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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3화. 진일보(2) >

한동안 멍하니 상태창을 바라보던 나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세 자리를 넘어간 저 스텟창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이런 날이 오긴 오는군.'

드디어 승급전을 뛸 때 모든 특전을 다 켠 것보다.

내 기초 스텟이 더 높아진 것이다.

'특전을 다 키면 얼마지?'

나는 곧장 종이와 펜을 꺼내, 피의 강화 특전까지 켜졌을 때의 내 스텟을 계산했다.

역천자와 차원의 성계 30퍼센트.

피의 강화 특전 30퍼센트.

천둥의 숨결로 인해 근력과 민첩 15퍼센트.

거기에 보름달이 떴다고 가정하고 달의 메아리 5퍼센트까지.

[근력 : 203(+5)(+88)] [민첩 : 203(+5)(+88)] [체력 : 183(+5)(+70)]

[정신 : 168(+5)(+64)] [지력 : 56(+22)] [마력 : 137(+5)(+52)]

"하. 하하······."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모든 특전을 다 켜면.

근력과 민첩이 200을 넘어있었다.

'미쳤어.'

콜로세움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보는 엄청난 고 스텟에 전율이 일었다.

상위 리그의 최강자라고 불리는 쿠 훌린?

만나보지 못했기에 얼마의 스텟을 가지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특전을 모두 켠 이후에 싸운다면 아마 내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 당장 고위 리그로 올라가도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스텟이었으니까.

'침착하자.'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서둘러 심호흡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날뛰기 시작한 내 심장은, 쉽사리 잠잠해지지 않았다.

고위 리그.

그 문턱에조차 가보지 못했던 내가.

어느새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초월 리그를 생각하자 곧바로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고위 리그에 올라간다고 끝이 아니야.'

고위 리그로 올라갈 수 있다고?

근데 뭐?

아직 이룬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곳이 콜로세움이다.

높은 스텟을 가지고도 내 손에 죽었던 플레이어가 얼마나 많던가.

'상위 리그까진 1회차의 경험이 있다고 하지만, 고위 리그 이상부터는 정보가 너무 없어.'

거기다 가장 큰 문제는.

고위 리그와 초월 리그에선 어떤 미션이 나오는지.

초월 리그의 챔피언이 되는 조건이 무엇인지.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완벽한 미지의 세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그런 곳에서 살아남으려면, 남들보다 스텟이라도 더 높아야 유리할 것이다.

그렇기에 여기서 스텟을 더 올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제 훈련을 통해 스텟을 올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

저주셋을 착용하고 훈련하면 오르기야 하겠지만, 기껏 해봐야 한 달에 1포인트 올릴 수 있을까 말까.

1씩 올린다고 가정해 봐도 1년을 해봤자 12포인트 밖에 올리지 못하는 것이다.

'효율이 너무 떨어져.'

예전이라면 울며 겨자 먹기로 효율이 떨어지더라도 훈련에 매진했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플레잉 코치 시스템.

그리고 피의 흡수.

새로운 무기가 두 개나 있었으니까.

'플레잉 코치로 들어오는 포인트가 계속 늘고 있어.'

첫 달에 들어온 게 763 포인트였고,

세 번째 달에 들어온 게 2,684 포인트였다.

그런데 이번 달에는.

'벌써 5천 포인트가 넘게 들어왔네.'

상승률이 무시무시했다.

이 추세대로라면 앞으로 몇 년 안에, 달마다 10만 포인트 이상 들어올 것 같았다.

'저 기간을 더 단축시킬 방법이 없을까.'

나는 검지로 테이블을 톡, 톡 두드렸다.

결국 팀 투지 소속 플레이어들을 성장시켜야 한다는 건데.

훈련법은 더 이상 손 볼 곳이 없을 정도로 완성됐고.

'남은 건 아이템과 스킬 뿐이야.'

내가 번 골드를 그들에게 투자하는 게 과연 맞을까?

나는 종이에 슥슥 투자 대비 효율을 적어 나갔다.

일 인당 얼마의 골드를 투자해야 할 것이고, 그로 인해 내가 벌게 될 포인트가 얼마나 될지.

하지만 내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 혼자 투자해서는 답이 없어.'

골드는 교환이 가능하고, 이후에도 많이 벌 자신이 있지만.

그래도 손해가 너무 커, 도저히 수익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였다.

쾅!

"안우진님!"

집무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아세리안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흠칫 놀랄 정도.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모습이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순간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렇게 당황하는 아세리안의 모습을 처음 보았기에.

"안우진님······."

"예."

"안우진님······?"

"······?"

얼마나 당황했는지 내 이름만 부르며 쉽게 말문을 떼지 못하는 아세리안.

그래서 나는 가장 먼저 그녀를 진정시키기로 했다.

"일단 침착하시죠.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어떻게 된 거예요?"

"예?"

"지금 안우진님 스텟이요. 갑자기 엄청나게 오르셨던데······?"

아.

그것 때문에 이렇게 놀란 거였나.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네.

"아, 네. 그동안 모아뒀던 포인트를 썼거든요."

"모아뒀던 포인트요?"

"네."

그러자 아세리안이 빠르게 눈을 깜빡깜빡거렸다.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모아둔 포인트로······ 스텟을 110까지 끌어올리셨다고요?"

"예."

입을 벌린 채 멍한 표정을 짓는 아세리안.

그녀의 반응에 나는 피식 웃었다.

하긴.

거의 90만 포인트가량을 모았다는 뜻인데, 그런 미친놈이 존재할 거라고 어느 누가 생각할까.

당장 나만 해도 누군가가 90만 포인트를 모아서 최근에 스텟을 올렸다는 얘기를 듣는다면 믿지 못할 것이다.

그게 얼마나 힘든지, 아니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지 알기 때문이다.

"서, 설마 콜로세움에 들어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포인트를 사용하지 않으셨다는 건 아니죠?"

"맞는데요."

"세상에······!"

내 말에 아세리안이 탄성을 내질렀다.

얼마나 놀랐는지 양손으로 입을 막은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세상에······.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셨어요? 그러다가 죽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스텟이 80을 넘으면 올리기가 힘드니까요."

"아, 아무리 그렇다 해도······. 혹시 인생 2회차라도 되시나요? 어떻게 그런······."

"······."

아세리안의 말에 내심 뜨끔했다.

실제로 2회차 인생을 살고 있으니까.

그래서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아세리안이 고개를 내저었다.

"에휴. 무슨 헛소리람. 시간을 되돌아왔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릴. 아무튼, 정말······ 대단하시네요."

다행히 아세리안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역시.'

그 모습에서 다시 한번 알 수 있었다.

여신인 그녀조차도 시간 회귀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상황.

그래서 께름직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왕이 날 회귀시켜준 이유가.

도대체 뭐 때문이었을까.

뭐, 어쨌든.

"운이 좋았습니다."

솔직하게 얘기해줄 순 없었기에, 그 한마디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그······ 스킬들은 어떻게 되신 거예요? 전 지금까지 포인트를 골드로 바꿔서 구입하신 줄 알았는데."

"아, 경기 중에 운 좋게 고가의 아이템들을 많이 얻었거든요. 중개 거래소에 팔아서 스킬들을 산 거였죠."

"와. 상상만 해봤지, 이런 일이 실제로 가능한 거였구나······. 안우진님이라면 분명 고위 리그까지 올라가실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고작 5개월 만에 고위 플레이어 수준까지 올라오실 줄이야······."

아세리안의 가냘픈 어깨가 잘게 떨렸다.

무척이나 흥분한 모습.

물론 이해는 됐다.

상위 플레이어가 있는 팀을 중견급으로 본다면, 고위 플레이어가 나오는 순간 대형급 팀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극악의 확률이지.'

랜덤 뽑기로 나온 플레이어들 1천 명 중에 한 명이 상위 리그로 올라올까 말까 했다.

