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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근손실을 막는 건축물 (2)

"어, 석빙고 만들어줄 거야."

휘이이잉.

황야의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이 눈가로 모래 입자를 실어 왔다.

그 침략 앞에 로이드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살짝 경사가 진 공터를 이리 보고 저리 살폈다.

"석빙고가 뭡니까?"

그의 예상대로 하비엘의 반문이 날아왔다.

절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빙고."

"예?"

"아니, 그건 아니고. 너 혹시 아이스 하우스(ice house)라고 들어봤어?"

"들어본 적 없습니다."

"응, 그렇겠지."

석빙고.

아이스 하우스.

모두 더운 계절에 얼음을 보관했던 역사 속 시설이다.

석빙고는 조선에서, 아이스 하우스는 유럽에서 그러했다.

그뿐만 아니라 중동의 야즈드(Yazd) 지방에는 모아예디(Moayedi)라는 옛 얼음 보관 시설이 아직까지 온전히 남아 있기도 했다.

즉, 얼음을 보관하는 시설은 지구촌 어딜 가나 옛적부터 제법 있었다.

하지만 소설 철혈의 기사의 배경이 되는 이곳 로라시아 대륙은?

조금 사정이 달랐다.

'마법 때문에 저런 시설이 발전하지 못했어.'

어차피 여름철에 얼음을 찾는 이는 부유한 계층이다.

그리고 이 세계에는 부유한 이들을 위해 힘껏 봉사할 마법사가 넘쳐났다.

한여름에도 주문 한 방이면 얼음 동동 띄운 샹그리아를 즐길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야. 내가 이곳 역사 최초로 그런 걸 만들어보려고."

"오크들을 위해서 말입니까?"

"어."

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경사진 대지는 석빙고를 만들기에 딱 적당해 보였다.

그는 오크 부락의 부족원 숫자, 그들의 식사량, 평균적으로 사냥해 오는 사냥감의 규모를 대강 계산했다. 그 크기에 맞추어 건설할 석빙고의 면적을 가늠해보았다.

'조선 시대 것보단 확실히 크게 만들어야겠네.'

그렇게 측량 스킬과 설계 스킬의 도움을 받는 동안 문득, 아까의 일이 떠올랐다.

"하체 운동 넘기는 대신에 서늘한 식량 보존고, 제가 지어드릴 테니 전사로 인정해 주시죠."

"꾸익?"

이쪽이 꺼낸 말에 족장 아쿠쉬가 보인 첫 반응은 두툼한 눈두덩을 한껏 치켜드는 것이었다.

"식량 보존고라니, 꾸익?"

"말 그대롭니다. 식량을 보존하는 창고입니다."

"그걸 건설하면 뭐가 달라지나, 꾸익?"

"예. 달라집니다."

"어떤 게, 꾸익?"

"사냥한 고기가 좀처럼 상하지 않을 겁니다."

"꾸익? 그게 가능한가, 꾸익?"

"당연하죠."

믿기지 않는다는 듯 미간에 주름을 만드는 아쿠쉬.

그런 그를 향해 싱긋 웃었다.

이럴 때는 자신감을 보이는 게 중요하다.

그런 사실을 가슴에 새기며 로이드가 말했다.

"상상해보십시오. 힘껏 사냥한 커다란 몬스터 고기를 절반도 못 먹었는데 벌써부터 썩어가는 광경을. 그렇게 먹지도 못하고 버려야 하는 자연산 단백질 덩어리의 슬픔을."

"...꾸이이익! 화가 난다, 꾸익!"

"그렇지요?"

"그렇다, 꾸익!"

"그런데 그걸 신선하게 유지해서 하나도 안 버리고 다 먹을 수 있는 겁니다. 그 탱탱한 고기가 모조리 족장님의 입으로 들어가 양분이 되어 근육으로 변하는 겁니다. 어때요, 멋지지 않습니까?"

푸흥!

족장 아쿠쉬는 대답 대신 거친 콧김을 뿜어냈다.

상상만 해도 짜릿했다.

"그게 정말인가, 꾸익?"

"당연히 정말이지요. 제가 누굽니까?"

"은인이다, 꾸익!"

"그렇지요?"

"그렇다, 꾸이익!"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절 믿어주셔서. 그럼 일단 공사 발주계약서부터 하나 쓰도록 할까요."

"공사 발주... 계약서, 꾸익?"

"예. 이런 일에는 계약서가 제일 중요하니까요. 하비엘?"

로이드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이런 상황에 제법 익숙해졌는지, 하비엘이 종이와 펜을 냉큼 건네주었다.

로이드는 건네받은 종이에 간단한 양식의 발주계약서를 슥슥 썼다.

"원래 이런 겁니다. 그냥 주먹구구로 공사를 결정하고 시작하면 항상 권리관계가 모호해져서 뒷말이 나오는 법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이입니까? 그런 일이 생기면 서로 슬프지 않겠습니까?"

"...어, 무슨 말인진 모르겠지만 어쩐지 그럴 거 같다, 꾸익."

"잘 생각하셨습니다. 역시 현명하십니다. 자, 여기."

"꾸익?"

"이 아래쪽에 서명하시죠."

"서명, 꾸익?"

"위대한 족장님이 이 계약서의 내용에 동의한다는 표식을 남기는 겁니다."

"표식 좋다! 그런 거 잘한다, 꾸익!"

아쿠쉬가 농구공만큼 큰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대로 발주계약서를 향해 내리쳤다.

쿠아-앙!

발주계약서가 아예 바위에 틀어박혔다.

무려 10센티미터 깊이로.

'헐.'

괴물.

이건 하비엘과 또 다른 의미에서의 괴물이었다.

새삼 오크 족장이 얼마나 강력한 존재인지 실감이 갔다.

'하긴. 원작에서 하비엘도 어렵게 제압했던 상대니까.'

그때의 하비엘은 갓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상태였다.

즉, 눈앞의 이 근육 떡대 오크 족장은 어림잡아도 소드익스퍼트 상급과 소드마스터 사이쯤의 전투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었다.

'심지어 순수한 육체적인 힘만으로 그래. 마나를 전혀 쓸 줄 모르는데도 말이야.'

생각할수록 무시무시한 힘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눈앞의 이 근육 괴물은 내 편이다.

로이드는 싱긋 웃었다.

"현명하신 판단에 감사드립니다, 족장님. 이제부터는 저만 믿어주시면 됩니다."

"물론이다! 나 아쿠쉬는 인간 로이드를 믿는다, 꾸이익!"

"네, 맡겨주세요."

로이드는 바닥에 틀어박힌 계약서에 자신의 서명도 남겼다.

계약서의 내용은 대강 이러했다.

[로이드 프론테라는 오크 부족에게 석빙고를 만들어준다.]

[오크 부족은 로이드 프론테라를 전사로 인정함과 동시에 공사 대금을 지급한다.]

[공사 대금은 부락에서 현재 사용 중인 운동기구로 대신한다.]

[이에 로이드 프론테라는 석재를 가공하여 만든 같은 무게의 새 운동기구를 부락에 제공한다.]

...였다.

즉, 서로가 손해 볼 것이 없는 내용의 계약서였다.

'아니, 손해 볼 것 없는 게 아니라 서로 윈윈이지.'

지금 부락에서 운동기구로 사용하는 귀중품과 금화 등은 어차피 오크들에겐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그걸 챙겨오는 대신에?

더 쓰기 편한 석제 운동기구를 만들어주면 오크들에게도 좋은 일일 것이다.

게다가 저들은 음식을 보관할 대형 냉장고인 석빙고를 얻게 되니, 그야말로 서로 이득이 되는 거래인 셈이었다.

"...라는 거니까, 신뢰를 지켜야 해. 잘 만들어줘야지. 자, 입구는 이쪽으로 두면 될 것 같고."

한편으로는 측량을 진행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아까까지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로이드가 말했다.

사실 그는 이번 석빙고도 정말 제대로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일은 신용이 제일 중요하니까.'

상대가 단순해 보인다고, 만만해 보인다고 쉽게 보면 안 된다.

당장 눈앞의 이득을 보겠다고 공사를 허술하게 진행했다간 나중에 피를 본다.

특히 저런 근육 괴물을 상대로는 더더욱 그렇다.

'오히려 이럴 때 신뢰를 지키는 게 길게 봐서 무조건 이득이야.'

오크 부족은 강대한 세력이었다.

전사 개개인의 전투력이 어마어마했다.

게다가 전쟁이 벌어졌다 하면 이 일대 수십 개의 부락이 순식간에 연합을 구성한다.

어지간한 국가의 정예 군단에 필적하는 군대가 조직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참에 제대로 점수를 따는 게 중요해.'

어쩌면 저들에게서도 RP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는 석빙고의 측량과 설계에 최선을 다했다.

'출입구는 남쪽으로. 얼음과 식량이 보관될 주실(主室)을 서늘한 북쪽으로.'

로이드는 전통의 조선식 석빙고를 기본 모델로 삼았다.

나름 대학 새내기 시절에 전통 건축물 관련 동아리 활동을 한 경험이 있었다.

그때의 경험이 지금 큰 도움이 되었다.

'그나저나 여기, 무척 건조하네.'

이곳은 건조한 황야였다.

석빙고를 지었을 때 조선 시대의 것보다도 효율이 더 괜찮을 듯했다.

그 밖에도 그는 석빙고가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 수많은 요소들을 꼼꼼하게 점검하고 배치했다.

'일단 더운 공기를 위로 보내는 게 중요해.'

전체적인 구조는 반지하였다.

딱 절반을 지하로 묻었다.

나머지 절반은 지상으로 불룩 솟게 구성했다.

그렇게 천장을 아치형으로 둥글게 만들어주었다.

열기가 최종적으로 빠져나갈 구조도 잊지 않았다.

'둥근 천장을 이루는 홍예(虹霓) 사이로 움푹하게 들어간 요철 공간을 만들어야 해. 그곳에 더운 공기를 가두어야 하니까. 이렇게 움푹 팬 지점의 중심점마다 환기구도 만들어 주고. 이러면 열기가 석빙고 밖으로 말끔히 배출되지. 환기구 위에는 햇볕과 빗물을 막아줄 덮개돌도 이렇게 두면... 됐다.'

츠츠츠츠츠...!

그의 시야에만 보이도록 홀로그램처럼 떠오른 입체 설계 화면.

그 속에서 천장 구조의 설계가 착착 이루어졌다.

거기에 그는 석빙고 내부의 바닥을 경사지게 조성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안 그러면 얼음이 자연적으로 녹으면서 생기는 물이 바닥에 고이고, 그 웅덩이가 나머지 얼음이 녹는 걸 돕게 되니까.'

출입구가 있는 남쪽을 높게, 주실 방향인 북쪽을 낮게 설계했다.

그리고 북쪽 끝에는 물이 배출될 배수로를 만들었다.

그 밖에도 열기를 배출하고 냉기를 지켜줄 구조를 꼼꼼히 챙겼다.

출입문 옆에는 옹벽을 남북으로 두었다.

겨울철 산맥을 따라 내려올 차가운 바람이 옹벽에 부딪쳐 석빙고 내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유도하는 구조였다.

단열재가 들어갈 자리도 충분히 확보했다.

그렇게 나흘이 지났을 무렵.

마침내 설계가 끝났다.

"후우, 도면도 오케이."

설계 스킬이 중급에 오르며 얻은 옵션 기능으로 설계 도면까지 깔끔하게 뽑아냈다.

석빙고 시공을 위해 해결해야 할 다음 단계는 건설 자재 확보였다.

'천장의 방수층을 형성할 진흙과 석회는 여기서 조달할 수 있어. 단열재로 쓰일 왕겨와 밀짚, 톱밥은 공병대 병사 열 명을 영지로 돌려보내서 공수해오게 시키면 돼. 외부에 최종적으로 덮을 잔디는 이 일대에 자생하는 가시풀로 대체하면 될 거야. 문제는 딱 하나, 화강암이지.'

로이드의 시선이 서쪽을 향했다.

프론테라 영지와 이곳 황야 사이에 자리한 동부산맥.

그곳 동쪽 사면 기슭이 아침 햇살을 받아 환히 빛나고 있었다.

일부 드러나 있는 화강암 암반이었다.

'석빙고를 시공하려면 저 화강암이 반드시 필요해.'

화강암은 규장질 마그마가 천천히 식으면서 생성된 암석이었다.

그만큼 단단하고 암석이 균질했다.

즉, 내부 구조에 결이 없기에 소재가 좀처럼 뒤틀리거나 쪼개지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현대 세계에서도 정밀성을 요구하는 반도체 장비나 측정 장비의 받침돌로 화강암을 많이 쓰지.'

그렇듯 화강암은 단단한 데다 변형마저 없었다.

오랜 세월을 버텨야 하는 건축물에 유리했다.

특히 석빙고처럼 긴 세월 단열과 방수 성능을 요구하는 건축물에는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화강암이라고 마냥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가공하기가 너무 어려워.'

단단한 만큼 깨기 힘들다.

심지어 돌에 결이 없어서 원하는 방향으로 쪼갤 수도 없다.

즉, 원하는 크기와 모양으로 채석하거나 가공하기가 극단적으로 어려운 암석이 바로 화강암이었다.

'우리나라 옛날 불상이 투박하게 생긴 이유도 그래서고.'

화강암투성이인 한반도.

덕분에 옛 조상님들은 화강암을 말 그대로 '하나하나 깎아서' 다루어야 했다.

길고 긴 시간을 들여 생고생을 해야 했던 것이다.

물론 로이드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자신의 영지도 아닌 오크 부락이었다.

남의 땅에 석빙고 하나 지어주겠답시고 긴 시간을 소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였다.

내심 해결책을 떠올린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말없이 뒤를 지키던 은발의 기사를 불렀다.

"어이, 하비엘?"

"부르셨습니까."

"어, 불렀지. 뭐 하나만 좀 물어보자."

"말씀하십시오."

"너, 검으로 돌덩이 벨 수 있지?"

"예."

"얼마나?"

"일검에 1미터 남짓까지는 성공해봤습니다."

"1미터짜리 바위를?"

"예."

하비엘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운 일이었다.

쇠로 만들어진 검이라 해도 결국엔 몇 킬로그램 남짓한 날붙이일 뿐이다.

한데 그걸로 1미터나 되는, 족히 톤 단위 무게에 가까울 바윗덩이를 단숨에 일도양단할 수 있다니.

하지만 로이드는 그런 하비엘을 보며 오히려 코웃음 쳤다.

"그래? 생각보다 별로네."

"...."

"난 또 한 번 검으로 베면 몇 미터씩 잘리고 구멍 나고 난리부르스 나는 줄 알았네, 쯧."

"...말씀하신 경지는 어지간한 소드마스터에게도 버거운 일일 것 같습니다만."

"그래애?"

"예."

"네가 못하니까 괜히 그렇게 핑계 대는 건 아니고?"

"아닙니다."

"아니야?"

"예."

"정말?"

"그렇습니다."

이쪽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고 생각한 걸까.

대꾸하는 하비엘의 목소리 온도가 평소보다 약간 더 쌀쌀해졌다.

"지금 로이드 님께서 무슨 생각으로 제게 그런 질문을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자신의 지위를 악용하여 제게 무리한 요구를 하려는 것이라면 미리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오호라. 파업 선언?"

"제 능력으로 해낼 수 없는, 불가능한 요구를 들어드릴 수가 없노라 미리 말씀드리는 것일 뿐입니다. 그걸 무시하고 고집을 부린다면 서로가 불행해질 테니까요."

"서로가 불행해진다?"

"그렇습니다."

"능력이 닿지 않는 일을 억지로 시킨다면?"

"역시 그렇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해봐."

"지금 로이드 님께서는 석빙고라는 것을 짓기 위해 석재를 구하려 하고 계십니다."

"어, 맞아."

"그리고 로이드 님은 그 석재 구하는 일에 절 써먹으려 하고 계시지요. 제 검으로 돌을 자르는 일을 시키려고 말입니다. 그걸 일찌감치 예상했기 때문에 드린 말씀입니다."

"그래서 팔자에 없는 채석공 신세가 되는 건 거부하겠다?"

"애초에 검으로 하기에는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쯧, 건방지네."

"감사합니다."

하비엘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마 이번 기 싸움에선 이겼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로이드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나름 승리를 확신하고 있을 하비엘을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툭, 던졌다.

"만약 내가 가능하게 만들어 주면?"

"예?"

"검 한 자루로 바위에 몇 미터씩 구멍을 내고 폭파할 수 있는 기술을 내가 가르쳐주면, 그럼 내 요구 들어줄 거야?"

"그게 무슨...."

하비엘이 말끝을 흐렸다.

로이드는 싱긋 웃었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소설 철혈의 기사 중반부에 하비엘이 완성한 어느 파괴적인 기술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그걸 하비엘에게 조기교육시킬 생각이었다.

33화. 광속 시공은 근육으로 (1)

"검 한 자루로 바위에 몇 미터씩 구멍을 낸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하비엘이 눈썹을 찡그렸다.

이쪽을 향하는 그의 눈빛.

뭔 헛소리를 하느냐는 불신의 기색이 가득했다.

"조금 이해가 안 됩니다. 솔직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솔직히?"

"예."

"그건 좀? 너 또 필터링 없이 팩트로 후드려패려는 거지?"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는 로이드 님을 폭행한 적이 없습니다만."

"있는데?"

"언제 말입니까?"

"개미굴에서. 주먹으로 내 명치 후려친 적 있잖아?"

"그건 물론...."

"아, 그 뒤엔 정신 차리라고 3연 따귀도 날렸다. 그치?"

"두 대였습니다. 세 번째는 때리기 직전에 멈췄지요. 로이드 님이 정신을 차리셔서."

"아하, 그래서 아쉬우셨다?"

"물론입니... 아니, 아닙니다."

"...."

"어쨌건 본론으로 돌아가 제 생각을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검으로 그런 일을 해냈다는 말을 저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없어?"

"예. 소드마스터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래?"

"예."

사실이었다.

고작 검으로 바위에 수 미터 깊이의 구멍을 낸다니.

심지어 그 구멍을 통해 바위를 폭파한다니.

그런 일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역사서에 남은 수많은 소드마스터들의 일화를 보아도 그랬다.

'남들보다 발전은 늦었지만 만년에는 역대 최강급이라 불렸던 건국왕 미카엘 경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기록으로 남은 미카엘 경의 소드 오러는 약 1미터. 검의 길이에 오러를 더한다 해도 2미터 조금 넘는 범위를 베거나 파괴할 수 있었을 뿐이야.'

소드 오러.

고밀도로 집중된 마나를 검에 덧씌우는 기법.

소드마스터의 상징이랄 수 있는 기술이었다.

하지만 그 파괴적인 기술에도 한계는 존재했다.

오러의 범위를 넘어서는 거리의 적을 공격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검은 근거리 무기니까.'

아무리 위력적인 공격이라도 직접 다가가서 베고 찔러야 한다.

마법사가 마법을 난사하듯 원거리의 적을 공격할 수는 없다.

그것이 소드마스터의 특성이자 약점이었다.

"한데 로이드 님께서는 그런 상식을 무시하고 계십니다. 존재하지도 않을 상상의 기술을 제게 가르치겠다 공언하고 계십니다. 이는 마치...."

"내가 미친 소리를 하는 것 같아?"

"예."

하비엘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명백히 그렇습니다. 미쳤거나, 돌았거나, 혹은 정신이 나간 사람이나 내뱉을 터무니없는 발언이랄까요."

"어이, 건수 잡은 김에 딜 박는 거 너무 티 나는데?"

"딜이 뭡니까?"

"후우, 됐다. 어쨌건-"

로이드가 피식 웃었다.

"그런 기술, 내가 가르쳐주면 어떡할 거냐."

"정말로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렇다니깐? 대답부터 해봐."

"만약 로이드 님의 호언장담이 사실이라면-"

하비엘이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땐 로이드 님의 뜻을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정말? 내가 시키는 대로 일을 하시겠다?"

"물론입니다."

하비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로이드의 말이 사실이라면 손해 볼 것이 없었다.

동시에 그는 생각했다.

저 제안, 허세일 거라고.

그런 허무맹랑한 일 따위, 가능할 리가 없다고.

"좋아. 합의한 거다. 그럼 이제부터-"

로이드가 손을 내밀었다.

하비엘의 어깨를 툭, 짚었다.

그리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검을 뽑고, 마나 써클의 회전을 최대치까지 올리고, 그 상태에서 써클 두 개를 강제로 겹쳐서 충돌시켜 볼래?"

"...예?"

"아, 그 과정에서 나머지 써클은 충돌에 참여시키면 안 돼. 심장을 보호해야 하거든. 안 그러면 심장이 충격으로 트리플악셀 뛰다가 마비될 거야. 한 큐에 요단강 건너는 거지."

"지금 무슨 말씀을...."

"일단 해보라고."

