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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7화. 타락 천사(1) >

게시글의 제목을 본 나는 곧장 클릭해 안으로 들어갔다.

―상위 리그에서도 성계 대항전이 열리나?

「상위 리그에서도 성계 대항전이 열릴지도 모른다.

요즘 그 징후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로, 상위 게임 메이커가 요즘 무언가를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다는 소문이다.

꼭 성계 대항전이 아니더라도, 무언가 큰 이벤트를 기획하고 있다는 뜻.

하지만 중요한 건 이다음부터다.

둘째로, 최근 상위 게임 메이커가 주변 천사들에게 하위 리그의 성계 대항전에 대한 정보를 구해 오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이미 끝난 이벤트를 굳이 왜?

여기서부터 이미 합리적 의심이 시작된다.

마지막으로, 요즘 하위 게임 메이커의 집무실로 상위 게임 메이커가 자주 드나들고 있다는 정보가 나돌고 있다.

사실상 독립적으로 리그가 운영되고 있으므로, 상위 게임 메이커가 그곳에 드나들 이유가 없다.

그 증거로, 최근 3년 동안 상위 게임 메이커는 고작 4번밖에 하위 게임 메이커를 찾아가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1달 동안, 알려진 것만 해도 무려 7번이나 하위 게임 메이커의 집무실을 드나들었다고 한다.

이 정도라면 정황상 상위 리그에서도 성계 대항전이 열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때마침, 얼마 전 렌이 상위 리그로 승급하면서 상위 리그에도 열두 성계의 플레이어가 모두 존재하는 상황.

어떠한가?

필자의 말마따나 성계 대항전이 열릴 것 같지 않은가?」

'찌라시였군.'

실제로 성계 대항전이 열린다는 내용이 아닌, 신 중에 한 명이 추측성으로 써놓은 게시글이었다.

그나저나, 라파엘이 하위 게임 메이커의 집무실로 자주 드나들고 있다라······.

언급된 내용이 사실이라면 슬슬 성계 대항전이 열리려는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하위 게임 메이커의 집무실로 드나들 이유가 없을 테니.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죄목으로 출전 정지를 내린 거였어.'

괜히 내가 경기에 뛰다가 비명횡사라도 당하는 순간, 지금까지 준비해왔던 모든 것들이 물거품 될 것이다.

현재 상위 리그에 존재하는 지구인은 나밖에 없으니까.

내게 6개월 정지 징계를 먹였으니, 아마 그 즈음에 열리겠지.

'제법 예리하네.'

나는 게시글을 쓴 신에 대해 감탄했다.

이 정도의 단편적인 정보들만으로 성계 대항전이 열릴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 신은 많지 않을 것이기에.

그에 대한 방증으로 상위 리그에서 성계 대항전이 열린다는 것에 대한 신들의 반응은······..

└라는 내용의 소설 추천 좀.

└ㅋㅋㅋㅋㅋㅋㅋ 씨발 지구에 꼴랑 1명 있는데 어떻게 열 건뎈ㅋㅋㅋㅋㅋ 각 성계에서 대표로 한 명씩만 나오나? ㅎ

└한 명씩 나와도 문제임 ㅎㅎ 렌이 지금 하위 넘버링 경기를 뛰고 있는데 걔가 나오려 할까??? 상위 넘버링 플레이어랑 만나면 순삭 당할텐데? ㅎㅎ

└눈 버렸네ㅡㅡ ㅅㅂ 생각 좀 하고 싸질러라 좀. 고작 1명씩, 12명이 나오는 경기가 초대형 이벤트임? ㅋㅋㅋㅋ

└한 명씩 나오는 경기에 성계 대항전이란 이름 갖다 붙이지 마라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ㅇㅇ; 굳이 12명이 뛸 경기를 만들 것 같진 않음 ㅎ.. 어차피 현시점에선 쿠 훌린 미만 잡 아닌가? 각 성계 당 최소 100명씩은 나와야 이벤트라고 할 수 있지~

└100명 ㅋㅋㅋㅋㅋㅋ 시발 상위 리그에선 평생 성계 대항전이 열릴 수 없다는 뜻이자너ㅋㅋㅋㅋ 지구에서 100명 올라오려면 100년도 더 걸릴 듯 ㅋ

└똥을 존나 진지하게 싸질러 놨네 ㅎㅎ 조금만 대가리를 굴려 보면 이게 불······.

'역시 모두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군.'

댓글에 욕이 엄청나게 박히고 있었다.

그것도 실시간으로 계속 늘어나고 있는 상태였다.

뭐, 어찌 보면 당연한 거다.

나도 처음 성계 대항전에 참가하겠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딱 저 심정이었으니까.

'성계 대항전이 시작되기 전에 플래티넘 등급 스킬이라도 하나 얻었으면 좋겠는데.'

내 부탁으로 인해, 아세리안이 팜에 새로운 사용인을 고용했다.

할 일은 중개 거래소를 뒤지며 쓸만한 스킬과 아이템을 찾는 것.

특히, 플래티넘 등급 이상의 스킬이 등장하면 앞뒤 재지 말고 일단 나에게 알려달라고 했는데, 지금까지 감감무소식이었다.

'안 되면 그림자 분신이랑 마력 상쇄랑 천둥의 숨결을 업그레이드 해달라고 해야겠군.'

한숨을 내쉰 나는 눈을 감았다.

앞으로 3시간 뒤면 피넛엘과 대련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다.

그녀와 대련하려면 조금이라도 쉬어 둬야 한다.

그나마 유일한 위안이 있다면.

'이번 달엔 1만 포인트 정도 되겠는데?'

플레잉 코치로 들어오는 포인트가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는 것이었다.

"형. 근데 언제까지 존댓말 하실 거예요?"

대련이 끝나고 쉬는 시간.

주창범의 물음에 다른 이들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존댓말이요?"

"네. 다른 사람들은 이제 형누나동생 하면서 친하게 지내는데, 형은 끝까지 존댓말만 하시잖아요."

"그게 그렇게 이상합니까?"

"음······ 별다른 뜻은 아니에요. 그냥 형이 다른 사람들에게 벽을 세워두고 계신 거 같아서요."

벽을 세워두고 있는 것 같다라.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이들과 친목을 도모할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그들의 과거가 궁금하지도 않았고, 그들에게 내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언제 헤어질지 모르는 이들이야.'

팀 투지의 생존율이 다른 팀에 비해 월등히 높다고 하지만, 그래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건 똑같다.

이곳은 콜로세움이기에.

'1회차 때 영향도 좀 있는 것 같고.'

눈이 보이지 않았던 시절.

많은 이들이 뒤에서 날 조롱하고 무시했다.

아니, 뒤에서 그러는 것들은 차라리 괜찮았다.

그런데 앞에서 대놓고 내게 시비를 걸거나 모욕을 주는 경우도 일상다반사였던 게 문제였다.

1회차 시절에 소속되었던, 팀 정의에는 나보다 강한 플레이어들이 많아서, 묵묵히 그 치욕들을 감내해야 했으니까.

'유쾌하지 않은 기억이군.'

그때 외톨이로 혼자 훈련하고, 고군분투했던 기억 때문일까.

여전히 누군가에게 마음을 준다는 것이 무척 불편했다.

그래서 이렇게밖에 얘기할 수 없었다.

"좀 더 친해지면. 그때 말을 놓도록 하겠습니다."

내 대답에 모두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내 말을 카이로시아가 받았다.

"애초에 그럴 여지도 안 주는데 어떻게 친해져요?"

"예?"

"그렇잖아요. 더 친해지면 말을 놓도록 하겠다는데, 그럴 여지도 안 주면서 무슨. 너희랑 친하게 지내기 싫어서 그렇다고 딱 말해요, 그냥."

"······."

"그게 아니면 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상위 리그로 올라오는 사람에겐 반말해주는 걸로."

카이로시아의 말에 주창범과 사인방, 모용악, 고건하까지 고개를 끄덕였다.

상위 리그로 올라오면 반말을 해달라······.

그녀의 말에 나 또한 피식 웃었다.

고작 그런 걸로 상위 리그에 올라올 동기부여를 얻을 수 있다면.

"좋습니다. 아니, 원한다면 함께 술도 마셔 주죠. 딱 세 번까지만."

얼마든지.

'누구라도 좋으니까 제발 상위 리그로 올라와라.'

마의 구간을 넘은 이상.

그 어느 때보다 이들의 승급이 절실했다.

"오, 좋아요! 우진이형, 제가 어떻게든 상위 리그로 올라가서 형동생 하면서 술을 마시고 말 거예요!"

"좋았어. 나도 어떻게든 도전해 본다."

"이봐, 제이스. 그다음은 나라고."

그러자 모두들 반응이 괜찮았다.

자기들끼리 누가 먼저 오를 거라며 왁자지껄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나쁘지 않네.'

나는 그저 그 모습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때였다.

띠링!

[긴급 미션이 내려왔습니다!]

[지금 당장 게이트로 입장하세요!]

긴급 미션?

게이트?

'뭐지······?'

눈앞에 뜬 알림창에 어안이 벙벙했다.

1회차, 2회차를 통틀어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다.

"왜 그러세요, 형?"

내가 갑자기 움찔하자, 다른 사람들이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아닙니다. 전 먼저 나가보도록 하죠."

특수 단련장을 나오자, 공터에 생성된 게이트가 보였다.

평소 경기에 입장할 때 생성되던 게이트였다.

게이트의 입구가 조금씩 좁아져 가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없다는 뜻.

'아세리안에게 먼저 물어봐야겠어.'

나는 곧바로 아세리안의 집무실로 향했다.

"안우진님!"

그런데 마침, 아세리안 또한 집무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긴급 미션이래요. 당장 게이트로 들어가셔야 해요."

아세리안은 무척 다급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물어볼 건 물어봐야 했다.

"긴급 미션이요?"

"어······. 경기 외에 갑작스럽게 악마나 그에 준하는 존재가 나타나면 생성되는 미션이에요."

"근데 전 징계 중이지 않습니까?"

"아, 이런 미션은 게임 메이커가 아니라, 열두 주신이 내리는 거예요. 아무튼, 꼭 들어가셔야 해요. 안 그러면 영구 자격 정지가 내려올 수도 있어요!"

영구 자격 정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플레이어의 자격을 박탈한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렇게 되면, 내가 지금까지 해온 모든 것들이 물거품이 된다.

'씨발!'

나는 곧장 닫히기 직전의 게이트로 뛰어갔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등 뒤에서 아세리안이 무사 귀환을 염원했지만, 대답해 줄 겨를도 없었다.

띠링!

[모든 상태를 100%로 회복합니다.]

화륵! 화르륵!

그리고 들어온 경기장 안.

불꽃이 넘실거리고, 뜨거운 열기가 코끝을 찔렀다.

[무스펠하임에 입장하셨습니다.]

[<달의 메아리> 가 외부 온도를 차단합니다.]

불꽃의 세계, 무스펠하임.

긴급 미션이 치러지는 장소는.

지옥이었다.

* * *

"타니엘. 경기장 디자인은 마무리됐니?"

"아······ 죄송합니다. 아직 못 끝냈습니다."

"내가 분명 오늘 아침까지 끝내라고 했을 텐데? 왜, 그냥 아예 일정 미룰까? 응?"

"저, 정말 죄송합니다."

"최대한 빨리 끝내는 게 좋을 거야. 명심하렴."

"예······!"

라파엘의 말에 세 쌍의 날개를 가진 천사, 타니엘이 고개를 조아리곤 그녀의 시야에서 빠르게 벗어났다.

"주르엘, 하이블러드나이트 126에 출전할 플레이어들 선정은 어떻게 됐지?"

"여기 있습니다, 라파엘님."

다섯 쌍의 날개를 가진 천사, 주르엘이 종이 뭉치를 라파엘에게 건넸다.

라파엘은 종이를 들여보며 한 명씩 찍었다.

"음······. 얘는 빼. 저번에 보니까 관객들 반응이 별로야. 그리고 얘도. 살고 싶으면 플레이어 자격 내려놓고 사용인이나 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나머지 애들한텐 오퍼 돌리고, 기사 짤막하게 띄워. 어그로 좋은 제목으로."

"예."

"르니카엘! 130 스토리 미션이 지금 어디까지 진행됐······."

주르엘에게 지시를 내린 라파엘이 숨돌릴 틈 없이 르니카엘에게 지시를 내릴 때였다.

"라파엘님! 열두 주신께서 오셨습니다!"

"······열두 주신께서?"

"예. 지금 막 발할라에 도착하셔서 이쪽으로 오고 계십니다."

천사의 말에 라파엘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휴. 바빠 죽겠는데. 모두들 잠깐 휴식이라도 취하고 오렴. 르니카엘은 근처로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주고."

"알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분주하게 움직이던 수백 명의 천사들이 빠르게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각양각색의 복장을 한 열두 명의 사내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라파엘은 원피스 치마를 양손으로 살포시 잡고,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1급 치천사 라파엘, 열두 주신님을 뵈옵니다."

"음, 라파엘. 노고가 많군."

"아닙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오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러자 한쪽 눈에 안대를 낀 주신, 오딘이 앞으로 나섰다.

"음. 방금 아버지를 뵙고 오는 길이라네. 우릴 급하게 소집하셨더군."

'아버지께서······ 주신님들을?'

열두 주신은 악마와 관련된 일을.

그리고 치천사들은 콜로세움의 운영을 처리한다.

그렇기에 고위 리그부터는 열두 주신이 게임 메이커와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

거기서부턴 마계의 악마들과 싸우는 곳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께서 열두 주신을 소집했다는 건 한 가지 이유밖에 없었다.

"타천사가 나왔군요."

"음."

타락 천사.

말 그대로 신성이 타락했다는 뜻이었다.

신성이 타락하는 일은, 마계에 있는 죄인의 힘을 빌려 쓰는 경우에 일어난다.

혹은 포인트를 받았거나.

그럴 경우, 아버지의 신성력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이번 타천사는 상위 플레이어를 보내려고 하는 건가?'

아버지께 신성을 부여받아 권능을 행사하는 신과 천사들에게, 신성의 타락은 치명적이었다.

더 이상 천계에 있을 수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럼 절 찾아오신 건, 그 타천사들을 사냥하는데 상위 플레이어를 보내시려는 거군요."

라파엘의 말에 또 다른 주신, 환웅이 한숨을 내쉬었다.

"고위 플레이어들과 초월 플레이어들은 이미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어서 도저히 뺄 수 있는 인력이 없더구나. 그래서 이번에는 상위 플레이어들을 좀 보내야겠다."

"알겠습니다. 누구를 보내면 될까요?"

"쿠 훌린, 주소월, 온달, 오디세우스······."

라파엘의 말에 오딘이 한 명씩 읊기 시작했다.

한 명 한 명이 상위 리그의 네임드였는데, 그 이름이 끝이 없었다.

'도대체 몇 명이나 보내려는 거야······?'

"······프리드레이프, 막시무스, 마지막으로 렌."

그렇게 40명째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호명이 끝났을 때였다.

"잠시만요, 오딘이시여. 말씀 중 죄송하지만, 렌은 보낼 수 없습니다."

"어찌하여?"

"현재 6개월 자격 정지 징계를 받아 근신 중에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경기에 출전하게 된다면 콜로세움에서 경기를 뛰는 많은 플레이어들이 징계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하위 넘버링 경기를 뛰는 플레이어인 만큼 다른······."

그녀가 어떻게든 렌을 제외시키기 위해 열변을 토했다.

하지만 라파엘의 말은 끝까지 이어질 수 없었다.

오딘이 고개를 젓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가. 우린 이미 렌을 선발했다. 이미 그의 능력을 충분히 지켜본 바, 하위 넘버링 플레이어라는 이유로 제외할 수 없다. 그리고 징계 건도 그러하다. 지금껏 잡음 없이 리그를 이끌어 나간 그대의 노고를 충분히 알고 있지만, 마계와 관련된 일에는 우리의 결정을 따라야 한다. 라파엘이여, 콜로세움이 만들어진 목적을 잊지 말거라."

오딘의 말에 라파엘이 입술을 깨물었다.

무척 확고한 대답.

그간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여기서 자신이 뭐라고 한들, 이미 내려진 결정은 바뀌지 않을 거라는 걸.

'하아. 되는 일이 없네.'

라파엘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주신님들의 의견에 따르겠습니다."

"음. 시간이 없으니 바로 부탁하노라."

"예. 비프로스트를 어디로 연결하면 될까요?"

그녀의 물음에, 환웅이 공중에 홀로그램을 띄우며 한곳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제일 위에 있는 천계, 그리고 가장 밑에 있는 마계.

그사이에 존재하는 중간계의 제일 하단에 있는.

"무스펠하임."

불의 지옥, 무스펠하임이었다.

< 97화. 타락 천사(1) > 끝

< 98화. 타락 천사(2) >

└님들 지금 상위 리그에서 긴급 미션 떨어졌음 ㄱㄱ!!

└오, 리그 열리는 날도 아닌데 개꿀~ 간만에 직관하겠구만.

└와 뭐임? 지금 참가자 명단 봤는데 쿠 훌린, 오디세우스, 온달 등등 상위 리그 초특급 네임드들임 ㅋㅋㅋㅋㅋㅋ

└스타 플레이어는 다 출동하네;; 바로 보러 간다 ㅂ2

└"어느 파티가 가장 먼저 사냥하나 토토하실 분들은 발할라 명예의 정원으로 오세요."

└하여튼 콜로세움에 미친 것들. 너넨 타천사가 네 명이나 나온 건 눈에도 안 들어오냐? 천계가 어찌 되려고 ㅉㅉ..

└ㅋㅋㅋㅋ 마계 죄수 열일하누~ 평소 한두 명씩만 나왔는데, 네 명이나 나온 건 진짜 오랜만인듯 ㅎ

└다른 애들은 알겠는데 렌은 왜 낀거임? 활약하는 건 알겠는데, 이 멤버 사이에 끼는건 좀 애바 아니냐 ㅋㅋㅋㅋ 다들 상위 넘버링에서 날아다니는 네임드들인데? 쟤 심지어 출전 정지 징계까지 먹지 않았음? 렌이 저기 껴 있는거 나만 불편함?

└불편러 또 등판했네 ㅉㅉ 아직 경기 시작도 안 됐는데 뭔 ㅡㅡ 출전 정지야 말도 안되는 걸로 먹은 거고, 실력이야 미션 진행하면서 어련히 드러날텐데.. 끝날 때까진 중립 기어 박아라.

└"어느 파티가 가장 먼저 사냥하나 토토하실 분들은 발할라 명예의 정원으로 오세요."

* * *

'오랜만이군.'

성계 대항전 이후 처음으로 와보는 지옥 맵.

상위 리그로 올라온 이상, 언젠가 한 번쯤은 겪게 될 줄 알았지만 이런 식으로 오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게이트를 통해 넘어온 인원은 나를 포함해 총 10명.

악마의 눈으로 체크해 보니, 모두들 하나같이 스텟이 어마어마했다.

상위 리그는 스텟의 편차가 어마어마하기로 유명한 리그.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들어온 플레이어들의 스텟이 비정상적으로 높았다.

'상위 넘버링 중에서도 네임드로 군림하는 녀석들인가 본데.'

띠링!

[<긴급 미션>을 시작합니다.]

[유형 : 척살(단체 PvP)]

[게임명 : 타천사 사냥]

[맵 : 무스펠하임(특대)]

[관객 수 : 1,993 명]

[생존한 플레이어 수 : 40 명]

[죽여야 할 타천사 수 : 4 명]

[미션]

[총 네 명의 타락 천사가 마계로 도주 중입니다.]

[마계로 들어가기 전에 타락 천사를 모두 사살하세요.]