당장 팀 투지를 예로 들어 봐도, 264 명의 플레이어가 소속되어 있지만 나밖에 상위 플레이어가 없으니.

그렇게 적은 숫자의 상위 플레이어들 중에서 고위 리그로 올라가는 자는 100명 중에 한 명 나오는 수준이다.

확률적으로 보자면 대략 10만 명을 랜덤 뽑기 해야 1명 나올 수 있다는 것.

'대한민국 현역 군인 숫자가 60만이라면, 6명 정도밖에 안 되는 거지.'

4성 장군의 숫자가 육해공 포함해서 7명이니, 그보다도 적은 극악의 비율이었다.

그만큼 오르기 어려운 곳을, 상위 리그에 올라온 지 고작 6개월 정도 밖에 안 된 내가 들어가게 생겼으니, 아세리안이 저렇게 흥분하는 것이리라.

그렇게 한동안 기쁨에 잠겨 있던 아세리안이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좀 진정이 되셨습니까."

민망하다는 표정이 된 아세리안.

"흠, 흠. 제가 너무 정신이 없다 보니, 실례를 했네요. 바쁘실 텐데 저는 이만 나가볼게요."

'슬슬 얘기를 꺼내 볼까.'

"아세리안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네?"

"혹시 골드를 투자하실 생각 없으십니까?"

"투자요? 안우진님한테요?"

아세리안이 눈을 치켜떴다.

"아뇨. 팀 투지 소속 플레이어들에게요."

"음.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요."

나는 그녀에게 구상했던 것들을 설명했다.

"훈련 시스템은 이미 완성되어 있죠. 이건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죠."

"그럼 전력을 강화 하기 위해서 남은 건 장비와 스킬 뿐이죠. 그래서 말인데, 저렴하면서도 가성비 좋은 장비, 그리고 시너지가 좋은 스킬들을 지금 있는 팀원들에게 투자할 생각이 없냐는 겁니다."

아까 전, 내가 생각했던 생각의 연장선이었다.

나와 아세리안은 엄밀히 말하면 동업자 혹은 협력자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플레잉 코치 시스템을 통해 많은 포인트를 벌게 된다면, 그녀 또한 이득을 볼 거라는 건 너무나도 뻔한 사실.

나 혼자서 골드를 투자하면 수익성이 안 나오겠지만, 그녀가 함께 골드를 대 준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음······. 무슨 취지에서 하신 말씀인지는 알겠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 손해가 너무 막심하지 않을까요?"

한동안 고민하던 아세리안이 고개를 내저었다.

나처럼 투자 대비 손해 보는 게 너무 많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에 대한 해결 방법이 있습니다. 장비를 아예 사주는 것이 아닌 대여해주는 거죠."

"대여를 해준다고요?"

"네. 효율이 좋은 장비들을 사놓고, 경기에 출전할 때만 빌려주는 거죠. 물론 경기장에서 죽으면 장비도 잃게 되겠지만, 그래도 모두에게 한 벌씩 사주는 것보단 훨씬 손해가 적을 겁니다."

"아······."

"그리고 말 그대로 투자입니다. 당장 처음에는 손해를 보겠죠. 하지만 아시지 않습니까. 결국 장비와 스킬을 지원해준 덕분에 저들 중 단 한 명이라도 상위 리그로 올라온다면 손해가 아니라는 것을."

내 말에 아세리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현재 팀 투지에 상위 플레이어가 나 하나밖에 없어서, 더 잘 알 것이다.

내가 벌어오는 포인트가, 나머지를 전부 다 합친 것보다 많다는 것을.

"만약 아세리안님이 투자하실 의향이 있다면, 저도 1천만 골드를 내놓겠습니다."

아세리안이 어느 정도 흥미를 보인다고 생각한 나는 승부수를 던졌다.

"······1천만 골드씩이나요?"

"예. 팀이 빠르게 커질수록 제가 받는 포인트도 많아지니까요."

한동안 고민에 빠져 있던 아세리안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음······ 좋아요. 안우진님께서 그런 거금을 투자하시겠다는데, 명색이 팀의 주인인 제가 빠질 수 없죠."

'됐어.'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걸로 플레잉 코치를 통해 들어오는 포인트의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질 것이다.

플레이어들에게 골드를 투자해 아이템과 스킬을 맞춰주기로 아세리안과 합의한 이후.

팜에 특수 대련장이라는 새로운 건물이 생겼다.

기존의 대련장 레벨을 만렙까지 찍어야 만들 수 있는 건물인데, 내 요청에 의해 아세리안이 지어준 것이었다.

'아주 좋아.'

그냥 싸울 수 있는 링만 존재하는 대련장과 다르게 특수 대련장에선 정글, 사막, 늪지대, 온갖 지형을 구현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더욱 실전처럼 대련을 할 수 있다는 것.

나는 새로 지어진 특수 대련장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그동안 스텟을 올리기 위해 훈련하던 시간들을 모조리 대련 스케줄로 바꾼 것이다.

이제는 훈련으로 스텟을 올리는 게 거의 불가능하니까.

밀림의 한복판.

울창한 풀숲 사이에 숨어 있던 나는 순식간에 주창범에게 달려들어 단검을 휘둘렀다.

챙! 챙! 채챙! 푹! 푹! 푹! 푹! 푹!

"헉, 허억. 타, 타임! 형! 끄악! 잠시······끅!"

방패를 쳐내고, 그의 복부에 단검을 찔러넣길 십여 차례.

도망가지 못하도록 어깨를 꽉 쥐고 있던 손아귀 힘을 풀자, 다리가 풀린 주창범이 스르륵 고꾸라졌다.

이걸로 오늘만 20번째 죽음.

피를 쏟으며 미동도 하지 않던 주창범이, 잠시 후 파르르 떨며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그의 배에 난자되어 있던 칼자국은 모두 사라져 있었다.

"하. 우진이형. 도무지 형의 돌파를 막아낼 수가 없어요."

"왜 막을 수 없습니까."

"움직임이 너무 사기에요. 방향 전환이 너무 빨라서 도저히 제가 따라갈 수가 없어요."

주창범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가 한번 고갯짓을 할 때마다 이마에 맺힌 땀이 주변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그럼 저 같은 암살자를 만나면 그냥 죽어줄 겁니까?"

"그건 아니지만······."

"후, 이번에도 제가 설명해 줘야겠군요. 해결 방법은 두 개 입니다. 첫 번째로 빠른 무게 중심 이동. 이걸 배워도 저만큼 방향 전환을 하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들어오는 타이밍에 맞춰 방패를 내밀 순 있을 겁니다."

내 설명에 주창범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한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집념이 엿보였다.

"빠른 무게 중심 이동이라······."

"두 번째는 공간 자르기입니다. 아무리 단련해도, 결국엔 자기보다 더 빠르고 날렵한 플레이어들을 만나기 마련이죠. 그럴 때 저는 그들이 필수적으로 지나야 할 공간을 차단합니다."

"필수적으로 지나야 할 공간을 차단한다고요?"

고개를 갸웃하는 주창범을 일으킨 나는 그에게 시범을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 혹은 여기. 어디에 서 있든 상관없습니다. 방패가 가로막고 있는 각도가 있기 때문에 반드시 이 공간으로 파고들어 공격해야 하죠. 자, 지금 여기 있죠? 제가 그쪽으로 파고들어 볼 테니까, 이쪽에 검을 찔러 넣어 보겠습니까?"

"넵!"

나는 최대한 느리게 움직여 주창범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내가 찍어준 포인트로 날아오는 주창범의 공격이, 어떻게 내 움직임을 막아내는지 확실하게 보여 주었다.

"아! 이런 식으로 차단한다는 거군요!"