"여기서, 지금 말입니까?"

"어."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비엘은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그게 가능한 건가.'

상식이 파괴되는 기분이었다.

몸의 일부 같은 아스라한 심법이었다.

그럼에도 이런 시도는 그에게 낯설기만 했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방식의 시도였다.

아니, 가능할 거라고 여겨본 적조차 없었다.

당연했다.

각각의 마나 써클은 출력을 올릴수록 회전이 빨라진다.

회전이 빨라질수록 일종의 척력을 지니게 된다.

같은 극의 자석처럼 서로를 밀어내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억지로 충돌시키라니.

"괜찮아. 나머지 써클로 심장만 단단히 보호하면 안 죽어."

"...."

로이드의 말이 너무 태연했다.

그래서 더 신뢰감이 떨어졌다.

물론 하비엘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이곳과는 다른 공간과 시간 속의 또 다른 자신.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의 자신이 이 기술을 창안했다는 것을.

이 기법이야말로 소설 속 자신을 로라시아 대륙 역사상 최강의 기사로 만들어 준 기술 중 하나라는 사실을.

'물론 그건 지금으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 될 예정이었지만.'

로이드는 문득, 소설 내용을 떠올렸다.

발파(confined blasting).

이 기법을 개발하던 당시의 하비엘은 갓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상태였다.

더불어 네 번째의 써클을 장착하기도 했다.

소드마스터와 쿼드라 써클의 조합.

그것만으로도 역대 최강 기사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조합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강력함을 손에 넣고도 그는 힘의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나마란의 장벽.

사악하고도 강력한 방어 마법이 걸린 성벽이었다.

그 성벽 뒤에 그가 구해야 할 수천의 피난민이 있었다.

오러를 씌운 검으로도, 쿼드라 써클의 마나 증폭으로도 장벽을 깰 수 없었다.

그 상태에서 시간이 헛되이 흘렀다.

사악한 마법사가 공언한 날짜가 다가왔다.

이대로면 수천의 피난민이 마법사가 벌이는 의식의 제물이 될 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밝은 운명의 날.

장벽을 뚫고자 고군분투하던 하비엘은 최후의 공격을 시도한다.

결사적인 시도 끝에 자신도 모르게 두 개의 써클을 충돌시키게 된다.

그 스스로도 상상해보지 못한 기법, 발파를 처음으로 사용한 순간이었다.

상상을 초월한 그 위력에 나마란의 장벽이 단숨에 허물어진 순간이기도 했다.

'그 뒤로 발파는 하비엘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주력기가 되지.'

말 그대로 아스라한 심법과 함께 철혈의 기사를 대표하는 기술로 자리매김했다.

한데 그걸 지금의 자신이 이 녀석에게 가르친다니.

한편으로는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나도 나중에 트리플 써클이 되면 꼭 익혀야겠어.'

지금 자신은 익히고 싶어도 불가능했다.

충돌시킬 두 개의 써클.

그 외에 심장을 보호할 써클이 하나는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즉, 발파는 최소한 트리플 써클의 단계에 올라야만 익힐 수 있는 기술이었다.

'물론 트리플 써클이라고 해서 쉬운 건 아니겠지만.'

그건 하비엘이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가 피식 웃었다.

"음, 아직도 망설이고 있네. 내 말이 그렇게 안 믿기냐?"

"...."

"혹시 무섭냐?"

"물론 아닙니다. 다만-"

"다만?"

"약속을 하나 해주셔야겠습니다."

"으음, 약속이라니?"

"로이드 님이 알려준 그 새로운 기술 말입니다."

"응."

"만일 그게 거짓말이거나 저를 농락하려는 고약한 장난이라면...."

"장난이라면?"

"앞으로 자장가 서비스를 무상, 무한으로 연장해주시기 바랍니다."

"허럴."

생각보다 대담한 제안이었다.

동시에 녀석이 내심 자장가 서비스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는 제안이기도 했다.

"너, 이제 보니까-"

로이드의 눈꼬리에 음흉한 눈웃음이 배었다.

"자장가 서비스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몸이 되셨구만?"

움찔.

하비엘의 어깨가 아주 희미하게 꿈틀거렸다.

로이드의 말이 이어졌다.

"어떡하냐? 확 티가 났네?"

"지나친 추측이십니다."

"어허. 눈 똑바로 보고 말하세요?"

"로이드 님의 시선을 피한 적은 없습니다만."

"내 눈이 콧구멍에 달렸냐?"

"...."

"됐고. 약속할게."

"정말이십니까?"

"어. 내 말이 거짓이거나 널 농락하려는 거였다면 자장가 서비스, 앞으로 무한 리필이다. 심지어 공짜로."

"약속하신 겁니다."

"알았으니까 해보기나 해. 아까 알려준 방법은 안 까먹었지?"

"예."

스르릉.

하비엘이 롱소드를 뽑았다.

로이드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처음 시도라서 조금 걱정은 되지만... 하비엘이라면 이걸 연습하다가 잘못될 일은 없겠지.'

아스라한 심법에 있어선 이쪽보다 몇 단계나 앞서 있는 하비엘이었다.

트리플 써클을 보유했다.

마나 써클 하나하나의 컨트롤도 뛰어났다.

장인처럼 능란하고 세련된 경지에 다다라 있었다.

처음 알려주는 개념을 시도하는 것이긴 해도, 그것 때문에 심장에 타격을 받을 일은 없으리란 믿음이 갔다.

'물론 최소 며칠 정도는 잔뜩 고생하겠지만.'

몸속, 그것도 심장 근처에서 고속으로 회전하는 마나 써클을 충돌시키는 기법이었다.

당연히 신체에 엄청난 충격과 부담이 가해질 것이다.

제아무리 검술의 천재라 해도 익숙해지려면 그만큼 시간이 걸릴 터.

'그러니 빨라야 일주일? 어쩌면 보름 이상 걸릴 수도 있어. 그럼 채석 작업을 그때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하고 시공 일정을 잡아야....'

투컥!

"성공했습니다."

"...."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입을 멍하니 벌렸다.

몇 발짝 앞에 있는 하비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조금 더 멀리 던졌다.

그곳 땅바닥에 방금 전까진 없던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걱정했던 것만큼 어렵지는 않군요."

"...."

무려 10미터의 기다란 고랑이 파여 있었다.

그냥 깔짝깔짝 겉에서부터 판 흔적이 아니었다.

지면 안쪽에 생긴 기다란 구멍.

그 내부에서부터 폭발이 일어나며 땅거죽이 일직선으로 뒤집힌 흔적이었다.

"저기, 하비엘?"

"예, 로이드 님."

"너 혹시 괴물이세요?"

"아닙니다. 전 물론 인간입니다만."

"...."

괴물, 맞는 거 같은데.

혹은 전설로만 존재하는 줄 알았던 상상의 생물인 엄마 친구 아들이거나.

로이드는 황당한 심정으로 하비엘을 보았다.

하비엘이 한쪽 입술만으로 우아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로이드 님. 절 놀리신 게 아니었군요."

"그걸 이제 알았냐?"

"예."

"허럴. 뻔뻔한 거 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생각해본 적도 없던 개념이라서."

"그럼 이제는 좀 납득이 가냐?"

"예. 다만-"

"다만? 뭔데 또."

"로이드 님이 어떻게 이런 절묘한 기법을 생각하신 건지 궁금해졌습니다."

"왜? 난 이런 거 떠올리면 안 되냐?"

"물론 그건 아닙니다만...."

하비엘이 뒷말을 얼버무렸다.

로이드가 목에 힘을 빳빳하게 주었다.

"됐고. 약속이나 지켜. 내가 너 놀리는 거 아니라는 건 알겠지, 이제?"

"예."

"그럼 내가 시키는 일 순순히 하는 거다?"

"어떤 일이라도 기꺼이 하겠습니다."

쌀쌀맞긴 해도 한다면 확실히 하는 녀석.

하비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딩동.

[하비엘 아스라한이 당신의 가르침에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비엘 아스라한의 당신에 대한 호감도가 +3 상승하였습니다.]

[하비엘 아스라한과의 현재 관계 : -11]

[주요 인물과의 약간의 관계 개선으로 54 RP를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561]

'좋아.'

녀석이 이번 일을 마음으로 승복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제는, 본격적인 채석 작업을 위해 녀석의 성능(?) 테스트를 할 때였다.

"자, 이제부터 넌 인간 다이너마이트의 역할을 할 거야."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오크 부락에서 서쪽으로 한참.

산맥 기슭에 드러난 화강암 지대에서 로이드가 커다란 붓을 들었다.

그리고 품에 안고 있던 항아리에 푹 담갔다.

찰박.

오크들에게 받아온 붉은 물감이 붓에 스몄다.

로이드는 붉은 물감 묻은 붓을 들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바닥에 쿡쿡 찍었다.

"여기. 그리고 여기. 또 여기."

푹푹푹!

바닥에 주먹 크기의 붉은 점이 푹푹 새겨졌다.

"내가 표시하는 곳들 보이지?"

"예. 혹시 거기에 검을 찔러 넣으면 되는 겁니까?"

"그래. 똘똘하네. 찌르고, 마나 써클 충돌시켜서, 쾅. 알지?"

"알겠습니다. 그런데 정해진 깊이는 있습니까?"

"응. 10미터."

"10미터요?"

"네가 지금 수준에서 만들 수 있는 가장 깊은 구멍이잖아. 그렇지?"

"예."

"그 깊이로 일정하게 찔러. 그리고 터뜨려. 전력으로."

로이드가 주먹을 쥐었다가 보란 듯이 펼쳐 보였다.

"애초에 그 깊이로 터뜨릴 걸 계산해서 찌를 자리 표시하고 있는 거야. 대신 다 터뜨리고 나면 나 있는 쪽으로 재빨리 도망쳐야 된다? 안 그럼 무너지는 바위에 깔려서 꿍, 아야 해요. 알았지?"

"...알겠습니다."

하비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드는 폭파 예정지에서 수십 미터 물러났다.

하비엘을 향해 두 팔을 높이 들었다.

"셋! 둘! 하나! 파이어 인 더 홀!"

크게 외쳤다.

1초 뒤, 하비엘이 검을 드는 게 보였다.

이윽고 녀석의 모습이 사라졌다. 아니, 흐릿해졌다. 귀신같은 속도로 움직이며 검을 바위로 쿡쿡 찔러넣었다.

그 모습을 보며 로이드는 주먹을 쥐었다.

'제발 성공해라.'

성공만 하면 채석 작업이 엄청나게 수월해진다.

스웨덴의 과학자 알프레드 노벨이 발명한 다이너마이트 덕분에 채석장에 혁명이 일어난 것처럼. 이전엔 원시적인 정과 망치, 지렛대로 수십 명이 끙끙대며 1년 동안 캐내던 돌을 불과 며칠 만에 캐낼 수 있게 된 것처럼.

하비엘이 현대적 발파 작업에 쓰이는 폭약인 ANFO, 혹은 뉴마이트의 역할을 해준다면 이번 달 안에 석빙고를 완공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라고 발파를 가르쳐준 거야. 제발 밥값 해라!'

로이드는 기원했다.

그리고 목격했다.

번쩍!

"...!"

거대한 화강암 암반 곳곳에서 섬광이 치솟았다.

그 직후, 하비엘이 질풍처럼 이쪽으로 달려왔다.

순식간에 도착해 바로 앞에 멈춰 섰다.

"다녀왔습니다."

철컥.

녀석이 롱소드를 검집에 갈무리했다.

그 순간-

투화하학!

화강암 지대로부터 맹렬한 충격파와 돌풍이 몰아닥쳤다.

거대한 암반 전체가 수십 조각으로 쪼개졌다.

거인이 쓰러지듯 무너졌다.

쿠르르르릉...!

지축을 뒤흔들며 달려오는 압도적인 굉음.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꾹 쥐었다. 확신했다.

"됐어."

마침내 모든 공사 준비가 끝났다.

이제는, 본격적인 시공을 시작할 차례였다.

34화. 광속 시공은 근육으로 (2)

"파이어 인 더 홀!"

후욱, 번쩍!

햇살 반짝이는 아침이었다.

로이드의 외침이 햇살을 갈랐다.

동시에 하비엘의 롱소드가 번득였다.

새하얀 섬광이 화강암을 파고들었다.

깊숙이 스몄다. 속에서 폭발했다.

쩌적!

수만 년을 한자리에서 버텨왔던 화강암도 내부에서 정교한 계산에 의해 터진 폭발에는 견디지 못했다.

한 방향으로 쩌적, 금이 갔다.

균열이 순식간에 확장되었다.

자체의 무게에 의해 무너졌다.

쿠르르릉!

거인의 주사위처럼 정육면체로 쪼개진 화강암이 떨어져 나왔다.

족히 수 톤은 될 큼직한 덩어리였다.

"잘했어, 하비엘!"

로이드가 엄지를 치켜들었다.

하비엘이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거기까지가 하비엘의 역할이었다.

다음은 환상종의 차례였다.

"자, 뽀동아?"

"뽀동?"

"이거 먹어볼래? 빨간 해바라기씨."

"뽀도동?"

"나 이거 너한테 먹이려고 특별히 주문한 거야. 한 세트에 빨간 거랑 파란 거 하나씩밖에 없는데 무려 1 RP나 주고 사야 한다?"

"뽀도옹?"

"그걸 어제 50개나 샀어. 50 RP나 쏟아부었어. 그런데 어쩌겠냐. 이게 다 너랑 방울이 먹여 살리려는 이 몸의 갸륵하고 눈물겨운 노력 아니겠어?"

"뽀도동?"

"그러니까 맛있게 먹어줄래?"

"뽀동!"

손바닥 위의 뽀동이가 빨간 해바라기씨를 냉큼 받았다.

단숨에 입에 넣고 오물거리기 시작했다.

그사이 로이드는 멀찌감치 물러났다.

그리고 뽀동이의 변신을 지켜보았다.

뚜아앙-!

10미터 덩치의 햄스터가 강림(?)했다.

"뽀도옹!"

"그래. 잘했어, 뽀동아. 자, 쓰담쓰담."

"뽀동!"

"오구오구. 그럼 저거 좀 옮겨줄래?"

로이드의 손이 정육면체 화강암 덩어리를 가리켰다.

"오크 마을까지 옮겨주면 돼. 어때? 해줄 수 있어?"

"뽀동!"

뽀동이가 동글동글하고 커다란 머리를 힘껏 끄덕였다.

녀석이 곧장 화강암 덩어리를 향해 뽕실한 궁둥이를 뚱실뚱실 씰룩이며 다가갔다. 앙증맞은 손을 뻗었다. 더 앙증맞은 입을 벌렸다.

그리고 화강암 덩어리를 입에 꼬깃꼬깃 밀어 넣었다.

"쁘등! 쁘드등!"

뽀동이의 한쪽 볼주머니가 정육면체 모양으로 빵빵해졌다.

"잘했어, 뽀동아. 그럼 저것도?"

"쁘드등!"

뽀동이의 나머지 볼도 정육면체 모양으로 뽕뽕해졌다.

로이드는 뽀동이의 등에 올라탔다.

"그럼 가자!"

"쁘등!"

양쪽 볼에 수 톤짜리 화강암 덩어리를 담고서도 뽀동이의 걸음엔 거침이 없었다. 덤프트럭처럼 오크 마을을 향해 으샤으샤 달려갔다.

그렇게 오크 마을로 화강암을 옮기면 다음 과정이 이어졌다.

다음 과정의 주역은 로이드 본인과 젊은 오크 전사 아로쉬, 그리고 20인의 공병대 병사들이었다.

"돌 왔다, 꾸익!"

"다들 준비!"

처처척!

석빙고 건설 예정지에서 대기하던 그들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화강암이 도착하자마자 정이며 망치, 곡괭이를 들었다.

그리고 뽀동이가 뱉어낸 화강암을 향해 맹렬히 달려들었다.

"부순다, 꾸이익!"

"우리도 지지 말자!"

"우오!"

오크 아로쉬와 20인의 공병대 병사들은 종일 땀을 흘렸다.

로이드가 화강암에 그려준 표식을 따라 암석을 덩어리로 쪼개고, 네모나게 다듬었다.

석빙고에 쓸 큼직한 화강암 벽돌을 만드는 것이었다.

물론 그동안 뽀동이도 쉬지 않았다.

"뽀동아?"

"뽀동?"

"여기 좀 파줄 수 있어? 여기부터 여기까지. 이만큼. 깊이는 7미터로."

"뽀도동?"

지지직!

로이드가 나뭇가지로 지면에 금을 그었다.

아무렇게나 그리는 것처럼 보이는 동작이었다.

하지만 사실 그가 그려 보이는 선은 석빙고의 설계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다.

설계 스킬의 옵션, '평면도 표시(2D)' 덕분이었다.

'아, 편하다. 나한테만 실시간으로 지면에 표시되는 평면도라니.'

미리 설계한 석빙고의 설계 모델을 불러오면 됐다.

그걸 실제 지형에 적용하면?

오직 자신에게만 보이는 평면도가 땅바닥에 새겨졌다.

덕분에 그가 긋는 선은 실제 석빙고 설계를 그대로 반영했다. 땅을 파야 할 범위와 깊이, 형태를 뽀동이에게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었다.

"자, 부탁해."

"뽀동!"

뽀동이가 두 팔을 치켜들었다.

바닥에 그려진 선을 따라 맹렬한 기세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호바바바밧!

잔뜩 메말라 단단한 황야의 땅이라 해도 예외가 없었다.

한 번의 손짓마다 땅이 퍽퍽 파였다.

엄청난 양의 먼지도 피어났다.

하지만 로이드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럴수록 땅을 파는 뽀동이의 옆에 머물렀다.

자신을 위해 일해 주는 뽀동이와 함께 기꺼이 먼지를 마셨다.

뽀동이가 땅을 판 자리를 매번 꼼꼼히 점검했다.

실제 설계와 오차가 있는지.

혹시 모자라거나 과하게 파지는 않았는지.

측량과 설계 스킬을 동시에 발동하며 구석구석을 철저하게 살폈다.

그리고 약간씩 오차가 있는 곳을 발견할 때마다 직접 삽을 들었다.

모자라게 판 곳은 세심하게.

과하게 파낸 곳은 탄탄하게.

파내고 메꾸었다.

단 1센티의 오차도 모두 직접 바로잡았다.

'터 파기. 이건 석빙고 건설뿐만이 아니라 모든 시공에서 가장 중요한 과정 중 하나니까.'

말 그대로 구조물의 토대를 만드는 일이었다.

이 과정에 소홀하면 나중에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그렇게 건축물에 문제가 생기면?

'신용이 떨어져. 나쁜 소문이 번져. 그러면 사업을 오래 유지할 수 없게 돼.'

고객과의 신용은 가장 중요했다.

상대가 인간이건 오크건 상관없었다.

오크 족장 아쿠쉬 또한 엄연한 고객이었다.

자신과 발주계약을 맺은 존재라면 누구나 고객이다.

그게 인간이 아니라도, 설령 오크나 몬스터라 해도 모두 고객으로 생각하자는 것이 로이드의 마음가짐이었다.

'장인정신? 아니야. 돈을 주니까! 돈 주는 사람은 전부 고객 킹객 갓객이지!'

그러니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야 했다.

최선을 다 쏟아부어야 했다.

지금의 공사대금, 그리고 미래에 줄줄이 들어올 돈을 생각하면 당연히 그래야 했다.

그렇게 로이드는 기꺼이 구슬땀을 흘렸다.

며칠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판에 박은 듯 숨 가쁜 나날이었다.

하비엘이 화강암을 발파해서 덩어리를 떼어냈다.

뽀동이가 화강암 덩어리를 현장으로 옮겼다.

오크 아로쉬와 병사들이 화강암을 손질했다.

로이드는 열심히 터를 다듬고, 점검했다.

그리하여 열흘이 지났을 무렵, 마침내 기초 공사가 끝났다.

"쉴 틈 없어! 계속 가자!"

"예엡!"

로이드가 직접 웃통을 벗고 나섰다.

공병대 병사들과 함께 화강암 벽돌을 날랐다.

미리 반듯하게 다져놓은 터 위에 벽돌을 줄줄이 깔았다.

대한민국의 현장에서 타일 작업을 보조했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때 깔던 타일보다 어마무시하게 크고 무겁지만!'

단단한 재질로 바닥 마감을 한다는 점은 같았다.

바닥을 탄탄하게 다지고.

수평이나 경사를 미리 설정하고.

그 계획에 맞게 단단한 돌을 덮는 것.

줄눈으로 돌 사이의 틈을 메꾸는 마무리까지 비슷했다.

여기선 타일 줄눈을 치는 대신 석회 섞은 진흙으로 방수처리를 한다는 점이 약간 다를 뿐이었다.

어쨌건 그때까지는 전체적인 시공이 원활하게 돌아갔다.