[파티 단위로 죽여야 할 타천사를 배정합니다.]

[플레이어 '렌'이 소속된 파티에 배정된 타락 천사의 위치는 '지도'에 표시됩니다.―자색빛이 흘러 나옵니다.]

[타락 천사가 마계로 들어가게 될 경우 미션에 실패합니다.]

'천사를······ 죽이라고?'

상태창에서 지도를 눌러보니, 무스펠하임 전역이 보이는 전도가 나타났다.

오른쪽에 보니, <1 : 50,000,000> 이라는 숫자가 보였다.

아마 지도의 축척을 뜻하는 거겠지.

한마디로 1cm당 500km라는 것.

지도가 가로세로 1미터 정도였으니, 최북단에서 최남단까지 대충 5만 킬로미터 정도 된다는 뜻이었다.

'무스펠하임이 이렇게 컸어?'

지구의 둘레가 4만 킬로미터 정도 되니까, 그보다 조금 넘는,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여기에도 문명이 있었군.'

지도 곳곳에서 성이나 도시 같은 것들이 있는 걸로 보아, 아무래도 무스펠하임엔 몬스터뿐만 아니라, 고도의 지적 생명체들도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북쪽 끝, 무스펠하임의 초입이라고 쓰여져 있는 곳에 자줏빛 점이 하나 찍혀 있었는데, 아주 미세하게 조금씩 이동하고 있었다.

아마 우리가 죽여야 할 타락 천사의 현재 위치일 것이다.

'저걸 어떻게 죽이란 거지?'

자줏빛 점이 지도상에서는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다지만, 무스펠하임의 크기를 생각해 보면 실제로는 어마어마한 속도일 것이다.

천사들은 날개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런 존재를 추살하라고?

도대체 어떻게?

하지만 그런 의문은 곧바로 시스템이 해결해 주었다.

[각 파티의 리더에게 단 1회에 한하여 사용할 수 있는 <날개 제어> 능력을 부여합니다.]

[리더를 선출해 주세요.]

'날개 제어라······.'

이름만 들어도 대략 어떤 느낌의 능력인지 알 수 있었다.

아마 천사의 날개를 묶을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거겠지.

"천사의 속도가 무척 빠르군요. 바로 리더를 선출해야겠습니다. 저는 온달이라고 합니다."

그때, 선이 굵고 시원시원하게 생긴 미남자가 말했다.

등 뒤에 거대한 창과 활이 엑스자로 매달려 있는 남성이었다.

'이 남자가 온달이었군.'

만나본 적은 처음이었지만, 닉네임 정도는 알고 있었다.

현재 상위 리그를 휩쓸고 있는 졸본 출신의 유명 네임드였으니까.

다른 파티원들도 나와 마찬가지였는지, 온달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양초풍이라고 하오. 나는 온달님을 리더로 추천하고 싶소."

"하레크누드요. 나도 온달님께 한 표 주겠소."

"수무아붐입니다. 저도 온달님께서 리더를 맡아주시길 희망합니다."

그렇게 한 명씩 짧은 자기소개와 함께 리더 선출을 시작했다.

검객 셋, 마법사 둘, 기사 하나, 전사 하나, 궁수 둘, 창술사 하나였다.

돌고 돌아 마지막으로 내 차례가 되었다.

"렌입니다. 저도 온달님을 추천합니다."

여덟 명 중 여섯 명이 온달을 지명한 상황.

그렇기에 나도 무난하게 온달을 골랐다.

그때였다.

"그대가 렌이라고?"

"오, 유명 네임드!"

내 닉네임을 듣자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오고, 모두들 날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알고 보니 하위 리그에서부터 명성이 쩌렁쩌렁 울리던 렌 님이셨군. 그나저나 상위 리그로 승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걸로 아는데, 벌써 긴급 미션에 투입되다니, 정말 대단하시오."

"이제 두 경기인가 밖에 안 뛰지 않았어요? 근데 벌써 상위 넘버링으로 올라온 거예요?"

"지구 출신으로 상위 리그까지 올라온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인데······."

어느새 내 명성이 많이 퍼져 있었던 모양이다.

아직 하위 넘버링 경기밖에 뛰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모두들 날 알고 있었다.

'벌써 긴급 미션에 투입됐냐고?'

그리고 나 또한 파티원들이 하는 말을 통해 한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상위 넘버링 경기를 뛰는 플레이어에게만 긴급 미션이 내려지는 모양이군.'

어쩐지 1회차에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다 싶었다.

그나저나, 2회차의 나도 아직 하위 넘버링에서 경기를 뛰고 있는데?

'한 번도 상위 넘버링 오퍼를 받은 적이 없는데 어떻게 된 일이지?'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곧바로 그 생각을 뇌리에서 지웠다.

지금 아무리 고민해본다 한들, 답이 나올 수 없는 의문이었으니까.

"그럼 렌님도 온달님을 추천했으니, 총 일곱 분이네요. 온달님께서 리딩을 부탁드립니다."

율리안이라고 본인을 소개한 기사가 상황을 정리하자, 온달이 입을 열었다.

"모두들 렌님이 포함된 줄 몰랐던 모양인데, 다시 투표를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재투표요? 렌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율리안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온달]

[성향 : 신뢰]

[근력 : 187(+?)] [민첩 : 193(+?)] [체력 : 166(+?)]

[정신 : 99(+?)] [지력 : 1] [마력 : 158(+?)]

[각성 능력 : <궁왕 > <특급창술 > <특급마나운용 > <고급박투술 > <고급추적술 > <상급치료술 >]

[업적 특전 : 졸본의 신성新星]

들어보니, 모두들 긴급 미션에 대한 경험이 있는 것 같았다.

반면에 나는 한 번도 경험이 없는 상태.

그렇기에 굳이 리더 자격에 대한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매 순간 옳은 판단을 내려야 하는 리더에게 있어, 경험의 부재는 뼈아플 테니까.

"전 그냥 온달님이 리더를 맡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음. 렌님이 고사하셨으니, 온달님께서 리더를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율리안의 말에 온달이 고개를 끄덕였다.

띠링!

[파티의 리더가 정해졌습니다.]

[리더 : '온달']

[플레이어 '온달' 에게 <날개 제어> 능력을 부여합니다.]

[단 1회만 사용할 수 있으며, 거리 제한은 시야가 보이는 곳까지 입니다.]

[능력의 유지 시간은 10분 입니다.]

현재 우리가 있는 곳은 무스펠하임의 북부.

자줏빛 점과는 대략 10센티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출발 전, 온달은 일단 타락 천사가 향하는 방향을 직선으로 긋고, 우리가 대략적으로 만날 수 있을 만한 위치부터 물색했다.

중간에 방향을 틀 것도 고려해, 오차 범위로 각도를 10도나 적용했더니, 어마어마한 반경을 커버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일단 오차 범위 내의 영역으로 이동해, 실시간으로 타락 천사의 위치를 파악하며 경로를 수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쉽지 않겠는데.'

고작 1밀리미터만 틀어져도 50킬로미터 가까이 벌어질 테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바로 이동하겠습니다."

그때부터 온달을 리더로 한 타락 천사 사냥이 시작되었다.

꽝! 콰과과광!

곳곳에서 화산이 터지고, 분화구에서 날아온 바위가 지면과 부딪히며 터져나갔다.

어마어마한 열기에 모두들 숨을 짧게 끊어 쉬었다.

물론 달의 메아리가 있는 나한텐 해당 사항이 없었지만.

"취익! 취이익!"

"전방에 헬오크 무리가 있네요. 다섯 마리밖에 안 되니까 그대로 돌파하겠습니다."

성계 대항전 때와 다르게, 무스펠하임엔 각종 몬스터들로 우글거렸다.

[보름달이 떴습니다.]

[<로브:달의 메아리> 가 달의 힘을 빌려와 모든 스텟이 5% 상승합니다.]

"취익! 인간!"

3미터가 넘는 키.

검붉은 피부에 우락부락한 근육질 몸.

벽력섬전의 길이와 맞먹을 만큼 거대한 도끼.

코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꽃까지.

이 무시무시한 생명체는 놀랍게도 오크였다.

'무스펠하임에서만 사는 헬오크.'

트롤도 가볍게 씹어 먹고, 오우거와도 맞먹는 이 무시무시한 생명체를.

"취이익!"

푹! 서걱! 푹! 푹! 푹! 쿠웅!

온달과 다른 파티원들은 아주 손쉽게 쓸어버렸다.

'역시 상위 넘버링.'

그것도 내가 손 쓸 새 없이.

'나도 좀 사냥을 하고 싶은데.'

그런 내 마음을 읽은 걸까.

"왼쪽에서 불개미 옵니다."

측면의 수비를 담당하던 하레크누드의 말에 최전방에서 파티원들을 이끌던 온달이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렌님, 처리 후 합류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드디어.

포인트로 스텟을 올리고 처음으로 활약할 시간이 찾아왔다.

'빨리 피의 강화 특전을 켜고 싶어.'

오랜만에 느껴보는 설렘.

"키에에에에엑!"

불개미는 몸길이가 2미터를 넘는 거대한 개미 마수였다.

특징으로는 온몸이 불꽃으로 이글거린다는 것.

화륵! 화르륵!

'하나 더 있었군.'

그리고 턱을 열 때마다 화염이 뿜어져 나온다는 것이었다.

불의 지옥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들인 만큼, 거의 모든 생명체가 불 속성을 기본적으로 탑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콰지지지지지직!

'아무리 불 속성이어도 뇌전은 찌릿찌릿 할 거야.'

불개미의 숫자는 아홉.

나는 천둥의 숨결을 켜며 곧바로 녀석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서걱! 서걱! 서걱!

띠링!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강화> 능력으로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1/30)]

[3분 이내에 다른 생명체를 처치하지 못하면 상승분이 초기화됩니다.]

[<피의 흡수> 능력으로 극소량의 민첩 스텟을 흡수합니다.]

'아주 좋아.'

처치할 때마다 힘이 솟구치는 게 느껴졌다.

워낙 스텟이 높다 보니, 고작 1 스텍 올리는 것만으로도 쭉쭉 상승하는 것이다.

"키에에에에에에엑!"

동족이 죽자 불개미들이 포효하며 거칠게 달려들었지만.

'스텟이 높다는 것만으로도 전투가 이렇게 쉽다니.'

애초에 스텟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상대였다.

거기다 피의 강화 덕분에 계속해서 강해져 가고 있으니.

서걱! 서걱! 서걱! 서걱!

몇 마리의 불개미가 몰려오든, 소용없는 짓이었다.

"와, 움직임이 엄청나시군요. 과연 최단 시간 만에 상위 넘버링까지 올라오실 만 하네요."

순식간에 아홉 마리를 모두 처치하고 파티에 합류하자, 온달이 내게 엄지를 들어 올렸다.

"또 상대할 만한 몬스터가 있다면 제게 지시 부탁드립니다."

"아, 그러면 혹시 전방을 맡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온달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곧장 앞으로 달려 나갔다.

시간이 없었다.

3분이 지나기 전에.

서걱!

다음 생명체를 죽여야 했으니까.

그때부터 나는 온달이 지시하는 방향으로 뚫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띠링! 띠링! 띠링!

헬오크, 헬하운드, 불개미, 심지어 최상위 몬스터인 바실리스크까지.

모두들 피의 강화 스텍의 제물이 되어 사라졌다.

그 모습에 격렬한 전투를 펼치고 있는 와중에도,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쉽다고?'

띠링!

[<청천벽력 >이 발동합니다.]

꽈과과과과광!

이 정도의 힘과 움직임을 직접 겪어본 건 처음이었으니까.

어떤 공격이 들어오고, 그걸 나는 어떻게 반응할 것이며, 어느 부위를 찌르고 들어갈 것인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그저, 내 앞에 나타나는 존재를 향해.

"취이이익! 인간!"

서걱!

창을 휘두르기만 하면 됐다.

"렌님! 체력 조절을!"

쐐액!

아주 사소한 몸짓에도 바람 터지는 소리가 났다.

'미쳤어.'

정말 어마어마한 사냥 속도.

띠링!

[<피의 강화> 능력으로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30/30)]

[<피의 강화> 로 올릴 수 있는 스텟을 끝까지 채웠습니다.]

[<피의 강화>로 상승한 스텟이 30분간 유지됩니다.]

기다리던 피의 강화 특전이 켜지며 내 움직임이 정점을 찍었다.

'하. 하하······.'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렌)] [소속 : Team 투지]

[리그 : 상위리그]

[근력 : 203(+5)(+88)] [민첩 : 203(+5)(+88)] [체력 : 183(+5)(+70)]

[정신 : 168(+5)(+64)] [지력 : 56(+22)] [마력 : 137(+5)(+52)]

그때부터 학살이 시작되었다.

< 98화. 타락 천사(2) > 끝

< 99화. 타락 천사(3) >

└와, 뭐임? 렌 움직임 왜저럼? 이전 경기랑 아예 차원이 다른데?

└쟤 가면 쓴 애 닉네임 뭐냐?

└어휴ㅡㅡ 수준 낮은 하위 리그만 쳐 보니까 렌을 모르지 ㅋㅋㅋㅋㅋㅋ 어? 아닌데? 하위 리그만 보면 렌을 모를 수가 없는데? 혹시 평소에 고위 리그만 봄?

└ㅇㅇ 쿠 훌린이란 애가 잘 싸운다 그래서 한번 놀러와 봤는데 쿠 훌린보다 저 가면 쓴 애한테 더 눈길이 가네. 딱 보니까 쿠 훌린이랑 쟤랑 두 명은 곧 고위 리그 올라오겠는데.

└ㅋㅋㅋㅋㅋ 렌 상위 리그 올라온 지 이제 10개월 됨 ㅋㅋ 상위 리그에서 고작 두 경기밖에 안 뛰었음 ㅎㅎ 쟤 아직 하위 넘버링에서 경기함.

└와 그럼 도대체 초기 스텟이 몇이었던 거임? 간만에 어마어마한 네임드 들어왔나 보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렌 지구 출신이에요..

└?????????? 지구 출신인데 어떻게 저런 움직임이 나옴 ㅋㅋㅋㅋㅋㅋ 뻥을 치려면 좀 성의껏 치던가;;

└진짜 지구 출신 맞음!

└ㅉㅉ 그렇게 살지 마셈. 간만에 상위 리그 보려고 왔는데 기분 완전 잡쳤네

└아니 진짜 지구 출신이라고 ㅡㅡ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온달의 말에 나는 주변 몬스터들을 정리하며 발걸음을 멈췄다.

"키에에에에에엑!"

"취익! 반드시 죽인다!"

몬스터의 영역 한 가운데를 뚫고 지나왔더니, 우리 주변으로 엄청난 숫자의 몬스터 군단이 몰려들었다.

[옥죄어 오는 눈보라!]

[폭루유성爆淚流星!]

쐐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액!

콰과과과과과과과과과광!

그러자 마법사들의 광역 마법 퍼레이드가 시작되었다.

불의 세계에 무시무시한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하늘에서 거대한 유성이 떨어져 주변을 초토화 시켰다.

'미쳤네.'

카이로시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어마어마한 위력의 마법.

물론 그녀도 상위 리그로 올라오고, 이곳에서도 네임드로 자리 잡으면 이 정도 화력은 나오겠지만, 아직 한참 먼 얘기였다.

마법이 휩쓸고 나자, 그 많던 몬스터들이 한순간에 사라져 있었다.

'이게 상위 넘버링인가.'

물론 여전히 몬스터들이 끊임없이 몰려들고 있지만, 이 정도 숫자쯤이야 여기 있는 열 명의 수준을 생각해 봤을 때, 정말 별 볼 일 없는 수준이었다.

"렌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정말 대단하시네요. 여기까지 뚫고 오셨는데도 숨이 하나도 안 차시다니."

"덕분에 정말 빠르게 왔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도착하자마자 따로 지시 없이도 나와 온달, 마법사들을 에워싸고 방진을 형성한 파티원들이 내게 고마움을 표했다.

내가 앞에서 정리하는 모습을 인상 깊게 본 모양이었다.

'내가 앞으로 이런 녀석들과 싸워야 한다는 말이지.'

하지만 나야말로 놀라웠다.

피의 흡수가 있기 때문에 체력적인 문제가 없다곤 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도 파티원들은 하나같이 별로 힘들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렌님.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곁에 서 있던 온달의 말에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래도요. 덕분에 생각했던 것보다 30분은 더 줄일 수 있었습니다."

온달의 눈빛은 처음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뭐랄까.

고마움 사이사이에 경계가 조금씩 섞여 있다고 표현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등 뒤를 지켜줄 전우가 강한 건 분명 좋은 일이지만, 이곳은 콜로세움.

오늘의 전우가 내일의 적으로 만나는 곳이다.

특히나 그 경향은 최상위권으로 올라갈수록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법이었으니까.

위로 올라갈수록 플레이어의 풀이 적어지기에, 이후 온달과 다시 만날 확률이 높을 것이다.

'그땐 적으로 만날 수도 있고.'

나 또한 그런 상황을 대비해서 온달을 예의주시했다.

아주 사소한 습관이나, 성향, 혹은 스타일 등등.

그런 것들이 쌓이고 쌓이면 막상 싸울 상황이 왔을 때 엄청 큰 도움이 될 테니까.

"12시 방향으로 움직이겠습니다!"

스톱 오버 포인트(경유지)에 도착한 뒤로 파티원들의 움직임이 더욱 예민하게 변했다.

지도에 표시된 천사의 위치가 실시간으로 조금씩 바뀌었기 때문이다.

"온달님. 천사가 11시 방향으로 꺾었어요."

"아직 오차 범위 안이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이동하겠습니다!"

"더 위쪽으로는 금지된 땅이에요!"

천사의 속도가 워낙 빠르다 보니, 그에 맞춰 우리도 위치를 계속해서 바꿔 나갈 수밖에 없었다.

몰려드는 몬스터를 처리하며 천사의 위치를 따라 이동하길 한참.

"타깃과 조우하기 10분 전!"

"타깃과 만나면 마법사님들은 주변 잡몹 정리부터 부탁드립니다. 이후로는 레이드 형식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사이 자줏빛 점은 우리가 있는 스톱 오버 포인트 근처까지 도달해 있었다.

아마 곧 있으면 천사가 보일 것이다.

그때였다.

"저기! 저기 보이는 거 타깃 아니에요?"

연녹색 빛의 보석이 박힌 지팡이를 들고 있는 남자 마법사, 플로이드의 말에 고개를 돌려 보니, 먹구름으로 가득해 누리끼리한 하늘 위로 회색 점 같은 게 보였다.

언뜻 보기엔 새 한 마리가 날아가는 것 같았지만, 여러 장의 날개를 가지고 있는 걸로 보아 우리가 죽여야 할 타락 천사가 맞는 것 같았다.

"어어······? 마, 맞는 거 같은데요? 맞다! 맞아요! 타깃이에요!"

"모두 전투 준비!"

다른 파티원들도 나처럼 날개를 보고 타락 천사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모두들 무기를 뽑아 든 채 긴장감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쐐애애애애애애애애액! 콰아앙!

저 멀리서, 마치 전투기가 날아오는 듯한 파공음 소리가 들려왔다.

간간이 소닉붐이 들릴 정도로 엄청난 굉음이었다.

"엇! 타깃도 우리를 발견한 모양입니다!"

그때, 멀리서 날아오던 타락 천사가 급하게 방향을 선회했다.

아주 찰나의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젠장. 지금 바로 걸겠습니다. 날개 제어!"

온달이 타락 천사를 가리키며 날개 제어를 외치자, 순간 타락 천사가 허공에서 비행을 뚝 멈췄다.

그러더니, 이내 빠른 속도로 추락하고 있었다.