"물론, 격렬하게 싸우는 와중에는 매 순간마다 어떤 타이밍에 어느 공간을 차단해야 하는지 계속해서 바뀔 겁니다. 그걸 파악하려면 기본적으로 상대의 움직임이 어떻게 이어질 것인지를 예측할 수 있어야 하구요. 실전에서 사용하려면 많은 훈련이 필요할 겁니다."

"네!"

"오늘 대련은 여기까지 하죠. 고건하님 보고 들어오라고 전해주시겠습니까?"

"앗!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 말에 주창범이 희희낙락하며 특수 대련장을 빠져나갔다.

강도 높은 대련에 진이 빠지던 찰나에 다음 사람 차례가 와서 무척 기쁜 모양이었다.

이곳에서 내가 팀원들에게 가르치는 건 검, 도, 창, 활, 단검 등등 다양한 무기에 대한 상대법.

그리고 돌격, 암습, 침투 같은 다양한 스타일들의 대처법이었다.

그로 인해 나는 다양한 무기술과 스타일을 연습할 수 있어서 좋고, 팀원들은 그로 인해 각종 무기술에 대한 상대법을 배울 수 있기에 일석이조였다.

"후······. 벌써 제 차례입니까."

그때, 특수 대련장 한쪽에서 고건하가 한숨을 내쉬며 나타났다.

피로감에 찌들어 있는 얼굴.

'요즘 좀 빡세게 하긴 했지.'

대련 시간이 대폭 늘어남에 따라.

다른 플레이어들이 엄청나게 갈려 나가고 있었다.

< 93화. 진일보(2) > 끝

< 93화. 진일보(3) >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 성과가 드러나는 훈련 커리큘럼과 다르게, 장비 대여와 시너지 좋은 스킬의 무상 분배는 금방 가시적인 성과를 드러냈다.

80%를 웃돌던 생존율이 90% 위로 올라온 것이다.

물론, 오른 건 생존율만이 아니었다.

―어메이징 팀 투지! 블러드나이트 239에 참가한 모든 플레이어들이 승리를 챙겨가다!

―요즘 하위 리그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팀 투지. 생존율이 무려 91.7%. 역대 2위의 생존율을 자랑하던 팀 불꽃의 79.8%보다 무려 11.9%나 높은 수치!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의 활약. 어떻게 저게 가능한 걸까? 팀 투지의 모든 것!

└와 진짜 미쳤다.. 생존율 91퍼센트가 나올 수 있는 숫자였구나..

└ㅋㅋㅋㅋ 우리 팀 생존율이 얼마였더라.. 너무 암울해서 안 본 지 한참 됐는뎈ㅋㅋㅋㅋ

└어이구 빙신들아 ㅋㅋ 니들도 많이 뽑아서 쓸만한 애들만 경기에 내보내 봨ㅋㅋㅋ 저 정도는 쉬움 ㅎ

└ㅋㅋㅋㅋ 역대 1위 기록이 쉽다고?

└응 방구석 여포 들어가. 2위부터 10위까지 고작 3프로 차이 나는데, 2위랑 1위가 12프로나 차이남 ㅋㅋㅋㅋㅋ 조금만 생각이 있다면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지 ㅋㅋㅋㅋ

└쉽다고 얘기할 거면 인증하고 까라 그럼 ㅇㅈ해줌

└ㅂㅅ이네 ㅋㅋㅋ 그럼 쓸만한 애들만 던지고, 나머지는 팜에 썩혀 두냐? 더미로 안 던짐?

└그러고 보니까 팀 투지에서 더미로 던지는 거 한 번도 못 봄;; 쟤넨 진짜 플레이어를 ㅈㄴ 잘 키운다는 뜻임..

└와 진짜 존나 궁금하다 ㅠㅠ 도대체 어떻게 키우길래 저게 가능한 거지? 훈련 매뉴얼 공유 좀 해줘라 ㅠㅠ

└생존율에 가려져 있어서 그렇지 승률도 엄청 높음. 거의 30프로에 육박하던데.. 세 명 나오면 한 명은 승리를 챙겨간다는 뜻임 ㅎㄷㄷ

경기에서 활약하는 플레이어의 숫자도 엄청나게 늘어난 것이다.

그 말은 한마디로.

'기본급도 빠르게 높아지고, 승리 수당까지 챙긴다는 거지.'

물론, 내가 특수 대련장에서 다양한 무기의 상대법과 스타일에 따른 공략법을 가르쳐 준 것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뭐, 어쨌든.

덕분에 내게 들어오는 포인트도 단기간에 엄청나게 상승했다.

저번 달에 들어온 포인트가 5,271 포인트.

그런데 이번 달엔······.

[남은 포인트 : 19,732 P]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게 882,934 포인트.

거기서 스텟을 올리는 데 878,000 포인트를 사용했다.

그리고 저번 달에 들어온 5,271 포인트를 제외하면.

'7,527 포인트나 들어왔어.'

고작 한 달 만에 42%나 성장한 것이었다.

물론 장비와 스킬이 전력을 즉시 올려주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이만한 성장율을 보이긴 힘들겠지만.

'조금 있으면 6기수 신입들을 받을 차례지.'

며칠 전 경기에서 죽은 5명을 제외하면, 현재 팀 투지의 팜엔 259명의 플레이어가 있다.

그런데 6기수로 뽑을 플레이어의 숫자는 대략 950명.

단숨에 소속 플레이어의 숫자가 천 단위로 올라가는 것이다.

초기 교육에 어느 정도 시간이 들어가긴 하겠지만.

'6기수까지 활약을 펼치기 시작하면 포인트가 어마어마하겠군.'

벌써부터 그날이 기다려졌다.

그렇게 한동안 대련장에서 살다시피 하며 2기수부터 5기수까지 골고루 갈아버리고 있을 때였다.

'쯧.'

나는 2기수 사인방, 카이로시아, 모용악, 그리고 고건하까지 일곱 명을 동시에 상대하면서도 답답함을 느꼈다.

녀석들이 빠르게 성장해가는 건 좋은데, 문제는 내가 너무 강해졌다는 데에 있었다.

이제는 저주셋을 끼고도 저 일곱을 상대로 별로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다 보니, 정작 내가 대련에서 얻는 게 없었다.

'다른 대련 방법이 없을까.'

"카이로시아님! 못 도망가게 뒤쪽으로 불의 장벽을!"

끄덕.

"어어! 돌파에 뚫렸어요! 제이스형, 커버 좀!"

"으윽, 나도 뚫렸어!"

"아, 안 돼!"

서걱!

오죽했으면 저들을 상대로 싸우는 와중에도 더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할 정도였다.

내 돌파를 저지하는 주창범과 모용악, 제이스를 가볍게 뚫어낸 나는 원거리 딜러인 카이로시아와 고건하를 단숨에 베어버리곤, 남은 이들을 서서히 정리해 나갔다.

"와, 우진이형.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제는 아예 상대도 안 되네요."

자신들이 철통같이 세워 둔 저지선을 내가 너무 가볍게 뚫어버리다 보니, 주창범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모두 수고했습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형. 오늘도 대련해주셔서 감사해요."

"가르침 감사합니다, 안우진님."

"안우진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너무나 허무하게 끝난 대련.

모두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여준 나는 특수 대련장을 나섰다.

'다시 스텟을 올리기 위한 단련이라도 시작해야 하나.'

이렇게 마의 구간을 한참 뛰어넘는 스텟을 가져본 게 처음이다 보니, 성장이 멈춘 것 같은 이 기분이 너무나 찜찜했다.

대련을 한다고 해도 설렁설렁하게 되니, 내 성장 자체에는 큰 의미가 없는 것 같고.

그렇게 고민을 하며 집무실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안우진님?"

"아, 아세리안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벤치에 앉아 햇살을 맞으며 어깨를 톡, 톡 두드리고 있던 아세리안이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피식 웃은 나는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가면을 쓰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고민을 하고 있는 게 티 났던 모양.

