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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화. 예정된 재앙 (1)

 

 

"비벙-!"

동부산맥 중턱 카푸아 호수에서부터 온 세상에 울리는 맑고 고운 소리. 파워풀한 비벙이표 알람과 함께 프론테라 백작령의 아침이 밝았다.

"으음...."

모처럼 상큼한 아침이다.

오랜만에 개운하게 잘 잤다.

눈을 뜬 로이드가 떠올린 첫 생각이었다.

'어째서 쉬려고 마음먹은 날은 평소보다 눈이 잘 떠지는 걸까.'

참 이상한 일이다.

예전부터 쭉 그랬다.

등교하거나 일이 있는 날은 억지로 눈뜨는 것조차 빡쎈데.

참 신기하게도 아무 일 없는 아침엔 자동으로 눈이 반짝 떠지곤 했다.

오늘도 그랬다.

'당분간 열심히 매달릴 일이 없구나.'

로이드는 침대에 누운 채로 영지의 일들을 떠올려보았다.

아파트 단지 공사는 순조로웠다.

특히 103동 건물이 완공된 뒤부터 제대로 탄력이 붙었다.

모든 동이 '복사-붙여넣기'처럼 똑같이 생긴 덕분이 컸다.

작업자들이 점점 숙련되다 보니 건설 속도가 올라가면서 동시에 완성도도 한층 좋아졌다.

'그러니까 이대로 쭉 맡기면 되고.'

대하수로 공사도 마찬가지였다.

하수로의 대동맥 역할을 해줄 메인 대하수로와 슬러지 처리장이 완성된 상황이었다.

이제 남은 공사는 각각의 촌락과 아파트 단지에 하수정을 설치하고, 그 각각의 하수정에서부터 대하수로를 잇는 하수관을 만드는 것이 다였다.

'그것도 그냥 맡기면 돼. 난 점검만 하는 거지.'

바이에른 경 만세.

공병대와 엘프, 오크 일꾼들 만만세.

자신이 일일이 잔소리하지 않아도 알아서 공사가 굴러가는 시스템.

믿고 일을 맡길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건 얼마나 큰 복인가.

'물론 영지 자금이 넉넉한 편은 아니지만.'

천장을 보며 뒹굴거리던 로이드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영지의 자금.

사실 언제나 넉넉하지 못했다.

돈이 들어가는 곳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었다.

일단 피난민부터가 몇만 단위의 머릿수였다.

그들을 먹이고 입히는 물자만 해도 엄청났다.

한데 아직 동부산맥 개간지는 이제 겨우 첫발을 떼었을 뿐이다.

'물론 라코나 자작령에서 쭉쭉 거둬들이는 수도세랑 여러 자금에다가 왕실에서 나오는 물자와 지원금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넉넉한 건 절대로 아니야.'

처음엔 넉넉할 줄 알았는데.

막상 큰 공사를 연이어 하고 나니 전혀 넉넉하지 않았다.

아니, 기회가 있다면 안정적인 자금줄을 더 확보해야 할 듯했다.

'왕실에서 나오는 지원금이 영원한 것도 아니잖아.'

지원금은 언제든 끊길 수 있다.

왕실에서는 아니라고 하지만.

국왕이 약속해주긴 했지만.

세상만사가 언제나 약속대로만 돌아가는 건 아니지 않겠는가.

'예기치 못한 천재지변이나 정치적인 격변이라든가, 혹은 전쟁 같은 게 터질 수도 있지. 그래서 왕실이 어려워질 수가 있는 거니까.'

즉, '피치 못하게' 지원금이 끊길 가능성이 언제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쪽은 '어쩔 수 없이' 굶고 말라 죽게 된다.

가능하다면 그런 사태는 피하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안정적인 자금원을 추가로 마련해두고 싶었다.

'...라지만, 그 고민은 내일부터 하자. 내일부터.'

오늘은 좀 쉬자.

정말로 푹 쉬자.

지난 몇 달 동안 온갖 공사를 다 치렀으니까.

아파트 단지부터 동부산맥 옹벽에다가 대하수로까지.

진심 몸이 몇 개로 쪼개지는 듯 피곤하기 짝이 없으니까.

로이드가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뒤척일 무렵이었다.

그래서 침대에서 삐걱 소리가 난 직후였다.

 

똑똑똑.

 

"로이드 도련님, 혹시 방에서 식사를 하실는지요?"

침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

뒤이어 하녀의 물음이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벌써 아침 식사 때가 되었나 보다.

로이드는 침대에서 상반신을 일으키며 얼른 셔츠를 주워입었다.

"어, 들어와."

문이 열리고 하녀가 쟁반을 가지고 들어왔다.

하녀 중에서 특히 낯이 익은 얼굴, 에밀리였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도련님?"

"어. 혹시 식사 들고 온 채로 문 앞에서 기다린 거야? 내가 뒤척이면서 소리 낼 때까지?"

"딱히 많이 기다리지도 않았어요."

별일 아니라는 듯 생긋 웃는 에밀리.

그녀가 소시지와 달걀 한 덩이, 샐러드, 따끈한 우유를 차례로 착착 내려놓으며 말했다.

"한데 도련님? 혹시 이런 말씀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도련님은 참 좋으시겠어요."

"응? 내가? 왜?"

"저렇게 친절하고 온화하신 영애 분이 청혼을 위해 이 먼 곳까지 오셨잖아요."

"아, 그분?"

로이드는 피식 웃고 말았다.

어제 잠깐 봤던 코르도나 백작 영애가 떠올랐다.

확실히 굉장히 친절하면서도 쿨한 모습이었지.

그런 모습이 에밀리에게도 깊은 인상으로 느껴진 듯했다.

"으음, 뭐 그래도 어쩌겠냐. 정작 나도, 코르도나 영애도 이런 정략결혼에는 관심이 없는걸."

쓴웃음과 함께 말했다.

한데 에밀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움, 저는 페라노 영애님을 말씀드린 건데요?"

"응?"

"아, 맞다."

짝, 에밀리가 손뼉을 쳤다.

깜빡했다는 듯 재잘재잘 덧붙였다.

"생각해보니까 도련님은 아직 못 만나보셨겠어요. 페라노 영애님 말여요."

"...잠깐. 페라노 영애님이라니. 그건 또 누구?"

"아침 일찍 오신 분이셔요."

"아침 일찍?"

"네. 아침 완전 일찍요. 해 뜨기 전이요."

"완전 일찍, 해 뜨기 전, 그러니까, 나 자고 있을 때?"

"네네. 제가 오늘 새벽 물 떠오는 당번이라서 일찍 일어났거든요. 그래서 봤어요. 완전 호화로운 마차에 호위기사님을 열두 분이나 두셨더라구요. 그런데도 어찌나 친절하고 나긋나긋하신지."

"...워워. 잠깐. 잠깐만."

지금 에밀리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로이드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물었다.

"네가 신호도 없이 마구 급출발을 해서 내가 잘 파악이 안 돼서 그러는 건데, 하나만 물을게."

"네에, 도련님."

"그러니까 설마 지금 코르도나 영애 말고 다른 영애가 또 여기 도착했다는 거야? 꼭두새벽에?"

"네에, 도련님. 지금 백작님이랑 같이 아침 식사 드시고 계세요."

"...."

"도련님?"

로이드는 쿵콰당쿵콰당거리는 심정으로 벌떡 일어났다.

미치겠다.

어제 코르도나 영애와 이야기를 잘 끝낸 걸로 사태가 수습된 줄 알았는데. 생각도 없는 청혼 사태를 완전히 종식시켰구나 안심하고 있었는데.

한데 아닌 듯하다.

아무래도 이거, 번지는 산불처럼 일이 커질 듯한 기미가 보인다.

그는 저도 모르게 신발을 주섬주섬 신기 시작했다.

"어, 에밀리 미안. 나 좀 가봐야 할 거 같아."

"네에?"

"급히 가봐야 할 거 같아서. 아니, 수습을 좀 해야 할 거 같아서. 아침은 식당에 가서 먹을게."

"저기, 그럼 이 음식은...."

"네가 먹어."

"네?"

"나 대신 먹으라고. 남들한테 티 내지 말고. 알았지?"

"아, 저기...."

"음식 남기지 마라. 벌 받아. 나중에 지옥 가서 평생 남긴 음식 싸그리 다 비벼서 먹어야 돼."

"...."

안색이 해쓱해지는 에밀리를 두고 침실을 나섰다.

식당으로 내려가는 로이드의 걸음이 바빠졌다.

 

 

"후아."

폭풍 같은 오전이 지나갔다.

아니, 정정.

멘탈의 밑바닥까지 탈탈 털린 듯한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그래서, 그때부터 영애들과 첫대면을 할 때마다 단도직입적으로 단호한 거절의 말씀을 서슴없이 내미셨다는 겁니까."

"어."

이곳은 프론테라 저택 정문 근처.

로이드는 정문 앞 나무그늘 벤치 등받이에 젖은 빨래처럼 등을 축 기대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에둘러 말할 필요 있겠냐."

"혹시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함이셨습니까."

"어."

하비엘의 물음에 재차 고개를 끄덕.

그러자니 문득, 아까 아침부터 겪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식당에 내려갔더니 글쎄, 새벽에 도착했다는 페라노 영애가 활짝 웃으며 날 맞이하더라. 근데 그 분위기가 어휴."

"분위기가 어쨌길래 그러십니까."

"내가 고개 끄덕이기만 하면 당장 여길 시댁으로 삼을 기세더라고."

"그래서요?"

"이건 아니다 싶어서 반사적으로 말했지."

"뭐라고 하셨습니까."

"딱히 특별할 거 있겠냐. 그냥 그쪽 분이랑 결혼할 생각 없으니 며칠 푹 쉬시다가 잘 돌아가시라고 말했어."

"너무 직설적인 거절이었군요. 페라노 영애께서 모욕감을 느끼셨을 듯합니다만."

"그러니까 웃으면서 나한테 악담을 퍼부은 거겠지."

"무슨 악담을 들으신 겁니까."

"기대 많이 하고 왔는데 막상 와서 날 직접 보니까 엄청 실망이래."

"어째서요?"

"나라는 인간이 이상한 약을 먹은 건지, 아님 꼭 먹어야 하는 약을 안 먹은 건지 구분이 안 되는 상태로 보인다고 그러더라."

"제가 보기엔 후자 같습니다만."

"...멋대로 정답 정하진 말아줄래?"

"어쨌건, 그래서 그 뒤에 차례로 찾아온 다른 영애 두 분께도 똑같은 방식으로 대응하신 겁니까?"

"어. 얼굴 보자마자 거절의 뜻부터 알렸지. 덕분에 악담도 두 배로 적립했고."

사실이었다.

그 뒤로 오전 동안 연이어 찾아온 에스페리아 영애와 시칠리 영애.

그들이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거절 멘트부터 날려줬다.

덕분에 모욕감을 느낀 영애들에게 알찬 악담을 차곡차곡 들어야 했다.

조금 무리수를 둔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번 사태(?)가 왜 발생했는지를 이제는 조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백작님이 답장을 애매하게 쓴 거겠지.'

확실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황상 그게 제일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청혼장이 무더기로 날아와서 그걸 거절하라고 내가 말했던 날 백작님이 엄청 아쉬워했거든.'

아무래도 그 아쉬움과 미련이 답장에 그대로 남은 것이 아닐까. 그래서 애매한 답장이 써지면서 뭔가 상대에게 엄청나게 여지를 남겨준 것이 아닐까.

'덕분에 거절 답장을 받은 가문들 쪽에서도 미련이 남게 된 거야. 거절을 받긴 했는데 어쩐지 한 번 더 찔러보면 뭔가 떡고물이 떨어질 것 같은 그런 기분? 그런 희망을 엿본 거겠지. 그래서 몇몇 굵직한 가문들이 이렇게 영애를 직접 보낸 거지. 가문의 명성을 믿고서. 나한테서 확답을 받아내려고.'

그러니까 이럴수록 애매한 대응은 금물이다.

조금 실례가 된다 하더라도 확실하게.

노빠꾸 직진 단호박의 마음가짐으로.

아예 칼로 자르듯 거절의 뜻을 보여야 한다.

그래야 질질 끌려가지 않을 수 있다.

저쪽에서도 일찌감치 미련을 접을 수 있다.

그게 서로에게 최선이 되리라고 생각하는 로이드였다.

"암튼 그래서 배 엄청 부르네. 아침도 점심도 죄다 굶었는데 배가 고프질 않아. 욕을 많이 먹어서 그런가."

로이드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비엘이 피식 웃었다.

"그런 거라면 로이드 님은 항상 배가 부르셔야 할 텐데요."

"음? 어째서?"

"저 덕분에 말입니다."

"뭐? 설마, 항상 속으로 날 욕하던 거였어?"

"당연하신 말씀을."

"헐. 부정하지도 않아."

"솔직함과 진솔함은 기사의 미덕이니까요."

"그래도 이럴 땐 가식 좀 떨어주면 안 돼?"

"안 됩니다."

"단호하네."

"칭찬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아, 저기. 또 온다."

싱글거리며 익숙하고도 훈훈한 악담을 나누는 것도 잠시.

로이드의 시선이 언덕 아래를 향했다.

완만한 오르막길 진입로를 올라오는 마차 한 대가 보였다.

그냥 짐마차가 아니었다.

호화로운 장식이 가득했다.

네 마리 백마가 이끌고 있었다.

마부의 옷마저 깔끔했고, 주위로는 말에 탄 여덟 명의 기사가 호위를 도맡고 있었다.

딱 봐도 귀족이다.

그런데 오늘 여길 찾아오는 귀족이라면?

뻔하다.

"후아. 오늘만 네 번째 영애인가."

이번엔 또 무슨 악담을 적립하게 될까.

혹시 댁 입에서 따뜻한 쓰레기 냄새가 난다는 소리를 듣는 건 아닐까. 어쩌면 주먹으로 성형수술 시켜주고 싶게 생겼다는 칭찬을 듣게 되는 걸지도.

묘한 기대감(?)에 가슴이 뛰는 걸 느끼며 로이드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 사이, 마차가 언덕을 다 올라왔다.

정문 앞에 멈추어섰다.

기사 여덟 명이 도열했다.

마부가 마차 문고리를 잡았다.

금테를 두른 호화로운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와 동시에 로이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부터 발사할 거절 멘트를 야물딱지게 혓바닥 위에 장전했다. 열리는 마차 문 사이로 몸을 내미는 영애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멈칫했다.

'어?'

인사를 나누기 전에 거절 멘트부터 재빨리 발사해야 하는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영애에게 반해서?

이상형이라서?

아니었다.

어쩐지 기억 속에 있는, 아는 얼굴이라서였다.

'철혈의 기사. 거기 중간중간에 들어 있던 일러스트. 삽화. 거기서 봤어.'

어디서였더라.

어떤 장면에서였더라.

또각, 마차 문 아래 땅을 딛는 영애의 구둣굽 소리.

동시에 떠오르기 시작하는 기억 한 조각.

'저 여자, 악역은 아니었어.'

선역이었다.

그런데 불쌍한 선역이었다.

스스로를 희생했다.

많은 사람들을 위해.

그저 남들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내던졌다.

그 희생 덕분에 하비엘이 반격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절대로 뚫리지 않던 장벽을 부수고.

수많은 사람을 구해내고.

대참사를 막아냈다.

그 사건이 벌어진 장소는 바로....

"나마란 백작령. 실루리아 나마란."

기억의 끝자락에서 절로 흘러나오는 중얼거림.

그걸 듣고서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쪽을 쳐다보는 여인.

"네? 혹시 절 알고 계시는 건가요?"

"...."

로이드는 대답 대신 여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소설 철혈의 기사 속에서 흑마법사들에 의해 수많은 백성이 제물로 희생당할 위기에 놓였던 도시.

그 재난을 막아내고자 최초로 발파를 창안했던 하비엘.

하지만 그러한 하비엘조차도 구해내지 못했던, 그래서 안타까운 최후를 맞이했던 비운의 여인, 실루리아 나마란이 눈앞에서 빙긋 웃고 있었다.

162화. 예정된 재앙 (2)

 

 

나마란의 장벽.

소설 철혈의 기사 중반의 가장 인상 깊던 에피소드. 마침내 노골적으로 정체를 드러낸 흑마법사 세력과 하비엘이 처음으로 격돌하던 스토리였던가.

로이드는 그걸 읽던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흑마법사들이 도시의 시민 전체를 제물로 삼으려 했지. 강력한 마법의 장벽으로 도시의 성벽을 둘러싸고서.'

그 누구도 돌파할 수 없던 마법의 장벽이었다.

하비엘이 아무리 애를 써도 그러했다.

어쩌면 그 시련과 위기 덕분이었을 것이다.

소설 철혈의 기사를 대표하는 기술인 '발파'가 나마란의 장벽 앞에서 탄생한 것은.

'처음으로 마나 써클을 충돌시켰지. 장벽을 돌파하기 위해 너무 무리하게 마나를 운용하다가. 우연히 그 충돌의 힘을 발산하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터득해 버린 거야.'

그렇게 하비엘의 간판 기술인 발파가 탄생했다.

발파에 오러를 섞었다.

그토록 견고하던 나마란의 장벽이 마침내 깨졌다.

성내로 진입한 하비엘과 그를 따르던 나마란의 기사단.

장장 이틀에 걸친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던가.

그 끝에 하비엘은 흑마법사를 물리치고 나마란의 시민들을 구출할 수 있었더랬다.

하지만 단 한 사람.

나마란 백작의 외동딸만은 구해내지 못했다.

최후의 순간, 발악하듯 지옥의 기사를 소환하려던 흑마법사를 저지하기 위해 그녀가 스스로를 희생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소드마스터조차도 압도하는 지옥의 기사, 헬나이트의 소환이 취소되었다.

하비엘의 승리가 확정되던 순간이었다.

'그 영광의 뒤에 저 여자의 희생이 있었던 건가.'

상념에서 빠져나온 로이드는 고개를 들었다.

앞에 선 여인이 보였다.

이쪽을 향해 빙긋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방금 제 이름을 중얼거리신 듯한데. 혹시 제가 잘못 들은 것이었던가요?"

실루리아 나마란.

전부터 느낀 건데, 소설 속의 일러스트로 보던 인물을 실제로 만나게 되면 참 기분이 묘해진다.

처음 하비엘을 만났던 때에도 그랬고, 지금 또한 그렇다.

게다가 그 인물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는 사실을 아는 지금 같은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기분에 얽매일 때가 아니다.

로이드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싱숭생숭함을 얼른 접었다.

접대용 미소를 환하게 피워냈다.

"아, 첫 만남부터 이런 실례를. 로이드 프론테라입니다. 아울러 프론테라 백작령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혹시나 하였더니 소문으로만 듣던 프론테라 공자님이시군요."

"예. 제가 그 소문의 망나니입니다."

"겸양이 상당하시군요. 게다가 제 이름을 이미 알고 계시고 말이지요?"

"아, 그건 마차에 새겨진 가문의 문양을 보았기에."

"눈썰미가 예리하시네요."

"칭찬에 배가 불러오는 중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로이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 보니 좀 걱정이 된단 말이지.'

그는 눈앞의 여인을 보며 생각했다.

문득, 궁금해졌다.

소설 속 나마란의 장벽 사태.

그 재앙급 사건이 여기서도 벌어지는 걸까.

'나마란은 동부 지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먼 지방도 아니니까.'

정확히는 동부와 남부 사이의 산악지대에 위치한 도시였다.

한데 만약 거기서 뭔가 일이 터지면?

이곳 프론테라 영지에도 곧바로 영향이 올 것이다.

'한번 확인해 봐야겠어.'

사실 원작 소설에서와 같은 사건이 벌어지지 않을 확률도 충분히 있다.

상황이 소설과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우선 자신이 죽지 않았다.

하비엘의 활동이 달라졌다.

국왕 알리시아가 팔을 잃지 않았다.

몬스터 도미노 현상의 시기와 결과 또한 바뀌었다.

크레모 항은 기가티탄이라는 걸림돌이 사라져 다시 번영하게 되었으며, 원작에서 시골로만 남았던 프론테라 영지는 대규모의 피난민을 수용하며 재건의 중심 도시로 발돋움하고 있다.

그렇듯 이미 수많은 변화가 이 세상에 일어났다.

어쩌면 나마란도 비슷할 것이다.

소설에서와 같은 비극적인 사태가 벌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작은 소망을 담고서 로이드가 물었다.

"그런데 혹시 나마란에 명망 높은 칸나바로 씨라고, 계시지 않습니까?"

"네?"

눈이 조금 커지는 나마란 영애.

그녀를 향해 태연하게 떠보듯 말했다.

"제가 듣기로 칸나바로라는 자산가가 나마란에서 굉장히 훌륭한 선행을 펼치고 계시다 하더군요. 개인적으로 존경하게 된 분이라서."

사실 그 칸나바로가 흑마법사다.

나마란의 사태를 일으킨 주범이다.

하지만 이 시기의 그는 평범한 자산가로 위장하고 있을 터다.

'그러다가 한순간 명성을 쌓지. 어떻게? 제법 많은 숫자의 유민을 받아들이고 사비를 들여 보살핌으로써.'

소설 속에서 흑화한 알리시아.

그런 국왕에게 반역을 시도한 남부 지방.

대규모의 혹독한 반란 토벌이 실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수의 유민이 발생했다.

일부 유민이 나마란에도 흘러들어 갔다.

그들을 칸나바로가 보살폈다.

자비심이 넘쳐나서?

물론 아니었다.

'흑마법 실험에 이용하기 위해서였다고 언급됐어, 소설에서.'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알리시아가 흑화하지도, 남부에서 반란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칸나바로 또한 유민을 받아들일 건덕지가 없었을 거야.'

그럼 아직 그의 명성이 드높아지지 못했으리라.

즉, 지금은 나마란 영애에게서 '칸나바로 씨요? 그게 누구?'라는 식의 대답이 돌아오면 된다. 그 대답이 나마란이 당분간은 안전할 거라는 확답이 될 것이다.

그 흑마법사가 유민을 이용한 실험을 시작하지 못한 상태일 테니까.

'그럼 나도 당분간은 저 동네에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지는 거고. 그러니까 어서 칸나바로를 듣보잡이라고 말해! 어서!'

속으로 알뜰살뜰 간절히 빌었다.

그때, 나마란 영애가 활짝 웃었다.

"칸나바로 씨 말씀이신가요? 놀랍군요. 그분의 명성이 벌써 여기까지 퍼졌나 봐요?"

"예?"

"참 훌륭한 분이시죠. 갈 곳 잃은 이들을 그렇게 많이 돌보다니. 설령 재산이 많다고는 해도 보통 사람이라면 선뜻 실천하기 어려운 일일 테니까요."

"갈 곳 잃은 이들이라시면...?"

"이곳 동부 지방에서 생긴 불행한 일 때문이랍니다. 프론테라 공자님께서도 알고 계시겠지요? 몬스터 도미노 사태 말여요."

"아."

"네, 맞아요. 그 재난 때문에 일부 피난민이 우리 나마란에까지도 흘러들어왔답니다. 약 사백 명가량 되었던가요. 처음엔 제 부친이신 나마란 백작께서 그들을 보살피려 하셨답니다. 그런데 그때 칸나바로 씨가 선뜻 나서셨어요."

"피난민들을 보살피겠다고 말입니까?"

"네. 훌륭한 분이시죠. 물론 이곳에서 수만 명이나 되는 피난민을 책임지고 계신 프론테라 백작님의 선행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요."

"하하, 과찬이십니다."

...난리 났다.

로이드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400명 이상이라니.'

실험체 후보가 100명 남짓이었던 원작보다 더 많아졌다.

즉, 사태가 오히려 원작 소설보다 심각해질 거라는 소리다.

'이러면 나가린데.'

쌔한 기분이 느껴졌다.

 

 

"후우. 이거 참."

침실로 돌아온 로이드는 소파에 털썩, 몸을 기댔다.