띠링!

[플레이어 '온달' 이 <날개 제어> 능력을 사용했습니다.]

[날개 제어 능력 유지 시간 : 00:09:59]

'젠장. 너무 먼데.'

"서두르죠!"

온달의 말과 동시에, 파티원 전원이 바닥을 박찼다.

문제는 천사가 떨어지고 있는 지점이 우리가 있는 곳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

거리는 대략 15킬로미터 가량.

제한 시간은 10분.

그 전에 몬스터들을 뚫고 가서, 어떻게든 타락 천사의 날개까지 잘라내야 한다.

"하필 금지된 땅으로 떨어지다니!"

"렌님! 이번에도 선두를 부탁합니다!

온달의 지시에 나는 곧장 선두로 나가, 몰려드는 몬스터들에게 창을 휘둘렀다.

꽝! 꽈아아앙!

주위에 있는 네 개의 산 분화구에서 끊임없이 화산이 폭발했다.

가는 길 곳곳에서 용암이 흘러나와 바닥을 잠식해 나가고 있었다.

"모두 호흡에 유의를!"

정신없이 달리고 있는데, 뜬금없이 온달이 외쳤다.

호흡에 유의하라고?

갑자기?

'이게 무슨 냄새지?'

순간 퀴퀴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엄청난 악취였다.

마치 썩은 노른자 냄새를 맡는 기분이었달까.

어디서 맡아본 적이 있었던 거 같은······.

'아!'

나는 곧바로 인벤토리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막았다.

'유황 가스였어.'

"습, 후우. 윽! 쿨럭, 쿨럭!"

몇몇 파티원들이 마른기침을 내뱉었다.

'엄청 독하군.'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인간의 범주를 한참 뛰어넘은 이들.

그런 이들에게 아무리 유황 가스가 유독하다고 해도, 큰 피해를 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올라오는 유황 가스는 너무 독해서 숨이 턱 막히고, 피부와 눈이 따끔거렸다.

눈을 뜰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래서 금지된 땅이었나.'

아무래도 여기가 불의 지옥, 무스펠하임이라서 그런 모양이었다.

내가 이럴 정도인데, 다른 파티원들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키에에에에에엑!"

"키에에에엑!"

'쯧. 제대로 꼬였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근처에 있던 불개미들까지 달려들고 있는 상황.

그렇기에 나는 더욱 세심하게 불개미들을 정리해 나갔다.

콰지지지지직!

눈을 감고 있어도 불개미를 죽이는 건 어렵지 않았다.

"키엑!"

화륵! 화르륵!

녀석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턱에서 불을 내뿜는 소리가.

바글바글-

그리고 마력장을 통해 녀석들이 움직이는 몸짓이.

서걱!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졌으니까.

'내가 다 정리해야 해.'

나야 눈이 보이지 않던 1회차 때의 경험이 있었기에 앞이 보이지 않아도 얼마든지 싸울 수 있었지만, 다른 파티원들은 아닐······.

'어?'

"키에에에엑!"

"스읍, 후. 쿨럭, 쿨럭."

서걱!

마력장을 통해, 정확하게 불개미의 머리를 베어버리는 율리안이 느껴졌다.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푹! 푹! 푹!

정확하게 날 피해 몬스터들에게 날아드는 온달의 화살.

[한중월아寒重月牙!]

거기다 주변을 쓸어버리는 송곳니 같은 고드름까지.

'하. 하하······.'

파티원들의 능력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초감각 덕분에 마력장까지 펼칠 수 있는 나와 다르게, 이들은 눈을 감은 채, 감으로 몬스터들을 상대해야 한다.

그에 대한 방증으로, 섬세했던 공격이 무척 투박해져 있었다.

그런데도 아군에게 검을 휘두르거나, 화살을 맞추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이런 이들과 경쟁을 해야 한다라······.'

파티원들의 실력에 감탄하는 한편, 마음 한켠이 서늘해졌다.

언젠가는 이들과 무기를 겨눈 채 싸워야 했으니까.

'더 분발해야겠군.'

나는 더욱 힘껏 벽력섬전을 휘둘렀다.

아마 이 유황 가스는 화산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니 조금만 더 나가면 이 유황 가스 지대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날개 제어 능력 유지 시간 : 00:07:33]

"모두 이제 눈을 뜨셔도 됩니다."

"후, 이제야 살겠네."

"우욱. 정말 참기 힘든 냄새였어요."

불개미들을 뚫고 분지 아래로 내려오자, 더 이상 유황 가스 냄새가 나지 않았다.

내 말에 모두들 눈을 꿈벅꿈벅 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지옥이라고 불릴 만 하군.'

당장 우리가 지나왔던 화산 지대와 유황 가스, 그리고 당장이라도 펄펄 끓어오를 만큼 뜨거운 열기까지.

그런데 이제는 사막이 펼쳐져 있었다.

이곳의 뜨겁다 못해 아플 정도의 열기를 생각하면 당연한 건지도.

도대체 이곳에 어떻게 생명체들이 존재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이곳은 무척 열악한 환경이었다.

완벽한 초인의 경지에 발을 내딛은 이들조차 이렇게 버거워 할 정도였으니.

"타깃은 어디로 갔지?"

"저기! 저기 있어요!"

수무아붐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타락 천사가 헬오크들 무리를 베며, 어떻게든 우리와 멀어지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10명이나 보내준 이유가 있었군.'

진한 회색 머리칼이 한번 찰랑일 때마다 헬오크 네다섯 마리의 목이 날아간다.

움직임이 너무 빠르다 보니, 헬오크들을 죽이며 가고 있음에도, 우리와의 거리가 쉽사리 좁혀지지 않았다.

그녀의 등 뒤에 달려 있는 날개는 다섯 쌍.

즉, 피넛엘보다 등급이 높은 5급 역천사力天使란 뜻이었다.

아마 스텟도 피넛엘보다 훨씬 높을 것이다.

'낯이 익은데.'

타락 천사를 향해 달려가는 한편,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뒷모습일 뿐이지만 무척 익숙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천사들이 비슷비슷한 느낌을 가진 순백의 갑옷을 입고 있으니까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건가.

"온달님, 제가 먼저 가서 발목을 붙잡고 있어도 되겠습니까?"

상대적으로 민첩이 낮은 마법사들을 배려하느라 의도적으로 속도를 늦추고 있던 상황.

거기다 앞을 가로막는 몬스터들까지 처리하느라 생각보다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나라도 먼저 가서 타락 천사를 붙잡고 있는 게 낫지 싶었다.

"그럼 무리하지 말고 시간만 끌어주십쇼!"

온달도 그게 맞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당부의 말을 전했다.

'그럼, 전속력으로 달려 볼까.'

나는 곧장 땅을 박차며 앞으로 나갔다.

타락 천사와의 거리는 대략 4에서 5킬로미터.

좁혀지지 않던 타락 천사와의 거리가 빠르게 가까워져 갔다.

[날개 제어 능력 유지 시간 : 00:06:01]

"후. 내가 이런 하등한 생명체들에게 쫓기는 날이 올 줄이야."

내가 거의 100미터 정도의 거리를 남겨두게 되자, 타락 천사가 헬오크를 베며 나아가던 걸 멈추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아직 5분이나 남은 상황에서, 이대로는 도망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싸우려는 것 같았다.

'어?'

"어?"

순간 나와 타락 천사, 둘 다 몸을 움찔 떨었다.

하. 하하······.

'어쩐지 낯이 익다 싶더라니.'

"이게 누구신가."

타락 천사는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물론 나도, 그리고 그녀도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

"요즘 승승장구하고 있다지?"

하지만 나도 그녀에게 원한이 있고.

그녀 또한 내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나는 더미로 내보내져, 죽을 뻔 했기에.

그녀는 나를 팔아먹고 배 아파 할 것이기에.

'시노엘.'

이번 긴급 미션에서 내가 죽여야 할 타천사는.

내가 회귀하고 팀 성장 팜으로 들어갔을 때 만났던 천사, 시노엘이었다.

'한 번쯤 다시 보고 싶었지.'

"얼마나 네가 보고 싶었는지 몰라."

별다른 이유는 아니었다.

그저.

'더미로 던졌던 쓰레기가 알고 보니 진귀한 보석이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으니까.'

"널 꼭 내 손으로 죽여주고 싶었거든."

시노엘이 날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처음 만났을 때 봤던 차분하고 당당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마치 뭔가에 씌인 듯한 모습이었다.

미쳐버린 것 같다고나 할까.

'타락하면 색깔이 달라지는 모양이군.'

은은한 은발이었던 머리칼과 순백의 날개가 진한 회색빛을 띠고 있었다.

그 덕분에 분위기도 확 달라 보였다.

"팔다리를 자르고 마계로 데려가 주마. 안심하거라. 매일매일이 흥미진진한 하루가 될 테니."

광기가 번뜩이는 눈동자.

그녀라면 아마 정말로 그렇게 할 것 같았다.

그리고는 매일같이 날 고문하겠지.

"함께 가자꾸나!"

'제대로 미쳤는데.'

그녀가 나를 향해 빠르게 짓쳐들어왔다.

나 또한 곧바로 시노엘을 향해 달려들었다.

콰지지지지지지지직!

[날개 제어 능력 유지 시간 : 00:04:12]

< 99화. 타락 천사(3) > 끝

< 100화. 타락 천사(4) >

몸 안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뇌전이 창날에 압축되어 강렬한 빛을 뿜어댔다.

챙! 채챙! 챙!

그 강렬한 빛은 시노엘의 검과 부딪힐 때마다 작은 알갱이가 되어 주변으로 흩뿌려졌다.

현재의 나는 모든 특전이 켜지며 근력과 민첩이 200을 넘어선 상황.

"키에에에에에엑!"

'불개미들이라도 많아서 다행이군.'

그런데도 시노엘은 곳곳에서 달려드는 불개미들을 처치하면서 동시에, 여유롭게 내 창을 막아냈다.

[5급 역천사 '시노엘'의 그림자에 표식이 등록되었습니다.]

'과연. 5급 역천사라 이건가.'

피의 강화 특전이 활성화된 상태라면 피넛엘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시노엘은 피넛엘보다 날개 한 쌍이 더 많은 5급 역천사.

피의 강화 특전이 켜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하기가 굉장히 까다로웠다.

스텟 차이가 제법 많이 나는 것이다.

'난전 상황이 아니었으면 힘들었겠는데.'

서걱!

나와 시노엘, 둘 다 곳곳에서 몰려드는 불개미를 죽이랴, 서로를 상대하랴, 정신이 없는 상황.

'5시 방향에서 두 마리.'

'3시 방향. 몸을 틀면 시노엘이 어글을 먹겠어.'

'방향을 바꿔야겠군. 12시에서 오는 녀석들까지 상대하면 곤란할 수도.'

하지만 나는 초감각과 마력장 덕분에 이런 난전에 특화되어 있었다.

내가 슬쩍슬쩍 방향을 바꾸며 치고 빠질 때마다 시노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내가 의도적으로 불개미를 그녀에게 붙여 버리니까, 날 죽일 기회를 노리던 시노엘의 입장에선 성가신 방해물처럼 느껴질 것이다.

'체력이 금방 빠지겠군.'

거기다 지형도 좋지 않았다.

현재 우리가 싸우고 있는 곳은 황폐한 사막의 땅.

모래 사이로 발이 푹푹 빠져들어 갔다.

그 바람에 움직일 때마다 하체 힘을 더 많이 줘야 했다.

띠링!

[<악마의 눈>이 5급 역천사 '시노엘'의 <권능:역천사의 눈>을 방어합니다.]

쐐액! 챙! 쐐애애액!

창을 쳐낸 시노엘이 순간, 내 간격 안으로 뛰어들었다.

'더 빨라졌어!'

갑작스럽게 시노엘의 움직임이 빨라지는 바람에, 내 반응 속도가 조금 더뎠다.

바닥을 박차며 최대한 뒤로 빠졌으나, 어느새 시노엘의 검 끝이 내 가슴을 꿰뚫을 기세로 날아오고 있었다.

'젠장.'

나는 재빨리 창대로 시노엘의 손목 부분을 쳐내며 몸을 비틀었다.

서걱!

그러자 들려오는 피륙음.

왼쪽 어깨에서 불에 데인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챙! 채챙! 챙!

'어떻게든 떼어놔야 해.'

나는 곧바로 시노엘에게 창을 휘두르며 그녀와의 거리를 벌렸다.

"키에에에엑!"

그리고는 등 뒤로 크게 창을 휘둘러, 달려드는 네 마리의 불개미들을 단숨에 베어버렸다.

"후후, 발버둥 쳐 보거라."

나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무시무시한 속도로 쇄도해 들어오는 시노엘.

'무슨 권능이지?'

창과 검을 맞댈 때마다, 그녀의 움직임이 계속해서 빨라지고 있었다.

챙! 챙! 챙!

단순히 일시적으로 민첩이 상승하는, 그런 종류의 능력은 아닌 모양이었다.

띠링!

[<율마천사律魔天使의 권능>에 의해 체력 소모가 30% 증가합니다.]

[<마력 상쇄><율마천사의 권능>을 상쇄했습니다.]

[5급 역천사 '시노엘'의 권능이 마력 상쇄를 무시합니다.]

[체력 소모가 30% 증가합니다.]

'씨발.'

몸을 격렬하게 움직일수록 빠르게 호흡이 가빠져 왔다.

현재 내 체력 스텟은 183.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까마득히 높은 수치이지만, 문제가 있었다.

그건 바로 근력과 민첩 스텟이 상승할수록 체력 소모도 커진다는 것.

"후후, 표정이 좋지 않구나."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였다.

100킬로그램의 힘을 쓰면, 그에 상응하는 에너지를 소비한다.

마찬가지로 200킬로그램의 힘을 쓰면, 그만큼 소비량도 더 늘어난다.

안 그래도 200 포인트가 넘는 근력과 민첩 스텟을 감당하느라, 체력 소모가 무척 심했던 상황.

'천둥의 숨결을 꺼야 하나······?'

천둥의 숨결로 인해 체력 소모가 50% 증가했고, 앞으로는 율마천사의 권능으로 30%가 추가로 소모되기에 순식간에 체력이 바닥날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시노엘의 권능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띠링!

[<봉마천사封魔天使의 권능>에 의해 일시적으로 보유 스킬 한 가지가 랜덤으로 봉인됩니다.]

[<천둥의 숨결>이 봉인되었습니다.]

"······!"

천둥의 숨결이 꺼지며 내 움직임이 빠르게 느려졌다.

근력과 민첩을 15% 상승시켜주는 효과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시노엘이 내 품속으로 파고들어 왔다.

서걱!

옆구리에서 밀려오는 아릿한 통증.

공격을 허용한 대신에 그녀를 창으로 밀어내며 거리를 벌렸기에, 이어지는 후속타만큼은 피할 수 있었다.

"왜 그런 것이냐? 분명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자신감이 철철 흘러넘쳐 보였거늘."

시노엘이 이죽거리며 계속해서 나를 밀어붙였다.

'차라리 잘 됐어.'

나는 시노엘의 검을 맞받아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천둥의 숨결이 봉인된 것은 뼈아프지만, 어마어마한 체력 손실 때문에 스킬을 꺼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상황.

뇌신이나 마력 상쇄, 그림자 표식을 봉인 당하는 것보다 천둥의 숨결이 꺼지는 게 훨씬 나았다.

띠링!

[<궐마천사蹶魔天使의 권능>에 의해 마기가 깃든 아이템의 능력이 봉인됩니다.]

[<가면:블라디미르의 희열>의 능력이 봉인됩니다.]

'뭐, 뭐라고······!'

알림창을 본 나는 두 눈을 부릅떴다.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지금 상황에서 블라디미르 가면이 봉인된다면, 나는 죽은 목숨인 거나 마찬가지.

띠링! 띠링!

[<가면:블라디미르의 희열> 아이템의 등급이 훨씬 높습니다.]

[<가면:블라디미르의 희열><궐마천사의 권능>을 무시합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알림창에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큰일 날 뻔했어.'

찰나의 순간, 나도 모르게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었다.

안 그래도 천둥의 숨결을 쓸 수 없어서 피지컬로도 엄청나게 밀리는 상황.

거기다 블라디미르 가면까지 사용할 수 없어 스텟이 30% 더 깎여 나갔다면 이 싸움은 해보나 마나였다.

단 한 번의 공격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할 것이다.

검을 막는 순간 창이 튕겨져 나갈 것이기에.

"렌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때마침 사막의 구릉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파티원들이 언덕을 넘어오며 합류했다.

찌잉! 찌잉! 찌잉! 찌잉!

시노엘의 검이 강기가 실린 온달의 화살을 막을 때마다 찌르르 울리고.

[심연에 잠긴 소나기!]

마법사들은 마법을 날리며 날 지원해 주었다.

'후. 살았다.'

적절한 타이밍에 파티원들이 합류해준 덕분에, 아찔했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나는 겨우 한숨 돌렸다.

"스읍, 후. 헉, 체력이······!"

"스킬도 봉인되었습니다!"

"키에에에에에엑!"

"키에에엑!"

"마사노부님은 불개미부터 정리를! 율리안님이 탱킹을 부탁드립니다! 수무아붐님과 오스카님은 퇴로 차단부터!"

"알겠습니다!"

그때부터 온달의 지휘하에 시노엘 레이드가 시작되었다.

스킬이 봉인되거나, 체력 소모가 늘어나 당황하던 파티원들은 금세 침착하게 시노엘을 밀어붙였다.

레이드를 할 때는 주변 잡몹의 존재가 거슬리기 때문에 몇 명은 불개미를 정리하러 가야 했다.

'쉽지 않겠군.'

[날개 제어 능력 유지 시간 : 00:03:07]

시노엘은 에워싸이지 않도록 영리하게 움직였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꼭 우리를 쓰러트릴 필요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무리하게 맞상대하는 것보다, 치고 빠지는 식으로 최대한 시간을 벌며 전투를 펼쳤다.

마침 우리 쪽에서 불개미들을 정리해주고 있으니, 그녀가 움직일 공간도 확보된 상황.

그와 반대로 우리 쪽에서는 마음이 다급했다.

'일단 저 발을 묶어야 돼.'

그녀의 민첩 스텟이 워낙 높기 때문에, 에워싸지 않고서는 저 날개를 처리할 수가 없었다.

"양초풍님, 하레크누드님! 아예 크게 돌아주시죠!"

"알겠소!"

"에디든님, 11시 방향 좀 불바다로 만들어 주시겠습니까. 아예 한쪽 방향을 지워버려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온달도 나처럼 일단 시노엘의 발을 묶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았다.

그때그때 파티원들에게 지시를 내리며 시노엘을 몰이 사냥하기 위해 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렌님은 커버 좀 부탁드립니다."

"예."

나는 리치가 긴 창의 이점을 이용해 정면에서 시노엘의 공격을 막고 있는 율리안을 지원했다.

율리안, 오스카가 시노엘과 공방이 벌어질 때마다 빈틈을 노려 창을 찔러 넣은 것이다.

내 공격 덕분에 시노엘의 템포가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온달이 마력을 강하게 압축시킨, 강기罡氣 화살들을 쏘며 지원해 주었고.

[찰나의 섬광!]

[아련하게 내려앉거라, 부나방이여!]

마법사들도 마법을 쏟아내며 압박해 들어갔다.

하지만 시노엘은 여유로운 미소만 흘릴 뿐이었다.

'그 웃음이 언제까지 가나 보자고.'

그렇게 한동안 지루한 공방전을 주고받고 있을 때였다.

"율리안님! 오스카님! 대쉬를!"

"흐읍!"