나는 아세리안에게 솔직하게 얘기하기로 했다.

"성장이 멈춘 것 같아 요즘 좀 답답해서요. 좋은 방법이 없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 마의 구간을 넘어서 그러시군요. 그래도 여전히 엄청 바쁘게 움직이시잖아요? 매일 수백 명이랑 대련도 하시고."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련을 하고 있긴 한데, 스텟이 너무 높아지니까 저도 모르게 쉬엄쉬엄하게 되더군요. 이건 대련이 아닙니다."

"아······."

"물론 알고는 있습니다. 이런 일을 저만 겪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손 놓고 있을 순 없으니까요."

내 말에 아세리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결국 나 스스로 이겨내야 할 문제라는 것을, 그녀 또한 알고 있을 것이다.

"분명 잘 이겨내실 거예요."

그래서 아세리안은 언제나와 같이 날 응원해줄 뿐이었다.

그날 밤.

똑똑-

자려고 침대에 누운 나는 누군가의 노크 소리에 다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누구지?'

나, 그리고 2기수 사인방, 이세연, 카이로시아, 모용악, 고건하까지.

현재 내가 사용하는 숙소엔 9명 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팀에 소속된 플레이어의 숫자가 증가함에 따라 건물을 여러 개로 나눈 것이다.

거기다 난 술을 거의 마시지 않으므로, 이 시간에 노크할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서둘러 협탁에 내려 둔 가면을 쓴 나는 방 문을 열었다.

철컥-

"······피넛엘님?"

"음. 자려고 준비 중이었던 모양이군. 잠시 들어가도 되겠는가?"

오밤중 내 방을 찾은 것은 다름 아닌, 한참 전에 퇴근했어야 할 피넛엘이었다.

"예, 들어오시죠."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문을 활짝 열고 그녀를 안내했다.

침대와 간단한 티테이블, 그리고 의자 하나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는 10평 정도 크기의 방 안.

나는 그녀에게 의자를 내어 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늦은 시간에 미안하군."

"아닙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내 물음에 피넛엘이 한쪽 다리를 꼬으며 입을 열었다.

"그대가 요즘 마땅한 대련 상대가 없어서 답답해하고 있다고 아세리안님께서 그러시더군. 맞는가?"

"······예."

"음, 그대만 괜찮다면 내가 대련 상대 역할을 해줄 수도 있다."

피넛엘의 말에 나는 눈을 치켜떴다.

그녀가······ 나와 대련을 해줄 수도 있다고?

"그게 정말이십니까?"

"그렇다."

"괜찮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제가 오히려 부탁드리고 싶은 일입니다."

사실, 그녀가 얼마나 강한지는 나도 알지 못했다.

'악마의 눈.'

띠링!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피넛엘]

[<권능:능천사의 눈><악마의 눈>을 방어합니다.]

악마의 눈을 통해 그녀의 정보를 확인하면.

그녀의 능력이 악마의 눈을 방어했다고 떴기 때문이다.

하위 리그 성계 대항전에서 고주몽이 사용한 신궁의 눈을 악마의 눈이 방어했던 것처럼.

다만 피넛엘은 내가 악마의 눈을 통해 그녀의 스텟을 스캔하려 했다는 건 모르는 것 같았다.

피넛엘이 아무런 반응도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강할까?'

한 쌍의 날개를 가진 9급 천사만 해도 어지간한 상위 플레이어보다 강할 것이다.

하급 악마인 헬리퍼가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 피넛엘은 무려 네 쌍이나 날개를 가진 6급 능천사能天使.

거의 고위 플레이어들과 비슷하거나, 아니면 그보다 더 강하지 않을까 예상만 할 뿐이었다.

"그럼 준비해서 나오거라. 나는 특수 대련장으로 가 있겠다."

"······지금 대련하잔 말씀이십니까?"

현재 시각은 밤 10시 52분.

내일 훈련을 위해 모두들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다.

나도 슬슬 잘 생각이었고.

"우리의 대련은 비밀로 진행되어야 하니, 어쩔 수 없구나."

그런데 이어지는 피넛엘의 말에 나는 그녀가 어째서 이 시간에 날 찾아왔는지 알 수 있었다.

천사.

말 그대로 우리보다 상위 차원의 존재다.

그런 존재가 일개 플레이어와 대련했다는 소문이 퍼져 봤자 좋을 게 없을 테니까.

"아뇨. 이렇게라도 대련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바로 준비해서 가도록 하죠."

그렇게 해서 나와 피넛엘의 대련이 성사되었다.

[맵 : 폐허 원형 투기장]

[3초 후 대련이 시작됩니다.]

"후우."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곳곳이 무너져 폐허가 된 건물, 경기장을 감싸고 있는 10미터 높이의 외벽.

그리고 잔잔하게 불어오는 옅은 바람까지.

그 모든 것들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2초 후 대련이 시작됩니다.]

'이 느낌이지.'

싸늘한 긴장감이 온몸을 잠식했다.

주창범이나 카이로시아를 상대했을 땐 느낄 수 없었던.

마치 경기를 뛰기 직전인 것 같은 이 팽팽하게 조여진 감각이.

너무 좋았다.

[1초 후 대련이 시작됩니다.]

맞은편에는 얇은 흉갑과 각반을 착용한 피넛엘의 모습이 보였다.

평소와 똑같은 복장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검을 썼었군.'

피넛엘이 팜으로 들어온 지 어느덧 38주.

무려 9개월이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을 처음 봤다.

그런데······.

'기세부터가 다르네.'

검을 쥐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서 형용할 수 없는 위압감이 흘러나왔다.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대련 시작!]

그녀가 나보다 한참 더 강하다는 것을.

'전력으로.'

탐색전 따윈 필요 없었다.

잘못하면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으니까.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직!

"흐읍!"

나는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바닥을 박찼다.

여유롭고, 고고하게 스타팅 포인트에 서 있는 피넛엘.

나는 그녀에게, 벽력섬전을 힘껏 내리쳤다.

채애애앵!

'윽!'

분명 내가 돌진해 들어갔음에도, 엄청난 반발력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피넛엘은 고작 한 걸음 밀려났을 뿐.

[근력 : 165(+5)(+50)] [민첩 : 165(+5)(+50)] [체력 : 145(+5)(+32)]

[정신 : 134(+5)(+30)] [지력 : 44(+10)] [마력 : 109(+5)(+24)]

'스텟 차이가 엄청나군.'

피의 강화 특전이 활성화 되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 근력과 민첩 스텟은 165.

혁명 미션을 수행할 때 당시, 모든 특전을 다 켠 것보다도 30 포인트나 높은 수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넛엘한테 밀려난 것이다.

[6급 능천사 '피넛엘'의 그림자에 표식이 등록되었습니다.]

"호오, 정말 대단하구나."

피넛엘은 본인이 밀려났다는 것만으로도 놀라 보였지만.

한 번의 격돌로 내 스텟이 마냥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피넛엘이, 이내 먼저 공격을 펼치며 달려들었다.

챙! 챙! 챙! 챙! 챙!

'팔이 저릿저릿하네.'

그녀의 검이 한 번 번쩍일 때마다 내 몸이 한 움큼씩 뒤로 밀려 나갔다.

'뭔가 이상해.'

하지만 나는 그녀와의 싸움이 생각보다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텟의 차이는 절망적이었다.

못해도 근력과 민첩에서 40 스텟 이상 차이 나는 수준.

챙! 챙! 챙!

그녀의 검을 막아낼 때마다 창의 각도가 기형적으로 틀어지고.

"어딜!"

아무리 뒷걸음질 치며 거리를 벌려 보려고 해도, 그녀는 금세 따라붙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막기가 쉬운 거지?

만약 테루오미와 스텟이 이렇게 많이 차이 났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을 테니까.

'할 만한데?'