하지만 바닥면을 마무리하고 벽면의 돌을 올리기 시작하자 문제가 터졌다.

"끄히잉↗"

괴상해서 어쩐지 더 스펙터클하게 느껴지는 신음과 함께 어느 공병대원의 허리에서 뽀각, 소리가 났다.

"어이, 괜찮냐?"

"으으... 허리가 나간 것 같습니다."

"...."

벽에 돌을 올리다가 허리가 나간 병사는 며칠을 끙끙대며 누워 있어야 했다.

들어 올리기엔 커다란 화강암 블록이 너무 무거운 탓이었다.

공병대의 다른 병사들도 비슷한 처지였다.

하루하루 작업이 진행될수록 골골대는 인원이 늘어났다.

누군가는 손목 인대를 다쳤다.

또 누군가는 어깨가 나갔다.

지금까지 온돌방, 포장도로, 석탄 광산 건설 등으로 나름 노가다에 익숙해진 병사들이었음에도 그러했다.

결국엔 그나마 낑낑대면서라도 돌을 들어 올릴 사람이 로이드 혼자만 남게 되었다.

하비엘은 발파를 연달아 사용한 까닭에 며칠은 더 쉬어야 했다.

로이드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이건 조금 골치네. 오크 아로쉬라도 있으면 좀 써먹을 텐데. 아, 그 녀석. 하필이면 이럴 때 사냥 원정 나가는 건 뭐람.'

아쉽게도 아로쉬는 부락에 없는 상태였다.

터 다지기 시공이 마무리될 무렵, 부족원들과 함께 전사의 의무인 단체 사냥을 나간 까닭이었다.

'그렇다고 뽀동이를 여기서 거대화시킬 수도 없고.'

갓 바닥 시공을 마친 터였다.

아직 바닥에 깐 돌이 자리를 잡지 못했다.

수십 톤에 달하는 뽀동이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밟고 다닌다면 기껏 힘들게 깔아둔 바닥돌이 미세하게 어긋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럼 어떡한다.'

로이드는 해법을 고민했다.

돌이 너무 크고 무거운 게 문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돌의 크기를 줄일 수는 없었다.

'최소한 이 정도 두께는 되어야 단열이 될 테니까.'

지금 석빙고를 짓는 목적은 어디까지나 냉기의 보호였다.

외부의 열기를 차단하려면 반드시 통짜로 두꺼운 돌을 써야 했다.

'그냥 바닥돌이 자리를 잡길 기다렸다가 뽀동이를 쓰는 수밖에 없는 건가.'

병사들의 안전을 위해서는 차라리 그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데 그렇게 로이드가 고민에 잠긴 날 오후였다.

의외의 해법이 뜻밖의 방식을 통해 나왔다.

"꾸이익? 그거 그렇게 들면 안 된다, 꾸익!"

석빙고 시공을 시작할 때부터 삼삼오오 모여들어 구경하던 오크들이 있었다.

그들은 연신 꾸익거리며 뽀동이와 로이드가 터를 파고 다지는 모습, 바닥에 돌을 까는 모습을 구경하곤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로이드는 혼자 벽면 돌을 올리고 있었다.

물론 엄청나게 무거웠다.

하지만 아스라한 심법의 도움을 받으니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참에 근력 단련이나 하자 싶은 생각도 있었다.

한데 구경하던 오크들이 하나둘 참견을 하기 시작했다.

"인간! 그거 그렇게 드는 거 아니다, 꾸익?"

"예?"

돌을 올리느라 얼굴이 벌게져 있던 로이드가 고개를 들었다.

시공 현장 구덩이 바깥, 위쪽에서 어느 나이 지긋한 오크가 이쪽을 향해 말을 걸고 있었다.

"방금 뭐라고 하신 건지?"

"말 그대로다. 그렇게 들면 고립운동이 안 된다, 꾸이익."

"예에?"

"허리는 세우고 엉덩이를 뒤로 빼야 한다. 가슴도 펴고. 발목의 유연함을 살려야 원하는 부위의 근육에 제대로 자극을 줄 수 있는 법이다, 꾸이익!"

"저기, 저는 운동하는 게 아닌데요?"

"상관없다, 꾸익!"

"...."

그때부터였다.

함께 구경하던 다른 오크들도 한마디씩 보태기 시작했다.

"더 아래쪽을 잡아라, 꾸익!"

"호흡도 중요하다, 꾸이익!"

"올릴 때 더 빠르게, 꾸익!"

"하나 더, 꾸익!"

"...."

마치 태어나서 처음 간 헬스장에서 석유 엑기스 급으로 고이고 고인 헬스장 죽돌이 아저씨들에게 친절하게 둘러싸인 듯한 기분이었다.

급기야 상황은 그 아저씨(?)들이 이쪽의 지지부진한 모습에 직접 나서는 지경에 이르고야 말았다.

"크아아, 저 인간 답답하다, 꾸익!"

"왜 알려주는 대로 못 하는 거냐, 꾸이익!"

"우리가 시범을 보여주겠다, 꾸이이익!"

"잘 보고 배워라, 꾸익!"

열댓 명의 울끈불끈한 오크 아저씨들이 현장으로 쿵쿵 내려왔다.

로이드가 어찌 말려보기도 전에 커다란 화강암 벽돌을 하나씩 끌어안았다.

그들의 등짝에 아나콘다 같은 힘줄이 불끈 치솟았다.

"허잇차, 꾸익!"

"엽차, 꾸이익!"

로이드가 아스라한 심법을 운용하면서도 끙끙대며 들던 돌이었다.

공병대 병사들 서넛이 달라붙어야 겨우 들 수 있던 돌이었다.

한데 이 오크 아재들은?

그야말로 올림픽 역도 경기장에 난입한 떡고릴라가 밥상 뒤엎듯 너무나 가볍게 들어 올렸다!

"헐."

절로 입이 쩍 벌어지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로이드는 놀라움에 사로잡혀 있지만은 않았다.

그는 지금 이 황당한 상황의 본질을 재빨리 캐치했다.

그가 잽싸게 말했다.

"어이쿠, 엄청나십니다!"

"꾸익! 이 정도쯤이야, 꾸이익!"

"아닙니다. 정말로 대단하십니다. 저는 그 돌을 '저기까지' 올려놓는 건 꿈도 꿀 수 없었거든요."

"저기까지, 꾸익?"

로이드가 반쯤 쌓아올려진 벽면을 가리켰다.

근육질 오크 전사가 그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인간들은 그게 문제다. 잘 봐라, 꾸이익."

안고 있던 돌을 단숨에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반쯤 빈 라면 박스 다루듯 로이드가 가리킨 곳에 살포시 놓았다.

쿠우웅-!

가슴 깊이 울리는 육중한 사운드와 함께 커다란 화강암 벽돌이 자리를 잡았다.

시공을 위해 필요한 자리에 정확히 놓인 셈이었다.

'됐어. 이거다.'

로이드는 몰래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화강암 벽돌을 끌어안았다.

일부러 끙끙거리며 애썼다.

"흐억, 흐어어업! 전 잘 안 되는데요?"

"쯧쯧! 비켜봐라 인간. 제대로 된 시범이란 이런 거다, 꾸이익!"

번쩍, 쿠웅-!

또 하나의 거대한 돌이 필요한 자리에 놓였다.

그 뒤로도 비슷한 과정이 계속되었다.

로이드는 연신 땀을 뻘뻘 흘리며 엄살을 부렸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뺨치는 난감한 표정 연기로 오크 전사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럴 때마다 오크 전사들은 치솟는 안타까움에 이두박근을 부르르 떨며 나섰다.

나약하고 빈약한 인간에게 제대로 된 운동 자세를 알려주려 나름 애썼다.

불끈거리는 근육과 힘줄 속에 따스한 정이 넘쳤다.

덕분에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석빙고 벽면을 모조리 올릴 수 있었다!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이고, 이렇게 드는 건 더 어렵네요! 으읏, 끄으응!"

다음 날에도 로이드는 일부러 끙끙대며 엄살을 부렸다.

마치 처음 헬스장에 간 초보가 트레이너 소환술을 시전하는 것 같은 안쓰러운 모습이었다.

그러자 전날보다 더 많은 오크 전사가 콧김을 내뿜으며 몰려왔다.

저 안타까운 초보에게 참된 운동법을 알려주고자 하는 의지를 활활 불태웠다.

그런 그들의 자발적인(?) 도움 덕분이었다.

석빙고의 아치형 천장 구조, 홍예 또한 이틀이 지나기도 전에 윤곽이 잡혔다!

'심지어 이거, 날림 공사도 아냐.'

오크들은 하나하나가 기중기 같았다.

워낙 힘이 좋다 보니 엄청나게 크고 무거운 돌을 다루면서도 정확한 위치에 척척 놓을 수 있었다.

말 그대로 근육 만세.

로이드가 꿈에서나 그리던 광속 시공이 현실화되고 있었다.

35화. 광속 시공은 근육으로 (3)

"꾸익? 이거 뭐냐? 설마 석빙고... 벌써 다 만든 거냐, 꾸이익?"

오크 아로쉬는 천생 전사였다.

적을 맞이해 싸운다.

부족을 위해 사냥을 한다.

당연하게도 그의 미덕은 용맹.

평생 싸움만을 생각하며 살아온 그였다.

그렇기에 그는 토목 시공에 대해 전혀 몰랐다.

공사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어떤 결과를 만드는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는 게 있었다.

어떤 공사도 하루아침에 끝나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오크 아로쉬는 오늘, 진심으로 놀라야 했다.

"이거 분명 며칠 전엔 그냥 구덩이였다! 그런데 이건 어떻게 된 거냐? 돌덩이가 가득하다, 꾸익!"

사실이었다.

며칠 전.

로이드의 터 다지는 작업을 돕던 그는 어쩔 수 없이 삽을 놓아야 했다.

사냥을 나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미안하다! 며칠 싸우고 돌아오겠다, 꾸이익!'

사냥은 부족 전사의 신성한 의무였다.

마치 군대가 대한민국 남자의 의무이듯, 전역을 하고도 예비군 훈련과 민방위에 참가해야 하듯, 모든 오크 전사는 정기적으로 집단 사냥에 나서야 했다.

오크 아로쉬의 경우는 이번이 그 차례였다.

'돌아오면 다시 도와주겠다, 꾸익!'

그렇게 로이드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더랬다.

사냥을 마치고 부락으로 돌아오자마자 현장으로 달려왔더랬다.

은인 로이드를 돕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웬걸.

불과 며칠이 지난 사이, 현장이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그저 터 파기만 간신히 마쳤던 구덩이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엔 화강암 벽돌로 꼼꼼하게 만든 석실이 떡하니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석실, 아니, 석빙고 앞에 로이드가 있었다.

"어, 왔냐? 어쩌다 보니 이만큼 만들어 버렸네. 아직 완공은 아니지만."

"...."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는 로이드.

그 모습에 아로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미지의 생물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내 은인은 대체 뭘까, 꾸익.'

대단했다.

볼수록 그런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은인, 로이드가 뭔가를 뚝딱하면 뭔가가 뿅 하고 생겨난다.

가끔이 아니었다.

매일 그랬다.

'하비엘에게 명령을 내렸다. 돌로 된 산 일부가 반듯하게 덩어리로 쪼개졌다. 가져온 돌을 다듬고 땅을 팠다, 꾸이익. 그랬더니....'

순식간에 석빙고라고 부르는 반듯한 석실이 생겨났다.

'심지어 마법을 쓴 것도 아닌데, 꾸익.'

마법보다 더욱 마법 같은 결과라고 아로쉬는 생각했다.

젊은 오크 전사는 진심으로 엄지를 치켜들었다.

"은인 너! 왕콧구멍이다, 꾸이익!"

"왕콧... 구멍?"

"그렇다, 꾸익!"

로이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로쉬가 콧김을 풍 뿜어냈다.

"콧구멍이 커야 숨을 잘 쉰다. 숨을 잘 쉬면 지치지 않는다. 지치지 않는 오크는 최고의 전사다, 꾸익!"

"아하. 칭찬인 거였어?"

"당연하다, 꾸익!"

오크 아로쉬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벌쭉 웃었다.

로이드도 피식 웃고 말았다.

"겨우 이런 걸로 칭찬이라니. 낯 뜨겁네. 사실 석빙고 같은 건 제대로 배운 적도 없는 건데."

"배운 적이 없다니, 꾸익?"

"말 그대로야. 내 전공은 토목공학이라서. 이쪽이랑은 완전히 다르거든."

"토목... 꾸이익?"

"그런 게 있어. 다만 예전부터 이런 쪽에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았거든. 그 덕을 좀 보는 거랄까."

온돌 때도 그랬지만 석빙고 등의 전통 건축물에 관심이 있었던 그였다.

가입한 동아리도 전통 건축물에 관련된 모임이었다.

집안 사정이 넉넉하던 시절에는 동아리원들과 함께 답사도 다니곤 했었다.

"뭐, 지금은 너무 멀어진 시절의 일이랄까. 어쨌건 이 석빙고, 겉으로 보기엔 우와 소리가 나오겠지만 아직 껍데기만 겨우 모양을 잡은 거야. 완공하려면 멀었어."

찹찹!

로이드가 벽면을 손바닥으로 착착 쳤다.

"보다시피 경사진 바닥에 배수로라든가, 홍예와 환풍구라든가, 이런 건 다 만들긴 했어. 너네 부족 전사들 끝내주던 힘 덕분에 말야."

정말이었다.

오크 전사들의 힘은 정말이지 끝내줬다.

하나하나가 모두 일당백.

유압기 쌩쌩하게 장착한 고릴라 같았다.

덕분에 로이드는 지난 며칠간 손에 먼지 한 번 안 묻힐 수 있었다.

근육 빵빵 힘줄 불끈 오크들의 도움을 받아 석빙고의 벽체와 아치형 천장을 모조리 올릴 수 있었다.

물론 아직 완공 상태인 건 아니긴 했지만.

"뭐, 일단 겉으로만 좀 삐까번쩍한 상태랄까. 이대로는 아직 석빙고의 구실을 전-혀 못 할 거야."

"못 한다고, 꾸익?"

"어. 단열재가 없어서."

로이드의 말이 이어졌다.

"나름 화강암 벽돌을 최대한 두껍게 만들었는데도 그래. 지금 이대로면 여름철 지열이 그대로 석빙고 내부로 들어올 거야. 그래서 외부의 열기를 차단할 단열재가 필요한 거고."

"그럼 단열재는 어디서 구하면 되는 거냐, 꾸익?"

"구할 필요 없어."

"없다고, 꾸익?"

"어. 기다리기만 하면 돼. 공병대 병사 열 명을 우리 영지로 보냈거든. 가서 단열재로 쓸 것들 가져오라고."

사실이었다.

하비엘을 동원한 첫 발파를 시작하기도 전이었다.

그때 이미 로이드는 공병대 병사 중에 체력 좋은 열 명을 추려냈다.

그들을 프론테라 남작령으로 돌려보냈다.

석빙고 시공에 쓰일 단열재를 가져오라는 명령과 함께였다.

"사실 그것들, 여기선 좀처럼 못 구하는 물건들이거든. 왕겨랑 밀짚, 톱밥 말야."

그것 또한 사실이었다.

이곳 오크 부락은 황야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당연히 농사 따위와는 조금의 인연도 없었다.

농업의 부산물인 왕겨와 밀짚을 구하는 건 이곳에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뭐, 녀석들 보낸 지 제법 됐으니까 며칠만 더 기다리면 올 거야."

아닌 게 아니라 이제 슬슬 올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게 며칠간의 기다림이 이어졌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사흘이 지나고 또 나흘 닷새가 흘러도.

심지어 열흘이 지나는 때까지도 영지에서 돌아오는 병사는 없었다.

단열재를 가지고 오기는커녕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으음, 이상한데.'

오크족의 부락에서 하비엘과 농담 따먹기를 하며 시간을 때우게 된 로이드였다.

물론 그러는 와중에도 그의 눈은 항상 서쪽을 향해 있었다.

생각보다 긴 기다림이 이어지며 그의 눈빛에 의혹이 피어났다.

'녀석들, 예상대로라면 어제쯤엔 돌아왔어야 했는데.'

직접 동부 산맥을 넘어온 그였다.

당시의 경험을 통해 병사들이 영지까지 돌아가는 시간, 그리고 물자를 챙겨 산맥을 넘어올 시간을 계산할 수 있었다.

그런 그의 계산에 따르자면 최소한, 아무리 늦어도 어제쯤엔 병사들이 돌아왔어야 했다.

"어이, 하비엘."

텐트 안에 누운 채 무료하게 다리를 흔들던 그가 입을 열었다.

대답은 금방 돌아왔다.

"부르셨습니까."

"응, 불렀지. 또 부려 먹으려고."

"...무슨 일이신지."

"너 저쪽 산맥에 마실 좀 다녀와라."

"수색입니까?"

"어."

서로 긴 말은 필요 없었다.

사실 하비엘도 지금 로이드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무엇을 걱정하는지 대략 알고 있었으니까.

"마중 겸 수색이 되겠군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공병대 녀석들이 아직까지 오지 못했다는 건 중간에 뭔가 일이 생겼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니까."

그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내심 어제까지로 생각하고 있던 물자 도착의 데드라인.

그건 일반 병사들의 체력, 그들이 가져올 물자의 부피와 무게 등을 모두 고려한 결과였다.

거기에 험지에서의 이동에 따른 지연까지 계산에 담았다.

날짜에 충분히 여유를 둔 계산인 셈이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소식이 없어. 원인은 둘 중에 하나일 거야. 뭔 일이 생겼든가, 아니면 탱자탱자 농땡이를 피우고 있든가."

"알겠습니다. 일단 지난번 산맥을 넘어온 길을 우선으로 수색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조심하고. 올 때 메로나."

"...예?"

"암것도 아냐. 메롱이라고."

"후우."

하비엘은 대답 대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곧바로 수색에 나서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배낭을 꾸리고 장비를 갖추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후 텐트를 떠났다.

그렇게 텐트에서 나가기 직전 걸음을 멈추었다.

특유의 시크하고 서늘한 표정으로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무뚝뚝한 한마디를 툭 던졌다.

"...반사."

"어?"

뭔가 반격(?)을 시도할 틈도 없었다.

하비엘 녀석은 이쪽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쌩하니 텐트를 떠나 버렸다.

"허허허."

절로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무 일 없어야 할 텐데.'

어쩐지 쌔한 느낌이 쑴펑쑴펑 솟아났다.

그리고 다시 사흘이 더 지났을 무렵.

그의 쌔하던 느낌은 현실이 되었다.

"이런 것을 발견했습니다."

"...."

사흘 만에 돌아온 하비엘이 내민 것은 허름한 장갑 한 짝이었다.

로이드는 그 장갑의 정체를 단숨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거, 우리 영지 거잖아.'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영지의 공병대 병사들에게 그가 직접 지급한 작업용 장갑이기 때문이었다.

질문하는 로이드의 표정이 굳었다.

"이거 어디서 찾은 건데."

"산맥 동쪽 사면의 골짜기에서 찾았습니다. 왕국 공용 지도에는 '플로기아 협곡'이라 표기된 지역이며, 발견 시점은 이틀 전입니다."

"계속 설명해봐."

"저는 처음엔 지난번 우리 일행이 산맥을 넘어왔던 길을 위주로 수색을 진행했습니다. 혹시나 병사들이 일정보다 늦게 돌아오는 중이라면 도중에 만날 가능성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파노 봉'과 '페사노 봉'을 넘을 때까지도 병사들과 조우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흔적 또한 발견할 수 없었고 말입니다. 그 사실이 알려주는 정보는 하나였지요."

"병사들이 농땡이를 부리느라 늦게 오고 있을 가능성이 없다는 거지."

"예. 그때부터는 병사들이 사고를 당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움직였습니다. 덕분에 플로기아 협곡에서 이 장갑을 발견했고, 주위에 떨어져 있던 밀짚 일부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곳곳에 밀짚이 조금씩 떨어져 있더군요. 그 흔적을 따라갔습니다. 흔적은 제법 큰 동굴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플로기아 협곡... 동굴이라. 그래서? 그 안에 들어갔냐?"

"예. 덕분에-"

하비엘이 덤덤한 얼굴로 왼팔 소매를 걷었다.

그렇게 드러난 그의 새하얀 팔뚝.

그 팔뚝엔 덤덤한 표정과 너무나 대조되는 상흔이 새겨져 있었다.

"이렇게 당했습니다. 동굴로 몇 발짝 들어가자마자 마법진이 발동되더군요."

"...괜찮은 거냐?"

"예, 괜찮습니다. 조금 긁힌 정도입니다."

"긁힌 정도가 아니라 이거, 화상 같은데."

아닌 게 아니라 상처가 제법 컸다.

게다가 단순한 화상이 아니었다.

