단에서도 후작에 대한 충성심이 각별한 녀석이었다.

세상천지에 같은 편이라고는 후작하나뿐일 테니 당연했다.

출신 성분 때문에 기사단 내에서 어떤 지위를 갖지는 못했지만.

"추적, 은신 능력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후작이 아끼는 정말 몇 안 되는 기사 중 하나라고 합니다. 이제 후작도 죽었으니 어찌 될지.

"검술 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가끔 저런 놈이 기사라니 인정 못한다고 덤비는 것들이 있다더군요.

다들 먼지 나게 처맞고 집에 기어들어갔다고 알려져 있죠."

"홈.

"풍문으로 들은 건 여기까진데.

좀 더 알아봐 드릴까요? 헤햇. 저 정도면 무척 빠삭한 편입니다만."

"이 정도면 됐소. 술은 좋을 대로 처분하도록."

- 훌쩍!

그대로 2층 난간에서 뛰어내렸다.

어라, 진짜 안 드시고 가십니까,

하는 목소리가 뒤로 울려 퍼졌다.

무시한 채 그대로 인파 속에 섞여들었다.

'은신.'

'추적.'

스킬을 최고 수준으로 발동하고 골목과 골목 사이로 숨어들었다.

조용히〈추적자 레일리〉를 따라갔다. 더 이상 가짜 관에는 관심이 없었다. 안은 텅 비었거나, 아니면 가짜 시체가 있을 확률이 높다.

웨이터와의 대화는 유익했다.

놈이 후작과 남다른 관계였다는 사실을 파악한 것만으로도 목적은 충분히 달성이다.

저 남자의 분노는, 후작의 미심쩍은 죽음에 대한 분노다. 그걸 미끼로 던지면 반드시 끌려 나온다.

후작의 관은 수많은 인파가 지켜보는 가운데 제국 제2 묘역에 안착됐다. 레일리의 눈은 점점 더 붉어졌다. 하지만 이를 악물었을 뿐 눈물한 방울 홀리지 않았다. 그는 동료들과 몇 마디를 나누더니 혼자 으숙한 골목길로 빠졌다.

'호오?'

수도의 뒷길을 훤하게 꿰고 있는 모습이었다. 레일리는 골목과 골목을 계속 누벼 더 깊숙이 들어갔다.

인적은 점점 드물어지고, 길은 점점 더 복잡해졌다.

인간이 전력으로 질주하는 속도로 골목과 골목을 넘어 추적이 한참 이어졌다.

전과자가 운영할 것 같은 불결한 여관들이 보였다.

제 딴에는 탐욕스러워 보이지만, 당장 내일도 생각하지 못할 것 같은 자들이 누런 이를 드러내고 서 있었다.

막다른 골목인 줄 알았는데 희한하게판잣집을 통해 뚫리는 길이 있었다.

위생을 보장하기 힘들 것 같은 허름한 음식점들이 연이어 나타났다.

수도의 빈민가인 것 같았다.

레일리의 자취는 놓칠 듯 아슬아슬하게 계속 잡혔다.

꺾고, 뛰어넘고, 뚫고 들어갔다. 어느 순간 시야가 탁 트였다.

슬럼가를 지나 황량한 폐건물이 있는 공터에 도착했을 때였다.

갑자기 탐지 범위에서 레일리가 사라졌다.

'역시. 유인 당했군.'

크게 놀랄 일은 아니다.

일부러 빈민가를 지나갈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했다. 삼십 분 정도 추격한 뒤에는 확신했다. 하지만 싸워도 이길 자신은 있다.

루-륨 회로까지 발동한다면 탈출정도는 가능할 거다.

물론, 그럴 일이 없다면 좋겠지만.

아이작이 가르쳐 준 회로는 말파스의 인장을 찍는 회로다.

어떻게 탐지하는지는 몰라도.

말파스의 흔적이 남는다면, 마왕푸르손의 신도들이 눈에 불을 켜고 날 찾으려 할 거다.

게다가 녀석을 해치기 위해 쫓아온 것도 아니다.

말이 통할 거라고 생각했을 때.

"제법이군."

뒤에서 약간 쉰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찰국에 이 정도 추적 능력을 가진 개새끼가 있을 줄이야."

걸걸했다.

그놈이다.

- 철컥.

최대한 자연스럽게 뒤로 돌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흠. 못 찾겠나 보지? 고개 들어."

목소리는 위에서 들려왔다.

사자 문양이 새겨진, 푸른 갑옷을 입은 남자가 담벼락 위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판금으로 된 갑옷을 입고도 그런 자세가 불편해 보이지 않았다.

충혈된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장례 행렬에서부터 날 졸졸 쫓아오더군. 대체 어디까지 쫓아오나 두고 봤는데. 제법 재미있었어."

'암행暗行이 장기라더니.' 생각보다 대단한 녀석이었다.

일단 우호적으로 접근하자.

"기사 레일리? 당신과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소."

안타깝게도 그는 내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말보다는.

- 스롱.

그가 허리에서 칼을 빼 들었다.

"소리 좋네. 이걸로 대화하지?"

- 피릭!

날렵한 롱소드가 바람을 갈랐다.

- 팟!

뒤로 뛰어 섬뜩하게 반원을 그리는 칼을 피했다. 간발의 차였다. 칼끝이 갑옷 표면을 긁어내는 소리가 날카톱게 공터에 울렸다.

"흥."

