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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아스라한 심법 (1)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검술 훈련은 계속되었다.

거창한 내용은 아니었다.

여전히 로이드는 연무장을 뛰고 또 뛰었다.

그 외에 틈틈이 검을 쥐는 법과 기본자세, 발 쓰는 법을 익혔다.

철저한 기본기 위주의 훈련이었다.

하지만 로이드는 한 번도 푸념하지 않았다.

강력한 기술을 가르쳐달라는 항의도, 실전에 도움될 만한 기교를 알려달라는 요청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묵묵히 훈련에만 매진했다.

가르치는 하비엘이 매일 놀랄 지경이었다.

놀란 것은 남작가 저택의 식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도 도련님이 훈련만 하셨다구요?"

"그렇다니까. 불평 한 번 안 했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세상에. 그렇게 매일 녹초가 되면서도...."

"그러게. 난 보면서도 안 믿기더라니까."

"저도요. 이건 말도 안 되지 않아요?"

"말이 안 되다니?"

"으음, 혹시 도련님이 무슨 병에 걸린 거 아닐까요?"

"병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정신병 같은 거요."

"그러니까 미친 거 같다고?"

"네네, 맞아요. 좀 미친 거 같아요."

"...제법 일리가 있네."

라는 식의 대화가 하녀들 사이에 오갔다.

그런가 하면 저택의 병사들도 의혹 가득한 표정을 짓곤 했다.

"로이드 도련님 요즘 왜 저래?"

"엉? 그게 무슨 말인데."

"아니 좀 이상해 보여서. 그렇지 않냐? 저 인간 요즘 술 마시는 거 본 적 있어?"

"어라, 없는 거 같은데?"

"그치?"

"엉. 말 듣고 보니 그렇네. 저 인간 술 마시는 꼴을 못 본 지가 최소 보름은 된 듯한데?"

"와 소름."

"왜?"

"나 말도 안 되는데 말이 될 거 같은 생각이 떠올라서."

"그게 뭔데."

"혹시 로이드 저 인간, 남들 몰래 약 하는 거 아니냐?"

"약?"

"어, 약."

"그니깐 무슨 약."

"무슨 약은 무슨. 마약이지, 인마."

"뭐어?"

"쉿. 목소리 살살. 들어봐. 매일 술만 찾던 인간이 하루아침에 술을 끊었어. 게다가 온종일 성실하게 훈련만 한다? 이거 약빨 아니고 뭐겠냐."

"무슨...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왜 말이 안 돼? 마약 중에는 한 가지 일에만 비정상적으로 집중하고 몰두하게 해주는 약도 있다던데? 혹시 그런 거 맞고 온종일 훈련하는 거 아니냐고."

"...."

"내 말 맞지? 그게 아니면 저 쓰레기 같은 인간이 저렇게 열심히 훈련하는 게 말이 되냐?"

"어, 으음, 닥쳐 인마."

"왜?"

"뒤에, 뒤."

"...뒤? ...어, 아, 안녕하십니까, 부인!"

저택 정문을 지키며 잡담을 나누던 병사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뒤에서 나타난 남작 부인, 마르베야 프론테라가 우아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도 수고가 많군요."

"아, 아닙니다."

"여기, 우리 아들 훈련이 끝나면 이 수건 좀 전해줄 수 있을까요?"

"알겠습니다, 부인."

"고마워요. 근무 중에 많이 무료하죠?"

"예?"

"즐거운 대화는 무료함을 달래는 훌륭한 수단이죠. 다만 화제의 선만 적당히 지켜주세요. 어쨌건 내 아들이니까."

"...명심하겠습니다."

라는 대화도 종종 오갔다.

하녀들은 그가 미쳤노라 했고.

병사들은 그가 약이라도 먹었다 여겼다.

남작 부부는 기쁨과 걱정 담긴 시선을 보냈다.

그동안 로이드의 훈련은 순조롭게 이어졌다.

하비엘의 놀라움 또한 이어졌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지는 훈련이었다.

말이 훈련이지 실상 지옥에 가까운 일정이었다.

온종일 달리고, 심지어 굴렀다.

지겹도록 같은 자세로 검을 내리쳤다.

손바닥이 까지다 못해 너덜너덜해질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전혀 불평하질 않아. 불평은커녕 즐기고 있어.'

처음엔 저 호기로운 모습이 며칠이나 갈까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오히려 부상을 걱정하게 되었다.

로이드의 의욕이 너무 과해서였다.

그는 매 순간 긴장하며 로이드의 훈련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러다가 칼 같은 타이밍으로 로이드를 말리고 강제로 휴식을 주었다.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 건가.'

매일같이 술만 찾던 망나니.

취해서 행패나 부리던 인간쓰레기.

하지만 이제 그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게다가 밤마다 읊어주는 그 기묘한 이야기들이란.'

덕분에 모처럼 숙면의 나날을 보내는 그였다.

콘크리트니 뭐니.

응력이 어떻고 저떻고.

휨 모멘트가 어쩌고 저쩌고.

분명 마법 주문은 아니었다.

금방 잠이 들어 버리느라 제대로 기억할 수는 없었다.

얼핏 돌이켜보면 학문 내용인 듯했다.

한데 그 위력(?)이 수면제보다 강력했다.

자신은 그저 의자에 편안하게 앉아 있기만 하면 됐다.

몇 마디만 듣다 보면 의식이 날아갔다.

자신도 모르게 꿀잠을 누릴 수 있었다.

이쯤이면 가히 놀랍다 못해 신비로울 지경.

하비엘은 가만히 눈썹을 찡그렸다.

'저 사람의 진짜 모습은 대체 뭐란 말인지.'

개차반이었던 과거의 모습.

의외의 연속인 지금의 모습.

그냥 개과천선이라 여기기엔 그 갭이 너무나 컸다.

차라리 망나니 로이드의 몸뚱이에 다른 사람의 영혼이 들어온 거라고 믿고 싶을 지경이었다.

'물론 그런 허무맹랑한 일은 불가능하겠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벌써 서른 바퀴째 연무장을 돌며 다가오고 있는 로이드를 향해 말했다.

"이만 멈추시지요, 로이드 님."

"후, 후욱, 벌써? 아직 뛸 만한데?"

"저도 압니다."

"근데 왜?"

"이제 슬슬 다음 단계의 훈련으로 넘어갈까 합니다."

"다음 단계라니?"

"마나 감응 훈련입니다."

"오올."

로이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기대했던 순간이 다가온 까닭이었다.

'솔직히 기초 훈련만 하는 건 슬슬 지겨웠는데.'

죽도록 열심히 달렸다.

군소리 없이 훈련에 매진했다.

덕분에 제법 체력이 붙었다.

혈색이 맑아졌고, 전신에 활력이 생겼다.

아침에 일어날 때의 느낌마저 훨씬 생기가 넘쳤다.

덤으로 그동안 성실한 모습을 보인 덕분인지 제법 많은 RP도 획득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많이 얻었어. 벌써 RP가 97이나 쌓였으니까.'

며칠 사이 하비엘과의 호감도가 추가로 1이 올랐다.

그렇게 얻은 RP가 18이었다.

그밖에 프론테라 남작과의 호감도가 2 오르면서 20 RP를, 남작 부인과의 호감도가 3이나 오르면서 30의 RP를 얻을 수 있었다.

덕분에 로이드는 이 RP 획득 시스템에 대해 조금씩 감을 잡아가는 중이었다.

'하비엘에게서 얻을 수 있는 RP는 호감도 1당 18. 그리고 남작 부부에게서는 1당 10의 RP를 얻을 수 있는 듯? 즉, 소설 속 등장인물마다 제공하는 RP에 차이가 있다는 거겠지.'

아무래도 캐릭터의 소설 속 중요도가 높을수록 더 많은 RP를 주는 게 아닐까.

로이드는 그렇게 추측했다.

'그럼 하비엘과의 호감도를 주력으로 올려야겠지. 그건 그렇고, 남작 부부는 조금 의외란 말이지.'

사실 소설 내의 비중으로 따지면 남작 부부의 비중은 높지 않다.

엄밀히 말하자면 소설 초반의 엑스트라에 불과하다.

그런데 하비엘의 절반이 넘는 RP를 제공한다니.

혹시나 아직 밝혀지지 않은, 숨겨진 역할이 더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건 드디어 마나 감응 훈련을 하는구나.'

감회가 새로웠다.

기대되기도 했다.

'노이만 경을 꺾으려면 최소한 지금 시점부터는 마나 연공을 시작해야 하니까.'

이제 결투까지 남은 시간은 보름 남짓.

물론 마나 연공을 시작한다고 해서 보름 안에 마나하트를 연성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마나하트 연성에는 엄청나게 긴 시간이 걸린다.

자질이 부족한 자는 10년 이상.

평범한 사람은 5년 내외.

수재라 불리는 이는 2년 남짓.

세기의 천재라 불리는 이들도 최소 6개월.

숙련된 지도자의 가르침 아래 배워도 그 정도 시간이 걸리는 게 마나하트 연성이었다.

'그런데 하비엘은 단 하루 만에 마나하트를 연성했지. 심지어 혼자 셀프로.'

하여간 괴물 같은 놈.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하비엘의 말이 귓구멍에 쏙쏙 들어왔다.

"물론 마나 감응 훈련을 시작한다고 해서 곧바로 마나하트를 연성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 같은 건 하지 마십시오. 한 걸음씩 차근차근 간다는 생각으로 임하셔야 합니다. 어쨌건 마나 감응 훈련을 하는 것만으로도 신체 능력이 조금씩 향상될 테니까 말입니다."

하비엘의 지도가 이어졌다.

"그럼 이쪽에 앉아 보시죠."

"이렇게?"

"네. 긴장 푸십시오. 어깨에 힘 빼시고."

"이러면 되냐?"

"네. 이제부터 제가 로이드 님의 신체에 마나를 조금 주입할 겁니다."

"그럼 내가 해야 할 일은?"

"없습니다. 그저 눈을 감고 제가 조종하는 마나의 경로를 느끼시면 됩니다."

"이거 뭐, 운기조식 같은 건가."

"운기조식이 뭡니까?"

"그런 게 있어. 일단 시작하자."

"알겠습니다."

로이드는 눈을 감았다. 긴장을 풀었다. 전신의 힘을 뺐다.

이윽고 하비엘의 손바닥이 등에 와 닿았다.

귀족 같은 곱상한 외모와는 달리 손바닥 가득 박힌, 악어가죽 뺨치는 굳은살이 등을 통해 생생히 느껴졌다.

이윽고 서늘하면서 맑은 기운이 등으로 스며들어 왔다.

츠스스스스....

"...."

이게 마나의 느낌이라는 건가.

신기하고도 낯선 감각이었다.

마나가 피부와 근육을 통과했다.

티슈에 물이 스미듯 몸속으로 들어왔다.

내장을 통해 내려갔다.

배꼽 아래에 깃들었다.

흔히 단전이라 불리는 부위였다.

그곳에서 마나 덩어리가 유턴을 했다.

고속도로에 올라타듯 척추로 들어갔다.

차근차근 척추를 따라 올라오며 신경을 자극했다.

뒷목을 타고 정수리를 찍더니 얼굴을 감싸며 내려왔다.

그렇게 가슴까지 도착한 마나가 마침내 심장을 감쌌다.

두근, 두근!

심장 뛰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팽창했던 근육이 수축하는 감각.

힘차게 피를 빨아들이고, 밀어냈다.

마나 덩어리가 그 흐름에 스며들었다.

자연스럽게 심장 내부로 들어왔다.

몸 전체에 자신의 기운을 전달했다.

온몸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로이드는 그 상태로 한참을 더 있다가 눈을 떴다.

"어떻습니까?"

전보다 선명하게 들려오는 하비엘의 목소리.

그뿐만이 아니었다.

눈에 보이는 연무장의 모습.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의 모양.

그 모든 것들이 전보다 선명하게 보였다.

예전의 시야가 평범한 HD 화질이었다면, 이제는 한순간에 풀HD 화질로 세상이 업그레이드된 듯한 기분이었다.

게다가 피부에 와 닿는 바람도 어쩐지 예전보다 생생하게 느껴졌다.

단 한 번의 마나 감응 훈련.

그것만으로도 모든 감각이 조금씩 향상된 것이었다.

로이드는 뒤를 돌아보았다.

하비엘이 조금은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 로이드도 싱긋 웃었다.

처음 해본 마나 감응 훈련.

그걸 체험한 가장 솔직한 감상을 하비엘에게 돌려주었다.

"구려."

"...예?"

"구리다고."

"...."

하비엘의 뿌듯해하던 표정에 쩌적, 금이 갔다.

하지만 로이드는 더욱 철판을 깔듯 태연하게 내뱉었다.

"생각보다 별 차이도 없는데?"

"몸속을 움직이는 마나를 못 느끼셨습니까?"

"아, 그건 느꼈지."

"로이드 님, 그게 마나와 감응했다는 증거입니다. 실제로 예전보다 감각이 예리해지셨을 텐데요."

"아, 이거? 겨우 이 정도로 생색을 내겠다는 거야?"

"로이드 님."

이쪽을 향한 하비엘의 눈빛이 까칠해졌다.

목소리에도 어쩐지 쌀쌀함이 깃들었다.

"겨우 이 정도라고 말씀하실 수준이 아닙니다. 원래 그런 것입니다."

"마나 감응 훈련이라는 게?"

"네, 그렇습니다. 지금 로이드 님은 크나큰 착각을 하고 계십니다."

"착각이라. 어떤 착각일까?"

"이를테면 지나친 기대감이겠지요."

"설마 나 스스로를 향한?"

"그렇습니다."

하비엘의 대답이 조금은 신랄해졌다.

"당장 마나 감응 훈련을 한다고 해서 눈에 띄게 강해지거나 초인이 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마나하트 연성을 위해서는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첫술에 배부를 수가 없듯이 말입니다. 로이드 님도 상식이 있다면 잘 알고 계실 텐데요."

"응. 물론 잘 알지."

"그런데 어째서 떼를 쓰시는 겁니까."

"떼? 내가?"

"그렇습니다. 혹시 노이만 경과의 대결이 다가오면서 초조함을 느끼시는 겁니까? 하지만 그 결투는 애초부터 무리한 것이었습니다. 노이만 경은 결코 약한 자가 아닙니다. 그는 무려 소드 익스퍼트의 문턱을 밟은 기사입니다."

"나도 알아. 소드 익스퍼트 하급. 내가 손쉽게 넘볼 상대는 아니지. 그저 평범하고 일반적인 마나 연공법을 보름 정도 뚝딱 배우는 정도로는 말이야."

"...네?"

시종일관 차갑게 반응하던 하비엘이 처음으로 멈칫했다.

로이드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하비엘을 쳐다보았다.

"넌 지금 내가 어거지를 부리고 떼를 쓴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야 당연히...."

"계속 시치미 뗄래?"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봐. 하비엘 아스라한. 내가 괜히 너를 콕 짚어서 검술을 가르쳐달라고 했겠냐? 아니면, 내가 고작 보름 남짓 평범한 연공법만 익히고는 노이만 경에게 이길 거랍시고 도전할 멍청이로 보였냐?"

"그야 물론...."

"우리 조금만 솔직해지자. 너, 이런 평범한 연공법 말고 나 몰래 꿍쳐둔 연공법 따로 있지?"

"...."

역시나.

항상 느끼는 거지만 하비엘은 거짓말에 정말 재주가 없다.

'너무 티가 팍팍 난다니깐.'

그 생각에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피식 웃었다.

"대놓고 말할까? 아스라한 심법. 그걸 가르쳐달라고. 이래도 계속 발뺌할래?"

"...."

하비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스라한 심법.

그것은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 하비엘이 창안한, 그를 역사상 최초의 그랜드 마스터로 만들어준 절세의 연공법이었다.

13화. 아스라한 심법 (2)

"아스라한 심법. 그걸 가르쳐달라고. 이래도 계속 발뺌할래?"

"...."

하비엘은 멈칫했다.

저도 모르게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단지 자신의 호위대상일 뿐인 도련님.

그런 자의 입에서 절대 나올 수 없는 말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내 마나 연공법을 알고 있다고? 로이드 님이?'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불면증 때도 그랬지만, 이 연공법 또한 자신만의 은밀한 비밀이었다.

당연히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었다.

티를 낸 적조차 없었다.

아니, 심지어 '아스라한 연공법'이라는 이름을 붙인 게 겨우 한 달 전이었다!

'그렇게 아직 완성도 되지 않은 연공법인데.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이 망나니 도련님이 혹시 독심술이라도 쓰는 건가.

그는 불가사의한 존재를 마주한 기분으로 로이드를 보았다.

로이드가 콧방귀를 풍 뿜었다.

"뭐. 왜. 뭐."

"...."

"왜 그렇게 가자미눈을 뜨고 보는 건데."

"그야 당연히...."

"당연히?"

"어떻게 아신 겁니까?"

매번 자신이 꽁꽁 숨기던 것들을 척척 들춰내는 인간이었다.

발뺌해보았자 돌아오는 것은 조롱밖에 없다.

이제 그걸 아는 하비엘은 굳이 발뺌하지 않았다.

대신 비결(?)이라도 알고 싶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간단했다.

"잠꼬대로 알아서 다 말하더만."

"예?"

"진짜야. 떡실신해서 셀프로 다 알려주더라?"

"그게 사실입니까?"

"응."

로이드는 씨익 웃었다.

사실?

물론 아니다.

완벽한 구라다.

하비엘에겐 잠꼬대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우아한 용모를 가진 놈 아니랄까 봐 잠든 모습마저도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로이드는 입술과 양심에 침을 촵촵 발랐다.

"안 믿기면 증명해줘?"

"증명이라니요?"

"예를 들자면 이런 거지."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 상세하게 나왔던 아스라한 심법.

그 내용을 떠올리며 읊어주었다.

"인간의 마나하트에는 한계가 있어.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생물학적 한계. 그래서 한 번에 동원할 수 있는 마나의 양에도 한계가 있지."

마치 컴퓨터의 램, 혹은 물동이 같은 원리였다.

8기가짜리 램으로 한 번 나를 수 있는 데이터의 양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는 법.

1리터 용량의 물동이로 한 번 옮길 수 있는 물의 양은 1리터가 한계인 법.

인간이 심장으로 움직일 수 있는 마나의 양도 똑같았다.

심장 크기만큼의 한계가 있었다.

인간인 이상 그 한계를 돌파할 수는 없었다.

"그건 어떤 누구도 예외일 수 없어. 아무리 강한 검사라도, 그 어떤 지고의 경지에 다다른 기사라도 말이지. 이유는 간단해. 인간으로 태어났으니까. 인간의 몸, 정확히는 인간의 심장이 태생적으로 지니는 생물학적인 용량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는 거야. 그래서 드래곤하트를 지닌 드래곤이 사기캐인 거기도 하고."

"그건...."

"쉿. 더 들어봐. 그래서 넌 생각했지. 만약 자신의 몸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마나를 끌어온다면? 바깥의 환경에서 흡수한 마나를 마나하트에 보탠다면? 그러면 일시적으로나마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서는 마나를 발산하고 다룰 수 있지 않을까."

로이드는 싱긋 웃었다.

여전히 침착 시크한 표정의 하비엘.

하지만 그 동공에 희미한 지진이 일어나는 것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그 후로 넌 남몰래 새로운 마나 운용법을 연구했어. 얼마 전엔 야물딱지게 이름도 붙였지. 아스라한 심법이라고. 그게 한 달쯤 전이던가? 맞아?"

"...맞습니다."

"어쩐 일로 순순히 인정하네?"

"발뺌할 생각도 들지 않을 만큼 토씨 하나 틀리지 않으셨으니까요."

"그렇지? 그럼 이야기를 원점으로 되돌려보실까."

이쪽이 하고 싶은 얘기는 이거다.

"넌 그런 쌔끈한 심법을 놔두고서, 엉? 개나 소나 다 배우는 평범한 연공법을 나한테 가르치고 입 싹 닦으려 했냐? 너 혹시 유치원 햇님반 검술 선생님이냐? 이거 아주 팥 없는 붕어빵을 팔려고 하셨어?"

"하지만 로이드 님."

"알아. 이거 네가 연구한 심법이고 함부로 남한테 가르치진 않는다는 거. 그런데 말이다. 내가 너한테 '아무나'인 거냐?"

"네."

"헐."

"엄밀히 말씀드리자면 로이드 님은 제게 호위대상이실 뿐입니다만. 게다가-"

"게다가?"

"지금 당장은 로이드 님께 제 심법을 가르치고 싶어도 그게 불가능합니다."

"어째서?"

"아직 미완성의 심법이기 때문입니다."

하비엘의 목소리가 칼로 자르듯 단호해졌다.

"로이드 님이 말한 제 심법의 개념, 맞습니다. 외부의 마나를 흡수해 자신의 것으로 사용하는 것이 핵심이지요. 하지만 아직 누구도 성공하지 못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저조차도 이론만 만들었을 뿐, 실제로는 아직 성공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위험합니다. 로이드 님처럼 마나의 기초도 모르는 초심자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애?"

"네."

"지금 나 걱정해주는 거야?"

"물론 아닙니다."

"쯧. 단호박 같은 놈."

"감사합니다."

"어쨌건, 그 심법이 아직 미완성이라서 위험하니까 내게 알려줄 수 없으시다?"

"그렇습니다."

"그럼 안 위험해지면 어쩔 건데?"

"...예?"

하비엘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로이드는 피식 웃었다.

이쪽이 또 무슨 이야길 꺼낼까 불안한 거겠지.

"네 심법이 왜 미완성인지, 어디가 막혀 있는 건지 어디 한번 짚어볼까?"

"무슨 말씀을...."

"외부에서 마나를 흡수해. 마나하트로 옮겨와. 거기서 몸에 원래 지녔던 자신의 마나랑 융합시켜. 그런데 안 돼. 항상 거기서 막히지. 융합하려다 반발하고, 충돌해. 그래서 번번이 실패했어. 맞지?"

하비엘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걸 어떻게?"

"어떻게긴. 말했잖아. 잠꼬대로 다 들었다니깐?"

"...."

잠꼬대로 들었다는 거짓말.

그 무적의 치트키 같은 마법의 핑계 앞에 하비엘의 입이 다물렸다.

로이드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할 말이 없겠지. 푹 잠들어서 떡실신을 하는 놈이 자기 잠버릇이 어떨지 알 수도 없을 노릇일 테고.'

문득 소설 철혈의 기사 속 내용이 떠올랐다.

이 시기의 하비엘은 실제로 저 마나 충돌 현상 때문에 심법을 완성하지 못했다.

다양한 시도를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발상을 바꿔서 심법을 완성하는 것은 무려 5년 뒤.'

이후, 하비엘은 완성된 심법을 더욱 갈고닦는다.

마침내 로라시아 대륙의 역사에서 최초로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게 된다.

그렇게 하비엘이 5년 뒤에나 이루어낼 발상의 전환.

그걸 떠올리며 로이드가 말했다.

"내가 보기엔 외부의 마나를 자신의 마나와 섞으려는 시도 자체가 에러, 아니, 실수인 거 같은데?"

"네?"

하비엘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말 그대로야. 왜 굳이 외부의 마나를 마나하트 안쪽에 쑤셔 넣어야 되는 건데? 마나하트의 용량 한계 때문에 심장에 무리가 가잖아. 게다가 외부의 마나를 자신의 마나랑 애써가며 섞어야 될 이유가 있냐? 그거, 기존의 마나하트를 운용하는 방법에 얽매인 고정관념 아냐?"

"그 말씀은...."

"밖에서 돌리면 되잖아. 마나하트 바깥으로."

"...."

경악으로 서서히 커지는 하비엘의 눈.