졸지에 출렁거리게 된 소파가 한숨처럼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로이드의 심정도 마찬가지였다.

'청혼 거절은 성공했는데 전혀 기쁘지가 않아.'

조금 전까지 이야기를 나눈 나마란 영애가 떠올랐다.

나마란의 정황과 칸나바로에 대한 걸 떠본 직후였다.

자신은 재빨리 입을 열었더랬다.

당신네 가문과 결혼으로 맺어질 생각이 없다고.

멀리서 온 것에 감사드리며, 편히 지내다 가시라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말했다.

애초에 그러려고 저택 앞에서 기다린 거였으니까.

나마란 사태도 심각한 일이겠지만, 이쪽이 억지 장가를 가야 하는 사태도 그 못지않은 재앙이 될 테니까.

다행히 나마란 영애의 반응은 세상 쿨했다.

어차피 자신도 가문에서 등 떠밀려 온 거라고.

오히려 그렇게 미리 생각을 밝혀줘서 고맙다고.

부담감이 사라진 듯하다고.

환하고 티 없이 웃었던가.

"...."

그래서 더 찜찜했다.

조금 전까지 눈앞에서 웃던 사람인데.

머지않아 불행한 사태에 휘말려 죽을지도 모른다니.

'미리 귀띔이라도 해 줘야 하나.'

그런 생각도 문득 들었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니 그것도 좀 아니었다.

지금은 칸나바로의 명망이 한창 하늘을 찌르는 시기다.

그런데 그가 사악한 흑마법사라고 고발한들 누가 믿겠는가.

오히려 돌아이 취급받기 딱 좋을 듯했다.

게다가 그의 사악한 계획을 고발할 똑 부러지는 증거도 딱히 없었다.

그 흑마법사가 어떻게 나마란의 장벽을 만들었는지, 정확한 묘사나 설명이 소설에서 나온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냥 상관하지 말까.'

소파에 누웠다.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상관하기 싫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나마란의 장벽 사태.

그걸 방치했다간 여기까지 거대한 불똥이 튀어올 테니까.

'헬나이트.'

지옥의 기사.

흑마법사 칸나바로가 시민들 전체의 생명을 바치는 거대한 의식을 통해 소환하려던 존재였다.

한데 만약 그 사태를 막지 못한다면?

그래서 소설과 달리 헬나이트가 소환된다면?

아마 몬스터 도미노와는 차원이 다른 지옥도가 펼쳐질 것이다.

'헬나이트는 소드마스터마저 압도하는 존재라고 했으니까.'

소설 철혈의 기사에 직접 등장한 적은 없었다.

다만 소설 후반의 하비엘이 이런 독백을 한 적은 있다.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자신도 아스라한 심법 없이 헬나이트와 겨룬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즉, 헬나이트가 일반적인 그랜드 마스터와 거의 동급일 거라는 소리지.'

지금의 하비엘로는 턱도 없다.

열 명이 덤벼도 못 이길 것이다.

그만큼 그랜드 마스터의 위력은 절대적이니까.

'그런 놈이 소환되는 거면 무조건 막아야 해.'

나마란은 물론이고 왕국 전체가 몰락할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 이곳 프론테라 영지만 무사하길 바라는 건 불가능한 일이리라.

'젠장. 그럼 어떡하지. 하비엘만 나마란에 보내야 하나? 아니. 그랬다가 소설과 내용이 달라지면? 이미 달라졌는데. 그런 변화 때문에 그 사태를 막지 못할 수도 있어.'

가능하다면 자신이 직접 나마란에 가야 한다.

그래야 변화하는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그러니 그곳에 갈 구실을 만들어야 한다.

'그냥 놀러 가고 싶다고 할까. 근데 그건 좀 이상하잖아. 으음, 나마란 영애한테 딱 삼 개월만 위장 결혼을 해달라고 말할까. 아니, 그랬다간 뺨 맞기 딱 좋을 듯.'

사실 이곳 프론테라 영지도 바쁜 형편이었다.

아파트 단지와 대하수로 공사.

그 마무리를 하는 판국이다.

한데 그 일들을 제쳐놓고 나마란에 다녀오겠다고 말할 적당한 핑곗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한데 그때였다.

 

똑똑.

 

"로이드 도련님, 혹시 안에 계십니까?"

노크 소리. 그리고 누군가의 물음이 들려왔다.

저택 행정관의 목소리였다.

로이드는 소파에 누운 채로 행정관을 맞아들였다.

"여기까지 무슨 일이야?"

"아, 며칠 전에 시켜두신 일을 보고드리러 왔습니다."

"보고? 아, 설마 아파트랑 대하수로 작업자들 성과급 정산서?"

로이드는 몸을 일으켰다.

생각해보니 그런 일을 시켜 두었던 게 떠올랐다.

"벌써 정산서를 다 만들었어?"

"예. 근로 기록표가 워낙 꼼꼼해서 계산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여기."

어렵지 않았다는 말과는 달리 행정관의 눈가는 다크써클에 점령되어 있었다.

약간의 안쓰러움을 느끼며 정산서 뭉치를 받아들었다.

그는 정산금 총액부터 확인을 했다.

"...생각보다 장난이 아니네."

보자마자 입맛이 씁쓸해졌다.

아닌 게 아니라, 작업자들에게 지급할 금액이 예상보다 제법 많았다.

'하긴. 워낙 큰 공사인 데다 기간도 엄청 길었으니까.'

특히 아파트 시공은 작년부터 이어져 오던 공사다.

거기에 대하수로는 어떠한가.

공병대와 백색창기병대, 기존의 영지민과 피난민 작업자까지 대규모의 인력이 투입된 공사였다.

이래저래 인건비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한꺼번에 다 지급하려면 허리가 휘청하겠는데.'

사실 영지의 자금 사정도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

왕실에서 정기적으로 나오는 지원금.

라코나 자작령에서 받는 수도세.

거의 그것만으로 버티는 형편이기에 여러 공사에 들어가는 자재비를 충당하기에도 빠듯했다.

그때였다.

행정관의 조심스러운 말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로이드 도련님? 차라리 작업자들에게 지급할 돈을 한꺼번에 주지 말고 나눠서 주는 건 어떻겠습니까?"

"음?"

"한 번에 큰 지출을 감당하는 건 아무래도 영지의 살림살이에 부담이 될 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작업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서 내년 상반기 정도까지 금액을 나누어서 지급을 하면...."

"안 돼."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로이드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약속과 다르잖아. 애초에 근로계약서에는 그런 내용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만. 거기까지. 계약서는 지키라고 있는 거야."

계약서는 말 그대로 약속이나 다름없다.

한데 그걸 안 지키면?

신뢰를 왕창 잃게 된다.

다음부터는 그 누구도 자신을 믿고 선뜻 소매를 걷으며 나서지 않을 것이다.

'임금체납, 지급 연기, 그런 건 한국에서 겪은 걸로 지긋지긋해.'

그날 일당 못 받는 거.

한참 뒤로 미뤄져서 받는 거.

대한민국 현장에서 종종 겪은 일이었다.

그럴 때마다 속으로 얼마나 욕을 했던 자신이었던가.

한데 지금 와서 입장이 바뀌었다고 그런 쓰레기 짓을 하고 싶진 않았다.

"어쨌거나 돈이 문제네."

행정관을 내보내고 나니 또 한숨이 나왔다.

그렇잖아도 나마란 사태 때문에 고민하던 참인데.

이제는 자금 문제에 대한 고민까지 추가되어 버렸다.

'아무래도 새로운 자금줄이 필요해.'

물론 지금도 돈이 모자란 것은 아니다.

허리띠를 조이면 그럭저럭 영지 전체가 입에 풀칠할 정도는 된다.

하지만 계속 이런 상황으로만 지내고 싶진 않았다.

'미래를 위해서도 좋진 않아. 누구나 살아가면서 뒤가 편하려면 연금보험 하나쯤은 들어 두는 게 좋은 법이잖아?'

다다익선.

돈은 많을수록 좋다.

지금 또한 마찬가지다.

비록 왕실에서 지원금이 나오지만.

라코나 자작령에서 뜯어내는 수도세가 있지만.

그게 영원할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왕실에 변고가 생길 수도 있는 거고.

라코나 자작령이 어느 날 망할 수도 있는 법이니까.

한데 그렇게 하루아침에 자금줄이 툭 끊어지게 되면?

이쪽도 심각하게 허덕이다가 굶어 죽게 되리라.

'그건 안 돼.'

로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보다 풍요롭고 아름다운 여생을 위해서.

당장 작업자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추가적인 목돈과 자금원을 확보할 필요가 있을 듯했다.

'문제는 어떤 방법을 동원하느냐는 거지. 땅 파서 돈 나오는 것도 아니고. 안 그래도 나마란 사태 때문에 걱정도 산더미인데. 하아, 그냥 아예 나마란 사태를 막으면서 돈까지 벌 방법이 있으면 좋겠다. 차라리 나마란에서 뭔가 공사 하나쯤 따낼 건덕지라도 있으면 좋... 어라?'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몸을 벌떡 일으켰다.

투덜거리다 불현듯 찾아온 깨달음.

너무나 당연하고 단순한 해답.

"잠깐만. 진짜로 굵직한 공사 하나쯤 구실 붙여서 따내면 되는 거잖아?"

그러면 된다.

나마란에서 공사 대금도 벌고.

시공 진행하는 동안 거기 머무르며 예정된 재앙도 막아내고.

이거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중국집에서 군만두도 서비스 받듯.

두 가지 이득을 1+1으로 두루 챙기는 격이 아니겠는가.

'그럼 나마란에서 어떤 공사를 따내면 좋을까.'

로이드는 기억을 더듬었다.

소설 철혈의 기사 내용을 최대한 되짚었다.

그러자 조금씩 떠올랐다.

나마란.

그곳에 세워진 마법의 장벽.

그걸 깨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하비엘.

그런데 도시가 피라미드처럼 우뚝 솟은 절벽 꼭대기에 있어서 하비엘이 고생을 했었지.

경사가 너무 가팔라서.

절벽 사면이 잘 부스러져서.

평지에서보다 훨씬 고생하면서 싸워야 했던가.

'그거다.'

잘 부스러지는 절벽 사면.

그 꼭대기에 자리한 도시.

그렇다면 그곳의 영주는 평소 어떤 고민을 했을까.

생각해보니 서서히 답이 나왔다.

'찾았어.'

어느새 그는 침실을 나서고 있었다.

복도와 계단을 지나, 1층 주실을 건너, 손님이 머무는 별채로, 나마란 영애의 숙소 문을 노크했다.

"프론테라 공자께서 무슨 용무이신지."

영애의 호위기사가 문을 열었다.

로이드는 그 즉시 문틈으로 한쪽 발부터 쑥 집어넣었다.

마치 좋은 말씀 전하러 왔다는 동네 종교인 아주머니처럼. 혹은 이런 기 막히는 물건을 고객님 같은 분께만 이렇게 착한 가격에 소개해드리는 거라고 떡밥부터 뿌리는 올해의 판매왕 영업사원처럼.

입술에 침을 츄릅 바르며.

기사의 어깨너머 영애를 향해.

그리고 예정된 재앙으로부터 모두를 구하면서 목돈도 땡겨보기 위해.

능청스럽고도 재빠르게 말했다.

"날이면 날마다 이런 말씀 드리는 게 아닙니다. 아무한테나 함부로 드리는 말씀도 아닙니다. 부스러지는 절벽, 내려앉는 지반, 그거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무너지는 도시도 다시 세우고, 안 무너진 도시는 더 튼실하게 만들어 주는 사면안정공법이라고,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163화. 절벽 위의 도시 (1)

 

 

"사면안정공법이라고,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네?"

"역시. 그 좋은 걸 아직 못 들어보셨다니. 이렇게 안타까울 수가 있을까요."

"...."

여전히 손님용 숙소 문에 한쪽 다리를 쑥 밀어 넣은 채.

그렇게 문을 닫지도 못하게 만드는 대한민국표 방문판매원 전용 스킬을 선보이며.

로이드가 영업용 미소를 머금었다.

그 미소를 접한 나마란 영애는 생각했다.

저거, 혹시 미친놈인가.

하지만 그녀의 생각이 어떠하건 상관없이 로이드의 혓바닥은 다음 멘트를 촉촉하게 발사하고 있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안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실례가 된다면요?"

"그럼 이대로 이야기를 나누는 거고요."

"그것도 싫다면요?"

"영애께서는 자신의 가문이 다스리는 도시의 가장 큰 고민이 일거에 해결될 절호의 기회를 놓치는 셈이 되겠지요."

"마치 제 고향의 문제를 꿰뚫어 보고 계신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왜 아니겠습니까. 절벽 위에 세워진 도시의 문제점을 그 지방의 사람만 알아야 한다는 법이라도?"

"물론 그런 법은 없겠지요."

"예. 맞습니다. 그래서입니다."

좋다.

일단 대화는 텄다.

그럼 이제 공격 개시.

로이드는 빠꾸 없는 말투로 다짜고짜 핵심을 푹 찔렀다.

"절벽 문제, 제가 해결해 드리지요."

"당신이요?"

"예. 제가."

어깨를 으쓱.

이럴수록 자신감 가득 장착하고서.

믿고 맡기면 될 거라는 신뢰를 갖도록.

"절벽 위에 세워진 도시. 한데 절벽의 지반이 약하지요. 그래서 조금씩, 확실하게 허물어지는 중일 겁니다. 아마 이대로 십 년만 더 지나면 도시를 둘러싼 성벽의 기초마저 위험해지는 사태가 벌어지겠지요. 맞습니까?"

"...."

"물론 나마란 백작께서도 백방으로 애를 쓰셨을 겁니다. 절벽에 초목을 심기도 하고, 회반죽을 덧칠하기도 해 봤겠지요. 하지만 그런 미봉책으론 별 효과를 못 보셨을 거고 말입니다."

"마치 당신이라면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식으로 말씀하시는군요."

"사실이니까요."

"...."

"사면안정공법. 아까 말씀드린 그 공법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 무슨 다짜고짜...."

나마란 영애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갑자기 이렇게 손님용 숙소로 불쑥 찾아온 행동도.

문이 열리자마자 전격적이다 못해 저돌적인 제안을 턱밑에 내밀어 오는 태도 또한.

그녀로 하여금 로이드의 의도를 의심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 사람, 뭐지.'

혹시 이거, 수작을 부리는 건 아닐까.

처음엔 그런 의심도 잠깐 들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 같지는 않아. 정략결혼에 대한 이야기는 아까 깔끔하게 마무리를 지었으니까.'

무엇보다도 저 남자, 막무가내 제안을 하는 것치고 상당히 진지하다.

자신을 향한 눈빛도, 태도도, 모두 그렇다.

거기에 더하여 문득 떠오르는 사실 하나.

이 남자, 왕도의 국왕에게 명장 칭호를 받은 자가 아니던가.

'국왕 전하의 명으로 왕도에 하늘을 걷는 듯한 다리를 지었다지. 게다가 크레모 시에서도 사람들의 찬탄을 자아내게 하는 공사를 치렀다고 들었어.'

국왕의 총애를 받는 건설가.

그러한 로이드의 명성은 이미 왕국 방방곡곡에 두루 퍼져 있었다.

그녀 또한 그 명성을 잘 알았다.

어쩌면 이 사람, 믿어볼 수 있을지도.

"그 제안, 정말 진심으로 건네는 것인가요?"

떠보듯 물었다.

동시에 자신의 고향을 떠올렸다.

나마란.

피라미드처럼 솟은 절벽 위에 세워진 도시.

하지만 그곳이 처음부터 큰 도시였던 것은 아니었다.

약 400년 전, 남부와 동부를 잇는 교역로를 감시하고 관리하기 위해 세워진 작은 요새가 나마란의 시작이었다.

한데 그 위치가 너무 절묘했다.

큰 교역로를 감시하기 좋은 위치에 있다 보니 교역상인들이 요새 주위에서 쉬어가는 일이 많아졌다. 요새 덕분에 산적이나 야생동물, 각종 몬스터로부터 안전이 보장된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듯 상인들이 즐겨 쉬게 되자 여관이 생기고.

여관을 따라 식당이 들어서고.

각종 시설이 생겨났다.

그에 따라 요새의 규모도 커져 갔다. 확장과 확장. 유입되는 인구. 더욱 활기를 품고. 더욱 많은 상인이 모여들었다.

아예 교역소까지 차려졌다.

그때부터였다.

나마란은 상인들이 쉬기 위해서 거쳐 가는 곳이 아닌, 교역을 하기 위해 도착하는 곳이 되었다.

본격적인 도시로의 폭발적인 성장이었다.

그렇기에 오늘날의 문제가 생겨났다.

'애초에 큰 도시를 지으려던 장소가 아니었으니까.'

그저 교역로 감시용 요새.

그걸 짓기 위한 부지에 불과했다.

한데 요새가 커지고 또 커지다 보니 어느새 도시가 되어 버렸다.

절벽 꼭대기의 공간이 비좁은 것은 둘째치고, 커져 버린 도시를 절벽이 감당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러 버렸다.

그리 단단하지 못한 절벽의 토질.

거기에 막대한 도시의 하중까지 더해졌다.

절벽 사면이 하루가 다르게 부스러지고 흘러내렸다.

수십 년에 걸쳐 아주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절벽 꼭대기의 면적이 좁아져만 갔다.

그게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도시를 둘러싼 성벽의 기초가 위험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대로 몇 년만 지나면?

성벽이 허물어질 거라는 시민들의 걱정이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나마란 영애는 그 사실을 떠올리며 로이드의 대답을 기다렸다.

로이드의 대답은 단순명료했다.

"네."

할 수 있다.

자신이라면 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알려줄 것은 알렸고, 어필할 만큼 했다.

여기서 더 미사여구 따위를 붙일 필요가 없다.

힘들여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필요 또한 없다.

그랬다간 구차해진다.

매달린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

그러니 이제는 적절하게 치고 빠질 타이밍이다.

"저를 신뢰하느냐의 여부는 그쪽 분의 몫입니다. 그러니 잘 생각해 보시길."

로이드는 출입문 안쪽으로 걸쳐놓았던 다리를 뺐다.

언제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냐는 듯 뒤로 물러났다.

오히려 태연자약한 눈빛을 보이며.

선택은 당신의 몫이라는 듯이.

난 손해 볼 것 없다는 듯이.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그럼 이만. 실례가 많았습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갔다.

"아니, 저기, 무슨...."

한바탕 휙 지나가는 폭풍을 바라보는 기분이 이러할까.

반쯤 열린 채 남겨진 숙소 문을 향한 나마란 영애의 눈빛에 벙찜이 떠올랐다.

 

하루가 지났다.

치고 빠지기의 위력은 대단했다.

"당신에게 그 공사를 맡겨 보면 어떨까 싶어요."

"결정하신 겁니까?"

"네."

다음날 로이드를 찾아온 나마란 영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다녀가신 후로 고민해 봤답니다."

사실은 그 고민 때문에 잠까지 뒤척였다.

나마란의 문제를 너무나 정확하게 짚은 로이드.

그런 그가 보인 자신감과 명성.

그걸 믿어 보기로 했다.

손해는 아닐 듯했다.

고향인 나마란에게도, 자신에게도 말이다.

'이 기회에 아버지께 면목을 세울 수도 있을 거고.'

사실 가문에서 등 떠밀려 여기로 온 나마란 영애였다.

프론테라 가문의 장남과 좋은 관계를 맺어 보라고.

가문의 입지를 더 탄탄히 다질 기회라고.

이곳으로 떠나오던 날 기대감에 부풀어 자신을 배웅해 주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부담스러웠다.

정략결혼은 싫었으니까.

처음부터 빈손으로 돌아갈 작정이었으니까.

그래서 한편으로 죄송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최소한 빈손으로 돌아가는 건 아니게 됐으니까. 이 남자를 신랑감이 아닌 훌륭한 건설자로 데려가는 거긴 하지만.'

혼인에 대한 기대를 만족시켜 드릴 순 없겠지만.

도시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으리라.

그 정도면 충분히 괜찮은 성과겠구나 싶었다.

그래서였다.

"나마란으로 돌아갈 때 당신도 저와 함께 갔으면 하는데, 어떠신가요?"

"저야 물론 환영입니다."

그녀의 물음에 로이드가 진심으로 빙그레 웃었다.

작전, 성공.

그러니까 이제는 교역도시 나마란을 고쳐주고, 구해주고, 알뜰살뜰 야물딱진 대형 빨대를 꽂을 일만 남았다.

 

 

출발 준비는 간단했다.

로이드는 며칠에 걸쳐 바이에른 경에게 여러 지시와 당부를 거듭했다.

아파트 단지 시공.

대하수로의 확장 구간 시공.

그 남은 공사의 마무리를 맡겼다.

저택에 있던 나머지 영애들에게는 각자의 가문으로 잘 돌아가시라는 덕담(?)도 남겨주었다.

그리고 백작부부의 배웅을 받으며 출발했다.

산 넘고 물 건너고 들판을 지나쳐 12일의 여정 끝에 나마란에 도착했다.

평균 해발 1천 미터.

그러한 고지대의 중심에 피라미드형 절벽이 우뚝 서 있었다.

"...아. 보라보콘 먹고 싶다."

나마란 시를 보자마자 로이드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좋아했던 아이스크림을 떠올렸다.

도시를 떠받치는 절벽.

그 절벽의 모양이 딱 보라보콘을 뾰족하게 거꾸로 세워놓은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옆에서 나란히 말을 몰던 하비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라보콘이 뭡니까."

"그런 게 있어. 아이스크림."

"왕도의 귀족들이 즐겨 먹는다는 차가운 디저트 말입니까."

"어. 대강 그런 거야."

로이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절벽과 꼭대기의 나마란 시를 올려다보았다.

도시를 떠받친 피라미드형 절벽.

녹아서 펑퍼짐하게 퍼진 보라보콘 아이스크림이 떠올랐다.

'즉, 절벽이 거꾸로 세워진 채 녹아내리고 있는 보라보콘이라면 나마란 시는 그 꼭대기에 위태롭게 얹힌 딸기 한 덩어리랄까.'

절벽과 나마란 시의 모습이 딱 그러했다.

동시에 그는 나마란의 절벽이 왜 계속 허물어지는지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역시. 지반의 대부분이 사암과 점판암이었네.'

사암은 모래 입자가 쌓여 만들어진 퇴적암이었다.

점판암은 셰일이 압력과 열을 받아 단단해진 변성암이었다.

둘 모두 단단하다고는 할 수 없는 종류의 암석이라 할 수 있었다.

'이런 토대 위에 도시를 세웠으니 지반이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지.'

그렇게 로이드는 측량 스킬로 주위 지반을 둘러보며 절벽을 올랐다.

올라가는 길은 비교적 편했다.

반듯하고 넓은 도로가 절벽 둘레를 따라 뱅글뱅글 닦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로이드는 절벽의 아래에서부터 위쪽까지 거의 모든 면적을 측량 스킬로 미리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이 도시에 어떤 시공이 필요할지도 자연스럽게 계획이 잡혔다.

'이건 옹벽으로는 안 되겠네. 아무리 겉에 벽을 쌓아서 하중을 받친다 해도 오래 버티질 못할 거야. 꼬밍이의 거미줄로 절벽 사면을 꼼꼼하게 감싸도 마찬가지겠지.'

생각보다 경사가 제법 있었다.

암석 자체도 무른 편이라, 겉을 감싼다 한들 미봉책에 불과할 듯했다.

그러니까 이건 안쪽에서부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억지말뚝과 앵커를 쓰는 거야. 그렇게 표면에서부터 기반암이 되는 점판암까지를 한데 묶어 버려야 해. 그래야 사면이 부스러져서 흘러내리는 힘을 제대로 떠받치고 붕괴를 방지할 수 있겠어.'

대략적인 계획이 착착 세워졌다.

필요할 장비와 인력, 시간과 자금.

그에 따른 시공 순서와 일정 계획까지.