온달의 외침에 율리안이 방패를 앞세워 시노엘을 밀어붙이고, 오스카가 측면에서 검을 찌르며 들어갔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구나."

그러자 시노엘이 뒤로 훌쩍 빠지며 거리를 벌렸다.

그때였다.

"키에에에에엑!"

무리를 이탈하고 한동안 보이지 않던 양초풍과 하레크누드가 불개미들 사이에서 튀어나오며 시노엘의 후방으로 짓쳐들어왔다.

곳곳에 구릉처럼 솟아오른 지대가 많았던 데다가, 우리가 싸우는 곳이 약간 음푹 파인 곳이었기에, 시노엘은 양초풍과 하레크누드가 뒤에서 나타나는 것을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후후."

하지만 그들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시노엘은 높은 민첩을 이용해 그 둘의 검을 피하며 좁은 공간을 빠져나가려 했다.

아마 큰 변수가 없다면 이대로 탈출을 할 것이다.

큰 변수가 없다면.

'지금!'

[5급 역천사 '시노엘'에게 <그림자 이동> 능력을 사용합니다.]

그림자 이동으로 순식간에 뒤를 점한 나는 창을 크게 휘둘렀다.

목표는 날개가 아닌.

시노엘의 목이었다.

"······!"

'내가 날개를 노릴 줄 알았지?'

피넛엘과 싸우면서 느낀 것이 있었다.

날개는 분명 무척 유용한 무기였지만, 반대로 얘기하자면 그만큼 지켜야 할 게 많아졌다는 뜻.

지금처럼 창끝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지켜야 할 게 많아졌다는 것은, 판단력이 느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시노엘이 급하게 뒤를 돌며 날개를 방어하려다, 내가 애초부터 그녀의 목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급하게 마력이 깃든 날개를 펼쳐 들었다.

서걱!

'아쉽군.'

회심의 일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창은 결국 시노엘의 날개 열 장 중에, 세 장만을 베어버렸을 뿐이었다.

"으읏······."

뭐, 그것만으로도 작지 않은 성과였지만.

[날개 제어 능력 유지 시간 : 00:01:57]

거기다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여전히 시노엘의 퇴로를 막고 있다는 것.

"지금입니다!"

온달의 외침에 모두들 총공세를 때려 넣었다.

순식간에 에워싸여진 시노엘이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그러자 시노엘은 과감하게 움직였다.

'판단력이 좋은데.'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최악의 상황만큼은 피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나마 마사노부를 뚫고 나가기 쉽다고 판단한 시노엘.

그녀는 날개를 방패 삼아 단숨에 마사노부를 쳐내고는 우리의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서걱! 서걱! 서걱! 서걱! 서걱!

물론 그녀 또한 남은 일곱 장의 날개 중 여섯 장이 잘려져 나갔지만.

"크윽! 젠장!"

한순간에 시노엘을 놓치게 된 마사노부가 욕지거리를 내뱉었지만, 다른 파티원들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남은 한 장의 날개론, 더 이상 날 수 없을 테니까.

그때였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율마천사律魔天使의 권능>이 해제 되었습니다.]

[<봉마천사封魔天使의 권능>이 해제 되었습니다.]

줄줄이 해제되는 시노엘의 권능.

'뭐지?'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현재 시노엘은 현재 죽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다.

그런데도 권능을 해제한다고?

그럴 이유가 있나?

'혹시 날개에 권능이 담겨져 있는 건가?'

지금으로선 그게 가장 가능성 있는 추론이었다.

"습, 후우. 권능이 해제됐군요. 조금만 더 힘냅시다! 거의 끝났습니다!"

"이, 이 하등한 것들이······!"

온달의 외침에 파티원들이 마무리를 위해 전력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나도 천둥의 숨결을 다시 켠 채로 끊임없이 시노엘을 쫓아다니며 괴롭혔다.

권능도 해제됐겠다, 더 이상 시간에 쫓길 필요도 없으니, 데미지를 쌓는 방식으로 가기 시작한 것이다.

시노엘이 애처롭게 버둥거렸지만, 우리의 공세는 그치질 않았다.

그때였다.

콰과과과과과과과광!

'무슨!'

우리의 주변으로 마법 폭격이 떨어졌다.

땅이 뒤집어지고, 먼지가 피어올랐다.

우리 마법사들이 사용한 마법은 아니었다.

'설마?'

고개를 돌려 보니, 저 멀리서 누군가 우릴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온달님!"

"저도 봤습니다!"

달려오는 존재의 숫자는 열 명.

모두 새까만 갑옷과 망토를 두르고 있었는데, 머리 위로 조그마한 뿔이 솟아 있었다.

'씨발.'

머리 위에 뿔이 있는 존재는 많지만.

지금 이 순간에 등장할 법한 존재들은 딱 하나였다.

'악마.'

열 명의 악마들이 무서운 속도로 우리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 100화. 타락 천사(4) > 끝

< 101화. 타락 천사(5) >

"아직 거리가 제법 있으니까 모두 침착하세요! 일단 타천사 처치가 최우선입니다!"

온달의 외침에 모두들 고개를 주억거리며 시노엘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전투.

'미리 알고 있었군.'

온달의 뉘앙스로 보아, 악마가 미리 등장할 거라는 걸 예견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지옥이라서 악마가 나올 거라고 판단한 건지, 아니면 긴급 미션 때마다 악마가 나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쉽지 않겠는데.'

악마들과의 거리는 대략 1킬로미터에서 2킬로미터 사이.

못해도 1분 안에는 도착할 만한 거리였다.

시노엘의 날개를 잘라내긴 했지만, 애초에 우리는 그녀가 날지 못하는 상태에서 싸웠었다.

달라진 건, 시간 압박 없이 싸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권능이 해제됐다는 것 뿐.

물론 권능이 해제된 것 만으로도 분명 대단한 성과이긴 하지만, 시노엘의 스텟이 워낙 높기에 저들이 도착할 때까지 처리하는 건 무리였다.

결국 타락 천사를 처치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어쩔 수 없지.'

"온달님."

"예."

"제가 가서 시간을 벌어 보겠습니다."

"렌님 혼자서 말씀이십니까?"

"예. 저들의 발목을 잡는 것 정도는 어떻게든 가능할 것 같습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차라리 제가 두 분을 더 붙여 드리겠습니다."

온달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주위에 몬스터가 너무 많다.

그런 상황에서 저들에게 시간을 벌려고 하다가 몬스터들에게 길이 막힌다면 둘러싸여 죽게 될 것이다.

한 명 한 명이 소중한 상황에서, 그건 너무나 뼈 아픈 손실이었다.

'하지만 난 초감각이 있어서 그럴 염려가 없지.'

차라리 남은 전력을 집중해 한시라도 빨리 시노엘을 처치하는 게 유리하다.

"지금도 타락 천사를 사냥하기에 벅차지 않습니까. 저 혼자면 충분합니다."

"음······. 휴우. 제가 과한 부탁을 드릴 수밖에 없네요.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온달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동시에 나는 악마들이 달려오는 방향으로 내달렸다.

'악마의 눈.'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라돈]

[성향 : 광신]

[근력 : 171(+?)] [민첩 : 179(+?)] [체력 : 153(+?)]

[정신 : 99(+?)] [지력 : 13(+?)] [마기 : 155(+?)]

[종족 특전 : 하급 악마의 피]

'저 정도면 충분해.'

다행히 열 명의 악마 모두, 피의 강화 특전이 활성화된 상태의 나보다 스텟이 낮았다.

파티 대 파티 단위로 싸우면 우리 파티가 가볍게 쓸어버릴 수 있을 정도.

하지만 그렇게 난전이 펼쳐지면 시노엘을 놓칠 확률이 커진다.

아니면 시노엘이란 존재 하나 때문에 역으로 우리 파티가 전멸할 수도 있고.

그렇기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들에게서 시간을 끌어야 했다.

[남은 체력 : 33%]

"키에에에에엑!"

시노엘과 싸우면서 생겨나는 소음과 진동 때문에 끊임없이 몬스터들이 몰려들었다.

그래서 악마들은 주변에 있는 몬스터들을 정리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 상황에선 오히려 몬스터가 많은 게 유리해.'

불개미와 헬오크들은 우리에게도 골치였지만, 악마들 입장에서도 썩 달가운 손님이 아닐 것이다.

그들을 돌파하며 와야 했기에.

서걱!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나는 주변에 있는 몬스터들을 죽여 체력을 회복하면서 악마들에게 내달렸다.

'히트 앤 런으로 가야겠군.'

어차피 주변에 몬스터들도 많겠다, 민첩 스텟도 내가 우위에 있으니 치고 빠지면 충분히 시간을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전략을 정한 나는 뇌전을 뿜으며 그대로 악마들에게 돌진했다.

콰지지지지지직!

악마들도 나를 발견했지만, 그들은 그다지 날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중심부에서 리더로 보이는 듯한 악마가.

"미끼는 무시해! 바로 돌파한다!"

라고 외쳐댔으니까.

다른 악마들도 나에게 검 끝을 치켜세웠다.

그 말에 나는 살며시 미소 지었다.

'무시하면 안 될 텐데.'

그리고는 선두에 있는 악마를 향해 있는 힘껏 창을 내리쳤다.

챙! 콰지지지지직!

"······!"

민첩 스텟 203이라는 어마어마한 스피드와 203이라는 근력이 담긴 일격.

선두에서 검으로 내 창을 받아내려던 악마가 그대로 뒤로 튕겨 나갔다.

내 힘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그 모습에 리더로 보이는 악마가 경악하며 외쳤다.

"모두 정지! 돌파하지 마!"

"하, 하지만 귀순하기로 한 천사가······!"

"이대로 무시하고 가면 우리가 뒤에서부터 한 명씩 죽어!"

'제법인데?'

찰나의 순간임에도 악마들의 리더가 가장 현명한 판단을 내렸다.

녀석들이 날 무시하고 계속 달려가는 순간, 그때부터는 일방적인 학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원래 등을 돌리고 도망치는 상황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가 나오는 법이니까.

악마들이 도주하는 패잔병은 아니지만, 결국 비슷한 상황임에는 분명했다.

"그럼 몇 명 만이라도 보내는 건 어떻습니까?"

"반으로 나누면 각개격파 당할 수도 있어! 최대한 빠르게 처리하고 이동한다!"

그 말에 다른 악마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노선을 확실하게 정한 것 같았다.

그렇게 시작된 전투.

챙! 채챙! 챙! 챙! 쐐액! 쐐애액!

'시간만 벌면 돼.'

다섯 명의 악마들이 날 압박해 들어오고, 두 명의 악마가 후방에서 화살을 쏘아댔다.

남은 세 명의 악마는 마법사인듯 마법을 영창하고 있었다.

'얘네들한테도 무언가 특수한 능력이 있겠지.'

플레이어에겐 스킬이 있고, 천사들에겐 권능이 있다.

그리고 이전에 헬리퍼를 상대하며, 악마들에게도 그런 비슷한 종류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기에 나는 되도록 신중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처럼 스킬을 복사해버린다든가 하면 무척 골치 아플 테니까.

'시노엘은 아직 멀었나?'

서걱!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곳곳에서 몰려드는 몬스터들, 그리고 악마들의 공격을 막으며 슬쩍 곁눈질해 보니, 파티원들은 아직도 격렬한 전투가 한창이었다.

못해도 5분 이상은 끌어줘야 할 것 같았다.

'5분이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지만, 지금처럼 미션 진행이 한창인 와중엔 너무나도 귀중한 시간.

하지만 나도 5분 정도는 더 끌 수 있을 것 같았다.

시노엘처럼, 나 또한 이들을 상대로 시간만 벌면 되는 거니까.

어차피 몬스터들을 처치하며 어느 정도 체력이 회복된 상황.

그때부터 내 발놀림이 더욱 표표해졌다.

└쿠 훌린은 정말 부동의 원탑인 듯. 앞으로 한두 경기 안에 고위 리그로 올라갈 것 같음.

└주소월도 ㅈㄴ 잘 싸움. 쿠 훌린한텐 상성에서 밀리니까 그랬지, 주소월한테 유리한 맵에서 싸웠으면 어떻게 될지 모름.

└네, 다음 쿠 훌린한테 발리신 분?

└님들. 빨리 온달 파티 쪽 싸우는 거 보셈. 여기 개 꿀잼임 ㅋㅋㅋㅋ

└재미있어 봤자 얼마나 재밌다고 ㅋㅋㅋ 아 씨, 쿠 훌린이나 볼려고 했는데 저렇게 얘기하니까 갑자기 또 궁금하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 구도 존나 웃기네 ㅋㅋㅋㅋ 천계에서 온 플레이어들은 천사 죽이려고 하고, 마계에서 온 악마들은 고위 악마 죽이려고 달려드는 모양새임 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 어느 순간부터인가 렌한테서 악마의 모습이 보옄ㅋㅋㅋㅋ 심지어 천사랑 렌이랑 움직이는 게 ㅈㄴ 비슷함 ㅋㅋㅋ 시간 벌깈ㅋㅋ

└방금 위에다가 재미있어 봤자 얼마나 재밌겠냐고 댓글 단 신이다. 말이 필요 없다. 빨리 온달 파티 쪽 보셈 ㄱㄱ 존나 재밌음 여기.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없네. 몬스터들이 언제 길막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되게 여유로워 보임. 스텟도 되게 높은데 쟤도 쿠 훌린한텐 안 되겠지?

└음······.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얼마 전까진 쿠 훌린한테 개 발릴 거 같았는데, 오늘 움직임 보니까 싸우면 제법 잘 비빌 거 가틈.

└ㅈ까라 븅신들. 쿠 훌린한테 비빈다는 건 선 넘었지. 라그나 빠들이 쿠 훌린 이길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빨드니 얼마 전에 탈탈 털린 거 못 봄?

└ㅋㅋㅋㅋ쿠 훌린한테 비빌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래 한번 보고 올게^^ 그리고 나서 팩트로 힘껏 때려줘야지.

└확실히 5급 천사가 귀중한 전력이긴 한가 보네 ㅋㅋㅋㅋ 하급 악마를 열 명이나 보냄 ㅎ

└당연하지 ㅋㅋㅋㅋ 5급 천사면 중급 악마 수준임. 거기다 조금만 더 강화하면 상급 악마까지 노려볼 수 있는데 마계 입장에선 게거품 물며 달려들 수밖엨ㅋㅋㅋㅋ

[검붉은 정화의 성화!]

마법을 영창하던 악마의 주문과 동시에 내 주위로 마력이 모여들더니, 동서남북에서 불꽃으로 이루어진 네 개의 막 같은 게 생성되었다.

불꽃들은 이내 나를 찍어 누를 기세로 쇄도했다.

'마법사들이 제법 까다로운데.'

마법은 강대한 위력을 담고 있는 대신, 정확하게 맞추기가 어렵다.

그래서 일대일 전투에서는 마법사의 효율이 좋지 못했다.

대단위 전투에서야 광역 마법으로 쓸어버리면 그만이기에 문제 없겠지만.

그런데 적 악마의 마법은 정확하게 내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흡!"

콰지지지지지직!

뇌전이 담긴 창으로 마법을 찢어버리고 나오자, 온갖 화살 세례가 쏟아졌다.

화살들은 날 맞추려는 목적보다, 내가 특정 위치로 향하지 못하도록 견제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슬쩍 방향만 틀어도, 모두 피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팅! 팅! 팅! 팅! 팅!

하지만 나는 화살들을 피하는 대신, 굳이 막아가며 원래 가던 방향으로 내달렸다.

'몰이사냥을 하려고?'

우리 파티가 시노엘에게 그랬던 것처럼, 녀석들도 날 에워싸려는 것이다.

하지만 마력장이 넓게 퍼져 있어, 어디가 데스 포인트인지 알고 있는 내게는 통하지 않았다.

"루스펠! 밀어붙여! 더 앞으로!"

측면에서 다가온 루스펠이라 불린 악마가 마나가 담긴 길다란 손톱을 휘둘렀다.

나는 굳이 맞받아치는 대신, 슬쩍 방향을 틀어 그 공격을 피해냈다.

그리고는 90도로 꺾어, 곧장 마법과 화살을 쏘는 악마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조심······!"

날 잡기 위해 혈안이 됐던 근접 물리 계열 악마들이 화들짝 놀라며 날 막아섰다.

그로 인해 넓게 퍼져 있던 악마들의 진형이 그대로 붕괴했고.

챙! 채챙! 챙!

"젠장! 또다시 도망칩니다!"

그 넓은 공간을 이용해 나는 다시 뒤로 슬쩍 빠졌다.

악마들이 조금씩 날 밀어붙이며 전장을 시노엘이 있는 방향으로 옮기려 했던 상황.

'어딜 가려고?'

그렇기에 내가 단순히 도망만 다니는 게 아니라, 잘못하면 치명적인 피해를 입혀줄 수도 있다는 걸 보여준 것이었다.

그러자 악마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이 개새끼! 잡히면 손발을 자르고 혀를 뽑아서 바닥을 기어 다니게 만들겠어!"

"제발 죽여달라고 애원할 때까지 고문해주마!"

내가 저들의 전략을 간파했다는 듯, 계속해서 치고 빠지며 맞상대해주지 않자, 눈이 뒤집힌 것이다.

그때부터 전투가 더욱 격화되었다.

[음울한 오후의 소나기!]

콰과과과과과과과광!

마력을 아끼던 마법사는 고위 마법들을 펑펑 써댔고, 궁수들도 자기 편이 맞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그 탓에 나도 더욱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지만.

'아주 좋아.'

오히려 내가 원했던 그림이었다.

기왕 시간을 끌 거라면, 체력과 마력도 빼주게 하는 것이 훨씬 좋았으니까.

나야 피의 흡수로 체력이 회복되기에 전혀 아쉬울 게 없었다.

그때였다.

'빈틈!'

찰나의 순간 악마들이 움찔하는 사이, 아주 좁은 공간이 생겨났다.

띠링!

[<전광석화 > 능력을 사용합니다.]

[10초 동안 민첩 스텟이 +20% 상승합니다.]

내가 조금이라도 망설이거나, 반응이 늦었다면 사라질 만큼 미세한 공간이었지만.

서걱!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단숨에 날 막아서는 두 명의 악마들을 돌파한 나는 그대로 마법사와 궁수들에게 돌진했다.

"안 돼!"

"······!"

그리고는 한 줄기 섬광과 같은 공격을 휘둘렀다.

뇌전의 칼날이 사방을 휩쓸었고.

서걱!

허공을 나는 두 악마의 머리.

띠링!

[플레이어 '라샤펠' 을 처치했습니다.]

[플레이어 '록사딘' 을 처치했습니다.]

[<피의 흡수> 능력으로 극소량의 민첩 스텟을 흡수합니다.]

단숨에 두 명의 악마 마법사를 처치한 나는 그대로 궁수들에게도 벽력섬전을 휘둘렀다.

띠링!

[<청천벽력 >이 발동됩니다.]

꽈과과과과과과광!

때마침 터지는 청천벽력.

하늘에서 다섯 줄기의 벼락이 주변으로 떨어지며 온 땅을 뒤집어엎었다.

'마침 운도 따르는군.'

예상치 못한 벼락에 악마들이 당황하는 사이, 나는 한 명의 궁수를 추가로 벨 수 있었다.

"이 광대 새끼가 감히!"

다른 악마들이 서둘러 커버를 왔지만 이미 세 명이나 죽은 상황.

챙! 채챙! 챙! 챙!

"······!"

내가 뒤로 빠지지 않고 공격을 맞받아치자, 달려들었던 악마가 눈을 치켜떴다.

'상황이 달라졌는데도 이전처럼 행동할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되지.'

10대 1일이었던 게 한순간에 7대 1로 급변했다.