이 정도만 말해줘도 이미 대강은 깨달았겠지.

로이드는 연무장 구석에 굴러다니던 나뭇가지를 집어들었다.

나뭇가지로 흙바닥에 슥슥, 그림을 그렸다.

"외부의 마나를 흡수하면? 이렇게 회전시키면 어떻겠냐는 거야. 심장, 마나하트 바깥면으로."

"고리 모양의 써클을 만들어 심장을 감싸라는 겁니까?"

"그렇지. 써클. 이름도 그럴듯하네."

"그럼 원래 지니고 있던 신체의 마나와는...."

"섞을 필요 없잖아. 따로 운용하는 거야. 내 마나는 마나하트 안쪽으로. 바깥에서 흡수한 이질적인 마나는 마나하트 외부에 써클 모양으로 회전시켜서. 어때?"

"...."

"난 그냥 떠오르는 대로 말한 거다? 너도 알다시피 난 마나 운용에는 초보자니까. 어쩌면 그래서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은 건지도 모르고."

"...."

"의심되면 직접 시험해보든가."

"알겠습니다."

하비엘이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감을 잡은 듯했다.

그때부터 로이드는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몇 발짝 옆으로 조용히 물러나 주었다.

하비엘이 새로운 심법을 시험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하비엘이 눈을 떴다.

의미심장한 눈으로 이쪽을 돌아보았다.

"감사합니다."

딩동.

[하비엘 아스라한의 당신에 대한 호감도가 +5 상승하였습니다.]

[하비엘 아스라한과의 현재 관계 : -22]

[주요 인물과의 가시적인 관계 개선으로 90 RP를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187]

[하비엘 아스라한과의 친밀 단계가 에서 으로 상향되었습니다.]

[친밀 단계 상향에 따른 보너스로 5 RP를 추가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192]

'성공했구나.'

하비엘의 감사.

조금은 달라진 눈빛.

그리고 눈앞에 떠오르는 호감도 메시지를 보며 로이드는 확신할 수 있었다.

하비엘이 아스라한 심법을 마침내 완성했음을.

"잘 됐냐?"

"네, 로이드 님."

"써클은 잘 돌아갔냐?"

"네. 한 개만으로는 흡수한 마나의 운용이 비효율적인 듯해서 여러 개를 만들게 됐습니다만."

"몇 개?"

"세 개입니다."

"헐."

첫 성공에 곧바로 트리플 써클이라니.

하비엘은 역시 굇수 같은 놈이었다.

'그럼 이제는 거의 소드마스터를 눈앞에 둔 수준이 됐겠군.'

현재 하비엘의 경지는 소드 익스퍼트 상급.

여전히 소드마스터와의 격차가 제법 크긴 하다.

'그래도 마나하트 외부에 트리플 써클을 생성했으니 어지간한 소드마스터와 정면에서 싸워도 진지하게 비벼볼 정도는 될 거야. 운이 따라주면 무승부 정도는 노릴 수 있을지도.'

현재 단계를 뛰어넘는 힘을 추가로 주는 것.

그것이 아스라한 심법의 강점이었다.

'원래 지니고 있는 마나 운용 능력에 외부에서 땡겨오는 마나를 추가로 얹어 버리는 거니까. 써클 하나당 보조 엔진 하나를 장착하는 격이랄까.'

그럼 원작 철혈의 기사에서 하비엘은?

소드마스터 상태에서 아스라한 심법을 완성했다.

그 즉시 무려 4개, 쿼드라 써클을 달성했다.

그것만으로 모든 소드마스터를 통틀어 압도적인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심지어 그 후엔 그랜드마스터에 등극하고 5개, 펜타 써클을 장착하지. 최종전에서는 그걸 뛰어넘은 무려 6개, 헥사 써클의 보유자가 되고.'

그 상태에서 하비엘이 한 번에 운용하는 마나의 양은 드래곤하트의 것을 아득하게 뛰어넘은 것이었노라 소설에선 묘사하고 있었다.

지금, 자신은 그 전설의 시작이 되는 아스라한 심법의 완성 순간을 원작보다 5년이나 일찍 앞당겨서 목격한 셈이었다.

하지만 로이드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돈 한 푼 안 되는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다.

손아귀에 들어오는 이득을 움켜쥐어야 할 때였다.

그는 생색을 내듯 하비엘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감사하시다?"

"네, 로이드 님."

"그럼 이젠 나한테 가르칠 이유가 생겼겠네."

"예?"

"아스라한 심법."

"...."

"어허, 이거 보소? 설마 감사하다는 말로 때우고 넘어가려는 거였냐?"

"하지만 로이드 님."

"응. 변명해봐."

"기본적인 마나 연공법의 기초가 더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응. 그래서?"

"그러니 일단은 기초 연공법을 먼저 익히시고 그다음에 제 심법을 따로 배우시는 게 어떨까요."

"응. 안 돼."

당연히 안 될 말이다.

당장 보름 뒤면 노이만 경과의 결투를 치러야 하는 입장에서는 더욱 그랬다.

"넌 내 입장에서 생각 좀 해봐라. 기본적인 마나 연공법을 아무리 열심히 익힌다고 해도 보름 후의 결투에서 내가 그걸 써먹을 수나 있겠냐?"

"그건 아닐 거라고 봅니다."

"그럼? 그냥 결투에서 지라는 거네?"

"...."

"그래. 나도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진 알아. 당장의 소소한 패배보다는 더 길게 보라는 거겠지. 탄탄한 기초를 쌓는 게 이득이라는 거겠지. 맞는 말이야. 그런데 말이다. 나한텐 맞는 말이 아닌 것 같다."

"어째서입니까?"

"이번 결투, 그만큼 중요한 거니까."

사실이다.

노이만 경은 이미 뒷구멍으로 영지를 배신한 인간이다.

그런 놈을 일벌백계로 밟아놓지 못하면 앞으로 영지의 기강을 바로잡는 일은 영영 요원해지고 만다.

평생 빨대를 꽂아야 할 영지의 체질개선이 처음부터 어그러지는 셈이었다.

"그러니까 난 반드시 이길 거다. 아스라한 심법도 꼭 배울 거고."

"하지만 제가 거부한다면 어쩌실 겁니까?"

"오호라? 쎄게 나오시겠다? 그럼 나도 방법이 있지."

로이드는 씨익 웃었다.

나름의 필살 카드를 꺼내 들었다.

"네가 나한테 그 심법 안 가르쳐주면 나도 자장가 서비스 중단할래."

"...."

"뭐. 왜. 뭐. 어째서 똥 씹은 표정으로 보는 건데. 내가 치사해?"

"조금은요."

"세상에 공짜가 어딨냐. 억울하면 심법 알려주든가."

"...."

하비엘의 얼굴이 번뇌에 잠겼다.

로이드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절대로 거부 못 할걸. 왜냐고? 넌 이미 꿀잠의 맛을 알아 버렸거든.'

최근 며칠간 하비엘은 전에 없이 숙면을 맛보고 있었다.

이쪽이 기억 속 전공서의 내용을 읊어주는 덕분이었다.

한데 그 서비스(?)가 한순간에 끊긴다니.

아마 가슴이 제법 철렁했을 터다.

'사람 심리가 원래 그래. 받았다가 뺏기면 더 아깝고 쓰라린 법이거든.'

누구나 그렇다.

한번 편리함을 맛보게 되면 좀처럼 그거 없인 살아가지 못하게 된다.

'스마트폰, 한번 써보면 피처폰은 답답해서 못 쓰지. 로봇 청소기도, 키높이 깔창도, 셀카 어플도, 배달 앱이나 엘리베이터도 그래. 쓰다가 안 쓰면 미치도록 답답하고 불편하고 허전하거든.'

지금 하비엘의 경우가 딱 그럴 터였다.

몇 년째 불면증에 시달리던 신세였다.

그러다가 이쪽 덕분에 행복한 꿀잠의 맛을 알게 되었다.

더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린 셈이었다.

역시나, 예상대로 하비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알겠습니다."

"알겠다니, 뭘?"

"아스라한 심법, 가르쳐드리지요."

"좋은 결정이야."

로이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니까 내가 장담했지? 네 검술, 모조리 내 것이 될 거라고.'

아스라한 심법.

이제는 열심히 익힐 일만 남았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그동안 훈련은 계속 이어졌다.

기초 체력이 더욱 탄탄해졌다.

아스라한 심법에도 더욱 매진했다.

한편으로 로이드는 대장간에 특별한 무기 제작을 의뢰하기도 했다.

"통짜 강철로. 디자인은 여기 이 도면 그대로 해줘."

"로이드 도련님? 이건?"

"내가 쓸 무기라서 직접 그린 도면이야. 왜? 이상해?"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어떻게 이걸 무기로...."

"됐고. 만들 수 있지?"

"예? 옙."

"그럼 잘 부탁해."

대장장이는 로이드가 건네준 도면을 보면서 곤혹감에 휩싸였다.

도면을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이건 무기로 쓰일 물건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영주의 아들인 데다 워낙 막장으로 소문난 망나니였다.

그런 자의 의뢰에 토를 달 용기는 대장장이에게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더 지났다.

마침내 밝아 온 결투의 날 아침.

"로이드 도련님. 대장장이에게 의뢰하셨던 물건이 도착했습니다."

제작을 의뢰했던 무기가 저택으로 배달되어 왔다.

그 소식을 알리는 하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로이드는 주먹을 살포시 움켜쥐었다.

아스라한 심법.

거기에 자신만의 무기까지.

이로써 모든 준비가 갖추어졌다.

'노이만 경, 넌 이제 뒤졌어.'

로이드의 눈이 살벌하게 번득였다.

드디어, 썩은 싹을 잘라낼 때가 왔다.

14화. 망나니의 네 가지 무기 (1)

햇살 맑은 초봄의 정오.

누구나 오전의 일과를 마칠 시간이었다.

밭에서 땀 흘리던 농부도.

산기슭에서 힘쓰던 나무꾼도.

들판에서 피리 불던 양치기도.

양조장에서 술 담그던 양조업자도.

빨래터에서 빨랫감과 싸우던 아낙네까지.

모든 영지민들이 잠시나마 일손을 내려놓고 점심 식사와 휴식을 즐길 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영주인 프론테라 남작의 저택에 딸린 연무장.

그 널따란 공터에서 특별하고도 희귀한 이벤트가 열릴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이봐, 오늘 결투는 어떻게 될까?"

"결투? 보나 마나 뻔하지, 뭐."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당연한 것 아닌가."

"하긴 그렇지. 로이드 님이 뭔 수로 노이만 경을 이기겠나."

"덕분에 우린 노났지, 뭐. 이런 때가 아니면 언제 이런 구경을 하려고."

"크허흐, 그건 그렇구만. 하고한 날 진상질이나 부리던 도련님이 흙바닥을 구르는 걸 이런 때가 아니면 언제 구경이나 해볼까."

하루 밭일을 제치고 연무장 가장자리에 모인 농부들이 숙덕거렸다.

그 곁에선 점심 식사를 미룬 아낙네 무리가 삼삼오오 떠들었다.

"그래도 조금은 걱정이네요."

"걱정이라니, 뭐가요?"

"로이드 도련님 말이죠. 혹시나 노이만 경에게 이기면 어떡하죠? 그럼 더 기고만장해지실 텐데."

"어머나 걱정도 참. 그런 걱정을 뭐 하러 해요?"

"어째서요? 듣자니 울리히 경도 로이드 도련님한테 마구잡이로 맞았다고 하던데요?"

"하지만 이번 상대는 노이만 경이잖아요."

"으음, 그럼 로이드 님이 이길 가능성이 없는 건가요?"

"그렇다고 봐야죠. 노이만 경은 우리 영지에서 가장 쎈 분이니까. 덕분에 우린 좋죠. 모처럼 좋은 구경 하게 생겼잖아요?"

...라는 식이었다.

결투를 구경하기 위해 연무장에 모여든 수많은 영지민.

그들 대부분이 로이드의 패배를 예상했다.

노이만 경의 승리를 응원했다.

그들이 아는 로이드는 검술과 거리가 먼 인간이었다.

최근에는 그나마 잠잠해졌다지만 불과 한두 달 전까지만 해도 매일 술독에 빠져 살던 인간이 로이드 프론테라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안 좋은 사고는 항상 솔선수범(?)해서 치고 다녔다.

그 진상질과 행패에 피해를 입은 적 없는 영지민을 손에 꼽을 정도였다.

'제발 오늘 로이드 저 인간이 쥐어 터지는 걸 구경 좀 해봤으면.'

그러면 저 인간도 좀 얌전해지겠지.

아니, 제발 그래야 할 텐데.

그것이 이곳에 모인 영지민 대부분의 솔직한 바람이었다.

하지만 일부나마 로이드를 응원하는 영지민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로이드 도련님, 최근엔 한 번도 행패를 부리지 않았던 것 같은데 말이죠."

어느 양치기 소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소년의 말은 주위의 나무꾼들에게 곧바로 반박되었다.

"어이, 꼬마야. 그래도 사람 본성은 안 변하는 거야."

"네? 그치만 사실이잖아요."

"그래. 사실이긴 하지. 그런데 그게 뭐? 겨우 한두 달 조금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그걸로 끝인가? 아니지. 계속 좋은 모습을 보여야 믿음이 가는 거지."

"그래도 우리집엔 온돌도 깔아주셨는데."

"쯧. 공짜도 아니잖냐."

"그래도 엄청 따뜻하고 좋던데."

"에잉, 아서라, 아서. 누가 양치기 소년 아니랄까 봐."

"거짓말하는 거 아녜요. 진짜거든요?"

"됐다. 나도 분양 계약인지 뭔지 해놨으니까 온돌이란 거, 깔아보면 알겠지. 일단 구경이나 하자."

"네...."

물론 이렇게 내심 로이드를 응원하는 소수파(?)의 인물 중에는 남작 부부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프론테라 남작은 결투의 당사자인 노이만 경을 불러 특별한 당부를 해놓기도 했다.

"이보게, 노이만 경."

"말씀하십시오, 주군."

"오늘 우리 아들 녀석, 잘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그래, 고맙네. 비록 내 아들이 자네에게 무례를 범하긴 했지만 후일 자네가 모시게 될 사람일세. 하니 너무 혹독하지는 않게, 다치지 않게 신경 좀 써주게나."

"명심하겠습니다."

...라는 식이었다.

즉, 오늘 이곳 연무장에 모인 사람들 중에 로이드의 승리를 예상하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의 예상은 로이드가 연무장에 나타나는 순간 확신으로 바뀌었다.

"로이드 도련님이 도착하셨습니다!"

저택의 하인이 외쳤다.

그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연무장 출입구로 향했다.

이윽고 로이드가 연무장으로 설렁설렁 들어왔다.

한 손에 삽을 들고서.

"...어?"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삽이라니.

이곳은 연무장인데.

로이드 님은 오늘 이곳에서 결투를 벌일 예정인데.

그런데 어째서 검이나 도끼, 창이 아닌 삽을 들고 온 걸까.

"어이? 혹시 오늘 여기 공사 일정 잡으신 거 있나?"

"무슨 말이야?"

"요즘 로이드 님이 벌이고 계신 온돌 공사 말이야."

"그거 여기서도 하는 거냐고? 그럴 리가."

"그렇지?"

"응. 그렇지."

오늘 하루 공사 작업에서 자유로워진 병사들이 숙덕거렸다.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 사이, 로이드는 여전히 태연한 표정으로 연무장 중앙에 섰다.

밝게 비치는 햇살 아래, 비로소 그의 손에 들린 삽의 면면이 제대로 드러났다.

삽은 손잡이까지 통짜 강철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 의미는 단 하나.

저 삽이 도구나 연장이 아닌 무기라는 뜻이었다.

그러한 모두의 추측에 답을 알려주듯, 로이드가 상석에 앉은 남작을 향해 선언했다.

"저 아르코스 프론테라의 아들, 로이드 프론테라는 노이만 경과의 결투에 임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명확하고도 명징한 결투 준비 선언이었다.

남작이 눈가를 찌푸렸다.

"결투에 임할 준비가 되었다고?"

"그렇습니다."

"무기는? 가지고 왔느냐?"

"여기, 보시는 이것이 제 무기입니다만."

로이드가 빙그레 웃으며 강철삽을 들어 보였다.

"...."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최근 정신 좀 차렸나 싶었는데.

모처럼 바른길로 돌아오나 했는데.

역시나 자신의 장남은 제정신이 아니다.

'설마하니 결투마저 저런 방만한 태도로 임할 줄이야.'

남작은 남몰래 이를 꽉 깨물었다.

내심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는 전보다 굳은 눈길로 노이만 경을 돌아보았다.

노이만 경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험하게 다루어도 되네. 이참에 정신 좀 차리도록 도와주게나.'

'알겠습니다. 명하신다면 기꺼이.'

남작의 뜻을 알아차린 노이만 경도 고개를 끄덕였다.

바라던 바였다.

아니, 간절히 원하던 바였다.

자신에게 건방지게 군 천둥벌거숭이 도련님을 험하게 굴려주는 것.

노이만 경의 그러한 바람은 로이드가 이쪽을 향해 잡은 자세를 보는 순간 더욱 맹렬한 소원으로 승화(?)되었다.

웅성웅성.

영지민들의 웅성거림 속.

로이드는 처음 보는 기이한 자세를 잡고 있었다.

두 손의 간격을 크게 넓혀 삽자루를 쥐었다.

왼손은 삽머리 바로 아래쪽 부분을.

오른손은 손잡이 위쪽 부분을.

차분하게 쥐고서 두 팔을 자연스럽게 굽혔다.

그러자 마치 삽을 반쯤 안은 채 삽날 끝으로 이쪽을 겨냥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건 노이만 경의 입장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엉거주춤한 자세에 불과했다!

참다못한 노이만 경이 콧등을 씰룩거렸다.

"로이드 님, 잊으셨습니까? 이건 결투입니다."

"응. 나도 아는데."

"그런데 그 자세는 뭡니까."

"응. 싸우려는 준비자센데."

"지금 어린애 장난으로 절 모욕하시려는 겁니까?"

"응. 아닌데."

"그럼 뭘 하시려는 겁니까."

"몰라서 물어? 이걸로 너 후드려팰려고 자세 잡은 거잖아."

"...그 대답, 후회하도록 해드리지요."

"응. 그러시든가."

"...."

까드득!

절로 이가 갈렸다.

노이만 경은 모욕감에 치솟는 분노를 곱씹으며 고개를 돌렸다.

프론테라 남작을 향해 말했다.

"저도 결투에 임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스산한 목소리로 읊은 결투 준비 선언.

그 목소리에 밴 서늘함에 영지민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어쩐지 오늘의 결투가 자신들의 바람(?)을 제대로 충족시킬 듯하다는 기대감이 무럭무럭 피어났다.

그리고 마침내 남작의 선포가 떨어졌다.

"나, 남작 아르코스 프론테라는 둘의 정당한 결투가 시작됨을 알리노라."

결투의 시작이 정식으로 선포되었다.

그와 동시에 노이만 경이 송곳니를 드러냈다.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땅을 박찼다.

'건방진 애송이 놈! 본때를 보여주지!'

파아앗!

노이만 경의 두 발이 경쾌하게 움직였다.

땅을 밀어냈다.

몸이 옮겨졌다.

그것은 일반인의 수준을 뛰어넘는 간결하고도 재빠른 전진이었다.

결투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노이만 경과 로이드의 간격은 약 4미터.

그 4미터의 간격을 노이만 경은 단 한 번의 발 구름으로 단숨에 좁혀 버렸다!

"...우와!"

구경하던 영지민들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 탄성이 끝나기도 전에 노이만 경의 검이 움직였다.

검집에서 뽑지도 않은 채.

검집 통째로 맹렬히 휘둘러졌다.

'우선 한두 군데쯤 넉넉히 부러뜨려 주마!'

자고로 미친개에게는 몽둥이찜질이 딱이다.

게다가 어차피 이런 허접하고 초라한 촌구석 영지 따위, 정나미가 떨어진 지 오래다.

그러니 이참에 주제도 모르고 나대는 망나니 도련님을 제대로 짓밟아 버리리라 그는 독한 마음을 품었다.

'이렇게 쌓였던 스트레스도 풀고! 그래 봤자 남작은 날 탓하지도 못할 거고! 그 후엔 이 영지를 뜨는 거야. 미리 약속한 대로 말이지! 크하핫!'

장밋빛 미래가 그려졌다.

자신과 내통하던 자가 떠올랐다.

남들은 그를 부동산 투자 사기꾼이라 비난했다.

하지만 자신이 보기엔 아니었다.

'합당한 사업이지, 그건!'

그 사업가는 자신을 통해 프론테라 영지의 정보를 얻었다.

그 정보를 이용해서 프론테라 남작의 자산을 차지했다.

덕분에 자신은?

'사업가'에게서 제법 큰 사례금을 받았다.

게다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 사업가가 자신에게 약속했다.

이런 촌구석 영지 따윈 버리고 자신에게 오라고.

그러면 능력에 걸맞은 더욱 귀한 대우를 해주겠다고.

'당연한 일이지. 난 이런 촌구석에서 썩을 인재가 아니니까!'

언제나 가슴속에서 꿈틀거리던 야망.

검 한 자루로 부귀영화를 이루겠노라던 꿈.

이제 그 꿈이 멀지 않은 곳까지 다가와 있었다.

물론 그러기 전에 우선, 눈앞에서 나대는 건방진 도련님부터 밟아 버릴 작정이었다.

'바로 이렇게 말이지!'

후우우웅!

검집조차 벗기지 않은 장검이 흉험한 기세로 공기를 갈랐다.

오른쪽 위에서부터 왼쪽 아래로.

사선으로 휘둘러졌다.

그 경로의 끝에 로이드의 왼쪽 쇄골이 있었다.

'일단 쇄골 한쪽!'

노이만 경의 눈동자에 잔혹한 빛이 떠올랐다.

동시에 그는 확신했다.

로이드 같은 애송이는 자신의 이 일격을 절대로 막을 수 없을 거라고. 삽자루나 들고서 저따위 엉거주춤한 자세를 잡고 있는 놈에게 그건 절대 불가능한 일일 거라고.

그런 생각은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굳은 표정의 프론테라 남작도.

두 손을 꼭 쥔 남작 부인도.

그 밖의 모든 구경꾼이 그렇게 확신했다.

단 한 사람의 예외, 하비엘만 제외하고서.

'로이드 님의 저 자세는 어쩐지, 장난이 아닌 것 같다.'

하비엘은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로이드를 지켜보고 있었다.

로이드의 자세는 엉거주춤하고도 낯설고 기이해 보였다.

한데 묘하게 안정감이 있었다.

편안해 보였다.

결코 얼치기로 익힌 자세가 아니었다.

한두 번 잡아본 자세 또한 아니었다.

'하지만 나와 훈련하던 중에는 한 번도 저런 자세를 보인 적이 없었어.'

설마 이쪽 몰래 따로 연습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다만 한 가지 사실만은 명확했다.

'틀림없어. 저건 철저히 실전만을 위해 고안된 자세다.'

그 사실을 깨닫자 문득, 소름이 돋았다.

어쩌면 이 결투의 결과가 모두의 예상과 정반대로 나올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하비엘의 예감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휘릭!

지금껏 잠잠히 있던 강철삽이 별안간 움직였다.

간결한 선을 그리며 위로 솟았다.

비스듬히 떨어져 내려오던 장검을 가로막았다.

카각!

너무나 간단하고 군더더기 없는, 그래서 참으로 쉬워 보이는 동작.

하지만 그렇게 자신의 공세가 가로막혔음에도 노이만 경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겨우 이런 방어 따위!'

어찌 운이 좋아 얼결에 막은 것이라 여겼다.