앞으로의 큰 그림을 그리며 절벽 꼭대기에 올랐다.

성문으로 들어섰다.

한데 그때였다.

조금 특이한 광경이 눈에 띄었다.

성문 안쪽의 광장에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두런두런 모여 있었다.

어딘가 옷차림이 남루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쪽에서 고소한 음식 냄새도 날아왔다.

뭔가 눈에 익은 광경이었다.

'저건....'

"칸나바로 씨가 운영하는 무료 배급소랍니다."

어느샌가 살짝 열린 마차 쪽창.

쪽창 안쪽에서 나마란 영애가 살풋 웃고 있었다.

"저와 처음 인사를 나누던 날 말씀하셨죠? 칸나바로 씨의 명성을 듣고 존경하고 계시다고요. 네, 맞아요. 저곳이 그분이 자비로 운영하는 배급소랍니다. 동부의 난리를 피해 이곳으로 온 많은 이들이 저렇게 칸나바로 씨의 호의 덕분에 배불리 먹으며 지내고 있죠."

"...그렇군요."

로이드는 배급소에 모인 이들을 조금 더 살펴보았다.

남루한 옷차림과 달리 다들 혈색이 좋았다.

잘 먹고 잘 쉬어서 그런 것이리라.

'하지만 저게 무엇을 위한 호의인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고 있겠지.'

로이드는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저 사람들, 실험 재료로 바쳐지게 될 거다.

한데 그걸 모르고서 밝게 웃으며 배급소에 모여 있었다.

그릇에 음식 떠주는 이를 향해 감사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였다.

나마란 영애가 말했다.

"아, 마침 저기 계시네요."

"예?"

계신다니. 누가?

영애가 살풋 웃었다.

"칸나바로 씨요. 저기."

"...."

마차 쪽창 안에서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

그곳을 따라 로이드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배급소.

사람들의 눈인사와 미소가 향하는 중심.

그곳에서 소매를 걷어붙인 채 국자를 들고 있는 남자.

통통했다.

인자한 인상이었다.

자신에게 감사를 표하는 사람들을 향해 세상 온화하고 따스한 미소로 화답하고 있었다.

"보이시죠? 저분이 바로 칸나바로 씨랍니다. 역시나 오늘도 평소처럼 직접 피난민들을 챙겨 주고 계시네요."

마치 도시의 자랑거리를 말하듯 뿌듯해하는 나마란 영애의 목소리.

하지만 로이드는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쳐줄 수 없었다.

칸나바로의 정체를 알고 있어서?

저 흑마법사가 소설 속 나마란 영애를 죽인 사실이 떠올라서?

모두 아니었다.

그가 입을 다물어 버린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검은 용 머리의 사신.'

칸나바로가 걷어붙인 소매 위쪽 어깨.

그 옷에 새겨진 자수 문양이 보였다.

얼핏 보기엔 평범한 가문의 표식 같았다.

하지만 로이드는 그 문양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언데드 마스토돈.'

그걸 묻어 둔 네크로맨서가 사용했던 문양.

또한, 소설 속 폭군으로 타락한 국왕 알리시아가 채택했던 문양.

그 불길하기 짝이 없는 문양이 칸나바로의 옷에도 새겨져 있었다.

164화. 절벽 위의 도시 (2)

 

 

"자네가 로이드 프론테라로군? 이거, 실제로 만나서 보니 소문이 많이 틀린 듯하이. 소문에는 이렇게 훤칠하니 잘생겼다는 말은 일절 없었건만. 허허허!"

...또 시작이다.

로이드는 옅은 한숨을 살포시 내쉬었다.

그리고 시선을 들었다.

나마란 백작 저택의 호화로운 응접실.

그 공간을 가로질러 오는 노인이 보였다.

어쩐지 산타 할아버지를 닮은 인상.

나마란 백작이었다.

그가 이쪽으로 걸어오는가 싶더니 흡족한 얼굴로 하비엘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힘들진 않았는가?"

"아닙니다, 그닥."

"그랬구만. 이리로 와서 앉게나. 허허. 보고 또 봐도 잘생긴 친구일세."

하비엘을 향한 백작의 미소가 더욱 정겨워진다.

그걸 보고 있자니 절로 쌉싸름한 미소가 피어난다.

하.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지금 나서서 '저기, 사실은 제가 로이드 프론테라입니다'라고 말해야 할까.

로이드는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아니, 어쩐지 그게 더 비참해.'

왼쪽 콧구멍 오른쪽 콧구멍이 두 차례씩 파르르 떨렸다.

그때, 다행히(?) 나마란 영애가 나서 주었다.

"저어, 아버지?"

"음?"

"사실 이쪽이...."

그녀가 조금은 난처한 얼굴로 이쪽을 가리켰다.

그제야 이쪽을 향해 삐그덕 움직여 오는 나마란 백작의 시선.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쪽? 아아, 프론테라 영식의 호위기사인가 보군? 소문에는 호위기사이자 소드마스터인 하비엘 아스라한 경의 외모가 신이 빚은 조각상 같다고 하던데. 흐음, 아무래도 이 친구의 얼굴 상태로 보아선 그 소문의 아스라한 경은 아닌 것 같고."

백작이 하비엘을 돌아보았다.

"이번엔 아스라한 경은 데리고 오지 않았나 보구만. 기회가 된다면 왕국의 떠오르는 소드마스터도 만나보고 싶었는데. 아쉽군. 실로 아쉬워."

정말로 아쉬운지 백작이 입맛을 쩝 다셨다.

로이드도 인생의 쓴맛을 쓰읍 다셔야 했다.

나마란 영애가 더욱 난처해진 얼굴로 말했다.

"저기, 아버지. 이쪽이 프론테라 공자세요."

"으음?"

"이쪽이 로이드 프론테라...."

"...."

백작의 움직임이 딱 멎었다.

그렇게 응접실의 모두가 3초간 침묵.

이내 백작의 하얀 수염이 들썩였다.

"이쪽이?"

"네에."

"로이드 프론테라?"

"네, 아버지."

"그럼 저쪽은?"

"하비엘 아스라한 경이세요."

"소문의 그 소드마스터?"

"네."

"크흠! 흠! 아무리 봐도 저쪽이 귀족 느낌이었는데?"

"아잇, 아버지. 아무리 아스라한 경이 프론테라 공자보다 훨씬 귀티나게 생겼고 그게 부정할 수 없는 확고한 사실이라 해도, 그걸 그렇게 대놓고 말씀하시면...."

...공사고 뭐고.

그냥 다 때려치우고 집에 가 버릴까.

로이드는 깊은 산 속 옹달샘처럼 쑴펑쑴펑 치솟는 외모지상주의의 폐해를 느끼며 쓰라린 들숨날숨을 삼켰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뻔뻔하게.

"처음 뵙겠습니다. 로이드 프론테라입니다."

비로소 붙잡은 자기소개의 기회(?)를 활용했다.

나마란 백작이 민망한 듯 무안한 듯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런. 초면부터 실례가 많았구만."

"괜찮습니다. 처음 겪는 일은 아니라서."

"그런가? 역시."

...뭐가 역시야!

로이드는 속으로 빽 외쳤다.

이 부녀, 어쩐지 아까부터 자꾸만 팩트로 사람 명치를 후려친단 말이지.

하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사람 좋게 웃는 나마란 백작의 모습을 보자니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아까 이곳 저택으로 오는 길에 보았던 광경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이 사람, 자신이 통치하는 도시에서 암세포 같은 존재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어.'

아까 마주쳤던 칸나바로.

원작 속 나마란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

거기에 더해 뜻밖의 것까지 보아 버린 로이드였다.

'설마 칸나바로가 그 문양을 사용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

검은 용 머리의 사신.

언데드 마스토돈이 발굴된 장소에서 나온 문양이었다.

그걸 제조한 네크로맨서가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단서였다.

또한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 폭군 알리시아가 사용했던, 왕가의 새로운 표식이기도 했다.

한데 칸나바로가 그 문양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 뜻은 명확했다.

'그 작자가 우리 영지 인근에 언데드 마스토돈을 묻어 둔 네크로맨서와 깊은 연관이 있거나, 동일인일 가능성이 있다는 거지.'

그냥 있는 정도가 아니다.

뭔가 일이 점점 연계되며 커지는 느낌이 든다.

하니 이건 한 번쯤 파헤쳐 봐야 하리라.

그 생각을 갈무리해 두며 로이드가 시선을 들었다.

일단 지금은 눈앞의 나마란 백작과의 일부터.

그렇게 생각하며 영업용 미소를 방긋.

미리 준비해 둔 찰진 멘트를 혓바닥 위에 장전했다.

"어쨌건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백작님. 아울러 백작님의 도시를 괴롭히는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손을 보탤 수 있게 되어 더욱 영광이고 말입니다."

"음? 그게 무슨 소린가?"

나마란 백작이 고개를 갸웃.

의아한 듯 물어왔다.

"고질적인 문제라니? 설마 내 딸이 시집을 못 가던 게?"

"아닙니다. 절벽 붕괴 문제를 말씀드리던 겁니다."

"절벽?"

"예."

"그럼 혼인은?"

"아, 그건...."

"자네, 우리 가문의 청혼을 수락하는 게 아니라, 도시의 절벽을 보수해 주러 온 거였나?"

"예."

이거, 아무래도 또 하나의 오해를 적립한 것 같다.

로이드는 쓴웃음을 참아내며 말했다.

"이렇게 말씀드리긴 외람되지만, 따님은 제게 너무 과분한 분이십니다. 굳이 저 같은 놈이 아니더라도 더욱 훌륭한 분들과 연을 맺게 될 테니까 말입니다."

"...크흠. 그래도 서운하구만."

"죄송합니다. 그래도 달리 생각을 해 보자면, 따님 시집은 나중에도 보낼 수 있겠지만 지반 붕괴가 더 진행되고 나면 다시 살리기 어렵지 않을까요."

"그게 그렇게 되나."

"예. 그렇게 생각합니다."

"말 하나는 청산유수로구만."

"감사합니다."

"뻔뻔하기도 하고."

"죄송합니다."

"그래서, 자네가 우리 도시의 허물어지는 절벽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여기로 왔다는 말이로군?"

"정확한 요약이십니다."

다행히 나마란 백작은 현실적인 사고방식의 인물인 듯했다.

그때부터 그는 혼인 문제를 입에 담지 않았다.

대신 한층 진지한 눈빛을 하고서 물어왔다.

"내 자네의 건설가로서의 명성은 익히 듣긴 했네. 크레모에서의 공적도, 왕도에 놓은 새 다리 소식도 들었고 말일세. 한데 나도 여기서 절벽 문제에 대해 가만히 손을 놓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야. 이름난 건설가를 불러 백방으로 노력했다네. 그리고 모두 실패했지. 한데도 자네는 자신이 있단 말인가?"

"예."

길게 대답할 필요도 없다.

로이드는 미리 생각해 두었던 말을 핵심만 짚어내듯 술술 꺼냈다.

"제가 공사를 지휘 감독하고 백작님께서 자금과 인력을 지원해 주시면 됩니다. 만약 시공이 실패로 끝나거나 중대한 하자가 발견될 시엔 제가 백작님께 미리 협의된 위약금을 지불하게 될 테고 말입니다."

"위약금?"

"예. 우선 여기부터 봐 주실까요."

로이드가 품속에서 서류를 꺼냈다.

백작이 한쪽 눈썹을 살짝 올렸다.

"이건 뭔가?"

"공사 발주 계약서입니다."

프론테라 영지에서 출발하기 전날 미리 작성해 둔 것이었다.

로이드가 그 계약서의 곳곳을 딱, 딱, 짚으며 말했다.

"여기 보시다시피 백작님께서 제게 시공에 관한 권한과 책임을 위임하는 형태가 될 겁니다. 저는 현장의 측량과 설계, 시공 과정에서의 기술 지원과 총괄적인 감독 역할을 맡습니다. 그 대가로 시공을 안정적으로 마무리하였을 때 소정의 공사 대금을 받을 것이고 말입니다."

"흐음, 금액이... 상당하구만?"

"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자신만만하기도 하고."

"도시의 지반을 영구적으로 안정화시키는 데에 드는 투자 금액으로는 오히려 싸게 먹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데 여기 이 항목은 뭔가? 장기 관리 비용?"

"아, 그건 시공이 끝난 후에도 시설물의 관리를 도맡아 드리는 데에 드는 비용입니다."

"일 년에 네 번, 분기마다 이 금액을 따로 자네에게 지급해야 하는 건가?"

"예. 아무리 시공이 성공적으로 되었다 하더라도 지속적인 시설물 관리는 필수니까요."

"흐음.... 이거 아무래도."

나마란 백작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이쪽을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자네, 두고두고 내 창고를 털어 가려는 속셈인가? 욕심이 제법 많구만?"

"해 드리는 일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여기, 이 위약금 항목도 설정을 해 둔 것이고 말입니다."

"그래, 위약금.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어디 보세."

나마란 백작의 눈이 계약서 아래를 훑었다.

이내 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건 마음에 드는구만."

"그렇지요?"

"공사에 실패하거나 결과물에 중대한 하자가 있으면 공사대금의 세 배를 자네가 나한테 토해 내겠다니. 이래도 괜찮겠는가?"

"계약이니까요."

"그래서 이런 서류를 작성한 것이고?"

"그래야 서로 최소한의 신뢰를 가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로이드가 싱긋 웃었다.

계약서란 서로의 신뢰를 보증해 주는 최소한의 장치다.

그것이 계약서에 대한 로이드의 생각이었다.

'약속을 명확한 증거로 남기는 거니까. 계약서가 없으면 오히려 곤란하지.'

특히 고용되는 쪽이 한없이 곤란해진다. 불리해진다. 부당한 불이익을 받을 확률이 엄청나게 늘어난다.

대한민국에서의 경험이 그걸 잘 말해 주고 있었다.

'언제였더라. 포항 현장에 갔던 때였지.'

한창 노가다에 물이 올랐던 시절이 떠올랐다.

하루는 당시 현장에서 자신을 좋게 봐주던 반장님한테서 연락이 온 적이 있었다.

포항에 보름짜리 일이 있다고.

숙식 제공에 거의 매일 야근이 있을 거라고. 짭짤할 거라고.

듣자마자 오케이를 외쳤더랬다.

그렇게 포항 현장으로 갔다.

도착하자마자 안전교육 후 곧바로 작업에 투입되었다.

한데 그때 중대한 실수를 하고 말았더랬다.

'근로계약서를 안 썼어. 그때 현장에서 그랬지. 지금 엄청 바쁘니까 일단 일부터 하고 나중에 따로 쓰면 된다고.'

당시엔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나중에 쓰면 되는 건데 괜히 까탈스럽게 굴었다가 안 좋은 인상 박힐까 봐.

유난스럽게 군다는 소리 들을까 봐.

그렇게 튀는 게 싫어서.

알겠다고 하고는 일을 시작했었다.

그게 치명적인 실수였다.

'결국 거기 현장에서 일한 돈 계속 밀리고 또 밀리다가 반쯤 떼였으니까.'

내일은 줄 거다.

다음 달엔 꼭 지급될 거다.

너무 이러지 마라, 우리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다 등등.

온갖 핑계와 고성이 오갔다.

재하도급으로 계산서를 발행한 일부 팀장, 십장 등등의 사람들만 돈을 받고 나머지는 그대로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 버렸다.

덕분에 자신은?

터덜터덜 서울로 돌아와서는 한 달 내내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고시원비도 제때 내질 못해 설설 기어야 했다.

그때의 쓰라린 경험 때문이었다.

'계약서는 반드시,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아니, 내일 지구가 멸망하는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작성할 것.'

그래야 뒷말이 없어진다.

일을 시키는 쪽과 하는 쪽 모두가 편하고 평화로워진다.

그렇게 로이드는 나마란 백작과의 공사 발주 계약서 작성을 무사히 마쳤다.

"감사합니다. 그럼 백작님께서는 계약서에 명시된 대로 공사에 들어갈 자금과 물자, 인력을 준비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얼마나 준비하면 되겠는가?"

"이제부터 제가 공사 계획과 일정을 잡아볼 겁니다. 그 윤곽이 나오면 따로 말씀해 요청드리도록 하지요."

"허허. 꼼꼼한 친구로구만."

"그러려고 노력하는 편이긴 합니다."

백작에게 예를 표하고는 응접실에서 물러났다.

당분간 지낼 손님용 숙소에서 짐을 풀었다.

짐을 풀자마자 로이드는 하비엘을 쳐다보았다.

"어이."

"또 시키실 일이 있는 겁니까."

"너, 눈치 많이 빨라졌다?"

"원래 빨랐습니다."

맞은편 자리에 개인용 칫솔과 수건 등등을 꺼내 정리하던 하비엘이 툭 던지듯 대꾸했다.

"보통 이럴 때 로이드 님이 저를 부르시는 목적은 둘 중에 하나니까요."

"어떤?"

"농담 따먹기를 시도하거나, 제게 뭔가 특별한 일을 시키시거나."

"그럼 지금은 후자인 걸로 느껴졌어?"

"예."

하비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왼쪽 콧구멍이 벌렁거리고 있지 않거든요."

"응?"

잠깐.

저건 무슨 소리야.

잠시 벙쪄 있는데 하비엘의 대꾸가 이어졌다.

"모르셨습니까. 로이드 님께선 시시껄렁한 농담을 할 때면 항상, 언제나, 어김없이 왼쪽 콧구멍을 벌렁거립니다."

"...."

"그래서 콧구멍 속 숭숭 돋아난 털이 아주 잘 보이곤 하지요."

"거, 거짓말."

"안 믿으셔도 상관없습니다. 사실이니까요."

"...."

뭔가 뜬금없이 몸쪽 꽉 찬 디스에 얻어맞고 완패한 기분이다.

하지만 우선 지금은 시킬 일부터.

로이드는 아스라이 바스러지는 멘탈을 부여잡고는 말했다.

"그래. 일단 네가 맞다고 치고. 내가 시키는 것 좀 하자."

"어떤 일입니까."

"칸나바로 씨 알지? 아까 성문 안쪽 광장 배급소에서 본 사람."

"압니다. 그 사람 뒤를 캐라는 겁니까?"

"어떻게 알았냐?"

"저도 봤으니까요. 그자의 옷에 작게 수 놓여 있던 문양 말입니다."

"그럼 왜 이걸 시키는지 구구절절 설명 안 해 줘도 되겠네?"

"물론입니다. 다만...."

"다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누군가의 뒤를 살금살금 캐는 행위 자체가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

하비엘이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제 신념에도, 본분에도 어울리는 행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문양과 우리 영지의 안위가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기에 로이드 님의 명에 따르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꼭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분으로는 안 내키는데 그 문양을 조사할 필요는 있다고 말하는 거지, 지금?"

"예."

"그럼 출발."

"...."

하비엘이 찜찜한 기색을 드러냈다.

하지만 군말을 보태지는 않았다.

"다녀오겠습니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검을 차고 숙소를 나섰다.

그 뒤로 로이드도 혼자 도시로 나갔다.

성벽과 도시 주위의 지반을 더욱 자세히 살폈다.

그러는 사이에 하루가 다 갔다.

마침내 밤이 깊었다.

하비엘이 숙소로 돌아온 것은 낯선 별자리가 자정의 밤하늘을 수놓던 무렵이었다.

"로이드 님, 꼭 드려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칸나바로의 뒤를 캔 반나절 동안 녀석은 대체 뭘 보고 온 걸까.

어떤 걸 봐야 저렇게 심각한 눈빛을 하게 되는 걸까.

하비엘이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165화. 언더커버 (1)

 

 

"로이드 님, 큰일이 났습니다."

"뭐?"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 하비엘.

그런 녀석의 등 뒤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자정의 낡은 형광등.

로이드는 삐걱대는 싱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

"고시원비가 모자랄 것 같습니다."

"...응?"

저건 대체 무슨 소리야.

듣자마자 잠이 확 깼다.

고개를 들었다.

보이는 것은 고시원의 낡은 골방 풍경.

그 누리끼리한 벽지를 배경으로 하비엘이 서 있었다.

초월적인 광경이었다.

그때 하비엘이 더욱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게다가 오늘부터 편의점 삼각김밥 금액이 전부 한 개에 십만 원으로 오를 예정이라고 합니다."

"야. 너 뭐라는 거야, 지금."

"농담이 아닙니다. 정부 방침이랍니다. UN에서 공식적인 중대사안으로 방금 발표했습니다. 특히나 로이드 님이 제일 좋아하는 전주비빔밥 맛은 십오만 원으로 오를 거라던데요."

"어이? 너 지금 제정신이야? 이보세요?"

"저 제정신 맞습니다. 이게 다 저 사람 때문입니다."

하비엘이 진지한 얼굴로 자신의 등 뒤를 가리켰다.

그때였다.

달칵.

낡은 방문이 열리며 시커먼 옷을 입은 사람이 고시원 골방으로 들어왔다.

아까 낮에 봤던 자선사업가, 칸나바로 씨였다.

"반갑습니다. 처음 뵙죠? 새로 온 고시원 총무입니다."

"...예?"

"듣자하니 이번 달 고시원비 밀릴 예정이시라던데, 이만 방을 빼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게다가 학점도 살짝 모자라서 장학금 못 받으실 것 같던데요? 크하하핫!"

"자, 잠깐만요?"

이거 대체 무슨 상황인 거지.

당황스럽다.

그리고 무섭다.

난 왜 고시원에 있는 거지.

어째서 하비엘과 칸나바로 씨가 날 저런 눈빛으로 보는 거지.

지금까지 내가 겪은 일들은? 프론테라 영지는? 나는? 로이드 프론테라는?

소름이 쭉 돋았다.

'아, 안 돼! 잠깐만! 안 돼!'

다급히 소리쳤다.

이딴 게 말이 되냐고.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딨냐고.

따지듯, 애원하듯, 소리치고 싶었다.

그런데 외침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마치 지독한 악몽에 가위라도 눌린 듯 아무런 소리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만일, 그 순간 불쑥 다가와 어깨를 흔들어 준 손길이 아니었다면 계속 가위에 눌려 있었을 것이다.

"로이드 님?"

"...어, 읍!"

"괜찮습니까?"

"...!"

로이드는 눈을 떴다.

뜨자마자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최고급 침대는 삐걱이는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희미한 형광등 불빛과 싯누런 벽지 대신 일렁이는 빛과 고급스러운 실내가 보였다.

그 아스라한 빛 속에 촛대를 들고 있는 철혈의 기사의 모습도.

"하, 하비엘?"

"예. 접니다. 괜찮으십니까?"

"나는...."

"안 좋은 꿈을 꾸신 듯합니다. 가위에 눌리고 계셨습니다."

"...."

미친. 개꿈이었구나. 그것도 꽤나 지독한.

로이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개꿈치고도 참 악랄했다.

그만큼 은근 리얼했다.

돌이켜 떠올리자니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그는 고개를 휘휘 흔들어 남은 졸음과 기분 나쁜 개꿈의 흔적을 털어냈다.

"그건 그렇고. 언제 왔어?"

"방금 왔습니다. 알려드릴 것이 있습니다."

"설마 삼각김밥 가격 올랐다는 소릴 하려는 건 아니지?"

"...삼각김밥이 뭡니까."

"방금 네가 꿈에서 했던 얘긴데."

"혹시 절 꿈에서 보신 겁니까."

"어."

"그래서 가위에 눌리신 겁니까."

"어."

"...."

"어쨌건. 알려 줄 일이 뭔데."

"칸나바로 씨에 대한 일입니다."

"뭔가 수상한 점이라도 있었어?"

"설명보다는... 직접 보시지요."

하비엘이 등에 둘러메고 있던 보따리를 풀었다.

보따리 안에서 네 벌의 옷가지가 나왔다.

제법 두꺼운 겉옷 한 벌.

안에 받쳐 입는 편한 상의 세 벌.

