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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투두두두두!

"밀어!"

쿠구그그극!

힘찬 구령이 울렸다.

장정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어둑한 갱도 횃불에 공병들의 땀 젖은 근육이 엇비쳤다.

근육에 지렁이 같은 힘줄이 새겨졌다.

강철 실드가 서서히 전진했다.

실드가 전진하며 비운 자리에 철근으로 엮인 판벽이 남았다.

판벽이 방금 파낸 갱도의 하중을 떠받쳤다.

이번이 몇 번째로 세운 판벽일까.

그들은 알 수 없었다.

오직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만 했으니까.

숨을 고르는 대장장이와 공병들을 향해 로이드의 명령이 떨어졌다.

"자, 수고했어. 교대!"

"교대!"

"신속하게 움직여. 푹 쉬고 와. 다음 작업자들 투입!"

"투입!"

한 무리의 대장장이와 공병이 실드 뒤쪽으로 물러났다.

그렇게 비운 자리를 다른 조의 대장장이와 공병들이 채웠다.

"로이드 님은 괜찮으십니까?"

어느 대장장이가 물어왔다.

로이드는 피식 웃었다.

"왜? 걱정돼?"

"그야 당연히...."

"괜찮아. 딱히 댁들처럼 힘쓰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이렇게 덥고 공기가 탁한데 계속 계시면...."

"어이쿠, 눈물 나게 고마워라. 됐고. 일이나 시작합니다."

로이드는 손사래를 쳤다.

이쪽을 걱정스럽게 쳐다보던 대장장이가 눈길을 거두었다.

사실 별로 안 괜찮다.

'더워서 미치겠네.'

갱도 속은 더웠다.

그냥 더운 정도가 아니었다.

종일 사우나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공기마저 탁하기 그지없었다.

당연했다.

이곳은 굴착이 이루어지고 있는 갱도의 끝 부분, 막장이었다.

땅속이라 기본적으로 바깥보다 온도가 높았다.

작업자들의 몸에서 나오는 열기도 쌓였다.

게다가 원활한 환기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좀 더 기술력이 있었다면 환기 시스템도 좀 제대로 구현했을 텐데.'

터널 공사에서 환기는 중요했다.

작업자들의 안전과도 직결된 문제였다.

먼지를 많이 마시는 것도 좋지 않았지만, 무엇보다도 저산소 환경으로 인한 산소 결핍이 발생하면 생명이 위독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이번 공사에서 로이드는 그 문제를 강제 환기 방식으로 때우고 있었다.

"야! 공기 파이프 밟지 마!"

로이드가 버럭 외쳤다.

공병 하나가 화들짝 놀라며 물러났다.

그 공병이 밟고 있던 곳에 팔뚝 굵기의 철제 파이프가 놓여 있었다.

이곳 막장으로 바깥의 공기를 넣어주는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저게 있으니까 그나마 버티는 거지.'

파이프의 반대편은 갱도 바깥으로 통해 있다.

그곳에서 몇 명의 작업자들이 열심히 손잡이를 돌리고 있을 터다.

그러면 손잡이에 연결된 대형 바람개비가 돌아가며 파이프에 공기를 강제로 밀어 넣고, 그 공기가 막장까지 들어와 산소를 공급하는 식이었다.

"파이프 연결부에 구멍 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여기선 티가 안 나도 더 아래로 내려가면 중간에 공기 새는 거야. 막장까지 새 공기가 제대로 안 들어오는 거라고. 알겠어? 조심해."

"죄, 죄송합니다."

"쯧. 됐고. 집중하자."

"옙!"

아무래도 무덥고 힘들다 보니 신경이 날카로워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작업자들처럼 수시로 바깥으로 나가서 쉴 수도 없었다.

'실시간으로 상황을 체크해야 해.'

직접 체크할 것이 많았다.

우선 갱도의 진로였다.

굴착이 탄층, 즉 석탄이 매장된 층을 향해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지를 실시간으로 점검해야 했다.

'그나마 전대 영주가 기록을 꼼꼼하게 남겨놓은 덕분이지.'

고맙게도 전대 영주는 비싼 마법사를 셋이나 데려와 지질조사를 거듭 실시했다. 그때 발견한 석탄 탄층을 자세한 기록으로 남겨두었다.

덕분에 방향을 잡기가 수월했다.

하지만 지하에는 그 밖에도 위험 요소가 많았다.

'보이지 않는 전방에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 지하수라거나. 메탄가스층이라거나.'

지하수는 잘못 건드리면 기껏 굴착한 갱도가 수몰되는 수가 있었다.

게다가 메탄가스층은 더했다.

인화성 가스라서 대폭발이 일어난다.

'그러면 아주 그냥 끝이지, 끝.'

이게 석탄 광산 개발의 가장 무서운 점이었다.

석탄에는 자체의 화합물질인 MACs(methoxylated aromatic compounds)를 먹이로 삼아 메탄가스를 생성하는 메탄생성균이 산다. 그 미생물이 만드는 메탄 때문에 석탄 광맥 곳곳에 메탄가스층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필연이었다.

'그러니 잠시도 경계를 늦출 수 없어.'

최소한 하루에 세 번은 측량 스킬을 써야 했다.

지금 파고 있는 전방 5미터 범위에 무엇이 있는지를 계속 체크해야 했다.

게다가 전진하는 실드와 남겨진 판벽 사이에서 발생하는 테일보이드(tail void) 침하 현상도 경계 대상이었다.

'아무래도 실드가 판벽보다 직경이 크니까.'

전진하는 실드의 직경.

실드 내부에서 조립한 판벽의 직경.

둘 사이엔 당연히 미세한 차이가 존재했다.

그 때문에 실드가 전진하고 나면 두 물체의 직경 차이만큼 지반이 약간씩 내려앉을 수밖에 없었다.

단 몇 센티 내외의 미세한 붕괴.

사소해 보인다고 소홀히 다루었다간 모두가 손에 손잡고 오붓하게 생매장당하는 대참사가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런 꼴을 당할 것 같냐, 내가.'

무더위.

탁한 공기.

그 속에서 로이드는 집중력을 잃지 않기 위해 애썼다.

아예 웃통을 까고서 열기를 감내했다.

머리가 멍해지면 파이프에 얼굴을 대고 맑은 공기 몇 모금을 마셨다.

그렇게 며칠의 작업이 더 이어졌다.

갱도가 점점 길어졌다.

그만큼 목표인 탄층에 가까워졌다.

'조금만 더 힘내자.'

매일을 더위와 탁한 공기에 시달리니 피로가 잘 풀리지 않았다.

아침마다 겨우 힘겹게 눈을 뜨곤 했다.

하지만 자신만 참아내면 될 일이었다.

다행히(?) 로이드에겐 이런 경험은 낯선 것이 아니긴 했다.

'전엔 이것보다 더했어!'

고시원에서 지내던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천국 같았다.

당시엔 제대로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낮엔 강의실에서 코피를 흘렸다.

저녁부터 밤엔 알바하다가 코피를 쏟았다.

그러고도 끝이 아니었다.

어떻게 쪼개서든 자투리 시간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 밀려드는 과제를 소화할 수 있었다.

그나마 쪼개기 제일 만만한 시간이 수면 시간이었다.

잠을 줄이고, 또 줄였다.

만성피로는 필연이었다.

당장 쓰러질 것 같은 상태에서 좀비처럼 계속 공부하고, 일하던 나날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공사할 때만 힘들지, 저택에선 배부르게 먹고 푹 잘 수 있잖아?'

심지어 음식마저 고시원 시절과 비교도 안 되게 좋았다.

'고시원에선 기본 제공 공짜 쌀밥이랑 김치가 전부였단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없던 근성도 활활 타올랐다.

다시는 그런 시절로 돌아가기 싫었다.

앞으로 이 영지를 더욱 풍족하게 가꾸겠다는 의욕이 쑴펑쑴펑 솟아났다.

그런 의지와 의욕 덕분에 시공은 중단되지 않았다.

방울이와 작업자들도 더욱 작업에 능숙해졌다.

시공에도 탄력이 붙었다.

그리고 마침내 로이드의 측량 스킬에 목표 지점의 탄층이 포착되었다.

'드디어 나왔다.'

중급 측량 스킬로 들여다본 막장 전방 5미터 지점.

그곳에 시커멓게 자리한 탄층이 보였다.

땅속의 고오급 인삼, 역청탄이었다.

"자, 끝이 보인다! 가자!"

"가즈아아!"

"방울!"

로이드가 환호의 샤우팅을 내질렀다.

작업자들과 방울이가 한목소리로 외쳤다.

심지어 시종일관 차분하던 하비엘마저 함성을 내질렀다.

모두가 직감하고 있었다.

길고 힘겨웠던 시공의 끝이 다가왔음을.

마침내 완공의 순간이 눈앞에서 빛나고 있음을.

"빠방울!"

방울이가 역청탄 탄층을 향해 마지막 한 입의 흙을 퍼먹었다.

24화. 지저의 야수들 (2)

"방울!"

와구!

방울이가 입을 크게 벌렸다.

눈앞의 흙 한 덩이를 시원하게 베어 물었다.

흙이 사라진 공간에 시커먼 덩어리가 보였다.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흙을 퍼먹으면 그 뒤엔 또 흙이 있었다.

혹은 회백색 암석이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역청탄이다. 방울아? 스톱!"

로이드가 재빨리 나섰다.

마침내 탄층 광맥이 드러난 상황이었다.

즉, 이제부터 갱도 벽면에 매달린 것은 모두 돈이 될 석탄이라는 뜻.

방울이가 꿀꺽 삼키게 두기엔 너무나 아까웠다.

"이제부터가 중요해.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

그는 환호성을 내지르려던 작업자들을 다독였다.

큰 재난과 사고는 언제나 가장 방심하는 순간에 일어난다.

마침내 목표 달성을 눈앞에 두고서 긴장이 풀어지는 지금처럼 말이다.

로이드는 그런 사실을 가슴에 새기며 재빠르게 말했다.

"완공은 아직이야. 우린 이제 겨우 탄층 끝 부분에 접촉한 거니까. 환호는 나중에. 세레머니는 골이 확실하게 들어가고 난 후에. 알았어? 지금 작업자들 수고했어. 다음 조로 교대하자. 그리고 다음 조한테 받침 기둥 가지고 오라고 전달해."

이제부터는 세심한 작업이 필요했다.

지친 작업자들을 내보냈다.

쌩쌩한 다음 조 작업자들을 불러들였다.

그동안 로이드는 방울이에게 파란 해바라기씨를 내밀었다.

"방울아?"

"방울!"

"그래. 너도 정말 수고 많았어. 너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이렇게 빨리 구멍을 파지도 못했을 거야, 진심으로."

"방울! 빠방울!"

"하하, 알았어. 나중에 올라가면 맛있는 거 줄게. 그러니까 일단 지금은 이걸로 만족해 줄래?"

"방울!"

파란 해바라기씨를 녀석의 입에 물려주었다.

방울이가 씨앗을 야물딱지게 삼켰다.

꼴깍.

그리고 3초 뒤.

방울이가 작아졌다.

포퐁!

"방울!"

"그래, 수고했어. 고마워."

로이드는 작아진 방울이를 품속에 챙겼다.

그사이에 새 작업자들이 받침 기둥을 짊어지고 막장까지 내려왔다.

"다들 보다시피 여기, 탄층이 발견됐다. 이제부터가 중요해. 탄층을 따라 막장 공간을 넓힐 거야. 위험한 작업이니까 지시에 철저히 따라야 해. 알았어?"

작업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드는 중급 측량 스킬을 발동했다.

'측량.'

츠츠츠츠!

그의 눈동자에 희미한 빛이 서렸다.

이윽고 갱도 내의 수많은 정보가 떠올랐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막장 끝의 탄층, 그 주위의 정보도 무수히 표시되었다.

'다행히 탄층 근처의 지반은 단단한 편이네. 실드 장치를 치워도 붕괴 위험은 적겠어. 그리고 탄층이 뻗은 방향은... 좋아, 이쪽이구나.'

로이드가 작업자들을 돌아보았다.

"자, 이제부터 실드를 해체할 거야. 최대한 천천히. 조심스럽게."

실드의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뒤로 빼거나 할 수 없다.

그러니 이곳에서 조립을 푸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자, 거기 잡고. 둘, 셋, 당겨!"

철컥!

로이드의 구령에 따라 작업자들이 움직였다.

한 군데씩 차근차근 실드 장치를 해체했다.

어느 정도 해체가 진행되었을 때 로이드가 외쳤다.

"받침 기둥!"

대기하던 작업자 셋이 그의 외침에 즉시 반응했다.

받침 기둥과 위아래 판을 짊어지고 막장으로 전진했다. 실드가 치워진 자리에 받침판과 기둥을 세웠다.

막장 붕괴를 막기 위한 임시 장치였다.

"보강 작업 시작해. 다들 연습한 거 잊지 말고!"

"예!"

작업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막장 벽면을 따라 삽질을 시작했다.

막장 면적이 넓어졌다.

넓어진 면적에 맞추어 임시 받침판과 기둥을 추가로 세웠다.

채굴 공간 확보를 위한 작업이었다.

그동안 로이드는 계속해서 측량 스킬을 활성화한 채였다.

막장의 벽면과 천장에 걸리는 하중을 실시간으로 살폈다.

조금이라도 붕괴의 조짐이 보이면 모두를 대피시키기 위함이었다.

다행히 작업은 순조로웠다.

붕괴의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됐다.'

일단 제일 어려운 과정이 끝났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두면 되리라.

그리고 내일부터 추가적인 갱도 보강 공사를 진행하면?

늦어도 다음 달부턴 석탄을 채굴할 수 있을 듯했다.

"후아."

비로소 긴장이 풀렸다.

작업자들의 땀투성이 지친 얼굴에도 뿌듯한 웃음이 걸렸다.

마침내 기본적인 갱도 굴착 공사가 완료되었음이 실감 났다.

"자, 다들 고생 많았고. 일단 올라가자. 오늘은 고기와 술, 그리고 두둑한 보너스 파티다."

힘든 작업에는 그만한 보상을.

그것이 로이드가 나름으로 세운 철칙이었다.

공병대도 그간 그와 함께 작업하며 그런 방침을 어느 정도 파악한 터였다.

'후아! 이번에도 보너스 제대로겠지?'

'이번 보너스 받으면 뭐 하지?'

'기다려라, 로잘리아. 오빠가 너 학비 다 벌어간다!'

이번 공사는 그 어느 때보다 힘들었다.

온돌방이나 포장도로 작업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보너스 또한 이전보다 훨씬 두둑할 터.

그 생각에 모두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작업 도구를 정리하는 동작도 한결 가벼워졌다.

마음은 이미 갱도 밖의 환한 햇볕 아래를 거니는 듯했다.

한데 그때였다.

투둑, 툭.

드러난 탄층에서 미약한 소리가 났다.

돌더미가 부스러져 흘러내린 걸까.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그쪽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투툭, 툭!

소리가 커졌다.

한데 흘러내리는 부스러기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다시 한 번 투둑, 탄층 건너편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느낌이 이상했다.

아니, 어쩐지 쌔했다.

탄층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소리라니.

그는 반사적으로 스킬을 발동했다.

'측량.'

츠츠츠츠!

로이드는 소리가 나는 탄층을 측량 스킬로 살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눈을 휘둥그레 떠야 했다.

'어?'

탄층 너머 3미터쯤 되는 지점.

그곳에 아까까진 없던 굴이 생겨나 있었다.

아니, 직경 2미터쯤 되는 굴이 실시간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무슨? 붕괴? 아니야. 붕괴 현상이랑은 달라.'

정확히는 뭔가가 굴을 파고 있었다.

명확히 이쪽을 향해.

더욱 빠르게.

노골적으로.

투콱!

고개를 내밀었다.

"...!"

거대한 개미 머리가 탄층을 뚫고 튀어나왔다.

수박 두 배 크기의 머리.

활짝 벌어진 위턱은 팔뚝보다 길었다!

"으읏? 엇!"

로이드는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그 서슬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게 행운이었다.

철컵!

이쪽을 향해 불쑥 다가온 위턱이 코앞에서 다물렸다.

톱니처럼 서 있는 위턱 날이 횃불 빛에 번들거렸다.

저런 것에 물리면?

팔이든 다리든 단번에 잘리고 만다. 확실하다.

오싹 소름이 돋았다.

"뭐야! 왜 개미가 여기서 나와!"

"으아아악!"

작업자들 사이에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째서 느닷없이 개미가 튀어나온 건지.

그 개미가 늑대만큼이나 큰 게 말이나 되는지.

그런 것들을 따질 겨를도, 정신도 없었다.

로이드는 손을 뻗었다.

아무것이나 잡히는 대로 쥐었다. 애용하던 통짜 강철삽이었다. 들어 올렸다. 휘둘렀다.

쿠작!

날카로운 삽머리 날이 거대 개미의 머리통 옆면에 반 뼘쯤 쑤셔 박혔다.

"퀴이에에엑!"

개미가 비명을 내질렀다.

고통스러운지 고개를 거세게 흔들었다.

상처에서 쏟아져 나온 투명한 체액이 얼굴에 확 뿌려졌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모두 피해!"

반사적으로 외쳤다.

그 외침이 시작이었다.

얼어 있던 작업자들이 앞다투어 갱도 위쪽으로 달려갔다.

로이드도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럴 틈이 없었다.

"키에엑!"

이쪽의 반격을 받아 독이 오른 개미가 더욱 앞으로 돌진해 왔다.

활짝 벌어진 위턱.

이쪽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반면에 이쪽은 다 일어나지도 못해 엉거주춤한 상태였다.

'크으읏!'

피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기엔 자세가 너무나 나빴다.

위턱이 순식간에 이쪽의 목을 향해 다물리려는 게 느껴졌다.

'젠장!'

그때였다.

쐐애액!

돌연, 위쪽에서 은빛 섬광이 번득였다.

서컥! 서걱!

맹렬히 다물려 오던 위턱이 잘렸다.

뒤이어 은빛 섬광이 개미의 정수리를 파고들었다.

콰작!

위에서부터 내려 찍힌 검이 개미의 머리를 관통했다. 송곳처럼 바닥에 꽂아 버렸다. 비틀었다. 와작, 소리와 함께 개미 정수리 외피가 깨졌다.

"키에엑!"

한껏 버둥대던 개미가 축 늘어졌다.

검이 쑥 뽑혔다.

손이 이쪽으로 내밀어졌다.