초심자답게 엉겁결에 삽을 치켜든 것에 불과하다 여겼다.

반면 자신은?

무려 소드 익스퍼트 하급에 다다른 자였다.

로이드 같은 도련님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는 마나를 운용할 수 있었다.

'그따위 방어는 이 힘으로 깨부숴 주지!'

화아악!

노이만 경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그의 장검이 희미하게 빛났다.

마나가 장검에 주입되었다.

약간의 검기가 생성되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희미하던 검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니, 장검에 맞닿은 강철삽에 흡수되었다. 옮겨졌다.

심지어 자신의 몸에서도, 마나하트에서도 마나가 쑥 빠져나갔다!

'...어?'

노이만 경이 두 눈을 경악으로 부릅떴다.

동시에 강철삽이 움직였다.

카가각!

"...!"

자신의 장검을 옆으로 슥 밀어냈다.

마치 귀찮은 파리를 밀쳐내는 듯한 동작이었다.

버티고 싶었다.

그런데 저항할 수 없었다.

이상하게도 전신에서 힘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강철삽 머리가 기묘한 각도로 불쑥 돌진해 왔다.

터어엉!

"...푸큭!"

안면을 강타하는 강렬한 충격.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핏방울과 함께.

노이만 경의 머리가 맹렬하게 홱 돌아갔다.

15화. 망나니의 네 가지 무기 (2)

터엉!

"푸크윽!"

안면을 강타하는 아득한 충격.

노이만 경의 시야 속 세상이 홱 돌아갔다.

'뭐지?'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하지만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노이만 경은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자신이 처한 지금 상황을 재빨리 파악했다.

'내 공격이 막혔다. 심지어 반격을 당했다고? 내가?'

느려진 시야 속.

허공으로 천천히 날아가고 있는 핏방울이 보였다.

자신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피였다.

그러고 보니 입 안쪽이 얼얼했다.

충격 때문에 볼 안쪽이 터진 듯했다.

'저 애송이 놈 때문에? 내가?'

까드득!

노이만 경은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재빨리 다리를 움직였다.

두 다리를 넓게 벌려 땅을 디뎠다.

허리를 낮추며 가까스로 쓰러지는 것을 모면했다.

"크아압!"

균형을 회복하자마자 기합성을 내뱉었다.

마나하트의 마나를 끌어모았다. 전신으로 돌렸다. 되찾은 활력을 담아 검을 끌어당겼다. 아래에서부터 위로 비스듬히 올려쳤다.

회심의 반격이었다.

하지만 그 공세는 금방 가로막히고 말았다.

까앙!

"오, 그래도 곧바로 반격을 하네? 저번에 울리히 경은 선빵 맞자마자 정신 못 차리던데."

"...그읏!"

넓적한 삽머리가 장검을 가로막고 있었다.

하지만 노이만 경의 공세는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반격이 막힌 것을 깨닫자마자 검의 움직임을 변화시켰다.

한 걸음 내딛으며 검을 돌렸다.

카가가각!

검과 삽이 얽히며 쇠 긁히는 소리를 냈다.

'이대로 삽을 날려 주지!'

양쪽의 무기를 두 바퀴 얽은 후에 걷어낸다.

그러면 상대는 십중팔구 무기를 놓치게 된다.

로이드를 빈손으로 만든 후에 다리를 걸어 넘어뜨린다.

그것이 노이만 경이 순간적으로 세운 전투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 몰랐다.

처맞기 전까진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계획이 있다는 서글픈 진리를.

"쯧. 무장해제라. 의도는 좋은데."

카각!

로이드의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얽히던 검과 삽의 움직임이 뚝, 정지되었다.

아니, 정확히는 로이드가 삽을 멈추었다.

그러자 검이 따라서 멈추어졌다.

동시에 노이만 경의 마나하트에서 힘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마나하트에서 두 팔로.

두 팔에서 검으로.

검에서... 삽으로.

마치 음료가 빨대로 쭉쭉 빨려가듯이.

혹은 엎지른 물이 티슈로 빨려가듯이.

자신의 마나가 로이드의 삽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이, 무슨!"

기겁한 노이만 경은 황급히 검을 거두려 했다.

하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어쩐지 자신의 동작이 평소보다 느려져 있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나를 사용할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일반인이 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반면 로이드는?

소드 익스퍼트 하급의 기사가 보여줄 법한 속도로 돌진해 오고 있었다!

"참말로 다행이야."

"...!"

처척!

너무나 가볍게.

실로 간단하게.

로이드가 이쪽의 간격 안으로 뛰어들었다.

"크읏!"

노이만 경은 황급히 검집째 검을 휘두르려 했다.

하지만 로이드의 다음 반응이 훨씬 빨랐다.

후우웅!

"...!"

어느새 삽 손잡이가 쇄도해 오고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피할 틈도 없이 콧등을 강타했다.

콰작!

"쿠흑!"

코뼈가 뭉개진 걸까.

묵직하고도 시큰한 통증에 눈을 뜨기가 어려웠다.

저도 모르게 세 걸음이나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로이드가 더욱 집요하게 전진해 왔다.

"사실 조금 걱정이었거든. 소드 익스퍼트 하급이 발산하는 마나를 싱글 써클로 소화할 수 있는지 확인해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

"그으읏!"

물러나던 노이만 경이 질색했다.

다급한 몸짓으로 검을 내리쳤다.

그나마 순간적으로 회복한 마나가 약간 담겨 있는 반격이었다.

하지만 그 반격조차도 검이 삽에 가로막히는 순간 절망으로 바뀌었다.

검에 실린 마나가 또 삽으로 흡수된 것이었다!

'미쳤어, 이건!'

쯔컥!

마나 실린 삽이 날아왔다.

평평한 삽머리에 따귀를 얻어맞았다.

고개가 홱 돌아가며 시야가 뿌옇게 물들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상상도 해본 적 없었다.

'저 애송이 놈이 내 마나를... 흡수하고 있어.'

이제는 상황을 어렴풋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의 마나를 흡수하다니.

그렇게 흡수한 마나를 자신의 것처럼 사용한다니.

'...어떻게?'

사기처럼 느껴졌다.

억울했다.

하지만 노이만 경은 포기하지 않았다.

쓰러지지 않으려 애썼다.

통하지 않는 반격을 이어갔다.

물론 그럴수록 로이드는 더욱 그를 몰아붙였다.

'정신 못 차리겠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도 안 되지? 그러니까 나한테 당하는 거야. 넌 그저 자신이 이길 거라고 확신하며 지난 한 달을 보냈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상대를 철저하게 분석했다.

결투의 모든 상황을 예측했다.

이기기 위한 모든 종류의 준비를 총동원했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이었다.

카캉, 터엉!

앞으로 내민 삽을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 범위는 결코 과하지 않게.

몸의 중심선을 벗어나지 않게.

최대한 간결한 동작으로.

반격해 오는 노이만 경의 검을 걷어냈다.

걷어낸 즉시 왼발을 내딛으며 삽 머리를 쭉 뻗었다.

마지막에 스냅을 주며 노이만 경의 따귀를 평평한 삽머리로 후려쳤다.

그런 로이드의 심장은 전에 없이 날뛰고 있었다.

심장 주위로 생성된 마나 써클 덕분이었다.

키이이잉!

오늘의 결전을 위해 로이드가 장착한 첫 번째 무기.

아스라한 심법으로 생성시킨 마나의 써클이었다.

노이만 경에게서 흡수한 마나를 동력으로 삼아 강렬하게 회전했다.

그 회전에 공명하며 심장이 거칠게 날뛰었다.

폭발적인 기세로 신선한 혈액을 전신으로 보냈다.

마나써클에서 방출된 마나가 가득 담긴 혈액이었다.

'이게 싱글 써클의 위력이구나.'

진심 놀라웠다.

이 정도의 위력은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그저 노이만 경의 마나를 흡수해서 상대를 약간이나마 약하게 만드는 정도만을 예상했는데.

지금 자신의 몸을 통해 발산되는 위력은 완전히 기대 이상이었다.

즉, 자신은 노이만 경의 힘을 그대로 이용할 수 있었다!

'소드 익스퍼트, 엄청나잖아.'

초인이 된 기분이었다.

새삼 노이만 경 같은 기사들이 얼마나 강한 건지 실감이 갔다.

그래서 그가 준비한 두 번째 무기가 바로 통짜 강철삽이었다.

까앙! 카그각!

로이드의 손에 들린 강철삽이 번득이며 움직였다.

그럴 때마다 노이만 경이 휘두른 검을 철저하게 가로막았다.

마치 기다란 장대 끝에 달린 방패 같은 모습이었다.

'다들 은근 무시하지만 알고 보면 삽이라는 거, 엄청난 도구니까.'

군대에서 삽질 좀 해본 사람들은 안다.

삽은 그저 단순한 작업 도구로 치부될 물건이 아니었다.

땅을 파다가 번거로운 칡뿌리나 자잘한 나무뿌리가 나오면?

그냥 날을 세워서 찍어 버리면 된다.

어지간한 작은 초목 줄기쯤은 한 번의 스윙으로 절단한다.

그 자체로 도끼의 역할이 가능한 것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야.'

역사적으로도 삽이 여러 번 무기로 쓰였음을 로이드는 알고 있었다.

끔찍한 참호전이 펼쳐진 1차대전의 서부전선에서도.

참혹했던 2차대전의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에서도.

백병전에서 삽은 무기로써 빛을 발했다.

작정하고 내리친 삽이 상대의 철모를 가르고 두개골을 쪼개기 일쑤였다.

그 외에도 삽은 실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면적이 넓은 삽머리를 방패처럼 쓸 수 있지. 삽머리 아래쪽 부위로는 상대의 무기를 걸어서 당길 수도 있어. 뾰족한 끝으로는 창처럼 상대를 찌르기도 하고.'

심지어 삽을 거꾸로 세워서 삽날을 밟고 올라타면?

'스카이콩콩도 탈 수 있다고!'

그야말로 무기 세계의 맥가이버칼 같은 존재.

그런 삽을 수도 없이 다룬 로이드였다.

대한민국의 군대에서 행보관의 소환수(?)가 되었을 때도.

학비를 마련하느라 공사판을 전전하던 때도.

삽은 언제나 그의 든든한 동반자였다.

그만큼 가장 손에 익은 도구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는 최근 모았던 RP를 투자해서 새로운 재능 스킬을 개화하기까지 했다.

그것이 바로 그가 준비한 세 번째 무기.

무려 40 RP를 투자한 '연장 숙련 스킬 : (삽)' 이었다.

딩동!

[연장 숙련 스킬 : (삽)이 활성화된 상태입니다.]

[도구와 나는 일심동체! 오늘은 삽질로 정했다!]

[스킬 레벨 : 1]

[삽을 사용하는 동안 체력 소모가 10% 줄어듭니다.]

[삽의 움직임이 5% 빨라집니다.]

[삽에 실린 힘이 5% 강해집니다.]

[삽을 놓칠 확률이 20% 감소합니다.]

가장 손에 익은 도구인 삽.

그 삽질을 효율적으로 만들어주는 스킬.

이것이야말로 자신에게 안성맞춤인 세 번째 무기였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무기는 바로 이거지.'

처척! 카앙!

로이드의 삽이 다시금 움직였다.

찔러져 들어오는 노이만 경의 검을 완벽하게 차단했다.

그 삽머리의 움직임은 결코 로이드의 신체 중심선을 벗어나지 않았다.

단순하지만 간결하고 절도 있는 동작.

그래서 더없이 효율적이고 실전적인 자세.

삽이라는 물건을 무기로 다룰 수 있을 정도로 호환성(?)마저 끝내주는 기술.

바로 대한민국의 군필자 남성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익혀보았을 전투법, 총검술이었다.

휘릭, 카아앙! 퍼억, 콰작!

비키고 우측으로 찔렀다.

노이만 경이 피하며 검을 횡으로 휘둘러 왔다.

좌하단을 막았다. 때렸다.

물러나는 노이만 경을 간결한 스텝으로 따라붙었다.

좌측으로 돌고 삽을 세워 막았다.

동시에 앞차기로 노이만 경의 사타구니를 끊어 찼다.

노이만 경이 당황하는 순간 눕힌 삽의 손잡이로 관자놀이를 돌려쳤다.

뻐걱!

"커윽!"

비틀거리며 물러나는 노이만 경.

거친 숨 내뱉는 로이드의 입가에 미소가 배어났다.

'역시 통한다, 총검술.'

사실 총검술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군필자라면 누구나 익히기에 쉽게 여겨져서 그렇지, 의외로 그 뿌리는 18세기에 유럽에서 발달한 스몰소드 기법에 두고 있었다.

거기에 복싱의 스텝이 결합되었다. 궁극적으로는 1차대전, 2차대전, 6·25 전쟁 등 여러 전투 사례를 통해 기술이 철저하게 축적되고 다듬어졌다.

알고 보면 더없이, 지극히 실전적인 격투술인 셈이었다.

'게다가 이 총검술이 삽이랑 시너지가 끝내주거든!'

작업 도중에 장난을 친답시고 삽으로 총검술을 펼쳐본 자들이 은근 많을 것이었다.

로이드도 그랬다.

거기에 하비엘에게 배운 검술의 기본기를 보탰다.

그 효과는 놀라울 정도였다.

아스라한 심법의 마나 써클.

유틸성이 뛰어난 무기인 강철삽.

삽질을 더욱 손에 익게 해주는 연장 숙련 스킬.

거기에 하비엘의 가르침을 베이스로 삼은 실전적 총검술까지.

오늘의 결투를 위해 준비한 네 가지 무기가 강력한 시너지를 일으켰다.

안일하게 결투에 임한 노이만 경을 말 그대로 압도, 아니, 일방적으로 박살을 내고 있었다.

"커어억!"

빠악!

삽 손잡이에 관자놀이를 맞은 노이만 경이 비틀거렸다.

하지만 그에게 쓰러질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그를 따라잡은 로이드의 삽이 또 날아왔다.

터엉!

평평한 삽머리로 옆구리를 두들겼다.

심지어 뾰족한 삽머리 끝으로 발등을 찍기까지 했다!

콰악!

"...크아아아!"

노이만 경은 환장할 노릇이었다.

반격을 시도할 때마다 마나를 흡수당했다.

기묘한 형상을 살린 삽이 예측 불가능한 공격을 퍼부었다.

그렇듯 삽을 다루는 로이드의 동작이 그렇게 익숙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로이드의 모든 움직임은 지극히 빈틈없이 간결하기까지 했다.

'이럴 수는 없어!'

분했다.

성질이 났다.

영지민 대부분이 보는 앞이었다.

한데 풋내기 애송이에 불과한 도련님에게 당하는 꼴이라니.

제대로 된 무기도 아닌 삽으로 얻어터지는 꼬락서니라니.

'죽인다. 죽여 버린다!'

노이만 경의 눈동자에 음습한 살기가 배어났다.

이제는 결투고 뭐고 알 바 아니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자신에게 치욕을 안긴 애송이.

저 애송이 놈을 어떻게든 끝장내고 싶었다.

'결투 중에 일어나는 사고는 은근히 흔한 일이니까!'

그러니까 잘못 찌른 검이 상대의 심장을 관통한다든가.

혹은 엉겁결에 휘두른 검날에 목이 베인다든가.

그런 일은 드문 게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 그런 일이 벌어져도?

그에겐 뒷감당을 해낼 자신이 있었다.

'어차피 이 영지, 머지않아 망할 거잖아. 그러니까 예정보다 좀 더 일찍 뜨는 거야! 새 주인을 모시고 떵떵거리고 사는 거야! 그 와중에 일어나는 사고? 어쩔 수 없지. 결투 중에 벌어진 일이니까 처벌도 못 할 거잖아?'

그러니 결투가 끝난 뒤에 잠적하면 된다.

예정보다 일찍 이 영지를 떠나 새 주인을 찾아가면 될 일이다.

그렇게 나름의 계획을 세운 노이만 경의 손아귀가 검 손잡이를 거세게 움켜쥐었다.

나머지 한 손으로 검집을 잡았다.

당겼다.

스르릉!

지금껏 검집에 감싸여 있던 장검이 서늘한 송곳니를 드러냈다.

망설일 틈도 없이 로이드를 향해 직선으로 뻗어 갔다.

그 경로의 끝에 로이드의 심장이 있었다.

"아앗!"

지금까지와는 달리 살기가 실린 일격이었다.

구경하던 영지민들이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단상에 앉아 있던 프론테라 남작이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로이드는 아니었다.

'뭐. 그래서 어쩌라고.'

살기가 느껴지긴 했다.

하지만 그래 봤자 느려터진 일격이었다.

이미 워낙 많이 얻어맞은 탓에 힘이 다 빠져 있었다.

비록 진검이라고는 하지만 그런 비실거리는 반격에 허투루 당할 로이드가 아니었다.

이 정도 반격이 한 번은 있으리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난 이걸 기다렸지.'

카앙!

강철삽이 기다렸다는 듯 장검을 가로막았다.

아까 노이만 경이 시도했던 것처럼 장검을 얽어 버렸다.

카가가각!

얽고 휘돌렸다. 끌어당기며 걷어냈다. 뿌리쳤다.

"...엇?"

파앗.

노이만 경의 손에서 벗어난 장검이 하늘을 날았다.

열 발짝 떨어진 지면에 푹, 꽂혔다.

"...."

연무장 주위로 정적이 맴돌았다.

구경꾼들의 수백 쌍 눈동자가 경악에 잠겼다.

검을 놓친 노이만 경.

그런 노이만 경의 얼굴을 삽으로 겨누고 있는 로이드.

믿기지 않는, 그림처럼 완벽한 승리였다.

그러나 로이드의 용건은 끝나지 않았다.

"멍 때리면 결투 끝나냐? 엉?"

"...!"

콰앙!

모두의 침묵 속에서 로이드의 강철삽이 날았다.

빈손이 된 노이만 경의 안면을 더욱 단호하게 후려쳤다.

분풀이를 위해서?

아니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야. 이제부터가.'

다시금 말하는 거지만 오늘, 이 영지에 뿌리 내린 썩은 싹을 제대로 뽑아낼 생각이다.

'일단 배신자의 자백부터.'

노이만 경을 향하는 로이드의 눈동자가 전에 없이 서늘하게 번득였다.

16화. 일벌백계 (1)

노이만 경.

프론테라 남작령의 선임 기사.

그는 이 시골구석 영지가 싫었다.

출세하고 싶었다.

호화롭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이곳 프론테라 영지는 왕국에서도 구석에 처박힌 벽촌이었다.

나름 목가적인 평화로움을 즐기기엔 좋았지만,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런 안온함을 즐기는 것은 은퇴한 늙다리에게나 어울리는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즉, 이곳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자신은 이런 데서 썩을 인재가 아니라고 믿었다.

'탈출하고 싶었어!'

이 영지를 버리고 떠나고 싶었다.

더 큰물에서 놀며 출세하고 싶었다.

남부럽지 않은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프론테라 남작에게 맹세했던 충성을 철회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불가능했다.

주군에게 바친 충성을 철회한 기사는 어딜 가든 배척받는다.

어떤 영주도 그런 기사를 수하로 두려 하지 않는다.

주군을 배신한 기사.

기사도를 잃은 기사.

폐급 기사로 낙인찍히는 셈이었다.

그래서 그는 생각했다.

자신이 주군과 영지를 버리고 떠날 수 없다면 그 주군과 영지가 망하도록 만들면 되지 않겠는가, 라고.

그러면 배신자로 낙인찍히지 않으리라.

아무런 비난도 받지 않고 이 지긋지긋한 촌구석을 떠날 수 있게 되리라.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외부자와 내통했다.

영지의 정보를 팔았다.

남작에 대한 정보도 팔았다.

그 결과 남작은 거액의 투자 사기에 걸려들었다.

심각한 자금난에 시달리다 못해 사채꾼에게 손을 벌리기에 이르렀다.

기뻤다.

남작의 파산이 머지않았음을 확신했다.

그 말은 곧, 자신이 자유를 얻을 날이 가까워졌다는 뜻이었다.

'모든 계획이 성공적이었어.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됐어. 그런데 왜? 어째서?'

나는 이곳에서 저 애송이 도련님에게 정처 없이 얻어터지고 있는 걸까.

휘이익!

"...!"

삽이 날아왔다.

넙데데한 삽머리가 시야 속에서 급속도로 커졌다.

온 세상을 울리는 맑고 고운 소리와 함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골통 내부가 온통 울리는 강렬한 충격은 보너스였다.

터엉!

"커억!"

노이만 경은 다리가 풀렸다.

하지만 가까스로 쓰러지지 않았다.

대신 그는 세상 억울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 그만! 이미 내 손엔 검이 없습니다!"

사실이었다.

검은 아까 놓쳤다.

그때부터 자신은 비무장 상태였다.

결투의 승부가 명백히 갈린 것이었다.

그 시점에서 결투가 끝났어야 했다.

그것이 노이만 경이 지닌 상식 내에서의 지극히 보편타당한 절차였고, 도리였으며, 결말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하드코어한 시궁창이었다.

자신이 빈손이 되었음에도?

로이드의 공격은 중단되지 않았다.

아예 쓰러진 자신을 일으켜 세워가며 팼다.

항복을 거듭 외쳐도 듣지도 않고서 폭행했다.

심지어 도망치려 해도 따라오면서 기어이 또 삽을 휘둘렀다!

"그으으, 그읍! 그만! 더는 저를 모욕하지 마십시오!"

견디지 못하고 빽 외쳤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답 대신 단호한 삽질(?)만 날아왔다.

터어엉!

"...커헉!"

또다시 골통이 쩌렁쩌렁 울렸다.

'누가 좀... 말려줘.'

눈앞이 막막해졌다.

이대로 맞고만 있다간 진짜로 죽겠구나 싶었다.

더는 자존심을 챙길 때가 아니었다.

그의 절박한 눈길이 단상 위의 프론테라 남작을 향했다.

'주군! 도와주십시오!'

결투가 끝난 상황에서도 미친놈처럼 삽을 휘둘러대는 로이드.

저 개망나니 후레자식을 말릴 수 있는 이는 아버지인 남작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노이만 경은 필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남작이 있는 방향을 향해 쓰러졌다.

고개를 들고서 애처로운 눈빛으로 남작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제발!'

자신이 주군인 남작을 배신했던 일은 머릿속에 떠오르지도 않았다. 배은망덕이고 뭐고, 일단 지금 이 상황을 모면하는 게 훨씬 중요했다.

다행히 그런 마음이 닿은 것일까.

남작이 단상에서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로이드, 그만하거라. 결투가 이미 끝난 것 같구나."

프론테라 남작의 목소리가 연무장에 울렸다.

나직하지만 영지의 주인다운 권위가 실린 음성이었다.

그 시점에서 모두는 생각했다.

아, 이쯤에서 저 망나니 도련님이 삽질을 멈추겠구나.

구경하던 농부 A씨도, 나무꾼 B씨도, 아낙네 C씨도, 병사 D씨도 다들 마찬가지였다.

당연한 추측이었다.

영지의 주인이자 아버지의 명이었다.

로이드 도련님이 아무리 막 나간다 해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영주의 명령까지 무시하고 계속해서 행패를 부릴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모두의 추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모두의 달팽이관을 찰지게 때리는 시원한 타격음과 함께.

터어어엉!

숙련된 프로골퍼의 티샷처럼 호쾌한 포물선을 그리며 올려쳐 진 삽머리!

노이만 경의 턱주가리에 강렬한 충격을 선사했다.

"...쿠악!"

"쿠악은 무슨. 아직 안 끝났다. 더 맞아야지."

"크, 쿠훕, 쿨룩! 컥!"

"아파? 억울해? 이런 내가 미친놈 같아? 응?"

"그, 그르륵, 그만...!"

"그만하라고?"