색상과 모양도 제각각이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자수로 새겨진 용머리 사신 문양. 이거 어디서 났어? 설마 칸나바로 씨네 집에서 훔쳐온 거야?"

"아닙니다."

하비엘이 고개를 저었다.

"시장에서 사왔습니다."

"뭐?"

대체 무슨 소리인 걸까.

하비엘의 말이 이어졌다.

"아까 낮에 여길 나서고부터였습니다. 저는 로이드 님의 당부대로 칸나바로 씨가 있던 성문 안쪽 배급소부터 시작해 그의 저택을 조사했습니다. 평범한 행인의 차림을 하고서 그의 행동을 살펴보기도 했지요."

"얼굴도 가렸어?"

"예. 대강은."

"그래서?"

"자산가들의 집이 의례 그러하듯 그의 저택에도 마법적인 출입 방지 장치가 걸린 구역이 있었습니다만, 나머지 부분들은 대략적으로 모두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칸나바로 씨의 행동도 계속 살펴볼 수 있었고 말입니다. 다만...."

"다만?"

"반나절 내내 칸나바로 씨에게서 어떠한 의심이 가는 행동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반대였습니다."

"반대였다니?"

이쪽의 물음에 하비엘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의 행동은 오직 선의와 선행으로만 가득했습니다. 제가 본 가운데 가장 인자한 사람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말입니다."

"고작 반나절을 봤을 뿐인데?"

"물론 긴 시간은 아니긴 했습니다. 다만 그는...배급소의 일을 마친 뒤부터 자신의 저택에서 환자를 간호했습니다. 병에 걸려 온몸이 썩어 가던 환자를 말입니다."

"그래서?"

"환자가 전신에서 흘리는 악취 가득한 고름을 정성껏, 반나절 내내 닦아 주더군요. 눈살 한 번 찌푸리지 않고서 말입니다."

하비엘은 자신이 보았던 광경을 차근차근 말했다.

지금도 눈에 선했다.

그건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가족이나 친구도 아닌, 생판 모르는 남을 위해 선뜻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이가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그러면서도 종일 힘든 내색 한 번 없이, 인자한 미소를 잃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감탄스러웠습니다. 회의감이 느껴졌습니다. 그런 훌륭한 사람을 미행하고 뒤를 캐는 저 자신의 좀스러운 행동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러다가 발견했습니다."

"어떤 걸?"

"보살핌을 받고 있던 환자 중에도 이 문양이 새겨진 옷을 입은 이들이 있더군요."

"그래서?"

"짐짓 봉사자인 척 다가가 붕대를 갈아 주며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에 넌지시 떠봤지요. 옷에 새겨진 이 문양이 멋지다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환자가 대답하길, 시장에서 파는 옷일 뿐이라 했습니다."

"시장에서?"

"예."

하비엘이 옷가지로 시선을 던졌다.

"사실이더군요. 몇몇 상인들이 저걸 팔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죄다 사온 거야?"

"아뇨. 일부만 사온 겁니다. 시장에서 본 것만 족히 수십 벌은 되어 보였으니까요. 이 문양, 그만큼 흔하더군요."

"후우."

로이드는 숨을 푹 내쉬었다.

시장에서 파는 옷들에 저 문양이 흔하게 새겨져 있다니.

이러면 이야기가 또 달라진다.

그는 눈썹 사이를 찡그린 채 두뇌를 풀가동시켰다.

'용머리 사신 문양 이거 시장표 에디션이었어? 골때리네. 그래도 칸나바로가 이곳 흑마법사들의 우두머리인 건 확실한데.'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 그랬으니까.

따로 부정할 가치도 없을 만큼 확실했다.

그러니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다.

뒷조사는 계속되어야 하리라.

'그 작자가 소설과 똑같이 움직일 거라는 보장이 없으니까. 분명 뭔가 다른 움직임을 보일 가능성이 높으니까. 소설 내용대로만 막으려다간 자칫 낭패를 볼 수도 있어.'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이럴수록 적의 동향을 샅샅이 살펴야 한다.

적의 집에 놓인 포크 숫자, 입은 속옷 색깔마저 놓치지 않을 기세로 정보를 모아야 한다.

그래서 건수를 잡으면?

칸나바로가 사악한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걸 입증할 명확한 증거를 찾아내면?

그 즉시 나마란 백작에게 사실을 알리면 되리라.

그러면 백작이 그를 체포하게 될 것이다.

그 계획을 염두에 두며 로이드가 말했다.

"그래서 설마 하비엘, 뒷조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건 아니겠지?"

"물론...."

"아냐. 계속해."

"하지만 로이드 님."

"느낌이 와. 분명 뭔가 있어."

"...."

"설마 날 못 믿는 거야?"

"예."

"이럴 때만 대답 은근 빠르게 한다?"

"착각이실 겁니다."

"착각 아닌데."

"...."

"좀 믿어 봐라. 누군가를 뒷조사나 하는 게 안 내키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 때문에 이러는 거야."

"만에 하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어. 만에 하나 내 느낌이 사실이라면 우리 영지에도 손해가 될 일은 아닐 테니까."

사실이다.

나마란 사태를 막는 건 물론이다.

아울러 훗날의 숨은 위협을 발견하는 길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명령이야. 뒷조사 계속해."

"보통 이럴 때는 명령 대신 진심 어린 부탁을 통해 듣는 사람의 감동을 이끌어 내곤 하던데 말입니다."

"내가 왜?"

"...."

"명령하면 들을 거 뻔히 아는데 왜 피곤하게 설득이나 부탁 같은 걸 하냐."

"...."

"까라면 까야지."

"후우. 아까 깨워 드리는 게 아니었는데."

"계속 가위눌리라고?"

"당연하신 말씀을."

쯧, 혀를 차며 하비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 말이 채 끝맺어지기도 전이었다.

어느 순간 하비엘의 모습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남은 흔적이라곤 녀석이 남겨 둔 촛대와 어느새 열린 창문, 그리고 나풀거리는 커튼뿐.

그 모습에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역시 소드마스터는 대단하네.'

이쪽도 어느새 익스퍼트 중급에 다다랐는데.

그런데도 하비엘이 움직이는 기척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했다.

사라지는 모습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하니 녀석에게 맡긴 일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그럼 그동안 나도 내 일을 좀 해둘까.'

열린 창문을 닫은 로이드는 숙소 책상에 앉았다.

흑마법사에 대한 추적은 당분간 하비엘에게 맡겨 두자.

그동안 자신은 나마란 백작에게 받은 시공을 준비하자.

그렇게 생각하며 설계 스킬을 열었다.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로이드는 이번 시공에 대한 계획을 구체적으로 잡았다.

'역시나 전에 생각했던 대로 억지말뚝과 앵커를 쓰는 게 제일이겠어.'

이 도시를 떠받치는 사암질 사면.

그냥 겉면만 보강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아예 안쪽 깊숙한 지반에 말뚝과 앵커를 박아서 든든한 지지 기반을 만들어야 할 듯했다.

한데 그러자니 문제가 있었다.

'앵커를 제작해야겠어.'

절벽 비탈면에 수많은 구멍을 뚫고 기반암에 꽂아 넣을 앵커.

그건 그냥 철근을 꽂아 넣는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통나무나 대나무는 더욱 안 될 일이었다.

반드시 현대식으로 만든 앵커가 필요했다.

'그래야 비탈면에 뚫은 구멍의 안쪽 면에 앵커가 단단하게 고정이 되니까. 제대로 고정이 돼야 기반암에서부터 겉면까지 힘을 전달해서 절벽이 흘러내리는 걸 막아줄 테니까.'

그래서였다.

어느 정도 설계를 마친 로이드는 나마란 백작을 찾아갔다.

"이 도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대장장이를 소개해 주셨으면 합니다."

"대장장이를 말인가?"

"예."

로이드는 자신이 생각하는 공사의 개요와 앵커에 대해 설명했다.

특히 앵커를 설명하면서는 미리 그려 온 도면을 백작에게 보여주었다.

"이번 시공에 반드시 이 물건이 필요합니다. 그러려면 실력 좋은 대장장이의 도움이 필수일 테지요."

"이 앵커라는 걸 만들기 위해서 말인가?"

"예."

그가 고안한 앵커는 사실 대한민국의 현장에서 사용하는 '웨지락볼트'에 더 가까운 물건이었다.

그게 어떻게 작동하는 것이냐면....

'기다란 원통 막대 끝에 커다란 너트가 달려 있지. 막대를 기반암까지 뚫어 놓은 구멍 끝까지 밀어 넣는 거야. 그리고 막대 끝의 너트를 돌려 버리면? 너트가 막대 안쪽으로 파고들면서 막대 겉면을 늘어나게 벌려. 막대가 두꺼워지면서 구멍 안쪽 면에 단단히 물려 버리는 거지.'

말 그대로 너트를 돌리는 만큼 두꺼워지는 요술 막대라 할 수 있었다.

'어쨌건 그걸 만들려면 너트의 나선 홈을 제대로 파야 해.'

나사와 같은 나선 홈.

그걸 원하는 규격대로 정확하게 만들 수 있는 건 실력 좋은 대장장이밖에 없다.

'그렇다고 코기두스 어르신을 불러올 수도 없고.'

드워프 대장장이는 오늘도 꿀벌 아파트 단지 시공에 쓰일 철물을 두들기고 있을 것이다. 그런 그를 무리해서 여기까지 데려올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입니다. 이 도시 최고의 대장장이가 필요합니다. 안 그러면 시공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겁니다. 시공을 제대로 못 하면 절벽이 바사삭 무너질 겁니다. 절벽이 바사삭 무너지면 백작님이 슬퍼지실 겁니다. 백작님이 슬퍼지시면 제 행복지수도 힘찬 하락곡선을 그리게 되지 않겠습니까?"

"허허? 그런가?"

"예."

"그거 볼 만하겠구만."

"그 말씀은?"

"당연히 소개해 주겠네. 우리 도시 최고의 대장장이 말일세."

"감사합니다."

"어차피 계약서까지 쓴 사이에 감사는 무슨. 행정관에게 일러둘 터이니 그를 따라가게나."

백작의 너털웃음을 들으며 집무실에서 물러났다.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자니 잠시 후 백작가의 행정관이 왔다. 행정관의 안내를 받으며 저택을 벗어났다. 시가지를 통과했다. 평범한 초가을 햇볕 아래 평범한 시민들 곁을 수없이 지나쳤다.

그동안 로이드는 사방을 꼼꼼히 살폈다.

'하나라도 단서를 모아야 해.'

하비엘은 잘 해내고 있을까.

녀석, 며칠째 돌아오지 않고 있는데.

칸나바로의 구린 뒤를 잘 캐내고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행정관과 함께 시내 광장을 지나가던 무렵이었다.

"후우. 요즘 들어 배급소에 사람이 너무 몰려서 난리라더니, 그 말이 사실이로군요."

앞서 걷던 행정관이 너스레를 떨었다.

아닌 게 아니라 광장의 배급소에 몰린 사람이 전보다 훨씬 많아진 게 보였다.

로이드는 의아함을 느끼며 물었다.

"피난민이 더 많이 몰려든 겁니까?"

"아, 그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그럼요?"

"제가 듣기로는 최근 며칠 새 엄청난 미인이 배급소에서 자원봉사를 시작했다고 하더군요."

"미인... 말입니까?"

로이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이쪽의 리액션 덕분인 걸까.

행정관이 어쩐지 신이 난 얼굴로 침을 튀겨댔다.

"사실 저도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들려오는 얘기로는 실로 절세의 미인이 따로 없다고 하더군요. 하늘의 별과 은하수마저 질투를 느낄 정도로 청초한 아름다움을 지녔다던가요. 하아. 그러니 저렇게 피난민이 아닌 사람들마저 온통 배급소로 몰려든 거겠지만 말입니다."

"설마 그 미인을 구경하려고 말입니까?"

"왜 아니겠습니까."

행정관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더니 이쪽을 은근한 눈초리로 떠보는 것이 아닌가.

"저기, 말이 나온 김에 우리도 잠깐만 발길을 멈추고 구경을 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혹시 공자님께서 많이 바쁘신 게 아니시라면...."

"...."

어떻게 할까.

로이드도 호기심을 느꼈다.

저토록 행정관이 극찬하는 미인의 미모가 궁금해서?

아니었다.

'어쩌면 흑마법사와 연관이 있는 단서일지도 몰라.'

나마란 사태가 예정된 이 시점에 절세미인의 등장이라.

소설 철혈의 기사에선 없었던 일이었다.

어쩐지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한번 구경해 보도록 하죠."

행정관의 입이 귀에 걸렸다.

그와 함께 배급소의 인파에 끼어들었다.

출퇴근 시간 서울 지하철 신도림역의 추억(?)을 담아 어깨로 파고들며 끼어들기, 궁둥짝으로 부비적대며 자연스럽게 공간 만들어 스며들기 등등의 기술을 총동원했다.

덕분에 얼마간 낑낑댄 끝에 인파를 헤치고 지나갈 수 있었다.

배급소의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모두의 시선이 모인 곳.

그곳에 미인이 있었다.

수수하기 짝이 없는 앞치마.

그러나 눈빛은 샛별처럼 반짝였다.

청초한 생머리 은발은 그 자체로 은하수 같았다.

그렇게 너무나 눈부신 모습으로 국자를 들고 있는 절세의 미인은 바로....

'하비엘?'

하마터면 로이드는 눈가를 비비던 손가락으로 자신의 안구를 푹 찌를 뻔했다.

166화. 언더커버 (2)

 

 

'하비엘?'

로이드는 하마터면 눈가를 비비던 손가락으로 자신의 안구를 찰지게 푹 찌를 뻔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황당했기 때문이었다.

'뭐? 누군가의 뒤를 캐는 일이 떳떳하지 못해서 싫다고? 자신의 본분에 어울리는 일이 아닌 듯해서 회의감이 든다고?'

며칠 전 자정 무렵의 일이 떠올랐다.

이슥한 달빛 아래 숙소로 돌아왔던 녀석.

자괴감과 회의감에 휩싸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칸나바로를 뒷조사하라는 이쪽의 명령에 잘도 반발했더랬다.

그런 녀석을 어르고 달래서 다시 보냈었다.

그 뒤로 어째 며칠 소식이 없다 싶었더니.

'...사실은 즐기고 있던 거였냐.'

수수한 드레스.

찰랑이는 생머리 은색 가발.

거기에 옅게 분을 칠한 하비엘 녀석을 보자니 한숨과 감탄이 동시에 흘러나왔다.

너무나 감쪽같았다.

워낙 본판이 잘생긴 녀석이다 보니.

인상마저도 곱고 부티나는 놈이다 보니.

저렇게 살짝 분장을 한 것만으로도 절세미녀 느낌이 물씬 났다.

'게다가 날씬하기까지. 속은 꽉 찬 근육질이지만 군살이 전혀 없어서, 옷 입혀놓으면 엄청 날씬해 보이니까. 좀 키가 큰 게 부담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여기 사람들이 보기엔 완전 슈퍼모델 같은 느낌이려나.'

어쨌건 그런 덕분(?)인 듯했다.

배급소에서의 하비엘의 인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했다.

흡사 지구 최강 여자 아이돌 크와이스 콘서트장이나 팬사인회 현장에 와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때였다.

"어이? 이보쇼."

누군가가 뒤에서 어깨를 툭툭 쳤다.

돌아보니 피난민으로 보이는 남자가 삐딱한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거, 줄을 선 거면 빨리빨리 좀 움직입시다. 사람이 왜 그렇게 굼떠?"

"아?"

"멍 때리지 말고 좀 가자니깐요?"

"어엇?"

남자가 온몸으로 등을 밀어왔다.

아니, 그 남자뿐만이 아니었다.

그 뒤로 늘어선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두 체중을 실어서 앞으로 전진해 왔다.

어쩐지 낯설지 않은 친숙한 감각이었다.

'이거 완전 아침 출근 시간 전철 2호선인데?'

신도림역이 떠올랐다.

출근 시간의 신도림역.

그곳은 한낱 평범한 전철역이 아니었다.

온갖 인간군상이 서로를 밀쳐대는 용광로이자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종종 내가 굳이 움직이지 않아도 주위 사람들이 밀어대는 압력만으로 이동할 수 있는 일이 매일마다 벌어지는 신비의 공간이기도 했다.

한데 지금이 딱 그랬다.

하비엘의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서 인파를 헤치고 들어왔던 로이드. 그는 졸지에 배급소에 늘어선 사람들의 인파에 휩쓸리게 되었다.

빠져나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얼결에 함께 줄을 서게 되었다.

오순도순 강제 부비부비를 체험했다.

그러는 사이에 강제로 떠밀려 오고 말았다.

배급소의 여신(?)으로 추앙받는 하비엘 앞으로.

"...."

"...."

하비엘이 이쪽을 보며 눈을 깜빡깜빡.

이쪽은 녀석을 향해 반쯤 썩은 미소를 프스스.

그런 침묵도 잠깐.

녀석이 시치미를 뚝 떼듯 말했다.

"그릇, 내미세요."

"아."

얼결에 나무그릇을 집어들었다.

녀석을 향해 내밀었다.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질문이 튀어나왔다.

"저기 실례지만 레이디의 성함이?"

"아... 엘라랍니다."

"엘라요?"

"네. 엘라할 때 '엘', 엘라할 때 '라'요."

"...."

녀석답지 않게 얼빠진 대답을 하는 걸 보니 녀석도 이쪽만큼이나 내심 당황하고 있는 듯했다.

'짜식.'

나름 이쪽이 시킨 뒷조사를 더 확실히 하려고 이렇게 배급소에 잠입한 거겠지.

로이드는 하비엘을 더 당황시키지 않기 위해 그쯤에서 물러났다.

"감사합니다, 엘라 양. 그럼 이만.'

수프를 받았다.

그걸 원샷하고는 줄에서 간신히 빠져나왔다.

그렇게 겨우 한숨을 돌리는데 나마란 백작의 행정관이 다가왔다.

"허허, 프론테라 공자님 그렇게 안 봤는데 말입니다?"

"예?"

로이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래는 거야, 이 양반이.

게다가 또 왜 그렇게 빙글거리고 있는 건데.

행정관이 뭘 모른 척하냐는 듯 콧등 쿡 찡그리는 웃음을 보내왔다.

"아까 제가 저 미녀 이야기를 드렸을 때는 별로 관심 없어 하시던데 말입니다. 그런데 막상 모습을 보고는 저보다 더 적극적이실 줄은 몰랐지 말입니다?"

"...."

"직접 이야기를 나눠보니 어땠습니까? 목소리는요? 말투는요?"

"거, 참. 궁금하면 직접 가서 확인하시든가. 일이나 합시다, 일이나. 흠흠!"

로이드는 짐짓 역정을 내는 척하며 헛기침을 삼켰다.

입이 근질거렸다.

당신네들 전부 속고 있다고.

저 엘라인지 얼라인지 하는 숙녀님, 알고 보면 싹싹한 데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을 남자 놈이라고. 게다가 잠버릇마저 고약하기 짝이 없어서 자장가가 없으면 눈도 못 붙이는 수면 고자라고.

생각 같아선 동네방네 다 떠들어주고 싶었다.

저놈의 정체를 모르고서 상사병에 걸린 듯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측은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대의를 위해 입술에 지퍼를 잠갔다.

'일단은 하비엘 녀석, 위장 잠입 중인 거니까.'

장난으로 저런 짓(?)을 벌일 녀석이 아니다.

녀석이 저러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다.

뭔가 확실한 냄새를 맡았기에 저런 짓까지 벌이며 잠입을 시도하고 있는 거겠지.

'일단은 믿어보자.'

당분간 녀석이 하는 대로 놔두자.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는 걸음을 서둘렀다.

하비엘이 이쪽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노력하는 만큼 이쪽도 할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행정관의 안내를 받아 대장간에 갔다.

대장간에 앵커 제작을 의뢰했다.

처음엔 고개를 갸웃거리는 대장장이였다.

앵커라는 물건 자체가 생소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미리 그려둔 설계도를 건네주며 자세히 설명을 곁들이자 비로소 이해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야. 이 도시에서 제일 믿음직한 대장장이라더니. 코기두스 어르신의 어마무시한 실력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앵커 정도는 충분히 맡겨볼 수 있겠어.'

덕분에 걱정거리 하나를 덜었다.

이후 로이드는 혼자 성 밖으로 나갔다.

성벽 둘레, 절벽 사면을 따라 걸었다.

측량 스킬을 사용했다.

스킬 옵션인 '지하 스캐닝'을 발동했다.

'이제부터 여기 곳곳에 억지말뚝과 앵커를 박아 넣어야 하니까, 조금 더 디테일하게 살펴볼까.'

실제로 억지말뚝을 어떻게 박을지.

앵커의 각도와 깊이를 어떻게 설정할지.

실제로 시공할 자리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흠, 가도를 이루는 평탄한 자리에 억지말뚝을 꽂아서 전체적인 구조적 안정성을 올리고, 사면에 앵커를 설치해서 흘러내림을 잡아두는 게 유리하겠네. 그걸 성벽이 있는 위쪽에서부터 절벽 저기 아래까지 쭉 반복적으로 시공하면 될 듯.'

그렇게 생각하며 실제 지형의 데이터를 꼼꼼히 따냈다.

기반암의 정보도 빈틈없이 파악했다.

한데 그러던 도중이었다.

'음?'

지하 스캐닝으로 땅속을 살펴보는데 이상한 물체가 감지되었다.

'뭐야, 저건?'

깊이는 지표에서 약 50센티 남짓한 지점.

처음엔 그저 평범한 돌덩이인 줄 알았다.

한데 아니었다.

위쪽은 새하얗고 동글동글.

아래쪽은 각이 지고 울퉁불퉁.

그건 바로....

'두개골이잖아? 저런 게 왜 저기 있어?'

로이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말 그대로 사람의 머리뼈가 통째로 땅속에 파묻혀 있었다.

한데 아무리 봐도 묘를 만들 자리는 아니었다.

게다가 두개골만 덩그러니.

몸 쪽의 뼈는 근처에 보이지도 않았다.

'처형당한 사람의 머리만 여기 묻힌 건가.'

로이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큰 도시 주위니까.

나름 역사가 깊은 곳이니까.

긴 세월 동안 별별 일이 다 있었을 것이다.

처형당한 사람의 머리뼈 하나 주위에 묻혀 있다고 유난을 떨 일도 아닐 터다.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는 땅속에서 감지되는 주인 없는 두개골을 지나쳤다.

하던 일에 계속 열중했다.

측량 스킬을 발동하며.

지하 스캐닝에 집중하며.

시공 현장을 파악하며 걸음을 옮겼다.

한데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그의 지하 스캐닝에 또 다른 두개골이 탐지되었다.

'뭐야, 저거.'

로이드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아까와 너무나 비슷했다.

깊이는 지표면으로부터 약 50센티.

몸통도 없이 두개골만 땅속에 덩그러니 묻혀 있었다.

그는 이번에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자리를 지나쳤다.

'괜히 찜찜하네. 아님 오늘 운이 특별한 건가. 한국이었으면 이거 오늘 로또 각인데.'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피식.

그는 찜찜한 기분을 털어냈다.

다시금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

하지만 10분 뒤.

그는 더 이상 피식거리며 웃을 수 없게 되었다.

'뭐야. 또 있잖아?'

두개골이 또 보였다.

아까와 같은 지표면에서 50센티 깊이.

게다가 자세히 보니 앞선 두 번과 똑같이 두개골이 땅속에 똑바로 세워진 채 도시를 바라보며 묻혀 있었다.

"...."

그는 굳은 눈길로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처음과 두 번째 두개골이 발견된 지점을 살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있는 장소와의 거리를 측량 스킬로 체크했다.

놀랍게도 세 지점 사이의 간격이 정확히 똑같았다.

'이거 뭔가 있는 거 같은데?'

그냥 처형당한 사람의 두개골이 아무렇게나 묻힌 거?

절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 두개골이 똑같은 깊이와 방향으로 묻혀 있었다.