마치 화상과 동상을 함께 섞어놓은 듯 피부가 붉고 퍼렇게 변해 있었다.

"정확한 정체는 모르겠지만 저주 마법의 일종인 것 같습니다. 다행히 직격은 피했지만요."

"...."

"정말로 괜찮습니다. 상처가 근육까지 침투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마도 지금처럼 마나를 운용해 꾸준히 회복에 힘을 쏟는다면 며칠 안에 흔적도 없이 말끔하게 나을 것 같습니다."

"어, 그건 다행이긴 한데."

"예. 병사들이 걱정입니다."

자신의 상처를 보여줄 때는 덤덤하던 하비엘의 표정이 병사들을 언급하면서 어두워졌다.

"떨어진 밀짚 등의 흔적이 동굴 안쪽까지 그대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그 사실로 미루어 병사들은...."

"그 안으로 끌려갔겠지?"

"그런 듯합니다."

하비엘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마법진에 당한 뒤로도 몇 차례인가 진입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불가능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쯧. 죄송할 것까지야."

하비엘에겐 잘못이 없다.

오히려 방어용 마법진에 걸리고도 저 정도 상처만 입고 빠져나온 게 대단한 거였다.

"하지만 저는 기사입니다. 영지의 병사들을 지휘하는 것뿐만 아니라 병력을 최대한 보호하고 보존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제 실력이 모자란 탓에 병사들을 구출할 수 없었습니다. 하니 제게 다시 기회를 주신다면-"

하비엘의 비장한 말이 이어졌다.

"최대한 빨리 영지로 돌아가 이 사실을 알리고 준비를 갖추어 그 동굴에 공세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동굴을 공격할 거라고?"

"예. 입구에 설치된 방어 마법의 위력과 저주의 교묘함으로 미루어, 동굴에 상당한 수준의 흑마법사가 도사리고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아마도 흑마법사가 사악한 목적으로 우리의 병사들을 납치한 것이겠지요."

"즉, 시간이 생명이다?"

"그렇습니다. 흑마법사의 수중에 오래 있을수록 병사들이 위험에 처할 테니까요."

"흐음. 그럼 지금 바로 가자."

로이드는 대뜸 말했다.

마치 삼각 김밥 사러 편의점 가자고 말하는 것처럼.

혹은 배털 그라운드 한 판 땡기러 동네 피씨방이나 가자는 것처럼.

너무나 평범해서 오히려 핵당당한 말투로 툭 내뱉었다.

하비엘의 눈이 휘둥그레졌음은 물론이었다.

"예? 무슨...."

"무슨은 무슨. 흑마법사한테 우리 애들 잡혀 있다며. 게다가 내 소중한 건설 자재도 싸그리 뺏겼잖아?"

"그렇습니만-"

하비엘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로이드 님이 직접 나서는 것은 위험합니다. 너무 무모한 시도이십니다."

"그렇게 생각해?"

"예. 결단코."

하비엘이 진지한 눈빛으로 단정하듯 말했다.

"저조차도 그곳의 방어용 마법진에 큰 위험을 겪어야 했습니다. 로이드 님의 하찮은 실력으로는 절대로 무리한 일입니다. 게다가 상대는 흑마법사입니다. 또 어떤 사악한 함정을 꾸며놓았을지 알 수 없습니다."

"헐. 대놓고 하찮대."

"제 실력과 비교하자면 엄연한 사실이니까요."

"뭐 어쨌건, 지금 내가 가면 제대로 털릴 거다?"

"그렇습니다. 비참하게 잘리거나, 얼어붙거나, 어딘가가 부러지거나, 혹은 팔팔 튀겨질 수도 있겠지요. 마치 추수감사절에 오순도순 먹으려고 끓는 기름에 담갔다가 깜빡 잊는 바람에 까맣게 타버린 꼬마새우처럼 말이죠."

"...어이. 그거, 어쩐지 묘사에 진심 어린 바람이 팍팍 담긴 것처럼 들린다?"

"전혀요. 오해이십니다."

"오해는 개뿔. 완전 리얼하구만."

로이드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의 손에는 어느새 배낭이 들려 있었다.

며칠간 산속에서 움직일 식량과 물자가 담긴 배낭이었다.

"그럼 가자."

"예?"

"말했잖아. 지금 바로 그 동굴로 가보자고. 시간 싸움이라며. 우리 병사들 오래 잡혀 있을수록 위험해질 거라며."

"물론 그게 사실이긴 하지만 이대로는...."

"괜찮아. 나만 믿어라."

로이드는 다른 배낭을 들었다.

녀석의 가슴팍에 배낭을 내밀어 푹 안겨주었다.

"빨랑 따라와. 안 그럼 버리고 간다?"

"...."

얼결에 배낭을 받아든 하비엘.

그의 표정이 잔뜩 굳었다.

이건 너무 무모한 시도였다.

하지만 그는 꿈에도 몰랐다.

이번에 자신이 퇴각해야 했던 플로기아 협곡의 동굴, 아니, 흑마법사의 던전.

그곳이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 나오는 곳임을.

소설 속 몇 년 뒤 시점의 자신이 공략하게 되는 던전임을.

그 내용을 읽은 로이드가 공략법을 모조리 숙지하고 있는 상태임을.

그는 알지도 못했고, 짐작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까 플로기아 협곡 에피소드에서 하비엘한테 썰리던 놈... 흑마법사 루펠란이란 놈이었나?'

까드득!

로이드는 내심 이를 갈았다.

방어용 저주 마법진이고 자시고.

자신의 병사들과 건설 자재를 건드리면 어떤 꼴이 나는지 놈에게 제대로 실감시켜 주리라.

거기에 보너스로 놈이 던전에 꿍쳐두었을 모든 것들을 등골에 골수에 모공 속 육수까지 모조리 알차게 빼먹어주리라.

죽고 싶어도 못 죽게.

짜낼 것은 모조리 짜내리라.

'그러니까 결론은, 넌 뒈졌다고 미리 복창해라.'

응징과 착취.

그 목적을 위한 로이드의 걸음이 협곡을 향했다.

36화. 진정한 회개법 (1)

"로이드 님, 여전히 저 던전에 들어가실 생각인 겁니까."

"당연하지."

로이드는 대답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었다.

따라서 원래는 뙤약볕이 사방에 내리쬐어야 할 터다.

하지만 지금 그와 일행이 있는 곳에선 햇볕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었다.

사방이 어둑한 그림자에 휩싸여 있었다.

'음침한 곳이로구만.'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이곳 플로기아 협곡은 생각보다 훨씬 좁고 깊었다.

덕분에 지금 그가 있는 계곡 밑바닥엔 햇볕이 전혀 들지 못했다.

아니, 지금뿐만이 아닐 것 같았다.

'최소 몇만 년은 한 번도 햇볕이 들지 않은 듯한데.'

풀이라곤 없이 사방이 눅눅한 이끼와 이름 모를 버섯으로 뒤덮여 있었다.

특히 그의 시선이 향하는 우묵한 던전 입구는 더욱 그랬다.

"하지만 위험합니다. 지난 며칠간 계속 말씀드린 것처럼 말입니다."

하비엘 특유의 차갑고 건조한 목소리가 뒤에서 귓바퀴를 콕콕 찔러왔다.

"로이드 님,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상대는 마법사입니다."

"...."

"이대로 영지로 돌아가 마법사에 맞설 준비를 제대로 갖추고 다시 오는 것이 나을 겁니다."

"...."

"로이드 님?"

"어."

"제 말을 듣고 계신 겁니까."

"아니. 귓등으로 흘리고 있는데."

"...."

로이드는 여전히 던전 입구만 쳐다보며 말했다.

"혹시 너 앵무새냐? 어째 오크 부락에서 출발한 뒤로 똑같은 얘기만 계속 반복하는 것 같다?"

"제가 언제...."

"언제는 개뿔. 계속 그랬어, 계속. 로이드 님, 위험합니다. 로이드 님, 무모합니다. 로이드 님, 무리입니다. 로이드 님, 청기 들고 백기 내려. 음 이건 아닌가. 어쨌건-"

로이드가 콧등을 찡그렸다.

"난 네 의견, 마음에 안 든다."

"어째서입니까."

하비엘의 반문이 곧바로 날아왔다.

로이드도 곧바로 대꾸했다.

"네가 불편한 진실을 애써 숨기고 있으니까."

"예?"

"내 말, 부정하진 못할 텐데."

어느새 로이드가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자신을 향하는 그 눈빛에 하비엘은 무의식중에 멈칫했다.

"하비엘? 아니, 아스라한 경. 하나만 물어보자. 만약 내가 네 의견을 따른다 쳐. 그래서 제대로 된 준비를 갖추려고 영지로 돌아갔다가 여기로 다시 온다 치자고."

"예."

"그 사이에 저 안에 잡혀들어간 병사들은 다 죽겠지?"

"그건...."

"맞지?"

"...예, 아마도 그럴 겁니다."

하비엘이 못내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드의 입가에 쓴웃음이 피어났다.

"그래. 사실은 너도 알고 나도 아는 불편한 진실이지. 하지만 넌 판단을 내렸겠지. 병사 몇몇을 구하기 위해 영지의 후계자를 위험에 빠뜨려선 안 된다고. 맞아?"

"로이드 님, 저는...."

"됐고. 네 판단이 합리적이라는 건 인정해. 단, 던전의 방어용 함정 마법진을 돌파할 방법을 모르는 상황일 때의 이야기겠지만."

"예?"

저건 무슨 소리일까.

하비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생각해두신 돌파법이 있는 겁니까?"

"어. 아스라한 심법을 응용하면 될 것 같은데."

"심법을 말입니까?"

"어."

고개를 끄덕이는 로이드.

그의 머릿속으로 문득, 소설 철혈의 기사 속 내용이 떠올랐다.

'그래. 심법을 응용했지. 몇 년 후의 소드마스터가 된 네가.'

소설 속에서 이 던전을 공략하게 되는 미래의 하비엘.

지금보다 훨씬 풍부한 경험이 쌓인 상태였다.

그 경험을 살려 효율적인 마법진 돌파법을 고안했다.

바로 아스라한 심법의 마나 흡수 능력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렇듯 로이드는 책 속 미래 시점의 하비엘이 고안한 돌파법을 입에 담았다.

"너, 아스라한 심법으로 공기 중의 마나 우걱우걱해봤지?"

"우걱우걱이라니요?"

"흡수."

"예, 당연히."

하비엘이 대답했다.

"평소에도 종종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겠지. 나도 그래. 언제 어디서건 할 수 있어서 심법에 좋은 훈련이 되니까."

사실이었다.

그런 이유로 로이드도 종종 틈이 날 때마다 아스라한 심법을 운용했다.

공기 중에 퍼져 있는 자연적인 마나를 흡수했다.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살짝 증폭했다.

나름 훌륭한 연습이었다.

"그렇게 공기 중의 마나를 흡수할 때 어떤 느낌이 들어?"

"그야 물론-"

하비엘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평온한 느낌을 받습니다."

"평온? 어째서?"

"공기 중의 마나가 항상 일정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지?"

"예."

그것 또한 사실이었다.

공기 중에 퍼져 있는 마나는 언제나 균일했다.

한곳에 뭉쳐 있다거나, 빈 곳이 있다거나 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공기의 마나를 흡수하면 써클로 들어오는 마나의 양이 언제나 일정했다.

"그렇지. 그냥 공기를 마시는 것처럼 항상 일정하게. 그런데 말이다. 만약 눈에 보이지 않도록 숨겨진 마법진 주위에서 심법을 운용하고 마나를 흡수하면 어떤 느낌이 들까?"

"예? 물론 그건... 아."

하비엘의 표정이 달라졌다.

새삼스러운 눈으로 로이드를 보았다.

"마법진에 의해 비정상적으로 밀집되어 있던 마나가 울컥, 덩어리져서 한꺼번에 들어오게 되는군요."

"그래.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지?"

"예."

로이드가 씨익 웃었다.

하비엘은 내심 감탄을 삼켰다.

은근 간단하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발상이었다.

'로이드 님의 말씀이 맞다. 본디 마법진은 자연에 널리 퍼져 있는 마나를 인위적으로 끌어들이고 배열을 변화시켜 마법 작용을 일으키는 장치. 그러니 당연히 그 주위엔 마나가 비정상적으로 모여 있겠지.'

그럼 그 마법진을 찾아내려면?

아스라한 심법을 운용해서 주위의 마나를 흡수한다.

흡수 상태를 유지하면서 천천히 걷는다.

그러면 마법진에 의해 한곳에 모여 있던 마나가 울컥, 덩어리져서 흡수될 것이다.

'그럼 그 마나 덩어리가 들어온 방향과 거리를 가늠할 수 있어. 마법진이 숨겨져 눈에 보이지 않아도 감각만으로 찾아낼 수 있게 되는 거야.'

하비엘의 시선이 로이드를 향했다.

"로이드 님."

"어?"

"아마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예."

하비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드가 씨익 웃었다.

"그럼 이제 던전으로 돌격할 마음이 좀 드셨어?"

"네. 그럼 로이드 님은 여기서 기다리고 계시지요. 저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그건 싫은데?"

"어째서입니까. 안쪽은 위험합니다만."

"나도 알아."

로이드가 주위로 시선을 힐끗 던졌다.

"그런데 너, 날 여기 냅두고 혼자 안으로 들어가면 안심이 되겠냐?"

"예?"

"여기라고 안전할 거란 보장 있어?"

"그건...."

"없지?"

"...."

하비엘은 침묵했다.

듣고 보니 로이드의 말도 맞았다.

이 협곡 밑바닥에 위험요소가 흑마법사 하나일 거라고 단정할 수 없었다.

한데 로이드를 이곳에 두고 혼자 던전에 들어간다면?

그렇게 남겨진 로이드가 돌발적인 위험에 빠진다면?

지켜줄 수 없을 것이다.

하비엘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함께 들어가도록 하지요. 다만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조건? 말해봐."

"언제든 상황이 위험해지면 망설임 없이, 즉각 도망치겠노라 약속해주십시오."

"상황이 위험해지면?"

"그렇습니다. 안쪽에 있을 병사들을 구하려는 로이드 님의 마음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로이드 님의 안전입니다. 그러니-"

하비엘의 눈빛과 표정이 비장해졌다.

"상황이 위험해지면 언제든 즉각 도망치십시오. 설령 절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응? 당연한 거 아냐?"

"...."

"내가 죽을 판이면 당연히 너 버리고 튀어야지. 뭘 그런 걸 새삼스럽게 참."

"...."

"서운하냐? 삐쳤냐?"

"아닙니다."

"아니긴. 너 지금 어떤 눈빛 하고 있는지 알아?"

"모릅니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거 봐. 삐친 거 맞네."

"...."

하비엘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로이드는 빙글거리며 삽을 들었다.

어느새 둘은 던전 입구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몸을 긴장시키며 감각을 끌어올렸다.

하비엘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먼저."

"그래, 가라. 로봇청소기."

"...로봇청소기가 뭡니까."

"그런 게 있어. 예쁘다는 수식어야."

"전 별로 예쁘지 않습니다만."

"잘 아네. 집중 좀 하자. 지금이 농담이나 나눌 때냐?"

"농담은 로이드 님이 먼저... 후우, 아닙니다."

하비엘의 표정이 서늘해졌다.

집중력을 끌어올리는 듯했다.

걸음도 신중하고 느릿해졌다.

그렇게 조금씩, 한 발짝씩 전진했다.

말 그대로 로봇 청소기가 바닥을 청소하듯.

주위의 마나를 조금씩 흡수하며 공간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스윽, 스으윽.

바람도 불지 않는 협곡 밑바닥의 동굴 입구.

그곳에 하비엘의 발소리만 희미하게 울렸다.

그렇게 얼마나 전진했을까.

하비엘이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 전방 세 발짝 지점입니다."

"그렇게 애매하게 말하지 말고 더 구체적으로 말해. 너, 회중시계 본 적 있지?"

"예."

"그 시계에 표시된 시간을 방위로 삼아. 정면이면 12시. 후방이면 6시. 이런 식으로."

지금은 그렇게 말해야 한다.

그저 막연하게 앞쪽, 오른쪽, 이런 식으로 방향을 말하며 움직였다간 자칫 대참사가 일어날 수 있다. 서로 사인이 맞지 않아서 몇 센티의 차이로 마법진을 밟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하비엘도 그런 이쪽의 뜻을 깨달은 걸까.

곧바로 말을 바꾸었다.

"1시 방향, 세 발짝 거리입니다."

"오케이."

스윽, 스으윽.

이동이 계속되었다.

하비엘의 탐지도 계속 이어졌다.

"2시 방향. 두 발짝 거리입니다."

"그럼 11시 방향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럼 11시 쪽으로 두 발짝만 움직여보자."

"알겠습니다."

"탐지되는 거 있어?"

"9시 방향이군요. 전방은 말끔합니다."

"오케이. 다시 전진."

그 뒤로도 이동과 탐지가 계속되었다.

물론 위험한 순간도 종종 있었다.

함정이 마법진만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철컥, 쐐애액!

바닥에서 희미한 소리가 났다.

동시에 벽면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녹색으로 번득이는 화살촉.

독이 발린 화살이었다.

"어딜!"

카앙!

하비엘의 가슴을 향해 날아들던 화살이 로이드의 삽머리에 가로막혔다.

"후우, 감사합니다."

"됐고. 계속 전진하면서 탐지해. 넌 마법진을 탐지하고, 난 물리적인 함정을 막고. 오케이?"

"알겠습니다. 다만...."

"다만?"

"무리하지는 마십시오."

"아하. 화살 같은 거 막으려고 다치거나 하지 말라는 뜻이지?"

"정확하십니다. 만일 로이드 님이 다칠 것 같으면 저를 방패막이로 쓰셔도 좋습니다."

"원래부터 그러려고 했는데?"

"...."

"아까부터 당연한 걸 참."

"...."

"또 삐치기는. 가자."

그렇게 둘은 계속 전진했다.

하비엘이 마법진을 탐지하고, 로이드가 물리적 함정 장치를 방어했다.

'물론 소설에서의 하비엘은 이걸 혼자 다 해냈지만.'

그건 몇 년 뒤, 녀석이 소드마스터가 된 상태에서의 이야기다.

반면 지금 하비엘은 소드 익스퍼트 상급에 불과하다.

마나를 탐지하며 물리적 함정까지 한꺼번에 대비하는 것은 지금의 녀석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마나를 흡수하며 감지한다 해도, 그 양이 굉장히 미세했기 때문이었다.

'말은 마나가 덩어리로 울컥 들어온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음... 라면 국물 1리터 원샷하는데 그 속에 딱 하나 섞여 있는 건더기스프 파 쪼가리 하나 정도쯤 되려나. 아니, 그것보다 훨씬 더 미세할 거 같은데.'

그만큼 섬세한 감각이 필요한 일이었다.

하비엘이 완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야 했다.

"자자, 계속 가자. 천천히. 서두르지 말고."

둘은 차근차근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주위가 점점 어두워졌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빛이 사라졌다.

그때부터는 횃불 빛에 의지했다.

그러고도 계속 전진했다.

30분, 1시간, 어느덧 2시간째 수많은 마법진을 탐지하고 함정을 피했다.

그러는 동안 로이드는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의 내용을 끊임없이 되새기고 상기했다.

이 기다란 함정지대의 끝.

그곳에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유형의 함정이 나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소설 속 묘사에 따르면 대강 이쯤일 듯한데.'

오른쪽으로 크게 꺾이는 통로.

그다음엔 통로가 확 넓어졌다.

넓어진 통로 반대편 저 멀리에 탁 트인 공간이 보였다.

던전 가장 깊은 곳.

흑마법사의 연구실이었다.

'찾았다.'

저 멀리 있는 연구실.

그 중앙의 테이블에 앉아 있던 검은 옷의 흑마법사가 벌떡 일어나는 게 보였다.

흑마법사가 이쪽을 향해 손짓하는 모습도 보였다.

절대로 피할 수 없는 함정이 발동되는 순간이었다.

그 함정은 천장에서부터 내려왔다.

끼릭, 철컥, 콰아앙-!

두터운 강철 차단벽이 떨어졌다.

앞쪽 통로 전체를 완전히 가로막았다.

뒤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또 하나의 강철벽이 떨어졌다.

콰아앙-!

그로써 둘은 통로 중간에 완전히 갇히고 말았다.

상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천장에서 푸슈슥!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달콤하고도 향긋한 냄새가 밀폐된 통로 내부에 번졌다.

수면을 유도하는 강력한 아로마 가스였다.

그러나 로이드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하비엘 또한 마찬가지였다.

둘은 이 정도쯤엔 속눈썹은 물론이고 십이지장 융털돌기 하나 움찔거리지도 않았다.

"어이. 이거 은근 익숙한 상황이지 않냐."

"뭐, 듣고 보니 그렇군요."

어두운 통로.