"그, 그렇습...."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야."

콰악!

삽 손잡이로 등을 찍었다.

그러자 또 아프다고 자지러지는 노이만 경.

하지만 그런 노이만 경을 향한 로이드의 눈길은 차갑기만 했다.

'억울하냐? 어쩔 수 없어. 이게 바로 본보기라는 거니까. 이런 꼴 당하기 싫었으면 자길 믿어주는 사람 배신해서 등쳐먹는 짓거린 하질 말았어야지.'

솔직한 심정이었다.

엄밀히 말해서 이놈은 배신자다.

한데 이런 놈을 물렁하게 용서해주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해서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아름다운 스토리가 펼쳐질까?

'아니, 절대 그렇지 않아.'

로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이야기는 동화책 속에나 존재할 뿐이다.

현실이 얼마나 야비하고 지저분한지 그는 너무나 잘 알았다.

대한민국에서 지겹도록 밑바닥 생활을 해봤기 때문이었다.

'고시원에서도 그랬지. 공용 냉장고에 넣어둔 내 장조림 몰래 빼먹다가 딱 걸린 아저씨처럼 말야. 그때 화를 냈어야 했어. 괜히 봐줬어.'

당시엔 솔직히 좀 당황했었다.

화낼 타이밍을 놓쳤다.

결국 멋쩍게 웃으며 다음엔 그러지 마시라고, 좋은 소리로 타일렀었다.

그랬더니?

'계속 훔치더라고.'

심지어 나중엔 서로 나누면서 사는 걸 가지고 뭘 그렇게 빡빡하게 구냐는 소리까지 들었다.

지금도 돌이켜보면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그런데 이런 놈을 봐준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장조림 하나에도 뻔뻔해지는 게 인간이라는 존재다.

그런데 주군을 팔아먹은 놈을 용서해주면?

호의를 함부로 베풀면?

호구가 된다.

이후로도 이쪽을 만만하게 보고 비슷한 짓거리를 하는 놈들이 손에 손잡고 줄줄이 비엔나소시지처럼 설쳐댈 것이다.

"그러니까 넌 오늘 본보기가 될 거야. 초주검이 될 때까지 밟힐 거란 뜻이지. 아직 안 끝났어. 개소린 집어치우고 일어나기나 해."

이날을 위해 얼마나 칼을 갈았던가.

로이드는 손을 뻗었다.

노이만 경의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반대편 손으로는 삽을 치켜들었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그만두라는 내 명을 듣지 못하였느냐!"

남작의 우렁찬 호통이 날아왔다.

로이드가 움찔했다.

남작을 돌아보았다.

태연하게 대꾸했다.

"들었습니다."

터어엉!

대답과 함께 삽머리가 노이만 경의 정수리를 후려쳤다.

남작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뭐?"

"들었지만 따를 수가 없는 명이라서요."

터어엉!

재차 노이만 경의 머리통을 후려치는 삽머리.

남작의 눈꼬리가 실룩거렸다.

"넌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 자각은 하고 있는 것이더냐?"

"물론입니다."

터퍼엉!

머리를 맞을 때마다 들썩거리는 노이만 경의 몸뚱이.

남작의 눈동자에 노기가 떠올랐다.

"넌 지금 결투를 마친 상대를 능욕하고 있는 것이야. 그뿐이더냐? 그 상대는 5대째 우리 남작가를 섬겨온 가문의 후예이자 영지의 선임 기사이기도 하다."

"네. 그리고 그만큼 신임을 받았음에도 주군과 영지를 배신한 놈이기도 하지요."

"뭐라고?"

남작이 멈칫했다.

로이드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되물으실 줄 알고 미리 준비해뒀습니다. 단상 탁자에 깔아둔 보자기 아래를 보시죠."

"무슨...."

"제가 준비해둔 것이 있을 겁니다."

"...."

남작은 얼떨떨해졌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노이만 경이 자신과 영지를 배신했다니.

단상 탁자의 보자기 아래를 살펴보라니.

남작은 얼떨떨한 가운데에도 단상 탁자의 보자기를 들췄다.

이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건...."

보자기 아래에 웬 종이봉투가 있었다.

봉투를 꺼내 열었다.

손때 묻은 서신 서너 장이 나왔다.

"이게 무엇이더냐?"

"보시고 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

뭔가 느낌이 심상치가 않았다.

그저 행패를 부리는 거라고 치부하기엔 로이드의 태도가 너무나 당당했다.

남작은 서신으로 눈길을 옮겼다.

처음에는 차근차근 천천히.

이윽고 점점 떨리는 눈길로.

종국엔 서신 쥔 손가락을 떨며 황급히 내용을 읽어내렸다.

"이런...."

와직!

남작의 손이 서신을 움켜쥐었다.

어느새 그는 믿기지 않는 눈길로 노이만 경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로이드가 남작에게 보여준 서신.

바로 노이만 경이 영지의 정보를 사기꾼에게 팔아넘기며 주고받은 서신이기 때문이었다.

'토르데스.'

문득 떠오르는 이름.

자신에게 접근해온 젊은 상인이었다.

열정적이면서도 신중했으며, 진취적인 인상을 지닌 자였다.

하루는 그가 명예를 걸고 보증했다.

좋은 땅이 있다고 했다.

지금은 볼품없는 땅이라 했다.

하지만 몇 년만 지나면 가치가 폭등할 거라고도 했다.

그러니 지금 때맞춰 그 땅을 미리 사들인다면?

훗날 재산을 몇 배는 불릴 것이라 장담했다.

그 말을 믿었다.

물론 모든 투자에는 리스크가 있는 법.

만약 투자 결과가 나쁘면?

생각보다 수익이 적으면?

그땐 사들였던 땅을 다시 되팔면 된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본전은 건질 수 있겠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더는 망설일 게 없었다.

영지의 자금에 빚까지 끼고서 땅을 사들였다.

그리고 그 모든 자금을 잃었다.

'알고 보니 사들였던 그 토지가 서류로만 존재하는 허위 매물이었어.'

당연히 투자금을 모두 잃었다.

자신을 속인 토르데스는 투자금을 모조리 꿀꺽 집어삼키고 종적을 감추었다.

하룻밤에 소득도 없이 빚더미에 올라앉게 된 셈이었다.

'그런데... 그 토르데스에게 영지의 자금 사정부터 내 개인적인 취향, 기호, 관심사 등을 낱낱이 알린 자가 노이만 경이었다고?'

토르데스에게 받았던 많은 선물이 떠올랐다.

마호가니 가구에서부터 참수리 깃 장식 셔츠까지.

하나같이 취향을 제대로 저격하는 선물 공세였다.

대화의 주제 선정도 마찬가지였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노라면 언제나 이쪽의 관심사를 척척 맞추었다.

어쩌면 이렇게 가려운 곳을 제대로 긁어주나 싶을 정도였다.

'덕분에 참 잘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그렇게 내게 접근해서 신뢰를 샀어.'

그 신뢰의 끝은 뼈아픈 배신과 파산이었다.

한데 그 사기꾼과 내통한 자가 노이만 경이었다니.

두쿵, 두쿵!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심장 뛰는 소리가 고막을 두드렸다.

눈앞이 노랗게 변하는 듯 어지러웠다.

그런 남작을 지켜보던 로이드는 쓰린 입맛을 다셨다.

'충격이 크겠지.'

바로 곁에 두었던 이가 자신을 파멸로 몰아가고 있었다는 진실.

그것을 깨달으며 느꼈을 충격과 배신감.

멀리서 봐도 남작의 안색은 창백했다.

당장 쓰러진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였다.

괜히 저 서신을 보여줬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별수 없었다.

'저렇게 증거를 딱 보여줘야 사태를 깨달을 테니까.'

이걸 위해 일찌감치 뽀동이를 동원한 로이드였다.

뽀동이를 노이만 경의 침실로 침투시켰다.

저 서신을 찾아오게 했다.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 노이만 경이 사기꾼과 주고받은 서신을 침실 협탁 서랍에 보관했다는 언급이 나왔던 덕분이었다.

'역시나 그 언급이 사실이었고 말이지.'

뽀동이는 덩치 작은 햄스터답게 은밀히 노이만 경의 침실로 침투했다.

작은 주제에 힘은 강력해서 서랍을 무리 없이 열어젖혔다.

그렇게 배신의 증거인 서신을 확보할 수 있었다.

'저 서신엔 훗날 노이만 경을 고용하겠다는 사기꾼의 약속이 담겨 있지. 서신이 진짜임을 증명하는 마법 서명과 함께. 그래서 노이만 경은 서신을 함부로 버리지 못했어. 덕분에 이렇게 덜미가 잡힌 거지만.'

문득, 입맛이 한층 씁쓸해졌다.

만약 대한민국에서도 이랬더라면.

아버지를 속였던 사기꾼들이 증거를 남겨뒀더라면.

그랬다면 자신의 가족이 불행에 빠지는 일은 없었을 텐데.

최소한 아버지랑 엄마가 돌아가시진 않았을 텐데.

'후우, 일단 지금은 감상에 빠지지 말자.'

로이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은 감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다.

현재의 상황을 설계대로 유리하게 끌어가야 할 때다.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는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창백한 안색의 남작을 향해 입을 열었다.

"괜찮으십니까?"

"...."

"어지러우면 잠시 앉아서 호흡을 고르시죠."

"...알겠다."

가까스로 반응하는 남작.

그 모습을 보며 로이드는 생각했다.

역시 남작은 독한 사람이 못 된다.

그저 선하게 영지를 다스리는 것만 가능한 호인일 뿐.

그런 사람은 평화가 거듭되는 시기에는 성군이라는 칭송을 듣는다.

하지만 역경을 극복할 능력이 요구되는 난세에는?

착한 마음씨를 이용당하기 십상이다.

금방 호구로 전락하고 만다.

즉, 도태되는 것이다.

'심복에게 배신당했다는 걸 깨닫고도 처리를 망설이는 모습만 봐도 확실해.'

딱 봐도 남작의 표정은 충격과 혼란의 도가니였다.

지금까지 심복이라 여겼던 노이만 경.

그의 배신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어떤 방식으로 처리해야 할지.

독한 마음을 먹지 못해 망설이고 있는 것이리라.

'그럼 내가 해줘야지.'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지금 하지 않으면 영지의 기강이 엉망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는 입을 열었다.

"저, 아르코스 프론테라의 아들 로이드 프론테라가 이 영지 후계자의 자격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17화. 일벌백계 (2)

"저, 아르코스 프론테라의 아들 로이드 프론테라가 이 영지 후계자의 자격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로이드의 음성이 연무장 가득 울려 퍼졌다.

어느새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해 쏠려 있었다.

어느 농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떤 나무꾼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또 어느 양조업자는 연신 입술을 잘근거렸다.

모두가 상상도 못 했던 상황이었다.

영지의 선임기사인 노이만 경이 패배했다.

같은 기사도 아닌, 놈팡이인 줄로만 알았던 영주의 아들 로이드에게 아주 제대로 짓밟혔다.

그것만 해도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한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결투가 끝났음에도 로이드의 폭행이 이어졌다.

보다 못한 남작이 역정까지 내며 로이드를 말렸다.

그러나 로이드는 더욱 당당하게 대꾸했다.

노이만 경이 영지와 주군을 배반했노라고.

다들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뭔지 모를 서신을 읽은 남작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다리가 풀렸는지 힘없이 자리에 앉았다. 망연자실한 눈으로 노이만 경을 쏘아보았다.

덕분에 모두는 대강이나마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었다.

'로이드 도련님의 말이 사실이라는 건가?'

남작의 반응으로 보아 그런 듯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노이만 경은 어떻게 되는 걸까.

연무장 주위에 운집한 영지민들의 시선이 모두 로이드를 향해 모였다.

그의 입에서 나올 선언을 기다렸다.

로이드 또한 그 시선을 느꼈다.

'이제부터가 중요해.'

이 상황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계산을 했던가.

기억하고 있는 소설 철혈의 기사의 내용을 모조리 정리했다.

그렇게 자신이 파악하고 있는 영지의 현황, 인물들의 관계와 감정을 고려했다.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일어날 소설 내용의 변화도 예상했다.

즉, 그는 거의 수십 가지의 시나리오를 일일이 설계하다시피 하며 상황을 끌어온 셈이었다.

물론 그중에는 이제부터 보일 남작의 반응도 있었다.

'여기서 너무 강경한 제안을 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

남작은 호인이다.

마음이 여린 사람이다.

아무리 노이만 경이 배신을 했다고 해도.

단숨에 냉혹한 처분을 내릴 생각은 못하리라.

그러니 대놓고 강경한 처단을 건의했다간?

남작이 거부감을 보일 위험성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낚시를 할 때야.'

어차피 이쪽은 의견을 개진할 수 있을 뿐.

처분을 정하는 결정권자는 남작이다.

그러니 남작부터 낚아야 한다.

그래야만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다.

로이드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많이 고민되실 겁니다. 네, 저도 그렇습니다. 노이만 경은 오랜 시간 우리 영지에 몸을 담았고, 그동안 적지 않은 공을 세우기도 했으니까요."

"흐음. 더 말해 보거라."

이쪽이 뜻밖에 노이만 경을 두둔해서였을까.

남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이드는 말을 이어갔다.

"물론 이번 사건을 통해 드러난 노이만 경의 행적은 충격적인 것입니다. 주군을 등졌고, 영지에 큰 해를 끼쳤기 때문입니다."

"즉, 노이만 경에게 공과 과가 함께 있다는 걸 말하고자 하는 것이더냐?"

"그렇습니다."

다행히 이야기가 잘 통했다.

남작은 호인이되 아둔한 사람은 아니었다.

"하면 공은 공으로. 과는 과로. 노이만 경의 모든 행적을 고려하여 이번 일을 처리해달라는 것이더냐?"

"네, 그렇습니다."

"으음,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을 보니 네가 따로 생각해둔 처벌 방식이 있는 듯하구나."

"물론입니다."

로이드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단숨에 쇠뿔을 뽑듯.

미리 생각해둔 처벌 방식을 말했다.

"그의 머리 위에 '쥐'를 떨어뜨리면 어떨까 합니다."

"...쥐?"

"그렇습니다."

로이드의 말이 이어졌다.

"노이만 경의 머리에 '쥐'를 떨어뜨립니다. 그래서 그가 한 군데도 다치지 않는다면, 그에게 반성의 기회를 주시는 게 어떨까요."

"반성의 기회라 함은...."

"일반 사병으로 강등시키는 것이 적당할 듯합니다."

"병사의 신분으로 복무함으로써 과거를 뉘우치고 충성을 증명하라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

남작은 침묵했다.

남작부인은 저도 모르게 두 손을 꼭 쥐었다.

나머지 영지민들은 하나둘씩 침묵에서 빠져나오며 옆 사람을 돌아보았다. 수군거렸고, 웅성거렸다.

"이봐? 저 말, 뜻이 뭐야?"

"쥐를 떨어뜨린다는데?"

"그렇지? 자네도 그렇게 들었지?"

"엉. 노이만 경의 머리에 쥐를 떨어뜨린다고 그러네."

"설마 그게 처벌인 건가? 고작 그게?"

"으으음.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어떤 농부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떤 나무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머리 위에 고작 쥐를 떨어뜨려서 다치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요?"

"으음, 저는 가능할 것 같긴 해요."

"어떻게요?"

"제가 쥐를 무서워하거든요. 깜짝 놀라서 비명을 지르고 날뛰다가 넘어질 수도 있는 거잖아요?"

"...하지만 노이만 경은 그렇진 않겠죠?"

"아무래도요?"

"맞아요. 그는 기사니까."

아낙네들도 곁의 일행과 열심히 수군거렸다.

나름 열심히 추측하고 머리를 굴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저런 처벌로 노이만 경이 다칠 것 같지가 않았다.

즉, 모두는 로이드의 제안을 이렇게 해석했다.

"노이만 경을 용서하자는 거겠지. 그렇지 않나, 하비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곁에 있던 바이에른 경의 물음.

그 질문에 하비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이 정도 처벌이면 충분하다고 판단하신 거겠지요."

"로이드 도련님이?"

"네, 그렇습니다."

하비엘의 말이 이어졌다.

"노이만 경은 이미 모두가 보는 앞에서 충분히 치욕을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용서를 받는다 해도 그가 받을 치욕은 거기서 끝이 아닐 겁니다."

"그렇겠지. 기사의 작위를 박탈당하고 일반 병사의 신분으로 복무해야 할 테니."

"예. 그것 자체가 더없이 치욕스러운 일이겠지요. 다만...."

"다만?"

"조금 의아한 부분이 있습니다."

"의아하다니?"

"로이드 님의 제안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조금 뜻밖이랄까요."

무슨 뜻이냐는 듯 이쪽을 돌아보는 바이에른 경.

하비엘은 잠시 뜸을 들인 후 말했다.

"너무 온건합니다. 지나치게 자비롭습니다. 그래서 로이드 님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엔 저 인간... 아니, 저분은 저럴 위인이 아니거든요."

솔직히 그랬다.

그동안 자신이 호위한 로이드 프론테라.

덕분에 곁에서 항상 지켜본 저 인간은 이렇게 뒤끝이 깔끔한 타입이 아니었다.

'더러워. 그것도 상당히. 심지어 철저하고 집요하며 치사하기까지 하지.'

나쁜 놈은 아니다.

하지만 착한 놈은 더더욱 아니다.

은근 엄청나게 쪼잔한 구석이 있다.

손해를 볼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철저하게 영악한 놈.

그것이 최근 하비엘이 내린 로이드에 대한 가장 솔직한 평가였다.

'그럴 수밖에 없어.'

저 인간은 어느 날부터인가 극적으로 변했다.

매일같이 부리던 진상질을 멈추었다.

대신 엄청나게 쪼잔해졌다.

영지민들에게 받는 공사 대금을 철저하게 챙겼다

동전 한 닢이라도 모자란 걸 깨달으면 저녁을 먹다가도 뛰어가서 받아냈다.

그뿐일까.

'자장가 서비스? 그따위 괴상한 걸로 날 완전히 휘두르고 있어.'

밤마다 들려주는 괴상한 학술 용어의 퍼레이드.

덕분에 깊은 잠을 푹 잘 수 있게 되긴 했다.

처음엔 마냥 기뻤다.

세상을 다 얻은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나보니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아야 했다.

'대가가 지나치게 비쌌으니까.'

하루에도 몇 번씩 저 인간에게 협박 아닌 협박을 들어야 했다.

'검술 가르쳐주지 않으면 자장가 서비스 콱 중단해 버릴 거야.'

'아스라한 심법 그것도 우리 공동 저작권 있는 거 알지? 인정 안 하면 자장가 서비스 스톱?'

'어, 목이 좀 마르네. 근데 알지? 냉큼 떠오면 자장가 서비스 하루 연장해줄게.'

...라는 식이었다.

갑질도 그런 갑질이 없었다.

제대로 코 꿰인 흑우가 되어 매일매일을 살아가는 기분이었다.

도저히 저 마수(?)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아니, 벗어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저 인간이 제공해주는 자장가 서비스가 너무나 달콤했기 때문이었다!

'...후우. 이건 생각할수록 처참한데. 어쨌건, 그처럼 철저한 인간이 영지를 배신한 데다 자신에게 대든 노이만 경을 이렇게 용서해준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차라리 술주정이나 부리던 예전이라면 모를까. 최근의 저 인간이 그렇게 헐렁하게 상대를 용서할 리가 없어.'

분명 뭔가 더 있다.

저 인간이라면 틀림없다.

반드시 악랄한 꿍꿍이를 숨기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하비엘은 가자미눈을 뜨고서 로이드를 쳐다보았다.

물론 이 연무장에서 그렇게 로이드를 의심하는 이는 오직 하비엘만이 유일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달랐다.

모두는 로이드가 보인 뜻밖의 관대함에 놀라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프론테라 남작의 놀라움이 가장 컸다.

'그래. 나름 온건한 판단을 내렸구나, 로이드.'

남작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뜻밖이었다.

그래서 흐뭇했다.

'언제까지나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철부지인 줄로만 알았더니.'

아니었다.

이제 보니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

자신의 아들 로이드는 어느새 대견한 모습으로 자라나 있었다.

'훌륭하구나. 이제야 이해가 되었어. 어째서 영지의 선임 기사인 노이만 경과 불화를 일으키는가 싶었더니, 그때부터 너는 이미 노이만 경의 배신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로구나.'

그래서 일부러 노이만 경과 갈등을 만들었으리라.

이렇듯 의도된 결투를 벌였으리라.

모두가 보는 앞에서 노이만 경을 혹독히 응징한 것이리라.

'그래. 하나를 벌하여 나머지 모두에게 경종을 울리려 함이었겠지. 동시에 너는 이 순간에 모두의 예상과 달리 관대함을 보임으로써 영지의 실리적 이득까지 꾀하는 지혜를 발휘하였구나.'

생각할수록 대단했다.

비록 배신자라고는 해도 노이만 경은 귀중한 인적 자원이기 때문이었다.

'저 정도 수준의 기사를 고용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까.'

어디까지나 이곳은 변방의 시골 영지였다.

어지간한 기사들에겐 기피 받는 변두리였다.

특히 소드 익스퍼트의 경지에 다다른 기사들에겐 더욱 그랬다.

'냉혹한 응징을 통해 영지의 기강을 바로잡는다. 동시에 뜻밖의 관대함을 보이며 기회를 주는 것으로 배신자에게 반성과 갱생의 여지를 준다. 그리하여 배신자의 능력을 버리지 않고 최대한 활용할 여지를 남겨둔다. 정말로 훌륭해.'

노이만 경도 이번 일로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다.

자신을 살려준 관대한 결정에 감동할 것이다.

자신의 지난 잘못을 진심으로 반성할 것이다.

그리고 영지에 더욱 충성하게 될 것이다.

남작은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이런 생각을 내 아들이 했다니.'

참으로 폭넓은 식견과 계산이었다.

생각할수록 대견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남작은 콧등이 찡해지는 기쁨을 애써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로이드, 네 제안을 수락하마. 노이만 경? 그대의 뜻은 어떠한가. 로이드가 제안한 기회를 받아들일 뜻이 있는가?"

"...네! 있습니다!"

지금껏 축 늘어져 있던 노이만 경이 대번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형편없이 얻어터지고 너덜너덜해진 처지였지만 귓구멍은 열려 있었다.

당연히 로이드가 남작에게 제시한 의견도 들었다.

노이만 경으로선 쾌재를 부를 의견이었다.

'고작 쥐를 머리에 떨어뜨린다고? 그래서 안 다치면 이번 일을 용서해준다고? 이런 조건이면 당연히 받아야지!'

그렇게 용서를 받는다.

이번 일을 그럭저럭 넘긴다.

그러고는?

'반성은 무슨. 일반 사병으로 강등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런 치욕을 당할 생각 따윈 조금도 없었다.

'이런 지긋지긋한 영지, 곧바로 떠날 테다. 그리고 복수해 주지.'

으드득!

이를 갈았다.

하지만 들키지는 않게.

짐짓 반성과 후회의 표정만을 가득 담고서.

남작을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당장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부디 간곡히 청합니다. 로이드 도련님의 현명한 의견을 받들 기회를 주십시오."

"좋다."

남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드, 노이만 경의 머리에 떨어뜨릴 쥐는 준비되어 있느냐?"

"네. 이러실 줄 알고 미리 준비해두었습니다."

"다행이구나. 그럼 집행하도록."

"알겠습니다."

마침내 남작의 허락이 떨어졌다.

노이만 경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로이드의 입가에도 사악한 미소가 피어났다.

"이봐, 노이만 경? 웃네? 좋아?"

"예?"

"뭐, 그래. 축하해. 이렇게 용서를 빌 좋은 기회를 얻었구나 싶지?"