서로 간의 전력값이 달라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이전처럼 시간만 끌고 다닌다?

서걱!

[근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이렇게 피의 흡수 제물들이 많은데.

내가 왜?

< 101화. 타락 천사(5) > 끝

< 102화. 타락 천사(6) >

라파엘의 집무실.

열한 명의 주신이 떠나고 집무실엔 라파엘과 오딘, 단둘만이 남아 있었다.

둘 사이에서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오딘은 긴급 미션이 끝난 후에야 떠날 생각인지, 경기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중이었다.

"역시 하급 악마들까지 왔군."

오딘의 말에 라파엘이 얼른 대답했다.

"이번에 타락한 시노엘과 마요엘, 미누엘, 레시엘 모두 5급 천사들이니까요. 마계 죄수의 입장에선 곧 상급 악마 수준으로 승급시킬 수 있는 타천사들이 열 명의 하급 악마보다 훨씬 귀중할 겁니다."

―결국 쿠 훌린 파티가 가장 먼저 타천사 사냥에 성공합니다!

―정말 대단하네요. 상위 리그의 최강자라는 칭호가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거기다 주소월까지 같은 파티에 속해 있다 보니, 이건 뭐 다른 파티들과 비교가 불가한 속도군요.

―맞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식으로 전력이 불균형하게 파티를 짰는지는 좀 의아하군요. 주소월이 사사키······.

"정말 뛰어난 플레이어를 키웠어. 고생이 많았노라, 라파엘."

"아닙니다, 주신님께서 매번 후원해주신 덕분입니다."

"음. 확실히 쿠 훌린과 주소월, 저 두 플레이어는 완숙의 경지에 들었군. 언제쯤 고위 리그로 올릴 생각이느냐."

"앞으로 1년 정도 예상하고 있습니다."

라파엘의 대답에 오딘이 가슴까지 풍성하게 흘러내린 수염을 쓸어내렸다.

"1년이라······. 충분히 완성됐다 싶을 때 올리거라. 고위 리그엔, 약한 존재는 필요 없으니."

"알겠습니다. 쿠 훌린 파티는 이만 회수할까요?"

"비프로스트를 한 번 여닫는데 많은 포인트가 들지 않느냐. 일단 그냥 두거라. 그나저나, 저 렌이란 아이 말이다."

오딘의 말에 라파엘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자꾸 렌한테 관심을 보이는 거지?'

그녀의 입장에선 주신들이 한 번씩 렌의 닉네임을 언급할 때마다 무척 불안했다.

렌은 상위 리그에서 성계 대항전을 열고자 한다면 반드시 필요한 플레이어.

그렇기에 성계 대항전을 준비하느라 어마어마한 포인트를 쏟아부은 라파엘의 입장에선, 렌이 혹여나 죽게 되면 그 포인트가 모두 날아가는 셈이었으니, 달가울 리 없었다.

"저 아이가 쓰고 있는 가면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말이지."

"가면······ 말씀이십니까?"

라파엘의 물음에 오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아이를 내가 한 번 만나볼 수 있겠느냐. 아무래도 뭔가 찜찜하단 말이지. 이런 홀로그램 말고, 직접 대면해보고 싶구나."

"······."

"후후, 왜 그런 표정을 짓는고.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는가?"

"아, 아닙니다."

오딘이 묘한 눈빛을 보내오자, 라파엘이 서둘러 대답했다.

그녀는 지금 이 자리가 무척 불편했다.

의미심장하게 툭툭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자신의 내면을 슥슥 훑어보는 느낌이랄까.

'후우. 침착하자. 지금까지도 잘 상대해 왔잖아. 침착해.'

라파엘이 티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의 주신은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기로 유명한 존재.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쫄 것 없었다.

자신 또한 아버지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다섯 천사 중 하나.

오딘이 뭘 알고 있다 해서, 함부로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럼 플레이어 렌과의 만남을 주선해 보거라."

"알겠습니다."

전혀 만나게 해줄 생각이 없지만, 라파엘은 티 내지 않은 채 고개를 숙였다.

그때였다.

―어어! 지금 뭐 하는 거죠!

―이건 정말 뼈 아프네요! 순식간에 전세가 뒤바뀝니다!

해설신들의 고함에 홀로그램으로 고개를 돌린 라파엘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커졌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네 파티 모두 순조롭게 타천사를 사냥하고 있었는데.

―아······. 너무 무리했습니다. 누가 봐도 타천사가 미끼로 나온 게 뻔한 상황이었는데, 그걸 물어 버리네요.

―네에. 이렇게 사사키 코지로 파티가 마요엘의 날개를 꺾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결국 전멸하고 맙니다.

오딘과 대화하는 그 잠깐 사이에 파티 하나가 전멸하고 만 것이다.

그 모습에 라파엘은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상위 리그의 흥행을 이끌 네임드 열 명이 사라진 셈이었으니까.

지금 상황에선 타천사를 놓치냐 마냐가 제일 중요한 문제.

하지만 성계 대항전이 워낙 초대형 이벤트다 보니, 라파엘의 입장에선 그런 생각부터 들 수밖에 없었다.

"쯧. 그나마 날개라도 꺾어서 다행이군. 가장 근처에 있는 파티가······."

"쿠 훌린 파티입니다."

"당장 쿠 훌린 파티를 보내, 도주하는 타천사를 사살하라."

"바로 지시하겠습니다."

―아, 오디세우스 파티도 결국 타천사를 놓치고 맙니다. 악마들이 시간을 끌어준 사이에 이미 너무 멀리 도망갔네요.

―물론 열 명의 악마를 처치한 건 대단한 공적이지만, 그래도 5급 타천사 한 명에 비할 바가 아니거든요?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오디세우스 파티도 날개를 꺾었다는 거죠.

―하지만 바로 근처에 마계에서 만든 요새인 루에타가 있습니다. 루에타 요새 안에는 마성석魔聖石으로 구동되는 치료의 샘이 있죠. 치료의 샘에서 12시간 동안 있으면 잘려 나간 날개가 재생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완벽하게 놓치고 말 겁니다.

―거기다 루에타 요새에 심어져 있는 마성석 때문에, 반경 천 킬로미터 안쪽으로는 비프로스트를 열 수도 없습니다. 결국 지금 있는 플레이어들로 어떻게든 처리를 해야 한다는 뜻인데요!

"뭐 하나 뜻대로 풀리는 것이 없군. 루에타 요새를 오디세우스 파티 혼자서 뚫어낼 수 있겠는가."

오딘의 물음에 라파엘이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할 겁니다. 마성석을 지키고 있는 하급 악마만 해도 50명 가까이 될 테니까요."

"그나마 온달 파티는 시노엘을 사냥할 수 있겠군. 온달 파티가 시노엘 사냥을 완료하면 오디세우스 파티와 합류해 루에타로 도주한 레시엘을 사냥하라."

"차라리 고위 플레이어를 보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저들만으로 루에타를 뚫기엔 역부족일······."

"후후. 고위 플레이어라······. 한 번 냉정하게 생각해 보거라. 지금 상황에서 먼 곳에 있는 고위 플레이어를 보내는 게 타천사를 처치할 확률이 높겠는가, 아니면 온달 파티를 보내는 게 낫겠는가. 무엇이 더 합당한 방법이지?"

오딘의 말에 라파엘은 내심 뜨끔했다.

높은 난이도에 혹여나 렌이 죽을까 봐 고위 플레이어 얘기를 꺼낸 것이기 때문이다.

"······사냥이 끝나는 대로 바로 이동하게끔 지시하겠습니다."

하지만 오딘이 묘한 웃음을 짓는 순간 라파엘은 알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라파엘에게 원하는 대답을 들은 오딘이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상위 리그의 재정 상황이 많이 열악해졌다지. 내, 다른 주신들께 건의해서 투자금을 올려달라고 얘기해 보겠노라."

"감사합니다, 오딘이시여."

라파엘이 오딘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엔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반드시 성계 대항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말겠어. 열두 주신들보다 내 방법이 더 옳다는 것을 아버지께 증명해 보여야 해.'

고개를 숙인 라파엘의 눈동자엔 독기로 가득했다.

* * *

고작 악마 네 명을 죽였을 뿐인데, 벌써 스텟이 1 포인트나 올랐다.

혁명 미션을 진행할 때 안타레스에서 죽인 소드 마스터들보다, 악마들이 훨씬 높은 스텟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스텟 흡수율이 어마어마하게 높았다.

'남은 여섯 마리를 다 죽이면 1 포인트 정도 더 오르겠는데.'

그렇게 생각하자 기분이 좋았다.

마의 구간에 돌입 후, 스텟이 오르지 않아 내심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으니까.

거기다 마력 상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거슬렸던 마법사들은 다 죽인 상황.

이 정도라면 내가 밀릴 이유가 없었다.

판단을 내린 나는 그때부터 더욱 과감하게 악마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모두 조심! 녀석의 스타일이 달라졌다!"

내 움직임에 악마들의 리더가 예민하게 반응했지만.

챙! 채챙! 챙! 챙!

"으윽! 손이······!"

악마들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콰지지지지지직!

벽력섬전이 부딪힐 때마다 사방으로 뇌전이 흩뿌려지며 악마들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루스펠! 백업해! 고르긴은 뒤쪽 공간을!"

'에워싸려고 하는 거군.'

그것도 문제없지.

"드디어 잡았······."

"키에에에에에엑!"

"으윽! 고르긴! 룩소나! 몬스터부터 처리해!"

사방에서 몰려드는 몬스터 때문에 날 에워싸는 순간, 저들도 등 쪽이 빌 수밖에 없었다.

이젠 저 몬스터들을 광역 마법으로 처리해 줄 마법사들이 없는 상태였으니까.

어쩔 수 없이 남은 악마 중 몇 명은 몬스터들을 처리하며 다른 악마들의 등을 지켜줘야 했다.

'잘 처리해 보라고.'

나는 곧장 녀석들에게 짓쳐들어가 난전을 유도했다.

히트 앤 런 스타일에서 토 투 토(toe to toe-발 붙이고 하는 근접 난타전) 스타일로 바꾼 것이다.

6대1의 상황에서 몬스터를 정리하기 위해 2명이 빠져나갔고.

나를 상대하는 악마는 고작 네 명.

서걱!

[플레이어 '루스펠' 을 처치했습니다.]

[<피의 흡수> 능력으로 극소량의 체력 스텟을 흡수합니다.]

스텟에서 내가 훨씬 높은데, 고작 네 명을 상대하지 못할 리가 없었으니까.

"젠장! 루스펠! 이 더러운 광대 자식이 감히 루스펠을!"

그때, 나와 맞상대하는 악마 중 한 명이 내 창을 무시한 채 돌진하며 손톱을 휘둘러 왔다.

언뜻 보기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서 달려드는 것 같지만.

'뭔가 목적이 있는 것 같은데.'

녀석의 눈동자가 빠르게 내 몸을 훑고 있었다.

이성을 잃은 사람이 저런 식으로 눈동자를 굴린다고?

그렇다고 작전일 가능성도 없다.

아직 완벽하게 불리한 상황도 아닌데, 동귀어진을 한다는 것 자체가 코미디였으니까.

'피해야겠군.'

나는 단숨에 악마의 심장을 꿰뚫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곧장 뒤로 빠져나갔다.

명백하게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

일전에 싸운 레기아가 그랬던 것처럼, 녀석들 또한 내가 모르는 어떤 능력을 사용할 수도 있고.

그 능력이 얼마나 위험한지 이미 한 번 겪어 봤기에 애초에 그들이 능력을 사용할 기회도 주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

내가 완벽한 기회인데도 그냥 뒤로 빠지자, 달려들었던 악마 녀석이 눈을 치켜떴다.

'역시 능력에 관련된 행동이었어.'

나는 계속해서 치고 빠지며, 악마들이 특이한 행동을 할 때마다 그것들을 머릿속에 입력해 나갔다.

'이 녀석도 피를 주워 먹으려고 발악을 하는군.'

'데미지 반사 관련 능력을 가지고 있는 녀석 같은데.'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대쉬한다라. 자폭 관련 능력이라도 가지고 있는 건가.'

그렇게 한동안 했더니, 어떤 악마 앞에서 어떤 행동을 조심해야 하는지 다 파악할 수 있었다.

"미친! 이 자식은 도대체······!"

그렇게 악마들이 능력을 사용할 기회조차 주지 않자, 녀석들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미칠 지경이겠지.'

힐끗 보니, 시노엘이 궁지에 많이 몰려 있었다.

저들은 서둘러 시노엘을 구하러 가야 하는 상황.

그런데 난 맞상대도 해주지 않고, 무시하고 가기엔 내 민첩 스텟이 너무 높다.

그런 식으로 내게 완벽에 가깝게 차단되어 있다 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우선순위를 미리 정했으면 됐을 것을.'

각각의 팀에서 개인적으로 모이는 우리와 다르게, 악마들은 한 팀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당장 누군가가 죽었을 때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우리 파티였다면 누가 죽든 말든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을 테니까.

그저 묵묵히 미션 수행을 했을 것이다.

왜냐고?

어차피 이번 경기만 끝나면 이후에 적으로 만날지도 모르는데, 그런 사람들을 위해 슬퍼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였다.

'하지만 같은 팀원이라면 얘기가 다르지.'

내가 적 파티장이었으면 세 명을 희생양 삼아 시노엘과 합류했을 것이다.

개개인으로 모인 플레이어들에겐 희생이라는 개념이 없으니 절대 불가능한 방법.

애초에 팀전으로 참가하지 않은 이상 희생 같은 단어가 존재할 수 없었다.

반면에 적들은 하나의 팀.

희생을 강요한다면 충분히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뭐, 이미 늦었지만.'

"대장님! 귀순하기로 한 천사가······!"

"제에엔장!"

시노엘이 궁지에 몰릴수록 악마들의 움직임 또한 조급해졌고, 그로 인해 동작이 조금씩 커져 갔다.

'빈틈!'

서걱!

[플레이어 '룩소나' 를 처치했습니다.]

[<피의 흡수> 능력으로 극소량의 민첩 스텟을 흡수합니다.]

그러다 보니 나는 계속해서 녀석들에게 데미지를 쌓아가며 한 명씩 처치할 수 있었다.

나와의 전투에 집중하지 못하고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 있는 순간, 승부는 정해진 거나 다름이 없었다.

어차피 시간은 내 편이었으니까.

그런 내 철벽같은 수비에 악마들은 알아서 무너져 내려갔다.

"지독한 자식······."

서걱!

[플레이어 '카시오' 를 처치했습니다.]

[<피의 흡수> 능력으로 극소량의 민첩 스텟을 흡수합니다.]

[민첩 스텟이 1 상승합니다.]

'끝났군.'

결국 나는 열 마리의 피의 흡수 제물을 모두 먹어 치웠다.

* * *

―온달 파티에서 대이변이 일어났습니다! 설마 렌 혼자서 열 명의 악마를 모두 처치할 줄이야······!

―렌에 대한 평가는 지금까지 항상 수정되어 왔죠! 잘 싸우네! 상위 리그에서도 잘 버틸 수 있겠어! 어어? 생각보다 더 강한데? 이 정도면 상위 넘버링까지 가능할지도! 그런데 오늘! 렌이 그 평가를 또 수정해 버렸습니다! 이젠 명실상부 상위 리그의 컨텐더(도전자) 계열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위 리그도 렌이 등장하면서 많은 지각 변동이 생겼거든요? 그런데 상위 리그 조차도 렌에게는 너무 좁은 무대였던 모양입니다! 단숨에 두각을 드러내네요!

< 102화. 타락 천사(6) > 끝

< 103화. 타락 천사(7) >

└와ㅏㅏㅏㅏㅏㅏ 악마를 혼자서 전멸시켜 버렸누..?

└뭐임? 오디세우스 파티 싸우는 거 보고 온 사이에 어쩌다 전세가 이렇게 변했냐.

└ㅋㅋㅋㅋㅋㅋㅋ 난 계속 보고 있었는데도 한순간에 뒤집혀 있더라.. 뭐가 어떻게 된 거지?

└평소 고위 리그만 보신다는 형님. 보고 계셨다면 해설점.

└악마 파티가 계속해서 전술을 바꿔가며 렌을 뚫어보려고 시도했음. 근데 렌이 그때마다 전술의 취약점을 공략하며 철벽같은 수비를 펼침. 거기에 악마 쪽이 조급해져서 조금 무리하다가 단숨에 마법 전력 다 잃고, 그때부터 렌이 도망 다니지 않고 난타전 펼치더니 끝. 근데 쟤가 진짜 지구 출신이라고?

└..그게 끝입니까?

└한순간에 전세가 뒤집어졌다고 느껴지는 게 렌이 갑자기 본인의 장점을 180도 바꿔버렸음. 완벽한 수비 위주에서 갑자기 어마어마한 화력으로 적 악마들 찢어버렸기 때문임. 근데 진짜 쟤가 지구 출신이라고? 말이 안 되는데? 아무리 수비도 잘하고 공격도 잘하는 올라운더 플레이어라도 결국 한 가지 장점이 더 우세하기 마련인데, 쟤는 공수 모두 특화되어 있는데? 저게 가능한지는 나도 오늘 처음 봤음.

└쿠 훌린이랑 렌이랑 싸우면 누가 이기나여.

└음.. 그래도 쿠 훌린 쪽에 한 표. 공수 밸런스는 쿠 훌린보다 렌이 더 나은데, 공격력의 맥시멈에서 쿠 훌린이 훨씬 높음. 뭐 이것도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올 수도 있겠지만 ㅇㅇ~ 근데 쟤가 진짜 지구 출신이냐고???? 내가 묻는 것도 대답 좀 해줘라ㅡㅡ

'생각했던 것보다 스텟 상승이 쏠쏠한데?'

열 명의 제물을 먹어 치우고 근력과 민첩이 각각 1 포인트씩 상승했다.

이 정도 상승량이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기초 스텟도 온달 만큼 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뭐, 충분한 제물이 주어졌을 때의 얘기지만.

악마들을 모조리 도륙한 나는 곧장 파티에 합류했다.

파티원들은 시노엘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었지만, 여전히 피니쉬 시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녀왔습니다."

나는 가장 먼저 온달에게 복귀했음을 알렸다.

"와······."

"······악마들을 혼자서 다 죽이실 줄이야."

"키에에에에에엑!"

그러자 주변의 잡몹을 사냥하면서도 날 반겨주는 파티원들.

아니, 반겨준다기보단 모두 경악한 표정이었다.

기껏 해 봐야 시노엘의 발목을 잡고 있던 것처럼, 악마들에게서 시간이나 벌어 주는 게 고작일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핑! 핑! 핑! 핑! 핑! 핑!

온달 또한 시노엘에게 무수한 화살을 날리다 말고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대단하시군요······. 당장 고위 리그로 올라가셔도 손색이 없으시겠네요."

그의 말에는 감탄과 동시에, 약간의 허탈함도 담겨 있었다.

상위 리그의 네임드 중 한 명으로서, 내가 밑에서 올라와 자신을 앞질러 나가는 것에 대해, 자신이 지금껏 노력해 온 시간에 대한 허망함 같은 걸 느낀 거겠지.

'나도 1회차 때 같은 감정을 많이 겪어 봤으니까.'

"운이 좋았을 뿐, 여전히 많이 부족합니다."

서걱! 서걱! 서걱!

나는 달려드는 불개미들을 무심하게 베어 넘기며, 진심을 담아 온달에게 말했다.

그게 사실이었으니까.

주변에서 몰려드는 몬스터들, 그리고 시노엘이라는 시간 압박 없이 싸웠다면 저들을 전멸시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니, 역으로 내가 죽었을 수도.

'아, 이건 가능성이 좀 희박하겠군.'