밀폐된 공간.

그 속에 고립된 상황.

어쩐지 예전에 극복한 개미굴이 절로 떠올랐다.

이 친근한(?) 조건에 둘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고 이 상황에 너무나 태연하게 대처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잠시 후.

둘을 가두었노라 안심하고 있던 흑마법사의 멘탈이 칠성장어 승천댄스를 추며 증발되고 말았다.

37화. 진정한 회개법 (2)

푸슈슉!

무색의 기체가 천장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동시에 달콤한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마음속 깊은 나른함을 톡톡 건드렸다.

코끼리도 한 방에 잠재운다고 알려진 아로마.

그렇게 잠들면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는 죽음의 기체.

아소니아 추출물이 한껏 깃든 수면 가스의 습격이었다.

퓨슈슥!

밀폐된 공간에 아소니아 아로마 가스가 가득 채워졌다.

보통의 사람이 이곳에 있었다면 즉시 쓰러졌을 상황이었다.

그렇게 한 번의 잠이 영원한 안식으로 이어질 크나큰 위기였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이곳.

밀폐된 강철의 벽 안쪽에 갇힌 두 사람은 조금 달랐다.

'뭐, 소설 내용이랑 똑같네.'

로이드는 태연한 눈길로 사방을 휘휘 둘러보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코와 입으로는 치명적인 아소니아 아로마가 한껏 깃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이나 눈빛에는 졸음의 기색이 조금도 떠오르지 않았다.

"괜찮으십니까?"

"어."

물어오는 하비엘에게 대답하는 그의 입술.

그의 입술에는 일찌감치 새하얀 잎사귀 한 장이 물려 있었다.

바로 아소니아의 수면 효과를 중화해주는 유일한 각성 약초, 인소니아의 잎사귀였다.

'미리 준비했지.'

강철벽과 치명적인 수면 가스.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도 나오는 내용이었다.

그렇기에 미리 대비할 수 있었다.

오크 부락을 출발하여 이곳으로 오는 며칠 동안 인소니아 꽃이 보일 때마다 잎사귀를 땄다.

고이 모아서 주머니에 챙겨뒀다.

아까부터 미리 입에 물고 있었다.

덕분에 아소니아 아로마를 아무리 들이마셔도 졸음이 오지 않았다.

물론 단점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거, 엄청 맵네. 설마 매운맛 깡뎀으로 화끈하게 잠 깨우는 원리인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인소니아는 정말이지 매웠다.

그냥 매운 정도가 아니었다.

물고 있는 입술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아니, 아주 그냥 삭제되는 기분이었다.

'내가 한국인이라서 다행이야.'

다행히(?) 그는 한국인이었다.

한국인이 어떤 존재인가.

무려 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먹는 독한 민족이 아니던가.

로이드도 마찬가지였다.

비가 오면 매운 게 땡겨서 불닭을 시켜먹었다.

날씨가 맑고 더우면 땀나는 게 좋다며 된장찌개에 땡초를 가득 넣었다.

집안이 망해서 가난한 고시원 생활을 시작한 뒤에도 비슷했다.

끼니를 때우느라 삼각김밥을 먹어도 제일 매운맛을 골랐다.

그렇게 평생 동안 자연스럽게 키운, 캡사이신에 대한 종특적 항마력이 지금 큰 도움이 되어주었다.

즉, 그는 화끈한 매움의 고통을 참고 잎사귀를 계속 물고 있을 수 있었다.

"그러는 넌 괜찮냐?"

입술의 화끈함을 참아내며 로이드가 물었다.

하비엘이 드물게도 하품을 살짝 했다.

"예. 다만, 으음, 조금 졸립군요."

"졸려? 얼마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춘곤증 정도랄까요."

"그래?"

"예."

실제로 딱 그 정도였다.

약간 졸음이 오긴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는 중증 불면증 환자였다.

모든 불면증 환자가 으레 그러하듯, 숙면의 꿈(?)을 이뤄보고자 온갖 시도를 다 해본 그였다.

양을 세기는 기본.

수면 안대 또한 기본.

목욕에 족욕도 해보았다.

숙면에 좋다는 향초도 태워보았다.

마음의 평화를 위한 명상도 해보았다.

먼 나라에서 유행한다는 요가도 끙끙대며 시도했다.

하다하다 못해 지금 맡고 있는 이 아소니아 아로마 향까지 맡아보았다.

그럼에도 좀처럼 잠들지 못해 얼마나 수많은 밤을 흰자위 실핏줄 팡팡 터뜨려가며 지새워야 했던가.

이 정도 졸음으로 쉽사리 공략당할 그가 아니었다.

덕분에 한편으로는 서글픈 비애감이 몰려오긴 했지만.

'후우... 로이드 님이 불러주는 자장가에 비하면 졸린 것도 아니구나, 이건.'

이제 난 정말로 자장가 서비스가 없으면 잠들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린 걸까.

어쩌면 저 인간에게서 평생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피어났다. 한편으로는 에스프레소처럼 깊고 진한 자괴감도 쑴펑쑴펑 솟구쳤다.

절로 한숨이 푹푹 몰려나왔다.

그렇게 하비엘은 힘겨운 현실부정을 시전하며 검을 뽑았다.

수면 가스로부터 둘 다 무사한 건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여기 계속 갇혀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강철벽, 뚫을까요?"

"아니."

그의 물음에 로이드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베거나 찔러서 뚫을 거 아니지? 발파 쓸 거지? 이렇게 갇힌 곳에서 그랬다간 나 고막 상큼하게 톡톡 터진다?"

"...."

하비엘이 들었던 검을 슬그머니 내렸다.

대신 로이드가 강철삽을 들었다.

"그냥 아래쪽으로 파자. 내가 굴 만들 테니 따라와."

"알겠습니다."

로이드가 삽질을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아스라한 심법 스킬의 전용 옵션을 발동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에너자이저.'

딩동.

[아스라한 심법 옵션, 에너자이저가 발동됩니다.]

[더블 써클의 효율성이 극한으로 발휘됩니다.]

[10분간 절대로 지치지 않습니다.]

'으라잣잣차!'

푹! 파팍! 팍!

강철삽이 현란한 춤을 추었다.

한 번 땅을 찍을 때마다 양동이 하나만큼의 흙이 퍼내졌다.

바닥에 순식간에 구덩이가 생겨났다.

처음엔 무릎 깊이로.

다음엔 허리 깊이로.

나중엔 키보다 깊게.

그만큼 수직으로 굴을 파고 내려간 로이드는 곧바로 삽질의 방향을 바꾸었다.

'이대로 땅굴 개통이다!'

에너자이저 옵션의 시간은 10분이었다.

강철 장벽 아래를 지나갈 땅굴을 파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로이드가 현란하고도 맹렬한 삽질을 하며 전진했다.

그동안 하비엘은 얌전히 뒤를 따랐다.

삽질하는 로이드의 뒷모습을 보며 가만히 생각했다.

'땅강아지 같군.'

기억해뒀다가 다음에 꼭 써먹어야지.

언젠가 로이드 님이 또 말로 자신을 농락하면 이걸로 반격해야지.

그렇게 마음속 메모장에 다짐을 써두곤 주위의 기색을 살폈다.

혹시나 흑마법사가 땅굴 위쪽에서 공격해올 것에 대비했다.

그 상태에서 몇 분이 더 흘렀다.

"어이."

로이드의 부름이 들려왔다.

"앞으로 와. 그리고 비스듬히 위쪽으로 검 찌르고 발파. 알겠지?"

"고막은 괜찮겠습니까?"

"어. 강철을 때리는 게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하비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땅굴을 파서 강철벽 아래를 지났으니 이젠 위로 올라갈 때였다.

물론 얌전히 삽질로 올라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랬다간 흑마법사의 좋은 표적이 될 테니까.

"물러나십시오."

로이드가 안전한 범위까지 물러나는 것을 확인한 직후.

하비엘이 검을 들었다.

당겼다.

찔러넣었다.

푸훅!

동시에 그의 심장을 둘러싼 세 개의 써클이 고속으로 회전했다.

회전하는 써클의 각도가 뒤틀렸다.

두 개의 써클이 급속도로 맞붙었다.

맹렬한 충돌이 일어났다.

...!

충격파가 심장을 타고 번졌다.

혈관을 따라 폭주하듯 내달렸다.

근육의 말단에 이르는 동안 더욱 증폭되었다.

그의 팔꿈치와 손목, 손가락을 타고 검에 스몄다.

검의 경로를 따라 직선으로 한껏 내뻗어져 나갔다.

폭발했다.

투화학-!

땅굴 속에서부터 비스듬히 위쪽 방향으로.

10미터 길이에 달하는 범위가 마나의 폭발에 휘말려 증발되었다.

그 범위를 따라 기다란 터널이 만들어졌다.

"가자! 단숨에!"

귀를 막고 있던 로이드가 외쳤다.

두 사람은 재빨리 터널을 벗어났다.

동물원을 탈출하는 두 마리 맹수처럼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그 서슬에 흑마법사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지고 말았다.

"흐억? 무, 무슨!"

든든하다고 믿고 있던 던전의 방어 태세였다.

한데 그게 이토록 쉽게 무력화되다니.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말도 안 돼. 저 은발 녀석은 며칠 전에 입구도 제대로 뚫지 못해서 도망쳤던 놈인데?'

사실 흑마법사는 지난 며칠간 던전 주위의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며칠 전, 던전에 진입을 시도했던 은발의 기사, 하비엘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침입을 시도한 놈이었다.

비록 입구 근처의 마법진에 걸려 물러나긴 했지만 만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법진에 걸리고도 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흑마법사는 생각했다.

저놈, 조만간 다시 올 것 같다고.

'과연 그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지.'

물론 흑마법사라고 그 사이에 손가락만 빨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은발의 기사가 퇴각한 이후 며칠 동안 던전의 방어 태세를 보강했다.

마법진의 숫자를 이전의 두 배로 늘렸다.

그러고서야 다소 마음이 놓였다.

이대로 이 던전이 안전해지는가 싶었다.

한데 아까 갑자기 은발 녀석과 처음 보는 떨거지가 이곳, 던전의 가장 깊은 곳까지 불쑥 모습을 드러냈더랬다.

심지어 입구에서부터 단 하나의 마법진도 건드리지 않은 채로!

'놀랐지.'

진심으로 놀랐다.

놈들이 마법진을 건드리지 않고 들어왔기에, 여기까지 오는 줄도 몰랐다.

당황한 흑마법사는 최후의 방어 함정을 발동했다.

강철벽으로 침입자를 차단, 감금하고 치명적인 가스로 잠재워 죽이는 함정이었다.

'한데... 그것마저 뚫리다니!'

지금 땅굴 위로 치솟는 두 침입자.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방심하다간 당한다.

흑마법사는 즉시 두 손을 모았다.

"크하압!"

가슴 앞에 모은 손이 특별한 모양을 맺었다.

굽히고 펼친 손가락으로 맺은 수인.

그 수인에 따라 마나가 흘렀다.

흐르는 마나가 특정한 법칙으로 재배열되었다.

흑마법사의 모은 손 앞에 10센티 크기의 시커먼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그가 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타앗!"

슈화학-!

마법진이 울컥거렸다.

마물이 위액을 토하듯 정체불명의 액체를 쏟아냈다.

촤아악!

탁한 점액질 액체가 직선으로 뻗어 나갔다.

하비엘을 그대로 덮쳐갔다.

그 순간 하비엘의 검이 공간을 갈랐다.

촤학!

아래에서 위로.

수직으로 솟구친 검날이 번득였다.

번득인 검날의 경로를 따라 검풍이 몰아쳤다.

그를 덮쳐오던 액체가 검풍에 세로로 쪼개졌다. 좌우 두 줄기로 나누어졌다. 압력에 밀려나 양쪽으로 날아갔다.

치이이익-!

졸지에 액체를 덮어쓴 바위가 부글부글 끓으며 녹아났다.

그 사이, 하비엘은 이미 돌진을 감행하고 있었다.

투확!

"...!"

흑마법사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자신이 시전한 마법은 극산성을 지닌 독액을 발사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막을 수가 없는 공격이었다.

특히 검이나 방패로는 더욱 그랬다.

아니,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걸 갈랐다고? 검을 휘둘러 만들어낸 풍압만으로?'

그게 가능하다니.

미쳤다.

저 은발의 기사 놈은 정녕 미친놈이다.

'설마 소드마스터라도 된단 말인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저건 자신이 아는 소드 익스퍼트들과 수준이 달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순순히 당할 생각은 없었다.

흑마법사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카하악!"

표독한 기합과 함께 한쪽 무릎을 꿇었다.

넓게 벌린 두 팔을 아래로 향했다.

손바닥으로 양옆의 지면을 짚었다.

갈라진 손가락이 땅을 파고들었다.

그그극!

손가락 각각의 꺾임의 정도, 흙을 파고든 깊이의 차이에 따라 마나의 배열이 또 바뀌었다.

바뀐 마나의 배열이 지면에 새로운 마법진을 새겼다.

구르륵!

검은 마법진이 꿈틀거렸다.

이내 부르르 떨며 땅을 두드렸다.

그 순간.

덥썩!

지면에서 회색 손아귀가 흙을 뚫고 튀어나왔다.

흑마법사를 향해 돌진해 오고 있던 하비엘의 발목을 움켜쥐었다.

"...!"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하비엘이 잠깐 주춤하는 사이.

수십에 달하는 손아귀가 지면을 뚫고 우후죽순처럼 솟구쳐 나왔다.

처음엔 손아귀만.

그 아래로 손목이.

이윽고 팔뚝과 어깨가.

종국엔 반쯤 썩은 얼굴이 올라왔다.

"크워억! 그우웁! 거억!"

살아 있는 인간의 살을 파먹기 위해 혈안이 된 식시귀.

구울이었다.

"갸하아아악!"

하비엘의 주위에서 구울이 마구잡이로 일어났다.

그 숫자가 무려 50구에 달했다.

잠깐 돌진을 멈춘 하비엘은 순식간에 포위당하고 말았다.

흑마법사의 얼굴에 회심의 웃음이 피어났다.

'크핫하하하! 이건 그냥 구울이 아니야! 그저 지능도 없이 느릿하게 움직이는 평범하고 허접한 구울과는 차원이 다르단 말이다! 이것들은 그야말로 내가 백 일의 밤낮에 걸쳐 수많은 시약과 강화 마법진으로 연성한 작품이지. 화강암만큼 단단한 피부! 바람처럼 빠른 움직임! 내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며 생명체를 학살하는 흉포함까지! 하나하나가 데스나이트에 필적하는 것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소드 익스퍼트쯤은 수십 명이 몰려와도 처리할 수 있는 흉기, 그 자체란 말이....'

서걱.

흑마법사의 웃음이 채 만개하기도 전이었다.

하비엘의 주위로 일순간 서늘한 섬광이 번득였다.

뒤이어 만년한빙 같은 바람이 불었다.

그를 향해 달려들던 강화 구울 50구가 모조리 우뚝, 멈추었다.

그리고 다 함께 똑같은 소리를 냈다.

"구울?"

그것이 끝이었다.

투둑.

구울 50구의 목이 모조리 잘렸다.

머리통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뒤이어 팔과 다리가.

허리와 몸통이.

차례로 잘렸다.

한때 강화 구울이라고 불렸던 고깃덩이들이 망가진 레고 조각처럼 허물어졌다.

후두두둑.

차가운 침묵이 흘렀다.

침묵 속에서 하비엘이 고개를 돌렸다.

서릿발 같은 그의 시선이 흑마법사를 향했다.

"더 불러올 친구들이 또 있나."

"...."

그 순간 흑마법사는 절감했다.

아, 나는 오늘 죽었구나.

38화. 진정한 회개법 (3)

"으읏, 으으읏."

흑마법사 루펠란은 뒷걸음질을 쳤다.

가슴이 온통 쿵쿵 뛰었다.

두려움이 치솟았다.

당장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저벅, 저벅.

눈앞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은발의 기사, 하비엘.

그의 눈빛이 어떠한 빈틈도 내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뭔가를 하려고 하면 곧바로 검을 뿌릴 거야.'

흑마법사는 직감했다.

자신이 도망치려는 순간 검이 날아올 것이다.

자신은 그 검을 절대로 피하거나 막아내지 못할 것이다.

하물며 반격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마나가 바닥났기 때문이었다.

'설마 강화 구울을 그렇게 처리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온갖 시약과 흑마법을 동원해 만든 구울이었다.

특별히 제작한 마법진에서 백 일의 밤낮에 걸쳐 특수한 처리를 가했다.

그렇게 강화된 구울은 보통의 언데드 구울과는 격이 다른 강함을 자랑했다.

강철처럼 단단한 피부는 도끼도 튕겨냈다.

움직임은 바람처럼 재빠르고 신속했다.

게다가 자체적인 지능까지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다.

그 지능을 바탕으로 한 흉포함엔 주인인 그조차도 종종 섬뜩할 정도였다.

즉, 강화 구울은 그의 입장에선 완벽한 살인 병기이자 최종병기였다.

한데 눈앞의 이 은발 기사는 뭐란 말인가.

대체 어떤 존재이기에 강화 구울 50구를 일 검에 토막 내 썩은 고깃덩이로 전락시킨단 말인가.

"넌! 넌 대체 뭐냐!"

억울했다.

흑마법사의 목덜미에 핏대가 솟았다.

"대체 뭐하는 놈이길래 여기서 행패를 부리는 건가!"

두려움과 억울함, 다급함이 섞여 아무렇게나 외침이 터져 나왔다.

한편으로 그것은 자포자기의 외침이기도 했다.

그도 직감하고 있었다.

자신이 이제 곧 죽으리란 것을.

'죽기 싫어.'

살고 싶었다.

꼭 성공하고픈 연구가 있었다.

그 연구의 끝을 보아야만 했다.

그래야 잃은 가족을 되살릴 수 있으리라.

마침내 행복했던 과거의 삶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그렇게 철석같이 믿으며 버텨온 흑마법사였다.

그런 그의 눈에 서서히 다가오는 은발의 기사는 저승사자, 그 자체로 보였다.

저벅, 저벅.

하비엘의 걸음이 한 발짝, 다시 한 발짝, 차근차근 거리를 좁혀왔다.

도망칠 구멍도, 반격할 여지도 없었다.

심지어 한마디 말도 걸어오지 않았다.

협상의 가능성마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 사실이 흑마법사를 패닉에 몰아넣었다.

"그만! 오지 마! 오지 마!"

다급하게 외쳤지만 소용없었다.

은발 기사의 푸른 눈에 살기가 떠올랐다.

그의 검이 빛을 뿌리며 공기를 가로질러 왔다.

쐐애액!

"...히익!"

흑마법사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이었다.

"하비엘, 스톱."

뜻밖의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목덜미에 가벼운 바람이 와 닿았다.

후욱.

"...!"

설마 목이 잘린 걸까.

흑마법사는 감았던 눈을 조심스럽게 떴다.

그리고 다시 한 차례 기함해야 했다.

은발 기사의 롱소드가 자신의 목덜미로부터 불과 1센티도 안 되는 곳에 멈춰 있음을 뒤늦게 깨달은 까닭이었다.

"흐, 흐읍!"

다리가 떨렸다.

오금이 저렸다.

그때, 구원의 동아줄 같은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일단은 죽이지 마, 하비엘. 먼저 할 일이 있으니까."

누구일까.

흑마법사의 눈길이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움직였다.

곧 그는 검은 머리칼의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흑마법사의 시선을 받으며 로이드가 피식 웃었다.

"저놈이랑 할 얘기가 있으니 검부터 좀 치우자."

"알겠습니다."

하비엘의 검이 치워졌다.

흑마법사가 뒤늦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로이드가 그런 흑마법사를 향해 다가왔다.

"이봐요. 좀 괜찮아?"

"...."

방금까지 칼부림과 저주 마법을 오순도순 나누던 사이인데 괜찮냐니.

하지만 흑마법사는 그런 로이드를 뻔뻔하다 여기지 않았다.

어쨌거나 자신을 살려준 사람이었다.

흑마법사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후우, 후... 괘, 괜찮소. 어쨌거나 자비를 베풀어 주어서 고맙소."

"자비는 무슨."

로이드가 피식 웃었다.

딱히 예뻐서 살려준 게 아니었다.

등골까지 빼먹을 게 있어서 살려둔 것이었다.

간단한 거다.

이제까지가 응징의 시간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착취의 시간이 될 것이다.

동시에 낚시와 농락의 잔치가 열리리라.

그렇게 앞으로의 영악한 플랜을 되새기며 로이드가 말했다.

"자비라. 난 그렇게 착한 놈 아닌데."

"...."

"어쨌거나 댁이 내 병사들을 납치했잖아. 건설 자재도 모조리 강탈했고. 그렇지?"

"으음, 며칠 전에 데려온 자들을 말하는 거요?"

