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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화. 도망치는 사람 (1)

푸취이이익!

불길한 소리가 울렸다.

처음엔 작고 미약하게.

그러나 점점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뭐지?"

비벙이의 굴착 작업을 구경하던 공병대 병사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잖아도 땅속에서 반듯하게 매장된 마스토돈 사체 수백 구가 발굴(?)된 상황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인근 현장 작업자들이 호기심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구덩이 주위로 백색창기병 대원과 피난민 작업자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숙덕이고 술렁였다.

"저거, 무슨 소리입니까?"

"나도 모르겠는데. 혹시 악취가 빠지는 소리인가?"

"악취라니요?"

"거 왜, 그런 거 있잖소. 소나 돼지 죽은 거 계속 오래 두면 시체 뱃속에 바람 차는 거."

"아하. 저도 본 적 있습니다. 시체 배가 풍선처럼 부풀다가 뻥, 하고 터지던 거 말입니다."

"그렇지. 저거도 아마 그런 현상 같은데."

"혹시 흙 속에 눌려 있다가 흙을 걷어내니까 지금 터지는 겁니까?"

"아마도?"

"하. 이거, 모처럼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겼군요."

공병대 병사들과 백색창기병 대원, 피난민 작업자들.

모두가 눈을 반짝거렸다.

소나 돼지 사체가 터질 때면 빵, 하고 북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나는데.

저 커다란 마스토돈 사체의 배가 터지면 얼마나 요란할까.

그런 진귀한 모습을 구경할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이 현장에 모인 모두의 호기심과 흥미를 더없이 자극했다.

딱 한 사람만 빼고.

'저거, 뭔가 좀 이상한데?'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쌔한 기분을 느꼈다.

땅속에 반듯하게 묻혀 있는 수백 구의 마스토돈 사체.

저건 그냥 자연적으로 죽어서 매몰된 게 아니었다.

분명히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매장한 것이었다.

'누가?'

알 수 없었다.

다만 눈에 보이는 분명한 사실이 있었다.

'저 사체들, 부패한 정도가 비슷해. 모두 비슷한 시점에 죽었다는 뜻이야. 그렇다는 건....'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죽였다는 뜻이다.

무려 수백 마리의 마스토돈을.

짧은 시간에.

뚜렷한 의도를 가지고서 말이다.

'어째서? 무엇을 위해?'

물론 그것도 알 방법이 없었다.

대신 그 순간, 로이드는 자신의 가슴을 찌르던 쌔한 느낌이 단순한 예감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아스라한 심법을 통해서였다.

'어?'

문득,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아스라한 심법을 통해 비정상적으로 흐르는 마나의 줄기가 감지되었다.

마스토돈의 사체를 향해.

마치 마법진이 마나를 빨아들이듯.

대량의 마나가 비정상적으로 집중되고 있었다.

동시에 사체에서 흘러나오던 가스 새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그건 즉....

"다들 물러나!"

로이드가 외쳤다.

얼떨떨한 눈빛으로 이쪽을 돌아보는 작업자들.

그들을 향해 더욱 크게 소리쳤다.

"구덩이에서 물러나! 최대한 멀리! 어기는 사람은 보너스 전액 몰수할 거야!"

지금은 이해보다 반사적인 반응을.

그게 더 빠른 대피를 이끌 길이리라.

그런 로이드의 생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보너스 몰수.

이보다 무서운 말이 없었다.

그 말에 모든 작업자가 반사적으로 구덩이에서 물러났다.

그 직후였다.

푸취이이익, 투확-!

마스토돈 사체 하나가 섬광을 뿜어냈다.

거칠게 폭발했다. 뿜어져 나왔다.

가스와 불꽃, 충격파가 어우러졌다.

옆의 마스토돈 사체를 집어삼켰다.

집어삼켜진 마스토돈 사체도 폭발했다.

그 옆의 것도, 또 그 옆의 것도, 연이어 섬광을 뿜어냈다.

거대한 연쇄 폭발이었다.

콰아아아앙-!

순식간에 50구에 달하는 마스토돈 사체가 폭발했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인 폭발이 아니었다.

그저 사체의 복강에 차오른 가스가 터지는 게 아니었다.

끔찍한 수준으로 집중된 마나의 폭발이었다.

악몽처럼 사방을 휩쓰는 마법적 파괴력이었다.

그리고 로이드는 이런 유형의 폭발을 간접적인 지식으로나마 잘 알고 있었다.

소설 철혈의 기사를 읽은 덕분이었다.

'젠장, 역시나 이거... 시체 폭발 마법이잖아.'

문득, 소설로 읽은 내용이 떠올랐다.

네크로맨서가 일정한 절차로 시체를 가공한다.

시체폭발 마법을 걸어둔다.

그러면?

특정 조건이 충족될 때 시체가 폭발한다.

매우 강력하게 주위를 초토화해 버린다고 했던가.

그 위력은 시체의 크기에 비례한다고 했다. 인간의 시체가 폭발할 경우 대전차지뢰의 위력에 필적한다고도 했다.

한데 지금은?

인간의 시체가 터지는 것보다 훨씬 심했다.

'코끼리 사이즈의 시체가 터지는 거니까 이건... 그아앗!'

로이드는 욕지기를 삼키며 구덩이 밖으로 뛰었다.

몸을 날리며 삽을 고쳐 쥐었다.

폭심지를 돌아보았다.

곧바로 삼중 발파를 쏠 준비를 했다.

몰려오는 폭발과 충격파를 완전히 피하기는 이미 글렀다.

차라리 이쪽에서 삼중발파를 내쏘아서 폭발과 충격파에 맞불을 놓아야 한다.

'되든 안 되든.'

눈을 빛내며 세 갈래 써클을 회전시켰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비벙!"

커다란 외침과 함께 눈앞이 확 시커메졌다.

아니, 비벙이의 커다란 몸이 앞을 가로막았다.

이쪽을 향해 웅크려 왔다.

마치 폭발로부터 이쪽을 감싸 지켜주듯.

"비벙아?"

"비버벙!"

엎드려!

그 말에 로이드는 반사적으로 엎드렸다.

그 직후, 폭발과 충격파가 덮쳐왔다.

...!

소리도, 섬광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기분.

뱃속이 통째로 들썩이는 기분.

귀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이명이 모든 소리를 삼켰다.

눈을 떠도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었다.

아니, 새하얀 것이 하늘일까.

그럼 새까만 것은?

'...비벙아?'

흙먼지 속에 쓰러져 있는 비벙이가 보였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뱃살로 보아 다행히 숨을 쉬고 있었다.

로이드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어지러움을 참아내며 비벙이를 살펴보았다.

피를 흘리거나 큰 외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폭발력을 온몸으로 막아내는 과정에서의 큰 충격으로 기절한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주르륵.

이마를 통해 핏줄기가 흘러내린다.

소매로 닦아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제야 조금씩 이명이 걷혀 갔다.

주위의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쿨럭! 콜록!"

"이, 이게 뭐야!"

"으으윽, 괘, 괜찮소?"

곳곳에 쓰러져 있던 작업자들이 비척비척 일어나는 게 보였다.

다행히 죽거나 크게 다친 사람은 없어 보였다.

폭발이 일어나기 직전에 이쪽의 외침을 듣고 구덩이에서 재빨리 물러난 덕분인 듯했다.

'무슨... 이런 일이.'

로이드는 자신의 뺨을 세게 쳤다.

그제야 어지러움과 메스꺼움이 조금은 가셨다.

한데 그때였다.

"쿼어오옥... 쿼오옥!"

시체폭발이 일어났던 구덩이 안쪽.

그곳에서 잔뜩 쉰 포효성이 들려왔다.

하나가 아니었다.

"쿼어옥!"

"크... 워옥!"

적게 잡아도 수십.

어쩌면 그 이상.

불길한 포효성이 연달아 울리기 시작했다.

가라앉아 가는 흙먼지 속에서 서서히 가까워져 왔다.

로이드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이거 설마.'

시체 폭발이 단지 시작에 불과한 건 아니겠지?

...라는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이었다.

후우웅!

흙먼지 속에서 커다란 무언가가 쇄도해 왔다.

"...!"

재빨리 몸을 숙이며 물러났다.

그 직후, 통나무 크기의 기다란 무언가가 머리 위 공간을 맹렬히 훑으며 지나갔다.

'코끼리 코?'

아니다.

마스토돈의 것이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다.

그걸 깨닫는 순간, 거대한 덩치가 흙먼지를 뚫고 돌진해 왔다.

"쿼어어오오옥!"

"...!"

마스토돈이었다.

그런데 살아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죽은 생선처럼 흐릿한 눈동자와 곳곳이 썩은 가죽이 그 증거였다.

하지만 그 어떤 살아 있는 생명체보다도 더욱 사납고 맹렬하게 돌진해 왔다. 상아와 뿔을 동시에 휘두르며 거대한 덩치로 이쪽을 짓뭉개려 달려들었다.

언데드 마스토돈이었다.

'우와악!'

호러 무비에나 어울릴까 싶을 비주얼의 괴수.

그런 놈이 대놓고 정면으로 달려드니 로이드도 기겁했다.

'시체 폭발에 언데드라니.'

이제는 확실해졌다.

이 짓을 벌인 사령술사, 네크로멘서의 수준이 장난이 아닌 듯하다.

한두 마리도 아닌 수백의 언데드 마스토돈이라니.

그러니까, 구덩이 속에서 폭발한 50여 구 외의 나머지 수백 마리 언데드 마스토돈이 모조리 이쪽을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미친!'

로이드는 절로 온몸이 오싹해졌다.

도망치고 싶었다.

자신은 영화에서나 나올 용감한 주인공이 아니니까. 죽음도 불사하며 위험을 감수하는 영웅적 행위 따위엔 1그램의 관심도 없으니까.

'그런데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는 거냐고!'

평화롭게 슬러지 처리 시설을 만들던 중이었는데.

난데없이 발생한 사태에 로이드는 개탄했다.

차라리 하비엘이 이곳에 있었다면 대신 용감히 나서줬을 터다. 엄청난 무위를 선보이며 언데드 마스토돈들 따위, 순식간에 쓸어버렸을 터다.

하지만 지금 여기엔 하비엘이 없었다.

녀석은 아파트 단지 현장에서 오러로 철근 자르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지금은 내가 모두를 책임져야 한다.

안 그러면 여기 사람들, 다 죽는다.

"다들 도망쳐!"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다행히 그 외침이 효과가 있었다.

놀람과 공포로 굳어 있던 작업자들이 움찔했다.

이제야 사태 파악이 된 걸까.

모두가 기겁한 표정이 되었다.

"우, 우와아아악!"

"도망쳐!"

"사람 살려!"

영지민과 피난민이 대부분인 작업자들이었다. 일부 섞인 공병대 병사들도 조금 힘이 센 일반병에 불과했다. 그런 이들이 언데드화한 마스토돈에 맞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모두가 겁에 질려 삽과 곡괭이를 버리고 냅다 뛰었다.

영지가 있는 남쪽을 향해 달음박질쳤다.

그런 모습이 언데드 마스토돈 무리를 자극했다.

"쿼어오오-옥!"

무리의 선두에서 한 마리가 사납게 울부짖었다.

반쯤 썩어 가는 근육질 기다란 코로 도망치는 작업자들을 가리켰다.

이내 무리 전체가 작업자들의 뒤를 향해 돌진했다.

"쿼오옥!"

언데드 특유의 살아 있는 생명에 대한 증오가 타올랐다.

흉흉한 기세로, 모든 것을 짓밟을 듯.

지축을 흔들며 내달렸다.

한데 그 앞을 가로막는 여섯 명의 남자가 있었다.

백색창기병 대원들이었다.

"우리는! 국왕 전하의 검이며 방패다!"

"전하의 검과 방패는! 전하의 백성을 지킨다!"

로이드가 말릴 틈도 없었다.

검을 뽑아든 백색창기병 대원 여섯이 함성을 내지르며 내달렸다. 돌진해 오는 언데드 마스토돈 무리를 향해 정면으로 돌격했다.

비록 말을 타지 못했고, 갑옷을 갖추지 못했더라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리고 짓밟혔다.

"쿼오오오옥!"

언데드로 변질되며 일반 마스토돈보다 훨씬 강해진 놈들이었다. 그저 창칼로 베고 찌르는 걸로는 타격조차 입지 않게 된 놈들이었다.

"...!"

용감하게 달려든 백색창기병대원 여섯이 순식간에 놈들의 무리에 휩쓸리고 짓밟혀 희생되고 말았다.

그걸 본 순간 로이드는 이를 갈았다.

'도망치라니까 뭐하는 거야, 진짜!'

방금까지 함께 땀 흘리며 삽질하던 자들이었다.

그런 자들이 눈앞에서 죽어나갔다.

안타까움에 손이 덜덜 떨렸다.

더는 저런 희생이 있어선 안 된다.

그러니까, 서둘러 생각을 짜내야 한다.

뭐라도 해야 한다.

이곳의 상황과 지형.

이쪽의 전력과 인원.

모두가, 나도, 안전해질 방법.

그 모든 조각이 얽히고.

마침내 머릿속이 번쩍.

문득, 그럴듯한 대응법이 떠올랐다.

"뽀동아!"

조끼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뽀동이를 꺼냈다.

"뽀도동! 뽀동!"

녀석도 안주머니 속에서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던 걸까.

꺼내어지자마자 이쪽을 향해 작은 입을 야물딱지게 벌렸다.

로이드는 그 입에 빨간 해바라기씨를 넣어주었다.

그리고 녀석을 멀리 내던졌다.

퍼어엉!

"뽀동!"

10미터 크기로 변한 뽀동이에게 외쳤다.

"우선 놈들을 지연시켜! 최대한!"

"뽀동!"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질주를 시작했다.

마스토돈 무리의 선두를 향해 달려들었다.

"뽀도동!"

쿠우웅!

온몸으로 들이받았다.

뽀동이의 몸길이는 10미터.

4미터인 마스토돈보다 체중이 몇 배는 무거웠다.

제아무리 언데드가 되어 흉포해진 마스토돈이라도 어찌할 수가 없는 체급 차이였다.

"쿠오오옥!"

작업자들을 향해 돌진하던 선두의 언데드 마스토돈 일곱 마리가 볼링핀 무너지듯 나뒹굴었다.

그러나 그 뒤가 문제였다.

"쿼오옥!"

나머지 무리가 해일처럼 몰려왔다.

눈대중으로 대강 헤아려도 최소 300마리 이상.

그 머릿수의 압력에는 뽀동이도 당해낼 수가 없었다.

"뽀도동! 뽀동!"

가까스로 몸을 빼냈다.

그 과정에서 뿔과 상아에 몇 차례나 궁둥이를 찔렸다.

피는 나지 않았지만 엄청나게 아팠다.

하지만 뽀동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조금 물러나면서 거리를 벌린 후엔 어김없이 방향을 틀었다. 속도를 높였다. 선두를 향해 몸통박치기를 시도했다.

"뽀동!"

콰아앙!

그럴 때마다 마스토돈 대여섯 마리가 나뒹굴었다.

그만큼 놈들의 돌진도 발목이 잡혔다.

그동안 로이드는 도망치는 작업자들을 향해 내달렸다.

정확히는 작업자들의 최후방에서 대열을 가다듬고서 싸울 준비를 하고 있던 공병대와 백색창기병대에게 뛰어갔다.

"바이에른 경! 블랑크 경!"

공병대를 이끄는 바이에른 경.

백색창기병대장인 블랑크 경.

두 지휘관이 외침에 화답했다.

"로이드 님, 어서 몸을 피하십시오. 여긴 저희가 지키겠습니다."

"이곳은 백색창기병에게 맡겨 주시오. 우리의 용맹이 헛되지 않은 것임을 증명해 보이겠소."

믿음직한 얼굴로 각오를 밝히는 두 사내.

그들을 보며 로이드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다들 도망쳐요. 경들도, 공병대와 백색창기병대 모두도."

"예?"

"여기서는 내가 시간을 벌어주겠단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다들 작업자들을 인솔해서 최대한 빠르게. 퇴각. 알겠죠?"

"로이드 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바이에른 경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블랑크 경이 정색하며 반문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지금 우리 백색창기병에게 적을 두고 등을 보이라는 소리요?"

"예, 바로 그 소리입니다."

로이드가 곧바로 대답했다.

"여기서 맞서 싸우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니 작업자들을 보호하며 최대한 남쪽으로 퇴각하세요. 그럴 시간은 제가 벌어 줄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권유를 들을 수는 없소. 우리 백색창기병은...."

"이거 권유 아닙니다."

로이드의 일침이 블랑크 경의 반박을 잘랐다.

어느새 정색한 그의 눈빛이 블랑크 경을 향했다.

무모한 희생을 막기 위해서.

그렇게 모두를 살리기 위해서.

단호하고 엄격한 어조로 말했다.

"명령입니다."

152화. 도망치는 사람 (2)

"음?"

프론테라 영지의 대장장이 공방.

그곳에서 한창 작업에 몰두 중이던 솔리타스는 일손을 멈추었다.

공들여 깎고 있던 나뭇조각과 조각칼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공방 바깥, 북쪽을 바라보았다.

'방금 뭔가 폭발이 느껴졌는데.'

가까운 곳은 아니다.

영지의 북쪽 경계 너머.

거리가 멀어서 인간이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드래곤이었다.

'그냥 단순한 폭발? 아니야. 마나의 요동이 느껴졌다.'

어느새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북쪽으로 감각을 집중한 채 공방을 나섰다.

그러자니 마나의 잔향이 조금씩 선명하게 느껴졌다.

'마나의 폭발. 마법. 마나 요동의 패턴. 네크로맨서의 사령술. 그렇다면 시체 폭발인가. 한데 보통의 시체 폭발보다 훨씬 강력했어.'

그는 드래곤답게 수 킬로미터 밖에서 벌어진 일의 전말을 거의 정확하게 유추해 냈다.

물론 그는 폭발이 일어난 방향에 누가 있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로이드 프론테라. 흠, 사고에 휘말린 건지.'

도와줘야 할까.

귀찮은데.

그래도 가보는 게 좋지 않을까.

솔리타스가 그런 생각을 떠올릴 무렵이었다.

별안간 뒤쪽의 공방에서 따끔한 일침이 날아왔다.

"허허, 쯧! 내가 도제였을 때는 스승님이 시킨 일을 끝내기 전엔 기침 한 번 못하고 일에만 집중했는데 말이지."

"...."

고개를 돌린 솔리타스는 자신의 스승, 드워프 장인 코기두스와 눈이 마주쳤다.

장인이 엄격한 눈빛을 빛냈다.

"자네, 내가 시킨 나무 깎기는 다 했는가?"

"음, 아니오. 아직."

"그럼 마저 해야지?"

"...."

"지금 맡은 과정에 집중해. 나무 다음은 석고, 석고 다음은 화강암, 화강암 다음은 각종 금속, 거기까지 익숙해진 다음에 손톱 크기의 자갈을 거쳐 보석 다루는 법을 알려 줄 테니. 그 기간이 얼마나 짧아질지는 자네 하기에 달렸어."

"으음, 알겠습니다."

솔리타스는 장인의 말에 수긍했다.

장인의 말이 옳았다.

하지만 단지 그래서만은 아니었다.

'하비엘 아스라한. 저 인간도 나와 거의 비슷한 수준의 감각을 지닌 건가.'

그의 시선이 저 멀리 대로를 향했다.

그곳을 다급히 뛰어가는 은발의 기사가 보였다.

하비엘이었다.

북쪽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역시.'

저 인간도 방금의 폭발을 느낀 것일 테지.

그러니 북쪽으로 달려가고 있는 거겠지.

그렇다면 안심이었다.

'지난번 대결에서도 느꼈던 거지만 저놈, 엄청났으니까.'

저런 괴물 같은 놈이 가세한다면 북쪽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건 딱히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아니, 오히려 걱정되는 건 자신이었다.

'후우. 나무 깎기. 이게 뭔데 이렇게 어렵냐.'

공방으로 돌아가 다시 나무토막을 집어 들었다.

나름 열심히 깎는다고 깎았는데 그 모양이 형편없이 삐뚤빼뚤.

보면 볼수록 한숨이 나왔다.

이래서야 대체 언제쯤 진짜 보석을 그럴듯하게 세공해서 연애와 결혼 준비를 할지 눈앞이 막막하기만 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연애도. 결혼도. 그리고 복수도.'

하비엘 아스라한.

지난번의 치욕은 수십 년 뒤에 갚아주마.

그렇듯 야물딱진 다짐을 가슴에 새기며 솔리타스는 조각칼을 집어 들었다.

"후우."

로이드는 삽을 집어 들었다.

남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멀어지는 작업자들이 보였다.

그런 작업자들을 보호하듯 최후방에서 함께 퇴각하는 공병대와 백색창기병도 보였다.

문득, 조금 전의 일이 떠올랐다.

'블랑크 경, 고집이 세단 말이야.'

여기서 자신이 시간을 벌어 주겠다고 했다.

그러니 언데드 마스토돈에 정면으로 맞서지 말라고 했다.