"무슨... 말씀이신지."

노이만 경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황이 반가우면서도 뭔가 쌔했다.

저 인간이 왜 저렇게 즐겁게 웃는 건지.

어째서 저 웃음이 서늘하게 느껴지는 건지.

"무슨 말씀이긴."

로이드의 미소가 더욱 사악해졌다.

어느새 그의 한 손에는 작은 햄스터가 들려 있었다.

반대편 손에는 빨간 해바라기씨가 들려 있었다.

가까이 있는 노이만 경에게만 보이는 광경이었다.

"용서를 빌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없다는 말이지, 이 색기야."

"...예?"

노이만 경이 얼떨떨하게 반문하는 순간.

오도독!

햄스터가 빨간 해바라기씨를 야물딱지게 씹었다.

로이드가 햄스터를 공중으로 던지며 물러났다.

그리고....

뚜아앙!

"뽀동아! 밟아!"

"뽀동!"

"...!"

몸길이 10미터에 달하는 거대 햄스터가 노이만 경을 온몸으로 덮쳤다.

18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1)

"뽀동!"

뽀동이가 뛰어내렸다.

포동통한 뱃살로 착륙(?)했다.

뱃살과 바닥 사이에 낀 물체가 형편없이 뽀개졌다.

뽀각!

호두 껍데기가 으스러졌다.

으스러진 껍질 사이에서 알맹이를 꺼내며 뽀동이가 해맑게 웃었다.

"뽀동? 뽀도동. 뽀동."

"맛있어?"

"뽀동!"

빛의 속도로 호두 알맹이를 볼주머니에 챙겨 넣는 뽀동이.

그 모습을 보며 로이드는 피식 웃었다.

"더 먹을래?"

"뽀동!"

"껍질 깨서 줄까?"

"뽀동? 뽀도동!"

"그래. 잠깐만 기다려 봐."

로이드는 오른손으로 호두를 쥐었다.

나머지 왼손은 펼쳐서 치켜들었다.

그리고 아스라한 심법을 운용했다.

'후우.'

호흡과 함께 심장이 뛴다.

작은 박동을 타고 한 줄기 흡입력이 생성되었다. 흡입력이 치켜든 왼손으로 흘러갔다. 펼친 손바닥을 통해 주위의 기운을 끌어들였다.

공기에 퍼진 자연적 마나였다.

'오, 된다.'

물론 그렇게 큰 힘은 아니었다.

그저 공기에 퍼진 마나를 약간 끌어들이는 것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의 아스라한 심법은 이제 겨우 초보 단계인 싱글 써클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그그긋!

왼손으로 끌어들인 마나의 힘을 심장 외부로 끌어들였다.

심장을 둘러싼 싱글 써클로 회전시켰다.

회전에 실린 마나가 증폭되었다.

증폭된 마나를 오른손으로 보냈다.

원래의 악력에 보태어 호두를 짓눌렀다.

"으... 그그극!"

뽀각!

단단한 호두 껍데기가 으깨졌다.

'후아, 됐다.'

맨손으로 호두 깨기.

예전이라면 엄두도 못 냈을 일이었다.

그는 성공의 기쁨을 담아 뽀동이에게 호두 알맹이를 안겨주었다.

"자, 여기."

"뽀동!"

"좋아?"

"뽀도동!"

"그래, 나도 좋아."

이제는 평범한 일반인의 육체 수준을 어느 정도 벗어났다는 느낌이 왔다.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여긴 다들 칼 차고 다니는 세상이니까.'

이곳은 대한민국이 아니다.

당장 영지를 벗어나기만 해도 마동식 뺨치는 산적과 더불어 서로의 몸에 정겨운 칼빵을 새겨줄 수도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몸을 지킬 최소한의 실력조차 없이 살아가야 한다면?

'언제 눈먼 칼에 맞아 죽을지 모르지. 그런 건 절대 사양이야.'

새삼 하비엘에게 아스라한 심법을 배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똑똑.

누군가가 침실 문을 두드렸다.

"로이드 님? 계십니까?"

특유의 시니컬한 톤의 목소리.

하비엘이었다.

로이드는 피식 웃었다.

직접 일어나 침실 문을 열어주었다.

역시나 문 앞에는 하비엘이 서 있었다.

"너도 양반은 못 되는구나. 들어와."

"양반이라니요?"

"그런 게 있어. 시킨 일은 잘했고?"

"그렇잖아도 주군께 보고를 마치고 오는 길입니다."

"그래?"

"네."

"남작께선 뭐라 안 하시디?"

"특별한 언급이 있으셨는지 물으시는 겁니까?"

"엉."

"있으셨습니다."

"뭐라고 하셨는데?"

"노이만 경의 행운을 빌어주시더군요."

"뭐, 하다못해 행운이라도 있어야겠지. 지금의 노이만 경한테는."

노이만 경.

그를 생각하자 절로 조소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며칠 전의 일이 떠올랐다.

그와 결투를 치렀던 날이자, 그의 배신을 폭로했던 날이었다.

'그놈 참 운도 좋지.'

아니, 이 경우엔 지지리 운이 나쁜 거라 말해야 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노이만 경은 죽지 않았다.

무려 거대화된 뽀동이의 뱃살에 깔리고도 질긴 생명력을 자랑했다.

대신 목숨을 건진 대가는 컸다.

그는 무려 전신의 뼈 수십 군데가 와지끈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참혹했느냐면, 가히 건어물 코너에 걸린 반건조 오징어가 바닥에 패대기쳐진 꼬락서니 같았다.

심지어 그의 상태를 살펴본 영지의 의사마저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을 정도였다.

'이건 살아도 산 게 아닙니다. 하늘이 내려준 행운이 따라서 운 좋게 완치된다고 해도 평생 사람 구실은 못 할 테니까요. 걷거나 일어나는 건 당연히 불가능할 거고, 아마 죽을 때까지 남이 떠먹여 주는 죽만 간신히 삼킬 겁니다.'

...라는 것이 의사의 진단이었다.

그리고 노이만 경은 며칠의 치료로 고비만 간신히 넘긴 상태에서 오늘, 영지 밖으로 추방되었다.

"뭐, 그래도 가족도 함께 추방됐으니까 당장 죽을 일은 없겠지."

"아마 그렇겠지요."

그뿐만이 아니었다.

평소 노이만 경을 따르던 울리히 경과 콘테 경도 세트 메뉴처럼 묶여서 함께 추방되었다.

한쪽 손발의 힘줄이 잘리는 형벌과 함께였다.

'평생 검을 쓸 수 없겠지. 조금 안타깝기는 하지만, 어쨌건 영지 내부의 기강 확립은 이로써 성공이다.'

어차피 소설 내용상으로 이 영지에 등을 돌릴 놈들이었다.

용서를 해줘도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은 물론이고, 두고두고 해를 끼칠 놈들이었다.

그런 놈들은 일찌감치 솎아내고 싶었다.

그리고 오늘, 그 목적이 달성되었다.

후련했다.

"어쨌건 덕분에 부기사단장이 되셨네. 자, 아스라한 경? 소감은 어떠셔?"

"딱히 소감이랄 것은 없습니다만."

"그래?'

"네."

"어째서?"

"영지에 남은 기사가 저와 바이에른 경 둘밖에 없는 상황이니까요."

"음, 그래서 외로워?"

"...."

"쯧, 그랬구나. 우리 하비엘이 친구가 없어서 심심했던 거였구나. 그랬구나."

"당연히 그럴 리가...."

"있지. 알아.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뭐."

"로이드 님."

"뭐. 왜. 뭐. 정색하면 어쩔 건데."

"...."

"나한테 따로 할 말이라도 있는 거냐?"

눈치로 보아 아무래도 그런 듯싶었다.

역시나 하비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뭔데."

"저 햄스터 말입니다."

하비엘의 손이 책상 위에서 호두 알맹이를 우물거리고 있는 뽀동이를 가리켰다.

그 표정이 한결 진지해졌다.

눈빛은 더욱 신중해졌다.

그래서 로이드도 살짝 긴장했다.

저놈이 대체 뭘 물어보려고 저렇게 엄격 근엄 진지한 기색으로 뜸을 들이는 걸까.

'뭐지. 설마 내 소환술을 의심하는 건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하긴 내가 일부러 한 달 동안 기초 소환 마법서를 옆구리에 끼고 다니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의심을 완벽히 피하는 데엔 무리가 있겠지.'

소환 마법도 엄연히 마법이다.

따라서 어지간한 천재가 아니라면?

한 달 정도의 독학으로 소환술을 쓴다는 건 말이 안 됐다.

'뭐, 그래도 어쩌겠어. RP 시스템이나 환상종 랜덤 뽑기를 솔직하게 말해줘 봤자 더 안 믿을 거잖아. 그러니까 이대로 우겨야지.'

독학으로 성공한 게 맞다.

그렇게 우기리라.

로이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하비엘의 질문을 기다렸다.

진지한 기색으로 뜸을 들이던 하비엘이 말문을 열었다.

"이름을 뭐라고 불러야 합니까?"

"...응?"

"이름이 궁금합니다."

"설마, 쟤 이름?"

"네."

"궁금한 게 그거였어?"

"그렇습니다. 어쨌건 로이드 님께서 소환한 소환수니까 말입니다."

"아하, 쟤랑 종종 보게 될 거니까 통성명을 하고 싶으셨다?"

"그렇습니다."

"근데 왜 그렇게 쓸데없이 분위기를 잡으셨어요?"

"예?"

"...후. 됐다. 뽀동이야. 쟤 이름."

"뽀동이, 말입니까?"

"응."

"흐음, 거대하던 위용에 비해 초라한 이름이군요."

"그거 내가 지은 이름인데?"

"...초라한 이름을 짓는 일이야말로 적을 방심시키는 위장술의 기본인 법이지요. 잘 지으셨습니다."

"진심으로?"

"...."

"탈룰라하기는. 됐고. 내가 지은 거 아냐. 뽀동이가 이름인 건 맞지만."

"그럼 저는...."

"알아서 불러."

"알겠습니다. 뽀동 경?"

하비엘이 뽀동이를 향해 눈높이를 맞추었다.

호두 알맹이를 우물거리던 뽀동이가 고개를 들었다.

"뽀동?"

"저는 하비엘 아스라한이라고 합니다. 로이드 님을 호위하는 기사이지요.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뽀동!"

하비엘의 기다란 손가락과 뽀동이의 작은 앞발이 악수를 나누었다.

로이드는 하품을 했다.

"통성명은 다 했냐?"

"네."

"그럼 좀 나갈까? 안 그래도 볼일 있어서 나가려고 너 기다렸던 참이거든."

"절 말씀이십니까?"

"엉. 어쨌건 내 호위잖냐. 나보다 훨씬 쎄고."

"그건...."

"됐어. 누구나 어느 정도는 실력을 숨기며 지내는 법이니까. 안 그래?"

"...."

하비엘이 흠칫했다.

로이드는 피식 웃었다.

이미 소드 익스퍼트 상급의 경지에 다다라 있는 하비엘.

처음엔 녀석이 그런 자신의 수준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도 그런 식으로 묘사되었으니까.

'하지만 실제로 옆에서 쭉 보니까 좀 다르더라고. 소설로만 접하는 거랑은.'

하비엘과 매일 아웅다웅하며.

하비엘에게 검술을 배우며.

그렇듯 가까이에서 녀석을 보며 깨달을 수 있었다.

하비엘은 자신의 경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단지 그 실력을 숨기고 있을 뿐이다.

이유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다만 짐작해볼 수는 있었다.

'소드 마스터를 목전에 둔 최연소의 기사. 그 존재가 알려지는 것만으로도 난리가 날 테니까.'

작게는 노이만 경 등의 상급자들의 질시.

크게는 주위 대영주 등의 끊임없는 영입 시도.

그런 등쌀 때문에 프론테라 남작령은 넝마가 될 것이 확실했다.

'그런 식으로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거겠지. 남작에 대한 충성을 지키려는 나름의 노력이기도 할 거고.'

하여간 대단한 놈.

실력도 실력이지만 인성마저 흠잡을 데 없는 녀석이었다.

"어쨌건 나가자. 이러다 해 지겠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상대로 하비엘은 조금은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지금 이 주제로 이야기가 계속 진행되길 원하지 않는 거겠지.

사실 그건 이쪽도 똑같았다.

'네 비밀은 지켜준다. 그러니 너도 내 삽검술에 대해 의문만 가지고 있어. 굳이 그걸 입밖으론 꺼내지 말고.'

거듭 말하지만 녀석은 검술의 천재다.

그런 녀석이 유구한 역사를 지닌 총검술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할 리가 없다.

'적어도 나 같은 초심자가 얼치기로 만든 기술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아봤을 거야.'

무술이나 스포츠는 아는 만큼 보인다.

복싱이나 종합격투기를 떠올려보면 확실했다.

모르고 볼 때는 복싱 중계가 그렇게 지루할 수 없었다.

경기 내내 바닥에서 비비적대는 종합격투기는 더했다.

그런데 실제로 고등학생 때 복싱을 배워보니?

대학교 동아리에서 주짓수를 익히고 나니까?

달라졌다.

수면제 같던 복싱 경기가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바닥에서 끙끙대는 걸로만 보이던 격투기 그라운드 싸움은 흥미진진 용호상박 그 자체였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늘어나기 때문이었다.

그럼 역사상 전무후무한 검술의 천재인 하비엘은 어떨까.

당연히 이쪽이 사용한 총검술의 특징을 대부분 파악했을 것이다.

'그래. 그것마저 피할 수는 없지. 하지만 파악만 하고 있어. 네가 입 닫고 있으면 나도 네 비밀 지켜줄 거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하비엘을 보았다.

이런 이쪽의 의도를 깨달은 걸까.

하비엘이 순순히 이쪽을 따라 일어났다.

"...가시죠. 모시겠습니다."

그렇게 하비엘과 함께 침실을 나섰다.

저택을 벗어났다.

걷다 보니 영지민들과 종종 마주쳤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이 예전과 제법 달랐다.

예전엔 이쪽과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길가로 물러서던 이들이었다.

행여나 눈이라도 마주칠까 두려워하며 고개 숙이던 사람들이었다.

한데 이제는 아니었다.

어느 아낙네가 살갑게 웃으며 인사했다.

이쪽이 로이드의 몸에 빙의 됐던 첫날, 두 손을 벌벌 떨며 두려움을 보이던 아낙네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떤 농부는 대놓고 웃으며 이렇게 물어왔다.

"저기, 도련님? 저희 집 온돌방 시공은 언제쯤 가능해질까요?"

"응?"

로이드는 똑똑히 기억할 수 있었다.

눈앞의 싱글벙글한 이 농부, 빙의 첫날에 마주쳤을 땐 대놓고 안색이 하얗게 질렸던 사람이었다.

로이드는 턱을 매만지며 반문했다.

"어, 으음, 기억이 잘 안 나서 그러는데, 집이 어디였지?"

"참나무숲 골짜기 초입의 바위 왼편입니다요."

"아, 거기. 어디 보자. 분양 계약 순서로 따지면 다다음 번이네."

"그럼 공사는 언제쯤 시작하시게 될는지...."

"지금 상황으로 봐선 이르면 보름쯤 후?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어차피 봄이잖아."

"하지만 아직 바람이 차가워서 말입죠."

"그럼 껴안아라도 줄까? 완전 포근하게?"

"그, 그건 아닙니다."

"싫지? 다행이야. 나도 그건 싫어. 소름 돋잖아."

"어쨌건, 으음, 잘 부탁드립니다, 도련님."

"알았어. 공사 대금 까먹진 말고."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그래.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손 좀 놓자?"

로이드는 자신에게 엉겨붙는 농부를 간신히 떼어놓고 걸음을 옮겼다.

'후우. 이거 졸지에 인싸 된 기분인데.'

며칠 전부터였다.

영지민들의 이쪽을 보는 눈길과 태도가 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날 보는 눈빛들이 제대로 초롱초롱이네. 이거 대놓고 게임할 때 캐리머신 버스 기사 영접하는 느낌?'

문득, 쓴웃음이 나왔다.

왜 저러는지는 짐작은 됐다.

그래도 한 번은 확인해보고 싶었다.

"어이."

곁을 따르던 하비엘에게 넌지시 물었다.

"다들 왜 저래? 전엔 대놓고 날 싫어하지 않았나?"

"뭐, 예전엔 그랬습니다만."

"예전엔? 니다만?"

"예."

"그럼 지금은 어떻길래."

하비엘이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능력자 탄생이지요."

"능력자?"

"고작 한 달의 훈련으로 영지의 선임 기사를 꺾으셨습니다. 물론 저들은 아스라한 심법의 존재를 모르니 더욱 대단하게 보였겠지요. 거기에 선임 기사의 배신행위를 폭로했고, 심지어 모두의 앞에서 충격적인 소환 마법까지 선보이셨죠."

"...음, 그렇게 다 모아서 열거하니까 좀 쩔긴 하네. 요약하자면 검술과 소환술을 다 갖춘 문무겸비 능력자 느낌?"

"그렇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하비엘이 덧붙였다.

"주민들의 입장에선 당연히 반가울 수밖에 없겠지요. 매일 술이나 퍼마시고 진상질에 민폐만 끼치는 구제불능이던 인간이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능력 있는 모습을 보였으니까 말입니다."

"...."

"미래의 영주 될 사람이 갱생 불가능의 암울한 인간쓰레기에서 한순간에 유능한 인재로 바뀐 셈입니다. 영지민들이 환호하고 기뻐할 법도 하지요."

"어, 그거, 칭찬 맞지?"

"예. 맞습니다."

"근데 칭찬치고 좀 묵직하다?"

"묵직하다니, 뭐가 말입니까?"

"명치에 꽂히는 팩트가 시속 170은 충분히 찍힐 거 같아서."

"시속 170이라니요?"

"아, 뼈 부러졌다고. 이 발골 기술자 같은 놈아."

"...."

하비엘이 이쪽을 빤히 쳐다보았다.

대체 무슨 희한한 소리를 하느냔 뜻이겠지.

그런데 그 모습마저 한 폭의 그림처럼 서늘하고 기품이 넘친다.

'그래, 좋겠다. 잘생겨서.'

싸움도 잘하고.

인성도 출중하고.

외모마저 완벽한 녀석.

로이드는 그야말로 소문은 무성한데 실체는 없는 엄마 친구 아들의 현실판 같은 놈에게 툴툴거리듯 말했다.

"다 쳐다봤냐? 그럼 좀 비켜봐라. 볼일 좀 보자."

"볼일이라니요?"

"여기부터 저기까지."

로이드가 손으로 땅을 가리켰다.

이쪽, 저택 진입로부터 저쪽, 영지를 관통해서 동쪽 산기슭까지.

그곳을 둘러보며 로이드는 이미 측량과 설계 스킬을 발동시키고 있었다.

지형을 살펴본다.

모든 정보를 낱낱이 파악한다.

파악된 정보 위에 짓고자 하는 구조물의 청사진을 덧씌운다.

덕분에 아직 건설되지 않은 이곳의 미래 모습 일부가 그의 눈에만 살짝 엿보였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넌 처음 들어봤지?"

싱긋 웃으며 하비엘을 돌아보는 로이드.

물론 하비엘은 그 웃음의 의미를 몰랐다.

앞으로 영지 발전의 대동맥이 될 포장도로가 이곳에 지어질 거라는 사실도.

그로 인해 프론테라 남작령이 왕국에서 손꼽히는 역세권 영지로 떡상하게 될 미래 또한.

그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로이드의 다음 말이 이어지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다.

19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2)

All roads lead to Rome.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법한 말이다.

이는 또한, 고대 로마 시기에 건설된 수많은 도로에서 유래된 말이기도 하다.

'로마 제국은 그야말로 도로 덕후였지.'

도로는 가능한 직선으로 만들어야 한다.

광대한 영토 구석구석 이어져야 한다.

그를 위해선 산에 굴을 뚫는 일도, 골짜기에 다리를 놓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한 신념을 가장 철저하게 지킨 제국이 로마였다.

덕분에 그들은 총연장 8만 5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도로를 닦았다.

적도를 기준으로 지구를 두 바퀴 이상 감을 수 있는 길을 건설했다.

"그만큼 도로가 중요하단 거야. 너, 땅값에 제일 크게 영향을 주는 요소가 뭔지 아냐?"

"잘 모르겠습니다만."

"교통이야, 교통."

"...."

하비엘의 침묵 속에서 로이드의 말이 이어졌다.

"네가 집이 있다고 쳐. 그런데 그 집에서 시장까지 가는 길이 완전 험난해. 산 넘고 물 건너고 번지점프까지 생난리를 쳐야 돼. 어디 한 번 외출할 때마다 멘탈이 자동으로 출발드림팀을 외쳐. 너 같으면 그런 집에서 살고 싶겠냐?"

"훌륭한 단련이 될 것 같습니다만."

"...."

"매일 산을 타고 헤엄을 친다면 기초 체력이 튼튼해질 겁니다. 번지점프...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 또한 극한의 경험을 안겨주는 것이라면 훌륭한 검술 훈련이 되겠지요."

"쯧, 그럼 너처럼 검술 페티시 있는 놈 말고 일반인 기준으로."

"음, 그건 좀 곤란하겠군요."

"그렇겠지?"

"예."

"이제 좀 말이 통하네."

로이드가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집뿐만이 아니야. 영지도 똑같아. 우리 영지의 가장 큰 문제점이 뭔지 알아?"

"과거에는 로이드 님이셨지요."

"...."

"지금은 모르겠습니다."

"흠흠. 도로야, 도로."

"도로 말입니까?"

"그래. 너, 우리 영지에서 제대로 포장된 도로 봤냐?"

"못 봤습니다."

"그렇지? 바로 그거야."

사실이었다.

프론테라 남작령엔 포장된 도로가 단 하나도 없다.

그저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을 따라 풀이 자라나지 않아 자연적으로 발생한 흙길만 얼기설기 나 있을 뿐이다.

이제는 그걸 바꿀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통상적인 역할의 도로가 끝이 아니었다.

로이드에겐 도로를 활용할 더욱 중요한 계획이 따로 있었다.

"어쨌건 내가 뭘 하려는지 넌 당장 알 필요 없고. 좀 비켜줄래? 측량 좀 하자."

도로 건설의 이유 같은 건 어차피 결과로 보여주면 된다.

그러니 지금은 설명보다는 실행을 해야 할 때다.

그는 하비엘을 향해 휙휙 손을 저었다.

도로를 놓을 지형을 살폈다.

'아스팔트를 깔면 가장 좋겠지만 그건 여기선 무리고. 이곳 현지에서 동원할 수 있는 기술력으로는 아피아 가도(Via Appia)가 제일 적절하겠네.'

로이드는 교양 강의 때 접했던 아피아 가도를 떠올렸다.

마침 조별 과제에서 조사하고 발표했던 주제이기도 했다.

'초기 로마의 도로. 로마가 건설한 수많은 도로의 모태이자 시작점. 그 아피아 가도 덕분에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 남부의 정벌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어. 심지어 그 가도는 오늘날까지도 튼튼하게 남아 있지.'

건설한 지 무려 2천 년이 넘은 도로였다.

한데도 아직까지 별다른 보수 없이 쌩쌩했다.

고대 로마의 가공할 토목 기술을 엿볼 수 있는 단면이었다.

로이드는 바로 그러한 아피아 가도를 영지의 중심 구역을 따라 건설할 계획이었다.

'여기부터 저쪽까지.'

영주 저택 진입로에서부터 저쪽, 영지를 직선으로 관통하여 저 멀리 동쪽 산까지.

장차 영지 성장의 대동맥으로 삼기에 딱 좋은 구획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건설을 시작하기에 앞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측량과 설계였다.