그럼 싸우지도 않고 도망쳤을 테니까.

뭐 어쨌든, 초감각과 시간이라는 무기가 있었기에 녀석들을 처치할 수 있었던 거였다.

"겸손하시기까지. 정말 흠잡을 곳이 없으시네요. 고생 많으셨으니 조금만 쉬고 계시죠. 저희도 타깃을 잡기 일보 직전입니다."

그때, 온달이 내게 휴식을 권했다.

율리안, 양초풍, 오스카, 하레크누드가 시노엘을 몰아붙이고 있고, 온달, 에디든, 플로이드가 화살과 마법으로 원거리 지원을 하며, 마사노부, 수무아붐이 주변 몬스터들을 정리하고 있는 상황.

어차피 내가 껴 봤자 공격할 공간도 나오지 않기에 이런 권유를 하는 것이다.

거기다 시노엘이 비틀거리는 걸 보아하니,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양초풍님! 조심!"

"크윽. 궁지에 몰린 쥐새끼가 발톱을 세우는군!"

"지금 쥐새끼라고 했느냐! 이 하등한 생명체 따위가! 감히 이 몸에게!"

"하레크누드님! 지금입니다!"

전방의 파티원들이 시노엘과 여전히 격렬하게 싸우고 있는 걸 보면서 제대로 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뇨, 저도 바로 합류하겠습니다. 모두들 열심히 싸우고 있는데 저만 쉬긴 좀 그렇네요."

"렌님이 휴식을 취하신다고 해서 뭐라고 하는 분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초반에 길을 뚫어주시고, 먼저 나서서 타깃의 발목을 잡아주셨지 않습니까. 거기다 위험할 게 뻔한데도 혼자서 악마들을 상대하시기까지. 만약 누가 뭐라고 한다면 제가 대신 욕을 먹겠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플로이드님, 에디든님?"

"좀 쉬시죠, 렌님."

"이번 미션에서 얼마나 열심히 하셨는지 저희도 다 봤습니다."

온달의 열변에 곁에서 주문을 영창하고 있던 마법사들, 그리고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며 주위의 불개미들을 정리하고 있던 수무아붐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들 내가 쉬길 바라는 눈치.

그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정말 괜찮습니다. 그럼, 바로 합류하겠습니다."

만류하는 온달을 뒤로하고, 나는 곧장 시노엘에게 달려갔다.

내겐 쉴 수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시노엘을 죽여 스텟을 올려야 했으니까.

'5급 역천사는 얼마나 올려주려나.'

악마들보다 스텟이 훨씬 높기 때문에, 못해도 1 포인트는 올려줄 것이다.

"역시. 저런 독기와 집념을 가지고 있으니까 빠른 성장률을 보일 수 있었던 거겠죠."

"죽음의 위기가 아님에도, 매 순간마다 최선을 다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

뒤에서 온달과 플로이드가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군.'

시노엘을 죽이러 가는 걸 보고 뭔가 오해를 하는 모양이었다.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만.

챙! 챙! 후욱! 챙! 채챙!

시노엘과 정신없이 싸우고 있는 율리안, 양초풍, 오스카, 하레크누드.

"저도 합류하겠습니다."

나는 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며 말했다.

"앗, 렌님!"

채앵!

"큭, 혼자서 악마 열 명을 처치하고 올 동안, 우리는 타깃 한 명도 제대로 쓰러트리지 못하다니. 부끄럽소."

"운이 좋았습니다. 이제부턴 제가 탱킹을 맡겠습니다."

"괜찮······어어!"

나는 정면에서 시노엘을 상대하는 율리안을 슬쩍 밀어내며, 시노엘의 정면을 차지했다.

콰지지지지지직!

그리고는 시노엘에게 전력을 다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정말 괴물이군.'

그녀는 아홉 명의 네임드를 상대하면서도 여전히 힘이 남아 있었다.

정말 대단한 체력.

'이대로는 안 되겠는데.'

아무래도 그녀를 한 번 흔들어 줘야 할 것 같았다.

"왜 그러지? 분명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자신감이 철철 흘러넘쳐 보였는데."

나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시노엘에게 말했다.

내가 시노엘의 발목을 잡기 위해 달려왔을 때, 그녀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준 것이다.

그러자 시노엘의 얼굴이 야차의 그것처럼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감히······. 고작 더미 경기에나 출전하던 쓰레기 같은 녀석이······!"

채애애애앵!

있는 힘껏 검을 내리치는 시노엘.

"감히!"

채애앵!

"네까짓 게!"

채애애앵!

"날 무시해?"

평소라면 걸려들지 않았겠지만 워낙 궁지에 몰려 있어 정신적 압박이 심한 데다가, 날개도 모두 잘려 나가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내가 비웃자, 그녀의 얼굴이 분노로 물들었다.

완전히 이성을 놓아버린 모습.

채애애애앵!

그녀가 검을 내리칠 때마다 손바닥이 욱씬욱씬했다.

방어를 버린, 공격 일변도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서늘할 정도.

'하지만 여기엔 나만 있는 게 아니지.'

"쓰레기 같은 자식이!"

내가 슬쩍 뒤로 빠지자, 시노엘이 놓치지 않겠다는 듯 따라붙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서걱! 서걱! 서걱!

세 줄기의 피륙음.

"끄윽······!"

내가 뒤로 빠지는 사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온 율리안과 양초풍, 오스카가 그녀를 베는 소리였다.

순식간에 왼팔이 절단되고, 옆구리와 허벅지를 베인 시노엘.

"······!"

"······!"

"······!"

하지만 그녀는 그런 상태에서도 날 포기하지 않았다.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면서도 내게 달려든 것이다.

"반드시······ 반드시 네 놈 만은!"

그녀의 눈동자엔 어느새 흰자만이 가득했다.

그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스텟이 아무리 높더라도.

'잘 가라.'

서걱!

이성을 잃은 상대조차 쓰러트리지 못할 내가 아니었다.

[5급 역천사 '시노엘' 을 처치했습니다.]

[<피의 흡수> 능력으로 극소량의 체력 스텟을 흡수합니다.]

[체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체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시노엘의 머리가 허공을 날았다.

깔끔하게 베어진 목의 절단부에서 피가 흩날렸고.

털썩.

머리를 잃은 시노엘의 몸뚱아리는 실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으로 허물어 내렸다.

온통 피범벅에, 옅고 깊은 상처가 한가득인 시노엘의 시체.

5급 역천사라는 높은 계급을 가지고 있는 천사치고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하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았다.

'체력 스텟이 2나 올랐어.'

1 스텟을 올릴 때 들어가는 노력, 혹은 포인트를 생각했을 때, 고작 한 명 죽인 것 치고는 엄청난 수확이었다.

계산하자면 24,000 포인트 가량을 벌어들인 셈.

'아주 좋은데?'

앞으로 이런 종류의 긴급 미션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때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연출된다면 기본적으로 4에서 5 포인트 가량의 스텟을 획득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띠링!

[승리 조건 : 도주하는 타천사를 척살하라]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타천사 사냥> 미션을 완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긴급 미션 <타천사 사냥> 경기가 종료되었습니다.]

[기본급 x 1 의 승리 수당이 지급됩니다.]

'끝났군.'

시노엘을 죽임과 동시에 울리는 경기 종료 콜.

"휴우."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특히 렌님. 덕분에 무사히 끝낼 수 있었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렌님."

그러자 파티원들이 한숨을 내쉬며 내게 고마움을 표했다.

거의 궁지에 몰아넣었지만, 시노엘을 죽이기엔 역부족이었던 상황을 내가 나서서 빠르게 정리해 줬기 때문이었다.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나도 파티원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띠링!

[공헌도에 따른 보너스를 책정합니다.]

[공헌도]

[렌 : 16%] [온달 : 13%] [율리안 : 12%] [플로이드 : 11%] [양초풍 : 10%]

[하레크누드 : 9%] [에디든 : 8%] [수무아붐 : 8%] [오스카 : 7%] [마사노부 : 6%]

[악마 처치에 대한 공헌도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긴급 미션의 공헌도 1위를 기록했습니다.]

[공헌도 1위를 달성하셨기 때문에 70,000 포인트의 보너스를 지급받게 됩니다.]

[악마를 10명이나 처치했습니다.]

[추가로 x 2 의 보너스 포인트를 지급받게 됩니다.]

[새벽의 소성!]

[설화난무雪花亂舞!]

"키에에에에에엑!"

주변에 가득한 몬스터들을 마법사들이 쓸어버리는 사이, 온달이 파티원들을 가르며 내게 다가왔다.

"렌님. 덕분에 미션을 무사히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뇨. 그 집념과 독기, 그리고 언제나 초심을 잃지 않은 채 최선을 다하는 모습까지. 렌님을 보면서 제가 배우는 게 많았습니다. 이후에 다시 뵌다면, 같은 팀으로 만났으면 좋겠네요."

온달이 오른 주먹을 가슴에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졸본 특유의 인사법인 것 같았다.

"저도 온달님은 적으로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도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띠링!

[상위리그-긴급 미션 <타천사 사냥> 경기를 종료합니다.]

[파이트 머니로 161,000 P 를 지급받았습니다. (팀 '투지' 수수료 69,000 P 차감)]

[기본급 +45,000 P / 승리 수당 +45,000 P / 추가 보너스 +140,000 P / 수수료 -69,000 P]

[다음 경기부터는 기본급을 55,000 P 로 책정합니다.]

16만 포인트라······.

혼자서 악마를 모두 처치한 덕분인지, 이번 경기에서도 엄청난 포인트를 획득했다.

거기다 플레잉 코치 시스템 덕분에 69,000 포인트에서 3%를 페이백 받아 2,070 포인트를 추가로 받을 것이다.

'어떤 스텟을 올리는 게 좋을까.'

더 이상 포인트를 모을 필요가 없는 상황.

그렇게, 팜으로 돌아가서 포인트를 어떻게 사용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띠링!

[이어서 두 번째 긴급 미션 <루에타 침투> 를 시작합니다.]

[유형 : 척살(단체 PvP)]

[게임명 : 루에타 침투]

[맵 : 무스펠하임(특대)]

[관객 수 : 1,872,462 명]

[생존한 플레이어 수 : 28 명]

[죽여야 할 타천사 수 : 2 명]

[미션]

['오디세우스' 파티가 타천사 사냥에 실패했습니다.]

[날개가 꺾인 타천사는 악마들이 세운 요새, 루에타에 숨어들었습니다.]

['오디세우스' 파티와 합류해, 루에타로 도망친 타천사를 척살하세요.]

['오디세우스' 파티의 위치는 '지도'에 표시됩니다.―녹색빛이 흘러나옵니다.]

[도주한 타천사의 위치는 '지도'에 표시됩니다.―적색빛이 흘러나옵니다.]

[제한 시간 내에 타천사를 처치하지 못하면 미션에 실패합니다.]

[제한 시간 : 11:28:09]

[보너스 조건이 있습니다.]

[루에타 요새에 있는 마성석을 부수는 파티는 50,000 P 의 보너스를 추가로 획득합니다.]

"······!"

"······!"

순간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 103화. 타락 천사(7) > 끝

< 104화. 고결한 수정(1) >

알림창을 본 파티원들은 그저 입만 벙긋벙긋할 뿐이었다.

'두 번째 미션이라고?'

미션 내용을 본 나도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내겐 나쁠 것이 없었다.

어차피 첫 번째 미션과 같은 내용의 두 번째 미션이었으니까.

거기다 두 개의 파티가 한 명의 타락 천사를 죽이는 것이다.

'포인트도 얻고, 피의 흡수 제물도 잡아먹고.'

나로서는 이보다 좋은 미션이 없었다.

다만.

'모두들 상태가 좋지 않아.'

먹구름으로 가득한 잿빛 하늘임에도 불구하고, 무스펠하임의 열기는 어마어마할 정도로 뜨거웠다.

거기다 푹푹 빠져드는 사막의 모래까지.

불의 지옥, 무스펠하임은 빨리 지칠 수밖에 없는 조건들로 가득했다.

'쉽지 않겠어.'

그런 환경에서 시노엘과 장시간 싸운 상황.

거기다 미션이 끝났다고 생각해 모두들 긴장이 풀렸을 것이다.

땀도 무척 많이 흘렸고.

지금쯤 무거운 피로감이 짓누르고 있겠지.

침묵 속에서, 온달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바로 이동하겠습니다."

지도상으로 우리 파티와 오디세우스 파티의 거리는 1센티미터.

즉, 5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다.

초인의 경지를 아득히 뛰어넘은 우리에겐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

평소라면 2시간 정도 만에 주파할 수 있었겠지만, 문제가 있었다.

"먹잇감이다, 취익!"

"인간! 취익!"

서걱!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몬스터가 몰려든다는 것.

"스읍, 후우. 스읍, 후우."

그리고 파티원들이 많이 지쳐있다는 것이었다.

"스읍, 후우. 조금만 힘냅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잠시간의 휴식도 가질 수 없었다.

[제한 시간 : 11:02:33]

루에타 요새가 어떤 상황이고, 뚫고 들어가 타락 천사를 죽이는 데 얼마의 시간이 소요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은 최대한 빨리 도착하는 수밖에 없었다.

"렌님, 괜찮으십니까?"

"예."

"피곤하실 텐데 이렇게 선두를 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힘드시면 바로 말씀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언젠가 꼭 보답하겠습니다. 음, 아마 제 예상엔······. 멀지 않아 보답을 할 순간이 올 것 같군요."

"······?"

"아무튼, 힘드시면 꼭 말씀해주셔야 합니다."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며 천천히 속도를 줄여, 다시 뒤쪽으로 향하는 온달.

서걱!

고개를 끄덕인 나는 제일 선두에서 쉬지 않고 창을 휘둘렀다.

온달이 내게 고맙다고 한 것만 벌써 다섯 번째.

아무래도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인 모양이었다.

'그렇게까지 고마워하지 않아도 되는데.'

어차피 나는 몬스터를 죽일 때마다 체력도 회복되고, 피의 흡수 덕분에 스텟도 오른다.

그렇기에 내 입장에선 비키라고 해도 억지를 부리며 선두를 서야 하는 상황.

그런 속사정을 모르기에 온달이나 파티원들은 내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전방에 화염 전갈 떼 옵니다!"

그때 내 바로 뒤에서 전방을 주시하던 율리안이 외쳤다.

물론 나도 보긴 했지만, 굳이 내용을 전달해줘야 할 숫자는 아니었기에 입을 다물고 있었을 뿐.

"마법사님들, 광역 마법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온달의 말에 나는 서둘러 손을 흔들어야 했다.

"마나 아끼시죠. 제가 다 처리하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너무 무리하시지 않으셔도······."

"충분합니다."

저런 녀석들 하나하나가 쌓이고 쌓여 내 스텟의 자양분이 될 테니까.

콰지직!

다만 뇌전의 출력을 조금 낮춰, 최소 출력만을 유지했다.

체력과 다르게 마력은 시간이 지나야 회복되는 만큼, 아껴 써야 할 필요가 있었다.

"카아아아악!"

"카아아아아아악!"

화염 전갈은 무스펠하임에만 사는 몬스터.

몸길이만 3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육체에.

단단한 외골격으로 둘러싸인 피부와, 어지간한 강철은 가볍게 찢어버릴 날카로운 집게.

그리고 불꽃으로 이글거리는 꼬리까지.

저런 녀석들이 지구나 졸본 같은 중간계에서 나타났다면, 그것만으로도 재앙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돌파하겠습니다."

그저 무미건조한 한마디만 내뱉을 뿐이었다.

"카아아아악!"

서걱! 서걱! 서걱!

[<피의 흡수> 능력으로 극소량의 근력 스텟을 흡수합니다.]

[<피의 흡수> 능력으로 극소량의 민첩 스텟을 흡수합니다.]

[<피의 흡수> 능력으로 극소량의 체력 스텟을 흡수합니다.]

이런 녀석들을 상대로 고전하기엔, 내 스텟이 너무 높았으니까.

쐐애애애애애액!

녀석들의 꼬리가 쏘아질 때마다 공기 터지는 소리가 났고, 집게발을 뻗을 때마다 강철과 부딪히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별거 아니군.'

나는 완벽에 가깝게 막아내며 녀석들을 학살했다.

띠링!

[<벽력 >이 발동됩니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때마침 터진 벽력.

빛기둥이 하늘로 솟구치고, 뇌전의 칼날이 사방을 휩쓸었다.

순식간에 거대한 구덩이가 만들어지며, 근처에 있던 화염 전갈 다섯 마리가 터져 나갔다.

스텟이 워낙 높다 보니, 벽력의 임팩트도 무시무시했던 것이다.

'미쳤네.'

당사자인 나도 놀랄 정도의 위력이었으니, 파티원들의 반응은 말할 것도 없었다.

"와······."

"미쳤다······. 이런 스킬이 존재할 줄이야."

"전 뇌신이라도 강림한 줄 알았어요."

흘깃 뒤쪽을 보니, 모두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이래서 마법을 쓰지 말라고 하셨군요. 렌님은 보면 볼수록 놀라운 분인 것 같습니다."

'그런 거 아닌데.'

온달의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창을 휘둘렀다.

의도한 건 아닌데, 온달의 말처럼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띠링!

[<청천벽력 >이 발동됩니다.]

꽈과과과과과과광!

그리고 이어지는 일곱 줄기의 벼락.

마치 마법이 폭격하는 것처럼 순식간에 일곱 개의 구덩이가 생겨났고.

"카아아아악!"

주변에 있던 여덟 마리의 전갈들이 비명을 지르며 꿈틀거리다 쓰러졌다.

탄 내가 코끝을 찔렀다.

"······."

"······."

"······."

순간 아홉 개의 뜨거운 눈초리가 뒤통수에 꽂히는 느낌이 들었다.

서걱! 서걱! 서걱!

'어이가 없군.'

하필 벽력이 터지자마자 청천벽력까지 터지다니.

"······."

그때부터 내게 괜찮냐고 물어보는 파티원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내가 길을 뚫으면 묵묵히 따라올 뿐.

다만.

뒤통수가 뜨거울 뿐이었다.

* * *

바빌론 성계에 있는 대도시, 누비아.

그곳에선 전투가 한창이었다.

"감히 신의 행사를 방해하려 하다니! 이교도들을 처단하라!"

"마루드크! 지원을 요청해, 어서!"

"알겠습······끄아아아아아악! 불! 불이 제 몸에서어억······."

"젠장! 부관! 부관은 어딨나!"

아비규환.

수많은 사람들이 길거리로 나와 우왕좌왕 댔고, 침입자를 막기 위해 투입된 병사들과 뒤엉키며 난전이 펼쳐졌다.

그 사이에서, 안우정과 네 명의 파티원들은 적들을 뚫으며 빠르게 내달리고 있었다.

[승리 조건 : 누비아의 백성들을 제물로 바쳐 악마를 소환하려는 흑마법사들을 처단하라―붉은빛이 흘러나옵니다.]

[남은 흑마법사 수 : 3 명]

"남은 흑마법사 위치는?"

"저어기, 중심부에 높은 탑 보이십니까? 저기 근처에 모여 있습니다."

"내성 쪽이군. 왼쪽 골목길로 돌파하겠습니다."

안우정의 말에 파티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룬이 과감하게 돌파를 시도하네요.

―뭐, 화력만 봤을 땐 룬이 주저할 이유가 전혀 없죠. 이번 스토리 미션은 성공으로 끝날 것 같습니다.

―요즘 룬의 활약이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제는 어엿하게 하위 리그의 네임드로 자리를 잡은 모습입니다.