나는 그녀가 대쉬해 올 때마다 창을 찔러 넣으며 들어오지 못하도록 견제했다.

피넛엘이 검으로 내 공격을 쳐내며 다가오면 슬쩍 외곽으로 빗겨 돌아, 공간과 거리를 확보했다.

그리고 또다시 공격.

피넛엘은 쳐낸 뒤 파고 들어온다.

그런 일들이 반복되자 나는 한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마음가짐부터가 달랐던 거야.'

매일같이 생존을 위해 콜로세움에서 피를 뿌리며 싸워야 했던 우리와 달리.

피넛엘은 그저 플레이어들을 가르치기만 하면 된다.

그러다 보니, 애초에 누군가와 싸울 일 자체가 별로 없었던 것.

'이 정도면 싸워볼 만 하겠어.'

그때부터 나는 전략을 바꿔, 그녀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 94화. 진일보(3) > 끝

< 95화. 진일보(4) >

'제법이군.'

피넛엘은 내심 감탄했다.

안우진의 근력과 민첩 스텟은 110 언저리.

그간의 경기들을 통해 그가 스텟을 상승시키는 다양한 스킬과 아이템으로 무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긴 했지만, 그래봤자 150을 조금 넘는 수준일 것이다.

반면에 자신의 스텟은 200 초반대.

애초에 안우진이 자신을 상대로 버틴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랄까.

'감각이 무척 예리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우진은 자신을 상대로 끈질기게 버티고 있었다.

특히 저 반사 신경.

자신이 대쉬를 하고자 상체를 조금 숙이는 순간, 안우진은 이미 두 걸음이나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어떻게 움직일지 미리 알고 행동하는 것 같은 느낌.

'자유자재로 바꾸는 스타일도 대단하고.'

안우진의 창은 매 순간 다른 사람이 휘두르는 것 같았다.

날카롭다가도 묵직해지고, 예리하다가도 부드러워진다.

창을 쳐내고 공간을 만들어, 어떻게든 거리를 좁혀야 하는 피넛엘의 입장에선 어느 장단에 맞춰줘야 할지 알 수가 없을 정도.

'저 뇌전도 문제야.'

창을 맞댈 때마다, 뇌전으로 이루어진 마나가 자신의 내부로 침투해 들어온다.

그렇다고 찔러 들어오는 창을 쳐내지 않을 수도 없고.

한마디로 안우진과 싸우는 동안엔 이 따끔한 통증을 계속해서 안고 가야 한다는 것.

피넛엘도 마력을 이용해 내부로 들어오는 안우진의 마력을 막아보려 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저 통증을 조금 완화시킬 뿐.

직접 무기를 맞대고 싸워보니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굉장히 까다로워.'

전 경기에서 안우진과 비교되었던 플레이어······ 테루오미라고 했던가?

그의 마음이 이해가 됐다.

공격 하나하나가 예측할 수 있는 범위 밖에서 휘둘러져 오고, 막아내도 데미지를 입으며,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나려 해도 놔주질 않는다.

아마 하위 넘버링 경기를 뛰는 상위 플레이어들은, 안우진을 상대로 큰 벽을 느껴야 했을 것이다.

어떻게 뚫고 들어가야 하는지 보이지가 않을 정도였으니.

'압도적인 스텟으로 밀어붙이는 방법밖에 없겠군.'

분석을 마친 피넛엘은 그때부터 힘으로 안우진의 창을 찍어 누르기 시작했다.

이미 그의 실력은 흠잡을 곳이 없었다.

'압도적 강자를 상대론 그런 기교들은 통하지 않는다는 걸 이번 기회에 알려줄 필요가 있겠어.'

그렇기에 현재 피넛엘이 안우진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두 가지 뿐이었다.

압도적 강자와의 전투 경험과.

'패배가 한 번도 없었던 안우진에게 패배를 경험시켜주는 것.'

챙! 콰지지직!

전력으로 창을 쳐내자, 안우진의 팔이 기형적으로 꺾여나갔다.

비슷한 수준의 상대와 싸울 때는 나올 수 없는, 힘으로 찍어 눌러 공간을 확보한 피넛엘은 곧바로 안우진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지금까지는 좁혀지지 않던 거리가, 순식간에 검이 닿을 만큼 좁혀졌다.

그러자 나타나는 수많은 빈틈.

'대련이 끝나면 어디에 빈틈이 있었는지 알려줘야겠어.'

자신의 목적은 안우진을 쓰러트리는 게 아닌, 성장을 돕는 것.

힘으로 찍어 눌렀을 때 틈이 벌어지는 포인트들을 체크한 피넛엘이 곧장 검을 찔러 넣었다.

서걱!

"뭐······!"

순간, 왼쪽 어깨가 불에 데인 듯 화끈했다.

자신이 품으로 파고들자 창을 짧게 잡은 안우진이 오히려 대쉬해 들어오며 자신의 어깨에 상처를 입히고 빠져나간 것이다.

다시 안우진과의 거리가 벌어진 피넛엘은 힐끗 자신의 어깨를 살폈다.

견갑과 흉갑 사이의 작은 틈으로 시뻘건 핏물이 똑, 똑 떨어지고 있었다.

'방금 움직임은 대체 뭐지?'

피넛엘은 안우진과 대치하며 방금 전 그의 움직임을 되새겨 보았다.

창을 쳐내자마자 안우진이 자신의 왼쪽 방향으로 움직였고.

검을 찔러 넣는 순간 그가 역으로 대쉬해 들어오며, 상대적으로 허점이 많은 자신의 어깨를 공략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움직임.

'우연일까. 아님 의도한 걸까.'

그래서 더 아리송했다.

의도한 것 치고는 움직임이 너무 빨랐고, 우연이라기엔 너무 치명적이었으니까.

피넛엘은 검을 치켜세웠다.

잘 모르겠다면.

'다시 한번 확인해보는 수밖에.'

피넛엘은 또다시 안우진의 창을 쳐내며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서걱!

그러자 이번엔 왼쪽 허벅지 쪽에서 붉은 선혈이 생겨났다.

"······!"

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돋았다.

'의도한 행동이었어.'

지금까지 안우진은.

일부러 허점을 드러내며 자신이 들어오길 유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피넛엘의 움직임이 주춤하기 시작했다.

분명 없는 공간을 힘으로 찢어가며 만들어 냈는데.

그곳 또한 자신을 유인하기 위한 미끼였던 상황.

'어디로 파고들어야 하는 거지?'

그걸 깨닫자, 안우진에게 파고들 방법이 사라졌다.

드러난 허점이 자신을 유인하는 함정인지 아닌지, 피넛엘로선 알 수가 없었으니까.

슬슬 검을 쥐고 있는 오른팔이 저릿저릿해 왔다.

초반, 안우진의 실력을 본다고 뇌전에 너무 오랫동안 무방비로 당한 여파였다.

거기다 왼쪽 어깨와 허벅지의 상처까지.

'하.'

피넛엘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괴물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 수준이었을 줄이야.

챙! 채챙! 콰지직! 챙! 챙!

피넛엘이 먼저 달려들지 못하니, 그때부터 전투가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안우진이 마음 놓고 자신을 두들기기 시작한 것이다.

'빈틈!'

중간중간 너무나 매력적인 허점들이 보였지만, 피넛엘은 몸을 움찔할 뿐 감히 파고들 수가 없었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은 허점을 만들어서 공략해도 자신이 손해를 볼 정도였는데, 저렇게 훤히 보이는 빈틈을 안우진이 그냥 보여줬을 리 없을 테니까.

분명 자신을 유혹하고 있는 것이리라.

'흠잡을 곳이 없네.'

피넛엘은 인정하기로 했다.

애초의 목적은 더 높은 스텟의 플레이어와 싸우는 법을 알려줄 생각이었는데.