'일단 스킬 레벨부터 좀 올리자.'

로이드는 스킬창을 열었다.

딩동.

[보유 중인 스킬 목록을 불러옵니다.]

[기초 측량 : Lv 2]

[기초 설계 : Lv 2]

[연장 숙련 스킬 - (삽) : Lv 1]

'흠, 역시 측량과 설계 스킬에 더 투자할 필요가 있겠어.'

그동안 온돌방 몇 채를 측량하고 설계했다.

그렇게 경험이 쌓인 덕분인지 측량과 설계 스킬이 각각 1씩 상승했다.

하지만 이걸로는 도로를 측량하고 설계하기엔 부족했다.

'측량 스킬은 한 번 사용에 겨우 121㎡의 면적만 파악 가능해. 설계 스킬로는 1,331㎥의 부피가 고작이야. 이래선 너무 효율이 떨어져.'

로이드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사실이었다.

얼마 전 자신이 단숨에 몇 번의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지 시험해본 그였다.

그 결과는 생각보다 만족스럽지 못했다.

측량과 설계 각각 열 번이 한계였다.

그 이상을 시도하면 극심한 피로와 현기증이 몰려왔다.

당연히 스킬도 저절로 취소가 되었다.

심지어 다시 스킬을 사용할 정도로 회복되기까지 거의 하루가 걸렸다.

즉, 지금의 스킬 수준으로는 하루에 1,210㎡의 면적과 13,310㎥의 부피만 측량하고 설계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선 곤란하지. 여기서 저 산까지 거리가 얼만데. 봄철 장마가 오기 전에 공사를 마치려면 조금이라도 서둘러야 해.'

시간이 많지 않았다.

대신 다행히도 그동안 모인 RP는 제법 있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659]

...아니, 엄청나게 쌓여 있었다.

'이거, 노이만 경에게 감사의 절이라도 올려줘야 하나.'

노이만 경과 결투를 치르고 그를 처단한 덕분이었다.

많은 이들과의 호감도가 향상되었다.

남작 부부와 각각 20씩.

하비엘과 2.

바이에른 경과 1.

거기에 영지민을 통합한 호감도가 6만큼 올랐다.

덕분에 그날 하루만 무려 507 RP를 무더기로 챙길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섣부르게 RP를 낭비하지 않았다.

쟁여두고 있으면 유용하게 쓸 날이 온다.

그 믿음으로 지금껏 RP를 알뜰살뜰 챙겨놓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챙겨두었던 RP를 사용할 때가 온 셈이었다.

'그럼 어디 보자. 일단 시험 삼아 1레벨씩만 올려볼까.'

로이드는 스킬창 한쪽으로 눈동자를 옮겼다.

그곳에 스킬 레벨업 버튼이 있었다.

그의 시선이 마우스 클릭처럼 스킬 레벨업 버튼을 향해 깜빡였다.

딩동.

[레벨업 가능한 스킬 목록]

[기초 측량 : Lv 2 → 3 (소모 RP : 10)]

[기초 설계 : Lv 2 → 3 (소모 RP : 10)]

[연장 숙련 스킬 - (삽) : Lv 1 → 2 (소모 RP : 15)]

'측량과 설계부터.'

두 스킬을 선택했다.

딩동.

[스킬 레벨업!]

[기초 측량 : Lv 3]

[한 번에 측량 가능한 면적 : 144㎡]

[다음 레벨업에 필요한 RP : 15]

[기초 설계 : Lv 3]

[한 번에 설계 가능한 구조물의 면적 : 1,728㎥]

[다음 레벨업에 필요한 RP : 15]

[현재 보유 중인 RP : 639]

스킬의 효과가 약간씩 상승한 것이 보였다.

하지만 이대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기왕 올리는 김에 제대로 투자해보자.'

측량과 설계는 자신의 밥줄이었다.

절대 투자를 아낄 계제가 아니었다.

로이드는 남은 RP를 과감히 쏟아부었다.

측량과 설계 스킬이 쭉쭉 상승했다.

3레벨에서 4레벨로.

5레벨에서 6레벨로.

마침내 9레벨에서 10레벨로 올랐다.

거기서 한 번 더 RP를 투자해서 11레벨로 올리자 이번엔 조금 다른 메시지가 떠올랐다.

딩동!

[스킬 등급 업!]

[측량 스킬의 등급이 으로 상승했습니다.]

[스킬 등급 상승에 따라 스킬 옵션이 개방되었습니다.]

[중급 측량 : Lv 1]

[한 번에 측량 가능한 면적 : 1,600㎡]

[스킬 전용 옵션 ① : 토지 가격 감정 - 측량한 지형의 현재 시점 토지면적당 단가를 감정합니다. (오차율 +/-5%)]

[스킬 전용 옵션 ② : 지하 스캐닝 - 측량한 지형을 지하 5미터까지 자동으로 스캐닝합니다. 범위 내의 지반 구성, 토질, 암반, 지하수, 매장 자원 등의 모든 요소를 파악합니다.]

[다음 레벨업에 필요한 RP : 100]

[설계 스킬의 등급이 으로 상승했습니다.]

[스킬 등급 상승에 따라 스킬 옵션이 개방되었습니다.]

[중급 설계 : Lv 1]

[한 번에 설계 가능한 구조물의 면적 : 64,000㎥]

[스킬 전용 옵션 ① : 도면 출력 - 설계한 결과물을 도면(지정한 종이 등)에 정확하게 출력할 수 있습니다.]

[스킬 전용 옵션 ② : 평면도 표시(2D) - 설계한 결과물을 실제 토지에 2D 형태의 평면도로 표시하여 보여줍니다. (특 : 나만 보임)]

[다음 레벨업에 필요한 RP : 100]

[현재 보유 중인 RP : 119]

'헐, 대박.'

변화된 스킬 내용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엄청나게 소모한 RP는 신경도 쓰이지 않을 정도였다.

'측량 면적이랑 설계 부피가 엄청나게 늘어났네. 하지만 이것보다 더 대박인 게 있어.'

로이드의 시선이 측량 스킬 전용 옵션으로 향했다.

스킬 레벨이 초급 10레벨을 넘어 중급으로 상승하며 생성된 옵션.

저 옵션들의 내용이 진심 대박이었다.

'토지가 감정? 말 그대로 땅의 현재 시세를 파악할 수 있으니까 이건 완전 부동산 어플이네. 게다가 지하 스캔이라니.'

일단 사용해보자.

로이드는 시선을 먼 곳으로 던졌다.

중급 측량 스킬을 발동시켰다.

'측량.'

츠츠츠!

로이드의 눈동자에 희미한 푸른빛이 깃들었다.

동시에 그가 바라보는 풍경이 바뀌었다.

시선으로 지정한 가로 40미터, 세로 40미터 정사각형의 면적.

그 범위 내에 표시되는 정보에 몇 가지가 추가되었다.

첫 번째는 토지 예상 판매가였다.

'헐... 우리 영지, 이렇게 똥값이었어?'

현재 그가 측량으로 스캔하는 곳은 그나마 영지 내에서 중심가라 부를 수 있는 곳이었다. 주점과 몇 가지 상점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나름의 노른자였다.

그런데 평당 예상 판매 가격이 1골드도 되지 않았다!

'쩝. 좀 더 분발해야겠구나.'

새삼 프론테라 남작령이 얼마나 깡촌인지 제대로 실감이 됐다.

하지만 그건 지금의 이야기일 뿐.

영지를 가꾸면 땅값은 자연히 올라갈 것이다.

로이드는 측량 스킬로 보이는 다른 정보에 집중했다.

이번에 그가 주목한 정보는 지하 스캐닝의 결과물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데?'

스킬 옵션에 달린 설명 그대로였다.

측량 범위 내의 지하가 5미터까지 훤히 들여다보였다.

땅속에서 나무뿌리가 어떻게 얽혀 있는지, 지하수가 어떤 경로로 흐르는지, 심지어 군데군데 만들어진 토끼굴도 보였다.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끝내준다, 진심.'

지금까지는 측량 스킬을 써도 지표면의 정보만을 볼 수 있었다.

직접 땅을 파보기 전에는 지하에 뭐가 있는지는 알 길이 없었던 셈이다.

그런데 그게 한 번에 해소되었다.

'특히나 지반 공사를 할 때 엄청나게 유용하겠어.'

현장에서의 지반 기초 공사는 절대적이다.

특히나 큰 건축물을 지을 때일수록 기초 공사는 더욱 중요해진다.

커다란 교량이나 댐을 짓는데 지반 상태가 개판이라면?

그에 따른 적절한 기초 공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면?

그 건축물은 얼마 안 가 문제를 드러낸다.

기울어지거나, 금이 가거나, 내려앉는다.

마침내는 무너지고 만다.

그러기 전에 눈물을 머금고 철거를 강행해야 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

기껏 큰돈을 들여 뭔가를 지었다가,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한 철거에까지 헛돈을 때려 붓는 대참사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하 스캐닝이 자동으로 되면 그런 일이 훨씬 줄어들지. 기초 공사 기간도 줄어들 테고.'

실시간으로 기초 공사 상황을 점검할 수 있다.

공사 기간이 훨씬 단축된다.

그만큼 공사에 들어가는 돈을 아끼는 셈이다.

'설계 스킬 옵션도 만만치 않아.'

로이드의 시선이 이번에는 설계 스킬에 생성된 두 옵션을 향했다.

'도면 출력에 평면도 표시라.'

당장 써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옆에 하비엘이 있는 상황이었다.

설계 스킬로 도면을 주르륵 뽑았다가는 자칫 인간 프린터기로 오해받기 딱 좋았다.

'설계는 혼자 있을 때 써보자.'

일단은 측량부터.

츠츠츠츠!

그날부터 로이드는 낮엔 측량에 매달렸다.

도로를 놓을 면적을 계산하며 경로를 측량했다.

며칠에 걸쳐 수집한 모든 정보를 데이터로 만들었다.

데이터를 설계 스킬로 옮겼다.

낮이 측량의 무대였다면 밤은 설계가 주역이 되는 시간이었다.

밤이 오면 그는 일단 하비엘을 재웠다.

"소성한계(plastic limit; PL)는 반죽된 흙을 직경 3.2mm(1/8 in.)의 실 모양으로 굴려서 부서질 때의 함수비 백분율로 정의된다. 소성한계는 흙의... 어쩌고저쩌고... 이며... 액성한계를 결정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미주알고주알... 중량 240g을 가진 비슷한 원추형 콘을 사용하여... d = 20mm의 콘관입에 대응하는 함수비가... 블라블라...."

"...쿠우울."

하비엘이 완전히 곯아떨어지면 그때부터 설계 스킬을 발동했다.

측량으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도로의 노선과 단면도 등을 설계했다.

그리고 하비엘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도면을 출력했다.

츠즈즈즈!

시험 삼아 종이에 도면 출력을 시도했다.

그랬더니 스킬로 설계한 도면이 그대로 종이에 찍혔다.

'오오, 된다. 진짜로 된다.'

지금까지 그는 스킬로 설계한 도면을 일일이 손으로 옮겨 그려야 했다.

불편하고 힘든 노가다였다.

정확도가 약간씩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제 도면을 프린터로 뽑듯 출력하니 더없이 쾌적하고 편해졌다.

스킬 옵션의 위력(?)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어이, 하비엘. 저거 보이냐?"

"예? 뭐가 말입니까?"

며칠 뒤 아침, 로이드는 도로 건설 예정지에서 하비엘을 대상으로 스킬 옵션을 시험해보았다.

그가 도로가 지어질 자리를 가리켰다.

"저거. 바닥에 막 선이 죽죽 그려져 있고 그렇지 않아?"

"그런 거 안 보입니다. 다만...."

"다만?"

"로이드 님의 안구 건강, 혹은 정신 건강이 조금 염려되기는 하는군요."

"내가 헛것을 보는 것 같으시다?"

"그렇습니다."

"후후후, 알았어."

"...?"

로이드는 음흉하게 웃었다.

역시나 예상대로다.

어젯밤에 스킬로 설계한 결과물.

그래서 지금 부지 곳곳에 2D로 새겨진 평면도.

그게 오직 자신에게만 보이고 있었다.

'됐어. 할 수 있어.'

기대보다 훨씬 강력해진 측량과 설계 스킬.

덕분에 시공 준비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이제는 본격적인 시공에 뛰어들 때였다.

20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3)

본격적인 시공이 시작되었다.

강력해진 측량과 설계 스킬.

덕분에 시공은 첫 단계부터 쾌적했다.

"뽀동아?"

"뽀동?"

"자, 이제부터 내가 바닥에 선을 그어줄 거야."

"뽀동!"

"그럼 그 선 안쪽 범위를 1.5미터 깊이로 일정하게 파줄 수 있겠어?"

"뽀도동!"

로이드가 물었다.

그의 손바닥 위에서 뽀동이가 통통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우선 이것부터 먹자."

"뽀동!"

빨간 해바라기씨를 내밀었다.

뽀동이가 기다렸다는 듯 해바라기씨를 받아서 오도독 씹었다.

퍼어엉!

녀석의 덩치가 순식간에 10미터로 거대해졌다.

그 사이, 로이드는 삽을 들었다.

삽으로 흙바닥에 선을 주욱 그었다.

오직 그에게만 보이는, 바닥에 2D로 새겨진 평면도를 따라 도로의 모양을 그렸다.

그그그긋!

"자, 여길 시작으로 해서 이렇게. 내가 그은 선을 정확히 지켜서 이쪽 방향으로. 폭은 13미터로 일정하게 부탁해."

"뽀도동! 뽀동!"

호바바바밧!

뽀동이의 앞발이 질풍처럼 움직였다.

녀석의 통통한 궁둥이가 들썩일 때마다 엄청난 양의 흙이 파헤쳐져 뒤쪽으로 치솟았다.

그야말로 살아 있는 고출력 포클레인이 따로 없었다.

로이드의 명령이 떨어졌다.

"공병대 1조, 투입."

"투입!"

영지의 사병 30인으로 이루어진 공병대 1조가 삽을 들고 일제히 움직였다.

그들은 뽀동이가 파헤친 13미터 너비, 1.5미터 깊이의 구덩이로 뛰어들었다.

계속해서 구덩이를 파며 전진하는 뽀동이의 뒤를 따라갔다. 뽀동이가 땅을 파헤치며 사방에 튀긴 흙과 돌, 나무뿌리 조각 등을 구덩이 밖으로 퍼냈다.

캉캉! 카앙! 캉! 퍼퍽! 푸슥!

30자루의 삽이 춤을 추었다.

공병대 1조의 땀방울이 햇볕에 반짝였다.

그럴 때마다 구덩이 벽면과 바닥이 단단하게 다져졌다.

그렇게 1조가 다진 바닥을 뽀동이가 한 번 더 짓눌렀다.

"뽀동!"

뽀그락!

뽀동이의 퐁퐁한 궁딩이가 바닥을 도장처럼 찍어눌렀다.

25톤의 체중이 흙바닥을 야물딱지게 압축시켰다.

그 상태에서 뽀동이가 구덩이를 따라 굴렀다.

뽀드드듯!

이것은 그야말로 살아 있는 25톤 무게의 롤러나 다름없는 위용!

그렇게 기초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또 다른 30인으로 구성된 공병대 2조가 부지런히 움직였다.

공병대 2조는 고운 모래를 강가에서 퍼왔다.

그러면 1조가 모래를 구덩이 바닥에 일정하게 깔았다.

다시 다지기가 실시되었다.

공병대가 삽으로 다졌다.

뽀동이가 궁둥이로 눌렀다.

다져진 모래의 두께는 정확히 30센티로 맞추어졌다.

그런 식으로 작업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반복되었다.

파고, 깔고, 두드리고, 짓눌렀다.

모래 위에는 달걀 크기의 자갈을 30센티 두께로.

그 위에 주먹 크기의 잡석을 30센티 두께로.

또 그 위에 호두 크기의 자갈을 30센티 두께로.

다시 그 위에 20센티의 고운 모래층을 깔았다.

영지의 공병대 2개 조 60인, 그밖에 채석공과 갱부 등이 합심하여 땀을 흘렸다. 효율적인 작업 배분과 적절한 휴식, 식사가 제공되었다.

덕분에 시공 첫날 저녁이 되었을 무렵, 30미터 가량의 구간 기초 작업이 끝났다.

"좋아."

로이드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생각보다 훨씬 진행이 빨랐다.

'뽀동이가 있으니 진행이 제대로네. 역시 공사에는 중장비가 있어야 해.'

뽀동이가 굴삭기와 롤러 역할을 해 준 덕분에 작업 속도가 가히 질풍 같았다.

거기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준 공병대의 공로도 컸다.

'그동안 온돌방 공사에 동원하면서 단련시키길 잘했어.'

60인으로 구성된 공병대는 이미 삽질의 정예가 되어가고 있었다.

체력 또한 예전과 비교도 안 되게 좋아졌다.

'노가다 근육이 붙은 덕분이지.'

문득, 대한민국 육군 현역으로 구르던 시절이 떠올랐다.

원래는 나라를 지키러 군대를 갔던 거였다.

그런데 현실은 완전히 달랐다.

막상 자대배치를 받고 보니?

나라보다 중대 막사와 시설물을 지키기 위해 땀 흘려야 했다.

말 그대로 자신의 군생활은 훈련보다는 각종 노가다와 작업으로 점철된 것이었다.

날마다 온갖 작업에 동원되었다.

무성한 풀을 베고, 울타리와 배수로를 보수했다.

비 새는 막사 지붕을 고치고, 경계 초소를 뚝딱거렸다.

막사 뒤편에 비닐하우스를 세우고, 공구리를 쳐서 창고를 넓혔다.

'그게 다 토목공학과를 나왔다는 이유 때문이었지.'

마치 행보관의 전용 소환수가 되어 공짜로 봉사하는 듯했던 그 기분이란.

'쯧, 소름 돋네.'

로이드는 당시의 경험을 떠올리며 공병대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사악하게 웃었다.

'너희도 그런 기분을 만끽하게 될 거야.'

어차피 공병대는 영지에서 봉급을 주어 고용한 사병들이었다.

그러니 공사에 동원하는 대신 약간의 보너스만 지급하면 큰 불만은 생기지 않을 터다.

마음껏 굴리면서도 인건비를 절약할 수 있는 대상인 셈이었다.

게다가 공사는 이제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

봄철 장마가 오기 전까지.

그는 어떻게든 포장도로의 첫 구간을 완성할 계획이었다.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다행히 날씨는 계속 맑았다.

쾌청한 날씨만큼 공사는 쾌적하게 진행되었다.

하루가 다르게 공사 구간이 쭉쭉 늘어났다.

그동안 영지민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공사를 구경한 것은 물론이었다.

"워어. 이게 대체 뭐지? 뭘 만들려고 이렇게 수선을 떠는 거람?"

"자네, 아직 모르나?"

"뭘?"

"듣기로는 이게 포장도로라는 거라던데?"

"포장도로?"

"응."

"그게 뭣에 쓰는 물건인가?"

"그건 나도 모르겠네. 뭐, 듣기로는 좋은 거라고는 하던데."

"어디에 좋은 거라던가?"

"...글쎄, 좋은 거겠지?"

"자네도 모른다는 소리구만."

"쩝."

어떤 이들은 서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숙덕거렸다.

한창 영지의 중심을 가로지르며 건설되는 도로의 모습을 보며 저마다 도로의 용도를 추측하기도 했다.

"혹시 저거 수로로 쓰려는 거 아닐까?"

"제가 보기엔 겨울에 물 채우고 얼려서 스케이트 타려는 거 같은데요?"

"아닐세. 저건 밭일세, 밭. 밭을 쭈욱 길게 일궈서 수확하기 편하게 하려는 거지."

"딱히 편해질 것 같진 않은데 말입니다. 왜, 차라리 도미노 놀이하려고 땅 파는 거라고 하든가 말이죠."

"글쎄, 수로가 맞다니까."

"아, 스케이트장이니까요."

"아무리 봐도 밭이 맞구만 뭘 그러나."

"차라리 영주님배 체육대회용 달리기 트랙이라고 하든가요."

...라는 식이었다.

물론 영지민들도 도로의 용도를 모를 정도로 바보가 아니었다.

그들도 포장된 도로가 어디에 쓰이는지 익히 알았다.

잘 닦여진 도로가 놓이면 사람이 다니기 편해진다.

수레 등을 이용해 물자를 나르기도 좋다.

그래서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 영지는 딱히 도로 같은 게 필요할 정도로 사람이나 물자가 많이 오가지도 않는데 왜?'

어째서 로이드 도련님은 이런 코딱지만 한 영지에 굳이 포장된 도로를 깔겠다는 걸까.

그래서 도로 공사의 목적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공사 자체가 뜬금없게 느껴졌다.

지금도 가끔 길이 진창이 되긴 하지만 살짝 불편할 뿐이다.

한데 굳이 저렇게 자금과 인력을 동원하면서 도로 공사를 벌일 필요가 있을까.

그러한 의문은 공사에 동원된 공병대 병사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끄응! 후우, 후욱, 으으, 힘들다. 힘들어."

"야, 농땡이 피우지 마. 너만 삽질 힘드냐."

"아 그래도. 이거 좀 너무하지 않냐?"

"뭐가?"

"공병대, 좋다 이거야. 다른 병사들이 못 받는 보너스도 제법 받고. 그런데 말이다. 우리가 지금 벌이고 있는 이 짓, 아무리 생각해도 굉장한 낭비 같지 않느냔 말이지."

"낭비라니?"

"생각해봐. 이런 포장도로 깔아서 뭐하냐?"

"그야 물론...."

"딱히 생각나는 거 없지?"

"...어, 그렇네."

질문을 받은 병사가 머리를 긁적였다.

불평하는 병사가 눈가에 흐르는 땀을 신경질적으로 닦아냈다.

"내 말이 그 말이야. 우리 영지에 뭐 쥐뿔이라도 있냐? 딱히 다른 영지랑 무역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상단이나 군대가 수시로 오가는 것도 아니잖아."

"하긴. 왕국에서도 동쪽 구석에 처박혀 있으니까."

"그렇지? 게다가 더 동쪽엔 다른 왕국도 없고 산맥이랑 황무지만 가득이잖냐."

"으음, 듣고 보니까 진짜 그렇네?"

"바로 그거지. 그런데 이렇게 거창하게 도로 깔아서 뭐 하겠느냔 말이야, 내 말이. 심지어 이 도로, 그 아무것도 없다는 동쪽으로 깔고 있다?"

"뭐? 그게 사실이야?"

"어. 사실이야. 직접 보면 알 거 아니냐."

"...와 씨, 진짜네?"

"그렇지?"

"하아, 뭐, 그래도 별수 있냐. 도련님이 까라면 까야지, 뭐."

"후우, 그건 그렇지. 쯧!"

퍽, 팍, 팍!

병사의 삽질이 거칠어졌다.

며칠째 계속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숨 가쁜 작업.

그 속에서 공병대 병사들은 이 도로 공사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공사는 쉼 없이 계속 진행되었다.

이미 시작된 공사였다.

물론 병사들 사이에 불만이 생겨나고 있음은 로이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도중에 공사를 중단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명확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다들 의문을 느끼고 있겠지. 누군가는 불만을 품고 있을 거야. 하지만 이 도로가 완성되고 나면?'

그때는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비로소 이쪽의 큰 그림을 깨닫게 될 것이다.

로이드는 그렇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하니 구구절절한 설명은 필요없다.

그저 결과로 보여주면 될 뿐.

그런 그의 뚝심처럼 공사는 계속해서 착착 진행되었다.

땅을 팠다.

자갈과 모래를 깔았다.

두드리고 짓눌러 다졌다.

그렇게 기초 공사 구간이 점점 늘어났다.