작업자들의 피신을 도우며 함께 도망치라고 했다.

당연히 블랑크 경이 강하게 반발했다.

그럴 수 없노라고.

국왕의 검이자 방패인 자신들이라고.

적을 두고 등을 보이라는 권유를 들을 수는 없다고.

정색하며 굳은 투지를 드러냈던가.

그래서 명령으로 찍어 눌렀다.

'이거, 권유 아닙니다. 명령입니다.'

일부러 정색했다.

엄격하게 말했다.

자신에겐 명령할 권한이 있노라고.

현재 백색창기병은 국왕의 명에 의해 프론테라 백작령에 파견된 상태이며, 따라서 프론테라 백작에게 실질적 지휘권이 있노라고 했다.

한데 이곳 건설 현장의 책임자는 자신이었다.

자신은 프론테라 백작에게 현장의 지휘와 책임을 위임받았다.

그러니 현장에 작업자로 참여한 백색창기병은?

'당연히 제 책임과 소관으로 귀속된 상태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현장에서 불의의 사고가 발생하여 다수의 인명이 위험에 처한 비상상황이므로, 더더욱 현장 전체를 지휘할 긴급 지휘권이 제게 있는 겁니다. 또한, 한시가 급한 이 순간에는 무의미한 논쟁 이전에 일사불란한 행동부터 취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빠르고도 정확하게.

또박또박 명확하게.

숨 쉴 틈도 없이 말했다.

블랑크 경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다행히 그런 뜻이 통한 걸까.

블랑크 경이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던가.

'...뭔가 염두에 둔 방법이 있으신 듯한데, 모쪼록 무사하셔야 합니다.'

그 말과 함께 백색창기병을 이끌고 작업자들의 후방에 합류했다.

바이에른 경과 공병대도 함께였다.

덕분에 지금 이곳, 도망치는 작업자들과 달려오는 언데드 마스토돈 무리 사이 황무지엔 자신 혼자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아니, 정정.

아기 마스토돈 5남매도 함께였다.

"그래서 혹시 불만 있는 어린이?"

"뿌이애애앵!"

"아무도 불만 없지?"

"뿌애애애앵!"

다섯 아기 마스토돈이 불안한지 콧김을 풍풍 뿜어내며 2미터가 넘는 덩치를 떨어 댔다.

로이드의 얼굴에 미안한 웃음이 희미하게 배어났다.

"그래, 미안. 나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건 아니긴 한데, 이번엔 너희 신세를 좀 져야 할 것 같아."

"뿌애이이잉!"

"어, 알았어. 알았어. 얼굴 핥지 말고. 너 이도 안 닦았잖아."

"뿌애애앵!"

로이드는 잠시 아기 마스토돈들을 달랬다.

갑자기 일어난 대폭발.

그리고 날뛰기 시작한 언데드 마스토돈 무리.

아이들이 겁먹기에 충분한 난리였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너희가 침착하게 나랑 같이 움직여 줘야 하는 거야. 알겠어? 그래야 나도 살고, 너희도 살아."

"뿌이애애앵!"

"그래, 그래. 착하지. 자, 준비됐지?"

"뿌으앵!"

투두두두두...!

어느새 지축이 울리고 있었다.

북쪽을 돌아보니 언데드 마스토돈 무리가 200미터 남짓한 곳까지 달려오고 있었다.

그보다 한참 앞서서 달려오는 뽀동이도 보였다.

"자! 뽀동아, 이리로!"

"뽀동!"

거친 숨 몰아쉬며 도착한 뽀동이의 등에 올라탔다.

마스토돈 무리를 지연시키며 드잡이질을 한 탓인지 뽀동이의 털이 온통 엉망이 되어 있었다.

잠깐 치솟는 고마움과 미안함.

그 마음을 새겨두며 로이드가 고개를 들었다.

언데드 마스토돈 무리와의 거리는 약 100미터.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여기서 잘해야 언데드 마스토돈 무리가 작업자들을 버리고 이쪽을 향해 집요하게 달려들 것이다.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작업자들이 안전하게 도망칠 수 있을 테니까.

각오를 다지며 로이드는 뽀동이의 뒷목 털을 움켜쥐었다.

"자, 가자! 출발!"

"뽀동!"

"뿌이애애앵!"

뽀동이가 땅을 박찼다.

아기 마스토돈 5남매가 곁으로 나란히 따라왔다.

"서쪽으로!"

내달렸다.

그렇게 달리며 뒤로 고개를 돌렸다.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달려 내려가는 언데드 마스토돈 무리.

놈들을 향해 힘껏 외쳤다.

"여기!"

삽을 치켜들었다.

곁에서 나란히 달리는 아기 마스토돈 5남매를 삽으로 가리켰다.

"너희 무리의 새끼들이 내 손에 잡혀 있다아!"

로이드의 외침이 더욱 커졌다.

"만약 너희가 이 새끼들을 구하러 달려오지 않으면! 내가 어떤 짓을 하게 될까! 이 녀석들을 납치할 거야! 도살장으로 데려갈 거다! 그러고는? 뿔과 상아를 뽑겠지! 가죽도 홀라당 벗겨서 모조리 비싸게 팔아먹을 테다!"

그가 삽을 거칠게 휘둘렀다.

아스라한 심법을 동원했다.

목소리에 마나까지 실었다.

"내 말 들리냐!"

그의 마나 실린 우렁찬 외침이 황야를 쩌렁쩌렁 흔들었다.

남쪽으로 돌진하던 언데드 마스토돈 무리의 귓가에도 닿았다.

로이드는 초조하게 놈들 무리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제발. 우회전해라. 제발.'

문득,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 언급된 내용이 떠올랐다.

마스토돈.

드넓은 평원에서 살아가는 대형 초식 몬스터.

녀석들은 크게 무리를 지어서 산다고 했다.

무리에서 태어나는 모든 새끼를 공동육아로 보호하고, 키워낸다고 했다.

마치 북미 대륙의 평원을 질주하는 버팔로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무리의 새끼에 대한 모성애와 집착이 장난이 아니라고 했어. 얼마나 장난이 아니냐면, 심지어 언데드가 되고 나서도 그 본능이 다 지워지지 않고 일부는 남을 정도라고 했지.'

소설 속 그 설정을 떠올렸던 때부터였다.

죽음마저도 뛰어넘는 집착과 모성.

그 강력한 본능을 이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였다.

순식간에 계획을 세웠다.

바이에른 경과 공병대.

블랑크 경과 백색창기병.

그들을 작업자들과 함께 대피시켰다.

그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 줄 수 있겠다는 가능성이 엿보였다.

"그러니까! 너희 새끼들이 여기 있다고! 이대로 콱! 납치해서 괴롭히고 때리고 팔아먹을 거라고!"

후우웅!

삽을 사납게 휘둘렀다.

그 서슬에 곁을 나란히 달리던 아기 마스토돈 5남매가 흠칫 놀라며 구슬프게 울었다.

"뿌이애애앵!"

그 순간이었다.

"...쿼오옥?"

남쪽을 향해 질주하던 언데드 마스토돈 무리.

그들의 질주가 일순간 느려졌다.

놈들의 고개가 이쪽으로 돌아왔다.

흐리멍덩하던 시선 너머로, 흐릿한 모성이 일말의 흔적을 드러냈다.

"...쿼오옥. 쿼옥!"

새끼다.

무리의 새끼가 저기 있는 것 같다.

아직 젖을 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그래서 아직 보호가 필요한, 어미와 무리의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 새끼들이 저기에서 울고 있는 게 느껴진다.

그걸 느낀 순간부터였다.

"쿼오오오오!"

투두두두두!

언데드 마스토돈 무리 전체가 서쪽으로 질주 방향을 바꾸었다.

맹렬한 분노를 담고서 이쪽으로 돌진해 오기 시작했다.

'좋았어.'

로이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그로를 끄는 데에는 성공했다.

이제는 무사히 도망치고 추격을 따돌릴 일만 남았다.

"그럴 경로는 이미 생각해 뒀지. 뽀동아? 이대로 서쪽으로 계속!"

"뽀동!"

황무지를 가로질렀다.

때때로 언데드 마스토돈 무리와 거리가 좁혀진다 싶으면 뒤쪽으로 발파를 쏘기도 했다.

한데 그러던 도중이었다.

투확, 퍼컥!

"쿼옥!"

선두의 한 마스토돈이 발파에 제대로 맞았다.

머리부터 엉덩이까지.

아예 일직선으로 꿰뚫렸다.

나뒹굴며 쓰러지더니 그대로 폭발했다.

투확-!

시체폭발이었다.

덕분에 놈들 전체의 대열이 잠깐이나마 크게 흐트러졌다.

그걸 보며 로이드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걸 느꼈다.

'정면으로 안 싸우길 다행이다. 백색창기병을 퇴각시키길 잘했어.'

저놈들, 아무래도 전투불능 상태가 되면 자동으로 시체폭발 마법이 발동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백색창기병이 일제히 돌격을 감행했다면?

폭발에 휘말려 엄청난 인명피해를 입었을 것이리라.

'잘했어. 아까의 나.'

로이드는 계속해서 도주에 박차를 가했다.

그렇게 얼마나 서쪽으로 도망쳤을까.

이윽고 황야 끄트머리에 높다랗게 솟은 절벽이 보였다.

로이드가 삽으로 절벽 한쪽을 가리켰다.

"뽀동아, 저기! 보여?"

"뽀도동?"

"절벽 한쪽에 있는 협곡 말이야!"

로이드가 가리키는 지점.

그곳에 좁은 협곡의 출입구가 있었다.

마치 절벽 중앙을 도끼로 내리찍어서 수직으로 파낸 듯한 모양의 협곡이었다.

"저곳으로 들어가! 그대로 협곡을 통과하는 거야!"

"뽀동!"

협곡을 지나기만 하면 된다.

그 너머에는 제법 큰 숲이 펼쳐져 있다.

'그 숲에 숨는 거지. 뽀동이도 다시 작게 만들어서. 그럼 저 언데드 녀석들, 충분히 따돌릴 수 있어.'

로이드는 야물딱진 계획을 떠올리며 협곡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몇 분쯤 내달렸을 무렵.

그는 자신의 계획에 엄청난 걸림돌이 생겼음을 깨달아야 했다.

'뭐야. 왜 협곡이 무너져 있어?'

로이드는 다급히 뽀동이를 멈춰 세웠다.

눈앞을 가로막은 장벽을 망연자실 쳐다보았다.

"이런...."

협곡이 무너져 있었다.

앞길이 꽉 막혀 있었다.

수만 톤은 될 법한 토사와 바위.

협곡 양옆의 절벽이 모조리 붕괴되어 길이 차단되어 있었다.

'설마 봄철 장마 때문에?'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쿵, 쿠웅,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이러면 나가린데.'

뒤쪽에서는 언데드 마스토돈 무리가 이쪽을 밟아 죽일 기세로 달려오고 있다.

그런데 잘 뚫려 있을 줄 알았던 협곡이 산사태로 막혀 버렸다.

길고 좁은 통로.

돌아나갈 길도 없는 지형.

그곳의 막다른 곳에 갇혀 버린 셈이었다.

'망할.'

식은땀이 주르륵 솟아났다.

하지만 로이드는 패닉에 빠지지 않았다.

쓸데없는 호들갑으로 시간을 낭비하지도 않았다.

그가 즉시 외쳤다.

"다들, 절벽에 바싹 붙어!"

이건 기어오를 수 있는 절벽이 아니다.

측량 스킬로 재빨리 둘러본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사암이다. 잘 부스러지는 돌이야. 어설프게 절벽 타기를 시도했다간 떨어져서 다치기 딱 좋아. 게다가 얼마 전 내린 비 때문에 아직 지반이 젖어 있어. 운이 나쁘면 그냥 떨어지는 게 아니라 산사태까지 일으키게 될 거야.'

그러면 순식간에 생매장 당첨이리라.

그러니 절벽을 기어올라서 탈출하려는 시도는, 특히 뽀동이나 아기 마스토돈처럼 체중과 덩치가 상당한 녀석들을 이끌고 그런 시도를 하는 건 일찌감치 접어 두는 게 나을 듯했다.

계산을 순식간에 마친 로이드가 뽀동이를 바라보았다.

빠르고도 군더더기 없는 어조로 말했다.

"이제부터 잘 들어. 아기 마스토돈들 잘 끌어안고 있어. 그리고 절벽에 꼭 붙어 있어. 나한테 가까이 오지 마. 내가 오라고 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알았지?"

"뽀동?"

"알았어?"

"뽀... 동!"

"그래, 착하지."

언제나 가장 믿음직한 아이.

뽀동이를 한 차례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이제까지 달려온 협곡의 좁은 길.

그쪽으로 걸어갔다.

저 멀리.

협곡의 꺾어진 길을 따라 돌진해 오는 언데드 마스토돈 무리의 선두가 보였다.

"쿼오옥!"

이쪽을 발견한 놈들의 눈에 살기가 배어났다.

하지만 로이드는 멈추지 않았다.

그대로 걸어나갔다.

놈들을 향해 정면으로.

발길을 옮기며 삽을 들어 올렸다.

세 갈래 마나를 충돌시켰다.

삼중 발파를 하늘로 내쏘았다.

콰하학-!

'이 좁은 곳에서 놈들한테 발파를 쏠 수는 없어. 그랬다가 시체폭발이 일어나면 산사태 당첨일 테니까. 그러니까... 놈들에게 맞설 방법은 이게 최선이야.'

전력을 쏟아부은 삼중 발파.

그걸 쏘아낸 직후의 탈력감.

지독한 현기증을 느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거칠게 달려오는 거대한 무리를 보며 피식 웃었다.

각오는 끝났다.

눈을 감았다.

스스로를 무아지경에 빠뜨렸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으로 또렷한 알림이 울렸다.

딩동.

[아스라한 심법 스킬 옵션 ⑤ : 급속충전이 발동됩니다.]

[주위의 무작위한 대상으로부터 대량의 마나를 흡수합니다.]

그때부터였다.

키이이이이잉-!

협곡을 짓이기듯 돌진해오는 언데드 마스토돈 무리.

그 앞에 평온히 주저앉은 로이드.

마나의 블랙홀이 된 그가 다가오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153화. 마나 포식자 (1)

[아스라한 심법 스킬 옵션 ⑤ : 급속충전이 발동됩니다.]

[주위의 무작위한 대상으로부터 대량의 마나를 흡수합니다.]

키이이이잉!

로이드의 눈이 감겼다.

의식이 점점 멀어졌다.

그의 심장에 변화가 일어났다.

심장을 둘러싼 세 갈래 써클에 시동이 걸렸다.

처음엔 천천히.

부드럽고 고요하게.

그러나 차츰 빠르게.

격하고 맹렬하며 사납게.

한계 속도로 회전했다. 한계를 넘었다. 부쉈다.

모든 제약이 풀리고.

일체의 망설임이 사라지고.

대상을 구분하지 않게 되더니.

마침내 주위의 모든 것을 하나로 정의했다.

흡수할 대상으로.

키아아아아아-!

세 갈래 써클이 울부짖었다.

주위로 영향력을 행사하며 날뛰었다.

로이드를 중심으로 반경 7미터.

총 지름 14미터의 공간이 사나운 소용돌이로 변모했다.

그 안쪽으로 들어오는 모든 것들의 마나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콰과과과곽!

지면의 수분이 순식간에 말라붙었다.

땅속의 개미도, 이름 모를 딱정벌레도.

근처를 날아다니던 날파리와 먼지 속 진드기도.

급속충전의 범위에 들어오는 즉시 모든 마나를 빼앗겼다.

살이 말라붙고, 혈액이 고갈되더니, 알맹이가 부스러졌다.

알맹이 잃은 껍데기마저 가루가 되었다.

물론 돌진해 오던 언데드 마스토돈도 예외가 아니었다.

"쿼오오오옥!"

선두의 언데드 마스토돈이 거친 포효를 토해 냈다.

로이드를 노려보는 흐릿한 눈깔에 살기가 스몄다.

하지만 다음 걸음을 내딛는 순간.

언데드 마스토돈의 눈깔에 변화가 일어났다.

"...쿼오옥?"

키아아아아악!

가장 먼저 급속충전의 범위에 들어선 부위는 언데드 마스토돈의 머리였다.

그중에서도 비교적 수분이 많이 남아 있던 안구가 제일 먼저 쪼그라들었다.

"쿼옥!"

퍼퍽!

급속도로 마나를 빼앗기며 안구 속 수분이 고갈되었다.

반쯤 썩어 있던 안구가 움푹 꺼지며 바스러졌다.

이내 입과 귀가 비틀렸다.

콰작! 콰지직!

신체 내부가 부글부글 끓었다.

순식간에 마나를 빼앗기며 수분이 사라졌다.

썩은 조직을 지탱하던 세포의 막이 순식간에 찢어졌다.

"쿼그억!"

가죽과 근육이 갈라졌다.

뿔과 상아가 가루가 되었다.

관절과 골수가 부스러지고 무너졌다.

7톤에 달하는 몸체가 바닥에 쓰러졌다.

마침내 더 버티지 못하고 최후의 단계를 밟았다.

언데드 마스토돈을 만든 네크로멘서가 시체에 남긴 최후의 사악한 마법.

시체 폭발이었다.

후우욱, 투콰학-!

비틀리며 바스러지던 언데드 마스토돈의 사체가 맹렬히 폭발했다.

로이드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불과 5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였다.

사납게 피어나는 폭발과 충격파.

그 날름거리는 불꽃으로부터 로이드를 보호해 줄 장벽은 어떤 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니었다.

로이드는 안전했다.

시체폭발의 폭발력마저 모조리 흡수했다.

키아아아아악-!

로이드의 마나 써클이 더욱 맹렬히 포효했다.

사악한 탐욕을 드러내며 게걸스럽게 회전했다.

이쪽을 향해 날름거리며 뻗어 오던 불길도.

공기를 떨쳐 울리며 온몸을 찢을 기세였던 충격파도.

모조리 급속충전의 마수에 걸려들었다.

폭발이라도 상관없었다.

아니, 시체폭발 같은 마법적 폭발은 오히려 환영이었다.

더욱 증폭된 상태의 마나를 그에게 선물했기 때문이었다.

키이이이잉-!

폭발마저 순식간에 집어삼킨 로이드.

그의 감은 눈꺼풀 앞으로 숨 가쁜 메시지가 떠올랐다.

딩동!

[급속충전 스킬을 통해 대량의 마나가 흡수되고 있습니다.]

[흡수되는 마나의 양이 마나하트의 한계량을 넘어서는 중입니다.]

[마나하트가 강제로 확장됩니다.]

[스킬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콰드득, 콰짓!

원래부터 마스토돈이 생체적으로 담고 있던 마나.

거기에 네크로맨서에 의해 심어진 언데드의 기운.

추가로 시체폭발 마법의 폭발적 힘까지.

모조리 마나로 변환되었다.

짧은 순간에 그걸 모조리 흡수하게 되었다.

당연히 로이드의 마나하트에 무리를 주었다.

그 충격이 고스란히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마나하트 스킬의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딩동!

로이드가 눈을 뜨고 있었다면.

메시지를 읽을 수 있는 상황이라면.

진심으로 환호했을 법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스킬명 : 마나하트]

[단계 : 소드 익스퍼트 하급 Lv 3]

[신체 능력 향상률 : 340%]

[보유 중인 스킬 전용 옵션 : ① 충격상쇄 ② 만독불침 ③ 무아지경]

[다음 레벨업에 필요한 RP : 400]

[현재 보유 중인 RP : 2,870]

"쿨룩!"

너무나 급격한 마나하트 성장이었다.

큰 충격을 받은 로이드의 상반신이 크게 들썩였다.

그러는 사이에도 나머지 언데드 마스토돈 무리가 더욱 끝도 없이 달려들었다.

"쿼오오오옥!"

놈들은 언데드답게 사고력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앞서 달리던 동료가 로이드에게 마나를 빼앗겨 가루가 되어도, 시체폭발을 일으켜도 아무런 망설임 없이 돌진해 왔다.

끝도 없이.

멈춤도 없이.

계속해서 연이어.

차례로 마나를 빼앗겨 말라비틀어졌다.

비틀어지다 못해 시체폭발을 일으켰다.

주위에 아무런 폭발력도 행사하지 못하고 그 폭발력마저 고스란히 흡수당했다.

"쿨럭! 크욱!"

대량의 마나가 울컥울컥.

그때마다 로이드의 상반신이 태풍이라도 만난 듯 요동쳤다.

예전, 왕도에서 국왕 알리시아의 마나를 흡수하던 때와는 또 다른 종류의 경험이었다.

'커억, 컥...!'

국왕 알리시아의 마나는 지극히 순수했다.

정제되고, 압축되어, 깨끗하기 그지없는 마나였다.

그만큼 흡수가 편했다.

단지 너무나 밀도가 높았기에.

그래서 마나하트의 용량이 모자랐기에.

그만큼 마나하트의 크기를 키우는 것으로 충분히 소화해 낼 수 있는 종류의 마나였다.

한데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정반대였다.

"쿠읍!"

피핏-!