안우진은 이미 자신이 알려줄 필요도 없을 정도로 완성되어 있었다.

펄럭!

'그럼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되겠어.'

네 쌍의 날개가 펴지자, 피넛엘의 몸이 순식간에 하늘로 날아올랐다.

플레이어와 싸우는 법을 안우진은 이미 마스터한 상태.

이제부터는 날개 달린 존재와 싸우는 법을 알려줄 생각이었다.

"······?"

무아지경으로 창을 휘두르던 안우진은, 그녀가 하늘로 날아오른 뒤부터 그저 자신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 위로 올라온 이상, 그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창을 던지기라도 한다면 모를까.

'생각하거라, 그대여. 날개가 달린 존재와 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늘은 날아다니는 존재들이 언제든 쉴 수 있는 피난처.

곤란한 상황이 생긴다면 언제든 이곳으로 올라오면 된다.

그렇기에 안우진이 자신을 쓰러트리려면, 하늘로 올라오지 못하게 막아야 했다.

'이것도 미리 경험시켜 주는 게 좋겠지.'

순간 날개를 오므린 피넛엘이 빠른 속도로 활강했다.

쐐애애애애애애애애액!

속력이 어찌나 빠른지, 바람이 터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그녀는 그 속도 그대로 안우진에게 달려들어 차징 공격을 때려 넣었다.

콰아아아앙!

엄청난 속도, 그리고 마력이 깃든 검이 바닥에 꽂히자 굉음과 함께 땅이 파헤쳐졌다.

"미친······!"

그녀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몸을 날린 안우진이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을 정도로 엄청난 위력.

그녀는 그대로 다시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언젠가는 안우진도 날개가 달린 존재들과 싸워야 할 순간이 있을 터.

'제대로 느껴 보거라.'

창공을 날아다니는 존재의 무서움을 똑똑히 각인시켜줄 생각이었다.

쐐애애애애액! 콰아앙! 펄럭! 펄럭! 쐐애애애애액! 콰아아아앙!

그때부터 다시 일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피넛엘이 활강 후 차징 공격을 넣으면, 안우진은 피하기 바빴던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안우진은 절대로 조급해하지 않았다.

함부로 자신의 공격을 받아내는 대신, 끊임없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장기전으로 가는 게 자신한테 유리하다는 걸 알고 있군.'

잠시 공격을 멈춘 피넛엘은 공중에 뜬 채로 안우진에게 알려줄 피드백들을 정리했다.

이대로라면 체력이 먼저 떨어지는 쪽이 불리하다.

안우진이 지금 제법 지쳐 보이긴 하지만, 이런 전투가 지속되면 결국엔 자신이 먼저 나가떨어질 것이다.

몸을 던져 한 번만 공격을 피하면 되는 안우진과 달리, 그녀는 날아오르고, 차징 공격을 넣는다.

당연히 피넛엘의 체력 소모가 더 심할 수밖에 없었다.

'반사 신경 덕분에 차징 공격은 앞으로도 잘 대처할 수 있겠어.'

피넛엘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로 했다.

그건 바로.

날아다니는 상태로 근접전을 펼치는 것.

자신이 하늘을 날게 된 순간, 안우진이 커버해야 하는 범위는 정면에서 머리 위까지 늘어나게 되었다.

아무리 그가 철벽의 수비를 자랑해도, 익숙하지 않은 머리 위까지 방어해내긴 쉽지 않을 것이다.

펄럭! 펄럭!

챙! 채챙! 챙! 챙! 콰지지직!

네 쌍의 거대 날개가 먼지를 일으키고, 검과 창이 맞부딪힐 때마다 스파크가 튀었다.

위에서 밑으로 공격을 퍼붓고 있는데도, 안우진은 침착하게 잘 막아내고 있었다.

'공중전에 대한 경험도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저 감각이 좋은 것인가?'

그러면서 공격 중간중간, 묘한 눈빛으로 자신의 날개를 바라보았다.

날개부터 처리하고자 하는 모양이었다.

'날개부터 공략하는 건 좋지 않은 방법이지.'

피넛엘은 곧장 안우진의 전략을 꿰뚫어 보았다.

아니,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생각이었다.

날개로 인해 생긴 이점을 없애고자 한다면, 누구나 날개부터 처리하고자 할 테니까.

하지만 날아다니는 존재들 또한 그런 상황을 수없이 많이 겪어봤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날개를 보호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을 거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사실.

챙! 챙! 챙! 챙! 채챙!

"흐읍!"

한동안 기합 소리와 서로의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너무 신중한데.'

안우진은 절대로 무리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하게 기회가 생기길 기다리며 수비에 전념할 뿐.

점점 줄어가는 체력 때문에 조급해할 법 한데도 불구하고.

'과감해야 할 때는 좀 더 확실하게 움직이라고 얘기해줘야겠군.'

장기전으로 갈수록 결국 그녀 쪽으로 승부의 추가 기울어지리라.

챙! 채챙! 챙!

한동안 계속해서 밀어붙이니, 안우진이 기를 쓰고 발악했다.

어떻게든 기울어진 전세를 바꾸기 위해 처절하게 창을 휘둘렀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러기엔 안우진은 이미 너무 많은 걸 손해 봤으니까.

"······!"

피넛엘의 검을 막던 안우진이 순간 휘청했다.

그의 동공이 빠르게 확장되었다.

놀랐을 때 나타나는 생체 반응.

'결국 이렇게 끝나는군.'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피넛엘이 순간적으로 안우진에게 파고들었다.

말로 설명해 주는 것보다, 직접 몸으로 겪어보는 것이 더 확실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때였다.

"······?"

뭐야.

어디 갔지?

'설마······!'

피넛엘이 순간 빠르게 등을 돌렸다.

그러자 자신의 뒤에서 창을 휘두르고 있는 안우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온몸이 쭈뼛했다.

확실한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마저도 함정이었던 것이다.

'스킬!'

안우진은 너무 신중해서 타이밍을 놓친 것이 아니었다.

다만, 더 확실한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

그 결과로, 지금 그녀는 완벽하게 궁지에 몰려 있었다.

피넛엘은 과감하게 판단했다.

검으로 창을 쳐내는 것은 이미 늦은 상황.

급소 부위만이라도 막는다.

어떻게든 치명상을 피해야 했다.

서걱!

소름 끼치는 피륙음과 함께, 왼쪽 어깨에서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펄럭이던 네 개의 날개가 잘려버렸기에, 피넛엘은 고꾸라지듯 바닥으로 착지해야 했다.

'처음부터 목적이 그거였나······!'

애초에 안우진은 자신이 급소 부위만 막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래서 그쪽으로는 공격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날개를 노린 것이다.

'하. 어이가 없군.'

분명 천사와 싸우는 것이 처음일 텐데도 불구하고.

그는 이미 싸우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안우진에게는 처음부터 가르침이란 것이 필요 없었던 것이다.

'정말 대단해.'

안우진의 눈엔 흔들림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부릅뜬 눈동자에서 아주 사소한 움직임도 놓치지 않겠다는 집념이 느껴졌다.

고작 대련일 뿐인데도, 죽기 살기로 임하고 있다는 뜻.

안우진은 정말 말 그대로, 본인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해 싸우고 있었다.

"내가 알려줄 것이 하나도 없구나."

그래서 더욱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실력이면 실력. 노력이면 노력. 집념이면 집념.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부턴 정말 조심해야 할 것이다."

팜에서는 카리스마와 강함, 완벽한 자기 관리로 플레이어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얻는 정신적 지주이자.

경기장에선 상대방에게 투사 같은 모습으로 악몽을 선사한다.

이 대단한 플레이어에게, 애초에 자신이 알려줄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부터는 권능을 사용할 것이니."

강자와의 싸움이라는 경험.

그것 하나 뿐.

"이것도 상대해 보도록."

[<섬마천사殲魔天使의 권능>을 활성화 합니다.]