게다가 묻혀 있는 지점 사이의 간격도 거의 똑같았다.

얼마나 똑같냐면, 오차가 겨우 10센티 남짓할 정도였다.

'이 정도면 거의 자로 재가면서 자리를 정하고 묻었다고 봐야지. 그러니까 이거, 그냥저냥 우연히 묻힌 게 아냐. 이거 분명 뭔가 있어.'

어느새 로이드는 배낭을 뒤적이고 있었다.

접이식 손삽을 꺼냈다.

두개골이 파묻혀 있는 자리를 열심히 팠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두개골을 발굴해낼 수 있었다.

한데 두개골을 구덩이에서 꺼내려고 손을 뻗는 순간.

 

파츠즛!

 

"...읏!"

마치 전기에 감전된 듯한 통증이 손끝을 때려 왔다.

로이드는 황급히 손을 움츠리며 두개골을 관찰했다.

'마법?'

땅속에 파묻혀 있을 때는 느껴지지 않았는데.

이렇게 파내서 모습이 보이게 되니 느껴졌다.

아스라한 심법을 통해 보였다.

고밀도의 마나가 모여 있었다.

지극히 음울하고, 어둡고, 사악한 종류의 마나였다.

그걸 감지한 순간부터였다.

'잠깐만. 설마 이거....'

로이드의 두뇌가 핑핑 돌아가기 시작했다.

일정한 간격으로 묻혀 있는 두개골.

그 두개골에 응축된 음울한 마나.

그걸 바탕으로 머리를 굴려보았다.

추론과 추리.

추측과 예측.

사실과 사견.

현실과 허실.

명확히 가려내고, 분류하고, 짜맞추었다.

눈앞에 드러난 증거와 현상을 토대로 예측하고 추론했다.

그렇게 맞추어진 퍼즐의 끝자락에서 결론이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나마란의 장벽. 이걸로 만드는 거였어.'

깨달음의 끝에 소름이 돋았다.

문득, 소설 철혈의 기사 속 나마란의 장벽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소설의 하비엘은 장벽을 앞두고 고난과 좌절을 겪었다.

그걸 극복하며 극적인 성장을 이루어내었다.

그렇게 나마란의 장벽을 깨부수고, 영웅적인 업적을 이루어내는 과정에 이야기의 포커스 대부분이 맞추어져 있었다.

덕분에 장벽이 만들어진 자세한 원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게 이거였어. 흑마법을 담은 두개골. 이걸 도시 둘레에 묻어둠으로써 말이야.'

그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두개골을 쳐다보았다.

동시에 생각했다.

여기에 응축된 마나를 흩어 버릴 수 있다면?

그러면 흑마법이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나마란의 장벽이 세워지는 걸 막을 수 있을 거라고.

'해볼까.'

그는 두개골에 응축된 마나의 양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아스라한 심법을 점검했다.

'트리플 써클 2레벨.'

이걸 모조리 동원하면 어떨까.

저 응축된 마나를 해체할 수 있을까.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각을 재보았다.

'가능하겠어.'

답이 나왔다.

그렇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다.

 

키이이잉!

 

마침 주위에 보는 눈도 없었다.

그는 아스라한 심법을 발동하며 손을 뻗었다.

심법의 마나 흡수 능력을 최대로 발휘했다.

손끝이 두개골 정수리에 닿는 순간.

'흡.'

극도로 음울한 마나가 손끝을 통해 해일처럼 밀려들어 왔다.

'이건 먹으면 안 돼. 배탈 나.'

세 갈래 써클을 최대한으로 회전시켰다.

몸속으로 들어오는 음울한 마나를 반대편 손으로 보냈다. 실타래를 풀듯이. 꼼꼼하게. 배출했다. 날려보냈다. 공기 중으로. 연기를 피우듯. 차근차근. 확실하게.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몇 분쯤이 지났을 무렵.

"...후아!"

로이드가 숨을 크게 토해냈다.

그런 그의 얼굴은 약간 창백해져 있었다.

하지만 입가에는 뿌듯한 미소가 걸렸다.

'해냈다.'

폭탄 제거반의 기분이 이런 걸까.

다행히 세 개의 써클이 마나 흡수와 해체, 배출을 잘 버텨줬다.

구덩이 속 두개골에 응축되어 있던 음울한 마나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는 두개골을 구덩이에서 꺼냈다.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한데 그때였다.

 

달그락.

 

두개골 안쪽에서 뭔가 소리가 났다.

작고 단단한 것이 굴러다니는 소리.

"어?"

두개골 안쪽을 살피던 로이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보석?"

흑요석처럼 새까만 보석이 두개골 안쪽에 놓여 있었다.

크기는 엄지손톱 정도.

한눈에 척 봐도 반들반들 영롱했다.

한마디로 엄청 비싸 보이는 보석이었다.

'잠깐. 그럼 이거, 두개골은 이 보석을 담은 포장 박스였던 거네. 응축된 마나는 보석에 담겨 있던 거였고. 어쨌건 그럼, 내가 마나를 해체하면서 이 보석도 평범해진 거니까....'

이제부터 이 보석은 제 소유입니다.

 

씨이익.

 

로이드의 입꼬리에 자본주의적 탐욕의 미소가 맺혔다. 절로 심장이 16비트 자진모리장단으로 뛰었다.

그때부터였다.

'보물찾기, 스타트.'

로이드는 나마란 둘레의 절벽 사면을 발바닥에 땀 나도록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헥헥거리며 뼈다귀를 찾는 강아지처럼.

엄마 몰래 카레 속 고기만 쇽쇽 빼먹듯.

눈이 시뻘게지도록 지하를 탐색했다.

그렇게 흑마법사들의 사악한 계획도 저지하고.

적에게 거한 엿도 먹이고.

동시에 비싼 보석도 짭짤하게 챙겨서.

내 지갑을 풍요롭고 빵빵하게 채우기 위해.

정의의 이름으로 기꺼이 감행하는 욕망의 정주행이었다.

167화. 언더커버 (3)

 

 

흔히 사람들이 하는 핀잔 중에 '땅 파면 돈 나오느냐'는 말이 있다.

맨땅에서 돈이 나올 일이 없다는 뜻이다.

물론 보통의 경우 그 말이 맞다.

땅 파서 돈 나오는 일이란 좀처럼 없다.

하지만 오늘, 로이드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왜 안 나와? 이렇게 쑴펑쑴펑 나오는데!'

그의 흡족한 눈빛이 방금 파낸 구덩이 속을 향했다.

약 50센티 깊이의 구덩이.

그 속에 해골이 하나 묻혀 있었다.

학교 생물실에 있을 법한 모형이 아닌 진짜 사람의 두개골.

보통의 멘탈을 지닌 사람이라면 보는 순간 어깨부터 움츠렸을 법한 물체였다.

그러나 지금의 로이드는 달랐다.

'어휴. 내 금덩이.'

두개골을 바라보는 로이드의 눈길은 흡사 금송아지 바라보는 놀부 영감의 것만 같았다. 혹은 가을바람에 낙엽과 함께 나풀거리던 5만 원짜리를 발견한 사람의 눈빛 같았다.

당연했다.

두개골 안에 귀한 보석이 담겨 있으니까.

'그러니까 응축된 마나를 해체하기만 하면 보석이 내 것이 된다는 말씀이지. 이렇게. 요렇게.'

 

키이이이잉!

 

그의 세 갈래 마나써클이 부귀영화의 꿈을 싣고 힘차게 회전했다.

두개골에 걸린 마법.

보석에 응축된 마나.

그걸 모조리 빨아들였다.

마나써클의 회전을 통해 마나의 구조를 해체했다.

마치 시한폭탄의 회로를 제거하듯.

혹은 정교하게 쌓아둔 젠가 블록을 차근차근 빼내듯.

위험한 목적을 위해 구성된 마나의 구조물을 해체하고 분해했다.

그리고 반대편 팔을 통해 방출했다.

 

프스스스...!

 

평범하게 변한 마나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그렇게 마나 해체 작업에 얼마나 매달렸을까.

로이드의 이마에서 땀이 주르륵 흘러내릴 때쯤.

마침내 두개골 속 보석의 위험한 기운이 완전히 사라졌다.

로이드의 입가에 보람찬 미소가 피어났음은 물론이었다.

'이제 이 보석은 제 겁니다. 흐흐흐.'

 

달그락!

 

두개골에서 굴러나온 보석이 손바닥 위로 데구르르 떨어졌다.

그 모습은 또 얼마나 예쁘고 기특한지.

로이드는 꿀이 떨어지는 눈빛으로 보석을 요리 보고 조리 살폈다.

'좋아. 흠집도 없고. 완벽해.'

오늘만 벌써 24개째.

반나절에 걸쳐 나마란의 절벽 주위를 배회한 로이드였다.

그동안 24개의 두개골을 발견했고, 그만큼의 보석을 챙겼다.

불룩해지는 주머니만큼 마음도 훈훈해졌다.

하지만 그는 마냥 기뻐하지만은 않았다.

"무슨 험한 일을 겪으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명복을 빕니다. 부디 영면하세요."

보석을 챙긴 그는 두개골을 바닥에 놓았다.

두개골을 향해 정중히 고개 숙였다.

그리고 행여나 망가뜨릴까 조심스러운 손길로 두개골을 챙겨 보따리에 넣었다.

그의 주위에는 그런 보따리가 이미 3개나 더 있었다.

지금까지 발견한 24개의 두개골.

그걸 모두 담은 보따리였다.

'배낭에 보따리 삼을 천이 있었던 게 다행이야.'

안 그랬으면 이렇게 많은 두개골을 챙겨다닐 엄두도 못 냈을 것이었다.

'장례까지는 무리겠지만 그래도 양지바른 곳에 묻어줘야 하니까.'

몸통도 없이 두개골만 남은 이들이었다.

그것마저도 흑마법사들에게 이용당한 이들이었다.

사악한 보석을 품은 채로 차가운 땅속에 아무렇게나 묻힌 한이 얼마나 클까.

그걸 생각하니 그냥 버리거나 내버려두기 싫었다.

조금 귀찮고 번거롭지만.

그 전에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례를 치러주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양지바른 곳에는 정중히 묻어주는 것이 좋을 듯했다.

그래서였다.

로이드는 보석을 챙길 때마다 두개골을 꼼꼼하게 챙겼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해가 서쪽 지평선에 걸쳐져 있었다.

곧 밤이 올 것이다.

순식간에 주위가 어두워지리라.

'일단 숙소로 돌아갈까.'

로이드는 두개골 담긴 보따리를 챙겼다.

숙소에 놓았다. 그리고 다시 나왔다. 더 많은 보따리를 챙기고서였다.

'당연하지. 어두워졌다고 보석 안 챙길 이유가 있나?'

노는 물이 들어왔을 때 저어야 한다.

돛은 순풍이 불 때 올려야 한다.

땅속의 보석을 챙기는 일도 마찬가지다.

기세를 탔을 때 뽕을 뽑아야 한다.

뷔페에 갔을 때 혼을 바칠 기세로 위장 용량을 늘려야 하듯. 썸 타는 이성에게서 처음으로 선톡이 왔을 때 관계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듯.

이렇게 기회가 왔을 때 밤을 지새워서라도 보석을 다 챙겨야 한다고 로이드는 생각했다.

'아마 이런 기회가 오래가진 않을 거니까.'

흑마법사들의 마법이 담긴 보석이었다.

그걸 몰래 파내고 슥삭 챙겨오는 일이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흑마법사들이 눈치를 챌 것이다. 자신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고 묻어놓은 마법진의 기틀이 사라졌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니 놈들이 눈치채기 전에 최대한 챙기는 거야. 할 수 있어.'

딱 하루 폭탄세일 소식을 듣고 달려가듯.

선착순 증정품 행사 꿀을 빨기 위해 눈에 불을 켜듯.

로이드는 발바닥 각질에 땀이 배어나도록 성 밖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파고 또 팠다.

캐내고 또 캐냈다.

풍작을 수확하는 농부의 마음으로.

그물을 끌어올리는 어부의 정성으로.

수많은 두개골을 발견하고, 마나를 해체하고, 보석을 챙겼다.

그러는 과정에서 보너스 같은 뜻밖의 이득도 얻었다.

 

딩동!

 

[스킬 레벨 업!]

 

[아스라한 심법 : 트리플 써클 Lv 3]

[마나 증폭률 : 560%]

[스킬 전용 옵션 : ① 에너자이저(改) ② 잠력 폭발(改) ③ 절전 모드(改) ④ 써클 시프트⑤ 급속충전]

[다음 레벨업에 필요한 RP : 600]

 

[현재 보유 중인 RP : 3,005]

 

'읏차!'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를 확인하며 로이드는 흙투성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보석에 응축된 사악한 마나.

그걸 해체하는 과정에서 아스라한 심법을 최대 출력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 과정 자체가 아스라한 심법의 스킬에 좋은 경험이 되는 듯했다.

'아, 나마란에 오길 정말 잘했어.'

흑마법사들의 계획도 저지하고.

비싼 보석도 왕창 챙기고.

아스라한 심법도 키우고.

그러는 김에 사면안정공법을 시공할 자리들도 꼼꼼하게 체크했다.

지하 스캐닝 옵션.

거기에 아스라한 심법.

두 가지 요소를 모두 지닌 자신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룰루랄라 난나나.'

절로 나오는 흥겨운 콧노래.

그렇듯 노동요를 벗 삼은 로이드는 밤새도록 산삼 캐내듯 보석을 챙겼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다음날 자정 무렵.

로이드가 전날 밤새도록 캐낸 보석을 숙소에서 헤아리고 있을 때였다. 흐뭇한 웃음을 실실 흘리고 있는데 창가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은 냉담한 듯 툭 쏘는 말투.

돌아보니 하비엘이 창틀을 넘어오고 있었다.

녀석을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는 넌 대체 무슨 어마어마한 일을 겪었길래 무려 샤방샤방 레이디가 되셨냐?"

아닌 게 아니라 지금 창틀을 넘어오는 하비엘 녀석.

전날 낮에 배급소에서 봤던 모습 그대로였다.

수수하고 평범하기 짝이 없는 드레스.

청초한 생머리 긴 은발.

즉, 녀석은 지금 '레이디 엘라' 모드인 셈이었다.

녀석도 그런 자신의 모습이 민망하게 느껴진 걸까.

콧등을 팍 찡그리며 대꾸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었다니? 본능이 시키디?"

"...불쾌하기 짝이 없는 오해라고 대답하고 싶군요. 절대로 아닙니다."

"그럼?"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칸나바로 씨의 저택에 좀처럼 들어갈 수 없는 구역이 있었습니다."

"마법으로 보안이 유지된다던 곳?"

"예. 지하실입니다."

"그곳에 들어갈 기회를 엿보기 위해서 여장을 하게 된 거야?"

"예."

하비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아무리 소드마스터라 하더라도 마법적인 방비에는 대응할 수 없으니까요. 들키지 않고 무단으로 들어갈 방법이 이것 외에는 없었습니다."

뭘 떠올리는 걸까.

녀석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생겼다.

"그래도 처음엔 여장까지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 외모가 문제더군요."

"너무 잘생겨서?"

"예."

"헐. 부정하지도 않아."

"명백한 사실이니까 말입니다."

녀석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너무 눈에 띠었습니다. 변장을 하더라도 얼굴을 바꿀 방법은 없었으니까요. 그러다가 역발상을 떠올리게 되었고 말입니다."

"차라리 여자로 변장하게 되면, 눈에 띄더라도 그걸 너와 연관 짓지는 못할 거라고?"

"예. 설마 이름난 기사가 여자로 변장할 거라는 생각까진 떠올리지 못하리라.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였습니다."

녀석이 두 손으로 자신의 앞치마를 슬쩍 들어 보였다.

"처음엔 좀 걱정했는데, 아무도 의심하지 않더군요."

"그리고 절세미녀 레이디 엘라 양으로 명성을 떨치게 됐고 말이지."

"...그건 잊어주시죠."

녀석이 넌더리를 내며 웃었다.

"어쨌건 덕분에 이 모습으로 변장한 지 사흘째 되는 날 지하실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심부름을 핑계로 말입니다. 한데 그 지하실, 조금 이상하더군요."

"어떤 점이?"

"지하실 아래에 또 지하실이 있었습니다."

"오호라. 들어가 봤어?"

"거기까진 아직입니다. 칸나바로 씨와 소수의 측근들만 들어갈 수 있는 듯해서."

"그렇군. 확실히 의심스러워."

"아직도 그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당연하지."

로이드는 삐딱한 고갯짓으로 하비엘을 쳐다보았다.

"그럼 넌 아직도 그를 선량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냐?"

"예."

"어째서?"

"아직 그에게서 악행과의 어떠한 연관성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그가 정성껏 피난민들을 돌보는 일에 하루를 모두 쏟아붓고 있기도 하고 말입니다."

"쯧. 지하실 아래의 지하실까지 봐놓고 그런 소릴 하는 거야?"

"그 정도야 자산가들이 흔히 두는 비밀 금고일 수도 있는 거니까요."

"여전히 칸나바로 씨를 변호할 생각이면서 여장은 왜 했냐?"

"거듭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로이드 님의 명령을 확실하게 수행하기 위해서입니다."

"대답은 잘하네."

"평소부터 로이드 님을 거울삼아 배운 덕분입니다."

"뻔뻔하기까지?"

"감사합니다."

녀석이 별일 아니라는 듯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이쪽을 향해 물어왔다.

"그나저나 아까도 여쭈었던 거지만 로이드 님도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음? 왜?"

"다크써클이 심해지셨습니다. 그런데 표정은 밝아졌군요."

"티가 나냐?"

"예. 많이."

"후우. 사실 이런 걸 발견해서."

로이드는 검은 보석 하나를 꺼내서 보여주었다.

그리고 어제부터 있었던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알려주었다.

측량을 하다가 땅속에서 발견한 두개골.

수상하게 응축되어 있던 마나.

마나를 해체하자 두개골 속에서 나오던 보석까지.

그 이야기를 다 들은 하비엘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래서 밤새도록 그 보석을 도굴, 아니, 발굴했다는 겁니까."

"어. 그리고 난 두개골과 보석이 칸나바로 씨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증거는 있습니까."

"그건 이제부터 네가 찾아봐야지."

물론 아직은 증거가 없다.

땅속에 묻힌 두개골과 보석.

그게 칸나바로의 짓임을 입증할 명확한 증거는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로이드는 알고 있었다.

'이건 무조건 칸나바로, 그자의 짓이야.'

소설 철혈의 기사를 읽은 자신이기에 알 수 있었다.

칸나바로.

그자가 나마란의 장벽을 일으켰으니까.

이곳에서도 비슷한 일을 저지를 거니까.

"그래서 하는 말이야. 지하실 아래에 또 다른 지하실이 있다고 했지? 그곳을 조사해봐. 분명 거기에 뭔가가 있어."

"로이드 님. 지금 너무 확신을 하고서 칸나바로 씨를 몰아가려는 건 아니신지."

"그러니까 내 확신이 맞는지 확인을 해봐야 하는 거잖아?"

"...."

"게다가 이 보석이 정말로 칸나바로 씨의 것이라면 내일부턴 그에게서 뭔가 변화가 보일 거야. 보석을 빼앗겼다고 생각할 테니까. 덕분에 행동이 달라지거나 주위의 측근들이 바빠지거나 할 테지. 그 틈을 잘 이용해봐."

"...."

"내 추측이 맞을 거라는 데에 내기라도 걸어주랴?"

"어떤 내기입니까."

"만약 내 추측이 틀려서 칸나바로 씨가 이 일과 관련이 없다면 1년 동안 널 형님이라고 불러주지. 둘만 있을 때라는 조건하에."

"3년. 어떻습니까."

"헐."

"겁나십니까?"

"아니, 전혀. 대신 내 추측이 보기 좋게 들어맞아서 칸나바로 씨가 범인이라면, 넌 프론테라 영지로 돌아가는 날 지금 입고 있는 그 복장을 해야 할 거니까."

"...."

"겁나냐?"

"아닙니다, 전혀."

"좋아. 대신 밝혀지는 진실 앞에 솔직해져야 할 것. 알겠지?"

"물론입니다. 내기는 여흥일 뿐이니까요."

당연한 소리다.

하비엘도 로이드가 발견한 두개골과 보석 이야기를 들으며 이게 보통 일이 아님을 직감하고 있었다.

사악한 마법.

음흉한 계획이 이 도시에서 싹트고 있다.

그 불길함을 피부로 느낀 하비엘도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뭔가를 발견하는 즉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때까지 로이드 님께서도 부디 안전에 유의하시길."

"그래. 너도."

로이드는 그렇게 하비엘을 창밖으로 보냈다.

열린 창문을 통해 밀려드는 한밤의 선선한 공기.

그걸 맡고 있자니 머릿속이 맑아졌다.

앞으로의 계획을 다시금 점검하게 되었다.

'일단은 증거가 필요해. 두개골, 보석, 그걸 묻어둔 이가 칸나바로라는 걸 입증할 명확한 증거가.'

그걸 찾으면?

곧바로 나마란 백작을 찾아갈 것이다.

'그러면 게임 셋이지. 아무리 칸나바로가 흑마법사라 해도 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영지 기사들의 급습을 받으면 꼼짝없이 체포될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러면 굳이 자신이 직접 움직일 필요도 없다.

위험을 짊어지지 않아도 된다.

나마란의 장벽 사태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하비엘, 너만 믿는다.'

녀석이라면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는 테이블 앞에 앉았다.

전날 밤새도록 챙겨온 보석을 알뜰살뜰하게 헤아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나마란 성벽 주위에 묻어둔 저주의 보석, 녹타니움이 모조리 사라진 사실을 깨달은 칸나바로의 눈이 분노로 뒤집혔다.

168화. 자선사업가의 진실 (1)

 

 

"지난 이틀 사이에 대부분의 녹타니움이 사라졌소."

이곳은 칸나바로의 저택 지하.

수많은 마법적 보안 장치로 보호되는, 지하실 아래의 지하실.

그곳에 칸나바로와 30인의 흑마법사들이 모여 있었다.

총 31명이 둘러앉은 크고 기다란 테이블 위로 놓인 조명이라고는 위태로운 촛불 하나.

그 어둑하고 음침한 풍경 속에서 칸나바로가 눈길을 들었다.

테이블 위로 올려둔 자신의 두 손.

그 위쪽을 날아다니는 초파리 한 마리가 보였다.

"...."

이곳은 그 어떤 침입자도 허용하지 않는 공간인데 저 초파리는 대체 어떻게 들어온 걸까.

아니, 어쩌면 초파리라는 것들은 그냥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무작위로 생겨나는 존재들이 아닐까.

자신의 풍부한 마법적 지식으로도 풀 수 없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칸나바로는 금방 그 생각을 접었다.

지금은 초파리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다.

녹타니움이 사라졌다.

그가 흑마법사들을 향해 말을 이어갔다.

"모두가 알고 있겠다시피 모든 요소를 고려한 위치였소. 나마란을 드나드는 이들의 눈길과 발걸음이 가장 닿지 않는 자리. 그러면서도 장벽을 세우기 위한 마나의 공명 현상이 가장 강력하게 일어날 수 있는 자리. 한데 그렇게 묻어둔 녹타니움이 모조리 사라진 것이외다."

"혹여 나마란 백작이 눈치를 챈 것입니까?"

후드를 깊이 눌러쓴 흑마법사들.

그들 중의 하나가 입술을 달싹여 물어왔다.

칸나바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외다. 그는 아직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소."

"한데 땅속에 묻은 두개골과 녹타니움이 불과 하루이틀사이에 모조리 파내어졌다는 겁니까?"

"믿기지 않겠지만, 그렇소."

"...."

모두의 무거운 침묵.

그 사이로 칸나바로의 목소리가 흘렀다.

"누구의 짓인지는 아직 모르오. 다만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능력을 지닌 조직, 혹은 인물이 이 일에 개입한 것만은 분명하오."