"어. 살아는 있어?"

"물론이오."

"전부 다?"

"그렇소."

"다행이네. 한 명이라도 잘못됐으면 바로 죽이려고 했는데."

로이드가 싱긋 웃었다.

흑마법사의 눈꼬리가 살짝 움찔거렸다.

"어, 으음... 이거, 미안하게 됐소."

"미안해? 입으로만?"

"물론 아니외다."

흑마법사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당장 그들을 풀어주겠소. 그러니 잠시만 좀 움직여도 되겠소?"

"얼마든지."

로이드의 허락이 떨어졌다.

흑마법사가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연구실 한쪽으로 가더니 레버를 당겼다.

철컹! 철컥!

몇 번의 쇳소리가 울렸다.

이윽고 연구실 한쪽의 나무 벽이 통째로 열렸다.

그 뒤쪽 공간에 숨겨져 있던 감옥 시설이 드러났다.

"쯧쯧."

로이드는 감옥 안쪽을 보자마자 눈살부터 찌푸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우리 애들 죄다 삐쩍 골았네."

아닌 게 아니라 병사들의 몰골이 별로 좋지 못했다.

단열재 가져오라고 영지로 돌려보냈던 열 명.

영지에서 추가로 함께 보낸 듯한 다른 열 명.

도합 스무 명 모두가 갇혀 있는 동안 제대로 된 식사를 못했는지 눈이 푹 꺼지고 볼이 움푹한 모습이었다.

"미... 미안하오."

"미안한 줄은 알아? 쟤들 저러다 죽었으면 어쩔 뻔했어."

"...."

"이쯤 되니 슬슬 궁금해지는데. 혹시 댁 변태야? 쟤들 저렇게 가둬놓고 뭔 짓을 하려고 한 건데."

"그, 그게...."

"솔직하게 말 좀 해보시지? 뭔가 사연이 있는 것처럼도 보이는데."

"...."

다그치는 듯하면서도 묘하게 상대를 다독이는 로이드의 말투.

그런 말투 때문이었을까.

몇 번인가 주저하며 입술을 달싹이던 흑마법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으음, 나는... 망자를 되살리는 연구를 진행하는 중이었소."

"망자를 되살려? 언데드?"

로이드가 조각난 강화 구울을 돌아보았다.

흑마법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니외다. 언데드를 연구하던 것은 아니오. 그것과는 다르오."

"달라? 뭐가 다른데."

"내가 하던 연구는 정말로 말 그대로 죽은 자를 되살리는 방법이오."

"죽은 사람을? 설마 부활?"

"부활... 그렇소. 비슷하외다."

흑마법사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을 살리고 싶었소. 내 아내와 아이들... 말이오."

"왜? 무슨 일 있었어?"

"그렇소."

흑마법사의 어조에 처음으로 슬픔이 배어났다.

"나는 원래 평범한 어느 영지의 마법사였소. 아내와 아이들을 꾸리며 살아가는 평범한 가장이기도 했지. 행복했소. 아니, 계속 행복했을 거요. 그 불운한 사고만 아니었다면...."

"스톱. 구구절절 무슨 사고였는지 주절거리려는 거라면 그만두시고."

"...어, 어쨌건, 그렇게 잃은 가족을 되찾고 싶었소. 그래서였던 거요."

"여기서 마법을 연구하던 게?"

"그렇소."

"설마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해 산목숨을 제물로 막 바치고 그래야 하는 건 아니지?"

"그건...."

"맞네."

로이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심지어 벌써 몇 번은 시도한 것 같고. 맞지?"

"...."

흑마법사의 말이 없어졌다.

로이드의 목소리가 까칠해졌다.

"금지된 마법을 연구하셨구만. 최소 수십 명은 제물로 바쳤을 거고."

"그건...."

"닥치세요, 좀. 댁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아?"

로이드의 목소리가 까칠함을 넘어 거칠어졌다.

"죽은 사람을 되살려? 그게 가능할 거 같아? 상식적으로 생각해봐, 이 멍청한 작자야."

"나는...."

"됐고. 그래. 만약에 말이야. 정말로 만약에 댁의 미친 그 시도가 성공했다고 쳐. 그래서 아내랑 아이들을 되살렸다고 치자고. 그럼 아내와 아이들이, 우와 우릴 살려줘서 감사합니다, 이럴까? 아, 그럴 수도 있겠다. 끼리끼리 만난다고도 하니까. 최소한 댁 마누라는 그럴지도."

"내, 내 아내와 아이들을 모욕하지는 말아주시오."

"댁이 모욕하게 만들었잖아."

"...."

"왜? 싫어? 화가 나? 그런데 할 말이 없지?"

"...."

"이제 댁이 무슨 짓거릴 했는지 좀 감이 잡혀? 이 멍청한 작자야.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야. 이미 보냈다면 그대로 쉴 수 있도록 보내주는 게 예의라고."

문득 부모님이 떠올라서였을까.

로이드가 콧등을 찡그렸다.

흑마법사가 입술을 깨물었다.

"물론 나도... 그건 알고 있소. 하지만 내 사랑하던 아내, 더 사랑스럽던, 내 목숨보다 소중하던 아이들을 한순간도 잊을 수 없었소. 어떻게 그리 쉽게 보내겠소.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계속 눈앞에 어른거려 견딜 수가 없는데 말이오."

"그래서 그렇게 보낼 수 없으셨다?"

"내 잘못이오. 나도 아오. 내 욕심과 미련이라는 걸."

"그래서, 이젠 어떡할 건데."

"...잊어야지. 별수 있겠소?"

어느새 흑마법사의 얼굴에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눈물을 훔치는 대신 붉어진 눈시울로 로이드를 쳐다보았다.

"이런 연구, 그만두겠소."

"그만둘 거야? 정말로?"

"그렇소. 실은 나도... 지쳤소."

"쯧. 진즉 지치시든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구려. 대신-"

흑마법사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

그곳엔 큼직한 철제 상자가 있었다.

그가 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상자 안의 것들을 모두 당신에게 드리겠소."

"저거? 뭔데?"

"내가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그동안 모았던 갖가지 마법 시약과 물품이오."

"음, 그거 비쌀 텐데?"

"하지만 이제 내겐 필요 없는 것들이오."

"...정말 제대로 결심한 모양이네."

"그래야 마땅하지 않겠소? 자, 여기. 상자를 열어드리리다."

흑마법사가 상자로 다가갔다.

상자 앞에서 자신의 검지 끝을 깨물었다.

그렇게 피 흐르는 검지를 상자 열쇠 구멍에 갖다 댔다.

혈액이 열쇠 구멍 속으로 스며들었다.

"이건 마법적으로 만든 잠금장치외다. 오직 내 피로만 열리지. 그것도 살아 있는 상태에서 흘린 피로만 말이오. 그게 아니라 외부에서 조금이라도 충격을 준다면 상자 속의 물건들이 모조리 녹아서 사라지게 만들어두었소."

그의 말이 사실인지 상자가 철컥, 하고 열렸다.

과연 그 안에는 갖가지 마법 시약과 재료, 물품이 꾹꾹 눌러 담겨 있었다.

"이건 내가 당신의 병사들을 납치하여 입힌 피해에 대한 보상이기도 하오. 부디 받아주시오."

"그렇게 말한다면 기꺼이."

로이드가 흐뭇하게 웃었다.

흑마법사도 애달픈 미소를 지었다.

그제야 손을 들어 눈가에 흐르던 눈물을 닦았다.

그렇게 얼굴을 가리게 된 소매 뒤에서 입술을 말아 올렸다.

'멍청한 놈.'

흑마법사가 웃었다.

이쪽을 믿어주다니.

정말로 다행한 일이었다.

'젊은 도련님 녀석이 똑똑한 척하길 좋아해서 다행이야.'

게다가 적당히 욕심이 많으면서 착하기까지 했다.

덕분에 진정으로 반성하는 듯하는 태도로 놈의 용서를 받을 수 있었다.

'됐다. 마법 물품이야 다시 모으면 돼. 시약도 다시 만들면 돼. 일단 여기서 살아남아 빠져나가는 게 중요한 거야.'

어떤 것을 내주더라도 살아 있으면 된다.

그러면 다른 곳에서 다시 연구를 시작할 수 있다.

더 열심히 연구에 매진하고 이론을 완성할 수 있다.

'그러면 되살릴 수 있어. 여보, 얘들아. 우리, 꼭 다시 보는 거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졌다.

애달픈 마음이 부르르 떨렸다.

당장에라도 이곳을 벗어나 다시 연구를 시작하고 싶었다.

'그것도 더 큰 규모로. 더 대담하게. 수십 명이 아니라 백 단위로 제물을 만들어 바치는 거야. 그러면 성공 확률도 올라가겠지. 그 뒤에는? 다시 행복을 되찾을 수 있어. 따뜻했던 그날의 삶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거야.'

흑마법사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저 도련님을 적당히 속였으니 이젠 빠져나갈 때라고.

자연스럽게 감동적이고 훈훈한 모습으로 여기서 떠나면 될 거라고.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소."

"어디로 가는데?"

"아직은 모르겠소. 정처 없이 다니다가 발길 닿는 곳에서 농사나 지어볼까 하오."

"그래. 그것도 나쁘진 않겠네."

"고맙소. 그럼."

흑마법사는 로이드를 향해 살짝 고개 숙였다.

애달프고도 진중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 했다.

그 순간이었다.

"하비엘. 하나만 묻자."

로이드의 서늘한 한마디가 울렸다.

"왕국 법전에 명시된 연쇄살인범에 대한 처분은 어떻게 되지?"

"수차례에 걸친 살해 행위에서의 의도성이 뚜렷하고, 객관적 증거와 증언, 혹은 자백이 존재하며, 열 명 이상의 증인이 있는 경우 왕국 귀족의 권한으로 즉결처분이 가능합니다."

하비엘의 칼 같은 대답도 울렸다.

흑마법사는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무, 무슨? 그게 무슨 말이오?"

소름이 좍 돋았다.

즉결처분이라니.

저게 무슨 말인지.

분명 방금까지 훈훈한 분위기였는데.

왜 갑자기 저렇게 태도가 싹 바뀐 건지.

스르릉.

하비엘이 검을 뽑았다.

이건 장난이 아니었다.

흑마법사가 다급히 말했다.

"어째서요? 왜?"

허겁지겁 뒷걸음질을 쳤다.

로이드를 향해 물었다.

"정말로 날 죽이려는 거요? 왜? 어째서?"

"어째서라니? 당연한 거 아냐?"

"당연하다니, 그게 무슨 말...."

"방금 못 들었어? 연쇄살인범이잖아, 당신."

"...."

이쪽을 보는 로이드의 눈빛.

아까와 같은 어리숙함과 훈훈함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한편으로는 씁쓸해하면서도 냉정한 표정.

절로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치만, 나, 난 충분히 반성도 했고... 또, 잘못을 시인했고...."

"그래서?

"게다가 눈물도 흘렸소! 죄를 뉘우치며 울기도 했는데!"

"울면 끝나? 반성하면 죄가 없어져?"

"그건...."

"이봐.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그만 하세요."

로이드의 입가에 어처구니없다는 웃음이 떠올랐다.

"아까도 내가 말했을 텐데. 가족을 위해 그랬다고?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되살리려고 그랬어? 그럼 댁한테 죽은 사람들은 뭔데. 그 사람들은 가족 없어? 인생 없어?"

"...."

"억지 감동으로 죄를 포장하지 좀 말지. 반성하는 척하지도 말지? 내가 그런 거에 속을 거 같아? 댁처럼 구는 인간 한두 번 본 줄 아시나 진짜."

로이드의 목소리가 까칠해졌다.

문득, 대한민국이 떠올랐다.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에 나오던 흉악범들의 소식도 떠올랐다.

사람을 납치하고, 강간하고, 죽이고, 차마 인간이라고 부르기도 아까운 것들.

'하지만 그들 중에 제대로 죗값을 받는 놈은 거의 없었어.'

대한민국의 재판 때문이었다.

이상했다.

흉악범들이 매번 솜방망이 판결을 받았다.

어떤 놈은 술을 먹어서 실수한 거라고.

혹은 정신병이 있어서 심신미약이라고.

그도 아니면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어서라고.

온갖 이해되지 않는 엿 같은 구실을 붙여서 인자한 판결을 내려주었다.

정말로, 진심으로, 미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매번 들었다.

그런 꼴을 수십 번은 본 로이드였다

당연히 지금 흑마법사가 부리는 수작쯤은 훤히 내려다보였다.

처음부터 흑마법사를 가지고 논 것이었다.

'저 마법 재료들을 얻기 위해서였지.'

로이드의 시선이 힐끔 상자를 향했다.

사실 흑마법사를 잠시 살려준 이유가 저것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기를 쓰며 하비엘과 함께 여기까지 들어오기도 했다.

그러니 이제는?

목적을 이뤘으니 흑마법사는 필요 없다.

아니, 이런 놈은 가급적이면 제대로 처리하고 싶었다.

'용서해줘 봤자 정신 못 차릴 놈이야. 소설에서도 그랬어. 하비엘에게 한 번 용서받고 나서도 뻘짓하다가 목 잘렸지.'

실제로 그랬다.

그러니 여기서 이놈을 살려주면?

또 어딘가에서 연구를 한답시고 수백의 인명을 학살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이런 거야. 댁이 아무리 사연을 꾸미고 눈물 같지도 않은 즙을 애써 짜내봤자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어. 댁의 본질이야. 그게 뭔지 알아?"

"그, 나는...."

"연쇄살인범이라는 거."

"...."

"그리고 연쇄살인범은 그에 맞는 죗값을 받아야지. 그래야 맞는 거지."

"자, 잠깐만!"

"하비엘, 법대로 해."

로이드가 돌아섰다.

흑마법사가 다급히 애원했다.

하비엘이 검을 뽑으며 앞으로 나섰다.

"기사 하비엘 아스라한, 주군의 아들 로이드 프론테라의 명을 받들어 왕국의 엄정한 법을 집행합니다."

스르릉.

검이 자비 없이 번득였다.

39화. 오크족의 친구 (1)

흑마법사는 죽었다.

물론 로이드는 그 모습을 직접 보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아직 그의 내면은 대한민국의 김수호였다.

사람이 죽는 모습을 굳이 구경하고픈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런 건 한 번으로 족해.'

불현듯 떠오른 부모님의 마지막 모습.

콧등 찡그려 가슴에 묻고 현실로 돌아왔다.

"야, 야. 다들 조심해라. 한눈팔다가 엉뚱한 자리 밟지 말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바닥 잘 살피고."

"알겠습니다."

감금되고 굶어서 쇠약해진 병사들이었다.

그들을 데리고 던전에서 나오는 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아직 남아 있는 마법 함정 때문이었다.

몇 시간에 걸쳐 조심스럽게 빠져나왔다.

그 뒤엔 하비엘을 시켜 던전 속 연구실의 물품을 챙겨 나오게 했다.

흑마법사가 쓰겠답시고 연구실 한쪽에 쌓아두었던 단열재 또한 챙겨왔다.

물론 그렇다고 일이 다 끝난 건 아니었다.

병사들의 컨디션이 바닥이었기 때문이었다.

"어휴. 이 녀석들 전부 골골거려서 큰일이네. 내놔, 인마."

"엇? 도련님?"

"됐고. 내놓으라고."

석빙고 단열재로 쓰일 짚단.

그걸 짊어지고 산맥을 내려가느라 비실거리던 병사였다.

로이드는 그런 병사에게 다가가 아무렇지도 않게 짚단을 빼앗았다.

물론 졸지에 짚단을 빼앗긴(?) 병사는 잔뜩 당황하고 말았다.

"저, 저기, 도련님? 그건 제가 옮겨야 합니다. 귀한 분께서 어찌 그걸...."

"어이쿠. 그러다가 너 쓰러지면 누구 발목 잡으려고."

"쓰러지지 않겠습니다."

"말로만?"

"...."

"지금 딱 봐도 안색 완전 똥인데?"

"그건...."

"됐다니까. 안 그래도 너네가 늦게 오는 바람에 공사 한참 늦어졌거든? 근데 여기서 쓰러지면? 너 챙기느라 더 느리게 움직이게 될 거 아냐. 안 그래?"

"...."

"그러니까 너 이쁘다고 챙겨주는 거 아니다. 착각하지 마라?"

"아, 알겠습니다."

"알겠으면 쓰러지지 말고 잘 따라오든가. 웃차!"

로이드는 병사에게서 빼앗은 짚단을 번쩍 짊어졌다.

병사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행렬의 제일 뒤로 물러났다.

가장 걸음이 느린 병사와 걷는 속도를 맞추어주었다.

물론 입으로는 병사를 끝없이 갈구긴 했지만.

"야. 너 왜 자꾸 내 눈치 보면서 걷냐?"

"아,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힐끔거리는 거 다 보이는구만."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군생활 끝나냐?"

"아닙니다."

"여기가 밖이지 안이야?"

"...."

"어휴. 더 했다간 울겠네. 됐다. 계속 걷자."

그렇게 그는 입으로는 병사들을 독려(?)하며 지친 인원의 짐을 짊어지길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 일은 산맥을 넘어오는 내내 반복되었다.

"후우, 오늘은 그나마 수월하게 걸었어. 로이드 님 덕분인 거 같아."

"그렇지? 나도 어제 그랬어."

"어, 나도. 진짜 고맙더라."

밤이 깊어 차린 임시 야영지에선 병사들이 두런두런 모였다.

그들은 행여나 목소리가 새어나갈까 조심하며 저들만의 뒷담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로이드 도련님 말이야. 진짜 우리를 구하기 위해 오신 거야?"

"아무래도 그런 거 같지?"

"뭐, 단열재도 되찾으러 겸사겸사 오신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와주신 게 어디냐. 난 정말 거기서 죽는 줄 알았는데."

"하긴 그래. 나도."

병사들은 자신들을 구해준 로이드에게 깊은 고마움을 느꼈다.

그런 고마움은 하비엘의 충고에 더욱 커졌다.

"그냥 고마워해선 곤란해. 너희는 로이드 님께 평생 감사하며 살아야 할 거다."

"엇? 아스라한 경?"

병사들은 대화에 불쑥 끼어든 하비엘의 모습에 긴장했다.

하비엘의 무표정한 말이 이어졌다.

"나는 영지로 돌아가 준비를 갖춘 뒤에 흑마법사를 치자고 로이드 님께 건의 드렸다. 하지만 로이드 님은 내 의견을 듣지 않으셨어. 그렇게 하면 너희가 죽을 것을 염려하셨다. 그래서 나와 함께 단둘이서 흑마법사의 굴에 기꺼이 몸을 던지신 것이고."

"...."

"그런 로이드 님의 결정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너흰 흑마법사의 굴에서 굶어 죽었거나, 제물로 희생되어 죽었을 것이다. 그 사실을 평생 가슴에 새겨두고 살아가도록."

"알겠습니다."

병사들은 더욱 감격했다.

다른 이도 아닌 아스라한 경의 말이었다.

하비엘 아스라한은 과장이나 아첨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평소 성실하고 공정하며 냉철한 그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을 수 있었다.

'로이드 님이 우릴 위해서 그렇게까지....'

한때 망나니라 불렸던 분.

그래서 수많은 뒷담화를 들었던 분.

심지어 자신들도 수없이 뒤에서 욕했던 사람.

그랬던 분이 위험을 무릅쓰고 일개 병사인 자신들을 구하러 몸을 던졌다니.

감격한 병사들은 모닥불 앞에서 눈가를 훔쳤다.

연기가 매워서 그런 거라며 실없이 웃었다.

그렇게 로이드를 향한 감사한 마음을 가슴 깊이 새겼다.

덕분에 로이드의 눈앞에도 반가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딩동.

[구출된 공병대 병사들이 당신의 행동에 깊은 감격을 느끼고 있습니다.]

[지금은 이들만이 감동받고 있지만, 추후에 영지로 돌아가게 되면 이 병사들의 입을 통해 당신의 미담이 널리 퍼지게 될 것입니다. 이는 고스란히 사회적 업적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오호라.'

로이드는 속으로 빙고를 외쳤다.

다행히 병사들도 살리고 귀한 마법 재료도 얻고.

거기에 석빙고에 쓸 단열재까지 다 챙겨서 오크 부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부락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석빙고 마무리 공사에 돌입했다.

'시공 기간이 길어지는 건 정말 극혐이야!'

토목 시공은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시공 기간이 길어지면 그만큼 시공비도 치솟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다들 잽싸게 움직이자. 나 없는 며칠간 푹 쉬니까 아주 좋았지들?"

그는 오크 부락에 남았던 공병대 병사들을 독려했다.

직접 웃통 벗고 현장을 지휘하며 함께 구슬땀을 흘렸다.

석회 섞은 진흙을 갰다.

진흙에 왕겨와 밀짚, 톱밥을 적절한 비율로 섞었다.