그래서 피넛엘은 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기로 했다.

그게 안우진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이었으니까.

이제부터 진짜 제대로 된 싸움이 될 것이다.

* * *

띠링!

[<섬마천사殲魔天使의 권능>에 의해 일시적으로 마력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 95화. 진일보(4) > 끝

< 96화. 진일보(5) >

서걱!

피넛엘의 왼쪽 어깨에 달린 네 개의 날개를 베어버리자, 공중에 떠 있던 그녀의 몸이 한쪽으로 쏠리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후. 겨우 날개를 처리했군.'

그 모습에 나는 겨우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아무리 그녀를 몰아붙여도, 위기의 상황 때마다 하늘로 날아오르면 닭 쫓던 개 꼴이 될 테니까.

그래서는 절대 그녀를 피니쉬 시킬 수 없었다.

하지만 한쪽 날개밖에 남아있지 않은 이상, 더 이상 날 수 없을 것이다.

'이 정도면 피의 강화 특전까지 활성화 시켰을 땐 충분히 이길 수 있겠는데?'

물론 피넛엘이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다.

지금도 바짝 긴장하지 않으면 그녀의 검을 막아낼 수 없을 정도.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상대할만 하다는 게 내 감상이었다.

'이대로 소모전을 계속해서 강요하면 충분히 버틸······.'

"정말 대단하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전투에만 집중하던 피넛엘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에 따라 나도 공격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경기장에서 상대가 말을 꺼냈다면 무시하고 창을 휘둘렀겠지만.

"인정하겠다, 그대여."

'쯧.'

어찌 됐든 그녀는 적이 아니고, 내 대련을 도와주는 상대였으니까.

아무래도 이대로 대련을 끝내려는 모양.

"지금부터는 권능을 사용할 것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피넛엘의 말에 풀어지려던 긴장감이 다시 팽팽하게 조여지기 시작했다.

'권능?'

권능이란 게 정확하게 어떤 걸 의미하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플레이어들이 사용하는 스킬 같은 게 아닐까 추측되었다.

"그러니 조심하도록."

'지금까지 봐주고 있던 거군.'

그렇게 생각하자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젠장.

지금만 해도 상대하기 버거울 정도였는데, 그게 스킬을 사용하지 않고 있었던 거라니.

'쉽지 않겠군.'

당장 나만 해도 스킬을 사용하지 않았을 때와, 사용했을 때의 수준이 넘사벽으로 차이가 났다.

사용하지 않으면 사인방, 카이로시아, 모용악, 고건하에게도 질 정도.

하지만 스킬을 쓰면 마음먹고 그 일곱 명을 죽이는 데 5분도 채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때였다.

띠링!

[<섬마천사殲魔天使의 권능>에 의해 일시적으로 마력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뭐라고?'

상태창을 보는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마력을 사용할 수가 없어······?

"그럼, 다시 가겠다."

그와 동시에 쇄도해 들어오는 피넛엘의 검.

나는 그녀의 공격을 막아내며 최대한 뒤로 빠졌다.

살면서 처음으로 겪는 마력 봉인.

그렇기에 일단 현재 상태부터 점검해야 했다.

'특전들은 상관없고. 천둥의 숨결도 체력 소모로 유지되는 거라 괜찮아.'

하나하나 따져 보니, 평소 잘 쓰지 않는 침묵의 망토와 뇌신 스킬을 제외하면 크게 변하는 건 없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크게 손해를 보는 거나 다름없었지만.

챙! 채챙! 챙! 챙!

'그것만이 아니었군.'

마력이 담긴 피넛엘의 검에 나는 속수무책으로 밀려났다.

부딪힐 때마다 벽력섬전 창날의 이가 나가고 있었다.

이 상태라면 얼마 못 가 날이 깨져나갈 것이다.

띠링!

[<벽력 >이 발동합니다.]

순간 근력이 220까지 오르며 방금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던 붉은 뇌전이 뿜어져 나왔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앙!

'젠장.'

하지만 내 창은 피넛엘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민첩 스텟이 워낙 많이 차이 나다 보니, 벽력으로 증폭된 내 근력에 빠르게 반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스텟만 놓고 본다면 확실히 이전에 상대했던 플레이어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수준.

뭐, 닿았다고 해도 그녀의 근력이 워낙 높기에 큰 치명타를 주긴 힘들었겠지만.

'방법이 없군.'

뇌신과 벽력섬전, 둘 다 마력에 뇌전이 깃드는 효과였다.

한마디로 마력이 없으면 뇌전 공격을 할 수 없다는 뜻.

그렇게 되는 순간부터, 장기전은 오히려 내게 독이나 마찬가지였다.

[남은 체력 : 29%]

지금도 천둥의 숨결로 인해 빠르게 체력이 닳고 있었으니까.

어떻게든 체력을 다 소진하기 전에 승부를 봐야 했다.

'동귀어진이라도 하는 수밖에.'

나는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했다.

방법이 없다고 나 혼자 죽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내가 죽는다면 최소한 상대의 팔 한 짝이라도 가져가고 싶었다.

누가 보면 대련인데 왜 이렇게까지 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절대 나 혼자서는 안 죽어.'

그게 내가 여태껏 콜로세움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만들어 주었던 마음가짐이었으니까.

"흐읍!"

피넛엘이 내 창을 쳐내며 압박해 들어온다.

검 끝이 향하는 방향은 내 왼쪽 옆구리.

피넛엘에게 찔러 넣은 창을 회수한 나는 곧바로 창을 짧게 잡았다.

'심장만 보호하면 돼.'

그리고는 피넛엘의 검을 막으려는 척하며 손목을 비틀었다.

그녀의 검을 무시한 채 가슴으로 쏘아져 나가는 창날.

"······!"

피넛엘이 눈을 치켜떴다.

'됐어.'

지금까지 수비를 워낙 견고하게 세우고 있었기에, 설마 내가 그녀의 공격을 무시할 거란 생각을 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자 피넛엘의 검 끝도 내 옆구리에서 심장 쪽으로 옮겨갔다.

피하고자 몸을 틀어도, 피넛엘의 검은 예민하게 반응할 것이다.

결국 심장이 찔리겠지.

'왼팔을 줘야겠군.'

과감하게 판단한 나는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찔러 들어갔다.

그리고 왼쪽 팔을 피넛엘의 검에 가져다 댔다.

어떻게든 검의 경로를 바꾸기 위함이었다.

푹!

'젠장.'

하지만 마력이 담긴 피넛엘의 검은 내 왼팔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찢으며 날아오고 있었다.

조금이나마 경로를 틀게 만드는 데 실패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몸을 비트는 피넛엘.

'어딜!'

나는 그대로 손목을 비틀어, 피넛엘이 비트는 만큼 창의 궤도를 수정했다.

그렇게 서로의 심장으로 검과 창이 쏘아지려는 찰나!

"그만!"

"······?"

피넛엘의 외침에 나는 그녀의 심장을 코앞에 둔 채 멈춰서야 했다.

그녀의 검 역시 정확하게 내 심장의 바로 앞에서 정지해 있었다.

싸움이 계속되었다면 분명 피넛엘과 나, 둘 다 죽었으리라.

"고생 많았노라. 오늘 대련은 여기까지 하겠다."

대련이 끝났다는 피넛엘의 선언에, 끊어질 듯 말 듯 팽팽하게 조여진 집중력이 한순간에 풀어지고, 온몸의 힘이 쭈욱 빠져나갔다.

"헉, 헉. 고생 많으셨습니다."

나는 그대로 털썩 바닥에 드러누웠다.

체력도 체력이지만, 정신력의 소모가 너무 컸다.

한순간이라도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그녀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을 만큼, 스텟의 격차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거의 반으로 잘린 왼팔과, 피부 가죽 채로 뜯겨져 나간 오른쪽 손아귀.