"괜찮으십니까?"

"...."

굳은살 가득한 강인한 손바닥.

어둑한 광산에서도 여전히 서늘하고 침착한 표정.

하비엘이었다.

녀석이 손을 내밀고 있었다.

맞잡고 일어났다.

"저거, 대체 뭐야!"

"모르겠습니다. 다만-"

"다만?"

"산맥 건너편 황야에 서식한다는 야수 개미가 아닐까 합니다."

"야수 개미? 그놈들이 왜 여기서 나와?"

진심 황당했다.

야수 개미는 산맥 건너편 동쪽 황야에 서식하는 놈들이었다.

그런데 지하라곤 하지만 산맥 너머 이쪽에 출몰하다니.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사람들의 인식과 달리 개미굴이 지하를 통해 이 근처까지 뻗어와 있었던 거겠지요. 그게 아니라면...."

"아니라면?"

또 한 마리의 야수 개미가 탄층 구멍으로 나왔다.

이쪽을 보자마자 곤봉 같은 더듬이를 흔들며 돌진해 왔다.

"우리가 갱도를 파는 소리를 감지하고 이쪽으로 마주 굴을 파면서 다가온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콰작!

하비엘의 검이 다시금 은빛 섬광을 뿌렸다.

달려들던 개미 머리통이 세로로 쪼개졌다.

그러나 그 뒤에는 다른 개미가 또 있었다.

즉, 구멍을 통해 개미가 끝도 없이 나올 태세였다!

"젠장."

절로 욕이 나왔다.

아무래도 하비엘의 두 번째 추측이 맞는 듯했다.

'아까 탄층을 발견했을 때는 그 뒤에 굴 같은 건 없었어.'

확실했다.

측량 스킬로 막장 주위를 계속 살폈다.

그땐 개미굴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 이후에 실시간으로 굴착되는 개미굴과 거기서 나온 야수 개미를 보았을 뿐.

'어떡해야 하지?'

이건 완전히 예상 밖의 일이었다.

하지만 대비하지 못했음이 뼈아팠다.

'전대 영주의 지질 조사에선 개미굴을 발견했다는 기록 같은 건 없었어. 그래서 방심했던 거야, 내가.'

물론 기록에 없었던 걸 어떻게 대비하느냐는 생각이 들긴 했다.

하지만 어쨌건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이었다.

어떻게든 수습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막아야 하나?'

혼란과 피로.

더위와 탁한 공기.

그 속에서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개미들이 갱도 밖으로 나가면 끝장이야.'

갱도 출구는 영지로 이어진다.

거기로 저 개미들이 나가면?

영지의 병사들로는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기엔 개미들의 숫자가 너무나 많을 테니까.

최악의 경우엔 영지 전체가 쓸려나갈 수도 있다.

감당 불가능의 재난이 벌어지는 셈이다.

'그건 안 돼.'

상상만으로도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그런데 하비엘은 그런 이쪽의 모습을 잘못 해석한 듯했다.

"로이드 님, 정신 차리십시오."

퍽!

별안간, 녀석의 주먹질이 날아왔다.

이쪽의 명치를 가볍게 쿡, 찔러 쳤다.

"...쿠억!"

숨이 콱 막혔다.

녀석 나름으론 약하게 친 거였겠지만, 방심하다가 얻어맞은 터라 꽤나 아팠다.

"너, 무슨 짓이야!"

"이런 상황에서 공포에 사로잡히면 곤란합니다."

"안 무섭거든? 머리 굴리고 있던 거거든?"

"그럼 뭔가 방법이라도 떠올려 주십시오."

쉬릭, 콰작!

차분하게 대꾸하는 와중에도 하비엘은 개미떼를 막아내고 있었다.

숨소리 한 번 흐트러지지 않았다.

녀석의 검이 한 번 번득일 때마다 어김없었다.

개미 한 마리의 목이 날아가거나 머리가 쪼개졌다.

하지만 그런 하비엘의 상체는 이미 땀투성이였다.

셔츠마저 벗어 던진 근육질 몸이 땀에 젖어 맥동쳤다.

'이대론 답이 없다. 아무리 하비엘이라도 한계가 있어.'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물론 하비엘은 강하다.

그러나 이곳은 무덥고 탁한 공기가 가득한 막장이었다.

제아무리 하비엘이라도 몰려드는 야수 개미떼를 끝없이 막아내려다간 체력의 한계에 부딪힐 터였다.

'녀석이 버텨주는 동안 방법을 떠올려야 해.'

개미떼를 막아낼 방법.

영지로 올라가지 않도록 저지할 방법.

그러면서도 모두의 피해가 최소화될 방법.

'여기서 갱도를 무너뜨릴까? 아니, 불가능해. 실드 공법으로 세운 판벽이 너무 튼튼해서, 한두 군데를 손상시킨다고 무너질 리가 없어. 게다가 그렇게 무너뜨려 봤자, 이 개미들의 굴 파는 속도로 봐선 영지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어.'

로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괜히 그러다간 개미는 못 막고 개죽음만 당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니 애매한 방법으론 안 돼. 개미 군체를 확실하게 제어하면서 한 번에 몰살시킬... 어라? 잠깐.'

급박한 상황.

그 속에서 뭔가가 번득 떠올랐다.

로이드는 고개를 들었다. 하비엘을 보았다. 외쳤다.

"어이, 하비엘! 너, 이대로 돌파 가능하겠냐?"

"돌파라니, 무슨 말씀이신지."

촤악!

달려드는 개미의 더듬이를 단숨에 잘라 버리며 하비엘이 되물었다.

로이드가 외쳤다.

"무슨 말씀이긴! 정면으로 돌파하면서 전진하는 거, 할 수 있겠냐고!"

"이 개미떼를 향해서 말입니까?"

"어!"

"...."

하비엘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개미 머리통 쪼개는 일도 바쁜 판국에 그게 무슨 미친 소리냐는 눈빛을 던져왔다.

로이드는 더욱 태연하게 외쳤다.

"그게 모두가 살고 개미떼를 막을 유일한 방법인 거 같거든! 안 믿어지냐? 아님 쫄리냐? 쫄리면 뒈지시든가!"

"지금 제가 겁을 먹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당연하지!"

"...그런 오해는 불쾌하군요."

"그럼 가능하긴 한 거야?"

"당연합니다. 한데 이 위치를 지키면서 막는 것도 아니고 돌파라니. 어디까지 돌파하면 되는 겁니까?"

"개미굴 안쪽까지 쭈욱!"

"설마, 계속 말입니까? 끝까지?"

"어!"

"정말로 따로 염두에 둔 생각이 있으신 겁니까?"

"물론! 기똥찬 방법이 있거든!"

"...."

"왜 그래? 나 못 믿겠냐?"

"그 무슨 당연한 말씀을."

"야! 넌 이 와중에까지...."

"부디 바라건대, 그 기똥찬 방법이라는 게 미친 시도가 아니었으면 좋겠군요."

각오를 다진 걸까.

혹은 이쪽의 말을 듣는 것 외에 별다른 수가 없으리라고 직감한 걸까.

우드득!

검을 쥔 하비엘의 손아귀에서 스산한 소리가 났다.

녀석의 목소리도 전에 없이 살벌해졌다.

"꼭 붙어서 따라오십시오. 어영부영하다 저 놓치지 마시고."

치명적으로 번득이는 검의 폭풍과 함께 하비엘의 돌파가 시작되었다.

쉬리릭, 촤칵, 스컥!

순간, 로이드는 하비엘의 번득이는 검이 정말로 아름답다고 느꼈다.

달려들던 개미 다섯 마리가 검풍에 휩쓸려 조각났다.

그 사이로 하비엘이 뛰어들었다.

한 마리 은빛 짐승 같은 기세였다.

로이드도 횃불과 강철삽을 양손에 나누어 움켜쥐고 뒤를 따라 달렸다.

"달려! 멈추지 마!"

순식간에 탄층에 난 구멍을 넘어 개미굴 안쪽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개미떼는 갱도 위쪽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대신 개미굴에 난입한 침입자인 이쪽을 추격해 왔다.

둘은 앞을 막아서는 병정개미를 베고, 쪼갰다.

쉼 없이 개미굴 속을 뛰고, 또 내달렸다.

"계속 아래로!"

내달리는 내내 로이드는 측량 스킬로 개미굴 곳곳을 샅샅이 살폈다.

'어차피 이거 아니면 방법이 없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해보자.'

그가 찾는 목표는 단 하나.

개미굴 깊숙한 곳 어딘가 매장되어 있을 메탄가스층이었다.

25화. 지저의 야수들 (3)

"남작님! 큰일, 크, 큰일이 났습니다!"

화창한 정오였다.

영지의 사병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예절이고 격식이고 모조리 어기며 남작의 집무실로 뛰어들었다.

잠시 후, 남작이 마시던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챙그랑!

"...뭐라고?"

남작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다시 한번 말해보게. 뭐라고? 야수 개미가?"

"그렇습니다, 남작님. 야수 개미가 출몰했습니다. 로이드 도련님이 굴착하던 갱도 안에 말입니다."

"그럼 로이드는?"

"함께 있던 작업자들의 말로는 뒤에 남았다고 합니다. 모두에게 얼른 피하라고 외치면서...."

"혼자 말인가?"

"아닙니다. 아스라한 경이 함께 남았습니다."

"...."

보고를 마친 병사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동쪽 산맥 너머에 서식하는 야수 개미.

놈들은 무서운 존재였다.

개체 하나하나가 늑대보다 훨씬 강했다.

그 숫자도 너무나 많았다.

두려움을 몰랐다.

조직적이었다.

즉, 놈들에게 한번 찍히면 살아나올 방법이 없다고 보아야 했다.

특히 땅속에서 맞닥뜨렸을 땐 더 절망적이었다.

"바이에른 경이 우선적으로 병사들을 소집했습니다. 갱도 앞에 집합시켜둔 상태입니다. 갱도를 폐쇄할 준비와 함께 말입니다."

그게 최선이었다.

만약 야수 개미가 갱도를 통해 올라온다면?

놈들은 사냥터를 초토화시킨다.

영지민들이 몰살을 당할 것이다.

이곳의 사람은 물론이고 가축까지 모조리 사냥당해 고기 경단이 될 것이다. 운이 좋으면 산 채로 마비되어 저장고에 비축되거나, 혹은 개미 군집 애벌레의 맛있는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런 사태를 막으려면 늦기 전에 갱도를 폐쇄함이 옳을 터였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남작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

"영주님?"

"...."

"저, 바이에른 경이 영주님의 지휘명령을 꼭 받아오라고...."

병사가 쭈뼛쭈뼛 눈치를 살폈다.

남작의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남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집무실 벽장을 열었다. 그 안에 보관되어 있던 갑옷을 꺼내 입기 시작했다.

"저, 영주님?"

그러나 프론테라 남작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집무실에는 오로지 남작의 무장 갖추는 소리만이 대답 대신 울려 퍼질 뿐이었다.

철컥, 철걱! 꾸득!

철판 덧댄 브리간딘을 걸쳤다.

은빛 번득이는 폴린으로 무릎을 감쌌다.

데미그리브를 신고, 베서닛 투구를 썼다.

쇠테 두른 방패를 등에 메고, 손때 묻은 롱소드를 갑옷 허리에 걸었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전투를 위한 무장을 갖추는 모습이었다.

한데 그 당사자가 최소 10년은 검을 잡은 적 없는 남작이라는 점이 병사에겐 뜻밖이었다.

"저기, 영주님? 지금...."

"가도록 하세."

"예?"

"못 따라오면 버리고 가겠네."

콰앙!

남작이 집무실 문을 거의 걷어차듯 거칠게 열며 달려나갔다.

복도를 뛰고, 마구간으로 달려가, 말 등에 올랐다.

"하!"

말 옆구리를 걷어찼다.

그동안 남작의 머릿속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만이 가득했다.

'로이드, 조금만 기다려라. 버텨라. 꼭!'

광산을 향해 박차를 가하는 남작의 마음이 더욱 다급해졌다.

투두두두! 쉬익!

거친 발걸음이 땅을 박찼다.

맹렬한 검격이 공간을 갈랐다.

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콰작!

"키에에엑!"

내리친 롱소드에 야수 개미 한 마리의 머리가 수직으로 쪼개졌다.

비명과 함께 투명한 체액이 튀었다.

하지만 그땐 이미 롱소드가 머리통에서 뽑힌 지 오래였다.

다음 목표물을 찾아 차분하고도 서늘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스칵! 카각! 푹!

옆으로 베며 몸을 돌린다.

하단을 걷어내 막는다.

찌르고 뽑으며 올려친다.

올려치는가 싶더니 질풍처럼 전진한다.

'좌로 한칼, 우로 한칼, 좌상단 베기에 옆 찌르기, 그다음엔 내리치기인가?'

좁은 갱도를 달리며 로이드는 혀를 내둘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두 발짝 앞에서 돌진하고 있는 하비엘.

녀석의 검격을 보고 있자니 감탄이 절로 터졌다.

'진심 쩐다. 저게 진짜 기사의 실력이구나.'

예전에 겨루었던 노이만 경과는 차원이 달랐다.

모든 동작에 막힘이 없었다.

물이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동시에 맹렬하고 거침이 없었다.

게다가 연결 동작 사이에는 눈으로 파악하기도 어려운 미세한 잔 동작이 엄청나게 많았다. 찰나의 번득임. 수많은 페이크와 치명적인 공격이 현란하게 섞여 있었다.

한마디로 하비엘의 검술은 마치,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 같았다.

그 유려하고도 파괴적인 검격 앞에 야수 개미들이 말 그대로 썰려나갔다.

"...라지만! 너 안 힘드냐!"

로이드가 뒤를 따라가며 외쳤다.

앞서 검을 휘두르며 하비엘이 이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힘듭니다."

숨결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대답.

목소리로만 보면 전혀 안 힘든 것 같다.

하지만 로이드는 알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없어.'

하비엘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사람이다.

사람에겐 체력의 한계가 있다.

영원히 싸울 수는 없다.

만약 녀석이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면 마나의 끝없는 순환 덕분에 체력의 제약이 풀리겠지만, 아직은 그렇지 못하다.

지금은 그나마 아스라한 심법으로 지치는 걸 늦추고 있을 뿐.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아 한계를 드러내고 말 것이다.

"로이드 님이 말한 기똥찬 방법이라는 거, 아직입니까?"

스카각!

앞길을 막는 개미 한 마리를 머리 가슴 배 세 조각으로 분리시키며 하비엘이 물어왔다.

로이드는 미간을 찡그렸다.

"아직!"

"언제쯤 되는 겁니까?"

"나도 몰라. 최대한 찾고 있어!"

"아직도 찾고 있는 거라니...."

"잔말 말고 진로 개척이나 해. 최대한 많이 움직여야 확률이 올라가는 거니까!"

로이드가 빽 외쳤다.

그의 외침은 사실이었다.

지금도 그는 중급 측량 스킬을 한계까지 발동하는 중이었다.

측량 스킬의 옵션 기능으로 개미굴 통로에서 5미터 범위의 토질을 끊임없이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애타게 찾는 목표.

그것은 바로 개미굴 아래 어딘가에 묻혀 있을 메탄가스층이었다.

'분명 있다. 여긴 역청탄 광맥이 곳곳에 박혀 있는 곳이야. 그러니 메탄가스, 분명히 있을 거야.'

로이드는 계속해서 뛰었다.

하비엘을 앞세우고서 개미굴 구석구석을 내달렸다.

측량 스킬의 측량 범위를 최대한 절약하며 사방을 탐지했다.

그렇게 얼마나 열심히 탐색했을까.

마침내 로이드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찾았다!'

아래쪽 5미터 지반 속.

그곳에 도사리고 있는 메탄가스가 약간 보였다.

본체는 아니었다.

줄기?

그 정도는 되어 보였다.

'하지만 여기선 당장 접촉할 방법이 없어.'

자신이 있는 굴과 메탄가스층 줄기.

그 사이에는 5미터 가량의 흙과 바위가 있었다.

삽 한 자루로 파내려면 한세월은 걸릴 두께였다.

그렇다고 방울이를 거대화시킬 만큼 굴이 넓지도 않았다.

"하비엘! 저쪽으로!"

로이드가 한쪽 통로를 손가락질했다.

메탄가스층 줄기가 이어져 있는 방향이었다.

"이제부턴 내가 가리키는 쪽으로만 달려!"

"알겠습니다. 다만-"

"다만?"

"우리, 밖으로 나갈 수는 있는 겁니까?"

"...."

차분하게 개미를 썰며 물어오는 녀석의 눈초리.

이미 여기서 최후를 맞이할 각오를 마친 눈빛이었다.

착 가라앉은 그 눈길 앞에서 로이드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왜? 겁나냐?"

"겁이 나는 건 아닙니다만."

"그럼?"

"조금 억울합니다."

"이런 곳에서 죽을까 봐?"

"아닙니다."

"그럼 혹시 숙소 침대 밑에 야한 그림이라도 숨겨놨어? 그거 들킬까 봐?"

"물론 아닙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하비엘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로이드 님 같은 분과 함께 죽을까 봐서요."

"헐."

"기사로서의 욕심이랄까요. 기왕이면 좀 더 가치 있고 존경할 만한 분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기사가 맞이할 수 있는 가장 명예로운 죽음이 아닐까 합니다."

"허허, 그래서 나 같은 놈이랑 같이 손에 손잡고 오순도순 개죽음당하는 게 억울하시다?"

"정확한 요약이십니다."

"그래? 이제 아주 막 나가시겠다?"

"어차피 여기서 같이 죽을 신세 아닙니까."

"저승길 동무끼리 본색을 드러내겠다는 거로구만?"

"이 정도쯤은 솔직하게 털어놔야 조금은 덜 억울할 것 같아서 이러는 겁니다."

카각! 턱! 스걱!

여전히 개미떼는 이쪽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정면에서는 커다란 병정 야수 개미가 앞을 가로막았다.

그럴 때마다 하비엘은 쉼 없이 내달리며 앞을 막는 개미를 베고, 또 베었다.

물론 로이드도 뒤를 숨 가쁘게 따랐다.

양손에 든 횃불과 강철삽으로 뒤에서부터 추격해 오는 개미떼를 열심히 견제했다.

그렇듯 둘은 몸으로는 개미떼와 싸웠다.

입으로는 서로 투닥거렸다.

"하! 그래! 기왕 죽는 거 야자타임 좀 해보자고?"

"야자타임이 뭡니까."