―렌에 이어 두 번째로 나온 지구의 네임드죠. 거기다 비슷한 복장에, 특유의 저돌적인 스타일까지. 완전히 렌을 빼다 박은 느낌입니다. 그것 때문에 요즘 관객들 사이에서 인기 절정을 누리고 있습니다.

안우정이 레바테인을 휘두를 때마다 푸른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화륵! 화르르르륵!

"끄아아아악!"

"물! 누가 물 좀 뿌려아아아아악!"

시퍼런 청염이 곳곳으로 퍼지며 병사들을 휘감고, 곧 건물로 옮겨붙더니 사방을 집어삼켰다.

세상에 내려앉은 밤의 어둠이, 청염으로 인해 환하게 보일 정도였다.

"역시 네임드······!"

"같은 메인 이벤터인데 우린 하는 게 없군요."

"너무 기죽지 마시죠. 네임드잖아요. 어차피 곧 상위 리그로 올라갈 겁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뒤에서 따라오던 파티원들이 수군거렸다.

'상위 리그라······.'

그 말을 들은 안우정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상위 리그를.

'과연 내가 올라갈 수 있을까.'

안우정의 자신감은 많이 무너진 상태였다.

'당연히 올라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피나는 노력과 팜의 주인인 루디악의 지원.

그리고 성계 대항전 특전으로 빠르게 강해진 안우정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상위 리그에 올라갈 수 있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 자신감이 깨진 건 단 한 명 때문이었다.

'렌······.'

발리노르의 에덴에서, 그가 싸우는 걸 실제로 봤으니까.

벼락이 흩뿌려지며, 뇌전의 칼날이 사방을 휩쓸어 버리고.

안우정을 그렇게 고생하게 만들었던 팔라딘들이, 단 한 번의 공격조차 제대로 막아내지 못한 채 죽어 나가던 그 모습을.

천둥소리와 함께 등장한 렌의 위용은 지금 생각해도 전율이 일렁일 정도였다.

'한번 만나보고 싶어.'

그래서 꼭 좀 물어보고 싶었다.

같은 지구인이라며?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강할 수 있는 거지?

도대체 어떻게 해야 상위 리그로 올라갈 수 있는 거야?

'나도······. 나도 상위 리그로 가고 싶다고······.'

꼭 만나서.

물어보고 싶었다.

―저지하기 위해 나선 적 병력들이 룬의 청염에 빠르게 녹아내리네요. 정말 화력 하나만큼은 렌 못지않습니다.

―사실상 혼자서 경기를 이끌어 나가고 있군요. 앞으로 두세 경기 안으로 상위 리그로 올라갈 것 같네요. 정말 엄청난 실력입니다.

―룬 파티가 내성으로 진입하는군요. 남은 흑마법사의 숫자는 세 명입니다.

"여기서 찢어지겠습니다. 저는 혼자서 갈 테니, 두 분씩 짝지어서 흑마법사 한 명씩 처치하는 걸로 하죠."

"전 루소 님이랑 1시 방향으로 가겠습니다."

"그럼 저랑 카인님이 11시로 갈게요."

파티원들의 말에 안우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남은 곳은 딱 하나.

'저 탑을 올라가야겠군.'

"모두 건투를 빕니다."

"룬님도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파티원들이 미리 정해 두었던 방향으로 달려갔다.

안우정도 서둘러 탑 쪽으로 내달렸다.

내성으로 뚫고 들어오긴 했지만, 여전히 적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서둘러 흑마법사를 처리하지 않으면 고립될 수도 있었다.

'탑 모양이 특이하군.'

누비아 중심부에 혼자서 우뚝 솟아 있는 한 개의 탑.

탑의 외관에는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가로세로 50미터 정도 크기의 정사각형 모양이었는데, 높이가 150미터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바빌론이라는 성계의 건축 기술을 생각하면 놀라운 수준.

그 예로, 근처의 다른 건물들은 높아 봐야 3층 정도의 높이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탑의 내부로 한 걸음 내딛을 때였다.

띠링!

['오벨리스크' 에 입장하셨습니다.]

갑자기 등장하는 알림창.

'뭐지?'

순간 안우정은 고개를 갸웃했다.

게이트를 통한 차원 이동이 아닌, 같은 맵 안에서 이동하는데 저런 알림창이 뜨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무슨 이유가 됐든, 어차피 이 탑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위에 있는 흑마법사를 죽이지 않고선, 이 미션을 끝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교도가 신성한 탑으로 들어왔다!"

"막아!"

그렇기에 안우정은 곧바로 적들의 목을 베며 탑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 뭐죠? 룬이 탑으로 들어갔음에도 시야가 밝혀지지 않네요.

―아무래도 탑 주변으로 신성시神聖視를 가로막는 결계가 처져 있는 모양인데요.

―대다수의 관객분들께서도 룬의 플레이를 보기 위해 오셨을 텐데요. 아쉽게도 탑에서 나오기 전까지는 룬의 플레이를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저깄군.'

그렇게 안우정이 막아서는 병사들을 죽여가며 탑의 꼭대기까지 올랐을 때였다.

꼭대기 층 한쪽 구석에서 붉은빛이 흘러나오는 흑마법사가 보였다.

그의 곁으론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는 갑옷을 입은 여섯 명의 장군들이 있었다.

"······애석하구나. 태양신의 성물까지 구해서 이제 소환 의식만 하면 됐거늘."

머리까지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흑마법사가 안우정을 보더니 읊조렸다.

"반드시 라르사 대사제님을 지켜야 하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엘람의 재건을 위하여."

스르릉- 스르릉-

여섯 명의 장군들이 동시에 검을 뽑아 들었다.

'제법 강해 보이는데.'

안우정도 긴장감을 끌어 올리며 레바테인을 겨눴다.

그때였다.

"이교도 한 명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디로 숨어든 거지? 설마, 오벨리스크로 올라간 건 아니겠지······!"

"앗, 장군! 시체들이 오벨리스크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젠장! 전군! 나를 따르라! 반드시 대사제님을 지켜야 한다!"

탑 바깥에서 적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곧 있으면, 엄청난 숫자의 적들이 꼭대기까지 올라올 것이다.

'어쩔 수 없지. 빠르게 죽이고 빠져나가야겠어.'

탑이라는 특성상, 한 번 입구가 막히는 순간 빠져나갈 구멍이 없을 테니까.

단숨에 불지옥을 만들어, 흑마법사를 처치할 생각이었다.

"흡!"

마음을 먹은 안우정이 곧장 6명의 장군들에게 달려들었다.

"흥! 죽더라도 네 놈 만큼은 길동무로 데려가 주마!"

"엘람의 재건을 위하여!"

여섯 명의 장군들도 동시에 검을 휘두르며 돌진해왔다.

[꿈속에서 일렁이는 거짓된 태양!]

장군들의 뒤에 있던 흑마법사도 마법을 시전하며 안우정을 압박했다.

안우정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최강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염왕炎王'

안우정의 몸에서 불길이 솟구쳤다.

평소의 푸른색 불꽃보다 훨씬 진해져, 얼핏 보면 하얗게 보일 정도였다.

순간 어마어마한 열기가 탑의 꼭대기를 가득 채웠고.

"끄아아아악!"

달려들던 여섯 명의 장군들은 고작 한 번의 휘두름만으로 녹아내렸다.

"신이시여······. 당신의 종이 부족하여, 거짓된 태양을······."

그리고는 뭐라고 혼자 지껄이고 있는 흑마법사를 향해 레바테인을 휘둘렀다.

화르르르르륵!

[바빌론인 '라르사' 를 처치했습니다.]

[남은 흑마법사 수 : 2 명]

'후우. 이쪽은 끝났군.'

단칼에 여섯 장군을 베고, 흑마법사까지 처치한 안우정은 꼭대기 층의 난간으로 다가가 바깥의 상황을 살폈다.

두 군데에서 동시에 전투가 펼쳐지고 있었는데, 둘 다 붉은빛이 흘러나오는 곳과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아마, 무난하게 경기가 끝날 것이다.

'서둘러 나가야겠어.'

그리고 바글바글할 정도의 적 병사들이 탑 입구로 들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그래서 안우정이 급히 아래층 계단으로 내려가려 할 때였다.

'저게 뭐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해가고 있는 방 안.

청염이 사방을 휘감으며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런데 흑마법사가 서 있던 뒤쪽으로, 불에 휩싸이고도 제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무언가가 보였다.

웬 팔찌 같은 것이었다.

'아이템인 게 분명해.'

청염에도 녹지 않는 아이템이라니.

높은 등급의 아이템일 가능성이 컸다.

안우정은 재빨리 다가가 팔찌를 주워들었다.

띠링!

[신화 아이템 <팔찌:태양신의 진노>를 획득했습니다.]

< 104화. 고결한 수정(1) > 끝

< 105화. 고결한 수정(2) >

서걱!

몬스터들을 죽이며 길을 뚫기 시작한 지 2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

콰과과과과과과과광!

"카아아아아악!"

하늘 위에서 생성된 얼음 화살비가 주변 일대를 휩쓸었고, 마법에 직격당한 몬스터들이 꿈틀거리며 주변을 피바다로 만들었다.

그리고 저 멀리서 녹색빛이 흘러오는 여덟 명의 존재가 다가오고 있었다.

띠링!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오디세우스]

[성향 : 모험]

[근력 : 183(+?)] [민첩 : 189(+?)] [체력 : 169(+?)]

[정신 : 99(+?)] [지력 : 32] [마력 : 149(+?)]

[각성 능력 : <용맹의 검> <특급마나운용 > <최상급박투술 > <상급치료술 >]

[업적 특전 : 대서사시의 주인공]

'이 자가 오디세우스였군.'

"모두 정지!"

여덟 명의 플레이어는 나와 30미터 정도를 앞두고 멈추더니, 선두에 있던 오디세우스가 앞으로 나섰다.

"온달님."

"오디세우스님."

그러자 내 뒤에 있던 온달도 그에게 다가가더니,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눴다.

'일면식이 있는 모양이군.'

"휴우. 면목이 없군요. 저희 파티 때문에 긴 발걸음을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미션의 승패는 병가지상사라고 하더군요. 너무 마음 쓰지 마시죠."

고개를 숙이는 오디세우스에게 온달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오디세우스가 먼지를 가득 뒤집어쓴 우리 파티원들을 쓸어보며 입을 열었다.

"쉘터를 마련해 뒀습니다. 일단 그곳으로 가서 마저 얘기 나누시죠."

오디세우스가 만들어 둔 쉘터는 불과 2킬로미터 떨어진 메디펠 화산이었다.

용암이 흘러내리는 곳 사이사이에 안전한 공간이 있었는데, 거기에 있는 동굴을 쉘터로 쓰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바로 옆쪽으로 용암이 흘러 내렸기에 어마어마한 열기가 파고들었지만, 그래도 몬스터의 공격을 피해서 쉴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쉘터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다.

"휴. 드디어 쉴 수 있겠네요."

"정말 힘들었습니다."

파티원들이 동굴 안쪽에서 편안하게 등을 기대앉으며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땀범벅이 된 상태로 500킬로미터의 거리를 빠르게 주파하느라, 모두들 기진맥진해 있는 상태였다.

'나쁘지 않네.'

나도 처음으로 긴장을 내려놓은 채 파티원들 곁에 앉았다.

육체적으로는 멀쩡했지만, 계속해서 긴장을 유지하다 보니, 정신적 피로감이 상당했던 것이다.

그런 우리를 보며 오디세우스가 입을 열었다.

"우선 저희가 지금까지 모아 놓은 정보를 공유해 드리겠습니다. 타깃의 위치는 루에타 요새입니다. 직경 1킬로미터짜리 소형 요새인데, 내부엔 중급 악마 하나와 삼십에서 오십 정도로 추정되는 하급 악마가 지키고 있습니다."

오디세우스가 검자루로 바닥에 동그랗게 원을 그렸다.

"거대한 성벽이 둘러싸고 있고, 마법 처리가 되어 성벽을 부수는 건 불가능합니다. 입구는 여기 하나뿐인데, 타깃은 여기, 요새의 끄트머리에 있는 회복의 샘에 있는 곳으로 파악됩니다."

오디세우스의 설명을 들은 온달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급 악마 하나에 하급 악마가 삼십에서 오십 정도라······. 쉽지 않겠군요."

"네. 하급 악마만 해도 문제인데, 중요한 건 중급 악마입니다. 5급 역천사인 타깃보다는 약하겠지만, 어쨌든 높은 스텟을 가지고 있을 건 분명하니까요.

오디세우스의 말에 파티원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쉽지 않겠는데.'

여기에 있는 플레이어의 숫자는 열여덟.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서, 하급 악마가 오십이나 된다고 해도 충분히 쓰러트릴 수 있을 정도의 전력이었다.

이쪽은 상위 리그에서도 손꼽히는 강자들로만 이루어져 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중급 악마였다.

'중급 악마한테 최소한 다섯은 달라붙어야 해.'

다섯 명이 중급 악마에게 붙고, 나머지 열세 명 만으로 오십이라는 하급 악마를 감당할 수 있을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가능이야 하겠지만, 이쪽에서도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을 것이다.

'근데 중급 악마가 끝이 아니란 말이지.'

미션은 루에타 요새에 있는 악마들을 처치하는 게 아니었다.

바로 도주한 타락 천사를 죽이는 것.

오디세우스가 말한 것으로 추정하건데, 타깃도 5급 역천사일 것이다.

한마디로 중급 악마 둘 이상을 잡아야 한다는 뜻.

"······."

오디세우스의 설명에 동굴이 침묵에 휩싸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최악의 상황.

무엇보다, 미션의 난이도가 너무 높았다.

[제한 시간 : 08:32:57]

우리에겐 제한 시간도 걸려 있는 입장이었으니까.

그때, 오디세우스 파티에 소속되어 있는 한 명의 플레이어가 손을 들었다.

"말씀하세요, 하부 아스미님."

"주변에 있는 몬스터들을 몰이해서 데려가는 건 어떻습니까?"

'몹 몰이를 하자고?'

진짜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인가?

순간 하부 아스미라는 이름을 가진 플레이어의 의견에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온달이나 오디세우스의 표정도 나와 다르지 않았다.

"······별로입니까?"

"음······ 아무래도 우리의 목적이 루에타 요새의 함락이 아닌, 타깃 제거 후 탈출이니까요. 괜히 몹 몰이를 잘못했다간 타깃을 제거한다고 치더라도, 몬스터들에게 길이 막혀 탈출에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 전멸이겠죠."

"아, 그렇군요.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하부 아스미가 머쓱하다는 듯 입을 닫자, 쉘터에 정적이 흘렀다.

모두들 좋은 방법이 있나? 하는 얼굴로 바라보다가 김이 샜다는 표정이었다.

침묵 속에서 오디세우스가 입을 열었다.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어차피 우리의 목적은 타깃을 제거하는 거지, 루에타 요새에 있는 악마들을 처치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마침 루에타 요새의 악마들은 신경 써야 할게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바로 마성석이죠. 마침 미션에서도 마성석이 있다고 하니까, 이걸 이용해 시선을 분산시키는 겁니다."

"마성석이요?"

"예. 저 요새를 유지하는 근간이 지하의 거대한 공동에 있는 마성석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두 파티로 나뉘어 한 파티가 먼저 진입해 중급 악마를 상대하고, 다른 한 파티가 마성석을 부수러 가는 척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요?"

"다른 한 파티가 마성석을 부수러 가면 아마 모든 어글이 끌릴 겁니다. 잘하면 첫 번째 파티가 상대하는 중급 악마마저도. 그럼 모든 악마가 자리를 비운 사이, 첫 번째 파티가 타깃을 제거하는 겁니다."

"하지만 중급 악마의 어그로가 안 끌릴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온달의 물음에 오디세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중급 악마를 처치하고 타깃을 제거하러 가는 수밖에요. 중급 악마가 어떻게 움직이든 결과는 비슷할 겁니다. 만약 중급 악마가 마성석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면 타깃을 제거하는 속도가 빨라질 테니까 지하 1층으로 내려간 파티가 버텨야 할 시간도 짧아지죠. 반대로 중급 악마가 그냥 남아 있으면 마성석을 부수러 간 파티가 받을 압력도 줄어들 겁니다. 대신 더 오래 버텨야겠지만."

"······."

"그리고 어글이 안 끌려도 상관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실제로 마성석을 부숴버리면 그만이니까요. 어차피 마성석을 부수는 순간 회복의 샘도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없을 거고, 그러면 제한 시간도 사라질 겁니다."

"제한 시간이 사라진단 말씀이십니까?"

"애초에 저 제한 시간이라는 게 타깃이 날개를 회복하면 잡을 수 없기 때문에 설정되어 있는 걸 테니까요. 그러면 우리는 유격전을 펼치며 야금야금 적 전력을 깎아가면 됩니다."

오디세우스의 말에 쉘터에 있던 모든 플레이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지금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전략이 아닐까 싶었다.

물론 어느 정도의 피해는 당연히 따라올 테지만.

'젠장.'

하지만 나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럼 어느 파티가 마성석을 부수러 가느냐가 관건이겠군요. 그리고 십중팔구 그 역할을 우리 파티가 맡게 되겠고요."

오디세우스 파티엔 여덟 명 밖에 없었다.

아마 미션 진행 중에 두 명이 전사한 거겠지.

"그래서 말씀드리기가 조심스러웠습니다. 결국 이 작전의 핵심은 마성석을 부수러 간 파티가 얼마나 버텨주느냐가 관건이니까요. 물론 저희 파티가 들어갈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전멸하겠죠. 중급 악마만 해도 다섯 명 정도는 붙어야 할 테니."

온달의 말에 오디세우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예. 그렇다고 파티를 뒤섞을 수도 없고요. 일분일초가 소중할 테니, 조금이나마 호흡을 맞춰본 사이가 유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우리 파티가 마성석을 부수러 내려가는 역할을 맡게 될 수밖에 없었다.

"좋습니다. 저희가 맡도록 하죠."

그런데 온달의 반응이 무척 의외였다.

흔쾌히 수락하는 모습에 파티원들이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였다.

'이걸 아무 조건 없이 수락한다고?'

"정말이십니까?"

"예. 어차피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저희 파티가 마성석 쪽으로 이동해, 어그로를 끌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반면에 오디세우스의 얼굴은 환해졌다.

'뭐지?'

짧은 시간이었지만 온달을 겪어 본 나로서는 무척 의외였다.

그는 파티원들을 배려하는 리더였지, 호구는 아니었으니까.

적어도 이런저런 조건을 달 줄 알았는데 그가 너무 흔쾌히 수락한 것이다.

물론 마성석을 부순 파티에게는 1인 당 5만 포인트의 보너스가 주어진다고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리스크를 생각하면 좀 부족한 감이 있었다.

"중급 악마의 어그로까지 끌었을 때 타깃을 제거하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하시죠?"

"음······. 빠르면 10분. 못해도 20분 안에는 타깃을 처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분이라······. 그 정도면 우리 파티도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 같네요.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시죠. 파티원들이 어느 정도 회복될 때까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은데, 작전은 5시간 후에 진행하시는 게 어떠십니까."

"알겠습니다. 제한 시간이 3시간 남았을 때 작전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렇게 작전이 결정되었다.

'쯧. 내가 사람 잘못 봤군.'

[제한 시간 : 03:39:26]

'슬슬 나갔다 와야겠네.'

휴식을 취하다 보니, 어느새 작전까지 40분밖에 남지 않은 상황.

나는 벽력섬전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전이 시작되기 전에 피의 강화 특전을 활성화 시킬 생각이었다.

"어디 가십니까?"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오디세우스.

"작전 시작 전에 정찰 좀 하고 오려구요."

"피곤하실 텐데 조금 더 쉬시지······."

"괜찮습니다."

띠링!