거칠게 뱉어내는 기침.

로이드의 입에서 핏방울이 튀어나왔다.

언데드 마스토돈의 마나가 너무나 탁하고, 더럽고, 거칠었기 때문이었다.

"...크으읍!"

살아 있는 생물의 마나가 아니었다.

죽어서 썩어가던 존재의 마나였다.

거기에 사악한 사령술의 가호마저 받은 부정하고 타락한 마나였다.

아마 세상에서 더럽기로는 제일 가는 종류의 마나일 것이었다.

당연히 그걸 받아들이는 몸에 심대한 타격이 가해졌다.

꾸드득, 드득!

무아지경의 와중에도 로이드는 이를 갈아댔다.

너무나 아파서, 온몸에 소름이 돋도록 고통스러워서.

전신을 덜덜 경련하면서 간신히 통증을 견뎌냈다.

흡수를 유지했다.

타락하고 부정한 마나를 흡수할수록 그의 신체 곳곳이 간접적인 죽음을 시시각각 경험했다.

덜컥!

심장 박동이 불규칙해졌다.

심실세동이 일어났다.

심장 근육이 경련했다.

심근경색이 가슴을 옥죄었다.

그러다가 가까스로 근육이 평정을 되찾았다.

호흡기도 마찬가지였다.

"쓰흐읍... 쿨럭!"

천식을 일으킨 기관지가 순식간에 좁아졌다.

호흡이 가빠지고, 얼굴 곳곳에 불그스름한 열꽃이 피었다.

허파 속 폐포가 괴사되었다가 간신히 복구되었다.

그런 현상이 전신에서 일어났다.

경련하는 위 내부에서 궤양이 생겨났다.

담낭에선 순식간에 담석이 생성되었다. 담관을 막았다. 담즙이 역류했다. 간에 담즙이 쌓였다. 담즙 내의 빌리루빈이 간 조직에 축적되었다.

황달이 일어났다. 간 조직이 실시간으로 파괴되었다. 조직이 섬유화되었다. 급속도로 일어나는 간경변 증상이었다.

근육에서도 마비가 일어났다. 단백질이 파괴되었다.

뼈에서는 골다공증과 관절염이 생겨났다.

혈액이 변질되고.

림프가 역류하고.

신경 조직이 끊어지고.

연골이 닳아 사라졌다.

그렇듯 로이드의 몸이 실시간으로 반쯤 죽었다.

그러면 로이드의 신체가 반발했다.

마나하트를 최대로 활성화했다.

망가진 조직을 복구하고, 신체의 이상을 회복했다.

파괴와 재생.

죽음과 부활.

담금질과도 같은 그 반복이 뜻밖에도 로이드에게 수련의 기회를 선물했다.

"크으... 큽!"

사시나무 떨리듯 경련하는 전신.

고통을 참아내려 가쁘게 내뱉는 호흡.

무아지경의 와중에도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불편하기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과정 자체가 그에게 수련이 되었다.

본디 수련이라는 것이 그렇다.

수련의 궁극적인 목적은 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발전하는 것도, 진보하는 것도 수련의 진정한 목적이 아니다.

진정한 수련의 목적은 불편함을 마주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마음 수련을 거듭하는 이들도, 고행을 감내하는 고행자도, 혹독한 과정을 서슴없이 받아들이곤 한다.

내 육신의 불편함.

마음속 가득한 불편함.

호흡과, 정신과, 기억의 불편함.

그렇듯 몸과 마음을 얽어매는 모든 불편함.

매일의 수련을 통해 불편함을 발견하는 것.

그렇게 마주한 불편함을 직시하는 것.

불편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인정한 불편함을 받아들이고.

마침내 끌어안고, 포용하고, 내 것으로 녹여 내는 것.

그리하여 다음 차원의 불편함을 발견하기 위한 여정을 거듭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수련의 목적이다.

강해지는 것.

진보하는 것.

나아지는 것.

그 모든 결과는 오직 목적을 향한 길에서 얻어지는 부산물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로이드는 본인의 의도와 아무런 상관없이 뜻밖의 진정한 수련에 임하게 된 셈이었다.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극단적이면서도 급진적인 불편함의 연속에 놓이고, 그걸 극복하길 반복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커으... 억...."

신음 같은 가쁜 호흡.

그 속에서 필사적으로 고통을 끌어안았다.

만약 그가 제정신이었더라면.

조금이라도 의식이 있었더라면.

절대로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지닌 또 다른 스킬 옵션이 이런 초인적인 인내를 가능케 했다.

딩동.

[마나하트 스킬 옵션 ③ : 무아지경이 발동됩니다.]

[60초 동안 무아지경의 상태에 빠져 하나의 목표만을 위해 맹목적으로 집중하게 됩니다.]

때맞춰 무아지경 옵션이 발동되었다.

그때부터였다.

로이드의 표정이 평온해졌다.

고통 자체를 감내하며 급속충전을 계속해서 이어갔다.

극도로 부정하고 탁하며 부패한 언데드의 마나.

그 모든 기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갔다.

동시에 그의 마나하트가 더욱 확장되었다.

딩동!

[마나하트 스킬의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스킬명 : 마나하트]

[단계 : 소드 익스퍼트 하급 Lv 4]

[신체 능력 향상률 : 360%]

[보유 중인 스킬 전용 옵션 : ① 충격상쇄 ② 만독불침 ③ 무아지경]

[다음 레벨업에 필요한 RP : 450]

[현재 보유 중인 RP : 2,870]

순식간에 마나하트 스킬 레벨이 올랐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침없는 성장의 시작점에 불과했다.

그의 꽉 감긴 눈꺼풀 앞에 메시지가 연이어 떠올랐다.

마나하트 스킬의 레벨이 폭풍 같은 기세로 올라갔다.

4레벨에서 5레벨로.

5레벨을 넘어 6레벨과 7레벨로.

8, 9레벨을 뛰어넘어 10레벨까지.

마침내 하급 10레벨의 벽마저 넘어섰다.

딩동!

[스킬 등급 업!]

[스킬명 : 마나하트]

[단계 : 소드 익스퍼트 중급 Lv 1]

[신체 능력 향상률 : 600%]

[보유 중인 스킬 전용 옵션 : ① 충격상쇄 ② 만독불침 ③ 무아지경]

[다음 레벨업에 필요한 RP : 800]

[마나하트 스킬의 등급이 <소드 익스퍼트 중급>으로 상승했습니다.]

[당신의 마나하트는 무아지경 속에서 지극히 부패한 기운을 받아들여 성공적으로 소화하였습니다. 이 특별한 경험이 스킬에 새로운 전용 옵션을 부여합니다.]

[스킬 전용 옵션 ④ : 언...]

그때였다.

갑작스럽게 새로운 긴급 메시지가 난입했다.

스킬 안내 메시지를 순식간에 뒤덮었다.

딩동!

[아스라한 심법 스킬 옵션 ⑤ : 급속충전의 발동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키이이이...!

긴급 메시지와 함께 날뛰던 마나써클이 잠잠해졌다.

광포하게 회전하던 기세가 차츰 누그러들었다.

포악하고 게걸스럽던 마나 흡수가 종료되었다.

휘우우우웅.

바람이 불어왔다.

로이드를 중심으로 펼쳐졌던 반경 7미터의 흡수 공간.

그 바닥에 수북하게 쌓인 먼지를 바람이 앗아 갔다.

단 5분.

그 사이에 그를 향해 달려들다가 마나를 빼앗겨 가루만 남은 언데드 마스토돈 수십 마리가 부스러지며 쌓인 먼지였다.

하지만 그 먼지바람 뒤쪽으로.

불길한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쿼오오옥!"

아직 언데드 마스토돈이 백 마리가 넘도록 남아 있었다.

협곡이 좁아서.

한 번에 한 마리씩만 달려들 수 있어서.

5분이라는 짧은 시간만으로는 무리 전체를 다 흡수할 수 없었던 까닭이었다.

"쿼오옥!"

흉악한 급속충전의 범위에 걸려들지 않은 놈들이 살의를 불태웠다.

여전히 바닥에 앉아 있는 로이드를 향해 돌진했다.

"쿠워오오옥-!"

쿵쿵쿵쿵쿵!

지축이 뒤흔들렸다.

4미터 덩치의 언데드 마수들이 거침없이 짓쳐들었다.

그때까지도 로이드는 평온하게 앉아 있기만 했다.

아무런 보호 수단도 없었다.

일어나 도망칠 생각도 없어 보였다.

적어도 로이드가 천천히 눈을 뜨기 전까지는, 정말로 그런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였다.

"뽀동! 뽀도동!"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고 느낀 뽀동이가 움직였다.

절대로 다가오지 말라던 로이드의 당부가 떠올랐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대로면 로이드가 마스토돈에게 밟힐 것 같아서.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앞뒤 잴 것 없이 달려나갔다.

로이드를 지나쳐 마스토돈에게 박치기를 시도했다.

아니, 시도하려고 했다.

그 순간 로이드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백 마리가 넘는 마스토돈을 향해 서슴없이 달려들었을 것이었다.

"뽀동아, 그만."

"...뽀?"

차분한 목소리.

뽀동이는 멈칫했다.

어느새 로이드가 눈을 뜨고 있었다.

정면의 언데드 마스토돈을 그저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쿼오옥?"

돌진해오던 언데드 마스토돈이 다급히 자리에 멈추어 섰다.

단지 로이드와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혹은 한없는 공포에 사로잡힌 듯한 모습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쿼어오옥!"

선두의 마스토돈을 시작으로 무리 전체가 돌진을 멈추었다.

그 순간, 로이드의 눈앞에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마나하트 스킬 옵션 ④ : 언데드 지배가 활성화됩니다.]

154화. 마나 포식자 (2)

 

 

"쿼오옥?"

지축을 울리며 돌진하던 언데드 마스토돈이었다.

그 자비 없던 발길이 너무나 갑자기 멈추었다.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혹은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전신을 크게 움찔거리며 다급히 돌진을 멈추었다.

"...쿼오오옥?"

원래 언데드는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그 어떤 강력한 적을 만나도 아무런 두려움이나 망설임 없이 사나운 공세를 유지한다.

그것이 바로 언데드의 가장 큰 강점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언데드 마스토돈은 분명하고도 명확한 공포심을 느끼고 있었다.

바로 앞에 있는 인간.

그저 바닥에 앉아 있는 로이드.

그가 평온하게 치켜뜬 눈과 시선이 얽히면서부터였다.

 

딩동.

 

[마나하트 스킬 옵션 ④ : 언데드 지배가 활성화됩니다.]

 

새로운 메시지가 로이드의 눈앞에 떠올랐다.

불현듯 품으로 안겨 온 선물꾸러미처럼.

혹은 시련을 이겨낸 자에게 주어진 영광의 증표처럼.

힘찬 메시지의 물결이 로이드의 시야 일부를 점령했다.

 

[당신의 마나하트는 무아지경 속에서 지극히 부패한 기운을 대량으로 받아들였고, 이를 성공적으로 소화하였습니다. 이 특별한 경험이 스킬에 새로운 전용 옵션을 부여합니다.]

[스킬 전용 옵션 ④ : 언데드 지배 - 지닌 마나의 보유량이 당신의 것보다 적은 언데드 개체를 일정 시간 지배하여 조종합니다. 지배 시간은 당신과 피지배 언데드의 마나 보유량에 따라 결정됩니다. 지배 시간 동안 피지배 언데드 개체는 당신의 모든 명령을 충실히 이행할 것입니다. 단, 해당 언데드 개체는 당신과 마주 보는 상태에서만 당신에게 복종하며, 이 조건이 사라질 때에는 즉시 당신을 향해 잔혹한 공격성을 드러낼 것입니다. 지배 개체 수 제한 없음. 단, 하루 1회만 사용 가능.]

 

'역시 메시지 내용 그대로네.'

로이드는 조금 전의 일을 떠올렸다.

급속충전을 사용한 직후였던가.

주위의 소란이 확 느껴졌다.

눈을 떴다.

이쪽을 향해 달려들던 언데드 마스토돈이 보였다.

처음엔 급히 일어나 피하려 했다.

하지만 그때 새로운 메시지를 발견했다.

언데드 지배가 활성화되었다는 메시지였다.

바로 그 순간, 선두의 언데드 마스토돈과 눈이 마주쳤다.

그때부터였다.

이쪽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공포에 질리는 언데드의 모습.

마치 다음날 갚아준다며 만 원을 빌리고는 일주일째 잠수를 타다가 학생식당에서 딱 마주친 친구놈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한마디로 쫄아 있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급속충전으로 언데드의 마나를 대량으로 흡수한 덕분에 언데드를 일정 시간 지배할 수 있는 스킬이 생겼다는 거지?'

요약하자면 그런 듯했다.

눈앞에서 돌진을 멈춘 언데드 마스토돈 무리의 모습이 그 증거였다.

'하. 이런 개꿀 옵션이 생기는 상황까지 기대하고 계산한 건 아니었는데.'

그저 급속충전을 사용하는 게 최선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좁은 협곡에서 놈들의 돌진을 막는 데에 가장 효율적일 거라고 판단했을 뿐이었다.

한데 이렇듯 꿀맛 나는 옵션을 얻게 되다니.

'심지어 익스퍼트 중급이 됐어.'

예전과 차원이 다른 감각이 느껴졌다.

온몸에 깃든 활력도 장난이 아니었다.

예전 익스퍼트 하급 시절과 비교하자면 헬스장 핵초보 멸치에서 순식간에 3대 운동 500kg쯤 치는 헬스장 죽돌이로 진화(?)한 느낌이었다.

'이거 완전 초겨울에 꺼낸 코트 주머니에서 작년에 넣어 뒀다가 깜빡한 5만 원짜리 지폐를 발견한 기분이네.'

하지만 좋아하고만 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로이드의 시선이 메시지창 아래쪽을 향했다.

그곳에 활성화된 언데드 지배 스킬의 남은 시간이 표시되어 있었다.

 

[현재 지배 중인 언데드 개체 : 108구]

[지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4m 58s... 4m 57s....]

 

이 협곡에 남은 언데드 마스토돈의 숫자가 108마리.

그리고 실시간으로 줄어들고 있는 지배 종료까지의 시간이 4분 50여 초 남짓.

'시간이 얼마 없네. 이거, 옵션 시간만 좀 길어지면 아예 좀비나 스켈레톤 같은 언데드를 무임금 일꾼으로 부려먹을 수 있을지도.'

어쩌면 정말로 그걸 실현할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단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허투루 헤벌쭉하고 있을 때 또한 아니다.

로이드는 즉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언데드 마스토돈 무리와 마주보고 있는 상태가 풀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뒷걸음질쳤다.

뽀동이와 아기 마스토돈 5남매 곁으로 다가갔다.

"다들 괜찮아?"

"뽀동!"

"뿌이애애앵!"

"그래그래, 다행이야. 다들 무서웠지?"

"뽀도동! 뽀동!"

"아니야? 아가들 무서울까 봐 꼭 안아 주고 있었어?"

"뽀동!"

"그래, 잘했어."

아무래도 이쪽이 급속충전을 발동하고 무아지경에 빠져 있는 사이, 뽀동이가 아기 마스토돈 5남매를 꼭 끌어안아 지켜 주고 있었던 듯했다.

로이드는 멈춰 있는 언데드 마스토돈 무리를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그러니까 이젠 여길 빠져나가자. 내 설명 잘 들어."

"뽀동!"

"뿌이애앵!"

"저 녀석들의 등을 밟고 건너뛰어서 협곡 출구로 달려갈 거야. 시간이 얼마 없으니 따로 질문은 안 받을 거고."

"...뽀동!"

"뿌애앵!"

녀석들도 상황이 만만치 않음을 충분히 알고 있는 듯했다.

별다른 의문을 표하지 않고 대뜸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드가 빠르게 지시했다.

"뽀동이는 날 태워. 다섯 아기들은? 서로 코로 꼬리를 잡아. 기차놀이 하듯이. 줄줄이 비엔나처럼. 모르겠어? 이렇게. 좋아, 잘했어. 앞으로도 놓치지 말고 꽉 잡아. 여길 빠져나갈 때까지. 알았지?"

"뿌이애애앵!"

언데드 마스토돈 무리가 꽉 막고 있는 협곡이었다.

한데 놈들을 뒤로 물러나게 하면서 이곳을 빠져나가려면?

5분도 남지 않은 시간으로는 턱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언데드 지배가 풀리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려면 놈들의 등을 밟고 건너뛰는 방법밖에 없어 보였다.

"자, 그럼 가자!"

"뽀동!"

"뿌이애앵!"

남은 시간, 4분 26초.

뽀동이와 아기 마스토돈 5남매가 땅을 박찼다.

동시에 로이드가 언데드 마스토돈 무리를 향해 명령했다.

"전부 다 꿇어!"

 

츠즈즈!

 

그의 명령이 강력한 사념이 되었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쿠, 쿼오옥!"

잠깐 주춤하나 싶었던 선두의 언데드 마스토돈이 앞다리를 숙였다. 뒷다리를 굽혔다. 커다란 몸을 최대한 바싹 낮추었다.

그렇게 머리를 숙이고.

두꺼운 코를 앞으로 뻗었다.

딱 밟고 올라가기 좋은 계단처럼 엎드렸다.

"자, 최대한 빠르게!"

"뽀동!"

"뿌으이애앵!"

첫 번째 언데드 마스토돈의 머리와 등을 밟았다. 올라섰다. 뒤쪽의 광경이 드러났다.

"...쿼오옥!"

100마리가 넘는 언데드 마스토돈이 줄지어 협곡을 꽉 채우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가즈아!"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질주했다.

 

쿠다다다닥!

 

첫 번째 놈의 등을 밟고.

두 번째 놈의 정수리를 박차고.

세 번째 놈의 궁둥짝을 발판 삼아 도약했다.

그때부터였다.

"쿼오옥!"

이쪽이 한 놈씩 밟고 지나갈 때마다.

밟혔던 언데드 마스토돈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언제 얌전히 엎드리고 있었느냐는 듯.

이쪽의 지배를 받았던 일조차 없었다는 듯.

흉맹하게 떨치듯 일어나 이쪽의 등을 향해 달려왔다.

사나운 살의를 터뜨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역시 옵션 설명 그대로 조건이 풀리니까 바로 태세전환이네.'

이쪽이 뽀동이를 타고서 놈들의 등을 타 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마주 본다'라는 조건이 풀린 까닭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뒤를 돌아볼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앞쪽에 얌전히 엎드리고 있는 놈이 들고 일어설 것이다.

즉, 지금 이쪽이 행할 수 있는 최선은 딱 하나였다.

"달려! 더 빨리!"

"뽀동!"

"뿌으이애앵!"

상황을 깨달은 뽀동이가 더욱 힘껏 내달렸다.

통통한 옆구리가 출렁거리도록.

뽕뽕한 궁둥이가 몽실거리도록.

자그마한 손과 발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바람처럼 뛰고, 질주했다.

그 쏜살같은 질주에 뒤쪽의 아기 마스토돈 5남매가 허공에 봉봉 줄지어 떠올랐다.

"뿌이애애앵!"

코로 뽀동이의 꼬리를 감아쥔 첫째가 당황해서 울었다.

그만큼 코에 더욱 힘을 주었다.

뽀동이의 꼬리를 더욱 야물딱지게 감아쥐었다.

첫째의 꼬리를 감아쥔 둘째도, 둘째의 꼬리를 쥔 셋째도, 넷째와 막둥이도 마찬가지였다.

앞쪽의 형아와 누나를 믿었다.

코와 궁둥이에 힘을 바짝 주었다.

덕분에 그 누구도 대열에서 낙오하지 않을 수 있었다.

"좋아. 이대로 가면 돼. 계속 달려, 뽀동아!"

"뽀도동!"

남은 시간 3분 25초.

로이드는 남은 시간과 앞쪽에 엎드린 언데드 마스토돈의 숫자를 재빨리 계산했다.

'이제 50마리쯤 남았어. 대열의 중간을 넘었어. 아까 4분 26초가 남았을 때 출발했으니까, 여기까지 딱 1분 1초가 걸린 거야. 그러니까 가능해. 이 기세만 그대로 살리면 완전 여유롭게 빠져나갈 수 있어.'

희망이 느껴졌다.

무사 탈출의 각이 보였다.

그는 확신을 담아 뽀동이의 질주를 독려했다.

"좋아! 잘하고 있어, 뽀동아! 조금만 더 힘내고!"

"뽀도동! 헥헥!"

"뒤에 아가들! 앞쪽 형아 누나 꼬리 놓치지 말고!"

"뿌이애앵!"

좋다.

모든 것이 잘되고 있다.

이대로만 도망치면 된다.

"자, 가즈아!"

"뽀동!"

더욱 힘차게 뛰었다.

시시각각 앞에 남은 마스토돈의 숫자가 줄어들었다.

스물, 열다섯, 여덟, 다섯, 셋, 둘.

마침내 마지막 놈의 등을 뛰어넘었다.

 

파아앗!

 

"됐다! 이대로 협곡 출구까지!"

"뽀동!"

"뿌이애앵!"