"계급장 떼고 하고 싶던 말 다 하는 거! 읏차!"

"그거, 좋군요. 흡!"

카캉! 스칵!

왼쪽 통로로 뛰어들었다.

검을 내찌르고, 횃불을 치켜들며, 삽을 휘둘렀다.

둘 사이의 설전도 계속 이어졌다.

"그럼 나부터 시작할까! 너, 인간적으로 재수 없어!"

"어째서입니까?"

"너무 잘생겼잖아!"

"제 얼굴은 타고난 것입니다만."

"그래서 재수 없는 거라니까?"

"말씀, 다 하셨습니까?"

"안 했다면?"

"그래도 제 차례는 챙기겠습니다.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면 억울하니까요."

"어쭈. 시간 좀 아껴보시겠다?"

"그렇습니다."

"그거 좋네. 시간은 금이니까, 친구. 물론 넌 셋 다 없겠지만!"

"...."

"우냐? 응? 왜 두들겨 맞고만 계셔?"

"문득 당신이 불쌍하게 느껴져서입니다."

"헐, 왜?"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니 제 젖꼭지가 당신 얼굴보다 잘생긴 거 같거든요."

"허럴...."

생각보다 강력한 한 방이었다.

로이드가 이를 악물고 반격했다.

"하! 그런데 넌 그런 얼굴로 지금까지 뭐 하고 살았길래 여자친구 하나 없었을까?"

"열심히 검술 훈련에 매진하며 살아왔습니다만."

"아하. 그래서 모태 솔로로 살아오셨다?"

"여자친구가 없는 건 로이드님도 마찬가지이실 텐데요."

"뭐?"

"제가 알기론 그렇습니다. 게다가 저는 사실-"

"사실?"

"고백 편지는 제법 받아봤습니다."

"뭐? 고백 편지?"

"그렇습니다."

여전히 검을 휘두르며 싸우는 하비엘.

녀석의 눈빛에서 정체 모를 자신감이 엿보였다.

로이드는 강철삽으로 개미의 아래턱을 막아내며 외쳐 되물었다.

"몇 번?"

"으음, 대강 숙소에 모아둔 게 두 상자쯤 되는 것 같습니다만."

"거짓말!"

"사실입니다."

"그게 말이 되냐? 우리 영지 인구가 몇 명인데! 영지민 중에 성별이 여성인 사람 거의 모두한테 고백 편지를 받아야 그 정도쯤은 쌓일 거 같은데?"

"훗."

"솔로 무시하지 마!"

"이빨 닦을 땐 칫 솔로."

"...."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도레미파 솔로시죠?"

"...."

"오늘도 솔로 밤을 지새우실 예정이십니까?"

"...고릴라 암내 같은 놈아, 거기까지!"

로이드가 빽 외쳤다.

말빨에 밀려서?

아니었다.

마침내 목표했던 지점에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설전을 이어가고 있던 하비엘도 그걸 직감했는지 눈빛이 달라졌다.

"여깁니까?"

"어."

로이드가 지면을 살폈다.

측량 스킬로 엿보이는 지면 아래쪽.

약 1.5미터 남짓한 아래에 펼쳐져 있는 공동이 보였다.

하지만 그 공동은 그저 빈 공간이 아니었다.

'메탄가스층이다. 엄청 커.'

스킬로 엿보이는 공간은 전체 메탄층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제대로 왕건이(?)를 찾아낸 셈이었다.

로이드가 빠르게 말했다.

"이제부터 난 여기서 땅을 판다. 그동안 날 지켜."

"알겠습니다."

여기까지 온 마당이다.

믿을 건 서로밖에 없는 상황이다.

의문을 가질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그때부터였다.

로이드는 삽으로 통로 아래를 미친 듯이 파기 시작했다.

하비엘은 양쪽에서 달려드는 개미떼를 견제하며 로이드를 지켰다.

한데 다음 순간이었다.

"쿼어어어억!"

통로 한쪽에서 엄청난 괴성이 들려왔다.

뒤이어 통로 전체를 쿵쿵 울리며 커다란 무언가가 다가왔다.

다른 병정 야수 개미보다 두 배는 거대한 머리.

통로를 아예 꽉 채울 정도의 몸집.

롱소드보다 길고 날카로운 위턱.

'여왕개미?'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하지만 로이드는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여왕개미 따위는 목표가 아니야!'

이건 군주의 목을 베기만 하면 승리하는 삼국지 게임이 아니다.

설령 여왕개미를 잡는다 해도 나머지 개미 군락 전체가 동요하는 일 따윈 없을 것이다.

운이 나쁘면 오히려 더욱 큰 분노를 사기만 할 뿐.

지금은 원래의 목표에 집중하는 게 최선이었다.

"제대로 막아! 내가 이거 다 팔 때까지!"

"알겠습니다."

하비엘이 롱소드를 세워 들었다.

여왕개미와 이쪽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 모습에 분노한 것일까.

여왕개미가 돌진해 왔다.

"쿠어어어어억!"

쿵! 쿠쿠쿠쿠쿠!

아예 통로를 짓뭉갤 듯한 기세였다.

아니, 여왕개미는 실제로 비좁은 통로 벽면을 강제로 짓뭉개고 넓히며 돌진해 왔다.

그러나 하비엘은 물러나지 않았다.

"흐읍."

한 차례 호흡을 고른다.

단 한 모금의 호흡으로 사방의 마나가 흔들린다. 요동친다. 그에게 집중된다. 세 줄기의 트리플 써클로 모여든다. 증폭된다. 쏟아져 나간다.

쐐애액! 카캉!

트리플 써클의 회전을 담은 롱소드.

괴력이 실린 한 쌍의 키틴질 위턱.

두 무기가 서로를 짓이길 기세로 충돌했다.

첫 충돌은 무승부였다.

카가가각!

"...!"

"쿠웍?"

엇비슷한 힘으로 대치하게 된 롱소드와 위턱.

서로의 무기를 사이에 두고 하비엘이 눈을 부릅떴다.

여왕개미가 위턱 속에 자란 섬모를 흠칫 곤두세웠다.

백중지세.

예상을 넘어서는 상대의 힘에 서로 놀랐다.

먼저 움직인 쪽은 여왕개미였다.

"쿠억!"

후우우웅!

커다란 더듬이 한 쌍이 휘둘러졌다.

오함마나 야구방망이보다 크고 묵직한 곤봉, 그 자체였다.

"...!"

하비엘이 재빨리 몸을 숙였다.

탄력을 살려 롱소드를 올려쳤다.

여왕개미도 맞서 위턱을 휘둘렀다.

그때부터였다.

하비엘과 여왕개미.

두 호적수이자 짐승은 서로를 향해 자신의 모든 공격 본능을 쏟아냈다.

막고, 베었다.

차고, 때렸다.

찍고, 밀었다.

밀렸다가, 후려쳤다.

피했다가, 올려쳤다.

뒹굴었다가, 달려들었다.

하지만 상황은 점점 하비엘에게 불리하게 흘러갔다.

'녀석, 지치고 있어!'

로이드의 삽질이 더욱 바빠졌다.

이쪽도 마찬가지로 지친 상태였다.

하지만 목숨 건 싸움을 이어가는 하비엘은 더할 터였다.

'더! 조금만 더!'

하비엘이 쓰러지면 이쪽도 끝이다.

이쪽이 끝나면 계획도 실패하고 만다.

그러면 굴착된 갱도를 통해 야수 개미가 영지에 풀릴 것이다.

'젠장, 갱도 너무 튼튼하게 만들지 말걸!'

이제 와서 무너뜨리기엔 늦었다.

시도해 봤자 일부만 간신히 무너질 뿐.

그 정도 붕괴로는 야수 개미를 막을 수 없을 것이 확실했다.

'그러니 반드시 성공해야 해.'

로이드의 삽질이 더욱 맹렬해졌다.

그의 삽이 춤출 때마다 흙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의 목덜미와 등을 따라 땀이 쉼 없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삽이 목표지점까지 땅을 파냈다.

푸슈슷!

'됐다!'

구덩이 속에서 기체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메탄가스 분출이었다.

로이드는 얼른 삽을 챙겼다.

하비엘을 향해 외쳤다.

"인마! 일루 와!"

그 외침에 하비엘이 즉시 반응했다.

강력한 일검으로 여왕개미를 뿌리치고 이쪽으로 달려왔다.

녀석이 달려오길 기다렸다.

반대편 통로로 함께 내달렸다.

뒤에서 여왕개미가 맹렬히 쫓아왔다.

뒤를 돌아보았다.

여왕개미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로이드가 피식 웃었다.

여왕개미를 향해 횃불을 던졌다.

횃불이 여왕개미의 머리에 맞았다.

탁, 소리와 함께 허무하게 튕겨 나갔다.

뱅글뱅글 허공을 돌며 여왕개미 뒤쪽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기체, 메탄가스와 만났다.

메탄가스와 불꽃이 섞였다.

맹렬한 화학 반응이 시작되었다.

1몰(mol)당 891 kJ의 에너지가 발생했다.

투확...!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대폭발이었다.

26화. 더블 써클 (1)

투둑, 툭.

흙더미가 떨어졌다.

눈꺼풀을 두드렸다.

속눈썹이 간지럽다.

그런데 손을 올릴 수 없다.

고개를 흔들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된다.

'아, 딱 알딸딸한 기분이네. 나쁘진 않은데.'

눈앞이 온통 흔들흔들.

시야가 완전 어질어질.

머릿속은 띵하다 못해 멍했다.

그래서인지 헛것이 필터도 없이 마구잡이로 보였다.

'뭐야. 컴퓨터 그래픽이 실감 나게 다가오네.'

눈앞에 누군가가 다가와 있었다.

벽면의 발광 버섯에 은은하게 비치는 모습.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사람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비주얼이 이 세상 사람의 것이라 보기엔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쩔었기 때문이었다.

'핵존잘.'

회색이 감도는 은발에 파란 눈동자.

이목구비는 그 자체로 예술이었다.

심지어 얼굴 곳곳에 그을음이 잔뜩 묻어 있어도 그랬다.

흘러내린 땀이 그을음과 섞여 덕지덕지 말라붙어 있는데도 잘생겼다.

오히려 귀족적인 인상과 대비되는 또 다른 마성의 매력을 뿜뿜하는 느낌이었다.

'아 씨, 보다 보니까 짜증 나네.'

사람이 저 정도로까지 잘생긴 건 반칙이다.

존재 자체로 중대한 생태계 교란이다.

그러니까 저건 사람이 아니어야 한다.

CG다.

그냥 먹고, 자고, 말하는 CG라고 믿자.

안 그러면 자괴감이 끝도 없이 쑴펑쑴펑 피어날 거 같으니까.

"...이드 님. 괜찮으십니까?"

말 걸지 마, CG야.

나 지금 어지러워.

토할 거 같아.

하지만 눈앞의 CG, 아니, 하비엘은 이런 이쪽의 속도 모르고 손을 들어 올렸다.

다짜고짜 이쪽의 뺨을 찰싸닥 후려쳤다.

쫘압!

"정신 차리십시오."

"...."

촤압!

"여기서 눈 감으시면 안 됩니다."

"...스톱. 거기까지."

겨우 정신이 조금 들었다.

황급히 입을 열었다.

3연 따귀를 날리려던 하비엘의 손이 멈추었다.

비로소 녀석의 얼굴에 안도감이 떠올랐다.

"괜찮으십니까?"

"응, 안 괜찮아. 너 때문에."

"예?"

"방금 따귀 찰지더라?"

"감사합니다."

"헐."

"일어나실 수 있겠습니까?"

"좀 어려울 거 같은데. 방금 누구한테 감정 실린 따귀를 맞아서."

"저는 필요한 조치를 취했을 뿐입니다만."

"아 네, 그러시겠죠."

"이만 일어나시지요."

하비엘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녀석의 부축을 받을 수는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녀석도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어이? 너? 혹시 다리 다쳤냐?"

"예."

"어딜 다쳤는데."

"발목이 접질린 것 같습니다."

녀석이 자신의 발목을 가리켰다.

통증이 심한 걸까.

로이드는 뒤늦게야 하비엘의 이마에 송골송골 피어난 땀이 식은땀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게 많이 아프냐? 못 일어날 정도로?"

"양쪽을 모두 다쳤습니다."

"아하. 그럼 좀 전에 나한테 손 내민 이유가 부축이나 해달라는 거였냐?"

"예."

"...."

뭐 이런 뻔뻔한 놈이.

"내가 네 부축 셔틀이냐?"

"셔틀이 뭡니까?"

"있어, 그런 거. 암튼 됐고. 잠깐 있어봐."

로이드는 일행의 상태부터 살폈다.

하비엘은 두 다리를 다쳤다.

품속의 방울이는 기절한 채였다.

자신은 특별히 접질리거나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있어봐야 자잘하게 긁히거나 까진 곳이 전부였다.

물론 온몸을 저릿하게 움켜쥐는 전신 타박상은 고통스럽긴 했지만.

'장난 아니네.'

온몸이 아팠다.

욱신거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어느 정도냐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헬스장에 가서 지옥의 떡대 트레이너에게 온종일 굴려지고 난 다음 날 아침 같은 기분이었다. 혹은 종일 통돌이 세탁기 속에서 탈수된 기분이었다.

말 그대로 전신의 근육과 뼈마디가 다 아팠다.

심지어 겨드랑이털까지 뻐근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살아남은 게 기적이야.'

주위 통로 곳곳에 피어 있는 발광 버섯.

그 은은한 빛 덕분에 주위를 살펴볼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엉망이 되어 무너진 통로였다.

머리와 가슴 일부만 너덜너덜하게 남은 여왕개미의 사체도 보였다.

비로소 폭발 속에서 자신과 하비엘이 무사했던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뜻밖의 여왕개미 실드가 우릴 살렸네.'

메탄가스는 후방에서 터졌다.

그런데 폭발이 일어난 방향과 이쪽 사이에 여왕개미가 있었다.

놈이 이쪽을 추격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왕개미는 덩치가 컸지. 통로를 거의 메우다시피 했을 정도로. 그런데 그 덩치가 우릴 살린 거네. 마치 코르크 마개가 샴페인 터지는 걸 막아준 것처럼.'

통로를 거의 꽉 채우던 여왕개미의 몸뚱이.

그 커다랗던 몸이 코르크 마개 역할을 해주었다.

후방에서 일어난 메탄가스 폭발의 압력을 막아준 듯했다.

'덕분에 폭발 에너지 대부분이 다른 방향의 통로로 분산됐어.'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이쪽은 반드시 죽었을 것이었다.

'운 좋았네. 저놈이 폭발력을 거의 다 막아줬는데도 이렇게 삭신이 쑤시는 거 보면 말 다했지 뭐.'

폭발에 직격으로 휘말렸다면 시체도 찾지 못했을 것이다.

찢어진 걸레 조각 꼴이 되어 버린 여왕개미의 사체가 그 증거였다.

'하비엘의 전력이 실린 검을 맞아도 멀쩡하던 놈이었는데.'

폭발, 얼마나 강력했던 걸까.

오싹 소름이 돋았다.

로이드는 고개를 세차게 저어 소름을 털어내며 말했다.

"바로 움직이자. 여기 있으면 죽어."

운이 좋아 폭발에 휘말리진 않았다.

그래도 아직은 안심할 수 없었다.

사실 상황은 여전히 암울했다.

"저쪽 건너편, 다 죽은 걸까요?"

부축을 받아 일어나며 하비엘이 힐끗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무너진 통로가 있었다.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폭발이 일어난 방향의 통로.

붕괴된 통로 건너편에는 지옥도가 펼쳐져 있을 것이다.

폭발에 휩쓸렸을 야수 개미들은 즉사가 확실했다.

그 외에 살아남은 놈들은?

"대부분의 통로가 무너졌을 거야. 막대한 양의 토사에 산 채로 짓눌려서 생매장됐겠지. 나머지는? 안 봐도 뻔해. 질식해서 죽어가고 있을걸."

개미굴 곳곳에까지 퍼져 있는 탄층.

그 탄층에 불이 붙었을 것이다.

유독가스가 대량으로 발생하고 있을 것이다.

그 끔찍한 열기와 가스 속에서 질식사하게 되는 셈이다.

"그러니까 무너진 통로 건너편에 있던 개미들은 전멸이라고 보면 될 거야."

지하 갱도 내에서의 폭발과 화재는 그만큼 무서웠다.

기술력이 발달한 현대 세계에서도 그랬다.

최선의 안전 설비와 구조 시스템을 갖추어도 매년 안타까운 희생자가 끊임없이 발생하곤 했다.

그러니 야수 개미라도 예외가 아닐 터였다.

대량의 화재와 연소 작용.

그렇게 산소가 고갈된 환경에서는 버틸 수 없을 테니까.

"그나저나, 일단 우리도 피하자. 끄읍!"

이제는 이쪽이 살아남을 차례였다.

로이드는 하비엘을 부축한 팔에 힘을 주었다.

두 다리를 모두 다친 녀석을 억지로 일으켰다.

그리고 재빨리 몸을 돌려 녀석에게 등을 보이며 몸을 살짝 숙였다.

"업혀."

"예?"

"업히라고."

"감사합니다."

"헐."

녀석은 두 번 고민도 않고 냉큼 업혀왔다.

심지어 업힌 채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딴 소리까지 지껄였다.

"로이드 님, 혹시?"

"엉?"

"제가 망설일 거라고 생각하셨던 겁니까?"

"아니, 뭐, 예의상?"

사실이다.

녀석이 한두 번은 뺄 줄 알았다. 그래서 '나도 시커먼 남자 놈 업는 거 싫거든? 극혐이거든?' 따위의 상투적인 대사를 준비하기도 했다.

하지만 하비엘의 뻔뻔함, 혹은 냉철함은 이쪽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잘 결정하셨습니다. 합리적인 판단입니다. 두 다리를 모두 다친 저를 부축하는 것보다는 업는 쪽이 움직이기 수월할 테니까요."

"어이, 널 반드시 데려간다는 걸 당연한 전제로 깔아둔 거 같은데?"

"그럼 버리고 가실 겁니까?"

"너 하는 거 봐서."

"근데 벌써 업으셨잖습니까."

"그래서 무거워 죽겠다, 인마. 보기엔 멸치같이 호리호리한 놈이 뭐 이렇게 무거워."

아닌 게 아니라 하비엘 녀석, 겉보기보다 훨씬 무거웠다.

온몸이 꽉 찬 근육질이랄까.