다시 열심히 개어서 뻑뻑한 죽처럼 만들었다.

대한민국의 현장에서 쓰이던 단열재, 우레탄폼을 천연재료 버전으로 만든 듯한 모습이었다.

'이거면 되겠어.'

손수 만든 천연 단열재를 예전에 쌓은 화강암 벽돌과 대지 사이의 공간에 채워넣었다.

조금의 공기 틈도 남지 않도록 꽉꽉 눌러 넣었다.

아치형 천장 위쪽도 마찬가지였다.

"자, 빈틈없이 꽉꽉!"

"꽉꽉!"

로이드의 구령과 병사들의 외침이 어우러졌다.

힘찬 구령과 외침 속에 천장 외부가 단열재 반죽으로 두껍게 덮였다.

그 위로 다시 한 번 석회 섞은 진흙을 두껍게 발라주었다.

지면에서 아래로 침투할 물기를 막아줄 방수층이었다.

그 위로 다시 두껍게 흙을 덮었다.

아예 봉분처럼 둥글게 치솟게 했다.

흙을 다 덮고 나자 미리 만들었던 환기 굴뚝 꼭대기만 살짝 봉분 위로 올라온 형태가 되었다.

환기 굴뚝 위를 덮개돌로 덮어주었다.

그리고 봉분에는 황야에 자생하는 가시풀을 퍼와서 빽빽하게 심었다.

'이렇게 풀이 잔뜩 있어야 태양 복사열이 차단되니까.'

풀잎이 1차적으로 태양열을 막아줄 것이다.

뿌리는 아래로 스밀 수분을 흡수할 것이다.

"후우, 이게 마지막 가시풀인가."

로이드의 삽이 움직였다.

뿌리째 퍼온 가시풀 한 덩이를 봉분 꼭대기에 놓았다.

삽머리 평평한 면으로 적당히 꾹꾹 눌러주었다.

약간의 물을 뿌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뿌리가 제자리를 잡도록 도와줄 물이었다.

그 로이드의 삽질을 끝으로 마침내, 석빙고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기서 모든 일이 끝난 건 아니었다.

"꾸이익? 은인이 석빙고 다 만들었다. 그런데 여기 들었던 것만큼 시원하지가 않다, 꾸익."

석빙고가 완공됐다는 소식에 콧구멍 털 휘날리며 달려온 오크 청년 아로쉬였다.

서늘한 공기를 모아서 음식을 오래 보관할 곳이라 했던가.

벌써부터 기대되는 마음에 대흉근이 불끈거렸다.

그런데 막상 석빙고 안쪽으로 들어와 보니 웬걸.

기대와는 달리 안쪽이 별로 시원하지가 않았다.

"이거 어떻게 된 거냐? 별로 시원하지가 않다, 꾸익."

"그렇지? 물론 한여름 무더위 끔찍한 바깥보다는 좀 낫긴 하겠지만 이게 뭔가 싶을 거야."

"그렇다. 여기가 바깥보단 조금 시원하긴 해도 딱히 큰 차이까지는 모르겠다, 꾸이익."

오크 아로쉬는 커다란 머리를 갸웃거렸다.

조금 실망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은인인 로이드를 믿었다.

지금까지 항상 신기한 뚝딱거림을 보여준 은인이니 이번에도 무슨 생각이 있겠거니 싶었다.

그런 아로쉬의 예상은 역시나 맞았다.

"맞아. 아직은 별로 안 시원할 거야."

"아직은, 꾸익?"

"어. 석빙고 하면 얼음인데 아직 얼음을 안 채웠으니까."

"얼음? 얼음을 여기에 채워야 시원해진다는 건가, 꾸익?"

"당연하지. 아무리 석빙고라도 그냥 있는 것만으로는 안 시원해지는 게 당연하잖아. 아이스박스에 얼음도 안 넣고 시원해질 수 없듯이 말야."

"아이스... 박스, 꾸익?"

"어. 그거랑 비슷한 거라고 보면 돼."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어쨌건, 그럼 얼음을 어디서 구할 생각인 거냐, 꾸익?"

"구할 방법은 없지, 원래대로라면."

"원래대로라면, 꾸익?"

"어. 한여름이니까."

"아하, 꾸이익."

듣고 보니 맞았다.

지금도 바깥엔 뙤약볕이 쨍쨍했다.

얼음을 구하긴커녕 시냇물이 마르지 않길 바라야 할 판이었다.

아로쉬가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하지만 뭔가 생각이 있을 것 같다. 맞나, 꾸이익?"

"어, 맞아."

로이드가 싱긋 웃었다.

"지금은 정상적인 방법으론 얼음을 구할 수 없으니까 만들어서 채워넣을 거야."

"얼음을 만든다고? 어떻게, 꾸이익?"

"어떻게긴. 잘 만들어야지."

지금은 한여름이었다.

당연히 얼음을 구할 곳은 없었다.

그렇다고 빙계 마법을 쓰는 마법사를 불러올 처지도 아니었다.

그러니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얼음을 직접 만드는 것이었다.

'내겐 아스라한 심법이 있으니까.'

심법을 제대로 응용한다면 얼음을 만들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그는 곧바로 얼음 만들기에 돌입했다.

우선 뽀동이에게 빨간 해바라기씨를 먹였다.

거대해진 뽀동이에게 부탁을 했다.

"뽀동아?"

"뽀동?"

"저어기 산맥 기슭에 있는 개울가 알지?"

"뽀동!"

"응. 거기 맞아. 그 개울에 가서 물 좀 담아와 줄래?"

"뽀도동?"

"볼주머니에 가득. 양쪽 전부 다. 해줄 수 있어?"

"뽀도동! 뽀동!"

"아, 가는 김에 방울이도 데려가 주라. 방울아? 너도 해바라기씨 좀 먹자. 여기. 옳지."

"방울!"

뚜와앙-!

방울이도 빨간 해바라기씨를 먹고 거대해졌다.

뽀동이가 그런 방울이를 등에 태웠다.

"방울이도 물 잔뜩 머금고 와. 그거 강철 끙까로 만들지는 말고. 마려워도 궁디에 힘주고 좀 참어. 알았지?"

"방울!"

두 환상종이 거대한 궁디를 흔들며 달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막대한 양의 시냇물을 볼주머니와 뱃속에 빵빵하게 채워왔다.

"잘했어. 여기 뱉어줄래?"

"쁘등! 오에에엑-"

"븡을! 오애애액-"

쏴아아!

두 환상종이 담아온 물을 바위틀에 쏟아냈다.

로이드가 미리 만들어둔 바위틀이 찰랑이는 물로 가득 찼다.

'이건 뭐, 냉장고 냉동실에 넣는 사각 얼음틀을 칸칸으로 나눈 거대화 버전이랄까.'

석빙고를 만들고 남은 화강암을 이용했다.

틈틈이, 열심히 깎아서 만들었다.

딱 대한민국 누구나 집에서 사용하는 가정용 냉장고 얼음틀의 거대화 버전이었다.

칸칸이 나뉜 얼음틀을 병사들과 함께 석빙고 내부로 옮겼다.

옮긴 후엔 모두를 내보냈다.

석빙고 문을 닫았다.

로이드 혼자만 남았다.

'그럼 시작해볼까.'

로이드는 석빙고 구석으로 갔다.

그곳에 쌓아둔 짚더미를 옮겨왔다.

물 찰랑거리는 얼음틀 속에 지푸라기를 큼직큼직하게 넣었다.

바닥면과 옆쪽 면에 꾹꾹 눌러주며 두툼하게 고정시켰다.

나중에 물이 얼었을 때, 얼음에 손상을 주지 않으면서 편리하게 얼음을 떼어내기 위한 준비였다.

그렇게 로이드는 모든 얼음틀 안쪽 바닥과 옆면에 지푸라기를 꼼꼼히 깔았다.

나름의 준비를 모두 마쳤다.

곧바로 본격적인 얼음 만들기에 돌입했다.

'정신을 집중하고.'

얼음틀을 앞에 두고 양반다리로 앉았다.

소매 걷은 두 팔을 얼음틀 속 찰랑이는 물에 담갔다.

그 상태에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아스라한 심법을 발동했다.

키이이잉....

마치 자동차에 시동이 걸리듯.

잠잠하던 두 개의 마나 써클이 회전을 시작했다.

심장을 중심으로 두고서 회전하며 흡인력을 발휘했다.

흡인력이 혈관과 근육을 타고 확장되었다.

어깨를 지나고 팔뚝을 거쳐, 손끝에 다다랐다.

손끝으로 주위의 마나가 흡수되었다.

여기까지는 평소의 아스라한 심법의 운용과 같았다.

로이드는 여기서 한 가지 변형을 시도했다.

'모든 마나가 아닌, 따뜻한 성질을 지닌 마나만 골라서.'

천천히 흡수했다.

물론 처음엔 생각처럼은 잘되진 않았다.

익숙하지 않은 운용법에 마나 써클의 회전이 불안정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로이드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더욱 차근차근.

정신을 집중하며.

손을 담그고 있는 물에서 따뜻한 마나만을 골라서 흡수하려 애썼다.

그렇게 그는 한참 동안 심법의 응용에 매달렸다.

한 시간, 두 시간, 그리고 세 시간.

얼음틀 속 물에 변화가 일어났다.

츠즈, 츠즈즈....

얼음틀 속 물이 따뜻한 성질의 마나, 열기를 빼앗겼다.

물이 조금씩 시원해졌다.

살얼음이 끼기 시작했다.

동시에 로이드의 머릿속으로 맑은 메시지가 울렸다.

딩동.

[아스라한 심법의 새로운 응용법을 개발하였습니다.]

[이 특별한 시도로 인해 아스라한 심법 스킬의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석빙고의 완성을 찍을 얼음 만들기.

그것을 위한 로이드의 연구와 시도가 심법의 성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40화. 오크족의 친구 (2)

딩동.

[스킬 레벨 업!]

[아스라한 심법 : 더블 써클 Lv 2]

[마나 증폭률 : 220%]

[스킬 전용 옵션 : ① 에너자이저 ② 잠력 폭발 ③ 절전 모드]

[다음 레벨업에 필요한 RP : 120]

별안간 귓속에 울리는 맑은 메시지.

그걸 들으며 로이드는 내심 환호했다.

'됐다. 얼음이 얼고 있어. 게다가 스킬 레벨까지 오르다니.'

내심 바라던 일이었다.

물속 따뜻한 성질의 마나만 심법으로 흡수하는 것.

그렇게 해서 물의 온도를 낮추고 궁극적으로는 얼리는 것.

그러한 새로운 시도를 하면 아스라한 심법에 대한 훈련도 될 거라 생각했던 그였다.

기대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기대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이거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데?'

물에 담그고 있는 손.

그 손끝을 통해 흡수되는 따뜻한 마나가 느껴졌다.

처음엔 익숙하지 않아서 좀 어려웠는데, 한번 감을 잡으니 생각보다 쉽기도 했다.

마치 자전거를 처음 배우는 데 성공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자, 더 기세를 올려서.'

츠즈즈즈....

심장을 둘러싼 두 개의 마나 써클.

두 써클의 회전이 약간 더 빨라졌다.

손끝에서 발휘되는 마나 흡인력이 더욱 커졌다.

그만큼 더 많은 열기가 물에서 손으로 흡수되었다.

물이 얼어붙는 속도 또한 한층 빨라졌다.

'손이 얼음 속에 갇히지 않게.'

점점 슬러시처럼 얼어붙는 물.

그 속에서 손을 조금씩 움직여서 뺐다.

나중에는 수면에만 손끝이 살짝 닿도록 했다.

그 상태에서 계속 물속의 열기를 빨아들였다.

심장 주위의 마나 써클로 가공하여 입으로 배출했다.

덕분에 살짝 벌린 그의 입에서 따뜻한 입김이 계속해서 빠져나왔다.

물에서 흡수한 열기였다.

'음, 이거 뭔가 비주얼이 좀 굴뚝 같긴 하지만.'

지금은 비주얼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로이드는 계속해서 심법을 운용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첫 대형 각얼음을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후우."

손을 뗐다.

눈을 떴다.

아까까지만 해도 찰랑이며 틀에 담겨 있던 물.

그 물이 꽝꽝 얼어 있었다.

'좋아. 성공이야.'

그는 고개를 들었다.

시선을 올려 천장을 살폈다.

아스라한 심법을 운용하며 공기 속 열기의 흐름을 느꼈다.

'열기도 잘 빠져나가고 있어.'

자신이 물에서 흡수해 배출한 열기가 아치형 천장으로 몰려 굴뚝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내부 열기의 원활한 배출.

석빙고가 제대로 만들어졌다는 증거였다.

'굴뚝 밖으로 언뜻 보이는 빛으로 봐서 저녁인가.'

아까 여기 들어올 때는 점심이 조금 지난 무렵이었다.

한데 얼음 하나를 만들고 나니 저녁 먹을 시간이 되어 있었다.

'느려. 이대로면 얼음 다 만들 때쯤엔 환갑잔치 상이 차려져 있을지도 몰라.'

더 빠르게 만들어보자.

로이드는 다음 얼음틀 앞에 앉았다.

심호흡을 하며 손을 담갔다.

아까보다 조금 더 대담하게.

심법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츠즈즈즈...!

'오, 된다.'

몇 분 지나지도 않았는데 물이 약간씩 서늘해지는 게 팔뚝으로 느껴졌다.

'좀 더 빠르게.'

마나 써클의 회전력을 끌어올렸다.

손끝으로 집중시킨 흡인력이 한층 커졌다.

그렇게 물이 더욱 빠르게 식어갔다. 표면에 살얼음이 끼었다. 슬러시처럼 변했다. 마침내 한 덩이 당당한(?) 대형 각얼음으로 재탄생했다.

'좋아. 계속 가자.'

두 번째 얼음 만들기는 대강 한 시간이 걸렸다.

이제는 요령이 붙었다.

자신감도 함께 붙었다.

그는 곧바로 다음 얼음 만들기에 돌입했다.

다음 얼음은 조금 더 빨리 만들어졌다.

'대략 40분.'

얼음 만들기가 계속되었다.

만드는 시간도 점점 줄었다.

다음 대형 각얼음은 약 30분.

그다음에는 25분.

다음은 20분.

나중에는 15분까지 줄었다.

'헉, 허억. 계속!'

손으로 열기를 흡수하고 입으로 배출하고.

마치 인간 실외기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밤이 새도록 열심히 얼음 만들기에 매달렸다.

그리고 새벽이 밝았을 무렵.

마침내 마지막 얼음틀의 물을 얼려낼 수 있었다.

"후, 후우!"

너무 오래 심법을 운용한 탓일까.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순간 눈앞이 띵했다.

하지만 그만큼 보람도 있었다.

'심법 스킬 레벨이 또 올랐어.'

마지막 대형 각얼음을 완성하는 순간이었다.

아스라한 심법 스킬이 마침내 더블 써클 3레벨로 올랐다.

덕분에 증폭률도 무려 240%를 찍게 되었다.

'어쨌건 이로써 정말로 완성이다.'

그는 뿌듯한 얼굴로 석빙고 내부를 둘러보았다.

전날 아로쉬가 투덜거릴 때의 훈훈하던 실내는 이제 온데간데없었다.

곳곳에 만들어진 얼음에서 나오는 냉기.

그 냉기가 석빙고 안쪽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냥 있다가 보면 입에서 한겨울에나 보일 입김이 나올 정도였다.

'그럼 이제 정리해볼까.'

조금 피곤했지만 아직 쉴 수는 없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아스라한 심법을 운용했다.

'이번엔 그냥 평범하게 힘으로. 읏차!'

꽈자작!

얼음틀 둘레로 삐져나온 지푸라기 덩이를 잡았다.

힘을 주어 천천히 끌어당겼다.

꽈작, 소리가 나며 대형 각얼음이 천천히 끌려나왔다.

로이드는 그렇게 들어 올린 얼음을 미리 깔아둔 두터운 짚더미 위에 내려놓았다.

내려놓자마자 겉면에 톱밥과 왕겨를 듬뿍 발랐다.

짚더미로 옆면과 위쪽까지 꼼꼼하게 감쌌다.

얼음이 녹지 않도록 자체적인 단열을 추가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로이드는 모든 얼음을 꺼내고, 짚으로 넉넉히 감쌌다.

서로의 냉기가 지켜질 수 있도록 켜켜이 쌓았다.

'좋아. 이거면 겨울까지 녹지 않고 버틸 수 있어.'

로이드의 피로 가득한 얼굴에 함박웃음이 번졌다.

마침내 석빙고가 완전히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또한, 우여곡절 끝에 석빙고를 완공한 보상을 듬뿍 챙길 때가 다가온 순간이기도 했다.

"꾸이익! 정말 시원하다, 꾸익!"

"꾸이익! 진짜 서늘하다, 꾸익!"

"꾸이익! 얼음도 맛있다, 꾸익!"

"...여기 배신자가 있다, 꾸이익!"

석빙고 안은 혼란의 도가니였다.

최근의 사냥으로 확보한 대형 몬스터 고기.

그걸 석빙고에 넣으러 온 오크들은 빙고 내부에 가득한 냉기를 접하자마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놀라기는 족장 아쿠쉬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정말로 이렇게 시원할 줄은 몰랐다, 꾸익."

빙고 내부를 둘러보는 족장의 왕방울만 한 눈에 감탄이 서렸다.

로이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절 별로 못 믿었던 겁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다. 그냥 조금 선선한 지하실 정도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꾸익."

"뭘 그렇게 감탄까지. 문단속만 잘하시면 됩니다. 여름에는 꼭꼭 닫아두시고, 겨울에는 찬바람이 들도록 열어두세요."

그 밖에도 로이드는 석빙고의 얼음을 보존하는 법, 겨울에 얼음을 구해서 채워넣는 시기 등을 알려주었다.

모두 석빙고 운영의 핵심이 되는 꿀팁이었다.

그런 덕분이었을까.

"과연, 꾸익."

아쿠쉬의 솥뚜껑 같은 손바닥이 로이드의 어깨를 짚었다.

족장의 눈빛에는 종족을 뛰어넘은 신뢰감이 서려 있었다.

"이 정도 냉기라면 겨울까지도 고기를 보관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 로이드, 진심으로 고맙다. 너는 내 아들을 살려준 은인일 뿐 아니라 우리 부족의 오랜 고민을 해결해준 진정한 친구이자 전사이다, 꾸익."

"그럼 절 전사로 인정해주시는 겁니까?"

"당연하다, 꾸익."

"우랄 산맥 떡멧돼... 아니, 당신들이나 겨우 들 수 있는 동상을 짊어지고 하체 운동을 하지 않아도요?"

"그것 또한 당연하다, 꾸익."

족장 아쿠쉬가 커다란 머리를 끄덕였다.

"우리는 이제 친구다. 하체 운동 좀 못하는 허약하고 나약하고 연약하고 물렁해서 가련하게 바스라질 멸치 같은 모습이라도 얼마든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꾸익."

"...어이, 이봐요."

"농담이다, 껄껄껄, 꾸익!"

로이드가 어처구니없게, 아쿠쉬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린 순간이었다.

딩동.

로이드의 눈앞에 뜻밖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종족 개방]

[오크 부족장 아쿠쉬가 당신을 진정한 친구로 받아들였습니다.]

[이제 오크족은 당신을 동등한 우정의 대상으로 여깁니다.]

[오크와의 호감도를 올리고 RP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종족 개방 보너스로 100 RP가 특별지급됩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611]

'어?'

로이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크에게도 RP를 얻을 수 있게 된 거야?'

사실 처음 아로쉬를 구조할 때부터 내심 기대하던 것이었다.

어쩌면 아로쉬에게서 호감을 사고 RP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한데 어쩐 일인지 RP를 얻을 수 없었다.

호감도에 관련된 메시지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아로쉬가 자신을 은인으로 여기게 되었음에도 그랬다.

'그래서 그냥 오크에게는 RP를 얻을 수 없는 거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내심 단념하고 있었다.

기대를 접었다.

'그런데 사실은 달랐어. RP를 얻을 수 없는 이유가 따로 있었던 거야.'

종족의 장벽.

그 종족과 동등한 우정을 쌓지 못한 것.

그것이 오크에게서 RP를 얻을 수 없었던 이유였다.

한데 이제 그 제한이 풀린 것이었다.

'뜻밖의 수확이네.'

로이드는 앞으로도 이곳 오크 부족과 친하게 지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물론 지금 챙길 수 있는 보상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럼 이제 계약서의 내용을 실천할 차례겠군요."

"그렇다. 네가 우리에게 석빙고를 지어줬으니, 우리는 쓰던 운동기구를 너에게 준다, 꾸이익!"

"그럼 전 계약서대로 돌로 만든 운동기구를 드리도록 하지요."

그러잖아도 석빙고를 만드는 틈틈이 운동기구도 만들어두었다.