이미 모든 언데드 마스토돈에 대한 지배가 풀린 마당이었다.

다시 뒤를 돌아본다 한들 오늘은 놈들을 지배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언데드 지배 옵션은 하루에 한 번이 한계라고 했으니까.'

이제 남은 건 전력으로 달리는 일뿐이다.

먼저 협곡을 빠져나가고.

그 순간 협곡 옆의 우뚝 솟은 절벽에 발파를 쏘리라.

협곡 전체에 산사태를 일으켜 언데드 마스토돈 무리를 매장해 버리리라.

로이드는 순식간에 계획을 정리했다.

그때부터였다.

뽀동이를 독려했다.

비좁은 길을 질주했다.

개울을 건너뛰고, 몇 번의 모퉁이를 돌았다.

저 멀리, 협곡 출구가 보였다.

그만큼 희망의 빛이 또렷해졌다.

무사 탈출의 각이 한층 확실해졌다.

그런 것만 같았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쿠워옥!"

 

후우웅!

 

거친 괴성과 함께 공기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에서 뭔가가 날아오는 느낌이 났다.

"어엇?"

로이드는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몸을 숙였다.

그 직후였다.

 

후웅!

 

섬뜩한 소리와 함께 엄청나게 커다랗고 시커먼 덩어리 하나가 머리 위를 스치듯 지나갔다.

"바위?"

지름이 3미터는 될 법한 바위였다.

아마 뒤쪽의 어느 마스토돈이 코를 투석기 삼아 내던진 듯했다.

'맞았으면 한 큐에 다이렉트로 조상님 얼굴 뵈러 갈 뻔했네.'

로이드는 식은땀을 주르륵 흘리며 안도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자신의 안도가 섣부른 것이었음을 깨달아야 했다.

자신을 스치듯 지나쳐간 바윗덩이.

그 커다란 덩어리가 빨랫줄처럼 쭉 뻗는 궤적을 그리며 협곡 옆으로 우뚝 솟은 절벽을 향해 날아갔기 때문이었다.

'...어?'

날아간다. 서슴없이. 부딪친다. 쾅. 꽂힌다.

그리고, 절벽 전체가 흔들린다.

 

콰아아아아앙-!

 

비좁은 협곡과 절벽이었다.

그 안에서 세차게 부딪친 바위가 엄청난 굉음과 메아리를 만들었다.

절벽 전체가 몸을 떨었다.

쌔한 느낌을 선사했다.

'설마?'

문득 불길함이 느껴졌다.

설마 하는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측량 스킬을 발동했다.

그러자 보였다.

'절벽 전체로 실금이 번져가고 있어.'

아주 미세한 균열이었다.

하지만 그게 시시각각 커져가는 게 너무나 또렷하게 보였다.

소름이 돋았다.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외쳤다.

"뽀동아! 더 달려! 최대한 빠르게!"

그 순간이었다.

 

콰자작, 꽈앙-!

 

뭔가가 뒤틀리는 소리.

터지며 짓눌리는 굉음.

절벽 곳곳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산사태의 시작이었다.

"이런 미친!"

 

콰앙-! 콰아앙!

 

사방에서 바윗덩이가 떨어져 내려왔다.

그 사이를 질주했다.

요리조리 피하며.

조금이라도 살아보려고.

아등바등 뛰고, 구르고, 물러났다가, 다시 돌진했다.

하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안 돼. 빠져나갈 길이 안 보여.'

눈앞이 캄캄해졌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저 앞에 보이는 협곡 출입구.

그곳으로 가는 모든 경로가 무너지고 있었다.

아니, 시야에 보이는 모든 곳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수천, 수만 톤의 토사와 바위가 사방에서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이미 피하는 것이 무의미해 보였다.

이건 발파로도 안 된다.

'압사 엔딩이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저 웃음만 흘려내며 고개를 들었다.

문득, 억울해졌다.

아까 괜히 나섰구나 싶었다.

그냥 작업자들이랑 같이 도망칠걸.

사람들 살려보겠다고 혼자 위험하게 나서는 거, 하지 말걸.

그러나 후회하기엔 이미 늦었다.

고개를 들어 보아도.

시선을 돌려 보아도.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시야 대부분을 흙더미와 바위가 뒤덮어 왔다.

그러니까, 이젠 정말로 끝이다.

"...미안하다, 얘들아."

최후를 직감한 로이드가 말했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취리릭!

 

"...!"

별안간 새하얀 무언가가 날아왔다.

팔과 다리, 온몸을 끈적하게 휘감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뽀동?"

"뿌이애앵?"

뽀동이와 아기 마스토돈 5남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대응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새하얀 그물 같은 것에 휘감겼다.

그러니까 이건....

"거미줄?"

로이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음 순간.

그의 혼잣말에 대답을 돌려주듯 맑은 외침이 하늘에서부터 울려 퍼졌다.

"꼬밍-!"

155화. 책임지는 사람 (1)

 

 

"꼬밍!"

하늘에서부터 울려 퍼진 외침.

동시에 새하얀 뭔가가 날아왔다.

순식간에 온몸을 휘감으며 달라붙어 왔다.

마치 그물처럼.

 

취리릭, 촤촥!

 

"...!"

갑작스러운 포박.

로이드는 움찔했다.

저도 모르게 자신의 몸을 휘감은 새하얀 그물을 쳐다보았다.

'거미줄?'

하얗다. 끈적인다. 온몸에 달라붙었다.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을 태우고 있던 뽀동이도.

뽀동이의 꼬리를 잡고 있던 아기 마스토돈 5남매도.

모두가 뽁뽁이로 포장된 택배처럼 거미줄에 꽁꽁 휘감겨 있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당겨졌다.

 

쫘아아악!

 

"...궯!"

전신을 휘감은 거미줄이 확 당겨졌다.

어떻게 반응할 틈도 없이 힘껏 딸려갔다.

뽀동이와 아기 5남매도 마찬가지였다.

"...쁘등!"

"...쁘으읭!"

 

화아악!

 

원래 전력으로 달리고 있던 상황.

거기에 온몸을 앞쪽으로 힘껏 당겨 주는 거미줄.

두 가지 힘이 맞물리며 폭발적인 가속력을 뿜어냈다.

질주 속도가 두 배가 되었다.

덕분에 위에서 떨어져 내려오던 거대한 바위의 범위를 순식간에, 아슬아슬하게 벗어날 수 있었다.

 

쿠아아아앙-!

 

떨어지는 것만으로도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굉음을 만드는 바위.

만일 저기에 깔렸으면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어떻게 되긴! 한 큐에 쥐포 엔딩 당첨이었겠지.'

로이드는 헐떡이며 뒤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하지만 한가롭게 소름이나 즐길(?) 틈은 없었다.

위쪽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더 당길 겁니다. 꽉 잡으십시오."

"...!"

그와 동시에 협곡 위로 비치는 하늘에 익숙한 실루엣이 엿보였다.

"꼬밍!"

시원하게 펼친 날개로 활강하는 커다란 뱁새의 모습.

그 위에 타고 있는 은발의 기사도 보였다.

꼬밍이와 하비엘이었다.

"하하, 하! 하비엘, 반갑... 그와앏!"

 

쭈와아악!

 

또 한 번, 거미줄 그물이 전신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이번에는 앞쪽이 아니라 위쪽을 향해서였다.

덕분에 뽀동이의 두 발이 땅에서 떠올랐다.

아기 마스토돈 5남매도 마찬가지였다.

즉, 뽀동이와 아기 5남매는 모두 졸지에 두 손으로 볼따구 잡고 온몸을 들어 올리는 서울 구경 놀이를 온몸으로 체감하게 되었다.

"쁘, 쁘드등!"

"쁘, 쁘으읭!"

당황해서 바동거렸다.

그럴수록 꼬밍이의 날갯짓이 더욱 바빠졌다.

차츰, 차근차근, 그러나 확실하게.

모두가 협곡 바닥에서 더욱 높이 떠올랐다.

양옆에서 절벽을 따라 쏟아지는 수만 톤의 토사와 암석.

그 파괴적 붕괴의 틈바구니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지나쳤다. 상승했다. 솟구쳤다. 더욱 높이. 훨훨. 마침내 안전한 절벽 위까지.

그때쯤, 꼬밍이의 등 위쪽에서 하비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뽀동 경? 거미줄 끊겠습니다. 준비하시길."

"쁘등!"

뽀동이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 순간, 위쪽에서 하비엘의 검이 번득였다.

 

터어엉-!

 

견고하게 버텨오던 거미줄이 오러에 끊어졌다.

뽀동이와 아기 마스토돈 5남매가 절벽 위로 착지했다.

하지만 로이드는 예외였다.

그를 묶은 거미줄은 끊어지지 않았다.

로이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나는?"

"로이드 님은 올라오시지요."

어쩐지 하비엘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톤쯤 쌀쌀맞게 들리는 건 이쪽만의 착각일까.

로이드는 미간을 찡그리며 위로 연결된 거미줄을 붙잡았다.

로프를 당기듯 몸을 밀어 올렸다.

마침내 꼬밍이의 등에 올라탔다.

"후아."

오늘은 정말로 죽을 뻔했다.

뒤늦은 안도의 한숨이 크게 흘러나왔다.

하지만 로이드는 한가롭게 한숨만 쉬고 있을 수 없었다.

온몸에 끈적끈적 달라붙은 거미줄을 떼어낼 여유도 느끼지 못했다.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

꼬밍이의 등 위.

앞쪽 안장에 앉은 하비엘.

이쪽을 향해 물어오는 녀석의 목소리가 더없이 차가웠다.

로이드는 몸에 붙은 거미줄을 떼어내려던 손을 멈추었다.

슬그머니 녀석의 뒤에 자리를 잡았다.

"다친 곳이 있으면? 입김이라도 호오 불어 주려고?"

"썩지 않도록 도려내 주고 싶습니다만."

"...컥."

어쩐지 오늘 하비엘의 태도를 날씨로 표현한다면 폭설, 혹한이 적절할 것 같다. 그만큼 녀석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의 온도가 심상치가 않았다.

로이드는 산사태에 파묻혀 가는 협곡을 힐끔 내려다보며 대꾸했다.

"그나저나,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들었습니다."

"듣다니?"

"폭발음 말입니다."

"설마, 처음 현장에서 터졌던 시체폭발?"

"아마 그것이었겠지요."

하비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아까의 일이 떠올랐다.

아파트 단지 시공 현장에서 일하던 자신이었다.

방울이가 뿜어내는 철근을 규격에 맞도록 철걱철걱 잘라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한데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북쪽 멀리에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느낌이 심상치가 않았다.

불길하고 사악한 마나가 멀리서도 희미하게 느껴지는, 그런 종류의 폭발이었다.

즉시 현장을 박차며 빠져나왔다.

제일 먼저 꼬밍이부터 찾았다.

만약 자신이 느낀 대로 북쪽에서 뭔가 사고가 발생한 것이라면, 그 사고가 로이드가 있는 현장에서 발생한 것이라면.

'뛰어가려면 늦을 거야.'

아무리 자신이 빨라도 꼬밍이의 비행보다는 못하다.

급하게 꼬밍이를 찾았고, 사정을 설명했다.

덩치를 키워서 자신을 태워 달라고 말했다.

다행히 꼬밍이는 빨간 해바라기씨 한 알을 가지고 있었다. 만일에 대비해 로이드가 환상종들에게 하나씩 맡겨둔 씨앗이었다.

그렇게 변신한 꼬밍이를 타고 날아왔다.

북쪽으로 오는 도중에 대피 중인 작업자들과 조우했다.

작업자들을 피신시키던 바이에른 경에게서 사건의 전말을 간략히 들을 수 있었다.

로이드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도 들었다.

그래서였다.

화가 났다.

아주 많이.

"후아. 그랬던 거네. 고마워. 마침 네가 안 와 줬으면 지금쯤은 어우야.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

뒷자리에 앉아서 거친 숨을 고르는 로이드.

덕분에 살았다며.

정말로 타이밍 잘 맞췄다며.

드물게도 이쪽을 향해 고맙다고 말하는 로이드.

그 도련님의 모습이 오늘따라 유난히 얄밉게 느껴졌다.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가 저도 모르게 로이드를 향해 따끔한 일침을 놓은 것은.

"그래서, 좋습니까."

"어?"

"좋으시냔 말입니다. 저 덕분에 무사해지셔서."

"으음. 그게 말이다, 너 혹시 무슨 일 있냐?"

"아무 일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왜 그렇게 까칠해?"

"까칠하다니요.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아닌데. 까칠한 거 맞는데. 공격적이기도 하고."

"...."

"너, 나한테 뭔가 화난 일 있지?"

"예."

"헐, 숨기지도 않아."

"참으려 해 보는데, 잘 되지가 않아서 말입니다."

"어째서?"

"몰라서 물으십니까."

"혹시 아까 희생된 백색창기병 대원들 때문에 그러는 거야?"

"전혀 아닙니다."

하비엘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뒤에 앉아 있는 도련님.

저분은 정말로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것 같다.

"희생된 여섯 백색창기병은 그들의 본분을 다했을 뿐입니다. 국왕 전하의 검이자 방패로써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싸웠고,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했지요. 그것이 그들의 의무이며, 본분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희생은 존중하고 애도할 일일지언정 안타까워할 일은 아닙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다른 곳이라니?"

"로이드 님이 스스로의 본분을 망각하고 그들과 똑같은 행동을 취했다는 점이 문제인 겁니다."

"뭐?"

역시, 모른다.

이 도련님은 자신이 이 영지에서 얼마나 중요한 사람이 되었는지에 대한 자각이 없다.

하비엘의 냉랭한 말이 이어졌다.

"로이드 님은 자신이 사라진 후에 이 영지가 어떻게 될지를 생각해 본 적이 없으십니까."

"음, 있긴 한데."

"그럼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아실 텐데요."

"알지. 내가 사라지면 지금 벌여 놓은 일들을 마무리할 사람도, 수습할 사람도 없어지는 거다. 그러니 영지가 홀라당 망하게 될 거다. 그 말을 하려는 거지, 지금?"

"정확하십니다."

하비엘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예전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그저 주군의 소중한 혈육, 장남, 후계자... 그 정도로 여겼지요. 그래서 최악의 경우, 그러니까 주군과 로이드 님 둘 중에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할 때는 당연히 주군을 보호해야 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중요해지셨어?"

"그렇습니다."

하비엘이 단호하게 덧붙였다.

"로이드 님에게 정이 가서가 아닙니다. 그만큼 이 영지의 미래를 전보다 훨씬 많이 짊어지신 상태라서 그런 겁니다."

"굳이 그렇게 애써 덧붙이지 않아도 되는데."

"하지만...."

"어쨌건, 그래서 그렇게 화가 나고 삐치셨던 거였어?"

"삐친 적 없습니다만."

"맞는데. 완전 삐쳤던데. 여기 뒤쪽에서도 입술 삐죽 튀어나온 거 다 보이더만."

"로이드 님은 지금 제가 장난으로 이런 말씀을 드리는 줄 아십니...."

"그렇게 가볍게 여기는 거 아니야."

"...."

로이드의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산사태에 완전히 묻혀 가는 아래쪽의 언데드 마스토돈 무리를 바라보며, 한편으로 급박했던 아까의 순간을 되돌아보며 말했다.

"네가 하는 말, 무슨 뜻인지 충분히 알아. 그 뜻도 알아. 그러니까 이제는 위험한 일이 생겨도 전처럼 나서지 말고 안전하게 도망치라는 거잖아. 맞지?"

"예."

"한데 그런 뜻도 모르고 마음대로 위험을 무릅쓰고 나서서 이런 꼴을 당하니까 화가 난 거잖아. 그것도 맞지?"

"맞습니다."

"그런데 어떡하냐. 앞으로도 몸 사리는 건 좀 어려울 것 같은데."

"어째서입니까."

"날 믿고 일해 주던 사람들이잖아."

"...."

무어라 반박하고 싶다.

그런데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가 않는다.

그래서 선택할 수 있는 게 침묵밖에 없다.

그렇듯 하비엘이 택한 침묵 속에서 로이드의 말이 이어졌다.

"당연히 위험한 건 나도 싫어. 무섭지. 죽는 건 더 싫고. 그런데 말이다. 사람한테는 책임이라는 게 있는 거잖아."

솔직한 심정이었다.

물론 죽거나 다치는 건 싫었다.

하지만 그건 다른 사람들도, 자신 때문에 작업에 동원된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북쪽 황무지에 와서 땅을 팔 일도 없었겠지, 오늘의 작업자들은. 그렇지 않아? 내가 벌인 공사판이잖아. 내가 그 현장의 책임자인 거잖아."

"하지만...."

"난 책임이라는 거, 그런 거라고 생각해. 아무리 내가 나쁜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도. 얄미운 놈들을 수시로 등쳐먹고 엿 먹인다 해도. 최소한 날 믿고 따라와 주는 내 사람들한테는 그러지 않는 거."

문득, 대한민국에서의 일들이 떠올랐다.

현장은 항상 위험한 곳이었다.

조금만 아차하면 갖가지 사고가 터졌다.

비록 자신은 운이 좋아서 사고를 겪은 적이 없었지만, 뉴스를 보면 사고는 언제나 끊이지 않았다.

용접 현장에서 화재가 나거나.

낡은 타워크레인이 무너지거나.

그 밖에도 다양한 안전사고가 발생하곤 했다.

그때마다 희생되는 건 현장에서 뛰는 작업자들이었다.

한데 책임은?

제대로 지는 사람이 없었다.

해봤자 현장 소장 정도가 꼬리 자르기 식으로 징계를 받을까.

건설 회사는 그저 면피용으로만 애도를 표하곤 했다.

쥐꼬리만 한 보상금마저도 더 줄여서 지급하려 애쓰는 경우마저 있었다.

그러고 난 뒤에는?

비슷한 일이 잊을 만하면 반복되었다.

사고의 원인을 제거하려 나서는 사람도 없었다.

비용이 많이 드니까.

수고스러우니까.

그저 지금까지 해 왔던 그대로 굴리면 된다고.

안전 대책을 마련하는 비용보다는 사고 희생자에게 지급하는 위로 금액이 더 싸다고.

경제적인 논리와 핑계를 구실로 책임을 미루어 두기만 했다.

그런 모습이 너무나 싫었다.

"그래서야. 내 어깨에 얹힌 책임이라는 거, 내가 책임지는 현장에서마저 외면하고 싶지가 않네."

솔직한 진심을 담아 말했다.

앞으로도 이러리라고.

자기 사람들에 대한 책임은 놓기 싫다고.

무섭고 짜증나고 귀찮아도 그래보고 싶다고.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래도 뭐, 나도 당연히 죽거나 다치는 건 싫고 무서우니까 최대한 몸 사려는 볼게. 널 위해서라도 말이다."

"저를 위해서라니요."

앞자리의 하비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느냐는 반응이다.

로이드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자장가 말이야."

"예?"

"너, 솔직하게 말해 볼래? 내가 잘못되면 자장가 불러 줄 사람 없어지니까 이러는 거지? 사실은 그게 무서운 거 아냐?"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씀을...."

"어라, 발끈하는 거 보니까 의외로 정곡을 찔린 거 같은데?"

"전혀. 터무니없는 말씀이십니다."

"그래?"

"예."

"확실하게?"

"물론이지요."

"그런데 왜 귓불이 빨개지셨어?"

"바람이 차가워서 그런 겁니다만."

"방금 대답하는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는데?"

"큰일이군요. 아까 귀가 잘못되신 것 아닙니까?"

"어허. 그렇게 둘러대기야?"

"천만의 말씀을."

하비엘이 쌀쌀맞은 목소리로 고개를 홱 돌렸다.

하지만 그 순간, 로이드의 눈앞에는 뜻밖의 반가운 메시지가 떠오르고 있었다.

 

딩동.

 

[하비엘 아스라한이 당신이 밝힌 포부와 진심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하비엘 아스라한이 오늘, 당신에게서 발견한 새로운 면모에 자그마한 존경심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비엘 아스라한의 당신에 대한 호감도가 대폭 상승하였습니다.]

156화. 책임지는 사람 (2)

 

 

 

[하비엘 아스라한이 오늘, 당신에게서 발견한 새로운 면모에 자그마한 존경심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비엘 아스라한은 당신의 생각과 포부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비엘 아스라한이 당신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하비엘 아스라한의 당신에 대한 호감도가 +15 상승하였습니다.]

[하비엘 아스라한과의 현재 관계 : +23]

[주요 인물과의 대폭적인 관계 개선으로 270 RP를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3,140]

 

[하비엘 아스라한과의 친밀 등급이 <일상적 관심>에서 <일상적 호의>로 1단계 상향되었습니다.]

[친밀 등급 상향에 따른 보너스로 100 RP를 추가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3,240]

 

'헐.'

로이드는 눈앞에 샤랄라 떠오르는 메시지를 빠르게 읽어내렸다.

읽다 보니까 절로 미소가 새어나왔다.

조금은 음흉해진 눈길로 앞자리 하비엘의 알밤 같은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짜식, 좋냐."

"...갑자기 무슨 말씀입니까, 그게."