마치 쇳덩이를 업은 기분이었다.

"그건 제가 무거운 게 아니라 로이드 님의 체력이 빈약한 탓이 아닐까 합니다만."

"와나, 이거 진짜 콱 버리고 가 버릴까."

"제가 안 놓을 겁니다만."

"거머리세요?"

"이렇게 잘생긴 거머리 보셨습니까?"

"뻔뻔함 보소. 심지어 이젠 스스로 잘생겼대."

"대신 마나를 빌려드리지요."

"아, 뉘예뉘예. 이렇게 대놓고 셔틀로 써 주시는 게 감사해서 그랜절이라도 오지게 박아드려야 하나."

"셔틀은 아까 말씀하셨다치고, 그랜절은 또 뭡니까?"

"아, 그런 게 있어. 안 떨어지게 꽉 잡기나 해."

"알겠습니다."

로이드는 하비엘과 입씨름을 하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사실 힘들었다. 지쳤다.

그럴 때마다 녀석이 마나를 불어넣어 주었다.

무려 소드 익스퍼트 상급의, 트리플 써클의 아스라한 심법으로 불어넣어 주는 마나였다.

그 효과는 엄청났다.

녀석에게 마나를 받을 때마다 기름 빵빵하게 먹은 파워 경운기가 된 기분이 들었다.

"후, 후욱! 힘이 난다. 무럭무럭! 훅! 후우!"

"더 드릴까요?"

"어이쿠, 이런 귀한 몸에 누추한 마나를."

"...."

"닥치고 더 줘. 얼른. 힘들어 죽겠네, 진짜."

"알겠습니다. 단, 대화에 빠져 호흡이 흐트러지면 심법의 운용도 흔들립니다. 체력의 고갈도 심해지고 말입니다. 그러니 지나친 잡담은 자제하시죠."

"닥치고 그냥 걸으라고? 싫은데? 후, 후우!"

찰싹!

"아야! 왜 때려!"

"워워. 이랴."

"...진짜 콱 버린다?"

그렇게 둘은 아웅다웅하며 서로를 이용했다.

하비엘이 로이드를 셔틀로 이용하는 것이라면, 로이드는 하비엘을 연료통으로 써먹었다.

게다가 이렇게 나누는 잡담이 서로에게 위로가 되기도 했다.

'만약 혼자 이런 곳에 갇혔으면 진심 멘붕이었을 거야.'

로이드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지하 수백 미터의 캄캄한 굴.

폭발에 횃불도 사라졌다.

유일한 빛은 군데군데 자라난 희미한 발광 버섯.

만약 이렇게 이야기 나눌 사람조차 없이 홀로 고립되었다면 미칠 것 같은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게다가 녀석을 업고 움직이는 덕분인지 눈앞에 반가운 메시지도 떠올랐다.

딩동.

[하비엘 아스라한이 당신의 행동에 큰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비엘 아스라한이 당신에게 처음으로 신뢰의 감정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비엘 아스라한의 당신에 대한 호감도가 +6 상승하였습니다.]

[하비엘 아스라한과의 현재 관계 : -14]

[주요 인물과의 가시적인 관계 개선으로 108 RP를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157]

로이드는 등에 업힌 하비엘을 힐끗 돌아보며 웃었다.

"짜식, 고맙냐?"

"뭐가 말입니까."

"됐고. 이제 슬슬 눈에 익은 길이 나오는 것 같은데."

"제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다행히 올라가는 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까 내려오면서 야수 개미들과 수없이 싸워야 했다.

그 싸움의 흔적이 내려왔던 길을 따라 죽 이어져 있었다.

즉, 하비엘에게 알차게 깍둑썰기를 당한 개미들의 사체가 줄줄이 이어져 있었다.

그 사체들이 널린 방향만 따라서 걸으면 됐다.

점점 눈에 익숙한 통로가 나왔다.

그럴 때마다 희망이 피어났다.

마음속 빛이 점점 밝아졌다.

붕괴되어 막힌 통로가 앞길을 가로막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다.

"쯧."

아까 폭발이 일어났을 때 무너진 걸까.

로이드는 이마의 땀을 털어냈다.

붕괴되어 막힌 통로를 살폈다.

측량 스킬로 막힌 곳 건너편까지 탐색했다.

하지만 5미터 범위 안에 뚫린 건너편 통로가 보이지 않았다.

즉, 이 길을 뚫으려면 최소 5미터는 굴을 파내야 한다는 뜻이었다.

'5미터는 차라리 양반이지. 어쩌면 50미터일 수도 있어.'

그럴 바엔 측량 스킬을 유지하면서 다른 무너지지 않은 길을 찾는 게 빠를 듯했다.

로이드는 걸음을 돌렸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더 서둘러야....'

그때였다.

콰드드드! 쿠르릉!

"...!"

굉음이 울렸다.

굴 전체가 요동쳤다.

흙먼지가 확 몰려왔다.

하지만 로이드는 그 먼지 속으로 오히려 뛰어들었다.

그리고 보고야 말았다.

돌아나가려는 길이 무너진 모습을.

그 뜻은 명확했다.

"설마 우리, 여기 갇힌 겁니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이번에는 농담도 나오지 않았다.

로이드는 하비엘을 내려놓았다.

뒤쪽의 무너진 통로를 살펴보았다.

마찬가지로 5미터 범위 안쪽에는 뚫려 있는 통로가 보이지 않았다.

'망했다.'

완벽히 갇혔다.

심장이 쿵쿵거렸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가장 두려워했던, 최악의 상황이 발생한 것이었다.

'여기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로이드는 자신들이 갇힌 공간을 재빨리 파악했다.

몇 미터 되지 않았다.

그만큼 산소의 고갈도 일찍 찾아올 터다.

'30분? 어쩌면 더 짧을지도 몰라.'

그 뒤엔 산소가 부족해지리라.

꼼짝없이 끝장이 나리라.

하지만 이대로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순 없었다.

로이드는 품속의 기절한 방울이를 꺼냈다.

하비엘에게 건네주었다.

"너, 빨리 얘 좀 깨워라. 아까 나한테 한 것처럼 뺨을 때리든 어떻게든. 알았어? 당장 써먹어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하비엘도 상황을 파악했는지 군말 없이 방울이를 받았다.

로이드는 냉철하게 머리를 굴렸다.

'이판사판이다.'

더는 뒤가 없다.

여기서 끝나면 모든 게 끝장인 상황이다.

가능한 수단이라면 다 시도해야 했다.

지금 모여 있는 157 RP.

그걸 효율적으로 쏟아부을 때가 왔다.

결정을 내린 로이드는 스킬창을 열었다.

27화. 더블 써클 (2)

[스킬창을 불러옵니다.]

로이드는 스킬창을 열었다.

앞뒤가 붕괴된 통로에 갇혔다.

남은 산소는 길어봐야 30분 남짓.

이제 더는 뒤가 없는 상황이었다.

'할 수 있는 걸 다 해야 해.'

로이드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눈앞에 떠오른 스킬창 한쪽의 메뉴를 선택했다.

그가 선택한 메뉴는 바로 '재능 스킬 개화'였다.

[스킬로 개화 가능한 재능을 검색합니다.]

'역시, 된다.'

로이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예전, 처음 하비엘에게서 RP를 얻고 스킬창을 열었던 때가 떠올랐다.

당시 눈앞에 떠올랐던 안내문의 내용을 모두 기억하는 그였다.

'그때 이런 메시지가 있었지. 획득한 RP를 투자하여 재능 스킬을 개화할 수 있다고.'

분명 그랬었다.

지니고 있는 재능이나 지식을 스킬로 만들어 주는 기능.

덕분에 자신은 열심히 공부한 토목공학 지식을 스킬로 개화할 수 있었다.

측량과 설계 스킬이 그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삽질도 스킬로 만들었어.'

종종 알바를 하러 현장을 다녔다.

삽질이라면 아주 지긋지긋하도록 해야 했다.

스킬창은 그 삽질 재주도 재능으로 인정해주었다.

'그럼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다른 능력, 재능도 스킬로 만들 수 있을 거야.'

지금 이 순간 가장 필요한 능력.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 능력.

분명 스킬로 개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로이드의 바람처럼 눈앞에 메시지가 차례로 떠올랐다.

[현재 개화 가능한 재능 스킬 목록]

[주위의 마나를 흡수하는 재능이 감지됨.]

[...흡수한 마나를 가공하는 재능이 감지됨.]

[...흡수한 마나를 증폭하는 재능이 감지됨.]

[이를 종합하여 '아스라한 심법' 스킬로 개화 가능]

[개화에 필요한 RP = 15]

'됐다!'

예상대로였다.

가장 바라던 결과였다.

로이드는 망설일 것도 없이 결정했다.

즉시 15 RP를 투자했다.

반가운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딩동.

[아스라한 심법 스킬이 개화되었습니다.]

[스킬명 : 아스라한 심법]

[단계 : 싱글 써클 Lv 5]

[주위의 마나를 흡수합니다. 흡수한 마나를 심장 둘레에 생성한 써클로 가공/증폭하여 발출합니다. 써클의 숫자가 늘어날 때마다 증폭률이 대폭 상승합니다.]

[마나 증폭률 : 120%]

[다음 레벨업에 필요한 RP : 10]

[현재 보유 중인 RP : 142]

'좋아.'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아스라한 심법의 스킬화.

게다가 싱글 써클 Lv 5라는, 예상보다 높은 등급을 받기까지 했다.

'아마도 그동안 종종 연습한 덕분이겠지.'

나름 열심히 훈련했다.

노이만 경과 겨루며 실전에서 써먹기도 했다.

그 뒤로도 틈이 날 때마다 심법을 운용하며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그 성과가 드러난 셈이었다.

하지만 로이드는 여기서 끝내고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여기서 만족할 거였으면 굳이 귀한 RP를 소모해가면서 심법을 스킬로 만들 필요도 없었겠지.'

스킬로 만들었다고 해서 당장 심법이 강력해지는 건 없었다.

마나를 흡수하는 능력도.

가공하는 기술도.

증폭하는 힘도.

스킬로 개화하기 전과 똑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중대한 차이점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심법을 스킬로 개화한 덕분이었다.

'굳이 연습하고 훈련하지 않아도 RP 투자만으로 강력하게 업그레이드할 수 있게 됐으니까.'

그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로이드는 RP를 아스라한 심법에 투자했다.

[스킬 레벨 업!]

[아스라한 심법 : 싱글 써클 Lv 6]

[마나 증폭률 : 125%]

[다음 레벨업에 필요한 RP : 15]

[현재 보유 중인 RP : 132]

한 단계 스킬 레벨 상승으로 마나 증폭률이 5%가 올랐다.

'좋아. 나쁘지 않아.'

로이드는 재빨리 머릿속으로 계산을 굴렸다.

스킬 레벨이 오를 때마다 다음 레벨업에 필요한 RP가 5씩 늘어나는 듯했다.

그렇다면 지금 남은 RP를 모조리 투자한다면?

'싱글 10레벨을 넘기고 그다음 단계까지 올릴 수 있을 거야. 아슬아슬하겠지만 가능해.'

어차피 도박이었다.

만약 예상외로 5 이상씩 필요 RP가 늘어난다면 실패할 터.

하지만 해보기 전엔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망설일 때가 아니었다.

'모 아니면 도다!'

이판사판의 상황.

로이드는 남은 RP를 모조리 쏟아부었다.

아스라한 심법 스킬이 쭉쭉 상승했다.

6레벨에서 7레벨로.

9레벨에서 10레벨로.

마침내 마지막 남은 RP를 싹싹 긁어서 투자하자 기대했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딩동!

[스킬 등급 업!]

'성공이다!'

로이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예상했던 대로 싱글 10레벨에서 한 번 더 레벨업을 시키자 등급이 올랐다.

그동안 다행히 RP가 모자라는 사태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는 눈앞에 떠오르는 안내 메시지를 읽어내렸다.

[아스라한 심법의 등급이 <더블>로 상승했습니다.]

[스킬 등급 상승에 따라 스킬 옵션이 개방되었습니다.]

[아스라한 심법 : 더블 써클 Lv 1]

[마나 증폭률 : 200%]

[스킬 전용 옵션 ① : 에너자이저 - 더블 써클의 효율성을 극한으로 활용합니다. 옵션 기능 사용 시 10분간 절대로 지치지 않고 움직일 수 있게 됩니다. (제한 : 하루 1회만 사용 가능.)]

[스킬 전용 옵션 ② : 잠력 폭발 - 써클의 증폭 성능을 극한까지 폭발시킵니다. 옵션 기능 사용시 20초간 마나 증폭률이 3배까지 상승합니다. 단, 옵션 사용이 완료되면 사용자는 탈진 상태에 빠져 아스라한 심법을 하루 동안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제한 : 하루 1회만 사용 가능.)]

[다음 레벨업에 필요한 RP : 100]

[현재 보유 중인 RP : 7]

두쿵! 두쿵!

스킬 설명을 다 읽었을 무렵이었다.

로이드의 심장이 크게 두 차례 뛰었다.

이윽고 처음으로 겪는 낯설고도 강력한 감각이 심장을 감쌌다.

츠즈즈즈....

예전에 생성했던 싱글 써클.

그 첫 번째 써클과 정확히 직각을 이루는 각도로 새로운 써클이 생성되었다.

앞에서 보면 심장을 열십자(十)로 감싸는 모습이었다.

갓 생성된 두 번째 써클이 회전을 시작했다.

키이이이잉...!

"흡."

더블 써클.

두 개의 써클이 회전하며 공명했다.

겪어본 적 없는 강력한 힘의 파도가 혈관을 타고 전신의 세포를 일깨웠다.

그 경이로운 감각에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을 정도였다.

로이드의 입가에 미소가 배어났다.

'됐어.'

대박이었다.

변화된 스킬의 내용을 읽으면서도 믿기지 않던 터였다.

한데 그 직후에 이렇듯 몸으로 감각을 확인시켜주니, 비로소 제대로 실감이 났다.

'이게 더블 써클의 힘이란 거구나.'

분명 방금까지 잔뜩 지쳐 있던 터였다.

그런데 이제 그 피로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전에 없던 활력이 몸 구석구석의 세포까지 일깨우는 기분이었다.

예전, 싱글 써클만 지니고 있을 때와 차원이 다른 활력이 전신에서 느껴졌다.

'아스라한 심법을 스킬로 개화하길 잘했어.'

몸에 익히고 있던 심법의 스킬화.

그것을 통해 두 가지 장점을 노렸던 로이드였다.

'하나는 빠른 성장이었어.'

스킬로 생성을 하면 RP를 투자할 수 있다.

대량의 RP를 쏟아부어서 성장시킬 수 있다.

잘만 하면 몇 개월, 몇 년 치의 성장을 단기간에 이룰 수도 있다.

그 노림수가 그림처럼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리고 등급 상승에 따른 옵션.'

이미 측량과 설계 스킬을 성장시키며 등급 상승을 경험한 그였다.

당시 생성된 스킬 옵션으로 얼마나 쏠쏠한 재미를 보았던가.

어쩌면 아스라한 심법도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등급이 오른다면.

더블 써클의 경지를 이룩한다면.

그에 걸맞은 보상이 옵션으로 주어질지도 모른다 여겼다.

그리고 그 노림수 또한 제대로 적중했다.

'옵션이 제대로야.'

하나는 하루에 한 번, 10분 동안 사람을 지치지 않는 에너자이저로 만들어줄 수 있었다.

또 하나는 딱 20초 동안 폭발적인 힘을 낼 수 있게 해주는 옵션이었다.

둘 모두 지금 상황에 더없이 도움이 될 옵션이기도 했다.

'좋아, 해보자.'

꽈득!

로이드는 강철삽을 움켜쥐었다.

이 상황에서 남은 RP를 탈탈 털어 투자한 이유.

'막힌 통로를 뚫기 위해서지. 이렇게!'

콰악!

그의 삽이 공기를 갈랐다.

붕괴되어 막혀 있던 앞쪽 통로를 헤집었다.

거칠고도 쉼 없는 기세로 흙더미를 파내기 시작했다.

쿠악! 콰악! 더컥! 수걱!

로이드의 팔뚝에 힘줄이 돋아났다.

'좀 더! 계속!'

그것은 삽질의 폭풍이었다.

일반인의 힘을 한참 뛰어넘은 삽이었다.

삽이 흙더미를 들쑤셨다.

돌과 흙을 맹렬히 긁었다.

긁은 상태에서 그대로 퍼냈다.

삽질 한 번에 양동이 하나만큼의 구멍이 퍽퍽 생겨났다.

그런 삽질이 일주일 굶은 거지의 숟가락질보다 더 빠르게 계속되었다.

퍼퍼퍽! 콰팍! 쿠거걱!

'지치지 않아! 최고야!'

이미 로이드는 첫 번째 옵션, 에너자이저를 발동시키고 있었다.

옵션의 내용이 사실이었다.

쉼 없이 움직이면서도 전혀 힘들지 않았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일도, 호흡이 거칠어지는 일도 없었다.

오히려 더블 써클에 오른 아스라한 심법의 영향으로 심장 주위에 증폭된 마나가 남아돌게 되었다.

그 증폭된 마나의 힘까지 삽질에 실었다.

삽질이 더욱 맹렬해졌다.

동시에 한층 정교해졌다.

'무작정 무식하게 파기만 하면 안 돼. 자칫 통로에 2차 붕괴가 일어날 수 있어.'

이미 메탄가스 폭발로 충격을 받아 무너진 통로였다.

조금이라도 자극이 가해지면 또 무너질 수 있었다.

그렇기에 로이드의 삽질은 거칠되 조심스러웠다. 맹렬하면서도 신중했다. 재빠르면서도 동시에 부드러웠다.

풍부한 삽질 경험 덕분이었다.

'돈 떨어질 때마다 인력사무소 다니길 잘했네.'

새삼 드는 생각이었다.

현장에서 삽질 잘한다는 소리를 종종 들었던 로이드였다.

군대에서도, 사회의 공사장에서도 그랬다.

그중에서도 특히 삽으로 공구리를 갤 때의 경험이 지금 가장 큰 도움이 되어주고 있었다.

'그게 거의 내 전공이었지.'

삽으로 공구리 개기.

대한민국에서 군대를 나온 남자들도.

혹은 현장에서 굴러보았던 사람들도.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보았을 일이었다.

모래와 시멘트 가루를 섞어서 쌓아올린다.

그 상태에서 중간을 움푹하게 분화구처럼 만든다.