방울이로 강철 끙까를 뽑고 엮어서 철봉으로 제작했다.

화강암을 깎아서 무게추로 삼았다.

그렇게 초중량 덤벨과 역기, 그 밖의 기구들을 만들어 오크족에게 선물할 수 있었다.

대신 오크족이 그동안 사용했던 수많은 금은보화를 얻을 수 있었음은 물론이었다.

보상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나 아로쉬는 은인 로이드에게 약속했다! 로이드가 전사로 인정받으면 120명의 오크 남자를 영지에 보내주기로 했다. 아로쉬는 사나이 전사다. 오늘 나 아로쉬는 약속을 지킨다, 꾸이익!"

아로쉬의 외침이 울렸다.

근육 울끈불끈한 오크 전사 120명이 줄을 섰다.

프론테라 남작령으로 파견되기 위해 자원한 전사들이었다.

"인간들은 연약하다, 꾸익!"

"운동 가르치고 싶다, 꾸익!"

"우리가 가야 한다, 꾸이익!"

그렇게 120명의 근육 전도사, 아니, 파견 인원도 순식간에 꾸려졌다.

로이드는 그들을 돌아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설마 이 정도로 많은 걸 챙길 줄은 몰랐는데.'

오크들과의 우정을 쌓아 RP를 얻을 수 있게 됐다.

부락에 쌓여 있던 금은보화를 싸그리 챙기게 됐다.

120명의 오크 전사를 일꾼으로 쓸 수 있게도 됐다.

거기에 흑마법사를 처리하고 얻은 귀한 마법 재료도 있었다.

이번에 얻은 것들을 헤아릴수록 흐뭇함이 차올랐다.

'좋아. 매우 좋아.'

처음 아로쉬를 개미굴에서 발견했을 때부터 떠올렸던 핵이득 플랜.

그때 그렸던 큰 그림보다 더욱 근사한 그림이 그려진 지금이었다.

"그럼 바로 출발하도록 하지."

오크 부족의 열렬한 배웅을 받으며 귀경길에 올랐다.

로이드와 하비엘, 40인의 공병대 병사들, 거기에 120인의 오크 전사들이 더해졌다.

큰 규모의 인원인 만큼 산맥을 건너오면서도 행렬이 떠들썩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몬스터의 위협에서 안전했다.

어지간한 몬스터는 오크 120마리가 모여 있는 광경을 보고는 슬그머니 다른 길로 피해 갔다.

가끔 용감하게(?) 일행을 덮친 몬스터는 하비엘과 오크 전사들의 반격을 받아야 했다. 아주 그냥 영혼의 뿌리 끝까지 탈탈 털리고는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으로 전락했다.

그렇게 일행은 산맥을 맹렬히 넘었다.

오크 마을에서부터 가지고 온 크고 무거운 금은보화가 잔뜩 짐이 되고 있음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모두가 애초에 오크 전사들이 운동기구로 애용했던 물건들이었던 까닭이었다.

"이거 들고 걸으니까 제대로 운동 된다, 꾸익!"

"난 어깨에 근자극이 온다, 꾸익!"

"지방이 타오른다, 꾸이익!"

보통의 인간은 들기도 버거운 물건들이었다.

하지만 오크들은 오히려 좋아했다.

들고 걸으니 근육에 자극이 온다며 기뻐했다.

역시 쇠질이 최고라고 외치는 동네 헬스장 죽돌이 아저씨들 같았다.

서로 더 무거운 걸 짊어지려고 쟁탈전까지 벌여댔다.

그렇게 열흘 동안 산맥을 걷고, 떠들고, 통과했다.

마침내 익숙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프론테라 영지.

집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한데 그렇게 돌아온 남작가 저택에는 조금 뜻밖의 상황이 벌어져 있었다.

"로이드 도련님, 남작님께서는 지금 응접실에 계십니다."

남작 부부를 대신해서 마중을 나온 행정관이 고개를 숙였다.

로이드가 반문했다.

"응접실? 손님이라도 와 있는 거야?"

"그렇습니다."

"손님 누구?"

"그게...."

"그게?"

"샤일로 씨와 미트로프 씨입니다."

"그게 누군데."

"으음, 남작님께 사채를 빌려준...."

"아하. 사채꾼?"

기억이 났다.

지난번에 남작을 찾아왔던 홀쭉이와 뚱뚱이.

당시 약간의 정중한 뻥카와 위협을 섞어서 그들을 쫓아냈던가.

로이드는 당시의 일을 떠올리며 싱긋 웃었다.

"마침 잘됐네."

정말로 잘됐다.

마침 이제 슬슬 사채꾼들과의 빚 문제를 점검해보려던 참이었는데.

'걔넨 좀 나랑 은근 잘 맞나 봐. 어쩌면 이렇게 필요한 순간에 딱딱 맞춰서 찾아와주냐. 고맙게.'

응접실로 걸음을 옮기는 로이드.

오늘, 사채꾼들과 협상을 벌일 생각에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41화. 오크족의 친구 (3)

"다녀왔습니다."

끼이익.

로이드는 문을 열었다.

짐짓 태연하게 말했다.

열리는 문 너머 드러나는 응접실 안쪽의 광경.

세 명의 시선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아니, 로이드?"

먼저 이쪽을 향해 말문을 연 이는 프론테라 남작이었다.

놀라움과 반가움, 조금의 난처함이 섞인 눈빛이었다.

로이드는 남작을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

"네, 다녀왔습니다."

"그래, 무사히 잘 돌아왔구나. 다친 곳은 없고?"

"예. 걱정해주신 덕분에."

"그래도 얼굴이 야위었구나."

"괜찮습니다. 열심히 산을 넘어오다 보니."

로이드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자신을 보자마자 걱정해주는 남작이 고마웠다.

다른 한편으로는 남작이 가장 난감한 순간에 영지로 돌아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남작의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두 불청객의 모습 때문이었다.

"그쪽도 오랜만이군요. 샤일로 씨. 미트로프 씨."

"...."

두 사채꾼은 아까부터 말없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홀쭉이 사채꾼 샤일로.

뚱뚱이 사채꾼 미트로프.

이쪽을 향한 둘의 눈길은 결코 곱지 못했다.

'아마 지난번 여길 방문했을 때 내 논리에 허점을 찔려 물러나야 했던 경험 때문이겠지.'

과연 그 생각이 맞은 걸까.

홀쭉이 샤일로가 한쪽 입술을 말아 올렸다.

"오호라. 이게 누구신가. 프론테라 남작의 훌륭한 장남이 아니신가."

"그러게. 오늘은 또 무슨 구실로 우릴 쫓아내려고 이렇게 오셨나."

뚱뚱이 미트로프도 한마디 거들었다.

로이드의 쓴웃음이 짙어졌다.

"오늘은 정식으로 초청을 받고 오신 거겠지요?"

"물론."

샤일로가 말했다.

"미리 남작께 사람을 보내 연락을 넣었지. 우리가 방문해도 되겠느냐고. 현명한 남작께서는 흔쾌히 그 제안에 동의하셨고. 맞습니까?"

"...맞습니다."

남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남작은 이들에게 거액의 빚을 진 입장이었다.

그러니 이들의 방문을 막을 엄두는 내지 못했을 것이다.

로이드는 딱히 자세한 설명을 듣지 않아도 저간의 그러한 사정을 모두 눈치챌 수 있었다.

이런 상황,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도 그러셨으니까.'

하루가 머다하고 집을 찾아오던 빚쟁이들.

아버지는 그들의 등쌀에 시달리면서도 감히 막을 생각을 못하셨다.

그들이 어떤 폭언을 퍼붓고 행패를 부려도 그저 네, 네, 고개 주억이기만 하셨다.

힘없는 사람이 죄인이다.

빚진 사람이 죽일 놈이다.

사채꾼들이 집안을 뒤엎고 돌아간 날 저녁이면 홀로 소주잔 기울이시며 아버지가 한탄처럼 내뱉으시던 말이었다.

'후우, 그만 생각하자.'

떠올리기만 해도 쓰라림이 몰려오는 기억들.

로이드는 숨을 골랐다.

쓰린 기억을 눌렀다.

눈앞의 두 사채꾼을 쳐다보았다.

그런 그의 눈길은 이미 침착했다.

아픈 기억 대신 차분한 영악함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사채꾼들을 향하는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하하. 그러셨군요.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혹시 목축이실 음료는 받으셨습니까?"

"음료 같은 거 말고 다른 걸 받고 싶은데."

홀쭉이 샤일로가 이죽이며 대꾸했다.

뚱뚱이 미트로프도 한마디 보탰다.

"이를테면 광산 같은 거."

"광산이요?"

"그래, 광산."

미트로프의 두툼한 볼살이 출렁거렸다.

살 속에 반쯤 파묻힌 눈동자가 탐욕을 드러냈다.

'애송이, 네놈이 만든 석탄 광산 말이다.'

문득, 떠올랐다.

프론테라 남작령에 만들어졌다는 석탄 광산.

망나니로 유명했던 장남이 병사들을 동원해 만들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그 소문을 믿지 않았다.

남작령에 무슨 광산이냐고.

그런 걸 만들 돈도 없을 거라고.

그렇게 피식거리는 비웃음으로 무시했다.

한데 아니었다.

이후로도 비슷한 소문이 계속 들려왔다.

광산을 파다가 사고가 났다느니.

야수 개미가 출몰할 뻔했다느니.

그 과정에서 망나니 장남이 일꾼들을 구했다느니.

별별 소문들이 연이어 사람들의 입을 타고 귓가를 톡톡 두드려 했다.

그쯤 되니 미트로프도 상황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사람을 풀어 프론테라 남작령의 일들을 조사했다.

덕분에 알 수 있었다.

"설마하니 우리 남작님의 장남께서 그런 재주를 지니고 있었을 줄 누가 알았을까. 구들장? 온돌? 그런 괴상한 걸 만들고 영지민들을 꼬드겨서 돈을 모았다지?"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얼마나 놀랐던지.

"덕분에 비로소 이해하게 된 점도 있었지. 어쩐지 최근 우리 남작님께서 이자를 성실하게 따박따박 내시더라고? 그게 그 온돌인지 뭔지를 만들면서 나온 돈이었던 거야."

"거기서 남는 돈으로 도로도 깔고. 광산도 파고. 똑똑해. 정말이지, 쿠그큭."

홀쭉이 사채꾼 샤일로도 쿡쿡대며 웃었다.

절로 웃음이 나왔다.

석탄 광산이라니.

그것도 갓 만든 광산이라니.

돈 냄새라면 기가 막히게 잘 맞는 자신의 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저 광산, 차지할 수만 있다면 당분간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어줄 것이 확실하다고.

"그래서지. 남작님을 방문해서 이렇게 조오-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참이란다."

"좋은 이야기라뇨?"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협상을 하던 중이랄까."

로이드의 반문에 샤일로가 능글맞게 웃었다.

그가 남작을 돌아보았다.

거만하게 눈짓했다.

"직접 아드님께 말씀해주시지요?"

"...."

남작이 침묵했다.

샤일로가 쯧, 혀를 찼다.

그가 비쩍 말라 뾰족한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남작께서 말씀하실 생각이 없으시면 내가 해야겠구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런 거야. 남작님은 광산의 권리를 우리에게 양도하고, 우리는 남작님께 3개월치의 이자를 면제해드리고. 그런데 말이야. 어째 남작께서 우리의 조건을 계속 거부하고 계시다는 말씀이지."

"...."

"젊은 사람의 생각은 좀 어때? 직접 아버지를 설득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우리가 제시하는 조건, 이만하면 훌륭하지 않나?"

"...."

훌륭하기는 개뿔.

힘들여 개고생 끝에 만든 광산을 넘기는 대신에 달랑 3개월치 이자 면제라니.

듣고 나니 기도 차지 않았다.

절로 주먹이 꽉 쥐어졌다.

이가 갈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로이드는 주먹을 치켜들지도, 얼굴을 일그러뜨리지도 않았다.

빡친다고 해서 빡친 티를 드러내면 말리는 거다.

빡칠수록 나긋나긋하게.

화날수록 능글능글하게.

"어이쿠야. 그거 참 윈윈스러운 제안이네요."

"그렇겠지?"

그렇기는 개뿔.

이제부터 그 제안을 나만 두 번 이겨서 윈x2가 되는 협상으로 바꿔주지.

다짐한 로이드는 빙긋 웃었다.

"그럼 저도 하나 제안을 드릴까 하는데. 들어보시겠습니까?"

"협상을 해보자고? 별로 들을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앞으로는 채무를 조금씩 나누어서 상환하겠습니다. 일부 상환이랄까요. 그리고 이후의 이자는 상환해서 줄어드는 채무액에 맞춰서 낮춰주시죠."

"...뭐?"

"아, 어떡하죠? 벌써 제안을 들어 버리셨네요."

"...."

샤일로와 미트로프의 눈길에 불쾌한 기색이 떠올랐다.

미트로프가 두툼한 턱살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건 곤란하겠는데."

"맞아. 곤란해. 일부 상환은 불가능해. 그게 우리 방침이거든."

샤일로가 이어서 말했다.

"갚으려면 한꺼번에 갚아. 조금씩 떼어서 돈 갚는 거, 안 돼. 그런 거 우리 방식 아니야."

"허. 그 많은 원금을 한꺼번에 갚으라구요?"

"당연하지."

"그럼 그동안 막대한 이자를 계속 내라는 뜻인 겁니까?"

"우리 방식이 원래 그래. 그걸 알고도 돈을 빌려간 것 아닌가?"

샤일로가 뭔 소리를 하냐는 듯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들은 사채업자였다.

약간의 돈을 빌려주고 그걸 막대한 이자로 불리는 게 그들의 목적이자 사업 수단이었다.

그렇기에 일부 상환 따위는 받지 않았다.

불어나기만 하는 원금.

그 막대한 금액을 한 번에 갚을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하물며 급전이 필요해 사채를 끌어다 쓴 사람에게는 더욱 불가능한 이야기일 터.

즉, 영원히 갚을 수 없는 빚의 굴레 속에서 허덕이게 되는 것이다.

마치 개미지옥에 빠진 개미처럼.

버둥거려도 빠져나갈 수 없다.

체액을 빨려 빈 껍질만 남는다.

'그렇게 채무자가 시달리다 못해 파산하거나 죽으면 그때 영지 등의 부동산을 헐값에 꿀꺽하고 비싸게 파는 거지.'

샤일로와 미트로프.

두 사채꾼이 가장 즐겨 쓰는 수법이었다.

또한, 프론테라 남작이 현재 걸려들어 있는 함정의 실체이기도 했다.

로이드는 이참에 그 함정의 악랄한 고리를 끊어 버릴 생각이었다.

'안 그러면 내가 아무리 돈을 벌어도 끝이 나질 않을 테니까.'

일부 상환이 가능하도록.

남은 채무액에 따라 이자가 줄어들도록.

그 두 가지 조건만 관철하면 많은 게 달라질 것이다.

더는 사채라고 부를 수 없는, 일반적인 채무와 비슷해질 것이다.

앞으로 빚 갚을 일 또한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그러니 제안을 드리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제가 제시하는 조건, 이만하면 훌륭하지 않습니까?"

"...."

상대가 코웃음 치건 말건.

얼굴에 티타늄 철판을 깔고 밀어붙였다.

물론 샤일로와 미트로프의 코웃음은 더욱 커졌다.

샤일로가 입꼬리에 노골적인 비웃음을 얹었다.

"우리 도련님이 오늘 감을 잃으셨나? 자꾸 이상한 고집을 부리시는구만? 설마하니 우리가 그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당연하지요."

"당연해?"

"네."

"어째서?"

"제가 오늘 협상 능력이 뛰어난 친구를 데려왔거든요."

"...뭐?"

샤일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트로프가 두툼한 미간에 주름을 그렸다.

로이드가 뒤를 돌아보았다.

응접실 출입문 쪽을 향해 말했다.

"어이, 이제 들어와도 돼."

그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벌커억! 후우웅!

응접실 문이 엄청난 기세로 열렸다.

문이 숫제 통째로 뽑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격렬한 기세였다.

문이 열리며 만들어진 바람이 로이드의 셔츠 깃은 물론이고 뒤쪽에 있는 두 사채업자의 머리칼마저 나풀나풀 흔들리게 만들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우렁찬 외침이 응접실에 울렸다.

"반갑다! 나 오크 아로쉬가 오늘 강철모래 부족을 대표해서 프론테라 남작령의 주인을 만나러 왔다, 꾸이익!"

쿠아아!

외침 한 방에 실내가 쩌렁쩌렁 울렸다.

"...!"

샤일로와 미트로프는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기겁한 얼굴로 응접실 등받이에 몸을 푸확 파묻었다.

당황하기는 남작도 마찬가지였다.

"자네, 으음, 오, 오랜만에 보는군?"

"그렇다, 꾸익!"

"우리 로이드와 함께 온 건가?"

"물론이다! 우리 부족장님의 뜻을 전하러 왔다, 꾸이익!"

"뜻이라니?"

"이거다, 꾸익!"

쿵, 쿠웅, 쿵!

아로쉬가 거대한 근육질 덩치로 응접실을 가로질렀다.

기겁한 두 사채업자를 대흉근 불끈거리며 지나쳤다.

남작의 테이블 앞에 묵직한 물건을 내려놓았다.

대형 몬스터의 송곳니였다.

"가장 용감한 전사만 사냥할 수 있는 카르가스의 송곳니다. 부족장님이 남작에게 이걸 증표로 전해주길 원하셨다, 꾸이익."

"증표라니, 어떤 증표를 말하는 건지."

"혈맹의 증표다, 꾸익."

"뭐?"

남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로쉬의 말이 이어졌다.

"로이드 프론테라는 우리 부족 전체의 은인이다. 그뿐만 아니라 오크 일족의 역사에서 드물게 부족의 전사로 인정받은 인간이다, 꾸이익."

"무슨...."

남작의 눈이 점점 더욱 커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크에게 부족의 전사로 인정받았다니.

로이드가 호언장담했던 일이 정말로 실현됐다니.

이는 정말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니,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소수의 예외가 있긴 했다.

그중에 가장 유명한 일화가 바로 수백 년 전, 어느 이름 모를 소녀가 대족장 아카쉬에게 전사로 인정받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오래전의 일이었다.

역사서에 기록되었을 뿐인, 진위조차 파악하기 어려운 아득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실은 남작도 로이드를 보내면서 전사로 인정받을 수 있으리란 기대는 거의 하지 않기도 했다.

한데 그런 비현실적인 일이 지금, 당당한 오크 전사이자 부족장의 아들인 아로쉬의 입을 통해 공식적으로 선언되고 있었다.

"또한, 당신은 그런 부족의 은인이자 전사인 로이드 프론테라의 아버지다. 우리 부족과 피를 나누는 혈맹의 자격이 충분하다, 꾸이익."

아로쉬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표정 또한 엄숙했다.

"어떤가, 남작? 우리 족장님의 뜻을 받아들여 우리와 혈맹의 관계를 맺겠는가, 꾸이익?"

"...."

남작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미처 상상해본 적도 없는 거대한 행운이었다.

오크 부족과 혈맹을 맺는다는 것.

그것은 즉, 프론테라 남작령이 오크 종족 연합의 공식적인 구성원이 된다는 뜻이었다.

"물론일세."

이건 망설이거나 고민할 일이 아니었다.

결심한 남작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아로쉬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다! 이제 프론테라 남작령은 우리 부족과 혈맹이 되었다! 우리는 친구이자 형제이며 자매다, 꾸익!"

남작과 아로쉬가 악수를 나누었다.

그동안 두 사채업자는 멍한 눈길로 그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자신들을 돌아보는 아로쉬의 눈빛에 저도 모르게 온몸을 움찔하고 말았다.

"그런데 저 인간들은 누구냐? 아로쉬는 문밖에서 다 들었다. 저 인간들이 남작을 자꾸 무시했다, 꾸익."

"...!"

홀쭉이 샤일로.

뚱뚱이 미트로프.

두 사채업자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어지는 아로쉬의 물음이 둘의 심장을 더욱 벌렁거리게 했다.

"혹시 저 인간들은 남작령의 적인가, 꾸익?"

"...."

남작령과 강철모래 부족은 혈맹의 관계.

남작의 적은 부족의 적이다.

부족의 적은 즉각 척살하는 것이 전사의 미덕이다.

그만큼 오크들은 은혜와 원한에 철저하기로 유명했다.

그리고 불운하게도, 두 사채업자는 그러한 오크의 관습을 제법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으음, 글쎄? 이분들이 내 제안을 거부하면 그때부턴 안타깝게도 적이 될 예정이긴 한데."

빙글거리며 한마디 보태는 로이드의 너스레.

그걸 들은 두 사채업자의 등짝에서 식은땀이 쑴펑쑴펑 솟구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