"그렇겠지요. 두개골에는 감지를 무효화하는 마법을 포함해서 수많은 도굴 방지 마법이 걸려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사실이었다.

그래서 안심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걸 발견할 일이 없을 거라고.

설령 발견하더라도 두개골에 걸린 마법을 해체할 수는 없으리라고.

확신을 담아서 신뢰하고 있었다.

그런데 현실은 거짓말처럼 달랐다.

'그 두개골의 마법이 해체되다니. 녹타니움이 모조리 사라지다니.'

황당했다.

허망했다.

일 년치 농작물 전체를 하루아침에 강탈당한 농부의 기분이 이런 걸까.

칸나바로와 흑마법사 30인은 그동안 녹타니움을 만들고 묻어두기 위해 쏟아부었던 피, 땀, 눈물을 떠올리며 비분강개의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지금은 화만 내고 있을 때가 아니다.

칸나바로가 감정을 추스르며 모두를 돌아보았다.

"자, 냉정하게 생각합시다. 이미 사라진 건 사라진 것이오. 우리의 손을 떠난 것에 미련을 둘 필요가 없소."

"하면 이제부터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이런 사소한 역경에 발목을 잡혀 대업에 차질을 줄 수는 없소."

"그 말씀은?"

"거사는 예정대로 실행할 것이오."

"하지만 방법이 있습니까?"

흑마법사 한 사람이 물어왔다.

다른 흑마법사들도 그 물음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수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 설치해둔 녹타니움이었다.

그래서 이제 코앞으로 다가온 거사 날짜를 기다리고 있던 참인데.

마지막 준비를 가다듬고 있었는데.

"녹타니움 없이는 거사를 치를 수 없을 겁니다. 그걸 저희보다 더 잘 알고 계실 줄로 믿고 있습니다만...."

"물론 잘 알고 있소."

"하면?"

"두개골을 설치하는 방법 대신 우리가 직접 나서서 장벽을 발동하면 되오. 그러면 거사일을 넘기지 않고 일을 치를 수 있을 것이외다."

"하지만...."

후드 아래로 드러난 흑마법사들의 입매가 곤란함, 난처함으로 뒤틀렸다.

하지만 반론은 펼쳐지지 못했다.

칸나바로가 먼저 입을 열어 선수를 쳤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두개골은 우리가 직접 움직여 장벽을 세울 필요가 없도록 대리인의 역할을 하는 매개체일 뿐이지 않소."

"그렇습니다. 그래야 거사를 거행하더라도 우리의 신분이 노출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하지만 무엇이 중요한지를 생각해보시오."

"...."

"우리의 신분이 노출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오? 아니면, 날짜에 맞추어 거사를 치르고 대업을 이루는 일이 중요하오?"

"...."

"설마 우리 일신의 안전이 더 중요하다고 말할 사람은 이 자리에 없겠지. 그렇지 않소?"

"그건...."

"그렇지 않소?"

"...."

칸나바로의 눈동자에 일순간의 광기가 번득였다.

흑마법사들의 입이 일제히 다물렸다.

"원래라면 선택하지 않았을 방법이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소. 거사는 예정대로 거행되어야 하오. 다들 알고 있잖소. 이게 우리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말이오. 더욱 거대한 계획 속에서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라는 걸 말이오. 즉, 우리가 늑장을 부린다는 것은 곧 대업 전체의 발목을 잡게 된다는 뜻이오. 늑장을 부릴 수 없소. 미룰 수 없소. 우리가 직접 나서야 하오. 대신 무작정 위험을 감수할 필요까진 없겠지."

"따로 염두에 두신 묘안이 있으신 겁니까?"

"가장 안전한 순간을 노려 장벽을 발동시키면 어떨까 하오."

"안전한 순간이라 하심은?"

"나마란의 기사들, 병력이 모두 성내에 머무르는 순간을 노려보자는 말이오."

"...아!"

흑마법사들의 입이 경탄으로 벌어졌다.

그렇다.

자신들이 세울 녹타니움의 장벽.

그것은 장벽 안쪽에 있는 모든 생물의 생명력을 흡수하여 한 곳으로 집중시키는 대규모의 강력한 저주였다.

물론 장벽이 한번 세워지고 나면 어떤 이도 장벽을 넘을 수 없게 된다.

안쪽에서 밖으로도.

바깥에서 안으로도.

소드마스터 이상의 힘을 발휘하지 않는다면 결코 통과할 수 없게 된다.

그러니 나마란의 기사들과 병력들이 모두 도시의 성벽 안에 머무르는 시간을 골라서 장벽을 세운다면?

안쪽의 어떤 기사도.

강력한 군대도.

장벽 밖으로 나올 수 없게 될 것이다.

고스란히 생명력을 흡수당하게 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자신들을 위협할 적이 사라지게 되는 셈이다.

"거기에 강화 좀비를 각각 호위로 대동하면 어떻겠습니까?"

"좋은 의견이오."

"하지만 여전히 걱정입니다. 녹타니움을 해체한 것이 어떤 이들의 소행인지 모르는 판국에, 우리의 모습까지 노출된다면...."

"그 점은 너무 염려하지 마시오."

"대책이 있으신 겁니까?"

"내가 그대들을 지켜주겠소."

"설마 직접 호위를 자처하시겠다는 겁니까?"

"물론이오. 그대들은 그 정도 보호를 받을 자격이 충분한 이들이니까."

"오오...."

비로소 흑마법사들의 입가에 배어나는 안도감.

칸나바로가 자신들을 보호해준다면 믿을 수 있다.

그만큼 그는 강력한 흑마법사니까.

"게다가 장벽을 발동하면 자체적인 방어 마법이 추가로 그대들을 보호할 것이오. 소드마스터가 아니라면 털끝 하나 다치게 할 수 없을 마법이 말이오. 거기에 나의 호위까지 더해진다면 무엇이 두렵겠소."

"옳은 말씀이십니다. 이제는 좀 마음이 놓입니다."

흑마법사들이 빙그레 웃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칸나바로도 흡족하게 웃었다.

'머저리 같은 놈들.'

직접 보호해주겠다는 말.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소모품에 불과한 놈들이다.

능력이 조금 아깝기는 하지만.

어차피 장벽을 발동하기만 하면 죽어도 상관없는 놈들이다.

한번 발동된 장벽의 저주는 장벽 자체가 부서지지 않는 한 절대 중단되지 않으니까.

"자, 그럼 세부적인 계획을 가다듬어 봅시다."

독사 같은 본심을 숨긴 채.

칸나바로가 더욱 흐뭇하게 웃었다.

 

 

며칠이 지났다.

'자, 다시 한 번 계획을 점검해보자.'

하비엘은 가만히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앞치마를 쳐다보았다.

방금 일부러 쏟아 버린 물동이.

덕분에 앞치마가 흠뻑 젖어 있었다.

앞치마뿐만 아니라 속에 받쳐 입은 치마와 신발도 마찬가지였다.

"에그머니, 이를 어쩐담."

발을 동동 구르는 아낙네.

물동이가 쏟아진 것이 자신 때문인 줄로 아는 듯했다.

하긴 그럴 법도 하다.

티가 안 나게 부딪쳤으니까.

그 순간 물동이를 놓치는 척했으니까.

그런 덕분이었다.

"아이고 이런. 앞을 안 보고 다니시면 어떡해요, 아주머니."

"큰일 날 뻔했네. 엘라 양? 어디 다치진 않았어?"

배급소에서 함께 식자재를 나르던 사람들이 아낙네를 타박했다.

아낙네도 자신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줄 알고서 연신 미안해했다.

하비엘은 짐짓 살풋 웃었다.

"전 괜찮아요."

"괜찮기는. 치마며 신발이며 온통 엉망이 됐는데. 어휴. 하마터면 나 때문에 고운 발까지 다칠 뻔했지 뭐야. 그래, 갈아입을 옷이랑 신발은 있고?"

"그건...."

"없나 보네?"

"...."

아낙네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더 많아졌다.

하비엘도 양심이 콕콕 찔리는 미안함을 느꼈다.

하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서.

두 손을 쪼물딱쪼물딱 움직였다.

그것만으로도 효과(?)는 충분했다.

"그럼 내 옷이라도 괜찮으면 좀 갈아입겠어? 식자재 창고 입구 옆에 있는 쪽방 알지? 거기 뒀는데."

"...."

"크기는 안 맞겠지만 젖은 치마 입고 일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어서 갈아입고 와. 응? 내가 미안해서 이러는 거니까."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내가 미안하지."

"...."

정말 죄송합니다, 아주머니.

하비엘은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배급소에서 종종종 빠져나왔다.

하지만 식자재 창고로 향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의 걸음은 칸나바로의 저택을 향했다.

'매일 이 시간이면 그는 지하실 아래로 내려가니까.'

최근 며칠 동안의 관찰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었다.

이렇게 여장까지 감행하면서 배급소에서 일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우연한 심부름을 핑계로 지하실에 내려가 보지 못했더라면 절대로 알아낼 수 없었을 사실이기도 했다.

그래서였다.

오늘, 그는 칸나바로 저택 지하 2층을 캐내 볼 작정이었다.

방금도 그러기 위해 물동이를 쏟아 배급소를 잠시 빠져나올 구실을 만들었던 것이었고.

 

타닷!

 

어느새 그는 바람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젖은 앞치마와 옷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경이로운 악력으로 꽉, 한 번 짜주는 것만으로도 뚝뚝 흐르던 물기 대부분이 사라졌으니까.

그렇게 그는 순식간에 칸나바로 저택에 당도했다.

사람들 시야의 사각과 사각 사이.

그 절묘한 틈을 이용해 정원을 가로질렀다.

정원 뒤쪽 쪽문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저택 1층에서는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림자처럼 스며들어 지하실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실 문이 앞을 가로막았다.

마법의 자물쇠로 잠긴 문이었다.

손을 들었다.

 

키이이잉!

 

마나 써클 하나를 회전시켰다.

며칠 전 보았던 마나의 배열을 떠올렸다.

이 마법의 문을 드나들던 저택의 집사.

그가 사용하던 마법 열쇠에 담긴 마나의 배열이었다.

 

츠즈즈즈...!

 

하비엘의 손끝을 따라 마나의 도형이 그려졌다.

정교하고도 정확한 마나의 배열을 따라.

자물쇠로 스며들었다.

자물쇠를 빛냈다.

 

달칵.

 

자물쇠가 열렸다.

'좋아.'

하비엘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물론 그의 힘이나 능력이라면 이런 마법 자물쇠 따위, 얼마든지 부수거나 해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되었다.

흔적이 남게 되니까.

상대의 경계를 불러일으킬 테니까.

이렇게 흔적을 남기지 않고 지하실로 들어가기 위해 며칠간 들였던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하비엘은 지하실로 진입했다.

"...."

어둡고 인기척 없는 지하실을 가로질렀다.

이윽고 지하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더 나서지 않았다.

구석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호흡도 멈추었다.

두근거리는 심장도, 혈액의 흐름도 안정시켰다.

신체의 모든 리듬과 에너지의 성격을 주위와 동화시켰다.

즉, 모든 종류의 인기척을 지워 버렸다.

그리고 기다렸다.

십 분, 삼십 분.

낯선 인기척이 지하실로 내려온 것은 그가 기다린 지 거의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저벅, 저벅....

 

누군가가 신중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한 발짝을 내디딜 때마다 주위를 살폈다.

행여나 숨어 있는 이는 없는지.

따라붙은 미행은 없는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주위를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칸나바로.'

하비엘의 눈동자가 살짝 수축되었다.

신중한 표정의 칸나바로가 지하실에 내려와 있었다.

그리고 하비엘이 바라보는 가운에 지하 2층 문 앞에 섰다.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마나가 담긴 열쇠였다.

 

우우웅....

 

열쇠 속 마나가 자물쇠로 들어갔다.

자물쇠 속 마법진을 공명시켰다.

마법진이 회전했다.

자물쇠가 열렸다.

 

철걱.

 

칸나바로가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피고는 지하 2층으로 내려갔다.

문이 닫히고, 마법의 자물쇠가 잠겼다.

그때까지 하비엘은 가만히 어두운 구석에 있었다.

그 뒤로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삼십 분 뒤.

칸나바로가 문을 열고 나와서 앞을 지나쳐갈 때도, 지하 1층을 벗어나 위로 올라갈 때까지도 그러했다.

그는 주위와 동화된 채 석상처럼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1층으로 올라간 칸나바로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에야 비로소 움직였다.

"후우."

어느새 하비엘은 지하 2층 문 앞에 서 있었다.

자물쇠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아까의 기억을 떠올렸다.

칸나바로가 꺼내던 마법의 열쇠.

열쇠가 발산하던 마나의 흐름과 패턴.

아스라한 심법을 통해 철저하게 느끼고 기억해두었던 그 마나의 배열을 똑같이 재현했다. 복제했다. 그리고 성공했다.

 

달칵.

 

마법의 자물쇠가 열렸다.

"...."

하비엘은 숨을 골랐다.

지하 2층에는 무엇이 있을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옳은 것일까.

남의 뒤나 캐내는 자신의 이런 떳떳지 못한 행동이 말이다.

"...."

만약 칸나바로 씨의 지하 2층이 별 볼 일 없는 곳이라면.

그저 흔한 부잣집의 비밀 금고 정도가 놓인 곳이라면.

이대로 돌아가서 로이드 님의 멱살을 한 번쯤 잡아보리라. 그리고 내기의 결과에 승복하라고 선언하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하비엘은 문고리를 잡았다. 돌렸다. 열었다.

 

삐이걱.

 

불협화음과 함께 열리는 문 너머.

지하 2층의 광경이 드러났다.

아니, 진실이 드러났다.

"그르륵?"

목 없이 흐느적거리며 배회하던 좀비가 그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169화. 자선사업가의 진실 (2)

 

 

"그르륵?"

이쪽을 돌아보는 몸통.

그런데 그 위로 머리가 없다.

잘려 썩어가는 목덜미를 움찔거리며.

흐느적대는 두 팔을 이쪽을 향해 펼치며.

좀비가 땅을 박찼다.

"그르르륵!"

"...!"

상식을 뛰어넘는 속도였다.

눈을 부릅뜨는 순간.

흐느적거리던 움직임과 달리 좀비는 이미 지척까지 쇄도해 오고 있었다.

시커먼 손톱이 얼굴을 긁기 위해 날아왔다.

그러나 좀비가 덮친 대상은 하비엘이었다.

즉, 상대가 너무 나빴다.

 

뻐걱!

 

좀비의 손톱이 얼굴을 긁기 직전.

하비엘의 다리가 먼저 움직였다.

빛살처럼 쏘아진 앞차기가 좀비의 명치를 찍었다.

"...그륵!"

흔적만 남은 목구멍으로 기괴한 소리를 내며 좀비가 날아갔다.

아니, 일격으로 척추가 박살 나며 5미터쯤 튕겨 나갔다.

반대편 벽에 부딪혔다.

틀어박혔다.

꽈작, 전신의 뼈 부러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동시에 지하 2층의 복도 양쪽을 따라 닫혀 있던 문들이 일제히 열렸다.

"그르르륵!"

"그륵!"

열린 문으로 목 없는 좀비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숫자는 대략 60구.

하비엘의 입가에 짙은 쓴웃음이 피어났다.

"...이거, 영지로 돌아가면 당분간 놀림감이 되는 건 피할 수 없겠군."

불현듯 로이드와 걸었던 내기가 떠올랐다.

칸나바로 씨에게 뭔가 있다고.

그의 뒤가 구린 것 같다고.

계속해서 주장했던 로이드였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은 반대였다.

로이드가 쓸데없는 의심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부당한 명령을 내린 거라고, 칸나바로 씨는 그런 의심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고만 여겼다.

그래서 내기를 걸었다.

'후우. 영지로 귀환할 때 이 복장을 해야 한다니.'

레이디 엘라.

수수한 앞치마 걸친 천사.

혹은 배급소의 샛별 여신.

프론테라 영지로 돌아가는 날 그 복장을 할 것.

그게 자신이 내기에 졌을 때 행해야 할 벌칙이었다.

"...."

그만 생각하자.

소름 돋는다.

하비엘은 어깨를 부르르 털어냈다.

앞으로 프론테라 영지에서 레이디 엘라를 향해 울려 퍼질 수많은 찬사보다 훨씬 덜 소름 끼치는 광경을 향해 눈길을 들었다.

"그르르르륵!"

이쪽을 향해 돌진해 오고 있는 60여 구의 목 없는 좀비들.

가래 끓는 소리가 요란했다.

살기는 더욱 노골적이었다.

'강화 좀비인가.'

좀비치고는 너무 빨랐다.

그 말은 즉, 근력 또한 일반적인 좀비를 초월할 거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소드마스터인 그에겐 좀비건 강화 좀비건 그저 한낱 걸어 다니는 시체일 뿐.

설령 그의 손에 검 대신 나무토막 하나가 들려 있어도 그랬다.

 

와작!

 

손을 뻗었다.

테이블 다리를 꺾었다.

그로써 훌륭한 몽둥이가 마련되었다.

무기가 필요해서?

아니었다.

맨손으로 좀비를 때리려니 찝찝해서였다.

 

꽈지직! 와작! 쿠득!

 

그의 다리가 간단한 기본 스텝을 밟았다.

스텝과 함께 내리치고, 끊어치고, 돌려쳤다.

찌르고, 올려치고, 후려치고, 찍고, 뿌리치고, 털어냈다.

 

콰당탕! 투콰곽!

 

복도를 따라 그가 전진할 때마다 서너 구의 좀비가 무더기로 벽면에 틀어박혔다.

60구의 강화 좀비가 모조리 무력화되었다.

그리고 하비엘이 복도 끝의 문을 박찼다.

 

콰앙!

 

문이 통째로 뜯겨 실내로 날아갔다.

안에서 무기를 뽑아들고 있던 사내를 덮쳤다.

"그와아악!"

20킬로그램은 족히 넘을 묵직한 철문이었다.

거기에 속도가 붙어 날아가니 흉기가 따로 없었다.

졸지에 문에 맞아 깔린 사내가 단박에 혼절했다.

그러나 하비엘에겐 자비가 없었다.

 

콰작!

 

쓰러진 사내의 두 다리를 몽둥이로 내리쳤다. 분질렀다. 동시에 오른발로 뒤를 걷어찼다.

 

쿠적!

 

"꺼헉!"

뒤에서 그를 덮치려던 사내의 아래턱이 덜컥 들렸다. 단숨에 허물어지며 기절했다.

그리고 하비엘이 몽둥이를 뻗었다.

세 번째 사내의 미간을 겨누었다.

서릿발 같은 눈동자를 번득였다.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건지. 무슨 일을 꾸미고 있었는지. 칸나바로와 댁들이 어떤 관계인지 모두 밝히도록."

"...히, 히이익."

세 번째 사내가 온몸을 떨며 어깨를 움츠렸다.

너무나 놀란 나머지 바지가 금방 축축하게 젖었다.

'무, 무슨 이런 괴물이?'

사내는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지하 2층으로 들어온 은발의 침입자.

처음엔 칸나바로 씨가 돌아온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첫 번째 좀비가 벽에 틀어박히는 순간, 그 사실을 깨달았다.

즉시 나머지 좀비를 몽땅 풀었다.

문에 달린 쪽창으로 복도를 살폈다.

이때까지만 해도 기대했었다.

무려 60구의 강화 좀비였다.

침입자의 사지를 잡아 뜯을 거라고.

오랜만에 살아 있는 인간의 비명을 들어보겠다고.

모처럼 두근거리는 기분으로 복도의 싸움을 구경했다.

덕분에 목도하고 말았다.

60구의 강화 좀비가 불과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모조리 벽에 틀어박히는, 믿기지 않는 광경을. 그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른 은발의 침입자가 순식간에 달려오는 모습을.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사내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자신에게 몽둥이를 겨누고 있는 침입자의 이름을 간신히 떠올렸다.

"에, 엘라! 엘라 양?"

"...."

"이거 왜 이래? 나 알지? 나, 배급소에서 오전에 일하는...."

"한 번만 더 그 이름을 입에 담으면 영원히 말을 못하게 될 거야."

 

딸꾹.

 

얼음장보다 스산한 눈동자.

하비엘의 눈빛에 위축된 사내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엘라 양이고 뭐고.

지금은 아무런 잔꾀도 통하지 않으리라는 걸.

눈앞에 있는 은발의 사내에겐 어떤 타협도 먹히지 않으리라는 것 또한.

"워, 원하는 게 뭐요."

"진실."

"...."

"아까도 물었을 텐데. 여기서 뭘 하던 건지. 무슨 일을 꾸미던 중인지. 칸나바로와 댁들이 무슨 관계인지. 모조리 말하라고."

"...."

사내는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렸다.

앞서 쓰러진 두 동료의 가련한 모습을 눈에 담았다.

하지만 그건 실수였다.

 

뻐걱!

 

"...!"

다짜고짜 날아온 몽둥이가 한쪽 무릎을 후려쳤다.

"끄어억!"

다리를 부여잡으며 쓰러졌다.

그러나 그를 내려다보는 하비엘의 눈동자엔 조금의 동정심도 떠오르지 않았다.

"저 머리 없는 좀비. 댁들이 만든 거겠지. 그런데 왜 머리가 없을까. 어디에 쓴 걸까. 왠지 알 것 같은데."

머릿속에 주르륵 떠올랐다.

며칠 전 밤이었던가.

로이드에게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땅속에 묻힌 두개골을 엄청나게 찾았노라고.

그 속에 마나가 응축된 보석이 담겨 있었노라고.

두개골.

마나 담긴 보석.

머리 없는 좀비.

제발 아니길 바라는 퍼즐이 눈앞에서 윤곽을 드러내는 기분이 이러할까.

"말해. 대답을 망설이거나 질문과 관련 없는 허튼소리, 거짓말을 입에 담을 때마다 한 군데씩 부러뜨려주지."

사내를 내려다보는 하비엘의 눈에 희미한 경멸과 분노가 배어들었다.

무릎 꿇은 사내도 그걸 똑똑히 느꼈다.

저 말은 진짜다.

결코 허풍 섞인 위협 따위가 아니다.

"저, 저는...!"

본능적인 공포에 휩싸인 순간.

사내의 입이 다급하게 열렸다.

"장의사입니다. 저도, 이 친구들도 모두, 그, 그렇습니다."

"장의사?"

"예, 예!"

"내 상식이 잘못된 건가. 장의사는 사람을 장사지내주는 사람이지, 좀비를 만드는 사람은 아닐 텐데."

"그, 그게, 칸나바로 씨에게 배웠습니다!"

"칸나바로에게?"

"예!"

"더 자세히."

하비엘의 눈빛이 스산하게 빛났다.

사내의 대답이 더 빨라졌다.

"마, 말씀드렸다시피 저희는 원래 장의사였습니다. 그런데 작년 말이었을 겁니다. 칸나바로 씨가 제게 넌지시 묻더군요. 굉장히 큰돈이 될 일이 있다고. 그걸 도와주면 좋겠다고. 보수는 사,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넉넉하게 챙겨주겠다고...."

"그래서 좀비 만드는 법을 배웠다고?"

"저희가 무슨 재주가 있어서 그런 흑마술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저희, 저희는 그저, 칸나바로 씨가 제공하는 시체를 다듬는 일만 했습니다."

"그럼 좀비를 만드는 주술은?"

"칸나바로 씨와... 다른 사람들이...."

"누구?"

"고르도 씨, 미켈란 씨도 있었고, 그, 저, 대부분 교역소에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칸나바로 씨와 함께 교역소를 관리하고 장부를 쓰는...."

"교역소 직원들이 흑마법사라고?"

"예, 예예! 저도 믿기진 않았지만...."

"그런데 왜 좀비의 머리가 없는 거지?"

하비엘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사내, 장의사의 목울대가 크게 요동쳤다.

"그건...."

"대답."

 

꽈드득.

 

몽둥이를 꽉 쥐는 소리.