[플레이어 '오디세우스'의 그림자에 표식이 등록되었습니다.]

나는 오디세우스의 그림자를 밟으며 동굴을 나섰다.

'각자도생하자고.'

평소라면 중요한 순간에 적을 처치하기 위해 썼겠지만, 이번에는 미션의 난이도가 너무 높은 상황.

호구 같은 온달만 믿고 있다간 비명횡사할 수 있기에, 혼자서라도 살아남을 출구를 찾는 수밖에 없었다.

부글부글-

엄청난 열기를 뿜어대는 용암 지대를 빠져나와 분지 쪽으로 나오니, 저 멀리서 루에타 요새가 보였다.

거리가 5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을 텐데도 또렷하게 보일 정도.

'무시무시하군.'

천사처럼 날개 달린 존재들이 침입할 걸 대비해서인지, 성벽의 높이만 해도 300미터를 훌쩍 뛰어넘는 크기였다.

'시작해 볼까.'

먹이를 찾아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불개미들.

나는 뇌전을 피우며 곧장 녀석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들었다.

"키에에에에에엑!"

날 발견한 불개미들이 화염을 뿜어대며 포효했다.

서걱! 서걱! 서걱!

뭐, 내겐 그저 피의 강화 스텍의 제물일 뿐이었지만.

띠링!

[<피의 강화> 능력으로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30/30)]

[<피의 강화> 로 올릴 수 있는 스텟을 끝까지 채웠습니다.]

[<피의 강화>로 상승한 스텟이 30분간 유지됩니다.]

'이제 빠져야겠군.'

피의 강화 특전이 켜지자마자 나는 곧바로 등을 돌려 화산 지대로 내달렸다.

불개미들은 동족이 죽으면 지독하게 달려들기로 유명한 몬스터.

자칫 잘못했다간 쉘터까지 따라올 수도 있기에, 전속력으로 이동해야 했다.

그렇게 불개미들을 떼어내고 쉘터로 돌아갈 때였다.

"여기 계셨군요."

'온달······?'

쉘터 쪽에서 온달이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어디 가십니까?"

"아, 자고 일어나 보니, 렌님이 정찰을 나가셨다고 해서 나와봤습니다. 그런데 정말 대단하시군요. 렌님도 피곤하실 텐데 이렇게 먼저 나와서 정찰까지 하실 줄이야."

온달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정찰 목적도 아니었고, 그와 대화를 길게 나누고 싶은 마음도 없기 때문이다.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 말씀이라면 충분히 들었습니다만."

"그리고 한 가지 알려드릴 것도 있구요."

"······?"

온달의 말투는 무척 진지했다.

그나저나.

내게 알려 줄 게 있다고?

"제가 너무 쉽게 마성석을 부수러 가겠다고 해서 실망하셨죠?"

"음. 부정은 못 하겠군요."

"하하,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근데 저는 손해 보는 결정을 내린 게 아닙니다."

"그럼······?"

온달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제가 한 가지 흥미로운 얘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제가 소속된 팀에는 고주몽이라는 고위 플레이어가 있습니다. 졸본 성계 때부터 저와 함께해 온 의형제죠. 근데 주몽이 제게 그러시더군요."

"······."

"마성석을 부수면 안에 고결한 수정이 들어있을 것이다. 그럼 주저하지 말고 바로 먹어라."

"고결한 수정······?"

"예. 그걸 먹으면."

온달이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보더니 내게 한 걸음 다가왔다.

"가지고 있는 스킬 중 한 가지를 선택해서 플래티넘 등급으로 올릴 수 있다. 라고 하더군요."

"······!"

뭐라고?

온달의 말에 나는 눈을 치켜떴다.

< 105화. 고결한 수정(2) > 끝

< 106화. 고결한 수정(3) >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플래티넘 등급으로······.

업그레이드가 된다고?

'미친.'

그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 파티가 반드시 마성석을 부수러 가야 했다.

플래티넘 등급.

즉, 그림자 표식과 같은 등급의 스킬을 얻을 수 있다는 거였으니까.

'사실이군.'

온달에게서 붉은빛이 흘러나오지 않는 걸 보아,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런 정보를 제게 왜······?"

그래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당장은 우리의 리더이긴 하지만, 결국 미션이 끝나면 언제 적으로 만날지 모르는 상황.

그런데도 이런 귀한 정보를 준다고?

하지만 그런 내 반응에 도리어, 온달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제 말을 믿으시는 겁니까?"

"거짓말을 할 분은 아니시니까요."

"아······. 하하, 이거 참 민망하네요. 절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군요."

"······."

"은혜는 태산처럼. 복수는 칼날처럼. 이게 제 지론이거든요. 아, 물론 고결한 수정을 양보하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먼저 쥐는 사람이 임자죠, 하하."

온달이 한 걸음 물러나더니 씨익 웃었다.

"전에 제가 말씀드렸죠. 반드시 보답하겠다고."

그의 미소는.

"그 기회가 빨리 와서 다행입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멋있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제한 시간 : 03:05:34]

[현재 생존한 플레이어 수 : 18 명]

온달과 함께 쉘터로 돌아오니, 어느새 출격 준비를 마친 플레이어들의 모습이 보였다.

동굴의 입구에 나와 있던 오디세우스가 우리 둘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아, 마침 딱 맞춰 오셨네요, 온달님. 렌님."

"예."

"정찰 결과는 어떠셨습니까?"

"특이 사항은 없었습니다."

오디세우스의 물음에 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애초에 피의 강화 특전 때문이었지, 정찰 목적으로 나갔던 게 아니었으니까.

다행히 오디세우스는 깊게 물어보지 않았다.

"음. 알겠습니다. 온달님, 잠시 후면 출격 예정 시간입니다."

"예."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우리 둘은 바로 파티원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모두들 푹 쉰 모양이군.'

뿌옇게 먼지에 휩싸인 것은 그대로였지만, 얼굴에 짙게 깔려 있던 피로감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렌님은 정말 한결같으시네요. 피곤하실 텐데 그사이에 정찰까지 다녀오시고."

"고생 많으셨어요, 렌님."

날 반갑게 맞이해주는 파티원들.

만난 지 고작 하루 조금 넘었을 뿐이었지만, 어느새 유대감 비슷한 게 생긴 모양이었다.

뭐, 한 번이라도 등을 지켜 준 동료라는 것엔 분명했지만.

나는 파티원들에게 고개를 저었다.

"거창하게 정찰이랄 것까지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답답해서 바람 좀 쐬고 왔을 뿐이거든요."

"음······. 네, 뭐. 렌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하지만 파티원들은 그다지 내 말을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진짜 정찰 안 했는데.

"자, 슬슬 모여 주시죠. 바로 작전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다행히 파티원들을 소집하는 온달 덕분에, 내게 향하던 부담스러운 눈길을 떨어트릴 수 있었다.

오디세우스 파티는 동굴 바깥에서 동그랗게 모여 있었기에, 동굴 안에는 우리 파티 뿐이었다.

"일단 대열부터 짜겠습니다. 선두는 렌님이 맡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예."

온달의 말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뒤로 율리안님이랑 수무아붐님."

"예."

"중심부엔 저랑 플로이드님, 에디든님."

"네."

"왼쪽을 양초풍님이, 오른쪽을 오스카님이 맡아주세요."

"알겠소."

"후방은 하레크누드님과 마사노부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하나만 명심하세요. 우리는 단순히 미끼로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목표는 마성석을 부수는 것."

온달이 굳은 표정으로 파티원들을 쓸어 보았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성석을 부수고, 넉넉한 보너스 포인트까지 챙겨서 돌아갑시다. 반드시 살아서."

온달이 내뱉은 마지막 단어가 가슴에 팍하고 꽂혔다.

'살아서라······.'

다른 파티원들의 눈에서도 어떻게든 살아서 돌아가겠다는 결의가 느껴졌다.

동굴의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온달.

우리는 열을 맞춰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제한 시간 : 03:02:12]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어느덧.

시간이 되었다.

띠링!

[보름달이 떴습니다.]

[<로브:달의 메아리> 가 달의 힘을 빌려와 모든 스텟이 5% 상승합니다.]

"몰래 다가가는 건 여기까지가 한계입니다. 성벽 위에 경계를 서는 악마들이 있거든요."

"음. 여기서부터 전속력으로 돌진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예."

루에타까지 3킬로미터를 남겨둔 상황.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이동하다 보니, 제법 근처까지 다가올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시간 싸움이겠군.'

저 멀리 성벽 위를 보니, 달빛을 맞으며 주변을 경계하고 있는 하급 악마들의 모습이 보였다.

여기서 더 나가면 분명 알아차릴 것이다.

[제한 시간 : 02:59:57]

"20분. 그 이상이 지나면 실패라고 생각하고 그냥 탈출하겠습니다."

"예. 잘 부탁드립니다."

온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오디세우스가 등을 돌렸다.

"갑니다. 흡!"

그리고는 루에타 요새의 성문을 향해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우리도 가겠습니다! 렌님!"

"예."

온달의 외침에 나도 서둘러 오디세우스 파티의 끄트머리로 따라붙었다.

온달과 파티원들도 기민하게 내 뒤를 따라왔다.

"적 출현!"

"적이 출현했다!"

어둠 속에서 벗어난 지 500미터도 채 되지 않았는데, 루에타의 성벽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타락 천사라는 존재 덕분에 우리가 언제든 습격할 거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던 모양.

'정말 묘한 분위기네.'

사막 한 가운데에 혼자 우뚝 솟아 있는 루에타 요새.

근처까지 다가가니, 성벽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오디세우스의 말대로 마법 처리가 되어 있는 것이다.

[사그라드는 연홍 눈물!]

[들이치는 격류의 메아리!]

[폭루유성爆淚流星!]

[격랑하는 겨울의 향기!]

[웅크린 산신의 분노!]

그때, 주문을 영창하던 마법사들이 마법을 시전하자, 다섯 개의 마법이 동시에 날아가 성문을 폭격하기 시작했다.

꽈과과과과과과광! 꽝! 꽈아아아아앙!

"······!"

"······!"

"······!"

'엄청나네.'

물, 불, 땅, 바람.

네 가지 속성 마법이 동시에 터지며 온갖 빛깔의 향연이 펼쳐졌고.

쐐애애애애애애애애액!

먼지를 동반한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우리를 덮쳤다.

로브가 터져 나갈 듯 펄럭거렸다.

'시작이 좋군.'

먼지가 걷어지자 보이는 뻥 뚫린 성문.

만약 저 성문이 멀쩡했더라면 많은 부분에서 손해를 봤을 것이다.

지금부터는 1분 1초가 소중한 상황이었으니까.

"못 들어오게 막아!"

"광대 자식들! 여기가 어디라고!"

이미 성문 앞에는 많은 숫자의 하급 악마들이 나와 있었다.

'악마의 눈.'

다행히 딱히 이렇다 할 만한 강자는 보이지 않았다.

녀석들 모두 죽음의 땅에서 싸웠던 열 명의 악마와 비슷하거나, 조금 낮은 수준.

"바로 돌입합니다!"

캉! 카강! 캉! 카가강!

선두에 서 있던 오디세우스가 얼굴 위까지 방패를 들어 올리곤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시작해 볼까.'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나도 뇌전이 깃든 벽력섬전을 힘껏 휘둘렀다.

"으윽!"

띠링!

[플레이어 '옥사딘' 을 처치했습니다.]

[<피의 흡수> 능력으로 극소량의 마력 스텟을 흡수합니다.]

[마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위치가 나쁘지 않은데?'

최전방에서 길을 뚫는 오디세우스와 그의 파티원들 덕분에, 내가 하급 악마들과 마주칠 때 쯤엔 이미 밸런스가 무너져 있거나, 어딘가에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아무리 하급 악마들의 스텟이 높다고 하지만, 그런 녀석들을 놓칠 내가 아니었다.

서걱!

"앞사람과 절대 거리가 벌어지면 안 됩니다!"

[제한 시간 : 02:57:02]

어느새 창을 빼든 온달의 외침을 뒤로하고, 하급 악마를 죽이는 데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중급 악마!"

오디세우스의 외침에 고개를 돌려 보니, 한 악마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머리에 치솟은 작은 뿔과 검은 피부.

붉은 눈동자.

외형만 봐서는 하급 악마와 다를 게 없었지만.

펄럭! 펄럭!

하급 악마와 다른 점이 딱 한 가지 있었다.

'날개가······?'

중급 악마는 검은 한 쌍의 거대한 날개가 달려 있었다.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바놉]

[근력 : 224(+?)] [민첩 : 219(+?)] [체력 : 187(+?)]

[정신 : 123(+?)] [지력 : 33(+?)] [마기 : 193(+?)]

'이 자식도 장난 아니네.'

중급 악마, 바놉의 능력치를 확인한 나는 혀를 내둘렀다.

거의 피넛엘과 비등비등한 수준의 능력치.

"렌님!"

그때, 온달의 외침이 귓가로 날아와 꽂혔다.

그걸 신호로 나는 곧장 오디세우스 파티의 대열에서 벗어나, 크게 우회하기 시작했다.

내 뒤쪽에서 따라오던 파티원들이 기민하게 나를 뒤쫓아 왔다.

"녀석들이 귀순한 천사를 노리고 있다! 어서 치료의 샘 입구를 막아라!"

챙! 채챙! 챙! 챙! 챙!

중급 악마의 지시에 우릴 막아서는 한 무리의 하급 악마들을 제외하고, 나머지가 한쪽 입구 앞을 가로막았다.

마력장 덕분에, 악마들에게 가로막혀 있는 입구 쪽에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하에 마성석이라는 보물이 잠들어 있는 상황.

'지하로 가는 길은······ 건물 안에 있군.'

그런 지하의 입구가 천장도 없이 맨바닥에 뚫려 있을 리 없었으니까.

보안상의 이유로 건물 안에 있을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벽력섬전을 크게 휘두르며 녀석들이 가로막은 입구를 그대로 지나쳤다.

그리고는 곧장 중앙부에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미친! 놈들이 노리던 건 천사가 아니라 마성석이었나······! 뭣들 하는 게냐! 어서 막아!"

그러자 악마들이 화들짝 놀라며 우리 뒤를 쫓아 들어왔지만.

'이미 늦었어.'

챙! 콰직! 콰지직!

건물 입구를 지키고 있던 두 명의 악마를 단숨에 쳐내버린 나는 곧바로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부터 찾았다.

다행히 입구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건물 내 복도 끝 쪽에, 지하로 내려가는 곳이 떡하니 있었던 것이다.

특이한 건 계단이 아닌, 완만한 내리막길이라는 것.

펄럭! 펄럭!

"렌님! 중급 악마 어글을 우리가 먹었습니다! 일단 지하로!"

온달의 지시에 나는 곧바로 지하로 향하는 내리막길을 향해 내달렸다.

'엄청 좁네.'

계단은 성인 남성 다섯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폭이었다.

내려가는 거야 괜찮지만, 문제는.

'길목에 누가 있으면 안 돼.'

이렇게 좁은 공간에선 내 실력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다는 것.

좌우로 움직일 수 없으니, 다양한 스타일로 상대에게 카운터를 치는 내게는 커다란 페널티였다.

다행히 좁은 계단에는 우리의 발소리와, 뒤따르는 악마들의 외침만이 울려 퍼질 뿐이었다.

[제한 시간 : 02:54:32]

[현재 생존한 플레이어 수 : 18 명]

내리막길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끝도 없이 이어졌다.

체감상 거의 루에타 요새의 외곽을 한 바퀴 도는 느낌이었달까.

'지하 공동이 엄청 거대한가 본데.'

지하실이라기보단, 거대한 광장 같은 게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구조가 나올 수 없었다.

'차라리 잘 됐어.'

마성석이 있는 지하마저도 좁았으면 아마 곤란했을 것이다.

중급 악마, 바놉을 상대하려면 결국 레이드 형태의 전술을 사용해야 할 테니까.

"수무아붐님! 따라오는 적들과의 거리가 얼마나 됩니까!"

"아직 여유 있습니다!"

"가까워지면 바로 말씀을!"

"알겠습니다!"

"렌님, 아직 멀었습니까?"

"예."

"지하 공동이 엄청나게 큰 모양이군요. 지하로 내려가기 전까지 전투는 최대한 지양하겠습니다!"

온달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일이 잘 풀리는데.'

내 입장에선 과정이 어떻게 흘러가든, 결국 지하 공동으로 향해야 했다.

그래야 마성석을 부수고, 온달이 얘기해 준 고결한 수정이란 아이템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마성석을 부수면 받게 될 5만 보너스 포인트도 무척 탐 났지만, 그래도 플래티넘 등급 스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어차피 오디세우스의 그림자에 표식을 달아두기도 했고.'

미리 보험을 들어놨기 때문인지, 아래로 한참을 내려가는데도 그다지 불안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한참 동안 내리막길을 내달릴 때였다.

―신들 앞에서 광대 짓이나 하는 것들이! 감히 마성석을 노리다니! 모조리 갈기갈기 찢어 죽여주마!

강력한 마기가 깃든 목소리가 좁은 복도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순간 가슴이 서늘했을 정도.

그와 동시에 누군가가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더 빠르게 움직여야겠군.'

중급 악마의 민첩이 아무리 높다고 하더라도, 지하 공동으로 내려갈 때까지는 시간을 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리막길이 워낙 비좁은 데다가, 앞서 달리며 우리를 쫓아 오던 수많은 하급 악마들에게 막혀 속도를 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내 예상과 다르게, 중급 악마가 하급 악마들을 제치고 우리 뒤에 바짝 붙어서 쫓아오는 모양이었다.

"머, 멀었습니까! 거의 다 따라 잡혔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남은 거지?'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한 지 어느덧 3분째.

달린 시간만 봤을 때는 이미 루에타 요새를 2바퀴 정도 돈 셈이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끝이 나오지 않았다.

만약 이대로 계속 나아가다가, 혹시라도 중급 악마에게 뒤를 잡히게 되면 금세 전멸하고 말 것이다.

뒤통수에 대고 때리는 공격을 막아낼 수는 없을 테니까.

그렇다고 멈춰서서 중급 악마를 상대한다?

'그것만큼은 피해야 해.'

공간이 좁아 일대일 구도로 싸우게 될 텐데, 애초에 중급 악마의 피지컬부터가 차원이 달랐다.

결과적으로 한 명씩 죽어 나가는 건 똑같겠지.

그때였다.

'저건!'

내 시야가 닿는 끝 쪽에서, 복도의 벽이 끝나는 지점이 보였다.

그렇다는 건.

"다 왔습니다! 앞으로 20초!"

"크흐흐흐. 모조리 죽여 주마."

오백 미터.

"조금만 더 빨리!"

사백 미터.

삼백, 이백, 백.

'드디어!'

좁은 내리막길을 빠져나온 나는 곧장 한숨부터 내쉬었다.

여기라면 중급 악마와 충분히 싸워 볼 만 할 것이다.

'최악의 상황은 면했······.'

"······?"

지하 공동의 높이는 20미터.

넓이는 루에타 요새를 지하에 통째로 옮겨 놓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대한 크기.

가운데에선 자줏빛이 뿜어져 나오는 1미터 정도 크기의 크리스탈이 보였다.

저게 아마 마성석이란 거겠지.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후후. 어서 오거라."

지하의 공동에서 누군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이쪽으로 올 줄 알고 있었지."

머리에 치솟은 작은 뿔과 검은 피부.

엉덩이 뒤로 얼핏 보이는 길다란 꼬리.

붉은 눈동자.

그리고 한 쌍의 검은 날개.

'씨발······.'

지하 공동에.

중급 악마가 하나 더 있었다.

< 106화. 고결한 수정(3) > 끝

< 107화. 고결한 수정(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