얼마나 집중했는지, 그 통증들이 이제서야 느껴지기 시작했다.

격렬하게 움직였던 후유증인지, 몸이 잘게 떨렸다.

"정말······ 정말 대단하구나. 그대가 잘 싸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 수준이었을 줄이야. 오히려 대련을 하며 내가 배우는 게 많았을 정도였다."

피넛엘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린 청록색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무척 감탄한 표정.

그녀의 상태 또한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찢어진 한쪽 날개에선 계속해서 피가 흐르고 있었고, 허벅지와 어깨의 상처도 제법 벌어져 있었다.

'쉽지 않았어.'

사실, 이렇게 많이 차이 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최고의 훈련법으로만 훈련했고, 포인트도 아껴뒀다가 한 번에 사용했다.

그야말로 효율적인 성장의 정석이었달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난 약자였다.

처음부터 그녀가 권능을 사용했다면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겠지.

그녀와의 대련을 통해 얻은 게 무척 많았다.

'고위 리그는 최대한 천천히 올라가야겠군.'

피의 강화 특전까지 활성화 시킨다면 충분히 고위 리그에서도 통할 것이다.

스텟이 오를수록 특전을 통해 오르는 스텟의 양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니까.

하지만 피의 강화 특전을 킬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지금 가지고 있는 스텟만으로 고위 플레이어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찢기겠지.'

피넛엘과 다르게 그들은 처음부터 스킬을 사용할 것이다.

그리고 리그가 높아질수록 더 좋은 스킬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사실.

그들 중에는 그림자 표식급의 플래티넘 스킬을 가지고 있는 녀석들도 있을 것이고.

아마 상대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자 한숨이 흘러나왔다.

'언제부턴가 특전이 켜지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군.'

기초 스텟을 기준으로 생각했어야 했다.

콜로세움은 게임과 다르게.

한 번 죽으면 끝인 곳이었으니까.

'다음에는 피넛엘에게 처음부터 권능을 키고 싸워달라고 부탁해야겠어.'

뭐, 그녀가 앞으로도 대련을 해줄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숨을 돌린 나는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어느새 내게 존재했던 상처들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피넛엘의 상태도 처음처럼 회복된 상태였고.

이걸로 내가 얻은 피드백 정리는 끝.

이제는 피넛엘의 조언을 들을 차례였다.

"혹시 보완할 점이나 고쳐야 할 점이 있다면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내 물음에 피넛엘이 고개를 저었다.

"나로서는 그대의 단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스텟 차이가 많이 나는데도 불구하고 수비가 견고하니 뚫고 들어갈 수가 없더구나."

"······."

"기본기가 뛰어난 것도 대단했지만 내가 특히 놀랐던 건, 그대가 수 싸움에 능통하고, 스타일이 변화무쌍하다는 점이었다. 거기다 움직임도 창의적이고, 스킬도 까다로워 혁명 경기에서 테루오미라는 플레이어가 압도적으로 밀렸던 게 이해가 될 정도였다. 나도 애를 먹을 정도였으니. 아마 비슷한 스텟을 가지고 있는 플레이어 중에선 그대의 창을 받아내는 상대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생각지 못한 극찬이었다.

피넛엘은 나와의 전투가 무척 감명 깊었던 모양이었다.

"그럼 제 무엇이 가장 큰 장점이었는지라도 알려주시겠습니까."

"음, 장점이라······. 스킬도 까다로웠고, 그대의 창술도 매서웠지만 내 기준에서는 계속해서 변화하는 스타일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나마 내가 스텟이라도 높았기에 뚫고 들어갈 시도라도 가능했지, 그게 아니었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피넛엘이 꼽은 내 가장 큰 장점은 초감각이었다.

상대의 스타일을 빠르게 파악하고, 한발 먼저 패턴을 바꾸기 위해서는 감각적인 반사 신경이 필수였으니까.

초감각은 공간 전체를 읽어내는 능력.

내가 한 템포 빠르게 스타일을 바꿔가며 카운터를 칠 수 있던 것은 모두 초감각 덕분이었다.

"큰 도움이 되어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내 보는 눈이 부족한 탓이겠지."

피넛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대련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혹시 앞으로도 꾸준히 대련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음. 그대에게 도움이 된다면야 언제든지. 물론 지금처럼 비밀로 해야겠지만 말이다."

'도움이 되고말고.'

지금 상황에서 나보다 스텟이 한참 높은 상대와 싸울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았다.

그것도 죽음이라는 리스크 없이.

오늘도 이렇게 대련을 펼치는 것 하나만으로 얼마나 많은 피드백을 얻었던가.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진심을 담아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한동안은 그녀가 고생 좀 하게 될 테니까.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그동안 나는 일과 시간엔 팀원들과 대련을 하며 그들의 실력을 끌어올리는 데 집중했고, 늦은 밤엔 피넛엘과의 대련을 통해 실전 감각을 계속해서 쌓아나갔다.

"카이로시아님! 뒤쪽 공간부터!"

[핏빛 여명의 칼날!]

서걱!

"오! 형들! 드디어 제가 우진이형의 옷깃을 갈랐어요!"

콰지지지지직!

"아악! 항복! 항복!"

어느덧 징계를 먹은 지 3개월째.

매일같이 굴려댔더니, 팀원들의 실력이 쭉쭉 상승해 나갔다.

이제 웬만한 공격들은 모두 막아낼 정도.

물론 팀원들의 실력만 늘어난 것은 아니었다.

"음. 대련을 하면 할수록 상대하기가 버거워지는 구나. 이젠 시작부터 권능을 사용하지 않으면 내가 그대에게 질 정도다."

"오늘 대련도 감사드립니다."

"그대도 애썼다. 온 종일 플레이어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나와 대련까지 하느라 피곤할 텐데 어서 들어가 쉬거라."

나 또한 피넛엘과 대련을 펼치며 계속해서 성장해 나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버티기에도 급급했다면, 이젠 간간이 매서운 반격까지 넣을 정도로 발전한 것이다.

거기다 그녀와의 대련 덕분에 나보다 스텟이 높은 상대와 싸울 때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하는지 메커니즘을 정립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어지간히 스텟 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 이상, 어이없게 죽는 일은 없을 것이다.

―쿠 훌린이냐, 라그나 로드브로크냐. 그동안의 논쟁에 종지부를 찍다!

―이제는 명실상부 상위 리그의 최강자가 된 쿠 훌린. 더 이상 그의 적수가 없다.

―쿠 훌린의 아성에 도전한 라그나 로드브로크. 결국 쿠 훌린의 매서운 창을 넘지 못하다.

방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커뮤니티로 들어가니 온통 쿠 훌린의 얘기로 가득했다.

티르너노그의 네임드인 쿠 훌린과 미드가르드의 네임드, 라그나 로드브로크가 최근에 전투를 펼친 모양이었다.

그 게시글들을 읽으니, 나도 모르게 팔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 나도 충분히 강해졌기에, 녀석과 한번 겨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세려나.'

사실 나는 쿠 훌린을 실제로 만나본 적이 없었다.

1회차 시절, 내가 상위 리그로 올라왔을 때 그는 이미 고위 리그로 승격한 후였으니까.

쿠 훌린은 고위 리그로 넘어가서도 이름을 떨친, 진짜 강자였다.

'후. 조급해하지 말자.'

플레잉 코치로 들어오는 포인트도 늘어나고 있고, 피넛엘과의 대련을 통해 나 역시 계속해서 강해져 가고 있는 상황.

이대로만 계속한다면.

언젠간 맞부딪힐 날이 올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커뮤니티를 닫으려 할 때였다.

'어?'

게시글 중에 유독 눈에 띄는 게 있었다.

―상위 리그에서도 성계 대항전이 열리나?

< 96화. 진일보(5) > 끝

< 97화. 타락 천사(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