"이 형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감동 먹었냐고."

"기대도 마시지요. 절대로. 전혀. 결단코 그럴 일 없습니다."

오늘따라 녀석의 가로젓는 고갯짓이 유난해 보이는 건 착각일까. 혹은 평소보다 더 강하게 보이는 건 이쪽만의 착시일까.

녀석의 쌀쌀맞게 톡 쏘는 말이 이어졌다.

"감동 받을 일 없습니다. 자신의 위치와 중요함조차 망각하고서 함부로 위험에 뛰어드는 사람의 변명에 감동이라니요. 게다가 저는 로이드 님과 형제가 아닙니다만."

"왜. 나보다 다섯 살 어리잖아."

"젊은 겁니다. 그리고 쌩쌩한 거고 말입니다."

"어이. 너도 5년 뒤엔 내 나이가 될 건데?"

"그땐 로이드 님은 그만큼 더 늙어 계시겠지요."

"...커헐."

"어쨌건 신체적인 나이의 많고 적음만으로 로이드 님을 형제처럼 대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 부질없는 기대는 일찌감치 접어두시지요."

"선을 긋고 지내시겠다?"

"애초에 그런 사이니까요."

여전히 쌀쌀맞은 녀석의 목소리.

듣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도저히 지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 행동은 참 다르네?"

"무슨 말씀이신지."

"너, 지금 한 손은 내 소매 잡아주고 있는데?"

"...."

"아까부터 이랬잖아. 나 처음 꼬밍이 등에 탔던 때부터."

"...."

"설마 나 떨어질까 봐 잡아주는 거냐?"

"착각이십니다."

"착각이라니?"

"기분 같아선 오늘 벌이신 일 때문에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데, 손이 거기까지 닿질 않아서."

"아하. 그래서 대신 소매 꽉 잡아주는 거야?"

"...."

"하긴. 내가 좀 소중하고 존경스러워야 말이지."

"...."

"아이구. 착해라, 우리 하비엘."

"확 밀어서 떨어뜨려 드릴까요."

"정말? 진심으로?"

"제발 이 정도 높이면 깔끔하게 보내드리기에 충분해야 할 텐데 말입니다. 하도 목숨줄이 바퀴벌레처럼 질기신 분이라."

"은근 진심이 섞인 거 같다?"

"당연하신 말씀을."

"...."

그렇듯 악담이 난무하는 와중에도 끝끝내 녀석은 이쪽의 소매를 놓지 않았다.

마치 당장에라도 이쪽이 떨어질까 걱정하는 것처럼.

덕분에 로이드는 안심하고서 아래쪽을 살필 수 있었다.

꼬밍이의 날갯짓 아래로 펼쳐진 협곡.

완전히 무너지고 있었다.

수십만 톤은 족히 될 토사와 바위가 협곡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그 압도적인 재앙 속에서 간헐적인 폭발이 일어나고 있었다.

토사와 암석에 맞고 깔려 짓뭉개지는 언데드 마스토돈.

놈들이 최후의 발악처럼 일으키는 시체폭발이었다.

그 폭발이 2차, 3차 산사태를 연이어 불러왔다.

'저 정도면 멀쩡하게 협곡을 빠져나올 놈은 없겠네.'

완벽한 격멸.

혹은 매장.

이후로도 협곡 상공을 몇 차례 더 선회했다.

행여나 살아남은 놈이 있을까 꼼꼼하게 관찰했다.

다행히 언데드 마스토돈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앞자리의 하비엘이 입을 열었다.

"아까 피신하던 작업자들에게 얼핏 들었습니다만, 저 언데드 마스토돈들이 땅에서 나왔다지요?"

"어."

로이드는 아까의 일을 떠올렸다.

슬러지 처리 시설을 만들기 위해 파던 구덩이.

그 땅속에 매장되어 있던 수많은 마스토돈의 시체.

"그냥 중구난방으로 묻힌 게 아니었어. 가지런히 매장된 모습이었어."

"아마도 저것들을 만든 네크로맨서의 짓이겠지요."

"그렇겠지."

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누굴까. 혹시 짐작 가는 놈이라도 있냐?"

"아니요, 전혀."

하비엘의 말이 이어졌다.

"딱히 짚이는 자가 없습니다. 게다가 네크로맨서는 워낙 찾아보기 어려운 자들이라."

"흐음, 혹시 전에 우리가 처리했던 그놈이랑 연관이 있는 건 아닐까."

"동부산맥에서 우리 병사들을 납치했던 그 흑마법사 말입니까?"

"어. 오크 부락에 석빙고 만들어주던 때. 기억하지?"

"물론입니다."

하비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자와 연관이 있는 네크로맨서의 소행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아직 그렇게 단정 짓기는...."

"그래, 알아. 성급한 거겠지."

"예,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로이드는 복잡한 눈길로 무너진 협곡을 내려다보았다.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누가 언데드 마스토돈을 만든 것인지.

무엇을 위해 영지 인근에 저것들을 묻어둔 것인지.

'단순히 보관을 위해 묻어둔 걸 내가 파내게 된 건지, 아니면 우리 영지에 뭔가 수작을 부리려던 건지. 이건 짐작을 해볼 단서조차 없네.'

소설 철혈의 기사를 되짚어 봐도 그랬다.

프론테라 영지 북쪽의 황무지에 묻힌 수백 마리의 언데드 마스토돈.

이건 소설에서도 일어난 적이 없는 일이었다.

당연했다.

소설에서는 프론테라 영지에 몬스터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동부산맥 너머 평원에 서식하던 마스토돈 무리가 이곳으로 오지도 않았으니까.

'쓰읍. 하지만 그렇다고 이 문제를 그냥 넘길 수만은 없어.'

이래저래 우환거리가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네크로맨서가 그냥 단순한 보관을 위해 묻어두었던 언데드 마스토돈이었다면?

이쪽이 그걸 캐내어서(?) 망가뜨려 버린 셈이 된다.

네크로맨서가 보상을 요구할 수도 있다.

혹은 원한을 품을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 애초부터 영지에 위해를 가하기 위해 묻어둔 것이라면?

그건 그것대로 더 큰 우환거리가 될 것이다.

이리 생각해도.

저리 감안해도.

이래저래 훗날의 걱정거리가 될 각이 보였다.

"쯧."

하지만 지금은 당장의 해야 할 일이 많다.

오늘 터진 일을 뒷수습부터 해야 한다.

대하수로 공사도 계속 진행해야 한다.

누군지 모를 네크로맨서에 대한 단서는 그 과정에 열심히 찾아보아야 하리라.

그러니, 지금은 우선순위의 일들부터 처리해야 할 때다.

"가자. 저쪽으로."

일단은 최초의 폭발을 막아주며 기절한 비벙이부터 살펴보자.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가 동쪽을 가리켰다.

꼬밍이의 날갯짓이 바빠졌다.

 

 

다행히 비벙이는 무사했다.

큰 덩치에 어울리는 엄청난 맷집 덕분이었다.

코앞에서 시체폭발을 맞았음에도 그러했다.

털이 그슬리는 약간의 화상과 뇌진탕 증세가 다였다.

"그러니까 방울아?"

"방울?"

"네가 비벙이를 간호해주면 좋을 것 같아."

"빠방울? 방울?"

"아, 너보단 하망이가 간호에 더 어울릴 거라고? 물 한 번 가득 담아와서 부어주면 그슬린 털도 씻어내고 정신 차리는 데에도 도움이 될 거라고?"

"방울! 빠방울!"

"흐음,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른데."

"방우울?"

"어차피 비벙이 녀석, 많이 다친 건 아니라서."

"방울?"

"물을 부어주는 것보단 네가 옆에 같이 있어 주는 게 훨씬 위로가 될 거 같아서."

"빠방울? 방울? 방울?"

"정말이야. 내 말 믿어봐. 너한텐 그런 능력이 충분히 있어."

"방우울?"

끝까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방울이였다.

그런 녀석의 머리를 토닥이며 비벙이의 곁에 붙여주었다.

그리고 로이드의 예언(?)이 적중했다.

"비벙! 비버벙! 비벙!"

정신을 차린 비벙이는 곁에 있는 방울이의 모습을 보자마자 난리가 났다.

자신은 괜찮다고.

그 정도 폭발은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털 그슬린 건 침 좀 바르면 낫는 거라고.

뇌진탕도 마찬가지라고.

그런 거 일어난 적도 없다고.

그냥 조금 노곤해서 졸았던 거라고.

벌떡 일어나더니 듬직한 표정을 마구마구 지어댔다.

덕분에 방울이에게 잔소리를 실컷 들었다.

"방울! 빠방울!"

그런 게 어딨냐고.

환자는 누워서 쉬어야 한다고.

안 그러면 간호 그만둘 거라고.

그 말에 비벙이가 빛의 속도로 다시 드러누웠음은 물론이었다.

"비버벙!"

어느새 귀에 걸린 비벙이의 입꼬리.

그걸로 보아 녀석을 딱히 걱정해줄 필요는 없을 듯했다.

그 뒤로도 로이드는 바쁘게 움직였다.

전사한 여섯 백색창기병의 유해를 정성껏 수습했다.

사고가 일어난 현장을 며칠에 걸쳐 정리했다.

언데드 마스토돈을 발견한 구덩이.

그리고 붕괴가 일어난 협곡까지.

이번 사건이 벌어진 장소들을 꼼꼼하게 정리하고, 수색했다. 혹시나 남겨져 있을지 모를 네크로맨서의 단서를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딱히 발견되는 단서랄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너무 조바심내지는 말거라. 나는 말이다, 네가 이렇게 무사한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인지 모르겠구나."

 

달칵.

 

며칠만의 제대로 된 저녁 식사일까.

로이드는 백작 부인이 앞에 놓아주는 접시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거, 아까 하셨던 말씀과는 이야기가 조금 다른 것 같은데요."

"이야기가 다르다니?"

"바쁘더라도 잠깐 간단한 것이라도 먹고 가거라, 라고 말씀하시며 절 잡아끄셨잖아요?"

"그랬지."

"그래서 정말 그 말씀대로 간단한 걸로 요기나 하려고 제가 여기로 온 거잖아요?"

"그랬지."

"그런데 이 접시 위의 수북하다 못해 동부산맥 최고봉 꼭대기보다 더 높게 치솟은 음식 더미는 대체 뭘까요."

"으음, 차린 게 부족하니?"

"아뇨. 다 먹었다간 배가 터질 것 같아서 걱정하는 중입니다만."

"너무 걱정 말거라. 더 먹을 것도 넉넉히 있단다."

"...."

답은 정해져 있으니까 넌 닥치고 먹기나 해.

차라리 대놓고 그렇게 말해주는 편이 마음 편할 것 같다.

로이드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자신의 접시를 쳐다보았다.

일단 접시의 크기가 엄청나게 컸다.

지름만 해도 50센티는 족히 되어 보였다.

그러니까 이건 접시가 아니라 둥근 쟁반이라고 불러야 어울릴 것 같았다.

그런 초대형 접시 위에 온갖 음식이 빼곡하게 가득 담겨 있었다.

마치 난생처음 뷔페에 온 사람의 첫 접시처럼.

혹은 제대로 각 잡고 방송하는 먹방 너튜버의 식단처럼.

샐러드와 소시지, 달걀과 스테이크, 절인 고기와 빵, 소스 얹은 면발과 다진 감자, 버터로 익힌 거위와 향긋한 연어찜, 거기에 크림 가득 발린 옥수수와 빵가루를 입혀 튀긴 닭고기까지.

그 밖에도 수많은 음식이 사열 종대 연병장 다섯 바퀴 반을 채울 기세로 접시를 가득 점령하고 있었다.

"...저기, 이거 다 먹지도 못할 거 같은데요."

"괜찮단다. 오래오래 천천히 먹으렴."

"어, 으음, 그러려면 열흘은 걸릴 거 같은데."

조금 곤란했다.

밀린 일이 많았다.

해가 지기 전에 현장 정리를 마쳐야 했다.

내일 정리할 구획을 미리 확인해 보아야 했다.

엄청나게 피곤하지만, 당장 쓰러져서 푹 자고 싶지만, 그래도 할 일이니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데 그런 이쪽의 바쁨을 알고 있을 백작부인이 오늘따라 유독 고집을 드러냈다.

"알고 있단다. 네가 바쁘다는 것도. 빨리 현장에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으음, 그러면 저 여기 소시지 한 덩이만 먹고 얼른...."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네 얼굴을 언제 이렇듯 편하게 보겠니."

"...."

"말은 하지 않지만, 네 아버지도 요즘 걱정이 많으시단다. 네가 너무 무리하는 것 같다고. 혼자 다 짊어지려는 것 같다고 말이다."

"...."

"그래서란다. 가끔은 어미의 말을 들으렴. 하루 정도는 배부르게 먹고, 푹 쉬렴. 네 자신에게도, 널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쉴 틈을 주어보렴."

"...."

조용히 다가와 가슴에 스미는 것 같다.

아니, 실제로 백작부인이 어느새 다가와 손을 내밀어 주었다.

두 손을 꼬옥 감싸듯 잡아주었다.

염려 가득한 목소리로.

마치 등을 토닥거리듯.

지친 마음 달래주시듯.

조곤조곤 당부해주었다.

"그러니 앉으려무나."

"...네."

왜 불현듯 중학교 때가 떠오른 걸까.

주말을 앞둔 어느 저녁, 학원 가려던 내게 밥 먹고 가라고 말씀하시던 엄마 목소리가 떠오른 걸까.

그때 난 뭐라고 대답했던가.

바쁘니까 필요 없다고 했던가.

'사실은 학원 가는 것도 아니었으면서.'

친구들이랑 학원 째고 피시방 가려고.

그 약속 안 늦으려고.

엄마 말을 무시하고 그대로 집을 나섰더랬다.

그러다가 외투 안주머니에 들어 있던 지폐를 뒤늦게 발견했더랬다.

밖에 나가서도 굶지 말라고, 배고프게 다니지 말라고, 그런 마음으로 엄마가 주머니에 몰래 넣어주신,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 한 장이었다.

"...."

그때 엄마 말씀 잘 들을걸.

그런데 어째서인 걸까.

왜 자꾸만 백작부인의 얼굴에 그때 엄마 표정이 자꾸 겹쳐 보이는 걸까.

눈빛이 너무나 똑같아서인 건지.

아니면 그냥 그때가 그리워서인 건지.

로이드는 짐짓 콧등을 크게 찡그리며 식탁에 앉았다.

접시 가득한 음식을 천천히, 꼭꼭 씹어서 먹기 시작했다.

그저 묵묵히 먹었다.

먼 과거의 어느 날 먹지 않았던 엄마 밥을 떠올리며.

과거의 후회와 죄송함을 곱씹듯 정성껏 차근차근 먹었다.

딱히 눈물 같은 건 나지 않았다.

울컥한 것도, 일부러 눈물을 참은 것도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음식이 평소보다 아주, 조금, 짜게 느껴졌다.

157화. 책임지는 사람 (3)

 

 

이틀이 지났다.

그동안 로이드는 현장의 모든 작업을 중단시켰다.

가끔은 휴식을 취하라는 백작 부인의 조언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덕분에 현장에서 매일 땀 흘리던 공병대와 작업자들이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앞선 사고로 인해 흐트러졌던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음도 물론이었다.

"...라는 과정을 거쳤으니, 오늘부터는 다들 작업 재개입니다."

"그래도 괜찮겠느냐?"

"뭐, 예."

아침 식탁에서 프론테라 백작이 건네어 오는 질문에 로이드가 싱긋 웃었다.

"다들 이틀 동안 쉴 만큼 쉬었으니까요."

"넌 아닌 것 같다만."

"저야 항상 그렇죠."

다시금 멋쩍게 웃으며 포크로 샐러드를 쿡.

지난 이틀 동안 작업자들이 쉰 것은 맞았다.

하지만 그는 거의 쉬지 못했다.

"사람이 죽었으니까요."

언데드 마스토돈의 난동.

그 서슬에 피신하던 작업자들.

그때 모두를 위해 기꺼이 몸을 던진 백색창기병 대원 여섯 명이 있었다.

수백 마리 마스토돈의 앞을 용감하게 막았고, 목숨을 던졌다.

그들의 장례를 정중히 치러주었다.

다만 이곳에 묘를 만들지는 않았다.

엉망이 된 시신들을 정성껏 수습하여 화장했다.

귀한 은장식 함을 구해 뼛가루를 담았다.

백색창기병 대원 30명을 선별했다.

그들에게 특별휴가를 주었다.

전사한 대원들의 뼛가루 담긴 함을 왕도로 운구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왕도의 유족들에게 두둑한 위로금과 함께 진심 담긴 위로의 서신도 보냈다.

당신의 아들은, 남편은, 아버지는 진정으로 용감했노라고. 다른 이들을 살리기 위해 세상에서 가장 명예롭고 숭고한 희생을 자처하였노라고.

뭔가 상투적이고 뻔한 말 같기는 했다.

하지만 막상 유족들에게 위로의 편지를 쓰려니 그런 말 외에는 딱히 떠오르는 적절한 말이 없었다.

모두 사실이었으니까.

진심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으니까.

정녕 그들을 존경하게 되었으니까.

그래서였다.

국왕에게도 추가로 서신을 보냈다.

여섯 백색창기병 전사자들의 공적, 그들이 최후의 순간에 보여준 용기, 숭고하고도 명예로운 죽음을 최대한 정성껏 썼다.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표현과 말재주를 동원했다.

그렇게 하면 국왕이 전사자들의 가족을 더욱 잘 돌봐줄 것이다.

그런 바람을 가득 담았다.

그리고 드워프 장인 코기두스의 공방을 방문했다.

추모비 제작을 의뢰했다.

전사한 여섯 대원의 이름을 새긴 추모비였다.

그렇듯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니까.'

자신의 영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 바쳐 희생해준 사람들이었다.

그토록 고마운 이들에게 이 정도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 덕분이었을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방문을 받은 것은.

'어젯밤 블랑크 경이 날 찾아왔었지.'

문득, 지난밤의 일이 떠올랐다.

평소처럼 하비엘을 자장가로 재우고 침실로 돌아오던 때였던가.

저택 안뜰을 서성이던 백색창기병 대장, 블랑크 경과 마주쳤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노라고 했다.

꼭 할 말이 있다면서.

 

-고맙소.

대뜸 꺼내던 말.

-원래 우리는 죽는 일이 다반사외다. 수많은 전장과 싸움터를 전전하며 늘상 접하는 것이 대원의 죽음이오. 어쩌면 그래서였는지도 모르겠소. 어느새 우리가 대원을 잃는 일에 조금쯤 무감각해져 있었던 것은.

희미한 초승달빛 아래.

블랑크 경의 눈시울이 촉촉해져 있었다.

-그래서 더욱 놀랐소. 그대가, 그대의 가문이 그토록 우리 대원을 정중히 보내줄 줄은 말이오. 하여 고맙소. 그들도 자신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은 것이었노라 기뻐하였을 것이오.

-아, 그건 원래 해야 할 일을....

-아무도 그렇게까지 해준 적이 없었소.

-....

-왕실도 마찬가지였소. 물론 우리는 왕실에 충성하오. 왕실도 전사자에 대한 정중한 장례와 유족에 대한 보상을 거른 적이 없소. 그러나 형식적이라는 느낌까지는 지울 수 없었소. 그냥, 우리는 조금 특별한 소모품이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그런 느낌말이오.

블랑크 경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고맙소. 우리 대원들의 죽음을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알아주어서. 그렇게 우리의 명예를 존중해주어서.

그 순간이었던가.

눈앞에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더랬다.

 

[호감도 개방]

[백색창기병 대장 발레라디 블랑크 경이 당신의 고결한 인품에 감복하였습니다.]

[발레라디 블랑크는 왕실에 충성하는 동시에, 명예로운 기사로서 당신을 진심으로 따르고자 마음을 먹었습니다.]

[발레라디 블랑크가 내심 당신의 휘하에 귀속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이에 앞으로 발레라디 블랑크와 호감도를 올리고 RP를 획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호감도 개방 보너스로 50 RP가 특별지급됩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3,290]

 

[발레라디 블랑크의 당신에 대한 호감도가 +5 상승하였습니다.]

[발레라디 블랑크와의 현재 관계 : +52]

[등장 인물과의 관계 개선으로 45 RP를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3,335]

 

'헐.'

절로 헛숨이 들이마셔졌다.

겉으로 대놓고 선언하지만 않았다 뿐이지, 이건 거의 반쯤 충성서약을 받은 셈이나 다름없었다.

내심 기쁘면서도 뜨끔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거 국왕 누님한테 걸리면 큰일 날 듯.'

어디까지나 블랑크 경은 왕실의 기사다.

한데 엉뚱한(?) 자에게 호의 이상의 충성심을 품다니.

로이드는 급히 웃으며 블랑크 경을 다독였더랬다.

-경의 그 마음 잘 알겠습니다. 대원을 잃으신 건 안타깝고도 슬픈 일이었겠지요. 아마 국왕 전하께서도 저와 같은 마음이실 겁니다.

일부러 국왕을 언급했다.