그곳으로 적당량의 물을 왕창 쏟아붓는다.

그리고 삽으로 분화구(?)의 주위를 무너뜨리며 재빠르게 물과 섞어준다.

이 과정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포인트는 분화구에 담긴 물을 '절대로' 바깥으로 나가지 않도록 컨트롤하는 삽의 현란하고도 정교한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로이드는 그 맨삽 공구리 만들기에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

'그걸 지금 써먹을 줄이야!'

콱! 콰자작! 투서컥!

수많은 경험이 담긴 삽질이었다.

마치 세 번째의 손처럼 움직였다.

순간적으로 강약을 마음껏 조절했다.

긁고, 헤집을 때는 강렬하게.

퍼내고, 걷어낼 때는 정교하게.

뒤집고, 찌를 때는 재빠르고도 부드럽게.

그 모든 움직임이 실시간으로 섞이고, 조화를 이루었다.

덕분에 그는 경이로운 속도로 굴을 파내면서도 주위의 지반에 거의 충격을 주지 않았다.

파낸 굴의 길이가 어느새 3미터, 4미터를 넘어설 때까지도 그랬다.

'그러니까 이젠 좀... 제발! 보여라!'

에너자이저 옵션을 발동시킨 지 5분쯤 지난 듯했다.

로이드는 초조함에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폭풍 같은 삽질을 하면서 측량 스킬도 함께 발동하고 있는 그였다.

지금 파고 있는 굴의 전방 5미터 앞까지가 훤히 보였다.

한데 여전히 희망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전방 5미터.

그 범위 내엔 무너진 굴을 꽉 채우고 있는 흙더미만 보일 뿐이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공기가 슬슬 탁해지고 있었다.

'이래선 방울이도 못 쓸 것 같아.'

아직 방울이를 거대화하기엔 너무 공간이 좁았다.

게다가 함부로 거대화를 시켰다간 이곳에 남은 산소마저 순식간에 소모될 것이다.

로이드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내가 해결해야 해.'

어차피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멈추면 희망을 찾을 가능성마저 사라진다.

그의 삽질이 더욱 악착같이 변했다.

쿠확! 쿠각! 쿠그그극! 투걱!

힘껏 파낸 땅굴이 더욱 길어졌다.

6미터, 7미터에 다다랐다.

그때쯤이었다.

'어?'

전방 5미터 앞에 뭔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주먹 크기만큼의 빈 공간이었다.

'설마?'

콰작! 쿠가가각!

삽질이 더욱 바빠졌다.

전진이 한층 빨라졌다.

한 걸음 앞으로 나갈 때마다 측량 스킬로 미리 보이는 전방 5미터 앞의 빈 공간이 커졌다.

주먹 크기에서 수박 크기로.

수박에서 드럼통만 하게.

그리고 원래 뚫려 있던 통로 크기만큼.

'찾았다!'

매몰되지 않은 통로가 4.5미터 앞에 있었다!

"하비엘!"

그가 외쳤다.

"따라와! 못 걷겠으면 기어서라도!"

이미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고 있었다.

눈앞의 사물이 때때로 두 개씩으로 겹쳐 보였다.

저산소증 증상이었다.

'시간이 얼마 없어.'

몽롱한 기분이 조금씩 커졌다.

이러다가 어느 순간 필름이 끊기듯 의식이 사라지리라.

그렇게 쓰러지면 잠들듯 질식해서 죽게 된다.

저산소증, 혹은 무산소증이 무서운 이유였다.

로이드는 몽롱한 기분이 커질수록 입술을 깨물어가며 삽을 움직였다.

'조금 더. 조금만 더!'

눈앞에 남은 흙더미를 3미터만 더 치우면 된다.

전부 다가 아니라도 주먹만큼만.

그만큼만 구멍을 뚫으면 된다.

그러면 최소한의 공기가 통한다.

살아날 희망을 잡는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딩동.

[아스라한 심법 옵션, 에너자이저 발동이 종료되었습니다.]

벌써 10분이 모두 흘렀다.

동시에 전신에서 힘이 쑥 빠졌다.

그동안 느끼지 못하고 있던 피로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래도 여기서 끝날 순 없어.'

정말로 얼마 안 남았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저산소증에 시달리는 몽롱한 의식 속에서 로이드는 눈을 부릅떴다.

'잠력 폭발!'

딩동!

[아스라한 심법 옵션, 잠력 폭발이 발동됩니다.]

[더블 써클의 증폭 성능이 극한까지 발휘됩니다.]

[20초간 마나 증폭률이 3배까지 상승합니다.]

[마나 증폭률 : 600%]

콰아아악! 콰악!

이제는 부드럽고 정교한 삽질은 없었다.

오로지 살고자 하는 일념으로 맹수처럼 삽을 휘둘렀다.

찌르고, 찍고, 긁고, 퍼냈다.

붕괴된 구역 너머 온전히 남아 있는 통로.

그곳까지의 거리가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퍼컥! 퍼그컥! 카가각!

2미터, 1.5미터, 1미터, 0.5미터....

생존의 희망을 향한 힘찬 전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앞을 막은 토사 벽 가장 얇은 부분이 불과 30센티만 남은 순간.

[아스라한 심법 옵션, 잠력 폭발 발동이 종료되었습니다.]

[옵션 발동의 페널티로 탈진 상태에 빠집니다.]

철그렁!

온몸에서 힘이 쑥 빠졌다.

저도 모르게 삽을 놓쳤다.

어느새 다리가 풀려 버렸다.

눈을 부릅떴지만 소용없었다.

'젠장.'

로이드는 손을 뻗었다.

다시 삽을 집어들려 애썼다.

거의 다 왔는데.

정말 눈앞인데.

무려 10분 만에 12미터나 되는 굴을 팠는데.

이제 마지막 한 걸음만 남았는데.

'그런데 여기서 끝인 거야?'

억울했다.

미안하기도 했다.

벌써 의식을 잃은 듯 쓰러져 있는 하비엘을 보니 더욱 그랬다.

'저 녀석, 괜히 끌고 왔나.'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불현듯 잠이 쏟아졌다.

급속도로 의식이 몽롱해졌다.

어느샌가 헛소리까지 들리기 시작했다.

"뽀동!"

"...어?"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헛소리치고는 어쩐지 너무 또렷했다.

로이드는 마지막 남은 힘을 모아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그는 볼 수 있었다.

뽀깃!

남아 있던 30센티 두께의 벽에 주먹 크기의 구멍이 뽕 뚫렸다.

주먹만 한 햄스터, 뽀동이가 동그란 머리를 뽀잇 내밀었다.

"뽀동!"

28화. 더블 써클 (3)

"뽀동!"

흙벽에 구멍이 뚫렸다.

구멍으로 뽀동이가 머리를 뽀잇 내밀었다.

벽 앞에 주저앉아 있던 로이드를 향해 방긋 웃었다.

로이드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을 열었다.

"뽀동...이?"

"뽀동!"

"정말, 너야?"

"뽀도동! 뽀동!"

힘껏 고개를 끄덕이는 뽀동이.

그런 뽀동이의 작고 동그란 머릿속으로 최근 겪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며칠 전까지 뽀동이는 너무 심심했다.

로이드는 종일 광산 개발 공사에만 매달리고 있었다.

방울이도 공사에 동원되느라 종일 자리를 비우곤 했다.

한데 자신은 할 일이 없었다.

매일 방에서 뒹굴거리는 일상을 보내야 했다.

처음엔 좋았지만 계속 그렇게 지내자니 도저히 할 짓이 아니었다.

몸서리쳐지는 심심함.

결국 로이드의 방에서 뛰쳐나왔다.

저택이 이리저리 구경하며 다녔더랬다.

그러다가 저택 꽃밭에서 꽃을 가꾸던 여인과 마주쳤다.

로이드의 어머니, 남작 부인이었다.

남작 부인은 자신을 만나고는 무척 반가워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했더랬다.

'이렇게 고마울 데가. 마침 요즘 생쥐 몇 마리가 자꾸 꽃밭을 망쳐서 고민이었단다. 넌 그들과 친척이지? 혹시 가능하다면 그들을 찾아가줄 수 있겠니? 그 아이들에게 꽃밭을 망치지 말아달라고 나 대신 부탁을 좀 해주렴.'

...이라는 부탁이었다.

당연히 받아들였다.

어차피 할 일도 없던 신세였다.

부탁을 받아들이고는 신이 나서 풀밭으로 달려갔다.

그때부터였다.

뽀동이는 며칠에 걸쳐 저택 인근의 쥐떼를 찾아다녔다.

마침내 쥐떼 무리를 포착했고, 그 무리의 우두머리와 만나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 쥐떼의 리더에게 나름 정중한 제안을 했다.

'뽀동! 뽀도동? 뽀동!'

남작 부인의 꽃밭을 놀이터 삼지 말아 달라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쥐떼의 리더는 이렇게 대답했다.

'찌직! 찍? 찍찍!'

네가 뭐라는 건지 모르겠다는 대답이었다.

즉, 뽀동이는 생쥐의 언어를 몰랐고, 생쥐는 뽀동이의 언어를 몰랐다.

안타까운 협상 결렬이었다.

전쟁(?)의 시작이기도 했다.

뽀동이는 생쥐 무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생쥐 무리가 보일 때마다 용맹하게 달려갔다.

뱃살로 찍어누르고, 궁둥이로 튕겨내고, 머리로 들이받았다.

그럴 때마다 생쥐들은 혼비백산 달아나기 바빴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뽀동이는 생쥐 무리의 대장을 추격했다.

하지만 생쥐 대장은 생각보다 재빨랐다.

잡힐 듯 잡히지 않으며 계속 도망쳤다.

뽀동이도 그 뒤를 열심히 추격했다.

저택 정원을 지나, 진입로를 내달려, 마을을 거쳐, 산기슭에 다다라, 공사 중인 갱도까지 오게 되었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갱도를 지나쳐 개미굴까지 들어왔다.

'뽀동?'

모르는 곳에 들어와 버렸다.

생쥐 대장도 놓쳤다.

거기서 걸음을 돌리려 했다.

만약, 가까운 곳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그대로 저택까지 돌아갔을 터였다.

'후우! 훕!'

정확히는 목소리가 아니라 숨소리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뽀동이는 누구의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뽀동!'

자신을 이 세상에 소환해준 사람.

그렇게 자신을 존재할 수 있게 해 준 사람.

로이드의 숨소리였다.

'뽀동! 뽀도동!'

반가운 마음에 목청 높였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로이드는 여전히 근처 어딘가에서 거친 숨소리만 뱉어댈 뿐이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삽질로 땅 파는 소리가 퍼석, 퍼석, 들려왔다.

'뽀동?'

뽀동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로이드가 근처에서 땅을 파고 있는 것 같다고.

그럼 자신도 가서 도와주면 되겠다고.

'뽀도동! 뽀동!'

열심히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파악했다.

멀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있는 통로 바로 건너편이었다.

그때부터였다.

뽀동이도 굴을 파기 시작했다.

로이드의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열심히 흙을 팠다. 뽀동뽀동한 궁둥이를 씰룩거리며 밥풀 같은 손바닥에 땀이 나도록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이곳, 로이드의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정말, 너 맞아?"

"뽀동!"

"...."

뽈뽈뽈 다가와서 인사하듯 볼에 궁디를 부벼대는 뽕뽕한 감촉.

뽀동이 특유의 꼬릿한 냄새도 났다.

로이드는 실감할 수 있었다.

정말로 뽀동이가 맞았다.

"허, 네가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처럼 반가울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끝장이구나 싶었던 순간이었는데.

몽롱하던 정신이 조금씩 깨어나고 있었다.

뽀동이가 들어오며 뚫은 주먹만 한 구멍.

그곳으로 공기가 통하게 된 덕분이었다.

'물론 아직 머리가 깨질 것 같지만.'

저산소증은 여전했다.

작은 구멍으로 들어오는 공기라 봐야 상태가 악화되는 걸 겨우 막아주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도 죽는 것보단 훨씬 낫지.'

로이드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다행히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졌다.

그가 뽀동이에게 말했다.

"뽀동아? 나 부탁이 하나 있는데."

"뽀동?"

"내 코 좀 깨물어줄래? 정신 번쩍 들게."

"뽀도동?"

"괜찮아. 그걸론 안 죽어."

"뽀동?"

"정말이라니까? 얼른."

"뽀동!"

어깨에 올라타 있던 뽀동이가 자세를 잡았다.

두 발로 일어나 이쪽의 볼따구에 두 손을 갖다 댔다.

그리고 코끝을 야물딱지게 물었다.

"뽀동!"

꼬작!

"...끄악!"

생각보다 훨씬 따끔했다.

절로 온몸이 들썩, 크게 움찔거렸다.

그래도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크으으, 고, 고마워!"

로이드는 어깨 위에서 따봉을 날려오는 뽀동이를 향해 웃어주었다.

그리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거의 무릎으로 기다시피 해서 벽으로 다가갔다.

뽀동이가 뚫은 구멍에 얼굴을 갖다 댔다.

구멍 너머에서 흘러오는 공기를 몇 모금 마셨다.

상태가 조금 더 나아졌다.

'저 녀석도 살려야 해.'

로이드는 몸을 돌렸다.

저만치 떨어진 하비엘에게 기어갔다.

하비엘은 완전히 기절해 있었다.

다행히 숨이 끊어지진 않았다.

끙끙대며 녀석을 끌고 왔다.

멱살을 잡고 상체를 끌어올렸다.

구멍에 얼굴을 갖다 대어 주었다.

그러기를 잠시, 녀석의 안색이 좋아지는 게 보였다.

'그럼 이제 여기서 나가자.'

언제 추가 붕괴가 일어날지 몰랐다.

만약 지금 상황에 또 붕괴가 일어나면 반드시 죽는다.

그걸 아는 로이드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떨어뜨린 강철 삽을 집어들었다.

잠력 폭발 옵션을 사용한 페널티 때문에 아스라한 심법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대신 조금씩이나마 움직일 힘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는 삽으로 벽면을 찔렀다.

쿠욱.

삽머리 끝이 1센티 정도 흙을 파고들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그 상태에서 로이드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자신의 체중을 삽에 모조리 실었다.

쿠구국....

삽머리가 흙을 한층 깊이 파고들었다.

더 깊이, 깊숙하게, 거침없이, 끝까지.

그리고 마침내 꿰뚫었다.

퍼석!

천천히 흙을 파고들던 삽이 갑자기 불쑥 들어갔다.

삽머리가 30센티의 장벽을 뚫고 반대쪽으로 빠져나간 것이었다.

'됐다!'

로이드는 더욱 힘을 주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의 몸이 체중을 실은 질량 병기(?)가 되었다.

쿠웅!

어깨로 장벽을 들이받았다.

온몸으로 흙을 밀어붙였다.

마침내 벽이 퍼서석 허물어졌다.

"후, 후아!"

허물어지는 흙더미에 깔렸지만 상관없었다.

로이드는 힘껏 숨을 들이마셨다.

작은 구멍으로 간신히 마시던 것보다 훨씬 많은 산소가 그의 폐에 스몄다.

한결 더 활력이 솟아났다.

"그러니까 이젠 눈 좀 떠주면 안 되냐."

로이드는 투덜거리며 하비엘을 업었다.

녀석이 기절해서 그런지, 혹은 이쪽이 잔뜩 지쳐서 그런지 아까보다 훨씬 무겁게 느껴졌다.

하지만 로이드는 차근차근 걸음을 옮겼다.

'이럴 때일수록 걸음을 차분하게. 확실하게. 쓸데없는 힘은 빼고. 허리랑 하체에 힘주고.'

그게 지쳤을 때 무거운 것을 짊어지고 옮기는 요령이다.

무조건 힘으로만 옮기려 덤비면 안 된다.

그러면 금방 퍼지고 만다.

무거울수록 급하지 않게.

힘겨울수록 요령껏.

그렇게 대한민국에서 새벽마다 인력소를 드나들던 시절, 수많은 시멘트 포대와 벽돌 지게를 짊어지고 날랐던 로이드였다.

'온종일 타일이랑 벽돌 만땅으로 실린 지게 짊어지고 빌라 4층까지 오르락내리락하던 거에 비하면 이까짓쯤!'

이를 꽉 깨물었다.

걷는 데에만 집중했다.

앞장서는 뽀동이 덕분에 길 찾기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었다.

오로지 발을 내딛고, 다음 걸음을 옮길 자리의 바닥을 확인하는 일에만 모든 마음을 쏟았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눈앞에 뜻밖의 메시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딩동.

[극한의 상황에서 남다른 요령을 통해 육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있습니다.]

[그 특별한 경험이 <스킬 : 아스라한 심법>에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새로운 스킬 옵션이 개방되었습니다.]

[스킬 전용 옵션 ③ : 절전 모드 - 극도의 탈진 상태에서도 아스라한 심법의 사용 상태를 미약하게나마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이때의 마나 증폭률은 평소의 10%로 고정됩니다.]

'헐? 이건 또 뭐야.'

로이드는 눈을 끔벅거렸다.

생각지도 못했던 스킬 옵션 생성이었다.

그 효과는 곧바로 몸으로 느껴졌다.

키이이잉....

심장을 둘러싼 마나의 더블 써클.

탈진 상태에 빠져 잠들어 있던 써클이었다.

한데 그 잠에서 깨어나 회전하기 시작했다.

평소의 1/10 정도에 불과한 회전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극도로 지쳐 있던 지금의 로이드에게 가뭄의 단비 같은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마나가 다시 흡수된다.'

의도하지 않아도 아스라한 심법이 자동으로 발동되고 있었다.

주위에서 소량의 마나를 끌어와 흡수했다.

흡수한 마나를 써클로 돌려 신체 곳곳으로 공급했다.

새로운 활력이 솟아났다.

'할 수 있어. 빠져나갈 수 있어!'

로이드의 걸음에 힘과 속도가 붙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여전히 하비엘을 업고서 결코 멈추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주위의 모습이 바뀌기 시작했다.

개미굴 벽면 곳곳에 서식하는 발광 버섯의 숫자가 차츰 줄어들었다.

하지만 굴이 어두워지지는 않았다.

저 멀리 앞쪽.

그곳에서 일렁이는 횃불 빛이 이쪽을 밝혀주었기 때문이었다.

"저기! 로이드 도련님입니다!"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여럿의 다급한 발걸음.

황급히 다가와 이쪽을 부축하려 뻗어오는 손길.

그중에는 남작의 것도 있었다.