장의사의 망설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머리는 따로 처리했습니다."

"자세히 말하도록."

"그, 그게, 그... 저, 시체가 오면 머리부터 제거하고 손질을 했습니다. 두개골은 따로 귀하게 쓸 일이 있다고 그래서. 그, 두개골 속 내용물은 모두 제거하고, 뼈만 남겨서...."

"남겨서?"

"갖가지 용액에 담갔습니다. 예, 칸나바로 씨가 제공한 용액입니다.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그냥 귀한 마법 시약이라고...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게 대략 열다섯 가지 종류쯤 됐습니다."

"열다섯 가지나?"

"예. 한 가지 용액에 약 이틀 정도. 그러니까 두개골 하나를 약품으로 처리하는 데에만 거의 한 달이 걸렸습니다. 물론 용액이 많고 이틀 단위로 새 두개골을 계속 이어가며 담갔으니까...."

"그 후에는?"

"칸나바로 씨와 교역소 분들이 두개골에 갖가지 마법을 걸었습니다. 그래도 딱히 큰 변화는 느껴지는 게 없었지요. 그런데도 다들 매우 만족한 얼굴로 두개골을 챙겨갔습니다. 제가 두개골에 대해 아는 건, 이, 이게 답니다. 정말입니다."

"아니, 더 있을 텐데."

하비엘의 표정이 단호해졌다.

"그 두개골,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알겠어. 머리 없는 좀비가 어떻게 생긴 건지도. 그런데 아직 제대로 밝히지 않은 게 하나 있는 것 같군. 두개골, 좀비, 그걸 만든 시체는 어디서 구했지?"

"그...."

"말해."

"죄, 죄송합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장의사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하비엘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여전히 차가운 눈길로 장의사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길에 흠칫.

장의사가 어깨를 떨며 황급히 눈물을 훔쳐냈다.

그리고 자백했다.

"...피난민들입니다."

"뭐?"

"칸나바로 씨가 보살피던 피난민들입니다. 원래 아프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병에 걸렸거나, 크게 다쳤거나...."

"그래서 죽인 건가."

"...예."

"원래 아프던 이들이었다는 말이 변명이 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겠지."

"그, 그건...."

"그래서 남아 있는 피난민들에겐 거짓말을 했고?"

싸늘하게 식어가는 기분.

그 기분 속에서 하비엘은 지난 며칠 동안의 기억을 되새겼다.

배급소에서 피난민들이 종종 나누던 얘기가 있었다.

이번에 누구누구 씨가 어디어디 보호시설로 옮겨졌다더라. 그 보호시설, 여기보다 훨씬 따뜻하고 안락해서 병세 회복에 많은 도움이 될 거라더라. 다만 수용 인원에 한계가 있어서 우릴 한꺼번에 다 데려가진 못한다더라... 는 식의 이야기였다.

'피난민들 대부분이 그곳에 가길 바라고 있었지. 그곳에 먼저 간 사람들이 완쾌되어서 자리가 나면 좋겠다고. 다들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게 바로 여기였다.

이 죽음의 공간이었다.

안락한 보호 시설 따윈 애초부터 없었다.

하비엘은 저도 모르게 일그러지는 콧등을 느끼며 물었다.

"거의 200개에 달했다고 들었다."

"예?"

"보석. 그걸 담고 있던 두개골의 숫자."

"...."

"피난민 중에 목숨이 오락가락할 정도로 병세가 위중했던 사람이 200명이나 됐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그, 그건...."

"설마, 심하게 아프지 않았던 이들까지 죽인 건 아니겠지."

"...."

"맞군."

"그, 그게!"

장의사가 다급히 외쳤다.

"그! 편해지는 약이라고 했습니다! 정말로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먹였군. 피난민들에게. 그렇게 죽인 것이로군."

"정말로 몰랐습니다!"

"정말로?"

"예, 예!"

"진심으로?"

"...예?"

"장의사에게 환자를 맡기는 사람이 있나? 편해지는 약? 그걸 먹어서 편해지면, 장의사가 간호를 해주는 건가? 본인이 생각해도 우습지 않나?"

"그...."

"거짓 섞인 변명은 그만."

"...살려... 살려주십시오!"

장의사가 넙죽 엎드렸다.

등을 움찔대며 꺽꺽 울음을 터뜨렸다.

"정말로 이런 일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저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입니다. 그, 그러니까 한 번만 자비를...!"

"죽이지 않아."

"예?"

"죽이지 않을 거라고."

"그 말씀은... 가...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장의사가 머리를 쿵쿵, 바닥에 찧으며 외쳤다.

그러나 하비엘의 표정은 더욱 싸늘해져 있었다.

"죽이지는 않아. 단, 아까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을 텐데."

"예? 무슨...."

"거짓말을 할 때마다 한 군데씩 부러뜨려주겠다고."

"저기, 저, 저는...!"

 

뻑!

 

몽둥이가 공기를 갈랐다.

장의사의 어깨를 내리쳤다.

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장의사의 표정이 무너졌다.

"흐, 으으아악!"

어깨를 부여잡고 쓰러지는 장의사.

그를 내려다보는 하비엘의 눈동자엔 자비가 없었다.

"편해지는 약. 이럴 줄은 몰랐다. 그저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이다.... 변명치고는 너무 조잡하고 저열해. 자신만은 끝까지 착한 사람이고 싶었던 건가? 그런 마음씨치고는 칸나바로에게 받아서 챙겼을 두둑한 돈이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된다만."

"그, 그흐으읍! 사, 살려...."

"말했다. 죽이진 않을 거라고."

"...!"

하비엘이 몽둥이를 치켜들었다.

곧이어 서너 번의 둔탁한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잠시 후.

하비엘이 지하실에서 빠져나왔다.

그 사이 그의 복장은 바뀌어 있었다.

찰랑이는 생머리 가발도, 수수한 앞치마도 사라졌다.

대신 흑마법사들이 벽에 걸어두었던 검은 후드를 덮어썼다.

후드 아래 드러난 그의 표정은 더없이 굳은 채였다.

'지금은 꾸물거릴 때가 아니야.'

지하실에서 얻어낸 진실.

장의사들을 단죄하며 깨달은 상황.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다. 칸나바로와 교역소의 흑마법사들. 그들이 뭔가를 꾸미고 있어. 그냥 둘 수는 없다.'

로이드와 나마란 백작에게 알릴까도 생각해보았다.

원칙대로 하면 그게 올바른 대응일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하비엘은 판단했다.

'자칫 칸나바로와 흑마법사들이 이쪽의 대응을 눈치챌 수도 있으니까.'

아마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체포를 위해 기사단과 병력들이 움직이면.

칸나바로의 저택을 수색하기 위해 소란을 피우면.

저 흑마법사들을 잡아들일 기회를 놓치게 될 것이다.

그 전에 숨고 도망칠 테니까.

그러니까....

'로이드 님, 죄송합니다. 그 전에 제가 먼저 저들을 처리해야겠습니다.'

선 제압 후 보고.

그 방침을 결정한 소드마스터의 발길이 교역소를 향했다.

후드와 망토로 가린 가슴팍에 서늘한 검 한 자루를 품은 채였다.

170화. 나마란의 장벽 앞에서 (1)

 

 

교역소.

수많은 상인이 드나드는 곳.

도시와 도시 사이의 교역품과 화폐 또한 드나드는 곳.

나마란 시의 교역소 또한 마찬가지였다.

왕국의 남부와 동부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상인이 가장 많이 들르는 장소였다.

그나마 동부가 초토화된 요즘이야 전보다 덜해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이곳은 언제나 활기가 넘쳤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

적막하다.

교역소에 도착한 하비엘이 처음 받은 느낌이었다.

평소라면 떠들썩했을 이곳이 너무나 조용했다.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이 시간이면 한창 바삐 교역소를 드나들어야 할 마차와 짐수레도.

분주하게 땀 흘리며 교역품을 싣고 내릴 하역꾼도.

그 옆에서 흥정을 하며 목청을 높일 상인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교역소의 앞마당에도.

그 건너편의 하역장에도.

어쩐 일인지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설마.'

후드 아래 하비엘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뭔가 있다.

오늘 자신이 칸나바로의 지하실에서 밝혀낸 진실.

그 참혹한 진실과 오늘 적막에 감싸인 교역소의 모습을 보자니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콰앙!

 

교역소 문을 박차고 진입했다.

그러나 안쪽 또한 텅텅 비어 있었다.

평소였다면 드나들 상인을 가장 먼저 반길 안내인도 보이지 않았다.

"...."

눈치챈 건가.

하비엘은 굳은 눈길로 교역소의 지하부터 3층까지 모든 곳을 뒤졌다.

그러나 한 사람도 발견할 수 없었다.

마치 멀쩡한 채로 버려진 난파선 같았다.

'어째서지. 저택 지하 2층의 시설이 탄로 난 걸 눈치챈 건가.'

아니, 그럴 시간적 여유는 없었을 터다.

거기서 진실을 알아내자마자 곧바로 여기에 왔으니까.

그걸 위해 로이드와 나마란 백작에게 진실을 알리는 것마저 미루었을 정도니까.

'불과 5분.'

칸나바로의 저택에서 이곳 교역소까지 자신이 오는 데에 걸린 시간.

그 사이에 칸나바로와 흑마법사들이 상황을 감지했다고?

이곳을 말끔히 비우고 완벽하게 도주했다고?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됐다.

'그럴 시간이 없었을 테니까. 그럼 왜지. 어째서지?'

이대로 로이드에게 달려가야 할까.

혹은 이곳에서 수색을 더 진행해야 할까.

그는 초조한 고민에 휩싸인 채 걸음을 옮겼다.

한데 그가 교역소를 나서기 위해 문고리를 잡는 순간이었다.

 

쿠우우우웅!

 

너무나 별안간, 천둥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늘에서?

아니었다.

사방에서였다.

교역소 바깥.

동서남북 모든 방위에서.

무언가가 폭발하는 듯한 거대한 굉음이 달려왔다.

그와 함께 속이 뒤집혔다.

"...!"

위장이 순식간에 경련했다.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시야가 순식간에 흔들렸다.

정신이 급격하게 흐려졌다.

동시에 온몸에서 마나가 썰물처럼 공기 중으로 빠져나갔다!

'무슨.'

만약, 그가 소드마스터가 아니었더라면.

끝없는 마나의 순환을 이룬 자가 아니었더라면.

그토록 풍부한 마나의 힘을 끌어내어 본능적으로 아스라한 심법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순식간에 의식을 잃었을 것이었다.

"...큽!"

다급히 마나하트를 움직였다.

아스라한 심법을 발동했다.

세 갈래 써클을 전력으로 회전시켰다.

 

키이이이잉!

 

써클이 울부짖으며 마나의 급격한 유출을 가로막았다.

그제야 경련하던 위장과 심장이 진정되었다.

시야가 돌아오고 정신이 수습되었다.

'대체.'

무슨 일일까.

하비엘은 기겁했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공기가 확 바뀐 느낌이 이러할까.

아니, 주위의 공기가 몸속의 모든 생명력을 빨아먹기 시작하면 방금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 걸까.

비로소 그는 깨달았다.

'공기 중으로 마나가 빠져나가려 하고 있어. 엄청난 기세로.'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러했다.

아스라한 심법을 계속 발동해야 했다.

만약 마나 써클의 회전을 중단한다면?

방금과 같은 일을 또 겪을 듯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방금 울렸던 엄청난 굉음.

그와 동시에 시작된 기현상.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

불길한 느낌을 받은 그는 교역소 문을 열었다.

그리고 목격하게 되었다.

"무슨...."

거대한 장벽이 도시를 둘러싸고 있었다.

물질로 된 장벽이 아니었다.

검은빛에 가까운 보라색 마나.

일렁이는 아지랑이처럼 불길한 기세로 도시를 감싸고 있었다.

성벽보다 훨씬 높았다.

하늘을 찌를 것처럼, 어림잡아 수백 미터 이상 치솟아 있었다. 아니, 도시 위쪽의 하늘까지 모조리 뒤덮고 있었다.

덕분에 태양마저 가려졌다.

시커먼 보랏빛으로 변질된 햇볕이 사방에 쏟아졌다.

그리고 대로변에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다.

시야에 보이는 모든 사람들이.

"이보세요."

달려갔다. 쓰러진 사람을 살폈다.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였다.

"끄흐... 으으...."

이미 의식이 없었다.

전신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눈은 뒤집혔고, 입에는 거품이 가득했다.

"...이런."

마나를 빼앗기고 있는 거다.

조금 전, 아스라한 심법을 반사적으로 발동하기 직전에 자신이 겪었던 것처럼. 그런데 자신과 달리 마나를 빼앗기는 상황에 대처할 방법이 없는 거다.

눈앞의 할머니뿐만이 아니었다.

대로에 쓰러져 있는 모든 사람이 그랬다.

모두가 똑같은 현상을 겪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짐작할 수는 있었다.

저 장벽.

도시를 둘러싼 불길한 마나의 장벽.

분명 저것과 깊은 연관이 있으리라.

어쩌면 저 장벽이 사람들의 마나를 무자비하게 흡수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기본적인 생명을 유지할 마나까지 말이다.

그렇다면 로이드는 어떨까.

"로이드 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버틸 수 없을 거다.

아스라한 심법이 있어도 그렇다.

소드 익스퍼트 중급에 올랐더라도 그렇다.

못 버틴다.

소드마스터가 아니니까.

끝없는 마나의 순환을 이루어내지 못했으니까.

다른 이들보다는 몇 분쯤 더 버티겠지만, 그 이상은 무리일 것이다.

결국엔 의식을 잃고, 아스라한 심법을 쓰지 못하게 되고, 무자비하게 마나를 빼앗길 것이다.

그렇게 죽어갈 것이다.

"...보살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대신 이 현상, 꼭 해결하겠습니다. 제발 그때까지 버티세요, 꼭."

할머니를 그늘에 눕혀드렸다.

죄송한 마음을 담아 말했다.

그 이상은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최대한 서둘러 이 사태를 해결하는 것.

오직 그것만이 할머니와 쓰러진 사람들을 구하는 길이 되리라.

그걸 가슴에 새기며 하비엘은 달렸다.

교역소 앞 대로를 지나쳐, 광장을 가로질러, 나마란 백작 저택을 향해 뛰었다.

대로에 쓰러진 사람들.

광장에서 경련하는 이들.

배급소의 아주머니도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그럴 때마다 하비엘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서 더욱 달음박질에 박차를 가했다. 마나 강탈을 막아내느라 마나하트와 써클을 모조리 동원하면서도, 남은 약간의 마나를 모조리 쏟아부어 달리고 또 달렸다.

그리고 백작 저택 귀빈용 숙소에 도착했다.

"로이드 님!"

 

콰앙!

 

숙소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서둘러 로이드부터 찾았다.

그러나 보이지 않았다.

로이드가 없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디에?'

로이드 님.

어서 찾아야 한다.

그래야 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해야 이 도시의 모두를 살릴 수 있을 터다.

'로이드 님, 분명 뭔가를 알고 있는 듯했으니까.'

생각해보면 전부터 그랬다.

처음부터 칸나바로를 의심했었다.

나마란 영애가 프론테라 영지에 도착한 날도 그랬다.

영애와 마주한 로이드는 대뜸 칸나바로에 대한 질문부터 던졌더랬다.

그러니까 로이드는 뭔가를 알고 있다.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도 알고 있을 것이다.

로이드의 지혜.

거기에 자신의 힘.

두 가지를 합쳐야 한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서 서로를 도와야 한다.

그래야만 이 도시의 모두를 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숙소 어디에도 로이드가 없다.

"로이드 님!"

더욱 다급해진 하비엘의 외침이 백작가 저택 곳곳을 들쑤셨다.

 

 

"아, 여기도 없나."

 

푸욱!

 

강철삽이 땅을 푹 들쑤셨다.

땅속으로 파고든 삽머리 주위로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걸 보며 로이드가 입술을 비죽거렸다.

"괜히 여기까지 내려왔나 본데."

그는 투덜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딛고 있는 절벽 사면 위쪽을 쳐다보았다.

거의 백 미터 이상 위쪽.

그곳에 우뚝 선 도시 나마란이 보였다.

즉, 그는 나마란 시의 절벽 꼭대기에서 한참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보석을 더 챙겨보기 위함이었다.

'전엔 나마란 성벽 주위만 탐색했으니까.'

그렇게 얻어낸 보석이 200개에 달했다.

흡족했고, 동시에 아쉬웠다.

기왕이면 보석을 좀 더 챙겨보고 싶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절벽 사면 아래쪽까지는 탐색해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망설일 것도 없었지.'

딱히 손해 볼 일도 아니었다.

발품만 약간 팔면 된다.

땀 좀 빼주면 된다.

그러면 값비싼 보석을 추가로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즉시 삽과 보따리를 챙겨 나왔다.

열심히 절벽 사면 아래쪽을 탐색했다.

한데 허탕이었다.

"쯧. 두개골이 보인다 싶었는데."

두어 번인가.

땅속에 묻힌 두개골을 지하 스캐닝 옵션으로 찾기는 했다.

한데 신이 나서 파냈더니 그냥 평범한 두개골이었다.

응축된 마나도, 보석도 없었다.

'이번엔 진짜로 옛날에 처형당한 유골인 거 같네.'

 

쯧.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내가 욕심이 너무 과했나.'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와본 거였는데.

그렇게 일확천금의 찬스를 살려보려던 거였는데.

아무래도 이번만큼은 허탕을 친 듯했다.

'에휴. 접자. 접어. 오늘은 좀 쉬자.'

땀도 이만큼이면 충분히 흘릴 만큼 흘렸다.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는 강철삽과 빈 보따리를 챙겼다.

조끼 안주머니를 향해 물었다.

"꼬밍아? 자?"

"...꼬밍?"

"쯧. 아니다. 자라."

꾸벅꾸벅 졸다가 반쯤 감긴 눈으로 고개를 드는 안주머니 속 꼬밍이.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잠깐이었지만 녀석을 타고 도시로 돌아갈까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러기엔 사용해야 할 빨간 해바라기씨가 너무 아까웠다.

'그냥 운동 삼아 걷는 거지, 뭐.'

짐을 챙긴 그는 절벽 사면을 뱅글뱅글 둘러싼 진입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늦여름의 바람이 모처럼 선선하게 느껴졌다.

"날씨 좋고."

마침 구름 한 덩이가 태양을 가린 덕분에 땡볕도 줄어들어 있었다.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한데 그때였다.

별안간, 구름이 어둡게 변했다.

하얀 뭉게구름에서 시커먼 먹구름으로.

동시에 절벽 사면 위쪽, 도시에서 기이한 마나의 요동이 느껴졌다.

"어?"

뭘까.

무슨 일일까.

어리둥절해졌다.

고개를 들어 하늘과 도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때였다.

검은색에 가까운 보랏빛 마나의 장벽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은.

 

츠츠츠츠츠!

 

"...!"

일렁이며 안개처럼 일어났다.

일어나는가 싶더니 솟구쳤다.

태양을 가리고, 구름을 찢어발기며, 도시를 에워쌌다. 아니, 집어삼켰다.

로이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저거.'

설마.

나마란의 장벽?

눈이라도 한바탕 거칠게 부비고 싶었다.

자신이 보고 있는 광경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거 나마란의 장벽 맞는 거 같은데. 그러니까, 소설 철혈의 기사 일러스트에서 본 거랑 똑같은데. 근데 이게 가능해? 어떻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 땅속의 두개골과 보석을 제거했으니까.

나마란의 장벽을 이룰 마법진 자체를 망가뜨려 버렸으니까.

그런데 자신의 그러한 활약이 무색하게도, 눈앞에서 나마란의 장벽이 치솟고 있었다. 도시를 에워싸고 있었다. 음울하고 사악한 기운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장벽 안쪽 도시의 모든 마나와 생명력을 게걸스럽게 빨아먹기 시작했다.

그걸 깨달은 순간부터였다.

"젠장. 꼬밍아!"

로이드는 서둘러 꼬밍이를 깨웠다.

"미안. 설명은 나중에. 일단 이것부터 좀 먹자."

"꼬, 꼬밍!"

안주머니 속에서 졸다가 불길한 기운을 느낀 걸까.

꼬밍이도 이미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었다.

이쪽이 내미는 빨간 해바라기씨를 냉큼 받아먹었다.

그리고 거대해졌다.

 

퍼엉!

 

"가자! 위쪽으로!"

"꼬밍!"

녀석의 등에 몸을 실었다.

거친 날갯짓 독려하며 날아올랐다.

절벽 사면을 순식간에 지나쳐 도시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도시 안쪽으로 진입할 수는 없었다.

'진짜로 나마란의 장벽이 맞구나.'

로이드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도시보다 높은 상공에서 관찰하니 장벽의 전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검은색에 가까운 보랏빛 마나의 장벽.

그 반투명한 막이 도시를 완전히 감싸고 있었다.

새는 물론이고 파리 한 마리도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이걸 깨부술 수도 없고.'

자신의 힘으로는 절대로 무리다.

설령 삼중발파를 동원한다 해도 그럴 것이다.

소드마스터의 오러를 써도 부술 수 없던 저주의 장벽.

그걸 앞에 둔 소설 속 하비엘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거.'

이 사태를 막으려 그렇게 애를 썼는데.

결국엔 세워지고 만 장벽 앞에서 로이드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뭐라도 해야 한다.

그런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렇게 두서없이 시선만 사방팔방 던져대지 말고.

저 장벽을 깨부술 방법을 찾아내어야 한다.

'RP를 투자할까. 마나하트 스킬을 올려서 소드마스터가 돼야 하나. 아니, 그러기엔 RP가 모자랄 거야. 어설프게 소드 익스퍼트 상급까지만 오르고 멈출 가능성이 훨씬 커. 그럼 아스라한 심법을 올릴까. 써클 숫자를 늘려서 삼중이 아닌 사중 발파를 쓰면? 그러면 가능하지 않을까.'

하지만 로이드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무리 사중 발파라 해도 안 될 거야. 발파가 몇 중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발파에 오러를 결합해야 돼.'

어떤 물질이건 대부분 절삭하는 가공할 위력의 오러.

그걸 발파에 섞어야 한다.

한데 자신은 그럴 수가 없다.

소드마스터가 아니니까.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막막해졌다.

한데 그때였다.

문득, 지상에 있는 뭔가가 보였다.

"사람?"

도시를 둘러싼 장벽 주위로 드문드문 흩어진 사람들이 보였다

그 숫자는 약 90명 정도.

3인 1조로 장벽 주위 곳곳에 규칙적으로 흩어져 있었다.

한데 그들의 복장이 어쩐지 익숙했다.

시커먼 로브.

시커먼 후드.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 일러스트로 봤던 모습.

"흑마법사네?"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방긋 웃었다.

반가웠다.

마침 잘 만났다.

어떻게 해야 장벽을 깰 수 있을지 고민이었는데.

때마침 장벽을 만든 생산자(?)가 눈에 딱 들어오다니.

일단 저놈들을 족치면 되리라.

그러면 장벽을 없앨 방법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여간 저렇게 민폐만 끼치는 장벽은 반품이야!'

 

쐐애액!

 

강철삽 굳게 움켜쥐고서.

로이드가 저돌적인 급강하를 개시했다.

가장 가까운 지점의 흑마법사를 향해서였다.

171화. 나마란의 장벽 앞에서 (2)

 

 

쐐애애애액!

 

귓가를 스쳐 가는 바람 소리.

시야가 극도로 수축되는 감각.

온몸으로 느껴지는 극한의 속도감.

어릴 적 타봤던 롤러코스터와는 비교도 안 되는데.

그런데 어째서 난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 걸까.

'이판사판이니까!'

로이드는 속으로 외쳤다.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다.

나마란의 장벽이 세워지고 말았다.

장벽 안쪽에 갇힌 도시의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쓰러지고 있을 것이다.

그걸 생각하니 더는 망설일 것이 없었다.