그제야 블랑크 경이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표정은 너무나 짧은 순간 떠올랐다가 사라졌고, 그는 묵묵히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안뜰을 떠나갔다.

그러했던 지난밤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던 무렵이었다.

"...이드 님, 보여 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어?"

상념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목소리.

로이드는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보았다.

"바이에른 경?"

바이에른 경이 식당에 들어와 있었다.

"경이 아침부터 여긴 무슨 일로?"

"방금 주군과 도련님께 말씀드렸다시피 보여 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이것입니다."

그가 식탁에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그것은 방금 자른 듯 싱싱한(?) 염소의 머리였다.

한데 염소 머리의 미간에 뭔가가 박혀 있었다.

반쯤 불타고 찢긴 자수 문양이었다.

"실은 휴식을 명하신 이틀 동안 틈틈이 수색을 진행했습니다. 마음이 맞는 백색창기병 대원 몇몇과 자체적으로 말입니다. 그러다가 어제저녁 늦게 이걸 발견했습니다."

"저녁 늦게?"

백작의 물음에 바이에른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마스토돈의 시체가 묻혀 있던 구덩이 인근에 파묻혀 있던 걸 백색창기병 대원이 발견했습니다. 바로 보고를 드릴까 하였으나 시간이 너무 늦어 이렇듯 아침 일찍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흐음."

백작이 자수 문양을 살펴보며 말했다.

"검은 용의 머리와 날개를 지닌 사신(Grim Reaper) 문양이라. 특이하군. 처음 보는 것이기도 하고."

"예. 저도 처음 보는 문양입니다. 다만, 묻혀 있던 장소와 염소 머리를 사용한 점으로 미루어 짐작을 하자면, 이게 언데드 보존 마법진의 상징 부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마도 그렇겠지. 그렇게 많은 마스토돈 시체를 썩지 않게 오래 보존하려면 마법적인 장치가 필요했을 테니까."

그 뒤로도 백작과 바이에른 경은 문양을 보며 여러 가지를 토론했다.

처음 보는 낯선 문양.

누가 이걸 사용하는지.

혹은 비슷한 풍문을 들은 적이 있는지.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궁리하며 추리를 시도했다.

그 모습에 로이드는 입맛이 싹 달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아침 식사를 하다가 잘린 염소 머리를 구경하게 되어서?

아니었다.

물론 제법 그로테스크한 모습이기는 했지만, 다행히 그는 비위가 강한 편이었다.

그의 입맛이 뚝 떨어진 이유는 따로 있었다.

검은 용의 머리와 날개가 달린 사신의 문양.

저 문양이 그에겐 익숙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저거...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 나왔던 거잖아.'

기억이 났다.

어디에서?

소설 속 삽화에서.

왕도의 왕성 꼭대기에서.

펄럭이던 왕가의 새로운 깃발.

그 속에 담겨 있던 문양이 바로 저것이었다.

'소설 속에선 한쪽 팔을 잃고 폭군이 됐던 국왕 알리시아가 저 문양을 왕가의 새로운 상징으로 채택했어. 어느 측근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말이지. 그때부터였을 거야. 알리시아의 폭정과 공포정치가 본격적인 막을 올린 게.'

진정한 암흑시대의 시작이었다.

즉, 저 용머리 사신의 문양은 소설 속 폭정과 암흑시대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런데 왜 저게 여기서 나와?'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문득,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국왕 알리시아가 이번 일의 배후인 걸까.

하지만 그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니야.'

그럴 리가 없다.

이곳 영지에 위해를 가한다고 해서 그녀가 이득을 볼 수 있을까.

그건 아닐 듯했다.

이득을 볼 건덕지가 전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의심을 하자면 소설에서 흑화한 알리시아에게 저 문양을 추천하고 권유한 측근이라는 자. 그자가 이번 일과 연관이 있다고 보아야겠지.'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더 높아 보였다.

이곳의 알리시아는 소설 속과 달리 한쪽 팔을 잃지도 않았고, 폭군으로 타락하지도 않았다.

아마 지금 당장 왕도로 달려가 저 문양을 보여주어도 고개만 갸웃거리며, '웃기게 생긴 문양이로군'이라는 식의 반응만 보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번 일에는 소설에서 언급된 그 측근이라는 자가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인 건데... 으음, 그래서 좀 문제네.'

로이드는 미간을 찡그렸다.

원작에서 언급된 측근.

그게 누군지 짐작이 가지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소설에서 직접적으로 등장한 적이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누군지 이름도 나오지 않았지. 그저 흑화한 알리시아의 생각이나 독백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만 언급된 게 다야.'

그게 어떤 지문이었더라.

아마도, '국왕 알리시아는 최근에 들인 측근의 조언을 떠올렸다.'라거나, '그녀는 근래 심복으로 삼은 측근과의 만남을 잠시 돌아보았다'라는 식의 지문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한때나마 소설 커뮤니티에 측근에 관련된 독자들의 추측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국왕에게 빌붙은 간신배일 것이다.

그냥 단순한 엑스트라일지도 모른다.

혹은 숨겨진 진정한 흑막이 아닐까.

라는 등등의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답을 알 수 없었다.

'결국 철혈의 기사 1부가 끝날 때까지 정체가 안 밝혀졌으니까. 그 상태에서 2부가 영영 나오지 않게 됐으니까.'

그래서였다.

측근의 정체는 수많은 추측과 의혹만 남긴 채 미회수 떡밥으로 머물게 되었다.

로이드는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그래서 일부 작가라는 작자들이 안 되는 거야. 하여간 책임감이 없어요, 책임감이.'

기왕 쓰려면 끝까지 제대로 완결을 내든가.

궁금하게만 만들어놓고 끝내 안 밝히는 건 무슨 악취미인 건지.

그는 잠시 소설 철혈의 기사를 쓴 작가에게 속으로 악담을 퍼부었다.

'그래도 뭐, 이 정도라도 알아낸 게 어디야.'

적이 누군지 아는 것과 까맣게 모르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막연하게나마 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대비를 해볼 수 있다.

앞으로 어떻게 정보를 얻어갈지도 생각해볼 수 있다.

최소한의 방향은 잡히는 것이다.

'며칠째 현장을 뒤적거린 것도 그 방향을 잡아줄 단서를 찾기 위해서였던 거니까.'

그러니 당분간은 측근, 그자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머리를 짜내 보자.

열심히 단서를 모으고, 왕도의 동향에 귀를 기울이자.

그러는 한편으로 지금 할 일을 하자.

앞으로의 방향을 결정한 로이드가 입을 열었다.

"음. 그래서, 바이에른 경?"

"예?"

"이 염소 머리, 설마 아침 반찬 삼으라고 가져온 건 아니지?"

"예, 그렇습니다."

"그럼 이제 그만 식탁에서 좀 치워주면 참 고맙겠는데."

"...아."

졸지에 아침 식탁에 덜컥 올려져 혀를 빼물고서 존재감(?)을 과시하게 된 염소 머리.

그제야 자신의 만행을 깨달은 듯한 바이에른 경.

그의 얼굴 가득 당황의 기색이 떠올랐다.

때마침, 후식 쿠키를 가지고 들어오던 하녀의 새된 목소리가 아침 식당을 우렁차게 수놓았다.

"끼야아아아악!"

 

 

잠시의 소란을 딛고 대하수로 공사가 재개되었다.

"비벙! 비버벙!"

폭발의 충격에서 회복된 비벙이가 열심히 땅을 팠다.

슬러지 처리장을 만들 구덩이가 실시간으로 넓어졌다.

공병대 병사들도.

백색창기병대와 피난민 작업자들도.

언재 사고를 겪었느냐는 듯 삽자루를 쥐고서 비지땀을 흘렸다.

하루, 이틀, 나흘, 여드레.

그런 모두의 노력과 땀방울 속에 슬러지 처리장이 차곡차곡 제 모습을 갖추어 갔다.

로이드는 그러한 슬러지 처리장의 기본적인 구조로 '중력식 농축' 방식을 선택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중력의 힘으로 슬러지를 아래로 모이게 하는 거지. 마치 옛날 시골에 있던 푸세식 화장실처럼. 그래서 구조가 단순해. 저장과 농축을 동시에 할 수 있어. 약품을 쓸 필요가 없고, 유지와 관리를 하기도 쉽지.'

사실 다른 방식의 슬러지 처리장 모델도 있었다.

하지만 설비나 기계 장치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이곳에서는 대부분이 부적합했다.

애초부터 선택지가 별로 없는 셈이었다.

그렇듯 로이드는 나름 이곳의 사정에 맞게 농축조를 설계했다.

대하수로를 통해 모인 오물과 하수.

그걸 농축조로 흘러들어 가도록 했다.

농축조 안에서 슬러지는 아래로 가라앉고, 위로 뜨는 나머지 수분과 부유물은 유출관으로 흘러나가도록 설계를 다듬었다.

그리고 슬러지 처리장의 상부를 개방할 수 있도록 거대한 나무판 뚜껑(?)을 만들었다.

슬러지를 처리해줄 드래곤 솔리타스를 위해서였다.

'그래야 가라앉은 슬러지를 마법으로 들어 올려 꺼내기 편할 테니까. 뚜껑만 열고 슬러지만 쓱.'

사실 마음 같아선 더 세련된 방식을 선택하고 싶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현대식 설비에서처럼 슬러지 호퍼나 슬러지 배출관을 정교하게 작동하고 관리할 각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여기서 할 수 있는 만큼만.'

그 선을 지켜가면서 시공에 임했다.

한데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마침내 훌쩍 다가온 본격적인 여름.

무더위와 함께 뜻밖의 서신이 프론테라 가문에 날아들었다.

왕국 각지의 총 59개 가문에서 경쟁적으로 로이드를 신랑감으로 지목하며 보낸, 따끈따끈한 청혼장의 폭격이었다.

158화. 꽃바람 폭격 (1)

 

 

"저기, 로이드 도련님?"

유독 노곤한 저녁이었다.

종일 현장에서 땀을 가득 흘려서.

직접 연장통을 허리에 차고 진두지휘를 해서.

그렇게 작업자들과 광합성을 할 기세로 땡볕을 쬐어서.

당장에라도 좀 씻고 널브러지고 싶은, 그런 저녁이었다.

한데 그런 이쪽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하녀가 이쪽을 찾아왔다.

"로이드 도련님? 집에 돌아오면 집무실로 건너오라는 백작님의 당부가 있으셨어요."

"집무실로?"

"네에, 도련님."

하녀가 생긋 웃었다.

"뭔가 기분 좋은 일이 있으신 듯했답니다. 함께 기쁨을 나눌 일이 생겼노라 이르셨어요."

"그랬어?"

"네에."

기쁨을 나눌 일이라. 대체 뭘까.

로이드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설마 로또라도 당첨되셨나. 당연히 그건 아닐 거고. 아님 왕도에서 뭔 좋은 소식이라도 왔나?'

어쩌면 국왕이 추가적인 지원 정책을 발표한 건 아닐까.

혹은 왕도에서 여기 영지까지 다이렉트로 도로 하나 뚫어준다든가.

뭐 그렇게 떡고물 하나쯤 떨어지는 일이면 참 좋으련만.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는 하녀의 안내를 받았다.

하녀가 백작의 집무실 문을 노크했다.

안쪽에서 백작 특유의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도록 하려무나."

어쩐지 목소리 톤이 평소보다 살짝 밝다.

진짜로 뭔가 좋은 일이 있나 보다.

괜한 기대감에 로이드는 가슴이 쿵더덕쿵덕 뜀뛰기 하는 걸 느꼈다.

"안내해줘서 고마워, 에밀리."

설마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줄 줄은 몰랐던 걸까.

얼굴이 확 붉어지는 하녀를 뒤로하고 집무실로 들어섰다.

응접용 소파에 앉아 있는 백작부부가 보였다.

"어서 오너라. 오늘도 고생 많았지?"

"뭐, 조금요."

부부의 건너편에 앉았다.

백작 부인이 다과용 주전자를 기울였다.

"조금이 아니겠지. 이 무더위에 종일 밖에서 일하고 있으니 얼마나 힘이 들겠니. 목 타겠다. 이것부터 좀 마시렴."

 

쪼르륵.

 

시원한 찻잔을 받아들었다.

그렇잖아도 마르던 목구멍을 축이며 백작부부의 기색을 살폈다.

"한데 무슨 일로 저 부르신 건지. 뭐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아닌 게 아니라 부부가 둘 다 싱글벙글이다.

백작은 만면에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서 시종일관 입꼬리가 귀에 걸려 있다. 백작 부인은 기품 있는 표정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은연중에 배어나는 흐뭇함마저 가려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진짜로 뭔 일 있나 본데.'

로이드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백작 부부는 경망한 이들이 아니었다.

큰 기쁨이나 슬픔을 과하지 않게, 우아하게 표현할 줄 알았다.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지난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백작 부부가 저렇게까지 기뻐하는 모습은 별로 보지 못했다. 그나마 비슷한 모습이라면 예전, 가문에 걸린 사채를 모두 청산했을 때?

'그럼 그렇게 빚을 청산했던 때와 버금가는 빅뉴스가 있다는 뜻인 건데.'

대체 뭘까.

궁금증이 살금살금 덩치를 키워가려는 무렵.

마침내 백작이 용건을 꺼냈다.

"아, 내 정신 좀 보거라. 기껏 널 불러다 놓고 본론을 이야기하지 않고 있었구나. 자, 이것부터 받으렴."

백작이 묵직한 봉투 꾸러미를 응접용 탁자 위에 놓았다.

대강 눈대중으로만 훑어도 족히 50장은 넘어 보이는 꾸러미였다.

"이건 뭡니까?"

"직접 보렴."

"...."

50장이 넘는 편지인 건가.

그런데 봉투의 규격도, 색상도 모두 제각각이다.

그나마 공통점이라면 봉투들이 하나같이 호화롭다는 거.

'진짜로 뭐지.'

봉투의 때깔(?)로 보아선 모두 귀한 곳에서 온 서신인 듯한데.

로이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맨 위의 봉투부터 집어들었다.

조심스럽게 편지를 봉인하는 밀랍, 실링왁스를 뜯었다.

봉투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건 호화로운 문양이 찍힌 편지지. 그 종이마저 보들보들한 것으로 미루어 최상품을 쓴 듯했다.

서신을 펼쳤다.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렸다.

 

- 존경하는 프론테라 백작께.

프론테라 백작가에 무궁한 영광 있기를.

근래에 귀 가문의 명성과 명예가 드높아짐을 느끼고 존경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귀 가문의 장남에게 아직 반려가 없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마침 본 가문의 둘째 여식에게도 여태껏 짝이 없는바, 백작님과 더불어 이에 대해 긴밀한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습니다.

다시금 프론테라 백작가의 번영과 승승장구를 기원하며, 양측 가문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만들 행운과 축복, 기회에 대해 좋은 답변을 바라고 있겠습니다.

- 남부에서. 코르도나 백작 올림.

 

"...."

로이드는 눈을 끔뻑거렸다.

오늘 작업하다가 눈에 뭐가 들어갔나.

아님 내가 갑자기 난독증이 생겼나.

'분명 반려니 둘째 여식이니 뭐니 했는데.'

그러니까 요점만 콕 짚어내자면 이거다.

청혼이다.

양측 가문이 결혼을 통해 본격적이고도 전략적인 제휴 관계를 맺어보자는 거다.

"어떠하니?"

백작이 물어왔다.

이 아저씨, 어느새 테이블을 넘어올 기세로 상체를 쭉 기울여 온 상태다.

게다가 그 눈빛이 얼마나 초롱초롱한지.

입가는 또 얼마나 싱글벙글인지.

로이드는 애매한 웃음을 띄워 보이며 물었다.

"음, 설마 여기 쌓인 나머지 봉투도 죄다 비슷한 내용인 건 아니겠지요?"

"직접 보려무나."

"...."

"귀족 가문 사이의 공식적인 청혼인지라, 왕도의 귀족원으로 모인 청혼장이 한꺼번에 온 것이란다. 그래서 사실은 내가 정리를 조금 했고 말이다."

"정리라니요?"

"가문의 역사가 깊고 명성이 드높은 순서대로."

"봉투를 쌓으신 겁니까?"

"바로 그거란다."

"...."

"그래야 아무래도 네가 고민하고 판단하기가 편할 것 같아서 말이다. 으음, 혹시 이 아비가 너무 유난을 떠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더냐?"

"아, 아뇨. 그건 아니긴 한데."

"아니긴 한데?"

...쬐끔 부담스럽습니다.

'하아.'

그리고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힘껏 표정관리에 신경 쓰며 나머지 서신들을 대강 훑어보았다.

북부의 페라노 백작, 서부의 에스페리아 백작, 서남부의 자산가 시칠리 자작 등등. 그 외에도 각 지방의 자작이며 남작 등등 중소 귀족들의 청혼서도 다수 섞여 있었다.

아니, 사실 이 정도면 왕국 각지의 어지간한 귀족가에서는 전부 다 청혼장을 보냈다고 보아야 할 수준이었다.

'이게 뭔 일이람.'

살면서 이렇게 인기남이 되어본 적이 있을까.

무려 59개 가문에서 청혼을 요청해 오다니.

평생 썸을 탔거나, 남몰래 짝사랑을 했거나, 거기에 좋아했던 아이돌의 숫자까지 다 합쳐도 59명은 되지 않을 로이드였다.

"그래서, 혹시 끌리는 가문이 있느냐?"

"...."

이쪽이 서신을 읽는 사이에 한층 흐뭇해진 표정의 백작이 물어왔다.

로이드는 대답 대신 찻잔부터 천천히 비웠다.

일단은 차분하게.

들뜨지 말고.

분위기에 휩쓸리지도 말고.

그렇게 몇 모금 시원한 찻물을 들이켜자 당혹감이 가라앉았다.

냉정함이 되돌아오고, 조금씩 생각이 정리가 되었다.

제일 먼저 짐작된 것은 이렇듯 청첩장이 무수하게 날아든 이유였다.

'이유는 딱 하나지. 우리 가문이 확 떠오르고 있다는 거.'

그냥 떠오르는 정도가 아니었다.

왕국 동부 일대를 휩쓸어 버린 몬스터 도미노.

그 재난에서 살아남은 몇 되지 않는 영지였다.

덕분에 동부 지방 재건의 중심지가 되었다.

국왕이 대놓고 지원 정책을 발표했다.

그 과정에서 백작가로 승격되었다.

거기에 자신부터가 왕도에서 국왕 시해 시도를 막아내는 공적을 세웠다.

즉, 국왕 알리시아의 전폭적인 총애를 받는 가문으로 자리매김한 셈이었다.

'향후 이삼십 년 정도는 왕국에서 미래가 가장 탄탄한 가문이 된 거지. 떠오르는 신성. 라이징 스타. 핵떡상이 보장된 주식. 그러니까 다들 이 기회에 연을 맺으려고, 더 뜨기 전에 미리 포섭하고 침을 발라두려고 청혼장을 보낸 거야.'

그렇게 보니 상황 파악이 됐다.

상확 파악이 되니?

자연 대응할 방향도 정해졌다.

"기뻐하시는 와중에 이런 말씀 드리긴 죄송하지만 이번 청혼, 전부 거절해야 할 듯합니다."

"...어?"

싱글벙글하던 표정이 쩌저적.

그 상태 그대로 굳어 버리는 백작을 향해 말했다.

"지금은 결혼을 할 때가 아닌 듯합니다."

"어째서? 왜?"

이내 백작의 눈동자에 떠오르는 당혹감과 실망감.

로이드는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들이 쟁쟁한 가문들로부터 폭발적인 구애를 받는 상황이 얼마나 기뻤을까.

한데 그걸 죄다 거절해야 한다니.

그는 백작이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도록 신경 쓰며 말했다.

"조금 자세히 설명을 드리자면, 시기가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재건에 힘을 쏟아야 할 때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지금은 결혼에 따른 이득이 거의 없는 상황일 거라서요."

"이득이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더냐? 혹시 결혼해봤자 물자 지원을 받을 것이 의미가 없을 거라는 뜻이더냐?"

"네. 물자는 왕가에서 받는 걸로 그럭저럭 부족함이 없는데다, 결혼 상대 가문에게서 얻어봤자 완전한 공짜는 아닐 테니까요. 게다가 이 결혼이 시기상조인 이유가 또 있습니다."

"혹시 들어볼 수 있겠느냐?"

백작이 앉은 자세를 고쳐잡았다.

로이드가 신중하게 말했다.

"사실 지금 저 청혼서에 응답하는 거, 반쯤 이용당하는 일이 될 겁니다."

"이용이라...."

"아마 짐작하고 계실 겁니다. 다들 결혼을 통해 우리 가문과 맺어지려고 하는 이유. 우리 가문이 국왕 전하의 총애를 받고서 떠오르는 가문이라서가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렇겠지."

"그래서입니다. 우리 가문의 최고점은 아직 멀었습니다. 계속 가치가 상승하고 있는 중이지요. 그러니 조금 더 기다리시면 됩니다. 그 기다림의 시간만큼 우리 가문의 가치가 더욱 상승할 겁니다."