"괜찮으냐? 어디 다친 곳은?"

두 손으로 이쪽의 얼굴을 와락 부여잡고서 물어오는 황망한 목소리.

로이드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대답할 정신은 없었다.

살았다.

그 안도감에 긴장의 끈이 풀어졌다.

절로 미소가 나왔다.

눈꺼풀이 감겼다.

'후아. 빡센 하루였네.'

고시원에서 지낼 때도 녹초가 될 만큼 힘들면 이렇게 늘어지곤 했는데.

로이드는 허물어지듯 남작의 품으로 안겼다.

길고도 고단했던 하루의 끝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로이드는 모두의 생각보다 깊은 잠에 빠졌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눈을 뜨지 않았다.

혹사에 상한 근육과 인대 외엔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병세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영지의 의사가 말하길, 그저 몸이 쉬는 것이라고, 지친 육신이 잠을 통해 회복을 거치는 중인 거라고 했다. 그렇게 남작 부부를 다독였다.

남작 부부는 수시로 로이드의 침실에 머물렀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로이드의 침대 곁을 지켰다.

특히 남작이 그러했다.

전날 야수 개미들을 향해 앞장서서 돌격했던 남작이었다.

지하 개미굴로 내려가는 길을 뚫기 위해 누구보다도 몸을 사리지 않았던 그였다.

그 싸움에서 한쪽 팔이 부러졌음에도, 그 여파로 몸에 열이 끓음에도 그는 병상을 거부하고 로이드의 곁을 지키려 애썼다.

남작 부인의 정성도 그에 못지않았다.

그녀는 남편을 대신하여 영지의 일들을 수습했다.

야수 개미와의 싸움에서 다친 병사들을 직접 찾아가 그들의 공을 치하하고 상처를 토닥였다.

그동안 영지에는 훈훈한 소문이 잔잔히 퍼져갔다.

로이드에 대한 소문이었다.

야수 개미가 처음 출몰했을 때, 이 망나니 도련님이 작업자들을 먼저 피신시켰다고 했다. 그들의 안전을 위해 하비엘과 함께 제일 뒤에 남았노라 했다. 그것도 모자라 개미굴로 쳐들어가 야수 개미를 격퇴하였고, 기사 하비엘까지 구해냈다고 했다.

증인도 있었다.

대피의 순간에 있었던 작업자들.

구조의 순간 하비엘을 업고 있던 로이드를 목격한 병사들이었다.

영지민을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위험을 무릅쓴 도련님.

충성스러운 기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업고 나온 도련님.

영지의 사내들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주먹을 꾹 쥐었고, 처녀들은 가슴 두근거림을 느꼈으며, 마음 여린 노인들은 눈시울을 붉혔다.

한편, 남작 부부는 먼저 깨어난 하비엘을 불렀다.

젊고 충실한 기사에게 개미굴에서 벌어진 일을 물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부부는 때로는 놀라고, 탄식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듯 모두는 기다렸다.

진심으로 고대하며 바랐다.

자신들의 도련님이 깨어나기를.

어서 빨리 건강한 모습으로 일어나 주기를.

그렇게 사고가 일어난 지 나흘째가 되었을 무렵.

로이드가 눈을 떴다.

[프론테라 남작령의 모든 이들이 당신이 보인 영웅적인 용기와 솔선수범에 깊은 감명을 받아 찬사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 커다란 사회적 업적에 따른 보너스로 대량의 RP가 특별 지급됩니다.]

29화. 핵이득 플랜 (1)

딩동.

[프론테라 남작령의 모든 이들이 당신이 보인 영웅적인 용기와 솔선수범에 깊은 감명을 받아 찬사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 커다란 사회적 업적에 따른 보너스로 대량의 RP가 특별 지급됩니다.]

[500 RP를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507]

"...."

로이드는 눈을 깜빡거렸다.

너무 오래 푹 자서 그런 걸까.

눈의 초점이 잘 맞지 않았다.

아니, 헛것이 보였다.

'RP? 대량 획득? 무려 500이나?'

멍한 기분으로 메시지를 읽어내렸다.

그러는 사이 조금씩, 자신이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아.'

갱도 공사.

야수 개미.

메탄가스 폭발.

어두운 굴에 조난.

하비엘 업고 노가다.

'살았구나.'

아득바득 하비엘을 업고서 걸었던 기억이 났다.

마지막에 남작과 병사들을 만났던 것도 기억났다.

비로소 로이드는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후후후. 다들 이 몸의 업적을 칭송하고 계시다?'

아주 좋은 현상이야.

매우 훌륭해들.

로이드는 흡족함을 느꼈다.

죽지 않으려고 아둥바둥거렸다.

인동초처럼 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남았다.

덕분에 기대하지도 않았던 RP를 왕창 챙기게 됐다.

마치 늦가을에 겨울옷을 꺼냈는데 작년에 안주머니에 꽂아뒀다가 깜빡한 5만 원짜리 한 뭉텅이를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즐거운 고민에 빠졌다.

'이걸 어떻게 쓰는 게 좋을까. 아니다. RP 좀 쌓였다고 펑펑 쓰는 것보단 일단 쟁여두는 게 낫겠어.'

앞으로 또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

그런 돌발상황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카드는 두둑하게 쌓인 RP다.

이번에 겪은 일만 해도 그랬다.

'만약 하비엘을 업고 다니면서 녀석과의 호감도가 오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러면 RP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얻은 RP를 투자해서 아스라한 심법을 스킬로 만들지도 못했을 것이다.

'꼼짝없이 죽었겠지.'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그러니까 RP는 비장의 카드이자 최후의 보험이야. 낭비하지 말고 넉넉하게 챙겨두자.'

로이드는 소름을 털어냈다.

그러다가 문득, 옆을 돌아보았다.

동작을 딱 멈추었다.

입을 열었다.

"너, 거기서 뭐하냐?"

"로이드 님을 구경하는 중입니다."

"...."

"...."

질문한 로이드.

대답한 하비엘.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이번에도 침묵을 깬 쪽은 로이드였다.

"아니, 그러니까. 언제부터 거기 멀찍이 동상처럼 앉아서 날 구경한 건데."

"언제부터냐고 물으신다면 으음, 세 시간쯤 된 것 같습니다만."

"세 시간?"

"예. 아침 식사 후에 주군과 교대를 했으니까요."

"그럼 아침 먹고 나서부터 계속 거기 앉아 있으셨다?"

"예."

"거기서 오전 내내 나 뻗어 있는 거 구경하고 있으셨다?"

"예."

"너 변태세요?"

"아닙니다."

"그럼?"

"단지 로이드 님을 간호하고 있었을 뿐입니다만."

"간호라니. 무슨 간호?"

"그렇게 누워 계시다가 숨이 끊어지면 당장 사람을 부를 준비랄까요."

"...."

"농담입니다."

"어, 별로 농담처럼 안 들리는데."

"착각이시겠죠."

"그런데 넌 괜찮은 거냐?"

"예, 그럭저럭."

로이드의 눈길이 하비엘의 발목을 향했다.

하비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이젠 다 나았습니다."

"벌써? 며칠이나 지났길래."

"나흘입니다."

"...지금 내가 4일 동안이나 자다가 깬 거라고?"

"예."

"그리고 넌 접질려서 걷지도 못하던 다리가 4일 만에 다 나은 거고?"

"예."

"와나. 너, 솔직하게 말해라. 그날 뼁끼친 거지?"

"뼁끼가 뭡니까?"

"엄살."

"전 엄살을 부린 적 없습니다만."

하비엘이 뭔 소리냐는 듯 대꾸했다.

로이드의 관자놀이에 혈관이 툭 돋아났다.

"뭐가 엄살을 부린 적이 없어. 너 제대로 못 걸었잖아. 표정도 완전 울 것 같이 그래가지고. 엉? 로이드 님 저 못 걷겠어요, 히잉, 하고. 엉? 막 찡찡거리더만. 엉? 그래서 이 몸께서 친히 업어주기까지 하셨는데. 그게 다 연기였던 거냐?"

"물론 아니었습니다."

하비엘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리고 특유의 시니컬한 말투로 툭 내뱉었다.

"트리플 써클의 회복력 덕분입니다."

"회복력? 트리플 써클?"

"그렇습니다."

"아하. 그러니까, 트리플 써클로 마나를 쑴펑쑴펑 증폭시키는 덕분에 회복력도 남다르시다?"

"정확한 요약이십니다."

"후아. 억울해지네. 난 아직도 뼈마디가 욱신거리는데."

"억울하실 것 없습니다."

"왜?"

"그냥 저보다 늙어서 회복력이 떨어지는 거라고 생각하시면 조금은 위로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만."

"뭐 이런 발골업자 같은 놈이. 자꾸 팩트로 뼈 때릴래?"

"때린 적 없습니다. 다만-"

"다만?"

"이렇게 깨어나셔서 기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 그래. 나도 기쁘다, 이 자식아."

로이드는 피식 웃고 말았다.

다행이었다.

이렇게 살아남았다는 사실도.

하비엘이 무사하다는 사실도.

모두 반가웠다.

그런 마음은 하비엘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새삼 그토록 어둡고 암울하던 개미굴을 함께 빠져나왔다는 실감이 났다.

"다행이야. 정말."

로이드는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행인 건 다행인 거고.

이제는 움직일 때였다.

로이드의 상태는 빠르게 회복되었다.

지하에서 얻은 더블 써클의 위력이었다.

종일 수시로 아스라한 심법을 운용했다.

두 개의 써클로 흡수한 마나를 증폭했다.

증폭한 마나를 신체 말단까지 두루두루 돌렸다.

자연 체세포의 생체 사이클이 빨라졌다.

세포의 회복 주기 또한 빨라졌다.

덕분에 극심한 혹사로 늘어났던 근육과 인대가 불과 열흘도 지나지 않아 대부분 완쾌되었다.

좋은 소식은 또 있었다.

저택 곳곳에 붙어 있던 차압 딱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눈에 거슬렸던 그 빨간 딱지들이 사라졌다.

남작가에 대한 압류가 해제된 덕분이었다.

'이게 다 이 몸 덕분이지.'

로이드는 문득, 소설 철혈의 기사 속 내용을 떠올렸다.

소설대로라면 이 시기의 남작가 저택은 완전히 텅텅 빈 상태여야 했다.

일찌감치 압류가 실행된 까닭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압류가 취소되었다.

그동안 자신이 꾸준히 벌려온 온돌방 시공 사업.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남작의 이자를 꼬박꼬박 낸 덕분이었다.

'덕분에 남작가에 대한 신용이 회복됐지. 정말 다행이야.'

철혈의 기사에서는 이 시기쯤 남작가 식구들이 모두 저택 밖으로 쫓겨난다.

남작 부부는 절망해서 넋이 나가고, 로이드는 본격적으로 현실부정과 술독에 빠져 살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그 암울했을 시나리오를 자신이 바꾸어가고 있었다.

또한, 앞으로도 계속 바꿀 계획이었다.

"그러니까 다들 움직여! 더워졌다고 설렁설렁 하지 말고!"

로이드의 외침이 광산 건설 현장에 쩌렁쩌렁 울렸다.

어느새 광산 건설 마무리 공사에 복귀한 그였다.

직접 공사를 지휘했다.

연장 벨트를 허리에 매고 선두에 나섰다.

가장 힘들고 위험한 작업마다 반드시 참여했다.

그럴 때마다 숙련공들과 공병대 병사들은 더욱 소홀함 없이 비지땀을 흘렸다.

모두가 이전보다 로이드를 한층 신뢰하게 된 덕분이었다.

'우리의 안전을 자신의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 분이야.'

이제 더는 과거의 망나니는 없었다.

한때 망나니였다 하더라도 그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처음 야수 개미가 출몰했던 그날, 작업자들을 안전하게 피신시키기 위해 제일 뒤에 남았던 로이드였다.

그 모습이 작업자들의 가슴에 깊이 각인되었다.

그리고 다들 생각했다.

그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저런 분이 지휘하는 작업이라면 믿고 따를 수 있다고.

설령 또다시 위험한 순간이 온다 해도 저분이 안전을 책임져 줄 것이라고.

신뢰의 힘이었다.

덕분에 광산 마무리 공사는 그 어느 때보다 더욱 활기를 띠었다.

"이게 마지막 보강 기둥이다. 조금만 더! 구령 붙이고! 둘! 셋!"

"허으압!"

로이드의 구령에 맞추어 공사의 마지막 단계가 끝났다.

드디어 석탄 광산이 완공된 것이었다.

하지만 로이드는 거기서 들뜨지 않았다.

'이제 시작이야.'

완공을 기념하는 회식 장소에서도.

공사에 참여한 모든 숙련공과 공병대 병사들에게 특별 보너스를 지급하면서도.

로이드는 들뜨는 대신 다음 단계의 일을 차분히 구상했다.

그리고 실행에 옮겼다.

급하지 않게.

차근차근 한 걸음씩.

바로 완공된 광산의 안전 점검 과정이었다.

'빚 청산하려면 부지런해야 하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남작가는 이제 겨우 압류를 면했을 뿐이었다.

지금 온돌방 시공 사업으로 벌어들이고 있는 돈으로는 매달 이자를 맞춰 내는 것만으로도 빠듯했다.

'그 말은 곧, 아직 본게임인 원금 갚기가 남아 있다는 뜻이지.'

그 원금이야말로 궁극적으로 치워야 할 거대한 똥 덩어리였다.

그걸 정리하기 위해선 쉬지 말아야 했다.

동시에 성급해서도 절대 안 되었다.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이야.'

사실 당장의 돈만 생각하면 그냥 광산을 열어도 된다.

당장 광산에서 일할 광부를 모집하고 교육을 시작하면 된다.

그만큼 일찍 석탄 채굴을 시작할 수 있다.

시간과 비용, 모두 절감될 것이다.

하지만 로이드는 그렇게 하기 싫었다.

'그렇게 하면 당장의 작은 돈은 벌 수 있겠지. 하지만 이런 일일수록 길게 봐야 해.'

그는 대한민국에서 겪고 보았던 수많은 일들을 떠올렸다.

대한민국은 빨리빨리의 나라였다.

안전점검 따위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아니, 아예 작업자를 부속품 취급하기 일쑤였다.

수많은 공장, 물류센터, 현장까지 대부분 그랬다.

'기계에 손이 잘리고, 용광로에 빠지고, 고압선에 감전되고, 전철 스크린도어에 끼어서 사고를 당하고, 에스컬레이터를 수리하다가 말려 들어가 참사를 겪고... 그런 비극이 끊임없이 뉴스를 타고 알려져도 관리를 한다는 놈들은 잠깐 반성하는 척, 안전에 신경 쓰는 척만 하고 끝내지. 그렇게 사고가 생겨나서 빈 자리에 새로운 작업자를 집어넣어. 또 망가질 때까지 굴려. 망가지면? 상관없어. 새 작업자를 구하면 된다고 생각하니까. 그게 놈들이 말하는 당연한 관행이니까. 헌 부속품을 버리고 새 부속을 끼워 넣듯이 간편하게.'

뉴스를 통해 바라보았던, 밑바닥 계층으로 살아가며 피부로 겪어보았던 대한민국의 어두운 측면이었다.

로이드는 저런 방식에 신물이 났다.

혐오감에 가까운 회의를 느꼈다.

'저러면 당장은 좋아도 결국엔 작업자들의 신뢰를 잃게 돼. 나중엔 아무도 내가 맡기는 일을 하려 들지 않을 거야.'

게다가 뒤늦게 사고가 발생하면?

그걸 수습하기 위해 더 큰돈이 들어간다.

아니, 무엇보다도 자신의 지휘를 받는 사람들이 그런 꼴을 겪는 것 자체가 싫었다.

그러니 광산을 열기 전에 안전 점검을 시행하는 건 필수였다.

'다행히 이렇게 측량 스킬이 있으니까 편하기도 하고. 측량!'

츠츠츠츠!

광산 구석구석을 살피는 그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빛났다.

측량 스킬을 통해 광산 내부의 구조를 세밀하게 점검했다.

지반은 안정적인지.

토대는 잘 다져졌는지.

침하가 진행되는 곳은 없는지.

단 1센티의 면적도 놓치지 않고 살피려 애썼다.

게다가 그의 안전 점검 범위는 광산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설마 개미굴로 다시 들어가려는 겁니까?"

광산 밑바닥 탄층.

그곳에 뚫린 구멍으로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하비엘의 물음이 날아왔다.

로이드는 하비엘을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응. 겁나냐?"

"그건 아닙니다. 다만-"

"다만?"

"어째서 들어가시려는지 이유가 궁금합니다."

"어째서긴. 안전 점검이지."

로이드가 뭘 그리 당연한 걸 물어보느냐는 듯 말했다.

"사실 공사로 만든 갱도보다 여기가 더 위험해. 개미들이야 타고난 터널 시공자라곤 하지만 이 아래에서 폭발이 일어났잖아? 지반이 불안정해졌을 거야. 추가 붕괴가 큰 규모로 일어나면 위쪽의 갱도에까지 영향이 미칠 수도 있어."

그의 말이 이어졌다.

"그뿐일까. 여전히 남아 있을 메탄가스가 유출될 위험은 없을지, 혹은 살아남은 몇몇 야수 개미가 돌아다니고 있을지도 살펴봐야 해. 놈들이 올라와서 광부들을 해칠 수도 있으니까. 이쯤이면 이해가 됐겠지? 그럼 가자."

그렇게 할 말을 마친 로이드는 개미굴로 들어갔다.

하비엘과 함께였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해가 안 된다니. 뭐가."

"어째서 직접 위험을 무릅쓰시는 겁니까."

"왜 다른 사람을 시키지 않느냐고?"

"예."

고개를 주억거린 하비엘이 잠시 생각을 정리하더니 말했다.

"보통 이런 위험한 일에 직접 나서는 귀족이 있다는 말은 못 들어본 것 같습니다만."

"그런 귀족, 있으면 안 되냐?"

"예?"

"날 위해 일해 줄 사람들의 안전을 직접 확인하겠다는 건데, 이런 내 생각이 그렇게까지 이상한가?"

"그건 아닙니다. 무모하지만 한편으로는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오. 어쩐 일로 내 칭찬을."

"무모하다는 전제를 깔았습니다만."

"수줍어하기는. 칭찬하고 싶으면 그냥 해."

"싫습니다."

"허허. 츤츤대기는."

"츤츤은 또 뭡니까?"

"그런 게 있어. 근데 저건 뭐냐?"