어느새 영지 중심부를 관통했다.

더 나아가 동쪽 산기슭에 닿았다.

완만한 경사를 타고 산기슭을 올라 옆구리까지 파고들었다.

그 시점에서 로이드는 공사의 다음 단계를 진행시켰다.

기초를 다진 도로를 본격적으로 포장하는 작업이었다.

그를 위해 로이드는 영지의 석공들을 모조리 동원했다.

"자아. 이제부터는 여러분의 역할이 중요해. 지금까지의 기초 공사는 모두 이제부터 시작할 포장 작업을 위한 준비였던 거야."

"예, 도련님."

"그럼 설명 잘 들어. 기초 위에 포석을 까는 방법은...."

로이드의 작업 지시가 이어졌다.

처음 접해보는 방식의 작업 내용에 석공들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이윽고 포장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럼! 움직이자! 안전 수칙 잊지 말고!"

"예엡!"

석공들과 공병대 병사들이 조를 이루어 투입되었다.

다양한 재질로 기초가 다져진 도로 위로 크고 납작한 돌을 일정하게 깔았다.

한 변이 70센티미터 가량인 돌끼리 착착 맞물렸다.

접합 면의 빈틈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폭 6미터로 조성된 도로는 중앙이 가장자리보다 살짝 볼록하게 높았다. 완만한 아치 형태를 이룸으로써 빗물이 양옆으로 흘러가도록 만들어졌다.

오목한 도로 가장자리에는 폭 50센티미터, 깊이 20센티미터의 배수로가 마련되었다. 그 바깥으로는 탄탄하게 다져진 폭 3미터의 인도가 도로 양쪽을 감싸게 되었다.

'이렇게 하면 도로가 물에 잠기지 않지. 양옆의 배수로가 자연히 물을 처리하고, 기초로 깔아둔 자갈과 모래, 돌을 통해 길 주위로 물이 고이는 게 방지돼. 게다가 인도를 따로 마련해야 수레와 보행자가 뒤섞이지 않지.'

마지막으로 로이드는 도로 양옆에 나무를 심지 못하도록 구역을 지정했다.

자칫 나무뿌리가 포장된 도로의 지반을 파고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다시 공사가 이어졌다.

도로가 포장되는 범위가 매일 조금씩 연장되었다.

영주 저택의 진입로에서 영지민 거주 구역으로.

거주 구역과 시장을 지나 영지 외곽으로.

마침내 외곽 너머 동쪽 산 중턱까지.

모든 구간의 공사가 끝났다.

마침내 프론테라 영지를 가로지르는 첫 포장도로가 완공된 것이었다.

물론 이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도로 완공의 정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영지민들도.

공사에 동원된 공병들도.

심지어 공사를 허락한 프론테라 남작까지도.

로이드가 어째서 이 도로를 건설하였는지 제대로 짐작하지 못했다.

그 상태에서 봄철 장마가 시작되었다.

열흘 넘게 장대비가 내렸다.

모든 길이 진창이 되었다.

새로 건설된 도로만 멀쩡했다.

여기까지는 대략 영지민들 모두가 예상한 결과였다.

그토록 공들여 포장한 도로였다.

이 정도 비에 멀쩡한 것이 당연했다.

그래서 의문은 더욱 사라지지 않았다.

어째서 이토록 과분하게 훌륭한 도로를 건설한 걸까.

로이드 도련님은 이 도로를 무슨 일에 쓰려는 것일까.

퍼붓는 빗줄기와 함께 의문은 더욱 증폭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장마가 물러가고 비가 그친 날 아침.

모두의 의문과 의혹 속에서 로이드는 포장된 도로를 따라 걸었다.

도로의 끝, 동쪽 산 중턱에 다다랐다.

그곳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공사 알림 팻말을 떡하니 꽂았다.

<역청탄 광산 건설 예정지 : 무허가 경작 행위를 금지함 - 영주 아들 백>

마침내, 빙의 첫날 온돌방을 처음 기획하던 때부터 그려왔던 로이드의 큰 그림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21화. 두 번째 랜덤 뽑기 (1)

카앙! 캉캉!

강철삽이 움직였다.

움직일 때마다 봄철 따가운 햇볕을 반사했다.

쇳가루 밴 소음 뿌리며 팻말 머리를 내리쳤다.

카캉!

마침내 팻말이 땅속 깊숙이 꽂혔다.

그제야 삽질을 멈춘 로이드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후우."

살랑살랑 땀방울을 훔쳐가는 산들바람.

쬐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햇볕.

거기에 눈앞에 떡하니 세워진 팻말까지.

로이드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어이, 어때?"

그의 고개가 돌아갔다.

뒤쪽에 서 있던 은발의 기사를 향해 시선을 보냈다.

그의 질문을 받은 은발의 기사, 하비엘이 시큰둥한 눈길로 되물었다.

"어떠냐니, 뭐가 말입니까."

"뭐긴. 이거지."

로이드의 손이 팻말을 가리켰다.

하비엘의 눈동자가 팻말을 향했다.

팻말에는 이런 문구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역청탄 광산 건설 예정지 : 무허가 경작 행위를 금지함 - 영주 아들 백>

"이런 거 미리 꽂아놔야 돼. 안 그럼 나중에 일이 복잡해지거든."

"어떻게 복잡해진다는 겁니까."

"고추며 양배추며 심어놓기 일쑤거든."

로이드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동네 할머님들이랑 아주머니들 말이야. 좀 괜찮다 싶은 빈 땅 있으면 상추며 고추, 양배추에 부추까지 완전 꼼꼼하게 심어두신다? 근데 그 땅에서 공사를 시작해야 하는 거면?"

실제로 대한민국에선 그런 일들이 많았다.

보통 그런 경우엔 텃밭 같은 건 그냥 포클레인으로 밀어 버리기 일쑤다.

밭을 꾸리시던 할머님이나 아주머니에게 범칙금이 부과되는 경우도 있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물론 로이드는 여기서 그렇게 일을 처리할 생각은 없었다.

"공사를 위해서 텃밭을 밀어 버렸다간? 농부의 소중한 경작지를 짓밟았다는 비난 듣기 딱 좋아. 폭군 소리 듣기도 딱 좋지. 최근에 좀 좋게 쌓았나 싶었던 내 이미지도? 칠성장어 승천댄스 추면서 굿모닝 헬게이트로 날아가는 거야, 아주."

"...요약하자면 비난에 직면하게 된다는 뜻이로군요."

"응. 그거지."

로이드가 씨익 웃었다.

기껏 영지민들의 신뢰를 받기 시작한 요즘이었다.

한데 사소한 분쟁으로 그걸 잃기는 싫었다.

"어쨌건 조만간 공사 시작할 거야. 여길 파서 갱도를 만들고, 역청탄을 캐는 거지."

"역청탄이라면, 석탄 말입니까?"

"응. 잘 아네?"

"예, 조금은."

하비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땅속에서 나오는 검은 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잘 부스러지지만 장작보다 훨씬 훌륭한 땔감이라고 하더군요."

"응. 맞아. 그걸 여기서 캘 거야."

"여기에 역청탄이 묻혀 있다는 말입니까?"

"어."

로이드가 피식 웃었다.

"기록을 찾아보니까 전대 영주 시절에 이 근처에서 두 번이나 광산 건설을 시도했다가 실패했더라? 지반이 연약해서 갱도가 무너졌다나."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 언급된 사실이었다.

문득 소설 속 내용이 떠올랐다.

로이드의 아버지인 아르코스 프론테라 남작.

소설 속의 그는 결국, 빚 독촉에 시달리다가 자살하고 만다.

그렇게 목을 매달기 직전, 탄식 같은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자신의 선대 영주였던 마티아스 프론테라가 광산 개발에 성공했더라면 오늘 같은 이런 비극은 없었을 것이라고.

물론 로이드는 그러한 소설 속 언급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였다.

영지 개발을 결심했던 초기부터였다.

이 산의 광맥 개발을 내심 필수 코스로 계획표에 새겨두었다.

물론 그 와중에 확인도 빠뜨리지 않았다.

광맥 확인에는 최근 중급으로 오른 측량 스킬이 도움이 되었다.

측량 스킬을 발동하면 지면에서 5미터 지하까지의 공간을 모두 파악할 수 있었다.

암반과 지하수의 구성, 광맥의 유무까지 모조리 파악이 가능했다.

'더 깊이까지 스캔이 되면 좋겠지만.'

일단 그동안 조사한 바로는 이곳이 최적지다.

그래서 포장도로를 놓았다.

광산에서 캐낸 석탄을 원활히 옮기기 위해서였다.

"그 석탄이 당분간 우리 영지의 밥줄이 될 거야. 게다가 올해 겨울에 시작될 땔감 대란을 막아줄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기도 할 테고."

"땔감 대란이라니요?"

"땔감이 많이 모자라게 될 거거든. 요즘 내가 지어주고 있는 온돌방 때문에. 이건 예언이 아니라 필연이고 확신이야."

로이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구들 방식 난방이 원래 좀 그래. 뜨끈한 대신에 땔감 소모가 좀 심해. 아무래도 벽난로처럼 주방만 데우는 게 아니라 집 전체의 바닥을 데우게 되니까. 덕분에 산림자원이 쑴펑쑴펑 소모되지. 쉽게 말하자면 몇 년 안 지나서 이 일대가 민둥산이 될 거야."

"땔감으로 쓸 나무를 너무 많이 베어서 말입니까?"

"응."

"그럼...."

"그 폐해를 예상했냐고? 물론이지."

로이드의 미소가 살짝 사악해졌다.

"내가 누구냐. 온돌 난방을 설계한 사람이야. 당연히 이 정도는 예상했지. 이번 겨울이 절반쯤 지나면 모두가 슬슬 느끼기 시작할 거다. 가을철부터 준비했던 땔감용 장작이 모자랄 거라는 사실을 말이지."

"그럼 모두를 속인 겁니까?"

"내가?"

"그렇습니다."

하비엘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로이드 님을 믿고서 집의 벽난로를 허물고 온돌을 설치한 영지민들입니다. 한데 장작이 모자라게 되면 남은 겨울의 절반을 추위에 떨며 보내게 될 텐데요."

"응, 맞아."

"그럼 로이드 님은 그들에게 사기를 치신 겁니까."

"음, 그건 아닌데."

"하면...."

"석탄을 판매할 거야."

"영지민들에게 말입니까?"

"응. 석탄은 캐낼 수만 있다면 최고의 땔감이니까. 사지 않고는 못 배길걸."

그것이 로이드의 계획이었다.

영지에 온돌 난방을 보급한다.

보급률이 올라갈수록 땔감이 모자라게 된다.

땔감 소모가 극심하다는 온돌 고유의 단점이 부각될 것이다.

그 시점에 비축해두었던 석탄을 영지민들에게 판매한다.

온돌 시공으로 1차 수익을.

석탄 판매로 2차 수익을 얻는 셈이다.

'거기에 온돌 시공을 이웃 영지로 확대하면? 아예 석탄을 다른 영지로 수출하면 되는 거야.'

온돌과 석탄.

두 가지 수익의 쌍두마차가 영지의 빚 해결에 큰 힘이 될 것이다.

그 생각에 로이드의 미소가 더욱 흐뭇하게 사악해졌다.

반면 로이드를 보는 하비엘의 표정은 더 굳었다.

"설마 로이드 님은 이걸 모두 미리 감안하셨던 겁니까."

"응."

"언제부터 그러셨던 겁니까."

"처음부터. 너랑 같이 주점 주인장을 찾아가서 사과하고 첫 온돌방 계약서를 썼던 시점부터."

"...."

"할 말 있으면 해. 눈으로 욕하지 말고."

"해도 됩니까?"

"응."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비엘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당신은 영악한 인간입니다."

"순진한 것보단 낫잖아."

"그래서 싫습니다."

"내가?"

"예."

"그런데 어떡하냐."

"뭐가 말입니까."

"그 싫어하는 인간이 매일 밤 너한테 꿀잠을 안겨주고 있는데."

"...."

"그래서 자장가 서비스, 싫어?"

"...."

"짜식. 고민하기는. 눈동자 굴러다니는 거 보소."

"...."

"아죠씨, 말 듣고 나서 시선 고정하면 너무 티 나잖아요."

"...."

"눈 떠, 인마. 안 놀릴게."

"...."

"안심하기는. 귀엽게시리."

"저는...."

"됐어. 자장가 서비스 안 끊을 거니까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찡찡거리지 말고."

...저는 강아지가 아닙니다!

하비엘은 저도 모르게 빽 외칠 뻔했다.

하지만 먼저 나온 로이드의 말이 그의 외침을 가로막았다.

"뭐, 네가 지금 학을 떼는 이유는 대강 알겠어. 내가 영악하게 모두를 속이고 이용하는 거라고 여기는 거겠지. 그런 내 태도가 야비하게 느껴지는 거겠지. 다 알아. 굳이 부인하진 않을게. 그런데 어떡하냐. 우리 영지, 일단 살리고 봐야지."

로이드의 사악하던 미소가 조금은 씁쓸해졌다.

"그거 아냐? 솔직히 말해서 어린 시절엔 돈이 세상의 전부가 아닐 줄 알았다? 그런데 나이 먹고 보니까 착각이더라고. 돈보다 중요한 게 없더라고. 돈이란 건 내 어린 시절 막연하던 생각보다 훨씬 좋은 거였어."

"로이드 님, 하지만...."

"맞아. 아무리 그래도 돈으로 행복을 살 수는 없지. 그래도 돈이 있으면 더 행복할 수 있어. 그러니까 일단은 좀 치사하고 야비해도 돈 좀 벌어보자. 영지에 쌓인 빚부터 좀 갚아보자고. 응?"

"...."

하비엘은 입을 닫았다.

로이드의 계획을 깨닫는 순간 치밀었던 혐오감이 어느새 가라앉아 있었다.

자신을 향해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하는 로이드 프론테라.

그 눈빛이 이렇게 말하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욕은 내가 먹는다. 비난? 손가락질? 내가 받을게.'

그러니까 넌 눈 딱 감고 따라오기나 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

눈앞의 이 사람.

답 없는 망나니인 줄로만 알았던 인간인데.

언젠가부터 종종 사람을 당황시키곤 한다.

지금도 그렇다.

그런데 그게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방식이 얄밉고 껄끄럽긴 하지만.'

지나고 나서 보면 저 인간이 하는 일이 결과적으로 옳은 경우가 많았다.

아스라한 심법의 완성을 도와줬다.

노이만 경의 배신을 밝혀냈다.

그러니 지금은?

어쩌면 영지의 큰 도약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고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하비엘은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로이드를 향해 솔직하게 말했다.

"인정하도록 하지요."

자신의 호위 대상인 로이드.

그를 진솔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로이드도 이쪽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정한다니? 혹시 내 계획을?"

"예, 물론."

"너어, 지금 무슨 착각하고 있는 거냐?"

"예?"

"난 딱히 네 인정이나 허락 같은 거 구한 적 없는데?"

"...."

"맞잖아. 나 영주 아들인데. 광산 하나 파는데 네 인정이 왜 필요하냐, 내가."

"...."

"그러니까 착각은 알차게 접어두시구요. 이만 비켜줄래? 측량 좀 하자."

하비엘의 우아한 얼굴이 왕창 구겨졌다.

로이드가 짓궂게 웃었다.

역시나 하비엘은 놀려먹는 재미가 쏠쏠한 녀석이다.

그날부터였다.

로이드는 종일 광산 건설 예정지에 달라붙어 있다시피 했다.

주변을 측량하고, 환경을 분석했다.

과거 두 차례 있었던 광산 건설 시도.

그렇게 연이어 발생한 두 차례의 실패 사례.

그 사례에 맞추어 시공 계획을 짰다.

'전통적인 착암 방식으로는 답이 없겠어. 시간도 오래 걸리고, 무엇보다도 너무 위험해.'

마침 저택의 서고에 과거 공사 실패의 기록이 있었다.

살펴보니 두 차례 모두 전통적 착암 방식을 사용했노라 기록되어 있었다.

'불에 달구었다가 식히는 방식으로 암석을 쪼개며 전진했다지.'

그것이 전통적인 암석 파쇄 방법이었다.

땅을 파다가 큰 암석이 나오면?

일꾼들이 암석에 불을 지핀다.

암석을 아주 뜨겁게 달군다.

그 상태에서 차가운 물을 들이붓는다.

그러면 달구어졌던 암석에 갑작스러운 온도 변화가 가해진다.

암석이 결을 따라 갈라진다.

부수기 쉽게 되는 것이다.

'처음엔 그렇게 전진했지. 하지만 불과 30미터도 전진하지 못했어. 갱도가 무너졌지. 두 차례 모두.'

불운한 일꾼들이 모조리 매몰되었음은 물론이었다.

그 때문에 로이드의 할아버지, 마티아스 프론테라 남작은 광산 건설을 포기하게 되었다.

'이유는 간단해. 지반이 연약해서 그래.'

연약한 지반의 성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사고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가 파악하기로 이 산의 지반은 일부 암석과 푸석푸석한 토질이 혼합된 형태의, 일종의 연약 지반이었다.

하니 환경에 대한 맞춤 공법을 동원하는 것이 필수였다.

"그래서 실드 공법을 사용해볼까 합니다."

"실드 공법?"

저녁 식사 도중의 일이었다.

로이드는 식탁 건너편의 남작을 향해 종이 한 장을 스윽 내밀었다.

"제가 생각해본 거랄까요. 여기, 이건 실드 공법을 간단하게 나타낸 개념도입니다."

"개념도라."

남작의 눈이 개념도를 향했다.

로이드의 설명이 이어졌다.

"간략하게 말씀드리자면, 강철로 제작한 원통형 틀을 실드라고 합니다. 그 실드 안에 작업자가 들어갑니다. 흙과 암석을 파냅니다. 그동안 실드 자체가 갱도의 압력을 버티며 붕괴를 막아줍니다."

"흐음, 일종의 방패이자 지지대가 되는 것이더냐?"

"그렇습니다. 혹시 배좀벌레조개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배좀... 벌레조개?"

"예."

"설명해보거라."

"대강은 오징어나 달팽이의 먼 친척뻘쯤 되는 동물입니다. 나무로 만들어진 배 밑바닥을 갉아먹고 구멍을 내는 몹쓸 녀석이기도 하지요."

"한데 그런 동물이 지금 이 공사와 무슨 연관이 있다는 것이냐."

"실드 공법에 아이디어를 제공한 녀석이거든요."

로이드가 미소 지었다.

사실이었다.

실제로 1,800년대 중반, 영국 런던의 템즈강에 뚫은 템즈 터널의 공사가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템즈 터널을 설계한 마크 브루넬이라는 기술자는 배좀벌레조개의 생태를 보고는 아이디어를 얻어 새로운 공법을 개발했다.

그것이 바로 실드 공법이었다.

"배좀벌레조개는 방패막 같은 껍질로 배 밑바닥 목재에 구멍을 뚫습니다. 그런데 목재는 물을 먹으면 부풀지요. 그러면 기껏 파놓은 구멍이 좁아지고, 배좀벌레조개는 자신이 만든 나무 구멍 속에 끼어 죽게 됩니다. 그걸 막기 위해 배좀벌레조개는 구멍을 파면서 동시에 터널 안쪽 면에 분비물을 바릅니다. 분비물이 굳으면서 구멍이 좁아지는 것을 방지하지요. 실드 공법도 똑같습니다."

로이드가 개념도를 가리켰다.

"실드가 배좀벌레조개의 방패막과 같은 구실을 합니다. 작업자를 보호합니다. 구멍을 파는 선봉 역할을 합니다. 그렇게 실드 안에서 작업자가 조를 이룹니다. 일부는 구멍을 파고, 나머지 일부는 갱도의 붕괴를 막아줄 설비를 실시간으로 설치합니다."

"그 벌레가 분비물을 구멍 안쪽 면에 발라서 구멍이 망가지는 걸 막는 것처럼 말인가?"

"네."

"그럼 구멍을 파고 보강하는 과정을 동시에 수행하면서 조금씩 전진한다는 말이로군."

"거의 정확한 요약이십니다."

로이드는 공사 계획을 조금 더 자세히 설명했다.

남작은 그런 로이드의 말을 경청해주었다.

그동안 남작은 큰 흥미를 느꼈다.

석탄은 훌륭한 땔감 자원이다.

캐낼 수만 있다면 돈이 된다.

거액의 빚에 부담을 느끼는 남작이 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로이드가 제시한 새로운 공법 또한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마침내 남작은 공사를 허락했다.

"좋구나.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다."

"무엇입니까?"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네가 갱도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한다."

"위험할까 봐요?"

"당연하지."

남작의 대답이 단호해졌다.

"새로운 공법이 있다고 해서 완벽하게 안전하달 순 없지 않겠느냐."

"하지만 그건 곤란한데요."

"어째서?"

"제가 안 들어가면 어떤 작업자가 새 공법의 안전성을 믿고 작업을 하려 들겠습니까."

"...."

"게다가 현장의 상황이나 환경의 변화를 시시각각 지켜봐야 합니다. 그래야 사고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약속드리죠. 안전할 겁니다."

"허허."

그 뒤로도 설왕설래가 이어졌다.

하지만 더 고집이 센 쪽은 로이드였다.

그 고집 앞에 결국 남작은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렇게 광산 건설 공사가 결정되었다.

하지만 로이드는 곧바로 공사에 착수하지는 않았다.

이번 공사에 앞서 준비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밤이 오길 기다렸다.

하비엘을 푹 재웠다.

한밤의 뒤뜰 연무장으로 나섰다.

시스템 창을 불러왔다.

'환상종 랜덤 뽑기' 메뉴를 열었다.

'뽀동이는 이번 공사에 쓸 수 없어. 땅굴을 파기엔 덩치가 너무 커서 오히려 위험해. 그렇다고 사람의 힘만으로 갱도를 팔려면 그만큼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

공사 기간이 길어지면 그만큼 돈이 든다.

실드 공법은 공사를 안전하게 해줄 뿐.

딱히 공사 속도를 올려줄 수는 없었다.

그러니 공사 기간을 줄이고 공사비를 아끼려면 유능한 일손이 필요했다.

'가능하다면 땅굴 파기에 관련된 능력을 지닌 녀석이면 더 좋을 텐데.'

로이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랜덤 뽑기' 메뉴를 실행시켰다.

마침 지난번에 사용하고도 남은 RP가 제법 있었다.

[랜덤 뽑기 비용(2회차) = 70 RP]

[현재 보유 중인 RP : 119]

[랜덤 뽑기를 실행하시겠습니까?]

[YES / NO]

'YES'를 선택했다.

[환상종 랜덤 뽑기를 실행합니다.]

파아앗...!

창백한 빛이 공간을 물들였다.

복잡한 마법진이 새겨지며 공간이 요동쳤다.

요동치는 공간 속에서 생소한 실루엣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정체를 드러내는 새로운 환상종.

그 모습을 마주한 로이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22화. 두 번째 랜덤 뽑기 (2)

파아앗!

창백한 빛이 공간을 물들였다.

생소한 실루엣이 엇비치기 시작했다.

강렬한 충격파와 함께 그 실체를 드러냈다.

파치칫!

"방울!"

뭔가가 야물딱지게 외쳤다.

이쪽을 향해 휘릭 떨어졌다.

로이드는 행여나 놓칠세라 얼른 '그것'을 두 손으로 받았다.

손바닥에 촵 떨어지는 통실한 감촉.

이번엔 어떤 환상종이 뽑혔을까.

로이드는 그 모습을 확인했다.

"방울!"

"어?"

10센티 길이의 통실한 몸매.

동글동글한 커다란 머리.

눈망울도 동그랗고 초롱초롱.

꼬리 끝에는 리본 장식 엮인 금빛 방울까지.