마치 개발이 결정되기 전의 강남땅처럼.

혹은 아이펑이 대박을 터뜨리기 직전의 애폴 주식처럼.

아직 프론테라 가문의 전성기는 오지 않았다.

이제 상승세가 시작되었을 뿐이다.

그러니 지금 약간 달콤한 제안이 들어왔다고 해서 그걸 덥석 물어 버리면?

반드시 나중에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이 결혼이 시기상조라고 느껴집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몇 년만 더 기회를 묵혀두면 됩니다. 그때쯤엔 훨씬 더 격이 높은 가문에서 청혼장이 날아오게 될 테니까요."

"으음, 그러니까 네 말은, 일찍 우리를 포섭하려는 가문들과 성급하게 연을 맺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로구나."

"네, 바로 그겁니다. 시간이 우리 편인 상황이니까요."

"하지만 내가 보기엔 시간에 네 편은 아닌 것 같다만 말이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넌 이미 노총각이지 않느냐."

"...컭."

예상치 못한 카운터펀치가 명치로 훅 들어왔다.

백작이 던지는 팩트도 정수리로 팍팍 날아왔다.

"네 나이를 생각해 보려무나. 벌써 스물일곱이란다. 세상 어느 귀족가 장남이 그 나이가 되도록 홀몸으로 지내겠느냐."

"으음, 하지만...."

"이 아비도 이젠 손주를 볼 때가 되지 않았겠니?"

"...."

나왔다. 손주 어택.

백작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스물일곱 살.

대한민국에서는 사회적으로 한창 파릇파릇한 나이일 터다.

하지만 이곳 로라시아 대륙의 기준으로는 명백한 노총각이다.

'그래도 여기서 밀릴 수는 없어.'

로이드는 정신을 바짝 다잡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성격도 취미도 얼굴도 모르는 귀족가 여인과 마음에도 없는 정략결혼을 덜컥 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자신은 그저 평범한 여자와 알콩달콩 만나서 연애를 하고, 평범한 결혼을 하고 싶었다.

그러니 지금이 아니라 나중에.

정말로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났을 때.

정식으로 백작에게 결혼 의사를 밝히리라.

로이드는 생각을 정리하고는 말했다.

지금은 정말로 때가 아니다. 어차피 우리 가문을 통해 얻을 이득만 계산하고서 보낸 청첩장이다. 그러니 나중에 만일 우리 가문이 휘청거리면? 그땐 미련 없이 돌아설 이들이다.

...라고 차분한 설득을 시도했다.

그동안 백작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끝내 버리지 못하는 아쉬움과 미련을 붙들고 있었다.

그 고집의 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이는 뜻밖에도 백작 부인이었다.

"여보. 이번엔 로이드의 말을 따라보도록 해요."

"부인?"

"본인이 저렇게 싫다잖아요. 우리가 대신 결혼해줄 것도 아닌데."

"...."

"언제나 믿음직한 아이니까요. 믿어보도록 해요."

"후우."

결국, 백작이 백기를 들었다.

조금은 착잡해진 기색으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정녕 네 뜻이 그러하니?"

"죄송합니다."

"후, 알았다. 그럼 내가 어찌하면 좋겠느냐."

"간단합니다. 거절의 뜻을 담은 서신을 써서 보내주시면 됩니다."

이럴 때는 과감히 쐐기를 박아야 한다.

그렇게 로이드는 못 박듯 말했다.

조금은 백작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후우. 정말 어쩔 수가 없는 건가."

그날 밤.

자정이 깊은 시각이었다.

그때까지도 프론테라 백작은 집무실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집무실 안을 서성서성.

그럴 때마다 깊은 한숨만 푹푹.

아쉬움과 미련을 곱씹었다.

아까 저녁의 일 때문이었다.

'녀석, 결혼할 생각이 있기는 한 건지.'

걱정이 되었다.

예전에는 너무 난봉꾼 짓을 하고 다녀서 걱정이었는데.

이제는 아들이 너무 성실해져 버려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종일 현장에서 노력하는 건 좋은데. 열심히 땀 흘리는 것도 좋은데. 그래도 장가는 더 늦지 않게 가주면 좋으련만.'

자신의 아들이 노총각으로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다.

그 사실에서 초조함을 느끼지 않을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게다가 무려 59군데에서 엄청난 혼담이 날아든 상황이었다.

한데 그걸 모조리 거절해야 한다니.

밀려드는 청혼장을 받으며 몽실몽실 떠올랐던 마음의 높이만큼, 그는 추락감과 실망감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그래도 녀석이 그렇게 완강히 뜻을 드러냈으니 따라주어야겠지.'

그게 아들을 존중하는 길일 터다.

그러니 뜻을 따라주자.

마음을 정한 프론테라 백작은 책상에 자리를 잡았다.

빈 편지지를 펼치고 펜을 들었다.

"후우."

아쉬움을 가득 담아.

미처 떨쳐내지 못한 미련 싣고서.

그의 펜촉이 마지못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존경하는 코르도나 백작께.

귀 가문에 명예로운 영광과 행운이 있기를.

백작께서 보내주신 감사한 제안에 금치 못할 기쁨을 느꼈습니다. 두 가문의 신뢰가 돈독해짐을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생각지도 못하는 순간에 선뜻 건네어 오는 누군가의 악수가 크나큰 축복이 될 수 있음 또한 피부로 느꼈습니다.

그렇기에 아쉽고, 또 아쉽습니다.

슬프고 안타까운 심정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드높은 명성과 명예를 떨치는 귀 가문과 특별한 사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제 가슴을 찢어놓고 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저는 지금 깊은 탄식에 잠겨 이 답장을 쓰고 있습니다. 미련과 실망감에 떠밀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요.

그러니 행여나 제 답장을 읽으시며 부디 오해는 하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비록 건네어 주신 이번 청혼에는 안타까운 거절의 뜻을 표하오나... 어쩌고저쩌고... 아쉽고도 아쉬워서... 미주알고주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재잘재잘... 하는 마음이 제 진심이기에... 블라블라....

 

그렇듯 깊어가는 밤과 함께 거절 아닌 거절의 답장이 작성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59장의, 미련 가득 애매한 답장을 나눠 실은 전서구 스무 마리가 왕도 귀족원을 향해 무리지어 힘차게 날아올랐다.

159화. 꽃바람 폭격 (2)

 

 

"제7차 동부 토벌작전 보고이옵니다."

이곳은 마젠타노 왕가의 왕성.

호화롭고도 가장 은밀한 곳에 마련된 회의실.

군무대신 엘카모 경의 강인한 눈길이 보고서를 읽어내려갔다.

"우선 지난 6회차에 걸친 토벌 작전을 통해 동부 일대에 피해를 입힌 몬스터 무리의 주력을 격파했던바, 이번 7차 작전은 격파가 완료된 지역에 대한 소탕 작전에 주안점을 두었사옵니다."

"결과는?"

"소르티노 영지와 아드라노 영지 일대에 소수 남아 있던 몬스터 잔당을 일소하였사옵니다. 그 과정에서 인근 바스토 영지와의 경계에 터를 잡은 몬스터 군락 3개소를 발견하였사옵니다."

"우발적인 교전이 있었나?"

"예, 전하."

"아군의 피해는?"

"주력인 제20보병 연대에서 전사 77명, 부상자 182명, 지원 부대인 레인저 특수군에서 부상자 16명이 발생하였사옵니다."

"제법 많군."

"송구하옵니다."

군무대신이 고개를 숙였다.

회의장 상석의 국왕 알리시아 테르미나 마젠타노가 손을 저었다.

"경의 실책이 아니니 너무 괘념치 말라. 경은 전체적인 작전에 차질이 없도록 부상자 후송과 보충병 투입, 지원물자 관리와 수송에 만전을 기하도록."

"명 받들겠사옵니다."

군무대신이 자리에 앉았다.

그사이, 국왕 알리시아는 남모를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빌어먹을 몬스터들 같으니.'

동부 지방 일대를 휩쓸어 버린 몬스터 도미노.

사실 그 파괴적인 재난은 아직 이어지고 있는 상태였다.

물론 더 몰려오는 몬스터는 없었다.

도미노 현상 자체는 끝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피해가 누적되고 있었다.

동부산맥을 건너온 몬스터 무리가, '인간의 영지를 파괴했으니 이제 다시 우리 고향으로 돌아가자!'라며 얌전하게 물러갈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즉, 도미노 현상을 일으킨 몬스터들이 폐허가 된 지방에 아예 터를 잡아 버렸다.

'그걸 그냥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게 해서 기나긴 대규모 토벌 작전이 7차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실정이다.

한데 아직도 완전히 끝나기엔 멀었나 보다.

국왕 알리시아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내무대신에게 눈길을 던졌다.

"다음."

"예, 전하."

내무대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부 지방의 피해 복구 상황.

프론테라 백작령에 대한 물자 지원 상황.

그 밖의 여러 현안에 대한 보고가 이어졌다.

뒤이어 외무대신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외무대신은 조금은 격앙된 목소리로 동부 술탄국의 뻔뻔한 대응을 입에 담았다.

그들이 아직도 몬스터 도미노 현상 발생에 대한 사실관계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그 사건을 단순한 사고의 결과로 치부하고 있다는 것이 보고의 주 내용이었다.

보고를 듣는 동안 국왕 알리시아의 미간에도 주름이 잡혔다.

'술탄... 그 뻔뻔한 자 같으니.'

차라리 실력행사를 해야 할까.

아니, 그 전에 최후의 기회를 주는 것이 어떨까.

국왕 알리시아는 조만간 술탄국에 이번 일을 제대로 따지고 외교적 보상을 받아낼 특사를 파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문득, 한 인물이 떠올랐다.

'로이드 프론테라.'

그 당돌한 자를 특사단에 합류시켜 보면 어떨까.

의외로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유의 간사한 혀 놀림이 십분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게다가 로이드를 특사단과 함께 보내는 것은 명분과 이치에도 어느 정도 들어맞을 듯했다.

프론테라 백작가 또한 몬스터 도미노 사태의 직접적인 피해자니까.

'괜찮을 것 같은데. 긍정적으로 고려해보아야겠군.'

그렇게 생각과 생각을 거듭하는 사이.

각부 대신들의 현황 보고가 끝났다.

그녀는 그 뒤로도 반나절에 걸쳐 정기회의를 이끌었다.

그러다가 문득, 또 한 가지 사소한 궁금증을 떠올려 가슴속에 담아놓게 되었다.

계속 담아놓고만 있다가.

회의가 끝난 직후, 회의장에서 물러나던 내무대신을 불러세웠다.

"짐이 잠깐 그대에게 묻고 싶은 일이 있노라."

"하문하소서, 전하."

내무대신이 공손히 질문을 기다렸다.

국왕이 물었다.

"귀족원은 내무부의 하위 관청이지?"

"그러하옵니다, 전하."

"짐이 듣기로 최근 귀족원을 통하여 프론테라 백작가에 다수의 청혼장이 날아들었다고 하였다. 혹여 그대는 그 결과를 알고 있는가?"

"예, 전하. 마침 어제 프론테라 백작의 답신이 귀족원에 도착하였사옵고, 귀족원에서는 그 답신을 각각의 가문으로 전달하였사옵니다."

"그렇군."

청혼장에 대한 답신이라.

'로이드 프론테라. 과연 그 교활한 사내가 어떤 가문을 자신의 짝으로 선택하게 될까.'

기왕이면 영지 재건에 도움이 되는 가문이면 좋겠는데.

그리하여야 기반이 더욱 탄탄해질 텐데.

자신의 든든한 동쪽 방패로써 거듭날 텐데.

그렇듯, 국왕 알리시아는 동부에서 들려온 청혼장 소식에 사소한 기대감과 흥미진진함을 느꼈다.

 

 

다시 며칠이 지났다.

그사이 슬러지 처리장의 막바지 공사에 박차가 가해졌다.

처리장의 전체적인 모습은 땅속에 묻힌 거대한 양동이 같았다.

튼튼하게 마련된 콘크리트 기초.

그 위로 정교하게 파낸 화강암 틀을 넣었다.

무려 지름 5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를 통째로 파내서 만든 초대형 양동이. 덕분에 하비엘이 장장 나흘에 걸쳐 오러 담긴 검으로 부당 노동에의 분노를 담아 만들어낸 걸작.

그것이 중력식 농축조의 본체(?)였다.

그런 농축조를 처리장까지 옮겨오는 일은 비벙이의 몫이었다.

"비버벙! 비벙!"

모두의 응원을 받으며 비벙이의 3천 톤 궁둥이가 씰룩거렸다.

물론 비벙이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속을 파냈다고 해도 지름만 비벙이의 몸길이 절반인 50미터에 달하는 돌덩이였다.

즉, 사람으로 치면 명절날 떡 치는 대형 절구를 혼자 들고서 수백 미터를 끙끙대며 옮기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비버... 벙!"

비벙이의 발바닥에 땀이 좍좍 배어났다.

하지만 비벙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힘든 티를 내지도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방울이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벙!"

무릇 진정한 사나이란 첫사랑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아니하는 법.

당장 허리가 뽀그닥 부러질 것 같아도.

숨이 턱까지 차올라도.

다리가 후들거려도.

그럴수록 더욱 멋있는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것.

그게 첫사랑에 빠진 상남자 비벙이의 진심이었다.

"비버버버벙!"

뻐드렁 앞니 꽉 깨물었다.

근성으로 옮겨온 농축조를 준비된 땅속 기초에 넣었다.

 

쿠우웅!

 

지축이 울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농축조가 기초 속에 딱 맞는 퍼즐 조각처럼 들어가 맞물렸다.

슬러지 처리장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하수로 공사가 끝난 건 아니었다.

'슬러지 처리에는 물이 아주 많이 필요하니까.'

수세식 변기와 똑같은 이치였다.

하수로 안에는 항상 물이 흘러야 한다.

그래야 건더기(?)가 원활히 슬러지 처리장까지 흘러오게 된다.

안 그러면?

온갖 오물이 하수관 안에서 죄다 말라붙게 될 것이다.

그럼 하수관이 막히게 되고, 오물이 더욱 쌓이게 되고, 마침내는....

'...굳이 거기까지 상상하진 말자.'

로이드는 식욕 감퇴를 불러오는 상상 속 광경을 서둘러 접었다.

어쨌건 그날부터였다.

닷새에 걸쳐 프로나 강에서 하수정으로 이어지는 수관 공사를 진행했다. 강물 일부가 관을 타고 영지 중심 촌락의 하수정으로 들어와 대하수로 내부로 흐르도록 만들었다.

대하수로 첫 구간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그날, 로이드는 영지 중심 촌락의 주민들을 불러모았다.

"자, 다들 오늘 왜 모였는지는 알고 있겠지?"

기울어가는 한여름 오후의 햇볕.

그 아래 모인 300여 명의 주민들.

저마다 손에 묵직한 양동이를 들고 있었다.

그 양동이 속에는....

"다들 내가 미리 당부했던 대로 잘 모았어?"

 

끄덕.

 

주민들이 다들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그들은 누구 하나 예외 없이 수건이나 천조각으로 복면처럼 코와 입을 막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지난 며칠간 버리지 않고 모은 오물이 양동이 가득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로이드도 황급히 코를 꽉 잡았다.

"...그래, 잘했어. 냄새로 봐선 다들 열심히 분발해준 것 같아서 참 기쁘네. 오늘 실험만 성공적으로 치르면 돼. 그럼 내일부턴 그렇게 애써서 모을 필요 없는 거야. 오물이 생기는 대로 양동이에 담아다가 여기, 하수정에 버리면 되니까. 알겠지?"

역시나 다들 끄덕!

모두의 고갯짓이 조금 전보다 살짝 다급해졌다.

그렇잖아도 푹푹 찌는 여름날이었다.

며칠째 모은 오물은 이미 무르익을(?) 대로 숙성되어 있었다.

이미 그 자체로 고도의 생물학적 화학적 전략병기나 다름없는 악취를 마음껏 발산하고 있었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기원했다.

로이드 님, 살려주세요. 제발 연설을 시작하지 말아 주세요, 라고.

그리고 로이드는 모두의 진심 어린 열망에 기꺼이 호응했다.

"어우야. 코 떨어지겠다. 설마 연설 듣고 싶은 사람은 없겠지? 다들 줄 서. 가져온 거 차례로 하수정에 붓자. 대신 급하지 않게. 주위에 안 튀게. 알았지들?"

 

샤샤샥!

 

역시나 다들 대답이 없었다.

더 머뭇거리다간 후각세포의 멸망을 만끽할 판국이었다.

모두는 대답 대신 일사불란한 행동력으로 화답했다.

300명 주민들이 며칠간 알차게 모은 오물이 하수정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그리고 로이드도 맨홀을 통해 하수정으로 내려갔다.

하비엘과 함께였다.

"...이렇게 직접 내려오실 이유가 있는 겁니까?"

"당연하지."

로이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오물이 하수로를 따라 잘 내려가는지, 그 흐름이 어떤지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해. 안 그랬다간 난리가 날걸."

사실이었다.

그냥 대하수로를 다 만들었다고 안심할 일이 아니었다.

오염 물질이 흘러가는 통로였다.

이게 제대로 만들어졌는지, 실제로 막히는 곳이 있는지 확인하는 건 필수였다.

"하수로라는 게 말이지, 어딘가가 막혀도 바로 티가 나질 않아. 며칠쯤 지나서 퀴퀴한 냄새가 올라온다거나, 하수가 역류한다거나 하는 문제가 발생하겠지. 그때쯤엔? 이미 늦었어요. 공사할 때보다 수십 배는 고생하면서 막힌 곳을 뚫어야 할걸."

그래서 직접 내려왔다.

방금 300명의 주민들이 하수정으로 부어놓은 대량의 오물.

그게 슬러지 처리장까지 잘 흘러가는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렇듯 로이드가 친절한 설명을 해주었음에도 하비엘의 굳은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그럼 제가 로이드 님과 함께 여기까지 내려온 이유도 있는 겁니까."

"어."

"뭡니까."

"나만 내려오면 억울하잖아."

"...."

"이걸로 입이랑 코 막아. 속 뒤집히기 전에. 아, 물론 토해도 상관은 없겠네. 하수도 따라서 흘러내려 갈 테니까?"

로이드가 짓궂게 웃으며 손수건을 내밀었다.

이미 입과 코를 두 겹의 수건으로 꽁꽁 틀어막은 로이드였다.

그러지 않으면 숨을 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아니, 그렇게 했는데도 숨을 쉬기가 괴로웠다.

'이거 진짜 장난이 아니네.'

지하 깊은 공간.

대하수로를 향해 뻗은 하수로.

비좁았다. 한 사람만 간신히 하수로 옆으로 걸어갈 수 있었다. 그런 통로 옆으로 대량의 푹 썩은 오물이 흐르는 물에 섞여 동동 떠내려가고 있었다.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환기가 되지 않는 곳이라 그 악취가 더했다.

게다가 그는 이제 소드 익스퍼트 중급의 수준으로 올라와 있었다.

그게 또 그를 엄청나게 괴롭혔다.

예전보다 감각이 예민해진 까닭이었다.

'미칠 것 같다. 할 수만 있다면 코를 삭제하고 싶다. 아니, 그냥 마나하트 스킬을 초기화하고 싶다. 익스퍼트고 뭐고 그냥 다 취소하고 없애고 싶다.'

수건으로 막아도 별반 소용이 없었다.

괴로웠다.

어느 정도로 괴롭냐면, 군대 유격장에서 가스 자욱한 화생방실에 들어가 방독면을 벗고 토끼뜀을 뛰며 애국가 4절을 완창했던 경험만큼이나 괴로웠다.

그래서 로이드는 다짐했다.

'행여나 나중에 소드 익스퍼트 상급으로는 절대 안 올라가야지.'

사실 이런 경험이 아니더라도 가급적 그러려던 참이었다.

바로 소드마스터 증후군 때문이었다.

'전에 하비엘이 그거 때문에 불면증으로 고생했지.'

모든 감각이 예민해지다 못해 인간의 한계치까지 올라가 버린다.

심지어 그렇듯 예민해진 감각을 조절하지도 못하게 된다.

24시간 바늘 떨어지는 소리 하나까지 모두 들으며 살아야 한다. 그 밖에도 너무나 민감하게 느껴지는 각종 냄새와 촉감에 시달리게 된다. 시각적인 부분도 마찬가지다.

'지나치게 독수리눈이 돼서 앞사람 모공까지 낱낱이 들여다보인다지.'

그럼 설마 하비엘은 지금까지 자신을 그렇게 본 걸까.

문득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그는 짐짓 고개를 휘휘 저으며 하비엘을 돌아보았다.

"이거, 안 받아?"

아닌 게 아니라 하비엘은 아직도 이쪽이 내미는 수건을 받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표정이 너무나 태연하고 침착했다.

어째서일까.

궁금증을 느끼려는 순간, 하비엘이 입을 열었다.

"전 괜찮습니다."

"괜찮아? 진짜?"

"예."

녀석이 고개를 끄덕.

피식거리는 미소를 머금었다.