한창 옥신각신 잡담을 나누며 개미굴을 조사하던 도중이었다.

로이드가 눈을 찡그리며 횃불로 앞쪽을 가리켰다.

그곳 바닥에 뭔가 반짝이는 게 있었다.

"제가 보겠습니다."

하비엘이 검을 뽑아들고 접근했다.

로이드가 가리킨 장소를 살폈다.

한데 그곳에서 반짝이던 물건은....

"검입니다."

"검?"

"예."

하비엘이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검을 집어들었다.

"인간이 쓰는 검은 아닌 것 같습니다. 조악하고 균형이 맞지 않군요. 손잡이의 모양이나 날이 손상된 형태로 보아... 아무래도 오크가 쓰던 검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크?"

"예."

"오크 검이 왜 여기서 나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리송한 일이었다.

오크라면 철혈의 기사에서 종종 등장하던 돼지 머리를 지닌 몬스터였다.

한데 지하 수십 수백 미터의 개미굴 한가운데에 떨어져 있는 오크제 장검이라니.

"걔들 원래 동부 산맥 건너편 황야에 사는 애들 아냐?"

"맞습니다."

"흐음, 신기한 일이네."

어쩌면 어떤 개미가 그냥 물어온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는 의문을 접어두었다.

"계속 조사하다 보면 뭔가 또 나올 수도 있겠지. 일단 계속 움직이자."

"알겠습니다."

그 뒤로도 둘은 개미굴 곳곳을 조사했다.

워낙 방대한 면적에 얼기설기 얽힌 굴이었다.

꼼꼼히 조사하는 사이에 보름이 훌쩍 지나갔다.

그리고 조사 16일째가 되던 날.

둘은 개미굴 밑바닥 저장고에 널브러져 있는 어느 젊은 오크 전사를 발견하게 되었다.

"뭐냐, 이건."

오크가 왜 여기서 나와?

로이드는 얼떨떨한 얼굴로 오크 전사를 살펴보았다.

나란히 오크를 살피던 하비엘이 대답했다.

"개미에게 포획된 오크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오크, 살아 있는 것 같군요."

"뭐어?"

살아 있다고?

마치 냉동인간처럼?

하비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마비독에 당한 상태인 것 같습니다."

"...."

문득, 철혈의 기사에서 읽은 내용이 떠올랐다.

그것은 야수 개미의 생태에 관한 내용이었다.

'맞아. 야수 개미들은 일부 식량을 산 채로 마비시켜서 보관한다고 했지.'

아마도 이 오크가 그런 케이스인 듯했다.

그런 사실을 확인한 덕분이었다.

불현듯, 머릿속에 새로운 그림이 그려졌다.

"...어, 잠깐. 빙고."

오크의 상태를 확인한 순간 번개처럼 떠올린 뜻밖의 핵이득 플랜.

로이드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피어났다.

30화. 핵이득 플랜 (2)

"내 이름은 아로쉬.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위대한 오크 아카쉬의 서른 마흔 다섯 대째 후손이다, 꾸이익!"

"서른 마흔 다섯 대째 후손?"

"그렇다, 꾸익."

"그거 혹시 서른 더하기 마흔 더하기 다섯?"

"아니다. 마흔 빼기 서른 더하기 다섯이다, 꾸이익!"

"15대째 후손이라는 거로구만?"

"그걸 단숨에 계산하다니, 너 천재다, 꾸이익!"

"...."

쩝.

로이드는 착잡한(?) 심정으로 자신의 방 침대에서 눈을 뜬 오크, 아로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혹시 내가 전두엽 없는 바보를 주워온 건가.

'아니면 이 오크 놈, 뇌 주름이 15개밖에 없는 걸지도.'

문득, 오늘 겪은 일이 생각났다.

하비엘과 함께 개미굴을 탐사했다.

16일에 걸친 안전 점검의 마지막 단계였다.

마침내 개미굴 가장 깊은 곳, 최하층으로 추정되는 저장고에 다다랐다.

그곳에서 이 오크를 발견했다.

놀랍게도 이놈은 살아 있었다.

"오랜만에 깨서 그런지 얼떨떨하다. 개미 마비독 너무 따끔했다, 꾸이익."

"마비독?"

"그렇다, 꾸익."

"역시. 마비독이 맞았구만."

대강 알 것 같았다.

저장고에 가사 상태로 보관되던 오크.

그렇다면 그 용도야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개미들이 저장용 식량으로 삼기 위해 비축해두었던 거겠지. 마비독을 써서 말이야.'

음식을 신선하게 보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죽이지 않는 것이다.

살아 있는 고기는 썩거나 상하지 않으니까.

아로쉬가 커다란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돌격의 아로쉬다. 성년식을 마치지도 못했는데 쉽게 죽을 수는 없다, 꾸익."

"성년식?"

"그렇다, 꾸익."

"그럼 너 아직 미자냐?"

"미자가 뭐냐, 꾸익."

"미성년자... 아니, 아직 어른이 안 된 거냐고."

"성년식을 마치면 전사 오크로 인정받는다. 그래서 야수 개미 영역으로 쳐들어간 거다, 꾸이익."

"설마 야수 개미를 잡는 게 너희 부족의 성년식인 거야?"

"그렇다, 꾸익."

아로쉬의 말이 이어졌다.

"위대한 조상 대대로 내려온 관습이다. 그러니까 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아들의 아버지가 동부 황야에 터전을 잡았을 때부터였다, 꾸이익."

"...그냥 고조할아버지라고 말해."

"어쨌건 야수 개미 많이 잡았다. 때리고 자르고 죽였다. 열 마리씩 열 번은 죽였다. 그러다가 너무 흥분했다, 꾸익."

"그래서?"

"여왕개미를 잡고 최고의 전사로 인정받고 싶었다. 개미굴로 쳐들어갔다, 꾸이익."

"개미굴로 들어갔다고? 일부러? 그것도 혼자서?"

"당연하다. 전사는 혼자가 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꾸이익."

"미쳤구만."

이 오크가 어쩌다가 개미들의 삼각김밥 신세가 되어 있었던 건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무리한 돌격을 감행했다가 포위되어 지쳤으리라.

결국엔 마비독에 당하고 말았으리라.

로이드는 피식 웃고 말았다.

'운이 좋았네. 그 상황에서 살아남은 이 오크 녀석도, 이 녀석을 득템한 나도.'

문득, 아까 이곳에서 벌어졌던 난리가 떠올랐다.

개미굴에서 이놈이 살아 있다는 걸 알자마자 업어왔다.

당연히 저택에선 난리가 났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오크를 본 하녀들은 두려움에 혼비백산했다.

소식을 듣고 파자마 차림으로 달려온 남작도 안색이 하얗게 질렸더랬다.

'로이드, 지금 뭘 하는 것이냐?'

'왕위를 계승하는 중입... 아니, 보시다시피 오크를 데려왔습니다.'

'그러니까 오크를 왜?'

'생각해둔 바가 있어서입니다. 우선 여기, 냉수부터 한 잔 들이켜시구요.'

로이드는 오히려 차분하게 대꾸했다.

침착한 태도로 남작을 안심시켰다.

'개미굴을 탐사하다가 발견했습니다. 이 오크를 살려주면 반드시 영지에 큰 이득이 돌아올 겁니다.'

'이득이라니?'

'제가 듣기로 오크족은 용맹한 전사이며, 은혜와 원한을 확실히 구분하는 성격을 지녔다고 했습니다.'

사실이었다.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도 몇 차례나 언급된 내용이었다.

'그런 사실은 나도 익히 들어 알고 있다만, 그래도 괜찮겠느냐?'

'괜찮습니다. 만일 이놈이 깨어나서 난동을 부려도 하비엘이 금방 제압할 겁니다.'

그렇게 간신히 남작을 안심시켰다.

아로쉬를 자신의 침대에 눕혔다.

영지의 의사를 불러왔다.

다행히 의사는 아로쉬의 증상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흐음, 이건... 손톱이 파랗게 변한 걸 보니, 야수 개미들이 먹잇감을 사냥하고 보관할 때 쓰는 독에 당한 모양이로군요. 그럼 이 약을 먹이시면 될 겁니다.'

'이건?'

'타나리아의 잎사귀를 말리고 갈아서 얻은 가루입니다. 마비 증상 해소에 탁월한 효과를 지녔지요.'

의사에게 받은 약을 먹였다.

과연 의사의 호언장담대로 약발(?)은 끝내줬다.

약을 먹인지 불과 10분도 지나지 않아서 아로쉬가 눈을 뜬 것이었다.

"어쨌건 고맙다. 네가 날 거기서 데리고 나오지 않았더라면 나 아로쉬, 개미밥이 될 뻔했다, 꾸이익."

"그렇지? 고맙지?"

"그렇다. 너, 내 은인이다, 꾸이익."

"그럼 은인한테 보답을 해줘야겠네. 그렇지?"

"맞다, 꾸익!"

"원하는 보답을 말하면 되는 거야, 그럼?"

역시, 넘어온다.

로이드의 목소리가 은근해졌다.

아로쉬가 더욱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다. 뭐든 말해라 인간, 꾸이익!"

"광산에서 일해 줄 120명 정도의 오크 남자가 필요해."

마치 이 말을 꺼낼 순간만 기다렸다는 듯이.

로이드는 빙빙 돌리지 않고 푹, 찌르듯 말했다.

사실 이것이 아로쉬를 구해준 이유였다.

오크는 튼튼하다.

체력도 빵빵하고, 힘은 더 끝내준다.

용맹하고 겁이 없어서 위험한 일에도 주저 없이 뛰어든다.

힘든 광산 일을 맡기기에 드워프에 버금갈 정도로 최고의 재능을 갖춘 종족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니 널 구해준 거지. 그게 아니면 네가 뭐 예쁘다고 여기까지 업어 와서 간호하고 보살폈겠냐.'

그렇게 구해줬다.

은혜를 입혔다.

원하는 바를 말했다.

그런데 아로쉬의 기색이 이상했다.

슬며시 이쪽의 눈을 피하고 있었다.

"..."

"어이?"

"...."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하라며."

로이드가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로쉬가 슬그머니 눈동자를 옆으로 굴렸다.

"이봐요, 아저씨?"

"...."

"오크 아저씨, 내 눈 좀 볼래요?"

"꾸익, 그건 좀... 어렵겠다, 꾸익."

"어렵다니, 뭐가."

"인간 네가 나 아로쉬를 구해준 건 고마운 일이다. 은혜를 갚을 수만 있다면 나 아로쉬는 뭐든 할 거다. 하지만 인간 네가 방금 말한 부탁은 조금 다른 일이다, 꾸이익."

"다른 일이라니. 어떻게 다른데."

"너는 전사가 아니다, 꾸익."

"그래서?"

"전사가 아닌 자는 오크 남자를 부려 먹을 수 없다. 그럴 자격이 없다, 꾸이익."

아로쉬의 우락부락한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가 정말로 미안한 마음으로 말했다.

"미안하다 인간, 꾸익. 그 부탁은 내가 들어줄 수 없을 것 같다, 꾸이익."

진심이었다.

로이드라는 저 인간.

생면부지의 자신을 구해줬다.

어두운 개미굴에서 개미들의 식량으로 끝장날 뻔했던 자신을 살려준 은인이었다.

어떻게든 이 은혜를 갚고 싶었다.

저 인간이 말하는 부탁이라면 다 들어주고 싶었다.

은혜와 원한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끼지 않는 것.

그것이 황야를 살아가는 오크 전사의 긍지이자 명예였다.

그렇기에 안타까웠다.

들어주고 싶어도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을 로이드가 꺼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내게 전사의 자격이 없기 때문에 오크 남자들을 일꾼으로 거느릴 수 없는 거라고?"

"그렇다, 꾸익."

"자격을 얻으려면 뭘 해야 하는데?"

"성년식을 치러야 한다. 우리와 똑같은 방법으로. 그리고 족장에게 그 공적을 인정받아야 한다, 꾸익."

"그래애?"

로이드의 입가에 미소가 슬쩍 피어났다.

그가 턱을 치켜들며 반문했다.

"그럼 나 자격이 있는 거 같은데?"

"뭐, 꾸익?"

"맞잖아. 성년식 치르면 된다며. 그런데 너희 성년식은 야수 개미를 잡는 거라며."

"그렇다, 꾸익."

"그럼 저거부터 좀 볼래?"

로이드가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엄지를 치켜들고서 침실 한쪽을 가리켰다.

아로쉬의 시선이 그 손가락질을 따라 움직였다.

로이드의 어깨를 넘어.

침실 벽면을 따라.

벽에 걸린 물건에 닿았다.

"여왕개미의 머리야. 이번에 잡은 기념으로 트로피 삼아 걸어놨는데, 어때?"

"꾸이익...?"

아로쉬의 입이 쩍 벌어졌다.

진짜로 여왕개미의 머리였다.

모조품이나 가짜가 아니었다.

평생을 야수 개미와 투쟁하며 살아가는 부족의 아들인 그였다.

야수 개미의 머리를, 그것도 여왕개미를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저걸 어떻게, 꾸익?"

"어떻게긴, 잡아서 걸었지."

로이드가 싱긋 웃었다.

반은 맞고, 반은 거짓말이었다.

메탄가스를 폭발시켜서 여왕개미를 잡은 건 맞았다.

하지만 직접 싸워서 잡은 건 아니긴 했다.

로이드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입술에 침을 촵촵 발랐다.

"그런데 말이야. 저 여왕개미를 잡는데 조금 흥미로운 점이 있었어. 뭔지 알아?"

"뭐, 뭐였냐, 꾸익?"

"어쩐지 여왕개미가 힘이 많이 빠져 있더라고."

로이드의 목소리가 은근해졌다.

"꼭 마치 다른 누군가와 힘껏 싸우기라도 했던 것처럼 지쳐 있더라? 그런데 그 근처에서 이런 검이 발견됐어. 하비엘?"

로이드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뒤에 묵묵히 서 있던 하비엘이 검을 들어 올렸다.

개미굴을 조사하다가 발견했던 오크제 철검이었다.

그걸 본 아로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꾸익? 저거 내 검인데, 꾸익?"

"그렇지? 역시."

로이드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좀 알겠네. 여왕개미가 누구랑 싸우다 지친 거였을까?"

"설마 나랑, 꾸익?"

"그렇지. 바로 그거지. 똑똑하네."

로이드가 더욱 환하게 웃었다.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아로쉬의 철검은 여왕개미와 아무런 연관도 없는 곳에서 발견되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진짜 중요한 건 상대가 그렇다고 믿어주는 거지.'

그렇게라도 거래를 성사시킨다.

오직 그것만이 로이드에게 중요했다.

물론 실시간으로 뒤통수에 날아와 박히는 하비엘의 '이 사기꾼'이라는 눈빛이 좀 따끔거리긴 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생각해봐. 너 개미굴에서 싸울 때 좀 큰 개미 없었어?"

"꾸이익... 끄응."

"너무 열심히 싸워서 정신이 없었던 거지?"

"그렇다, 꾸익."

"하지만 있었어. 여기 증거가 있잖아?"

하비엘에게서 철검을 받았다.

아로쉬에게 건네주었다.

"여기, 네 철검이 증명하고 있어. 여왕개미는 너 때문에 지친 거야."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인간, 꾸익?"

"뭐겠어. 여왕개미를 잡은 내 공적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거지."

"설마, 꾸익?"

"그 설마가 맞아. 결과적으로 같이 잡은 거야. 여왕개미를. 너랑 내가. 즉, 우리가."

"...."

"공동 작업. 공동 제작. 공동 저작권. 하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이냐. 안 그래?"

"그럼...꾸익."

"아예 힘을 합쳐서 잡은 걸로 하자."

로이드가 송곳으로 푹 찌르듯 말했다.

"너, 엄밀히 말하면 성년식 치르는 데 실패했잖아. 무사히 부락으로 돌아가지 못했으니까. 이제 돌아가 봤자 실패자 취급받을 거란 말이다. 알아?"

"꾸익?"

"그런데 여기, 이 여왕개미 머리를 떡하니 들고 돌아간다고 생각해봐. 어때?"

"...."

"끝내주지 않아?"

꿀꺽.

아로쉬의 목울대가 크게 출렁였다.

상상만 해도 끝내줬다.

지금껏 수많은 전사들이 성년식을 치렀지만, 어떤 오크도 여왕개미를 잡은 적은 없었다.

그런데 자신이 그런 공적을 세우게 되는 거라니.

부락 모든 오크 처녀의 뜨거운 시선을 받게 될 것이다.

그뿐 아니라 모든 오크 전사의 존경을 받을 수도 있으리라.

로이드의 목소리가 젊은 오크의 가려운 옆구리를 살살 긁어주듯 흘러나왔다.

"잘 생각해봐. 손해 볼 거 없다니까? 게다가 이거 사기 치는 것도 아냐. 엄밀한 사실이야. 너 아니었으면 내가 여왕개미를 잡지도 못했을 거니까. 안 그래?"

"그, 그러면... 꾸익."

"맞아. 어깨 당당히 펴. 너 완전 쩌는 오크야."

"꾸익!"

"좋아. 보기 좋네. 그럼 내 부탁 들어줄 수 있겠지?"

"부탁, 꾸이익?"

"우린 힘을 합쳐서 함께 여왕개미를 잡은 거야. 그러니까 날 너희 부락으로 데려가. 내가 족장에게 자격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그렇게 내가 전사로서의 자격을 인정받으면 120명의 오크 남자를 일꾼으로 우리 영지에 파견해 주는 거야."

"그러면 나는... 꾸익...."

"최고의 성년식을 치른 전사가 되는 거지. 거기에 내게 은혜까지 갚을 수 있어. 모두가 행복해지는 거야. 어때?"

"...."

아로쉬는 로이드를 쳐다보았다.

이쪽을 향해 빙그레 웃는 인간.

자신을 죽음으로부터 구해준 고마운 인간.

그런 은인답게 정말로 선량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넘치도록 고마운 제안까지 건네주고 있었다.

아로쉬는 마음을 굳혔다.

"좋다 인간! 나 아로쉬는 은혜를 가벼이 여기지 않는 오크 전사다. 나는 네가 전사의 자격을 얻을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해 돕겠다, 꾸익!"

젊고 순진한 오크 전사가 솥뚜껑 같은 손을 내밀었다.

로이드가 마주 내민 손과 힘찬 악수를 나누었다.

물론 아로쉬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이 순간, 하비엘이 안타까움의 시선을 자신에게 보내고 있음을.