레일리는 웃으며 세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다시 가로로 칼을휘둘렀다. 두 검격은 한순간에 겹치듯 일어났다.

나는 균형을 잡기 위해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나야 했다. 생각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였다.

"이야? 쉽게 피하네? 갖고 노는 재미가 있겠어."

녀석은 왼쪽 입꼬리를 씩 올렸다.

아직 전력은 반도 내보이지 않은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당한다.

'질주.'

[스킬〈질주〉를 사용합니다!]

[남은 시간 - 14:59.]

공격이 반대편에서 다시 한 번 들어왔다. 날카롭게 뻗어 나온 섬광이 가슴팍을 베어 왔지만, 몸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어? 뭐 한 거야?"

'이제 내가 앞선다.' 제한은 15분.

15분 동안 승부를 봐야 한다.

다만 협조를 못 받을 정도로 너무 심하게 패도 곤란하다.

살살 구슬려야지.

- 부응!

칼을 쥐고 슬쩍 휘둘렀다. 대검의 강한 검풍에 레일리의 짙푸른 머리칼이 뒤로 흩어졌다. 걸친 갑옷과 어울리는 머리카락이었다.

이마가 트인 레일리의 표정에서 여유가 반쯤 사라졌다.

"좋아. 해 보자는 거지?"

- 파츠츠츠츠!

푸른 기운이 몸에 타오르는 것과 동시에, 눈앞에서 레일리의 잔상이 꺼지며 빠른 속도로 그의 칼이 날아왔다.

'시끄러워지겠군.'

검기를 발동시킨 채, 대검을 뒤로 당긴 뒤, 몸 전체로 회전을 주며 가로로 휘둘렀다.

- 콰광!

검기를 두른 터라 어느 쪽도 상대의 무기를 절삭하지 못했다.

거대한 폭음이 울렸고, 레일리가 허공에서 뒤로 튕겨 났다.

'힘은 앞선다.'

허공에서 튕겨 나는 녀석을 그대로 쫓아가 주먹을 내질렀다.

- 피릭!

하지만 레일리는 허공에서도 균형을 잡으며 몸을 회전시켜 칼을 휘둘렸고, 황급히 대검을 들어 막아야했다. 놈이 가한 의외의 강한 반격에 비틀거리며 몇 걸음을 물러나야했다.

"제법이군."

"홍, 정체를 밝혀라."

"기사 레일리, 나는 대화를 원하는 상대일 뿐이오."

"잘 무는 건 인정하겠다만, 결국개새끼 주제에 감히 사자와 대화하겠다는 거냐?"

'여기선 이게 안 통하는군. 다른걸 입고 왔어야 했나?' 레일리는 자세를 낮춘 채 롱소드손잡이를 눌렀다.

- 투둑.

뭔가가 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죽어라. 네 정체는 죽인 뒤천천히 확인하지."

레일리는 한쪽 발을 축으로 빙글 회전하며 강하게 칼을 휘둘렀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소리였다.

- 스릉! 스릉!

'두 개?'

가지고 있던 롱소드가 두 개로 갈라졌다. 한층 더 얇고 뾰족한 쌍검雙劍을 그가 역수로 쥐었다.

"하아. 하아. 하아.

레일리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간신히 칼을 짚고 서 있었다.

갑옷 곳곳은 그을리거나 얼어붙어있었고, 휑하게 구멍이 뚫려 있는 곳도 있었다.

"크으으. M비틀거리는 녀석의 모습을 보는 나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젠장. 써 버렸다.

멍하니 주위를 바라봤다.

불타고 무너지고 부서진 파편이 곳곳에 보였다.

놈의 쌍검 술은 내가 밑천을 탈탈 털게 만들었다.

고문 미궁의 보스, 부두 골렘을 처리할 때보다도 훨씬 많은 마법을 사용해 버린 것이다.

'그러고도 쉽지 않았어.'

싸움에서는 이겼지만 초조했다.

푸르손의 신도들이 언제 이 흔적을 찾아낼지 모른다.

그나마 위안인 것은. 아직 레나의 펜던트가 발동하지 않았다는 것.

나는 다시 일어나려는 레일리를 향해 진심으로 충고했다.

"무리하지 마시오."

"죽여라, 마법사."

"대화하자니까. 다짜고짜 칼을 휘두르면 곤란하지 않소?"

"갑자기 쫓아와서 미안하지만.

[가면무도회Masquerade 활성화!]

[짧은 시간 동안 얼굴에 '인간'의모습을 덧씩읍니다.]

[최근에 본 가장 인상적인 인간을 가장합니다.]

[변신: 바티엔느 폰 레안드로]

[65% 흡사합니다.]

[남은 부분은 무작위 처리됩니다.]

[제한 시간: 10분]

[다음 사용까지: 6시간]

- 철컥.

나는 투구를 벗었다. 그러자 레일리의 눈이 크게 떠졌다.

"당신은.!"

"제법 닮지 않았소?"

"혼 외자 설이. 아니 그 나이에 그럴 리가 없는데. 대체 누구요?"

놈의 말투가 갑자기 온화해졌다.

진작 이럴 걸 싶기도 했지만, 먼저얼굴부터 보여 줬다면 얼굴 자체를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그분의 가까운 친척이지. 아, 찾아봐도 나에 대한 정보는 안 나올 거요. 어릴 때 조금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말이지."

157화 공동의 적, 내부의 적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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