자신이 정의의 사도라서?

'솔직히 그건 아니고... 나한테 돈 줄 사람이 저기 있거든!'

나마란 시가 망하면 안 된다.

나마란 백작이 죽으면 더 안 된다.

도시와 백작을 살리고 공사를 마무리 지어서 공사 대금을 받아내야 한다.

그 불타는 일념으로 로이드는 한 손의 강철삽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급강하하는 꼬밍이의 등 위로 몸을 바싹 낮추었다.

'가즈아아!'

지면이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그곳에 서 있는 검은 옷의 사내가 보였다.

장벽을 바라보며 두 팔을 활짝 펼치고 있었다.

그런 사내에게서 기묘하고도 음울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확실하다.

흑마법사다.

로이드의 눈이 번득였다.

"꼬밍아, 지금!"

"꼬밍!"

안장 손잡이를 확 잡아당겼다.

꼬밍이가 접고 있던 날개를 활짝 펼쳤다.

급격한 방향 이동.

수직 강하에서 수평 비행으로.

급강하의 속도를 그대로 살려 지면을 스치듯 활강했다.

그대로 흑마법사를 향해 돌진했다.

로이드의 삽도 번득였다.

꼬밍이가 흑마법사의 옆을 스치듯 지나가는 순간.

그의 강철삽 평평한 면이 흑마법사의 허벅다리를 향해 휘둘러졌다.

'잡았다!'

이 타격에 맞고 버틸 리가 없다.

아마도 다리를 부여잡고 쓰러질 것이다.

그러면 사내를 제압하여 장벽을 무효화 할 방법을 알아내리라.

그렇게 로이드가 장밋빛 청사진을 그리는 순간이었다.

흑마법사의 허벅다리를 두드린 강철삽에서 엄청난 반발력이 느껴졌다.

 

터어엉-!

 

"...!"

오른 손아귀에 감각이 없어졌다.

하마터면 삽을 놓칠 뻔했다.

만약 '연장 숙련 스킬 : (삽)'이 없었다면, 자신이 소드 익스퍼트 중급이 아니었다면, 정말로 놓쳤을지도 모른다.

"그으읍!"

아니, 삽을 놓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불운이 되었다.

반동을 받으며 허리가 확 꺾였다.

그 힘이 꼬밍이에게도 전달되었다.

"꼬, 꼬미잉!"

꼬밍이의 비행 균형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이쪽의 상체가 오른쪽으로 거칠게 돌아가며 꼬밍이의 오른쪽 날개가 확 들렸다. 의도치 않은 좌측으로의 급격한 방향 전환. 고도와 균형을 모두 잃었다. 꼬밍이가 다급히 날개를 파닥였다.

하지만 늦었다.

균형을 되찾기에도.

고도를 올리기에도.

"꼬미, 밍!"

"...읏!"

지면이 이쪽을 반겼다.

너무나 거칠게.

 

콰드드드득!

 

"...!"

추락. 충돌. 회전.

땅과 하늘이 수십 번 돌았다.

아니, 지면을 수십 바퀴는 구르는 듯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마침내 지상의 거친 환영 인사가 끝났을 때, 로이드는 간신히 눈을 뜰 수 있었다.

"그... 으으읏."

온몸이 욱신거렸다.

동시에 온몸이 포근했다.

말캉말캉 따뜻하고 포근한 것이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한 쌍의 날개였다.

"꼬밍아?"

로이드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꼬밍이가 날개로 자신을 감싼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설마 추락하는 그 순간에 자신을 감싸준 걸까.

그래서 추락의 충격을 대신 받아낸 걸까.

"어이? 꼬밍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급히 꼬밍이를 흔들었다.

꼬밍이가 눈을 살포시 떴다.

"꼬, 꼬밍?"

"후아. 괜찮아?"

"꼬밍!"

"다친 데는 없고?"

"꼬미밍! 꼬밍!"

아프지 않단다. 말짱하단다.

하지만 씩씩한 그 말과는 다르게 꼬밍이는 금방 일어나진 못했다.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다만 추락의 충격에서 회복되려면 시간이 조금 필요할 듯했다.

'후아. 이거 무슨 일이냐, 진짜.'

그제야 조금 안심한 로이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몸을 일으키는 동안에도 전신의 근육이 뻐근하다며 비명을 질러댔다.

근처에 떨어뜨린 삽을 주웠다.

흑마법사가 있는 쪽을 보았다.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허허허."

아까 분명 삽으로 제대로 후려쳤는데.

여전히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는 흑마법사가 보였다.

하늘을 향해 두 팔을 활짝 펼친 모습마저 그대로였다.

즉, 전혀 타격을 받지 않은 것이었다.

'설마 보호 마법이라도 걸린 건가?'

로이드의 콧등이 찡그려졌다.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방금 자신이 날린 일격은 그냥 삽으로 후려친 정도가 아니었다.

급강하를 통해 꼬밍이의 비행 속도를 한계까지 올렸다.

거기에 자신과 꼬밍이의 체중을 알차게 실었다.

마나하트에서 뿜어내는 마나까지 담았다.

어지간한 중기병의 랜스차지마저 압도하는 위력이 실려 있었다. 거의 봉고차에 치이는 것과 비견될 만한 충격이었다.

'그런데 그 힘이 모조리 튕겨 나왔어. 덕분에 이쪽이 추락하고 말았고.'

만약 추락의 순간에 꼬밍이가 이쪽을 감싸주지 않았다면 자신은 어떻게 됐을까.

어쩌면 최소 전신 골절 당첨이었을지도.

로이드는 무의식중에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충격을 추스르고 있는 꼬밍이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고마워. 잠시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꼬, 꼬밍!"

꼬밍이를 뒤로 남겨두었다.

흑마법사에게 다가갔다.

후려쳐서 안 된다면 발파로라도 쓰러뜨리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강철삽을 움켜쥐는 순간이었다.

"그르륵!"

"그륵!"

두 인영이 불쑥 앞을 가로막았다.

한데 둘 다 머리가 없었다.

생선 썩는 듯한 냄새가 확 몰려왔다.

좀비.

그것도 머리가 없는 좀비였다.

"아까 하늘에서 보니까 3인 1조로 옹기종기 흩어져 있더니. 설마 흑마법사 하나에 호위 좀비 둘의 조합이었던 거냐."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좀 부담스럽네.'

로이드는 어깨를 움츠렸다.

아닌 게 아니라 솔직히 좀비 같은 언데드와 맞닥뜨리는 건 정말 부담스러웠다. 일단 비주얼부터가 고어물을 현실로 보는 셈이라서 안구와 정신 건강에 심히 좋지 않았다.

게다가 냄새는 또 어떠한가.

'진짜 코를 없앨 수도 없고.'

소드 익스퍼트 중급에 오른 게 죄라면 죄이리라.

예전보다 몇 배나 예민해진 감각 때문에 후각 세포가 멸망의 떼창을 관광버스표 무한 메들리로 부를 판국이었다.

하지만 물러설 수는 없다.

물러설 이유도 없다.

자신에겐 저런 좀비를 제압할 훌륭한 스킬 옵션이 있으니까.

로이드는 두 좀비가 자신을 향해 달려들기 전에 재빨리 스킬창을 열었다.

그리고 마나하트 스킬의 옵션을 발동했다.

 

딩동.

 

[마나하트 스킬 옵션 ④ : 언데드 지배가 활성화됩니다.]

 

"그르륵?"

이쪽을 덮치려던 두 좀비였다.

순식간에 놈들의 전신이 덜컥, 크게 떨렸다.

하지만 그뿐.

놈들이 다시금 흉성을 드러냈다.

동시에 실망스러운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언데드 지배의 대상으로 지정된 두 좀비에게 머리가 없습니다. 두 좀비는 당신을 '마주 보지' 못합니다. 따라서 언데드 지배의 중요 조건인 '마주 보는 언데드를 지배할 수 있음'이 성립하지 않는 상황입니다.]

[언데드 지배에 실패하였습니다.]

 

"그르르륵!"

 

콰앙!

 

빼곡한 메시지를 배경으로 달려들어 오는 머리 없는 좀비.

로이드의 콧등이 일그러졌다.

"아, 진짜!"

싸우기 싫은데.

하지만 싸워야 하는 거라면 질질 끌지 말자.

독한 마음을 먹었다.

황소처럼 달려드는 두 좀비의 공격을 옆으로 흘려냈다.

삽으로 걷어내고, 옆으로 밀어 찼다.

그 서슬에 두 놈이 서로 얽혔다.

다리가 꼬이며 두 좀비가 한 덩이가 되어 넘어졌다.

"그르륵!"

놈들이 다시금 흉성을 터뜨렸다.

즉시 일어나려 버둥거렸다.

하지만 그게 놈들의 마지막 몸짓이었다.

미처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날아온 발파가 몸통을 꿰뚫었기 때문이었다.

 

투확!

 

"...긁!"

강철삽으로 내뿜은 발파가 두 좀비의 몸통을 꿰뚫었다. 확장되었다. 50센티 지름으로 순식간에. 그 범위의 모든 것을 해체했다.

 

퍼어엉-!

 

두 좀비의 몸통이 아예 사라졌다.

그걸로 끝이었다.

"쯧."

로이드는 혀를 찼다.

다행히 좀비를 제압했지만 기분이 더 찝찝해졌다.

사실 저 좀비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아니, 오히려 좀비들에게 미안했다.

'따지자면 저놈이 진짜 나쁜 놈이지.'

그의 시선이 저만치 떨어진 곳의 흑마법사를 향했다.

저 흑마법사가 정말로 때려죽일 놈들이다.

죄 없는 사람을 죽여서 좀비로 부려 먹고.

이상한 장벽이나 세워서 생명을 빨아먹고.

이렇게 민폐나 끼치는 사회의 암 덩어리 같은 놈들이 나쁜 놈들이 아니면 뭐겠는가.

'그러니까 너도 한 방에.'

제압하리라.

다만 죽이진 않으리라.

대신 장벽을 무력화할 방법을 실토할 때까지 두들겨주리라.

로이드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다시금 발파를 준비했다.

발사했다.

 

투확!

 

내뻗은 삽에서 쏟아져 나간 거친 마나의 격류.

쏘아졌다. 돌진했다. 공간을 꿰뚫었다. 흑마법사의 다리를 때렸다.

그리고 튕겨 나갔다.

 

투컹!

 

"...어?"

로이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무리 그래도 발파인데.

'그게 튕겨져나갔다고?'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한데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거 실화냐.'

설마 삼중발파라도 쏴야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걸까.

아니, 그게 된다는 보장도 없다.

그럼 어떡해야 하는 걸까.

로이드는 고민에 잠겼다.

그러다가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잠깐. 그러고 보니 저 흑마법사. 아까부터 계속 움직이지도 않고 있네.'

생각해보니 정말로 그랬다.

처음 꼬밍이를 타고서 기습하며 삽으로 후려쳤던 때도.

추락한 이쪽이 좀비 둘과 투닥거리고 있던 때도.

방금 발파를 날렸던 때에도 그랬다.

저 흑마법사, 시종일관 하늘을 향해 두 팔을 펼친 채 석상처럼 서 있기만 했다.

그렇다는 뜻은....

"어이. 당신 설마 못 움직이는 거야?"

혹시나 싶었다.

슬쩍 다가갔다.

다섯 걸음 거리까지 가까워졌을 때 말을 걸어보았다.

그런데 어쩐지 흑마법사에게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반응도 없었다.

아니, 아주 약간 있기는 했다.

온몸이 굳은 채로 눈동자만 데룩, 굴려서 이쪽을 쳐다본 것이었다.

"하. 진짜네. 못 움직이나 보네."

로이드는 그만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저 흑마법사, 나마란의 장벽을 일으키고 유지하느라 못 움직이는 거야. 대신 그만큼 엄청난 수준의 방어 마법으로 자신을 보호해둔 거고.'

엄청난 힘이 실린 강철삽의 일격도.

심지어 발파마저도 튕겨내는 방어 마법이었다.

그걸 깨닫게 되자 오히려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어떡하지.'

로이드는 고민에 잠겼다.

삼중발파로 확 끝장낼까.

아니면 급속충전 옵션을 써 버릴까.

한데 그렇게 고민하던 도중이었다.

로이드는 문득, 흑마법사에게서 익숙한 마나의 흐름을 느꼈다.

'어?'

고개를 들었다.

시선을 움직였다.

마나의 흐름이 느껴지는 곳.

흑마법사의 가슴팍 어름.

그곳으로 눈길을 던졌다.

덕분에 발견할 수 있었다.

"보석?"

보랏빛을 띤 시커먼 보석이 흑마법사의 목걸이에 박혀 있었다.

로이드는 흑마법사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아예 대놓고 목걸이의 보석을 관찰했다.

덕분에 깨달을 수 있었다.

'같은 거다.'

자신이 땅속에서 파낸 두개골.

그 속에 담겨 있던 보석.

그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보석에서 느껴지는 마나의 흐름도 거의 똑같았다.

기괴하고 음울하게 응축된 마나가 날뛰듯 요동치고 있었다.

그리고 나마란의 장벽을 공명시키고 있었다.

즉, 이 보석이 나마란의 장벽을 일으키는 마법적 매개물이 맞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순간부터였다.

'빙고.'

로이드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머릿속에 번쩍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자신이 수없이 마나를 해체하고 얻어낸 보석.

그래서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보석의 마나 구조.

한데 그걸 자신의 앞에서 사용하고 있다?

'이건 뭐 대놓고 나 먹으라고 상 차려준 거나 똑같네.'

굳이 힘들여 장벽을 부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장벽을 일으키는 마법적 매개물.

그것만 처리하면 되니까.

아니, 이 경우에는 단순히 처리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

"어이, 이봐요?"

어느새 여유를 찾은 능글능글한 눈빛으로 로이드가 흑마법사를 쳐다보았다.

물론 흑마법사는 대답이 없었다.

로이드의 물음이 이어졌다.

"지금 여유롭지? 막 든든하지? 방어 마법이 있으니까. 내가 어떻게 후려치고 때리고 꼬집고 발광을 해도 안전할 거라는 확신과 안도감을 만끽하고 계신 거지?"

"...."

무슨 그런 당연한 소리를.

흑마법사가 그런 비웃음 담긴 듯한 눈길을 보내왔다.

하지만 로이드는 쓸데없이 흥분하지 않았다.

이럴 땐 흥분하는 쪽이 진다.

그는 더욱 짙어진 눈웃음으로 응수했다.

"안심하셔. 내가 댁을 왜 때려. 쓸데없이 힘 빠지게. 대신 센터만 좀 까면 되는 걸 가지고."

"...."

"무슨 뜻이냐고? 잘 들어. 댁이 갖고 있는 이 보석, 보이지? 이제부터 내가 이 보석의 용도를 좀 바꿀 거야."

"...!"

"말도 안 된다고? 그런데 난 할 수 있는데?"

"...."

"진짜야. 볼래?"

로이드가 손을 들었다.

흑마법사의 목걸이에 박힌 보석.

녹타니움을 서슴없이 움켜쥐었다.

"내가 마법은 잘 몰라도 마나 흡수랑 재배열은 좀 할 줄 알거든. 게다가 하도 설계도를 만지작대고 살아서, 복잡하고 세밀한 거 수정하는 데에는 아주 지긋지긋하도록 이골이 났어요.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

"...."

"댁이 믿고 있는 이 보석. 여기에 응축된 마나 배열을 내가 바꿀 거란 뜻이지. 그래서 장벽이 제물로 삼아 마나를 흡수하는 대상을 바꿔 버릴 거야. 장벽 안쪽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장벽을 일으킨 당사자, 즉 댁으로."

"...!"

흑마법사의 눈동자에 불신의 빛이 서렸다.

그 순간이었다.

 

키이이이잉-!

 

보석을 움켜쥔 로이드의 세 갈래 마나 써클이 거칠게 회전했다.

마나 흡수와 재배열에 특화된 아스라한 심법.

그 심법의 진가가 극한의 수준으로 발동되기 시작했다.

172화. 나마란의 장벽 앞에서 (3)

 

 

키이이이잉-!

 

굳게 움켜쥔 로이드의 손아귀.

그 안에서 보석 녹타니움이 거칠게 떨렸다.

그것은 반항이자 저항이었다.

'이거 장난이 아닌데?'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흑마법사가 착용한 목걸이 속 보석.

역시 이 보석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날뛰는구만.'

로이드의 한쪽 눈썹이 움찔거렸다.

마치 길들지 않은 야생마에 올라탄 듯한 기분이다.

혹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트럭을 몰고서 언덕길을 내려가는 것만 같다.

그러나 로이드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마나 써클의 회전력을 더 올렸다.

보석이 저항하는 기세를 흡수하고, 흘려냈다.

동시에 자신의 마나 일부를 보석에 침투시켰다.

아스라한 심법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디 보자.'

로이드는 눈을 감았다.

보석 속에 밀어 넣은 자신의 마나.

그 마나에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

그러자 보석 속에 배열된 마나의 구조가 하나의 풍경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복잡하네.'

미로 같았다.

수많은 점과 선, 면이 늘어서고 엇갈리며 얽혀 있었다.

서울 번화가에 처음 와본 두메산골 청년이 된 기분이 이럴까.

혹은 장롱면허 탈출 1일 차에 출퇴근 시간 영등포 로터리에 차를 끌고 나가면 이런 느낌일까.

너무나 압도적인 복잡함.

초월적인 막막함과 아득함.

혹은 순식간에 정글에 갇힌 느낌.

하지만 로이드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를 향해 굳고 빡쎈 마인드 컨트롤을 걸었다.

'이건 설계도다. 도면이야. 그냥 조별과제 조원들이 개판 치면서 제작한 도면인 거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한다? 고쳐야지. 수정해야지. 그래야 학점 폭망도 면하고! 장학금도 안 놓치고!'

장학금을 놓치면 난리가 난다.

고시원비도 겨우 내면서 살아가는 형편이다.

그런데 장학금 없이 등록금까지 내려면?

아예 1년을 통으로 휴학하면서 노가다를 뛰어야 할 것이다.

그건 싫었다.

졸업이 미뤄지게 되니까.

그만큼 사회 진출도 늦어지니까.

지긋지긋한 밑바닥 삶이 연장된다는 뜻이니까.

'기사 자격증! 빨리 따야 한단 말이다!'

로이드는 당시의 심정을 떠올리며 버럭 외쳤다.

이로써 마인드 컨트롤, 성공.

그때부터였다.

그는 초월적으로 막막하고 복잡한 마나 회로 속에서도 제정신을 유지했다.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공간 전체를 차분하게 파악했다.

점과 선, 면을 냉정하게 분석했다.

급하지 않게.

차근차근.

꼬인 실타래 풀어가듯.

보석 속에 배열된 마나의 구조를 파악하고 이해했다.

그러자 자연히 길이 보였다.

어디를 수정할지.

어떻게 바꿀지.

그러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든 것을 파악한 순간 절로 미소가 나왔다.

'니들은 이제 다 끝났어.'

로이드의 본격적인 수정 작업이 시작되었다.

파악이 다 된 상태에서의 수정 작업은 의외로 쉬웠다.

익숙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익숙한 정도가 아니야. 지긋지긋할 정도지!'

이건 설계도다.

설계도를 고치는 작업인 거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니 편했다.

로이드는 녹타니움 속의 마나 배열을 때로는 과감하게, 때로는 디테일하게 수정하고 재배열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수정 작업의 결과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츠즈즈즈즈!

 

굳건하던 나마란의 장벽 일부가 흔들렸다.

하늘마저 물들이던 색이 변했다.

녹타니움과 같은 짙은 보랏빛을 띤 검은 색.

그 특유의 불길한 색이 옅어지며 오색으로 일렁거렸다.

동시에 흑마법사의 안색 또한 변했다.

"...그흡!"

흑마법사가 무의식중에 헛숨을 들이켰다.

동시에 두 눈을 경악으로 부릅떴다.

단순히 놀라서?

아니었다.

'몸속에서... 마나가!'

급속도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장벽으로 흡수되고 있었다.

'거, 거흐억!'

흑마법사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날뛰었다.

그럼에도 아무런 대처를 할 수 없었다.

이미 녹타니움을 발동하고 있으니까.

강력한 방어 마법으로 보호받는 동시에, 움직일 수 없게 되었으니까.

심지어 이 마법을 취소할 수도 없으니까.

'어떻게... 어떻게 이런?'

흑마법사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방금 자신 앞에 나타난 로이드.

그가 능글거리며 뭐라 지껄일 때만 해도 이럴 줄은 몰랐다.

장벽의 마나 흡수 대상을 바꾸겠다느니.

자신은 할 수 있다느니.

전부 허풍인 줄로만 알았다.

당연했다.

상식에 벗어나는 말이었으니까.

절대로 불가능한 이야기였으니까.

한데 지금 보니 아니었다.

그 말들, 전부 사실이었다!

'어떻게, 대체 어떻그커거걱!'

더는 버틸 수 없다.

흑마법사는 절망감을 느꼈다.

그러나 몸부림조차 칠 수 없었다.

여전히 두 팔을 벌리고 선 채로 마나를 빼앗겼다.

눈앞이 아득해지고, 머리칼이 모조리 뭉텅 빠지고, 피부가 버석해졌다.

몸속의 혈액이 순식간에 말라붙었다.

급속도로 근육 손실이 일어났다.

간과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즉, 그는 선 채로 미라가 되어 버렸다.

그러고도 마지막 남은 한 방울의 마나까지 모조리 장벽에 게걸스럽게 흡수당했다.

로이드가 눈을 뜬 것은 그 직후였다.

"...깜짝이야."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거의 미라가 되어 버린 흑마법사의 얼굴.

목걸이를 쥐고 있느라 가까이 서 있었던 탓에.

그 몰골의 면상을 거의 줌인 풀샷으로 딱 눈에 담아야 했다.

"어오. 진짜."

로이드는 소름을 털어내며 황급히 물러섰다.

이미 선 채로 숨이 끊어진 흑마법사.

한편으로는 씁쓸했지만, 그뿐.

딱히 미안하다거나 불쌍하다는 생각까진 들지 않았다.

자업자득이니까.

저 작자가 벌인 일이니까.

끔찍한 장벽으로 수천, 수만 명의 시민을 저렇게 죽이려고 한 거니까.

그 대가를 고스란히 돌려받은 거라고 생각하니 별반 안타깝거나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더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멍 때리고 있을 때가 아니야. 꼬밍아?"

"꼬밍!"

부르자마자 날개를 파닥대며 뽀잇뽀잇 달려오는 꼬밍이.

다행히 그 사이에 충격에서 많이 회복된 모습이었다.

"날 수 있겠어?"

"꼬밍!"

"정말? 괜찮겠어? 힘들 것 같으면 무리 안 해도 돼. 내가 좀 열심히 뛰어다니면 되는 거니까."

"꼬미밍! 꼬밍!"

꼬밍이가 커다랗고 동글동글한 머리를 도리도리.

힘차게 저으며 말했다.

"꼬밍! 꼬미밍!"

"음, 그래도 지금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앉아서 구경할 생각은 없다고?"

"꼬밍!"

그러고는 얼른 타라는 듯 등을 내미는 꼬밍이.

녀석의 등에 올라탔다.

그런 로이드의 눈길은 이미 다음 목표물을 포착하고 있었다.

제법 멀리 떨어진 절벽 사면에 있는 다른 흑마법사였다.

그 흑마법사 또한 두 팔을 펼친 채 서 있었다.

"저쪽. 또 한 놈이 있는 것 같아. 가자!"

"꼬밍!"

꼬밍이의 날개가 힘차게 펼쳐졌다.

다음 목표물에 고정된 로이드의 눈동자가 번득였다.

'댁들은 이제 다 뒈졌어.'

오늘 저들이 세운 장벽의 마나 흡수 대상을 모조리 바꿔주리라.

그다음엔?

저들의 다른 보석까지도 몽땅 꿀꺽할 거다.

그 생각에 로이드의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