로이드가 대박 호구를 잡은 사기꾼의 푸근한 미소를 짓고 있음을.

그렇게, 갓 완공된 석탄 광산에 최고의 광부를 공짜로 투입하기 위한 로이드의 큰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31화. 근손실을 막는 건축물 (1)

"아버지, 꾸익!"

투두두두!

아로쉬가 내달렸다.

지렁이 같은 힘줄이 꿈틀거렸다.

가로등만큼 두꺼운 근육질 종아리로 땅을 박찼다.

우랄 산맥 떡멧돼지를 연상시키는 덩치가 믿기지 않는 속도로 돌진했다.

그러자 반대편에서 더 큰 오크가 열렬히 화답했다.

"아들, 꾸이익!"

쿠두두두!

중년 오크가 달려왔다.

구렁이 같은 힘줄이 불끈거렸다.

전봇대보다 두꺼운 근육질 다리로 땅을 박찼다.

퉁구스카 핵불곰만큼 거대한 떡대가 흙먼지를 휘날리며 돌진해 왔다.

그리고 충돌했다.

투콰학!

두 근육질 덩치 사이에 끼었을 공기 분자가 불쌍해지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쪽의 감상과 별개로 아로쉬와 중년의 오크, 두 부자는 서로를 얼싸안고 나름 맹렬한(?) 상봉을 치렀다.

"이놈 아로쉬야, 꾸익!"

"아버지이, 꾸이익!"

"너 괜찮은 거냐, 꾸익?"

"전 괜찮습니다! 으흐흑, 꾸익!"

"다행이구나. 하지만 울지 마라 아들아, 꾸이익."

"이런 순간에도 말입니까, 꾸익?"

"당연하지. 안 그래도 고생으로 수척해진 녀석이 함부로 울면 양분이 빠져나가서 근육 줄어든다, 꾸이익!"

"헉, 근손실, 꾸익!"

"전사라면 그것만은 피해야 하지 않겠느냐, 꾸익?"

"역시 아버지는 현명하십니다, 꾸이익!"

...아니, 현명하다기보단 뇌가 덤벨 모양일 것 같은데.

로이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창 해후를 나누고 있는 오크 부자의 모습.

동네 헬스장에 던져놓으면 3대 운동 1톤쯤은 워밍업으로 너끈히 칠 것 같았다.

그러고도 만나자마자 근육 이야기부터 나누고 있다니.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 오크들을 중증 근육 바보라고 부르더니, 역시나 그 표현이 상당히 정확한 거였구나 싶었다.

절로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한편으로는 문득, 보름 전의 일이 떠올랐다.

"그 계획이 통하겠느냐?"

"예, 아마도."

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전자를 들었다. 기울였다. 조르륵, 맑은 찻물이 남작의 잔을 채웠다.

"말씀드렸다시피 아로쉬는 저를 완전히 신뢰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듣기로 그는 부족장의 아들이라더군요."

"아들이라고? 부족장의?"

"네."

로이드가 자신의 찻잔을 들었다. 기울였다. 한 모금 머금어 목으로 넘겼다.

"아마도 그는 아들의 성년식 공적을 인정할 겁니다."

"여왕개미의 머리 때문에... 그렇겠군."

"네, 저는 거기에 숟가락을 얹는 거죠."

공동 저작, 공동 사냥.

대강 그런 타이틀을 붙일 생각이었다.

아로쉬와 함께 여왕개미를 잡은 거라고.

그러니 자신도 전사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족장이 널 쉽게 인정해 주겠느냐?"

"만만한 일은 아니겠죠. 시도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쨌건 성공했을 때의 이득이 너무 커서요."

사실이었다.

만약 오크 부족장에게 전사로 인정받게 된다면?

아로쉬의 지원을 받아 120명의 오크 전사를 광부로 부릴 수 있게 된다.

튼튼하고 용맹한 120인의 오크.

지치지도 않고 석탄을 캐낼 것이다.

천 명의 인간 광부보다 유능할 것이다.

"게다가 숙식 비용을 제외한 인건비도 거의 들지 않을 겁니다. 고급 인력이 공짜라는 거죠."

"하지만 위험하진 않겠느냐? 아무래도 오크 부락에 직접 가는 건 조금...."

"괜찮습니다. 족장의 아들인 아로쉬가 절 은인으로 여기고 있으니까요."

"으음...."

남작의 표정이 흐려졌다.

그는 로이드가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오크는 난폭하고 거친 종족이다.

그런 이들의 땅에 가겠다니.

가능하다면 말리고 싶었다.

그 뒤로도 로이드는 망설이는 남작을 열심히 설득했다.

남작 대 로이드의 고집 대결이었다.

물론 승자는 로이드였다.

"...좋다. 대신 조건이 있다."

"뭡니까."

"병사를 데려가거라. 서른 명 정도."

최소한 그 정도 호위는 있어야 안심이 된다는 것이 남작의 주장이었다.

로이드는 남작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병사 서른 명의 호위.

혹시나 모를 보험 정도로 괜찮을 터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공병대 병사 30인에 더해서 아스라한 경도 함께 데려가도록 하지요."

그렇게 출발 준비가 착착 진행되었다.

야영 도구와 식량 등을 갖추었다.

다음 날 아침에 출발할 수 있었다.

남작 부부가 저택 문 앞까지 배웅을 나와 주었다.

진심으로 이쪽을 걱정해주는 모습이었다.

잠시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 마음은 금방 접어두었다. 자신이 아니었다면 원작대로 몰락했을 분들이었다. 곧 죽음을 맞이해야 했을 부부였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조금은 복잡한 기분으로 인사했다.

그렇게 남작가를 출발했다.

일행과 함께 동부 산맥을 넘었다.

아로쉬는 유능한 전사이자 길잡이였다.

산맥의 지리에 익숙한 그 덕분에 일행은 위험한 몬스터 서식지를 피해 이동할 수 있었다. 덕분에 열흘의 여정 끝에 무사히 오크 부락에 도착했다.

그리고 마침내....

"꾸이익! 반갑다! 나 아쿠쉬로 말할 것 같으면 아로쉬의 아버지다, 꾸익!"

...부락의 수백 명 오크가 지켜보는 가운데 떡대 오크 부족장과 악수를 나누게 되었다.

"네, 반갑네요."

"아로쉬한테 이야기 들었다. 내 아들을 구해줬다고, 꾸익?"

"네, 어쩌다 보니."

"좋다! 그럼 넌 내 은인이기도 하다, 꾸익!"

"동시에 당신의 아들과 함께 여왕개미를 사냥한 전사이기도 하지요."

"...뭐, 꾸익?"

아쿠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이드가 하비엘을 향해 눈짓했다.

하비엘이 등에 짊어지고 있던 보자기를 풀었다.

헬스장 짐볼만큼이나 큼직하고 시커먼 덩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왕개미의 머리입니다. 전리품으로 챙겼죠."

"꾸, 꾸익?"

아쿠쉬의 커다란 목울대가 위아래로 꿈틀거렸다.

비단 족장 아쿠쉬만 놀란 것이 아니었다.

주위에 모인 수백의 오크들도 마찬가지였다.

"꾸이익? 저건 뭐냐, 꾸익!"

"저렇게 큰 야수 개미 머리는 처음 본다, 꾸이익!"

"사나울 것 같다, 꾸익!"

"강력할 것 같다, 꾸익!"

"맛있을 것 같다, 꾸익!"

"...여기 밥도둑이 있다, 꾸이익!"

한마디로 오크 부락은 순식간에 감탄과 소란에 빠졌다.

이런 순간을 놓치면 안 된다.

냉정한 판단을 내릴 시간을 주면 안 된다.

한번 탄 분위기를 그대로 밀고 나가야 유리해진다.

그렇게 판단한 로이드가 재빨리 말했다.

"야수 개미의 굴을 탐사하던 중이었습니다. 지쳐서 비틀거리는 여왕개미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어렵사리 잡았지요. 그런데 그 여왕개미 근처에 오크제 철검이 떨어져 있더군요."

"오크제 철검, 꾸익?"

"그렇습니다. 당신의 아들인 아로쉬의 검이었죠."

말을 마친 로이드가 아로쉬를 향해 힐끗 눈짓했다.

아로쉬가 콧김을 풍 뿜었다.

"은인의 말이 맞습니다, 꾸익!"

"그렇다면 아들 네가 여왕개미와 싸우며 힘을 다 빼놓았고, 그 후에 은인이 여왕개미를 잡았다는 뜻인가, 꾸이익?"

"그렇습니다. 함께 싸운 셈입니다, 꾸이익!"

"으음, 꾸이익...."

족장 아쿠쉬의 두꺼운 눈두덩 살집이 꿈틀거렸다.

그의 진녹색 눈동자가 아들과 로이드, 여왕개미 머리를 번갈아 향했다.

그는 여왕개미의 머리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진짜로구나, 꾸익.'

평생 야수 개미와 투쟁하며 살아온 족장이었다.

그들 무리의 여왕이 얼마나 강력한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한데 자신의 아들이 그런 강적을 사냥했다니.

족장의 두툼한 대흉근이 감격으로 부르르 떨렸다.

"아들, 꾸익!"

"예, 꾸이익!"

"축하한다! 넌 이제 전사다! 나 아쿠쉬는 족장의 이름으로 오크 아로쉬가 부족의 당당한 전사가 되었음을 선포한다, 꾸익!"

"감사합니다, 꾸익!"

"좋다. 기념으로 오늘은 하체다, 꾸익!"

"남자는 하체, 꾸익!"

아쿠쉬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아로쉬가 부락 한쪽으로 달려갔다.

그곳에 놓인 커다란 동상을 어깨에 짊어졌다.

족히 0.5톤은 될 법한 엄청난 크기.

심지어 도금까지 되어 있는 조각상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주변엔 도금된 동상 외에도 호화로운 물건이 잔뜩 널려 운동기구로 혹사(?)당하고 있었다.

무려 역기 무게추로 쓰이고 있는 샹들리에.

그 중간에 박힌 봉은 진주로 장식된 기둥이었다.

심지어 금화 가득한 보물 상자는 통짜 케틀벨로 쓰이고 있었다!

'헐, 미친.'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 오크들이 얼마나 유능한 전사이자 약탈자인지 묘사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한데 실제로 보니 더했다.

'수십 년 동안 쌓인 약탈품이겠지. 그런데 정작 오크들은 금은보화가 있어도 쓸 곳이 없으니.'

쩝.

운동기구로 전락한 금은보화.

아로쉬가 스쿼트를 한답시고 끙끙대며 들고 있는 도금 동상.

모두 보고 있자니 절로 군침이 돌았다.

그동안 아로쉬는 동상을 짊어지고서 킁킁 콧김을 뿜어냈다.

그때마다 아나콘다 같은 허벅다리 근육을 뽐내며 일어났다 앉기를 반복했다.

그런 아들을 보는 족장 아쿠쉬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보았는가. 오늘은 기쁜 날이로군, 꾸이익."

족장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솥뚜껑 같은 손을 뻗어 어깨를 짚어왔다.

"고맙다 인간. 넌 내 아들을 구해줬을 뿐만 아니라 함께 여왕개미를 잡는 용맹함 또한 보였다, 꾸익."

"그럼 저도 전사로 인정받는 겁니까?"

로이드가 물었다.

때로는 뻔뻔해질 필요가 있는 법.

원래 이런 건 대놓고 물어야 한다.

과연 그 효과가 있었는지 족장 아쿠쉬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다! 나 아쿠쉬는 족장의 이름으로 인간... 꾸익?"

"로이드입니다. 로이드 프론테라."

"...인간 로이드 프론테라가 부족의 당당한 전사로 인정받았음을 선포한다, 꾸익!"

마침내 아쿠쉬의 선포가 떨어졌다.

주위에 모인 수백의 오크가 함께 환호했다.

그리고 족장 아쿠쉬가 당연하다는 듯 외쳤다.

"인간 은인이 전사가 되었다! 기념으로 인간 은인도 오늘은 하체다, 꾸이익!"

"...예?"

잠깐.

이 떡대 아저씨.

방금 뭐라고 한 거야.

'설마 나보고 저 500킬로그램은 될 법한 동상을 짊어지고 스쿼트를 하라는 건 아니겠지?'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집어삼켰다.

하지만 불길한 예감은 어찌나 척척 잘만 들어맞는지.

족장 아쿠쉬가 등을 펑펑 두드려 오며 벌쭉 웃었다.

"가자!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까 나도 함께하겠다, 꾸이익!"

"...."

"남자는 하체! 꾸이익!"

"...."

하늘이시여.

눈앞이 캄캄해졌다.

주위의 환호성은 더욱 커져만 가고 있었다.

로이드는 사골 육수처럼 쑴펑쑴펑 피어오르는 난감함을 느꼈다.

"저기?"

"꾸익?"

"제가 운동도 좋아하고 현장에서 무거운 거 제법 들어봤습니다만, 저건 좀...."

"꾸이익? 무슨 뜻인가, 꾸익?"

"저한텐 너무 무거운 거 같은데요."

로이드는 솔직하게 말했다.

사실이었다.

무거운 걸 짊어지는 건 제법 자신이 있는 편이었다.

거기에 아스라한 심법 덕분에 일반인의 신체능력을 뛰어넘게 되었다.

하지만 500킬로그램이 족히 넘을, 그것도 들기 불편하게 생긴 동상을 어깨에 짊어지고서 웃으며 스쿼트를 할 정도는 아니었다!

"운동 권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좀 더 가벼운 건 없을까요?"

이대로 허리나 다리가 부러지긴 싫었다.

그래서 물었다.

한데 족장 아쿠쉬의 표정이 굳는 게 보였다.

"뭐? 저걸 못 든다고, 꾸이익?"

"그렇습니다."

"전사로 인정받았는데도, 꾸이익?"

"물론...."

"전사가 저걸 못 든다니 말도 안 된다, 꾸익!"

"...."

"저거 부락에서 가벼운 축에 드는 기구다. 어린 전사들 몸풀기용이다. 한데 그걸 못 든다면 전사로 불릴 자격 없다, 꾸익."

"저기, 저는 오크가 아닙니다만."

"그래도 전사는 해야 한다, 꾸익."

어느새 아쿠쉬는 정색하고 있었다.

로이드의 표정도 굳었다.

'젠장.'

어쩐지 일이 잘 풀린다 싶었는데.

여기서 생각지도 못한 스쿼트 때문에 태클을 맞을 줄은 몰랐다.

그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이대로 하체인지 뭔지 저 운동을 못 한다고 빼면 전사 인정이고 뭐고 다 날아갈 분위기인데. 어떡하지?'

여기서 포기하기엔 너무 아쉬웠다.

전사로 인정받기만 하면 큰 이득을 얻게 된다.

튼튼한 오크 전사 120명을 공짜 광부로 부릴 수 있을 것이다.

그걸 쉽게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무리한 허세를 부리다가 허리가 부러지는 건 더 싫었다.

'방법을 찾아야 해.'

스쿼트는 안 된다.

대신 무언가 다른 것을 어필해야 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특기를 살려야 한다.

그래서 이들에게 자격을 인정받으면 될 것이다.

로이드의 눈동자가 재빨리 움직였다.

오크 부락 곳곳을 구석구석 살폈다.

이곳의 환경, 이들의 성향 등, 눈에 들어오는 모든 정보를 끌어모았다. 분류했다. 분석했다.

그러다 보니 문득, 짚이는 점이 있었다.

'잠깐.'

빠르게 움직이던 그의 시선이 멈추었다.

그곳은 부락 구석에 만들어진 구덩이였다.

"저건 뭡니까?"

구덩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족장 아쿠쉬의 대답이 돌아왔다.

"저거? 고기 버리는 구덩이다, 꾸익."

"고기를 버려요?"

"그렇다. 저기에 버리고 흙으로 묻는다, 꾸익."

아쿠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해서 못 먹는 걸 버린다. 그런 거 함부로 먹었다간 배탈 난다. 약해져서 운동할 수 없다. 운동 못 하면 근육 빠진다, 꾸이익."

어느새 족장의 목소리에 짙은 아쉬움이 배었다.

"참 아까운 일이다. 저거 안 버리고 다 먹으면 그만큼 근육이 될 텐데. 매번 안타깝다, 꾸익."

"그래요?"

"그렇다, 꾸익."

아쿠쉬가 입맛을 쩝 다셨다.

로이드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이거다.'

문득, 소설 철혈의 기사 중반부의 내용이 떠올랐다.

지금으로부터 제법 시간이 지난 어느 무렵.

모험을 거듭하던 하비엘은 단독으로 오크 부족과 대치하게 된다.

힘겨운 싸움에서 기지를 발휘하여 항복을 받아내게 된다.

그 기지란 바로 오크 부족의 사냥을 방해한 것이었다.

'오크들이 살아가는 황야는 척박하지. 농사는 아예 불가능하고, 채집으로는 충분한 식량을 조달할 수 없어. 그래서 사냥 의존도가 굉장히 높아. 거의 모든 식량을 사냥으로 마련하지.'

황야의 무시무시한 대형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

오크 부족은 그렇게 식량을 마련했다.

그러기 위해 더욱 용맹해져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힘들여 마련한 식량을 보존하는 기술은 없었다.

그저 쌓아놓고 먹을 줄만 알았다.

기껏 마련한 식량이 금방 상하는 것이다.

'그 점을 깨닫게 된 하비엘은 오크들의 사냥을 열심히 방해했지. 그러자 열흘도 지나지 않아 오크 부락은 식량난에 허덕이게 됐어.'

보존 기술이 열악하니 식량이 쌓이지 못했다.

사냥에 매번 실패하니 얻는 식량마저 끊겼다.

식량난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로이드는 그러한 소설 속 스토리를 떠올렸다.

"한 가지 제안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제안, 꾸익?"

"그렇습니다."

그가 족장 아쿠쉬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하체 운동 넘기는 대신에 서늘한 식량 보존고, 제가 지어드릴 테니 전사로 인정해 주시죠."

거기에 굴러다니는 금은보화로 공사대금도 빵빵하게 챙겨주시고 말입니다.

그렇게 전사로 인정받아 인부도 데려가고.

이참에 공사도 발주 받아 공사비도 챙기고.

꿩 먹고 알 먹고.

한타 이기고 바론도 먹고.

장도 보고 쿠폰까지 챙기고.

계산을 마친 로이드의 입가에 영악한 미소가 모락모락 피어났다.

32화. 근손실을 막는 건축물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