"...뱀?"

새 환상종은 뱀이었다.

한데 2등신 뱀이었다.

욕이나 비하가 아니었다.

진짜로 머리와 몸의 비율이 정확히 1:1인, 통통한 2등신 사이즈였다!

"너, 진짜로 뱀 맞아?"

"방울!"

맞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생긋 웃는 그 얼굴이 새침했다.

그걸 보자니 문득 짐작되는 게 있었다.

로이드가 물었다.

"혹시 네 이름이 방울이인 거야?"

"방울? 빠방울!"

다시 고개를 끄덕이는 새 환상종, 아니, 방울이.

역시나 짐작이 맞았다.

'자기 이름 외치는 거야 뭐 드문 게 아니니까.'

유명한 만화 피x츄도 피카피카.

그렇게 생각하니 환상종들의 이름과 외침의 관계가 잘 이해되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로이드는 방울이를 쳐다보았다.

2등신 비율을 지닌 뱀이라.

제대로 기어 다닐 수나 있을지 의심이 갔다.

하지만 로이드는 섣부른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그는 이미 뽀동이를 뽑아본 경험이 있었다.

그 경험이 말해주었다.

환상종은 겉모습으로만 판단하면 안 된다고.

"방울아?"

"방울?"

"너, 혹시 설명서 같은 거 가지고 있어?"

"빠방울? 방울!"

혹시나 해서 물었더니 진짜였다.

방울이가 입을 크게 벌렸다.

입안엔 복주머니가 들어 있었다.

복주머니를 열어보니 해바라기씨 세트 10개와 곱게 접힌 쪽지가 나왔다.

로이드는 쪽지를 찬찬히 읽어보았다.

[방울이 사용설명서]

[방울이는 사랑스러운 방울뱀입니다. 사랑과 관심으로 보살펴 주세요.]

[방울이는 소환자인 당신에게 절대적인 신뢰와 충성을 바칩니다. 환상종은 평생의 반려동물이자 또 하나의 가족입니다. 함부로 유기하지 말아 주세요.]

[방울이는 두 가지 종류의 해바라기씨를 먹음으로써 덩치를 바꿀 수 있습니다.]

[빨간 해바라기씨 : 방울이를 거대하게 만들어줍니다. 거대화 최대 유지 시간 = 12시간]

[파란 해바라기씨 : 방울이를 아담하게 만들어줍니다. 거대화 최대 유지 시간을 초과하기 전에 먹여 주세요. 거대화 상태에서 파란 해바라기씨를 먹지 않고 12시간을 넘기면 방울이는 탈진 상태에 빠집니다. 저절로 아담한 모습으로 돌아오지만, 대신 24시간 내에는 다시 거대화가 불가능해집니다.]

[2색 해바라기씨 세트 구매 비용은 1 RP입니다.]

[방울이는 거대화 상태에서 다양한 스킬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방울이 보유 스킬 목록>

[흙 퍼먹기 (Lv. 1)]

[흙 소화 가속 (Lv. 1)]

[강철 끙까 배출 (Lv. 1)]

'헐, 뭐야. 흙 퍼먹기? 소화 가속? 강철 끙까 배출?'

방울이의 스킬 목록을 보던 로이드가 입을 쩍 벌렸다.

황당하기 그지없는 조합의 스킬이었다.

'설마 흙을 먹고 강철을 싼...다는 건 아니겠지?'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빨간 해바라기씨를 꺼냈다.

시험 삼아 방울이에게 건네주었다.

"방울아?"

"방울?"

"이거 한번 먹어볼래?"

"방울!"

방울이가 기다렸다는 듯 냉큼 해바라기씨를 물었다.

로이드는 방울이를 땅에 내려놓았다. 재빨리 물러났다.

이윽고 방울이가 빨간 해바라기씨를 꿀꺽 삼키는 순간.

퍼어엉!

"방울!"

거대해졌다.

몸길이 5미터의 통통한 2등신 방울뱀으로.

'그래, 이 정도는 예상했어.'

이미 뽀동이를 경험한 로이드였다.

그는 거대해진 방울이에게 다가갔다.

"방울아?"

"방울!"

"시험 삼아 스킬 한번 사용해볼래?"

"방울?"

"흙 퍼먹기랑 소화하기, 뭐 그런 거 말야. 할 수 있어?"

"빠방울?"

방울이의 눈빛이 샐쭉해졌다.

설마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느냐는 눈빛이었다.

로이드는 찔끔했다.

'음, 반응이 새침하네. 방울이는 뽀동이랑 성격이 좀 다른 건가.'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그는 말투를 조금 더 부탁조로 바꾸었다.

"나야 당연히 네 능력을 믿지. 한번 구경하고 싶어서 그래. 멋질 거 같아서."

"방울?"

"진심이야."

"방울!"

그제야 방울이의 표정이 풀렸다.

기분이 좋아졌는지 통통한 몸을 요리조리 씰룩거렸다.

그러더니 커다랗고 동그란 머리를 숙였다.

연무장 바닥을 향해 입을 벌렸다.

"빠방울!"

덥석! 우물우물! 꿀꺽!

...엄마, 쟤 흙 먹어.

치킨을 뜯을 때 내가 저런 모습인 걸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방울이는 흙을 맛있게 퍼먹었다.

퍼먹고, 꿀꺽 삼키고.

한참을 그렇게 먹더니 트림을 했다.

그러고는 돌연 통통하고 짧은 꼬리를 세차게 흔들기 시작했다.

"방울! 빠방울!"

딸랑딸랑!

꼬리 끝의 리본 방울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동시에 방울이가 꼬리 끝을 치켜들었다.

뭔가 힘을 주는 표정을 지었다.

다음 순간.

투화하하학!

시뻘겋게 달구어진, 얇고 긴 강철 끙까를 직후방으로 발사했다!

"...."

이건 무슨 뻥튀기도 아니고.

로이드는 황당함을 억눌렀다.

대신 방울이가 발사한 강철 끙까를 살폈다.

비로소 그는 방울이의 진정한 위력(?)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거, 대박이다.'

방울이가 발사한 끙까는 진짜로 강철이었다.

한데 그저 난잡한 끙까 모양이 아니었다.

'철근이야.'

길이는 약 10미터에 달했다.

두께는 엄지와 비슷했다.

한데 일정했다.

들쭉날쭉한 곳이 전혀 없었다.

처음부터 끝 부분까지 완전하게 일정한 두께를 이루고 있었다.

즉, 완벽하게 제련된 철근 그 자체였다!

'심지어 엄청나게 뜨거워.'

지금도 강철 끙까는 식지 않은 상태였다.

열기가 남아서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의미는 명확했다.

'식기 전에 재단할 수 있어. 원하는 길이로 자르거나 구부릴 수 있어.'

그건 즉, 현장에서 치수대로 자르거나 구부려서 즉시 건설 자재로 쓸 수 있다는 것.

철근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됐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흙만 퍼먹이면 언제든 자유롭게!

'완전 미친 거 아냐?'

좋아도 너무 좋았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쩔었다.

생각해보면 이건 그냥 철근을 뽑아내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흙을 퍼먹을 수 있다.

즉, 땅굴을 팔 수 있다.

그러니까 자신이 원래 계획하던 실드 공법에 방울이를 포함시키면?

'실드 장치 안에서 방울이가 흙을 퍼먹어. 굴을 뚫어. 동시에 강철 끙까... 그러니까 철근을 배출해. 그럼 대장장이가 그 자리에서 곧바로 철근을 재단해. 작업자들이 갱도를 지지할 세그먼트, 즉, 판벽을 현장에서 만들고 바로 세울 수 있어. 그렇게 판벽이 세워지면 다시 실드를 전진시키고, 방울이가 흙을 퍼먹고, 철근을 뽑아내고....'

머릿속으로 작업 계획이 착착 수립되었다.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이 계획이 실현된다면 공사 기간을 1/10로 줄일 수 있겠어.'

그저 땅파기 관련 능력을 지닌 녀석 정도만 나와주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던 로이드였다.

한데 이건 뽑아놓고 보니 훨씬 대박이었다.

로이드는 조금 멍한 기분으로 방울이를 돌아보았다.

"방울아?"

"방울?"

"너어, 진짜 대박이다."

"빠방울?"

"아니, 초초대박인 거 같아."

"방울!"

로이드는 엄지를 치켜들었다.

방울이도 기쁜지 활짝 웃었다.

***

공사 준비에 탄력이 제대로 붙었다.

랜덤 뽑기로 방울이를 얻은 날부터였다.

로이드는 실드 장치를 방울이에 맞추어 설계했다.

세그먼트, 판벽을 이루는 철근 구성도 거기에 맞추었다.

방울이가 이번 시공의 핵심이었기 때문이었다.

"뽀동! 뽀도동!"

"방울?"

"뽀동!"

"빠방울!"

다행히 뽀동이와 방울이도 친하게 잘 지냈다.

햄스터와 뱀이라서 혹여나 참극(?)이 벌어지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는데, 막상 지나고 보니 기우에 불과했다.

같은 환상종이라는 동질감 덕분이었을까.

뽕뽕한 햄스터와 통통한 2등신 방울뱀은 순식간에 단짝이 되었다.

일이 없는 날은 종일 붙어서 뽕뽕하고 통통한 몸으로 바닥을 굴러다녔다. 함께 햇볕을 쬐거나, 꾸벅꾸벅 졸거나, 또 햇볕을 쬐거나, 다시 꾸벅꾸벅 졸았다.

'어휴. 너흰 좋겠다. 종일 뒹굴거려도 귀엽다고 칭찬받아서.'

두 환상종이 뒹굴대는 동안 로이드는 바쁘게 움직였다.

매일 대장간을 들락거렸다.

종일 대장장이를 들볶았다.

설계한 실드 장치 제작을 직접 감독했다.

덕분에 약 열흘이 지났을 무렵, 마침내 실드 장치가 완성되었다.

위아래가 뚫린, 기다란 콜라캔을 눕힌 것처럼 생긴 원통형 장치였다.

그 원통의 지름은 약 3미터.

원통의 전방 중심에는 방울이가 탑승(?)할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 주위로는 원통 외벽을 지탱할 단단한 받침 구조가 벌집 모양으로 빼곡하게 자리했다.

그 뒤로 작업자들을 위한 공간이 있었다.

그곳에서 작업자들은 실드 구조에 보호받으면서 방울이의 강철 끙까, 즉 철근을 받아내고 재단할 것이었다. 즉석에서 갱도의 붕괴를 방지할 판벽을 세울 수 있는 셈이었다.

'이제 됐어.'

다음 차례는 인력 동원이었다.

로이드는 작업 인원을 구성했다.

영주인 프론테라 남작의 허락 덕분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뜨거운 철근을 현장에서 재단할 대장장이 그룹.

대장장이의 작업을 보조하고 실드 장치를 전진시킬 공병대까지.

순식간에 인적 구성까지 마쳤다.

곧바로 작업을 개시했다.

실드 장치의 진정한 위력(?)이 빛을 발했다.

"방울! 빠방울!"

실드 장치 속의 방울이가 커다란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크게 벌린 입으로 흙과 암석을 덥석덥석 물어 삼켰다.

잠시 후 통통한 배가 꿀렁거렸다.

짤막한 꼬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딸랑딸랑!

꼬리의 방울이 요란하게 울렸다.

"나온다!"

로이드의 외침에 대장장이들이 긴장했다.

이윽고 방울이의 강철 끙까가 철근의 형태로 쫘악 쏘아졌다.

투화화화확!

시뻘겋게 달아올라 엿가락처럼 쭈욱 쏘아지는 강철근!

"식기 전에 서둘러. 하비엘!"

로이드가 외쳤다.

그의 외침에 하비엘이 움직였다.

코트를 벗어 던졌다.

검을 뽑았다.

스르릉!

롱소드가 하비엘의 표정만큼이나 서늘한 빛을 품었다.

번개처럼 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시뻘건 강철근을 향해서였다.

츠컥!

무려 소드 익스퍼트 상급인 하비엘이 전력으로 내리친 일검이었다.

롱소드는 달아오른 강철근을 너무나 깔끔하게 잘라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었다.

"어이! 치수대로 잘 하고 있는 거 맞지?"

"물론입니다."

츠컥! 츠컥! 석둑! 석둑! 쓰뚝!

하비엘의 롱소드가 현란하게 움직였다.

쉴 새 없이 강철근을 향해 내리쳐졌다.

원작 '철혈의 기사'에서 강대한 적을 무수히 베어 넘기던 철혈의 검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환상종의 강철 끙까를 자르는 데 쓰이고 있었다.

그 칼 놀림은 마치 매일 밤 떡을 썰어온 한석봉네 어머니, 혹은 평생을 김밥헤븐에서 일하신 아주머니의 김밥 써는 솜씨처럼 깔끔하고도 현란했고, 정확했다.

철그렁! 철겅!

길고 짧은 십수 가닥으로 잘린 강철근이 나뒹굴었다.

모두 로이드가 지시했던 치수 그대로였다.

로이드가 엄지를 치켜들었다.

"좋아! 깻잎 한 장의 오차도 없겠는데?"

"...감사합니다."

환호하는 로이드.

졸지에 철근 자르개로 전락(?)한 자신의 신세에 한숨을 푹 내쉬는 하비엘.

다음 차례는 대장장이들의 몫이었다.

"철근이 식기 전에 움직여. 조립해!"

"알겠습니다! 영츠아!"

로이드의 지휘 아래 대장장이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하비엘이 자른 철근을 치수에 맞추어 구부렸다.

엮고, 묶었다.

고정하고 조립했다.

차근차근 판벽이 만들어졌다. 세워졌다.

철근을 촘촘히 엮어 완성한 원통형의 판벽은 실드의 안쪽 면과 사이즈가 일치했다.

그걸 확인한 로이드가 외쳤다.

"실드, 전진!"

"전진!"

수십 명의 공병대가 일제히 복창했다.

실드 뒤로 연결된 지렛대를 힘차게 밀었다.

방울이와 작업자들을 실은 육중한 실드가 서서히 앞으로 움직였다.

방울이가 파먹은 공간 속으로 정확히 1미터 전진했다.

그러자 1미터 길이로 만든 판벽이 뒤에 남았다.

쿠르릉!

갱도를 떠받치던 실드가 앞쪽으로 지나간 상황이었다.

그러자 갱도 천장과 벽면의 토사와 암석이 요동쳤다.

하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실드가 떠난 빈자리에 판벽이 남아서 갱도의 벽면과 천장을 지탱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이 로이드가 계획한 대로였다.

'좋아. 제대로 작동한다.'

로이드의 눈에 자신감이 차올랐다.

작업을 지휘하는 로이드의 목소리에 더욱 활력이 깃들었다.

동시에 그의 눈은 더욱 꼼꼼하게 전방을 살폈다.

츠츠츠츠츠!

줄곧 발동하고 있는 중급 측량 스킬.

덕분에 로이드는 갱도를 팔 예정인 5미터 전방의 상황을 미리 살펴볼 수 있었다.

전방의 지반 상황은 어떤지.

행여나 위험한 가스층은 없는지.

훤히 들여다보며 작업을 지휘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막장 전방 예지'였다.

실제 현대 세계의 현장에서 땅속을 살피는데 사용되는 탄성파 검사법(TSP, HSP), 혹은 반사 포토그라피 등의 최신기술 뺨치는 능력이었다.

"자, 계속 탄력 붙여서!"

"으자자잣!"

"방울!"

로이드의 지휘와 작업자들의 힘찬 구령, 방울이의 야물딱진 외침이 연이어 울렸다.

그 외침이 점점 산 옆구리를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쾌속의 공사 진행이었다.

그렇기에 모두는 몰랐다.

지금 파내고 있는 이 갱도의 끝에서 어떤 존재가 자신들을 맞이할지를.

23화. 지저의 야수들 (1)

햇볕 맑은 봄날이었다.

올해는 유독 다른 해보다 날씨가 쾌청하기도 했다.

그런 덕일까.

프론테라 남작령의 공사는 순조로웠다.

예전부터 시행하고 있던 온돌방 시공이 차근차근 이어졌다.

다가올 겨울에 대비한 온돌방 보급률이 어느새 30%를 넘어섰다.

최근 벌이기 시작한 광산 개발 공사 또한 매일 쾌조를 보였다.

실드 공법 덕분에 무사고의 나날이 이어졌다.

처음엔 불안해하던 작업자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심했다.

일에만 매진했다.

영지에 활력이 넘쳤다.

농부들의 일손이 바빠졌다.

공병대로 투입된 사병들은 쉼 없이 땀 흘렸다.

그들에게 새참을 나르는 아낙네들의 손길도 부지런했다.

심지어 아이들마저 분주해졌다.

이 시기쯤이면 한창 개구리를 잡으러 쏘다닐 꼬마 장난꾸러기들이었다.

하지만 올해 프론테라 영지의 개구리들은 유례없는 평화를 만끽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 개구리를 잡지 않았다.

대신 광산 개발 공사장 주변을 얼쩡거렸다.

꼬마들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로이드가 이번 공사에 동원한 환상종 몬스터, 방울이 구경이었다.

"우와! 나왔다아!"

종일 공사장 주변에서 알짱대던 아이들은 어쩌다 방울이가 모습이라도 보일라치면 신이 나서 외쳐댔다. 그러면 휴식을 위해 갱도 밖으로 나와 있던 방울이의 팬서비스(?)가 어김없이 이어졌다.

"방울! 빠방울!"

일부러 쉼터 근처의 흙을 크게 한 입 먹었다.

요란하게 방울을 흔들며 강철 끙까 방출쇼를 선보였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의 꺄르르 자지러지는 환호성이 더욱 커졌다.

갱도 밖에서 쉬던 작업자들의 호통도 이어졌다.

"어허, 이놈들! 자꾸 공사장 근처까지 와서 소란 피울래? 여기 위험하다고 몇 번을 말해!"

"안 위험한데요? 괜찮은데요?"

"이놈들이? 계속 어른 말 안 들으면 늑대만큼 큰 야수 개미가 와서 어흥 하고 잡아간다?"

"그런 개미가 세상에 어딨어요?"

"어디 있긴. 산맥 너머 동쪽 황무지에 그 야수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래도 여긴 없잖아요."

"어허, 이눔이 끝까지 말대답을!"

그렇듯 모두가 활력 넘치는 매일을 보내고 있는 프론테라 영지였다.

아니, 모두는 아니었다.

예외가 있긴 했다.

바로 뽀동이였다.

"뽀동... 뽀도동...."

심심해애.

그렇게 생각하며 뽀동이는 입을 쩍 벌리며 하품했다.

오늘도 늦잠을 잤나 보다.

아니, 아침에 잠깐 깨어났다가 다시 잠들었던가.

"뽀도동...."

사실 일찍 일어나도 할 일이 없다.

최근엔 항상 그랬다.

로이드는 자신을 광산 공사에 데려가지 않았다.

대신 '모처럼 쉬면서 좀 놀라'면서 이렇게 자신을 저택에 남겨두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미안. 해바라기씨가 좀 모자라서. 방울이에게 사용하는 거만 해도 빠듯할 거 같아.'

공사에 동원되려면 빨간 해바라기씨를 먹어야 한다. 그렇게 덩치를 키워야 한다.

그런데 변신용 해바라기씨 세트에는 수량의 한계가 있었다.

빨간색과 파란색.

각각 하나씩을 구매하는 데에만 1 RP가 사용된다고 했다.

그래서 뽀동이가 저택에 남게 되었다.

아무래도 땅굴을 안전하게 파는 데는 방울이가 더 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너 위험해질까 봐 걱정되기도 해서. 갱도가 너한텐 좀 좁을 거 같기도 하고. 자칫 무너지면 크게 다칠 수도 있으니까. 알겠지?'

...라고 자신을 달래던 로이드.

조금 서운하기는 했다.

하지만 불평할 수는 없었다.

자신을 걱정하는 로이드의 마음이 진심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 뽀동이는 팔자에 없던 백수 생활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뽀동... 뽀도동...."

이쪽으로 뒹구르르.

저쪽으로 뒹구르르.

쉬어서 편하긴 했다.

그런데 너무 심심했다.

아무도 자기랑 놀아주지 않았다.

하는 일이라곤 종일 왼쪽으로 한 바퀴, 오른쪽으로 한 바퀴를 뎅구르르 굴러다니는 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20일째를 넘기자 도저히 할 짓이 아니었다!

"...뽀동! 뽀도도도도도!"

뽀동이는 동그란 고개를 흔들었다.

찰떡처럼 빵빵한 볼살을 찰랑거렸다.

문득,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뽀동!"

뭐라도 해야 한다.

이대론 심심해서 죽을 거 같다.

그러니 일단 밖으로 나가자.

결심한 뽀동이는 손수건을 박차고 몸을 일으켰다.

영차영차 테이블 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출입문으로 뽈뽈뽈 달려갔다.

방문을 뽀잇뽀잇 기어올랐다.

문고리를 끙차 잡아당겼다.

딸칵.

문이 열렸다.

복도로 나섰다.

"뽀동?"

로이드 없이 혼자 여기까지 나오는 건 처음인 뽀동이였다.

기다랗게 이어진 복도를 보자 두려움보다는 모험심과 호기심이 살랑살랑 피어올랐다.

"뽀동!"

일단 아무 데나 가보자.

뽀동이는 복도를 따라 도도도 뛰어갔다.

계단을 만나면 내려갔고, 하녀들이 지나가면 그 뒤를 쫄쫄쫄 따라갔다.

그렇게 얼마나 쏘다녔을까.

어느새 뽀동이는 저택 안뜰로 나오게 되었다.

"뽀도옹...."

햇볕이 따스했다.

살랑 불러오는 바람 속 풀냄새가 좋았다.

어디선가 달콤한 꽃향기도 날아왔다.

뽀동이의 걸음이 꽃향기를 따라갔다.

그러다가 마침내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어머?"

위쪽에서 들려오는 고운 목소리.

뽀동이는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그리고 프론테라 남작 부인과 눈이 마주쳤다.

"...생쥐?"

"뽀동?"

"생쥐가 아니라고?"

"뽀동!"

뽀동이의 고개가 끄덕끄덕.

꽃밭을 손보던 프론테라 남작 부인이 흙 묻은 장갑을 벗었다.

"이제 알겠구나. 넌 우리 아들이 소환했던 그 커다란 소환수야. 맞니?"

"뽀동!"

"그런데 어쩌다 꽃밭까지 오게 된 거니?"

"뽀도동? 뽀동."

"음, 미안한데 네가 하는 말을 나는 알아들을 수 없단다. 그럼 혹시... 날 도와주러 온 거니?"

"뽀동?"

"그렇구나. 역시 그런 거였니?"

"뽀도동?"

뽀동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작 부인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이렇게 고마울 데가. 마침 요즘 생쥐 몇 마리가 자꾸 꽃밭을 망쳐서 고민이었단다."

"뽀동?"

"넌 그들과 친척이지?"

"뽀도동? 뽀동?"

"혹시 가능하다면 그들을 찾아가줄 수 있겠니? 그 아이들에게 꽃밭을 망치지 말아달라고 나 대신 부탁을 좀 해주렴."

"뽀동?"

"해줄 수 있겠니?"

"...뽀동!"

뽀동이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생쥐들과 친척이 아니다.

만나서 말이 통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을 향해 웃어주는 남작 부인의 목소리가 너무나 따스했다.

그리고 일단, 저 부탁을 들어주면 당분간 심심하지 않을 것 같았다!

"뽀도동! 뽀동!"

뽀동이가 뽀당당하게 두 발로 일어섰다.

자기만 믿으라는 듯, 밥풀 같은 손바닥으로 제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그렇게 남작 부인의 퀘스트(?)를 수락한 뽀동이는 힘차게 풀밭을 향해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