"로이드 님과 함께 여기 들어오면서부터 후각을 모두 차단했으니까요."

"...차단했다고? 후각을? 설마 일부러?"

"예."

"그런 게 가능해?"

"예. 소드마스터니까...."

"그럼 지금 이 악취를 하나도 못 느끼고 있다는 뜻인 거야?"

"예."

"...."

"사실 마음만 먹는다면 맡고 있는 공기의 냄새가 꽃향기로 느껴지도록 감각을 조절할 수도 있습니다만."

"퍽이나 좋겠다."

"감사합니다."

"...."

갑자기 문득, 억울함에 땅을 치고 싶어졌다.

그렇게 로이드는 음차원의 영역으로 폭락하는 행복지수를 느끼며 걸음을 옮겼다.

콜레라 카날 하수로를 따라.

드넓고 기나긴 대하수로를 거쳐.

동동 흘러가는 300인분의 오물과 오순도순 나란히.

슬러지 처리장까지 걷고 또 걸으며 대하수로 내부의 실제 흐름을 관찰하고 점검했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좋아. 방금 뚫어뻥으로 펑 뚫은 변기처럼 완전 쑴펑쑴펑 내려가네.'

그날부터였다.

로이드는 바이에른 경에게 하수로의 나머지 확장 구간 공사를 맡겼다.

영지의 나머지 촌락마다.

꿀벌 아파트 단지에도.

백작 가문 저택에도.

하수정을 시공하도록 지시했다.

'그렇게 각각의 하수정에서 오물을 모으고, 거기서 콜레라 카날 하수로를 통해 대하수로로 흘러와서 슬러지 처리장으로 떠내려가게 되는 거야.'

그것이 그가 고안한 대하수로 시스템의 핵심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확장 구간도 하나씩 착공되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열흘, 보름....

그동안 대하수로의 첫 혜택을 누리는 중심 촌락 주민들이 열심히 오물을 생산(?)하고, 그걸 마을 하수정에 버렸다.

날이 갈수록 슬러지 처리장에 오물이 쌓였다. 수분과 분리되어 농축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한 달의 시간이 지났을 무렵.

 

투확-!

 

영지 북쪽 경계 너머에서 레드 드래곤 솔리타스의 브레스가 불을 뿜었다.

슬러지 처리장 위의 뚜껑(?)을 열고서.

열린 뚜껑을 통해 마법으로 슬러지 덩어리를 띄우고서.

슬러지가 떠 있는 허공을 향해 지옥의 숨결을 토해냈다.

 

...!

 

프론테라 백작령 중심 촌락 주민 300여 명이 한 달간 분발(?)하여 생산한 대량의 결과물.

그 결과물이 수만 도의 화염에 휩싸였다.

악취를 풍길 틈도 없었다.

불타올랐다.

순식간에 재가 되었다.

그 순간, 로이드의 눈앞에 반가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딩동!

 

[당신은 신비로운 선견지명과 정교한 공학적 지식, 지상 최강 종족의 조력을 얻어 로라시아 대륙 역사상 최초의 집단적 하수 처리 시스템을 구현하는 데에 성공하였습니다.]

[당신이 건설한 대하수로 시스템에 의해 로라시아 대륙에 최초로 '공중 보건'의 개념이 정립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당신의 인상적인 업적이 후세에 길이길이 전달될 것입니다.]

[당신을 향한 후대 토목공학도들과 공중보건학도들의 피, 땀, 눈물, 원망이 담기게 될 새로운 찬사가 생성되었습니다.]

 

[새로운 찬사,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가 생성되었습니다.]

160화. 꽃바람 폭격 (3)

 

 

딩동.

 

[새로운 찬사,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가 생성되었습니다.]

 

눈앞에 반가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역시나 예상했던 바였다.

'대하수로 첫 구간을 완성했고, 처음으로 슬러지 처리를 완료했으니까.'

지금까지 종종 이래 왔다.

마레즈 개간지를 간척했던 때에도.

옹벽을 이용한 계단식 농경지를 조성했던 때에도.

새로운 건설물을 그냥 완공했다고 해서 업적이나 찬사 등의 보상이 주어지지 않았다.

건설물을 이용해서 뭔가 결과를 만들어내어야 비로소 보상을 얻을 수 있었다.

'이번 찬사는 뭘까.'

어떤 꿀맛 같은 옵션을 가지고 있을까.

기대감을 품은 로이드의 눈동자가 데구르르 움직였다.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

[찬사 등급 : 왕국 역사]

 

옛날 옛날 먼 옛날.

동부 구석 어느 영지에.

성격 쪼잔한 도련님이 살았대요.

이 도련님은 어찌나 성격이 배배 꼬였는지.

사람들 변소 다니는 일까지 시시콜콜 참견했지 뭐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물었죠.

도련님, 도련님, 우리 도련님.

우리는 어찌하여 끙까를 모아서 여기에만 버려야 합니까.

그러자 도련님이 손 휘휘 저으며 급히 이르길.

냄새나니까 꾸물대지 말고 빨리 버리기나 해.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어요.

하지만 몇 년이 지나며 깨달았다죠.

자신들의 마을에, 영지에, 터전에.

돌림병이 자취를 감추었다는 사실을 말예요.

 

그 소식을 접하면서부터였답니다.

왕국 방방곡곡 사람들이.

대부분 영지의 주민들이.

아무 데나 오물을 버리지 않게 된 것이 말이죠.

 

[찬사 효과 : 향후 일정 기간 동안 영지의 전염병 발생률이 0%가 됩니다. 또한, 외부 영지에서 유입되는 전염병 또한 100%의 확률로 차단, 종식될 것입니다.]

[찬사 지역 : 프론테라 백작령]

[찬사 유지 기간 : 50년]

[찬사의 효력은 찬사를 받는 지역과 기간 내에서 24시간 적용됩니다. 또한, 추후 당신의 행적에 따라 찬사를 받는 지역과 기간이 확장 및 연장, 축소 및 단축될 수 있습니다.]

[찬사가 매달 제공하는 CP : 6]

 

[현재 보유 중인 CP : 218]

 

'헐.'

찬사 내용을 다 읽은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대박.'

내심 좋은 옵션이 뜨길 기대했는데.

이건 그 기대를 한참 뛰어넘은 보상이었다.

전염병 발생 확률 제로.

즉, 엔딩 스포일러로 봤던 내년 봄의 콜레라 창궐이 완벽히 방지될 거라는 소리였다.

'아니, 설령 그게 콜레라가 아니었더라도 상관없이 모두 막아줄 거란 뜻이지.'

진심 대박이었다.

사실 대하수로를 만들면서도 그는 완전히 마음을 놓고 있던 게 아니었다.

가슴 한쪽엔 여전히 불안감이 남아 있었다.

엔딩 스포일러로 엿본 내년 봄의 전염병.

그게 콜레라일 거라는 보장을 100%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무슨 공중보건 전문가도 아니고. 그저 여러 상황을 토대로 추측을 해서 가장 확률이 높아 보이는 걸 콜레라로 지목했던 거지.'

그렇기에 정말로 만에 하나.

콜레라가 아닌 다른 전염병일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실은 대하수로를 어느 정도 완공하고 나면 엔딩 스포일러를 한 번 더 사용하려고 했던 그였다.

확인을 위해서였다.

'당연하지. 목숨이 걸린 일이니까.'

대하수로만 다 만들었다고 해서 안심하고 탱자탱자 지낼 순 없었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듯.

다 끓인 북엇국도 국물 간 미리 체크해보듯.

자신이 대하수로를 통해 내년 봄의 전염병을 방지해냈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한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전염병 발생 확률 제로. 유입되는 전염병도 차단 확률 백 퍼센트. 게다가 기간은 무려 50년.'

완벽하다.

이제는 내년 봄에 전염병으로 죽을 일이 없어졌다.

굳이 엔딩 스포일러로 그걸 확인해볼 필요도 사라졌다.

'덤으로 CP도 아끼게 됐고 말이지.'

그 또한 마음에 들었다.

사실 CP는 정말 가능하다면 아껴두고 싶었다.

CP가 모이는 방식과 엔딩 스포일러의 엄청난 CP 소비량 때문이었다.

'RP와는 달리 CP는 모으기가 어려워. RP가 호감도를 올리거나 업적을 세울 때마다 곧바로 지급되는 일당 형식이라면, CP는 무조건 한 달에 한 번만 들어오는 월급 같은 거니까.'

CP는 한 달에 한 번, 딸랑 36이 모이는 상황이었다.

한데 엔딩 스포일러의 CP 소모량은 어떠한가.

'벌써 한 번 사용하는 데에 무려 80 CP가 들어가지. 그다음 번은? 정확히 두 배로 뻥튀기가 붙어서 160. 그다음은 또 두 배로 불어나서 무려 320.'

당장의 소모량이 많지 않다고 펑펑 써댔다간?

나중에 엔딩 스포일러 한 번 보려면 몇백 CP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 그 한 번을 위해 몇 달, 혹은 일 년 이상 CP를 모아야 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그건 곤란하지.'

정작 절실하고 필요할 때 엔딩을 엿볼 수 없게 된다.

해서 그런 사태를 가급적 피하고 싶었는데.

새로 생긴 찬사의 옵션 덕분에 당장의 CP 낭비도, 엔딩 스포일러의 CP 요구량 상승도 피해 갈 수 있게 되었다.

일석이조.

흐뭇한 기분이 절로 쑴펑쑴펑 피어났다.

그는 브레스 발사를 마치고 인간의 겉모습으로 돌아온 솔리타스를 향해 빙긋 웃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한시름 덜었네요."

"뭐, 감사할 것까지야."

"아닙니다. 정말 큰 도움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런가."

쩝.

솔리타스는 쓰려지는 입맛을 다셨다.

요즘 한창 세공 기술을 익히느라 바쁘던 그였다.

이제 나무토막 깎기는 간신히 보아줄 정도는 되었다며 스승인 코기두스에게 처음으로 칭찬을 들은 게 어제였다.

나름 보람이 느껴지는 나날이었다.

그래서 아까 로이드가 자신을 불러낼 때도.

얄밉게 외주 근로 계약서를 팔랑거리며 보여줄 때도.

계약서에 담긴 약속에 따라 이곳 슬러지 처리장으로 올 때도.

그냥 별생각을 하지 않았던 레드 드래곤이었다.

그저 할 일을 하는 거라고.

세공기술을 배우는 밥값을 하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본체로 현신했고, 브레스를 뿜었다.

인간의 배설물 수 톤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그러고 나니 비로소 입맛이 쓰려졌다.

에스프레소처럼 깊고 진한 자괴감이 드래곤하트를 때려 왔다.

이 땅의 자랑스러운 드래곤으로 태어난 내가 인간의 똥 덩어리나 태우는 신세가 됐다니.

듣던 바로는 나중엔 똥이 더 많아질 예정이라던데.

심지어 오크랑 엘프 똥도 추가될 거라던데.

특히나 고기가 주식인 엘프 똥은 냄새, 엄청나다던데.

'용생, 뭘까.'

절로 영혼의 뿌리까지 착잡해졌다.

생각할수록 자신이 이 광활한 우주에서 아무런 존재가치도 없는 한낱 미물 쪼가리처럼 느껴졌다.

아니, 현재 시점을 기준으로 삼자면 가치가 딱 하나 있긴 하다.

초고성능 최첨단 배설물 버너.

"...."

연애고 결혼이고 뭐고.

그냥 다 때려치울까.

이대로 확 레어로 돌아가 버릴까.

그래서 용생의 모든 번뇌와 미련에서 훌러덩 벗어나 건강하고 아름다우며 조화로운 심신의 모태솔로 드래곤으로 독야청정 살아볼까.

그렇듯 솔리타스는 불현듯 강력하게 찾아온 현자스러운 깨달음에 강한 이끌림을 느꼈다.

한데 그때였다.

"그나저나 아, 이런 날엔 코르도나 지방에 놀러 가고 싶어지네요."

그의 회한(?)으로 점철된 상념 속에 로이드의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상념에서 벗어난 레드 드래곤이 미간을 찡그렸다.

"코르도나라니. 그게 어디인가."

"어? 모르십니까?"

"당연히...."

"거기 요즘 완전 뜨고 있는 신혼여행진데."

"뭐?"

신혼여행.

그 말에 솔리타스가 움찔했다.

자신이 한 번도 이루어보지 못한 연애와 결혼의 꿈.

아직 희미하게나마 남아서 드래곤하트를 콕콕 찔러대는 희망과 미련.

그 작은 불씨가 신혼여행이라는 저 한마디에 살짝 눈을 떴다.

로이드의 말이 이어졌다.

"듣기로는 사계절 온화하고 풍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답니다. 특히 '핫스프링 비치'라는 장소가 연인, 신혼부부들 사이에 선풍적인 인기라고 하더군요."

"핫스프링? 비치?"

"예. 특이한 모래사장이라죠. 온천수가 뿜어져 나오는."

"모래사장에서 온천수가 나온다고?"

"예.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 해변의 모래사장 아무 곳이나 상관없다고 합니다. 삽으로 모래를 적당히 파내서 욕조 모양으로 만들기만 하면 아래에서 유황온천수가 샘솟아 차오른다죠. 그럼 연인과 함께 둘만의 모래사장 온천 욕조에 풍덩하는 겁니다."

 

꿀꺽.

 

상상하자니 절로 목울대가 출렁.

로이드의 꿀 같은 설명이 이어졌다.

"그뿐일까요. 특히나 이 계절의 코르도나 지방은 계절풍의 영향으로 자정마다 딱 한 시간 동안만 폭우가 내린다죠."

"폭우? 그럼 안 좋은 것 아닌가."

"아뇨. 엄청 좋은 겁니다."

"어째서?"

"생각해보세요. 연인과 함께 바닷가 모래사장의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밤하늘의 별을 보다가, 폭우가 쏟아지는 겁니다. 온천에 담근 몸은 따뜻하고. 내놓은 어깨와 얼굴은 폭우 속에 시원해지고. 귓가로는 감미로운 파도 소리가 쉼 없이 들려오는 거지요."

"앗, 아아...."

"상상이 되시죠?"

 

끄덕.

 

어느새 솔리타스는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그의 드래곤하트를 거세게 때려오던 회한과 쓰라린 입맛은 이제 찾아볼 수도 없었다.

대신 그는 이전보다 더욱 의욕을 불태우게 되었다.

'나도 결혼해서 그 모래사장, 빗속의 온천욕, 꼭 해볼 거야!'

이루고 싶은 더욱 디테일한 꿈이 생겨 버렸다.

그 꿈을 위해 인간의 똥 덩어리쯤.

오크와 엘프 똥 따위.

얼마든지 불살라주리라 그는 각오를 다졌다.

그런 레드 드래곤을 바라보는 로이드의 눈에도 흐뭇한 눈웃음이 걸렸다.

"하아. 저도 그런 곳 좀 가보고 싶네요. 그렇지 않습니까?"

"...동감이다."

이로써 시기적절한 기름칠, 성공.

그렇게 로이드는 흔들리던 레드 드래곤의 멘탈을 추슬러주었다.

그리고 홀가분한 걸음으로 저택으로 돌아왔다.

'당분간은 좀 쉴 수 있으려나.'

어느덧 여름도 저물어가고 있었다.

여전히 무더웠지만 전보다 조금씩 짧아지는 해가 느껴졌다.

몇 달 뒤면 영지가 단풍으로 물들다가 첫눈이 내리겠지.

'시간은 넉넉해.'

대하수로 확장 구간 공사가 원활히 진행되고 있었다.

꿀벌 아파트 단지도 거침없이 쑥쑥 올라오는 중이다.

두 공사 모두 겨울이 오기 전에 무난하게 끝낼 수 있을 듯했다.

거기에 예정된 전염병까지 확실히 방지하게 되었으니, 이제는 큰 걱정거리가 없었다.

'여분으로 돈만 조금 더 벌면 돼. 연금보험 들어두는 느낌으로. 수도세와 왕실 지원금에만 기대기엔 살짝 불안하니까. 그것까지만 해결하면 이제 꿀 빨면서 살 수 있는 거야.'

최근 참 고생이 많았구나 싶었다.

특히 오늘은 정말로 피곤했다.

눈에 딱 들어오는 업적과 결과물을 확인해서인 건지. 그래서 안심하면서 긴장이 풀려서인 건지.

지난 몇 개월 동안 스스로를 채찍질하듯 일터로 내몰면서 쌓여 왔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들어가면 든든히 먹고, 씻고, 푹 자자. 가능하면 내일이랑 모레도.'

한 며칠쯤 작정하고 뒹굴거려 보면 어떨까.

대한민국의 고시원에서 지내던 시절엔 꿈만 같던 일이었다.

이참에 그걸 제대로 실컷 누려봐야지 싶었다.

한데 저택에 도착한 직후였다.

로이드는 저택 1층 주실에서 뜻밖의 광경과 마주하게 되었다.

"어?"

처음 보는 여자가 프론테라 백작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나이는 20대 초반쯤?

입은 옷이나 장신구로 보아선 하녀나 평민은 절대 아니었다.

게다가 여자 옆에는 호위기사로 보이는 자도 붙어 있었다.

'귀족?'

호화로운 차림과 호위기사.

귀족이 확실하다.

'그런데 귀족가 여인이 여기는 왜?'

로이드가 그렇게 생각할 무렵이었다.

여인의 시선이 이쪽을 향해 왔다.

예의 차린 미소가 맺히는가 싶더니.

"그쪽 분이 로이드 프론테라, 맞으신가요?"

인사를 건네어 왔다.

로이드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그런데 그쪽 분은?"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군요. 코르도나 백작가의 카를로타 코르도나라고 합니다."

그런데요?

여긴 어쩐 일로?

로이드는 뭔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그 예감은 이어지는 프론테라 백작의 말로 현실이 되었다.

"으음, 놀라지 말고 듣거라. 얼마 전 청혼서를 받은 일을 기억하겠지? 그때 내 답장을 받은 코르도나 백작께서 영애를 여기로 보내셨구나."

"예? 어째서요?"

저도 모르게 반문이 튀어나왔다.

대답은 코르도나 영애가 했다.

"제 부친께서 이번 청혼 건에 대해 미련이 조금 남으신 모양입니다. 그래서 제 등을 떠미셨지요."

"...."

아, 그러니까.

이쪽에선 거절을 했는데 한 번 더 혼담을 나눠보자며 보내 버린 건가, 딸을?

'이것도 어필의 한 방법인 건가. 거 참. 꽤 전격적인 양반이네.'

불현듯 식은땀이 쑴펑쑴펑 돋아났다.

설마하니 청혼을 거절당했다고 딸을 여기로 보내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

로이드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추스르며 프론테라 백작을 돌아보았다.

"저기, 확실하게 거절의 서신을 보내신 거 아니었습니까?"

"으으음, 분명 그러긴 했는데."

"...."

"나도 조금은 놀라워서 말이다. 허허허."

프론테라 백작이 곤란한 듯 웃었다.

사실 그는 정말로 곤란했다.

설마하니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그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내가 거절의 뜻을 너무 에둘러가며 썼나? 분명 거절을 하긴 했는데. 아니면 미련이 남은 게 노골적으로 느껴진 건가? 아무래도 그래서인 건지도.'

가슴 한쪽이 뜨끔하고 찔렸다.

아들에게 사실을 밝혀줘야 할까.

자신이 거절 서신을 애매하게 써서 이런 사태가 생긴 것 같다고.

그렇게 밝혀야 하는 걸까.

그때였다.

백작이 난처한 고민에 빠진 사이, 코르도나 영애가 살풋 웃으며 나섰다.

"너무 곤란해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예?"

로이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곤란해하지 말라는 말씀의 뜻은?"

"솔직히 밝히자면 저도 정략결혼에 뜻이 없으니까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제 부친께 등을 떠밀려 마지못해 여기 온 입장이니까요."

"아...."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라는 말씀입니다. 제 부친께서 충분히 납득하실 며칠 정도의 시간만 이 저택에 신세를 지며 머무르겠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지내기만 하다가 돌아갈 테니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그 말씀, 진심이신 겁니까?"

"네."

영애가 똑 부러지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로이드는 내심 환호의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사, 살았다.'

행여나 이렇게 덜컥 마음에도 없던 결혼 문제에 시달리게 되나 싶었는데. 예정에도 없던 풍파를 만나게 되나 싶었는데.

그런데 예상 밖으로 영애가 선보이는 쿨함을 보자니 그런 걱정은 덜어도 될 듯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며칠간 내 집이라 생각하고 편히 지내세요."

"감사합니다."

영애와 비즈니스적인 인사를 나누었다.

침실로 돌아와 편해진 마음으로 두 다리를 뻗었다.

'영애고 뭐고. 관심도 없어. 난 쉴래. 꿀 빨면서 뒹굴거릴 거야.'

그러니까 이제는 푹 자자.

내일도 늦잠 실컷 자보자.

그렇게 로이드는 안도감 속에 평화롭게 잠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평화롭던 프론테라 백작 저택에 또 다른 4개 가문의 영애 네 명이 차례대로 속속 도착했다.

161화. 예정된 재앙 (1)